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정치

로스바드의 자연법적 소유권에 대한 비교방법론적 고찰(2010.10,정연교/경희대)

Ⅰ. 서론

Ⅱ. 로스바드의 자연법 이론

Ⅲ. 로스바드의 소유권 이론

Ⅳ. 맺는 말: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의 계승 방향

 

 

국문초록

 

로스바드는 친시장적 무정부주의 정치경제학을 집대성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혹자는 그 원인을 스타일에서 찾는다. 그러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이를 규명하는 동시에 로스바드 정치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로스바드의 정치철학인 ‘자유론’을 비교 방법론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먼저 ‘자유론’이 기반하고 있는 자연법 이론을 메타윤리학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공리주의 및 사회계약론과 비교한다. 이어서 ‘자유론’의 중추를 이루는 소유권 이론을 노직이 ‘소유권에 바탕을 둔 정의론’이 해결해야할 3대 과제로서 지목한 의제에 비추어 노직의 학설과 비교분석한다.

이러한 비교 방법론적 고찰은 한편으로는 로스바드의 자연법 이론이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모델이라는 사실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론’이 노직의 ‘자격이론’에 못지않은 소유권 이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으로 필자는 롤즈 류의 평등주의적 정의론이 지닌 문제점을 토대로 향후 로스바드의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이 나아갈 방향이 원리주의에 있음을 논증한다.

 

주제어: 로스바드, 자유지상주의, 자연법 이론, 소유권 이론, 정의론

 

 

 

Ⅰ. 서론

로스바드는 ‘친시장적 무정부주의 정치경제학’(anarcho-capitalistic political economy)을 정초했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를 로스바드만큼 정교하고, 호소력 있게 발전시킨 학자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Norman Barry 1987, 193) 특히 ‘소유권’을 매개로 삼아 ‘사실’과 ‘가치’를 하나의 체계 내에서 묶어냄으로써 친시장적 무정부주의 ‘세계관’(weltanschauung)이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등의 제 분야에서 어떻게 상호연관성을 갖고 표현될 수 있는지 보여준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하다.

 

로스바드 정치경제학의 철학적 토대는 그가 ‘자유론’(Theory of Liberty)이라고 명명한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이다. 비록 미제스를 이어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종주로서 활약했지만, 로스바드는 가치중립적인 분석이나 경제학만 갖고는 자유지상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경제학은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는데 필요한 근거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자유지상주의 정치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판단은 필연적으로 가치 판단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정치 철학 역시 필연적으로 윤리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에 더해 윤리학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Rothbard 1982, xlvii)

 

로스바드가 ‘자유론’을 전개한 주저는 『자유의 윤리』(The Ethics of Liberty)이다. 이 책에서 로스바드는 ‘자기소유’(self-ownership)에 기초하여 소유권을 정의하고, 교환과 침해, 독점, 처벌, 인권, 계약, 아이와 동물의 권리 등 자유지상주의 정치철학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슈에 대해 정교하고 체계적인 논지를 펼친다.1)

로스바드가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드린 시간과 수고 또한 그가 이 책에 부여한 의미가 남달랐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Rothbard 1982, xlv)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윤리』가 발간되었을 때, 학계의 반응은 기대 밖이었다. 학계는, 한마디로, 그를 외면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유력한 해설 중 하나는 그 원인을 로스바드가 학설을 전개한 방식, 즉 스타일에서 찾는다. 로스바드가 ‘고루한’ 자연법사상을 원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답적인’ 기하학적 이론전개방식을 사용해서 문제였다는 것이다. 만약 로스바드가 자연법 이론이 아닌 사회계약론적 논의 전개 방식을 채택했거나, 노직과 같이 ‘현란’하면서도 ‘유연한’ 스타일을 활용했더라면 학계의 반응이 그 정도로 냉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Hans-Hermann Hoppe 2002)

 

필자는 로스바드에 대한 학계의 냉담한 반응이 자연법 이론이나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의 전개방식에서 기인했다고 보지 않는다. 정치철학계가 자연법이나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의를 고루하거나 고답적이라고 본다고 생각할 근거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3)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아마 가장 주된 이유는 그가 당대 정치철학의 주요 현안과 논법에 친숙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가 노직과 달리 당대를 풍미하던 주요 철학자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4)

본업이 정치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계는 로스바드의 ‘자유론’을 흥미롭지만 여전히 ‘비전문가’가 집필한 저작 중 하나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1) 로스바드는 또한 이 책의 3부에서 국가의 본질, 국가의 내적 모순, 국가와 국가의 관계 등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국가와 자유가 양립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어서 4부에서는 미제스의 공리주적 경제철학, 벌린의 소극적 자유 개념, 강제에 대한 하이약의 이론 및 노직의 최소국가론에 대해 논평한다.

 

2) 로스바드는 저자서문에서 이 책을 쓰는데 평생이 걸렸고, 수차례 전면적인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밝혔다. 『자유의 윤리』 서문을 쓴 호페 역시 이 책이 로스바드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 경제, 국가』(Man, Economy, and State)에 이은 두 번째 걸작(magnum opus)라고 보았다. (Hans-Hermann Hoppe 2002)

 

3) 로스바드의 논의전개방식은 롤즈의 논의전개방식에 비하면 ‘고답적’이라고 느낄 만큼 엄밀하거나 체계적이지 않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정의론』이 『자유의 윤리』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다.

 

롤즈 자신도 『정의론』은 “단지 길이에 있어서만 길게 느껴지는 책”이 아니라고 토로할 만큼 지루하다. (Rawls 1971, viii)

 

4) 『자유의 윤리』에서 롤즈가 언급된 것은 공리주의를 비판한 학자 중 하나로서 주석에 등장한 것이 전부이다. 52쪽 주2. 헨리 시즈윅, 데이비드 라이언즈, 리처드 브렌트 등의 공리주의자는 물론이고 로날드 드워킨, 브루스 애커먼, 아마티아 센 등과 같이 당대를 풍미했던 평등주의자에 대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로스바드의 스타일이, 적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장점일 수 있다고 본다. 비교 방법론적으로 고찰할 때 로스바드의 ‘자유론’이 지닌 ‘진가’, 즉 정치철학적 특성과 장점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 자연법 이론과 체계적인 소유권이론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선 로스바드 ‘자유론’이 기반하고 있는 자연법 이론을 메타윤리학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공리주의 및 사회계약론과 비교하고자 한다.

이는 자연법 이론이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모델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비록 로스바드의 ‘자유론’이 현재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방법론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학문적으로 존중받을만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줄 것이다. 이어서 필자는 로스바드 ‘자유론’의 중추를 이루는 소유권 이론을 노직이 ‘소유권에 기반을 둔’ 정의론의 3대 과제로서 지목한 의제에 비추어 노직의 학설과 상호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자유론’의 요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노직의 자격이론에 비해 로스바드의 ‘자유론’이 내용이나 스타일 모두에 있어 못지않게 충실함을 보임으로써, 후자의 학문적 위상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를 촉구할 것이다. 끝으로 필자는 롤즈류의 평등주의적 정의론이 지닌 문제점을 토대로 향후 로스바드적 자연법적 소유권 정치철학이 나아갈 방향이 기본에 충실한 ‘원리주의’에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Ⅱ. 로스바드의 자연법 이론

 

호페에 따르면, 학계가 로스바드를 “무시하고 곡해하고 심지어는 화난 것처럼 적대시”한 이유는 그가 “터무니없는 소리”(nonsense on stilts) 라고 벤담이 핀잔을 준 이후 거의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연법 모델을 원용했기 때문이다.(Hans-Hermann Hoppe 2002, xxxi) 앞에서 시사했듯이 학계가 로스바드를 무시한 이유가 자연법 이론에 있다고 볼만한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벤담이 자연법이나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근거 없으며 자가당착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벤담에 따르면, 권리라는 말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규정하는 법이 먼저 존재해야 하는데, 자연법을 규정하는 법은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담은 자연권을 “아비 없는 자식”에 비유한다.5)(Waldron 1988, 73) 그러나 벤담의 논변에도 불구하고, 자연권에 대한 논의는 도덕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어떤 이론에 비해도 기울 것이 없다.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로스바드가 자연법과 자연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5) “내게 있어, 권리는 법의 자식이다. 법이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따라 권리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연권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이다.” Bentham의 “Anarchial Fallacies” 중에서. Waldron, 1988 참조.

 

자연권은 ‘자연법’이라는 더 큰 사상적 체계의 정치철학적 주춧돌이다.

자연법사상은, 세계에는 수많은 ‘실재’(entities)가 존재하고 있으며, 각각의 실재는 다른 실재와 구분되는 분명하고 고유한 특성, 즉 그것의 ‘본성’(nature)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지각과 그 외의 정신적인 기능을 통해, 즉 이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리는 철이나 소금과 구분되는 구리 본연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실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인간도 세상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고유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세계와 교호한다. 간단히 말해서,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이 갖고 있는 본연의 특성과 그것이 교호하는 다른 실재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식물이나 하등동물의 행동은 생물학적 특성 혹은 ‘본능’(instinct)에 의해 결정되지만,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선택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수단을 모색해야 하는 특성을 갖고 태어났다.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주는 본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배워야 하고,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 가늠해내야 하며, 사물의 인과관계를 파악해서,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생각하고,느끼고, 평가하고,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스스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배우고, 선택하고, 능력을 계발하고,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에 의거해서 행동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과정에 간섭하거나 폭력을 통해 저해하는 것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과 선택에 억지로 간섭하는 것은 매우 ‘반인간적’(antihuman)이며,인간이 본래 필요로 하는 것을 훼손하는 짓이다.6)

(Rothbard, 1973 [2006], 32-33)

 

6) 자연법에 대한 로스바드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표현된 곳은 『자유를 위하여』 (For a New Liberty) 제2장이다. 로스바드는 『자유의 윤리』 1부를 자연법과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는데 할애했지만 내용이 매우 미미하다. 비록 4개의 장으로 나누어 자연법과 이성, 자연법의 과학성, 자연법과 실정법의 차이, 자연법과 자연권의 관계 등에 대해 언급했지만 모두 20여 쪽에 불과한 분량이다. 『자유의 윤리』에서 “자연법사상을 길게 설명하거나 옹호”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 책의 목적은 “자유를 위한 정치철학을 전개”하는데 있다고 해명한다. (Rothbard, 1982, 25) 참조.

 

결국 로스바드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주체성, 즉 ‘자율’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자율적 삶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할 도덕적 의무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즉 자연적 질서로부터 도출 가능한 도덕적 의무라고 보았다.

 

도덕의 기원을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토대를 둔 ‘불-침해원리’(principle of non-aggression)에서 찾는 것은 자유주의적 자연법 사상가의 공통적 특징일 뿐만 아니라 크게 보면 자유주의 전통 전체가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따라서 방법론적 관점에서 볼 때, 쟁점은 자연법 이론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자연법이라는 이론적 모델을 사용해서 논의하는 것이 적합한 가이다.

 

이제 자연법과 공리주의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메타윤리학적 분석틀을 이용해서 상호 비교함으로써 자연법 이론이 정치철학적 모델로서 유효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메타윤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위(ought)를 논하는 이론은 모두 두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나는 “‘좋은 것’ 또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흔히 ‘규범론’(theory of righ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두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통합적인 가치철학체계를 갖출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학설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치론과 규범론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여러 학설의 가치론과 규범론을 각각 하나의 명제로 정리해서 비교분석할 수 있다면, 비교적 용이하게 각자의 특징과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로스바드 자연법 이론의 가치론과 규범론을 정리해보자.

 

[R1] 가치 있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이다.

[R2] 옳은 것은 다른 사람의 주체적인 삶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7)

 

[R1]은 ‘자유론’의 가치론이고 [R2]는 ‘자유론’의 규범론이다. 그런데 [R1]과 [R2]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R1]과 [R2]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위대한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을 내세워 [R1]을 입증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도 있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8)

 

[R2]의 경우에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유리한지 가장 잘 아는 것은 본인”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온정주의적 문화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R1]과 [R2]는, 엄밀한 의미에서, 확실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주장이다. 말하자면, ‘임의적인’(arbitrary) 명제들이다. 그러나 임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공리주의나 사회계약론의 처지도 비슷하다면, [R1]과 [R2]가 임의적이라는 사실은 자연법 이론의 결함을 함축하기 보다는 당위적인 성격을 가진 모든 논의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

 

7) [R1]과 [R2] 이외에도 자연법 이론이 공유하는 명제는 많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서로 본질이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적절한 생존방식을 갖고 있다.”와 같은 명제들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나 사회계약론과의 상호 비교를 위해서라면 [R1]과 [R2]로 충분하다.

 

8) 서양 고중세기에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명령에 따라, 일종의 위계질서를 형성한다고 믿었고 이를 "자연의 사다리"(scala naturae)혹은 "존재의 사슬"이라고 불렀다. 존재의 사슬에 따르면, 맨 위에는 완전한 존재인 신, 맨 아래에는 가장 기본적 물질인 먼지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인간은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 즉 동물과 천사 사이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고중세기에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존재의 사슬과 창세기 말씀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에서 찾는 것이 당연했지만, 근대 이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든다.

 

이제 공리주의의 가치론과 규범론에 대해 생각해보자. 공리주의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가치를 검증 가능한 것들로 한정하려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이 대등하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결과주의와 평등주의가 공리주의의 특징이다. 이를 메타윤리학적 분석틀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를 얻을 수 있다:

 

[U1] 가치 있는 것은 사람의 행복이다.

[U2] 옳은 것은 많은 이해당사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자연법적 가치론과 규범론은 임의적이라고 했다. 공리주의는 어떠한가? 과연 [U1]과 [U2]는 입증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U1]을 입증하기 위해 공리주의자들은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해내고자 애썼다. 해즐릿이 예증하듯이 심리학적 행복주의로부터 도덕적 행복주의를 도출해내려 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제로부터 “행복은 좋은 것이다.”는 명제를 추론해내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추론은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한다고 비판받았다.9) 이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이제는 윤리를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하나”로서 인식해야 한다고 응수한다.10)(Hazlitt 1964, 34) 해즐릿의 전향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의 성격 전환이 [U1]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U1]은 가치론의 형식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행복이 궁극적인 ‘도덕적’ 가치라는 주장을 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U2]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도 찾기 어렵다. 공리주의의 태두 벤담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누군가 이 [효용의] 원리의 타당성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이 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입증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다른 모든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증명의 사슬도 처음에는 증명되지 않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효용의 원리를 증명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Bentham 1923 [2010], 4)"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이 모두 벤담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U2]를 수정, 보완해서 입증해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U2]에는 도덕적 지도성이나 방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U2]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라고 말한다.

한편 민주적인 것처럼 보여 좋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의 행복’을 뜻하는지 의아하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사람의 행복과 남을 해하려는 사람의 행복, 남에게 빚진 사람의 행복과 남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행복, 운이 좋아 희희낙락하는 사람의 행복과 어려움 속에서 굳세게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U2]가 단지 누구나 똑같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정당한 것과 다수의 행복을 혼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자연주의의 오류’란 영국의 철학자 ‘무어’(G. E. Moore)가 명명한 논리적인 오류의 일종으로서, 도덕적으로 ‘좋은 것’을 ‘쾌락’, ‘욕구’, ‘발전’ 등의 자연적 속성을 통해 정의할 때 발생한다. 무어에 따르면, “...이다” 라는 사실적 언명과 “...해야 한다”는 당위적 언명은 언어-논리적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에로의 추론은 불가피하게 논리적 간극(the 'is-ought' problem)을 발생시킨다.

 

10) 해즐릿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윤리의 성격 재규정을 제안한다. 윤리를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궁극적 가치인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라고 재규정하자는 제안이다. 궁극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윤리와 분리함으로써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은 문제를 전가할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 행복이 궁극적인 가치인지 여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들은 [U2]의 근본정신을 유지하면서도, 특히 모든 사람의 행복을 대등한 것으로 여기는 평등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정당한 것과 다수의 행복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다.

그래서 찾은 해법 중 하나가 공리주의의 기능을 순수메타윤리학설로 제한하는 것이다. [U2]는 여전히 맞지만, 법이나 제도 혹은 행위 규범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올바름은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만, 개별적인 제도나 법은 반드시 매번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라냄으로써 곤경을 모면하려는전략이다. 그러나 몸 전체가 두 동강날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이다. 만약 [U2]가 삶을 지도할 수 있는 지침을 줄 수 없다면, 공리주의는 언제나 “모든 것이 업보”라고 말하는 도사의 말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법은 [U2]를 두 단계로 세분화하는 것이다. ‘규칙공리주의’라 부르는 이 입장을 정식화하면 이렇다:

 

[U2']

(1)옳은 행동은 옳은 규칙에 따르는 것이다.

(2)옳은 규칙은 길게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옳은 규칙’이란 대체로 오랜 기간 공동체에서 지켜온 전통적 생활규범이다. 전통적 생활규범은 ‘선조의 지혜’가 녹아있는 것으로서 장구한 세월 동안 유용성을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에 안전하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떤 전통, 어떤 규범, 어떤 관습인가에 따라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U2]가 다양한 전통과 관습 중에서 무엇이 옳은 규칙인지 가늠할 수 있는 별도의 기준을 제시 하지 못한다면, [U2']는 [U2]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눈속임에 불과하다.11)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리주의를 자연법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친근성과 같은 방법론외적 기준을 갖고 평가하더라도 자연법 이론이 공리주의에 비해 못한 증거는 없다. 일례로 공리주의는 서양인에게는 친숙할지 몰라도 동양인에게는 그렇지 않다.(Nisbett 2004)

자연법 역시 어떤 사람에게는 임의적이라는 인상을,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여하튼 경험적으로 입증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둘 다 마찬가지이고, 설득력에 있어서도 고만고만하다.

 

11) 현대 공리주의자들이 종종 보수적인, 즉 가급적 현존하는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향을 갖게 된 것도 이 같은 한계에서 기인한다.

 

다음은 현대 사회계약론을 대표하는 롤즈의 가치론과 규범론에 대해 검토해보자.

롤즈는 가치 있는 것을 ‘기본가치’(primary goods)라고 부르고 두 종류로 나눈다. ‘사회적 기본가치’(social primary goods)와 ‘자연적 기본가치’(natural primary goods)가 그것이다.

사회적 기본가치에는 소득과 부, 기회와 권력, 권리와 자유 등이 속한다. 자연적 기본가치에는 건강, 지능, 체력, 상상력, 선천적 재능 등이 속한다. 그러나 기본가치는 모두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무엇인가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해 가치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 즉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는 무엇인가? 롤즈는 ‘삶을 살아가는 것’(leading a life)이라고 말한다.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숙고한 후, 바람직한 삶에 대한 설계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인생을 의미한다.(Rawls 1971, 92-95, 407-416)

 

롤즈의 규범론을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general conception of justice)으로부터 유추해보자.12) 롤즈는 “모든 사회적인 기본가치가 이러한 가치들의 일부 혹은 전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최소 수혜자의 이득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Rawls 1971, 303)

첫째, 선천적인 재능이나 타고난 여건은 ‘전적으로 운’(brute luck)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불우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치 않기 때문이다.

둘째, 경우에 따라서는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요긴한 능력을 이끌어냄으로써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불평등을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최소 수혜자, 즉 불우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똑같은 사회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만들 수는없다는 것이다.

 

12) 롤즈의 규범 이론은 정치철학적이다. ‘기본적인 사회적 구조’(basic social structure)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지침은 그가 정의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으로부터 유추해야 한다. 문제는 롤즈의 사상체계가 복잡하다는 데 있다. 원칙이 많을 뿐만 아니라 원칙들 사이에 위계도 있다. 따라서 섣부른 유추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강을 잡는 다는 취지에서, 정의의 원칙이나 소소한 개념적 장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했다.

 

롤즈의 가치론과 규범론을 메타윤리학적 분석틀을 적용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J1]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에 헌신하는 인생이다.

[J2] 옳은 것은 불우한 사람들이 살만하도록 돕는 것이다.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J1]과 [J2]를 평가해보자. [J1]과[J2]는 입증가능한가?

[J2]를 입증하기 위해 롤즈가 활용한 것은 현대적으로 가공한 사회계약론이다. 롤즈는 만약 우리가 공공질서가 확립되기 이전 상태에 처해있고 정의의 원칙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J2]를 정의의 원칙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먼저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13)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으면 자신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어떤 소질과 재능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편애를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요소에 대해서도 모르기 때문에 공평무사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자신이 속해서 살아갈 사회의 기본 틀을 주도할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라고 요청받을 경우, 롤즈에 따르면, ‘맥시민’(Maximin) 전략을 취해야만 합리적이다.14)

“좋은 삶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의의 원칙이 맥시민이어야 하는 이유가 좋은 삶에 대한 헌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면, 다시 말해, [J2]가 정당한 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J1]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면, [J1]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순서이다.

[J1]을 입증할 근거는 무엇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없다.

분명 [J1]은 자유주의자라면 어렵지 않게 공감할만한 명제이다. 그러나 만약 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즉 각자 어떤 인생을 사는 것이 좋을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15), [J1]은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R1]과 비교할 때, 즉 “가치 있는 것은 인간의 생존”이라는 주장과 비교할 때 [J1]은 다른 입장처럼 보인다. 전자는 생존을, 후자는 주체적인 삶을 이상적인 가치로 설정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R2]까지 감안하면,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로스바드가 [R2], 즉 “옳은 것은 다른 사람의 주체적인 삶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저변에는 각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믿음이 있다. 로스바드에게 ‘인간’은 이미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이다. 따라서 로스바드에게, 생존은 곧 주체적인 삶의 영위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가치관에 있어 로스바드와롤즈는 대동소이하다. 둘 다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갖고 있다.

 

13) 홉스, 로크, 루소 등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자들은 ‘원초적 입장’에 해당하는 공권력 부재의 상태를 ‘자연상태’(state of nature)라고 지칭했다. 자연상태는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단지 정부나 국가와 같이 개인을 초월할 수 있는 의사결정절차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14) 맥시민이란 가급적이면 ‘최악의 경우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minimum)을 ‘최대한 살만하게 만드는’(maximize) 전략을 의미한다.

 

15) 예를 들어, 텔래반과 같이 원리주의적인 무슬림들은 개개인이 각자 자율적으로 가치관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경악하고 분노할 것이다. 전통적이거나 종교적인 대개의 윤리관이 그러하다.

 

만약 서로 유사한 가치관을 갖고 있고, 둘 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가치관을 갖고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시 롤즈의 규범론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J1]이 옳다면, [J2]를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이것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맥시민은 안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일이 일어날 개연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롤즈의 말처럼 “마치 철천지원수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할 수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는 것은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다. 더구나 원초적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베이즈식 의사결정론(Bayesian Decision Theory)에 따라 ‘근거불충분원리’(the principle of insufficient reason)를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워킨(Ronald Dworkin)이 제안한 것처럼, 원초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의 재산을 배부한 후, 잘 못 태어날 경우를 가정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각자 보유하고 있는 재산 중 보험료로 지불할 용의가 있는 액수를 물어 그 결과를 종합하면 개인적인 기대치(expected value)를 합리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Dworkin 1981, 296-299) 여하튼 맥시민만이 원초적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선택 가능한 유일한 원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롤즈는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정의관은 원칙에 대한 자명한 전제나 조건들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awls 1971, 121)

원초적 입장을 어떻게 설계하는가 하는 것도 사전에 어떤 정의의 원칙을 채택할 것인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덕적 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고려 대상들이 서로 지지하고 결합하는 접점을 찾아 하나의 일관된 관점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정의의 원칙이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는 숙고된 신념과 합치 하지 않을 경우, 양쪽을 저울질해서 조정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신념을 바꿔야하고 다른 때에는 원칙을 보정해야 한다.

 

롤즈의 말을 따른다면, ‘인간본성’이나 ‘원초적 입장’에 대해 논의하는 목적은 개념적 모델을 세우는데 있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거나 무엇인가를 ‘입증’하는데 있지 않다. 물론 개념적 모델이 단지 수사적 기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모델 역시 객관적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당위적 논의는 자연과학과 달리 의식 외부에 실재하는 어떤 것을 통해 확실하게 검증할 수 없고, 기하학과 달리 ‘공리’(axiom)로부터 ‘정리’(theorem)를 연역할 수 있을 정도로 엄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만약 다른 조건이 유사하다면, 형식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누가 더 공감을 이끄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가에 있다. 물론 여기에 비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공식에 따르면 효과를 본다는 보장도 없다. 때로는 도덕형이상학에 호소하는 것이 적절하고, 때로는 인지과학 이론을 차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과 방대한 경험적 사실 그리고 기발한 사유실험이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모델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 판도가 좌우되지는 않는다. 비록 근대 이후 자연법 모델을 활용하는 학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그것이 곧 자연법을 원용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저열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법 이론도 개발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계약론에 버금가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며 로스바드 자신이 이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

 

 

 

Ⅲ. 로스바드의 소유권 이론

 

호페에 따르면, 로스바드는 ‘체계적인 사상가’이고 노직은 ‘비체계적이고, 연상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인상주의적인 사상가’이다. 그래서 로스바드의 글은 장시간 집중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노직의 글은 “짧고 간헐적인 집중”으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로스바드는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신념이 남다른 사람이었지만, 노직에게 자유지상주의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학계가 노직에 대해서는 과도할 정도로 관심을 보인 반면, 로스바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냉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Hans-Hermann Hoppe 2002)

 

분명 노직의 글은 ‘현란한’ 면이 없지 않다. 노직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도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당시 비주류에 속했던 자유지상주의가 학계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을 끄는 것과 각광을 받는 것은 다르다. 과연 노직이 ‘비체계적이고, 연상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이어서 각광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학계는 보수적이다. 철학계도 예외가 아니다. 스타일도 의미 없지 않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논증이다. 기발한 상상력, 화려한 문체, 놀라운 반전이 철학자의 제일 덕목은 아니다. 비록 노직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그 자체로 완결적인 ‘논저’(treatise)를 저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소유권이라는 하나의 가치에 천착하여 정치철학의 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노직은 자연법 이론 중 그로티우스와 로크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계승했고, 학계가 관심을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왜 로스바드에 대한 반응은 그렇게 달랐을까?

과연 남다른 신념을 갖고 체계적으로 논지를 전개한 것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철학계의 생리를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할만한 이유는 거의 없다. 로스바드가 받은 냉대는, 그가 정치철학계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저작을 발간한 순서나 시기에 있어 노직에 뒤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노직으로 하여금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 이론”에 관심을 갖도록 한 것이 로스바드였지만,『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Anarchy, State, and Utopia)가 발간된 것은 1974년이고 『자유의 윤리』가 발간된 것은 그보다 8년 후인 1982년이다. 특히 노직의 ‘자격이론’(entitlement theory)이 로스바드의 ‘자유론’과 그 얼개에 있어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소위 ‘비전문가’의 저작인『자유의 윤리』에 대한 철학계의 상대적인 무관심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로스바드의 후예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왜 당시 학계가『자유의 윤리』를 무시했는가?”가 아니라, “당시 학계의 무관심은 부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만큼 『자유의 윤리』가 지닌 학술적 내용의 깊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이 정치철학의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로스바드의 소유권 이론과 노직의 소유권 이론을 조목조목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직이 ‘자격이론’16)의 구성원리로서 제시한 3대 과제를 준거로 삼아 둘을 비교한다면, 서로 얼마나 비슷하고 어디에서 다른지 그리고 누가 더 나은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 자격이론은 (i) 정형화된 패턴에 의존적이지 않으며 (ii) 역사성을 감안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정의론과 구별된다. 즉 인격, 효용, 환경 등과 같이 어떤 자연적 속성을 준거로 삼아 분배의 원칙을 정하지 않으며, 현시점을 기준으로 삼아 분배의 원칙을 정하지도 않는다. (Nozick, 1974,153-164) 참조.

 

노직이 생각하는 자격이론의 3대 과제는 다음과 같다

(Nozick 1974, 150-152):

 

(1) '소유물의 최초 취득'(the original acquisition of holdings), 즉 이전에 소유된 적이 없는 것을 소유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정하는 일.

(2) ‘소유물의 양도’(the transfer of holdings), 즉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넘겨받을 때 지켜야 하는 절차를 정하는 일.

(3) ‘부당 소유물의 교정“(the rectification of injustice in holdings), 즉 소유권이 부당한 행위에서 기인한 경우 이를 바로 잡는 절차를 정하는 일.

 

그리고 이상의 과제를 해결할 경우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초할 수 있다:

 

[E1] 정의로운 취득 원칙 (the principle of acquisition)

[E2] 정의로운 양도 원칙 (the principle of transfer)

[E3] 정의로운 교정 원칙 (the principle of rectification)

 

먼저 왜 최초 취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가 생각해보자.

이는 왜 정의론이 자격이론, 즉 소유권에 대한 이론이어야 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 노직에 따르면,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은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르자면,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Nozick 1974, 30-33) 누군가를 본인의 동의 없이 이용하는 것은 그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곧 그가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에 대한 자유, 즉 자기소유권을 함의한다.

 

자기소유권은 물질에 대한 소유권도 함축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서 생산한 모든 것 또한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낸 것을 소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재능과 우리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산한 것 중에는 외적인 요소에서 기인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황무지를 개간해서 곡물을 생산했을 경우, 황무지는 그가 생산한 것에서 그 자신이 기여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최초 취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 알아야만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 개념을 정립할 수 있다.

 

노직은 로크를 빌려 최초 취득에 대해 설명한다. 로크에 따르면, 토지는 본래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개척하고 정주함에 따라 사적 소유가 발생한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타인에게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 충분할 정도로’ (enough as good) 남아있을 경우에만 정당하다.17)

노직은 이를 “다른 사람들의 처지가 나로 인해 더 나빠지지 않을 경우에만 정당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Nozick 1974, 174-182)

 

로스바드 역시 최초 취득을 설명하기 위해 로크를 이용한다. 그러나 노직과 달리 단서를 달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 본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써서 한 노동, 손으로 한 일 모두가 그의 소유이다. 따라서 그가 자연적으로 제공된 것을 그 상태에서 빼내어 자신의 노동을 섞은 후, 즉 자신에 속하는 어떤 것과 결합시킨 후 다시 돌려놓게 되면 그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 그의 소유가 된다.18)"

 

로스바드는 이해를 돕기 위해 “크루소 경제”를 활용한다. 모두 로빈슨 크루소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만약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혼자 남겨졌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주변의 자원을 활용해서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산의 원형이다.

생존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생산이다. 따라서 생존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부인하지 못한다.

 

17) 노직은 로크가 내건 정당한 최초 취득의 조건을 ‘로크의 단서’(The Lockean Proviso)라고 명명했다.

 

18)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 Government, Rothbard 1973, 37에서 재인용.

 

로스바드는 더 강력한 논거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생산한 것을 소유하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다. 생산한 것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런 사실’(natural fact)이기 때문이다.(Rothbard 1982, 34)

예를 들어, 크루소가 무소유를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움막을 만들고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그래도 사람들은 움막이 그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사용하기 전에 그의 허락을 구할 것이다. 설사 그가 움막을 방치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가 “움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고 밝히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생산하는 행위가 이미 소유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처음에는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생산과 소유에 대한 논의로부터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정당화가 가능한 자유의 범위이다. 만약 생존이 가치 있는 것이고, 생산이 생존에 필수불가결하다면, 생산행위를 저해하거나 생산물을 강탈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다시 말해,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반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존중할 근거가 없다. 그것은 생산 행위도 아니고, 생산물을 지키는데 필요한 행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자유’(freedom)를 ‘능력’(power)과 혼동하는데서 기인한다.(Rothbard 1982, 42) 마치 물리적 법칙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크루소 사유실험에서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결과는 정당화가 가능한 생산의 의미이다. 크루소가 생산물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것을 직접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을 섞지 않고”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벗어나 신대륙을 발견했더라도 그는 신대륙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발견은 생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몸소 대륙의 주변을 둘러보는 수고를 했더라도 그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둘레 길에 지나지 않는다.19) (Rothbard 1982, 47)

 

19) 그렇다고 역으로 토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소유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손목시계를 한동안 착용한 후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보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한동안 사용한 후 방치한다고 해도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Rothbard 1982, 64)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E1]에 대한 노직과 로스바드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노1] 최초 소유권은 소유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처지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경우 정당하다.

[로2] 최초 소유권은 생존을 위해 의도적으로 생산한 결과에 대한 것일 때 정당하다.

 

노직과 로스바드의 차이는 분명하다. 둘 다 로크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 로스바드는 소유를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했고, 노직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기 편의적 행위”로 보았다. 하지만 의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초 취득의 원칙으로서 양자가 제시하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행동의 집합은 다르지 않다. 무산자의 처지가 어떤 다른 사람이 토지를 경작하고 전유했다고 해서 처음보다 나빠졌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전보다 사정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노직이 내세운 원칙도 언뜻 보기 보다는 충족하기 어렵지 않다.

 

이제 [E2], 즉 정의로운 양도 원칙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보자.

노직은 ‘챔벌레인 논증’에 의거해서 ‘정형화된’ 정의론을 비판한다. 이 논증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정형화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예를 들면 롤즈에게, 마음대로 재분배하도록 허용한다. 그 결과 발생한 비교적 ‘평등한’ 재분배 상태를 D1이라고 하자. 만약 D1 상태에서도 사람들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활한다면,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농구장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농구천재, 윌트 챔벌레인(Wilt Chamberlain)이 나타났다. 그는 특별한 만큼 남달라서, 별도의 입장료를 요구한다. 자기를 보기 위해서는 한 사람 당 25센트를 추가로 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를 보기 위해 농구장을 찾았고 그 결과 챔벌레인은 시즌이 끝난 후 $25,000을 벌었다. 이 경우 챔벌레인은 $25,000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는가?(Nozick 1974, 160-164)

 

노직의 챔벌레인 논증은 비교적 ‘평등한’ 재배분 상태 D1에서 시작한 사회가 ‘불평등한’ 배분 상태 D2로 변하게 되어도 그 과정이 자발적인 행위에서 기인했다면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는 직관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재분배와 자발적인 소유권 행사가 양립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 사람들의 ‘정의감’, 특히 선천적 재능과 같이 운에 따른 요인으로 인해 행복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잘 반영한다면, 노직의 챔벌레인 논증은 사람들이 자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특히 각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그 내용이 어떻든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 보여준다.

 

로스바드 역시 부정적 논증을 활용한다. 그러나 노직과 달리 양도에 대한 권리가 배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세 경우로 상정하고 '제거법'(law of elimination)을 사용해서 정형화된 정의론을 비판한다.

로스바드의 논증을 정리하면 이렇다. 정당한 양도를 규정하는 원칙으로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 마음대로 양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는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모든 사람이 소유권을 양도할 권리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두 번째가 정의로운 양도의 원칙이라면, 애초에 소유권을 가졌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후자가 전자의 신체와 노동의 결과를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언명법의 또 다른 형태인 ‘보편화가능성’(universalizability), 즉 “시공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없다.

세 번째 방안은 공산주의적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모두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구현 불가능하다. 인류가 60억 명이라면, 모든 사람이 모든 소유물에 대해 60억 분의 1 만큼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소유권을 공유한다면, 누구도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전 승인을 받지 않고 교환, 거래, 계약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실제에 있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평한 소유는 모든 소유권이 일부 지배 계급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는다.(Rothbard 1982, 45-46)

 

로스바드의 논증은 재분배가 ‘공산주의적’이라는 함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재분배는 모두가 소유권을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정형화된 정의론과 전체주의 철학의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바드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나 ‘사회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보고 이들 모두가 전체주의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정의로운 양도 원칙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노2] 소유권은 소유자가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양도할 경우 정당하다.

[로2] 소유권은 소유자가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양도할 경우 정당하다.

 

서로 다른 근거를 갖고 문제에 접근했지만 결론은 같다.둘 다 모두 자율적인 의사에 의한 양도만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노직과 로스바드의 논거 중 어떤 것이 더 훌륭한가?

사안과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노직은 재분배와 자율이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로스바드는 참여적 공유주의가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소유권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을 정초하는데 기여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제 끝으로 [E3], 즉 정의로운 교정 원칙에 대한 양자의 생각을 살펴보자.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취득한 소유권을 바로잡는 원칙은 어때야 하는가? 노직에 따르면, 공동체마다 소유권이 생성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원칙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 상태가 부당하다고 판단한다. 현재의 소유 상태가 정의로운 취득과 양도의 원칙에 따라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별도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가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1)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못산다.

(2) 못사는 집단의 일원은 부당한 침해를 당한 당사자이거나 그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3) 잘사는 집단의 일원 중 어떤 이는 부당한 이득을 본 사람이거나 그 후손이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타당하다면,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지금 당장 미봉책이라도 써야 한다고 노직은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노직이 한시적인 ‘주먹구구식’ 교정 규칙으로서 제시한 것이 맥시민이라는 사실이다. 노직이 제시한 원칙은 “어떤 집단이던지 그 집단이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경우라도 그 상황이 가능한 좋을 수 있도록 사회를 조직하라.”이다.(Nozick 1974, 231)

 

노직이 ‘주먹구구식 규칙’으로서 제안한 것을 정의로운 교정의 원칙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세 가지 가정이 성립될 경우에만 정당화할 수 있는 한시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시적으로 제안한 맥시민적 재분배 정책은 ‘자격이론’이 권고하는 것과 달리 과거불문하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당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보상을 받고, 부당하게 이익을 보지 않은 사람이 보상하는 사태를 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스바드 역시 노직과 마찬가지로 교정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별로 소유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했는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교정의 원칙이 기본적으로 준수해야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만약 현 소유자가 소유권을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취득했다는 증거가 확실치 않다면, 현 소유자의 소유권은 정당하다.

(2) 만약 현 소유자가 소유권을 본인의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취득했다는 증거가 명확하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현 소유자가 소유하고 있는 것의 소유권은 피해자의 것이다. 이 경우 현 소유자는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

(3) 만약 현 소유자가 소유권을 본인의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취득했다는 증거가 명확하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현 소유자의 소유물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4) 만약 현 소유자가 소유권을 불법적이지만 본인은 불법성을 인지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취득했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현 소유주의 소유권은 정당하다.

 

이들 원칙 중 현 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경우는 (1)과 (4)이다. 불법적인 취득이나 양도에 의한 소유라는 증거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본인 잘못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 예를 들면 장물을 취득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다만 (4)의 경우에는 피해자를 찾을 수 없어야 한다. 이에 비해 (2)와 (3)은 현 소유자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경우이다. 두 경우 모두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소유권을 취득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다만 (2)의 경우에는 피해자를 찾을 수 있어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반면 (3)의 경우에는 피해자를 찾을 수 없어 제3자가 주인으로 나서기 전까지 무소유 상태로 놔둘 수밖에 없다. 실제에 있어 적용 가능한 사례로 로스바드가 지목한 것은 중남미에서 당시에도 자행되고 있던 봉건적 토지 독점 체제이다. 로스바드는 토지 주인이 농민들의 토지를 부당한 수단으로 강탈한 후 다시 소작을 받고 경작토록 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교정대상이라고 보았다.(Rothbard 1982, 69-75)

 

단순화해서 정리하면 그의 정의로운 교정 원칙은 다음과 같다:

 

[로3] 부당한 취득이 확실하고 피해자가 분명할 경우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재분배는 옳지 않다.

 

노직과 로스바드의 차이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재분배를 허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후자는 소유권이 발생한 역사에 대한 무지가 재분배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 반면, 전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도 학계가 노직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으로 반응한 반면, 로스바드에게는 무관심한 이유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양자에 대한 상호 비교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람의 철학적 입장은 매우 유사하다. 비록 노직은 최소국가론을, 로스바드는 무정부주의를 지지했지만 정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다.

‘사실’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이지 ‘가치’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둘 다 절대적인 소유권에 기반을 둔 자유지상주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동소이하다. 더구나 노직이 현란할지 몰라도, 핵심에 있어 매우 선명하고 체계적인 논지를 전개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스바드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그가 정치철학계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저서 발간의 순서와 시기에 있어 노직보다 늦어졌다는데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로스바드의 소유권 이론이 노직의 이론과 기본적인 얼개에 있어 유사할 뿐만 아니라, 노직이 소유권에 토대를 둔 정의론이 답해야 한다고 본 3대 의제에 대해 노직에 못지않은, 판단하기에 따라서는 더 훌륭한 이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제 로스바드의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을 계승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 남은 과제는 그의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을 창조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그가 끝맺지 못한 과업, 즉 친시장적 무정부주의를 정치, 경제, 철학등 사회사상계 전반에서 주목받는 학설이 될 수 있도록 착근하는 일이다.20)

 

20) 노직 역시 이 부분에 있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재 정치철학계에서 노직 류의 최소국가론을 추종하는 학자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후기 저작에서는 스스로 자유지상주의가 “심각하게 부적합” 면이 있었다고 토로했기 때문이다. (Nozick 1989, 286-287) 참조.

 

 

 

Ⅳ. 맺는 말: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의 계승 방향

 

로날드 드워킨(Ronald Dworkin)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사람들이 ‘타고난 조건에 둔감’(endowment-insensitive)한 반면, ‘개인적 야망에 민감’(ambition-sensitive)한 정의론을 제시해야 한다.(Dworkin 1981, 311) ‘타고난 조건’에 둔감하다는 말은 누구나 진정한 의미에서 기회의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종, 성, 계급 등에 의해 평등한 기회를 가질 권리를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타고난 조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선천적인 재능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만약 피부색과 성별뿐만 아니라 재능도 전적으로 혹은 대체로 운에 의해 결정된다면, 재능이 없기 때문에 부와 명예, 권력과 기회를 놓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러한 생각에 천착해서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이 롤즈의 정의론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정의론은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인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의론은 한편으로는 잘못 타고 난 탓에 불우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억울하게 그 대가를 치루지 않도록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참지 못하거나 게으른 탓에 불우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정당한 몫 이상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정의론은 “야망에 민감”해야 한다는 말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두 번째 조건을 반영하는데 있어 매우 소극적이다.

 

만약 정의론이 충족해야 하는 조건에 대한 드워킨의 생각이 옳다면, 로스바드의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은 언뜻 보아도 부족하다. 타고난 조건에 전혀 둔감하지 못한 정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소유권 이론에 따르면, 최초 취득이 정당하다면, 누구나 그것에 대해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게 되고, 이를 여하한 방법으로든 침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잘못 타고 난 탓에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라도 보상을 요구할 방도가 없다.

물론 로스바드의 정의론은 ‘야망에 민감’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절대적인 소유권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사람이 제 몫을 받도록 보증하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절반의 성공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로스바드 류의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도 롤즈를 좇아 ‘타고난 조건에 둔감한’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좌파-자유지상주의(left-libertarianism)가 추종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다. 정의론이 충족해야 하는 조건에서 ‘타고난 조건에 둔감’해야 한다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로스바드를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후자, 즉 원리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옳다. 전자를 취할 경우 소유권 이론의 정체성 자체가 유실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지 보기 위해 롤즈의 이론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자.

 

타고난 조건에 둔감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 얼마나 둔감해야 하는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누구에게 둔감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롤즈는 주로 장애나 재능을 염두에 두었지만, 반드시 거기에 그칠 이유가 없다. 타고난 조건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일례로 MIT의 심리학자 스티븐 핀커에 의하면, 가장 기본적인 성품조차 유전적인 영향 하에 있다. 즉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산만한가 차분한가, 새로운 경험에 대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 사람들에게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 목적 지향적인가 목적의식 없는가 하는 것이 대략 40-50% 가량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Pinker 2003, 50)

심지어 거짓말, 도둑질, 싸움질, 기물파괴 등의 반사회적 행동들까지 상당부분 타고난다고 한다. 이제 타고난 것, 선천적인 것에 신체나 재능과 관련된 것을 넘어 기질이나 성품까지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만약 여기에 롤즈의 정의론을 결합시킨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누가 어떤 짓을 하던지 그가 한 일의 반 이상이 그의 책임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고난 것에 대해서는 일절 공과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롤즈의 주장을 견지한다면, 이제 신체장애인 뿐만 아니라 연쇄살인범도 혹시나 스스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즉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지식과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며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구현 불가능하다. 소웰의 표현을 빌리면, ‘범우주적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Sowell 2002)

 

롤즈 정의론의 또 다른 문제는 타고난 것에 둔감해야 하는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만약 누군가 타고 난 조건이 불리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롤즈는 당연히 보상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보상을 할 수 있는가?

통상 롤즈의 정의론은 복지정책 또는 복지국가를 정당화하는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세금 등의 재산권 이전 정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교정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롤즈는 복지국가에 만족할 수 없다.

롤즈의 사회적 가치에는 자존감의 기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소득이나 사회적 서비스를 공여하는 것으로 충족 가능하지 않다.

자존감을 가질 수 있으려면, 정치적 위계, 문화적 편견, 사회적 차별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 누구에게나 원하는 직장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차별적 발언이나 가부장적 위계질서도 일소해야 한다.

 

롤즈 자신도 본인의 이상은 복지국가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재산소유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통해서만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Rawls 1971, 274)

 

재산소유민주주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시작의 평등을 지향한다. 복지국가가 사회적인 소득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재산 소유민주주의는 사전적 배분에서의 적극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재산소유민주주의는 더 이상 단지 ‘타고난 조건에 둔감한’ 사회가 아니다. 누구나 똑같은 출발점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자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여건을 강화하는 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장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문화와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전방위적 사회엔지니어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일은 전체주의를 요구한다. 취지에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치룰 수 없는 비용을 수반하는 입장이다.

 

타고난 조건에 둔감한 정의론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를 감안할 때, 로스바드와 같은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타고난 조건에 둔감하기 위해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파-자유지상주의 노선을 취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이 갖는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경우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스바드에게 좌파-자유지상주의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소유권 이론에 충실한 원리주의자가 되는 방법뿐이다.

비록 타고난 조건에 둔감해야 한다는 조건을 정의의 조건에서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소유권에 기반을 둔 정의론을 착근시킬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로스바드의 정치철학이 지닌 특징과 장점을 비교방법론적 분석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먼저 로스바드의 자연법사상이, 적어도 가치론과 규범론이라는 기본틀에 있어, 공리주의나 사회계약론에 못지않으며, 그의 소유권 이론이 노직의 ‘자격이론’과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 대등함을 보이고자 했다. 이는 로스바드가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어서 정치철학계에서 주류를 이루는 논제와 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지만, 자연법적 소유권 이론이 그 골간에 있어 여전히 유효한 틀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본다.

더불어 소유권 이론을 계승 발전시킬 방향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다. 필자의 논지가 타당하다면, 자연법적 소유권이론을 계승하기 위해 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원리에 충실을 기하며 소유권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듬어 가는 것이다. 소유권에 대해 다시 천착할 때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용 외, 『시카고학파의 경제학: 자유, 시장 그리고 정부』, 민음사, 1994.

민경국, 「사유재산권, 왜 소중한가?」, 철학연구, 제 72집, 2006.

박효종, 『국가와 권위』, 박영사, 2001.----------, 『자유와 법치』, 2002.

황경식, 「소유권은 절대권인가?: 사유재산권과 분배적 정의」, 철학연구, 제 72집, 2006.

 

Barry, Norman, on Classical Liberalism and Libertarianism, St. Martin's Press, 1987.

Bentham, Jeremy, An Introduction to the Prinic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Nabu Press, 2010.

Block, Walter and Llewellyn H. Rockwell Jr., eds. Man, Economy, and Liberty: Essays in Honor of Murray N. Rothbard, Ludwig von Mises Institute, 1988.

Boaz, David, Libertarianism: A Primer , Free Press, 1997.

----------, ed. The Libertarian Reader: Classic and Contemporary Readings from Lao-Tzu to Milton Freedman, Free Press, 1997.

Bogart, J. H., "Lockean Provisos and State of Nature Theories," Ethics, 95/4, 1985.

Brandt, R. B, A Theory of the Right and the Good,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Brink, David, "Utilitarian Morality and the Personal Point of View," Journal of Philosophy, 83/8, 1986.

 

Buchanan, James M., The Limits of Liberty: Between Anarchy and Leviath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5.

Christman, John, "Can Ownership be Justified by Natural Right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15/2, 1986.

----------, "Self-Ownership, Equality and the Structure of Property Rights," Political Theory, 19/1, 1991.

Cohen, G. A.,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Crossley, David, "Utilitarianism, Rights and Equality," Utilitas, 2/1, 1990.

Daniels, Norman, "Wide Reflective Equilibrium and Theory Acceptance in Ethics," Journal of Philosophy 76, 1979.

Diggs, B. J., "Utilitarianism and Contractarianism," in H. B. Miller and W. H. Williams, eds., The Limits of Utilitarianis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Dworkin, Ronald, Taking Rights Seriously, Duckworth, 1977.

----------, "What is Equality? Part I: Equality of Welfare; Part II: Equality of Resource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10 3/4: 185-246, 283-345. 1981.

Exdell, John, "Distributive Justice: Nozick on Property Rights," Ethics, 87/2, 1977.

Feallsanach, Am, "Locke and Libertarian Property Rights," Critical Review, 12/3, 1998.

Finnis, John, 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 Fundamentals of Eth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Gordon, David, Murray N. Rothbard, A scholar in Defense of Freedom (bibliographical essay) , Ludwig von Mises Institute, 1986.

Grover, Jonathan, ed., Utilitarianism and its Critics, Macmillan, 1990.

Haworth, Alan, Anti-Libertarianism: Markets, Philosophy, and Myth, Routledge, 1994.

Hayek, F. A, The Road to Serfdom, 50th Anniversary ed., Unviersity of Chicago Press, 1994.

Hazlitt, Henry, The Foundations of Morality, The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1994.

Hirshman, Albert O.,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 ts Triumph,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Hoppe, Hans-Hermann, "From the economics of laissez-faire to the ethics of libertarianism," In Block and Rockwell, 1988.

----------, "The ultimate justification of the private property ethic," Liberty 2, no. 1., 1988.

----------, "Obituaries to Murry N. Rothbard, March 2 1926-January 7, 1995: In Memoriam, " Journal des Economites et des Etudes Humanines 6, no 1., 1995.

----------, "Introduction," in Rothbard, 1982.

Hospers, John, Libertarianism: A Political Philosophy for Tomorrow, Nash Publishing, 1971.

Ingram, Attracta, A Political Theory of Rights,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Kymlicka, Will, Contemporary Political Philosophy: An Introduction, Clarendon Press, 1990.

Liggio, Leonard P., "Obituaries to Murry N. Rothbard, March 2 1926-January 7, 1995: In Memoriam,"

Journal des Economites et des Etudes Humanines 6, no 1., 1995.

Machan, Tibor R. ed., The Libertarian Reader, Rowman & Littlefield, 1982.

----------, Libertarianism Defended, Ashgate, 2006.

Machan, Tibor R. and Douglas B. Rasmussen, eds., Libert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ontemporary Libertarian Thought, Rowman & Littlefield, 1995.

Moore, G. E., Eth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12.

Murray, Charles, What I t Means to Be a Libertarian: A Personal Statement, Broadway Books, 1997.

Narveson, Jan, the Libertarian Ideas, Temple University Press, 1988.

Nisbett, Richard, The Geography of Thought: How Asians and Westerners Think Differently and Why, Free Press, 2004.

Nozick, Robert, Anarchy, State, and Utopia, Basic Books, 1974.

----------, The Examined Life: Philosophical Meditations, Simon & Schuster, 1989.

Otsuka, Michael, "Self-Ownership and Equality: A Lockean Reconciliation,"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27/1, 1998.

----------, Libertarianism Without Inequal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inker, Steven, 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Penguine, 2003.

Polanyi, Karl, The Great Transformation, Octagon Books, 1975.

Rawls, John, A Theory of Justice,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 Political Liber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 The Law of Peop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Ross, W. D., The Right and the Good, Oxford University Press, 1930.

Rothbard, Murray N., Man, Economy, and the State, Nash Publishing, 1970.

----------, Power and Market: Government and the Economy, Sheed Andrews & McMeel, 1977.

----------,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Macmillan, 1973 [2006].

----------, The Ethics of Liberty, Humanities Press, 1982.

Singer, Peter, ed., A Companion to Ethics, Blackwell, 1991.

Sciabarra, Chris Matthew, Total Freedom: Toward a Dialectical Libertarianism, Pennsylvania State Univ. Press, 2000.

Sowell, Thomas, The Quest for Cosmic Justice, Free Press, 2002.

Steiner, Hillel, An Essay on Rights, Blackwell, 1994.

Vallentyne, Peter and Stener, Hillel, eds., The Origins of Left-Libertarianism: An Anthology of Historical Writings, Palgrave, 2000.

---------- ----------, eds., Left-Libertarianism and its Critics: The Contemporary Debate, Palgrave, 2000.

Van Parijs, Philippe, What's Wrong with a Free Lunch: A New Democracy Forum on Universal Basic Income, Beacon Press, 2001.

----------, Real Freedom for All: What (if anything) can justify capitalism? ,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Waldron, Jeremy, ed., Nonsense upon Stilts: Bentham, Burke and Marx on the Rights of Man, Methuen, 1988.

Williams, Bernard, Morality: An Introduction to Ethics, Harper and Row, 1972.

----------,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Fontana Press, 1985.

Wolff, Jonathan, Robert Nozick, Property, Justice, and the Minimal Stat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1.

Rockwell Jr., Llewellyn H., "Rothbard's Legacy", Ludwig von Mises Institute Daily, http://mises.org/daily/4486, 2010.

 

 

 

Murray N. Rothbard's “Natural Property Right” Political Philosophy:

A Comparative Methodological analysis

 

Yoen-Kyo Jung

 

Abstract

 

Rothbard is one of the most sophisticated defender of anarcho-capitalistic libertarianism in the 20th century. However, his political philosophy has won little attention in the academia. Many blame it on his style. I contend that it is not a probable claim. In order to make the case and to reconstruct Rothbard's political philosophy I employ two subsequent comparative methodological analyses. First, I show that natural law theory is as good a methodological framework as any alternatives, and Secondly, that Rothbard's theory of property right is on a par with Nozick's well-received 'theory of entitlement' in terms of its depth as well as its width. Then I conclude that the real controversy to be reckon with for the Rothbardians lies in the fact that their theory of justice is not "endowment-insensitive." And the two options open to the Rothbardians are either becoming a left-libertarian or keep upping the ante. I believe and argue that the Rothbardians must choose the latter. For they would not want to run the risk of losing their identity by accommodating the leftist's "endowment-insensitive" requirement.

 

Key Words: Murray Rothbard, Libertarianism, natural law theory, theory of property right, theories of jus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