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수필

일찍이 나는/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詩) 해설, 문태준 시인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 그녀

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

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 ( ‘개 같은 가을이’)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뼈를 잘못 삼켰

다,”(‘시인’)이라며 시인의 기본 성깔을 운운한 그녀는 삶의 고

통과 세계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

 

이시에도 폐광과 같은 유폐와 자기 방기가 있다. 시인은

“곰팡이”와 “오줌 자국”과 “죽은 시체”에 자기 존재의 흔적

을 견준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귓가를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한 루머”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삶

을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감히 말하며 아예 내 존재의 근거를

박탈해 버리려는 이런 듣기 거북한 발언은 그녀의 다른 시편

에서도 흔하게 있다. 그녀에게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2’)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주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런 발언에는 위선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혐오와 저주가 깐질기게 숨겨져 있다. 그녀는 이 세계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병들어 있다고 보았다. 세계가 비

명으로 가득 차 있고, 탐욕의 넝마이며, 치명적인 질환을 앓

고 있는데 누군들 그곳서 생존을 구걸하겠는가. 그러므로 내

존재를 루머도 없게 치워 달라고 할밖에.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녀가 독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동원

해 본인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은 일

종의 위악의 방식이다. 이 부패한 지상에서 더 이상 썩지 않

으려고 ‘부정하는 법’을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

상에 태어났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시인. ‘허무의 사제’ 최승

자 시인은 세상을 혹독하게 앓고 시를 혹독하게 앓았다.

 

그녀는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자살 연구))

((침묵의 세계)) 등 주옥같은 역서를 낸 능력 있는 번역가이기

도 하다. 그녀는 지금병환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신작 시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끔

찍하게 독한 그녀의 시가 그립다. 그녀가 밤새 짜낸 ‘치욕의

망토’ 로 ‘귀 멀고 눈먼’ 우리들은 따스함을 얻겠지. 그녀가

시 (‘삼십 세’)에서 “오 행복행복행복 항복/ 기쁘다 우리 철

판깔았네”라고 쓴 것을 읽고 기이한 쾌감을 느꼈던 것처럼.

'시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 정연복  (0) 2022.06.20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0) 2022.06.13
감자꽃/박노해  (0) 2022.06.13
삶의 찬가/롱펠로  (0) 2022.06.10
라일락 그늘 아래서/오세영  (0)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