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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송은영.연대


목 차
1. 역사적 방법론 : 텍스트성의 미로를 탐사하기 위하여
2. 객관적 진리의 현시로서의 작품 : 비례와 조화의 미학
3. 저자의 육화로서의 작품 : 통일성과 유기성의 미학
4. 의미의 위기에서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텍스트 개념으로


<국문초록>
이 논문은 20세기 중반 이후 인문과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인식론적 전환과
문학 작품의 존재론적 변신 과정에서 ‘텍스트’라는 용어가 호출된 역사적 맥락과
이 개념이 극복하고자 하는 범주를 구체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학
이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검토하면서, 조화와 비례, 통일성과 유기성에 기초한
‘작품’ 개념이 서양 철학의 진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탈구조주의
가 원래 있던 단어인 ‘텍스트’의 어떤 함의에 주목하여 이 용어에 내재되어 있던
측면을 되살리려 했는지 분석했다. 이 글은 이를 통해 흔히 탈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탈구조주의의 텍스트 개념이 사실은 자신들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철저한 역
사적 반성의 산물이었다는 점, 즉 새로운 글쓰기를 옹호하고 전통을 부정하기 위하
여 전통 안에서부터 해체의 계기를 발견하고 은폐 혹은 배제되어 있던 타자를 전통
안에서 발견하는 방식을 통해 텍스트 개념이 탄생했음을 밝히고자 했다.


주제어 : 텍스트, 작품, 조화, 비례, 통일성, 유기성, 탈구조주의, 저자, 역사에 대한 자기반
성, 새로운 글쓰기
*206 인문학연구 제51집


1. 역사적 방법론 : 텍스트성의 미로를 탐사하기 위하여
텍스트Text는 오늘날 학문 영역과 일상 영역을 아우르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 중 하나이다. 텍스트는 20세기 중반 이후 인문과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
난 인식론적 전환과 문학 작품의 존재론적 변신 작업에 필요한 용어로 호출된
이후, 전문적 영역으로 분화되고 고정되어 있는 현대 학문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 문학이론과 비평은 물론 미학, 문화이론, 언어학, 철학 등에서도 광범
위하게 쓰이고 있다. 특히 문학 비평에서는 시, 소설, 희곡 등 기존 장르의
명칭이 서정적 텍스트, 서사적 텍스트, 드라마 텍스트 등의 용어로 의식적으
로 대체되는가 하면, 그 동안 익숙하게 써 왔던 ‘작품’이나 ‘책’과 같은 친숙한
명칭이 텍스트라는 새로운 낱말에 밀려 퇴장당하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해독
할 수 있는 의미와 약호를 지닌 인간의 모든 의사소통물이 텍스트로 간주되고
있으며, ‘세계 자체가 텍스트’라는 주장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일상어에서도
텍스트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을 만큼 이 용어가 지닌 파급력과
포괄적인 능력은 탁월하다. 텍스트가 이처럼 이론과 현실의 변화를 아우르는
용어가 된 것은 기호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의사소통체계를 텍스트로 바라보
는 최근의 학문적 경향이 낳은 결과이다. 덕분에 최근 텍스트는 ‘텍스트학
(Textwissenschaft)’이라는 학문 영역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다양한 학문적
영역들을 포괄하고 매개하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의 교통로로 기
능하고 있다.
텍스트가 이렇게 각광받는 용어가 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사
상적 흐름이 사유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고 새로운 글쓰기의 시대에 호응
하면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이 흐름의 한가
운데에서 무수한 이론가들에 의해 서로 다른 용법과 의미로 사용되었고, 때
로는 다른 말과 합성되어 새로운 조어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론들에서 텍스트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검토한다고 해서 이 개
념의 내포를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는 확정적 의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07


미로 활용되는 국부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각 논자들이 정립하려고 했던 이
론 또는 글쓰기의 장이거나 혹은 그들이 공격하려 했던 의미를 파열시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공통된 기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롤
랑 바르뜨(Roland Barthes)의 말대로 텍스트는 어떤 고정적 의미를 지닌
개념이나 대상이라기보다 일종의 “방법론적 영역”1)으로 봐야 할 것이다.
텍스트가 방법론적 영역이라는 것은, 현대 문학 비평에서 이 용어가 기존
의 문학작품의 존재론을 새롭게 정립하고 철학과 미학에서 문학적 의미와
진리에 대한 존재론적․인식론적 전통을 전복시키는 공간이라는 것을 의
미한다. 실제로 20세기 비평은 텍스트 개념을 통해 그 동안 문학 텍스트 이
해와 비평의 관건이었던 ‘의미’의 존재 근거와 방식을 문제로 삼으면서, 문
학과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과 글쓰기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의 위상 변화나 의미론적 전환에 그치지 않고 비평과
이론이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스스로 재정립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
정은 문학이론 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언어학 등 한 동안 서로 분화되어
있었던 제반 학문 영역이 합작하여 새롭게 건설한 20세기 중반 이후의 신
작로였다. 이 와해와 전복의 행로에서 텍스트의 ‘의미’는 철학의 진리 개념
을 시험하는 실험실이 되었고, 텍스트성(Textuality)은 주체, 역사, 전통, 해
석, 글쓰기 등 여러 쟁점적인 개념들을 재정립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며, 새
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텍스트의 공
간을 탐색하는 것은 그 의미와 용법만을 탐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탈현대적 사유의 물길이 텍스트라는 낱말의 공간 안에서 터놓은 쟁
점들과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론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그 시야를 문학 내부
로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문학의 전통적인 모방론, 효용론, 존재론, 인식론
등에 파열을 내어 서구 문명의 정신사적 맥락을 반성하고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정립하는 과정이 된다. 그 파열의 흔적들이 저자, 독자, 작품 등의


1)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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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이나 모방, 재현, 이해, 해석 등 가장 전통적인 개념에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이 쟁점들이 버티고 있는 텍스트성의 공간은 때로 추적자로 하여
금 문학비평의 경계를 이탈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이탈과 그로 인한
경계의 박막화가 올바른 탐색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하는 표지판들을
내걸고 있다. 우리가 텍스트성의 미로를 탐사하고 세부지도를 그리기 위해
때로 문학 비평의 경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을 탐색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이 글은 텍스트 개념이 대타적인
개념으로 삼고 있는 ‘작품’ 개념을 역사적이고 통시적인 맥락 속에서 다루
면서 비교하여 텍스트 개념을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한다. 그 맥락은
때때로 고대까지 거칠게 거슬러 올라가는 추적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 텍스
트 개념을 문학의 중심부에 떠오르게 한 사유들이 공시성의 체계 혹은 탈
역사화의 방법에서 출발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텍스트 이론을 위
반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서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을 듯하
다. 그러나 텍스트 이론을 비롯한 탈현대적 사유들이 거점으로 삼곤 하는
탈역사화의 방법은 실상 철저하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와 관계하고 현
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기획하는 서구인들의 문제제기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글의 시선은 주로 그 역사적 반성의 운동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개념의 운동과 범위를 끊임없이 역사적 문맥으로 돌려보내어 검토하는 작
업은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여기에는 텍스트 이론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글들이 개념 자체에 대한 분석적 해설과 탈구조주의 이론의 논리적 해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판단도 많이 작용했다. 아마 그것은 탈현대적 사유와
텍스트 이론이 그 자체만으로도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난해하고 복
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학비평과 이론이 서구의 개념과 이
론을 수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발생하고 전개된 역사적 맥락
과 이유를 회상하고 상기하여 구체적인 내면화에 다다르는 작업일 것이다.
이 글은 텍스트 이론을 탈구조주의 중심으로만 소개하기보다 그 이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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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맥락과 비교할 때, 낯선 이론과 개념이 우리의 맥락에서도 비로소 소
화될 수 있으리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2. 객관적 진리의 현시로서의 작품 : 비례와 조화의 미학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텍스트 개념의 재구축 과정에서 텍스트와 직접적
인 비교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해체와 전복의 목표물로 개념화된 것은 ‘작품
work, oeuvre’이라는 범주이다. 하지만 탈구조주의자들이 새로운 텍스트
개념을 구축하면서 행한 공격과 해체 작업은 근대적 산물로서의 ‘작품’ 개
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작품’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사실
상 고대부터 시작된 서구적 사유의 전통을 농축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텍스트론은 서양 형이상학의 거대한 역사와 실체라
는 훨씬 더 뿌리깊은 전통을 겨냥하고 있는데, 그 전통에는 예술적 생산물
을 조화와 통일성을 지닌 유기체로 보는 관념과 함께 그러한 견해를 형성
하고 존속시켰던 예술작품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관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데리다(Jacque Derrida)가 ‘작품(oeuvre)’이 아닌 ‘책(livre)’이라는 광범위한
은유로 지시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전통이다. 이 장에서 텍스트론의 전사를
이루는 예술작품에 대한 관점의 역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려는 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및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텍스트 이론을 형성하고 부상시키는 추
동력이기 때문이다.
서양 문학론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그 시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요구한다. 그들이 예술작품의 본질을 진리의 형상화
나 진리에 대한 인식과 연관시킨 이래 문학작품을 포함한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는 진리의 문제와 분리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
는 예술작품의 의미란 문학수업에서 다루듯 작품에 담겨 있는 구절이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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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제나 당대의 존재론과 인식론적 사유의 자장 안에
서 논의되어 왔던, 그 의미들을 해석하는 근거와 이해하는 방식의 문제를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오늘날의 모방(imitation), 모사
(copy), 재현(표상, 대리; representation) 등을 포괄하는 미메시스(mimesis)라
는 유명한 용어를 통해 설명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은 예술작품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복제한 데 지나지
않는 현실 속의 사물을 재모방한다고 비난했다. 플라톤에게 예술작품은 참된
실재로부터 두 단계나 멀리 떨어진 함량 미달의 존재로, 즉 진리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닮은 가상과 환영으로 실재를 왜곡하는 위험천만한
존재로 간주된다.2)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쾌감과 교육의 측면에서
미메시스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면서, 시는 사물과 사실 그대로를 그리기보
다 개연적이거나 허구적인 것, 불가능한 것 등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을 말하
는 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3) 이 유명한 주장들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미메시스의 대상과 방식이나 예술의 진리인식적 기능에 대한 부정론
과 긍정론이 아니라, 그들이 예술작품의 의미는 물론 작품이 형상화하는 대
상, 작품의 내적 형식 등을 진리와 관련해서 생각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이
서양의 사유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예술 비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 구제의 근거는 모두 예술
작품이 얼마나 객관적 실재를 완전하게 형상화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가시적이고 변화무쌍한 감각 세계
가 아니라, 그 감각적 개별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영원하고 완전한 형상의
세계이다. 플라톤은 이 보편자의 세계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감각적으로 지
각되는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에 참여 혹은 분유(分有; methexis)의 방식으
로 관여할 수 있을 뿐 참된 실재의 존재에 어떠한 권한도 행사하지 못한다.
2) 플라톤,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1997, 614~618면.
3)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4, 1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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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는 예술작품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척도 역시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데, 작품은 참된 실재에 상응 혹은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존재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구체적 형상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플라톤의 이원론
을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영원하고 불변하는 초월적 존재를 감각적 개별자
들의 변화와 운동의 목적지점에 위치시킨 그의 철학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진전이자 완성이라는 측면 또한 지니고 있다. 그는 예술작품이 현실과 사실
그대로를 모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허구
적인 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 사물의 이데아 등을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객관적 진리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형상화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한에서 허구와 상상력, 변형을 허락받는 것이다. 결국 플
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작품의 의미는 예술이 독자적으로 전해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지성(nous)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철학의 진리
에 놓여 있게 된다. 작품의 의미가 보편성의 진리, 동일성의 진리, 일치의
진리에 종속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예술작품이 진리를 반영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속성을 정의함
으로써 후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예술작품
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참여한다는 점을 인정했는데, 플라톤에게 “아름다움
의 이데아는 이데아라는 점에서는 지적 존재 영역에 속하지만 동시에 감각
지각을 통해서도 파악되고 인지되는 유일한 이데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 보여지기 때문이다.”4) 예술작
품은 이렇게 초월적인 아름다움의 형상(eidos)을 감각적, 가시적으로 보게
해주는데, 그 형상은 바로 ‘절제’를 통해서만 습득되고 표현할 수 있는 ‘질서
(kosmos)와 조화(harmonia), 균형과 완전성’으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이 아름
다움의 이데아를 분유(分有; methexis)하려면, “전체에 동적인 정적과 자기
4) 프리도 릭켄, 고대 그리스 철학, 김성진 옮김, 서광사, 2000, 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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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을 부여하는 균형 또는 대비”라든가 “치수(metron)와 비례(symmetron)”
등의 자질을 필수적으로 갖춰야만 하는 것이다.5) 다시 말해 예술작품은 참된
실재를 실현하기 위해 질서와 비례, 조화와 통일성 같은 속성을 갖추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반영해야 한다.
서양 철학 자체가 무질서하고 감각적인 현상 세계를 일관되고 통일된 원리
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도 했지만,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
터 수학적 조화와 완전성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예술론과 그에 기반이 된 존재
론을 확립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따르면, 이 세계는 신처럼 한정되어 있는
“하나의 단일한 전체”이며, 따라서 일정하게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이
한 부분들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질서(kosmos)가 나타나게”끔 “조직
화(organization)”되어 있다. 코스모스(kosmos)란 “질서와 적절함 그리고 아
름다움의 관념들을 결합시켜 가진 하나의 번역할 수 없는 낱말”인데, 피타고라
스의 세계관에서는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도 “대우주(macrocosm)의 구조적
원리를 재현하는 유기체(organism)” 즉 소우주(microcosm)가 된다. 플라톤은
이 질서와 정돈taxis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모든 장인은 각각의 부분을 그
알맞은 위치에 배열하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적절히 어울리게끔 만들어,
마침내 전체가 하나의 질서 잡힌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한다”고 썼다.6)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사실상 플라톤의 예술론을 긍정적 효과와
가치를 인정하는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다. 시적 모방이 특별한 즐거움과
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역사나 여타 학문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진리 인식
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히 플라톤 이론의 갱신이나
극복이다. 하지만 그가 예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해서까지 플라톤과 다른 생
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생물이든, 여러
5) 먼로 C.비어즐리, 미학사, 이성훈 옮김, 이론과 실천, 38면.
6) W. K. C. 거스리 지음, 희랍 철학 입문,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56~61면, 142~
143면.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13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들의 배열에 있어 일
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
면 안 된다”는 시학의 유명한 구절이 플라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는 점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거나 플롯이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한다는, 후대
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던 여러 구절들은, 예술작품이 “전체성과 통일
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7)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작품을
인간의 완전한 신체에 간략하게 비유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 있는 생
명을 지닌 ‘생물학적 유기체’의 모델을 문학작품의 구조와 완벽한 유비관계
에 놓이게 하였다. 그는 플라톤처럼 언제나 변화하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세계를 초월적인 이데아의 형상과 분리시키지 않기 위해, 가능태(dynamis)
로 내재해 있는 형상이 최종적인 목적으로서의 형상을 향하여 점점 성장하
여 현실태(energeia)로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데아인 형상을 감각적 질료
속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예는 살
아 있는 생물과 같은 유기체이다.8) 예컨대 하나의 씨앗이 나무의 형상을
가능태로써 내재해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 씨앗은 커다란 나무의 형상이
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현실화할 때까지 내재적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은 씨
앗 자체의 본질적 기능이 내재적으로 전개되는 형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
의 원리를 태아가 자라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
다. 근대의 낭만주의자들이 시학에서 발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문학작
품의 구조였다. 그가 시학에서 문학작품을 유기체에 견주어 어느 한 부분
도 바꾸거나 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구절
들은, 아마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총합이 아닌 유기적인 종합에 의한 통일성
7)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4, 54~59면.
8) 거스리, 앞의 책, 167~1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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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근대 이
후 재해석될 계기를 얻게 되자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풍성하게 솟아오
르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크게 보아 객관주의적 입장으
로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견해 안의 무수하게 다양한 편차들을 잠정적
으로 무시하는 게 허락된다면, 이러한 태도는 중세와 근대 고전주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입장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세에는 초월적 존재가
철학적 신이 아니라 종교의 신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고대의 존재론과 인식
론은 신의 존재를 보증하는 철학적 논의에 적용되었으며, 세계는 신이 지은
책이고 모든 존재에 신의 질서와 뜻이 담겨 있다고 간주되었다. 따라서 예술
작품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신의 말씀과 뜻에 따라 성서의
권위에 따라 해석되어야 했으며, 예술작품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도 신의
속성을 반영하는 초월적인 미의 감각적 현시로 간주되었다. 중세 미학자와
수사학자들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수적 조화에 근거한 ‘비례의 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유기체의 미학’을 유지하고 계승한다. “통일성, 수, 일
치, 비례, 질서 등”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을 설명했던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와 미의 조건을 “완벽성 혹은 완전성,” “비례 혹은 조화,” “선명
함 혹은 명료성” 등에서 찾았던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외에도9),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된 “변종 이론”들을 전개시켰다.10)
근대 고전주의는 데카르트가 정초한 근대 개인주의의 기반 위에서 태어나
기는 했지만, 그들이 독립시킨 개인의 주관성은 이성이라는 객관적 존재 안에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자연 안에 깃들어 있는 이성을 발견하
는 것이 예술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며 질서와
조화를 지닌 합리적인 것이며, 예술작품도 이를 쫓아 간결하고 명석해야 하며
9) 먼로 C. 비어즐리, 앞의 책, 100~103면, 112면.
10) 움베르토 에코, 중세의 미와 예술, 손효주 옮김, 2000, 63~90면, 147~1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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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작품에 나타나 있는 조화롭고 엄격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질서하거나 다양하거나 서로 대립하는 부분들이 이성적 진리라는
하나의 목적과 통일성에 복속되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목적론적 사고
로,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객관주의적 예술론은
그의 예술에 대한 공격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후 모든 서양 문학 이론의
원점이자, 탈구조주의의 등장 이전까지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면서도 일관되
게 준수되는 규범이 되었다. 아마 플라톤 이후의 서양 미학이 조금씩 강조점
을 이동시키거나 불충분한 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이면서도
계속 플라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3. 저자의 육화로서의 작품 : 통일성과 유기성의 미학
객관주의적 예술 이해에 대한 단절은 칸트의 미학과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왔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감성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미적 체험의 자율성
을 인정함으로써 예술작품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를 인간의 주관성
쪽으로 돌리게 했다. 예술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감상자의 주관에 특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칸트의
미학은 예술작품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칸트의 미학
은 주관적 예술 이해가 개별성과 특수성의 한계에 갇히게 된다는 문제를
각 개인의 주관성이 이미 내재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관적 보편
성’의 관점으로 해결했다.11) 여기서 자극을 받은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의
의미란 이제 더 이상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규범적
모방 따위를 통해서는 다다를 수 없는 것이며, 예술가의 내면과 주관성의
세계를 통해서만 형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예술
11) 이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옮김, 박영사, 1994, 67~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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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시인의 자유로운 감정의 분출과 분방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이렇게
탄생한 작품은 이성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오직
예술의 심미성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특수한 진리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낭만
주의자들이 새롭게 인식한 ‘시적 진리’는 예술작품의 의미에 대한 논의를
이성적 진리의 영역에서 구출해내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기체’의 미학 역시 약간 다른 방향으로 진전시
켰다. 이 진전은 바로 언제나 예술가가 창작의 원리로 체득해야 할 대상이자
그 결과물인 작품이 따르고 모방해야 할 실재였던 “자연” 개념의 변화에서
왔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고전주의자들이 생각하듯 규칙의 존중과
선행작품의 모방에 의해 형상화될 수 있는 조화롭고 균형잡힌 대상도 아니고,
계몽기의 과학자들이 취급하듯 부분들로 분해되고 분석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이들에게 자연은 영원한 실재이자 유기체적 통일성을 이룬 ‘전체’이
기는 하지만, 생성과 변화의 속성을 지닌 여러 부분들의 독자성과 다양성이
없다면 결코 존립할 수 없는 전체이다. 자연의 이러한 속성은 인간, 더 나아가
인간 정신의 산물인 문학작품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발리스(Novalis)는
이러한 생각을 “여러 종류, 형태, 색깔의 동식물, 형상물로 가득 찬 생기 있는
자연의 풍요로움처럼 문학의 세계는 측정하기 어렵고 풍부한 세계이다”라는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12) 여기서 고전적인 통일의 이념이었던 “다양성 속의
통일”은 코울리지(Coleridge)의 표현처럼 “통일 속의 다양성”13)으로, 다시
말해 통일성보다는 그 안에 함축된 부분들의 독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는 곧 “한 작품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면, 통일성은
전체에도 있지만 부분에도 꼭 같이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14)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적합한 모델은 생물학적 유기체밖에 없
12) 최문규, 「자연철학에 기초한 독일 낭만주의의 자연관 및 문학관」, 독문학과 현대성,
범우사, 1996, 193면.
13) 이상섭, 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연세대 출판부, 1975, 192면.
14) 이상섭, 영미비평사 2, 민음사, 1996, 115면.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17
다. 사람과 동물, 나무와 꽃 등은 하나의 전체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면서도
각각의 부분들이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형상과 기능을 가지고 있
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코울리지가 “기계적 형식”과 대
비하여 문학작품의 유기적 형식을 설명하는 구절, 즉 “유기적 형식은 내재
적이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스스로를 전개시키면서 형성하며 그 자기 전개
의 최종 상태는 그것의 외부적 형식의 완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라는 설명
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상을 문학작품에 완벽하게 적용하고 있다.15) 문학
작품의 유기체적 성격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여러 낭만주의자들에게 공통
되는 것으로,16) 이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의 물신화와 과학기술로 인한 소
외로부터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는 생각과도 상통한다. 전체로서의 자연이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이성이 아닌, 오직 상상력과 영감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내면적 능력은 오직 시인의 정신과 그것의 실현인
문학작품에서만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라고 하는 근대적 용어는 이러한 배경 아래서 탄생한다. 원래 고대
부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언어적 구성물과 그 영역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시(poem, poetry)’라는 낱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 용어는 그리스인들이
인간이 만들어낸(poiein) 것을 자연과 대비시켜 가리킬 때 사용하던 단어인
poiesis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비해 ‘작품’이란 용어는 르네상스 시기였던
14-15세기 무렵 여러 표기법의 형태로 등장했으며, 완전히 문학과 그 외 순
수예술의 결과물을 총칭할 수 있는 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8-19세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원래 ‘한 개인의 노동 혹은 일’을 뜻하는 단어인 work가
이러한 의미를 동시적으로 지니게 된 것은, 이 단어가 저자(author) 혹은 예
15) 이상섭, 영미비평사 2, 민음사, 1996, 119면.
16) 존슨(Ben Johnson), 영(Edward Young), 쉴러(J. F. C. Schiller), 슐레겔(Friedrich
Schlegel), 노발리스(Friedrich von Hardenberg Novalis) 등이 문학작품을 생물학적 유기
체에 비유하여 언급한 구절들에 대해서는, 이상섭, 앞의 책, 1975, 190~192면과 이상섭,
앞의 책, 1996, 119~133면 및 최문규, 앞의 책, 178~179면 등 참조.
218 인문학연구 제51집
술가(artist)의 관점에서” 예술적 생산물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작품(work)’은 예술가의 정신적 ‘노동(work)’의 산물로써, 예술적 결과물이
전적으로 예술가에게 귀속된다는 함의를 강조한다. ‘작품’이라는 용어와 그
함의 자체가 ‘저자’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구성물, 즉 개인의 개성과 창조성의
발견 위에서 탄생한 역사적 담론의 하나인 것이다. ‘작품’은 또한 이러한 용
어가 정착되던 당시 예술작품에 대한 암묵적인 관념, 즉 예술작품은 반드시
다양성을 통일성 있게 포괄하는 유기적 조화를 가지고 있다는 함의를 내포
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예술적 생산물을 ‘텍스트’가 아닌 ‘작품’이라고 부르
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의 소우주처럼 유기적이고 완전한 세계이며 일관성
있고 통일성 있게 해석될 수 있다는 비평적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이
는 ‘작품’이라는 용어가 사실 상 고대 이래의 예술론을 총화시킨 개념의 근대
적 표현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 개념이 가장 도식화된 것은 바로 역사전
기적 비평이다. 문학작품의 의미는 저자의 의식과 그것을 형성한 환경에서
나온다고 보고 저자의 전기적 생애와 환경을 연구하고 저자의 대담과 일기
를 참고하는 연구 방법론이 생겨난 것이다. 작품 외의 세목들은 작품의 의
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결국 그 의미는 저자가 속한 유파와 시대의
연구로까지 확장된다. 이때의 ‘저자’란 낭만주의에 의해 신성화된 예술가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개성을 지니게 된 구체적
개인을 가리키는데, 이 관념은 생뜨-뵈브(Sainte-Beuve)와 이폴리뜨 뗀느
(Hyppolyte A. Taine)에 의해 역사주의적 비평이 발생하던 19세기 중반 이
후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는 역사, 문학, 비평 등이 점차 장르적 혼
재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시기로, 역사학과 문학은 각각의 분과 학문으로
정립되는 한편 문학작품이 유행이나 개인적 감상과 상관없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체계적 이론이 시도되고 저널리즘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비평의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17) 역사전기적 비평은 비평의 독립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19
과 학문적 제도화를 등에 업고 이후 대학 제도 내에 가장 견고하게 자리잡
은 문학연구방법론이 되었으며, 이는 텍스트 이론이 강단 비평을 가장 격렬
하게 비난하면서 출발했다는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평의 역사적 출
발점이기도 했던 역사주의적 비평은 무엇보다도 문학작품이 과학적 이론
과 체계에 의해 전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당시의 학문적 목표를 지향
하는 비평이고, 텍스트 이론은 1960년대 신비평과 구비평에 대한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의 과학화를 주장하는 역사전기적 비평과 구조주의를 모
두 비판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20세기 전반기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영미의 신비평가들은 문학작품
의 의미를 작품 내부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당시 강단과 비평계를
휩쓸던 역사주의적 방법론이나 맑스주의 비평과 확실하게 구별된다. 특히
영미 신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언어가 외적 실재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생각을 ‘바꿔쓰기의 이단(heresy of paraphrase)’이라고 여겼고, 이미 텍스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작품의 의미를 시인(저자)의 의도에서 찾으면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이고 독자들의 정서적 반응에서 찾으면 ‘감정의 오
류(affective fallacy)’가 된다고 생각했다.18) 신비평가들에게 의미는 이미 텍
스트의 언어와 구조 속에 내재해 있기에 텍스트 바깥의 다른 사실이나 효과,
관념 등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작품은 모든 의미를 이미
내재한 채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해석자의 의미 발굴과 해독을 기다리고
있으며, 따라서 비평가와 독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에 대한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 뿐이다. 이러한 발상은 분명 20세기 중반 이후
발흥할 언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구조주의가
17) 제라르 델포, 안느 로슈, 비평의 역사와 역사적 비평, 심민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3, 59~82면.
18) C. Brooks, 잘 빚어진 항아리: 시의 구조에 관한 분석, 이경수 옮김, 문예출판사, 1997,
255~280면.; W. K. Wimsatt and M. C. Beardsley, The verbal icon : studies in the
meaning of poetry, University of Kentucky Press, 1954, pp.3~18, pp.21~23.
220 인문학연구 제51집
극대화시킬 문학의 ‘텍스트성’을 예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비평가들
은 작품 외적 사항들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언어와 실재의 직접적
대응 관계를 부인했을 뿐, 작품의 언어가 모호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참된
실재에 대한 통찰과 인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들이 외부와의
관련성과 소통로를 완전히 차단시켜 문학작품을 객관적 사물과 같은 존재로
간주할 때, 작품은 작품 외적 세계와 완전히 관련을 끊기보다는 그 세계와
등가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적 유기체가 된다. 이 완전한 소우주를 생산해내는
시인이야말로 신적 창조주인 ‘저자’의 정점이 된다. 이들이 행한 문학작품의
물신화는 자본주의적 소외로부터 벗어날 시적 진리의 신성한 요새를 문학작
품에 구축하려고 했던 낭만주의자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예술작품이라는 존재가 갖춰야 할 조화와 통일성의 덕목
도 의심하지 않았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의 존재론보다 시적 언어
의 특성과 기법 및 그것의 일탈이 주는 효과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지만, 작
품의 통일성과 조화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채 리듬, 소리 등의 운율적 요
소와 의미 사이의 상호통일성이나 긴밀한 연관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영미
신비평가들은 작품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된 전체라는 생각을 마치
단단한 사물처럼 안과 밖이 모두 닫혀 있어서 그 어떤 외부적 요인도 영향
을 미칠 수 없는 고립된 실체로 비유하는 데까지 밀고 나간다.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시적 언어의 기능을 역사적이고 통시적인 맥락과 언어학
적 체계에 개방시켜 놓은 것과는 또 다른 면모다. 신비평가들에게 작품이란
여러 구성요소들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유기체적 완결성을 띤
전체의 문맥(context) 속에 용해되어 통일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자기목적
적(autotelic) 실체이다. 아이러니(irony), 모호성(혹은 다의성; ambiguity),
역설(paradox), 긴장(tension) 등의 다양한 개념들이 신비평가들의 작품론
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서로 부조화스럽거나 상반되거나
대립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화해 혹은 결합시킬 수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21
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문학비평이 문학
작품을 ‘유기적’일 만큼 긴밀하게 연결되고 통일된 하나의 전체로 간주해왔
다. 이 장에서 생략된 수많은 다른 이론들도 예외는 아니다. 삶의 의미내재성
이 박탈당하고 더 이상 조화로운 총체성이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작
품이 오히려 ‘만들어진 총체성(totality)’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루카치
와 여러 맑스주의 이론가들을 떠올려 보라. 해석의 다양성과 복수성을 인정하
는 수용미학에서도 의미는 독자에 의해 일관되고 체계적인 것으로 파악되어
야 하며 그러한 수용의 구조는 이미 작품 내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탈구조주의가 ‘작품’을 부정하고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텍스트’를 제시한다고
할 때, 부정되는 실체 중 하나는 바로 이 조화와 통일성, 전체성의 개념이다.
이 조화의 개념들에 논자나 사조나 이론마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차이가 있다
는 점만큼이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화와
통일성에 대한 지향이 언제나 끈질기게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는 서양 형이상학을 관통한 로고스중심주의의 당연
한 귀결이다. “미학 전통, 나아가서 전통적 예술에 따르면 예술 작품의 총체
성은 의미 연관으로 규정된다. 전체와 부분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예술
작품은 유의미한 것으로 각인되며, 그럼으로써 의미의 총괄 개념은 형이상
학적 내포와 일치하게 된다. … 이 의미 연관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부르는
바의 그 ‘예술 작품의 정신’으로서 예술 작품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아도르
노의 말은, 예술작품의 존재양식과 의미에 대한 논의에 형이상학적 진리를
향한 열망이 깔려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19) 아도르노(T. Adorno) 등은
조화로운 유기체로서의 작품이 더 이상 현대의 파편화되고 소외된 상태에
대한 도피처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파열과 분열 그 자체를 형상화
19) T. Adorno, Aesthetic Theory, trans. by R. Hullot-Kentor, Univ. of Minnesota Press,
1997, 152면.
222 인문학연구 제51집
하거나 부정성을 직시하는 예술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미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이 탈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전면화
되는 순간 그들의 예술작품론조차 로고스중심주의의 소산으로 판명되게
된다. 데리다는 이 형이상학적 전제를 해체하기 위해서 먼저 조화롭고 질서
있는 ‘책’의 관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글쓰기의 정신을 옹호하는 텍스트 이
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를 추동한 문제의식은 데리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역사적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던 서양의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4. 의미의 위기에서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텍스트 개념으로
탈현대의 사상과 텍스트 이론의 발생은 ‘의미의 위기’가 일어났다는 역사
적인 위기의식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여기서 끝자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위기의식이 20세기 중반 이후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낭만
주의 이후 과거와 현재를 동일한 감각 안에서 파악하고 미래를 안정적으로
전망할 수 있게 해주던 세계관이 사라지고 과거와 현재는 서로 다른 시간
대에 속한다는 단절의 역사의식이 비로소 생겨났으며, 보편적 진리의 준거
점이었던 신적 영원성의 자리에는 개별화된 주관성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의 삶과 의식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던 의미의 진원지가 흔들리고 그
곳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의식은 낭만주의자들과 헤겔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단과 처방을 받았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이 위기를
“삶의 의미내재성이 사라진 시대”라고 역사철학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
러나 이들은 의미의 위기를 지각하게 하는 계기를 인식했을지언정, 의미 자
체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의미
의 생산과 작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준거점들이 장소를 바꾸었을지언정 남
아 있었기 때문이다.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23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20세기 초반 두 번의 세계 전쟁과 참혹한 홀로코스
트의 경험 때문에 더욱 더 철저하게 되었다. 이 점이 먼저 가시화된 것은
이론가들의 머리가 아니라, 바로 예술작품의 영역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집
단 창작과 탈개성화, 무의식에 의존한 자동기술, 창조주로서의 저자의 위치
를 부정하는 뒤샹의 <샘>과 레디메이드 예술, 우연성과 육체적 직접성을
강조하는 미술, 예술과 제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 했던 아방가르드 예
술 등이 그것이다. 이 위기의 가장 위대한 진단자는 바로 니체였다. 역사의
과잉을 비판하고 역사주의의 공과를 진단한 니체의 사상은 탈현대 사조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니체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진리의 모습, 그 준거점으로
의 주체가 완전히 허구이며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었다. 니체는 ‘모든 것은 해석의 해석’이라고 말함으로써 진리의 허구성과
실재의 가상성을 이야기했으며,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
았다. 서양 문명의 귀결과 그것을 뒷받침한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 전면화되었을 때 해결장소로 등장한 것은 바로 예술과 미학의 영역
이다. 이에 “작품이라는 전통적 개념과 대면하여 과거의 범주를 이동, 전복
시켜 얻은 새로운 대상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으며, 바로 이 대상이 텍스트이
다.”20) 그러나 텍스트가 이렇게 예술의 영역에서 작품을 대신할 대상만으로
간주된 것은 아니며, 세계 전체가 텍스트라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특히 ‘의미’의 문제에 대한 탐구는 소쉬르적 언어학을 통해서 재성찰되었
다. 20세기 언어학에 의해 생산된 텍스트의 ‘의미’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진리 개념에 가깝다. 구조주의적으로 설명해보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되
어 있고, 이 기의는 지시대상이 아니라 ‘개념’이다. 언제나 진리를 지시하고
재현하는 전달자로 간주되었던 언어의 배후에 개념이 있다고 할 때, 하나의
기표에 기의로 상응하는 그 개념들은 최종적으로 귀결되는 보편적 기의, 초
월적 기의를 상정하게 된다. 개념의 세계란 바로 보편적 진리의 세계이기도
20) 롤랑 바르트, 「작품에서 텍스트로」, 38면.
224 인문학연구 제51집
했다. 그런데 이 보편적 기의의 세계가 부정될 때, 미메시스 개념과 재현이
라고 하는 전통적 글쓰기의 방법을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재현해야 할 객
관적 실재가 부정되고 진리와 의미를 담지해야 할 실재가 갑자기 해석에
불과한 것, 기표의 연쇄작용에 따른 유희로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재현의 대상이 되는 실재가 사라졌기 때문에 문학적 글쓰기
의 모방과 재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 글쓰기의 대상의 자리만 갑자
기 텅 빈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는 주체와 재현되는 객체, 재현의
매개인 언어와 재현되는 대상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재현의 매개인 언어는 기의를 재현하는 기표가 아니라 지시체를
갖지 않는 기표가 되고, 이 기표는 다른 기표들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기표
의 연쇄작용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즉 내면/외면, 본질/현상, 기의/기표 등
의 이분법적 관계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이 관계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재현의 개념도 부정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표의 자율적
인 유희와 연쇄에 따라 흘러가는 텍스트 개념이 등장했다. 아무런 기의와
지시대상, 실체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오히려 그러한 의미를 흩트려 놓는
글쓰기를 가리키는 텍스트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서양 현대 문명이 스스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텍스트라는 오래된 개념을 선택한 역사적 맥락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문학 비평과 철학을 통해서 텍스트 개념의 범주와 내포가 새롭게
정립되기 전에, 이미 이 용어는 문학 이론에서 사용되고 있었다.21) 프랑스의
21) 20세기 중반 이후 인문학의 중심에 등장한 ‘텍스트(Text)’라는 용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단어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text는 ‘짜다, 엮다, 결합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texere에서 파생된 라틴어 text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1세기 경 로마 제정 초기의 유명
한 수사학자였던 퀸틸리아누스(Favius Quintilianus)는 웅변술에 대한 저서 Institutio
Oratoria에서 언어의 배열과 구성을 직물의 조직이나 짜임새에 비유함으로써, text라는
용어를 문학과 관련된 영역에 처음으로 등장시켰다. 로망스어에서 텍스트Text는 문학
작품에서 서로 다른 부분이나 요소들의 결합을 의미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언어적 구성
체가 직물처럼 문자와 단어를 엮고 짜거나 여러 부분들을 결합하여 조직화한 결과물이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25
랑송(Gustave Lanson), 이탈리아의 드 상티스(Francesco De Sanctis), 독일
의 게르비누스(Georg Gottfried Gervinus), 셰러(Wilhelm Scherer) 등 19세기
에 역사-실증주의의 흐름을 주도했던 문학사가들은, 각각 오늘날 ‘원전비평
(Textual Criticism)’과 ‘원전문헌학(Textphilologie)’이라 불리는 학문적 작
업을 수행하면서 ‘텍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이 사용한 ‘텍스트’라는
용어의 의미는 귀스타브 랑송의 경우를 살펴보면 단적으로 나타난다. 랑송은
쌩뜨 뵈브(Sainte-Beuve)와 이폴리뜨 뗀느(Hyppolyte A. Taine)가 주도했던
19세기 역사주의 비평을 완성시키면서 원전비평의 방법론을 확립한 장본인
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법론은 작품의 언어, 작가의 전기, 작품의 성공과
영향 등에 대한 역사학적 탐구 방법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먼저 서지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텍스트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초고나 스케치같은 첫 구상
에서부터 초판이 나올 때까지 텍스트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초판에서 마지
막 판본까지 텍스트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등을 검토하여 원전Text을 확정하
는 작업을 요구한다.22) 이렇게 실증적 작업으로 확정될 수 있는 문학 연구대
상이 바로 ‘텍스트’이며, 당시 이 용어의 함의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개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질 과정을 거치려면 그
이후로도 반세기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원전비평이 텍스트 용어의 역사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는 반면, 1910년대에
발아하여 30년대에 너무 일찍 스러져간 러시아 형식주의(Russian Formalism)
나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성행했던 영국과 미국의 신비평(New Criticism)
은 텍스트를 부각시킨 최초의 20세기 문학 이론들로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텍스트라는 용어의 역사에서만 보면 이러한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
다. 이 두 운동은 모두 텍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오늘날 ‘작품’
라는 이 단어의 의미는 현대어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Micheal Kelly(ed), Encyclopedia of Aesthetics, Vol. 4,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8, 371면 참조.
22) 제라르 델포․안느 로슈, 앞의 책, 182~184면.
226 인문학연구 제51집
대신 사용되는 텍스트의 개념을 확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흐름
모두 주로 시 장르에 주력했기 때문에 텍스트라는 용어 대신 ‘시(poetry)’나
‘작품’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고수하거나 혹은 ‘문학(literature)’이라는 포괄적
인 용어를 사용했다. 다만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문학의 언어와 기법에 대한
관심을 선도하고 신비평가들이 텍스트 그 자체의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
를 주창하면서, 문학 외적인 사실에 주력하거나 작품의 의미를 작가에게서
찾던 비평의 관심을 작품 그 자체로 돌리게 하는 데 성공했던 것뿐이다.
실제로 텍스트를 자신들의 이론적 인식을 핵심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용어로 사용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및
독일의 수용미학과 해석학이었다. 문학 텍스트를 언어학적 구조의 산출물
로 보았던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언어적 조직물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
는 용어인 텍스트를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 구조주의의 비판
자로 등장했던 탈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라는 구조주의 용어에 내포되어
있던 여러 의미를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그들은 문학이 작
가의 창조적 글쓰기의 산물로서 일관되고 조화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환상
을 배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품’이나 ‘책’과 구분되는 ‘텍스트’ 개념을
창안해냈다. 이들의 텍스트 개념은 문학 작품의 존재론적 위상과 글쓰기의
인식론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드러내고 펼칠 수 있는 특수한 방법
론의 장이 된다. 이 개념의 탄생은 문학작품을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지
닌 조화로운 저자의 창조물로 보던 기존의 발상을 거부하려는 인식의 소산
으로, 텍스트가 문학용어로써 새로운 입지점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이 텍스트라는 용어를 선호했던 것은 이 단어에 숨어 있던 문학적
글쓰기의 다른 의미를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라틴어 texere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생산적 의미를 추가로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이
동사가 ‘낳다, 생산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tikto에서 유래했기 때문
이다. 이 그리스어는 그 유사어였던 techne와 결합하면서 의미가 확장되었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27
으며,23) 텍스트의 어원인 texere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쳤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어 Techne는 오늘날 보통 예술Art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비
범하고 특별한 능력을 요하는 일을 수행하는 기술(skill) 혹은 기예(craft)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 기술은 어떤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포
함하는 것으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낚시술을 예로 들어 기술 일반을
‘획득적인’ 기술과 ‘생산적인’ 기술 즉 창조적인 기술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
가 협의의 의미에서 실용적인 기술이라면, 후자인 생산적 기술은 ‘그림, 직
조, 자수, 건축, 가구제작’ 등을 포함하여,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기술을 의미한다.24) 즉 Techne란 일종의 ‘상상적’ 능력을
포함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 상상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을 내포하는 의미가
라틴어 texere와 그 파생어 textus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중세의 예술
이론이 그리스의 예술techne 이론처럼 “기술과 기능직으로 여기는 것에도
적용되는 넓은 개념”이자 “사물을 제작하는 규칙에 대한 지식”이었고, 또
언제나 “우선적으로 장인(craftsman)의 이론”이었기 때문이다.25)
탈구조주의 이론에서도 텍스트 개념의 범주는 언제나 이 두 가지 근원적
의미를 토대로 하여 규정되거나 확장되었다. 텍스트는 언어적 조직이라는
함축성 때문에 주로 문자나 활자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대상이나 물질적 실재
를 배타적으로 가리키는 경향이 있지만, 동시에 원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재를 함축하기도 한다. 전자가
문서, 책, 문학작품 등의 물질적 실체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러한 물질적
대상으로 고정시킬 수 있게끔 하는 비물질적인 실재를 의미한다. 전자는 물질
적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바꿔 쓸 수 없는 고정적 대상이지만, 후자는 얼마
든지 전사(transcript)해서 바꿔 쓸 수 있는, 반복적이고 유동적이지만 동시에
23) D. C. Greetham, Theories of the Text,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9,
p.26.
24) 먼로 C. 비어즐리, 앞의 책, 25면.
25) 움베르토 에코, 앞의 책, 179~182면.
228 인문학연구 제51집
생산적인 능력을 갖춘 실재이다. 원래 텍스트 개념에는 이 두 의미가 서로
분리할 수 없게끔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의미가 강조된 나머지
텍스트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언어로 되어 있거나 글로 씌어진 물질적
대상만을 배타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종종 취급되었으며, 심지어 발화된
말도 텍스트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경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은 텍스트의 개념에서 바로 후자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 것이다.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는,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현
상 텍스트(phenotexte) / 생성 텍스트(genotexte)’의 구분을 이어받아, ‘작품
과 텍스트’의 구별을 새롭게 행한다. 그는 텍스트와 작품을 물질적으로 분
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부정하면서 작품은 고전적인 것이
고 텍스트는 전위적인 것이라는 도식 또한 거부한다. 그는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텍스트가 있을 수 있으며, 오늘날의 문학적 산
물 안에서도 전혀 텍스트가 아닌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행한 ‘작품’과
‘텍스트’의 구분은, 사실 상 텍스트에 함축되어 있던 두 의미의 차이를 부각
시키는 한편 후자의 의미로 돌아간다. 바르뜨에 따르면, 작품은 도서관에서
책들의 공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실체의 단편이지만, 텍스트는 담론의 움
직임 속에서 존재하면서 언어 안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다만 증명될 수 있
는 영역에 불과하다. “작품은 서점, 서류함, 시험 일정표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도서관 안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26) 바르뜨가 텍스트론을
“거미학(hypologie)”27)이라 표현한 것은 텍스트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나
타낼 수 있는 비유로서,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끊임없는 짜임에 의해 텍스
트가 만들어지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할 수 있는 신조어이다. 20세기 후반
에 일어난 텍스트 범주의 무한한 팽창은 사실 상 텍스트 개념에 잠재해 있
26) 롤랑 바르트, 「작품에서 텍스트로」, 앞의 책, 27면.
27)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111면.
텍스트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새로운 글쓰기의 도래 229
던 생산적, 비물질적 의미를 새롭게 일깨운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있던 낡은 단어에 전혀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은 이미 내재해 있던 잠재적 의미들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소생시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대 문학
비평은 유서깊은 한 낱말에 묻혀 있던 잠재적 의미들에 심폐소생술을 행한
셈인데, 이 소생술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정의한 바 있는 ‘기원으
로의 회귀’를 연상시킨다. 푸코에 따르면, 역사적 반성에 의해 이미 사라져
버렸거나 희미해진 것을 현재의 지식 형태에서 다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과학의 ‘재발견’과 달리, 인문학에서의 ‘기원으로의 회귀’는 자체적인 특수
성을 가지고 있으며 본질적이고 건설적인 망각을 통해 새로운 담론성을 ‘창
설’하는 행위를 의미한다.28) 20세기의 텍스트 개념도 기원으로 회귀하는 회
상의 사유를 그 동안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요소들을 망각하는 사유와
동시에 진행시키는 이중의 작업을 통해 새롭게 창설된 것이다.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문학 / 철학, 작품비평 / 이론 등 경계의 전면적
인 해체를 가져왔다. 철학이 철학의 바깥에서 사유할 수 있게 된 것만큼이
나, 문학은 문학 바깥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문학이 자신을 해체하는 문학의 자발적인 죽음으로 간주하
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으로 문학을 확장하는 것, 문학의 역할과 가치를 쇄
신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상기시킨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것은 문학 혹
은 문학에 대한 사유가 사회와 급진적으로 관계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해준
다. 탈구조주의와 텍스트 이론은 모든 것이 텍스트이고 모든 것이 의미가
부재하는 유희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허무주의와 지적 엘리트적 유희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산물이다. 전통을 부정하기 위하여 전통 안에서부터 해체의
28) 미셸 푸코, 「저자란 무엇인가」, 미셸 푸코의 문학 비평, 김현 편, 문학과지성사, 1989,
260~261면 참조.
230 인문학연구 제51집
계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내파시키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
그리고 전통을 부정하기 위해 전통 바깥에 존재하던 이질적인 타자를 수입
해오기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철저히 점검함으로써 은폐 혹은 배제되어 있
던 타자를 전통 안에서 발견하는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
서 탈역사적 텍스트론은 철저히 역사적 반성이며, 가장 극단화된 자기 회의
와 자기 의식의 결과물이자, 새로운 시대에 도래한 혁신적 글쓰기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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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인문학연구 제51집
Abstract
Textuality as a Historical Concept and Appearance of New Writing
Song, Eun-young*
29)
This article intends to clarify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word "text"
and how it was reused in the epistemological turn and the ontological
change of literary work. This article also tries to make it clear that the
concept of "text" is based on the reflection of Western history and culture.
To do this, the Western literary and philosophic theory from Plato to poststructuralism
is heavily scrutinized. Special attention is paid to the concept
of "work,"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concept of "truth" in Western
philosophy. Even if the textuality concept is frequently considered ahistorical,
this research seeks to prove that the concept of "text" resulted from the
radical self-reflection of history and this concept owes itself to the Western
tradition that finally led to the support to the new style of ecriture, or
writing.
Key Words : text, work, harmony, proportion, unity, organism, author, self-reflection on
history, ecriture as new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