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연구에서 묘비 묘지 등 墓道文字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지성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立碑의 사
실 자체를 문화사적 관습과 관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하에 묻는 墓誌와 壙誌는 墓
主가 다양해서 승려, 사대부, 여성, 요절한 아이의 것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지상에 세운
묘비는 대부분 승려들의 비였고, 사대부 관원의 경우는 고려 전기와 중기까지는 지상에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사대부의 神道碑와 墓表가 지상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전기부터 사대부 지식인들은 外命婦로서 국왕으로부터 직첩을 받은
집안의 여성들을 위한 墓誌墓誌銘을 주의 깊게 작성했다.
사대부 여성의 묘도문자는 처음에는 지상에 세우는 묘표나 묘갈보다는 지하에 묻는 墓
誌에 새겨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부터 여성 묘주의 비석이 땅 위에 세
워지기 시작했다. 그 비석은 주로 墓碣이나 墓表의 형태를 띠었다. 다만 이 경향은 시대적
조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立言者가 그러한 묘도문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조
선후기에 이를수록, 여성 묘주의 경우 부군의 묘에 祔葬하면서 生歿年과 葬地를 묘비의
비음에 새기는 경향이 짙어졌다. 다만 17세기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묘주의 묘도문자가 증대하고, 이에 병행하여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도 점차 더 많
이 세워지게 되었다. 곧, ‘부인은 남편을 따른다(夫人從夫)’는 관념을 벗어나, ‘그 남편의
묘에 부수하여 일컫지 않는(不稱以夫墓)’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여성의 烈節이나 女中
274 漢文學論集 제49집
君子의 덕목이 여성이라는 존재자의 독자적 가치로서 부각되고 衆人의 耳目에 傳播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을 제작하는 관습
은 아직 시대적 조류로서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家格이 뛰어난 집안의 학자-문인,
先妣 혹은 夫人에 대한 각별한 정념을 지닌 문사들이 그러한 묘표와 묘갈을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夭殤의 여성을 위한 묘표도 적은 수이지만 건립되었다.
여성 묘주를 위한 神道碑는 太宗의 명을 받아 權近이 1403년(태종 3)에 찬술한 太祖의
正妃 神懿王后 韓氏의 齊陵 神道碑銘이 가장 이른 예이다. 그 후 인조는 생부 定遠君을 낳
은 仁嬪金氏를 위해 張維와 申欽에게 명해서 두 차례에 걸쳐 神道碑銘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朴弼成에게 명하여 신도비문을 작성하게 했다. 이
세 글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대부 여성 묘주를 위한 立碑 사
실과 마찬가지로 命撰者(이 경우는 국왕)의 각별한 정념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승을 위한 묘표는 蔡濟恭이 定有大師를 위해 작성한 女大師定有浮屠碑銘이
유일하다. 이 글은 여성의 치열한 구도 행력, 여승에 대한 추억 등을 치밀하게 착종시킨
명문이다. 또 19세기 후반에는 東都名妓紅桃之墓碑처럼 敎坊 伶妓들이 ‘樂府의 師宗’을
위해 妓女墓表를 세우기도 했다.
주제어: 여성 묘비, 사대부 여성의 묘갈과 묘표, 여성 묘주의 신도비문, 女大師 묘
주 비명, 殤夭 여성 묘표, 妓女墓表
한문학 연구에서 묘비 묘지 등 墓道文字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지성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立碑의 사
실 자체를 문화사적 관습과 관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하에 묻는 墓誌와 壙誌는 墓
主가 다양해서 승려, 사대부, 여성, 요절한 아이의 것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지상에 세운
묘비는 대부분 승려들의 비였고, 사대부 관원의 경우는 고려 전기와 중기까지는 지상에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사대부의 神道碑와 墓表가 지상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전기부터 사대부 지식인들은 外命婦로서 국왕으로부터 직첩을 받은
집안의 여성들을 위한 墓誌墓誌銘을 주의 깊게 작성했다.
사대부 여성의 묘도문자는 처음에는 지상에 세우는 묘표나 묘갈보다는 지하에 묻는 墓
誌에 새겨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부터 여성 묘주의 비석이 땅 위에 세
워지기 시작했다. 그 비석은 주로 墓碣이나 墓表의 형태를 띠었다. 다만 이 경향은 시대적
조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立言者가 그러한 묘도문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조
선후기에 이를수록, 여성 묘주의 경우 부군의 묘에 祔葬하면서 生歿年과 葬地를 묘비의
비음에 새기는 경향이 짙어졌다. 다만 17세기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묘주의 묘도문자가 증대하고, 이에 병행하여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도 점차 더 많
이 세워지게 되었다. 곧, ‘부인은 남편을 따른다(夫人從夫)’는 관념을 벗어나, ‘그 남편의
묘에 부수하여 일컫지 않는(不稱以夫墓)’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여성의 烈節이나 女中
274 漢文學論集 제49집
君子의 덕목이 여성이라는 존재자의 독자적 가치로서 부각되고 衆人의 耳目에 傳播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을 제작하는 관습
은 아직 시대적 조류로서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家格이 뛰어난 집안의 학자-문인,
先妣 혹은 夫人에 대한 각별한 정념을 지닌 문사들이 그러한 묘표와 묘갈을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夭殤의 여성을 위한 묘표도 적은 수이지만 건립되었다.
여성 묘주를 위한 神道碑는 太宗의 명을 받아 權近이 1403년(태종 3)에 찬술한 太祖의
正妃 神懿王后 韓氏의 齊陵 神道碑銘이 가장 이른 예이다. 그 후 인조는 생부 定遠君을 낳
은 仁嬪金氏를 위해 張維와 申欽에게 명해서 두 차례에 걸쳐 神道碑銘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朴弼成에게 명하여 신도비문을 작성하게 했다. 이
세 글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대부 여성 묘주를 위한 立碑 사
실과 마찬가지로 命撰者(이 경우는 국왕)의 각별한 정념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승을 위한 묘표는 蔡濟恭이 定有大師를 위해 작성한 女大師定有浮屠碑銘이
유일하다. 이 글은 여성의 치열한 구도 행력, 여승에 대한 추억 등을 치밀하게 착종시킨
명문이다. 또 19세기 후반에는 東都名妓紅桃之墓碑처럼 敎坊 伶妓들이 ‘樂府의 師宗’을
위해 妓女墓表를 세우기도 했다.
주제어: 여성 묘비, 사대부 여성의 묘갈과 묘표, 여성 묘주의 신도비문, 女大師 묘
주 비명, 殤夭 여성 묘표, 妓女墓表
한문학 연구에서 묘비 묘지 등 墓道文字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지성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立碑의 사
실 자체를 문화사적 관습과 관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하에 묻는 墓誌와 壙誌는 墓
主가 다양해서 승려, 사대부, 여성, 요절한 아이의 것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지상에 세운
묘비는 대부분 승려들의 비였고, 사대부 관원의 경우는 고려 전기와 중기까지는 지상에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사대부의 神道碑와 墓表가 지상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전기부터 사대부 지식인들은 外命婦로서 국왕으로부터 직첩을 받은
집안의 여성들을 위한 墓誌墓誌銘을 주의 깊게 작성했다.
사대부 여성의 묘도문자는 처음에는 지상에 세우는 묘표나 묘갈보다는 지하에 묻는 墓
誌에 새겨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부터 여성 묘주의 비석이 땅 위에 세
워지기 시작했다. 그 비석은 주로 墓碣이나 墓表의 형태를 띠었다. 다만 이 경향은 시대적
조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立言者가 그러한 묘도문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조
선후기에 이를수록, 여성 묘주의 경우 부군의 묘에 祔葬하면서 生歿年과 葬地를 묘비의
비음에 새기는 경향이 짙어졌다. 다만 17세기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묘주의 묘도문자가 증대하고, 이에 병행하여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도 점차 더 많
이 세워지게 되었다. 곧, ‘부인은 남편을 따른다(夫人從夫)’는 관념을 벗어나, ‘그 남편의
묘에 부수하여 일컫지 않는(不稱以夫墓)’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여성의 烈節이나 女中
*274 漢文學論集 제49집
君子의 덕목이 여성이라는 존재자의 독자적 가치로서 부각되고 衆人의 耳目에 傳播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을 제작하는 관습
은 아직 시대적 조류로서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家格이 뛰어난 집안의 학자-문인,
先妣 혹은 夫人에 대한 각별한 정념을 지닌 문사들이 그러한 묘표와 묘갈을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夭殤의 여성을 위한 묘표도 적은 수이지만 건립되었다.
여성 묘주를 위한 神道碑는 太宗의 명을 받아 權近이 1403년(태종 3)에 찬술한 太祖의
正妃 神懿王后 韓氏의 齊陵 神道碑銘이 가장 이른 예이다. 그 후 인조는 생부 定遠君을 낳
은 仁嬪金氏를 위해 張維와 申欽에게 명해서 두 차례에 걸쳐 神道碑銘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朴弼成에게 명하여 신도비문을 작성하게 했다. 이
세 글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대부 여성 묘주를 위한 立碑 사
실과 마찬가지로 命撰者(이 경우는 국왕)의 각별한 정념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승을 위한 묘표는 蔡濟恭이 定有大師를 위해 작성한 女大師定有浮屠碑銘이
유일하다. 이 글은 여성의 치열한 구도 행력, 여승에 대한 추억 등을 치밀하게 착종시킨
명문이다. 또 19세기 후반에는 東都名妓紅桃之墓碑처럼 敎坊 伶妓들이 ‘樂府의 師宗’을
위해 妓女墓表를 세우기도 했다.
주제어: 여성 묘비, 사대부 여성의 묘갈과 묘표, 여성 묘주의 신도비문, 女大師 묘
주 비명, 殤夭 여성 묘표, 妓女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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