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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매체철학/blog.naver.com/czech_love

<발터 벤야민-기술복제에 의한 예술의 탈 아우라화와 정치화>

현대사회에선 매체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매체에 대한 연구는 현대인의 삶과 현대사회의 양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중 최초로 등장한 아날로그 매체는 대중문화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대중들이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 대중매체의 발달과 확산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고, 기대하는 시선도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매체를 통하여 똑같이 배우고 똑같이 생활을 하여 개성을 잃어버리고 하향평준화가 될 것이라 비판하였다. 반면 벤야민은 대중매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부정적인 입장의 경우 대중을 생각 없이 사는 수동적 존재라고 평가했는데, 벤야민은 대중을 잘못된 정보를 비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똑똑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중매체를 매개로 하여 소수의 상류층 엘리트들만이 누리던 문화, 예술, 지식에 대해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소수의 엘리트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은 매체철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현시대를 기술복제시대로 정의하고, 가장 큰 특징으로 '아우라의 몰락'을 지칭한다. '아우라의 몰락'에 따라 예술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의 지각을 변화했으며, 대중적 시각 이미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사회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미학이 현시대에 있어서 큰 쓸모는 없다고 보았으며, 사람들의 지각을 중심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탐구하였다. 또 그것이 전통예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사회와 대중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생각하였고, 그것을 '아우라'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1. 아우라(Aura)

그가 보기에 전통예술작품은 아우라가 있다. 전통예술작품은 권위를 갖고 있고, 종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복제시대에 이르자 전통예술작품은 이러한 아우라를 잃는다. 이를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 완성'이라고 표현하였고 대중매체의 특징으로 이해하고 규정지었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우라는 '예술품을 에워싸고 있는 고유의 고풍스럽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정의를 바로 위의 내용과 대조해보면 기술복제시대 이전의 작품들은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게 아니었고, 기술과 사회체제의 한계에 의해 고고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아우라에 대해 꼭집어서 서술한 적은 없지만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아우라는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객관적 특성'과 '수용대상으로서의 주관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근원은 종교적 기능이다. 즉 예술작품이 자체의 미적 특징으로서 즐김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대상으로서 숭배적 가치가 중시된 것이다. 그리고 전통예술작품은 당시 기술의 한계상 대량으로 생산하거나 복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숭배의 대상으로서 많은 수량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적 가치와 희소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예술작품에서 사람들은 귄위를 느꼈던 것이다. 벤야민은 이 물질적 특징이 전통예술작품의 본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파악한다. 즉 벤야민에 따르면 전통예술작품은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에가치는 창조성과 천재성이 아닌 종교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인 원본성·진품성·일품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특징에서 아우라가 발생하여 작품이 권위를 동반하는 신비한 분위기를 가지게 된것이다. 허나 아우라의 객관적 특성이 기반하는 물리적 속성은 수용자와 작품간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다. 아우라의 형성과 작품의 가치는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평가하느냐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데, 이는 아우라의 권위와 분위기는 그 종교적 의미와 희소성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신비감 등 주관적 경험에서도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은 기술복제시대에 이르러 사라지게 된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일회성과 유일성, 원본성, 즉 '객관적 속성'을 예술작품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수용자들은 예술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져 지각방식에 변화가 온것이다. 예술작품은 중교적 숭배의 대상이 아닌 심미적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특징을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유럽에 등장한 파시즘 체제는 사회의 전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민족영웅을 미화하고 전쟁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등 종래 예술의 징표였던 아우라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파시즘 미학의 경향을 벤야민은 '정치의 미학화'라고 일축했다. 그에 대립되는 자신의 미학적 경향성에 대해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고 하였다.

 

벤야민이 아우라의 개념을 설명하자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구도는 단순하게 심미적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가들과 예술의 사회적 특성을 강조하는 맑스주의자들의 대립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벤야민이 객관적 특성을 통해 예술작품을 단순화 시켰다고 비판하였고, 후자는 예술작품를 객관적으로 나타낸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들은 아우라의 몰락을 예술작품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켜주었고, 새로운 정치적 기능을 획득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2. 새로운 예술 형식에 대한 해석

다른 사상가들이 대중매체가 예술 영역에 가져다줄 부정적 기능 및 효과를 우려한 반면에, 벤야민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며 예술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체의 효과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되는지의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아우라의 몰락은 폐쇠적인 수용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각 작용의 시작이다. 따라서 과거의 기계적 재생산을 통해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공간적 제약을 해소시켜 폐쇄적인 예술의 판도를 뒤집어 놓아 아우라적 권리를 제거하고, 주체와 대상간의 평등한 관계를 성립하여 예술의 민주적 접근 가능성을 확대시켜 예술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 대중매체(사진·영화·광고)를 새로운 예술로 인정하며 새로운 매체의 활용성에 대해 관심을 높인 것이다.

 

이런 예술의 가치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새로운 매체는 사진이다. 벤야민은 사진을 기술의 발전 수준과 예술의 영역에서 사진의 역할에 따라 초기 사진과 후기 사진을 구분하였다. 의외점은 초기 사진의 경우 기계로 만들어 졌으며 원본의 의미가 없어지고 재생산 가능성이 생겼음에도 아우라가 존재했던 점이다. 왜냐면 초기 사진은 기계적이라고 한들 기술의 한계상 한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엄청난 시간이 들어갔기 때문이며, 묘사의 대상이 주로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초상화의 아우라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던 셈이다. 후기의 사진은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데 소모되는 시간이 보다 짧아졌으며, 이를 통해 사진 촬영의 대상이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상풍경, 건축물, 자연경관 등으로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락의 대상인 영화야 말로 소수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섞인 불특정 다수인 대중을 관객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아우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한 방이었는데, 영화는 인간의 지각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기존의 예술작품이 정적인 것에 반해 영화는 다양한 화면기법과 오버랩 등 색다른 효과와 함께 화면을 재구성하는 편집을 가능케 하는 동적인 매체이다. 이것은 현실의 논리적 시공간을 해체하며 다른 시공간에 대한 체험을 하게 해준다. 벤야민은 영화에서 기인한 새로운 지각 방식을 정신 오락적, 분산적 지각으로 파악한다. 기존의 예술을 대할 때는 정신을 집중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지만, 영화의 경우 마음을 분산시켜 이를 하나의 오락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을 집중하여 대하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비판을 할 수 없는 주체성이 부재한 상태가 된다고 하였다. 반면에 영화는 오락적, 분산적 지식으로 감상하기 때문에 즐기는 동시에 비판이 가능해 긍정적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벤야민이 대중을 단순히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수용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분산적 지각은 시각적 촉각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촉각이란 무언가를 신체적으로 느끼는건데, 분산적 지각은 이걸 시각적으로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적 촉각성은 광고를 통해 체험할 수 있다. 그에게 광고는 새로운 미학적 대상이며, 대중들은 광고를 통해 과거 예술에서 느꼈던 낯섦임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많은 경우 광고는 유심히 관찰하는게 아니라 스쳐보고 지나가는 것이다. 거리를 걸으며 제각각의 광고그림을 힐끗힐끗 보게 되면서 그것들이 시각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촉각적으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테어도어 아도르노-문화산업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대중매체를 폄하하는 대표이론으로 언급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이 그의 예술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 오해라고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어쨌건 이러한 논쟁이 꾸준히 일어난다는건 아도르노만큼 대중문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학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아도르노가 대중문화의 폭발적인 힘을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대중문화에 대한 폄하인가 아닌가' 라는 이분법적 입장에서 고찰하는 것보다는, 왜 그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지, 또는 어떠한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려고 했는지를 보는 것이 더 타당하고 중요한 고찰이다. 더 나아가 그의 문화산업론이 현재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도 좋은 탐구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산업론에 대한 비판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없다. 그가 어떤 관점에서 대중매체를 비판했던 간에 그것의 부정적 영향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체철학 초기 논쟁의 중심이었던 벤야민과 아도르노 모두 대중매체가 가져올 커다란 변화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자 모두 예술이 지니는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다만 벤야민이 대중의 측면에서 수용과 경험을 강조했다면, 아도르노는 생산 또는 제작의 측면에서 대중매체를 분석했다. 따라서 벤야민은 대중매체를 예술에 대한 민주적 접근을 강화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아도르노는 대중매체를 그것의 이면에 숨어있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예술과 문화를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전락하게 시키고 사람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철학자였던 아도르노는 '예술의 대중화'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 예술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그의 예술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이야말로 '관리되는 사회'(자본논리로 인해 억압되는 사회) 밖에서 사회전반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예술을 상품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거나, 상품을 마치 예술처럼 미학화하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탈예술화' 현상으로 보았다. 그에게 예술이란 상품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상품 또한 절대 예술의 탈을 쓰면 안된다 그의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그의 예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허나 아도르노가 예술 일반을 옹호하고 대중매체 일반을 비판했다고 생각하는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이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한 예술이란 바로 진리와 계기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가 예술에게 기대했던 진리 내용과 계기는 바로 '비판적 내용'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개념을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 비판적 내용은 예술이 처해 있는 당대 사회적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억압에 대한 비판이라는 진리 내용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작품이 자율적임과 동시에 사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근원적인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예술이 근원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양면성'이다. 먼저 예술은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예술은 외부 세계에 대해 자신을 폐쇠시키고 이와의 소통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사회와 완전히 무관하다면 어떻게 사회를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예술은 외부와 소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이자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예술작품의 기능 또한 노골적으로 수행되어서는 안된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비사회적 요인'과 '무기능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능하려면즉 '관리되는 사회'를 위한 그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는 무기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용성과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그 어떠한 유용성이나 효율성도 추구하지 않으며 이것을 추구하지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의 무기능성이야 말로 바로 예술이 수행해야하는 사회적 기능이자 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이때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기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외에는 어떠한 목적과 기능도 없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예술의 비사회적 요인이야 말로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야만 예술은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으며, 상품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의 기능은 바로 '기능 없음'에 있는 것이고, 이 '기능 없음'이야 말로 사회와 기능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능을 통해 예술은 기꺼이 사회에서 눈엣가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통해 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채,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외부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이며,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는 예술작품의 기능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2. 문화산업론

고로 아도르노는 대중매체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대중매체와 대중예술을 결코 문화와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고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날카롭고 본질적인 비판과 계기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은 '관리되는 사회' 체제를 굳건하게 하는데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활약을 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산업은 대중매체를 이용해서 예술을 '탈예술화'시킴과 동시에 상품화하기도 한다. 아도르노가 생각하기에 대중문화를 만들어 내는 대중매체는 극소수 독점자본 소유 아래 있으며, 이것을 소유한 독점자본가들은 단지 이윤 추구만을 위해서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예술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문화산업의 본질은 예술을 흉내 내는 것이며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악의적으로 예술을 왜곡함으로써 예술의 진지성을 해치는 것이다.

 

먼저 진정한 예술과는 달리 새로움이 배제된 문화산업은 그때그때 약간씩만 변형해서 등장할 뿐, 언제나 동일한 것을 재생산할 뿐이다. 즉 동일성과 규격화된 획일성이 문화산업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겉으로는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문화산업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비자를 현혹하고 기만하기 위한 차이만이 있을 뿐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동일성과 규격화만을 산출하는 문화산업은 말 그대로 유흥산업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의 본질은 단순한 즐김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망각하게 만들고, 이 망각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즐김으로의 도피, 그리고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문화산업이 만들어 내는 허위 욕구와 직접 연결된다. 아도르노는 대중이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비된다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산업의 본질은 대중의 요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들의 요구와 반응을 조작하며,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이 독점적이며, 그 독점의 지위가 확고해질수록 대중에 대한 기만은 더욱 견고해진다.1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의 횡포를 찾아볼 수 있는 예시로 음악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음악은 당연히 예술의 옷을 입고 있는 유흥이자 오락에 불과하다. 음악은 청취자들의 정신을 오락적으로 분산시킨다. 여기서 청취자는 퇴행하는데, 그들은 동일한 것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유아들 처럼 같은 장르의 음악만을 수용하는걸 고집한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들었을 때 대다수의 청취자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비단 음악 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문화가 그 특유의 동일성과 규격화 때문에 같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이런 총체적인 유아기적 단계에서 벗어나기가 극히 힘들다.

그렇다면 문화산업은 왜 오락을 예술로 포장하고 사람들의 문화적 소양을 퇴행시키는가? 단순히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서인가? 물론 상업적 요인도 아주 큰 원동력이긴 하지만 아도르노가 가장 비판하는 문화산업의 원동력 겸 결과는 '비판의식의 실종'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실종시키기 위해서 고통의 일시적 완화제를 공급한다. 대중들은 여가시간 마저도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맡겨 버림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에서 가질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삶에 대한 성찰을 방기한 채, 문화산업의 산물들을 그저 즐기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또 문화산업은 말도 안되는 환상을 만들어 내어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며, 그들이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예컨대 현대판 신데렐라를 주인공하는 로맨스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저항의 싹을 없애기 위해 하나의 환상을 제공해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이에 환호하고 열광하며, 이를 꿈꾼다. 심지어 고학력자이며 스스로 사고할줄 아는 지식인들도 대중문화를 즐긴다. 왜 그럴까? 이런 비이론적인 현실적 상황에서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가 발생한다.

3. 문화산업론의 의의와 비판

대중문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입장은 대중문화로 인해 예술과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이 없어지고 또 이것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매체가 가지고 온 효과는 '교양의 상실'과 '야만적인 무질서의 증가'일 뿐이다. 즉 예전에는 대중이 접근할 수 없었던 예술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듯 하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조작들을 통해 문화산업은 욕구를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며, 또 욕구자체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문화산업을 수용하는 수용자 주체의 퇴행과 해체를 가져온다. 그리고 개인의 퇴행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자신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즉 문화산업으로 인해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야만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문화적, 또는 예술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며, 비단 경제적 목적의 이윤추구말고도 '관리되는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교모히 은폐하여 이를 조작하기도 한다. 바로 이점이 문화산업론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매체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아도르노 매체이론의 핵심은 '조작'이다. 즉 '관리되는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선동성과 조작성을 단순히 절대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매체의 이러한 특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요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체는 그 사용에 따라 억압적인 것이 될 수도, 해방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매체의 영향력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그 여지를 두지 않은 점이 가장 큰 한계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전복적이며 해방적인 계기를 놓치고 말핬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수용자들의 능동적 수용 행위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다. 즉 대중을 주체적 활동이 배제된 존재로 본 것이다. 결국 아도르노는 대중매체에서 대안적 미학의 기능성을 보지 않았으며 관심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가 도출된 이유는 아도르노가 수용자의 관점에서 매체를 분석하기보다는 대중매체를 생산하는 독점자본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했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 수용자들에게는 문화적 퇴행만이 있다고 보았지만, 현실적인 사례를 볼때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많은 대중들은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했으며, 대중매체에서 대안적이며 해방적인 계기를 추구하였다. 예컨대 기존 문화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서 대중문화가 그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에서 명백한 비판점이 보인다고 한들 그의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는건 어불성설이다. 여전히 그가 비판했던 문화의 지나친 상업화와 질적 저하를 유발하는 대중문화 현상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이런 예시는 현대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한국사회에선 대부분의 영화관이 재벌기업의 소유에 있기 때문에, 재벌기업의 영화사가 제작한 특정영화만 계속해서 스크린에서 상영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독립영화나 비주류영화의 상영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거나, 극히 드물게 상영할 뿐이다. 영화를 보는데 선택권이 극히 제한되는 것이다

     

<귄터 안더스-문화종말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대중매체를 폄하하는 대표이론으로 언급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이 그의 예술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 오해라고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어쨌건 이러한 논쟁이 꾸준히 일어난다는건 아도르노만큼 대중문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학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아도르노가 대중문화의 폭발적인 힘을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대중문화에 대한 폄하인가 아닌가' 라는 이분법적 입장에서 고찰하는 것보다는, 왜 그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지, 또는 어떠한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려고 했는지를 보는 것이 더 타당하고 중요한 고찰이다. 더 나아가 그의 문화산업론이 현재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도 좋은 탐구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산업론에 대한 비판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없다. 그가 어떤 관점에서 대중매체를 비판했던 간에 그것의 부정적 영향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체철학 초기 논쟁의 중심이었던 벤야민과 아도르노 모두 대중매체가 가져올 커다란 변화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자 모두 예술이 지니는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다만 벤야민이 대중의 측면에서 수용과 경험을 강조했다면, 아도르노는 생산 또는 제작의 측면에서 대중매체를 분석했다. 따라서 벤야민은 대중매체를 예술에 대한 민주적 접근을 강화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아도르노는 대중매체를 그것의 이면에 숨어있는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 예술과 문화를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전락하게 시키고 사람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철학자였던 아도르노는 '예술의 대중화'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 예술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그의 예술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이야말로 '관리되는 사회'(자본논리로 인해 억압되는 사회) 밖에서 사회전반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예술을 상품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거나, 상품을 마치 예술처럼 미학화하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탈예술화' 현상으로 보았다. 그에게 예술이란 상품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상품 또한 절대 예술의 탈을 쓰면 안된다 그의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그의 예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허나 아도르노가 예술 일반을 옹호하고 대중매체 일반을 비판했다고 생각하는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이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한 예술이란 바로 진리와 계기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가 예술에게 기대했던 진리 내용과 계기는 바로 '비판적 내용'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개념을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 비판적 내용은 예술이 처해 있는 당대 사회적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억압에 대한 비판이라는 진리 내용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작품이 자율적임과 동시에 사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근원적인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예술이 근원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양면성'이다. 먼저 예술은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예술은 외부 세계에 대해 자신을 폐쇠시키고 이와의 소통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사회와 완전히 무관하다면 어떻게 사회를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예술은 외부와 소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이자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예술작품의 기능 또한 노골적으로 수행되어서는 안된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비사회적 요인'과 '무기능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능하려면즉 '관리되는 사회'를 위한 그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는 무기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용성과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그 어떠한 유용성이나 효율성도 추구하지 않으며 이것을 추구하지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의 무기능성이야 말로 바로 예술이 수행해야하는 사회적 기능이자 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이때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기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외에는 어떠한 목적과 기능도 없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예술의 비사회적 요인이야 말로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야만 예술은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으며, 상품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의 기능은 바로 '기능 없음'에 있는 것이고, 이 '기능 없음'이야 말로 사회와 기능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능을 통해 예술은 기꺼이 사회에서 눈엣가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통해 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채,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외부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이며,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는 예술작품의 기능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2. 문화산업론

고로 아도르노는 대중매체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대중매체와 대중예술을 결코 문화와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고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은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날카롭고 본질적인 비판과 계기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은 '관리되는 사회' 체제를 굳건하게 하는데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활약을 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산업은 대중매체를 이용해서 예술을 '탈예술화'시킴과 동시에 상품화하기도 한다. 아도르노가 생각하기에 대중문화를 만들어 내는 대중매체는 극소수 독점자본 소유 아래 있으며, 이것을 소유한 독점자본가들은 단지 이윤 추구만을 위해서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문화와 예술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문화산업의 본질은 예술을 흉내 내는 것이며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악의적으로 예술을 왜곡함으로써 예술의 진지성을 해치는 것이다.

 

먼저 진정한 예술과는 달리 새로움이 배제된 문화산업은 그때그때 약간씩만 변형해서 등장할 뿐, 언제나 동일한 것을 재생산할 뿐이다. 즉 동일성과 규격화된 획일성이 문화산업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겉으로는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문화산업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비자를 현혹하고 기만하기 위한 차이만이 있을 뿐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동일성과 규격화만을 산출하는 문화산업은 말 그대로 유흥산업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의 본질은 단순한 즐김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망각하게 만들고, 이 망각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즐김으로의 도피, 그리고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문화산업이 만들어 내는 허위 욕구와 직접 연결된다. 아도르노는 대중이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비된다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산업의 본질은 대중의 요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들의 요구와 반응을 조작하며,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이 독점적이며, 그 독점의 지위가 확고해질수록 대중에 대한 기만은 더욱 견고해진다.1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의 횡포를 찾아볼 수 있는 예시로 음악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음악은 당연히 예술의 옷을 입고 있는 유흥이자 오락에 불과하다. 음악은 청취자들의 정신을 오락적으로 분산시킨다. 여기서 청취자는 퇴행하는데, 그들은 동일한 것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유아들 처럼 같은 장르의 음악만을 수용하는걸 고집한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들었을 때 대다수의 청취자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비단 음악 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문화가 그 특유의 동일성과 규격화 때문에 같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이런 총체적인 유아기적 단계에서 벗어나기가 극히 힘들다.

그렇다면 문화산업은 왜 오락을 예술로 포장하고 사람들의 문화적 소양을 퇴행시키는가? 단순히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서인가? 물론 상업적 요인도 아주 큰 원동력이긴 하지만 아도르노가 가장 비판하는 문화산업의 원동력 겸 결과는 '비판의식의 실종'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실종시키기 위해서 고통의 일시적 완화제를 공급한다. 대중들은 여가시간 마저도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맡겨 버림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에서 가질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삶에 대한 성찰을 방기한 채, 문화산업의 산물들을 그저 즐기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또 문화산업은 말도 안되는 환상을 만들어 내어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며, 그들이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예컨대 현대판 신데렐라를 주인공하는 로맨스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저항의 싹을 없애기 위해 하나의 환상을 제공해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이에 환호하고 열광하며, 이를 꿈꾼다. 심지어 고학력자이며 스스로 사고할줄 아는 지식인들도 대중문화를 즐긴다. 왜 그럴까? 이런 비이론적인 현실적 상황에서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가 발생한다.

3. 문화산업론의 의의와 비판

대중문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입장은 대중문화로 인해 예술과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이 없어지고 또 이것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매체가 가지고 온 효과는 '교양의 상실'과 '야만적인 무질서의 증가'일 뿐이다. 즉 예전에는 대중이 접근할 수 없었던 예술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듯 하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조작들을 통해 문화산업은 욕구를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며, 또 욕구자체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문화산업을 수용하는 수용자 주체의 퇴행과 해체를 가져온다. 그리고 개인의 퇴행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자신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즉 문화산업으로 인해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야만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문화적, 또는 예술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며, 비단 경제적 목적의 이윤추구말고도 '관리되는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교모히 은폐하여 이를 조작하기도 한다. 바로 이점이 문화산업론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매체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아도르노 매체이론의 핵심은 '조작'이다. 즉 '관리되는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선동성과 조작성을 단순히 절대적인 부정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매체의 이러한 특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요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체는 그 사용에 따라 억압적인 것이 될 수도, 해방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매체의 영향력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그 여지를 두지 않은 점이 가장 큰 한계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전복적이며 해방적인 계기를 놓치고 말핬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수용자들의 능동적 수용 행위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다. 즉 대중을 주체적 활동이 배제된 존재로 본 것이다. 결국 아도르노는 대중매체에서 대안적 미학의 기능성을 보지 않았으며 관심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가 도출된 이유는 아도르노가 수용자의 관점에서 매체를 분석하기보다는 대중매체를 생산하는 독점자본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했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 수용자들에게는 문화적 퇴행만이 있다고 보았지만, 현실적인 사례를 볼때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많은 대중들은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했으며, 대중매체에서 대안적이며 해방적인 계기를 추구하였다. 예컨대 기존 문화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서 대중문화가 그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에서 명백한 비판점이 보인다고 한들 그의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는건 어불성설이다. 여전히 그가 비판했던 문화의 지나친 상업화와 질적 저하를 유발하는 대중문화 현상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이런 예시는 현대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한국사회에선 대부분의 영화관이 재벌기업의 소유에 있기 때문에, 재벌기업의 영화사가 제작한 특정영화만 계속해서 스크린에서 상영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독립영화나 비주류영화의 상영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거나, 극히 드물게 상영할 뿐이다. 영화를 보는데 선택권이 극히 제한되는 것이다

     

<마샬맥루헌:매체에의 인간의 확장과 매체의 형식-미디어는 메세지다>

마셜 맥루언은 매체철학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인물로, 전자 매체에 관한 논쟁은 맥루언으로 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존의 인쇄문화와 새로운 매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맥루언의 이론에 대해서는 극단적 평가가 오가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매체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맥루언은 매체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고찰하기보다는 인간에게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능으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면 그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전자 매체의 등장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으로서 '인간의 확장'이며, 인간 감각을 보충하고 확대하여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더 높이 도약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맥루언은 매체와 인간 감각의 관계를 고찰 했는데, 이 관계에서 특히 맥루언이 주목한 것은 과거의 인간들은 다양한 기술과 매체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오감 중 어떤 하나만의 감정을 확장시킴으로써, 그 외에 다른 감각이나 기능을 억압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의 감각만이 확장되거나 구체화된다면, 결국 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각 능력에 문제를 야기하리라는 것이 바로 맥루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인쇄문화가 이러한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다양한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 들어서 비로소 매체가 더이상 특정 지배적 감각을 중심으로한 폐쇠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는게 아니라 다양한 감각이 서로 상호작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맥루언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문화가 하나의 감각 중심으로 편향적인 감각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오감이 서로 공감각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열린 감각 체계였다.

 

그리고 매체가 곧 인간의 확장이라면, 그것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시각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1차적으로 중요한건 '시각 그 자체' 이지 시각의 대상이 아니다. 이처럼 매체또한 원론적으로 따지면 텔레비전이냐 컴퓨터냐 라디오냐 하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지, 거기서 애니메이션이 나오든 드라마가 나오든 그 내용은 원론적으로 형식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즉 맥루언은 매체를 ‘새로운 지각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1. 매체형식을 중심으로한 역사관
앞서 말했듯이 맥루언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매체는 인간의 인식, 행위, 그리고 사유방식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도구를 넘어선 인간의 확장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매체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맥루언의 이론에서 영원한 매체는 없는데(이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의 역사는 매체와 기술의 발전을 중심으로 구술이 중심인 부족문화, 문자를 중심으로한 필사문화, 인쇄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구텐베르크 인쇄문화, 그리고 현대의 전기 시대 4단계로 분류했다. 이렇게 매체와 기술을 중심으로한 역사 분류 방식은 사회체제나 경제 또는 문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분류한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어떻게 보면 기존의 역사분류보다 더 명확하게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지배적인 매체가 등장하면, 단순히 매체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예술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변혁이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기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전자 매체를 분석하는 그의 매체 이론은 바로 구텐베르크 인쇄문화가 발전시킨 책 중심 문화에 대한 종말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인쇄 문화 또는 책 문화의 특징은 무엇이며, 도대체 왜 전기 시대에 와서 몰락하게 된것인가?

 

인쇄, 더 나아가 인쇄가 형성한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문화를 맥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라고 칭하는데, 맥루언에 따르면 전기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맥루언은 과거의 인쇄 문화를 비판적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무엇보다도 '감각들의 상호작용'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맥루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이 오감을 이용해서 외부 세계를 지각하고, 이과정에서 오감이 상호의존하는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바로 이지점에서 맥루언은 매체 형식을 중심으로 매체와 감각을 연결시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그에 따르면 인쇄 문화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현상을 억압한다. 그는 구텐베르크 인쇄 기술이 낳은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가 "시각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감각들을 서로 떼어 놓고, 상호작용하는 것에 간섭하여 방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각 중심으로 형성된 인쇄문화는 전기로 인한 다양한 매체들의 발명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 한다. 다시 말해 매체로 인한 인간의 확장, 즉 인간 감각의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즉 그는 이전의 매체 시대들에서 하나의 감각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이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들을 억압했던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전기 시대에는 다른 양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기 시대의 새로운 양상에서 그는 다음의 두 현상에 주목했다.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새로운 현상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등장했는데, 바로 이것들이 구어적인 것에 바탕을 둠으로써 탈문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하나의 감각기관에만 호소하던 매체들이 전기 시대에 와서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그는 "인간의 확장된 감각이 집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에 주목했다.

2. 매체 형식과 매체 내용
앞서 강조했듯이 맥루언은 매체 내용이 아니라 매체 형식에 주목한다. 그리고 동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매체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던 것에 대해 그는 매체 내용을 중심으로 매체를 연구한다는 것은 다 틀린 것이라는 식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연구의 기본 전제를 전환해서 매체 형식을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루언은 매체를 사람들의 경험·사유방식·인간관계 등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즉 매체는 단순한 도구나 기술 이상으로, 인간의 삶을 환경 같은 것이므로 인간의 확장 인것이다. 따라서 그는 매체들이 매개하고 전달하는 '내용'이 중요하는 게 아니라, 바로 매체 그 자체의 형식과 논리를 다루면서 그 매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 즉 '매체 자체의 매개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인간이 어떤 매체들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따라 매체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일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이메일·전화·문자 등을 이용할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데, 예컨대 문자를 사용할때는 거칠게 말하는 사람이 전화를 할때는 상냥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 때문에 매체 내용이 아니라 매체 형식을 중심으로 매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내용을 중심으로 매체를 연구했을 경우에는, 매체 본성을 아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매체는 메세지이다"라는 말로 집약 된다. 즉 매체의 형식으로 인해 내용(메세지)이 규정된다는 것이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중심으로 매체를 파악한다는 것, 즉 매체 내용이 형식에 의해 규정되므로 결국 매체 내용이 매체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맥루언은 새로운 매체에서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 것들이 낡은 매체의 형식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문자라는 새로운 매체가 담고 있는 내용은 결국 문자 이전의 음성 언어이다. 또 언어라는 매체는 비언어적 매체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낡은 매체의 형식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매체의 내용으로 재등장한다. 여기서 낡은 매체의 형식이 아니라, 결국 낡은 매체 내용이 새로운 매체의 내용으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매체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작용한다는데 있다. 즉 새로운 매체 형식이 등장한다고 해서 낡은 매체 형식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낡은 매체의 형식이 새로운 매체의 형식으로 재등장하기도 한다. 또는 반대로 낡은 매체가 새로운 매체 형식을 받아들여 변형된 매체 형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매체형식이 곧 내용이기 때문에, 그에게 매체이론은 매체 형식에 대한 이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매우 모호하다. 이렇게 보듯이 그는 형식을 중심으로 한 매체 연구에서 매체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뜨거운 매체'와 '차가운 매체'의 분류라는 적합한 예들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3. 매체에 대한 인식론적 분류 : 뜨거운 매체와 차가운 매체
매체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다는 기본 전제 아래, 맥루언은 매체를 일종의 인식론적 분류로서 뜨거운 매체와 차가운 매체로 나눈다. 매체 형식이 우리의 사유 과정과 사유 범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틀이 사유 내용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 그 자체가 사유 형식과 사유 내용을 규정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타당하다. 예컨대 글을 쓸때 있어서 원고지·타자기·컴퓨터 등 다양한 매체 중에서 무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글의 내용에는 너무나 명확한 차이가 생긴다. 사실 맥루언 선대의 많은 철학자, 예컨대 하이데거같은 경우에도 새로운 글쓰기 매체가 글 내용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었다. 그러나 맥루언은 이러한 관계를 단지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않고, 구체적으로 매체 형식을 매체가 가지고 있는 정보량과 이를 수용하는 인식론적인 태도와 연결해서 분석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야기하는 뜨거운 매체와 차가운 매체의 분류이다. 그렇다면 어떤 매체가 뜨거운 매체이고, 또 어떤 매체가 차가운 매체인가? 맥루언의 분류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의 결정적 기준은 그 매체의 정세도이다. 정세도란 '인간의 지배적인 단일 감각'이 매체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을 의미한다. 맥루언은 뜨거운 매체를 "높은 정세도의 매체"라고 설명한다. 이와 반대로 차가운 매체는 "낮은 정세도의 매체"라 설명한다. 그리고 단일 감각에 호소하는 정보의 양인 정세도는 매체 사용자가 그 매체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를 결정한다. 따라서 뜨거운 매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세도가 높기 때문에 참여도가 낮아질 수 밖에 없으므로 배타적인 매체로 작용한다. 이와 반대로 차가운 매체는 포괄적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라디오는 전달하는 청각 정보의 양이 매우 많다. 즉 높은 정세도를 지니기 때문에 수용자는 그저 듣기만 하면된다. 반대로 전화는 청각 정보의 양이 적다. 즉 전화는 낮은 정세도를 지닌다. 따라서 전화라는 매체를 활용하는 사람들은 비단 듣기만 할 뿐 아니라 자신또한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둥 매체에 적극 참여해서 낮은 정세도의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리고 뜨거운 매체와 차가운 매체의 차이는 상대적 개념이지 절대적으로 고정불변하는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진과 만화를 비교했을때, 사진은 뜨거운 매체이고 만화는 차가운 매체가 된다. 이는 사진이 만화보다 높은 정세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는 비구상 회화보다는 높은 정세도를 가진다. 이런경우에 만화가 뜨거운 매체가 되며, 비구상 회화는 차가운 매체가 된다. 또 매체적 상황이 상이한 문화권을 비교했을 때, 특정 매체의 작용또한 달라질 수 있다. 라디오가 일반적인 문화에서는 전화가 차가운 매체가 되지만, 라디오가 일반적이지 않은 문화에서는 전화가 뜨거운 매체가 된다. 즉 뜨거움과 차가움은 상대적 개념으로서 매체 상황과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매체가 가지고 잇는 상호작용성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맥루언이 강조했듯이 그 어떤 매체도 단독으로 그 의미와 작용을 갖지는 않는다. 하나의 매체는 다른 매체와 상호작용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며, 자신의 작용을 명확히 한다.

 

최종적으로 어떤 매체가 단일 감각에 의존하고 단일 감각의 힘을 극단적으로 키우게 되면, 이와 동시에 다른 감각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매체는 뜨거움의 정점에까지 발전하지만, 그 정점에서 차가운 매체로 전환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맥루언 이론에 따르면 시각이라는 단일 감각에 호소하는, 그리고 정세도가 높기 때문에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 뜨거운 인쇄문화는 전기 시대에 들어서 다른 차가운 전자 매체에 의해서 결국 몰락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매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매체와 기억, 그리고 의식적 기록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기록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인간의 기억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두뇌는 기억할 수 있는 정보량만 머리에 담아두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중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또한 있는데, 이런 것들은 어떠한 계기를 통해 갑자기 드러나기도 한다. 키틀러에 따르면 기록은 기억의 능력을 잠식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대치적 관계에 있다.1 따라서 인간의 기억을 반영구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이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는 매체는 인간의 기억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매체를 사용할때 인간은 의식적으로 행동하므로,'무의식적 기억'은 엄밀히 하자면 매체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체의 기록에는 의도적 편집 외에도 기록하지 않고자 했는데도 쓰여진 무의식적인 흔적이 있을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키틀러는 매체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1. 19세기의 문자기록체계

키틀러는 매체가 그 시대의 기록체계를 규정하며 나아가 그 시대의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세기의 기록체계에 대한 분석을 어머니, 즉 여성에서 시작한다. 왜냐면 그가 문자로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기록하는 수단으로서의 문자체계 그 자체를 탐구하고자 하는 동시에 성립과 근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키틀러가 주목한 것은 18세기 당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쓰기를 수행하지 못했던 여성이 '쓰기 영역'에서 수행하는 기능이었다. 키틀러가 보기에 여성의 입은 19세기 기록체계의 근원이며, 결국 사회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당시 여성은 쓰기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어를 통해 쓰기의 주체가 되었던 남성의 교육을 담당했다. 어머니의 입이 매체가 되어 기록체계의 내용들을 전달했기 때문에, 구어로 교육을 받은 독자들은 그저 정보를 전달받기만 한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어머니의 무의식적인 의도또한 전달받은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독자들이 나중에 성장한 후 쓰기를 통해 기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 기록하는 주체는 아니더라도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19세기의 기록체계는 1900년경이 되어 기술매체들의 등장으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2. 20세기의 기록체계1: 축음기와 실재계

키틀러는 20세기의 기록체계를 분석할 때 타자기 이외의 축음기와 영화 또한 중요한 기록매체로 분석하는데, 20세기의 기록체계가 단지 문자체계의 청산이 아닌 소리와 이미지라는 다른 기록 매체와도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문자가 가지고 있는 독점적인 기록체계가 붕괴하여 이제 기록하는 것은 문자만이 아니다.

 

축음기는 소리를 저장,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록매체이다. 키틀러는 소리를 기록함으로써 기억매체로 작용하는 축음기의 의미를 무의식과 연결해서 라깡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키틀러는 라캉의 실재계2를 축음기와 연결한다. 그는 소리를 의식으로, 소음을 무의식으로 비유하는데, 소리는 존재감이 뚜렷한 반면 소음은 그 존재를 부정당함으로써 존재한다. 따라서 일회적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악보체계로 기록했던 기존에는 선별된 소리들만이 의식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즉 소음은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소리와 소음의 구별하지 않고 모두 물리적 파동으로서 기록하는 축음기가 등장한 후 이러한 소음이 실재의 흔적으로 작용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축음기에 의해 기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3. 20세기의 기록체계2: 영화와 상상계

축음기가 소리와 소음을 구별하지 않은 채 이 둘 모두를 기록하고 재생함으로써 실재계의 영역에 들어섰다면, 영화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3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키틀러는 영화와 상상계가 이미지를 전제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을 연결시켰다. 축음기와 영화 모두 기술적인 기록매체임에도, 축음기는 실재계에 영화는 상상계에 연결시킨 이유는 초기 영화의 기술적 한계와 근본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물리적 파동 그 자체를 기록하기보다는 화학적 효과를 통해 이미지를 필름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실재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의 운동이 분절된 채 하나의 장면들이 기록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절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영화는 기본적으로 편집을 전제로 한다. 영화에서 실제는 분쇄되고 절단되기 때문에 축음기와 달리 실재와 연결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상상계가 거울이미지로 투사된 현실과 연결된다면, 영화는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로 현실을 드러낸다. 상상계에서 주체는 거울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영화의 관객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주인공과 자신을 종종 동일시하며, 영화속 이야기를 현실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동일화의 특징은 동일화될 수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틈을 인식하지 못하고 동일화한다는 데 있다. 또한 키틀러는 영화 이미지의 표현 방식이 결국 꿈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꿈을 통해 우리의 내적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보았다. 즉 축음기가 소리와 소음을 구별하지 않은 채 기록함으로써 실재를 드러냈다면, 영화는 자신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내적인 이미지, 즉 무의식의 이미지를 환영의 형태로 온전히 스크린에 드러내는 것이다.

 

4. 20세기의 기록체계3: 타자기와 상징계

마지막으로 타자기는 상징계4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언어의 개념체계인 상징계는 기록매체들이 등장하기 이전 낭만주의, 즉 19세기 문화의 특징이다. 글을 쓰는 주체와 정신이 지배하던 글쓰기시대는 바로 이러한 상징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계도 타자기의 등장 이후 타자기로 대체된다. 키틀러에 따르면 글을 쓰는 매체가 바뀌면 글의 내용과 이를 구상하는 사유의 형식도 바뀐다. 원고지에 글을 쓸 때에는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글을 쓰기 전에 치밀한 구성을 한다면, 타자기로 글을 쓸 때에는 수정이 쉽기 때문에 씀과 동시에 구상하기도 하며, 컴퓨터의 경우 오리기와 붙이기 등을 통해 일종의 콜라주적 글쓰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키틀러가 기계적 글쓰기의 등장에 주목한 것도 바로 글쓰는 주체와 사유의 변화에 있는데, 그는 기계적 글쓰기로 인해 주체와 정신이 해체되고 글쓰는 개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이와 동시에 남성중심의 글 쓰는 주체도 해체되고, 글쓰기에서 배제된 여성의 등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여성은 입으로 전달하는 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기라는 기계 앞에서 문자를 기록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 시대에 교육을 담당하고, 글을 쓰는 남성들에게 정신적 영향만을 주던 여성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자와 관계 맺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남성중심의 문화와 남성의 권력, 권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5. 디지털 매체시대의 의식 문제

키틀러가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인 매체로 분류한 축음기, 영화, 타자기는 모두 기록매체들이다. 그는 이러한 기록매체들이 무엇을 기록하는가와 더불어, 기록매체에 의해 기록되면 그 내용들이 어떻게 변화하며,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축음기는 소리를, 영화는 이미지를, 타자기는 사유를 기록함으로써, 기록체계와 우리의 사유방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고 컴퓨터로 대표되는 디지털 매체 시대는 아날로그 매체 시대와는 다른 기록체계를 보인다. 이제는 소리와 이미지 그리고 사유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매체에 의해 통합적으로 기록된다. 기록뿐만 아니라 전송도 가능하며, 이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매체 안에서 함께 작용한다.

 

다양한 기록매체가 컴퓨터라는 복합매체에 통합된 디지털 매체 시대에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과 관련된 기억이 중점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기억 능력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 시대에 기억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증상중 하나가 '디지털 치매'이다. 말 그대로 디지털 매체 시대에 다양한 매체들로 인하여 인간에게 새롭게 나타난 기억능력의 쇠퇴이다. 플라톤이 일찍이 문자의 등장과 더불어 우려했던 인간의 기억능력의 쇠퇴와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의 소멸이 진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빨리 기억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빨리 찾아내는 능력이다. '기억'대신 '자료찾기', 그리고 '사유'대신 '자료 내려받기'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그렇기에 디지털 시대의 사유방식도 이제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볼 때가 온 것이다.

 

  1.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문자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머릿속에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문자로 기록하려고만 할 것이며, 그 결과 사람들의 기억 능력은 퇴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2. 라캉에게 실재란, 상상계의 거울이 보여주지 못하고, 또 상징계의 틀이 이를 잡아낼 수 없는 나머지나 찌꺼기다. 즉, "사유의 그물에 잡히지는 않지만 의식 외부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존재의 질서"다. 그리고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이 의식 외부에 존재하지만 파악될 수 없는 것과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어 있다. 의식의 그늘에서 벗어나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듯하게 있는 무의식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 어떤 계기에 의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라캉식으로 이야기하면 억압된 '실재와의 만남'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무의식이 지배하는 실재계를 불러내기도 한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을 대화를 통해 불러내는 것이다. 환자가 정신분석의를 찾아와 아무런 맥락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스스로 하게 만들며, 이 이야기 속에서 환자는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게 된다.
  3. 라캉은 상상계를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의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단계라고 설명한다. 거울은 대상, 즉 어린아이를 이미지로 투사하고 아이는 주체로서 거울에 투사된 이미지를 본다. 거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주체가 시각세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캉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 거울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거울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지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어린아이는 거울 이미지아 자기 자신, 더 나아가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라캉은 바로 여기서 주체의 정신세계와 주변세계의 한계를 보았다. 이때의 이미지는 주체의 정신세계와 주변세계 간에 존재하는 일종의 관계다. 그런데 주체의 정신세계와 현실인 주변세계 상에는 일종의 틈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틈을 중개할 수 있는 주체가 상상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떄문에 라캉은 상상계에서의 주체가 파편화된 신체로서 분열된 자아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4. 라캉의 상징계란 "언어, 개념체계, 그리고 이것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 문화적 규율"을 의미한다. 상징계와 달리 실재계와 상상계에서는 주체 이외의 타자나 문화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상징계가 지배적인 문화와 의식의 세계라면, 실재계와 상상계는 상징계에 편입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다. 실재계와 상상계는 무의식과 관계하며, 실제계는 상징계에 편입하지 못했지만 잔여물로 존재하는 세계다. 반면 상상계는 무의식이긴 하지만 꿈과 내적인 이미지라는 형태로 분열한다. 상상계에서는 분열된 자아가 등장하며, 이 분열된 자아는 대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환영을 갖게 된다. 이 두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로, 타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상징계는 언어와 개념체계를 기본으로 형성되머, 언어와 개념체계가 의미하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책상이라 칭하기로 약속했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약속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책상을 책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상징계는 기본적으로 체계와 질서들에 존재하는 차이에 근거한다. 우리가 무엇을 A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B라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 영역에서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차이의 작업을 통해 규정된 것이다. 책상은 의자와 다른 것이며, 그렇기에 동일화될 수 없다. 의자와 책상을 구별해서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타인과 약속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약속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한 약속이 성립된 사회에 태어났다면, 이미 그 사회의 언어적 질서 체계에 편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문화적 규율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쟝 보드리야르-시물라시옹시대의 실재와 가상>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자연적 욕구는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빈곤지역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이러한 자연적 욕구는 기본적으로 충족할만한 제반환경이 마련된 오늘날, 아마도 인간의 욕구는 자연적 욕구에만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의 원동력이 경제라는 점, 그리고 경제라는 것의 제1목적이 인간의 필요, 즉 욕구를 충족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자연적 욕구를 넘어선 새로운 욕구가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면, 전통사회의 경제적 원동력은 생산과 노동이었다. 즉 경제적 산물인 상품을 보는 초점이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통사회에서 의류를 구매하는 경우, (이미 사치문화를 누렸던 최상류층은 제외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몸을 가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적인 의류의 본질, 즉 사용가치만을 고려할 것이다. 이러한 사용가치 중심적 사고는 선술했다시피 자연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다. 반면 보드리야르는 이를 넘어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점에서, 옷을 살때 물리적 편의성보다는 어떤 브랜드인지, 어떤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케팅을 했는지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보드리야르는 상품의 광고나 브랜드에 새겨진 기호인 상징가치에 초점을 맞추며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욕구를 소비의 욕구로, 경제적 원동력을 상징가치의 소비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경제적 발전에 의해서만 설명할수는 없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경제를 이미지의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 들어서 가상과 본질 사이의 간격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생산, 유통 그리고 수용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사물은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존재론적 변혁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원래 이미지란 현상적인 것으로, 본질인 실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얼마나 본질과 참된 관계를 맺느냐에 국한되었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일뿐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여겨졌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이미지는 실재를 넘어서서 본질이 되기도 한다. 혹은 아예 실재가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희한한 상황까지 연출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에 들어서는 개인이 보고 체험하는 이미지 그 자체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상품의 이미지들이 실질적으로 상품들의 사회적 위치나 지위를 형성하고 소비를 하게끔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코카콜라의 음료로서의 기능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가지는 기호화된 젊음이나, 아이폰의 통신기기로서의 기능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호화된 인간성같은 감성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점에서 소비사회에서 소비의 이유를 기호라고 답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사물의 존재나 개인의 존재 마저도 기호의 질서 안에서 흡수되고 소멸된다고 말하는데, 이런 상황을 그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규정한다.

 

1. 시뮬라크르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이미지가 어떻게 그것의 실재를 떠나서 스스로 존립하는지, 즉 이미지가 시뮬라크르로 발전하는 과정을 세단계로 분류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최초의 이미지는 실재를 반영하는 모사의 질서(미메시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까지의 전통적인 이미지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두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실재를 그대로 재현하는 미메시스적 단계에서 벗어나 실재를 감추고 왜곡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서는 왜곡되기 전의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산업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즉 기술재생산시대의 지배적인 이미지가 여기에 속한다. 예컨대 사진은 원본이 되는 사물 자체는 없어도 대신하여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 사물의 실체를 다 드러내지 않고 일정요소만 반영함으로써 실상을 왜곡할 수 있다. 어떤 배우의 화보집은 그 배우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도록 대신하여 그 배우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그 배우의 진면목을 다 드러내지 않고 사진에 찍힌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배우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둥 다른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이 배우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진에서 느껴지는 인상만으로도 호감을 느낀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이미지가 사물을 대신하는 동안 사물 자체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이미지만 의식하는 것이다. 사실 이 단계만 해도 어느정도 시뮬라크르적 성격이 있긴 하지만 아직 이미지와 실재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이미지는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림으로써, 시뮬라크르(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 처럼 만들어진 이미지)로 각성한다. 보드리야르가 본격적으로 지적하는 지점또한 바로 이 마지막 단계이다. 이미지는 이제 사물 자체와 상관없이 스스로 무엇인가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배우의 이런 저런 사진과 인터뷰 따위가 그 배우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 배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뒤로는 배우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그의 사진이 연출하는 인상이나 개성 그리고 카리스마 등의 효과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 배우를 직접 보는 것 이상으로 그 배우의 특성을 대변하여 ‘스타 브랜드’의 요소로 자리 잡는다. 이제는 실재가 없어도 이미지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룬다. 이렇게 이미지가 점점 더 시뮬라크르화 될수록 이미지는 실재와 점점 더 멀어지며, 너무 변형되어서 그것에서 실체의 흔적을 찾기 매우 어려워지거나, 아예 실체가 부재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이미지는 완전한 시뮬라크르로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게 순수자립하는것이 된다. 즉 시뮬라크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실재의 가상성이 아니라 바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가상성 그 자체이다. 이미지의 독자적인 영역 확보, 즉 '원본없는 이미지'의 등장은 일종의 존재론적 혁명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중요한 논제중 하나였던 가상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하이퍼리얼(초과실재)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오늘날은 기존의 가치의 경계, 영역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과정인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를 하기>를 의미)이 지배하는 세계인데, 보드리야르는 이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특징으로 두가지를 꼽는다. 첫번째 특징은 '실재의 소멸'이다. 즉 이미지가 실제를 넘어섰기에 실재의 쥐보다는 미키마우스가, 실재의 북극곰보다는 코카콜라 광고속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는 착하고 순한흰곰이, 사람의 본성보다는 사람의 이미지가 더 사람들에게 더욱 익숙하고 중요하게 인식되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하이퍼리얼'(초과실재)의 새로운 질서의 성립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들어서는 사실 사람들이 실재 또는 현실이라고 믿는 어떠한 것 마저도 자세히 살펴보면 가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진짜 실재라고 믿고있는 것의 가상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러한 현실위에 군림하는 또다른 가상인 하이퍼리얼이 사용된다. 즉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상적인 것인데, 사람들은 하이퍼리얼적인 것들을 보거나 그러한 공간에 잠시 머무르면서, 이 가상의 것들과는 다른 실재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1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믿음에 반박하고 사실을 폭로함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재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비판하며, 하이퍼리얼과 실재의 관계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간다. 이런점에서 보드리야르가 단지 가상과 실재의 전도된 관계를 마치 자포자기하듯이 서술한 것만은 아니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와 워터게이트 사건을 대표적인 하이퍼리얼의 모델로 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디즈니랜드를 하이퍼리얼의 완벽한 모델이라고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하이퍼리얼인 디즈니랜드가 존재하는 이유는 미국이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다. 디즈니랜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서 꿈의 놀이동산으로 인식되며, 디즈니랜드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은 디즈니랜드가 제공하는 꿈과 환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모든것이 시뮬라크르라는 점에 디즈니랜드가 위치한 미국이라는 나라도 실상은 디즈니랜드와 별 다를바가 없는 시뮬라크르이다. 즉 사람들은 디즈니랜드가 가상인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미국이 가상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디즈니랜드가 가상이기에 미국은 실제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미국은 스스로가 시뮬라크르, 혹은 하이퍼리얼이면서 또다른 하이퍼리얼인 디즈니랜드를 자기 자신이 하이퍼리얼임을 숨기는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또한 마찬가지이다. 보드리야르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그 사건이 하나의 스캔들이었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본래 정치는 청렴하다는 믿음을 주입시키기 위해 워터게이트를 하나의 추악하고 특이한 정치적 스캔들로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디즈니랜드가 본래 미국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것을 감추었던 것처럼, 워터게이트 사건도 정치 그 자체가 바로 스캔들이라는 것을 감추는 기능을 했다고 보았다.

 

3. 맺음

보드리야르에 따른다면 현대에 들어서 시뮬라크르와 실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양자간의 관계에서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시뮬라크르라는 점에서 이미 실제는 찾을 수 없고, 남은건 시뮬라크르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하에 보드리야르는 스스로 허무주의자임을 선언하며,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단순히 우리가 지금 이런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만 한다. 그는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 그리고 실재 간의 갈등 관계에서 허무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허무주의에서는 회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도 없다. 즉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결코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실재의 소멸을 한탄하고, 또 시뮬라크르의 등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다고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틀린것은 아니다. 왜냐면 대책이 없든 그저 허무주의자의 한탄이든 간에 어쨌든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재에 대한 믿음에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 것만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 시대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단지 시뮬라크르가 대세가 되었다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가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했다고 지적하면서 실재의 가상성을 이야기 했다는 것은 여지껏 사람들이 실재와 진리라고 믿었던 것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시뮬라크르의 등장으로 사라진 실재와 가상간의 구분을 재정립하는 형이상학적 담론을 다시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드리야르의 가상과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즉 하이퍼리얼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실재와 가상성에 대한 문제는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와 맞물리면서 가상현실의 존재론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비록 그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던 걸로 보일수는 있어도 그의 이론은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 실재와 가상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에 중요한 축으로 작용한다.

 

  1. 물론 이렇게 믿게 조작하는 주체는 어떤 기득권층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지 그 자체의 특징에서 발현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수도 있다.

     

<빌렘 플루서-코무니콜로기를 통한 이미지 재평가와 텔레마틱 사회의 도래>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와 함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이미지는 사실 철학의 기원인 플라톤 시대부터 철학의 중요한 문제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시점은 아날로그 매체가 등장하여 이미지의 생산방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용방식에 변동이 온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단순한 도구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성적 행위등 정신영역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디지털 매체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가상의 영역을 넘어서서 실재의 본질에 접근하는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이미지가 등장한 지금,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단지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미지의 재생산과 복제에 대한 논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실재 또는 현실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중 과연 무엇이 실재이고 현실인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도 던져지고 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봤을때 "가상"이라는 개념은 "현실"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파생된 개념이므로, 가상이나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역으로 본질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빌렘 플루서는 이미지를 논의하는데 있어서 이미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위상이 어떻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플루서에 따르면 디지털 매체 시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디지털 이미지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그것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며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문화·사회적인 현상들에 있어서 이미지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더 나아가면 그러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루서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불신에 반박함과 동시에 이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디지털 이미지를 비롯한 이미지 전반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그는 사회에서의 주된 의사소통 수단이 문자에서 이미지로 변화하는 과정에 주목하며, 기술과 매체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등장이 가지는 의의를 비롯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의사소통 전반의 문제를 융복합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코무니콜로기', '소통학'라는 새로운 철학을 시도한다.

 

1. 코무니콜로기

플루서는 매체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단편적으로 매체만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학·철학·미학·매체철학등을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지엽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를 일종의 융복합학인 '코무니콜로기'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정립함으로써 매체를 기준으로 하여 각 시대의 사회체계 전반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가 하나의 융복합학으로서의 코무니콜로기를 제안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안과 고독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다면 인간은 이를 잊고자, 그리고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가면서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맺고 타인과 소통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플루서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라는 존재론적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라면 코무니콜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플루서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변화된 기술적 또는 매체적 상황이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예시로 1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관계, 인간과 기술 또는 도구와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2차 산업혁명1은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플루서는 2차 산업혁명을 겪고난 지금 기술 발전으로 인한 변화들이 무슨 의미를 파악하는지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론이 그 어떤 이론보다도 중요하다면서 기술·사회적 측면에서도 코무니콜로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코드'(지배적 매체)에 따른 시대구분

과학자들과 다르게 많은 철학자들은 무언가를 명확하다고 말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점이 철학을 다른 학문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철학의 근본을 '사유함'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은 그것이 사유함 그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여기에 주목했듯이 문자와 이미지 그리고 매체에 대한 플루서의 연구의 출발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에 따른다면 기술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바로 "새로운 의식 형태로의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플루서는 이제 매체가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중심이며, 그렇기 때문에 매체 그 자체를 충실하게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1 선사시대의 그림코드와 역사시대의 문자코드

이러한 이론적 전제하에 플루서는 매체를 중심으로 인류문화사에 등장한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크게 세 가지, 선사(그림)·역사(문자)·탈역사(기술적 이미지)로 분류하고 이러한 구분을 '코드'라고 명명한다. 선사시대에는 그림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 인간은 조각을 만들거나 동굴벽화와 같은 그림을 그림으로써 세계과 교류하였다. 다시 말해 '주술'을 통하여 세계의 적대성을 극복하고 그것과 관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선사시대에서는 사유방식 자체가 덜 논리적이고 원을 그리듯이 유기적으로 연관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적인 사유는 인간을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긴 하지만, 세계를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우상숭배'라고 불리는 위협적인 광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플루서는 이러한 전환을 "상상에서 환상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전환에서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더 이상 주술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게되었고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던 그림은 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역사시대에 접어든 인간은 주술적 사유에서 벗어나 합리적·철학적 사유를 통해 새롭게 세계와 매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주술과 그림을 통해 비체계적·유기적·감각적으로 상상하듯이 사유하고 정보또한 이런 식으로 전달했다면, 문자를 통해서는 선형적으로 사유하면서 논리적 인과관계를 중시하며 정보를 정확하게 구상하여 통시화한다. 이렇게 구상이 상상을 대체함으로써 지식과 정보 전달의 기능적 측면에 있어서 역사적 의식이 마술적 의식을 추월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플루서는 이러한 문자가 점차 대중이 접하기 어렵고 난해하고 불투명하게 발전해나갔다고 말한다.

 

2.2 탈역사시대의 디지털코드

플루서는 선형성에 근거한 역사시대를 비판하면서, 문자가 우상숭배로서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한 것 처럼, 이러한 문자에 대한 투쟁으로 등장한 기술적 이미지를 통해 문자가 독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시대 또한 과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대가 바로 플루서가 이야기하는 '탈역사 시대'이다. 여기서 기술적 이미지란, 말 그대로 기술적인 장치로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기술적 이미지는 단지 사진, 영화,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시각 영역에 기술적 장치가 매개되는 과정에서 시각이 확장되어 경험하게 되는 이미지 전반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현미경 등을 비롯한 다양한 시각장치들로 인하여 자연적인 눈으로는 체험할 수 없었던 이미지들도 기술적 이미지이다. 즉 장치가 매개되어 이미지가 생성되고 이미지를 체험하고 그 이미지가 우리의 지각에 현상되는 것을 말한다. 이 기술적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의 특징, 즉 인간과 세계를 매개해서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표상하게 만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기능적 측면에서 차이점을 가진다. 플루서는 선형문자가 인류역사에 가져온 많은 중요한 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역사시대의 경험 여부가 양자간의 차이를 가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척도라고 강조한다.

 

전통적 이미지는 구체적인 세계를 추상화할때 세계를 바로 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비논리적이고 감각적이다. 이와 달리 기술적 이미지는 이미 역사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텍스트에 의해서 이미 개념화된 세계를 다시 추상화한다. 즉 세계는 전통적 이미지에서 즉각적으로 추상화되고, 문자에 의해서 개념화됨으로써 2단계의 추상화 가정으로 표현되며, 마지막으로 텍스트에 의해 개념화된 세계가 기술적 장치라는 매개물에 의해서 다시 한번 이미지로 추상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루서가 이야기하는 전통적 이미지와 기술적 이미지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따라서 기술적 이미지는 전통적 이미지가 가지고 있던 마술적이며 신화적인 비논리적 성격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텍스트에 의해서 개념화된 세계가 기술적 장치를 통해서 다시한번 추상화되어 이미지로 등장한다는 것을 논의할때 플루서가 주목했던 것은 단지 매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로인한 사유의 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술적 이미지의 등장이 가지는 의의를 텍스트 중심의 사유인 역사적 의식, 개념적 의식을 새롭게 대체함으로써, 수용자를 개념적 사고방식이라는 필연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2.3 텔레마틱 사회

플루서는 디지털코드의 등장과 더불어 현대 사회는 텔레마틱 사회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텔레마틱(Telematique)텔레커뮤니케이션(전기통신Telecommunica tion)과 인포마틱(정보과학Informatique)의 합성어로 직역하자면 스스로 움직여(Automat)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가져다주는(Tele) 기술이라는 뜻인데, 이를 해석하자면 텔레마틱은 모든 사람들의 동참이 가능한 전지구적인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해주는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텔레마틱에 속하는 기술로는 인터넷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텔레마틱은 엔지니어들이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요구하는 정치적인 문제를 동반한다.

 

플루서가 말하는 텔레마틱 사회의 주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람들은 자신을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오락에 내맡기지 않고 디지털코드를 통해 대화를 즐긴다. 그리고 텔레마틱 사회에서는 문자가 지배하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독창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예술을 탄생시킬 수 있다. 또한 텔레마틱 사회에서의 보편적인 인간상은 ‘일하는 인간(Homo Faber)’이 인간관계와 사홰생활을 장기 게임처럼 즐기는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 전환된다. 즉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고 삶을 유희로서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유희 속에서는 항상 새로운 정보가 창조되고 새로운 도전이 체험될 수 있다. 플루서에 따르면 텔레마틱 사회는 민주적인 대화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참여에 의해 대화와 담론이 균형을 이루어 어떠한 지배와 권위도 허용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이며, 인간이 실제로 창조한 사회 중 최초의 자유로운 사회이다.

 

3. 이미지에 대한 재평가

그것이 전통적인 이미지이든, 또는 기술적인 이미지이든 간에 플루서는 이미지에 대한 평가절하에 반대한다. 그에 따른다면 더 이상 이미지가 낮설지 않고 친근하게 된 디지털 매체 시대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상과 이미지에 대한 불신은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가상 또는 이미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도대체 왜 종합적인 그림들, 소리들, 그리고 홀로그램들, 가상이라는 단어를 실재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냐고 묻는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기술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전체적인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플루서는 이러한 불신이 생기는 이유를 디지털 매체 시대의 세계 또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 형성된 이미지 공간을 하나의 만들어진 공간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미지 공간이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대안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며, 또 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거짓과 속임수가 충분히 개입될 수 있다는 인식이 전제해 있다. 결국 이미지는 표면이며 피상성의 세계인 것이고, 그래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플루서는 이미지, 기술적 이미지 그리고 디지털 가상으로 이루어지는 표면과 피상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는 표면과 피상성이 깊이가 없다고 비판하는 행위 또는 표면과 피상성을 자꾸 실체와 연관시켜 지금의 문화를 비판하려는 행위를 비판한다.

 

역으로 플루서는 이미지를 표면으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됬냐고 되묻는다. 그가 말하는 표면이란 내적인 본질 또는 실체와 무관한 의미 없는 표면이 아니라 의미를 나타내는 피상성을 가지는 표면이다. 전통적 이미지 논의에서 보면, 이미지는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곤 했다. 즉 이미지를 늘 사물의 본질, 또는 실체 그리고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파악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는 이미지가 기껏해야 본질과 실체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또는 본질과 실체와 무관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플루서는 이미지를 세계와 인간 사이의 매개물로 정의한다. 그리고 현상학을 중시한 플루서의 입장에서 인간은 세계안에 존재하지만 이 때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엄밀히 말해서 본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세계이다. 따라서 의미가 표면에 놓여져 있어 단 한번에 시선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는 매개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표상 가능하다록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그에 따르면 원본과 가상을 구별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원본이든 가상이든 결국 그것을 본질이 아니라 표면이나 현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지각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그는 지금의 세계는 실재냐 가상이냐라는 이분법만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지금은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다원적인 세계이며, 결국 이러한 세계에서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플루서는 인간이 지각을 하는데 있어서 이미지는 필수적이라고 진단한 뒤, 이미지는 무작정적인 폄하의 대상으로 평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1.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에서 기술 혁신과 소비재 대량 생산의 시작, 오락 분야에서의 영화, 라디오, 축음기의 탄생

     

 

<노르보르트 벨쳐-디지탈 매체의 화산과 예술의 새로운 국면>

기술은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런 이유에서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산업혁명은 물질적·경제적 영역에 있어서의 혁명이었으나 그것이 비단 인간의 삶의 양식과 경제생활을 넘어서 예술이 이용할 수 있는 아날로그 매체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문화와 예술등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 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은 정보혁명, 혹은 디지털혁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디지털 매체의 탄생을 이끈 이 새로운 혁명의 경우 예술적 분야에 있어서 가져올 영향력이 산업혁명 이상일 것으로 예측된다. 왜냐하면 이전의 매체들과는 달리 디지털 매체는 단순한 도구의 영역을 넘어섰으며, 인간의 사고방식과 감각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런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예술은 이전 시대의 예술과는 근본적인 측면에서부터 다를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개념과 이론을 가지고 디지털 시대의 예술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미학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재정립이 요구될 것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디지털 매체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예술이론을 정립하고자 한다. 그는 디지털 매체가 인간의 감각작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때 수용자의 입장에서의 감성작 지각이 디지털 매체 시대에 들어선미학의 새로운 중심문제라고 말한다. 볼츠는 매체미학의 이론가중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명으로 꼽힌다. 새로운 매체상황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볼츠의 문제의식과 주장이 타당한 면이 많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긴 하지만, 그가 매체미학의 전도사·소장파 라고 불릴정도로 적극적으로 전통미학을 공격하고 매체미학의 시대적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이론은 현대미학의 필수적인 관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 문자문화와의 결별

볼츠는 지각의 측면에서 그의 철학적 탐구를 시작한다. 볼츠는 지각의 측면에서 디지털 매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보았을때, 사람들은 더이상 직접적으로 세계를 지각하는데 힘을 쓰지 않고 대신에 디지털 매체에 의해 매개된 새로운 지각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따른다면 현대 사회는 매체 의존적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볼츠의 의견은 충분히 타당한 근거를 갖추고 있다. 왜냐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실제 경험이 아니라 매체 경험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는 행위,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으로 주요 뉴스 소식을 확인하는 행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행위, 전화통화와 메일로 업무를 보는 행위는 당연히 매체에 의한 간접적 경험이다. 심지어 누군가 방문했을 때 초인종 소리로 누군가가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터폰 등을 통해 그 누군가를 확인하는 것마저도 매체에 의해 매개되는 경험에 속한다. 이렇듯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매체에 의해 매개되는 경험에 상당히 의존한다.

 

당연히 현대사회의 이러한 매체 의존적 경향은 새로운 지배적 매체의 등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볼츠에 따르면 이전의 매체들의 경우 각각의 독립된 매체에 시각, 청각등 다른 지각형식이 상응해왔다는 점에서 지각간의 상호작용이 미흡하였고, 다양한 매체들 중에서도 문자매체가 지배적인 매체가 되어 다른 매체들을 억압했었다. 반면에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비록 시각이미지 매체가 상대적으로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지각이 하나가 되어 공감각적으로 소통하는 복합매체가 새로운 지배적 매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왜냐면 지각이 따로따로 작용하지 않고 하나의 매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편리하고 다방면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비롯한 현대 디지털 매체들이 여전히 단 한가지 지각에만 의존하는 전통적 매체에 불과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 디지털 매체들은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되 다양한 지각형식을 복합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한가지 지각에만 의존하는 전통 매체를 도태시키고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 중 손편지를 쓰는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다수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고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전자 메일을 사용한다.

 

즉 볼츠는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한 공감각적인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으로 인해 문자문화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논의는 당연히 볼츠의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이미 볼츠 이전의 많은 매체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펼치곤 했다. 그런데도 볼츠의 주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문자문화와의 결별을 아주 강하게 옹호할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낡은 근대적 세계로부터의 이별이 필연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적극주장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매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근대적 인간 개념과 문자문화에 연연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디지털 시대의 문맹인"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볼츠는 디지털 매체의 등장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볼츠는 문자문화를 근대적 유럽문화의 합리성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고전적 휴머니즘의 가치들을 '인간을 구속하는 사슬'이라고 비판한다. 즉 볼츠에게 있어서 문자문화와의 몰락은 체계, 합리성, 이성이라는 범주들로 설명되는 세계관과의 작별, 그리고 특권화된 계급과 그 계급이 독점적으로 향유하던 고급문화와 문화의 폐쇄성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문자문화의 몰락에 대한 어떤 향수도 가지지 않으며,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탈문자화를 불가피하고 환영할만한 현상이라고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볼츠는 몇몇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디지털 매체는 결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적인 요소가 지극히 다분한 새로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를 저장하는 기록체계로서 보다 긍정적인 시대상황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 책 등 문자문화를 상징하던 것들은 새로운 매체 상황과 더불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낡은 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볼츠는 이제 문자매체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지배적 역할은 상실하지만, 그 역할이 '재목적화'되어 여전히 유용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볼츠는 복합매체 시대의 문자문화의 미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볼츠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주는 역할을 상실한 낡은 문자매체들이 사멸하지 않는 이유를 그것이 여가적 차원에서 가지는 복고적 감성에서 찾는다. 그는 디지털 매체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문자매체가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볼츠는 디지털 매체의 장점으로 칭송되는 ‘상호작용성’과 '정보의 바다'가 사실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 디지털 매체의 특징을 효율적이게 사용한다는 예측은 이상주의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디지털 매체의 수많은 선택가능성들과 자유는 분명히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특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력과 시간이 많이드는 매우 피곤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언제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 사용하며 사는 것보다는 종종 신문이나 책또한 겸사겸사 읽으면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인쇄매체에서 느낄 수 있는 심적 안정감과 편안함은 그것이 디지털 매체보다 다루기 쉽다는 물리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인쇄매체는 쉽게 넘겨보기 편리하고 보관하기도 쉬우며, 떨어뜨린다고 망가지지도 않고 대개의 경우 디지털 매체보다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끈질기게 업그레이드를 요청하지도 않으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고, 수시로 암호를 변경할 필요도 없다. 점점 비어가는 배터리와 충전기의 부재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으며, 새로운 제품의 복잡한 사용방법을 익히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물리적 특징에서 인쇄매체는 언제나 디지털 매체에 대해서 물리적 우월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디지털 매체의 여가적 대안과 위안거리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보의 양 만큼이나 확고한 방향설정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두각된다. 디지털 매체 상에서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질낮은 정보나 홍보성 정보가 엄청나게 많아 제대로된 정보를 찾기가 조금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디지털 매체의 세계가 점점 더 확대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두각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어서 문자매체는 그 물리적 특성상 디지털 매체보다 나은 점이 있다. 전통적인 신문매체와 정보를 최적화해주는 각종 전문서적들에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구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편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인쇄매체들은 디지털 매체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 확고한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볼츠의 주장은 기존 입장의 선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적어도 우리 세대의 경우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 디지털 매체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에, 종이로 된 매체는 더욱 소중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가깝거나 먼 미래에 완전히 디지털 매체의 시대로 전환되면 몰라도 아직 우리 세대는 여전히 문자매체의 영향력 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2.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감성학

볼츠에 따른다면지털 매체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시각중심의 이미지문화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본다면 사실 디지털 매체나 이전의 아날로그 매체의 영화나 사진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이전 매체와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앞서 알아보았듯이 그것이 시각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청각, 촉각 등의 다른 지각방식을 모두 하나의 매체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볼츠는 이러한 복합매체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의 매체를 통한 한 가지의 지각체험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각 체험이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의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의 전반적인 인식과정과 인식구조또한 직접적 지각에서 매체의존적 지각으로의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매체와 인간의 지각능력의 관계에 주목한 볼츠는 아름다움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에 치중하는 전통적 미학에 의존해서는 작금의 디지털 매체에 의해 매개되는 예술적 상황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고 비판하며, 디지털 매체 시대의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미학이 감성적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감성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볼츠에게 있어서 미학의 중심논제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적 이해, 예술가의 창조성과 의도, 예술작품에 관한 객관적 분석"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떤 매체를 이용해서 전달되고, 또 이 예술작품이 각각의 수용자에게 어떻게 지각되고 체험되는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볼츠는 사실 미학의 근원을 탐구해본다면, 감성학이라는 것은 디지털 매체 시대에 대두된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원초적인 미학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미학이 고대 희랍어 단어인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감각 또는 감각적 지각을 가르킴)'에 어원적 기원을 두고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이점에서 볼츠는 사실 미학의 본래적 개념은 예술가의 창조성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분석, 즉 철학으로서의 미학이 아니라 인간의 지각, 감정, 느낌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매체미학의 감성학적 특성은 사실 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었던 왜곡된 미학을 미학의 본래 이름인 감성학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이러한 볼츠의 관점에 따른다면 디지털 매체는 특권화된 계급과 그 계급이 독점적으로 향유하던 고급문화와 문화의 폐쇄성을 몰락시킨 것에 더해서 철학에 의해 왜곡된 미학또한 본래적인 미학으로 원상복구 시키는데 있어서도 큰 기여를 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디지털 매체 시대의 예술의 새로운 특징과 수용방식의 변화

산업혁명 이후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아날로그 매체에게는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특징인 아우라(원본성·진품성·일회성 등)를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이런 점에서 아날로그 매체는 원본과 복제품의 관계에 큰 변화가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왜냐면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서 예술영역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며, 사람들은 복제품을 통해 예술작품을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의 측면에 있어서 아날로그 매체의 예술은 '이미지의 복제'라는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디지털 매체 시대에 들어서는 예술과 이미지의 관계에 있어서 '이미지의 변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모방·재현·복제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적 접근을 통해 예술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예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술한 바 처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규정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비물질적인 예술가의 의도, 상상 등이 물질적 대상인 예술작품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을 전통적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볼츠는 손으로 직접 제작한 전통적 예술작품과는 다르게, 디지털 매체 상황에서 산출된 매체예술은 “일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속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한다.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게 됨에 따라 컴퓨터 예술 웹 아트 기술이 가지는 비물질적 특징이 예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매체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무엇을 묘사하는 것인가가 아니라 그저 이미지가 무정형적이며 무대상적이게 빛의 형상화로 전환됬다는 점이다. 즉 디지털 매체 예술에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적 재현과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가 중요하다.

 

예술과 관계된 매체가 변화하면, 예술 그 자체의 특징만 변화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수용하는 방식도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디지털 매체의 새로운 특징, 즉 비물질적이고, 비대상적인 특징은 결국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상호작용성에 근거한 작품의 수용 과정을 더 문제 삼게끔 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 예술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로 논의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수용문제다.1 볼츠는 디지털 매체시대의 새로운 수용방식은 이전의 지속적 지각과는 다르게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고 말한다. 그는 벤야민의 독특한 개념인 시각적 촉각성을 받아들이면서, 공감각과 더불어 이 촉각성이야말로 새로운 매체에 의해 형성된 예술을 수용하는 주된 지각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볼츠는 벤야민의 시각적 촉각성 개념을 수용하되, 분사적 지각 개념은 수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른다면 영화가 되었든 게임이 되었든간에 많은 영상들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즉 정신오락적·분산적 지각이 아니라, 영상 속으로 집중과 침잠이 다시 요구 되고 있다. 일종의 환각 체험처럼 영상에 몰두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를 즐기는 데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영상들을 단지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영상들 속으로 깊이 개입한다. 다시 말해서 수용자는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영상에 개입하는 것이다.

 

4.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의 확대와 예술의 탈비판의식화

사실 엄밀히 말해서 볼츠는 전통적인 미학이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매체 예술을 예술로 파악하기보다는 일종의 “컴퓨터에 입각한 그래픽 디자인”으로 파악한다. 그래픽 디자인과 상품 디자인이 이제 예술 작품의 창작을 대신하고, 그 결과물들이 예술작품을 대신하는 것이다. 볼츠는 이러한 디지털 매체 예술을 "미디어 환경 디자인"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미디어 환경 디자인으로서의 디지털 매체 예술은 유희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며,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미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미적 기본 체험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때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얼마만큼 창조적인 의도를 내놓는가 일 뿐이다. 따라서 볼츠는 현대 매체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콘셉트적인 예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술 창작에 컴퓨터가 사용됨으로써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지만 가능했던, 즉 일종의 도제적 방식의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예술 창작이 이제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좀더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예술가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이점에서 볼츠는 더이상 기법(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예술의 종말이 아니라 예술의 확대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볼츠는 문자매체에 연연하는 것은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처럼,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 개념또한 폐기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른다면 전통적으로 예술은 사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볼츠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물음은 낡은 합리적 세계관에서 나오는 물음에 불과한 것이므로 불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볼츠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계기를 갖지 않은 미학이론과 예술적 상황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단지 소일거리와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한 예술, 삶의 자극소 역할을 하는 예술이 바로 새로운 예술인 것이며, 매체에 의해 확장된 유희 공간을 떠돌며 많은 미적 체험을 하고 또 즐기는 행위만이 예술에게 적합한 행위인 것이다. 물론 볼츠의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어떻게 보면 섯불리 동의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비판의식을 가지거나 이러한 발언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고루하고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볼츠의 논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가 스스로 현대 사회를 매체의존적 사회라고 정의하고 사회적 변화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미학은 매체를 다루어야만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해서 성립된 매체미학은 사회에 더 이상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호충돌적이다.

 

  1. 물론 이러한 예술과 수용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 와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아니다. 이미 아날로그 시대에도 수많은 매체철학자들이 이러한 논의를 전개했었다

     

 

<폴 비릴리오-과속을 통한 총체적 기술/매체 비판>

폴 비릴리오는 디지털 매체를 포함한 모든 매체 발전, 더 나아가 총체적인 인류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비슷한 입장을 취했던 몇몇의 다른 매체철학자들이 대개의 경우 이론에 있어서 어느정도 긍정적 여지를 남겨 두었던 것과는 명백하게 대비되게도 비릴리오는 '기술공포증'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대중매체를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매체의 발전과 진보라는 것이 결국 모든 존재를 파괴할 것이라고 본다. 즉 기술매체가 모든 존재들의 물질적인 속성과 그들 존재의 기본 범주인 시간과 공간을 해체 시키며, 최종적으로는 인간 신체또한 해체시킬 것이며, 기술의 발달로 가속화되는 속도에 의해 공간이 재편되고, 다양한 시각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지각체계가 편협한 시각 중심으로 재편되어 실제적인 공간이 소멸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매체적 공간이 집단지성이 가능한 공간이라느니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주니 하는 해방의 공간이 아니며, 오히려 커다란 전자감옥으로 기능하며 인간을 끊임없이 자기검열하게 만들어 자기만의 감옥에 구속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한다.

 

1.속도에 의한 공간의 소멸

비릴리오는 시간과 공간의 연결지점으로 작용하는 '속도'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하여 공간의 소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질주학'을 제시함으로써 일상생활의 변화와 권력의 작동방식을 파악하고자 했다. 먼저 그에 따른다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속도가 새로운 가치이자 척도로 기능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는 교통이 속도가 엄청나게 발전한 세계로서, 이러한 발전을 통해 더 이상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비릴리오는 이렇게 속도에 의해 실제적인 공간과 지역이 무의미하게 된 것을 '탈영토화'라고 칭한다. 그는 이러한 '탈영토화'를 '도정성'의 문제로 분석한다.

 

이동수단의 발전으로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비릴리오는 이를 나와 타자 사이에 삶의 공간과 지속과 머무름의 소멸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로써 시작과 마지막만이 중요해졌으며, 도정(과정)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동수단의 발전된 속도에 의해 공간의 제약과 실제적인 공간이 해체·소멸함으로써 탈영토화를 이루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이렇게 자연적 공간 자체가 무화됨에 따라 이제 사람들의 삶은 특정 공간에 고정되어있는 정착민의 삶이 아니게 된 것이라 속도의 가속화에 의해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으로 변화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권력의 작용에 있어서 속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빠른 속도가 가능한 교통로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도와 교통로 그리고 공간의 소유에서 나온다. 특히 그는 프랑스혁명을 예시로 들며 이 혁명이후로 비로소 모든 교통로가 국가 소유가 됬다고 강조하며, 민주정을 질주정이라고 재정의한다.

 

이러한 비릴리오의 주장은 전쟁과 엮어서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공성전, 즉 성 혹은 요새라는 하나의 고정적인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를 중심으로 했던 과거의 전투는 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적이었던 고대와 중세의 전술과는 다르게 근대를 기점으로 전투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대포’를 비롯해 이전의 공성무기보다 상대적으로 덜고정적이고 보다 동적이면서도 막강한 화력을 쏟아붓는 무기의 등장으로 통해 기존 요새는 쉽게 함락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군대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형식으로 변했고, 전투의 지배적인 양상은 공성전에서 점차 야전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면서 전장이란 개념은 성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얽매인 것이 아닌 필드라는 상당히 넓은 범위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현대전으로 넘어옴에 따라 항공기·전차·수송차량 등과 같은 여러 기계들로 통해 전장이 이곳에서 저곳까지 순식간에 변화하는 기동력이 가장 중시되는 전술이 강조됨과 동시에, 어떤 고정적인 전장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현대전에서 이러한 공간의 소멸을 가져온 대표적이고 극단적인 병기가 바로 항공모함과 미사일이다. 이론상으로 미국의 항공모함은 외부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1,000km이 넘는 먼 거리의 표적이라도 전폭기를 출항시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단 몇분만에 초토화 시킬 수 있다. 더욱이 미사일은 단 하나의 단추를 누르는 것으로 지구 반대편의 한 지점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다. 이러한 현대 무기들은 그야말로 공간의 소멸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렇게 현대전에서는 속도를 지배하는 사람이 전장을 지배한다.

 

이러한 전쟁의 사례는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시켜볼 수 있다. 속도를 중시하며 더 빠른 것을 추구하면서 ‘탈영토화’라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릴리오는 이제 공간으로의 도시, 머무르기 위한 도시는 사라졌다고 본다. 더이상 사람들은 항상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이동한다는 것이다. 즉 지역 사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두한 지구촌 사회라는 것은 이제 언제든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도착할 장소에 도착하느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도정성은 사라진다. 얼마나 그 곳에 빠르게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지 그 과정은 도외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정치또한 이제 속도에 의해 좌우된다. 더 임의적으로 자기 공간을 점유하고 재판할 수 있게 해주는 속도를 소유한 자가 권력을 가진 자이며, 속도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일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된다.

 

2.매체에 의한 공간의 소멸

이동수단에 이어서 정보통신매체또한 대단한 수준으로 발달한 현대는 거시적으로 본다면 '지금'이라는 현재 시간과 '여기'라는 현재 공간의 의미가 철저하게 상실하게 되었을 정도로 공간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시대이다. 과거에는 편지 한 장을 보내는데 최소 몇일에서 최대 몇개월이 소모되었으나 현대는 편지 수백만장 분량의 데이터가 길어야 몇초면 거뜬히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시대이다. 다른 수많은 매체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비릴리오는 이러한 매체의 발전이 단순히 도구적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방식과 사유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면서, 실시간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매체기술이 모든 공간을 하나의 시간에 통합시킴으로써 먼저의 운송수단보다 더욱 철저히 현실의 공간을 소멸시킨다고 말한다.

 

실시간 통신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거리감이라는 것, 즉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차이가 사라지게 되면서 이웃이라는 공간이 사라졌으며,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어떤 지역의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놀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부를 필요가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인터네에 자신의 아이디를 등록한 뒤 자신이 하고 싶은 게임을 다운받고 서버에 접속만 하면 거기 접속해있는 어느 누구와도 같이 게임을 할 수 있다. 비릴리오는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여 장소에 고정된 인간은 탈장소화되었는데, 이러한 인간은 이전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 유형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는데, 이때 새로운 존재방식이란 금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지금 거기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격 현존이다. 즉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인간은 유비쿼터스적인 인간, 즉 '지금'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여기'라는 공간적 제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에 빠른 속도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할 수 있는, 말그대로 어느 곳에서라도 존재하는(Ubique) 인간이다.

 

그런데 수많은 매체철학자들이 이러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창조적인 가능성으로 보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대비되게, 비릴리오는 이를 매체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해체되고 있다고 보면서 결국 이로인해 인간 신체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강화되어 인간의 자유가 소멸될 것이라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3. 피크노렙시(속도의 의한 인간지각의 개편)

비릴리오는 다양한 매체의 발전과 지각의 연관관계를 고려하며 매체들이 어떻게 지각을 재편하며 또 이러한 지각의 재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속도와 관련해서 지각체계의 변화를 논의한다. 비릴리오는 속도로 인해 이미지가 파편화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는 이런 변질된 이미지를 지각하는 인간의 인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개념을 불필요하다고 보며 '피크노렙시'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일종의 기억장애로, 파편화된 이미지에 의해 경험하는 지각의 일시적인 단절과 의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비릴리오는 이를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피크노렙시를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비릴리오는 운송 수단의 발전, 그중에서도 철도로 인한 지각 체계의 변화를 속도로 인한 이미지의 혼란이라고 지적하며 속도로 인해 변질된 이미지를 인식하는 새로운 지각형식의 예시를 든다.

 

그에 따른다면 열차에 탑승한 사람이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는 기존의 고정되어있는 이미지가 아닌 이동과 함께 흐르는 이미지를 보게 되며 이 이미지들의 흐름, 혹은 다발이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처럼 계속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바깥 풍경은 사물로써 인식되는 것이 아닌 연속된 이미지들의 나열, 즉 마치 정지되어있는 이미지들이 프레임을 이루고 순식간에 지나감으로 인해 스크린에 움직이는 영상을 쏘는 것처럼 인식된다. 그런데 이렇게 속도로 인해 재편된 이미지들은 인간의 지각과 기억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함에 있다. 빠른 기차나, 자동차 안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의 연속은 우리에게 항상 잔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잔상으로 파편화된 바깥 풍경은 소멸되고, 사람의 인식에 남는 것은 잔상으로 재편된 이미지일 뿐이다. 더불어 자신이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거나 손에 쥐고 있는 사물을 일시적으로 망각하는 것 역시 피크노렙시이다. 이는 자신이 사물을 쥐고 있다는 의식과 또 사물을 쥐고 있는 손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장애를 일으켜 순간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식은 자신이 컵을 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감각은 순간적으로 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의 원인으로 '속도'말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광학기계'를 제시하는데, 이는 이전까지는 순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속도와 움직임같은 것들이 기계가 개입됨에 따라 가시화되었음을, 즉 현대에 들어서 시각과 기계가 점차적으로 하나로 통합되감을 말한다. 비릴리오는 이 개념을 두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소극적 광학이며 또 하나는 적극적 광학이다. 소극적 광학은 단순한 매질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이는 안경의 유리알을 통해 보는 세계, 물에 반사되어 보이는 다른 물체 등 이렇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극적 광학은 텔레비전 화면과 모니터 화면과 같은 전기적인 빛, 왜곡되었고 축소되었고 픽셀화된 인공적인 시각을 말한다. 비릴리오는 이러한 적극적 광학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하였으나, 시각적인 감각만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 시각편향적인 감각이 매우 편협되고 왜곡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 경고한다. 물론 그는 먼 곳에서 있는 상황이 적극적 광학으로 비추어지는 것 그 자체또한 맹렬히 비판하기도 한다.

 

4.전방위적 디지털 감시체계의 등장

비릴리오는 권력을 가진 자가 디지털 매체의 특징인 해체된 공간, 어디서든 존재하게끔 하는 속도, 인간 정신의 확장을 악용하여 결국 디지털 매체를 완전한 원격 감시 체계로 완성시킬 것이라며 심히 우려하고 비판한다. 사실 비릴리오의 우려는 상당히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CCTV 영상에 기록된다.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각 개인이 언제 어디서 경제활동을 하였는지, 어떤 상품을 선호하는지등을 기록한다.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의도적으로 VPN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항상 어떤 글을 썼는지, 어떤 글을 보았는지, 어떤 사이트에 들어갔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자기 자신도 모르게 기록되고 있는 개인의 사생활이 국가 권력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된다고 가정해본다면, 국가는 사실상 아무것도 안하면서도 어느곳에서나 존재하며 전체를 감시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 경우 만약 인터넷 상에서 정부에 반대되는 의견을 낸다면 자신의 인터넷 사용기록과 계정에 등록된 개인정보를 토대로 체포당할 수도 있다. 즉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에서 공권력의 개입은 오히려 ‘어둠 속에서 기어오는’ 감시 체제에 대하여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비릴리오는 현대를 언제 어디서든지 국가가 개인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시대상황을 '판옵티콘'이라는 감옥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즉 국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개인은 국가의 감시를 항상 느끼게 되는 이런 사회는 가운데 어두운 방에 간수가 있고, 그 어두운 방을 중심으로 밝게 비추어지는 죄수들의 방이 둘러쌓여 항상 간수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을 주는 상당히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인 감옥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릴리오는 속도의 발전과 공간의 해체가 강화됨에 따라 판옵티콘의 반대어인 시놉티콘의 개념이 추가되어, 현대의 네트워크 상황은 판-진옵티콘이라는 유비쿼터스적 감시체계, 즉 국가가 국민들을 감시하고자 하면 누구도 이 감시와 통제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시놉티콘이라함은 감시받는 대상인 대중들이 감시자인 권력을 역으로 감시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개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긍정적인 개념이 보다 더 부정적인 상황을 도래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에 따른다면 판옵티콘에 시놉티콘이 가미된 판-진옵티콘의 특징은 '자기검열'이다. 즉 판옵티콘 감옥에서 죄수는 현재 감시자가 자신을 감시하는지, 혹은 다른 죄수를 감시하는지, 혹은 감시하는 것을 잠시 쉬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개인은 국가가 자신을 검열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반정부적인 게시글에 ‘코렁탕’이라는 덧글을 다는 것이 유행을 타고 있다. 이는 국정원 요원들이 잡아가 ‘코로 설렁탕을 먹인다’라는 의미를 지닌 은유적인 말로서, 현재 감시체계에 대한 풍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말임에 동시에, 감시체계로부터 자기 검열을 요구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즉 비릴리오는 네트워크 세계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창조를 가져다 주는 유토피아적 신세계가 아니라 애초부터 감시 받고 있는 스크린 안의 세계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탈공간화 된 세계를 감시하고자 하는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저항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런 저항의 방법도 디지털적 역감시의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탈공간의 세계를 통해 국민이 오히려 국가를 역감시하고 그 실체에 대해 고발하는 형식으로 국가를 견제할 수 있고, 이러한 싸움은 정보통신이라는 줄을 잡고서 줄다리기를 하는 국가와 시민이라는 대결 구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5. 맺음

비릴리오에게 기술의 의미와 영향력은 매우 크지만, 큰만큼 암울하기도 하다. 그는 지금까지의 기술발전과 앞으로 다가올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거의 묵시론적인 수준의 전망을 펼치고 있다. 그 이유는 비릴리오가 무엇보다도 기술을 전쟁 혹은 지배와의 쌍생아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통신체계도 그것이 국가 권력에 의한 전방위적 감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다.

 

디지털 관음중과 노출증이 일상적인 현상이 된 지금, 비릴리오의 경고는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비릴리오의 기술에 대한 사유는 하나의 경고 그 자체로만 읽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줄수 없으며, 결국 허무주의로 끝날 수도 있다는 한계가 있다. 한탄이나 체념은 쉽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희망이나 가능성을 비롯한 다른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릴리오의 저작에는 이러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