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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자유기업원칼럼/김경훈

<자유주의자의 수행모순>

80년대 말 혜성같이 나타난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교수는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대의 지적 혁명을 일으킨 바 있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문하에서 수년간 철학 전반을 학습한 호페는,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와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의 인간행동학(Praxeology)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터인데, 오스트리아학파가 자유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살아있는 자유주의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곧 호페 교수라고 보아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호페 교수의 다양한 업적 중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단연 그의 '논증윤리’(Argumentation Ethics)이다. 이는 사유재산권 및 자연권의 옹호 등을 포함한 자유주의의 윤리적 입장이 곧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절대적인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간행동학을 하버마스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담론윤리(Diskursethik) 및 신칸트주의(Neu Kantianismus)적 맥락에서 윤리학적으로 응용한 결과물이다. 호페 교수의 의도가 상당히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만큼, 논증윤리가 정말로 타당한지는 더욱 많은 검증과 토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논증윤리가 자유주의 윤리학에서 가장 발전된 입장임은 사실이다. 논증윤리의 -그리고 호페의 사상체계 전반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는 논리학 용어이다. 이는 “반박주장이 반박대상을 암시적으로 인정하는 논리적 역설”을 의미한다.

호페 교수에게 있어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수단을 이용해 행동한다.”라는 인간행동학의 기본공리는 정말로 자명하고,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이 공리를 수행모순적으로 반박하는 모든 명제는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행동학에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주장은 자세히 따져보면 인간행동학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행동학의 기본공리와 수행모순관계를 맺지 않는 -적어도 지금까지 개발된 것 중에서는- 유일한 윤리학적 입장이 곧 라스바드와 자신의 자유주의 윤리뿐이라는 것이 호페의 주장이다.

안타깝게도 호페 교수가 비주류 학자인 관계로, 그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려는 학계 차원의 시도는 비교적 미진한 편이다. 더군다나 호페 교수는 극단적 합리주의를 지지하며 사회과학과 형이상학에서 경험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적을 두고 있다. 사실상 현대 철학계와 사회과학계 전체를 홀로 상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아무리 호페 교수에게 크게 공감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사상이 정말로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데에는 사실 많은 부담이 따른다.

호페 교수에 대한 찬반 토론은 차치하더라도, 필자는 여기서 '수행모순’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접근법이, 자유주의자라면 반드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논리적 일관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자기모순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호페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엄격한 기준에 입각한 일관된 견해는, 자신이 정치와 경제 등 민감한 분야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자유주의의 특수성을 참작한다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수행모순으로부터 더더욱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자유주의의 구체적 정의를 학문적으로 파고 들어간다면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상언어의 차원에서보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아마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이 세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중에서 자유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사상은 없다. 심지어 파시즘과 공산주의도 자기 나름대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또 자유라는 개념 자체도 확실하지 않다. 사람들이 자유를 말할 때 그 구체적 의미 혹은 뉘앙스는 다를 소지가 다분하다. 혹자는 정치적 자유를, 다른 사람은 경제적 압박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또 다른 사람은 형이상학적 자유를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유주의 자체도 liberalism 혹은 libertarianism 중에서 어떤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인지에 대하여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모호성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지난 3년간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여러 사건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3~40년 전에 있었던, 무고한 시민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적극 주도했던 권위주의 정권 역시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곤 한다.

상식적 관점에서, 이러한 부류의 자유주의는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다. 어떤 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또 다른 영역에서는 국가와 공동체의 권위를 보다 우선시하곤 한다. 개별 분야에서 이러한 모순이 중첩됨으로써, 결국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가 형성되어,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사회주의자나 전체주의자와 별다른 견해차를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진정으로 자유주의자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가?

자유주의를 “사유재산권을 필두로 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보다 깊게 정의한다고 해도, 사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가를 방도는 없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Natural law theory) 사상은 그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고려한다면, 우리가 이 두 입장 중 무엇이 더 타당한지를 단언할 수는 없다.

상술한 딜레마를 고려하여 필자는 “자유를 추구하는 데 있어 수행모순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즉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의 논리만을 이용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면, 그가 정말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 상술한 예시에서는, 자유주의자보다는 자유지향적 보수주의자가 더욱 적절한 서술어가 될 것이다.

“자유를 추구함에서 자기모순이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그다지 가혹한 요구인 것은 아니다. 그저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해둘 필요가 있음을 말할 뿐이다. 이는 더 나은 논리적 사고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자기모순의 유무라는 진단기준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 자유주의자이고, 아닌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자유주의자 자신이 가진 문제점 및 오류를 스스로 검토하고 개선할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논리적 오류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곧 자기모순이다.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논리는 절대 신뢰받을 수 없다. 이는 곧 “A라는 주제에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B라는 주제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여전히 주장하는 사람, 자유를 추구함에서 'if 조건문’을 추가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자격을 충족시킨다는 주장이 우리의 상식 및 이성적 추론과 합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학과 연면과학>

필자가 이 글에서 경제학이 연역과학임을 구체적으로 논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경제학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대로) ‘선험적 공리에 입각한 연역적 추론을 통해 개발되는 학문’임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수행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과 무관한지를 고찰해보고 싶을 뿐이다.

‘인간행동학(praxeology)’과 그것의 가장 발전된 세부 분야인 경제학은 공리-연역적 논증(axiomatic-deductive arguments)'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인간 존재에 관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irrefutable facts about human existence)'과 몇 가지 보조적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전체 이론체계를 도출해낼 수 믿는다. 연역적 추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만약 그것이 근본적 가정에서부터 올바르게 수행된다면, 그 추론 결과 역시 시작점과 동등한 위상의 필연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올바르게 수행된 연역적 추론의 타당성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만약 오스트리아학파의 전제와 추론이 타당하다면, 그것의 모든 논리적 결론, 예컨대 “생산요소 가운데 사유재산이 없다면 가격요소는 있을 수 없으며, 가격요소가 없다면 비용계산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사유재산과 양립할 수 없다.”, “중앙은행은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재구성한다.” 등은,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이다.”, “100은 99보다 큰 수이다.”, “1 + 1 = 2 라면, 2 + 2 = 4 다.”와 같은 기하학 명제와 마찬가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절대적•보편적으로 타당한 진리로 작용한다.

연역적 추론은 전제가 진리라면 결론도 진리라는 특징 때문에, 적절한 사안에서 논리적 결점 없이 행해진다면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가진다. 수학에서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1 + 1 = 2” 라는 명제를 공리에 기초하여 도출하는 것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논리전개 과정의 복잡함과 난해함이 “1 + 1 = 2” 이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약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대로 사회과학에서 연역적 추론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가장 논리적으로 무결한 연역적 추론을 전개한 학파가 오스트리아학파라면, 오스트리아학파의 사상을 인간행동과 그 결과인 사회현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상술한 연역적 추론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다음 세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 즉 “(1) 오스트리아학파가 옳다고 여기며, (2)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하며, (3) 인간사회가 보다 번영하길 원하거나, ‘그리고/아니면(and/or)’, ‘수행모순’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학파의 결론에 대한 비타협적•일관적 수용”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과학체계는 물론 가치중립적이다. 인간행동학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해줄 뿐,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침을 내려주진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학문을 공부한다. 오스트리아학파 이론이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인간 세상에 대한 진리에, 단 하나의 보조적 가정, 즉 “우리는 번영하는 삶을 추구한다.”를 덧붙인다면, 오스트리아학파에 기초한 정책제언이나 사회비판이 가능해진다.

상술한 보조가정을 곁들인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책제언은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다. 만약 시장경제가 정부보다 효율적이라는 연역적 추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모든 영역에서 정부보다 더 나은 기능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폐지되고 화폐를 전적으로 민영화해야 하며, 국방과 사회간접자본을 포함한 모든 재화는 시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공급될 수 있으며, 오직 정부가 형성한 독과점만이 사악한 결과를 가져오며, 시장실패의 근본은 정부실패이며, 정부는 완전히 백해무익한 조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전용덕 교수가 2014년에 자유기업원에서 행한 [자유주의 시민강좌]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주류경제학과 작금의 사회체제는 궁극적으로 문명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가?

오늘날 오스트리아학파 학계의 절대적 주류 의견에 따른다면, 완전한 ‘무정부-자본주의(anarcho-capitalism)’가 해답이다. 오스트리아학파에는 크게 두 개의 조류가 있다. 하이에크의 전통을 따르는 ‘조지메이슨 대학교-케이토 연구소’ 학파와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전통을 따르는 ‘론 폴-미제스 연구소’ 학파이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주류영합적이고, 온건하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다. 그러나 두 학파 모두 하나의 이상사회가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고 있다. 바로 ‘무정부-자본주의’가 오스트리아학파의 종착점이라는 점이다. 과거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최소한의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제자는 국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방향으로 스승의 이론을 수정했다. 정부가 해롭다는 연역적 추론을 수행모순 없이 일관적으로 고수하기 위해서는, 정부에게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담이지만, 제자들의 연구에 대한 하이에크와 미제스의 대응은 흥미롭다. 노년의 하이에크는, 화폐이론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리아학파에서 점차 이탈하여 사회민주주의가 연상될 정도로 국가의 권력을 옹호하는 성향을 보였다. 반면, 미제스는 라스바드의 무정부-자본주의 논증이 완전히 옳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과도기 역시 허용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무정부-자본주의가 단번에 도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정부-자본주의가 특정 시공간대에서는 국가 통제하의 여타 사회체제보다 덜 효율적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무정부-자본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효율적인 체제로 작동한다. 국가 통제하의 여타 사회체제에서 무정부-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나 비효율을 우려하는, 즉 수 년 동안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신체장애인에게 단번에 홀로 걸으라 요구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자정작용일 뿐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경제위기가 닥쳐도 불황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행동도 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전환과정에서 발생한 혼란을 우려하며 무정부-자본주의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하며 동시에 인간사회의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더 많은 정부통제가 언제나 추후에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무정부-자본주의에 반대하거나, 최소한 천천히 단계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학파 지지자”는, “경제위기에서 양적완화를 옹호하는 오스트리아학파 지지자”와 같은 논리적 오류를 공유한다.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한다는 것은 연역적 추론이 옳고, 그 결과 역시 옳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연역적 추론의 전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면, 논리적 결함없이 도출된 결론도 절대적으로 옳다. 이에 대한 타협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판단 유보는 오직 귀납적 추론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반대하거나,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한다면, 그리고 인간사회의 번영을 꿈꾼다면, 오스트리아학파의 논리적 결론 역시 철저하게 비타협적으로, 또 모든 영역에서 일관적으로 옹호하길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권리인가>

대략 15년 전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달빛천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인데, 당시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20대 초·중반 세대가 상당한 규모의 소비력을 확보했기 때문인지, 지난 9월에 해당 작품의 국내 더빙판 사운드트랙을 앨범으로 발매하고자 하는 크라우트펀딩이 개시된 바 있다. 20대 초·중반 세대의 문화소비 규모가 방대함을 입증하듯, 해당 프로젝트는 국내 크라우트펀딩 사상 최고 규모를 기록했으며, 당초 목표금액은 3300만원 수준이었으나, 최종적으로 약 7만여 명이 참가해 26억 4천만원 규모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26억원에 육박하는 대형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내용물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엊그제부터 인터넷 상에서 활발하게 지적되기 시작했다. 앨범의 표지가 해당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무관하고, 그저 해당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담당한 성우의 사진으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에, ‘달빛천사’라는 특정 애니메이션을 기념하는 앨범이 아니라, 특정 성우를 기념하는 앨범처럼 보인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필자가 보아도 이는 확실한 소비자 기만이자 사기 행위로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해보인다. 이는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와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가 정립한 자유주의 윤리학의 입장에서도 반박불가능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자유주의 권리이론에 비추어볼 때 이 논란에서 문제시되는 점이 하나 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해당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의 성우는 “애니메이션 OST의 수익 절반을 음원유통사(구글)이,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원저작자가 가져가고 있다.” (출처) 라고 말하며 프로젝트 계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즉 자신이 녹음한 한국판 OST의 수익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외부인들이 가져가고 있다는 논지이다. 애당초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시점에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앨범의 표지가 해당 성우의 사진으로 교체된 이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첫번째 비판 논지는 26억원이나 되는 수익을 창출했으면서, 이미 15년이나 지난 오래된 작품의 저작권을 취득하지 않겠다는 점이었으며, 두번째 논지는 해당 성우는 일본인 작곡가가 창조한 곡조에 자신에 목소리를 덧붙였을 뿐이기 때문에 원 작곡가 혹은 음원회사에 수익이 돌아가는 것이 정당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권리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두 비판논지 모두 부당하다. 저작권은 권리가 아니며, 국가가 부여한 약탈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성우는 소비자 기만과 사기행위에 대해서만 비판을 받아야 한다. 위대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머레이 라스바드의 표현을 빌리면, 해당 성우 역시 ‘삼각적 개입(triangular intervention)’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극도로 중요시하면서, 저작권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점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문시될 수 있다. 흔히 저작권은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창조자의 정당한 권리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학작품의 작가가 책을 출판하면서 구매자들이 그것을 허가 없이 복제하거나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없음을 조건으로 해도, 그것은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표절과 소위 ‘불법복제’는 적법하며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작물에 대한 재산권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자유주의 권리이론가인 한스-헤르만 호페와 스테판 킨젤라(Stephan Kinsella)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창안한 인간행동학(Praxeology) 방법론을 응용하여 지적재산권과 저작권의 논리적 불가능성을 논증한다. 호페의 논증에 따르면, 재산권은 근본적으로 자원의 희소성에서 기인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원 소유를 둘러싼 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따라서 물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자원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확인가능한 재산권 분배가 가능하다. 두 사람이 하나의 물리적 실체를 동시에 점유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리적 실체는 ‘희소’하다.

반면, ‘생각’은, 일단 누군가 한 번 떠올린 이후에는 희소성이 있을 수 없다. A가 생각한 것을 B가 똑같이 머릿속에서 떠올린다고 해서 B가 무언가를 A에게 갈취하는 것은 아니다. A는 여전히 방해받지 않고 똑같이 그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게 줄어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창조한 모든 것은 일종의 ‘자유재(free goods)’이다. 그것은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이 원하는 만큼 소유가능한, 희소성이 부재한 재화이다. 어떤 갈등도 생겨날 수 없다. 모든 문학작품, 논문, 에세이, 음악의 곡조와 가사 등 인간정신의 모든 산물은 자유재에 해당한다.

인간정신의 산물이 자유재임을 부정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진다. 호페의 표현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에 부딪히게 된다. 가장 적나라한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는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모든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논리적 사고의 법칙을 최초로 문서화하여 발표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손 혹은 그의 친척의 자손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는 이상, 논리적 사고를 해선 안 될 것이다. 한글도 사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세종대왕의 후손인 전주 이씨 종친회가 한글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저작권료를 내지 않는 한 한글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서양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데이비드, 존, 에이브러햄 등 성경에서 기인한 이름 역시 바티칸 교황청에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현행 국가체제에서는 이러한 논리적 파산을 피하기 위해 저작권에 기한을 정해두고 있다. 그러나 내가 창작한 관념적 실체가 나의 소유물이라면, 그것이 50년 혹은 70년 후에는 나에게서 벗어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단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임의적으로 설정한 기한일 뿐이다. 비일관성의 모순을 피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번째, 지적재산권 및 저작권을 완전히 부정한다. 두번째, 지적재산권 및 저작권이 물리적 실체에 대한 권리만큼 타당함을 인정하며, 물리적 실체에 대한 권리의 영구적 상속가능성을 지적재산권 및 저작권에도 인정하고, 따라서 만약 세종대왕의 후손인 전주 이씨 종친회가 한글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한다면 그들에게 돈을 내고 한글을 사용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가까운 혈통상 혹은 족보상 후손이 모든 논리적 사고의 권리를 요구하면 그들에게 돈을 내기 전까지는 정신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합리적인 재산권은 오직 물리적 실체에만 적용된다. 나는 나의 책을 소유한다. 누가 내 책을 도둑질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내가 쓴 책의 내용을 마음대로 배끼고 자신의 창작물 마냥 출판하는 것은 비양심적일 뿐 법적 범죄가 아니다. 자유사회에서 표절이나 불법다운로드에 대한 법적 처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윤리적으로 비양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민간사회에서의 자생적인 불이익이 따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당 성우는 자신이 부른 노래에 대한 저작권료를 일본의 원 작곡자 혹은 음원회사에게 지불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는 우리 역시 그 성우의 음악을 소위 불법으로 다운로드해도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해당 성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앨범을 발매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그 앨범을 구매하거나 구매하지 않고 음원만 인터넷상에서 추출할 권리가 있다.

‘달빛천사’ OST 앨범 발매 논란에 있어,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유일하게 문제시되는 점은 해당 성우가 앨범의 표지를 자의적으로 변경하면서 따른 소비자 기만 및 사기 행위일 뿐이다. 저작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당 성우가 일본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것은 정당하며, 저작권료 지불에 불만을 표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

 

 

 

 

 

<오스트리아학파와 유사과학>

제임스 M. 뷰캐넌(James M. Buchanan)과 고든 털럭(Gordon Tullock)이 설립한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의 '무정부-자본주의(anarcho-capitalism)'적 함의를 연구하는 저명한 경제학자 브라이언 캐플런(Bryan Caplan) 조지메이슨 대학교 교수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실질적으로 '메타-경제학(meta-economics)’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현대 주류 경제학의 경험주의-실증주의 방법론을 상당부분 옹호했다.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인식론적 패러다임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학파는 많은 비판과 마주한다. 가장 논란이 되는 사안은 과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과학으로 간주할 수 있냐는 주제이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종교집단과 같다고 비난한 폴 크루그먼의 발언이 아마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주류 학계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할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해 가능한 가장 비판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오스트리아학파는 경험적 검증 혹은 반증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유사과학이다. 즉, 경험적-통계적 자료 혹은 정보를 통한 개선 혹은 비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과학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2. 극단적인 선험주의-합리주의에 기초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경험주의 비판은 마찬가지로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한 극단적인 경험주의-실증주의에 관한 것이며, 비교적 온건한 경험주의-실증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즉, 오스트리아학파는 논리적 일관성의 추구를 위해 극단적인 시작점을 설정했으나, 그에 비례하여 간과한 부분이 생겨났기 때문에, 극단적 선험주의와 경험주의 모두를 경계하는 중도적인 입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첫번째 비판점은 과학을 협소하게 정의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진다. 경험주의 패러다임이 우리의 인식체계를 장악한 이후, 과학은 곧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뜻으로 변모하였으나, 사실 과학은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학문일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오늘날의 유사과학, 사이비과학이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과학 방법론에 부실한 것을 넘어 학문적 엄밀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분명 자연과학과 매우 상이하지만 충분히 엄밀한 태도로 임해진 학적체계라 볼 수 있다.

두번째 비판점은 경제학이 반드시 선험적 차원에서 공리-연역적으로 유도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학파 주장의 타당성을 의문시한다. 단 하나의 입장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학파는 필연적으로 강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늘날 권장되는 학문적 태도와 매우 상반되기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비타협적인 오스트리아학파의 프로그램은 열린 태도와 검증 및 반증을 중요시하는 주류학계의 과학적 회의주의와 강하게 충돌한다. 오스트리아학파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더라도 오스트리아학파의 엄격한 비타협주의에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실례로 하이에크 전통의 오스트리아학파는 미제스-라스바드-호페가 주도하는 정통 오스트리아학파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주류영합적으로 발전하였다.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학파의 폐쇄성을 보완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비타협적인 태도가 가지는 위험성은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가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 가능성이 다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위험성 때문에 비타협적 태도가 학문적으로 적절치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과학과 학문일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중립성과 실재성이다. 즉, 우리는 개인적인 가치판단을 중지하고 오로지 무엇이 사실 그 자체와 가장 합치되는가를 다루어야 한다. 오직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존중만이 학문하는 사람에게 허용되는 최소한의 가치판단이다. 이런 점에서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의 타당성 여부가 오스트리아학파의 학문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이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의 태도가 비타협적이라고 거부한다면, 그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인식론 일반은 물론이고 오스트리아학파조차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견해를 내세울 자격이 없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의 타당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확실한 진리, 즉 특정 학문에 대한 접근법은 그 학문 주제영역과 가장 합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은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연과학 방법론을 모든 영역에 적용하고자 하는 '물리주의(physicalism)’ 태도는 필연적인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여러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유클리드 기하학의 5대 공리와 기본적인 명제논리는 부정할 수 없다. 평면 위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언제나 180도이며, 총각은 언제나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 기하학과 논리학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려고 할 수는 없다. 물리주의 태도를 취하여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파악할 영감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보조방법에 불과하다.

관건은 경제학의 주안점이 자연과학과 같은 경험주의 태도에 있느냐, 기하학 혹은 논리학과 같은 선험주의 태도에 있느냐에 있다. 우리의 직관은 전자를 향한다. 경제학은 경제현상에 대한 학문이다. 경제현상은 현실세계에서 발생한다. 현실세계에 대한 연구는 경험을 수반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현상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 직관의 결론이다. 너무 자연스러운 추론의 연쇄이기 때문에 무어라 반박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제현상은 인간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경제학은 궁극적으로 인간행동의 학문이다. 피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경제를 넘어, 그것의 근본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어찌되었든 인간과 인간행동을 탐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사회과학의 공통점이다.)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주류경제학은 지금까지 이상적 인간상을 가정하여 인간행동을 탐구해왔다. 가설에서 출발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으로 행동경제학이 대두했다. 이는 경험적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하는 주류경제학의 시도이다. 행동경제학은 경험과학의 테두리에 있기 때문에 물론 한계를 가진다. 경험적 데이터를 완전히 파악하기도 힘들 뿐더러, 완전히 파악한다고 한들 인과관계 설정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하다. 따라서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행동은 가설적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제학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경제학은 영원히 가설로만 가득 찬 학문으로 남을 것이다. 매우 유용하고 실재에 가까운 이론이라고 한들 진리는 아니다. 이는 현재 주류경제학의 학문적 지위일 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비롯한 모든 자연과학의 태생적 한계이다. 주류학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그 어떤 경제학자도 이러한 한계를 필연적이라 받아들이며, 어떠한 문제의식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자연과학에 있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경제학에서도 당연하다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는 의문을 제기한다. 자연세계와 인간은 같은 인과관계를 공유하며, 같은 방법으로 탐구될 수 있는가?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자연세계는 인과적이고 경험적이지만, 인간은 목적론적이고 선험적이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없고 그저 사물에 불과한다고 한들 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행동의 형성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그것이 목적을 가지고 있고,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결과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적으로, 개체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필연적인 인지적 한계가 인간행동을 구조짓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의 숨은 원인>

미제스 연구소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마크 손튼(Mark Thornton)은 2015년작 영화 '빅 쇼트'를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다룬 모든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며 높게 평가했다. 모기지저당증권(MBS)과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2007-8년 세계 금융위기 이전 미국 금융시장의 왜곡된 상품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세계 경제위기를 이해하는 시발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훌륭하다. 사실 시나리오 자체는 상당히 지루한 편이다. 종종 영상미가 돋보이기는 하나 그마저도 독특한 수준을 이루진 못했다.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영화적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전 미제스 연구소 부대표 및 현 미국경제연구소(AIER) 대표 제프리 터커(Jeffrey Tucker)의 지적대로, '빅 쇼트'는 매우 위험한 영화이기도 하다. 분명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루고 있는 영화지만, 선명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보이는 것'만 다루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은 다루고 있지 않은 영화이다.

시장에서 불량 금융상품의 판촉이 촉진되었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원인인지, 즉 경제위기의 원인이 은행 및 금융 산업계의 탐욕, 혹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인센티브 구조의 선천적 결함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이는' 것 만 가지고 사태의 인과원인을 단정짓는 것은 엄격한 학문적 태도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으로 인과관계를 추적하고 현상에 대한 명석한 이해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교훈을 따라 '보이지 않는' 것 역시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후반의 미국 주택거품과 경제위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정부규제와 중앙은행의 역할에 있다. 이는 '경기변동이론(Business Cycle Theory)'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파악할 수 있는 사안이다. 정부의 비효용적 통화 및 신용정책에 의해 시장에서 리스크 높고 불안정한 불량 금융상품이 파생되었다는 것이 2007년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다. 경제위기를 다루는 매체에서 경기변동이론과 통화정책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빅 쇼트'에서는 중앙은행의 화폐정책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으며, 경기침체의 해소책이 시장규제에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분명 실재적이지 못한 분석이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언급하듯) 이 영화는 사실 그 자체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저널리즘 매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경기변동이론과 통화 및 신용이론의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감상한다면 유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이론적 내용을 배제하고 현상 만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론 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금융산업과 자본주의는 강력한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는 추론에 도달하기 쉽다. 분명 인과적으로 실재적이지 못한 결론이다.

정확한 이론 없이 '빅 쇼트'를 본다면 경제위기 이전의 대부분의 금융활동이 악의적인 사기행위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주어진 조건에서 발생하는 시장 신호를 따라 과거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경제활동을 했을 뿐이다. 당시 금융시장에서의 손익 인센티브 신호가 비정상적이라 볼 수는 없었다. 그 금융시장 구조 자체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인센티브 신호가 장기적으로 지속불가능한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 중앙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인위적인 금리 인하는 곧 대출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고 저축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출이 쉬워졌기 때문에 주택 자체를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 주택을 구매하는 행위가 서민층의 필수요소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가능하지 못했을 방향으로 주택시장이 비대해졌고, 그에 비례하여 금융상품 역시 정상적인 시장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불량 상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결국 2007-8년의 경제위기는 정부의 책임이다.

영화 '빅 쇼트'의 주인공 두 명은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한참 전에 이미 경제위기를 예측하였다. 금융상품이 건전하기 못하기 때문에 언젠가 임계점을 도달한다고 정확히 예측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주인공은 영화 내내 바보 취급을 당한다. 정확한 경제학 이론에 입각하여 미래를 예상하고 현 상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과 기업가적 기민성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주인공 역시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미래 예측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촉이 좋았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파악하는 이론이 아니라, 개인적인 식견과 명백하게 관찰되는 것만 다루는 감각에만 의존하면 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감각적으로 보았을 때 시장경제의 장기적 유지는 경제행위자의 개인적 도덕감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파악했을 때, 경제행위자의 '입증된 선호(demonstrated preference)', 수요-공급의 법칙 등을 감안한다면 시장경제는 도덕과 무관하게 가능한 최적의 상태를 우리에게 보장해준다. 간섭받지 않는 시장경제에서도 실패와 성공의 반복은 계속되지만, 2007-8년의 경제위기와 같이 똑똑하고 경험 많은 최상위 엘리트들이 연쇄적으로 실수를 일으키는 경우는 일어날 수가 없다.

경제행위자의 행태를 보여주는 경기변동이론 없이 이 영화가 유일하게 성공한 비판적 조명은, 납세자들이 엘리트 계층에서 만연한 모럴 해저드의 보증인이라는 정확한 지적이다. 불황은 '과오투자(malinvestment)'를 바로잡는 기간이다. 잘못 배치된 자본을 정상적으로 재배치하여 시장경제를 원상복구하는 것이 불황이다. 이는 분명 고통스럽지만 결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당초 경제구조가 잘못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만약 불황기간의 고통을 막자고 정부가 양적 완화를 시행하거나 파산한 기업에 대한 구제를 시행한다면, 불황의 고통은 더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될 뿐이다. 지난 경기침체에 미국 연방정부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많은 정부는 파산한 기업의 부채를 면제하거나 대리 납부해주었다. 그러한 재원은 결국 일반 서민이 납세한 세금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마불사'를 이유로 파산을 막아준다면 기업가들의 실수는 반복된다. 실패한다고 해도 정부가 다시 복원해주기 때문이다. 구조 전체에 '보험'이 걸린 시장경제는 기능할 수 없다.

제프리 터커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경제학계의 로르샤흐 테스트라고 할 만 하다. 잘못된 경제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 경제이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 그리고 정확한 경제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점은 명백하다.

 

 

 

 

 

<"행동공리"에 대한 오류>

오스트리아학파의 '행동 공리', 즉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한다" 라는 명제에는 매우 많은 오해가 있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이 명제는 '비가언적' 진리에 해당한다. 즉 특정한 조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전제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인 객관적 사실"이다. (이것이 오스트리아학파가 공리를 공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현대 기하학에서 공리의 의미가 거의 상실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리의 '비가언적' 성격을 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전통적 학문에서, 공리란 곧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명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행동 공리 그 자체와 그것으로부터 논리적 오류 없이 연역된 법칙의 진리요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혹은 형식논리학과 대등한 지위에 있다. 즉 "1+1은 2이다", "평면에서의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결혼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다" 따위의 논리적 명제와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모든 정부행동은 비효용을 창출한다"라는 경제학 명제는 동등하게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행동 공리'가 그들의 가열한 선언만큼 보편타당하진 않다고 말해준다. 직관적인 파악이 어렵다는 점이 특정 명제의 진리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동 공리'를 폄하하고자 노력한다. '행동 공리'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는, 그 명제가 함의하는 용어를 잘못 이해하거나, 범주를 착각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많은 사람이 인간행동학과 심리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명백히 다른 두 영역을 혼동하곤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종종 무의식적이다. 이는 과학적 사실이다. 무의식은 의식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므로, 목적지향적이지 않다. 이 때 인간의 양태는 합목적성을 띄고 있지 않다. 예컨대 우리는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흔드는 등의 신체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이는 분명히 무의식적이고, 따라서 목적을 수반한 행동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우리말에서는 명확한 구별이 되어있지 않지만, 영어에서 '행동(Action)'과 '행위(Behavior)'는 명백히 다르다. '행동'은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동물로서의 반사신경에 의해 이루어진다. 종종 행동과 행위 사이의 구별이 몹시 어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범주적으로 볼 때 '합목적성을 띈' 행동과 '무의식적인' 행위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인간행동학과 그것의 가장 발전된 세부 분야인 경제학에서 다루는 것은 전자이며, 후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후자의 존재는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한다" 라는 명제의 반박사례가 되지 못한다.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기한 명제를 반박하려면 목적을 갖지 않고, 의식적이지 않은 행동의 사례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합목적성'을 함의하기 때문에, 이는 "결혼한 총각"만큼이나 자기 모순이다.

인간 행동의 원인, 즉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행할 때, 어떤 이유로 그 결정을 내렸는지 역시 경제학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것 역시 심리학의 영역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삶의 배경, 가치관, 지식, 잠재의식 따위의 많은 심리적 요소가 행동의 근저에서 무의식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스트리아학파의 요지는 그러한 외부요인적 설명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인간행동의 법칙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미제스는 우리가 이성과 자의를 통해서 행동을 언제나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행동하였던 간에, 그러한 결정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상품들 사이의 가격을 형성한다는 점에는 이견에 여지가 없다.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은 인간이 선택을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주목하며, 선택, 결과, 목적, 수단 따위를 탐구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유의지의 문제라는 민감한 규범에 의존하는 연약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보다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잠재의식에 완전히 지배받는다고 해도, 또 우리가 사실 자유의지가 없이 그저 돌멩이와 같은 수준의 존재론적 지위에 불과한 기계인형에 불과하다고 한들, 오스트리아학파의 '행동 공리'는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학파 인식의 출발점이 외부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내면적 반성, 즉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있으며, 그 탐구대상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구별되는 목적론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은 동일율과 비동일율 원리가 타당하다는 전제하에, 귀류법적으로 이 원리에 어긋나는 견해들을 쳐내가는 방식으로 논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긴 어렵다. (기술해본 결과 대략 14페이지 가량이 소모된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요약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논리의 초석은 동일율과 비동일율이다. 즉 "A는 A가 아니다" 따위의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2. 동일율과 비동일율이 언제나 타당하다는 점은 곧 선험적인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동일율과 비동일율에 입각하여 발견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는, (a) 관찰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후험의 영역이 아니라 내면적 반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험의 영역에 속하는 경우, (b) 다른 모든 명제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거나, 그것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곧 자기모순에 직면할 경우에 성립된다. 4. 그러한 무전제적이고 절대적으로 타당한 선험적 진리 중 하나에 '행동 공리'가 포함된다. 행동 공리에 반박하려는 모든 시도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의식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5. 여기서 그것이 목적을 가지며 의식적이라는 점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행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러한 선택이 선행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6. 행동은 선택과 결과 사이의 목적론적 인과성을 함의한다. 이 점에서 인간의 행동은 의도적이고 목적을 가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택과 결과 사이에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격차가 있으며, 그 과정을 메꾸는 것은 인간의 목적지향성과 의도성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A 시점의 인간 B가 선택지 C, D, E 중 C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결과로서 F가 발생했다는 점은, 인간이 목적지향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선택과정에 잠재의식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다분하며, 외부 관찰자에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소위 말하는 무의식적인 선택일 수도 있으나, 주관의 입장에서 그것은 언제나 '스스로가 원인이 되어' 선택했다는 점에서 [강조하지만,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물들은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한다.] 의도적이다.

논지를 요약하며 글을 마친다. 1. 인간행동학과 심리학은 서로 다루는 범주가 다르다. 인간행동학은 '행동'을 다루며, 심리학은 '행위'와 행동의 원인에 대해 다룬다. 2. 인간의 의도적 행동의 원인으로 무의식이 지적될 수 있다는 점은, 논리적으로 인간행동이 의도적이라는 점을 반박할 근거로 작용하지 못한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사상적 위치>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철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그러한 시도는 철학계에서 이미 개발된 이론을 입맛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다분하다. 스스로의 철학적 기초를 독립적으로 계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학파는 오스트리아학파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분명 경제학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범위가 점점 방대해진 까닭에 지금은 더 이상 경제학파에 국한하기엔 어려운 상황이다. 비교적 경제학과 가까운 영역인 역사학과 사회학은 물론, 정치철학, 법철학, 윤리학, 심지어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학파의 범위는 포괄적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철학적 기초가 주류 학계와 매우 상이하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학파의 의의를 사상사의 맥락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분명 엄청난 노력이 소모된다. 주류 학계에서 관련 연구가 거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상술한 주제로 글을 쓸 때, 지금 당장으로서는 오스트리아학파 혹은 미제스의 철학사적 업적을 자평하는 오스트리아학파 내부의 연구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상당한 비약일 수 있지만 대개 서양의 근대철학은 크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두 개의 조류로 구성된다고 여겨진다. 그 이후에는 임마누엘 칸트를 시작으로 하여 이 두 전통만 가지고 모든 철학자를 분류하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경제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사회과학의 범주를 넘어 철학에도 상당한 발자취를 남긴 오스트리아학파의 철학사 인식은 독특하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적어도 근대 이후의 서양철학사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결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오스트리아학파의 자체적인 정의에 따르면, 합리주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선험적인 진리의 존재를 믿는 전통이며, 경험주의는 그것에 반대하는 전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이 합리주의 인식론의 전범을 보여준다. 반면에 경험주의에는 흄, 논리실증주의, 포퍼, 현대 비-유클리드 기하학,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속한다. 그것들이 선험적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신들이 라이프니츠와 칸트 전통의 합리주의 철학의 최후의 계승자이자 가장 발전한 형태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고유의 인식론인 '인간행동학(Praxeology)’이 경험주의 철학의 논리적 파산을 이끌어냈으며, 합리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가열차게 선언한다. 대표적인 오스트리아학파 철학자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일개 경제학 학파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지식체계가 인식론의 궁극적인 토대이자 합리주의 철학의 궁극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식과 지식을 가장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참된 인식의 여부를 따지는 것인데, 그 과제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학의 오스트리아학파에 의해서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른다면,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치철학과 경제학은 궁극적인 인식의 기초로부터 논리적 결함 없이 연역적으로 도출되었으므로, 곧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선험적 진리로서의 자격을 가진다. 그에 비례하여, 오스트리아학파가 아닌 모든 다른 입장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완전히 잘못된 것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적어도 사회과학, 인식론, 정치철학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이 역사의 종언이자 최종형태라는 것이 그들이 굳건히 고수하는 입장이다.

본인이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기에 확언할 수는 없는 바 이지만, 오늘날의 학계에서 상술한 오스트리아학파와 같은 비타협적인 학적 태도를 가진 학파 단위의 입장은 상당히 드물다고 생각된다. 유사학문이 아니라 학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비주류 전통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주류 패러다임과 극심하게 상충하는 전통 중 하나로 분명 오스트리아학파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가 그들의 주장대로 인식론의 완성인지는 보다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 중 무리없이 인정할 수 있을 법한 사안 역시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학파가 합리주의 전통의 가장 일관된 계승자라는 평가이다. 이는 오늘날의 사회과학계의 일반적인 패러다임을 살펴보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사안이다. 물론 합리주의 전통을 계승하는 학파 혹은 학자는 철학계 내에서 여전히 다수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주의가 함의하는 바, 즉 부정불가능한 선험적 진리의 발견과 그것의 응용을 가장 충실하고 근본적인 영역까지 발전시킨 입장은 아마 오스트리아학파일 것으로 사료된다.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등 20세기의 유럽철학은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으나 그에 비례하여 치명적인 실수를 종종 저지르곤 했다. 그들이 '행동하는 인간’을 인식의 시작점으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행동하는 인간’을 시작점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논리적 결함 없이 새로운 지식을 발굴하고자 한다. '행동하는 인간’ 이상의 궁극적 기초를 더 이상 논할 수 없다면, 오스트리아학파는 가장 근본적인 인식론적 함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여러 주장은 분명 보다 엄격한 검증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주장이 상당히 비타협적이고, 일반적인 상식과 종종 충돌하며,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주류 학계에 대응은 완전한 무관심에 가깝다. 오스트리아학파가 분명 과학이면서도 선험적 진리를 추구하는 매우 독특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철학적 성격을 따지는 전문 철학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오스트리아학파가 그들의 주장만큼 엄밀하고 궁극적인 학파가 아니라고 한들, 그들이 합리주의 전통의 현대적 계승자로서 가지는 사상사적 의의는 부정하기 어려운데도 말이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와 관계 없이, 그들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 볼 수 있다.

 

 

 

 

 

<기업성공과 자유시장의 부정적효과>

기업가정신은 사회의 영속적인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민간 자본 투자의 확대를 이끌고 생산과 저축을 촉진하며 더 많은 사회적 부를 가져다주는 기업가들은 분명 자유시장 경제와 자유주의 사회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곤 한다.

그리하여 많은 자유주의자가 기업가와 기업가정신을 칭송한다. 소설가 아인 랜드는 기업가가 파업을 선언한 세계를 그려낸 소설 <아틀라스>를 통하여 기업가정신의 위대성과 정부 및 반기업정서를 가진 국민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경우, 대체로 삼성, 현대, LG, 그리고 포스코 등 고도발전시기에 성공적인 기업을 운영하며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로 이끈 1세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과 역량에 찬미를 보내곤 한다.

물론 1세대 기업가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가 지난 20세기에 반시장경제 독재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성공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경제의 발전은 언제나 민간의 생산적 자본 투자의 확대 및 저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정부는 언제나 경제를 파괴하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1세대 기업가들이 언제나 순수하게 시장경제에서만 활동하며 스스로의 역량만을 통해 대기업을 일구지 않았다는 불편한 진실에 있다. 우리나라의 재벌 대기업들은 분명 정부의 권력을 이용해 중소기업과 국민의 재산을 갈취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장악한 일련의 반시장주의 세력은 자신과 야합하는 일부 기업을 선택하여 다른 기업들이 누릴 수 없는 혜택과 보조금 지급 등을 제공해주었다. 간택된 기업들 역시 독재정권에 뇌물과 로비를 주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령을 개정하거나 상대 기업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정상적인 자유시장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상황을 조성하며 자신들의 우위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정부-재벌 유착관계’가 반영속적으로 구축됨에 따라, 기업의 경우 비효율적인 투자를 계속하면서도 정부의 비호 아래 시장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정부는 자기들 나름대로 정권 수명 연장에 보탬을 받을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정경협력’과 ‘경제력 집중’의 결과인 일종의 경제 기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엄격하고 일관된 논리로 시장경제를 설명하는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학에 따르면, 정부의 경제개입은 언제나 과오투자를 창출하거나,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고 그저 자산을 낭비할 뿐이다. 더욱이, 시장경쟁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곧 소비자가 선호하지 않는 방향으로 경제의 진행과정을 왜곡하여 결과적으로 생산성과 삶의 질의 하락을 가져온다.

즉 정부의 경제개입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성장은 간단히 말해 ‘운’이 좋았을 뿐이다. 정부와 재벌의 강력한 국가주의적 유착관계가 가져오는 비효율을 상쇄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민간사회에서 계속하여 나왔기 때문에, 동 시기의 유사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의 양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지, 정부 및 정부와 야합하는 재벌대기업의 역량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머레이 라스바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경제성장(economic growth)’이 결과가 아니라 ‘강제성장(coerced growth)’의 결과이다. 경제는 양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면도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강제된 양적 성장의 결과, 질적인 면이 따라오지 못하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가용가능한 자본 및 노동이 상대적으로 세계평균보다 높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양적인 풍요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물론 과거의 독재정권과 재벌대기업이 형성한 관치경제체제의 필연적 결과이다. 노동시장은 매우 경직되었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의 질 차이가 극심해지면서 청년계층의 자발적 실업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상 대기업이 아니면 시장에서 지속가능한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중소기업이 정부의 보조금 지급으로 연명하는 유사 배급제, 유사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사회의 일부 세력은, 국가주의가 형성한 이런 암울한 측면을 무시하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양적인 성장결과에만 주목하며 정부와 야합했던 1세대 기업가들의 일부 역량만을 찬미하거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청년계층의 비관주의를 비난하며 “이렇게 양적으로 풍족한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너희 정신의 빈곤함과 가난이 너를 불행하게 한다. ‘헬조선’은 허구다.” 라고 대응하곤 한다. 그러나 상기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설명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태도는 최소한 자유시장과 그것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한국경제의 질적 비효율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며, 이것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로 1세대 기업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가는 언제나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이윤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런 기업가에게, 정부와 야합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상대방과 경쟁하며 우위를 취하는 것은 극심한 노력과 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 혹은 국가란 무엇인가? 특정 영토 내의 법률과 무력을 독점하는 일종의 독점기관이다. 몇 가지 제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부 혹은 국가는 언제나 모든 사회의 가장 지배적인 기관이다. 이러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와 친해지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분명 기업가의 입장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보다 정부를 꼬드겨 그들의 힘으로 경쟁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것이, 더 적은 투자로 더 많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정부의 시장경제 개입이 존재하는 한, 기업가정신은 언제나 유혹에 시달린다. 유혹에 굴복한 기업가정신은 시장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시장경제에 해악을 미친다. 1세대 기업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긍정적인 유산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불편한 진실 역시 곱씹으면서, 앞으로 기업가정신이 시장경제에 유익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시장의 일관된 옹호자 중 한명인 전용덕 교수의 이 발언은 분명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한국은 국가 주도의 수출지향적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성장시켰다. 다시 말하면, 국가 주도의 산업화로 많은 비효율과 자원 낭비(경기변동 등에 의해)가 발생했지만 그것을 크게 능가하는 민간의 자본 투자, 저축,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투입, 높은 교육(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자본을 투입하는 것임), 기업가들의 도전정신(반도체 투자, 조선업 투자 등) 등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초래했다.”

 

 

 

 

 

<자유사회와 n번방>

사회적으로 현재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을 다루는 글이므로,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를 공지하고자 한다.

1. 필자는 전문적인 학문적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오스트리아학파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이다. 즉, 이 글은 오스트리아학파의 논리를 빌리고 있음에도, 명백한 오스트리아학파 견해라 보기 어려울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오해와 잘못은 필자의 책임이다.

2. 이 글은 Stephan Kinsella - Against Intellectual Property, Walter Block - The Crime of Blackmail: A Libertarian Critique, Murray N. Rothbard - The Ethics of Liberty 등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치철학 저서에서 밝혀진 몇 가지 개념에 의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 글이 그러한 기초 위에서 일관성있게 성립되었는지와 별개로) 오스트리아학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3. 이 글에서 말하는 '자유사회’는 오스트리아학파에서 말하는 '아나코-캐피탈리스트(Anarcho-Capitalist)’ 사회를 의미한다.


n번방 사건은 기본적으로 "협박을 통해 수십여 명의 여성에게서 나체 사진 및 성적 행위가 담긴 영상물을 받아내고, 그것들을 텔레그램을 이용하여 약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용자들에게 유포 혹은 판매한 사건"이다. 문장만 보아도 이 사건이 심히 악덕함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주동자에 대한 매우 강경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범죄가 악덕하지만 모든 악덕이 범죄는 아니다. 예컨대, 살인 범죄가 악덕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친구와 약속하고 어기는 행위는 악덕할 수는 있어도 범죄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덕적으로 그릇된 악덕과 법적인 처벌을 필요로 하는 범죄의 구별은, 오스트리아학파 정치철학의 사실상의 창시자 머레이 N.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가 매우 강조해온 사안이다.

선요약하자면, n번방 사건은 매우 심각한 중범죄와, 안타깝게도 범죄라고 볼 수 없는 요소들이 뒤섞여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필자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n번방 사건의 주동자들은 세 가지 유형의 행위를 하였다. 첫째, SNS에서 자신의 알몸 사진을 올리던 여성들의 계정을 해킹하여 신상정보를 파악한 후, 그것을 유포한다고 협박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음란 영상물을 받아냈다. 두번째, 성매매 여성 혹은 성매매를 원하는 여성에게 접근하여 신상정보를 파악한 후, 그것을 빌미로 협박하며 음란 영상물을 받아내다가, 여성이 거부할 경우 강간 협박 혹은 살해 협박을 하며 계속 음란물을 촬영할 것을 강제했다. 세번째, 상기한 방법으로 여성을 유인한 후, 모텔 등에 감금하고 집단으로 강간하였다. (이 세가지 유형이 조금씩 섞인 사례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두번째 사례와 세번째 사례는 결정적으로 물리적 협박을 하였거나 폭력을 행했으므로 매우 심각한 중범죄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경미한 첫번째 사례, 즉 물리적 협박 혹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갈취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건의 시작부터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해킹은 범죄인가? 오스트리아학파 법학자이자 지적재산권 변호사 스테판 킨젤라(Stephan Kinsella)의 해석에 따르면, 두 가지 유형의 해킹이 있다. 첫번째 경우는 데이터를 제거하거나 치명적 바이러스를 심어 기기를 못쓰게 만드는 해킹이다. 두번째 경우는 데이터를 그저 염탐하거나 복제하는 해킹이다. 첫번째 해킹은 물리적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재산권 침해이다. 그러나 킨젤라는 두번째 해킹은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유지 무단 침범과 달리 인터넷상의 무단 접속은 언제나 물리적인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데, 만약 무단으로 접속한 후 데이터를 제거하지 않고 복사만 한다면, 여기서 발생하는 어떤 물리적 파괴도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비스 제공사의 서버에는 여전히 이전과 정확하게 같은 데이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과 정확하게 같은 새로운 데이터가 해킹범의 하드디스크에 추가되었다. 새로운 것이 생겨났을 뿐, 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죄는, 서비스 제공사가 만약 계정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라 보증했을 경우, 그 보증이 허구임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사기행각을 저지른 경우 밖에 없다. 서비스 제공사는 자신들의 데이터에 대한 독점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데이터는 일종의 '자유재(free goods)’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이전 칼럼인 '저작권은 권리가 아니다, http://cfe.org/20191205_22131’를 참고하라. 이 글 역시 부족한 점이 많지만 관련 주제에 대한 필자의 논지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n번방 주동자가 SNS 상에서 자신의 알몸사진을 업로드하던 여성들의 계정을 해킹하여 신상정보를 파악한 것 자체는 범죄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상정보를 가지고 여성들을 협박하여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 것은 범죄인가?

라스바드와 월터 블락(Walter Block)에 따르면, '협박(threat)’과 '공갈(blackmail)’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물리적인 위협이다. 즉, A가 B에게 “내일 오전 9시까지 나에게 1억원을 주지 않으면, 널 죽일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을 통보하는 것이므로 협박에 해당하며, 상대방을 침해하는 범죄행위이다. 요구조건을 따르지 않는다면 실제로 죽임을 당하거나,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하리라는 점이 개연성있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반면, A가 B에게 “내일 오전 9시까지 나에게 1억원을 주지 않으면, 네가 1주일 전에 동성애자 클럽에 갔다는 것을 폭로할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을 예고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그의 사회적 평판을 훼손한다고 예고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상대방에 대한 침해인가? 라스바드는 아니라고 답한다. 지적재산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평판 혹은 지식은 소유될 수 없는 자유재이다. 무언가에 대한 평판 혹은 지식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다. 이를 물리적으로 통제하거나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생각은 무한정으로 복제가 가능하다. 누군가 독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 혹은 누군가 혼자만 알고 있던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은 어떤 재산상의 피해 혹은 침해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형법에서는 협박과 공갈의 구별이 명확하진 않지만, 라스바드의 정치철학에서는 매우 철저하게 구별된다. (라스바드는 이를 자신의 명저 '인간, 경제, 국가’와 '자유의 윤리’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하이에크는 라스바드와 정 반대의 견해를 가졌다. 즉 사회적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라스바드는 하이에크의 이런 측면을 '자유의 윤리’에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단순히 악덕할 뿐인’ 해킹을 통하여 수집한 정보를 볼모로 '공갈’하는 것은, 어떠한 물리적 협박 혹은 위협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는 범죄로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악덕함과 별개로, 안타깝게도 법적인 처벌 역시 이루어지기 어렵다.

물론 라스바드, 킨젤라, 그리고 블락의 해석(이들은 모두 자연법을 응용하여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한다.)이 틀렸을 수도 있다. 저명한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로버트 머피(Robert Murphy)는 라스바드의 자연법 이론에 매우 공감하면서도, 한 두명의 학자가 모든 개별 사례에 자연법의 응용을 도출하기는 어려우며, 자연법에 입각한 법 이론은 필연적으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발견 과정(discovery process)’을 거쳐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즉 공갈 혹은 해킹 등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자연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문제는 즉각적으로 도출할 만한 사안이 아니고, 매우 장기간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선 이 글에서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잠재적 정설이라 할 만한 라스바드의 견해에 계속 의존하여 논의를 진행해보자.

물리적 협박이 수반한 2번 사례와, 실제 강간이 이루어진 3번 사례와 달리, 단순 공갈에만 의존하여 음란물을 갈취한 1번 사례는 범죄라 보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그렇다면, 만약 오스트리아학파 법 이론이 지배하는 자유사회에서는, 1번 사례와 같이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공갈로 이득을 취하는 '범죄자는 아니지만 악덕한’ 부류의 인간군상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실제로 많은 반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유주의에 반대하곤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사회복지가 없는 자유사회는 최저수준의 빈곤층은 굶어 죽게 되는 끔찍한 사회일 것이다.” 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절반만 보고 나머지 절반은 간과하는, 국가주의적 오류이다. (존재하지 않지 않는) 지적재산과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자들에 대해 자유사회가 법적으로 보복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사회가 스토커와 공갈법들에게 매우 친화적인 인외마경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이 '범죄는 아니지만 당하면 불쾌한’ 사안들의 경우, (물론 개인정보를 도용하여 사기를 치거나 대출을 하는 경우 등은 분명한 범죄이다. 여기서 말하는 프라이버시 침해는 개인 신상 및 일상 침해 등을 의미한다.) 분명 자유사회에서도 상식적인 인식이 매우 좋지 않을 것이고, 당연히 프라이버시 침해를 일삼는 사람의 사회적 평판은 굉장히 안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라이버시 침해자를 존중하지 않고, 각종 불이익을 주는 사회적 관습이 생겨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예컨대, 특정 공동체 혹은 토지 소유주, 주택 소유주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 자신들 소유의 마을, 거리, 주택 등에서 거주할 수 없거나 출입할 수 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의 적법한 권리행사이다. 그들은 흑인 혹은 동성애자의 출입을 금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자를 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권리행사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그들에게 있기에,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은 상대방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만약 자유사회에서 이번 n번방 사건 주모자가 발각된다면, (물리적 협박 혹은 강간을 수반한 2번, 3번 사례가 아니라 1번 사례만 저질렀다는 전제하에서) 그가 민간검찰에 기소되거나 민간법원에 세워질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자연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유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 역시 대단히 적다. 오히려 그의 삶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보다 더 고단해질수도 있다.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와 달리, 자유사회에서 그의 삶은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피해자에게 했던 것 처럼, 그의 신상정보가 온 사회에 만연하게 알려져 모든 사람이 그를 거부할 것이다. 그는 물건을 구입할 수 없을 것이고, 주택을 임대할 수도 없을 것이고, 취직은 당연히 할 수 없을 것이며, 아예 길거리를 걷는 것도 허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매우 높은 확률로 무인도 혹은 산골자기로 피신해 홀로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고독하게 살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관습법에 대한 이해가 지금과 매우 다른 사회의 경우, 극단적으로 추측해본다면 그가 설령 폭행당하거나 살해당한다고 해도 민간경찰, 검찰, 법원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잠정적으로 유예할지도 모른다. (이는 매우 극단적인 추측이다.)

실제로 자유사회가 도래한 적이 역사상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사실 이는 시장경제의 작동원리와 유사한 논리를 사회문화적 측면에도 조금이나마 적용해본 것이다. 프라이버시 침해자 혹은 공갈범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전무에 가깝다. 그러한 인간부류의 공급은 오히려 피해를 끼친다. 수요가 없는 공급은 지탱될 수 없다. 공급을 아예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급된 이후에는 (어떻게 본다면) 현행 제도하에서 보다 더 강경한 보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시장경제원리가 지배하고 국가가 부재한 자유사회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적인 사회철학자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는, 국가가 행하는 강제력 행사를 통한 사회악 청산이 아니라, 상기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사회적 자정효과'를 '물리적 제거(physical removal)’라고 명명하였다.

자유사회의 논리적 근거와 작동원리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호페는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사회에서 물리적으로 제거당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호페가 우리에게 몽둥이를 들고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자고 선동한 것은 아니다. 그는 “1. 사회제도와 문화를 개선하여 공산주의자에게 불이익이 가는 관습을 형성하고, 2. 공산주의자가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들의 문화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조치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자정작용을 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산주의자는 자유사회에 '물리적으로’ 발을 내딛지 못할 것이다. 같은 논리가 n번방 주동자를 비롯한 '범죄는 아니지만 악덕한’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1. 물리적 협박과 침해가 수반되지 않고, 프라이버시 침해와 그것을 이용한 공갈은 범죄로 성립하기 어렵다. 2. 그리하여, 자유사회에서 그러한 부류의 악덕함이 법적으로 처벌되지는 않을 것이다. 3. 그러나, 시장경제의 원리와 매우 유사한 사회적 자정작용이 행해져 그러한 악덕을 '자생적으로’ 해결해나갈 것이다.” 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있느냐는 매우 별개의 문제이다. 이성적으로 옳은 경우에도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사람들은 대체로 거부하는 문제를 보인다. 논리적 참을 사람들이 인정하게끔 수사법을 개선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은 추후에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