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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위만조선-漢나라의 전쟁 양상/조원진.세종대

 1. 머리말

2. 위만조선-漢나라 전쟁의 원인 및 시작

3. 초기전투 양상과 협상 결렬

4. 왕검성 전투와 위만조선 멸망

5. 맺음말

 

1. 머리말

본 연구는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 원인 및 전쟁 양상에 대한 검토를 목표로 한다.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에 대해서는 주로 위만조선의 흥망을 검토하면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으며1) 역대 전쟁사의 일환으로 연구되었다. 2) 최근에는 史記 朝鮮列傳에 대해 다른 이민족열전과 의 비교를 통한 재검토3)와 위만조선의 통사를 다루면서 이루어진 검토4), 전쟁 당시 漢나라의 전쟁 전략 및 왕검성의 붕괴 시점 검토 를 통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5)가 이루어졌다. 또한 漢代의 선박6) 및 군사제도7)에 대해서도 연구되었다. 특히 史記 朝鮮列 傳의 전쟁 기사가 漢나라의 전쟁 결과 보고를 위한 공문서에 기초 했다는 연구8)는 사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있다. 

 

         1) 이병도,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 김정배, 「위만조선의 國家的 性格」,사총 21·22, 1977 ; 윤내현, 「위만조선의 재인식」,史學志19, 1985 ; 서영수, 「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韓國古代史硏究9, 1996 ;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 전대준·최인철, 조선단 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0 ; 박경철, 「古朝鮮 對外關係 進展과 衛 滿朝鮮」,東北亞歷史論叢 44, 2014 ; 박준형, 고조선사의 전개, 서경문화사, 2014 ; 조원진, 「위만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검토 -朝·漢 전쟁 이전을 중심으로-」, 白山學報109, 2017.

        2) 서인한, 韓民族戰爭通史1(고대편), 國防軍史硏究所, 1994, 30~62쪽 ; 서인한, 한 국고대 군사전략,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5, 51~75쪽 ; 서인한, 한중군사관계 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7, 3~26쪽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1, 27~38쪽 ;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1(고대1), 육군본부, 2012, 71~92쪽 ; 陳梧桐·李德龍·劉曙光, 中國軍事通史 5(西漢軍事史), 軍事科學出版社, 1998, 295~298쪽 ; 編寫組, 中國歷代戰爭簡史(修訂版), 解放軍出版社, 2006, 104쪽 ; 三軍大學, 中國曆代戰爭史第3冊(楚漢戰爭~東漢), 軍事譯文出版社, 2012, 206~ 210쪽.

         3) 기수연, 「사기의 이민족 기재방식과 「조선열전」」,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 산업사, 2005 ; 김병준,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 조선열전의 재검토-」, 韓國古代史硏究 50, 2008.

        4) 김남중,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 과정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4, 165~ 171쪽 ; 苗威, 衛氏朝鮮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9, 44~49쪽.

        5) 조법종, 「衛滿朝鮮의 崩壤時點과 王險城ㆍ樂浪郡의 位置」,한국사연구110, 2000a ; 조법종, 「위만조선의 대한 전쟁과 강한제후국의 성격」,先史와 古代 14, 2000b ; 박성용·남창희·이인숙, 「漢나라 군사작전으로 본 위만조선 왕험성 위치 고찰」, 국방연구 58-2, 2015.

       6) 席龍飛, 中國造船史, 湖北敎育出版社, 1999, 70~100쪽 ; 王冠倬 編, 中國古船圖 譜,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2000, 53~78쪽.

       7) 백기인, 중국군사제도사, 國防軍史硏究所, 1998, 71~88쪽 ; 李德龍, 漢初軍事史 硏究, 民族出版社, 2001.

       8) 김병준, 앞의 논문, 2008, 6~10쪽.

 

이처럼 위만조선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양국 전쟁의 원인이나 전반적인 전쟁의 양상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여전히 소홀한 면이 있었다.

史記 朝鮮列傳에 기록된 위만조선의 漢나라와의 전쟁 양상은 크게

①전쟁원인(섭하의 파견과 교섭 실패 및 조선 비왕 살해)

②전 쟁 반발(섭하의 요동 동부도위 임명과 위만조선의 공격)

③초기전쟁

④교섭시도 및 실패

⑤패수 방어선 붕괴와 왕검성 포위

⑥조선의 내부분열과 우거왕 암살

⑦成巳의 항쟁과 왕검성 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지만 史記 朝鮮列傳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전해 주지는 않고 주로 ①, ③, ④, ⑥의 정황만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초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간 이유나 교 섭 상황 및 패수 방어선이 무너진 이유 등 전쟁의 주요 양상이 분 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기록에 직접적으로 명시되 어 있지는 않으나 전후 상황을 충분히 검토해 본다면 유추해볼 여 지가 있다.

특히 전쟁 원인과 협상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에 대한 검토가 소홀하여 전쟁 원인과 초기 전쟁 양상 및 협상 결렬 이유 등을 살펴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해당 사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동안 구체적으 로 밝혀지지 않았던 전쟁 양상에 대해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史記 朝鮮列傳이며 이외에도 史記, 漢書의 관련 기사 및 史記 三家注 등의 문헌자료를 참 고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은 철저히 漢나라 중심으로 쓰여진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본고는 이러한 점을 유의하며 史記 南越 列傳 등 다른 이민족열전의 기술 방식과 비교하면서 관련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 

 

2. 위만조선-漢나라 전쟁의 원인 및 시작

가. 섭하의 파견과 조선 비왕 살해

전쟁 원인에 대한 史記 朝鮮列傳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A-① 아들을 거쳐 孫子 右渠 때에 이르러 유인해 낸 漢나라 망명 자 수가 대단히 많아졌고, 天子에게 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 라 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天子에게 알현하려 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A-② 元封 2년(B.C.109)에 漢나라는 使臣 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右渠는] 끝내 [漢나라]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浿水에 이 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裨王 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드디어 天 子에게 “조선의 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가 그 공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하를 遼東 東部都尉에 제수했다.9) A-①에서 보듯이 전쟁 원인에 대해 史記 朝鮮列傳은 위만조선 이 漢나라 외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기술하였고 이어서 섭 하를 살해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전쟁 원인을 조선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인식은 후대에도 이어져 漢書 武帝紀에는 “조선왕 이 요동 도위를 공격하여 살해하자 (…) 조선을 쳤다.”10)고 하였고, 通志11), 册府元龜12), 文獻通考13) 등에서도 史記 朝鮮列傳을 인용하여 전쟁 원인을 우거왕의 섭하 살해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9)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 55,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 旁衆 國欲上書見天子 又擁 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 諭 右渠 終不肯奉詔 何 去至界上 臨浿水 使御 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 殺朝鮮 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10) 漢書 卷6 武帝紀 第 6, "朝鮮王攻殺遼東都尉 乃募天下死罪擊朝鮮"

        11) 通志 卷194 四夷傳 第1 東夷 朝鮮, "朝鮮殺漢使者 即時誅滅(...)朝鮮怨何 發兵 襲攻殺何 天子募罪人 撃朝鮮"

        12) 册府元龜 卷982 外臣部 征討,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

        13) 文獻通考 卷324 四裔考1 朝鮮, "朝鮮怨 發兵襲攻殺之 漢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 渤海"

 

 그러나 史記 朝鮮列傳에서 전쟁 원인이 조선에 있었던 것처럼 기술된 것은 史記의 기술방식과 관련된다. 史記 朝鮮列傳은 양 국 전쟁에 대한 기본 자료지만 이 내용은 전쟁을 도발하고 또 결과적으로 승리했던 漢人에 의해 작성된 전쟁 공적 보고서류에 근거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위만조선의 전략 등 전쟁의 전말 이 어떠했는지 기록된 것이 아니라 漢나라가 위만조선 침공을 어떻 게 합리화하고 평가했는지가 적혀 있다.14) 그러나 당시 전쟁의 직 접적인 원인은 漢나라 섭하의 위만조선 비왕 살해이며 나아가 국제 정세에서 본다면 漢나라의 대외팽창과 흉노와의 전쟁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15) 하지만 漢나라가 ‘반란’을 판단하는 근거는 누가 먼 저 침공했는지가 아니라 신하의 신분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에 거역했는지 여부일 뿐이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에 전쟁을 도발한 漢 나라에 가장 중요한 직접적 원인은 ‘반란’이어야 했고, 이를 억지로 라도 찾으려했다. 16)

 

       14) 김병준, 앞의 논문, 2008, 7쪽.

       15) 조원진, 앞의 논문, 2017, 75~80쪽.

       16) 김병준, 앞의 논문, 2008, 19~20쪽.

 

양국의 전쟁 원인은 위만조선의 지리적 위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만조선은 ‘方數千里’의 영토와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동북 강국으로 북쪽으로는 흉노의 동쪽 영토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요 동 패수를 경계로 漢나라와 인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은 흉노와 연계하여 漢나라를 동북 측면에서 군사적 위협을 가할 수 있고 반대로 漢나라와 연계하여 흉노를 서북 측면에서 공략하고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漢나라와 흉노 간에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양국 간의 전세를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7) 이미 한문제 시기 장군 진무 등은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청한 바 있다.18) 이에 문제는 흉노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는 시기에 전쟁보다는 화친을 맺어 변방을 안정시키자고 거절한다. 그러나 한무제 시 기 漢나라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 기 시작했다. 특히 기원전 127년 위만조선 우거왕에게 반기를 든 예군남려가 투항하려 하자 漢나라는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려 하다 실패한 바 있다. 19)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이미 이전부터 漢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을 원하고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무제시기에 바뀐 漢나라의 대외정책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무제는 즉위초인 기원전 138년 東甌가 閩越의 침입에 따라 구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군대를 파병하며 주변국의 정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어 한무제는 기원전 133년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는데 비록 선우를 잡지는 못했으나 이제 漢나라가 적극적으로 흉 노를 공격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무제는 창해군 설치를 시도했던 기원전 127~125년에는 흉노와 전쟁 중이라 위만조선을 압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漢나라는 흉노와의 대규모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주변국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漢나라는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켜 9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동월을 멸 망시켰다.20)

 

       17) 이춘식, 고대 중국의 패권전략과 주변국 조공화,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229쪽.

       18) 史記 卷25 律書 第3, “南越朝鮮 自全秦時內屬爲臣子 後且擁兵阻阸 選蠕觀望”

       19) 史記 卷30 平準書 第8, “至今上卽位數歲(…)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 閒靡然發動”

       20) 漢書 卷6 武帝紀 第6. 

 

한무제는 흉노, 양월, 서남이와의 관계가 마무리되자 A-②에서 보듯이 기원전 109년 섭하를 파견하여 위만조선과의 관계를 개선 하려고 했다. 섭하의 파견과 전쟁의 시작은 史記 朝鮮列傳에 비 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여기서 당시 양국 관계가 악화된 이유를 크 게 3가지를 들고 있다.

① 유인해 낸 漢나라 망명자수가 대단히 많 게 되었으며,

② 천자에게 입견하지 않고

③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섭하가 구체적으로 우거왕에게 무엇을 요 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위의 3가지 범주 안에서 우거왕을 설득했 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거왕은 끝내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 지 않았다고 한다. 이중 우거왕에게 천자에게 입견할 것을 요구했다 면 이것은 위만조선의 복속을 요구한 것이므로 들어줄 수 없는 것 이었다. 또한 漢나라인들을 유인해내는 것은 이들을 통해 인력, 인 재, 기술 등을 확보하고 국제 정세 정보도 입수할 수 있는 국가의 핵심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주변 나라들이 漢나라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위만조선에 대한 정보를 漢나라가 입수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21)

 

    21) 이춘식, 중국패권의 뿌리와 이념, 고려대학교출판부, 2014, 238~248쪽. 

 

따라서 漢나라의 요구는 모두 위만조선 입장에 서 쉽게 허락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우거왕을 설득하지 못한 섭하는 당시 공을 세우지 못하고 한무제 에게 돌아갈 경우 처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섭하는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했고 이에 돌아가면서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裨王 長을 찔러 죽이게 된다. 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돌아왔다는 섭하의 보고에 한무제는 섭하 를 遼東 東部都尉에 제수하며 위만조선을 자극하게 된다. 결국 전쟁 의 직접적인 발단은 섭하가 조선 비왕을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한 무제가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삼은 것은 조선의 공격을 유도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漢나라의 도발에 대해 위만조선은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요동 동부도위 공격으로 이어진다.

 

나. 위만조선의 요동 동부도위 공격

전쟁의 시작은 한무제가 조선 비왕을 살해한 섭하에게 遼東 東部 都尉라는 관직을 내렸고 우거왕이 이를 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면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史記 朝鮮列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A-③ 이에 朝鮮은 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공격해 何를 죽이니, 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朝鮮을 치게 하였다.22)

 

그런데 여기서 섭하가 임명된 요동 동부도위 치소는 漢書 地理 志에 의하면 요동군 무차현에 있었으며 위치는 요령성 鳳城縣 鳳山 鄕 劉家堡村 남쪽에서 발견된 대형 漢城으로 추정된다. 23) 위만조선 시기 漢나라 요동 동부도위의 기록은 섭하와 관련된 기사가 유일하 다. 요동 동부도위는 양국의 국경선인 패수에서 가까운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요동 동부도위의 위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쟁 초기의 양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위만조선 시기 漢나라 요동군의 범위에 대해서는 양국의 국경선인 패수의 위치 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에는 패수의 위치에 대해 청천강설, 압록강 설이 주로 주장되었으나 최근 패수=혼하설도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 다.24) 前漢紀25)에는 고조선과 漢나라의 경계를 遼水로 기록하여  요수(소요수)를 국경으로 삼은 정황을 전해주며26) 위만조선이 ‘方數 千里’이며 주변 집단이 漢나라 천자에 입조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22)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55,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23) 孫進己·王綿厚 主編, 東北歷史地理(1),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292~293쪽.

      24) 서영수,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東洋學 29, 1999 ; 김남중, 「衛滿 朝鮮의 領域과 王儉城」,韓國古代史硏究22, 2001 ; 박준형,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중심지와 서계의 변화」,史學硏究 108, 2012 ; 오현수, 「회남자 기재  ‘갈석’과 ‘요수’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한국학35-4, 2012 ; 조원진, 「고조선과 秦나라의 대외관계 연구」,史學硏究129, 2018. 

      25) 前漢紀 孝武皇帝紀 卷第14, “漢興以爲其遠難守 故遼水爲塞” 

     26)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44~48쪽.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요동군은 요동 서부도위, 요동 중부도 위, 요동 동부도위 등 3개의 부도위를 두고 있었다. 이중 요동 서 부도위는 무려현, 요동 중부도위는 후성현, 요동 동부도위는 무차현 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위만조선 시기에 요동 동부도위는 서안평 현이었으나 이후 방어가 용이한 무차현으로 옮겼다고 추정하는 견 해도 있다. 27) 중국학계에서는 전국시대 燕나라가 청천강까지 진출 하면서 燕·秦·漢 세력이 계속해서 요동전역에 요동군을 설치했다 고 보고 있다.28) 그러나 요동 동부도위 치소가 무차현인 것은 위만 조선 멸망 이후에 기록된 漢書 地理志에서 확인되며 위만조선 시 기에 요동군의 정확한 범위와 동부도위 치소 위치는 알 수 없다. 위만조선시기에도 요동 동부도위가 무차현이나 부근에 있다는 보는 것은 요동군의 범위가 위만조선 멸망 전후로 변화가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 가능하다. 패수=압록강설의 입장에서는 요동 동부도위가 패수 서쪽의 당시 위만조선과 가까운 단동부근에 위치했다고 추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하=패수설29)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정황을 다르게 볼 수 있다.

 

       27) 권오중, 「滄海郡과 遼東東部都尉」,역사학보 168, 2000, 114쪽.

       28) 孫進己·王綿厚 主編, 앞의 책, 1989 ; 劉子敏, 「戰國秦漢時期遼東郡東部邊界考」, 社會科學戰線5, 1996, 132~139쪽.

       29) 패수를 혼하로 본다면 요동지역에서 확인되는 서한전기에 조영된 한묘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위만조선으로 유인해낸 漢人이 많다는 기록이 주목하여 이른시기 한묘를 漢나라에서 위만조선으로 정착한 이주민이 조영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강둔한묘에서 출토된 동한대의 백색토기와 서한초기의 타날문장경호 등은 산동반도의 동 시기 토기와 통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의 출자가 산동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정인성, 「위만조선시기 요동반도 남부의 강둔한묘」,북방지역 주요 고고 유적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까지, 동북아역사재단, 2020, 420쪽). 

 

 史記 朝鮮列傳30)은 燕나라가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鄣塞를 설치했고, 秦나라가 遼東外徼를 설치했으며, 漢나라는 秦나라 보다 후퇴하여 연나라가 설치했던 遼東故塞를 수리하여 浿水를 경계로 삼은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漢나라-遼東故塞-浿水-遼東外 徼-古朝鮮’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확인된다. 鹽鐵論에는 燕나라 등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병합한 秦나라가 “沛水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31)고 하여 양국의 국경선으로 沛 水가 언급된다. 史記의 浿水와 鹽鐵論의 沛水는 동일한 강으로 볼 수 있다. 漢書 地理志를 보면 요동군 번한현조에는 沛水가32), 낙랑군 패수현조에는 浿水가33), 현도군 서개마현조에는 마자수와 염난수가34) 언급된다. 여기서 沛水는 혼하로, 浿水는 청천강으로, 마자수와 염난수는 압록강과 혼강으로 각각 비정할 수 있다. 35) 따 라서 고조선과 漢나라의 국경선인 浿水는 지금의 혼하로 문헌의 성립연대에 따라 표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조선의 후퇴로 패수의 명칭이 이동하였기 때문에 서한 말기부터는 요동의 浿水를 고조선 중심지와 가까운 浿水와 구분하기 위해 沛水로 고쳐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36)

 

     30)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55,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 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31) 鹽鐵論 卷8 誅秦第44, “秦旣幷天下東絶沛水並滅朝鮮”

     32)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遼東郡, “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

     33)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樂浪郡, “浿水(水西至增地入海)”

     34)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玄菟郡,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 入海)”

     35) 박준형, 앞의 논문, 2012, 11~12쪽.

     36) 서영수, 앞의 논문, 1996, 104쪽. 

 

<지도 1> 서한의 요동군 속현 위치(王綿厚·李健才, 1990 수정):생략(별첨논문파일참조)

① ② ⑦ ⑨⑤ ● ❸ ⑧ ④ ◯17❻ ①襄平縣 ②新昌縣 ❸無慮縣 ④望平縣 ⑤房縣 ❻候城縣 ⑦遼隊縣 ⑧遼陽縣 ⑨險瀆縣 居就縣 高顯縣 安市縣 ⓭武次縣 平郭縣 西安平 文縣 番汗縣 沓氏縣

※ 각 부도위 번호는 검은색으로 표시함

 

패수를 혼하로 본다면 당시 무차현은 위만조선 영역 안에 포함되 기 때문에 섭하가 요동 동부도위로 부임할 수 없는 곳이다. 반면 요동 서부·중부도위는 패수 서쪽에 위치하여 위만조선 당시에 2개 의 부도위는 위만조선 영역 밖에 이미 설치되어 있다고 볼 수 있 다. 특히 요동군 중부도위의 치소인 후성현의 위치는 대체로 瀋陽 일대로 고증된다. 구체적으로는 戰國~漢代의 풍부한 유적이 발견된 심양 시내의 舊城址로 보거나37)

 

    37) 孫進己·王綿厚 主編, 앞의 책, 1989, 281~283쪽. 108 |軍史 第118號(2021. 3.)

 

혹은 심양시 東陵區 혼하 남쪽  上伯官屯 漢城이나 심양 동남쪽 古城子로 보기도 한다. 38) 후성현은 혼하와 가까운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요서군에는 동부도위와 서부도위만 있는 데 요동군에는 이보다 더 많은 3개의 부도위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 해볼 수 있다. 이전 위만조선시기에는 요동군도 2개의 부도위만 있 었으나 위만조선 멸망후 부도위를 하나 더 설치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요동 서부도위와 요동 중부도위는 혼하 서쪽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면 이후 중부도위가 되는 후성현은 위만조선 시기에는 동부도위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만조선 멸망 후 漢나라는 요동군을 재편하면서 종전의 동부도위였던 후성현을 중부도위로 삼고, 위만조선의 영역이었던 지역에 동부도위인 무차현 등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우거왕은 패수인 혼하를 건너 당시 요동 동부도위인 후성 현을 공격하여 섭하를 처치한 것이다. 그리고 우거왕이 요동 동부도 위를 공격하면서 이 지역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위만조선은 향후 전면적인 전쟁을 대비하여 패수 서쪽의 방어에 유 리한 지역을 미리 선점한 것이다. 이 점은 이전 고조선과 중원국가 와의 전쟁 기록에서 燕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요동을 건너 조 선을 쳤다.” 39)고 하거나 秦나라가 “패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 다.”40)고 한 것과 대비된다.

 

    38) 王錦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 沈陽出版社, 1990, 39쪽 ; 권오중, 「요동군 중 부도위와 고구려의 신성」,고구려의 국제관계, 동북아역사재단, 2005, 22쪽.

   39) 鹽鐵論 卷8 伐功 第45,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 而攻朝鮮” 여기서 ‘요동’은 ‘요하’의 오류라고 보기도 한다(서영수, 앞의 논문, 2008, 33쪽).

  40) 鹽鐵論 卷8 誅秦 第44,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並滅朝鮮” 

 

이들 기사가 특정 강이나 지역을 건너 조선을 공격했다고 기록된 사례와 달리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 기사에 패수를 건너 조선을 쳤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즉 위만조선은 이미 패수 서쪽 漢나라의 요동 동부 도위 일부지역을 차지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던 것이다. 

 

3. 초기전투 양상과 협상 결렬

가. 한 수륙군의 규모와 초기 전투

漢나라의 출병 및 초기 전투 양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B-① 그 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㒒을 파견하여 齊지역으로부터 배 를 타고 渤海를 건너게 했다. 군사 5만이다. 左將軍 荀彘는 요동을 나와 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B-② 左將軍의 卒正인 多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 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多도 도망하여 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B-③ 樓船將軍은 齊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王險에 이르 렀는데, 右渠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城을 나와 樓船軍을 치니 樓船軍은 패해 흩 어져 도망갔다. 將軍 楊㒒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 중에 숨어 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았다.

B-④ 左將軍도 조선의 浿水 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나아갈 수가 없었다.41)

 

      41)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55,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 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 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 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 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 浿水西軍 未能破自前” 

 

B-①에서 보듯이 漢나라는 수군과 육군으로 이루어진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것은 이전에 고조선과 燕나라 및 秦나라와의 전쟁이 육지에서만 이루어진 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수군과 육군을 통해 한반도를 공격한 첫 사례에 해당한다. 여기서 수군과 육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B-① “遣樓船將軍楊 僕從 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에서 ‘兵五萬人’을 앞쪽에서 끊어 읽어 좌장군의 군대를 5만 명이고 누선장군의 군대 가 7천 명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누선장군 양복의 군대가 5만 명이었다.”로 읽어 출발한 군대가 5만 명이었는 데 7천 명만이 도착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42) 중국학계에서는 위만조선-漢나라 전쟁이 역대 전쟁사의 일부로 연구되고 있는데 史記 朝鮮列傳의 내용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언 급하고 세심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위만조선의 영역을 압록강 이남으로 이해하면서 漢 수륙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누선군 이 5만 명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순체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하 지 않거나 5~6만 명이었다고 추정한다. 43)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 전쟁이 齊지역으로부터 발해를 건너 공격을 시도한 첫 사례라는 점 에서 의의를 부여한다. 44) 한편 북한학계에서도 漢 수군이 5만 명이고 전체 漢兵은 10만 명이 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45)

 

    42) 김병준, 앞의 논문, 2008, 26~28쪽 ;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편, 역 주 중국 정사 동이전 1 :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동북아역사재단, 2020, 24쪽.

   43) 陳梧桐·李德龍·劉曙光, 앞의 책, 1998, 295~297쪽 ; 編寫組, 中國歷代戰爭簡 史(修訂版), 解放軍出版社, 2006, 104쪽 ; 三軍大學, 앞의 책, 2012, 208~210쪽.

   44) 王子今, 「論楊仆擊朝鮮樓船軍 “從齊浮渤海”及相關問題」,魯東大學學報(哲學社會 科學版) 1, 2009, 1~6쪽 ; 苗威·李新, 「西漢海伐衛氏朝鮮考論」,海交史研究 2, 2018, 104~106쪽.

   45) 전대준·최인철, 앞의 책, 2010, 168쪽.

 

수군이 본래 5만이었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 하면 당시 양복이 거느린 군대가 7천이었는데 군대수가 적은 것을 우거왕이 알고 쉽게 격파하기 때문이다. 양복의 군대가 단독으로 왕 검성을 공격하기 적은 군대수였다면 육군과 수군이 비슷하게 합류 할 수 있도록 양 군대의 도착시간을 맞추는 것이 전략상 옳은 판단 이었다.

특히 패수를 혼하로 볼 경우 육군은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패수를 건너 요동을 돌파하며 다시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 지 진격해야 한다. 따라서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인데 소수의 수군을 훨씬 먼저 도착하게 하여 우거왕의 공격을 받게 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와 비교해볼만한 자료는 漢나라의 남월 공략이다. 당시 漢나라 복파장군은 죄인들을 거느리고 오면서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여 누선장군을 만났을 때는 불과 천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선의 공격을 받은 반우의 성중 사람들은 모두 소수의 군사를 거느린 복파장군에게 항복하였다. 46)

 

    46) 史記 卷113 南越列傳.

 

하지만 이것은 당시 남월의 성안 사람들이 평소 복파 장군의 이름을 들었었고 날이 저물어 그의 군 대 규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누선의 공격으로 복파의 영채 안으 로 몰리면서 발생한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복의 군대가 본래는 단독 공격 수행이 가능한 규모의 군대였다면 당시 한나라의 군사 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죄 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라 왕검성에 도착할 때는 홀로 공격하기 어려 운 7천의 군대만 남았고 이에 漢나라는 전략을 수정하여 양복에게 육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남 월 정벌 때 10만의 군대를 동원했던 漢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그 절반인 5만 7천의 군사를 동원했다는 의문도 해결된다. 즉 漢나 라는 원래 수군과 육군 모두 약 5만정도로 총 10만의 군대를 편성 하여 조선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수군 상당수가 이탈하면서 수륙 군이 합류한 이후 왕검성을 공략하도록 전략을 바꾸었다고 보는 것 이다. 그러나 패수전투에서도 위만조선의 군대에 고전하면서 漢나라 는 본래의 전략대로 전쟁을 이끌어가지 못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漢나라 수군의 규모는 당시 노선과 후대 사례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산동반도에서 한반도로 향하는 항로는 크게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황해도 혹은 평안도 연해에 이르는 서해 북부 연 안 항로와 산동반도에서 직접 한반도로 향하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 가 있다.47) 서해 북부 연안항로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는 묘도열도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이것은 산동지역의 용산문화와 악석문화의 토기가 요동반도에서 발 견되고 산동지역에도 요동지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과 석관묘가 확인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48) 중국문헌에서 고조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 齊나라와 고조선의 문피교류가 서술된 管 子인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고조선 과 齊나라의 문피교류는 산동반도에 거주했던 萊夷의 영향력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산동지역의 고인돌은 요동에서 산동지역으로 이주한 고조선계(예맥계) 주민 집단에 의해 건립되었고, 이들이 고조선과 齊나라의 교역과정에서 중간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한다. 49)

 

      47) 정진술, 한국의 고대 해상교통로, 韓國海洋戰略硏究所, 2009, 196~199, 252~ 254쪽.

     48) 蔡鳳書, 「古代山東文化と交流」,東アジアと半島空間 : 山東半島と遼東半島, 思 文閣出版, 2003,45~58쪽 ; 박준형, 「산동지역과 요동지역의 문화교류 -산동지역 에서 새로 발견된 선형동부를 중심으로-」,한국상고사학보79, 2013, 39~68쪽.   

      49) 박준형, 「古朝鮮의 海上交易路와 萊夷」,북방사논총 10, 2006, 179~191쪽. 

 

이처럼 서해 북부 연안항로는 오래전부터 이용되었다. 따라서 산동지역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항로는 당시 漢나라가 가장 일반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루트라고 볼 수 있 다. 다만 이 항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 연안 등을 거쳐야 하기 때 문에 조선군의 반격을 받을 수 있고 왕검성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산동반도에서 직접 한반도로 향하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의 경우도 고려해볼 수 있다. 양 지역 간의 최단거리는 180km 정도로 그 사이에 앞서 북부 연안항로와 달리 섬이 분포하 지 않는다. 다만 황해남도 해안에서 20km도 채 떨어지지 않아 백 령도가 있을뿐 시인거리에 미치지 못하여 지문항법이 불가능한 구 역이 중간 공해상에 있다. 이 횡단항로는 목적지 해안에 대한 정보 를 확보하지 않으면 찾아가기가 어려운 항로이다. 때문에 오랜 시행 착오를 거쳐 양쪽 해안의 지형을 숙지하였을 때 비로소 왕래가 가 능한 루트이다. 고조선 후기 혹은 한군현이 황해남도에 중심지에 자 리잡은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50) 또한 全羅北道 完州 上林里 에서 26점의 중원식 동검이 출토된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齊나라 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이 유물의 이동 경로를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서해안으로 곧바로 횡단했다고 보기도 한다. 51) 다만 산동지 역과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항해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특별한 정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52) 만일 漢 나라의 수군이 서해 중부 횡단항로를 통해 왕검성으로 곧바로 향했 다고 한다면 B-①~③에서 보듯이 수군이 육군보다 이른 시기에 왕 검성에 도착한 것과 齊지역에서 발해를 건너 곧바로 왕검성에 도착 한 것처럼 기록된 내용과도 부합한다. 新唐書 地理志53)에 실린 唐나라의 賈耽의 道理記에는 登州에서 한반도지역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가 기록되어 있다.

 

      50) 이청규, 해상활동의 고고학적 기원과 전개, 경인문화사, 2016, 65쪽.

      51) 이청규, 「동검을 통해 본 산동과 한반도 및 주변 지역간의 교류」,중국 산동지역의 동 이, 역사공간, 2018, 235∼269쪽.

      52) 이청규, 앞의 책, 2016, 145쪽.

     53) 新唐書 卷43下 志 第33下 地理 7下. 1

 

이 교통로는 등주에서 요동반도 남단을 거 쳐 烏骨江(압록강 어귀)에 이르는 항로와 등주에서 산동반도 연안을 따라 동쪽 끝 秦王石橋(성산각)에 이르고 동쪽으로 곧바로 바다를 건너 麻田島·古寺島·得物島(인천 앞 덕전도)를 지나 得物島(경기도  남양)에 도달하는 항로이다. 8세기에는 북부 연안항로뿐만 아니라 중부 횡단항로도 이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54) 하지만 이 기록은 위만조선 시대보다 훨씬 후대라는 한계가 있다. 서해 중부 횡단항로가 열린 것은 고구려가 요동반도 일대를 영역화하면서 백제가 기존의 서해 북부 연안 항로 이용이 어렵게 된 5세기 초 이후라고 보기도 한다. 55)

 

      54) 정진술, 앞의 책, 2009, 240~245쪽.

      55) 박순발, 「連雲港 封土石室墓의 歷史 性格」,百濟硏究 57, 2013, 91~92쪽. 

 

그렇다면 서해 중부 횡단항로를 통한 해상 공격에 대해 다른 사 례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중원세력이 산동반도에서 직접 한반도지역으로 해로를 통해 공격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표 1> 중원세력의 수군을 통한 한반도 침입 사례

 598년 여름 6월 수문제의 고구려 평양 공격 주라후의 수군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

612년 여름 6월 수양제의 고구려 평양 공격 내호아의 수군 고건무의 유인술에 패배

660년 가을 9월 당고종의 백제 사비성 공격 소정방의 13만 명 백제 정벌 성공

661년 여름 4월 당고종의 고구려 평양 공격 35軍을 수륙군으로 나누어 편성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에게 패함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주로 수·당시기에 해로를 통한 한반도 공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반에 수나라의 해로를 통한 고구려 공 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문제 시기에는 바람을 만나 많은 배가 침몰 되었고 육군도 양식이 떨어지고 유행병이 돌아 죽은 군사가 8, 9할 이었다. 수양제의 공격때는 어디까지나 육군이 주력군이었으며 수군의 규모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의 청야전술과 고구려 해군의 활약 덕분이기도 했다. 특히 요동지역은 고구려 수군이 활발히 활동하며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서해 북부 연안항로를 이용한 공격은 한계가 있었다.

唐나라는 안시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서해 중부 횡단항로를 통해 고구려 정벌을 계 획하게 된다. 결국 660년 백제 공략때는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사비성과 웅진성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唐나라는 다시 해로를 통해 고구려 평양성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해 횡단은 당태종대 부터 큰 배를 건조하며56) 오랜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56) 舊唐書 卷199上 列傳 第149上 東夷 高句麗傳, "太宗又命江南造大船" 57) 周成 編, 中國古代交通圖典, 中國世界語出版社, 1995, 382, 384쪽. 

 

그렇다면 漢나라도 이러한 준비가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漢 나라는 한문제시기부터 위만조선 공략에 대한 건의가 있었으며 기 원전 128~125년에는 위만조선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했다가 폐지하 기도 했다. 하지만 해로를 통한 위만조선 공략을 위해 唐나라의 사례처럼 준비를 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漢나라는 위만조선을 침 공할 때 죄수를 모아서 준비했다고 하는데 육군과는 달리 수군은 단순히 죄수를 모아 보낼 수 있는게 아니라 바다에서 어느 정도 훈련이 된 군사여야 가능하다.

 

<그림 1> 한대의 선박57) : 생략(별첨논문파일참조)

 

한대가 되면서 항해 관련 장비가 크게 발전하는데 선체가 높아지 고 큰 多種甲板이 등장하며, 橫隔倉技術을 이용하여 선체의 충격과 침몰을 예방하는 기술이 높아졌고, 각종 추진과 조종하는 설비(槳· 櫓·舵·帆·錨)가 거의 완비되었다. 이러한 발달은 해상교류의 다 양화와 해상항로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다.58) 그리고 한대의 무덤 에서는 배모양 제품이 출토되는데 대부분 중국 남중국해와 면한 광 동성 광주지역에서 출토된다. 토제품으로 동한대의 사례가 10여점, 목제품으로서 서한대 것을 중심으로 10여점이 전한다. 대부분 연안 항로 혹은 하천에 운항하던 실물 구조선을 그대로 본뜬 것으로 갑 판 위에 선실을 시설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데에 회전축을 이용한 操舵와 정박용 닻이 묘사된다.59) 당시 漢나라의 수군이 이용하는 배는 樓船이었으며 이에 따라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도 누선장군이 라 칭했다. 樓船은 이미 춘추후기에 吳나라에서 전투에 활용하였으 며 이후 한대에 이르러 樓船이 수군의 주력이 되어 남월과 조선과 의 전쟁에 활용되었다. 한대 누선군의 주요기지는 장강연안과 연해 지역이었다. 60) 漢나라가 수군을 전투에 활용한 것은 남월과의 전쟁이 처음인데 당시 남월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을 통하지 않으면 안되어 큰 배를 만들었다고 하며61) 누선의 높이는 십여 丈이었다고 한다. 62) 남월과 조선을 공략할 때 동원한 누선의 수량에 대한 기록 은 없지만 한대 누선군의 규모는 1,000척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3)

 

    58) 孫光圻, 「漢唐時期 中國과 韓半島의 海上航路」,百濟硏究 57, 2013, 5쪽.

    59) 이청규, 앞의 책, 2016, 242~246쪽.

    60) 席龍飛, 앞의 책, 1999, 65~67쪽 ; 孫占民·程林, 「秦漢樓船考」,昆明學院學報2, 2010, 72~74쪽.

    61) 史記 卷113 南越列傳 第53 所引 史記集解, “應劭曰 時欲擊越 非水不至 故作 大船”

    62) 史記 卷30 平準書 第8, “是時越欲與漢用船戰逐 乃大修昆明池 列觀環之 治樓船 高十餘丈”

    63) 席龍飛, 앞의 책, 1999, 73쪽. 

 

이보다 약간 후대지만 동한시대인 기원후 42년에 伏波將軍 馬援이 嶠南지역을 평정하면서 누선 2천여 척으로 2만여 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64)을 참고할 수 있다. 하지만 漢나라가 남월 공략때 다수의 배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바 다로 가는 길을 이용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남월로 향하는 漢나라 군대는 내륙의 물길을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보인 다. 65) 따라서 당시 漢나라가 바다를 통해 전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당시 漢나라가 익숙하지 않은 서해 중부 횡단 항로를 통해 위만조선을 공략하거나 5만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수군 으로 보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따라서 수군은 齊지역의 7천 명 이 서해 북부 연안항로를 통해 왕검성으로 향하고 육군 5만 명은 요동으로 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이해된다. 수군이 단독 공격이 불가능한 7천의 규모로 일찍 왕검성에 도착 한 것은 먼저 육군이 패수전투에서 예상외로 고전한 사실과 함께 섭하가 부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섭하는 이미 위만조선에 사신 으로 다녀오면서 왕검성의 위치 등 위만조선의 지리적인 정보를 알 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사하면서 수륙군의 진격속도와 거리 등을 계획하는데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요동으로 향하는 육군의 이동경로는 발해의 북부 요동만의 서북해안지대에 개척된 요서주랑을 이용했을 것이다. 요서주랑은 고 대에 동북지역을 연결하는 유일의 육로 교통로이다. 주랑은 요동만 에 인접한 해안지대로서 비교적 평탄한 편이지만 남북의 방향으로 뻗은 주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灤河·六股河·興城西河·大陵河 등 하천의 흐름으로 통행에 지장을 받았다. 주랑을 통과하면 요하하 류 지역에 도착한다. 이곳은 ‘遼澤’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광활한 늪지대로 군대가 이동하는데 많은 장애가 되었다. 66)

 

      64)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第14, “援將樓船大小二千餘艘 戰士二萬餘人”

      65) 최병욱, 사마천의 동아시아 – 초, 한, 남월, 조선, 산인, 2018, 352쪽.

      66) 권오중, 요동왕국과 동아시아, 영남대학교출판부, 2012, 26~28쪽.

 

좌장군은 燕·代 지역에서 군대를 모아 요서주랑을 통해 요동군 無慮縣에 이르렀고 다시 요택을 지나고 요하를 건너 패수 서쪽의 위만조선군과 격돌했 을 것이다. 육군의 경우 패수에서 크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첫 번째는 多가 요동군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여 패수의 조선군과 싸운 것이다.

漢나라의 육군은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연·대지역의 본진 과 多가 거느린 요동군 군대로 이루어졌다. 당시 본진은 연·대지역 에서 요서주랑과 요택을 지나 요동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시간이 많 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B-②에서 보듯이 위만조선과 가 까운 곳에 위치한 요동군 군대를 거느린 多는 좌장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패수의 위만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위만조선의 군대는 多 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후 도착한 좌장군에 의해 多는 참형을 당 하게 된다. 이어서 좌장군이 이끄는 육군 본진과 위만조선의 군대가 패수에 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B-④에서 보듯이 漢나라군은 위만조선의 패수서군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패 수서군’은 말그대로 패수 서쪽에 있는 군대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 다. 여기서 위만조선이 패수를 건너 요동 중부도위를 공격하고 섭하 를 죽이면서 패수 서쪽의 요동 중부도위 일부 지역을 차지한 것으 로 이해된다.67)

 

       67) 서인한, 앞의 책, 2007, 21쪽.

 

따라서 위만조선은 패수서쪽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 하면서 초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漢나라 육군이 위만조선의 패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전진하지 못할때 양복의 수군은 먼저 왕검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계획 대로 열구에서 좌장군을 기다리지 않고 왕검성으로 진격한다. 이것은 양복이 남월정벌 때 우세한 군대를 거느리고도 소수의 군대를 거느린 복파장군에게 공을 빼앗긴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양복은 왕검성을 단독으로 공략하기에는 적은 규모였음에도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무리해서 왕검성 공략에 나선 것으로 보 인다. 하지만 우거왕은 漢 수군의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고 성에서 나와 누선군을 공격했다. 결국 양복은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에 숨어 살다가 흩어진 병졸을 거둔다. 이처럼 초반 전투에서 위만조선은 왕검성전투와 패수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게 된다.

 

<지도 2> 漢나라의 위만조선 침공로 :생략(별첨논문파일참조)

 

이에 한무제는 상황이 유리하지 않자 위산을 보내 협상을 추진하 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나. 협상 진행과 한무제의 친정

회담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史記 朝鮮列傳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B-⑤ 천자는 양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 를 원하였으나 양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B-⑥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치면서 군 량미를 내주었다. 무리 만여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使者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 리라고 명하시오.”라고 하였다. 태자도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 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 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 자는 위산을 주살하였다.

B-⑦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68)

 

         68)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55, “天子爲兩將 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 渠見使者頓首謝 願 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 饋 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 人毋 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 破浿水上軍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협상을 추진하면서 파견된 위산은 증원부대를 이끌고 온 것으로 보인다. B-⑤를 보면 전세가 불리함을 본 한무제가 위산을 파견하 여 군사의 위엄으로 우거를 달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위산이 대군을 이끌고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위만조선이 충분히 한의 군대를 막고 있었는데 추가 병력없이 위만조선을 위협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69) 앞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군은 패수 서쪽을 차지하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그런데 B-⑥에 의하면 양국의 국경은 다시 패수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협상을 위해 조선군이 스 스로 패수 동쪽으로 물러갔거나 위산이 파견되어 새로운 지원군이 합류하면서 조선군이 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漢나라가 그대로 협상을 추진한 것은 이미 위만조선의 만만치 않은 국력을 확인했고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자 했던 의도가 담겨있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과 漢나라는 협상과정에서 우거왕의 직접 입견이 아닌 태자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漢 나라는 말과 군량미를 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漢나라는 흉노를 다 시 정벌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말이 부족해서라고 언급할만큼70) 흉노 정벌을 위해 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위만조선은 태자와 함께 5천필의 말을 제공하려 했다. 그런데 태자가 거느린 조선군 만여 명이 패수를 건너려 할 때 무장 해제를 요구한 한측과 입장이 엇갈리며 결국 태자는 돌아갔고 협상이 결렬된다. 이때 태자를 호위하는 군대 1만이 무장을 하고 漢나라의 도읍인 長安까지 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위만조선 측은 왜 무리하게 무장한 군대를 패수에 보냈을까. 여기서 당시 무제가 친정에 나섰다 는 연구가 있어 주목할 수 있다. 71)

 

    69) 서인한, 앞의 책, 2007, 22쪽 ; 김남중, 앞의 논문, 2014, 166~167쪽.

    70)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竟不復擊匈奴者 以漢馬少"

    71) 서영수, 앞의 논문, 1996, 109쪽. 

 

사료에 무제가 직접 친정에 나서거나 전선에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무제의 당시 행적을 살펴본다면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한무제는 말년에 방술에 관심을 가져 동해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 했으며 바다 에서 봉래를 찾으려했다.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직전인 기원전 110~ 109년에 한무제는 태산에서 봉선 제사를 지내고 동쪽 바닷가를 계속 순행하였으며 요서군에서 북쪽 九原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72)

 

      72) 史記 卷12 孝武本紀 ; 漢書 卷6 武帝紀 第6,

 

즉 한무제는 바다를 건너 도달하는 조선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 며 조선과 가까운 지역을 자주 순행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이 길어지자 한무제는 직접 패수에 가까운 지역까지 친정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위만조선 측에서는 1만의 군대를 통 해 漢나라의 군대를 공격할 의도가 있다기 보다는 가까운 지역에 있을 한무제에게 무력시위를 통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무제가 친정했다면 1만의 군대가 무장을 하고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좌장군과 위산이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 도 한무제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순 시에 빠지지 않고 수행하였으며 한무제의 명으로 서남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西南夷列傳을 기록하기도 했다. 史 記 朝鮮列傳에 양국의 협상 과정이 유독 생생하게 기록된 것도 한 무제의 친정으로 사마천도 전선에 직접 가서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 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섭하가 비왕을 죽이고 돌아올 때 “즉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卽渡馳入塞)는 구절이 있다. 여기 서 섭하가 말을 달려 급히 요새 안으로 들어간 이유는 두가지로 생 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비왕을 잃은 조선 병사들이 섭하의 뒤를 추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섭하가 급히 보고를 할 대상인 무제가 전선에 나가있을 가능성이다. 만약 후자라면 섭하는 반드시 공을 세우고 전선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무제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조선 비왕을 살해했을 것이다. 결국 양국의 팽팽한 기싸움 속에 협상이 무산된 것은 한무제의  친정이 중요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협상이 무산된 이후 전세는 조선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B-⑦에 의하면 좌장군이 마침 내 패수 위의 위만조선 군사를 격파한 것이다. 협상 결렬 후에 패 수방어선이 무너진 원인에 대해서는 漢나라가 방비가 허술한 패수 상류를 건너 조선을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보거나73) 그해 겨울에 이 르러 강이 얼어붙자 漢軍이 비교적 쉽게 패수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74)

 

        73) 서영수, 앞의 논문, 1996, 110쪽.

        74) 박영해, 「기원전 2세기 말~기원 4세기 초의 여러 전쟁과정을 통하여 본 락랑군의 위치」,력사과학4, 1996. 

 

하지만 위산의 추가 군대가 합류하였고 협상 전에 이미 패수 서쪽의 위만조선 군대가 패하여 패수 동쪽 으로 물러간 상황이라는 점에서 조선군은 이전의 우위를 상실한 상 황이었다. 따라서 유리한 고지를 빼앗기고 군사수에서도 밀린 위만 조선의 패수방어선은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4. 왕검성 전투와 위만조선 멸망

가. 왕검성의 위치 문제와 왕검성 전투

패수방어선이 무너진 후 漢나라의 육군은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여기에는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도 합류하였다. 드디어 漢나라에서 처음 계획했던대로 육군과 수군이 합류하여 왕검성을 포위한 것이 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C-① 누선[군]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 가 끝내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75) 

 

      75) 史記 卷115 朝鮮列傳 第55, “樓船亦往 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B-⑦과 C-①에서 보듯이 육군은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수군은 성의 남쪽을 포위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왕검성의 위치이다. 먼저 위만조선의 도읍명에 대해 삼국유사는 王險城이라고 기록했지만 삼국유사 위만조선조에서는 王儉城이라고 기록했 다.76) 王險城(王儉城)은 고조선 시조의 존칭(이름)이자 통치자의 칭호인 왕검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에서 왕검성이 아닌 왕험성이라고 한 것은 음차 과정에서 험한 곳에 위치한 지세를 고려한 것으 로 이해된다.77) 왕검성의 위치는 대동강 북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78) 북한 학계에서도 일찍이 도유호는 평양지역의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왕검 성을 대동강 북안으로 비정한 바 있는데,79) 이후 북한학계는 고조선 요동중심설이 정설을 차지하며 왕검성은 요하(열수) 유역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있다고 보았다. 80) 단군릉 발굴 이후에도 북한학계는 평양의 왕검성과 별도로 漢나라 군대와 싸운 부수도 왕검성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81) 당시 樓船將軍이 왕검성(왕험성)에 도달한 것을 뒤에서는 列口에 이르렀다고 하여82) 洌口는 洌水 하구로 보이며 洌水는 왕검성 부근 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열수는 대동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따라서 왕검성은 대동강 북안으로 볼 수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단군릉 발굴 이후 평양의 청암동토성을 왕검성으로 주목하고 있 다. 83)

 

      76) 三國遺事 卷1 紀異1 魏滿朝鮮條.

      77) 조원진, 「고조선과 燕나라의 전쟁과 요동」,선사와 고대 62, 2020, 57~58쪽.

      78) 이병도, 앞의 논문, 1976, 88~91쪽.

      79) 도유호, 「왕검성의 위치」,문화유산 5, 1962, 60~65쪽.

      80)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조선의 령역과 그 중심지」,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 사회과학출판사, 1976, 71~73쪽.        81) 전대준·최인철, 앞의 책, 2010, 167~174쪽.

      82) 史記 卷115 朝鮮列傳,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83) 남일룡, 「대동강류역 고대성곽의 성격」,조선고고연구1, 25~27쪽.

 

국내학계에서도 대동강 북안에 왕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84) 하지만 이 지역에서 왕검성으로 비정할 수 있는 확실한 고고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낙랑군 위치와는 별로 왕검성의 위치를 한반도 밖에서 찾는 견해85)도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재반론도 이어지고 있다. 86) 왕검성을 압록강 이북에서 찾는 견해는 최근 위만조선의 영역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한 지역을 모두 포함시키는 연구가 나오면서 힘을 얻고 있으며 험독, 패수 등의 지명이 요동지역에 있음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이동설의 입장에서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왕의 도읍이었던 시기는 燕나라 진개 침입 이전이며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으로 조선계 지명인 열수와 패수가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한지역에 모두 남겨지게 되었다는 반론이 있다.87)

 

    84) 오영찬, 「기원전 2세기대 서북한 고고 자료와 위만조선」,韓國古代史硏究 76, 2014, 109~120쪽.

    85) 조법종, 「衛滿朝鮮의 崩壤時點과 王險城·樂浪郡의 位置」,한국사연구 110, 2000a ; 조법종, 「위만조선의 대한 전쟁과 강한제후국의 성격」,先史와 古代14, 2000b ; 김남중, 「衛滿朝鮮의 領域과 王儉城」,韓國古代史硏究 22, 2001 ; 윤명철, 「해양질서의 관점으로 본 王險城의 성격과 위치」,단군학연구33, 2015 ; 정인성,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韓國考古學報106, 2018.

    86) 송호정, 「衛滿朝鮮의 王儉城 위치에 대한 최근 논의와 비판적 검토」,역사와 담론 92, 2019, 26~36쪽.

    87)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한국사 시민강좌 2, 1988, 43~47쪽.

 

전쟁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경선인 패수에서 도읍 인 왕검성에 이르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도 중요하다. 史記 朝 鮮列傳은 패수에서 왕검성까지의 거리가 나와있지 않으며 마치 패 수전투 이후 별다른 이동이나 전투없이 바로 왕검성에 이른 것처럼 기록되었다. 따라서 왕검성이 대동강 유역에 있고 패수를 압록강이 나 청천강이라 보거나, 패수를 요동지역의 강으로 보고 왕검성도 이 와 가까운 요동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패수를 혼하로 볼 경우 중요한 방어선의 하나인 압록강에서의 전투 등이 생략된 것은 이해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경선인 패수를 압록강·청천강으로 볼 경우 위만조선이 ‘方數千里’라는 기록과 맞지 않으며 왕검성을 요동지역으로 보는 경우도 ‘方數千里’의 위만조선이 서쪽 경계인 패수와 가까운 지역에 도읍인 왕검성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漢나라가 육군과 수군으로 위만조선을 공격한 것도 국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 왕검성이 위치함을 암시한다. 史記의 전쟁 기술 방식은 朝鮮列傳 과 南越列傳 기록을 비교하여 참고할 수 있다.

 

<표2> 史記 朝鮮列傳과 史記 南越列傳의 전쟁 과정 비교

( 조선열전) 

-.초기전투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군을 공격하 였으나 전진하지 못함. 누선장군은 먼 저 왕검성에 도착하였지만 우거왕에 게 패하여 군대가 흩어짐  복파장군은 행로가 멀어 뒤늦게 도착 함

-.양군 합류와 도성으로 진격 과정

교섭 실패 후 좌장군은 패수 방어선 을 뚫고 전진하여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함. 누선장군도 합류하여 성의 남 쪽을 포위함 

(南越列傳)

-.초기전투

누선장군이 尋陜을 함락시키고 石門 을 격파했으며 남월의 선봉을 꺾음.

-.양군 합류와 도성으로 진격 과정

양군이 합류하여 번우에 이름.

누선장 군은 동남쪽에, 복파장군은 서북쪽에 주둔함

 

漢나라의 육군이 패수 방어선을 뚫고 왕검성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시일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표2>에서 보는 것처 럼 史記 南越列傳도 초기 전투 이후 번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특히 史記 朝鮮列傳은 漢나라 군대의 거의 유일한 승리 기록인 패수전투 마저 그 내용이 아주 소략한 것을 볼 때 왕검성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다른 전투들이 있어도 史記 기술 방식의 특성상 그 내용은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C-①에서 보는 것처럼 패수 방어선의 붕괴와 漢나라 수륙군의 합류에도 왕검성은 수개월 동안 적의 공격을 잘 방어한다. 이것은 위만조선이 대군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방어체계와 물자가 갖추어 져 있음을 의미한다.

사마천도 “우거는 험고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88)고 한 바 있다. 이러한 도성의 방어체계는 이미 준왕 시기에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준왕에 의해 고 조선 서쪽에 자리를 잡은 위만은 세력을 키운 후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준왕을 공격했다.89)

 

    88) 史記 卷115 朝鮮列傳,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89) 三國志 卷30,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第30 韓傳 所引 魏略,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이것은 당시 고조선도 漢나라의 대군이 쳐들어 올 경우 먼저 국경선 부근에서 위만이 방어하고 한편으로는 도성에 병력을 집결하여 항쟁하는 전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만조선 시기에는 이러한 방어체계가 더욱 견고해져서 패수 방 어선에서 적의 대군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었으며 적의 수륙군 이 합류한 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왕검성의 방어가 견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위만조선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 게 된다.

 

나. 우거왕의 죽음과 왕검성 함락

漢나라의 왕검성의 포위 이후 상황은

  ① 조선대신들이 몰래 누선 장군에게 항복하려하고 좌장군과 누선장군 사이에는 불신이 생김

  ② 한무제가 제남태수 公孫遂를 보내고 공손수는 좌장군의 말을 듣 고 누선장군을 체포하여 양 군대를 합침

  ③ 위만조선 일부 지배층 이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함

  ④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함

  ⑤ 大臣 成巳가 항전하지만 결국 왕검성이 함락됨으로 정리할 수 있다.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 과정은 고구려와 隋·唐과의 전쟁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먼저 중원세력이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 육군은 요동지역으로 향하고 수군은 직접 평양으로 진격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같다.

그리고 멸망 당시에는 요동방어선이 붕괴되어 평양이 수 륙 양군에 포위되어 고립되면서 내부의 반역자가 발생하는 것도 동 일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발견된다. 隋·唐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할 때 겨 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마치려 했지만 漢나라는 겨울이 오고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겨울이 오고 전 쟁이 길어질 경우 추위와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漢나라가 물러가지 않고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전쟁 을 계속한 것은 한무제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무제는 기원전 110년에 태산에 올라 봉선 제사를 행하며 천하가 이미 모두 복속되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바 있다. 그런데 유독 위만 조선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사신 위산을 직접 보내거나 다시 공손수 를 특사로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천하를 이미 얻었다는 자신 감이 흔들릴까 두려워서이거나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였을 수 있 다. 90) 협상에 실패한 위산과 누선장군을 마음대로 체포한 공손수를 잇달아 죽인 것도 전쟁을 신속히 끝내고 싶은 초조함 때문일 수 있다. 또한 漢나라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식량이나 장비를 계속 보급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청야전술과 수군의 활약으로 唐나라는 해를 넘겨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으며 결국 수군 보강을 통해 서해에서 직항으로 평양을 공격하고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으로 이를 해결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경우 전 쟁에서 수군의 활약이 드러나지 않는다. 위만조선이 주변 국가들이 漢나라 천자에 입견을 막았다는 기록이나 준왕이 배를 통해 남으로 도망간 것은 위만조선의 수군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 다. 당시 위만조선은 대동강 유역을 거점으로 삼아 동아시아 해양교 역을 독점하면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91)

 

      90) 김병준, 앞의 논문, 2008, 22쪽.

      91) 강봉룡, (바닷길로 찾아가는) 한국 고대사, 경인문화사, 2016, 47쪽. 

 

그러나 막상 漢나라와 의 전쟁에서는 구체적인 위만조선 수군의 활동 기록은 전해지지 않 는다. 漢나라가 해를 넘겨 전쟁이 가능했던 것은 신속한 이동이 가 능한 바다를 통한 물자의 지속적인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위만조선 의 수군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위만조선 내부에서는 전쟁이 지속되어도 이 길 수 없다고 생각한 무리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의 지 배층인 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은 함께 漢나라로 투항하게 된다. 路人이 도중에 죽었다는 기록을 볼 때 왕검성에서도 도망가는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전투가 벌어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의 고위층이었기 때문에 이후 왕검성의 방어체제 도 상당히 약화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우거를 배반하고 漢나라에 항 복하기로 한 사람은 4명인데 尼谿相 參은 함께 도망가지는 않고 내 부에서 호응하였다. 그를 반란의 주도자로 이해하기도 한다. 92) 결 국 參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나서 항복한다. 우거왕의 죽 음으로 사실상 위만조선은 멸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거왕이 죽은 후 위만조선은 成巳가 항전을 계속한다. 하지만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長降, 상 노인의 아들 最로 하여금 成巳를 죽이게 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왕검성은 함락된다. 93)

 

      92) 정인보, 朝鮮史硏究(上), 서울신문사, 1946, 148쪽.

     93) 우거왕이 죽고 成巳 등은 長降을 왕으로 세우고 항전을 지속했다고 보기도 한다 (김남중, 앞의 논문, 2014, 170쪽). 

 

우거의 아들 長降이 앞서 漢나라와 위만조선의 협상과정에서 나오던 태자와 동 일인물인지 아니면 우거왕의 다른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후자라 면 우거왕이 죽고 대신인 成巳가 조선군을 지휘한 점으로 보아 이 미 태자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패수전투를 지휘하다가 이미 전사했을 수도 있다. 위만조선은 漢나라와의 전쟁에서 선전했으나 결국 1년만에 왕검 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위만조선은 초반에 선전하며 협 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협상은 무산되었다. 위만조 선이 전쟁에서 패한 가장 큰 이유는 패수방어선의 붕괴라 할 수 있 다. 패수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유리하게 이끌어가던 전세가 역전되어 漢나라의 수륙군이 합류하고 왕검성이 포위되었다. 결국 우거왕은 내부 배신자에 의해 암살되고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또한 자료가 없어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위만조선의 수군 활 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패배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5. 맺음말

본 연구는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 원인 및 전쟁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전쟁 원인에 대해 史記 朝鮮列傳은 위만조선이 漢나라 외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한의 사신인 섭하를 살해했기 때문인 것처 럼 서술했다. 그러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漢나라의 대외팽창 정 책과 섭하의 조선 비왕 살해였다. 우거왕이 섭하를 살해한 요동 동 부도위는 漢書 地理志에 기록된 요동 중부도위가 있던 후성현 지 역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위만조선은 패수 서쪽 일부 지역을 차지 하며 초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당시 漢나라의 진격로는 육군은 燕·代지역에서 요서주랑과 요택 을 지나 요동으로 향했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평 양으로 향하는 서해 북부 연안항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요동과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전선이 길어지면서 漢나라 수륙군 이 원활한 연락을 주고받기 어려운 점도 초반 漢나라가 고전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漢나라가 위산과 추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패수 서쪽에 있 던 위만조선군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은 협상을 통해 전 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전세는 위만조선 에 불리해졌다. 이때 한무제는 패수와 가까운 지역에 친정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패수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왕검성은 漢나라의 수륙군에 포위되었다.

이후에도 위만조선은 왕검성을 견고하게 지켰 으나 결국 내부 배신자들에 의해 우거왕과 대신 成巳가 죽임을 당 하면서 왕검성은 함락되었다. 이러한 위만조선과 漢나라의 전쟁 상황은 여러 가지로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수·당 나라가 해를 넘겨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과는 달리 漢나라는 일년 가까이 전쟁을 수행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청야전술과 수군의 활약이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위만조선은 漢나라의 보급을 저지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위만 조선이 무너지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주제어 : 위만조선, 고조선, 漢나라, 우거왕, 한무제, 왕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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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Features of the war between Wiman Chosun and Chinese Han Dynasty

Cho, Won-chin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auses and aspects of the war between Wiman Chosun (衛滿朝鮮) and Han (漢). The major cause of the war was that Shehe (涉何) of Han murdered Biwang of Gochosun, which was the firstly established country in the Korean peninsula. Wiman Chosun could not but choose the war as a result of this provocation of Han, which led to the attack of Wiman Chosun on Liaodong Eastern Section. The location of Liadong Eastern Section to which Shehe was appointed is possibly the region of Houcheng-xian (候城 縣), which became Liadong Central Section after the fall of Wiman Chosun. If we conjecture the scale and advance route of Han's armies, it does not seem probable that the navy of Han dynasty attacked Wiman Chosun via the trans-central West Sea route. Therefore, it is construed as proper that Han sent its navy via the northern West Sea coastal route and dispatched its army composed of 50,000 soldiers towards Liadong. Wiman Chosun had already captured an advantageous position to the west of Paesu (浿水) river, and so was able to prevent the joining of Han's army and navy and lead early combats to the advantage of Wiman Chosun. Afterwards, the two countries started negotiations, which, however, came to a rupture after all. It is probable that Wudi of Han went on the conquest in person and was at a region near Paesu. After the negotiations was failed, the tide of war turned against Chosun troops. For the armies of Wiman Chosun above Paesu was defeated by the armies of Han's General taken up the position of left flank, and thus the defense line of Paesu was broken through. Consequently, the army and navy of Han joined to lay siege to Wanggeom-seong (王險城). 위만조선-漢나라의 전쟁 양상 | 137 It is the general opinion that Wanggeom-seong was located on the northern shore of the ‘Daedong’ River. It is hard to imagine that Wiman Chosun, whose territory extended thousands of li in all directions (方數千里), had its capital near Paesu, which was on the western boundary. Wanggeom-seong defended successfully against the enemy's attack for months. However, as the war was protracted, a rebellion occurred within Wiman Chosun, King Ugeo was assassinated, and Wanggeom-seong (王儉城) was captured after all. Wiman Chosun failed to block supplies for Han armies. In conclusion, the consequential protraction of the war may be viewed as another cause of the fall of Wiman Chosun. It is the general opinion that Wanggeom-seong was located on the northern shore of Daedonggang River. It is hard to imagine that Wiman Chosun, whose territory extended thousands of li in all directions (方數千里), had its capital near Paesu, which was on the western boundary. Wanggeom-seong defended successfully against the enemy's attack for months. However, as the war was protracted, a rebellion occurred within Wiman Chosun, King Ugeo was assassinated, and Wanggeom-seong (王儉城) was captured after all. Wiman Chosun failed to block supplies for Han armies. In conclusion, the consequential protraction of the war may be viewed as another cause of the fall of Wiman Chosun.

 

keyword : WimanChosun, Old Chosun, Han, King Ugeo, Han Wudi, Wanggeom-seong

 

 

軍史118호202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원고투고일 : 2020. 11. 30, 심사수정일 : 2021. 1. 8, 게재확정일 : 2021.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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