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모

조선노비이야기(2)

조선노비이야기(2)

<<<조선의 노비산책>>> 71

 

태종의 사돈제의를 거절해 노비가 된 이속~~

 

왕실과 사돈 맺기를 거부하다 노비로 전락한 이속에 관한 이야기다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실과 혼인하면 왕실 가족이 된다.

세자와 왕자가 나이가 차면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절차에 들어간다.

공주나 옹주는 어떻게 했을까?

 

공주나 옹주도 간택령을 내려서 입맛데로 골라 잡았다

조선시대 임금의 사위도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기준에 따라 선발되었는데 이들을 바로 부마라고 한다.

부마(駙馬) 란 황재가 타는 부마를 맡아보는 부마도위(駙馬都尉)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전이나 세자빈처럼 왕실로 시집온 여자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왕실로 장가든 남자들 이야기는 별로 알려지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친정의 존재감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왕살 거족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태종 시절까지만 해도 왕의 사위는 그래도 끗발있는 자리였는데....

세종 임금(26) 때 이 제도를 확 바꿔 버린다.

 

세종대왕 왈

 

사위(부마)가 어떻게 왕자랑 동급이냐?

그리고 앞으로는 왕자 보다 한 등급 아래로 내려서 위()로 불러라 그리고 처가(妻家) 덕 본디는 말이 나오지 않게 웨만하면 관직에 못 올라가도록 해라 알았지~~”

 

부마의 지위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왕의 사위라는 프레미엄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종 시절 만큼은 아니어도 부마 자리는 여전히 행세깨나 하는 가문의 자제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부마 지리를 더구나 조선왕조 통 털어 가장 강력했던 군주 태종의 사위자리를 걷어 찬 남자가 있었다니 정말 베짱(?)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태종이 먼저 손을 내 밀었는데....

 

딸 부자 태종의 고민...

 

부인 10(민경왕후 민씨외 9명의 후궁)에게서 무려 1217녀를 낳았다.

원경 왕후 민씨는 아들 넷. 딸 넷을 낳았고 후궁들에게서 813녀를 낳은 것이다.

 

당시 태종의 사위들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자식들이었다. 장녀 정순공주는 이거이(李居易)의 차남 이백강에게 시집을 갔고. 이거이의 장남 이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와ㅜ결혼을 했다. 겹사돈이다.

 

이거이가 누군가?

1.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오른 팔이었다.

훗날 태종의 사병혁파에 반대하여 유배되어 폐서인이 되었지만 부마 이백강은 유배에서 풀려나 태평허게 살았다,

 

태종의 둘째 공주 경정공주는 개국공신 조준의 며느리로, 셋째 경안공주는 공신 권근의 며느리로, 넷째 정선공주는 남경문의 며느리가 되었다,

 

여기서 짐깐, 정선공주와 남경문의 아들 휘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역사에 그 유명한 남이장군이다. 젊은 나이에 유자광의 모함에 빠져 처형을 당했다.

 

상기 네 명의 공주는 모두 원경왕후의 민씨가 낳은 공주들이다.

본처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궁에게서 낳은 서녀(庶女)들이다.

서녀 옹주는 모두 13명이다.

 

당시 태종은 사위들을 모두 군 요직에 임명했다.

하지만 왕의 사위가 되면 감수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남자들에게 흔했던 바람 피는 행위다.

그리고 아내인 공주.옹주가 죽으면 재혼을 할 수 없었다. , 새 장가는 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 맞이 한다고 해도 아무리 출신이 양반이어도 첩으로 기록 될 뿐이다,

그러나 어느 양반 댁이 첩으로 들어오려고 하겠는가?

 

실제로 왕녀가 일찍 죽은 경우 부마들이 재혼을 승인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절대 불가였다.

 

우여곡절 끝에 새 장가를 들어도 그 마누라는 일 뿐이다.

그들 사이에 낳은 자식은 서자였다,

 

그런데도 부마의 인기는 여전했다. 로열 페밀리로 합류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72

 

 

배짱 좋은(?) 춘천부사 이속은

태종의 사위 제안을 거부 했다~~

 

태종은 내시를 시켜 점쟁이 지화(池和)를 불렀다.

내가 딸을 시집 보내려 하니 중매 좀 서 달라. 잘 골라라 알았지. 섭섭지 않게 해주마

 

태종의 명을 받은 지화는 후보검증 작업을 시작했다.

지화는 괜찮다고 생각된 이속의 집을 방문 했다.

 

왕명으로 왔으니 아들 사주 팔자를 불러 주세요~”라고 이속에게 말했다.

뭐 내 아들이 임금의 사윗감 후보라고......‘

 

그런데

권궁주( 權宮主)의 딸이면 아들을 주겠는데 다른 후궁들의 딸이라면 내 아들을 줄 수 없구먼~~!!“

 

아니 뭔 말씀......“

여기사 잠깐 권궁주는 성균관 권홍의 딸로 후궁 의빈 권씨가 된 후궁이다.

 

이속의 말은 가히 당시로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태종은 권궁주의 미모에 반해 그 집에 연못까지 파주고 누각도 세워 주었다.

 

원해 후궁은 궁녀 출신이자만 권궁주는 집안 뼈대 부터 달랐다.

 

점쟁이 지화 왈

 

의빈 권씨 딸 정헤 옹주는 지난 번 시집갔는데..... 그럼 결국 왕이랑 사돈을 못하겠다 그말인겨.....?“

 

이속 왈

그래. 난 궁녀 집안과 사돈 할 생각없는겨...”

 

이속이 이런 막말을 하며 혼담을 거부한 정신옹주는

 

신녕궁주 신씨(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 출신 후궁이었다.

 

tv드라마에서 이방원 부인의 몸종으로 이방원의 눈길을 받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왕이라면 어머니가 아무리 천첩인 서얼이라도 당연히 왕족이었다.

 

즉 정신옹주는 분명한 왕족이었다.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더라도 그 자식은 단순 왕족을 넘어 왕까지 될 수 있었다.

 

이속은 연안 이씨 집안으로

할아버지 이원발이 고려 대에 공조전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상신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청했지만

 

불사이군 충절을 지킨 명신으로 남아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이귀산은 호조판서와 관찰사를, 큰아버지 이귀령도 좌의정을 지내는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명문가였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굳이 '급이 낮은' 왕녀와 얌전히 혼례를 치러야 정도로 아쉬운 집안이 아니었다.

 

점쟁이 지화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기가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를 부득 부득 갈았다.

 

태종 왈

당장 이속을 잡아 들여라

 

정신옹주 또한 태종이 아주 예뻐한 딸이었고, 그렇기에 혼담도 꽤나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속은 임금과, 그 총애를 받는 후궁과 그 후궁의 딸이자 왕의 핏줄인 옹주까지 무례한 언사로 깔아뭉갠 것이다.

 

당연히 분기탱천한 태종은 이속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죄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심지어 도승지 조말생은 "이속의 죄가 대역에 관계되니, 대역의 죄인 삼족을 멸하여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73

 

이에 태종이

"아이들 일에 어찌 사람을 벨 수 있겠냐"며 다시 사리에 합당한 처벌을 찾도록 했다.

 

그러자 하연이

"베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라고 하자

 

태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으나

 

이것도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잇단 신하들의 상소 러시에 결국 태종은 이속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저것도 너무 약합니다"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첫째로 왕의 명을 거역한 죄,

둘째로 왕명을 수행 중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죄,

셋째로 왕녀에게 천한 혈통 운운한 죄까지 따져볼수록 역모니까 목을 잘라야합니다."라고 태종을 볶아댔고

 

이번에도 태종은

그 등쌀을 못이겨서 이속을 관노로 만들었다. 창원부(昌原部)의 관노가 된 것이다

 

덤으로 예비사위 후보였던 이속의 아들에겐 평생 금혼령 , 다시말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라는 처벌이 떨어졌다.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들이 다시 "이속이 노비로 살아있는 것도 안 될 일이니, 처형까지 시켜야 합니다"라고 상소를 내며 아주 그냥 끝장을 보려고 달려든다.

 

세종은

이 청을 거절하면서 이속은 노비로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속의 아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게도 아들 모두에게 가해진 평생 독신 명령은 나중에나마 풀렸다.

 

훗날 자식도 낳고 과거에도 급제를 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속의 핀결을 마치고 20여일 지났는데

태종은 딸 정산옹주의 혼처를 찾으라고 지화에게 명을 내란 것이다.

 

이때 지화가 추천한 인물은 윤향의 아들 윤계동이다.

 

윤향은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다,

뼈대 굵은 파평윤씨 가문의 사람으로 대사헌. 공조판서.형조판서. 호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배중이었다.

 

윤향이 귀양을 간 이유는

 

'위화도 회군은 오로지 태조의 덕업인데, 여기에 끼어서 한몫 챙긴 놈들은 항우 진영의 배신자 정공이나 다를 바 없으니 공신 대우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세력의 시초가 결국 전주 이씨 관련 위화도 회군공신들인 걸 생각하면 좋게 말해 대담하고 강직한 거고 까놓고 보면 그야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소리다.

 

태종 왈

윤향이 내 딸을 며느리로 데려 가는데 오케이 했다구

그러면서 윤향의 처남 홍여방을 불러

 

너 좀 내려가서 윤향을 데려와라. 그리고 장관자리 하나 만들어 봐라......임금과 사돈인대 체면을 세워 주어야지.”

 

결국 윤향은 아들이 정신옹주와 결혼한 덕분에 유배에서 풀려나고 관직에 다시 복직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74

 

이속 사건 이후

 

태종는 왕실 가족 혼사에 간택령을 도입하기로 결심했으며 가능한 지원자 중에서 왕족의 혼사를 처리하도록 했다.

 

조선 왕실의 기본적인 혼인 절차가 완성되었는데

간략히 왕실의 간택절차를 알아보자

 

조선왕실의 간택 절차

태종 임금 시절 이전에는 일종의 중매를 통해서 혼인이 이루어 졌다.

 

즉 비빈(妃嬪)을 구할 때는 상궁을, 부마를 구할 경우에는 감찰을 각각 예정된 처녀와 남자 집에 보내 혼인의 뜻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태종대에 이르러 춘천부사 이속의 혼인 거절 사건을 계기로 간택제도가 정비 되었던 것이다.

 

왕실의 혼인이 결정돠면 먼저 금혼령이 내려진다.

 

이 때는 양반 뿐 만 아니라 서민도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이어 적임자의 집에서 스스로 단지를 내라는 붕단령이 내려졌다.

 

여기서 적임자는 사족(士族)으로서 李氏가 아닌 사람 , 부모가 있는 사람. 세자( 혹은 왕자녀)보다 2~3세 연상까지 였다.

특히 혈통과 가문은 좋되 재산과 권력이 없어야 했다.

이는 사치와 교만을 경계하고 외척의 권력남용를 막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점을 쳐서 간택일을 정하고 나면 3단계를 거쳐 간택을 하는데 초간택 후보자는 30명 내외, 재간택 후보자는 5~7, 삼간택 후보는 3명이었다.

 

간택 당일에 처자들이 궐내로 들어오면 넓은 마루에 모아 놓고 각자 앞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써 붙이도록 했고 처자들이 각각 다과상을 내려 먹는 행동거지를, 왕비는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 , 긍녀는 면전에서 관찰을 했다.

 

이 때는 본인의 됨됨이와 용모.,, 어진 인상 등을 기준으로 보았다.

 

이렇게 최종 한명이 선택되면

 

그녀는 곧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가례 전까지 50일 남짓 예비 비빈으로 궁중법도를 읽혀야 했다.

 

그러나 이런 간택 절차는 넉넉하지 않은 선비의 집안에서 처자의 의복과 가마,유모 등 수행원의 복장까지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부담이 컸다.

 

이런 이유로 단자 넣기를 꺼리는 게 현실이어서 초간택에 모이는 인원이 30명 안팎을 겨우 채우거나 그나마 차지도 않아 연기되는 수도 있었다.

 

또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세도정치에 악용되기도 했다.

 

출처 및 참고문헌: 발칙한 조선 인물실록(김성주

 

 

 

조선 초기에 등용된 천인 출신 중에서

가장 고위직까지 올랐던 인물은 박자청(朴子靑)이다.

 

실록에 따르면 박자청은 개국공신 황희석(黃希碩)의 보종(步從:수행원) 또는 가인(家人) 출신이었다.

 

그는 태조 때 중랑장(中郞將: 5.장군 아래 벼슬)으로서 궁문을 지키는데

 

태조의 이복동생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임금의 명령 없이 들어가려 하자 막았다.

 

 

화가 난 이화가 발로 면상을 차서 상처가 났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태조는 이화를 불러

 

옛날 주아부(周亞夫:중국 한나라의 장수)의 세류영(細柳營)에서는 단지 장군의 명만 받을 뿐 천자의 조서도 듣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박자청이 너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이런 것으로서 네가 한 일은 옳지 않다고 꾸짖었다.

 

그러곤 박자청을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시키고 은대(銀帶)를 하사했다.

 

박자청은 임금의 호위 장교로서 유악(=작전계획 수립하는 곳)을 지킬 때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순찰을 도는 성실함으로 큰 신임을 얻었다.

 

태종은 박자청이 건축에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방면으로 중용해 재위 8(1408)에는 나라 안의 모든 건축물과 공사를 총괄하는 공조판서로 임명했다.

 

정도전이 서울을 설계했다면

건축물은 박자청이 지었다고 할 정도로

 

대부분의 도성 건물이 그의 손을 거쳐 건설됐다.

 

태종은 박자청이 지은 건물들을 열거하면서

 

송도(松都:개경)의 경덕궁과 신도(新都:서울)의 창덕궁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모화루(慕華樓)와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위한 곳이다.

 

개경사(開慶寺)와 개경사(開慶寺)와 연경사(衍慶寺)는 고비(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곳)

 

성균관을 짓고 행랑(行廊)을 세우는 것 또한 국가에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는가?“

 

<태종실록 1261>

 

태종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박자청에 대한 사대부들의 견제와 비판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실록 710

박자청은 성질이 까다롭고 급해서 역사를 감독할 때마다 속성으로 하려고 인부를 재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괴롭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자청은 공기를 단축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이 때문에 한양은 개국 초임에도 제대로 된 도성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태종 12(1412)

공조판서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는데 부사직(副司直:5) 이중위(李中位)가 인사도 없이 말을 타고 지나가자 박자청이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이례적으로 삼성(三省:사헌부·사간원·형조)에서 합동으로 탄핵하자

 

태종 왈

박자청은 다만 외로운 종적이고 대가 거족(大家巨族)이 아니다......

대개 삼성(三省)은 종사에 관계된 죄나 합동으로 신청하는 것이다.....

어째서 박자청을 이렇게 심하게 미워하는가?“ 라고 비판했다.

<태종실록 12514>“

 

태종은 이때

박자청이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도리어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동정하면서도 ‘(박자청을) 다른 사람으로 택해서 아뢰라고 명했다.

 

하도 비판이 거세자 교체를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박자청이 일을 잘 알고 부지런하니 갈 수 없습니다라며 대안이 없다고 보고할 만큼 그의 일솜씨는 최고였다.

 

박자청은 굉장한 능력과 소신을 지녔던 인물이다.

 

고려 시대 한 가문에서 일하던 천한신분이었지만,

 

왕조 교체라는 불안한 정국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장관과 서울시장 직까지 올랐으며,

 

필요하면 임금에게 대들기도 했지만 죽지 않았고 도리어 능력을 인정받아

 

1423년 세상을 떠나면서 '익위(翼魏)'라는 시호까지 받는다.

 

 

<<<조선의 노비산책>>> 76

 

세종의 천인 등용~~

 

세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인재를 등용했다.

 

하나는 인물의 장점을 간파해 등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장점을 간파하는 세종의 능력은 육진 개척의 영웅 김종서가 잘 보여준다. 세종은 김종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유학을 공부한 신하)으로서 몸집이 작고 무예도 짧으며 행정 능력(吏才)은 뛰어나니 장수로서 마땅하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에 임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했다.

 

4()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일을 처리한 것이 알맞아서 그 효과를 보았으니 포상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2275>

 

체구 우람한 무신이 아니라 몸집 작은 문신을 육진 개척의 적임자로 본 것이 세종의 능력이다.

 

김육(金堉:1580~1658)은 그의 저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서

 

세종 왈

 

비록 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사진은 능히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고 전한다.

 

김육은

조선시대 중기 인물로 조선 최고의 관료학자로 꼽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당시 사회에서는 혁신적인 조세법인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화폐의 유통과 같은 실물경제 감각을 지니고 실천한 빼어난 관료였다.

 

이처럼 통념을 뛰어넘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이 세종을 성공한 군주로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가 정점에 서 있는 신분제 사회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능력이 뛰어날 경우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최장수 영의정인 황희도 그런 인물이었다.

 

세종실록 106월 기록을 보면

황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라고 전한다.

 

실록은 이어 황치신은 그 부친(황희)이 황군서의 정실(正室) 자식이 아닌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썼다.

 

황희 집안 차원에서 모친이 천계(賤系)라는 사실을 감췄음을 알려주지만

 

황희의 모계(母系)는 세종을 비롯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서자 출신 황희를 최장수 영의정으로 등용한 것이다.

 

세종 때는 미천한 신분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태종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에게는 동래 관노(官奴) 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장영실(蔣英實)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능력을 발휘해 고위 관직에 올랐다.

 

 

<<<조선의 노비산책>>> 77회

이런 인물들은 대략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무관 계통,
다른 하나는 중인계급이다. 특히 그들은
기술자·과학자들로서 모두 실용을 중시했던 세종임금 시대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장영실(생몰년 미상)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가 기생이었고
신분은 동래관노 출신이다.

중국인인 장영실의 아버지는 고려 말 중국에서 범죄를 짓고 고려로 도망 와서 동래현의 관기와 살다가 장영실을 낳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세종은 장영실의 이런 신분은 개의치 않았다.

중국인 범죄자 아들 노예도 고위 관직 임명하는 세종의 혁명적 인사조치였다,

세종이 열은 과학기술의 황금시대는 장영실이라는 위대한 과학기술자를 중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장영실은 이민족 범죄자의 아들이었고 가장 천한 노비 신분이었다.

신분질서가 가장 중요한 그 시대의 노비신분이며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외국인 범죄자의 아들 장영실을 기술이 있다 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즉위 3년만인 1421년 장영실을 관상감으로 불러 혼천의(천체관측기)제도를 연구하도록 했다. 장영실은 이때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임금의 지혜를 받든 장영실의 기묘한 솜씨는 임금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여기서 그만 두지 않았다.

“장영실 등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역시 천재 군주 세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세종은 또한
“중국의 각종 천문 서책을 수입하고 보루각과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해도를 도면으로 그려오라”는 특명까지 내리고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기를 눈대중으로 보고 와서 똑같이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1년간 중국에서 눈대중으로 외워 그려온 도해도를 바탕으로 각종 천문기구를 제작했다.

세종은 장영실이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자

세종왈
“원나라 자격루보다 그 정교함이 뛰어날 것”이라면서
“장영실은 만대에 길이 남을 기물을 제작했다”고 극찬했다

참으로 대단한 눈썰미라고 해야 할까~

1년 뒤 돌아온 장영실 등은 눈대중으로 외우고, 그려온 중국 흠경각과 보루각의 도해도를 바탕으로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썰미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다니 기이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종 24년(1442)
장영실이 제작·감독한 안여(安輿:임금의 수레)가 부서지자 의금부에 명을 내려 국문시키고 직첩을 회수했다.

그 후 장영실은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는 세종이 능력 있는 천인들에게 기회도 주었지만 그 실책에 대해서도 엄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들 하는데 왠지 궁금증이 생긴다.
 

<<조선의 노비산책>>> 78회

한편 조선역사는
천인(賤人)이  고위직에 오른 입지전에 대해 실록의 사관들은 한결 같이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는 그게 성리학을  중요시하는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 때 정2품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오른 윤득홍(尹得洪)에 대해

세종실록은
“해안 출신의 미천하고 낮은 사람(沿海微劣人)인데 단지 바다에서 있었던 작은 공 때문에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있었던 작은 공’ 중에는 충청도 비인(庇仁)을 노략질한 왜구의 선박 1척과 왜구 수십 명을 생포한 큰 공이 포함되어 있다.

비인을 노략질한 왜구들은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대부들은 기득권의 관점에서 ‘작은 공’ 운운하며 깎아 내렸던 것이다.

세종실록 23년(1441) 2월

“전라도 처치사(處置使) 윤득홍이 나이 70이 차서 치사(致仕:사임)하려고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득홍은 세종 30년(1448) 77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그의 졸기는 “항상 여러 도의 병선(兵船) 및 조운(漕運)의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종이 나이 70이 넘은 윤득홍의 사직을 거부한 이유는 바다에 관한 한 꼭 필요한 해양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종2품 동지총제(同知摠制) 송희미(宋希美)에 대해 세종 12년(1430) 좌사간 유맹문(柳孟聞) 등은

“송희미는 낮고 천한 데서 일어나 별다른 공이나 재능도 없이 단지 활을 조금 잘 쏘는 작은 재주로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2품에 이르렀다”고 비난하고 있다.

송희미는 세종 13년(1431) 북방의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로 부임해 내내 북방을 지켰는데,

세종은 재위 17년(1435),
그가 오래 변방을 지켰다는 이유로 종2품 상계(上階) 품계인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세종은 재위 19년(1437)
여진족이 경원을 이틀 동안 포위하고 공격했음에도 송희미가 나가서 싸우지 않고 150여 명의 백성이 잡혀간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진(自盡:자결)하게 했다.

이때 경원 사람 서득귀(徐得貴) 등 472명이 사형을 면하게 해 달라고 상언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세종은 즉위년(1418) 8월
앞서 살펴본 노비 출신 박자청을 종1품 의정부 참찬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실록의 사신(史臣: 역사를 기록한 사관)은 “(박자청은) 미천한 데서 일어나 다른 기능 없이 다만 토목공사를 감독해 지위가 재부(宰府:재상)까지 이르렀으니 중의(衆議)를 누를 수가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때의 ‘중의’는 백성들의 의견이 아니라 사대부들만의 ‘시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외에도 평양의 관노 출신으로 호군이 된 김인(金忍), 곽추(郭樞)의 노자(奴子) 출신으로 2품까지 올랐던 전흥(田興)과 한방지(韓方至) 등 세종 때 천인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은 많다.

세종 때의 국력 신장과 문화 르네상스는 신분보다 능력을 높이 샀던 실용정신에 힘 입은 것은  틀림 없는 것 같다.

 

 

<<<조선의 노비산책>>> 79회

♣노비, 여종에서 정1품 빈(신빈)으로~~

관청 노비에서 일약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세종은 6명의 부인 사이에 총 18남 4녀를 두었는데
2살 연상의 소헌왕후 심씨(1395~1446)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고

여종(노비) 출신 신빈 김씨는 세종의 자식을 8명이나 낳았다.
그중 두 명의 딸은 일찍 죽었지만 남은 6명은 모두 왕자였다.

신빈 김씨는 1427년부터 1439년까지 12년 만에 아들만 여섯 분을 두었으니 세종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모(중전)의 자리에 오른 대가로 시아버지 이방원(태종)으로부터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소헌왕후 심씨 보다는 후궁들의 신세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세종의 여인은 신빈 김씨(?~1464)일 것이다.

신빈 김씨의 출세기는 <세종실록> 1439년 1월27일자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세종의 육성이다.

세종 왈

“소의(정2품) 김씨를 귀인(종1품)으로 올리고 싶다”고
도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김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중궁(소헌왕후)이 막내아들(영응대군)을 기르게 했다.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했겠느냐.”

남편 세종과 함께 묻힌 소헌왕후는 원래 왕후가 될 수 없었지만 지아비인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 아버지(심온)가 죽임을 당하는 등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졌다.

소헌왕후가 막내아들(영응대군)의 교육을 맡길 만큼 노비출신 신빈 김씨의 심성이 고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은 김씨를 칭찬하면서
“예부터 궁녀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의 계보)엔 본래 귀천이 없었다”면서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고 길게 부연 설명한다.

그러면서 “김씨의 계보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13세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이후에 쌓은 부덕(婦德)은 바른 것”이라면서 “과인이 김씨를 빈(嬪)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한다”고 의견을 물은 것이다.

이때 도승지 김돈은

“셋째 부인 이하는 계보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면서 “김씨를 귀인으로 삼아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동의를 한다.

훗날 김씨는 내명부 정1품인 신빈으로 승격한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신빈 김씨는 ‘선왕의 후궁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풍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이유는 선왕의 부인들이 대궐에 남아있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임금이 선왕, 즉 아버지의 부인에게 마음을 두게 되면 그것은 패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깎게 했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특별히 “신빈 김씨만은 머리를 길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다.

그러나 신빈 김씨는 “환속해도 좋다”는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

그만큼 절제하고 조신하는 성격이었다.

그 덕분에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58년(세조 4년) 신빈 김씨가 목욕을 하러
강원도를 방문하자

“강원도 관찰사는 군자미 5석을 신빈에게 주라”는 명까지 내린다.

그리고 신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1464년·세조 10년) 쌀과 콩 70석을 부의(賻儀)로 하사한다.

신빈 김씨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1365~1420)는 태종의 재위(1400~1418) 중에 13살이던 내자시 여종을 중궁전으로 불렀다는 거니까 140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신빈 김씨가 1464년 세상을 떠났으니까 당대로서는 장수한 편인 60대 초반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참고문헌: 경향신문 이기환의 Hi-story)

♣노비로 추락한 임금의 누이~~

단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이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올라 삼촌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긴 그 짧은 삶은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대중의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단종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단종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었을 한 여인이 있다.

바로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다.

역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생도 한없이 불쌍하고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는 단종처럼 살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 때도 있다. 공주의 삶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왕실에서는 그의 혼사를 서둘렀다.
만약 세종이 사망한다면 삼년상 동안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식구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를 경우 경혜공주는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한성부윤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 2. 6.)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결혼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할아버지(세종)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이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81회

이로써 공주의 동생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열여덟 살이었다. 운명은 공주의 편이 아니었다.

2년 뒤인 스무 살 때, 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도는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 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의 유배지는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1456)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왕자급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고, 남편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귀양지를 바꾸게 되었다.

단종은 이듬해에 죽고 정종은 단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죽었다.
정종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 경혜공주는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놓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바로 공주 신분과 자유인 신분이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세조는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부른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군데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82회
♣나라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조득림~~
조선 성종 때의 일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괴산군)에 봉해진 조득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중상모략으로 나라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남의 집과 땅을 권력을 이용해 빼앗기 일쑤였고

아버지 상중에 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고 하여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문제아다.

그런데 이 골칫덩이  조득림이 바로 노비출신이었다.

조득림은 원래 정희왕후(세조 부인)의 친정 아버지 윤번의 집안 노예였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했다고 한다.

정희왕후가 수양대군에게 시집가고 나서 수양대군에의 눈에 조득림이 들어왔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안평대군을 제거할 때 공을 세웠으며 집권후에는 3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수양대군의 교지를 보자
“충성을 다하여 나를 도와서 이미 비상한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차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야 하겠다.

생각건대
그대는 성품이 빼어나고 일을 처리하는데 공경하며 삼가며 어린 나이에 나를 따라서 항상 좌우에 있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해이하지 않고 받들어 수종하는데 어긋남이 없었다......(중략)......충성이 왕가에 있으니 내가 그대의 공적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에 죄익 3등공신에 임명하여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밭80결.노비8구. 백은(白銀) 25냥쭝 등을 내리노라.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여 나를 섬기도록 하라.“

이렇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조득림이었다.
그러니 성종임금은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조득림을 어찌하기 어려웠다.

공신이 된 노비의 자식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노비출신이 양반되기도 어려웠던 시절, 관리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역모를 고변한다든지 권력자의 종복으로서 공을 세우고 관리가 된 경우는 가끔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자식은 과거시험에 응사할 수 도 있었다.

조득림은 공신에 봉해지기 전 역시 종이었던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공신이 된 후에는 양반의 딸과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응시를 했다.

 

<<<조선의 노비 산책>>>83회

♣연산군과 노비(관기) 장녹수~~

조선시대 性스캔들의 주인공들로 세종(世宗)시절의 유감동(兪甘同) 그리고 성종(成宗)시절의 어을우동(於乙于同)과 연산군시절의 장녹수(張綠水)가 있는데 이들을 조선시대 3대 음부(淫婦)라고 부른다

여기서 장녹수를 살펴보자
장녹수는 비록 천인의 신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녹수는 누구인가?

연산군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 ~ 1506)는

아버지는 문의현령( 현재 충북 상당군  군수)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고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다.

동복언니의 이름은 장복수(張福壽)로 연산군에 의해 면천되기 전까지 내수사 여종이었다.
< 연산군일기 연산 12년 1월 14일>

그러므로 장녹수의 어머니는 천첩이며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서 장녹수도 천민의 출신이다.

천인(賤人)출신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 생활하였으므로 시집을 여러번 갔다.

그러다가 제안대군(성종임금의 친형) 집안 노비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다.

그녀는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고,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했던 것으로 사료(史料)는 적고 있다.

“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11월 25일

이 기록의 내용을 보면 복화술에 목소리가 맑고 동안에 얼굴은 예쁘지 않았으나
남자를 휘어잡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여자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이 장녹수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연산군의 총애함이 날로 발전하여 그녀가 말하는 것은 모두 해주었고,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장녹수의 집으로 보냈다.

또한 금은주옥의 보물을 다 주어서 장녹수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며,
장녹수 집의 노비와 전답, 가옥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장녹수의 형부인 김효손(金孝孫)은 사정(司正: 정7품 무관직)에 제수되었다가 함경도 전향별감(傳香別監 : 임금을 대신헤서 지방에서 향을 피우는 직업)이 되어서 집안이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다.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어 왕이 반하여 좋아하니 거만하게 되었다.

연산군 또한 예능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니 관심사가 같았고

연산군은 어머니가, 장녹수는 아버지가 없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 동질감을 가졌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장녹수의 요령과 욕망이 모두 맞아 떨어지며 연산군의 눈에 들고 연산군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연산군과 장녹수 사이에 연분(戀分)을 맺어준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齊安大君)이었다.

제안대군은 장안에서 이름난 풍류한량이었는데, 정치에는 욕심이 없고 오로지 기생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무(歌舞)를 즐기면서

자신 역시도 기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의 노비 산책>>> 84회

연산군은 자주 미복(微服)차림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는데,

숙부인 제안대군의 집으로 행차하여 술을 마시던 도중 제안대군이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 중에서 아주 괜찮은 아이가 있다며 장녹수를 친히 불러 가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이 한 눈에 반하여 장녹수를 친히 데리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하였고,

제안대군 역시도 그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제안대군은 풍류만을 즐기는 사람이라, 여색(女色)과 권력욕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장녹수와 하룻밤을 보내고, 연산군은 그녀를 잊지 못해 친히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천기(賤妓)를 궁궐로 불러들여 후궁을 삼았다고 비난하였다.

왕실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여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천기이며 이미 시집을 여러번 가서 가정이 있는 여자로 후궁(後宮)을 삼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연산군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장녹수에게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를 내렸다.

이때 장녹수의 나이가 연산군보다 10살 위였다.
장녹수는 유일무이하게 연산군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인이었다.
천하의 요부(妖婦)라도 그런 요부가 없을 지경이었다.

연산군의 조종사 장녹수~~

장녹수는 연산군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했다.
연산군의 아명이 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대신 ‘백돌아‘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연산군은 후궁이 함부로 자신의 아명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장녹수는 욕하고 때리고 꼬집고 연산군을 거의 노비노예 처럼 다루었고

연산군은 비록 몹시 화가 나도 장녹수만 보면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장녹수의 입에 달렸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연산군의 행동을 오이디푸스컴플렉스로 보기도 한다. 연산군과 장녹수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장녹수의 악행도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장녹수의 최후

그녀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1506년(중종 1년)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장녹수는 전비, 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 앞(현 서울시청 광장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분노한 군중들이 그들의 성기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외쳤다. 돌무더기가 산을 이뤘다는데 이후에 시신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금세 돌무덤이 만들어 졌다고 실록에 기록 되어 있다.

슬하에 영수라는 딸 1명이 있었는데 왕위 계승권이 없는 딸이어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18년(중종 13)에도 살아있었고 집, 노비, 약간의 토지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수에게 노비 15구와 가사 1좌 전지 15결을 하사하라”고 명하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월 17일>

그리고 1529년(중종 24년)에는 권한에게 은밀히 시집을 간 일이 알려진 것을 보면 이 때도 생존해있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

[장녹수 노래 가사]

1. 가는세월 바람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담아
가는곳이 어드메냐
구중궁궐 처마끝에
한맺힌 매듭엮어
눈물강 건너서
높은뜻 그렸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의 홀로우는가

2. 한조각 구름따라
떠도는 저 달님아
한많은 사연담아
내숨은곳 어드메냐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뜻 기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우는가

 

<<<조선의 노비 산책>>>86회

사방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여자 아이의 옷을 입고 연지와 분을 바르고 바느질을 배우는 등 여자 아이로 길러졌다.

장성하여서는 벼슬한 선비의 집안에 꽤나 드나들며 많은 여시(女侍)와 통하였다.

그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려다가 여자 스님 비(匕)와 지원 등의 여승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던 여자 스님 비(匕)가 아이를 밸 것을 염려하자 사방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남의 부인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었지만 잉태시킨 적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즉, 턱수염도 하나 없는 사방지는 겉모습이 완전 여자인 탓에 의심 없이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처지였던 셈이다.


여승 비(匕)의 소개로 여자 중 비(匕)의 이웃이었던 李氏 부인과도 인연이 맺어졌다.
여승 비(匕)가 사방지를 소개하길

“양도(陽道)가 매우 장대하다”고 했고 李氏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자 종 반덕(班德)에게 만져보게 하였더니 정말이었다.

일찍이 과부가 된 李氏 부인은 사방지를 여종으로 들여놓고 수놓는다고 핑계하고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식사와 잠자리를 한지 10년이 지났다.

사방지의 간통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어져 세조에게 국문을 하도록 수차례나 청했다. 하지만 세조는 끝끝내 사방지를 벌하지 않고,

이씨 부인의 아버지인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세조의 논리는 사방지가 병자라는 이유였다.

즉, 사방지는 한마디로 「어지자지」라는 것이다.

「어지자지」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한 몸에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로서, 남녀추니 또는 고녀(睾女), 반음양(半陰陽)이라고도 한다.

비록 남자의 형상이 조금 더 많기는 했지만 사방지는 「어지자지」라는 특수한 인간으로 인정 받았던 것이다.

하성위 역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 장대하냐 하였다.

상은 웃으시고 특별히 추국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까 염려된다 하시고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주어 처리하게 하니

이순지는 다만
곤장 십여 대를 쳐서 기내(畿內;경기)에 있는 노자(奴子)의 집으로 보내었다.


그러나 세조가 사방지를 벌하지 않은 진짜 사정은 따로 있었다.

李氏의 아버지 이순지는
세종이 아끼던 공신으로서 판원사(判院事)라 종2품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이순지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또 이씨 부인의 외아들  김유악의 부인은 정인지의 딸이었다.

정인지는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와 영의정이 된 인물이었기에, 세조로서는 李氏와 사방지의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이순지에게 맡겨 집안 일로 처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李氏 부인은 이순지가 시골로 보낸 사방지를 잊지 못하고 온천에 간다는 핑계로 찾아다녔다.
이에 결국 세조는 사방지를 신창현( 현재 아산시)의 공노비로 보냄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순지가 죽은 후,
과부 李氏는 사방지를 잊지 못하고 다시 사방지를 불러 올려서 간통을 즐겼다.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사방지(舍方知)는 다시 이씨(李氏)의 집에 들어가 추납한 흔적이 더욱 현저하니,
청컨대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도 이미 국문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또한 우선 용서하라~ 하니

신숙주(申叔舟)와 심회(沈澮)가 진언(進言)하기를

사방지(舍方知)는 일찍이 한 여자 중을 통간(通姦)하고 여자 중은
마침내 머리를 길렀으니, 그 정상을 알 만합니다.

청컨대 도성 안에 머물러 풍속(風俗)을 오래도록 더럽힘이 없게 하소서~ 하고, 홍윤성(洪允成)은 아뢰기를 신과 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이 함께 들었으니, 이 일은 진실로 허위가 아닙니다~ 라고 여쭈었다.


결국 더 이상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세조는 사방지를 변방의 관노비로 내쳐버렸다.

내치면서 세조가 다시 말하길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 먼 후손)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라고 교서를 내리게 된다.

이 사건은 당사자 과부 李氏의 아들이었던 김유악에게 두고두고 주홍글씨로서 작용했다.

이후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성종 임금 때
이 일로 김유악은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지방관)에서 개차(파직) 당하였고

연산군 때는
이 일 때문에 부마를 선택할 때 김유악의 후손은 궐에 들이지 말라고 했었다.


말하자면 김유악의 가문이 '더럽다'고 하여 사대부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게 된 셈이었다.

 
<<<조선의 노비 산책>>>87회

조선 초 대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자신의 저서 필원잡기에 사방지에 대해 적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서거정은  당시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며
사방지를 관노비로 보낼 때 세조가 의견을 물은 신하였으며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내면서 위 사건의 피해자(?)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로 임명하는걸 반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세조가 서거정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을 실록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서거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는 좀 더 길게 얘기했었던 듯 하다고 한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래에 한 사내종의 모습이 여자와 흡사한 자가 있었다.

이 사내종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옷을 입고, 나이 40이 넘도록 사대부 가문에 출입하다가 이 사실이 드디어 탄로되었다.

대간이 법에 의하여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조(世祖)는 일이 애매하다 하여 이를 용서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의 의사는 어떠하냐." 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신이 소시 때에 《강호기문(江湖記問)》을 열람하였는데 강회(江淮) 사이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수(繡)를 잘 놓았으므로

양가(良家)에서 딸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더니, 돌연 임신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이를 힐책하니,
딸은, “비구니와 더불어 날마다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자 성(性)의 감각이 있는 것 같더니 드디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양가에서 지방관에 호소하여 비구니를 자세히 조사해 살펴보니,
음양(陰陽)의 두 생식기가 모두 없었습니다.

지방관이 장차 이를 관대히 용서하려 하자,
한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소금물로 양경(陽莖 자지) 뿌리 위를 적신 다음 누런 개를 데려다가 이를 핥게 하면 양경이 튀어나옵니다.” 하므로,

지방관이 시험하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지방관이 판단하여 말하기를,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양과 음이요,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이다. 이제 이 비구니는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니, 인도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하고

마침내 죽이니, 강회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하오니, 대개 천하의 사리(事理)가 무궁함이 이와 같사옵니다." 하였더니,

세조는 웃으며 말하기를,

“뭔 그렇게 잡설을 자세하게 늘어놓냐? 경은 부디 억지로 무슨 일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 하였다.


과연 사방지가 실제로 반음양인(어지자지)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방지의 성을 감별하는 일을 직접 맡은 정현조가 정인지의 아들이자 이씨 며느리의 친오빠였으니, , '여장남자'가 진실인지?  양성인간(어지자지)이 진실이지? 그 공정성 여부가 의문으로 남는다.
 

<<<조선의 노비 산책>>>88회

신송주(신숙주 대감 동생)의 고변에서는
여장남자의 뉘앙스를 풍기던 사건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의 스승 하성위(河城尉)와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鄭顯祖)의 조사 이후로는 사건이  사방지가 이의(二儀)의 사람,
다시 말해 양성(兩性)인간으로 뒤바뀌어 버렸다.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남자의 형상이 더 많고 음경, 음낭이 좀 이상할 뿐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 고변했던 신송주 마저 파직시켰다.

세조가 불완전하지만 엄연한 남성인 사방지를 양성인간으로 보아 일을 처리한 데에는 자신의 공신이자 사돈인 정인지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정인지는 김유악을 사위로 삼았는데 김유악은 바로 사방지와 간통한 李氏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씨와 간통한 사방지를 여장남자로 인정해버리면 김유악은 물론 장인인 정인지까지도 체통이 심히 깎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통자들이 오랜기간 간통했으면서도 임신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사방지의 요도하열증에는 불임으로 연결되는 다른 원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다.

임성구지 사건~~
아내가 장가를 가다~~

그 후 명종 3년 때인 1548년에는 사방지보다 좀 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함경도 길주에 사는 임성구지라는 사람이 반음양 인간으로 밝혀진 것이다.
특히 임성구지의 경우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간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신하들이 요물이라며 죽일 것을 간하였으나,
명종은 사방지의 예에 따라 외진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아내가 다시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장가를 간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한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여자가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든 사례가 해외토픽에 나온 적도 있다.

그러나 성전환 수술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할 조선시대에 그런 일이 생겼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1548년(명종 3년) 11월 18일 기록이다
명종실록’을 보면 함경 감사가 혼자 결정하기엔 너무 곤란한 일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있다.
장계 내용에 의하면
“길주 사람 임성구지(林性仇之)는 음양이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 사정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함경도 길주에 사는 임성구지는 어릴 때부터 생식기 구조가 좀 특이 했지만 여자로 자랐다.

그러다 혼기가 되어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첫날밤을 맞은 남편은 혼비백산을 한다. 새색시의 은밀한 부위에 생각지도 못한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 산책>>>89회

당장 남편과 시댁에서 내쳐진 임성구지는 갈 곳이 없어 떠돌다가 남장을 한 후 남자 행세를 한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여자를 만나 장가를 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중 행각은 얼마 가지 않아 들통이 났고,

관청에 끌려온 임성구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 함경 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다.

장계를 받은 명종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법문의 어느 조목에도 그런 사항은 나와 있지 않으니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옛 사례를 뒤적이던 중 세조 때 일어난

사방지 사건’의 판례를 찾아냈다.

명종은 사방지의 예에 따라 임성구지를 그윽하고 외진 곳에 따로 두고 왕래를 금지하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게 하는 판결을 내렸다.

유교 사상으로 인해 성(性)에 대해 엄격히 통제했던 조선 사회에서도 동성애 커플이 꽤 있었다.

남성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던 궁중의 궁녀나 환관촌에 살던 내시의 아내들이 동성애의 주계층이었다.

이들의 관계를 당시에는 대식(對食)이라 했는데, 대식 관계가 이루어지면 서로를 서방님 또는 마님으로 불렀다.

또 이와 같은 여자 동성애자의 상대방을 ‘맷돌남편’이라 일컬었다.

대식이란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해서 동성연애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대식은 바깥출입을 할 수 없던 궁녀들을 위해 가족이나 지인을 처소로 불러들여 같이 밥을 먹게 해주는 제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외부인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이 제도를 이용해 궁녀들이 동성연애 대상을 끌어들인 데서 ‘대식’이 동성애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것.

대식의 역사는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 한나라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노비 산책>>>90회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사편을 보면

“궁중의 옛 규례에 환관과 궁녀가 서로 부부가 되는 것은 한나라 시대부터 그러하였는데, 이를 대식이라 한다.

그런데

궁녀는 환관을 통하여 물품을 사들이고 환관은 궁녀에게 의뢰하여 옷을 꿰매 입는 등 민간의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또 “궁인이 자기들끼리 부부가 되는 것을 대식이라 하는데,
서로 매우 투기했다”고도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궁녀들끼리의 동성애와 더불어 궁녀와 환관까지의 관계도 대식이라 일컬었던 것 같다.

궁궐 안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대식의 폐해를 알리는 상소가 올라온 적도 있었다.

1727년(영조 3년) 7월 18일 조현명이 올린 상소 내용을 보면

“예로부터 궁인들이 혹 족속이라 핑계하여 여염의 어린아이를 궁중에 재우고 혹 대식을 핑계하여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와 안팎에서 교통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출입의 방지를 준엄하게 하여 왕래하는 것을 끊으소서.”라고 아뢰고 있다.

최고의 성군으로 불렸던 세종의 세자빈도 궁녀들과의 대식이 발각되어 폐출된 뒤 자결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조선의 궁궐 안에서는 동성애가 꽤나 유행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방지 사건의 경우 단순한 대식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컸다.

명종은 사방지의 판례에 따라 임성구지에 대한 처결을 내렸지만,

사실 둘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임성구지는 남성 및 여성과 번갈아 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양성인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방지의 경우 수십 차례나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가운데 그 어디에도 여성의 성기가 달려 있다는 보고가 없다.

그런데도 세조가 “사방지는 병자이니 추궁하지 말라”며 양성인간으로 취급한 것은 선대의 공신인 이순지와 자신의 왕위 찬탈을 도운 정인지의 입장을 고려한 까닭이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즉, 임성구지는 어지자지임이 분명하나 사방지는 어지자지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

다음회 에서 참고로 이순지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의 노비 산책>>>    92회

이순지는 천문학 개론서인 ‘천문유초(天文類抄)’를 편찬했다. 별자리를 해설하고 일월성신(日月星辰)에 관한 이론, 점성(占星)에 관한 이론을 정리해 수록한 책이다.

1445년엔 세종의 명을 받아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했다. ‘제가역상집’은 세종 때 만든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1458년엔 세조의 명을 받아 일식과 월식을 간편하게 계산하는 법을 소개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를 편찬했다.

이순지는 자주적 천문역법에 대한 세종의 열정과 혜안을 제대로 간파했고 세종은 그런 이순지를 끝까지 신뢰했다.

1436년 이순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순지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러야 했다.

이때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젊은 학자 김담을 추천했다.

그런데 세종은 1년 만에 그를 불러들였다.

김담도 뛰어났지만 세종은 이순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종은 “내가 간의대(簡儀臺)에 얼마나 열심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라며 상중의 이순지를 불러 간의대 일을 계속 맡겼다.

이순지에 대한 세종의 무한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간의대는 1434년 세종이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운 천문관측대로, 이 간의대를 토대로 다양한 천문관측기기를 제작했다.                   
세조 때인 1462년, 사방지(舍方知) 스캔들로 조선 땅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이 스캔들에 이순지의 딸이 연루되었다.
일찍 과부가 된 이순지의 딸이 사방지와 10년 가까이 내연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신들은 이순지의 사퇴를 요구했고 세조는 마지못해 이순지를 파직했다.
하지만 세조는 이순지를 열흘 만에 복직시키고 대신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3년 뒤 이순지가 죽고 나자 딸과 사방지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순지가 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흠을 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세조의 신뢰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방지 스캔들 이듬해인 1463년 세조는 “이런 일(지리서 편찬)은 이순지처럼 정교하게 할 사람이 없다…음양이나 지리 같은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의논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순지는 세종 시대부터 문종, 단종, 세조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의 노비 산책>>> 93회

♣노비의 신분을 딛고 관리가 된 노비?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반석평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며 학문에 뜻이 있었지만 천민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그의 할머니가 반석평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천민신분을 속이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공부를 시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주인은 15세기에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꼬마 노비의 영특함에 주목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남긴 <성호사설>에 따르면
이 재상은 어린 노비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 이야기가<어우야담>에도 실려 있다.

<어우야담>을 보면,

이 재상은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이나 조카와 똑같은 자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이가 노비 신분으로는 재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재상은 아이를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潘瑞麟)의 양자로 보냈다.

신분 세탁을 통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상가의 어린 노비는 입양된 후 반석평(潘碩枰, ?~1540)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반석평은 연산군(燕山君) 10년(1504)에 열린 소과, 생원시험과 중종 2년(1507)에 열린 대과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그는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방어하며 경력을 쌓았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종2품 차관급),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평안도관찰사, 공조·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죽기 전에 임명된 마지막 관직은 지중추부사였다.

반석평은 이렇게 잘나갔지만, 그를 밀어준 재상 가문은 그렇지 못했다.

주인집은 가세가 기울었다.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재상이 죽은 뒤에는 경제적으로 곤궁해져, 생활은 하층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반석평은 그들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초헌(軺軒)을 타고 길을 가다 주인집 사람들을 만나면 얼른 내려 진흙길 위에서도 절을 했다.


품계가 오르자 반석평은 조정에 자신의 진짜 신분을 고백했다.

더불어 자기 관직을 박탈하고 주인집 가족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청했다.

신분이 드러난 반석평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조정에서는 특례를 인정했다.

또 그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인집 가족들에게도 관직을 수여했다.

그의 의리와 솔직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여진족 방비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tv‘천일야사’에도 소개된 내용이다.

유몽인은 반석평과 같은 인재를 발굴한 주인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주인집 재상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을 과감히 없앴을 뿐 아니라 남의 훌륭함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면서

“그런 인자함이 있었기에 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비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유몽인은 반석평 같은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관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땅이 치우치고 작아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중국의 1,000분의 1도 안 된다”라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양인과 노비를 구분하기 때문에 인재 발탁이 더욱 더 어렵다고 말했다.

사대부들의 생각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것이다.

유몽인은 ‘기자조선’ 이래의 노비제도가 인재등용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반석평 같은 인재들이 정상적으로 발탁될 수 없는 현실의 시발점이 ‘기자조선’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서적에서 등장하지 않은 해설이라고 한다.

유몽인은 조선 명종(1559년.명종 14년) ~ 인조( 1623년.인조 1년) 때의 사람으로 한성부좌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문학가다.

 

 

<조선의 노비 산책>>>    94회

♣[노비 송사 奴婢訟事]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다물사리'라는 여자가 자기는  노비(관비)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특이한 노비 쟁송을 소개한다. 〈출처: 나는 노비로소이다.임상혁 교수지음>


저자는 이책에서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소유권을 다투는 노비송사,
후기에는 묘터의 소유권을 다투는 산송이 중요한 민사 소송이었다.

원고와 피고가 구술이나 문서로 자신의 주장을 한껏 토해내던 조선시대의 송사는 매우 역동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처리한 판결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1586년(선조 19년) 3월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노비 소송이 벌어졌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주장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은 노비라고 반박한다.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왜? 다물사리는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한 것일까.


이지도는 다물사리의 남편이 이지도의 아버지 소유의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며,
그 자손도 자기 집안의 노비라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그 자손도 노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물사리는 자기가 성균관 소속의 관비인 길덕의 딸이라서 자신도 관비라고 주장한다.
부모가 모두 천민일 경우 아버지가 사노비더라도 어머니가 관비라면 그 자손들은 모계를 따라 모두 관비가 된다.

다물사리는 자기 후손들을 혹독한 대접을 받는 사노비보다는 비교적 덜 고통스런 관노비로 만들 생각에서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송관 김성일은 증거조사에 들어간다.

먼저 국가의 공적 장부인 호적을 조사하고 증인을 불러 신문한다.

호적을 조사할 때는 보통의 계보 외에도 원고의 경우 멀쩡한 양인을 자신의 노비라고 호적에 올리는 ‘암록’을 했는지,

반대로 피고의 경우 각종 역을 피하려고 세력가나 기관에 몸을 맡겨 노비가 되는 ‘투탁’을 한 것인지 따져본다.

조사 결과 다물사리는 자기 자손들을 사노비에서 관노비로 바꾸려고 성균관에 투탁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성일은 다물사리의 딸 인이와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의 어머니 서씨 부인에게 지급하라고 결정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도 넌더리를 낼 정도로 노비 송사가 많았다.

이 시대에는 거느린 노비의 수가 부의 척도였다. 노비는 평생 주인에게 노동과 재물을 바쳐야만 했고, 그 자체로 알짜배기 재산이었다.

노비제 사회는 주인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체제이지만, 노비로서는 벗어나고 싶은 질곡의 굴레다.

저자 임교수는
“노비제도가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와 사회 얼개(구조.짜임새)를 규명하는 핵심”이라고 보고 “노비 소송 절차를 통해 당시 사회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조선의 노비 산책>>>    95회

♣글 읽는 선비 노비 박인수~~

우리 선입견처럼 마당을 쓸거나 주인에게 굽실대거나 툭 하면 얻어맞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노비 신분을 갖고도, 존경 받는 학자로서 활약을 펼쳤다.

전문적으로 학문 활동만 하는 노비도 많았다. 박인수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박인수(朴仁壽, 1521~92)는 정2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지낸 신발(申撥)의 노비였다.

누군가는 박인수가 평민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박인수는 노비였으나 높은 학식과 단정한 품행으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제자들까지 거느렸다.

박인수는 노비신분이지만 막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었다.

학식을 쌓고 선비 이상의 몸가짐을 유지한 노비였다.

조선 후기 민담집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인수는 천한 일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면서 선행을 좋아했다.

읽은 책은 《대학》 《소학》 《근사록(近思錄)》2) 같은 것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락 소학 등은 오늘날대학에서 배운 수준의 학문이었다.

박인수는 박지화(朴枝華)란 학자에게서 수학을 했다고 한다.

박지화는 대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손꼽혔다.

박인수는 유학만 배운 게 아니었다. 한때는 불경에 심취해서 승려가 되려고 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했으니, 누구와 대화해도 막힘이 없었을 것이다.

방 안에 거문고를 두고 즐길 정도로 취미도 제법 고상했던 듯하다.

노비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남들이 알아주기나 했을까? 비웃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그의 학문은 남들이 ‘알아줄’ 정도였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존경했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제자들은 박인수에게 죽을 올린 뒤, 그가 다 먹은 다음에야 물러갔다.

그가 선비 중심의 사회에서 얼마나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노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노비 산책>>> 96회

이 정도였으니
박인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노비주(奴婢主) 신발(申撥)도 그를 쉽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인수가 주인집에 기거한 솔거노비였는지 아니면 주거를 따로 한 외거노비였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 노비 신분을 유지하며 공부에 전념한 것을 보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문적 명성을 쌓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그를 위해 희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중에도 그가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외거노비의 중요한 의무는 노비주에게 정기적으로 신공(身貢), 즉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신공을 바쳤을 것이고, 제자가 생긴 후에는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박인수 스스로 신공을 마련했을 것이다.

노비 박인수는 주인집과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집<어우야담>에서는

그가 주인 신발(申撥)의 아들인 신응구(申應榘)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박인수는 그냥 학문이 좋아서였지만,
신응구는 과거시험을 목표로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다.

‘수험생’인 아들을 노비에게 맡긴 것을 보면, 신발(申撥)이 박인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인수가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인집과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박인수가 좀 더 쉽게 선비 사회로 진입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주인이 면천(免賤)을 시켜주지 않았다면, 일개 노비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면천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인수 같은 인물이 면천되었다면, 그 이야기도 분명히 전하겠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노비 신분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박인수의 모습뿐이다.

선비형(型) 노비 박인수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노비가 글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노비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박인수를 떠받든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良人)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 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노비에 관해 잘못 아는 게 많기 때문에 박인수란 존재를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노비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여 살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들이 많이 나온다
 
 

<<<조선의 노비 산책>>> 97회


♣공신이 된 노비의 자식으로 입신한 대표적 인물은
송익필(1534-1599)이라는 인물이다.

송익필은 아버지 송사련이 노비출신이다.
신분에 한을 품은 송사련은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밀고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출세 가도를 달렸고

그 덕에 아들 송익필과 그 형제들은 유복하게 자라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출(庶出)이라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어울렸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심의겸(沈義謙) ·율곡 이이(李珥) ·성혼(成渾) ·정철(鄭澈) 등과 교우하였고 파주의 5인방으로 불리며 정치적 의리를 함께하는 동지가 되었고 조선 예학의 테두로 칭송받는 김장생 등을 제자로 길렀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년)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 70여명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다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유명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岦)·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대의 팔 문장가로 불렸다.

<<<조선의 노비 산책>>> 98회

♣유극랑(?_1592)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자신이 노비인줄 모르고 장군이 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재상 홍섬의 집에서 종으로 일했는데 재상집의 큰 술잔을 깨뜨리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가서 양반과 결혼을 해서 유극랑을 낳았다.

당시에는 <노비 종모법>이 시행될 때이다.
어미가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되는 시대다.

유극랑을 그 사실을 모르고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을 했고 벼슬이 수군절도사(정3품)에 이르렀다.

그는 이순이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오기 직전에 전라 좌수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임진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를 했다.
훗날 병조판서로 추서되었다.

그리고 연안 유씨의 시조로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종이 될 처지였지만 한 성씨의 시조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다.

노비출신 관료들이 겪어야 했던 비애~~

노비출신들은 비록 자신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운명을 거슬렀지만 양반들의 견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앞서 송익필도 노비출신이었기에 과거를 보기보다는 학문에 전념했고 동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의 와중에 반대파가 득세하자 다시 노비로 환천된 사례....

반석평은 노비 출신이기 때문에 임금과 경서와 국사를 논하는 저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임금이 반석평을 공서판서,병조판서로 임명할 때 많은 견제를 받았다.

유극랑의 경우는 애초 어미가 종으로 있던 재상 홍성이 너그럽게  모른 척 해주었기에 다행히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노비가 관료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사례는 극히 제한적이다.

노비들은 대신 돈으로 신분 상승을 도모하거나 민란에 참여를 했다.
그들에겐 출세는 그저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은 혁명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뒤엎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참여한 의병은 양반(양인)이고 왜군에 협력하거나 참여한 조선인은 노비들이다.

임진왜란 때 참여했던 명나라 군대가 자국으로 철수할 때 따라 나섰던 조선인들도 대단히 많았는데 그들은 노비출신들이었다. 

 

 

<<<조선의 노비 산책>>>99회


♣상궁 김개시~~

조선의 27명 왕들 중 재위 중에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廟號:왕의 사후 붙이는 호로 태조, 세종 등)를 못 받은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두 왕들 모두 여인들이 화근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놀아나다가 반정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장녹수와 김개시 모두 다 천민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지존의 왕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여인들이었으나 결코 미인들은 아니었다.

이 두 여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종의 신분으로만 살아야 했다.

미인이 아닌 그녀들이 왕과 처음 마주쳤을 때 떠오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왕을 성적 테크닉(?)으로 사로잡은 후에

왕을 이용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종살이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녀들에게는 왕의 사랑과 인간성보다 왕의 권력이 더 필요했다.

외로운 광해군에게 나타난 여인 김개똥, 부왕 선조에게도 총애 받았다.

광해군은 부왕 14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 태어났는데 3세 때 모친이 사망했다. 모친 사망 후 선조는 인빈 김씨 등 여러 후궁들에게 빠져 어미 없는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박대하고 곤경에 빠뜨리곤 하여 그들은 왕자이지만 외롭고 힘들게 자랐다.

임해군의 비뚤어진 성격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단한 광해군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동궁전의 궁녀 김개시가 나타났다.

그녀의 입궁 시기는 1600년 전후 즉 광해군이 26세 전후로 추정한다.
김개시는 영민한 것은 물론 글도 읽고 문서 처리도 잘 해 젊은 세자 시절 때부터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개시(介屎)에서 시(屎)는 똥이란 뜻이니 개똥이라는 이름이었다.

광해군 일기에
“김개시의 용모는 나이가 들어서도 펴지 않았으나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나 꾀가 많았다.

애교와 서비스가 뛰어나 부왕에게도 총애를 받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부터 광해군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광해군
임진왜란으로 세자 되고 전쟁에 공 세워 부왕이 시기하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들에게서는 13명의 왕자들이 있었고 광해군은 서차남이었다.

광해군이 18세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선조는 수도 한양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선조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은 피난길에 죽었고 서장남 임해군의 성격이 포악하여 피난 도중 평양에서 행실이 모범적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왕과 달리 평안도와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분조활동을 잘 해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선조는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정비의 아들이 아닌 서자(덕흥대원군: 중종의 후궁 창빈의 아들)의 아들로서 왕이 되어 콤플렉스가 많았다.

이 방계 콤플렉스 탓인지 총명하고 전란 중 나랏일을 잘하여 백성들 평판이 높은 세자 광해군을 경계하고 냉대하며 괴롭혀 광해군은 부왕으로부터 한 맺히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조선의 노비신책>>> 100회

광해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도 있었지만
결국 “형제를 사랑”하라는 부왕 유언 받고 어렵게 왕이 된다.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지 2년 후인 1602년 나이 51세에 서인 김제남의 19세 된 딸과 재혼했다.

새 왕비는 1606년 선조의 적장자가 되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나이 50 중반에 꽃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23세 젊은 부인이 낳은 아들이니 보고 또 보아도 예쁘고 이 세상 모든 것 다 주고 싶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시기하였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 등은 왕과 새 왕후의 마음을 읽고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했으나 때 마침 선조는 지병도 있었고 선조의 귀여움을 받던 김개시가 그런 위기에서 광해군을 두둔하고 옹호했다.

1608년 1월
병세가 심해진 선조는 3살 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는 없었다.
영창대군 모친 인목왕후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57세의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형제를 사랑하라는 유서를 쓴 후 약밥을 먹고 갑자기 사망했다.

김개시와 이이첨이 한 짓(독살)이라고 소문이 돌았으나 다음 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에 왕위에 올랐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곧 사약을 받았고 이제 세상은 김개시와 대북(大北)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의 것이 되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연인 사이라고 추문이 날 정도로 자주 만났다.

광해군은
대동법 등을 실시해 민심을 달랬으나 형, 동생 및 조카를 죽이고 계모(영창대군 모친)
를 가두고.....

왕이 된 광해군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와 민심을 복구하는데 공을 들였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한 것은 물론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여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굶거나 병들어 죽어 가던 백성들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그러나 전란 후 궁궐 복구공사 등으로 인한 재정과 민생의 피해는 광해군의 실책이었다.

또한 명나라에서 서장남인 임해군을 제치고 왜 서차남 광해군이 왕위 계승을 했냐고 따지자

임해군을 미친 자라고 명나라에 알리고 역모죄로 몰아 강화 교동으로 유배 보내어 죽였다.

1613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관련되었다고 조작한 역모사건(계축옥사)이 제보되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살의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거센 장작불로 방을 뜨겁게 달구니 어린 영창대군은 불덩이 같은 방안에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다 타 죽었다.

어린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인목대비는 온몸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통곡을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 부친 김제남(연안 김씨, 서인)과 김제남의 아들 셋을 죽였으니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풀 수 없는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계축옥사 역모사건에 인목대비가 관련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결국 1618년 광해군은 김개시, 이이첨 등과 함께 서궁에 가두었던 인목대비를 조선 최초로 대비에서 폐위시켜 어머니 자격을 박탈했다.

인목대비와 그녀 아들 영창대군이 비록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도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는 효(孝)를 통치의 근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도덕적,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이었고 광해군의 정적인 서인들에게는 좋은 반정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도 역모와 관련하여 죽였는데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동생 원수를 갚는다고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인조반정) 모의에 앞장섰다.

 

<<<조선의 노비산책>>>101회

실리 외교에는 능했으나  상궁 김개시에 놀아나~~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망해가는 명국에 대한 의리를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만주의 신흥세력 후금국과 친화하느냐의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던 조선의 왕이었다.

그는 명나라에 섭섭하지 않게 하고 후금국에도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함으로써 후금국의 침략을 모면하였다.

당시 조선은 7년간의 전쟁 후 흉년과 기근이 덮쳐 백성들은 먹을 것이 전혀 없어 사람이 생사람을 죽여 잡아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 때 광해군이 서인들처럼 명국에 대한 사대와 의리를 고집했다면 만주를 통일하고 중국 본토를 넘보는 신흥 강국 후금(청)의 침략을 당해 조선은 그대로 붕괴되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실리의 양다리 외교로 후금(청)과 전쟁을 피한 탁월한 외교의 정치가였으나
이 실리 외교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고 주장하는  서인의 반정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외롭고 힘든 세자 시절부터 왕이 될 때까지 도와 준 김개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했다.

김개시는 머리가 좋아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마음에 들어 왕을 마음대로 모실 수 있었다.

김개시는 용모는 안 예쁜데 방중 섹스 기술(?)만은 워낙 뛰어나 광해군을 완전히 품안에 사로잡았다(?)고 한다.

위키 백과에 김개시는 부왕 선조와도 성관계를 한 궁인이라 했고 야사에는 광해군이 김개시와 잠자리 할 때 나이 많은 궁인이 힐책을 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해군은 김개시의 성적 매력에 흠뻑 빠져 그녀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꼼짝을 못했다. 또한 김개시는 단순한 광해군의 연인을 넘어서 국가의 모든 정사를 논하는 정치 동업자였다.

부왕과 성관계한 궁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김개시에게 후궁 첩지를 주지 않았다.
김개시 본인이 이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후궁 첨지가 아니라 권력이 중요했다.

김개시는 낮은 상궁의 위치에서 자유로웠고 말이 상궁이지 왕비보다 더 높았다.

권력의 맛을 본 김개시는 대북 세력의 실력자 이이첨과 한패가 되어 매관매직을 하며 온갖 뇌물을 받아 광해군 조정은 부패로 얼룩졌다.

상궁 김개시 뇌물 받고 광해군 팔아먹어~~~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명분을 상실한 광해군은 역모가 발생하지 않나 하고 항상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반란의 모의자 중 김자점이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와 연결하여  줄을 만들었다.

서인인 전 평산부사 이귀와 김자점 등의 반란 모의가 있다고 광해군에게 여러 번 보고되었다.

그 때마다 김자점이 김개시에게 뇌물을 바치며 후일을 약속 해주자 김개시가 받아들이고 광해군에게 반란 모의가 헛소문이라 하며 안심시켰다.

얼마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1623년 3월 12일
김개시는 후원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광해군에게 술을 먹였다.

그 때 이이반이 역모 고변을 했으나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늦장을 부리면서 수습에 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대궐에 들어온 것을 알고서야 대궐 밖으로 도망가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

고변한 이이반은 반정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김개시는 새 정권의 공신이라 권력 참여를 기대하였으나 서인들은 반정 성공 다음 날 반정의 명분을 위해 그녀를 죽였다.


광해군은
전란 때의 공적과 유연한 실리 외교 때문에 유능한 군주라는 평이 있다.

그러나 모략꾼이며 옹녀 같은 김개시에게 놀아나고 지지 세력인 대북파에 눌려 동생(영창대군)과 형을 죽이고 어머니(인목왕후)를 폐하는 폐륜을 저질렀다.

 

 

 

 

<<<조선의 노비산책>>>102회

♣부자가 된 巨商 노비 열정~~~

조선 전기는
화폐가 있어도 유통이 되질 못했다.

조선 건국 10년 뒤인 1402년에 태종은 지폐인 저화를 강제로 유통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1410년에 다시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세종도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성종 때는 <경국대전>을 통해 저화를 국폐(國幣)로 공인했지만,

사회 구성원들 간에 존재하는 지폐에 대한 불신감을 없앨 길은 없었다.

이때까지도 지폐가 유통될 만큼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시대에는  옷감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1410년 때의 일로  조선 건국이후 20년이 채 못 되었을 때다.

조정에서는 저화를 강제로 통용시키기 위해 민간에서 화폐로 사용되던 옷감인 ‘베’를 죄다 거둬들이고자 했다.

베가 없어지면 저화가 통용될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조정에서는 베를 관아에 납부하면 그에 상응하는 저화를 지급하겠다고 선포했다.

화폐개혁 때 신 화폐를 구 화폐로 교환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성들은 조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베를 꽁꽁 숨겨두고 내놓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베를 은닉하는 행위를 단속했다.

그때 적발된 사람 중의 하나가 불정(佛丁)이란 남자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불정은 무려 1,500필의 베를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숨긴 베는 추포(麤布)라 불리는 하급 품질이었지만 그렇더라도 1,500필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재물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논 한 마지기가 면포 세 필 정도에 거래된 사례들도 있다.

상당히 많은 양의 베를 숨겼기에 불정의 행위가 조정 차원에서 거론되고 실록에까지 기록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소개한 ‘불정’의 신분이다.

그의 신분과 관련된 대목을 <태종실록》에서 살펴보자.
태종 11년 1월 21일(1411. 2. 13.) 열>린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호조판서 이응
“부상(富商)인 좌군노(左軍奴) 불정이 추포(하급품) 1,500여 필을 남의 집에 옮겨두었습니다.”

태종 이방원
“이 노비가 부상(富商)인데도 저화를 쓰지 않는 것은 법률의 틈을 엿보는 행동이다. 사헌부에서는 그 자를 추포(追捕)하라.”

불정은 거상이었지만 신분은 노비였다.

조선 초기에 군무를 총괄하던 기구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있었다.

의흥삼군부는 중·좌·우 3군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좌군노 불정은 의흥삼군부의 좌군에 속한 공노비였다.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은 상업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뜻이고,

상업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가 선상노비보다는 납공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노비라면 흔히 마당을 쓸거나 시중을 들거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쉽지만,
불정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상업을 해서 큰돈을 버는 노비들도 있었다.

어전회의의 대화록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호조판서나 태종은 노비가 상인이라는 사실과 거부(巨富)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이 노비(불정)가 부상(富商)인데도 저화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격분할 뿐이다.

불정처럼 상업에 종사하는 노비들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03회

♣한양 솔거 노비 김의동~~~
김의동은 한성에 사는 신씨(愼氏)의 솔거노비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아야기다.

그는 나무를 하거나 말에게 먹일 꼴을 베는 일을 담당하는 노비였다.
그러다가 19세 때 주인집에서 탈출했다.
“나무를 하고 꼴 베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보다는 적성에 안 맞아서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비 신분을 숨기고 종3품 부사까지 올랐다면,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다.

부사란 자리는 오늘날로 치면 대규모 기초자치단체장(1급)에 맞먹는 자리로 시장급이다.

웬만한 의지를 가진 노비라면 이런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다.

노비 출신으로 부사까지 오른 그였으니 고된 노동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그가 육체노동을 못 견딘 것은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 가격으로 저화 4,000장, 쌀 80가마니짜리 젊은 노비가 도망을 갔으니,
신씨 집안에서는 어떻게든 김의동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상태로 10여 년이 흘렀다.

신씨 집의 업산(業山)이란 노비가 외거노비들에게서 세공을 징수할 목적으로 영남으로 떠난 뒤에 비로소 김의동의 소재가 드러났다.

충청도 괴산과 경상도 문경 사이에 ‘새재’란 고개가 있다.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한성을 떠난 업산이 말을 타고 새재를 넘을 때였다.

웬 고관이 수행원과 군병들을 잔뜩 이끌고 행차하는 것이 보였다.

“물렀거라!” 길을 벽제(辟除)하는 소리도 들렸다. 업산은 얼른 말에서 내려 길가에 엎드렸다. 하지만 고관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았다. 순간, 업산은 놀랐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업산과 고관의 눈길이 부딪혔다.

행렬이 지나간 뒤, 업산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따라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의아함을 감추며 1리쯤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군병 몇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업산은 당황해서 넋이 나갔다. 군병들은 업산을 산골짜기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형 장막도 보였다. 거기서 고관이 나왔다.

그는 업산을 정중히 맞이했다. 그리고는 장막 안으로 데려갔다. 장막 안은 휘황찬란했다. 붉게 화장한 여인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중드는 여인들이었다. 잠시 후 여인들이 커다란 상을 차려왔다.

진수성찬이었다. “제후의 부를 방불케 했다”고 <어우야담>에 나온다.
고관은 다시 한 번 공손히 읍(揖)한 뒤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조선의 노비산책>>> 104회


자신이 그 옛날 도망갔던 노비 김의동이란다.

얼떨떨한 표정이 된 업산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의동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주인집에서 도주한 뒤에 그는 신분 세탁부터 했다.

그런 다음에 최포향(崔浦鄕)이란 곳에서 정장(亭長: 면장.이장) 생활을 했다. 정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종실록>의 용례만 소개하겠다.

이에 따르면, 당시의 나루터에는 관장(官長)이나 정장(亭長) 같은 간부 외에 나루치라는 일꾼이 있었다.

최포향의 포(浦)가 ‘물가(포구)’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김의동이 역임한 관장. 정장이란 것은 나루터의 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정장 생활을 하던 김의동은 나중에 ‘녹림현감’에 올랐다가 ‘황주부사’로 승진했다.

황주부사로 근무하던 중에, 한성에서 내려오는 고관을 맞이하러 새재까지 나갔다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노비가 신분을 숨기고 나루터 간부로 시작해서 10여 년 만에 부사의 지위까지 올랐으니,

그가 얼마나 맹렬히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김의동의 임지였던 최포향, 녹림현(綠林縣), 황주부(潢州府)는 가공의 지명이다.

앞서 소개한 반석평은 출세한 뒤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김의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의동은 신분 세탁 후 이름이나 근무지를 숨겼다.
그는 업산을 후히 대접했다.
후히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업산이 한성에 돌아가서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신의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의동은 시종에게 고급 비단 50필을 갖고 오라 명령했다.

그는 그중 열 필을 업산에게 주고 나머지는 주인집에 주라면서 말했다.
“삼가 10년치 세공을 바칩니다.”

김의동이 업산에게 건넨 비단으로 신씨 집안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 업산이 받은 열 필도 값이 꽤 나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어유야담>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노비 김의동이 종3품 부사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그가 어떤 이름으로 어디서 근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김의동이 주인에게 바친 10년치 세공이다.

그가 준 40필의 고급 비단 덕분에 주인집은 단번에 부자가 되었단다.

그럼, 일반적인 경우에 노비는 주인에게 얼마만큼의 세공을 바쳤을까? 궁금하지만 기록이 없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05회

태조 이성계의 후궁 화의공주 김씨.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와 소빈 김씨.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세조의 후궁 박씨,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광해군의 최 측근 상궁 김개시는 모두 노비출신 이다.

숙종의 왕비 (훗날에 후궁으로 좌천)장희빈은 얼녀(孽女)였다.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는 관노로 전락했다가 회복되었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딸(서녀) 이구지는 노비를 사랑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노비와 간통(사랑?)한 양녕대군의 서녀 이구지~~~

양녕대군의 서녀 이구지,
남편 권덕영은 이구지를 박대했고
심지어 일찍 죽어 이구지는 과부가 되는데...

노비와 아이를 낳았다?! 추문에 휩싸인 왕족 이구지!~

이구지의 노비 천례와 말비는 혼인을 해
딸 준비를 낳았지만 말비는 집을 떠난다
그런데 이구지가 준비의 엄마라는 추문이 도성에  퍼진다.

이구지는 경기도 광주에 살던 권덕영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은 이구지를 구박하였고 남편 사후 남편의 종 천례와 간통하여 딸을 낳은 뒤 그 딸을 시집 보냈다.

천례와의 간통사은 그냥 소문으로 불문율로 붙여졌으나 이구지 또는 천례가 자신의 딸이 왕실의 후손이라고 발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왕명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녀는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어우동.유감동 등과 함께 음란한 여성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마녀 사냥감이 되어 온 인물 중 하나다.

이후 왕실 족보에서도 제명 되었고 은폐되어 왔던 그녀의 존재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이구지의 생모는 천첩으로 양녕대군의  여종이었으며 양녕대군의 세 번째 서녀다

이구지가 노비천례와의 간통하여  낳은 딸을 앟았는데 그 이름른 준비라고 했다.

준비는 1488년 무렵 평민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인적사항은 정해지지 않는다.

그 뒤 이 일이 관아에 알려져 비밀리에 잡아다가 심문하는 과정에서 왕실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475년 12월 22일
이구지가 남자 종 천례와의 정분이 나서 살림을 차렸다는 말이 도성에 자자하였고

사헌부 장령 허계가 이 문제를 갖고 왕에게 신분을 뛰어 넘어 금지돤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을 붙잡아 꾸문을 해야 한다고 주청을 하였고

종친들이 모여서 이를 의논하게 된다.

왕실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왕실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을 입에 담은 장령 허계를 파직하고 벌을 주라는 것이었다.

대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왕실의 결정은  동문서답이고 적반하장인 셈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간원 주장은 아래와 같다.

“이씨는 태종의 손녀이지만 종 천례와 이상한 관계임이 소문이 나 있고 그 소문에 따라 진상을 조사한 것인데 사헌부 관리를 벌 주라 하심은 너무 억지 주장입니다”

그러나 왕실과 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국정(國政)이 아니고 집안 일이라는 것이다.

집안일은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성종임금은 불쾌하게 생각하며

“왕실의 좋지않은 소문을 꺼내는 저의가 무엇인가?”라며 반문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06회

이에 사헌부 장령 허계는
“이는 왕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사대부 자손의 여자들이 사내 종과 연애에 빠지면 당사자 모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법도인데

이것은 왕실에서 더욱 업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반복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성종임금은  계속해서 언급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허계등은 계속 이 일을 문제 삼는다.

이게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의 정신이었다.

이에 성종은 드디어 교서를 내린다.

“장령 허계는 왕실의 일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죄로 그의 괸직을 거둔다”

성종의 교서를 발표한뒤
여기 저기서 반대의 상소가 올라온다.

“허계는 사헌부 장령으로 직분을 다한 인물이며 이 일을 먼저 듣고 곧바로 풍속을 잡으려는
관리의 책임감으로 나온 것인데 도리어 그를 파직시킴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은 풍속을 다스릴때지 언로를 막을 때가 아닙니다.”라는 내용이다.

성종임금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전을 나왔다.
이후 계속 천례와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려왔으나 성종 임금은 이를  듣지 않았다.

양반이 여종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중인이 되고 왕족이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는
천만으로 간주하지 않고 왕족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왕족이나 양반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조선의 법률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 할 수는 없었다.

이구지는
자신과 노비 천례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우리 딸은 왕실의 자손이다”라고 떠 벌리고 다니다가 사헌부 감찰에 첩보가 접수 되었다.

또한 종과 간통하여 얻은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간통사실이 들어나 관아로 끌려갔고 임금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뿐 만 아니다
종의 신분인 천레가 갑자기 말을 타고 비단옷을 입고......각종 폼을 내고 다니다가 주변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는 소문으로 확신되었던 것이다.

사헌부는 천례를 잡아다가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이 14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양녕대군의 서녀와 결혼한 그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왕은 종친회의를 소집하지 않고 천례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그러나 천례는 욍실 여자와 간통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

소문을 들은 주민들과 대질도 했지만 끝내 부인했다.
지독한 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그러나 1475년(성종 6년) 사헌부외  사간원 관리들이 그녀를 계속 탄핵하였고  결국 이구지는
1489년 3월7일 왕명으로 사사되었다.

사내들의 간통시건은 흔한 일이다.
양녕대군 서녀 이구지가 사내 종과의 간통사건은 당시로서는  업청난 파장을 몰고 온 사건이다.

성종임금은
찬례와 이구지와의 간통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그저 종과 음란한 여인의 다순한 색정으로 봤다.

조선왕조 내내 음란함의 대명사로 매도당하였으며  선원록(왕족 족보)에도 실리지 못했다.

어우동.유감동 등은 1910년 이후 문학.연극 등 소재가 된 반면 이구지의 존재는 철저하게 묻혀졌다.

그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70년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조선왕조실록  등을 국역하는 과장에서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게 도 된 것이다.

이구지와 천례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 준비는  이미 출가한 뒤였기 때문에 연좌되지는 않았다.
당시  출가한 여인에게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07회

관비 출신 정난정~~~


도총관 정윤겸과 관비출신 소실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난정은

종모법(從母法: 모친 신분에 따름)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관비가 되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재주를 바탕으로 당찬 결의를 구현했지만 양반 중심의 조선역사는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규정했다.

역적 윤원형을 꼬드겨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올곧은  선비를 탄압한 을사사화의 배후는 정난정의 모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 사대에는 훈구파와 사람파의 투쟁이 격렬하게 진행 되다가

결국은 조광조가 훈구파에 밀려 기묘사화(1519년)라는 역풍을 맞고 쓸어진다

1510년 남쪽에서 삼포왜란과 사랑진 왜변이 이어지고 북방에서도 야인들의 내습이 반복되자

조정에서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기관으로 비변사를 설치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고종 때 까지 항시 전투태세를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진다.

바로  이때 조선의 여걸 문정황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문정황후는 조선 중종의 계비이고 13대 임금 명종의 모친으로  수렴청정을 했던 인물이다.

중종의 조강지처는 반정 때 참살당한 신수근의 딸 단경 왕후 신씨였는데 폐위되고

제 1계비인 윤씨가 장경왕후로 책봉되고 세자(인조)를 낳고 6일만에 죽었다.

이후이후 1517년
윤지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문정왕후 윤씨다.

1521년 중종의 맏딸을 며느리로 삼은 김안로가 세력을 얻자 심정.난곤이 그를 견제했다.

이들의 이전투구가 극에 달 할 때 장경왕후 윤씨 친척 윤임(대윤파)과 문정왕후의 윤씨 친척 윤원형(소윤파)가 조정에 출사하서 훈신(공신)과 척신(외척)간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의 승부는 윤씨 일가의 압승(소윤)으로 끝나고 그 여파로 사림의 일부가 조정에 복귀했다.

하지만 정사는 외척들이 좌지우지 했다.

이 무렵 정난정과 윤원형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문정왕후의 수태불공을 드리러 봉은사에 갔던 윤원형은 보우대사의 소개로 경국지색의 여인을 알게되는데 첫눈에 반했다.

도총관 장윤겸을 찾아가 소실로 달라고 간청했지만 정작 본인 정난정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후사를 낳으면 정실로 맞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정난정은 양반 적자출신인 윤원형이 유교 근본주의에 물들지 아니하고 사대부들이 경멸하는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실제로 윤원형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색적인 인물이다, 

독실한 불교신도 였던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정난정은  소실이 되었지만 당찬 행동으로 대를 잇지 못하는 본처 김씨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당시 대를 잇지 못하는 여인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08회

1544년
중종임금이 승하한 뒤 인종임금이 승계했지만
임종임금이 재위 8개월만에 생을 마치면서 외척 윤씨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당시
인종임금의 죽음에는 문정왕후(명종 친 어머니) 윤씨의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생모 장경왕후(인종의 친 어머니) 윤씨가 출산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인종은 문정왕후 윤씨에게 양육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생(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의 독살설이  훗날 정난정이 본처 김씨 독살설과 함께 민간에 유포되어 여인들이 정치판에 나사면 나라가 망조에 이른다는 통념을 심어주었다.

구한 말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서도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대원군의 독백을 당연히 하곤 했는데 이는
승자가 남긴 왜곡된 기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종 즉위 직후 윤임(임금 외숙)이 이끄는 대윤이 득세했고 명종 즉위 후에는 윤원형(임금 외숙) 중심의 소윤이 득세를 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대윤과 사림을 탄압하는 을사사회(1545년)를 연출했다.

심지어 윤원형은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친형 윤원로를 귀양 보낸 뒤 죽이기 까지 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는 등 조선 불교 부흥에 전력했고 문정왕후는 정난정의 조언을 받으며 조선을 불교국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하고 전국에 300여개의 사찰을 공인했으며 도첩제(승려 과거시험)를 부활시켰다.

정난정의 깊은 불심은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1649년 문정왕후는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 정난정과 그 소생이 벼슬길에 오르도록 은전을 베풀었다.


1551년 윤원형은
명종에게 정실부인인 본처 김씨의 악행(?)을 들먹이며 이혼의 숭낙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 들여지자  윤원형은 정난정을 정실부인으로 삼았다.

쫓겨난 연안 김씨는 가난과 구박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1552년 문정왕후는
명종을 통해 윤원형의 첩 정난정을 합법적인 부인이 되게 했으니 종 1품 의정부 좌찬성 윤원형의 부인으로, 외명부 종 1품 정경부인이 된 것이다.

같은 해 정난정은 남편으로 하여금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사대부 증심의 나라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도 차별받지 않도록 노력한  공로는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윤원형이 영의정.우의정. 좌의정과 함께 올린 상소(서얼허통)는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조판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허통법」이 통과되어
서얼들의 대환호를 받았으니 악행을 저질러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간교한 여성이라고 비난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분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대에 강력히 저항했던 인물이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09회

1553년 문정왕후는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역사는 이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1555년 왜구들이 70척의 배로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 임꺽정이  의적을 자처하며 1559년~1562년 까지 3년간에  결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었다.


1563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자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으로 외명부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이는 숙종임금때 원자를 낳고 중전이 된 장옥정( 장희빈)에 비견 될 정도의 성공 신화라고 할 수있다.

정난정은 조선의 돈줄을 파악하고 재산을 모아 남편에게 뒷심이 되었다.

훗날 사가들은 정난정이 남편의 권력을 미끼로 매관매직과 뇌물을 받아 한양에 집이 15채나 되었다고 비난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를 떠나자 사림세력은 명종의 조정에 따라 척신세력(외척)의 상징인 보우대사와 윤원형을 탄핵했으며  윤원형의 죄목은 26개 항목으로 그중

첫째는  관비소생 정난정을 부인으로 삼고 그녀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려한 죄였다. 당시 사대부 나라에서 신분 타파가 제일 큰 죄명이었다, 거기다가

윤원형의 정실 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 죽게 했고 도주한 노비들을 비호했다는 협의도 있었다. 대부분 정난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림세력은  보우대사 및 윤원형 보다는 불교와 정난정이 더욱 미운 것이다.

윤원형은 파직되었고 사림세력은 정난정의 부인첩을 회수하라고 상소를 했다.

명종은 못이기는 척하며 정난정을 부인에서 다시 첩으로 강등했고 때를 맞추어 본초 정실부인 김씨의 모친 강씨는 정난정을 김씨 독살혐으로 고발했고

국청에 끌려간 정난정은 궂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독약을 마시고 최후를 맞았고 그로부터 5일 후 윤원형도 독약을 마시고 자결을 했다.

이후 양반들은 정난정을 권력자 윤원형을 사주해 국정을 파탄낸 간여(奸女)로 묘사를 했다.

연산군 때 기생 장녹수.광해군때 궁녀 상궁 김개시, 숙종 때 장희빈과 같은 수준의 여인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10회

♣동시대 서로 엇갈린 운명을 걸었던
두 천민출신 장군 이야기

정충신  장군과  한명련 장군

임진왜란은 끔찍한 피와 살육의 시대였지만 젊고 미천했던 두 남자에겐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했던가~~

30세의 나이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고의 돌격대장이었으며
명나라 장수에게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조선 최고의 장수로 인정 받았던 사내 한명련

그는 오직 무예 하나만으로 천민의 신분에서 종2품의 관직에 오르는 기염을 보인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충무공' 하면 당연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은 꽤나 많이 존재하는데,

그와 같은 시대에 살다 간 김시민 장군도 있고 오늘 알아볼 정충신(1576~1636) 장군도 있다.

둘은 임진왜란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운명의 여신은 각각 그들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노비 출신 정충신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아전출신 정윤과 노비(관기)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천민이었다.

조선시대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천민 신분 벽을 넘어 포도대장이 된 인물이며 조선 최고의 외교관, 스파이(?) 였다.

그는 천민 출신이지만 임진왜란중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면천이 되었고

다음 해 실시된 무과 급제에 합격하여 벼슬을 받았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후일 후금과의 외교전에서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충무공’의 칭호를 받았던 인물로
광해군과 인조 사이의 격동의 시대에서 최선을 다해 국익을 위해  활동한 인물이다.

정충신은 성장한 뒤에 광주 목사로 재직하던 권율의 휘하 노복으로 들어갔는데,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야무졌기에 권율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이 터진 뒤에도 여전히 광주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권율의 장계를 의주에 파천한 선조에게 올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광주에서 북쪽 끝 의주까지 가려면 일본군이 좍 깔려 있는 적진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이 어려운 임무를 아무도 맡아서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정충신이 자원해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선조에게 직접 면천을 받아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이항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정충신은 용모와 행동이 아름답고 공손했기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항복 또한 다르지 않아서 수 많은 제자들 중 그를 유별나게 아꼈고 과거 시험을 보기를 권하기도 했다.

정충신은 그의 권유를 듣고 무과에 응시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천민 출신으로 벼슬까지 오른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항복은 천민 출신 정충신을 지극히 아꼈다.
사람들은 이항복의 첩이라고 놀릴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11회

 

아래글은

기재사초 (寄齋史草)중 ‘임진 잡사’에 실린 글 일부다.

 

「.... 중략...정충신(鄭忠信)이란 자가 있어 나이 17세에 징병에 응모하여 일찍이 왜인들의 목을 베고 이어서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말이 유창하였는데 조리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사랑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항복이 특히 그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정충신과 같은 이불에서 잘 때도 꼭 동행하고 앉을 때도 꼭 붙어 있었다.

 

이항복은

정충신에게 과거를 보기를 적극 권했다.

정충신은 마침내 무과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그를 판서 이항복의 별실(=첩)이라고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

 

기재사초 (寄齋史草)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박동량의 일기인데 사관(史官)을 겸했던 저자가 임진왜란 전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오늘날 전하는 유일한 사초(史草)라고 한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뒤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후금이 날로 성장해 명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펼치고자 하였고

 

북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만포 첨사로 재직하던 정충신 또한 그 중 하나였는데, 만주 지역의 여진 추장들과 자주 만나 후금과 명나라의 정세를 살피는 데 힘썼고 누르하치를 만나 후금 내의 정세를 조선이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연이은 피바람을 일으키고 부정적인 사건을 연달아 일으키면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정충신은 인조 정권이 집권한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안주 목사로 북방에 주둔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정충신은

 

인조반정 공신 책봉에 대한 불만과 아들이 반란 혐의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이에 분개한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장군 이괄은 평소에 정충신 장군과 친하게 지내던 무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의심받아 고초를 겪은 정충신은 동료 남이흥과 함께 황주에서 기세등등한 반란군을 막아내었으나 패배하였다.

 

다시 군세를 가다듬고 도원수 장만의 휘하로 들어간 정충신은 지형상의 강점등을 이용하여 수 백명의 이괄의 반란군을 죽이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정충신은

그 뒤에도 계속 여진의 본부인 심양까지 가서는 담판도 때리고,

 

때리는 와중에 여진 군사력을 정탐하여 조정에 보고를 하는 외교관 겸 스파이로서 활동을 훌륭히 수행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정충신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 당진으로 유배를 간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

 

 

<조선의 노비산책>>> 112회

또 한 명의 천민 출신 장군 , 한명련 (韓明璉)

(? ~ 1624년 2월 14일)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한명련

황해도 천민출신 의병으로서,

용맹함을 인정받아 승진했으며, 임진왜란 중 많은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싸웠다.

황해도 출신의 천민으로 남다른 그의 용맹이 담긴.

기록을 보자

주상이 이르기를,

"변장과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12월 3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장사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노숙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선거이ㆍ홍계남ㆍ정희현ㆍ권응수ㆍ백사림ㆍ한명련도 다같 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21일>

금년 정월 28일 별장 한명련이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에 의하면

“소수병력를 영솔하고 도로 가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병 1명을 생포하여 왔는데 통사가 조사한 결과 신은질이(信隱叱已)라는 자임을 알았다” 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별장 한명련이 충청도 방어사(박명현)와 합세해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공주ㆍ회덕 지경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왜적이 진산으로부터 산길을 경유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2일에 잠자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변을 기다렸는데 왜적의 선봉이 갑자기 이르러 서로 교전하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크게 쳐들어와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쏘아 죽인 것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중과부적인 데다가 날도 어두워져 다만 6급만 베어가지고 왔기에 그 귀를 베어 올려 보냅니다.

''이날 싸움에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좌우로 분격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창황한 나머지 전장에 버려두고 다 가져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힘껏 싸운 사람에 대해서는 권장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7일>

경기 감사 홍이상이 치계하였다.

“(.....중략.....)

별장 한명련이 소초평에서 싸워 참살한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13일>

 

 

<조선의 노비산책>>> 113회

엇갈린 운명~~~

한명련은 미천한 신분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디 예정돼 있던 중앙에서의 관직 생활을 포기하고 변방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정충신은 스승과 정치적 뜻을 같이하다 .

스승의 유배길(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한 이항복)을 따라갔고 중풍에 걸린 스승을 간호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둘은 북방 최전선에서 조선을 지켰다.

변방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는  장수

이괄 전군~~
한명련, 정충신과 모의했소~~

1624년 역모라는 이름의 올가미가 목을 죄어오고 각자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이괄은 정말로 반역을 일으킨 인물이다
역모의 혐의로 호송되던 한명련은 이괄에게 구출된다

선택의 기회조차 없었다.
노쇠한 맹장  한명련의  칼은 이괄의 반란군 칼로 변해 이제 왜적도 여진족도 아닌 조선의 왕궁을 향하게 된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다.
본래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수학한 정충신.

그는 이 시점에 어느 선택을 해야 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충신은 이괄의 반란을 오히려 생존의 기회로 삼기로 한다.

그는 이 반란을 막기로 결심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출세한 두 천민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다.

한쪽은 불세출의 맹장 한명련~~~~
다른 한쪽은 뛰어난 판단력을 지닌 정충신~~

말년에는 억울한 역모에 휩쓸려 이괄의 난에 가담, 반역군의 핵심이 되어 반역에 앞장섰던 한명련은 ​흙먼지가 부는 전장에서 반란군과 관군이 격돌했고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한명련이 죽었다는 거짓외침이 반란군을 와해시켰다


정충신에게 패한 후 이괄과 함께 부하에게 배신당해 1624년 2월 14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경안면 경안리 경안역 부근에서 참살당했고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로써 정충신은 만고의 충신으로, 한명련은 영원한 역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괄과 함께 난을 주도했던 순변사 겸 구성부사 한명련(韓明璉 , ? ~1624)장군은
아마도 한명련이란 이름이 익숙하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반란을 일으킨 역신으로 죽었고, ‘이괄의 난’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그의 공과를 논하는 일은 물론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다

한명련 장군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의 아들, 한윤(韓潤)이다.
반란이 실패하자 후금, 청으로 망명하여 조선 침략을 충동질하고, 침략군의 길잡이가 된 반역자로 유명하다.  그래서 한명련이란 이름은 또 금기시 되었다.

​한명련이 반역자로 죽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평가와 기록은 변할 수 없겠지만

왜 그가 ‘이괄의 난’에 가담 할 수 없었고 같은 노비 출신 정충신과는 엇갈린 운명을 살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에게 낯 설은 한명련에  대해 한번 쯤 뒤돌아보고자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14회


평생을 나라를 위해 최 변방에서 국경을 지키며  많은 공을 세우고  당시 조선에서 손에 꼽히는 명장(名將)  한명련~~

구성(평안북도)부사에 순변사(국경담당 특사)로 군부의 요직이자 높은 벼슬에 있는 그가 왜 반란의 공모자가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한명련‘ 장군은

선조실록부터 시작해서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그리고 2백 여년 후 순조실록에 까지 이름이 거론되는데, 그 횟수가 원문 기준으로 69건 이나 된다.


한명련 장군은 출생연도의 기록이 불분명하여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문화현(신천군)의 천민출신으로,임진왜란  7년 전쟁 당시 의병으로 참전, 일개 병졸에서 시작했는데 그 용맹이 실로 대단했다.

나중엔 조선군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수가 되어서 맹활약하고 임금인 선조가
신분이 미천했던 그를 특별히 기억하고 인정할 정도 였다

​상(선조)이 이르기를,

"변장(邊將)과 수령(守令)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장사(將士)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 노숙(風餐露宿)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力戰)하고 있습니다. (......중략..........)

전번에 김태허(金太虛)·박의장(朴毅長)·고언백(高彦伯)에게는 이미 표리(表裏)를 내렸습니다만,
선거이(宣居怡)·홍계남(洪季男)·정희현(鄭希玄)·권응수(權應銖)·백사림(白士霖)·한명련(韓明連)도

다같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최상중(崔尙重)이 갈 적에 삼승포(三升布) 각 2필씩을 부송하여 한편으로는 고전한 공로를 포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군심(軍心)을 용동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임금)이 따랐다.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그리고 한명련(韓明璉)은 어떤 사람인가?"
"전공(戰功)으로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되어 당상으로 승진하였다."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당상관의 신분이었지만 졸오(卒伍; 일반 병졸)와 같이 처신하여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혹 걸어다니기도 하였는데,

같은 당상관들이 비웃기라도 하면 의(義)로써 그들을 나무랐다고 하니, 이 일은 매우 가상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하지 못하던 일로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의 나이가 얼마인가?"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30여 세쯤 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정원(왕명의 출납기관)에 전교하였다.

"한명련(朝明璉)은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용렬한 의사로 치료하게 할 수 없다.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간호하되 마음을 써서 구제하도록 하라."

한명련은 힘껏 싸운 장사다.
앞장 서서 돌격하여 참획(죽이고 생포)이 매우 많았으므로 상이 장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려 오른쪽 볼기에 탄알을 맞아 서울로 올라왔기에 임금 선조가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15회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을 맡아 명나라 군사 5만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온 마귀(麻貴)왈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군과 관련 된 기관)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하였다.

​위 기사는 선조실록 중 한명련 장군이 나오는 대목 중에서 일부다.

임진왜란  7년전쟁 당시 한명련 장군의 활약상이 어떠했으며, 임금 선조부터 여러 전시재상들, 그리고 명나라의 제독 마귀까지 그의 기량을 크게 평가하고 인정을 했다.

​천민이었던 이가 임진왜란 7년전쟁이란 전란을 만나 활약하면서 입신하여 벼슬이 당상(堂上)에 이른 것은  충무공 정충신 장군과 공통점이지만

나이는 한명련 장군이 한참 위였던 것 같다.

다른 점은 한명련 장군이 용맹이 돋보이는 맹장(猛將)이라면, 정충신 장군은 지모가 돋보이는
지장(智將)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스타일 만큼, 훗날 운명도 갈린다.

​전쟁 때에는 한명련 장군 같은 장사가 필요하고, 인정 받지만 전쟁의 끝이 보일 때,

평화가 돌아오면 그의 필요는 다하게 되니 입지에 변화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

특히 선조가 한명련을 많이 편애했기 때문에 그걸 많은 신료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전쟁의 전공으로 벼슬이 2품인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어도,
그의 미천했던 신분을 빌미로 조정 대신들이 많이도 괴롭힌다.

결국은 한명련 장군도 지치고, 질려서 그런지
북방의 정세가 심상찮다고 스스로 북방으로 부임하기를 청해서 떠났지만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이 수많은 실책을 저질러 국내 정치에 실패하고 적을 만들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 되지만,

적어도 당시 대다수 신료들에 비해 국제정세를 잘 읽어내고, 대응한 것은 평가할 만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자시절, 임진왜란 7년 전쟁 때 전선으로 나아가 전쟁을 이끌기도 했던 임금이기에

그도 한명련 장군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기용해서 중용울 하게 된다.

비록 변방의 군진을 돌며 길주목사, 방어사를 거쳐 평안도의 중요한 곳인 구성부사 겸 순변사를 맡았지만 임금으로 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한명련 장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고, 광해군의 사람이라 세상에 보여지는 사람, 미천한 신분 출신에 과분하게 높은 지위에 올라 여러 양반들의 질시를 받았던 그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여겼는지 사직상소를 여러 번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중요한 대임을 맡고 있으니 걱정 말고 소임에 충실하라고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임금과 조정은
한명련 장군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았던 차에 반란의 주모자 이괄의 근무지와 가까운 곳에 근무하는 한명련 장군에 대해  역모라는  혐의를 씌워 서울로 압송을 당하게 된다.

부원수, 평안병사 겸 안변부사 이괄과 임지도 가깝고, 그랬으니 서로 교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저런 빌미로 의심하여 역모로 걸면 누구든지  역모죄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대로 끌려 가면 죽음 밖에 무엇이 있을까.?
고문하면 그야말로 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16회

한명련을 위한 소극적 변명~~

반란의 주모자 이괄이
압송되어 가던 한명련 장군을 구출했고,

한명련 장군은 이 순간에 이괄과 함께 난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한명련 장군은 살기 위해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나라에 수많은 공을 세웠고, 묵묵히 나라를 위했건만

천만출신이라고 그를 끊임없이 음해하고 의심해 죽이려 들었던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배신감에 온 몸이 떨리고,

눈에 불이 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명련 장군은 이괄의 선봉장이 되어 평안도 안변에서 황해도를 거쳐 순식간에 한성을 점령했고

인조는 덕분에 불명예스런 세 번의 몽진(피난) 중 첫 번 째를  기록하게 된디.

이괄의 반란군이 한성에 입성하자, 백성들이 이들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거나 피하기는 커녕 환대한 것을 보면 그 짧은 시간에 인조가 참으로 인심을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이괄도, 한명련 장군도
그저 그들은 무인일 뿐 정치를 모르기 때문인지

곧바로 인조를 추격해서 끝장을 내버려야 햇는데   방심하고 그대로  한성에 눌러 앉아 시간을 허비하고,

흥안군 이제를  새로운 임금으로 세웠는데 백성들은  혀를 차며  걱정을 하게 된다

역시나
한성에 입성하고 겨우 사흘만에 진압군과 도성 외곽의 안현(鞍峴)에서 전투를 벌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이괄의 반란군이 크게 패하고, 진압군을 피해 도주하던 중 이괄도, 한명련 장군도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며, 이괄의 난은 끝을 맺게 되지.


이괄의 난으로
이괄장군도  한명련 장군도
그들의 가솔과 지인들까지 많은 이들이 화를 입었다.

그런데 한명련 장군의 아들 한윤(韓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아 한명련 장군이 마지막으로 부임해 있었던 구성(龜城) 인근에 숨어 있다가 

현상금을 걸고 검거령이 떨어지자 결국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 후금(後金)에 귀순하였다.

한윤은 누르하치에게 그리고 누르하치의 다음 칸이 된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치자고 끊임없이 부추기고,

그가 조선을 침공할 때, 후금군의 길잡이가 되어 조선을 침공하여 성안에 불을 지르는 등  그는 완전한 매국노, 배신자가 되었다.

배신자 한윤은 그렇다치고
하지만 한명련 장군의 경우는 참으로 억을한 면이 없지는 않다. 

그는 어쨌든 이괄의 난에서 반란군의 선봉장이자 주역이 된 사람으로, 반란자이며 역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고, 그 굴레를 벗기 어려울 것 같다.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워 충성을 다해왔고, 그 때문에 천인이던 그가 당상관의 벼슬을 받았으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만 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가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만약에 인조와 당시 실권자들이 그를 의심하지 않고 믿어 주었다면,

분명치도 않은 역모를 씌워 죽이려 들지 않았더라면 그가 반란군이 되었을까?

그때 그 사직을 받아 주었다면 남은 생은 조용히 살다 갔을 거다.
그는 역모자가 아니라, 역모자가 되도록 내몰린 자다.


당시 조선이란 나라가, 그리고 하늘이 한명련 장군에게 정말 가혹했고, 부당한 운명을 강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선의 노비산책>>> 117회

♣노비 정막개(鄭莫介)~~

정막개(鄭莫介)는 본디 의정부(議政府) 관아의 관노비였는데,
1513년 박영문과 신윤무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조정에 고발하여 중종 임금으로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상호군(上護軍)이라는 정3품 벼슬을 받았던 인물이다.



1513년(중종 8년) 전 공조판서 박영문(朴永文)과 전 병조판서 신윤무(辛允武)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산군 전(寧山君 恮:성종의 열세 째 아들)을 추대하려고 한다고 고변(告變)하여 출세한 인물이다.

조선에서는  ‘역모고변’으로 출세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1513년 10월 22일 의정부(議政府)의 노(奴) 정막개(鄭莫介)가
정원(政院)에 상변(上變)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위를 범한 말을 와서 고(告)하는 자가 있으니 승정원에서 물어서 써서 아뢰리까? 사정전(思政殿) 앞에서 물으리까?"하니

전교하기를 "도승지가 사관(史官) 두 사람을 데리고 사정전 뜰로 들어와 사람들을 물리고서 물으라."하였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두 사람이 불궤(不軌)한 마음이 있음을 고한 사람이 있는데, 내 마음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으나 와서 고한 자의 말이 매우 분명하니 반드시 말에 관련된 사람이 있고 또 선동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친히 국문(鞫問)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또 명패(命牌)로 두 사람을 불러올 것인가? 법에 의하여 잡아 올 것인가?"하니

신하 왈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법에 의하여 잡아 와야 합니다.
추문(推問)한 뒤에 사실이 아니면 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일이 국가에 관계되니 친히 국문하셔도 됩니다."하였다.


정막개의 고변내용은
"신이 이 날 13일에 빚을 받으려고 사직서(社稷署)의 종 보현(寶玄)의 집에 갔다가 마침 보현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올 적에 명례방(明禮坊)의 전 병조 판서 신윤무(辛允武)의 집 앞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의정부(議政府)의 노(奴) 정막개(鄭莫介)가 전에 신 판서를 뵈었기 때문에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이 집에 있는지 다른 집에 있는지를 알 수 없어 대문 앞에 서서 살펴보았는데,

----중략......처음에는 유의해서 듣지 않았으나.....“

역모를 고변한  정막개(鄭莫介)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  상호군(上護軍)을 제수하고,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 15구(口)와 전지(田地) 15결(結)을 주고, 당표리(唐表裏) 1습(襲) 외 안구마(鞍俱馬) 1필과 삽은대(鈒銀帶) 1요(腰)를 상의원(尙衣院:관복제작소)에서 만들어 주게 하였다.

성품이 원래 교활하여 사람들이 싫어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더욱 천하게 여겼다.

그가 붉은 띠를 띤 조복(朝服)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고변한 정막개야, 붉은 띠가 가소롭구나.”하고 놀려댔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다가 결국 굶어죽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18회


♣임매(任邁, 1711~1779)

『잡기고담(雜記古談)』에서

“게으른 사람을
꼭 ‘종놈[奴隷]’이라고 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조롱할 때는 반드시 ‘종놈의 재간[奴才]’이라고 한다.”면서

조선에서는 종들을 짓밟기를 마치 개와 돼지, 소와 말처럼 한다고 지적하였다.

임매의 말처럼
노비의 처지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노비의 상황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사노비의 경우 그의 지위는 일단 모시는 상전이 누구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상전의 지위가 낮을 때 그의 노비 또한 처지가 열악한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권세가를 주인으로 둔 노비 가운데는 주인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아래 이야기는 황소(黃釖, 1647~?)라는 이가
약관 시절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다.

황소가 하루는 노량진 나루에 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와 보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가마 하나가 땅에 내려져 있었는데 벌써 반쯤은 부서진 상태였다.

가마 안에서는 어떤 부인의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고 또 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가마 뒤에 서서 울고 있었다.

종이나 말은 보이지 않았다. 선비가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부인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복창군(福昌君, 1641~1680)의 궁노 십여 명이 말을 타고 오면서 가마를 치고 지나가더이다.

그래서 가마채를 잡은 하인들이 이를 항의했더니
궁노들이 화를 버럭 내며 십여 명이 동시에 말에서 내려서는 가마부터 끌어내리고 욕을 하며
‘우리가 이 여자를 범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더니 가마를 때려 부수고 가마꾼과 말도 두들겨 패 가마꾼과 말은 바람이 눕듯 달아나 버렸지요. 그리고 궁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유유히 가더군요.” 」

그러면서 선비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 앞에 가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홀연 한 무사가 추격을 해 와 등자를 휘둘러 궁노들을 모두 말에서 떨어뜨리고는 혼을 내주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패거리 가운데 궁노는 네 명이고 나머지는 궁노를 따라 악행을 저지르는 다른 집의 종들이었다고 한다.

종을 거느리고 가마를 탔다면 양반집 여성일 텐데 궁노들이 양반집 여성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예록(天倪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것들이 많아 위의 자료도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줄거리가 만들어진 것은 행패를 일삼는 권세가의 노비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19회

관에 소속되어 있던 공노비의 경우도 관리들을 믿고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임방(任埅, 1640~1724) 천예록(天倪錄)>에 나오는 노비 이야기다

임방(任埅, 1640~1724)은 조선 중기(숙종)때 문신으로 천예록은 1717년에서 1724년 사이에    편찬한 야담집(野談集)으로 필사본만 존재한다.


공노비였던 조막동(趙莫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막동은 천한 종으로 관가에서 먹고 살다가 그 몸을 마친 노비출신이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5부(五部) 사령(使令)이 되어 부의 관리가 길 닦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 나도 반드시 따라갔는데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장만하라고 요구하여 마음대로 마시고 배부르게 먹고는 그 나머지를 두었다가
해가 저물어 관원이 시장해 할 때를 기다려 가져다 바치면서 말하기를

‘마침 적은 음식을 준비하여 감히 한 번 맛볼 자료를 장만했습니다.’라고 하면

관원들이 매우 좋아하면서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관청의 잔심부름꾼에 불과한 막동이 관리의 묵인하에 백성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막동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천인 신분인 막동의 실제적인 지위는 일반 백성들보다 오히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노비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상전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경평군(慶平君)의 종이었던
김예봉(金禮奉, 1601~?)의 일화이다.

경평군(慶平君)은
선조대왕의 11남으로 평생 곧은 성품과 근신하는 태도로 임하여 정국의 대소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왕실의 안위를 위하여 전심을 다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김예봉은 경평군의 종이었다.

그는 말을 잘 훈련시켜 팔아서 돈을 모았다.

1636년(인조 14년)
겨울에 말 1필을 전창위(全昌尉) 유연량(柳延亮) 집에 팔았다.

비싼 값을 받은 지 10일이 되기도 전에 북쪽 변방에서 적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왔다.

예봉이 돈을 돌려주며 말을 달라고 말하기를
“우리 집주인이 피난을 가야 하는데 탈것이 없어 이 말로 모시려고 합니다.

말 값이 비싸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 공이 종으로 주인과의 의리를 내세웠으므로 곧 말을 내주었다.

예봉은 이 말로 경평군을 모시고 능히 난을 피했다.

난이 끝난 후 예봉은 주인에게 충직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이 일로 면천되어 뒤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실제 『무과방목(武科榜目)』에

김예봉은 면천(免賤)된 후 37세 되던 1637년(인조 15)에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0회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상전의 배려로 학문을 익히고 양반들과 교유하는 노비도 있었다.

조선에서 동인,서인 분당의 빌미를 제공하였던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 1545~1594)의 노비 서씨가 그러한 경우였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나오는 야기다

서 아무개는 심충겸의 종이다.
학문을 약간하여 헛된 명성이 있었다.

그러자
그 주인이 그를 놓아주어 일을 시키지 않고 한가롭고 편안히 살게 하였다.

경진년과 신사년 사이에
공산과 유성(지금의 충남청양 일대)에 살았는데 내가 일찍이 그와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서가 “성은 진실되고 정은 거짓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대하여 변론하였으나 그의 생각은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 됨됨이가 이와 같이 흐리멍덩한데도 한 시대의 많은 선비가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서씨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서씨는 양반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심충겸의 배려가 없었다면 서씨는 애초에 학문을 익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서씨의 학문이 높아지자 심충겸은 아예 서씨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이야기다

재상 심열(沈悅)의 종이었던 서기(徐起, 1523~1591)는
심열이 세상을 떠난 후 심열의 아들을 가르쳤으며 조헌(趙憲)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서기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심열이 서기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주인과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있던 노비들도 있었지만 이는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대다수의 노비는 인격적으로 예속된 최하층 신분일 뿐이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효빈잡기(效嚬雜記)>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는데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양민과 천민은 서로 혼인을 맺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부유하면서 친족들이 강성한 노비들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노비 대장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신분을 숨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상전을 살해하는 자도 있었다.

근세 이래로 법망이 느슨해져서 양민과 천민의 경계가 거의 흔적도 없이 되어 버렸다.

내가 듣자니, 백여 년 전에는 가난하고 몰락한 양반이 추노(推奴)를 하러 갔다가 해를 당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임매(任邁, 1711~1779),잡기고담(雜記古談)>

아예 노비 대장에서 이름을 빼거나 심지어 상전을 살해하는 등의 방법으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잡기고담>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양인과 천인의 경계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실제 ‘양천교혼(良賤交婚)’ 즉 양인과 천인 사이의 혼인이 널리 행해지면서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이전에 비해 모호해져 갔다.

그렇다고 노비들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었던 것은 아니다.

잡기고담(雜記古談)은
[천예록(天倪錄)]을 편찬한 임방(任埅)의 손자 임매가 1754년에서 1767년 사이에 편찬한 야담집으로, 현재 일본 천리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1회


♣노비 정학수~~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가 감히 글을 배우는 것도 모자라서 양반들을 가르치는 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심지어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노비 정학수가 그런 인물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는 수복(守僕: 능.서원 등에서 제사 업무를 돌보는 종)이었다.

수복들은 대대로 이어져오는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공권력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도둑을 잡으러 들어갔던 포도청 관리가 파직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던 노비인 그가 어떻게 양반들을 가르치게 되었을까?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성균관 유생들의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글을 깨우치지 않았나 싶다고 추정한다.

그렇게 성균관 노비들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체득한 학문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균관 동쪽의 송동이라는 곳에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세운 서당은 우리가 사극에서 본 것처럼 자그마한 문간방이나 대청마루에 아이들 몇 명을 모아놓고 천자문을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1770년 한양의 김진사는 매번 낙방만 하는 아들 때문에 걱정이 컸다.

아내는 소과에 올해만 5명이나 합격시킨 서당 이야기를 듣고 김진사에게 전해줬다.

이 서당은
수백명이 수업하고 있어 경쇠라는 종으로 수업의 시작의 끝을 알릴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김진사는 수업을 참관하고 아들을 이곳에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대기자에 입학까지 1년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니....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강당이 있었고,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경쇠라는 작은 종을 울렸다고 하니까 보통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인기 강사의 강좌에 수백 명이 몰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실력은 대단했는지 밑에서 배운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출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양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교류했는데 개중에는

그를 우암 송시열과 비교하다가 곤혹을 치룬 선비도 있었다.

조수삼(영조~헌종 시대의 시인)도 추재기이에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풍을 칭찬하는 글을 남겨 놨으며 정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고

양반들도 정학수의 천한 신분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을 맡겼다.

오늘날로 치면 강남스타 강사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의 이야기는 당대에 쉼 없이 오르내렸으며 심지어는 죽은 이후에도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22회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한 노비 엄택주~~

“가짜 양반 엄택주를 영원히 노비로 삼으라”

1457년 10월 21일 강원도 영월에 유폐됐던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죽었다.

영월 말단 관리 엄흥도는 서강(西江) 물가에 방치된 그 시신을 수습해 자기 선산 언덕에 묻었다.

1698년 숙종 때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왕위가 복위되고
1758년 영조 때 엄흥도는 사육신을 모신 영월 창절서원에 배향됐다.

단종이 묻힌 언덕은 장릉(莊陵)으로 조성됐다.

이보다 3년 전인 1755년 엄흥도 후손인 전직 현감 엄택주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1698년 11월 6일 ‘숙종실록’, 1755년 3월 12일, 1758년 10월 4일 ‘영조실록’>

노비 신분을 세탁해 현감까지 오른 뒤 흑산도로 유배됐다가 역모(逆謀)에 휩쓸려 죽은,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일생.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인 장릉(莊陵). 1457년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이 죽자 영월 관리 엄흥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신을 자기네 선산에 모셨다.

노비였던 이만강은 엄흥도 후손 엄택주로 신분을 위조해 현감 벼슬까지 지내다 적발됐다.


환부역조(換父易祖)와 화려했던 엄택주
이제 엄택주 이야기다.

도망간 노비 가운데 부(富)를 이룬 자들은 ‘부모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 족보를 위조해 양민 또는 양반 행세를 한다.

족보를 살펴보면 거의 친외가 모두 유학(幼學)이다
(左幻右眩而幾皆良丁幼學·좌환우현이기개량정유학).’
<1798년 12월 17일 정조 22년 ‘일성록’>

‘유학(幼學)’은 과거 급제나 벼슬 제수 경력이 없는 유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국가에 기록이 없는 자들을 골라 자기를 족보에 끼워 신분을 세탁한 것이다.

이렇게 아비를 갈아치우고 족보 위조로 할아버지를 바꿔버리는 행위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다. 우리의 엄택주는 역사에 남은 환부역조 대표 사범이다.


조선왕조 역대 과거 급제자 명단인 ‘국조방목’에 따르면
엄택주는 영월 사람이고 1719년 과거 응시 당시에는 강릉에 살았다.

171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경상도 영일 현감까지 지냈다. 아비는 엄완이요 할아버지는 엄효, 외조부는 신원종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3회

1745년 3월 7일 사간원 정언 홍중효가 영조에게 충격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엄택주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1745년 3월 7일 영조실록>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가짜라는 것이다.
주요 죄목은 ‘환부역조’와 ‘친부모 제사 의무 불이행’이었다.

알고 보니 엄택주는 노비였다.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다.

‘엄택주는 충청도 전의 관아 노비 아들이었다. 어미도 노비였다.
재주가 뛰어나 어릴 적부터 스승 신씨로부터 글을 배웠다.

훗날 “주인집 처자와 혼인하고 싶다”고 스승에게 털어놓자 스승이 크게 꾸짖었다.

이만강은 그 길로 달아나 영월 말단 관리 사위가 되고 스스로 엄흥도 후손이라고 칭하고 이름을 엄택주로 바꿨다.‘

정언 홍중효가 전의에 들렀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천민이 신분을 위조한 데다 전의에 있는 친부모 묘소에 단 한 번도 성묘하러 온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강상죄(綱常罪)까지 저지른 악질이었다.

서울로 끌려온 엄택주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흑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영조가 이리 하교했다.
“죽여도 아까울 것 없다 하겠다. 영원히 노예로 삼고 방목(榜目: 급제자를 기록한 책)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라.”
<1745년 5월 26일 ‘영조실록’>

국조방목에는 ‘삭과를 당하고 관노가 됐다’라 부기됐다.

가뜩이나 히스테리가 심한 영조였고,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라는 신분적 피해 의식이 심한 왕이었다.

영조는 신분 위조보다 ‘한 번도 그 아비의 무덤에 성묘(省墓)하지 않았음’을 제1의 죄로 꼽았다.

성리학적 질서를 파괴한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엄택주는 이듬해 몰래 서울을 왕래하다 발각되더니
<1746년 5월 26일 ‘영조실록’>

9년 뒤인 1755년 반(反)영조 역모 사건인 나주 괘서사건 때 주동자 윤지와 편지를 왕래한 사실이 드러나 서울로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엄택주는 “문예(文藝)가 있었음에도 귀양을 갔었기에 원한이 가득했다”고 자백하고는 물고(物故) 됐다.
고문사했다는 뜻이다.
<1755년 3월 10일, 3월 12일 ‘영조실록’>

출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조선의 노비산책>>> 124회


♣조선제일침. 침술의 대가 허임~
노비에서  어의(御醫)까지

허임(許任: 1570~1647) 본관은 하양

조선시대 최고의 명의였던 허준은 우리에게 드라마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허준은 실제로는 침을 놓지 못했으며 조선시대 촤고의 침술 명의는 따로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임이라는 인물이다.

허임은 전라도 나주목(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이던 아버지 허억복(許億福)과 사비(私婢)인 어머니 사이의 천민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7대조는 세종대왕 때 문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허조다. 그의 후손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돼 집안 전체가 천민으로 전락했다.

아버지 허억복은 본래 강원도 양양도호부에 소속된 관노(官奴)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귀영(金貴榮) 집안의 사노비였다.

부모의 병 때문에 동네의원의 집에가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특히 침구경험방에

“명민하지 못함 내가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하면서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을 떳다”고 

기록을 하여 자신의 의술을 배운 과정을 밝히고 있다.

약관의 나이에 침의로 발탁되어 임진왜란 중 광해군을 수행하며 치료를 했다.

그는 20세쯤 침의로 활약한 허임은 공주로 내려온 왕의 인후증을 우연히 치료할 기회를 맞아 큰 공을 세웠고

이후 내의원과 궁중의사로 활약하며 결국 왕을 치료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당대의 명의였던 허준과 동시대를 살았던 허임은

선조와 광해군.인조 때 까지 왕의 침의(어의)로 활동했다.


서출(서자출신)이자만 양반집안이었던 허준은 대역죄인의 외손자라서 출세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허임은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더더욱 출세가 아려웠던 인물이다.

일반 서자는 그나마 책이라도 읽을 수 있었지만 노비는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허임은 궁중에서 침 하나로 어의에 당상관 까지 올랐다.

선조의 극심한 편두통을 침으로 치료했기 때문입니다.

허준도 안정한 침술의 대개 허임~~
조선왕조실록에는 허준이 허임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은 침을 잘 놓지 못합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 어의였던 허준의 나이는 58세. 허임은 34세. 허임의 실력을 짐작 할 수 잇는 대목이다.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는 허준이 용천부사 허륜과 기생 출신의 손씨 사이에서 난 얼자라서 설움받고 멸시받고 지내다가 아버지 곁을 떠나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다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 인물이고 모델로 보이는 유이태라는 인물은 허준이 죽고나서도 약 150여년 뒤인 숙종 대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허준이 선조에게

"침술은 자신보다 허임이 낫다"라며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실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듯 보인다.

<조선실록>은 허임의 기행을 이렇게 전한다.

“침의인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임금의 명을 무시한 죄를 징계해 국문하도록 명하소서.”(광해군 2년)


이뿐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나서 직접 그의 징계를 탄원한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정2품 고위관리)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잡아다 국문을 해 그 완악함을 바로잡으라고 명하소서.”

사간원의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오히려 치료를 잘하는 의사라며 그에게 가자, 즉 포상금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제로 허준이 침을 놓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다고 하여 허준은 실제로 침술을 구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

인조반정 이후 관직을 버리고 집필 활동에 힘을 써서 '침구경험방'이라는 서적을 냈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고 중국과 일본의 침술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실제로 이 책을 청나라에서 표절한 이가 있어 크게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내의원 제조인 이경석은 ‘침구경험방’  발문에서  허임의 의술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을 했을 만큼 당 대 최고의 침의로 편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수많은 필사본으로 만들어져 질명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 내용은 신비한TV 서프라이즈  757회 때 조선제일침 허임을 소개한 바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5회

♣조태채의 노비  홍동석

조태채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인조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사촌인 조희석의 아들이며,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의 사촌이다.

특이하게도 그의 가문은 소론 가문인데 조태채 자신은 노론을 택한 인물이다.

경종 임금(숙종과 장희빈 사이 태생 ) 때 
즉위한 지 1년 밖에  경종임금에게  연잉군(훗날 영조. 숙종임금과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사이 태생)에게 양위하고 물러날 것을 건의(?)한 인물이다.

조태채  괘씸죄로 전라도 진도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노론의 거두이면서 그의 4촌 형인 조태구에 의해 결국 사사된다.

왕조실록을 보면

「금부 도사(禁府都事) 송식(宋湜)을 보내어 위리 안치(圍籬安置: 울타리 밖으로 못나가게 함)한 죄인 조태채(趙泰采)를 진도(珍島)에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 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 10월 29일>

조태채는 사약을 마시고 죽기는 했으나,

그의 충직한 노비 홍동석 덕분에 며칠이나마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조태채의 노비 겸 집사 홍동석은

상전 조태재의 힘으로 입사한  선혜청의 서리로 있을 때 상전인 조태채의 죄를 쓸 수 없다고 버텨 두들겨 맞고 서리직에서 쫓겨났다.

노비라고 해도 충성을 다하면  조정의 말단 직위가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동석은 조태채의 유배지까지 스스로 따라나서 거기서도 조태채를 돌봤다.

홍동석은
이후 금부도사와 수행원들이 조태채에게 사약을 가지고 오자 아직 조태채의 아들인 조관빈이 오지 못했으니,( 아버자의 사약 소식을 들은 아들이 마지막을  아버지 얼굴을 보기 위헤 긴급히  진도로 내려 오고 있는 중)

며칠만 더 기다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태채가 사약을 들이키기 직전,

이단옆차기로 사약을 뒤엎어버렸다.

사약(賜藥)이란 죽을 사(死) 가 아니고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약(?)이란 의미다.
홍동석은
임금의 하사품을 엎어버렸으니  죽을 죄를 범한 것이다.

당연히 홍동석은 경악한 금부도사 일행에게 실컷 처맞았다.

하지만 금부도사로서도 이 사실을 그대로 조정에 보고하면 왕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자신과 일행들도 엄벌을 면치 못할 수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안이 멸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금부도사는
조정에 조태채가 유배된 섬, 진도로  가던 길에 심한 파도로 사약이 엎어졌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덕분에 새로운 사약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이 유배지로 와서,  아버지 조태채와 며칠이나마 같이 머물며 못다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새로운 사약이 오자 그때서야 조태채는 이를 마시고 숨을 거둔다.

조태채는 이런 귀한 시간을 벌여준 홍동석을 칭찬하며 아들인 조관빈에게 그를 형제처럼 잘 대우 해달라고 당부했다.

조관빈도 그뒤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지키며 홍동석을 무척 아껴줬다고 한다.

이후 홍동석은 조관빈에 의해 면천까지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이윤이 생기는 말직을 받아 흥성했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26회

♣조선 후기 노비가   안동 김씨 양반으로 신분세탁을 하다

권내현 고려대 교수(역사교육)는

2012년 역사비평 봄호에 실은 논문 ‘양반을 향한 긴 여정'
을실었다.

권교수는
조선 후기 어느 하천민 가계의 성장에서 150여년에 걸친 노비 수봉과 그 후손의 신분 변천을 추적했다.

유교적 신분질서가 무너지던 조선후기 (17~18세기),

권 교수는 논문에서

“1678년에서 1717년 사이 노비 수봉이 평민이 된 후, 그의 후손들은

약 100년에 걸친 신분 세탁을 통해 중간층이 됐고,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유학’의 칭호를 얻었다”며

“노비 수봉의 집안은 1849년 본관을 안동으로 바꾼 후 안동 김씨 신분을 얻어, 그 지역을 대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비 수봉, 평민으로 신분 상승

1717년 경상도 단성현 도산면(지금의 경남 산청군)에 김흥발이라는 평민이 살고 있었다.

본관은 김해이고 군역을 부담했다.

권 교수는 그의 호적을 보고 원래부터 그가 평민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흥발의 아버지 수봉의 직역(職役)은 납속통정대부로서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정3품의 관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봉을 제외한 흥발의 다른 조상들은 평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군역이 호적에 기재돼 있지 않았어요.

또 흥발의 부인은 변 소사(召史)인데 변 소사의 외조부는 사노비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기 때문에 변 소사도 노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권 교수는 흥발 조상의 기록이 누락된 점, 흥발이 노비 출신 여성과 결혼한 점을 의심했다.

권 교수는 흥발과 수봉의 출신을 알기 위해 조선시대 관청이 기록한 호적을 살펴봤다.

“노비 가계를 장기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자료로는 호적만 한 것이 없습니다.”
1678년의 호적에 본관이 김해인 사노비 수봉이 있었다.

“이를 단서로 추적한 결과 과거의 노비 수봉과 훗날의 수봉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를 찾았다”.

“1678년 호적에 노비 수봉의 장인은 성이 기재돼 있지 않은 채 ‘금금이(金金伊)’라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아버지가 이생(李生)이었기 때문에 금금이의 성은 ‘이씨’가 되겠지요.

1717년의 호적을 보면 평민 수봉의 장인이 이금금(李今金)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1678년 노비 수봉에게는 금학(金鶴)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금학이 김씨 성을 사용할 때 반복되는 김(金)을 떼어내 김학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1717년 호적에는 수봉의 아들로 김학(金鶴)이라는 사람이 기재돼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노비 수봉이 1678년에서 1717년 사이 어느 시점에 평민이 됐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7회


노비가 어떻게 평민이 될 수 있었을까?

권 교수는
“노비들은 다른 지방으로 불법 도주를 하거나 주인이나 국가에 곡식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주인과 같이 살지 않는 외거(外居) 노비들은 평민과 유사한 처지에 있어 토지 경작이나 상행위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부를 쌓아 신분 해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노비들은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당시 평민들은 성과 본관, 이름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노비들이 평민이 될 때 성관(성과 본관)을 획득했습니다”라고 했다.

권교수는
"성관을 모두 가진 노비들의 비중은 1678년 5.4%에서 1717년 18.2%로 늘었다" 고 했다

수봉도 1678년에는 김해라는 본관만 갖고 있다가 천민에서 벗어나면서 김이라는 성을 쓰게 됐다.

상류층이 되기 위한 노력~~~

권 교수는
조사 과정에서 유독 진주(19.6%)와 김해(12%) 본관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진주는 도산면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김해는 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은 지역”이라며 “
노비들이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인구가 많은 지명을 본관으로 선호했다”고 했다.

본관이 김해인 주호(住戶)의 비중은 1717년 25%로 늘어 주호 46명 중 37명이 평민, 나머지는 노비였다고 한다.

권 교수는 “수봉의 다른 아들 홍창도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정3품의 명예직이 됐다”고 했다.

논문에 따르면 홍창은 아들 세우를 서원의 원생(院生)으로 등록시켰다.

뒤이어 수봉의 증손자 광오가 최초로 중간층의 업유(業儒)가 됐다.

수봉의 자손들은 중간층에 머물다가 수십 년이 지난 1831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상층의 유학이 됐다.

“19세기 중엽 그들은 알맞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 있는 본관에 의탁하기 위해 본관을 변경했습니다.

1825년 호적을 보면 수봉의 고손자 성종은 신등면(현 경상남도 산청군 일부)으로 이주하면서

안동으로 본관 이동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고 본관은 환원됐습니다.”

안동 김씨로의 본관 이동

수봉의 자손들은 본관 이동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김성종이 본관 이동에 실패한 이후,

그의 6촌 동생 김종원이 본관 이동을 다시 시도해 결국 1849년 호적에 있는 친족 구성원 모두의 본관을 안동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어 나중엔 수봉과 혈연적 연관이 없는 안동 김씨가 한 호밖에 없게 됐다.

권 교수는 “결과적으로 수봉의 후손들이 이 지역의 안동 김씨를 대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들의 본관 이동이 비교적 쉬웠던 것은 안동 김씨들이 18세기 이후에 도산면을 벗어나 대거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1831년 도산면 안동 김씨는 단 1호에 불과했다. 이것을 기회로 수봉의 후손들은 본관을 바꿨다.

본관 이동에 드는 비용에 관련해 묻자,
그는 “가짜 족보를 만들거나 향리와 결탁해 호적을 만들면 물론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비용 없이 몰래 본관을 바꿨다”고 말했다.

양반의 입양 문화 모방

수봉의 후손들이 완전한 양반이 되기 위해 행한 것이 또 있었다. 입양이었다.

권 교수는 “당시 입양은 상류층의 문화였다”고 했다.

그는 “단성 지역(지금의 산청 일대)의 경우,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이 17세기 유력 가문에 처음 정착돼 18세기 양반층으로 확대됐고,

19세기가 되면서 비양반층으로 전파됐다”고 덧붙였다.

수봉의 후손 중 최초로 입양된 인물은 1831년 양자로 기재된 김종원이다.

종원은 큰아버지 김정대의 양자 역할을 했고, 종원의 아들 재곤은 할아버지 이름을 김정대로 기록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부계 친족을 통해 가계를 잇는 것은 조선 후기 양반층의 정서였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양반이 되고자 한 상당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위를 상승시켜 온 하천민의 후손”이라며

“수봉의 후손처럼 경제력을 갖춘 하천민들이 오랜 기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완벽히 양반이 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8회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노비~~

사료를 보면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 수천 명의 노비를 둔 집안이 많았다는 정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직후 사헌부에서 태조 이성계에게 제출한 상소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왕씨 500년 동안 종친과 거족(巨族, 원문 표현은 ‘거실(巨室)’)들이 노비들을 많이 끌어들여, 천여 구(口)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종친이나 귀족 가문에 노비가 1,000명이나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보고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에 왕씨 성을 가진 종친과 왕씨 성을 갖지 않은 귀족들 중에 노비를 1,000여 명 가까이 보유한 예가 많았다는 의미다.

사헌부의 보고서를 보면, 노비를 1,000명 가까이 보유하는 것이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주가 노비를 사용해서 수익을 올리는 경제구도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또 조선시대의 특권층 역시 고려시대의 ‘선배들’ 못지않게 사회의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므로 특권층 가문이 대규모 노비를 거느리는 것은 고려시대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에는 수 천의 노비를 거느리는 광대한 농장이 경영되기도 했다.

태종 때의 홍길민(洪吉旼), 세종 때의 안망지(安望之)의 처 허씨(許氏), 문종 때의 유한(柳漢) 등은 1,000여구의 노비를 소유했고, 성종 때의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은 무려 1만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들은 대부분 주인의 농장에서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농장에서 노비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정도였다.

또한, 양반들의 농장이 발달됨에 따라 농장주들은 그들의 권세를 빙자해 국가로부터 사노비에 부과된 요역이나 공부의 면제는 물론 전조도 가볍게 징수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그리하여 이들 노비에게 부과되었던 요역과 공부까지 더해 부담해야만 했던 양인들은 그들의 과중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농장에 투탁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노비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하였다.

당시 노비 가운데에는 농업 이외에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의 대부분은 공노비였으며, 사노비 가운데에는 상업에 종사해 부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 노비 중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한 노비의 비중이 매우 낮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 사노비들은 대체로 양반·양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지만 능력 여하에 따라서 엄청난 재력을 보유할 수도 있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의 경우 천인·노비들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노비는 상전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시대와 같이 가옥·토지와 함께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29회

조선시대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선정한  청백리(淸白吏)는 총 217명이다.
그 중 이맹현(李孟賢, 1436~87)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세조 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성종 6년에는 경회루 증축을 시도하는 임금에게  가뭄에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는데 그런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극력하게 반대를 했던 인물이다.

오늘날의 차관보급인 홍문관의 부제학(정3품)을 지냈고
신라부터 고려까지의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청백리란 찬사에 조금은 걸맞지 않게 그는 수 많은 노비들을 거느렸다.

물론 청백리라고 해서 노비가 적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청백리가 수 많은 노비들을 보유했다는 것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

노비를 많이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재산도 많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494년에 작성된 분재기(分財記, 상속집행문서)에서 그의 노비 보유 실태를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망 당시 그에게는 전국 70개 군현에 752명의 노비가 있었다.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따르면, 300명 미만의 상시 근로자를 준 제조업체는 중소기업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300명 이상을 둔 제조업체는 대기업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 된다. 노비 숫자로만 본다면, 이맹현 집안은 대기업이었던 셈이다.

16세기에 권벌(權橃, 1478~1548)이라는 유명한 관료가 있었다.

그는
중종 때 도승지를 지냈고, 조광조를 실각시킨 사건인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에도 연루된 인물이다.

그로 인해 파직된 후 복직되어 경상도관찰사와 한성부판윤(=부시장) 등을 역임했다.

권벌 역시 많은 수의 노비를 데리고 있었다.

분재기에 따르면, 사망 당시 그의 노비는 317명이었다.

이맹현의 노비들은 전국 각지에 산재한 데 비해, 권벌의 노비들은 안동과 그 인근에 주로 거주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안동 권씨인 권벌은 안동 지역에서 상당한 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노비 1,000명을 거느린 사례는 <어수신화>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18세기에 한성에서 생존한 것으로 보이는 홍씨 과부의 집에는 거의 1,000명이나 되는 노비가 있었다.

이 집안의 노비는 경기도 안성·이천과 경상도 예천 등지에 분포해 있었다.

홍씨의 남편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각지의 노비들은 공물을 꼬박꼬박 잘 바쳤다.

하지만 남편이 죽고 관리 체계가 약화되자 노비들이 주인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물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한 집안이 많은 수의 노비를 거느린 모습이 이방인들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네덜란드 동인도연합회사 직원으로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서른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제주도에 표류한 젊은 선원이 있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30회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그 주인공이다.

제주도는 물론 한양과 전라도에서 13년간 생활한 그는 조선을 탈출해서 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멜 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을 남겼다.

그는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서

“양반의 수입은 소유지의 재산과 노비로부터 생긴다”라고 한 다음에,

“어떤 양반은 2,000~3,000명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노비가 살았을 리는 없기 때문에,
하멜이 본 것은 같은 집안의 외거노비가 한 마을이나 여러 마을에 나누어 살고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런 광경을 목격한 곳은 농토와 농민이 많은 전라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멜이 조선의 언어와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은 전라도로 옮긴 뒤였기 때문에,

그곳에 살 때에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노비를 거느리는 가문은 사료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도 나타난다.

유명한 <장화홍련전>에서도 그 같은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 시절
평안도 철산군에서 지역 유지인 배무룡의 딸로 태어난 장화와 홍련은
어려서 엄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하다가 둘 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

언니인 장화는 계모의 계략으로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동생인 홍련은 이를 비관하다가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억울한 죽음에 한이 맺힌 홍련은 철산부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자신의 사연을 호소했으나, 귀신의 출현에 놀란 신임 부사들은 하나같이 기절하여 죽어 나갔다.

나중에는 다들 철산부사 자리를 기피할 정도였다.
이때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인물이 정동우란 관료였다.
철산부사 직을 자임한 그는 부임 첫날밤 홍련과 당당히 대면했다.

홍련은 귀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부사 앞에서 자신을 소개한 뒤, 계모가 자기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비는 혹해서 계모의 참소를 듣고 소녀 자매를 심하게 박대했지만,
소녀 자매는 그래도 어미라 계모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사옵니다.
계모의 박대와 시기는 날로 심해졌사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본디 소녀의 어미가 재물이 많아 노비가 수천 구요, 전답이 천여 석이었나이다.

그러니 보화는 거재두량(=車載斗量, 수레로 담고 말로 헤아릴 정도)이라,

소녀 자매가 출가하면 재물을 다 가질까 보아 시기심을 품고 소녀 자매를 죽여 재물을 빼앗아 제 자식을 주고자 하여 주야로 모해할 뜻을 두었나이다.

자신이 재산 문제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홍련은
친엄마의 노비가 “수천(數千) 구(口)”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수천’이란 것은 2,000~3,000을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1,000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한 가문들이 많았기에 문학작품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 집안이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노비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료나 문학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한 집안이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노비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 집안’이 아니라 ‘한 기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31회

조선시대에는 가문을 중심으로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이 이루어졌으니,

당시의 가문은 오늘날의 기업이나 정치조직 같은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한 집안에 수백 혹은 수천의 노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위계질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솔거노비들 간의 위계질서는 한층 더 촘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비들 사이의 계층질서에서 최상위에 있는 사람을 흔히 수노(首奴)라 불렀다.

이런 수노는 오늘날로 치면 사실상 최고경영자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집안일은 물론 농업경영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수노 주변에 있는 상층부 노비들 역시 대기업 이사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왕의 남자 노비인 내시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듯이 주인의 최측근인 이들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아야 한다.

양인 신분을 가진 일반 농민이나 하급 관직을 가진 선비들이 과연 이들 앞에서 허세를 부릴 수 있었을까?

앞에서 도망노비 김의동의 사례를  소개했다.

고관이 된 김의동과 마주친 것은 업산이란 노비였는데 그는 일반 노비가 아니었다.

외거노비들에게 세공을 징수하는 일종의 관리직 노비였다.

김의동은 업산에게 공손히 읍을 올렸다.

물론 업산의 입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업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한 집안에서 외거노비뿐 아니라 양인 신분의 소작인을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수노가 외거노비뿐 아니라 양인 소작인까지 함께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양인 소작인은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수노의 감독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기업에 ‘얽매인’ 이사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영업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길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가 대기업 ‘노비’인 이사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가?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관리직 노비와 일반 양인의 역학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한다.

그러므로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최하층의 지위에 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노비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속한 경우에는 그 속에서의 서열을 바탕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노비는 신분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도 열등한 입장에 놓여 있었지만,

일부 노비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지라도 노비는 법률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비 신분이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강해진 자신의 모습에 흐뭇해하는 순간, 주인이 형법상의 특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32회


한성 최고 기생, 성산월을 차지 한 노비~~~

성주 기생 성산월(星山月) 그리고
좋은 기회를 놓친 김예종(金禮宗)

기생 성산월은 지난 ‘기생산책’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한 번 더 소개한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녀는 “날씬하고 뽀얗고 수려”해서 당시 최고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덕분에, 나중에는 한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성으로 옮긴 그는 고급 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웬만한 남자는 얼씬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날씬하며 피부가 뽀얗고 수려해 귀인들이 노니는
화려한 연회를 독차지 하였으니,

장안의 젊은 협객들이
멀리서나마 바라보고자 해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루는 지위가 높고 점잖은 명류들과 더불어 한강에
배를 띄우고 놀다가 취한 틈을 타 주연을 피해
돌아오던 도중에 큰 비를 만났다.

성산월은 밤 10시 이후에 숭례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성문은 새벽 4시 무렵에 열고 밤 10시 무렵에 닫았다.

성문은 닫히고 비는 쏟아지니, 이래저래 마음이 급했던 그는 어느 집 처마 밑에 있는 불 켜진 창문에 접근했다.

창 안쪽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보니,

글을 읽는 젊은 선비가 보였다. 성산월은 작게 헛기침하며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성산월이 조그맣게 기침 소리를 내며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서생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성산월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소연하였다.
​"저는 성 안에 사는 기생이옵니다.
주연을 피해 오다
비를 만났는데 기숙할 곳이 없습니다. 책상 아래 한
귀퉁이를 빌려 밤을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인기척에 의아함을 느낀 김예종은
창문을 열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쁜 여자가 비를 맞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여자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룻밤 자고 갈 수 있겠냐’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크게 놀라 생각하기를 '이처럼 빼어난 미인이 어찌
빈한한 서생에게 스스로 몸을 던지리오?

필시 요괴일 것이다.'하고는 즉시 문을 굳게 닫고 손가락을
튕겨 주문을 외우며 말했다.

​"어떤 요망한 귀신이 감히 와서 사람을 현혹하느냐?"

​성산월이 말했다.

​"저는 사람이지 귀신이 아닙니다. 나이 젊은 선비가
풍류가 적어서 그렇소?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어찌 이리
야박하시오."

​서생은 더욱 두려워져 스스로 안정시킬 수 없는지라,
연이어 이십팔수를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성산월은 밤새도록 문지방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비를
피하였다. 날이 밝자 성산월은 창문을 밀치고 서생을
꾸짖었다.

​"불쌍하구려, 이 서생아. 당신은 장안의 명기 성산월의

이름도 못 들어 보았소? 당신같이 궁색한 선비가
청천명월에 나를 맞이하려 한들 내가 당신을 돌아보기나

하겠소? 내가 불행히 비를 만나 재워 달라고 애걸하였는
데도 도리어 나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지지리
복도 없는 인간이오. 나를 자세히 보시오. 내가 과연 귀신인가~~

 

<조선의 노비산책>>> 133회


<어우야담>에 따르면  천하의 기회를 놓친 그 남자는  이 선비는 김예종(金禮宗)이란 청년이었다.

김예종은 1552년 진사시험과 1564년 대과에 합격했다. 또 선조 21년 7월 12일자(1588. 9. 2.) <선조실록>에는 사간원이
“충주목사 김예종은 그릇이 적합하지 않으니 해임하십시오”라고 건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시 소인배(?)였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성산월의 명성을 일거에 무너뜨린 남자가 있었다.

성산월을 ‘차지’한 남자가 아니라 성산월을 ‘무너뜨린’ 남자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성명 미상의 일개 노비였다.

장흥고(長興庫) 소속의 공노비로 알려진 남자다.
장흥고(長興庫)는 궁중에서 사용할 물품(돗자리.유지.종이 등)을 조달하는 관청이었다.

이곳 소속의 관노가 성산월에 접근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체적 콤플렉스도 갖고 있었다. 호리병처럼 생긴 큰 혹이 목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성산월을 자기 여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목에 큰 혹이 있는 노비의 여자가 되었으니 당대 최고의 기생이라는 성산월의 명성이 일거에 붕괴된 것은 당연했다.

당대 최고의 기생을 자신의 여자로 만든 그 노비는 돈이 매우 많았다.

<어우야담>에서는 “재산이 거만(鉅萬)이었다”고 했다. 이 표현만으로는 재산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고위층 인사들을 제치고 성산월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던 모양이다.

<어우야담>에서는 성산월의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방법은 있다.

크게 두 가지 루트가 있는데
만약 납공노비였다면, 그는 농업보다는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선상노비였다면 근무 외 시간에 상업 같은 것을 경영할 수도 있었지만,

돈을 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조달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업무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당시엔 안정을 해준 것이다. 양반은 공업.상업은 쳐다보지도 안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개 관노가 당대 최고 기생을 유혹할 정도의 재산을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사극 속의 노비들은 좁은 방에서 별다른 재산도 없이 살지만, 이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노비들 중에는 상당 규모의 재산을 모은 이들도 있었다.

이어지는 노비산책에서, 노비의 재산 보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조선의 노비산책>>> 134회


노비의 재산 보유 ~~

민법상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자체가 법인격을 부여 받은 사단법인,
재산 자체가 법인격을 부여 받은 재단법인 등,

이런 법인들은 형식적으로만 사람일 뿐이지 실상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법인제도를 만든 까닭은,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사람이 아니면 법률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람만이 인간사회 안에서 집도 사고 물건도 사고 거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관념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니면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없다는 관념은 노비의 재산권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보면, 당시 노비가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은 원칙일 뿐이었다.

전체 인구에서 적어도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노비들이 GNP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다가 주인이 모든 노비를 완력으로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노비가 자신의 재산을 확보하고 증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컨대 외거노비가 세공을 바치고 남은 쌀을 아껴 먹고 비축해둔 경우,

주인이 그것까지 가로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인들이 그렇게 했다가는 노비제도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먹고살기도 바빴겠지만,

일부 노비들 중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부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부자가 된 노비들 중 일부는 축적한 재산으로 토지나 가옥 등을 매입했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소수의 노비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앞서  장흥고(=돗자리 등 물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배부하는 관서) 노비가  당대 최고의 기생 유혹할 수 있는 재산을 모은 것은,

이처럼 노비의 재산 보유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수이기는 하나 노비들 중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부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거부의 반열에 오른 노비들을 사료에서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중 한 명을, 함길도(함경도)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한 세조시대의 사례에서 만날 수 있다.

함길도는 여진족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다.

그렇기 때문에 군수물자를 충분히 공급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국가재정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또 변방이어서 군수물자를 제때 공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은 민간에, 그리고 노비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세조실록>(세조 13년 7월 4일자.1467. 8. 3.) 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공노비나 사노비가 쌀 50석(100가마니)을 함길도까지 직접 운송해주면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35회


쌀 50석은 상당한 재물이었다.

기록에 의혀면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논 한 마지기(300평)의 연간 수확량이 112킬로그램에 불과했다고 한다.

극히 저조한 셍산량이다.

한 마지기에서 쌀이 한 석도 안 나왔던 것이다. 조선시대 수확량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

수확량이 적었으니,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에 비해 쌀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보면, 쌀 50석을 국가에 헌납하고 자기 비용으로 함길도까지 운반하는 것은 대단한 경제력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국가가 노비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제법 많은 수의 노비들이 꽤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너무 많은 노비들이 이 제안에 호응하는 바람에 국가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위의 조치를 시행한 지 2개월 만인 세조 13년 9월 10일(1467. 10. 7.)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함길도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생기는 군사상의 이익보다는 노비들을 대거 면천시킴으로써 생기는 체제상의 불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부유한 노비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재벌들이 거액의 성금을 내는 일이 있다.

이것은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일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재벌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도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부자들이 재산을 헌납하곤 했다.

그런데 노비들이 거액을 헌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헌납 즉, 기부금을 놓고 흥정(?)을 벌인 노비도 있다.

감히 왕에게 딜을 건 私노비 임복~~~

조선시대에도 홍수.가뭄.역병 등 자연재해.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일단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

하늘이 벌을 준 것이다‘라고 생각들 했다. 일명 ‘재이설 =災異說’이다

물론 임금도 신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을 물고 늘어진다.
성종임금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이야길 하긴 했다. 기우제도 지냈다.

그러나 하늘은 비 소식을 주지 않았다.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감동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반응으로 나타나 좋은 징조와 나쁜징조가 각각 종류대로 이르는 것이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비가 제때에 오지 않고 불볕이 내려 쬐여 곡식을 상하게 한다.

내가 염려하건데 안팎의 관리가 내 뜻을 따르지 않고 혹은 억울하게 매를 때려서 인명을 상하게 하거나 혹 옥사를 결단하는 것을 게을리 하여  이를 체류시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고 재앙을 부른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바라건데 모든 관리는 각각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여 옥송(獄訟) 유체됨 없고 원통하고 억울함이 다 풀리게 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대응하고 나의 수성(修省)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성종실록 16년 5월 29일>

 

<조선의 노비산책>>> 136회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게 큰 기업(基業:대물림왕조)을 이어 받았으니 마음이 바르지 못한 까닭으로 다스리는 도에 어둡고 행실을 닦지 않은 까닭으로 일을 행함에 마땅함을 잃어서 하늘의 노여움과 꾸짖음을 초래하여 한밭이 해를 끼친다”
<성종실록 16년6월3일>

위 글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성종임금이 반성문(?)으로 제출한  '자아비판' 글이다.
성종의 자아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성이  부족했던지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영의정이 사표를 내야할 차례인가?
물론 반려 되겠지만 형식이 그랬으니까......

당시 가뭄에 대처하는 순서는
기우제-왕의 반성문 제출-정승급 관료 일괄 사표-장관급(판서) 관료 사표......순이었다.

물론 사면령도 내리고 죄수도 방면하고 궁녀도 방출(노처녀 결혼 못해 한이 맺혀 가뭄)했다.

“신 등은 삼공(三公:영의정.좌.우의정)의 자리만 갖추고 음양을 고루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신 등이 잘 보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청컨대 신 등의 직임을 갈아 주소서”

<성종실록 16년 6월3일>

영의정 윤필상 등 3정승이 사표를 냈다. 물론 반려를 했고....
그러나 또 사표를 제출한다.........성종이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6조의 판서 등도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신 등은 지위가 육조의 반열에 있으면서 그 직위만큼 덕이 없으니 이번 한재는 오로지 신 등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에서 맘미암은 것입니다.
신 등을 파직하여 하늘의 견책(譴責)을 막아 주시길 청합니다”

이에 성종왈

“경 등의 맘이 진심으로 성심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니
(이 말의 뜻은 너희들 관습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지 뭐...)

“신 등의 말은 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감히 거짓이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성종이 하교하길
“사직하지 마라”고 했다. 각본대로 된 것이다.

이번에는 호조에서 공무원 인건비 삭감안을 들고 왔다.
호조판서 이덕량이 아뢰길

"이른 곡식은 이제 이미 절망 상태이고 콩도 심지 못하여 백성들의 생업(生業)이 우려됩니다.
금년의 한재가 이에 이르렀으니 공무원들의  녹봉을 신축년의 예에 의하여 오는 추등(秋等: :가을 절반 시기)부터 시작하여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성종 왈
“그렇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어느날

“진천에 사는 사노(私奴) 임복(林福)이 백성을 진흘하기 위해 곡식 2,000석을 바쳤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이제 기근을 당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도 바치려 하지 않는다.

천한 종의 몸으로 이를 하였으니 면천하는 것으로 상을 줌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승지(왕명 출납 담당  당상관) 등이 아뢰길

“이 사람은 본래 면천하여 양민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비록 국가에는 공이 있어도 그 주인으로 본다면 횡역(橫逆: 사노의 재산의 곧 주인의 재산이라는 의미)한 종이 되며 또 종량(從良:양민으로 면천)은  중대한 일이니 쉽게 그 단서를 열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했다.
<성종실록 16년 7월 24일>

노골적으로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한 것이다. 지네들은 콩 한 알도 내놓지 않으면서........

 

 

<조선의 노비산책>>> 137회 4.18(화)


성종은 양반 놈이나 벼슬아치들은 입만 살아서 기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데 노비가 감히 기부를 하다니....진정으로 감탄했다.

승정원(비서실)에 명하여 임복을 불러서 그의 희망사항을 조사하라고 했다.

임복은 그의 네 아들이 있는데 면천하여 양민이 되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한명회.이극배. 윤호 등이 의정부(議政府)와 의논하여 결론을 내고 아래와 같이 임금에게 청하였다.

“임복이 곡식 2,000석을 바쳤으니 이는 100명의 생명을 구하기 족 합니다.

임복의 원에 따라그 아들의 면천을 만들어 주고 그 인원에 상당한 노비를 그 주인에게 보충하여 주소서“ 라고 했으며

심회(좌의정.영의정 역임. 세종의 정부인 소헌왕후 친동생)으로 원칙론자),홍응(우의정.좌의정 역임.성종의 1등공신) 등 다른 쪽인물 들은

“만약 곡식을 바쳐 종량(從良)하는길을 열어 준다면 주인을 배반하는 자가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국론이 나뉜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 왈

“임복의 네 아들 모두 종량하고 공천(公賤:관노비)으로 본 주인에게 보상해 주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성종실록 16년 7월28일>

이런 성종의 결정에 끝까지 물고 늘어진 자가 있었으니 그는 전라도 진도 출신 사헌부 대사헌 이경돈 이라는 인물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어떻게 감당 하시려고 그럽니까?”

성종은 진돗개 이경동의 반대에 입장이 곤란해 했다

.함부로 할 수도 없고... 계속 물고 늘어질 놈이 분명하거늘....
조선시대 사헌부 근무자들, 특히 대사헌(검찰총장.감사원장)은  원칙을 앞세워 꼴통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노비 임복이 이를 알아차리고 승부수를 던진다.

임복은 추가로  곡식 1,000석을 더 바치 겠다고 아뢰었다.

성종이 전교하길
‘지금 바친 것은 관봉(관에서 도장을 찍어 봉함)한 식량 가운데 있는 것인가? 그것도 묻도록 하라“고 하였다

임복이 아뢰길
“신의 私穀(사곡)은 모두 8,000석인데 현감과 어사가 모두 봉하였으며 지금 신은 봉한 것 가운데 1,000석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임복이 전날에 곡식 2,000석을 바쳤으므로 진휼(흉년에 백성을 구함) 할 밑천으로 삼고 특별히 양인을 삼도록 명하였는데

그 아들이 4인으로 곡식을 바친 수량은 적고 종량할 자는 많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종량할 수효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흉년에 자기의 재물을 아끼지 이니하고 1,000석을 더 바치니 그 정상이 가상하다,

그 아들  4인을 이울러 종량하라“ 고 했다.

임복과 네 아들은 그렇게 면천 되었다.

구휼미 3,000석을 낼 정도면 총 재산은 더 많다는 것인데 어떻게 노비가 이런 어머어마한 재산을 모았을까?

임복 본인의 말로는

자신의 재산은 곡식만 8,000석이라고 했다.
그렇게 모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외거노비’( 外居奴婢 )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일이 전국의 부자 노비들에게 큰 영향을 준 모양이다.

한 달도 안 돼서 충분한 양의 곡식이 모아진 것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부자 노비들이

기부 대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38회

그런데
뒤늦게 이 대열에 동참한 사노비가 있었다.
전라도 나주의 남평에 사는 가동이란 노비도 임복과 똑같이 2,000석의 곡식을 납부한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이번에는 임복과는 다른 명을 내렸다.
이미 충분한 양의 곡식을 모았으니 더는 면천을 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처럼 부유한 노비들의 존재를 사료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장흥고 노비와 관련해 그의 재산 증식이 상업 경영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상업 외에 농업 경영도 재산 증식의 주요 방법 중 하나였다.

직접 농사를 지어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부유한 양인의 대토지를 관리해주는 방법으로도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수건이 엮은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담긴 하씨(河氏) 여인의 〈화회문기(和會文記)〉(재산분배 문서)에서 그런 정황이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작성된 이 문서에 따르면,

김부필(金富弼)이란 이의 미망인인 하씨는 대토지를 소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런데 하씨 집안의 전답은 100여 년 전부터 노비가 관리했다. 일종의 마름이 이 집안의 토지를 관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고 하씨 집안의 감독이 느슨해지니, 이 집안의 토지는 어느새 노비의 실질적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TV에서도 소개된 이야기다.

“태반이 줄어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토지가 노비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조선이란 나라를 실무적으로 운영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다름 아닌 노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가 직접 토지를 관리하기보다는 노비가 권한을 위임받아 대신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주인의 토지를 은근히 잠식해서 자기 재산을 증식하는 노비들도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노비들도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국가 입장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는 제대로 운영될 수 없는 것이 국가다.

노비들 중에도 가진 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농업생산과 그로 인한 조세 수취를 기대할 수 없었다.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을 경우 노비주가 노비의 재산을 빼앗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노비의 노동에 근간을 둔 경제체제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39회


<세조실록>(세조 4년 1월 30일자.1458. 2. 13.) 에서는

노비의 재산을 보호해주려는 국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노비주가 노비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 사례를 통해 노비든 양인이든 가진 자를 배려하는 국가의 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노비들 중에도 재산을 축적한 이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극히 일부의 부유한 노비의 모습을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 노비의 이미지에 대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별한 노비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부유한 노비가 적지 않았음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전체 노비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노비는 주인이나 일반 양인에 비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재산이나 신체가 부당한 침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양인에 비해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재산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노비들은 양인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노비산책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런 예외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연산군 유모 노비 최씨~~

왕도 당연히 어미젖을 먹고 자랐다.

그러나 신분상 왕비나 후궁들은 의사들이 맥도 함부로 짚지 못했는데  가슴을 풀어 제치고 젖을 먹이기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중전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왕이 될 원자들은 누구 젖을 먹고 자랐을까?
젖 때문에 신하들과 정치적 싸움을 벌인 연산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전하 감축드립니다. 건강한 왕자님이 태어났사옵니다”
수고한 사람들 포상도 하고 죄인 방면 등 사면도 하고.....

이 때 준비할 것 중 중요한 것이  젖을 먹여줄 유모를 준비 시키는 일이다.

당시 왕자를 낳은 여인들은 삼칠일(3×7=21)까지만 자식에게 젖을 물렸고 그 다음 부터는 유모가 대신했다.

왕자.공주를 떠나 왕실 자식들은 유모가 젖을 물렸다.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띠는 유모선발 절차는 매우 까다로웠는데 대부분 대비가 친히 선발을 주도했다.

선발조건을 보면 일반적으로 건강문제.지병여부,음주여부.식성은 어떤지. 그리고 인성까지 검사를 했다

심지어 젖 색깔까지 살폈다. 진한지 희멀건지...
유모로 뽑힐 수 있는 사람은 젖이 나와야 하니까 아이를 낳은 상태에서 선발된다.

그러니 자기자식은 젖을 먹이지 못한다.
더구나 차기 임금 후보자 일 경우 유모는 더욱 엄격하게 선발했다

유모의 신분은 어떠했을까?
대부분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청) 또는 각 사의 여종 가운데서 선발했다.

차기 대권주자가 노비의 젖을 먹고 자라다니....사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왕자들과 어머니 관계는 정이 없다고 해야할까?
후궁들은 자식들에게 반말도 못했다. 임금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중전도 조심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모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젖을 떼어도 유모 젖을 만지고 성장한 왕자도 있다.
젖을 떼면 바로 유모가 떠난 것이 아니고 2~3년간 보모로서 계속 왕자의 곁에 남았다.

이러다 보니 유모들은 젖먹이 무렵부터 성인이 될 때 까지 왕자의 곁을 지킨 친밀한 여인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 왕자가 왕이 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아닐 수 없다.

폐비 윤씨 소생 연산군은 자신이 어머니가 죽은 줄 알고 성장을 했지만 계비 정현왕후가 자기 친아들 진성대군과 똑 같이 잘 관리를 해주어 별 불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모정에 굶주린
연산군은 유모 최씨에게 과다하게 집착을 했다.
한마디로 지나친 애정을 과시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40회

연산군은 유모 최씨에게 어떤 상을 내렸을까?

우선 봉보부인(임금이 유모에게 내려준 봉작으로 종 1품)이란 칭호를 내린다.

당시 육조 판서(장관)직급이 정2품이니 장관보다 직급이 높았던 것이다,

이런 직위에 걸맞게 연봉도 대단했다.

연산군 당시 영의정 연봉이 얼마나 되었을까?  
월급이 쌀 2석 8부에 콩 1석5두 였으니 약4석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연봉이 50석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봉보부인은 연봉만 60석이었다. 여기에 식대 .의상비. 같은 퓸위유지비는 후궁인 빈 수준에서 매달 지원을 받았으니 인생역전이 따로 있을 손가~~

방금 전까지 노비신분이고 궁녀였던 유모가 종 1품 봉보부인이 되고 노비신분에서 해방되었으며 덤으로 그녀의 남편 역시 벼슬을 받았다. 이뿐인가?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상당한 지원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부릴 수 있는 노비들도 보너스로 주어졌다,

웬만한 양반가를 압도하는 부와 명예를 얻는 셈이다.

진짜는 임금과의 끈끈한 정이다. 웬만한 청탁은 다 들어 준다.

과거 예종임금이 자신의 봉보부인의 사촌까지 면천을 해주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27명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봉보부인의 동생 1명만 면천을 해주었다,


연산군은 어떠했을까?
노비 유모 최씨, 봉보부인 최씨와 관련된 친인척의 면천 범위를 놓고 금기야 왕권과 신권이 대립을 하게 된다.

이 때가 연산군 즉위 2년, 나이는 20살이었다.
신하들은 연사군의 기를 꺽을 필요가 있었다,

“전하, 아버지 성종을 따르셔 야지요”
“아니다. 나는 예종을 따를 것이다”
“아니되옵니다. 아버지 예를 따라야 합니다”

연산군은 신하들과  면천 범위를 놓고 기 싸움을 벌였지만 봉보부인의 죄(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연산군의 언급으로 봐서 왕실 물건 절도)를 물어 모두 없던 것으로 해버린다.

본인의 직책도 회수해 버리고.....연산군은 신하들이 그 원인을 물었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아 가록에 남질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세월이 지나 다시 유모 최씨에게 봉보부인 직책을 돌려주는 등 직첩과 녹봉을 돌려주었고 그의 아들과 사위에게 벼슬을 하사했다,

봉보부인이 죽은 뒤에도 그 가족에게 봉보부인이 받던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선의 노비산책>>> 141회


♣남편을 과거에 합격시킨 여종~~~~

일본에서는 오늘날처럼 고대에도 까마귀가 길조였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이 까마귀의 인도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까마귀를 길조로 인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는 <산성일기(山城日記)>에는

“(임금께서) 산성에 들어오신 후 성 안에 까마귀와 까치가 없었는데,
이날은 많이 들어오니 사람들이 길조라 했다”는 문장이 있다.

이처럼 과거 한국에서는 까마귀와 까치가 모두 길조로 통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까마귀는 흉조의 대명사로 변하고 까치만 길조의 대명사로 남았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까치가 남쪽 가지에 둥지를 틀면 영화(榮華)를 본다’는 속설이 있었다.

적어도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속설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자기는 원래 이런 속설을 비웃었다고 했다.
그(유몽인)가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청파(靑坡)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지붕 남쪽 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틀자, 사람들은 유몽인이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유몽인이 아닌 처형의 사위였다.

그 뒤 까치가 똑같은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그해에는 유몽인이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이때가 1582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이었다.

이로부터 7년 뒤, 똑같은 나무에 까치집이 다시 생겼다.

이번에는 유몽인이 대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의 일이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유몽인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 전에는 꼭 까치집이 등장하곤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한 공로로 종전 후인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뽑혔을 때도 유몽인의 집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이쯤 되면, 까치 속설을 비웃던 유몽인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明禮坊)에 살 때의 일이다. 이때도 집의 남쪽 버드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당연히 그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같은 유씨 성을 가진 지인이 무과에 급제했다.

그해에 유몽인의 관직은 낮아지고 집에는 우환이 생겼다. 다음 해에도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이번에는 유몽인의 여종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포수인 그의 남편이 무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번에도 유몽인과 그의 집에는 나쁜 일이 생겼다.

까치가 오면 복이 온다느니, 올빼미가 오면 화가 온다느니 하는 속설들이 언제나 적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유몽인의 결론이다.

유몽인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새옹지마의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42회


명례방(지금 서울 명동)에 살 때 출현한 까치는 유몽인에게는 좋지 않은 의미를 주었지만,
그 집 여종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여종에게는 좋은 전조(前兆)가 되었다. 여종의 남편이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노비의 남편이 과거에 합격하다니, 언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유몽인은 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기록했다.

가까운 지인이 무과에 합격한 것과 여종의 남편이 무과에 합격한 것을 똑같은 어조로 기록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이 여종은 외거노비였던 듯하다. 솔거노비였다면 남편이 유몽인의 집에서 편히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종이 유몽인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남편은 가끔씩 거들면서 과거를 준비했던 듯하다. 아내는 노비, 남편은 양인이었던 것이다.

이 경우, 남편이 급제한다고 해서 부인이 자동으로 면천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이 여종은 평생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유몽인에게 보상금을 준다면 모를까. 남의 집 농토를 경작하면서 공부를 했으니 가문이 좋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든든한 배경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관료가 된 후에도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출셋길이 신통치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를 배출했다고 해서 이 집안의 형편이 아주 비약적으로 좋아졌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여종은 평생토록 유몽인의 집에 얽매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이 여종을 쉽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과 합격자를 남편으로 둔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유몽인은 물론 유몽인의 집안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역 사회에서 그는 남편을 과거에 합격시킨 ‘장한 아내’로 통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천대를 받은 게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노비일지라도 가족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43회


유사한 사례는 《금계필담》에서도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영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의 이야기다.

조문명은 연잉군(延礽君, 훗날의 영조)을 보호하고 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가 1725년에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떠날 때의 일이었다. 압록강을 넘기 전에 조문명은 평안도 안주진(安州鎭)에서 머물렀다.

‘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군이나 현에 상응하는 지역이다.

이런 경우에 지방 관청에서는 관기들을 불러 사신을 접대했다.
조문명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관계(官界)에 입문한 지 12년 뒤였으니, 이런 대우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이때 연회장에서 열두 살짜리 관기가 그를 매혹했다. 그는 소녀를 따로 불렀고 그 뒤 부채를 정표로 주었다. 물론 안주를 떠난 조문명이 그 관기를 언제까지 마음에 담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훗날 조문명이 안주를 다시 방문했다.

그때 밤늦은 시각에 아전 한 명이 조문명을 찾아와 부채 하나를 바쳤다.

부채에는 옛날 그 관기의 글이 적혀 있었다. 아직도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 관기는 조문명을 만난 이후로는 어느 누구의 수청도 들지 않고, 오로지 시 짓고 책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수청을 거부해 고초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아전을 시켜 관기를 불러보니, 머리는 지저분하고 얼굴은 더럽고 옷차림은 남루했다.

자신을 기다리다 이렇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조문명은 그 길로 관기를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조문명에게 관기의 존재를 환기시킨 아전은 관기의 오빠였다.

정확한 직책은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오늘날로 치면 시청·군청·구청의 공무원이었다.

사극에서는 사또에게 아부나 하고 목소리도 약간 여성스럽게 나오지만, 이방 같은 아전들은 조금 과장하면 지금의 시·군·구 국장급에 해당했다.

일반 서민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관기의 오빠가 국장급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아래였는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조의 최측근에게 접근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라면 안주진 내에서 상당한 위상을 점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관기가 수청을 거부하느라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시를 짓고 공부하며 조문명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오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성춘향처럼 사또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 관기는 지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정 노비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종합적으로 고찰해야만 그의 사회적 지위를 정확하게 도출할 수 있다.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최하층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노비 중에는 양인에 못지않은 혹은 양인보다 훨씬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신분과 지위의 괴리인 셈이다. 일부 노비에 국한된 사례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노비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44회

♣18세기의 노비시인 ~~

노비 시인의 계보~
그 중심에 홍세태가 있다

노비 신분은 직업에 제한을 받았으며 그 신분과 직업이 세습되었다.
그들에게 학문과 문학은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각 시대마다 노비이면서 학문에 뛰어나고 문학에도 능력을 보인 몇몇 인물이 극히 드물게 등장한다.

조선 오백년 동안 천민 시인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계보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김해의 관노였던 어무적(魚無跡)과 전함노(戰艦奴)였던 백대붕(白大鵬)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여기에 송익필(宋翼弼)도 넣을 수 있으나
그는 천민이라고 하기에 여러 가지 걸림돌이 많다.

그 이후로는 17세기의 홍세태와 18세기의 정초부 그리고 이단전이 노비 시인을 대표한다.
여기에 안동 출신의 여종 설죽(雪竹)도 천민 시인에 속한다.

이밖에도 노비이면서 한두 작품을 남긴 인물이 조금 더 있으나 한두 편의 시를 남긴 것에 불과하여 전문 시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무적과 백대붕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노비 시인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은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지만 작품성이 아주 뛰어나 많은 평자로부터 높은 평가도 얻어냈다.

그들은 노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박대와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어무적은 아버지 쪽은 양반 사대부였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여서 김해의 관노가 되었다.

아버지 쪽의 영향으로 한문을 배웠고 시재가 뛰어나 <유민탄(流民嘆)> 과 <신력탄(新曆嘆)> 같은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사회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꼰 시를 다수 지었다.

1501년, 연산군 7년에는 이른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란 직책으로 연산군에게 상소문까지 올린 것을 보면 면천(免賤)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수령이 매화나무에까지 무리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에 분개해 작매부(斫梅賦)를 지어 관장의 횡포를 규탄했는데

그 시에 화가 난 수령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해서 도망 중에 객사했다.

노비 출신으로서 자의식 강한 문학을 한 셈이다.

이렇게 신분이 미천하지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인구에 회자되어 17세기 전반까지 문학에는

어무적 박계강(朴繼姜) 정옥서(鄭玉瑞), 학행에는 서기(徐起) 박인수(朴仁壽) 권천동(權千同) 허억건(許億健)을 꼽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45회

유몽인(柳夢寅)이 자기 시대의 비천한 시인인 유희경(劉希慶)의 전기에서 그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천민으로 입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에 대한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미천한 신분으로 명성을 날릴 만큼 두각을 나타냈으나 시간이 흘러 그들이 활동한 내역은 물론 이름조차도 사라졌다.

천민들은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전할 매체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비 작가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은 17세기 말엽에 등장한 홍세태(洪世泰)라는 시인이다.

그는 조선 후기 여항문단의 터전을 마련한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인생 후반기에 기술직 중인에 해당하는 직책을 역임했으나 늘 신분이 비천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부계(父系)가 기술직 중인이었다고는 하나 밝혀진 것이 없는 반면 모계는 사노비(私奴婢)가 분명하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는 자연스레 노비에 편입되었다.

장성한 그는 노비로 일하기를 거부했는데 화가 난 주인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때 막강한 권력자인 김석주(金錫冑: 숙종 임금 외척)가 돈을 주어 그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었고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은 사지에 처한 그를 살려냈다.

이미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진 그의 시적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명문가 사대부와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도움으로 역과(譯科)에도 합격하고 낮은 벼슬도 얻었다.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고 뛰어난 시재를 지닌 데다 권력자와 친분도 깊었기에 그는 승승장구할 여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비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죽을 때까지 벗어던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것은 사후에도 따라다녔다.

 

<조선의 노비산책>>> 146회

1710년, 숙종 36년
사헌부는 탄핵 장계를 올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통례원(通禮院)에 소속된 종6품의 벼슬)로 재직하는

홍세태를 탄핵해 본래 비천한 노비 신분이었던 자가 문반관료의 자리에 앉았다고 상소했다. 뿐 만 아니다.

그가 죽은 뒤인 1729년에도
그런 모욕이 이어지자 영조는 "천류(賤流) 홍세태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이렇듯이 사람을 모욕한다면 모면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고 두둔한 적이 있다.

이 밖에도 홍세태가 눈에 띌수록 그를 노비 출신이라 비난하고 모욕하는 일이 거세졌다.

노비 신분을 벗어났고 뛰어난 시인이라는 명성까지 얻었으나 언제나 노비 출신 시인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뒤따라와서 그를 괴롭혔다.

노비로 태어난 자는 노비에서 풀려났다고 해도 신분의 굴레를 시원스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보듬은 사대부가 생전에도 적지 않았고

사후에는 임금 영조가 그를 대우했다.
영조는 유달리 홍세태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문집을 들이라 하여 읽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월대의 노래(滿月臺歌)>를 영조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라 칭찬했다.  

만월대 앞에는 낙엽 지는 가을     
(滿月臺前落木秋)

서풍 불고 해는 져서 나그네 시름 젖네
(西風殘照使人愁)

드높던 강감찬의 기상 사라진 산하에는
(山河氣盡姜邯贊)

일월만 정몽주의 이름인양 걸려 있구나
(日月名懸鄭夢周) 

회고조로 흐르기 일쑤인 개성을 읊은 시 가운데서도 웅혼한 기상을 드러내 보인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일반 사대부라 해도 군주로부터 이 같은 평을 한 번 얻어 내기는 어려운데.......

더군다나
홍세태처럼 신분이 문제가 되는 사람을 국왕이 높이 평가한 것은 이례적 사건이었다.

1770년에는
일본 화가가 그린 홍세태 초상화를 영조가 궁궐에 들여와 어람(御覽: 임금이 봄)한 일도 벌어졌다.

노비였던 자의 초상화를 임금이 열람했다 해서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조가 홍세태를 여러 번 두둔하고 문집과 초상화까지 열람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심했다.
제왕이라서 감히 누구도 발설하지 못했지만 영조도 천민 출신인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신분이 비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진하게 갖고 있었고

송익필이나 홍세태에게 동정적 시선을 보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147회


정초부와 여춘영 노비와 주인  ​

영조가 칭찬한 홍세태는 숙종시대를 대표하는 노비 출신 시인이었다.

그를 이어
영조시대에는 정초부가,
정조 시대에는 이단전이
노비 시인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노비 시인으로 이 두 시인을 꼽을 수 있다.

그에 걸맞게 사람들은 홍세태를 계승한 시인으로 이 둘을 꼽았다.

그런데 두 시인은 홍세태의 활동 처지와는 조금 다르다. 홍세태가 시적 재능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免賤)되어 양인으로 활동했다면

정초부와 이단전은 생의 대부분을 노비 신분을 가지고 시인으로 활동했다.

홍세태는 이른 시기에 면천되었기에 법적으로는 노비가 아니었고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관료였다.

관료는 아무리 낮은 직책이라도 관료다.

그러나 정초부와 이단전은 출신도 노비인데다
한평생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도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관직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나무꾼과 임노동자로 평생을 보냈다. 

두 사람은 모두가 명문가의 노비로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노비 시인 이단전 ~~

시 쓰는 노비, 이단전

이단전(1755~1790)은 스스로를 종놈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시인이었다.

실제로 그는 우의정을 지낸 유언호 댁의 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종이었고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아비도 모르는 채 계집종에게서 태어난 천출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르고 작은 키에 애꾸눈이었고 마마를 앓아 심하게 얽은 곰보였다.

어디 한 구석 정을 줄 수 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어떻게 한학을 해서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양반집의 종으로, 어깨너머로 문자를 익혔을 것이고 문자를 익히고 나서 시문을 읽게 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청년 시절, 그는 재야의 문단을 장악하고 있던 일흔셋의 이용휴를 찾아갔다.

옷소매에서 시집 원고 하사고(霞思稿)를 꺼내놓았다.
이용휴는 시집을 읽어나가며 얼굴빛이 달라졌다.
놀라운 문장이었다.

이용휴는 말없이 벽도화 가지를 꺾어 이단전에게 건넸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는 의미였다.

이단전에게 주는 커다란 상찬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48회

이용휴는 이단전과의 만남이 유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단전이라는 이름이었다.

단전(亶佃)의 단은 '진실로'라는 의미요 전은 소작인 또는 '머슴'이라는 의미니 진짜 머슴이라는 뜻이다.

이단전은 스스로를 모멸하는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이름뿐 아니라 호 또한 그랬다.

필한(疋漢)의 필은 하인(下人)의 합자이니 하인 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자기의 흠결을 숨기려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단전은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말까지 어버버 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밤마다 시를 쓰고 날 밝으면 나가
여러 문인과 명사 찾아 비평 받아
이 같은 일 10여년간 꾸준히 반복

그런 그가 당대의 문인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시 공부를 했다.

양반댁에서는 일은 안 하고 밤낮으로 시를 쓰고 술을 퍼마시고 시인 묵객들을 찾아나서는 종놈을 곱게 보아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놈은 어엿한 문사로 양반들과 시회를 열거나 시문을 통한 교류를 하고 있으니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정쩡하게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그의 시 스승은 남초부였다가 후에 이덕무로 바뀌었다.

남초부는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었다.

이덕무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시를 잘 가르쳐서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비천한 계급의 자식들까지 두루 찾아와서 시를 배웠다.

이단전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덕무의 열린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시를 잘 가르쳐도 늘 가난했다. 자신을 일러 잘못된 시구를 고쳐주는 시 땜쟁이라고 묘사한 글이 있다.

이단전은 늘 큰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때마다 주머니에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49회

우의정을 14년간이나 지낸 남공철(남이 장군 후손)은 이단전의 시집 서문에

「밤마다 기름을 사서 등불을 밝히고 꼿꼿이 앉아서 시를 썼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문밖으로 나가 여러 문인과 명사를 두루 찾아보고 비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일을 10여 년 동안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이군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이군의 시는 영롱한 마음과 지혜가 담겨 있는데, 때때로 곤궁함과 불평의 언어를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군의 시는 마치 화를 내는 듯하고 비웃는 듯하며 과부가 밤에 곡하는 듯하고 나그네가 추운 새벽에 일어나는 듯도 하다」고 썼다.

그의 시는 영롱한 마음·지혜 담겨
때론 곤궁함과 불평 언어 드러내

이단전의 시로 널리 알려진 '관왕묘에서'는

'낡은 묘는 으슥하여 대낮에도 스산하고/
의젓한 관우 상은 한(漢)의 의관 입었구나/
중원 평정 큰 사업을 완수하지 못해선가/
천년토록 적토마는 안장을 풀지 않네'라고

중원 평정을 이루지 못한 적토마의 한을 노래한다.

또 다른 詩 '거미'에서는

배는 불룩 경륜이 담겨 있고/
먹이를 도모하려 그물을 쳐놓고서/
이슬방울 군데군데 깔아놓은 데로/
바람 타고 날아온 나비 걸려드누나!

라고 재기발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詩를 보자.
“인생 백년 길지 않다”

​“쌀과 소금. 땔감과 기름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건 슬픈 일이다”

​“조물주는 무슨 생각으로
해동 한 모퉁이에 나를 낳았을까

심성은 바보와 멍청이를 겸했고
행색은 말라깽이에 홀쭉이

사귀는 이는 모두가 양반이지만
지키는 분수는 남의 집 종

천축에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무슨 인연인지 부처에게 물어보리라”


이단전은 취하면 사대부를 만나 그들의 패악을 직선적으로 지적했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는 술이 취해서 이 시인, 저 시인을 찾아다니다 그러기를 10여년......
결국  술을 많이 마시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길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조선의 노비산책>>> 150회


​♣ 노비 시인 정초부를  살펴본다.

명문가 여씨 집안 노비이자 나무꾼
기억력 좋아 주인의 글 다 외워버려

종놈의 아들

18세기의 노비 시인 이단전(李亶佃:1755~1790)은
영조 임금 때'나는 종놈이다'라고 거침없이 내놓고 다녔다.

그는 제 스스로 노비임을 밝히고서 노비이지만 시를 쓰노라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단전보다 선배 노비 시인인 정초부(鄭樵夫)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나무꾼이라고만 밝힌 것이다.

정초부(1714~1789)는 정조 때 시단을 풍미했던 노비 시인이다
.
그는 경기 양평 사람이다.
성은 정(鄭 혹은 丁)씨라고 알려졌지만 이름은 분명한 초부(樵夫)다. 나무꾼이란 뜻이다.

특별히 18세기에는 천민으로서 이름을 날린 시인이 몇 명이나 등장했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주목할 노비 정초부도 있다.

정초부의 시가 실린 조선시대의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 권에 이른다.

먼저 주인과 그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초부는 여러 기록에 대체로 천민으로 나온다.

기록자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함양(咸陽) 여씨(呂氏) 집안의 가노(家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정확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기록한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제(呂聖齊:1625 ~1691) 여춘영(呂春永:1734 ~1812) 여만영(呂萬永1730~?) 여동식(呂東植1774~1829)의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저 여씨 집안의 종이라고만 밝힌 기록도 있다.

19세기 전기의 지식인은 정초부가 당시에 참판을 지내는 등 중앙정계에서 크게 활동하던 여동식의 가노(家奴)라고 소개했다.

한편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편찬한 <병세집 (竝世集)>에서는 정초부를 월계초부(月溪樵夫)라고 적었고 여춘영의 노비라고 밝혔다.

그를 여춘영의 노비로 기록한 자료가 가장 많으며 생몰연대로 볼 때도 여춘영의 노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여춘영은 누구인가. 자는 경인(景仁)이고 호는 헌적(軒適)이다.

조선 후기 문벌가문 가운데 하나인 여씨 집안의 주거지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이다. 

이곳은 팔당대교가 위치한 월계(月溪) 부근이기에 월계의 부속지로도 불렸다.

지금도 수청리 254-2번지에는 이 집안을 중흥시킨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사랑채 한 채가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 집안을 비롯한 명문가와 나란하게 이 일대에서 명망을 지키며 대를 이어 문과 급제자와 쟁쟁한 명사를 배출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1회


여선응의 둘째 아들 여춘영이 여선장의 양자로 들어가 영의정을 지낸 여성제 집안을 이었다.

여춘영은 여동근과 여동식을 낳았다.

정초부는 바로 이 혁혁한 명문가 소유의 종이었고

그가 젊은 시절 모셔야 했던 주인이 바로 여춘영이었다.

홍세태나 이단전은 아버지가 양인 이상의 신분이었으나 어머니가 노비라서 그 자신도 노비가 되었으나

정초부는 사정이 달랐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씨 집안의 노비로 줄곧 이어졌다.

아버지 쪽 학식이 토대가 되어 시인으로 성장한 다수의 노비 시인과는 경우가 달랐다.

여춘영은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만시 12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 (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는 구절이 있다.

어릴 적에는 노비인 정초부를 스승으로, 커서는 벗으로 지내, 시를 함께 지었다고 밝혔다.

스무 살 연상의 정초부를 상당히 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했다고하여 정초부가 노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신분이 낮은 노비였다는 것은 여춘영이 그를 묻고서 돌아온 길에 쓴 시에서도 보인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 黃壚亦樵否)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霜葉雨空汀)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 三韓多氏族)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 來世托寧馨)
-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읊다 -
(哭樵夫葬 歸路有吟)


정초부는 가을에 사망한 듯하다.

여춘영은 낙엽을 보고 정초부가 저승에 가서도 나무를 하는가 보다고 했다.
또 내세에는 명문가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즉 신분이 천하고 나무꾼을 했던 점을 아쉬워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52회


여춘영은 시를 잘하는 노비를 면천시키고 그와 시벗이 되어 지내며 연민과 동정으로 그를 보살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한양의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트렸다. 

세상이 정초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주인 덕분이었다.
여춘영은 문장으로는 제문 네 편만 남겼는데
그 가운데 '정초부의 제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하 ‘정초부 제문 ’ 내용이다

「아아! 왕공(王公)도 혼자 차지하지 못하고 장사도 억지로 빼앗지 못하는 것이 초부의 동호(東湖)를 읊은 작품이 아니겠는가?

하늘이여! 사람이여!

사람이 이런 재주를 가지고도 늙도록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초부의 시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빼어나지만 귀신이 보기에는 졸렬해서인가? (…)

초부가 처음에 기운을 타고 세상에 왔으므로 반드시 다시 사물에 몸을 기탁하리라.
그러면 큰 산등성이에 들어가 울퉁불퉁한 나무가 될까 아니면 바닷가 산에 들어가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될까?

헌적이 비척비척 지팡이 짚고 가다가 범상치 않고 속되지 않은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만나면 흔연히 어깨를 툭 치고 다시 막역한 벗이 될 것인가? 초부가 내 말을 여기까지 듣는다면 혹시라도 크게 한번 웃으려나.

오호라 슬프다. 

<여춘영이 정초부를 위해 쓴 제문>

이렇듯 거의 존재하기 힘든 노비 시인이라는 엄청난 벽을 정초부나 이단전은 넘었다.
그렇다면 여씨 집안의 노비 정초부는 무엇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시인이 되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153회


<삼명시화(三溟詩話)>에는 정초부가 시를 배운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날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잠을 잤는데 주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바로 외워버렸다.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짓게 됐을까?
한시는 운율과 음의 높낮이 등을 맞춰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낸다고 한다.

한 편의 한시를 짓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초부는 낮에는 산에 가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사랑채에서 잤다. 주인은 늘 책을 읽었다.

그는 주인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외워버렸다.

경탄할만한 기억력이었다.

이런 그를 주인이 가상하게 여겨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학업성취가 빨랐다.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었다.

그의 문장은 주인집 자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운 것이다.

주인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배려했는데 학업 성장이 빨랐다.


천한 노비가 시를 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문젯거리냐고 의문을 표할지 모르겠으나 조선시대에 노비가 시를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했다.

한시(漢詩)는 한글 시가와 달리 고급문화에 속해서 식자들이 독점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여성과 평민을 포함하여 문화적 소수자는 감히 곁눈질조차 하기 힘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초부는 43세 무렵에 면천되어 양근(현재 양평) 갈대울에 거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무꾼 신세였다.

정초부의 시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동풍이 장안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

양인이 된 정초부는 시인으로서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2011년 KBS 역사스페셜에 「노비 정초부, 시인이 되다」로 소개한 바 있으며
경기도 양평군은  그 옛날 ‘노비 시인 정초부 지게길’을 복원하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4회

단원 김홍도 작품 ‘도선도(渡船圖)’의 화제(畫題: 그림위에 쓰는 詩文)가 있다.

한 척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의  상단에는 김홍도가 영감을 받았다는 시가 쓰여 있다.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필치로 쓰인 시는 ‘동호범주( 東湖泛舟)’였다.

오늘날 서울 옥수동 앞 지금의 한강인 동호( 東湖)를 건너던 나룻배 한 척을 그렸다.

그림에는 애사(哀詞)를 읊은 한시(漢詩)가 그 것이다.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飛去盡(유덕일성비거진)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夕陽山色滿空潭 (석양산색만공담)
노을 아래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나무를 해서 한 배 가득 싣고
성동구 옥수동 주변의 한강인 동호(東湖)를 가다가 봄직한 풍경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 시와 동일한 작품이 실린 시집인 ‘초부유고’가 발굴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2011년 2월.

그동안 다른 문헌을 통해 그 존재만 알려졌던 ‘초부유고’를 고려대 도서관이 소장 중인 <다산시령>안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정초부의 본명은  이재(彛載)였다고 발표했다.


「다산시령」은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18세기 최고 문인의 시(詩)만 골라 묶은 시선집이다.

이 책 안에는 <초부유고(樵夫遺稿)>라는 제목으로 노비 시인 정초부의 시 약 90수(首)가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천재 화원(김홍도)의 마음을 움직인 시인은 초부, 그는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던 것이다.

김홍도의 시로 알았는데  정초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초부가 시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퍼트린 작품이다.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5회


수원 부사를 지낸 김상묵(金尙默1726~1779)은 양평 양수리에 살아 정초부 집과 가까이에 있었다.

노론 청류(淸流) 계열에 속한 그는 정치적으로 실의했을 때 정초부와 어울려 지내겠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1769년,
김상묵은 정초부와 시를 주고받은 시첩 <백우초창시권伯愚樵唱詩卷>을 만들었다.

여기서 백우(伯愚)는 김상묵의 자이고 초창樵唱은 정초부와 주고받았다는 뜻이다.

그 시권에 정조시대의 실력자인 김종수(金鍾秀)가 서문을 써주었다.

그 글에서 "백우가 '초부는 천인(賤人)이다. 월계(月溪) 가에 집이 있는데 산에 들어가 나무하여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

생김새가 고괴(古怪)하고 말이 어눌하나 이렇듯이 시를 잘한다'라고만 했다.

내가 초부의 시를 읽어보니 곡조는 깨끗하고 재주는 빼어나서 세속적 기운이 거의 없다.

가끔 정신이 소탈하여 도인(道人)의 말과 닮았으니 초부는 참으로 기이한 선비다"라고 말했다.

친분이 깊던 김상묵의 말을 통해서 정초부가 용모가 아주 못 생겼고 말을 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어 주인집 자제가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황윤석의 <이재란고(頤齋亂藁)>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양근현에 사는 나무꾼이 본래는 종인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그 주인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글을 써줘 급제를 시켰으며

이에 주인은 그 대가로 그를 양인으로 풀어줬다는 것이다.

변재민(邊載岷)이란 아이가 전해준 말을 황윤석이 기록에 남겼다.

당대에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는데

예컨대 주인집 자제들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대리시험을 쳐서 주인집 자제들을 급제시켰다는 소문도 그중의 하나다.

그는 면천된 후에도 나무를 해서 배와 지개를 이용해서 양평에서 용산까지 오가며 나무장사를 하는 것으로 호구지책 삼았다.

그가 남에게 고용되어 나무를 해서 팔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56회

정초부의 시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나무꾼은 이제 늙었으며,

늙어서도 나무를 지게에 힘겹게 짊어지고 장안으로 들어오는 고단하고 신산한 삶이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굶주림을 묘사한 시 가운데는

다음 작품이 명작이라고 한다

굶주림을 참다 못해 관아에 환곡미를 얻으러 갔으나

관아 호적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없어 곡식을 빌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낙담한 그는 관아의 다락에 올라가 다음 시를 지었다.

산새는 진작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山禽舊識山人面

관아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郡藉曾無野客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

一粒難分太倉粟

높은 다락에 홀로 오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高樓獨倚暮烟生

< 환곡을 구걸하며 乞糶>

*걸조: 쌀을 구걸하다

1844년경 82세의 시인 조수삼이

정약용의 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인 정학연(丁學淵)과 함께 시를 지을 때 정초부를 언급하며

"오백년 문명이 영정조 때에 꽃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지었네

‘五百文明英正際 樵夫農婦摠能詩’ "라고 평가 했다.

출처 : 안대회교수(성균관大 한문학) 및 김윤배 시인 등 글 옮김

<조선의 노비산책>>> 157회

♣초노(樵奴: 나무꾼 전문 노비) 아이종의 구슬픈 넋두리~~

나무하는 일만 맡는 노비를 초노(樵奴)라고 했다.

경북 예천의 선비 황용한은 나무하는 아이 종을 두었다.

눈이 내리던 11월 어느 날

아이 종이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땔감이 없으니 밥도 못 짓고 온돌도 덥히지 못한다.

아이 종이 나타나자, 먹여주고 입혀 주는데 그 깐 나무 하나 제대로 못해 오느냐?고 꾸짖었다.

묵묵히 꾸지람을 듣던 아이종이 입을 연다.

「제가 주인어른께 의지한 뒤로

고생만 했지 받은 은혜는 없지요

풍년이 들어 쌀이 흙처럼 흔해도

나는 항상 쭉정이만 먹었고

더구나 솜옷은 화려하지 않아

내옷은 겨우 정강이를 덮었지요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데

나무는 먼 산 기슭에 있지요

간신히 작은 어깨에 들러메니

어께가 말라서 멍이 들려 하지요

그런데도 꾸짖음을 면치 못하니

나는 걱정스러워 죽겠습니다.

주인이 있어도 이와 같으니

제가 누구를 믿겠습니까?

듣자니 서울의 대갓집에는

하인도 고운 비단옷을 입고

서쪽 마을 부짓집은

일꾼에게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인다네요

이제 이곳을 버리고 떠나려니

짚신 한 컬레 준비하겠습니다.

새는 나무를 가려 앉고

선비는 자리를 가릴 줄 알지요」

아이 종의 주인 황용한은 후회했다.

내가 가난한 처지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따뜻하고

배 부르려는 욕심에서 아이 종을 학대 했구나......

아이 종 하나 품지 못하는 내가 백성을 구제하는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출처: 조선 잡사.민음사>

 

<조선의 노비산책>>> 158회


노비는 물건(?)이었다. !!!~

대명률에 의하면
노비주인이 노비에게 구타 등 위해를 가할 경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구타로 인해 사망의 결과만 발생했을 경우 처벌 할 수 있었다.

폭해죄(상해죄)는 처벌하지 않고 폭행(상해)치사죄만 처벌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행(상해) 치사죄도 무조건 처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관청에 신고를 해둔 경우에는 처벌을 면 할 수 있었다.

“우리집 노비가 이러저러 한 죄(잘못)를 범했기 때문에 혼좀 내 주겠습니다‘라고 신고를 해둔 경우에는

노비가 죽더라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런 절차를 지키지 않고 노비가 죽을 경우에는  노비주인은 곤장 100대에 처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신고 절차를 지키지 안했어도 눈감아 주거나(마치 시고를 한 것처럼)

사망과 폭행 사이에 작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특권은 노비의 주인 뿐 만 아니라

그 노비주의 기복친(朞服親)과 노비주인의 외조부모게도 적용되었다.

「기복친」이란 노비주인이 죽을 경우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 2촌.3촌의 부모 뻘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부모.백부모.숙부모 등을 말한다.

노비는 자기주인을 물론이고 그 집안의 어른에게도 깍듯이 대해야 했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비가 술에 취해 주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염려대왕을 부른 것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다음은 <금계필담(錦溪筆談>)에 기록된 이야기다.

<금계필담>은
조선의 역대 국왕과 조신(朝臣)들의 국사처리에 관련된 고사(故事) 및 명사들의 기행(奇行) ·기문(奇聞)을 수록한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조선 임금 선조의 사위중에 신익성(申翊聖)이란 자가 있었다.

신익성 집에는 사위 홍명하(洪命夏)가 얹혀 살고 있었다.

훗날 조선 현종 임금 때 좌의정을 역임했던 인물인데

서른 일곱 살 때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처가에서 시험공부를 했는데

신익성의 아들 신면(申冕)이  홍명하를 엄청 무시.구박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9회

그러던 어느날

식사시간이었다.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았다.
이 때 집 노비가 실수로
홍명하의 숟가락과 신면의 숟가락을 바꾸어 놓았다.

그 날 노비는 하찮은 일로 신면에게 곤장으로 볼기를 맞았다.

노비의 자식들인 꼬마 노비들이 장난을 치다가 잘못을 범할 경우  파가 날 정도로 매질을 당했고

심지어는 머리를 기둥에 치기까지 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라고 표현을 했는데
오랫동안 아동폭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노비가 주인에게 위해를 가한 경우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살해한 경우에는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했다.
괴실로 주인을 죽게 한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했고

고의로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곤장 100대를 치고 유배형에 처했다.

주인의 집안어른에게 폭행. 상해. 살인을 가해도 웬만하면 사형에 처했다.

노비가 주인을 꾸짓거나 욕을 한 경우에도
‘주인모독죄’라고 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이뿐만 아니다.

노비에게는 고소권 제약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주인이 역모죄.반역죄를 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었다.

만약 노비의 배우자가 남편을 위해 고발을 할 경우 곤장 100대와 유배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자식은 어버이를 고소하지 못한다(반역.역모죄 예외)」는

대명률에 의거 조선의 경국대전은 노비와 주인관계에도 적용한 것이다.

국가는 양인이 돈이 있어야 세금을 받을 수 있고

노비주인은 노비를 마음대로 다스려야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국가와 노비주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영의정 홍언필 부인 여산 송씨~~~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유명 여류인사’명단에  등록된 여인은 한국여인은 신사임당도 아니고

유일무이하게 조선시대 홍언필 영의정 부인 여산 송씨다

그녀는
중종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송일의 딸이요 남편 홍언필(洪彦弼)은 대사헌에만 여섯 차례나 제수되었고,

이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높은 벼슬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한 인물이다
아들 홈섬 역시 청백리. 영의정이었다.

그녀는 94세 까지 장수했다.
그런 그녀에게 잘 아려지지 않은 엽기적인 사건,  반전이 이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60회

노비와 관련된 그녀의 엽기적인 사건 2가지를 소개한다

중종 임금 때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렀다가 석방된 후에 삼정승을 두루 지낸 인물이 있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이 그 주인공이다. 홍언필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명종실록>

〈홍언필 졸기〉에서는
“인품이 겸손하고 청렴하여 일상생활이 매우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마음속으로 항상 화를 두려워하여 바른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두 가지 평가를 종합하면,

그는 신중하지만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그와 반대였다.

그의 부인은 중종 때 명재상인 송질(宋軼)의 딸로,
왈가닥인 데다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홍언필이 송씨와 결혼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송씨는 처녀 때부터 엽기적인 행각으로 유명했다.

처녀 시절, 송씨의 마을에 질투가 심한 부인이 살고 있었다.

질투에 질린 남편은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온 동네에 보여주었다.

투기가 심한 여인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가락 얘기를 들은 송씨는
여종에게 그 손가락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여종이 손가락을 가져오자 상 위에 올려놓은 뒤 술을 붓고는 “그대는 여자로서 죽어도 마땅하니, 내 어찌 조문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 사이에서 송씨는 결혼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홍언필이 결혼을 결심한 것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 여자는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결혼을 한 홍언필이었지만 혼례를 치른 다음 날 짐을 싸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식을 치룬 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년 정도 살다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 풍속이었는데

신랑이 첫날밤만 보내고 짐을 싼 데는 까닭이 있었다.

혼례식을 치룬 홍언필은 어떻게 하면 신부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신부와 단둘이 있는 방 안에서도 그런 고민에 빠졌다.

마침, 예쁜 여자 노비가 술상을 들고 신혼 방에 들어왔다.

홍언필은 일부러 여종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는 척했다.

부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다음, 태도에 따라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부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1회

아니 오히려 그녀는 못 본체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술을 다 마신 홍언필은 사랑방에 가서 혼자 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부인이 남편을 찾아 사랑방에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피가 떨어지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남편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조금 전에 홍언필이 만지작거렸던 여종의 손가락이었다.

결혼하자마자 별거에 들어간 이 부부는 수년이 지난 뒤 다시 결합했다.

송씨가 부모의 권유로 남편에게 용서를 빈 뒤였다.

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송씨의 엽기 행각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 홍섬(洪暹)이 태어난 지 7년 뒤에

송씨는 <중종실록>)에까지 기록될 만한 범죄행각으로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에게 수없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그것으로 모자라 빗으로 얼굴을 긁기까지 했다.

그렇게 폭행을 당한 여종은 쓰러졌는데 사람들은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여종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여종을 죽도록 때린 송씨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땅에 묻은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송씨 부인에 의해 손가락이 잘린 여종이나 땅속에 묻힌 여종의 사례는 노비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주인이나 양반들이 가하는 사적 형벌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송씨가 남의 집 여종을 죽인 것은 간통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적었다. 문책을 당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손가락이 잘린 여종처럼 별다른 항변도 못 하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주인이 노비의 생명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집안에서 쉬쉬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62회

태조 이성계 때다.

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인 교서감(校書監)에 조직 내 서열 3위이자 정3품인 왕미(王亹)라는 관리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왕미의 집에서 여자 노비 하나가 그의 부인에 의해 살해됐다.

노비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부인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범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사례는 잘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이성을 상실한 부인의 행동 때문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 노비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시신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옆에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사건은 공개되었고

형조는 사법 절차에 착수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적으로 목숨을 잃은 노비의 억울함은 세상에 알려지기 힘들었다.

송씨가 저지른 두 번째 범죄처럼 남의 집 노비에 해를 끼친 경우는 그나마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한 노비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피해자인 노비의 인권이나 가해자의 형사처벌 보다 노비주의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주안점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간대접 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의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 없었다.

노비에 대한 인식의 문제~~

오늘날 기준으로 노비 인권이 아닌 그 시대의 눈높이에서 노비 인권~~

동정 받지 못한 노비의 죽음~~~~

조선 후기의 관료 겸 시인 중에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있다.

영조 때 과거에 급제해서 정조 때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총리급의 거물이었다.

그는 과거 급제 당시부터 훌륭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유영(《금계필담》의 저자)의 아버지는 과거에 갓 급제한 이서구가 영조 임금을 알현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당시 서유영의 아버지는 재상이었다.

서유영의 아버지는

“그가 임금께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했고 행동거지도 신중해서 대단한 그릇”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3회

이서구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가 왕위에 있을 때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사가시인(四家詩人), 즉 4대 시인이란 명성을 얻었다.

이서구는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에게서 문장을 배우고 정조 임금의 총애까지 얻었다.

박지원·홍대용(洪大容)·박제가·이덕무·유득공 같은 실학자들과 인연을 맺은 데에다가 정조의 신임까지 받았으니,

그의 학문적 능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금계필담》에 서유영의 8촌 형이 전하는 이서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유영의 8촌 형은 ‘풍석(楓石)’이란 호를 가졌다는 사실과

판서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이야기의 전달자는 서유영이 아니라 8촌 형이다.

어느 날 오전,

8촌 형의 아버지인 7촌 숙부(서유영의 입장에서)가 이서구의 집을 찾아가서 담소를 나누었다. 숙부는 재상을 지낸 인물이었다.

잠시 후, 대문 옆에 붙은 행랑채에서 갑작스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그 집 노비 A의 목소리였다.

이서구는
수노(首奴)인 B를 불러 “A가 또 술주정을 부리느냐?”며 “벌써 두 번씩이나 용서를 해줬건만”이라면서 탄식했다.

그러더니
“A를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가서 때려죽여라”고 명령했다.

일의 추이가 궁금해진 숙부는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무렵까지 이서구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라 A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해질 무렵이 되자, B가 돌아와 “때려죽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이서구가 “그는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니

장례 절차는 후히 해줘라”고 말했다.

이서구의 말을 듣고 B는 물러났다.

숙부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B가 다시 돌아왔다.

문밖에 형조의 서리가 와 있다는 것이다.

형조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보낸 아전이었다.

서리는 “관청에 알리지도 않고 매질해서 죽이는 것은 불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결론이 날까? 내일 이어진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서구의 말을 듣고 형조 서리는 두말도 않고 돌아갔다.

“그 자는 우리 집 사노(私奴)인데, 윤리를 어지럽히는 죄를 지었네.

만약 관청에 신고하게 되면, 입에 담기가 몹시 수치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사사로이 죽인 것이네~~~~“

 

 

<조선의 노비산책>>> 164회

민담의 편찬자들은
그 시대의 정의 관념에 따라 세상 이야기들에 평을 달았다.

《금계필담》에도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정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이서구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자.

이 문제를 둘러싼 그 시절의 정의 관념을 이해할 수 있다.

《금계필담》 이서구 편의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런 점을 볼 때, 이서구는 나이 젊은 명사로서 일처리가 엄정하면서도 번거롭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니,
이 어찌 원대한 그릇이 아니겠는가? 」

선친(서유영의 7촌 숙부)께서는 손님들을 대할 때마다 이것을 말씀하시곤 했다.

노비를 죽인 뒤에, 번거롭다는 이유로
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이서구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에게 높은 평가를 내린 인물이 이 이야기에 다섯 명이나 나타난다.

우선, 이서구의 행동을 직접 목격한 7촌 숙부가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자기 집에 손님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 일을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숙부는 자기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범한 노비를 죽인 뒤 노비주의 위세를 부리면서 당당하게 관청에 신고할 수 있는데도

그런 번거로움이 싫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한 이서구의 행동이 아주 장한 일로 생각됐던 것이다.

게다가 ‘젊은 친구’가 어쩜 그렇게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냥 ‘물건’이 폐기처분됐을 뿐이다.

못 쓰게 된 ‘물건’을 조용히 잘 처리한 이서구의 행동이 그저 장할 뿐이었다.

7촌 숙부의 이야기를 전달한 8촌 형 역시 자기 아버지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랬으니까, 서유영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다.

서유영 또한 공감했기에 《금계필담》에 이서구의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이서구의 행동에 공감한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된다.

 

 

<조선의 노비산책>>> 165회

형조판서 채제공도 마찬가지였다.
채제공은 정조 임금 당시 유명한 정승이며 정조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다.

수구문 밖의 노비 시신 때문에 이서구에게 형조 서리를 파견한 채제공은 서리로부터 이서구의 말을 전해 듣고 수긍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미천한 노비라도 주인이 사사로이 죽였다면 큰 사건이다.
만약 채제공이 이서구의 말을 황당하게 여기고 수사를 지시했다면,

7촌 숙부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금계필담》에 소개된 것처럼, 7촌 숙부는 이서구가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저녁까지 그 집에 눌러 앉아 있었다.

채제공도 이서구의 말에 공감을 느꼈기에 별 탈 없이 문제가 마무리된 것이다.

또 채제공의 심부름을 한 서리 역시 이서구의 말에 동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이서구에 관해 우호적인 보고를 했기에 채제공이 사건을 그대로 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들 다섯 명 외에도 이서구의 행동에 공감을 표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7촌 숙부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자기 집 손님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가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방문객들이 이야기에 어느 정도 호응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직 재상을 방문해서 담소를 나눌 정도면 방문객 역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 유추할 때,

당시 조선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 중 상당수가 노비를 죽인 이서구의 행동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이서구의 노비는 주인에게 맞아 죽었지만 동정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을 죽인 주인의 명성을 한껏 고양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노비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물건의 폐기처분으로 생각했다.

그 노비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서구 앞에서 쥐 죽은 듯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서구의 행동을 높게 평가할 때도 잠자코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고 칼질을 당해도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던 노비들의 열악한 법적 지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다.

 

<조선의 노비산책>>> 166회

여종의 사랑을 막은 김대섭~~

16세기에 덕개(德介)라는 여자 노비가 살았다.

그녀는 김대섭(金大涉, 1549~94)이란 이의 사노비로 외거노비였다.

김대섭은 경상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종2품)를 지낸 김윤종(金胤宗)의 손자로

서른다섯 살에 소과에 합격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대과 응시는 포기했다.

임진왜란 때 자진해서 선조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조지서별제(종6품)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 격무로 사망했다.

덕개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는데 허봉(許篈, 1551~88)이었다.

유명한 문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자 허균(許筠)의 형이었다.

허봉 역시 재주가 탁월했는데

스물세 살 때 선조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기도 했다.

사가독서란 왕이 신하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도록 하는 제도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중에서 우수한 이에게 학문 연구를 위한 휴가를 준 데서 비롯됐다.

허봉이 살았던 16세기에는

국가에서 두모포(=豆毛浦,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세종이 대마도 정벌 출정식을 했던 곳)에

동호당(東湖堂)이란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했다.

지금도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혹은 독서당길이라 한다.

허봉은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당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활약했던 것이다.

서른네 살 때는 서인의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함경도로 유배되기도 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덕개와 허봉이 처음 만난 것은, 허봉이 함경도에 귀양 갔다 돌아온 직후인 1585년 무렵이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금세 활활 타올랐다.

명망이 높은 관료인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두 남녀를 두고 풍마(風馬)라고 놀릴 정도였다.

풍마란 발정 난 암말과 수말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들의 열애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덕개는 허봉이 아니라 김대섭의 노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덕개의 혼인은 주인인 김대섭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김대섭의 의사가 이들의 사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봉이 일반 평민이었다면,
김대섭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 거기서 생긴 자식은 어머니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주인으로서는 자기 노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덕개가 허봉과 혼인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복잡해진다.

허봉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김대섭이 덕개의 아이를 데려가기가 힘들 수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7회

당시 허봉은 동인당의 선봉장으로 요즘 말로 하면
집권당 원내대표 정도의 인물이었다.

김대섭은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아직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봉을 상대로 덕개의 아이를 빼앗아올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허봉이 아이를 순순히 내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녹록하지 않은 싸움을 각오해야 했다.

법적으로는
아이를 빼앗아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대섭으로서는 덕개와 허봉의 만남을 방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책이었다.

물론 허봉의 입장에서 덕개의 주인인 김대섭의 반대는 덕개 부모의 반대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런 우려는 그대로 현실화 되었다.

허봉은 말을 보내 덕개를 자기 집에 데려가려 했다.

첩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덕개가 노비주와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였다면
허봉이 함부로 말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김대섭이 제지에 나섰고
그 결과 덕개는 그대로 집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덕개와 허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노비 자신의 의지나 판단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주인의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에 주인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노비는 신분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존재였기 때문에,

결혼문제에서도 제약을 많이 받았다.

경제력이나 지위가 높아진 노비들은 그렇지 않은 노비들에 비해 제약을 덜 받았겠지만,

이들 역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경제력이나 지위를 보유한 배우자를 고르려면, 아무래도 노비라는 신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68회

노비 입장에서 가장 편한 선택은 같은 주인을 둔 이성을 고르는 것이었겠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같은 주인 밑에 있다고 해서 연정이 무조건 생길 리는 없었다.

노비의 결혼에 가해진 제약을 이것저것 논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노비의 결혼에 관한 법적 제약만 살펴보기로 하자.

법에서 제약을 둔 결혼 형태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이다.

이런 경우의 일차적 동기는
노비 숫자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녀의 신분은 원칙상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으므로,

이런 결혼을 인정할 경우
자식은 모두 양인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노비의 숫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 양인 남자들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양인 여자를 노비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기도 작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관련 규정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을 방조한 노비주나 가장을 처벌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런 형태의 결혼을 금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법제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 7월 27일(1401. 9. 5.)에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 금지를 분명히 하고, 이를 위반한 남녀는 강제로 이혼시키도록 했다.

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혼을 시키기로 했으니 고려시대에 비해 한층 더 엄해졌다고 볼 수 있다.

태종 6년 1월 1일(1406. 1. 20.)부터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결혼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모두 공노비로 만들었다.

단, 예외 규정이 있었다.

남자 노비가 사노비일 경우,

이 규정이 노비주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주게 된다.
그래서 남자 노비의 주인이 이 사실을 몰랐을 경우,

남자 노비는 그대로 사노비로 두도록 했다.

이 규정은 노비주들이 자신의 노비가 양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9회

태종 13년 9월 1일(1413. 9. 25.)에는
태종 6년 조치에 비해 다소 완화된 규정이 나왔다.

남자 노비와 혼인한 여자 양인이 공노비가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강제 이혼을 당하는 것과
남자 노비 및 그들의 자녀를 공노비로 만드는 조치는 여전했다.

여자 양인의 신분만 보호한 것이다.

이 조치는 태종 6년 1월 1일에 언급한 법령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자 노비의 경우에는
노비주가 결혼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공노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면서

여자 양인만 공노비가 되도록 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 양인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단종 2년 5월 8일(1454. 6. 3.)에는
남자 사노비가 여자 양인과 혼인하면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귀속시켰다.

남자 사노비는 종전대로 공노비가 되도록 했다.

물론 주인이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에는 예외였다.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주도록 한 것은
노비주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조치였다.

신랑인 남자 사노비를 국가가 데려가는 대신,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줌으로써 노비주의 손해가 최소화되도록 한 것이다.

한편, 남자 공노비와 여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에 취해진 조치는 태종 13년 9월 1일의 것과 똑같았다.

이때까지 발포된 법령들이 <경국대전> 〈형전〉에 통합적으로 규정되었다.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이 혼인하면 이들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동시에 남자 노비를 공노비로 만들었다.

단, 남자 노비가 사노비이고 노비주가 자기 노비의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만은 신랑을 공노비로 만들지 않았다.

여자 양인은 그대로 양인 신분을 보유했다.

자녀의 법적 처리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뉘었다.

남자 노비가 공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공노비로 만들고, 남자 노비가 사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사노비로 만들었다.

산속에서 숨어 살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결혼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노비는 노비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법을 위반한 혼인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법에 그런 규정이 있었고 법에서 엄단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70회


노비 자녀들의 운명~~

세종 때 김무(金務)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죽기 전에 225명의 노비를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통계표에 의하면 따르면, 세종 11년인 1429년의 추정인구는 6,435,000명이다.
인구수를 참고하면 225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김무 집안의 노비 자녀들이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가 김무가 남긴 분재기(分財記:재산상속문서)에 남아 있다.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있는 〈김무 도허여문기(金務都許與文記)〉란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 역시 한문뿐 아니라 이두로도 작성되었다. 이 분재기는 세종 11년인 1429년에 김무가 자손들에게 상속한 노비들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니
이를 해설한 문서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가. 장남인 고(故) 서령(署令) 탄지(坦之)의 몫
나.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
다. 女노비 범장의 소생인 女노비 반이, 나이 마흔 살
라. 같은 여노비 반이의 소생인 남노비 묘동, 나이 여덟 살
마. 다음 소생인 男노비 작연, 나이 여섯 살
바. 다음 소생인 女노비 작덕, 나이 두 살
사. 죽은 男노비 백동과 양인 아내가 낳은 자식인 女노비 막장, 나이 열두 살
아. 죽은 女노비 석이의 소생인 男노비 조송, 나이 열 살
자. 女노비 가질가의 소생인 男노비 금록, 나이 스물다섯 살
차. 죽은 男노비 한문과 양인 아내인 복수 사이의 소생인 女노비 나화이, 나이 미상
카. 같은 女노비인 나화이의 소생인 男노비 성춘, 나이 두 살

각 행의 항목 표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거라고 한다.
여기에는 김무의 장남인 김탄지에게 배당된 노비들의 신상명세서가 제시되었다.

‘서령’이란 관직을 가리킨다. 명칭이 ‘서(署)’로 끝나는 관청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고(故)’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탄지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면, 김탄지의 아내와 자손들에게 배당된 노비들에 대한 내용이다.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이라는 표현은 김무가 자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들임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노비 문서에는 노비주가 어떤 경로를 통해 노비를 취득했는지를 반드시 표시했다.

이 문서에서처럼 아버지에게 받은 것인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인지 등등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김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에서 김탄지에게 물려준 노비는 훨씬 더 많다.

여기 소개된 글은 저자가 일부만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김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외에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 일부도 김탄지에게 배당(?)했다.

위에 적힌 노비 아홉 명을 보면,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분재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여노비인 범장, 반이, 석이, 가질가, 나화이의 남편이 누구인지 표시되지 않았다. 이는 여노비의 경우에는 남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노비 본인에게는 자기 남편이 누구인지 중요했겠지만, 적어도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노비가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졌든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는 무조건 주인의 소유의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71회


어제 소개한
‘라’항에서 ‘바’ 항까지를 자세히 음미해보자.

이 부분은 여노비 반이의 자녀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이름이 어째 좀 이상하다.

라) 같은 여노비 반이의 소생인 남노비 묘동, 나이 여덟 살
마) 다음 소생인 남노비 작연, 나이 여섯 살
바) 다음 소생인 여노비 작덕, 나이 두 살

묘동, 작연, 작덕이다. 둘째와 셋째는 ‘작’ 자 돌림이다. 이들의 성별은 다르다.

둘째 작연은 남자아이고, 셋째 작덕은 여자아이다. 그러면서도 남자아이인 첫째의 이름에는 ‘작’ 자가 없다.

이는 당시 여노비들의 성관계 혹은 혼인 실태를 반영한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여노비가 아이를 ‘무조건’ 많이 낳는 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자기 집 여노비가 밖에 나가 남자들을 많이 사귀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노비들 중에는 이 남자 저 남자와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김대섭은 덕개와 허봉의 사랑을 반대했다.

그것은 허봉이 고위층이라서 자칫 덕개는 물론 덕개의 자녀까지도 빼앗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 주인은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늘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된다면

노비주로서는 여노비의 ‘애정 행각’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여노비가 솔거노비인 경우는
노비주가 배후에서 이런 조종을 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노비의 출산에 대한 노비주들의 반응은 ‘환영’이었다.

여노비 반이가 낳은 자녀들의 이름에서 좀 이상한 느낌이 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반이의 세 자녀 중에서 작연과 작덕만 돌림자를 사용한 것은 이들과 묘동의 아버지가 다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반이는 묘동의 친부와 관계를 갖다가 작연과 작덕의 친부와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다.

여노비가 낳은 아이는 무조건 주인의 노비가 되는 시대였기에, 반이가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해서 여러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정행각을 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은 그것이 당연시됐기 때문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세 아이의 친부들이 양인인지 노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양인 중에서도 고위층 양반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양인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낮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72회


‘사’ 항과 ‘차’ 항에는 양인 여성과 결혼한 男노비들에 관한 정보가 나온다.

사) 죽은 남노비 백동과 양인 아내가 낳은 자식인 여노비 막장, 나이 열두 살

아) 죽은 여노비 석이의 소생인 남노비 조송, 나이 열 살

양인 여성과 결혼한 것을 볼 때, 이들은 일반 노비들보다 경제력이 좋았을 가능성이 있다.

외모가 좋았거나 언변이 탁월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제력이 높았으리란 추정이 좀 더 현실적이다.

높은 경제력으로 양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외거노비로서 재산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계에서 태어난 나화이(‘차’ 항)의 나이를 주인집에서 파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남노비 한문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남노비와 여성 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무조건 노비였다.

분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인 경우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서얼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가 고위층 양반이고 과거시험을 준비할 만한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는 신분상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 역시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출처 : 김종성 노비연구(문서해설 편)

노비를 재산으로 소유하고 자식들에게 상속했다.~~

「노비상속」은 어떻게 했나~~

노비 가족은 부부와 미혼의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4~5명 정도의 소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노비주들은 노비가족의 자녀들을 1~2명씩 분할하여

자신의 자녀들에게 형식상 상속함으로써 노비주 일족이 노비 가족을 공동으로 소유, 관리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러한 공동소유, 공동감시를 통해 노비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사노비의 상속에 관한 원칙은 1405년의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 20조’를 기초로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이에 의하면 먼저 노비 상속의 대원칙을 보자

부모가 생전에 분배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자녀의 생사에 관계없이 급여하되, 분배할 노비가 적을 때는 적자녀에게 고루 급여하고

만일 나머지가 있으면 승중자(承重子)에게 우선해 급여하고,

또 나머지가 있으면 장유의 순서로 지급하며

적처의 자녀가 없으면 양첩의 자녀순으로 지급하기로 규정했다.

또, 부모의 노비는 적자녀에게 평분하며 승중자에게는 5분의 1을 더해 주고,

양첩 자녀에게는 7분의 1을, 천첩 자녀에게는 10분의 1을 급여하도록 규정했다.

만약 이 규정에 따라 35구의 노비를 적자녀 3명, 양첩 자녀 1명, 천첩 자녀 1명에게 상속할 경우

적자녀 가운데 승중자에게 12구, 나머지 적자녀 2명에게 각각 10구, 양첩자에게 2구(적자녀가 12구일 경우 2구임.)

천첩자에게 1구가 배당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이 밖에도
① 적자는 없고 적녀가 있을 경우,
② 적자녀가 모두 없는 경우,
③ 자녀가 없는 적모의 경우,
④ 자는 없고 여만 있는 적모의 경우,
⑤ 양첩녀만 있을 경우, 천첩자녀만 있을 경우,
⑥ 의자녀(義子女)의 경우,
⑦ 양자녀(養子女)에 대한 상속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대체로 적 자녀·양첩 자녀·천첩 자녀는 각각 분배에 차등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자녀(子女)의 차등은 없고

다만 승중자와 중자(衆子)의 차등이 있는 것은 후사를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3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의 막내 아들 영웅대군 이염은 1만여명의 노비를  소유(?) 하고 있었다.

성종 25년(1494년)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던 이맹현이  자식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는 무려 757명이다.

그가 청백리에 녹선된 것은 굳이 부패하지 않아도 충분히 부유했기 때문이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한양에 300여명,지방에 수천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이황의 집은 300여명. 윤선도 집안은 700여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권벌도 317명의 노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노비를 부리는 양반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의 관점,
즉 노비의 관점으로 보면 이 많은 숫자의 노비는 그 존재 자체로 사회 불안 요소였다.

노비는 크게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나뉘는데, 사노비의 처지가 훨씬 열악했다.

노비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재산처럼 거래되는 것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 자자손손 천인(賤人)이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모의 신분이 서로 다를 경우 그 자식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도 문제였다.

양인과 천인이 혼인하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의 경우 자식들은 누구의 신분을 따라야 하는가.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모법(從母法) 또는 수모법(隨母法)이라고 하고,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했다.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돼 있었다.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개국 이래 종모법을 실시했다.

종부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로써 종부법은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제정된 법임이 명백해졌다.

이때 세종이 ‘조정의 성헌(成憲)은 고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면 이후 조선 역사는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선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세종은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모법으로 환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법과 여성에 주목하여

‘정의의 감정들’ 펴낸 김지수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조선시대엔 여성 노비도 땅 지키려 맞고소했다」

“소인이 세상에서 당한 원통한 사정을 감히 아룁니다. (........…) 부디 이 과부를 도우셔서 제 땅을 빼앗으려는 승운의 못된 계략을 멈춰주시고,

제게 한 거짓 고소를 거둬주신다면
제가 원(寃)을 덜 수 있을 겁니다.”

경오년 2월, ‘말금’이란 이름의 여종이 고을 수령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지(所志·청원이 있을 때 관아에 내는 소장)를 제출했다.

말금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았지만 남편의 친족 ‘승운’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자 맞고소를 한 것이다.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노비(4)  (0) 2023.08.03
노비이야기(3)  (0) 2023.06.12
혈문장  (0) 2022.12.04
일문강호  (0) 2022.11.30
쌍금도  (0) 20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