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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자유지상주의 이론체계/blog.naver.com/czech_love

<비침해성(NPA)의 공리와 자유지상주의 신조>

목차

1. 비침해성의 공리

2. 자유지상주의의 이념적 성향

2.1 자유지상주의의 국가관

2.1.1 자유지상주의의 지식인 분석

3. 자유지상주의적 반국가주의 저항의 목적

 

1. 비침해성의 공리

자유지상주의 신조는 하나의 핵심적 공리에 의존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체 또는 재산을 절대로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서 '비침해성의 공리'Non-Aggression Principle 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침해'Aggression 는 타인의 신체나 재산에 대하여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로 정의되며 공격Invasion 과 유사한 뜻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절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면,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을 절대적 권리를 갖는다면, 이는 당연히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민의 자유'Civil Liberties 를 확고하게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민적 자유는 언론, 출판 및 결사의 자유는 물론이고, 포르노나 변태적 성행위 그리고 매춘과 같이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s 를 행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범죄'를 타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한 폭력적 침해로 정의하기 때문에, 피해자 없는 범죄는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강제징집제도를 대규모 노예제도로 간주하며, 국가 간의 전쟁 특히 현대전과 같이 무고한 시민의 대량 살상을 유발하는 전쟁은 명백한 부당 행위로 간주한다.

 

2. 자유지상주의의 이념적 성향

위와 같은 자유지상주의 입장은 현대의 이념적 잣대로 보면 '좌익'과 유사하다. 그러나 좌익과는 달리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사유재산권에 대한 침해를 반대하기 때문에, 사유재산권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간접은 물론이고, 규제 및 통제, 보조금 지급, 그리고 사업제한 및 금지 등을 통해 정부가 자유 시장경제에 간섭하는 모든 행위를 철저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이 다른 사람의 침해 및 약탈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면, 그의 자산을 자유롭게 무상으로 양도, 증여 및 상속을 하거나 아무런 간섭 없이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교환(자유로운 계약이나 자유시장을 통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사유재산권과 자유로운 거래를 제한없이 보장하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Laissez-Faire Capitalism 체제를 지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유재산과 경제체제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입장은 통상적 잣대에 의하면 '극우적'이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 어떤 경우는 '좌파', 다른 경우는 '우파'와 입장이 같다고 해서 일관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각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일관성 있는 유일한 입장이다. 개인의 자유 측면에서 좌파와 우파는 모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좌파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쟁이나 강제징집과 같은 폭력에는 반대하면서 어떻게 세금징수나 시장통제와 같은 폭압적 침해행위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모순을 보일 수 있는가? 우파 역시 한편으로는 사유재산권 보장과 자유기업체제를 찬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강제징집을 지지함을 물론, 단지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비침해적 활동 및 사업의 불법화를 지지한다. 우파는 또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에 대한 정부의 광범위한 보조금 지급이나 시장 왜곡 또는 비효율 등의 병폐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어떻게 자유시장체제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1 자유지상주의의 국가관

이 부분은 '침해자인 국가'와 '국가와 지식인' 선행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의 단체를 불문하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견지하면서,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폭압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 기제가 바로 국가라고 간주한다. 이 점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좌파, 우파 또는 중도파들을 비롯한 여타 입장과 확연히 다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어느 개인이나 사회단체가 범했다면 당연히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거나 법적으로 처벌해야 할 행위임에도, 국가가 자행하면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여타 사상의 입장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간단히 말해, 아무리 국가라 하더라도 보편적 도덕 및 규범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으며 모든 개인 및 집단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가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 조차 극악무도한 범죄로 인정하는 행위를 국가가 저지르면 관대하게 눈감아주고 심지어 관장하는 사례를 쉽사리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국가는 '전쟁'이나 '폭동 진압'을 핑계로 대량학살을 습관적으로 자행해왔고, '징집'이라는 허울 하에 국민을 노예처럼 부려왔으며, '조세'라는 핑계로 국민의 재산을 강탈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국가 행위가 대다수의 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지 여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설사 국민 대다수가 국가의 수탈을 용인한다 해도, 전쟁은 여전히 대량학살이고, 징집은 노예제도이며, 세금징수는 도둑질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고집스럽게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계속 외쳤던 동화 속의 아이와 같다.

 

2.1.1 자유지상주의적 지식인 분석

역사적으로 집권자들은 어용 지식계급에 의해 신격화되어 왔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왕의 가신들은 국민에게 국가와 왕은 신성하다는 사상을 지속해서 주입함으로써 왕들이 저지른 독재, 대량학살, 광범위한 경제적 수탈 등을 국가 경영상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게끔 하였다. 근대사회로 이동하면서 집권자들의 신성한 지위는 거의 소멸하였으나 '여용 지식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국가와 집권층을 대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공공의 이익'과 '국민 복지'를 위한 것이고 세금을 걷고 쓰는 일은 소위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1 를 통해 국가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는 것이며, 정부의 다양한 '서비스'는 민간이 시장과 사회에 대해 자율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제공하는 것이라고 선전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정부와 어용지식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국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술책이고 국민을 기만하는 수작에 불과하며, 오직 정부만이 제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대국민 서비스 역시 민간이나 기업이 훨씬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자유지상주의적 반국가주의 저항의 목적

그러므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요 과업 중의 하나는 불행히도 국가의 허구성을 직시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국가는 더이상 신성하지 않고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파하고 계몽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민이 국가를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전제 군주는 물론이고 소위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현대국가 역시 결고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모든 정부는 국민을 착취하고 국민 위에 군림함으로써 존속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국가 지배의 필요성 및 정당성에 대한 어떤 객관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지속해서 계몽해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는 주된 기제가 바로 조세와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왔다. 비록 어용 지식인들이 온갖 술수를 사용하여 국민이 국가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조장하고, 그 대가로 집권자들로부터 권력을 나누어 받고 국민에게서 착취한 부를 챙길지라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민이 언젠가는 실상을 파악할 것이라고 믿는다.

 

국가주의자Statists2 에 따르면, 납세는 국민의 자발적 행위이다.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세금납부가 진짜 '자발적' 행위라면, 누구도 세금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국가로부터 처벌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생각해보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과 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정부만이 강제적 폭력을 동원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정부 의외의 모든 개인과 단체는 자발적 기부(동호회, 자선단체 등), 또는 소비자들의 자발적 구매에 의한 재화와 서비스의 판매를 통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만약 정부가 아닌 누군가가 감히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강제적 약탈이나 도둑질로 간주될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통치권'Sovereignty 이라는 요상한 개념을 동원해서 국민을 상대로 엄청난 규모의 도둑질을 합법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방식으로 자행하고 있다. 오진 자유지상주의자들만이 이 같은 실태를 직시하고 사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1. 거시경제에서 정부(개인 포함)의 지출은 결국 개인이나 기업의 소득으로 돌아간다. 즉, 정부 지출이 소득을 늘리고 그 소득은 다시 지출을 초래하는 방식으로 반복적 과정을 겪게 된다. 정부 지출이 경제에 몇 배수의 효과를 초래하는지를 개념화한 것이 승수효과이다. 케인즈 학파는 정부 지출이 승수효과를 통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여 침체된 경제를 자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가국에서는 종종 둔화된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공공사업에 대한 정부 지출을 시행한다. 도로 건설을 예로 든다면, 정부 지출은 시멘트, 철재, 건설장비의 구매는 물론 건설 인력에게 임금으로 지급된다. 이어서 도로 건설에 참여한 기업과 사람들은 획득한 이윤과 임금을 식품, 주택, 의복 등의 구매에 다시 소비하게 되며, 이 같은 소비활동이 승수효과를 통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 만일 소득의 80%를 소비하고 20%를 저축하는 (즉, 한계소비성향 = m = 0.8) 어느 건설인력에게 200만원의 임금이 지급되면, 그 사람의 소비지출이 경제에 미치는 승수는 2,000,000/(2,000,000-m) = 2,000,000/(2,000,000-0.8) 1000만원이다. 다시 말하면, 200만원의 임금을 지급받고 80%를 소비하면 임금의 5배인 1000만원이 경제 전체에서 지출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한계소비성향이 클수록 승수효과는 커진다.
  2. '국가주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신들과 입장이 대비되는 입장을 지칭하기 위해 즐겨 쓰는 정치철학 용어이며,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사름들을 국가주의자라고 부른다. 국가주의자들은 좌파이건 우파이건 간에 국가는 좋은 것이며,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목표 달성을 위해 국가(또는 중앙정부)의 사용 또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최근(2011년)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 댄 미첼은 부유한 국가주의자들(예, 워렌 버핏)에 의한 세금 더 내기 운동(예, 부유세 납부)과 큰 정부 만들기 주장을 위선적 행태라고 비판하였다.

     

 

<자연권공리와 존로크의 소유권이론>

목차

1. 자유지상주의의 공리

1.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

1.1.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의 문제점

1.2 자연권 사상

1.2.1 자연권적 자유지상주의 비판에 대한 반박

1.2.2 자기소유권 원칙을 통한 공산주의 비판

2. 자유지상주의의 물적소유권 이론

2.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물적소유권 이론 비판

- 로크의 물적소유권 이론

 

1. 자유지상주의의 공리

자유지상주의 신념의 핵심 공리는 다른 사람의 신체와 재산을 절대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공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그것의 이론적 기초와 배경은 어떤것인지 살펴보자. 자유지상주의 공리는 대체로 주정주의Emotivism1, 공리주의Utilitarianism 그리고 자연권Natural Rights 이론 등 세 가지 유형의 윤리학설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정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근거에 토대를 두고 자유 또는 비침해성의 공리를 지지한다. 그러나 주관 및 감성에 의존헌 주정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은 그들 자신의 신조를 굳건하게 만드는 근거로서는 타당할지 몰라도 타인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주정주의에 의하면, 도덕적 원칙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아무리 그들 자신은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1.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

한편, 공리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결과에 관한연구에 기초하여, 세상은 자유가 보장될 때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가치인 조화, 평화 그리고 번영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념을 평가함에 그 이념이 초래하는 결과를 비교하여 장단점을 평가하고 상대적 우월을 가늠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공리주의적 윤리에만 의존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리주의는 각각의 선택지가 가져오는 결과의 좋고 나쁨을 측정할 수 있고 그것에 기초하여 정책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선택지 X가 초래하는 결과에 관해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다면, 결과가 아니라 대안 그 자체에 가치판단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어느 행위 그 자체는 그것이 지닌 본질적 성격에 의해 선악을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리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 상황에 예외 없이 적용 가능한 절대적이고 일관된 판단 기준과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기껏해야 모호한 지침이나 이상적 목표만을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그 원칙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9세기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의 중요한 약점이었다. 이들 급진주의자는 18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방임주의적 이념을 이어받았지만, 그 후 소위 '신비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자연권 사상을 포기하고 당시 '과학적'이라고 칭송받았던 공리주의를 자신들의 철학적 기초로 삼았다. 그 때문에 19세기의 자유방임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판단척도가 아닌 여러 다양한 척도 중의 하나 정도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현실과 타협을 계속하면서 자유지상주의 신념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밝혔다.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다양한 가치와 이해가 서로 상충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모든 구체적 사안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이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기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현대 인물 중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지유지상을 신봉하는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역시 다른 고전경제학자들처럼 국가의 간섭을 비판하고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자유를 다양한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한 개념으로 취급함으로써 실제 문제에서 수없이 많은 독소적인 예외를 용납하고 말았다. 경찰과 군대 문제, 교육, 조세, 복지, 이웃효과Neighborhood Effects2, 반독점법, 그리고 화폐 및 금융 분야에서 그가 용납한 예외들은 그가 평소에 주창했던 자유와 자유시장의 원칙을 스스로 와해시키기에 충분했다.

 

1.1.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의 문제점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악마의 사도라는 맹목점 믿음에 근거하여 발견 즉시 사형에 처하는 공동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더 나아가 빨간 머리는 조상 대대로 아주 소수이여서 통계적으로 거의 무시할 정도라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들Utilitarian-Libertarian 은 아마 다음과 같이 추론 할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빨간 머리 몇 명을 처형하는 짓은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빨간 머리의 공개처형으로부터 커다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비용은 무시할만한 수준이고, 사회적, 심리적 혜택은 매우 크다. 따라서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빨간 머리들을 처형하는 것이 올바르고 적절한 일이다."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반해 자연권 이론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Natural-Rights Libertarian 은 '정의'에 대한 신념에 따라 이러한 행위는 절대로 넘겨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같은 처형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정의롭지 않은 행위이며 공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비록 빨간 머리를 처형하지 않아 '그 결과'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심리적 쾌감을 느낄 수 없다고 해도, '절대주의적인' 자유지상주의자들은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사회 정의와 논리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자연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기꺼이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1.2 자연권 사상

그러면 이제 자유지상주의 신조의 기초를 제공한 자연권 사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자연권 이론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자유지상주의자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철학적 기초로 받아들였던 사상이다. '자연권'은 역사적으로 자연법Natural Laws 사상이라는 더 포괄적인 사유체계의 정치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자연법 이론은 다음과 같은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 이상의 다양한 독립체Entity 로 구성된 세계에 살고 있고, 각각의 독립체는 다른 독립체와 구분되는 특유의 속성, 즉 '본질'Nature 을 갖고 있으며, 그 본질은 인간의 이성, 지각 및 정신 능력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리는 다른 금속과 구별되는 속성이 있어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철이나 석탄도 본연의 속성과 역할이 있다. 인간이라는 종Species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 가능한 속성이 있다. 이에 더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세계 및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에서 나타나는 구별 가능한 속성도 있다. 조금 지나치게 축약하여 말한다면, 모든 무기체와 유기체는 그것에 고유한 자연적 속성과 그것이 접촉하는 다른 독립체의 자연적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식물이나 하등동물의 경우, 각자는 생물학적 특질 즉 '본능'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인간은 이와 달리 목적으 선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스스로 마련하는 특질을 타고났다. 인간은 외부환경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본능을 갖고 있지 않아서, 각자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활용하여 가치관을 선택해야 하고, 원인과 결과를 판단해야 하고, 자신의 생종과 유지를 위해 목표 지향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평가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개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각자가 자유롭게 배우고, 선택하고, 소질을 계발하고,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각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이것이 인간 본성에 맞는 길이다. 누군가 폭력을 사용하여 이 과정을 방해하거나 저지른다면 그것은 곧 인간 속성에 의해 추구하는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해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배움과 선택을 폭력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매우 '반인간적'Anti-human 인 처사이며 인간의 욕구에 관한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1.2.1 자연권적 자유지상주의 비판에 대한 반박

개인주의자들Individualists 은 늘 '원자론적'Atomistic 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아 왔다. 즉 개인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아무런 교류 없이 혼자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다시 말해 아무도 없는 '텅빈' 진공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전체주의자들이 그저 비판을 위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개인주의자 중 실재로 '원자론적'으로살아온 사람이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사실상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서로 배우고 협조하고 교류하면서 살아왔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주변으로부터의 어떤 영향은 수용하고 거부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을 먼저 수용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수용할 것인지에 관한 최종 선택은 각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발적으로 교환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적극 지지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자발적인 협력을 저해하고, 각자가 지닌 생각과 뜻에 어긋나게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강제하는 폭력의 사용이다.

 

1.2.2 자기소유권 원칙을 통한 공산주의 비판

자연권 이론에 입각한 자유지상주의 입장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핵심 논제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자유지상주의의 기본적인 공리라 할 수 있는 '자기소유권'Right to Self-Ownership 에 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각자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기 신체를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소유권이 의미하는 바다. 이는 누군가의 강압적 간섭 없이 자기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판단하고, 목적과 수단을 선택해야 하므로 어떤 강압적 폭력에 의해서도 방해받거나 제한당하지 않고 이 같은 중요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신체 소유권을 '부인'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해보자. 오직 두 가지 경우만이 존재하게 된다. (1) 특정 집단 A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집단 B에 속한 사람들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는 경우이거나, (2)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몫으로 서로를 공유할 권리를 가지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에 따르면, 집단 A에 속한 사람들은 인권을 갖게 되지만, 집단 B에 속한 사람들은 사실상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된다. 당연히 인권또한 가지지 못한다. 물론 집단 B에 속한 사람들 역시 '인간'이므로, 특정 부류의 인간에 대해서 인권을 부인하는 첫 번째 경우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더욱이 집단 A에 속한 사람들에게 집단 B에 속한 사람들을 소유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전자로 하여금 후자를 정당한 대가없이 착취하면서 기생충처럼 살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기생 행위는 바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생산과 거리와 같은 기본적 경제 행위를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두 번째 대안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몫으로 서로를 공유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경우로서 '참여적 공유주의'Communalism 나 '공산주의'Communism 라고 부를 만하다. 만약 지구상에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면 모두가 다른 사람을 70억분의 1만큼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첫째, 이 같은 입장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고 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 반면 정작 본인은 '자기 자신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같은 세계가 실현 가능한지도 따져 볼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사전 동의나 지시 없이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세계는 실현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산주의자' 세계에서는 누구도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머지않아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만약 본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전혀 보유하지 못한 반면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소유권만을 보유하는 세상이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면, 한 걸음이라도 그러한 방향으로 내딛는 것 자체가 결국 지구상에서 인간과 인간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자연법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

 

결론적으로 참여적 공유주의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세상에 사는 사람은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의 신체를 똑같이 배분하여 소유하므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쪼갤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할 때, 다른 사람의 신체를 지속해서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만인이 만인에 대한 공동의 소유권을 보유한다는 개념은 유토피아적 발상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참여적 공유주의 개념을 실현하려면 다른 사람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특정 전문가 집단에 양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렇게 할 경우, 그 특정 전문가 집단이 결구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계층으로 자리잡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에서 공유주의 또는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은 곧 실재에 있어서는 계급지배 체제Class Rule 로의 전락을 의미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앞에서 논의한 첫 번째 경우와 유사한 입장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2. 자유지상주의의 물적소유권 이론

결국 자유지상주의는 앞서 설명한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거부하고 자유지상주의 기본 공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즉,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이유에 의해 자기 소유권이라는 보편적 권리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보다 좀 더 어려운 과제는 사람이 아닌 사물, 즉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에 대한 소유권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신체 소유권을 침해했을 때, 그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만약 A가 B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A는 B가 가진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소유권의 침해 여부는 판단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가 소유한 시계를 빼앗은 경우에도, 우리는 쉽게 A가 B의 소유권을 침해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A가 시계의 원래 소유자, 즉 '진정한' 소유자여서 자신의 재산을 정당하게 되찾는 행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를 판단하려면 시계의 정당한 소유자가 A인지 혹은 B인지 그도 아니면 제3자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이론, 즉 소유권에 대한 정의론Theory of Justice 이 필요하다.

 

2.1 공리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물적소유권 이론 비판

자유지상주의자 중 어떤 이는 현행법이나 현행 정부방침에 의해 공인된 소유권을 준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 정부의 실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정부가 하는 일이라며 무엇이든지 간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던 자유지상주의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모든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는 소유권 개념을 바로 그 정부로 하여금 규정하고 적용하도록 맡기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단은 존속해온 소유권을 모두 인정해준 후, 이후부터 새로운 자유지상주의 세상을 여는 것이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바로 공리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주의자들Utilitarian Laissez-Fairists 이 다시말해, 이들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그간 자유의 침해자라고 계속 지탄해 온 바로 그 정부의 법령에 따라 인정된 기존 소유권을 그대로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날 정부와 산하 기관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간 누려왔던 권력을 포기해야 할 사태에 이르자 시민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직전 다음과같은 간교한 책략을 쓴다고 상상해보자. 뉴욕 주 정부는 뉴욕 주의 모든 토지를 록펠러 가문에게 이양하고, 메사추세츠 주 의회는 마찬가지로 모든 땅을 케네디 가문 소유로 만드는 법률을 제정한다. 다른 주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률이 제정된다. 그런 후에 정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핑계로 앞으로는 모든 권력을 포기할 것이며, 세금과 규제 관련 법률 역시 모두 철폐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경우, 공리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록펠러와 케네디 가문이 새로 취득한 소유권을 정당한 사유재산권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소유권에 대한 정당성 이론을 전혀 갖추지 못한 공리주의자들이 만약 이와 같은 정부 법령에 따라 인정된 소유권을 그대로 승인한다면, 미구의 50개 주에서 50명의 신흥 부호들이 일방적으로 '임차료' 형태의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사회질서를 승인하는 셈이 된다. 이에 비해 자연권 이론을 지지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유일하게도 정부 법령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당한 소유권 이론을 정립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만이 새로운 지배층이 전 국토를 사유화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고 무효화시킬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다. 19세기의 위대한 자유주의자였던 영국의 액튼 경이 자연법이야말로 정부의 법과 조례를 지속해서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이론적 기초라고 역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자연권 입장에서의 소유권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로크의 물적소유권 이론

우리는 이제까지 각개인의 자기 소유권, 즉 자기 자신과 신체에 대한 소유권의 공리를 확립해왔다. 그러나 사람은 떠도는 유령도 아니고,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단히 활용함으로써 생존하고 번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땅 위에서 '거주'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 자연이 제공한 자원을 '소비재', 즉 자신이 사용하고 소비하기에 적합한 물질로 변환시켜야 한다. 먹거리를 재배하여 식품으로 만들어야 하고, 광물을 채굴하여 돈을 벌거나 유용한 소비재로 가공해야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물질 또한 소유해야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물질에 대한 소유권은 어떻게 배분해야 하나?

 

이해를 돕고자 진흙과 도구를 사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조각가를 상상해보자. 잠시 진흙 덩어리와 조각 도구가 애초에 누구의 소유였는지는 접어두기로 하자. 여기에서 문제의 초점은 "조각가가 공들여 만들 예술품은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이다. 물론 이물음에 대한 답은 조각가이다. '창조'한 것이므로 그의 소유이다. 비록 그가 물질을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연이 제공한 물질(즉, 진흙)을 자신의 아이디어와 손과 에너지를 동원하여 다른 형태로 변환시켰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조각가가 그의 작품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기 몸을 소유할 권리가 있고, 또한 생존을 위해 세상의 물질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면, 자신의 에너지와 노력을 투입하여 만든 작품은 조각가가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나하면 그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조각가의 몸과 마음이 '확장'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유권에 대한 위대한 이론가 존 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가는 진흙 덩어리에 자신의 '노동을 섞음으로써'Mixing his labor 그 원재료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각인시킨 것이다. 조각가가 자신의 에너지를 투입하여 변환시킨 작품은 이제 조각가의 아이디어와 비전이 물질적으로 구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존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3

 

… 모든 사람은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 의외에는 누구도 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그의 몸을 사용하는 '노동'과 그의 손을 사용하는 '작업' 역시 전적으로 그의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렇다면 자연이 제공해서 줄곧 자연 속에 존재해온 상태로부터 추출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자기가 소유하는 어떤 것과 결합하면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 비록 애초의 자연 상태에서는 인류 공동 소유로 존재했지만, 그 사람이 그것을 추출하여 그의 노동을 결합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면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공동 소유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노동은 의문의 여지 없이 노동한 사람의 소유이므로, 일단 그 같은 노동이 결합한 것에 대해서는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권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에 대한 소유권처럼, 물건의 소유권에 대해서도 세 가지 논리적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1) 그것을 만든 사람, 즉 '창조자'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다. (2)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그가 창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다. (3) "공유주의적" 해법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몫으로 그 조각에 대한 소유권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신체애 대한 소유권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그 조각가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빼앗은 사람이나 집단이 전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지라도 그럴 것이다. 누가 그런 권리를 가질 수 있겠는가? 조각가의 마음과 에너지로 만든 작품을 무슨 권리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조각가가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섞어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처럼 명백한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조각가의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신체를 공유하는 공유주의적 해법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어느 창조자의 작품을 '전세계 공동 유산' 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 실제로 공동 소유로 삼으려는 해법은 결국 '일부' 특권계층의 독점체제를 초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른 '모든 생산물'과 조각 작품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땅에서 진흙을 추출하여 조각가에게 판매한 사람들의 경우, 조각가처럼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자연이 준 물질에 자신들의 생각과 기술적 비법을 섞어서 유용한 제품을 만들었으므로 똑같은 '생산자'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천연자원에 자신의 노동을 섞어서 그 자원을 좀 더 유용한 제품과 서비스로 변환시켰기 때문에 '생산자'로서 그 소유권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소유권은 정확히 어떤 시점부터 발생하는 것일까? 다시 로크의 말을 들어보자.

 

숲속 도토리나무에서 채취한 도토리나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를 먹고 살아온 사람은 그것들을 당연히 자신의 소유로 여겨왔다. 아마 아무도 그가 채취한 것이 그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정확히 언제부터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일까? 소화되었을 때일까? 먹었을 때일까? 삶았을 때일까? 집으로 가져왔을 때일까? 아니면 채취했을 때일까? '분명한 것은' 만약 최초의 채취 행위로 그것이 그의 것이 되지 않았다면, 그 후의 어떤 행위도 그것을 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것과 만인 공동의 것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노동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우리 모두의 공동의 어머니인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에 무엇인가를 새롭게 더한 것이 바로 노동이므로, 그가 채취한 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가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채취한 도토리와 사과를 그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를 혼자서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그의 행위를 도둑질로 간주해야 하는가? 만약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 제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이다. … 그렇기에 비록 애초에는 다른 사람들과 권리를 공유하고 있던 지역에서 내 말이 뜯어 먹은 풀, 내 하인이 깎은 잔디밭, 내가 직접 채굴한 광물은 다른 사람에게 일부를 배분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아도 나의 소유가 된다. 그 노동은 바로 나의 소유이므로 그것들을 애초에 공동 상태로부터 때어낸다면 그것들은 바로 나의 소유가 된다.

만약 공동으로 주어진 것의 일부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데 반드시 다른 모든 사람의 명시적인 동의를 얻어야 한다면, 어느 아버지나 주인이 자신의 아이들이나 하인들에게 공동의 고깃덩어리를 주더라도 각자에게 정해진 몫을 배분하지 않고는 그 고깃덩어리를 자를 수조차 없는 경우와 같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라고 해서 누가 과연 주전자 속의 물이 그 물을 길은 사람의 소유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그의 노동이 이미 샘물을 공동 소유의 자연의 품으로부터 뗏다 … 따라서 그것은 그만의 전유물이 된다.

이 같은 이성의 법칙에 의해 인디언이 애써 사냥한 사슴은 그의 소유물이 된다. 비록 그전에는 모든 사람의 공동의 권리였지만, 그것에 그의 노동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성의 법칙에 의해 그의 재화로 인정한다. 이전에는 공동 소유였던 것에 대한 최초 소유권 인정 문제에 적용되었던 이 원시적인 자연법칙은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아직도 인류 공동 소유의 드넓은 바다에서 누군가가 잡아 올린 물고기나 공동소유의 자연 상태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잡아 올린 향유고래에서 추출한 용연항에 대한 소유권은 그런 수고를 마다치 않고 감수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 로크의 토지소유권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고, 따라서 그 신체를 사용한 노동까지 소유한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노동을 사용하여 '창출'하였거나 그 이전에는 누구도 사용하거나 소유하지 않아서 '자연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부터 채취한 재화를 모두 소유한다고 가정하면, 이제 남은 문제는 '바로' 그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나 통제권은 과연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도토리나 산딸기는 그것을 채취한 사람이 소유권을 갖고, 밀과 복숭아는 그것을 수확한 농민이 소유권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이것들이 자라난 땅에 대한 소유권은 과연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일까?

 

2.3 공산주의적 토지소유권 비판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줄곧 입장을 같이 해왔던 헨리 조지4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즉, 채취 및 수확활동이 이루어진 '땅', 즉 토지에 대해서는 개인의 소유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현재 그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개인이 생산하고 창조한 재화는 당연히 각자의 소유이지만, 토지는 자연 또는 신이 창조했으므로 누구도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효율적으로 생산에 활용되려면, 토지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반드시 소유 또는 통제되어야 한다. 이들의 주장을 논의하기 위해 토지의 소유 방식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안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첫째, 처음으로 토지를 생산에 투입한 사람, 즉 첫 번째 토지 사용자에게 소유권을 귀속 시킨다. 둘째, 첫 번째 토지 사용자가 아닌 다란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에 그 소유권을 귀속시킨다. 셋째, 전 세계 모든 인간이 모든 통지를 각각 똑같이 나누어 소유하는 방식이다. 헨리 조지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했지만, 그것으로는 그가 애초에 제기한 도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즉, 만약 토지가 하느님이나 자연에 귀속되어야 마땅하다면, 전 세계 모든 인간이 모든 토지를 똑같이 나누어 공동 소유하는 것이 각 개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허용하는 것보다 왜 더 도덕적인가? 현실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토지에 대해 70억 인구가 (만악 인구가 70억이라면) 각기 70억 분의 1 만큼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전 세계인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위에서 내린 결론과 마찬가지로, 몇몇 독재자 집단이 통제하고 소유하는 과점체제를 낳게 된다.

 

헨리 조지의 주장이 가지는 이 같은 한계점과는 달리,자연권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토지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문제와 토지가 아닌 다른 모든 재화에 대한 최초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누구도 '실제로' 물질을 '창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자연이 제공한 물질을 가지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비전에 따라 노동을 투입함으로써 그 물질을 변환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그전에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토지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든 개척자, 즉 '개척이주민'Homesteader 의 행위와 정확히 동일하다.5 토지를 정비하고 울타리를 치고 땅을 갈고 그 위에 농가건물을 지은 개척이주민의 행위는 땅에서 철광석을 채굴한 사람의 행위와 다르지 않으며, 자신의 노하우와 에너지를 투입해서 채굴한 철광석을 강철로 변환시킨 사람의 행위와 정확히 동일하다. 개척이주민 역시 자신의 노동과 정성을 다해 자연이 제공한 땅을 변환시켰기 때문이다. 조각가나 제조업자의 경우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개척이주민은 그 땅의 합법적 소유자이다. 개척이주민 역시 다른 사람들만큼 '생산자'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만약 최초의 토지가 자연이나 신이 부여한 것이라면 사람들의 재능, 건강과 아름다움 역시 자연이나 신이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 모든 속성이 '사회'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에게 부여되었듯이, 토지나 자연자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이 모든 자원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회는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세상에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상호작용하는 개인들만이 존재한다. 토지나 다른 모든 재화를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정부 관료나 그와 흡사한 소수 독재집단이 그 재화를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최초로 그 재화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자 또는 개척이주민들을 착취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더구나 누구도 최초 토지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으며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노동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산하거나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반드시 토지와 다른 천연자원의 도움알 받아야 한다.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토지와 천연자원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태어나며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자원에 노동과 정신과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그 자원을 자신에게 좀 더 유용한 재화로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만약 개인이 최초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면, 인간은 온전한 의미에서 노동의 결과물을 소유할 수 없다. 예컨대 만약 농민이 밀을 키울 수 있는 땅을 소유할 수 없다면, 그 자신이 수확한 밀 또한 소유할 수 없다. 결국, 토지와 노동은 밀접하게 서로 연계되어 있어서, 토지소유권을 빼앗으면 나머지에 대한 소유권도 동시에 빼앗는 것이 된다.

 

만약 노동의 결과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의 소유란 말인가? 예를 들어,어떤 사람이 아이오와 주에 있는 땅을 밀밭으로 일구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 땅에 대해 파키스탄의 어떤 신생아가 일부 지분을 소유한다면 설득력이 있을까? 아이오와의 어떤 어린애가 파키스탄에 있는 어느 농장에 대해 일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그 땅들은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고 누구도 소유한 적이 없었던 토지였는데도 말이다. 헨리 조지와 같은 공유주의자들은 그 토지를 전 세계인의 공동 '소유'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아무도 아직 사용한 적이 업었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주인이 없는 땅이다. 인류에게 가치를 주지 못한 그 땅을 생산과 사회적 효용이 있는 것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그 땅을 최초로 사용하고 옥토로 전환한 개척자 또는 개척이주민들이다. 수천 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살면서 그런 토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공동소유권을 나누어 주려고 그 개척민들로부터 소유권을 빼앗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도덕적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권적 의미에서 누가 과연 정당한 소유권을 지녔는지에 대한 문제는 가축의 예를 살펴보면 훨씬 더 명확해진다. 동물은 원래 자연에 속한 자원이어서 경제적 의미에서 '땅'과 다를 바가 없다. 아마 야생마를 최초로 발견하고 길들여서 가축으로 전환한 사람에게 그 말의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산에서 도토리와 딸기를 채취한 사람에게 그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개척이주민은 그때까지 누구도 경작하지 않았던 '야생'의 땅을 '길들여' 쓸모 있는 생산적 토지로 만든 사람이다. 따라서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든 사람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야생의 땅에 노동을 투입한 사람에게 그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로크가 천명했듯이 "어느 사람이 땅을 개간하여 나무를 심고, 토질을 개량하여 씨를 뿌리고 경작하여 그 생산물을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소유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토지에 노동을 투입한 사람은 그 토지의 공동 소유를 배제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칠 권리가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였던 레온 윌로우스키와 에밀 르바써는 자유지상주의의 소유권 이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적극 실행할 수 있고 동시에 지능적이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행을 통해 바깥 자연에 영역을 확대하고,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지배하고, 자신의 필요에 적합하도록 그것을 변형시키며,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과 자연 사이의 인과 관계를 확립함으로써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

문명국가에서 인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땅이나 나뭇잎이 어디 있는가? 도시에 사는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평평한 포장도로나 잘 다져진 도로 위를 걷는다. 예전의 진흙 길을 개선하려고 멀리 떨어진 언덕 기슭에서 돌과 자갈을 가져다가 포장하여 좋은 길로 만든 것도 인간이다. 지금도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사람들의 활약상을 관찰할 수 있다. 수 세대에 걸쳐 농민들은 토질을 개선하고 기름진 땅을 갈아 경장하였다. 사람들은 강을 막아 댐을 만들고 황량한 곳에 물을 공급하여 기름진 땅으로 변환시켰다. … 어디에서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켰다. 자연은 인간을 주인으로 인정했으며, 인간은 자연 속에 있을때 편안함을 느낀다.자연은 늘 인간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용됐으며, 점차 인간의 '소유'로 인식되었다. 자연은 인간의 '재산'이며, 그 소유권은 정당한 것이다. 소유권은 인간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신성한 권리이다. 재화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으로부터 절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소유물이다. 인간이 출현한 이후에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추출되고 운반됨으로써 소위 가치있는 재화가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이것들이 상호 교환 가능한 부Wealth 로 추척되었다. 모든 것이 자연적 물질로 이루어졌지만, 그 물질의 기여가 거의 없는 위대한 화가의 그림에서부터 단지 흐르는 강물을 끌어올려 소비자에게 제공되는 물 한 동이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인간의 생산물은 인간들 사이의 품질 평가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획득하며, 그 품질은 인간의 활동과 지적 능력 그리고 힘으로 결정된다. 생산자는 자신이 만든 제품 속에 오직 그 자신만이 지닌 개성을 반영시키며, 그 개성이 결국 높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그 생산물은 모두 외부 자연에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투영하여 만든 결과물이다. 그리고 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소유물이다. 다시 말해, 그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생산능력이 바로 그 자신의 소유이므로, 그 능력을 발휘하여 생산한 결과물 역시 당연히 자신의 재산이다. 이같이 인간의 개성이 분명하게 각인된 것에 대한 소유권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부는 그것을 창조한 인간에게 귀속시킬 수 밖에 없다. … 인간이 물질에 자신의 개성을 각인시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이다. 지구를 가꾸고 쓸모없는 땅을 기름진 전답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노동이고, 버려진 산림을 질서정연하고 경제적으로 유용한 숲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노동이다. 씨앗을 뿌려 대마를 가꾸고, 대마에서 실을 뽑고, 그 실을 가지고 천을 짜고, 다시 천으로 옷을 만드는 것도 바로 여러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투입한 노동의 산물이다. 광산에서 캐낸 볼품없는 철광석을 조각상으로 변환시켜 공공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것을 관람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술가의 생각을 지속해서 전달해 주는 것 역시 인간의 노동이다.

노동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는 재화는 그것에 독특한 향취를 부여한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과 마찬가지로 재산에 대한 소유권 역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신성불가침하다. 어느 개인이 애초에 독립적으로 혼자서 재작했다면 당연히 그의 소유이어야 하고, 여러 사람이 협조하여 제작에 참여한 때에도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유한 사람이 이전의 모든 작업자가 기여한 노동과 그 결실에 대해 소정의 가치를 내고 샀다면 그것의 소유여야 한다.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물픔은 대체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유하게 된다. 소유물이 판매나 상속을 통하여 타인에게 양도될 때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소유물은 인간의 노동이 투영된 자유의 결싱이며, 그 보유자는 생산자가 소유권을 갖게 된다.

 

  1. 주정주의는 1930년대 철학자 에이어 등이 주창했으며, 윤리는 논리나 원칙이 아닌 정서적 태도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도덕적 판단이나 규범, 명령과 같은 가치판단 기준은 합리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및 정서 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며, 진실 또는 거짓으로 규정할 수 없고, 도덕적 진실 또는 도덕적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문제는 어떤 진실된 규범체계를 가정해야 판단할 수 있으나, 우리는 그 기본적 도덕원칙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이웃의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이나 또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에 의해 개인의 성향이 형성되며, 그것이 개인의 투표 성향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하는 것이 정치학에서의 이웃효과이다. 이는 경제학의 외부효과External Effects 이론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어느 개인 또는 산업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들이나 산업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부정적 외부효과의 예를 들면, 하천 상류에서의 폐수 방출은 하류의 어족을 고갈시켜 하류에 거주하는어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이다.
  3. 로크는 당시 역사적으로 전승된 국왕과 교회에 유리한 재산권 이론의 대안으로 자연권에 기초한 재산권 이론을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헨리 조지는 미국의 작가, 정치인, 정치경제학자로서 "사람들은 자신이 창조한 것은 마땅히 소유해야 하지만, 토지와 같이 자연에 원래 존재하는 것은 인류가 공동으로 똑같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사상을 조지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는 1879년에 저술한 『성장과 재산』(Progress and Poverty)에서 산업사회에서는 순환적으로 불평등이 나타날 수 밖에 없으며 그 해결책은 토지가치세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토지는 공동으로 소유하되 토지사용자들에게 경제적 사용료를 부과하는 것이다. 현대의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조지주의 정신에 따라 공해물질 방출에 대해 환경세 도입을 주장하였다.
  5. Homesteader라는 말은 신대륙 초기의 개척이주민을 지칭한 데서 유래한다. 미국에서는 '공유지 불하법'(Homestead Act, 1862)을 제정하여 개척이주민에게 공유지를 불하하는 방법으로 개인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1934년까지 신청자의 약 40%인 160여만 명에게 토지 불하가 승인되었다. 이는 미국 토지의 약 10% 정도에 해당된다.

     

 

<자유지상주의 사회관>

목차

1, 자유지상주의 사회관

2. 사회의 인격화

 

1. 자유지상주의 사회관

이제까지 우리는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그러면 누군가가 '사회의 권리'Rights of Society 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권리가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로 간주하는 사회학 이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개인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는, 우월하고 신성한 존재로 취급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악에 관한 책임을 전가해도 무방한 악마적 존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자들은 오직 개인만이 존재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실재이고, '사회'는 단지 상호작용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호칭에 불과할 뿐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고수한다. 사회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재로 간주하는 것은 그 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 무엇인지 잘못 파악하는 오류를 낳는다. 만약 어떤 작은 공동체에서 10명의 사람이 딥단으로 다른 3명을 공격한다면, 이는 분명히 특정 개인들로 구성된 어느 한 집단이 합심하여 또 다른 개인들로 구성된 다른 집단을 해치는 경우이다. 이때 만약 10명의 사람이 자신들만의 '사회'를 대표한다고 착각하여 자신들이 저지른 일은 '사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법정에서는 물론이고 상식적으로도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아마 도둑들조차 이렇게 뻔뻔스러운 논리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그 같은 우스꽝스러운 논리가 사람들에게 먹혀들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2. 사회의 인격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라는 집한 명사에 대해서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파커 문은 이 같은 오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람들은 '프랑스'라는 단음절어를 사용할 때, 프랑스를 하나의 단위, 즉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프랑스가 튀니지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군대를 파견했다"는 말을 접할 때, 사람들은 프랑스를 하나의 개체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마치 인격을 지니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 같은 단어 사용 방식은 사실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를 마치 인격을 갖춘 여러 국가가 배우로 활동하는 화려한 드라마처럼 착각하게 된다. 진짜 배우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남녀노소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쉽게 간과하고 있다. … 만약 우리에게 '프랑스'라는 단어가 없다면 … 우리는 튀니지 원정을 다임과 같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프랑스 국민] 3,800만 명 중에서 일부가 튀니지 정벌을 위해 3만명의 다른 사람들을 파병하였다." 이렇게 표현하면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이 제기된다. 도대체 그 '일부'는 누구를 뜻하는가? 그들은 왜 튀지니에 3만 명을 파견했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왜 그들의 뜻을 따르는가? 제국주의 국가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할 문제는 각국에서 제국주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소수의 적극적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다음에 왜 대다수의 사람이 제국주의적 팽창에 필요 불급한 전쟁의 비용을 지그바고 더 나아가 참전까지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자들의 견해는 "사회는 당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견해는 대체로 '사회'가 초월적 권력을 갖는 영웅이면서 동시에 온갖 원성을 한몸에 받는 악당으로 간주하는 경우의 분석 도구로 사용된다. 어느 개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자신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스미스라는 사람이 존스라는 사람의 물건을 빼앗고 살해했을 때, '전통적인' 견해는 스미스가 자신의 행동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 자유주의자의 견해는 얼핏 세련되고 인도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주의자의 견해를 통해 다시 해석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스미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 즉 피해자인 존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이 스미스의 범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대부분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라는 가상의 실재를 도입해서 그럴듯 하게 말을 꾸미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사회학자인 아널드 그린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범죄에 대하여 범죄자는 책임이 없고 전적으로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회구성원들만이 범죄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은 사회를 악마로 간주할 때 만이 가능하다. 즉, 사회 속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행동이 바로 사회의 구성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사회를 그들과 전혀 동떨어진 악마 같은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대한 자유지상주의 기고가인 프랭크 초도로프 역시 "사회는 곧 사람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사회관을 피력하였다.

 

사회는 집합 개념 중 하나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편의상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가족, 군중, 갱단 등과 같이 사람들의 집합체에 붙여진 단어와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 제3의 '인물'이 아니다. 만약 인구조사 결과 인구가 1억 명이라면, 정확히 1억 명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하나라도 더 많이 존재하거나 적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비로소 사회에 추가될 수 있다. '유령도시'나 폐허만 남은 고대문명에서 볼 수 있듯이,구성원이 모두 떠나고 나면 사회 또한 사라진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사회를 어떤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들이 모두 사라지면 전체도 사라진다.전체는 절대로 개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집합명사인 사회를 단수형 동사와 딱을 이루어 사용하다 보니 잘못된 상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집단에 인격을 부여하게 되고, 마치 그 집단 자신이 몸과 마음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자유시장과 자유의 개념>

목차

1. 절대적 소유권과 자유시장

2. 자유의 개념

 

1. 절대적 소유권과 자유시장

자유지상주의 신조의 핵심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사유재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의 신체에 대해 절대적인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 이전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연자원을 누군가가 최초로 자신의 노동을 섞어 변환시켰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절대적인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공리,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 및 '개척자'의 권리는 자유지상주의 신념체계에서 중추적인 원리이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두 이들 핵심적 신조에서 도출되거나 그 함축적 의미를 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X는 밀을 키우는 농장주이고, Y는 어부이며, Z는 양배추를 재배하는 농장주라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들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부여되었다면,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자유계약과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정당성의 근거는 바로 이 같은 사유재산권으로부터 연유한다. 위와 같이 만약 X가 밀을 재배했다면 그는 그 밀을 Y가 잡은 물고기나 Z가 재배한 양배추와 교환할 수 있다. 또한 X와 Y, 또는 Y와 Z, 또는 X와 Z가 자발적으로 소유권을 교환하기로 동의하면 그 재산은 합법적으로 타인에게 이전된다. 만약 X의 밀과 Y의 물고기를 교환하면 Y와 물고기는 X의 재산이 되고, 반대로 X의 밀은 Y의 재산이 된다. 교환 후에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새로운 재산을 다시 양도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인간은 또한 자신의 소유인 재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동도 자유롭게 제공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노동 역시 당연히 그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Z는 농부 X의 농산물을 받는 대가로 X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나타나며, 그로부터 노동의 전문화 및 분업체제가 뒤따른다.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생산적 형태의 경제체제를 이룸으로써 인류 문명을 이끈 산업화와 현대 경제로의 발전을 기여하였다. 이러한 행운의 발전은 자유시장의 공리주의적 결과에 기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지지하는 '주요' 이유는 그 시장경제체제가 이룩한 결과 때문이 아니다. 그 주요 이유는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도덕적이며 자연권에 기초한 사유재산 보호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설령 애덤 스미스의 순수 자유체제System of Natural Liberty 보다 더 생산적인 경제체제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독재적이고 조직적인 권리침해가 심각한 사회체제라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도덕적인 이유로 그 자유체제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많은 분야에서 공리주의와 도덕성, 자연권 사상과 전체적인 번영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

 

고도화된 시장경제도 외견상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밀 재배 농부와 양배추 재배 농부, 그리고 밀제부 농부와 교사등 두 사람의 자발적 상호 합의의 기초한 거래가 확장된 네트워크에 불과하다. 내가 10센트를 내고 신문을 사는 것도 자발적이고 상호 이득이 되는 두 사람의 사이의 거래이다. 이 거래에서 나느 10센트의 소유권을 판매자에게 양도하고, 그는 신문의 소유권을 나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노동의 분업체제하에서 나는 신문 한 부의 가치가 10센트보다 더 크다고 믿으며, 마찬가지로 신문 판매자는 신문 한 부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10센트를 가지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교환이 발생한다. 또 대학교수는 강의라는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보다는 월급 받는 것을 선호하고, 대학 당국은 교육예산을 지출하지 않는 것보다는 교수의 강의서비스 제공을 선호하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진다. 만약 신문 판매자가 신문값으로 50센트를 고집한다면 나는 그 신문이 그 정도 가치는 없다고 판단하여 교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대학교수가 월급을 3배 올려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대학 당국은 그 강의 서비스를 중단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정의와 사유재산권, 그리고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기꺼이 수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농민들이 자신의 밀에 대한 소비자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기꺼이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산상속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야구 선수인 스타젤이 동료 선수인 잭보다 10배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스타젤이 잭보다 10배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백만장자인 록펠러 가의 아들이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학자인 로스바드의 아들보다 10배 이상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정당한지의 여부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해답은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인이 아니라 그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춘다. 만약 스미스와 존스 그리고 스타젤이 자신의 노동과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자신의 재산을 그들이 원하는 사람에게 자유롭게 '줄' 수 있는 권리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자신의 자녀에게 재산소유권을 유산으로 제공할 권리가 있다. 만약 스타젤이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재화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재화를 스타젤 2세에게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선진국의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농민은 밀과 화폐를 상호 교환한다. 제분업자는 밀을 사들여 밀가루로 변환시켜 빵을 만드는 제과업자에게 판매하고, 그 제과업자는 만든 빵을 도매상에게 팔고, 다시 산매상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팔리게 된다. 각 단계에서 생산업자와 판매업자는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화폐를 지급하고 노동서비스를 받는다. 각 단계에서의 '화폐'의 역할을 파악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지만, '개념적으로는' 화폐가 밀이나 밀가루 등과 교환되는 일련의 삼품과 같은 재화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물론, 밀이나 밀가루는 화폐 대신에 옷감이나 철등과 직접 교환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 단계에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소유권의 교환이 합의를 통해 거래된다는 사실이다.

 

2. 자유의 개념

이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1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논의할 차례이다. 자유는 어느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 및 합법적으로 획득한 물질적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부당하게 침해또는 공격당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타인의 재산을 훔친 사람은 타인의 머리를 때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한한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제한 없는 사유재산권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범죄'는 타인의 재산에 대한 권리, 즉 타인의 신체 또는 물질적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 행위이다. 즉, 범죄는 폭력을 사용하여 타인의 재산을 침해함으로써 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노예상태'는 자유의 반대말이며,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노예는 폭력에 의해 자신의 신체 및 생산물을 주인에게 체계적으로 착취당하는 사람이다.

 

이같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분명히 평등주의자Egalitarians 가 '아닌' 개인주의자이다. 자유지상주의자가 주창하는 '평등'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 여태껏 사용되지 않았던 자원을 '개척'하여 얻은 재산에 대한 권리, 그리고 자발적 교환 또는 증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휙득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각 개인에게 동일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사유재산권과 인권>

목차

1.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사유재산권의 필요성

1.1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모순 비판

2. 자유주의의 공리우선적 성향 비판

 

1.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사유재산권의 필요성

자유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개인의 자유'Personal Liberty 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성인 간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는 성적인 활동과 같은 개인적 '거래'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자기소유권은 철저히 옹화지만, '물질적 재화'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은 부정한다. 즉,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는 '인권'은 철저히 지지하지만 '사유재산권'은 거부하는 이분법적 입장을 취한다. 이에 비해 자유지상주의자는 인권과 사유재산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불리할 수 없어서 이 둘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다.

 

1.1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모순 비판

예를 들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Liberal Socialists 은 표현 및 언론의 자유를 '인간적' 권리로 생각하여 강력히 옹호하지만, 정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 각 개인의 사유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적' 권리가 어떻게 행사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정부가 모든 언론 매체와 인쇄소를 소유한다면, 어떻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만약 정부가 모든 언론 매체를 소유한다면, 필연적으로 모든 언론 매체를 운영하고 배정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갖게 된다. 따라서 만약 정부가 자신의 정책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 언론 매체의 사용을 제한한다면, 그 매체와 관련된 특정 국민의 '언론의 자유'는 한낱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또한, 정부 임의대로 부족한 예산을 여러 언론 매체에 배분하는 과정에서, 소수파 또는 소위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사회주의자들의 언론의 자유는 매우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정부가 모든 집회 장소를 소유하고 정부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에게만 그 장소의 사용을 허가한다면, '표현의 자유' 역시 언론의 자유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무신론을 표방해던 과거 소련 정부가 마트조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할당하지 않기로 했다면, 정통파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는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한의 이유에 대해 소련 정부는 숫자도 적은 정통파 유대인들의 과자를 만들기 위해 희소 재원을 투자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을 것이다.

 

'인권'과 '사유재산권'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초현실적인 추상적 존재로 취급하는 것처럼 심각한 오류이다. 인간이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에 자신의 노동을 결합해 유용한 재화로 변환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또한 자신이 거주하고 사용할 수 있는 토지 및 자원또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인권', 즉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계속 보장받으려면 물질세계에서 자신이 생산한 재화에 대한 소유권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권은 '사실상' 인권과 같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힘을 쏟고 있는 바로 그 인권이 보장되려면 필수적으로 사유재산권 보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 매체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권리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사유재산권과 분리된 인권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집회 장소를 자유롭게 빌릴 수 있거나 아예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즉 사유재산권에 불과하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 역시 종이와 잉크를 자유롭게 사들여 신문이나 책을 인쇄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권리와 다르지 않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표현의 자유' 또는 언론의 자유는 사유재산권 보장 이외에 더 특별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인간의 모든 권리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분쟁은 그 권리와 관련된 사유재산권이 무엇인지 찾아내여 파악하면 해결할 수 있다.

 

2. 자유주의의 공리우선적 성향 비판

자유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에 대해 과거의 유명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미국의 대법원 판사였던 홈스1는 그의 판결문에서 누구도 만원인 극장 안에서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외칠 권리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홈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름지기 모든 권리는 정확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위의 예문을 반복적으로 인용해왔다.

 

그러나 홈스는 판결문에서의 문제점은 인간의 권리라고 해서 무제한으로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명확한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모호하고 부정확한 개념에 근거하여 도출한 점이다. 그러면 이 사례를 사유재산권 측면에서 다시 분석해보자. 만원인 극장 안에서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외쳐서 큰 혼란을 야기한 사람이 그 극장의 주인이거나 지배인일 때, 그리고 극장에 입장한 고객일 때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만약 그가 극장 주인이라면 그는 고객들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그는 고객들에게 영화나 연극을 상연해주겠다는 약속의 교환조건으로 돈을 받은 다음,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외쳐서 혼란을 초래하고 상연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고객의 재산을 훔침으로써 고객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다.

 

반면에 거짓으로 외친 사람이 극장 주인이 아니라 고객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는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다른 고객들의 사유재산권은 물론이고 그 극장 주인의 사유재산권까지 침해한 것이다. 그는 고객으로서 극장 주인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극장 주인이 제공하는 공연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극장 주인의 소유물에 입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악의적인 행동은 극장 주인과 다른 고객들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야!'라고 거짓으로 외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권리의 제한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개인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따라서 '사유재산권' 침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원인 극장 안에서 악의적으로 '불이야!'라고 외친 사람이 사실상 유죄인 이유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표현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제한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명백하게 타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1. 올리버 홈스 2세(Oliver Wendell Homes, Jr. 1841~1935)는 미국의 대법원 판사(1902~1932)를 역임하였으며 표현의 자유 확대에 공헌함으로써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19년의'쉥크 대 미국'(Schenck v. United States) 이라는 소송 재판의 판결문에서 "표현의 자유 보장을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극장안에서 거짓으로 불이 났다고 외쳐서 사람들을공포로 몰아넣은 사람을 보호하지 않느 ㄴ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의 전쟁 동원령에 반대하는 연설과 인쇄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사람이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피고인들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홈스는 위의 판결문에서 '명백하고 상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 상황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홈스는 자연법에 반대하였으며, 뉴딜 정책등과 같은 경제규제를 지지하였다.

     

 

 

<자유지상주의 국가관>

목차

1. 사회에 대한 개인의 우월성

2. 절대악인 국가

2.1 국가에 의한 전방위적 독점과 제약의 미비

2.2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과두정의 철칙

2.3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기생적 본성

3. 세금에 의한 국가의 두 계급

 

1. 사회에 대한 개인의 우월성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요체는 개인의 신체 및 그 개인이 자발적으로 획득한 사물에 대한 재산권을 침해하는 모든 형태의 행위에 반대하는 것이다. 개별 범죄자와 범죄 집단도 당연히 거부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유지상주의 신념이 여타 사상과 특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사상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무작위적 폭력 행사를 용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행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편적 견해에 대해서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 강조점이 다르다. 자유지상주의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데도 그 실재하지도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기소하는 '검찰'이 없다. 고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 자신이다. 동면의 양면 같은 이야기지만, 더 나아가 자유지상주의 세계에서는 피해자가 검사에게 기소를 요청하지 않고도 잘못된 사람에 대해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자유지상주의 형벌 체계에서 주안점은 '사회'로 하여금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로 하여금 범죄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하도록 강제하는 데 있다. 이에 비해 현행제도는 피해 보상은커녕 가해자를 감금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피해자가 세금 형식으로 더 부담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는 재산권 보장은 근간으로 피해자를 배려하는 자유지상주의 세계에서는 분명 말이 안 되는 제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평화주의자는 아니지만, 평화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간섭하는 현행제도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평화주의자인 존스라는 사람이 범죄자인 스미스에 의해 침해를 당해했다고 해보자. 존스가 자기 신념에 기초해 폭력행사를 통한 자기 방어에 반대하고, 그에 따라 범죄에 대한 어떤 처벌도 거부한다면, 존스는 단순히 기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그 사건은 그것으로 마감된다. 심지어 피해자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범죄자를 추적해 재판을 넘기는 현행 검찰과 같은 정부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2. 절대악인 국가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와 일반인의 가장 큰 특징적 차이는 개인적 범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 즉 정부의 역할과 관련한 양자 간의 견해에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를 국민과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는 항구적이며 고도로 조직화한 최상위 침해자로 간주한다. 국가가 침해자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체제의 종류에 상관없이 민주국가나 독재국가 또는 왕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국가의 이념이 빨간색이거나 흰색, 파란색, 또는 갈색이거나를 구별할 것도 없이 공통적으로 그러하다.

 

국가라는 존재! 정부와 그 통치자 및 운영자들은 언제나 일반적인 도덕률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국민을 상대로 해서는 서슴없이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예가 인류역사에는 허다하다. 왜 그런 것일까? '국가라는 이유' 때문이다. 일반시민에 의해 '사적'으로 자행되었다면 비도덕적이거나 범죄로 여겨질 행위라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이유에서라면 모두 면책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의 특징은 일반적 도덕률을 국가기구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냉철하고 비타협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예외를 두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국가는 (더 엄밀하게 말해서 정부의 일원으로 행세하는 소수의 개인은)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매한 수사법으로 포장해왔다. 수 세기 동안 국가는 대량 살상 행위를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그에 수반되는 대규모 학살을 미화하였다. 또한, 국가는 오래전부터 국민을 노예화하여 무장집단으로 만들었고, 이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징집'이라 불렀고, 국민을 총대로 위협하고 약탈하는 행위를 '세금 징수'라고 이름 붙였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국가와 국민의 모든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저 국가를 범죄 집단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모든 입장이 그대로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사회의 다른조직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는 흔히 모든 조직과 단체를 위계적, 구조적, '정부적' 등이라 칭하며 이들 간의 중대한 구분을 흐리고 있다. 가령, 좌파 성향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같은 사적 조직에 대해서도 '엘리트적'이고 '강제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다. 이에 비해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 같은 불평등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며, '강제'라는 개념은 단지 폭력을 행사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정부는 중앙이건, 주 또는 지방이건 간에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사회의 다른 모든 조직과 명백히 구분된다고 본다. 첫째, 정부를 제외한 다른 집단이나 개인은 자발적인 지급의 방식으로 소득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지역공동체의 공동기금이나 취미 모임과 같이 자발적인 기부나 선물에의해 자금을 마련하며, 식료품점 주인이나 야구선수 또는 철강 제조업자 등은 시장에서 재화나 서비스를 자율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소득을 얻는다. 오직 정부만이 유일하게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소득을 얻는다. 즉 정부의 납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몰수나 감금과 같은 직접적인 위협을 행사한다. 이러한 강제적 징수가 바로 '조세'인 것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범죄를 저지르는 무법자를 제외하고, 오직 정부만이 자국민이나 또는 다른 대상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데 자체 재원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는 오직정부만이 포르노를 금지하고, 종교의식을 준수케 하며, 정부가 생각하는 적정 가격 수준보다 높은 가격에 재화를 판매한다고 해서 관련자들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 이 두 차이는 바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있다. 사회에서 오직 정부만이 자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든, 도덕률을 강제하기 위해서이든 혹은 정부와 의견 차이가 있는 자를 처형하기 위해서이든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심지어 가장 비독재적인 정부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재정 수입은 항상 강제적인 징세권을 통해 확보해왔다. 또한, 과거 세계역사 속에서 자행된 살인과 노예적 예속화의 대부분은 정부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미 앞에서 보았다시피 자유지상주의의 요체는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관한 권리를 침해하는 그 어떠한 것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국가를 이 귀중한 권리를 위협하는, 본질적으로 가장 장압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반대한다.

 

2.1 국가에 의한 전방위적 독점과 제약의 미비

국가에 의한 침해가 개인 간의 사적인 침해보다 훨씬 더 중대하게 된데는 국가의 지배자가 부과할 수 있는 중앙에서의 자원 동원 능력과 그 조직의 규모가 개인보다 월등히 크다는 것 외에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약탈을 견제할 어떠한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피아나 노상강도에 대해 우려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견제 말이다. 사적 범죄자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나 그 하부 조직인 경찰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국가자체로부터는 누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국가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국가가 보호 서비스를 독점화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실질적으로 폭력 행사를 독점하고 사회 내에서의 최종 의사 결정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국가의 법원에서 내리는 결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면 우리가 의탁할 수 있는 또 다른 보호 기구는 어디에도 없다.

 

최소한 미국에는 정부의 특정 권한에 대해 엄격한 제약을 가하는 헌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이미 경험했듯이, 어떤 헌법도 스스로 해석하거나 집행을 강제할 수 없다. 해석은 '사람'이 해야한다. 따라서 헌법을 해석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이 정부 자체의 대법원에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그 대법원이 자신의 정부를 위해 끊임없이 더 광범위한 권한을 승인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미국에서 크게 내세우는 정부 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권력 분립'같은 것들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분립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같은 정부의 일부이고, 같은 부루의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탁월한 정치 이론가 중 한 사람이자 부통령을 역임했던 존 칼훈은 성문 헌법의 제약을 무력화시키는 국가의 본연적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적으로 언급했다.

 

성문 헌법은 분명 여러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보호 대상인 그 국민에게 헌법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주지 않으면서 단순히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한계를 정하는 규정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우월적 지배자인 정부가 그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정부를 소유하고 있는 당사자인 그들은 헌법에 따라 부여된 권력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만 그것을 제한하고 하는 규제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이다. 우월하고 지배적인 당사자인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려 이러한 규제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

반면 작고 힘없는 자들은 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고, 우월한 상대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는 이러한 규제가 필수적이라 여길 것이다. … 우월한 상대로 하여금 규제를 준수케 하는 방법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은 오직 유일한 수단을 헌법을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항하여 우월한 당사자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시할 것이다. 즉 권한을 부여한다는 단어에 가능한 최대의 포괄적 의미를 허락하는 그런 헌법 말이다. 그러면, 양측이 서로 장군멍군하는 식이 될 것이다. 즉, 한 쪽은 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확장하려는 것이고, 다른 쪽은 가능한 축소하려는 것이다. 그런 데 한 쪽이 만든 것을 실행하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다른 쪽은 자신의 것을 집행할 수단을 박탈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대항하여 약자가 엄격하게 헌법을 구성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상대가 되지 않는 대결에서의 결과는 뻔하다. 제한을 옹호하는 쪽이 힘에서 압도될 것이다. … 제한 규정은 결국 폐지되고, 정부는 일종의 무제한적 권력기구가 되고 말 것이다.

정부를 서로 상호 독립적으로 대하는 별개의 부서로 분리한다고 해서 이러한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 전체 정부뿐 아니라 이들 개별 부서 모두가 수적 다수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권력을 대리인이나 대표자 간에 배분하는 것으로는 권력 나묭과 억압의 경향을 전혀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그런데 왜 정부 권한에 대한 제약의 미비를 걱정해야 하는가? 특히 '민주국가'에서 말이다.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해 서서히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던 1960년대 중반 이전의 전성기 시절에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바로 정부가 아니던가?"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했다."우리가 정부다"라는 문구에서 사용된 '우리'라는 용어는 적나라한 착취의 정치 실태를 은폐하는 이념적 위장막을 드리우게 했다. 왜냐하면, 만약 진실로 우리가 정부라면 정부가 개인에게 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하고 비억압적일 뿐 아니라, 관련 당사자인 개인으로는 '자발적인' 것이 된다. 정부가 일군의 집단을 위해서 다른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갚아야 하는 공적 부채를 엄청난 규모로 발생시켰다고 하더라도, 이 현실적 부담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라는 허튼소리로 편리하게 가려졌다(그러나 '우리'라는 말은 누구이며 '우리 자신'은 누구를 말한단 말인가?). 정부가 누군가를 징집하든 또는 불온한 사상을 이유로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짓"일 뿐이므로 어떤 부적절한 행위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나치 정부가 죽인 유대인은 살해당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택한 정부이므로 그들은 '자살'을 한 것임이 분명하며, 따라서 정부가 자행한 어떤 짓도 그들에게는 자발적인 일인 셈이다. 하지만 국가를 단지 국민의 자비롭고 자발적인 대리인으로만 보는 정부 옹호론자들로서는 이런 끔찍한 추론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도 정부가 아니고 정부도 '우리'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정부는 대다수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예로 90%의 국민이 10%를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자고 결정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살해이며 노예화의 범죄인 것이지 억압된 소수 측에서 행한 자발적인 자살이나 예속화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시민이 억압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범죄는 범죄이고, 권리에 대한 침해는 침해이다. 다수자라는 것에 그 어떤 신성함도 없으며 폭도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는 다수일 뿐이다.

 

2.2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과두정의 철칙

폭도와 같이 다수가 적극적이고 전제적이고 호전적이 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일반적으로 지속하는 상태가 과두지배이다. 즉 국가 기구의 통제권을 얻게 된 엘리트들에 의한 강압적 지배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모든 인간의 행위에서 '과두정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 을 낳게 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불평등과 노동 분화이고, 둘째는 국가사업 자체의 기생적 속성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개인주의자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인류에 내재하는 방대한 다양성, 즉 문명이 진보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만개하게 될 그런 다양성과 개별성에 대해 개인주의자가 보여준 통찰력 때문이다. 직업 간에서뿐 아니라 직업 내에서도 개개인은 각기 다른 능력과 관심이 있다. 그래서 모든 직업과 인간사에서는 그것이 철강 생산이든 아니면 취미 동호회 조직에서이든, 상대적으로 소수의 가장 능력 있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지도층을 형성하게 되고 나머지 다수는 일반 추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의에 기초한 경우이거나 (범죄 조직에서와 같이) 악의에 기초한 경우이거나를 막론하고 언제나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실 과두정의 철칙은 독일 사민당이 표먼적으로는 평등주의를 추구하지만, 실제 기능에서는 엄격히 과두적이고 서열적임을 밝혀낸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발견했다.

 

2.3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기생적 본성

국가가 과두 지배가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국가의 기생적 본성, 즉 국가가 시민의 생산 활동에 강제적으로 빌붙어 산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잘 살아가려면 기생적 착취의 열매가 비교적 소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별 의미 없이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약탈이 자행되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 프란츠 오펜하이머는 국가의 강압적이며 기생적인 본질에 대해 그 누구보다 명확히 갈파했다. 오펜하이머는 인간이 부를 획득하는 데에는 두 가지 서로 배타적인 방법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자유시장 방식인 생산과 자발적 교환의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폭력 사용에 의한 강탈의 방법이다. 오펜하이머는 전자를 '경제적 수단', 후자를 '정치적 수단'이라 각기 명명했다. 정치적 수단은 명백히 기생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착취자가 징발하려면 그 이전에 생산이 있어야 하고, 징발한다는 것은 사회 내의 총생산에서 무엇인가를 더하는 대신 감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펜하이머는 국가를 '정치적 수단의 조직'이라고 정의했다. 즉, 특정 영토 내에서 약탈 과정을 체계화시키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사적인 범죄는 기껏해야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불확실하며, 기생적 삶이라고 해도 오래가지는 못하고, 기생의 강제적 생명선은 피해자의 저항으로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다. 반면 국가는 생산자의 재산에 대해 합법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약탈의 경로를 구축하고, 사회 내의 개생 계급에 생명선을 제공하며, 이 생명선을 확실하고 안전하며 '평화로운' 것으로 만든다. 위대한 자유지상주의 작가인 앨버트 제이 녹은 "국가는 범죄의 독점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다. … 국가는 사적 살인을 금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직적 살인을 범하고 있다. 사적인 도둑질은 벌한다. 하지만 자신은 시민의 재산이든 외국인의 재산이든 상관없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파렴치 하게 손을 댄다."라고 생생히 기술했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선뜻 세금을 강도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를 강도 집단으로 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을 '자발적'납부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사람조차 세금을 내지 않으면 발생할 일을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변할 것이다. 절대 자유지상주의자라고는 볼 수 없는 위대한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는 "국가는 사적 영역에서 사적 목적으로 창출된 수입을 정치적 폭력을 동원하여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먹고 산다. 세금을 클럽 회비나 진료비와 같은 서비스 비용에 비유하는 이론을 세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증명할 뿐이다."라고 했다. 빈의 저명한 '실증주의' 법학자 한스 켈젠은 그의 논문 『법과 국가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Law and the State 에서 전적으로 '과학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기반 위에서 정치 이론, 즉 국가의 정당성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책의 도입부에서 이미 '당나귀의 다리'Pons Asinorum1 라고 불리는 정치철학적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즉 도적의 명령과 국가의 칙령은 어떻게 다른가? 켈젠은 그저 국가의 칙령은 '정당하다'고 선언한 후, '정당성'을 설명하거나 정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논지를 펼쳐 나갔다. 사실 자유지상주의자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고민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조세를 강탈과 구별하여 정의할 수 있는가?

 

지난 19세기에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위대한 헌법 법률가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 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자명한것이었다. 그는 국가를 강도 집단으로 보았는데 그의 이러한 분석은 이제껏 개진된 비판 중에서 가장 신랄한 것이다.

 

헌법 이론상으로는 모든 세금은 자발적으로 납부되는 것이며, 정부는 사람들의 상호협의 하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상호 보험 회사나 다름없다. …

그러나 정부에 관한 이 이론은 현실과 매우 다르다. 현실 속의 정부는 노상강도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돈을 주든가 아니면 목숨을 내놓든가"라고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세금이 이러한 위협적 강제 하에 징수된다.

정부가 실제로 한적한 곳에 숨어서 기다리다 갑자기 나타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주머니를 뒤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세는 여전히 강도 행각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부끄럽고 비열한 강도질이다.

노상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따르는 위험과 처벌을 혼자서 감당한다. 그는 당신의 돈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돈을 당신의 이익을 위해 쓰는 체하며 가장하지도 않는다. 노상강도는 자신이 사람들의 의사에 반하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거나 강도가 제공하는 보호망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얼빠진 여행자를 보호해 주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노상강도도 그런 허언을 할 정도로 지각이 없지는 않다. 그뿐 아니라, 돈을 빼앗은 후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놓아줄 것이다. '보호'를 빌미로 자신이 당신의 적법한 '주권자'라고 자처하며 원하지 않는데도 줄곧 쫓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보호를 자처하며 당신에게 엎드려 시중을들라고 요구하거나,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돈을 강탈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권위에 반하거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반영자로 낙인찍어 무자비하게 총살에 쳐하지도 않을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기, 모독 그리고 흉악 범죄에 비하면 노상강도조차 너무나 신사라 할 정도이다. 다시 말해, 강탈한 것도 모자라 다신을 얼간이나 노예로까지 만들려 하는 강도는 없다는 것이다.

 

3. 세금에 의한 국가의 두 계급

만일 국가가 약탈자 집단이라면, 그 집단은 누구인가? 지배 엘리트는 언제나 (1) 국가를 담당하고 운영하는 전담기구, 즉 관료, 정치인, 왕 그리고 (2) 국가로부터 특권, 보조, 그리고 혜택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의 나머지는 피지배자가 된다. 아무리 정부 권력이 미약하고 세금 부담이 적고 공평하게 배분된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그 속성상 사회 내에 서로 갈등하는 불평등한 관계의 두 계급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고보다 분명하게 간파해 낸 사람 역시 존 칼훈이었다. 감면 다 받아도 결국 세금을 내는 사람, 즉 '세금 납부자'와 낼 거 다 내고도 주로 세금으로 사는 사람, 즉 '세금 소비자'이다. 정부가 댐을 건설하려고 그다지 많지 않은 표면상으로 균등하게 배분된 세금을 부과한다고 가정해 보자. 바로 이 행위는 대다수 국민에게서 돈을 가져와서 순 '세금 소비자', 즉 사업 운영자인 관료와 댐을 건설하는 건설업자, 그리고 노동자에게 지급하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 영역이 커지면 커질수록 재정 부담은 더 커지고, 그것이 초래하는 부담과 이 두 계급 사이의 인위적 불평등 역시 더욱더 확대된다고 칼훈은 지적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정부의 대리인과 고용인은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서 세금으로부터 나온 수익을 배타적으로 수혜받는 게층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얼마를 공동체로부터 가져가든 중간에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용이나 지급금의 형태로 그들에게 들어간다. 조세와 지급금 이 둘은 정부의 재정을 구성하며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공동체에서 가져간 것을 지급금이라는 명목으로 공동체의 일원인 수혜자에게 이전시킨다. 그러나 수혜자는 공동체 일부분만을 구성하기 때문에, 재정 과정의 두 부분을 통합해 생각해보면, 세금을 내는 사람과 그 수입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불평등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셈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각 개인에게서 징수된 돈이 지급금의 형태로 납부 당사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한 (그럴 때 그 과정 자체가 터무니 없고 부질없는 것이 되겠지만) 다른 관계가 나올 수 없다. …

그래서 정부의 불평등한 재정행위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거대한 두 계급으로 분할시킨다. 즉 실제로 세금을 내며 전적으로 정부를 지탱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과 지급금을 통해 세수를 받음으로써 사실상 정부에 의해 보조되는 계급으로 나뉜다. 더 간단히 말해 세금 납부자와 세금 소비자로 양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의 조세 행위를 중심으로 두 계급을 서로 적대적인 처지에 놓이게 하고, 정부 정책과정을 적대적인 두 계급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도록 한다. 조세와 지급금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쪽이 이득이, 다른 쪽은 손해가 더욱 증대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매번 규모가 증대될 때마다 한쪽은 강해지고 부유해지지만, 다른 한쪽은 약해지고 빈곤해진다.

 

만약 지구상 모든 국가가 약탈자인 소수 지배집단에 의해 운영됐다면 그들은 어떻게 민중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이미 두 세기 전에 지적했듯이, 모든 정부는 아무리 독재적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국민 다수의 지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라는 것이 국민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세금이나 또 다른 형태의 공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가 얼마나 많은 강제를 행사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의 지지가 반드시 열성적이고 열렬한 승인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소극적인 수용이나 체념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죽음과 세금이 그것이다"라는 경구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징세를 불가피한 것으로 추정하여 채념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은 집단인 세금 소비자는 소극적인 납부자와 달리 국가 체제의 열성적인 추종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소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반 국민의 동의와 복종을 확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화된 폭력행사의 문제, 즉 정치를 다루는 철학 분야인 정치철학에서의 중심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시민 복종이라는 불가사의한 문제와 마주한다. 왜 사람들은 지배 엘리트의 칙령이나 약탈행위에 복종하는가? 자유지상주의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보수주의 작가 제임스 버넘은 시민 복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매우 명쾌하게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부의 기원이나 정당성을 전적으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해낼 방법은 없으며 … 왜 세습 군주제, 민주주의 혹은 또 다른 정치체제를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나에 대한 특정인의 지배를 어떤 하나의 정치체제 또는 정치원칙을 통해 정당화해야 한다고 보는가?" 그의 답변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원칙을 받아들인다. 글쎄 …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고, 지금까지도 그랬고 지금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국민 대다수가 그것을 수용하는 데 동의하는가? 그 이유는 어용 지식인에 의한 국가의 선전·선동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국민들 대다수가 국가 체제의 와해이후 도래할 일시적 혼란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당나귀의 다리(bridge)'로 번역된 Pons Asinorum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이등변 삼각형의 두 변은 같다는 뜻임. 비유적으로는 초심자에게는 어려운 문제 혹은 우둔한 학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