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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이야기(3)

<조선의 노비산책>>> 140회

연산군은 유모 최씨에게 어떤 상을 내렸을까?

우선 봉보부인(임금이 유모에게 내려준 봉작으로 종 1품)이란 칭호를 내린다.

당시 육조 판서(장관)직급이 정2품이니 장관보다 직급이 높았던 것이다,

이런 직위에 걸맞게 연봉도 대단했다.

연산군 당시 영의정 연봉이 얼마나 되었을까?  
월급이 쌀 2석 8부에 콩 1석5두 였으니 약4석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연봉이 50석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봉보부인은 연봉만 60석이었다. 여기에 식대 .의상비. 같은 퓸위유지비는 후궁인 빈 수준에서 매달 지원을 받았으니 인생역전이 따로 있을 손가~~

방금 전까지 노비신분이고 궁녀였던 유모가 종 1품 봉보부인이 되고 노비신분에서 해방되었으며 덤으로 그녀의 남편 역시 벼슬을 받았다. 이뿐인가?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상당한 지원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부릴 수 있는 노비들도 보너스로 주어졌다,

웬만한 양반가를 압도하는 부와 명예를 얻는 셈이다.

진짜는 임금과의 끈끈한 정이다. 웬만한 청탁은 다 들어 준다.

과거 예종임금이 자신의 봉보부인의 사촌까지 면천을 해주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27명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봉보부인의 동생 1명만 면천을 해주었다,


연산군은 어떠했을까?
노비 유모 최씨, 봉보부인 최씨와 관련된 친인척의 면천 범위를 놓고 금기야 왕권과 신권이 대립을 하게 된다.

이 때가 연산군 즉위 2년, 나이는 20살이었다.
신하들은 연사군의 기를 꺽을 필요가 있었다,

“전하, 아버지 성종을 따르셔 야지요”
“아니다. 나는 예종을 따를 것이다”
“아니되옵니다. 아버지 예를 따라야 합니다”

연산군은 신하들과  면천 범위를 놓고 기 싸움을 벌였지만 봉보부인의 죄(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연산군의 언급으로 봐서 왕실 물건 절도)를 물어 모두 없던 것으로 해버린다.

본인의 직책도 회수해 버리고.....연산군은 신하들이 그 원인을 물었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아 가록에 남질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세월이 지나 다시 유모 최씨에게 봉보부인 직책을 돌려주는 등 직첩과 녹봉을 돌려주었고 그의 아들과 사위에게 벼슬을 하사했다,

봉보부인이 죽은 뒤에도 그 가족에게 봉보부인이 받던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선의 노비산책>>> 141회


♣남편을 과거에 합격시킨 여종~~~~

일본에서는 오늘날처럼 고대에도 까마귀가 길조였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이 까마귀의 인도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까마귀를 길조로 인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는 <산성일기(山城日記)>에는

“(임금께서) 산성에 들어오신 후 성 안에 까마귀와 까치가 없었는데,
이날은 많이 들어오니 사람들이 길조라 했다”는 문장이 있다.

이처럼 과거 한국에서는 까마귀와 까치가 모두 길조로 통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까마귀는 흉조의 대명사로 변하고 까치만 길조의 대명사로 남았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까치가 남쪽 가지에 둥지를 틀면 영화(榮華)를 본다’는 속설이 있었다.

적어도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속설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자기는 원래 이런 속설을 비웃었다고 했다.
그(유몽인)가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청파(靑坡)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지붕 남쪽 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틀자, 사람들은 유몽인이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유몽인이 아닌 처형의 사위였다.

그 뒤 까치가 똑같은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그해에는 유몽인이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이때가 1582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이었다.

이로부터 7년 뒤, 똑같은 나무에 까치집이 다시 생겼다.

이번에는 유몽인이 대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의 일이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유몽인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 전에는 꼭 까치집이 등장하곤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한 공로로 종전 후인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뽑혔을 때도 유몽인의 집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이쯤 되면, 까치 속설을 비웃던 유몽인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明禮坊)에 살 때의 일이다. 이때도 집의 남쪽 버드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당연히 그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같은 유씨 성을 가진 지인이 무과에 급제했다.

그해에 유몽인의 관직은 낮아지고 집에는 우환이 생겼다. 다음 해에도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이번에는 유몽인의 여종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포수인 그의 남편이 무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번에도 유몽인과 그의 집에는 나쁜 일이 생겼다.

까치가 오면 복이 온다느니, 올빼미가 오면 화가 온다느니 하는 속설들이 언제나 적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유몽인의 결론이다.

유몽인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새옹지마의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42회


명례방(지금 서울 명동)에 살 때 출현한 까치는 유몽인에게는 좋지 않은 의미를 주었지만,
그 집 여종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여종에게는 좋은 전조(前兆)가 되었다. 여종의 남편이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노비의 남편이 과거에 합격하다니, 언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유몽인은 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기록했다.

가까운 지인이 무과에 합격한 것과 여종의 남편이 무과에 합격한 것을 똑같은 어조로 기록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이 여종은 외거노비였던 듯하다. 솔거노비였다면 남편이 유몽인의 집에서 편히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종이 유몽인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남편은 가끔씩 거들면서 과거를 준비했던 듯하다. 아내는 노비, 남편은 양인이었던 것이다.

이 경우, 남편이 급제한다고 해서 부인이 자동으로 면천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이 여종은 평생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유몽인에게 보상금을 준다면 모를까. 남의 집 농토를 경작하면서 공부를 했으니 가문이 좋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든든한 배경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관료가 된 후에도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출셋길이 신통치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를 배출했다고 해서 이 집안의 형편이 아주 비약적으로 좋아졌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여종은 평생토록 유몽인의 집에 얽매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이 여종을 쉽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과 합격자를 남편으로 둔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유몽인은 물론 유몽인의 집안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역 사회에서 그는 남편을 과거에 합격시킨 ‘장한 아내’로 통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천대를 받은 게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노비일지라도 가족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43회


유사한 사례는 《금계필담》에서도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영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의 이야기다.

조문명은 연잉군(延礽君, 훗날의 영조)을 보호하고 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가 1725년에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떠날 때의 일이었다. 압록강을 넘기 전에 조문명은 평안도 안주진(安州鎭)에서 머물렀다.

‘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군이나 현에 상응하는 지역이다.

이런 경우에 지방 관청에서는 관기들을 불러 사신을 접대했다.
조문명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관계(官界)에 입문한 지 12년 뒤였으니, 이런 대우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이때 연회장에서 열두 살짜리 관기가 그를 매혹했다. 그는 소녀를 따로 불렀고 그 뒤 부채를 정표로 주었다. 물론 안주를 떠난 조문명이 그 관기를 언제까지 마음에 담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훗날 조문명이 안주를 다시 방문했다.

그때 밤늦은 시각에 아전 한 명이 조문명을 찾아와 부채 하나를 바쳤다.

부채에는 옛날 그 관기의 글이 적혀 있었다. 아직도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 관기는 조문명을 만난 이후로는 어느 누구의 수청도 들지 않고, 오로지 시 짓고 책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수청을 거부해 고초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아전을 시켜 관기를 불러보니, 머리는 지저분하고 얼굴은 더럽고 옷차림은 남루했다.

자신을 기다리다 이렇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조문명은 그 길로 관기를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조문명에게 관기의 존재를 환기시킨 아전은 관기의 오빠였다.

정확한 직책은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오늘날로 치면 시청·군청·구청의 공무원이었다.

사극에서는 사또에게 아부나 하고 목소리도 약간 여성스럽게 나오지만, 이방 같은 아전들은 조금 과장하면 지금의 시·군·구 국장급에 해당했다.

일반 서민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관기의 오빠가 국장급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아래였는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조의 최측근에게 접근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라면 안주진 내에서 상당한 위상을 점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관기가 수청을 거부하느라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시를 짓고 공부하며 조문명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오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성춘향처럼 사또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 관기는 지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정 노비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종합적으로 고찰해야만 그의 사회적 지위를 정확하게 도출할 수 있다.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최하층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노비 중에는 양인에 못지않은 혹은 양인보다 훨씬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신분과 지위의 괴리인 셈이다. 일부 노비에 국한된 사례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노비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44회

♣18세기의 노비시인 ~~

노비 시인의 계보~
그 중심에 홍세태가 있다

노비 신분은 직업에 제한을 받았으며 그 신분과 직업이 세습되었다.
그들에게 학문과 문학은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각 시대마다 노비이면서 학문에 뛰어나고 문학에도 능력을 보인 몇몇 인물이 극히 드물게 등장한다.

조선 오백년 동안 천민 시인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계보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김해의 관노였던 어무적(魚無跡)과 전함노(戰艦奴)였던 백대붕(白大鵬)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여기에 송익필(宋翼弼)도 넣을 수 있으나
그는 천민이라고 하기에 여러 가지 걸림돌이 많다.

그 이후로는 17세기의 홍세태와 18세기의 정초부 그리고 이단전이 노비 시인을 대표한다.
여기에 안동 출신의 여종 설죽(雪竹)도 천민 시인에 속한다.

이밖에도 노비이면서 한두 작품을 남긴 인물이 조금 더 있으나 한두 편의 시를 남긴 것에 불과하여 전문 시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무적과 백대붕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노비 시인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은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지만 작품성이 아주 뛰어나 많은 평자로부터 높은 평가도 얻어냈다.

그들은 노비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박대와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어무적은 아버지 쪽은 양반 사대부였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여서 김해의 관노가 되었다.

아버지 쪽의 영향으로 한문을 배웠고 시재가 뛰어나 <유민탄(流民嘆)> 과 <신력탄(新曆嘆)> 같은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사회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꼰 시를 다수 지었다.

1501년, 연산군 7년에는 이른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란 직책으로 연산군에게 상소문까지 올린 것을 보면 면천(免賤)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수령이 매화나무에까지 무리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에 분개해 작매부(斫梅賦)를 지어 관장의 횡포를 규탄했는데

그 시에 화가 난 수령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해서 도망 중에 객사했다.

노비 출신으로서 자의식 강한 문학을 한 셈이다.

이렇게 신분이 미천하지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인구에 회자되어 17세기 전반까지 문학에는

어무적 박계강(朴繼姜) 정옥서(鄭玉瑞), 학행에는 서기(徐起) 박인수(朴仁壽) 권천동(權千同) 허억건(許億健)을 꼽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45회

유몽인(柳夢寅)이 자기 시대의 비천한 시인인 유희경(劉希慶)의 전기에서 그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천민으로 입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에 대한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미천한 신분으로 명성을 날릴 만큼 두각을 나타냈으나 시간이 흘러 그들이 활동한 내역은 물론 이름조차도 사라졌다.

천민들은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전할 매체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비 작가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은 17세기 말엽에 등장한 홍세태(洪世泰)라는 시인이다.

그는 조선 후기 여항문단의 터전을 마련한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인생 후반기에 기술직 중인에 해당하는 직책을 역임했으나 늘 신분이 비천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부계(父系)가 기술직 중인이었다고는 하나 밝혀진 것이 없는 반면 모계는 사노비(私奴婢)가 분명하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는 자연스레 노비에 편입되었다.

장성한 그는 노비로 일하기를 거부했는데 화가 난 주인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때 막강한 권력자인 김석주(金錫冑: 숙종 임금 외척)가 돈을 주어 그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었고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은 사지에 처한 그를 살려냈다.

이미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진 그의 시적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명문가 사대부와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도움으로 역과(譯科)에도 합격하고 낮은 벼슬도 얻었다.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고 뛰어난 시재를 지닌 데다 권력자와 친분도 깊었기에 그는 승승장구할 여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비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죽을 때까지 벗어던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것은 사후에도 따라다녔다.

 

<조선의 노비산책>>> 146회

1710년, 숙종 36년
사헌부는 탄핵 장계를 올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통례원(通禮院)에 소속된 종6품의 벼슬)로 재직하는

홍세태를 탄핵해 본래 비천한 노비 신분이었던 자가 문반관료의 자리에 앉았다고 상소했다. 뿐 만 아니다.

그가 죽은 뒤인 1729년에도
그런 모욕이 이어지자 영조는 "천류(賤流) 홍세태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이렇듯이 사람을 모욕한다면 모면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고 두둔한 적이 있다.

이 밖에도 홍세태가 눈에 띌수록 그를 노비 출신이라 비난하고 모욕하는 일이 거세졌다.

노비 신분을 벗어났고 뛰어난 시인이라는 명성까지 얻었으나 언제나 노비 출신 시인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뒤따라와서 그를 괴롭혔다.

노비로 태어난 자는 노비에서 풀려났다고 해도 신분의 굴레를 시원스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보듬은 사대부가 생전에도 적지 않았고

사후에는 임금 영조가 그를 대우했다.
영조는 유달리 홍세태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문집을 들이라 하여 읽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월대의 노래(滿月臺歌)>를 영조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라 칭찬했다.  

만월대 앞에는 낙엽 지는 가을     
(滿月臺前落木秋)

서풍 불고 해는 져서 나그네 시름 젖네
(西風殘照使人愁)

드높던 강감찬의 기상 사라진 산하에는
(山河氣盡姜邯贊)

일월만 정몽주의 이름인양 걸려 있구나
(日月名懸鄭夢周) 

회고조로 흐르기 일쑤인 개성을 읊은 시 가운데서도 웅혼한 기상을 드러내 보인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일반 사대부라 해도 군주로부터 이 같은 평을 한 번 얻어 내기는 어려운데.......

더군다나
홍세태처럼 신분이 문제가 되는 사람을 국왕이 높이 평가한 것은 이례적 사건이었다.

1770년에는
일본 화가가 그린 홍세태 초상화를 영조가 궁궐에 들여와 어람(御覽: 임금이 봄)한 일도 벌어졌다.

노비였던 자의 초상화를 임금이 열람했다 해서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조가 홍세태를 여러 번 두둔하고 문집과 초상화까지 열람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심했다.
제왕이라서 감히 누구도 발설하지 못했지만 영조도 천민 출신인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신분이 비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진하게 갖고 있었고

송익필이나 홍세태에게 동정적 시선을 보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147회


정초부와 여춘영 노비와 주인  ​

영조가 칭찬한 홍세태는 숙종시대를 대표하는 노비 출신 시인이었다.

그를 이어
영조시대에는 정초부가,
정조 시대에는 이단전이
노비 시인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노비 시인으로 이 두 시인을 꼽을 수 있다.

그에 걸맞게 사람들은 홍세태를 계승한 시인으로 이 둘을 꼽았다.

그런데 두 시인은 홍세태의 활동 처지와는 조금 다르다. 홍세태가 시적 재능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免賤)되어 양인으로 활동했다면

정초부와 이단전은 생의 대부분을 노비 신분을 가지고 시인으로 활동했다.

홍세태는 이른 시기에 면천되었기에 법적으로는 노비가 아니었고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관료였다.

관료는 아무리 낮은 직책이라도 관료다.

그러나 정초부와 이단전은 출신도 노비인데다
한평생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도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관직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나무꾼과 임노동자로 평생을 보냈다. 

두 사람은 모두가 명문가의 노비로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노비 시인 이단전 ~~

시 쓰는 노비, 이단전

이단전(1755~1790)은 스스로를 종놈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시인이었다.

실제로 그는 우의정을 지낸 유언호 댁의 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종이었고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아비도 모르는 채 계집종에게서 태어난 천출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르고 작은 키에 애꾸눈이었고 마마를 앓아 심하게 얽은 곰보였다.

어디 한 구석 정을 줄 수 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어떻게 한학을 해서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양반집의 종으로, 어깨너머로 문자를 익혔을 것이고 문자를 익히고 나서 시문을 읽게 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청년 시절, 그는 재야의 문단을 장악하고 있던 일흔셋의 이용휴를 찾아갔다.

옷소매에서 시집 원고 하사고(霞思稿)를 꺼내놓았다.
이용휴는 시집을 읽어나가며 얼굴빛이 달라졌다.
놀라운 문장이었다.

이용휴는 말없이 벽도화 가지를 꺾어 이단전에게 건넸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는 의미였다.

이단전에게 주는 커다란 상찬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48회

이용휴는 이단전과의 만남이 유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단전이라는 이름이었다.

단전(亶佃)의 단은 '진실로'라는 의미요 전은 소작인 또는 '머슴'이라는 의미니 진짜 머슴이라는 뜻이다.

이단전은 스스로를 모멸하는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이름뿐 아니라 호 또한 그랬다.

필한(疋漢)의 필은 하인(下人)의 합자이니 하인 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자기의 흠결을 숨기려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단전은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말까지 어버버 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밤마다 시를 쓰고 날 밝으면 나가
여러 문인과 명사 찾아 비평 받아
이 같은 일 10여년간 꾸준히 반복

그런 그가 당대의 문인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시 공부를 했다.

양반댁에서는 일은 안 하고 밤낮으로 시를 쓰고 술을 퍼마시고 시인 묵객들을 찾아나서는 종놈을 곱게 보아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놈은 어엿한 문사로 양반들과 시회를 열거나 시문을 통한 교류를 하고 있으니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정쩡하게 눈감아주었을 것이다.

그의 시 스승은 남초부였다가 후에 이덕무로 바뀌었다.

남초부는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었다.

이덕무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시를 잘 가르쳐서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비천한 계급의 자식들까지 두루 찾아와서 시를 배웠다.

이단전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덕무의 열린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시를 잘 가르쳐도 늘 가난했다. 자신을 일러 잘못된 시구를 고쳐주는 시 땜쟁이라고 묘사한 글이 있다.

이단전은 늘 큰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때마다 주머니에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49회

우의정을 14년간이나 지낸 남공철(남이 장군 후손)은 이단전의 시집 서문에

「밤마다 기름을 사서 등불을 밝히고 꼿꼿이 앉아서 시를 썼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문밖으로 나가 여러 문인과 명사를 두루 찾아보고 비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일을 10여 년 동안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이군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이군의 시는 영롱한 마음과 지혜가 담겨 있는데, 때때로 곤궁함과 불평의 언어를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군의 시는 마치 화를 내는 듯하고 비웃는 듯하며 과부가 밤에 곡하는 듯하고 나그네가 추운 새벽에 일어나는 듯도 하다」고 썼다.

그의 시는 영롱한 마음·지혜 담겨
때론 곤궁함과 불평 언어 드러내

이단전의 시로 널리 알려진 '관왕묘에서'는

'낡은 묘는 으슥하여 대낮에도 스산하고/
의젓한 관우 상은 한(漢)의 의관 입었구나/
중원 평정 큰 사업을 완수하지 못해선가/
천년토록 적토마는 안장을 풀지 않네'라고

중원 평정을 이루지 못한 적토마의 한을 노래한다.

또 다른 詩 '거미'에서는

배는 불룩 경륜이 담겨 있고/
먹이를 도모하려 그물을 쳐놓고서/
이슬방울 군데군데 깔아놓은 데로/
바람 타고 날아온 나비 걸려드누나!

라고 재기발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詩를 보자.
“인생 백년 길지 않다”

​“쌀과 소금. 땔감과 기름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건 슬픈 일이다”

​“조물주는 무슨 생각으로
해동 한 모퉁이에 나를 낳았을까

심성은 바보와 멍청이를 겸했고
행색은 말라깽이에 홀쭉이

사귀는 이는 모두가 양반이지만
지키는 분수는 남의 집 종

천축에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무슨 인연인지 부처에게 물어보리라”


이단전은 취하면 사대부를 만나 그들의 패악을 직선적으로 지적했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는 술이 취해서 이 시인, 저 시인을 찾아다니다 그러기를 10여년......
결국  술을 많이 마시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길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조선의 노비산책>>> 150회


​♣ 노비 시인 정초부를  살펴본다.

명문가 여씨 집안 노비이자 나무꾼
기억력 좋아 주인의 글 다 외워버려

종놈의 아들

18세기의 노비 시인 이단전(李亶佃:1755~1790)은
영조 임금 때'나는 종놈이다'라고 거침없이 내놓고 다녔다.

그는 제 스스로 노비임을 밝히고서 노비이지만 시를 쓰노라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단전보다 선배 노비 시인인 정초부(鄭樵夫)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나무꾼이라고만 밝힌 것이다.

정초부(1714~1789)는 정조 때 시단을 풍미했던 노비 시인이다
.
그는 경기 양평 사람이다.
성은 정(鄭 혹은 丁)씨라고 알려졌지만 이름은 분명한 초부(樵夫)다. 나무꾼이란 뜻이다.

특별히 18세기에는 천민으로서 이름을 날린 시인이 몇 명이나 등장했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주목할 노비 정초부도 있다.

정초부의 시가 실린 조선시대의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 권에 이른다.

먼저 주인과 그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초부는 여러 기록에 대체로 천민으로 나온다.

기록자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함양(咸陽) 여씨(呂氏) 집안의 가노(家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정확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기록한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제(呂聖齊:1625 ~1691) 여춘영(呂春永:1734 ~1812) 여만영(呂萬永1730~?) 여동식(呂東植1774~1829)의 종이라고 기록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저 여씨 집안의 종이라고만 밝힌 기록도 있다.

19세기 전기의 지식인은 정초부가 당시에 참판을 지내는 등 중앙정계에서 크게 활동하던 여동식의 가노(家奴)라고 소개했다.

한편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편찬한 <병세집 (竝世集)>에서는 정초부를 월계초부(月溪樵夫)라고 적었고 여춘영의 노비라고 밝혔다.

그를 여춘영의 노비로 기록한 자료가 가장 많으며 생몰연대로 볼 때도 여춘영의 노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여춘영은 누구인가. 자는 경인(景仁)이고 호는 헌적(軒適)이다.

조선 후기 문벌가문 가운데 하나인 여씨 집안의 주거지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이다. 

이곳은 팔당대교가 위치한 월계(月溪) 부근이기에 월계의 부속지로도 불렸다.

지금도 수청리 254-2번지에는 이 집안을 중흥시킨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사랑채 한 채가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 집안을 비롯한 명문가와 나란하게 이 일대에서 명망을 지키며 대를 이어 문과 급제자와 쟁쟁한 명사를 배출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1회


여선응의 둘째 아들 여춘영이 여선장의 양자로 들어가 영의정을 지낸 여성제 집안을 이었다.

여춘영은 여동근과 여동식을 낳았다.

정초부는 바로 이 혁혁한 명문가 소유의 종이었고

그가 젊은 시절 모셔야 했던 주인이 바로 여춘영이었다.

홍세태나 이단전은 아버지가 양인 이상의 신분이었으나 어머니가 노비라서 그 자신도 노비가 되었으나

정초부는 사정이 달랐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씨 집안의 노비로 줄곧 이어졌다.

아버지 쪽 학식이 토대가 되어 시인으로 성장한 다수의 노비 시인과는 경우가 달랐다.

여춘영은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만시 12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 (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는 구절이 있다.

어릴 적에는 노비인 정초부를 스승으로, 커서는 벗으로 지내, 시를 함께 지었다고 밝혔다.

스무 살 연상의 정초부를 상당히 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했다고하여 정초부가 노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신분이 낮은 노비였다는 것은 여춘영이 그를 묻고서 돌아온 길에 쓴 시에서도 보인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 黃壚亦樵否)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霜葉雨空汀)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 三韓多氏族)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 來世托寧馨)
-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읊다 -
(哭樵夫葬 歸路有吟)


정초부는 가을에 사망한 듯하다.

여춘영은 낙엽을 보고 정초부가 저승에 가서도 나무를 하는가 보다고 했다.
또 내세에는 명문가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즉 신분이 천하고 나무꾼을 했던 점을 아쉬워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52회


여춘영은 시를 잘하는 노비를 면천시키고 그와 시벗이 되어 지내며 연민과 동정으로 그를 보살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한양의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트렸다. 

세상이 정초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주인 덕분이었다.
여춘영은 문장으로는 제문 네 편만 남겼는데
그 가운데 '정초부의 제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하 ‘정초부 제문 ’ 내용이다

「아아! 왕공(王公)도 혼자 차지하지 못하고 장사도 억지로 빼앗지 못하는 것이 초부의 동호(東湖)를 읊은 작품이 아니겠는가?

하늘이여! 사람이여!

사람이 이런 재주를 가지고도 늙도록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초부의 시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빼어나지만 귀신이 보기에는 졸렬해서인가? (…)

초부가 처음에 기운을 타고 세상에 왔으므로 반드시 다시 사물에 몸을 기탁하리라.
그러면 큰 산등성이에 들어가 울퉁불퉁한 나무가 될까 아니면 바닷가 산에 들어가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될까?

헌적이 비척비척 지팡이 짚고 가다가 범상치 않고 속되지 않은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만나면 흔연히 어깨를 툭 치고 다시 막역한 벗이 될 것인가? 초부가 내 말을 여기까지 듣는다면 혹시라도 크게 한번 웃으려나.

오호라 슬프다. 

<여춘영이 정초부를 위해 쓴 제문>

이렇듯 거의 존재하기 힘든 노비 시인이라는 엄청난 벽을 정초부나 이단전은 넘었다.
그렇다면 여씨 집안의 노비 정초부는 무엇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시인이 되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153회


<삼명시화(三溟詩話)>에는 정초부가 시를 배운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날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잠을 잤는데 주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바로 외워버렸다.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짓게 됐을까?
한시는 운율과 음의 높낮이 등을 맞춰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낸다고 한다.

한 편의 한시를 짓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초부는 낮에는 산에 가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사랑채에서 잤다. 주인은 늘 책을 읽었다.

그는 주인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외워버렸다.

경탄할만한 기억력이었다.

이런 그를 주인이 가상하게 여겨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학업성취가 빨랐다.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었다.

그의 문장은 주인집 자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운 것이다.

주인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배려했는데 학업 성장이 빨랐다.


천한 노비가 시를 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문젯거리냐고 의문을 표할지 모르겠으나 조선시대에 노비가 시를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했다.

한시(漢詩)는 한글 시가와 달리 고급문화에 속해서 식자들이 독점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여성과 평민을 포함하여 문화적 소수자는 감히 곁눈질조차 하기 힘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초부는 43세 무렵에 면천되어 양근(현재 양평) 갈대울에 거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무꾼 신세였다.

정초부의 시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동풍이 장안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

양인이 된 정초부는 시인으로서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2011년 KBS 역사스페셜에 「노비 정초부, 시인이 되다」로 소개한 바 있으며
경기도 양평군은  그 옛날 ‘노비 시인 정초부 지게길’을 복원하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4회

단원 김홍도 작품 ‘도선도(渡船圖)’의 화제(畫題: 그림위에 쓰는 詩文)가 있다.

한 척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의  상단에는 김홍도가 영감을 받았다는 시가 쓰여 있다.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필치로 쓰인 시는 ‘동호범주( 東湖泛舟)’였다.

오늘날 서울 옥수동 앞 지금의 한강인 동호( 東湖)를 건너던 나룻배 한 척을 그렸다.

그림에는 애사(哀詞)를 읊은 한시(漢詩)가 그 것이다.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飛去盡(유덕일성비거진)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夕陽山色滿空潭 (석양산색만공담)
노을 아래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나무를 해서 한 배 가득 싣고
성동구 옥수동 주변의 한강인 동호(東湖)를 가다가 봄직한 풍경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 시와 동일한 작품이 실린 시집인 ‘초부유고’가 발굴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2011년 2월.

그동안 다른 문헌을 통해 그 존재만 알려졌던 ‘초부유고’를 고려대 도서관이 소장 중인 <다산시령>안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정초부의 본명은  이재(彛載)였다고 발표했다.


「다산시령」은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18세기 최고 문인의 시(詩)만 골라 묶은 시선집이다.

이 책 안에는 <초부유고(樵夫遺稿)>라는 제목으로 노비 시인 정초부의 시 약 90수(首)가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천재 화원(김홍도)의 마음을 움직인 시인은 초부, 그는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던 것이다.

김홍도의 시로 알았는데  정초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초부가 시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퍼트린 작품이다.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5회


수원 부사를 지낸 김상묵(金尙默1726~1779)은 양평 양수리에 살아 정초부 집과 가까이에 있었다.

노론 청류(淸流) 계열에 속한 그는 정치적으로 실의했을 때 정초부와 어울려 지내겠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1769년,
김상묵은 정초부와 시를 주고받은 시첩 <백우초창시권伯愚樵唱詩卷>을 만들었다.

여기서 백우(伯愚)는 김상묵의 자이고 초창樵唱은 정초부와 주고받았다는 뜻이다.

그 시권에 정조시대의 실력자인 김종수(金鍾秀)가 서문을 써주었다.

그 글에서 "백우가 '초부는 천인(賤人)이다. 월계(月溪) 가에 집이 있는데 산에 들어가 나무하여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

생김새가 고괴(古怪)하고 말이 어눌하나 이렇듯이 시를 잘한다'라고만 했다.

내가 초부의 시를 읽어보니 곡조는 깨끗하고 재주는 빼어나서 세속적 기운이 거의 없다.

가끔 정신이 소탈하여 도인(道人)의 말과 닮았으니 초부는 참으로 기이한 선비다"라고 말했다.

친분이 깊던 김상묵의 말을 통해서 정초부가 용모가 아주 못 생겼고 말을 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어 주인집 자제가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황윤석의 <이재란고(頤齋亂藁)>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양근현에 사는 나무꾼이 본래는 종인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그 주인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글을 써줘 급제를 시켰으며

이에 주인은 그 대가로 그를 양인으로 풀어줬다는 것이다.

변재민(邊載岷)이란 아이가 전해준 말을 황윤석이 기록에 남겼다.

당대에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는데

예컨대 주인집 자제들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대리시험을 쳐서 주인집 자제들을 급제시켰다는 소문도 그중의 하나다.

그는 면천된 후에도 나무를 해서 배와 지개를 이용해서 양평에서 용산까지 오가며 나무장사를 하는 것으로 호구지책 삼았다.

그가 남에게 고용되어 나무를 해서 팔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56회

정초부의 시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나무꾼은 이제 늙었으며,

늙어서도 나무를 지게에 힘겹게 짊어지고 장안으로 들어오는 고단하고 신산한 삶이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굶주림을 묘사한 시 가운데는

다음 작품이 명작이라고 한다

굶주림을 참다 못해 관아에 환곡미를 얻으러 갔으나

관아 호적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없어 곡식을 빌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낙담한 그는 관아의 다락에 올라가 다음 시를 지었다.

산새는 진작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山禽舊識山人面

관아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郡藉曾無野客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

一粒難分太倉粟

높은 다락에 홀로 오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高樓獨倚暮烟生

< 환곡을 구걸하며 乞糶>

*걸조: 쌀을 구걸하다

1844년경 82세의 시인 조수삼이

정약용의 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인 정학연(丁學淵)과 함께 시를 지을 때 정초부를 언급하며

"오백년 문명이 영정조 때에 꽃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지었네

‘五百文明英正際 樵夫農婦摠能詩’ "라고 평가 했다.

출처 : 안대회교수(성균관大 한문학) 및 김윤배 시인 등 글 옮김

<조선의 노비산책>>> 157회

♣초노(樵奴: 나무꾼 전문 노비) 아이종의 구슬픈 넋두리~~

나무하는 일만 맡는 노비를 초노(樵奴)라고 했다.

경북 예천의 선비 황용한은 나무하는 아이 종을 두었다.

눈이 내리던 11월 어느 날

아이 종이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땔감이 없으니 밥도 못 짓고 온돌도 덥히지 못한다.

아이 종이 나타나자, 먹여주고 입혀 주는데 그 깐 나무 하나 제대로 못해 오느냐?고 꾸짖었다.

묵묵히 꾸지람을 듣던 아이종이 입을 연다.

「제가 주인어른께 의지한 뒤로

고생만 했지 받은 은혜는 없지요

풍년이 들어 쌀이 흙처럼 흔해도

나는 항상 쭉정이만 먹었고

더구나 솜옷은 화려하지 않아

내옷은 겨우 정강이를 덮었지요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데

나무는 먼 산 기슭에 있지요

간신히 작은 어깨에 들러메니

어께가 말라서 멍이 들려 하지요

그런데도 꾸짖음을 면치 못하니

나는 걱정스러워 죽겠습니다.

주인이 있어도 이와 같으니

제가 누구를 믿겠습니까?

듣자니 서울의 대갓집에는

하인도 고운 비단옷을 입고

서쪽 마을 부짓집은

일꾼에게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인다네요

이제 이곳을 버리고 떠나려니

짚신 한 컬레 준비하겠습니다.

새는 나무를 가려 앉고

선비는 자리를 가릴 줄 알지요」

아이 종의 주인 황용한은 후회했다.

내가 가난한 처지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따뜻하고

배 부르려는 욕심에서 아이 종을 학대 했구나......

아이 종 하나 품지 못하는 내가 백성을 구제하는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출처: 조선 잡사.민음사>

 

<조선의 노비산책>>> 158회


노비는 물건(?)이었다. !!!~

대명률에 의하면
노비주인이 노비에게 구타 등 위해를 가할 경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구타로 인해 사망의 결과만 발생했을 경우 처벌 할 수 있었다.

폭해죄(상해죄)는 처벌하지 않고 폭행(상해)치사죄만 처벌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행(상해) 치사죄도 무조건 처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관청에 신고를 해둔 경우에는 처벌을 면 할 수 있었다.

“우리집 노비가 이러저러 한 죄(잘못)를 범했기 때문에 혼좀 내 주겠습니다‘라고 신고를 해둔 경우에는

노비가 죽더라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런 절차를 지키지 않고 노비가 죽을 경우에는  노비주인은 곤장 100대에 처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신고 절차를 지키지 안했어도 눈감아 주거나(마치 시고를 한 것처럼)

사망과 폭행 사이에 작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특권은 노비의 주인 뿐 만 아니라

그 노비주의 기복친(朞服親)과 노비주인의 외조부모게도 적용되었다.

「기복친」이란 노비주인이 죽을 경우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 2촌.3촌의 부모 뻘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부모.백부모.숙부모 등을 말한다.

노비는 자기주인을 물론이고 그 집안의 어른에게도 깍듯이 대해야 했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비가 술에 취해 주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염려대왕을 부른 것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다음은 <금계필담(錦溪筆談>)에 기록된 이야기다.

<금계필담>은
조선의 역대 국왕과 조신(朝臣)들의 국사처리에 관련된 고사(故事) 및 명사들의 기행(奇行) ·기문(奇聞)을 수록한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조선 임금 선조의 사위중에 신익성(申翊聖)이란 자가 있었다.

신익성 집에는 사위 홍명하(洪命夏)가 얹혀 살고 있었다.

훗날 조선 현종 임금 때 좌의정을 역임했던 인물인데

서른 일곱 살 때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처가에서 시험공부를 했는데

신익성의 아들 신면(申冕)이  홍명하를 엄청 무시.구박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59회

그러던 어느날

식사시간이었다.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았다.
이 때 집 노비가 실수로
홍명하의 숟가락과 신면의 숟가락을 바꾸어 놓았다.

그 날 노비는 하찮은 일로 신면에게 곤장으로 볼기를 맞았다.

노비의 자식들인 꼬마 노비들이 장난을 치다가 잘못을 범할 경우  파가 날 정도로 매질을 당했고

심지어는 머리를 기둥에 치기까지 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라고 표현을 했는데
오랫동안 아동폭행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노비가 주인에게 위해를 가한 경우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살해한 경우에는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했다.
괴실로 주인을 죽게 한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했고

고의로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곤장 100대를 치고 유배형에 처했다.

주인의 집안어른에게 폭행. 상해. 살인을 가해도 웬만하면 사형에 처했다.

노비가 주인을 꾸짓거나 욕을 한 경우에도
‘주인모독죄’라고 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이뿐만 아니다.

노비에게는 고소권 제약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주인이 역모죄.반역죄를 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었다.

만약 노비의 배우자가 남편을 위해 고발을 할 경우 곤장 100대와 유배형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자식은 어버이를 고소하지 못한다(반역.역모죄 예외)」는

대명률에 의거 조선의 경국대전은 노비와 주인관계에도 적용한 것이다.

국가는 양인이 돈이 있어야 세금을 받을 수 있고

노비주인은 노비를 마음대로 다스려야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국가와 노비주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영의정 홍언필 부인 여산 송씨~~~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유명 여류인사’명단에  등록된 여인은 한국여인은 신사임당도 아니고

유일무이하게 조선시대 홍언필 영의정 부인 여산 송씨다

그녀는
중종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송일의 딸이요 남편 홍언필(洪彦弼)은 대사헌에만 여섯 차례나 제수되었고,

이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높은 벼슬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한 인물이다
아들 홈섬 역시 청백리. 영의정이었다.

그녀는 94세 까지 장수했다.
그런 그녀에게 잘 아려지지 않은 엽기적인 사건,  반전이 이어진다

 

 

<조선의 노비산책>>> 160회

노비와 관련된 그녀의 엽기적인 사건 2가지를 소개한다

중종 임금 때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렀다가 석방된 후에 삼정승을 두루 지낸 인물이 있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이 그 주인공이다. 홍언필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명종실록>

〈홍언필 졸기〉에서는
“인품이 겸손하고 청렴하여 일상생활이 매우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마음속으로 항상 화를 두려워하여 바른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두 가지 평가를 종합하면,

그는 신중하지만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그와 반대였다.

그의 부인은 중종 때 명재상인 송질(宋軼)의 딸로,
왈가닥인 데다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홍언필이 송씨와 결혼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송씨는 처녀 때부터 엽기적인 행각으로 유명했다.

처녀 시절, 송씨의 마을에 질투가 심한 부인이 살고 있었다.

질투에 질린 남편은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온 동네에 보여주었다.

투기가 심한 여인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가락 얘기를 들은 송씨는
여종에게 그 손가락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여종이 손가락을 가져오자 상 위에 올려놓은 뒤 술을 붓고는 “그대는 여자로서 죽어도 마땅하니, 내 어찌 조문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 사이에서 송씨는 결혼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홍언필이 결혼을 결심한 것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 여자는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결혼을 한 홍언필이었지만 혼례를 치른 다음 날 짐을 싸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식을 치룬 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년 정도 살다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 풍속이었는데

신랑이 첫날밤만 보내고 짐을 싼 데는 까닭이 있었다.

혼례식을 치룬 홍언필은 어떻게 하면 신부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신부와 단둘이 있는 방 안에서도 그런 고민에 빠졌다.

마침, 예쁜 여자 노비가 술상을 들고 신혼 방에 들어왔다.

홍언필은 일부러 여종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는 척했다.

부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다음, 태도에 따라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부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1회

아니 오히려 그녀는 못 본체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술을 다 마신 홍언필은 사랑방에 가서 혼자 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부인이 남편을 찾아 사랑방에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피가 떨어지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남편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조금 전에 홍언필이 만지작거렸던 여종의 손가락이었다.

결혼하자마자 별거에 들어간 이 부부는 수년이 지난 뒤 다시 결합했다.

송씨가 부모의 권유로 남편에게 용서를 빈 뒤였다.

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송씨의 엽기 행각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 홍섬(洪暹)이 태어난 지 7년 뒤에

송씨는 <중종실록>)에까지 기록될 만한 범죄행각으로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에게 수없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그것으로 모자라 빗으로 얼굴을 긁기까지 했다.

그렇게 폭행을 당한 여종은 쓰러졌는데 사람들은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여종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여종을 죽도록 때린 송씨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땅에 묻은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송씨 부인에 의해 손가락이 잘린 여종이나 땅속에 묻힌 여종의 사례는 노비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주인이나 양반들이 가하는 사적 형벌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송씨가 남의 집 여종을 죽인 것은 간통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적었다. 문책을 당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손가락이 잘린 여종처럼 별다른 항변도 못 하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주인이 노비의 생명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집안에서 쉬쉬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62회

태조 이성계 때다.

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인 교서감(校書監)에 조직 내 서열 3위이자 정3품인 왕미(王亹)라는 관리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왕미의 집에서 여자 노비 하나가 그의 부인에 의해 살해됐다.

노비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부인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범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사례는 잘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이성을 상실한 부인의 행동 때문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 노비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시신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옆에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사건은 공개되었고

형조는 사법 절차에 착수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적으로 목숨을 잃은 노비의 억울함은 세상에 알려지기 힘들었다.

송씨가 저지른 두 번째 범죄처럼 남의 집 노비에 해를 끼친 경우는 그나마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한 노비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피해자인 노비의 인권이나 가해자의 형사처벌 보다 노비주의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주안점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간대접 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의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 없었다.

노비에 대한 인식의 문제~~

오늘날 기준으로 노비 인권이 아닌 그 시대의 눈높이에서 노비 인권~~

동정 받지 못한 노비의 죽음~~~~

조선 후기의 관료 겸 시인 중에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있다.

영조 때 과거에 급제해서 정조 때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총리급의 거물이었다.

그는 과거 급제 당시부터 훌륭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유영(《금계필담》의 저자)의 아버지는 과거에 갓 급제한 이서구가 영조 임금을 알현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당시 서유영의 아버지는 재상이었다.

서유영의 아버지는

“그가 임금께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했고 행동거지도 신중해서 대단한 그릇”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3회

이서구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가 왕위에 있을 때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사가시인(四家詩人), 즉 4대 시인이란 명성을 얻었다.

이서구는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에게서 문장을 배우고 정조 임금의 총애까지 얻었다.

박지원·홍대용(洪大容)·박제가·이덕무·유득공 같은 실학자들과 인연을 맺은 데에다가 정조의 신임까지 받았으니,

그의 학문적 능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금계필담》에 서유영의 8촌 형이 전하는 이서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유영의 8촌 형은 ‘풍석(楓石)’이란 호를 가졌다는 사실과

판서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이야기의 전달자는 서유영이 아니라 8촌 형이다.

어느 날 오전,

8촌 형의 아버지인 7촌 숙부(서유영의 입장에서)가 이서구의 집을 찾아가서 담소를 나누었다. 숙부는 재상을 지낸 인물이었다.

잠시 후, 대문 옆에 붙은 행랑채에서 갑작스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그 집 노비 A의 목소리였다.

이서구는
수노(首奴)인 B를 불러 “A가 또 술주정을 부리느냐?”며 “벌써 두 번씩이나 용서를 해줬건만”이라면서 탄식했다.

그러더니
“A를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가서 때려죽여라”고 명령했다.

일의 추이가 궁금해진 숙부는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무렵까지 이서구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라 A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해질 무렵이 되자, B가 돌아와 “때려죽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이서구가 “그는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니

장례 절차는 후히 해줘라”고 말했다.

이서구의 말을 듣고 B는 물러났다.

숙부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B가 다시 돌아왔다.

문밖에 형조의 서리가 와 있다는 것이다.

형조판서 채제공(蔡濟恭)이 보낸 아전이었다.

서리는 “관청에 알리지도 않고 매질해서 죽이는 것은 불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결론이 날까? 내일 이어진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서구의 말을 듣고 형조 서리는 두말도 않고 돌아갔다.

“그 자는 우리 집 사노(私奴)인데, 윤리를 어지럽히는 죄를 지었네.

만약 관청에 신고하게 되면, 입에 담기가 몹시 수치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사사로이 죽인 것이네~~~~“

 

 

<조선의 노비산책>>> 164회

민담의 편찬자들은
그 시대의 정의 관념에 따라 세상 이야기들에 평을 달았다.

《금계필담》에도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정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이서구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자.

이 문제를 둘러싼 그 시절의 정의 관념을 이해할 수 있다.

《금계필담》 이서구 편의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런 점을 볼 때, 이서구는 나이 젊은 명사로서 일처리가 엄정하면서도 번거롭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니,
이 어찌 원대한 그릇이 아니겠는가? 」

선친(서유영의 7촌 숙부)께서는 손님들을 대할 때마다 이것을 말씀하시곤 했다.

노비를 죽인 뒤에, 번거롭다는 이유로
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이서구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에게 높은 평가를 내린 인물이 이 이야기에 다섯 명이나 나타난다.

우선, 이서구의 행동을 직접 목격한 7촌 숙부가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자기 집에 손님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 일을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숙부는 자기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범한 노비를 죽인 뒤 노비주의 위세를 부리면서 당당하게 관청에 신고할 수 있는데도

그런 번거로움이 싫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한 이서구의 행동이 아주 장한 일로 생각됐던 것이다.

게다가 ‘젊은 친구’가 어쩜 그렇게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냥 ‘물건’이 폐기처분됐을 뿐이다.

못 쓰게 된 ‘물건’을 조용히 잘 처리한 이서구의 행동이 그저 장할 뿐이었다.

7촌 숙부의 이야기를 전달한 8촌 형 역시 자기 아버지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랬으니까, 서유영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다.

서유영 또한 공감했기에 《금계필담》에 이서구의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이서구의 행동에 공감한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된다.

 

 

<조선의 노비산책>>> 165회

형조판서 채제공도 마찬가지였다.
채제공은 정조 임금 당시 유명한 정승이며 정조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다.

수구문 밖의 노비 시신 때문에 이서구에게 형조 서리를 파견한 채제공은 서리로부터 이서구의 말을 전해 듣고 수긍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미천한 노비라도 주인이 사사로이 죽였다면 큰 사건이다.
만약 채제공이 이서구의 말을 황당하게 여기고 수사를 지시했다면,

7촌 숙부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금계필담》에 소개된 것처럼, 7촌 숙부는 이서구가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저녁까지 그 집에 눌러 앉아 있었다.

채제공도 이서구의 말에 공감을 느꼈기에 별 탈 없이 문제가 마무리된 것이다.

또 채제공의 심부름을 한 서리 역시 이서구의 말에 동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이서구에 관해 우호적인 보고를 했기에 채제공이 사건을 그대로 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들 다섯 명 외에도 이서구의 행동에 공감을 표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7촌 숙부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자기 집 손님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가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방문객들이 이야기에 어느 정도 호응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직 재상을 방문해서 담소를 나눌 정도면 방문객 역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 유추할 때,

당시 조선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 중 상당수가 노비를 죽인 이서구의 행동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이서구의 노비는 주인에게 맞아 죽었지만 동정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을 죽인 주인의 명성을 한껏 고양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노비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물건의 폐기처분으로 생각했다.

그 노비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서구 앞에서 쥐 죽은 듯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서구의 행동을 높게 평가할 때도 잠자코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고 칼질을 당해도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던 노비들의 열악한 법적 지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다.

 

<조선의 노비산책>>> 166회

여종의 사랑을 막은 김대섭~~

16세기에 덕개(德介)라는 여자 노비가 살았다.

그녀는 김대섭(金大涉, 1549~94)이란 이의 사노비로 외거노비였다.

김대섭은 경상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종2품)를 지낸 김윤종(金胤宗)의 손자로

서른다섯 살에 소과에 합격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대과 응시는 포기했다.

임진왜란 때 자진해서 선조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조지서별제(종6품)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 격무로 사망했다.

덕개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는데 허봉(許篈, 1551~88)이었다.

유명한 문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자 허균(許筠)의 형이었다.

허봉 역시 재주가 탁월했는데

스물세 살 때 선조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기도 했다.

사가독서란 왕이 신하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도록 하는 제도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중에서 우수한 이에게 학문 연구를 위한 휴가를 준 데서 비롯됐다.

허봉이 살았던 16세기에는

국가에서 두모포(=豆毛浦,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세종이 대마도 정벌 출정식을 했던 곳)에

동호당(東湖堂)이란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했다.

지금도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혹은 독서당길이라 한다.

허봉은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당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활약했던 것이다.

서른네 살 때는 서인의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함경도로 유배되기도 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덕개와 허봉이 처음 만난 것은, 허봉이 함경도에 귀양 갔다 돌아온 직후인 1585년 무렵이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금세 활활 타올랐다.

명망이 높은 관료인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두 남녀를 두고 풍마(風馬)라고 놀릴 정도였다.

풍마란 발정 난 암말과 수말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들의 열애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덕개는 허봉이 아니라 김대섭의 노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덕개의 혼인은 주인인 김대섭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김대섭의 의사가 이들의 사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봉이 일반 평민이었다면,
김대섭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 거기서 생긴 자식은 어머니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주인으로서는 자기 노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덕개가 허봉과 혼인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복잡해진다.

허봉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김대섭이 덕개의 아이를 데려가기가 힘들 수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7회

당시 허봉은 동인당의 선봉장으로 요즘 말로 하면
집권당 원내대표 정도의 인물이었다.

김대섭은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아직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봉을 상대로 덕개의 아이를 빼앗아올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허봉이 아이를 순순히 내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녹록하지 않은 싸움을 각오해야 했다.

법적으로는
아이를 빼앗아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대섭으로서는 덕개와 허봉의 만남을 방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책이었다.

물론 허봉의 입장에서 덕개의 주인인 김대섭의 반대는 덕개 부모의 반대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런 우려는 그대로 현실화 되었다.

허봉은 말을 보내 덕개를 자기 집에 데려가려 했다.

첩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덕개가 노비주와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였다면
허봉이 함부로 말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김대섭이 제지에 나섰고
그 결과 덕개는 그대로 집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덕개와 허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노비 자신의 의지나 판단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주인의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에 주인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노비는 신분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존재였기 때문에,

결혼문제에서도 제약을 많이 받았다.

경제력이나 지위가 높아진 노비들은 그렇지 않은 노비들에 비해 제약을 덜 받았겠지만,

이들 역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경제력이나 지위를 보유한 배우자를 고르려면, 아무래도 노비라는 신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68회

노비 입장에서 가장 편한 선택은 같은 주인을 둔 이성을 고르는 것이었겠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같은 주인 밑에 있다고 해서 연정이 무조건 생길 리는 없었다.

노비의 결혼에 가해진 제약을 이것저것 논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노비의 결혼에 관한 법적 제약만 살펴보기로 하자.

법에서 제약을 둔 결혼 형태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이다.

이런 경우의 일차적 동기는
노비 숫자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녀의 신분은 원칙상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으므로,

이런 결혼을 인정할 경우
자식은 모두 양인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노비의 숫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 양인 남자들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양인 여자를 노비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기도 작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관련 규정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을 방조한 노비주나 가장을 처벌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런 형태의 결혼을 금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법제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 7월 27일(1401. 9. 5.)에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 금지를 분명히 하고, 이를 위반한 남녀는 강제로 이혼시키도록 했다.

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혼을 시키기로 했으니 고려시대에 비해 한층 더 엄해졌다고 볼 수 있다.

태종 6년 1월 1일(1406. 1. 20.)부터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결혼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모두 공노비로 만들었다.

단, 예외 규정이 있었다.

남자 노비가 사노비일 경우,

이 규정이 노비주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주게 된다.
그래서 남자 노비의 주인이 이 사실을 몰랐을 경우,

남자 노비는 그대로 사노비로 두도록 했다.

이 규정은 노비주들이 자신의 노비가 양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69회

태종 13년 9월 1일(1413. 9. 25.)에는
태종 6년 조치에 비해 다소 완화된 규정이 나왔다.

남자 노비와 혼인한 여자 양인이 공노비가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강제 이혼을 당하는 것과
남자 노비 및 그들의 자녀를 공노비로 만드는 조치는 여전했다.

여자 양인의 신분만 보호한 것이다.

이 조치는 태종 6년 1월 1일에 언급한 법령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자 노비의 경우에는
노비주가 결혼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공노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면서

여자 양인만 공노비가 되도록 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 양인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단종 2년 5월 8일(1454. 6. 3.)에는
남자 사노비가 여자 양인과 혼인하면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귀속시켰다.

남자 사노비는 종전대로 공노비가 되도록 했다.

물론 주인이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에는 예외였다.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주도록 한 것은
노비주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조치였다.

신랑인 남자 사노비를 국가가 데려가는 대신,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줌으로써 노비주의 손해가 최소화되도록 한 것이다.

한편, 남자 공노비와 여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에 취해진 조치는 태종 13년 9월 1일의 것과 똑같았다.

이때까지 발포된 법령들이 <경국대전> 〈형전〉에 통합적으로 규정되었다.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이 혼인하면 이들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동시에 남자 노비를 공노비로 만들었다.

단, 남자 노비가 사노비이고 노비주가 자기 노비의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만은 신랑을 공노비로 만들지 않았다.

여자 양인은 그대로 양인 신분을 보유했다.

자녀의 법적 처리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뉘었다.

남자 노비가 공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공노비로 만들고, 남자 노비가 사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사노비로 만들었다.

산속에서 숨어 살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결혼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노비는 노비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법을 위반한 혼인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법에 그런 규정이 있었고 법에서 엄단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70회


노비 자녀들의 운명~~

세종 때 김무(金務)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죽기 전에 225명의 노비를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통계표에 의하면 따르면, 세종 11년인 1429년의 추정인구는 6,435,000명이다.
인구수를 참고하면 225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김무 집안의 노비 자녀들이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가 김무가 남긴 분재기(分財記:재산상속문서)에 남아 있다.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있는 〈김무 도허여문기(金務都許與文記)〉란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 역시 한문뿐 아니라 이두로도 작성되었다. 이 분재기는 세종 11년인 1429년에 김무가 자손들에게 상속한 노비들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니
이를 해설한 문서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가. 장남인 고(故) 서령(署令) 탄지(坦之)의 몫
나.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
다. 女노비 범장의 소생인 女노비 반이, 나이 마흔 살
라. 같은 여노비 반이의 소생인 남노비 묘동, 나이 여덟 살
마. 다음 소생인 男노비 작연, 나이 여섯 살
바. 다음 소생인 女노비 작덕, 나이 두 살
사. 죽은 男노비 백동과 양인 아내가 낳은 자식인 女노비 막장, 나이 열두 살
아. 죽은 女노비 석이의 소생인 男노비 조송, 나이 열 살
자. 女노비 가질가의 소생인 男노비 금록, 나이 스물다섯 살
차. 죽은 男노비 한문과 양인 아내인 복수 사이의 소생인 女노비 나화이, 나이 미상
카. 같은 女노비인 나화이의 소생인 男노비 성춘, 나이 두 살

각 행의 항목 표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거라고 한다.
여기에는 김무의 장남인 김탄지에게 배당된 노비들의 신상명세서가 제시되었다.

‘서령’이란 관직을 가리킨다. 명칭이 ‘서(署)’로 끝나는 관청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고(故)’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탄지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면, 김탄지의 아내와 자손들에게 배당된 노비들에 대한 내용이다.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이라는 표현은 김무가 자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들임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노비 문서에는 노비주가 어떤 경로를 통해 노비를 취득했는지를 반드시 표시했다.

이 문서에서처럼 아버지에게 받은 것인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인지 등등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김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에서 김탄지에게 물려준 노비는 훨씬 더 많다.

여기 소개된 글은 저자가 일부만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김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외에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 일부도 김탄지에게 배당(?)했다.

위에 적힌 노비 아홉 명을 보면,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분재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여노비인 범장, 반이, 석이, 가질가, 나화이의 남편이 누구인지 표시되지 않았다. 이는 여노비의 경우에는 남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노비 본인에게는 자기 남편이 누구인지 중요했겠지만, 적어도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노비가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졌든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는 무조건 주인의 소유의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71회


어제 소개한
‘라’항에서 ‘바’ 항까지를 자세히 음미해보자.

이 부분은 여노비 반이의 자녀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이름이 어째 좀 이상하다.

라) 같은 여노비 반이의 소생인 남노비 묘동, 나이 여덟 살
마) 다음 소생인 남노비 작연, 나이 여섯 살
바) 다음 소생인 여노비 작덕, 나이 두 살

묘동, 작연, 작덕이다. 둘째와 셋째는 ‘작’ 자 돌림이다. 이들의 성별은 다르다.

둘째 작연은 남자아이고, 셋째 작덕은 여자아이다. 그러면서도 남자아이인 첫째의 이름에는 ‘작’ 자가 없다.

이는 당시 여노비들의 성관계 혹은 혼인 실태를 반영한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여노비가 아이를 ‘무조건’ 많이 낳는 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자기 집 여노비가 밖에 나가 남자들을 많이 사귀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노비들 중에는 이 남자 저 남자와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김대섭은 덕개와 허봉의 사랑을 반대했다.

그것은 허봉이 고위층이라서 자칫 덕개는 물론 덕개의 자녀까지도 빼앗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 주인은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늘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된다면

노비주로서는 여노비의 ‘애정 행각’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여노비가 솔거노비인 경우는
노비주가 배후에서 이런 조종을 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노비의 출산에 대한 노비주들의 반응은 ‘환영’이었다.

여노비 반이가 낳은 자녀들의 이름에서 좀 이상한 느낌이 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반이의 세 자녀 중에서 작연과 작덕만 돌림자를 사용한 것은 이들과 묘동의 아버지가 다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반이는 묘동의 친부와 관계를 갖다가 작연과 작덕의 친부와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다.

여노비가 낳은 아이는 무조건 주인의 노비가 되는 시대였기에, 반이가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해서 여러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정행각을 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은 그것이 당연시됐기 때문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세 아이의 친부들이 양인인지 노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양인 중에서도 고위층 양반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양인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낮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72회


‘사’ 항과 ‘차’ 항에는 양인 여성과 결혼한 男노비들에 관한 정보가 나온다.

사) 죽은 남노비 백동과 양인 아내가 낳은 자식인 여노비 막장, 나이 열두 살

아) 죽은 여노비 석이의 소생인 남노비 조송, 나이 열 살

양인 여성과 결혼한 것을 볼 때, 이들은 일반 노비들보다 경제력이 좋았을 가능성이 있다.

외모가 좋았거나 언변이 탁월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제력이 높았으리란 추정이 좀 더 현실적이다.

높은 경제력으로 양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외거노비로서 재산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계에서 태어난 나화이(‘차’ 항)의 나이를 주인집에서 파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남노비 한문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남노비와 여성 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무조건 노비였다.

분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인 경우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서얼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가 고위층 양반이고 과거시험을 준비할 만한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는 신분상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 역시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출처 : 김종성 노비연구(문서해설 편)

노비를 재산으로 소유하고 자식들에게 상속했다.~~

「노비상속」은 어떻게 했나~~

노비 가족은 부부와 미혼의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4~5명 정도의 소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노비주들은 노비가족의 자녀들을 1~2명씩 분할하여

자신의 자녀들에게 형식상 상속함으로써 노비주 일족이 노비 가족을 공동으로 소유, 관리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러한 공동소유, 공동감시를 통해 노비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사노비의 상속에 관한 원칙은 1405년의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 20조’를 기초로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이에 의하면 먼저 노비 상속의 대원칙을 보자

부모가 생전에 분배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자녀의 생사에 관계없이 급여하되, 분배할 노비가 적을 때는 적자녀에게 고루 급여하고

만일 나머지가 있으면 승중자(承重子)에게 우선해 급여하고,

또 나머지가 있으면 장유의 순서로 지급하며

적처의 자녀가 없으면 양첩의 자녀순으로 지급하기로 규정했다.

또, 부모의 노비는 적자녀에게 평분하며 승중자에게는 5분의 1을 더해 주고,

양첩 자녀에게는 7분의 1을, 천첩 자녀에게는 10분의 1을 급여하도록 규정했다.

만약 이 규정에 따라 35구의 노비를 적자녀 3명, 양첩 자녀 1명, 천첩 자녀 1명에게 상속할 경우

적자녀 가운데 승중자에게 12구, 나머지 적자녀 2명에게 각각 10구, 양첩자에게 2구(적자녀가 12구일 경우 2구임.)

천첩자에게 1구가 배당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이 밖에도
① 적자는 없고 적녀가 있을 경우,
② 적자녀가 모두 없는 경우,
③ 자녀가 없는 적모의 경우,
④ 자는 없고 여만 있는 적모의 경우,
⑤ 양첩녀만 있을 경우, 천첩자녀만 있을 경우,
⑥ 의자녀(義子女)의 경우,
⑦ 양자녀(養子女)에 대한 상속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대체로 적 자녀·양첩 자녀·천첩 자녀는 각각 분배에 차등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자녀(子女)의 차등은 없고

다만 승중자와 중자(衆子)의 차등이 있는 것은 후사를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3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의 막내 아들 영웅대군 이염은 1만여명의 노비를  소유(?) 하고 있었다.

성종 25년(1494년)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던 이맹현이  자식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는 무려 757명이다.

그가 청백리에 녹선된 것은 굳이 부패하지 않아도 충분히 부유했기 때문이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한양에 300여명,지방에 수천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이황의 집은 300여명. 윤선도 집안은 700여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권벌도 317명의 노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노비를 부리는 양반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의 관점,
즉 노비의 관점으로 보면 이 많은 숫자의 노비는 그 존재 자체로 사회 불안 요소였다.

노비는 크게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나뉘는데, 사노비의 처지가 훨씬 열악했다.

노비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재산처럼 거래되는 것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 자자손손 천인(賤人)이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모의 신분이 서로 다를 경우 그 자식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도 문제였다.

양인과 천인이 혼인하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의 경우 자식들은 누구의 신분을 따라야 하는가.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모법(從母法) 또는 수모법(隨母法)이라고 하고,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했다.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돼 있었다.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개국 이래 종모법을 실시했다.

종부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로써 종부법은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제정된 법임이 명백해졌다.

이때 세종이 ‘조정의 성헌(成憲)은 고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면 이후 조선 역사는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선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세종은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모법으로 환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법과 여성에 주목하여

‘정의의 감정들’ 펴낸 김지수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조선시대엔 여성 노비도 땅 지키려 맞고소했다」

“소인이 세상에서 당한 원통한 사정을 감히 아룁니다. (........…) 부디 이 과부를 도우셔서 제 땅을 빼앗으려는 승운의 못된 계략을 멈춰주시고,

제게 한 거짓 고소를 거둬주신다면
제가 원(寃)을 덜 수 있을 겁니다.”

경오년 2월, ‘말금’이란 이름의 여종이 고을 수령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지(所志·청원이 있을 때 관아에 내는 소장)를 제출했다.

말금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았지만 남편의 친족 ‘승운’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자 맞고소를 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74회 


수령은 조사를 진행했고  결국 말금은 땅을 되찾았다.

조선시대는 노비제와 남녀차별이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말금처럼 계급의 가장 말단에 있는 여성 노비 역시 소송 권한을 갖고 있었다.

노비부터 양반까지 조선시대 여성들이 신분과 관계없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고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지수 조지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는

<정의의 감정들>에서 조선시대 여성들이 국가에 낸 소장(訴狀) 600여건을 분석해 당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법적 주체로 권리를 행사했음을 밝혔다.

특히 김지수 조지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의 책 <정의의 감정들>에서는

18세기, 19세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여성 노비 말금이 죽은 남편의 토지를 빼앗은 남편의 친족을 관아에 고소해 남편의 땅을 되찾는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국가의 법 체계를 이용해 재산권을 행사한 여성 노비도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엄격한 계급사회였지만 노비는 자신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양반이나 평민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김 교수는  백성의 ‘원(寃)’, 즉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조선시대 법 담론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을 국가와 군주의 도리로 여겼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조선사회가 억울한 감정을 중시한 것은 민본사상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회의 영향”이라며

“백성이 나라의 근간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중시했고,

1401년 신문고를 도입해 왕이 백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통로를 제도화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법적 공간에서는

하층계급이 소원(訴寃)의 법적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양반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동시대 중국 또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조선은 젠더와 신분제 차별 속에서도 모든 백성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고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법적 통로가 존재했다”며

“천민 신분인 기생의 자식이 억울하게 관에서 고문을 당해 죽으면 그 수령을 관찰사 또는 왕에게 고발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조선은 남녀와 신분 차별이 뚜렷했지만, 본인의 젠더 또는 신분 내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됐습니다.

만일 침해를 당했다면,

여성이든 천민 출신이든 남편 또는 주인만 아니면 타인을 상대로 본인의 법적 능력을 행사해 소를 제기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성별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감정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통함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중요했습니다.”」

이는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는 등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백성의 ‘원’을 풀어줌으로써 반란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국가의 본질적 관심사는 평민과 노비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그들이 신분질서에 도전하는지를 감시하고, 그 경계를 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5회


다만 김 교수는

“전근대 시기 국가와 민(民)이 끊임없이 억울함을 소통할 수 있는 사법 공간이 존재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라며 “조선 전기에는 불법으로 간주됐던 사건들이 민이 억울함을 호소함에 따라 후기로 가면서 법제화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는 것은 조선 전기에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백성들 요구로 합법화됐다.

18세기 초에는 평민들의 ‘소원’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양반이 양민을 착취해 강제로 노비로 만드는 ‘압량위천’이나, 관아에서 고신(고문)을 남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

사적 영역에서 겪은 고통을 고발해 공적 담론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감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은 임금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데 적극적인 당사자로 등장했다.

동시대 중국이나 유럽에서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통해서만 법정에 설 수 있었던 것과 달랐다.

특히 여성들은 한글로 고소장를 제출해 한문이 지배하는 공적인 문자 영역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를 “여성 송자들은 한글로 글을 쓰는 관행을 통해 조선의 문예문화에서 저속한 대본으로 여겨졌던 한글을 법률문서에서 공식적인 언어로 격상시켰다”고 분석했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한글을 쓸 할 줄 알았다~~~

원칙적으로 노비는 성씨(姓氏)를 가지지 못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창두적각 蒼頭赤脚)
흔히 노비를 창적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된다

경남 진주시 재령 이씨 종가의 고문서 더미에서 확인한 최초의 한글 계(契)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집안 노비와 마을 평민들이 썼다. 부조 내용을 적은 치부와 계원들 이름을 적은 계안이다
‘황강아지, 김뭉치, 김바회, 손삭담이, 김슈벅이, 강돌상, 노막산................’

정겨운 어감의 이 순우리말 이름들은 18세기 경남 진주의 대곡면 마진마을 재령 이씨 집안 노비와 마을 백성들의 이름이다.

이 노비들이 한글로 적은 계(契) 문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마을 백성과 노비들이 한글로 쓴 ‘상계(喪契) 문서’를 다량 찾아냈다.

상계는 상(喪)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서로 돕기 위해 만든 계다.

양반들이 한자로 적은 계 문서는 있지만 노비 등이 한글로 적은 계 문서는 처음이이라고 한다

안 책임연구원은 “노비가 주인의 명령을 받아 쓴 한글 매매계약서 등은 수십 장 남아 있지만

자신들의 일에 관해 주체적으로 쓴 문서를 확인한 것 역시 처음”이라며 “‘어린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의 이상이 실현된 증거”라고 말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6회 

이 문서는 계원 명단을 적은 계안(契案)과 돈의 출납 등을 적은 치부(置簿)로 구성됐다.

18세기 중후반 계안 2책, 19세기 초중반 치부 3책, 19세기 초반 전답 추수기록 3책 등 8책과 낱장 문서 23장 등이다.

상을 당한 사람의 이름과 부조 물품, 시기를 적었고 임원들이 확인 서명을 했는데 거의 모두 한글로 돼 있다.

‘을유 시월 초 칠일 막산의 처상 때에 부조 조 한 섬 곡자 네 개 아울러 전수를 전급한다.’

치부에 쓰인 이 문장에서 ‘조(租)’는 도정하지 않은 벼, ‘곡자(曲子)’는 누룩을 의미한다. 이를 모두 돈으로 환산해 준다는 뜻이다.

안 책임연구원은
“지금까지 전해진 한글 문서는 왕실 여성이나 양반의 편지 등 지배계층의 것이 많아 조선시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천민이 적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며

“하지만 이번 발견으로 천민이 쓴 한글 문서들이 근대를 지나며 적지 않게 유실됐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고 말했다.

계원들이 문서에 성과 이름을 모두 적은 것도 특징이다.

함께 발견된 이씨 가문 분재기(分財記)에 이 집안 소유 노비들은 성 없이 이름만 적혔다.

안 책임연구원은
“분재기에는 양반의 예속민으로 이름만 적혔지만 계원으로 기록할 때는 성을 함께 적어 국가의 공민(公民)이라는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 성씨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성씨와 역사

우리나라 성씨와 역사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 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선물함)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조선의 노비산책>>> 177회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 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78회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상기 문건 등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79회 

노비 매매 와  매매가격~

노비의 매매(買賣)·양여(讓與)·기진(寄進:기부하여 바침) 등의 행위는 고대사회로부터 있어 왔지만,

그에 관한 현존 최고의 문서는 고려 후기의 것이 상한으로 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노비관계 문서로서는 일부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현전하는 노비문서는 매매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7세기 후반 상평통보가 시중에 돌기 시작하면서 노비 매매가 급증한 18세기 초반까지 급증하는 추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거래는 관아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였고
관아에서는 허가를 잘 해주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사고 팔리는 노비의 수가 생각만큼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신하와 임금 관계의 축소판으로 보는 관념 때문에

양반들부터 노비 매매를 천하게 여겨서 정 피치못할 사정이 아니면 잘 하지 않았다.

1687~1690년 노비 5992명 중 사고 팔린 노비의 수는 14명이였다.

<이정수, 김희호, 「조선후기 노비매매(奴婢賣買) 자료를 통해 본 노비(奴婢)의 사회ㆍ경제적 성격과 奴婢>


『경국대전』에는 가옥·토지의 경우와 같이 노비의 매매 뒤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뒤 15일로 정했고,

노비의 매매는
토지나 가옥의 매매와 같이 매매 후 100일 이내에 관(掌隷院 장례원: 노비(奴婢)에 관(關)한 부적(簿籍)과 소송(訴訟) 관계(關係)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 또는 地方官)에 청원해 입안(立案_관의 인증서)을 받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입안 없이 매매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었으나,

토지 매매의 경우보다는 훨씬 엄격히 입안 제도가 준행되고 있었다.

토지나 가옥과는 달리 노비는 생동(生動)하는 재산으로서 출산으로 인한 증가가 있고,

도망할 가능성도 항상 있었다.

그러므로 관의 공증(公證)을 더욱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입안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매매 당사자와 증인·필집(筆執_문서를 쓰는 사람)이 입회한 가운데

매매(買賣)문기(文記)가 작성되면, 매수인(買收人_신청한 사람)이 매매문기를 입안을 신청하는 소지(所志_청원서)에 첨부해 관아에 제출한다.

관에서는 이를 검토해 이상이 없으면 소지의 왼편 아래 여백에 입안을 발급한다는 처분을 내린다.

그리고, 매도인·증인·필집을 불러 매매 사실을 진술받는 초사(招辭_진술서)를 받아 입안을 발급하게 된다.

이 때 소지·문기·초사·입안을 차례로 붙인다.

그리고, 이것을 차례로 붙인 곳과 초사·입안의 여러 군데에 관인을 찍은 뒤

입안을 신청한 사람에게 주면 이로써 노비 매매에 대한 관의 공증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80회 

노비문기에는 연호(年號)를 사용했으며, 그 밑에 매수인의 이름을 썼다.

내용에는 매도 사유, 그 노비의 전래처, 구수(口數: 몇명), 가격 등이 기재되며, 매도인·증인·필집의 성명을 쓰고, 수결(手決)을 하게 된다.

양반집의 노비 매매에는 양반이 직접 매매에 관계하지 않고, 양반에게 위임받은 노(奴 : 代奴·差奴)가 대행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출처 노비문기 [奴婢文記] .고려 조선의 노비제(奴婢制)

「만력 7년 기묘년 6월 7일 유학 신여규 전(前) 명문(약정서)

이 약정서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가장이 상속한 아버지 쪽 공물 수급권을 빈곤한 사정 때문에 처리하는 일이다.

황해도 백천군 금국창 북정관리 거주.
노비 막고와 이사의 사이에서 출생한 노비 막심.

나이는 임오년 생. 이 노비가 후칠을 얻어서 낳은 노비 막동. 나이는 계해년 생.

이들의 몸을 저화 7,000장, 가격으로는 오륙승목 15필에 거래하고

이후의 소생도 함께 영구적으로 매도하오니,

나중에 형제·자녀·친족들이 분쟁을 걸게 되면 이 약정서를 갖고 관청에 고해 사실을 밝힐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노비주: 고(故) 학생 나윤위의 처, 곽씨
증인: 가장의 동성(同姓) 사촌, 나윤원
집필자: 가장의 형, 정로위 나윤적」


노비 매매를 법적으로 완성하려면,

명문(明文) 외에도 노비주의 초사(招辭, 확인서), 증인·집필자의 초사, 소지(所志, 신청서), 입안(立案, 관청의 인증서)이 더 필요했다.

이 문서의 형식인 명문은 지금의 ‘약정서+영수증’에 해당한다.
번역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명문의 작성 주체는 매도인이다.

오늘날의 계약서에는
매도인과 매수인이 함께 서명하지만,

명문은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형식이었다.

어떤 물건을 넘기고 어떤 대가를 받았다는 내용을 써서 넘겨주기 때문에,

매수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명문 작성에 간여하지 않더라도 권리를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중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법률 행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중국어 회화 교본인 <노걸대(老乞大)>에 예시된 ‘말 매도’ 약정서에도 매도인과 중개인의 이름밖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81회 

명문에 따르면, 노비 매매가 발생한 시점은
중국 달력으로 만력 7년 6월 7일인데
이를 서기로
하면 1579년 6월 30일이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3년 전이다.
매도인은 나윤위의 미망인인 곽씨다.

나윤위 앞에 붙은 학생(學生)이란 표현은, 매수인인 신여규 앞에 붙은 유학(幼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유학,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은 학생이라 불렀다.

나윤위와 신여규 모두 양반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선생님’ 같은 존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매매의 대상인 노비는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하는 막심이와 막동이다.

이 점은 이들이 외거노비였음을 증명한다.

근거는 관청의 인증서인 입안에 있다. 입안에 따르면, 곽씨의 거주지는 청주목이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의 본질은, 노비가 주인에게 납부하는 공물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데 있었다.

“이 약정서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 공물 수급권”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가장이 상속한 아버지 쪽 공물 수급권”이란 표현은

막심·막동이의 소유권이 나윤위의 아버지로부터 나윤위에게 이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비 관련 문서에는 매도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노비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적어야 했다.

막심이와 막동이의 프로필을 자세히 살펴보자. 막심이는 임오년에 출생했다.

음력인 임오년에 태어났다면, 출생 연도는 양력으로 1522년이거나 1523년이다.

음력을 기준으로 하면 계약 당시 막심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막동이는 계해년에 태어났다.

1563년이나 1564년에 태어난 것이다.

음력으로 하면, 계약 당시 막동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명문에서도 언급됐다시피, 이들은 부모자식 관계다. 막심이가 마흔두 살에 막동이를 낳은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막심이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다.

막심이는 여성이다.

막심이란 이름 자체가 여성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와 그의 자식인 막동이가 한 집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계약서에 막심이의 자식이 안 나타났다면,

그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계약서에 부모자식이 함께 언급됐다면

그 부모가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노비 계약서에 관한 한, 그 부모가 어머니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노비는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심이는 여성인 것이다.

막심이가 막고에게서 태어났다고 했기 때문에, 막고 역시 여성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82회 


외할머니-어머니-자식의 혈통이 약정서에 나타난 것이다. 막고·막심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막동의 경우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막동이란 이름을 봐서는 남자아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동이라 불린 여자 노비가 다른 계약서에 등장하는 점을 볼 때 막동이란 이름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사용했다.

막고-막심-막동이 똑같이 ‘막’ 자로 시작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노비 3대의 이름이 똑같이 ‘막’ 자로 시작한 것이다. ‘막’ 자가 혹시 성씨는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성씨였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노비 문서에는 노비의 성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노비는 성씨 자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막’ 자는 성씨가 아니라 이름의 첫 글자였던 것이다.

이름에 돌림자를 사용하는 것은 형제간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막고-막심-막동 3대에게 돌림자를 붙였다.

노비주인 나씨 집안에서 그렇게 한 것은,
이름만 갖고도 노비의 혈통을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노비 상호 간의 부모자식 관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개돼지만큼의 취급도 받지 못한 조선시대 노비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참 슬픈 이야기다.

노비가 상전의 재산인 우마(牛馬)와 동일시 했다는 것을 추정 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우마매매한(牛馬賣買限)과 동일한 조항에서 취급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노비 제도가 문란했던 고려 말 우마의 값만도 못해 말 1필의 값이 노비 2, 3구에 해당했으며,

명문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부분은 노비의 몸값이다.

막심·막동은 일괄적으로 저화 7,000장에 매매되었다. 노비의 몸값에 관한 《경국대전》 〈형전〉의 규정은 이렇다.

“나이 열여섯 살 이상 쉰 살 이하면 가격이 저화 4,000장이고, 열다섯 살 이하이거나 쉰한 살 이상이면 저화 3,000장이다.”라고 정해
상등마값 4,000장과 비슷하게 정했다.

이로 볼 때 조선 건국 이후 노비의 가격은 대체로 등귀했다고 하겠다.

막심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따라서 막심이의 몸값은 저화 3,000장이다.

막동이는 열일곱 살이라 했으니 몸값은 저화 4,000장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형전〉의 규정에 따라 7,000장에 일괄 매매되었던 것이다.

그럼, 저화 한 장의 가치는 어떠했을까?

<태종실록>에 따르면, 저화를 최초로 통용시킬 당시인

태종 2년 1월 9일(1402. 2. 10.)에 조정에서는

저화 한 장을 쌀 두 말(20되)과 교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저화는 조정의 생각대로 유통되지 않았고 저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그러자 세조시대에 저화와 쌀의 교환 비율을 조정했다.

저화 한 장을 쌀 한 되와 교환하도록 했다.

태종시대에 비해 저화의 가치가 20분의 1로 하락한 것이다.

세조시대에 정한 이 환율이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경국대전> <호전>에서는 “저화 한 장은 쌀 한 되에 준한다”고 못을 박았다.

 

 

<조선의 노비산책>>> 183회 

이를 근거로 막심과 막동의 몸값을 환산해보자.

막심의 몸값인 저화 3,000장을 쌀로 환산하면 3,000되이니 곧 30석 정도다.

이를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가마니로 환산하면 60가마니쯤 된다.

<심청전>에서 심청은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았다.

막심의 몸값은 심청이의 10분의 1>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홈플러스나 이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서 쌀 20킬로그램(0.25가마니)이 보통 5만 원 안팎에 거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60가마니는 4,800킬로그램이고 4,800킬로그램은 960만 원에서 1,200만 원 사이다.

이것이 막심의 몸값이었다.

한편, 막동의 몸값은 쌀 40석 즉 80가마니다.

막동의 몸값을 요즘의 일반미 가격으로 환산하면 1,280만 원에서 1,600만 원 사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법이 규정한 노비의 ‘가격’이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였다는 점이다.

960~1,200만 원 혹은 1,280~1,600만 원은 그냥 참고 자료로만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쌀 60가마니나 80가마니의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일 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쌀 한 가마니는 오늘날의 쌀 한 가마니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컸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쌀이 훨씬 더 풍부할 뿐 아니라

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그래서 똑같은 쌀 한 가마니일지라도 지금보다는 옛날의 가치가 훨씬 더 높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는 조선시대에는 960~1,200만 원 혹은 1,280~1,600만 원보다 훨씬 더 비싸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경국대전>의 노비 몸값은 어디까지나 법률이 정한 공시 가격이었다.

실제의 거래 가격은 달랐을 수도 있다.

막심과 막동을 매매한 당사자들은 관청에 제출하는 서류에만 공시 가격을 적었을 수도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84회 

노비 몸값~~~

노비의 가격은 말의 1/3 수준이었다.
대부분 흉년, 부채 등 생계에 긴급한 경우에 발생하였다.

조선사대 군마보다 하찮았던 노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노비는 짐승과 같이 여겨졌다.

노비는 말하는 집승이었다.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 노비법은 천하에도 없었던 법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까지 그 괴로움을 받게 된다’며 안타까워 했다.


노비는 말하는 짐승이었지만 말보다 가격이 낮았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태조 7년 6월 18일(양력 1398. 7. 31.)이었다.

형조 산하의 노비 담당 부서인 형조도관(장례원의 전신)에서 이성계에게 올리는 보고서 그 값이 나온다.

태조 이성계에게 보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릇 노비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五升布) 150필에 지나지  않은데 말값은 4.5백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요시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급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은 남.여를 구분 할 것 없이 나이 15세에서 40세 까지는 400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0세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 때는 노비 열 명이 말 한마리 값~~~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전시에는 노비 값도 더욱 폭락한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명을 맞 바꿨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 마리 값이 은자 10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1명의 값이 은자 1냥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쟁에 쓰일 큰 말은 가격이 더 높았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 맘대로 사고 팔 수 있는 동산일 뿐 이었다.

재산 상속을 할 경우에는 일일이 노비 숫자를 셈하여 자식들에도 고루 배분했다.

노비 매매를 빙자하여 멀쩡한 양인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소위 인신매매 사건도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85회 

1718년, 숙종 44년,
사헌부가 올린 장계에 나오는 이야기다.

북도는 원래 사람이 많이 살지 않은 지역이어서 노비 값이 남쪽 지방보다 몇 갑절 더 비싸기 때문에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다.

이러다 보니 인신 매매범들이 남쪽 내륙으로 내려와 양인과 떠돌이 공천(公賤).사천(私賤)부류 및 남부 지역의 도망노비나 갈 곳 없는 떠돌이들을 함경도 지방으로 유인하여 데리고 가서 마음대로 매매를 하면서 큰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사헌부는 청하길

도망간 노비는 일일이 찾아서 원래의주인에게 돌려주고 인신매매범들은 조사하여 반드시 잡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노비는 급속이 줄어 들었으나 여전히 주인 맘대로 매매대상이었다.

주인의 심부름꾼 청지기
상전 외출시 수행하는 상노
안방마님 시중을 들며 이야기 상대방인 안잠자기
마님의 몸종인 상지기
밥을 짓는 식모.찬모
바느질 전문 침모등도 처우는 조금씩 달라도 노비는 노비였다.

동학혁명 때는
소 한 마리에 미모의 계집 종 하나를 포함한 다섯명의 노비와 맞바꾸었다.

다만 행랑아범.행랑어멈 등이 시대에 맞춰 생기는데 비록 주인집의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지만 노비처럼 매매는 되지는 않은 노비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동전 40냥 이상으로 거래된 노비는 없었다.

참고로, 상평통보 10文은 1전(錢), 10전은 1냥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거래된 37명 중에는, 40냥 이상에 팔린 노비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중 두 명은 70~80냥 수준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거래된 18명 중에는, 100냥을 넘은 노비가 두 명이나 되었다.

그중 한 명은 575냥이라는 고가에 거래됐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노인보다는 청년이 비싼 값에 거래됐다.

여자 노비의 값이 더 높았던 것은, 여자는 새로운 노비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노비 가운데에는 노동력으로 활용할 노비보다는 첩으로 활용할 노비가 비싼 값에 거래됐다.

특히 보통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된 여자 노비들은 거의 다 첩이었다고 보면 된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를 전체적으로 보면,
151명은 주로 5~20냥에 거래됐다. 이 가격대에 거래된 노비는 모두 100명이다.

일반적인 노비 가격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조선의 노비산책>>> 186회 

경제사 연구자인 전 서울대 이영훈 교수등이  제시한 경상도 경주의 쌀값 추이를 근거로 할 때,
경주에서는 쌀 한 석 즉 두 가마니의 평균 가격이 18세기 전반기에는 1.5냥, 18세기 후반에는 1.8냥, 19세기 전반에는 2.1냥, 19세기 후반에는 5.8냥이었다.

노비들이 보통 5~20냥에 거래됐다는 것은 18세기 전반으로 치면 노비가 쌀 7~27가마니에, 18세기 후반에는 6~22가마니에,
19세기 전반으로 치면 5~19가마니,
19세기 후반에는 2~7가마니에 거래됐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노비의 몸값이 지속적으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노비의 법정 가격은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였다.

그런데 현실적인 노비 시장에서는 훨씬 더 싼 가격에 ‘물건’이 거래됐다.

막심과 막동의 몸값도 매매 명문에 적힌 것보다 낮았다고 보아야 한다.

공시가가 실거래가보다 훨씬 더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 정부가 일부러 노비의 법정 가격을 시장 가격보다 높게 설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 정부가 노비 매매를 신고제로 운영한 것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노비를 매매할 때는 관청에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 없이 매매할 경우에는 노비와 거래 대금을 모두 몰수했다.

이렇게 신고제로 노비 매매를 운영함과 동시에 실거래가보다 훨씬 높게 노비의 법정 가격을 정한 것은, 조선 정부가 기본적으로 노비 매매를 제한하는 기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노비를 한 곳에 묶어두는 것이 경제 성장에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토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토지 경작자가 자주 바뀌는 것은 경제적으로 이롭지 않다.

이것은 농업경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다. 실질적인 토지 경작자인 노비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기보다는 같은 토지를 오래도록 개간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이로웠던 것이라는 거다

그러자면 노비를 한 주인에게 묶어두는 편이 나았을 것이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노비 매매를 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노비에 대한 조선 건국세력의 우호적 관점도 그들로 하여금 노비 매매를 억제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의 몸값을 높이 설정하면 그들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일이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본다.

어떤 의도에서였든지 간에 정부에서는 노비 몸값을 높이 잡았지만, 현실적으로 노비는 그런 값에 거래되지는 않았다.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일반적인 노비들은 쌀 2~27가마니에 거래되었다. 노비제도가 공식 폐지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에는 쌀 두 가마니에 거래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노비 몸값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87회 

노비의 면천. 속량(贖良)

노비들의 평생 소원은 면천이었다.
(贖良)이란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노비와 상전의 구별을 마치 땅과 하늘로 비유하던 조선시대
노비들의 면천의 길은 원칙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었다.

변란이나 전쟁은 그들에게 기회였다.


특별한 경우 면천 종량된 예가 있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 때 압록강변에 사군, 두만강변에 육진을 설치하고 실변책(實邊策)으로 남도인의 사민정책(徙民政策: 북방이주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응모하는 양인·향리·노비에게 각각 토관직(土官職)을 제수, 면역·면천 종량의 특혜를 약속했다. 그리고

1467년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해 출전한 관군의 무기와 군량이 부족하자 이의 조달책으로

노비로서 궁시(弓矢:활.화살) 4바리[馱:말등에  실은 짐]를 전진(戰陣)에 운반한 자와 공사노비로서 50석을 납곡한 자는 면천방량(免賤放良)하도록 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진압에 참가한 노비들을 면천시키겠다고 선포했다.

그 결과 무려 1,200여 명의 노비가 반란 진압 후 면천되었다.

이러한 예는 국가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때때로 취한 임시 조처로서 간주되어야 하겠지만,

『경국대전』에는 평상시에도 노비로서 공을 세우면 면천 종량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실제 노비가 모반 사건에 공을 세워 면천 종량된 예, 열녀 또는 효자로서 면천된 예가 있다.

이러한 경우 면천종량된 자가 사노비인 경우

방량으로 인한 재산상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는 그 상전에게 공노비로써 보상했다.

이 밖에도 『경국대전』의 규정에는 양반과 비첩 사이의 소생에 대해 일정한 법적 수속을 거쳐 속량하도록 했다.

즉, 종친 남자와 천인 처첩 사이의 소생 자녀는 아무런 제한 없이 양인이 되었다.

앞서 성종 임금 때 기부금을 많이 내고 면천 했던 노비를 소개한 바 있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이 자신의 즉위에 기여한 노비들을 면천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외의 정변들에서도 노비 출신 공신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렇게 면천이 될 경우

전답과 노비까지 받을 수 있었으므로, 신분 상승을 희망하는 노비들한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었다.

노비가 신분 상승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천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야 했다.

 

 

<조선의 노비산책>>> 188회 

임진왜란 초기에 명나라군은 보급 문제로 큰 곤란을 겪었다.

이 문제는 조선 조정에도 당연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노비들에게까지 손을 벌리기로 했다.

곡식을 헌납하면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조치는 처음에는 공노비들에게만 한정됐다.

하지만 이들의 납속만으로는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사노비들에게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째인 선조 26년 2월 13일(1593. 3. 15.)이었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재정적 곤란에 직면할 때마다 노비들에게 재화를 걷고 그들을 면천했다.

하지만 사노비에게까지 국가가 면천을 시행하는 것에는 당연히 노비주의 반발이 발생했다.

자기 노비가 납속에 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인들도 적지 않았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왜구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명종시대에, 정부에서는 군공을 세우는 노비에게 면천의 특혜를 제공하겠다고 보증했다.

그러자 자기 노비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적인 형벌을 가하는 노비주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기에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자 조정은 대응책을 강구했다. 사헌부에서는 그런 노비주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조선조정에서 노비주들의 피해를 고려한 적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노비주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면천을 시행하곤 했다. 그만큼 다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면천을 약속한 국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사례도 제법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면천을 전제로 노비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일이 끝나면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인조 쿠데타’ 직후의 상황을 들 수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4개월여 뒤인 인조 1년 7월 17일(1623. 8. 12.)이었다.

이날 인조는 광해군 때에 면천된 공노비가 너무 많다면서,

이들의 면천을 취소하고

대신 일정 기간 이들의 의무를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

정치적 목적의 면천도 수시로 단행되었다. 이런 면천은 주로 정변을 계기로 단행되었다.

정변의 승자 쪽이 자신들에게 가담한 노비들을 대거 면천시키곤 했던 것이다.

물론 노비주가 개인적 이유로 노비를 면천시킨 사례도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189회 

조선시대 사례는 아니지만, 노비들을 과감하게 면천시킨 사례로 신라 사다함(斯多含)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사다함 열전〉에 따르면,

사다함은 562년에 대가야를 멸망시킨 공로로 진흥왕으로부터 300명의 노비를 받았다.

이 300명은 가야 유민들이었다. 사다함은 이들을 수용한 뒤에 모두 풀어주었다.

사다함의 사례는 노비주가 자발적으로 은혜를 베푼 경우에 해당하지만,

이와 달리 노비가 주인에게 은혜를 베푼 결과로 면천이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어우야담>에 있는 무사 권가술(權可述)의 이야기가 그런 예에 해당한다.

권가술은 수석(水石)이란 노비와 함께 대형 선박에 탑승했다.

이 배에는 100여 명이 탑승했다.

그런데 바람을 만나 방향을 잃은 선박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익사했고,

권가술과 수석만이 판자 하나에 의지에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 판자가 좁아서 두 사람이 동시에 올라타 있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좀 더 심하게 불자,

수석은 권가술에게 하직을 고하고는 물에 뛰어들었다.

혼자 남은 권가술은 판자에 의지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수석의 부인을 면천시켜 주었다.
수석의 희생이 부인의 면천으로 연결된 것이다.

국가가 면천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을 볼 때,
수석은 사노비인 데 비해 부인은 공노비였을 가능성이 있다.

면천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공문서 조작의 방법으로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한 대형 사건이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형조 서리인 진구(陳球)가 뇌물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양인으로 위조해주다가 발각된 것이다.

노비의 신분 위조를 포함해서 그가 벌인 공문서 조작이 수백 건이나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런 범죄행위가 많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면천을 통해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노비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노비제도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다.

학자들은 노비숫자는 인구의 3분의1 정도로 추정했는데

조선 초기 인구가 500만명 안팍으로 보고 노비숫자는 약 15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그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비를 면천시킬 때는 면천첩이라는 문서를 발급했다.

하지만 임복처럼 조선초기 납속량은 상당히 많이 소요되었는데 명조 때인 1553년에 경상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을 구제 하기 위해 50석에서 100석 정도를 납속하면 공노비에게 면천을 해 주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90회 


16세기 「납속제도」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

납속이란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해 주던 제도다.

전쟁이 장기화 되자

조선정부는 전국에 노비 면천첩을 가진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납속을 받았는데 이때의 납속량은 15석 정도였다.

납속량이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다는 애기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납속은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 진다.

지방에 놀러가는 양반이 노잣돈 대신 노비 면천첩을 가지고 다니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경국대전에도 노비가 면천하여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넣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노비가 모반사건 등에 공을 세울 때,
그리고 열녀나 효자로 이름이 났을 뿐으로 아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인 1745년의 ‘속대전’에서는
당시 세태를 반영하여 납속에 의한 면천을 법으로 규정했다.

법에 의한 노비면천의 가격이 쌀 13석으로 규정했다.
당시의 돈으로는 100냥 수준 이었다.

이때에 이르면 노비들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양인이 될 수 있었다.

선조임금
임진왜란 끝나자 류성룡 대감의 개혁 정책을
헌신짝처럼  버리다~~

특히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북상길에 올랐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의 어가(御駕)가 떠나자 백성들이 난입해서 ‘먼저 장예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다’고 전한다.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형조와 장예원은 모두 노비 문서와 노비에 대한 소송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평소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임금 일행이 도주하자 대궐에 난입해 형조와 장예원에 불을 지른 것이다. 나아가 노비들은 일본군에 적극 가담했다.

선조 25년(1592년) 5월4일 개성까지 도주한 선조는

윤두수에게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물었다
<선조실록> 25년 5월4일>

노비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조선은 망했다는 생각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하려 한 것일까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노비산책>>> 191회 

그래서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은 노비들이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고,

공이 클 경우 양반 벼슬까지 주는 면천법(免賤法)을 제정했던 것이다

1553년(명종 8년) 혹심한 재해를 당한 경상도 지방의 기민을 정부의 힘으로 구제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민간에게 납속할 것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50석 내지 100석을 한도로 국가에 납속한 자에 대해

국가는 사족(士族)에게 관직 제수, 죄인에게 면죄, 공사 노비에게 면천 종량의 은전(?)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례가 있은 뒤 계속되는 재난과 변방의 소요 때문에 진제곡(賑濟穀:백성 구제 목적 곡식)과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납속제는 계속 실시되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납속제 실시는 절정에 도달했다.

임진왜란 중 노비의 인력과 재력을 동원,
수취하기 위해 납속·군공에 의한 공사 노비의 면천 종량이 광범위하게 실시됨에 따라

양인과 천인의 간격은 좁혀지고 구별이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중 신설된 훈련도감은 사족·양인·노비의 세 신분으로 혼합, 구성되었으며,

속오군(束伍軍) 또한 양천혼성군으로 천민의 노비가 실제로 양역인 군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의 도감규식(都監規式)에 따라 시재(試才)에 의해 면천 종량되거나

2대 이상 양역에 종사함으로써 법제에 따라 양인이 되었다.

서울 수복을 위한 명군의 군량 조달책으로 작전 지역내에서 500석을 모속(募粟:군량 모집)·모운(募運: 모집 군량 수송)한 공사 노비에게 상으로 면천, 종량시켰다.

그 뒤 전란이 장기화하자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 모속관(募粟官)을 파견하고 모속 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 모속관들은 공사노비로서 납속한 자에게 지급하기 위해 많은 노비면천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어느 곳에서나 노비들은 모속관에게 납속하고 면천첩을 구득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92회 

1593년에는 납속 사목을 발표하고 모속을 하였는데,

이때의 납속량은 15석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임진왜란 중 공사노비 가운데 이 정도의 재력이 있는 자는 제한없이 면천종량되었다.

공노비.사노비가 일본군의 머리
1급을 베어오면 면천(免賤·천인에서 벗어남)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국왕 호위무사)에 제수하고,
3급이면 허통(許通·벼슬 시키는 것)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하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27년 5월8일)

류성룡이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불길을 밟더라도 전력을 다해 적을 무찔러 열흘도 채 못 가서 적의 수급이 쌓여 경관(京觀·적의 시신을 쌓아놓은 탑)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노비들이 의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은 신분제를 완화시키는 면천법을 제정해 국망(國亡)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전쟁이 끝날 때가 되자

선조와 사대부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면천법을 비롯해 류성룡이 전시에 시행했던 각종 개혁 정책들을 무효로 돌리고

전쟁 전의 사회로 되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 남이공 등이 상소를 올려

“(류성룡이) 국정을 담당한 6~7년 동안에…훈련도감과 체찰군문(?察軍門)에서 속오군(束伍軍·양반과 노비로 편성한 부대)을 만들고…서예(庶?)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라며 류성룡이 전시에 신분제의 틀을 흔들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결국 임진왜란·정유재란이란 7년 전쟁을 진두에서 이끈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포상을 받기는커녕 선조 31년(1598년) 11월19일 파직당했다.

류성룡을 쫓아내고 그가 주도했던 각종 개혁 입법을 폐기시키고, 다시 ‘양반천국, 백성지옥’의 구체제로 돌아갔다.


정유재란이 종결된 지 불과 30년 만에 북방의 만주족이 남침하는 정묘호란(1627년)이 발생했다.

1745년의 『속대전』에는 사노비의 경우 100냥, 즉 쌀 13석의 속전을 지불하면 면천종량할 수 있도록 그 값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노비는 언제든지 노비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에서 사노비뿐만 아니라 공노비의 유지도 어려운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돈은 쌀 160석이 최고였다.

17세기 숙종 때는 최저 10석까지 낮아졌지만 여전히 노비 하나가 25년을 일해야 거둘 수 있는 돈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193회 

불만은 가득한데 무공도 돈도 없는 노비들은 도망을 갔다.

영조 5~8년 3년 사이에 성균관 소속 노비 가운데 달아난 종들이 2500명이었다.
<1732년 9월 2일 ‘승정원일기’>

2500명이 달아난 사실도 놀랍지만, 성균관에 그 많은 노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달아난 천민들은 서북쪽 국경 지대와 남도 섬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다.

숙종 때 신분제 완화와 북벌을 주창했던 백호·윤휴는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감사 윤훤이 성을 지킬 계책을 내자

“군사들이 호패를 풀어서 성 위에 쌓아놓고서 떠들썩하게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고 말했고 군사가 드디어 크게 궤멸하고 윤훤은 달아나서 서로(西路·평안도와 황해도)가 파멸되었습니다”
<숙종실록.숙종 4년 5월11일>

[해설]
감사 윤훤이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자고 말하자 병사들은 거꾸로 서얼·상민·노비라고 써놓은 호패를 성 위에 쌓아놓고 ‘너희들(양반들)이나 나가서 싸우라’고 거부했다는 것이다.
안주성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신분제로 백성을 옭아맸던 나라가 위기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재야사학자인 이덕일의 위 내용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고,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임진왜란이나 호란 때 백성들이 똘똘뭉쳐 일본이나 청에 대항했다고 알기 쉽지만

실상은 다른 것이다.

노비들의 입장에선 양반한테 착취 당하나 타국인들에게 착취 당하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병들은 대부분 양반들이 조직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또 다른 기록들을 실펴보자

심지어 뱃속 태아도 포함하여 노비로 팔려간다.

스스로 가난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양반들은 돈을 받고 노비를 풀어줬다.

1709년(숙종 35년) 양반 박상현은
외사촌에게서 샀던 계집종 애임(愛任)을 ‘긴히 쓸 돈이 필요해’ 숫소 두 마리와 돈 3냥에 속량했다.

애임은 외사촌이 길거리 떠돌던 아이를 주워다 종으로 기른 여자였다.
그 여자를 박상현이 사서 부리다 속량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194회 

1723년 5월 1일에는 김상연이라는 가난한 양반이 계집종 넷을 이내장이라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스물아홉 먹은 이월(二月)이는 ‘임신중(懐孕·회잉)’이라는 문구가 문서에 부기돼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07769 ‘金尙埏奴婢文記’>

1733년(영조 9년) 봄 김씨 성을 가진 주인은 자기네 산소 석물(石物)을 세울 돈이 필요해 사내 종 준석을 50냥을 받고 영원히 속량해주었다.

어제 말한 애임(愛任)을 「숫소 두 마리와 돈 3냥」에 속량한 박상현은

‘본인이 계집종에게 먼저 속량하라고 제안할 정도로’ 돈이 급했다.(전경목, ‘조선후기 노비의 속량과 생존전략’, )

연도 미상인 어느 날 이씨라는 상전은 종 상돌이와 자식들을 속량했다.
가격도 문서에는 없다.

이유는 ‘상돌이의 원통함이 지극하고 나 또한 어기지 못할 명을 따르기 위한 계책으로’였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8046 ‘上典李贖良文記’>

인간이 아닌 삶, 그리고 저항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비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양민이 되었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토지 매매계약서와 노비 매매계약서는 대개 양식이 유사했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7일
박 생원이 자기 노비 임단(任丹)이 가족을 최 생원 집에 팔았다.

식구는 6명이었다. 일괄 가격은 60냥이었다.

그런데 노비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뒤에 태어날 아이들(後所生·후소생)과 임단이 배 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 포함.’
마흔다섯 먹은 여자 임단이는

그렇게 배 속 ‘태(胎)’와 함께 최 생원 집으로 팔려갔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796-2 ‘朴生員宅奴李長生奴婢文記’>

박 생원이 노비 임단 가족을 최 생원에게 판 노비문기.

그때 임단은 임신 중이었는데 문서에는 ‘뱃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도 함께 판다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특이한 사례를 보자.
스스로 양반에서 노비신분을  택한 사람과 조선조정의 방관~~

성리학 윤리를 법제화한 조선 법률체계에서 스스로를 노비로 판 행위를 자매(自賣)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매(自賣)는 불법이었다.

하지만 윤리가 생존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이 조선 조정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모순 해결을 위해 자신들의 존엄을 팔고 생존을 택했다.

흉년, 부모 봉양, 빈곤, 채무 그리고 환곡 등 ~~~~

자매문기(自賣文記)에 나오는 대표적 매매 사유라고 한다.

자매문기에 ‘·비문권婢文券’이라는 표준 계약서 양식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조선의 노비산책>>> 195회 

노비를 두고 윤리와 현실이 충돌할 때, 조선 정부는 명분을 택했다.
예컨대 사례를 보자

‘양구 사람 이만근은 흉년을 맞아 자기 몸을 팔아 부모 봉양 밑천으로 삼았다.

한 달여 만에 그를 산 자가 어질게 여겨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이만근은 굳게 사양하였다.
(1794년 정조18년 7월 16일 ‘일성록’, 김재호, 논문)


정조임금 조정은 스스로를 판 이만근을 효자로 선정하고 그 후손에게 노역을 면제해줬다.

인신매매 사례가 아니었다.

인신매매는 양성화하고 그 몸을 판 사람을 효자로 선정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노비계약서인 ‘자매문기(自賣文記)’ 대부분은 ‘영영방매(永永放賣)’라는 조건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조선에서 원래 토지나 가옥의 매매는 영구적 매매,

즉 매도인의 소유권이 매매로 인하여 매수인에게 영구히 무조건 이전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자금이 생기거나 매도인이 후회한 경우 곧 매매를 취소하고 물리려고 하여 이러한 것의 소송이 빈번하였다.

*참고:영영방매(永永放賣)라는 사자성어는 조선시대에 토지, 노비 등의 거래문서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다시 물릴수 없는 거래

그런데 노비를 자청한 자매(自賣) 노비 본인은

‘단 하루라도 일을 하면 주인에게 속량을 청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렸다.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양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김재호,논문)

“1756년 양민 안낭이(安娘伊)
다섯 냥에 이 몸을 노비로 팔겠나이다”

1624년 인조가 국가 보유 기와와 목재로 정명공주 저택을 신축하려 하자 사간원에서 이리 비판했다.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賣子貼婦·매자첩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
<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해설]
‘자식을 팔고 아내를 저당 잡혔다(賣子貼婦·매자첩부).
전쟁 포로도 아니고 납치해온 이웃마을 개똥이도 아닌,

자기 아들과 아내를 팔아 세금을 메꿨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함해 가족을 팔아 노비(奴婢)가 된 사람들을 자매노비(自賣奴婢)라고 하고 그 계약문서를 자매문기(自賣文記)라고 한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닌가~~

 

 

<조선의 노비산책>>> 197회 


조선 영조 32년인 서기 1756년 봄이 올 무렵이다.

안낭이(安娘伊)라는 여자가 자신을 노비로 팔았다.

문서에 따르면 안씨는 양인 여자(良女·양녀)다.
그런데 ‘죽음의 세월에 살 방도가 없어서’ 스스로 남의 집 노비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늙은 어미를 봉양할 방도가 없었다. 몸값은 ‘다섯 냥’이었다.

그리고 향후 어찌어찌하여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 또한 ‘영영 노비로 판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기에 그녀는 오른손을 종이에 대고 그려서 서명을 대신했다.

김씨 성을 가진 유생이 문서를 작성하고 본인이 서명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21788>

이 문서에서 나오는 ‘글로써 밝힌다(明文)’ ‘이 문서를 관에 제시해 바로잡는다(持此文告官 卞正事)’ 따위 문구는 자매문서 공통으로 보이는 서식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서른 냥 짜리 정일재 가족

「“건륭 51년 12월 22일
최생원 댁 노비 유성 앞에서 문서로 밝힙니다.

흉년을 당해 팔십 노모를 부양할 방도가 없기로, 마흔 먹은 아내와 스무 살짜리 둘째아들 창운,

열여섯 먹은 셋째딸 흥련과 열두 살 먹은 아들 용운,

여덟 살인 다섯째 용재, 세 살 난 창돌이를

각각 다섯 냥씩 그리고 뒤에 태어날 일곱째 아이까지 노비로 영원히 파나이다.“」

정조 10년인 서기 1786년에
정일재라는 사내가 온 가족을 최생원 집에 노비로 팔았다는 기록이다.

이유는

‘흉년에 노모 봉양 불가’. 아내 배 속에 있는 일곱째 아들까지. 문서에는 정일재 본인을 재주(財主), 물건 주인이라고 적었다.

문제가 있으면 관에서 바로잡는다는 문구도 보인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800>

 

<조선의 노비산책>>> 198회

1793년 정월 ~~

아기연이(阿其連伊)라는 양인 여자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흉년(大殺年)에
기근과 역병이 만연해 명을 보전 못 할까 두려워
(飢饉癘疫塡壑迫·기근려역전학박)

본인과 13세 맏아들 용복, 여섯 살 먹은 딸 초래를 25냥에 팔고, 뒤에 낳을 자식들도 모두 영원히 노비로 팔았다.

아기연이의 남편 원차세와 아이들 삼촌 원명순이 증인으로 계약에 참석했다.(규장학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40391)

1822년 박승지 댁에 노비로 들어간 복쇠-복섬 부부 자매문기.

복쇠 부부, 박승지 댁 노비가 되다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서른아홉 먹은 소인 박종숙은 본인과 마흔두 살 먹은 아내 구월이,

서른 살짜리 첩 시월이와 여섯 살짜리 맏아들과 세 살배기 둘째를 노비로 팔겠나이다.”」

건양 원년 11월에 작성한 이 자매문기는

‘첩까지 둔’ 박종숙이라는 사람이 온 가족을 노비 시장에 내놓겠다는 문서다.

문서에는 누구 손인지는 불명인 손바닥 세 개가 그려져 있다.

건양 원년 11월은 1896년 11월이다.

고종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직후 만든 문서다.

증인도 없고 노비로 구매한 사람도 없다.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도광 2년 11월 서른두 살 먹은 복쇠(福釗)는
스물여덟 먹은 자신과 아내 복섬(福譫)이를 박승지 댁에 팔았다.

자식은 기록에 없다. 생활고가 이유였다.

이 또한 조건은 ‘영영 노비로 판다’였고
가격은 스물다섯 냥이었다.

문서에는 복쇠 본인 글씨인 듯한 필체로 복쇠와 복섬 이름이 적혀 있고

누군가의 손바닥이 가로로 누워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접수 2972-18’)

도광 2년은 1822년, 순조 22년이다.

한 해 전 조선 팔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흉년이 겹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조 이후 구한말까지 ‘엄청나게 많은’ 자매문서가 박물관과 역사 관련 기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199회 

또 다른 자매(自賣:스스로를 판매)문기다

1900년 재금이라는 여자가
남편 없이 살아가다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윤참판 댁에 500냥에 판다는 자매문기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00년 재금이라는 여자가 남편 없이 살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윤참판 댁에 500냥에 판다는 문서.

영원히 노비가 되더라도 먹고 살기를 바란다는 역설이 숨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좀 더 살펴보자
망국까지 이어진 자매(自賣: 스스로를 매매하다)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4년째인 광무 4년(1900년)
재금(再金)이라는 여자가 열 살 난 딸 간난이(干蘭伊)를 윤 참판 댁에 팔았다.

「“이 작은 계집은 지아비를 잃고 빚이 수백 금이라 부득이 열 살 난 여식 간난이를 오백 냥에 윤 참판 댁에 영원히 팔려 하오니

훗날 족친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오리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79)“」
오늘날 본인의 인감증명서를  첨부한 것이다.

1901년 조봉길은 딸 완례를 윤 참판 댁으로 판다는 문서 이야기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듬해 조봉길이라는 사내는 ‘살길이 없어’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 참판 댁(위에서 언급한 간난이가 팔려간 그 윤 참판과 동일 한 인물인지는 알 수 없음)에
당오전 일천냥에 팔았다.

당오전이니까 200냥이다. 조봉길은 현금 대신 찰벼 다섯 섬, 메벼 네 섬, 추모(秋麰 :
가을에 씨를 뿌려 이듬해 초여름에 거두는 보리.) 한 섬 해서 10석을 받았다.

재금이도,
조봉길도,
자기 딸 간난이와 완례를 ‘영원히’ 노비로 판다고 계약했다.
<규장각학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83>

을사조약 1년 전인 1909년 겨울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팔겠다는 자매문기.
거래는 불발됐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어느 겨울날 최씨 성을 가진 여자가 열 살짜리 자기 딸 간난이를 노비로 팔겠다고 내놓았다.
]
“긴급히 사용하기 위해(緊用次·긴용차)”라 적어놓았으니
급전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녀가 딸에게 매긴 몸값은 362냥53전이었으니, 이게 빚 규모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문서에는 최씨 손바닥만 그려져 있을 뿐 간난이를 사간 사람도 증인도 없다.
거래 불발이다.

최씨가 간난이를 내놓은 때는 망국 1년 전인 대한제국 융희 3년, 1909년 음력 11월 한겨울이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86981>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였을까?
가족 판매에 증인이 됐던 아기연이(阿其連伊) 남편 원차세는 무능한 본인을 탓하며 가족에게 살길을 열어준 건 아닐까?.

출처:<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의 노비산책>>> 200회 


노비제도를 연구한 학자들은

『“조선인들의 상당수는 세습노비로 살았고 이들은 사람 대접을 못 받았으며 가축들 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같은 동양권 아니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도 같은 동족이 동족을 이렇게 세습을 통해서 착취한 예는 거의 없다고 한다”.』고 하면서

「“역사에서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비판해야 한다.”」 는 게 그들의 견해다,

현상금을 노린  노비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국가의 재정이 압박이 가해지자 노비의 신분을 해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노비가 양인이 되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군역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전란이나 반란 때의 공헌.경제력의 상승으로 신분 해방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나 주인의 압박이 심한 경우 노비는 도망으로 신분 해방을 꾀했다.

주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도망가서 신분을 감추고 살다 양인으로 사칭하는 방법이었다.

조선 전기의 추쇄(推刷:도망노비 검거)에 대해 전술했지만 후기에 들어와서  도망노비가 급증했다.
이것은 조선의 노비제도를 붕괴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양반 송태하(오지호)와 노비 언년이(이다해)가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신분과 소유권은 과연 어떻게 될까.?

언년이의 상전이었던 추노꾼 이대길(장혁)이 그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201회 


게장 백반의 묘미는, 게 껍질에 밥을 비벼 먹는 데 있다.

딸려 나오는 각종 반찬보다도 게 껍질과 밥과 장이 함께 만들어내는 묘미가 훨씬 더 감미롭다.

그런데 게장 백반을 먹은 뒤 피해야 할 디저트가 있다.

가을철 과일인 감만큼은 꼭 피해야 한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약학 서적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고 했다. 게와 감은 상극이므로 둘을 함께 섭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얘기다.

이시진이 《본초강목》을 집필한 시점은 16세기다.

그래서 18세기 초반의 조선 사람들은 이런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점은 <영조실록>에 실린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경종(장희빈의 아들) 4년 8월 20일(1724. 9. 26.), 창덕궁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20대 경종에게 바쳐진 수라상에 게장이 있었고
디저트로 생감이 놓인 것이다.

그날 밤부터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운 경종은 결국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서른일곱 살의 젊은 군주가 그렇게 죽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의 게장은 창덕궁 소주방(왕궁 주방)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경종의 라이벌이자 후계자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사저에서 보낸 음식이었다.

경종과 연잉군의 관계는 외형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긴장관계를 갖고 있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張禧嬪)과 연잉군의 어머니인 최숙빈(崔淑嬪)은 둘다  숙종 임금의 후궁으로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장희빈과 최숙빈은 똑같은 궁녀 출신이었다. 그런데 중전이 된 장희빈은 궁녀 최씨가 숙종의 관심을 끌자 최씨를 죽이려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최씨는 확인되지도 않은 장희빈의 비위를 숙종에게 보고하여,

장희빈을 중전에서 끌어내린 데 이어 장희빈이 사약까지 마시도록 만들었다.

어머니끼리 원수지간이었으므로, 경종과 연잉군이 겉으로는 좋았을지라도 속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사이였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경종과 연잉군은 정치적 기반도 달랐다.

당시 중앙 정계는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정치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경종과 연잉군은 각각 소론과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연잉군이 보낸 음식을 먹고 경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연잉군이 즉위했다(1724).

그래서 당시 민간에서는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을 것이란 의혹이 크게 번졌다.

 

 

 

<조선의 노비산책>>> 202회 

영조 때 편찬된 <경종대왕 행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종은 이미 세자 시절부터 국민적 존경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경종의 사망에 의혹의 시선을 보냈으며 영조(당시 연잉군)를 그 배후로 의심했다.

1728년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경종에 대한 동정심과 영조에 대한 의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론이 주도하는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다가 안성·죽산에서 정부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때 반군은 경종의 상여를 앞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경종은 국민적 존경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반군 안에 황진기(黃鎭紀)란 인물이 있었다.

지도부 중에서 이인좌나 박현필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황진기는 끝까지 살아남아 「 ‘도망자 황진기’」의 명성을 날렸다.

조정에서는 그가 국경을 넘어 청나라로 망명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상태에서 황진기의 망령이 조선 조정을 계속 괴롭혔다.

반란이 진압된 지 5년 뒤인 1733년에는

황진기의 여노비가 비정규직 궁녀인 방자가 되어 궁 안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대역죄인의 노비가 궁 안에 있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비정규직 궁녀'란 궁녀 명단에는 없고  온갖 어려운 잡일을  처리하는 무수리를 말하며 잘 가르친 방자(무수리) 한명은 궁녀 열 사람 보다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었다,
임금이 궁녀 뽑을려 해도  맘대로 못하고 절차가 복잡해서
명단에도 없는(출퇴근) 무수리(방자)를 채용했다

한번은,
삼을 캐기 위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영역에 잠입하다 붙들린 범죄자가 황진기 핑계를 댄 사례도 있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함경도민 신준정은 “왜 국경을 넘었느냐?”란 질문에 대해
“역적 황진기를 뒤쫓다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둘러댔다.

이때는 이미 이인좌의 반란이 진압된 지 19년 뒤인 1747년이었다.

이 정도로, 도망자 황진기의 명성은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황진기의 명성」이 한창이던 시절, 한성에 사는 홍씨라는 과부가 사위 세 명을 불러들였다.

앞에서, 노비 1,000명을 거느린 한성 과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안성·이천·예천 등지에 이 집안의 노비들이 살았고,
남편이 죽은 뒤부터 노비관리가 해이해져 노비들이 세공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가 있다.  월요일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의 노비산책>>> 203회 

<어수신화>에 따르면,
홍씨의 사위들은 저마다 특기가 있었다.

한 사위는 머리가 영리하고,
또 다른 사위는 힘이 장사고,
또 다른 한 사위는 문장이 좋았다.

홍씨는 그들에게 예천에 가서 숨은 노비들을 찾아내 공물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사위들에게 추노꾼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숨은 노비들을 수소문하던 홍씨의 사위들은
예천에서 노비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노비들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숨어 있던 노비들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숨어 살던 노비들은 사위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은 산속으로 유인했다.

도망 노비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접근한 듯하다.

노비들은 산속에 들어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곧바로 사위들을 결박하고 산속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끌고 갔다.

인질들을 대들보에 매단 노비들은 칼을 갈며 살해를 준비했다.

세 인질은 하얗게 질렸다.

바로 이때, 글에 능한 사위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갑작스레 너털웃음을 지은 것이다.

나머지 둘은 “지금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웃음이 나와?”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글에 능한 이는
“제가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볼 심산으로 과부 사위 행세를 하며 종적을 감췄습니다만,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됐습니다.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웃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머리가 영리한 사위는 “죽는 거야 어떻게 죽든 매일반이지만,
우리가 형벌을 면하고 처자식의 연좌를 면한 것만도 다행 아닌가?”라고 대꾸했다.

만약 관청에 잡혔으면 가족들까지 연좌제에 걸렸을 것이니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낫다는 말이었다.

 

 

 

<조선의 노비산책>>> 204회 

노비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리한 사위가 글에 능한 사위를 가리키며 “저 자는 바로 망명죄인 황진기”라고 말했다.

자신들은 황진기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노비들은 잠시 밖으로 나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정말로 황진기라면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발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포상금 욕심이 났던 것이다.

잠시 뒤, 건장한 노비 몇 명이 ‘황진기 일당’을 끌고 관청을 향했다.

뒤늦게 산속의 집에 도착한 또 다른 도망노비가 이 사실을 알고 펄쩍 뛰며

“이러다 우리 신분만 들통 나겠다”며 사람들을 보내 황진기 일당을 도로 데려오도록 했다.

뒤쫓아 간 노비들은 관청 앞에 가서야 동료 노비들과 황진기 일당을 발견했다.

이때, 힘이 장사인 사위가 몸을 뒤틀고 용을 쓰더니 결박을 풀고 노비들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노비들은 모두 도주했다.

세 사위는 관아에 들어갔다.

글 잘하는 사위가 자신들이 한성에서 내려오게 된 사연과 황진기 행세를 하게 된 사연을 소상히 적어서 사또에게 바쳤다.

그러자 사또는 신분을 숨기고 살던 노비 일당을 즉각 체포했고 주동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나머지 노비들에게는 밀린 세공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도망 노비들을 찾으러 경상도까지 갔다가 하마터면 칼 맞아 죽을 뻔한 홍씨의 사위들은,

이처럼 황진기의 명성을 빌려 노비들을 추쇄(推刷:도망한 노비를 붙잡아 본래의 주인이나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던 일.)하고 밀린 세공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노비들의 관리감독이 어려운 틈을 타 공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인 홍씨의 땅을 가로채려 했던 예천 노비들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05회 

저항을 택한 노비들의 도망
~~그리고 추노(推奴:도망간 노비 추적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한 김덕령 장군에게는 왜적과의 싸움 외에도 유명한 설화가 하나있다

그는 자신의 장인이 도망간 노비들을 잡으러 갔다가 살해됐다는 사연을 듣고는
신혼 첫날밤 홀로 쇠방망이를 들고 노비들의 은신처로 찾아가 복수를 한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장모에게 가져다줬으니,
'백년손님'이라는 사위가 장가온 첫날부터 큰 선물을 안긴 셈이다.

이렇게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일을 추노(推奴)라고 했다.
KBS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노비는 해야 하는 일의 의무만 있었을 뿐 권리라고는 없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건이나 가축과 같은 재물이었다.

특히 사노비는 공노비와는 달리 그들을 직접 구속하여 통제했기 때문에 신분적 예속이 더 심했다.

사노비는 주인의 소유물로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었고, 국가의 공권력도 노비의 인권까지는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노비가 주인을 구타했을 경우 무조건 참형이었다.

주인의 친족이나 외조부모를 구타한 노비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노비가 과실로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에는 장형 100대, 유형 3000리의 중형에 처해졌다.

비단 주인에 대해서만 열악했던 것이 아니었다.

노비와 평민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법률은 노비에게 일방적으로 가혹하게 적용되었다.

이처럼 열악한 처지였기에 주인이 심하게 수탈하면 노비는 도망을 가거나, 심한 경우 주인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재산이 도망가는 것을 국가건 양반이건 방치하지 않았다.

법전에 ‘노비를 신고한 자는 매 4구(명)에 1구(명)를 상으로 준다’고 규정하였고,
드라마에서처럼 노비를 쫓는 ‘추노’가 생겨났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는 불완전한 관계다.

노비들도 실제로는 생산자이면서도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피착취에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주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의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었다.
그중 하나는 도망이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도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현재의 거주지를 이탈하는 것이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주인과의 연락을 단절하는 것이 있다.

주인과의 소통을 끊음으로써 노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가지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런 형태의 저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급증했다.
대규모 전란과 함께 사회 시스템이 이완되면서 노비의 도망이 급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이 시끄러워져서 노비의 도망이 급증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는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전란으로 토지가 피폐해진 데다가 주인의 착취까지 가중되면서 도망이란 저항 형태를 선택하기가 쉬웠다.

현재의 거주지에 살면서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힘들어질 경우에 이런 저항 형태가 급증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06회 

양대 전란을 계기로 급증한 노비의 도망은

18세기가 되면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도망 노비들을 주변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노비의 도망이 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은,
노비생활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길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도시에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거나, 임금을 받고 농사일을 할 기회가 많아졌을 수도 있다.

그런 대안이 없었다면, 아무리 현실이 힘들더라도 쉽사리 현실로부터 도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도망노비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시나 농촌에서 임금노동자 형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신고하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의 숫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들이 없으면 산업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비들을 색출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고려 때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란 기구에서 도망노비의 추쇄 작업을 벌였고,

조선시대에는 건국 3년 뒤인 1395년에 설립된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동일한 작업을 수행했다.

이런 기구에서 추적한 노비는 공노비였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노비의 도망이 보편화되어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자,
정조 때인 1778년에 국가는 「노비의 추쇄」를 중단했다.

국가가 노비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으니,

노비제도 해체의 조짐이 이미 이때부터 뚜렷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몽인(1559~1623: 전라도 고흥. 선조임금 때 장원급제. )이 경기도 금천현에 살 때였다.

금천현은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광명시와 서울시 금천구·구로구 일원에 있었던 지역이다.

유몽인이 젊었을 때였으니까, 임진왜란 이전의 어느 해 봄이었다.
초봄이라 한강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은 때였지만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행인들이 꽤 많았는데, 빠져 죽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때, 의금부의 노비 한 명이 쌀을 짊어지고 한강을 건넜다.

의금부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부근인 공평동에 있었으니, 의금부에 쌀을 전달하기 위해 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런데 무거운 짐 때문에 그의 발아래가 폭삭 꺼졌다.

다행히 상체는 아직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얼음의 성한 부분에 두 손을 짚고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소리쳤다. “등에 지고 있는 짐을 풀어버리면 살 수 있어!” 그러나 의금부 노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쌀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노비산책>>> 207회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는 “당신, 나보고 이 짐을 버리라는 거요? 이 짐을 버리고 산다면,

살아서 당할 고통이 죽는 것만 못하잖소!”라고 소리쳤다.

노비는 어떻게든 쌀과 함께 얼음 위로 올라오려 했지만

결국 쌀과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조선시대의 쌀은 상당히 고가의 상품이었다.
그 노비는 쌀을 빠뜨렸을 경우 자신이 받게 될 불이익을 두려웠던 것이다.

살기 힘들어 도망을 선택하는 노비들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쌀을 포기하고 자기 몸이라도 건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금부의 노비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비단 이 노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노비들은 괴로울지언정 쉽사리 도망을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7세기 이후에는 노비의 도망이 보편화 되었다지만, 그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노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처지가 불만스러우면서도 도망보다는 안주를 택한 노비들이라고 해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저항 형태 중에 가장 흔한 것은 태업이었다.

일을 게을리하거나 거르는 것이었다.
공물을 납부하지 않는 것, 즉 신공납부 거부도 있다.

이로 인해 18세기 중후반에는
노비주들의 신공 수입이 크게 격감했다.

같은 시기에 도망노비의 추쇄가 금지된 것을 생각하면,

노비에 대한 국가 및 주인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비의 저항 형태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주인을 살해하는 일(殺主)이었다.

15세기 후반인 성종시대부터 이런 현상이 많아졌다.

노비들의 주인 살해는 조선의 법률제도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대명률직해>에 규정은
주인을 폭행한 노비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때리기만 해도 참형을 받았으니,

노비 입장에서는 때릴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살주(殺主)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다가 순조 때 가서야 급감했다.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 때부터 노비에 대한 통제가 크게 이완되다 보니,

노비와 주인이 정면충돌할 기회가 다소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상전을 죽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평소에 충성을 바치던 대상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대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 못지않게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노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하는 동정심이 들 수도 있다.

 

<조선의 노비산책>>> 208회 

명종 때 사노비인 복수(福守)와 충개(蟲介)의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명종실록>에 따르면,

강원도 원주에 원영사(元永思)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외거노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충개란 여노비를 첩으로 삼아 한동안 동거했다.

나중에 그는 후처가 생기자 충개를 내보냈다.

이후 충개는 원영사의 또 다른 노비인 복수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자 원영사는 충개가 타인의 처가 된 데에 앙심을 품고

이들 부부에게 과도한 신공을 부과했다.
이만저만 과도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복수와 충개」가 복수를 결심했을 정도니 말이다.

복수 부부는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했다.

충개는 잘 아는 여인을 원영사 집의 살림 도우미로 소개했다. 이 도우미는 노비는 아니었다. 복수가 도우미에게 부과한 임무는 ‘내응’이었다.

적의 성문을 열기 위해 아군 특수부대를 성 안에 잠입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복수는 결정적 순간을 대비해 동지 몇 명을 구했다.

복수는 노비였지만, 지역 기반이 튼튼했던 모양이다.

좋은 일도 아니고 주인을 죽이는 일에 여러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낸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날, 도우미에게서 원영사가 술에 취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이때다’ 싶었던 복수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원영사의 집에 침투해 임신한 원영사의 부인을 포함한 일가족 다섯 명을 살해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이런 일까지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 수십 건이 기록되어 있다.
1556년(명종 11) 4월 원주 노비 복수(福守)는 주인 원영사 및 그 가족 5명을 죽였는데 뱃속의 아이까지 꺼내 죽였다.

당연히 노비 복수는 극형에 처해졌고 원주의 관리까지 처벌하였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건이다.

조선 제 17대 효종 임금 재위 시절
경상도에
아버지를 죽이고 달아난 노비를  7년간이 추적한 문계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문계달의 아버지는
한명의  반노(叛奴: 상전을 배반.죽인 노비)을 붙잡아 관아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 반노로 부터 문계달의 아버지가 오리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계달은 큰 충격에 큰 슬픔에 잠겼고 곧 관청에 그 반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반노는 곧 석방 되었다,

왜 석방되었을까?

 

 

<조선의 노비산책>>> 209회 

석방이유는 다름 아닌 그 관청 수령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계달은 이런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게 된다.

그는 7년 동안 상복도 벗지  않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그를 추적한다
그러는 사이 문계달의 안타까운 사연이 여러 고을에 전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계달의 안타까움에 동조를 하고 그 반노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된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 반노는 도망만 다녀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는 자신의 동료를 모아 오히려 문계달을 죽이고자 했다.

문계달은 반노를 추적 하던 중 산골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 과거시험을 보러가기 위해 지나가는 선비들이 나타났고
문계달은 그 선비들과 함께 무사했으며

한편  반노는 자기 무리들과 이 산골을 지나가다 문계달과 그 선비들을 보고
그 숫자가 모두가 자신을  붙잡으로 온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무리들은 훝어지기 시작했고

문계달은 선비들과 합세하여

그 반노를 공격했고 그들을 생포하였으며

모두들 관청에 인계하여 뇌물 등 사건전모가  밝혀져 그 반노는 참형에 처해졌고

안타깝게도 문계달 역시 아버지 복수는 했지만 병이 들어 죽는데

그 동안 함께 추적하면서 문계달이 타고 다녔던 말이 3일간 울었다는  이야기가  마을 뿐 아니라 조정에 까지 알려져 <효종실록>에 기록된 것이다. 


숙종 대에는 살주계(殺主契)가 조직되어 조직적으로 주인을 살해하는 사례도 있었다.

주인을 살해하는 풍조는 살주계(殺主契)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조선에는 '주인을 죽이는 노비들의 모임'이 있었다.
일명 살주계(殺主契)다 

 

<조선의 노비산책>>> 210회 

살해된 중신들의 시신에 새겨진 '又(우)'

드라마 <이산>에 소개된  연쇄살인사건이 미궁에 빠졌었다.

살해된 중신들의 시신에 우(又)자를 새겨 넣는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개혁군주 앞에서 목을 뻣뻣이 세우던 노론 중신들도 막상 살인의 위협 앞에서는 다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홍국영의 짓"이라고들 했지만,

홍국영이 구속된 뒤에도 공조참판이 살해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다들 촉각이 곤두선 상태에서

박대수·서장보·강석기 3총사가 진범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린다.

세상에 공개된 연쇄살인의 주역은 알고 보니 살주계(殺主契)라는 조직이었다.

문자 그대로 '주인을 죽이는 노비들의 모임'이었다.

드라마의 배경인 정조 집권 초기로부터 근 100년 전인 숙종 시대에 실제로 살주계라는 조직이 출현한 적이 있었다.

숙종 때인 17세기 후반에는 살주계 몇 개가 수도권 일원에서 적발되었다.

한성 청파와 경기도 광주의 살주계가 <연려실기술>에 소개되어 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숙종 10년(1684) 이후 민심이 크게 동요하면서 각종 계(契)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 와중에 살주계라는 조직도 생겨났다고 한다.

살주계에 참여한 노비들 중에는 남인 실세였던 전 형조·예조·호조판서인 목내선((睦來善,1617~1704년)의 노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주계를 조직한 사실이 발각되자 목래선은 자신의 노비를 잡아 죽였다.

포도청에서 7, 8명을 체포해 보니 이들이 모두 다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장 조직이었던 것이다.

상부상조 정신에 입각한 계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지만 이런 문화가 주인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도 악용되었다.

살주계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서인지,

<연려실기술>에는 양반 특권층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들만 적혀 있다.

적발된 살주계의 내부 문서에 ‘양반을 살육하자’, ‘부녀자를 약탈하자’, ‘재물을 약탈하자’는 내용이 쓰여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우리도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 등의 주장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실제로 이런 주장을 했든 안 했든,

양반 특권층 사이에서 이런 풍문이 퍼진 것은 그만큼 살주계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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