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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양 일 모.서울대



[국문초록]
19세기 후반 이후로 아시아 지역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 쟁탈
의 무대가 되면서, 제정 러시아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가담했고 서양 열
강의 일원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웃하는 러시아의 변화는 중국인
의 근대국가 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인식 또한 위협, 모방, 연대, 공포, 학습, 희망 등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이 글은 청일전쟁에서 러시아 1차 혁명
전후에 이르는 약 10여 년간을 중심으로 청조 내부의 다양한 근대 국
가 건설의 구상이 러시아에 대한 인식과 연동되는 과정을 규명하면서,
나아가 중국의 타자에 대한 표상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5년 러
시아 1차 혁명에 대한 청의 인식과 그 영향이 그 이전의 러시아 인식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하는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러시아에 대한 청의 인식이 중국인의 근대
국가 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표상하는 담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02.28), pp. 357~389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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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의 주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왕조체제
의 지속을 전제로 정권을 유지하고자 한 조정의 관료, 왕조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구한 사대부 관료,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지식인과 언론매체,
만주족 정권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외친 혁명가들이 각각
격변하는 러시아를 사상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모색하고자 했던 근대
적 구상의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드러
났다. 청조 당국과 관료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혼란과 소요를 미연에 방
지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의 준비를
서두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계초 등과 같은 망명 정치인에게 러시
아 혁명은 전제정체가 바뀌어야 하는 타당성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고 지방의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는 혁명으로 인한 내분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토지국유와 같은 사회주
의적 정책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각성제가 되었다. 청조 타도를 외친 젊
은 학생과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면서 중국에서 군주제도를
타도하는 정치혁명과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사회혁명
의 동시성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혁명이론을 강화시켰다. 이처럼 러시
아는 중국의 정치현실과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와 맞물려 서로 다른 이
미지로 표상되었다.


1. 머리말
중국은 현재 14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러시아와는 이웃하는
다른 나라와는 구별되는 역사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전근대시기에 러시
아는 한국 혹은 베트남 등과 같이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 속해 있지 않
았으며, 티베트 혹은 신장과 같이 번부에 속하는 변방국가도 아니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청조는 러시아와 조약에 기초하여 국경을
획정하고 있었으며 대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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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이후로 아시아 지역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 쟁탈의
무대가 되면서, 제정 러시아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가담했고 서양 열강의
일원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혼란과 위협에 직면한 청조 내부
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개량과 혁명 등 다양한 방안이 구상되던
때였다. 이웃하는 러시아 제국의 변화는 중국인의 근대국가 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인식 또
한 위협, 모방, 연대, 공포, 학습, 희망 등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이 글은 청일전쟁에서 러시아 1차 혁명 전후에 이르는 약 10여 년간을
중심으로 청조 내부의 다양한 근대 국가 건설의 구상이 러시아에 대한
인식과 연동되는 과정을 규명하면서, 나아가 중국의 타자에 대한 표상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에 대한 청의 인
식과 그 영향이 그 이전의 러시아 인식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하는 측
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어떤 국가에 대한 인식은 해당 지역에 대한 지나간 역사에 대한 파악
과 자신들의 미래를 투사한 상상에 의거한 이해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
를 향해 열심히 학습하면서 변화의 논리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유
럽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싸워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학습해야 할
대상이었다. 어떤 지역을 학습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
떤 내재적 이해와 주체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러시아에 대한 청의 인식과 그러한 인식이 중국인의 근대
국가 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표상하는 담론
의 주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왕조체제의
지속을 전제로 정권을 유지하고자 한 조정의 관료, 왕조체제 내에서 개
혁을 추구한 사대부 관료,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지식인과 언론매체, 만
주족 정권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외친 혁명가들이 각각 격변
하는 러시아를 사상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모색하고자 했던 근대적 구
상의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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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협에서 모방과 연대로
17세기 중엽 이래로 러시아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흑룡강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중원을 차지하면서 제국을 형성해 가던 청과 충돌
하게 되었다.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1689), 카흐타조약(1727) 등을 통해
국경 지대의 분쟁을 해결하였으며,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청과 러시아가 맺은 이러한 조약은 호혜
와 평등에 근거한 조약이었다.1) 이는 화이질서에 근거한 조공체제가 아
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래 서양 열강과 맺게 되는 불평등조약도 아니
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러시아가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양국의
국경 지대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면서 종래의 조약체제에 균열이 발생했
다. 1858년 러시아는 청과 아이훈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강 동부 지역을
공동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한 제2
차 아편전쟁에서 러시아는 교전국 사이에서 강화를 알선했다는 이유로
청국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면서 우수리강 동쪽의 연안을 차지하였다.
결국 만주에서 신강에 이르는 북부 지역이 러시아의 정치적 상업적 지배
를 받도록 개방된 것이다.2) 열강과의 조약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공친왕
(恭親王)은 러시아의 영토 잠식 요구를 “겨드랑이의 환부”로 간주할 만
큼 위급하다고 판단했다.3) 1871년 청의 진압군에 쫓긴 회교도들이 러시
아 영내로 들어오자, 러시아는 이리 지역을 점령했다. 1881년 이리조약


1) 구범진(2008), 「청대 대러시아 외교의 성격과 그 변화—체약대신과 교환 조약문의
언어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제61집.
2) Joseph Fletcher (1978), “Sino-Russian Relations, 1800-62”,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10, Late Ch’ing, 1800-1911, Part 1 (ed. by J. K. Fairbank),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43-347.
3) 민두기(1985), 「무술변법운동의 국제적 환경—聯英日論을 중심으로」, 중국근대개
혁운동의 연구, 일조각, pp. 2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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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에서 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토를 회복하였
지만, 900만 루블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4)
1860년대 이래로 중국에서 서양에 관한 업무는 ‘이무’(夷務)에서 ‘양
무’(洋務)로 바뀌었다. 서양은 더 이상 오랑캐로 표상될 수 없었고, 학습
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응해야만 하는 상대였다.
서양 열강이 난립하는 국제정치는 고대 중국에서 열국이 각축했던 춘추
혹은 전국시대의 혼란상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정관응(鄭觀應)은 국제정
세를 전국칠웅에 비유하면서 일찍이 러시아를 진(秦)에 비유하고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을 육국의 합종으로 파악했
다.5) 러시아와 영토 분쟁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청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러시아를 다른 열강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전개되
었다. 정관응은 1874년 홍콩에서 간행된 36편본 이언에서 “조약을 맺
은 여러 국가를 살펴보면 영국이 가장 강하고 미국, 프랑스, 러시아가 모
두 그와 대적할 만하다. 영국인은 음험하고 간사하며 프랑스인은 용맹하
고 사나워 세력이 서로 대적할 만하니 그들의 연횡은 안위에 관계된다.
러시아는 지리적 조건이 유리하고 군대의 기율이 엄하며 오로지 영토의
확장을 노려서 일찍이 여러 나라가 꺼리는데 특히 중국에게는 걱정거리
이다. 밖으로 화친하고 안으로 방비를 철저히 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
도록 해야 한다.”6)라고 말하면서 영국, 프랑스보다 러시아를 방어하는


4) Immanuel C. Y. Hsu (1980), “Late Ch’ing Foreign Relations, 1866-1905”,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11, Late Ch’ing, 1800-1911, Part 2 (ed. by J. K.
Fairbank),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95-96.
5) 鄭觀應, 易言 「論邊防」(夏東元 編(1988), 鄭觀應集 上冊, 上海人民出版社, p.
66.)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에도 파견되었던 외교관인 증기택(曾紀澤)의 일
기(曾惠敏公使西日記 第1卷, 16쪽)에 러시아를 진나라에 영국을 제나라에 비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국제정세를 춘추전국시대에 비유하는
담론이 중국의 관료들에게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6) 鄭觀應, 易言 「論邊防」(夏東元 編(1988),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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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이후 중국의
러시아 인식에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청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인식
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1894년에 간행한 정관응의 성세위언에서
는 러시아를 단지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학습의
대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그는 “지난 날 러시아와 일본이 약세일 때
러시아의 옛 군주 표토르, 일본의 친왕과 대신이 모두 서양에 가서 학습
하고, 아울러 재덕을 겸비한 우수한 수십 명의 학자들을 초빙해 와서 국
가를 다스렸다. 중국도 거액을 차관하여 급히 이 나라들을 본받아야 한
다.”7)라고 주장했다. 즉 청일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는 중국이 일본과 러
시아를 모방하여 근대적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일
본과 함께 중국의 근대화가 나아가야할 모델로 파악된 것이다.
청대 사대부들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당시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통
된 현상이었다. 강유위(康有爲) 또한 1880년대 후반까지 러시아의 동청
철도 건설 과정을 위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즉 그는 1888년
에 광서제에게 “러시아가 철로를 개설하여 작년에 이미 코칸트에 이르
렀으며, 지금은 세 노선을 개설하고 있으니 2, 3년 내에 훈춘에 이를 것
입니다. 페테르부르크 도성에서 군대와 무기를 운반하여 9일 만에 중국
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수도와 국가에 순식간에 재앙이 닥칠 것입
니다.”8)라는 내용이 담긴 첫 번째 상소를 올렸다. 그렇지만 청일전쟁에
서 중국이 패한 이후에 제출한 상서에서는 러시아—일본을 포함하여—
는 모방의 대상으로 표상되었다. 즉 그는 광서제에게 올린 다섯 번째 상
소에서 변법을 위한 첫 방책으로 “러시아와 일본을 본받아 국시를 정하
고 러시아 표토르대제의 마음을 심법으로 삼고 일본의 메이지유신 정치


7) 鄭觀應, 盛世危言 「增訂新編後序」, 夏東元 編(1988), p. 932.) 이 글은 1895년 14
편본의 서문이다.
8) 康有爲, 「上淸帝第一書」(湯志鈞 編(1981), 康有爲政論集 上冊, 中華書局,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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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법으로 삼기 바랍니다.”9)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해 1월 말에 올
린 여섯 번째 상소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편집한 일본
변정고와 러시아 표토르 변정고를 광서제에게 올렸다.10)
러시아를 모델로 삼고자 하는 논의는 이미 청일전쟁에서 청조의 패색
이 짙어질 무렵부터 청말의 언론계에서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엄복(嚴復)
은 “지금에 와서 자강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외적 개혁과 내적 개혁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 외적인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가 행한 것
과 같이 대권을 수렴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내적인 것은 무엇
인가? 민지⋅민력⋅민덕 이 세 가지를 중시하는 것이다.”11)라고 하면서,
러시아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 중앙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국민
의 지식, 체력, 도덕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개혁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확립과 지식과 체력, 도덕성
으로 무장된 국민의 양성을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청은 1895년 4월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이홍
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체결한 조약에 의거하여 청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요동반도⋅대만⋅팽호제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일본에 지불해야 했다. 청나라의 조공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소국 일본에게 대국 중국이 패하여 영
토의 일부를 할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그 결과는 정관응과 강유위 등 청조의 사대부들에게 일본과 러시
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은 이 조약에서 일본


9) 康有爲, 「上淸帝第一書」(湯志鈞 編, p. 208.) 이 상소의 작성 연대는 1898년 1월로
알려져 있으나 林克光(1990), 革新派巨人康有爲(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p.
195)에 의거하여 1897년 11월로 본다.
10) 康有爲, 「上淸帝第一書」(湯志鈞 編, pp. 211-213.)
11) 嚴復, 「原強」(王栻 主編(1986), 嚴復集 第1冊, 北京: 中華書局,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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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할양하도록 되어 있는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강
력히 권고하였다. 삼국의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결국 그해 11월 요동반
도를 반환하는 조약을 청과 맺게 되었다. 삼국간섭에서 러시아가 청에게
보여준 우호적인 행동은 청조의 관료들에게는 러시아를 적대가 아니라
연대의 대상으로 상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청조의 당국자들
이 러시아와 연대를 모색하도록 이끌어간 계기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었
다. 1896년 이홍장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로마노프 러시
아 외무상과 비밀동맹을 맺었다. 이 밀약에서 양국은 일본이 러시아, 청,
조선을 침략할 경우에 서로 원조하며 단독강화를 하지 않는다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는 대신에, 북만주지역을 횡단하여 시베리아철도로 이어
지는 러시아의 동청철도 부설에 동의한 것이다.12)
청일전쟁 이후 청조가 러시아와의 연대를 모색하자, 각 지역에서 출간
된 언론매체에서도 러시아를 제도적 개혁의 모델로 삼자는 기사가 연이
어 실리게 되었다. 1896년 상해에서 시무보를 창간하면서 변법의 기치
를 내걸고 있던 양계초(梁啓超)는 독일의 빌헬름 2세, 일본의 메이지천황
과 함께 러시아 표토르대제의 개혁을 근대적 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성공
한 제도 개혁론의 사례로 꼽았다. 그는 표토르대제가 여러 서양 국가에
가서 공예를 학습하고 돌아와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고 그 뒤의 왕이
이러한 방략을 이어받아 국세가 날로 강해지고 수만리의 영토를 확장했
던 사례를 들어 청조도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학습하여 강성한 국가를 만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아울러 그는 표토르대제가 1699년 구 의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의회를 만들면서 규정을 개정하여 군주에게 권력을 집
중시킨 제도 개혁에 대해 다군(多君) 정치에서 일군(一君) 정치로 발전한


12) 야마무로 신이치 저, 정재정 옮김(2010), 러일전쟁의 세기—연쇄시점으로 보는 일
본과 세계, 소화, p. 89.
13) 梁啓超, 飮冰室文集 卷 1, 變法通議, 「論不變法之害」(飮冰室合集, 北京: 中華
書局, 1989, p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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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청조의 개혁 또한 강력한 군권의 확립을 통해서 가
능하다고 주장했다.14) 변법을 제안하는 자들이 러시아에서 찾고자 한 것
은 국제정치의 현실로 존재하는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가 아니라, 현재
와 같은 강력한 러시아를 만들어 낸 개혁 군주로서 표상된 이전의 표토
르대제였다. 그들은 표토르대제의 개혁 정책을 귀감으로 삼아, 광서제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외국의 사정을 학습하고 제도적 개혁을 시도
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3. 제국의 공포: 짜르의 러시아
청조와 러시아의 비밀 군사동맹은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그리 오
래가지 못했다. 1897년 11월 산동성 거아현(巨野縣)에 위치한 독일 가톨
릭교회에서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빌헬름 2세는 함대
를 파견하여 교주만을 점령했다. 청은 군사동맹을 맺은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 해 3월 대련
만과 여순항을 25년 동안 조차하고 남만주 지역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
는 조약을 체결했다. 삼국간섭에 참여했던 프랑스가 운남 일대의 조차를
요구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
온 것이다.
러시아의 현실적 위협이 부각되는 가운데서도 변법론자들은 여전히
모델로서의 러시아를 상상하면서 연대 혹은 학습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이 러시아와 연대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며 러시
아인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은 아마도 믿을 수 없다.”15)라고 하는, 러시아


14) 梁啓超, 飮冰室文集 卷 2, 「論君政民政相嬗之理」(飮冰室合集, p. 10.)
15) 嚴復, 「中俄交誼論」(王栻 主編(1986), 제2책, p. 471.) 엄복은 이 글에서 당시 러시아
와의 연대를 비판하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을 소개하고, 이러한 여론을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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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불신의 감정이 솟아나고 있었다. 1900년 서태후는 의화단의 힘
을 이용하여 제국주의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재정장관 비테는 이를 중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확대할 기회로
삼았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로 확대되자 러시아는 동청철도 주변을 방
어한다는 구실로 만주에 군대를 투입했고, 사실상 만주를 점령했다.16)
그해 7월, 북만주의 국경지대에서 청과 러시아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청국 군대가 아무르강을 항해하던 러시아 기선을 공격하면서 이 지역에
전운이 감돌았고, 러시아는 블라고베센스크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강의
남쪽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만행을 자행하여 수천 명을 강물에 매장
했다. 나아가 러시아군은 아무르강 건너편 지역의 64촌락을 불태우고 주
민을 학살했다. 이는 러시아의 포악성을 보여 준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러시아를 또 다시 공포의 나라로 상상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일본
에서도 ‘아무르강의 유혈이여’라는 노래가 만들어져 러시아에 반대하는
감정이 증폭되었다.17)
1901년 2월 외무장관 람스도르프는 러시아 주재 청국 공사 양유(楊儒)
에게 동북지역의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계속해서 주둔시키고자
하는 밀약을 제시했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그해 3월 상해의 장
원(張園)에서 러시아가 제시한 협약에 조인을 반대하는 항의 집회가 개
최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짜르로 상징되는 러시아[沙俄] 제국주
의의 침략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02년
4월 러시아는 청러 동삼성조약에서 18개월 이내에 3번에 걸쳐 철병할 것
을 약속했지만, 다음 해 2월 니콜라이 2세는 청의 동북지역에 러시아 군
대의 장기주둔을 비준했다. 오히려 러시아는 철병 조건으로 동북지역을


하면서 러시아와 연대하고 나아가 표토르의 개혁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 한정숙(1996), 「제정 러시아 제국주의의 만주⋅조선 정책」, 역사비평 계간35호
통권37호.
17) 和田春樹(2010), 日露戰爭—起源と開戰(上), 岩派書店, pp. 33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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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적 세력 범위로 삼기 위한 7개항의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18)
곧바로 상해에서는 러시아가 제시한 새로운 조건을 거부하는 군중집
회가 개최되었다. 동경에 유학 중인 청국 유학생들도 이 운동에 합류하
였고, 500여 명의 학생들이 거아의용대(拒俄義勇隊)를 결성하는 모임을
갖고 군사 행동을 꾀하고자 했다. 일본 주재 청국 공사인 채균(蔡鈞)은
양강총독 단방(端方)에게 “동경의 유학생들이 의용대를 결성하였고 200
여명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
는 혁명이며, 이미 국내외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각 주현에서는
엄밀하게 조사하도록 힘쓸 것이다.”19)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전신으로 보
냈다. 곧이어 북경의 경사대학당에서 러시아에 항의하는 선언이 발표되
었을 정도로, 젊은 학생들이 러시아의 제안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청나라 조정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는 러시아의 침략을 제국주의로 규
정하였고, 이러한 러시아 인식을 통해 청조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러시아를 대하
고 있었고, 학생들의 행동을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청조
에 대한 저항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청조는 러시아에 저항하는 동경의
청국 유학생들을 불온한 혁명당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을 엄히 조사해서
체포하라는 밀유를 내렸다.20) 한편 러시아가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등장한 상황에서도, 양계초는 러시아가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성격을 지
니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서도, 러시아의 무(武)에 대한 존중, 즉 상무
(尙武)의 정신이야말로 근대국가의 요소라고 해석했다. 러시아가 현재
유럽과 미국에 비해 문화정도가 낮은 반(半) 개화국이지만, 침략을 종지


18) 中國社會科學院 近代史硏究所 中華民國史硏究室 主編(1979), 拒俄運動 1901-1905,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pp. 69-70.
19) 「蔡鈞致端方電」, 蘇報, 1903년 6월 5일.
20) 「密諭嚴拿留學生」, 蘇報, 1903년 6월 5일.
368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02.28)


로 삼는 표토르의 유훈과 러시아인의 완강하고 강인한 정신으로 말미암
아 장래에 튜턴인을 대신하여 세계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21)
이처럼 러시아에 대한 청의 인식은 각 진영의 정치적 의견에 따라 분화
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열강에 의한 중국의 분할이 공공연히 논의되면서, 중
국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담론이 점차 심화되어 갔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영토가 할양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청조 지식인들이 열강의
침략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면서 애국심과 제도개혁을 요청했지만, 이러
한 사태를 세계사적 시각에서 제국주의로 설명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
았다. 양계초는 1896년의 청러 밀약에 대해서 반대하면서—서태후의 의
도가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에서—이러한 밀약은 “중국을 과분(瓜分)하
는 선봉이 될 것”22)이라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그는 1900년 8월 5일, 의
화단 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8개국 연합국이 북경으로 진
격한 다음 날 지은 글에서도 “영토가 분할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로 손해는 크지만, 영국⋅미국⋅일본 등 여러 국가들은 이러한 마음이
절대로 없을 것이며, 결코 영원히 이러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으로
믿는다.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국가들에 쫓겨서 하게 되
는 부득이한 경우일 것이다.”23)라고 하면서, 열강의 중국 침략 의도에 대
해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문명론적 관점에 의거
하여 제시된 열강에 대한 희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제국주의의 등장이
라는 세계사적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양계초는 20세기가 제국주의의 시대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19세기의 제국주의는 18세기의 제국주의와 외형이 비록
유사하지만 실질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옛날의 정부는 군주 일인이


21) 梁啓超, 飮冰室專集 卷2, 新民說 「論尚武」(飮冰室合集, p. 10.)
22) 梁啓超, 飮氷室文集 卷4, 亡羊錄 「中俄密約」(飮冰室合集, p. 43.)
23) 梁啓超, 飮氷室文集 卷5, 「論今日各國待中國之善法」(飮冰室合集, p. 54.)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69


주체이므로 그 제국은 독부(獨夫)의 제국이지만, 지금의 정부는 전 국민
이 주체가 되므로 그 제국은 민족 제국이다.”24)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근대적 국가로서 민족국가를 추구하고 있었고 이러한 민족국가가 진화
의 법칙에 따라 자체의 힘이 팽창되면서 민족제국으로 성장한다고 파악
한 것이다. 1901년 12월에 간행된 최후의 청의보 잡지에서는 “우리가
제국주의를 좋게 평가하는 것은 우주의 대법과 세계의 대세에 따라 국민
의 희생을 극력 발휘하여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기 때문이다.”25)라고 설
명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국민신문의 기사를 번역한 것이라고 밝히
고 있는 점으로 보아, 20세기 벽두에 중국 지식인들의 제국주의 인식이
제국주의 측의 담론 속에서 형성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03년 러시아에 대한 저항운동이 격화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에 점차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양계초는 러시아의 침략을 문명론적
제국주의의 예외로 간주하였지만, 열강의 중국 침략이 제국주의로 개념
화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경에서 간행되고 있던 중국인 유학
생들의 잡지인 절강조에서는 제국주의라는 명사에 대해 개념적 정의
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러시아가 폭력적이라고 말하지만, 러시아의 폭
력은 정당하다. 이는 제국주의의 수단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
근 러시아가 만주 문제로 조약을 강요한 것에 대해 중국인이 극도
로 분개하여 타당하지 않다고 비난하지만, 러시아의 관점에서 보자
면 정정당당한 정책이요, 약육강식의 공리에서 보면 당연한 일로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산동에서 독일, 양자강 유역에서 영국,
광동과 광서 및 운남에서 프랑스, 복건에서 일본이 행한 수단은 각
각 다르지만, 자세히 그들의 주의를 살펴보면 만주에서 보여준 러시
아의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이 저들 몇 나라


24) 梁啓超, 飮氷室文集 卷6, 「國家思想變遷異同論」(飮氷室合集, p. 22.)
25) 「帝國主義」, 淸議報 第100冊, 1901년 12월 21일.
370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02.28)


는 비난하지 않고 단지 러시아를 욕하고 있다. 이는 드러나지 않은
것에 어둡고 드러난 일에 놀라는 것이지만, 총체적 원인을 찾아보
면, 한마디로 이십세기의 제국주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다.26)
20세기 초기에 서양의 학문을 수용한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국주
의에 대한 논의가 성행하게 되면서 제국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
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국주의는 서양에서 수용된 낯선 개
념이었지만, 러시아의 침략에 반대하고 나아가 청조 타도를 외치는 젊은
계층에서는 열강의 중국 침략을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
다. 그렇지만 절강조에서는 제국주의를 병탄주의, 국가주의, 침략적
제국주의/윤리적 제국주의, 민족제국주의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했고, 인
구의 증가에 따른 영토의 부족과 재화의 부족에 의한 식민지 개척이라는
측면에서 자기 민족을 흡수하고 이민족을 동화시켜 하나의 대국가를 이
루는 것으로 민족제국주의를 정의했다. 즉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은 반
대하였지만, 민족주의와 문명론적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제국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중시하고자 했다.


4. 전제와 혁명: 역전된 표토르대제 평가
동경의 거아의용대는 청 조정에 러시아와의 개전을 요구했다. 청조는
이 사실을 알고서 일본 정부에 의용대를 해산하고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제지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의용대가 해산된 이후 일부 학생들은 다시
군국민교육회(軍國民教育會)를 조직하여 상무정신의 양성과 민족주의의
실행을 기치로 내걸었고, 한편으로는 무능한 대응을 보인 청 조정을 비
판하면서 만주족을 배척하는 혁명[排滿革命]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이들
26) 新名詞釋義 「帝國主義」, 浙江潮 제6기 부록, 1903년 6월 20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71
에 대한 청조의 압박이 거세지자, 학생들로 조직된 군대는 선전, 봉기,
암살의 방법으로 청조에 대항했다.27)
중국에서 혁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에 저항하기 위한 학
생군의 일원이었던 진천화(陳天華)는 1903년에 간행한 경세종에서
“러시아가 동삼성을 다시 점거하고 나서 분할통치에 대한 논의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외국인들이 오히려 중국을 걱정하여 모두들 멸종의 날
이 닥쳤다고 한다.”28)라고 경고하면서, 서태후 이하 관료들이 이화원에
모여 경극이나 보면서 열강의 중국 분할에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에 분개
했다. 러시아 문제를 계기로 시작된 청조에 대한 반발이 반청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청말의 혁명론이 본격적으로 점화되어 갔다. 러시아를 비판
하고 나아가 청조에 저항한 세력들이 청말의 혁명론의 주체로 등장한 것
이다.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추용(鄒容)이 상해에서 간행한 혁명군
이라는 소책자는 20세기 초 중국에서 혁명의 기치를 선명하게 내건 서적
이다. 그는 “혁명은 자연세계의 법칙이며, 혁명은 세계의 공리이며, 혁명
은 존망을 다투는 과도기의 관건이다.”29)라고 정의하면서, 중국에서 혁
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강변했다. 장병린(章炳麟)은 “추용이 혁명군
이라고 책의 제목들 단 것은 이민족을 구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 학술,
예속, 품성까지도 혁신하고자 하여 크게 혁명이라고 지칭한 것이다.”30)
라고 하면서 이 책의 소개를 소보 잡지에 발표했다.
추용이 만주족 타도의 기치를 제시하면서 종족주의의 관점에서 혁명
을 주창했지만, 그가 혁명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종족주의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역사를 전제정치로 규정하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수천 년 동안의
27) 憑自由(1976), 革命逸史 제1집, 臺灣: 商務印書館, pp. 162-166.
28) 陳天華 지음, 민정기 역주, 경세종(성근제 외 옮김(2011), 20세기 초 반청 혁명운
동 자료선, 성균관대학교출판부, pp. 280-281.)
29) 鄒容 지음, 백광준 역주, 혁명군(성근제 외 옮김(2011), p. 206.)
30) 章炳麟, 「序革命軍」, 蘇報, 1903년 6월 1일.
372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02.28)
온갖 전제적 정치체제를 쓸어버리는”31) 것을 혁명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나라를 사유하고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며 상
서로운 징표나 황당한 논의를 끌어와 백성을 기만하고 천명을 날조하며
백성들의 소유를 빼앗아 대대손손 제왕을 할 수 있는 제도를 그는 전제
정치의 특성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정치적 특징이 전제라는 점은 당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양계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양계초도 이미 혁
명군이 발표되기 한 해 전에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정체(政體)의 변화
를 부족제-귀족제-전제-입헌군주제-공화제의 순으로 규정하고, 중국은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 일본보다도 빨리 진한시대에 귀족정치가 청산되
었으며 2000여 년도 이전에 성립된 전제정치가 초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왔다고 설명했다.32) 혁명을 주장한 추용이나 혁명을 반대한 양계초 모두
청대의 군주제를 전제로 규정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제를 타도하고
입헌군주제로 이행 것인지 아니면 이 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공화제로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전제체제에서 벗어나 국민국가를 구상하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가운데 청조의 정치 체제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러시아
의 정체 또한 전제의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변법을 주장한 진영에서는
표토르대제가 개혁의 모델로 상징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오자 러시아
의 전제는 진화의 단계에서 뒤쳐진 전제의 모델로 설명되기 시작한 것이
다. 즉 “인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야만시대의 현명하고 뛰어난
군주로 불리는 사람이다. 러시아의 표토르대제가 그 일례이다.”33)와 같
은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표토르대제는 전제의 상징으로 바뀌기 시작
했다. 표토르대제에 대해 마군무(馬君武)가 이렇게 평가한 근거는 러시
31) 鄒容 지음, 백광준 역주, 혁명군(성근제 외 옮김(2011), p. 205.)
32) 梁啓超, 飮氷室文集 卷9, 「中國專制政治進化史論」(飮氷室合集, p. 80.)
33) 馬君武, 「俄羅斯大風潮 序言」(葛懋春⋅蔣俊⋅李興芝 編(1984), 無政府主義思想資
料選 上冊, 北京大學出版社, p. 2.)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73
아 국민이 표토르대제의 치하에서 노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국
민이 노예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서 러시아에는 지금까지 문명의 징표라
할 수 있는 헌법이나 의회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토르대제에 대한 평가의 역전은 당시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작용한 점도 있겠지만, 마군무의 평가가 영국인 토머스 커컵
(Thomas Kirkup, 1844-1912)의 A History of Socialism (1892) 중 “Anarchism”
부분을 번역한 아라사 대풍조(1902)의 서문에서 보이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막 소개되기 시작한 무정부주의 사조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마군무의 번역은 중국에서 최초로 아나키즘을 소개한 책이
며, 그는 ‘독립지개인’(獨立之個人)이란 필명을 사용하여 이 책을 간행했
다. 20세기 이전 청말의 변혁을 꿈꾸자는 자들이 권력이 집중된 국민국
가를 건설하기 위해 표토르대제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면,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는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표토르대
제를 야만시대의 군주로 평가한 것이다.
중국에 아나키즘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870년대 후반 만국공보에
러시아에서 전개되던 혁명의 기운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외국인선교사
들이 주재하는 잡지 혹은 중국어로 간행된 외국의 정치적 사건을 소개하
는 책자를 통해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 니힐리스트와 관련된 단편적
인 정보가 허무당이라는 총괄적인 명칭으로 중국에 알려졌지만, 사회적
으로 주목을 받지는 않았고 오히려 반란과 테러의 위험성이 알려지는 정
도였다. 중국에서 아나키즘이 사상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07
년 동경과 파리에서 각각 천의(天義)와 신세기(新世紀)라는 잡지가
간행된 이후였지만, 20세기 초부터 일본에서 간행된 넓은 의미의 사회주
의 문헌이 개량주의자와 혁명파에 의해 활발하게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양계초 등 개량주의자들은 아나키즘의 사상과 파괴주의에는 비판적이었
지만, 민의에 따르지 않는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민중의 사기가 고양
된 결과인 만큼 변혁을 추구하는 그러한 정신을 건설의 측면에서 활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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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했다.34) 한편, 청말의 급진주의자들은 허무당의 테러를 혁명 정세
의 각성제로 이해하고 전제를 공격하는 양호한 방법으로 환영했다.35)
청조를 타도하자고 외치던 단체들은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던 애
국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러시아의 허무당을 통해 20세기의 도래
를 상징하는 새로운 사조를 발견하고자 했다. 1903년 6월 청조에 대한
과격한 비판으로 신문사의 필진이 체포되고 발행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바로 직전의 「소보」에는 「허무당」이라는 제목의 논설이 다음과 같이 게
재되었다.
러시아는 세계 제일의 전제국가이다. 정치, 학술, 종교, 경제면에
서 한 치의 자유도 없고, 국민이 중앙정부에 절망하지 않은 것이 없
다. …… 허무당의 성질은 전제 정체로부터 나온다. 전제가 극점에
도달하지 않고 언제나 교육의 평등이 있고 참정의 특권이 있으면,
허무당을 배태하는 성질이 반드시 조금씩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전제정부는 실로 허무당을 제조하는 절호의 공장이다. 지
금 지구상의 전제국가 중에서 러시아는 최고로 꼽히므로, 당연히 허
무당이 나타나게 되었다.36)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인에게 러시아가 세계에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제국가로 표상되었다. 국민국가 건설의 모델로 부각되
었던 표토르대제는 이제 전제의 상징으로 이미지가 역전되었다. 러시아
를 전제국가로 분류하게 된 계기는 바로 러시아에서 허무당이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서는 전제적인
정체가 출현하였기 때문에 평등과 참정권을 요구하는 허무당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청말의 과격파 진영에서는 오히려 러시아
34) 嵯峨隆(1994), 近代中国のアナキズムの研究, 東京: 研文出版, p. 39.
35) 狹間直樹(1976), 中國社會主義の黎明, 東京: 岩波書店, p. 112.
36) 「虛無黨」, 蘇報, 1903년 6월 19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75
허무당의 파괴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이 러시아를 전제국으로 분류
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을 예비하는 진영에서 발간하는 매체에서도 러시아의 허무당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게 실리기 시작했다. 1903년 중국의 호남성이 자립하
여 하나의 독립국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린 신호남이라는 책이 일본에
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4장에서 “오늘날 세계 각국 중 파괴의 정신이
가장 강한 것은 바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이다. 무정부주의는 파괴의 총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37)라고 하면서, 혁명의 수단으로서 파괴의 의미
를 아나키즘과 연결시키고 있다. 마서륜(馬敍倫)은 “20세기에 새로운 주
의가 출현하였으니, 즉 러시아의 무정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러시아에
무정부주의가 있으니, 러시아는 문명으로써 20세기의 기축으로 웅비할
것이다.”38)라고 예견했다. 절강조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나타난 사회주
의의 조류를 공산주의와 극단적 민주주의로 구분하여 후자를 아나키즘
으로 지칭하면서, 프루동, 바쿠닌, 슈티르너가 그 대표적인 사상가이며
러시아 허무당의 운동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20세기 초 혁명을 주창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아나키즘에
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이념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39)
5. 러시아 1차 혁명과 중국의 반응
5.1. 청조의 반응: 헌정의 귀감
1904년 2월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전쟁이 발
37) 楊篤生, 新湖南(성근제 외(2011), p. 187.)
38) 馬敍倫, 「二十世紀之新主義」, 葛懋春⋅蔣俊⋅李興芝 編(1984), p. 7. 政藝通報
14-16호(1903, 8-9월)에 실린 글이다.
39) 大我, 「新社會之理論」, 浙江潮 제8기, 190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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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했다. 중국의 동북지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고
자 한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상호 인식의 변환에 지대한 영
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후 청조는 열강의 압박
속에서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1905년 1월 9일(러시
아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민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평화적으로
요구하던 노동자들에게 겨울궁전의 수비대가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하
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청조는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러시아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대되어 가는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 중국
에서는 이미 러일전쟁은 “아시아의 번영과 쇠락, 황종과 백종의 흥망, 전
제와 입헌의 강약”40)을 가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흘러 나왔다.
입헌군주국가 일본이 전제군주국가 러시아를 이겼다는 해석이 중국의
언론계를 장식했다. 이러한 해석은 청조가 입헌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
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주류 담론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러일전쟁의 결과
중국인의 근대 국가 구상에서 러시아 모델이 배제되고, 일본을 귀감으로
삼아 청조가 입헌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가 확실하게 된 대마도 해전(1905년 5월 27-28일)이 끝나
자 원세개, 장지동 등 당시의 실세 관료들이 마침내 공동명의로 입헌의
실시를 권고하는 상주문을 올렸다.41) 경사대학당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진불신(陳黻宸)은 “일본은 궁벽한 섬나라 소국이지만 강력한 러시아를
눌렀다. 지금 이후로 러시아는 하나의 입헌 대국이 될 것이다. 피차의 사
정을 살펴보면, 용자는 분발할 줄 안다. 입헌하지 않은 한 국가가 여러
입헌국가 사이에 거하고 있다면, 견식이 넓은 자가 아니라도 그것이 불
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는 상소를 올렸다.42) 1905년 7월 청조는
40) 別士, 「論中日分合之關系」, 東方雜志 創刊號, 1904년 3월 11일.
41) 민두기(1994), 신해혁명사—중국의 공화 혁명(1903-1913), 민음사, p. 93.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77
5명의 대신을 해외로 파견하여 각국의 입헌정체를 고찰하도록 명령했다.
예부상서 대홍자(戴鴻慈) 등은 그해 12월에 북경을 떠나 약 7개월 동안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4개국을 시찰하고 돌아보고 온 뒤,
다음과 같이 러시아의 상황을 보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전에는 병력이 강성하여, 민간에서 비록 입헌을 요구하는 마음
을 품고 있더라도 폭동이나 비상한 행동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패전 이후에 비로소 각종 요구가 있게 되었고, 당시 시세에 쫓겨 정
부가 윤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는 국채를 발행하고 새롭
게 병사를 늘려 훈련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권위가 점차 회복되고
있어 의회가 요구하는 각종 안건에 일마다 윤허하지 않을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상하가 서로 자기주장을 하여 자못 의혹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臣) 등은 러시아의 전 수상과 직접 대담을 나누었는데,
러시아의 입헌 준비가 이미 백년이 넘었지만 결국 민간의 지식이
완전히 개명된 것이 아니며 때때로 법도에 맞추기가 매우 어렵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번 선포는 정부가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지만 바라는 바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심려와
어려운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재 러시아가 입헌을 하고
있는 실제 사정입니다.43)
대홍자 일행이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것은 1906년 5월 16일이며, 페테
르부르크로 가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비테와 대담을 나눈 뒤 러시
아를 떠난 것은 5월 28일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헌법과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며 두마(국회)에 입법권을 부여할 것을 약속한 10월 선언이 이미
그 전해에 발표되었고, 체제 유지를 위한 근본적인 방안을 수립하고자
42) 程爲坤(1900), 「日俄戰爭與清末立憲運動」, 清史研究集 第7輯 재인용.
43) 「出使各國考察政治大臣戴鴻慈等奏到俄情形摺」 光緖 32年 閏四月 初四一日, 故宮
博物院明清檔案部 編(1979) 清末籌備立憲檔案史料 上冊, 中華書局, pp.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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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반동적인 스톨리핀 내각의 개혁이 진행 중이었던 때였다.44) 러시아를
방문한 청의 사절단은 군대와 박물관 등을 관람했고, 혁명 후의 혼란상
도 목도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전제정체를 유지하면서 입헌으로 나아가
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으며, 입헌의 어려움이 있
지만 입헌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비테는 청의 사절단에게 “중국의 입헌은 먼저 중국과 서양의 법률가
를 초빙하여 가장 적절한 법률을 정하도록 힘써야 한다. 법률이 정해진
뒤에 군민(君民)이 모두 법률의 준수를 실행해야 입헌이라 말할 수 있는
데, 대략 50년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45)라고 충고했다. 그렇지만 입헌
준비를 위해 해외로 나온 청의 사절단은 비테의 자문에 수긍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홍자는 비테의 대화를 기록한 일기의
다음 부분에 입헌을 위한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도 지금 청은 “지행병진”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적었다.
입헌을 향한 러시아의 현실적 고투는 청나라 조정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현실이었다. 각국을 시찰한 대신들의 보고서를 듣고서 광서제는
1906년 9월 입헌의 기초를 준비하라는 상유를 내렸다. 중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헌법의 형식을 갖춘 「흠정헌법대강」이 공포된 것은 1908년 8월
의 일이었다. 「군주의 대권」과 「신민의 권리와 의무」로 구성된 이 헌법
의 처음 두 조는 “대청황제가 대청제국을 통치하며 만세일계로서 영원
히 존대를 받는다.”, “군주의 신성 존엄은 불가침이다.”46)로 시작하고 있
다. 그렇지만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되어 이 헌법
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44) 한정숙(2011), 「러시아 혁명」 서양사강의(배영수 편), 한울, 개정판 24쇄, pp.
534-541.
45) 戴鸿慈(1982), 出使九国日记, 湖南人民出版社, pp. 225-226.
46) 故宮博物院明清檔案部 編(1979),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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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양계초의 희망: 지방의회의 꿈
일본에 망명 중이던 양계초는 러일전쟁의 결과를 보고서 “20세기의
국가에서는 끝내 전제정체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완강한 러시아가 자유
의 신의 위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47)라고 평가했다. 그 또한 전제 정치
에서 입헌으로의 정체의 진화를 실천에 옮기고자 했고, 여전히 입헌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05년 1차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에 양계초는 이
미 러시아에서 혁명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2
년에 쓴 「혁명! 러시아 혁명!」이라는 글은 러시아에서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병사들에게까지 혁명의 풍조가 전파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글은 “아 러시아 혁명! 오 러시아가 마침내 혁명을 면하지 못했구나!
오호라 러시아는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나!”로 시작하면서,
“러시아는 혁명에 쫓겨 입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입헌을 하지 못하고 혁
명이 성공할 것인가? 하여간 세계에 완전한 전제의 대국으로서는 중국만
남을 것이다.”48)라고 하면서, 지지부진한 청조의 개혁을 자책했다.
그렇지만 양계초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을 소개하면서 “무정
부당은 전제국가와 자유국가를 막론하고 수장(首長)을 죽이는 것을 일로
삼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질서의 파괴에 있다. 전제 질서와 자유 질서를
모두 묻지 않는다. 그들은 질서의 적이요 문명의 적이다.”49)라고 하면서
아나키스트의 암살 활동에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러시아 허무
당을 논함」이라는 글에서 “허무당의 수단은 내가 흠모하지만 그 주의에
는 찬동하지 않는다. 허무당의 종지가 무정부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
기 때문이다. …… 무정부는 비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천성에 반
한다.”50)라고 밝혔다. 그는 1904년 러시아의 내무대신 플레베가 암살당
47) 「俄國立憲政治之動機」, 新民叢報 58號, 1904년 12월 7일.
48) 「革命! 俄羅斯革命!」, 新民叢報「國聞短評」 제9호, 1902년 6월.
49) 梁啓超, 飮冰室專集 卷2, 「自由書⋅難乎爲民上者」(飮氷室合集,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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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건을 소개하면서 “플레베는 러시아의 공적이며 전 세계 인도의 공
적”이라고 평가하여 암살의 쾌거를 높이 사기도 했지만51), 결국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아나키즘을 사상의 차원
에서 수용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 1차 혁명에 대한 정보는 중국에 거의 동시간대로 전달되었다.
혁명의 소식을 가장 빨리 보도한 것은 요코하마에서 간행하고 있던 신
민총보였다. 양계초는 이 잡지에 로이터통신, 베를린전보, 런던전보 등
을 근거로 일자별로 혁명의 경과를 소상하게 알렸다. 그리고 유럽 각 지
역 언론의 반응을 소개하는 글에서, 그는 “개혁 사업은 큰 돌을 위험한
곳에서 굴리는 것과 같아 최종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그칠 수 없다고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는데, 러시아의 최근 현상을 보고서 더욱 이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52)라고 평가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자유를 보장
할 것인지 죽음에 이르는 길인지 지켜보자고 했다.
양계초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게 된 경제, 종교, 종족상의 원인,
혁명의 동기와 방침, 혁명의 전도, 혁명이 국내외에 끼치는 영향 등을 상
세히 고찰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혁명의 전도를
긍정과 부정 두 측면에서 평가했다. 먼저 그는 “세계에서 유일한 전제국
이 마침내 대혁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구나!”53)라고 문두를 열면서 혁명
의 주체인 ‘민당’(民黨)의 성질과 역할, 방법 등에 주목했다. 즉 이전의
혁명은 비밀결사의 음모이었지만 이번은 정정당당한 요청이요, 이전의
주동자는 극단적 급진주의자인 청년들이었지만 이번은 노숙하고 무게
있는 지위와 명망을 지닌 지방의회의 대표들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는 러시아의 정치가 자유를 누리는 경지에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은 바
50) 「論俄羅斯虛無黨」, 新民叢報 40⋅41호 합집, 1903년 11월 2일.
51) 「俄國虛無黨大活動」, 新民叢報 51號, 1904년 8월 25일.
52) 「自由死自由不死」, 新民叢報 61號, 1905년 1월 20일.
53) 「俄羅斯革命之影響」, 新民叢報 61號, 1905년 1월 20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81
로 지방의회일 것이라고 예측한 프랑스 경제학자 르루아볼리외(Leroy
Beaulieu)의 말을 인용하여 지방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양계초는 러시아 혁명이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아 루이 16세를
처형한 프랑스혁명의 전례를 밟게 된다면, 그 결과가 프랑스혁명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즉 “만일 러시아가 지금의 황통을 파괴하고
도 이전과 같이 슬라브족으로 여러 종족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이는 불
가능한 형세이다. 러시아 대제국이 마침내 3, 4개 혹은 6, 7개의 소국으
로 와해되어 통일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54)라고 내다봤다. 즉 그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분할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염려와 불
안은, 1905년 이후 중국동맹회가 혁명은 내란과 분할, 외국의 간섭을 초
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하게 된 단서를 제공한, 양계초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55) 나아가 그는 러시아에서 소란이 발생한 동기 가운데 정치
문제에 속하는 것이 10분의 3에 불과하고 경제 문제가 실로 10분의 7이
라고 진단하면서 가장 유력한 일파인 사회주의자들이 토지사유권의 폐
지를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혁명의 동기를 분석했다. 러시아가
전제에서 공화로의 이행이 성공하다면,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이 전부터
꿈꿔오던 토지사유권의 폐지를 시행하고자 할 것이며, 이는 세상에서 절
대로 실행할 수 없는 제도라고 평가했다. 토지사유권의 폐지에 대한 양
계초의 부정적 평가 또한 사회혁명을 주장한 중국동맹회가 토지국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양계초와 격렬하게 논쟁을 주고받게 된 주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56)
54) 「俄羅斯革命之影響」, 新民叢報 62號, 1905년 2월 4일.
55) 예를 들면, 汪精衛의 「駁革命可以召瓜分說」(民報 6호), 「駁革命可以生內亂說」
(民報 9호)
56) 예를 들면, 손문은 토지국유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 가격을
고정시켜 가격의 인상분을 국가가 수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紀十二月二日本
報紀元節慶祝大會事及演說」, 民報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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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민보와 러시아 1차 혁명
군국민교육회 암살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황흥(黃興)과 공보전(龔寶
銓)은 각각 호남성 장사(長沙)와 상해로 돌아가 비밀결사 단체인 화흥회
와 광복회를 창설했다. 절강 지역 출신인 장병린과 채원배 등은 광복회
의 일원이었다. 암살과 봉기를 외친 이들 단체들은 손문(孫文)의 주도로
하와이에서 만들어진 흥중회와 결합하여 1905년 8월 동경에서 중국동맹
회를 결성하여 청조의 타도를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에
간행된 중국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는 만주족 왕조의 전제정치를
타도하자고 외치고, 한편으로는 유럽과 미국에서 경제 문제로 인해 동맹
파업이 일어나고 무정부당, 사회당이 날로 흥하여 사회혁명이 멀지 않아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수행하여 효과를
한 번에 달성할 수 있다.”57)라고 주장했다.
민보는 신민총보보다 더 상세하게 러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혁
명의 소식을 전했다. 즉 허무당 여걸 소피아 초상(2호), 러시아 허무당이
스톨핀 수상에게 테러를 가하는 장면(9호), 러시아의 성인 톨스토이(11
호), 시베리아 아카뚜이 감옥에 있는 러시아 혁명당원, 아카뚜이 감옥 중
의 여성 혁명당원(14호), 러시아 혁명당의 비밀회의, 카자크병사가 시민
을 죽이는 장면(22호) 등 러시아 혁명의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사
진이 게재되었다. 또한 민보사가 러시아 혁명가 비르스트스키를 맞이하
는 사진이나 민보의 편집에 간여하고 있던 송교인(宋敎仁)이 비르스트
스키와 대담하는 장면 등을 게재했다.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독립」
(2호), 「1905년 러시아의 혁명」(3호, 7호), 「러시아 혁명당의 일보」(4호),
「러시아 입헌 후의 사정」(6호) 등 러시아 혁명을 소개하거나 분석하는
글도 연이어 다루었다.
57) 孫文, 「發刊辭」, 民報 제1호, 1905년 11월 26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83
민보가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러시아 혁명을 소개하고 분석
하는 글을 게재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청조 타도의 혁명을 외치던
민보의 편집진은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에 누구보다도 더 관심을 가졌
다. 그렇지만 1차 혁명이 발발한 해 11월에 중국동맹회가 성립되었다고
해서, 중국동맹회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성립되
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또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따라 발생한 경제적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보의 사회혁명론 또한 러시아 혁명
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추적하기도 어렵다. 중국동맹회 성립 이
전에 손문은 이미 미국 혹은 유럽의 상황을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한 ‘사회혁명’ 혹은 ‘토지국유’, ‘평균지권’
등의 개념 또한 러시아 1차 혁명 이전에 이미 제기된 것이었다. 오히려
중국동맹회가 성립되고 난 이후에 중국동맹회의 구성원 가운데 사회혁
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진영에서 러시아 1차 혁명에 심대한 관심을 보
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58)
러시아 혁명에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역시 러시아에서 온 혁명가를
직접 만난 송교인이었다.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형인 미야자키 다
미조(宮崎民藏)와 함께 비르스트스키와 대담한 송교인은 1906년 3월 10
일자 일기에 “혁명의 일은 한 방면에서만 착수할 수 없다. 정치혁명만을
강구하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사회혁명만을 강구하면 역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반드시 양자를 모두 갖추어야 자유의 권리를 얻을
수 있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59)라고 그날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가
말하는 사회혁명은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자유
까지도 포함하는 혁명이었다.
58) 丁則良(1956), 「評榮孟源同志有關一九○五年俄國革命對中國資產階級革命派的影
響的幾個論點」, 吉林大學社會科學學報編輯部, 人文科學學報 3호.
59) 湖南省哲學社會科學硏究所古代近代史硏究室 校注(1980), 宋教仁日記, 湖南人民
出版社, pp. 152-154.
384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02.28)
러시아와 일본의 혁명파들과 연대를 지닌 송교인은 1906년에 러시아
1차 혁명을 조명하는 「1905년 러시아의 혁명」을 민보에 나누어 게재
했다. 그는 이 글의 전반부에서 혁명의 단서, 노동자들의 소요, 민란과
군대의 진압, 농민의 폭동, 니콜라이 2세의 10월 선언 이후의 대동맹 파
업, 체신대신의 난폭함 등을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동맹파업의 압박,
10월 30일(러시아력) 총동맹파업의 감격, 인민의 대승리, 인민의 새로운
요구, 비테의 정계, 위기 때의 여론, 혁명 이후의 대세 등으로 나누어 상
세하게 러시아 혁명의 과정을 기술하고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이 
동경일일신보의 기사를 번역한 것이므로 송교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글의 말미에서 “러시아 혁명은 아
직도 끝나지 않았다.”60)고 진단하면서 러시아 인민이 정부에 가하는 혁
명과 요구라는 두 가지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폭동, 암살, 동맹파
업 등 강제력을 사용하여 정부에 반항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요구의 방법만으로는 정치혁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
아가 그는 러시아 황실의 전복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한 양계초
와는 달리, 독재의 군주제는 현대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신념 아래
러시아 황실이 전복되기를 기대했다. 러시아 1차 혁명은 송교인뿐만 아
니라 “러시아 혁명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병행하고 있다.”61)라고 분
석한 주집신(朱孰信)과 같이 중국동맹회 내부에서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
제를 지향하는 정치혁명과 민생주의를 강조하는 사회혁명의 병행을 주
창하는 자들에게는 혁명의 이론을 강화할 수 있는 현실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60) 勥齋, 「一千九百零五年露國之革命」, 民報 7호, 1906년 9월 5일.
61) 朱孰信, 「論社會革命當與政治革命竝行」, 民報 5호, 1905년 6월 26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85
6. 맺는말
20세기 전환기에 격변하는 러시아에 대한 청의 인식은 다양한 경로로
변화했다. 정치적 현실을 타개하고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청조의 관
료와 사대부,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젊은 학생이나 혁명을 요
청하는 진영 사이에서 제정 러시아는 각각 위험한 적국에서 모델 혹은
정치적 연대로 변했고, 제국주의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연대에서 전
쟁의 상대로 바뀌기도 했다. 러일전쟁의 결과 부상하는 일본, 일본에게
패해 무너지는 제국의 러시아는 열강들 내에서도 우열의 차이가 발생했
다. 입헌을 통해 근대국가를 창출하자는 요구가 점차 강해가던 20세기
초, 러일전쟁의 결과는 중국인의 근대국가 구상에 입헌제도의 우수성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러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근대사의 모순을 해결
하고자 한 허무당 등으로 표상된 아니키즘의 희망, 그리고 1905년의 제1
차 혁명 또한 중국의 인식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러시아를 상
상하게 만든 소재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를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드
러났다. 러시아 혁명은 청조 당국과 관료들에게 강력한 군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의 준비를 서두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러시
아가 입헌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와 같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서는 입헌을 해야 한다는 반면교사였다. 무술변법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현실적 권력을 지니지 않은 양계초 등과 같은 망명 정치인에게
러시아 혁명은 전제정체가 바뀌어야 하는 타당성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
를 부여하고 지방의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
로는 혁명으로 인한 내분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토지국유와 같은 사회주
의적 정책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각성제가 되었다. 중국의 초기 사회주의
자 혹은 청조 타도를 내건 젊은 학생과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바라
보면서 군주제도를 타도하는 정치혁명과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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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보하는 사회혁명의 동시성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혁명이론을 강화시켰
다. 청말의 혁명파들은 암살과 테러 등 아나키즘의 방법을 동원하고자
했기 때문에, 허무당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러시아를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전제의 상징으로 묘사했고, 그러한 상상 속에서 러시아와 청조
를 동일한 선상에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이처럼 러시아는
중국의 정치현실과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와 맞물려 서로 다른 이미지로
표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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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접수일: 2014년 12월 31일
심사 완료일: 2015년 1월 17일
게재 확정일: 2015년 1월 28일
양일모 /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국가 구상과 러시아 1차 혁명 389
ABSTRACT
Imaging the Imperial Russia in Modern China
Ilmo, Yang*62)
This article aims to investigate several aspects of interrelation between
the various projects of modern nation-building inside the Qing dynasty
and their awareness of Russia, and further to examine the structure of representing
the Other in modern China, comparing the Chinese recogni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of 1905 with their earlier perception of despotic
Russia.
In order to analyze this problem, it is necessary to inquire into each of
the subjects of discourses which produced various imaginations of
Imperial Russia. I will consider the different ways of thought expressed
by the typical Chinese political social groups, such as the government officials,
gentry, modern intellectuals and the mass media, revolutionary
groups, while making practical use of Russia as a resource of thinking.
I argue that Imperial Russia was represented in different images, depending
on the subjects who formed China’s political discourse and reality.
* College of Liber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