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고승전의 등장과 그 변형들
III.전등록 중심의 선종사서
IV.기전체와 편년체 불교사서
V. 속편들과 탈중세적 불교사서
VI. 맺음말
I.머리말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역사서 편찬이다. 『상서(尙書)』, 『춘추(春秋)』, 『죽서기년(竹書紀年)』, 『좌전(左傳)』. 『국어(國語)』 등 이미 고대 부터 수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고, 한대(漢代)에는 사마천이 기전체(紀傳體)라 는 새로운 형식의 『사기(史記)』를 저술해 내놓았다.
이 기전체는 이후 왕조가 바 뀔 때마다 편찬되는 정사(正史)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이에 더해 다양한 체재 (體裁)의 역사서가 중세 내내 거듭 편찬되었다.
『자치통감』 같은 편년체는 물론 이거니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나 강목체(綱目體)의 역사서들도 나왔다. 그 런데 이러한 역사서들은 대개 유교 지식인이나 관료 들이 편찬했다.
간단히 말 하면, ‘유교사서(儒敎史書)’이다.
중세에 중국에서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구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교사 서가 대거 편찬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교에 못지않게, 어쩌면 유교보다 더 중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불교 쪽에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불교는 외래종교지만,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57~75 재 위) 때부터 수많은 승려의 헌신과 노력으로 중국 사회에 차츰차츰 뿌리를 내리 며 널리 퍼졌다.
이 과정에서 유교나 도교와 대립하기도 하고 그 둘과 영향을 주 고받기도 했는데, 불교 쪽에서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아 한 일이 역사서 편찬, 정확하게는 ‘불교사서(佛敎史書)’의 편찬이다.
불교사서의 존재는 쉽사리 확인된다.
20세기 초에 편찬된 대정신수대장경 (大正新修大藏經) 1 의 ‘사전부(史傳部)’라는 항목에 대거 수록되어 있다.
‘사전(史 傳)’은 역사서와 전기를 아울러 일컫는 오래된 용어이다.2
실제로 이 항목에는 『고승전(高僧傳)』, 『불조통기(佛祖統紀)』 같은 불교사서들과 『석가보(釋迦譜)』,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같은 개별 전기들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는 그 형태 나 구성이 어떠하든 불교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역사서를 불교사서라 명명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런데 이 불교사서들 전반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리된 적도 없을 뿐더러 개 관한 일도 거의 없다. 중국의 역사서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모두 유교사서에 집 중되어 있었고, 불교사서는 중국의 사학사(史學史)에 포함되지도 못했다.3
1 1924년에서 1934년에 일본의 ‘다이쇼 잇사이쿄 간코카이(大正一切経刊行会)’에 서 편찬한 것으로, 한국의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일본 각지에 있던 한역 불전 을 모두 조사해서 모았다고 전한다. 크게 인도부(印度部), 중국부(中國部), 일본부 (日本部)로 나뉘는데, 중국부에 ‘사전부(史傳部)’라는 항목이 있다. 제49책에서 제 52책까지가 사전부이며, 모두 95종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그 전부가 여기서 논의 할 불교사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여기에 수록된 것이 전부도 아니다.
2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유협(劉勰)이 저술한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당시까지 의 문학론을 50개의 항목으로 정리해 집대성한 이론서이자 비평서이다. 거기에 ‘사 전(史傳)’ 항목이 있으며, 역사서와 전기 문학을 다루고 있다.
3 이종동 저, 조성을 역, 2009, 『중국사학사』(원저는 1953년 출판), 혜안; 유절 저, 신태갑 역, 2000, 『중국사학사강의』(원저는 1981년 출판), 신서원 등 중국의 사학 사에 관한 저술들에서 불교사서를 거론하거나 중요하게 다룬 경우는 거의 없으며, 언급된 일조차 없었다. 가령, 전목(錢穆), 1973, 『中國史學名著』, 臺北三民書局 出版, 177~179쪽에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뒤에 승려들이 중국의 문화와 전통에 영향을 받아서 역사적 안목을 갖추어 불교사를 서술하게 되었다면서 『고승전』을 짤 막하게 언급한 것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불교 학에서는 천위안(陳垣)이 1955년에 저술한 『중국불교사적개론(中國佛敎史籍槪 論)』(北京: 科學出版社)에서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문헌들을 대략 소개하면서 『고승전』과 『경덕전등록』 등 일부 불교사서들을 소개한 적이 있을 따름이다.
중세에 불교는 정치와 사회, 문화, 사상, 일상 생활 등 모든 면에서 지대하고 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1차 자료가 중세 내내 지속적으로 편찬된 불교사서들이다.
더구나 불교사서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유교사서와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이기도 하고, 불교의 교리들이 풍부 하게 또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는 철학 작품이기도 하다.
좁게는 불교문화를, 넓 게는 중국문화를 두루 보여주는 것이 불교사서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사 학사에서 유교사서만 다루고 불교사서를 배제했다는 것은 심각한 편향이고, 중 국 및 동아시아의 불교학에서 불교사서들을 주요하게 다루지 않은 것 또한 심각 한 불균형이다.
이 글은 이런 편향과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시론의 성격을 띤다.
이 글에서는 중국에서 중세 동안에 편찬된 불교사서들을 소개하면서 그 역 사적 양상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남아 전하는 불교사서들을 주요한 시기별로 묶어서 목록을 제시하고, 각각의 편찬 의도와 체재, 서술 방식 등을 고 찰해 대체적인 특성을 밝힌다. 이를 통해 불교사서의 편찬이 불교사의 전개와 맞물려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드러날 것이다.
II.고승전의 등장과 그 변형들
불교사서가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세기 말로 추정되지만,4 현재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사서는 6세기 초에 편찬되었다.
4 『고승전』 권14, 「序錄」. “齊竟陵文宣王三寶記傳, 或稱佛史, 或號僧錄, 旣三寶 共敘, 辭旨相關, 混濫難求, 更爲蕪昧. 瑯琊王巾所撰僧史, 意似該綜, 而文體 未足. 沙門僧祐撰三藏記, 止有三十餘僧, 所無甚衆. 中書郎郄景興東山僧傳, 治中張孝秀廬山僧傳, 中書陸明霞沙門傳, 各競擧一方不通今古, 務存一善不 及餘行.” 혜교가 여기에서 불교사서라며 거론한 『삼보기전』, 『승사』, 『출삼장기 집』, 『동산승전』, 『여산승전』, 『사문전』 등은 모두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저술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때 독창적인 서술 방식 이 나타나는데, 그 영향력은 8세기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대략 6세기 초에서 8세기 말까지를 불교사서 편찬의 제1기라 부를 만하다.
이 시기의 불교사서로는 모두 10종이 있다.
(1) 『비구니전(比丘尼傳)』(4권, 516), 열전체(연대), 보창(寶唱), T50
(2) 『고승전(高僧傳)』(14권, 519?), 열전체(십과), 혜교(慧皎), T50
(3) 『속고승전(續高僧傳)』(30권, 645), 열전체(십과), 도선(道宣), T50
(4)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5권, 690), 열전체(십과), 법장(法藏), T51
(5)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10권, 706), 열전체(팔과), 혜상(慧詳), T51
(6) 『전법보기(傳法寶紀)』(1권, 713), 열전체(계보), 두비(杜朏), T85
(7)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1권, 713), 열전체(계보), 정각(淨覺), T85
(8) 『법화전기(法華傳記)』(10권, 750), 열전체(십이과), 승상(僧詳), T51
(9)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1권, 774), 열전체(계보), 작자 미상, T51
(10) 『보림전(寶林傳)』(10권, 801), 열전체(계보), 지거(智炬), B145
현재 전하는 첫 번째 불교사서는 『비구니전』(4권)이다.6
6 혜교는 『출삼장기집』(15권)을 불교사서로 보고 언급했으나, 한역된 경전의 목록으 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불경을 한역한 경과에 대해 서술한 권1, 역경승들의 전기를 실은 권13~권15 등은 확실히 중국의 초기 불교사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며 혜교 또 한 이를 바탕으로 『고승전』의 「역경(譯經)」편을 기술했다. 그러나 번역된 경전의 목록과 각 경전의 서문을 정리해서 나열한 것이 주요한 부분이면서 대부분을 차지 하므로 불교사서로 보기는 어렵다.
보창(寶唱)이 516년 에 저술했으며, 동진(東晉)에서 양(梁)나라 때까지 활동한 비구니 65명의 전기 를 실었다.
불교사서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수행자인 비구니들을 입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실 보창은 『비구니전』과 짝이 되는 『명승전(名僧傳)』(31권) 도 편찬했다. 『속고승전』 권1에 실린 보창의 전기에, “역대의 승록을 찾아 모으 고 처음으로 그 내용을 구별해서 하나의 서적으로 편찬해 ‘명승전’이라 했으니, 5 저자명 뒤의 영문은 문헌이 실려 있는 대장경을, 숫자는 권수를 나타낸다.
이 글에 서는 네 가지 대장경이 언급되는데, B는 대장경보편, K는 고려대장경, T는 대정신 수대장경, X는 만속장경을 가리킨다.
이하 마찬가지이며, 더 자세한 것은 참고문헌 에 밝혀두었다.
모두 31권이었다”7 는 서술이 나온다.
7 『속고승전』 권1, 「釋寶唱」, “搜括列代僧錄, 創區別之, 撰爲部帙, 號曰名僧傳, 三十一卷.” 8 『고승전』 권14, 「序錄」, “名者本實之賓也, 若實行潛光則高而不名, 寡德適時 則名而不高. 名而不高本非所紀, 高而不名則備今錄. 故省名音代以高字.”
이는 보창이 중국의 초기 불교사를 기술하 면서 비구와 비구니를 대등하게 다루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인식은 높이 평가 할 만하다.
그런데 『비구니전』과 달리 『명승전』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혜교가 『고승전』을 저술한 것과 관련이 있다.
우선 혜교는 ‘명승(名僧)’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면서,
“이름(名)이란 본디 실제와 상대되는 개념일 뿐이니, 실제로 행동했어도 그 빛을 감추면 (덕은) 높지만 이름이 나지 않고 부족한 덕이어도 때에 맞으면 이름은 드러나지만 (덕 이) 높지 않다. 이름만 알려지고 (덕이) 높지 않은 이는 본디 기록할 사람이 아니 므로 (제쳐두고) 공덕이 높으면서 이름이 나지 않은 이를 이제 갖추어 기록한다. 그리하여 명(名)자를 빼고 그 대신 고(高)자를 쓴다”8
고 했다.
자신의 저술을 ‘고 승전’이라 명명한 까닭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명승전』은 31권인데, 혜교가 ‘고 승’이라 할 인물들을 가려내 실은 『고승전』은 14권이다.
이는 『명승전』에 수록 된 승려들이 엄정한 기준에 따라 선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명승전』 은 방대한 규모에 걸맞은 체재도 갖추지 못했던 듯하다. 『명승전』의 체재가 어떠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앞서 보창의 전기 에서 인용한 “처음으로 그 내용을 구별했다”고 한 구절에서 비구들의 행적을 나 름대로 분류했을 가능성은 읽을 수 있다.
보창이 『비구니전』에서는 전기를 연대 순으로 나열했지만, 적어도 수백 명의 비구가 입전되었을 『명승전』(31권)까지 연대순으로 나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수록할 비구들을 선정하는 기준 이 엄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분류 기준 또한 부실했거나 부적절했을 공산이 크다.
혜교가 『고승전』을 저술하면서 십과(十科)를 마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승전』의 「서록」을 보면, 혜교가 갖가지 기록을 열람하고 식견 있는 선배 들을 찾아 자문을 받으면서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이 드러나 있다.
마침내 혜교는
“한 명제의 영평 10년(67)에서 양 천감 18년(519)까지 453년 동안의 고승 257명, 거기에 덧붙인 200여 명을 그 공덕과 업적에 따라 서 크게 열 갈래로 나누었다.”9
열 갈래는 곧 「역경(譯經)」, 「의해(義解)」, 「신이 (神異)」, 「습선(習禪)」, 「명률(明律)」, 「망신(亡身)」, 「송경(誦經)」, 「흥복(興 福)」, 「경사(經師)」, 「창도(唱導)」 등이며, 흔히 십과(十科)라 부른다.10
9 『고승전』 권14, 「序錄」. “始于漢明帝永平十年, 終至梁天監十八年, 凡四百五十 三載, 二百五十七人, 又傍出附見者二百餘人, 開其德業, 大爲十例.”
10 정천구, 2022, 「중국 고승전의 체재 변화와 그 의미」, 『대순사상논총』 43집, 대순 사상학술원에서 『고승전』, 『속고승전』, 『송고승전』, 『대명고승전』 등 중국의 대표 적인 네 고승전을 중심으로 십과의 설정 과정과 각 과목이 갖는 의미, 이 과목들이 후대에 어떻게 계승되고 변형되는지 등을 고찰한 바 있다. 따라서 고승전의 십과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십과 덕분에 『고승전』은 불교사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훨씬 방대한 『명승전』 을 비롯해 당시까지 전해지던 대부분의 불교사서들을 대체할 수 있었다.
다만, 『고승전』에서 비구니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비구니전』은 따로 전해질 수 있 었다.
『고승전』에서 비구니를 배제한 일은 불교사서로서도 큰 결함이며, 비구 와 비구니에 우열을 두고 차별한 듯해서 모든 존재를 대등하게 보는 불교 교리 에도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고승전』에서 마련된 십과 체재는 도선(道宣, 596~667)이 649년에 저술한 『속고승전』(30권)에서 먼저 계승했다.
도선은 “『고승전』을 잇는다”는 의미의 책명 그대로 『속고승전』에 양나라 때부터 당나라 초기(645)까지 활약한 고승들 340명을 수록하면서 『고승전』의 십과를 일부 수정했다.
『고승전』의 「신이」를 「감통(感通)」으로, 「망신」을 「유신(遺身)」으로, 「송경」을 「독송(讀誦)」으로 바 꾸었으며, 「경사」와 「창도」를 합쳐서 「잡과(雜科)」라 했다.
이는 『고승전』에서 설정한 과목의 명칭이 내용과 합치되지 않거나 과목의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나 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법(護法)을 새로 두어 불교계 내에 서 일어난 변화를 보여주었다.
도선은 『속고승전』에서 불교사의 실상을 더욱 잘 보여주는 방향으로 십과를 수정하고 보완했는데, 이로써 고승전은 역사서로서 성격이 한층 강화되었다.
요컨대, 『속고승전』의 편찬으로 십과는 불교사서의 한 체재로서 확립될 수 있 었다. 그런데 『속고승전』 못지않게 이런 역할을 한 불교사서들이 잇달아 편찬되 었다.
앞에 제시한 10종의 불교사서 목록 중 (4), (5), (8)이 그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입지를 다진 불교는 수당 때에 더욱 융성했고 불교 사서들 또한 잇달아 편찬되었다. 다만, 불교사서의 성격이 좀 달라졌다.
690년 즈음에 법장(法藏)이 『화엄경전기』(5권)를, 706년에는 혜상(惠詳)이 『홍찬법화 전』(10권)을, 750년에는 승상(僧詳)이 『법화전기』(10권)를 각각 저술했다.
『고 승전』과 『속고승전』이 종파를 따지지 않고 그 덕행과 행적의 뛰어남만 중시 했다면, 이 세 가지 불교사서는 종파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화엄경전기』는 화 엄종의 불교사서이며, 『홍찬법화전』과 『법화전기』는 천태종의 불교사서이다.
세 불교사서의 체재는 모두 십과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그 종파성으로 말미 암아 상당히 변형되었다.
『화엄경전기』에서는 「부류(部類)」, 「은현(隱顯)」, 「전 역(傳譯)」, 「지류(支流)」, 「논석(論釋)」, 「강해(講解)」, 「풍송(諷誦)」, 「전독(轉 讀)」, 「서사(書寫)」, 「잡술(雜述)」 등 10과를 두었고, 『홍찬법화전』에서는 「도상 (圖像)」, 「번역(飜譯)」, 「강해」, 「수관(修觀)」, 「유신(遺身)」, 「송지(誦持)」, 「전 독」, 「서사」 등 8과를, 『법화전기』는 「부류증감(部類增減)」, 「은현시이(隱顯時 異)」, 「전역연대(傳譯年代)」, 「지파별행(支派別行)」, 「논석부동(論釋不同)」, 「제 사서집(諸師序集)」, 「강해감응(講解感應)」, 「풍송승리(諷誦勝利)」, 「전독멸죄 (轉讀滅罪)」, 「서사구고(書寫救苦)」, 「청문이익(聽聞利益)」, 「의정공양(依正供 養)」 등 12과를 두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화엄경전기』와 『홍찬법화전』의 일 부 과목이 겹치고 또 『화엄경전기』의 십과를 『법화전기』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는 것이다.
이는 화엄종과 천태종이 종파는 달라도 불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인식에서는 서로 비슷했음을 말해주며, 혜교와 도선의 십과가 불교적 사실에 기 반해 설정된 것이어서 변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6), (7), (9), (10)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화엄종과 천태종에서 각각 불교사서를 편찬한 시기에 가장 중국적인 종파인 선종(禪宗)에서도 불교사서를 거듭 편찬했다.
713년 즈음에 두비(杜朏)가 『전법 보기』(1권)를, 정각(淨覺)이 『능가사자기』(1권)를 각각 저술했다.
774년 즈음에 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역대법보기』(1권)가 편찬되었다.
『전법보기』는 보리달마 (菩提達摩)에서 신수(神秀)까지 7대의 전기를, 『능가사자기』는 구나발타라(求那 跋陀羅)에서 시작해 보리달마를 거쳐 신수와 그 제자들까지 8대의 전기를 서술 했는데, 둘 다 북종계의 선종사서(禪宗史書)이다.
『역대법보기』는 달마에서 혜 능을 거쳐 지선(智詵), 처적(處寂), 무상(無相), 무주(無住)로 이어지는 보당종(保 唐宗)의 법통을 서술한 선종사서이다.11
이 세 가지 선종사서는 8세기에 선종이 하나의 종파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정통 논쟁이 치열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12 스승에서 제자로 법등을 전하는 전등(傳燈)의 계보에 따라 서술함으로써 십과 체재의 불교사서에서 벗어난 파격 또한 보여준다.
위의 세 선종사서에서 주목할 점은 나중에 편찬되는 선종사서일수록 계보의 시작을 점점 더 올려잡는다는 점이다. 『전법보기』는 보리달마에서, 『능가사자 기』는 보리달마 앞의 구나발타라에서 시작했고, 『역대법보기』에서는 붓다로부 터 시작해 가섭, 아난을 거쳐 28조 승가라차(僧迦羅叉)까지 서천(西天, 인도)의 계보를 간략하게 서술한 뒤에 보리달마부터 동토(東土, 중국)의 전기를 시작 했다.
이는 801년에 지거(智炬)가 저술한 『보림전』(10권)에서 더욱 명확해 졌다.13
11 세 전등사서의 자세한 성격에 대해서는 柳田聖山, 1967, 『初期禪宗史書の硏究』, 禪文化硏究所의 2장과 4장 참조.
12 중국에서 선종의 등장과 그 역사적 전개에 대해서는 이부키 아츠시 지음, 최연식 옮 김, 2011, 『중국 선의 역사』, 씨아이알 참조.
13 『보림전』은 명대 이후로는 보이지 않다가 1933년에 일본에서 권6의 필사본이 발견 되었고, 1934년에는 중국 산서성(山西省) 조성현(趙城縣)의 광승사(廣勝寺)에 있 던 금판대장경(金版大藏經) 안에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광승사본은 권1~권5, 권 8 등 여섯 권뿐이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일곱 권만 전한다.
『보림전』은 마조(馬祖)와 석두(石頭)의 계통을 정당화한 선종사서인데, 가장 큰 특징은 석가모니불에서 시작하면서 가섭부터 달마까지 이른바 ‘서천 27조’를 전법의 계보에 포함했을 뿐 아니라 그 조사들의 전기 또한 서술하고 달 마에서 혜능까지 동토6조를 완성한 일이다.
서천27조설은 선종의 정통성을 강 조하기 위해 꾸며낸 계보지만,14 10세기 이후 편찬되는 수많은 선종사서가 이 계보를 수용하면서 ‘정설’이 되고 역사적 사실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위의 불교사서들은 기본적으로 고승들의 전기를 나열한 열전체인데, 『고승전』에서 정립된 십과를 기본틀로 확립했느냐, 변형했느냐, 그 틀에서 벗어났느냐에 따라 십과의 정형, 변형, 파격 등으로 구분 해서 볼 수 있다.15
14 선종에서 전등 의식이 성립되고 『보림전』에 이르기까지 전등의 계보가 확정되는 과 정에 대해서는 김호귀, 2014, 「선종의 법맥의식과 전등사서의 형성」, 『불교학보』 68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에서 자세하게 논의했다.
15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정천구, 2024, 「7~8세기 중국 고승전의 정형화와 다양 화」, 『대순사상논총』 48집, 대순사상학술원 참조.
『속고승전』은 십과를 정형화했고, 화엄종과 천태종 계열의 불교사서들은 변형시켰다.
그리고 선종의 불교사서들은 십과를 벗어나 ‘전등의 계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방식을 갖추었다.
십과 체재를 중심으로 볼 때, 『고승전』과 『속고승전』은 불교가 수용되고 전파된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주 고, 『화엄경전기』, 『홍찬법화전』, 『법화전기』 등은 불교 철학의 해석과 이해 과 정에서 종파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법보기』 등 선종사서들은 불교가 창조적으로 해석되면서 중국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III.전등록 중심의 선종사서
앞선 시기의 마지막에 저술된 『보림전』 이후로 거의 15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는 불교사서가 눈에 띄지 않는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난(755~763)을 일으킨 이 후로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79)이 종식될 때까지 거듭된 정치적 혼란과 전 란으로 말미암아 불교계 또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960년에 송(宋)이 건국되고 비로소 안정된 시기가 도래하자 불교사서 또한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제1기와는 사뭇 다른 서술 방식이 나타났다.
13세기 초까 지 이어진 제2기에는 모두 12종의 불교사서가 편찬되었다.
(11) 『조당집(祖堂集)』(20권, 952), 열전체(계보), 정(靜)·균(筠), K45
(12) 『송고승전(宋高僧傳)』(30권, 988), 열전체(십과), 찬녕(贊寧), T50
(13) 『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3권, 999), 기사본말체, 찬녕, T54
(14)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0권, 1004), 열전체(계보), 도원(道原), T51
(15)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30권, 1029), 열전체(계보), 이준욱(李遵勗), X78
(16)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9권, 1061), 열전체(계보), 계숭(契嵩), T51
(17) 『건중정국속등록(建中靖國續燈錄)』(30권, 1101), 열전체(계보), 유백(惟 白), X78
(18)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30권, 1121), 열전체(계보), 혜홍(慧洪), X79
(19) 『융흥편년통론(隆興編年通論)』(29권, 1164), 편년체, 조수(祖琇), X75
(20) 『승보정속전(僧寶正續傳)』(7권, ?), 열전체(계보), 조수(祖琇), X79
(21) 『연등회요(聯燈會要)』(30권, 1183), 열전체(계보), 오명(悟明), X79
(22)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30권, 1204), 열전체(계보), 정수(正受), X79
『조당집』(20권)은 952년에 완성되었는데, 천주(泉州) 초경사(招慶寺)의 정 수(淨修) 선사가 쓴 서문에 그 편찬 내력이 나온다.
“가르침의 말씀은 천하에 널 리 퍼졌으나 스승에서 제자로 전해지는 계통은 아직 자리 잡히지 못했으므로 늘 물이 쉽게 말라버릴까, 오(烏)자와 마(馬)자를 가리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이제 초경사의 정과 균 두 선사가 최근에 편집한 것을 꺼내는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금의 법요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으로 제목이 ‘조당집’이다.”16
16 『조당집』 권1, 「序」, “言教甚布於寰海, 條貫未位於師承, 常慮水涸易生, 烏馬難 辯. 今則招慶有靜·筠二禪德, 袖出近編古今諸方法要, 集爲一卷, 目之祖堂集.”
『조당 집』의 목적이 계통을 정리해서 확정짓는 데 있다는 점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앞선 『보림전』에서 이미 확립된 계보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조당집』은 역사적 존재로 보기 어려운 과거불(過去佛)들까지 계보에 포함 했다.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 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 佛) 등 이른바 과거칠불에서 시작해 천축27조와 중국6조를 거쳐 청원행사(靑 原行思, 671~740) 이하 8대 및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이하 7대까지 257명을 법맥(法脈)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8세기에 편찬된 선종사서들에서 다투던 북종과 남종의 정통 문제를 남 종의 정통으로 귀결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림전』에서 시작된 서천(인도) 과 동토(중국)의 계보를 확정한 것이다.
과거칠불에서 그 계보를 시작한다는 점 에서 『보림전』과 다를 뿐, 나머지 계보는 거의 같다.
이는 『보림전』을 참조했거 나 아니면 당시에 이미 이 계보가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계 보는 관찬 불교사서인 『경덕전등록』에 수용되면서 공인되기에 이른다.
송(宋, 960~1279)나라의 건국으로 정치가 안정되자 불교사서의 편찬이 이 어졌다.
먼저 찬녕(贊寧, 919~1001)이 『송고승전』과 『대송승사략』을 잇달아 편 찬했다.
『송고승전』은 『속고승전』의 십과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17 당나라 때부 터 활동한 고승 657명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17 정천구, 2022, 앞의 글, 195~200쪽 참조.
뛰어난 고승들을 종파에 관계 없이 두루 서술해 『고승전』에서 『속고승전』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따랐다.
이와 달리 『대송승사략』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에 갖추어진 갖가지 법식과 의례, 승직(僧職) 등 제도의 기원과 연혁을 밝혀 적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형식의 불교사서이다.
『대송승사략』은 인물 중심의 불교사서들이 빠뜨린 부분을 보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전등록 계통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편찬되 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황제의 칙서를 받아 편찬된 사실은 불교 가 정치 권력에 예속될 징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선종사서는 이미 8세기에도 편찬되었으나, 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 는 ‘전등록(傳燈錄)’의 등장은 1004년에 편찬된 『경덕전등록』부터이다.
『경덕 전등록』 또한 도원(道原)이 황제의 명을 받아 저술했는데, 서문에서 그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가나제바가) 바늘을 던진 현묘한 취지를 여는 것이 아니거나 거 센 번개처럼 빠른 기미를 내보이는 것이 아니거나 오묘하게 밝은 참된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거나 고와 공의 깊은 이치를 본받아 서술하는 것이 아니 라면, 어떻게 법등을 전한다는 전등(傳燈)의 비유에 들어맞아 눈의 막을 긁어내 는 (돈오의) 공덕을 베풀 수 있겠는가!”18
이미 『전법보기』 등의 선종사서에서 강 조하고 중시한 깨달음을 거듭 언급하면서 그것이 전등의 핵심임을 말하고 있다.
『경덕전등록』은 앞서 언급했듯이 『조당집』에서 확정된 계보를 그대로 계승 했다.
과거칠불에서 시작해 서천27조, 동토6조를 거쳐 법안문익(法眼文益)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52대, 1,701명의 전기와 기연(機緣)들이 집대성되어 있다.19
18 『경덕전등록』 권1, 「序」, “自非啟投針之玄趣, 馳激電之迅機, 開示妙明之真心, 祖述苦空之深理, 卽何以契傳燈之喻, 施刮膜之功.”
19 『경덕전등록』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石井修道, 1987, 『宋代禪宗史の 硏究』, 大東出版社, 1장 참조.
특히 주목할 부분은 권27~권30이다.
권27에서는 선승은 아니지만 선 문(禪門)에 현달했다고 여겨지는 인물 열 명의 전기를 서술하고, 이어 무명(無 名)의 존자들이 남긴 빼어난 말들을 간략하게 기술했다.
이는 나중에 『연등회 요』(1183)에서 「응화현성(應化賢聖)」과 「망명존숙(亡名尊宿)」이라는 항목으로 계승된다.
권28에는 「제방광어(諸方廣語)」라는 제목으로 열두 명의 선사가 남 긴 긴 법어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29와 권30에는 선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게송들과 짤막한 글들이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경덕전등록』은 불교사서이면서 공안집의 성격도 아울러 띠게 되었는데, 이는 전등록 계통의 선 종사서들이 갖는 특성이 되었다.
11세기 말을 전후해 『조당집』이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진 것도 그런 특성이 중시되고 강화된 결과로 여겨진다.
간단히 정리하면, 『경덕전등록』은 이후에 두 가지 방면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하나는 공안집이 저술되는 길을 연 일이다.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경덕전등록』을 바탕으로 고칙(古則) 100개를 뽑아 송을 붙여서 『설두송고(雪竇頌古)』를 저술하고,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 『설두송 고』에 주석을 달아 『벽암록(碧巖錄)』(1125)을 저술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 등록’이라는 불교사서의 한 갈래를 확고히 한 일이다.
이는 혜교가 십과를 마련 해 『고승전』을 저술함으로써 ‘고승전’이 불교사서의 한 갈래로 확립된 것과 흡 사하다.
『경덕전등록』에 이어 네 가지 전등록이 편찬되었다.
1029년에 이준욱(李遵 勗)이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을, 1101년에는 유백(惟白)이 『건중정국속등록 (建中靖國續燈錄)』을, 1183년에는 오명(悟明)이 『연등회요(聯燈會要)』를, 1204년에는 정수(正受)가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을 차례로 편찬했다.
『경 덕전등록』을 포함한 이 다섯 가지 전등록을 ‘오등(五燈)’이라 일컫는다.
『천성광등록』은 석가모니불을 필두로 서천27조, 동토6조, 남악과 청원 문 하의 선승들을 법맥에 따라 서술한 것이어서 『조당집』과 흡사하다.
『건중정국 속등록』은 『경덕전등록』과 『천성광등록』을 이었기 때문에 ‘속등록’이라 명명되 었는데, 역시 법맥과 기연어구, 게송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다만, 운문 종(雲門宗) 계통의 선승들에 편중된 면이 있다.
『연등회요』 또한 앞의 선종사서 들을 바탕으로 저술되었으며, 『경덕전등록』을 본받아 권29의 후반부에 「응화 현성」과 「망명존숙」을 두었다.
이 「응화현성」은 선승은 아님에도 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의 전기를 서술한 부분으로, 『경덕전등록』보다 더 많은 인물을 수록했다.
「망명존숙」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존숙들의 언 행을 실은 부분이며, 역시 『경덕전등록』보다 확대되었다. 오등의 마지막 전등록인 『가태보등록』에서 저자인 정수는 특이하게도 불심 이 깊고 교리를 깊이 이해하는 황제들과 관료들, 서민들과 여인들, 비구니들까 지 아울러 입전했다.
이는 앞서 편찬된 전등록들이 선승을 중심으로 기술한 점 을 보완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래서 전등록의 명칭도 ‘보등록(普燈錄)’이라 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252년에 보제(普濟, 1178~1253)는 이 다섯 가지 전등록을 종합하고 정리해 『오등회원』을 저술했다.
선종사에서 ‘전등록’과 ‘오 등’은 이렇게 해서 확립되었다.
송대에 전등록 형태의 선종사서만 저술된 것은 아니다.
1061년에 계숭(契 嵩, 1007~1072)은 『전법정종기』(9권)를 저술했는데, 책명은 ‘법을 전한 올바른 종통(宗統)이나 계통에 관한 기록’을 의미한다.
실제로 권1부터 권6까지는 석가 여래를 시작으로 서천27조와 동토6조의 전기를 아주 자세하게 서술해 정종(正 宗)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나머지 세 권에서는 6조 혜능의 직계 1,304명, 방계 205명의 전기를 간략하게 서술했다.
권6까지는 이전의 전등록들에서 빌려온 내용들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고, 권7부터는 거의 법명만 나열한 수준이다. 따라 서 『전법정종기』는 선종 특유의 깨달음보다는 계보를 정리하는 데 중점을 둔 선 종사서라 할 수 있다.
혜홍각범(惠洪覺範, 1071~1128)이 1121년에 저술한 『선림승보전』(30권)은 『전법정종기』와 대비된다.
당말에서 송대까지 조사 81명의 전기만 수록했기 때 문이다.
저술 의도는 혜홍이 순(珣) 상인에게 준 글에 잘 드러나 있다.20
20 이 글의 내용은 혜홍각범 찬, 원철 역주, 1999, 『선림승보전 상』, 장경각, 12쪽에 자세하게 나온다.
혜홍은 처음에 『송고승전』을 읽고 운문(雲門)의 전기가 없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가 오(吳) 땅에서 만난 한 노승에게서 찬녕이 “운문은 강학(講學)과 관계가 없어 일 부러 뺏다”고 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조산(曹山)과 동산(洞山)을 여행하다 가 얻은 중요한 기록들이 『경덕전등록』에는 빠져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혜홍은 『송고승전』과 『경덕전등록』의 부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찬술할 결심 을 했다.
그로부터 각지를 돌아다니며 조사들의 전기를 그러모아 만년에 완성한 것이 『선림승보전』이었다.
『선림승보전』은 그 방대한 분량에 비해 아주 적은 81명의 조사만 입전했다.
이는 각 조사의 전기가 아주 길고 상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조사들의 수행 방법과 깨달음을 얻은 기연, 주요한 게송과 짤막한 글, 문답 등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혜홍이 30년 이상 돌아다니며 모은 자료를 바탕으 로 한 것이다.
허구나 다름없는 석가모니불과 서천 27명의 조사, 이미 널리 알 려져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동토의 여섯 조사는 모두 배제하고, 생생하게 느 낄 수 있는 선승들의 갖가지 말과 행동을 중시해 수록했다.
참신하고 독창적인 저술이었다.
11세기 초부터 12세기 초까지 유사한 전등록이 잇달아 편찬되면서 선종사 서들은 처음의 독창성을 차츰차츰 잃기 시작했다.
특히 종통에 집착한 『전법정종기』는 선종사서의 진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혜홍의 『선림승보전』은 일시적이나마 선종에 참신한 기운을 불어넣는 구실을 했다.
12세기 후반에 조 수(祖琇)가 『승보정속전』(7권)을 저술해 『선림승보전』을 이으면서 송대 선승 30명의 전기만 수록한 것도 혜홍의 의도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속편에 지나지 않아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조수의 저술 가운데 주목할 것은 『융흥편년통론』(29권)이다.
『융흥편년통론』은 1164년에 편찬되었으며, 중국에서 나온 최초의 편년체 불교사서이다.
조수는 동한 명제 영평 7년(64)부터 오대 후주의 현덕 4년(957) 에 이르기까지 894년간의 불교사를 서술했다.
하나의 왕조가 시작될 때마다 서 두에 그 왕조 때의 불교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것, 사이사이에 승려들의 전기를 둔 것, 중요 사건마다 그 뒤에 저자가 ‘논왈(論曰)’이라는 논평문을 실은 것 등이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논평문은 계속 나오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책명에 ‘통론(通論)’이 붙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갖가지 고승전과 전등록 및 역대의 정 사들 외에도 비문, 조령(詔令), 표문(表文), 서기(序記) 등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 또한 크다.
제2기는 찬녕의 『송고승전』과 『대송승사략』으로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경 덕전등록』과 이를 계승한 선종사서들이 잇따라 저술되면서 이른바 ‘전등록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전등록의 시대란 전등록의 정형화 또는 획일화나 다름 없는데, 계보 중심의 서술 방식이 고착화된 데서 입증된다.
이러한 흐름을 간파 한 혜홍은 『선림승보전』으로 그 정형성을 깨뜨리려 했으나, 사상의 혁신이 동반 되지 못해 그 한계가 분명했다.
이런 와중에 조수가 편찬한 편년체의 『융흥편년 통론』은 전에 없던 형식을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불교사서가 편찬될 시 기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지였다.
IV.기전체와 편년체 불교사서
앞 시기에 편찬된 마지막 불교사서는 『가태보등록』으로, 송대에 편찬된 오등의 마지막 전등록이다.
그러나 송대 불교사서의 마지막은 아니다.
그 뒤에도 남송 이 멸망할 때(1279)까지 70여 년 동안 4종의 불교사서가 편찬되었는데, 그 체재 나 내용이 새로워졌다.
이런 흐름은 원나라가 멸망하는 1368년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제3기는 남송 후기부터 원 말기까지이며, 이 시기에 편찬된 불교사서는 모두 8종이다.
(23) 『석문정통(釋門正統)』(8권, 1237), 기전체, 종감(宗鑑), X75
(24) 『오등회원(五燈會元)』(20권, 1252), 열전체(계보), 보제(普濟), X80
(25) 『불조통기(佛祖統紀)』(54권, 1269), 기전체, 지반(志磐), T49
(26) 『석씨통감(釋氏通鑑)』(12권, 1270), 편년체, 본각(本覺), X76
(27) 『역조석씨자감(歷朝釋氏資鑑)』(12권, 1275), 편년체, 희중(熙仲), X76
(28)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22권, 1333), 편년체, 염상(念常), T49
(29)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4권, 1354), 편년체, 각안(覺岸), T49
(30)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30권, 1366), 열전체(십이과), 담 령(曇靈), X77
먼저 『오등회원』에 대해 간단히 거론하겠다. 『오등회원』은 보제(普濟)가 『경덕전등록』에서 『가태보등록』까지 다섯 전등록을 집약해 1252년에 내놓은 선종사서이다.
다섯 전등록의 구성이 대체로 동일하고 내용도 중복되어 번쇄하기만 하다는 판단에서 편찬된 것이므로 사실상 전등록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불교사서이다.
이 점은 이 시기에 기전체와 편년체 불교사서가 집중적으로 편찬 되는 데서도 확인된다.
『오등회원』이 나오기 전에 불교사서의 편찬에서 전환이 일어났음을 알려주 는 것이 천태종에서 나온 『석문정통』(8권)이다.
북송 때 원영(元穎) 21 법사가 저 술한 『천태종원록(天台宗元錄)』을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거사 오극기 (吳克己)가 필사하면서 책명을 ‘석문정통(釋門正統)’으로 고쳤다.
이를 종감(宗 鑑)이 수정하고 확충해서 기전체 형식으로 구성해 1237년에 완성한 것이 현재 전하는 『석문정통』이다.22
기전체 불교사서로는 중국 최초이며, 이 밖에는 『불 조통기』가 있을 따름이다.
그만큼 특이하고 주목할 만한 불교사서이다.
『석문정통』은 큰 틀에서는 유교사서의 기전체 형식을 따르지만 세부적으로 는 불교적 특성을 살리는 항목들이 설정되어 있다.
큰 틀은 「본기」(권1), 「세가」 (권1~권2), 「지(志)」(권3~권4), 「열전」(권5~권8), 「재기(載記)」(권8)로 이루어져 있다.
종감은 서문에, “본기로써 종파를 만든 이들을 높이고, 세가로써 그것을 지키고 이룬 이들을 드러내며, 지에서는 실행된 제도들을 자세히 서술해서 잘 해낸 승려들을 높이며, 열전에서는 (승려들의 전기를 통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흘러온 양상을 보여주고, 재기에서는 (천태종 이외의 승려들 가운데) 우뚝한 이들 의 전기를 서술했다”23고 쓰면서 자신의 의도와 함께 구성의 의의를 밝혔다.
21 이러한 사실은 『석문정통』 권7에 나오는 원영과 오극기의 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22 『석문정통』의 오극기 전기에 “(오극기는) 늘그막에 『석문정통』을 편집했는데, 「기 운(紀運)」, 「열전」, 「총론」으로 구성되었다”(『釋門正統』 권7, <오극기>. “晚編釋 門正統, 曰紀運, 曰列傳, 曰總論.”)는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기전체 형식으로 『석문정통』을 구성한 이는 종감이다.
23 『석문정통』 권1, 「序」, “本紀以嚴創制, 世家以顯守成, 志詳所行之法, 以崇能 行之侶, 諸傳派別而川流, 載記嶽立而山峙.”
「본기」에서는 교주인 석가모니와 천태종의 고조(高祖)인 용수(龍樹)의 전기 를 싣고, 「세가」에서는 혜문(慧文), 혜사(慧思), 지의 등 중국 천태종의 주요 조사들을 서술했다.
「지」는 「신토지(身土志)」, 「제자지(弟子志)」, 「탑묘지(塔廟 志)」, 「호법지(護法志)」, 「이생지(利生志)」, 「순속지(順俗志)」, 「흥쇠지(興衰 志)」, 「척위지(斥僞志)」 등 8개로 세분되는데, 갖가지 제도와 풍속 따위의 불교 적 사실들이 기술되어 있다.
「열전」에서는 천태종의 승려들, 특히 송대 이후에 천태종을 중흥하는 데 기여한 승려들을 주로 입전했고, 불법을 수호하는 데 뛰 어났던 다른 종파의 승려들과 속인들도 함께 실었다.
끝으로 「재기」에서는 선 종, 화엄종, 율종, 밀교 등의 주요 고승들이 입전되었다.
송대에 지속적으로 편 찬된 전등록, 즉 선종사서에 대응하기 위해 이러한 구성과 내용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1269년에 지반(志磐)은 『석문정통』보다 훨씬 방대한 『불조통기』(54권)를 편찬했다.
「본기」(권1~권8), 「세가」(권9~권10), 「열전」(권11~권22), 「표(表)」(권 23~권24), 「지」(권25~권54)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석문정통』처럼 기전체 형 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지반이 서문에서, “양저(종감)가 저술한 『석문정통』은 체재가 엉성하며 글은 거칠고 뜻은 어그러져 있다”24고 비판하고 있듯이 『석문 정통』을 본떴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반은 “「본기」와 「세가」, 「열전」은 태사공 을 본받았고, 「법운통색지」는 사마공을 본받았다”25고 했다.
24 『불조통기』 권1, 「序」, “良渚之著正統, 雖粗立體法, 而義乖文薉.”
25 『불조통기』 권1, 「序」, “紀傳世家, 法太史公; 通塞志, 法司馬公.”
태사공은 사마천 이며, 사마공은 『자치통감(資治通鑑)』(294권, 편년체 통사)을 저술한 사마광(司 馬光, 1019~1086)을 가리킨다.
지(志)에 속하는 「법운통색지』는 『불조통기』에 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독특한 항목이다.
우선 「본기」에는 석가모니, 그리고 가섭부터 사자존자(師子尊者)까지 서토 (인도)의 24조사, 혜문에서 형계담연까지 중국 천태종을 열고 계승한 동토의 9조사, 도수(道邃)에서 법지(法智)까지 형계 이후에 천태교학을 널리 편 8조사 등이 계보에 따라 입전되어 있는데, 천태종의 교리가 전해지고 도통이 이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세가」에서는 「본기」에 나오는 조사들의 방계를 서술하고 있다.
「열전」은 「제사열전(諸師列傳)」(10권), 「제사잡전(諸師雜傳)」(1권), 「미상 승사전(未詳承嗣傳)」(1권) 등으로 다시 세분되어 있으며, 모두 441명의 전기가 실려 있다.
「표」는 양무제 때인 502년부터 송나라 인종 때인 1033년까지 천태 종이 널리 전파된 내력을 연표로 작성한 「역대전교표(歷代傳敎表)」, 「본기」와 「세가」, 「열전」의 인물들이 불도를 서로 전한 계보를 정리한 「불조세계표(佛祖 世繫表)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 항목도 매우 흥미롭고 새롭지만, 가장 주목을 끄는 항목은 「지」이다.
「지」는 전체 54권 가운데 30권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큰데, 「산가교전지(山 家敎典志)」(권25), 「정토입교지(淨土立敎志)」(권26~권28), 「제종입교지(諸宗立 敎志)」(권29), 「삼세출흥지(三世出興志)」(권30), 「세계명체지(世界明體志)」(권 31~권32), 「법문광현지(法門光顯志)」(권33), 「법운통색지(法運通塞志)」(권34~ 권48), 「명문광교지(名文光敎志)」(권49~권50), 「역대회요지(歷代會要志)」(권 51~권54) 등 아홉 개의 하위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법 운통색지」이다.
주소왕 26년(기원전 1023)부터 송 이종(理宗) 때(1227)까지 불 교가 출현하고 중국에 전파되어 융성했다가 쇠락하는 동안에 일어난 불교사의 주요 사실들이 편년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법운통색지」 자체가 편년체의 불교통사인 셈이다.
이로써 보면, 『불조통기』는 기전체 속에 편년체를 담은 불 교사서라 할 수 있어 『석문정통』과 매우 다르다.
「지」의 다른 항목들 또한 독특하다.
각 항목들을 통해 불교사 전반을 두루 서술하고 있어 선종의 전등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지반은 서문에서, “유교와 불교, 도교에서 각각의 법을 세운 일, 선종과 교종, 율종 등이 종파를 연 일 따위 를 계통에 따라 한데 모아서 남김없이 다 기록했다”26고 밝혔는데, 실제 구성과 서술 또한 그러했다.
26 『불조통기』 권1, 「序」, “儒釋道之立法, 禪教律之開宗, 統而會之, 莫不畢錄.”
선종사서처럼 천태종의 종파적 우월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서도 다른 종파의 인물들과 일반적인 불교사까지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균형 을 잡고 있는 것이 『불조통기』의 특성이다.
이렇게 기전체 불교사서가 나온 뒤에 특이하게도 편년체 불교사서가 잇달아 편찬되었다.
앞 시기의 『융흥편년통론』(1164)으로부터 거의 100여 년 뒤인 1270년에 본각(本覺)이 『석씨통감』(12권)을 내놓았다.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사 마광의 『자치통감』을 본뜬 편년체 통사이다.
서주(西周)의 주소왕(周昭王) 갑인 년부터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경신년(960)까지 1930년에 걸쳐 불교와 관련 된 일들을 서술하면서 불교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승려들의 전기를 사이사이 에 끼워 넣었다.
편년체 속에 열전을 포함시킨 것은 『융흥편년통론』과 유사하지 만, 주소왕 때부터 불교사를 서술한 것은 다른 점이다.
서문에서 본각은, “온갖 경전과 사서, 열전과 기록 등의 편년이 앞뒤가 일관 되도록 이어가지 못하고 살펴보기에도 불편한 점, 게다가 대대로 이어진 신이한 일들도 숨기고 드러내지 못한 점을 민망하게 여겨 두루 구하고 널리 찾으며 밤 낮 없이 힘써 그러모아 한 권을 이루었으니, 석씨통감이라 했다”27고 밝혔다.
27 『불조통기』 권1, 「序」, “憫諸經史傳錄編年, 前後不相聯貫, 不便觀覧, 與夫歷 代神異, 隱而不顯者, 旁求廣索, 繼晷焚膏, 集成一部, 目曰釋氏通鑑.”
이 는 갖가지 문헌들을 두루 참조해서 엮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책의 서두에 참조 한 문헌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불서(佛書) 59종, 유서(儒書) 44종, 도서(道書) 3종 등이 명시되어 있다.
그 밖에도 적지 않은 송나라 때의 필기(筆記)들도 참조 했다.
『석씨통감』을 이어 원(元, 1271~1368)나라 때에도 편년체 불교사서들이 잇 달아 편찬되었다.
1275년에는 희중(熙仲)이 『역조석씨자감』(12권)을, 1333년 에는 염상(念常)이 『불조역대통재』(22권)를, 1354년에는 각안(覺岸, 1286~?)이 『석씨계고략』(4권)을 저술했다.
『역조석씨자감』은 주소왕 때부터 원나라 세조 지원(至元) 1년(1264)까지 서술한 통사인데, 송대 이전의 불교사는 『석씨통감』 을 바탕으로 했고 송대 이후는 저자 자신이 그러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 했다.
『역조석씨자감』은 특이하게 서두에 「제기(帝紀)」라는 항목을 두어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와 삼대(三代, 하·상·주)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했으며, 그런 뒤에 주소왕 때 마야부인이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하면서 불교사의 서술을 시작했다.
삼황오제와 삼대의 일을 서두에 넣은 것은 불교사를 중국의 고대사와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불조역대통재』와 『석씨계고략』에서도 이를 따랐다.
『불조역대통재』는 권1에서 과거칠불의 게송과 전통적인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기술했다. 게송은 『경덕전등록』에 나오는 것을 따랐다.
권2에서는 반고(盤 古)와 삼황오제, 삼대에 대해 서술했다.
권3부터는 주소왕 때를 기점으로 제왕 의 기원(紀元)에 맞추어 중국의 불교사를 기술했으며, 아울러 석가모니와 서천 의 27조사의 사적도 싣고 유교와 도교 및 세속의 큰일도 함께 기술했다.
이로 말미암아 『역조석씨자감』보다 분량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석씨계고략』 또한 삼황오제부터 기술하는데, 고작 네 권임에도 불교사와 세속사를 아울러 서술 했다.
선종과 관련된 사적이나 선승들을 중요하게 다룬 점을 볼 때, 선종의 입장 에서 불교사를 정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전체와 편년체가 주로 편찬되던 이 시기의 막바지인 1366년에 담령(曇靈) 은 『신수과분육학승전』(이하 ‘육학승전’이라 줄여 일컬음)을 저술해 내놓았다.
양·당·송의 세 고승전 및 『오등회원』을 주요 자료로 삼아 한나라 때부터 북송 초까지 1,673명의 전기를 실었다.
그런데 ‘육학십이과(六學十二科)’라는 독특한 체재를 갖추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을 바탕으로 육학(六學)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혜학(慧學)·시학(施學)·계학(戒學)·인욕학 (忍辱學)·정진학(精進學)·정학(定學) 등을 차례로 배치했다.
이 여섯 항목은 각 각 2개의 과목을 포함한다.
혜학에는 「역경(譯經)」과 「전종(傳宗)」이, 시학에는 「유신(遺身)」과 「이물(利物)」이, 계학에는 「홍법(弘法)」과 「호교(護敎)」가, 인욕 에는 「섭념(攝念)」과 「지지(持志)」가, 정진에는 「의해(義解)」와 「감통(感通)」이, 정학에는 「증오(證悟)」와 「신화(神化)」가 있어 모두 열두 과목이다.
과목의 명칭 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고승전』과 『속고승전』 등의 십과를 변형하고 확장해서 육바라밀을 결부시킨 체재이다.
무엇보다도 『육학승전』은 이전의 세 고승전과 달리 통사인데, 이 또한 이 시기 불교사서의 한 특성을 공유한 것이다.
이렇게 제3기에는 제2기 때와 다른 새로운 형식의 불교사서들이 편찬되 었다.
기전체가 처음으로 나타났고, 편년체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주 도한 쪽은 천태종 승려들이었으나, 뒤이어 염상과 각안 같은 선승들도 적극적으 로 변화를 꾀해 편년체 불교사서를 편찬했다.
십과를 창의적으로 변형시킨 고승 전도 저술되었다.
반면에, 불교계에서 선종의 교세가 여전했음에도 전등록은 새로 편찬되지 않았다. 이는 전등록이 공안집으로 여겨지면서 더 이상 불교사서 로서 의의를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V.속편들과 탈중세적 불교사서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제4기가 시작된다.
왕조가 바뀌었다고 불교계 가 재편되거나 불교사의 전환이 일어났을 것 같지는 않으나, 흥미롭게도 불교사 서의 편찬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요컨대, 제3기에서 나타난 새로운 체재의 불교사서들이 더 이상 편찬되지 않고, 이전의 여러 시기에 편찬된 불교사서들의 속편(續篇)들이 줄지어 나왔다.
물론 제4기의 막바지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불교사서는 아래와 같다.
(31) 『속전등록(續傳燈錄)』(36권, 1390 전후), 열전체(계보), 거정(居頂), T51
(32) 『속불조통기(續佛祖統紀)』(2권, 1400?), 열전체(계보), 작자 미상, X75
(33) 『신승전(神僧傳)』(9권, 1417), 열전체(연대), 주체(朱棣), T50
(34) 『증집속전등록(增集續傳燈錄)』(6권, 1417), 열전체(계보), 문수(文琇), X83
(35) 『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8권, 1617), 열전체(삼과), 여성(如惺), T50
(36) 『석감계고략속집(釋鑑稽古略續集)』(3권, 1627?), 편년체, 환륜(幻輪), T49
(37) 『거사분등록(居士分燈錄)』(2권, 1632), 열전체(연대), 주시은(朱時恩), X86
(38) 『불조강목(佛祖綱目)』(41권, 1634), 편년체(강목체), 주시은, X85
(39) 『보속고승전(補續高僧傳)』(26권, 1641), 열전체(십과), 명하(明河), X77
(40) 『오등회원속략(五燈會元續略)』(4권, 1644), 열전체(계보), 정주(淨柱), X80
(41) 『계등록(繼燈錄)』(6권, 1650), 열전체(계보), 원현(元賢), X86
(42) 『오등엄통(五燈嚴統)』(25권, 1653), 열전체(계보), 통용(通容), X80~81
(43) 『남송원명선림승보전(南宋元明禪林僧寶傳)』(15권, 1677), 열전체(계보), 자융(自融), X79
(44) 『속등정통(續燈正統)』(42권, 1691), 열전체(계보), 성통(性統), X84
(45) 『오등전서(五燈全書)』(120권, 1700 전후), 열전체(계보), 초영(超永), X81~82
(46) 『율종등보(律宗燈譜)』(8권, 1765), 열전체(계보), 원량(源諒), B22
(47) 『거사전(居士傳)』(56권, 1775), 열전체(연대), 팽제청(彭際淸), X88
(48) 『선여인전(善女人傳)』(2권, 1795), 열전체(연대), 팽제청, X88
제4기는 14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인데, 기간이 400여 년인만큼 편찬 된 불교사서의 수도 많아 무려 18종이다.
그런데 1417년에 『증집속전등록』이 편찬된 뒤로 200여 년이 지나서 비로소 『대명고승전』이 저술되었으므로 중간 에 긴 공백기가 있다.
그런데 이 공백기가 불교사서의 편찬에 큰 변화를 가져왔 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글에서 이런 공백기가 있음에도 이 기간을 하나로 묶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제4기는 한마디로 ‘속편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먼저 14세기 말에 거정(居頂, ?~1404)이 저술한 『속전등록』(36권)을 보자. 책명에서 드러나듯이 북송의 『경 덕전등록』을 이었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의 10세손에 해당하는 수산성념(首山 省念, 926~993)에서 18세손까지 송대와 원대 선승들의 전기를 실었는데, 내용 은 기존의 전등록과 유사하다.
곧이어 1417년에 문수(文琇, 1345~1418)가 『속전등록』을 계승한 『증집속전등록』(6권)을 저술해, 송대와 원대 선종의 전적(典 籍)과 탑명, 행장 등을 수록하고 육조의 18세손부터 25세손까지 500여 명의 전 기를 실었다.
속편의 속편에 해당하는 불교사서이다.
『속불조통기』는 『불조통기』(1269)의 속편이며, 체재가 기전체가 아니라 전 등록처럼 계보에 따라 승려들의 전기를 서술한 열전체이다.
『불조통기』의 열전 부분만 계승한 것이다.
환륜(幻輪)이 저술한 『석감계고략속집』은 『석씨계고략』 (1354)의 속편으로, 원 세조(世祖, 1271~1294) 때부터 명 희종(熹宗, 1620~1627 재위) 때까지 불교사를 편년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정주(淨柱)의 『오등회원 속략』, 원현(元賢)의 『계등록』, 통용(通容)의 『오등엄통』, 성통(性統)의 『속등정 통』 등은 모두 『오등회원』(1252)을 이은 것들이다.
『오등전서』(120권)는 『오등 회원』을 비롯해 온갖 전등록을 주요 자료로 삼아 편찬한 것이며, 전등록을 집대 성한 불교사서이다.
『남송원명선림승보전』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선림승보전』 (1121)의 속편이다.
1617년에 저술된 『대명고승전』은 『송고승전』을 이어 편찬된 일종의 단대사 불교사서인데, 십과가 아닌 삼과(三科)로 구성되어 있다.
불필요하다고 여긴 과 목을 빼버렸다.
이는 불교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28
28 이에 대해서는 정천구, 2022, 앞의 글, 200~204쪽 참조.
그럼에도 보완의 필 요성을 느낀 명하(明河)가 1641년에 십과로 구성된 『보속고승전』(26권)을 편찬 했으니, 『대명고승전』의 속편에 해당한다.
속편이 아닌 불교사서도 7종이 있다.
편찬된 연대순으로 간략하게 살펴보 겠다. 먼저 주체(朱棣), 곧 명의 성조(成祖, 1402~1424 재위)가 편집했다는 『신 승전』은 수많은 고승전을 참조해 한대(漢代)부터 원대(元代)까지 불교사에서 신 이한 행적을 남긴 승려 288명의 전기를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다.
주시은(朱 時恩, 1564~?)의 『불조강목』(41권)은 과거칠불 및 역대 조사들의 행적과 사적 을 강목체(綱目體)로 서술한 것인데, 크게는 역대 연호의 순서를 따랐으므로 편 년체이다.
저자가 거사라는 점에서도 특이하고, 강목체를 품은 편년체의 불교 사서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주시은은 거사들만 입전한 『거사분등록』도 편찬했다.
원량(源諒)이 1765년에 편찬한 『율종등보』는 율종의 유일한 불교사서이다.
책명의 ‘등보’에서 드러나듯이 전등록의 계보를 본떴다.
서천의 석가모니불과 다섯 존자를 율종의 종조로서 서술한 뒤에 동토의 율조들을 계보에 따라 기술 했다.
율종의 역사가 일찍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뒤늦게 나온 불교사서이며, 그 런 만큼 율종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불교사서들은 속편이든 아니든 모두 입전 대상이 승려들 이다. 불교사서의 편찬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니다.
제1기의 『비구니전』 이후로 모든 불교사서는 비구승들을 중심으로 불교사를 서술해왔다.
재가자들의 전기 가 실리는 경우가 가끔 있기는 했으나, 지극히 적은 분량만 할애되었을 뿐이다. 과연 이러한 서술이 불교사의 실상에 맞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편향된 서 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불교 교리에도 어긋난다.
붓다는 분명히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고 가르쳤다.
출가자와 재가자에 차등을 두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교리이다.
그럼 에도 불교사서에서는 여성 수행자인 비구니뿐 아니라 재가자들도 대부분 배제 되었다.
이는 오래된 정치적·사회적 차등이 불교계에 배어든 결과였다.
세간에 서 신분의 고하, 남녀의 성별 따위로 차별하던 인식이 출가자와 재가자, 비구와 비구니의 차등도 당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차별과 차등의 인식이 불교사서의 편찬에도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4기의 막바지에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불교사서들이 편찬되어 눈길을 끈다.
먼저 1632년에 주시은이 저술한 『거사분등록』(2권)을 보자.
유마 힐, 부대사(傅大士)로부터 시작해 원나라 송경렴(宋景濂)에 이르기까지 선의 법 등을 이어받은 거사와 관료 72명의 전기를 간략하게 서술한 열전체 불교사서 이다.
책명에는 ‘등(燈)’이 명시되어 있으나, 전등록처럼 스승과 제자의 계보에 따라 기술되지는 않았다. 입전 인물이 거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시은은 왜 이런 불교사서를 저술했을까?
주시은은 서문에서,
“그런데 법도가 성행하던 당시를 곰곰 생각해보면, 교 화의 줄기가 있으면 반드시 교화의 가지가 있다. 교화의 줄기는 위에서 서술했 듯이 전등록에서 갖추어 실었다.
교화의 가지로는 유마힐, 방도현(방거사), 무진 거사 장상영, 송경렴 등이 있는데, 이들은 큰 것은 숨기고 작은 것을 드러내며 더러운 진흙탕에서 살아도 가명(假名, 임시적 언어)을 쓰며 실상을 이야기 한다”29
고 말했다.
29 『거사분등록』 권1, 「自敍」, “然考當時法道盛行, 有主化者必有分化者. 主化者 如上所述, 具載傳燈. 分化者則有如維摩詰龐道玄張無盡宋景濂輩, 秘大現小, 帶水拖泥, 不壞假名而談實相.”
교화의 줄기는 조사나 선승들을, 교화의 가지는 거사들을 가 리킨다.
전등록이 주로 줄기만 싣고 가지들을 제쳐둔 데 대한 보완으로 『거사분 등록』이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선승과 거사를 차등적으로 보고 있어 오랜 통념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거사들만 수록하면서도 조사의 계보를 본뜬 데에 이미 그런 한계는 드러나 있었다. 『거사분등록』이 나온 지 150여 년이 지나자 방대한 분량의 『거사전』(56권) 이 저술되었다.
저자는 거사인 팽제청(彭際淸, 1740~1796)이다.
팽제청은 『불 조통기』, 『경덕전등록』, 『왕생전(往生傳)』 등 갖가지 문헌에서 거사들의 사적을 그러모아 열전체 형식으로 서술했다.
『거사분등록』이 선종에 치우쳐 있었다면, 『거사전』은 특정 종파에 한정하지 않고 후한 때부터 청 강희(康熙, 1662~1722) 연간까지 거사들을 두루 실었다.
팽제청은 『거사전』에 부치는 게송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 들으니, 관세 음보살은 변화하는 몸이 서른두 가지며 『화엄경』에도 쉰세 명의 선지식이 있다. 비구와 거사의 몸, 갖가지 천상과 인간의 모습들은 고정된 형태가 없이 바람을 따라 오가는 허공의 구름과 같고 또 비치는 해를 따라 다섯 가지 색을 드러내는 바다의 파도와 같다.”30
30 『거사전』 권1, 「題居士傳偈」, “我聞觀世音, 應身三十二, 華嚴善知識, 亦有 五十三. 比邱居士身, 種種天人趣, 譬如空中雲, 隨風無定形, 又如海上波, 從 日現五色.”
팽제청은 비구와 거사들뿐 아니라 천상과 인간에서 꼴을 가진 이들은 모두 보살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이는 모든 존재를 대등하게 보 았음을 의미한다. 차등적으로 본 주시은과는 인식이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팽제청은 『거사전』에 짝이 되는 『선여인전』(2권)도 저술했다.
1795년에 저술된 『선여인전』에는 진대(晉代)부터 청 건륭(乾隆) 연간 (1736~1795)까지 147명의 재가 여성 불자의 사적이 실려 있다.
이 여성들의 신 분은 황후에서 귀족 부녀자, 이름을 알 수 없는 노파들까지 매우 다양하다. 팽제 청이 갖가지 역사서를 비롯해 수많은 문집, 잡설 등을 두루 뒤져서 자료를 확보 한 결과이다.
그가 굳이 『선여인전』을 저술한 것은 두 딸에게 대승경전을 가르 치면서 고금의 선여인들이 어떻게 불법에 젖어들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함 이었다.
팽제청은 본전을 서술하기 전에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한나라 이래로 여 인 열전은 대부분 부녀자의 순종을 우선으로 했는데, 후대에 이르러 더없이 뛰 어나고 남달리 훌륭한 여인들이 이따금씩 나왔다.
그 지조와 절개를 미루어보 면, 눈이나 서리처럼 맑고 깨끗해서 마치 저 하늘의 강한 바람을 타고 청신한 기 운을 부려서 천제의 궁궐에서 노니는 사람이로다! 참으로 생사의 윤회를 끊고 열반의 피안에 오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적정한 경지에 정신을 집중하고 중생세 간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31
31 『선여인전』 卷上. “自漢以上, 傳列女者, 大都以婦順爲先, 至其後而卓絶瑰異 之行乃閒出. 推其志節, 皎如冰霜, 殆將乘罡風, 御顥氣, 而翱翔乎清都者耶! 夫誠欲斷生死流, 登涅槃岸, 必當棲神寂泊之場, 高蹈人天之表.”
중세에 여성에게 요구한 것이 순종이었다고 하 면서 팽제청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여인들 가운데서도 천제의 궁궐 에서 노니는 신선이 나오고, 생사의 윤회를 끊고 열반에 드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이는 여인을 남성과 대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탈중세적 인식으로 보 아도 무방하다.
네 번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속편 불교사서들은 종수와 수량에 관계없이, 아 니 종수와 수량이 많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불교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제쳐두더라도 구성이나 체재라는 형식에서조차 유의미 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사전』과 『선여인전』 은 역사적 변화에 걸맞은 인식의 전환을 일부 보여준 불교사서로 평가된다.
완 전히 탈중세를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근대로 한걸음 나아갔다고 말하 기에는 충분하다.
VI.맺음말
중세부터 근대 직전까지 중국에서 편찬된 48종의 불교사서를 대략 정리하고 소 개했다.
그동안 중국의 역사학 및 사학사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기에 시론 격으로 그 전반적인 양상을 검토했다.
그 결과, 중세 내내 지속적으로 편찬되 었다는 점, 더구나 불교사의 전개와 맞물려서 다양한 서술 방식으로 편찬되었다 는 점, 그리하여 불교사 및 불교문화사 전반을 연구하는 데 활용할 가치가 충분 히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본론에서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서 마무리하겠다.
먼저 불교사서의 서 술 방식 또는 체재에 대한 것인데, 열전체, 편년체, 기전체, 기사본말체 등 네 가 지가 있었다. 48종 가운데 38종이 열전체이고 그 밖에 편년체가 7종, 기전체가 2종, 기사본말체가 1종이었다.
비중이 가장 큰 열전체는 다시 세 가지로 나뉘는 데, 단순히 연대순으로 서술한 열전체(연대), 십과 또는 그 변형을 기본틀로 삼 아 서술한 열전체(십과), 교조나 개조에서 시작해 계보를 따라 서술한 열전체(계 보) 등이 그것이다.
열전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불교사가 본질적으로 승려 개개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불교의 교단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편년체 및 기전체 불교사서들이 세속의 정치사 또는 유교적 제왕 의 연대에 맞추어 서술하면서도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불교적 사실보다 고승들 의 전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는 중세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승려들의 행적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사서를 서술하는 네 가지 방식은 불교사의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 었다.
이 글에서는 그 서술 방식의 전환에 따라 네 시기로 구분했다.
제1기는 6세기 초부터 8세기 말(정확하게는 801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열전체가 주를 이 루었다.
특히, 혜교가 십과를 마련한 『고승전』을 내놓은 뒤에 이 십과를 따르거 나 변형한 체재들이 거듭 나타나면서 이 시기는 ‘고승전의 시대’가 되었다.
물론 십과를 벗어나 계보를 중시하는 열전체가 나왔으나, 크게 보아 고승전에 속하는 것이었다.
제1기에 변형된 십과와 계보 중심의 서술 방식이 나타난 것은 불교계가 종 파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종파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면서 중국적인 색채를 띤 선종의 계보형 열전체가 제2기의 불교사서 편찬을 주도 했다.
제2기는 10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초까지인데, 『경덕전등록』이 나온 뒤에 이를 본받은 선종사서들이 잇달아 편찬되면서 선종의 계보형 열전체는 ‘전등록’ 또는 ‘등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전등록이 불교사서 편찬을 주도한 시기, 다시 말해 선종이 압도적으로 교세를 떨친 시기가 제2기이다.
제2기에 전등록이 잇달아 나와 압도하자 곧바로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체재의 불교사서들이 편찬되면서 제3기가 시작되었다.
제3기는 13세기 초부터 원나라가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이다.
이 시기의 불교사서 8종 가운데 6종이 기전체와 편년체였다.
기전체는 이 시기에만 나타났고, 편년체 또한 이 시기에 집중되었다.
기전체는 천태종에서 선택했으며, 편년체는 선종에서 채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등록이 공안집의 성격을 띠면서 불교사서로서 의의를 잃은 결 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술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 었다.
이는 제4기에서 입증되었다.
제4기는 명이 건국된 14세기 후반부터 청대 18세기 말까지이며, 이 시기에 편찬된 불교사서는 모두 18종이다.
기간도 길고 편찬된 수도 많으나, 14종이 17세기 이후에 편찬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불교사서를 잇는 ‘속편’들이 주 류를 이루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역사가 전환하고 있었음에도 이에 걸맞은 대응이나 반응이 불교계에 없었다는 방증이다.
불교의 쇠퇴가 불교사서의 편찬 양상 을 통해서도 드러난 셈이다.
이 와중에 중세 내내 불교사서에서 간과되거나 배 제되었던 거사들이나 선여인들만 입전한 열전체 불교사서가 편찬되어 주목 된다.
비구 중심의 편향된 서술 태도가 중세가 다 지나서야 일부 시정된 것이다.
중세에 불교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와 경제, 사상과 문화 전 반에서 유교보다 더 깊고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 을 풍부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불교사서(佛敎史書)’이다.
이 글에서 살 펴보았듯이 중국에서만도 방대한 불교사서가 편찬되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그 편찬 양상의 파악은커녕 정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 글에서 대략적 으로나마 정리했다.
이 글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동아시아 불교사서 전반에 대한 연구의 서론 에 불과하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 베트남 등에서 편찬된 불교사서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그 편찬 양상을 고찰해서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는 작업이 이어질 것 이다.
또 불교사서들이 시기별로 어떤 특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유교사서와도 비교 연구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불교사학사(佛敎史學史, Buddhist historiography)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 도 동참하기를 바라면서 맺음말을 마친다.
참고문헌
자료
혜홍각범 찬, 원철 역주, 1999, 『선림승보전 상』, 장경각. 劉勰, 『文心雕龍』. 高麗大藏經(K),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大藏經補編(B), https://tripitaka.cbeta.org/B 大正新修大藏經(T), https://tripitaka.cbeta.org/T 卍續藏經(X), https://tripitaka.cbeta.org/X
단행본
유절 저, 신태갑 역, 2000, 『중국사학사강의』, 신서원. 이부키 아츠시 지음, 최연식 옮김, 2011, 『중국 선의 역사』, 씨아이알. 이종동 저, 조성을 역, 2009, 『중국사학사』, 혜안. 錢穆, 1973, 『中國史學名著』, 臺北三民書局出版. 陳垣, 1955, 『中國佛敎史籍槪論』, 科學出版社. 柳田聖山, 1967, 『初期禪宗史書の硏究』, 선불교문화사. 石井修道, 1987, 『宋代禪宗史の硏究』, 大東出版社.
논문
김호귀, 2014, 「선종의 법맥 의식과 전등사서의 형성」, 『불교학보』 68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정천구, 2022, 「중국 고승전의 체재 변화와 그 의미」, 『대순사상논총』 43집, 대순사상 학술원. , 2024, 「7~8세기 중국 고승전의 정형화와 다양화」, 『대순사상논총』 48집, 대순 사상학술원.
국문초록
중국의 불교사서 편찬과 그 역사적 양상 정천구 불교는 후한 때 중국에 전해졌고, 수백 년이 흐른 뒤에 비로소 중국 사회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러한 과정을 서술하려는 의도에서 6세기 초 혜교는 십과 체재를 고안해 『고승전』을 저술했다. 그 이후 『고승전』을 본뜨거나 그 영향을 받아서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사서들이 편찬되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편찬 된 불교사서는 이 글에서 정리해 소개한 것만도 48종이며, 권수로는 900권이 넘는다.
불교가 중국에서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사학사에서는 불교사서가 거의 간과되거나 배제되어왔다.
이러한 편향 을 시정하며 불교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려는 것이 이 글 의 목적이다.
불교사서의 편찬에서 볼 수 있는 서술 방식 또는 체재는 열전체, 편년체, 기 전체, 기사본말체 등 크게 네 가지였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채택된 열전체는 다시 단순히 연대에 따라 서술하는 열전체, 십과 또는 그 변형된 방식으로 서술 하는 열전체, 계보에 따라 서술하는 열전체 셋으로 나뉘었다.
어떠한 체재를 선 택하느냐는 저자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연구에서 고찰한 바에 따르면 불교사의 흐름과 특히 깊은 관련이 있었다.
불교사서의 편찬 양상이 달라진 데 따라 시기는 넷으로 구분된다.
제1기는 6세기 초부터 8세기 말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십과 체재를 바탕으로 하는 열전 체 곧 고승전의 편찬이 지배적이었다.
제2기는 10세기 후반에서 12세기 말까지 인데, 계보에 따라 서술하는 열전체, 곧 전등록이라는 선종사서가 불교사서 편 찬을 주도했다.
제3기는 제2기에 곧바로 이어진 시기로, 13세기 초부터 14세기 말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기전체와 편년체의 불교사서들이 새롭게 편찬되었는 데, 이는 전등록이 주도한 불교사서 편찬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제4기는 명 이 건국된 14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로, 이 시기에는 이전 시기에 편찬된 불 교사서들을 이은 속편들이 대거 나왔다.
그 와중에 거사들이나 선여인들만 입전 한 열전체 불교사서 3종이 편찬되어 역사적 전환기에 인식의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주제어: 불교사서(佛敎史書), 고승전(高僧傳), 십과(十科), 전등록(傳燈錄), 속편(續篇)
ABSTRACT
A Study of the Compilation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in China and Their Historical Aspects
Jung Chunkoo
Buddhism was introduced to China during the later Han Dynasty, and only after hundreds of years did it deeply permeate Chinese society. With the intention of describing such a process, in the early 6th century, Hyegyo(慧皎) devised a system of ten subjects(十科) and wrote Gaosengzhuan(高僧傳). Since then, Buddhist historical texts(佛敎史書) have been compiled in various ways, modeled after or influenced by Gaosengzhuan. There are 48 kinds of Buddhist historical text compiled from the middle Ages to the modern era, and the volume of the texts is over 900. Considering the influence Buddhism had in China, this is a natural result. Nevertheless, Buddhist historical texts have been largely overlooked or excluded in Chinese historiograph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rrect this bias and raise the necessity for full-scale research on Buddhist historical texts in China. There were four main narrative styles or formats found in the compilation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the Ranked biographies(列 傳體), the Chronicle(編年體), the Annals and biographies(紀傳體),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events(紀事本末體). Among these, the Ranked biographies was the most adopted, and the Ranked biographies were also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the Ranked biographies described simply according to chronology, the Ranked biographies described in ten subjects or a modified form thereof, and the Ranked biographies described according to genealogy. The choice of the style can be seen as a matter of the author’s personal judgment, but according to what was considered in this study, it was particularly deeply related to the flow of the Buddhist history. According to the changes in the compilation aspect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the period is divided into four periods. The first peirod is from the early 6th century to the end of the 8th century, and during this period, the compilation of the ranked biographies, that is biographies of the eminent monks(高僧傳), based on the ten subjects, was dominant. The second period is from the late 10th century to the end of the 12th century, and the compilation of Buddhist historical text was led by the Zen Buddhist historical text called the transmission of the lamp(傳燈錄), a collection of biographies written according to genealogy. The third period is a period immediately following the second period, from the early 13th century to the end of the 14th century. During this period, Buddhist historical texts of the Annals and Biographies format and the Chronicle format were newly compiled, which can be seen as a backlash against the compilation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led by the Transmission of the Lamp. The fourth period lasted from the end of the 14th century to the end of the 18th century. During this period, many sequels(續篇) to the Buddhist historical texts compiled in the previous period were written. In the meantime, three kinds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containing only laymen or laywomen were compiled, showing that a change in perception was taking place during a historical turning point.
Keywords: Buddhist historical text, biographies of the eminent monks, the ten subjects, the transmission of the lamp, the sequel
동북아역사논총 84호(2024년 6월)
* 투고: 2024년 1월 15일, 심사 완료: 2024년 2월 28일, 게재 확정: 2024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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