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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나혜석-받은글

[화가·문인·교육자·여성운동가로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 나혜석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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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자화상’, 1928년경,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전에 출품 중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신여성’이라 불리는 나혜석이 제작한 판화 한 점을 보자.
파마머리에 롱코트를 걸친 여성이 바이올린을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녀를 향해 두루마기를 걸친 두 노인이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저것이 무엇인고’ 외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젊은 남성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한다.
조롱의 대상이자
동시에 호기심의 대상인 ‘저것’은
20세기 초 한반도를 강타한 신개념, ‘신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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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저것이 무엇인고’(1920). 잡지6 ‘신여자’에 게재된 판화. /개인 소장 >


◇나 참판댁 아기씨

작품 아래 ‘Rha’라고 크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작가 나혜석!
그는 1896년
수원의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군수를 역임했고,
대대로 고위 관료를 지낸 이 집안을 사람들은 ‘나 부잣집’
혹은 ‘나 참판댁’이라고 불렀다.
나혜석은 2남 3녀 중 둘째 딸로,
어릴 때 불린 ‘아명’은 ‘아기(兒只)’였다. 다부진 외모에 총명하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해 신문에도 났으니,
귀히 자랄 조건을 모두 갖춘 여성이었다.
가만히 세상에 순응하면
‘아기씨’라고 불릴 운명을 타고났지만, 나혜석의 선택은 남달랐다.

그는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나 언니처럼 사는 것이 싫었다. 그 시대 남성들이 흔히 그랬듯
나혜석 부친은 서모를 두었는데,
나혜석의 어머니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나혜석의 언니도
일찍 학업을 그만두고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평범하지만
이전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여성의 삶을 지켜보며,
나혜석은 자신은 이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혜석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한국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한 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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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화녕전 작약’, 193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나혜석이 이혼 후 고향 수원에 머물 때 그린 작품이다. 강렬한 원색의 대비와 거친 붓질이 화가의 불안하고 격정적인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여자도 사람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지켜야 했다. 평생
아버지, 남편, 아들,
즉 세 남성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에서 깨어나
여성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나면서,
나혜석 시대에 처음 본격화된 개념이 ‘현모양처’였다.
여성도 가정 운영의 주체로,
‘현명한 어머니와
훌륭한 부인(婦人)’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들으면
구태의연한 여성상으로 보이지만,
당시는 ‘현모양처’만 해도 신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혜석은
1914년, 불과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처음 발표한 논설에서,
‘현모양처론’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에 묶어 두는 새로운 굴레라고 비판했다.
‘온양유순’한 여성을 기르려는 교육의 목표 또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추샤, 노라, 라이초우, 요사노 등 다양한 새로운 여성상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여성도
“욕심을 내서”,
어느 방향으로든 더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창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을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학지광’, 1917년 7월)

나혜석의 주장은 처음부터 대담하고 과격하고 당찼다.


(김 인 혜 /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 ( 2 - 2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