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모

조선노비(4)

<조선의 노비산책>>> 211회 

한편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할 때에,

이 조직은 혁명적이거나 반체제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반사회적인 수준에 그친 모양이다.

왜냐하면, 포도청에서 압수한 이 조직의 책자에 적힌 '조직 목표'가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살주계'는 실존했던 무장 조직이기 때문에

'양반을 살육할 것'이라는 조항만 보면, 살주계가 혹 반체제 조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 등의 조항을 읽게 되면, 단순히 불만 해소를 목표로 결성된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물론 포도청에서 이들을 단순한 흉악범죄조직으로 매도하기 위해 증거물들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들은 한성 남대문 등에 "우리를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희들 배에다 칼을 꽂고 말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대자보까지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서는 살주계 회원이
"장차 난리가 일어나면 우리도 양반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면서 "양반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 심히 좋다더라"는 말까지 했다가

그 지역 양반에게 곤장 50대의 사형(私刑)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조가 즉위하기 오래 전에 조선사회에서는 이미 살주계라는 조직이 출현했었고

이 조직에 관한 이야기가 정조 시기까지도 여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 시대의 노비들 중에 '살주계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들의 저항은 갈수록 확산되었는데 이는 노비 관리비용의 증대를 초래했다.

주인을 살해한 노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단호했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속살해나 그 이상의 중죄로 보아 극형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면하고 읍격을 낮추었다.

도망 노비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국가의 고민이었다.
그만큼 국가의 노동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12회 

도망간 노비들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을
‘노비추쇄’라고 한다.

1655년(효종 6년) 1월에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도망간 노비를 본격적으로 조사하였다.

이전에 35만 명에 이르던 공노비의 숫자가
19만 명으로 줄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노비 명부에 등록된 공노비 19만명 중에서 신공을 바치는 자가 2만7000명밖에 되지 않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여 도망 노비를 찾아 나섰고,

자수하는 노비는 이전의 신공을 면제해 주었다.

효종 8년까지 거행된 추쇄 사업 결과 42만7000여명의 노비가 확보되었다.

효종은 노비 추쇄사업을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추쇄도감의궤’로 제작하였다.

의궤(儀軌: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기록)로 남긴 것은 노비의 추쇄를 국가 중대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655년 북벌읋 주장하던 효종임금은
도망노비 실태를 조사했는데 노비추쇄를 통해 무려 43만명의 노비를 확보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추쇄도감을 통해 150년 동안 6차례의 대규모 추쇄가 이루어졌는데

성종 10년에는 그 숫자가 35만 2,565여 명으로 집계되었고
성종 15년,1484년에는 재상 한명회가 한 말에 따르면
조선에는 150만 명 정도의 노비가 있었는데

도주하여 피한 자들이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이 무렵 노비추쇄를 통해 주인에게 돌려보낸 노비가 26만 1984명에 달했다.

공권력은 사노비의 추쇄에도 협조적이었는데 원칙상 사노비의 관리는 노비주의 몫이었으나

추쇄하는 과정에서 관청과 노비주가 공조하며 노비주의 이권을 보호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 추쇄 제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불법적인 노비 추쇄는 꾸준하게 나타났고

이것은 커다란 사회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반노비제 정책이 실시되던 숙종~정조 시기에도 관아에서는 입안을 발급하여 노비주의 소유권을 강화해 주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도망간 지 60년이 지나면 노비의 주인은 그 일을 가지고 소송할 수 없었다.
숙종 43년에는 그 기한이 30년으로 줄어든다.

경국대전에는 공노비를 3년마다 추쇄해 속안을 작성하게 했고
20년마다 1번씩 정안을 작성하게끔 규정하였다.

숙종 임금 때 북벌론자 윤휴의 제안으로 창설된 만과는 장원이 없이 서얼과 공사천의 무과 급제자를 18,200명이나 양산했다,

영조임금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수많은 노비들이 반란진압에 지원해 면천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213회

그러나 대부분의 노비들은 도주를 선택했다.

섬. 광산.목장.도시변경 등으로 숨어들어가 생계를 유자했다.

전란이후

행정체계가 무너져 모두 색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도망간 노비를 찾고 노비들의 저항을 방어하는 일을 놓고 주인들이 고심함에 따라,

이로 인한 비용이 증가한 것이다.

이것은 주인뿐 아니라 국가 입장에서도 비용의 증대를 의미했다.

노비와 주인의 갈등을 처리하는 데 보다 더 많은 공권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비용의 증가는 노비주들로 하여금 새로운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노비 대신 몇 달 혹은 1년 정도만 부릴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주인들이 늘어난 것이다.

당시에는 도망노비들이 주로 임금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주인들의 입장에서는 좀 더 유리하기도 했다.

그래서 18세기에는 임금노동자의 숫자가 노비 못지않게 증가했다.

국가가 추노를 포기한 것도 이런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런 현상은 노비제도를 해체시키는 동력원이 된다.

동대문 노비들의 노비제도 폐지 예견~~

대학로가 있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서울의 4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을 만날 수 있다.

혜화문에서 다시 3분 정도 동쪽으로 걸어가면, 서울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이 나온다.

그곳에서 성북천이란 하천을 볼 수 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서얼 출신 관료인 성대중(成大中)은 저서인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혜화문 밖 불천(佛川=성북천)에서 벌어진 기괴한 일을 소개한다

혜화문은

조선의 4소문 중 하나로 태조 때 건축되었다. 다른 소문인 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어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1812년 이전의 어느 시점까지,

불천의 가에 석벽이 있었다.

부처님의 형상이 새겨진 석벽이었다.

사람들은 그 부처님을 ‘노비 부처’란 의미의 노불(奴佛)이라 불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불상은 한성 동부 노비들, 그러니까 동대문 쪽에 사는 노비들의 미움을 샀다.

노비들은 “우리를 남의 종으로 만든 놈이 이 불상이다”라며

“불상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쳐다본단 말인가?”라며 반감을 표하곤 했다고 전한다

노비들은 단순히 욕설만 하고 지나간 게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부처님’에게 낫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고

그들의 낫은 불상의 눈을 집중적으로 공격도했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214회

불상의 두 눈이 움푹하게 들어갈 정도였다.

석가모니를 받드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흉측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불상을 보며 노비들은

“저 불상만 없어지면 노비도 없어질 거야”라고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동대문 쪽 노비들은 노불을 노비제도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노불이 사라지는 날에 노비제도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성대중은 1732년에 태어나 1812년에 사망했다.

그는 70대 나이에 <청성잡기>를 집필했다.

성대중은 자신이 젊었을 때만 해도, 불상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젊었을 때’가 정확히 언제까지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800년 이전에는 그의 청춘이 끝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불이 모습을 감춘 시점 역시 1800년 이전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계속되는 장마로 산이 깎이고 하천이 메워지면서 노불도 어느덧 모래에 파묻히고 말았다.

불상 전체가 모래에 묻혀서 들어낼 수 없을 정도까지 됐다.

노비들의 저주대로 불상이 정말로 없어진 것이다.

극적인 일이었다.

성대중이 젊었을 때,

즉 1800년 이전에 노불은 분명히 없어졌다.

사람들은

‘노불이 없어지는 날, 노비도 사라질 것’이라고들 예언했다.

노불이 종적을 감춘 뒤로부터 얼마 뒤인 1801년,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공노비 해방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성대중이 얼마나 신기하게 생각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목격한 일들이 기적 같았는지,

그는 “결국에는 모든 노비가 반드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좀 더 대담한 예측을 내놓았다.

성대중의 예언은 그가 죽은 지 82년 뒤인 1894(갑오개혁)년에 실현되었다.

유독 조선의 노비제도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입장을 보자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노비제도를 유독 비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또, 15세기 이전에 노비가 사라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유별난 사례라는 견해가 많다.

과연 조선은 30~40%가 노비·천민…........

조선은 과연 사대부를 위한 나라였는가?

 

 

<조선의 노비산책>>> 215회 

세종은 자기 아버지 태종이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보고 싶어 했다.

사관을 불러 졸랐다. 나 그것 좀 보여다오. 사관은 거절했다.

전하께서 그것을 보시면 전례가 남을 뿐만 아니라

선왕(先王)의 흑역사를 고치고 싶어질 것이기에 아니 되옵니다.

어명과 사정을 반복한 끝에 세종도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이 남았다.

「주상께서 실록을 보여달라 보채시다」.

「조선왕조실록」은 오로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사대부들의 견제장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의견도 있다.

왕은 틈만 나면 그들의 손아귀(감시?)에서 벗어나려 했고
신하들은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을 잠시라도 임금이 잊을까 봐 매일 경연(=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ㆍ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함)을 통해 유교경전을 공부하게 했다.

그게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의 정체인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조선은 왕의 나라였던가 ? 아니면
사대부들의 나라였던가 ?
아니면 백성의 나라였는가?

조선은 어쩌다 왕의 나라였지만 대체로 사대부들의 나라였다.

태종이나 세종. 영.정조 임금 당시는  그래도 임금의 나라였던 성싶다.

숙종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사대부 손에 놀아나지는 안했다. 오히려 이들을 조정했다. 절대군주의 면모를 보여준 임금 이다. 장희빈 아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서인의 거두 송사열을 파면. ,유배,사약을 내린 인물이다

헌종은 여덟 살에,
순조는 열 살, 단종과 명종은 열한 살,
성종과 고종은 열두 살,
선조는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다.

중종, 예종, 연산군, 철종은 열여덟에 왕이 됐다.

전부 어린임금 이였다
특히 철종은 아예 까막눈이었다.

나이 어린 임금 머리 위에 허울 좋은 왕관을 씌워놓고 사대부들 멋대로 끌고 간 나라가 조선이었다.

특히 조선후기 외척들의 세도정치는 조선을 망국의 길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럼 사대부들이 다스린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왕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왕이 되었을 때의 처지는 이토록 비참했다.>

비단 세조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으로 왕에 오른 중종은 공신 박원중을 서서 맞이했고 갈 때는 따라가 배웅했을 정도였다.

인조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도 그를 왕위에 올려준 서인에게 항상 굴복해서 결국 병자호란 때 삼배구고두례(三拜口叩頭禮)의 치욕을 겪었다.
물론 후일을 기약하기 위한 불가피한측면도 고려해야겠지만.........

 

<조선의 노비산책>>> 216회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차남 왕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쫓겨났고,

효종은 스승 송시열의 등쌀을 견디지 못해 당시 위법한 「기해독대」라는 초유의 정치적 장면까지 연출해 주기도 했다.
「기해독대(己亥獨對)」란 1659년 효종이 서인 사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요청에 따라 단 둘이 북벌에 관해 논의했던 사건을 말한다.  임금과 신하의 독대는 당시 금지되었다.
반드시 사관이  입회해야 했다.

방계인 선조와 철종은 신하들의 대립 속에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우수한 학자 신하들을 제어하지 못하면 왕 노릇하기 어려웠던 것이 조선의 정치였던 것이다.”

누군가는 조선이 도덕국가였다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500년이나 존속한 왕조가 드문데 조선이 그 수명을 누린 것은 도덕적으로 탄탄한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조선은 20%도 안 되는 양반들이 나머지 80%를 착취(?)하는 국가구조였다는 견해다.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으며 수도인 한성은 인구의 70% 이상이 노비나 천민이었다. 흔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세계 최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도의 신분제도는 다른 종족 간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패배한 종족은 모조리 노예가 되었고 그래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르다.
단일종족이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절반 이상 노비로 부린 나라는 조선이 아마 유일할 것이다.
< 출처:카페에서 읽는 조선사 - 표학렬 >

이이(율곡)는
상소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도대체 자기 나라의 같은 민족을 이렇게도 많이 노비로 부리고 사고파는 나라가 동서고금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임진왜란 때 노비들이 앞장서서 싸웠다. 왜 그랬을까.

애국심이 넘쳐서? 그럴 리가 없다.

왜군 목을 하나 자르면 상을 주고,
둘을 자르면 면천하고,
셋을 자르면 관직을 준다고 양반들이 꼬드겼기 때문이다(물론 약속은 안 지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비들이 왜군에 붙을까봐 그랬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웬 말이냐?”라고 의아해 했다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중국에 비록 노비가 있으나 모두 범죄자로 몰입(沒入)된 자이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남에게 고용된 자뿐이며,

그 족계에 의해 대대로 노비로 삼는 법은 없었다.

죄도 없는 자를 노비로 삼는 법은 옛날에도 없었고,

죄를 지어 노비가 된 자라도 후사에게까지 형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217회 

유형원(1622~1673: 반계수록)은

조헌이 「동환봉사(東還封事:1574년(선조 7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 신종(神宗)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사행(聖節使行)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
에서 ‘중국에는 노비가 없고 모든 용역에 임금노동자(雇工)가 쓰인다.’라고 한 말을 세 번이나 인용했다.


이익(1681~1763)도 그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노비라는 이름은 은나라시대부터 나타난 것인데, 기자(箕子)는 그 제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나 은나라 시대에도 세전(세습)의 규정은 없었다. ……(중략)……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百世)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그 부당함을 들어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뿐 만 아니다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 없는 법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죽을 때 까지 고역을 겪는 것도 불쌍한데 반드시 어미의 신역(身役)을 따라야 하니 말이다.......이런  횐경에 빠진다면
...중략.......마침내 노둔하고 미천한 최하등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비가 세습되는 것은 또한 고금에 사해( :이세상)를 통틀어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의 노비법, 개벽 이래 이런 것 없었도다. 백 대, 천 대 이르러도, 대대로 남의 노비 되네. 귀천의 형세가 억지로 정해지니, 커다란 변고로다 천리에 어긋나도다!”

조선시대 학자의 시 일부이다.
지은이는 윤봉구(尹鳳九·1681~1767).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로, 송시열의 묘지문을 썼으며 충청도에 살던 성리학자였다.


노비 연구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중국과 비교해도 가혹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노비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隧錄)> <병제(兵制)〉에서 중국 노비는 자기 대에 한해서만 복역할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다는 점은 당나라의 법전이자 동아시아 역대 법령의 모범인 <당육전(唐六典)>에서도 나온다고 한다.

송나라 때 완전 노비제가 철폐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당옥전> 관노비가 70세가 되면 양인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노비의 세습을 불허했음을 뜻한다.

그에 비해 조선에서는 본인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대대로 신분적 굴레를 씌웠으니 조선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제도가 가혹하기는 조선 이전의 왕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218회 

물론 중국 노비제도에서는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지켜졌다고 볼 수만은 없다.

적어도 국법상 그랬다는 것일 뿐인 것이다.

노비를 부모로 둔 자녀 입장에서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독립을 선언(?)한다면,

어디서 호구지책을 마련할 것인가?

오히려  부모의 길을 따르는 게 현실적으로 유리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 노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하는것이 중요하다.

조선의 노비들은 그런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고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도 얽매인 삶을 살아야 했다는 점이 우리의 슬픈 역사라는 점이다.

물론 다른 민족을 노비로 두면 이보다 낫다는 건 아니다.

다만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이 현대를 목전에 둔 19세기까지 이런 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분명 의외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도 노비가 있긴 했지만
중국의 경우엔 송나라 때 법으로 철폐됐고,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물론 이후에도 노비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무 관계라든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고

국가 차원에서 노비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고 폐지된 셈이다

노비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라고 한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또, 15세기 이전에 노비가 사라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유별난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있다

수요일에는 그 반대 의견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219회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보자

조선시대를 까내리는 사람들이 조선이 유일하게 자국민을 노예로 쓰는 미개한 나라라고들 하는데 조선이 유일한  나라는 아니다.

단순히 세계사만 봐도 자국민을 노예로 쓴 나라는 매우 많았다. 단적으로,

옆 동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기간에
붙들린 전쟁포로를 유럽 각국에 노예로 대거 팔아먹었고,

에도 막부 시기에도
죄없는 사람을 유곽이나 등지로 팔아먹는 인신매매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노비를 전문적으로 파는 시장인 노시(奴市)가 있어 집중적으로 노비 매매를 진행했다.

또한 한나라의 노비 대부분은 파산한 농민이 전락하여 형성되는데 노비는 각종 중노동에 종사했으며,

주인의 사적 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사거나 팔 수 있었다.

아울러 중국 청나라 시대에도 노비를 사고 파는 시장은 엄연히 존재했는데,

매 번 장날이면 사방 멀리에서 팔려는 노비들이 몰려오곤 했고

중국 강희제 20년, 대동과 선부 등지는 연속 몇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팔았는데,

어린 아이는 백 문도 안 되고 성인도 은 1~2냥이 안 되었으며 크고 작은 수레들이 끊이지 않고 들이닥쳐 여러 손을 거쳐 판매되곤 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60세를 넘은 노비는 납부와 동원에서 제외되었다”면서(노비 신분은 그대로 유지)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도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들이 같은 여자 노비인 하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은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부모의 신분을 그대로 물려받아 관습적으로 세습 노비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노비 비중이 주변국에 비해서 컸다는 점도 있지만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재상이었던 아흐마드는 무려 7천여명의 노비들을 거느린 대지주였다는 것이다.

노비에 대한처우?

그들의 인권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는가? 과연 소나 말과 같이 짐승처럼 대했을까?

조선시대 노비에 대한 국가의 처우방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방법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노비에 대해 검색하는 방법도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220회 

먼저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태조실록을 보자

우선 공 있는 자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거나,
죄인의 처족으로서 노비된 자를 풀어주거나,
여성 노비가 양인의 종첩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상속권은 어찌 되는가 등을 세세히 논한다.

그 외 세조가 자신보다 윗 항렬인 종친이 여성 노비를 강간하자 아래 항렬인 자신은 벌을 줄 수 없다고 논한 일,

즉 법에 위반은 되지만  임금인 자신이 집안 어른을 처벌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는
당대의 권신 이숙번이 여노비를 강간하려 하자 15세 여노비가 이마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정에서 여노비는 무죄라고 판결했다.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과연 이방원 다운 판결이다.

유부녀 노비와 性관계~

남편이 있는 노비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 자체가 간통죄에 해당하는 일이였으며 적발시 처벌대상이였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는
내침장고(內沈藏庫:임금에 올리는 음식 보관 ) 제거(提擧:종3품 벼슬) 박희무가 창고의 여종 성덕과 간통했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는데

박희무는 이 일 때문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방에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또한 여종 성덕의 남편인 종 모지는 간통 현장을 보고 박희무를 폭행했는데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간통현장에서 포획하여 징벌한 행위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양자가 합의해서 한 성행위에 대해 이렇다는 것이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데 겁탈을 한다면 강간죄에 해당했다.
<태종실록 6년 윤7월 8일>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주인의 권세를 믿고 조정 내에서 양반을 구타한 사례, 반대로 여종이 강간으로부터 도망치자 적반하장으로 관가에 신고를 하거나,

여종을 일방적으로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경우까지 그 사건기록이  매우 많다.

그리고 양반들이 쓴 일기에서도 노비의 상벌에 대해 쓴 기록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현종 임금 당시 경신대기근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노비들이 좀더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편인 유력자의 노비나 공노비로 본인의 신분을 세탁하기도 했는데,

어차피 생활고 때문에 노비로 들어간 마당에 무작정 자유민의 신분으로 되돌아가 봤자 딱히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21회 

그래서 기왕이면 좀더 부유한 사람의 노비로 다시 들어가거나,

꾸준히 숙식을 제공받거나 각종 휴가를 보장받는 등으로 복지가 좋은 편인 관노가 되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믿음직한 영향력인 유력자나
공권력 밑에서 호가호위하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노비로 살 수 밖에 없다면
그나마 좀더 힘 있는 노비주 밑에서 최소한의 경제권이라도 보장받으려는 의도가 컸던 것이다.

오히려 성균관 소속의 노비들인 반인들은 공공기관인 국립대학 소속이라는 점을 악용해서 거꾸로 양반들에게 패악질을 부리거나 

자신들의 거주지인 반촌을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어서 부를 쌓는 등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양반들이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한 경우는 생각만큼 흔하지는 않았다.

우선 유교적 사회질서에서 노비는 재산이나 물건이 '아니라' 격은 낮지만 천성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고

또 노비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조선 후기에도
양반가의 잡다한 집안일을 꾸려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라서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못 배워먹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었다는 것이다.

양반들에겐 사병이 없다보니 노비들이 분노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들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양반들이 아픈 노비들의 병간호를 직접해주고 약을 지어주거나, 노비들이 죽었을 경우 관을 마련해서 제사도 지내주고

노비들이 결혼할때 지원해주며 주인집 식구들보다 밥도 더 많이주는 등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모습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노비제가 유교 사회에서 군신관계의 축소판이기도 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경국대전’에는 노비가 출산하면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의 휴가를 규정하였다.

그 남편도 산후 15일의 휴가를 주었다.

외거노비는 주인 땅 일부를 경작하여 수확물을 바치고 남는 것은 자신의 재산으로 할 수 있었다.

공노비는 좁은 기회이긴 하지만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 불리는 하급기술직에 종사하여 물품의 제조나 책 인쇄, 요리, 바느질, 말 기르기 등 잡일을 하였다.

과연
조선의 천민인 노비가 중국과 일본의 다른 천민들에 비해 특별히 더 불합리한 처지에 있었냐의 논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22회 

조선시대에 노비 제도 개선을 위해 나름 애를 쓴 인물을 말하라면 누가 있을 까?

조선21대 임금 영조. 22대 임금정조, 선조때 유성룡 대감, 조선 중기의 실학자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며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개혁안을 내세운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노비제도 굿바이~~~

임진왜란이후 노비제도의 변화~~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서얼에게 과거응시 기회부여),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문관직. 무관은 西班職이라고 함)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 져갔다.

임진왜란 이후 토지의 황폐화가 농민을 농토에서 떠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자 정부는 호패법의 시행으로 이를 막으려고 하지만 그리 실효를 보지 못한다.

더욱이 전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파난을 떠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하자 각 지역의 향촌사회는 무너지거나 재편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공명첩이나 납속책을 마구 발행시켜 신분질서의 와해를 촉진시키는 매개수가 되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사실 조정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시선은 임진왜란 전과는 크게 달랐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대신들이 도망치느라 정신없었던 와중에서 궁궐이 빈 것을 보고 농민들이 격분하여 궁궐 곳곳을 불태우기도 했다.

게다가 임진난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국가의 재정상태도 안 좋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재정확보를 위해 공명첩과 납속책이라는 극단적인 제도를 실시한다,

간단히 말해 공명첩은 돈 주면 관직 준다는거고
납속책 또한 백성에게서 곡물을 받고 이에 대한 특전을 주는 건데

조선사회가 엄격한 유교적 신분사회였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러한 제도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

그만큼 임진왜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신분 세습되는 노비, 조선 사회의 화약고~

재일교포 학자인 윤학준 호세이 대학 교수는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1994년>란 책에서
재일 한국인 중 99%가 양반이고 99%가 상놈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조선의 노비산책>>> 223회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의 99%는 스스로를 양반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지 않을까?

조선 숙종 16년(1690년) 대구부의 신분 구성에서 양반은 9.2%, 양인(良人·평민) 53.7%, 노비 37%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양반 숫자가 크게 증가 했음에도 양반 비율이 10%를 넘지 못했다.

선조 39년(1606년)에 단성(丹城·경남 산청) 지역에서는 64%가 노비였고, 광해군 1년(1609년) 울산 지역에선 47%가 노비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양인과 천인 혼인하면 천인 모친 신분 따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반 비율이 크게 올라가는데,

앞의 대구부는 영조 5년(1729년), 양반이 18.7%로 10% 정도 급증했다.
양인은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노비는 26.6%로 10% 정도 줄었다.

이는 노비 숫자가 줄어든 만큼 양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부를 축적한 백성들은 공명첩(空名帖·이름을 비워놓은 관직 임명장)을 산다든지,

양반들에게 직첩(職牒·벼슬 임명장)을 산다든지,

향리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바꾼다든지 하는 방법들을 통해 양반 신분을 샀다.

이렇게 양반 숫자는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으로 반상(班常)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이것이 현재 모든 한국인으로 하여금 양반의 후예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 많던 평민·노비는 모두 어디로 증발했을까.

노비추세법(奴婢推刷法) 폐지~

16세기 후반부터 조선왕조는 외부에서 날아온 연이은 강타에 휘청거렸다.

임진왜란(1592~1599),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7)1)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자연히 노비에 대한 통제 시스템도 약해졌다. 노비들의 도망은 조선 전기에도 많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훨씬 더 많아졌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들의 도망을 통제할 힘마저 크게 약해졌다.

여기에다가 노비들의 저항이 한층 거세졌기 때문에, 국가와 주인의 통제력은 더욱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224회 

주인들이 노비들을 다루기 힘들어지면서,

17세기부터는 임금노동자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노비들이 임금노동자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노비와 주인 양측의 필요가 절충된 결과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임금노동자로의 변신은 신분적 속박의 탈피를 의미했다.

특히 도망노비들로서는, 객지에서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임금노동자가 되는 길뿐이었다.

노비주 입장에서도 거친 노비를 다루는 것보다는 임금노동자를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노비제도가 법전 안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 속에서, 현실에서는 노비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임금은  화성을 건축할 때 요역을 동원하지 않고 임금 노동자들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최초였다,

정조의 애민 정책인
손상익하( 損上益下:윗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아랫사람에게 이익을 주다)정책은 양반의 물질적 토대인 노비제 개혁에 까지 미쳤다.

노비 신분을 대를 물리지 않으려 한 정책을 구상한 것이다.

영조 대까지만 해도 양반들은 나라의 중심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었다.

양반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변란이 생긴다면서
"나라에서는 차라리 小民(소민)의 마음은 잃을지 언정 士夫(사부)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양반이야말로 민심을 단속하면서 국가, 국맥을 유지시켜 가는 주체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때,
소민을 국가의 근본으로 간주하는 정조의 정치인식은 역사상 커다란 진전이었다.

우리나라의 노비는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신분의 세전제(世傳制)로서 명분이 매우 엄중하여

그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법은 좀처럼 시행하기 어려웠다.

노비법을 제정해서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노비신분으로 못 박아 사역하는 형태는 중국에는 전혀 없는 제도었다.

정조는“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존재는 노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며,
기자의 八條之敎(팔조지교)에 근거하여 노비제도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양반들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조선의 노비산책>>> 225회 

기자의 八條之敎(팔조지교)는 악을 징계하자는 일시적 조처에 불과했던 것인데,

역대로 그것을 변혁하지 않고 그대로 因襲(인습)해 왔기 때문에 노비들이 대를 물려 가면서 남의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식구와 나이를 헤아려서 사고팔고 하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고,

아들 손자로 전해 가면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니 토지나 매 한가지며,

오랑캐 비슷하게 반드시 어미를 우선하고,아비 성을 따르지 않고 종으로 성을 삼는다.

​혼인도 할 수가 없고 이웃에서도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으니,

높고 두꺼운 하늘과 땅 사이에 갈 곳 없는 자와 같게 되었다고 하였다.

노비의 이러한 처지는 인륜은 물론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하여 好生之德(호생지덕) 을 베푸는 천리에도 어긋난다고 보았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결코 그렇게 만들 이치가 없다는 것이 정조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노비도 백성인데 백성 사이에 노비와 같은 심한 차별을 받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 하에서 정조는 노비제의 전면적인 혁파를 구상하였다.

노비의 인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존중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선 노비 규정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대신 雇備(고비)의 법을 만들어서

노비신분의 대물림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한하도록 하는 조처를 마련하였다.

이는 노비의 世傳(세전)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조선의 획기적인 개혁안이었다.
정조는 노비제 폐지의 의지를 강력히 밝혔다 .

推刷官(추쇄관:도망노비추적단)을 혁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단지 작은 節目(절목)내의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이 평민과 섞여 사는 것과 본분을 지키는 일이 어그러지지 않고 병행될 수만 있다면 단연코 결행할 것이다 .

이처럼 정조는 노비해방의 결심을 굳혔으나 명분론에 얽매이는 바람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국가 행정력을 동원하여 도망노비를 찾아내 주는 奴婢推刷法(노비추쇄법)은 즉위 직후인 1778년 폐지하였다.

노비세습제 폐지~

세도정치 기간 동안 반 노비정책으로 크게 줄어들며 일시적으로 사노비가 증가하기도 하였으나 개혁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1801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한 66,000여명의 공노비 해방을 시작으로

1864년
궁노비 해방,
공노비 중에서도 내수사(內需司) 소속의 노비는 내노비 또는 왕실의 노비라는 뜻에서 ‘궁노비(宮奴婢)’라고 하였다.

고종임금 때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사노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처럼 실제로는 노비제도가 붕괴하고 있는데도, 법전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은 조선의 사회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새로운 경제현상을 제도적으로 수렴해야만 경제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데,

법전이 여전히 과거의 경제현상을 규정하고 있다면 법률에 의존하는 국가 기능이 헛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18세기 이후 조선이란 나라의 최대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같은 현실과 제도의 괴리에 대해 사림파의 후예들은 치유책을 내놓지 못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226회


이들은 새로운 현실을 긍정하고 그에 걸맞은 해법을 내놓기보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기존의 지배질서를 한층 더 강화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송시열을 지지하는 서인당·노론당이 1910년 국권 상실 때까지 주도세력의 지위를 유지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후기의 지배층은

노비제를 근간으로는 사회질서를 억지로라도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시대에 역행하는 전략을 고수했던 것이다.

더구나 17.18세기 조선이나 주변국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조선이란 나라는 노비제도가 잘 작동될 때에만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나라였다.

노비제 사회를 발판으로 하는 왕조였기 때문이었다.

노비들이 주인의 감독 아래에서 열심히 노동해야만 조선왕조의 재정과 국방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비제도가 일련의 전쟁을 계기로 삐걱거리더니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으니,

조선왕조로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정과 국방의 안정을 도모할 길이 없었다.

19세기에 만연한 삼정(三政,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은 곧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취제도가 파탄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세 수입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려다가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고
결국 민란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이후로는
조선과 일본의 전통적 관계가 종결되었다.

이는 조선왕조를 국제적으로 지탱하던 보호막이 사실상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 등은
조선왕조가 기존 방식으로는 더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기에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하층민의 반란이 아니었다.

군대와 지배층이 그 진원지였다.

그나마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던 국제적 카르텔이 약해지자,
군대와 지배층이 체제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두 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근근이 방어한 조선왕조는
1894년에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조선왕조 최대의 민중반란인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弊政) 개혁안 중에 노비문서 소각이란 조항이 포함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동학농민군은 이미 사문화된 노비제도를 최종적으로 소각시키고자 했다.

노비제도가 끝난다면 조선왕조도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농민군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조선왕조는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간판을 내렸어야 했다.

정부군이 동학농민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것만 보아도,
조선왕조의 통제력이 이미 와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서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해체 될 것처럼 보였는데

고종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여기에다 불청객 일본군까지 덩달아 가세하면서,

노비제도는 동학농민군이 아닌 제3자에 의해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227회(마지막 회)

동학농민군이 밀려난 자리는 일본군에 의해 대체되었다.

일본군이 조선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의 노비제도는 최종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법과 실상은 따로 따로 놀았다.

갑오경장 이후 노비제도는 불법이 되었지만 인신매매의 이익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유혹으로 인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日帝는 자신들이 노비제도를 없앴다고 하지만 일제 강점기가 되었어도 인신매매는 계속 이어져 왔는데 일제는 이를 단속하지도 않았고

훗날 이들은 위안부 모집책(포주)으로 변신을 했다고도 한다.


실제는 6.25전쟁으로 노비제도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노비제도가 공식적인 국가 제도로서 폐지된 것은 조선 후기이나, 이것이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사라진 건 한국전쟁 이후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8.15 광복 이후 큰 사회적인 혼란 과정에서 기존의 신분을 알 수 없게 된 데다,

좌우 이념 대립 과정에서 개개인의 신분보다는 이념 노선과 능력이 중시되면서 기존의 신분과 관련된 관습의 상당수가 부정되었는데,

이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지역(염전) 등에서 멀쩡한 사람들을 사실상의 노비로 삼아 현대판 노예처럼 착취하는 건 얼마 전 까지도 언론에 보도 되기도했다.

대표적으로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자주 발견되는 섬노예가 있고, 서울에서도 경기장에서 노예로 부려먹은 예도 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노비 제도가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노비는 해방되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일부 젊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양반집에 그대로 매인 채로 머슴으로 전환되어 과거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도 이들에 대한 대우를 노비 시절과 크게 달리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젊은 노비들은 신분제 폐지를 환영했지만 일부 나이든 노비들은 오히려 노비 제도가 없어짐으로써

양반집에서 그걸 명분삼아 해방을 핑계로 그냥 내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비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이들의 처지를 이용한 양반들의 횡포로 그전과 큰 차이가 없는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에 시달렸으며,

단지 합법으로 포장하기 위해 상당히 적은 보수를 지급했는데 최저임금제가 없었던 시절이었고,

이렇게 짜게 부려먹어도 단속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당연히 노비는 있었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사회가 뒤집어지고,

뒤이어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1960년대부터 노비 계급은 대부분 사라진다.

1970년대까지는 지방의 낙후된 시골지역에서 그 존재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지방의 노비계급까지 폐지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섬노예, 지적장애인 등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가끔 비하적 표현 등으로 비유적으로 용어가 쓰이기는 한다.

만약 현대에 정말로 사람을 노비처럼 부린다면 불법이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섬노예 등이 그러한 경우. 해안도서의 섬노예뿐만 아니더라도 타 지역에서 지적 장애인들을 시골 농가나 외진 곳에서 착취하는 범죄는 잊을 만하면 뉴스가 뜨고 한 적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비제도가 완전히 사라진지는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 세대는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노비의 삶과 역사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심층적인 연구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및참고문헌: 천하지만 특별한 조선노비들(김종성)

「조선의 노비」와 관련된 교수 저서및, 논문, 기고문 그리고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 놓은 글, 여기 저기 인터넷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노비관련 자료를 모아 편집해서
지난 해 10월부터 금년 8월까지 11개월 동안 연재해온 <조선의 노비산책>은 오늘 227회를 끝으로 그 연재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 동안 조선시대의 각종 모아둔 자료의 정리. 그리고 관련 서적 내용을 그대로 옮기거나 또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소소한 조선시대  이야기 거리를  발굴하여  9월초부터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이라는 제목으로 년대 순과 관계없이   연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비이야기(3)  (0) 2023.06.12
조선노비이야기(2)  (0) 2023.01.11
혈문장  (0) 2022.12.04
일문강호  (0) 2022.11.30
쌍금도  (0) 20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