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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송호근.서울대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목차
1. 머리말
2. 제국의 기원:신화
3. 중심의 구축
4. 제국, 그 광기의 행군
5. 맺음말:극단과 초극의 정신병리


일본의 근대국가 구축과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
었다. 제국의 도래가 이렇게 급속한 근대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 사례는 드물다.
서양 제국들은 가장 늦게 도달한 이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제국이 발아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유아적 제국’이 황조황종의 천황 이데올로기를 앞세
워 세계를 하나로 품고자 하는 팔굉일우의 대망을 가진 ‘공격적 제국’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은 훨씬 강도 높게 서양 제국의 폭력적이고 기만적
인 경로를 답습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광역 제국’의 길을 걸어갔다. 왜 그랬을까?
메이지유신으로 구축된 근대국가는 제국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었을까? 일본 제
국주의의 발아와 성장을 특징짓는 정신구조는 무엇일까? 조선 식민화의 역사적
논리와 일본 식민통치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 필수적인 질문이 이것이다. 메이
지유신은 일본 근대국가를 ‘근대화의 역코스’라는 운명에 가둔 혁명이었다. 종교
와 정치의 분리, 권력의 분권구조, 신민에서 국민으로의 진화를 근대화의 전형적
경로라고 한다면 일본은 정종일치, 권력의 집중, 신민화의 길을 걸었다. 근대국
가를 천황제라는 ‘위조된 구축물’의 부속품으로 편입시킨 결과였는데, 일본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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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인식에 내재된 ‘지리적 고립’과 ‘문명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일본적 고안이
었다. 그런 인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열등감과 공포심을 ‘신화적 시간’으로의
망명을 통해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역사의 신화화’는 결핍된 근대를 채우지 않
고도 일본에 초극(超克)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했고, 팔굉일우로 진격하는 윤리
적 자격을 부여했다. 이 글은 메이지유신이 고안했던 ‘신정적 천황제(神政的 天皇
制)’의 사상적 맥락을 분석하고 그곳에서 발아한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를 규
명했다.


논문분야 사회정책, 정치사회학, 역사사회학
주 제 어 메이지유신, 역코스, 대응적 제국주의, 신정적 천황제, 이중적 고립, 공포와
불신, 극단과 초극, 국체, 근대의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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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1)
일본의 근대국가 구축과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었다. 250여 년을 지속한 단단한 봉건체제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했다
는 점에서 그렇고, 번벌체제를 지탱했던 지배계급이 혁명의 주도 세력이 되
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불과 10여 년의 혼란과정을 메이지유신(1868)으로 마
감했고,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듯 불과 10여 년 만에 중앙집권적 근
대국가를 건설했다.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동양은 서양
의 제국들이 가장 늦게 도달한 지역이었다. 제국의 도래가 이렇게 급속한 근
대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랬을
까? 어떻게 이런 급속한 혁명, 그것도 성공적인 혁명이 가능했을까?
이에 비하면 동양의 중심인 중국은 오랫동안 붕괴했고, 근대국가 건설이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전면적 도전에 직면했던 조선 역
시 봉건체제가 주저앉지 않은 채로 제국 열강을 맞아야 했다. 그 결과는 참
담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식민 지배 혹은 반제 전쟁 속에 나라를 던져 넣어
야 했다. 가장 늦게 도달한 이 지역에서 서양 제국들은 초기적 형태의 제국
이 발아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유아적 제국’이 황조황종(皇祖黃宗)
의 천황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세계를 하나로 품고자 하는 팔굉일우(八紘一
宇)의 대망을 가진 ‘공격적 제국’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홉슨
(John A. Hobson)이 지적하듯 서양의 제국들이 그 기만적 언어로 타민족과
영토를 강점하던 제국의 시대에 동양이라고 해서 제국이 흥기하지 말라는 법
은 없다. 홉슨이 ?제국주의론?을 출간한 1902년 당시 동양의 제국으로 떠오
른 일본에 다소 긍정적 시선을 보낸 사실은 흥미롭다. 워낙 서양의 제국주의


1) 이 논문은 ?인민의 탄생?(2011), ?시민의 탄생?(2013)에 이어 3부작 ?국민의 탄생?의 제1장에
해당하는 글이다. 원래 원고지 400매가량의 분량을 저널의 규정에 따라 150매가량으로 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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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탓이었을 것이다.2) 홉슨은 서양의 제국들과는 달리
일본이라는 신생 제국은 ‘개인의 활동을 사회적 협동으로 승화시키는 지속적
인 공공정신이 그 어느 국가보다 잘 작동하고 있어’ 서양의 약탈적이고 기만
적인 경로를 피해 갈 수 있으리라고 희망한 것이다.3) 그런데 그 희망은 곧
무너졌다. 일본은 훨씬 강도 높게 서양 제국의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경로를
답습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광역 제국’의 길을 걸어갔다. 왜 그랬을까? 메이
지유신으로 구축된 근대국가는 제국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었을까? 일본 제
국주의의 발아와 성장을 특징짓는 정신구조는 무엇일까?
조선 식민화의 역사적 논리와 일본 식민통치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이 질
문에 답해야 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 근대국가를 ‘근대화의 역코스(reverse
course)’라는 운명에 가둔 혁명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 권력의 분권구조,
신민에서 국민으로의 진화를 근대화의 전형적 경로라고 한다면, 일본은 정종
일치, 권력의 집중, 신민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근대국가를 천황제라는
‘위조된 구축물’의 부속품으로 편입시킨 결과였는데,4) 일본의 역사 인식에
내재된 ‘지리적 고립’과 ‘문명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일본적 고안이었다.
그런 인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열등감과 공포심을 ‘신화적 시간’으로의 망
명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다.5) ‘대응적 제국주의’ 혹은 ‘방어적 제국주의’로
규정되었던 유아적 형태의 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을 표방하고 내선일체, 일만
선일체 이념으로 무장해 약탈과 강점을 불사하는 ‘공격적 제국’으로 변신한
그 정신구조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교수는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공
포와 교만이라는 특수한 콤플렉스’로 진단한 바 있다.6) ‘역사의 신화화’는 결


2) J. A. 홉슨(1982), ?제국주의론?, 신홍법·김종철 역, 창작과비평사, 186쪽.
3) J. A. 홉슨(1982), 앞의 책, 280~281쪽.
4) 정의, 2014, 「근대일본의 서구숭배와 국수주의:메이지유신부터 청일전쟁까지를 중심으로」, ?일본사상? 제27호.
5) 클로드 레비스토로스(2011), ?레비스토로스:일본을 말하다?, 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6) 마루야마 마사오(1997b), 「일본에서의 내셔날리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김석근 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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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된 근대를 채우지 않고도 일본에 초극(超克)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했고,
팔굉일우로 진격하는 윤리적 자격을 부여했다. 이 글은 메이지유신이 고안한
‘신정적 천황제’의 사상적 맥락을 분석하고 그곳에서 발아한 일본 제국주의
의 정신구조를 규명하려고 한다.


2. 제국의 기원:신화
이때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는 황손에게 명령을 내려, “아시하라(葦原)
의 지이호아키(千五百秋)의 미쓰호(瑞穗)라는 나라는 나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할
땅이다. 이에 황손은 가서 다스려라. 나아가라. 하늘 자손(寶祚)의 융성이 천양과
더불어 무궁하리라.”7)
일본 천황제의 기원이 되는 이 신화는 일본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유신 지도자들이 근대국가 구축의 중심 원리로 재발견한 천손강림신
화는 일본이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에 의거한 신국이며, 만세일
계의 천황이 황조황종의 절대적 윤리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신정(神政)국가
이념으로 진화했다. 신정국가란 제정일치적 율령국가의 통치 이념을 계승
한 정치체제로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간대로 진입한 동서양 모든 국가가 중
세 역사의 갈피에 애써 마감한 그런 국가 형태였다. 일본은 ‘근대국가’를 만
들면서 신정적 질서를 거꾸로 요청한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근대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정반대로 역코스를 밟았다. 메이지유신의 지도
자들은 일본열도를 천황제라는 유사 종교에 열광적으로 밀어 넣었다. 정치
와 종교의 합일, 그것도 천황제라는 유사 종교에 정치를 종속시킨 메이지유
신이 결국 일본과 일본인을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갈 것임을 미리


7) 전용신 역(1989), 「9단 「천손강림조」 제1의 1서」, ?일본서기(日本書紀)?, 일지사,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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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270여 개 번으로 분열된 일본을 어떻게 통일
하고, 중세 질서 속에 푹 젖은 도쿠가와막부를 문명화라는 운명적 대열에 어
떻게 참여시킬 것인지가 최대의 고민이었다. 그런 메이지시대 지도자들에게
고대로부터 전승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건국신화는 천금의
자원이었다. 태양 토템에서 발원하는 태양신화와 천강(天降) 스토리가 유별
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일본 특유의, 일본열도에만 고유한 축원체
계로 만들었다. 신화의 정치화, 영혼의 정치화가 이루어진 것이다.8)
당면한 번체제의 통일과 근대국가 구축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대사
앞에 이른바 ‘전통의 발명’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18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중반에 걸쳐 쇄국 일본에 충격을 가한 서양 제국의 출현 때
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농민분규(一揆)와 재정 악화로 통치력이 쇠락하던
막부가 흔들렸다. 막부의 개항 결정에 대한 번주들의 반발과 저항이 잇달았
다. 서양의 무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항전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막부
가 250년 동안 지켜 온 쇄국정책은 일본 국수(國粹)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해방책(海防策)으로 집약되었고, 아편전쟁의 참혹한 결과가 전해지자 양이론
(洋夷論)은 존왕론(尊王論)과 결합했다. 이 일련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
하는 이념적 자원을 찾는 것이 당시 지도자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그들은 믿었다. 태양이 뜨는 곳, 원기가 시작되는 신주(神州) 일본은 서양
오랑캐들이 아무리 뛰어난 무기와 화술로 침략을 해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
고. 세계 질서를 주관하며 만방에 군림하는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일본이
라고. 천황은 ‘인간의 종자가 아니라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예로서 곧 신’
임을 스스로 믿었다. ‘천양무궁의 신칙’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막말 밀어닥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미토학(水戶學)을 대표하는 아이자와 세이시사
이(會澤正志齊, 1782~1863)가 전형적이다. 그는 일본을 신주, 신국(神國)으로


8) 이찬수, 2013, 「영혼의 정치학:천황제와 신종교의 접점」, ?일본비평?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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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하고 존왕과 양이를 결합하여 국체(國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초기 형태
의 이 국체 개념이 메이지 30년대에 제국주의의 이념적 중추로 발전할 줄은
아이자와조차 몰랐을 것이다.
일본이 황도의 나라, 천황의 나라임을 새삼 강조했던 것은 일본의 봉건적
전통을 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
의 국학(國學)과, 예악을 바로잡아 권력투쟁으로부터 황조의 전통을 구출해
야 한다고 외친 야마가타 다이니(山縣大貳, 1725~1767)에게서 일찍 출현했다.
그런데 막부 가신 그룹인 후다이(譜代) 다이묘가 다스리던 미토번의 학자 아
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여기에 신국사상을 더해 일본의 영구불멸성을 강조했
다. ?신론(新論)?의 첫 장은 ‘천양무궁의 신칙’을 더욱 받들어 사회의 퇴폐,
제도의 붕괴, 국력의 곤궁을 극복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토로였다. 천조의
은혜가 하토에 임하고 백성은 천조를 존숭할 때 하늘과 하나가 된다.9) 이 언
명은 제정일치, 즉 신정적 질서의 회복이 위기 극복의 해결책이라는 당시의
지배적 사유 방식을 집약한다. 물론 무조건적 개항과 서양문물의 수용이 유
일한 구제책이라는 양학자들의 주장이 출현하기도 했지만, 메이지 이전에는
막부의 관심을 사지 못하고 세 규합에 실패한 것은 집단 무의식 속에 오랫동
안 내재해 있던 공포심 때문이었다. 섬나라 일본의 외부는 예외 없이 적으로
간주되었기에 도쿠가와막부는 바다를 봉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는 적이
었고, 공포였다. 이런 ‘지리적 고립’이 일본인에게는 ‘공포심’이라는 집단 무
의식을 선사하였고, 중국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문명적 고
립’은 일본인에게 ‘열등감’을 안겼다. 기본적으로는 한자문명권과 유교문화권
에 편입되어 있으면서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하
여 학문과 지식수준이 반주변국 조선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일찍이 절
감한 일본은 나가사키라는 작은 숨구멍을 통해 서양문물을 부분적으로 수용


9)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 ?신론(新論)?, 김종학 역(미출간 원고). 미출간 번역 원
고를 기꺼이 보내 주고 또 인용을 허락해 준 김종학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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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으로 열등감을 달래 왔다. 공포심과 열등감은 ‘이중적 고립’이 일본인
에게 각인한 집단 무의식의 본질이었다.
일본은 공포심과 열등감을 ‘극단적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내향(inward)
과 외향(outward), 방어(defense)와 공세(offense)라는 극점을 오가는 진자운동
이 그것이다.10) 막말에 나타난 존왕론과 양이론은 인식의 내향운동을 통해
결집된 국난 극복의 사상이었다. 메이지 이전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지리
적 고립감을 더욱 부각함으로써 서양과의 차별성을 심화시켰으며, 일본의 전
통적 사상과 특성에 더욱 몰입함으로서 고구가쿠(國學)와 미토학 같은 국수
주의적 사상을 만들어 냈고, 양학(洋學)과 난학(蘭學)이 외향의 실용주의적
유용성을 설파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적 인식공간으로 기꺼이 망명했다. 18세
기 후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의 초기 해방론(海防論)이 19세기
중반 미토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1811~1864)과 그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에 이르기까지 막말 구국론의 지배
적 사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내향적 운동이 만들어 낸 물줄기였다. 그들은
집단 심리의 한복판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공포심을 더욱 철저한 해안방어로
덜어 내려 했으며, 일본의 고유한 본질로 회귀해 가장 일본적인 것을 확대하
고 절대화함으로써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이 내향적 인식은 타불령
(打拂令)과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으로 실행되었으며, 급기야는 사쿠마 쇼잔
의 ‘양이를 위한 개국’으로 나아가게끔 되었다.11) 사쿠마 쇼잔은 내향에서 외
향으로의 전환, 방어에서 공세로의 사상 전환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어 낸 인물이다. 그렇다고 양이론의 본질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양이를 위해서 쇄국에서 개국,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한 미
토학의 대표 학자였다.
쇼잔은 내향에서 외향으로의 진자운동을 공포심과 열등감의 극복 방안으


10) 진자운동에 관한 논의로는, 정의, 2014, 앞의 논문.
11) 박삼헌, 2005, 「막말 유신기의 대외위기론」, ?문화사학? 제23호;송석원, 2003, 「사쿠마
쇼잔의 해방론과 대서양관」, ?한국정치학회보? 제37집 제5호.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81


로 제시했던 것이다. 경막론(敬幕論)을 적극 주장하던 요시다 쇼인이 과격파
토막론(討幕論)자로 돌변한 것에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존재한다. 쇼인은 막
부가 당면한 내우외환을 해방(海防)과 민정 수습으로 해소해야 하며 일본 고
유의 국체로 복귀하는 게 급무라고 외친 미토학의 계승자였다. 신국사상을
전면에 내세운 쇼인은 페리의 요구에 막부가 굴복하자 절망했고 새로운 지도
자의 필요성, 즉 왕정복고에서 왕정유신으로 급선회하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 대가는 효수형이었지만, 신국 일본을 옹립해야 한다는 내향적 갈망이 서
양 병서와 서양 역서의 연구가 시급하다는 외향적 사고로의 절박한 선회를
보여 준다. 그 중간 타협점은 없었다.
내향적 사고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일본적 고유성이었고, 고유성의
정점에 기기(記紀)신화12)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내향적 사고의 필연적 운
명이었다. 기기신화는 일본적 고유성을 상대론적 관점보다는 절대론적 영역
으로 몰고 갔다. 세계 유일의 만세일계의 천황, 태양의 후손이자 신이 다스
리는 신주 일본은 내향적 사고가 발견한 가장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 보물은
‘어국체 수호’의 필연성과 즉시 연결되었으며, 서양만이와의 전쟁은 국체를
위한 성전으로 미화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전의 목표는 ‘방어’였다. 그러
나 ‘계축(癸丑) 이래 미증유의 국난’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성전의 ‘방어적’ 본
질에는 ‘공세적’ 성격으로의 변질 가능성이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국체 수호
를 위한 태양신화의 방어적 절대화가 타국과의 관계에 그대로 연장될 때에
공세적 제국주의로 변질되는 것과 동일한 이치였다. 쇼인의 사고 유형이 그
런 변질의 전형이었다. 쇼인은 수감 중에 쓴 옥중수기인 ?유인록(幽人錄)?에
서 일본의 국체를 보존하려면 군사와 무력을 배양하는 것, 즉 ‘방어’만으로는
부족하고 홋카이도, 캄차카, 오호츠크해, 류구, 조선, 만주, 대만과 필리핀제
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공세적 논리’를 폈다.13) 공포심은 방


12)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합친 개념.
13) 山口縣敎育會 編, ?吉田松陰全集 1?. 박삼헌, 2005,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282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어적 해방론에서 공세적 확장론으로, 열등감은 내향적 절대화에서 외향적 우
월론으로 진전을 부추겼다. 이 극단적 진자운동에서 정신 세계의 균형점은
결코 확보되지 않았다. 조선이 의존적 사고양식에 매몰되어 정신적 균형상태
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일본은 자기몰입적 사고양식에 지나치게 호소한
결과 양이와 개국 간의 급격한 단절을 어떤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건너뛰었던 것이다. 천황이라는 ‘위조된 구축물’이 왕정복고와 왕정유신의 양
단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그 고리에는 메이지유신이 제국주의의 씨앗을 틔우
는 ‘비틀림’이 자라나고 있었고, 일본의 서구화 경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양면성을 내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막말 지도자들이 가졌던 인식 세계의 저류에는 불신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에 주목한 마루야마는 후에 ‘정신적 잡거성(雜居性)’이라고 칭하던 사
상적 ‘무구조의 전통’이 막말의 이런 집단 심리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사유
의 편의성에서 유래했음을 밝히고 있다. 마루야마 교수는 이렇게 썼다. “그
존왕론의 밑바닥에는 피지배층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서민층이 외국 세력의
지원을 믿고서 봉건적 지배 관계를 뒤흔드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14) 서양 제국에 대한 공포는 백성들이 혹시 미혹될까 두려워
하는 지배층의 공포심을 다시 유발했는데, 그것은 결국 서민층에 대한 불신,
즉 우민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상적인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만들어지
려면, ‘정치력의 집중화(concentration)’와 그것을 국민 전체로 배분하는 ‘권력
의 확산(extension)’, 즉 분권과정을 충족해야만 한다. 그러나 메이지 지도자
들의 전통적인 우민관은 집중화와 분권 간 균형을 방해했으며, 그 결과 국민
을 배제한 고도의 중앙집중적·엘리트 독점적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
이다. 그리하여 전국 인민의 뇌리 속에 ‘국가’라는 절대적 관념이 각인되었
다. 정신 세계의 불균형은 국민국가 구축과정에도 그대로 재현되어 불신과
공포심의 제어에 유용한 방식이 관철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도(神道)의 정


14) 마루야마 마사오(1995),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역, 통나무, 500쪽.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83


치화, 천황상의 정립이라는 ‘전통의 발명’이 공포심과 열등감을 해소하는 데
에 동원되었으나, 내향과 외향, 방어와 공세 사이를 메울 필연적 논리를 ‘위
조된 구축물’로 채우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15)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
는 그 경로에서 신화를 불러들였던 일본의 근대적 운명은 가시밭길을 내장한
것이었다. 마루야마의 지적처럼, 일본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은
‘히틀러도 부러워할 만한’ 논리를 갖췄지만, 그것은 전(前)근대와 초(超)근대
가 결합한16)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멋진 허구였다. 그 결합의 촉
매제는 기기신화였고, 논리적 허구를 깔고 앉은 것은 천황이었다. 일본은 신
화라는 율령국가의 배를 타고 근대로 건너갔다.
3. 중심의 구축
1) 중앙집권국가
근대국가는 ‘권력의 분권적 구조’와 ‘국가의 통합구조’라는 두 측면에서 중
세국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도쿠가와막부는 270여 개 번으로 분할된 일종
의 분할국가였다. 에도(東京)에 거주하는 쇼군(將軍)이 번벌을 통괄하는 체제
이지만, 각 번은 영토 관할에 최종적 책임을 지고 광범위한 자율적 권력을
행사했다. 권력과 영토의 극심한 분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은 근대국가
구축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극심한 분할구조를 하나의 통
합구조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중세국가적 전통은 유럽에 비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권력과 영토의 극단적 분
절, 취약한 관료제, 쇼군과 공가(公家), 귀족에 집중된 막부 권력, 파벌주의와
15) 야스마루 요시오(2008), ?근대천황상의 형성?, 박진우 역, 논형.
16) 마루야마 마사오(1998), 「국체의 정신적 내면으로의 침투성」, ?일본의 사상?, 김석근 역,
한길사, 92쪽.
284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붕당정치 등 분열적 권력구조가 그러했고, 상공업층이 발달하지 않아 이른바
시민 세력이라고 할 새로운 직업군이 형성되지 않았다.
여기에 정체성 문제가 커다란 장애물로 놓여 있었다. 농민은 각 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지식인 그룹과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본이 하나의 국
가라는 관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울러 지리적으로 분절된 향촌과 서
민을 문화국민(cultural nation)이라고 할 단일한 역사공동체로 묶어 내는 데에
일본의 가장 유력한 지배종교인 불교는 맞지 않았다. 막말 지식인들은 일본
의 전통종교인 신도(神道)에 눈을 돌렸다. 신도적 신앙심과 정치를 연결하면
중앙집권적 제정일치국가를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 오
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로부터 발원되어 막말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와 미토학파에게 전승되었다. 일본의 고유 민간신앙인 신도는 자연신이나 마
을신의 무체계적 집합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하면 신도ㆍ유
교합일적 제사체계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정일치적
정치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국체신학(國體神學)으로 진화했던 것이다. 결
국 천황이라는 허구적 구조물에서 역사와 종교가 결합했는데, 그것은 근대국
가의 정체성을 관장하는 ‘발명된 종교’였다. 기왕에 존재하던 종교를 밀어내
고 새로운 종교를 그 자리에 앉혔다. 중심성의 구축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
었다. 그것은 일본인의 집단 심리에 내재해 있던 불안감과 열등감을 감싸 주
는 외피였던 것이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출범시킨 메이지유신은 혁명이었다. 혁명 10년
만에 근대국가, 그것도 중세적 질서에 젖어 있던 일본인을 근대적 제도와 인
식공간으로 이동시켜 이른바 ‘국민국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국가의 몰
락이 수십 년, 심지어는 1백 년 넘게 진행된 서양에 비하면, 혁명의 진전 속
도는 매우 빨랐고 그만큼 실행 의지와 집행력은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유럽과 비교하여 일본의 배타적 특징은 바로 시민사회의 결핍 내지 미발
달 상태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주로 구 엘리트 집단의 결단에 의
해 일어났고 일반 서민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로 추진되었다. 시민층의 도전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85
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권력 집단 간 노선투쟁이었고, 경막(敬幕) 혹은 도
막(倒幕)인가의 여부에 따라 그 진로가 가름되었다. 서민이 철저히 배제된 위
로부터의 혁명은 혼란 비용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만, ‘독주하는 권
력’을 저지할 어떤 견제 장치도 없을 때 전제정치로의 길이 열린다. 군국주의
는 일본적 혁명 양식(mode of revolution)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17)
유럽의 혁명이 그렇듯이 근대국가를 향한 메이지유신 역시 국가구조와 권
력 분점의 양식을 둘러싸고 주도 세력 간 치열한 투쟁을 예고했다. 1868년
3월 신정부가 반포한 ‘5개 조 서언’은 천황이 정치의 중심임을 전제로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정치는 공론(公論)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하여(제1조) 공의
정체론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번벌 중심의 공의정체론이 도막파 무사들과
지사들의 반발을 사면서 친정부군과 신정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메이지유신의 향방을 좌우할 이 내전[보신전쟁(戊辰戰爭)]에서 사이고 다카모
리(西鄕隆盛, 1828∼1877)가 이끈 신정부군이 승리하자 도막파의 의지가 비로
소 관철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이다.18) 신정부
를 장악한 도막파 지도자들은 부국강병, 문명개화, 식산흥업을 내걸고 국가
구조와 권력구조의 전면적 개혁에 착수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창출에 서양
제국의 문물과 제도가 전범이 되었다. ‘양이를 위한 개국’이었지만, 양이가
아니라 학이(學夷)였다.
신제도의 도입은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우선 보신전쟁이 막을 내린 1869년
3월에는 영토와 재산을 천황에게 바친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있었고(1869),
번체제를 완전히 해체시킨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가 발효되었다(1871). 이
두 조치는 번벌체제를 종식해 국토 통합을 이룬 가장 근본적인 개혁이었다.
17) 메이지유신에 관한 연구서로는, 피터 두으스(1983), ?일본근대사?, 김용덕 역, 지식산업사;
함동주, 2009,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창비;이노우에 가쓰오(2013), ?막말 유신?,
이원우 역, 어문학사;W. G. Beasley(2013), ?일본제국주의, 1894~1945?, 정영진 역,
Huebooks 등 참조.
18) 그럼에도 동북 지역에는 막부 친정부군이 여전히 저항을 계속해서 그들을 완전히 진압하
는 데에 1년 5개월이나 걸렸다. 메이지유신은 이런 내전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286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이 ‘국가의 통합구조’를 이룬 두 개의 근본적 조치라고
한다면, 태정관제의 도입은 ‘권력의 분권구조’에 해당하는 정치 개혁이었다.
1867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발령을 계기로 유신세력은 막번체제의 권력구조
인 섭정, 관백, 막부를 총재, 의정, 참여의 삼직(三職)으로 개편해 의정과 참
여를 장악했다. 의정과 참여는 혁명을 추진하는 실질적 권력이 집중된 직책
이었다. 이와쿠라 도오미(岩倉具視),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
保利通) 등이 참여직을 맡았다. 그러던 것이 점차 삼권분립에 대응하는 형태
로 정부 직제를 확대 개편할 필요성에 부딪혔다. 서양의 정치제도를 준거로
한 일본식 정부 형태였다. 유신정부는 정부 직제를 태정관제로 명명하고 그
밑에 의정관(입법), 행정관(행정), 형법관(사법)의 삼권을 분리·설치했다. 이
른바 삼권분립의 밑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유신 세력의 독주는 메이지 3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만세
일계의 천황제를 명시한 제국헌법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1889). ‘집중’과 ‘분
권’의 제도적 기초를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메이지유신의 정치 세력은 분권
보다는 ‘집중’으로 치달았으며, 메이지 지도자들과 군부의 합작에 대항할 어
떤 세력도 성장하지 못했다. 일본 근대국가의 구축과정은 ‘놀라운 성공’이었
지만, 그 유례없는 성공 속에서 독버섯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에 그들은 서양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함, 전통적인 불안감을 해소할 성
취 업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2) 신정적 천황제
‘권력의 분권구조’와 ‘영토의 통합구조’를 두 개의 축으로 한 근대국가의 구
축 작업은 삿초동맹(薩長同盟:사쓰마와 조슈 동맹)과 유신 연합 세력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거대한 거푸집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막
태동한 근대국가의 명분을 정당화하고 정체성을 유지·발전시킬 정신적 자
원의 창출이라는 막중한 과제에 봉착했다. 전자를 ‘제도적 중심’이라 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87
후자는 ‘사상적 중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민의 머리와 인식공간을 장악할
정신적 자원이 없다면 새로운 국가는 크고 작은 대내외 위기에 또 다시 출렁
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익숙한 정신적 전통 내지 신심(信心)에 하나의 계통을 부여
해서 현실 정치와 연계시키는 것이 ‘비종교적 종교’로서 신정적(神政的) 천황
제를 창출한 의도였다. 종교가 없는 일본에 종교를 만드는 작업은 결국 일본
인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신도와 천황을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천
황의 신비화’ 내지 ‘천황의 종교화’는 이미 막말 유학자와 미토학파에 의해
그 기초가 닦여져 있었다. 유신 세력은 이 학자들이 위기 관리 이데올로기로
제시한 제정일치의 신국관을 근대적 시간대로 옮겨 놓는 것으로 도도하게 흐
르는 전통적 국수주의에 화답했다.
막부 중기의 최고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로부터 ‘천양무궁의 신칙’을 설파
한 모토오리 노리나가 그리고 미토학과 국학자에 이르기까지 제사, 종교, 정
치의 일체론을 주장했고, 사회의 무질서와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정적 천황제국가를 구상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참
배, 제사의례와 국체 개념을 결합시킨 것은 미토학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였
다.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 메이지 지도자들이 전국 향촌과 촌락에 산재하던
신도를 천손강림신화와 연계하여 정비하고 계통화하는 작업 끝에 도달한 것
이 신도국교주의(神道國敎主義)였다. 근대적 제정일치라고 해야 할 신정적
천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신정적 천황제는 ‘비종교적 종교’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독일식 황제와 로마식 천황의 성격을 동시에 갖
춘 매우 특이한 형태의 정체였다. 그리하여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의 두 자
격을 한 몸에 갖추었고, 국민은 정치적으로 천황의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천황 신자가 되었다.”19)
19) 이찬수, 2013, 앞의 논문, 125쪽;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1994), ?일본 근대사상사?,
심원섭 역, 문학과지성사.
288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일본 근대의 특이성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세계의 근대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면, 일본은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키는 역코스를
스스로 걸어갔다. 종교로부터의 정치의 분리가 근대를 출발시키는 중대한 역
사적 계기였음에 반하여, 일본은 정치를 종교의 한가운데 우겨 넣음으로써
근대를 출범시켰다. 그것도 기왕에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급조된 종교였
다. 서양 중세의 신민은 근대를 계기로 시민으로, 후에는 국민으로 전환했으
나, 일본의 인민은 근대를 맞으며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어야 했다. 메이지
지 도자들은 일본인을 근대와 신민을 결합시킨 매우 특이한 공간으로 몰아넣
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예외적 경로였다.
그 예외적 경로가 어떤 역사적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예
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토학과 후기 국학이 배양한 국체 관념에 기기신화가 제공한 고대율령제
의 신기관제도를 결합한 제정일치적 신정(神政)이 탄생한 이면에는 일본을
수천 년 지배해 온 불안감과 공포심이 흐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불안과
공포에 짓눌린 정신 세계에 원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대응 논리가 국체신학
이었고, 국체신학은 결국 유신 세력이 천황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화한
신도국교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신도국교주의는 메이지 정부의 공식
종교이자 동시에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정체제에 일본인을 몰아넣는 통합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근대 일본의 새로운 정체성을 무엇으로 만들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유
신 세력은 멀리 일본 기기신화로 거슬러 올라갔고, 천손강림신화와 신의 자
손인 천황에 주목했으며, 백성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신도를 그 밑그림으로
배치했다. 신정적 천황제가 신비주의와 관념론적 허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
다. 신도의 텅 빈 신좌에 역대 천황을 앉혔으며, 국가신도의 신전에 천황상
을 새겨 넣었다. 신정적 천황제가 근대국가의 외피를 쓰고 태어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적처럼, 전근대와 초근대가 결합한 세계 초유의 정체가
그렇게 탄생했다. 신정적 천황제는 정체성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진 막번체제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89
에서 통합적 질서와 연대적 규범을 창출하려는 유신 세력이 발명한 이데올로
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고대적 근대’가 만세일계의 천황을 위한 성전
을 거쳐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를 팔굉일우의 황조 품에 헌납하려는
시대착오적 폭력국가로 변신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정적 천황제는 파시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신화를 역사로 착
각한 결과였는데, 이러한 착종은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대륙에서 떨
어져 오랫동안 고립무원의 생활을 지속해야 했던 일본 고유의 특성에서 생겨
난 결과였다. 현실적 고난을 극복해야 했던 일본은 극대화된 불안과 공포를
‘신화적 시간’으로의 망명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다. 일본이 신화와 역사를
착종한 것은 그 ‘신화적 시간’ 속에서 역사를 재건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
다. 그래서 ‘역사를 신화 속에 심었는데’ 도대체 이런 문화의 내면에 잠재된
무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레비스토로스의 답은 간단했다. “거대한
대륙의 끝에,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긴 시간을 고립된 채 살아왔다!”
는 것.20) 한편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근대국가의 정신적 기축인 신정적 천
황제는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비로소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마루야마는 일본 신민과 식민지인을 대동아전쟁에 열광적으로 몰
아넣었던 군국주의자들이 전범재판에서 보여 준 그 나약한 체념과 무책임성
에 절망하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치스 독일의 지도자들은 자신
들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적어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회의하지는 않았으
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결여했다는
차이가 있다.21) 막말 위기에 천황제가 전면에 배치·전환되었고, 태평양전
쟁 당시에는 천황제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 채 군국주의로 몰려갔다. 그러므
로 신도-천황제-군국주의는 주체성 없는 군부 실세가 선택한 ‘비합리적 결
단의 방대한 퇴적’이다.22)
20) 클로드 레비스토로스(2011), 앞의 책, 21쪽.
21) 마루야마 마사오(1998), 앞의 책, 74쪽.
22) 마루야마 마사오(1997a),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김석근
290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신정적 천황제는 메이지 정부와 군국주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에서 윤
리와 권력을 분리시킨 가장 중대한 명분이자 결함이었다. 정치는 신민이든
국민이든 그들의 공익에 기여한다는 윤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
권력은 책임을 말할 수 있고 적절히 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이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하고 국가권력은 모든 행위의 윤리성 여부를 그
절대자에게로 위임하는 한, 국가권력을 제어할 장치는 소멸된다. 즉 책임성
의 소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군국주의 일본에서 국가권력
의 윤리성 여부는 ‘천황과의 거리’에 의해 측정되었다고 말한다. 천황과 가까
우면 윤리성은 증대하고, 멀어질수록 희박해진다.23) 그러므로 모든 권력 실
세는 천황의 이름으로, 황도를 성취한다는 일념하에 잔학무도한 짓을 서슴없
이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황은(皇恩)이 비치는 곳에서는 죄의
식을 느낄 수 없었다. 주체적 책임 의식의 결핍은 신정적 천황제에 위임했던
윤리적 판단과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실제 권력의 상호 분리 현상에서 비롯
된 기이한 병증이었다.
4. 제국, 그 광기의 행군
1) 신국(神國)에서 제국으로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할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의 치열한 각축전에 뛰
어들겠다는 의도는 그리 명백하거나 단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팽창주의적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밀려드는 제국 열강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율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막
역, 한길사, 134쪽.
23) 마루야마 마사오(1997a), 앞의 책, 56쪽.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91
말 이전 우국지사들의 양이론(攘夷論)에서 보듯이 오랑캐의 공세로부터 신주
(神州)의 나라를 지켜 내야 한다는 방어적 심리가 초기 민족주의의 대세였다.
제국 열강과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조약이 결국 하늘이 선택한 나라 신국을
초라한 식민지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불안감과 공포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국
가적 과제가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라는 메이지유신의 목표로 발현
되었던 것이다. 이를 ‘방어적 민족주의(defensive nationalism)’라고 불러도 좋
을 것이다. 아무리 단기간에 근대국가 구축을 완료했다 할지라도 메이지 초
기 일본이 제국(empire)이 되기에는 국력과 지식, 인력과 산업은 여전히 후
진적이었다. 그러기에 양이는 곧 학이로 바뀌었으며 많은 학자와 관료가 ‘문
명개화’라는 과제를 안고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는 동안 1870년대
홋카이도 식민, 쿠릴열도 편입(1875), 오키나와(琉球) 합병(1879) 등 식민주의
(colonialism)를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있었다. 이를 ‘내국 식민주의’라고 한다
면, 대만 정벌(1895)과 조선의 보호국화(1905)는 ‘외국 식민주의’로 나아가는
전조였다. 외국 식민주의는 일본이 열도에 한정된 국민국가로부터 인접국의
강제 점령 및 병합을 꾀하는 팽창주의적 제국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개
념적 출구였다. 국민국가 만들기로부터 불과 20여 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민족국가의 성격 변화는 왜 일어났는가? 아니면 일본
은 그들이 구축한 근대국가의 내부에 제국주의의 씨앗을 어떻게 심었고 시간
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화되었는가? 이런 언명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이
구축한 근대적 민족국가 내부에는 이미 제국주의적 성향이 심겨져 있었으며,
이른바 제국주의시대에 그것이 발현된 것’이라고 말이다. ?신론?을 집필한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에서 과격파 존왕양이론자 요시다 쇼인, 그리고 화혼양
재(和魂洋才)를 주장한 사쿠마 쇼잔에 이르기까지 선택된 나라 일본의 안위
를 위해서는 류쿠, 조선, 만주를 차례로 정벌해야 한다는 정벌복속론이 맹
위를 떨쳤고, 그것을 당위로 생각하게 되었다. 정벌론과 복속론이 아무리
영토 방위의 필연성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자국을 위해 이웃 국가를 정벌
해도 된다는 사고는 식민주의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적 욕망과 맞닿아 있
292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다. 1873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세계 국가를 방문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제
기된 정한론은 그와 같은 배경 없이 이해할 수 없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
한론을 제기한 이면에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위시한 소수 그룹에 메이지 신정
부의 권력이 독점된 현실에 대한 반발이 놓여 있었지만, 천황의 재가까지 획
득할 정도였다면 식민주의적 영토 확장과 제국주의적 억압통치의 씨앗은 처
음부터 잠재해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런 애초의 의식이 1880년대 서구
열강의 경쟁 구도 속에서 본격적으로 발화했다. 1880년대 초반 자유민권운
동과 헌법제정운동 와중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피력한 조선관, 그리고 1890년
대에 출간된 「대동합방론」이 전형적이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0년대 이미 조선 정벌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었다. 1885년에 집필해 1893년
에 출간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은 조선 병합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보다 노골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므로 1890년 총리대신을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24)의 주
권선과 이익선에 관한, 그 유명한 의회연설이 나온 후 일본의 사상적·정치
적 분위기가 어떻게 고조되어 갔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894년 청일전
쟁은 노쇠한 대국을 상대로 한 가벼운 한판승이었는데, 그 여파가 선물한 제
국 행군의 의기양양함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낱 주변국이자 그 자신 오랑
캐로 취급당하던 일본이 중심국과 맞붙어 이긴 그 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에
요구했던 제1조는 “조선은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였다.25) 일
본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역사의 아이러니
인가?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싸움, 「문야(文野)의 전쟁」이라
는 논설을 ?시사신보?에 썼다. “조선의 체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문자를 알
고 있는 야만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힘에 의해 조선의 개화를 재
24) 야마카타 아리토모는 1890년 내각의 총리대신을 지냈는데, 주권선과 이익선을 개념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권선은 일본을, 이익선은 조선을 포함한 주변 국가와 도서를 말한다.
25) 1895년 4월 17일 청의 이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93
촉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채찍질을 해서라도 따르도록 해야 한다”26)고 하며
청일전쟁의 궁국적 목표가 조선 복속에 있음을 드러냈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일본의 전반적 분위기가 제
국주의로 빠져들어 가는 그런 시간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일본은 열강과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에서 치외법권, 낮은 관세, 최혜국 대우
와 같은 불평등 조항을 없앴다. 영국의 역사학자 비슬리(Beasley)가 표현한
집약적 개념인 ‘조약항구체제(treaty port system)’를 폐기 처분해 버린 것이
다.27) 조약항구체제는 영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이점을
독점하기 위해 자국에 유리한 조항을 강제하는 통상체제를 말한다. 1858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필두로 일본은 열강에 의해 조약항구체제를 강제
당함으로써 ‘준(準)식민지’라 할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청일전쟁은 일
거에 그런 준식민지 상태를 탈피하게 해주었으며, 10년 후 러일전쟁을 계기
로 제국주의 반열로 올라섰다. 유럽 열강이 열을 올렸던 ‘제국주의시대’가
1884~1914년까지 약 30년 기간 동안이라면,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
간에 중세 국가로부터 변신해 제국의 대열에 재빨리 끼었던 것이다. 역으로
서양 제국들이 아시아에서 추구했던 무분별한 권력 충돌이 미개(未開) 지역
인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제국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조했다. 19세기 말 영
국, 프랑스, 독일, 미국은 영토와 시장을 거침없이 재편하고자 했던 아시아에
서 그들과 대등한 위세와 욕망을 갖춘 섬나라 제국과 마주쳐야 했다. 그것도
산업 부르주아지가 허약한 제국이었다. 피터 두스는 이런 특이한 경로를 거
쳐 탄생한 일본의 제국주의를 ‘대응적 제국주의(reactive imperialism)’로 불렀
다.28)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여 대등한 지위로 올라서려는 일본의 국가
목표가 만들어 낸 전략적 산물이다. ‘대응적’에는 ‘소극적’이라는 뜻이 함축되
어 있는데, 이 소극적 제국이 약 30여 년 뒤 아시아 전역을 식민화하고 제국
26) 이규수, 2014, ?한국과 일본, 상호인식의 변용과 기억?, 어문학사, 39쪽에서 재인용.
27) W. G. Beasley(2013), 앞의 책, 7~8쪽.
28) 피터 두으스(1983), 앞의 책, 138쪽.
294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의 선배 국가에 총부리를 겨누는 ‘공세적 제국주의’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은 ‘극단의 시대’에 한 축을 담당한 전체주의국가가 되었
다. 신국에서 제국으로의 변신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2) 광기의 정신구조
메이지유신의 원로들이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이념에 과도하게 집착했고,
인민이 좌지우지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피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시아 국가들을 전쟁과 식민통치로 몰아넣었던 폭력적 파시즘까
지를 예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1870년대 당시에 파시즘은 미래의 낯선 정치
개념이었으며, 심지어는 세계의 열강들을 상대로 한 총력전에 서슴없이 돌입
해 광기를 뿜어내는 전범국가 일본을 예견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서로 충돌하는 국민국가들은 나아갈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는 아렌트의 지
적처럼, 일본은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자체 조절하지 못하는 폭압적인 제국
이 되었으며, 대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을 외치며 전면전을 일으킨 파시즘
국가로 행군했다. 그 행군은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모두 원했고, 누구도 기
획하지 않았지만 마치 기획한 것과 같은 예정된 코스를 밟아 나갔다. 히틀러
와 나치스 그룹이라는 이데올로기 제조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는 독일 나치즘
과는 달리, 일본 파시즘은 그것을 제창하고 책임질 소재가 불분명했다. 병리
학적 관점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 난망한 광기(狂氣)의 행군, 그것이 일본 제
국주의였다.
1940년대 초반 태평양전쟁의 전선이 확장되면서 일본의 영토는 서쪽으로
는 미얀마(버마)와 싱가포르, 동남부에는 인도네시아와 보르네오, 독일에서
양도받은 남태평양의 섬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대만, 조선, 만주와 중국 연안
지역을 포괄해 말 그대로 광역 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어떤 제국을 만들
지가 불분명했다. 점령 국가들의 경제적 분업은 그런대로 지역적 특성에 따
라 차별화되었으나,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였다. 전시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95
내각의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일본이 핵심이 되는 윤리
적 원칙에 입각한 공존과 공영 같은 것을’ 창조하는 방식을 제시했을 뿐이다.
이처럼 점령지를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 하에 두는 느슨한 연합체가 바로 ‘대
동아공영권’이었다. 1940년 선포된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는 “일본, 만주, 지나
를 근간으로 하고 구 독일령 위임통치 제도(諸島), 프랑스령 인도 및 태평양
도서, 태국, 영국령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미얀마),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 등” 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교토학파는
대동아공영권의 철학을 제공했는데,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드는 ‘팔굉일
우’, 영어로 ‘universal brotherhood(보편적 형제애)’였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교토학파는 이렇게 주장했다.29)
좁은 민족 개념을 초월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 논리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공영권 국가에 의해 대동아의 공영권을 조직할 경
우 종래 유럽류의 자신만의 고립적 국가 개념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
이 고래의 동양적 국가 의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본의 팔굉일우의 ‘우(宇)’
가 결코 좁게 제한된 ‘집’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세계(八宏)를
덮는 ‘집’이다.30)
1943년 어전회의에서 내려진 결정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그해 11월 공영
권의 민족 지도자들이 도쿄에서 대동아공영권 회의를 개최했다. 도조는 환영
29) 가타야마 모리히데(2013), ?미완의 파시즘?, 김석근 역, 가람기획. 교토학파가 이런 주장
을 내놓기 전, 팔굉일우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였다. 일련종
승려인 그는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1914년 고쿠추카이(國柱會)를 조직했고, ?천양무궁(天壤無窮)?이라는 책을 썼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엄팔굉이위우(掩八宏而
爲宇:팔굉을 덮어서 집을 삼는다)를 지가쿠가 변용했다[가타야마 모리히데(2013), 앞의
책, 190쪽].
30) 1942년 ?중앙공론?이 주최한 좌담회. 정창석, 2005, 「식민지 시대 한일 양국의 상호인식」,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일제 식민지지배의 구조와 성격?, 경인문화사, 79쪽에
서 재인용.
296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연설에서 아시아 정신주의의 소중함과 국체명징을 강조했고, 서양의 물질주
의 문명이 초래한 침략과 착취의 비도덕성을 규탄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을 건설함에 있어서 서로의 주권과 문화적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각 지역의
상호 의존과 호혜성을 높여 황도사상을 널리 펴는 데에 기여해 줄 것을 당부
했다. 그것뿐이었다. 치밀한 기획도 밑그림도 없었다. 다만 레토릭이었을 뿐
이다. 조선에서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앞세워 국민정신총동원과 전시체제 슬
로건으로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전쟁에 단단히 결박하던 시기였고, 일본에서
역시 ‘근대의 초극’ 담론이 모든 일본인의 정신 무장과 황군의 결사항전을 촉
구하고 있을 때조차 대아시아주의에 입각한 ‘대동아공영권’의 통치구조는 이
처럼 엉성했던 것이다.
점령지 지도자회의가 열리기 한 해 전, 이미 태평양전쟁은 기울고 있었다.
옥쇄(玉碎), 죽음으로 천황을 지키는 것이 힘겨운 전쟁을 도발한 일본 군국주
의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것은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의 전쟁에
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신력으로 물질주의를 이긴다는 신념은 서
양에 대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적 우월성을 지탱한 사고방식이었고, 특히 미
국의 물량주의적 공세에 겁을 먹는 황국 병사를 독려하는 마취제였다. 물자
부족에 쪼들리는 패전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신들린 듯한 광기’ 외에는 없
다. ‘천황을 위한 순국’으로 개조된 ‘죽음의 미학’은 광범위한 국민동원을 위
해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즐겨 활용하는 공통 요소로서 일본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 같은 돌진순국 형태의 옥쇄에서 절정에 달했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탔던 전투기에 그려진 사쿠라꽃은 정치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가 물
들인 환생의 상징이었다.31)
황국 신민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갔던 군국주의의 정신적 구조는 1935년
부터 시작된 ‘국체명징운동’과 ‘국체의 본의’에서 이미 골격이 형성됐다. 우익
정당과 군부 과격파는 “우리 국체와 배타되는 논의와 학설은 즉시 단호한 조
31) 오누키 에미코(2004),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미의식과 군국주의?, 이향철 역, 모멘토.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97
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체명징운동을 펴나갈 것을 선포했다. 당
시 정부가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이라는 것은 우리 국체의 본의로서 제국 신
민의 절대 변하지 않는 신념이다. 제국헌법의 각 조항의 정신 또한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 교육 및 모든 사항은 어떤 나라와도 비할 수 없는 국체의
본의를 기반으로 하여 그 진수를 현양할 것을 필요로 한다.32)
‘국체의 본의’는 무엇인가? 1937년 문부성이 내놓은 ‘국체의 본의’는 마침
벌어지고 있던 쇼와 제2유신의 흐름을 타고 메이지유신의 초기 이념을 훨씬
절대화하는 종교적 신념으로 치달았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황
조의 신칙(神勅)을 받들어 영원히 이를 통치한다”는 것이 국체의 본의다. 여
기에 더 나아가, “일대가족국가로서 억조일심 성지(聖旨)를 받들어 능히 충효
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 국체는 “우리나라 국사(國史)를 관통하여 광
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33) 개인이 숨쉴 공간은 조금도 없는 집단주의의
광기가 바로 국체였다. 도조 히데키가 제창한 ‘국민총동원체제’와 ‘익찬체제
(翼贊體制)’가 바로 국체명징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여
기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근대의 초극’ 논리다.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 근대의 상징인 미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투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이 표방한 문명개화는 ‘근대를
따라잡는’ 일본이 전제되어 있다. ‘추격하는 일본’으로는 적어도 논리적으로
는 미국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부딪혔는데, 그것을 돌파한 일종의
임의적 궤변이 ‘근대의 초극(超克)’이었다. ‘추격하는 일본’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본으로 위상을 바꾸면 ‘근대에 갇힌 미국’을 내려 볼 수 있다는
32) 강상규, 2007, ?19세기 동아시아 패러다임의 변환과 제국 일본?, 논형, 173~174쪽에서 재
인용.
33) 日本文部省, 1937, ?國體の本義?. 정창석, 2005, 앞의 글, 93쪽에서 재인용.
298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출구가 생긴다. 이 이론은 1942년 ?문학계?가 기획한 ‘문화종합회의 심포지
엄’에서 출현했다. 서양 근대문명의 요체인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전제하에 교토대학 교수
였던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는 서구문명의 세 영역에서의 초극을 말했다.
“근대의 초극이란 정치에서 민주주의의 초극, 경제에서 자본주의의 초극, 사
상에서 자유주의의 초극을 의미한다”고.34) 서양은 이 세 영역의 분리에 의해
서 문화, 역사, 윤리의 분절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것을 통합하는 유일
한 국가가 일본이라고 주장했다. “종교와 윤리가 일본 정신의 가장 깊은 곳
에서 통합된다.”35) 그리하여 근대문명의 본질적 모순을 초극하는 것이 신질
서의 목표이자 대동아공영권의 본질이다. 미국과의 성전은 그래서 ‘세계사적
필연’이다. 그러니 미국과의 성전에서 산화한들 나의 개인적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태평양전쟁은 세계사의 발전법칙이 명령한 신성한 일본의 과제이
며 ‘보편적 형제애’와 ‘천황적 가족국가’를 세계만방에 발화하는 ‘신칙의 구현’
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집단 광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신 초기에는 그토록
열광하던 서양문명을 ‘모순’으로 정의하고, 그 모순을 넘어서는 유일한 국가
로서 일본을 상정하는 집단적 논리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전통의 개조’
내지 ‘전통의 발명’은 민족주의를 발화시킬 필요에 부딪는 대부분의 국가가
호소하는 방식이겠는데, 개조된 전통으로 근대를 넘어서겠다는 바로 그 지점
에서 일본은 ‘근대의 결핍’이 낳는 통증을 아예 무시했거나, 그것을 성찰할
정신적 자원이 궁핍했던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근대의 본격적 경험 없이 ‘근대의 초극’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적 광기의 정신적 구조를 겨냥한다. ‘근대의 성숙’을 건너뛴 채 제국
주의로 진입하는 국가가 빠지기 쉬운 위험한 경로를 일본은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권 내지 역사적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1889년 제정된 대일
34) 이삼성, 2014, ?제국?, 소화, 355~356쪽. 이 책은 제국과 제국주의에 관해 동서양의 이론
과 학설을 두루 고찰하는 개념사적 연구서로서 보기 드문 역작이다.
35) 이삼성, 2014, 앞의 책.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299
본제국헌법이 그렇고, 군인칙유(1882), 교육칙어(1890)가 그러하며, 1890년대
에 제정된 억압적인 사회 관련 법령들이 그러하다. 시민적 저항이 없었던 것
은 아니지만, 근대적 의미의 시민은 아직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고, 메이
지 정부 세력을 견제할 부르주아계급은 처음부터 국가 주도의 식산흥업, 부
국강병 정책에 포섭되었다. 일본은 1920년대 중·후반에 입헌정치의 민주적
기반을 갖추기보다 오히려 억압적인 ‘치안유지법’을 통과시키고(1925), 천황
대권과 일본의 특수성을 주창하는 ‘국가개조론’과 같은 극단적 국수주의사상
에 더욱 매료되어 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갑작스레 발생한 경제 침체와
구미 열강과의 대립 국면을 타개하려면 일본 고유의 국체를 굳건히 하여 동
서문명의 융합이라는 세계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일
본은 천황중심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고, 모든 국민이 대화혼(大和魂)의 정
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국가개조의 요지였다. 국가개조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군국주의의 진군을 위해 하나로 묶는 것, 그리하여
작은 나라 일본의 정신적·물질적 총력을 최대화하는 일종의 초극 논리의
전초였다. 기타 잇키(北一輝)를 필두로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의 국가개조
론이 1926년 출범한 쇼와시대를 이끌었는데, 슈메이는 이미 ‘미국과의 일전’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못박을 정도였다.36) 아직 아시아를 두고 유럽
열강과 세를 엿보고 있을 당시에조차 ‘미국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
로 규정했던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구조를 관통하는 것은 ‘극(極)
과 극(克)의 논리’라고 볼 수 있다.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極) 그것을 초월하는 것(克), ‘극단(極端)의 사
고’와 ‘초극(超克)의 의식’이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특징이다. 그것은 마루
야마 마사오가 지적하듯 근대의 결핍이 가져온 정신병리적 병증이기도 하고,
일본인의 사유 양식에 깊숙이 내재된 ‘불안과 공포심’이 ‘대응적 제국주의’의
본질적 열등의식과 습합하여 일으킨 돌연변이와 같은 것이기도 했다. 공포와
36) 大川周明, 1926, ?日本乃日本人の道?, 東京. 강상규, 2007, 앞의 책, 155~156쪽에서 재인용.
300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교만,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이고, 결핍과 초극은 갖지 못한 나라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적 연쇄고리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갖추기보다는 초극
(해야)한다는 논리는 쌍생아다. 쇼와유신을 뒷받침한 국가개조론은 이런 인
식 작용의 산물이었는데, 1930년대 파시즘이 본격화될 때에 주창된 ‘국민총
동원령’과 ‘익찬체제’, 1940년대 ‘근대의 초극’과 ‘신문화의 창조론’ 등은 모두
결핍과 초극이라는 두 개의 축을 빼고 나면 텅 빈 공간만 남는 허망한 이데
올로기였다.
5. 맺음말:극단과 초극의 정신병리
미국과 영국은 물질주의문명의 폐단을 전 인류 사회에 확산시키는 주범이
며, 그들이 외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국가에게나 적
합하지 일본과 같이 정신력으로 생존하는 나라에게는 망국의 이념이었다. 그
리하여 동서양문화의 정수를 골고루 섭취한 일본이야말로 인류 사회를 구제
하고, 특히 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창조할 자격과 능력
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허구적 각성으로 나아갔다. 이런 주장에는 서양
에 대한 자기충족적, 자기예찬적 ‘분노’가 깔려 있다.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예찬의 자의식을 발동하는 것이다. 자기예찬적 자의식의 발동은 이미 후
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와 ‘아시아맹주론’에서 맹아가 싹텄고,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대일본팽창론’에서 활짝 개화되었다. 후쿠자와는
일찍이 1882년 조선과 청국 문제를 논하면서 이들 야만 국가를 문명 세계로
인도할 사명이 일본에게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서양의 침략을
막으려면 아시아에서는 오직 일본밖에 없음을 거듭 강조하고 ‘일본이 아시아
의 맹주’임을 천명했다.37) 후쿠자와의 맹주론은 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하
37) 福澤諭吉, 1963, 「時事小言」, ?福澤諭吉全集 20?, 東京:岩波書店, 186~187쪽. 이규수,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301
여 도쿠토미 소호가 평민주의를 포기하고 대일본팽창론과 일본주의라는 극
단의 국권주의로 나아가는 논리적 자원이 되었다. 도쿠토미는 청일전쟁을 일
본 인민으로 하여금 ‘위대한 국민’이 되게 하는 중대한 역사적 계기, 즉 ‘국민
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민족 심리를 깨닫게 하고 그 장단점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일종의 계몽전쟁이다. 청일전쟁은 일본을 진정한 민족국가,
국민국가로 거듭나게 하는 기회로 여겨졌으며, 이를 계기로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중국, 조선, 남방, 대만으로 팽창해야 할 필연성을 역설했
다.38) 1894년 발표된 ‘대일본팽창론’은 일본을 ‘문명의 안내자’, ‘인도의 확장
자’로 규정함으로써 식민 지배의 침략성과 불법성을 정당화하는 역설적 논리
였다.39) 당시에는 이미 제국주의론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도쿠토미의
‘대일본팽창론’은 말하자면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논리였는데,
그는 다른 글에서 ‘제국주의는 평화적 팽창주의’임을 거듭 강조했다. ‘무역,
생산, 교통, 식민으로써 일국의 이익을 확충하고 민족의 발달을 기하는
것’40)이라는 도쿠토미의 주장에는 피식민국가, 제국주의의 통치를 받는 국가
는 결국 문명의 혜택을 입는다는 일본 고유의 국수주의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위기와 개혁이 중첩되는 혁명적 상황에서 발현되는 이런 자기예찬적 자의
식은 불안과 공포심을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위태로운 성공이 거듭
될수록 이렇게 뒤집거나 극단으로 몰아가는 관성은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전근대와 초근대, 과거와 현실, 신화와 역사의 극단을 오가는 진자
운동은 천황을 앞세운 제국 권력의 목표와 본질이 바뀌는 길을 따라 부단히
지속된다. 동양과 서양의 대립 구도 속에서 양극을 진자운동한 제국 일본의
2014, 앞의 책, 37쪽에서 재인용.
38) 박양신, 2008, 「근대 일본에서 국민, 민족 개념의 형성과 전개」, ?동양사학연구? 제104집.
39) 송석원, 2011, 「도쿠토미 소호와 전쟁:‘대일본팽창론’을 중심으로」, ?일본문화학보? 제50집.
40) 德富蘇峰, 1899, 「帝國主義の眞意」, ?國民新聞?. 박양신, 1999, 「19·20세기 전환기 일
본에서의 제국주의론의 제상」, 일본사학회, ?일본역사연구? 제9집, 137쪽에서 재인용.
302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궤적에는 그런 분열적 정신구조가 개재되어 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한 ‘대동아공영권’은 메이지 초기 아시아 맹주를 자처했던 일본에게는
논리적 모순 자체였다. ‘탈아입구’란 아시아를 문명화시킬 역사적 사명을 완
수하기 위해 문명의 발원지인 서양으로 귀화한다는 논리였다. 입구(入歐), 즉
서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본이 서양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였는데, 어떻게
탈구(脫歐)를 선언하고 입아(入亞)하게 되었는가? 메이지유신 초기에 아시아
는 야만이었고 문명화의 대상이었다. 스스로를 서양화하기 위해 이른바 오리
엔탈리즘의 동양관을 그대로 답습했던 일본이 1920년대 국제 질서가 구미와
의 대립으로 치닫자 아시아를 식량, 자원, 인력의 공급지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미국과의 일전을 선포하면서 동서양 대결 구도를 문명화의 인
류사적 과제로 상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상황 변화에 맞추어 만주, 조선,
중국(만선지) 일체론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일본은 다시 아시아
로 귀환해야 했다. 아시아 맹주론으로 여전히 무장한 채였지만, 그때 맹주는
아시아 형제애로 치장한, 황민 대가족주의와 팔굉일우 이데올로기로 옷을 갈
아입은 채 아시아를 야만시하던 과거를 뒤로 감춘 제국이었다. 아시아 형제
애 역시 팔굉일우라는 하나의 집에 평등하게 포용하는 이념이 아니라, 일본
종족을 최상위에 두고 천황에의 충성심을 척도로 계서화하는 차별적 종족민
족주의(ethnic nationalism)에 불과했다.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는 팽창적 민족주의의 공통적 요소이기는 하
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른 사례와는 달리 자기예찬적·자기몰입적 극단 의식
이 발화된 결과다. 국제관계를 오직 힘의 관계로 볼 경우 “어제까지의 소극
적 방어 의식이 갑자기 내일은 무제한의 팽창주의로 변하게 된다. 거기에서
는 완전히 알지 못하는 원시적인 심정으로서의 공포와 교만이라는 특수한 콤
플렉스가 당연히 지배하게 된다”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진단은 이런 측면에서
핵심을 찌른다.41) 근대가 결층이었던 일본에서 갑작스레 구축된 제국주의는
41) 마루야마 마사오(1997b), 앞의 글, 202쪽.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303
그런 콤플렉스가 역으로 발화된 결과였으며, 극단의 논리를 배제하면 텅 빈
공간으로 남는 부조리한 인식 작용의 결과였다. 근대의 결핍과 제국주의로의
급상승은 일본 민족주의를 국민적 해방의 원리로부터 멀리 떼어 내 어둠 상
자 속에 유폐시켰다. 그리하여 비록 1890년대부터 ‘위대한 국민’이 호명되기
는 했지만, 권리를 갖지 못하고 의무만 짊어진 ‘신민’이 되기를 강요당했다.
‘천황제 가족국가’ 내에서 신민은 “천황에 귀일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신민의 도(道)’를42) 충실히 이행하는 국민이어야 했
다. 교육칙어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황조황종의 나라에서 그 유훈을 받들어
‘충량한 신민’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근대국가가 국민에게 내린 절체절명
의 명령이었다. ‘충량한 신민’은 1910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
毅)가 부임하던 날 조선인에게 발포한 공식 명령이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호명한 ‘신민’은 공포와 교만이라는 뒤틀림의 의식구조가
잉태한 시대착오적 개념으로써43) 일본인들을 결국 전쟁의 화약고에 뛰어들
게 만들었던 ‘동양의 화란(禍亂)’이었다.44) 천황에게서 위임받은 전제적 군권
으로 무장한 8명의 조선총독은 조선인을 황조황종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현해탄을 건넜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
슈번을 대표하는 군벌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정적이었던 야마카타 아리토모
의 후예였다.
접수일(2015. 10. 18), 심사 및 수정일(1차 2015. 12. 11, 2차 2015. 12. 23), 게재확정일(2015. 12. 23)
42) 강상규, 2007, 앞의 책, 180~182쪽.
43) 마루야마 마사오(1997c),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김석
근 역, 한길사, 61쪽.
44) 일본 군부, 정치인, 언론인은 1910년 조선병탄이 성사되자 ‘동양의 화란’을 제거했다고 감
탄사를 연발했다. 그 구절은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압하고자 고종에
게 한 말이었다. ‘동양의 화란’은 정작 일본이었다(한상일, 2015,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
국?, 까치, 240쪽).
304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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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_ 개념과 소통 제16호(2015. 12)
* Professor at the Department of Sociology, Seoul National University
Abstract
The Mental Structure of Japanese Imperialism
Hokeun Song*
■ Keywords:Meiji Restoration, reactive imperialism, imperial theocracy, divine
emperor, dual isolation, fear and inferiority, extremity and transcendence,
nationalism, deficiency of the modern
This paper analyzes the rise of the distinctively theocratic Japanese
Empire, and the psychological structure of Japanese Imperialism. The Meiji
Restoration is a unique historical case with many features rarely seen in
other countries. When the Europe imperialists reached the east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Japanese empire was embryonic, and at that point it was
scarcely imaginable that Japan, through its ‘reactive imperialism’, would
develop an aggressive and expansive imperialism which would occupy and
attempt to incorporate parts of eight sovereign territories into an imperial
theocracy. Why did Japan aspire to expand and integrate its empire? Did
the Meiji Restoration plant the seeds of imperialism? What characterizes the
psychological structures underlying the process of nation-state building in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구조 _ 307
modern Japan? This paper seeks to answer these questions, which are
essential to any examination of the Japanese occupation of Chosun, and to
Japanese imperial rule from 1910-1945.
Japan is perhaps unique in the course taken by its modernization, which
proceeded quite differently from other countries. In many ways, modern
Japan took a path which was the reverse of that taken elsewhere:by
unifying religion and politics, by centralizing power, and by making its
people the subjects of a fabricated ideology. The Japanese needed to find a
way to overcome their geographic and cultural isolation, which had
inspired fear and a sense of inferiority during the Tokugawa years:the
device they came up with was a divine emperor. The mythicization of
history allowed the Meiji leadership to eradicate these negative sentiments,
and to build the foundations of a strong state which integrated all of its
people under the ideology of divine nation. Through such factors, this
paper seeks to explain the underlying ideas and the psychological
structures which drove the creation of Japanese Imperi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