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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계급 재생산을 위한 문학 -발리바르와 마슈레의 이데올로기 형체로서의 문학에 대하여-/고부응.중앙대

1. 다시 부르는 마르크스주의

노동 계급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이후 자본주의 체제에서 내파의 과정으 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관이었다. 그러나 봉건 체제를 채 벗어나지 않은 제정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과 이어 나타난 소련 체제는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난제였다. 1991년의 소련 해체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의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여 주었다. 현재 완성된 전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는 마르 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축복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의 비판(critique; 칸트적 의미에서의 분 석과 평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본격화될 수 있는 조건이 이제 갖추어진 셈이 다. 물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체제를 종식시키는 혁명에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1) .

 

         1) 마르크스의 저서로 가장 잘 알려진 공산당 선언 (엥겔스와 공저)은 노골적으로 노동계급의 혁명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선언이 ‘공산주의자 동맹’(Communist League)의 요청으로 엥겔스 가 쓴 초안을 마르크스가 완성한 것임을 생각하여 보면 마르크스의 일차적 관심이 당시에 이루어 질 노동계급의 체제 전복 혁명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공산당 선언 자체로도 이 저서의 상당 부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기본 모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 등을 다룬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대부분은, 특히 그의 지적 완숙을 보여주는 후기 저작 대부분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과 평가였다. 그의 자본주의 분석과 평가의 결정판인 자본의 부제는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학 비판”이며 그 자본의 각 각을 이루는 1권, 2권 3권의 부제가 “자본의 생산 과정”, “자본의 순환 과정”, “자 본주의 생산의 총 과정”이라고 밝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의 작업은 자본 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본을 읽다보면 기업 경영 전략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작동과 축적 원리를 철 저하게 분석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쓸 당시의 자본주의 체제가 서구 유럽과 이의 하부 체제 인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이제 그 체제는 전 세 계적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생산 양식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쿠바와 북한에서도 조만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제야말로 마르 크스의 비판적 분석 대상이었던 자본주의 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업이 본격화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 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제 거의 힘을 못 쓰고 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직접 다루어 마땅한 대학의 경제학에서 마르크스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본주의의 현실과 무관한 학문, 또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순종하는 학문만이 번창하고 있다. 이 글의 관심사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 다. 문학의 보편성을 옹호하는 부르주아 문학 비평과 달리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 이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역사 사회적 조건에서의 문학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 이라면 자본주의가 완성된 현재가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을 본격화할 수 있는 조 건이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또는 문학 이론) 역시 마르크스주의 일반론과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거의 사 라졌다. 현재 서구 문학이론의 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은 1920년대에서 80년대 정도까지 유지하였던 중요 이론으로서의 위상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진보 진영의 지 적 작업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 학 이론이나 비평의 세계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당시에는 대세를 이루고 있 었다. 2)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에 관련된 논의 자체가 현재에는 거의 없 계급 재생산을 위한 문학 11 어진 상태이다. 3) 이 글은 우선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취하지 못 하고 부르주아적 신비주의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서 이 글의 본령인 에티 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와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가 같이 쓴 이 데올로기 형체4)로서의 문학에 대하여 5)(“On Literature as an Ideological Form”)의 핵심 논지인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으로서의 문학의 기능을 논의한 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취하는 문학 비평가들이 자본주의 체제와 이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문학의 기능에 비판적 관심을 가져야 함을 주장한다.

 

          2) 1987년 6월 항쟁 이후 출판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졌고 그 후 마르크스 저서의 번역, 출판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글과 책이 쏟아져 나왔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관심 이 정점을 이루었던 1990년대에 나온 주목할 만한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 논문으로 바로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는 발리바르와 마슈레의 이데올로기 형체로서의 문학 을 소개하는 강내희 교수의 유물론적 문학이론 모색의 한 예 를 꼽을 수 있다. 필자의 이 글은 강내희 교수의 논의를 계승하면서 보완하고 있다. 계승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문학론, 특히 발 리바르와 마슈레의 유물론적 문학론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보완한다는 것은 강내희 교수의 논문이 유물론적 인식론에 근거해 문학의 대상성을 주로 논의하는 나머지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 계급투쟁으로서의 문학적 실천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강내희, 유물론적 문 학이론 모색의 한 예 , 민족예술 2(1994): 158-69 참고. 이 글은 강내희, 문학의 힘, 문 학의 가치에 재수록되어 있다. 

 

         3)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의 학술정보시스템에서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과 ‘마르크스주의 문 학비평’으로 검색한 결과 2000년 이후에 나온 국내 논문으로는 허상문 교수의 논문 2편(각 각 벤야민과 제임슨을 다룬 논문) 안진수 교수의 논문 1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의 임 무 ), 이도흠 교수의 논문 1편( 기호학과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 ) 정도에 불과하다. 검색 어를 제임슨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로 바꾸면 좀 더 많은 논문을 볼 수 있으나 이런 경우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인 계급이나 자본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검색어를 ‘계급’과 ‘문학’으로 변경하면 한국문학 분야에서 계급을 주제로 한 작품론을 꽤 볼 수 있 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문학 이론을 논의하는 논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물론’으 로 검색하면 영문학 전공자들이 쓴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주창한 문화유물론 관련 논문들을 꽤 볼 수 있고 철학이나 유럽 문학 전공자들이 쓴 마르크스주의 본령에 해당하는 사적유물 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제로 다루는 논문들도 간혹 볼 수 있다.

        4) 이 논문의 제목 “Sur la littérature comme forme idéologique: Quelques hypothèses marxistes” (맥클라우드 등 [Ian McLeod, John Whitehead and Ann Wordsworth]의 영역은 “On Literature as an Ideological Form”)에 있는 ‘forme’(‘form’)은 이 논문의 독일어본을 한국어로 번역한 이성훈 교수의 말과 같이 ‘형식’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하다 (도미니크 르쿠르 외 지음,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5] 참고). 강내희 교수 가 옮긴 ‘형태’도, 자본의 여러 형태 변화를 논의하는 자본의 논지를 생각하여 보면, 적절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forme idéologique’(‘ideological form’)를 이데올로기로 형성된 언어조직체로서의 문학,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형성체로서의 문학을 뜻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형식’이나 ‘형태’보다는 ‘형체’, ‘형성체’, ‘구성체’ 등이 적절해 보인다. 필자는 ‘형체’를 선택하였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기본적 으로 영역본을 참고하고 있지만 필요한 경우 불어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있기도 하다. 

      5) 앞으로 이 논문을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라고 표기한다.

 

     2. 물신이 된 문학

문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질서를 공고 하게 한다는 명제는 대부분의 문학 애호가나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수용하기 어려 운 진술이다. 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애정이 있음을 뜻할 것이고 그 애정의 대상인 문학이 문학 연구자가 기대하지 않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 정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이 현존하는 지배 질서의 재생산 기능 을 수행한다는 주장을 문학을 적대시하는 연구자가, 예를 들어 정치학자가, 한다면 이런 주장 역시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용납하기 어렵다. 그런 주장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외한의 주장에 불과하며 따라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 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으로서의 문학의 기능을 논의하는 발리바르와 마슈레 는 둘 다 기본적으로 철학자이지만 이 둘은 문학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마슈레는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를 쓴 문학 이론가이기도 하다. 또한 발리바르는 문학연구자인 그의 어머 니 르네 발리바르(Renée Balibar)가 쓴 허구 프랑스어(Les français fictifs)에 대한 서문으로 이들의 공동 논문인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를 쓰고 있기에 문학에 적대적인 문외한이 아니다. 발리바르와 마슈레6)는 문학에 대해 의도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문학의 기능을 이들의 공동 논문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셈 이다.

 

          6) 앞으로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의 공동 저자로서의 발리바르와 마슈레를 지칭할 때는 ‘발 리바르-마슈레’란 이름을 쓴다. 

 

문학 애호가나 연구자들이 문학이 현존하는 지배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문학에 대한 이상화, 즉 문 학 작품에 대한 물신숭배(fetishism)적 태도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상품이 “형 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133)이라고 한 다. 상품은 원래 사용가치를 갖는 인간 노동력의 산물이며 따라서 생산자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표시하는 대상물이었지만 이 대상물이 시장에서 (교환)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면 그 상품들 간에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 자체로 자립적인 속성 을 갖는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자체가 갖는 물적 사회적 존재 양식이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규정 하는 상태로 변하여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상품은 신비로운 물신이 되어 실제로 있는 생산자들 간의 사회적 관계, 궁극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을 은폐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이 물신으로 작용하는 방식은 문학에도 적용하여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역사 사회적으로 특정의 시기에 특정의 작가에 의해 특정의 양 식으로 생산되며 또한 특정한 역사 사회적 시기에 소비된다. 문학 작품의 생산 시 기와 소비 시기는 일치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산 양식과 소비 양식 역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문학의 물신적 특성은 문학이 생산과 소비의 관계나 과정 과는 분리되어 문학 작품 자체가 독립적인 고유한 존재 가치를 획득할 때 나타난 다. 물신으로서의 문학은 문학의 고유성으로 포장한 신비의 베일을 쓰게 된다. 물신으로서의 상품의 신비를 벗겨낸 마르크스도 문학의 신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는 사회 발전과 예술의 관계를 말하면서 신화에 바탕을 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가 신화가 없어진 현재에도 읽히는 이유가 그런 서사시에는 인류 의 어린 시절이라는 “영원한 매력”(“eternal charm”)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Grundrisse 111). 현대의 독자들도 호머의 서사시를 읽는 이유가 인류의 어린 시 절의 순수함이라는 영원한 매력을 즐기기 위하여 읽는 지도 따져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을 신비화하는 마르크스의 문학관이다. 마르 크스는 고대 그리스의 예술과 서사시가 현대인에게도 미적 즐거움을 줄뿐 아니라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 현재에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나 전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 설명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호머의 서사시나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같은 고전 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매력을 발산하는 절대적 가치의 보고가 된다.

서사시에서 문학 작품이 주는 즐거움을 독자들이 더 이상 향유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 이나 현대의 독자가 과거의 문학 작품을 읽을 때에서는 사실상 현 시기의 지적 정 서적 구조에 준용하여 그 텍스트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로 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문학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필자의 이 글이 상당한 정도 의존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한 알튀세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서는 문학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 포함시키면서도(143) 그의 예술론이 개진되었다고 알려진 예술에 대하여 (“A Letter on Art”)에서는 “진정한 예술은 이데올로기 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221)라고 한다.

알튀세르는 진정한 예술에 해당하는 발자크나 솔제니친의 소설은 실체를 암시하는 어떤 것을 우리들이 ‘보게’ ‘인식하 게’ 그리고 ‘느끼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스스로 이데올로기 이론을 전개할 때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 포함시켰던 문학을 구원하여 이론(철학)의 반열에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 포함시키는 문학 작품 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그저 그런 일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 에 대하여 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술에 발자크의 소설이 포함되고 또 발자크의 소 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인 (프랑스의) 중고등학교에서 중요한 문학 교재로 자 리매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알튀세르 역시 문학이나 예술을 따로 논의할 때에는 문학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사회 제도 그리고 예술과 관념을 사회 경제적 생산 관계라는 물적 토대의 지배를 받는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축한 마르크스가 예술과 문학에 대해서는 이런 유물론을 적용하지 않고 있음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보강하면서 토대를 이루는 생산관계와 생산력, 상부구조를 이루 는 정치 사회 제도 및 이데올로기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 된다는 이론을 구축하는 알튀세르가 체제의 재생산 과정에서 예술과 문학은 제외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 자신뿐 만 아니라 알튀세르를 비롯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문학과 예술을 논의할 때 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19세기에 형성된 절대적 보편 성으로서의 문학의 출현에 기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현대까지의 언어, 생명, 노동을 탐구하는 인간학(the human sciences) 의 역사를 다루는 말과 사물(The Order of Things)에서 푸코는 18세 기말까지의 언어에 대한 지식은 재현으로서의 언어였지만 19세기 초에 언어의 내 적 구조를 밝히려는 비교문법이 도입되면서 언어에 대한 지식은 재현에 대한 관심 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던 일반문법이 언어 자체 내의 규칙을 연구하는 비교문법 또는 문헌학, 그리고 궁극적으로 언어학이 될 때 언어는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 존 재 의의를 갖는 대상으로 변화한다. 언어 연구는 언어가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 한 연구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연구로 변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 때 역사상 처음으 로 순수 언어, 즉 그 자체의 존재의의를 갖는 언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294). 언어는 수단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이 되면서 언어 이외의 어떤 것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즉 르네상스 시기의 유비(analogy)나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이 아니라, “자율성을 갖는 유기적 구조”가 되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언어가 독립한다는 뜻은 언어가 세계로부터 고립된다는 뜻이다. 언어가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지도 않고 세계를 재현하지도 않을 때 언어의 위상은 사실상 격하 된다. 이런 언어의 격하와 고립에서 언어를 구원해주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푸코는 문학의 출현을 든다(299).

자율적 존재로서의 언어가 가장 이상화된 형태가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적 언어로서의 문학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푸코는 설명한다. 19세기 이전에도 현재 우리가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는 단테의 시와 같은 언어구성체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언어구성체들은 그 자체의 존재 의의를 갖는 문학(Literature)은 아니었다.

19세기에 탄생한 문학은 절 대적인 보편성을 갖는 언어 구성체로서 외부 세계에 대해 진술하지도 않고 외부 세계의 간섭도 배제한 채, 오직 언어 그 자체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푸코의 표현 을 그대로 옮기면, “소리도 없고 묻는 사람도 없이, 오직 자신에 대해서 말고는 아 무런 진술도 하지 않으면서, 하얀 종이 위에 조심스럽게 침묵의 말을 늘어놓는, 그 자체의 광채로 빛을 내는”(300) 대상이 된다.

 

3. 문학의 목적

푸코가 말하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문학의 개념에 부합하는 문학관은 신비평이 나 구조주의 비평에서 말하는 문학이지 현재의 문학 비평에서 상정하고 있는 문학 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문학 작품 자체가 아니라 어떤 다 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문학작품은 목적 문학이나 하류 문학이라고 평가하 는 문학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생각하여 보면 푸코가 말하는 문학은 현재의 대부분의 문학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문학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문학 작품과 그 문학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외부 세계 중 문학 연구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이 문학 작품 자체에 있음을 생각하여 보면 문학 작품이 외부 세계에 어떤 작용을 하는 지에 대한 관심은 상당한 정도 축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 학 작품이 무엇을 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사라져가고 있 을 때 역설적으로 문학 작품이 외부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그만큼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이 현실에 작용하는 효과는 문학 연구자들이 이를 비판적으로 논의하지 않을 때 방해 없이 수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영향이나 효과는 다른 말로 하면 문학의 효용이나 목적이다. 문학 이 목적을 갖는다는 생각 자체를 현대의 문학 비평가들은 싫어하겠지만 세상 만물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갖고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통합적인 학문 체계 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인 4 원인론7)(four causes)을 문학에 적용하여 보면 19세기 이래 문학에 대한 논의는 형상인에 집중되어 있으며 목적인에 대한 관심은 금기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7) 아리스토텔레스의 4 원인론은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재료(질료인), 모양(형상인), 제작자(작용인), 그리고 쓸모(목적인)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이다. 문학 이론의 역사를 모방론, 효용론, 표현론, 존재론의 차례로 설명하였던 애브럼즈(M. H. Abrams)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4 원인론으로 문학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모방론은 재료인, 효용론은 목적인, 표 현론은 작용인, 존재론은 형상인에 대응한다. 애브럼즈가 생각하는 문학론의 역사를 아리스 토텔레스의 방식으로 변환하면 재료인, 목적인, 작용인, 형상인의 순서가 된다. (아리스토텔 레스의 형이상학과 애브럼즈의 거울과 등불(The Mirror and the Lamp) 참고.) 

 

그러나 4 원인론의 관점으로 문학을 본다면 문학 작품을 이루는 모든 양상, 즉 재료인인 문학의 내용, 형상인인 문학의 구조, 작용인인 작가, 목적인인 효용으로써 문학 작품을 설명하여야 한다. 문학론에서 문학 작품의 목적, 즉 효용에 대한 논의를 피해갈 수는 없다. 문학을 목적에 따라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으로 분류하는 방식은 문학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이래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문학비평사의 기원이 되는 플라톤의 문학론은 시인 추방론이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의 문학론(예술론) 은 문학을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으로 나누고 난 다음에 미래의 국가 수호자인 젊 은이들을 유약하게 하고 타락으로 이끄는 문학은 교육과정에서 배제하고 이들에게 신을 경배하게 하고 용맹을 가르치며 옳은 지식을 전달하는 문학은 교육과정에 포 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2권, 3권) 8).

 

       8) 국가 10권에서는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시인이 이상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 다. 2권과 3권의 문학 교육론과 10권의 시인 추방론이 모순되는 듯하지만 10권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철학과 진리와 거리가 먼 재현 예술을 대조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 여 보면 플라톤은 철학의 우월성이 인정되는 한 예술의 교육적 역할을 긍정하고 있다. 10권 에서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내세워) 신과 영웅을 찬양하는 시를 용인한다.

 

플라톤의 관심은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 체제 를 이룩하기 위한 교양 교육으로서의 문학 교육을 위하여 문학 작품이 어떻게 선 별되어야 하는 지에 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 제도에서 좋은 문학 작품이란 이름 으로 불리는 ‘정전’이 문학 교육 과정에 전제되어 있듯이 플라톤이 생각하는 문학 교육 과정은 이상 국가 구성의 이상에 부합하는 문학 작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학론은 ‘시인 추방론’이 아니라 ‘문학 교육론’이라고 불 리는 것이 정당하다. 발리바르-마슈레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문학 교육론이다. 그러나 여기의 문학 교육론은 뒤집혀진 문학 교육론이다. 플라톤의 문학론이 신을 찬양하고 영웅 의 용기를 말하는 문학 작품을 통하여 미래의 지도자인 젊은이들의 인성 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발리바르와 마슈레이는 이 문학론에서 제도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교육이 현실의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는데 이바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들이 말하는 문학론이 효용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효용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인 자본가들과 그 공모자들을 위한 효용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이들이 옹호하는 노동계급에게는 이들 이 말하는 문학은 효용이 아니라 위해이고 현실을 호도하는 미신이다. 발리바르-마슈레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문학 이론 논의의 장에서, 심지 어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 영역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재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에 문학론자들이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 자 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발리바르의 시민권론과 신인종차별론, 그리고 마슈레의 저서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가 마르크스주의 진영 밖에서도 어느 정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가 함 께 쓴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가 외면 받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9)

 

         9) 중요한 문학 이론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글이 포함되는 노튼 이론 및 비평 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Theory and Criticism)에도 이 논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논문을 문학 이론가들이 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기도 하다. 이 논문의 영 역본(“Literature as an Ideological Form: Some Marxist Propositions,” trans. Ian McLeod et al. Oxford Literary Review 3 (1978): 4-12)이 나온 다음 현대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 의 대표 논문으로 이 논문이 문학 이론 선집에—예를 들어 멀런(Francis Mulhern)이 편집 한 현대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Contemporary Marxist Literary Criticism) 또는 로버 트 영(Robert Young)이 편집한 텍스트 매듭풀기: 탈구조주의 선집(Untying the Text: A Post-Structuralist Reader)—종종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한 본격적인 논 의는, 앞에서 언급한 강내희 교수의 논의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는 물론 영어권에서도 찾 아보기 어렵다. 예외적으로 레쉬(Robert Paul Resch)의 알튀세르와 새로 보는 마르크스 주의 사회이론(Althusser and the Renewal of Marxist Social Theory)이 있지만 레쉬 역 시 이 논문의 논점을 지배 언어와 문체의 문제로 설정한다. 레쉬 역시 지배 체제를 유지하 고 재생산하는 문학의 기능에는 별 주목을 하지 않는다. 

 

문학 이론가들이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설정한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의 영향을 받고 나서이다. 문학 이론 선집에 알튀 세르의 이 논문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10)

 

      10) 우선 노튼 문학 이론 및 비평 선집에 이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노튼 선집에 포함되 는 문학론이 너무 다양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리브킨과 라이언(Julie Rivkin and Michael Ryan) 공편의 문학이론 선집(Literary Theory: An Anthology)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 자체를 논의 하지 않는 알튀세르의 이 논문의 논지를 문학에 적용하여 이데올로기 재생산으로 서의 문학론을 구축하고 있는 논문으로는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가 거의 유일함 에도 정작 이 논문은 문학론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이는 알튀세르식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에 대한 착각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문학론자들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여 알튀세르식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을 구축한 이론가로 알튀세르의 제자인 마슈레를 꼽으며 그의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를 알튀세르식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의 백미로 꼽는다.

물론 틀린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는 알튀세르의 이데 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의 이론틀(또는 문제틀, problematic)을 수용한 문학론이 아니다.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는 1966년에 발간되었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는 1969년에 쓰이어서 1970년에 발간되었다. 1966년에 발행된 저서의 내용이 1970년에 발행된 논문의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 또한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의 핵심 논지가 ‘부재 읽기’라는 점을 생각하여 본다면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의 이론틀은 알튀세르의 ‘징후 읽기’(symptomatic reading)이 다. 징후 읽기는 알튀세르가 그의 제자들인 발리바르, 에스타블리, 랑시에르, 마슈 레와 함께 쓴 1965년 간행의 자본 읽기(Reading Capital)에 실려 있는 알튀세 르의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From Capital to Marx’s Philosophy”) 의 핵심 개념이다. 자본 읽기와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가 1년의 발행 기간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마슈레가 알튀세르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고 자본 읽기를 같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마슈레의 기획은 알튀세르의 자본 읽 기의 독법을 문학에 적용해 보려는 것이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마슈레는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에서,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징후 읽기의 독법을 통 하여 휴머니즘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인식론적 단절을 수행하고 이론적 또는 과 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듯이, 문학 작품에 대한 징후 읽기의 독법으로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 또는 부재를 읽음으로써 작가에 못지않게 독 자의 개입으로 생산되는 문학론을 구축하였다.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의 실제 비평에 해당하는 3부의 작품론에서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핵심 논제로 다루어지지만 여기의 이데올로기 역시 알튀세르가 이 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 논의하는 체제의 재생산 기제로서의 이 데올로기와는 거리가 있다. 영어권에서 이데올로기 문학 비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글튼(Terry Eagleton)의 비평과 이데올로기(Criticism and Ideology)에서 논 의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 논의되는 이데올로기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비평과 이데올로기 는 사실 마슈레의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의 영어판이라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정도로 이 두 저서는 문학 텍스트의 구조와 문학 텍스트에 작동하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의 층위 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결국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서 개진한 이데올로 기 이론이 문학 비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식이 문학 이론가들 사이 에 있음에도 막상 이를 구체화한 논의인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를 주목하지 않았 다는 점은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 문학 이론의 구축에 문학 이론가들이 별 관심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의 서두에 말했듯이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면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은 우리 가 읽는 문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회피하여 문학 작품 을 읽거나 문학 작품을 분석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없이 문학 작품을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가 읽는 문학이, 더 나아가 문화물이 사회 경제 적 체제와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만든 신이 인간을 지배 한다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진술과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였기에 인간이 신을 경배한다는 종교적 진술 중 종교적 진술을 택하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경제 사회적 산물이며 동시에 경제 사회적 구조에 작용을 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에서 적용 되어 문학이 지배 체제의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다룬다.

 

4.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개요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르네 발리바르의 허구 프랑스어: 프랑스어 문학의 문체 연구(Les français fictifs: le rapport des styles littéraires au français national)의 서문으로 처음 발행되었다. 허구 프랑스어는 르네 발리바르와 도미 니크 라포르트(Dominique Laporte)가 함께 쓴 민족국가어로서의 프랑스어: 프랑 스 혁명기의 프랑스어에 관한 정치와 실천(Le Français national: Politique et pratiques de la langue nationale sous la Révolution française) 11)의 후속작이다.

 

    11) 이 두 저서의 한국어 번역본이나 영어 번역본이 아직은 없다. 이 두 저서의 내용은 레쉬 (Robert Paul Resch)의 알튀세르와 새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사회 이론을 참고하였다.

 

 르네 발리바르는 이 두 저서를 통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민족국가인 프랑스에서 불어 교육을 통하여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지배하는 양상을 첫째 저서에서는 프랑스 혁명기를 중심으로 둘째 저서에서는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이 두 저서의 내용을 요약 해설하면서도 이를 근거로 마르크수주의 문학 이론을, 특히 마르크스주의 문학 교육론을,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1부인 ‘문학 및 반영 범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들’과 2부인 ‘문학의 심미적 효과 생산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1.1 ‘마 르크스주의 미학은 가능한가’, 1.2 ‘유물론적 반영의 범주’ 1.3 ‘이데올로기 형체로 서의 문학’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2부는 2.1 ‘문학 형성체의 특수한 복합성—이 데올로기적 모순과 언어 충돌’ 2.2 ‘허구와 리얼리즘: 문학에서의 동화(同化) 메카니 즘’, 2.3 ‘이데올로기적 지배 효과로서의 문학의 심미적 효과’로 이루어져 있다.

1.1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가능한가’에서 발리바르-마슈레는 마르크스주의 미 학이나 문학론이 정립되려면 예술성을 따지는 부르주아 미학의 문제틀에서 벗어나 서 계급투쟁을 문제틀로 설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 자체로 이론과 실천의 결합체이듯 마르크스주의 문학론 역시 실천론, 즉 구체적 인 역사 사회적 조건에서 문학이 어떤 실천적 기능을 수행하는 지를 따져야 한다 고 주장한다.

1.2 ‘유물론적 반영의 범주’에서 발리바르-마슈레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이 주장하여 왔던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이라는 관념을 부정한다. 이론과 실천 을 분리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입장에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실천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1.3 ‘이데올로기 형체로서의 문학’에서 발리바르-마슈레는 알튀세르가 이데올 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 설명한 이데올로기 이론을 바탕으로 문학이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수행하기 위한 구성체임을 설명한다. 문학은 국가 사회 구성 원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를 전제로 하면서 일상어와 고급 언어, 피지배 계급을 위한 초급 교육과 지배 계급을 위한 상급 교육, 그리고 일상어를 쓰는 피지 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고급 언어인 문학 언어를 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모순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적 복합체임이 여기에서 설명된다. 

2부인 ‘문학의 심미적 효과 생산 과정’은 이데올로기 형체로서의 문학의 심미 적 효과가 계급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효과임을 설명한다.

2.1 ‘문학 형성체의 특수한 복잡성—이데올로기적 모순과 언어 충돌’에서 발리 바르-마슈레는 일상어와 문학어는 사실상 충돌 관계에 있지만 문학 작품에서는 우 위적 위치를 차지하는 문학 언어의 작용에 의하여 그 충돌은 봉쇄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상어와 문학어로 대표되는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지배 계급의 이데 올로기가 사실상 모순 관계에 있지만 문학 작품에서는 문학 언어의 작용으로 그 이데올로기적 모순이 해소되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고 이들은 설명한다. 2.2 ‘허구와 리얼리즘: 문학에서의 동화 메카니즘’에서 발리바르-마슈레는 문학 작품의 이데올로기적 호명 작용을 설명한다. 문학 작품이 허구라면 그 허구의 뜻은 가짜나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문학 작품의 호명 작용에 의하여 허구 효과가 만 들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허구 효과는 독자의 의 식 세계 내에 진짜로 그런 허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실제 효과이기도 하다. 실제 로 존재하는 새로운 의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허구 효과를 통하여 실제 효과를 생산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2.3 ‘이데올로기적 지배효과로서의 문학의 심미적 효과’에서 발리바르-마슈레 는 문학의 효과가 특정의 사회적 조건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기 위한 이 데올로기적 지배 효과라고 설명한다. 독자가 문학 작품의 독서를 통하여 얻게 되는 심미적 효과란 현실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모순이 문학 작품 내에서 통제 가능 한 이데올로기적 모순으로 변화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가 피지배 이데올로기를 포섭한 결과를 뜻한다. 문학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지속적으로 지배 계급에 종속시키는 계급투쟁의 과정이고 산물이라고 이들은 결론 을 내린다. 12)

 

       12) 모든 요약이 그러듯이 필자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요약은 원본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 키고 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발리바르-마슈레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의 불어 원본, 국역본, 영역본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각각의 언어 본에 대한 서지 사항은 이 글의 끝에 있는 인용문헌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5. 모순 관계로서의 언어, 교육, 문학

위에서 개요로 제시한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의 논지에 동의하는 독자는 많 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필자가 발리바르-마슈레의 논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는 탓도 있겠지만 (이 경우라면 독자가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를 직접 읽어보 시기를 다시 부탁드린다) 더 큰 이유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부르주아 문학 전통과 문학관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물론 이런 독자들은 자신들이 부르주아 문학관이 아니라 보편적 문학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적 문학관이 극복되어야 마르크스주의 문 학론이 정립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 나 이 글의 모든 독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전제할 수는 없기에 마르크스주의 자가 아닌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문학론의 다양성을 위한 글로 읽히기를 기대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할 때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가 계급적 입장에 경도되어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가. 이 글은 우선은 마르크스주의자 를 위한 글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있 다고 필자는 믿고 싶다. 이어지는 논의는 위의 개요에서 제시한 논점 중 문학의 지 배 체제의 재생산 작용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접맥시키면서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문학은 의식의 차원인 상부구조에 속한다. 상부구조가 경제 사회적 토대라는 조건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생각하여 보면 문학이 사회경 제적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며 따라서 사회경제적 존재 조건과 분 리하여 문학을 논의할 수는 없다. 이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틀에 더하여 알 튀세르는 상부구조가 토대라는 조건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부구조 역시 토대의 재생산을 위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그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 설명하고 있다(135). 정치 사회 제도와 믿음 체계로 구성되는 상부 구조 역시 사회경제적 토대에 해당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하여 작동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의 하 나인 상부구조와 토대의 상호 작용, 또는 상호 재생산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에서 문학을 논의할 때도 당연히 수용되어야 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예술을 따로 다루는 글에서는,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예술에 대하여 나 추상 화가 크레모니니 (“Cremonini, Painter of the Abstract”)에서는, 예술을 이데올로기와 분리하여 지식의 세계에 인접한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는 분명하게 문학과 예술을 스포츠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 포함시키고 있다(143). 그는 문학, 예술, 스포츠 등을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고 규정한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 기적 국가 기구 의 원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 재생산에 대하여(On the Reproduction of Capitalism) 13)에서 알튀세르는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 출판과 유통 기구(publishing and distribution apparatus)도 포함시키고 있다. 문학이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이나 스포츠에 비하여 출판 과정이 필수적임을 생각하 여 보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를 이론화 할 때 알튀세르는 분명하 게 문학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임을 명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 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의 핵심 논지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의 역할이 자본주의 체제의 개인들을 이데올로기적 호명 작용(interpellation)을 통하여 자본 주의 체제의 종속적 주체(subject) 14)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13)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는 단행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 재생산에 대하 여를 하나의 논문으로 축약한 것이다.

          14) 너무나 잘 알려져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개념이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서 ‘subject’는 철학에서의 의식의 주체라는 뜻과 정치 체제에서의 통치권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호명 작용에 의하여 형성되는 주체는 자 신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지배 체제가 설정한 틀 안에서 지배자에 종속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서의 문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에 작용하는 방식은 독자의 문학 작품을 읽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독자의 문학 작품 독서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작용이 되며 그 독서 행위의 결과가 자본주의 체제 내의 순종하는 주체로 독자가 변화되는 것이다. 발리바르-마슈레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는 알튀세르가 제시 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서의 문학의 기능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입증하는 논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발리바르-마슈레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서의 문학의 역할을 논의하기 위하여 문학의 역사적 출현을 먼저 거론한다. 15) 이들은 부르주아 시대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도록 특정의 언어적 실천들—언어, 교육 및 문학 (허구) 차원의 언어 실천—의, 결합체로서의 문학이 구축되었음을 먼저 지적한다 (84) 16) . 문학은 피지배 계급을 지배 계급에 종속시키기 위한 기획의 결과물이며 그 기획은 문학 교육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 발리바르-마슈레의 설명이다. 발리바르-마슈레가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실천 형체로서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이용한 역사를 살펴야 한다. 17)

 

       15) 앞에서는 문학의 출현 시기를 푸코의 설명에 따라 19세기라고 하였다. 푸코는 학문의 역 사, 즉 인식소의 변화에 따른 지식 구성의 변화의 관점에서 언어가 지시 대상에서 유리되 면서 문학이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발리바르-마슈레는, 르네 발리바르의 논지를 따 라, 프랑스 혁명 이후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기에 부르주아가 그들이 주도하는 계급투 쟁이 지속되도록 언어 교육 과정에서 문학이 출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론적 틀은 다르지만 푸코와 발리바르-마슈레(사실은 르네 발리바르) 양자가 다 문학의 출현이 19세기 의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16) 19세기에 프랑스에서 문학이 출현하는 과정은 발리바르-마슈레에 앞서 르네 발리바르가 민 족국가어로서의 프랑스어: 프랑스 혁명기의 프랑스어에 관한 정치와 실천에서 밝힌 내용 이다. 발리바르-마슈레가 이 논문에서 하는 일은 르네 발리바르의 역사학적 작업을 마르크 스주의 문학이론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7) 이 설명은 레쉬의 저서를 참고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지 배 계급이 되는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 이전에는 전통적 귀족인 혈통 귀족에 맞서 세력을 키워온 법복 귀족(관료층)이었다. 법복 귀족은 민족주의가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 행정 및 통치 언어로 평민들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공통 표준어로 규정 하고 이를 행정어로 사용함으로써 라틴어를 쓰는 전통적 귀족을 제압하고 평민과 왕권 지배 체제 사이에서 통합적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왔 다. 법복 귀족은 평민들의 언어를 통치 언어로 설정함으로써 ‘민주’적인 정치 체제 를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말’을 하지 ‘글’을 쓰지 않는 평민들에 대해 자본주의 시대의 우월적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이 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는 민 족국가 체제 내에서의 법적 제도적 평등을 평민 계급에게 제공하여야 할 과제, 그 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들이 확보하고 누려왔던 우월적 지배 체제를 유 지하여야 할 과제가 동시에 생긴다. 이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이 통합 교육과정을 만들어 초급 교육 과정에서는 공통의 프랑스어를 학습시키고 상급 과정 에서는 문학 언어를 학습시키는 것이었다. 혁명 이전에는 하층 계급의 학교와 부르 주아 계급의 학교가 따로 있었고 교과 과정 역시 달랐었다. 통합 교육 과정에서는 초급 과정의 프랑스어 교육은 프랑스인 모두가 쓰는 의사전달 목적의 일상 프랑스 어가 되고 상급 과정의 프랑스어 교육은 부르주아 계급 구성원만이 이해하고 또 사용하는 고급 언어, 즉 문학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상급 과정에서 학습하는 문학 어는 일상어를 포함하지만 그 일상어는 문학어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포섭된다. 르네 발리바르에 의하면, 그리고 르네 발리바르의 연구를 수용하는 발리바르마슈레의 입장에서 문학 교육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체제 구 축과 그 체제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이루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다. 문학 교육 과정 에서 문학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차원에서 모순의 결합체이다. 언어의 차원에서 문학은 피지배 계급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상 언어와 지배 계급이 구현하는 언어인 상상 언어(추상적 관념 언어 포함)를 포함한다. 일상 언어 와 상상 언어는 둘 다 피지배 계급의 구성원과 지배 계급의 구성원 모두가 사용하 는 프랑스어(한국에서라면 한국어)에 속한다. 문학이 프랑스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원칙적으로 프랑스어 문학은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초급 교육 과정 이수에 그치는 피지배 계급의 구성원 은, 그리고 초급 교육 과정에서 언어 교육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지시 언 어로서의 일상어에 제한되기 때문에, 상상의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문학에서 일상 언어와 상상 언어는 공존하면서도 동시에 모 순 관계를 이룬다. 또한 일상 언어가 없다면 상상 언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점 때 문에18) 그리고 상상 언어가 지배 계급의 구성원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상상 언어가 일상 언어에 대해 우월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상상 언어는 일상 언어에 대해 우월적 모순 관계를 이룬다.

 

        18) 문학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내연적 의미(connotation)는 1차적 의미인 외연적 의미 (denotation)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문학의 의미는 언어의 2차적 의미, 바 르트(Roland Barthes)식 표현으로는 미신(myth [迷信]—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거짓인 믿음 체계)이다. 알튀세르가 사실이라고 잘못 받아들이는 상상의 관계를 이 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있다면 바르트는 이를 미신(‘신화’[神話]라고 흔히 번역하고 있지만) 이라고 부른다. 바르트가 기본적으로 문학 이론가였음을 생각하면 발리바르-마슈레 역시 바 르트의 기호학적 미신 체계를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재정립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일상 언어 교육이 이루어지는 초급 교육 과정과 상상 언어 교육이 이루어지는 상급 교육 과정은 자본주의의 노동 분업 체제에서 노동력 생산 과정이다. 초급 교 육 과정은 그 자체로 노동력 생산 과정이면서 동시에 상급 교육 과정의 준비 과정 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급 교육 과정과 상급 교육 과정은 교육 과정 전체의 부분을 이루면서 이 두 과정은 계급적 모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상급 교육 과정 이 초급 교육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은 은폐되어 있다. 문학은 실제와 허구를 포함하고 그 둘은 모순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발리바르마슈레가 말하는 실제와 허구의 모순은 문학은 허구이고 그 허구가 문학 외부에 존재하는 역사 사회적 사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한다는 의미에서의 허구와 실제의 대립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문학이 실제를 포함한다는 뜻은 문학 자체가 사회적 실체라는 의미에서의 실제이다. 문학은 역사 사회적으로 특정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역사 사회적 실체이며 그 실체가 독자를 매개로 현실적인 작용을 한다. 문학이 허 구라는 뜻은 언어적 재현체로서의 문학이 실제의 역사 사회적 조건과는 다른 상상 의, 즉 허구적인, 형체라는 뜻이다19) .

 

       19)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실제 존재 조건에 대해 개인들이 갖는 상상적 관계의 재 현”(162)이라고 정의한 것을 염두에 두면 문학의 허구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 올로기가 실제가 아닌 상상적 관계를 표시한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문학은 실 제가 아닌 허구적 형체다. 알튀세르는 또한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주체이면서 동시 에 종속체인)로 호명한다”(170)라고 한다. 사실 발리바르-마슈레의 문학, 이데올로기 형 체 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서 개진한 이데올로 기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전제되어 있다. 필 자는 이 글의 독자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또한 그 허구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적 호명 효과를 실천한다는 의미에서는 다시 실제가 된다. 문학에서 허 구와 실제는 동시에 상호 작용하는 원인이며 결과, 유물론적 표현으로는 생산 조건 이며 생산물이다. 

 

      6. 모순의 해소로서의 문학의 호명 작용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현실을 모순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지 금까지 있어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Communist Manifesto 473)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진술은 사회 구성체가 계급 모순으로 이루어져 왔 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술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체 자체가 모순의 결합물임 을 인식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이 진술에 바로 이어 계급투쟁의 양상이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드러나는, 끊임없는 싸움”(474)이라는 말을 부연함으로써 계급투쟁이 항시적임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역사 과정에서 확인되는 지배계급이 이 기는 투쟁이 진행될 때는 그 투쟁이 숨겨지는 반면 역사적 변혁기나 예외적인 사 건들의 시기에 나타나는 지배계급이 도전받는 투쟁이 진행될 때는 그 투쟁이 드러 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숨겨진 계급투쟁을 드러나게 하여야한다. 마르크 스주의자가 주도하는 사회 혁명이나 노동 쟁의 시기는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 계 급의 도전이 눈에 보이는 상황이며 이때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드러나는 싸움이 된 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즉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평시에는, 모순이 봉합되거나 봉쇄되는 시기이며 이때 계 급투쟁은 숨겨진 싸움이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이런 숨겨진 계급투쟁을 가 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주도하는 계급투쟁은 평화와 화해로 위장되며 이런 평화와 화해의 겉모습을 벗겨내 계급투쟁의 진면목을 가시화시켜야 피지배계 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마슈레가 문학, 이데올로기 형체 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역할이다. 문학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언어, 교육, 그리고 허구의 차원에서 모순의 복합물이다. 문학이 개입하기 이전 단 계, 즉 일상어를 쓰는 피지배계급과 문학어를 쓰는 지배계급은 현실에서 적대적 모 순관계를 이룬다. 이 모순관계는 역사가 진행하는 한(또는 계급이 소멸되는 공산주 의 사회가 오지 않는 한) 현실에서 해소될 수는 없다. 이 현실에서 해소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짜로 해소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적 차원, 교육적 차원, 그리고 허구의 차원에서 모순 관계에 있는 대립 항에 대해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대립 항을 포괄하기 때문에 각각의 모순 관계는 은폐되고 따라서 해소 계급 재생산을 위한 문학 29 되는 것 같이 보이게 한다. 말하자면 언어적 차원에서라면 문학적 언어가 일상 언 어에 대해 우월적 모순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일상 언어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작 용하기 때문에 일상 언어는 문학 언어에 포섭되며 따라서 일상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