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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화-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받은 글

풍수화-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김용운 지음/맥스미디어

크리미아반도와 한반도

크리미아반도는 황금 예술로 유명한 스키타이 문명의 고장으로 최초의 유목민이 등장한 곳이다. 뒷면에 산맥이 없었기 때문에 비잔틴 문화가 러시아 평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이자 반도의 운명으로 여러 번 전쟁을 경험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반도는 구미세력과 러시아 사이에 15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이유, 같은 구도로 전쟁과 대립을 하며 지난 역사의 되풀이를 재현하고 있다.

중세의 왜구 침략과 임진란 등으로 고려와 명(明)의 멸망을 유도할 만큼 일본은 강력한 무력을 지녔다. 반면 한반도는 중국과 몽골, 그리고 일본열도의 도요토미와 제국주의자들의 육교로 이용당하며 수시로 발생하는 대륙과 열도의 정세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나폴레옹도 “지리학을 보면 그 나라의 외교정책을 파악할 수 있다.”고 천명했듯이 18세기는 각 나라가 국민국가를 향해 부국강병을 지상 목표로 하던 시기였다. 반면 스스로 외교 정책을 구상할 수 없었던 근대의 한반도는 지정학이란 가혹한 운명 앞에 놓여 있었다.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 더 잘 알려진 19세기 크리미아전쟁은 서구와 러시아 사이에 전형적 반도 지정학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경계한 영국과 프랑스, 터키가 연합해서 싸운 것이 크리미아 전쟁이다. 결국 러시아는 연합국에 대패했다. 러시아는 대신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여 동방의 부동항을 노렸다. 특히 38선을 책정한 회의가 열린 얄타도 크리미아반도의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다.

한국에 맨 처음 크리미아전쟁을 알린 것은 청(淸)의 황준헌(黃遵憲)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외교관보다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중·일 문화 비교론인 『일본국지(日本國志)』의 저자이기도 하다.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은 크리미아전쟁에 실패한 러시아가 조선에 끼친 영향과 외교적 전략을 논한 것이다. 이 책의 주요 골자는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세력에게 패하고 크리미아반도 탈취에도 실패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는 게 목적이므로 한반도에 진출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은 결(結)미국, 친(親)일본 정책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청(淸)의 입장과도 같고 근대화 과정에서 양무(洋務)운동과 정치 외교의 중심인물이었던 이홍장(李鴻章)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육지로 이어진 러시아를 일본보다 더 경계하고 있었다.

일본의 외교 책략

유럽의 후진국 프로이센왕국의 철혈재상(鐵血宰相)인 O. 비스마르크(O. Bismarck)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에서 당시 유럽의 최대 강국 프랑스를 이겨 독일 통일을 성취했다. 그를 찾아온 일본 신정부의 지도자(구미시찰단)에게도 ‘약육강식’의 국제 관계론을 설명해 큰 감명을 주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그를 찾은 사람 중 하나였다. 특히 일본 헌법 제정과 외교의 기본 방침, 육군 조직 수립에 비스마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스마르크의 군사 대국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멸망케 했고 그것을 모범으로 삼은 일본 또한 같은 운명을 강요당한다.

조선이 겨우 중국의 의도를 반영한 결(結)미국, 친(親)일, 반(反)러의 『조선책략』을 외교 교과서로 삼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독일 제국주의의 정수를 직접 전수받고 있었으니 이후 조선과 일본 양자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진란 직전 정보 수립을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내용은 ‘왜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와 ‘왜는 침략 못 한다.’로 서로 엇갈려 있었다. 하지만 군비에 부담을 느낀 조정은 김성일의 ‘침략은 없다.’는 주장에 따라 전혀 준비하지 않아 피해를 증폭시켰다. 한국 속담 ‘명주 바지에 오줌싸개’식으로 우선 추위를 면하기 위해 취하는 고식적 사고가 외교에서는 희망적 판단이 된 것이다.

무자비한 지정학의 주술 앞에서는 친구도 적도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러시아의 동방 진출에 불안해진 영·미 세력은 일본에 손을 내민다. 영국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영일동맹 관계가 된다.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각각 필리핀과 한반도를 취할 것을 약정하고 일본을 후원해 러시아와 싸우게 했다.

지금 세계 어떤 곳에서 발생한 일이 과거 역사의 절편과 연계되어 언제 어디서 한국의 진로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 수백의 국가가 참여하는 세계 외교 정세는 복잡계이며 나비효과가 수시로 발생하는 세상이다.

외교 관계에서는 감정이 아닌 냉정한 계산이 필요하다. 미국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난했으나 미국의 진의는 다시 한 번 일본을 앞장세워 러시아와 중국을 경계하는 것이다. 중국이 역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하여 한국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과 미국을 가르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의 선의만 믿는 것은 다시 한 번 19세기 말의 국제 구도를 재현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한·중·일 외교와 지정학

1. 백강전투 결과 일본은 당의 원조로 천황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번영을 누렸다. 신라가 당 세력에 눌려 한반도 남쪽 한구석에 움츠린 상황과는 정반대로 앞뒤 걱정할 것도 없이 열도를 적극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2. 몽골 침략으로 고려인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희생을 강요당한다. 20만 6,800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니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고려인과 삼별초의 적극적 저항이 없었다면 일본은 분명이 잔인한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홋카이도(北海道) 또는 일본의 동북(東北)지역을 분단할 계획이었으나 미국의 의도에 따라 대신 한반도를 38선으로 분단했다.

4. 한반도인이 6.25로 인해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는 동안 일본은 이를 경제 부흥의 계기로 삼았다.

한반도의 지정학은 해양 세력에게는 교두보를 제공하고 대륙 세력에게는 방어벽을 제공하는 구조로 이들의 싸움터가 되어왔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외세의 한반도 개입이다. 한반도는 백강전투와 조선 말기처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중 어느 한쪽을 끌어들여 오면 다른 쪽이 자동으로 들어오는 자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한반도인은 외침에는 철저하게 항거하면서도 외국에 나가 싸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 일본열도에게 이렇게 좋은 이웃이 또 있을까? 일본의 전 역사를 보면, 한국처럼 고마운 나라는 없다.

인간의 본질이 변하지 않고 지리 조건이 그대로 있는 한 ‘역사는 거울’이다. 현실적 외교로 이름을 날린 비스마르크는“슬기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으로 판단한다.”고 했는데 경험도 제대로 판단 못하는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많은 것이 안타깝다.

03 한·중·일의 국제관

중국의 국제관

맹자는 평화를 위해 왕도(王道)와 패권(覇權)을 구별했고 ‘예(禮)가 무력보다 효과적으로 국제 질서를 유지한다.’는 신념으로 ‘이소사대(以小事大)’를 내세웠다. 즉 소국이 대국의 국력을 인정하고 대국을 예로 대하며 대국 또한 소국을 예로써 답하는 것이 왕도이며, 반대로 대국이 무력으로 소국을 병합하는 것은 패권이라 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왕도는 인권과 문화의 국제 질서이고 패권은 제국주의로, I. 칸트(I. Kant)의 『영구 평화론(Zum ewign Frieden)』보다 2천년 이상이나 앞선 것이었다.

진시황은 중국 통일 이후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고 주변국은 야만국이라는 중화사상을 정착시켰다. 주변의 소국들은 중국에 사대하고 예(禮) 사상을 받들어 대국 중심의 질서를 형성할 수 있었다.

후쿠오카 근처의 섬에서 발견된 도장과 옥새(玉璽)인 인수(印綬)는 A.D. 57년에 후한의 황제 광무제가 왜노(倭奴)국왕을 왕으로 인정하여 하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A.D. 239년 야마토 여왕 히미코(卑弥呼)는 위(魏)에 여러 차례 조공사를 보냈다.

한(漢)족은 배만흥한(俳慲興漢, 만주족을 배척하고 한(漢)족을 부흥시키자)이라는 구호로 신해 혁명에 성공하자 곧바로 왕도적인 오족공화(五族共和, 한족,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위구르족의 공화정치를 표방)를 표어로 내걸었고 신중국은 청(淸) 본관의 땅 만주와 그 민족을 몽땅 흡수했다. 또한 모든 민족이 하나로 크게 뭉친다는 대동사상으로 마찰을 최소화하고 무력보다는 예와 덕의 모양새를 갖추어 대국화했다. 중화사상은 이상이지만 현실적으로도 대국화에 효력이 있는 외교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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