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言
高麗 중엽인 毅宗 24년(1170) 武臣亂의 勃發로 武臣政權이 성립되면서 武臣들이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무신들만이 정권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많은 文臣이 官職에 등용되어 무신정권에 협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武臣執權期 支配體制의 역사적 특성이 올바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문신의 정치활동에 대한 연구가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신집권기의 문신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註 001 연구결과에 의하면 무신집권기는 초기무신집권기와 최씨집권기로 구분하였고, 문신들은 隱居한 인물과 정권에서 疎外된 인물 그리고 정권에 참여한 인물 등으로 나누어 검토되었다.
그런데 종래에는 무신집권기의 한 시기 또는 문신들 중 일부만이 집중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즉 연구시기와 범위를 압축하여 文臣像 규명에 큰 학문적 성과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종래의 연구개요와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무신정권시대의 文人들의 動向을 주로 作品활동을 통해 천착하거나, 문인의 내면적 본질을 관념적인 분석으로 해명하였다.
○ 무신집권기 文士들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을 개괄적으로 考究하였다.
○ 무신집권하 文人知識層의 동향을 類型化하여 파악하였다.
○ 무인정권시대를 文士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시각에서 문사(은거문사는 제외)외 동태와 성격을 추구하였다.
○ 최씨정권에 참여했던 문신만을 대상으로 그 역할과 지위를 고찰하였다.
이에 따라 全武臣執權期에 모든 문신에 대한 總體的 이해는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旣往의 연구업적을 참조·종합하면서 全武臣執權期를 초기무신집권기와 최씨집권기로 나누고, 무신난 이후 모든 문신의 동향과 정치활동을 점검하여 그 性向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對文臣優待政策의 實相 규명에도 留意할 것이다.
무신집권기와 문신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고려 무신집권기의 지배체제 연구에 一助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本稿에서 ‘文臣’은 文士·文人·文班·儒者 등을 포괄하여 편의상 지칭한 것이며, 武臣勢力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음으로 시기와 내용에 따라 용어가 달리 쓰여지기도 하였음을 밝혀 둔다.
- 註 001
- 무신집권기 문신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閔丙河, 〈高麗武臣執政時代에 대한 一考〉(《史學硏究》 6, 1959).
朴菖熙, 〈崔忠獻小考〉(《史學志》 3, 1969).
邊太燮, 〈高麗朝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 11, 1961;《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武臣政權과 對蒙抗爭, 1973).
金毅圭, 〈高麗武臣執權期 文臣의 政治的 動向〉(《史學論志》 3, 1975).
李佑成, 〈高麗武臣執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嶺南大開校紀念 國際學術會議發表論文集》, 1977; 《韓國의 歷史像》, 1982).
Edward J. Shultz, 〈The Military-Civilian Conflict of the Koryo Dynasty) (《The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1979).
金毅圭, 〈高麗武人執權期 文士의 政治的 活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張淑卿, 〈高麗武人政權下의 文士의 動態와 性格〉(《韓國史硏究》 34, 1981).
南仁國, 〈崔氏政權下 文臣地位의 變化〉(《大丘史學》 22, 1983).
金塘澤, 〈崔氏政權과 文臣〉(《高麗武人政權硏究》, 1987).
羅滿沫, 〈高麗武人政權期의 國王과 文班〉(《震檀學報》 63, 1987).
朴菖照,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그의 30代에서의 官僚指向性에 대하여―〉(《外大史學》 1, 1987).
______,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Ⅱ)―그의 40代 이후의 의식의 변용에 대하여―〉(《外大史學》 2, 1989).
______,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Ⅲ)―그의 晚年에서의 感慨―〉(《外大史學》 3, 1990).
1. 武臣亂 후 文臣의 動向
毅宗 24년(1170) 庚寅 8월에 武臣들이 봉기하면서 무릇 文冠을 쓴 자는 胥吏라 할지라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하여註 002 文臣滅種의 구호를 외치며 大小문신에 대해 무차별로 대량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어 明宗 3년(1173) 癸巳 9월 金甫當의 반란 때에는 앞서 庚寅亂 때 禍網에서 살아남은 문신들이 다시 慘禍를 입어 10일간에 걸쳐 모두 살해되었거나 강물에 投盡하여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다.註 003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문신의 受難期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兩次의 문신 대학살로 高麗前期 문신위주의 정치체제는 終焉을 告하고 무신집권기가 출현되었다. 毅宗은 폐출되고 王弟 明宗이 새 국왕으로 추대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무신 暴擧의 渦中에서 문신들이 전멸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육된 문신보다는 免禍된 문신의 수가 더 많았던 것 같다.註 004 이제 免禍된 사례와 救命된 문신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免禍·救命된 문신들은 그들의 입장과 성격에 따라 무신정권에 각기 달리 對處하였다. 무신난 후 문신들의 동향은 크게 세 유형(隱居文士·疎外文人·登用文臣)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1) 隱居文士
전술한 입산도피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신난이 일어나자 神駿과 悟生은 虎口에서 脫身하여 佛門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儒者服飾인 冠帶를 버리고 僧侶服인 伽梨를 입고서 무인정권에 趨附하지 않고 고결하게 여생을 마쳤다. 신준과 오생은 《高麗史》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西河集》·《破閑集》·《櫟翁稗說》 등 文集이나 詩話類에 보일 뿐이다. 신준은 公州로 도피하였고,註 015 오생은 伽倻山에 은둔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名聲은 세상에 떨쳤고 節操는 崇尚의 대상이 되었다.註 016
그런데 신준이 公州의 山莊에서 지방의 郡守子弟들을 모아놓고 교육에 종사했다는 사실은註 017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麗季의 名儒 李齊賢이 忠宣王과의 대화에서 王이 우리나라 선비들이 寺院의 승려를 찾아가 글을 익히는 관습이 언제부터이냐고 했을 때, 이제현은 무신난 후에 화를 피해 山門으로 들어간 文士들이 그곳에서 지방자제들을 교육시켜 그것이 한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註 018 이 지방의 자제들은 아마도 신준의 경우와 같이 군수의 자제이거나 또는 지방토착세력인 鄕吏層의 자제일 것이며,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후일 士大夫 형성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註 019
儒冠을 버린 신준이나 오생과는 달리 亂初에 피신은 하였으나 끝까지 유관을 버리지 않고 지방에서 儒學을 닦으며 處士生活로 일관했던 權敦禮와 같은 文士도 있었다. 御史 출신인 권돈례는 原州에 幽居하면서 門徒들을 길러냈는데, 늘 문을 닫고 가르쳤음으로 제자들이 모여들어 강습하는 소리가 孔子의 고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註 020
권돈례는 끝내 出世하지 않았음으로 林椿이 오생과 권돈례에게 보낸 書翰에 의하면,註 021 당시 그의 淸名은 利祿에 甘心되고 名利에 誘惑되는 俗儒들에게 위의 오생과 함께 큰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산도피 한 은거문사는 기록에 전하여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恭讓王 3년(1391)에 成均生員 朴礎 등이 불교의 폐해를 論駁한 上疏文에서 庚癸亂 이후 文士들은 兵難에 죽었거나 山林으로 도망하였음으로 通儒와 名士가 1백명에 1·2명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註 022 통유와 명사는 곧 文士를 뜻하는 것으로 이 상소문에 의하여 무신난에서 免救된 문사들은 거의 입산도피하여 승려가 되거나 지방에 은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준·오생·권돈례 이외에 현재 文集을 통하여 찾을 수 있는 은거문사로는 李仲若·朴仁碩·王若壽·皇甫若水·趙亦樂 등이 있다. 은거문사는 문헌의 발굴로 더 나타날 것이 기대되고 이들의 동향에 대하여도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은거문사들은 儒冠을 버린 경우와 버리지 않은 차이는 있었으나 무신정권과 타협을 거부하고 後學들을 熏陶하면서 淸高한 입장을 고수했던 지식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疎外文人
은거문사와는 달리 무신난 초에 피신하였다가 다시 開京으로 돌아와 仕宦하려 했던 문인들이 있었다. 林椿·吳世才 등이 이 유형에 속하는데, 詩文을 숭상했던 이들 문인은 당시 文壇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註 023
임춘은 원래 開國功臣의 후예로 난후 脫身하여 한때 嶺南지 방을 유랑하였다. 그 후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무신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던 문신들에게 官職에 등용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고난과 失意에 빠지고 飢餓에 허덕이다가 早死함으로써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註 024
오세재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仕官의 길을 원했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신집권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회적 신분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비참한 모습으로 離京하여 말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註 025
이처럼 임춘이나 오세재는 무신정권에서 소외되어 등용되지 않았음으로 《高麗史》에는 그 기록이 零細하고 文集類에 나타나는 詩文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임춘과 오세재는 당대의 名詩人들 이었는바, 이들 문인의 政治遍歷에 대하여는 節을 달리하여 초기무신집권기 문신의 정치활동을 고찰할 때 再論될 것이다.
요컨데 난후 소외되었던 문인들은 정권에 등용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은거문사와 소외문인은 政界에서 隱退한 계열로 볼 수 있다.
3) 登用文臣
셋째 문신의 유형으로는 문신지위의 유지가 그대로 허용되어 무신정권에 참여·협력했던 등용문신을 들 수 있다. 이 등용문신은 재등용된 경우와 신규로 등용된 문신으로 구분된다.
먼저 毅宗朝에 이미 官途에 진출해 있었거나 고위관직에 있던 문신들 중에서 德望이 있거나 惠政治民했던 인물이 있었음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들은 난후 무신집권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재등용되어 宰相職까지도 승진하였다. 이들 문신은 舊文臣이라 할 수 있는데, 文克謙·尹鱗瞻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음 난후 과거에 급제하여 신규로 등용된 新進文臣들도 있었다. 무신집권기를 대표할 수 있는 李仁老와 李奎報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신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무신난이 일어나자 일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피신함으로써 免禍되었던 이인로는 난이 진정된 후 歸俗하여 과거로 發身, 무신정권에 등용되었다.註 026 또한 이규보는 明宗代에 문신으로서 顯達할 것을 지향하였으나 몇 번의 좌절을 겪은 후 최씨정권에 重用되어 마침내 재상에까지 올랐다.註 027
그리하여 등용문신들은 무신집권자들이 포섭하고 우대함에 따라 그들에게 결탁·아부하면서 무신정권에 진출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무신들이 문신을 등용한 것은 兩班制度의 유지를 위한 文班機構의 계속 存置로 문신등용의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고, 정치나 행정사무를 담당할 문신의 利用度 그리고 문신대학살로 世情이 흉흉케 동요되었음으로 민심의 수습·안정을 기하기 위함이었다.註 028
등용문신에 대하여는 本稿에서 그 활동상과 성격이 詳論될 것이다. 등용문신은 말할 것도 없이 政界에 登場한 계열이라 할 수 있다.
- 註 002
-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高麗史》 권128, 鄭仲夫傳).
- 註 003
- “甫當 臨死誣誕曰 凡其文臣孰不與謀 於是 一切誅戮 或投江水 旬日間 文士戮且盡”(위의 책).
- 註 004
- 閔丙河, 〈高麗武臣執政時代에 대한 一考〉(《史學硏究》 6, 1959) p.57.
- 註 005
- “不幸毅王季年 武人變起所忽 薫蕕同臭 玉石俱焚 其脫身虎口者 遯逃窮山 蛻冠帶而蒙伽梨 以終餘年 若神駿·悟生之流 是也”(《櫟翁稗說》 前集 1).
- 註 006
- “昨於擾攘之際 人皆深潜遠遁 盜名僞服 以避一時之難…足以激貪汚之志者 唯足下與北原處士灌君耳”(《西河集》 권4, 寄伽倻山人悟生書).
- 註 007
- “李仁老……鄭仲夫之亂 祝髮以避”(《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 註 008
- “(徐)恭……爲人 大膽略 善騎射 六爲兩界兵馬使 士卒樂附 及拜宰相 志益謙遜 疾文士驕傲 禮遇武人 鄭仲夫之亂 重房 令巡檢軍二十二人 環衛其第 不及於禍”(《高麗史》 권94, 徐熙傳 附恭傳).
- 註 009
- “(李)奕蕤……生長閥閱 不以富貴驕人 人多重之 故得免鄭仲夫之亂”(《高麗史》 권95, 李子淵傳 附奕蕤傳).
- 註 010
- “崔惟淸……鄭仲夫之亂 文臣皆被害 諸將素服惟淸德望 戒軍士 勿入其第……俱免禍”(《高麗史》 권99, 崔惟淸傳).
- 註 011
- “文克謙……累遷左正言 伏閤上疏曰 宦者白善淵 專擅威福 密與宮人無比爲醜行 術人榮儀 執左道 取媚于上 置百順館北兩宮 私藏財貨 以支祝釐齊醮酸之費 而與善淵掌其務 凡雨界兵馬五道 按察階辭之日 必於兩宮置酒慰錢 令各獻方物 隨其貢奉多少 以爲殿最 至使家抽戶歛 以召民怨……王大怒焚其疏……遂眨黃州判官……鄭仲夫之亂 克謙直省中 聞變逃匿 有兵跡而獲之 克謙曰 我前正言文克謙也 上若從吾言 豈至今日 願以利劒決之 兵異之 擒致諸將前 諸將曰 此人 吾輩素聞名者 勿殺 囚于宮城”(《高麗史》 권99, 文克謙傳).
“文克謙……有女在室 義方弟隣娶之 由是 癸已之亂 一族皆免”(위의 책).
- 註 012
- “李知命……擢第 調黃州書記 居官廉直 民有飢者 盡心賙恤 流氓褓負而至 後爲忠州判官 政如黃州 鄭仲夫之亂 內外文臣 逃竄無所容 州人感知命惠政 護之 知命獨免”(《高麗史》 권99, 李知命傅).
- 註 013
- “毅宗朝 文臣大盛 資諒年十六 與儒家子弟 約爲契 欲併引武人吳光陟·文章弼 皆不肯 資諒曰 交游中文武俱備可矣 若拒之 後必有悔 衆從之 未幾 鄭仲夫作亂 同契者 賴光陟·章弼營救 皆免”(《高麗史》 권99, 庚應圭傳 附資諒傳).
- 註 014
- “鄭仲夫之亂 扈從臣僚 多遇害 永淳本兵家子 且與武臣相善 故免”(《高麗史》 권100, 盧永淳傳).
- 註 015
- “白雲子 棄儒冠 學浮屠氏敎包腰 遍遊名山 途中聞鶯 感成一絕……其有才不見用 流落天涯 覊遊旅 泊之狀 了了然皆見於數字間”(《破閑集》 권下).
- 註 016
- “某謹東望再拜 遙致尺牘于伽倻山人 生公侍者……昨於擾攘之際 人皆深潜遠遁 盜名偽服 以避一時之難 及其神志一變 則不待鶴書之聘 甘心利祿 突梯苟冒 誰復自蔵於胖高肥遁之節耶 是以幽逸之士 古則相望於世 今則罕聞焉 其箕顈之志 始末不渝 淸風爽氣 凜凜與秋 霜爭嚴 足以激貪汚之志者 唯足下與北原處士權君耳”(《西河集》 권4, 寄伽倻山人悟生書).
- 註 017
- “白雲子神駿 掛冠神虎 歸隱公州山莊 郡守遣其子受業”(《破閑集》 권下).
- 註 018
- “又問臣曰 我國古稱文物 侔於中華 今其學者 皆從釋子 以習章句 是宜彫蟲篆刻之徒 寔繁 而經明 行修士絕 少也 此其故何耶 臣對曰……其後 國家稍用文之理 士者雖有願學之志 顧無所從而學焉 未 免裏足遠尋 蒙伽梨而遯窮山者 以講習之……故臣謂學者從釋子習章句 其源盖始于此”(《櫟翁稗說》 前集 1).
- 註 019
- 李佑成, 〈高麗武臣執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韓國의 歷史像》, 1982) p.192.
- 註 020
- “近聞先生 常閉門敎授 門徒日盛 誦習之聲 比於沫泗 此非獨幽居避世者所樂也 盖君子之所處 人受其賜 不必待名位而後有爲也 勉之勉之”(《西河集》 권4, 答權御史書).
- 註 021
- 《西河集》 권4, 寄伽倻山人悟生書 및 代李湛之寄權御史敦禮書 참조.
- 註 022
- “我國家 自庚寅癸已以上 通儒名士 多於中國 故唐家以爲君子之國 宋朝以爲文物禮樂之邦 題本國使臣下馬所曰 小中華之館 自庚癸以後 不死兵難 則逃入山林 通儒名士 百無一二存者”(《高麗史節要》 권35, 恭讓王 3년 6월).
- 註 023
-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1973) p.257.
- 註 024
- “(林)椿 字耆之 西河人 以文章鳴世 累擧不第 鄭仲夫之亂 闔門遭禍 椿脫身僅免 卒窮夭而死”(《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附林椿傳).
“……身殘家敗 食貧口衆 爲寒窘所迫 遂之江南 乞丐爲生 凡五移星霜 以今年春首 西笑而旋久寄旅泊 囊槖傾渴 弱妻寡妹 蓬飄萍斷 一在天之涯 一在地之角 無寸田尺宅 可以聚而容膝 每一念之 不覺涕下 僕之先祖 嘗從草昧之際 功成汗馬 圖畵淩烟 以丹書鐵卷 錫之土曰永世無絕 而反爲兵士所奪 故 郭外數畝 無日可得……疾聲大呼 以乞憐於左右者 不唯他人笑之 僕亦自笑之”(《西河集》 권4, 上刑部李侍郞書).
- 註 025
- “(吳)世才 字德全 高敝縣人……明宗時登第 性疎雋少檢 不容於世 仁老三上書薦之 竟未得官 僑寓東京 窮困而卒”(《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附吳世才傳).
- 註 026
- 《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 註 027
- 《高麗史》 권102, 李奎報傳.
- 註 028
- 邊太變, 〈高麗後期의 武班에 대하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pp.407∼408.
2. 初期武臣執權期 文臣의 政治活動
초기무신집권기는 明宗 원년(1171) 李義方의 정권탈취로부터 明宗 26년(1196) 崔忠獻이 李義旼을 제거할 때까지의 明宗朝로서, 무신정권의 成立期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난에 참가한 무신들의 이해관계가 정권욕과 결부되어 무신 상호간의 처참한 정권쟁탈전이 계속되었음으로 어느 한 무신세력에 의한 장기적인 안정된 집권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明宗朝 26년간에는 李義方(?∼1174)-鄭仲夫(?∼1178)-慶大升(1154~1183)-李義旼(?∼1197) 등이 교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주도하였다. 무신난 직후 문신에 대해 보복적이었던 무신집권자들은 未久에 毅宗朝에 官界에 진출해 있던 舊文臣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문신들은 무신난 이전처럼 관직을 모두 독점하지는 못하였으나, 무신들보다 관직을 많이 제수받았다.註 029
무신정권에 포섭되어 등용된 문신들의 관직제수내용을 통해 실제 활동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明宗 즉위년(1170) 9월 文克謙의 批目에 의하여 단행된 문신들의 인사발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註 030
任克忠……中書侍郞平章事
文克謙……右承宣·御史中丞
庚應圭……工部郞中
尹鱗瞻……知樞密院事
金宰尹……左諫議大夫
李應招……左司諫大夫
金甫當……右諫議大夫
崔 讜……右正言
文克謙은 무신난 전에 문신들의 不正을 논란·배척하여 그 忠直함이 武將에게 알려졌던 까닭으로 면화된 문신이었다.註 032 明宗이 즉위 한 후 批目을 쓰게 된 殿中內給事 문극겸은 李義方의 추천으로 右承宣·御史中丞에 임명되었고, 문신으로서 최초로 上將軍이 되었다.註 033 또한 그의 딸을 이의방의 동생인 李隣에게 출가시켜 집권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어註 034 그의 一族이 모두 면화되었을 뿐 아니라 明宗朝에 修國史, 中書侍郞平章事, 判禮部事까지 승진 하면서 안정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庾應圭는 무신난 발생 때 閤門祗候로 재직한 인물이었는데, 明宗 즉위 후 金에 吿奏使로 파견되어 明宗 옹립을 정당화시키는 大任은 완수하였다.註 035 이에 대하여는 後述할 것이다. 그는 明宗朝에 工部侍郞까지 되었다.
尹鱗瞻은 무신난 당시 60세로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으나, 權貴나 王에게 諫言을 피하고 우유부단하게 處身하다가 軍卒들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保身에 힘써 明宗朝에 守太師門下侍郞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武班職인 上將軍을 兼帶하였다.註 036
金莘尹은 左諫議로 李應招·金甫當·崔讜 등 젊은 문신들과 함께 上疏하여 毅宗 때 宦官吿身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고 이의방의 형인 李俊儀와 이의방과 인척관계였던 문극겸의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 이는 이의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김신윤은 判大府事로 좌천되었다.註 037 그는 무신난 때 開京에 일어난 유혈사태를 개탄하기도 하였으나註 038 등용되어 同知貢擧로서도 활동하였다.
李應招도 김신윤과의 상소사건으로 左司諫大夫에서 禮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정중부집권기인 明宗 8년(1178) 右諫議大夫로서 同知貢擧가 되었고,註 039 경대승집권기인 明宗 10년(1180)에는 知樞密院事가 되었다.
金甫當은 난 후 右諫議大夫가 되었으나 위의 상소사건으로 工部侍郞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복직이 된 것으로 보아 무신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 明宗 3년(1173) 김보당은 毅宗 復位를 표방하면서 거병하였다. 김보당은 무신정권에 등용되어 활동하였으나 무신에 대한 반감이 쌓여 정치성을 띤 反武臣亂을 일으켰다.註 040 당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반항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崔讜은 德望之士인 崔惟淸의 아들로 右正言에 등용되었으나 역시 상소사건으로 한 때 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다시 관직이 累遷되어 明宗朝에 參知政事까지 승진하였다.註 041
또한 德望과 惠政治民으로 면화되었던 문신들도 재등용되어 크게 활동하였다.
崔惟淸은 무신난 당시 75세의 고령이었으나 평소에 덕망이 있었음으로 中書侍郞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그 후 守司空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로 致仕하였다.註 042
李知命은 난 전에 書記와 判官을 역임하면서 善政을 베풀어 그의 惠政에 감사해하는 지방민들의 보호로 救免된 문신이었다. 그 후 尚書右丞이 되었고 이어 政堂文學이 되었다.註 043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무신난 후 문신들은 宰樞兩府로부터 六部·臺省職 등 중요관직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문신들이 이처럼 고위관직을 제수받아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 보다 그들의 정치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문신이 무신정권에 등용되었으나, 초기무신집권기는 정권이 확립되지 않았음으로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었고 심한 압박과 견제를 받았다. 이와 같은 문신탄압의 현상은 明宗朝는 말할 것도 없고 高宗朝에 이르기까지 起伏은 있었을망정 꾸준히 계속되었던 것이다.註 044 따라서 문신들의 활동은 위축되어 많은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당시의 形局이 이와 같았음은 尹鱗瞻의 실례가 이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즉 문신들은 政事에 항상 견제되어 氣를 펴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保全할 수밖에 없었음으로 문신의 意氣는 沮喪할 수밖에 없었다.註 045
한편 문신들의 士氣가 위축되었던 것은 出仕路의 축소에서도 살필 수 있다. 明宗 元년(1171) 李義方이 집권한 후 무신세력이 확대되면서 문신의 出仕路였던 外任에 무신이 임용되었는데,註 046 이는 문신들의 출사로가 축소된 반면 무신들의 宦路의 폭이 확대된 것을 뜻한다. 또 明宗 5년(1175) 이의방에서 정중부로 집권세력이 바뀌었지만 外任에 武散官을 充用함으로써註 047 문신들의 출사로는 더욱 축소되었다. 문신들의 士氣가 크게 위축되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신에 대해 비교적 好意的이었던 慶大升집권기에 오면 그간 계속되었던 문신탄압의 현상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정권에서 소외되었거나 외면당하였던 문인들이 점차 과거에 응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즉 科試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던 林椿이 과거를 통해 생활의 방도를 찾으려 하였고,註 048 뛰어난 文才를 지녔던 吳世才는 낙방을 거듭하다가 明宗 12년(1182) 50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註 049 또한 李仁老도 明宗 10년(1180) 과거에서 29세로 壯元及第를 하였는데,註 050 이와 같은 사실은 이전보다 나아진 문신들의 상황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추세는 李義旼의 집권기에 접어들자 다시 反轉되었다. 임춘은 신병으로 과거를 포기하여註 051 仕宦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궁속에서 30代에 夭折하였다.註 052 과거에 급제한 오세재는 仕宦을 원했으나註 053 끝내 入仕가 좌절되고 55세에 東京 (慶州)에 寓居하다가 비참하게 客死하고 말았다.註 054 오세재가 등용되지 못한 것은註 055 사회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집권층에게 용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신정권에 추종하던 문신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李仁老도 급제는 하였으나 집권층의 冷遇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세태 때문에 임춘·오세재·이인로 등 竹林七賢이 등장하여 현실도피적인 은거생활의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요컨데 이의민집권기에는 문신에 대한 견제가 다시 계속되어 문신의 士氣는 沈退하였던 것이다.
이상으로 초기무신집권기에도 문신들이 무신보다 많이 관직을 제수받고 등용되었으나, 항상 무신들의 견제와 탄압으로 문신들의 정치활동은 위축된 상태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註 029
- Edward J. Shultz, 〈The Military-Civilian Conflict of the Koryo Dynasty) (《The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1979) p.11.
- 註 030
- 《高賭史節要》 권11, 毅宗 24년 9월條.
- 註 031
- 《高麗史》 권17, 毅宗 世家 참조.
- 註 032
- 주 11)과 같음.
- 註 033
- 《高麗史》 권103, 趙冲傳.
- 註 034
- 주 11) 과 같음.
- 註 035
- 《高麗史》 권99, 庚應圭傳.
- 註 036
- 《高麗史》 권96, 尹瓘傳 附鱗瞻傳.
- 註 037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元년 9월條.
- 註 038
- 《東文選》 권19, 庚寅重九 참조.
- 註 039
-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選場 明宗 8년 6월條.
- 註 040
- 邊太變, 〈武臣政權期의 反武臣亂의 性格―金甫當의 亂과 趙位寵의 亂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 19, 1978) 참조.
- 註 041
- 《高麗史》 권99, 崔惟淸傳 附讜傳.
- 註 042
- 《高麗史》 권99, 崔惟淸傳.
- 註 043
- 《高麗史》 권99, 李知命傳.
- 註 044
- 邊太燮, 〈高麗後期의 武班에 대하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pp.400∼401, p.413.
- 註 045
- “自鄭仲夫亂 文臣沮喪 鱗瞻與武臣同事 每被製肘 脂韋自保而已”(《高麗史》 권96, 尹瓘傳 附鱗瞻 傳).
- 註 046
- “外寄 是東班仕路 故東班必補外 然後得授朝官 西班則循次以進”(《高麗史》 권75, 選擧志 3, 銓注 凡選用).
- 註 047
- “明宗八年四月 兵部集武散官 誠牋奏 以擬外補”(위의 책).
- 註 048
- 《東文選》 권59, 與皇甫若水書 참조.
- 註 049
- 《破閑集》 권下 참조.
- 註 050
- 《破閑集》 권下 참조.
- 註 051
- 《東文選》 권13, 病中有感 및 권59, 與趙亦樂書 참조.
- 註 052
-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1973) p.263.
- 註 053
- 《東文選》 권116, 吳先生德全哀詞并序 참조.
- 註 054
-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1973) p.260.
- 註 055
- 《東文選》 권102, 吳德全載巖詩跋尾 및 《高麗史》 권102, 李仁老薄 附吳世才傳.
1. 崔氏執權期의 文臣政策
明宗 26년(1196) 4월 崔忠獻(1150∼1219)은 李義旼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아들 怡(?∼1249), 손자 沆(?∼1257), 증손 竩(?∼1258)에 걸치는 4代 6C여 년간 권력을 세습함으로써 전형적인 무신정치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최씨집권기는 무신정권의 확립을 가져왔다.明宗 말기에 오면 무신난 발생으로부터 초기 무신정권기에 생존하였던 많은 문신과 무신들이 死去하였다. 무신난에 가담했던 세대가 거의 물러난 시점에서 등장한 최충헌도 무신난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註 056 그런데 최충헌은 단순한 武將이 아니라 政治家로서의 역량을 구비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최충헌이 집권한 후 明宗 27년(1197) 5월에 上書한 封事10條註 057에서 당시 高麗社會가 당면한 정치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門蔭으로 官途에 진출한註 058 최충헌은 본래 文吏출신이었음으로 文學에 대한 식견과 문신들과의 친분유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집권과정에서 무신들은 다수 살해하거나 流配시켰으나 문신들은 소수의 숙청으로 그쳤다.註 059 그리하여 문신들을 회유·포섭하고 탄력성 있는 政治運用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정권을 구축해 나갔다.따라서 이 시기에는 문신에 대한 견제와 注視는 사라지고 도리어 문신이 우대되는 逆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문신이 우대를 받고 점차 重用됨에 따라 반대로 무신이 억압되기에 이르렀다.註 060趙永仁……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任 濡……中書侍郞平章事
崔 讜……中書侍郞平章事
于述儒……左僕射
崔 誅……知樞密院事이들 문신에 대하여 검토해 보면 문신등용의 배경을 살필 수 있다.趙永仁은 毅宗朝에 급제하여 全州書記를 지낸 후 明宗朝에 參知政事·政堂文學을 역임하였고,註 063 첫 인사발령 때에는 문신으로서 유일하게 判吏部事로 임명되었다. 이번 인사에서 門下侍郞平章事가 된 그는 崔忠粹와는 查頓관계였고,註 064 神宗옹립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註 065 조영인은 정권과 밀착된 관계였음을 알 수 있고, 마침내 門下侍中까지 승진하였으며 神宗廟庭에 配享되었다.任濡는 累代의 宰相家門의 후예로註 066 明宗朝에 등제하였고 參知政事가 되었다. 최씨가문과는 二重의 혼인관계를 맺었고,註 067 熙宗을 폐하고 康宗을 옹립 할 때 최충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註 068 이번 인사에 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되었고 마침내 門下侍郞平章事까지 승진하여 康宗廟庭에 配享되었다.崔讜은 崔惟淸의 아들이었음으로 무신들과 밀착될 소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번 인사에 中書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고 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가 된 후 곧 致仕하였다.註 069干述儒는 明宗朝에 등제하였고 이번 인사에 左僕射에 임명되었으나 곧 致仕하였다.註 070崔詵도 崔惟淸의 아들이었음으로 무신들과 밀착될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최선은 20년 전부터 최충헌과 交分을 맺고 있었다. 즉 최충헌이 28세 때인 明宗 6년(1176) 知安東府事副使로 있었을 때 최선이 이 지역의 察訪使였음으로註 071 친분이 성립되었던 것이다.註 072 이번 인사에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고 神宗을 폐하고 照宗을 옹립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註 073 그 후 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까지 승진하였으며 熙宗廟庭에 配享되었다.이처럼 인사발령으로 등용된 문신들을 검토해 볼 때 최충헌은 집권하기 전에 비교적 좋은 가문배경을 지닌 문신들과 교섭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충헌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문신을 고위관직에 등용하였고, 이들은 최충헌정권에 깊이 간여하여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등용문신들에게 뿐 아니라 정권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문인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즉 竹林七賢이었던 李仁老는 翰林, 李湛之는 留院, 咸淳은 司直이 되었다.註 074최충헌이 문신을 등용함으로써 그 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문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씨정권의 전개에 따라 문신의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다.註 075 그러나 최충헌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에 의존하였음으로, 최충헌집권기에는 문신보다 무신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한편 최씨정권은 무신들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왜냐하면 최씨정권에 반기를 들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신집권자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무신들을 견제·억압하게 되었고, 반대로 그들이 등용한 문신들은 우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崔怡집권기 이후에는 문신들의 지위가 점차 향상되었던 것이다.註 076 최이의 집권 이후 문신들의 중요관직 점유율이 최충헌집권기에 비해 계속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註 077 여기서 문신들이 무신에 비해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다고 해서 문신의 정치적 지위가 무신보다 優勢하였던 것은 아니다. 정치의 실권은 무신이 장악하였던 시기였음으로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 문신은 무신보다 劣勢였다.註 078다음 문신이 최씨정권에 발탁·등용되는 과정과 집권자의 의도를 결부시켜 文臣優待政策의 實相을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최씨집권자에게 발탁된 문신들은 모두 과거 합격자였다. 그런데 이들 문신은 반드시 최씨정권과 밀착된 측근문신의 薦擧가 있어야만 최씨집권자에게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과거에 누차 不第하다가 明宗 14년(1184) 에 급제 한 琴儀는 三韓功臣의 후예로 그의 가문은 별로 떨치지 못하였다. 그는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文士를 求할 때 李宗揆에 의해 천거되어 발탁되었다. 그 후 금의는 최충헌에게 謟事하여 華要職을 역임하였다.註 079 그는 마침내 최충헌의 가장 신임받는 측근이 되었던 것이다.明宗 20년(1190)에 급제한 李奎報는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註 080 趙永仁·任濡 등 재상에 의해 천거되었다. 그러나 불평하는 자들의 방해로 任宦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0년이 지난 神宗 2년(1199)에 全州司錄에 始補되었다.註 081 그것은 이규보가 최충헌의 邸宅에 招致되어 祝壽의 詩 千葉㨨花를 지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註 082 또 熙宗 3년(1207)에 新築된 芧亭에 초대 받아 記文을 지어註 083 直翰林으로 權補되었다. 그 후 高宗 初에도 作詩하여 參職을 구해 자신이 스스로를 천거하여 최충헌에게 인정을 받아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이규보는 최충헌·최이 父子 2代에 걸쳐 집권자에게 각별한 恩顧을 받으면서 晚年에는 재상이 되어 당대의 영화를 누렸다.崔冲의 후예인 崔滋는 康宗朝에 登第하였는데 이규보의 천거로 최이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文翰을 담당했던 이규보의 후계자로 뽑혀 최이에게 주목되었고 마침내 正言에 이르렀다.註 084이처럼 금의·이규보·최자 등 과거에 합격한 문신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최씨정권과 밀착된 측근문신들의 천거로 발탁되어 출세가 보장되었던 것이다.앞서 살핀 바와 같이 최충헌은 집권하자 문사를 구하였다. 최이도 마찬가지로 문사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이가 구한 문사는 주로 寒士로, 최이는 이들을 발탁하여 人望을 얻었던 것이다.註 085 그런데 최이가 寒士로 발탁한 문신들은 그 가문이 寒微하였다.註 086 따라서 한미한 가문출신의 과거합격자가 최씨집권자에게 발탁되려면 그들의 座主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씨집권기의 座主(知貢擧·同知貢擧)들은 최씨와 親昵한 측근문신이었기 때문이다. 熙宗 4년(1208) 右副承宜 琴儀가 동지공거로서 皇甫瓘 등을 試取하자 최충헌 父子는 이들을 厚禮로 대접하고 왕도 이들에게 특혜를 베풀었다.註 087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 科試의 동지공거가 최충헌이 신뢰하는 금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최씨를 중심으로 恩門·門生의 상하관계의 계열화가 강화되었다.註 088 실제로 최충헌집권기의 과거에서 좌주는 任濡·崔詵·李桂長·琴儀·崔洪胤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註 089 이들은 최충헌과 癒着되었던 측근문신 이었다. 그리고 과시를 담당하였던 좌주인 금의와 최홍윤은 함께 정승이 되었고 특히 문생이 많기로 유명하였던 금의는 여러번 과거를 관장하였음으로 致仕 후 축하연 때 많은 문신이 경하하여 감탄하였다고 한다.註 090 또한 금의는 名士를 많이 選取하였음으로 翰林曲에는 琴學士라 일컫고 있다.註 091 座主와 門生은 至親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유대를 지닌 엄격한 상하관계를 평생 지속하였다.註 092 또 좌주들은 문생의 문하에서 나온 문생을 볼 수 있게 되었음으로,註 093 이들 문신이 구축한 인맥은 최씨정권이 60년간 지속함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또한 최이는 銓注를 담당할 政房을 그의 私邸에 설치하고 이곳에 문사들을 소속시켰음으로註 094 문신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政房은 門客 中의 名儒들로 조직하여 교대로 숙위케 한 書房註 095의 존재와 함께 최씨정권의 對文臣政策의 중요한 斷面을 알려주는 것이다.요컨대 文士를 구하고 寒士를 발탁한 최씨집권자들은 이들 문신을 측근으로 기용·장악하여 文武兩班의 지배자로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결국 최씨집권기의 對文臣優待政策은 高度의 用人術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이가 설치한 政房과 書房도 문신정책의 一環이었다.- 註 056
- 金塘澤, 〈李義旼政權의 性格(《歷史學報》 83, 1979) p.46.
- 註 057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058
- “……始以門蔭 散補良醞令 旋拜成陵直 散加衛尉主簿 自許以功名顯 耻爲刀筆吏 改點興威尉保勝散員……”(《朝鮮金石總覽》 上, 崔忠獻墓誌銘).
- 註 059
- 주 57).과 같음.
- 註 060
- 邊太燮, 〈高麗後期의 武班에 대하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p.420.
- 註 061
-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7년 9월條.
- 註 062
- 《高麗史》 권20, 明宗 27년 12월條.
- 註 063
- 《高麗史》 권99, 趙永仁傳.
- 註 064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065
- 《高麗史》 권21, 神宗 元년 6월條.
- 註 066
- 《高麗史》 권95, 任懿傳 附濡傳.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 8, 1977) p.16 주 6) 참조.
- 註 067
- 주 64) 와 같음.
- 註 068
- 《高麗史節要》 권14, 熙宗 7년 12월條.
- 註 069
- 《高麗史節要》 권14, 神宗 2년 6월條 및 《高麗史》 권99, 崔惟淸傳 附讜傳.
- 註 070
- 《高麗史節要》 권14, 神宗 2년 6월條.
- 註 071
- 《朝鮮金石總覽》 上, 崔忠獻墓誌銘.
- 註 072
- 朴菖熙, 〈崔忠獻小考〉(《史學志》 3, 1969), p.107.
- 註 073
- 《高麗史節要》 권14, 神宗 7년 정월條.
- 註 074
- “己未仲夏 晋康公第千葉榴花盛開 公邀致李翰林仁老 金翰林克已 李留院湛之 咸司直淳 李先達奎 報淸賦之”(《補閑集》 권中).
- 註 075
- 李基白, 《韓國史新論》(新修版, 1990) p.202·p.205.
- 註 076
- 金塘澤, 〈崔氏政權과 文臣〉(《高麗武人政權硏究》, 1987) pp.126∼130 참조.
- 註 077
- 주 29) 와 같음.
- 註 078
- 金塘澤, 앞의 논문 pp.130∼134 참조.
- 註 079
- “琴儀 字節之 初名克儀 本奉化縣人 後賜籍金浦 三韓功臣容式之後……少力學 善屬文 屢擧不第 出監淸道務 剛直不撓 民目爲鐵太守 明宗十四年 中魁科 籍內侍 崔忠獻當國求文士 有李宗揆者 薦儀 遂謟事忠獻 歷敭華要”(《高麗史》 권102, 琴儀傳).
- 註 080
- 《高麗史》 권102, 李奎報傳.
- 註 081
- “宰相趙永仁·任濡·崔詵·崔讜等 上書薦之 爲不平者所抑 久不調 神宗二年 始補全州司錄”(위의 책).
- 註 082
- 《東國李相國集》 권9, 謝知奏事相公見 喚命賦千葉榴花 并序 참조.
- 註 083
- 《東國李相國集》 권23, 晋康候芧亭記 참조.
- 註 084
- “崔滋 初名宗裕 又名安 文憲公冲之後·康宗朝 登第……後怡謂奎報曰 誰可繼公典文翰者 曰有學諭崔安者 及第金坵其次也······怡欲試其才 令製書表 使奎報第之 凡十選 滋五魁五副 怡又欲試其吏 授給田都監錄事 亦敏而勤 高宗時 累遷正言”(《高麗史》 권102, 崔滋傳).
- 註 085
- “(崔怡) 多拔寒士 以收人望”(《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附怡傳).
- 註 086
- 金塘澤, 앞의 논문 pp.106∼108.
- 註 087
- “(琴儀) 照宗四年 以右副承宣掌試 取皇甫瓘等 瓘等謁忠獻 贈隨從坊厢銀瓶各一事 怡亦贈銀瓶 又謁王 親賜酒果 仍觀各坊廂歌吹 命瓘等七人屬內侍 儀爲忠獻所昵 故待以厚禮如此”(《高麗史》 권102, 琴儀傳).
- 註 088
-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1973) p.283.
- 註 089
-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選場(明宗 20년∼高宗 3년) 및 張叔卿, 〈高麗武人政權下의 文士의 動態와 性格〉(《韓國史硏究》 34, 1981) p.81 〈表 3〉 崔忠獻 執權期의 科擧合格者一覽 참조.
- 註 090
- 《補閑集》 권上.
- 註 091
- “……屢典貢 所選多名士 翰林曲有稱琴學士者 是也”(《高麗史》 권102, 琴儀傳).
- 註 092
- 曹佐鎬, 〈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 10, 1958) p.162.
- 註 093
- 《補閑集》 권下 참조.
- 註 094
- “怡 自此 置政房于私第 選文士屬之 號曰必闍赤 擬百官銓注……”《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附怡傳).
- 註 095
- “怡 門客 多當代名儒 分爲三番 遞宿書房”(위의 책).
- . 崔氏執權期 文臣의 政治活動최씨집권기의 문신정책으로 문신에 대한 寬容의 길이 열리고 측근인물로 浮上되면서 문신들은 최씨정권의 合理化와 무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임에 크게 기여하였다.먼저 문신들이 최씨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에 기여하여 무신세력과 밀착하게 된 것을 문신의 활동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최씨정권 이전인 초기무신집권기에도 무신정권의 합리화를 위해 문신들이 기여했음은 앞서 잠시 언급한 庾應圭의 활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유응규는 明宗이 즉위하자 吿奏를 위해 金에 갔다. 그런데 金帝가 왕위의 禪位를 의심하자 7일간 단식함으로써 드디어 回詔를 받아오는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註 096 毅宗의 폐위와 明宗의 즉위는 鄭仲夫에 의해 자행 되었는데,註 097 이는 정권의 부당성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응규는 明宗의 즉위가 毅宗의 內禪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최씨집권기에 들어와서 문신들이 정권의 합리화에 기여한 것은 趙永仁·金鳳毛·朴暄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최충헌 집권 후 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된 조영인은 神宗 옹립에 따른 난관을 해결함에 큰 역할을 하였다. 즉 明宗의 폐위와 神宗의 즉위에 의심을 품은 金이 사신을 파견하여 前王이 왕위를 사양한 일을 詰問하고 詰勅을 明宗에게 친히 전할 것을 주장하자 임기웅변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던 것이다.註 098 만일 최충헌이 자행한 遜位의 실상이 들어나면 최씨정권의 부당성이 밝혀질 것이다. 조영인은 최충헌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김봉모도 神宗옹립에 공을 세웠다. 祖와 父가 顯達하지 못하였던 김봉모는 明宗의 퇴위에 관해 조사하러 온 金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는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적절히 무마하는데 성공하였음으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註 099 그 후 그는 樞密院副使를 거쳐 參知政事에 이르렀다.註 100 김봉모도 최충헌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기여하였던 것이다.朴暄은 최이의 家臣으로 史館의 修撰官이 되어 최이의 공적을 허황되게 과장하여 기술한 功業錄 5·6권을 편집하였다.註 101 말하자면 최이를 역사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최이정권을 합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문신들은 최씨정권의 옹호와 역사적인 미화를 통해 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를 위한 작업에 적극 가담하여 최씨정권에 접근하였다.다음으로 문신들의 활동에서 최씨집권자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높임에 기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문신들은 최씨가문과 通婚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는 최씨집권층의 의도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씨집권자들은 최충헌집권초기 또는 그 이전에 재상을 역임한 문신가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록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신분관념이 중시되고 門閥에 대한 집착이 溫存했기 때문이다.註 102최씨집권 이전에도 문신들은 무신과 通婚한 적이 있었다. 毅宗朝에 門下侍中 王冲의 아들인 王桂는 정중부의 딸을 娶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난 때 왕계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최충헌집권 후 參知政事를 거쳐 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승진하였다.註 103 그리고 文克謙의 딸이 李義方의 弟인 李隣의 처가 됨으로써 문신과 무신이 查頓間이 된 예도 있었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최씨집권기에 이르면 최씨가와 통혼하는 문신의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최충헌집권 초부터 크게 활약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헌신한 바 있는 趙永仁의 子 趙準은 崔忠粹의 女婿가 되었다.註 104 조영인은 최충수의 딸을 子婦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서 최씨집권층은 名門인 조영인가문과 인척을 맺어 신분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동시에 조준이 최충헌집권 직후인 明宗 26년(1196) 4월에 權判吏部事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右諫議大夫와 右承宣을 역임한 것도註 105 양가의 통혼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최충헌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문신인 任濡의 형 任傅는 그 딸을 최충헌의 再娶로 들임으로써 임유는 최충헌의 妻叔父가 되었다. 또한 임유의 子 任孝明은 최충헌의 딸과 혼인함으로써註 106 임유는 최충헌과 이번에는 查頓이 되었다. 이처럼 최충헌이 累代의 재상가문이었던 임유와 2중으로 통혼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를 높여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임유의 세 아들(任景肅·任景謙·任孝順)은 재상이 되었다.註 107또한 최충헌이 집권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門下侍郞 崔誅의 아들 崔宗峻은 최이를 조카사위로 맞이하였다.註 108 최종준은 門下侍中에 이르고註 109 다시 그의 아들들(崔昷·崔坪)도 재상이 되었다.註 110 최선가문이 이처럼 번창한 것은 최씨집권자와 통혼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종준의 아들 崔昷의 딸이 崔沆에게 出嫁함으로써註 111 최종준은 집권자의 丈人이 되었다. 결국 최선의 후손들은 최씨집권자와 중첩된 혼인으로 인척관계를 이루어 무신들의 지위향상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동시에 최선가문도 번성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앞서 최씨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趙永仁의 손자 趙季珣의 딸도 최항의 配匹이 되었다.註 112 최항의 丈人인 趙季珣은 최항집권기에 재상이 되었다. 따라서 조영인가문은 2代에 걸쳐 최씨집권자와 통혼하였음을 알 수 있다.위와 같은 사례를 검토할 때 문신들이 최씨가와 통혼함으로써 최씨정권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신분적 위치를 높임에 기여하였음은 사실이다. 동시에 문·무신 간의 각기 다른 입장과 의도가 서로 符合되었기 때문에 통혼이 이루어졌던 점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가문의 열등의식을 지녔던 최씨집권자들은 문신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그 자신이 강력한 사회적 지배계층 속에 뿌리를 내리고,註 113 문신의 명문가문과 결합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적인 지위를 이용코저 한 것이다. 반면에 문신의 입장에서는 최씨가와 혼인함으로써 인척관계가 성립되어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받고 나아가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최씨집권기의 문신들은 정권의 합리화와 집권세력의 지위를 提高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한편 또 다른 정치활동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관직인 宰樞·承宣·臺諫의 활동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면 문신들의 구체적인 역할의 내용이 밝혀진다.註 114첫째, 문신들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宰樞會議에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최씨정권의 제반정책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둘째, 최씨정권의 인사행정의 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承宣이 최씨집권자의 銓注權 행사를 합리화시켜 주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셋째, 최씨집권자들은 자신들이 꺼리는 인물들을 臺諫으로 하여금 彈劾케 함으로써 문신들은 무신집권을 두둔함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이처럼 문신들은 최씨정권 밑에서 고위관직을 얻어 각각 주어진 위치에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신정권을 보좌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최씨집권자의 지지가 전제되었음으로 문신들은 무신세력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최씨집권기가 장기화하자 문신들은 정권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생활안정의 보장만을 바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무신집권기의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현실에의 영합과 적응이 생리화되어 최씨정권과 타협하고 집권세력에 阿附하면서 정치활동에 종사하였다.초기무신집권기에 忠直하여 면화되었던 文克謙은 무신정권에 협력하면서 정치활동을 하였던 문신이다. 그는 당시에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었다. 그러나 權豪의 간청을 듣자 賢否를 살피지 않아 銓注에 어긋남이 많았다. 또한 어린 子弟들을 벼슬시키고 僕從을 나누어 보내 田園을 넓혀 잡았음으로 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註 115 이처럼 문극겸은 집권자의 청탁에 협력·순종하여 관리의 銓衡에 잘못된 점이 많았던 것이다.최씨집권기에 들면서 무신세력에 아첨하여 결탁하였던 문신의 像은 琴儀와 李奎報의 行蹟에서 엿볼 수 있다.금의가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가장 신임받는 측근문신이 되어 華要職을 역임하였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神宗 때 많은 문신이 있는 자리에서도 말 앞에 서서 최충헌에게 얘기를 하였고,註 116 高宗 2년(1215)에는 최충헌이 別第로 옮겨 갈 때에 이전에는 재상으로 따라가는 자가 없었는데 簽書樞密院事로서 호위병과 함께 처음으로 따라갔다.註 117 이처럼 금의는 사람들이 鄙陋하다고 여길 정도로 무신집권자에게 극도의 아첨을 하였다. 이윽고 금의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취하면서 집권자에게 아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門生에게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즉 熙宗 4년(1208) 右副承宣 금의에게 科試에서 選取된 皇甫瓘은 의가 숙직하고 있는 집에 가서 詩를 지어 休官할 것을 풍자하였다. 황보관은 이로 말미암아 섬으로 유배되어 時議가 이를 야박하게 여기었던 것이다.註 118 또한 高宗初에 翰林承旨로 있던 금의는 觀碁詩 40餘䪨를 考閱하면서도 집권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충헌에게 사랑받는 門客이었던 이규보의 시를 首作이 되게 하였다.註 119문신집권기를 대표하는 문신인 李奎報는 文才로 어려서부터 文名이 있었으나 不遇와 失意속에 생활하였다. 따라서 20대초에는 竹林七賢과 交遊하면서 飮酒속에서 放達하여 비판적 氣槪가 강렬하였다.註 120 그러나 최씨집권기에 이르자 이규보는 집권자에게 아부하여 立身揚名을 성취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관직이 계속 승진함에 따라 무신정권에 예속되어 그 밀착도가 심화됨에 따라 현실비판의 자세는 점차 둔화되었다.이규보는 최충헌이 주최하는 詩會에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시작하였다. 神宗 2년(1199) 이규보는 祝搏의 献詩를 통해 최충헌을 절대적인 국가공로자로서 숭배하였고, 熙宗 3년(1207) 신축된 茅亭의 記文에서는 최충헌을 위력이 있고 존경해 마지않는 지도자로 찬양하였다.註 121 또한 이 규보는 최이도 칭송하고 그의 施策에 적극 추종하면서 아부하였다. 즉 최이를 위해 지은 十字閣의 記文에서 최이의 功烈이 빛나 日月과 더불어 光明을 다툰다고 칭송하였다.註 122 高宗 19년(1232)에는 望海因追慶遷都라는 시를 지어 대다수 관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된 江華遷都가註 123 정권의 건재를 위한 현명하고 다행스런 결단으로 여겨 최이를 국가수호의 공로자로 찬양하였다.註 124 그리고 이규보는 佛敎기반을 통한 백성들의 단합을 꾀해 대몽항쟁을 지속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彫板된 大藏經을註 125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의 神通力으로 몽고의 兵火를 물리쳐 국가의 평안을 간구하는 글을 撰함으로써註 126 최이정권을 두둔하기도 하였다.이처럼 이규보가 최씨정권에 적극 아부하게 된 것은 文名의 영구성의 유지와 가문의 榮達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註 127 이규보를 비롯하여 당시 대부분의 문신들은 立身出世의 집념 때문에 무신들에게 아부하였을 것이다. 최씨정권에 아부하였던 금의와 이규보는 英國의 집권자 크롬웰에 대한 詩人 밀턴으로 譬喻되기도 하였다.註 128요컨대 많은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추종하고 아부하면서 그들의 활로를 개척하였음으로 문신들은 마침내 무신집권자의 충실한 隸從者가 되고 말았다.註 129
- 註 096
- 《高麗史》 권99, 庚應圭傳.
- 註 097
- “仲夫廢毅宗 立明宗” (《高麗史》 권100, 洪仲方傳).
- 註 098
- “金遣宣問使大理卿孫俁來 俁詰前王遜位事由 對如前王表意 俁曰 有詔 必見前王親授 朝議難之 門下侍郞趙永仁曰 前王養疾南州 計程三十日乃至 必欲親授詔 請留待二三月 然後可 俁曰 苟如是不 必親授也 翼日 傳詔于王” (《高麗史》 권21, 神宗 元년 6월).
- 註 099
- “(金鳳毛) 至於異域方言俗語 無不通曉 神宗之受內禪也 金國宣門使抵此傳 以先謁前國王 然後致命於新君 朝議難之……於是承上命到館 論以便宜 隨問酬詰 彼皆釋然從之 由是朝廷益重”(《朝鮮金石總覽》 上, 金鳳毛墓誌銘).
- 註 100
- 《高麗史》 권101, 金台瑞傳.
- 註 101
- “朴喧 初名文秀 公州人也 中第 爲崔怡家臣 機警善辭辨 屢中怡意 遂見寵任……嘗爲史館修撰 虛誇怡功業 編至五六卷 獻于怡”(《高麗史》 권125, 朴喧傳).
- 註 102
- 金塘澤, 앞의 논문 p.103.
- 註 103
- 《高麗史》 권101, 王桂傳.
- 註 104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105
- 《高麗史》 권99, 趙永仁傳 및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106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107
- 《高麗史》 권95, 任懿傳 附濡傳.
- 註 108
- “(崔宗峻) 姪壻崔瑀”(《高麗史節要》 권15, 高宗 9년 4월).
- 註 109
- 《高麗史》 권99, 崔惟淸傳 附宗峻傳.
- 註 110
- 《高麗史》 권99, 崔惟淸傳 附息傳 및 坪傳.
- 註 111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附沆傳.
- 註 112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附沆傳.
- 註 113
- 朴菖熙, 〈崔忠默小考〉(《史學志》 3, 1969) p.109 및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世族〉(《한국사》 8, 1977) p.17.
- 註 114
- 金塘澤, 앞의 논문 pp.113∼125 참조.
- 註 115
- (文克謙) 時稱賢宰相 然 聽權豪干請 不察賢否 銓注多舛 又官其髫齕子弟 分遣僕從 廣植田園 時議惜之”(《高麗史》 권99, 文克謙傳)·
- 註 116
- “崔忠獻詣闕 御史台官 迎候於麗景門 及還第 雜端琴儀 立語馬前 人幾其謟”(《高麗史節要》 권14, 高宗 2년 5월).
- 註 117
- “忠獻 移入別第 劎戟兵衛 彌滿數里 朝士追隨者甚衆 前此 無宰相隨之者 至是 簽書樞密院事琴儀 樞密院副事鄭邦輔 始從之行 時人 鄙之”(《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 註 118
- “(琴儀) 照宗四年 以右副承宣 掌試取皇甫瓘等……儀 頗侍勢驕恣 瓘 詣儀直盧作詩諷休官 儀以 吿忠獻 流瓘于島 時議薄之”(《高麗史》 권102, 琴儀傳).
- 註 119
- “高宗初 拜禮部員外郎 謁崔忠默 請命題賦詩 忠獻召李奎報·陳澕 僧惠文 同賦觀碁詩四十餘䪨 使翰林承旨琴儀考閱 奎報爲首 陳澕次之”(《高麗史》 권96, 尹瓘傳 附世儒傳).
- 註 120
- 朴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7, 1973) pp.268∼269.
- 註 121
- 朴菖熙,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Ⅱ(《外大史學》 2, 1989) pp.6~7.
- 註 122
- 《東國李相國集》 권24, 崔承制十字閣記 참조.
- 註 123
- 尹龍爀, 〈高麗의 對蒙抗爭과 江都〉(《高麗史의 諸問題》, 1986) pp.766~782 참조.
- 註 124
- “遷都自古天上難 一旦移似轉丸 不是淸河謀大早 三韓曾已代胡蠻”(《東國李相國集》 권18, 望海因 追慶遷都).
- 註 125
- 閔賢九, 〈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韓國學論叢》 1, 1978) 참조.
- 註 126
- 《東國李相國集》 권25, 大藏刻板君臣祈吿文.
- 註 127
- 李菖熙, 〈武臣政權時代의 文人〉(《한국사》 7, 1973) p.289.
- 註 128
- 李丙壽, 《韓國史》 中世篇 (1961) p.520.
- 註 129
- 朴菖熙,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 Ⅱ(《外大史學》 2, 1989) p.24.
Ⅲ. 武臣執權期 文臣의 政治意識과 그 性向
무신집권기의 문신은 정계은퇴계열인 隱居文士와 疎外文人 그리고 정계등장계열인 登用文臣으로 大別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로 볼 때 정계은퇴계열의 文士와 文人들은 무신집권에 대한 반발로 출세를 단념하였음으로 逃避的 性向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계등장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대해 참여의식을 갖고 집권층에게 타협·아부하면서 활동하였음으로 御用的 性向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문신들의 내면적인 고충과 갈등을 度外視한 皮相的인 고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집권기의 문신들을 兩分하고 정치의식과 그 성향을 類型化하여 論斷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註 130정계은퇴계열의 은거문사들은 무신정권에서 立身出世하는 것을 단념하였으나 한결같이 도피적인 성향만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神駿과 悟生이 入山佛門한 뒤 還俗하지 않고 고결하게 여생을 마치었다고 하지만 무신정권에 향한 憧憬과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신준은 입산하여 승려가 된 뒤 울적한 심정을 토로한 詩에서 슬프고 한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自慰하고 있다.註 131 물론 시는 엄격한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시에 표현된 내용은 時代相이 반영된 歷史性을 내포하기 마련임으로 史料로서 援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公州山莊에서 지방자제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던 신준은 그의 제자를 서울로 보내어 과거에 응시케 하면서 눈물을 홀리며 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註 132伽倻山에 은거했던 悟生도 현실정국에 대한 관심이 至大하였다. 이는 그가 남긴 黃山江 樓詩의 落句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집권세력이 아직도 무신인 것을 풍자하면서 개탄하고 있다.註 133무신정권에 등용되지 못했던 林椿·吳世才 등 소외문인들이 정계에 등장하고자 하였음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이 로서 볼 때 文證은 미흡하지만 정계에서 은퇴한 은거문사들과 소외문인들이 다시 출세하는 것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고, 정계로의 등장을 선망하거나 동경하고 있었다고 推論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무신난 후 정계에 등장하였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결같이 완전무결하게 집권층에게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등용문신들의 御用性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고층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무신집권기를 맞아 전반적으로 意氣가 沮喪되고 위축된 문신들은 賦詩·飮酒로 相娛交遊하면서 老莊高蹈의 風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李仁老는 當世의 名儒인 吳世才·林椿·趙通·皇甫抗 .咸淳·李湛之와 더불어 忘年友를 맺어 詩酒로서 즐겼음으로 당시에 江左의 7賢에 比하였다고 한다.註 134 여기서 7人의 망년우는 문자 그대로 연령의 高下를 망각한 同志會·同好會와 같은 것으로,註 135 西晋代의 竹林七賢(稽康·院籍·阮咸·山燾·向秀·劉伶·王戎)과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망년우의 모임은 竹林高會라 하였다 한다.註 136그런데 무신정권에 결탁하여 최씨집권기에 크게 출세함으로써 後世史家로부터 崔氏門客이란 眨評을 받았던 李奎報가 忘年 7賢과 交遊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문신들의 동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이규보가 그들의 奔放한 氣質에 共鳴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규보와 이담지와의 문답내용과 이규보의 詩句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즉 이규보는 망년 7현의 高踏的인 태도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7현 중에 硏鑽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그 一席이 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세재가 사망하여 7현의 1員이 闕席되었을 때 이규보는 그 보충의 대상으로 거론되었다.註 137 이것은 이규보가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문인들과 一脈相通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세재가 失意속에 田野로 零落하여 곤궁속에서 사망하였을 때 이규보는 哀詞를 통해 집권충의 行弊를 울분에 찬 눈으로 개탄하였다.註 138 또한 이규보는 사소한 관직을 얻는 데도 뇌물이 요구되었던 사회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註 139 이로서 무신정권에 아부하였던 이규보의 울분과 불만의 度를 짐작할 수 있고, 사회비리에 대하여 敢然이 규탄하고 반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는 政事에 뜻이 맞지 않으면 時諱에 저촉될 염려가 적은 詩에 假托하여 비방하고 傲然히 大醉하여 미친듯 하였음으로 세상사람들이 狂客으로 여겼다.註 140 하지만 무신정권의 험란한 世態가 장기화하자 이규보의 반발의식은 변화하였다. 그는 자기 몸을 保全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을 두려워하고 말을 삼가함으로써 處世와 행동에 謹愼을 기하게 되었다.註 141등용문신으로서 집권세력에 반발하고 집권층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한 것은 비단 이규보만이 아니었다. 文安公 俞升旦은 民家가 퇴락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였고,註 142 翰林學士 柳澤은 집권자 최충헌의 횡포에 대하여 규탄하는 毗文을 지어 반발하였다.註 143 또한 翰林學士 陳澕는 무신들의 농민수탈을 고발하였다.註 144등용문신들의 반발의식과 비판적인 태도는 마침내 무신정권을 외면하고 부정하게 되었다. 즉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던 韓惟漢은 최충헌이 國政을 마음대로 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라 하여 가족을 이끌고 智異山에 들어가 숨어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최충헌은 그에게 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음으로써 就官을 거부하였다.註 145 한유한의 행동은 최충헌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위와 같은 사례를 종합해 볼 때 정계에 등장한 문신들이 어용적인 기질을 갖고 모두 집권층에게 결탁하여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은 再考되어야 할 것이다.결국 문신들은 모두 참여의식과 반발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계은퇴 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것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에 정계등장계열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완전무결한 同調者가 될 수 없었다.註 146 따라서 무신집권에 참여했던 등용문신은 말할 것도 없고 무신집권을 외면하였던 은거문사와 소외문인들도 정권에 등용되기를 갈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무신집권기의 문신들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은 각기 兩面性을 갖고 있었음으로 이를 유형화하여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註 130
- 金毅圭, 〈高麗武人執權期 文士의 政治的 活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p.281.
- 註 131
- “田家椹熱麥初稠……何事荒村寥落地 隔林時送兩三聲”(《諛聞瑣錄》).
- 註 132
- “有年 應擧京師 以一絕送曰 信陵公子統精兵 遠赴那鄲立大名 天下英雄皆法從 可憐揮涕老侯赢” (《櫟翁稗說》 前集 1).
- 註 133
- “臥聞漁父軸轤語 走馬紅塵非我徒”(《櫪翁稗說》 後集 2).
- 註 134
- “李仁老……與當世名儒 吳世才·林椿·趙通·皇甫抗·咸淳·李湛之 結爲忘年友 以詩酒相娱 世比江左七賢” (《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 註 135
- 李丙壽, 《資料韓國儒學史草稿》(1959) p.84.
- 註 136
- 《破閑集》 권末, 後序.
- 註 137
- “七賢 每飮酒賦詩 旁若無人 世才死 湛之謂査報曰 子可浦耶 奎報曰 七賢 豈朝廷官爵而補其闕 耶未聞稽阮之後 有承之者 皆大笑 又今賦詩 奎報口號 其一句云 未識七賢內 誰爲鑽核人 一坐皆 有温色”(《高麗史》 권102, 李奎報傳).
- 註 138
- 《東國李相國集》 권37, 哀詞 祭文 吳先生德全哀詞 참조.
- 註 139
- 《東文選》 권96, 舟胳說 참조.
- 註 140
- 《東國李相國集》 권26, 呈尹郞中威書 참조.
- 註 141
- “僕之所畏 不在諸物 特關於已……是以 聖人不畏於人 唯畏於口 苟愼於其口 於行世乎何有” (《東國李相國集》 권1, 畏賦).
- 註 142
- 《東文選》 권13, 書德豊縣公館 참조.
- 註 143
- “離自篤克勤之念 莫怠荒 不幸遭多難之時 未能制御”(《高麗史節要》 권14, 高宗 3년 3월條).
- 註 144
- 《梅湖遺稿》 詩 桃源歌 참조.
- 註 145
- “韓惟漢 史失其系 世居京都 不樂仕進 見崔忠獻擅政賣官曰 難將至矣 契妻子入智異山 淸修苦節 不與外人交 世高其風致 徵爲西大悲院錄事 終不就 乃移居深谷 終身不返 未幾果有契丹之難 蒙古兵繼至”(《高麗史》 권99, 韓惟漢傳).
- 註 146
- 金毅圭, 앞의 논문 (1981) p.293.
結語
지금까지 무신집권기를 초기무신집권기와 최씨집권기로 구분하여 문신들의 동향과 정치활동을 살피고 문신정책에 대하여 고찰한 다음 문신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을 검토하였다. 이를 요약함으로써 결어에 대신하고자 한다.무신난의 渦中에서 免禍된 문신들은 그들의 입장과 성격에 따라 각기 달리 무신정권에 대응하였다. 이른바 隱居文士들은 무신들과 타협을 거부하고 지방에 은둔하면서 淸高한 節操를 고수하였다. 난 후 무신정권에 仕宦하려 했으나 등용되지 않아 불우한 일생을 마친 疎外文人들도 있었다. 은거문사와 소외문인은 政界에서 隱退한 계열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난 후 문신지위가 유지된 舊文臣과 신규로 무신정권에 참여 하였던 新進文臣이 주류를 이룬 登用文臣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政界에 登場한 계열이었다.난 직후 문신에 대해 보복적이었던 무신들은 未久에 구문신을 포섭하고 신진문신을 등용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무신집권기의 문신들은 난 전과 같이 관직을 모두 독점하지는 못하였으나 관직의 점유율은 무신들을 앞섰고 중요관직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견제되어 정치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그 후 최충헌이 등장하여 최씨집권기가 되자 문신들은 다시 등용되고 집권자로부터 우대를 받게 되었다. 최충헌은 집권하기 전에 친분관계를 맺었던 좋은 가문출신의 문신들 뿐만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문인들도 등용하였다. 그 후 문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다.최씨정권이 문신들에 대하여 우대정책을 취한 것은 그들을 장악함으로써 文武兩班의 지배자로서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高度의 用人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신들이 최씨정권에 발탁되어 등용되려면 반드시 정권과 밀착된 측근문신의 薦擧가 필요 하였고, 그들은 座主로 있으면서 門生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선발하였던 것이다. 좌주와 문생간의 정치적 유대는 평생 지속되었음으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인맥은 최씨정권의 장기화에 큰 힘이 되었다.문신들은 최씨정권의 합리화와 정당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최씨가문과 通婚함으로써 최씨정권의 사회적 지위를 높임에도 공헌하였다. 최씨가문과의 혼인은 문신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진출과 정치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때문이었다. 또한 문신들은 고위관직에 임명되어 국정수행에 참여하면서 무신정권을 두둔하였다.그러나 문신의 정치활동은 최씨집권자의 지지가 전제되었음으로 문신들은 무신세력과 결탁하게 되었다. 이에 文名의 영구성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문신들은 최씨정권과 타협하고 집권층에게 아부하면서 그들의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결국 문신들은 집권자의 충실한 隸從者가 되고 말았다.무신집권기의 문신은 정계은퇴계열인 은거문사와 소외문인 그리고 정계등장계열인 등용문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문신들은 무신정권에 대하여 참여의식과 반발의식, 그리고 어용적 성향과 도피적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었음으로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것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무신정권에 완결무결한 동조자가 되지 못하였다. 등용문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은거문사와 소외문인들도 대부분 정권에 등용되기를 갈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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