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정치

자유지상주의/blog.naver.com/czech_love

<미국독립혁명과 고전적 자유주의>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미국독립혁명이 이념적 성격이 다분할 뿐 아니라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신조와 자유지상주의 제도에 헌신한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자각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 초기 정착민들은 자유지상주의 이념을 신봉해왔는데, 이 이념에 따라, 영국의 제국주의 정부가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탈해오자 그에 맞서 자신의 생명, 재산 그리고 신성한 명예를 걸고 저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미국독립혁명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논쟁해왔다. 헌법, 경제, 정치, 이념 중 어느 것이 원인인지 논란이 분분했다. 그러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했음을 참작하면, 그들이 한편으로는 도덕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유를 추구한 것에 아무런 모순이 없음이 자명해진다. 오히려 자유지상주의 하에서는 시민적 자유, 도덕적 자유, 정치적 독립, 그리고 생산과 거래의 자유 같은 것은 모두 하나의 이상적 제도를 구성하는 하부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를 애덤 스미스는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해에 발간된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단순 명백한 자연적 자유 체제"obvious and simple system of natural liberty 라고 불렀다.

 

2.

자유지상주의 신조는 17~18세기 서구에서, 특히 17세기 영국의 시민 혁명 시기에 태동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상당히 급진적이었던 이 자유지상주의 운동은 비록 발생지인 영국에서는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지만, 국가의 통제와 정부의 지원을 받는 도시길드제도의 숨 막히는 통제에서 산업과 생산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흥하는 데 일조했다. 고전적 자유주의 운동은 당시 수 세기 동안 서구 세계 전체를 지배해온 구질서, 즉 '앙시앵 레짐'the ancien regime 에 맞서 일어난 강력한 자유지상주의적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은 16세기에 시작하는 근대의 여명기에 봉건적 토지 독점과 도시 길드의 통제와 제약이라는 종래의 규제망 위에 절대적 중앙집권 국가 체계이자 왕권 신수설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구질서 하에서는 다양한 통제와 세금에 시달리게 되고, 또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 잘 보인 업자들만 생산이나 판매의 독점권을 얻게 되는 등의 결과로 유럽 전체가 침체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관료적이고 호전적인 새로운 중앙 집권적 국가와 특권에 길들여진 상인들 간의 연합, 그리고 그 둘 간의 연합에 봉건적 토착 영주 계급이 가세한 중상주의 체제가 바로 17~18세기에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급진파가 들고 일어난 구질서 체제였다.

 

3.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세금을 대폭 감축하고, 통제와 규제를 없애며, 개인과 기업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생산하고 교환하게 하여 모두가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개발하며 창조할 수 있게끔 하고자 하였다. 또한,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에 대한 온갖 형태의 제재도 제거하고자 하였다.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여 국왕과 그 하수인들의 폭정과 수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수백 년간 교파 간의 권력 투쟁으로 유혈 전쟁의 원인이 되어온 종교를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모든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끔 하려고 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가진 외교정책의 신조 역시 평화였다. 국권과 국부 증대를 도모하는 이전의 제국주의 정책에서 탈피하여 다른 모든 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하는 외교정책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또한 전쟁은 육군, 해군 등의 상비군에 의해, 즉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획책하는 군대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자기 가정과 이웃의 방어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인 지역 의용군, 즉 민병대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상식으로 통하는 '정교 분리'라는 사상은 '경제와 국가의 분리', '언론/출판과 국가의 분리', '토지와 국가의 분리', '전쟁/군사와 국가의 분리'등 서로 연관된 다양한 주제, 한 마디로 사실상 모든 것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의 한 면에 불과하다.

 

4.

단연컨대, 국가는 아주 작아야 한다,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은 예산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명확한 조세이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세금을 올리거나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강력히 저항했다. 미국에서도 조세 때문에 봉기가 일어나거나 일어나기 직전까지간 경우가 두 차례나 있었다. 우편세와 차세tea tax로 인한 것이 그것이다.

 

최초의 저유지상주의 성향의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가로는 영국 시민 혁명기의 '동등주의자들the Levelers'1과 17세기의 영국 철학자 존 로크를 들 수 있는데, 18세기 영국 정치를 주도한 '휘그 기득권 세력Whig Settlement2'에 맞서 급진적 자유지상주의를 표방한 '순수 휘그파True Whig3'들이 이들을 계속한 사람들이다. 존 로크는 각 개인이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자연권을 갖고 있으며, 정부의 목적은 오직 그 자연권을 보호하려는 것으로만 한정된다고 갈파했다. 로크의 영향을 받은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같은 권리를 지키고자 사람들은 장부를 세웠으며 정당한 공권력은 국민의 동의로부터 비롯된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 같은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러한 정부를 교체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당시 미국에서 로크의 저작물이 널리 읽히기는 하였지만, 추상적인 그의 철학 자체가 혁명을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일은 18세기에 활약한 급진적 로크주의자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훨씬 대중적이고 단도진입적이며 열정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으며 당시의 정부, 특히 대영제국 정부가 지닌 구체적인 문제점을 로크의 기본 철학에 따라 조명해 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은 『카토의 편지』Cato's Letters 라고 알려진 글인데, 이는 1720년대 초 런던에서 순수 휘그파인 존 트렌처드와 토마스 고든이 쓴 일련의 신문 기고문을 묶어 펴낸 단행본이다.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할 때 국민은 정당하게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견해를 로크가 피력하고 있지만, 트렌처드와 고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는 항상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카토의 편지』에 따르며, 인류 역사는 권력과 자유 간의 어쩔 수 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권력, 즉 정부는 언제나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자유를 침범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고 한다. 그래서 권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최소화시켜야 하며, 시민의 끊임없는 감시와 경게하에 두어, 권력이 적정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카토는 주장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버리기 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고자 그 어떤 악랄하고 부정한 일이라도 하려고 한다느 사실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례와 경험을 통해 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한 그 권력을 버린 적이 없다. 세계나 인류의 안녕이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포기하는 데 있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력은 본래 끊임없이 잠식해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정 시기에, 특정 경우에 한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비상 권력이라도, 그것을 어느 경우에나 사용할 수 있는 일상 권력으로 바꾸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더는 비상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권력을 우월한 입장에서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애석하도다! 권력은 매일같이 자유를 침해해오고 있다. 너무도 성공적으로. 권력과 자유의 균형은 사라진셈이다. 폭정이 이 세상을 거의 모두 삼켜버렸다. 인류를 뿌리째, 가지째, 파괴하며 전 세계를 도살장으로 만들고 있다. 단연하건대, 파괴는 틀림없이 계속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망가트리거나, 아니면 이럴 가능성이 더 높은데, 파괴할 것이 더는 아무것도 없을때 까지.

 

카토의 경고는 미국 식민지 정착민들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에 그들은 『카토의 편지』를 미국 전역에서 거듭해서 찍어냈으며, 이는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인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이 같은 권력관이 바로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4이 적절히 이름 붙인 것처럼 미국독립혁명을 이끈 "세상을 바꾸는 급진적 자유지상주의"를 태동시킨 것이다.

 

5.

미국독립혁명에는 당시 세계 최강인 서구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근대 최초의 사건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헌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리 장전bills of rights 이라는 형태로, 새로이 등장하는정부의 권력에 다양한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생 미국 전젹에서 교회와 구가는 엄격히 분리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봉건시대의 특권인 한사상속제도entail5 와 장자상속제도primogeniture6 를 폐지함으로써 미국 전역에서 봉건시대의 유습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연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에 의해 출범된 신생 연방 정부는 어떤 세금도 국민에게 부과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며, 만약 연방 정부가 어떤 중요한 권한을 확대하지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모든 주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특히 군사나 전쟁과 관련 있는 연방정부의 권한은 엄중한 감시와 제약을 통해 함부로 행사할 수 없도록 했다. 18세기 미국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전쟁, 상비군 유지 그리고 군국주의를 주된 수단으로 하여 국가가 그 권력을 증대해 왔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베일린은 미국의 독립혁명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이렇게 요약한다.

 

혁명 시기 및 그 이후에 일어난 미국 정치와 미국 정부의 현대화는 영국의 조지 1세 치하의 저항 지식인들이 최초로 제창했던 프로그램을 일거에 철저하게 실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현실안주적인 정치사회 질서와 어렵게 맞서야 했던 영국의 반대파는 그저 꿈꾸는데 그칠 수 없었던 반면, 같은 꿈을 가지고 이미 여러 면에서 근대화된 사회에서 산 미국인들은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일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영국의 반대파는 그저 부분적 개혁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급진적 해방 이념 중에서도 가장 이루기 어려운 꿈을 별다른 사회적 동요 없이 빠르게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미국의 정치 문화에 다음과 같은 18세기의 급진적 자유지상주의의 핵심 사상을 주입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악하다는 믿음이다. 권력은 끊임없이 부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은 통제하고 제약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으로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의 명문화, 권력의 분립, 권리장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대한 제한, 공권력과 전쟁선포에 대한 제약 등은 모두 미국 혁명을 이끈 이념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는 권력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구불변의 전통으로 미국인에게 전해져오고 있다.

 

6.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 자체는 영국에서 태동했으나 그것을 일관되고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다. 그것을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현실화시킨 것도 미국이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과 달리 봉건적 토지 독점이나 귀족 계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라고 해봐야 영국에서 건너온 식민정부 관리들과 몇몇 특권상인계층이 있었을 뿐인데, 이들은 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의 식민지 정부가 전복되었을 때 축출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 결과 고전적 자유주의는 영국 본토에서보다 미국 식민지에서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었다. 이에 더해 미국은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프랑스 혁명때 처럼 혁명을 반대하는 이웃 나라가 군대를 보내 침략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1973, Ludwig von Mises Institute)

Translated in Korean by Professors of Kyunghee University (2013, 한국문화사)

Chapter 1, "The Libertarian Heritage: The American Revolution and Classical Liberalism"

 

  1. 영국시민전쟁(1642~1651) 당시 부상한 정치운동. 주권재민, 참정권확대, 법적 평등권, 종교적 관용 등 자유주의적 가치를 주창했다.
  2. 1680년대에서 1856년대에 이르기까지 토리당과 함께 영국의회를 지배한 정당이다. 절대왕권에 맞서 입헌군주제를 주창했으며, 초기에는 귀족의 이익, 후에는 산업가와 상인의 이익을 대변했다.
  3. 영국의 휘그 세력과 관계가 있던 급진적인 정치평론가 그룹이다. 귀족(토지 소유자)의 과두정치를 지지했던 휘그당의 정책기조에 맞서 장인과 노동자 계급까지 포함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주장했다. 공화제 옹호 논평을 통해 미국의 독립혁명을 추동했다.
  4. 《미국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의 저자 (배영수 옮김, 새물결, 1999년도 출판)
  5. 봉토를 후손에게 대대손손 영구히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대신, 후손들이 몽토의 일부 또는 전부를 팔 수 없도록 하는 제도
  6. 장자만이 유일하게 재산을 상속받게 하는 제도

     

 

 

<혁명이후>

미국은 이렇게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명백한 자유지상주의 혁명 속에서 탄생했다. 이 혁명은 제국에, 과세에, 무역 독점과 규제에, 그리고 군국주의와 행정 권력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 권력에 대한 제약이 시행되게 되었다. 자유지상주의의 물결을 거부하는 미국내 조직적 저항은 별로 없었지만, 고율의 세금, 규제, 정부가 제공하는 독점 특혜 등 영국식 중상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원하는 엘리트 세력이 초기부터, 특히 거대 상인과 거대 농장주 사이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 심지어 제국주의 정부를 원하기까지 했는데, 한 마디로 이들은 대영제국 없는 영국식 제도를 원했던 것이다. 이들 보수반동세력은 미국독립혁명 기간에 최초로 나타났으며, 이후 1790년대에 '연방주의당'the Federalist Party 을 결성하여 연방주의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자유지상주의의 기세는 계속되었다. 토마스 제퍼슨과 앤드류 잭슨이 주도한 운동, 그리고 '민주공화당'the Democratic-Republican Party 과 그 이후의 '민주당'the Democratic Party 모두 미국에서 실질적으로 정부를 없애려고 대놓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육군이나 해군 등 상비군이 없는 정부, 부채가 없으며, 직접 연방세나 소비세, 수입 관세가 없는 정부, 다시 말해 극히 미미할 정도로만 과세하고 지출하는 정부, 통제나 규제를 하지 않는 정부, 화폐와 금융을 민간에 맡기고, 태환제도를 고수하며,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는 정부를 의미했다. 이들이 원한 것은 한마디로 수많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는 "전혀 없는 것 같은 정부"였다.

 

2.

제퍼슨이 추구한 최소정부는 제퍼슨의 대통령 취임 이후 불가능하게 되었다. 연방주의자들에게 한 양보(선거인단 수에서의 동수를 타개하기 위해 연방주의자들과 거래한 결과일 수가 있음)1와 위헌적인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 때문이었다.2 무엇보다도 제퍼슨의 두번째 임기 중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영국과의 전쟁3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결국 전쟁이 촉발되었으며, 아울러 군비 증가, 중앙은행, 보호관세, 직접 연방세, 공공사업 등 국가주의적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이 대부분을 확립시킨 일당 체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결과에 경악한 제퍼슨은 퇴임 후 그의 거처 몬티첼로Monticello 에서 숙고에 드어간다. 이후 그는 그를 자주 방문하던 젊은 정객 마틴 밴 뷰렌과 토마스 벤튼을 움직여 새로운 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하게 한다. 이는 물론 미국으로 하여금 새로이 대두한 연방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전의 제퍼슨 사상을 되살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젊은 정객이 앤듀류 잭슨을 그들의 지도자로 옹립하게 되자, 새 정당인 민주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잭슨을 중심으로 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계획을 하고 있었다. 즉 잭슨이 8년간 대통령으로 봉직한 후, 밴 뷰렌이 이를 이어받아 8년을 더 하고, 이어서 벤튼이 다시 8년 동안 집권하는 계획이었다. 24년간 잭슨식 민주주의가 계속되었다면, 자유지상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꾼 극소정부는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민주당이 즉각 다수당이 되리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대다수의 국민이 자유지상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잭슨 대통령은 8년간 재임하면서 중앙은행을 폐지하고 국가부채를 상환했으며, 밴 뷰렌 역시 4년의 재임기간 중 연방정부가 은행에 간섭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1840년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최초의 현대적 선거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설로 위드라는 사람이 나타나 유래 없는 선동적 선거 운동으로 밴 뷰렌을 낙선시킨 것이다. 위드는 오늘날에는 이미 일상적인 것이 되었지만, 각종 선거 장식들, 예를 들면, 따라 하기 쉬운 구호와 버튼 그리고 유세용 노래와 퍼레이드 등을 이용해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 당시 무명이었던 휘그당의 윌리엄 해리슨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는 요행으로 얻은 승리에 불과했다.

 

1844년 선거에서는 민주당도 위드의 선거 전술을 그대로 따라할 준비를 갖춤으로써 정권재탈환이 확실시되었었다. 당연히 밴 뷰렌이 다시 잭슨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이어갈 수 있는 듯이 보였다.그러나 바로 이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민주당이 노예제도, 더 정확하게는 새로 미국에 편입되는 주에 노예제도를 확대할 것인가의 중대한 문제를 두고 둘로 갈라진 것이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텍사스공화국을 노예 허용 주로서 미합중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대립하였다. 밴 뷰렌은 반대했고 잭슨은 찬성했다. 이들의 입장 차는 민주당내에 상존하고 있던 분파간의 갈등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때까지 당연시되었던 밴 뷰렌의 대통령 후보 재지명이 좌초되고 말았다. 민주당이 추구하는 자유지상주의 정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자유지상적 노예제도 떄문에 민주당이 와해되고, 그 결과 민주당의 자유지상주의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3.

남북전쟁은 전대미문의 살상과 파괴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전재에서 승리해 사실상 일당 체제를 이룬 공화당이 이전의 휘그당 정책인 국가주의적 정책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보호관세, 거대 기업에의 보조금 지급, 통화팽창을 유발하는 종이 화폐 제도, 은행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제권 회복, 대규모 공공사업, 고율의 소비세, 전시 징병제 및 소득세 등이 도입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주는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할 수 있는 권한을 비롯하여 연방 정부 권한과 구별되는 주 자체의 다른 권한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이 다시 자유지상주의적 정책 기조를 되살리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기에는 일이 너무 어려워져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 미국에 뿌리 깊은 자유지상주의의 전통이 생기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자유시장주의 전통은 아직도 미국 내 정치적 화법에 많이 남아 있으며, 정부에 대한 대다수 미국인의 도도한 개인주의적 태도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만약 세상 어디에서인가 자유지상주의가 다시 부활할 수 있다면, 미국보다 더 좋은 토양을 가진 곳은 없을 것이다.

 

-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1973, Ludwig von Mises Institute)

Translated in Korean by Professors of Kyunghee University (2013, 한국문화사)

Chapter 1, "The Libertarian Heritage: The American Revolution and Classical Liberalism"

 

  1. 제퍼슨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론 버Aaron Burr와 선거인단 득표에서 동률을 이루었고 대통령 선임이 하원에 넘겨졌다. 이에 제퍼슨은 당시 하원을 장악하고 있던 연방주의자 대표 해밀턴과 모종의 타협을 통해 대통령에 선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2. 미국 헌법에는 영토 매입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연방정부는 현행 헌법 체제에서 루이지애나 같은 거대한 영토에 대한 매입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또한 새 영토의 각 민족 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정부법을 만들어서 루이지애나 준주를 다스릴 정부를 만들었고, 제퍼슨은 '대표없는 곳에 과세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루이지애나 준주에 대한 과세를 반대했으나 의회에 의원들을 보내지도 못하는 준주인 루이지에나에 과세를 하게 되었다. 이는 제퍼슨의 이념과 아주 반대되는 결과였다.
  3. 1812년 영미 전쟁은 미국이 영국과 무역 분쟁, 군인 징집 및 영토 확장등의 이유로 벌인 전쟁이다.

     

 

<자유에 대한 저항>

1970년대 부터 시작한 자유지상주의 운동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자유지상주의와 일치하지 않지만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티파티 운동의 인기나 자유지상주의자 론 폴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콜로라도의 가정집에서 창당된 자유지상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120만 명의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둥 전체적으로 자유지상주의가 급속히 급속히 성장한 배경에는, 버나드 베일린의 말을 빌리자면 미국독립혁명이라는 강력하고 '영원한 유산'이 있었다. 그런데 만일 이 유산이 미국의 전통에서 그처럼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 였을까?이제 와서 왜 또 다시 새롭게 자유지상주의 운동을 일으켜 '아메리칸 드림'을 되살려야 할까?

 

2.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고전저 자유주의가 구질서의 수혜자들인 지배 세력, 즉 왕, 귀족, 특혜를 받은 상인, 군부, 그리고 관료들이 누리고 있던 정치 경제적 이해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한 3대 혁명, 즉 17세기의 영국 및 18세기의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이룬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구질서의 기득권 세력은 완강한 저항을 통해 토지에 대한 독점, 교회의 특권적 지위 및 호전적 외교 국방 정책을 유지하게 시키고, 투표권 또한 상당 기간 부유한 엘리트층만이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제1의 우선순위를 투표권 확대에 둘 수밖에 없었다. 시민 대중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부터 확보해야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세기 초만 해도 자유주의자 중 다른 이들보다 더 고집스럽게 원칙을 따랐던사람들인 '자유방임세력'Laissez-faire force 을 '자유주의자'Liberals 나 '급진주의자'Radicals 로, 구질서를 유지하고자 하거나 구질서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수주의자'Conservatives 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1

 

실제로 보수주의는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등의 고전적 자유주의 정신에 대한 반동으로, 즉 이를 파괴하고 그 이전의 상태로 회귀시키기 위해 19세기 초에 태동한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드 보날과 드 메트르의 선봉 아래 보수주의는 법 앞의 평등과 모든 개인의 평등권 대신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위계적인 구체제를 옹호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최소 정부 대신 거대 정부의 절대적 통치를 옹호했다. 이에 더해 종교적 자유를 거부하고 국교에 기반을 둔 신정 통치를, 자유 무역 대신 중상주의적 규제를, 그리고 평화 대신 군국주의와 국익을 위한 전쟁을 옹호했다. 그들은 또한 공업과 제조업보다는 봉건적인 농업 경제를 옹호했으며, 국민 모두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대량 소비의 새 세상보다 소수 지배층만 호사를 누리는 구질서를 선호했다.

 

3.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보수주의자들도 더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산업혁명과 그것이 일반 대중에게 안겨준 엄청난 규모의 생활 수준 향상을 내놓고 비판하거나 참정권 확대를 계속 반대하여 결과적으로 일반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태도를 고수하면, 그들에게 더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19세기 말이 되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에 '우익'Right wing(프랑스 혁명 시절 구실서 수호자들이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던 우연한 사실에 기인함)은 그간 견지해왔던 고루한 국가주의적 견해를 바꾸어 산업주의와 참정권 확대에 대한 노골적 반대 뜻을 포기하게 된다. 그 결과 예전의 보수주의자들처럼 드러내놓고 대중을 향한 증오나 혐오를 표하는 대신, 그들을 기만하고 선동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우리 역사 산업화를 원하고, 인민이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기 바란다.그러나 그런 목적을 이루려면 산업이 공익에 기여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유경쟁시장을 잘 조직화한 협동 체제로 대체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국가를 파멸로 이끌 평화주의, 자유무역주의를 버리고, 국가 번영을 위해 자주국방, 보호무역, 영토 확장,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렇게 하려면 최소정부Minimal Government로는 어림도 없고 거대 정부가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세기 말 국가주의와 거대 정부가 부활한다. '친-산업', '친-복지'의 얼굴을 하고서, 구질서가 복귀한 셈이다. 그러나 수혜자 면면에는 일부 변화가 일어났다. 귀족과 영주, 군대와 관료 그리고 정부의 비호를 받는 상인이 예전의 구질서 체제에서 특혜를 받은 계층이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구체제에서 혜택을 누리게 된 자들은 군인과 관료 그리고 과거에 비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과 무엇보다도 특권적 지위의 제조업자들이었다. 특히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신우익'the New Right 은 전쟁, 군국주의, 보호무역 및 산업의 강제적 카르텔화를 토대로 우파적 집산주의Right-wing Collectivism, 즉 정부와 대기업 간의 유착을 가져오는 통제와 규제, 보조금 및 특혜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조성해냈다.

 

4.

새로이 생겨난 수많은 공장 임금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문제에도 대처해야 했다.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19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노동자는 자유방임과 자유경쟁시장을 선호했다. 노동자로서는 좋은 임금과 좋은 작업 조건을 얻을 수 있고, 소비자로서는 값싸고 다양한 소비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초기 노동조합들조차 자유방임적 경제체제를 철저히 신봉했다. 하지만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영국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동정을 보이는 시늉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을 병합하고 통제하여 경쟁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막아버림으로써,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지를 약화시켜 버렸다. 그 결과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늘날까지도 서구 세계의 지배적인 정치 경제 체제인 신보수주의적 '조합주의 국가'Corporate State 가 등장하고, 노동 조합마저 '책임을 다하는' 노동조합이라는 가치 아래, 국가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의사결정체제에 편입되어 거대 정부와 특권적 지위의 대기업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질서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에 불과한 소위 '신질서'the New Order 를 정착시키려고 신 지배 계층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이 대국민 사기극을 펼쳐야 했다. 절대군주제나 군사독재정부를 막론하고 어떤 정부든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존속할 수 있지만, 민주 정부는 특히 매일같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신보수주의의 지배 일레트들은 여러 핵심적이며 기본적인 사안에 있어 국민을 기만해야만 했다. 그들은 국민으로 하여금 억압이 자유보다 더 좋고, 자유경쟁시장 체제보다 카르텔식 봉건적 산업체제가 소비자에게 더 유리하며, 반독점Anti-Trust 이라는 핑계로 독점적 카르텔을 허용하는 것이 마땅하며, 지배 엘리트를 위한 전쟁과 군국주의가 강제징집을 당하고 세금을 내며 전장에서 죽기까지 하는 국민에게 실제로 더 이익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5.

어느 사회든지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국민 대부분은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만들지도, 퍼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문 지식인 집단, 즉 아이디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아이디어를 듣고 이를 자기 의견으로 받아들인다.앞으로 더욱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역사적으로 지식인을 필요로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를 지배하는 독재자나 지배 엘리트였다. 국가는 항상 대중으로 하여금 국 지도자들이 현명하고 선량하며, 따라서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믿도록 해주는, 즉 "임금님은 벌거숭이가 아니라고" 여론을 조작해주는 지식인을 필요로 했다. 근대 이전에는 주술사나 성직자와 같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지식인이 소임을 떠맡았다.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히 지속해온 이 같은 동반자 관계는 역사적으로 유구한 전통을 이어 왔다. 교회는 미혹한 신도들에게 왕을 임명한 것은 하느님이니 반드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왕은 그 대가로 세금을 걷어 교회의 금고를 두둑이 채워주었다. 자유지상주의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그토록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자유주의자가 꿈꾸던 세상은 지식인이 세속의 다른 모든 사람처럼, 국가에 기생하지 않고 시장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주의적 질서, 즉 신중상주의적 조합주의 국가 시스템을 뿌리내리게 하려면 국가와 지식인 간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해야 했다.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된 당시의 상황에서 이는 곧 성직자가 아닌 속세의 지식인과 연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새롭게 지식인 계층으로 등장한 교수, 박사, 역사학자, 교사, 테크노크라트 경제학자, 사회사업가, 사회학자, 의사, 엔지니어 등과 손잡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와 지식인 간의 이 새로운 연대는 19세기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보수주의자들은 합맂거 이미지를 자유주의자들에게 양보하면서, 대신 불합리성, 낭만주의, 전통 그리고 신권정치의 덕목을 내세웠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과 불합리한 상징이 가진 덕목을 강조함으로써, 위계적 사회질서가 계속될 수 있도록 대중을 기만했으며, 국민국가와 군대에 대한 미신을 견지하도록 오도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신보수주의자들은 이성Reason 과 '과학'이라는 장식을 받아들인다. 이제 경제나 사회를 '전문가 집단'인 기술관료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과학이 명령하는 바가 되었다. 이 같은 메세지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대가로 신지식인 계층은 새로운 질서의 옹호자로서, 새로운 카르텔을 형성한 경제와 사회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직책과 명예를 갖게 되었다.

 

6.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구 국가의 정부들은 새로운 국가주의 체제를 여론보다 우위에 서게 하고, 여론의 동의를 확실하게 얻고자 교육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학을 통제하고 공립학교 체제를 구축하고 의무 교육법을 만들어 교육 전반을 통제했다. 특히 공립학교를 통해 의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국가에 대한 복종심과 여타 시민적 덕목을 주입했다. 이 같은 교육의 국가주의화는 결과적으로 교사와 교육전문가들의 확장과 관련하여 최대 기득권 세력의 하나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신국가주의 체제에서 지식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과거의 용어가 지닌 의미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중이 그러한 용어에 대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함축적 의미를 조작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자유주의자'Liberals 라는 말은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급진주의자'Radicals 라는 말은 그들 중 가장 순수하고 가장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들을 '진보주의자'Progressives 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이 산업 발전, 자유의 확산 그리고 소비자의 생활수준 향상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국가주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엉뚱하게도 자신을 스스로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동시에, 거꾸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을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고리타분한 구시대인이자 '반동적'Reactionary 세력이라고 몰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보수주의자'Conservative 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다시피 신국가주의자들은 '이성'이라는 개념까지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7.

국가주의와 중상주의가 '진보적인' 조합국가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면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개념에 혼란이 야기된 것도 사실이지만, 19세기 말 고전적 자유주의의 쇠퇴를 가져온 결정적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1830년대 태동해서 1880년대 이후 급속도로 팽창했다. 사회주의의 특징은 사호 대척적 기존 이념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두 이념의 영향을 함께 받은, 그 둘을 제멋대로 섞어놓은 잡종 운동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산업주의와 산업 혁명, '과학'과 '이성'에 대한 숭배심을 차용했다.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평화, 개인의 자유 및 생활 수준 향상 등과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다. 실제로 사회주의자들은 조합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과학, 합리성 그리고 산업화 사이의 조화를 도모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인민'이 스스로 경제를 운용하는 '확장된 민주주의'Expanded Democracy 체제를 제창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주의는 보수주의로부터 국가주의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안과 강제력을 행사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 국가를 '과학'에 근거해 경제와 사회를 다스리는 절대 권력 기구로 만들어 산업 평화와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인민'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테크노크라트'라 불렸던 전위대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제멋대로 침탈하고 통제하게끔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합리성과 과학 탐구의 자유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던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국가체제를 꿈꾸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전대미문의 풍요를 이룰 수 있게끔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준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국가 체제,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정치인과 관료와 기술관료가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또한 자유주의자가 신봉하는 권리의 평등, 법 앞에서의 평등에 만족하지 못하던 사회주의자는 결과의 평등 혹은 동등이라는 괴이하고도 불가능한 목표를 내세우며 권리의 평등, 법 앞에서의 평등마저 짓밟았다. 그러한 불가능한 평등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미명 하에 새로운 특권 엘리트 계급을 만들어냈다.

 

8.

사회주의는 모순을 잉태한 잡종 운동이었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산업 평화와 성장이라는 자유주의적 목표, 즉 정부로부터 모든 것을 독립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자유를 통해서만 성취 가능한 목표를 국가주의, 집산주의 그리고 계급주의적 특권과 같은 이전의 보수주의적 수단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사회주의는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으며, 실제로 실패로 끝났다. 20세기에 여러 국가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정부가 자기 국민에게 가져다준것은 전대미문의 독재, 기아 그리고 혹독한 가난뿐이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사회주의의 등장이 초래한 가장 큰 해악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원래 '좌익'으로서 가졌던 이념적 좌표, 다시 말해 서구 사회에서 희망, 급진주의 그리고 혁명을 상징하는 당으로서 가졌던 이념적 좌표를 잃게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 구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의 오른쪽에앉았듯이,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왼쪽에 앉았다. 그때부터 사회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자유지상주의적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좌' 혹은 '극좌'에 위치했다. 이들을 바스티아 같은 자유방임적 극렬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서구에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정당으로서, 자유, 평화, 진보를 위한 개혁과 희망의 정당으로 출발했다. 그런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원래 이념적 자리에서 밀려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좌익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긴 것은 매우 뼈아픈 전략적 패착이었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라는 양 극단 중간에 있는 어정쩡한 정당으로 오인받게 되었다. 자유시장주의에서 자유를 향한 변화와 진보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므로, 그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나 대중의 마음에서 자유지상주의 자체의 존재 이유의 대부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9.

그러나 만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내부에서 와해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그랬듯이, 사회주의는 모호하고 자가당착적일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나 마찬가지이며, 절대군주제 또는 봉건주의라는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오직 그들만이 여전히 진정한 급진주의자들이며 자유지상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용사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1973, Ludwig von Mises Institute)

Translated in Korean by Professors of Kyunghee University (2013, 한국문화사)

Chapter 1, "The Libertarian Heritage: The American Revolution and Classical Liberalism"

 

  1. 현대에는 보통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민주당과 같은 사회자유주의자들을, 급진주의자라고 하면 좌파를 떠올리며, 리버테리언들과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보수주의의 일부로 본다.

 

 

 

<내부로부터의 와해>

고전적 자유주의는 국가주의에 대한 부분적이지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이후 급진성, 즉 보수적 국가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끈질김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부분적승리를 교두보로 삼아 더 큰 압력을 가해야 했었음에도, 변화에 대한 갈망과 원칙의 순수성에대한 갈망을 잃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들은 그간 거둔 성과를 지키는 데 안주함으로써 급진주의자에서 현 상태에 만족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로 변모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사회주의가 희망과 급진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임할 수 있도록 방치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등장하는 조합주의자들이 자유지상주의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을 '극우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나 '진보주의자'라고 나서도록 방치하기까지 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정지 상태Stasis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대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같은 전략은 급변하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퇴락한 이유를 단지 전략이나 입지에서 찾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들은 원칙 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전쟁과 관련된 권한을 국가의 손에 넘겼으며, 교육에 대한 권한, 화폐와 은행에 대한 권한과 도로에 대한 권한을 국가의 손에 넘겼다. 다시 말해 권력의 핵심적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모두 국가에 양보했다. 행정기구와 관료주의를 전적으로 적대시한 18세기 자유주의자와 달리, 19세기 자유주의자는 행정 권력과 소수 엘리트 중심의 관료체제를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환영하기 까지 했다.

 

2.

18세기와 19세기 초 자유주의자가 주장한 '노예 폐지론'Abolitionism 은 그들의 원칙과 전략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입장은 노예제이든 아니든 국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제도는 최대한 빨리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국가주의의 즉각적 폐지가 실제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즉각적인 폐지를 모색하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유일한 입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악하고 강압적인 제도의 즉각 폐지보다 점진적 개선을 선호하는 것은 그러한 악을 재가하고 추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훌륭한 자유지상주의자였던 윌리엄 개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해도, 애달프게도 노예제도는 점진적으로 폐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노예제도가 한 번에 전복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단지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고 우리는 줄기차게 주장할 것이다."

 

3.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과 이념이 서구 세계에서 역동적이고 진보적이며 급진적인 입장에서 퇴락을 거듭하게 된 이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사건은 19세기 초에서 중반 사이에 일어난 일로서 '자연권'Natural Rights 이론을 포기하고 그 대신 테크노크라트의 이념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를 채택한 것이다. 자연권 이론은 자유의 근거를 개인이 자신과 자기 재산에 대해 가진 절대적 도덕성에서, 즉 자유의 옹호 근거를 기본적으로 권리와 정의의 차원에서 모색하는 데 비해, 공리주의는 국민 복지나 공동선과 같이 모호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자유가 일반적으로 최선의 방편이기 때문에 이를 선호할 뿐이다. 자유의 이론적 근거를 자연권으로부터 공리주의로 전환하게 되면서 두 가지 심각한 결과가 발생했다. 먼저 목표의 순수성과 원칙의 일관성이 불가피하게 훼손되었다. 자연권 이론을 신봉했던 자유시장주의자들은 도덕과 정의룰 추구했기 때문에 순수한 원칙을 강력히 고수할 수 있었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자유를 그때그때의 방편적 측면에서만 중요시할 뿐이다. 방편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어서, 냉철히 손익계산을 해야 하는 공리주의자로서는 사안별로 국가주의적입장을 취할 수도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원칙 자체를 버리게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영국서 벤담 류의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실제로 나타났다. 철저하지 못한 자유지상주의와 자유방임 이념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점점 더 깊은 국가주의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둘째로, 이 역시 첫 번째 결과만큼 중요한데, 공리주의자 중 급진적인 사람, 즉 포악과 강압의 즉각적 폐지를 열망하는 사람을 찾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효율성을 중시하므로 급진적인 변화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주의자 중에 혁명가가 나온 적이 없다. 공리주의자 중에는 즉각적 폐지론자가 있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폐지론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 정의롭지 못한 것을 최대한 빨리 없애려고 해야 한다. 그렇기에 냉철하게 그때그때 손익을 저울질할만한 여유를 부려서는 곤란하다. 결과적으로 공리주의를 택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급진주의를 포기하고 점진적 개혁주의를 택하게 되었다. 개혁가로 자처하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자문가나 효율성 전문가로 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공리주의자들은 자유지상주의의 원칙뿐만 아니라 그 원칙에 기반한 전략까지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리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와 현상 유지의 옹호자가 되고 말았고, 그 결과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 조합주의자들로부터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는 편협하고 보수적인 수구 세력이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보수주의자들의 대척점에서 출발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그들이 그토록 맹렬하게 투쟁했던 거대악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자유지상주의는 공리주의의 악역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경제학의 태동기에 벤담과 리카도의 영향 아래 공리주의가 시장경제학을 주도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막강하다. 최근의 시장경제학에서도 점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윤리, 정의 또는 원칙의 일관성 같은 것은 빈축을 사기 일쑤이다. 계산만 맞으면 당장에라도 자유시장 원칙을 내버릴 태세이다. 오늘날의 자유시장 경제학에 대해 지식인들은 그저 현상유지론을 극히 일부 수정한 정도로만 취급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4.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의 변질에 박차를 가한 두 번째 사건은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자들이, 최소한 20~30년 동안,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라고도 알려진 '사회진화론'Social Evolutionism 의 원칙을 받아들이면서 발생했다. 국가주의적 역사가들은 허버트 스펜서나 윌리엄 섬너와 같은 사회진화론적 자유방임주의자들을 냉혹한 사람들이라고 비방했다. 적자생존의 논리를 앞세워 사회 부적응자를 방치하고 더 나아가 말살하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나 섬너는 그저 경제학 및 사회학적 입장에서 자유지상 원칙에 당시 유행했던 진화론의 옷을 입힌 것뿐이었다. 사회진화론의 치명적인 문제는 오히려 종(이나 유전자)의 변화가 극히 천천히,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일어난다는 원리를 사회 영역에 잘못 적용한데 있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혁명이나 급진적 변화에 대한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대신 오랜 세월이 지나면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저절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한 마디로 혁명과 급짅적 변화를 주도하여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에 도전해야할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급진적 방법을 거부하고 점진적 변화만을 찬성하는 보수주의자들로 변신하였던 것이다.1

 

사실인즉, 한때 위대한 자유지상주의자였던 스펜서 자신이 이러한 변화가 고전적 자유주의 내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 이다. (마찬가지 예를 미국에서 찾아보면 윌리엄 섬너를 들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펜서의 삶 자체가 19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의 퇴락 과정의 상당 부분을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펜서는 처음에는 순수 자유지상주의자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급진적인 자유지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과 사회진화론에 물들면서 스펜서는 점차 자유지상주의를 이론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역동적이고 급진적인 역사적 운동의 일환으로는 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완전한자유의 승리, '신분'에 대한 '계약'의 승리, '군국주의'에 대한 '산업'의 승리를 갈망하면서도, 이러한 승리는 긴 시간 동안의 점진적 진화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스펜서는 급진 투쟁을 마다치 않는 신조로서의 자유주의를 버리고 당시 급성장하던 집산주의Collectivism 와 국가주의에무력하게, 보수적이고 수세적으로 저항하는 정도로만 그의 자유주의를 유지했다.

 

5.

만약 자우주의 운동의 철학과 이념을 퇴락하게 한 주원인이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공리주의였다면, 자유주의 운동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이전까지만 해도 엄중하게 지켜졌던 전쟁과 제국, 그리고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 원칙을 저버린 데 이다. 국민국가와 제국의 사이렌 소리가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파멸시킨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코브던, 브라이트, 멘체스터 학파가 주창한 반전주의와 반제국주의, 즉 '작은 영국주의'Little Englandism 를 포기하게 된다. 그들은 대신 '자유주의적 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 라는 터무니 없는 이름을 내걸고 보수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대영제국의 확장에 동참했으며, 보수주의자 및 우익 사회주의자와 손잡고 제1차세계때전을 초래한 제국주의와 집단생산주의를 받아들였다. 독일에서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통일 독일이라는 목표를 미끼로 승리를 눈앞에 둔 자유주의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영국과 독일 양국에서 자유주의의 이상이 파멸을 맞게 되었다.

 

6.

오랫동안 미국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대표해온 정당은 19세기 후반 "개인의 자유를 대변하는 정당"the Party of Personal Liberty 으로 알려진 민주당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대변하는정당이기도 했다. 민주당은 금주법, 청교도적 금욕법, 의무교육법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자유 무역, 태환화폐제도(정부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불가능함), 정부와 은행의 분리, 그리고 절대적 최소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앞장섰다. 민주당은 각 주의 권력을 극소화하고자 노력했고, 연방 정부의 권력을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외교정책에도, 민주당은국내 정책에 대해서만큼은 아닐지라도 평화, 반군국주의,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1896년 '브라이언 학파'the Bryan Forces2 가 민주당을 장악하면서부터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 영역에서 자유지상주의적 기조를 상실하게 되었고, 20년여 년 후 우드로 월슨이 집권하면서 불간섭주의 외교 정책 역시 폐기되었다. 그러고는 간섭과 전쟁이 밀려와, 죽음과 황폐화의 세기, 전쟁과 새로운 폭정의 세기가 도래한다. 또한, 전쟁 중인 이들 조합주의적 국가주의 나라들에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거대 정부, 거대 기업, 노동조합 그리고 지식인이 연대를 이루는 '복지-전쟁국가'Welfare-Warfare State 의 세기가 도래한다.

 

7.

미국에서 피어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불꽃은 19세기 마지막 무렵에 '반제국주의연대'the Anti-Imperialist League 를 결성하려고 뭉친 자유지상주의 용사들에 의해 피어올랐다. 이들은 미국의 대 스페인 전쟁과 그 후 스페인과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필리핀인을 진압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항하고자 뭉친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서 반제국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원래 영국의 코브던과 브라이트 그리고 프로이센의 유진 리히터와 같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로부터 비롯되었다. 보스턴의 사업가이자 경제학자였던 에드워드 앳킨슨이 주도(섬너도 함깨)했던 이 반제국주의연대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맹렬히 투쟁하고 이후 자유무역, 태환화폐제도 그리고 최소정부를 지지한 자유방임적 급진주의자들이 주 구성원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미국의 제국주의화에 끝까지 맞서 싸운 것은 그들이 한평생 강압과 국가주의, 그리고 불의와 싸워온 것, 즉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일상사에서 거대 정부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싸워온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8.

우리는 이제까지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고전적 자유주의 태동, 부분적 승리, 그리고 쇠락을 추적해보았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미국에서 다시 자유지상주의 사상과 활동이 부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토록 막강한 국가주의 세력과 연대가 이정도라도 자유지상주의 운동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어째서일까? 19세기 말고 20세기를 풍미한 국가주의의 위세를 보면, 희미한 자유지상주의의 불꽃이 다시 불타오르기는커녕 사그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자유지상주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가?

 

우리는 왜 자유지상주의가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가장 먼저, 가장 온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지 보았다. 미국은 자유지상주의적 전통이 매우 강한 땅이다. 그러나 우리는 갑자기 몇 년 전부터 자유지상주의가 부흥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 검토하지 못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미루기로 한다. 그전에 먼저 자유지상주의 신조가 무엇이며, 이 신조가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

 

 

Murray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1973, Ludwig von Mises Institute)

Translated in Korean by Professors of Kyunghee University (2013, 한국문화사)

Chapter 1, "The Libertarian Heritage: The American Revolution and Classical Liberalism"

 

  1. 역설적이게도 현대 진화론은 점진적 변화에 의한 진화 이론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종은 하나의 정적인 균형 상태로 부터 다른 균형 상태로 급격한 도약을 통해 진화한다는 이론이 더 정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이론은 "단속적 변화(Punctuational Change)" 이론이라 불린다. 이 같이 새로운 진화이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렇게 말했다. "점진주의는 변화에 대한 철학적 입장이지 자연계에서 도출한 사실이 아니다. … 점진주의가 힘을 얻었던 이유는 그것이 자연과 일치하는 객관적 설명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이념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점진주의는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자유주의의 반감을 정당화하는 근거, 즉 갑작스런 변화는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도그마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강력한 이념으로서의 효용을 지닐 수 있었다."
  2. 윌리엄 브라이언과 그 파벌을 말한다. 브라이언은 19세기 말 민주당의 반자유지상주의 세력의 태두였다. 1896년, 1900년 및 1908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