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
자신의 가정배경에 대한 원죄의식을 가지고 살았으며, 시대와 사회에 끼지 못해 고독과 고뇌를 느끼는 소외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관념론에게 지배당하던 당대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생전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후 실존주의의 시초로 재평가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삶을 가능케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우울과 절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난했던 시절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나머지 신을 저주했는데, 그후 얼마 안가 부자가 되어 그것이 신이 죄인인 자신을 벌하기 위한 것이라며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저주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일곱 자녀 중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형을 제외한 5명이 죽어버렸다.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형의 경우 아버지와 하녀의 관계에서 혼전임신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가 신을 저주했으며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음은 물론 하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평생 자기가 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후 그는 레이나 올센이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하나, 집안의 저주가 그녀를 희생시킬 것을 염려해 결국 파혼하고 만다. 이렇게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그가 절망과 우울의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고, 따라서 그의 철학은 자기고백적인 성격이 컸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쫓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골몰했다.
1. 주체성
키에르케고르는 현대가 정열이 없고 타산적인 가치만 추구하며 개인의 신념, 판단, 결단이 사라진 대중사회에 진입하여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매몰되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대중사회에서 특히 그가 주목하는 건 여론이다. 군중 속에서 개인의 생각은 하나로 통일되며 주관을 찾아 볼 수 없다.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은 다수가 지지하는 여론이 정답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요컨대 대중사회의 획일성에 길들여진 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책임을 지는 삶, 즉 자유를 망각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어떻게 하면 꼭두각시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키에르케고르 사상은 기존 철학자들의 주요 탐구대상이었던 객관적 진리를 비판하고 주체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주체성은 곧 진리) 그의 이런 주장은 당대 시대상과 대조해보면 헤겔체계에 대한 도전이었음은 이미 앞서 언급했다. 진리는 보통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타당한 참된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진리는 자기실현의 과정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개인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주체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주체성이 진리로 주목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사고하고, 감정을 가지고, 판단과 결의를 통해 행동하여 자기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실존하는 인격적이고 행동적인 주체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대한 객관적 진리라고 한들 그것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에만 집착하므로, 지적인 탐구 대상의 불과하다.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비롯한 자신의 실존에 있어서는 빛과 힘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다. 즉 키에르케고르가 찾으려고 했던 진리는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고루한 이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놓인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나에게 있어서 삶을 진정히 발전시키고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진리였다. 요컨대 자기 앞의 있는 자연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골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객관의 허구성을 깨닫고 자신의 실존에 집중하여 어떻게 살아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개인적인 사고와 행동이 근본 문제라는 것이다.
2. 불안
다만 꼭두각시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는 실존적 진리가 중요하다고 치더라도, 실존적 진리는 논리적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유'와 '감각적 경험'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실존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제3의 길이 필요한데, 이것은 '불안'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유를 따라 행동하면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는데, 이러한 불안한 감정이 새로운 선택을 갈망하는 내면의 신호인 것이다. 창세기의 아담을 예시로 드는데, 아담은 금단의 과일을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게 되며 동시에 죽는다는 금지와 경고를 신에게서 받는다. 이 금지 속에서 아담은 어쨌든 나는 신의 명을 거역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것이 ‘나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라는 불안한 가능성이다. 요컨대 선택이란 오로지 자유로운 의식에게 달려있으며, 이 사실에 관한 정서가 불안이다.
3. 절망, 실존의 세 단계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을 개인의 진전 가능성으로서 말했다면, 실존적 인간이 선택을 통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초월의 방법으로는 절망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인격체인 인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두려운 것은 의지나 행위의 주체인 스스로가 생의 지고한 목표를 잃는 것이며, 절망이란 이러한 이런 상태라 할 수 있다. 즉 절망이란 인간이 유한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절망은 실존의 세 단계와 연결되어 마찬가지로 세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절망하고 있으면서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절망'(감성적 단계),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으나 스스로 욕망하지 않는 절망’(윤리적 단계),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으며 스스로 욕망하고 있는 절망’(신앙적 단계) 이 그것이다.
첫째는 감성적 단계로, 쾌락과 부유하고 안락한 일상이 곧 인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충동적인 삶이기에 어떠한 선택도 없다. 선택 대신 감각적인 것들의 지배만 있으며, 선택이 없으므로 선택이 불러올 삶의 질적 도약 역시 없다. 따라서 더 큰 쾌락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좇지만, 결국 절망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든다.
둘째는 윤리적 단계이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이 돈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기에,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한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 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도덕 군자처럼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윤리적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므로 스스로를 욕망하지 않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마지막 셋째가 바로 신앙적 단계이다. 이들은 감성이나 보편적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가 아님을 깨닫고, 자신이 왜 절망하는 지를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며 삶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끝까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유한적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심지어 급기야는 아무 희망 없음에 좌절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곤 한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절망에서 벗어나는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앙은 인간이 유한자로서 자기자신의 힘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근본문제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철저한 절망의 자각을 매개로 하여 절망을 극복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신앙에 의거한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4. 의의
먼저 지식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인간과 삶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가? 지식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도 있고 삶이 가지는 가치에 비하면 지식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객관적인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을 학문을 우상화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것을 우리 시대의 우상숭배라고 불렀다. 그의 실존주의는 자기상실 혹은 자기소외를 초래하는 객관의 철학이 아니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실천의 철학이었다. 이어서 키에르케고르는 과연 진짜로 행복한 삶을 좇는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는 경쟁의 무거움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물음 자체를 한가하고 쓸데없는 소리로 만들어버리기에 우리 스스로가 족쇄를 걸고 삶의 무의미함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설사 무겁고도 치열한 삶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가볍고도 단순한 오락거리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나, 덧없는 일상의 쾌락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하게 채워줄 수는 없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이 마약을 계속 추구하는게 아닌 것 처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나 일상의 쾌락을 쫓는걸로는 결코 진정히 행복한 삶을 살수는 없다. 자기 처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여, 건강한 삶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에야 진정히 행복한 삶을 향할 수 있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자였기에 이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은 것이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를 읽을 때 역시 단순히 그가 말할 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면적 의미를 파악하고, 열정적으로 읽음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니체>
니체는 비단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 사상과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친 서양 철학사의 거인이자 사상 최고의 천재중 한명이며,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의 선구자이다. 그는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분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이론을 제대로 구성하지도 않았지만 윤리학과 역사 비평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니체는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전통적인 철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유려하면서도 문학적인 문장으로 방대한 논문을 저술했으며, 날카로운 명언을 창조해내기도 했던 문학적 성향이 짙은 철학자였다. 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그는 플라톤 이후 철학의 영역에서 추방된 예술을 중시하기도 했다. 또한 종래의 전통적인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주의적 가치를 '노예 도덕'이라고 부르면서 배격하였으며, 철학사가 쌓아 온 모든 결실을 무너뜨리고 플라톤 이전의 단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통적인 가치의 대부분을 부정적으로 본 니체는 인간이 세운 가치 체계가 곧 몰락하고 세계는 권력 투쟁의 전장으로 얼룩질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예언자적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1. 사상적 토대
니체가 철학사와 유럽의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유럽 문명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 시대였다. 니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 사회는 미적 가치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그 미적 가치는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혼합인데, 정형성을 띄는 조형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폴론적 가치는 이성적이며 형식적 질서속에서 정렬된데 반해, 격동적인 연극에서 찾아볼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광기 넘치며 정열적이고 무절제적이다.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결합을 통해 이룩된 그리스의 예술적 위대함은 소크라테스가 출현함과 더불어 이성적인 아폴론의 지나치게 강조됨에 따라 디오니소스가 역사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되어 퇴색하게 된다. 이에 창조적 정열의 힘은 사라지고 오로지 질서와 이성만이 세계에 군림하게 된다. 따라서 니체는 서양 철학을 전반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소크라테스-플라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독창성이 있는 진정한 철학자들이라고 평한데 반해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철학을 이성과 질서의 원리에 고착시킨 악한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이후의 철학과 유럽의 역사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정신적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소크라테스-플라톤주의의 발전역사에 불과한 야만적인 것이므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적 인간에 대한 갈망이나 이성적 세계관은 오히려 인간의 실존적 삶을 저해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후의 서양 철학과 역사에 대해서는 단적으로 질서와 이성이 고착화된 퇴폐적 철학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한다.
이러한 퇴폐적 철학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기 위해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제시한다. 계보학은 소크라테스-플라톤 이래로 "A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특정한 개념이나 사물, 현상등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며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알고자 하는 서구철학, 특히 그중에서도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철학에 대해서 "자명한 것을 왜 추구하며, 그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등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예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 전통적인 서구철학은 흔히 아름답다고 불리는 자연경관이나 예술작품 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명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적 개념이 있다고 가정한채 질문을 전개한다. 그러나 니체는 자명한 것, 확실한 것 등을 모두 어불성설이라고 보았다. 엄밀히 말해서 '자명한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데, 그 확실하지 않은 개념으로 확실한 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참되고 자명한 지식인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그에 따르면 자명한 주체,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 근거해서 니체는 계보학적 관점에서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인데,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자명한 것'을 찾아 나선다면, '자명한 것'을 통해 무엇인가 하려는 목적, 예컨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거나, 타인의 주장을 비판하려거나 등의 목적이 있다는 것인데, 이 물음에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를 욕망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의지만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걸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 라고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플라톤 이후의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근대 철학에서는 오직 진리일때만 지식이 정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식도 없다고 본것이다. 따라서 어떤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혁신적인 비판을 통해 진리에 대한 질문의도 자체를 바꾼다. 진리 자체가 오류를 깔고 있는 거짓일지도 모르는데, 진리에 대해 따지는 질문이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진리란 없고, 그것을 추구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중요하다. 즉 니체는 지식의 문제를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떤 효과를 야기하는가 라는 새로운 문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전통적인 최고 가치를 상실시켰다는 점에서, 니체는 니힐리즘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2. 사상
2.1 강자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니체는 종교, 도덕, 예술, 철학등 문명의 핵심요소들이 이성적, 규칙적 가치만을 추구하며 허무주의 내지 퇴폐주의적으로 개인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기존의 가치를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고자 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알아본 사실이다. 니체가 보기에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감정의 대상은 모두 허구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특히 그중에서도 니체는 종교, 즉 기독교를 취급함에 있어서 그것이 장기간 서구인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악의에 찬 거짓으로 향한 의지의 형태라고 비판하며, 기독교 윤리가 인간의 본성을 왜곡함으로써 인간을 약하게 만들고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추락시켰다고 말한다. 니체는 종교적 가치관을 만들어 내고 믿는 인간을 가리켜서 종교적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종교적 인간은 심리적으로 허약함을 은폐하고, 강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허구를 날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이 주장하는 도덕(구원·자비·사랑 등)은 거짓에의 의지에 물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적 윤리는 ‘주인의 도덕’을 시기하는 ‘노예의 도덕’이다. 이런 노예적인 도덕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노예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마디로 노예의 도덕이란 행동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힘이 없는 나약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더 나아가서 자기원인적인 주체적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자신과 같이 나약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보호기제가 될만한 동정, 박애, 자비와 같이 약한 자들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반동적인 덕목들을 선이라고 부른다. 반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삶의 부정이다. 이때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삶과 대립하는 삶 이상의 경건한 가치들을 따라 허무하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짐을 지고 나르기 때문에 그가 강하고 고귀하다고 말하며, 그는 더 높은 가치라는 짐을 지고 그것에 책임을 느낀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짐을 진 자는 노예일 뿐이며, 이렇게 왜곡된 가치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노예의 도덕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가치는 주인의 도덕, 즉 강자의 도덕이다. 주인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과는 달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넓은 도량과 고매한 영혼, 용기를 추구한다. 따라서 이 강자들은 행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니체가 보기에 유럽사회에서 통용되는 선과 악은 비겁한 약자와 기독교가 만들어낸 거짓된 구분에 불과하므로, 자기 운명적인 주인의 도덕은 선과 악을 초월해 있을 수 있다.
종합해보자면, 니체는 지배자, 부유한 자들은 탁월한 감정을 가지고 선을 대변하게 되었고, 피지배자, 못 가진 자들은 저속한 감정을 가지고 악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선과 악의 기원이 인간의 심층심리에 있다고 보며, 그러한 기원을 근거로 삼아 선과 악이 약자들에 의해 정치 사회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선한’과 ‘선하지 못한’의 대립은 영원불변한 선험적 대립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변조함으로 인해서 생긴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
2.2 힘에의 의지
이렇게 보듯이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특성이란 자신을 개선하고 환경을 지배하려는 의지인 것인데, 니체는 이를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질로서 자기를 실현하고 스스로 행동하여 더욱 성장하려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그러나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의지는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만약 인간이 노력했으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약자인 경우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현상에 머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이 뭉쳐서 발전한 것이 기독교인데, 즉 현세의 삶에 실패한 불쌍한 자들이 신앙을 통해 천국에서 안식을 취할 것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실존적 삶을 부정하고 내세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세계의 가치를 뒤집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약자들의 원한이 강자들의 힘에의 의지를 왜곡시켜 버리고, 그위에 비겁한 도덕을 세운다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럽의 도덕이 '힘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역사상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거짓말이며, 이로 인하여 약자들의 비겁함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유럽의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주지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성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만들었는데, 이는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지성에 의해서 인간의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아폴론적 이성으로 일방적으로 죽여버린 것이라는 것을 앞서 니체의 사상적 토대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술한 바 있다. 즉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니체는 수천년간 유럽을 지배해온 그리스도교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이성적 가치에 대해서 자명하고 선험적이며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없다며 ‘신은 죽었다’ 라며 비판한 것이다.
2.3 초인사상
계보학적 시각과 힘에의 의지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는 니체의 세계관에서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이후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라도 믿었던 모든 진리들은 결국 어떠한 의지의 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기독교적 가치는 비겁자들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전의 가치와 의미는 부정되어서 인간은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 놓이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이다. 따라서 니체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 즉 좀더 완성된 인간이 출현 하는 시대, 도덕 그 자체를 그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비겁자의 우매한 도덕에서 벗어나 '힘에의 의지'에 근거하는 도덕이 도래하는 시대이다. 니체는 이를 '초인'의 시대라고 불렀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미래의 진화된 인류, 혹은 과학적인 힘으로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초인이란 나약한 도덕적 윤리나 신앙으로 도피하거나 물질적 안일함만 탐하는 이제까지의 나약한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초인은 자기운명의 진정한 주인으로, 힘에의 의지를 그대로 행하는 강인한 인간이며, 스스로 모든 가치를 계보학적으로 재평가하여 어떠한 내적인 장애를 가지지 않고 정신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따라서 삶을 긍정하는 초인은 스스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최고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초인으로 발전하는데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 이미 이글에서 우리는 이 단계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지만 형식은 아직 알아보지 않았다. 최초의 단계는 '낙타의 단계'이다. 여기서 약자인 인간은 원한을 가지고 강자들을 시기하며 실존적 삶을 부정하고 반동적이게도 삶 이상의 도덕적 가치를 추구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갖은 권위와 의무로부터 속박당하는 고통을 겪으며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사막과 같은 고통으로 밀어넣는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사막에서 사는 인내심이 많은 동물인 '낙타'에 비유한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사자의 단계'이다. 여기서 인간은 기존의 모든 기준,도덕에 반기를 들고 극복을 시도한다. 그게 비록 정당하고 선하다 여겨진다 하더라도. 의무, 규범, 선악구도는 부정의 대상이 된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 쟁취는 곧 자유의 쟁취이며, 인간은 사자와 같은 힘으로 더없이 대단한 소득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사자의 단계'에 머물러선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할 수 없으며, 여전히 허무주의적이다. 타율적인 낙타의 정신이 반항적인 사자의 정신으로 바뀌고, 반항과 분노의 정신은 다시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아이의 정신으로 바뀐다. 니체는 인생을 놀이로 즐기며 죄책감과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인 어린 아이에게서 자기 긍정적이며 기발한 창조가 가능한 초인의 전형을 보았던 것이다. 즉 니체의 초인이론의 가치는, 이것이 철저한 개인의 완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4 영원회귀
니체는 우리의 삶의 실상을 영원회귀의 상태로 보았다. 인간의 삶과 역사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없고, 종교적인 내세관도 없으며, 인간의 삶에는 어떠한 목적과 의미도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사상은 연약한 인간들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운 사상이다. 인간들은 이런 영원회귀의 상황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들의 삶에 의미와 목표를 부여해주는 신이나 역사적 사명등을 가공해 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러한 것들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며, 자기기만을 통하여 삶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전형적인 약자적 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영원회귀의 상태는 니체에게 있어서 부정적인것만은 아니다. 물론 이 상태가 인간이 감당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인간이 이것에 견디고 맞서 싸운다면 인간은 지상의 삶의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 최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계단을 올라가는데는 힘이 들지만 그것을 올라가야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듯이,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이 닥쳤을 때,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극복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내면을 강화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목적인 것이다.
<칼 야스퍼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실존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첫 인물로서, 하이데거와 함께 실존철학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야스퍼스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적 신앙등의 맹목적인 것을 배격하는 개방적인 태도로 살았으며,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실존과 신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노력한 사상가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기술의 세계 속에서 단순한 사회구성원으로 안주한 채 획일화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덧없이 살아가는 속세인들의 비본래적인 생활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실증주의적인 과학에 대한 과신을 경고하고 이러한 생활을 돌파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본래적으로 선택하며 결정해 나감으로써 전개하는 '실존철학'을 시대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즉 야스퍼스에 따른다면 이론적이며 객관적 가치만 추구하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전문가들의 전유물인 추상적 사유로서의 철학 혹은 과학적 사고, 예컨대 인간에 대한 객관적 분석 따위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진정한 철학이란 현실의 개별적인 삶 가운데 자기 자신의 현존을 의식하고 인간존재의 근원에 파고드는 '철학함'인 것이다.
허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즉 참다운 자기 존재에 이르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죄어오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자로서의 한계에 대한 의식적인 경험은 인간을 절망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만약 인간이 한계의 절망적 상황으로부터 자기 존재를 비약하고자 스스로 결단한다면, 역설적으로 인간의 참다운 본질을 각성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야스퍼스의 인간관은 유한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단을 내린다고 한들 인간의 일방적인 노력만 가지고는 결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비약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도약하도록 인도해주는 초월자와 철학적 신앙을 요청한다. 그의 철학적 사유는 이렇듯 철학적 신앙으로 귀결하는 것이다.
그가 철학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강조한 인간의 실존은 현실적 삶에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고정된 실체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이나 과학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오로지 구체적인 현실의 상황 속에서 타인과 부단히 교류하는 가운데에서만 진정한 자기 존재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실천적인 상호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철학함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의 존재에 이르는 길은 이웃과 상호교류하는 가운데 더불어 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초월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 과학주의 비판
야스퍼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과학의 합리적 세계관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간 자신에 대한 ‘내적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주목한 실존적 문제들은 과학으로는 다룰 수 없는 문제에 속한다. 그리하여 그는 실존의 문제를 논하기 먼저 합리주의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는 비합리적·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논리적·인과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로서 모든 존재를 의식 외부에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 즉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탐구방법 또한 객관적으로 탐색하는 자세를 갖는다. 하지만 그는 합리적 세계관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보편타당함·질서정연함이라는 가치하에 체계화하여 고정시킨 일종의 독단론이라고 지적하며, 세계를 경직시킴으로서 본래의 역동적인 모습을 상실하게 만들어 인간의 창조성에 제약을 걸었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야스퍼스의 시각에 따른다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포착하려고 하는 합리주의의 과학적 사고는 일종의 오만이자 독단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으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해결책을 내놓기는 커녕 인간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억제하는 것이다. 다만 야스퍼스가 반과학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인 인간 내적인 면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각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2. 가능적 실존
'실존'의 사전적 정의는 "구체적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지만, 야스퍼스는 '현존재'와 '실존'의 개념을 구분해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존재는 개인의 진실한 자신, 즉 실존이 아니라고 말했다. 현존재란 일상에 매몰되어 자기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의식 없이 무반성적으로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의타적이고 비자주적 존재이다. 반면 실존은 사실로서 존재하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음에도 외부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의 독자적 결단에 의하여 결정하고 행동하는 독립된 자주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실존이 자주적 주체라면, 인과관계에 기반하는 현실과 철저히 구분된다. 따라서 불가지성과 인식론적 초월성을 띄게되므로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 가능성에만 머물게 되는 것이다.
3. 한계상황과 실존조명
야스퍼스가 인식론적 초월성을 근거로 현실과 실존을 구분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만약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별다른 고찰없이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성질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 자신의 실존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본래적인 실존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자극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심리적 자극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한계상황'을 말하며, 이를 계기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혀감으로써 참된 자기 존재를 알아가는 것을 '실존조명'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한계상황이란 인간이 삶을 살면서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자신의 실존에 대해 더욱 절실하게 되는 상황을 가르킨다. 이 한계상황에는 투쟁과 고통과 죄책과 죽음이 있다. 한계상황은 마치 벽과 같은데, 현존재적인 인간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실존적 인간은 한계상황을 받아들이고 맞부딪혀 난파해버린다. 예컨대 현존재 차원의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실존적 인간은 죽음을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또한 현존재 차원의 인간은 자신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억울함에 빠져 있어 자신과 같은 고통 속에 있는 타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존적 인간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러한 상황이 나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이해한다.
또한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투쟁해 왔다는 뜻인데, 현존재 차원의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착취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착취하겠다"는 이기적인 투쟁의지를 가지며 자신이 이룩한 모든 성과가 다른 사람의 희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투쟁을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인간은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한다. 즉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실존적 인간은 서로가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희생을 기반으로 해서 나의 생존이 가능했다'라는 것을 이해하므로 상대방을 나의 생존을 방해하는 악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온정적인 감정과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존재적 인간들은 죄책감이란걸 인정하지 않고 투쟁의 결과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계상황을 받아들인 실존적 인간들은, 단순히 한쪽이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이기적인 한계상황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상생하는 한계상황이 되도록 노력하게 된다. 즉 한계상황은 어떤 정당한 질서에서도 사라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한계상황을 수용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다가가는 더 나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관계를 야스퍼스는 ‘사회적 실존’이라고 표현한다. 즉 '너 없이 내가 나 일수 없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실존적 인간들이 서로 교제하는 사회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하고 실의에 빠질 수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반성하는 계기 또한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실존에 다가가는 것이다. 실존을 가능케 해주는 한계상황이 자신과 타인간의 공통된 근원에서 발흥하고 이것을 깨달아야만 극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존은 현실에서 타인과의 교제와 경험을 통해서 발현되가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을 재확인하는 실존적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자기원인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만큼 타인또한 배려하게 된다. 즉 인간 내적인 독단과 부조리는 사라지게 되고 참된 진리를 인식하는데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사회도 한계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한계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유대로 맺어진 실존적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4. 초월자와 암호해독(철학적 신앙)
하지만 야스퍼스는 실존을 밝히는 실존조명을 넘어서는 포괄자에게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하게 키에르케고르처럼 신에게 귀의하여 “다 이루었다”고 외치며 종교적 교리를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을 유한적 존재로 파악한 만큼, 자체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진정한 실존과 초월의 영역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간을 진정한 실존과 초월로 이끌 수 있는 초월자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초월자를 결코 인식할 수는 없지만 한계상황을 통해 느낄 수는 있으며, 이는 인간에게 어떤 역사적인 결단을 추동해주는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일종의 "암호"로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초월자의 품에 안김으로써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는게 아니라, 초월자가 보내는 암호를 해독하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이 메세지는 암호라는 점에서 ‘접촉되고 느껴질 수 있는’ 깨달음에 대한 것이지, 절대 이성적으로 직접 포착할 수 있는 인식의 대상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초월자의 암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예컨대 로마시대 유대교의 종교·도덕관에 문제의식을 느낀 예수에게 있어서 성경이란 것은 보편적인 종교나 도덕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들과 맞서 싸우도록 만들어준 신이 보낸 암호였으며, 그는 이 암호를 해독한 것이다.
초월자가 보내는 암호는 한번 해독해냈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영역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호를 통해 초월한다고 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상황으로의 이행일 뿐, 새로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스퍼스가 교제를 강조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타인또한 나와 동등한 존재로서 그 또한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는 신뢰를 통해 교제 하면서 서로가 참된 진리를 계속해서 인식하며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 초월자에 이르는 길로 본 것이다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서 많은 논쟁과 평가가 오고갔지만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은 그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칸트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철학사의 거인이자 영미철학에 대항한 대륙철학의 거성으로서 당대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이후 사상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준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명한 진리로 전제되었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존재 그 자체1"의 문제를 새로운 철학의 주제로 선보였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 유일하게 "존재와 같이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는 것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학의 본질이자 가장 우선적인 것은 "존재 그 자체", 혹은 "존재를 자명한 것이라고 상정하는 전제"를 분석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이며, 서양철학의 시초였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탐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 특히 데카르트의 철학이 등장한 이후 부터는 철학자들이 이 점을 망각하고 오히려 존재를 결코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설사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고 한들 있음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개념적 접근이 아니라 특정한 성질이 있는 형질, 즉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이러한 뿌리깊은 오류를 분쇄하기 위해 철학적 사고의 근원인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존재'라는 말을 일상에서나 철학에서나 흔하게 쓰면서도 정작 그 의미를 아무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여태까지의 존재물음과 답은 모두 방향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한 엉터리 물음과 대답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만 보았을때 하이데거는 엄밀히 말하자면 형이상학자로 분류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가 존재론적 분석을 통해 모든 존재자 중에서도 유일하게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능력을 가졌고 세계에 내던져 있기에 다른 존재와 관계맺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성격2을 분석하는 것이 다른 존재자들을 해명하는 모든 존재론들과 학문들에 대한 기초가 되는 실마리라고 생각했다는 점3에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그는 스스로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걸 꺼려하고 존재론자라고 자칭했다.
하이데거를 형이상학자로 간주하건 실존주의 철학자로 간주하건 명백한 사실은 선술했다시피 그가 현대유럽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구체적 삶과 떼어놓고 봄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경우 그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기간은 1년정도로 꽤 짧은 편이지만, 그가 나치행적에 대해 어떠한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록에 따르면 꽤나 나치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수많은 동료 지식인들이 나치에 대해 취했던 태도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차이가 나는 하이데거의 태도는 그를 쉽게 옹호할 수 없게 만든다.
1. 하이데거의 문제의식
하이데거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하는 것"에 관해 사유하면서 존재자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즉 전통적 형이상학은 진정한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존재자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자의 본성을 파악하려 했던 의도는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학문적인 측면에 있어서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는 뜻과 이 뜻의 의미를 아는 것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존재자들에 관해 묻는 형이상학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전통적 형이상학 하에서는 그 답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는 그저 ‘앞에 놓여 있는 것’ 또는 ‘주어져 있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 이와같은 태도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있는 것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가진 인간은 '있는 것'은 '마땅히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것이 어떻게 있느냐?”하는 따위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실 앞에 놓여져 있는 것 또는 주어져 있는 것에 대한 앎의 필요성은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뜻과 이 뜻을 펼치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긴급한 것이다.4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뜻’은 인간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요성에 대한 물음의 답으로 인간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즉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 속에 “인간 또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의 치명적인 결점일 수도 있는 “통속적 지성의 자연적 나태함” 때문에 저 물음은 단순한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 나태함은 아마도 “존재한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명하고 확실한 만큼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는 어줍잖은 확신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비교적 이성에 입각한듯한 근대철학또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철학은 신이 사유의 중심이었던 중세철학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을 사유의 중심에 두고자 했으며, 수학적 자연과학을 모델로 근거있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대철학도 그 이전 시대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관한 물음을 묻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중심으로 삼았던 인간에게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딛고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존재자에 관한 물음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존재자라는 실마리를 놓치고 있는 한, 형이상학적 사유는 그야말로 피안 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정에 놓이게 된다.
요컨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자를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견지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은 비단 그것의 물음이 진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그는 전통적 형이상학은 종극적으로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개념에 의존하게 되어 마침내 물음이 멈추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따라서 진정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은 채로 존재자를 주어져 있는것으로 보는 태도(존재망각)가 비록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만일 뜻과 길을 파악하는 일을 제대로 이룩할 수 없도록 하는 걸림돌이며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어림직작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태도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 밑바탕에 놓여 있는 존재를 새로운 철학의 문제로 제시한다. 그는 이러한 선험적인 문제는 존재자 대한 인간의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에서부터 전통적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신 또는 초월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닫혀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자에 앞선 존재에 관한 물음을 묻지 않는 한, 형이상학은 궁극적인 근거에 이르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존재에 관한 물음을 묻지 않고 남겨 두는 한, 형이상학은 진정한 근본을 탐구하는 제1철학이라는 정체성을 실현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기획은 전통적 형이상학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전제하고 있는 것을 밝혀 드러냄으로써 제1 철학의 진정한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이다.
즉 하이데거의 목적은 존재자에 대한 통시적인 일상적 사유, 이 일상적 사유에 의거하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고대철학으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극복을 위한 디딤돌을 세우는 것이었다.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 사유,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자에 대한 자연적 태도 때문에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소외라는 심각한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인 '기초존재론'에서 제안한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의 핵심적 아이디어는 ‘존재론은 인식론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2. 존재론
2.1 존재와 존재자
하이데거의 대표저서 『존재와 시간』 에서 그가 의도한 것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통해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다면 '존재'는 '존재자'와는 다르다. 예컨대 '망치'와 '망치의 존재'는 다른 것인데, 인간이 만지고 볼 수 있는 망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이다. 이렇듯 존재자는 돌, 나무, 책상, 산, 강 등 자연이건 무생물이건 생물이건 어쨌든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감각할 수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의미한다. 하지만 망치의 '존재'는 감각할 수 없는 엄밀한 의미의 개념적인 것이며 '존재론적'인 것이다. 정확히 하자면 존재란 어떤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은 … 이다"라고 말하기 이전, 즉 선술어적인 조건으로서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토대이다. 따라서 존재와 존재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구별되지만, 그 둘이 떨어져 있는 완전히 개별적인 것또한 아니다. 이렇듯 사실 존재자의 존재양식이자 그것이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사실 본래적으로 중요한 문제인데,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이를 간과한 것이다.
2.2 존재물음과 현존재로서의 인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며,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이 이를 간과하고 존재자성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이러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존재자가 어떻게 해서 존재자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규정되었던 가장 극단적인 근원적 차원, 즉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재를 향해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이 중요한 점은 명백하다. 만약 그의 말대로 존재가 존재자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천적 근원이며, 존재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전반적인 세계관이 달라진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개인의 삶과 인간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초적 물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일단 그의 대한 후대의 비판을 제외한다면) 기초적 물음으로서의 당위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존재 그 자체'라는 개념이 모호한 까닭에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또한 아주 난해하고 당혹한 질문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묻는 것'의 근본 목표를 제시하여 존재물음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니라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물음도 하나의 물음인 이상, 우선은 물음 일반의 형식적 구조에 대해 파악해야한다. 먼저 물음이란 어떤 사태가 문제가 될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하는 인간의 탐구적 태도이라고 볼 수 있다. 애려햔 물음의 형식적 구조는 3마디로 구성된다. 첫째는 물음의 주제이다. 예컨대 "인터넷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주제는 인터넷이다. 그러나 물음의 대상은 말이 없다. 만약 물음의 대상이 스스로 말한다면 물음을 던지는 행위는 전혀 없을 것이다. 즉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물음의 주제인 인터넷이 스스로 자신을 규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 인터넷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런 점에서 물음의 형식적 구조에서 두번째는 물음의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된다. 이를 하이데거는 '물음이 걸리는 것'이라고 칭했다. 마지막으로 물음의 구조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물음이라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내야한다. 아마 그것은 물음의 대상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즉 물음의 형식적 구조에서 세번째는 물음을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주제의 본질이 된다. 이를 하이데거는 '물음이 밝혀지는 것'이라고 칭했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또한 물음인 이상 이러한 형식적 구조를 공유하되, 그것이 기초적 물음이라는 특징이라는 점에서 그 형식적 구조의 내용은 일반적인 존재자에 대한 물음과는 차이가 있다. 존재물음에서 물음의 주제는 '존재'이다. 물음의 본질, 즉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존재자에 관한 물음과 동일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존재물음의 물음의 대상으로서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인간(하이데거의 언어로는 '현존재Dasein)'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물음과는 극명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는 묻는 자로서의 인간과 물음의 대상이 분명히 이원화되었다. 그러나 존재물음에서는 묻는자로서의 인간이 바로 묻는 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걸고 있다. 여기에서는 묻는 자와 물음이 걸리는 자가 동일하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존재자들중에서 인간이 물음의 대상으로서 제시된 것인가?
당연히 그 이유는 존재물음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존재물음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인 '존재'는 '존재자'를 규정하는 선술어적인 개념이므로 '존재자'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탐구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물음에서 '존재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예컨대 망치의 존재) 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자 없이는 존재도 탐구할 가치가 없을뿐 더러 존재는 직접 탐구할 수 없으므로 존재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존재를 잘 드러나는 존재자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탐구적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고뇌할 수 있다는 톡특한 가능성, 즉 '탈존성(실존성, Eksistenz·Existenz)'적인 특성을 가진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물음의 대상이 될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물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인간을 얼마나 잘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주장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담고 있지 않나 비판해볼 수 있다. 존재물음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인데 정작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야 된다는 것은 탐구하고자 하는 과제(즉 존재의 의미)를 탐구과정(즉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속에서 미리 전제하는 것이고 처음 제기된 존재의 문제는 망각되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순환논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학의 영역에 국한되며, 자신의 논증은 그와는 구별되는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른다면 인간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존재의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다. 예컨대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에 대해 충실하게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망치'라는 존재자와 망치의 '존재'가 분리된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념적인 차원에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탐구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순환의 원을 그리면서 이해의 폭이 더욱 넓어진다. 물론 알지 못하는 점도 많아지겠지만 그에 비례해서 알아가는 것또한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다.
2.3 현존재의 특성
2.3.1 '세계-내-존재'로서의 시간성과 피투성·기투성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시간'이라는 일종의 지평이 필요하다. 이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현존재란 '거기에 있다', 즉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실존하는 피투성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나무나 돌같은 사물로서의 존재자나 망치나 칼같은 도구적 존재자가 그 자체로 운명을 따르며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반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현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달리 단순하게 운명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어진 현실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내던진다. 즉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계와 무관하게 동떨어져 있거나 세계의 단순한 일부분으로서 허무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거주'하면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면서 그 삶을 유지하는 기투성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다. 필연적인 피투성과 가능성의 자유인 기투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현존재만의 독특한 특징이며, 이를 하이데거는'세계-내-존재'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현존재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몸을 담고 있는 시간이라는 지평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선술했다시피 인간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운명에 구속되긴 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의 자유를 가지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결정론자가 아니다. 그는 현존재는 일정한 조건에 한계지어질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을 다시 결단하고 주어진 현실성을 재해석하는, 즉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고 하였다.
결정론과 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하이데거의 자유개념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그에게 자유란 곧 인간의 결의이다. 즉 이미 주어졌거나, 불가피하거나, 설령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행위라도 미래 투기의 관점에서 다르게 재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때나 살아갈때 특정한 가족, 종교, 국적, 언어, 정치체제 등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런 것들은 인간을 규정하는 주어진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이 같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이러한 불가피한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개인의 결의와 변화를 막을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범죄자가 진정히 참회하고 선한 사람이 된다고 친다면, 이것은 결코 그가 과거에 지었던 '죄'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회했다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존재는 미래의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재해석하는 시간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가능성의 지평으로 투기하는 존재로서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2.3.2 배려(Sorge)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기 위해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교섭한다. 다시 말하면 항상 자기 주위, 곧 의미로 가득찬 환경 세계에 대해서 '배려'(Sorge)를 하면서 생활한다. 이때 세계-내-존재 로서의 현존재에게 외부의 존재자는 도구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인간은 어떤 집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하는둥 세계 속에서 사물을 이용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도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도구또한 인간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인간이 삽을 잡고 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게 있는 것이고, 인간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항상 도구를 통하여 자신을 배려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물에 대한 관심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음을 쓰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배려가 현존재의 근본성격이다.
2.3.3 퇴락과 '세인(das Man)'으로서의 현존재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에서 바로 이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존재자라는건 사실 실존의 이론적·형식적 개념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알 수 있듯이 이론은 반드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존재의 일상적 특성에 대한 체계적 분석또한 요구된다. 물론 이는 순수하게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의도만 가지고 있을 뿐 일상적인 인간에 대한 윤리적인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현존재의 일상적 특성에는 언어, 호기심, 애매성 등이 있지만 이중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으로는 '퇴락'을 꼽을 수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서 논의되는 퇴락은 도덕적 타락과 무관한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들을 배려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삶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 사물에 얽매일 수 있다. 즉 인간은 남을 배려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에 얽매인 나머지 일상의 흐름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살피고 타인들이 하는 대로만 하며 본래의 자신을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대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지 않고 세계의 다른 외적 존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맡기고 살아가는데, 이것이 퇴락이다. 이런 의미에서 퇴락은 현존재의 비본래성을 의미하며,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현존재를 소외시킨다. 자신의 근거를 상실한 현존재는 일상적 무지반성과 공허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이렇게 허덕이는 삶의 진실을 모르고 오히려 타인과 연예인의 가십거리로 잡담을 나누고 유흥의 몰두하는 퇴락적 삶을 자신의 고양된 본래적 삶의 모습으로 착각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사람들은 타자와의 차이성에 마음을 쓰는데, 다른 존재자와 자신의 차이를 최대한 적게 하든지 아니면 차이를 통해 타자보다 월등한 자기를 과시해 타자를 억누르려는 것이 일상적 현존재의 실존적 양상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서나 일상적 현존재는 차이성에 얽매인 채 타자들에게 예속된다. 나와 남을 구별하기 위해 타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만 실상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를 상실한 채 타자에게 귀속된다. 그렇기에 수많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단독적인 자기의 삶을 잃어버린 채 중성화된다.
하이데거는 이 중성적 존재자를 세인(das Man)이라 칭한다. 세인(일상적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는 선술한 차이성과 평균성, 평준화가 있다. 이렇게 세인은 자기의 본래적 실존을 추구하기는 커녕 모든 것을 공공선에 내맡긴다. 실로 현실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평균성적·연봉·수명 등 평균성을 삶의 가치 척도로 삼아 삶을 살아간다. 정치사회적으로도 고교 평준화 정책이나 무상급식, 대중문화 등등도 평준화에 기인한다. 모든 것이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평준화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세인의 존재양식은 공공성이라고 부른다. 선술했다시피 이러한 공공성은 세인의 자기 해석과 자신의 삶에 대한 결단과 책임을 규제하며,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를 상실하게 된다. 세인은 일종의 실존범주로서 현존재의 비본래적 혹은 비자립적 실존의 양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세인이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개는 세인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본래 자기 존재를 문재삼는 존재자인 현존재로서 인간은 이러한 삶에 본질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세인으로서의 자기를 극복하여 본래적 자기를 회복해야 한다. 본래적 자기 존재란 바로 세인의 실존적 변양이다. 이말은 즉슨 세인이나 퇴락이 사실 본래적 자기가 될 수 있는 토대라는 것이다.
2.3.4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불안
그러나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퇴락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본질(자기 존재를 문제삼음)을 상실했다고만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퇴락은 현존재의 피투성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실존론적 양상이다. 즉 퇴락이 현존재의 실존의 비본래적 양상이기는 하지만 현존재가 퇴락할 수 있는 까닭또한 자신이 세계-내-존재로서 세계에 던져져있는 피투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측면에서 퇴락이야 말로 현존재의 일상성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존재론적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퇴락으로부터 벗어나서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기 위해선 불안이라는 감정이 요구된다.
정확하게 불안에 대해서 정의 하자면, 먼저 불안이란 두려움과는 다른 개념이다. 두려움은 외부의 특수한 사물이나 상황에 의해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불안은 어떤 구체적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근본양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선요약하자면 불안의 대상은 '무(죽음의 가능성)'의 현존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내-존재로서의 피투성적 성격 그자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존재의 존재양식인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투기로서의 실존은 시간성 안에 놓여 있다. 이때 밝혀지는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최후의 종극으로 향하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가 결코 피할 수 없으며 더이상 가능성이 없는 종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시간이라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비존재의 가능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이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만약 이렇다면 죽음은 현존재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란 존재와 의미 자체의 소멸(無) 이다. 이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의 가능성은 종종 일상적으로 망각되긴 해도 언제나 모두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인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 하는데, 하이데거에 따른다면 보통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은폐한다. 즉 내일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은 모든 현존재가 자각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무것도 아니며 의의가 상실되었다'는 불안함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현존재가 불안을 느낀다면 바로 이지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찰하며 본래적 자기에 직면해야한다. 하지만 애초에 자기자신을 문제삼는 것을 본질로 삼는 현존재가 그것을 회피하고 퇴락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론과 현실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즉 무화된 세계 속에 내동댕이쳐진 현존재는 대개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려고 하지 않고 도피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피를 통해 일상적 현존재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하며 편안함과 느긋함은 즐기고 불안함은 망각되며, 불안은 기껏해야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관한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습은 본래적 자기로부터 뿌리뽑힌 일상적 현존재의 퇴락적 삶의 모습이며, 이러한 불안은 자기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본래적 불안이 아니라 비본래적 불안이다.
2.3.5 죽음의 가능성을 통한 본래적인 자기회복 가능성(죽음으로의 선구)
그런데 선술했다시피 불안, 죽음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은 비본래적이고 무의미한 삶에 은폐되어 있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현실과 죽음은 다르다는 점에서 죽음의 가능성은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자기이해를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은 불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만약 현존재가 실제로 죽는다면, 죽음은 더 이상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런 까닭에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재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 결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이를 자신과 관련이 없는 타인의 사건으로, 혹은 아주 먼 미래의 사건으로 간주하며 은폐하려고 한다. 이러한 은폐는 인간이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은폐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가능성 그 자체로서 견지하지 못한다는 것, 단지 현실성에 비춰서 인간의 가능성을 기투한다는 것,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서 인간의 자기이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죽음에 대한 태도로, 죽음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문제시하지 않은 것이지 일단 '은폐'라는 태도를 스스로 내린 것이다. 죽음은 이렇게 결코 피할 수 없으며 누군가에 의해서 대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필연적인 인간 실존의 가능성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더라도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인간이 퇴락적 삶을 계속해나간다면 어느 순간에는 비본래적 불안과 퇴락적 삶 속에 벗어나 본래적 불안을 자각하고 그 동안 망각해 왔던 자기의 본래적 존재에 비로소 직면할 가능성도 얻게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당연히 개인편차는 있겠지만) 분명히 일상적 현존재는 불안에 대한 도피로 퇴락적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러한 도피적 삶을 계속할수록 자신의 본래성과 일상적 친숙함의 비본래성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직시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기인하는 불안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면서 일상적인 가능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을 '죽음으로의 선구'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죽음의 가능성은 현존재를 자유로워지게끔 만드는 동시에 현존재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근거짓게끔 만들어 준다는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인간의 실존양식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듯이 불안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현존재의 구조 전체성의 존재를 해명할 현상적 기반을 마련해준다.
3. 정리
정리하자면, 현존재는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자, 그의 가능성에 따라서 (설사 그것이 일상적으로는 현실성에 기초해 있을지라도)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존재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존재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자이다. 현존재가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현존재의 가능성은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해온 세계안에 주어진 역사적이고 필연적인 가능성이며,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또한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이데거는 이점에서 현존재 스스로 최대한 자기 자신에 근거지우는 본래적 실존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는 채 스스로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자기이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들과의 잡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무엇보다도 세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이 바로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의미를 자기 스스로 정초하는 가능성임에도, 현존재가 역사적 세계 안에 내던져진 채 실존하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여전히 그가 놓여 있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런 점에서 현존재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은 세계를 초월한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적 존재자로 스스로를 건립하여 세인의 삶에 은폐되어 있는 역사성을 구현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역사성은 현존재에게 이미 항상 주어져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이유를 스스로 정초함으로써 구현해야 될 과제이며, 이것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실존하는 현존재에게 주어진 역설적인 삶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 역설적 과제는 현존재에게 어떤 짐스러운 무엇이 아니다. 이 과제는 현존재가 세인의 삶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과정 속에 놓여있는 것이며, 그래서 현존재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다. 현존재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함, 존재의 근거를 정초하라는 과제, 즉 현존재에게 그의 역사성을 구현하라는 과제와 현존재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의 자유는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라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그에게 부과된 과제를 현존재 자신이 떠맡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흔히 말하는 존재가 명사적인 개념이라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존재라는 개념, 혹은 동사적 의미의 개념이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성격을 규정하는 것을 '범주'라고 하였으며, 현존재만의 고유한 존재성격을 규정하는 것을 '실존범주'라고 불렀다.
- 하이데거는 이런 자신의 존재론을 스스로 현상학적 존재론 또는 기초존재론이라고 칭했다.
- 이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하이데거 전기철학을 개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이데거 후기>
1. 전기와 후기의 차이점
하이데거의 철학적 입장은 1930-35년에 걸쳐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전기 하이데거에서 세계는 현재의 실존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만약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경우에는 세계는 단순히 현존재의 감각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자들의 합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현존재가 본래적인 실존성을 회복한다면 세계또한 본래적인 의미공간으로 나타난다. 즉 세계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직면하려는 현존재가 결의하고 스스로를 기투함으로써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가 중심이기에 현존재의 존재구조에 대한 탐구가 기초존재론이라고 불리며 근본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 주제는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옮겨 가며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다른것으로서 존재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흔히 '전회'라고 칭함) 후기철학에서 존재란 존재자들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실존방식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을 개시하면서 자신은 은닉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자신을 밝힘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다.(즉 이전에는 인간의 본래적 실존을 가능케 해주었던 불안과 무의 가능성이 인간의 실존양식으로 해석되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존재 그 자체가 인간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세지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존재자의 개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이므로 세계가 존재 그 자체인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후기철학은 존재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분석하는 것을 중심에 두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현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어떻게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 스스로를 현시하는가를 다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존재의 역사적 현시를 보조하는 것을 통해 진정한 존재의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전회는 전기사상에 대한 포기가 아니다. 이는 전기사상이 목표하고 있는 바를 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성을 보다 철저하게 고려함으로써 좀 더 현실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 후기의 존재론
하이데거가 존재 자체는 존재자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한건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존재와 자신이 말하는 존재를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즉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존재란 눈앞에 있는 사물적 존재자로서 파악된 존재로, 존재자와 다른 것으로서의 존재가 구별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존재는 현존재 눈앞에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론적 고찰을 통해서 언제든지 고찰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물음으로 전개하며 눈 앞에 현존하는 존재자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존재 자체에 진입하고자 했는데, 이는 존재 자체로부터 존재자의 본질을 새롭게 물으려는 시도이다. 이 경우 존재자는 일개 표상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모아들이는 사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존재 자체인 세계는 사물에 모아들여짐으로써 현존하며, 또한 사물은 존재 자체인 세계를 자신 안에 모아들이면서도 자신 내부에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형태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얻게 된다. 이렇게 세계와 사물이 서로를 가능케 하는 관계를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의 '차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라는 문제를 후기에 이르러 세계와 사물 사이의 차이로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은 세계의 구체적인 현존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세계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 즉 존재자는 자체적으로 존립한다. 이말은 즉슨 개별적인 존재자의 본질이자 근거로서의 존재 그 자체는 개별적인 존재자 내부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 그 자체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은닉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은닉을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중 하나로 파악할 수 있다. 외부, 특히 현존재의 침입을 거부하는 성격을 가진 은닉을 통해 존재자는 현존재의 이론적 실천적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며 스스로 존립하는 자립성과 내적인 존속을 갖는 것이다. 예컨대 돌덩이에게는 그것의 무거운 무게 자체가 현존재에게 자신이 들리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은닉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 경우 존재자는 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근거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지각하는 그대로의 존재자이다. 나무의 푸른 잎은 다양한 식물세포로 구성된 유기물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저 푸른 잎으로서 자신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3. 언어론
3.1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어원분석이 가지는 의미
하이데거는 언어가 근원적으로 볼때 존재로부터 기인했으며 따라서 언어야 말로 존재가 인간과 관계맺는 방식중에서 가장 고유한 관계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인간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의 근원을 발굴하여 언어가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이렇듯 하이데거의 언어론의 목표는 존재가 언어로서 처음으로 발해졌을 때의 깊은 경험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의 언어론에서는 어원분석이 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데, 여기서 어원분석이란 그 어원을 단순히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언어가 원래 불러 내고 있는 근원적인 세계를 다시 현존케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즉 현존재가 핵심적인 (서양 문화권의 경우) 그리스어 개념이나 (동양 문화권의 경우) 한자의 뿌리에 도달하여 말이 담고 있는 심원한 의미를 다시 상기함으로써, 현존재는 존재가 인간에게 아직 직접적으로 현존했을 경우에 존재했던 상태에 직면하여 다시 새로운 깊이와 풍요로움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는 언어의 밖에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현존재의 언어는 그것을 지시하는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는 것이다.
3.2 비본래적 언어양식과 본래적 언어양식
하이데거는 언어를 음성, 멜로디, 리듬, 그리고 의미 따위로 정의하는 전통적인 언어관과 결별하고 언어를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언어를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향한 존재의 도래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언어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침묵으로 다가오는 존재의 언어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언어에 응답함으로써 존재의 무언을 자신의 언어로 가져오는 것, 즉 존재이 언어에 대한 응답이 곧 인간의 본질적 언어라고 말한다. 따라서 언어에도 비본래적 언어양식과 본래적 언어양식이 존재하는데, 하이데거는 언표(Aussage), 담론(Rede), 잡담(Gerede), 대화(Sagen) 네 가지 언어 양식을 제시한다.
3.2.1 언표로서의 언어(논리적 명제)
하이데거는 전통적 형이상학은 언어를 형식적·추상적 표현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 때 언어는 종종 과학적 표현력인 문법과 논리의 관점에서만 고려된다. 존재자들의 객관적 근거를 따지는 이성의 작업이 근대의 과확에 들어서 극한에 달해 언어는 이제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대한 정보로서 이해된다. 정보언어야 말로 진정한 언어로서 이해되며, 그 여타의 것들 예를 들어 예술 같은 것은 언어라기 보다는 사적인 감정의 토로 정도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 타당성은 오직 객관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언어만이 진정한 언어로서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세계와 사물을 불러낼 수 잇는 능력, 다시 말해서 하나의 세계를 세계로서 그리고 사물을 사물로서 현존하게 하는 환기력을 상실해버린 언어를 언어 자체로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언어의 의미에서 존재는 낱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표준화 하는 명제적 계산으로서 개진되었다. 그러므로 언표에 있어서 언어는 자주 실제를 추상화·계량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생명 없는 추상물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즉 수단일 뿐인 논리학이 배타적으로 전면적인 지배력을 행사해오고 있고 때때로는 위험한 수준에 까지 도달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학적 접근 태도를 비판하며 존재론적으로 좀더 근원적인 근거하에서 언어학을 재정초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3.2.2 해석적 담론으로서의 언어(실존 해석학)
논리적 언표가 사물을 대상으로 다룬다면, 해석점 담론은 각각의 사물을 특별한 의미의 담지자로서 이해한다. 만물은 현존재의 구체적인 (생존˙쾌락˙안정감˙편안함˙아름다움 등의) 투기를 전달하는 기호의 구실을 한다. 이리하여 현존재는 세계의 사물을 실존적으로 보게 된다. 즉 더이상 논리적 실재가 아니라 현존재의 실존을 내어던질 살아 있는 가능성으로서, 다시 말하면 해석학적 담론은 '내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존재자를 본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자를 초시간적인 추상적 고립에서 해방시켜 시간성으로서 나의 구체적˙역사적 관심의 지평으로 현전시키는 것이다. 즉 나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이런 실재의 의미성을 회복시키거나 혹은 그런 의미를 내가 미래에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투기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어떤 경험주체로부터 다른 주체로 지정된 정보의 교환인 언표로서 언어의 의사소통기능은 다른 사람과 실존적 세계의 공유로서 좀더 근원적인 의사소통 양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은 현존재를 다른 사람의 의미투기에 대응하면서 거기에 포함시키는(그 역 또한 가능하다) 공통된 생활세계에 대한 해석으로서 좀더 깊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존재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관계라는 맥락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현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물려받은 세계는 이미 현존재보다 선대 인류의 모든 상호 주관적 의사소통으로부터 현존재에게 남겨진 문화적˙역사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의미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학적 담론은 현존재의 개인적인 현존재를 공동체적으로 타자와 함께하는 존재, 즉 역사와 전통으로서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구별을 한다. 즉 실존적 담론에서 '본래적인' 형식과 '비본래적인' 형식을. 본래적인 형식을 그는 대화(Sagen)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것을 존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진정으로 거기에 화동할 수 있기 위하여 침묵함으로써 현존재의 언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자 하는 현존재의 능력과 동일시 한다.그가 '잡담'(Gerede)라고 부른 비본래적 방식은 거기에 책임지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다른 현존재의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무의미한 독선적인 수다로 규정된다.
3.2.3 잡담으로서의 언어(공론)
다른 사람과의 담론으로서의 언어는 쉽게 잡담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주체적으로 대답하기를 그치고 익명적인 '공론'의 잡담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여기서 개별적인 주체, 즉 현존재로서 '나'의 실존적 책임은 '세인'의 흐름에 편승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말은 본래적인 나이기를 그치고 시속에 따른 잡담의 교환으로서 단순한 일용품으로 전락하게 된다.잡담으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전략이 된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이 존재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존재를 망각한 결과, 근현대에 들어서는 유물론적인 과학기술과 결합되어 인간 존재의 망각이 극단에 도달했다고 보았다는 것은 이미 앞서서 알아본 바 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인간의 이성과 세계의 물리적 객관성을 절대화했다. 이러한 유물론적인 기술사회에서 인간은 기술에 의해 닦달되는 비인격적 도구로 전락하고 되어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잡담으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전략이 된다. 즉 현존재는 정확히 현존재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대화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해 도전하고 거기서 신비감을 맛보던 삶은 이제 가고, 모두가 일상적이고 편리한 것에 안주하고 만다. 현존재의 실존은 이제 더이상 현존재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르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익명의 '세인'에 의해서 현존재가 살게 된다. 그래서 현존재는 현존재 내부의 공허한 틈을 시속의 평균 규범에 따라 지껄임을 통해서 메운다. 잡담 또는 '누가 ˙˙˙ 라고 하던데' 라는 식의 말은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진정한 화답으로서 내가 정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그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말하는 정도만큼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현존재의 존재를 비본래적으로 전락시킨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소외되어 있는 언어를 다음과 같은, 즉 거기서는 현존재의 존재의 진정한 언설과 단순한 수다 사이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기반이 없다고 정의한다. 더욱이 세인의 기준에서 평균치로 말하는 화자는 이러한 구별을 원하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잡담은 도던적이며 비판적으로 차이성을 드러내는 각 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사상시켜 익명적인 대중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단을 제공해준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떤 것을 경솔하게 남이 하는 방식을 따라서 반복하게 되는 그런 무차별성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행위를 은폐시키는 행위로 전락시킨다. 달리 말하면 잡담은 현존재가 존재에 대해 참된 해석을 못하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은 새로운 탐구와 논쟁을 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세인의 대화는 전체주의적 지배를 강화시켜주고 현존재의 마음상태를 규정하고 현존재의 세계관과 판단기준 등을 지배한다. 익명적인 상투어와 구호들은 현존재가 자기해석을 못하게 하고 사려깊은 언어를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존재자의 외양만을 대충 훑어봄으로써 거기에 만족하고, 현존재의 뿌리를 묻는 존재에 대한 현존재의 근본적인 물음은 추구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는 따라서 이렇게 존재에 대해 묻지 않음이 현존재에게서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고질적인 현실이 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뿌리없는 대화인 잡담의 근원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에 의해서 인간은 현존재가 관계하는 주위환경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의해서 산만하게 들떠 있게 되며 비본래적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존재가 된다. 잡담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호기심에 근거한 대화이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있는 대화 이기보다는 존재자를 자랑하는 술자리에서의 대화, 타인과 진정으로 교통하지 않고 타인이 즐거움과 오락의 기회를 제공하여 줄것 정도로 예상되는 정도에서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호기심에 의해서 세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닌다. 들떠서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찾고 만나는 사람을 바꾼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진정한 언어와는 달리 세계에 대한 경이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3.2.4 진정한 대화로서의 언어(시)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언어의 본래적인 본질을 상기시키기 위해 세계와 사물을 불러내는 환기력을 가진 언어인 예술의 언어, 특히 시의 언어를 인간의 본래적인 언어로 꼽았다. 이러한 시의 언어에서는 다른 사람이 제3의 아무개씨로 세인이 되는 잡담과 다른 사람의 초월성이 과학적 확실성을 위하여 사상되는 논리적 언표의 약점이 극복된다. 시를 통해서 언어는 실존적 투기의 계시적 텍스트로서 세계를 해석하는 그 근원적 해석학적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 세계는 가능성의 열려진 지평으로 드러나고, 그 각각은 존재의 상징 또는 암호로서 현존재에게 말해온다. 만약 이렇게 존재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면, 일종의 동조현상이 나타난다. 동조현상을 하이데거는 근본기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존재의 말과 인간이 서로 동조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분이 바로 '경이'이다.아울러 현존재가 하나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시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수행하고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시를 이해한다고 할 때 현존재는 단순히 그것을 문자를 따라가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실존이 그 시에 의해서 모종의 충격을 입고 변화를 겪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리에 대한 청종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존을 기울이고 그에서 발하는 존재의 힘이 갖는 변용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만일 현존재가 시를 통해서 언어의 뿌리가 현존재의 본래적이 세계-내-존재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면, 현존재는 역시 현존재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죽음(비존재의 가능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도구적 연관으로 세계를 보는 나의 해석을 무화시킨다.
예컨대 시의 세계에서 장미는 단순히 원예농업적으로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물을 주어 길러서 팔 대상이 아니라, 나의 직접적인 환경의 일부로서 다듬어지고 참미된다. 단순히 무언가를 상징(영국의 국가정체성을 의미하는 장미, 성적인 순결을 의미하는 장미 등)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단순한 상징만은 아니다. 시적인 발화에 있어서의 장미는 모든 현존재의 해석적 투기를 넘어서 일체가 된다. 그것은 '왜라는 이유'도 없이 스스로 개시된다. 장미가 장미인 것은 그저 장미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를 경험함으로써 존재자를 개시하는한 궁극적으로 시적 언어에 기반해 있다고 확언한다. 존재의 경험은 종종 시적 언어가 특수한 실용적 관심과 관련해서 논리적 또는 실용적 도구로서의 언어를 버리도록 하고 현존재에게 죽음의 경험을 대면하게 할 때 일어난다. 시는 현존재의 실존이 유한하며 결국에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인간이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을 각성시키는 최상의 수단이다. 현존재는 시를 통해서 존재자로부터 되돌아와서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근본기분은 존재의 소리가 인간에게 전해지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렇게 독자에게 세계와 존재자를 이전과는 전적으로 달리 보게 해주는 힘을 가지는 시에 있어서 존재의 의미는 단순히 경제적 또는 정치적, 정보교환적인 실용적 맥락에서 해방된 존재라는 의미에서 '탈속'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내-존재로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사소통 및 관계맺음 방법또한 원칙적으로는 이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기분에 의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분에 기초한다. 슬픔의 잠긴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슬픔에 어느정도 동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일한 기분에 처해 있다는 것은 의사소통의 전제인 것이다. 이렇게 타인은 특이하면서 독특하며 나의 기능적 투기로 환원될 수 없이 나와 대면하게 된다. 따라서 말에서 현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될 수 있다.
4. 기술론
하이데거는 기술이 가져온 영향력과 변화보다 기술의 '본질'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과학기술로 인해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기술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이전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기술론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떤 진리 개념을 세웠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올바른 것'과 '참된 것'을 구분한다. '본질'과 관계된 것은 '참된 것'이고, 여기서 '참된 것'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일반적 진리 개념, 전통적 진리 규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과 연관된다. 전통적 진리규정은 올바름으로서의 진리이며, 일치로서의 진리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이 진짜니?" 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너의 말이 그 대상과 일치하니?" 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자물쇠가 부서졌다."라는 문장을 실제로 부서진 자물쇠를 보여주며 말했다면, 그 명제는 참이다. 이때 '참', 즉 진리란 인식과 눈앞에있는 대상이 '일치'함을 의미한다. 자물쇠(대상)가 일단 대화하는 사람들 앞에 놓여 있어야 "자물쇠가 부서졌다"는 인식이 그 대상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물쇠가 "드러나 있다"라는 사태는 '일치로서의 진리'를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가 말하는 진리란 '드러나있음'이다.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기술을 하나의 '수단' 또는 '인간 행동의 일종'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적인 것'들로부터 비롯된 도구적 규정은 기술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기술이 도구적 성격을 띈다는 것은 '올바른' 사실이나 그것이 기술에 대한 '참된 본질적인 규정'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보는 기술의 본질(기술에 대한 참된 규정)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기술을 인간과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기술의 본질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탈은폐'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기술은 인간의 실존적 진리의 영역과도 관련된다. 이러힌 기술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먼저 도구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술과 탈은폐의 관계를 증명한 뒤, '기술(테크놀로지)'라는 낱말의 어원인 '테크네'를 고찰하며 기술의 본질을 자세히 탐색한다.
4.1 근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는 근대적인 과학과 기술을 통해 규정된 시대이다. 과학기술시대에서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이론적인 접근을 규정하는 것은 과학이며, 실천적인 접근을 규정하는 것은 그러한 과학에 근거하는 기술이다. 현대의 기술이 존재자에 대한 과학적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존재자 전체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과학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이 기술적으로 이용 가능한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이미 기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은 이미 존재자 전체 내지 자연을 계산 가능한 인과 법칙의 체계로서 파악한다. 즉 자연에 대한 하나의 기술적인 해석에 입각해 있기에 기술적인 응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기술문명은 이성중심적 사고를 추구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전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근대 기술의 탈은폐 방식, 즉 근대 기술이 매개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맺음을 '몰아세움'이라고 이름을 붙이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전통적인 기술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지게 한 반면, 근대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떼어놓고 인간을 통해 자연을 '닦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연을 소모하고 고갈시킨다는 것이다. 근대이전에는 경작이 씨앗을 뿌리고 곡식이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었지만 근대이후에는 경작은 농토를 '닦달'하고 '몰아세우며' 더 많은 식량을 요구한다. 이때 농토는 단지 식량 공급원으로, 농업은 거대한 식량 산업으로, 자연은 그저 에너지 공급원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듯 근대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가진 고유한 존재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4.1.1 과학기술에 의한 의미상실과 존재물음
그런데 이용과 지배의 주체이며 과학기술을 통제한다고 여겨지는 인간 역시 이용가능한 노동력, 즉 부품으로 그 의미가 퇴색된다. 기술의 본질은 모든 것을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부품으로 삼는 지배체계이다. 존재자 전체는 자신만이 가진 유일한 가치와 고유한 의미를 상실해버린다. 기술과 과학에서 존재자 전체는 계량 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제조 가능한 재료가 된다. 여기서 인간또한 예외가 될 수 없이 과학기술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 전체의 의미 상실, 즉 니힐리즘이 이시대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기술에게 지배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술의 본질이 니힐리즘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가? 이를 위해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상을 탐구하는 과학기술적 방법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의미상실의 경험 자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경악과 불안과 무를 느끼고 의미상실을 경험한다. 무는 현존재의 존재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으며 이 기술시대의 진상 앞에 현존재를 직면시키고 존재자 전체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하는 강력한 그 무엇이 되는 것이고, 만약 현존재가 이러한 무의 고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한다면, 이를 통해 이를 통해 현존재는 과학기술이 부여한 의미에 의해 은폐되었던 존재의 진리를 처음으로 통찰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존재케 하라는 존재의 요구라고 볼 수 있으며, 존재물음이란 현존재 자신의 독창적인 질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현존재에게 자신을 무로서 드러내면서 현존재 자신과 존재자 전체를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존재케 하고 새롭게 사유하라고 요구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볼 수 있다.1 그리하여 존재자가 이러한 존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엄습한다는 것은 문장 그대로 존재가 말하는 무언가를 듣고 받아 적는다는게 아니라 존재가 인간에게 무언으로 전하는 불안과 무의 메세지로부터(불안과 무의 가능성은 전기철학에서는 현존재의 존재양태로 해석되었지만 후기철학에 들어서는 존재가 현존재에게 보내는 메세지로 해석된다.) 도피하지 않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현존이다.
4.2 과학기술의 대안으로서의 테크네 개념
요컨대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이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를 상실시키고 단순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기술문명으로 인해 전쟁과 폭력이 발발했다는 것이며, 이러한 근대기술문명이 탄생한 이유는 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존재자를 도구 또는 원료로서만 파악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기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가 근대기술을 비판하고 이를 탐구한 까닭은 "기술과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고 기술이 인간성과 존재자들의 본질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사실을 직시해야만 비로소 기술에 의한 부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술의 시대에 지배적인 논리를 이해하고, 인간과 세계가 관계맺는 본원적인 방식, 즉 '기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때 하이데거가 궁극적으로 중시한 것은 '물음'의 상실, '사유'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근대적인 기술이해를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기술을 합리적 규칙에 따른 모든 활동, 즉 학문과 예술 또한 기술의 일부로 포함하는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 개념으로 되돌림으로써 지금 기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하이데거는 현재와 같은 불행을 초래한 단순한 도구적인 목적의 기술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이 부정성을 해결할 수 있는 길 또한 도구적인 목적을 제외하더라도 진리추구와 예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던 고대의 기술개념(테크네)에서 본 것이다.
- 물론 이는 현대 과학기술문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각 시대의 근본기분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자신을 달리 고지하며, 인간은 그러한 존재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통해서만 새로운 역사를 건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자유개념과 자유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도덕주의 비판>
남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는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소극적 자유', 그리고 특정한 이상적 가치(자기실현·공공선의 실현·평등추구 등)를 상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적극적 자유'는 근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두가지의 조류이다. 전자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등 보다 개인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사상의 토대가 되었으며, 후자는 민주주의 일반이나 사회주의등 보다 집단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한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현대인들은 이 두가지 개념 중 한가지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전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 '소극적 자유'는 저급한 노예적 쾌락주의에 불과하며, '적극적 자유'는 기독교적인 오만한 지배욕의 제도화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니체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니체가 말하는 자유는 무슨 개념인가?
1. '자유주의적 자유(소극적 자유)' 비판
근대의 자유주의는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장해줄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는 회의주의적 경향을 띤다. 이렇게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전제함에 따라 자유주의는 각자의 판단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여러 가치판단들의 평등을 자연스럽게 주창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다원주의 하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각자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긍정된다. 물론 니체는 인간의 다양성을 옹호하면서 인간을 획일화시킨 기독교를 비판했던 사람인 만큼 가치다원주의를 환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니체는'개인적 자유의 보호'라는 거창한 명목을 달고 있는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저급한 욕망 추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발상을 허무주의와 다를바가 없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세세한 개인적 욕망과 욕구의 충족이라는 차원 안에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자유주의적 자유의 가치 하에서는 힘에의 의지는 사라지고, 무의미하고 쾌락주의적인 저급한 삶의 차원만 고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자유주의하의 인간은 모두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노예에 불과하다고 보고있다.
즉 자유주의적 제도가 자유주의적으로 정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나중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제도들보다 더 불쾌하면서도 철저하게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게 된다.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구속이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유로운 활동은 그저 표면적으로 볼 때나 그러한 것이고 실제로는 주체적인 의식의 상실과 제도에 대한 맹신에 근거한 기계적 노예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2. 적극적 자유 비판
한편, 니체는 '적극적 자유'에 대해 그것이 속박과 구속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노예의 자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적극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든지, 도덕과 정치의 문제들이 어떤 보편적 기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든지 하는 신념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를 물질적 수단에 근거함으로써 가능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맑시즘의 이론에 따른다면 경제적 격차를 인정하는 자유주의적인 자유와 평등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평등을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설을 제시한다. 복지국가의 경우, 부의 재분배가 개인의 행복 증진과 자유의 확대를 가져오며, 따라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복지를 시행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보다 보편적인 예시를 들어보자면, 민주주의의 경우는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정치적 평등을 절대선에 가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종일관 보편을 추구하는 형이상학과 종교와 도덕을 해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철학자이다. 즉 이렇게 보편적인 본질로서 상정된 자유 개념은 정치·사회적 질서나 규범을 정당화해준다는 점에서 신적 존재에 근거해 억압적인 규범을 만들어낸 기독교적 세계관의 세속화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적극적 자유에 근거한 이념인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그리스도교로서 인간의 총체적인 퇴화를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2.1 사회주의 비판
니체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로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의 계보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 이념은 자주적인 인간에 대한 노예적 생존을 하는 인간들의 질투와 복수심, 증오에서 생긴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교가 보여주었던 것을 그대로 보여주며 인간의 차이와 다름을 무시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평균화·균질화·획일화됨으로써 일종의 기계적인 노예로 전락한다. 이는 이전의 그리스도교가 종교적 교리로 인간을 구속했던 것과 지극히 유사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본능에 호소하며, 그리스도교의 가치판단은 여전히 사회주의 체계 전반에 남아 있다"고 단언한다. 둘째, 그리스도교 사제가 인간들을 약자와 죄인으로 만들어 그들에 대한 권력에의 의지를 행사하고 싶어했듯, 사회주의 이념의 추종자들은 인간들을 약자와 인민대중으로 만들어 그들의 오만한 지배욕구를 충족시킨다. 즉 니체는 그리스도교인이 '세상'에 유죄판결을 내리고 비방하고 더럽히는 것과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사회를 유죄판결하고 비방하는 것은 같은 '노예적 본능'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이나 '사회주의 혁명'같은 것은 지극히 노예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복수라는 달콤한 위안에 불과하다.
2.2 민주주의 비판
니체는 정치적인 평등을 절대선의 가치로 평가하는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민주주의는 '만인의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설정함으로써 당연히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강자의 출현을 환영하지 않으며 결국 사회를 나약한 노예의 사회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 즉 고통과 슬픔, 소외가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니체는 민주주의를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할 이념이며 위선적인 이념이라 파악하며 반대한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평등주의적 관점, 즉 세상의 불평등 혹은 격차를 부정하고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며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에게 평등이라는 이상을 주입한 것은 일종의 위선으로 작용하여 '지적 폭력'을 행할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며 타고남을 떠나서 평등한 것이기에 불평등적인 요소들을 전부 추방하고 보편성과 평등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위선, 사적인 이윤추구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공동체 일반과 평등한 노동계급의 보편성을 훼손하거나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타락시킨다며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경제적인 위선과 존재론적인 위선등 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위선일 수 있다. 이러한 위선은 결국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죄인으로 만드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것이 더 밝은 미래와 희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퇴락과 고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3. 니체의 자유개념
3.1 도덕의 극복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있어서 도덕이 요구되게 된 것은 도덕적 가치가 인간의 삶을 지배함으로써 시작된 것인데,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본래적인 삶의 역동의 상실,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초할 수 있는 자유의 상실이다. 도덕과 자유는 상호배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니체는 자유의 회복, 즉 해방을 ‘도덕의 극복’에서 찾는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해방은 결코 지배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지배와 그 수단인 강제와 폭력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서 문제는 지배냐 지배의 종식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지배냐 하는 것이다. 즉 도덕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의 ‘폭정’과 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의 ‘폭정’은 폭정인 한에서 다를 바 없지만, 전자가 도덕의 본질인 증오와 복수에 기초하면서 인간을 타락시키는 반면에, 후자는 ‘선과 악을 넘어서서’ 인간을 번영시키는데 그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3.2 필연성의 인식과 긍정
니체는 자유를 필연성을 인식하고 인정할때, 더 나아가 필연성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초해가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니체는 어떤 미리 규정되어 있는 필연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숙명론자이다. 하지만 니체의 숙명론은 세계가 전적으로 기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체념적이고 극단적인 숙명론이 아니라 자유의 개념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리 규정된 필연성이 세계와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세계에 참여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해나감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독특하게도 니체는 원칙적으로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는 ‘개인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세계와 삶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긍정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의 고유한 운명으로,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창조해가는 삶 속에서, 이와 같이 자기를 실현하는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보려했다고 볼 수 있다.
3.3 문제점
물론 니체의 자유론에도 몇가지 문제점이 보이는듯 하다. 먼저 니체가 도덕적 윤리나 신앙을 가지며 살아가거나 물질적 안일함,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는 인간을 노예로 칭한 반면에, 체념하거나 굴종하지 않고 영웅적 태도를 취하며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간상을 '초인'이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유론은 일상인을 위한 자유론이라기 보다는 '초인'이나 '엘리트'만을 위한 자유론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니체의 자유론이 대중의 자유 아니면 초인의 자유를 배타적으로 결정하도록 직접적인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처럼 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니체가 말하는 자유는 일상적인 '소극적 자유'와 반드시 구별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초인의 숭고하고 고귀한 자유와 일상적인 선택과 사적인 자유는 동시에 인정되거나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는 시각도 충분히 타당하다. 정작 니체의 철학은 그 자신이 비판한 자유주의적인 소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Individual Anarchism)과 굉장히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샤르뜨르>
실존주의는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를 시작으로 하여 독일의 야스퍼스, 하이데거에 의해 확립되었으나, 결정적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학인인 사르트르에게 크게 힘입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사조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애초에 이전까지 지엽적으로 전개되던 실존철학을 하나의 조류로 묶는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 자체가 사르트르이기도 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철학에서의 새로운 업적도 과거의 모든 철학적 담론의 총화에 자신의 독창적인 담론을 약산 추가하는 것일 뿐인데,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선대 철학자들인 헤겔·키에르케고르·니체·후설·하이데거에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두고 최초로 실존주의에 있어서 자유의 문제를 논했다는 점, 특히 이전까지는 지극히 존재론의 영역으로만 간주되던 무(無)의 영역을 자유개념의 심층적 기반으로서 논했다는 점이 그의 독창성으로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1. 실존론
1.1 전통적 실존론(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비판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형이상학은 제1원인으로서 신, 자연, 이성과 같은 본유적 또는 선천적인 원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미리 규정된다고, 즉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이론들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우주에서 어떤 지정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또한 이 세계에서 충실하게 실현해야 할 어떤 주어진 인간적인 '특성'과 '본질'을 갖는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전통적 관점을 본래성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본래성과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근엄성'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사르트느는 왜 한사코 전통적인 실존론을 거부하는가? 그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어떤 자연적 또는 신적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정함으로써,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불안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다. 즉 근엄성적인 실존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본질에 충실하는 길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만약 이 세계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거나 어떤 근본적인 진리에 의해 선도된다면, 인간은 이미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무슨 행위를 할지 미리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개인이 스스로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적인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며 근엄성을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서 근엄성이란 자기 자신을 그저 무대 위에서는 배우로 격하하는 자기파괴적 성향이므로 반기를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2 사르트르의 실존개념(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객관적 필연성, 즉 본질에 의한 존재는 자유가 없다. 즉 일반 사물이나 동물, 식물 같은 것들은 자유가 없다. 반면에 인간은 유일하게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인이고 또 그 자신이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질 수 있기에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이말은 즉 사르트르가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먼저 유신론과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보편진리 등 모든 근엄성적인 '본질' 개념을 거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1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보편적 진리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외부의 어떤 권위에 자신의 삶의 책임을 미룰 수 없게 되고,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창출해나감으로써 자유의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하에 둔다고 주장한다.2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무신론적인 주장을 일관성 있게 끝까지 밀어부치려는 노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으로 규정하였다.
사르트르의 주장대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개념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기 전에 실존하는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실존이 먼저 이루어지고, 스스로 이 세상에 발을 내디디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주의자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선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어떠한 주어진 객관성이나 본질이 없는 무규정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창출해간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할 때만 존재할 수 있으며, 자유란 인간의 실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설령 신의 존재에 대한 타당한 증명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이 일단 자기 자신의 자유를 의식해버리게 되면 더 이상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의 섭리를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그의 자유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속 깊이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르트르가 "인간은 살아 남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 "인간은 팔다리를 가진다" 와 같이 인간 존재에게 보편적 속성이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인간이 자유를 가진다는 그의 주장또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 이론중 하나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측컨대, 사르트르는 인간의 기본적 조건에 관해 다소 일반적인 진술이 명확함은 인정하고 있었으며, 모든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올바른' 일반적 진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해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닫힌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이 열려 있음(개방성 내지 무규정성)이야말로 (본질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다면)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자유는 바로 이러한 열려 있음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존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열려 있음, 즉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는 인간 실존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다.
1.2.1 선험적인 세계와 자유(인간의 피투성과 기투성)
물론 사르트르가 인과적 한계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자신의 상황을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다. 그는 실존이라는 것이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 상황지어져 있다는 것, 즉 개인은 자신이 태어나는 것도, 물리적 또는 생물적 조건도, 또는 경제적 계급과 정치적 지위, 혹은 민족의 문화와 공동체의 상식등, 심지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과정마저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불어 자기 자신도 바꿀 수 없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멀리갈 것 없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 습관을 바꾸는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인간능력의 현실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노력하는 것보단 선천적인 문화, 인종, 유전, 언어, 고향, 역사, 재산 등과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인해 만들어진 가치관, 습관들에게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모든 것은 인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인간은 그저 더 체계적인 기계적인 사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선험의 영역인 세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또한 개인적인 기획 투사에 달려 있다. 즉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비슷하게 인간을 기투적인 동시에 피투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근거해서 일련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며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가능성을 향한 기투, 즉 자유가 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역사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연속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나'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즉 '나'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의 인과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나 '한계'는 기투적 존재, 다른 말로 하여 자유를 가진 인간에게만 유의미한 현상이다. 즉 모든 기투(자유)는 이미 도달된 현실 즉 나의 과거와 지금 처해진 상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기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한계의 극복 내지 넘어섬을 의미한다.3 이런 점에서 이 세계와 역사는 미래를 향한 기투를 통해서, 즉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과거나 현재 내가 쳐해있는 이 세계는 분명히 객관적인 것으로 더 이상 변경되지 않는 견고한 사실로서 내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한계가 지니고 있는 의미까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한계는 나의 기투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자기만의 특징은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역사적 한계이다. 그것은 태어났을때부터 그랬거나, 내가 과거로부터 살아오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창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숨겨버리거나, 또는 긍지의 원천이자 성공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자부심을 느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무엇(선하거나, 악하거나 등)인 것은 그렇게 태어났거나 또는 그렇게 창조되었거나, 또는 주위환경, 즉 유전이나 가정교육, 모태신앙 등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 과거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얼마든지 임의로 왜곡할 수 있다거나 은폐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는 비록 원칙적으로 변경불가능한 사실로서 나의 자유에 한계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기투와 하나될 수 있으며, 이러한 하나됨을 통해서 과거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투 역시 더욱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주어진 것'은 자유를 위해 제거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자유의 현실화를 위해 불가결한 전제라고 말한다.4 후술할 존재론 파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세계는 허무주의적인 세계이며, 모든 존재는 어떠한 목적도 없는 잉여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개인적 선택과 투기를 통해 사물에게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이 세계가 유의미한 세계로서 재구축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바위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산악가가 산봉우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때, 그 바위는 여전히 그냥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산악가를 방해하는 극복대상으로서의 의미가 새롭게 부여된다. 즉 인간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때 세계의 수많은 사물과 현상, 심지어 같은 인간들 마저도 이 노력을 방해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에게 어떠한 저항이나 방해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방해물로서 경험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선택을 통해 대상으로서 인격화되야 하는 것이다.
1.2.2 자유의 절대성
자유는 과거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일정한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자유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자유는 인간 실존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기에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의 무한성은 아무런 한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결코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의 한계는 바로 자유가 스스로 만들어 부과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혹자는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부자유를 선택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반론은 부자유의 선택 자체 역시 이미 자유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 포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그의 근원적 자유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며, 인간의 인간다움의 징표로서의 자유의 포기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거부함을 의미할 뿐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강조하듯이 자유는 인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자유로 뿐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 받았다고 표현한다.
1.2.2.1 자유에 대한 무한한 책임
인간은 신의 섭리라는 안정적인 길을 포기하고 자유를 택한 댓가로서 자유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존재 해야만 한다는 부조리한 사실에 무조건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그 무엇에도 우리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완벽한 자유인으로서의 로캉탱이 느끼는 좌절, 구토, 현기증이 곧 우리의 좌절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존재의 부담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인간은 종종 자기 대신 자신의 길을 선택해 줄 존재를 찾아 헤매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져 있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이 살기 위해서라면 자유롭게 선택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르트르는 이 세계에 개인과 무관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유발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시말해 직접적으로 유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저도 자유를 가지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예시로 든다. 만약 전쟁이 발발하고 '나'가 징병이 된다면, 이것은 명백한 강제이자 개인적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전쟁을 '나'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비록 군인 신분일지라도 자살할 자유, 탈영할 자유, 자폭할 자유 등 이 전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자유, 혹은 체념하고 순응하는 자유, 혹은 아무생각도 안하는 자유 등 언제나 마주해야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유야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던,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 되어 처벌을 받던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어쨌건 '나'는 전쟁이 실존하고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정해져 있는 역사의 한 특정 시대 속에 내던져 있으며, 그 시대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무한히 자유로운 동시에 그에 합당한 무한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말해 본다면 어떤 선택과 그로부터 비롯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 아닌 다른 존재에게 비겁하게 미루는 것은(이러한 책임 전가는 유신론적 결정론이나 유전자 결정론, 환경 결정론 등 많은 태도에 입각할 수 있다.) 적어도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적 자유의 파괴와 아울러 그에 기초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의 훼손을 의미한다. 즉 자유의 숙명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묵묵히 받아 들이는 사람이라면, "나의 삶을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식의 비겁한 발뺌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출생을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요구한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오직 자신만이 질 수 있고 또 져야 한다.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한 책임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물을 수 없으며, 나의 생일을 저주할 수 없으며,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출생과 나의 세계 내 존재라고 하는 현사실에 대한 이러한 여러 가지 태도는 나의 출생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여러 가지 방식 이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원하건 원치 않건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일정한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는 오직 일정한 상황 안에서 가능할 뿐이며, 거꾸로 이러한 상황은 오직 자유로운 존재에게만 허용된다. 다시 말해서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향한 기투와 선택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내가 처해 있는 특수한 처지, 나의 과거, 나의 몸,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동료와 환경세계 등등 이미 주어져 있는 현실성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본질에 대한 실존의 선행성을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입장은 자유로운 선택에 앞서 주어져 있는, 선택을 모종의 방식으로 규정하고 지배하는 그 어떤 선험적인 가치체계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모든 선택에 대한 절대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낳게 된다.
1.2.3 자유와 불안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자유의 실재성을 불안이라는 현상을 통해 설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인의 삶을 책임져주는 객관적인 가치의 기준이란 건 없으며, 개인은 스스로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르트르는 인간이 불안을 느낀다고 말한다. 즉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불안은 자유 앞에서 느끼는 일종의 현기증으로, 자신의 자유, 책임에 대한 경험이다. 자유를 의식하는데서 비롯되는 이 불안은 그것이 허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우선 미래가 가능성으로서 '나'의 앞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미래의 가능성을 배제하고서 나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나는 아직 나의 현재 모습이 아니다. 즉 미래는 나의 존재 가능성일 뿐 아직 나의 현실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저 미래를 향한 가능성, 언제라도 무화가능한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가능존재일 뿐이다. 불안은 바로 이처럼 인간이 미래의 불확실한 존재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비롯된다.
예컨대 지방대학생인 '나'가 보다 사회적 명성이 높고 내실이 건실한 명문대학교로 편입을 하기로 결심한 경우, 내가 결심한 이 입시는 나 자신의 존재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나를 불안케 한다. 불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편입도전이 실현되지 못하고, 한낱 가능성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즉 이러한 가능성이 철저하게 무화되어 버릴 수 있다는 앞선 의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안은 동시에 나의 자유에 대한 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무에 대한 불안 안에서, 그 불안을 통해서 나는 다름아닌 나 자신의 자유를 가장 뼈저리게 의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내가 경험한 불안은 결국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한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 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피 심리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은 하이데거와 굉장히 유사한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부터의 도피, 즉 불안으로부터 도피를 꾀하고 있다. 자유와 불안으로부터의 이러한 도피를 사르트르는 '불성실', 혹은 '정직하지 못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불성실의 존재방식을 택한 인간은 그저 세상 일로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사람,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세인'으로 전락하여 의미없는 단순반복을 계속하거나, 유신론적 종교나 보편진리로 도망하여 불안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유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하므로, 이 불성실한 존재방식은 인간 실존의 핵심인 자유에 대한 회피로서 단어 그대로 '불성실 그 자체'인 것이다.
1.2.4 아리스토텔레스·칸트의 전통적 자유관과의 비교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 따르면 자유가 없다면 책임이 없다. 즉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때에는 그에게 '자유'가 있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이는 죄로 물을 수 없다. 이러한 자유관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통념으로서 자유와 책임의 관계에 대한 정립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전통적 가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사르트르도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함으로써 책임도 무한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에서 사르트르는 전쟁조차도 자유에 의해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한 사르트르의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사르트르 비판자들에 따르면 사르트르에게는 죽음에 대한 집념이 없다. 그가 말하는 미래란 죽음 직전까지의 현세에만 국한된다. 즉 사르트르의 사상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상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자유관에 근거해보자면 자신의 선택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자유 선택의 결과일 경우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르트르는 자유의지만 과격하게 주장했지 자유의지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자유론이 중요한 점은 인간 존재의 사실성은 직접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직시해야 하는 문제가 생길때', 즉 인간에게 무한히 주어진 것 같은 자유는 항상 주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났을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자유관에 근거하면 '~의 자유'는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적인 자유가 아니며, '~으로부터의 자유'가 본래적인 자유이다.
물론 사르트르가 초지일관 자신의 극단적 자유관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정치철학자가 아니라 일종의 형이상학(실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이다. 사르트르가 실질적인 인간 삶에서 제기되는 강제문제를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은 많은 강제와 억압은,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운 삶'따위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어야만 '억압'으로서, '부정의'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노예의 삶을 선택한다면 억압은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스스로 '억압'이라는 '장애물'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언제나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실질적으로 느끼기에는 부자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르트르의 사상에 따르며 자신의 실존을 직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의 목표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했을 경우는 물론, 혹여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상관없이 쳐해진 사태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언제나 자유롭다.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즉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다고 하여 자신이 그것을 뛰어넘어 완전히 자기 의사에 근거한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다고 위안하는 삶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으며, 정당화될수 도 없다. 더불어 사르트르는 사회체제나 타인이 개인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유의 억압은 '본질적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적 자유는 인간의 존재조건이기 때문에 어느 상황에서라도 실존한다. 자유의 억압이라는 것은 '실질적 자유'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유사한 자유관을 주장한 철학자로는 한나 아렌트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녀는 히틀러 다음가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인격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며, 그저 상관인 히틀러의 지시를 묵묵히 따르기만 하는 일반 관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를 아이히만에게 물었다. 그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가 학살의 근본 원인이다. 결국 자신에게 행동의 자유가 없었더라 하더라도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 존재론
2.1 즉자존재
사르트르는 자유의 현상학에 대한 존재론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우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식의 유무 여부를 기준으로하여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과감한 결단을 단행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의식을 가진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라는 두 존재영역이 존재하는데, 사르트르는 전자를 대자존재5로, 후자를 즉자존재6로 명명한다. 즉자존재는 산이나 바위, 책상, 풀, 강아지, 전쟁 등과 같은 사물이나 현상, 상황이나 사건 등 객관적 필연성을 가지는 것들로서 기계적이다. 이러한 즉자존재는 '존재론적 밀도'가 무한히 강한 존재자로서 고정된 본질을 가진다. 즉 그 어떤 다른 것들과의 관련도 없이 그냥 그 자체로 자기동일성을 지닌 것이다. 예컨대 즉자존재에 속하는 강아지는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강아지가 강아지인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2 대자존재
반면에 사르트르는 대자존재, 즉 인간의 의식을 존재론적으로 논의하는데 있어서 "의식은 의식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에도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즉 대자존재인 의식은 존재존재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의식은 그것의 존재방식조차 가늠할 수 없다"고 스스로 답변한다. 즉 대자존재, 다른 말로 인간의 의식은 고정된 자신의 존재 규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동일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물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전반성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주장을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개념에 따른다면 인간의 의식은 오직 ’지각한다‘, ’판단한다‘, ’추리한다‘, ’상상한다‘, ’의욕한다‘, ’느낀다‘는 등 구체적인 활동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의식은 무엇을 지각하고, 무엇을 판단하며, 무엇을 추리하고, 무엇을 상상하며, 무엇을 의욕하고, 무엇을 느끼지 않고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은 외부(즉자존재)를 의식하며 존재로서의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해 나간다. 즉 의식의 외부로 지향해 나감으로써 대자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재근거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사르트르는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의식은 항상 ~에 관한 의식이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영역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필연적으로 대자존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2.3 무화작용
사르트르에 따르면 대자존재는 '부정'의 방법인 '무(無)화작용'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러한 무화작용은 인간의식의 존재방식이다. 즉 인간의식이 사유한다(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것인데, 이러한 지향이 매순간 이루어지는 '부정'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향성을 인간존재의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방식으로, 무화작용을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존재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무화작용은 일상적인 예시를 통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가령 '나'가 'A7'라는 사람과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을때, 그와 약속한 카페에서 '나'는 'A'를 찾기위해 사방을 둘러 볼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것에 있는 모든 존재들, 예컨대 탁자, 의자, 다른 사람들 하나하나 등을 겨냥하고 잘라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존재 또는 특히 그 사람이 'A'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해나가게 된다. 즉 의식은 존재하기 위해 매순간 항상 외부의 대상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데, 의식이 대상으로 삼는 존재가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과정이 '무화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더불어 무화작용은 앞으로의 어떤 존재를 지향하여 종전의 존재를 무화했을 때, 그리고 자기가 지향하는 그 존재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을때 일시적으로 무(無)가 창출된다. 앞에서 예시로든 사례에는 최종적으로 'A'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그를 '나'의 의식의 지향성 구조로 세운 후 비로소 의식은 무화작용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는 것이다. 물론 머지앉아 다시 무화작용은 개시된다. A와 무슨 대화를 할지, A와 무엇을 먹을지 등을 생각하며 다시 의식은 사유를 재개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확인에 있어서도 의식은 대상을 부정할 때 자기 자신이 대상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통해 자기를 의식한다. 예컨대 "나는 그 대상이 아니고, 그 대상 또한 내가 아니다. 이 탁자는 내가 아니고, 나는 이 탁자가 아니다. 나는 이 대상들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이런 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자기확인방식을 사르트르는 '반영-반사'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인간의식은 무화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근거를 채우며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해나가고, 외부의 사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심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없이는 의미가 없는 허무적인 세계이며,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2.4 정리
이러한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들어나는 의식의 주체인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인간은 항상 자유롭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으며, 영원히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유라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 즉 무언가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실존의 어려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진다. 인간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의식을 비어 있는 상태로 둘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겨냥하고 잘라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죽을 때까지 결여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무엇인가로 계속해서 채워야 하는 실존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존재의 존재론적 우위, 곧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 (대자존재) 에 대한 즉자존재의 ‘존재론적 우위’를 이해할 수 있다.
- 이러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염세주의와 무행동의 성격을 띈다고 오해받은 적이 있으나, 오히려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을 최극단의 낙관주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적으로 자유, 책임, 그리고 행위의 수행에 호소하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을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놓기 때문이다. 역으로 사르트르는 근엄성적인 인간을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 "만일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그의 격언또한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다.
- 예컨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처해있는 상황은 나의 지난 과거(유년기 내지 청년기 등)가 누적된 결과이지만 거꾸로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즉 미래의 나를 과거의 나보다 더 발전한 존재자로서 세우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 즉 선험적인 세계가 마치 자유의 원인인 것처럼 오해되서는 안된다. 주어진 것은 순수한 우연에 불과하며, 이러한 우연을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자유가 확인되고 현실화되는 것일 뿐이다.
- 그 자신을 위해 있음
- 그 자체로 있음
-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직접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예시로 들지만 이 글에서는 A로 대체하도록함
<사르트르의 인간관계론(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란 주체성과 자유를 가진 주체이다. 즉 타자의 실재성은 나 자신의 실재성과 같이 절대적인 확실성을 갖는다. 인관관계에 있어서 사르트르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절대적인 자유를 가진 각자의 주체들끼리 대면할 경우 양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되느냐 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스스로 타인에게는 두가지 존재지위가 있다고 답한다. 1차적 존재지위는 지옥으로서의 타자이다. 이때 타자는 '나'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실존을 황폐화시킨다. 그러나 타자의 2차적 존재지위는 나에게 존재의 근거를 부여해주는 필수불가결한 매개자로서의 타자이다. 모순적이게도 이 두 특징은 동전의 양면마냥 병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타자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지옥이다. 타자에게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자를 존재론적인 지옥으로 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타인의 내면은 결코 알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하나의 인격임을 확신하듯 일상적인 실생활에서는 인간의 기준이나 정상의 표준에 관한 여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즉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기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인간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특수한 예외적인 경우, 예컨대 이론적·논리적 차원에서는 나를 제외한 타인이 인간인지 아닌지, 이 인간의 행동이 정상적인지 비정상적인지와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는 직관할 수 없으며 그 외표인 행동을 통해서만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의 해답은 결코 단순하거나 용이치 않다. 즉 엄밀히 따지면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실제로 그러면서 안 그런 척하거나 또는 안 그러면서 그런 척하는 경우를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인의 마음·정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아니 도대체 외형상으로는 인간처럼 생긴 존재가 인간의 정신·심리를 소유하거나 있기나 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매우 난감한 문제로 등장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의 진짜 생각과 감정, 즉 내면은 결코 알 수 없다. 타인이 겉으로는 A를 표방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B나 C를 생각하고 있을지, 아니면 곧이 곧대로 A를 생각하고 있을지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의 내면을 알려고 하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설명한다.
먼저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의식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는 유비론1이다. 즉 타인의 마음은 직접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처한 환경과 그의 행동의 연관 속에서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의 마음을 추정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가 과거 거리에서 걸인을 만났을때 불쌍한 생각이 들어 돈을 주곤 했다고 쳤을때, 유비론에 따른다면 이는 '나'가 돈이 없다면 몸과 마음이 힘들기 때문에 걸인의 마음상태또한 그럴것이라고 추리했기 때문에 행한 결과이다.
그러나 유비론이 정확할 확률은 매우 빈약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비론은 수치로 정확하게 드러나는 확실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결과로 얻어진 개연성, 확률이기 때문이다. 이는 귀납추리에 해당하는 것인데, 귀납추리는 그 특성상 사례가 많을 수록 정확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유비론의 문제점은 그 사례라는 것이 단지 나 자신의 경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나 자신의 경우 또한 굉장히 특수한 사례이다. 이처럼 유비론을 통해서는 오롯이 타인의 의식 상태만을 언급할 수 없다. 즉 근본적으로 유비론의 방법론은 무의미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행동유형을 통해 마음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유비론의 근본전제또한 불확실하다. 이 두가지 특징을 고려한다면 유비론은 나를 통하여 타인을 살피려 함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유아론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비론은 상당히 인과적 (개연적)성격을 띄고 있는데 사르트르는 이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에 따른다면 인간은 의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때가 많다. 예컨대 식사를 하는 행동이나 걸을때 양 팔이 흔들리는 것 등 수많은 신체적인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이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이상 대다수의 경우 사람들은 음식을 어떻게 씹을지, 걸으면서 팔을 어떻게 흔들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행해져야할 행동을 단순한 반사작용으로 여기지 않고 의식적으로 파악하려면 도리어 어색한 결과가 나올 뿐이다.
즉 유아론자들의 주장처럼 타인의 존재는 의심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결코 인과성이 적용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그에 따른다면 인과성이 적용되는 대상은 직접 경험할수 있을 경우, 예컨대 과학의 영역등에만 국한된다. 즉 그 확실성여부가 그때그때마다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인과적 분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나'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도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추리에 의한 확인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전반적인 직관에 의존하므로 인과적 분석과는 전혀 상관 없다.
2. '나'와 타인의 관계
2.1 지옥으로서의 타자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 자신이 유일하게 존재할때에는 내가 곧 시선이고 관점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적인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각자 서로 절대적인 주체성을 가진 '나'와 타자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 '나'는 타자의 시선 혹은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존재론적 지위에 변화가 생기며 절대성을 잃고 객관화되고 정형화됨으로써 타자의 세계 안에 정의된 하나의 대상, 외부의 힘에 의해서 판단되고 결정되는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관계에 의한 경험을 "수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수치의 경험으로서의 인간관계를 열쇠구멍을 통해서 옷벗는 여인을 훔쳐보는 남자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훔쳐보는 남자는 자신에 대하여 주체가 되며, 나체의 여인은 저절로 대상이 된다. 그러나 만약 지나가던 사람이 훔쳐보는 사람보고 호색한이라고 조롱한다면, 훔쳐보는 사람또한 그 자신이 대상이 된다. 이렇듯 사르트르는 수치심은 물화된 존재, 즉 다른 사람이 나의 정체성을 마치 생물중의 한 사물로 고정화하는 경험에서 유래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하여 인간은 겁쟁이·위선자·착한 사람·훌륭한 사람 등으로 규정되는데, 이는 곧 잉크병이나 탁자같은 사물을 대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므로 인간실존에 대한 수치이며, 인간만이 자신이 사물로 환원되는 이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와 함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종종 자기 자신을 사물화하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소외, 즉 즉자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기 자신만의 절대적인 주체성, 실존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때에만 가능하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결코 동등해질 수 없으며, 이 양자는 반드시 주체-대상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나의 실존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와해되고, 황폐화된다.
이렇게 주체성을 가진 인간은 절대로 타자를 위한 객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주체이길(즉자존재가 되지 않길) 원한다. 그러나 타자는 나의 자유를 위협하고 나로 하여금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며, 나로부터 세계를 훔친다. 따라서 '나'는 타자가 나를 객체화하기 전에 먼저 그를 객체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며, 마찬가지로 타인또한 나로 인해서 객채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나를 객체화하고자 시도한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내걸고 서로를 강등시키고 스스로가 승격되기 위한 시소와 같은 투쟁을 하게 된다.
2.2 매개자로서의 타자
그러나 타인은 그저 나에게 지옥으로써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가정함과 동시에, 자유와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초해나갈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악한'이라고 비난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대자존재로서 절대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근거를 산출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타자를 필요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실존이 타인에 의해 황폐화됨과 동시의 실존의 근거도한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 의해 객체화되고 즉자화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객체화되고 즉자화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시선을 끊임없이 받아야하는 이유이다. 이런점에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근거를 갖추게 되었으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권리는 나와 타인이 50 대 50 으로 나누어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사르트르는 이를 타자가 나에게 부여하는 의무의 일종으로서 설명한다. 먼저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은 '나'에 대해 비밀을 가진다. 여기서 비밀이라 함은 타자가 나를 즉자존재로서 어떻게 어떻게, 즉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할 따름이며, 설령 그가 설명한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에 붙여진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즉자존재로서의 모습과 나 자신이 놓여진 그대로의 대자존재로서의 모습을 결합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실존을 이룩할 수 있다. 이는 아마 나의 실존을 황폐화시킴과 동시에 나의 존재의 근거를 부여해준다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사르트르 나름대로 도출해낸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타자가 나에게 "너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말 했다면, 나는 그가 말하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렇게 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자는 나를 즉자존재로서 바라보았지만 나는 대자존재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요구하는 '공부 잘하는 사람'(즉자존재)으로서의 모습과 나 자신이 놓여진 그대로의 모습(대자존재)로서의 모습이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나의 존재, 즉 실존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항상 대자와 즉자의 결합상태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면 타자가 나에게 너는 무엇 '이다' 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타자가 보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따른 동화를 시도하는 정도만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완전한 대자와 즉자의 결합을 이룩할 수 없다.
요컨대 만약 나 자신이 단독적인 자유라면 세계는 나의 것이며 그 주인이 되지만, 이는 현실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나 말고도 다른 수많은 자유로운 존재가 존재한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다른 자유로운 존재들에게 침해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나는 객체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며 이 세계를 온전히 내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주체성과 투쟁하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대자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존재가치를 창출해낼 수 없다. 즉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에 의해 객체화되고 즉자화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근거를 마련하고 실존해나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인은 나에게 투쟁의 대상임과 동시에 나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해줌으로써 나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자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역설적인 존재라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3. 나와 타인의 구체적 관계
존재론적 관계에 의해서 인간 관계에서 주관들 중의 하나는 타자에게는 대상이 되므로 두 자유가 조화롭게 공존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의 의식이 대자적인 무로서 그 자유로운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물을 부정할 때에는 또다른 의식, 즉 반대되는 자유로운 부정의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요컨대 주관에 대하여 타자는 사물이 되므로서 공정한 관계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인간관계상의 근본적인 딜레마가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인식과 투쟁이 발생한 후 개인이 가지는 딜레마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별하여 제시한다.
첫번째 태도는 '마조히즘'적이다. 이 때 '나'는 자존감과 정체성이 좁아지면서 나 자신의 존재근거를 외적 존재에 의해서 확증되거나 정당화될 필요성을 느끼고 타인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는다는 것은 먼저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내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하여 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함을 필요로 하다.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때 나는 이와 동화되고자 그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태도인 '착한 사람'이라는 점을 나에게 흡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므로 노예가 되고 타인은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존재이므로 나의 주인이 된다. 혼자만의 자유의 불안에서 도피하면서 자기 자신은 노예적 부자유의 수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조히즘적 태도는 역설적인 비논리이다. 왜냐하면 내가 타자에 대하여 욕망되어지는 대상이 되기를 추구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운 대자존재로 자기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태도는 '사디즘'적이다. 이는 첫번째 태도와는 반대로 객체화되지 않고자 하는 의지와 동시에 타자를 나의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배우로 간주하듯이 나 자신이 주체를 가진 주인으로 군림하고 타자가 나의 일방적인 노예로서 객체화되길 바라며 존재론적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주인이 되며, 타자는 노예가 된다. 그러나 마조히즘적 태도와 마찬가지로 사디즘적 태도또한 비논리이다. 역설적으로 사디즘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내가 타자에 의해서 나의 자유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결코 진정한 주인이 아니며, 여전히 타인에게 어느정도 종속되어 있다. 더불어 사디즘적 태도로는 인간관계에서 만족감또한 느끼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아마도 타자는 그에게서 자유로운 주관성을 빼앗으려고 하는 나의 노력에 저항하기 때문에 나는 강제 또는 폭력에 호소해야하기 때문이다. 즉 새디즘에 있어서 나를 인정하는 타자는 자유로운 주체로서가 아니라 강압받고 있는 노예로서 강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투쟁적인 성향을 가지는 마조히즘적 태도와 사디즘적 태도의 절충으로서, 세번째 태도인 '무관심'의 태도가 제기된다. 이는 만일 내가 타자와의 어떠한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다면, 인간관계상의 딜레마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발흥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무관심도 다른 두가지 선택과 마찬가지로 비논리이다. 타자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결정또한 결국에는 타자에 굉장히 얽메이고 있는 관념에 의한 것이며,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타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을 부정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를 타인에게 구속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3.1 '유희'의 태도와 인간관계상의 희극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대중적인 인간관계의 태도는 네번째 태도인 '유희'의 태도이다. 이는 타자가 나를 보는 이미지대로 나를 맞추어서 연기하려는 태도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나를 바보같다고 생각할 경우, 나는 그 이미지에 맞게 바보스러운 행동을 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지배적이기는 하나 특히 나와 존재론적 힘의 불균형이 클 경우 더 많은 사례, 예컨대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힘이 강한 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고, 때문에 타자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 앞에서 연기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착실한 모범생'으로서의 자식을 원하는 부모의 개인적 욕구에 의한 닦달에 못이겨 자포자기한 자녀들이 자신의 본래적 모습은 그러한 사람이 아닌데도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부모의 이상향에 걸맞게 행동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유희 태도를 통해서 구축되는 구체적인 인간관계를 '희극'의 일종으로서 규정한다. 이는 나의 관점에서 ‘타자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부여받기 위해 연기를 하는 태도'이므로 지극히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본질을 지닐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외재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본질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과는 반대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있는 그대로의 주체적인 나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타자에 의해 보여 지는 나를 의식하여 진정한 나를 부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태도는 선술한 부모의 요구와 자녀의 순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매우 지배적인 인간관계상의 태도이다. 당연히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이러한 태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유희의 태도에 대한 실존주의의 거부와 부정은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에 잘 드러난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진정한 실존적 주체이다. 그가 진정한 실존적 주체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조금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엄마의 시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며, 엄마의 장례식 다음 날에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나간다. 뫼르소는 자신의 행위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연기적 태도’를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실존을 구현해낸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절 중 하나인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존의 예찬인 동시에, ‘연기적 태도’에 대한 부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어쨌건 이렇게 타자와 관계함도 전적으로 관계하지 않음도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자기 자신의 실존은 반드시 훼손된다는 점에서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지옥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 나의 행동 유형과 타인의 행동 유형간의 대비를 통해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의 대비가 가능하다고 가정하여 자신이 타인의 마음유형을 추정하는 것
<샤르뜨르의 몸존재론>
1. 몸을 무시하는 편견과 그 한계
유럽 문화 속에서 몸은 그리스 문화와 그 영향을 받은 기독교를 시작으로하여 오래 세월동안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했다. 그리스 사유에서 몸은 저주받은 영혼의 감옥이자 현세의 욕망에 인간을 이끌리게 함으로써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는 오류의 원천이며, 참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몸에 관한 그리스인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기독교라는 세월의 강을 건너면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실천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후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이전의 형이상학적 사변을 끊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신념을 가졌던 근대인도 몸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생각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데카르트의 시도는 의식의 자기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인간의 몸을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세웠다. 데카르트를 비판한 로크 이래의 경험론도 특별히 다를바가 없어보인다. 인식의 성립조건에 관한 그들의 이론은 지각의 단계에서 출발하여 심적인 과정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몸들 단순히 감각의 담지체로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몸을 무시하는 세계 이해는 현재까지도 경험적·실증적·과학적 사유가 가지는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전히 사람의 몸은 관찰과 실험의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되어 해부되고, 다시 기계적으로 결합된다. 이렇듯 그동안 몸은 단순히 하나의 육체로서 해석되어 왔으며, 이 해석은 몸을 다른 사물들과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게 하거나, 아니면 인식론의 출발점인 감각의 담지체로 이해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몸을 단순히 물체로서의 육체이거나, 심리적인 담지체인 신체로 간주하면서 의식과 몸을 인식론적으로 대립하는 관계로 간주하는 시각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오직 정신만을 유일한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로 삼은 전통적인 인식론적 견해를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추상적 사고'의 결과이자 과학자들의 몽상이라고 비판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스레 몸이 경험하게 해주는 삶의 의미를 무시하며 인간을 '유령'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격하하였으며, 인간의 삶을 물질로 이루어진 관리하고 통제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신념을 더욱 강화시켰다. 사르트르는 몸을 (그저 육체나 심리적 담지체로서 몸을 평가하는) 인식론적 관점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존재론적 관점에 따른다면 인간은 마음과 몸의 통일성으로 구성된다. 즉 몸과 의식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의식은 몸의 행위를 통해 세계 안에서 활동함으로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은 단순한 과학적·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매개자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인 것이다.
2 사르트르의 몸 개념
사르트르의 몸에 관한 설명은 ‘존재론’의 다른 구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의식이 곧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2.1 대자존재로서의 몸
사르트르는 의식을 설명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몸과 사물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을 다르게 하자면 사르트르에게 있어 몸과 의식은 두 개의 실체로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이다. 즉 대자존재는 전적으로 의식임과 동시에 몸이어야 하는 것인데, 인간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유령같은 존재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세계와 관계해야 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몸은 인간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요컨대 추상적인 존재인 의식이 구체적으로 세계내에 존재하며 세계 한가운데 있는 사물들을 도구로써 활용하면서 대자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들을 전개하기 위해서라면, 다시 말해 인간이 사물과의 관계와 세계의 의미를 부여하는 대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라면 의식은 전적으로 몸일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다.
즉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은 외재하는 물체(예컨대 책상)처럼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이며, 의식과 구분이 불가능한 하나로서 존재한다. '나'는 경험주체인 몸이 없는 개별화된 대자 혹은 의식으로 있을 수 없다. 이는 의식이 몸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대자적인 측면에서 의식과 몸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보다는 그 몸으로 부대끼는 사물들을 의식하기가 십상이다. 인간은 행위를 할때 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접속하는 사물들에 집중한다. 이렇게 '나'는 사물을 보고 만지는 것을 통해 '나'의 몸이 존재하는 것을 전반성적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몸은 실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제외하곤 의식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자기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지고 존립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외현'적인 존재라는 것도 의식과 동일하다. 이렇듯 사르트르에게서 의식과 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의식과 몸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의식의 결핍은 곧 몸의 욕망으로 발현되가 몰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이 자기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투하고자 한다면 몸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상황'으로서 의미있는 공간으로 구성한다. 즉 의식이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몸이 환경세계를 욕망에 따라 사물의 연관을 구성하여 세계로 구축하고, 그 구성이 몸이 선택한 상황이 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몸은 단순히 사물들의 한 가운데 있으며, 주어진 사물에 수동적으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은 사물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물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하나의 상황을 존재시킨다. 달리 말하면 몸은 주변의 모든 사물의 의미를 나타나게 하는 중심이다. 이렇듯 몸이 세계 전체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자로서의 몸은 하나의 상황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이렇지 않다면 대자로서의 의식은 현실 속에 자기를 개입시킬 수 없다. 내가 몸으로 엮인 세계를 존재시킬 수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의 몸은 세계의 표면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의 몸은 거리의 관목이 가로등 불빛 밑에 가리워져 있다는 사실, 다락방이 육층 창문 위에 있다는 사실, 또 달리는 자동차가 트럭의 저쪽을 오른쪽에서 왼족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 가운데에도, 또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가는 저 여자가 그 옆의 남자보다 키가 작아보인다는 사실에도 존재한다." 즉 나의 몸은 세계와 같이 존재하고 있고, 온갖 사물을 통하여 모든 방향으로 살포되어 있음과 동시에, 그들 사물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역할한다. 이러한 '부재하면서도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임' 또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중 하나에 해당한다.
2.1.1 대자존재로서의 '타자의' 몸
사르트르는 대자존재로서의 '나의' 몸과 마찬가지로 대자존재로서의 '타자의' 몸도 파악한다. 즉 개인의 경험상에서 타자의 신체는 일차적으로는 나의 세계 속에 있는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배치되어 있는 즉자적인 대상으로 파악되지만, 사실 타자의 신체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대자존재로서 모든 사물의 중심인 것이다. 더불어 사르트르는 타자의 몸을 일차적으로는 하나의 종합적인 전체로서 파악하고 이후에야 '나'는 타자의 신체가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의 중심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타자의 몸은 단순한 대상으로 치부될 수 있는게 아니라 타자 그 자체이므로 타자가 활동하는 공간과 그 공간 속에 있는 사물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대자존재로서의 내 몸이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사물에 확장되어 있듯이 타자의 몸또한 모든 사물에 하나의 세계로서 은밀하게 퍼져 있다. 모든 사물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그것을 도구로서 사용할 때 그것들이 나의 몸의 일부이듯이,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예컨대 '나'가 타인을 만나러 그의 장소에 방문했을때 그가 없다고 쳐도, 그의 그 장소는 그 사람의 몸을 '나'에게 드러낸다. 그 장소의 책상은 '그가 글을 쓰는 책상'이며, 그 장소의 창문은 '그가 보는 온갖 대상을 비치는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문'이다. 또한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할때에도 '나'는 그의 행동을 그의 의식이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로 파악한다. 거리를 거늘고 있는 한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때, '나'는 시간․공간적인 하나의 총체(가로-차도-보도-상점-자동차 등등)에서 출발하여 그의 보행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러한 시간․공간적인 총체의 어떤 몇몇 구조가 그 남자가 '앞으로 걸어갈 것', 즉 보행할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그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시공간적인 총체에서 타인의 몸을 파악할 수 있다.
2.32 즉자존재로서의 몸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을 하나의 사물로서 대상화할 경우에는 몸 그 자체가 인간의 필연적인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비로소 몸을 통해 세계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개 사람들은 몸과 의식을 분리하며 몸을 대상으로서의 육체로 포착한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내가 보는 남의 몸' 혹은 '남이 보는 나의 몸', 즉 '사물화되어 무시된 즉자적인 몸' 또한 분석하고 논구함으로써 만약 몸을 대상화하여 객관화시켜 실증하려고 한다면, 구체적인 몸의 의미를 넘어서 세계 전체의 존재의의조차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 몸을 육체로서 무시하게된 이유는 타자에게서 기인한다. 그에 따른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나의 몸과 나에게 주어지는 남의 몸의 존재구조는 다르다. 즉 타인은 나에 대해 대상인 타인, 그리고 타인에 대해 대상인 나 라는 두 가지 형식 하에서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몸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 즉 몸은 언제나 전반성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즉, 의식은 먼저 대상을 인식하고 그러한 대상을 인식하면서 자기 자신이 존재함을 경험하지만, 자기 자신 그 자체를 대상으로서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식은 기본적으로 실체로서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어서 외부 존재자를 꾸준히 부정하는 무화작용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아는 철저히 반정태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존재론적으로 대자존재는 즉자존재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의식 즉 몸이란 실체로서 대상화하여 의식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는 타자의 시선이 '나'의 존재에 깊이 침투하여 '나'로 하여금 완전히 동일한 나의 의식과 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몸을 대상으로서의 육체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대자존재로서 전반성적으로, 의식활동을 통한 은근히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는데, 타자의 눈초리로 인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물화하여 즉자존재로서, 즉 내 몸이 나에게 타자와 같은 낮선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몸의 존재론적 상황을 '몸의 제3의 존재론적 차원'이라고 명명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몸은 실제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환영처럼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눈초리에 포착된 '나', 그중에서도 남의 방문앞에서 타자를 엿보고 있다가 그 모습을 타자에게 틀켰을 경우의 가상사례를 '몸 즉자화'의 예시로 든다. 이러한 경우 자신은 타자의 눈초리 속에 갇힌 '나'를 반성적으로, 즉 어느정도는 대상으로 간주하며 의식한다. 그러나 나는 타자의 눈초리 안에 같힌 나의 인격과 자아, 즉 타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도저히 알 수 없다. 이렇듯 타자는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을 쥐고 있는 자이며, 타자에 의해 나는 즉자존재화, 즉 대상화된다. 이렇게 타유화되어 있는 '나'는 결정적으로 언어로서 대상이 된다. 타자가 나에 대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가 나를 어떤 존재로 선언하는지에 따라 나는 타자가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타자가 나를 '비열한 인간'이라고 선언했다면, 나, 즉 몸은 언어 속에, '비열한 인간'이라는 '인격적 개념'속에 갇히게 된다. 물론 이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타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타인과 나는 서로의 세계 속에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배치된 사물과 유사하게 대우되기 때문에, 나와 타인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더 이상 사물 전체의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존재일 수가 없으며, 자신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부정되고 붕괴된다. 물론 비단 우주의 중심으로서 자신의 지위만 무너지는 것을 떠나서 이 환경세계는 공적 공간이므로 사물들또한 나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보았을때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존재로서의 몸은 곧 대자존재로서의 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대자존재임과 동시에 복수개체이기 때문에 즉자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사르트르의 몸존재론의 의의
몸 이론에 있어서 사르트르의 파격적인 창의성은 몸을 육체로서 이해하지 않고 의식과 동등한, 인간을 세계에 존재하게 해주는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는 내 '몸'이 지금의 육체적 조건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히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그다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몸으로서, 하나의 대자존재로서 존재하는데 있어서 지금 여기의 육체적 조건은 어떠한 관계도 없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얼굴의 생김새나 키와 몸무게, 머리스타일, 의복과 화장의 상태등은 자신의 존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도 대개는 상식적으로 몸을 전적으로 육체로,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상식이라는 편견을 깨부수고 인간의 몸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간파한 것이다.
<샤르뜨르후기>
1.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한 사르트르
기존의 사르트르는 정치에는 사실상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예술과 문학에 심취해있던 철학자였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기간중 전쟁의 참상과 1년여간의 수용소생활을 겪은 사르트르는 역사 속 인간들의 연대성을 체험하면서 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자유가 가지는 실존주의적 의미의 강조, 집단과 역사같은 외부배경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 개념등이 전기의 자유이해의 특징이었다면, 후기로 접어들수록 사르트르에게는 자유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사회성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결국 이러한 관심의 변화는 사르트르로 하여금 젊은 날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다소 개인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자유관이 일종의 철학적 환상은 아니었나 하는 회의에 빠뜨리고, 이러한 회의는 그를 마르크스주의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후기에 들어서 사르트르는 전기의 자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무엇이 소외인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자유 이론, 자유가 얼마나 많이 조작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고, 또 자기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자유 이론은 사실상 끔찍한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자유 이론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유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고 믿는 것 역시 끔찍한 착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현실정치와 맞물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사회주의적 존재로서의 인간개념과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받아들였지만, 당시 사르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굉장히 경직된 상태였다. 그에 따른다면 당시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주체인 인간 각각의 삶을 사물로, 대상으로만 취급할 뿐 살아움직이는 실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적 사상이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입장을 받아들이되 인간이 구조와 세계와 자신을 결정짓는 하부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즉 실존주의적 믿음을 전제를 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어쨌건 진정한 자유는 마르크스주의적 가치관에 근거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1.1 마르크스주의 비판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우리 시대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동유럽에서 선전하는 것과 같은 기계론적인 반인본주의적 교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와의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폐혜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 따른다면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즉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제 기능을 다했다면 실존주의는 필요하지도 않으며 탄생할 이유조차 없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진리이나 불행히도 정지된 상태이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지한 이유를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이후 소련이라는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정지되어 버린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을 사르트르는 '관념론'과 '폭력'으로 지적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개별자와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미 이루어진 총체화 속에 개별자들을 끼워 맞추어 버리는 관념론화됨으로써 인간 각각의 삶을 사물, 대상으로서만 취급할 뿐 살아있는 실존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개별자에게 폭력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실존주의만이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 영역 모두에서 자라난 기형의 잡초를 쫍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의 설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는 변증법을 통한 개별자의 총체화로의 역사 발전을 이야기한 헤겔의 입장에 반박했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 개별자의 고통·욕구·정열·괴로움등은 개별자의 삶 속에 살아있는 것들이며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라도 초극되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지성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실재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개인의 실존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변증법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관념론에만 입각해서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고, 관념에서 벗어나 '물질적 노동'과 '혁명적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당대에 와서 현실의 운동성을 상실하고 총체성의 도식으로 고유한 개체성을 억압하고 있기에, 사르트르는 현실을 잃어버린 죽은 마르크스주의에 현실을 되살리기 위한 처방으로서 실존주의의 역할을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2.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스 좌파에 관련한 시대적 배경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기존의 절대왕정은 '왕'과 '귀족'의 국가였으므로 아직도 귀족의 힘이 너무 강했기에 혁명이후 설립된 국민공회에서는 두 개의 파벌이 대립하게 되었다.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왕당파와, 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화파가 그것이다. 왕당파는 자연히 기성체제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는 쪽으로, 공화파는 이를 깨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현하는 쪽으로, 양자는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792년 공회에서 왕당파를 축출한 공화파는 다시 내부적인 노선투쟁에 직면하는데, 대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좌파)와 부르주아적 이해를 대변한 지롱드파(우파)가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프랑스 지식인들은 전반적으로 자신이 부르주아 계층과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대부분이 자신이 좌파이거나 과격론자,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좌파는 영미권 세계의 좌파에 비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성향이 전반적으로 훨씬 강하다. 더불어 푸리에(Charles Fourier)와 생시몽(Henri de Saint-Simon), 소렐(Georges Sorel)을 사상을 비롯해서 프랑스에는 과격한 정치 사상의 전통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분의 프랑스 좌파활동의 철학적 기반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공산당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지식인들 마저도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이나 가치관에 관련해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적으로 가장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실정이다.
2.1 마르크스주의자와 수정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비록 지식인들이 공산당의 정치적, 사회적 노선을 전반적으로 지지한다고 해도, 이들이 조약하고 기계론적이며 교조적인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당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냉전시기 사회주의 권역을 대표하던 소련이 선전하는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이라기 보다는 엥겔스나 레닌, 스탈린의 사상에 더욱 가까웠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발전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이론화한 '과학적 사회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적 활동과 제도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는 사회의 경제체제이며, 이 경제체제는 필요한 상품을 사획 생산하는 기술, 즉 '생산수단'의 발달단계를 기계적 혹은 인과적으로 반영하는데, 이러한 식의 해석과 시각은 전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한 실증주의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론에서는 인간 사회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시각을 따라야 한다고 전제를 한다. 자연과학에서는 대상이 처한 상황이나 본질에 관한 어떠한 근본적 고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기계론적 시각을 비판하고 인간사회와 인간 전반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들에 따르면 무생물체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적 시각을 인간에게 적용하는건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에는 역사를 지닌다고 말한다. 따라서 영원불변하고 보편적인 '사회 발전의 원칙'을 무턱대고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과거로부터 형성되어 나온 특정한 방법을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프랑스의 수정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 논조에 따르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전적으로 도외시한다. 따라서 왜 사회주의의 실현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으며, 심지어 사회주의의 실현방안 자체를 강구하지 못한다. 기계론적인 원래의 마르크스주의만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면 종국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반동적 반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3. 변증법적 유물론(형이상학적 유물론) 비판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기 전에는 결코 폐기되지 않을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선술한 바와 같이 사르트르는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 구분한다. 그가 말하는 올바른 마르크스주의또한 역사적 유물론을 의미한다.(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는 역사적 유물론은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역사적 유물론과는 굉장히 다르다. 그냥 사르트르의 고유한 유물론이라고 보는게 나을듯 싶다.)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주관성을 가지고 잇는 인간은 단순한 자연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를 가진다. 즉 인간에게는 내적인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자연 대상의 움직임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행동을 통해서 표현하는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는 과거의 자신의 경험과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반면에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과학적 사회주의'는 인간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역사적 유물론'에서 '역사'를 배제함으로써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데 박차를 가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진보에 관해 논구하는 일종의 기계론적 유사과학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헤겔이나 스탈린이 주장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에 속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유물론은 자연과학으로부터 파생했으며 과학적인 사유를 모든 이해의 근본으로 여기는 세계관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유물론에 있어서 '물질'은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모든 것의 근본적 재료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을 수많은 자연 대상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간주하며, 인간의 행위도 다른 대상들에 적용되는 자연법칙에 따라서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것은 인간 역사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변증법적 법칙'을 자연 전체로 확대해 적용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에 인간 역사를 자연현상중 하나로서 환원시켜 놓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다. 사르트르는 이점에서 인간존재의 역사적 성격을 무시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의 본질을 왜곡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주관성을 중시하는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본래적인 특징인 인간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부활시킴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재기를 꾀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 자체는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이다. 따라서 역사적 차원을 껴안기 위해서 실존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에 내재한 유물론적 요소, 즉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은 물리적 환경과 관여한다는 사상을 필요로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더욱 그 정신을 살리기 위해 실존주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 시대의 기본적인 진리로 간주된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진리와 손을 잡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도움을 훨씬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즉 사르트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철학이라면, 실존주의는 올바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4. 사르트르의 후기사상
4.1 사르트르의 유물론적 인간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유물론이란 '변증법적'이어야 하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명백히 달라야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반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의 '변증법적' 접근방법은 변증법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상황속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상황과 직면하면서 역사를 창조한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그것을 구속하는 상황의 상호작용이 역사를 만들어낸다. 즉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 행동의 주체로서 세계에 관여한다는 사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기존의 상황에 구속된다는 사실, 따라서 인간이 역사의 일부이자 주체라는 변증법적 진리를 깨달아야만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물질과 상호작용을 통해 생존해가는 유기체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 욕구의 충족은 물질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질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몸을 이용하는 실천을 필요로 하는데, 이런 점에서 인간은 물질이나 인간을 매개로 하여 인간관계를 맺거나 물질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점에 주목하면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항상 빈곤에 시달린다고 고찰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킬 물질적 자원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상황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생존경쟁으로서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걸고 있는 처절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 의외 모든 사람에게 잠재적인 경쟁자이자 적수가 되는 셈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일차적 실천에 본질적으로 반인간성, 반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각 개인의 실천이 결국 타인의 실천과 기회의 범위를 제한하고 박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개인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관계의 전형적인 구조로 이해되는 인간 소외현상을 극복하고자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에 본질적인 변혁을 시도하였다. 즉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나 좌파 사상이 주장한 특수한 시대나 사회 체제에 국한되는 인간 소외 현상보다 더 본질적인 영역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4.2 보편윤리의 가능성(앙가주망)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의 자유가 사회를 참여하는 하에서 이루어진다면, 타인 전체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이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매우 흡사하다.) 그에 따르면 실존주의의 첫 번째 의도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주인이도록 하고, 그의 실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은 자기의 개별성 말고도 모든 인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즉 사르트르의 주장에 의하면 이처럼 자유로운 나의 선택 행위는 비단 나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한다. 한마디로 하여 개인의 선택은 전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개인은 타인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르트르는 결혼의 예를 들고 있다. 그 동안의 미혼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결혼을 하게된 사람이 있을 경우, 분명히 자유분방하게 아무하고나 교제할 수 있는 미혼으로 머물지 않고 누군가와 결혼하여 상호구속 상태를 선택하는 그의 행위를 가능케 한 것은 그 사람의 특정한 상황이나 욕구 내지 동기이다. 결혼 여부는 누구에게나 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통해서 그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인 '일부일처제'와 관계(앙가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혼이라는 그의 선택을 통해서 그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극히 개인적인 선택에 반드시 타인에게 연관되어 있다면, 이 사실을 의식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자유에 커다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가 다시금 불안을 언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의 자유가 비단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넘어, 일견 나와는 무관한 듯이 보이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만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해진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해 보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자면, 보다 성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보편윤리가 성립된다.
즉 사르트르는 '타인의 목적을 나의 것'으로, '거기'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그때 가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각자가 수행하는 자유로운 실천으로 개별적이지만 모든 개인이 사회참여를 통해서 하나같이 수행하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형성되는 보편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4.3 실천적 타성태와 사회개혁
'실천적 타성태'란 사르트르가 물질적 환경 및 인간적 구조들을 모두 포함하는, 한마디로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행동을 변형시키는 모든 외부 세계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더 간단하게 정의해보자면 실천적 타성태란 '인간의 사회적 실천'의 결과로서 만들어지고, 마치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인 것처럼 존속하여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생존을 규제하고 그 불가피한 여건이 되는 일체의 것이다. 즉 건물이나 교통 수단과 같은 좁은 의미의 물질 환경만이 아니라, 전통·사회조직·문화적 유산·여론·언어와 같이 '나'가 아닌 다른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내가 사회적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언어의 경우, 언어는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언어는 문법과 관용에 의해서 그 사용자를 구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통신호로부터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약정과 관습과 전통과 제도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굴레가 된다.
한데 사르트르에 따르면 때로는 이 실천적 타성태의 구속으로 인한 소외가 극도에 달해 개인들이 이를 강렬하게 의식하는 경우가 생긴다. 가령 자유민주주의 후기산업사회에서 개인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독자적인 인격이 아니라 언제나 대체가능한 기능적 단위가 되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기득권층에게 봉사한다는 굴욕을 뼈저리게 느낄수 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처지를 거부한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 후기산업사회라는 실천적 타성태속에 구속된 각 개인은 저마다의 역할이 요구하는 제스처를 시시각각으로 연기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천적 타성태에 의해서 피동적 존재로 머물렀던 인간이 주체로서의 집단적 실천에 의해서 그 여건을 극복하려고 나설 수가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천적 타성태의 지배에 대한 불만과 무력감이 계속되면 집단이 공통적 감정으로 발전하는데, 그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공동투쟁의 조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소외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동이 혁명적 실천으로서 나타나는 것인데, 사르트르는 이러한 집단적 행동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을 용해집단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개인이 용해집단으로 행동하며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상황이 부르는 대로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투신하는 역사적 결단을 실천함으로써 다우 개인의 행동이 혼열일체를 이룰때, 타자를 사물이나 물질로서 대하는 소외에서 벗어나 개인이 하나같이 수행하는 실천적 행동으로서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탄생한다면 타인의 실천으로 인해 '나'의 실천의 범위가 제한을 받거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게 된다. 즉 실천적 타성태에 얽매어 있는 개인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실천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혁명적 실천 다시 말해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설명했던 바대로 특수한 사회나 체제가 먼저 바뀌어 소외현상을 극복 하는 것이 아닌 인간 조건에 본질적인 변혁, 즉 개인의 혁명적 실천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4.4 한계
하지만 개인은 실천적 모습에 있어서 앞서 설명한 바대로 반인격적, 반인간적 모습을 가지기 전에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문제를 가진다. 즉 비록 혁명적 실천이 성공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성공을 다지기 위해서 미구에 자리잡을 제도와 권력구조의 필연적 결과로, 그것은 다시금 실천적 타성태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련의 관료정치와 독재체제는 그 극단적인 예이다. 안타깝게도 사르트르는 이러한 비관적 결말을 지양할만한 어떠한 구체적인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단 사르트르는 선술한 비관적 결말에 대해 용해집단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이기적 자아로 돌아가지 않고 집단 내 존재로 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반성적 태도를 취하게 됨으로서 그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체제를 지속하여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단순한 추측이기에 정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에 인간이 자신의 주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의로운 사회가 인류공통의 이상이긴 하겠지만, 그 실현은 어떤 형식으로든 간에 필연적으로 지배할 실천적 타성태로 말미암아 불가능한 것이다.
5. 사르트르의 마르크스주의의 의의와 실패
존재론적 자유의 주장으로부터 사회경제적 조건 속의 인간의 인식으로, 그리고 개인적 주체의 주장으로부터 피억압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옮아갔던 사르트르의 전햐향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 한결 더 중요한 이유는 교조적으로 전락한 맑스주의를 실존주의를 통해 재생시키려던 사르트르의 의도가 그의 이론 그 자체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데 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개인은 사회적 환경에서도, 자신의 계급에서도, 그외에 모든 집단적인 대상들과 다른 개인들 사이에서도 주체로서 존립하는 개인이다. 즉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세력, 집단과 구조가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고,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모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변증법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본래적으로 가지는 개인과 타자의 소외현상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종합하려는 사르트르의 시도는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인 인간 역사도 공산주의 사회로 완성되며, 동시에 진정한 인간성도 마침내 완벽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보는 인간 역사 전체에 대한 비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초역사적인 관점을 채택함으로써만 그러한 비전을 가질 수 있다. 초역사적인 관점이 아니면 인간 역사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개인의 행동이나 선택이 궁극적으로 역사를 결정짓는다는 관점과 양립할 수 없다. 즉 애초에 근본부터 마르크스는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설정하고 있다.
반면에 실존주의자에게 있어서 인간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실제 개인의 구체적 선택이어야 한다. 실존주의자들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사회를 만든 역사를 간과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은 단순히 사회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통해 사회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따라서 유기체인 개인들은 일련의 복잡한 개인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사회를 형성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경제적 상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수동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는 실천적 개인이 있기에 사회가 형성된다. 즉 실존주의자들에게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벗어나서 인간 역사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애시당초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서로 상반된다.
즉 마르크스의 개념을 사용해서 물질적 상황과 인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인간 역사의 과정을 이해하려 시도한 점에서 사르트르는 대체로 일관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하지만 혁명적인 행동을 통해서 쟁취 해야 할 어떤 목표, 인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특정한 목표를 제시한다는 맥락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애초에 사르트르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역사 전체의 진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라는 역사적 상황에 쳐해있는 '우리 시대'의 진리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맥락에서는 인본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완성해 나가야야할 어떤 보편적인 인간성으로의 본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인본주의자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의 종합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실존주의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칸트의 전통적 자유관과 샤르뜨르 자유관의 비교 >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 따를 경우,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 즉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때에는 그에게 '자유'가 있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이는 죄로 물을 수 없다. 이러한 자유관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통념으로서 자유와 책임의 관계에 대한 정립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전통적 가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사르트르도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함으로써 책임도 무한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에서 사르트르는 전쟁조차도 자유에 의해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개인과 무관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유발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약 전쟁이 발발하고 '나'가 징병이 된다면, 이것은 명백한 강제이자 개인적 의지의 표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다. 왜냐하면 '나'는 비록 군인 신분일지라도 자살할 자유, 탈영할 자유, 자폭할 자유 등 이 전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자유, 혹은 체념하고 순응하는 자유, 혹은 아무생각도 안하는 자유 등 언제나 마주해야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유야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던,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 되어 처벌을 받던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어쨌건 '나'는 전쟁이 실존하고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의 한 특정 시대 속에 내던져 있으며, 그 시대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한 사르트르의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사르트르 비판자들에 따르면 사르트르에게는 죽음에 대한 집념이 없다. 그가 말하는 미래란 죽음 직전까지의 현세에만 국한된다. 즉 사르트르의 사상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상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자유관에 근거해보자면 자신의 선택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자유 선택의 결과일 경우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르트르는 자유의지만 과격하게 주장했지 자유의지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자유론이 중요한 점은 인간 존재의 사실성은 직접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직시해야 하는 문제가 생길때', 즉 인간에게 무한히 주어진 것 같은 자유는 항상 주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났을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사르트르에 따르면 '주어진 것'은 자유를 위해 제거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자유의 현실화를 위해 불가결한 전제이며,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근거해서 일련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며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기에 자유로운 존재이다. 예컨대 자기만의 특징을 창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숨겨버리거나, 또는 그것을 긍지의 원천이자 성공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자부심을 느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무엇(선하거나, 악하거나 등)인 것은 그렇게 태어났거나 또는 그렇게 창조되었거나, 또는 주위환경, 즉 유전이나 가정교육, 모태신앙 등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자유관에 근거하면 '~의 자유'는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적인 자유가 아니며, '~으로부터의 자유'가 본래적인 자유이다.
물론 사르트르가 초지일관 자신의 극단적 자유관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정치철학자가 아니라 일종의 형이상학(실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이다. 사르트르가 실질적인 인간 삶에서 제기되는 강제문제를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은 많은 강제와 억압은,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운 삶'따위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어야만 '억압'으로서, '부정의'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노예의 삶을 선택한다면 억압은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스스로 '억압'이라는 '장애물'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언제나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실질적으로 느끼기에는 부자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르트르의 사상에 따르며 자신의 실존을 직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의 목표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했을 경우는 물론, 혹여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상관없이 쳐해진 사태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언제나 자유롭다.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즉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다고 하여 자신이 그것을 뛰어넘어 완전히 자기 의사에 근거한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다고 위안하는 삶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으며, 정당화될수 도 없다. 더불어 사르트르는 사회체제나 타인이 개인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유의 억압은 '본질적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적 자유는 인간의 존재조건이기 때문에 어느 상황에서라도 실존한다. 자유의 억압이라는 것은 '실질적 자유'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유사한 자유관을 주장한 철학자로는 한나 아렌트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녀는 히틀러 다음가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인격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며, 그저 상관인 히틀러의 지시를 묵묵히 따르기만 하는 일반 관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를 아이히만에게 물었다. 그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가 학살의 근본 원인이다. 결국 자신에게 행동의 자유가 없었더라 하더라도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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