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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조선 노비 이야기

<조선의 노비산책> 1

 

노비(奴婢)를 말이나 소처럼 사유재산으로 취급한 조선의 양반들~

 

<조선노비열전. (저자:이상각)>의 글(발췌.편집)을 머릿말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불과 100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면 대대손손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고대에는

천역(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 당대에 국한되었고 당사자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에 부역하였거나 무신정권의 마름( 지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소작농 관리하는 작업)으로서 사회 최상위 계급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 중 강윤충은 관노(관청의 소속된 노비)에서 정 1품 까지 올랐으며

 

고려 충숙왕의 모후, 재상 조석견의 아내 장씨 등과 간통하다 구설수에 오르자

 

이를 조사하러 온 나라 환관 고용보를 구워삶아 한통속으로 조정을 농락한 간웅(奸雄: 간고 깨가 많음)이었다.

 

이런 강윤충의 친형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경처) 강씨다 .

 

강씨는 조선건국의 어머니가 되어 신덕황후 강씨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이성계를 설득(?), 1차 왕자의 난의 계기를 만들었던 여인이다.

 

조선 건국 왕실 핏줄에도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에 일조를 했던 정도전 역시 고려 사대부들이 제기한 혈통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시달렸다.

 

조선의 대다수 노비들은 운명에 순응했지만 송익필, 장영실, 장옥정. 정난정. 장녹수 등은 제도의 허점. 인간적인 의지(?). 거센 저항(?)을 통해 팔자를 고친 사람들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위민정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강압적인 공포정치를 바탕으로 500년 내내 양반만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전쟁과 반란이 속출했던 고려시대에는 신분 역전의 기회가 많았던 만큼 노비들의 정계진출도 활발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들어서 귀족들의 무분별한 노비증식과 매매가 성행하자 비인도적인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반대로 누차에 걸친 노비제도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인한 부작용은 조선으로 고스란히 전이 되었다.

나라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노비제도를 고수했던 고려 귀족들처럼 조선의 위정자들은 오히려 노비제도를 이용하여 부를 확대하기 까지 했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면서 동족을 노비로 부린 동방 예의지국이었다.

 

조선은 개국초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으로 대외관계를 안정시켰지만 노비들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랜 이민족(원나라)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건국한 명나라(한족)전통적인 노비제도를 혁파해서

 

노비신분을 당대로 제한했지만 조선에서는 자손에게 세습하도록 했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명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숭상하면서도 오직 노비제도만은 명나라의 제도를 왜면하고 철저하게 조선식을 고수하였다.

 

조선은 비교 불가한 정도로 노비에 의존한 사회였다.

그리고 그 노비에 대한 처우는 극악한 정도였다.

 

조선의 선비들이 멸시했던 오랑캐 나라,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 조차도

이처럼 가혹한 노비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나

노예제도는 존재했었다.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였으므로

이민족인 경우가 많았다.

 

동족을 노예로 삼았던 경우는

경제사범으로 빚을 갚지 못한 경우이거나

죄를 지어서 벌로써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부분은 당대에 노예신분은 끝났다.

 

그러니까 자손에게까지 노예신분이

상속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는 달랐다.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였다.

그리고 동족이었고,

 

어제까지 친구로 지내던 사이도

하루아침에 노비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노비라고 해서 전부 무식한 것도 아니었고,

태생이 천한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선의 노비신책> 2

 

예를 들어 단종 복위사건으로 거사를 도모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역신들은 능지처참 되었고,

 

그 가족들은 한명회, 신숙주 등 64명의 공신들에게

노비로 분배되었다.

 

성삼문의 한 살된 조카는 정창손에게,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은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돌아갔다.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김문기의 딸 종산은 대사헌 최항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배정되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역모죄로 능지처참되면서

순천부의 관노가 되었다.

 

노비는 양반이 편안하게 놀면서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대신 경제활동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들은 기를 쓰고 노비를 늘리려 애썼다.

 

반면 임금의 입장에서는 노비가 늘어나고 양인이 줄어들면

군역을 담당할 재원이 줄어들게 되므로

일정한 규모 이상의 양인층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비 숫자를 줄이려 애썼다.

그래서 노비제도는 여러번 출렁거렸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노비라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삼았다.

 

태조는 양반과 비첩 사이에 태어난 서얼을

면천시켜 양인이 되게 했다.

태종은 양인과 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는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양반이 소유한 노비가 늘 수 없었기에

 

노비의 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요상한 논리를 앞세워

종모법(從母法)이란 걸 만들었다.

 

, 자식의 신분은 애미의 신분을 좇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노비인 여자가 낳은 자식은

아비가 양인이든 양반이든 상관없이 모두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여종을 소유하고 있는 양반의 입장에서는

가급적 여종이 양인과 사이에서 자식을 생산하길 바랐다.

그러면 가만히 앉아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종임금 때에는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인구 340만 명으로 집계된 가운데

노비의 수효가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비였던 것이다.

 

1609(광해군 1)에 작성된 울산의 6개 군, 면의 호적에는

2009명 중 48.6%가 노비로 기재되어 있다.

 

심각한 양역의 부족에 직면한 위정자들은

1543(중종38)에 양인 남자와 노비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는 종부법을 제정했지만

담당 관리나 양반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양역(良役:)이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公役))노역에 종사하는 요역(徭役)

군사적인 목적의 군역(軍役)이 있었다.)

 

16세기 후반 율곡 이이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자식을 양인으로 삼는 법을 건의했지만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1574(선조 7) 경 조선의 국방력 약화 원인을

노비제도로 인식한 조헌은 상소를 통해

노비제도의 철폐 내지 축소를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노비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양인으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불과 20만 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실제로 병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1000여 명 남짓이었다.

조선이 양난을 통해 뜨거운 맛을 보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효종대에 절충안으로 자식이 남자일 경우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고

여자일 경우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제도를 잠시 운영했으나

북벌정책이 우야무야되자 그것도 백지화되었다.

 

이후 여러 번 제도의 번복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양반 사대부들에게 유리한 종모법이 영구화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3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

 

먼저 조선의 서얼 庶孼제도를 먼저 살펴보자.

 

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시대 많은 국가들 중 조선만큼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도 드물었고

우리 역사만 봐도 조선시대 만큼 유난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배층(양반.중인)과 피지배층(상인.노비)이 너무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유교의 중주국인 중국보다 그 정도는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홍길동 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길동은 천한 태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바로 홍길동은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서얼은 서자얼자를 합친말로 모두 첩의 자식을 일컬었다.

 

만약 첩이 상민 출신이면 그 자식은 서자라고 하였고

첩이 노비 출신이면 그 자식은 얼자라고 하였다.

 

양반이 양첩(良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서()이고 비첩(婢妾)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얼()이다, 이를 합쳐서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서얼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야 했기 때문에, 원칙상 서자는 양민이었지만 얼자는 노비 대접을 받아야 했다

 

서얼들은 기본적으로 힘든 일은 하지 않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양반과 별반다름이 없어 보인다.

 

만약 이들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양반이 될 운명이지만 조선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수 없는 차별을 받았다.

 

순조실록(182382)

서얼들의 3가지 소원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게 해 주세요

둘째)집안에 대를 잇는 자식이 되게 해 주세요

셋째)우리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세가지다.

 

서얼들이 겪었던 구체적인 차별내용은 17세기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도 나와 있는데 이러했다

 

첫째) 서얼은 적자(본처 자식)를 매사 지극히 공경스럽게 섬겨야 한다.

둘째)서얼은 적자에 감히 맞서거나 나란히 앉아서도 안된다.

 

셋째)만약 적자와 서얼이 한자리에 앉게 된다면 적자가 앉은 자리에서 약간 뒷줄에 서자가 앉고 좀 더 뒷줄에 얼자가 앉는다.

 

넷째)서얼은 말을 타고 가다가 적자를 만나면 말에서 반드시 내려야만 한다.

 

다섯째)서얼은 적자가 나이가 어려도 절대로 라고 하지 못한다.

 

여섯째)서얼은 큰 부자가 되어도 감히 적자를 멸시하자 못한다.

 

일곱째)만약 서얼이 적자에게 무례하게 굴면 관아에서는 벌로써 다스린다.

 

고려시대의 서얼은?

 

그렇다면 언제부터 서얼의 차별이 이렇게 심해졌을까?

고려시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교문화가 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의민.김준 등 노비 출신이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도 했잖은가~

 

물론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평민들 사이엔 유교가 별로 였지만 상류층에서는 나름 유교문화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서얼출신은 승진의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13세기 후기

손변이라는 자는 부인이 왕족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다.

이에 손변의 부인이 안타까워 하며 말했다.

여보!! 제 미천한 신분 때문에 당신이 높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니....차라리 저를 버리고 다른 권문세가의 여인과 재혼을 하셨으면 합니다.” 이 말은 듣던

 

손변 왈

내가 어찌 벼슬길을 위해 3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소. 더구나 우리에겐 자식까지 있지 않소하며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서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순조실록에 기록된 서얼의 소원 3가지 중 첫째와 셋째 모두 오케이였다.

다만 둘째 즉 집안의 대를 잇는 문제는 좀 엄격했다.

 

조선시대엔 본처가 자식이 없고 첩의 자식만 있을 경우 부모가 인정하면 가계를 상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엔 한번 서얼은 영원한 서얼이기 때문에 가계 상속권은 없고 양자를 들이도록 했을 뿐이다.

 

 

 

<<<조선의 노비 산책>> 5

 

이렇듯

1415(태종 15)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등이 태종의 특정한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살펴 종친(宗親)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顯官)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반집은 정실 부인이 낳은 적자가 없으면 서얼자식에게 제사를 맞기지 않고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형제에게 자손이 없으면 일가에서 양자를 데려 왔던 것이다.

 

양자를 구하지 못하면 외가 측 자손에게 제사를 상속시켰다.

 

족보에도 서얼자손은 따로 표시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대감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성리학의 종주국 중국에도 없는 서얼 차별제도를 실시한 나라였다.

 

서얼 출신인 어숙권(魚叔權)패관잡기 稗官雜記에서 서얼에게 아예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경국대전편찬 후라고 지적하였다.

 

어숙권이 살던 시대(명종)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주해:경국대전 해석집에도 그러한 강화된 차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 세조가 즉위 초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편찬이 시작하여.

148511일 반포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유교적 법치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등 6전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법제도가 완성되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법이 유지되고 계승될 수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법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세조는 즉위와 더불어 영원히 변치 않는 대법전을 편찬하려는 뜻을 품고,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신설하여 육전상정관으로 하여금 편찬케 하고, 세조 스스로가 그 심의·수정을 보았으나 그중에 신분 차별이 신분법이 엄격하여 조선사회의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산군 때의 간신으로 알려진 유자광(14391512), 안평대군과 석봉 한호에 버금가는 명필이었던 양사언(15171584), 정조 때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17501805)등이 그런 인물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살았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양반이 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인 '서얼'이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얼 자손에 대한 법의 적용이 자자손손으로 해석되고, 서얼 자체에 대한 해석도 양첩산(양민 첩 자손)은 서, 천첩산(천민 첩 자손)은 얼이라고 구분하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양인(良人) 첩의 자손인 서()와 천인(賤人) 첩의 자손인 얼()을 합친 말인 서얼은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를 상징하는 집단이다.

 

특히, 얼은 죄를 범해 몰패된 여자가 요행히 고귀한 남자를 만나 자식을 낳으면 나무를 베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하여 차별 의식이 당시 대단히 경색화된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경국대전주해가 만들어진 시기를 전후해서 서얼 출신의 명사는 적지 않았다. 어숙권을 비롯해 조신(曺伸송익필(宋翼弼양사언(楊士彦양대박(梁大樸) 등 도학·행의·문장·충의 등에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얼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과거 응시를 금지한 '서얼금고법'이었다.

서얼 출신의 개국공신 정도전과 권력을 놓고 다퉜던 태종은 1415"서얼 자손은 높고 중요한 직위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했고,

 

인조 3(1625)까지 서얼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는 '허통'(許通)은 조정에서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 산책>>>6

 

그러나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는 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許通論者)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조선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유학(幼學: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을 이르던 말)이라 부를 수 없도록 하였고 합격문서에 서얼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567(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하여 박응서(朴應犀)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허균이 이들의 두목이라고들 말했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현종·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선조 30)부터 1735(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 1724(영조 즉위년) 정진교(鄭震僑)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 3대 권력기관:홍문관.사헌부.사건원)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序齒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영조가 출신 문제를 다룬 얘기만 나와도 노이로제, 편집증적 광증을 보였다는 점은 유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조의 출신 및 그에 대한 컴플렉스는 거꾸로 서얼 차별을 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전에도 후궁 소생의 왕자 군이 왕이 된 일(광해군, 경종. 다만 선조와 인조도 본인들은 적출이었으나 부친이 서얼이라 '서손'이었다.)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영조처럼 대놓고 천한 무수리였던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왕은 더더욱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짐은 고황제 후궁 소생이었다"

 

(유명한 '강목 사건'에서 나오는, 한문제가 남월왕 조타한테 보낸 편지에 실린 구절)

 

"질차이모비야"(네 어미는 종년이다!라고 꾸짖었다는, 사기 노중련 열전의 구절) 등 출신 신분 얘기가 나오는 구절도 듣기 싫어했고,

 

왕 앞에서도 함부로 천출이니 서얼이니 하는 말을 하기 어려운데, 다른 서얼에게 하자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조선의 노비 신책>>>7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 때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丁酉節目)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 문반의 분관(分館)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部薦)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형조·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 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을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 직은 제한 없이 처리하며, 무신은 중추부·오위장 등을 제한 없이 하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무의 여러 관직에 대한 진출의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1779년 내각, 곧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다수 이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柳得恭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은 4검서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抄啓) 문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차별은 여전히 이어졌다.

 

영조보다 약 100년 앞서 즉위한 인조는

 

"양첩 소생은 손자부터, 천첩 소생은 증손부터 과거 응시를 허용한다"는 조항을 신설했으나, 서얼이 차지할 수 있는 벼슬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얼들은 숙종임금이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와 사이에 낳은 영조가 왕권을 잡자 허통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던 영조는 재위 48년째인 1772년에야 서얼에게 관직을 대거 개방했고,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폐단을 혁파할 것을 지시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노론 중심의 문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얼을 등용했다.

 

박제가를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은 모두 서얼이었으나, 규장각에서 서적 편찬과 교정을 맡는 검서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서얼에 대한 차별은 다시 심해졌고,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조선 후기 임금의 혈통를 살펴보자

 

경종은 일단 원자에 책봉되긴 했으나, 출생 당시에 생모인 장희빈은 왕비가 아닌 일개 후궁에 불과했고,

 

영조는 경종의 이복동생이었고,

정조는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아들 즉 서 손자였다.

 

 

역시 순조도 정조의 서자였다.

 

헌종은 부친이자 순조의 적자인 효명세자가 뒷날 익종으로 추존되어 생모가 대비가 되긴 했지만,

 

부친인 효명세자가 요절해 즉위 당시 왕세자는 아니였다.

 

게다가 철종은 할아버지 은언군 대에 일찌감치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방계 왕족이었고,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전의 족보상으로는 은신군의 증손자, 그걸 넘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인 방계왕족이었다.

 

 

<조선의 노비신책> 8

 

1823(순조 23)

9,996명에 달하는 서얼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허통 요청을 상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미절목(癸未節目)이 마련되어 좌윤·우윤, 호조·형조의 참의, 병사·수사 등의 직도 허용한다는 것이 규정상으로 첨가되어 보완되었다.

 

그리고 승정원에도 가주서(假注書)를 두어 서얼의 자리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서얼허통의 당위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고조되었던 듯, 1827년 대리정청에 나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일체의 소통을 명령하는 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정책적 배려가 사회적 관습을 일신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이 운동은 계속 추진하여

 

집단적인 상소는 1848(헌종 14)1851(철종 2)에 각각 9,000인이 동원되는 규모로 계속되었다.

 

, 1851년에 任官등용에의 제반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이를 신해통공 또는 신해허통이라하고 이는 서얼 차별을 해결한 조치이다.

서얼의 청요직 진출을 허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조선의 3가지 큰 우환으로

 

첫째) 문관이 무관을 멸시하는 것,

둘째)속인이 승려를 천대하는 것

셋째)사대부가 서얼을 짓밟는 것을 들었다.

 

서얼 차별을 우환으로 본 것은 계속된 차별로 인해 서얼들이 원한이 쌓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1894(고종 31) 갑오경장에서

·첩 양쪽에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 양자를 허용하고, 과녀(寡女)의 재가도 허용하는 한편, ·사 노비 제도를 혁파함으로써 서얼 차별대우의 깊은 뿌리가 잘려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첩 제도 자체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뒤에야 공식 폐지되었기 때문에 서얼에 대한 차별의식이 사라지려면 그만큼 더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는 유력 정치인들과 재벌 기업인들, 공무원들은 계속 암암리에 축첩을 했다.

축첩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16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로,

 

당시 최고회의는 축첩을 엄금하여 축첩을 한 정치인 및 공무원에게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때렸었다.

 

이쯤해서 앞서 언급했던

 

얼자에서 일등공신에 오른 논쟁적 인물

유자광(柳子光, 세종 211439〕∼중종 71512)을 살펴 보기로 한다

 

그는 한국사에서 매우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이다.

 

유자광에 관련된 이미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서자의 삶의 방법은 대부분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처럼 저항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일반적인 양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체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그 장애를 뛰어넘는 순종의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유자광도 이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자광은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그는 서자출신도 아닌 얼자 출신이었고 출세가능성은 제로였던 인물이다.

 

뒤에서 보듯이 유자광은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되거나 승진할 때마다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며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실제 관직에는 거의 임명되지 못한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柳規, ?~1473)의 서자로 세종 21(1439)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우후(于後). 그의 집안은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인물평을 보자

 

유자광은 부윤 유규의 서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빠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까지 길에서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 강간하곤 했다.

 

유규는 유자광이 미천한 소생으로 이처럼 광패(狂悖)하므로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 남곤, 유자광전>, 허봉, [해동야언]

 

 

유자광은 감사 유규의 첩이 낳은 아들이다.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

깎아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시를 짓게 하자

 

즉시 뿌리는 땅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라는 시를 지었다.

 

유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자광에게 매일 [한서]의 열전 하나씩을 외우게 하고 은어(銀魚) 1백 마리를 낚게 했는데, 암송에 막힘이 없었고 고기도 그 숫자를 늘 채웠다.

<유몽인, 어우야담.>

 

 

<조선의 노비신책> 9

 

흥미롭게도 두 서술은 완전히 상반된다.

유자광이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을 충분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자광의 첫 직업은 갑사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그런 임무상 그들은 당연히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의장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용모와 체격도 뛰어나야 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지배층의 자제로 정규 무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교대로 지방에 내려가 복무하기도 했다.

 

유자광이 출세하게 된 첫 계기는 세조 13(1467) 5월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 난 이다.

 

그때 그는 28세의 갑사로 그동안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남원으로 내려가 복무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시애 난은 세조 치세의 맨 끝머리를 뒤흔든 큰 변란이었다.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유자광은 즉시 도성으로 올라와 상소를 올렸다.

 

그 글에서 그는

식사를 하다가 수저와 젓가락을 버리고 올라왔다면서 갑사에 소속된 뒤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했다고 아뢨다.

 

그때 전황은 관군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유자광은 함길도가 험하지만 그런 조건은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면서 과감한 결전을 주장했다.

그는 신이 미천하더라도 한 구석에서 싸워 조속히 이시애의 머리를 베어 바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적극적인 주장으로 긴 상소를 마쳤다.

 

세조는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했다.

이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하다. 참으로 기특한 재목이니 곧 임용해 그의 옳은 뜻을 시행하겠다.”

 

서자로 태어나 28세까지 갑사로 복무하던 유자광의 삶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세조는 유자광을 불러 이시애를 잡을 방략을 물었는데,

대답이 모두 뜻에 합치했다.

 

세조는 그를 크게 포상하고 겸사복(兼司僕, 3~9)에 임명했다. 효용(驍勇)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시험하니, 앞서 나왔던 것처럼, 몇 계단을 한번에 뛰어넘고 큰 기둥을 원숭이처럼 올랐다

<세조 136141630>.

 

유자광의 방략 덕분이었는지 이시애 난은 석달 만에 진압되었다.

 

세조가 유자광을 더욱 총애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통(許通)하고 병조정랑(5)에 임명했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삼사 관직의 임명에 동의할 수 있는 권한(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자대권自代權)을 가진 요직이었다. 놀랄 만한 인사였다.

 

앞서 유자광은 일생에 걸쳐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대간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말했는데, 그 긴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서자를 등용할 수 없다고 대간이 강력히 반대하자 세조는 단호히 제압했다.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인가? 이미 등용한다고 했으니 무슨 관직이든 못하겠는가?

 

나의 특별한 은혜를 너희가 저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절세의 재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말하지 말라.”

 

실록은 서얼이 육조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세조 13714일ㆍ9222528>

 

유자광에 대한 세조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조선노비신책> 10

 

 

재위 마지막 해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으로 행차했는데 유자광은 총통장(總筒將)으로 수행했다.

 

 

거기서 행차를 기념해 별시를 치렀는데, 문과 초시의 대책(對策) 중에 유자광의 답안이 낙방하자 세조는 시험을 주관한 신숙주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답안이 좋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신숙주 왈

 

고어(古語)만 사용한 데다 문법도 소홀해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조 왈

 

고어를 썼더라도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괜찮다면서 유자광을 1등으로 삼고 즉시 병조참지(兵曹參知, 3)에 제수했다.

 

 

조정이 놀라워했다는 기록대로 파격적인 지시였다

 

<세조 14215>

 

 

그러니까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세조에게 발탁된 지 8개월 만에 일개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이때 그는 29세였다.

 

 

남이 장군의 모반을 고변하다

 

 

유자광은 예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자신의 첫 고변을 감행했다.

 

 

그것은 유명한 장군 남이(南怡, 1441~1468)의 모반이다.

 

유자광은 남이가 한명회(韓明澮)ㆍ김국광(金國光)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변했고, 짧은 심문을 거쳐 남이를 비롯해 강순(康純)ㆍ조경치(曺敬治)ㆍ변영수(卞永壽) 등이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당연히 크게 포상되었다.

 

우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책봉되었던 적개공신에서 2등으로 추록되고, 남이의 옥사로 책봉된 익대(翊戴)공신에서는 1등 및 무령군에 녹훈된 것이다.

 

 

공신 명단의 가장 첫 머리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서 세운 그의 공로에 대한 평가를 웅변한다

 

<예종 즉위년 1024272830>.

 

 

이제 유자광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때부터 성종 8(1477) 무렵까지 그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면서 조정의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성종 7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 중단을 한명회가 반대하자 즉각 탄핵한 것은 유자광의 견고한 지위와 기민한 정치적 판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성종 7219>

 

 

그는 이듬해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성종 8년 윤227>

 

 

첫 번째 유배

 

순탄하던 그에게 첫 위기가 닥쳐왔다.

 

 

발단은 성종 87월 도승지 현석규(玄碩圭)와 우승지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의 대립이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라 무술옥사(戊戌獄事)’로도 불리는 이 사안은 한 간통 사건을 놓고 승지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었다.

 

 

현석규는 강간으로 결론지은 의금부의 판결에 찬성했지만,

 

임사홍을 비롯한 그밖의 승지들은 거기에 반대했다.

 

 

일단 결론은 현석규와 의금부의 판단이 옳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현석규가 다른 승지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들을 라고 부르는 등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제기되면서 문제는 확대되었다.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문제를 촉발시킨 현석규를 계속 승진시킨 성종의 조처에 반대하다가 이듬해 5월 결국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직첩을 돌려받을 때까지 침체의 시간을 보냈다

 

<성종 8823, 958, 13723>

 

<<<조선의 노비 산책>>>11

 

 

유자광의 재기와 무오사화의 발발~

 

 

유자광은 성종 16(1485) 5, 7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도 품계는 높았지만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46세의 장년이었다.

 

 

그 뒤 그는 중종 2(1507)에 두 번째로 귀양을 가서 최후를 마치기까지 20년 넘게 확고한 지위를 지켰다.

 

우선 성종 후반에는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성종17, 18>)

 

 

그러나 이 기간에도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임명되는 데는 계속 실패했다.

 

 

한성부 판윤(성종 186)과 황해도 관찰사(성종 2212)에 제수되었지만 대간들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다.

 

 

1494년에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그는 55세였다. 유자광은 그 위험한 12년의 치세를 무사히 넘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입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 중요한 계기는 연산군 4(1498)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유자광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촉발된 그 사건에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밝혀내 그 사화가 확대된 규모로 종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산군일기>에서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유자광은 옥사를 처벌하는 일이 점차 느슨해지자 자기 뜻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해 일을 진전시킬 방법을 밤낮으로 궁리했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는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술주시(述酒詩)>를 지목해 추관(推官)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킨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뤄진 것

 

 

이라고 말하고는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

 

 

< 연산군 4729>

 

 

그 해석의 타당성이나 사화의 의미를 여기서 깊이 논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유자광은 그동안 위기 때마다 보여준 기민한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행동을 이 사건에서 가장 극적으로 연출했다고 생각된다.

 

 

그를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하게 만든 결정적 굴레 또한 무오사화를 계기로 씌워졌다.

 

 

중종반정에 참여하다~~

 

 

수많은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 만에 최초의 반정으로 쫓겨났다.

 

하룻밤 만에 간단히 성공한 반정은 그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무거운 현실적 문제를 남겼다.

 

 

가장 큰 문제는 처벌적어도 자숙이나 퇴진의 대상이어야 할 연산군 때의 주요 신하들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요직을 장악하고 공신에도 책봉된 것이다.

 

 

물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그야말로 극한적인 수준까지 치달았고,

 

거기에 협력한 인물은 매우 소수였다.

 

 

대부분의 신하는 목숨을 지키려고 그저 순종한 측면이 컸다.

 

 

이런 상황적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그때까지 가장 많은 인원인 120명에 가까운 공신을 양산한 것은 반정 세력의 탐욕과 몰염치가 분명했다.

 

 

이런 문제의 불씨는 14년 뒤 기묘사화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유자광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궁궐 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고, 그 공로로 정국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중종 11506928>

 

 

그러나 두 차례나 1등에 책봉된 공신은 여전히 실직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얼마 뒤 그의 품계를 대광(大匡, 1)’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대간의 반대로 실패했다

 

<중종 2년 윤14>

 

이때 그는 68세였다. 아마 유자광은 평생 이어진 대간의 반대가 참으로 집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역사산책>>> 12

 

유배지에서의 최후~~

 

정국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 두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2(1507) 윤 정월에 조광보(趙光輔)라는 인물이 핵심 대신인 박원종(朴元宗)ㆍ노공필(盧公弼) 등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이라고 비판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비밀히 중상하려 하니 마음놓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면서 시골로 물러가겠다고 밝혔다

<중종 222>

 

그러나 대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중종 2413162223>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지금 경상북도 울진)로 유배되고 자손들도 멀리 귀양갔다.

 

그때의 사간들의 사평(史評)은 유자광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압축하고 있다.

 

유자광은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다시 갑자년의 사화를 일으켜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

 

<중종 251>

 

이 사평대로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지금까지도 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서자 출신 인물을 살펴본다. 그 인물은 ~~

 

우리들은 조선의 명필하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린다.

그러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또 한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바로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아래 시조를 지은 사람이 바로 양사언이다.

 

태산가(泰山歌)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楊士彦)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1517년 경기도 포천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

 

조선 전기(명종)의 문신·문장가·서예가이며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1540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54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함흥부윤, 평창군수, 강릉부사를 지내고 성균관에 있다가 회양군수, 철원군수, 고성군수를 지냈다.

 

40여년의 관직생활동안 따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청렴하고 검소하였게 살았다.

 

서예와 시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란 친필을 남기는 등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때가 명종, 선조 연간에 회양 부사로 있던 때라고 한다.

또한 평창 군수로 있을 때는 궁핍한 백성의 실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고전번역서인 성호사설에는 봉래(蓬來) 양사언(楊士彥)의 글씨는 표하여 마치 하늘에 치솟고 허공을 걸어가는 기상이 있으니, 그 글씨 속에 선골(仙骨)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농암집(조선 중기의 농암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시문집)에는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마치 용이 꿈틀대는 것 같은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고 극찬을 하였다.

 

 

 

<<<역사산책>>> 13

 

서자 양사언을 두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楊希洙)가 전라도 영광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전주에서 식사 때가 지나 몹시 시장하였으나 인근에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없어 이리저리 해매다 허름한 집을 발견하고 밥을 먹을 것을 청하였다.

 

14세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높으신 어르신께서 어떻게 밖에서 식사를 하시겠느냐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렸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군수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겨 밥을 잘 얻어먹은 고마움에 보답을 한다는 의미로 청선(靑扇: 푸른색 부채))과 홍선(紅扇: 붉은색 부채) 둘을 꺼내 소녀에게 농담 비슷한 말로

 

"이것은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채단'이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을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소녀는 깜짝 놀라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내려 펴고 여기에 청선(靑扇)과 홍선(紅扇)을 놓으십시요 라고 하였다.

 

어리둥절한 영광군수는 왜 그러냐고 묻자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두개의 부채를 홍보 위에 놓자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영광군수 양희수는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군수를 뵙자고 찾아 왔다.

 

이 노인은 군수에게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청선(靑扇), 홍선(紅扇) 두개를 주고 간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영광군수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군수는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겠다고 했다.“

 

식사 한 끼 얻어먹고 미안해서 대가로 부채 두 개를 준 것이 아내로까지 맞이하게 된 셈이 되었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양사업(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군수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士奇, 두 아들을 낳았다.

 

사준(士俊), 사언(士彦), 사기(士奇) ,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채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면서 세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 하냐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에게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이제 남편도 죽어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양씨 가문에 들어와 두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총명하고 풍채도 있으나 첩이 낳았다 하여 서자라는 딱지를 벗겨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장손인 양사준( 정실 아들)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서모인 내가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成服)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들이 잘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 마는 내가 죽은 뒤 자신이 낳은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말았다.

 

자기 아들들에게서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어머니, 이 어머니의 마음이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일 것이다.

 

양사언(楊士彦)은 후에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역사산책>>>14

 

조선의 가장 비참한 모습 중 하나로 최하층 계급인 노비가 있는데,

100만명에 불과한 노비가 나머지 1000만명 이상을 먹여 살리는 구조다.

 

이들은 인간적인 권리나 그 어떤 소유권도 인정받지 못했고, 노비의 소유자는 노비의 목숨을 맘대로 할 수 있다.“

 

조선인들의 특성은 온순하고 선량하며 순종적이라는 데 있다.

 

1000만 군중이 군대나 총검도 없이 고관의 명령에 의해서만 통치되고 있었다.

 

나는 관청이라고는 전혀 없는 매우 외진 마을에 가 있기도 했지만 질서가 파괴되는 일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러시아 장교의 내가 본 조선인에서>

 

다음은

1890314일 프랑스 공사관 직원의 본국 보고서 내용 일부다.

소개할 내용은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프랑스 공사관의 기록을 정리한 내용인데

물론 왜곡 내지 과장된 이야기도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도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무역에 대한 비난이 폭등했던 시기인지라 더구나 같은 민족 사이에서 존재했던 노예제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조선은 자연법에 위배되는 일종의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조선의 대다수 남자들은 특이한 노예 상태에 놓여있다.

이들은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는 아니고 주인에게 예속된 소작농 형태였다.

 

조선의 남자 노비는 게을렀고 주인에게 약간의 노역이나 봉사나 공물을 제공하는 정도였고 사실 자신이 머무는 거처에서 탈출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노예상태에 있던 이들은 궁궐이나 관에 고용된 남자노비와 사노비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주기적으로 가뭄.홍수가 발생하는데 이 때 대규모로 자신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들, 그 남편이나 부모가 팔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비매매는 조선에서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비즈니스였다.

 

조선에서는 전문적인 노비 상인들이 있었고 여자노비들을 싼 값(6~8프랑)에 대량으로 그들의 부모나 남편들에게 사서 조선의 서울(한양)이나 관찰사가 있는 큰 도시로 데리고 가서 다시 200~300프랑을 남기고 팔기에 노비 거래업자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남편이나 아버지가 노름에 빠지거나 빛을 갚을 방법이 없는 경우에 자신의 부인이나 딸을 채권자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경우 부녀자들은 무책임한 남편이나 부모 때문에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 진 것이다.

 

노비거래시 반드시 법에 따라 증인들이 참석해야 만 매매가 성립되고 매도자가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만일 글씨를 모르면 종이위에 오른손을 대고 붓으로 손 모양을 따라 그린다.

 

 

<<<조선의 노비산책>>> 15

*보고서내용이어짐

 

노비거래는 대부분 여자가 그 대상이 된다.

주인은 자기 맘대로 노비를 다루며 노비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구타를 한다.

 

법적으로 주인이라고 해도 노비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인이나 노비를 죽였을 때 처벌은 가벼운 유배형 정도가 가장 큰 형벌이었고 실제로는 뇌물로 해결되기도 했다.

 

주인에게 팔려온 값을 지불한다고 해도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자유인이 될 수 없다.

 

노비가 탈출을 시도하면 전문 추격꾼 추노에게 붙들리거나 또 다른 노비 매매상에게 납치 돨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여자 노비는 사실상 도망이 어려운 처지였다고 소개한다.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들이 관가의 노비보다 더 처참하다고 하지만 가장 비참한 존재는 조정이나 지방관아에 소속된 여자 노비들이었다.

 

이들은 관청에 근무하는 모든 남자들의 공동 소유였으며 이들에 대한 멸시보다 더한 멸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보고서는 묘사를 하고 있다.

 

보고서는 조선의 노비제도를 야만적인 관습이라고 지적하고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선이 노비제도를 폐지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적고 있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는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다.

 

관기는 딸을 낳으면 그 딸도 의무적으로 관기가 되어야만 했었다.

그랬기에 조선의 여성노비들과 관기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로 자식들(특히 딸)이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과학적인 피임법을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하다.

 

특히 여성 사노비의 경우

주인집 양반에 의해 모르는 길손들(여행중인 양반)과 강제적으로 잠자리를 해야 만 했기에 임신을 피히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일명 창호지법이다.

문에 바르는 창호지 또는 비단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를 자궁에 넣어 임신을 막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는 돼지 창자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돼지 창자를 우유속에 넣어 일단 부드럽게 하여 이를 콘돔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사내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남성피임 방법은 동의가 어려웠다고 한다.

 

여자노비의 비참한 현실

조선의 법에 따르면 여자노비의 남편은 주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고 한다.

 

그로인해 여자 노비들은 매우 비참한 일들을 겪곤 하였다.

 

한 예로

한 부부가 16년 째 같이 살고 있었고 아이들도 여럿 있었는데 남자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남자만 쫒겨났다고 한다.

 

그 남자는 주인에세 자기 부인에 대한 환속금을 지급 할 테니 부인을 데리고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은 남자에게 여자를 구입할 때 보다 12배의 돈을 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사건을 비일 비재 했지만 전혀 동정을 받지 못했고 특히 조선에서 여자는 일반적으로 열등한 인간이고 이름도 없으며 조선에서 가장 지식인이라고 존경받는 사람들 조차도 이러한 남존 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콜랭 드 풀랑시

*별지

서울 발 1890314일 정치공문 제132호 첨부

 

 

[매도계약서]

광서 황제 제위 년 월 일

현재 돈이 필요하여 10살 먹은 제 딸 욱이(oki)를 노비로 팝니다.

매매가격은 25리가튀르( 1피아스트르 65센트. 7프랑)로 제게 전액 지불되었습니다.

본 계약서는 이의가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증거로 작성합니다.

서명 의 엄마. 조씨 부인(趙召史) 손 지장

서명 연이(Yon-Y) 증인

정단(Tcheung) 증인

번역자 서기관 게랭

 

 

<<조선의 노비산책>>> 16

 

[노비 분류]~~

 

조선의 노비제도 원천인 신분제는 역사적으로

반상제(班常制)와 양천제(良賤制)라는 이원적 구조로 출발했다.

 

법적으로는 크게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으로 반상제를 내세우면서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이라는 양천제를 병행했던 것이다.

 

이후 양인(良人)은 양반(兩班). 중인(中人). 상민(常民)으로 분화되었다.

 

양반(兩班)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합성어로 초기에는 문무관리를 일컬었지만

 

세대변화에 따라 4대조 중에서 종 5품 당상관 이상 관리를 배출한 집안으로 의미가 축소되어

 

양인(良人)과는 다른 신분이 되었다.

 

양반(兩班)은 문과에 응시 할 수 있고 토지세. 경작세.노역을 면제받는 특권층이었다.

 

토지를 결작해 조세를 바치는 것으 양인(良人)의 일이요 도를 배워 직무를 닦고 공세를 먹는 것은 사군자(士君子: 덕이 높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의 일이다

<유형원의 반계수록>

 

중인(中人)은 주로 하급관직의 실무계층이었다. 일종의 전문가 집단이다.

 

잡과를 통해 통역.법률, 의료.천문.예술 등의 분야에 종사했는데 특정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신분상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지금의 의사, 법조인, 외교관, 무역상, 과학자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조선에서는 차별의 설움을 받았다.

 

오늘의 통역관을 말하는 역관은

외교, 무역, 스파이 역할까지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홍순언은 환갑이 넘어서도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국난 극복을 위해 맹활약한 사람이다

 

특히 지방의 中人계급인 향리들은 임기가 정해진 수령들과 결탁해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민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향리가 죽임을 당하였다.

 

상민(常民)은 국역(나라에서 발주한 토목, 건츅 일)을 거의 담당했던 하층민으로 통상 농민.상인.천역(賤役)등을 일컫지만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천민(賤民)은 최하위 게급으로 공노비. 사노비 등이다.그리고 기타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기생.등을 들 수 있다.

 

정리하면

15세기 조선사회의 기본적인 신분 구조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권리와 의무가 있는 양인과 권리가 없는 천인(賤人)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양인의 최상부인 양반과 중인(中人), 상민(常民) 평민의 신분 구분이 이루어져 천민과 함께 4대 신분으로 고정되었다.

 

양반이 가장 권리가 많은 신분이었다면, 바로 그 반대편에는 의무만 많았던 천민이 있었다.

 

조선시대 천민으로는 노비 외에도 백정·광대·사당·무격·기녀·악공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는 양인이었다가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천민으로 간주된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유일하게

 

노비만큼은 처음부터 천민이었기 때문에 최하위층의 대우를 받았다.

 

물론 사대부 집안도 역모 등으로 처벌을 받고 그 가족이 노비로 전략한 경우도 많다,

 

노비는 남성인 노()와 여성인 비()를 합친 단어다.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 기관에 묶인 공()노비와 일반 개인에게 속박된 사()노비로 나뉜다.

 

공노비와 사노비~~

 

노비는 소유주가 국가냐 개인이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다.

 

한편, 사노비가 공노비로 되기도 하고 공노비가 사노비로 되기도 했다.

 

수많은 노비를 소유한 자가 대역죄(大逆罪)를 지었을 경우 국가는 엄한 벌로 다스리고

 

가산(家産)을 몰수함으로써 공노비로 삼았다.

앞서 설명한 성삼문 등 사육신과 그의 가족이 그 사례다.

 

또 사노비가 국가에 큰 공()을 세웠을 경우 국가는 면천방량(免賤放良)해 줌으로써

 

농공행상하는 대신 소유주에게 상당공노비(相當功奴婢)로 보상해 주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

 

[공노비]

공노비는 소속기관에 따라 내수사,

즉 왕실에 소속되어 일하는 궁노비는 내노비, 행정기관에 소속될 경우 시노비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합쳐 내시 노비라고 한다.

 

감영이나 병영에서 일하는 노비는 영노(營奴),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는 관노(官奴)라고 부른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나라 풍속에 따르면,

내노(內奴사노(寺奴역노(驛奴교노(敎奴) 등의 부류는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私賤)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내노·사노·역노·교노는 공천, 즉 공노비다.

 

내노는 왕실 재정부서인 내수사에 속한 노비다.

 

출궁한 왕자의 집에 사는 노비도 내노에 속한다.

왕실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도 마찬가지다.

 

왕실에 속한 궁녀나 내시도 크게 보면 내노에 속하지만 이들은 별도로 분류되었다.

 

향교와 같이 특수한 관아일 경우 역노비 또는 교노비(校奴婢)라고 불렀다.

 

사노寺奴는 중앙관청의 노비다. 한자를 보면 사찰에 속한 노비를 뜻할 것 같지만,

사실은 중앙관청의 노비를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날에는 사() 자가 절을 가리키는 데만 사용되지만,

 

과거에는 절뿐 아니라 중앙관청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 건국세력이 억불정책을 통해 불교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사찰에 속한 노비들이 공노비로 대거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역노는 역참에 속한 노비, ‘교노는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속한 노비였다.

앞에서 설명한 성균관 노비도 이런 부류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공노비에는 읍노·읍비, 즉 지방 관청의 남녀 노비도 포함되었다.

 

[노비]

사족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이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사노비였다.

 

사족이란 사대부 가문을 지칭한다.

서민은 국가로부터 공적 지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사족은 그런 지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한편, 사족과 양반은 같은 것이 아닌가?

 

조선 초기에는 문관과 무관을 합해서 양반이라 했다. 이때만 해도 양반은 국가로부터 관직 혹은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사노비와 공노비 중 어느 쪽이 더 힘들었을까?

 

<성호사설>에서는

사천의 부역은 공천보다 중할 뿐 아니라 ······ 이 땅에서 사천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고 했다.

 

노비의 의무를 규정한 법전 조항들은 대부분 공노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공노비가 사노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진 것 같다.

 

하지만 사노비가 부담한 관습상의 의무는 공노비보다 훨씬 더 컸다.

사노비는 정변이 발생하면 경우에 따라 주인의 사병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권세가들이 보유한 사병은 거의 다 사노비들이었다.

 

사노비들은 공식적 의무 외에도 죽은 노비주의 제사에 동원 되거나 참여하는 등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의무까지 함께 부담해야 했다.

 

공노비의 의무는 법전에라도 규정되었지만

사노비의 의무는 실제 노비주의 맘이 곧 법이니 사노비의 부담이 훨씬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노비는 공노비와 달리 신분적 예속이 심했다.

사노비는 주인의 소유물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었고 공권력고 사노비의 인권에는 무관섭(?) 주의였다.

 

사노비가 주인을 구타하면 무조건 참형이고 주인의 친족이나 외조부모를 구타한 노비는 교수형이었다,

 

노비가 과실로 주인에게 상해를 입히면 장형 100.유형 3,000리 중형에 처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프랑스인 보고서에는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들이 관가의 노비보다 더 처참하다고 했지만 가장 비참한 존재는 조정이나 지방관아에 소속된 여자 노비들이었다.”고 했다. 앞서 이익의 성호사설과 상반된다.

 

 

 

<<<조선의 노비산책>>> 18

 

납공노비(納貢奴婢)’입역노비(立役奴婢)~

 

또 노비가 노동의 대가를 바치는 형태에 따라 납공노비와 입역노비나눌 수 있는데

 

입역노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주인의 명령에 따라 노동력을 바치는 노비인 반면에

납공노비는 1년에 정해진 액수의 현물을 바치는 노비였다고 한다.

 

그래서 납공노비는 주인집이 아니라 따로 주거지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공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세분됐다. 선상노비는 뽑혀진, 즉 선상(選上)된 노비를 의미한다.

 

납공노비는 납공(納貢), 즉 공물 납부의 의무를 지는 노비를 의미한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노비의 부담이 무형의 서비스냐 유형의 물건이냐에 있다.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공노비는 의무 내용이 노역인가, 현물에 의한 납공인가에 따라

 

다시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서울에 사는 공노비는 모두 선상노비였으며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구분되었다.

 

선상노비는 지방 또는 중앙의 각 관아에 차출되어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해야 했으며,

지방 관아에 입역할 경우 일곱 번으로 나누어 교대했다.

 

 

요약하면

 

관청에 나가서 노동력을 제공하면 선상노비이고, 관청에 나가지 않고 현물을 제공하면 납공노비였던 것이다.

 

납공노비에 관한 <경국대전>규정은

 

외거노비는 선상(選上) 및 잡고(雜故)를 제외하고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인 경우에는 공물을 거두되 사섬시(司贍寺: 노비(奴婢)의 공포(貢布)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 )에 납부하도록 했다.

 

(:남자)는 면포 한 필과 저화(楮貨) 스무 장을 내도록 하고, (:여자)는 면포 한 필과 저화 열 장을 내도록 하되, 만약 명주나 정포(正布, 고급 면포)로 대납하고자 할 경우는 이를 허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경거노비(京居奴婢), 즉 한성에 거주하는 관노비의 반대 개념으로, ‘지방에 사는 관노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잡고는 신체불구 등의 사유로 노비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위 조항에 따르면, 선상노비와 잡고노비를 제외한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의 지방 관노비는 면포와 저화(지폐)를 사섬시에 납부해야 했다.

 

국유지를 경작하는 관노비라면, 연말에 수확물을 면포와 저화로 바꾸어서 사섬시에 내야 했다. 사섬시란 저화의 유통과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태종 때 설치된 관청이다.

 

면포와 저화를 납부하는 것으로써 법적 의무를 충족했기 때문에 이들은 납공노비라 불렸다.

 

선상노비에 관한 <경국대전> 규정은.

 

선상노비는 공물을 납부하지 않는 대신, 관청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관청에서 실무나 잡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한성에서는 2교대로 한 번씩 호수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7교대로 한 번씩 호수가 되었다.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자기 순번이 되면 관청에 출퇴근 했던 것이다.

 

외거노비.솔거노비~~~

 

사노비의 경우 한 가호의 노비가 그들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그 상전으로부터 독립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가에 따라 전자를 솔거노비 또는 가내노비라 하고 후자를 외거노비라고 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공노비는 거의 대부분 외거노비의 범주에 속한다.

 

공노비가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된 것과 달리,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됐다.

 

공노비를 경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외거라는 것은 한성 밖에 산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사노비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외거란 주인집 밖에 산다는 의미다.

 

공노비의 경우에는 솔거노비란 게 없었다. 관청에 나가 근무하든 국유지를 경작하든 공노비는 자기 집에서 출퇴근했다.

 

하지만 사노비의 경우에는 가사 사용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규정하기 위해 솔거노비란 개념이 필요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9

 

외형상으로만 보면, 독립적인 주택과 농토를 가진 외거노비가 그렇지 않은 솔거노비보다 더 나았을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외거노비의 경우 혼인률은 70%에 이르렀지만 솔거노비는 혼인율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혼인을 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솔거노비들은 다수의 불특정 이성과 관계를 맺거나 노비주의 암묵적 동의를 받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솔거노비는

독자적인 가계나 재화 축적의 기회, 행동의 자유 등이 주어지지 않았고 일부는 주인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대부분 하인으로서 잡역 및 농경에 최대한 사역되었다.

 

이들은 고공(雇工:농사.잡역을 도와주고 댓가를 받는 사내))과 더불어 상전의 호적에 기재되었으며 조선시대 노비 가운데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젊은 여성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 노리개가 되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따라 아버지를 알 수 없거나 밝힐 수 없는 자녀를 출산하는 일도 많았다.

 

그나마 소유주와 여성 노비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소유주가 얼자로 공인하거나 속량 또는 면천 시켜주면 다행스런 경우였다.

 

종모법(從母法)이나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연관되어 있었다.)

 

유전자 검사가 없던 시절이라 누구 씨인지 밝혀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가 아이를 낳으면 일단은 노비로 간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었다.

 

외거노비는

주인의 직접적인 부림에서 벗어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납공 공노비의 경우와 같이 상전에게 매년 신공을 바쳐야 했다.

 

이들은 주인 또는 타인의 토지를 전작해 대략 수확의 반을 전작료로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경우에 따라 재화 축적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들은 생활면에서 양인(良人) 전호(佃戶: 지주 땅 경작.댓가를 지급함)와 비슷했고, 이들 외거노비가 전체 노비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가옥·토지뿐만 아니라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고, 또한 주인의 농장 관리인이 되어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매우 높은 자도 있었다.

 

조선 전기 농경에서 노비 노동의 수요는 양반 귀족층의 농장 소유의 발달과 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사전 개혁 이후 위축되었던 그들의 농장은 세종 때부터 확대, 발전해 여기저기 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들을 농장에 투입해 경작하게 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사노비의 분류가 많이 쓰여 왔으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분류에 대해서 사노비를 공노비와 같이 앙역(仰役:국가.상전을 위한 노무부담)노비와

 

납공노비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앙역(仰役)노비와 솔거노비도 구분되는 존재였다는 주장 또한 있어

노비의 유형분류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20

 

조서시대의 노비 관기들~~~

 

<배비정전>을 소개한 글을 요약해서 옮긴다.

 

한성 양반인 김경은 제주목사에 임명된 뒤 참모진을 꾸렸다.

 

이런 참모들을 비장(裨將)이라 불렀다. 비장으로 뽑힌 사람들 중에 배걸덕쇠란 이가 있었다.

 

그는 비장이 된 이후 배 비장이라 불렸다.

 

배 비장은 예방(禮房) 자리에 내정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제주시 문화산업국장 정도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사극 속의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은 목소리도 가늘고 어딘가 좀 모자란 것 같게 묘사들 하지만......

 

당시 서민들이 보기에는 꽤 높은 사람들이었다.

 

남편이 제주로 떠난다는 소식에, 그의 부인은 걱정이 태산 같아졌다.

안 그래도 바람기 많은 남편이인데......

 

미인 많기로 유명한 제주에서 주색에 빠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배 비장은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런 일은 아예 걱정하지 마오.

대장부가 한번 마음을 먹고 나서는 길인데 어찌 요망한 계집 때문에 신세를 버리겠소?”

 

라며 아내를 다독거렸다.

 

조선의 비장

비장은 조선시대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다.

 

그러나 제주에 상륙한 순간부터 배 비장은 시련에 직면했다.

그의 다짐처럼 되지 않았던 것이다.

 

관아로 가던 제주목사로 부임한 김경 일행은 제주 18경 중 하나라는 망월루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웬 여성과 남성이 눈물을 흘리며 신파극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야릇한 장면에 궁금증이 생겼다.

 

그 여성은 제주 최고의 관기인 애랑이였고,

남자는 전임 목사의 참모인 정 비장이었다.

 

정 비장이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뭍으로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이 망월루에서 만나 서로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옆에 있던 방자(관청 사환)에게 이런 사연을 들은 배 비장은 코웃음을 쳤다.

장부가 저런 일에 눈물을 흘려? 정말 딱하군!

 

그러나 방자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색에는 영웅도 없다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나이까?”

 

이에 배 비장은

양귀비나 서시 같은 계집이 옆에 있더라도 눈도 들어 보지를 않을 것이다라며 호기를 부렸다. 그러자 방자가 내기를 제안했다.

 

배 비장이 이곳에 있는 동안 애랑이에게 넘어가지 않으면 자신이 배 비장의 종이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배 비장이 타고 있는 말을 달라는 것이었다.

 

배 비장은 호쾌하게 동의했다.

배 비장은 도착 첫날부터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제주목사 김경 일행의 유흥에 제대로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 비장은 이미 호언을 뱉은 지라, 여성 있는 데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본래 그런 사람도 아닌데 갑작스레 홀로 고결한 척하니, 다른 참모들은 물론 제주목사 김경이 보기에도 꼴불견이었다. 비장들이 기생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에도 배 비장은 불참했다.

 

그럴 바에는 말이나 안 하고 잠자코 있었으면 괜찮았으련만, 그는 자신은 이 따위 유흥에는 관심도 없다느니

 

내가 기생한테 눈이나 돌리나 보라는 식으로 호기를 부렸다.

당연히 제주목사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21

 

보다 못한 제주목사 김경이 스스로 제주 기생들을 소집했다.

배 비장의 가식을 깨뜨릴 묘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때 애랑이가 나섰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한라산 꽃놀이 행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튿날 김경은 참모진과 관기들을 데리고 한라산으로 놀러 갔다.

노래와 춤으로 자리가 흥겨워졌지만,

배 비장은 여전히 관심 없는 척했다.

 

그런 배 비장의 시선을 한눈에 끈 것이 있었다.

그가 본 것은 근처 개울가에서 목욕을 하는 여인이었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몸매에 대단한 미인이었다. 바로 애랑이였다.

 

배 비장은 잠시도 애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놀이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산하겠다고 하자, 배 비장은 복통을 호소하며 자기는 좀 더 있다 가겠노라 말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 복통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방자와 단둘이 남게 된 배 비장은 이몽룡이 방자를 시켜 춘향을 유혹하듯, 방자를 시켜 애랑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결과는 당연히 퇴짜였다.

 

밤새 잠을 뒤척인 배 비장은 방자에게 거액을 쥐어주며, 애랑이에게 연애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애랑은 방자 편에 보낸 답장에서, 오늘 밤에 찾아오면 환영하겠노라고 알렸다.

 

배 비장은 기쁨에 설렜다.

모든 것은 김경과 애랑이의 작전대로 흘러갔다.

 

방자와 함께 한밤중에 애랑이의 집을 방문한 배 비장은, 급했던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애랑이를 끌어안았다.

 

잠시 뒤,

남편인 듯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리만 비우면 꼭 신발이 네 짝이냐며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은 방자였다. 그도 김경과 애랑의 작전에 동참했던 것이다.

 

급했던 배 비장은 그것이 방자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애랑이의 남편이 왔다고만 생각했다.

 

배 비장은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방 안에 있는 궤짝에 얼른 숨어들었다.

뒤이어 애랑이가 열쇠로 잠갔다.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방 안에 들어온 방자는

 

저 궤짝을 버리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궤짝을 바다에 버리겠노라고 고함을 쳤다.

 

곧이어 방자는 궤짝을 들고 바다가 아닌 동헌으로 갔다. 배 비장으로서는 자기가 바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헌 마루에는 목사와 참모들과 관기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방자는 가운데에 궤짝을 내려놓았다.

 

김경은 궤짝에 물을 뿌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방자는 궤짝을 흔들었다.

 

당연히 배 비장은 자기가 정말로 바다에 빠진 줄로 착각했다.

김경은 노비들에게 방문을 삐걱삐걱 여닫도록 했다.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궤짝 속의 배 비장은 사공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다.

 

사공은 바닷물에 눈이 닿으면 실명할 수 있으니 절대 눈을 뜨지 말라며 궤짝을 열어주었다.

 

배 비장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마룻바닥에서 헤엄을 쳐댔다.

 

알몸 상태로 말이다. 마루 기둥에 머리를 박은 뒤에야 그는 사태를 확인했다.

 

<<<조선의 노비 산책>>> 22

 

이 소문은 제주 전역에 금세 퍼졌다.

더는 제주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배 비장은 사직하고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황진이를 거절한 서경덕을 흉내 내려다 망신을 톡톡히 당한 바람둥이 양반의 이야기를 담은 배비장전

 

양반의 권위가 추락하고 그들의 위선이 폭로되던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관기의 삶과 애환을 그리고 있다.

 

관기와 노비~

 

TV 사극 속의 기생은 주로 민간 술집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 속의 기생은 주로 관청을 주 무대로 활약한다.

 

관청에 속한 노비들이 기생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관기라 불리는 이들이다.

 

조선시대 기생문화를 주도한 주류는 이들 관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민간에서 일하는 기생은 비주류였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지배층의 문화가 민간에 전파되는 것이 문화전파의 보편적인 경향이다.

 

마찬가지로 기생문화는 지배층에서 민간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기생문화는 관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봐야 한다.

 

옛날 기생이 오늘날의 일반인보다 지적 수준이 높았던(?) 것은

그들의 고객이 주로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고 유교 경전을 논하는 데 익숙한 관리들을 상대하자니, 그들도 자연히 그에 걸맞은 지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적인 면에서는 일반인보다 나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한 가지 측면에서,

그들은 오늘날의 일반인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폭력배에게 납치돼서도 아니고, 스스로가 원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들의 천한 노비 신분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 산책>>>23

 

<배비장전>의 제주 관기들처럼 가족과 떨어진 임지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성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의무였다.

 

그런 의무를 수청(守廳)이라 했다.

변 사또가 성춘향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것이다.

 

관기들이 부담한 수청 의무가 <어수신화禦睡新話:1812년 조선 영조 때의 화가 장한종이 편찬한 한문 소화집 >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어수신화>'졸음을 막는새로운 이야기'라는 의미다

 

평안감영 혹은 황해감영의 종5품 본부도사로 임명된 사람이 역에서 말을 바꿔 타며 임지를 향했다.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영에서 수청 기생을 파견했다.

 

수노(수석 관노)가 행수 기생(수석 기생)에게 관기를 골라 손님에게 보내도록 지시하는 방식으로 이 과정이 이루어졌다.

 

기생을 처음 접한 본부도사가 급창(관청 사환)과 나눈 대화 속에서 관기들의 수청 의무를 확인할 수 있다.

 

저 붉은 치마의 여인은 무슨 일로 여기 왔는가?”

본부에서 보낸 수청 기생입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어디에다 쓰는가?”

함께 주무시면 됩니다.” ······

 

여러 고을에 기생을 두는 것은 사객(使客, 임금이 파견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관기의 수청 의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3세기 후반에 동아시아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가 목격한 풍속이 동방견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 머물려 하면, (위그루족.집주인)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나그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집에서 나와 일하러 가서는 2~3일간 머문다.

 

나그네는 그의 부인과 집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그녀가 마치 자기 아내인 양 동침하기도 한다. ······

 

그들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나그네가 휴식을 필요로 할 때 그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우상(석가모니)이 자기들을 매우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덕분에 물건과 자식과 재산도 불어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모든 일이 아주 행복하게 되고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목격한 것처럼 13세기 후반의 카물 지방에서는 나그네에게 자기 아내를 소개해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상황과 똑같지는 않지만, 조선 관기들도 카물 여성들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객고(客苦: 일명 성접대)를 푼다는 말이 생긴건 암행어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728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삼남(전라.경상,충청) 일대가 모두 장악됐고, 난에 참가한 사람만도 20만명에 이르렀다. 실로 왕권을 흔들만한 정변이었다.

 

난은 어렵게 평정됐지만,

탕평책을 통해 국정을 안정시키고,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려했던 영조로서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인자의 난 평정에 공이 많은 엄행어사 박문수~

암행어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는 소론이지만 노론전성기인 영조임금의 신분이 두터운 인물이다.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한 것은 불과 1년정도 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박문수의 설화는 무려 200여개가 넘는다.

 

박문수와 관련된 구전설화가 실제의 활동보다 훨씬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박문수의 암행활동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박문수 설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은 무주 구천동인데,

 

예로부터 ··이라고 해서 무주,진안,장수는 첩첩산중의 외진 곳으로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해, 지방토호의 세력이 유난히 강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지방으로 파견한 암행어사는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7백여명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박문수처럼 암행어사직을 충실히 수행한 어사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관찰사나 지방 수령들은 암행어사가 파견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길목은 물론이고 주점, 객관까지 탐문하기 바빴다.

 

부정부패가 심한 고을의 수령들은 더 혈안이 돼 찾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강고한 의지와 책임감이 없는 어사라면 이같은 수령들의 뇌물공세에 넘어가기 쉬웠을 것이다.

 

심지어 기생들의 수청을 넘어, 향처(鄕妻), 요즘말로 하자면 현지처를 얻는 어사도 있었다고 한다.

 

암행어사를 포함해, 중앙관원들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현지 수령들이 관기를 동원해 성접대에 나서기도 했다. ‘객고(客苦)를 푼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그들은 관청을 방문하는 손님들과도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손님들에 대해서도 수청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평안도 정주목사가 전라도 남원에서 올라온 친척을 접대하기 위해 기생을 직접 고르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모든 손님을 상대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손님의 을 당연히 고려했다.

 

관리나 손님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관기들은 관청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동원되어 노래도 하고 춤도 출 의무도 지고 있었다.

 

 

 

<<<조선의 노비산책>>>24

 

관기와 일반 공노비의 차이~~

 

여성 관노비의 경우 일반 노비에서 관기로의 전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노비의 인격권이 인정되지 않은데다가 성 접대가 용인되었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보직을 관기로 바꾸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거나 혹은 다른 사정이 있어서 관기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면 일반 노비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관노비와 관기가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관기가 일반인들 속에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배비장전>의 배 비장은 애랑이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애랑이의 집은 일반 주거 지역에 있었다.

 

<춘향전>에서도 성춘향 모녀는 일반인들이 사는 곳에 거주했다.

 

숙종 때 정승인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의 사례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김우항은 송시열(宋時烈, 1607~89)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를 변호한 인물로 알려진 인물이다

1681년 대과에 합격하기 전에 그는 평안도 강계부사(3)인 이종사촌에게 돈을 꾸러 갔다가 푸대접을 받고 한밤중에 쫓겨났다.

 

객지에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노잣돈마저 다 떨어졌다.

 

그때 마침 퇴근길의 관기가 나타나서 자신을 소개한 뒤, 좀 전에 관청에서 당신이 당한 푸대접을 목격 했노라 면서

 

첩의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함께 가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우항의 사정을 짐작하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처럼 관기들은 자기 집을 갖고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관기 역시 일반 노비처럼 남자를 만나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배비장전>에서 배 비장과 애랑이가 한방에 있었을 때 밖에 있던 방자가 남편 흉내를 낸 데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관기 신분의 성춘향 역시 이몽룡과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어수신화>에서 본부도사를 접대한 관기 역시 머리를 틀어 올린 기혼녀였다.

 

지아비가 있는 것 같은데, 후환이 없을까?”라는 본부도사의 질문에 대해

방자는

혹간 지아비가 있기는 하지만, 감히 노여워하지는 못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마음속으로야 분했겠지만,

법으로 정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참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의 노비산책>>>25

 

관기는 노비 신분이었기에 관기를 그만둔다 해도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점은 <춘향전>에서도 나타난다.

 

아버지가 참판벼슬을 지낸 양반이었더라도 어머니가 한때 기생이었기 때문에 춘향이는 기생이 아닌데도 기생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천민 어머니와 양반 아버지 사이에 때어난 자식은 어머니 신분을 따른다) 때문이다,

 

당시 법적으로 관리들의 기생 수탈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지방수령들이 기생의 수청을 요구하는 것은 묵인된 관행이었다.

 

성춘향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변 사또는 남원에 부임하자마자 관기들부터 소집했다.

 

50명의 관기를 소집한 변 사또는 누가 춘향인지 확인하기 위해, 호장(수석 아전)에게 관기들의 이름을 부르도록 했다.

 

팔월 보름날 추석날에 빛깔 고와라, 추월이!” 하는 식의 멋들어진 소개가 계속되었음에도 춘향이 거명되지 않았다,

 

변 사또는

저 많은 기생을 그렇게 부르다가는 며칠이 걸리겠다. 빨리 불러라고 재촉했다.

 

호장이 이번에는 좀 더 간단하게 그윽하게 거문고 타네, 탄금이!” 하는 식으로 부르는데도 춘향의 이름이 나오지 않자,

 

변 사또는 갑갑하다, 한 번에 네다섯씩 이름만 불러라고 다시 주문했다.

 

호장이 이번에는 홍도, 행화, 앵앵이, 국화하고 여러 명을 묶어서 불렀지만,

 

춘향이는 역시 나오지 않았다.

 

한참 듣다가 자가 나오기에 변 사또가 엉덩이를 들썩했지만,

은 춘향이가 아니라 매향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춘향이 나오지 않자, 결국 변 사또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희 중에 누가 춘향이냐?”

 

행수 기생의 답변에 변 사또는 노발대발했다.

 

춘향이가 관기 명단에 없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몽룡과 혼인한 후에 명단에서 삭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관기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음에도 변 사또의 명령으로 춘향을 소환했다.

관기 명단에서는 빠졌지만 여전히 관노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관기는

일반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남편을 둘 수 있었으며 일반 노비로 전환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여느 관노비와 같았으나,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는 점에서는 일반 관노비와는 달랐다.

 

만약 관기가 관료의 첩이 됐을 경우, 태어난 자녀는 양인일까 노비일까?

 

관기가 낳은 얼자의 지위~

 

일반 여자 노비에 비해 관기들은 얼자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관기들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동시에 만났는지는 민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평안도 정주목사가 전라도 남원에서 올라온 친척을 접대하고자 기생을 직접 고른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일은 그 이야길 들어보기로 한다.

 

 

 

<<<조선의 노비 산책>>>26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 친척은 양씨 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양생(梁生)이라 불렸다. 정주에 체류하는 3년 동안 양생은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사랑하는 기생에게 죄다 쏟아부은 것이다.

 

관기와 이별하고 슬픈 마음으로 귀향하던 날,

 

그나마 남아 있던 가죽신마저 관기의 남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처남이 고맙고 미안해서 선물한 것이다.

 

축 처진 양생은 말에 올라타 반나절쯤 갔다.

시냇가 버드나무를 발견한 양생은 그늘에서 말을 먹인 뒤, 나무에 기대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한참 울다 보니, 웬 상인도 손으로 턱을 괴고 울고 있지 않은가.

 

양생은 우리 서로 슬픔을 털어놓자면서 자신은 정주 기생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상인도 자신이 정주에서 3년간 기생을 사귀었다며 입을 열었다.

 

그 기생이 다른 남자의 수청을 들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자신을 만나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생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슬퍼서 이렇게 울고 있노라고 상인은 말했다.

 

동병상련을 느낀 양생과 상인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동일인을 사귀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별의 슬픔이 싹 가셨음은 물론이다.

 

 

중종임금 때 조광조를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남곤(南袞) 역시 유사한 경험을 겪었다.

 

<어우야담>에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관찰사였을 때였다.

 

부임지에서 그는 어느 기생에게 푹 빠졌다.

 

기생의 집에까지 가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해가 중천에 뜬 지도 모르고 잠에 빠진 적도 있다. 관리들이 기생의 집으로 남곤을 찾아올 정도였다.

 

한성으로 돌아온 후에 남곤은 기생을 첩으로 들이고 집까지 장만해주었다.

그 후 어느 날이었다. 술에 취해 그 집에 갔다가, 잘생긴 남자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곤이 누구냐고 추궁하자, 기생은 나를 그렇게도 못 믿느냐며 결백의 표시로 손가락 하나를 칼로 베었다.

 

남곤은 창기가 두 마음을 갖는 것은 크게 책망할 일도 아니다라며 이렇게까지 행동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고 이별을 고했다.

 

관기의 양다리 걸치기에 분노한 게 아니라 창기의 지나친 결백 표시에 분노했던 것이다.

 

이 일화에서 드러나듯, 관기의 양다리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관기들의 양다리가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조선의 노비 산책>>>27.

 

<성조실록> 성종 91121(1478. 양력 12. 14.)

성종이 형조에 내린 왕명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내게) 진언을 올린 자가

창기들은 고정된 남편 없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저기서 자면서 아이를 잉태합니다.

 

자기 소생을 양인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 아이는 아무개 종친이나 재상과 사통하여 잉태한 아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종친이나 재상 역시 그 말에 현혹되어

 

아무개 기생의 자녀는 내가 낳았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후사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윤리를 문란케 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세종이 이래서<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으로 개정(?)했던 것일까?

그러나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 자식이 천민보다는 사대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관기들의 인지상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상대한 남자들 중에 가장 높거나 부유한 사람을 아이의 친부로 지목할 수도 있었다.

 

남곤이 기첩의 양다리 걸치는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첩도 정부의 아이를 남곤의 자식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뭐 유전자 검사는 물론 혈액형 검사도 할 수 없었으니....

 

중국 드라마를 보면 자식의 피와 자신의 피가 서로 섞이면 친자이고 섞이지 않으면 친자가 아니라고 판정한 대목도 등장한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관기가 낳은 얼자에 대해 좀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왕조가 이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태종 14627(1414. 양력7. 13.)의 조치에 따라 기첩(妓妾) 소생의 얼자도 아비가 양인이면 양인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세종 121218(1431. 양력 1. 1.)에는

양인으로 인정하는 범위를 축소했다.

 

관기가 한 명의 관리와 동거하다가 낳은 아이만 양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관기가 여러 명의 관리를 동시에 상대하다가 낳은 자녀, 관기가 일반인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 등은 양인이 아닌 노비가 되었다.

 

세종 1959(1437. 양력 6. 12.)의 조치는 한층 더 엄격했다.

 

기첩 소생의 얼자는 무조건 노비로 삼기로 한 것이다.

관기들이 남편을 자주 바꾼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세종 28729(1446. 양력 8. 21.)에는 관기의 입장을 반영하는 조치가 나왔다.

 

관기가 관리의 자식을 낳았을 경우, 관리의 신청에 따라 자녀를 양인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조건이 있었다.

 

그 자녀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를 관청 노비로 바쳐야 했다.

 

성종 91121(1478. 양력 12. 14.)에는

 

지금부터는 종친과 상하 관리가 집에 데리고 있는 기첩(妓妾) 외에, 서울·지방의 기첩을 범하여 낳은 자녀는 값을 치르고 양인으로 삼을 수 없도록 하라는 개정 조치가 내려졌다.

 

종친이나 관리가 집에 데리고 있는 기첩(妓妾:기생 첩)에게서 생긴 얼자만을 양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조치는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

 

물론 성종 9년의 조치로 양인이 될 수 있었던 기첩 소생의 얼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기첩(妓妾)을 집에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종친이나 관리의 수가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28.

 

머슴과 노비 차이

 

머슴과 노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는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개된 글을 통해 알아보자

 

조선 후기, 관료인 서유영(徐有英)이 정리한 이 민담집에 고유(高庾)란 인물이 나온다.

 

숙종 대에 활약한 고유는 임진왜란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다.

 

고경명의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광주에 거주했지만, 고유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경상도 고령에서 남의 집 머슴으로 살았다.

 

부지런하고 충직해서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 박 좌수(朴座首)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좌수는 시··구 의회 격인 향청(유향소)의 우두머리를 일컬으니,

박 좌수는 지역 유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지위에 비해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고유가 그와 함께 장기를 두었다. 도중에 고유가 내기 제안을 했다.

좌수는 내기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내기의 내용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고유가 황당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면 1년간 좌수의 머슴이 되고 자기가 이기면 딸을 달라는 것이었다.

 

고유가 보기에는 자신과 좌수의 처지가 비슷했다.

 

자신은 비록 머슴살이를 하고 있지만 고경명의 후손인 데 비해, 좌수는 비록 지역 유지이기는 하지만 명문가가 아닌 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좌수의 사위가 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좌수는 고유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고유가 아무리 명문가의 후손이라 해도 지금은 하찮은 머슴이니, 좌수인 자기 딸과 결혼하는 게 가당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좌수는 당치도 않아!”라고 고함쳤지만,

 

얼마 안 있어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딸도 고유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고,

 

동네 사람들도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고유의 가문으로 보나 사람 됨됨이로 보나 앞으로 훌륭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다들 그렇게 추천했다.

 

신혼 첫날밤~

신부는 고유에게 황당한 제안을 했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될 자질이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10년간 별거하면서 당신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나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자는 게 그 제안이었다.

 

고유는 제안을 승낙하고

동이 트기 전 마을을 떠났다.

 

이후 동네에서는 새신랑이 첫날밤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렇게 고령을 떠난 고유는 정말로 10년 뒤에 대과에 급제했고 부인은 장사를 해서 거상이 되었다.

 

고유의 사정을 들은 숙종 임금은 일부러 그에게 고령현감 자리를 주었다.

덕분에 고유와 부인은 10년 만에 감격의 재회를 나눌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고유는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했다.

 

고령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0년간의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하고 고위직에 오른 고유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머슴의 법적 지위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있다.

 

남의 집 머슴인 고유가 제가 장기에 지면 좌수 어른의 머슴이 되겠습니다라고

제의한 것이다.

 

, 머슴은 자신의 주인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인과 머슴은 고용계약을 매개로 묶였다.

 

그런 까닭에 계약만 해소된다면 머슴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머슴살이를 하던 고유가 과거에 응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머슴의 법적 지위는 일반 양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머슴 신분을 숨기고 응시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고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머슴살이 경력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입지전적 출세를 증명하는 것은 오히려 자랑거리였다.

 

숙종 임금이 그의 사정을 듣고 고령현감을 제수한 사실을 보더라도, 머슴살이 경력이 과거 급제에 장애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머슴은 비록 외형상으로는 솔거노비와 다를 바 없었지만

 

법적으로는 그들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머슴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29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미천왕도 왕이 되기 전에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 돌고(咄固)를 죽인 큰아버지 봉상왕(돌고의 형)을 피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것이다.

 

미천왕이 담당한 일은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이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김유정의 소설 < 봄봄>에 머슴이 등장한다.

 

이 머슴은 금전을 받고 일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인집 딸인 점순이가 더 크면 결혼 시켜주겠다는 주인의 계약조건을 보고 일하는 것이다. 예비 데릴사위가 된 셈이다.

 

그런데 머슴과 주인간에는 다툼이 끓이질 않는다,

점순이가 더 크면이라는 계약조건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동일한 조건인데 머슴은

점순이가 나이가 더 들면..”으로 해석을 하고

 

주인은 점순이가 키가 더 크면..”으로 해석을 했다.

 

문제는 점순이의 키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운동도 시키고 약도 먹여 보겠지만....

 

머슴이 주인에게 계약 이행을 촉구하면 주인은 자꾸 재 키좀 봐하면서 계약이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

 

장인 어른 ~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혼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이 자식아!! 혼례구 뭐구 갸 키가 자라야지........!!”

 

머슴은 오직 점순이가 키만 크기를 기다리면서 아무 댓가도 받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그는 계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민법상

"조건"은 법률행위 효력의 발생 또는 소멸을 장래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하게 하는 법률행위의 부관을 의미하는데

 

민법 147(조건성취의 효과)에서

법률행위 효력의 발생을 조건에 의존케 하는 '정지조건'이 있는 법률행위(계약)는 그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 그 효력이 생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가 조건성취의 효력을 그 성취 전에 소급하게 할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그 의사에 의 할 수 있지만 예비 장인어른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민법을 적용해도 유효한 계약이다.

 

<봄붐>에 등장하는 머슴이 가장 많이 활약한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구한말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와해 되면서

많은 노비들이 머슴으로 전환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구한말 이전에도 머슴은 존재했다,

 

그들 머슴은 노비와는 전혀 달랐다.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문헌에서 그 같은 머슴을 한번 더 살펴보자

 

조선 후기의 관료 겸 화가인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엮은 민담집 < 어수신화>

머슴(고한 雇漢) 이 등장한다.

 

순조 465(1805.양력 7.12)

장한종은 해주를 방문하고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정심혁이라는 인물과 주막집에 들렀다,

정심혁의 노비도 이들과 함께했다.

 

이 때 정심혁이 타던 말이 주막집 머슴을 걷어 차는 사고가 발생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정심혁과 장한종은 사과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정심혁이 새벽에 도주를 했다. 그러나 정심혁은 임진강 앞에서 잡혔고

격분한 주막집 머슴들이 배상하라고 나선 것이다,

 

정심혁의 노비들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아를 지켜 본 장한종이 자신의 말을 담보로 하고 붙잡은 노비드을 풀어주도록 했다,

 

이후 정심혁이 조카 뻘인 김포 사또에게 서너 양의 돈을 발려 주막집 머슴에게 치료비조로 지급하고 비로소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는 당시 농가 뿐 만 아니라 주막집에도 머슴들이 근무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장한종이 살던 조선 후기뿐 아니라 전가에도 머슴은 존재했다..

조선 건국 93년 뒤인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에 머슴을 가리키는 고공(雇工)이란 표현이 나온다.

 

앞선 고한이나 여기 고공은 모두 머슴을 가르키는 표현이다,

이들은 외형상으로 솔거노비와 구분은 되지 않았다.

 

물론 주인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다는 점에서 둘 개념은 엇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30

 

<경국대전><예전> 편에도 호적의 기재사항이 적시되어 있다.

이것을 호구식(戶口式)이라 한다.

 

주소.직분., 성명. 연령.본관. 4대 조상의 인적사항. 배우자의 성명. 연령.본관 및 4대 조상의 인적사항. 동거하는 자녀의 성명 및 연령.노비의 성명 및 연령. 고공 머슴의 성명 및 연령이다.

 

여기서 노비와 머슴이 다른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슴은 대체적으로 고용되어 그 곳에서 거주하면서 '새경'이라는 형태로 임금을 받는 일종의 임노동자를 의미하므로 노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노비가 노예와 같은 개념인가?

노비는 노예가 아니다

 

노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실중 하나가 노비를 노예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노비가 과연 노예와 다른 존재였냐를 두고도 학계에선 오랫동안 논쟁도 이어졌다

 

노비들은 법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사람들이지 직업이 노예는 아니었다는 점이 일반적이다

 

이를 테면 서당에서 훈장일을 하는 노비(대부분 역모에 연류된 인사들)도 있었고

장사하는 노비도 있었다. 이 경우들은 남자 노비들에 한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접에서 노비는 노예와 큰 차이가 있고 할 수 있다.

 

< 카페에서 읽는 조선사 >저자(표학렬)

조선 시대 노비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노비는 매매되는 특징 때문에 노예와 유사하지만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남자노비들은 정기적으로 주인을 찾아가 공물를 납부하거나 주인의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즉 노비는 겉 모습이나 직업이 천하지 아니했지만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을 뿐이다

 

사노비의 경우 거주 형태에 따라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와 따로 나와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김석형의 1957년 논문

"조선시대 농민의 계급구성"에서 노비를 거주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누어 소개하고 았다.

 

외거 노비가 농노와 같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 서울 대 이영훈 교수의 1987년 논문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전기 노비의 경제적 성격"에서는 외거노비가 농노와 같다는 김석형의 주장을 반박한다.

 

외거노비와 솔거노비 사이에 이동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루어 졌기 때문에 외거노비가 농노라는 김석형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거주 형태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상전 또는 국가에 바치는 재화의 형태에 따라 납공(納貢) 노비, 즉 재화로 부담하는 경우와 앙역(仰役:상전을 위해 일함)노비

즉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우로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조선 전기 봉건제 설을 부정하고, 토지국유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다.

 

참고로 농노

중세 봉건 사회에서, 봉건 영주에게 예속된 농민. 경제 외적(外的)으로는 영주로부터 신분적 지배를 받았고,

 

토지에 얽매여 이전(移轉)의 자유가 없었으며, 영주로부터 대여받은 토지를 경작하는 대가로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의 의무를 졌다.

 

조선시대 노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조선시대엔 평민인 양인과 노비인 천민이 혼인하는 '양천교혼'이 빈번했다.

 

15세기 후반 안동 권씨 집안과 16세기 후반 양동 손씨 집안의 노비 중 30%가 양인과 결혼한 이들이었다고 한다.

 

17세기 초 울산에서는 양천교혼율이 50%에 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노비가 정말로 '성노리개'나 다름 없는 신분이었다면 양인과의 빈번한 결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31

 

노비 역시 일반 가정처럼 '가계도'가 존재했다.

 

김의환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의 논문은 자그마치 4세대에 이르는 노비의 가계도를 발견하기도 했다.

 

가계도에는 90세의 노비 허농개가 양인 여성 엇덕과 결혼해 딸 인옥을 낳고, 인옥은 노비 난복과 결혼해 아들 일상과 선이, 딸 일개와 일춘을 낳았다.

 

장녀 일개는 12살 난 아들 무술과 6살 난 딸 진례를 낳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가 노예와 같느냐의 문제는 서양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시각이 다르다.

 

James B. Palais 같은 미국인 역사학자( 미 워싱톤 대 교수)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40%를 차지한 점을 들어 조선사회가 노예제 사회(Slavery Society)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구한말 서양인들의 시선으로는 그렇기 비춰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팔레 교수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도 노예제 사회였다고 말하면서,

 

조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후졌다는 평가를 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라고 했다.

 

애초에 팔레 교수는 노예제 사회가 고대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으며

조선에서 노비 증가의 원인을 평민들의 경제적 몰락에 의한 자발적인 노비화가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보는 편이라고 한다.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노비 연구 한국 학자들은

첫째)노비가 양인과 결혼을 할 수 있다(양천교혼)는 점이나,

둘째)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비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노예나 혹은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의 노비는 광의의 노예제도라고 한다.

 

 

덧붙여 팔레교수에 반대한 한국학자들은

 

미국의 저명한 한국사 학자인 제임스 팔레(워싱턴대학 한국학 명예교수)처럼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비와 노예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학문적 접근법'은 결과적으로

 

한국민들의 자주성 혹은 주체성을 은연중에 부정하려는 제국주의적 세뇌를 위한 '정치적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제임스 팔레 교수처럼

조선시대의 노비'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양반 관료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강화 유지된 노비제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이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애민성군으로 평가하는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도 넘기 어려운 난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참고문헌:중앙일보] 조선시대 인구 40%가 노비라는데···노비는 '노예'와 다를까

 

 

 

<<<조선의 노비산책>>>32

 

조선시대 노비 점유율은?

 

학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40% 수준이 노비 신분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노비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때도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랬을까?

여전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여러 책에서 등장하는 조선시대 노비 점유율을 살펴보자

 

일부 학자들은 단성호적과 숙종실록 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시대 전 인구의 30~40% 정도를 노비로 추산하고 있다.

 

단성현(현재 경남 거창) 호적대장은 1606(선조 39)부터 1888(고종 25)까지 작성된 것이다.

 

다른 지역의 호적대장에 비해 행정구역 전체를 망라할 뿐 아니라 작성된 식년이 연속된 자료들이 남아있다.

 

이외의 호적대장으로는 대구부(大邱府), 울산부(蔚山府), 언양현(彦陽縣) 등의 자료가 있다.

 

호적은 국역(國役)과 관련한 호구 파악의 산물로 여겨진다.

, 호구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원들인 셈이다.

 

또한 정약용은 백성들이 국역에 대한 부담 때문에 호적대장에 등재되는 것을 꺼려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자들은 호적대장에 실제 인구의 40% 정도만 기재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인구의 1/3 정도가 호적에서 누락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숙종 7년 병조참판 이사명의 상소에 따르면

 

조선 전체의 공사천호(.사노비)와 폐질자(廢疾者유면자(流丐者:떠돌이 구걸자)를 합치면 40여만호 정도였으며 호포 징수 대상자에 해당하는 평민은 70만여호 정도였다.

 

숙종 4년 호적에 등록된 호는 1,332,446호였고

숙종 7년 호적에 등록된 호는 1,376,842호였다.

 

폐질자와 유면자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극소수였다고 가정한다면 전체 호의 약 25~30%가 공사천호(.사노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 상소에서 관서지역 17만호 중 공사천은 3만여호 정도라는 발언도 나오는데

 

이 발언을 통해 한반도 북쪽 지역은 남부 지역에 비해 노비의 비율이 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의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하였고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는 73%로 기록되기도 했다.

 

노비 비율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춰 갈수록 계속 줄어든다.

 

이는 늘어나는 노비의 수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는 인원이 많아지고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비의 수를 줄이고 평민을 늘리려는 정책들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는 종모법이 논의되거나, 양란을 거치면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노비도 포함된 속오군이 창설되기도 했다.

 

속오군에서는 적의 목을 베는 등 공을 세우면 노비 신분에서 해방 시켜주기도 하였다.

 

속오군(束伍軍)이란

()을 지지 아니한 양인과 천민으로 편성한 군대조직으로 선조 27(1594)에 두었으며, 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게 하고 나라에 일이 있거나 훈련할 때에 소집했다.

 

특히 현종은 국가의 세수 증대를 위해 호구조사를 철저히 하는 과정에서 과세 대상의 적용을 엄격히 하는 등 국가의 토지 및 노동력을 장악하고자 도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보다 큰 왕권강화를 추구한 영, 정조 시기에 완전히 고착화되는데,

 

영조는 기존에 계속 논란이 되어 왔던 종모법을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만들었으며, 속대전에서 사노비가 100=13섬을 바치면 면천시켜 주도록 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

 

정조는 노비의 신공을 줄이거나 폐지하였고, 도망 노비를 추적(추노) 부서를 아예 없애버렸다,

 

 

 

<<<조선의 노비산책>>> 33

 

이러한 노비 제도의 변화로 인해 17세기부터 노비제는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영조-정조 시기를 거치며 노비들의 도망이 극에 달하여 호적상 등재된 노비들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영조 시절에 조선의 노비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인터넷 상에서 많이 보이는 조선시대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거나 심지어 7,80%가 노비였다는 등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날조 된 느낌이다.

 

조선 후기에 조선의 노비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 수준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 - 40% 내외였던 시기는 17세기 기준이라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로 조선 인구구조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줄어든 대목도 논쟁거리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비하면 조선시대에는 그나마 노비가 적은 편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부여·가야 등이 서로 항쟁하던 시대에는 전체 인구에서 노비 인구의 비중이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끌려가는 백성들은 상대방 나라의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비의 삶을 살았을까?

 

그것은 국가가 주인과 노비의 신분적 예속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해주고 거기서 생기는 수확물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국가도 노비제도를 통해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평범한 서민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남의 노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노비가 되어 남의 땅을 경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노비 인구도 결코 적다고는 볼 수 없다.

다른 시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최소 전체 인구 중 30퍼센트가 노비였다면 상당히 많았다고 봐야 한다.

 

백성 열 명 중에서 최소 세 명이 노비였고 어떤 때는 다섯 명이 노비였다는 사실은, 두 집 혹은 세 집 건너 한 집이 노비 가정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선 노비가 도망치고, 이를 잡아들이는 일이 빈번했으며 심지어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사실여부를 떠나 충격적이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대단히 많은 숫자다.

조선은 노비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노비를 유지했을까 ?.

 

또 왜 이렇게 많은 노비들은 도망을 다녔을까?

 

 

 

<<<조선의 노비 산책>>>34

 

앞서 삼국~고려시대 노비는 인구의 10% 이내 수준이라고 했다.

 

조선에서 유난히 노비 숫자가 증가했고 또 양반 관료들이 노비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은

 

고려 말부터 증가했던 대규모 농장을 유지하는데 노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흑인 노예제는 면화나 담배 같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도입하면서 시작됐는데.

조선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후기 원나라를 통해 모내기 등 선진농법이 도입되면서 농작물 생산력이 높아졌고, 권력충은 대토지 소유와 노비 확보에 많은 열을 올리게 된다.

 

서두에 조선시대엔 인구의 약 40%가 노비였다고 했는데, 학자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인근)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를 보면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6% 남짓 되는 것이다.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받은 식읍(食邑)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7명으로 약 4.3%에 불과하다.

 

그랬던 것이 100년 후엔 인구의 약 40% 정도가 노비다.

인구대비 10%대에서 40%대 까지 증가한 것이다.

 

조선 초기 공노비 숫자는 <성종실록 158>의 기록에 추쇄(推刷: 도망친 노비를 검거하는 일) 도감(都監): 임시로 설치한 부서)에서 아뢰기를

 

추쇄한 서울과 지방의 노비는 모두 261984()이고 여러 고을과 여러 역()의 노비는 모두 9581가구입니다라고 하여 노비의 수가 35만여 명에 이르렀음을 보고하고 있다.

 

1439(세종 21) 21만 수천구(),

1461(세조7) 20만 여구() 조사되었으며

1484년 성종 때는 위와 같이 352665구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 무렵 전국 호구는 100만호에 340만 여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니 성종 임금 때 공노비 35만 여 구(:)는 전체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당시의 인구 대비 공노비는 전체의 10% 정도였으며 사노비의 수까지 고려하면 조선시대 노비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을 것이다.<신병주 교수 책 인용>

 

성종 임금 때 재상 한명회(韓明澮)

 

공노비 가운데 미추쇄자가 10여만 구(.)가 있고

.사노비 중 도망 해서 숨어사는 자가 100만 구(.)라고 했다.

 

당시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기지 사정을 감안해서 전체 인구를 400~500만으로 추정하고 그 가운데 공사노비를 150만으로 보아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노비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영훈 전 서울대교수에 따르면, 1663(현종 4)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을 보면 73%가 노비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중엽 조선의 인구 약 1200만 명 중 3040%가 노비 신분이었다.

 

,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한 것은 조선 왕조부터라는 것이다.

이것이 노비를 연구한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조선의 노비산책>>>35

.

가장 큰 요인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 명만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됐고,

노비와 양인의 결혼 자체도 불법이었다.

 

그래서 원래 노비였던 이들만 대물림 됐기 때문에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조선 건국 후

엄격했던 양천교혼의 금기가 차츰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노비를 가진 양반 입장에선 노비와 노비를 결혼시키는 것보다는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이를 적극 권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양천교혼은 노비와 노비가 결혼할 때보다 더 많은 노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노비를 세는 단위는 몇 명이 아니고 몇 구()였다.

 

노비에 대한 명칭도 생구(生口)였다. 어쩌면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식구(食口)라는말도 여기에서 유래 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노비 점유율에 대해서는 논란은 있지만 요약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17세기 초 경상도 호적들의 전체 인구 대비 노비 인구는 적으면 42%, 많으면 64%까지 달하기도 했다.

 

군역 부과대상인 양인 신분의 인구가 호적에서 많이 누락된 것을 감안해 사학계는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 인구 중 30~40% 정도가 노비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비 인구의 비중은 확연하게 줄어든다.

 

호적을 처음 연구자료로 사용한 일제강점기 때

학자 시카타 히로시가 대구부의 호적을 조사한 결과, 노비 인구의 비중은 169043.1%에서 약 100년 후인 1789년엔 15.9%로 감소한다.

 

19세기에는 더욱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1825년 진해현 호적에서 노비 인구는 겨우 2%에 불과했다. 1867년 울산부 호적에서 노비 인구의 비중은 14.4%였다.

 

이렇듯 학계의 정설은 조선의 노비 인구는 17세기 말 정점을 찍은 뒤 18세기, 19세기를 거쳐 급격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를 광의의 노예제 사회로 보는 전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2007년 쓴 <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에서는

 

"어쨌든 노비 인구가 17세기 말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임학순 인하대 사학과 교수 역시 논문 <조선시대 노비제의 추이와 노비의 존재 양태>에서

 

노비 인구의 점유율이 17세기 후반까지는 30~50%를 보이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20~40%로 다소 낮아지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20% 이하의 수준으로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36.

 

노비 제도 변천사~~

 

우리나라 노비역사를 청동기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람도 있다

2,000년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양반들이 노비제도를 정당하다고 주장한 근거는 고조선(古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이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이 사유재산 제도가 확립되어 있고 노비제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대 기자(기자조선)가 사회정화와 문명개조 차원에서 노비제도를 들여왔다고 주장하면서 事大(약자가 강자를 섬김)이용한 것이다.(箕子朝鮮)

 

성인께서 노비제도를 만들어 이 땅에 귀족과 천민을 구분함으로써 신분의 혼란을 막았다

<정인지>

 

성인이 노비제도를 만든 건 인간을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고양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노비와 주인은 국왕과 신민의 관계와 같다

<하위지>

 

그것은 양반 사족(士族)층이 고안해 낸 조선 특유의 법제었다.

이들은 그 같은 노비법을 기자가 창시했다고 하면서 그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의 노비제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 禮俗(예속)의 유지를 위해서도 성현인 기자가 창시한 노비제도는 길이 지켜야 한다는 이념이야말로 조선 성리학의 독특한 해석으로 조선사회에 확고히 정착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는 양반층의 노비확보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층의 보편적인 주장이었다.

 

기자의 八條之敎(팔조지교)에 근거하여 노비제도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양반들~~

자기합리화의 근거였다.

<출처 및 참고문헌: 조선노비열전(이상각)>

 

고대국가에서는 전쟁이 노비를 한꺼번에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물론 이런 전쟁 노비 외에도 범죄자 노비, 채무자 노비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전쟁포로를 통한 노비의 공급이 많았으므로 노비신분의 세습제가 그다지 철저하지 않았지만,

 

신라통일 이후부터 노비의 공급로가 좁아지면서 일종의 노비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분세습제가 점차 강화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

고려시대 이후로는 주로 방어전에 치중했다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노비를 외부에서 공급하는 일이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비는 내부에서 충원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기본적인 노예제도를 살펴보자.

 

법적으로 자유로운 공민인 양인과 재산처럼 매매.상속.증여가 되는 천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다.

 

노비는 노비끼리만 결혼을 했고 부모중 한 사람만 노비일 경우 그 자식은 노비다.

남자 노비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 양인과 구분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37

고려는 귀족 국가였다.

노비 노동력은 귀족 권력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엄마가 노비면 아비가 양인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왕실과 귀족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했나 하면, 몽골 지배하에서도 노비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예 해방, 노비안검법~~~

고려 4대 임금 광종 7(956)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여 사노비(私奴婢) 가운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풀어준 법이다.

고려의 네 번째 왕이었던 광종이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를 강화하고자 시행한 법이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는데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이전 신분으로 되돌려 주는 입법이었다.

호족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사건이다.

이 정책은 고려의 쌍기의 건의에 따라 실시한 최초의 과거제도와 더불어 호족 세력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켜 고려의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호족들은 재산이자 군사력이었던 노비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되어 세력이 꺾이게 되었고. 또 노비가 양인이 되었으니 국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니

이것은 군인이 될 수 있는 사람도 늘어났다는 뜻이니 왕의 세력이 커지게 된 것이다.

해방된 노비들은 광종의 열렬한 지지층이 되어 왕이 나라를 더욱 잘 다스릴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이다.

고려 제6대 성종의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 ~

고려 성종임금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다.

노비환천법은

고려 광종 때 해방시킨 노비를 성종 때 다시 종으로 환원시킨 법이다.

환천된 노비 가운데 옛 주인을 경멸하는 풍습이 생기자,

982(성종 1)

최승로(崔承老)는 글을 올려 노비안검법의 폐단을 지적하고 광종 때에 종량(從良)된 노비를 다시 환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우리의 고유한 제도인 양천지법(良賤之法)이 붕괴되어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결국 공신이 불안에 떨게 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성종은 987년 노비환천법을 제정하여 방량된 노비로서 옛 주인을 경멸하는 자를 환천, 사역(使役)하게 하여 인신적(人身的)인 예속관계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법이 마련된 배경에는 최승로가 지적한 측면보다는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마련된 노비안검법의 실시로 귀족들이 가지게 된 인적·물적 손해를 되찾으려는 귀족들의 끈질긴 요구가 관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38

이처럼 대 귀족 무마정책의 하나로 채택된 이 법의 구체적인 대상은 옛 주인을 경멸하는 방량노비 외에도,

공로가 있는 노비로서 나이 40세 이후에 방량되었다고 해도 본인을 모욕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자 및 옛 주인의 친족과 서로 싸우는 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예외조항으로 노비로서 본인을 대신해 전쟁에 나간 자

또는 본인을 대신해 3년의 여막(廬幕: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을 산 자로서,

그 주인이 담당관청에 보고하면 그 공을 헤아려 나이 40이 넘는 자에 한해 면천(免賤)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노비환천과 아울러 다른 사람의 도망노비를 몰래 숨겨 자신의 노비로 부렸던 자는

하루에 포 30척씩을 그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는 타인노비 사역가(使役價)도 책정하였다.

또 고려 성종은

(=: 남자노비)는 포 100, (=: 여자노비)120필로 노비 몸 값을 정했다.

노비의 하루 임금이 1필이므로 100120일의 노동가치에 해당하여, 노비가 열심히 일하면 수년 안에 상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편 기근과 수탈로 피폐해진 농민들이 자녀를 노비로 팔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은

<노비환천법>을 더욱 강화 했다

다시 환천된 노비가 다시 양민으로 속량되고자 하면 매로써 다스린 뒤 삽면(鈒面: 얼굴에 흠을 내어 죄명을 찍어 넣는 일)하여 주인에게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다.

<노비 종부법, 천민 수모법>~

노비주의 입장에서 노비의 수를 늘일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 중 하나는 노비를 결혼시키는 것이다.

노비와 노비를 결혼시킬 수도 있고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킬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의 혼인으로 생긴 자녀는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그들의 혼인으로 생긴 자녀를 노비주가 온전히 자신의 노비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그들의 자녀를 양인에게 빼앗길수도 있었다.

즉 분쟁의 꺼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후자의 경우 생길 수 있는 분쟁의 소지를 해결하기 위한 입법 조치가 필요했다.

1039(고려 10대 정종)

정종(靖宗) 5, 천민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른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한 것이다.

이를 <천민 수모법>이라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남자 양인과 여자 노비의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되어야 했다.

주의 할 점은

이 법은 <노비신분법> 이 아니고 <노비소유권>에 관한 법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관행을 성문화한 것으로 고려사,에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 법은 노비끼리 통혼하여 낳은 소생에 대한 소유권을 다룬 법령이었고

양민과 노비가 결혼할 경우 그 자녀의 신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고려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양민과 노비 사이의 통혼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41

얼자문제에 대한 혁명 핵심부의 시각은

태조 이성계 6(1397)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태조에게 올린 건의서에 나타나 있다.

노비 소송을 담당한 이 기구에서 이성계에게 건의한 19개 항목 중 일곱 번째다.

건의문 내용은

비록 천첩의 소생일지라도 이 역시 골육입니다.
그러므로 노비와 똑같이 일을 시키는 것은 곤란합니다.

노비주가 생존해 있고 자기 소유의 천첩이 자녀를 낳은 경우,

(그 자녀를) 영구적으로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을 법률로 삼으소서라는 것이었다

이 건의문에서는
천첩의 몸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똑같은 자식인데 어떻게 노비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느냐는 건국세력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천첩 소생에게 갑자기 양인 신분을 부여할 수는 없었기에,
이 건의문에서는 타협적 방안을 내놓았다.

얼자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고 얼자의 어머니가 얼자 아버지 소유의 노비인 경우에 한해 얼자를 양인으로 인정해주자는 것이었다.

특권층이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얼자는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이들의 처지는 소설 속 홍길동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들이 서자들과 합세하여 조선왕조 내내 투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버지의 신분과 자신의 신분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그래서 작은 부인은 물론 첩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그랬다.

임금의 경우도 법적으로는 그랬다.

후궁이란 첩이 있었지만, 후궁은 공식적으로는 궁녀 신분이었다. 왕의 첩이라는 공식 지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일부다처를 금했기 때문에, 얼자에게 양인 신분을 부여하더라도 이들에게 양인과 똑같이 관직 진출의 기회를 인정할 경우 일부일처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금하면서 거기서 태어난 아이를 평등하게 다루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이 서자들과 함께 과거 응시나 관직 진출의 제약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401년 태종 2년에 권중화는 상소를 올려 <일천즉천: 一賤則賤: 부모중 1명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제도>으로 인해 천인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아뢰었다.

 

 

<<<조선의 노비산책>>>42

 

권중화는

천인의 수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역을 담당해야 하는 양인 계층이 줄어들어

국력 손실을 일으키고 있으니 양인과 천인의 통혼을 법으로 금지 시키고

이미 결혼한 경우엔 이혼을 시키며 만약 이를 어긴 것이 적발될 경우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전조(前朝·고려)<노비종모법. 천민수모법>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태종실록>에서도

그 같은 고려시대 입법의 결과로

노비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양민은 날이 갈수록 감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그 당시에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간의 혼인이란 게 무조건 법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 대감이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다.

 

1414년 황희는 권중화의 상소에 대해 수정제안을 한 것이다

 

태종 임금 당시 예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황희는

 

양인과 노비가 결혼 할 시 그 신분을 아버지를 따라간다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제안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1414(14)627일 예조판서 황희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노비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하자

 

태종 이방원 왈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 2품이상 관리)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하면서 황희 제안에 찬성한다.

 

부모 양쪽 노비 세습이라는 악풍을 부계(父系)만 따르도록 개혁한 사람은 조선 3대 국왕 태종이었다.

예조판서 황희 건의에 따라 태종이 이리 선언한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래 천민은 없었다. 이제부터 노비 여자가 양인(良人)에게 시집가 낳은 자식은 모두 양인이다.”

 

다만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해설하면 <노비종부법>으로 바뀌게 되면 노비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양반들에게 불리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는 뜻이다.

 

,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양반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종부법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직접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대통령령)을 내려 고려 때부터 내려온 <노비從母法>

<노비 從父法>으로 개정 한 것이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난 조치였다.

 

<노비종부법: 奴婢 從父法>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이다.

 

 

<<<조선의 노비산책>>>42

 

권중화는

천인의 수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역을 담당해야 하는 양인 계층이 줄어들어

국력 손실을 일으키고 있으니 양인과 천인의 통혼을 법으로 금지 시키고

이미 결혼한 경우엔 이혼을 시키며 만약 이를 어긴 것이 적발될 경우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전조(前朝·고려)<노비종모법. 천민수모법>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태종실록>에서도

그 같은 고려시대 입법의 결과로

노비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양민은 날이 갈수록 감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그 당시에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간의 혼인이란 게 무조건 법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 대감이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다.

 

1414년 황희는 권중화의 상소에 대해 수정제안을 한 것이다

 

태종 임금 당시 예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황희는

 

양인과 노비가 결혼 할 시 그 신분을 아버지를 따라간다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제안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1414(14)627일 예조판서 황희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노비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하자

 

태종 이방원 왈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 2품이상 관리)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하면서 황희 제안에 찬성한다.

 

부모 양쪽 노비 세습이라는 악풍을 부계(父系)만 따르도록 개혁한 사람은 조선 3대 국왕 태종이었다.

예조판서 황희 건의에 따라 태종이 이리 선언한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래 천민은 없었다. 이제부터 노비 여자가 양인(良人)에게 시집가 낳은 자식은 모두 양인이다.”

 

다만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해설하면 <노비종부법>으로 바뀌게 되면 노비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양반들에게 불리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는 뜻이다.

 

,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양반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종부법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직접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대통령령)을 내려 고려 때부터 내려온 <노비從母法>

<노비 從父法>으로 개정 한 것이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난 조치였다.

 

<노비종부법: 奴婢 從父法>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이다.

 

 

<<<조선의 노비산책>>>43.

 

태종 이방원은 드디어 윤음(綸音)을 내린다.

 

. 영락(永樂) 12(1414) 6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

·사 노비가 양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양인으로 삼는다는 왕명이 내려진 것이다.

 

<태종 14.1414627>

 

이 조치는 얼자의 아버지가 생존여부. 소유여부 여부를 가리지 않고 얼자를 양인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전 것보다 훨씬 개혁적인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노비종부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과연 테종 이방원은

'본래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평등하다'는 생각을하고 있었을까?

 

물론 당시엔 인권 개념은 없었고

세금을 납부하는 양인 숫자를 늘려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취한 조치였을 뿐이다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당시 태종 이방원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종의 명으로 <노비종부법>이 채택 되었으며

 

추가로 보충군(補充軍: 현재의 공익근무요원 방식)을 설치해 양반집 얼자(서자)들의 경우 일정 기간 동안 이곳에 복무하면 면천을 시켜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질적으로 <노비종부법>은 노비의 수 자체를 대폭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반의 자제들 가운데 어머니가 천출인 경우 이를 구제해 주는 법에 더 가까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노비수를 줄여주는 제도는 맞기는 하지만.....

 

문제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법을 만들더라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노비종부법> 역시 그러한 허점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 같다.

 

<노비종부법>

본래 양반 집안 얼자들을 위한 법이었지만 점차 천인들의 신분 세탁 용도로 남용되기 시작했다.

 

노비인 남녀가 관계를 가져 자식을 낳게 되면 여자 노비는 어머니 입장에서 양인 외갓 남자들을 유혹해 사실은 노비 사이에서 낳은 자녀가 양인 남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라고 우기는 방법으로 자녀들의 신분 세탁을 시도했다.

 

특히 공노비의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할 시 관청에서 대강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들 사이에서 일종에 위장 결혼이 횡횡하게 된다.

 

이렇게 낳은 자녀들의 경우 진짜 아비가 누구인지 정확히 분별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태종의 아들, 세종임금은

이러한 신분세탁 행위는 천륜을 어기고 사회 질서를 허물어트리는 행위이며 삼강오륜을 중요시 여기는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 것 같다.

 

 

<<<조선의 노비산책>>>44

 

세종대왕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1422(세종 4)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으로 노비를 주인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만들 수 있는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태종 이방원 때와 상황이 달라졌다.

 

맹사성·권진·허조 등 세종의 유명한 대신들은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라면서 종모법으로의 환원을 계속 주장했다.

 

그러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종부법으로 개정할 때 담당 승지였던 전 판서 조말생을 불러 종부법 제정 경위를 물었다.

 

조말생이 아뢰길

 

태종이 강력한 의지로 종부법으로 개정했으며

이숙번이 옳지 않다고 극력 말했으나 태종이 듣지 않으시고

 

신에게 법령 집필을 명하셨으며 친히 하교(下敎)하여 법을 세우셨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세종실록.세종 14315>

 

 

세종임금은

 

1431(13)에 관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 해 낳은 아들은 관노(官奴), 딸은 관기(官妓)로 삼자는 건의를 세종이 받아들였고

 

1432425(세종14)

아버지 태종이 실시한 <노비종부법>은 문제가 많으니 차라리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는 <노비종모법>을 채택한 것이다.

 

태종이 이 법을 만든 지 18년 만에 개정한 것이다.

 

<노비종부법>이 시행된 뒤 공천(公賤:공노비) 줄어들고

여성 노비들이 마음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을 가며 인륜을 어지럽힌다삼강오륜을 받드는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아비가 양인이지. 천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폐륜이다고 주장했다.

, 입법로비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경우 출산을 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속이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신분 세탁 염려는 없기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도 지배계급은 그들의 노비 소유량을 늘리려고 이 법 즉, <천자수모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이 날짜의 왕명에서는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여기서 생긴 얼자는 노비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자녀는 여자 소속의 관청이나 주인에게 귀속시킨다고 했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의 자녀는 양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자 양인과 여자 노비의 자녀만 양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전 상태로 완전히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아래와 같은 예외가 인정됐다.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 ·문무과출신·생원·성중관(成衆官) ·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 소생. 종친(왕족)2품 이상의 천첩자손과 대소원인(大小員人)의 적자손(嫡子孫)이 없는 자,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었을 경우 그 소생에게는 종부법을 그대로 적용한다

 

예외 규정을 두었다.

 

이에 따라 <경국대전>에서는 <노비종모법>을 채택하게 된다,

 

1485,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된다.

 

,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그런데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 숫자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45

 

1574(선조 7) 임진왜란 때

의병장 중봉 조헌은 일찍이 북경을 다녀온 후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인 동환봉사(東還封事_조헌이 중국에 다녀와 올린 상소문)에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아,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 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노비를 연구한 학자들은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했다고 한다.

 

반대로 병역과 세금을 담당할 양인의 숫자는 다시 감소하게 된 것이다.

 

1669년 현종 때

이를 수정하자는 목소리가 일어난다.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남성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양인으로 하자는 것이다.

 

즉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노비종모법(從母法>이다.

이는 좀 다른 < 노비종모법>이다

 

이 제도는 당시 치열했던 붕당 정치에 따라 운명이 왔다갔다 한다

 

당시 이 법안을 찬성했던 것은 서인과 노론이고, 반대했던 것은 남인이다.

그래서 각 정파의 부침에 따라 종모법이 시행됐다가 폐지됐다가 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31년에

<노비종모법>이 확정됐고, 이는 이후 불변의 법령으로 굳어지게 된다.

 

 

잠깐~~

세종 때의 노비종모법과 영조 때의 노비종모법은 좀 다른 종모법이다.

이 부분을 주의 해야 한다

 

세종 시기에 노비종모법을 시행한 이유는

 

태종 시기의 종부법으로 노비 인구가 감소하여 사대부의 불만이 많았으며

 

노비의 처가 양인 남성을 남편이라 속이고

자식을 양인화 하는 패륜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반면 영조 시기의 <노비종모법>은 이런 게 아니다.

 

정확히는 "노양처종모종량법"으로,

 

남자 종[:]와 양인 아내 사이의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 양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본래는 노비끼리 낳은 자식은 종모법,

노비와 양인사이의 자식은 일천즉천을 적용했던 것이다,

 

김상성이 군역(軍役)과 인족(隣族)의 폐해를 통절히 진달하고

이어

 

금년 이후로는

 

모든 종[]의 양처(良妻) 소생은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여 양정(良丁)의 수효를 늘릴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하니, 우의정 조문명이 힘주어 찬성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사(御史)의 진달한 바를 들으니, 양민의 날로 줄어든 폐단이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사소한 폐단 때문에 대체(大體)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금년부터 소생(所生)은 영갑(令甲)으로 정하여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라."

 

<영조실록, 영조.1730(13)> 1226

경기도 암행어사 김상성의 건의에 따라 영조는 <노비종모법>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46

 

노비공감법( 奴婢貢減法)의 시행~~

 

요약하면

1755(영조31) 노비의 공납품을 반으로 줄인 제도다.

 

이 제도에 따라 종래 1661세 사이의 노(남자 노비)가 내던 포 2필은 1필로, (여자노비)가 내던 1.5필은 반필로 줄었다.

 

나아가 1775(영조 51)에는 비가 내던 공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시대에 노비는 그 이전에 비해 수가 많아지고 노비 내에 분화도 생겨 노비간에도 우열이 있었다.

 

그중 공천(公賤)은 사천(私賤)보다 권세가 커서 노비이면서도 노비를 거느릴 정도였다.

 

양반들이 그 수로 재산의 정도를 과시하기도 하였던 노비는 매매·기증·공출(供出)의 대상이었으며,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상속되거나 세습되었기 때문에 도망자가 생겼으며,

 

이를 막기 위해 도망노비를 추포하기 위한 추쇄도감(推刷都監)을 두기도 하였다.

 

한편 관노비는 전부 독립하여 생활하면서 입역(立役) 또는 공포(貢布)의 의무를 지녔다.

 

공천으로 독립된 가정을 이룬 이른바 외거노비 중

외거노(外居奴)는 매년 포 1, 저화(楮貨) 20장을 바쳤고,

외거비(外居婢)는 포 1, 저화 10장을 바쳤다.

 

이들에 대한 관리는 사섬사(司贍司)가 맡았다. 한편 사천으로 독립 가정을 가진 자 중 사노는 매년 면포 2, 사비는 면포 1.5필을 주인에게 바쳤다.

 

그런데 노비에게 부과한 노비공(奴婢貢)은 공천보다 사천의 경우 점차 부과액이 증가해 생계를 위협할 정도였다.

 

노비공감법은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한편 실학자 정약용은 <노비종모법>을 비판했다.

 

1731(영조7) 실학자 정약용은 노비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一賤則賤_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신해년(1731)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_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망하는 것(亂亡)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정약용의 주석에 따르면

 

임진년(1592) 난리 때에는 남방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한 사람들이 모두 집안의 종 수백 명으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임신년(1812) 난리 때에는 고가 명족(故家 名族 오래된 명문 집안들)들이 창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한 명의 종도 구하기 어려웠으니,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대세가 완전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다

 

노비제 완화를 주장한 측은 서울 경기 지역에 터 잡은 서인 계열이었고

지방의 군소 지주인 남인들은 격렬히 반대하는 양상이 일반적이었다.

 

뿐 만 아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_跋顧亭林生員論>에서

나는 나라의 모든 백성이 통틀어 양반이 될까 걱정한다.

....... (중략).......

다 귀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하다.’고 주장해 노비제도와 신분 제도를 옹호하고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47

 

조선 23대 임금 순조 1년 때

공노비가 해방된다.

 

1801(순조1) 순조는,

영조와 정조가 노비의 부담을 덜어준 사례가 있음을 언급한 뒤,

 

우리 숙종 대왕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조정에 하문하신 다음 노공(奴貢)의 반과 비공(婢貢)3분의 1을 줄이셨고 우리 영조대왕께서는 여러 사람의 괴로움을 안타깝게 여겨 비공을 면제하고 또 노공의 반을 줄이셨다면서

 

숙종 영조 시대에는 노비의 부담을 덜어준 사례가 있음을 언급한 뒤 각 관청에서 노비 추쇄(推刷)의 폐단이 여전함을 지적하였다.

 

순조는

 

허다한 사람들이 그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지아비는 그 아내와 이별해야 하고,

그 어미는 자식과 이별해야 하니, 가슴을 두드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마 이별하지 못하였다.

 

가끔 불교에 몸을 맡겨 스스로 인연을 끊어버리고 여자는 흰머리를 땋아 늘인 채 저자에서 떠돌며 걸식하는 저도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노비제도 혁파(革罷)가 절실함을 선언하였다.

 

순조는

 

왕은 백성에게 임하여 귀천이 없고 내외가 없이 고루 균등하게 적자(赤字:임금의 사랑)로 여겨야 함을 강조하고 ()’라 하고 ()’라고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똑 같이 사랑하는 동포로 여기는 뜻이겠는가?” 라고 반문 하면서

 

결국 내노비(內奴婢) 36,974명과 관노비(官奴婢) 29,093명을 모두 양민으로 삼도록 하고,

 

승정원에서는 노비 장부인 노비안(奴婢案)을 거두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불태우게 하였다.

 

이때까지 노비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물건취급)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는데,

국가 소유 공노비(公奴婢)를 양인으로 해방시켜 줌으로써 당시 부족했던 세금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178509,

도망 노비에 대한 처벌법인 노비추쇄법폐지(정조)

 

1801. 01,

내수사와 각 관방의 노비원부를 불태우고 공노비 66,000명 해방(순조)

 

1886,

노비세습제 폐지(고종)

 

이조 말 신분제의 변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비 중에 부를 축적한 자는 납속하거나 관리와의 결탁을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다.

 

[속대전]에는

13석을 지불하면 사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이에 노비의 신분해방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고, 그 후 1886(고종 23) 노비세습제를 폐지하고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고 그들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1894(고종 31) 730일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를 완전 폐지했다.

 

공식적으로는 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1884(고종 21)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나 동학운동(東學運動)(1894) 때부터 여러 번 시도되었던 신분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실시하여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노비(私奴婢)에 실질적인 해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의 노비산책>>>48

 

조선의 노비제도를 두고

전 서울대 이영훈 교수와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쉽연구소 박현모 교수와의 세종 성군(聖君)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하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 및 저서 그리고 기고문 내용을 가감없이 그대로 소개한다.

 

이영훈 교수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1. “세종은 양반에게만 聖君이었다”(?)

 

세종임금을 재해석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의견~~

 

50 넘게 살면서 한 번도, 30년째 글 밥을 먹으면서 눈꼽 만큼도 의심해본 일이 없다. ‘세종은 성군(聖君)이다라는 명제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을 접하면서 모든 게 무너져내렸다.

 

책장을 넘기면서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실증 자료 앞에 반석 같았던 성군 세종이라는 통념은 맥을 추지 못했다.

 

실증사학자인 이 교수는 2017년 서울대에서 정년을 했다. 그는 한국 노비 2000년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다.

 

2018320일 오전 서울 관악구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영훈 이사장을 만났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노비와 기생이다.

 

17세기 중엽 조선 인구 1200만명 중 30~40%가 노비였다.

 

또한 1663년 한성부(현 서울) 호적을 보면 73%가 노비였다.

 

한 사회에서 노비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인간 예종(隷從)이 심했다는 거죠. 조선시대 인간은 자유인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양반 사대부와 중인들이 모두 노비를 소유했죠. 다른 인간을 노예로 부리면 그들 역시 자유인이 아니죠.”

 

17세기 중엽에 한성부의 노비가 73%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군요.

 

그만큼 노비적 종속이 심각했다는 얘깁니다.”

 

1442년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한 노비고소금지법을 만들었다.

 

또한 세종 때인 1432년 만들어진 노비종모법은 노비제의 기틀을 놓은 법이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 인간의 의식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 아닌가요.

 

고려시대에도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노비는 주인에 대해 법적 권리를 갖고 있었죠.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어떤가요.

송의 황제는 노비제를 폐지했죠.

 

그런 시대 상황에서 세종은 노비의 법적 권리를 박탈한 겁니다. 노비를 짐승의 반열로 내쳤던 겁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등으로 백성을 어여삐 여긴 임금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환상인 거죠. 세종 때에 이르러 노비 인구가 당초 10% 미만에서 30~40%까지 증가했어요.

 

이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들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죠. 이를 무시한 채 세종은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류를 이룬다,

 

인권을 고양했다 등의 얘기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노비 연구 권위자로서 삼국시대 노비와 조선의 노비는 무슨 차이가 있었나요.

 

삼국시대 노비는 조선시대 노비처럼 사고 팔리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힘이 약한 사람이 힘 센 상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당신의 노()가 되겠다고 했죠.

 

자유의지에 의한 엄연한 계약관계였어요. 하지만 조선시대 노비는 그런 계약관계가 아니었어요.”

 

 

기생제는 한국사의 개성적 특질이라고 썼던데요. 무슨 말인가요.

 

특정한 여인들에게 춤·노래와 함께 성접대의 역()을 지게 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어요.

 

중국에도 기생이 있었어요. 하지만 특정 여인에게 성접대의 역을 부여하고 기생의 신분을 그 딸에게 세습하는 제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성접대의 역()을 부여하고 영원히 세습시킨 나라가 세계사에 또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인간 특정 부류에 대한 인간 예종의 관념이 깊었습니다.”

 

세종은 1431,

관비(官婢)가 양인 남성과 낳은 자식 중 딸은 기생, 아들은 관노로 삼자는 형조(刑曹)의 건의를 수락한다.

 

1437년에 국경지대의 군사를 위로할 목적으로 기생을 두라는 지시도 내렸다.

 

 

 

<<<조선의 노비산책>>>49

 

그게 세종만의 사고방식이었을까요.

 

시대적 추세는 있었겠죠. 그런 추세를 이어받아서 세종이 법제화를 결정한 거죠.”

 

역사학에서 경제사적 관점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현실정치를 보면 정치 분쟁이 일어나는 문제가 결국 전부 경제 문제 아닙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3분의 2 이상 되지 않나요.

그걸 빼놓고 역사를 얘기하면 올바른 역사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 기존의 세종 관련 책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기술한 게 기억에 없네요.

 

과학기술을 장려했고 음악을 만들고 한글을 창제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예제(禮制)와 형식을 강조했을 뿐이죠.

 

세종이 얼마나 학문이 깊었고 글씨를 잘 썼고 그림을 잘 그렸는지만 묘사했죠.

 

그 경제적 배경에 어떤 게 있었는지에는 눈을 감았죠.”

 

역사 이해에서 정치사적·문화사적 관점을 중시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 수가 있나요.

 

관념적으로 과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구의 30~40%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정치 체제와 경제적 기초를 무시하고 세종과 양반의 관계만을 주목해 본다면 민주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죠.

 

그것만 보면서 세종이 얼마나 양반을 우대하고 사대부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을 존중했는지 얘기합니다.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양반 밑에 다수의 백성이 인간으로 취급당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로마 사회가 민주주의를 했지만

 

그 사회는 분명히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잖아요. 로마 사회를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보지 않잖아요.

 

우리는 왜 조선시대를 얘기하면서 경제적 기초는 보지 않고 국왕과 양반의 관계로만 보느냐는 겁니다.”

 

정치사와 문화사로 경도된 이유가 뭐라고 보나요.

 

한국의 민족주의죠.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민족인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우수한가. 이런 것을 적절한 수준에서 강조하는 건 필요하지만 과장해서는 안 되지요.”

 

고려에서는 천제(天祭)를 지냈지만 세종에 이르러 천제를 폐했고, 이것이 사대주의를 강화했다고 했는데요.

 

고려가 나라는 작고 힘이 약했지만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존재였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왕은 천명을 직접 받는 존재, 정신적으로는 세상의 주인이었죠.

 

고려의 왕은 제()였어요. 하지만 세종에 이르러 천제를 없애면서

조선의 왕은 황제국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중계받는 제후(諸侯)국이 되었던 겁니다. 조선의 왕은 제후였습니다.”

 

 

환상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집단심리라고 했는데요.

 

어릴 때부터도 내게 세종은 성군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한양가()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세종은 대왕으로 칭했어요. 조선조의 양반들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관념이죠. 조선의 양반들에게 세종은 참으로 지극한 성군이었어요. 오래된 관념이죠.

 

세종 재위 36년간 양반들은 단 한 명도 처형되지 않았어요. 양반들에게 세종은 너그럽고 자애로운 왕이었죠.

그 의식이 지금까지 쭉 내려오는 겁니다. 대신 양인과 노비는 엄격하게 처형했어요. 세종 때 법집행이 엄해졌다고 하죠. 신분 법치를 한 거죠.”

 

무엇이 잘못돼 이렇게 되었나요.

 

근대사회가 성립하려면 실증의 토대 위에서 해체할 것은 해체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으로서 지녀야 할 역사적 기억을 재편성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과정이 빠졌죠. 그 결과 조선조 양반들이 가졌던 관념을 그대로 계승한 겁니다.”

 

 

조선조 국왕 중에서 어느 임금을 성군이라고 평가하나요.

 

단연코 영조 임금이죠. 서민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 정책을 펼친 국왕이었습니다. 노비제를 해체(1)한 사람이 바로 영조잖아요. 영조 이후에 노비 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져요. 사도세자 건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가정사일 뿐이죠.”

 

 

 

<<<조선의 노비산책>>>50

 

주변에서 왜 세종의 잘못한 점을 굳이 드러내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웃음) 많죠. 하지만 역사학자는 어떠한 터부도 해부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읽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국민의 지성이죠. 저는 실증사학자로서 본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2. 세종은 정말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박현모 교수의 반박 내용]

논쟁 제 1라운드~~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2002)에서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수에 대한 두 종류의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담한 추측에 대한 사회의 관용과, 그 추측이 다른 사람들의 논박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오류(실수)를 인정하는 개인의 솔직함이 그것이다.

 

만약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논박)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 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보다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될 때

 

비로소 과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를 읽으면서

 

칼 포퍼의 책을 다시 꺼내든 것은 지식의 성장 조건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칼 포퍼는 지식의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단순성 새로움 경험적 성공을 들었다.

 

이에 비춰볼 때 이 교수의 주장은 ②②의 조건을 충족한다.

 

흔히 세종을 성군이라 하는데, 그는 양반 사대부들의 성군일 뿐 일반 백성들에게는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의 조건에 맞는다.

 

그 이유로 그가 드는 세종시대 노비의 삶의 질 악화와 세종 사후 노비인구 대확장설의 조건에 부합된다.

 

문제는 의 경험적 성공, 즉 그러한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느냐이다.

실록이든 호적(戶籍)이든 그의 대담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세종시대의 노비와 관련된 여러 논저를 검토해보니 이 교수의 주장은 의 조건에서 결정적 흠결이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이 글에서 밝히려 한다.

 

세종은 백성들의 성군이 아니었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종이 노비의 인권과 삶의 질을 크게 악화시키는 법을 만들었고,

둘째)

그 법으로 인해 세종시대 노비의 처지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셋째)

세종 사후 노비 인구가 대확장되었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1)과 관련된 첫 번째 법은 주인고소금지법’, 즉 종이 주인을 고발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즉시 목을 베도록 한다는 법이다. (1)

 

이 법에 대해 이 교수는 1420(세종2) 913일에 세종이 동의해 통과되었다고 하는데(위의 책 53), 사실이 아니다.

 

이날 예조판서 허조는 당태종의 말을 근거로 주인고소금지법을 거론했다.

 

하지만 정작 세종이 받아들인 것은 부민(속관·아전·백성)이 수령(품관·수령·감사)의 죄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수령고소금지법)뿐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51

 

주인고소금지법은

그로부터, 즉 수령고소금지법이 통과된 지 2년 후인 142223일에야 제정되었다.

입법자는 역시 허조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의 실록 기록인데, 처음 입법이 제안되었을 때(14209)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다(議之).

 

이 자리에서 정승인·유정현·박은 등은

그 법을 심히 그르게 여겼다”. 그렇게 하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그러자 허조는 당시 태상왕이던 태종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윤허하지 않으시면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서 울먹이는 허조에게 태종이 감동되어 즉시 통과시켰다(卽從之)’는 게 실록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는 그를 둘러싼 어떠한 찬반논쟁도 없었,

 

세종은 신하들의 과격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책 54).

 

다시 말해서, 양반 지배층이 자기들의 이익 내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노비 관련 법안을 일치단결해 제정한 게 아니었다.

 

또한 허조의 입법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종이 아닌 태종이라는 게 실록 기록이다.

 

따라서 이 법의 책임을 묻자면 결정권을 쥐고 입법을 허락했던 태종,

즉 이영훈 교수가 개혁적인 군주로서, 노비의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던 태종에게 지워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주인고소금지법은 태종의 결정이다.

 

이 교수는 또한 이 법이 제정된 이후 조선의 노비는 주인의 어떠한 불법 행위나 악행에 대해 저항할 법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했다(위의 책 56).

 

1422년 이후

노비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사회적 죽음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일 것이다.

 

노비는 그 당시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어떤 경우는 이 집 저 집으로 자식들을 분산시켜야만 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교수는 세종시대의 노비 상황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위의 책 37)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형하게 했고, 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다<14406>.

 

실제로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아내를 대신해 파직당하거나 유배가기도 했다.

<14279, 14406>.

 

자신의 여종을 임의로 죽인 안주인이 처벌받은 일도 있다.

<14385>

 

그런데도 이 교수는 세종에 의해 노비의 법적 권리가 박탈된 이후 노비에 대한 주인의 침탈이 맘대로 되었다.

 

노비를 죽여도 범죄가 되지 않았다.

 

노비가 노예적 상태로 떨어진 게 세종 때다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선의 노비산책>>>52

 

이 교수의 사실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세종이 1426년에 주인의 노비구살(歐殺·때려죽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변계량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말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세종이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426년 윤724일에 세종이 형조에 내린 왕명(傳旨)을 보면 그와 정반대다.

 

이 왕명에서 세종은

임금 된 자라도 (노비의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못한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인이나 하늘이 낸 백성(天民)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역설했다.

 

노비도 하늘 백성이라는 세종의 백성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아가 세종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노비를 구타 살해한 자는 일체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주저앉거나’ ‘좌절하지않고 노비구살금지법을 관철시킨 것이다.

 

이 교수도 1998년에 쓴 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에서 이 왕명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는 그다지 구속력이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구속력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전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종이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정상이 아닌 인류, 이류(異類)인 노비의 소생을 노비로 만드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것이다(위의 책 63).

 

이런 해석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1) 여기서 당시 세종실록 기록을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세종실록, 세종 4142223>

 

형조에서 주인을 고발하는 노비, 수령을 고발하는 부사·서도·이민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정하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영락 189월 예조의 수교 절해(受敎節該)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요사이 종이 주인의 반역을 고발하는 자가 있는데, 대체 반역하려는 일은 혼자 하지는 못할 것이니, 어찌 발각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종에게 고발하도록 하겠느냐.

 

지금부터는 종이 주인을 고발하는 자는 받아들이지 말고, 이내 목 베라. ’고 하였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에 의거하여 구분 처리할 것입니다.

 

 

 

<<조선의 노비산책>>>53

 

 

또 주문공(朱文公: 주석)이 조정에 아뢰기를,

 

원컨대 폐하는 중앙과 지방의 사정(司正전옥(典獄)의 관원에게 엄하게 명하여, 무릇 옥송(獄訟)에는 반드시 먼저 친소(親疎)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논한 후에 그 그릇되고 옳은 옥사(獄辭)를 듣게 할 것입니다.

 

대체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고, 낮은 사람으로서 높은 사람을 업신여긴 자는 비록 옳더라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그 옳지 않은 자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부사(府史서도(胥徒)가 그 관리(官吏)와 품관(品官)을 고발하고, 이민(吏民)이 그 감사와 수령을 고발한 자는,

 

그 고발한 것이 비록 사실일지라도, 일이 종사에 관계된 것과,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면, 위에 있는 사람은 이를 그만 버려 두고 논죄하지 않을 것이며,

 

아래에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하게 할 것입니다.

 

신 등이 살펴보건대, ‘()는 장()이라 하고, ()는 획()이라.’ 하며,

 

일설(一說)에는, ‘여자 종의 남편을 장()이라 하고, 남자 종의 아내를 획()이라. ’고 하는데, 대명률(大明律), ‘노비가 가장(家長)을 고발하면 장() 1, () 3년의 형벌을 쓰고,

 

다만 무고(誣告)한 것은 교형(絞刑)을 쓰며, 고공인(雇工人)1등을 감형한다. ’라고 하였으며, 본조(本朝)의 영락 5년 의정부의 수교(受敎)에도,

각기 따로 사는 여자 종의 남편은 고공인과 같이 논죄한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 노비와 여자 종의 남편과 남자 종의 아내를 모두 참형(斬刑)으로 논죄하니,

시왕(時王)의 제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주인의 명분(名分)이 엄한 것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그 고발을 받지 말고, 무고율(誣告律)에 의거하여 교형(絞刑)에 처할 것이며,

 

여자 종의 남편과 남자 종의 아내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그 고발을 받지 말고 장() 1, () 3천 리의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또 부사(府史서도(胥徒)가 관리(官吏)와 품관(品官)을 고발하고, 이민(吏民)이 감사와 수령을 고발한 자는 이를 받아 다스려서,

 

그 고발한 것이 거짓인가 참인가를 안 후에, 위에 있는 사람은 논죄하지 않고, 고발한 자만 죄를 더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종사에 관계되는 일과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일이 아니면 이를 받지 말고 장 1, 3천 리의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허조(許稠)가 예조 판서로 있을 적에 이 계사(啓辭)를 올리니, 임금도 또한 그렇게 여겨, 정부의 여러 관청에 내려 보내어 이를 의논하게 했더니,

 

유정현·박은·이원 등이 이를 심히 그르게 여기며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면 수령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허조는 아뢰기를,

 

"수령의 하는 짓은 많은 사람의 이목(耳目)에 드러나 있으니, 비록 이민(吏民)들로 하여금 이를 말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어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일찍이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늙었사오니 만약 윤허(允許)를 얻게 된다면, 신은 죽더라도 눈을 감겠습니다."

 

라고 하며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태상왕(태종: 이방원)이 그 말에 감동하여 즉시 그대로 따랐다.

 

*주석 ①《주문공(朱文公)

중국 남송(南宋)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를 말함. 이름은 희()이고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사람이다. ()나라의 대성자(大成者)이며 그의 학문을 성리학(性理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춘추전국 시대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학문을 훗날 발전시킨 사람은 맹자이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여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송나라 주자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자라는 학자로부터 시작되어 주자학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 말 안향에 의해서 성리학이란 학문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54

 

세종이 노비제를 개악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이 교수가 내세우는

 

두 번째 법은 노비종모법이다.

 

양인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신분을 종래와 달리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하는 법을 세종이 앞장서 입법했다는 것이다.

 

()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출생한 아이의 신분을 노비로 돌리는 종모종천법(從母從賤法)이 그것이다.

 

태종은 노비종부법 즉, 아버지 쪽을 따르게 했었다.

 

노비 관련 두 개의 악법, 주인고소금지법노비종모법중에서

이 교수가 중시하는 것은 후자(종모법)이다.

 

주인고소금지법은 노비의 권리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노비 폭증의 원인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이른바 노비 대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법은 후자인 종모법과 (근거 없는) 세종의 양천교혼 허용이다.

 

실제로 세종은 1432315일에 부왕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 개정을 제안했다.

 

여자 노비가 자주 남편을 바꾸어 양민과 천민을 뒤섞기(混淆·혼효) 때문에 그 자식이 태어났을 때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애매(曖昧)하여 구분하기 힘들고(難明·난명) 자기 아비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패륜까지 발생한다는 게 세종의 상황 인식이었다.

 

세종은 이날 태종이 만든 종부법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륜의 바른 길(人倫之正道)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들은 맹사성 등은 논의 끝에 종부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 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있으니, 종모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관계되는 바가 중하니 다시 깊이 헤아려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날의 종모법 논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위의 책 63).

 

그러나 세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曖昧)하게 갖다 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混淆·혼효)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難明).(‘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이 교수는 자기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이 자진하여이 법을 냈고, 신하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이 제안이 나오기 8년 전부터 신하들과 여러 차례 종부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허조를 비롯해 맹사성, 김효손 등이 종부법의 인륜파괴 문제를 제기하며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세종이 종모법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사건들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산책>>>55

 

그 하나는 각 고을의 창기가 양민과 천민을 번갈아 바꿔 상대하여 자식을 양민으로 만들려 하는 문제점이었다.

 

또 다른 예는 종모법 논의 2년 전인 143010월에 있었던 고미사건이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했다.

 

한마디로 부모 자식 사이를, 부부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교수는 노비라는 재산을 증식시키려는 양반들의 강한 요구에 이끌려 세종이 이 법을 통과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의 결정적인 사실 왜곡은 그 다음, 바로 양천교혼 관련 주장에 있다.

 

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세종시대에 들어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허락하는 양천교혼법(良賤交婚法)이 통과되었고,

 

이로써 양천교혼이 무한정 용인되었으며, 노비인구의 대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

 

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3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어떤 근거 제시도 없이

 

세종이 제정한 종모법에 의해 양천금혼의 빗장이 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위의 책 64).

노비인구 대폭발도 가설일 뿐~~

 

이 교수는 왜 이처럼 양천교혼(양인과 천민혼인) 허용 내지 권장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종모법과 양천교혼이 결합될 때 비로소 ‘15세기 노비인구 대확장의 원인이 세종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천교혼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노비인구 대폭발은 사실인가?

 

보다 정심(精審)한 연구를 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이 주장 역시 빈곤한 몇몇 데이터를 토대로, 검증할 수 없는 추론과 가정의 조합으로 이뤄진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을 자제하려 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의 사실에 의거한 바른 서술(擧事直書)’을 기다린다.

 

모든 논박은 위대한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추측이 없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인류 지식의 도약은 없었을 것이고, 엄밀한 논박이 없으면 근거 없는 주장과 거짓 이론을 판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성한 추측과 고집스러운 편견을, 사실의 연단(鍊鍛)을 거쳐 바른 지식으로 자리매김해주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고결한 의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영훈 교수나 또 다른 분들의 재논박을 기다린다.

필자 나름대로 실록을 토대로 논박을 해보았으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생산적 논쟁의 불모지인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출처] 박현모 여주대 교수 :< 세종은 정말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조선의 노비산책>>>56

 

3. 노비를 죽인 양반을 세종이 벌한 적이 과연 있었나?

 

- 세종 논쟁 2라운드- 박현모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15~17세기 전체 인구의 30~40%는 노비였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으로서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다. 노비에게는 주인을 고소할 법 능력이 없었다.

 

이에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조선왕조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노비의 상당 부분이 노예인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범주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대조적으로 고려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범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노비는 전체 인구의 5% 전후였으며, 많이 잡아도 10%를 넘지 않았다.

고려의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재산이 아니었다.

 

고려 노비의 가격은 조선 노비의 5분의 1에 불과하였다.

이에 고려의 노비는 쉽게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 능력을 보유하였다.

 

*졸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백년동안·2017)에서

 

나는 조선시대에 들어 노비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노비 인구가 크게 증가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으며 고소하면 목매달아 죽인다는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을 제정하였다.

 

또한 세종은 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출생한 아이의 신분을 노비로 돌리는 종모종천법(從母從賤法)을 제정하였다.

 

이 같은 졸저의 주장에 대해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의 박현모 교수가 주간조선을 통해 비판을 제기하였다.

 

세종은 신하들이 건의한 노비고소금지법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그 법을 제정한 사람은 상왕인 태종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내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난하였다.

 

우선 그에 대해 대답한다.

 

세종실록에서 관련 기록은 1420913, 14211226, 142223일의 셋이다.

순서대로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14209월 예조판서 허조 등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하며,

 

군현의 백성이 수령이나 감사를 고소하면 반역죄와 살인죄를 제외하곤 논하지 말고 무겁게 처벌하자는 두 법을 건의했는데,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전자가 노비고소금지법이고 후자가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다.

 

142112월 예조판서 허조가 비부(婢夫)와 노처(奴妻)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참형이 아니라

 

1등 감하여 처벌하자고 건의했는데, 세종이 대명률(大明律)의 해당 율을 잘 살피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14222, 형조에서 건의하기를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않고 교형에 처하며, 비부와 노처가 고소할 경우는 1등 감하여 장() 100과 유() 3000리이며,

 

백성이 수령과 감사를 고소할 경우 반역과 살인의 죄를 제외하곤 수리하지 말고 장 100과 유 3000리로 다스리자고 했는데,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를 관철한 노비고소금지법과 부민고소금지법이 확정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57

 

연후에 세종실록의 사관(史官)13개월에 걸친 그간의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초 허조가 두 법을 제기하자 임금 또한 옳다고 여겨(上亦以爲然) 의정부에 내렸으며 6조가 이를 의논하였다.

 

영의정 유정현 등이 반대하기를 이같이 하면 수령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에 대해 허조는 수령의 하는 짓은 여러 사람의 이목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백성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반론하였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자 허조는 죽기 몇 달 전인 상왕 태종을 찾아가 이 법이 통과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태종이 그 말에 감동하여 허조의 건의에 따랐다는 것이다.

 

이제 박 교수에게 묻는다.

 

첫째) 14209월 노비고소금지법이 처음 제기되자 세종이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가.

 

둘째)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결국 허조가 상왕을 끌어들여 결론을 본 것은, 백성과 수령의 관계를 둘러싼 부민고소금지법이 아닌가.

 

노비고소금지법은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주인을 고소한 노비를 참형에 처한다고 했다가 뒤늦게 대명률에 해당 율이 있음을 알고선 그에 맞추어 교형으로 조정했을 뿐이다.

 

요컨대 노비고소금지법을 둘러싸고 어떠한 논쟁도 없었으며 세종은 신하들의 과격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였을 뿐이라는 저술의 내용은 여전히 옳다.

 

박 교수는 해당 사료를 정확하게 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나를 사실을 왜곡한 사람으로 몰았다.

 

나는 평생 철저한 실증주의자라는 평판을 쌓아왔으며, 그것 하나로 온갖 비난을 버텨왔다.

 

나는 박 교수의 그런 비난에 침묵하기 힘들다.

 

그래서 공개리에 묻는다.

 

내가 못 본 다른 사료가 있는가. 아니면 사료를 제대로 읽지 않은 박 교수의 부주의나 무능력으로 빚어진 실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세종의 리더십을 홍보하는 직업인으로서 그에 불리한 학설을 지우기 위한 고의적 폄훼인가. 박 교수는 대답해주길 바란다.

 

이교수는

저서에서 나는 조선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노비제의 전성기인 1617세기엔 완벽하게 타당하다. 박 교수는 세종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세종은 노비도 하늘이 낸 백성이며, 이에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그 같은 정신에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했으며, ‘노비구살(毆殺)금지법을 제정하여 관철했다고 주장한다.

 

노비고소금지법 이후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증가한 것은 세종이 한탄했던 그대로이다.

 

그래서 몇 차례 그를 금하고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 또한 사실이다.

 

나는 박 교수가 언급하는 노비구살금지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느 법전에 실려 있는 무슨 법인가. 가르쳐주길 바란다.

 

실은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조선왕조는 대명률을 형률로 빌려 썼다.

 

거기에 노비를 관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죽일 경우 노비에게 죄가 있으면 장 100이고, 죄가 없으면 장 60에 도() 1년에 처한다는 율이 있다.

 

세종과 신하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그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세종이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한 사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세하게 읽으면 관료의 직첩을 회수하거나 벌금을 내게 하거나 고향으로 쫓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졸저에서

세종은 노비를 함부로 죽인 양반을 유배형에 처하긴 했지만 금방 풀어주기를 반복했다고 적었다.

 

이 말은 주석을 달진 않았지만

성종실록에 나오는 말로서 당대인의 세종에 대한 기억을 전하고 있다.

그렇게 세종은 양반 관료에 관대하였다. 어느 연구자에 의하면 양반 관료로서 세종에게 처형을 당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58

 

세종의 치세 36년은 그러한 세월이었다.

 

그 사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풍조가 정착하였다.

박 교수에게 묻는다.

 

세종이 노비를 함부로 죽인 양반을 대명률에 따라 장 60이나 100을 치고 1년간 유형을 보낸 사례가 있는가. 알려주면 고맙겠다.

 

<4>1432년 세종은 비가 양인 남자와 출생한 아이의 신분을 노비로 돌리는 종모종천법을 제정하였다.

 

그전까지는 태종이 만든 종부종량법(從父從良法)에 따라 아이의 신분은 양인이었다. 그 법이 세종의 발의와 신하들의 호응으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법을 발의한 세종의 문제의식은 천한 노비가 남편을 자주 갈아 그 자식이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구분하기 힘든 패륜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호응한 것도 마찬가지 취지에서였다. 저서에서 나는 이 사실을 소개한 다음,

 

종모종천법의 제정을 통해 고려왕조 이래 조선왕조 초기까지 이어져온 양천금혼(良賤禁婚)의 빗장이 풀렸으며, 그에 따라 노비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박 교수는

내가 세종이 그 법을 제정한 것은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쓴 것처럼 비난하고 있는데, 저서 어느 대목에 그런 서술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박 교수의 지적대로 세종과 신하들은 인륜을 바로잡을 목적에서 그 법을 제정하였다.

나는 그것을 두고 세종과 신하들은 노비를 이류(異類)나 금수로 간주했으며,

그러한 편견에서 비의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박 교수는 나의 이 같은 해석을 거부하고, 세종과 신하들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인륜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는 취지로 반론하고 있다.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썼지만 나는 정조는 여성의 본성이라고 믿는다.

아무 데나 씨를 뿌리고 다니는 것은 남성의 본성이다.

 

그러한 현대 진화론적 생물학의 설명도 있고 해서 나는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이 그러한 편견에서 비의 성을 마음껏 유린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세종과 신하들의 행위를 인륜을 밝히기 위한 순수 취지였다고 옹호하고 있다. 나는 박 교수가 15세기의 양반 신분인지 21세기의 자유 시민인지 헷갈린다.

 

<5>박 교수는

세종조에 걸쳐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용한 정책이나 법률이 취해진 적은 없으며, 세종은 비와 양인의 결혼을 시종 금지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세상에 어느 임금이 양인과 천인의 결혼을 공공연히 허용한단 말인가.

문제는 양인과 천인의 결혼을 엄하게 단속하거나 당사자나 혼주를 처벌했는가 여부이다.

태종까지만 해도 그러하였다. 양인과 천인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그 소생을 양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세종은 처벌은커녕 그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비 주인의 재산을 불리는 유인을 제공하였다.

가령 오늘날의 부동산투기와 관련하여 정부가 그것을 해도 좋다는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투기 수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상 투기를 용인한 꼴이다.

 

세종이 바로 그러하였다.

양인과 비의 소생을 비 주인의 재산으로 삼게 했으니 양천교혼을 유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것을 두고 나는 고려왕조 이래 오랫동안 걸려온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었다고 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59.

 

박 교수는

종모종모법의 제정 이후 노비 인구가 증가했다고 볼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과연 그러했는지는 장래의 연구과제라고 그럴듯하게 제안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인간은 유인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경제학은 그것을 경제인의 행위를 설명하는 공리(公理)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비를 양인과 결혼을 시키면 큰 덕을 보는데 비() 주인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둘째) 단편적이나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관련해서는 박 교수도 알고 있는 1998년의 졸고를 다시 참조해주기 바란다.

 

함경도 길주 최씨 양반가의 노비는 1417년에 2명에 불과했지만, 양천교혼 덕분으로 1457년까지 35명으로 증식하였다.

 

셋째) 노비 신분의 세습률에 관해 지난 50년간에 이루어진 제반 연구가 공통으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관련하여 나는 지승종 교수의 조선전기 노비신분 연구’(일조각·1995)를 높이 평가하며 크게 의존하고 있다.

 

지승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양인과 노비의 자식을 모두 노비로 돌린 법은 노비 상혼(相婚)에서 얻어지는 노비 인구의 단순한 자연적 증가를 넘어

 

양천 상혼의 소생까지 노비화함으로써 노비 인구를 크게 늘리고 그럼으로써 노비 소유의 안정화는 물론 그 규모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승종 교수의 위의 책, 59)

 

 

<6>주인이 노비를 돌로 짓이겨 죽이거나 발바닥을 도려내 죽이는 등 잔혹하게 살해할 경우, 대명률은 노비의 가족을 양인으로 해방하라고 명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세종의 관심은 인색하였다. 세종은 노비의 가족을 관노비로 옮기라고 명했을 뿐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나는 조선 경제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을 사숙하였다.

 

이에 관한 김석형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기막힌 비극과 지옥보다 더한 인종(忍從)의 가혹함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노비는 그의 부모·형제가 그의 면전에서 상전에 의하여 맞아 죽어도, 그의 부모·형제를 찍어 죽이고 코를 자르고 귀를 잘라 죽이더라도 그는 계속 그 상전의 집에서 그 상전의 종살이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세종의 리더십 연구자이다.

 

그도 좋지만 이 같은 당대 노비들의 처참한 인권 실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졸저는 노비제만이 아니라 세종이 만들어낸 기생제와 사대주의 체제도 다루었다.

 

저서에서 지적한 대로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 체제는 한 가지로 얽혀 있다.

 

그 점을 밝힌 데에 저서 나름의 학술적 기여가 있다고 자부한다.

 

남의 연구서를 비평하는 사람은 우선 그 전체적 구성과 논리의 흐름을 파악하고 소개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나는 박 교수가 그런 수준의 논문을 작성하여 학술지에 게재해주기를 고대한다

[출처] :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교수 :<세종논쟁 2라운드-박현모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주간조선 2018.6.18.

 

 

<<<조선의 노비산책>>>60

 

4. 세종은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사대전략가다~~

- 세종 논쟁 3라운드- 이영훈 교수 세종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반박

<1> 이영훈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에서 세종을 양반들의 성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백성들의 성군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 그는 세종의 노비정책과 사대주의 외교를 들었다. 나는 주간조선 2510호에서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의 사실왜곡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간조선 2512호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따라서 세종의 외교정책을 살피기 전에 세종시대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와 나의 논쟁을 짧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가 세종을 16세기 노비 폭증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세종이 재위 초반에 만든 (노비의) 주인고소금지법()으로 인해 노비의 삶의 질이 현저히 악화되었고,

 

재위 중반에 역시 세종이 세운 노비종모법()과 양천교혼(良賤交婚) 방임정책()이 결합하여 노비인구가 대확장되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의 문제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했다.

 

주인고소금지법의 입법 책임자는 당시 상왕으로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라는 점과, 이 법 제정으로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는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록을 다시 살펴보니 입법 책임자는 태종이 아니라 세종이었다.

물론 즉위 초반 세종은 일체개품(一切皆稟)’, 즉 일체의 정무를 부왕에게 품의(稟議), 즉 아뢰고 의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조의 입법 제안을 따른(從之)’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1420(세종2) 913일에 이 법이 통과되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외 이 교수의 세종시대 노비제도 비판은 여전히 허점투성이임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 교수는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했다. 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으며(14346), 주인이 임의대로 죽이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게 했다(1426년 윤7월 형조에 내린 전지(傳旨).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사건과 연루되었을 때 파직하거나 유배 보냈다(14279, 14406).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반론 글에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한 세종의 처벌 수위가 낮았다고 주장했다. 해당 관료의 직첩을 회수하거나 벌금을 내게 하거나 고향으로 쫓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이 교수의 처음 주장(앞의 책 37)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을 받아들여 수정해야 하지 않는가?

 

둘째) 종모법 제정의 배경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사실과 무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1432(세종14) 315일 세종은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으로 인해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 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그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61

 

그 폐단을 고치기 위해 노비종부법을 개정하자는 신하들의 요청은 이미 8년 전부터 계속 있었다. 세종이 주도적으로 발의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이고미 사건에서 보듯이 종부법은 이미 인륜질서를 파괴하는 악법적 요소가 있었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앞의 책 63), 성도덕과 고정관념의 문제로 몰아갔다.

 

그러나 거듭 확인해봤지만 세종은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하게 갖다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이 교수께서 왜 해명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셋째) 양천교혼 관련 주장의 허구이다.

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

 

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3월 등).

 

(이 교수는 양반 재산 증식과 관련해 자신의 책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억이 안 나시면 자신의 인터넷 강의 조선왕조시대의 양반과 노비 : 세종대왕의 종천법’(2015917)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 교수는 양천교혼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나의 지적에 대해 반론 글에서

양인과 비의 소생을 비 주인의 재산으로 삼게 했으니 양천교혼을 유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교수의 해석일 뿐이다.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혼인했다는 사료를 제시할 때만 그 해석이 설득력을 가질 것임은 실증주의자인 이 교수께서 훨씬 잘 알고 계실 터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교수는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

 

즉 양천교혼을 사실로써 증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

 

 

<<<조선의 노비산책>>>62

 

<2> 이영훈 교수는

세종을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군주로 비판했다.

 

조선왕조를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여 태종 때까지 지속되던 하늘 제사(天祭)를 폐지하고, 출정의(出征儀)를 거행하지 않는가 하면, 주자가례에 따라 부왕 사망 시 3년상을 국가의례로 정립했다는 것이다.

처녀와 해청(海靑: 사낭하는 새)을 지성으로 바치는 등 황제를 향한 세종의 성심은그치지 않았다고 비꼬아 말했다(앞의 책 156~166, ‘, 그 완벽한 사대의 예학이여’).

 

명나라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는 이 교수의 언급은 솔직히 말해 논박할 가치조차 없다.

 

그런 성심을 통해 세종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으며, 실제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세종을 사대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그의 억지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세종을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사대전략가라 생각한다.

 

큰 나라의 것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르고 숭배하는 대외의존적 태도를 가진 자를 사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이와 달리 국가이익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성사대를 했다.

가령 이 교수가 세종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해청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교수는 해청, 즉 해동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던 사냥용 매의 진헌을 대명(大明) 사대에서 조선왕의 성심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428(세종10)의 에피소드, 해청 3()을 이미 바친 뒤에

 

다시 2연이 잡혔을 때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황제를 위하여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나머지도 마저 바치게 한 것을 들어 세종의 지성사대를 이야기했다(앞의 책 159).

 

그런데 이 교수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

 

왜 세종이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황제의 마음을 사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143211월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이번에는 추가로 잡은 해청을 숨긴 신하의 처리 문제가 회의 안건이었다.

 

그 문제로 명나라 사신이 불쾌해하며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때 세종이 강조한 것은 의심의 실마리(疑端)’였다.

 

고려 때 간혹 중국 조정을 속이려다가 발각되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고국가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었다.

조선 건국 후부터 정성으로 사대하여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마당에 공교로운 거짓말로써 의심의 실마리를 만드는 것은

 

마치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잘못함으로 공이 깨어지는것과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이 중국 황제와 사신들의 요구를 지성스럽게 받든 사례는 해청만 있는 게 아니다.

 

해청 에피소드 바로 1년 전(1427)에는 5000을 보내라는 황제의 요청을 따랐다.

 

중국 사신들의 온갖 요구도 인내력 있게 수용했다.

금강산 구경, 마포 인삼 등 청구하는 물품을 이루 다 기록할 수없을 정도로 많은 사신들의 요구를 세종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조선의 노비산책>>>63

왜 세종은 그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 주었을까?

재위 중반부인 1432(세종14) 5월 명나라 황제의 요구, 1만 마리를 압록강 건너 요동지역으로 보내라는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이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세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소 1만 마리를 일시에 보내라는 것은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세종과 신하들은 회의를 열어 명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할지, 감면 요청을 해야 할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라 안의 소들이 마침 병에 걸려 많이 죽은 탓에 보낼 수 없다고 버텨보자는 제안이 우선 나왔다. 황희 등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은 절반만 보내자는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세종은 농사짓는 데 매우 중요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소를 명나라 요구대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소를 갖추어 바치는 일이 매우 어렵긴 하나, 국가의 안위(安危)보다는 덜 중요하지 않느냐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세종은 실제로 그해(1432) 7월부터 소 6000마리를 여섯 운으로 나누어 요동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소방(小邦·우리나라)에서는 그전부터 소의 생산이 심히 적고, 또 몸집이 작으나, 황제의 명령을 감히 어김이 있을 수가 없어전국의 쓸 만한 소를 어렵게 뽑아서 보낸다는 편지도 보냈다.

세종의 이러한 판단과 조치는 주효했다. 그해 10월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황제는 조선의 탁월한 현왕(賢王)의 판단에 감복했다면서 지금까지 보낸 6000마리면 족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칙서에 명시된 물건만을 사신들에게 주라는 말도 덧붙였다. 조선의 큰 골칫거리인 사신들의 잡다한 요구를 물리칠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세종은 지성사대로 중국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조선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하던 명나라의 과도한 요구를 줄이고, 양국의 신뢰를 쌓는 데 주력했다.

사신들의 과도한 요구를 차단시키고, 그 파견 횟수를 급격히 감소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외교적 성과였다(연평균 사신 파견 횟수: 태종시대 2.77세종시대 1.12).

한마디로 세종이 하늘제사를 폐지하고, 해청 및 조선 처녀를 정성껏 진헌한 것은 민폐 따윈 무시하고, 제후국 국왕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이 교수가 부정적 의미를 담아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한 더 고차의 정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이 교수는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1433(세종15) 3월의 어전회의를 언급하면서 이 교수는 세종을 정치와 인륜을 구분 못한왕이라고 비판했다(앞의 책 163).


과연 그랬을까? 당시 조선은 총사령관 최윤덕을 압록강 근처에 대기시켜 놓고, 국경 건너 파저강의 여진족 토벌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회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목을 벰)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세종이 걱정하자

신하들이 가장 늦게 도착한 자와 가장 멀리 이탈한 자만 참하자고 하였다고 인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앞의 책 163).

완전히 왜곡된 인용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여진족을 토벌하는 군사의 양식 준비와 명령불복종 문제 등을 의논하고 있다.

후자, 즉 명령불복종과 관련해 세종은 기한 내 도착하지 않은 자와 대오 이탈자를 모두 목을 베면 처벌받는 자가 자못 많을 것이며(受罪者頗多),

반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군령(軍令)이 엄하지 못할 것인데(軍令不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이 교수의 왜곡된 인용과 달리, 세종은 처벌받는 군사가 많아지는 문제점과 군령이 엄하지 않게 되는 문제점 모두를 지적한 다음 그 해법을 묻고 있다. 어디에서도 자애로움에 치우쳐 군대를 허무는말이나 의도를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세종 정부의 파저강 토벌은 대승으로 끝났다. 최윤덕이 지휘하는 총 15000여 토벌군은 그해 419일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기습 공격해 9일간 전투 끝에 여진족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아군 4명 사망).

도대체 이 교수는 어떤 근거로 세종에게서 외교와 군국을 포함한 내외 정치가 인륜의 논리로 관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앞의 책 163) 심히 궁금하다.

[출처] 박현모 여주대 교수 :< 세종논쟁 3라운드- 이영훈교수 세종 비판에 대한 두번째 반박>

 

 

 

<<<조선의 노비산책>>>64

 

5. 세종은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었다

 

[ 세종 논쟁 4라운드- 박현모 교수의 재반박에 답하다]

 

<1>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의 누이가 있었다. 전양지의 처 하씨이다. 경상도 선산부에서 살았다. 1469년 하씨는 남형제의 자녀와 여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친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작성된 상속문서가 전양지 처 하씨 점련문기이다.

 

분배된 노비를 헤아리면 모두 9명이다.

 

그들의 부모가 어떤 신분이고 언제 결혼하여 그들을 출산했는지를 소개한다.

 

1410년경 노() 중생이 양처(良妻) 금장과 결혼하여 1412년에 1소생으로 비() 실대*, 1430년에 4소생으로 비 옥금*을 낳았다.

 

1430년대 언젠가 비 실대는 노 불생과 결혼했는데,

 

1456년에 4소생으로 노 갓동*을 낳았다.

 

비 옥금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알 수 없는데,

 

1452년에 1소생으로 노 소산*,

 

1463년에 2소생으로 노 복중*을 낳았다.

 

1423년경 비 만월이 노 복상과 결혼하여

 

1425년에 비 승덕*을 낳았다.

 

비 승덕이 양부(良夫) 이의와 결혼하여

 

1454년 노 오망지*를 낳았다.

1415년경 비 광장이 양부 최도와 결혼하여

14192소생으로 노 최대*를 낳았다.

 

1410년경 비 기매가 양부 숙량과 결혼하여

 

1418년에 3소생으로 노 을만*을 낳았다.

 

<2>이상에서 노와 비의 결혼은 모두 7건이다.

노와 비의 결합이 2,

노와 양처의 결합이 1,

비와 양부의 결합이 3건이다.

 

나머지 1건은 비부(婢夫)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이다.

 

15세기 전반,

노비 배우자의 신분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이외에도 참고할 문서가 몇 가지 더 있다.

 

1429년의 김무 허여문기’,

1443년의 권명리 허여문기’,

1450년의 유의손 형제 화회문기’,

1452년의 이우양 허여문기’,

1460년경의 권심 처 손씨 허여문기등이 그것이다.

 

모두 1981년 고() 이수건 교수가 채집하여 경북지방고문서집성이란 자료집으로 공간한 것이다.

 

이래 조선 노비제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하였다.

 

나도 그에 참가하여 고문서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기쁨을 누렸다. 노비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담은 논문도 작성하였다.

 

1997년 나는 한국고문서학회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조선전기고문서집성-15세기편이란 자료집을 출간할 때 동참하였다.

 

나의 역할은 위와 같은 상속문서를 교열하고 해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나는 15세기 상속문서에 관한 한 전문가 그룹에 속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65

 

<3> 하씨의 상속문서에서 보듯이 15세기 전반 노비 결혼의 다수는 양천교혼이었다.

 

7건 중에 4건 내지 5건이 그러하였다. 이 점은 다른 상속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오히려 더 압도적 비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김무 허여문기에서 노의 배우자가 밝혀진 경우는 모두 33건인데, 예외 없이 양처와의 결합이었다.

 

문서에 나타난 상황이 대략 그러한 가운데 상이한 시기의 상속문서를 비교하여 노와 양처의 소생이 문서상의 전 노비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인지를 추적한 연구가 있다.

 

양영조의 여말선초 양천교혼과 그 소생에 대한 연구’(1986)

김성우의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2001)이 그 대표적 성과이다.

 

양영조는 태종이 제정한, 비와 양부의 소생을 양인 신분으로 돌리는, 종부법(從父法)이 관철된 14141432년의 기간에 양천교혼이 효과적으로 억제되었음을 밝혔다.

 

김성우의 결론도 동일한데,

 

나는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서평을 작성하기도 했다(‘역사비평’ 2001).

 

어쨌든 15세기 전반 태종과 세종 연간에 양천교혼이 광범했으며 1432년 종부법이 폐지된 이후 더욱 그러했음에 대해선 관련 연구자들의 생각이 한결같다.

 

 

<4> 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졸저에서

1432년 세종이 종부법을 폐지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리는 노비종모법(從母法)을 제정한 것이 양천교혼을 방임함으로써 이후 노비 인구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대해 박현모 교수는 노비종모법의 제정은 인륜을 바로잡기 위한 도덕적 조처이며, 양천교혼의 허용과는 무관하다는 취지로 반론하였다.

 

그러면서 나를 비판하기를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혼인했다는 사료를 제시할 때만 그 해석이 설득력을 가질 것인데,

 

원인과 결과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 즉 양천교혼을 사실로 증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박 교수가 이미 행한 것이며,

 

그에 대해선 내가 이미 대답한 바가 있다.

나는 그 대답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박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요지인즉 양천교혼을 사실로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불 대중을 독자로 하는 주간지(주간조선)에 걸맞지 않게 위와 같이 관련 사료를 번잡하게 제시하였다.

 

다시 설명한다.

 

전양지 처 하씨 점련문기에서 1410년대 이후 양천교혼이 엄격하게 단속되었다면 1465년 현재 9명의 노비 중 합법적 존재는 2명에 불과하게 된다.

 

노비종부법이 존속했더라면 양인이 되었을 노비가 9명 중에서 3명이다. 이만하면 사실로서 증명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나는 박 교수가 양천교혼이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비판할 때

그가 관련 고문서의 분포와 그에 관한 연구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숙지하는 가운데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런 수준에서 대답했는데, 그럼에도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서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은 관련 자료와 연구 성과가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실은 조선 노비제에 관해 논문을 쓴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그들을 모두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새로운 논문을 생산하면 빼놓지 않고 읽는다.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면 고문서학회가 중심이 된 정보의 네트워크가 작동하여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린다.

 

얼마 전 노비를 1만명 이상이나 소유한 세종의 제8 왕자 영응대군의 처 정씨가 1451년 친정으로부터 받은 노비 재산을 적은 상속문서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입수되었다.

 

소식을 들은 나는 곧바로 동 연구원을 찾아 동 문서를 열람하였다.

 

노비는 도합 57명이었다.

 

이 같은 학술과 정보의 네트워크에 박 교수는 속해 있지 않다.

 

박 교수는 노비제에 관해 어떤 창조적인 논문을 쓰거나 새로운 자료를 개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15세기 양반가의 상속문서에 양천교혼이 얼마나 광범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엉뚱하게도 관련 사료의 제출을 거듭 요구하였다.

 

솔직히 말해 노비제와 고문서 전문가들에게 그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은 어지간한 참을성으로는 대답의 글을 쓰기 힘들 정도의 심한 모독이다.

 

 

 

 

<<<조선의 노비산책>>>66

 

<6>박 교수는 노비제에 관해 두 가지를 더 질문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이전에 한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미 충분히 대답했으니 잘 살펴주길 바란다.

 

여기서 연구자의 자질과 관련하여 박 교수가 실록의 기사를 오독한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새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박 교수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을 제정한 왕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라고 주장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그 점이 널리 알려져 졸저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 점은 박 교수가 이미 시인했듯이 박 교수의 실록 오독에 따른 실수이다.

 

아니 실수라기보다 연구자일진대 절대 범해서는 안 될, 다른 무엇으로 변명하기 힘든 일탈이다.

 

주지하듯이 실록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 많이 끼어 있다.

 

연구자는 번역본에서 접한 기사를 인용할 때 반드시 한문으로 된 원문을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실록 기사의 번역에도 일부의 오역이 끼어 있다.

 

번역본은 세종이 노비고소금지법 제정의 건의를 수용한 뒤

 

정부의 여러 관청에 내려보내어 이를 의논하게 했다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의정부(議政府)에 내려보냈다. 6()가 이를 논의했다가 된다.

 

그래야 당시 정책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과정과 부합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원문을 세밀히 살피지 않은 채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는 박 교수가 세종이 동법의 제정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한 가지 빌미를 이루었다.

 

사소한 트집이 아니라 사료를 인용하는 연구자의 신경은 그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으면 안 됨을 환기하는 충고로 들어주길 바란다.

 

<7> 박 교수는 나에 대한 두 차례의 반론에서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따졌다.

 

홑따옴표이지만 인용부호를 달았으니 졸저를 읽지 않은 사람은 내가 그 말을 한 줄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인용이 아니라 요약과 강조를 위한 부호라 해도 졸저의 세종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요약하는 것 역시 큰 오독이다.

 

나는 14세기 후반 이래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대세였으며(졸저 51),

 

조선왕조 이후 태종이 노와 양처의 결혼을 금하거나 처벌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양인으로 돌리는 노비종부법을 결행하는 등 노비제를 봉쇄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그 효력에 한계가 있었으며(52),

 

이후 세종이 노비종부법을 폐지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노비로 돌림으로써 사실상 양천교혼을 방임했으며(63),

 

이후 단종 연간에 노와 양처의 결혼을 금한 정책마저 폐기되었으며(64),

 

이윽고 1460년대의 경국대전편찬에 이르러 노와 비의 소생은 그 배우자의 신분이 어떻든 무조건 노비가 되는 악법이 정립되기에 이르렀음을 소개한 다음,

 

양천교혼을 억제해온 역대의 노비 정책이 이토록 완벽하게 허물어진 것을 세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고 하였다(64).

 

그러고선 세종이 양천금혼(良賤禁婚)의 빗장을 풀어버린 공적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하였다(64).

 

이 같은 세종에 대한 평가에서 나는 한마디 한마디의 표현에서까지 더없이 신중했으며,

 

그 점을 지금도 자부할 수 있다. 어찌 노비 폭증의 원흉따위의 거친 어투를 연구자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8> 박 교수는 논쟁의 영역을 세종의 사대정책으로 까지 넓혔다.

세종이 지성으로 사대한 것은 명 황제의 마음을 감복시켜 공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박 교수의 논설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출처] : 이영훈 교수와 박현모 교수의 세종 성군(聖君) 논쟁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교수 : <세종논쟁 4라운드- 박현모 교수의 재 반박에 답한다>

 

이제 두교수의 논쟁 연재를 마치면서 세종의 고사하나, 그리고 선조임금당시 실록의 내용을 소개한다

 

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세종이 내관을 불러 물었다.

너는 백성의 하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관이 답했다.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전하이옵니다.”

세종은 호미질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니라.”

 

임진왜란 때 노비들이 앞장서서 싸웠다. 왜 그랬을까. 애국심이 넘쳐서? 그럴 리가 없다. 왜군 목을 하나 자르면 상을 주고, 둘을 자르면 면천하고, 셋을 자르면 관직을 준다고 양반들이 꼬드겼기 때문이다(물론 약속은 안 지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비들이 왜군에 붙을까봐 그랬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웬 말이냐?”

 

 

<<<조선의 노비산책>>>67

 

아주 특별했던 노비출신들 ~~~~

 

고려시대 노비출신 이의민~

고려시대 노비 출신으로 하도 유명해서 한 명만 소개하고 조선시대로 넘어간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부친은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라는 절의 노비였다.

 

고려시대 무신정변으로 유명한 이의민은 키가 190cm가 넘고 몸이 아주 좋았다

 

이의민은 완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두 형과 함께 마을에서 횡포를 부려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워낙 힘이 좋아서 형들이랑 같이 동내 깡패 노릇을 하다가 소문이 나서 안렴사 김자양(도지사급)한테 잡혀갔다.

 

천한 신분인데다 워낙 패악질로 유명했던 깡패새끼가 잡혀오니 안렴사는 그냥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김자양 " 얘들아 보통 곤장으로 몇 대 정도 때리면 죽냐?"

향리 " 네 대충 15대 쯤 맞으면 불구가 되고 40대쯤 맞으면 죽죠?"

김자양 "그럼 대충 100대쯤 때려. 중간에 죽겠지 뭐"

 

붙잡혀온 형들과 이의민에 대한 매타작이 시작됐고, 친형 2명은 모두 매 맞다가 죽었다.

그런데 이의민은 100대를 맞고도 살아 남았다.

 

이의민 왈

" 저 이제 가도 돼요..........?" 하고는 멀쩡하게 걸어 나갔다.

 

김자양

"! 쟈 좀 봐라~~~ 뭐냐?? 이리 데려와 봐라. 슬슬 때렸나 확인 좀 하자

 

이의민 " 왜요...저 불렀어요?"

 

김자양 "야 너 쎈놈이구나. “ 하고

김자양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기고 경군으로 선발하였다.그리고 훗날

 

김자양 너 장군 해볼 생각 없냐? 추천서 써줄게"

이의민 "? 싫은데요?"

김자양 "그럼 너는 몇 대 정도 맞으면 죽는지 실험 한 번 해볼까?"

 

이의민 " 추천서 써 주세요 장군 할께요"

 

그렇게 추천서 받고 장교 되었다,

군인이 되어 장교로 특진했을 시기는 문관과 무관의 갈등이 격해지고 의종이 주색에 빠져 국정이 혼란해져 있었던 때였다.

 

11708월 마침내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정중부, 이의방 등이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키자 이의민 역시 이에 가담해 문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는 수박(手搏: 격투기)을 잘 하여 고려 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 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이의민은

117310월 무신들의 정변에 반발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의종 복위 음모를 막기 위해 산원 박존위와 함께 의종의 유배지인 경주로 직접 내려갔다.

 

같이 술상에 앉아 기회를 엿보다가 의종의 척추를 접었다 펴서 시해한 후 시신을 가마솥에 넣어 연못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을 총애하던 군주였는데 그렇게 잔인했다.

<고려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의종 시해의 공을 세워 대장군으로 승진하지만 자신을 후대해 준 의종을 직접 시해했기 때문에 이후로 두고두고 반대파에게서 배은망덕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낙인이 찍혀 버렸다.

 

이의민(李義旼)의 처() 최씨(崔氏)

마음이 흉한(兇悍)하여 질투로 인하여 가비(家婢)를 죽이고 또 노()와 더불어 사통(私通)하니 이의민(李義旼)이 노()를 죽이고 처()를 쫓은 뒤 양가(良家)의 여자로서 자색(姿色)이 있는 많은 여자를 인치(引致)하여 혼인하였다가 곧 다시 버리기를 밥 먹듯 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은

무릇 뜻에 거슬린 자는 문득 이를 죽였고 아름다운 부인(婦人)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들으면 그 남편이 나간 틈을 엿보아 반드시 위협하여 이를 난행(亂行)하였고 길에서 아름다운 부인(婦人)을 만나면 노비를 시켜 안고 가서 강간을 했다.

 

이의민은 명종임금(최충헌 무신집권) 당시 의종을 죽인 죄를 물어 죽임을 당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68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은 천출(賤出)?인데 신분세탁(?)을 했는가 ?

 

정도전의 아버지는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한 청백리 정운경( 鄭云敬.1305~ 1366)의 아들이다

 

정운경이 언제 어디서 혼인했는지 내용을 알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정도전 또한 정확한 출생기록이 없고 다만 추측에 의해 1337년 혹은 1342년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정도전의 출생연도는 태조실록태조 5726일 사기와 삼봉집포은 봉사고서와 교류한 여러 문인들과 비교해 볼 때 1342년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영주지방 토속성씨인 영천 우씨(묘비에는 榮州禹氏로 새겨져 있음: 출처:영주시민 신문)라고도 하며 어떤 역사서에는 단양 우씨라고도 한다.

 

1383,

정도전은 정몽주의 소개로 알게 된 동북면지휘사 이성계와 왕래를 하였고

 

1388

위화도회군이후 정도전의 속 마음(새왕조 건국)을 알게 된 정몽주.이인승.우현보 등이

 

정도전의 모계(母系)의 천출(노비) 출신을 트집 잡으며 그를 긍지로 몰아넣는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정도전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해서 잘나가던 분이다

문제는 어머니 쪽이었다.

 

단양 우씨 가문에서는 정도전의 어머니 우씨는 가문의 여식이 아닌 노비출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도전은 단양 우씨 가문의 노비가 되는 셈이다.

 

정도전의 외조부 우연의 정실부인은 연안 차씨이고 정도전은 외조부 우연의 비첩(婢妾)과의 사이에 태어난 노비출신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의 증조할머니가 노비 출신이다.

고려 시대에는 일천측전 , 부모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이라는 잔인한 불문율이 있었다.

 

그러니 정도전은 당시로 보면 당연히 천민 출신인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건국 이전 고려말에 신분문제로 고초를 겪게 되고 건국 이후 자신의 신분을 문제삼은 우현보의 자식과 손자를 도륙했다.

 

정도전 왈

"왕은 똑똑할 수도 있고, 멍청할 수도 있다.“

 

지금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하늘이 왕을 점지해 준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 이런 생각은 굉장히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왕을 바꿀 수는 없으니 그 밑에 있는 재상이 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좀 모자란 왕이 왕위에 올라도 재상이 바로잡아주는 재상 중심 정치, 어쩌면 지금의 내각책임제 비슷한 정치를 꿈을 꾼다

 

정도전이 생각한 이런 재상 중심의 정치 구상은 왕족, 특히 이성계 아들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정도전은 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상정치를 통해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야심만만한 방원과 방간을 버리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 어린 방석을 태자로 삼게 된다.

 

1389

1차의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후 조선역사는 오히려 조선건국을 방해한 정몽주는 받들고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 그의 이름 석자는 모든 서훈이 최소되는 등 역신(逆臣)으로 기록되었다.

 

이방원은 정도전 같은 서얼 출신이 고위관직에 진출 하지 못하도록 악법을 제정했다.

 

정도전은 후세의 양반들에 의해 완전히 천출(賤出)로 규정하게 된다.

 

정도전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 2(1865)이었다.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넷째 아들(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69

 

노비 목인해~~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활동한 목인해(睦仁海, ?~1408)라는 사람이 있었다.

목인해는 노비 출신이었다.

 

<태종실록>에서는

목인해는 사망한 재상 목신우(睦臣祐)의 기첩 자식이었다고 했고

 

목인해는 김해 관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인해는 고려 때의 재상 목신우가 김해 관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것이다.

 

천자수모법에 의거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 관노가 되었던 것 같다.

 

고려 때만 해도 천자수모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문헌에는 목인해가 고려 우왕의 아들이라고도 적혀 있다.

실록상으로는 목인해는 관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지위가 높았다고는 하지만, 목인해는 어디까지나 노비였다.

고위층의 자식이라 해서 무조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아버지를 상대로 호부(呼父: ‘아버지라고 부름)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재상의 자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면 재상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목인해도 아버지라고 부를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지위를 잊고 노비 신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노비였던 그가 아버지의 지위(재상)에까지 오르려 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한 그의 일생은 출세지향형 인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목인해는 뚜렷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활쏘기 기술이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조선군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심지어는 조선 전기의 기병들조차도 창보다는 활을 더 많이 썼을 정도였다.

 

정규 기병 중에서 활을 쓰는 병사는 60퍼센트, 창을 쓰는 병사는 4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무과 시험에서도 활쏘기가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무예를 경시한 선비들도 활쏘기만큼은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잘 쏜다는 것은 중요한 출세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목인해는 한 쪽 눈이 없는데도 활을 잘 쏘았다.

그런 그를 처음 발탁한 것은 이성계의 사위이자 경순공주(慶順公主)의 남편인 이제(李濟)였다.

 

경순공주는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였다.

그 뒤, 목인해는 이방원 수하가 되었다.

 

 

목인해는 이 시기에 이방원의 도움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의 도움으로 중앙군 장교인 호군(護軍)이 된 사실로 보아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70

 

목인해의 출세 비결은 탁월한 활쏘기 능력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목인해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반역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승자 이방원의 반대편인 패자 정도전의 사람으로 분류됐던 것이다.

 

<태조실록>(태조 7826.1398. 10. 6.)에서 제1차 왕자의 난을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목인해, 박미, 이천우는 청해수군(靑海水軍)으로 충군(充軍)하며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청해는 동북면(함경도)의 지명이다.

 

수군은 신분은 양인이지만 직업은 천인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일종이었다.

 

수군이 아닌 자가 수군이 되었다는 것은 죄인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이는 목인해가 정도전 편에 섰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자의 난 직전만 해도 정도전의 세력이 훨씬 더 강력했으니 출세를 위해 주군인 이방원을 등졌던 모양이다.

 

중앙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그는 이 때문에 함경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목인해는 수군으로 쫓겨난 지 얼마 후에 그는 이방원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정종 2(1400) 2차 왕자의 난 때는 승자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사병이 권력자의 무력 기반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목인해는 뛰어난 궁술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살아난 목인해는 마지막 승부수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태종 이방원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목인해가 조대림을 끌어들인 배경은 그가 태종 81110(1408. 11. 17.)부터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소속의 좌군도총제를 겸직했기 때문이다.

 

삼군도총제부는 오늘날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하고, 좌군도총제란 삼군의 하나인 좌군의 감독자에 해당한다.

 

세 명이 좌군도총제를 겸했기 때문에 조대림 혼자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군부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조대림을 끌어들인 것이다.

 

조대림은 목인해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는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목인해는 도리어 조대림을 역모 혐의로 고발해 버린다.

 

동시에, 그는 비상 상황이라 속여 조대림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인솔하고 출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때가 태종 8125(1408. 12. 21.)이었다.

 

목인해의 운명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암시만 받은 게 아니라 실제로 철저히 무너졌다.

조대림이 반역 혐의로 체포됐지만 사건의 진상은 곧 밝혀졌다.

 

목인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조대림을 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실, 조대림은 스물두 살밖에 안 된데다가 큰일을 벌일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태종은 격노했고 사건을 주도한 목인해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대림은 어찌 됐든 반역에 연루됐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태종은 사위에 대해서만큼은 관용을 보였다.

 

조대림이 목인해의 꾐에 넘어갔다는 점만 부각시킨 것이다.

 

태종의 신뢰를 받는 대사헌 맹사성 등이 관용 없는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태종은 맹사성을 장 100대를 때리고 귀양 보내면서까지 사위를 살렸다.

 

목인해가 즉각 처형된 것도 조대림에게 혐의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태종의 의지 때문이다.

 

제일 밑바닥에서 제일 위를 추구했던 목인해의 마지막 승부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당시 노비 목인해의 역모 사주 사건은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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