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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조 세 현.부경대



【 목 차 】
Ⅰ. 머리말
Ⅱ. 개인 견문기에 나타난 해양이미지
Ⅲ. 사절단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화
(1) 빈춘(斌椿)사절단(1866)
(2) 벌링게임(蒲安臣)사절단(1868-1870)
(3) 숭후(崇厚)사절단(1870-1871)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지구의 광활함은 항해를 하지 않고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다. 고금에 멀리 여행했다는 사람
으로 비록 한(漢)의 장건(張騫)과 당(唐)의 현장(玄奘)이 있으나 단지 인도를 여행하다 끝났을
뿐이다. 구주 밖을 돌아다니려면 왕복 수만리인데, 천조(天朝)의 사신을 칭하며 외양(外洋)을 편
력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장덕이)는 동치 병인(丙寅)년에 명을 받들어 태서(泰西)에
파견되었는데, 10만 리를 여행하면서 15개국을 구경하였다…정묘(丁卯)년에 다시 사신을 따라
유럽과 미국 등지에 갔는데, 족적이 거의 지구 한 바퀴를 일주하였다…기이하고도 기이한 것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지 불과 1년 만에 또 다시 삼구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 숭후(崇厚)를 따
라 출사하게 된 일이다.”1)
청말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해양은 무슨 의미였을까? 전근대 중국인들은 바다에 대한 체계
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중화민국의 국부로 칭
송되는 손문(孫文)은 1878년 출국했을 때, “처음 윤선의 신기함을 보았고, 창해의 광활함을
보았다. 이로부터 서학을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고, 천지를 탐구하려는 생각이 일어났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처럼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근대적 윤선과 대륙을 둘러싼 드넓은 바다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아편전쟁 후 중국인들이 서양문화를

 


1) 張德彝, ?隨使法國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2冊), 岳麓書社, 1985年, 自敍,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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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하는 과정에서 개인 여행자와 해외 사절단 및 출사대신은 매우 중요한 중개역할을 담당
하였다. 이들의 해외 여행기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1980년대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청조의 대외관계, 중서문화의 교류와 충돌, 중국인의 여행문학
등을 다룬 주제는 많지만, 필자가 아는 바로는 여행기를 통해 서양의 해양문명을 다룬 연구
는 거의 없다.2) 이 글에서는 해양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양무운동시기 개인과 사절단의 해
외 여행기에 나타난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해양문명의 대강을 정리하여 중국인들이 새로운
해양관을 형성하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근대 중국사회에서 해외 여행기는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
다. 이런 여행기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개인견문기, 사절단여행기, 출사대신일기
등이 그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청말 해외 여행기의 시기구분을 대략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 초창기(1840-1875년): 아편전쟁이 일어난 뒤부터 곽숭도(郭嵩燾)가 출사하기 전
까지로, 이 시기는 일부 민간인이나 사절단차원에서 기록을 남겼는데 신기한 풍경묘사가 주
를 이루었다. 2단계 과도기(1876-1894년): 곽숭도가 정식으로 영국에 출사한 때부터 청일전쟁
까지로, 이 시기는 관방이 주가 되어 비교적 풍부한 일기를 남겼는데 정교제도와 이데올로기
등도 기록하였다. 대체로 1895년 청일전쟁 이전의 해외 여행기는 비록 서양문명에 대한 경이
로움으로 가득 찼지만 동시에 중국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잃지 않았다. 3단계 전환기
(1895-1911년): 청일전쟁부터 신해혁명까지로, 이 시기는 중국이 혼란기여서 여행자의 서양문
화에 대한 인식도 심각하게 급변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3) 이 논문에서는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양무운동시기 청조가 해외에 파견한 세 사절단의 여행기를 중심으로 서양의 해양문
명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것이다. 이에 앞서 개인차원의 견문기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중국인의 해외여행은 사실상 개인차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상인이나 유학생이었다. 임침(林鍼)이 미국으로 일하러 간 일, 용굉(容閎)이 미국으로 유학 간
일, 왕도(王韜)가 영국으로 건너간 일 등이 대표적이다.4) 단체차원으로는 1866년 빈춘(斌椿)
부자 일행이 출국한 것이 청조가 처음 파견한 관방여행단이었다. 해관총세무사 로버트 하트
(Robert Hart, 중문 赫德)가 영국휴가를 갈 때 함께 유럽여행을 시킨 것인데 엄격한 의미에

 

2) 청말 해외 여행기에 대한 연구로는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臺北, 文津出版社, 2008年;
閔銳武, ?蒲安臣使團硏究?, 中國文史出版社, 2002年; 吳以義, ?海客述奇: 中國人眼中的維多利亞科學?,
臺北, 三民書局, 2002年(上海科學普及出版社, 2004年); 王熙, ?一個走向世界的八旗子弟: 張德彛「稿本航
海述奇滙編」硏究?, 中山大學歷史系博士論文, 2004年; 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
察,認證與選擇?,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楊波, ?晩淸旅西記述硏究(1840-1911)?, 河南大學博士學位論
文, 2010年 등이 있다. 그 가운데 陳室如의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과 尹德翔의 ?東海西海之間
-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察,認證與選擇? 등이 각각 대만과 대륙의 대표적인 해외 여행기 연구서이
다. 일본학자가 쓴 鈴木智夫, ?近代中國と西洋國際社會?, 汲古書院, 2007年; 手代木有児, ?淸末中國の
西洋體驗と文明觀?, 汲古書院, 2013年 등도 이번 주제와 관련이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제한된 정보
로는 해양을 주제로 쓴 여행기관련 연구논문으로 周佳榮의 「第一個環游地球的中國外交人員: 張德彝
對近代海防和西方船炮的認識」(李金强等主編, ?我武維揚-近代中國海軍史新論?, 香港海防博物館編製,
2004年)이 거의 유일하다.
3) 楊波, ?晩淸旅西記述硏究(1840-1911)?, 河南大學博士學位論文, 2010年, p.19.
4) 1870년대 기조희(祁兆熙)는 미국 유학 가는 어린 학생들의 관리자로, 이규(李圭)는 미국 세계박람회
참석차 개인공무로 태평양을 건넌 사례가 있었다.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7

 

서 실험적인 관광여행에 불과하였다. 두 번째는 1868년의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
중문 蒲安臣)사절단으로 미국인이 인솔한 근대중국 최초의 외교사절단이었다. 지강(志剛)과
장덕이(張德彝) 등이 수행했으며 이 때 처음으로 청조를 상징하는 국기를 사용하였다. 다음으
로 천진교안 때문에 프랑스에 사죄하러 간 숭후(崇厚)사절단이 있는데, 이들은 뚜렷한 외교사
명을 띠고 프랑스에 간 사절단으로 우연히 파리코뮨을 목격한 중국인이 되었다.
이 글에서 주로 검토한 여행기로는 임침의 ?서해기유초(西海紀游草)?, 용굉의 ?서학동점기
(西學東漸記)?, 기조희의 ?유미주일기(游美洲日記)?, 왕도의 ?만유수록(漫游隨錄)?, 빈춘의 ?승
사필기(乘槎筆記)?, 장덕이의 ?항해술기(航海述奇)?, 지강의 ?초사태서기(初使泰西記)?, 장덕
이의 ?구미환유기(歐美環游記, 혹은 再述奇)?, 장덕이의 ?수사법국기(隨使法國記, 혹은 三述
奇)?, 이규의 ?환유지구신록(環游地球新錄)? 등 10여종이다.5) 본문에서는 이런 개인들과 세
차례 사절단의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관련 단편적인 사건들을 수집 정리하여 아편전쟁 시기부
터 양무운동 초기까지 중국인들이 인식한 서양 해양문명의 대강을 살펴볼 것이다.

 

Ⅱ. 개인 견문기에 나타난 해양이미지
아편전쟁 이전에도 대략 일곱 종류의 해외 견문록이 남아있다. 베트남을 여행한 석대산(釋
大汕)의 ?해외기사(海外紀事)?(1695-1696), 미국을 경유해 유럽을 여행한 번수의(樊守義)의 ?신
견록(身見錄)?(1707년 겨울-1720), 러시아를 여행한 도리침(圖理琛)의 ?이역록(異域錄)?(1712-
1715), 자바와 주변도서를 여행한 정손아(程遜我)의 ?갈라파기략(喝喇吧紀略)?(1729-1736), 구
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한 사청고(謝淸高)의 ?해록(海錄)?(1782-1796), 자바
와 주변도서를 여행한 왕대해(王大海)의 ?해도일지(海島逸志)?(1783-1791), 베트남을 여행한
채정란(蔡廷蘭)의 ?해남잡저(海南雜著)?(1835-1836) 등이 그것이다. 이런 해외 견문록 가운데
번수의와 도리침은 조정의 명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 경우이며, 나머지 견문록의 작자들은 개
인적인 이유로 해외를 여행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유란 주로 상업과 같은 경제적인 목적이었
으며, 일부 종교교류나 해상표류 등의 경우도 있었다.6)
이 가운데 유럽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으로는 번수의의 ?신견록?과 사청고의 ?해록?이 있
다.7) 번수의는 1707년 이탈리아 선교사를 따라 유럽에 갔다가 1720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강

 

5) 청말 해외 여행기를 정리한 자료집으로는 단연 鍾叔河 주편의 ?走向世界叢書?(岳麓書社, 1985年)를
들 수 있다. 이 방대한 시리즈에는 총 36종의 여행기가 실려 있어 가장 권위 있는 청말 여행기 자료
집으로 꼽힌다. 총서에서 편집자는 매 여행기마다 서론을 붙여 작자생애와 여행기의 주요내용 및 역
사의의를 소개하였다. 鍾叔河는 ?走向世界-近代中國知識分子考察西方的歷史?(中華書局, 2000年)라는
저서에서 자신이 주편한 ?走向世界叢書?를 가지고 청말 중국인의 서양역사에 대한 인식을 분석했으
며, 다른 저서인 ?從東方到西方-走向世界叢書敍論集?(岳麓書社, 2002年)에서는 총서에 실린 서문을
별도로 모아 놓았다.
6)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p.41-42. 도표 참고.
7) 아편전쟁 이전 중국인의 해외 여행기는 대부분 중국이외의 지역을 야만적이고 낙후한 이문화로 폄
하했으며 거꾸로 자신들의 천조에 대해서는 위대하다고 찬양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청조는 구미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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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제의 부름을 받아 ?신견록?을 썼는데, 중국인이 쓴 첫 번째 유럽여행기로 알려져 있다. 그
리고 사청고는 어린 시절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하다 폭풍우를 만나 표류했는데, 외국상선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 후 외국선박을 따라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14년 만에 중국으
로 돌아왔다. 그는 만년에 마카오에 정착하여 해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구술했는데, 이를 정
리한 책이 ?해록?이다. 이 견문록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 나라는 포르투갈(大西洋國) 영
국 미국 등이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관련내용이 많았다.8)
세계사의 시각에서 보면 신항로의 개척과 영국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교통수단이 발전하면
서 윤선과 기차 등 새로운 기계가 출현하자 전 지구적인 장거리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1835년 영국국적 자딘(Jardine)호가 먼 항해 끝에 광동 앞바다에 나타난 사건은 윤선이 중국
의 바다에 출현한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윤선이 중국의 연근해를 광범위하게 운항하
면서 중국인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청말 중국 지식인의 출양(出洋)은 대
부분 관방에서 파견했는데, 개인자격으로 대양을 건넌 임감 용굉 왕도 등의 경우는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우선 개인 견문기에 나타난 해양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
과 같다.9)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이 직접 외국에 갔다 와서 기록을 남긴 첫 번째 인물은 임침(林鍼)으
로, 그의 ?서해기유초(西海紀游草)?는 현존하는 근대시기 가장 빠른 해외여행기이다. 임침이
1847년(도광27년) 봄 미국에 가게 된 원인은 “가세가 빈곤하여 부모와 조모를 봉양할 수 없
어 풍랑에 몸을 실어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제적인 원인이었던 듯싶다.
그는 하문에서 미국상인의 통역을 하다가 한 미국인을 따라 광동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넘게 중국어 번역과 교사를 담당했으며, 1849년 2월 고향인 복건으로 돌아와 기록을 남겼
다.10) 임침이 태평양을 건너갈 때 탄 배는 윤선이 아니라 세 개의 돛대를 가진 범선이었다.
중국에서 미국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도중에 정박한 일을 포함해 무려 140일이나 걸리는
무척 힘든 여행이었다.11) 대양을 횡단하면서 경험한 검푸른 해수면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거
친 풍랑과 배 멀미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여행자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서해기유
초? 서문에는 자신이 타고 갔던 미국(花旗)호에 대한 웅장한 모습을 묘사했고, 미국 항구에
입항할 때 바라본 도시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한 충격도 남아 있다. 아울러 선박이 항구를 드
나드는 풍경과 배를 도선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모습 등을 기록하였다.12)
임침은 “대지가 회전하는 것을 쉬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낮이면 서양은 밤이다.”라며 지구
가 둥글고 자전한다는 사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서양인들이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해 항해
하는데 오차가 없는 사실에 경탄했으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지리설도 이들보다 상

 


의 압력아래 어쩔 수 없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양 각국을 방문했는데, 여행기의 수량이 현저히 증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조의식과 자아우월의식이 농후하였다(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
1840-1945?, p.588).
8) 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察,認證與選擇?,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p.44.
9) 鍾叔河主篇, ?走向世界叢書?第1輯(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67.
10) 鍾叔河, ?走向世界?, 51쪽;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70.
11) 鍾叔河, ?從東方到西方?, p.12.
12) 林鍼, ?西海紀游草?(?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36.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9

 

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13) 그는 미국인의 각종 과학기술, 특히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
계의 작동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옛날에는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면, 요즘은 겨우 조
개껍데기로 대해를 측량한다.”며 자신의 기술을 ‘측해규려(測海窺蠡)’에 비유하였다. 물론 작
은 조개로 대해를 측량할 수는 없겠지만 바다와 전혀 접촉하지 않았거나 바다를 본적이 없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였다.14) 임침은 전통사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만심이 적었고,
미국의 선진적인 모습을 배워야한다고 보았다. 비록 그의 여행기는 아편전쟁 이후 최초의 중
국인 해외 여행기라는 상징성이 있지만 견문기의 전체 분량이 많지 않고 학문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근대중국 최초의 유학생 용굉(容閎, 1828-1912)이 남긴 유명한 여행기 ?서학동점기(西學東
漸記)?의 영문제목은 ?My Life in China and America?이다. 이 책은 그가 1847년 미국으로
건너가 1854년까지 겪은 현지 생활을 말년인 1909년에 쓴 영문 회고록이다.15) 1847년 1월 용
굉 황승(黃勝) 황관(黃寬) 세 사람은 황포강에서 범선 헌트러스(Huntress)호를 타고 미국 여
행길에 올랐다. 용굉 일행이 미국 유학 갈 때 탄 선박은 뉴욕의 올리펀트 형제공사(The
Olyphant Brothers)의 배로 중국에서 차를 실어 미국으로 운반하는 범선이었다. 그 항로는
임침이 이용했던 태평양항로가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인도양을 지나 희망봉을 경유한 후
대서양으로 북상하여 뉴욕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용굉일행은 황포에서 출발해 희망봉에 이르
는 구간은 비교적 순항했으나, 그 후 대서양의 거친 파도에 고생했으며 망망한 바다 가운데
서 하늘의 별들에 의지하며 오랜 항해를 버티었다.16) 이 범선의 항행기간은 98일이었는데,
임침보다는 짧은 것이다.
용굉은 1854년 예일대학을 졸업한 후 그 해 11월 뉴욕에서 범선 유레카(Eureka)호를 타고
중국으로 귀국하였다. 이 시기는 희망봉 주변 날씨가 가장 험악한 때로, 동북풍이 자주 불어
범선이 동쪽으로 향할 때면 역풍을 만났다. 그가 탄 선박은 미국에서 홍콩으로 화물을 운반
하는 범선으로 용굉 일행 말고는 손님이 없었으며 무려 154일이나 걸린 힘든 여행이었다. 게
다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선장을 만나 선상에서 학대받는 선원들을 목격하였다. 훗날 용굉
은 평생 여러 차례 장거리 항해를 했지만 이때보다 힘든 여행은 없었다고 회고했다.17)
10여년 후 증국번(曾國藩)의 지시로 기계를 구매하러 다시 미국에 갈 때에는 상해에서 출
발하여 싱가포르에서 머문 후 인도양을 횡단했으며, 도중에 스리랑카에 잠시 상륙하였다. 이
집트의 카이로에서 다시 배에서 하선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수에즈운하는 공사 중이어서
기차를 타고 육로로 수에즈를 지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다른 배에 올라 타 프랑
스 마르세이유항구로 항행하였다.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에서 얼마 간 유람하다 대서양을

 

13) 林鍼, ?西海紀游草?, pp.36-37.
14) 林鍼, ?西海紀游草?, p.39.
15) 容閎은 광동 향산인으로 1836년 마카오의 메리슨 남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847년 1월 4일 미
국인 선생과 함께 미국유학길에 올랐으며, 예일대학의 첫 번째 중국인 졸업생이 된 후 1854년 11월
13일 뉴욕에서 귀국하였다. ‘西學東漸’이라는 번역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근대문명을 중국에 전
파하여 중국이 서양국가와 같은 근대국가로 변화하길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陳室如, ?近代域
外游記硏究1840-1945?, p.72; 鍾叔河, ?走向世界?, p.123).
16) 容閎, ?西學東漸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2冊), 岳麓書社, 1985年, pp.50-51.
17) 容閎, ?西學東漸記?, pp.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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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넜는데, 1864년 봄 뉴욕에 도착하였다.18) 용굉이 1865년 봄 기계구매를 마치고 귀국할 때
에 뉴욕에서 희망봉을 돌아 상해로 가는 노선은 과거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뉴욕에서 반대편인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태평양을 건너는 노선을 선택하였다. 하지
만 대륙 간 횡단철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연해윤선을 타고 뉴욕에서 파나마로 이동한 후
육로를 통해 반대편 멕시코해안에 도착한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에서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로 가는 삼궤범선에 몸을 실었다.19)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 지
구의 동서항로를 모두 돌고 싶었는데, 수에즈와 파나마운하가 만들어지기 전의 여행경로를
잘 보여준다.
용굉이 귀국 후 해양 분야와 관련해 한 활동으로는 한 때 태평천국의 홍인간(洪仁玕)에게
제안한 7가지 건의 중에 해군학교의 건립이 있었고, 증국번의 지지로 강남제조국을 만들 때
에는 기선공사의 건립을 제안한 바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용굉은 두 가지 역사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형공장인 강남제조국을 건립하는데
참여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청조의 관비유학생으로 네 차례에 걸쳐 아동 120명을 미국에 유
학시킨 일이다.20) 1872년 여름 제1차 학생 30명이 태평양을 건널 때 용굉은 인솔자의 자격으
로 또 다시 미국에 갔으며, 그 후 유학생을 관리하며 몇 차례 중국과 미국을 왕복하다가 나
중에 미국에 정착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했던 학생 가운데 귀국한 사람들은 중국
내 여러 분야에 종사했는데, 상해전보국 복주선정국 강남제조국 천진수사 등 다양하였다. 특
히 해군에 종사한 사람은 20명으로 그 가운데 해군장교는 무려 14명이었다. 이 숫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많은 인원이었다. 용굉의 여행기는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것이라 해양과
관련한 생동감 있는 묘사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훗날 용굉의 미국유학사업과 관련해 기조희(祁兆熙, ?-1891)라는 인물이 1874년(동치13년)
제3차 아동의 미국행 호송을 담당했는데, 미국으로 가는 여정을 담은 견문기 ?유미주일기(遊
美洲日記)?가 남아있다. 이들 일행이 미국으로 갈 때 일본에서 중국(China)호라는 배를 타고
건너갔다. 먼 외국에 가는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나라 이름을 딴 선박을 타는 것은 묘한 인
연이었다. 아이들이 탄 배는 명륜선(明輪船)이었는데, 이런 선박은 배의 양쪽에 큰 바퀴가 달
려 있고 배 안쪽에 두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큰 바람과 파도가 일면 쉽게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다. 당시 점차 사라져가는 모형이었는데 광동과 홍콩 간에 오는 연해선박 중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21) 아이들은 처음 배가 출발할 때는 천진난만했으나 폭우에 풍랑이 일어 배가
흔들리자 다수가 울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22) 중국호는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불과 28일이
걸렸다.23) 그는 아동을 관리하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미국을 유람하다 1875년 초 귀국하였
다.
1840년대 미국으로 건너갔던 임침과 용굉은 범선을 탔는데 반해, 1870년대에 미국으로 건

 

18) 容閎, ?西學東漸記?, pp.113-114.
19) 容閎, ?西學東漸記?, pp.116-117.
20) 鍾叔河, ?走向世界?, p.133.
21) 祁兆熙, ?游美洲日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2冊), 岳麓書社, 1985年, pp.269-270.
22) 祁兆熙, ?游美洲日記?, p.212.
23) 鈴木智夫, ?近代中國と西洋國際社會?, 汲古書院, 2007年, p.43.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11

 

너간 기조희는 새로운 교통수단인 윤선을 이용하였다. 그 사이에 원양항해의 혁신이 이루어
진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이처럼 선박의 개량에 따라 항로의 단축이 하루하루 빠르게 진행
되었다.24)
앞의 임침과 용굉 등이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던 반면, 1860년대에 영국으로 건너간 저명한
사상가 왕도(王韜, 1828-1897)의 여행기도 남아있다. 당시 태평천국과 연루되어 청조의 탄압
을 피해 홍콩으로 망명했던 왕도는 홍콩 영화서원(英華書院) 원장인 제임스 레그(James
Leege)의 요청으로 1867년 영국인 한학자를 따라 스코틀랜드에 갔다. 현지에서 체류하다
1870년 여행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왕도는 영국에서 중국경전의 번역을 도와
주었으며 시간이 나면 여러 명승지를 돌아보았다. 그의 ?만유수록(漫遊隨錄)?은 유럽여행기로
1887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출판되었다.25) 왕도는 스코틀랜드에 2년 넘게 거주하면서 한 해전
영국에 빈춘사절단이 오고 간 사실을 알았으며, 그가 있는 동안에 벌링게임사절단이 온다는
소식도 들었다.26) 그는 중국 최초의 영국공사인 곽숭도(郭嵩燾)보다 7년 빨리 영국에 와 있
었다. 왕도의 여행은 중국 고급지식인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유럽현지를 고찰한 것이자 서방
세계에도 진실한 중국형상을 전파한 것으로 해외 여행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왕도의 여행기에는 비록 해양관련 기록이 적지만 수에즈운하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아있
다. 그에 따르면, 옛날에 영국인이 동방으로 오는 해로는 모두 희망봉을 돌아 중국으로 향했
다. 함풍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홍해를 통해 육로로 170리 이동하면 지중해에 도착하는데 거
리가 거의 수만리 단축되었다. 이에 따라 희망봉의 위대함이 점점 사라졌는데, 앞으로 수에즈
운하가 열리게 되면 동서 간 윤선이 직접 통할 수 있으니 형세가 크게 변할 것이라고 적었
다. 실제로 왕도는 여행 중 수에즈에서 내려 이집트를 구경하였다. 수에즈의 동남쪽은 홍해이
고, 서북쪽은 지중해와 접해있다. 수에즈는 두 바다의 목줄로 영국인들이 특별히 화륜차를 만
들어 우편과 여행객을 실어 날랐다. 근래 프랑스인이 새로운 운하를 열어 화륜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시대의 변화에 인사는 무상하니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27)라고 적었다.
이 기록은 수에즈운하가 막 개통했을 때(1869년 말)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 흥미롭다.
임침 용굉 왕도 등이 남긴 개인견문기에는 항로에 대한 언급 말고는 해양에 대한 이미지가
대부분 단편적이다. 그들은 대양에 대해 놀라움이 가득했지만 이와 관련한 체계적인 기술을
남기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 파견한 해외사절단의 경우 그들의 정치적 위상 때문인지
서방국가의 배려로 좀 더 자세히 서양의 해양문명을 관찰할 수 있었다. 사절단은 고급 호텔
에 묵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고위인사로부터 성대한 접대를 받았고 각종 그들의 활
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24) 祁兆熙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항로는 세 가지였다. 해도를
보면 중간 항로가 가장 빠른데 대신에 풍랑이 가장 세다. 5월 이후에 운항하면 17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북쪽 항로는 여름에도 갈 수 있다. 남쪽 항로는 겨울에 갈 수 있지만 항로가 길어져 28일
만에 요코하마에 도착할 수 있다(祁兆熙, ?游美洲日記?, p.247).
25)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71.
26) 王韜, ?漫游隨錄?, p.129.
27) 王韜, ?漫游隨錄?(?走向世界叢書?第1輯 第6冊), 岳麓書社, 1985年, p.78,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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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사절단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화
(1) 빈춘사절단(1866)

 

청조가 유럽을 고찰하라고 처음 파견한 사절단이 곧 최초로 서양의 근대문화를 접촉한 중
국인 관료들이었다. 1861년에 성립한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 유럽탐방을 주지했는데, 이 계획
을 발의한 사람은 총세무사 하트였다. 1866년 봄 하트는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잠시 귀국할
때, 경사동문관 학생 한두 명을 데리고 가서 그곳의 풍토와 인정을 살펴 견문을 넓히도록 요
청하였다. 이에 총리아문은 하트로 하여금 빈춘(1804-?)과 그의 아들 광영(廣英)과 함께 동문
관 내 영문관의 봉의(鳳儀), 덕명(德明, 즉 장덕이)과 법문관의 언혜(彦慧) 등 모두 다섯 명을
데리고 유럽을 고찰하도록 했다. 빈춘은 기인출신이었으며 수행학생들은 중국 최초의 외국어
학교인 동문관 졸업생들이었다. 그런데 빈춘일행은 관광성격을 띤 사절단이지 정식 외교사절
은 아니었다. 빈춘은 ?승사필기?를 남겼으며, 장덕이(1847-1918)는 ?항해술기?을 남겨 두 권
의 여행기로 이번 유럽여행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빈춘은 1866년 봄에 출발해 그해 겨울에 돌아왔는데, 총 8개월 반 정도의 여정이었다. 프랑
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11개 국가를 여행했
는데, 오고간 시간을 빼고 나면 이들이 실제로 유럽에 체류한 시간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
다.28) 사절단은 1866년 3월 북경을 떠나 천진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내려가 다시 배를 바꾸
어 홍콩에 도착하였다. 홍콩에서 다른 선박으로 바꾸어 탄 후 베트남 연안을 따라 말라카해
협을 통과하여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당시 프랑스선박은 주로 프랑스 식민지를, 영국선박은
영국 식민지를 경유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서양인들이 어떤 ‘선견포리(船堅炮利)’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중국인
가운데 진정으로 화륜선을 구경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화륜선에 승선한 기록은 거의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빈춘의 ?승사필기?는 귀중한 자료이다.29) 그는 상해에서 프랑스윤
선을 탄 후 이 배를 진지하게 관찰하여 선박의 크기, 구조, 선내환경, 사용설비, 직원업무, 업
무원리 등에 관해 기록하였다. 그는 “화륜을 사용하면 인력을 쓰지 않고도” 정교하게 일을
할 수 있다며, 윤선의 증기기관과 정밀한 기계들에 대해 무척 감탄하였다.30) 일행인 장덕이
역시 여행 초기 천진항에서 영국화륜선 세 척을 본 경험을 기록하였다. 두 척은 암륜선이었
고 한 척은 명륜선이었는데, 외형상 깔끔하고 견고한 것이 중국선박과는 다르다고 평하였다.
그 중 한 윤선에 올랐을 때, 선박에 달린 구명튜브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배가 위험해지면 몸
에 튜브를 걸치고 바다로 뛰어내리면 해류에 따라 표류하다 구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기에는 영국선박의 구조와 설비의 정교함부터 손님을 맞는 방식까지
상세하게 적었다.31)

 

28) 鍾叔河, ?走向世界?, pp.60-61;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p.72-73.
29) 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察,認證與選擇?, p.49.
30) 斌椿, ?乘槎筆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p.94-95.
31) 張德彝, ?航海述奇?(?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p.446-447.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13

 

19세기 중엽 구미사회는 증기기관으로 상징되는 공업문명이 확립되어 윤선 기차 전보 등
각종 신식기계들을 광범하게 사용하였다. 장덕이는 배를 탄 후에 “화륜기는 불로써 물을 끓
여 증기가 상하로 철륜을 작동하며 회전시키면 배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32)이라고 윤선의
기본원리를 설명하였다. 그의 ?항해술기?에도 빈춘처럼 중국인이 증기기관을 바라보는 첫 인
상이 담겨 있어 의미가 있다.33) 홍콩에서 프랑스 신식윤선으로 바꾸어 탄 다음에도 장덕이는
이 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34)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 초기 여행자들
은 서양윤선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감상을 남겼다.
빈춘일행이 베트남해안을 지날 때 새로 만든 서양건물 십여 채를 보았는데, 이곳에는 프랑
스 해군제독과 3천 명의 해군이 체류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복건인과 광동인 5-6
만 명이 무역에 종사한다고도 했다. 베트남이나 싱가포르 등지의 차이나타운을 방문해 화교
를 만난 기록은 대부분 여행기에서 공통으로 나온다.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가는 여행단의
경우에도 나가사키나 요코하마에 사는 화교들을 종종 언급한다. 화교라는 존재는 근대 해양
문명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이다.
사절단이 항해하는 과정에서 대양에 대한 강한 인상이 곳곳에 나타난다. 망망대해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지기도 전에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를 만났다. 항해의 힘든 과정은 거의 모
든 여행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고통이 풍랑을 만났을 때의 배 멀미였다. 장덕
이는 “밤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파고가 백 척이고, 선박이 요동을 치니 사람들이 모두 구토
를 멈추지 못하였다. 창밖은 파도소리가 우렁차고 선내에는 사람들의 구토소리가 요란하며,
금속들이 울음소리를 내고 찻잔과 쟁반이 떨어졌다.”35)고 묘사했다.
항구 밖의 등대도 신기한 존재였는지 일기에 종종 보인다. 장덕이의 일기에는 중국국경을
넘어 베트남국경에 도달할 즈음 높은 탑처럼 생긴 등대를 보았는데, 이것은 중국항구 밖의
등탑으로 그 빛이 백리 밖을 비칠 수 있어서 야간에 운항하는 선박이 항구를 알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36) 빈춘의 일기에도 아덴을 떠난 후 바다 한 가운데 높은 철탑을 보았다는 글이
있다. 선원이 그곳은 물이 얕아 배가 위험할 수 있어서 탑을 세우고 사람이 지킨다고 했다.
낮에 선박이 보이면 깃발을 흔들고, 밤에는 등을 켜서 위험을 알린다는 것이다.37) 이런 영국
인의 제도는 “진실로 좋은 일”이라고 호평했다.
빈춘의 일기에 스리랑카에서 아덴으로 항해도중 한 인도인 회교도가 선상에서 사망하는 사
건이 발생하였다. 본래 터키로 가서 순례에 참가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배에 오른 후 병이 악
화되어 죽었다. 원양해운의 규정에 따르면 손님이 죽으면 하루 만에 바다에 던지도록 되어있
었다. 선주는 신원을 파악한 후 짐과 돈을 모두 일행에게 맡기고, 유산을 아들에게 준다는 글
을 모처에 보내었다.38) 장덕이의 일기에도 이 사건이 실려 있는데, 시체가 썩어 전염병이 선

 

32) 張德彝, ?航海述奇?, p.449.
33) 鍾叔河, ?走向世界?, p.95.
34) 張德彝, ?航海述奇?, pp.453-455.
35) 張德彝, ?航海述奇?, p.449.
36) 張德彝, ?航海述奇?, p.460.
37) 斌椿, ?乘槎筆記?, p.103.
38) 斌椿, ?乘槎筆記?,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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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에 돌 것을 우려해 어떤 경우라도 시신을 재빨리 처리한다고 했다.39) 선상에서 사람이 죽
는 사례가 다른 여행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대양항해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빈춘은 바다 멀리 범선의 돛대가 수평선너머 사라지는 장면을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며 이는 억측이 아니라고 했다.40) 특히 장덕이는 ?항해술기?본문에
앞서 따로 「지구설(地球說)」이라는 글을 써서 지구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지구의 둘레 직경
운행방식 및 해양과 대륙분포의 지리위치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기(氣)로서 말하자면, 가볍고 맑아 위로 뜬 것이 하늘(天)이고 무겁고 탁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 땅(地)이다. 이(理)로서 말하자면, 하늘은 만물을 덮는 것이요 땅은 만물을 싣는 것이다. 형
(形)으로 말하자면, 혹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 하고, 혹자는 하늘의 모양은 덮개와 같다고
하고, 혹자는 하늘과 땅의 모양이 계란과 같다고 한다. 요컨대 뒤의 학설이 사실에 가깝다. 대체로
하늘 모양은 바깥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으며, 땅 모양은 가운데 둥글게 모여 있으니 공 모양이 지
구의 모습에 가깝다. 지구를 동반부와 서반부로 나누는데, 사실은 하나로 억지로 나눈 것이다.”41)
「지구설」 다음에는 「지구도」라는 동반구와 서반구의 세계지도를 싣고 있다. 동반구에는 아
시아 유럽 아프리카대륙이, 서반구에는 남북아메리카대륙이 각각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상
해에서 마르세이유로 가는 자신들의 항로가 점선으로 희미하게 표시되어 있다.42) (후술할)
몇 년 후 이규(李圭)의 ?환유지구신록(環遊地球新錄)?에서도 장덕이와 비슷하게 「지구도설(地
球圖說)」과 함께 더욱 상세한 「지구도」를 삽입하여 구미의 지리개념을 소개하였다.43)
“지구의 모양은 공과 같고 태양 주위를 도는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돈다—우리 중
화는 이런 이치를 분명히 한 사람이 진실로 적지 않으나, 이 학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열에 여
덟아홉이다. 나 이규도 처음에는 자주 이 사실을 의심하였다. 지금 출양을 하게 되어 지구를 유
람하면서 믿게 되었다…지구의 모양이 사각형이거나 태양이 움직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
면, 어찌 상해에서 동쪽으로 끝까지 가면 다시 상해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44)
위의 기사와 같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열에 하나 둘이던 시절에 세계여행
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다양한 여행가들의 모험과
소개로 중국인들은 지구라는 용어가 점차 생소하지 않은 단어로 자리 잡았다.45)
사절단이 수에즈지역을 통과할 때에 “그 입구는 매우 넓으나 물이 얕고 모래가 많아 큰 배
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은 두 대륙이 연결되는 지역인데, 동쪽이 아
시아이고 서쪽이 아프리카이며 북으로는 지중해가 남으로는 홍해가 연결된다면서 이집트의

 

39) 張德彝, ?航海述奇?, p.468.
40) 斌椿, ?乘槎筆記?, p.129.
41) 張德彝, ?航海述奇?, pp.441-443.
42) 張德彝, ?航海述奇?, p.443의 「地球圖」 참고.
43) 李圭, ?環游地球新錄?(?走向世界叢書?第1輯 第6冊), 岳麓書社, 1985年, p.315의 「地球圖」 참고.
44) 李圭, ?環游地球新錄?, pp.312-313.
45) 張德彝의 ?航海述奇?와 李圭의 ?環游地球新錄?에 실린 두 종류의 지구도를 비교하면 중국인의 지
리관의 심화과정을 읽을 수 있다.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15

 

동북국경이라고 소개했다.46) 빈춘일행은 이집트에서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올랐으며, 육로로
수에즈지역을 지나 다시 배에 오른 후 지중해를 통과해 마침내 이탈리아에 도달하였다. 빈춘
사절단이 수에즈에 왔을 때는 아직 수에즈운하가 완공되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서 이 지역을
기차를 이용해 육로로 이동하는 여행과정을 적었다.47) 결국 1866년 5월 최종 목적지인 프랑
스 마르세이유항구에 도착한 후 본격적인 유럽일정에 들어갔다. 장덕이는 마르세이유항구의
모든 배들이 항구를 출입할 때 본국의 도항선이 인도하거나, 다른 나라 선박이 항구로 들어
올 때에도 반드시 도항선을 이용하는 모습을 신기해했다.48) 빈춘일행은 전체 여행기간동안
화륜선은 19번 화륜차는 42번이나 탔는데, 모두 모양이 달랐다고 적고 있다.49)
빈춘은 영국 항구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 큰 윤선을 보았다. 작은 배를 이용해 그 선박에
올라 구경할 수 있었는데, 선체는 대략 길이가 70장(丈)이며 연통이 무려 5개나 있었다. 현재
전기동선을 실어 미국으로 가려는데 이미 자재가 가득 실려 있다고 했다.50) 장덕이도 세상에
서 가장 큰 윤선인 그레이트이스턴호를 보았다며, 그 뜻은 대동방(大東方)이라고 썼다. 영국
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왕복하는 선박인데, 원래 전기동선 등을 실어 해저전선을 설치
하는 용도를 가진 배라고 소개하였다. 앞으로 그 사업이 끝나면 비용문제 때문에 다른 작업
을 하지 못해 세워둘 것이라고 했다.51)
영국에서 조선소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조선소의 크기가 매우 넓고 큰 작업장이 백여 칸
인데, 여기서 만든 각종 정교한 윤선모형도를 우선 관람한 후 공장을 견학하였다. 철을 녹이
는 용광로가 모두 자동으로 작동하며 이미 완성된 윤선과 제조 중인 윤선을 관람한 소감을
남겼다. 조포창을 방문한 기록도 있다. 조포창에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수십 칸의 방에 각종
기계가 자동으로 작동하며 무기를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52) 빈춘일행은 발틱해에서
러시아 포대를 구경했는데, 10년 전 영프함대가 포대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해 결국 화
의를 맺었다고 했다.53) 일행이 러시아 크론슈타트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 항구 다섯 곳의 높
은 요지에 세운 백석포대를 보았다. 포대의 하얀 돌담 너머로 대포를 숨겨놓았으며, 밖에는
큰 화륜병선 몇 척이 떠있었다고 묘사했다.54) 이들의 군함과 대포에 대한 이해수준은 개인여
행가들에 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대양을 건넌 중국인들에게 해양생물에 대한 인상은 꽤 깊었던 듯하다. 빈춘이 싱가포르에
서 스리랑카로 항행 중 비어(飛魚)를 본 기록이 있는데, 수면을 날아올라 오랫동안 공중 비행
하는 모습이 질서정연하여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고 했다.55) 귀국하는 길에도 원형의 눈이

 

46) 周佳榮, 「第一個環游地球的中國外交人員: 張德彝對近代海防和西方船炮的認識」, (李金强等主編) ?我
武維揚-近代中國海軍史新論?, 香港海防博物館編製, 2004年, p.170.
47) 斌椿, ?乘槎筆記?, pp.104-106.
48) 張德彝, ?航海述奇?, p.584.
49) 斌椿, ?乘槎筆記?, p.144.
50) 斌椿, ?乘槎筆記?, p.120.
51) 張德彝, ?航海述奇?, p.532.
52) 周佳榮, 「第一個環游地球的中國外交人員: 張德彝對近代海防和西方船炮的認識」, p.170.
53) 斌椿, ?海國勝游草?(?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176.
54) 張德彝, ?航海述奇?, p.551.
55) 斌椿, ?乘槎筆記?,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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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물고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크고 작은 무리가 배 주변에서 먹이를 찾았다고 했다.56)
이처럼 바다에서 본 경험 말고도 유럽의 동물원이나 수족관 등에서 본 기사도 적지 않다. 장
덕이는 프랑스의 동물원에서 국화모양의 물고기 등 해양에서 사는 형형색색의 물고기에 대해
소개하였다.57) 영국의 동물원에 가서도 해마(海馬, 실은 河馬)를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58)
특히 고래에 대한 기억은 가장 강렬하였다. 빈춘은 스웨덴의 한 박물관에서 고래표본을 구
경하였다. 해변 사람들이 포획했다는데, 잡은 물고기를 구경하기 위해 누각에 올라 작은 다리
를 건너 고기 입속으로 들어갔다.59) “물고기의 길이가 6장(丈)이다. 잘 처리하면 그 가죽으로
배를 만들 수 있어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큰 건물을 덮을 수 있다.”고 다소 과장되게 묘
사하였다.60) 장덕이도 같은 박물관에서 여러 짐승의 뼈를 철사로 이어놓아 살아있는 듯이 보
이는 표본들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거대한 고래가 있었다. 이 고래의 입은 커서 문과 같이
출입할 수 있었고, 그 뱃속은 6-7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했다. 북해에서
잡았는데 어선을 여러 척 뒤집을 정도로 커서 사람들이 지혜를 짜내어 그 가죽을 얻을 수 있
었다고 썼다.61)
여행기에는 해양신화에 관한 짧은 기록이 있다. 귀국 도중 스리랑카에 잠시 정박할 때에는
파도높이가 산과 같아서 작은 배를 타고 부두로 이동하는데 매우 위험하였다. 이 때 현지인
은 한 가지 전설을 얘기해 주었다. 스리랑카는 인도 최남단의 섬으로 예전에 네덜란드가 이
땅을 차지하려 했을 때 해룡(海龍)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네덜란드 군함이 총과 대포를
쏘며 며칠간을 싸워 결국 해룡이 이기질 못하고 사라지자 비로소 네덜란드 소유가 되었다고
했다.62)
“중국에서 서방으로 온 첫 번째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은 빈춘은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꼈으나, 바쁜 일정 때문인지 정치제도나 정신문명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승사필기?에는 서양의 면방직기, 도서인쇄, 동전제조, 윤선과 대포제조 등과 같은 기술
문명을 찬탄하는 기사도 있지만, 대부분 한밤의 가스등, 훌륭한 말 쇼, 남녀가 함께하는 무도
회, 물을 뿜는 분수, 작은 폭포와 기이한 공원, 신기한 동물원, 근대적 극장, 반라의 서양미녀,
화려한 궁중연회 등을 소개하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여하였다. 빈춘은 출국할 때 이미 63세
의 노인으로 사상이 보수적이어서 단지 해외기담을 적듯이 여행기를 남겼다. 이와 달리 장덕
이는 처음 출사할 때 불과 19세의 어린 나이로 그의 ?항해술기?는 빈춘의 ?승사필기?에 비
해 상대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감각도 예민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전통적 가치관에 얽매
이지 않고 새로운 문명관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63)

 

56) 張德彝, ?航海述奇?, p.586.
57) 張德彝, ?航海述奇?, p.493.
58) 張德彝, ?航海述奇?, p.509.
59) 斌椿, ?乘槎筆記?, p.127.
60) 斌椿, ?海國勝游草?, p.174.
61) 陳德勤, 「1866年張德彝在瑞典見到藍鯨標本」, ?中華科技學會學刊?第18期, 2013年12月, pp.101-102.
62) 張德彝, ?航海述奇?, p.588.
63) 手代木有児, ?淸末中國の西洋體驗と文明觀?, 汲古書院, 2013年, p.112, p.115.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17

 


(2) 벌링게임(蒲安臣)사절단(1868-1870)
청영 천진조약 27조 규정에 따르면 청국과 영국 쌍방이 10년 후에는 세칙과 통상장정을 수
정할 수 있었다. 조약이 체결된 때가 1858년(함풍8년)이므로 1868년(동치7년)에는 조약기간이
만료되어 개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이 일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중국주재 미국공사 출신인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이었다. 청조는 그를 구미각국에 출사하는 흠차(欽差)로 임명하
고 1868년 11월 조약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판리중외교섭대신(辦理中外交涉大臣)으로
지강(志剛)과 손가곡(孫家谷)을 임명하고, 장덕이와 같은 통역 및 동문관 학생들을 사절단의
구성원으로 삼아 함께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청조가 구미에 파견한 진정한 의미의 첫 번
째 외교사절단이자 해외 거류기간이 가장 긴 사절단이기도 했다.
1868년 2월 상해를 출발해 1870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미국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와 기타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였다. 일행 가운데 지강은 ?초사태서기(初使泰西記)?를, 장덕이는 ?구미
환유기(歐美環游記)?를 각각 남겨 당시의 여행상황을 알 수 있다.64) 특히 장덕이의 경우 이
번에도 벌링게임을 따라 구미로 출사했는데, 첫 번째 빈춘일행이 유럽을 구경한 것이라면 두
번째 여행은 지구를 한 바퀴 돈 장거리 여행이었다. 그런데 항로가 이전처럼 동남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서쪽 방향이 아니라,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동쪽 방향이었다.65) 지강과
장덕이는 벌링게임을 수행한 일행으로 같은 장소를 방문하고 별도의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두 일기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벌링게임사절단은 미국을 상징하는 화기(花旗)가 있듯이 중국을 상징하는 국기가 필요하다
고 판단해 자신들이 탄 선박이나 열차에 청조를 상징하는 용기(龍旗)를 달았다.66) 1868년 2
월 25일 상해를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한 후 태평양을 건넜으며 4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사절단은 미국에서 4개월간 체류한 후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9월
19일 영국의 리버풀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프
로이센 러시아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10개국을 방문한 후, 1870년 10월 18일 상해로 돌
아왔다. 전체 일정은 무려 2년 8개월이었는데, 1870년 2월 러시아를 방문하던 중 벌링게임이
병으로 사망하는 불행한 사건이 있었지만 일행은 여행일정을 계속하여 성공적으로 귀국하였
다.
지강이 쓴 ?초사태서기?의 내용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과학기술 부분으로 전체 책의 4
분의 1가량을 점한다. 이 책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묘사는 처음 작자가 강남제조총국의 병기

 

64)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74. 이 사절단은 3종의 기록물을 남겼다. 志剛의 ?初使泰
西記?, 孫家穀의 ?使西書略?, 張德彝의 ?歐美環游記?가 그것이다(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
記中的文化觀察, 認證與選擇?, pp.67-68). 여기서는 孫家穀의 ?使西書略?은 참고하질 못했다.
65) 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양 싱가포르 홍해 수에
즈운하 지중해 대서양 등을 지나 영국의 남부항구(Southampton)에 도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의 몬트리올이나 퀘벡으로 간 후 다시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서
영국의 리버풀(Liverpool)에 도착하는 것이다(林汝輝等, ?蘇格蘭游學指南?(?走向世界叢書?第1輯 第2
冊), 岳麓書社, 1985年, p.656).
66) 張德彝, ?歐美環游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p.677.
18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창과 조선창을 본 것부터 시작해서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윤선 차이나(China)호로 바꾸어
탄 후 이 선박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상세히 기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67) 바람이 충분히 불
지 않아 큰 배를 움직일 힘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샌프란시스코항구로 가는 2만 수 천리의
대양을 건널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위해 살펴본 결과 배에는 6개의 화로가 있고, 이
들 화로의 증기가 모여 피스톤을 상하로 움직이면 기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윤선의 축이 상하로 움직이며 선박의 쌍륜을 돌게 하면 배가 움직인다는 것이다.68) 이 시기
는 명륜과 암륜이 교체되는 시대였는데, 윤선의 암륜 모양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였다.69)
비록 지강은 기계구조나 작동과정과 같은 기술문제는 비교적 잘 이해했지만 그 배후의 과학
원리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인식했다.
예를 들어, 지강이 차이나호의 증기기관을 묘사하는 대목을 보면, 중국전통의 천인합일(天
人合一)사상을 가지고 증기기관을 직관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그는 증기기관이 엔진의 축을 상하로 왕복시키면서 배를 움직이는 원리를, “마치 사람의
생명과 같아서 심장의 불(火)이 내려가면 콩팥의 물(水)이 올라가는 것은 물이 불의 성질을
품기 때문이다. 열은 곧 기계를 움직여 기운(氣)을 만들고, 만들어진 기운이 앞뒤로 오르내리
니, 순환하는 것을 통제하여 사지와 모든 근육으로 퍼지게 한다.”70)라고 설명했다. 만약 막히
면 병이 나고, 굳으면 죽는 것이다. 이것이 천지인생의 대기관이다. 이처럼 지강은 중의학에
서 심장과 콩팥(心腎)관계를 이용해 증기기관의 작동원리를 설명하였다. 물론 중국의 중의학
과 서양의 동력학은 비교하기 곤란한 이론인데, 그는 무의식중에 이 두 가지를 융합한 것이
다.71)
이처럼 지강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국식으로 해독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 심신
관계를 가지고 증기기관의 원리를 설명한 것 말고도, 중국의 오행사상을 빌어 윤선의 구조를
그린다든지, 중의학 사상을 가지고 정신병원의 존재를 이해한다든지, 음양설을 가지고 달 표
면의 명암분포를 설명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지강이 서양과학을 받아들이
는 태도는 지식본래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소속된 사회문제라고 본다. 지강
이 살던 시대에 중국은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서방의 ‘선견포리’의 위협
속에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서양의 선진 무기를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하나는 ‘서학’의 수용
을 대대적으로 실행할 경우 전통신앙의 권위를 위협해 결국 중국인의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
라는 두려움이다.72) 지강은 이런 곤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중학(中學)을 가지고 서양문명을
설명한 것이다.
바다에 대한 풍경묘사와 큰 바람과 높은 파도에 대한 기술은 벌링게임사절단의 일기에도
예외 없이 등장한다. “사신과 수행학생들이 이미 어지러워 크게 토하여 서있을 수 없었다.”73)

 

67) 張德彝도 이 선박을 묘사하는데, 명륜이고 길이가 대략 45장이며, 넓이가 10장인데, ‘齋納’이란 이름
은 영어로 ‘中華’라고 했다(張德彝, ?歐美環游記?, p.629).
68) 志剛, ?初使泰西記?(?走向世界叢書?第1輯 第1冊), 岳麓書社, 1985年, pp.255-256.
69) 志剛, ?初使泰西記?, p.292.
70) 志剛, ?初使泰西記?, pp.256-257.
71) 尹德翔, 「?初使泰西記?中的西方科技與中國思想」, ?北方論叢?, 2008年第1期, p.102.
72) 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察,認證與選擇?, p.76.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19

 

라든가 “선실의 물건 중 둥근 것은 구르고, 네모난 것은 부러지고, 서있는 것은 넘어지고, 달
려있는 것은 요동친다.”74)고 묘사했다. 특히 이 사절단이 대동양(大東洋, 즉 태평양)을 건너
는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다. 장덕이는 ?구미환유기?에서 요코하마를 떠나 광활한 태평양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상을 적었다. 배를 탄 후 오직 하늘과 바다만을 보았을 뿐이며, 멀리 배
한 척이라도 나타나면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바라보니 항해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보통 식사를 마치면 모두 일어나 축송을 부르는데 그 의미는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게 해달라
는 바람이라고 했다.75)
사절단은 태평양에서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였다. 장덕이는 “분명히 대동양이고 혹은 태평
양이라고 부른다. 풍랑이 이처럼 험악하니 아마도 명실이 부합하지 않는다. ‘험조양(險阻洋)’
혹은 ‘구풍양(颶風洋)’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대양의 이름을 태평이라
지은 까닭은 그 험악함으로 인해 태평이라고 명명하여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을 것이
다. 혹은 다른 바다가 태평양보다 더욱 험악했기에 태평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모두 알 수는
없다.”76)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원을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77) 자신들이 탄 차이나호가 매
우 견고한 것은 다행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해양이 넓고 항로가 길기 때문에 이런 배가
아니면 어찌 건너겠느냐며 반문했다. (후술할) 이규의 일기에는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의 풍랑
을 묘사하였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국 런던으로 항해하던 중 거센 풍랑으로 5일 동
안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앓아 누었다. 친구가 찾아와 풍랑이 비록 크지만 별일은 없을 것이
며 항상 벌어지는 일이니 두려워말라고 위로하였다. 죽는 것 못지않게 배 멀미로 인한 고통
이 대단했었던 듯싶다. 선주는 대서양의 풍랑이 가장 험악하다며 이 바다는 1년 중 3개월 정
도만 잠잠하다고 했다. 서양인 선원들은 풍랑보다는 오히려 암초를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큰 바다는 암초가 없으니 선박에 치명적인 충돌에 의한 침몰사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선
박끼리 밤에는 등광 색깔을 통해 어느 회사의 선박인지 확인했고, 평소에는 전신을 통해 육
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날씨변화를 예측하였다.78)
벌링게임사절단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다시 멕시코 쪽으로 항행하였다. 항구
에서 내려 기차로 바꾸어 타고 파나마를 지나 다시 대서양 연안까지 가서 새로운 배에 올랐
다. 이 때 대동양과 대서양 사이의 허리가 불과 백 십리에 불과하니 지구지리의 신기함이 이
와 같다며 놀라워했다.79) 이 기록은 파나마운하가 만들어지기 전의 풍경이다. 이들 일행은
동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뉴욕에 도착했으며, 다시 대서양을 건너 결국 영국의 리버풀에 도
착하였다.

 

73) 志剛, ?初使泰西記?, p.252.
74) 志剛, ?初使泰西記?, p.258.
75) 周佳榮, 「第一個環游地球的中國外交人員: 張德彝對近代海防和西方船炮的認識」, p.172.
76) 張德彝, ?歐美環游記?, p.632.
77) 太平洋(Pacific Ocean)은 크고 평온한 바다라는 뜻이며, 포르투갈 항해가 마젤란이 풍랑이 심한 대
서양과 비교해 평온하다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정수일 편저, ?해상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4년,
p.328).
78) 李圭, ?環游地球新錄?, p.338.
79) 志剛, ?初使泰西記?, pp.266-267; 張德彝, ?歐美環游記?, p.650.
20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이전에 사신이 중국에서 서양 각국으로 갈 경우, 상해에서 윤선을 타고 동쪽으로 대동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하였다. 뉴욕에서 윤선을 타고 동쪽으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프랑스에
갔다.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들은 남북으로 대서양의 동부에 흩어져 있
다. 이것이 서양 각국의 대강인데, 마치 중국 연해의 각 성과 같다. 지금 사절단이 중국으로 귀
국하기 위해서 마르세이유항구에서 지중해 동남일대를 지나 인도양에서 동쪽으로 가면 중국의
민광(閩廣)경계에 들어가니, 더 동북으로 가면 원래 윤선을 탔던 상해에 도착한다. 출국을 동쪽
으로 하여 돌아오는 것도 여전히 동쪽이니 지구의 대세를 분명히 알 수 있다.”80)

 

벌링게임사절단은 “동양의 동쪽이 서양의 서쪽”이라는 사실과 “태양의 반대방향으로 여행
하면 하루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구를 일주한 최초의 중국사절단이었다. 지강은
시차문제를 설명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이 동반구이고, 아메리카와 동서양이 서반구라면서 대
동양의 중간을 기준으로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난다고 했다.81) 그리고 장덕이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구를 오대주(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와
오대양(대동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으로 나누었다. 지구의 자전에 따른 시차에 대
한 지리 관념도 여행기에 나타난다. “태양과 반대방향으로 주행하면 지구는 매일 반드시 몇
분 늦어진다. 태양을 따라 주행하면 지구는 매일 반드시 몇 분 빨라진다. 만약 그 증감을 계
산하지 않는다면, 어떤 곳에 도착한 날은 달력과 다를 것이다.”82)라고 썼다.
지강은 자신의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오늘날 서양인들이 그린 지구도와 사절단이 지구를
돌며 견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지리관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그러
나 그는 여전히 추행(鄒行)의 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라며 세계를 아홉 개로 나눈 설(九
州說)이 불가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이런 구주를 큰 바다가 둘러싼 사실도 예전에는
정확하게 설명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그 설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83) 단지 서양
인들이 윤선이나 기차를 통해 수륙을 연결하면서 인간과 금수가 서로 통하게 되었다고 보았
다. 지강은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여전히 유교적 사고틀 안에서 서
양의 과학을 견강부회해 해석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장덕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 1869년 7월 25일 장덕이는 파리에서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 치료 후에도 체력이 회복
되지 않아 일찍 귀국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였다. 이 때 바다에 대한
감상을 밝히면서, “지구 위를 생각하면 물이 5분의 3을 차지한다. 물은 정지해 모여져 새지
않는 까닭은 실은 중력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바다는 모든 하천의 왕이니, 바다를 물이
라 보기는 어렵다.”라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두 바다로 모이는 현상을 소개하였다. 아울
러 자신이 지구를 돌면서 여러 바다를 편력했는데 옛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곳들도 모두 직접
경험하며 목격했다고 자부했다. 조정이 통상을 허락하는 조서가 없었다면 어찌 배를 타고 역
외의 지역을 볼 수 있었겠는가?84)라며 귀국 직전의 안도감을 드러내었다.
지강은 외국의 군사무기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에서 신식대포와 포탄을 묘사하면서, “포탄

 

80) 志剛, ?初使泰西記?, pp.370-371.
81) 志剛, ?初使泰西記?, p.257.
82) 張德彝, ?歐美環游記?, p.633.
83) 志剛, ?初使泰西記?, pp.379-380.
84) 張德彝, ?歐美環游記?, p.807.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21

 

이 발사될 때 회전하면서 나가도록 했는데, 힘이 많이 축적되어 멀리 갈 수 있으며 힘이 여
러 배가 된다. 보이지 않는 군인이 있더라도 갑자기 포탄이 앞에서 터져 사람을 상하게 한다.
수십 리 밖에서 망원경을 이용해야만 발포한 자를 알 수 있다.”85)고 기록했다. 벨기에에서 만
든 다연발 포에 대한 소개나 미국에서 만든 기관단총에 대한 소개도 있는데, 아마도 총구에
서 일곱 발의 총알이 연속해서 발사되는 기능이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86)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도착했을 때, 지강은 조선소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시설을 관람한 후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한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는 큰 배를 만들어 바다로 입수시킬 때의 어
려움을 소개하였다. 갑문을 만들어 빈 공간에서 선박을 만들고, 배가 완성되면 갑문을 열어
배를 띄운 후 바다로 내보는 방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87) 일행인 장덕이도 지강 손가곡
등과 하구로 나가 새로 만든 윤선의 진수식을 참관한 경험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다시 배로
돌아와 20여리를 운항하여 샌프란시스코포대에 도착했는데, 이 포대의 현황과 대포가 발사되
는 원리에 대해서도 썼다.88)
지강은 보스톤의 한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 그 곳에 있던 군함을 설명하였다. “포대선(炮台
船)은 견고하여 전쟁을 견디는 무기이다. 그 선박은 철의 두께가 수 촌(寸)이며, 이십여 장이
다. 선박의 전후에 철포대 두 좌를 설치하였다. 중간에는 기통과 연통과 단단한 원형유리 몇
곳 이외에 별다른 설치물이 없었다. 선미에는 암륜창이 있고, 그 가운데 화륜기를 설치하였
다. 암륜의 진퇴는 비교적 편리하다. 포대 모양은 원형실이며 정상이 약간 높으며…전쟁 시
사방으로 모두 돌며 발사할 수 있다.”89)라며 전함의 이런저런 특징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막
을 수 없는 포선이 있다면, 공격할 수 없는 포갱(炮坑, 즉 포대)이 있다. 공격하는데 포선을
이용한다면, 방어하는데 포대를 이용할 수 있다. 포대는 돌도 있고 흙도 있고 철도 있는데,
모두 포갱을 쉽게 지키고 어렵게 공격하도록 만들었다.”90)라며 포대의 구조를 설명했다. 지강
은 ‘포대선견(炮大船堅)’이란 표현으로 서양의 해군력을 묘사하곤 했다. 일행인 장덕이 역시
보스톤 포대를 구경한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장교는 예포 13발을 발사했고 천하제일의 포대
라고 자랑하며 러시아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일행은 화약고 등을 구경한 후, 곧이어 해군요양
병원과 조선소 등을 구경하였다.91)
장덕이는 프랑스 여행 중 신문을 통해 영국에서 신형어뢰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신
문에 따르면 “영국에서 새롭게 수뢰 내부에 면약(棉藥, 신형화약의 한 종류)을 넣었는데 가장
큰 것은 1천 5백 근이고, 작은 것은 3백 근이다. 명인이 제조법을 발명해 새롭게 만든 것이
니, 그 이름을 바꾸어 어뢰(魚雷)라고 부른다. 사용할 경우 적선의 원근을 측정한 후 전기로
작동하여 스스로 물 밑으로 움직여 공격할 수 있는데, 그 힘이 매우 강하고 빠르다.”92)고 했

 

85) 志剛, ?初使泰西記?, p.254.
86) 志剛, ?初使泰西記?, p.313.
87) 志剛, ?初使泰西記?, p.260.
88) 張德彝, ?歐美環游記?, p.647.
89) 志剛, ?初使泰西記?, p.290.
90) 志剛, ?初使泰西記?, p.291.
91) 張德彝, ?歐美環游記?, p.689.
92) 張德彝, ?歐美環游記?, p.757.
22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다. 이 글은 서양해군의 판도를 바꾼 어뢰의 발명을 알린 초기 기사이다.
지강의 글에는 덴마크 항구와 포대에 대한 설명이 있다. “덴마크는 항구가 병사 식량의 근
원인데, 항구나 포대가 북문의 통로이다. 대서양 각국은 이곳을 통해 들어오고, 러시아 스웨
덴 노르웨이 등이 이곳을 통해 나간다. 덴마크는 그 진출입 세를 걷는다.”93)라면서 이런 항구
를 지키는 포대에 대해 썼다. 또 다른 곳에선 발틱해에 있는 러시아의 한 해안포대를 소개하
였다. 이 포대는 수도인 페테스부르그에 들어갈 경우 중국의 대고구와 같이 중요한 요지라며
포대 방비의 엄중함을 기록하였다.94)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에도 멀리서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포대가 가까워지며 드러나는 정교한 구조를 그렸다.95)
지강의 일기에는 처음 보는 해양생물에 대한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일행이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항구에 도착했을 때, 해안주변에 몇 개의 섬들이 보였다. 이 섬의 바위에는 바다
사자(海獅) 수십 마리가 출몰하였다. 이에 대해 “소 같기도 하고, 양 같기도 하고, 크기도 같
지 않다. 우는 소리는 개와 같고, 갈색에 얇은 털이 있다. 짐승모양에 물고기의 성질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 해우(海牛) 해마(海馬) 해구(海狗) 해저(海猪) 등이 있는 것이다”96)라고 했다.
지강은 이것은 형성(形性)의 번잡함을 이름이니, 그 상리(常理)를 잃은 것으로 물에서 나와
생활하다 그리된 것이라고 여겼다. 장덕이도 바다사자를 구경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수십 마
리의 바다사자가 수면에서 나와 돌 위에 엎드려 해를 향해 졸고 있다고 썼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털이 있는데 회색 자주 빛이며 머리는 쥐와 같고 개와 같다. 두 다리는 물고기가 물장
난치는 것 같고 큰 것은 소와 닮았고 울음소리는 개가 짖는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97)
지강은 영국에서 동물원을 구경하다가 조련사가 작은 생선을 이용해 물개(海狗)공연을 하
는 광경을 보았다. “수족관에 갔는데, 물개의 머리는 개와 닮았고 회색빛에 얇은 털이 있다.
다리는 있으되 발이 없고 꼬리는 물고기와 같다.”고 했다. 조련사가 작은 생선을 이용해 물개
를 물 밖으로 유인하여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는데, “이 개는 비록 바다에 살지만, 또한 구차
하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을 안다.”고 썼다.98) 지강은 물개가 큰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구걸하는 모습이 다소 서글프게 보인 듯싶다.99) 당시 그의 눈에 비쳐진 동물들은 현재 우리
가 바라보는 동물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읽혔다. 그밖에도 악어(鰐魚) 바다뱀(海龍) 상어(銳
魚) 및 고래(鯨魚) 등에 대한 기사도 있다. 특히 “(고래는) 가장 큰데 단지 그 뼈를 보아도…
전신의 뼈가 10여 장으로 철골이 연결된 것 같은 모양이 그 기본형이다. 그러나 목뼈는 원통
과 같다.”라면서 고래의 거대한 뼈를 그렸다.100) 이런 호기심은 구미의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방문하는 중국사신의 견문록에 고루 나타난다.
지강은 귀국 도중에 서양범선이 조류에 밀려 좌초하자 다른 선박들이 이를 구조하려는 모

 

93) 志剛, ?初使泰西記?, p.328.
94) 志剛, ?初使泰西記?, pp.342-343.
95) 志剛, ?初使泰西記?, p.349.
96) 志剛, ?初使泰西記?, p.259.
97) 張德彝, ?歐美環游記?, p.638.
98) 志剛, ?初使泰西記?, p.295.
99) 吳以義, ?海客述奇—中國人眼中的維多利亞科學?, 上海科學普及出版社, 2004年, p.27.
100) 志剛, ?初使泰西記?, p.295.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23

 

습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배에 실은 석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큰 파도에 결국 침몰하였
다. 다행히 선원들은 모두 탈출했는데, 그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서양인 항해자들
은 이런 위기상황을 항상 고려한다면서, 지구 해수면에서 매년 파손되는 배가 모두 4천 척
전후라고 전하였다.101) 장덕이는 귀국 도중에 스리랑카에서 들은 런던발 전신을 소개하였다.
영국의 화륜선 한 척이 수에즈에서 운항을 시작했으나 뒤처지자 선주는 불쾌해져 홍해에 다
다랐을 때 속도를 내게 하고 경로를 바꾸어 우리가 탄 배를 앞질러 나갔다. 그러나 배가 암
초에 부딪혀 절단 났고 물에 빠진 사람은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니 경계를 삼을 만하다고 했
다. 여행기의 말미에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영국윤선은 빨리 가는 것을 좋아해 자주 위험에
직면하며, 프랑스와 미국윤선은 천천히 운행하여 절대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102)
요컨대, 빈춘의 ?승사필기?와 지강의 ?초사태서기?를 비교하면 차이점이 뚜렷하다. 시기상
불과 일 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두 여행기의 성격은 구분된다. ?승사필기?는 관광과 오락에
관한 내용이 풍부해 기차나 윤선에 대한 묘사도 심미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시의 소재로 삼
는다. 이와 달리 ?초사태서기?는 서방의 과학기술 군사 정치 외교방면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
지하며 오락이나 사교방면의 내용은 별로 없다.103) 지강의 사고방식은 전통사상에서 출발했
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통적 신념체계의 와
해에 대한 두려움은 서방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방해했던 것이다.104) 한편 장덕이는
연이은 출국으로 어떤 중국인보다도 서양문명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을 많이 남겼는데, 예를
들어 서양음식, 서양 표점부호, 자전거, 재봉틀, 피임도구 등 다양하였다. 그런데 그는 갑작스
런 부상으로 지강일행보다 일찍 중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우연하게 가장 먼저 지구를 일주
한 중국인이 되었다.105)

 

(3) 숭후사절단(1870-1871)
벌링게임을 이어받아 중국대표단이 출양한 것은 1870년 숭후(崇厚, 1826-1893)사절단이다.
천진교안이 발생한 후 청조는 1870년(동치9년)에 병부시랑 숭후를 특사로 프랑스에 파견해
사과하기로 했다. 이 사절단에는 장덕이와 같이 통역을 담당한 중국인 말고도 영국인 프랑스
인 등이 포함되었다. 숭후일행은 그 해 겨울 천진을 출발하여 다음 해 마르세이유항구에 도
착하였다. 이들이 도착할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었는데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
배하자 사절단은 곳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 중 1871년 3월 파리코뮨을 진압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중국인이 되었다. 1871년 11월에야 겨우 정식으로 프랑스정부를 접견
할 수 있었다.106) 앞의 두 차례 사절단에 참여한 바 있었던 장덕이는 이 사절단에서도 통역

 

101) 志剛, ?初使泰西記?, pp.374-375.
102) 張德彝, ?歐美環游記?, p.812, p.817.
103) 尹德翔, ?東海西海之間-晩淸使西日記中的文化觀察,認證與選擇?, p.69.
104)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588.
105) 7년 후 李圭가 중국해관의 대표신분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후 8개월 동안 지
구를 일주하였다.
106) 陳室如, ?近代域外游記硏究1840-1945?, p.75.
24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으로 참가해 보불전쟁과 파리코뮨을 묘사한 세 번째 여행기 ?수사법국기(隨使法國記)?8권을
남겼다.107)
장덕이는 중국을 출발할 때 마침 지강일행이 귀국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천진에서 상해로
내려오는 과정에 흑수양(黑水洋)을 지나는데, 이곳은 본래 중국의 바다 가운데 풍랑이 심한 곳
이었다. 그래서 일행 중에 금강경을 바다에 던져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사람이 있었다.108) 세
번째로 출양한 장덕이로서는 여행기의 단골메뉴인 항구와 윤선, 대양과 지리 등에 대한 놀라
움은 이번 여행기에는 대체로 생략되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해양관련 기사는 많지 않다.
이번 장덕이의 여행기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시킨 이집트의 수에즈운하(Suez Canal,
1869년 완공)를 통과한 기록이 있다. 이전의 견문록이나 여행기에는 수에즈운하가 공사 중이
어서 이와 관련한 소개만 하고 모두 육로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프랑스 외
교관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Ferdinand Marie Vicomte de Lesseps)에 의해 10년 동안 추
진된 대운하공사에 감탄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꿰뚫은 이 공사는 인간의 노력이 하
늘을 이긴 우공이산의 고사에 비유하였다. 수에즈운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진흙을 퍼내는
신기한 선박에 대한 묘사도 엿보인다.109) 중국인의 눈에 수에즈운하와 같은 대공사는 서양인
의 해양개척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110)
수에즈운하에 대한 기록은 사절단이나 출사대신의 여행기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단골소재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몇 년 후 이곳을 지난 이규의 글에는 수에즈운하에 대한 항목이 별도
로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에즈운하는 본래 사막이었는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양 대륙 간에 있으며 터키의 이집트총독 관할에 있다. 북으로는 지중해에 접하고
남으로는 홍해에 접한다. 중간에 238리가 육지인데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서쪽에서 온 선박
이 지중해에 다다르면 반드시 지중해 남단의 한 곳(이집트 소속)에서 화륜차로 육지여행을
하고 홍해 북단의 수에즈지방에 다다르면 다시 배에 올라 동쪽으로 향한다. 물길로 곧바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함풍6년 한 프랑스인의 발의로 지중해상선이 곧바로 홍해로 갈수 있도
록 연결시키자고 하여 이집트총독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자금을 모아 오랜 대공사가 시작되
었다. 처음 프랑스인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천하에 논란이 많았다. 영국인들은 이 사업이 불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착각이었다. 이 운하를 통과할 때마다 그 크기와 무게에 따라
비용을 징수한다. 현재 듣기에 서양인들은 장차 서반구의 경계지역인 파나마운하도 개통하려
고 노력 중인데, 만약 완성된다면 동서 두 대양을 상선이 곧바로 통과할 수 있다. 그 거리는
불과 10여리로 수에즈운하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지반이 견고해 쉬운 공사는 아니라고

 

107) 張德彝는 1876년 12월 다시 출사대신 郭嵩燾를 따라 영국으로 출사하였다. 1878년 12월 또 다시
郭嵩燾가 귀국하기에 앞서 출사대신 崇厚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갔다. 그는 평생 무려 여덟 번의
출사를 통해 여덟 권의 여행기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른바 ?七述奇?를 제외한 일곱 권
이 전해지면서 19세기 후반 중국인 가운데 가장 빠르고 상세한 세계견문록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108) 張德彝, ?隨使法國記?, p.323.
109) 張德彝, ?隨使法國記?, pp.363-364.
110) 레셉스는 2억 프랑의 자본금으로 1858년에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를 만들고, 프랑스와 이집트
통치자가 공동으로 지분을 소유하였다. 수에즈운하는 총 길이 162.5킬로미터의 대공사로 1859년 4
월에 시작해 1869년 11월 17일에 완공하였다(정수일 편저, ?해상 실크로드 사전?, p.189).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25

 

한다.111)
숭후사절단 여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의 군사시설에 주목한 점이다.112) 베트남 연
해를 지날 때 프랑스 포선을 만난 것이나 프랑스 현지에서 병선과 조포창을 참관한 사실 등
이 실려 있다. 프러시아와 전쟁이 한창일 때 방문한 한 조선소에서는 군용물자의 필요 때문
에 작업이 중단된 상황을 소개하며, 동철을 모두 대포 만드는데 쓰고 있는데 대부분이 신형
후당포라고 했다.113) 7천 톤급 1,200마력의 대형군함을 구경한 것이나 수뢰를 만드는 공장을
구경한 일도 있다. 철로 만들고 3천근의 화약을 장착한 수뢰에 대해 “바다 속에 들어가는데
앞에는 작은 물건이 붙어있고 가운데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크고 작은 병선을 막론하고
접촉하면 폭발한다.”고 설명했다.114) 여행기 중에는 별도의 부기를 달아 세계 각국의 군함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두 가지 철포선이 매우 유명하다고 했다. 하나는 버지니아(Virginia)호이
고, 다른 하나는 모니터(Monitor)호라면서 두 철포선의 성능을 비교하였다. 이 군함들의 대포
는 사방을 경계할 수 있으며 적의 공격에도 사람을 상하게 못하도록 견고하다고 했다.115) 여
기서 철포선은 곧 철갑선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해군분야에 대한 관심은 얼마 후 곽숭도와 같
은 출사대신의 일기에서는 더욱 심화되었다.
숭후일행은 1871년 8월말 프랑스를 떠나 영국과 미국을 유람하였다. 프랑스 항구에서 망루
와 등대를 본 구절이 있다. “각 항구를 오가는 배들에게 장애물이 있는 곳이나 운항하기에
불편한 곳의 주변 산정상의 땅을 골라…원형모양의 탑을 쌓는데…모두 돌로 만든다.”116)면서
망루의 모양과 운영방법은 물론 등대의 유리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하였다. “등대의 큰
불빛은 55 리까지 비출 수 있어서 사방의 선박들에게 어느 곳에 위험물이 있어 피해야 하는
지 보여준다. 검은 안개로 혼미해져서 등광이 어두워지면 종을 울려 알리는데, 오는 배는 스
스로 소리 나는 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해의 위험한 곳에는 등
대를 많이 설치하여 항해하는 사람을 보호한다.”117)라고 적었다. 숭후일행이 영국에서 미국으
로 건너갈 때는 400여명을 태울 수 있는 명륜선을 탔다. 이런 배는 대서양의 거친 풍랑을 만
나면 충격이 커서 토하거나 우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고 한다.118)
사절단의 일기에 만국공법(萬國公法)이 종종 언급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행 중에 만난
미국인들이 10년 전 미국의 남북전쟁에 대해 소개하면서 내전 당시 영국이 남부군을 도와 만
든 병선 알라바마호 때문에 미국정부가 영국에 항의하면서 국제법 분쟁으로 확대되어 결국
영국정부가 미국에 배상하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알라바마호 사건119)과 관련해 만

 

111) 李圭, ?環游地球新錄?, pp.304-306.
112) 프랑스에서 서양의 군사지식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는데, 프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병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했다(周佳榮, 「第一個環游地球的中國外交人員: 張德彝對近代海防和西方船炮的認識」,
p.174).
113) 張德彝, ?隨使法國記?, p.389.
114) 張德彝, ?隨使法國記?, p.392.
115) 張德彝, ?隨使法國記?, p.488.
116) 張德彝, ?隨使法國記?, p.516.
117) 張德彝, ?隨使法國記?, p.517.
118) 張德彝, ?隨使法國記?, p.493.
119) 조세현, ?천하의 바다에서 국가의 바다로?, 일조각, 2016년, pp.162-169 참고.
26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국공법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흥미롭다.

 

“(공법에 실린 바에 따르면) 국가에 민변이 있으면 이웃나라는 소탕하는데 협조할 수 있으나,
역도들을 도와서 거꾸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양국이 교전을 하면, 중립국은 전쟁국의 인
민과 선박을 국경 내에 두어 적에게 다치게 하거나, 병사와 민간인이 전쟁을 돕는데 참여하는 것
을 허가하거나, 전선과 전쟁도구를 대신 제조하는 등의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중립국 상선은
비록 전쟁하는 나라에 매매할 수는 있으나 결코 군사물자를 운반해서는 안 된다. 빈 선박으로 영
해(海界) 밖에 정박해 있거나 혹은 다른 나라의 항구에 들어갈 때, 그 나라의 군사물자를 운반하
는 일 등은 할 수 없다. 또한 각국의 선박은 관민을 막론하고 해상의 여러 곳으로 갈 때 모두 그
나라의 영역과 같다. 만약 다른 나라에 의해 파손되면 그 강역을 침범한 것과 다름없는데, 국가의
주권을 간섭했기 때문이다. 화약을 맺은 후에는 하나하나 숫자만큼 배상해야 한다.”120)

 

이것은 국제법상 해양 전시법에 대해 그 요점을 기록한 것이다. ?수사법국기?에는 서양문
명의 보편성과 우월성에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문명관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목과 더불
어, 중국문명의 보편성을 절대시하는 전통적 문명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표현이 등장한
다. 장덕이는 점차 “각국마다 좋은 정치와 좋은 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였
다.121) 이에 앞서 지강의 기록에도 “종전에 프로이센병선이 천진 해구에서 덴마크화물선을
약탈하여 공법을 어겼다. 이번에 특별히 분명하게 처리해 각국이 동의한다면 앞으로 중국은
이런 번거로움을 면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이른바 대고구 선박사건122)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이들은 서양문명의 성과 가운데 하나인 만국공법에 대해 주목하였다.
숭후일행은 프랑스 마르세이유항구에서 암륜선을 타고 귀국하였다.123) 귀국선에서 한 여인
이 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침상에 눕히고 백의를 입힌 후 입에 향수 작은 병 하나를
부어 나쁜 냄새를 없앴다. 선박규정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 하루가 지나면 전염위험 때문에
바다에 던지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스리랑카와 멀지 않아 잠시 배를 세워 목재를 구해 관
을 만들었다.124) 그리고 여행기의 말미에는 서양인들이 지구를 논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는
지구의 자전으로 낮과 밤이 나누어지고, 지구의 공전으로 사계절이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소
개하였다.125) 숭후사절단은 구체적인 외교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벌링게임
사절단에 비해 유럽의 해양문명에 대한 언급이 소략하다.
청말 중국인의 구미여행기 중에는 청조 관리가 아닌 경우가 드믄데, 그런 면에서 중국 상
공업계를 대표해 세계박람회에 참여하고 세계를 일주한 이규(1842-1903)의 여행기는 이채롭
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숭후사절단이 귀국한지 몇 년 후인 1876년 미국이 건국 1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필라델피

 

120) 張德彝, ?隨使法國記?, p.513.
121) 手代木有児, ?淸末中國の西洋體驗と文明觀?, p.118.
122) 조세현, ?천하의 바다에서 국가의 바다로?, pp.157-162 참고.
123) 張德彝는 자신의 여행기에 프랑스 국제윤선의 출발지와 도착지 및 1등 칸부터 5등 칸까지의 가격
표를 실었다(張德彝, ?隨使法國記?, pp.557-560).
124) 張德彝, ?隨使法國記?, p.548.
125) 張德彝, ?隨使法國記?, pp.551-552.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27

 

아에서 대규모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중국은 해관의 서양인 관리 주관아래 이규를 참가시켰
는데, 그 해 5월 광동인 통역 한 사람을 데리고 미국상인과 함께 상해로 향했다. 이규는 미국
을 거쳐 유럽을 여행한 세계여행기 ?환유지구신록(環游地球新錄)?을 남겼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상해에서 직접 미국으로 가는 항로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당시 미국해운회사 태평양우선의 정기선을 타는 것이 빠른 방법이었다. 이규는 요코
하마에서 북경호라는 배에 올랐는데, 북경호는 태평양우선의 5,500톤급 대형 외륜선이었다.
이 배는 동경호 중국호 일본호 아메리카호 등 태평양우선의 동양항로에 취항한 11척의 신식
윤선 가운데 가장 크고 성능이 좋은 배였다. 당시 이 선박에는 다수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2
층의 중등선실에 있었는데,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화공들이었다. 이런 화공과 같은 사
람들은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일찍부터 서양의 근대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일
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여행기간은 18일이었는데, 1840년대 임침이 태
평양을 건널 때보다 무려 122일이나 단축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인 1871년 일본의 이와
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이 23일 만에 태평양우선의 아메리카호를 타고 요코하마에서 미국으
로 건너간 때에 비하면 5일정도 단축된 것이다.126)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대한 묘사는 이규의 여행기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는데, 박
람회장의 지도를 비롯해 서양의 다양한 근대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놀라움이 담겨 있다. 거
대한 증기기관, 신식 기관단총, 하천을 준설하는 선박, 크루프 대포 등 여러 가지 제품들이
전시되었다. 미국 체류기간 동안 이규는 어린 중국유학생들을 만났는데, 학생들은 미국 신사
집에 나누어 거주한다고 했다. 용굉에 대해서는 매우 서양인에 대해 경복한다는 인상을 받았
으며, 그와 함께 총포공장을 견학하기도 했다.127) 이규는 영국 울리치에 있는 대형 군수공장
을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수십 곳의 큰 공장들이 있었는데 소총과 대포는 물론 수뢰 등 다양
한 무기들을 생산하였다.128) 포츠머스군항도 방문했는데, 이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군함조선창
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담당자가 마중 나와 철갑선을 비롯해 여러 군함을 소개하였다.
이규의 기록 가운데는 북극 탐험선 두 척에 관한 기사가 있다. 이 탐험선들은 당시 북극해
를 탐험하고 막 돌아왔는데, 크기가 400-500톤에 불과하였다. 국가에서 탐험선을 파견할 때,
사람들은 배가 너무 작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비록 선체는 작았지
만 다른 배들보다 견고하여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특히 선장의 뛰어난 능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129) 또한 이규가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갈 때 다른 사람들처럼 배를
탔는데, 큰 배가 출입하기 어려운 항구사정으로 말미암아 상인들이 불편해 한다면서 최근 소
문에 양국 의회에서 해저터널을 뚫는 계획을 논의한다고 전했다.130) 한편 귀국선에서는 서양
인들이 윤선에 있는 기계를 이용해 물과 불로써 해수를 담수로 만든 후 다시 얼음으로 만든다
는 신기한 사실도 전하였다.131) 이 무렵은 서양의 해양문명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126) 鈴木智夫, ?近代中國と西洋國際社會?, pp.163-171.
127) 李圭, ?環游地球新錄?, pp.263-265.
128) 李圭, ?環游地球新錄?, pp.292-293.
129) 李圭, ?環游地球新錄?, p.294.
130) 李圭, ?環游地球新錄?, p.342.
131) 李圭, ?環游地球新錄?, p.347.
28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이규는 과거 사절단처럼 마르세이유에서 출발해 상해로 돌아왔는데, 승객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주로 영국인은 인도에 가고, 프랑스인은 베트남의 사이공에
가고, 네덜란드인은 자카르타에 간다면서, 그곳이 자신들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관리와 상인들
이 꾸준히 오간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독일인 미국인 일본인 인도인 등이 타고 있었다.132) 그
는 장덕이처럼 서양의 끝이 동양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다. 이규가 세계일주할
때는 중국 최초의 해외공사 곽숭도가 영국에 파견된 시기와 비슷하다. 그는 공무로 출장 간
인물이라서 그런지 여행기가 비교적 상세하여 출판되자마자 중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
쳤다.133)
덧붙이자면, 양무운동시기 청조가 최대 규모로 해외에 파견한 해외시찰단은 숭후사절단이
돌아오고 거의 20년 후인 1887년 7월 열 두 명의 시찰단을 다섯 조로 나누어 동시에 파견해
20여 개국을 고찰한 일이다. 이 시찰단은 청조가 동문관에서 시험을 통해 선발한 젊은 관원
들로 구성된 단체였다.134) 그런데 의외로 이 시찰단이 남긴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135)

 

Ⅳ. 맺음말
아편전쟁 이전 해외 여행기는 과거의 전설수준에서 벗어나 사실에 가까워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범위는 여전히 동남아지역과 러시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두 차례 아편
전쟁의 패배 후 서양의 이른바 ‘선견포리’의 위력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양
을 건너 유럽과 미국에서 각종 선진문명을 체험한 여행자들은 중국과 구미 열강의 뚜렷한 차
이를 자각하였다. 청말 중국 지식인의 출양은 대부분 관방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근대 중국인과 서양인이 교류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였으며, 오히려 개인여행자는 예외적인
사례에 속하였다. 임침 용굉 왕도 등이 남긴 개인견문기에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미지가 대부
분 단편적이다. 그들의 견문기에는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움이 가득했지만 이와 관련한 체계
적인 기술을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자격으로 구미열강의 해양문명을 대표하는 군함과
대포 등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32) 李圭, ?環游地球新錄?, p.344.
133) 郭嵩燾가 영국에 온 하트로부터 李圭의 ?環游地球新錄?을 선물로 받은 기록이 있다. 미국에서 열
린 독립 100주년 기념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에 하트의 명령으로 해관서기였던 이규가 참석했다
가 쓴 4권의 여행기라고 했다(郭嵩燾, ?倫敦與巴黎日記?, (?走向世界叢書?第1輯 第4冊), 岳麓書社,
1985年, pp.628-629).
134) 傅雲龍 顧厚焜 등 2인은 일본 미국 캐나다 페루 쿠바 브라질 등 6개국을 여행하였고, 劉啓彤 李瀛
瑞 등 4인은 영국 프랑스 및 영프 소속 식민지 인도 등지를 여행하였고, 李秉瑞 程紹祖 등 2인은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등을 여행하였고, 繆佑孫 金鵬 등 2인은 러시아를 여행
하였고, 洪勛 徐宗培 등 2인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등을 여행하였다. 사실
상 그들이 방문한 국가는 21개국이 넘었다(王曉秋, ?三次集體出洋之比較: 晩淸官員走向世界的軌迹」, ?學術月刊?第39卷 6月號, 2007年, pp.140-145).
135) 淸末新政 시기인 1905년의 유명한 五大臣出洋 사건도 빼놓을 수 없는 해외 사절단이다. 이것은 청
조가 왕공대신의 고위급 인사를 중심으로 각국의 정치를 출양고찰한 사절단이었다.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29

 

청조에서 파견한 해외 사절단의 경우 정치적 위상 때문인지 서방국가의 배려로 좀 더 세밀
하게 그들의 과학기술을 관찰할 수 있었다. 빈춘사절단의 빈춘은 물질문명에 대해 큰 호기심
을 느꼈으나, 바쁜 일정으로 서양의 정치제도나 정신문명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빈
춘의 ?승사필기?는 관광과 오락에 관한 내용이 많았으며 시적인 표현으로 가득 찼다. 이와
달리 벌링게임사절단의 지강이 쓴 ?초사태서기?은 서방의 과학기술 군사 정치 외교방면의 내
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지강의 경우 기술과 과학을 나누어보면, 서양의 기술체계
는 비교적 잘 이해했지만 과학 원리를 이해하는데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한편 숭후사절단은
천진교안의 사죄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한 외교관들인데, 전쟁과 혁명의 혼란 중에 방문한
것이라 상대적으로 현지사정 소개에 주력하였다. 특히 장덕이는 세 차례 사절단에 모두 참여
한 통역이라 흥미롭다.136)
대체로 임침 용굉 왕도 등과 빈춘 벌링게임 숭후 등은 초기 출양의 두 가지 유형을 보여주
는데, 하나는 개인의 필요였으며 다른 하나는 국가의 파견이었다. 이런 개인 견문기와 사절단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관련 기사들을 모아 분류해보면 그들이 바라본 서양 해양문명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다룬 (1)선박 구조와 항구 풍경, (2)대양항해에 대한 기억(풍랑 배멀미
등대 등), (3)지리관과 세계관의 혁신, (4)수에즈운하에 대한 경이로움, (5)군함과 조선소의 놀
라운 규모, (6)대포와 포대의 정교함, (7)동물원과 수족관의 신기한 어류, (8)서양인의 해양문
화(선정과 해양법 등) 등이 그것이다. 비록 아직까지 근대 해양문명에 대해 체계적인 인식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점차 구체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의 견문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서양 해양문명의 상징인 선견포리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일반인 신분이라 군사기밀인 군
함과 대포에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절단의 경우는 외국손님 신분으로 군함과 대포에 가
까이 접근해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시적인 방문이라 서양의 해양문명을 떠
받히고 있는 제도와 사상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알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일상적인 외교업무와 함께 군함과 대포의 구매임무를 띠고 바다를 건너 온 출사
대신(出使大臣)이나 영국과 독일의 해군학교에 신식학문을 배우러 온 해군유학생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오랜 기간 현지에 거주하면서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양의 해군
을 비롯한 해양문명을 탐색하였다. 이들 출사대신이나 해군유학생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136) 張德彝의 경우, 첫 번째는 동문관 졸업생의 신분으로 빈춘사절단을 따라 처음 유럽에 갔는데, 양
무운동 중에 소년기를 보내며 서양식 교육을 받은 신형 지식인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는 벌링게임사절단을 수행하여 다시 구미사회를 장기간 방문했는데, 우연한 사고로 말미암아 빨리
귀국해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이 되었다. 세 번째는 숭후사절단을 따라 출양
했는데, 파리코뮨의 목격자가 되면서 구미사회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해외로 출사하여 근대중국에서 가장 견문이 넓은 외교관이 되었다.
30 동북아문화연구 제48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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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초록 】
키워드
(Key words)
청말, 사절단, 해외 여행기, 해양문명
the Late Qing Period, Delegations, Overseas Travelogue, Marine Civilization
Marine Civilization appeared in the Overseas Travelogue of Individuals and
Delegations in the Late Qing Period
Cho, Se-Hyun
What did ocean mean to the intellectuals of China in the late Qing period? This thesis will
summarize outline of Western scientific technology, especially marine civilization appeared in
three overseas travelogues of individuals and delegations during the period of Westernization
Movement with a keyword ‘ocean’, and analyze the process that Chinese formed a new
outlook on the ocean. Articles related to ocean appeared in the record of personal experience
and travelogues of delegations enable us to know the outline of marine civilization they
looked. The foregoing includes (1) structure of ship and scenery of port, (2) memory of ocean
voyage(winds and waves, seasickness, lighthouse etc.), (3) innovation in geographic
perspective and outlook on the globe, (4) awe toward the Suez Canal, (5) astonishing scale of
warship and dockyard, (6) elaboration of artillery and artillery corps, (7) novelty of zoo and
aquarium, (8) Westerners‘ marine culture(rules on the deck and maritime law etc.) that were
covered in the body.
After China was defeated two times in the Opium War, the power of so-called ‘strong fleet
and sharp artillery’of the West astounded Chinese people, and travellers who experienced
various advanced civilization in the ground crossing the ocean realized a marked difference
between China and powers of the Occident. Reading the record of personal experience shows
that Chinese people had interest in the navy, a symbol of marine civilization of the West, but
were not allowed to access warships and artillery, military secrets for their status as the
general public. However, delegations were able to access warships and artillery closer as
foreign guests. Notwithstanding the aforementioned, delegations were not also able to have
in-depth knowledge of systems and thought that enabled marine civilization.
필자
인적사항
성명(한글): 조세현 (한자): 曺世鉉 (영문): Cho, Se-Hyun
국문제목: 청말 개인과 사절단의 해외 여행기에 나타난 해양문명
영문제목: Marine Civilization appeared in the Overseas Travelogue of Individuals and
Delegations in the Late Qing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