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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구조주의/blog.naver.com/czech_love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는 현상학(인식론/존재론에 집중), 비판이론(정치/사회/경제에 집중) 등과 함께 현대 유럽철학의 중요한 분야중 하나이다. 구체적으로 구조주의란, 사회, 문화, 경제 등에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담론을 규정하는, 숨어있는 또는 무의식적인 언어의 구조를 강조하는, 2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사상계를 중심으로 성장한 사상적 흐름이다.1 그런데 여기서 언어적이란 말의 의미는 영미의 분석철학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 발생한 개념이다.2

 

영미 언어철학의 주요한 관심이 일상적인 말을 분석하는 것이라면, 구조주의의 경우는 앞서 서술했듯이 표면적 의미 아래에서 그런 의미를 미리 규정하는 숨어 있는 구조적 법칙을 파고들어가는 것에 중점을 둔다. 구조주의의 일반적인 통설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은 대체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변환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를 사실과 전적으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영미분석철학자들의 주장과 확실히 대치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구조주의자들은 "말해지는 것은 분명히 말해질 수 있다"라는 분석적 입장을 거부한다.

 

구조주의는 반실증주의적이다. 구조주의자들에게서 언어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의미는 항상 은폐되고 왜곡된다. 구조주의는 그 특성상, 전통적 또는 분석적 언어학보다 비판적으로 문제에 대해 접근하며, 그것들 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기호의 기능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소쉬르와 그추종자들은, 기존의 언어학에서 말하는 언어의 기준을 훨씬 넘어서는 기호학을 제창했다. 기호학은 모든 기호의 체계를 대상으로 한다. 즉 언어를 넘어서, 심상, 몸짓, 음악의 음, 대상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잡한 결합의 결과인 의례와 관례, 대중의 오락등 비록 직접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구조주의는 이처럼 광범위한 지적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탐구에서 시작한 구조주의는, 하나의 방법론-일상적인 체계들이 은폐하고 있는 특수한 사실, 그리고 특수한 사실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으로 자리잡아 언어학을 넘어 인류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미학, 그리고 정치이론 등 다양한 학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양한 학자들 중에서도 구조주의를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확장시킨 공적은 레비스트로스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인류학에 적용, 예컨대 그는 구조주의를 이용하여 신화와 상징, 예술, 친족관계, 경제등을 분석, 그것에 은폐된 사회현상의 보편법칙을 탐구하고자 시도했다. 그의 시도는 인류의 문화적 표현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구조주의를 현대 유럽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적 도구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구조주의의 이념을 요약해보자면, 먼저 구조주의는 어떤 중심이 있다는 사고를 부정한다. 실존주의나 전통철학은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했으나, 구조주의에서는 자아를 명증하게 알 수 없기에 '나 자신은 타인이다'라는 말을 쓰며 타인이 나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조주의에서는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성이 부정된다.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부정되면서 구조주의에서는 언어가 중요하게 된다. 여기서 언어는 언어적 기호와 비언어적 기호를 포함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타자가 형성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나의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결국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나에게 주입한 언어에 불과하기에 나 자신은 빈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또한 서양문명이 서양 중심으로 인류의 모든 문명을 해석해 왔던 근거인 서구적 사고인 합리주의적 사고에 대하여 비판해서도 비판적이다. 예컨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서양문명이 인류의 중심문명도 아니고 최고로 발달한 문명도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며, 야생사회에도 현대사회 못지 않은 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역사와 문화라는 것은 우열의 비교가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조주의는 별다른 이념적 지향점이 없다. 구조주의는 어떠한 현실적인 요구도 주장함이 없이 오직 사실들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방식을 제공하려할 뿐이다.

 

그러나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 이후의 구조주의 철학자들, 예컨대 라캉, 알튀세르, 바르트, 그리고 푸코 등의 사상가들을 구조주의라는 단일한 명칭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강조에서는 놀랄 만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언어학자 야콥슨의 구조주의 언어학 간의 상호 관련성을 확신하여 의식과 전의식, 또는 자아와 원초적 자아의 분석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구조주의로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 알튀세르는 구조언어학의 개념이나 이론을 채용함이 없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반역사주의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특히 '자본론' 가운데 나타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구조주의라는 사상조류가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가장 구조주의에 잘 들어맞는 레비스트로스또한 후대의 구조주의 사상가들에 대해서 자신과는 상이한 사상들이라고 선을 그은바가 있다.

 

  1. 더욱이 구조주의 사상운동은 프랑스 국경내에 국한되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영미 인문학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바람을 타고 세계 각국의 학계와 문화계로 번져나갔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 사상운동을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계가 국제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조주의의 여러 사상가들이 구조언어학의 몇몇 개념들(가령 기표와 기의, 공시태와 통시태, 통합체와 연합체, 차이와 체계로서 언어 같은 개념들)을 자신의 주요한 방법론적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소쉬르>

소쉬르는 일반적으로 구조주의적 분석방법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그는 기호학으로 알려진 새로운 언어학 이론의 원리들을 제시했다. 소쉬르의 접근의 위대한 독창성은 언어를 기호들의 지시체계가 아니라 자체적인 내적구조라는 개념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소쉬르는 전통적으로 언어학자들이 단순히 언어의 내용1에 집중한것과 달리,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 상호관계와 형식체계를 밝히고자 했다. 요컨대 소쉬르는 낱말의 경험적 내용을 중시하지 안호,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에서 얻을 수있는 구조주의적 상호관계를 강조하였다. 소쉬르는 문장의 의미는 문장의 실체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문장의 구조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 사유체계를 지향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질서정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돈된 합리적 추론에 따라 가설적, 연역적 성격을 띠는 이론적 체계의 내부에서 개념들의 총합을 조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하나의 촘촘한 시스템으로서 분석한 후에, 언어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촘촘한 형식을 부여하기를 원했다. 소쉬르가 자신의 언어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장 몰두한 문제중 하나는 이론체계의 구성 순서, 특히 관점의 문제와 최초의 개념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였다. 하나의 해답을 도출하는데 있어서는 수많은 상이한 노선이 있기 마련이고,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선호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체계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고정되고 완결된 하나의 관점을 채택해야함은 명백하다. 고민끝에 소쉬르가 착안한 것은 언어이론에 기하학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또한 언어이론을 제시할 수 있는 순서를 정하는 것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체계를 구상하는데 있어서 순서의 문제는,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라는 연구대상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구적인 문제라 볼 수 있다. 소쉬르는 동일한 언어 개념을 4개 또는 5개의 상이한 형식을 통해 전개시켜야 하며, 언어 이론의 핵심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개의 대립적 노선에 의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언어학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소쉬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 소기와 능기, 체계와 드러남, 기호학과 의미론, 계열체적과 연쇄체적, 동시성과 통시성 등의 중요한 일련의 차이에 대한 개념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레비스트로스, 라깡, 바르트, 푸코 등의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다양하게 원용한 구조주의적 분석의 기본방법을 알려준다. 소쉬르의 저술은 대부분 고도로 기술적이다. 이러한 저술 태도는 소쉬르의 일차적 관심이 방법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소쉬르의 뒤를 이은 구조주의자들이 그의 언어학적 방법을 보다 구체적 형식으로 적용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라캉 등의 논의에서 소쉬르 자신의 선구자적인 기초작업의 중심적인 특징들을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

 

1. 랑그와 빠롤

새로운 언어학 이론을 엄격한 과학적 기반 위에 정초시키기 위해 소쉬르는 이전의 경험적 접근이라는 편협한 실증주의에서 벗어나서, 랑그(언어, 문법)와 빠롤(말)을 구분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정초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랑그란, 인간의 생물학적 보편적 능력인 언어활동과 역사적, 사회적으로 수립된 우발적 제도를 의미한다. 즉 랑그는 기호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2 이것은 개인들이 언어활동을 할 수 있게 사회적 차원에서 무의식적으로 채택된 규약들의 집합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빠롤은 개인의 발화 행위, 즉 우리가 추상적 언어체계를 구체적 발화를 통해 실현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화자는 단어를 조합해 빠롤을 행하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자발적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집단적인 것도 없다. 따라서 지금 실현되어 있는,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반면 랑그는 무의식적이고 집단성의 문제로서 비자발적으로 주입되는 것이다. 또한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랑그는 언어 전체 혹은 인간의 모든 발화행위의 기저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보편적 언어체계, 빠롤은 전체 안에서 작용하는 부분, 혹은 부분들의 다양성이다.

 

소쉬르는 빠롤보다 랑그를 중시한다. 더 나아가 그는 개별 발언자의 특수한 발화로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의도적인 빠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히 평면적이고 이미 누군가에 의해 상대적으로 명확한 의미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과학적 탐구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반면 랑그, 즉 문법 혹은 기호체계는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이어서 엄격한 과학적 탐구에 더욱 적합하다. 예컨대 랑그는 언어체계의 음운학적, 사전적, 구문론적 관계를 결합시켜 파악할 수도 있다. 빠롤의 내용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 심리학, 문헌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가능하지만, 언어 그자체에 대한 탐구는 단일과학인 구조언어학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빠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빠롤의 물리적 증언과 증거, 즉 가시적 발현이 있어야만 랑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빠롤은 랑그의 자료로서 언어학적 가치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소쉬르는 개인적으로 한 문장을 말하고 이해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언어체계라는 얼개 안에서만 의미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새로운 이해가 기호학이라는 새로운 언어학적 모델에 의해서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앞서 예시를 통해서 잠깐 언급 했듯이, 소쉬르는 언어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역사학 등 인접학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언어는 내적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언어 외적인 표현이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직접적인 경험적 접근3이라는 관점에서는 파악할 수가 없다. 랑그는 각각 빠롤에 함축되고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고 내면에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그는 부분들의 후천적 종합이라 볼 수없다. 그러나 선천적 종합도 아니다. 랑그, 즉 문법이 어떤 형이상학적 개념 안에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그 자체로, 내적으로 의존적인 체계이다.

 

1.1 랑그와 빠롤에 대한 구체적 설명

사회구성원들이 맺은, '언어'라 불리는 무의식적인 약속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언어학자는 이 무의식적 영역을 의식적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으며, 유아들은 어떤 원리에 의해 즉흥적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모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소쉬르는 의사소통 회로 모델을 제시하여 설명한다. 최소 두명 이상의 대화 상대자를 포함하는 이 회로는 양면을 지닌다. 첫번째 면은 심적이다. 즉, 선택된 언어도구는 발신자의 두뇌 속에 존재하며 수신자의 두뇌 속에서 발신자가 발송한 메시지의 약호가 해독된다. 의사소통 회로의 두번째 부분은 물리적이며 생리적이다. 그것은 음파를 생산하는 발신자의 발성기관이며, 대화 상대자의 귀는 그 음파를 수신한다. 끝으로 이 회로에서 순전히 심적인 연합중심부에는 언어개념과 언어 이미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언어주체들의 활동을 설명해주는 이 같은 도식은 비록 단순화되기는 했으나 랑그라는 제도 속에서, 즉 필요한 규정들의 집합 속에서 언어형식과 언어실질의 자리와 각각의 역할을 규정하도록 해주며, 아울러 빠롤과 랑그를 대립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소쉬르 언어이론에서 빠롤은 랑그라는 사회적 규약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선천적 언어능력을 실현하는 개인의 행위를 지칭한다. 랑그가 형식의 영역에 속한다면, 빠롤은 물리적 실현으로서 실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돌려 말해 빠롤은 랑그가 구체적 행위로 옮겨지는 것을 말한다.

 

랑그와 빠롤은 개인마다 다른 양상을 지닌다. 랑그가 가지는 의미론적 인상은 개인마다 상이하다. 예컨대 사회언어학적으로 사회계층마다 이것의 변이가 나타날 것이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단어는, 대기업 회장 또는 신고전파 경제학자와 공장 노동자 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에게서 상이한 함축의미를 가질 것이며, 젓가락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서양인과 동양인에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빠롤은 상이한 물리적 양상을 갖는다. 음성의 파동은 정상인을 비롯해 말더듬이에서 정신질환자의 발화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으로 매우 이질적이다.

 

언어활동, 랑그, 빠롤의 삼분할에서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함의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오직 빠롤만이 곧바로 지각되며, 랑그는 결코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고 잠재력을 갖춘 형식이다. 그 점에서 랑그는 본질적으로 추상적이다.4

 

2. 공시태와 통시태

소쉬르의 언어이론이 현대 인문학에 제공한 중요한 개념으로 공시태와 통시태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두개념은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이며 결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은 아니다. 이 두개의 관점은 각각 현시점에서 의사소통 도구로서 언어의 기능 작동에 대한 체계적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주고(공시태), 언어적 진화가 제기하는 문제(통시태)를 별도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소쉬르는 언어학적 현상들의 서로 다른 접근의 두 가지 방식을 가리키기 위하여 공시태/통시태라는 이원론을 도입했다. 이 구분은 랑그와 빠롤의 구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게다가 랑그에 대한 강조는 공시태에 대한 강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 혹은 일정한 시기에 어떤 언어 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 사이의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그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 반면 통시태는 "그언어가 시간축을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소쉬르는 공존하는 체계와 연속하는 변화를 단일 과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쉬르는 통시적인 연구보다 공시적인 연구를 우위에 둔다.

 

소쉬르가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쉬르는 특정한 시점의 언어구성요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현대 영어에서는 you를 단수와 복수, 주어와 목적어로 모두 사용하고 있지만, 초기 영어에서는 주어 ye와 목적어 you로 구분했으며, 단수형으로 쓴 thee와 thou와도 구분했다. 하지만 현대 영어에서는 you가 이러한 구분 없이 통용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현대 영어의 화자는 you라는 단어가 과거에는 목적어와 복수형으로만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도 영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거꾸로 그 사실을 아는 것이 현대 영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간상의 변화를 초래한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다고 해서 현재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대립관계를 의미하는 공시적인 상태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항상 어떤 언어 상태 앞에 놓인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에게는 공시적인 면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물론 언어 상태라는 것은 변한다. 하지만 언어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도 언어가 공시적인 체계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56 이렇게 소쉬르는 언어대중들 앞에서 언어는 변화가 아니라 상태로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언어의 변화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대중들은 그러한 변화를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 상태를 연구해야 할 언어학자는 "과거를 제거"해야 한다. 언어학자의 작업은 언어의 전체성 밖에서 어떤 관찰자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지, 언어의 역사적 변화와 발전이 확증되는 어떤 초월적 지점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쉬르가 언어를 역사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랑그는 빠롤 속에 은폐되어 현존하는 것이지, 독립적인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시태와 통시태는 랑그와 빠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언어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공시태는 일관성 있는 체계들의 연구로서의 언어학에 적합한 접근법이다. 반면 통시태는 역사적 문법에 대한 연구 영역에 적합한 접근법이다.

 

2.1 공시태와 통시태의 구체적인 방법론적 차이

첫째, 공시태 언어학(기술 언어학, 이하 공시태)은 하나의 관점, 즉 특정 시대의 화자들의 관점만을 인정하며, 그 방법은 전적으로 화자들의 언어생활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데 있다. 이에 반해 통시태 언어학(역사 언어학, 이하 통시태)는 두개의 관점, 즉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미래 전망적 관점과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는 회고적 관점을 구별해야한다. 둘째, 공시태와 통시태의 차이는 두관점이 각각 다루는 연구분야의 범위 차에서 비롯한다. 공시태 연구는 단지 각 언어에 해당하는 현상의 총체만을 다룬다. 공시태라는 일차적 관점은 오직 동시대 언어의 상태만을 인식하는 평범한 화자의 관점으로서 언어분석은 오직 이 화자의 지식을 명시화하는 것을 겨냥할 뿐이다. 반면 통시태는 보다 언어학자적인 관점이다. 다시 말해 선행하는 언어 상태들의 연구,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의 상태와 맺는 관계들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공시태와 통시태의 구별은 언어학자의 방법론적 관점의 구별이며, 결코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에 뿌리를 둔 대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언어를 제대로 연구하고 언어적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질서의 대립, 정태적인 것과 진화적인 것의 대립에 기초해야할 뿐이다.

 

3. 자의성 이론

소쉬르 언어이론은 자연언어의 문제를 좀더 넓은 관점에서 조망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는 언어학을 언어 이외의 다른 기호체계들을 다루는 한층 포괄적인 학문인 기호학의 핵심적 부분집합으로 파악했다. 그는 기호학적 토대를 갖춘 언어기호의 주요 원칙으로 철저한 자의성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기호의 양면을 이루는 기표(signifie)와 기의(signifiant)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니며, 동시에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기표는 기호의 지각 가능하고 전달 가능한 감각적 부분이다. 그것은 소리일 수도 있고, 표기일 수도 있고, 한 단어를 이루는 표기의 집합일 수도 있다. 예컨대 바다라는 말에서 "바다"라는 문자와 /bada/라는 음성을 말한다. 즉 기호의 형태이다. 반면 기의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기호의 개념적 부분이다. 예컨대 바다의 이미지와 바다라는 개념 또는 의미내용이다. 즉 기호의 내용이다. 기호란 이 기표와 기의가 하나로 묶여 형성되는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이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그 어떤 자연적인 필연관계, 내재적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쉬르는 기표(언어 기호)와 기의(지시 대상)이 서로 무관하다는 점에서 언어가 자의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자의성의 직관은 언어적 사실들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냈으며, 문화인류학의 비약적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이러한 소쉬르의 이론을 응용하자면, 우리가 흔히 자연법 등을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개념으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사실 자의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수도 있다.

 

예컨대 "바다"를 "바다"라고 쓰고 /bada/라고 발음하는 데 있어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것이 있었다면 모든 언어에서 바다는 /bada/로 발음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어의 "바다", 영어의 "sea", 불어의 "mer", 일본어의 "海"를 비교해 보면 "바다"라는 기의와 그것을 지칭하는 기표 사이에 필연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바다"라는 문자가 왜 /bada/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어떤 기표가 어떤 기의와 관계를 맺는가는 그 언어기호가 사용되는 언어 공동체마다 다르므로 그 관계는 관습적, 자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 사이의 필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둘을 이해하는 인간의 정신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되고 있다.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바다"라는 글자를 보거나 /bada/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거기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근저는 기본적으로 같다. 이는 자의적인 관습인 기호를 만들기 위해 기표와 기의가 결합되어 의미를 형성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즉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집단적이거나 사회적이며, 따라서 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서로 소통될 수 있다. 이것은 기호가 집단성, 의사소통 가능성, 자의성, 차이성 등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이처럼 언어는 오직 집단성에 의해 말해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또한 자의성 이론에서 소쉬르가 언어를 현실이나 사유 속에서 그 어떤 독립적 매체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 근거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소쉬르에게 있어서 언어는 관념이나 무의식, 사물과 결합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언어 기호)와 기의(지시 대상)의 결합에만 그 정체성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기호는 한번 결정된 이상 개인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언어의 체계가 개인적 언어활동에 의해 결정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체계가 개인의 언어활동을 결정한다. 이것이 기호의 불가역성의 원리이다. 바꿔말하면 언어는 신이나 인간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언어기호는 일차적으로 세계속의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3.1 자의성 이론의 의미

소쉬르 언어 모델의 불가역성적 측면은 구조주의 운동 전체의 중심 전제가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나 천재성이 의미를 창조한다는 낭만주의나 실존주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각 개인의 실존은 각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대해, 구조주의자는 각 개인의 빠롤의 의미는 랑그라는 집단적이고 개인에 앞서는 체계에 의해 규제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정치체계와 사회구조를 계약을 통해서 성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계약론자들의 견해에 대해, 구조주의자는 우리들이 수용하는 법체계는 자유롭게 동의한 규칙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저 감수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대립은 현대 대륙철학에서 가장 심각하게 격론을 일으킨다.

 

4. 언어기호의 가치론

소쉬르의 언어기호이론의 가치 개념은 19세기 비교역사언어학에 견주었을 때 가장 혁신적인 공헌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소쉬르는 기호를 그 자체로 닫혀 있는 고립적 단위로 보려는 전통적 언어 개념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랑그는 그것의 모든 구성 항들이 서로 연대를 이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랑그는 그 구성항들이 맺는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랑그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성 항들은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질료의 집합을 고유하고, 그 결과 가치들을 창조하며 그 가치들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작용이 수립된다. 요컨대 언어기호는 동일 시스템에 속하는 다른 언어기호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다시 말해 언어기호의 의미와 가치는 문장 표면에 명백히 나타나는 명사와 동사, 주어와 술어 등의 연속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전체 언어체계 안에서 드러나는 기호와 잠재적인 기호들간의 상대적, 부정적(다른 것이 아님) 가치들로 구성된다. 예컨대 소쉬르 이론에 따르면, 영어 단어 'rice'와 한국어 단어 '밥'은 동일한 의미작용을 가지나 그 가치는 다르다. '아버지'라는 언어단위는 '어머니', '할아버지', '아들'이 아닌 것에서 가치를 얻는다. '웃다'라는 동사는 '찡그리다', '화난 얼굴을 하다'등의 동사들과 관련하여 그 가치를 얻는다. 이렇게 고립된 요소의 관찰은 어떤 그 쓸모도 없다. 오직 그 요소를 규정하는 대립들의 다발만이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구성 항의 가치는 다른 구성 항들의 동시적 현존으로부터 비롯된다. "푸른 새가 노래한다."라는 고립된 문장만 본다면 우리는 '푸른 새', '노래'라는 기호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주어 동사 목적어라는 문법구조에 입각해 쓰여진 문장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새'가 '컴퓨터'나 '사자'가 아니라는 점, '파랑색'이 '검정색'이나 '보라색'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노래한다'가 '책을 읽다'와 'TV를 보다'와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적 가치 원리와도 유사하다. 1만원의 가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지폐가 일정 수량의 상품과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원리가 언어가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는 닮지 않은 무엇을 대체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닮은, 비슷한 다른 단어들과 비교될 수 있다.

 

5. 결론

소쉬르는 그가 언어활동의 기반이 되는 정교한 기초체계를 발견한 한에서는, 다시 말해 목적론적 의미에서는 전체로서의 언어체계는 기호의 특수한 작용이 앞서는 것이고, 결국 의미를 생기게 하는 언어의 능력을 결정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현대 구조주의의 위대한 선구자이다. 그는 언어활동의 경험적 차원보다는 구조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의 과학적 탐구는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소쉬르는 이런저런 의미가 사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인식론적 물음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른바 지시의 복합적 문제, 즉 '어떻게 낱말들이 언어 바깥에 있는 경험적이거나 존재론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가', '의미가 기초체계의 구조적 차원에서 어떻게 생겨나느냐'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것은 의미와 언어의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밝혀보려는 것이었다.

 

소쉬르를 이은 구조주의자들은 그의 언어학적 방법론과 기성사상에 대한 비판적 발전(정신분석학, 맑스주의 등)을 결합시킴으써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는 소쉬르가 성취하고자 했던 '사회 안에서의 기호에 대한 연구'를 보다 정확한 개념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즉 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권력과 지식(푸코), 신화와 친족관계와 상징(레비스트로스), 심적 무의식(라캉), 정치 이데올로기(알튀세르), 문학과 대중문화(바르트)의 숨겨진 기술과 연결되는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탐구의 내용이 변화하였다 할지라도, 구조주의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는 우리의 경험세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미리 결정하는 의미 있는 조작의 체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둘째, 그런 조작은 언어에 앞서 어떤 주관적인 사적 지시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객관적인 경험적 지시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전제하에서 구조주의 사상들이 전개되었다. 요컨대 소쉬르 다음에 나타나는 구조주의적 분석의 다양한 발전은, 소쉬르의 언어학적 모델이 암시하는 요청인 문화적, 사회적 기호체계에도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이 동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화, 문화적 텍스트, 대중매체 등의 기호체계에 문장의 언어학적 단위들이 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되게 되었다. 소쉬르의 제자들은 그의 구조언어학적 방법이 열어놓은 미탐험지역을 탐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구조주의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제시되는 소쉬르와 현대 프랑스 철학의 관계는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공인된 사실이라기 보다는 몇가지 대표적 사례에 기초하여 고착된 가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쉬르를 현대프랑스 철학 형성에 기여한 사상적 원류이자 '주체의 죽음'을 선언한 장본인이라는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철학이 아니라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1970년대부터 일군의 비평가들은 '언어(학)의 인플레이션' 또는 '언어적 환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현대 프랑스 철학 및 인문학이 소쉬르의 언어학 모델에 정신없이 도취하여 마구잡이식으로 언어학 모델을 인류학, 문학, 정신분석학 등의 영역에 무리하게 적용한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1. 언어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즉 언어가 무엇을 지시하는가.
  2. 이것이 경험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어떤 특정한 실재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란 실재세계의 어떤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거나, 더불어 집단이나 개인의 정신 안에 주관적 실재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소쉬르 이전 언어학의 주된 접근법
  4. 하지만 소쉬르 자신은 랑그에 대해 추상적이라는 표현을 부여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것은 마치 언어기호가 수학의 초월적 형식과 유사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소지가 있었다.
  5. 소쉬르는 체스 게임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통시태/공시태라는 대립관계를 설명했다. 체스 한판에서 체스말들의 배열은 매 수마다 바뀐다. 한 수를 둘 때마다 체스말 하나하나의 위치에 따라서 전체 배열은 완전히 다르게 묘사될 수 있다.(통시적 변화) 체스 게임 행위에서는 주어진 순간에 그 이전에 두어진 수들이 어떤 것인지, 그 수들이 어떤 순서로 두어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공시적 체계) 그 판의 특정한 상태, 장기 말들의 배열은 공시태적으로, 다시 말해서 앞의 수들을 참조하지 않고서 묘사될 수 있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어들이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 변화는 공시적 체계라는 전제조건하에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6. 또한 이 체스의 비유를 랑그와 빠롤에 대한 이해로도 사용할 수 있다. 공시태와 동시태의 구분은 랑그와 빠롤의 구분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체스말들의 이동, 즉 게임의 표면적 상태(빠롤)이 변화한다고 해도, 그 게임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적 규칙(랑그)는 불변하는 것이다. 물론 특수한 게임안에서 체스의 말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체스의 규칙또한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랑그의 법칙이 빠롤이 각가 드러나는 것보다 먼저 있다는 사실은, 랑그는 궁극적으로 빠롤을 더러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레비스트로스>

1.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 배경

레비스트로스는 사회현상의 다양성에는 보다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정신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인류학적 믿음1을 입증하고자 했다.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기초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1. 철저한 과학2과의 연계 : 자연이나 사회현상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기계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어야만 인간의 행위와 다양한 사회적 표현들을 경험적/과학적 탐구를 통해 하나의 법칙체계로 환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3

2.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체계 : 레비스트로스는 의식적이고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피상적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인간정신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에 대한 이론을 사회영역으로 확대적용 하는데, 예컨대 그는 무의식적인 '이드'는 자연적인 것이며, 의식적인 '에고'는 문화적인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3. 소쉬르의 구조언어학 :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의 구조적 측면을 분석, 인간정신에 접근하고자 했다. 구조주의 언어학이 언어를 하나의 무의식적인 사회현상이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응용하면 인간정신의 구조와 사회관계의 복합적 전체를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45

 

종합해보자면, 구조주의란 다양한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표현들을 하나의 법칙체계로 환원시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은폐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는 경험적 방법론이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인간정신의 보편성, 혹은 인간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학적 과업에 적합하다. 일련의 작업의 결과, 레비스트로스가 밝힌 인간정신의 기본적인 특징은 무의식성과 보편성이다. 즉 인간이 자신들의 심층 구조와 언어의 보편적 법척을 인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어떠한 특정언어나 기호에는 언제나 하나의 구체적인 일반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6 다시 말해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보편적인 인간정신이란, 인간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체계로서, 적어도 그 체계 안에서는 무한히 다양한 내용적 측면(인간의 상호관계와 문화)의 전개가 가능하다.

 

레비스트로스가 주체를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그는 탈근대적이다. 그럼에도 전인류적 차원에서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구조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철저하게 근대적이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탈근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해서 근대적인 기획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의 개념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사회구조의 연구목적은, 사회구조 모델을 세우고, 그 모델이 주는 의의를 통해서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분석할 때 경험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만 가능하게 할뿐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구조란 경험적 실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78 따라서 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모델'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복잡한 사회를 탐구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게 최선의 모델이란 '구조'였다.

 

레비스트로스는 하나의 구조는 다음의 몇 가지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모델로써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1. 구조는 한 체계의 특성을 나타내며, 구조를 이루는 몇가지 요소의 변화는 다른 모든 요소들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2. 만약 어떤 모델에 변형을 가한다면, 그 변형들은 같은 모델의 다른 특성으로 귀착되도록 정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

3. 상기의 특성은 만약 모델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수정을 받게 된다면, 그 모델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끝으로 모델은 모든 관찰된 사실들을 즉각적으로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만 한다.

 

이는 모델 혹은 모델들의 집단은 내적 일관성을 지녀야만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레비스트로스의 연구작업

상기한 방법론과 구조의 개념에서 출발한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과정은, 단순한 체계화를 넘어서, 인간을 구속하는 여러 정신적 구속구에 대한 이해, 임의성을 하나의 질서로 환원시키려는 시도, 자유의 환상을 내재하는 어떤 필연성을 발견하려는 탐구로 간주될 수 있다.

 

3.1 친족의 기본구조

레비스트로스의 첫번째 작업인 『친족의 기본구조』는 미개인이 생물학적 충동으로 단순히 반응하는 '자연'으로부터 사회집단을 기능화하는 '문화'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탐구한 것이다. 그는 미개인이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견해와는 반대로, 자연적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한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의 사이에 기본적인 대립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작업을 시작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호혜성의 원칙9이라는 교환구조를 통해서 여러 사회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금친금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든 기존의 사회집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친금혼이 동등하게 실천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금친금혼의 원인에 대하여, 유전적인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물학적 해석과, 친족체계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도덕적 혹은 심리학적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친족체계의 기능은 생물학적 이유나 위계질서의 확십이라는 측면보다는 한 집단이 금친금혼에 의하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사회적 이익이란 경제생활에 있어 재화와 용역의 순환과 유사한 '여자의 자유로운 순환'의 발생이다. 집단들은 여자를 집단 간의 교환할 수 있는 기호로서 간주하여, 이 기호들을 교환함으로서 서로가 공통적인 유대와 협력관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레비스트로스는 먼저 성욕에 대해 논의한다. 성욕이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것의 구체적 표현은 난교, 또는 난혼과 근친상간이라는, 자연적이며 반사회적인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에 의한 집단 간의 규칙적인 여자 교환은, 이와 같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관계를 해결하고, 여자에게 자연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기능과 문화적 가치의 이중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각 사회집단들이 '우리들'과 '그들'이라는 상이성에 대해 자각하고, 또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호혜성이 기능하게 되면서 사회적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친죽구조에 대한 해명만으로는 인간정신을 이해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친족관계에서 나타나는 결과들은 사회생활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들이 전적으로 인간정신의 구조에서 파생된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제거하고 정신이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정신이 가장 자유롭게 그 자체의 구조적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으로 관심을 옮겨간다.

 

3.2 야생의 사고

 

레비스트로스의 주요저작 중 하나인『야생의 사고』는, 서구인들의 전통적 미개인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서로서,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고의 깊이와 내재적 논리구조를 밝혀냄으로써, 우리들 문명인들의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른 '미개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환상, 그리고 서구인들의 2차적 본성이라고 할 수있는 과학 혹은 철학의 방법론적 선입견을 해체하는 것, 그리하여 무한히 다양한 표현들 밑에 깔려있는 인간사고의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인류학적 희망을 제시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있다.

 

여기서 야생의 사고라는 용어는 미개인의 사고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공리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문명인의 사고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인의 사고의 일부이기도 하다. 예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예술활동에서 야생의 사고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인간정신 속에 꽃피워온 사고이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문명을 이룩하는데 큰 기여를 한 내재적 사고로서, 근대과학의 논리만큼이나 엄밀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길들여지지 않은상태의 사고인 것이다.

 

물론 정신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고대나 현대에 걸쳐 모든 정신에 동일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선사 시대의 신화적 사고 간에 아무런 질적 차이를 두지 않는 그의 기본적 입장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의 인간사고의 원초적 구조의 성격에 대한 놀라운 분석은ㅡ 분명히 오늘날에도 인류학적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고 있다.

 

3.2.1 서구인들의 편견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반박

일반적으로 서구인들은, 미개인의 언어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명칭은 가지고 있어도 이것들을 범주로 묶는 추상명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논리적이고 고등차원의 지적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나무라는 추상화된 공통의 개념이 없이 소나무, 전갈나무, 떡갈나무 등의 개별적인 종에 대한 명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인과 미개인의 사고는 사물을 범주화시키는 방법과 관심의 영역에서 서로 다를 뿐, 이 중 어느 것이 더욱 과학적이라거나 논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음을 밝히고 있다. 즉 무질서에 대한 배타성은 미개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기원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가 하나의 단일한 부호를 추구하는 데 반하여, 야생의 사고는 그 자체를 계속하여 집단화하고, 많은 불연속적 요소들을 단순화시키지 않은 채로 경험세계의 자료들을 재정리하는 하나의 의미론적 체계이다.

 

또한 서구인들은 미개인들의 사고가 주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여기서 주술이란 과학의 전단계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과학이 인과율에 의한 결정론이라면, 주술은 인과율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결정론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근대과학은 병과 병균사이의 인과관계를 앎으로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주술적 치료는 환자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신화와 괴물의 세계에 병을 결부시키는 능력에 의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서구인들의 편견과 달리, 레비스트로스는 주술 역시 훌륭하게 구축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과학체계보다 열등한 것이 아닌, 별개의 것으로서 지식습득의 동등한 양식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원시인들의 사고를 단순하고 유치하며 미신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원시인의 사용되는 논리또한 세련된 것으로, 하나의 구체적이고 감지적이며, 심미적인 논법인것이다.

 

3.2.2 신화적 사고와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는 '주술적'이고 '감각적'인 미개인들의 야생적 사고를 신화적 사고라고도 표현한다. 이 신화적 사고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추상적인 과학과 마찬가지로 일반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서『야생의 사고』는, 신화적 사고가 지닌 이 일반화 능력과 과학성을 서구인들에게 납득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신화적 사고는 예술, 의례, 친족구조, 신화, 일상적인 작업들 등 여러분야에서 발휘되지만, 대표적인 예시는 토테미즘이다. 레비스트로스 이전의 인류학의 주류적 의견은, 토테미즘이 미개인들만이 가진 종교현상 혹은 사회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이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는 토테미즘은 비단 종교나 사회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고의 보편적인 특질을 나타내는 것중 하나로서, 그것을 형성하거나 차용한 사회에서 개념체계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토테미즘은 미개인의 분류에 기초를 제공하며,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테미즘의 논리구조는 이항대립의 관계로 구성된다. 예컨대 필리핀의 하누노족은 세계를 명명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은 다시 물건, 동물, 인간으로 구분한다. 어떤 하누노족 사람이 '식물'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말하는 대상이 돌이나 대상물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필리핀의 다른 부족인 수바눈족은 같은 원리로 병을 구분한다. 그들은 먼저 상처와 피부병을 구분하고, 또다시 염증과 궤양과 버짐의 세 가지로 나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형태를 다음과 같은 이항대립10의 대비를 적용해서 더욱 세분한다.

 

또한 토테미즘은 논리구조에 그치지 않고 행위양식을 금하고 명령하는 윤리적 기초가 된다. 예컨대 음식물에 대한 금기, 같은 토템을 가진 집단 속에서의 혼인이 금지되는 외혼제가 그 예이다. 음식물에 대한 금기는 생물학적 특성이나 신비성에서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금기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들중 유의미한 것을 추려내는 수단으로 쓰인다. 여러 동물을 구별하는 상징적 특징을 취하는 것은 인간 사이에 차등을 두는 데에 활용되기도 한다. 음식물들은 혼인의 대상이 될 여자와 교환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회집단의 상호결합을 공고히 하거나 이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말하자면 토테미즘은 여자와 물건, 인구와 생산물, 자연과 문화등에 균형을 이루도록하는 자동 조절장치의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

 

토테미즘이 주된 미개사회는 종종인간의 범주를 부족집단에만 한정하고, 그밖에 사람에 대해서는 이방인이나 더러운 야만인, 극단의 경우에는 위험한 동물 또는 망령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토테미즘이 종을 분류하는 하나의 논리체계로서 보편화와 특수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될 점은, 토템적 분류법이 지닌 본질적인 기능의 하나는 이러한 집단의 폐쇄성을 타파하고, 무한에 가까운 인류관을 키워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같은 토템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비록 속한 부족이나 촌락이 다르더라도 서로 친척 사이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토템적 보편화는 단순한 부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최초의 국제사회같은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테미즘의 사회학적 의미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가축에 까지 적용되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여러부족은 개를 형제나 자식으로 여긴다.

 

  1.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와 신념, 생활양식 및 그외 사실들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속성인 인간성이 어떻게 자연과 대립을 이루거나 혹은 조화하면서 하나의 문화 속에서 인간성의 특질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
  2.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과학적' 이라는 개념은, 경험적인 검증을 요구하는 영미적인 의미도 어느정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적인, 즉 소쉬르적인 조직적 체계를 기본적으로 의미한다.
  3. 이런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유물론적 성격이 다분하다. 그러나 동시의 인간의 행동과 역사는 정신의 일정한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도 주장함으로써 관념론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4. 구조주의 언어학에 따르면, 많은 언어행위는 무의식적인 사고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대화를 할때, 언어의 구문론, 형태론적 법칙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의식의 부재는 우리가 언어의 문법이나 음성학을 깨닫게 되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언어를 아무리 의식적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무의식적인 언어현상을 수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언어학의 경우 처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또한 사회현상의 각 요소를 내재적으로 은폐된 차원의 수준에서 가지는 의미를 중심으로 탐구한다.
  5. 그외에도 레비스트로스에 루소, 뒤르케임 및 모스, 마르크스 등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레비스트로스 방법론의 기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론과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라고 볼 수 있다.
  6. 이는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나 기호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에 관한) 보편적 특징을 표시할 수 있도록 형성해내는 지적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7. 이는 일반적인 사회과학자들이 구조를 연구한다는 것은 전체적 실체 혹은 전체 내의 부분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한다고 여기는 것과 상당히 대치되는 입장이다.
  8.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9. 사회적 쟁점을 해결할 때 쟁점의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것, 이 호혜성은 자연적 질서의 모순을 합치시키고, 또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확신하는 인간의 수단이다.
  10. 단순/복잡, 외부증/내부증, 중증/경증, 표피부/심층부, 말단부위/중심부위 등.

3.3 신화론

인간 본연의 보편적 사고구조인 '신화적 사고'의 본질은 비로소 그의 신화연구1에서 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증명된다. 신화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궁극적인 관심은, 신화의 구조가 반영하고 있는 무의식적 심층구조를 밝혀내어, 모든 인간정신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고형성의 원칙들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보편적 원칙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두뇌 속에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두뇌 속에서도 작동하는 것이었다. 단지 현대인의 경우에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의 생활을 통해 그들이 받아들인 문화적 훈련이 야생적 사고의 보편적 논리를 은폐시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선요약하자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신화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현상의 설명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이론적 질서를 지닌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현상을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란 인간정신의 구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하나의 영상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의식적인 경험으로는 부적당하지만, 신화는 한 집단이 갖는 꿈이나 그 집단의 심층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경험이 일정한 사고형성의 법칙에 따라 표현되는 것이다.

 

그의 신화론은 우선 아메리카의 수많은 부족의 개별적인 신화채집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각 부족의 신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신화의 분석 및 해석법이며, 나아가서 신화라고 하는 것의 의의와 문화 전체에서의 신화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자가 음운과 언어체계를 관련시키듯이, 여러 가지의 상이한 신화를 상호관련시키는 결합체계를 탐구한다. 하나의 복합체계 내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것들의 의미는 그 단위가 나머지 부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분석으로 부터 파생될 수 있다는 언어학적 가정에서 출발하여, 레비스트로스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수백 가지의 신화들을 하나의 동일한 유형에 짜맞추었다.2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3.3.1 신화의 속성

1. 신화는 무시간적이며, 시간통합적이다. 분명 신화는 아주 옛날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에 대해 다루지만, 동시에 이 태곳적의 일은 어떻게 여러 가지 사물들이 만들어졌고, 현재는 어떻게 되어 있으며, 장래 어떠한 형태로 남을 것인가 등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화는 과거에 의해 현재를 설명하고, 현재에 의해 미래를 설명하며, 어떤 질서가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영구히 계속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통해 확인한다.

2. 신화는 복수 또는 다수의 기호를 사용한다. 신화는 결코 어느 한 특정한 현상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단 한가지 줄거리를 사용하여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은 설명한다. 예를 들면, 서구의 그리스신화나 북유럽신화만 해도 태양과 지구의 거리, 계절의 원리, 동물의 종구별, 근친상간의 문제점, 태풍의 원인등을 하나의 줄거리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신화는 우주론, 천문학, 기상학, 동물학, 식물학, 사회학 등 모든 분야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과학적 설명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여러 차원을 가진 큰 구조로서 나타나고, 먼 과거나 먼 미래 또는 현재의 시간성을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 같은 논리의 형태 속에 넣어버리고자 한다. 또 현대인이라면 전혀 별개의 학문에 속하는 것이라 해서 다른 원리로 설명하고자 하는 사항도 커다란 하나의 구조속에 통합되버리고 만다.

 

3.3.2 신화의 방법론

그렇다면 신화 자체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이는 사실상 토테미즘에서 밝혀진 야생의 사고의 특징과 같다.

 

1. 이항대립 :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무의식적인 분류방법이다. 다양한 모든 구체적 사물, 즉 육감이 포착한 사실이나 사회적 경험등 모든 것을 이항대립의 총화로 환원킨다. 즉 신화는 두가지 대립된 요소들,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불과 물 등을 짝으로 이루어 그 논리를 구성한다.

2. 변환 :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언어적 범주가 인간의 보편적인 심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문화를 보편적인 구조 양상으로 변형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 문화가 언어적 범주를 통해 보편적인 형태로 변환된 것이 신화다. 이런 점에서 유럽대륙의 신화들과 유사한 것들을 전혀 문화적으로 연관성이 없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오이디푸스 신화, 즉 수수께끼와 근친상간의 얘기가 함께 나오는 유형의 신화가 그것이다. 근친상간은 서로 연결되서는 안되는, 분리된 채로 있어야 하는 것들의 결합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는 사회규범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다. 또한 수수께끼란 물음과 답이 연결되지 않는 물음이다. 이 점에서 수수께끼와 근친상간의 유사성, 즉 결코 연결되지 않는 답과 물음, 그리고 결코 연결되서는 안되는 남녀관계의 유사성 혹은 일체성이 포착된다. 또한 이 이야기 자체를 변환할 수도 있다. 아서왕의 성배 이야기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답이 없는 물음으로 성립되는 신화라면, 아서왕 신화는 물음없는 답으로 인해 성립되는 신화이다.

3. 매개 : 여러가지 항목을 대립시킨 후, 그것을 결집하여 충돌을 넘어서는 균형적인 관계맺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대립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양자를 접근시켜 처음의 모순과 대립을 완화시키는 방법이며, 또 다른 방법은 양자와 전혀 다르지만 서로 관계가 있는 제3항을 그 사이에 도입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북미 인디언 부족의 불의 기원에 대한 신화를 따르면, 인간은 원래 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불은 하늘에 있고 땅은 밤이 지배하는 추운 곳이었다. 그런데 지상의 주민과 천상의 주민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때 지상의 주민이 하늘로 올라가 불을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자의 방법에 해당한다. 반면 이웃 부족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불을 사용하는 것은 개가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개는 가축이기 때문에 자연의 영역와 문화의 영역 양쪽에 속하고, 또 대립하는 이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후자의 방법에 해당한다.

 

3.3.3 오늘 날의 신화

신화는 여러가지 다른 사안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해서 설명한다는 그 특성상,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고양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출현과 함께 신화는 공중분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파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옛날 신화가 통일적인 답을 부여하고자 했던 문제는 오늘날 전혀 다르게 다루워지고 있고, 어떤 문제에는 종교적 설명, 어떤 문제에는 법률해석, 또 어떤 문제에는 역사적 설명 등 각 문제마다 다른 해결방식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신화의 단편은 쉽게 발견 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종교나 예술은 신화의 본질적 특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화를 가장 잘 보존한 사고영역은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는 과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내다보는데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신화의 초시간적 특성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 신화와 역사의 시간관은 전혀 다르다. 신화에 있어서 우리는 이 세상의 태초부터 현재, 그리고 종말까지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신화의 시간관은 정적이고, 통합적이다. 그와 반대로 역사는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이해를 줄 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을 대립시키고, 미래를 구축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서로를 대립시키는, 동적이고 분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신화는 둘다 과거에 의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 혹은 과거의 형식이나 해석에 의해 미래를 준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에 한 좌익의 인간이 있다면, 그는 프랑스혁명을 칭찬하고 현재 갖고 있는 이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근거를 거기서 찾는다. 그리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만이 자기가 살고있는 사회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구축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우익인 인간이 있다면, 프랑스 혁명은 많은 과오를 범했고 실패도 많았으며,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므로 사회발전의 묘책은 될 수 으며 그것은 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3.4 슬픈 열대

『슬픈 열대』는 흔히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중 최고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가 1937년에서 38년까지의 기간 중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네 원주민 부족인 카두베오족3,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책은 단순한 인류학 연구서로만은 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청년기의 체험, 그리고 그가 왜 인류학자가 되었는가 하는 내용 들이 일종의 자서전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의 원주민 사회가 진보된 사회와의 접촉으로 인해 변질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문명이 다방면적 침투를 통해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상황에 대해 명백한 분노를 나타냈다. 신비스러운 조화의 구조, 인간정신의 본래적 특징을 잘 보전하고 있었던 원시적 과거가 이제 서구인의 손에 의해 파괴되어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열대 원주민 사회는 슬픈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사회가 세계의 다른 나머지 부분에 대해 자의적 기준을 부여하려는 오만하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는 원주민 사회 또한 나름의 논리와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서구사회 보다 변화가 적은 탓에 원초적인 인간성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 더 우월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서구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이들 원주민 미개사회보다 더 우월할지 모르나, 그것의 정신적 측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열의 척도가 될 수 없다.45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의 형태를 동적 사회(뜨거운 사회)와 정적 사회(차가운 사회)로 구분한다. 전자는 에너지를 산출하고 소비하면서 갈등을 통해 발전해왔고, 기술적 비약을 이룩해왔다. 후자는 원초적 상태를 유지하며 술적 진보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매우 민주적이고, 위계서열에 의한 인위적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개인당 가용 에너지 양으로 진보라는 것을 측정한다면, 서구사회가 가장 진보한 사회겠지만, 그 기준이 불리한 지리적 조건의 극복에 주어진다면 에스키모족이 으뜸이며, 가족 및 사회집단의 조화로운 유지에 둔다면 호주의 어보리진들이 으뜸이다. 이처럼 현대의 서구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낫거나 우월하다는 절대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열된 사회에 사는 서구인들은 변화가 거의 없는 미개사회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차가운 사회에 사는 미개인들은 서구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에 대해 편견이 아닌 객관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고, 나아가 우리들의 사회가 지닌 관습들의 정당성이나 자연스러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하나의 도덕적 선택이며, 사회적 완전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그는 일종의 반역사주의자로서 원시사회와 현대사회 간의 단절을 거부한다. 오직 역사적 진보라는 채찍에 의해 과열되고 있는 사회와 정적이고 조화스러운 원시적 사회가 존재할 뿐이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인간사회의 유토피아란 사람들이 진보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인간성의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도로 구현되는 어떤 자유의 시기와 조화의 사회이다. 바로 이와 같은 유토피아적 관점에서만이 사회인류학은 최고의 정당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사회인류학은 인간의 가장 암흑시기에서도 이러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임무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의 사회에 대해 동경과 연민의 정을 느끼는 동시에, 비인간적인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명백한 분노와 깊은 우수를 나타내고 있다.

 

4. 레비스트로스의 반역사적 성격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우리의 원초적인 사고방식, 즉 야생의 사고의 특징은 무시간성이다. 야생의 사고는 세계를 하나의 통시적, 공시적 전체6 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은 그가 역사적인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역사의식에 따른다면, 인류의 전역사과정은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유지되어온 의미나 지식의 축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각 시대와 공간적 특성에 따라, 동일한 구조가 다양하게 변모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비스트로스가 진보의 개념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결코 지니지 않았다. 단지 그는, 진보란 어떤 사회가 발달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거의 완전하게 파악하게 될 경우, 다른 차원의 사회로 이전되어 버리는, 동일한 구조내의 불연속적 다양화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역사가 존재하고, 또 이들 각각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우리들 자신의 사회척도에서는 진실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할 수 있는 사실도, 인간성의 척도라는 면에서는 진실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란 항상 인간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식의 양식을 기본적으로 변경시키지도 않는다. 요컨대 역사란 시간상으로 펼쳐진 인간의식의 조합과정으로서, 인간정신의 구조적 변형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5. 결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방법과 그것이 내포하는 사상적 특성에 대해서 지식인들 사이에 매우 격렬한 논의가 있다.

 

1.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성과는 과대평가 되었다. : 비평가들은 레비스트로스가 매우 적은 현지조사 경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에 적합하도록 자료를 취사선택했기 때문에, 만약 다른 자료를 사용한다면 그의 주제가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즉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구조적 짜임새 자체는 대단한 반면, 근거와 내용은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2.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인간 정신의 기계적 요소로 환원시킨다. :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은 하나의 형식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자로서, 그 생활은 일정한 구조들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3. 레비스트로스는 반혁명적이며, 그의 사상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어떠한 철학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이념적 목적을 가지고 그의 작업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곳은, 구조주의 철학의 내용이 아니라, 구조주의의 방법론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여전히 다양한 철학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미개사회라는 제한된 질문영역에서 그의 체계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조주의의 몇가지 이념을 명확하게 들추어 냈다. 가장 먼저, 그에 따르면, 인간과학과 인간의 행위는 정신과정의 구조 속에 지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는 자연과학자가 수학적 논리로써 자연을 이해하듯이 구조적 논리로서 문화현상을 이해하고자 해야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과 의지보다는 구조라고 불리는 계획된 회로에 따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는 모든 전통적인 휴머니즘 사상을 위협하는, 현대의 가장 완전하고도 엄격한 무신론적, 과학주의적 사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부터 시작한 구조주의는, 라캉, 알튀세르, 푸코등의 사상가들의 연구성과가 합쳐져 발전해온 바가 있다. 이 구조주의자들의 사상은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는 묵시적 시사를 던지고 있다. 구조주의에 의해 철학은 주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구조주의는 수사적 철학에 대한 반발이며, 오늘날 인간에 관한 지식은 거대한 과학적 전진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하나의 각성이기도 하다.

 

  1. 신화란, 우리말로는 '신'의 이야기가 되지만, 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뮈토스(Mythos)는 로고스(이성)과 대립하는 불합리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론의 기초는 그와 같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 뮈토스의 로고스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것의 합리성을 밝히자는 것이다.
  2. 그러나 신화란 언어 그 자체도 아니며, 단지 그것은 언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적 분석의 타당성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3. 카두베오족과 함께한 생활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안면 도식에서 수준 높은 예술적 정취를 느낀다. 카두베오족의 얼굴 문양은 아이들이 장난하듯 마구잡이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의해서 정교하게 그려진 하나의 예술이었다. 얼굴에 그려진 문양은 단순히 예술 즉, 유희의 차원을 넘어서서 부족의 구성원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성스러운 의식의 일종이며, 또한 즐거운 개인 축제의 하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카두베오족의 안면 도식에는 그들이 무의식 중에 요구하는 사회 제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분석한다. 즉, 안면도식은 카두베오족이 그들의 제도에서 느끼는 결함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대인들이 편견처럼 마구잡이식의 원시 예술이 아니라 치밀하게 고안된 그들만의 고급 문화이다.
  4. 물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대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내에서 의사 결정과 판단을 한다. 그것은 유럽인, 아프리카인, 한국인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타인에게 강제될 때 필연적으로 지배-예속의 형태가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구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의해 억압된 문명들이 파괴되는 것을 슬픈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5. 마찬가지로 모든 문명에서 나타나는 제도는 단순히 문명권 내 권력자의 도구라기보다는 전체 사회의 요청과 암묵적 합의에 의해서 나타난 필요물로 인식될 수 있다. 예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서양인의 기준을 통해서 단순히 계급적 억압 구조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6.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 통시태는 "그 언어가 시간 축을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 혹은 일정한 시기에 어떤 언어 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 사이의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그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

<쟈크라캉>

라캉은 소쉬르에 언어학 모델을 정신분석학에 인용한다면 어떻게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비록 논란을 불어일으키긴 했지만 매우 독창적인 논증을 했다. 구조주의의 영역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색해낸 것이다. 그의 연구의 기본전제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명제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평생을 걸친 노력은 프랑스 현대정신분석과 프랑스 현대사상의 형성 및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프로이트주의 혁명을 일으켜 정신분석 이론이 철학, 사상, 문화, 사회,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보편적인 인문사회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였다.

 

1. 라캉 철학의 이론적 배경

라캉은 프로이트 이후 시대의 정신분석학이 실증주의의 실험적 방법-과학주의-을 맹신하는 미국학계를 중심으로 생물학주의, 발달심리학, 사회순응주의 등으로 축소 혹은 왜곡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구체적으로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인간 주체가 합리적 의식이라는 이름 하에 무의식의 욕망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양한 정신발달과정을 거쳐 하나의 '표준적인' 자아가 확립되는지 등을 연구하는, '자아심리학'으로 환원되었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분석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식적 잠재의식과 뒤집어진 욕망으로부터 의식적 자아를 되찾아서 미국식 생활방식1에 적응하도록 하고 행복추구를 정당화하는 도구적 이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2

 

이러한 이론적, 역사적 맥락에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탈의학화, 탈생물학적 결정론화 및 비의학적인 문화적, 철학적 모델을 통한 재해석을 통해 프로이트의 본래적 모습을 되찾고자 했다. 라캉은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꼼꼼하게 재독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또한 프로이트의 새로운 통찰을 정당하게 평가해줄 가장 알맞은 방법을 제공해주는 것이 구조언어학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라캉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특히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발전한 대로 정신분석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화해를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2.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

전통심리학은 의식의 과학적 합리성은 중시하였으나 무의식의 세계를 무시하였고, 마침내 그것을 동물적 본능의 비이성적 수렁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이런 이전의 주장을 뒤엎어버리고 무의식적 과정은 자체적 합리성과 자체적인 실재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더 나아가서 무의식적 진술이 의식적 진술보다 보편적이고 근원적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정신과 의사의 경험적 데이터를 '객관화한 것'에 큰 의의를 남겼다면, 라캉은 그런 프로이트의 오랜 '과학적 접근'이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구조적 언어에 대한 탐구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즉 인간정신의 일차과정인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무의식을 꿈으로 표출한다. 이는 꿈 혹은 무의식의 구성물들(말실수, 농담 등)이 본능적 현상이 아니라 의미의 언어적 담지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언어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이, 꿈 이미지 역시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꿈이란 주체의 현재와 과거의 욕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욕망과 희망, 기대, 불안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언어적 표출이다. 이 주장은 이것은 라캉이 프로이트와 소쉬르의 발견에 공통점이 있고, 또 서로 보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이유이자,34 무의식은 생물학적, 동물적 본능이라는 전통심리학의 견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반박이기도 하다.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으로서 생물학의 정해진 길만을 따르는 본능과 달리, 무의식적인 충동은 예외와 일탈이 허용된다. 따라서 언어적으로 구성된 무의식의 내용들또한 정해진 규칙이나 고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며, 예외와 일탈을 허용한다.56 여기에 더해 라캉은 프로이트의 '꿈의 배꼽' 개념을 인용해, (꿈을 포함한) 무의식적 구성물들은 궁극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빈곳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 라는 라캉의 명제는, 말 그대로 무의식이 언어적 구조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무의식 혹은 무의식의 표출인 욕망은 일의적이지 않으며, 생물학적으로 정해진 길을 따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빈곳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2.1 자아와 주체의 구별

이 점에서 라캉은 자아와 주체를 구별하게 된다. 라캉 인식 체계에서의 주체는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각을 당하는' 주체로 사실상의 주체성이 부정된다. 라캉의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는 이 명제가 의미 하듯 주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그 무엇'이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7 이 점에서 주체는 분열되어 존재결여에 시달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 뒤에 감추어진 언어에 젖은 채 남아 있는 인간의 주체는 영원히 그의 환경에 대해서 분열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분열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빈곳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혹은 무의식의 주체 역시 궁극적으로 체워질 수 없는 결여를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기 때문에 분열될 수 밖에 없다.8 반면 자아는 주체의 본질적 분열을 은폐하고 봉합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의식의 욕망을 부정한다. 그러가 궁극적으로 결여를 채울 수는 없기 때문에, 자아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2.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 (다시)

둘째로 그는 이차과정인 합리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사고, 즉 의식 또한 본질적으로는 무의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의식의 권위는 무너지고, 의식적 과정은 무의식을 동반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는 랑그와 빠롤의 구조언어학적 관계를 무의식과 의식의 심리학적 관계의 유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이 유비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실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광범위한 암시를 준다고 믿었다.

 

3. 거울단계(상상계)

거울단계, 혹은 상상계란, 상징계, 실재계와 함께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세 요소이다. 이 단계는 인간의 자기의식과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첫 단계로, 아이가 거울에 비친 통합된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소외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거울단계라는 개념은 라캉의 이론에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거울단계 개념이 상징계와 실재계라는 개념보다 먼저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설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덩어리로 뭉그트려진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이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앙리 왈롱은 6-18개월 되는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지각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응하는 것을 발견했다. 환호성 반응은 어린아이가 타자, 즉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자아는 거울의 외부에 놓여 있지만, 아직 어린아이는 주체와 그 상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 시기에는 감각이 혼돈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진 통일성 없는 모습으로 인지하며, 안과 밖, 어둠과 밝음 등의 가장 원초적인 구별만을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자면 얼굴표정또한 원초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9 그리하여 어린아이는 일종의 자기망각의 상태에서 자신의 모습을 처음 경험한다.10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신체를 움직이며 거울의 상이 자신임을 확인한 어린아이는, 제3자(예컨대 어머니)에게로부터 자신이 지각한 사실이 참인지 확인을 요구한다. 물론 어린아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저게 나야?' 라고 질문하는 듯한 시선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것을 제3자가 인정하는 제스처를 보이면 어린아이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는 어린아이가 제3자의 '인정하는'시선을 통해 자신이 완전하다는 인상을 받고, 따라서 자신이 가진 운동감각기관의 미성숙이 은폐되기 때문이다. 즉 거울단계는 어린아이가 인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착각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울단계에서의 환호성 반응은 무의식적 욕망의 구조화된 형태로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금 지난 후에야 거울의 상은 그 위대성을 잃어버리며 어린아이에게 정확한 상을 보여준다.

 

요컨대 거울 단계란, 어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외적 세계를 구성하는 단계이다. 대략 생후 6~18개월 정도의 아이는 처음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외부 대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카오스처럼 하나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보게 되고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된다. 거울의 상에 대한 지각은 통일된 상을 봄으로써, 원초적인 감각적 혼돈은 사라지고, 어린아이는 신체의 통일성을 획득한다. 신체이미지에 대한 지각을 통해 어린아이는 분열의 위협과 불안감로부터 보호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거울 이미지는 이후 모든 심리 발달 단계에서 원형으로 작용한다.

 

라캉은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 자아의 자율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밝히고자 했다. 거울 단계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식의 기준이 되는 자명한 자의식이나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어느 순간 나의 이미지를 다른 대상 이미지로부터 분리하고 그것에 고착됨으로써 형성된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미지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시화된 신체를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된 타자적 대상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단지 신체가 가시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나와 마주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자이며, 나의 내면을 보여주지 못 하는 대상일 뿐이기에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 결국 거울 단계는 매우 행복한 단계이지만, 허구적 구축이 이루어지는 단계이고 타자를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자기 소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타자는 실제 타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주체의 타자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이상적 단일성 및 완결성은 표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아 자신의 본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에 의한 자신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나르시시즘적 환희를 느끼는 것이다. 거울단계는 "주체의 사태는 소외다"라는 라캉의 말처럼 의식의 본질이 자기 소외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아가 타자에 대한 동일시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구조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 사고, 생각, 표상등은 타자를 경유해야만 지각될 수 있다. 타인은 나의 심리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라캉에게 있어 주체성은 타자성을 구조적으로 함축한 것이다.

 

3.1 타자의 시선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어린아이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와 가지는 상호작용관계이다. 예컨대 어린아이는 자신을 반갑게 대해주는 타자, 예컨대 어머니의 목소리나 제스처 따위로 자신의 지각이 구조지어진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아직 자신의 통일성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어머니를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인지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어머니를 자아가 아니라 타자로 경험하고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거울단계의 어린아이는 자기동일성과 동시에 대상화를 경험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의 깨달음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시선에 잘보이는 것을, 즉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어머니의 시선을 성공적으로 획득하기를 욕망하게 된다. 또한 어린아이가 자신이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도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이처럼 타자의 시선,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시선은, 아이가 거울단계로 진입하도록 이끌거나, 막을 수 있는, 아이를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구조지을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첫 번째 단계가 발생한다. 어린아이가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볼때, 그 자신의 무능력이 아니라 이상적 완전함을 보는 이유는,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아이는 스스로를 팔루스11라는 기표로 여겨 자신이 어머니의 결여를 완전히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머니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기에 어머니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완전한 상상적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이처럼 나르시시즘적인 끈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를 엮고 있다.

 

4. 상징계

거울단계는 마치 상상계가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언어가 상상계로부터 생성되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의 존재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가장 어린 시절의 인상들을 구조지으며,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심리적 구조를 견고하게 한다. 거울단계에서 언어는 주체와 타자를 분리하는 속성을 보여주며 개인을 타자의 차원으로 이끈다. 그러나 언어의 역할이 단순히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통합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는 상징계에서 드러나는데, 구체적으로 상징계란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활동을 규율하는,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체계이다.

 

4.1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

상상계가 가시적인 것과 지각된 것들에 묶여있다면, 상징계는 아이의 언어화 과정에서 표상과 상상, 내적인 이미지들과 관계한다. 아이는 성장할수록 자신의 대한 표상을 발전시키고, 직접 눈으로 지각된 자기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자화상을 추상적으로 그려낸다. 즉 주체의 욕망에 대해, 아주 어린아이는 시선에서 답을 찾았다면, 보다 큰 아이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답을 찾는 것이다. 이즈음부터 아이는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맞는지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지식에 대한 이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눈의 보이는 것들은 내부의 상으로, 상상으로, 꿈으로 전환시키는 언어화를 통해서 아이는 앎에 대해 전보다 더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은 그에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더 이상 주지않는다. 이 시기 아버지는 아주 강력한 존재자로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일정기간동안 아이에게 모든 지식을 갖고 있는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그 역할을 통해 어머니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이는 자신이 결여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4.2 합일에 대한 욕망과 언어화

이러한 갈등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이때 팔루스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상징계에서 아이는 스스로가 팔루스가 되고자 했지만, 싱징계에서는 팔루스를 가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팔루스를 가지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것은, 언어화 과정을 통해 인간을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한다. 이러한 이름 불려짐은 타인에 의해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게 된다. 외부 사회의 무엇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는 그 사물의 이미지를 그 사물의 이름으로 전치하게 된다. 즉, ‘우유’라는 외부 물질을 이미지로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우유'라는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어린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이름이 불려지는 것부터 시작하게 된다. 타인에 의해 누구 집 아들, 누구 집 딸 따위로 불려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언어에 의해 하나의 개체로서, 사회 구조 속에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내 자리로 받아들이고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댓말을 배우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나의 질서에 편입되고 사회적 존재가 된다. 언어는 더 이상 정보의 전달이나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질서를 받아들여 '인간'이 된다.

 

요약하자면, 상징계에 들어선 아이는 타인에 의한 이름 불려짐, 즉 타인의 인정에 의해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이가 상징계로 진입한 이유는 어머니(타인)가 욕망하는 팔루스가 상징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는 상징계 안에서 상징계가 만들어낸 욕망인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여 타자가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언어를 통해서 아이는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4.3 라캉의 욕망이론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욕구는 아주 단순 형태의 식욕, 수면욕, 성욕 따위를 말하며, 요구는 욕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은 요구 너머에 존재하는 충족될 수 없는 무엇을 말하며 결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계속 울고 있을 때 부모는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여 밥을 주지만 그치지 않는다. 이에 부모는 대변을 봤나하고 확인하고 일부로 기저귀도 갈아주지만 그래도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요구를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즉 아이가 아무리 부모에게 요구하더라도 그 요구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에 항상 결핍을 남기는 것이다. 이 결핍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즉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욕구들은 어느정도 타인과의 관계를 매개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배가 고프다하여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먼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선행된다. 즉 음식들 사이에 인간 위주의 경계를 그어 나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나누는 것이다. 더욱이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무한히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음식은 무한재가 아니기에 타인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성욕의 문제로 넘어서면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중요해진다. 타인의 허락 없이는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적 욕구에는 어떤 외부적 대상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 단순하게는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같은 대상의 정립에서, 그 대상과 갈등하게 되는 타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자신의 외부의 어떤 존재를 상정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그 외부의 존재를 매개하여 자연적 욕구에서 사회적 욕구까지 만족을 얻으려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정 욕망이 발생하게 된다.

 

즉 주체는 상징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팔루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결여로 남게 된다. 결여 자체가 상징계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여의 인식을 통해 욕망이 형성된다. 이에 타자의 욕망을 소유하여 욕망을 충족해보지만 그것으로도 결여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이 이것을 가장 잘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로를 이상화하는 것과 '공통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마치 자신을 거울에서 보듯 타인에게서 보고싶어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자신과 타자와의 뚜렷한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이러한 망각은 모든 주체가 대부분 자신을 보지 않고 상대방에게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고와 감각도 우선 외부, 즉 타자에게 위치해있다. 합일의 대한 욕망, 즉 용해될만큼 완벽하고 순수한 사랑과 합일을 싶은 마음과 차이에 대한 욕망, 즉 타자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12 사이의 긴장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유도한다. 싸움, 격렬한 토론, 절망감, 관계단절에 대한 고민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요구하는 순간 그 요구는 완벽히 만족이 안 되기에 다시 결여를 낳게 된다. 결여가 존재하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시 또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욕망이다. 따라서 주체는 욕망을 알 수 없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명하기에 그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도대체 그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만이 남게 된다. 이때 주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자 역시 결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타자 역시 결여되어있기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서는 그것을 채울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타자의 욕망이며 그것에 대한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지점에서 주체는 타인의 욕망과 자신을 구별하여 분리된다. 주체는 이러한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따라서 주체는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재형성된다.

 

5. 실재계

실재계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생기는 결여, 언어 이전에 있었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이는 상징계에서 배제되면서도 상징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중핵적인 부분이다. 주체는 끊임없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욕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라캉은 후기에 들어 실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앞서 살펴본 결여가 말해주는 것은 상징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상징계로서 설명할 수 없는 상징계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익혀 상징구조에 종속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현실 그 자체가 상징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언어를 배우는 순간 고양이라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게 된다. 언어를 익히면서 철저히 언어의 상징구조에 따라서 고양이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나'는 사회적으로 표식할 수 있는 나의 지문, 이름, 주민등록번호 너머에 무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재에는 도달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고 해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재는 상징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 다만 인간이 언어구조에 의해 상징화되어 주체가 되었기에 언어체계로 포섭이 안 될 뿐이다.

 

5.1 죽음 충동과 주이상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끊임없이 죽음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이때의 죽음은 진짜 죽음, 즉 자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의 끝자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 충동은 상징계가 금지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다. 즉 금지하기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충족해보아도 결여는 남게 된다. 서울대에 가더라도 충족되지 않는 결여는 남게 되며 좋은 직장, 멋진 결혼 생활, 명품을 얻더라도 결여는 남게 된다. 따라서 주체는 사회가 금지하는 그곳에 결여를 채워줄 수 있는 더 큰 절대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이를 두고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 칭한다. 이는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라는 의미도 가지게 되는데, 사회구조적 금지를 넘어서는 순간 주체는 처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충동은 상징계 내에서의 삶에 대한 죽음의 선언에 다름이 없다.

 

라캉이 실재계를 통해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는 더 이상 사회 구조가 요구하는 법과 규범, 문화 질서에 종속된 채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실재를 만나 그 속에서 주이상스를 획득할 수 있는가에 놓인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이다. 라캉에 의하면 오늘날의 도덕이 가지는 위기는 욕망의 윤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으며, 도덕은 전통적 가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과거 전통적 가치가 배제하였던 실재를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승화이다. 승화(sublimation)는 일상적인 대상에 실재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주체는 결코 실재 그 자체를 만날 수 없기에 따라서 환상 속에서 승화를 통해 일상적인 대상에 실재의 지위를 부여하여 향유하게 된다.13 예컨대 예술이 승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예술은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를 표현할 수 있는 창조활동이자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화는 상징계에 완벽하게 종속된 주체가 실재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며 결코 채울 수 없는 결여를 환상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다.

 

흔히 실재는 뭔가 어둡고 기괴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실재는 지속적으로 말했듯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꼭 부정적인 늬앙스로 그려질 이유는 없다. 실재는 상징계에 포섭될 수 없는 곳으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논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곳이다. 우리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흔하게 경험하곤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주이상스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이다. 만약 인간의 삶이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만을 받는 상징계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답답하기 이를때가 없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흔히 일탈을 꿈꾸곤 한다. 저곳에 가면 나의 결여를 채워줄 수 있고 뭔가가 있을거라는 생각 이것은 우리에게 여유를 던져준다. 요컨대 정신분석을 통해 분석을 받는 개인, 분석주체가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이 던지는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이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라캉이 가지는 윤리학적 의의라 볼 수 있다.

 

  1. 열심히 일하고 자기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기능적이고 주류적이며 조용한 현대사회의 정상적인 시민의 생활양식
  2.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라캉은 좌파적 지식인으로 숭앙되었다.
  3.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언어를 드러냈다면, 소쉬르는 언어의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4. 프로이트는 그자체로도 언어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라캉은 소쉬르 이후의 세대에 속하므로 프로이트의 재해석에 소쉬르를 인용한다.
  5. 이는 소쉬르 언어학의 자의성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것이다.
  6. 이는 역설적으로 동물에게는 무의식이 없으며, 따라서 무의식이 있는 인간만이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윤리성, 자율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7. 이는 상징계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후술하도록 한다.
  8. 여기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무의식의 감추어진 언어를 해방시키기 위해 주체의 의식적 환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9. 이렇게 감각적 인상에 기초해서 최초의 정신적 흔적들이 형성된다.
  10. 그리고 이 거울의 상이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을 복사한 모습이라는 사실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아이의 사고력이 강화될 수록 서서히 알게된다. 그러고 나면 주체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서도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11. 어머니가 상실하였거나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 즉 인간 욕망의 대상이자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물로서의 상징적 표현.
  12. 이는 근본적으로 언어가 주체를 타자로부터 구별하는 차이를 낳는다는 점에서 유발한다.

  13. 라캉이 얘기하는 승화의 대표적인 예가 중세의 궁정풍 사랑이야기이다. 이는 높은 귀족의 부인을 사랑하는 기사의 이야기로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결혼을 한 여자이고 높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따라서 기사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자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사랑의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귀족 부인은 평범한 대상으로 실재의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귀족 부인은 아주 이상적이고 고귀한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그녀를 향한 금지된 욕망은 그녀를 더욱 더 고귀한 양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루이 알튀세르>

서론 : 알튀세르와 구조주의

루이 알튀세르는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맑스주의 철학자 중 한명이며,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인물인 데리다, 지젝, 바디우, 버틀러 등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영미권의 분석 맑스주의와 비판적 실재론이 형성되는 데도 촉매 역할을 했다.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와 정신분석, 프랑스 과학철학 등의 이론적 자원을 활용하여 맑스주의를 개조하려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핵심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인식론적 절단, 과잉결정, 구조인과성 같은 개념들을 제안했다. 『레닌과 철학』에서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을 도입하고 스피노자와 라깡의 이론을 기반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쇄신함으로써 전통적인 토대-상부구조론 대신 재생산의 문제설정에 따라 맑스주의를 개조하려고 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역할을 해명하고 자본주의의 변혁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다.

 

알튀세르가 20세기 유럽 대부분의 맑스주의 지식인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과 반인간주의 성향12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맑스 저작 속에서 단지 암시만 되어 있는 맑스주의의 개념을 만들어내거나 구성하기 위해 구조주의적 분석방법을 이용하였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읽는 선조건이 바로 맑스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맑스 사상이 맑스 텍스트의 개념적 전체성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맑스를 과학적(유물론과 변증법)으로 읽음으로써 그의 저술 및 사상을 해석할 것이 요구된다. 즉 맑스를 맑스 자체의 동시적 전체 안에서, 구조적으로 상호관련된 통시적 부분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단지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알튀세르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분석은 맑스 사상이 초기와 후기의 인식론적 단절을 겪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전기사상은 헤겔 및 관념론자들의 큰 영향을 받았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자신의 개념과 언어로 독창적인 사상을 정립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 맑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알튀세르는 헤겔을 비판하고, 맑스주의를 구원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대한 실존주의자와 신헤겔주의자들의 다양한 재해석(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후기 사르트르)은 과도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담고 있어 맑스 작품의 과학적 기초를 파괴하며, 맑스의 성숙한 과학적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 즉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철학적 틀 안에서 초기 맑스의 몇몇 개념들3을 부각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천을 위한 과학이론으로서의 진정한 사명을 다하는, 제대로 이해된 맑스주의는 어떤 이념적 편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를 그저 맑스 자신의 관점에서 읽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어떤 다른이론으로부터 파생될 수 없고, 그런 이론으로 번역될 수도 없는 자족적인 체계이다. 맑스에겐 이전도 이후도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은 그 자체적인 개념에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관념론, 경험주의나 실존주의 등 맑스철학 이외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것은 그 참뜻을 발견하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언어의 작용은 언어의 체계 안에서 구조적으로 이해되고(소쉬르), 무의식의 활동은 무의식의 체계 안에서 이해되는 것(라캉)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는 맑스주의 자체의 구조적 체계 안에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사상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스스로 구조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알튀세르가 구조주의자라는 것은, 맑스주의 자체가 완전한 개념적 체계라는 그의 전제와 모순되는 것으로, 맑스주의를 구조주의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맑스주의는 현대의 구조주의 운동을 앞서가는 '이론적 실천의 과학이론'이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계급투쟁 등의 사회내 요소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이념적 편견에 근거하지 않고 그것들이 그저사회라는 구조적 체계 안에 존재하는 구조적 관계라는 것, 따라서 사회의 각 요소들은 오로지 동일한 체계 내의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이 바로 맑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맑스 작품을 알튀세르가 제안하는 구조적 방법으로 읽는다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목표와 범주들을 불가피하게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한다.

 

0. 알튀세르 사상의 근본토대

0.1 맑스주의의 사적유물론

맑스와 엥겔스는 생활의 모든 측면이 물질적 조건들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맑스-엥겔스에게 있어서 인류 역사의 첫 번째 근본원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자연세계 내의 사람들은 자연재료를 가지고 생계 수단을 생산하는 통해 물질적 삶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생산의 재료와 도구인 생산력, 그리고 이 재료와 도구들로 자기 삶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생산관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견해에 근거해 맑스는 전혀 다른 물질적 환경에서 살아왔더라도 여전히 똑같이 유지될 수 있는 인간의 특성 따위는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의 삶이 처해 있는 물질적 조건은 그 삶의 환경, 맥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모든 방면에서 그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근본원리는, 주어진 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합이 그 사회의 토대, 혹은 하부구조, 즉 사회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부구조가 결정되는데, 이 상부구조는 사회 내에서의 삶이 갖는 모든 각각의 양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상부구조는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제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제도들에 따라 사회가 구조화된다. 둘째로 상부구조는 모든 종류의 문화적 산물, 즉 법률 이론과 정치 이론들은 물론 철학, 종교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문화적 산물은 그 사회의 여러 형태의 의식의 양상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 내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그들의 삶을, 그 사회의 생산관계들이 결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표현한다. 철학 마저도 그것이 발생하는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좌우된다.

 

0.1.1 부르주아지 그리고 프롤레탈리아트

역사에 대한 맑스의 유물론적 이해의 기본 윤곽을 이해하려면 그것의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해봐야 한다. 한 사회 내에서 새로운 생산수단이 발명되고, 새로운 재료가 발견되며, 새로운 생산물이 더 정교한 다른 생산물의 재료가 되고, 또 분배 및 교환의 수단이 됨에 따라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모든 생산양식은 모든 정치적, 문화적 실천의 변화까 수반하며 변화하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서구의 역사가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위기와 사회 혁명의 발전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착취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가지고 생계수단과 물적자원이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조정된 적은 없었다. 생산관계는 착취관계로 존속되어 왔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생산력은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그들의 경제적 지배를 발전, 유지시킬 목적으로 탄생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산업노동자 집단인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탄생되었다. 부르주아지들과 달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주거만을 소유할 뿐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은 소유하지 못한다.

 

0.1.2 이데올로기론

사적유물론적 개념에 따르면, 한 사회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그 산물이 해당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생산방식 혹은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총합이라는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점점 발전된 방식으로 그들의 생계수단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미지, 담론들도 생산한다. 이 문화적 생산물들은 모두 그것이 발생하는 사회로부터 생겨나는 생계 수단의 더욱 근본적인 생산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모든 미학적, 문화적 산물들의 주된 특징은 궁극적으로 포스트 모던시기를 구성하는 자본주의 일련의 생산력 및 생산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여하튼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상부구조의 문화적 산물들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계급간 착취구조가 정형화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일련의 담론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담론이다.

 

예컨대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자유'개념이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개인적 자유라는 개념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개인적 자유를 소거시킨다고 주장하는 중산층에 응수하면서, 개인적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즉, 19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적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산물으로서 자유로운 상업, 판매와 구매에 국한되는, 사실상 산업자본가들 중에서도 가장 힘 있는 계급의 소유물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계급을 위해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굶을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만 있었다. 부르주아지들이 귀히 여기는 이 개인적 자유는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담론 내에서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으로 표상되지만, 사실 그것은 규제 없이 사고팔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자유였으며,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지배는 바로 이 특수한 자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모순에 빠지지 않는 개인'을 표상하는 자유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역할은 바로 그들의 지배수단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있었다.

 

0.1.3 실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각각의 심급들은 실천으로 규정될 수 있다. 한 사회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 등으로 이루어진다.4 이 실천의 본질은 노동, 즉 사람들이 주어진 일련의 기술, 도수 및 조직화형식을 사용하여 원료가 완성품으로 변형되는 절차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심급활동들은 특정한 일련의 원료, 생산수단 및 완성품을 수반하는 이러한 유형의 실천으로 이루어져있다.

 

0.2 맑스 초기의 휴머니즘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졌으며, 프랑스에서는 전쟁 기간 동안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공산당의 입지가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야 말로 진정으로 정치를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믿음이 생겨나면서, 맑스주의 및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탈스탈린주의 공산주의 지적운동이 시작된다. 이론적으로 이는 교조주의적인 맑스 이해, 즉 『자본』에 담겨져 있는 기술적 정식들과 공산당의 무미건조한 경제주의적 정통론에서 벗어나 청년기 저작(『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맑스 사상의 본질5을 파악하려는 시도로 표현되었다. 청년 맑스의 저작에는 후기 저작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맑스 사상의 인간주의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 풍부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소외론이었다.

 

왜냐하면 소외론은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인간 노동력의 착취와 인간성의 상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맑스주의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맞선 인간해방의 사상이라는 점을 납득시켜주기 때문이다. 소외론에 따르면, 산업노동자는 그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는 대상을 생산하며, 대가로 너무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는 생산된 대상을 거의 살 수 없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은 산업자본가들의 힘의 경제적 토대가 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자신에게 불리한 경제체제를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은 그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노동 분업은 단조로운 노동을 지루하게 반복하도록 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반면 맑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노동은, 사람들이 자연 세계와 생산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자연세계를 모두 변환시키는 절차이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대상을 생산하는 삶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자본가들의 삶을 살찌운다. 그리고 이런 소외론에 입각하여 맑스가 제시한 자본주의 상황의 해결책이『자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청년 맑스의 사상을 이해해야만 공산주의의 철학적 메세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1.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1.1 인식론적 단절

알튀세르는 초기와 후기를 비교분석하는 휴머니즘적 맑스 이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간교한 계략에 속아넘어간 맑스주의의 위기라고 선언하며, 맑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안했다. 그가 보기에 맑스 사상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연속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독일 이데올로기』무렵부터 헤겔주의자들과 관념론자의 언어 및 개념을 빌리던 이전의 관점과 인식론적 절단을 이룩한 이후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절단의 징표가 되는 이유는 이 저작에는 청년기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맑스 자신의 고유한 개념들, 곧 생산양식, 사회구성, 상부구조, 이데올로기, 경제에 의한 최종 심급의 결정 등의 개념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맑스 사상의 정수는 인간 본성을 역사와 정치의 토대로 삼는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에 근거하는『자본』을 중심으로 한 후기 저작에 담겨 있다. 그렇다면 맑스의 사상은 두 시기로 양분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주체, 본질, 역사 등의 관념론적 범주에 의해 나타나는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맑시즘 ② 그런 모든 범주 없이 존격하는 엄격한 이론으로서의 과학적 단계. 앞의 단계가 개인 사이의 인간관계에 관심을 집중하는 반면(소외론), 뒤의 단계는 생산 관계 사이의 형식적 관계까지 심층적으로 뚫고 들어간다(노동가치설 등).

 

알튀세르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사적유물론)를 과학으로서, 즉 사회사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생산하는 개념 체계로서 이해한다. 알튀세르는 맑스가 사적유물론의 과학을 창시한 것은 역사 영역 내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단절을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휴머니즘과 결별하는 이런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역사는 진실로 과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기점으로 맑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관념론적 문제설정과도 단절했다고 보았다. 맑스주의 사유체계가 변증법에 기초하지만 헤겔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을 주장했다고 해서, 절단 이후의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맑스 사상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맑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맑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맑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라는 이론적 슬로건 아래 맑스 사상을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하는데, 그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알튀세르의 인식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1.1 알튀세르의 인식론

인식론적으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스피노자의 세가지 종류의 인식론을 원용한 세가지 일반성 이론으로 표현된다. 일반성 I은 인식의 소재가 되는 각종 이데올로기적 표상을 가리킨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표상들을 접하며 그것들을 통해 사유한다. 반면 일반성 II은 과학적 개념들을 뜻한다. 사적유물론의 경우에는 맑스가 발견한 과학적 개념들, 곧 생산양식이나 잉여가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일반성 III은 일반성 II를 수단으로 하여 생산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따르면 인식은 외부 현실과 무관하게 사고과정 내부에서 수행되는 작용으로, 인식론적 절단을 통해 형성된 기초적인 과학 개념들을 수단으로 이데올로기적 표상들을 과학적 인식으로 변화시키거나 개조하는 과정이 곧 인식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인식과정을 '이론적 실천'이라고 불렀다. 이론적 실천은 비판가들이 주장하듯 현실적 실천 내지 정치적 실천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 아니라, 당 지보두의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명령으로부터 이론작업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론작업의 자율성이 유지될 때 정치적 실천도 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철학을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 재정의한다. 각각의 분과학문이 각각의 영역에서 수행되는 이론적 실천작업이라면, 철학은 이러한 이론적 실천들 전체의 역사와 구조를 다루는 이론이라는 뜻이다.

 

1.2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정의

알튀세르의 첫번째 작업은 맑스주의 철학, 곧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적 맑스 해석이 나타나는 이유는 철학적으로 볼때 그것이 경험론적 입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경험론은 철학사 연구에서 흔히 말하는 영국 경험론보다 훨씬 포괄적인 관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 인식 주관 바깥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인식이란 관찰과 추상을 통해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뜻한다. 인간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사회의 객관적 현실의 본질은 바로 생산 주체로서의 인간이며, 자본주의에서는 이 주체가 자신의 생산물인 자본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는 일이 일어난다. 따라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의 변혁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본질이 회복된 사회, 인간의 자유가 가장 온전하게 실현되는 사회를 뜻한다. 알튀세르는 이들에 맞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옹호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구조적인 작용에 의해 규제되는 역사 속의 주체이며, 따라서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인간이 아니라 구조와 그 모순을 설명해야한다. 실제로 초기 맑스가 사회를 개별적 행위 주체의 총합으로 이해한 것과 달리, 후기에 들어서 맑스는 생산양식을 통해 사회를 사유했다. 한 사회의 생산양식은 사회구성원의 모든 사유, 욕망,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맑스는 후기에 들어서 국가가 사람들의 실천으로 구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지배하고 착취하는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제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3 맑스 변증법의 독창성 해명

두번째 중심 작업은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 고유의 변증법을 밝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에게서 용어를 빌린 '과잉결정(중충결정)' 개념을 독자적으로 이론화함으로써 두 변증법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특히 역사적 이행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곧 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인 러시아에서만 혁명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변증법의 차원에서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또는 자본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모순만 생각해서는 혁명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으며, 모순을 그것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모순을 상황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모순이 전개되는 외적 조건이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 모순을, 상황들과 하나를 이룩 있어서 단지 이 상황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이 상황 들 속에서만 포착되고 식별되고 작동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1917년 당시 유럽의 가장 후진국인 러시아는 자본주의적인 모순 이외에도 봉건적 착취체제의 모순,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착취의 모순, 식민지적 착취와 전쟁의 모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 정도와 농촌의 중세적 상태 사이의 모순,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배계급의 세력이 약화되어 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가 말하는 과잉결정은, 이데올로기 규정의 원인이 최종적으로는 경제적 심급으로 환원이 가능하지만, 경제적 토대에만 있는것은 아니며, 그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조건들 및 모순들의 복잡하고 변증법적인 상호작용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알튀세르는 상부구조의 이런 속성을 '상대적 자율성'과 '특수한 실효성'이라 칭한다. 상대적 자율성이란 상부구조의 한 심급6은 그 고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 역사는 일련의 복잡한 매개를 통해서 경제 심급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수한 실효성이란 상부구조의 각 심급이 경제 심급을 포함한 다른 심급의 역사와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잉결정 개념에 따르면, 사회는 '구조화된 복합적 전체'이다. 이 개념은 헤겔식의 기원과 목적의 변증법과 달리, 맑스의 유물변증법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체 역시 하나의 동질적 본질로 환원되지 않은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적 전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또한 사회는 '지배소를 갖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전체는 다양한 심급들 내지는 요소들 간의 위계적 결합관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음을 뜻한다. 다르게 보자면 이는 사회는 물론 사회를 구성하는 심급들 사이에서 '불균형 발전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사회적 심급이 다른 심급에 미치는 상호영향은 구조화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전체를 지배소를 갖는 구조에 따라 파악하는 것은 막연한 다원주의를 넘어서 구조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위계관계 또는 불균등한 접합관계를 인식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최종 심급에서 경제의 결정이라는 관념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이제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경제는 모든 생산양식에서 직접 다른 심급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 생산양식에서 지배소의 역할을 담당하는 심급들을 결정하는 기능만은 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나 항상 존재하며 지배구조를 만드는 최종 심급 역시 그 사회의 발전이나 유형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제가 지배소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면, 다른 생산양식에서는 정치나 이데올로기, 또는 다른 심급들이 지배소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하튼 맑스적 관점에서 한 사회는 여러 구조 간의 일련의 불균형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1.4 맑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성 해명

세번째 작업은 『자본』이 이룩한 이론적 혁명의 성격이 무엇인지, 곧 맑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성은 어떤 것인지 밝히는 일이다.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과의 이론적 동맹을 추구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은 진정으로 새로운 두개의 과학이며, 라캉이 자아심리학을 비롯한 사이비 정신분석으로부터 프로이트 사상의 진수를 보호하고 그것을 개조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각종 이데올로기적 위협으로부터 맑스주의 과학을 보호하고 그것을 개조하는 것이 맑스주의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미완으로 남겨진 역사유물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알튀세르는 특히 새로운 인과성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인과성에는 세가지 유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데카르트가 제안한 기계적 인과성으로, 이는 부분들 사이의 외재적인 관계만을 설명할 뿐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두번째는 라이프니츠 및 헤겔이 발전시킨 표현적 인과성으로, 이는 전자와는 반대로 각각의 부분들 속에서 전체의 표현을 발견할 뿐, 부분들 각각이 지닌 자율성을 사고하지 못한다. 세번째 인과성은 스피노자가 개념화한 구조적 인과성으로, 알튀세르는 이러한 인과성만이 맑스가 이룩한 이론적 혁명, 곧 역사유물론의 독창성을 잘 표현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인과성은 구조는 자신의 부분들 바깥에 있거나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고 그 부분들에 내재해 있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구조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독특한 결합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조라는 원인은 그 효과들의 결합일 뿐 그것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부재하지만, 또한 그 효과들 각각에 대하여 원인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부재하는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조적 인과성 개념은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직접적이고 단순화된 인과 작용에 따라 역사와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고,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7들의 역할을 경시하는 전통 맑스주의의 결함을 정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인과성에 의거할 경우 사회는 여러가지 상이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전체로 이해되며, 각 심급들 내지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서로를 규정하기 때문에 역사적 변화를 좀더 현실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

 

1.5 맑스 사상의 의의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맑스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실재를 표상하거나 반영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를 추상적 이론화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으로서 일반 사물의 발전을 표현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사상을 물질로(기계적 유물론), 혹은 물질을 사상으로(사유적 관념론)으로 환원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실천 그 자체를 우리의 살아있는 경험으로 구성하는 실천적 행위로서 인식해주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맑스주의는 결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거짓된 표상, 즉 어떤 거짓된 것의 관점에서 어떤 참된 것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며, 실재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는 거짓을 표상할 수 없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바로 그가 인간에게 자신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서 과학적(유물론과 변증법)으로 이해하려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맑스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위장된 계급사회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부터, 계급사회에서의 생산관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맑스 이론과 노동운동의 결과로 초래된 혼동은 알튀세르에게는 인간 역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대변되었으며, 그것의 최초 결과는 사회주의 혁명에서 나타났다. 이처럼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맑스의 사적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발견은 그 이전의 새로운 내용의 과학적 발견, 즉 탈레스의 수학의 발견과 갈릴레오의 물리학의 발견과 비교될만 하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작업이 역사를 최초로 과학적 지식으로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맑스의 역사과학이 아닌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따위는 부르주아지들의 사이비 과학이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엄격하게 과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역사의 동기가 인간의 실존적 의식 안에서가 아니라, 이 의식을 미리 결정하는 사회적 전체성의 구조적 질서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논증은 결정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을 직접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단정적으로 볼때 알튀세르는 주체보다는 체계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역사의 특권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개념을 거부한다. 인간적인 자유, 선택,창조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적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6 알튀세르 비판과 반박

알튀세르의 분석은 과학과 실천의 구조적 동일성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귀결된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무엇보다 역사적 실천의 과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이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가 로제 가로디는 알튀세르의 사상이 구체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맑스의 기도를 구조적 결정주의의 추상적 체계로 환원하였다고 비난하며, 거기에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동인은 제거되었다고 역설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는 그것이 실천의 실제적인 내용, 즉 살아있는 인간 주체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것으로서의 혁명적 계급투쟁을 과학적 틀로 해체하려는 것으로서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튀세르는 그의 적재적인 자들이 맑스주의를 의식의 이데올로기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다루는 것을 공격했다. 그는 그들이 역사의 진정한 실재로부터 이론을 유리시켰다고 비난한다. 역사는 인간 주체의 실존적인 무대연극이 아니라 구조적 관계의 체계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회주의는 스스로 과학적 체계로 드러날 때 진정한 객관적 지위를 얻을 수 있으며, 사회주의의 이론적 실천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유물론적 실천인 것이다.

 

  1. 구조주의자들은 문화 현상이 개별적 인간 존재의 의식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산물이 아니며,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자가 아니라 규약들에 지배당하는 사회 내 구성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2. 그러나 알튀세르는 전통적 구조주의와는 달리 오로지 맑스를 이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3. '노동'이나 '소외'
  4. 알튀세르는 이런 여러가지 실천 형식들의 총합을 의미하는 '사회적 실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5. 자본주의는 비인간적 체제이고 공산주의는 인민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사회체제이다.
  6. 예컨대 문화적 자율성
  7. 법, 이데올로기 등

     

 

1.7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에 대한 자기비판

1965년 두권의 저작을 통해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알튀세르는 그의 제자들과 계속 후속 작업을 진행하지만, 곧바로 다양한 비판과 장애물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소련의 노선을 따르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알튀세르의 작업을 편향된 것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또한 주로 알튀세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마오주의 좌파 운동가들은 알튀세르가 보수적인 프랑스 공산당과 단절하기 못하고 그 노선을 추종한다고 반대쪽에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이들은 알튀세르의 작업은 이론주의적 편향에 빠져있으며, 위로부터 대중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비판은 68 혁명을 경험하면서 훨씬 더 거세진다. 더욱이 알튀세르 자신은 두권의 책을 출간한 뒤 심각한 우울증이 발병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게 된다.

 

이러한 곤경에 처하여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정의가 이론주의적 편향을 범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철학을 새롭게 정의한다. 이제 철학은 '이론 안에서의 계급투쟁'으로 재정의된다.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우선 철학과 과학의 엄격한 구별을 함축한다. 알튀세르가 이전에 철학을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 정의할 때, 철학은 과학과는 구별되지만, 어쨌든 하나의 이론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 철학은 더이상 독자적인 이론이 아니라 계끕투쟁이라는 하나의 실천으로 정의된다. 이론 안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의 실천의 핵심은 경계선을 긋는 데 있다. 철학이란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활동일 뿐, 독자적인 대상을 갖는 이론이 아니다. 오직 과학만이 자신의 고유한 대상을 지니고 있다. 철학은 각각의 과학, 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사적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역사과학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적 표상들과 과학 개념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과학적 인식을 촉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다.

 

따라서 관념론과 유물론이란 서로 상이한 학설을 가진 두개의 철학진영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철학(관념론)과 과학적 인식을 옹호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사회의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철학(유물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철학사는 사실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영구적인 선긋기가 아니라 반복의 역사다. 문제는 철학의 역사가 아니라 철학 안에 존재하는 역사, 곧 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이다.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알튀세르의 이론작업의 중심이 계급투쟁이 문제로, 곧 사회구조의 재생산이냐 변혁이냐의 문제로 전위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알튀세르가 1970년대 내내 재생산의 문제 및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이데올로기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번째 부분은 맑스주의 상부구조 이론의 난점을 재생산이라는 문제설정에 따라 개조하는 부분이고, 두번째 부분은 예속적 주체 형성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 개념을 개조하는 부분이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말을 빌려, 만약 하나의 사회구성체가 생산을 함과 동시에 생산의 조건들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1년도 종속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생산의 최종적인 조건은 생산조건들, 즉 피착취계급의 재생산이다. 생산조건들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는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생산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문제로 구분되는데, 알튀세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후자의 문제다. 그런데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조직하는 기술적 관계와 더불어 항상 착취관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우회해야 하며, 이느 다시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사적유물론의 고전적인 장소론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장소론이 갖는 의의는 역사의 변화 동력을 관념이나 정신적인 것 또는 정치나 법제의 변화에서 찾지 않고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변화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곧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유물론적인 관념을 도입한다는 데에 바로 토대-상부구조 장소론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론의 한계는 상부구조의 반작용이나 상대적 자율성 같은 막연한 해명 이외에는 정치와 법,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알튀세르의 대안이 바로 생산과 재생산의 문제설정이다.

 

2.1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그는 우선 맑스주의 국가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국가는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국가장치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국가장치들은 서로 중첩되지만 구분되는 두 부류의 제도로 이루어져있다. 억압적 국가장치는 맑스주의 이론이 지금까지 국가로 여겨온 모든 것, 즉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익을 보존하기 사용하는,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조직되어 있는 억압적 제도를 의미한다. 정부, 행정,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 폭력을 통해 작동하는 '공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장치만으로는 국가가 수행하는 계급지배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해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계급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해 단지 강제와 폭력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를 도원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는 법률, 정치는 물론 교육, 가족제도, 종교, 문화 등 사적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이 억압적 국가장치와 구별되는 근본적 이유는, 억압적 국가장치가 폭력을 통해 작동하고 그 존재가 상대적으로 질서정연하고 뚜렷하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정신적으로 작동하고 뚜렷한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은 채 때로는 서로 갈등과 모순을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는 여러 제도들 조차도 국가장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자유주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정치와 권력은 항상 공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하며, 사적인 영역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되는 영역일 뿐 정치나 권력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반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는 개념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계급지배는 단지 공적인 영역에서 억압적 국가장치를 장악하고 활용함으로써 안정되게 재생산될 수 없으며, 사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개인들의 생활공간까지 장악하고 지배해야 비로소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제는 권력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적인 여역의 개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급지배가 관철되고 있고, 더 나아가 개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의해 형성되는지 설명하는 일이다.

 

즉 억압적 국가장치는 지배계급 혹은 계급동맹이 무력 혹은 즉각적인 무력 사용 위협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종교나 교육제도를 통해 강제를 합법화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정당화하면서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게 만든다. 각 집단은 계급사회 내에서 그들이 맡게 될 역할에 그들을 가장 잘 끼워 맞추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된다. 제도가 용납하는 선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낮은 점수를 받게 되고 상위 집단에서 배제되며, 불만을 묵살당하고 문제아로 찍히거나 궁극적으로는 제도권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될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은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해 수행된다. 만일 법원이 개인에게 금고형이나 사형을 선고한다면 그 선고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국가 질서의 유지를 위해 서로 협력한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 내의 상이한 형태의 제도들로서 존재하는 국가장치들을 통합하고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는 근본적인 수단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교육제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개진한다. 반면 전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종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개진했다. 계급투쟁을 위한 피착취 계급의 대립적인 이데올로기가 투쟁하는 영역도 바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6세부터 18세에 이르는 모든 아이들은 하루에 여러 시간을 지배적 담론 속에서 그 사회의 기술과 관습을 교육받고 있다. 아이들은 도덕, 종교, 그리고 철학이라는 형태 하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직접 배우게 된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나중에 노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 하급 및 중간 관리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 그리고 금융가·경영자·자본가·정치가·사제·교사 등 이데올로기 생산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계급이라도 억압적 국가장치를 다루듯이 손쉽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에, 피착취 계급또한 이런 모순을 이용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서 저항을 표현할수 있는 수단과 공세적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교육적, 문화적 담론에서 주로 행해졌지만, 전근대에서는 종교적, 신학적 담론의 수준에서 행해졌다.

 

2.1.1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실천을 가진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물질적 실존을 가지고 있다. 즉 이데올로기는 원래 담론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코 관념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관념 체계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의 규범적 실천(기도, 교회출석 등)에 참여하고 특정한 방식(기독교 윤리)으로 행동하며, 단체(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제도, 실천, 그리고 종교의식이 관념체계보다 선행하여 그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한 개인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지 않거나 교회에 출석하니 않는 등 그의 신념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실제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의심한다. 이처럼 개인의 관념은 개인의 실천들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가상이나 기만 또는 왜곡이 아니라, 실정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 곧 지배하고 예속하고 기만하고 억압하는 것만으로 작용하지는 않은다. 이데올로기는 능동적인 정치적 활동의 장소이자 지주로서 사고될 수도 있다.

 

2.1.2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상호작용적 실천들 간의 일련의 복잡한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실천들과 그것들의 관계가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의 삶을 결정짓는다. 실제로 모든 인간은 복잡한 일련의 실천들에 삽입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이 복잡한 일련의 관계를 통해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물질적 삶의 조건들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재벌·노동자·농민·지식인 등)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현실적인 조건에 선행해 성립하는 주체성, 개성, 심지어는 영혼 혹은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실제를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알튀세르는 이것이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일련의 복잡한 사회적 실천들 속에 삽입됨으로써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는 개인으로 하여금 그가 자유로운 주체이고 본인의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의 근원이자 원천이라고 믿게 만든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주체'라는 용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주체라는 개념 내에서 개인은 본인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독자적인 근원으로 여겨진다. 즉 주체적 인간은 "자유로운 주관성, 주도권의 중심, 행동의 창시자이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개인"이다. 이데올로기는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나'로서, '주체'로서, 정체성, 생각 그리고 행동의 근거지로서 나를 호명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마치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것 처럼 나를 주체로 만들며, 내가 주체라고 믿도록 만든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법률(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을 통해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본질에 비추어 볼때 이 규정은 가상적이다.

 

알튀세르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예로 든다. 이 종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데올로기의 '주체'인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호명된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신이 그들을 창조했다는 것, 그들이 신에 대해 의무가 있다는 것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듣는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다.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첫째로 그것이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른 주체, 이른바 근원적이고 완전한 주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한에서만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기독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서, 개인에 선행하는 위대한 절대적 주체에 의해 그렇게 호명되는 한에서, 개인은 주체로서 자신을 사유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체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주체는 일종의 모델이나 범례로서 상정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 이 모델이 실재적인 것으로 상정되고, 개인들은 이 모델을 토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행동한다. 개인들에 선행하는 상상적 주체에 근거하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함으로써 그들이 상상적 주체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들 스스로를 사유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은 절대적 주체에 종속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로운 주체로서 사유하게 한다는 의미에서만 우리를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정의한 주체, 즉 "종속적 존재이며 더 상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러므로 기꺼이 그의 예속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주체"라는 의미로도 우리를 호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산양식이라는 절대적 주체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주체가 되어 생산관계 체계 내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 생산관계 체제는 뭔가 다른 관계 체계가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는 논쟁 혹은 상상이 부재하는, 아주 명백하게 불신적인 착취의 체계이다.

 

3. 우발성과 마주침의 유물론

1990년 알튀세르가 사망한 뒤 출간되기 시작한 알튀세르의 유고들에는 그의 생전 저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사상의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 유고들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알튀세르 사상 전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알튀세르 사상의 온전한 일부로 평가받을만한 것들이다.

 

말년의 사상은 보통 알튀세르 자신의 표현을 따라 우발성의 유물론 및 마주침의 유물론이라고 불린다. 이 새로운 유물론은 서양철학의 흐름에 대한 포괄적 재평가에 기초하여 유물론의 핵심을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정통 맑스주의에서는 의식에 대한 물리의 우선성을 유물론과 관념론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반면, 알튀세르 자신은 사회의 재생산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철학이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옹호하느냐의 여부를 관념론 철학과 맑스주의 철학의 차이로 제시한 바 있다. 반면 유고에서는 세계에 확고한 기초나 근거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과, 세계는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는 우발성의 유물론 사이의 경게선이 그어진다. 이 새로운 구분에 따르면, 단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또는 헤겔만이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일부까지 포함하여 세게에 대하여 확고한 근거를 긍정하는 철학은 모두 관념론적인 철학에 포함된다. 반면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 같은 고대 원자론에서 발원한 우발성의 유물론에는 마키아벨리와 홉스, 스피노자,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들뢰즈,그리고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관점은 알튀세르 생전의 철학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몇가지 측면에서 연속성이 있다. 우선 우발성의 유물론은 1980년대의 유고들에서 비로소 자신의 명칭을 얻고 있지만, 이미 1960년대의 과잉결정이나 1970년대의 과소결정 개념에서도 표현된 바 있다. 또한 우발성의 유물론의 관점에 따라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재고찰하는『마키아벨리와 우리』는 1972년에 작성된 저작이다. 따라서 우발성의 유물론은 알튀세르의 사상이 단순하 구조적인 맑스주의 뿐만 아니라 상황과 정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세의 맑스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발성의 유물론에서 그가 고심했던 문제는, 어떤 체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 그 체계의 재생산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 그러한 재생산을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재생산에 대해 이질적으로 남아 있는 요소, 따라서 그 체계의 바깥에 있는 요소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좀더 분명히 말한다면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프롤레타리아 실존하는 대중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성적인 요소로서 그 체계의 재생산 과정 속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그 체계의 재생산과정 속으로 환원될 수는 없으며, 환원되어서도 안 된다는 알튀세르의 지속적인 이론적 입장의 표현이다.

 

 

 

<후기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광풍처럼 몰아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68혁명 시기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근거한 대대적인 지적혁명으로서, 전통철학과의 철저한 단절을 표방한, 철학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유의 흐름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철학자들은 직전의 세대를 사로잡았던 구조주의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거나 전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계승하는 면에서 연장이지만, 한편으로 반성이자 도전이며 극복이기도 하다. 구조주의자들은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내적 특징과 주체성을 비판하면서도, 방법 면에서는 근대성이 지향해온 합리주의를 이어받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는 합리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또한 구조주의는 결정론적이며, 필연을 중시한다. 구조주의에게 있어서 구조는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다. 반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사고를 비판하고 구조가 상대성과 역사성, 그리고 불완정성 및 불확정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다원화된 입장을 펼친다. 구조의 내적 측면을 중시하는 것, 그리고 랑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고정된 중심원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도 탈중심적이지만 후기 구조주의는 훨씬 더 탈중심적이다.

 

구조주의와 대결한다는 것은 철학적 관심사를 구조주의에 의해 활력을 얻은 사회·예술·자연과학의 영역으로까지 스펙트럼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보자면 주변 학문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개념적 도구와 분류의 도식을 철학의 영역으로 도입한다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일한 사상체계로 강력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상가들의 입장과 지향점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것이다. 그외에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의 배후에는 19세기 유럽의 가장 창조적인 사상가들이었던 니체, 프로이트, 맑스에 대한 계승이 있었다.1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철학적 담론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 일 것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 동안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기 동안 서구 문명에서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세계를 보는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통합된 물리적 법칙의 체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학적 기획과 더불어 철학자들은 인간 사고의 메커니즘을 탐구했다. 인문주의, 합리론, 경험론, 관념론 등의 철학 이론들은 모두 세계란 하나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유일한 설명 체계가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반영한다. 우리가 형성하는 모든 신념과 가치들은 이러한 통합적 체계에 기반을 둔다. 사물에 대한 이런 근대적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대까지 거쳐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철학체계의 성공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이들은 개별적인 관찰자로서 우리가 사물에 부과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사물들에게 종합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철학의 역사적 기획에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세계라는 근대적 체계 개념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상이다. 인간·사회·역사·언어·실재·인식 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담론에 의해 철학은 갑자기 역할을 잃은 듯은 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푸코,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같은 철학자들이 철학의 위기를 몰고온 것은, 오히려 서양사상사의 첨예한 유산들을 재해석하고 이전의 구조주의적 담론들을 정면으로 돌파함으로써 다시 철학의 존엄을 증명하고 더 정교하게 개발한 것에 가까웠다.

 

 

 

 

<미셀푸코>

푸코는 대단히 학자적인 사람이었지만, 공적 무대에서 난해한 지적 논쟁을 일으키는 주인공이었으며, 유명한 대중매체에 단골 토론자로 출현했고, 무모하기까지 한 인권운동의 기수였다. 억압된 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이 여성이건 죄수이건 동성애자이건 국자정치의 희생자이건 그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 푸코는 1984년 죽을 때까지 철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논란의 위치에 서 있었다. 푸코의 사상은 결코 이해하기 간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는 인기 있는 철학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가 갖는 관계, 푸코가 구조주의와 갖는 관계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유에 지어진 틀이 있다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전통 위에 서있었다. 특히 알튀세르는 방법상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조언자 중의 한명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구조주의의 방법을 사용한 것은 순수 구조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아니었다. 푸코는 종종 구조주의라는 꼬리표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구조주의 논쟁에 있어서 푸코의 기여는 그의 이전 세대 철학자들보다 더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있었다. 푸코 이전의 구조주의적 분석은 인문과학의 특정분야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소쉬르는 언어학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에,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그러했다. 반면 푸코는 정열적으로 여러 학문분야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의 구조주의적 탐구는 정신병리학1에서 시작하여 의학2, 범죄학3, 그리고 성욕4에 까지 이르고 있다.

 

1. 푸코의 연구목적과 구조주의적 성격

1.1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목적

푸코의 비판가들은 푸코의 작품이 다양한 이유가 그의 지적인 관심이 분열되었다고 해석하지만 그러한 분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푸코 연구의 흐름에서 우리는 어떤 기본적 연속성을 찾아낼 수 있다. 푸코의 관심은 지식의 구조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을 확립하는 것에 있었다. 인식론에 대한 푸코의 관심은 그의 초기 저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5, 그것은 서구 문화의 지배적인 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구조주의 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푸코는 지식의 숨겨진 구조가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과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궁극적으로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런 푸코의 접근법은 종종 '구조주의 인식론'이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푸코 자신은 고고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다. 푸코에 따르면 고고학이란 개념은 종래의 형이상학적 함의에서 벗어나 있고, 동시에 지식의 숨겨진 구조를 과학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고고학적 분석의 과제는 지식의 시대적 형식을 해독해내는 것인데, 그것은 그런 형식들을 지배하는 법칙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를 발견해내는 작업이었다. 즉 어떤 특수한 시대의 어떤 사실들이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푸코의 고고학적 탐구대상은 유명한 인물이나 사물, 혹은 경험적 사건 등 따위가 아니라 이론적 공문서들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어떤 문화적 시대의 특수한 사물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물들이 지각되고 표현되고 알려지는 방식이나 이런 사물들을 의미하는 낱말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특정한 어떤 시대의 일반적인 지식체게는 개개별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의 구조화된 총체적 효과로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언어학, 생물학, 경제학 등으로 드러난 합리적 의식의 질서체계의 근저에는 그것을 미리 규정하고 있는 숨겨진 질서가 존재한다. 이처럼 그는 휴머니즘적 합리주의 철학의 소산인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전합리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이 전합리적 구조를 우리의 문화적 지식에 숨겨진 긍정적 무의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푸코에 따를 경우 여러 학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 단일 학문분야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새로운 기발한 연구성과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분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구의 '인간'개념은 사실 근대의 인식론적 산물이며, 근대의 산물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다시 인간의 범주는 해체되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의 주체철학과 자연과학은 일찍히 자율적 실체나 개체적 의식을 가진 인간주체의 구성을 객관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오늘날 그 휴머니즘 사상의 후계적 지위에 있는 현대과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분리하는 가느다란 선을 점점 더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무의식의 시대인 현대에는 욕망과 범죄의 억압된 언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리비도 이론은 원초적인 일탈에너지를 성욕의 과학으로 조직화하는 데 공헌했다. 마찬가지로 소쉬르의 언어학은, 의미와 기호체계로서의 언어는 비정상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진술을 과학적으로 뷴류하는 수단을 제공하면서, 언어 또한 무의식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과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실증과학의 합리적 규제로서의 휴머니즘 자체의 귄위가 무너질 위험을 초래하고 말았다. 푸코는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적 기호체계의 권위적 질서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이는 동시에 합리적 인간이라는 개념또한 임의적 기호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는 근대적 구성을 해체하는 과정에 있다. 근대가 신 죽음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인간 죽음의 시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과학에 의한 인간 죽음을 통해 극적으로 인문학 및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를 뒤바꿔놓고자 했다. 푸코는 과학 자체의 인식론적 근거를 추구하는 고고학을 주창함으로써, 우리가 인간주체의 개인적이거나 원초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것들이 언어나 사상의 임의적 체계의 표면적 결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를 들어 예술작품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이 작품이 생겨난 에피스테메의 시대에 유행하던 상호작용하는 문화적 기호체계의 복합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푸코에 따르면 한 시대의 지식 기호체계(인식성, 에피스테메) 혹은 문화적 경향이 다른 것으로 변화할 때는, 낭만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연속적인 지식의 누적으로 설명되는 진보의 개념, 혹은 천재의 창조적 혁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지배하는 관계들의 체계에서 생긴, 인식론적 비약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비연속적 단절을 통해 변이된다. 즉 통시적인 인간들 사이의 경험적 관계나 내용은 연속적으로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관계들을 미리 결정하는 각 시대의 형식적/공시적 체계는 각각 분별적인 것으로, 비약적으로, 단절적으로 다른체제로 변이되는 것이다.

 

1.2 푸코의 구조주의적 성격

푸코 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요약해보자면 그것은 지식 안에서 문화적 변이를 미리 조건짓는 언어와 사상의 무의식적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은 탐구하고 있는 시대 안에서 생겨난 특수하게 고립된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갖는 반면, 푸코의 인문과학은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그런 현실적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맨 처음 가능하게 만든 하부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런 잠재적인 구조를 푸코는 에피스테메(인식성)이라고 부른다. 에피스테메란 하나의 주어진 시대 및 사회 안에서 지식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규칙들이 이루는 인식론적 장을 말한다. 즉 그것은 그 시대의 모든 학문적 지성들이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는 지적 토대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피스테메를 그 시대 연구의 일반적 스타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의 다양한 학문적 진술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규제하는 구조적 관계로서 이해한다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즉 에피스테메는 언명의 형성과 변화의 일반적 체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피스테메란 주어진 사회에 대한 공시적 접근법, 즉 구조주의적 함축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푸코는 진리가 어떤 억압적 제도들에 의해 종종 독점되는 방식을 확인한다. 이것은 공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일탈의 형식으로 범주화하여 지식을 속박하려는 시도였다. 예를 들면,『광기와 역사』에서 푸코는 비정상이라는 다른 범주의 출현에 대한 역사적 전제를 탐구한다.『임상의학의 탄생』에서, 그는 병자라는 임상적인 범주화의 뒤에 숨겨진 책략에 대해서 동일한 비판을 가한다.『감시와 형벌』에서, 그는 감시에 종속되는 공간 안에서 범죄자라고 하는 제도적 구속을 개념적으로 정초하는 것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심리적이고 법적인 성적 변칙성이나 변태를 분류하는 서구의 성적인 학문 뒤에 있는 고백적 합리성을 분석한다. 푸코의 심리학, 의학, 법률과 성욕에 대한 각각의 연구는, 사회가 어떤 사람들을 매장하여 지식의 어떤 공식적 실행을 합법화하는지를 보여준다. 푸코는 그 합법화는 숨겨져 있는 에피스테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규명하고자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인다. 공식적·일탈적 경험의 양상과 정상적·비정상적 관행을 전략적으로 구분하는 역사는 후기 푸코에서 권력의 숨겨진 역사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푸코의 비판적 기도는, 지식의 인식론적 구조에 대한 방법론적 관심과 이런 구조들이 지배라는 관심 안에서, 고백적 주체나 감금된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지식의 다양한 제도화를 어떻게 지지하는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탐구를 연결시킨다. 이런 접근은 푸코로 하여금 일탈이나 적법성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가를 드러내게 된다. 이런 개념들의 목적은 사회는 지배할 수 있는 전체라는 잘못된 생각을 교화하기 위하여, 사회 속에서 다양하게 생겨나는 모순과 차별의 불협화음을 규제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의 양상을 표준화하려는 다양한 과학적 시도는 범죄자, 병자, 광인이나 변태자라는 객관적 정의를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해진다. 궁극적으로 지식에의 의지가 의미하는 바의 목적은 사회적 통제를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과학적 학문은 간단히 말하면 감시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의 억압적 행태와 그 목적성에 대한 푸코의 공격은 그의 비판적인 모든 작품의 중심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사르트르는『말과 사물』이 출간되고서 뒤이어진 모든 논쟁에서 푸코의 가장 큰 적대자임이 확인되었다. 사르트르와 다른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휴머니즘이기 때문에 우리시대의 가장 참다운 철학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푸코는 인간의 개념은 실존적 실재가 아니라 특수한 역사의 한 시대의 인식론적 구성물이라고 대답한다. 같은 맥락에서 푸코는 우리가 현대시대로 진입하면서, 개인적 주체로서 우리가 이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에피스테메는 인간주체에 앞서서 존재하며, 인간주체의 모든 사상과 행위의 특수한 형태를 조건짓는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 사이의 관계를 결정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 안에서 언어를 통하여 사물을 개념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사물과 낱말 사이의 관계는, 이 관계를 규정하는 에피스테메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푸코는 지배적인 지식을 스스로 포괄하는 체계적 관점에서 역사적 시기를 구분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식별해냄으로써, 구조주의의 공시적 모델과 역사의 통시적 모델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정통구조주의자들과는 달리 푸코는 역사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이고 동질적인 연속성으로 역사적 시간을 생각하는 관습적 견해를 거부할 뿐이다. 푸코는 역사는 진술의 장들의 다양성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것들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이성에 의한 직선적 발전이라고 하는 계몽주의적 관념이 허구임을 느러냈다. 푸코는 진보적인 발전이라는 역사의 관념을 추방한다. 푸코는 경제학, 의학, 사회학, 문법학과 생물학 등의 다양한 과학분야의 개념들 사이의 자유 연상이나 교차 연결을 적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의 사회적 지각 안에서의 역사적 변화가 인식론적 단절을 언어의 무의식적 차원에서 어떻게 반영해내는지 지적해낸다. 푸코의 이러한 관점은 직선적 발전의 전제를 통해 사건을 추적해가는 전통적인 휴머니즘적 모델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결론적으로, 푸코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궁극적인 에피스테메는 구조주의에 의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선험성으로 특징지어진다고 결론짓고 있다. 푸코는 고고학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최근의 시대에서 발명된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이라는 이른바 초월적 자아의 진술은 언어라는 체계의 외적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낱말들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표상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주체의 자기표상도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낱말들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아마 구조주의의 가장 큰 세기적 발견은 언어가 스스로 말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이러한 출현은 인간의 행방불명과 일치한다. 구조주의 시대인 현대적 에피스테메에서 보면 인간주체의 개인적 진술인 빠롤은 언어 자체의 익명적 기호체계인 랑그 속으로 해체된다.

 

1.2.1 푸코와 구조주의의 차이점과 공통점

푸코의 주장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 등이 구조주의적 사유에 의해 강력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푸코 자신은 오직 구조라는 용어를 '언급', 즉 단순히 '인용'했을 뿐 '사용'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신은 결코 구조주의자가 아님을 강변한다. 이러한 주장의 적실성을 따지기 위해 푸코의 사유와 이른바 구조주의적 사유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차이점은 푸코의 에피스테메가 구조주의에서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이항대립'의 구도를 넘어 '다양한 요소들의 전체적 배치' 즉 '인식론적 장'의 개념 위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제정상과 미친, 의식과 무의식, 건강함과 병자 등의 이항대립적 개념으로 확립된 차이를 뒤집어 엎는다. 그는 사상의 이런 관습적 대립들 사이에 존재하느 생각해보지 못한 근본적 충돌을 밝혀내고, 그럼으로써 권력과 결탁한 에피스테메에 도전하는 것이다.

 

또 에피스테메가 엄격한 칸트주의적 의미의 '선험적 아프리오리'와는 구별되는 각 시대의 '후험적/역사적 아프리오리'로 이해되는 인식 가능조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자들이 역사를 제거하는 것과 달리 푸코는 역사에 대한 분석을 중요시 한다. 단지 합리적·인과적·연속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의 진보개념에 대해 부정적일 뿐이다. 예를 들면 레비스트로스는 역사 없는 사회에 대한 연구를 인정하지만, 푸코는 사회성 안에서의 역사, 즉 사회성의 역사를 선호한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 연대기적인 사건들의 목적론적인 발전이라는 역사주의자들의 역사개념을 논박하고, 역사를 실제로 존재하는대로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기호적으로 체계화된 다양한 진술들 가운데서 각각의 진술은 적법하게 생각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등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를 규제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내놓는다.

 

한편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푸코는 각각의 시대'들'을 가로지르는 메타적 기준은 부재하지만, 각각의 시대 '내부'에는 다양한 현상들을 가로지르는 일정한 준거점이 존재한다고 본다. 또한 각 시대의 모든 인식이 결국 오직 단 하나의 에피스테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가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푸코는 모든 인식의 밑바닥에는 불변의 무의식적 상수가 존재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는 푸코 자신의 주장과는 별개로, 푸코의 주장은 그것이 전통적 혹은 정통적 의미의 구조주의와는 일정한 차별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크게 보아 포스트-구조주의적 함축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명의 시기·광기의 역사

푸코는 자신의 작업을 내용과 방법론의 측면에서 1960년대의 '지식의 고고학', 1970년대 중반까지의 '권력의 계보학', 1970년대 중후반 이후 1984년 까지의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시기로 구분한다. 그리고 푸코는『광기의 역사』가 발표된 1961년까지는 아직 자신만의 방법론적, 사상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혼돈의 시기, 혹은 이후 독자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할 다양한 문제들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여명의 시기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1954년에 출간된 푸코의 첫번째 저작『정신병과 인격』에서 아직 그는 당시의 주된 사조였던 현상학과 실존주의, 그리고 맑스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책은 역사와 무관한 인간 자체의 본질로서 이해되는 인격의 소외와 해방을 말하고 있다.

 

『광기의 역사』는 푸코의 실질적인 첫번째 주요저작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포고된 조례에 의해 파리 시민의 1%가 감금되었던 '대감금'이래의 역사적 현상들을 언급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대감금은 범죄자, 매춘부, 광인, 무신론자, 마녀 등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같은 장소에 동시에 감금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로삐딸 제네랄'(l'Hôpital général)이라는 하나의 수용기관에 감금한 사건이다. 이것이 나타내는 이른바 광기의 '행정적 대상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광기의 인식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 로삐딸 제네랄에 감금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의해 '비정상'으로 규정된 사람들이며, 푸코는 바로 이러한 비정상에 대한 규정이 동시적 혹은 사후적으로 '정상'이라는 관념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비정상·정상을 나누는 실천은 이후 푸코가 말하는 '근대' 혹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르러 '광기에 대한 도덕적 단죄' 및 '광기의 정신의학화'로 이어진다. 17세기 말 피넬과 튜크 등에 의해 정신병원에서 광인들을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킨 이른바 '계몽주의적, 인도주의적인 광인의 해방'은 이제 푸코에 의해 '도덕적 책임, 즉 윤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죄의식의 내면화 과정'으로서 이해된다. 대감금 이후 광기는 이전 르네상스 시기에 누리던 '신적 축복'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 문제가 있는 존재, 위험한 존재로 이해되면서, 점차 도덕적, 윤리적 죄의식의 영역안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광기는 18~19세기의 전환기, 즉 근대시기에 이르러 '도덕적 죄책감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하나의 의학적 현상'으로서 규정되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 모든 역사적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정상·비정상'의 구분이 낳는 효과라는 정치적 관심이다: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대의 정신병리학까지도) '자연인' 혹은 모든 질병 경험 이전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되고 평가된다. 사실 이러한 정상인이라는 개념은 창안물이고, 정상인을 위치시켜야 하는 곳은 자연의 공간이 아닌 '사회인'을 사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의 질병으로 인해 정상 상태의 주변부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서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에 대한 '실증과학', 그리고 광인을 인간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도주의적 진단은 일단 이러한 종합이 이뤄지고 나서야 가능했다." 나아가 푸코는 인간이 광인으로 규정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인간이 자연과학적 대상일 수 있다는 실증적 정신의학의 전체와 객관적 인간학의 주제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광기'의 범주는 권력을 집중시키고 유지하려는 특수한 사회적 필요에 따라 생겨났으며, 정상적 행동이라는 제도화된 기호체계에 일치하지 않는 자들은 사회적인 울타리에서 추방되었다. 달리 말하면, 광기라는 개념의출현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제도적인 목적을 지닌다. 사회는 자체의 순수성을 지키고, 이른바 '선한 양심'을 사회 자체에 부여해서, 사회의 적법성을 유협하는 차이라는 달갑지 않은 요소들을 정화시킬 필요가 생겼다. 중세시대의 종교적 가치에서 르네상스이후의 이성주의적 가치로 유럽의 에피스테메가 전환하는 과정에서 광인은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이성적 정착을 공고히하기 위해 비정상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광인의 추방과 더불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를 벗어난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결과도 가져왔다. 17세기부터 비정상인의 감금은 사회적 지배에 기여하는 과학적 규칙들에 의해서 규제되었다.

 

결론적으로, 푸코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광기를 수용소나 정신병원으로 추방해버리기 보다는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이 우스꽝스러울지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지식의 고고학

지식의 고고학은 한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지식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푸코는 1963년에 출간한『임상의학의 탄생』과『레몽 루셀』을 통해서 이른바 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자연과학 및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학을 아우르는 인식의 공통적 틀, 즉 한 시대의 공시적인 공통분모로서의 '인식론적 장'의 중요성을 피력하고자 했다. 이 저서들을 기점으로 하여 푸코는 자신의 방법론적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이후 푸코는 1966년 출간한『말과 사물』을 통해서 자신의 이전 저서에서 처음으로 들쳐낸 '인식론적 장' 개념에 '에피스테메'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3.1『말과 사물

『말과 사물』은 르네상스 시기인 16세기부터 이 책이 저술된 1966년까지 유럽의 '에피스테메'를 탐구한 책이다. 푸코는 각 시대를 표상하는 기록물들을 완전히 분석함으로써,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에피스테메가 사물을 낱말로서 표현되도록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피스테메란 주어진 한 문화 혹은 사회의 모든 지식일반에 대한 가능조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인식가능조건'이라는 칸트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용어이다. 푸코에 따르면 모든 시대는 단 하나의 에피스테메만을 가질 뿐이다. 푸코는 유럽은 16세기 이래 단 두차례의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두번의 단절은 세개의 구분되는 시기를 낳는데, 푸코가 제시하는 각각의 시기와 에피스테메는 다음과 같다.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끝나는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이며, 17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8세기 중후반에 소멸되는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재현작용'이며, 18세기 말 1세기 초에 시작되어 1966년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역사' 혹은 '인간'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오늘날, 즉 현대는 여전히 근대의 파장안에 존재하고 있다.6

 

3.1.1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계를 신 자신이 인간이 읽도록 기록한 '신의 필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은 창조주가 계시한 본문의 기호들로서 서로 닮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만물들이 지정된 위치와 지정된 자리에 있는 것이라는 영적 상징의 그물과 신비적 상응으로 보았다. 단테의『신곡』은 낱말들이 사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자체 안에서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지는 것으로 보고 우주를 사물들이 완전히 반영된 것으로 보는 대표적인 예이다.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는 닮음의 체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낱말은 사물을 닮고, 사물은 낱말을 닮는다.

 

3.1.2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

푸코 분석하는 그 다음의 주요한 인식론적 시대는 17-18세기의 고전시대이다. 낱말과 사물의 구조적 관계는 닮음이란 에피스테메에서 표상의 에피스테메로 바뀐다. 즉 낱말과 사물 사이에 간격과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낱말은 표상적 관념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관념의 목적은 사물의 세계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이다. 아무도 이제는 더이상 낱말이 자연적으로 사물과 같다고 가정할 수 없다. 낱말은 사물과 같이 만들어져야만 하고 사물은 낱말과 같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데카르트의 관념론과 영국에서 흄의 경험주의를 발흥시킨 고전적 조직체계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와 과학자는 같말과 사물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낱말은 인간 주체에게, 사물은 대상의 세계에 맡겨졌다. 달리 말하면 대상인 사물은 더이상언어나 인간의 사유와 같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자신의 주관적 표상을 통해서7 이 사물들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탐구자인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물론 인간이 직접적으로 세계를 읽을 수는 없었다. 신은 이제 부재하는 신이 되었다. 거꾸로, 세계는 인간이 표상이라는 개념적 행위를 통해서만 주재하려고 애쓰는 자율적인 물질의 우주가 되었다. 대상의 세계의 사물의 질서는 그것이 주관에 의해서 나타나는 한 낱말의 질서로 환원됨을 통해서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이런 방식에서, 내재적으로 사물과 관련된 계시적 상징의 체계라는 르네상스적인 언어의 모델은 표상적 기호의 체계라는 고전시대의 모델로 대치되었다. 푸코는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집약하는 역사적 선험성은 인문자연과학의 공통된 시도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인간주체의 사상 속에 표상되는 사물세계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분류형식을 전개하는 것이다.

 

3.1.3 근대의 에피스테메

푸코는 계속하여 표상의 고전시대가 어떻게 자기언급의 현대로 대치되는가를 분석한다. 이런 변화는 낱말과 사물 사이에서 생기는 단순한 부분적인 분리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단절을 확고히 하는 또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을 수반한다. 낱말과 사물은 더이상 단순하게 다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닮음이나 지시 중의 하나인 어떤 상호관계도 빼앗기게 된 것이다. 19세기란 현대에서, 낱말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도, 사물들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표상하는 기호도 아니고, 단지 초월적인 인간 주체의 자기 언급적인 진술일 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낱말은 지금 인간 주체를 그 자신에게 반영한다. 푸코는 이 현대의 에피스테메를 인간중심주의 논리라고 정의한다. 자기 충족적진 자율적 주체로서 인간의 인류학적인 형성은 인간의 지식을 위한 신이나 자연 등의 외적인 지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긴 문제는 인간 그 자신이 지식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위치는 결과적으로, 엄격한 자연과학도 심리학, 사회학, 신화와 예술의 인류학적 연구 등 인간주체를 그들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초월적 과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에서 인간의 고유한 연구는 인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학에서는 소쉬르가, 자연과학에서는 다윈이, 그리고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가 근대 혹은 현대를 열어젖힌 인물이라고 평가하지만, 푸코는 이들을 근본적 단절이 아니라 찻잔 속의 태풍만을 일으킨 인물들로 간주한다. 반면 푸코는 언어학의 보프, 자연과학의 퀴비에, 그리고 경제학의 리카도가 근대를 연 인물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근대적 사유를 가능케 한 것은 과학적 지식의 특권적 주체인 초월적 자아를 확립하고자 애썼던 칸트이다.

 

3.1.4 현대의 에피스테메 -구조주의-

 

푸코가 이러한 논쟁적인 시기구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과 사물의 관계가 고정불변하는 비역사적인 자연적,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에서 개별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식 가능조건 일반의 변화에 의해 매 시대 새롭게 구성되며, 하나의 지식은 한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에 의해 가능하게 되고 또 그 의미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푸코의 근본적 주장이기도 하다. 가령 푸코는 근대는 물론 그 이전 시기의 생물학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당연시 하는 생물학 및 생명의 개념 자체가 근대 시기에 구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는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근대생물학'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동어반복이다. 근대 이전 고전주의 시대에 존재한 것은 오직 박물학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논의과정을 거쳐 푸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근대에 성립된 에피스테메 즉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다했으며, 20세기 중반 프랑스, 나아가 유럽은 이른바 반인간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반인간주의는 인간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고유명사로서의 근대적 인간 개념 및 그에 기초한 모든 개념적, 사회적 체제를 파기하자는 의미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기존의 '휴머니즘' 및 그에 기초한 진리, 자유, 정의, 사회, 개인, 정치적 좌파와 우파, 역사 등의 개념, 즉 자유주의는 물론 맑스주의의 모든 개념 역시 예외로 설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식에 대한 현대 휴머니스트들의 관심은 점점 사라지지만, 인간주체는 그 자신의 선택이나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법칙에 종속되는 제한된 의식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이것은 새로운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고 기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현대 실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구조주의의 대논쟁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푸코의 논지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검증하는 지식은 결과적으로 초월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주체자라는 휴머니즘의 관념을 확증해가는 것이 아니며, 그런 관념을 해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서는 우리가 이전의 인간의식의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했던 것을 결국에는 미리 결정하고 있는 무의식의 구조적 법칙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심적이고 사회적인 무의식이 언어의 체계로서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밝히는 한, 구조주의는 포스트 모던적인 과학으로서 탁월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캉의 구조적 정신분석학,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적 민속학적 사회학, 소쉬르의 기호언어학 등의 비판에 의해 그 기초가 흔들리닌는 인간주의적 심리학과 실존주의를 푸코의 고고학으로 대치해야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말과 사물』은 구조주의 자체에 대한 메타이론의 하나로 읽혀야 한다.

 

3.2『지식의 고고학

『말과 사물』의 문제점은 그것이 이미 일어난 변화의 양상과 내적 체계만을 추적할 뿐, 변화의 이유, 동력, 주체 등을 명시적으로 밝혀주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푸코는 이런『말과 사물』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그 방법론을 정교화하려는 의도에서『지식의 고고학』을 저술했다. 여기에는 자신에 대한 맑스주의 진영에 비판에 대응할 실천적 방법론을 고심하는 의도도 있었다. 더불어 이 책이 출간될 즈음부터 '지식인 투사'로서의 푸코의 모습이 표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더이상 에피스테메가 아니라 언표 및 담론의 개념을 활용하여 변화의 가능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 언표는 더이상 언어학적, 기호학적 함축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단어, 문장 혹은 명제가 아니다. 담론은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언표들이 집합'으로서 정의되는데, 한마디로 각각의 담론은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다.8 이러한 개념의 도입의 결과는 언어학적, 기호학적 방법론의 전면적 포기, 니체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정치적 배제의 메커니즘 또는 힘-관계를 담론 형성의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계보학의 도입이다. 푸코는 1970년대 후반의 한 대담에서 이제 관건은 더이상 '의미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한편 푸코는 종종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불리곤 하는데, 푸코를 광의로라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푸코 사유의 초기에 해당하는 1969년까지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푸코 사유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부적절한 용여라 할 수 있다.

 

  1. 광기와 문명
  2. 병원의 탄생
  3. 감시와 형벌
  4. 성욕의 역사, 세 권으로 기획되었으나 그가 죽을 때까지 단 두 권만 완성되었다.
  5. 초기 저서에서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디.
  6. 그렇다면 미국식 연구 경향을 따라 푸코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경우는 잘못된 것이다. 푸코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저술에서 단 한차례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현대' 역시 '근대'의 자장 안에 속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푸코에게 있어서 '탈근대적' 문제의식은 일종의 사이비 문제이다.
  7. 데케르트의 주장대로 그것이 본유관념이던, 아니면 흄의 주장처럼 그것이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던 상관 없이
  8.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담론'의 개념이 처음 규정된 것이 바로『지식의 고고학』에서의 푸코의 논의이다.

     

4. 권력의 계보학

『말과 사물』과『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의 분석은 역사적 시대의 일반 인식구조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1970년 꼴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담론의 질서』, 1970년대 초반 '감옥에 관한 정보그룹'(G.I.P.) 활동, 그리고 1975년의『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시기의 푸코는 사회적 권력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하여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계보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권력의 계보학은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그러한 지배를 감당하고 또 저항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4.1『담론의 질서』

푸코는 모든 사회는 담론법칙의 질서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담론은 일반 대중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다. 담론은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의 조건들을 규정하고, 규칙들을 부과하는 통제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담론에 의해 개별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정체성은 희박화되고, 담론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진다. 개인의 발언권은 축소되지만, 개인이 보고 듣고 배워야할 내용들은 많아지는 비대칭성이 생긴다. 푸코에 따르면 모든 사회의 지배적 담론은 일련의 통제·선별·조직·재분배 절차를 거쳐 생산된다. 푸코는 이런 담론 생산의 '절차들'을 세가지 범주로 세분한다:

1. 외적절차 : 권력을 실행하는 배제의 외부적 과정이다. 배제는 금지, 분할과 배척, 진위의 대립등으로 나타난다.

1) 특정한 대상, 관례, 그리고 권리를 금지함으로써 금기로 만든다. 이것들에 대해 부과되는 금지들은 권력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들이다.

2)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통해 사람들을 분할하고 특정집단(광인)을 배척한다. 광인의 말은 아예 무의미한 것으로 배척당하거나 신탁의 대리인으로 새롭게 분할되어 그 자신의 발화적 의미는 거세되어 버린다.

3) 참된 담론과 거짓된 담론을 구분함으로써 진위를 대립시킨다. 참된 담론은 권력의 실행에 연결되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푸코는 제도적인 토대에 서 있는 지배적 담론을 형성한 지배에의 의지는 다른 담론들에 강제적인 힘으로서 일종의 압력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2. 내적절차 : 배제의 내부적 과정으로서 주석, 저자, 분과학문으로 구성된다.

1) 푸코는 담론들 사이에 매우 규칙적인 일정한 차등화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것은 두가지 차원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일상언어와 담론의 본질을 나누는 차등화가 있다. 그리고 주석적 담론의 차등화가 있다. 주석은 새로운 담론을 구성하게 한다. 그러나 담론 내부에서 다뤄지는 대용들은 새로운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재귀일 뿐이다. 다시말해 주석은 텍스트와 다른것을 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텍스트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복과 동일자의 형태로 동일성의 틀안에서 담론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2) 담론을 재생산하는 저자들은 동일성을 추구하는 담론의 특성을 통해 개개인의 개별성을 희석시킨다.

3) 분과학문은 복잡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성립된다. 예컨대 한 명제가 하나의 학문에 속하려면 일정한 유형의 이론적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분과학문은 담론의 작동조건을 규정하고, 규칙을 부과하는 등 한계를 부여한다.

3. 실행 : 하나의 담론이 특정 사회에서 지배적 담론이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으로서의 요구사항이다. 즉 담론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상의 원리들이 있어야만 지배적 위치에 오를 수 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적·경제적·의학적·과학적·기술적 형식들이 포함된다.

 

4.1.1 담론의 계보학적 분석

푸코는 보다 더 넓은 인식론적 층위에서 담론들의 사회적 전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푸코에 따르면 교육체계가 지식·권력 및 담론을 유지·변형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방식이지만, 결국에 교육도 그보다 선행하는 것이 허락하는 범위 등에서 그어지는 제한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담론 생산 혹은 '한계짓기'의 다양한 절차들에 대한 역사적·비판적 분석 작업, 즉 계보학적 분석이 요구된다.

 

4.1.2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감시와 처벌』그리고『성의 역사』등 좀더 성숙해진 후기 푸코의 저서에서, 그는 구조주의와 네오맑스주의의 관용구들을 넘어서서 역사에 대해 고고학적 접근에서 니체적인 계보학적 접근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고고학적·비판적 분석 작업이 담론이 가진 구조적 형태를 명확히 드러내게 한다면, 계보학은 현실의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즉 그것의 출현과 성장, 그리고 변이 및 그것들의 조언을 살핀다. 물론 고고학적 분석과 계보학적 분석이 완전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그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이둘은 권력의 심급들을 비판적으로 문제삼으며, 그들을 형성하는 담론의 규칙성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고고학적 비판과 계보학적 분석은 대상이나 영역 차이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이다. 즉 고고학이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담론의 의미를 통해 근원적인 진리가 없다는 걸 밝혀냈다면, 계보학은 그 담론들이 만들어지고 실천되는 수많은 관계들의 총체(권력)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밝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계보학은 이른바 '참된 인식'의 이름으로 모든 지식에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고 위계화하며 검열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정당화되지 못했으며 '자격을 박탈당한' 단절된 국지적 지식을 작동시키려는 시도, 즉 모든 역사적 지식을 '탈예속화'하려는 시도이다. 계보학은 담론 그 자체가 아니라 담론의 실천이 유발하는 '효과'에 주목한다. 예컨대 계보학적 분석에 따르면, 특정 사회가 중시하는 특정한 규범은 하나의 진리가 되어 다른 한 쪽을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푸코는 진리의 이런 양상을 '진리놀이'라고 칭하며, 진리놀이의 작동의 힘, 그리고 그 힘의 원인과 효과 등을 총체적으로 '권력'이라고 규정한다.

 

4.1.1 칸트 인간학 비판

푸코의 계보학은 니체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니체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푸코가 시도하고자 한 것은 칸트적 주체의 니체화이다. 푸코는 칸트적 주체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푸코는 칸트적 주체를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고 부르며, 그것을 '모든 인식을 가능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이런 칸트적 주체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자신이 인식주체이자 인식대상이라는 양의적 입장을 가진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사유주체로서의 자아'임과 동시에,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자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방향은 우리 자신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칸트의 철학적 탐구또한 자아 자체를 반성적으로 재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인식방식에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외부사물에 대한 '경험론적 인식'에 구별하여, 칸트는 경험론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인식방식에 대한 인식을 '초월론적 인식'이라고 규정했다. 요컨대 칸트적 주체는 (외부사물을 대상으로 하는)경험적 인식과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하는)초월적 인식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에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적 주체는 모든 인식의 기반을 자신의 내부에서 가지며, 초월론적 시선을 통해 자신의 외부를 내부화하는 주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런 칸트적 주체 이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칸트는 인식에 있어서 자아와 물자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며 자아가 직관을 매개로 개념을 내재화된 대상으로 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이 점에서 푸코는 칸트적 주체가 '인간의 유한성'과 이것이 초래한 '한계'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했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한다.1 즉 칸트의 인간학이 '인간의 사유'라는 주체의 내부안에 인간을 가두고 세계를 은폐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넘을 수 없는 본질적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칸트는 인간을 유한성안에 가둬버렸다. 칸트적 주체는 경험적-초월론적 구조 안에서 판단 가능한 것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대안적 가능성, 혹은 외부를 모른다. 그리하여 푸코에 따르면 외부에 위치하는 모든 권력 관계를 부인하게 된다. 푸코에 따르면 실제 세계는 인간의 경험적 심급과 초월론적 심급이라는 사유 사이의 '주름', 굴곡 사이로 유폐되었다. 칸트식으로 따지자면, 세계는 인간의 주체 안에 폐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칸트적 인간학에 입각한 주체는 경험적인 것또한 초월론적 시각을 통해 보면서, 자신과 '다른 것'을 억압하게 된다. 철학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타자'를 '동일자'2로 환원하는 운동이 그러하다. 주체에게 있어서 다른 것(타자)는 억압되고, 나와 유사한 동일자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4.1.2 칸트적 주체의 니체화

칸트적 인간학에 대항하여 푸코가 취하는 전략은 외부에 의한 내부의 탈구축, 즉 칸트의 니체화(계보학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학적 사유 = 칸트적 주체의 구조의 닫힌 영역'을 타파할 수 있는 사유를 푸코는 푸코는 그런 사유를 니체적인 '바깥의 사유'라 부른다. 이는 주체성의 바깥에 자리잡은 사유이다. 이는 감각적 인식의 논리적 정당화나 인식론적 기초를 다지는 기존의 사유가 아닌, 그런 사유가 전개되는 구조를 포착하는 반성적인 사유이다. 따라서 주체의 외부에 머무는 바깥의 사유는 주체성의 '한계'를 드러나게 만든다. 즉 '바깥의 사유'란 기존의 철학적 한계의 외부에 서서 '인식'의 근거를 묻고자 한다.

 

바깥의 사유를 통해 푸코는 인식에 대한 문제를, 인간의 내부적형식에 대해 탐구하는 정형화된 방법이 아니라 동적인 실천과 역사의 측면에서 생각하고자 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서 사유의 '외부'란 역사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의 계보학으로 이해해야할 영역이다. 푸코의 논지를 선요약해보자면, 인식의 주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를 가진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진리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 여기서 푸코는 니체가 사용하는 발명(Erfindung)이라는 말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것이 기원(Ursprung)이라는 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종교의 '기원'에 관해 말하는데, 종교란 '기원'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종교가들의 '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도덕의 계보』에서는 '이상'이란 여러 가지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이로부터 푸코는 인식또한 발명된 것이며 형이상학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푸코에 따르면, 니체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충동들 상호간의 어떤 억제[관계]'이다. 충동들 사이에는 각자가 서로를 정복하려고 하는 투쟁이 존재하며, 그것이 충동 상호간에 '일종의 공평성과 계약'을 성립시킨다. 니체에게는 바로 이 '화해'의 광경이야말로 인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니체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하나의 인식행위가 가능하기 전에,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는 여러 충동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대상에 대해 조롱하고자 하는 충동, 탄식하고자 하는 충동, 저주하고자 하는 충동 등 상이하고 모순적인 충동들이 우리의 심적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충동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통하여 이런 충동들이 균형을 이루며 하나로 종합된다. 이렇듯 특정 대상에 대한 인식은 충동들간의 투쟁과 화해 이후에 이루어진다.3

 

그렇다면 인식과 인식 대상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게된다. 철학적 전통에서 인식이란 대상에 접근하고 대상을 동일화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니체에 따를경우 오히려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대상으로부터 나를 차이화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식은 대상과의 동일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식대상에 폭력을 가하고,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인식대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며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지 정하는 것은 칸트의 주장대로 이성과 오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들 사이의 투쟁과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인식은 본성, 본질, 보편적 조건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반드시 편파적이고 기울어져 있으며,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푸코는 주체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충동들 사이의 '투쟁'을 사회적 장에서 권력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재독해한다. 주체를 권력관계와 관련지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에게 인식이란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생겨나는 '역사적 결과'이며, '하나의 사건'이다. 이는 인간이 언제나 처해있는 일종의 전략적 관계로도 정의된다. 즉 사회적 장에서의 투쟁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권력-지식은 서로 다른 권력-지식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이 투쟁이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담론, 상식을 결정한다. 그리고 주체는 이 사회적인 투쟁관계의 산물로서, 주체의 인식또한 이 사회적 권력의 지향점 하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그 사회의 인식체계에 국한되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푸코는 인식을 힘들 사이의 투쟁으로 파악하는 니체적 '앎에의 의지'라는 이론을 가지고 다시 한번 칸트적 주체를 파괴한다. 전통적 찰학에서 말하는 주체는 푸코에 들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3『감시와 처벌』

『감시와 처벌』은 푸코가 이후 자신의 '첫번째 책'이라고 부를 만큼 푸코만의 독특한 사유가 완숙된 저작으로, 그의 가장 논쟁적이고도 중요한 저작이다. 푸코는 자신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에 대해, 푸코는 근대 사법권력이 근거하는 원천, 그리고 권력에 의한 처벌의 정당성과 법칙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은폐된 기현상을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 책은 1757년에 있었던 국왕 살해 미수범 다미앙의 처형 장면, 그리고 그로부터 81년 뒤 1838년 작성된 파리 소년감화원 규칙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한다. 산채로 온몸을 고문당하고 결국 네마리의 말이 끌어당겨 사지가 끊어져 사망한 다미앙의 예와, 시간 단위로 모든 일과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짜인 소년감화원의 규칙의 비교를 통해 푸코는, 백년이 조금 안 되는 이 두 시기 사이에 벌어진 일이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계몽주의적 인도주의'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잘, 더 효과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효용성의 논리에 입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감시는 권력의 가장 핵심적인 기제이며, 그것은 규율을 통해 이루어진다. 감시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정상으로 만드는것, 그것이 바로 규율적 권력이다. 푸코의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즉 근대 시기에 일어난 일로서, 이 '근대'가 오늘날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사회 '현대'의 기본적 틀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4.3.1 권력이론

4.3.1.1 전통적 권력이론의 거부

배제·억압·탄압·검열등의 이미지로 설명될 수 있는 전통적 권력개념은 문자로 쓰여졌으며 법으로 체화되어 있어 물질적이다. 따라서 가시적인 금지와 터부를 형성한다. 이때의 권력은 마치 재산처럼 누군가가 소유할수 있고, 따라서 양도, 계약의 형식으로 타인에게 전체 혹은 부분을 이양할수 있는 권리로 간주된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적 권력 개념이 그러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생산력의 점유 양식과 그 발달에 의해 탄생한 한 계급의 지배를 연장시키는 수단이 바로 권력이다. 이는 한 계급에게 노동의 과실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지속적인 권력 관계를 유지하고, 따라서 일부 사회 계급에게만 혜택을 주는 지속적 폭력으로써 작용한다. 이 '억압가설'에 기초해 마르크스는 상부구조, 하부구조로 억압의 심급을 나누고, 생산관계를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기능을 정치권력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재소유되는것이 아니라 그저 행사되며, 오로지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4.3.1.2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로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사람 사이의 관계이고, 사회는 지배 피지배의 이분법적 분리로 나뉘어진것이 아니라 마치 그물코 처럼 무수한 복수의 권력으로 뒤덮여 있다.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미시권력이다. 이 개념에 동의할 경우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권력의 성격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력'이라는 말에서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압한다', '검열한다', '고립시킨다', '숨긴다', '은폐한다'등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올린다. 그러나 푸코가 계보학을 통해 밝혀낸 근대 이후의 권력은 이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긍정적인, 즉 생산하는 권력이다.

 

중세 봉건시대 권력의 특징은 '선취'였다. 군주, 영주 또는 사제가 농민들로부터 생산량의 일부를 미리 떼어내는 징세 방식에 의해 금전 혹은 생산물을 선취했다. 이러한 착취는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선취는 재화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부역이나 군적 또는 방랑자의 감금이나 추방에 의해 인력이나 시간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졌다. 푸코가 말하는 부정적 권력이다.

 

그러나 18,19세기부터 규율 장치의 발전과 함께 전혀 다른 권력 메카니즘이 출현했다. 생산 효율성을 더해주고, 이 효율성이 만들어낸 이용가능성을 제고해 주는, 즉 인력과 생산장치의 증식을 조절하는 기술적인 역할을 가진 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생산이란 농업생산, 공업생산같은 글자 그대로의 경제적 생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지식과 적성을 생산하고, 병원에서는 건강을 생산하며, 군대에서는 살상력과 파괴력을 생산한다. 그중에서도 푸코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식의 생산이다.

 

4.3.1.3 권력-지식 복합체

『감시와 처벌』의 주된 논점은 '권력-지식'의 상호 구성이론이다. 권력-지식의 논점은, 권력과 지식은 분리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권력과 무관한 지식도, 지식과 무관한 권력도 없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학문이나 지식이 권력과 상관이 없으며,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지식이 권력과의 이해관계를 떠나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권력이 학자를 경솔하게 만든다거나, 거꾸로 권력을 버리는 것이 학자가 되는 조건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어용학자와 참다운 학자를 가르는 것이다. 반면 푸코는 지식이 순수하거나 중립적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 권력의 지배는 단순히 경제적 물리적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고, 권력이 지향하는 신념 체계와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가치를 전사회적으로 전파시키고 그것을 공유하도록 설득해야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았을때 권력집단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학자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격렬하게 맞서 반대 이론을 개진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반대학자들 또한 권력적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째서 지식과 권력은 필연적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그것은 선술했듯이 푸코가 지식을 사회적 세력간의 투쟁의 과정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권력에 유익한 지식이든 불복종하는 지식이든 지식은 각기 권력을 등에 업은채 앎끼리 투쟁을 벌이고, 그것이 또 권력을 구성한다.

 

다만 푸코가 권력과 지식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했다면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푸코가 주장하고자 한 바는 결코 '따라서 권력을 지식 혹은 진리를 억압하거나 이용·간섭하려 해서는 안되며, 지식또한 권력에 영합하거나 불의에 무관심해서도 안된다.'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을 각각 분리된 '실체들'로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권력과 지식을 '상관적 복합체'로 바라보는 푸코의 관점에서 도출불가능한 주장이다.

 

4.3.1.4 권력의 미시물리학

푸코는 권력-지식 복합체라는 관념을 통해 기존의 거시적인 국가단위의 권력관에 집중하는 자유주의, 공리주의, 헤겔주의, 그리고 맑스주의적 권력관을 모두 거부하고, 미시적 권력관계의 분석에 집중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을 주장한다.4 푸코의 권력관계론은 근대사회 분석에 집중하는데, 그 분석대상 중 하나가 공리주의의 창시자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은 권력을 자동화하고, 비개인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이다.

 

푸코는 근대 사회의 공간 배치 및 조작의 작동원리를 보여주는 판옵티콘을, 니체를 따라 근대적 영혼의 구성 메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 즉 총체적 국가화와 파편화되는 개인화의 동시적 형성 또는 이중구속을 만들어내는 생산장치로 바라본다. 근대에 들어서 권력은 호사스럽고 거창한 과시를 통해 개인을 직접 상대하지 않는다. 권력이 비물질적이고 무형의 것이 되면 될수록 권력의 효과는 더욱 더 지속적이고, 더욱 더 깊어지며, 결정적이게 된다. 규율권력이 제대로 행사되려면 지속적이고, 철저하며, 어디에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는 감시수단을 갖추어야 한다. 그 감시는 사회 전체를 지각 대상으로 만드는 얼굴 없는 시선이다. 그것은 도처에 매복되어 있는 수천 개의 눈이고, 움직이면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온갖 주의력이며, 위계질서화한 그물눈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만 하면, 언제나 권력의 강제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를 예속화한다. 이제 권력은 더이상 죄수에게 얌전한 행동을 하도록, 광인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노동자에게 부지런히 일하도록, 학생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환자에게 치료의 수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이렇듯 개인화의 측면에서는 도덕적 죄책감의 내면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길들여진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게 된다.

 

4.3.1.5 영혼은 신체의 감옥이다.

푸코는 근대의 권력이 개인적·사회적 신체의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서 영혼의 통제를 수행해왔으며, 플라톤 혹은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견해와는 반대로, 영혼이야말로 육체의 감옥이었음을 지적한다.『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집요하게 말했던 것은 권력이 신체에 '권력을 투여'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시대에 따라 권력은 언제나 신체를 포위하고, 낙인찍고, 훈련시키고, 고통을 주고, 노역을 강제했다. 신체에 대한 정치적 포위는 권력의 과시를 위한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체를 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체가 노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복종의 체계 속에 들어 있어야만 한다. 신체는 고분고분하게 복종하는 상태이면서 생산적일때만 유용한 인력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순종적이지 않은 육체는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종은 폭력이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획득될 수 없다. 신체에 직접적 작용을 가하더라도 그것은 폭력이나 공포감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되고 조직된 기술적 방법이어야 한다. 여기서 지식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신체의 이용성과 온순함을 모두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아닌 유연한 방법으로 자발적 복종을 유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지적인 규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규율권력은 개개인의 신체와 그 힘에 대해 작동함으로써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이 순종·복종하게 만들고자 한다. 예컨대 훈육이 그러한 작용이다. 신체에 대한 이런 권력의 투여를 푸코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권력이 신체를 목표로 하고 신체에 일종의 힘을 투여를 통해 행사된다고 한다면, 왜 '영혼은 신체의 감옥'일까?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영혼', 즉 정신이 신체를 유폐하고 신체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 정신이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 상위의 자아(초월론적 자아, 영혼)는 하위의 자아(경험적 자아, 신체)를 감시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신체를 통제하는 이 반성적, 규제적 시선을 '초월론적 시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권력은 개개인의 신체를 감시·관리·훈육하기 위해 자아를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고 반성하는 규제적 자아로 만든다. 즉 영혼은 신체를 규율화하고, 신체를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4.4 푸코 권력이론이 맞닥뜨린 한계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은 결코 어떤 실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항상 힘관계가 뒤집힐 위험을 품고 있는 전략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다. 푸코는 주체가 자기 속에 권력관계를 각인함으로써, 주체 속에서 자기감시 체계를 기능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즉 초월론적 자아는 권력의 대행자로서 경험적 자아를 감시하고 규율화한다.『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규율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는 자기 안에 자기감시 체계를 기능시키는 권력의 대행자일 수밖에 없다. 상술한 판옵티콘(죄수가 간수의 감시를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규제하는)의 예시처럼, 주체는 자발적으로 권력에 의한 예속화를 받아들인다.

 

이런 푸코의 권력이론 속에서 우리는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푸코가 서술한 권력 메커니즘은 항상 완벽하게 작용하며, 주체에 저항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규율권력은 도저히 극복할수 없는 비대칭성을 도입하고, 상호성을 배제한다. 초월론적 자아(권력의 대행자)와 경험적 자아(피지배의 심급)의 관계는 완전히 고정적이며, 힘관계의 역전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이 권력관계는 지배의 체계로서만 기능한다. 결국에는 저항에 관한 바로 이 간극이 말기 푸코를 사유의 전회로 이끌게 된다.

 

  1. 이에 대해 서술하기 앞서 주의해야할 점을 지적해보자면, 푸코는 하이데거의 테제에 의거해 칸트를 공격하면서도, 결국에는 하이데거또한 전면적으로 파탄시킨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와 그의 스승 후설의 현상학은 칸트적 유한성 개념안에서만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단지 하이데거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칸트적 명제를 현존재의 유한성이라는 자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할 뿐이다.
  2. 자기는 물론 자기 근처의 남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것
  3. 니체 – [즐거운 학문, 301] :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조롱하는 것도, 탄식하는 것도, 또한 저주하는 것도 아니며, 이해하는 것 !”이라고 스피노자는 그답게 단순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이해하다'라는 것은, 사실상 앞의 세 가지가 단숨에 우리에게 느껴지게 되는 형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 조롱하다, 탄식하다, 저주하다라는 의지인 상이하고 모순적인 충동들의 결과가 아닐까 ? 하나의 인식 행위가 가능해지기 전에, 이런 충동들 각각이 대상이나 사건에 관해 일면적인 견해를 선행적으로 제시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 그 부분성들 사이에 갈등이 산출되며, 이로부터 이따금 중간상태, 진정상태, 세 충동 사이의 상호 용인, 세 충동 사이의 일종의 공평성과 계약이 산출된다. 왜냐하면 공평성과 계약 덕분에 이 세 충동들은 자신의 실존을 주장할 수 있고, 서로 권리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긴 과정의 최후의 화해의 광경과 최후의 결산만을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해하다'라는 사실이 충동들에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어떤 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해버린다. 그것이 충동들 상호간의 어떤 억제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4. 권력의 미시물리학은 거시정치를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며, 거시적 권력을 다만 무한히 다양한 복수의 미시적 '권력관계들'이 발생시키는 가장 가시적인 최종적 효과 혹은 결과로서만 인정한다. 푸코의 권력관게론이 거시정치를 무시한다는 비판은 이처럼 푸코의 미시적 권력관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5. 윤리의 계보학

푸코는 1976년 발표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지식의 의지』로부터 자신이 사망한 1984년 발표된 제2·3권『쾌락의 활용』,『자기배려』에 이르는 시기를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이름 아래 묶는다. 이때의 윤리는 '성격·품성·품행·관습' 등의 함축을 갖는 그리스어 ethos에서 기원한 용어로서의 '윤리'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지칭하는 푸코의 독특한 용법이다. 푸코는 제1권에서 유럽의 근대를, 제2·3권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다양한 텍스트를 분석하여 한 인간이 어떻게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 스스로를 윤리 혹은 도덕의 주체로 구성하는지 다룬다.

 

5.1 윤리의 문제계로의 전회

권력의 계보학에서 윤리의 계보학으로의 푸코의 전회의 의미를 상세하게 검토한다면, 그것은 규율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문제를 자신의 이론에 도입하려는 시도로 파악할 수 있다. 푸코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오늘날의 주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따라서 근대적 권력구조의 구속으로부터 주체를 해방하고,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정초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푸코에 따르면, 저항을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일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을 상상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을 푸코는 윤리적 실천이라고 정의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서 윤리적 실천은 정치적 실천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규율권력이 미시적으로 주체에게 침투하여 주체를 예속화한다는 점에서, 권력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를 변용하는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천이야 말로 권력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가장 빼어난 정치적 전략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1

 

5.2『지식의 의지』

1976년 푸코는 전해에 발표한『감시와 처벌』과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서구 성 담론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한 '성의 역사' 시리즈의 제1권『지식의 의지』를 출간한다. 푸코에 따르면 17세기 초에는 성적 관행에 대해 어느 정도의 솔직함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성적 욕망은 조심스럽게 제한되고 성적 욕망은 생식 기능의 중대함 속에 흡수된다. 성의 쾌락적 측면은 금기시 되고 부부의 생식행위가 성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이런 '성억압'에 대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성에 대해 억압적인 담론이 공식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즉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노동력 형성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에너지 낭비에 의한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성이 억압되었다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임금노동을 착취할 필요가 없어지자 육체에 대한 폭력적 강제가 없어지고 성에 대해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성억압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억압, 금지 등 권력의 부정적 기능을 통해서만 권력을 바라보는 것은 권력이 갖고 있는 생산적 기능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따라서 억압에 대해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해방을 외치는 이러한 담론 자체가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메커니즘,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비판한다. 만일 성의 역사가 억압의 역사이고 이 억압이 노동력을 위한것이었다면, 성의 통제는 육체적인 단련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계급에게 더욱 강하고 교묘하게 가해졌어야 했다. 그러나 푸코가 계보학적 방법으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사태는 정반대였다. 가장 엄격한 방침이 적용된것은 우선 정치적으로는 지배계급, 경제적으로는 특혜받은 귀족 및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성에 대해 이상 과민증을 보였고, 공포를 느꼈으며, 여러 방안을 짜냈고, 학문적인 방법을 모색하며, 끊임없이 성을 유발하고 이야기 했다. 즉 성적인 낭비를 함으로써 손상을 입게되는것은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지적 능력이요, 도덕적 의무였다. 성적인 장치는 오로지 특권계급을 위해, 그리고 특권계급에 의해 엄격하고도 복잡하게 고안되었다. 하층계급은 오랫동안 권력의 성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성적 메카니즘이 아래 계급까지 내려간것은 훨씬 뒤의 일로,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인구'가 중요한 정치경제적 통치대상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도착적 성행위에 의학적, 법률적 통제가 가해지고, 피임방법이 보급을 통한 산아제한 혹은 사회복지를 통한 출산장려정책, 그리고 학교에서의 성교육 등을 시작한 19세기말에 가서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익'이라는 권력의 기제들에 의해 기독교적인 영역 밖으로 담론이 확대된 것이다.

 

요컨대 성을 대상으로 한 통치는 일방적인 금지보다는 유용하고 공적인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성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즉 성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성을 억압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지식-권력 복합체는 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가지 작업을 수행했다:

1.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 육체가 의학적 실천의 영역으로 통합되면서 여성의 육체는 성적 욕망으로 가득찬 몸뚱어리로 분석되었다.

2.어린이의 성의 교육학화: 성적 활동은 부당하기 때문에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성적 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야한다.

3.출산의 사회화: 사회복지 또는 세무상의 조치를 통해서 부부의 생식력을 사회적 차원에서 관리한다.

4.도착적 쾌락의 정신의학화: 성적 본능을 생물학적, 심층심리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형태의 '비정상'이 임상적으로 분석되었고, 그 비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교정적 기술체계가 탐구되었다.

 

5.3『쾌락의 활용』,『자기배려』

동성애자인 푸코는 대략 1970년대 중반에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데, 생애의 말년에 다가선 푸코가 주력한 것은 윤리의 계보학에 대한 지적 세련화 작업과 '성의 역사'를 속간하는 일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안 1980년대의 푸코는 자신의 '지적 유언장들'이라 부를 수 있을 일련의 작업(강연, 저술)을 수행한다. 『감시와 처벌』과『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주체의 탈중심화 구조를 비판했다. 탈중심화에 있어서 주체는 '타자'로서의 규율권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된다. 반면『쾌락의 활용』,『자기배려』이 저술된 1977~1978년경 푸코는 통치 및 통치성의 개념을 주축으로 하는 자기배려, 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 및 문제화의 개념으로 점차 이동해간다.

 

『쾌락의 활용』에서 푸코는 자신의 연구가 특권화한 르네상스-19세기를 넘어서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한 개인이 쾌락을 다루는 방식과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로 회귀한 이유는 근대는 생물학, 의학, 정신병리학, 사회학, 인종학 등의 영역내에서 발생한 지식의 범람과 그것에 근거한 새로운 규범체계들은 성에 있어서 주체의 역할, 그리고 주체가 자기와 맺는 관계가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푸코는 서구역사 내에 보다 심층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개념들(예컨대 '예속'은 기독교 사제권력으로부터 기인한 개념이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푸코는 근대적 성의 형성 이전 시대로 분석의 장을 옮김으로써, 친숙한 성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이와 관계된 이론적 실천적 배경을 분석하고자 했다. 여기에 더해『자기배려』에서는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 초기 로마에서 있어서의 자기 형성의 논리, 예컨대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스토아주의자들이 보여주는 특징에 집중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쾌락을 절제하고 활용하는 능력은 곧 욕망에 대한 이서의 우위를 증명해야 할 헬라적·남성적·시민적 미덕으로 이해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쾌락의 활용' 개념은 푸코에 의해 자기지배와 절도의 측면, 즉 능동적 절제와 수동적 무절제의 문제의 대표적 사례로 이해된다. 이는 부정적·억압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욕망 담론의 일면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포괄하고 넘어서서 지식·권력·윤리를 아우르는 존재론적·정치적·윤리적 주체화의 긍정적·생산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즉 푸코는 윤리를 법적 금지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닌,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주체화로 이해한다. 주체화의 구축에는 세가지 종류의 도덕(도덕성·법규·윤리)가 관련된다. 이중에서 도덕성과 법규는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순응이나 순응의 강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윤리에서는 자기의 자기에 대한 관계, 자기에 대한 성찰과 자기인식등이 문제된다. 푸코는 편의상 첫번째와 두번째를 도덕으로, 세번째를 윤리로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도덕이 해당하는 '통치'가 타인의 직접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개념이라면, 푸코가 말하는 윤리적인 '자기배려'는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 즉 인간이 스스로 행동규칙을 정할뿐만 아니라 자신을 관리하고, 절제력을 기르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개념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은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푸코는 성적 활동과 쾌락의 문제를 통해 '자기의 실천'을 문제화한다.

 

5.3.1 윤리적 주체화와 특이성

규율권력이 일반성으로서의 규범을 개체에 부과하는 장치라고 한다면, 푸코가 윤리적 주체화를 통해서 발견하고자 한건 일반성으로서의 규범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체의 특이성이었다. 즉 윤리적 주체화를 통해서 개인은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이성을 얻는다. 특이성으로서의 주체, 즉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에 있어서 저항의 문제가 개입한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에 대한 관계가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의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지점이다. '주체의 윤리'야말로 통치성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정치적 주체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전념하고, 윤리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전념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자기에 대한 자기의 반성적 시선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반성적 시선은 주체가 규율을 내면화하여 복종하게 되는 규제적 시선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행위를 점검하고, 자신을 이성적, 독립적 주체의 존재 양태로 변용시키는 시선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반성적 시선은 주체를 변용하고 '나'의 특이성을 구축한다. 요컨대 저항의 지점으로서의 윤리적 주체의 구축전략은 자기반성적 태도이다. 다만 이런 실천이 고독하게 혼자만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변용을 이끄는 타자의 개입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이미 자기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를 통치하는 기술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적 문제, '바깥의 사유'를 다시 보게된다. 즉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자기 촉발은 실현되어 특이성이 구축된다. 푸코는 이처럼 주체를 변용시키는 지식이 고대 그리스에서 진리로 불렸던 지식이라고 간주한다. 이처럼 푸코에게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전략은 끊임없는 반성적 비판이다.

 

요컨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구축, 즉 윤리적 주제화에는 늘 자기와 타자의 관계맺음이 결합되어 있다. 윤리적 주체로 자신을 구축한 자만이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그런 관계가 정치적 장에 특이성,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즉 푸코가 말한 주체화란 정치의 장,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특이성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 실천'을 의미한다.

 

  1. 반면 윤리의 계보학 시기 이전의 푸코는 아마 "어떤 형식으로 성행위가 도덕적 영역으로서 구성되었는가" 라는 매우 일반적인 문제제기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무엇을 위해서 개인의 삶의 양식을 변형하는지, 또 어떤 양식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삶을 변용시키는가 라는 물음을 놓치게 된다.

     

<질 들뢰즈>

들뢰즈 사상의 일반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현대철학은 칸트와 헤겔로부터 많은 창조적 영감을 길어냈다. 이와 달리 들뢰즈는 칸트의 비판철학 이전의 전통, 구체적으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계승하여 철학을 꾸민다. 유럽 대륙에서 전개된 근대철학은 두개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별자의 자기의식에서 출발하는 데카르트의 철학과 모든 개별자를 담고 있는 유일한 존재의 관념에서 출발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것이다. 데카르트, 칸트, 후설로 이어지는 의식철학의 전통은 자기의식을 존재와 진리의 근거로 세운다. 반면 스피노자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전통은 관념들의 필연적인 정의로부터 귀결되는 바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며, 자아 또는 자기의식을 원천이 아니라 이 귀결의 일부로 이해한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철학에서 '반의식철학' 내지 '반인간주의 철학'이라는 명칭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들뢰즈는, 헤겔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부정성'의 논리대신 스피노자적 '긍정성'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의 의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요컨대 들뢰즈 철학은 존재론에서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삶을 부정하는 길을 차단하고, 삶을 제물처럼 바치기를 원하는 초월적 원리들과 싸우는 데 전념하고 있다. 삶은 단지 살라고 주어진 것이지 가책과 죄의식과 부정을 통해서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며, 저편 어딘가에 있는 최종적인 완성 단계를 목적으로 삼아 훈육받으며 머물고 있는 열등한 중간기착지 같은 것도 아니다.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인식론적·존재론적 입장을 완성하고 있는 저작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스코투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니체 등을 주된 배경으로 삼아 '존재의 일의성' 및 그를 배경으로 한 '개체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스코투스와 스피노자를 배경으로 존재는 실질적으로 다수로 구별되지만, 이 다수는 실체저 다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갖는 형식상의 다수임을 보인다. 존재의 실체적 다수성을 지양함으로써 존재자들 사이의 위계의 성립이 부정된다. 이후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배경으로 다양한 개체들의 발생은 저 하나의 존재가 가진 힘의 '강도적 크기'의 다양성으로 설명된다.

 

 

1970년대부터 좌파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의 협업을 통해 내놓은『안티오이디푸스』와『천개의 고원』은 현대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눈부신 저작중 하나이다.『안티오이디푸스』의 핵심 기획은 정신분석학을 자본주의의 학문적 요구로서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오이디푸스(부성적인 법)의 개입을 통해 스스로의 본성에서부터 분리된 욕망의 정체를 폭로한다. 이것은 학문적 차원에서는 정신분석 비판이며, 정치적 차원에서는 정신분석의 개념들에 상응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천개의 고원』에서는 오이디푸스적 법을 통해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수많은 방식의 익명적 삶을 추적한다. 이 두저작의 배경에는 부정성을 매개로 자기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철학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들뢰즈 사상을 철학적 관심사에 따라 나누는 일반적인 분류에 따른다면, 그의 사상은 인식론, 존재론, 실천철학이라는 세 영역에 걸쳐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1. 인식론(진리론)

들뢰즈는 인식론적 과제를 그의 '사유의 이미지' 연구의 일환으로 취급한다. 사유의 가능조건, 가유가 가능하기 위한 지평, 누구나 공유하고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 그것 없이는 보편적인 사유가 가능하지 않은 것이 사유의 이미지다. 더 이상 그 존립근거에 대한 질문이 필요없는 공리적인 성격은 가진다는 점에서, 비유컨대 사유의 이미지는 하나의 수학체계가 기능하기 위한 공리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또 교회공동체의 지반을 이루는 '도그마'와 같은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사유가 가능하기 위해 밑그림처럼 전제되는 것이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유 안의 비사유'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고전철학이 전제해온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은 임의적이다. 그는 그런 임의적 전제없이 '발생하는' 사유를 그려보고자 했다. 고전철학 사유 안에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는 것들을 의심하고 그것의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는 이 작업은 니체의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음은 들뢰즈가 고전철학의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시하는 주장들이다:

1. 진리 찾기를 위한 자발적 의지는 임의적인 것이며 진리는 그것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강제 때문에 탐구된다는 것(선의지의 공리에 대한 비판)

2. 대상의 동일성의 형식은 임의적이라는 것

3. 마음의 능력들은 인식을 위해 서로 조화되도록 미리 짜여 있지 않고 발생적으로 조화한다는 것(재인식과 공통 감각의 공리에 대한 비판)

4. 정해진 답이 있기보다는 사유하도록 만드는 문제만이 있다는 것(오류의 개념에 대한 비판)

 

그렇다면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로 무엇인지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음으로 해서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 인식은 이른바 '기호'의 자극을 통해 시작된다. 기호의 자극으로부터 인식에의 도달은, 스피노자 인식이론에서 경험적 요소들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독특한 스피노자 독해에서 얻어진 산물이다. 그는 스피노자 인식론에서 경험적 요소를 강조한다. 스피노자에서, 사유가 최초로 처해 있는 '경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기호'는 일종의 억견, 부적합 관념이라 불리는 것이고, 참된 인식은 '표현', 이른바 적합관념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기호는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결과이며, 표현은 적합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기호는 상상의 대상이고 표현은 이성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미지의 기호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어서 이성이 그 기호를 여러 관계들(사물들 사이의 일치, 반대 등)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참된 관념인 표현에 이를 수 있다고 스피노자를 해석한다. 말하자면, 인식을 위해 미리 짜인 능력이 있거나, 임의적인 의지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자극에 의한 상상력의 활동과 인식의 강요, 그리고 이에 뒤이은 이성의 활동의 발생적 일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기호로부터 강제라는 수동성은 궁극적으로 그 기호에 대한 이성의 '능동적' 해석으로 귀결되므로, 이 강제는 부정성의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이런 인식 혹은 배움은 데카르트 이래의 의식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고 그 분리된 관계를 근대철학의 표상이나 현상학의 지향성을 통해 파악하는 구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되지 않는 미세지각 등 무의식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인식활동에 있어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강조한다. 즉 플라톤 이래 대상을 규정하는 근본 개념은 동일성과 유사성이었으나, 이제 들뢰즈의 인식론에서는 유사성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때문에 유사성이 산출된다. 차이가 근본 개념이며 동일성과 유사성은 그 결과물인 것이다.

 

2. 존재론

2.1 전통존재론에 대한 비판

이제 들뢰즈가 어떻게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입장을 수립하는지 살펴보자. 존재론에서 들뢰즈가 중시하는 개념은『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일의성, 내재성, 긍정성이다. 반면 그가 반대하는 개념은 서양 존재론의 전통적인 개념들인 다의성, 탁월성, 부정성, 유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대체로 서양존재론은 존재의 의미의 '다의성'에서 출발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탁월'하다는 개념을 도입하고, 그런 다음 '부정성'으로 나아가거나 '유비'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자신의 입장에 대비하여 적대적 구도 속에 배치하고 있는 전통 존재론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의성에서 출발해보자.

 

일의성은 존재란 한가지 의미로만 말해진다는 뜻인 반면, 다의성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가령 창조자라는 존재와 피조물이라는 존재를 보자. 두 존재는 같은 의미로 서술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 존재는 인간 존재보다 탁월하다. 어떻게 탁월한가? 신을 묘사하기 위해 모든 술어들을 동원해보자. 지혜롭다, 덕스럽다 등등. 그런데 우리가 아는 모든 지혜보다도, 모든 덕보다도 신은 더 탁월한 것 같다. 즉 신 존재가 가지는 것은 '베일에 싸인 탁월성'이다. 왜냐하면 신은 완벽한 존재일텐데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술어도 아니고 저 술어도 아니며, 모든 술어가 신의 탁월함을 기술하기에는 모자라다. 따라서 신 존재는 '~이 아니라는 부정'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의 의미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 존재가 피조물보다 탁월하지만, 그 본성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과 신 존재는 모두 지혜롭지만 신은 탁월하게 지혜롭다. 즉 인간 존재가 지혜롭다는 말과 신 존재가 지혜롭다는 말은 서로 다르나(다의성), 이 두 존재의 지혜 사이에는 비례관계가 있다. 마치 기념품점에서 산 에펠탑과 빠리의 에펠탑이 서로 다르지만 비례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유비'의 의미다.

 

이런 전통존재론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져왔다. 하나는 니체가 말했듯 우열과 열등의 위계를 나누고, 위계질서상 열등한 이 세계를 참되지 않은 것으로 부정하고, 거짓된 세계(이데아)를 진실로 여김으로써 삶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가 말하듯 현세적 존재인 우리의 원인을 인식하려는 것을 회피하고 상상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의성에서 출발한 부정성과 유비는 모두 우리 삶의 운명을 공상으로 꾸며진 피안에 맡긴 채 삶을 피안의 탁월한 것에 대해 열등한 것으로 비하하는 일이다. 나아가 피안의 초월적인 것을 동경하는 존재론의 경향은 철학을 넘어서 인종주의를 비롯한 현실적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특정 인종이 피안의 탁월한 인간과 자기 인종이 가장 닮았으므로 나머지 인종은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2.2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는 위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서양존재론을 구출하기 위해 '존재의 일의성' 개념을 제시했다. 즉 존재는 여러가지 의미가 아니라 단 한가지로만 설명된다. 존재는 항상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는 주장의 뜻을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들뢰즈는 뜻과 지시체를 구별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샛별-저녁별'의 예를 든다. 샛별과 저녁별은 의미상 서로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존재, 하나의 별을 가리킨다.즉 샛별도 '존재하고' 저녁별도 '존재한다'고 말할 때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야곱-이스라엘'의 예도 마찬가지다. 성서 속의 이 인물은 그의 형 에사오와의 관계 속에서는 야곱이라 불리지만 족장으로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린다. 여기서 분명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야곱이 '존재하고' 이스라엘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함'이란 오로지 동일한 한 인물의 존재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의성은, 존재는 늘 한가지 의미이며, 그 존재가 말해지는 형식(야곱, 이스라엘 등)은 '다의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철학사에서는 이 일의성을 구현한 자가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연장'과 '사유'는 서로 다른 의미이지만, 동일한 한 존재의 형식들이다.

 

존재는 늘 한가지 의미이고, 오로지 그 형식들(또는 이름들)만이 다의적이라면, 존재는 이 형식들의 '차이'를 통해서만 말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차이가 존재를 규정하는 근본 개념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밤하늘의 번개를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이라면 현상 가운데 번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번개의 정체성(동일성)에 관한 개념(이데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상세계 너머에 탁월한 형태로 있으며, 그 이데아를 분유받고 있는 현상계의 번개는 이데아보다 열등할 것이다.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서는 번개의 동일성(이데아)보다 '차이'가 먼저온다. 번개는 어떻게 생기는가? 바로 빛과 어둠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그 결과물로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조형물(번개)이 출현하는 것이지, 하나의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탁월한 것(이데아)이 먼저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앞서 들뢰즈의 인식론적 작업에서, 인식이 겨냥하는 본질이 '차이'라고 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사물들의 성립의 근거로서 차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2.3 부정성에 맞선 긍정성

존재 자체는 여러 의미를 지니지 않고 한가지 의미만 지닌다. 그리고 사물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데아 없이도 '차이'가 이 존재로부터 다양한 사물들을 출현시킨다. 즉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차이야 말로 사물 발생의 궁극적 단위이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원인으로서의 이데아는 존재근거가 사라진다.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이란 바로 현실에서 부가적인 초월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또한 이 내재성의 세계에는 '부정'이 끼어들 수가 없다. 탁월한 피안, 초월적 본질이 없으므로, 본질에 근거하여 '그것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사고방식으로는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부정성을 띈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헤겔이 세계의 운동원리로서 제시한 부정성, 모순이나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차이 개념은 헤겔의 변증법적 부정성과 경쟁관계를 가지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을 예시를 통해 설명해보자.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질 때 시작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혐오하면서, 거울 안의 자기에게 말한다. 이렇게 능력발휘를 못하다니! 너는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야." 이때 자신과 거울 안에 대상화된 모습 사이를 매개해주는 것이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 혐오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부정성이다.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상으로 이 매개 관계의 진면목은 '모순'이다. 이 모순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나의 장애로 여기고 극복하는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더 나은 결과들을 낳는 생성의 운동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 들뢰즈의 '차이'란 바로 이런 부정성이 아니며, 오히려 '비관계'를 뜻한다. 빛과 어둠이 병행적으로 있다는 사실에서 번개가 생겨나듯 차이는 부정성이라는 대립('나'와 '극복해야 할 나 자신'의 모순)의 운동 없이 사물을 출현시킨다. 부정성과 달리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 들뢰즈는 차이를 통해서 서로 차이가 나는 항들을 그 자체로 긍정하려고 하지, 부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이런 차이 내지 차이나는 항들로부터 개별자를 설명하고자 하는것이 그의 개체화 이론이다.

 

2.3.1 개체화 이론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해석하면서, 자연안의 힘들(사유하고자 하는 힘과 존재하고자 하는 힘)의 강도의 크기를 개별자(유한 양태)의 다양한 '본질'의 출현으로 이해한다.1 개별자에 대한 이러한 스피노자의 설명에서 들뢰즈는 개체의 발생 이론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에 따르면 강도적 크기의 본질적 과정은 개체화에 있다. 강도는 개체화하고 강도적 크기는 어떤 개체화의 요인들이다. 즉 힘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개체의 '본질'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힘의 정도들이 서로 다를 수 있게 하는 것은 힘 안에 내재하는 '차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차이가 개체 발생의 원인이다.

 

지금껏 철학에서 지배적인 설명으로 행사해온 개체화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를 통해 널리 알려진 '질료인'이었다. 형상이라는 일반적인 것에 질료가 개입해 개별자를 출현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경험적 결과로서 출현한 개체를 보고서 그것의 요소 중 질료를 개체화의 원인으로서 '상상'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결과를 모방해 그 결과의 원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원인이 결과를 닮았다는 것이며, 원인이 결과를 닮은 일은 상상에 입각한 추측 이상이 될 수 없다. 결국 질료인은 상상적이다.

 

개체의 본질을 발생하게 하는 원인인 차이는 그런 상상적 원인, 결과로서의 개체를 보고 상상해낸 원인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질서에 입각한 사유의 산물이다. 가령 '허기'라는 하나의 개체를 보자. 이는 몸안에 영양분이 양적인 차원에서 결핍되다가 그 양이 일정한 도(강도)에 이르면 발생하는 '질적으로 독특한 하나의 본질'이다. 이런 식의, 강도에 입각한 개체의 발생에 대한 이론은, 스피노자는 물론이고 들뢰즈가 영향을 받았던 스코투스에게서 그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 스코투스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다양한 개체가 출현하는 것을 하얀빛으로부터 강도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색이 출현하는 것에 비유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도적 크기는 개체의 '본질'을 출현시키지만, 이 본질에 대응하는 '실존'의 형성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즉 실존하는 물질들을 주관하는 법칙은, 그것에 대응하는 강도적 크기로서의 개체의 본질과는 별도의 성격으로 이루어진다. 실존이란 본질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실존이란 본질을 표현하는 외연적 부분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3.2 변증법에 맞선 '반복'

헤겔식 변증법에서는 부정성이 항들을 관계 맺어서 종합된 새로운 항으로 발전하게 해준다. (가령 다음과 같다. 의식은 하나다 → 경험은 다수다 → 의식은 다양한 경험의 종합이다.) 반면 차이의 세계에서는 차이 나는 것들이 부정되지 않고, 계속 그 자체로 '반복'되면서 사물들을 생산한다. 반복은 무엇보다도 시간적 개념, 즉 '되풀이되는 시간'이며, 주어진 상태들의 긍정을 조건으로 한다. 주어진 상태들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정의 대상이 될것이고 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반복이 없을 것이다. 또한 반복은 기쁨과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 시간에 사후적으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반복인 것이다. 생활 속에서 반복을 통한 생성의 예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음악에서의 선율의 반복, 시의 선율이나 후렴구, 무용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다른 예로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트라우마를 들 수 있다. 프로이트가 분석했던 일종의 '대인공포증'을 앓는 환자 엠마의 경우, 사춘기 이전에 있었던, 솟가게에서 상점 주인이 옷 위로 그녀의 몸을 만진 성추행 사건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증상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그러나 두번째 사건(옷가게 점원이 웃은 사건) 안에서 상점, 옷 등의 요소들이 반복되자 비로소 트라우마가 발생한다. 즉 "두개의 인자가 모여 한 병인을 완성시킨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들뢰즈식으로 하면 '반복이 하나의 대상을 출현시킨다'가 된다.2

 

3. 실천철학(정치철학)

들뢰즈의 저작『안티오이디푸스』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가『신학정치론』에서 제기했던 물음인 "왜 인민은 예속을 영예로 생각하는가?"에 관련된 것이다. 물리적 억압을 동원하는 제도적 장치들은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속 없이는 결코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제도적 억압의 성공을 개개인의 내면에서 묻고자 한다. 왜 사람들은 예속을 원하는가? 스피노자 시대때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교회였다면, 들뢰즈는 현대유럽에선 정신분석학이 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오이디푸스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버지라는 법의 금지를통해 자아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가리킨다. 즉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한 아버지의 문제는 나 자신을 긍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가책의 대상으로 만든다. 내면적 예속은 부성적 법에 의해 우리 마음이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신분석학의 팔루스 개념은 '차이'를 하나로 환원하고자 하는 초월성이며, 정신분석학은 이런 부정성을 통해 욕망을 억압하고자 한다.

 

문제는 이런 오이디푸스의 억압 작동이 단지 개개 가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정신분석학은 외부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호응하여 개개인의 내면을 옭아매는 것을 정당화하는 학문외에 다름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역할을 담당한 것을 찾자면 이른바 '위대한 인간', 가령 신이나 독재자들이 있다. 프로이트는『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위대한 인간에게 예속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위대한 인간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이라면 어디에는 권위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존경을 보내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배를 받든 학대를 받든 강력한 권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안티오이디푸스』에서 바로 이런 견해에 맞서 싸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갑각류 동물과 여기에 열광하여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 대중이라는 미친 무척추동물을 세계사에서 내쫓고자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자본주의의 복종화와 재생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오이디푸스를 가져왔고 정신분석학은 그것에 학문적 형태를 부여했다. 내 욕망이 아버지의 법 아래서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당연한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아이)로서 나는 영원히 자본주의 체제(아버지) 아래서 각종 억압과 금지를 당해야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안티오이디푸스』의 과제는 오이디푸스, 부성적 법, 초월적 지배자 등 억압적인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안의 욕망을 해방시키고 자본주의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들뢰즈 반인간주의의 구체적 형태이기도 하다. 그는 욕망을 인격적 형식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어떤 원리에 지배받지 않는 긍정성을 통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1. 스피노자에게서 자연의 힘의 역학적 측면(강도)을 개체 발생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해석은,스피노자가 채택한 '기하학적 방법'이 절대자의 생산하는 자기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따라서 스피노자의 절대자는 운동없는 죽은 신일 수 밖에없다는 헤겔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한 반박으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2. 이렇듯『차이와 반복』에서 프로이트는 반복의 중요한 사례로 제시되지만, 후에 1970년대 정치철학적 작업 속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보수성과 관련하여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리오타르는 들뢰즈, 데리다 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예술, 문학, 그리고 철학 분야에서 1980년대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출처와 목표를 나름대로 규정하고, 왜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지를 자신의 철학적 활동으로 삼고 있다. 고대의 소피스트적 전통에서 니체 및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이런 사유의 길이 도달되는 지점은 리오타르에 따르면 억압되고 소외된 것의 복권이고, 감추어져 있는 것의 드러냄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의 창안이다. 이런 것을 위해 인간의 죽음이나 주체의 해체 혹은 철학의 종말과 같은 과격한 용어들을 자신의 이론 속에 도입하고, 이로써 보편적 이성의 분산, 사변적 주체의 해체, 형이상학적 철학의 분해를 시도한다. 마르크스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유심론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함으로써 신 및 이성 중심주의에 그리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의식주의에 각각 종말을 고하고 그래서 기존 사유 양식의 탈정당화를 선언하듯이, 리오타르는 선진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 혹은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정당화 담론에 대한 탈정당화 과정이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한다.1 리오타르는 근대적 정신에게는 절망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시도를 철학의 언어적 혹은 미학적 전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

 

1930년대 이래 현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이를테면 사르트르, 카뮈, 메를로퐁티,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리오타르는 어떤 특정한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시대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사유의 텍스트는 역사적 현실이었다. 아우슈비츠, 굴라크, 1·2차대전 등 20세기의 주요한 역사적 비극에 맞닥뜨려 리오타르는 그 근본적 원인을 추적하고 그것이 다름 아닌 전체주의임을 폭로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체'라는 이름은 근대인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그리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권위'의 이름이었다. '전체를 위하여'에 거부나 불복종은 허용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체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소수에 대한 테러가 용인되고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체에 반감을 품은 리오타르의 철학적 사유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열외자 등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모든 전체주의의 테러를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오타르가 정보화사회라 일컬어지는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비인간주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저항할 것을 촉구한 것은 미래에도 기술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반성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 현실속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지녔던 계몽의 이념을 거부한다. 보편성, 통일성, 체계성, 획일성들을 강조하면서 개체성, 다양성, 차이성, 이질성을 억압하는 모더니티의 폭력을 포스트모더니티로 극복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진정한 모더니티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고 망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망각된 비판적인 모더니티를 상기하고 재생시키는 데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해방은 부르주아 모더니티가 부르짖은 전 인류의 진보와 해방을 '다시' 청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진보라는 미명 아래 '나'와 '너'를 '우리'속에 통합시키는 데에, 나아가 '너'안에 '나'를 명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포섭하고자 하는 데에 모던의 비극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언어와 사회 및 예술이라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이 종국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해방의 논리이다. 후기 산업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예술적인 억압 기제로 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리오타르가 가장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차이와 충돌 그리고 암시와 증언이다. 언어게임들간, 문장들간에 또 담론장르들간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고 또 이것들을 중재하여 해결해주는 보편적인 규칙이나 메타규칙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이것들 상호간에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주장 속에서 이질적인 문화들간의 차이와 충돌이 발생한다는 것도 함축하고 있다. 상층 문화들간의 충돌뿐만 아니라 하나의 상층 문화속에서 하층 문화들간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차이와 충돌을 증언하는 데에 철학자의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충돌의 증인이 됨으로써 충돌중에 상처를 입은 소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의 소리를 감지하고 암시하자는 것이다. 부정적이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적인 총체적 개혁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억압기제의 출처 확인과 증언만은 철학자, 아니 지금 여기에서의 지식인의 몫으로 보자는 것이다.

 

1. 거대담론의 파산과 포스트모더니즘

리오타르는 20세기 정치와 경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후기산업사회에서 전체주의를 지지하고 정당화해주었던 거대담론의 파산이 마무리되었음을 선언하며, '포스트모던'을 "메타 이야기에 대한 불신"으로 단언하고, '모던'을 "메타 이야기 혹은 거대 이야기라는 정당화 담론에 의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유 및 행위 양식"으로 규정한다.

 

거대담론(메타 이야기)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남김없이 설명해 줄 수 있는, 이성주의 시대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꿈꾸었던 통일적 이론체계를 말한다. 그것 자체는 외부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정당성을 가지며, 다른 모든 작은 담론들의 정당성으로 작용한다. 목적으로서는 도덕의 진보, 정의로운 사회와 제도의 실현, 인류의 행복증진 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사상의 변천사를 주목하면서 이런 정당화 이야기의 모형을 기독교적 이야기, 계몽의 이야기, 사변적 이야기, 마르크스적 이야기, 자본주의적 이야기로 세분한다. 그에 따르면 중세 기독교적 이야기는 사랑을 통해 아담이 저지른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근세 계몽의 이야기는 지식과 평등주의에 의해 무지와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헤겔류의 사변적 이야기는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에 의해 보편적 이념의 실현을, 마르크스적 이야기는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부르주아지의 착취와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자본주의적 이야기는 기술 산업적 발전을 통해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각각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모던의 기획'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저런 거대 이야기는 더 이상 신뢰될 수 없음을, 달리 말해서 보편적이고 계몽적인 모던적 주체가 소멸되었음을 지난 50년동안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즉,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사변적 이야기는 아우슈비츠 사건에 의해 거부되었고, “프로레타리아적인 것은 공산주의적인 것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프로레타리아적인 것”이라는 사적 유물론 이야기는 1953년의 베를린 폭동, 1956년의 부다페스트 혁명, 1968년의 프라하의 봄, 1980년의 폴란드 노조파업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민주적인 것은 국민에 의한 것이고, 국민에 의한 것은 민주적인 것”이라는 의회자유주의적 이야기는 사회적 일상이 대의적 제도를 와해시킨 프랑스 1968년 5월 혁명에 의해 설득력이 상실되었으며,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전반적인 번영을 약속하며, 전반적인 번영은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한다”는 경제 자유주의적 이야기는 1911년과 1929년 경제공황에 의해 신뢰성을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본인이 한 말이긴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지적은 심각하게도 터무니 없음.)

 

그러므로 진보와 해방이라는 계몽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보편성, 절대성, 통일성, 전체성을 축으로 해서 개별자, 구체자, 다양자, 상대자를 포섭하고 평가하면서 정당화시키는 모던의 기획과는 달리,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개별자들 간의 불일치와 차이 자체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동일성의 철학 혹은 전체주의적인 입장에 근거한 저 모던의 기획이 결과적으로 초래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목표로 한 인류의 해방이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아우슈비츠와 같은 인류의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인류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고유명사가 중요시 되는 또 고유명사들간의 차이성이 존중되는 포스트모던적인 정의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

 

1.1 포스트모더니티와 비판적 모더니티

그렇다면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과의 단절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러나 리오타르는 이에 대해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종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탄생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포스트'는 과거의 것 다음의 새로운 것, 즉 미래시제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업은 '삶의 형태'들간의 공약불가능성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시화시키며, '새로운 관념'을 창안해내고, '새로운 언술규칙'을 발견해내는 데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는 현재 통용되는 기존의 규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규칙도 없이, 그러나 '만들어 질' 새로운 규칙을 창안해내기 위해 작업하는 사람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이는 전적으로 모던적인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모던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통과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생활 양식과 사유 방식을 지향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전통과의 단절이 오히려 과거를 망각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지, 혹은 과거를 넘어서기 보다는 단지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포스트의 의미는 반복이 아니라 모더니티 속에 포함된 어떤 전제를 길고도 집요하며 극도의 책임성을 가지고 진행하는 철저한 분석과정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책임성을 포기한다면, 이는 모던적 노이로제를 그대로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오타르에 있어 포스트의 의미는 모던과의 단절이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모던이 추구한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던은 모던 '이후'가 아니라 모던을 '다시-쓰는' 작업일 뿐이다. 즉 포스트모던이 모던 이후에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포스트모던은 모던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모던이 연대기적으로 어떤 특정한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특정한 형태를 나타내는 개념들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상의 논의로 부터 리오타르는 모던을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즉, 리오타르는 한편으로 모던의 기획은 청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던속에서 표현되지 못한 것을 철저하게 다시 세공하고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산되어야 할 모더니티는 무엇이고, 다시 상기되어야 할 모던의 작업은 무엇인가? 이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이란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모더니티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바, 한편으로 모더니티는 자연과학과 기술공학의 진보, 산업혁명, 자본주의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변화의 산물로 나타난 얼굴을 갖고 있다. 이것은 진보의 원리, 과학과 기술의 유용한 가능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상품화 및 자본화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 추상적 인본주의속에서 정의된 자유의 이상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는 부르주아 모더니티일 것이다. 이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주체, 하나의 담론, 하나의 규칙, 하나의 원리, 하나의 생활 형태, 하나의 사유 양식, 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계, 하나의 구조를 선호하며, 메타, 절대, 보편, 초월의 성격을 지니면서 다양성과 구체성을 근거지우고 포괄하며 통제하고 지배한다. 이는 곧 총체적 통일성 및 단일성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주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을 가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더니티는 이런 진보적, 합리적, 기술공학적인 모더니티의 기본 가치를 근본적으로 탈신비화시키는 비판적이고 미학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항상 모던적이면서 동시에 반모던적인 셈이다. 즉, 개혁에 동참하고, 전통의 권위를 부인하고, 보편적인 이성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던적이지만, 다시 진보의 이념을 거부하고, 합리성을 비판하고, 근대 문명의 상실을 지적하고, 거대한 통합적 원형을 해체하고, 강력한 통일체를 파편화시킨다는 점에서는 반모던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데리다의 글쓰기의 해체, 푸코의 담론의 혼란, 세르의 인식론의 패러독스, 레비나스의 타자성, 들뢰즈의 유랑적인 만남을 통한 의미효과, 끊임없는 부정의 실천을 요구하는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 바티모의 '약한 사유'의 강조등과 같은 것을 절대성, 근원성, 체계성, 중심성을 해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2. 철학의 언어적 전환

리오타르는 진보와 해방의 이념으로 무장된 모더니티를 해체하기 위해 철학의 언어적 전환을 감행한다. 그는 이때 여러 특수 이성이 존재하며, 자기 고유의 규칙체계를 따르는 다양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언어게임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리오타르는 "각각의 다양한 종류의 진술은 그 특성과 가능적 활용을 명시하는 규칙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주목한다:

1. 규칙은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게임자들 간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인 계약의 대상이다.

2. 규칙이 없다면 게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 규칙의 미세한 변형조차도 게임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진술은 규칙에 의해 규정되는 게임에 속하지 않는다.

3. 모든 진술은 게임에서 행해지는 활동 혹은 동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리오타르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삼는 이유는 언어게임들 간에는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지시적 언어게임, 규정적 언어게임, 미학적 언어게임, 정치적 언어게임은 서로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게임의 논리에서 다른 언어게임을 판정할 수 없으며, 이런 이질적인 언어게임 모두를 포섭하는 메타담론또한 존재하지 않고, 모든 언어게임에 통용되는 메타규칙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특정한 언어게임 및 언술규칙이 선호되고, 그것을 모든 게임의 판단 준거로 사용된다면, 전체주의가 초월적 환상에 의해 자행하는 테러와 다름 아니다.

 

2.1 포스트모던적 생활양식

포스트모던적 생활양식은 1950년대 이래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데, 우선 기술의 혁신으로 지식은 그 전통적인 특성, 즉 사용가치를 상실하고, 지식의 정보화 현상으로 교환가치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한 정보 기계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현대적인 정보체계, 컴퓨터, 자료은행 등이 발달함으로써 정보망을 통해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또 지식 자체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은 정보체계에 맞게 번역될 때에만 비로소 소비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나 소비하는 사람들은 정보언어로 번역된 지식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정보화된 사회에서는 지식이 인격도양를 추구한다는 종래의 입장은 종식되고, 지식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팔리기 위해서 생산되며 또한 새로운 생산에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 소비된다.

 

그러므로 지식이 상품화된 포스트모던적 시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이 어떤 거대담론에 예속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한 지식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모던적 사회에서는 어떤 지식이 참이냐가 문제가 되었다면,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는 어떤 지식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느냐가 문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이야기할 때는 진리와 윤리의 측면을 함께 고려하던 모던과는 달리,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누가 결정하며, 어떤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윤리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자동화된 정보에만 얽매이는 생활양식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조건이라면, 이 사회는 그야말로 비인간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2.2 포스트모던적 지식과 언어

그러나 지식의 탈윤리화 현상에 직면하여,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 문화에 대한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통해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리오타르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빌려온 이유는 그것이 고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서 지식이 유통되는 양상을 잘 구현해주기 때문이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언어가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언어는 정보망을 통하여 의사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지식의 경우에는 지식이 정보화된 언어의 형태로만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과 언어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리오타르가 거대담론에 의존하는 모던과 대조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정보화된 사회회에서 정보언어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게임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이다. 포스트모던적 언어는 거대담론을 위해 쓰이는 단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놀이에 쓰이는 다양한 언어들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다양한 언어게임을 무리하게 하나의 언어게임으로 환원하는 시도에 저항하면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되게 하며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시킨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이런 지식은 합의가 아니라 차이나 불일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게임의 효과는 규칙의 채택을 타당하게 하는 것, 즉 불일치의 탐구이다.

 

리오타르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개념을 따라 언어란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동일한 기표의 의미조차 달라진다고 하면서, 어떤 구조나 보편적 체계를 전제하는것이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리오타르는 각 부분들이 갖는 고유성과 이질성을 어떤 보편적인 규칙이나 구조, 규범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하며, 반대로 그것들에 의해 표현되지 못하게 된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보편적인 규칙이나 규범에 대해 '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기획은 보편적이성 대신 특수 이성을, 동일성 대신 차이를, 언어게임들 간의 공약성 대신 공약불가능성을, 이론적 담론 대신 예술적 담론을 내세움으로써 전체를 위한 소수에 대한 테어의 가능성 자체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차단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1. 1979년에 출판한『포스트모던적 조건』은 철학계에 포스트모던에 관한 열띤 논쟁을 야기한 대표적인 저서이다. 원래 캐나다 퀘벡 정부의 요청으로 쓰인 이 책의 과제는 선진화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지식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 책은 '선진 사회의 지식에 관한 보고서'인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모던적·계몽적 사회에서 정립된 지식 개념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변형되고 있고,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2. 리오타르는 자신이 제시하는 차이의 철학이 철학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보여줄 때, 그는 소피스트들의 상대론적 입장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간의 분리, 파스칼의 세가지 질서의 확립을 거쳐 칸트의 이론적, 도덕적, 미학적, 정치적 이성들간의 구분,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들간의 다양성을 제시한다.

     

. 분쟁

리오타르는 한층 사회학적 저작인『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다룬 내용을 더욱 심도있게 논의하기 위해 철학적 토대를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언어게임의 차이성을 인정함으로써 전체주의적인 테러가 방지될 수 있다면, 언술활동들간의 충돌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충돌은 파트너들간의 잠정적인 합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권력이 개입할 수도 있지 않은가? 리오타르는 이런 문제를 1983년에 출간한 자신의 주저인『쟁론』에서 보다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얻은 통찰, 즉 지배적인 논증 및 타당화 규칙에 어긋나는 입장은 제시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그는 이 책에서 분쟁의 실행만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과제는 갈등하고 있는 두 당사자 간의 불일치는 탐구하는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분쟁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3.1 포스트모던적 언어 이론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언어게임이라는 방법론적 개념에 의해 전개되었다면,『쟁론』에서는 문장, 규칙체계, 담론장르 등과 같은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문장이다. 문장은 일련의 규칙집단, 즉 규칙체계1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질적인 규칙체계의 문장들은 상호 번역될 수 없다. 이런 이질적인 규칙체계를 따르는 문장들은 담론장르에서 서로 '연결'될 뿐이다. 대화하기, 광고하기, 강의하기 등과 같은 것이 담론장르이며, 이것들은 각각 자기 고유의 목표가 나름대로의 목적(지식을 획득하기, 유혹하기, 가르치기)을 갖고 있다. 이질적인 규칙체계의 문장들은 담론장르들이 갖고 있는 목표의 도달를 위해 상호 연결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문장은 그저 발생하는 것 혹은 일어나는 것으로서, 하나의 발생, 일어남 사건이다. 어떤 문장이 발생한다면, 그 문장은 어떤 담론장르속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문장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그 연결방식은 단지 '우연적'일 뿐이다. 모든 문장은 '원칙적으로' 앞의 문장과 연결될 잠재성을 갖고 있지만, 담론장르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문장을 우연적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한 담론장르도 다른 담론장르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연결방식도 역시 우연적일 뿐이다. 이것은 문장들의 연결보다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는데, 한 담론장르에서 문장의 연결은 하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연결되지만, 다양한 목표를 갖고 있는 담론장르들은 상호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연결을 정당화시켜 줄 보편적 목표, 보편적인 판단 규칙 혹은 보편적인 담론장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론장르들간의 연결은 항상 갈등 상황을, 즉 '충돌'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리오타르가 말하는 문장과 문장간 그리고 담론장르와 담론장르간의 피할 수 없는 충돌 상황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공약불가능성의 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리오타르는 자신의 언어이론을 변호인이 논증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소송과 변호인이 논증할 수단이 박탈된 경우 따라서 희생자인 경우를 가리키는 분쟁의 예시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상호간의 갈등이 동일한 규칙을 적용할 수 있는 소송의 경우는 조정과 화해가 가능하지만, 분쟁의 경우는 그것을 적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조정이나 화해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다. 예컨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법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파트너들 사이의 소송을 조정할 수 있지만, 노동력과 자본 사이의 분쟁은 조정하지 못"하며, "나치, 히틀러, 아우슈비츠, 아이히만과 관계가 있는 분쟁은 소송으로 변화될 수 없고 판결에 의해 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손실의 실재는 협상이나 합의에 의해서 접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오타르는 분쟁을 소송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데, 이는 부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자에 대한 강자의 테러가 동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부정의 희생자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인지적 문장으로 환원될 수 없는데, 이는 희생자로서 그 또는 그녀는 분쟁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분쟁의 존재는 인지적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부정의 기호이기 때문에 인지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3.2 포스트모던적 사회 이론

문장들 그리고 담론장르들간의 근원적인 충돌을 메타담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이미 차단되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취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리오타르에 따르면, 그것은 "충돌을 증언하는 것"이다. 충돌을 증언하라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강령은 손상과 부당성의 기제를 공격하고 그것의 오류를 발견함으로써 메타언어와 메타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특정한 담론장르를 추종하는 것은 곧 다른 담론장르에 손상을 입힌다는 것, 이런 종류의 침해 및 전체주의화가 근본적인 악이라는 것을 증시하고, 규칙체계들 및 담론장르들간의 이질성을 주목하고 그것들의 한계를 고수하는 것, 즉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역사·정치·언어·예술·사회 등에 접근하는 방법이 더이상 보편적일 수 없고 오직 국지적으로만 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충돌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어법을 창안하여 지배적인 담론에 의해 침묵하고 있는 담론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의 정의 실현은 정치가의 정치나 지식인의 정치가 아니라 '철학적 정치'의 과제이며,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철학적 정치가로 되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적 정치가의 임무는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감지되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열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반성적 책임이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책임은 "분쟁을 증언하고, 이것을 고려하고 고려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질적인 문장가족들에 고유한 선험적인 요구들의 공약불가능성을 확립하고, 현존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다른 언어를 창안해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입장,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그러나 '표현할 수 없고 신비적인 언어 밖'의 모든실재를 보존하는『논리 철학 논고』의 언어논리로부터 그의 후기 입장,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라는『철학적 탐구』의 언어이론으로 이행한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인 밖'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경험들은 언어의 그릇된 사용에 의해서 산출된 환상들일뿐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는 '밖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리오타르는 한편으로 소피스트로서, 실재의 '의미'는 전적으로 밖이 없는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로서 그는 사유의 과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4.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기

리오타르는『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과 회의주의에 근거해서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의 출현을 공표했었다. 즉 정보화사회는 거대담론 대신 무수한 작은담론을 추구할 기회를 가지며, 이에 따라 정치권력은 개인에게 되돌려지고 권위주의적인 국가의 권력 기반은 위협받으며, 거대담론, 즉 이데올로기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대를 예고했었다. 그런데『포스트모던적 조건』의 출현 이후 10년도 채 안 되어 출간된『비인간적인 것』에서는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흔들리고 훨씬 더 어두운 색조가 드리워진다.

 

4.1 기술-과학의 비인간주의

이 책에서 리오타르는 인류가 지난 날의 거대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적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그는『비인간적인 것』에서 태양의 열사망 이후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목적으로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하게끔 프로그램화되리라는 두려움을 피력한다. 인간이 기술을 통제하는 시대에서 이제 기술이 인간을 만드는 시대로 변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그가 말하는 비인간주의란 인간적인 것이 기술적인 것에 의해 무시되거나 기술적인 것에 예속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경우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리오타르는 인간성과 그 가치를 희생시키면서 기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기술-과학' 세력의 후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그런 '비인간적인' 해결책으로 전환하는 것에 철저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도덕성은 사라지며, 이러한 현상은 인간성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오타르는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는 이외에 다른 무엇이 '정치'로서 남아 있는가?"라고 하면서 발달된 기술에 의해 계획되고 있는 인간 소멸에 대항해서 자신과 함께 투쟁할 것을 촉구한다. 리오타르는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과제가 바로 이런 과정을 증언함으로써 기술-과학적 세력이 은밀하게 추진하는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기술-과학을 비난할 떄, 리오타르가 특히 지목하는 것은 인공지능인데, 이것은 지구와 지구의 자원에 대한 지배를 놓고 인간과 겨를 또 다른 진보된 생명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비인간적인 것과 함께 산다는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의지에 예속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만약 '비인간에 고유한 것'과 '인간에 고유한 것'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비인간적인 것의 본성은 모든 인간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리오타르가 자신의 포스트인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인간주의의 한 형태인 '비인간주의'를 몹시 염려하고, 그래서 후기 작업에서 되풀이해서 우리의 경계심을 일깨우는 이유이다. 컴퓨터가 더 효율적이 될수록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컴퓨터 작용에 의존하게 될수록, 우리는 컴퓨터의 지배자가 아니라 컴퓨터에 더욱더 종속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2000년부터 발생한 '밀레니엄 버그'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이 확장되는 것을 어디까지 내버려둘 것인가? 이 문제는 오늘날의 도덕적 딜레마임에 틀림없다.

 

4.2 비인간주의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인간주의

이러한 비인간주의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대한으로 리오타르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간주의를 제안한다.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간주의는 자연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이루려는 전통적인 인간주의의 특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인간주의는 공인된 문화규범에의 일치 여부가 관건이지만, 이 일치 여부는 오히려 인간적인 것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인간주의는 비인간성을 한 완고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극적인 측면과 관련된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비인간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은 다음 두가지 불가피한 물음으로 특징지어진다. 첫째로 만약 인간존재가 인간주의가 주장하는 대로 비인간화되는 과정에 있거나 그런 과정으로 들어가도록 강요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둘째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비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와 같이 리오타르는 비인간적인 것을 두가지 형태, 즉 겉으로 보기에 팽창과 기술혁신을 끝없이 욕망하는 선진자본주의라는 형태와, 전력을 다해 발전해가야 하는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이라는 형태로 놓고 본다. 그에 의하면,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따라서 항상 이미 달성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계쏙해서 상승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체의 의지에 인간을 굴복시키면서 비인간적 원리에 기반을 두는 문화를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리오타르는 발전의 음모에 집단적으로 저항하자고 호소하는데, 이러한 저항은 생산체계의 효율성보다는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반응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같이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 사회가 문제는 낳지만 그 해결책은 내놓을 수 없는 한계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갈등 당사자 간의 양립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구제의 출구가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리오타르의 후반기 사유의 주요한 특징을 이루는 멜랑콜리의 편린이다.

 

  1. 존재한다. 논중하다, 인식하다, 묘사하다, 설명하다, 질문하다, 명령하다등과 같은 것이 규칙체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