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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5·18 소설의 정치미학 연구 -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에 바탕해-/ 양진영.서강대

<목 차>

Ⅰ. 서론

Ⅱ. 봄날의 문학 정치 - 말과 사물의 과잉

Ⅲ.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 허구(fiction)의 정치성

Ⅳ. 결론

 

<국문초록>

이 글은 기존의 역사주의적 고찰과는 다른 접근법을 통해 5·18 문학을 살펴보려 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광주항쟁을 대표하는 두 소설을 대상으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이론화한 용어와 개념을 적용해 보려고 한다. 그의 * 정치미학은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정치적 예술과 미학적 예술 등의 이항대립적 경계 를 넘어서고 있어 5·18문학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유용한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 랑시에르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신비로운 도톨 가죽(La Peau de chagrin) 과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마담 보바리(Madam Bovary)를 읽는 방식에 기대 어 임철우의 봄날과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이하「저기 소리없 이」)를 읽어 볼 것이다. 랑시에르적 사유로 보면봄날은 발자크의 소설에서 보이는 말과 사물의 과잉을 추수(追隨)하는 텍스트이며, 「저기 소리없이」는 플로베르 소설의 문법인 재현의 규범을 거부해 허구(fiction)의 미학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 글쓰기의 한 예이다. 이 두 소설은 랑시에르가 개념화한 말과 사물의 과잉과 허구를 통해 정치를 규호(叫號)하지 않는 정치미학을 담지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능력과 무능력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반 대해 이들이 설정한 감성의 체제를 분할하는 작업을 정치의 본질로 여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규정된 몫 없는 이들이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말하 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다고 본다. 따라서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을 배분하고 재배분하는 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을 형성한다. 랑시에르적 정치 행위는 감성의 분할을 새롭게 구성해 새로운 대상들과 주제들을 공통의 무대에 오르게 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성의 분할은 그 자체로 정치 적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랑시에르는 예술은 기존 체제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역할 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분할의 대표적 양식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정치는 미 학적이고 미학 역시 정치적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적 사유로 보면 정치 적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배경이나 사건이 정치성을 띠고 있지 않은 「저기 소리없 이」와 같은 소설도 문학의 정치를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거나, 소음으로 간주된 말이 담론화하거나, 말과 사물의 과잉이 드러나거나, 허구의 글쓰 기가 실현되거나 등을 꼽고 있다. 이런 네 가지 방식 중 한두 가지가 발견되는 경우 감성의 분할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본고는 봄날에서는 말과 사물의 과잉 을, 「저기 소리없이」에서는 허구의 글쓰기를 각각 고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구체적 으로 보면 Ⅱ장에서는 임철우의 봄날을 대상으로 랑시에르적 사유에 바탕해 그동 안에 소음으로 간주돼 온 발화들이 말로 드러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봄 5·18 소설의 정치미학 연구 43 날에서 주도적으로 표출되는 사회적 하위주체들의 말과 사물의 과잉 양상은 자신 들의 존재를 비가시적인 상태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감성적인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분할하려는 랑시에르 정치미학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Ⅲ장 에서는 기존의 재현적 글쓰기 원리에 불일치하는 글쓰기를 허구(fiction)로 설명한 랑 시에르의 시각에 입각해「저기 소리없이」를 읽어 보았다. 그 결과 이 소설이 재현적 글쓰기의 규범인 사건의 인과적 배치를 의식하지 않고 낱말과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 으로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 정치성을 내파(內波)한 다고 보았다. 

 

주제어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문학의 정치, 5·18, 광주 항쟁, 임철우, 최윤, 봄날

 

Ⅰ. 서론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The politics of literature)에서 “문학의 정치는 작가 의 정치가 아니며 문학이 정치 행위를 그 자체로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에 따르면 문학의 정치란 자기 일 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소음으로 취급됐던 목소리를 말이 되게 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비가시적인 상태에서 가시적으로 드 러냄으로써 기존의 감성적인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분할하려는 시도이다.1) 랑시에르는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감성의 분할2)이라 부른다.

 

     1)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10-11면.

     2) 국내에서 랑시에르의 저서는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로 번역돼 있는데 여기서 감성(sensible)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감성의 분할의 역자 오윤성은 le partage du sensible이 “공통 세계에서 자리들을 나누는 감각 질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감성의 분할’로 옮겼고,정치적인 것 의 가장자리에서의 역자 양창렬은 ‘le sensible'이 그리스어 to aisthēton, 즉 감각 행위(aisthēsis)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을 들어 le sensible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등 말 그대로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partage'는 ‘배분’(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주는 것)인 동시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기에 우리말 ‘나눔’(각각의 몫으로 분배 하다, 함께하다)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화의 역자 진태원 역시 양창렬의 제안에 따라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랑시에르는 칸트로부터 감각적인 대상들이 지성 의 개념들에 의해 인식되기 전에 먼저 감성의 원리에 속하는 시공간에 의해 직관된다는 점을 받아 들이고, 푸코로부터 이런 감성적 원리가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 외부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역사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구성적인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  ‘감성’ 개념을 구체화했다. 

 

따라서 감성의 분할은 분할된  공통적인 것과 그것에 대한 이의제기, 이 분할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공간들, 시간들 그리고 활동 형태들과 관련된다. 랑시에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를 인용해 몫을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분할을 예시한다. 플 라톤은 국가에서 장인들은 자신들의 작업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에 관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을 통치 행위와 피통치 행위에 참여하는 자로 보는데 여기서 참여하는 자들 을 결정하는 분할은 이 참여하기에 우선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공통적인 것에 참여할 수 있는 자를 구분하고, 공통의 공간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규정하는 입장이다.3)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윤리적 이미지 체제(ethical regime), 재현적 예술 체제(representative regime), 미학적 예술 체제(aesthetic regime) 의 세 가지 체제를 도입한다. 윤리적 체제에서 예술은 공동체의 에토스와 관련된 이미지로 간주되고 개별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4) 이 체제에서 분리된 재현 적 체제에서 예술은 실재를 복제해야 한다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적 재현의 법칙을 갖게 된다. 재현적 체제에서 예술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보장받지 만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 그리고 말하는 방식 사이의 일정한 유형이라는 규범 을 만들어낸다. 이에 반해 미학적 체제는 예술의 단독성을 인정해 위계, 주제, 장 르 등 분야에서 재현적 체제가 규정한 일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다시 말 해 미학적 체제는 예술의 절대적 단독성을 단언하고 동시에 재현적 체제가 강요 했던 모든 실용주의적 기준을 파괴한다.5)

때문에 이 체제에서는 동물로 취급되 었던 사람들이 말하는 존재가 돼 공동체6)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3)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12, 13-14면.

      4) 위의 책, 26면.

      5) 위의 책, 30-31쪽; Rancière, Jacques. The Politics of Aesthetics :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trans, Gabriel Rockhill, Continuum : New York, 2004, pp. 20-23.

      6) 5·18에 나타난 공동체의 성격에 대해서는 최정운의 개념이 많이 인용된다. 그는 시민들이 시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5월 19일-20일의 상황을 전통적 공동체와 다른, 절대공동체라는 용어 로 표현했다. 그가 언급한 공동체는 ”투쟁을 목적으로 개인을 억압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을 이성과 용기로 극복한 시민들이 서로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결합한 조직“이다. 이 절대공동체에서 시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았고 새로운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최정운은 이 절대공동체를 “성스러운 초자연적 체험”, 루소의 “각 시민들이 주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주권체”로 형상화하고 있다.(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 봄, 2012, 171-173면.) 

 

 

재현적 체제에서는 비가시적인 것, 소음으로 취급된 것, 중요하지 않은 것 등 재현이 불가 능했던 것들이 미학적 체제 안에서는 가시화된다. 이것은 기존 체제의 감각의 재 분배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적 체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 일 수밖에 없다. “문학과 정치7)는 분리될 수 없다”는 랑시에르의 주장은 이런 미 학적 체제의 성립과 맥을 같이한다. 랑시에르는 말의 기교의 새로운 형태로서 문학을 가능하게 했던 문학성은 문 학적 언어의 특정한 적확성(的確性)이 아니라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문자의 급 진적 민주주의로 본다.8) 이런 주장은 자기지시적인 언어 사용을 중심으로 문학 성을 이해했던 구조주의적 시각과 대립된다. 이런 입장에 기반해 랑시에르는 “어 느 누구나 작가가 되거나 독자가 되는 새로운 글쓰기 체제”를 문학으로 정의한 다. 다시 말해 문학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작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글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전유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문학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은 새로운 감성의 분할과 관계된 것으로 기성의 글쓰기 체제에 반발하는 말의 교란 과 과잉이다. 이런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마담 보바리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에서 발견되는, “사물들과 중요하지 않은 역할들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나치 게 나열하는, 낱말과 사물의 과잉을 문학적 폐해”9)로 보았던 비평가들을 비판하 고 말의 과잉을 진정한 문학성의 징표로 보았다. 랑시에르는 프랑스 문단에서 이런 문학성을 대표하는 작가를 플로베르로 보 고, 그의 문장이 “어떤 대상이든 돌로 변화시켜 버린다.”10)고 혹평했던 샤르트르 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7) 통념상 정치는 권력이나 체제를 선택하고 유지하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랑시에르는 이런 정치 개념 은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치안에 해당한다고 본다. 치안과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의 재개념화에 대해서는 번역자의 아래 의견을 참조. “랑시에르는 행위 방식, 존재 방식, 말하기 방식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성립시키는 통념상의 정치를 치안으로 정의하고, 특정한 형태로 분할되어 있는 감각적 배치 를 깨뜨리는 전복적 활동이 정치라고 말한다.”(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 리에서, 도서출판 길, 221-223면.)

       8)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25면.

       9) 위의 책, 198면.

      10) 위의 책, 16면. 

 

 

랑시에르가 보기에 말의 화석화는 기존의 창작 규범 이 중시하는 인물중심적 사유와 그 의미에 대한 위반으로, 기존 질서의 와해를 의미한다.

그 결과 예술은 철저한 “동등성의 공식”으로 이해돼야 하고, 이 공식은 시학의 규칙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질서와 존재 방식, 말하는 방식 사이의 전복 을 의미한다. 이런 민주주의적 글쓰기는 일상을 반복, 재생하는 헐벗은 존재11)들 의 정치적 지위 상승에 영향을 준다. 랑시에르는 이런 플로베르식의 글쓰기를 문 학 고유의 정치 혹은 문학의 메타정치12)로 보았는데, 그가 주목한 말과 사물의 과잉, 그에 따른 헐벗은 존재들의 민주적 지위상승과 문학의 메타정치가 임철우 의 봄날에서도 드러난다.

 

       11) 랑시에르는 자기 일 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재정의해 ‘박탈당한 자들’로 표현했는데 그의 책에서 ‘헐벗은 존재’들도 등가적인 표현이다. 5·18 역시 희생자의 주류가 노동 자였다는 점에서 박탈당한 자들 혹은 헐벗은 존재들의 항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정해구는 광주항쟁의 사망자 대부분은 학생과 노동자였음을 조사 결과 밝혔다.(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역사비평사, 2011, 75면.)

       12)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37면. 

 

Ⅱ. 봄날의 문학 정치 - 말과 사물의 과잉

임철우의 봄날에 앞서 발표된 붉은 산, 흰 새(1990)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임철우가 실제로 체험한 5·18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임철우는 봄날의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전편 격인 붉은 산, 흰 새의 연장 선상에서 구상됐다.”(1, 12)13)고 밝혔는데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지는 상술하 지 않는다. 우찬제는 “붉은 산, 흰 새, 봄날은 분단 현실로 인한 좌우익의 갈 등과 대립, 전쟁 상황 등이 남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폭력의 역사로 이어졌음” 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는다.14) 서영채는 임철우에게 5·18이 원체험으로 기능하 고 있음에 주목해 “붉은 산, 흰 새의 배경인 낙일도는 광주의 부속섬”에 해당 한다고 본다.15)

이어지는 봄날에 대한 연구는 사실의 재현과 증언16),

 

        13) 이하 봄날(문학과지성사, 1997), 붉은 산, 흰 새(문학과지성사, 1990),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문학과지성사, 2000)를 인용시 권, 쪽수만 표기한다. 봄날은 1권(1-20장), 2권(21-35 장), 3권(36-51장), 4권(52-67장), 5권(68-86장, 에필로그)으로 구성돼 있다.

        14) 우찬제, 「역사적 상처와 서정적 치유-임철우 소설」, 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 109면.

        15) 서영채, 「임철우론:봄날에 이르는 길」,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3면.

        16) 우찬제, 앞의 책; 심영의, 「5·18 민중항쟁 소설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전성욱, 「‘5월 소설’의 증언의식과 서술전략」,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부끄러움과 죄의식17) 기억의 소환과 사회적 정동18)으로 대별된다. 성민엽19)은 이 소설을 불의 체험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파악 하고 있다. 서영채20)는 승화된 죄의식과 부끄러움 때문에 임철우 소설에서 서정 성이 풍부하게 나타난다고 읽고, 양진오21)는 역사의 사실적 증언에 주목해 “광주 의 망각에 대해 저항하는 기억 투쟁의 기록”으로 독해한다.

 

        17) 왕철, 「소설과 역사적 상상력」, 민주주의와 인권 2-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2.

       18) 정호웅, 「기록자와 창조자의 자리ㅡ임철우의 봄날론」, 작가세계 여름호, 1998; 정명중, 「증오 에서 분노로:임철우의 봄날읽기」, 민주주의와 인권 13-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3; 정명 중, 「인식되지 못한 자들, 혹은 유령들-5월 소설 속의 ‘룸펜’」, 민주주의와 인권 15-2, 전남대학 교 5·18연구소, 2015.

        19) 성민엽, 「불의 체험과 그 기록」,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문학과지성사, 2004, 331면.

        20) 서영채, 「임철우론: 봄날에 이르는 길」, 문학동네 봄호, 1998, 38-40면. 

        21) 양진오, 임철우의봄날을 읽는다, 열림원, 2003, 18면. 

 

봄날이 다른 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비교적 사실 에 충실한 하나의 기록물로서도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1, 14)라는 작가의 말 에서 드러난다. 그런 창작 의도 때문에 소설의 서사는 당시의 공간이나 상황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세세하게 진행되고 반대로 인물형상화 등 소설 미학은 다소 부족해 보이는데 다수의 선행 연구는 이 소설의 서사적 특징을 시점의 다원화로 보고 있다. 총 87개 장으로 구성된 봄날은 시점을 기준해 보면 한원구(1, 4, 9, 13, 79장)와 그의 세 아들인 무석(2, 8, 15, 43, 44, 48, 57, 68, 78, 83장), 명치(6, 11, 12, 23, 24, 33, 50, 53, 72, 81장), 명기(5, 10, 14, 19, 26, 39, 40, 45, 46장, 에필로그)를 중심인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석은 일반 시민을, 명치는 계엄군을, 명기는 대학생을 대표하는데 그들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각 장에 시점 인물로 등장해 시점의 다원화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중에서도 공무원 시험을 준 비하며 소일했던 인물로 시민군에 가담해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어간 무석과 그 의 친구들이 시점인물로 등장해 다양한 말을 쏟아낸다. 그들은 간호사 수희(3, 15, 56장), 제과 공장 여공 미순(7, 41, 69장), 술집 여급 은숙(25장), 목공 봉배(17 장), 철물점 종업원 칠수(60장), 여고생 연숙(70장)등인데 이들은 랑시에르가 “자 기 생활에 바빠서 자기 일 외에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 즉, 박탈당한 자로 불 렀던 기층민들22)이다.

 

        22) 이 글에서 하위주체, 하층민, 민중, 기층민은 그람시(Antonio Gramsci)와 가야트리 스피박이 개념화한 서발턴(Subaltern)계층과 등가적 표현이다. 그람시는 서발턴 계층을 기존의 체제에서는 침묵 을 강요당하는 문맹 소작농, 선주민, 도시 최하층 하부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한다.(가야트리 차크라 보르티 스피박 외 지금,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79면.). 이에 대해 최정운은 “절대공동체의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그곳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과 축복을 받은 계층이 이전에 전통적 공동체에서 존엄성을 상대적으로 박탈당했던 사람“이 라고 보고 있다.(최정운, 앞의 책, 199면.)

 

그밖에 주요 인물로는 신문기자 김상섭(36, 61, 64, 71, 75 장), 종교인 정신부(35, 38, 63, 65, 82, 86장), 시민군을 이끈 윤상원(52, 62, 66, 67, 77, 85장) 외에 계엄군의 시각을 보여주는 중령(54, 59장)까지 시점인물로 등 장해 항쟁의 여러 측면을 각자의 시점과 발화로 서술한다. 이중 상당수의 장은 한 장에 여러 명이 교차돼 초점화되는 다중 초점의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어 담화 혼합의 양상도 자주 목격된다. 지금까지 설명한 시점의 다원화, 시점 혼합, 담화 혼합은 미하일 바흐찐 (Mikhail Bakhtin)의 다성성을 환기시킨다. 바흐찐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 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에서 톨스토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인식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은 작가의 통제에 엄격하게 종속된 단성적(monologic) 양상을 띤 다고 보았다. 반면에 도스토옙스키 소설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다양 한 시점을 통일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비작가적, 비권위적, 다성적 (polyphonic) 형태로 분류했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의 의식이나 시점은 작가의 견 해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인물들은 독립성과 완전성을 보유하고 있고 그들 자 신이 직접적으로 의미 있는 어휘의 주체들이다.23) 프린스는 이를 재해석해 다성 적, 대화적 서사는 다수의 목소리, 의식, 세계관들이 상호작용한다고 본다.24)

 

        23) 라만 셀던 외, 정정호 외 역, 현대 문학 이론 개관, 한신문화사, 1998, 53면.

        24) 제럴드 프린스, 이기우·김용재 역, 서사론 사전, 민지사, 1992, 60면.

 

이 는 시점의 다원화는 목소리의 다원화와 등치적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시점이 다원 화될수록 목소리, 즉 말의 과잉이 다원화된다고 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40여 명에 달하는 초점자들이 드러내는 말은 빈민가인 광천동의 시국 불만(7, 8, 40, 41, 68장), 항쟁을 진압하는 공수부대원들의 가학적 언행(12, 23, 24, 28, 29, 50, 73장), 신문기자의 생생한 목격담(36, 37, 61, 64, 71, 75장), 종교인들의 호소(35, 38, 63, 65, 82, 86장), 시민군들의 분노(52, 62, 66, 67, 77, 85장)등이 두드러진다. 그밖에도 대인동 홍등가의 음담, 버스운전사들의 궐기문, 의사와 간호사들의 의료 기록, 지역 유지와 교육자들의 호소문, 자식을 찾는 부모들의 하소연, 공무원들의 변명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더해 항쟁과 직 접 관련이 없는,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의 역사,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등 신군부에 대한 조소, 계엄군의 폭력을 외면하는 타 지역민에 대한 원망 등의 정치적, 사회적 언어들이 다층적인 말의 영역대를 형성한다.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는 “자기 일 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존재임을 입증할 때에 시작” 된다고 보았다. 그의 사유에서 보면 그동안 소음으로 취급됐던 헐벗은 자들의 소 음이 항쟁 기간을 통해 담론화되고 있는 봄날은 문학 정치가 태동하는 텍스트 이다. 아래는 5월 19일 오전에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와 대치 중인 시민들의 발화 로, 같은 사태에 임해 각양각색의 화제를 쏟아내는 말의 과잉과 담화 혼합 양상 이 두드러진다.

 

저놈들이 참말로 한국놈들이까? 저건 인간들이 아니여.(···) 저놈들헌테 맞아죽 고 찔려죽은 사람들이 열 명은 될 것이라고 그럽디다.(···) 공수부대놈들이 모조리 경상도 병력이라잖든갑네.(···) 전두환인가 개새낀가 허는 놈이 일부러 그리 시켰 다 드라고.(···) 전라도 사람은 만 명도 좋고, 이만 명도 좋은께, 아예 몰살을 시켜 버릴 참이라데.(···) 공수부대가 지나가는 여대생 유방을 대검으로 오려내가꼬 죽 여버렸어라우.(···) 관광호텔 앞에서는 여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붙잡아다가 별 미친 개지랄을 했다여.(···) 이러다가 우리 광주 사람들, 저 놈들 손에 모조리 죽게 생겼 소.(···) 총이 없으면 식칼이라도 들고 나서야제. 하다못해 연탄집게라도 치켜들고 팔십만 시민이 동시에 왁하고 일어나.(2권, 92-93)

 

봄날에서는 말뿐만 아니라 사물도 과잉의 양상을 띤다. 몫 없는 이들의 다양 한 목소리가 장르적 규범을 벗어나 돌출한다면 잡다한 사물이 재현적 체제의 테 두리를 벗어나 전경화된다. 이 소설에서 사물의 과잉은 시점만큼이나 다양한 배 경에서 기인한다. 87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매 장에 등장하는 공간이 상 이할 정도로 배경이 다종적이고, 이질적이다. 소설의 무대는 항쟁이 발생한 광주 뿐만 아니라 서울 등 타 지역까지 섭렵하고 있어서 상이한 장소가 유발하는 상이 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지역별로 보면 광주의 경우 산수동(1, 4장), 광천동(7, 8, 40, 41, 62, 68장), 계림동(9, 20, 39장), 신안동(10장), 금남로(5, 5, 16, 24, 25, 36, 38, 43, 45, 51, 57, 58, 61장) 충장로(19장), 대인동(18장), 백운동(31장) 등이고, 50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88집 타 지역은 해진 포구(3장), 김포군 공수부대(11장), 서울 D대학교(12장), 서울 청 량리역(21장)이 등장한다. 기능적 장소로 보면 전남대학교(14, 49장), 조선대학교 (15, 23장), 광주역(22, 44장), 전남도청(32, 47, 50, 53, 54, 59, 64, 65 66, 69, 71, 75, 76, 77, 80, 82, 83, 84, 85장), 광주고(33장), 육군31사단(34장), K동 천주교회 (35장), 국군통합병원(42장), 문화방송국(46장), 녹두서점(52, 67장), 양림동 K종 합병원(56, 79, 86장), 광주교도소(60장), 전남대병원(63장), 주남마을(70, 72, 74 장), 상무관(78장), 광주비행장(81장) 등으로 확산된다. 이런 분화된 장소는 각 장소 고유의 말과 사물을 노출시킨다. 공장의 공원, 일 용노동자, 구두닦이, 식당이나 유흥업소 종업원, 고아, 넝마주이 등이 모여 사는 광천동에서는 재산도, 지식도, 그럴듯한 직업도 못 가진 헐벗은 존재들의 생활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홍등가인 대인동에서는 술집 아가씨들의 생활상이, 국군통 합병원과 양림동 K종합병원에서는 폭행이나 살해된 시민들의 처참함이, 대학가 와 광주교도에서는 계엄군의 잔인한 폭행과 고문의 실상이 지루할 만큼 길게 나 열된다. 공수부대의 비인간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강상병이 발로 사내들의 목덜미를 밟아 누르고”(1권, 229), “진압봉과 군홧발이 교수의 몸뚱이를 난타”하 고(1권, 271), “축 처져내린 여자들의 몸뚱이를 벽에 밀어놓은 채 뺨을 철썩철썩 후려치고”(1권, 340) 등등 사물을 다루는데 있어 평등주의적 무차별성이 두드러 진다. 종국에는 공수부대의 잔인성을 환유한 벌레, 파충류 등 사물까지 등장(16, 18, 19장)해 사물의 과잉을 제한없이 구사한다. 아래는 공수부대가 수십 종의 사 물로 치환돼 묘사되는, 사물의 과잉의 예이다. 공수부대를 “파충류” 같은 혐오 생 명체, “폭탄” 같은 위험물, 물체의 “덩어리” 같은 물질성, “세포” 같은 비하적 시 선으로 반복적으로 치환시켜 묘사를 남발하는 서술자의 태도에서 공수부대에 대 한 극도의 분노와 거부감이 노출된다.

 

맨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무석은 언뜻 그것이 거대한 물체의 덩어리라고 생각 했다.(···) 검푸른 빛을 띤 그 낯선 덩어리(···) 정체불명의 쇠붙이처럼 보였다. 그 쇠붙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가공할 만한 폭탄이거나 신형 무기 같기도 했 다.(···) 개체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한 덩어리로 완강히 뭉쳐진 그 거대한 물체로부 터 분명 그 불가사의한 공포는 시작되고 있었다.(···) 수백 개의 관절로 이어진 한마리 거대한 파충류처럼 기어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무석은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룩무늬가 더욱 또렷하게 보이 기 시작했다. 제복의 얼룩무늬는 얼핏 잘못 엎질러놓은 물감 자국 같았다. 아니 이제 막 부패를 시작한 시체의 살가죽에 돋아난 크고 푸릇푸릇한 반점들 같았 다.(···) 그 거대한 파충류의 몸뚱이로부터 수백 개의 마디마디가 일시에 세포 분 열을 시작했고 해체된 무수한 분절들은 순식간에 별개의 독립된 운동체로 변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1권, 305-311, 밑줄은 인용자.)

 

이런 사물의 과잉은 랑시에르에 의해 민주주의적 글쓰기로 예시된 발자크의 소설을 상기시킨다. 발자크의 신비로운 도톨 가죽25)에서 주인공 라파엘은 골 동품 상점에 간다.

 

       25)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8-36면. 한국어 번역은 나귀 가죽(문학동네, 2016)을 참조.

 

모든 시대와 여러 문명의 물건들과 예술 작품들, 종교적 징표 들, 사치품들과 일상생활 물품들이 이 가게 안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 발자크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이 상점은 “끝없는 시를 짓는다”라고 말한다. 이 시는 “고 상한 또는 비천한, 현대적 또는 옛적, 장식적 또는 실용적 사물들의 동등성을 드 러낸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우리는 발자크의 상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징후들 을 읽고, 이미 사라진 세계들의 파편들을 인지하며, 사멸한 신화적인 신성들의 등가물”을 만난다.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하는 파리의 하수구도 마찬가 지이다. 가면이 벗겨지며 일상생활의 쓰레기에 떠밀려 사회적 신분이 소멸되는 하수구는 재현적 체제가 거부하는 “진리의 구덩이”이다. 랑시에르는 발자크나 위 고의 이런 문학을 민주주의적 글쓰기로 정의한다. 이들의 글쓰기는 재현적 체제 가 강요하는 “토대적인 텍스트들과 지배적 수사학의 낱말들, 문장들과 어법들”을 우회하면서 구성된다. 랑시에르는 이들의 소설에서 과잉화된 말과 사물들은 재 현적 체제의 규범에 포섭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를 이룬다고 보았다. 어떤 이 유나 목적이 없는 말의 나열, 남용된 사물들의 장면은 재현적 체제에서 거부된 미시적 개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학이 행하는 정치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봄날에서의 말과 사물의 과잉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적 문 학성(literariness)으로 본다. 그는 학식 있는 이들의 글인 문예와, 평등을 구현함으 로써 감성의 재분할을 가져오는 문학을 구분한다. 여기에서 문학은 곧 정치와 동일시된다. 재현적 체제의 위계를 무너뜨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민 주주의적 글쓰기이며 랑시에르는 이것을 문학성으로 부른다. 구조주의 시대는 특정한 적확성을 문학성의 지표로 보아 고유한 글쓰기 용법에 입각해 문학을 정 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글쓰기를 “순수한 기표적 물질성에 도달한 언어 이상”의 그 무엇으로 본다. 랑시에르적 글쓰기는 언어가 지닌 모든 속성의 전도를 의미하며, 부정확한 용법의 군림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는 구조 주의적 시각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문학성을 “각자가 가로챌 수 있는 문자의 급진 적 민주주의”로 정의한다.26)

랑시에르는 이런 민주주의적 글쓰기의 전형을 발자크나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찾는다. 여기에서 두 작가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기가 정치적 격변기였음에 주 목해야 한다. 발자크나 플로베르와 같은 리얼리즘 작가들은 프랑스혁명의 여진 으로 시민의 자유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던 시대에 살았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민주주의적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봄날도 정치적 격변기였던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글쓰기가 가능했고 그 결과 스스 로 랑시에르적 정치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광주항쟁과 파리코 뮌의 유사성을 비교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특정 시 대를 분할하는 사회 변화의 격발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5·18(1980년), 프 랑스의 파리코뮌(1871년), 러시아의 전함 포템킨의 반란(1905년)을 동궤로 본다. 카치아피카스는 광주항쟁과 파리코뮌의 공통점으로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는 대 중조직의 출현, 아래로부터 무장된 저항의 출현, 계급, 권력, 그리고 지위와 같은 위계의 부재27)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랑시에르가 개념화한 미학적 체제의 출현 과 그에 따른 감성의 분할에 다름 아니다.

 

         26) 위의 책, 25면.

         27) 조지 카치아피카스, 「역사 속의 광주항쟁」, 조희연·정호기 엮음,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2009, 319면.

 

Ⅲ.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 허구(fiction)의 정치성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사는 애도의 서사, 5·18에 대한 공감과 정동, 정신분석학적 접근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요약된다. 애도의 관점 에서 우찬제28)는 이 소설이 “다원적 시점에 의해 현장의 상처를 다원적으로 기 억시킴”을 인정하면서도 “애도의 지연을 통해 애도를 거듭하면서 불안의 심상을 극화”한 애도와 불안의 서사로 읽는다. 정동에 방점을 둔 김병익29)은 시점의 다 양화를 통해 원죄적인 인간 실재(實在)의 상황에 독자의 참여를 유도했다고 하 고, 김경민30)은 2인칭 서술을 통해 이야기를 현실 세계로 확장시킴으로써 독자 들이 공감하고 행동 윤리적 책임을 느끼도록 하는 소설이라고 독해한다. 이채 원31)은 이 소설에서 폭력의 남성성이 드러나는 양상에 주목하고, 이가야·이주 영32)는 언어를 통한 증언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는다. 김형 중33)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묘사하는 문학에 나타나는 인접성 장애 실어증으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김혜경34)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분열된 자아상으로 본다. 이중 저자의 인터뷰35)에 드러난 “돌림노래”와 “감염”을 사회적 의미망으로 이 해해 이 소설을 5·18에 대한 공감과 정동으로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28) 우찬제, 「불안과 상처, 그 감각적 치유:최윤」, 불안의 수사학, 소명출판, 2012, 361-363면.

      29) 김병익, 「고통의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움의 고통」,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 성사, 2000, 309-310면.

      30) 김경민, 「2인칭 서술로 구현되는 기억·윤리·공감의 서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1(22-4), 한국 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8, 221쪽; 김경민, 「공감을 통한 문학의 인권감수성 형성-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대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14,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4, 66면.

       31) 이채원, 「후일담 소설의 젠더 지평」, 여성문학연구 46, 한국여성문학회, 2019, 217면.

      32) 이가야·이주영, 「제노사이드와 예외상태의 인간, 그리고 증언」, 불어불문학연구 96, 한국불어불 문학회, 2013, 153-154면.

      33) 김형중, 「오월문학과 실어증」, 동서인문학 45,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77-78면.

      34) 김혜경, 「최윤 소설의 정신분석학적 고찰-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16, 국제비교한국학회, 2008, 225-226면.

      35) 최윤,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문학동네, 1994, 100면.

 

프롤 로그와 10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주인공인 ‘소녀’, 소녀와 동거하는 ‘남자’, 소녀 를 찾아다니는 오빠의 친구들인 ‘우리’의 시점에서 묘사되는데 이중 역사적 사건을 당한 소녀의 고통을 이해하는 묘사는 남자에게서만 드러난다. 5장에서 남자는 소녀를 지켜보면서 “꼭 무슨 열병에 감염된 것 같다.”(243)고 하거나, 8장에서 “점점 더 자세히, 점점 더 강한 증폭과 깊이로 그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소문의 도시 전체를 보았다.”(262)고 하는 정도로 광주와 5·18로 추정되는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 그밖에 소녀의 시점은 죽은 엄마를 버려둔 과거에 대한 죄의식과 그로 인한 자학에, ‘우리’의 시점은 죽은 친구의 동생을 찾는 행위에 집중된다. 10장에 서 ‘우리’는 소녀를 찾아 여행을 떠난 동기를 떠올리면서 “이미 가버린 친구의 누이를 찾아 위안해주려고?(···) 그날, 그 도시, 그 이후 무언가를 했어야 했기 때 문에?(···) 이미 피폐될 대로 피폐된 그녀를 보호해주겠다는 경박한 인도주 의?”(287)라고 자문하지만 대부분의 질문은 소녀가 당한 고통에 대한 개인적 애 도에 집중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에서 서술자의 의도는 우찬제의 지적처 럼 “애도를 거듭하면서 불안의 심상을 극화”한 애도의 서사로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저기 소리없이」에 대한 세 가지 관점과 달리 랑시에르적 사 유에 기반해 이 소설을 정치적 텍스트로 보는 독법도 가능하다. 이 경우 소설에 빈번히 등장하는 실어증적 소음과, 미메시스 규범에 의거한 재현적 체제를 거부 하는 허구(fiction)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문학의 정치란 소음 을 말이 되게 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비가시적인 상태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냄으 로써 기존의 감성적인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분할하려는 시도이다.36)

 

     36) 감성의 분할은 대별하면 ‘볼 수 있는 것’과 ‘말할/들을 수 있는 것’(담론과 소음)의 두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감각과 지각의 차원에서는 가시(可視)적인 것의 분할, 인식의 차원에 서는 가지(可知)적인 것의 분할을 통해 몫 있는 자와 몫 없는 자, 셈해지는 자와 셈해지지 않는 자라는 분할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여기서 소음은 재현적 체제에서는 말로 취급될 수 없는 발화들인데 이 소설에는 아래 같은 소음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런 발화는 앞뒤 문장이나 문맥이 상호 소통되지 않기 때문에 개연성을 원리로 하는 재현적 체제에서는 말이 아닌, 소음으로 취급 될 수밖에 없다.

 

둘로 접혀지던 엄마 몸에 순식간에 구멍들이…… 그리고는 모든 게 끝이야.(···) 그때에 시커먼 휘장이 펄럭거리고 다가와 나를 덮쳤고 내 손을 움켜쥔 엄마와 같이…… 그냥 엎어졌나?(216-217) 죽은……, 오빠, 검은……, 구멍, 빨간 구멍…… 등의 단어들이 수없이 반복해서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이미 독립된 단어가 되지는 못했다.(251) 그녀는 끊임없이 입 속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아주 빨리, 혀를 굴 리는 바람에 각 단어들의 모서리가 마멸되어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었다.(261)

 

위 인용문에서 검은 휘장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넘어서, 소녀를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차단시키는 기제로 기능한다. 이 휘장 뒤에 숨은 소녀는 세상 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하면서 타인과 대화하지 못한다. 주어와 서술어가 조응 하지 못하고 말줄임표가 남발되는 소녀의 발화는 랑시에르적 사유로 보면 재현 적 체제에서는 소음에 불과하고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소녀의 기억과 고통은 말을 대신해 검은 휘장과 같은, 은유적 사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랑시에르의 관점에서는 미학적 예술 체계의 글쓰기 방식 으로 간주된다. 미학적 체계는 재현적 체계에서는 필수적인, 낱말이나 문장 사이 에 어떤 필연적이고 직접적인 의미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장르, 주제, 플롯의 개연성을 강조하는 재현적 체제의 글쓰기 규범에 대한 불일치로 이런 불 일치 자체가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미학이다. 때문에 최윤은 이 소 설에서 정치적 언표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재현적 체제의 규범에 따르지 않는, 불 일치만으로도 정치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저기 소리없이」에서 나타나는 사물의 남발과 같은 예를 플로베르 의 소설, 마담 보바리37)을 통해 설명한다.

최윤의 소설처럼 플로베르 소설에서 도 기의를 알 수 없는 사물의 기표만 제시되는 문장이 많다. 플로베르 소설에서 보바리가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남성 자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잡다한 사물들에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재현적 체제의 규범으로 보면 그럴듯함이 결여된 글쓰기인데 랑시에르의 입장에서는 미학적 글쓰기에 해 당한다. 기의가 불분명한 이런 사물의 나열을 랑시에르는 허구 개념38)

 

        37)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76-108면.

       38)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12, 47-56면.  

 

을 통해 설명한다. 미메시스가 글쓰기의 원리인 재현적 체제에서 허구는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것이라는 규범이 존재하는데 미학적 체제에서는 이런 재현적 체제의 글쓰 기 원리에 불일치하는 글쓰기를 허구로 본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의 공통점 을 불일치로 보고 있기 때문에 허구의 글쓰기를 통해 정치와 예술의 동일시가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의 언술을 통해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통념상의 허구는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든 이야기를 뜻한다. 이 런 허구는 랑시에르가 규정한 플라톤의 윤리적 체제에서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 문에 허구를 만들어내는 예술은 실재보다 열등한 위치를 점한다. 이에 반해 미메 시스라는 예술 규칙을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현적 체제에서의 허구는 실재 처럼 그럴듯하게 구성된 것, 인과적 논리가 부여된 사건들의 배치, 즉 “일어날 수도 있는 것”으로 격상된다.39)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으로부터 예술을 독자 적인 영역으로 이끌어냈으나 재현적 체제는 예술을 감각할 수 있는 영역과 감각 할 수 없는 영역으로 구분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분할 방식이 예술의 자율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보고 재현적 체제에서 설정된 허구와 실재의 이분법을 벗 어난 식별 방식으로 미학적 체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미학적 체제의 등장을 18-19세기의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통해 예증한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동시대에 재현적 체제는 주제나 재현 양식에서 엄격한 식별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귀족에게는 비극적 주제를, 서민에게 는 희극적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정이 존재했고 재현적 체제에서 작 가는 주제의 적합성을 고려해 글을 써야 했다. 재현적 체제는 장르들과 더불어 주제의 비천함 또는 고상함에 알맞은 표현 형태들과 상황들을 규정했다.40) 그러 나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렇듯 주어진 규범을 따르지 않고서도 예술이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랑시에르가 대표적인 예로 든 작품이 마담 보 바리이다.41)

 

        39) 위의 책, 50-51면.

        40) 위의 책, 43면.

        41) 랑시에르는 주제와 재현 양식 사이의 상관항을 파괴한, 미학적 체제의 작가로 아래를 거론한다. “한 시대 한 사회가 의복들, 특징들에게 읽힌 발자크, 하수구가 문명을 폭로한 위고, 농부의 딸과 은행가의 부인이 사물을 보는 절대적 방식으로서의 문체의 동등한 역량 속에 취해진 플로베르.”

 

랑시에르에 따르면 플로베르는 주제에 따른 위계를 파기하고 예술과 비(非)예술의 경계를 해체한 작가이다. 마담 보바리의 주제는 사랑이지만 엠마와 그녀의 연인들이 사랑을 느끼는 방식은 재현적 체제의 규범에 따라 인물 과 사건에 따른 인과성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의 감정은 인 물의 언술이나 사건의 전개 대신 공기방울과 태양 광선, 황금빛 광선과 레몬 향 기 등 사물에 대한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42) 이를 통해 보면 플로베르는 주제나 묘사 방식의 적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글을 썼으며 이것은 문체(style)가 특정의 주제나 인물에 종속되지 않음을 뜻한다. “더 이상 아름답거나 저속한 주제는 없 다.”고 선언한 플로베르는 재현적 체제가 강요했던 주제와 인물들 사이의 개연성 이라는 원칙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는 재현적 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플 롯 구성, 사상, 감정의 표현이 미학적 체제에서는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체제에서 작품의 짜임새를 결정하는 것은 문체로 그것은 사물을 보 는 절대적 방식43)인 것이다. 최윤의「저기 소리없이」에서도 미학적 체제의 원리 인 문체의 절대성이 드러난다.

 

          42) 랑시에르는 사랑의 탄생의 경우처럼 어떤 일이 발생할 때마다 사물들이 사건의 현실적인 내용물 이 됨을 강조한다. “문 아래서 새어나온 대기는 타일 바닥 위에 먼지를 조금 날렸다.” 이런 식으로 엠마와 샤를르 사이에 형성되는 내밀성의 강도가 표시된다. 농사 공진회 날, 엠마가 자신의 손을 잡는 로돌프를 내버려 두는 이유는 사실 그의 언변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감각적 요소들 의 조합 때문이다.(위의 책, 93면.)

         43) 위의 책, 20-21면. 

 

① 당신은 꽃자주 빛깔의 우단 치마를 간신히 걸치고 묘지 근처를 배회하는 한 소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가닥 난 긴 머리채에 시든 꽃송이로 화관 장식을 하고(···) 웃음을 흘리면서 당신 뒤를 쫓아올 것입니다.(205)

② 그날은 낯선 파도들이 춤추는 날이었는데(···) 파도가 더 빨리 사방으로. 몰 리고……흩어졌다가……다시 모이고……그리고는 또 검은 장막(···) 매 순간 뇌를 휘감는 이 뱀 같은 휘장.(220)

③ 내가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파랑새 한 마리가 내 가랑이 사이로 해서 내 몸속으로 들어왔지(···) 파랑새가 비집고 들어올 때 많이 아팠지만 소리지르지 않 았어.(236-237)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43면.)

④ 그 지하 지대가 남자에게는 백색으로 보였다. 시신이 타고 난 다음의 뼛가루 의 그 백색(···) 남자는 그녀가 언젠가는 그 백색의 구멍 속으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가.(270)

⑤ 머리에 시든 꽃을 꽂고 꽃자주색 치마를 팔랑거리면서 오빠의 있지 않은 무 덤 앞에 가볍게 내려앉는 한 소녀의 영상이 아주 잠시 우리의 뇌리에 스쳤다.(289)

 

인용문 ①에서 서술자는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소녀 같은 피해자들이 우리 사 회에 산재해 있음을 각성시키고 있고, ②는 소녀가 도시에 모인 군중과 그들이 학살당하는 날을 회상하는 대목이다. ③은 소녀가 잠시 머물던 옥포에서 남성들 이 그녀를 번갈아가며 겁탈하는 장면이고 ④에서는 무덤가에서 소녀를 목격한 남자가 그녀의 미래를 상상한다. ⑤는 소녀를 찾아다니는 ‘우리들’이 끝내 그녀 를 만나지 못하고 소설을 마감하면서 남긴 말이다. 랑시에르가 마담 보바리를 통해 설명했듯이 위 인용문에서는 감각하는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행위 사이 에 어떤 원리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의 대상이나 목적, 의도 등에 대한 언표가 사라진 자리에는 해석이 모호한 낱말과 문장의 나열만이 예술의 결과물로 남아 있다.44)

 

      44) 김형중은 이것을 야콥슨의 논의에 기대 인접성 장애(contiguity disorder)로 설명한다. 야콥슨은 인접성 장애는 일종의 무문법성으로 낱말의 어순이 혼란에 빠져 문법적인 대등관계와 종속관계가 무너진 것으로 본다. 이 경우 접속사, 전치사, 관사 등이 사라진다.(Jakobson, Roman, 신문수 편, 「언어의 두 양상과 실어증의 두 유형」, 문학 속의 언어학, 문학과지성사, 1989, 105-106면.) 김형중은 「저기 소리없이」에서도 접속사, 어미, 관계사가 생략돼 의미 있는 문장으로 성립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김형중, 앞의 논문, 77-78면.)

 

소설의 도입부인 ①에서 서술자는 독자들이 어떤 인물(소녀)을 왜 만나게 될지에 대한 언급 대신 “꽃자주 빛깔의 우단 치마, 긴 머리채에 시든 꽃송이로 화관 장식” 등의 낱말을 등장시킨다. 같은 원리로 다른 인용문에서도 “검은 장막, 파랑새, 백색의 구멍, 꽃자주색 치마” 등 기의를 알 수 없는 기표를 나열한다. 검은 장막은 사건에 대한 소녀의 죄의식, 파랑새는 그녀를 겁탈한 남 성들, 백색의 구멍은 그녀의 죽음 등을 은유하는데 이런 파편적인 낱말에 바탕해 독자들이 인물과 사건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에도 이 소설이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지, 소녀가 당했던 일이 시간·공간적 으로 어떤 순서로 배열돼 있는지 혼란스러워 한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재현적 체제의 규범을 거스르며 예술을 구성하는 행위야말 로 허구의 본질이며 이런 글쓰기를 미학 혁명45)으로 명명한다.「저기 소리없이」 에서도 서술자는 주제나 줄거리와 무관하게 낱말과 문장을 배열하고 있기 때문 에 독자들도 재현적 체제의 원리인 사건의 인과적 배치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랑시에르가 언급한 허구의 개념이며 이런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예술의 식별법, 새로운 인식의 틀로서 미학적 체제가 태동한다. 이렇게 보면 허구는 재 현적 체제에서 예술로 감각할 수 없는 실재(the real)를 예술로 감각할 수 있도록 재구성(reframing)하는 작업이다.46) 다시 말해 미학적 체제에서는 모든 실재가 예 술이 될 수 있는 평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고 그 평등을 실현하는 작업이 허구이 다.47) 예술에 있어 허구는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을 실천하는 행위, 즉 기 존의 감각적인 것의 분할에 대한 불일치(dissensus)48)이므로 랑시에르적 사유에서 그것은 곧바로 정치로 간주된다.

 

      45)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12, 49면.

      46) Rancière, Jacques. Dissensus: On Politics and Aesthetics, ed. and trans. Steven Corcoran, Continuum : London, 2010, p. 141.

      47)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단순한 무차별 체계로 구성되었다. 이런 주장을 하며 그는 플로베 르의 마담 보바리를 예로 든다. 그 소설 속에서 발견되는, 문체의 절대화는 민주주의적 평등 원리에 응답한다. 글쓰기의 평등주의적 순환도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의 주인공 엠마 보바리의 허구적 삶에 접근하고, 그 삶을 자기 자신의 삶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덧붙여, 플로베르는 문자의 임의적 순환과 그것이 산출하는 미학적 평등 유형에 대립하는 그의 문학적 평등을 구성한 다.(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76면.)

      48) Rancière, Jacques. op. cit., p. 141. 

 

「저기 소리없이」역시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텍스트로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Ⅳ. 결론

랑시에르에 따르면 통념상의 정치는 권력 행사나 권력 투쟁을 의미한다.49)

 

      49)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9면.

 

이 런 통념적 시각에서 보면 권력지향적 중심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임철우의 봄 날은 정치적이지도 않고, 정치적 서사물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의 주제는 국가, 체제, 계급 전복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부당 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시민들의 봉기는 자신들을 수호해야 할 정부와 군대의 폭력과 그에 따른 인간 존엄성의 파괴에 대한 분노였으며, 계급, 민중, 민주시민 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또 한국이라는 국가에 속한 국민과 시민으로서 시위 에 참여한 것이다. 이렇듯 일반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봄날은 통념상으 로는 정치적 텍스트로 볼 수 없지만, 랑시에르적 사유로 보면 이 소설은 말과 사 물의 과잉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미학적 정치성을 띠고 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랑시에르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배분하는 것이 감성의 분할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정치는 권력 투쟁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 외에는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참여해 말하 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즉 사람들 사이의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발생한다. 다시 말해 헐벗은 존재들이 평등을 주장하는 행위로부터 정치는 출현한다. 봄 날의 경우 헐벗은 존재들은 공수부대의 폭력을 목격하고 분노하는 과정을 통해, 그런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군이라는 또 다른 반폭력50)을 구성하는 과정 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평등한 관계에 이른다.

 

         50) 사카이 다카시는 현재의 지배 질서에 반대하면서 원폭력에 대항하는 맨몸의 저항을, 비폭력이나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되갚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과 구분해 반폭력(anti-violence)으로 정의한다.(사카이 다카시, 김은주 옮김, 폭력의 철학, 산눈, 2007, 25면.)

 

시민군에는 노동자, 대학생, 농 민, 직장인 등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동안의 사회가 강 제했던 부와 직업의 편견이 없었다. 그들은 폭력이라는 소통 방식을 통해 기존에 없었던 평등한 관계를 선취했다는 점에서 봄날은 랑시에르적 사유에서 보면 미학적 예술 체제, 즉 문학 정치의 실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소설뿐만 아니라 5·18을 배경으로 하는 다른 장르에도 적용 가 능하다. 박효선의 희곡, <금희의 오월>은 중심인물이 정연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가족들의 내면 고백도 드물고 극적 긴장을 높이는 인물간의 대립도 없다. 이런 이유로 극에서는 정연과 금희네 가족의 무대에 비해 시장 사람들이 등장하는 마 당극이 관객의 눈길을 끄는 중심 공간으로 기능한다. 랑시에르는 정치는 자기 일 외에는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말하는 존재임을 입증 할 때 정치가 시작된다고 보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금희의 오월>은 기존의 치안 질서에서 소외된 하층민을 가시화시키는 정치극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그동안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소음으로 간주된 말들이 기 존 질서의 담론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희의 오월>에서 서술자가 중심인물인 정연에 못지않게 시장 상인들의 극화에 치중하고 있는 점은 랑시에 르 정치미학의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보면, 정치적 인물이 중심인물로 기능하고 있지 않아서 비정치적 서사물로 평가 받는 여타의 5·18 창 작물에 대해서도 랑시에르적 사유를 적용할 경우 정치미학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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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Political Aesthetics in the 5·18 Novel - Based on Rancière's Politics of Literature

Yang, Jin-young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look at 5·18 literature through a different approach from traditional historical considerations. To this end, this article will try to apply the terms and concepts that Jacques Rancière theorized for two novels representing the Gwangju Uprising in Korea. His political aesthetics are a useful methodology for reinterpreting 5·18 literature as it goes beyond the binary boundaries of participatory literature, pure literature, political art and aesthetic art. To this end, this article will read Lim Chul-woo's Spring Day and Choi Yoon’s There, soundless, a petal falling depending on how Rancière reads Balzac's La Peau de chagrin and Flaubert’s Madam Bovary. For Rancière reasons, Spring Day is a text that shows the excesses of words and objects seen in Balzac’s novels, and There, soundless, a petal falling is an example of democratic writing in that it reveals the aesthetics of fiction by rejecting the rules of reproduction, the literary style of Flaubert novels. The two novels need to be reinterpreted through a new approach in that they contain political aesthetics that do not rule politics through the excesses of words and objects and fictions conceptualized by Rancière. Rancière considers the work of distributing the sensible system they set up against Plato and Aristotle, which create a hierarchy of abilities and incompetence, as the essence of politics. Rancière believes politics only begins when those who do not have a share stipulated by Plato and Aristotle are the ones who speak in the community. Therefore, allocating and redistributing languages and noise, visible and non-visible, etc. forms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that Rancière refers to. Rancière's political  act is to form a new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to bring new objects and subjects to a common stage, and to show what was invisible. In this regard,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is political in itself. Rancière regards art as a representative form of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in that it plays a role in disrupting and destroying existing systems. Here, it becomes possible to argue that politics is aesthetic and aesthetics are political as well. For Rancière’s reasons, novels such as There, soundless, a petal falling where no political figures appear and no background or event is politically motivated are also practicing the politics of literature. Rancière points out that in the way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s is made, the unvisual becomes visible, the words considered noise are discourse, the excesses of words and objects are revealed, or the fictitious writing is realized. Since one or two of these four methods can be seen as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s, this paper adopted a method of considering the excess of words and objects in Spring Day and fiction in There, Soundless and a petal fall. To be specific Chapter II examined Lim Chul-woo’s Spring day in which speeches, which have been considered noise are revealed in languages based on Rancière’s reasons. As a result, the surplus of languages and things of the social subordinate subjects, which is expressed in Spring day is a Rancière political aesthetics that tries to redistribute the existing sensible to their own way by visually revealing their existence in an invisible state. In Chapter III, based on Rancière’s view of writing that is inconsistent with existing reproducible writing principles as fiction, this articles reads There, soundless, a petal falling. As a result, the novel has aesthetic political character in that it attempts to redistribute the sensible in a way that arranges words and sentences without being conscious of the causal arrangement of events, which is the norm of reproducible writing. Key words Jacques Rancière,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The politics of literature, 5·18, Gwangju Uprising, Lim Chul-woo, Choi Yoon, Spring day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88집(24권 3호),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20년 7월 10일 접수   2020년 8월 21일 심사완료    2020년 8월 27일 게재확정

5&middot;18 소설의 정치미학 연구 -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에 바탕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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