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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파시즘/blog.naver.com/czech_love

<국가사회주의란 무엇인가/요제프 괴벨스>

 

Ten Commandments for Each National Socialist

민족사회주의의 십계명

조국은 네 삶의 어머니이다.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1. 너의 조국은 독일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독일을 사랑하고, 말로만 떠드는 것을 넘어서 그 사랑을 실제로 표출하라.

2. 독일의 적이 곧 당신의 적이다. 온 마음을 다하여 그들을 증오하라.

3. 민족의 모든 동지는,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독일의 한 부분이다. 자신을 아끼는 것만큼 그를 사랑하라.

4. 자기 자신에게만 의무를 요구하라. 그리하여 독일은 다시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독일을 자랑스러워하라. 수백만 명이 목숨을 바친 조국에 자부심을 가져라.

6. 독일을 모욕하는 자는 곧 너와 너의 죽음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를 처단하라.

7.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 말라.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권리를 부정하는 경우, 당신은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8. 멍청한 반유대주의자가 되지 말라. 하지만 ‘베를리너 타게블라트’(Berliner Tageblatt)는 멀리하라.

9. 새로운 독일에서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아라.

10. 미래를 믿어라. 그리하여 너는 미래를 얻을 것이다.


No Politics

정치적 냉소주의

“나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배신과 사기에 불과하다. 혁명 후에 어떤 사람들은 바보 같은 정치적 문구를 이용해 대중을 포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보다 더 똑똑 해졌다. 더 이상 그런 술수가 통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터무니없는 정치적 주장을 믿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에 충실할 것이고 정치를 멀리하고자 한다. 더 이상의 정치는 진절머리 난다!”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만약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의 공공의 적-자본주의, 유대인, 의회,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왜 그렇지?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목표는 독일 민족이 정치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우리를 사실상의 농노로 전락시켜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게 만들 것이다. 즉 정치를 무시함으로써, 유대인이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자네는 참으로 가차없군.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단순한 선전과 약속을 넘어서 우리를 진정으로 적정하는 우파 혹은 좌파 정치인의 단 한명이라도 예시를 대보라. 그리고, 정치적 약속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실제로 이행한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내게 알려 달라!”

“당신의 지적은 옳소. 모든 정당은 민족을 속이고 배신했지. 그 누구도 정직하지 않았고, 이론상으로 약속한 것을 실천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선거에서 당선되고 싶을 때만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정당들이 진정으로 독일을 위한 것인가? 오늘날의 정당은 모두 독일을 실망시켰고, 우리의 미래를 의심하고 배신했다. 의회의 정당들이 나쁘다면, 그들을 축출하기 위해 전 민족이 연대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작금의 독일에 맞서 새로운 독일을 위한 삶의 의지를 선언할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아니라 라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에게는 용기, 믿음, 그리고 결단력이 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The Economy and Politics

경제와 정치

“나는 아직 작은 희망 하나, 즉 경제의 힘을 믿고 있다. 나는 독일인의 거대한 창조력이 우리 자신을 곧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노동과 경제가 우리의 희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정치적인 발언에 더 적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자의 표효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구나! 하지만 당신의 생각은 참으로 순진하다. 당신은 마치 황야의 목소리처럼, 3백만명의 실업자에게 가서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게 말해야 하다!’고 설교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있으면, 어쩌면 당신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내가 계획하는 것보다 더 분명해질지 모르겠소.”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는 독일의 산업을 세계적 조합경제(syndicalism) 맥락 하에서 고도로 발달한 미국 금융산업과 통합시키기 위해 경제가 우리의 희망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당신이 경제를 믿는 이유이다. 경제는 우리 민족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요소로서, 사실 정치와 직결된다. 당신은 건강한 목적지향적 정치 없이 건전한 경제를 건설하거나 유지했던 단 한 사람이라도 예시를 들 수 있는가? 또한, 분명하고 본능적인 정치체제 없이 건전한 경제를 건설한 민족이 지금껏 단 한 사례라도 있었는가?

정치를 무시하는 당신의 견해는, 그야말로 유대인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얼간이, 혹은 부르주아 계층의 멍청이나 할 만한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경제가 아닌 정치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 건강한 정치는 곧 그에 상응하는 경제 정책으로 이어진다. 강력한 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는 건전한 경제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그런 정치를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The Nature of Politics

정치의 본질

정치는 민족에게 봉사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행동이다. 정치의 목표는 민족의 삶의 경지를 드높이고, 그 생명을 유지 혹은 방어하며, 인구를 증가시키고, 우리의 후손이 자유와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을 건설하는 것이다.”

 

Youth and Politics

청년과 정치

“그래서, 당신네 운동이 이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 입니까? 인생 경험이 거의 없는 새파란 청년들끼리 모여서, 길거리 싸움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과격한 행동을 하는게 그런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까? 당신들은 국가와 그 자연적 토대를 완전하게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역시 바로 그런 것 이오! 이런 유형의 정치는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렇게 지금 하고 있소. 노련한 지도자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평할 자격이 없소. 그들은 우리처럼 행동할 수도 없지요. 잘 교육된 부르주아 계층, 지식인들, 정치적으로 길들여진 소시민적 어머니와 소년들, 심지어 이 나라 정부와, 정치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처럼 행동할 수 없소.

당신이 어떤 점에서 우리를 우려하는 지는 잘 알고 있는 바요. 다만 당신이 가진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싶군. 우리 당이 청년들, 진정한 독일인 청년들과 함께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 오직 경험 없는 청년들 만이, 맹독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독일을 넘어서, 새로운 독일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청년과 함께 하는 것에 당당하며, 젊은이들이 인생 경험이 있던, 없던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소. 물론 당신은 그들보다 인생 경험이 많지만, 그들보다 정치에 대해서는 훨씬 뒤떨어져 있소. 우리 나치당 돌격대의 17세 청년들이 당신과 토론을 한다면, 그들의 문장 하나하나가 당신에게 수치심을 주리라 생각하오. 우리가 언제나 급진적인 정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급진주의가 필요한 영역에서 그것을 거부할 만큼 비겁하지 않소. 부르주아 계층 신사들은 언제나 급진주의에 불평하곤 하지.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국가에는 급진적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거요.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테러가 가해질 경우에만 최후의 수단으로 테러에 의존하오. 우리는 어느 노장회처럼 경찰에만 의존하며 벌벌 떨지 않고, 울타리 뒤에 숨어만 있는 비겁한 부르주아 계층처럼 겁쟁이 마냥 체념하지도 않소. 우리는 거리로 나서 테러에 맞서 폭력을 사용할 것 이오. 우리는 권력의 이론을 실천하고, 부르주아 계급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에 대비하기 위해 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있소.”

Class Struggle

계급투쟁

“당신의 정당이 계급투쟁을 지지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정당 이름조차 ‘노동자당’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칭했다. 지금 그대는 부르주아 계급국가를 논하고 있다. 이 세 요소가 나치당을 계급투쟁의 정당으로 만든다.

어떻게 당신이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를 수 있겠는가?”

“계급투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사고에 반대하는 뚱뚱하고 교양있는 부르주아 시민계층만큼 위선적인 존재는 없다. 따라서 당신은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당신은 프롤레타리아인 척하고 있지만, 본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민족주의자의 심장을 가진 척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불평할 수 있는가? 부르주아 계급국가는 거의 60년동안 조직화되어왔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적 사고의 역사적 필연성을 탄생시켰다. 1918년 11월 9일에서 당신은 교훈을 얻지 못했는가? 병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마주하여, 당신이 가진 반동적 부르주아적 오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가?

당신이 영양실조, 공허, 굶주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에 대적하는 풍요로운 중산층 유럽인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래, 우리는 스스로를 노동자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부르주아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노동의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노동자의 정당이라고 칭한다. 우리는 창조적인 노동이 역사를 움직이는 중대한 요소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노동은 소유, 교육, 계급, 그리고 가족 기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노동자당을 자처하는 이유이다!

Social and Socialist

사회와 사회주의자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이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하는 두번째 조치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인 척하는 부르주아의 거짓말과 동정에 대한 항의로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한다. 의회가 주도하는 ‘사회주의적 입법’은 정말 부조리하다. 그것은 먹고 살기에는 너무 적은 양만 보장하며, 죽기에는 충분하다.

우리는 자연과 법에 입각하여 우리의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육체와 정신을 사용해 창조한 것에 대한 정당한 몫을 원한다.

그것이 사회주의인가?

The Class State

계급국가

이제 부르주아 계급국가에 대해 논해보자. 오늘날의 부르주아 국가는 하나의 계급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국가는 성취와 의지를 등한시하며, 교육, 부, 그리고 전통유지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가 인간사에서 가장 거룩한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국가를 논한다. 부르주아 국가는 자신의 민족성과 독일을 진심으로 느끼고 사랑하는 1700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배제하며, 부에 대한 탐욕스러운 사랑으로 국가를 가득 채운다. 부르주아 시민이 의도한 바가 달랐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부르주아가 실제로 성취한 것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이 사실 강한 독일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1918년 11월 9일의 반란으로 붕괴된 국제적 노예 식민지로서의 독일을 안겨주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의 계급투쟁에 반대한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정치적 운동은, 독일 민족을 역사의 흐름에서 배제한 계급투쟁에 대한 대항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1700만 명의 사람들이 계급투쟁을 유일한 희망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60년 이상을 그런 식으로 배워왔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국가를 철저히 파괴하고 독일 공동체를 새로운 사회주의 구조로 대체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다면, 우리가 어찌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불평할 도덕적 권리를 가질 수 있겠는가?”

Hand and Mind

육체와 정신

“그래서, 누가 오래된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창조적인 독일인의 건강한 본성을 신뢰한다. 언젠가 모든 독일인들이 이를 자각할 날이 도래하여,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항거를 시작할 것이다. 악행이 들춰지고, 정당한 판결을 내려질 것이다.

그 날을 서둘러 맞이하는 게 우리의 임무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막론하고 모두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정당이나 계급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심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젊은 노동자들이 제3제국을 건설하게 되리라. 경험이 없는 젊은 청년들이 중요한 발언권을 갖게 될 것이다. 쇠사슬 같은 구태의 지혜와 경험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운명을 손에 넣을 것이다. 우리는 전통, 교육, 부, 사회적 지위, 그리고 계급 등을 무시할 것이며, 사회주의의 문제를 급진적이고 완전하게 해결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창조적인 독일인의 미래이다.

Nationalist and Socialist

국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민족사회주의가 부르주아 부와 자본주의적 이윤이라는 편리한 도덕적 신학 그 이상의 것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폐허에서 새로운 민족주의 정신이 자라나 민족적 자기보호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 즉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기반을 만들어낼 새로운 사회주의를 보여줄 것이다.

Marxist Desperation

마르크스주의의 절망

“당신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군! 지난 60년동안 우리는 정치적 이상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파산을 목도해왔다. 독일 노동자가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의 미래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결코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1. 그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해 60년간 싸웠다. 민족과 인종을 치명적으로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실제 사회주의와는 정반대다.

2.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독일 노동자의 정치적 관념이 아니다. 그들은 계급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 유대적 사상을 받아들일 뿐이다.

3.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적 사고방식과 그 사고방식의 실현을 위해 총체적으로 헌신하는 노동자 계급을 죽음으로 이끈다.

노동자는 사회주의를 의심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의심할 의무를 가진다. 그들이 최대한 빨리 베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Anti-Semitism

반유대주의

“당신이 하는 모든 주장은 결국 유대인에 반대한다는 점에 귀결된다. 그 점만 말하면 되지 왜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는가? 20세기의 반유대주의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다. 유대인 역시 다른 민족과 같은 인간이 아닌가? 왜 점잖은 유대인의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더군다나, 우리 6천만 명의 독일인이 2백만 명의 유대인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더 우습지 않은가?”

“중요한 요점을 놓치고 있군. 한번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시오:

1. 만약 우리가 오직 반유대주의만을 추구한다면, 당신 말처럼 우리가 20세기에 서 있을 장소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사회주의자다. 우리에게 반유대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길을 가리키고 있다. 사회주의를 통한 독일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유는 오직 유대인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독일의 자유, 즉 사회주의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유대주의자이다.

2. 물론 유대인도 인간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벼룩 또한 동물이다. 다만 유쾌한 동물이 아니라 불쾌한 동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벼룩을 보호하지 않는다. 벼룩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우리를 물어뜯고 괴롭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위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무해하도록 그것을 척결하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유대인에게도 적용된다.

3. 물론, 괜찮은(weiße) 유대인도 있다. 오늘날에는 괜찮은 유대인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할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증거이다. 우리가 종종 악당들을 괜찮은 ‘유대인’이라고 조롱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유대인을 싫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작용한다. 반대로 우리는 유대인으로서 부적절한 사람을 '괜찮은(gelbe) 기독교인'이라고 칭하곤 한다. 괜찮은 유대인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파괴적인 유대정신이 이미 우리 민족의 많은 부분을 감염시켰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가능한 유대인이라는 범세계적 전염병에 맞서는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

4. 6천만 명의 독일인이 2백만 명의 유대인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에게 좋지 않은 징조다. 우리는 이 2백만 명의 유대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싸운다. 당신이 이 전투에 참여하기에 너무 겁쟁이인 것이고, 뜨거운 난로 위의 고양이 마냥 행동하는 것이다.

이 6천만 명이 우리처럼 유대인과 맞서 싸웠다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유대인이 두려워했을 것이다.”

 

Monarchy or Republic?

군주제 혹은 공화정?

“당신의 본색을 보여라. 당신은 군주론자인가, 공화주의자인가?”

“우리는 둘 다 아니다:

1. 정부 형태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관한 질문이다. 베르사유의 명령으로 파괴되고 있는 민족을 복권하는 데 있어, 군주제 혹은 공화정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2. 이 문제는 우리가 자유로워질 경우에만 민족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공화국은 나쁜 군주국보다 낫고, 좋은 군주국은 나쁜 공화국보다 낫다. 두 형태의 정부 모두 장단점이 있다. 오직 자유인만이 그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나쁜 정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일단 우리의 정부는 확실히 제대로 된 공화국은 아니다. 지금의 독일 정부는, 스스로를 정치인 혹은 정치장교로 자처하는 히브리인이 고성방가와 높은 입찰가를 이용해 지배하는 국제적 중고품 시장에 불과하다.”

Black-White-Red or Black-Red-Gold

급진파인가, 중도파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해달라.

당신의 색깔은 흑백적[급진파]입니까, 흑적금[중도파]입니까?”

“둘 다 아니다:

1. 샤이데만/슈트레제만(Scheidemann/Stresemann) 공화국이 급진파 혹은 중도파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던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흑-금의 성향을 선호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마 흑-금을 선호할 수도 있다. 적어도 자신의 색을 가지고 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2. 독일 민족이 하나의 사상을 고수하고, 하나의 의지를 가져야만 공동의 깃발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민족공동체를 불러 일으키는 운동이 그 색깔을 온 민족에게 정해줄 것이다. 우리는 그 중심에 우리가 설 것이라고 확신한다.

Our Program

우리의 계획

“모든 정당은 표방하는 계획이 있다. 당신네 정당은 어떤가? 당신은 독일 노동자의 승리를 바라는데, 그를 위해서 무엇을 제안하는가?”

“우리가 거대 정당이나 유대인이라면, 장황한 약속을 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킬 것이다. 그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더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데도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만이 구원의 길임을 알고 있다.

1. 물론, 각 정당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정당도 자신의 계획을 실천한 적이 없다. 그들은 과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안한 모든 계획은 실행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2. 우리의 계획은 간결하고, 달콤하다: 창조적인 독일인들의 자유. 그 목표로 가는 길 역시 분명하고 간단하다. 독일 노동자를 해방시키고, 노동계급을 다시금 국가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자유가 요구한다면, 사회혁명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필품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감싸고 있던 쇠사슬을 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독일 노동자에게 약속하는 것 외에는 어떤 구체적인 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대가가 필요하던,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상관없이, 노동계급의 생존권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것이다. 우리는 민족과 억압된 노동계층에게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하고자 한다.

자유와 번영을 위한 싸움을 통해!”

Our Demand

우리의 요구

“그래서 독일 노종자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세상에 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독일 노동자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안이 있다:

1. 자유는 희생을 필요로 한다. 아무도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없다. 그가 직접 행동해야 한다. 자유는 최대의 선이다. 그는 자유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삶 그 자체를 기꺼이 헌신해야 한다.

2. 목표는 항상 필요한 자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 거짓말쟁이들은 (실제적인 노력이 아니라) 회원권을 얻기 위해 허공에 맹세한다.

반면 우리는 자유가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즉 가난, 걱정, 어려움, 배고픔,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 찬 길고 험난한 투쟁을 위하여, 건강, 즐거움, 행복, 만족을 끊임없이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독일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리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우리는 창조적인 노동으로 가득 찬 자유로운 독일을 성취할 것이고,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보상이다."

The Bourgeoisie

부르주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이하 나치당)이 수구적인 장교, 학생, 박사 등이 주도하는 쁘띠-부르주아 운동이라고 지적하며, 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인 당신네들이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걸 믿을 수 있겠는가? 노동자는 노동자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고 노동계급을 믿는다. 당신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 확신을 당신은 어떻게 꺾을 수 있는가?”

“이토록 짧은 순간에 그렇게 많은 허튼 소리를 하기도 힘들 것 이오.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게:

1. 나치당은 쁘띠-부르주아 운동이 아니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부패(Verbürgerlichung)에 대한 항거다. 나치당 지도부는 쁘띠-부르주아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샤이데만(Scheidemann), 라이네르트(Leinert), 노스케(Noske), 바우어(Bauer) 같은 사민당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부유한 부르주아로 살아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2. 나치당 지도부 중 수구적인 장교, 학생, 박사에 속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내게 알려달라. 친구여, 만약 당신이 마르크스주의 지도부 중 장교, 학생, 박사의 명단을 내게 알려 달라고 하면, 나는 적어도 100명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지도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만약 그가 나치당 지도부에 속했다면, 그는 ‘케케묵은 생물’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3. 당신은 나치당이 어떻게 노동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묻는다. 만약 당신의 질문이 정당하다면, 노동자는 먼저 노동운동에서 썩은 유대 이론서 무더기를 폐기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모욕하고 있을 뿐이고, 실제로 노동운동을 자신들의 비열한 목표에 오용하고 있다. 한번 우리 주변을 둘러보시오. 노동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노동자’를 찾을 수 있는가? 샤이데만, 벨스(Wels), 노스케, 바우어, 그 밖의 모든 사민주의자들이 실제로 ‘노동자’인가? 그들 모두는 부르주아 계급의 뚱뚱한 구성원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부르주아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싸움을 시작했고, 그들 스스로가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 되는 순간 싸움을 중단했으며, 더 이상 시기하지도 않았다.

즉, 독일 노동자만이 독일의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계급적 한계를 극복한 구 부르주아 세력 역시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한 시기심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독일을 나락으로 몰아붙인 계급에 대한 증오 때문에 노동운동에 동참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의 특권을 더 많이 얻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자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에 대한 깊은 책임을 통감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창조적 성장을 위해 이 길로 접어든 것이다.

독일 노동자는 그의 손을 뻗을 것이고, 육체와 정신을 통해 미래의 기적을 샘솟게 할 것이다: 제3제국을.

Proletariat and Working Class

프롤레타리아와 노동계급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나치당은 부르주아의 지도력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는 말인가?”

“나는 당신이 구태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독일은 그런 낡은 개념 모두를 극복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부르주아의 개념은 죽었고, 프롤레타리아의 개념 역시 다시는 생명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몰락하고 있는 부르주아의 세계도, 유대인과 유대인 앞잡이의 목표인 프롤레타리아-마르크스주의적 미래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독일을 원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노동과 성취를 가장 높은 도덕적, 정치적 가치로 삼는 독일을 원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자당이다. 만약 우리가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면, 독일은 노동자의 국가가 될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실제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들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기 좋은 언변으로 감추려는 것 아닌가?”

“친구여, 그런 지적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내 말을 계속 들어보시게. 미래의 독일은 새로운 토대 위에서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이러한 변혁을 단행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그 변혁대상인 오늘날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책임 역시 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모순적이다. 물론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는 데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역할은 이제 끝났으며, 젊고 건강한 새로운 계급의 창조성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적 역할을 차지할 새로운 계급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계급을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용어는 유대인의 궤변에서 나온 것이고, 따라서 독일 노동자에 대한 모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노동자들의 공동체 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이 노동자 공동체에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이끌면서 새로운 독일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육체의 강건한 힘이 정신을 안전하게 유지시킬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상호보완성처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가 한데 모여 협력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유대인이 독일 노동자를 인도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은 늘 독일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모든 사안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독일인의 정신과 육체가 함께 자유를 이끄는 것을 대표하는 유일한 슬로건은:

정신과 육체의 독일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International and National

국제와 민족

“그렇다면, 마르크스적 국제주의를,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건가?”

“정확하군! 마침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아직 남아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적은-우리가 그를 유대인이라 부르던, 자본주의자라 부르던- 국제적 맥락에서 생각하고 활동한다. 그래서 그는 국제적 방법을 동원해서만 싸울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국제 자본주의 체제를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설립인가?”

“친구여, 아무래도 내가 헛소리를 한 것 같군. 당신은 결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네. 한번 논리적으로 생각해봅시다.

1. 그렇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럽 국가를 등에 업고 그들의 국제조직을 건설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독일은 국가적 차원의 자본, 즉 철도, 광산, 공장, 돈, 금, 중앙은행 등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모든 것은 주식으로 환원되어 런던과 뉴욕의 유대인 은행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주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철로 위를 달릴 수 없으며, 광산에서 캐낼 수도 없고, 식량이나 상품을 생산하지도 않고, 돈도 벌어줄 수 없다. 주식은 오직 이자를 얻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독일인 국가를 가지고 있다면, 유대인 은행이 보유한 모든 독일 관련 주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여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국가 노동 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국가가 없기 때문에 도스(Charles Gates Dawes)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축복에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국가적 차원의 재산이나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민족의 재산과 자본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은 국제적 은행에 의해 관리된다. 국가 자본은 국제적으로 활동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국제경제의 하이에나들은 그것을 국제적으로 환원한다.

2. 물론 이 세계적인 힘과의 싸움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의 전선에 동참하고자 하는 모든 운동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세계 사회주의 단일 체제의 설립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해선 안될 것이다. 사회주의 단일세계는 오직 노동자를 배신하는 유대인의 머리 속, 그리고 잘못된 지식을 주입받은 독일 노동자들에게만 존재하는 관념이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새로운 사회주의 민족국가의 수립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제조직에 대항하는 국제적 공동 투쟁으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들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이해의 장벽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제조직은 모든 민족을 같은 방식으로 동시에 노예로 전락시키고자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국제적 공동 투쟁과 반대로, 그들은 차례대로 일을 진행할 것이다. 국제적 공동 투쟁은 이런 방식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그 누구도 다른 민족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될 만큼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각 민족은 자본주의 국제조직에 항거할 최적의 순간을 놓치게 되어, 자본주의자 악마가 그들을 집어삼킬 때까지 그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친구여. 우리는 다른 민족과 함께 할 만큼 시간이 충분히 없다. 우리는 최종붕괴의 기로 앞에 서있는 상황이다. 과거에 그 어떤 민족도 우리를 도와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민족과의 공동 투쟁을 하염없이 바라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다.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3. 당신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당신이 민족과 정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처사이다. 사회주의는 확실히 국제주의적이지만, 지금껏 국제적인 민족 집합체를 실현한 그 어떤 위대한 정치사상도 없었다. 역사의 원리는 단결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투는 국가와 민족을 구분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싸움을 거부하는 민족은 쇠퇴할 운명이다.

당신은 이것이 끔찍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자연적인 사실이고,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싸워야만 한다. 역사는 영원한 투쟁의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마르크스주의의 형재애는 역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단결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을 원한다. 자연은 서로 다른 민족이 뒤죽박죽 섞여서 살아가는 혼란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인종이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구성된 인간 전체를 원한다. 그러한 인간성 아래에서, 강자는 항상 약자에 대해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입각하여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독일인을 도울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 힘든 전투의 세계에서, 독일인이 약자를 짓밟고 승리하여 생존을 위한 투쟁을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국가라고 부른다!”

Production and the Social Problem

생산과 사회문제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본색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왔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이 사회문제를 어떻게 풀 생각이냐는 것이다.”

“질문의 핵심을 파악해보자. 사회문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1700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산수단 전체를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유일한 자본인 노동력을 최저가로 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상황을 묵묵히 용인하는 민족, 국가, 또는 민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내적 단합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민족은 작금의 국가를 지키려는 세력과, 거스르고자 하는 세력으로 분열된다. 이 같은 조건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서 우리 민족이 차지할 자리가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자본주의가 억압하고 있는 국가와 경제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다시금 민족의 일부로서 정초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유리는 다음을 요구한다:

1.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은, 영토, 강, 산, 숲, 지하의 자원, 하늘의 공기 등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민족 전체의 공동소유이다. 한 민족의 구성원이 이 중 무엇이라도 소지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민족 전체의 소유물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다는 국가적 소명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만약 그가 그것을 형편없이 관리하거나,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방향으로 사용한다면, 국가는 그에게서 그 소유물을 빼앗아 다시 한번 공동체의 소유로 만들 권리가 있다.

2. 생산은 인간의 힘, 능력, 창의력, 기업가정신, 천재성이 요구되는 한, 개인의 소유로 간주될 것이다. 국가는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소유권과 이익을 가질 수 있음을 보장한다.

3. 더 이상 힘, 능력, 창의성, 기업가정신, 그리고 탁월함(운송체계, 신탁, 대기업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료된 생산은 다시금 국가의 소유로 돌아올 것이다.

이 생산의 거대한 순환고리는, 물론 생산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포함한다.

이 요구를 이행함으로써, 우리는 노동자를 임금 노예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리라 믿는다. 그 결과는,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경제를 갖춘 자유로운 민족, 즉 민족공동체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Parliament and Parties

의회와 정당

“이것의 실행은 새로운 정당이 필요한가? 왜 그 어떤 원내정당도 이 계획을 채택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확실히 이 계획에 대해 논할 수 있었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군!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 어떤 정당이라도 이 계획을 표방함으로써 수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이를 채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총선과 의회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의회에서 우리의 계획을 ‘표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의 실행을 원한다. 이 특징이 우리를 다른 모든 정당과 구별하게 된다. 다른 정당은 의회에서 무언가를 대표하고, 말하고, 토론하고, 표결하고, 보수를 받는다. 우리는 행동한다. 우리는 언젠가 이 국가를 정복할 힘을 기르고 있다. 일단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의지와 계획의 수행을 위해서, 우리는 국가의 권력을 이용하여 가차없고 잔인하게 행동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의회와 정당의 사기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 민족의 힘과 노동을 착취하는 거대한 거래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독일 민족의 신체에 기생하는 숫벌과 같다. 의회는 벌떼로 붐비지만 꿀 대신 거름과 양배추만 생산한다. 그나마도 농부의 것보다는 훨씬 못한 수준이지만, 보통의 농부보다는 천 배는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

민족의 재산과 번영은 낭비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유대인이 있고, 유대 꼭두각시 인형들이 국회에서 발언하고, 투표하고, 보수를 받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통치한다.

국회의원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들은 선출된 대표로서 자유로운 민족 주권자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우리가 의회에 무언가를 원하면, 우리는 폭도로 간주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 대신에 무엇을 원하는 가? 우리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 의회를 없애려면 더 나은 대체재를 제시하여야 한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Dictatorship and Corporate State

독재정과 조합국가

“악취가 날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다수파를, 젊고 결연한 소수파가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역사는 독재정권의 수립을 통해, 완전한 승리에 도달할 때까지 새로운 사상을 실현할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일단 우리가 국가를 정복하면, 이 국가는 우리의 국가이다. 오직 우리만 이 국가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이 부패한 체제와의 전투에 있어, 우리는 하나된 정당이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원내정당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제도를 타도하는 순간 우리는 국가가 된다. 독재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가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책임감 있는 소수자로서 가졌던 의지를, 약하고, 부패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심지어 배후에 유대인의 사악한 계획을 끼고 있는 다수에게 강요할 것이다. 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독일의 해방을 원한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독일 민족의 자유로움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이던 상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독일 민족 대부분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고 비겁해서, 자신의 의지에 반할 경우에만, 오직 힘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글쎄, 당신의 주장은 설득력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당신이 영구적인 독재정권을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임시 독재정부 이후에는 무엇이 따를 것인가?”

“물론! 우리는 사후계획에 대하여 이미 생각한 바 있고, 이에 관련하여 우리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우리는 민족을 통치로부터 배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의 생명을 보장할 조건의 확립을 위해 싸우고 싶을 뿐이다. 일단 싸움을 마치고 자리를 잡게 된다면 우리의 임무는 그것으로 완수된다. 그럼으로써 민족사회주의 국가가 도래할 것이다.

민족사회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적 의회제 대신에 경제의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경제의회는 노동하는 독일민족의 전체성에 의해 선택되어, 누구나 평등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될 것이다. 경제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는, 기존의 원내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 내의 훌륭한 전문가들에 의해 치루어지게 될 것이다. 전문가의 범위는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정리될 것이며, 국가는 노동하는 독일인 각자의 의지와 업적에 대한 권리를 가질 것을 보장한다. 경제의회는 국가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만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국가정책은 상원이 담당한다. 상원은 모든 집단과 계층에서 독재자에 의해 선택된 대략 200 명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 200 명은 민족 전체를 대변하는 엘리트로서, 행정부를 지원하고 조언한다. 그들의 임기는 종신이며, 오직 기존의 구성원이 사망할 경우에만 새로운 인물이 임명된다.

상원은 수상을 선출한다. 수상은 대내외적으로 제국의 모든 정책을 구성하고 책임을 질 것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특정한 정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할 필요도 있다.

수상은 장관과 관료를 임명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될 것인데, 이는 수상이 모든 장관과 관료를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고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제도의 운영을 대통령이 주도하던 군주가 책임을 지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는 그가 자신의 업무를 잘 수행하리라 확신한다.”

The Will to Power

권력에의 의지

“이 체제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분명하다. 이 체제에서 무엇이 일어날지는 정말 간단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단 국가가 정복되고 난 상황을 전제한 후 계획되었다.

그래서 국가를 어떻게 정복할 건가? 작금의 독일은 강력한 권력에 기초한 경찰국가이다. 아마도 전쟁 전에 우리가 가졌던 국가보다도 더 잔인할 것이며, 이용가능한 모든 힘을 이용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한번 당신의 믿음처럼 당신의 소수정당이 점점 더 강해진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언젠가 그 성장세도 멈추는 날이 오긴 할 것이다. 당신은 독일 민족의 전사들을 끌어모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절대 다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대다수는 언제나 그대를 반대할 것이며, 분명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도 당신과 다른 편에 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친구여, 드디어 이해하기 시작했군.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 질문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선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오직 전사의 심장과 정복자의 주먹을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답을 들어도 의미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악물고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국가에 대항하며 투쟁하고, 독일을 위한 최후의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우리는 말뿐인 혁명이 아니라 실제적인 혁명을 실현할 것이다.

우리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독일인 육체와 정신의 힘에 의존하여 진실된 국가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계획을 실현할 힘이 없지 않은가.”

“친구여, 우리는 오직 행동만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다. 당신은 내가 1918년의 카프 폭동을 동경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그저 반란, 폭동 군인파업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는 결코 그런 단순한 행동을 지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혁명을 원한다. 혁명은 구세계를 전복시키고 신세계를 건설한다. 혁명의 중심은 창의성과 건설성에 달려 있다. 이에 충실한 진정한 혁명의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혁명은 특정 역사시대의 종말이자 시작점이다.

우리가 이 국가를 정복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다른 세력은 무기, 언론, 선전, 의회, 여론, 돈, 권력 등 이 국가를 비호할 모든 수단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결여하고 있으며, 반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승리를 아주 강력하게 확신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권력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는 어떤 대가를 수반하더라도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의 승리를 보장해준다. 권력에의 의지는 대의를 위해 가난, 굶주림, 걱정스러움, 공포를 받아들여야 함을 요구하는 잔혹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희생을 자처하는 소수의 의지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잘 사육된 다수의 지방덩어리 복부와 쾌락에 대한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

권력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수단을 창출한다. 다른 세력이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즉 힘을 사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기가 필요할 때 무기를 창출할 것이다.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자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유급 농노로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의회를 위한 삶을 연명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진 않을 것이다.”

War and Pacifism

전쟁과 평화

“한마디로, 당신은 힘에 의존 하는군. 당신은 정의와 법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만이 정의이자 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이면에 있는 주먹의 잔혹한 힘이 보인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힘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정의와 법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독일에서 정의와 법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힘에 의존한다.

베를린에는 더 이상 판사가 없다. 정의와 법을 짓밟히고, 법의 힘은 더 이상 야만적인 부당함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인 억압과 폭정이 도처에 만연한 상황인데, 이 모든 것이 지금 다수파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 다수는 옳고, 소수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소수는 박해받고 조롱당하며, 폭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독일 민족을 위한 정의를 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총대를 매어 잔인한 주먹을 쥐고 정의를 요구한다. 우리는 의회 다수당의 생명보다 민족 전체의 생명권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의 의지는 삶에의 의지이다. 정의는 항상 죽음이 아니라 삶의 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 이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만일 우리의 이 권리를 누군가 부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힘을 이용하여 권리를 위한 싸움을 전개할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평화를 어지럽히기만 하는군. 그대는 평화와 질서가 아니라 전투를 원한다. 전쟁이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닌가!”

“이제 거의 울부짖는군! 당신은 평화에 대해선 거의 종교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평화로운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고, 일을 하지 못하며,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고한 아이들이 굶주리고, 사람들이 구걸하고, 번영하던 독일의 땅이 사막처럼 변한 지금이 상황이 평화롭다는 말인가? 1918년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사실상 전쟁을 해왔고, 이 전쟁은 매일 보다 암울하고 잔혹하게 변하고 있다. 국제 증권 거래소의 뉴스를 읽어보라. 그것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 전쟁을 주도하는 외국의 국제전쟁 사령부로부터 온 소식지와 다름없다. 그리고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는 독일 노동자와 가족의 처지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평화다. 이는 묘지로 향하는 평화이고, 당신의 요청은 죽음으로의 엄숙한 질서이다. 내 친구여, 이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항하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는 민족을 불러일으켜 고문자들을 내쫓을 것이며, 유대인이 우리에게 씌운 쇠사슬을 끊기를 원한다.

오직 투쟁만이 우리 민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진정한 평화로 인도할 수 있다. 자연의 영구적 원리는 정의가 아니라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리를 굳히기 위한 싸움을 원하는 것이다.

평화주의가 곧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무력을 마주한다면 치욕스럽게 죽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다. 우리는 그러한 경향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보호하길 원한다. 독일 민족의 의지와 정신은 강해져야 한다. 우리를 망신시키거나, 부랑자로 취급하는 그 누구도 용납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정의는 자유, 번영, 그리고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울 것이다.

자유, 번영, 그리고 생활공간을 위한 이 싸움은 최고위층부터 최저위층까지 민족의 모든 구성원을 포함한다. 이는 민족 전체의 문제이다.

삶에의 의지를 가진 8천만 독일 민족의 통일된 힘은, 인권을 부르짖는 그 어떤 거짓말보다도 평화를 더 잘 보장해준다.”

Germany’s Freedom

독일의 자유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나게 되는가?"

독일 땅에서 독일 민족의 자유로 끝날 것이다. 모든 생산적인 독일인이 이 자유가 제공할 삶과 번영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기를 건설할 도덕적, 정신적 힘을 제공한다.

자유는 새로운 정부체제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싸워온 목적을 위해 기여할 더 나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죽어가고 있다. 사회주의 만세.

마르크스주의 역시 죽어가고 있으며, 오직 민족주의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해 새로운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새로운 러시아 혁명(경계없는 붉은 파시즘)/알렉산드르 두긴>

20세기에, 오직 자유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 만이 정치적-통치적(political-administrative) 실현의 맥락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치 이데올로기임이 확인되었다. 20세기에 실존했던 모든 사회는 상기한 이데올로기를 하나를 추구했다. 오직 자유주의 국가만이, 공산주의 국가만이, 그리고 파시스트(민족-국가주의자/nationalist) 국가만이 실존했다. 다른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다. 러시아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를 경험했다. 이제 남은 것은 파시즘 뿐이다.

Against national capitalism

민족-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오늘날 러시아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거나, 거의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한 파시즘의 한 유형은 '민족-국가 자본주의(national capitalism)'이다. 그러나 민족-국가 자본주의, 소위 '우파 파시즘'이 권력의 문제에 진지한 흥미를 가지고, '시간의 힘(the power of time)'을 절실하게 여기는 사회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달리 말하자면 파시즘의 '민족-국가 자본주의' 혹은 '우파적' 변형은 곧 파시즘의 본질을 불모로 만들 뿐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민족-국가 부르주아'와 '지식'인의 결합이 다가오는 러시아 파시즘의 기초를 이룰 것이라 말하는데, 사실 그러한 조합은 세계관, 교리, 그리고 하나의 스타일로서 파시즘의 진정한 의미와 완전히 반대된다. 파시즘 현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 즉 민족-'국가 자본의 지배(The domination of national capital)' 라는 관념이 아직도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구체적인 철학적 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파시즘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파토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잘못된 개념이다.

파시즘은 분명 '민족-국가주의(nationalism)'다. 그러나 다른 민족-국가주의와는 다르다. 파시즘은 위대한 신화와 초월적 사상에 호소하는, 혁명적, 반체제적, 낭만적, 이상적 형태의 민족-국가주의다. 파시즘은 불가능한 꿈을 실행하고, 영웅과 '초인(superhuman)'의 사회를 탄생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 완전히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파시즘 경제는 사회주의 혹은 중도적 사회주의 방법을 취한다. 따라서 개인과 이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민족-국가 전체의 후생, 정의로움, 그리고 형제애라는 원칙 하에 종속시킨다. 마지막으로, 문화를 대하는 파시스트 태도는 지식인의 본질, 즉 '너무나 인간적인' 인본주의 정신에 급진적 거부를 기초로 한다. 파시스트는 지식인을 혐오한다. 지식인은 가식적 부르주아, 허세부리는 속물, 호사가, 그리고 무책임한 비겁자의 무리에 불과하다. 파시스트는 잔인함, 초인적임, 그리고 천사같음을 동시에 추구한다. 파시스트는 추위와 비극을 사랑하지만 따뜻함과 안락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파시즘은 민족-국가 사회주의의 본질적 구성요소의 모든 것을 경멸한다. 파시즘은 (민족-국가 자본이 아니라) 민족-국가적 이상주의의 지배와 부르주아 및 지식인에 맞서 싸운다. (그들을 위하지도, 함께하지도 않는다.) 파시스트의 파토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유명한 구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 프롤레탈리아여, 깨어나라!(Rise, fascist and proletarian Italy!)'에서 정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즉 파시즘의 지향점은 파시스트이자 프롤레탈리아이다. 파시즘은 노동적이고, 영웅적이고, 전투적이고, 창조적이고, 이상적이고, 미래적인 이념이다. 장사꾼을 위한 정부의 특혜와 사회적 기생충인 지식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파시즘의 관심사가 아니다. 파시스트 국가와 파시스트 신화의 중심은 농민, 노동자, 군인이다. 파시즘의 으뜸에는, 운명과 우주적 엔트로피와의 비극적 투쟁의 궁극적 상징인 신적인 지도자가 자리잡는다. 두체(duce), 퓌러(Führer), 혹은 초인으로 불리는 그는 초월적 성품과 비범한 민족-국가적 의지의 소유자이다. 물론, 파시스트 국가에도 변두리 어딘가 쯤에는 정직한 상인과 대학 교수를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배지를 달고 의례적 모임에 나선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현실에서, 그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길을 잃고, 뒷배경으로 물러나게 된다.

부르주아와 지식인에 의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아닌 민족-국가 혁명이 행해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진정하고 이상적인 파시즘의 직접적 화신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권력의 장악과 경제적 질서 확립이라는 시급한 문제로 인하여,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살라자르 등 현실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보수주의자, 민족-국가 자본가, 대기업 총수와 동맹을 맺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 타협은 언제나 파시스트 정권에 개탄스러운 결과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독일 자본가 계급이 가열한 히틀러의 광신적 반공주의는 독소전쟁의 패배로 이어졌으며, (정확히 대기업 이익의 대변인에 불과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국왕의 정직함을 신뢰한 무솔리니는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와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에 의해 감옥에 쳐박혔고, 이탈리아가 미국의 품속으로 내던져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프랑코는 추축국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여 자유주의-자본가 국가인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장 오래버틸 수 있었다. 오직 그 뿐이다. 더군다나 프랑코는 진정한 파시스트도 아니었다. 민족-국가 자본주의는 파시즘의 내적 바이러스이고, 파시즘의 약화와 소멸을 보증하는 적이다.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내부 구조는 우연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로 가득 찼으며, 파시즘의 본질적 특성과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 즉 러시아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고 파시즘에 관한 무언가를 말해선 안된다. 그것은 진정한 파시즘의 피할 수 없는 도래를 사전에 왜곡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즉 진실되고, 실재적이고,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고, 일관된 파시즘이 도래하기 이전에 일종의 예방책 차원에서사이비-파시즘을 널리 알려려는 것이다. 진정한 파시스트의 파시즘은 전적으로 러시아에서 탄생하고 강해질 것이다. 민족-국가 자본주의자들, 즉 인민을 지배하고 모욕한 이전의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체제순응주의를 따른다. 그에 걸맞게 소련 붕괴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었으며, 이제 자유민주주의의 단계가 끝나고 있으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의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변모하면서, 분명하게도, 어용 지식인을 대동한 '일당독재정치 지지자(partocrats)'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민족-국가주의에 나쁜 영향을 주고 더럽힌다는 점은 정말 확실하다.

파시즘의 본질은 새로운 위계질서, 새로운 귀족제이다. 이전과 다른 참신함은, 위계질서가 자연스럽고 근본적이며 명확한 원칙, 즉 존엄성, 명예, 용기, 영웅주의 등에 기초한다는 점에 있다. 민족-국가주의 시대에 적응하려는 구태적 위계질서는 이전의 순응적 능력, 융통성, 조심성, 불의, 사대주의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 두개의 스타일, 두개의 인간 유형, 두개의 규범체계 사이의 명확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Russian socialism

러시아 사회주의

파시즘을 극우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작금의 현상은 파시즘을 '보수 혁명'이라는 역설적 공식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정확하게 특징지어진다. 파시즘의 문화-정치적 지향점은 우파적이다. 즉 전통주의와 국가, 근원, 민족 윤리에 대한 충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경제 구상은 좌파적이다. 즉 사회 정의, 시장의 힘에 대한 제한, 신용 노예제로부터의 해방, 주식 투기와 독점 및 신탁의 금지, 그리고 정직한 노동의 최우선성을 지향한다. 단순히 '독일 사회주의'로 불리곤 했던 민족-국가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우리는 러시아 파시즘을 '러시아 사회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민족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회주의에서 의미있는 사회-경제적 교리의 성립은 관념적 도그마와 합리주의적 법에 근거하지 않으며, 지금껏 유기적으로 민족을 형성해온 실재하는 영적-윤리적, 문화적 원칙에 기초한다. 러시아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러시아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을 위하 사회주의다. 그것은 융통성 없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도그마와 구별된다. 러시아 민족-국가 사회주의는 우리 민족, 우리 역사적 전통, 우리 경제적 윤리에 헌신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특징지어지는 사회정의의 이해에서 비롯된다.

러시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탈리아보다 농촌을 지향하고, 관리적이기 보다 공동체적-협동조합적이고, 중앙집권적이기 보다 지방분권적이다. 이 모든 것이 러시아 민족적 특성의 요구사항이며, 실제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 교리에도 반영되고 있다.

New people

새로운 인민

이러한 러시아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민과 새로운 계급, 즉 영웅과 혁명가의 계급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 노멘클라투라 정당과 그들의 퇴폐적 질서의 잔재는 러시아 민족-국가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분쇄되어야만 한다. 러시아인들은 신선함, 현대성, 진정한 낭만주의, 그리고 대의를 위한 생동적 참여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이 접하고 있는 모든 것은 구태적인 애국자, 혹은 지루하고 시니컬한 자유주의자들 뿐이다. 젊고, 악의적이고, 명랑하고, 두려움없고, 열정적이고, 한계를 모르는 민족-국가 혁명 속에서 '약동적인 공격, 유행하는 침략, 극단적인 교리, 의지의 선전 악의적인 역설(The dance and the attack, fashion and aggression, excessiveness and discipline, will and gesture, fanaticism and irony)'이 휘몰아 칠 것이다. 영웅과 혁명가 계급은 건설하고, 파괴하고, 통치하고, 질서를 이행하고, 민족의 적을 제거하고, 러시아의 노인과 아이들을 상냥하게 돌볼 것이다. 그들은 격노와 즐거움을 가지고 퇴폐적이며 썩은 시스템의 성채로 진군할 것이다. 그들은 힘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있으며,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고, 역사를 창조하는 달콤한 과정에 인민을 밀어넣을 것이다. 마침내 필요한 만큼 지적이고 용감한 새로운 인민이 탄생한다.

프랑스의 파시스트 저술가 로베르 브라지야크(Robert Brasillach)는 죽기 직전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하나 남겼다. "나는 동방에서, 러시아에서 경계없고 붉은 파시즘의 부상이 보인다.(I see how in the East, in Russia, fascism is rising – a fascism borderless and red.)"

주: 눈부신 새벽의 새로운 러시아 혁명, 파시즘은, 우리의 땅만큼 경계없고, 피처럼 붋다. 그것은 색바래고 독일적이거나-좌익적인(brownish-pinkish) 민족-국가 사회주의와 다르다.

 

 

 

 

<아리안주의란 무엇인가-고결함에의한 단결>

That is the mightiest thing which our Movement must create: for these widespread, seeking and straying masses a new Faith which will not fail them in this hour of confusion, to which they can pledge themselves, on which they can build so that they may at least find once again a place which may bring calm to their hearts.”

"우리 운동이 창조해야 할 가장 중대한 것은 무엇인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길을 잃고 해매는 수많은 대중이 갈망하는 그것, 최소한 그들이 다시금 마음의 평온을 취할 장소를 찾을 수 있게 해주며,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굳게 맹세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다."-아돌프 히틀러

 

The Neolithic era saw the initial establishment and gradual spread of subsistence farming communities among human populations. It also saw the swastika sign, unique and hitherto unseen, arising in many locations across the world - in carvings, on pottery, and more. This was no coincidence, as the swastika is a symbol of the sun: the energy source on which the Neolithic farmers depended for their crops to grow. The swastika can be considered the essential symbol of what was at that point a revolutionary way of life, described in myth as the simple and peaceful Golden Age (a reference not to the metal, but to the cereal fields and the sunlight). For the first time in human civilization, we were able – unlike the gatherers – to determine our own food supply, yet - unlike the hunters, herders and plunderers - without oppressing others. All it required was willingness to do the necessary work and to reject greed.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자급적 농업 공동체의 시작과 점진적 확산을 겪었다. 또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독특한 스와스티카(swastika) 표식이 새겨진 조각품과 도자기 등을 전세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표식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는데, 스와스티카가 태양, 즉 신석기 농민들이 농작물 재배를 위해 유일하게 의존했던 에너지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스와스티카는 [우리가 바라는] 순수하고(simple) 평화로운 황금 시대의 본질적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 인류 문명은 최초로 -수렵채집이 아닌 방식으로- 식량 공급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으며, -사냥꾼, 약탈자, 유목민족과 달리-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 없이 [비폭력적으로] 그럴 수 있었다. [농경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은, 해야만 하는 일을 기꺼이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 뿐이다.

The term “Aryan” derives from the root ”ar-” meaning “to till soil” or, more generally, to do self-sufficient labour. The same root can be found in terms such as “arable land” (= land suited for Aryans) or the Latin “aratrum” (= Aryan instrument), and even in the NSDAP (=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The Artaman League that was eventually absorbed into the NSDAP had the same idea but had decided to use the new word “Artaman” (literally “agriculture man”) coined by Willibald Hentschel before it was pointed out to them that the ancient word “Aryan” already expresses the etymological meaning they required. In an ideological sense, an Aryan is anyone who is innately inclined towards a lifestyle relying on personal effort and frugality, involving no oppression of others in any way. It is from this that arises the association of Aryans with nobility - the opposite of Jews with their concept of non-Jews as Goys, and similarly of Gentiles with their concepts of those outside their tribes as non-persons when it comes to ethics.

'아리아인(Aryan)'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ar-'에 근거하는데, 이는 '토지를 개간하는 것(to till the soil)',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자급자족 농업을 하는 것(to do self-sufficient labour)'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다른 용어로, '농지(= 아리아인에게 적합한 땅, arable land)', 라틴어 단어 '쟁기(= 아리아인의 도구, aratrum)', 그리고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SD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등이 있다. NASDP에 최종적으로 흡수된 [독일의 농본주의-민족주의 단체인] '아르타만 연맹(Artaman League)'은, [농본주의 사상가] 빌리발트 헨첼(Willibald Hentschel)의 독창적 신조어 '아르타만(= 농업의 인간, agriculture man)'을 사용했는데, 사실 고대 단어인 '아리안'에 이미 그들이 필요로 하는 어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근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아리아인은 개인의 노력과 검소함에 근거한 생활 방식에 본질적으로 이끌리는(innately inclined) 모든 사람(anyone)이다. 이 정의에 타인에 대한 억압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아리아인과 '고결함(nobility)'을 결합시키는 원천이다. 정반대 [의미를 가진 용어] 로, 유대인이 '비유대인(non-Jews)'을 경멸하는 표현인 '이교도(Goys)'가 있다. [그러나 비단 유대인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Gentiles)' 대부분 역시, 윤리적 측면에서 자기 집단(tribes) 소속이 아니라면 '하찮은 존재자(non-persons)'로 취급하곤 했다.

“The foundation of the Aryan struggle for life is the soil, which he cultivates, and which provides the general basis for an economy satisfying primarily its own needs within its own orbit through the productive forces of its own folk.”

"아리아인이 삶의 투쟁의 토대로 삼는 것은 그가 일구는 '토지(soil)'이다. 토지는 민족 고유의 생산력을 통해 [민족] '영향권(orbit)' 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의 보편적 기초이다."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

“Neither Jewry, alien to the soil, nor Rome, equally alien to the soil, recognizes the idea of honour. More precisely, they do not recognize this idea because there is no longing active within them for farmland.”

"토지에 익숙치 못한 유대인과 로마인은 '명예의 사상(the idea of honour)'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농지(farmland)'에 대한 내적 갈망이 없기 때문에 이 사상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Alfred Rosenberg,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As agriculture was the principal labour in that early state of society when we must suppose most of our Aryan words to have been formed and applied to their definite meanings, we may well understand how a word which originally meant this special kind of labour, was afterwards used to signify labour in general. … Now in modern German, arbeit means simply labour; arbeitsam means industrious. In Gothic, too, arbaiþs is only used to express labour and trouble in general. But in Old Norse, erfidhi means chiefly ploughing, and afterwards labour in general; and the same word in Anglo-Saxon, earfodh or earfedhe, is labour … and in the English errand, and errand-boy, the same word is still in existence.”

"아리안 단어(Aryan words)'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그 명확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초기 사회의 주요 노동인 농업이다. 우리는 농업이라는 특정한 노동만을 의미했던 단어가, 추후에 어떻게 노동 일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현대 독일어에서 'arbeit'는 정말 노동만을 의미하고, 'arbeitsam'은 근면함을 의미한다. 고트어에서, 'arbaiþs'는 노동 혹은 노동에 관련된 사안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고대 노르웨이어에서도, 'erfidhi'는 주로 쟁기질을 의미했으나, 나중에 노동 일반을 의미하는 용어로 변모하였다. 마찬가지로 앵글로-색슨 단어 'earfodh'와 'earfedh' 역시 노동을 의미한다. … 영어에서는, 'errand(심부름)' 그리고 'errand-boy(심부름꾼)' 등의 단어가 그 흔적을 보여준다."

Max Mueller, 막스 뮐러

Today, notwithstanding immense changes in technology and living conditions compared to prehistoric times, the fundamental divide in society remains between non-Aryans (whoever has no problem with oppression) and Aryans (whoever is disgusted by such practice), with Aryans outnumbered by non-Aryans (be they Jewish or Gentile) in every nation in the world. Unity among Aryans, the noble minority regardless of colour, wealth, education or other false denominational divides, in other words UNITY THROUGH NOBILITY, is essential if we are to advance the ideals we value. As a movement, we therefore differ from most others which share our cause in that we place much less emphasis on trying to convert bad people to good ideas, and much more emphasis on finding and gathering the good people, as Miguel Serrano recalled: “I realized that I would only achieve limited success among a small number of those I spoke to, whom I might just be able to save before an entire generation plunged into the abyss.” This is Aryanism.

선사시대와 비교할 경우, 오늘날의 기술 및 생활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했음에도, 비-아리아인(억압을 행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든 사람)과 아리아인(억압적 관행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사회적 차이는 여전한데, (유대인과 비유대인 전부를 포함한) 전세계의 모든 민족에서 비-아리아인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인종, 부, 교육수준을 비롯한 모든 잘못된 분모와 관계없이, '고결한(noble)' 소수의 아리아인들의 단결이 절실히 요구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고결함을 통한 단결(UNITY THROUGH NOBILITY)'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치있는 이상의 발전을 도모한다면, 이 단결은 필수적이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대부분의 다른 운동과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우리는 '나쁜 사람(bad people)'이 '좋은 생각(good ideas)'을 갖도록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은 '좋은 사람(good people)'을 발굴하고, 그들을 위한 구심점을 형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미구엘 세라노(Miguel Serrano)가 상기하듯,

“I realized that I would only achieve limited success among a small number of those I spoke to, whom I might just be able to save before an entire generation plunged into the abyss.”

"나는 오직 제한된 성공만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가 대화를 통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인구 전체가 나락으로 추락하기 전에 오직 소수만을 구할 수 있다.

Miguel Serrano, 미구엘 세라노

이것이 '아리아주의(Aryanism)'다.

Quality, Not Ethnicity

민족성이 아니라 자질

“We do not conclude from a man’s physical type his ability, but rather from his achievements his race.”

"우리는 물리적 신체 유형으로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지 않는다. 업적이 인종[의 능력]을 결정한다."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

If the prehistoric subsistence farming lifestyle was innovated by a single group of people and then diffused geographically, then it is clear why there have been such anthropological terms as “Aryan languages” and “Aryan race”. It is equally clear why mere speakers of Aryan languages and mere (supposed) descendants of the original Neolithic Aryan root race are themselves not necessarily Aryans. Speaking a language originally spoken by noble people does not make the speaker noble. Nor does descent from people possessing noble traits guarantee that such traits are expressed in subsequent generations due to defective mutations and lineal admixture. Conversely, if one carries noble traits by blood, being raised to speak a language of another origin or possessing a certain phenotype does not cause these traits to be negated. Whichever way we choose to examine the issue, the conclusion is that Aryans can only ever be distinguished by their nobility itself.

만약 선사시대의 자급적 농업 생활양식이 하나의 민족집단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그 후에 지리적으로 확산되었다면, 아리아인 언어와 아리아인 인종의 존재는 인류학적 맥락에서 명백하다. 그러나, 아리아인 언어를 사용하는 신석기 아리아인의 (추정된) 후손이 반드시 아리아인이 아닐 수 있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고결한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고결함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 고결한 민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곧 선조의 특성이 후대에도 완전히 표현됨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결함있는 돌연변이 혹은 혼혈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민족이 혈통적으로 고결하지 않고, 아리아인 언어가 아니라 다른 기원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성장했으며, 특정한 '유전적 성질(phenotype)'을 소유하기 때문에, 아리아인의 특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떤 방향에서 탐구하든, 결론은 하나이다. 아리아인의 자격은, 개인의 개별적 고결함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Populism, Not Elitism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대중주의

“Nobody set me over the people. Grown up among the people, I have ever remained one of the people, and to the people will I return.”

"그 누구도 나를 민족 위에 둘 수 없다. 나는 민족의 일원으로 성장했으며, 여전히 민족의 일원으로 남아있고, 민족으로 돌아갈 것이다."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

The majority of people in present-day society lack the quality we demand of members of a noble society, and we want only the few rare Aryan individuals to lead our movement, and eventually to lead any National Socialist states that our movement succeeds in establishing. With that said, we do not support social hegemony of the supposedly ‘noble’ over the ordinary, as hegemony of any kind is ignoble in itself. Rather, the aim is a society where nobility becomes the ordinary and popular condition. We aim not at a permanent Aryan aristocracy over non-Aryan masses, but of a fully Aryanized folk yet to come.

현대 사회의 대다수는, '고결한 사회(noble society)'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요구하는 자질이 부족하다. 우리는 소수의 희귀한 아리아인만이 우리 운동을 이끌기 원한다. 그렇게 하여 결국 우리 운동이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설립에 도달하길 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고결함'을 상정한 사회적 헤게모니의 한 유형을 지지하지 않는다. 모든 헤게모니는 그 자체가 '미천(ignoble)'하다. 우리는 고결함이 평범하고 대중적 조건으로 자리잡은 사회를 목표로 한다. 우리는 영구적인 아리아인 귀족이 비-아리아인 대중을 지배하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히 '아리아화된(Aryanized)' 민족의 형성을 추구한다.

Racial Idealism, Not Racial Identity

인종적 정체성이 아니라 인종적 이상주의

“Those who see in National Socialism nothing more than a political movement know scarcely anything about it. It is more even than a religion. It is the will to create mankind anew.”

"민족사회주의를 정치적 운동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민족사회주의에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민족사회주의는 심지어 종교 이상의 무언가이다. 민족사회주의는 인류를 새로이 창조하려는 의지이다."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

We have no reason to disbelieve that there exist heritable noble traits, and no reason to disagree that such traits should be demographically - including biologically – promoted if we wish for a less exploitative, more compassionate society. By this very goal it follows that we are wholly unconcerned with preserving present-day ethnocentric racial identities (e.g. ‘black’, ‘white’), every single one of which is merely a crude bundle containing noble as well as (far more predominantly) ignoble heritable traits. Indeed we are necessarily ideological opponents of all such “racial preservationists”, whom we consider tantamount to deliberate preservers of cruelty and injustice. We consider all historical civilizations to fall far short in moral quality compared to the new Golden Age civilization we could manifest with ease in a society unanimously composed of people like ourselves who value kindness and fairness and thus reject oppression in any form.

고결한 유전적 특성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구통계학적, 혹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만약 우리가 덜 착취적이고, 보다 동정어린 사회를 원한다면, 고결한 특성이 촉진되리라 예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바로 이 목표에 따라, 우리는 ('흑인' 혹은 '백인' 따위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민족-중심적 인종 정체성의 보존에 정말 무관심하다. [오늘날의 모든 민족은] 고결하거나 미천한 유전적 성질이 뒤섞여 있는 (그리고 미천한 성질이 훨씬 더 지배적인) '조잡한 묶음(crude bundle)'에 불과하다. 정말로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인종 보호주의자(racial preservationists)'에 반대한다. 인종 보호주의는 곧 잔혹함과 불평등을 고의적으로 보호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황금기 문명(the new Golden Age civilization)'은, 친절함과 공정함을 중시하며,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아리아인으로 완전하게 구성된 사회이며, 모든 역사적 문명보다 우월한 도덕적 자질을 보유한다.

Triumph of the Will

의지의 승리

“Everything is what you make of it, even yourself.”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Joseph Goebbels, 요제프 괴벨스

Large-scale demography and breeding of future generations are things to worry about later. Our most immediate priority is to unite the Aryan individuals of today, wherever such individuals may be found and whatever skills and resources they may be able to offer, into one folk under one ideology so that we may start working together towards our common goal. In the words of Rudolf Hess: “Imbue them with the spirit of camaraderie, free from the old concepts of class and ancestry, with the spirit of community, of the sacrifice of each for the other, of the spirit to accept privation for the sake of an idea.”

대대적 인구변동, 혹은 미래 세대의 번식 문제는 추후에 걱정할 사안이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오늘날의 아리아인들을 하나의 이념 아래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어떤 기술과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지 무관하게,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다. 루돌프 헤스(Rudolf Hess)의 표현을 빌리자면,

“Imbue them with the spirit of camaraderie, free from the old concepts of class and ancestry, with the spirit of community, of the sacrifice of each for the other, of the spirit to accept privation for the sake of an idea.”

"그들에게 동지애정신을 고취시켜 계급과 조상의 낡은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라. 또 공동체정신과 희생정신을 불어넣어,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상을 위해 궁핍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라."

Rudolf Hess, 루돌프 헤스

At this stage, we care not whether you were born with nobility or whether you learned nobility through intellectual or spiritual study, or through personal life experiences. One who can overcome an inherited defect through exertion of will is individually (even if not heritably) as Aryan as one without that defect in the first place. We care not how you arrived here, we care that you are ready to join us and make your nobility count in the struggle for the future direction of the world.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당신의 고결함이 타고난 것인지, 지적인 혹은 영적인 학습을 통해 배운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인생 경험으로 체득한 것인지의 여부를 신경쓰지 않는다. 의지와 노력으로 유전된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유전되지 않았다고 한들) 애당초 결함없는 아리아인의 개별적 지위를 보유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당신의 고결함을 세계의 미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Things and people do not have to be what they are. We can control ourselves; we can empathize. We can do the honourable thing. But most of all we can will to be more than we are: we can consciously continue our evolution in a positive way, which means striving to avoid harming other people and the other life with which we share this planet. We can and could create a noble, free society, based as such a society must be on the concept, the ideal, of personal honour.”

"사물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명예로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의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방식을 통해, 모든 것을 계속하여 의식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긍정적인 방식이란, 우리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 혹은 생명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노력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인적 명예라는 이상적 개념에 기초하여, 고결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고, 만들 수 있었다."

David Myatt, 데이비드 마이어트

If nobility is what fundamentally defines you and drives your actions, then you do not belong with your social class, ethnicity, religion or culture; you belong with us. Please use our motto - UNITY THROUGH NOBILITY - on your blogs, channels, profiles, signatures, and wherever else you wish to openly declare yourself part of our movement. Together we can make our vision real.

만약 당신이 스스로의 근본을 고결함으로 정의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사회적 계급, 민족성, 종교, 또는 문화에 속하지 않는다. 당신은 우리의 일부이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우리 운동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싶다면, 우리의 구호 '고결함을 통한 통일(UNITY THROUGH NOBILITY)'을 당신의 블로그, 유튜브 채널, 프로필, 서명 등에 기재하라. 함께한다면 우리의 전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파시즘 인간관의 개인주의적 성격>

Olena Semenyaka

올레냐 세메얀카

National University of “Kyiv-Mohyla Academy”

키이우-묠라 아카데미 국립대학교

Transformation of Ernst Jünger’s alternative to the bourgeois individual

Introduction

개요

Ernst Jünger’s personality and writings have always been surrounded by heated debates between his admirers and haters. Quite expectedly, the main source of this passionate attitude lays in Ernst Jünger’s biography, namely his undeniable ideological commitment in the development of National Socialism (1). Although in philosophical-political relation he is a foremost member of the Conservative Revolution, the later is equally arguable phenomenon because of its historical connectedness with the totalitarian regimes.

민족사회주의 발전에 있어 지대한 이데올로기적 공헌을 남긴 에른스트 윙거(Ernst Jünger)의 개성(personality)과 저작은 오랜 시간 동안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각주 1) 철학적-정치적 맥락에서 그는 보통 20세기 초 독일의 '보수혁명(conservative revolution)'의 매우 중요한 일원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후 전체주의 정권과 맺은 관계 역시 역사적으로 매우 논쟁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However, the reason why the Conservative Revolution is also called “The Third Position” or “The Third Way” (2) is the impossibility to refer it to some kind of a right or left ideology. The same is sound in Jünger’s case for his political beliefs have never walked hand in hand with those of National Socialism. This difference became the most explicit in the post-war writings of Jünger. Our research will focus on the transformation of Jüngerian alternative to the bourgeois individual as the gradual crystallization of the genuine conservative-revolutionary ideal of a human. Moreover, we will argue that namely postideological “end of the history” warrants the possibility to testify unchangeable since the Weimar Republic or whatsoever else essential core of the phenomenon. Therefore, starting with Jünger’s journalism during the Weimar years resulted in the Conservative Revolution manifesto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 (1932), we will proceed to his far later work, that is the futuristic novel “Eumeswil” (1977).

그렇지만, 보수혁명을 '제3의 입장(The Third Position)' 혹은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각주 2) 그것이 우파 혹은 좌파 이념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윙거의 정치적 신념은 민족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민족사회주의와 윙거의 차이는 전후 저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의 연구는 '부르주아 개인(bourgeois individual)'의 대안으로서 윙거가 제시한 보수혁명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점진적 [즉, 100년이 넘는 윙거의 삶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간 이상적 인간상 개념의] 구체화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역사의 종언(end of the history)'이라는 포스트-이데올로기가 바이마르 공화국과 모든 유사(whatsoever) 현상의 불변하는(unchangeable) 본질적 핵심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이마르 시대에 발표된 윙거의 보수혁명 선언문인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 (1932)을 시작으로, 훨씬 후기의 미래주의 소설인 “Eumeswil” (1977)까지 파악하고자 한다.

Accordingly, we will explore the shift from Jünger’s central pre-war concept of the Worker, which corresponds with the supposed substitution of the liberal individual by the new human type, to his post-war much more individualistic but still non-liberal concept of the Anarch. The latter, absorbing some traits of the “type,” still will be taken as the fullest explication of that ideal.

이에 따라 우리는 윙거의 전쟁전 핵신 개념인'노동자(the Worker)'의 의미변화를 탐구할 것이다. 윙거의 노동자 개념은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서 자유주의적 개인을 대체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전후에 윙거는 보다 개인주의적이나, 여전히 자유주의적이진 않은 '아나크(the Anarch)' 개념으로 주안점을 옮긴다.'아나크'는 [윙거가] 인간 '유형(type)'이 가지는 특성(traits)에 골몰한 결과물인데,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완전한 탐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What is worth mentioning, Jünger himself has never spoken of the type in terms of the ideal. Moreover, he has never applied the syntagm “conservative revolutionist” to indicate his philosophical-political attribution. He used much more laconic title “nationalist.” Although his famous tract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 written in 1932, is highly estimated as an exact prediction of the coming military-industrial world, in the preface Jünger insists that he makes nothing but a direct description of the current observable history. He does not prescribe what should be or assume what is going to be; he reflects what exists here and now. Hence we will summarize his most valid for our research observations presented in his text “The Worker.”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언급해야할 점은, 윙거 자신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려는] 맥락에서 그러한 인간 유형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철학적-정치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보수혁명주의자(conservative revolutionist)'라는 어구(syntagm)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는 훨씬 더 간결한 명칭인 '민족주의자(nationalist)'를 선택했다. 1932년작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에서, 윙거는 다가오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world)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서문에서 자신이 그저 관측가능한 당대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뿐이라 주장했다. 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될 것인지 규정하거나 상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 지금 당장 실존하는 것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의 'The Worker'가 우리의 연구계획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사안만을 요약할 것이다.

The Worker

노동자

Death of the individual

개인의 죽음

First, Jünger proudly admits that the Germans have never succeeded in being proper bourgeois. Consequently, the near downfall of the bourgeois order here is extremely welcome. Nevertheless, not only Germany but the whole world will witness soon the overthrow of the regime. The sign of the new times can easily be seen in the bourgeois’ being sentenced to death, whatever form they take upon — that of the individual or of the mass. Jünger affirms that humans are no longer individuals or persons. Likewise, the mass is not a sum of individuals or their calculable multiplicity. Even if the pretext of people gathering, instead of duties, business or profession, is policy, entertainment, and spectacles, it is impossible to overlook these changes. Everywhere can be noticed specific passion for the uniform and for one rhythm of senses, thoughts, and movements. Death of the individual varies from the exhaustion of the poet and artist whose works now border on absurdity to countless anonymous perishes of starvation. The individual with the familiar journal and coffee, with unique feelings and ideas became an endlessly provincial figure.

첫 번째, 윙거는 독일인들이 결코 적절한 부르주아로 성공하지 못했음을 자랑스럽게 인정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 질서의 붕괴가 도래하고 있다는 점은 극도로 환영할 일이다.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곧 부르주아 정권의 전복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조는 부르주아의 사형선고로 간주될 수 있다. '개인(individual)'으로서의, 혹은 '대중(mass)'으로서의 부르주아 모두 말이다. 윙거는 인간이 더 이상 [부르주아 사상적 맥락에서의] 개인(individual) 혹은 개별자(person)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찬가지로, 대중 역시 [부르주아적 정의인] 더 이상 개인 혹은 계산할 수 있는 다수 인간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는 이유가 의무, 사업, 혹은 전문성 때문이 아니라 정책, 오락, 구경거리 때문이라 해도, [부르주아 질서 붕괴에 따른] 그러한 [대중 혹은 집단이 가지는 의미의] 변화를 간과할 수는 없다. 어디에서나 '자기와 같은 동일성(uniform)'과 감각, 사상, 운동의 '율동적 변화(rhythm)'를 갈망하는 [맹목적인 대중의 모호함이 아니라] 명확한 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적] 개인의 죽음은 이제 부조리를 탐닉하는 시인과 예술가의 소멸에서부터 굶주림에 죽어간 수 많은 이름 없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특정 계층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다양하다. 독특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커피를 마시며 저널을 읽는 것에 친숙한 [부르주아적] 개인은 이제 끝없이 옹졸한(provincial) 인물상이 되었다.

The raise of the type

유형의 부상

Second, Jünger contends that ruin of the individual implies the change of domination. The bourgeois individuals do not vanish without leaving a trace — they are compulsory replaced by the new human “type” which manifests its will to power now. This type is the Worker. Here Jünger makes a series of crucial remarks. He emphasizes that, unlike the bourgeois, the Worker is not an estate. Jünger believes that namely bourgeois are responsible for the destruction of the ancient phenomenon of estate which is now nothing but a mask covering somebody’s interests. Neither is it a class in a sense of the revolutionary dialectic of the XIXth century. What makes Jünger’s position rather special, the Worker should not be confused with the proletarian. He claims that it is necessary to forget the legend about the economic quality as the main feature of the Worker. No wonder that the Worker uses bourgeois vocabulary and sets the questions in outmoded notions for the rebellion of workers was prepared in the school of the bourgeois thought.

두 번째, 윙거는 [부르주아적] 개인의 파멸이 지배의 변화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개인이 흔적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즉,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는 새로운 인간 '유형(type)', 즉 노동자로 강제 대체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윙거는 매우 결정적인 발언을 남기는데,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와 달리 노동자는 신분(estate)이 아니다. 윙거는 부르주아가 신분의 [보다 긍정적인] 오래된 의미를 파괴했으며, 그저 특정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부정적 늬앙스를 가지는] 단어로 왜곡시킨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는 19세기의 혁명적 변증법의 의미에서 계급(class)도 아니다. 윙거의 노동자 개념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프롤레탈리아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윙거는 노동자의 기본 특성이 경제적 수준에 있다는 신화를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어휘를 사용하며, 낡은 개념을 토대로 하여 노동혁명을 위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상의 학파에 의해 마련된 상황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However, now the Worker’s primal task is to quit thinking, feeling, and existing in the old bourgeois forms. Jünger carefully separates this gesture from the romantic disobedience. Society renews itself by artificial self-attacks, incorporating all its contraries as the ‘manifestations of freedom.’ That is the reason why the term “radical” gained the unbearably bourgeois shade. Besides, the bourgeois, irrespective of their approval or disapproval, have always treated the worker movements as movements of the slaves. However, Jünger’s central point that now it is undoubtedly the movement of the masters. After the Workers left behind their anarchic roots, their demands can be fulfilled only by novel aristocracy.

그리하여 노동자의 우선 과제는, 낡은 부르주아 방식으로 생각함, 느낌, 존재함을 중단하는 것이다. 윙거는 이러한 의사표현을 낭만주의적 불복종과 조심스레 구별하고자 한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는 인위적인 자기-공격 [즉, 부르주아 개념에 기초하여 부르주아에 반대하고자 하는 노동자들] 에 의해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모든 [사회적] 모순을 '자유의 표현(manifestations of freedom)' [즉, 개인의 자유를 보장함에 따라 당연히 사회적 모순이 발생하므로 문제가 없음] 으로 통합한다. '급진적(radical)'이라는 표현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르주아적인 색조를 얻게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지금의 사유체계에서 '급진적'인 것은 모두 부르주아적 개념에 기초했기 때문에, 아무리 급진적이라고 한들 결국 부르주아적이다.] 부르주아는 그들에 반대하건 찬성하건 상관없이 언제나 노동자의 운동을 노예의 운동으로 취급해왔다. [즉, 부르주아에 대한 반대 혹은 찬성 모두 결국 부르주아적 방식에 기초해있다.] 그러나, 윙거는 멩거는 두 가지 핵심점을 지적한다. 우선적으로, 노동자의 운동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주인(master)의 운동이 되었다. 또 노동자의 요구가 언제나 새로운 귀족 [부르주아] 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의 '아나크적 근원(anarchic root)'에서 탈피했기 때문이다.

Gestalt of the Worker

노동자의 게슈탈트

Third, Jünger’s prophetic-like sketch of the forthcoming tendencies grounds on his vision of what he regards as gestalt of the Worker. The latter turns his widened philosophical-political essay into the metaphysical tract. For Jünger the ability to comprehend gestalt equals to the revolutionary act insofar it allows to recognize the unity of being beyond all the moral, aesthetic, and scientific evaluations. Gestalt, similarly to Platonian ideas, is the whole which exceeds the sum of its constituents. Thus the more the individuals feel their involvement into the world of work the more they apprehend themselves as representatives of gestalt. The inference is not that they disappear or have some kind of meaning merely as members of the corporations, communities, and unities of the highest order. Gestalt is embodied in a separate human, too. Accordingly, the Worker is represented both by those superior forms of the individual which are covered by Nietzsche’s image of Übermensch and by all those “ant gatherings” where any encroachment on independence is nonsense.

세 번째, 윙거의 예언적 전망의 근거는 그가 '노동자의 게슈탈트(gestalt of the Worker)'라고 말하는 비전에 있다. 윙거 후반기의 철학적-정치적 에세이의 주제는 형이상학적이다. 윙거에 따르면, '게슈탈트(gestalt)' [윙거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심리학적으로 이 단어는 '세계와 사물을 의미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조직화된 방식'을 의미함] 를 이해하는 능력은, 모든 도덕적, 미적, 과학적 평가를 넘어서 존재 단결을 인식하는 혁명적 행위이다. 플라톤 사상과 유사하게도 그의 게슈탈트 개념은 그 구성원 합계를 초과하는 전체이다. [즉, 인식의 조직화된 방법으로서 게슈탈트는 단지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짐] 따라서 개인들이 노동세계에 더 많이 관여한다고 느낄 수록, 그들은 스스로를 게슈탈트의 대표자로서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이 추론이 개인의 소멸과 단지 최상위 질서인 기업, 공동체, 통일체의 일원으로서만 개별 인간이 의미있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게슈탈트는 물론 개별 인간으로서도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는 [상반되는 듯한] 두 개의 우수한 개인의 형태에 해당한다. 하나는 니체의 '초인(Übermensch)'으로서의 인간 형상(image)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립에 대한 어떤 침해도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한마디로 군집이면서 동시에 개별자가 의미를 가지는] '개미 집단(ant gatherings)'으로서의 인간이다.

Total mobilization

총동원

Further, Jünger alleges that work is not activity solely. In the same way, it is not opposite to leisure time which is now organized in a rather special manner. Regardless of whether it takes the form of celebration, of entertainment or, what is the most symptomatic, of sport, it does not differs much from work itself. The projection of work as a particular way of life is technology. As one of the most cited formulas from “The Worker” declares, technology is means by which the gestalt of the Worker mobilizes the world.

게다가, 윙거에 따르면 노동은 단지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은 현재 다소 특별한 [부르주아적] 방식으로 조직화된 여가시간(leisure time)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축제의 형태이던, 오락의 형태이던, 스포츠의 형태이던, 모든 여가는 노동 자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노동이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서 '기투(projection)'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노동의 기투는 곧 기술(technology)이다. 'The Worker'에서 가장 많이 보여진 공식에 따르면, 기술은 노동자의 게슈탈트가 세계를 동원하는(mobilize) 수단이다.

This corresponds with the new state of society which Jünger calls the state of total mobilization in his essay with the same heading. It means that all domains of life all over the world fall under character of war prepared by the rapid development of technology. As Alain de Benoist remarks,

이는 윙거가 동명의 에세이에서 '총동원 상태(the state of total mobilization)'로 명명한 새로운 사회 상태와 일치한다. 이는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의 모든 삶의 영역이 전쟁의 성격을 지니게 됨을 의미한다. 알랭 드 베노이스트(Alain de Benoist)의 말대로,

At the same time as war becomes a technical undertaking, the traditional distinction between combatant and non-combatant breaks down. Even the notion of war and peace gives way to the reality of permanent global conflict. Even the pacifist has to be ready to fight for his beliefs! The decisive aspect of the new state of affairs is the fact that all are potentially involved in war and all are available for mobilization.

전쟁이 기술적 사업(technical undertaking)이 됨과 동시에, 전투원과 비-전투원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무너진다. 전쟁과 평화라는 개념조차 항구적인 세계 갈등에게 현실의 자리를 내어준다. 평화주의자조차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의 결정적인 점은, 모두가 잠재적으로 전쟁에 연루되어 있고,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Similarly, the type of the Worker displays far more militant sides than those of bourgeois individual. It is notable for much easier treatment of death. It is close to the elemental. And it is endowed with radically different sense of freedom which leads to new hierarchy. The type is ready to act at a command without the odd “what for?” and “why?” It loses false and gains original autonomy. In other words,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유형은 부르주아 개인의 유형보다 훨씬 더 전투적인 면모를 보인다. 노동자는 죽음을 훨씬 더 가볍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점은 노동자의 본질에 가깝다. 그리고 노동자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와는] 다른 '자유의 감각(sense of freedom)'을 타고나 [부르주아적이지 않은] 새로운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노동자 유형은 '무엇을 위해?(what for?)'와 '왜?(why?)' 라는 이상한 [부르주아 계몽주의적] 물음 없이 명령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노동자는 [자유로 포장된 부르주아의] 거짓을 잃고 본래적 자율성(autonomy)을 얻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The individual whose demise Jünger so joyously proclaims is not altogether identical with the individual person; rather it is the bourgeois individual, the Individuum, born of the philosophy of the Enlightenment, a creature struck from its roots, from its heritage, is in contrast with the Einzelne, the individual person, whose identity is situated in an “organic environment.” The Individuum is “most charming invention of bourgeois sentimentality... a part of the mass, which is the contrary of a people.” So the individual is just “mass” in smaller letters (De Benoist).

윙거가 기쁘게 선언하는 [부르주아] '개인(individual)'은 [노동자] '개별자(individual person)'와 전적으로 다르다. 부르주아 개인으로서 '개체(Individuum)'는 계몽주의 철학을 근본으로 삼으며 그 유산에서 태어났다. 이는 [노동자의 개념인] '유일자(Einzelne)'로서 개별자와 대조적이다. 유일자의 정체성은 '유기적 환경(organic environment)'에 있다. 부르주아적 개인은 "부르주아 감성의 가장 매력적인 발명품이며 ... '인민(people)'의 정반대로서 '대중(mass)'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의 맥락에서] 개인은 [인민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의미에서 대중을 의미할 뿐이다.

The Anarch

아나크

This enables us to link Jüngerian type of the Worker to his post-war figure of the Anarch in spite of the cardinal change of the historical landscape. At a glance it is an absolute inversion of the type for the Anarch means nothing but a sovereign individual. There are no commands from above for there is no hierarchy the same as there is no gestalt to be mobilized by. Still Jünger does not rehabilitate the bourgeois individual.

이러한 분석에 입각하여, 우리는 [세계대전 전과 후에서 보이는 윙거의] 역사적 전망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에도, 그의 전쟁전 노동자 유형을, 전후의 '아나크(the Anarch)' 인간상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윙거의 아나크 개념은 주권을 가진 개인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노동자 유형의 완전한 역행으로 느껴진다. 아나크 개념에는 위계질서가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명령도 없다. 마찬가지로 동원에 필요한 게슈탈트가 없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여전히 윙거는 부르주아 개인을 복권하지 않는다.

Quite the reverse, he tries to overcome its persistence. Both the Worker and the Anarch satisfy the negative definition “the antipode of the bourgeois.” But they oppose the bourgeois in a different way, taking into account that “time of the great ideologies” is over. While the Worker lays claim to planetary validity, the Anarch has to resist the tyranny of modern political nihilism. The point is that now there is nothing to be mobilized for, except of the “petty functionary.” Nevertheless, as Jünger states in “Eumeswil,” the Anarch always remains aware of his essential freedom.

[그의 전쟁후 아나크 개념이 전쟁전 노동자 개념과 상이하다는 분석과는] 정 반대로, 윙거는 [여전히] [부르주아 개인의] 그 지속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부르주아의 대척점(the antipode of the bourgeois)'이라는 소극적 정의를 기준으로 할 경우, 노동자와 아나크는 모두 이에 부합한다. 그러나 '위대한 이데올로기의 시간(time of the great ideologies)'이 끝났기 때문에, [즉, 부르주아에 맞설 하나의 단일 이데올로기가 사라졌기 때문에] 노동자와 아나크가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노동자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전지구적 타당성(planetary validity)'을 주장하는 반면, 아나크는 현대 정치적 허무주의의 횡포에 [즉, 자유주의가 가져온 잘못된 개인주의에] 저항한다. 요점은 이제 '쁘띠-공무원(petty functionary)' [즉, 부르주아 체제에 야합하는 사람들] 외에는 동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Eumeswil'에서 윙거가 말하는 것 처럼, 아나크는 [동원이나 게슈탈트 없이도] 항상 그의 본질적 자유를 의식한다.

He can get away at any time, not just from the train, but also from any demand made on him by state, society, or church, and also from existence. He is free to donate existence to Being, not for any pressing reason but just as he likes, whether out of exuberance or out of boredom (154-155).

그[아나크]는 '무리(train)'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 종교가 그에게 요구한 어떤 것으로부터도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 그는 어떤 긴급한 이유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던, 아니면 지루하기 때문이던, 존재에 대한 기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This non-collectivistic disposition veiled by the image of type in “The Worker” became the very definition of the Anarch in “Eumeswil.” In order to avoid confusion, let us at once assert in Jünger’s terms that although concept of the Anarch depends on Stirner’s thought, the Anarch is to the anarchist, what the monarch is to the monarchist. Moreover, Anarchs’ state is the state that all Anarchs carry within themselves. The difference is that the monarch desires to rule many or even all people, whereas the Anarch wants to rule only himself. Besides, on the contrary to anarchist, the Anarch is capable of leading a lonesome existence. Unlike the anarchist, the Anarch sees little difference between regimes and will not fight against the system. According to Abdalbarr Braun,

'The Worker'에서 인간유형이라는 형상에 의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베일에 쌓인 [윙거의] 비-집단적 기질이, 'Eumeswil'는 바로 아나크의 정의로 자리잡는다.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윙거의 아나크 개념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사상에 의존하고 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아나크는 '모나크(the monarch)'와 대조된다. 전자는 물론 아나키스트이며 후자는 왕정주의자이다. 아나크의 상태는 모든 아나크들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상태를 반영한다. [즉, 아나크는 개별적이다.] 모나크와 아나크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모나크는 많은 사람, 심지어 모든 사람을 [자기 의지로] 지배하길 원하지만, 아나크는 자기 자신만을 지배하길 원한다. 여기에 더해, 일반적인 아나키스트와 반대로, 아나크는 외로운 실존을 영위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와 달리, 아나크는 여러 정권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고 여기며, 체제에 대항해 싸우지 않는다. 압달바르 브라운(Abdalbarr Braun)에 따르면,

It is not his goal to be dialectically resistant to the tyranny, rather he is observant as if following the Confucian code: “Attacking false systems merely harms you.”

폭정에 맞서 변증법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그 [아나크] 의 목표가 아니다. "잘못된 체제를 공격하는 것은 단지 당신에게 해가 될 뿐이다." 라는 유교적 규칙을 따르듯, 그저 관찰할 뿐이다.

At first sight, this posture is hardly compatible with the image of the Worker. On the other hand, Jünger believes that the Worker easily can do without dictatorship for freedom and obedience here are the same. Dictatorship is a transitional form necessary for the destruction of the bourgeois world obsessed with the insurance of safety. Similarly, as predecessors in the Weimar years, the Anarch sees no point in the denial of authority.

얼핏 보기에, 이 [아나크의] 태도는 노동자의 형상과 거의 양립할 수 없는 것 같다. 한 번 다른 면에서 보자. 윙거는 노동자가 자유와 복종의 독재 없이도 [무엇이던] 쉽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독재는 그저 안전이라는 보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세계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과도기 형태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와 유사하게, 아나크 역시 권위의 부정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렇듯 노동자가 늘 권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아나크가 늘 권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I am an anarch — not because I despise authority, but because I need it. Likewise, I am not a nonbeliever, but a man who demands something worth believing in. On this point, I am like a bride in her chamber: she listens for the softest step (Jünger 97).

나는 아나크다. 권위를 경멸해서가 아니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믿을 만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Furthermore, like the Worker by contrast to bourgeois, the Anarch has intrinsic relation to the elemental which is synonymous to the “anarchic.” Accordingly, for Jünger love is anarchic, marriage is not; the warrior is anarchic, the soldier is not; manslaughter is anarchic, murder is not; Christ is anarchic, Saint Paul is not. After all, the Anarch’s assessment of work is already more than familiar.

게다가, 부르주아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노동자처럼, 아나크 역시 '아나크적인(anarchic)'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유의어와 본질적 관계를 맺는다. [즉, '노동자적인'이 '부르주아적인'에 반대되는 것처럼, '아나크적인' 역시 '부르주아적인'에 반대된다.] 윙거에 따르면, 사랑은 아나크적이지만, 결혼은 그렇지 않다. 전사는 아나크적이지만, 병사는 그렇지 않다. 우발적 살인(manslaughter)은 아나크적이지만, 고의적 살인(murder)은 그렇지 않다. 예수는 아나크적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 결국, 노동에 대한 아나크의 판단은 이미 [이전의 노동자 개념에서] 익숙하다.

I can barely distinguish between work and leisure. I like them equally. This is consistent with my principle that there can be no empty time, no minute without intellectual tension and alertness... What causes the feeling of being constantly on vacation? Probably the fact that the mental person liberates the physical one and observes his game. Far from any hierarchy, he enjoys the harmony of rest and motion, of invulnerability and extreme sensitivity.

나는 일과 여가의 차이를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나는 이 둘을 똑같이 좋아하며, 이러한 관점은 어떠한 지적 긴장과 경각심이 없는 단 1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나의 원칙 [즉, 인간은 언제나 삶의 기투로서 노동하고 있다는 원칙] 과 일치한다. ... [내가] 끊임없이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즉, 보통의 부르주아 관념에서 노동과 휴가가 엄격하게 구분되지만, 자신이 노동할 경우에도 여가와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아나크가] '정신적 인간(the mental person)'으로서 신체를 해방시키고 [예속시키지 않고] 자신의 놀이(game)를 관조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어떤 위계에도 속하지 않는 아나크는, 휴식과 운동의 조화, 불굴의 의지와 극도의 감수성의 조화를 즐긴다.

Regardless of historical background, Jünger tends to lay stress on the necessity to cultivate the same abilities and values for a human to reach the rank of Overhuman forwarded by Nietzsche. And it is still unknown whether objective tone of “The Worker” attains the aim faster than highly aphoristic fiction like “Eumeswil.”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게, 윙거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지위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이] 동일한 능력과 가치를 배양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The Worker'의 객관적 어조가, 'Eumeswil' 같은 고도의 경구적 소설보다 더 빨리 [초인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달성하는 데 보다 유용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연구된 바가 없다. or 'Eumeswill' 이 'The Worker' 보다 더 발전했기 때문에 'The worker'가 더 낫다는 주장이 없다.]

Conclusion

결론

To sum up briefly, despite the fact that both the Worker and the Anarch are the expressions of the conservative-revolutionary subject, the concept of the Anarch is still the purest model of the latter. As far as one can see, the Anarch loses the “totalitarian” colors visible in the Worker yet. Thomas Nevin links it to Jünger’s personal experience as a citizen in his research “Ernst Jünger and Germany: Into the Abyss, 1914-1945.”

요약하자면, 노동자와 아나크 모두 보수혁명적 주체의 표현이다. 그러나 후기의 아나크 개념이 보다 완전한 모델이다. 우리가 이해한 바 로는, '아나크'는 노동자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토마스 네빈(Thomas Nevin)은 그의 연구 'Ernst Jünger and Germany: Into the Abyss, 1914-1945.'에서 이러한 전회를 시민 윙거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짓는다.

His memoirs of the Great War, for example, attempt to buttress individual valor in an age of fierce and whelming mechanization. Then, confronted with the steel­faced standardization of life which communism and Nazism alike ensured in the twenties, Jünger turns to the dreamworld of a very private bourgeois sensibility (237).

예를 들어, 세계대전에 대한 회고록에서, 윙거는 맹렬하고 압도적인 기계화 시대 속에서 개인의 용맹에 힘을 실어주고자 시도한다. 그 후, 1920년대에 공산주의와 나치즘이 시도한 삶의 강렬한 표준화에 직면하여, 윙거는 매우 개인적인 부르주아 감성의 공상세계로 눈을 돌린다.

At the same time, Jünger himself was far from being an exemplary bourgeois. As it was shown, Jünger persuasively revealed collective nature of the bourgeois individual for the conservative revolutionists are perfectly sensible for all sole imitations of what they understand under true individualism. At any rate, Elliot Neaman in his article “Ernst Jünger’s Legacy” contends that

[보다 탈전체주의화되고 개인을 강조하게 됨과] 동시에, 윙거 자신은 모범적인 부르주아와 거리가 멀었다. [즉, 상술한 논문의 주장과 달리 부르주아적으로 전회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윙거는, 보수혁명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개인이 가지는 [개인을 대중으로 매몰시키는] 집단적 성격을 설득력있게 폭로했다. [그리하여] 보수혁명주의자들은 [부르주아적 왜곡이 아니라] 진정한 개인주의 이해에 입각하여 모든 [개인주의] 모조품을 완전하게 분별해낼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 따라, 엘리엇 네이먼(Elliot Neaman)은 'Ernst Jünger’s Legacy' 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One should never lose sight of the fact that he never abandoned his anarchist animus against the liberal order of Europe.

...유럽의 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하여, [윙거가] 아나키스트적 적대감(animus)을 버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즉, 윙거가 전체주의적으로 보이는 사상을 전개했을 때도 여전히 개인을 염두해두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

Altogether, most of the changes heralded by Jünger in his tract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 took place subsequently indeed. What did not undergo desirable changes is the prevailing nihilism. Therefore, the concept of the Anarch offers the fruitful method of preserving inner freedom for those who treasure the authentic individuality. At last, this elitist position has always been the distinctive mark of the conservative revolutionists who openly admit that the reality is godless but never yield to nihilism (3).

윙거가 'The Worker: Domination and Gestalt'에서 예언했던 대부분의 변화는 실제로 일어났다. 바람직한 변화를 겪지 못한 것은 여전히 팽배한 허무주의적 경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욍거의 아나크 개념은 진정한 개별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적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을 제공해준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점은, 윙거의 이 엘리트주의적 입장이 언제나 보수혁명주의자들의 독특한 특징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에 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허무주의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각주 3)

Notes:

각주

(1) Ernst Jünger held the highest military awards for his endurance in the two World Wars. During the period of the Weimar Republic he not only rejected ‘Western’ parliamentary democracy but also published articles in the far-right militarist journals. Besides, there is evidence of his positive estimation of Hitler’s revolutionary role and policy at certain period of time. A copy of his “Feuer und Blut” was dedicated to “dem nationalen Führer Adolf Hitler” However, Jünger’s relationship with the Third Reich turned to be not very simple. He openly insulted Goebbels, rejected a place on the NSDAP electoral list, and refused to enter the Dichterakademie in 1933. After Ernst Niekisch was officially dismissed by the Nazis, Ernst Jünger demonstratively supported his family. Besides, his treatment of the “Jewish question” and the racial theory presumably will disappoint the convinced Nazi. At last, a post-war essay “The Peace” was Jünger’s contribution to the July 1944 conspiracy aimed at assassination of Hitler. Finally he departed from the direct political activity through inner migration.

에른스트 윙거는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공헌을 인정받아 최고 전훈 훈장을 수여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그는 '서구(western)'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극우 성향의 군국주의 저널에도 글을 투고했다. 게다가, 그가 히틀러의 혁명적 역할과 정책을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의 'Feuer und Blut'의 한 복사본은 '민족의 퓌러 아돌프 히틀러(dem nationalen Führer Adolf Hitler)'에게 헌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윙거와 제3 라이히의 관계를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는 괴벨스를 공공연히 비난했고,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SDP)의 공천을 거부했으며, 1933년에는 민족사회주의 성향의 '독일시인협회(Dichterakademie)'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민족 볼셰비즘의 창시자 중 한명인] 에른스트 니키쉬(Ernst Niekisch)가 나치에 의해 공식적으로 숙청된 이후, 윙거는 니키쉬의 가족을 보란듯이 지원했다. 게다가, '유대인 문제(Jewish question)'와 인종 이론에 대한 윙거의 생각은 아마 투철한 나치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마지막 사례로, 그의 전후 에세이인 'The Peace'는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을 목표로 한 윙거의 공헌을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윙거는 내적인 변화에 따라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그만두었다.

(2) Although the Conservative Revolution ideology agrees with rightists in rejection of the Enlightment and the French Revolution heritage, it is not aimed at preservation of the pre-revolutionary social order. But unlike leftists, who also insist on fundamental fallacy of the pre-revolutionary monarchic system, conservative revolutionists refuse to provide unlimited embodiment of the principle “Freedom, Equality, and Brotherhood.” Deriving “revolution” from Latin substantive “revolvere,” that is “return to the starting point, to the source,” they glorify not yesterday but the day before yesterday. So they are more right than far-rightists in the extent of their conservative vision and more left than far-leftists in their critic of the demoliberal capitalistic regime. Thus the Conservative Revolution movement is opposed both to the old conservatives and communists in its denial of liberalism.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보수혁명의 이데올로기는 우파와 일치한다. 그러나 보수혁명은 혁명 이전의 사회질서의 보존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혁명전 군주제의 근본적 오류를 주장하는 좌파와 달리, 보수혁명주의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 원칙의 무제한적 구현을 거부한다.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는 "시작점으로, 근원으로의 복귀(return to the starting point, to the source)"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revolvere'을 어원으로 한다. 보수혁명주의자들은 '어제(yesterday)'가 아니라 '그저께(the day before yesterday)'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극우파보다도 더 우파적이고, 파괴적인 자본주의 정권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극좌파보다도 더 좌파적이다. 따라서 보수혁명 운동은 자유주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자유주의적 성격을 공유하는] 고전적 보수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에게 반대한다.

(3) According to Alexandr Dugin, generalizing attitude to the conservatism allows to distinguish between four major types of the conservative ideology which can be divided into such social-political categories as the fundamental conservatism, the liberal conservatism, the social conservatism, and the revolutionary conservatism. According to the fundamental conservatism, or the traditionalism, the more religious,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institutions are ancient, the better they are. The past is sacred. However, they tend to preserve status quo due to the conviction that all the same tomorrow will be worse. The liberal conservatism is a reasonable balance between “yesterday” and “tomorrow.” Its followers are the moderate progressists. Their motto is “The disposition to preserve and the ability to improve, taken together.” The social conservatism strives for the building of the utopian society which consists of the best from the past and the best from the dream about future. The final goal of the social conservatism is justice for the “simple people” of the certain nation. The revolutionary changes are more preferable than evolutionary ones. At last, the revolutionary conservatives believe that the day before yesterday everything was really perfect, yesterday everything was quite bad, and today everything is unbearable. Starting from the fundamental conservatism, they rather quickly end with the total rejection of status quo and all of its representations. They openly admit that the reality is godless but do not yield to nihilism. They are creators of new gods and values. Despite the mentioned differences, all kinds of the conservatism have something in common. As Arthur Moeller van den Bruck said, “by the conservative’s side stays eternity.”

알렉산드르 두긴(Alexandr Dugin)에 따르면, 우리는 '근본적 보수주의(fundamental conservatism)', '자유주의적 보수주의(liberal conservatism)', '사회적 보수주의(social conservatism)', 그리고 '혁명적 보수주의(revolutionary conservatism)' 라는 4개 유형의 일반화를 통해 보수의 이데올로기를 구별할 수 있다. 근본적 보수주의, 즉 전통주의에 따르면 종교, 사회, 정치, 경제 제도는 오래될 수록 더 좋다. 과거는 신성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내일이 항상 똑같이 더 나빠지리라는 확신 때문에 현상유지(status quo)의 경향이 있다. 온건한 진보주의자들이 추종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어제'와 '내일' 사이의 합당한 균형을 추구한다. 그들의 구호는 '보존의 기질과 개선의 능력을 동시에 취하자(The disposition to preserve and the ability to improve, taken together)' 이다. 사회적 보수주의는 과거의 가장 뛰어났던 점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으로 구성된 유토피아적 사회의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사회적 보수주의의 최종 목표는 특정 국가의 '보통 사람(simple people)'을 위한 정의의 구현이다. [이때] [보다 미래에 중점을 두는] 혁명적 변화는 [과거로부터 점진적인] 진화적 변화보다 더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보수주의자들은, 그저께는 모든 것이 정말 완벽했으며, 어제는 모든 것이 상당히 나빴고, 오늘은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라고 믿는다. 혁명적 보수주의는 근본적 보수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상유지의 모든 표현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귀결되었다. 혁명적 보수주의는 현실에 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지만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신과 가치를 창조하고자 한다. 상기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보수주의자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가 지적하듯, "보수주의자들은 영원성에 머무른다.(by the conservative’s side stays eternity)"

Literature:

참고문헌:

1. Benoist, Alain de. “Between the Gods and the Titans.” 31 Aug. 2005. 1 Jan. 2010. http://home.alphalink.com.au/~radnat/debenoist/alain1.html.

2. Braun, Abdalbarr. “Warrior, Anarch, Waldgaenger.” 14 Feb. 2002. 28 Feb. 2010. http://www.fluxeuropa.com/juenger-anarch.htm/Miscellany.

3. Dugin, Alexandr. “Conservative Revolution. A short history of the Third Way ideologies.” http://elements.lenin.ru/1konsrev.htm.

4. Dugin, Alexandr. “The Logic of Eternity.” Political Journal. Political Journal, 6 Oct. 2008. 20 May. 2010. http://www.politjournal.ru/index.php?action=Articles&dirid=77&tek=8331.

5. Neaman, Elliot. “Ernst Jünger’s Legacy.” 7 Jan. 2002. http://web.mac.com/elliotyale2/Elliot_Neaman/About_Me_files/Ernst Jünger's Legacy.doc. 18 Feb. 2010.

6. Nevin, Thomas R. Ernst Jünger and Germany: Into the Abyss, 1914-1945.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6.

7. Jünger, Ernst. Worker: Dominion and Gestalt: And, Maxima-Minima: Additional Notes to the Worker.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

8. Jünger, Ernst. Eumeswil. New York: Marsilio, 1993.

 

 

 

<파시스트의 삶/모리스 바르데슈>

The purpose of the fascist state is to shape men according to a particular model. Unlike democratic states, fascist states do not hesitate to teach morals. Fascists think that the will and energy available to the nation are its most precious capital. They make it their highest priority to encourage the collective qualities that shape and preserve the national energy. They seek to develop such national qualities as discipline, a taste for order, love of work, the sense of duty and honor. In the practice of everyday tasks, these national moral principles are expressed in a sense of responsibility, a sense of solidarity, awareness of duties of command, the feeling of being at home in an accepted order and in an important task.

파시스트 국가의 목적은 특정 모델에 따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파시스트 국가는 도덕을 가르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시스트는 이용가능한 의지와 에너지가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파시스트는 민족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집단적 자질을 장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파시스트는 '규율(discipline)', '질서에 대한 선호(a taste for order)', '노동에 대한 사랑(love of work,)', 그리고 '의무감과 명예(the sense of duty and honor)'를 비롯한 '민족적 기질(national qualities)'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민족적 도덕원칙(national moral principles)'의 일상 업무 상에서의 실천은, '책임의식(a sense of responsibility)', '연대감(a sense of solidarity)', '지휘책임에 대한 인식(awareness of duties of command)', '수용된 질서에 속하는 것에 대한 안락함(the feeling of being at home)' 등의 중요한 과업으로 표현된다.

These feelings are not taught in schools with phrases written on blackboards. If education is to arouse them in a child, it is the regime itself that must develop them in men, with justice in the distribution of the national income, by the example it sets, by the tasks that it sets forth.

이런 감정은 학교 칠판에 쓰여진 문구에서는 배울 수 없다. 만약 교육이 아이들에게서 그것들을 일깨우려면, '체제(regime)' 그 자체가 아이들을 인간으로 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민족 소득 분배의 정의(the distribution of the national income)'에 기초하여, 적절하게 설정된 모범과 임무 등을 통해서 말이다.

Discipline does not arise in action with the stroke of a magic wand or in response to a grandiloquent appeal: it is a mark of esteem that a people gives to those who lead them, and a regime must earn this every day by the seriousness of its actions and the sincerity of its love of country. The discipline of a nation is a weapon that is forged like the discipline of an army. It is understood to be a treasure that must be guarded. But it is above all the reward of men who give themselves entirely to their work and are themselves exemplars of courage, selflessness, and honesty.

규율은 마술봉을 휘두르는 행동 따위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호소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규율은 민족이 자기 지도자에게 보여주는 존경의 표시이다. 체제는 그러한 규율을 마땅하게 받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모든 행동을 진중하게 행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민족의 규율은 군대의 규율 처럼 제련된 무기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보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규율은 하나의 보상이다. 즉, 자신의 일에 전적으로 충실하며, '용기(courage)', '이타심(selflessness)', '정직(honesty)'의 본보기가 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보상이다.

This cohesion of the national will is, moreover, possible only in a clean country. No regime should be more concerned with honor, honesty, and moral health than an authoritarian regime, and it must first of all be implacable in this regard with its own officials. This has not always been seen in the past. But there are many other things that we have not always seen in the past. Such self-discipline is the only thing that legitimates the discipline one demands of others.

이러한 민족적 의지의 응집은, 강조하건데 '무결한 국가(clean country)'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체제도, 체제의 권위보다 명예, 정칙, 도덕적 건강에 더 관심을 가져선 안된다.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체제의 관료들이 '완고함(implacable)'을 갖춰야만 한다. [즉, 민족사회주의 체제의 지도자들은 '내로남불'을 해선 안된다. 체제의 권위는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층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만 한다.] 이러한 양태가 과거에 항상드러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 많은 것을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도 하다. 상기한 '자기 수양(self-discipline)'은 다른 사람에게 규율을 요구할 때 그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But the policy of cleanliness is more than just that. It is also about the systematic elimination of all that discourages, sullies, and disgusts. I am not talking about pornographic magazines whose suppression the churchgoers and moralists believe will save the nation. Mostly, I am speaking of: fortunes amassed without work, unjustified success, triumphant crooks and scoundrels; the spectacle of which is infinitely more demoralizing and harmful to a nation than the buttocks of cover-girls. I do not want the reign of Virtue, much less of the moral order. But I regard it as obvious that one cannot ask a people to love their work and to do it with seriousness and precision without removing from social circulation those who insult our work and our conscience by their manner of getting rich.

그러나 무결성의 정책은 그 이상을 함의한다. 그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훼손하고, 역겹게 하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교회 신도들과 도덕주의자들이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포르노 잡지와는 다르다. [즉, 입만 나불거리며 포르노 잡지와 같은 수준인 주류 보수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주장한다. 노동 없이 축적된 재산, 정당하지 못한 성공, 사기꾼과 악당들의 성공은, 민족에게 있어서 창녀들의 엉덩이보다 훨씬 더 비도덕적이고 해롭다. 우리는 도덕적 질서보다 선행하는 '덕의 지배(the reign of Virtue)'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동과 양심을 모욕하는 놈들이 부자가 되는 사회적 악순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민족에게 자신의 노동을 사랑하고, 진지하게 다루며, 정확히 이행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받아들인다.

Fascism does not merely propose another image of the nation but of man. Fascism prizes some human qualities above all others because the very same qualities appear to give strength and duration to the state as well as meaning to individual lives. These are the qualities that have been required in all times of men who participate in difficult and dangerous enterprises: courage, discipline, the spirit of sacrifice, energy—virtues required of soldiers in combat, pioneers, sailors in peril. These are peculiarly military and, so to speak, animalistic qualities: they remind us that the first task of man is to protect and subdue, a calling that gregarious and pacified city life leads us to forget, but that is awakened by danger and every difficult achievement where man finds his natural adversaries again: storms, catastrophes, deserts.

파시즘은 단순히 민족의 또 다른 '형상(image)'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새로운 형상을 제안한다. 파시즘은 인간의 몇몇 '기질(qualities)'은 다른 모든 것 보다 더 높이 평가할 만 하다고 본다. 그러한 기질은 개인적 삶에서 더 의미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게 힘과 지속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위험한 모험에 가담하는 인간에게 항상 요구되는 기질은 용기, 규율, 희생정신(the spirit of sacrifice), —전투하는 병사, 혹은 위험에 빠진 개척자나 행해사에게 필요한 덕목인—에너지 등이 있다. 이것들은 군사적이며, 소위 '동물적 기질(animalistic qualities)'이다. 이 기질들은, 인간의 최우선적 임무가 보호와 정복에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교적이고 평화로운 도시생활은 우리가 이러한 임무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적수(natural adversaries)', 예컨대 폭풍, 재앙, 사막과 같은 '어려운 위업(difficult achievement)'을 마주할 때, 그 최우선적 임무는 다시금 깨어난다.

The animal qualities of man have engendered others which are inseparable from them, because they belong to a code of honor that was established in danger: they are loyalty, fidelity, solidarity, selflessness. These qualities are the foundations of relations between men at all times, even in hours of uncertainty and abandonment. They constitute a system of mutual commitments upon which all groups of men can live. The rest of morality is nothing but a series of applications, which always vary with time and place.

인간의 동물적 기질은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다른 기질들을 끌어들인다. 왜냐하면 동물적 기질이 결국 '명예의 규범(a code of honor)'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충성심(loyalty)', '신의(fidelity)', '연대심(solidarity)', '이타심(selflessness.)' 등이 이에 해당하는 데, 이것들 역시 오늘날 위험에 쳐해있다. 이러한 기질들은 불확실하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모든 순간 속에서 조차 항상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기초가 된다. [즉, 이러한 기질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 기질들은 모든 그룹의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호 약속의 체계를 구성한다. 다른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항상 달라지는 일련의 응용에 불과하다.

These qualities that are functional, so to speak, and that the fascist dream takes as essential, in turn give rise to others which are their refinements, which always with time and place, and which become essential in their turn, to the extent that the human animal is more aware of who he is and what he is worth. These qualities are luxuries that military societies gave themselves as they took shape and constituted their hierarchy. They include pride, scrupulousness in vows, generosity, respect for a courageous adversary, protection of the weak and weaponless, contempt for liars and respect for those who fight fair.

말하자면, 실제로 기능할 뿐더러, 파시스트 이상이 필수적이라 여기는 이런 기질들은, 결국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동물이 누구이며, 그것의 가치가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기질들이 보유한 특유의 세련됨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파시즘에서 이상적이라 상정하는 기질들은 다른 모든 유용한 인간적 기질의 기초로 작용한다.] 그러한 기질들은 '군사적 사회(military societies)'가 형성되고, 그들의 계급 구조가 형성되면서 스스로 부여한 호사이다. [즉, 이상적 기질들은 군사적인 환경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긍지(pride)', '맹세한 양심(scrupulousness in vows)', '관대함(generosity)', '용맹한 적에 대한 존중(respect for a courageous adversary)', '약자와 민간인에 대한 보호(protection of the weak and weaponless)', '거짓말쟁이에 대한 경멸(contempt for liars)', 그리고 '정당하게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respect for those who fight fair)' 등이 그것이다.

These civic qualities still stir obscure palpitations when our decadent cities honor those who, in the past, made it their business to fight and to be fully men. They were found in both military and religious Orders, among the Saracen princes and samurai. They constitute, at bottom, the sole code that military societies have recognized according their vocation; they are essential to the honor of the soldier. We are told that later the warrior monks became thugs and sodomites, robber barons, and cutthroat princes. When have wealth and above all power not degraded? It is the idea that matters. This beautiful human beast, this healthy human beast dreamed fascism.

우리가 전투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러나 퇴폐한 [즉, 이상적 기질이 중심이 되었으나 결국 퇴락하고 만] 과거 도시들을 존중할 때, 이러한 '시민적 기질(civic qualities)'들은 알수없는 가슴뜀을 자극한다. 그 기질들은 이슬람 공국들과 사무라이 내부의 군사적 그리고 종교적 질서에서 발견된다. 근본적으로, 그 기질들은 군사적 사회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인정한 유일한 규범을 구성한다. 그것들은 군인의 명예를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수도자적인 전사들(warrior monks)'들이 훗날 이상성행위자, 강도귀족, 그리고 극악무도한 군주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은 언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가? [즉, 이상적 기질을 가졌던 과거 선구자들이 결국 부와 권력에 무릎끓고 퇴보했으니, 그것을 방지할 방도를 파악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신념(idea)'에 있다. 이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짐승, 이 건강한 짐승인 인간은 파시즘을 꿈꾸었다.

It is certainly sad that the mud of war has rendered him almost unrecognizable, that the fury of war has effaced him like a statue in the desert, scoured by the winds of vengeance and hate. I do not say “this is what was.” I say: “this is what might have been and sometimes was.” This is the fascist dream, which was the dream in the hearts of a few.

'전쟁의 진창(the mud of war)'이 그러한 형상의 인간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전쟁의 격렬함이 복수심과 증오심의 바람에 휩쓸려 사막의 동상처럼 그러한 인간을 박살나게 했다는 것은 확실히 슬픈 일이다. [즉, 파시즘이 지난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몰락해버린 것은 인류에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가(this is what was)"라고 묻지 않는다. [즉, 파시즘이 사라졌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을 회고하려는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은 파시스트의 이상, 오직 소수의 심장 속에만 있는 이상이며, 있을 수도 있었으며 때로는 정말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파시스트의 이상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그것을 지금도 복권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The defeat of fascism should not make us forget that the image exists, that it still remains grand, and that others may find it again under new names. The very term fascism will no doubt disappear, because it is too freighted with calumnies, because it is lost in a sea of shadows under a malignant mist. But what does the word matter? We all know that Spartan order, Spartan man, is the sole shield that will remain when the shadow of death rises before the West.

파시즘의 형상은 존재하며, 여전히 웅장하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으로 파시즘을 부활시킬지도 모른다. 파시즘의 패배가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용어는 악의에 찬 안개 아래서 바다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즉,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이 특정한 인간에 대한 형상화는, 파시즘이란 용어 자체가 절대악으로 자리잡은 만큼 더 이상 '파시즘'으로 불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우리 모두는 '스파르타 질서(Spartan order)', '스파르타 인간(Spartan man)'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떠오르고 서구세계가 멸망할 때도 살아남을 유일한 방패이다.

Lenin prophesized that fascism would be the last form taken for survival by the societies that do not surrender without a fight to Communist dictatorship. If the West no longer has strength, if it disappears like an old man drowns, we can do nothing for it. But if it rises to defend itself, old Lenin’s prophecy will come true. Under a different name, a different face, and no doubt without any projections of the past, in the form of a child we do not recognize, or the head of a young Medusa, the Spartan order will be reborn: and paradoxically, no doubt, it will be the last defense of freedom and the good life.

레닌은 파시즘이 공산주의 독재에 맞서 항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는 사회가 생존을 위해 취할 마지막 형태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서구세계가 힘을 잃으면, 그것이 노인이 익사하는 것 처럼 사라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몸부림 친다면, 오래된 레닌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얼굴과 함께,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게도, 과거에 대한 어떤 투영도 없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새로운 아이의 형태로, 혹은 젊은 메두사의 머리를 가지고, 스파르타 질서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자유와 좋은 삶을 위한 마지막 방어일 것이다.

 

 

 

 

<진정한 좌파의 기초 (Foundation of True Left)>

"An easily observable difference between the False Left (sometimes known as the liberal left) and the True Left (sometimes known as the radical left) is that the latter is willing to hold Jews to the same standard of moral condemnation that it holds Gentiles, whereas the former commendably despises Gentile racism but is willfully blind to Jewish racism towards non-Jews out of fear of being called ”anti-Semite”. The timely emergence of the 21st century True Left is owed to a great extent to the post-9/11 anti-Zionist movement, and it is perfectly sensible that determined, unrelenting criticism of Jewish behaviour remains a key feature of all present-day True Left ideologies, of which Aryanism counts itself as one."

'거짓 좌파(False Left)' (종종 '진보 좌파(Liberal Left)'라고 불림) 와 '진짜 좌파(True Left)' (종종 '급진 좌파(Radical Left)'라고 불림)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후자는 유대인에게도 '비유대인(Gentiles)'의 것과 같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고자 하지만, [역주: 그리하여 정상적인 도덕적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유대인에게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만] 전자는 훌륭하게 비유대인의 [역주: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경멸한다. 그러나 '반유대주의(anti-Semite)'라고 불리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유대인에 대한 유대인의 인종차별을 고의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21세기 '진짜 좌파'의 시의적절한 등장은, 9.11 테러 이후의 반시온주의 운동에 크게 촉진되었으며, 유대인 행위에 대한 단호하고 가차없는 비판이 오늘날 모든 진짜 좌파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진짜 좌파 이데올로기에는 물론 '아리아주의(Aryanism)'가 포함되어 있다.

"An essential task of our movement is to restore the truth that authentic National Socialism is a left-wing ideology. This was demonstrated as early as shortly after Hitler’s arrest and imprisonment in 1923 following the failed Munich Beer Hall Putsch, when right-leaning NSDAP supporters steadily defected to rival parties such as the far-right DVFP, whereas left-leaning supporters remained loyal to Hitler. Moreover, the failed 20th July Plot to assassinate Hitler in 1944 was devised mostly by former members of the far-right DNVP/DNF (predecessor to the present-day far-right NPD), whereas leftist Otto Remer not only foiled the plot but remained loyal to Hitler’s anti-colonialist vision even after WWII, arming the FLN for combat against France in the Algerian War (the same war in which far-rightists Jean-Marie Le Pen (Gentile) and Dominique Venner (Gentile) fought on the side of France). This showed once and for all which side was truly dedicated to National Socialism as a higher ideal. Similarly, the admiration for Hitler by figures such as John F. Kennedy (who was assassinated when he began trying to free the US from Jewish domination and to limit the power of Israel, and who also enforced school desegregation, created the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called for the Civil Rights Act of 1964 and promoted the US as ”A Nation of Immigrants” via his book of the same name in which he argued for less restrictive immigration laws) makes little sense to those who insist that National Socialism was a right-wing ideology, but makes perfect sense to those who understand it as a left-wing ideology."

우리 운동의 본질적 과제는, '진실된 민족사회주의(authentic National Socialism)'가 좌파 이데올로기라는 진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는 1923년 뮌헨의 맥주홀 폭동 이후 히틀러가 체포돼 수감된 직후부터 입증된 바 있는데, 극우 성향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지지자들은 꾸준히 '독일 민족인민당(DNVP)' 등 경쟁 극우정당으로 이탈한 반면, 좌파 성향의 지지자들은 계속하여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게다가 1944년 7월 20일에 있었던 실패한 히틀러 암살 계획은, 주로 극우파인 DNVP와 '독일 민족전선(DNF)' (작금의 극우정당인 '독일 민족민주당(NPD)'의 전신)의 구성원들로 구성되었던 반면, 좌파인 오토 레머(Otto Remer)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히틀러의 반식민주의 전망에 충실하면서 프랑스에 맞선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FLN)'을 무장시켰다. (극우파 장-마리 르 펜(Jean-Marie Le Pen, 비유대인)과 도미니크 베너(Dominique Venner, 비유대인)이 프랑스 편에서 싸운 바로 그 전쟁이다.) 이러한 면모들이 좌파와 우파 중 어느 쪽이 민족사회주의를 우월한 이상으로서 생각하고 진정으로 헌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존 F. 케네디 (그는 미국을 유대인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다가 암살당했으며, 1964년 시민권법에 의해 요구된 '평등 고용 추진 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를 창설하고, 그가 미국 이민법의 규제 완화를 주장하며 저술한 책 '이민자들의 나라(A Nation of Immigrants)' 처럼 미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와 같은 인물에 의한 히틀러 찬양은 민족사회주의가 우파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사회주의가 좌파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이치에 부합한다.

"Authentic National Socialists are arguably the most merciless critics of Western civilization that the world has ever seen. In Hitler's own words: “The wealth of Great Britain is the result less of a perfect commercial organization than of the capitalist exploitation of the three hundred and fifty million Indian slaves. … That’s the strength of the English: to allow the natives to live whilst they exploit them to the uttermost.” And Joseph Goebbels on the same topic: “Their empire was built through war, oppression, concentration camps, starvation and blood. … We have some friendly advice for London. Do not shout so loudly. You are not alone. The whole world is laughing itself to death at pious talk of morality coming from those who reek of blood.” The Beatles, roundly condemned by post-WWII rightists as underminers of traditional Western values, found a sympathetic listener in Rudolf Hess from his lifelong solitary confinement inside Spandau Prison: “The youth of today are protesting for many reasons and they want to be heard. One way of being heard is through their music. I do enjoy the Beatles however; their music has a definite beat and in many ways their music is good music.” (In fact, the only element of the 1960s youth culture that Hess ever criticized was its drug use.) Reciprocally, National Socialist symbols were adopted by some post-WWII leftist Counterculture groups to signify their contempt for traditional Western society."

진실된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세계가 지금까지 목도한 것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서구 문명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비판자들이다. 히틀러가 말하길, "영국의 부는 완벽한 상업 기관의 결과가 아니라, 3억 5천만 인도 노예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결과물에 가깝다. ...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국인들의 강점이다. 원주민들이 극한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에서만 살도록 허용하는 것 말이다." 또 요제프 괴벨스도 같은 주제에 대하여 "영국인들의 제국은 전쟁, 압제, 강제수용소, 기아, 그리고 피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 우리는 런던을 위한 친절한 조언을 하고자 한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라. [역주: 나치 독일에 대한 영국의 자격 없는 비판을 저격하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피비린내로 물든 사람들이 말하는 경건한 도덕은 온 세상을 배꼽잡고 웃게 만든다." 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통적인 서구 가치를 훼손하는 존재자라고 우파들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았던 밴드 비틀즈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스판다우 교도소의 루돌프 헤스(Rudolf Hess)에게서 동정어린 칭찬을 받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반항하고 있으며, 그들은 듣고 싶어한다. 그들이 듣는 방식 중 하나는 비틀즈의 음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나 역시 비틀즈를 즐겨 듣는다. 그들의 음악은 확실한 비트를 가지고 있고, 많은 면에서 그들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다." (사실, 헤스가 비판한 1960년대 청년 문화의 유일한 요소는 마약 사용 뿐이었다.) 상반되게, 민족사회주의 상징들은 전통적인 서구사회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부 좌파 반문화 단체들에 의해 채택되곤 했다.

"Whereas the False Left is about creating ”equality”, the True Left is about destroying oppression. Whereas the False Left is about upholding “rights”, the True Left is about ending violence. Whereas the False Left is about “progress”, the True Left is about reversion to an uncorrupt condition. In every aspect the False Left reveals its tendency towards expansion and advancement, which in itself is a right-wing attitude, thereby exposing its falsehood. The False Left is thus precisely what its name suggests: an ugly pretence at leftism developed solely for pragmatic deployment by scheming Freemasons with no capacity for genuine idealism at all. This is in contrast to True Left, which is characterized by its tendency towards reduction and purification, thereby standing elementally opposed to the right-wing mindset, necessarily including the mindset of the False Left also.Rightists have sneakily duped into their camp many people disillusioned with the drudgery of the present-day world and who seek answers in myth and ancient history by crudely associating leftism with modernity and deceptively presenting rightism as the only camp that offers connection with the past. To counter this, the True Left must distinguish itself from the False Left by heavily emphasizing that we too offer a connection with the past – merely not (unlike the rightists) with the traditional past which we justly abhor. The past which inspires us is the romantic past of chances missed, of paths untaken, of the long intellectual legacy of anti-tradition that dates back to ancient times."

거짓 좌파는 '평등'을 창조하는 반면, 진짜 좌파는 '억압'을 파괴한다. 거짓 좌파는 '권리'를 들먹이지만, 진짜 좌파는 '폭력'의 종식을 원한다. 거짓 좌파가 '진보'에 관한 것이라면, 진짜 좌파는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고자 한다. 모든 면에서 거짓 좌파는 팽창과 진보의 경향을 드러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우파적 태도이며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낸다. 따라서 거짓 좌파는 그 이름이 암시하는 바 처럼, 그들은 오직 실용적 전개를 위해서만 개발된 좌파주의의 추악한 가식이다. 그것은 진실된 이상주의에 전혀 기여할 능력이 없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이 꾸며낸 책략이다. [역주 : 오늘날의 기득권 좌파는 기득권 우파가 자신들의 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듯함.] 이는 [역주: 팽창이 아니라] 축소와 [역주: 진보가 아니라] 정화의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진자 좌파와 대조적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가짜 좌파의 사고방식을 포함한 우파적 사고방식은 진짜 좌파의 사고방식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위치에 있다. 우파들은 좌파를 '현대성(modernity)'과 조잡하게 연결시키고, 반면 과거를 탐닉하는 유일한 진영이 우파라고 기만함으로써, 현대세계의 고역에 환멸을 느끼고 신화 혹은 고대사에서 해답을 찾는 많은 사람을 슬그머니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짜 좌파는 우리 역시 과거와의 관계를 제공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강조함으로써, 거짓 좌파와 스스로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파와는 다르게 혐오스러운 전통적 과거를 추앙하지는 않는다. 진짜 좌파를 고무시키는 과거는,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오랜 반전통주의적 지적 유산의 낭만적인 과거이다.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역주: 우파세력은 과거에 있던 추악한 요소들을 찬미하지만, 진짜 좌파들은 오염되기 이전 고대세계의 지적 유산을 계승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과거에 현실세계의 역사에서 실제로 구현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좌파는 그것을 구현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짜 좌파의 과거 추앙은 우파의 그것과는 다른 경향을 보인다.]

 

 

<민족-볼세비즘이란 무엇인가/알렉산드르 두긴>

It is possible to divide Bolshevism as a historical phenomenon in two parts. On one side, the doctrinal field of various pre-Marxist socialist and communist visions and theories existed as its parallels and continued their existence as intellectual motives after Marxism was forced to the final ideology. This first stage could be called "the Bolshevism project". The second stage is the incarnation of this project in concrete historical reality in the form of Russian social-democracy, later the Communist party, and, on the final stage, the history of the Soviet State and the ruling party. The first part is undisputedly wider than the second and, like any plan, supersedes the second. But we cannot understand one without the other. The realization makes no sense, if we do not know the plan, and a plan without a realization is a plain abstraction, and its possible realizations can go for better or worse in various circumstances.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볼셰비즘은 두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마르크스주의가 최후의 이데올로기로 강요된 이후, 볼셰비즘은 마르크스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비전 및 이론의 교리적 영역과 평행을 이루는 지적 원동력으로 [즉,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와 공통점이 없는 새로운 이념으로] 여겨져왔다. 이 최초의 단계를 '볼셰비즘 계획'(the Bolshevism project) 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두번째 단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그 후계인 공산당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볼셰비즘 계획이 발현된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소비에트와 그 집권당의 역사가 보여준다. 첫번째 단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번째보다 더 광대하다. 다른 '구상(plan)'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두번째를 대체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할 때 그것과 비교할 다른 것 없이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 구상을 알지 못한다면, 그 깨달음은 의미가 없다. 깨달음 없는 구상은 단순한 추상일 뿐이며, 그것의 가능한 깨달음은 여러가지 상황에서 더 좋아지거나 나빠질 수 있다. [즉, 확고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 임의대로다.]

National-Socialism and fascism present a similar scenario. On one side we have a theoretical dogma, philosophy, economic and historical views, all brought together by a common viewpoint ("the Fascist project") - on the other hand, the practices of historical parties (Nazi and Fascist), as well as the state organism of Mussolini's Italy and Hitler's Germany. However, there is one basic difference: "The Fascist project" of Germany and Italy was much farther from its incarnation than "the Bolshevik project" from the Soviet reality.

민족사회주의와 파시즘은 유사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한편으로, 그 둘은 이론적 도그마, 철학, 경제적-역사적 견해를 공유하며 ('파시스트 계획', the Fascist project) 결합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히틀러의 독일이 보여준 국가 유기체를 비롯한, 역사적 정당(나치와 파시스트)의 실현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본적 차이가 있는데,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계획은 소비에트 현실이 보여준 볼셰비키 계획보다 그것의 구현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지칭되어있지 않으나, 소련에서 볼셰비키 계획이 구현된 것보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계획이 원리-원칙에 덜 충실하다고 말하는 듯 함.]

It is widely known, that the historical Bolshevik and Fascist parties and regimes were against one another, and this resulted in bloody fights, the biggest of which was the second World War, also known as the Great Patriotic War. But this hostility was never absolute and there were some examples of Fascists and Bolsheviks coming together even on the external, purely political, level: The Soviet State gladly recognized the Fascist order in Italy; German nationalists joined forces during the "Schlageter Course", announced by Radek; Finally, the Molotov-Ribbentrop pact.

볼셰비키와 파시스트 정당 및 정권들이 서로 대립하였고,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까지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제2차 세계 대전 혹은 대조국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의 적개심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파시스트와 볼셰비키가 함께 한 몇 가지 외부적, 즉 순수하게 정치적인 예시가 있었다. 소련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질서를 기꺼이 인정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라데크가 발표한 '슐라게터 절차(Schlageter Course)' 동안 힘을 합쳤다. 최종적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체결되었다.

Yet these two projects have much more in common. If we look at Bolshevism as an ideology that includes Marxism, but crosses its borders (that's how it was - after all, Lenin's idea of "building Communism in one state only" is against Marx), and apply the same method to fascism and Nazism (especially focusing on the ideologists who laid the base for the Nazi power, but remained in the opposition against the regime they saw as a caricature of their own views), we are bound to notice that the two projects have a lot in common. Actually, they have so much in common that theoretically it would be possible to suggest the existence of a metaideology of sorts that would be common to both projects.

그러나 이 두 계획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볼셰비즘을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는 이데올로기지만, 결국 마르크스주의라는 경계를 넘어선 것 (레닌의 아이디어 "한 국가에서만 공산주의를 건설한다." 는 마르크스와 충돌한다.) 으로 이해한다면, 같은 이해 방법을 파시즘과 나치즘에도 적용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특히, 나치 권력의 기틀을 만든 사상가들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나치가 자신들의 견해를 모방한 것으로 보았고, 나치에 반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볼셰비키 계획과 파시스트 게획이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 두 계획 사이의 공통적인 종류를 추출하여 그 이상의 메타이데올로기의 실존을 제안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둘은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

This one single metaideology that lies not only beyond political concretization of Bolshevism and Fascism, but their political ideologies as well, is National-Bolshevism in its absolute essence. This metaideology has never before been recognized by anyone in its entirety; Only the deepest minds of both camps have intuitively guessed that it exists, trying to express these visions even remotely.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정치적 결합을 넘어, 그들 정치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본질을 반영하는 단 하나의 메타이데올로기는 바로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hevism)'이다. 이 메타이데올로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인정된 적이 없다. 오직 양 진영의 가장 깊은 마음을 가진 이들만이 이 전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서, 그것의 실존을 직감적으로 추측해왔을 뿐이다.

National-Bolshevism does not mean the pragmatic ways of Bolsheviks and European Nationalists, conditioned by Realpolitik. Nor does it mean the identical aspects of both "projects". It is something deeper that could appear only after the fall of the historical incarnation of one of the ideologies - the Soviet Union. (The actual incarnation of the Fascist project fell 50 years ago.)

민족-볼셰비즘은 현실정치의 조건에 굴복한 볼셰비키와 유럽 민족주의자들의 소위 '실용적 방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두 계획의 동일한 측면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민족-볼셰비즘은 두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역사적 화신이 무너진 이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더 심오한 것이다. (파시스트 계획의 실제 화신은 50년 전에 붕괴했다.)

These are the basic elements of this metaideology:

이 메타이데올로기의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Eschatological awareness, clear understanding of the fact that the civilization is finally nearing its end. This leads us to the idea of eschatological restoration. There is also an effort to perform this Restoration of the Golden Age by political means.

1. 종말론적 인식(Eschatological awareness). 문명이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수반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복원(eschatological restoration)'의 필요를 생각하게 한다. 황금시대의 복원을 정치적 수단을 통해 수행하려는 노력도 이에 포함된다.

2. The idea of inadequacy of the existing religious institutions of eschatological goals - the hidden anti-radicalism, reincarnations, and pharisaism of the traditional western religions. The spirit of reformation or "new spirituality" (mysticism, gnosticism, paganism).

2. 종말론적 목표(eschatological goals)에 있어 실존하는 종교 제도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인식 - '숨겨진 반-급진주의(the hidden anti-radicalism)', '영혼재생설(reincarnation)', 전통적 서양 종교의 '위선적 형식주의(pharisaism)'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대신하여, '개혁의 정신(The spirit of reformation)' 혹은 '새로운 영성(new spirituality)'은 '신비주의(mysticism)', '영지주의(gnosticism)', '이교주의(paganism)'에 있다.

3. Hate for the modern world, the Western civilization, with its roots in the spirit of Enlightenment. Identification of the cosmopolitan imperialist capitalism with the extreme global evil. Anti-bourgeois pathos.

3. 반-부르주아 파토스(Anti-bourgeois pathos). 즉 계몽주의 정신에 뿌리를 둔 현대 세계와 서양 문명에 대한 증오를 뜻한다. 동시에 '세계시민주의-제국주의적 자본주의(the cosmopolitan imperialist capitalism)'를 극도로 사악한 국제적 악과 다름없다고 인식한다.

4. Interest for the East and dislike for the West. Geopolitical orientation towards Eurasia.

4. 동양에 대한 관심과 서양에 대한 반감. 유라시아를 향한 지정학적 지향성.

5. Spartan (Prussian) ascetism. Pathos for Work and the Working Man. The basic idea of the primary spiritual origin among the people, among its lowest levels who have been safe from the depravity of the last few centuries, in comparison with the degenerated elite of the old regimes. The principle of "new aristocracy", rising from the masses of the people.

5. '스파르타 (프러시아) 금욕주의(Spartan (Prussian) ascetism)' 혹은 노동과 노동자의 파토스. 이는 '앙시앵 레짐(the old regimes)'의 퇴폐적 엘리트들과 비교해 볼 때, 지난 몇 세기 동안 타락으로부터 안전했던 최하급 계층, 즉 '민중(the people)' 사이의 '최초의 영적 기원(he primary spiritual origin)'을 근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민중으로부터 솟아오른 '새로운 귀족정(new aristocracy)'의 원칙이 될 것이다.

6. Understanding the people and the society as an organic brotherly collective, based on moral and spiritual solidarity. Radical denial of individualism, consumption and exploitation. Effort to bring all peoples to the state of the "golden age".

6. 민족과 사회를 도덕적-정신적 결속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형제 집단(an organic brotherly collective)'으로 이해하는 것. 이는 개인주의, 소비, 착취를 급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모든 민족을 '황금시대'의 상태로 격상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7. Dislike for the cultural, religious and economic traditions of Semitic origin (Judaism, Islam), setting Indo-Europeic traditions against them, since the social class of "merchants" (with its mentality) did not exist as such.

7. 셈족 기원의 문화적-종교적-경제적 전통 (유대교, 이슬람) 에 반하여 인도-유럽적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 본래 '상인(merchants)'이라는 사회적 계급 (과 그것의 정신)은 오늘날의 셈족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8. Readiness to sacrifice oneself for this ideal and what it's worth. Hate for mediocrity and petty-bourgeoisie. Clear revolutionary spirit.

8. 이상적이고 가치있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받아들일 준비자세를 가지는 것. 즉 '체제순응적 보통 사람(mediocrity)'과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증오. 분명한 혁명정신이 필요하다.

All the elements hereby numbered are to be found in any concrete dogma (Fascist or Bolshevik). They may vary by ideology or author, and may even appear together with other ideas that might contradict other points.

상기한 모든 요소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의 구체적인 도그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은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다른 것과 모순될 수 있는 생각들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The historical National-Bolsheviks (Nikisch, Ustryalov, Thiriart) have intuitively come close to this complex, but even they have faltered from the path: Nikisch saw positive meaning in technology and process, Ustryalov flirted with NEP and wasn't aware of Germany's meaning for Russia, Tieriard denied esoterism and religion, remaining a materialist pragmatic.

역사적인 민족-볼셰비키들 (에른스트 니키쉬, 니콜라이 우스트랼로프, 장-프랑수아 티리앙(Jean-François Thiriart)) 은 직관적으로 이러한 종합에 근접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완전하지 못했다. 니키쉬는 기술과 '변화(process)'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았으며, 우스트랼로프는 신경제정책을 지지한 동시에 러시아에 있어 독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티리앙은 '종교적 신비(esoterism)'과 종교를 부정했으며, 실용론적 유물론자로 삶을 마감했다.

National-Bolshevism is by far the most interesting phenomenon of the 20th century. It has adopted everything that fascinates us within Bolshevism or fascism. Whatever brought these ideologies to an end, contradicts with the spirit of this virtual doctrine.

민족-볼셰비즘은 단언컨대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볼셰비즘 혹은 파시즘 내부에서 우리를 매료시키는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무엇에 의해 종결되었던지 간에, 이 가상의 교리가 가지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즉,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역사적 패배는 민족-볼셰비즘과 무관하다.]

National-Bolshevism helps us understand where the anti-liberal regimes of our century went wrong and why they were bound to fall. This analysis is loyal to the past and graphic, when it comes to our time, when the "new" right and "new" left are but parodies of what even in its own time were merely parodies of the virtual National-Bolshevism.

민족-볼셰비즘은 우리 세기의 반-자유주의 정권 [즉,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한 독일과 러시아] 이 어디에서 잘못되었고 왜 그들이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분석은 과거와 '도표(graphic)'에 충실하며, 우리 시대의 '새로운' 우파와 '새로운' 좌파가 단지 가상의 민족-볼셰비즘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독일의 파시스트와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은 민족-볼셰비즘의 하위 분과이자 모방이다.]

The National-Bolshevik ideology is free from all the crimes of the past. The historical National-Bolsheviks blamed the Nazis and Communists of perverting the theories, and thus became victims of the totalitarian Moloch. As the doctrine is taking form only now, even this argument cannot be the most decisive one.

민족-볼셰비즘 이념은 과거의 모든 범죄로부터 자유롭다. 역사적인 민족-볼셰비키들은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이 그 이론을 왜곡했다고 비난했고, 그렇기 때문에 '전체주의자 희생양(victims of the totalitarian Moloch)'이 되었다. 지금에야 민족-볼셰비즘의 교리가 막 성립히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이 주장조차도 가장 결정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민족-볼셰비즘의 실체가 아직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나치와 공산당이 그 본질을 왜곡했는지는 확답하기 어렵다.]

National-Bolshevism is what has never been. It has never been in practice, nor even in theory. National-Bolshevism is what is to come. To come, as this doctrine will be a metaphysical and ideological sanctuary for those, who deny the modern world, the system of liberal capitalism that has become the sole basis of modern society. the protest will be forever. The old anti-bourgeois ideologies have proven their limits. Theoretical errors have sooner or later resulted in a historical fall. Who doesn't understand this, has no place in history.

민족-볼셰비즘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도, 심지어 이론적으로도 없었던 것이다. 민족-볼셰비즘은 이제 막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 교리는 현대사회, 즉 현대사회의 유일한 기반인 자유주의-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형이상학적-이데올로기적 성역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들의 항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오래된 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론상의 오류를 가졌기 때문에 얼마 안가 역사의 뒷편으로 추락해버렸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이제 아무 곳에도 없다.

The sole alternative for the modern world, this empire of the "liberal" antichrist, is NATIONAL-BOLSHEVISM.

현대 사회, '이 '자유주의적' 적그리스도 제국(this empire of the "liberal" antichris)'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민족-볼셰비즘 [원문에서 대문자] 이다.

Either it, or nothing. No compromise will change anything. If the system has survived the proud Reich and the great Soviet Union (destroying the traditional monarchies and empires before these two), with political parties and armed extremists it should deal without any problem.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없다.(Either it, or nothing.)' 어떤 다른 타협이던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이 체계가 자랑스러운 라이히와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 (둘 다 이전에 존재헜던 전통적인 독일 군주국괴 러시아 제국을 파괴했다.) 에서 살아남았다면, 정당과 무장한 극단주의자들과 함께 아무런 문제 없이 하나될 필요가 있다. [파시스트와 볼셰비키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임.]

The point is that National-Bolshevism has its own spiritual line, speaking of which would yet be untimely. This is an alternative secret that will stand against the opening "secret of illegality" during the final times. Without this force, the Bolshevik and Fascist experiments were forceless. Only after a certain distortion of the instruments of policy this force has left the above-mentioned movements, leaving them for fate to take care before the face of the "Master of the Universe", clearly standing for a liberalist society. There are signs telling that this force has lately taken a new (final) form that will come up to its nature.

요점은 민족-볼셰비즘이 그 나름의 영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이는 '불법성의 비밀(secret of illegality)'을 개방할 최후의 시점에 맞설 '대안적 비밀(an alternative secret)'이다. 이 힘이 없다면, 볼셰비키와 파시스트의 실험은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오직 '정책의 수단(the instruments of policy)'을 어느 정도 왜곡한 후에야, 이 힘은 상술한 운동을 떠났고, '우주의 주인(Master of the Universe)'이 되기 전에 운명을 돌보고,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보일 것이다. 최근에 이 힘이 본질에 도달할 새로운 (최종) 형태를 취했다는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I think someone might already guess what I am talking about.

누군가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마 알아맞출 것이다. [윗 문단에서 주어를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데, 물론 민족-볼셰비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임. 그러나 정확한 이해는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