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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2)/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1회

먹고살기 어려운 빈민이 대부분이었던 염상은

약간의 밑천으로 소금을 사서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실태를 파악하지 못해 세금징수가 어려웠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는 많은 이익을 남기므로 국가에서 통제하지 않으면 힘 있고 돈 많은 자들이 독점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생산은 국가가 주도하고 거대 자본을 소유한 중간 상인이 수례나 배로 전국 각지로 운송한 뒤

소규모 염상이 짊어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인 유통방안 이었다.

이렇게 하면 국가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고 가격을 합리적으로 정 할 수 있다.

아울러 염상은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백성은 편리하게 소금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유수원의 주장이다.

염상의 활동은 야담에 그대로 수용되어 부자가 된 사례로 흔하게 나타난다.

노명흠의 <동패낙송>에 실린 ‘염상으로 부자가 된 김서방 이야기’ 대표적이다.

김서방은 아내의 조언대로 보증금 서른 냥을 염부에게 맡기고 이자 명목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는 이 소금을 짊어지고 100리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외상으로 판매하면서 단골을 만들었다.

성실하게 장사를 한 덕분에 3년이 지나자 3,000냥을 벌었다.

김서방은 보증금을 되찾지 않고 다시 서른 냥을 추가로 지불하며 두 배의 소금을 달라고 했다.

염부들은 기꺼이 김서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서방은 동생과 함께 1년동안 소금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팔다가 자금이 늘어나자 말 한 마리를 구입하여 편하게 소금 장사를 이어갔다.

다시 3년이 흐르자 김서방은 갑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소금은 인삼이나 담배처럼 이득이 많이 나는 상품은 아니어도 없어서는 안되는 생활 필수품이다.

많은 자본도 필요 없었다.

건겅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판로를 확대할 수 있었으므로 서민들이 직업으로 삼기 충분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2회

종합 운수 사업자 세마꾼~~~

「세마 세필을 내었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겠니? 노자와 함께 열 냥이나 들 되 집에 돈이 턱없이 모자라 근이에게 돈을 빌렸단다 」

학봉 김성일의 11대손

김진화의 부인 여강 이씨가 1847년 5월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학봉은 김성일은

조선 선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후 히데요시의 일본 침략 움직임이 없다고 보고를 했던 인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 모친이 여흥 민씨(태종 장인 집안)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문 종가에서도 말을 빌리는데 돈이 모자라 ‘근이’라는 친척의 신세를 졌다는 것이다.

당시 말은 노비 보다 비쌌다.노비 한 명을 면포 150필 정도에 사고팔았는데

말은 그 세배에 달하는 400~500필을 줘야 살 수 있었다.

말을 먹이고 관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말을 소유하려면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말이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는 서비스가 생겨났다.

이들을 새마꾼, 또는 세마부라고 불렀다.

지금의 렌터카나 택시.택배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조선판 종합 운수 사업자인 셈이다.

왕실 기록에는 궁녀들이 궐 밖으로 나가거나 물건을 옮기는 데 세마를 이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고전 소설과 야담집에서는 오늘날 차를 렌트해 드라이브하듯 호탕하게 세마를 내어 길을 떠나는 장면도 나오는데

사실은 여강 이씨 사례처럼 양반가도 세마는 섣불리 쓰기 어려웠다.

이 씨는 비용부담이 맘에 걸려

“정신이 어지럽고 안정을 취할 수 없어 괴롭다”라고 까지 적었을 정도니 말이다.

여강 이씨가 쓴 열 냥은 얼마나 될까?

당시 서울의 여섯 간 짜리 초가가 스무 냥 가량이었다.

그러니 집값의 절반 수준이니 큰 돈을 쓴 셈이다, 그래서 어지러울 지경인 것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말을 빌리려는 수요는 늘어났고 적지 않은 규모로 말을 관리하고 빌려주는 가게인 ‘마계전’이 호황을 누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3회

여강 이씨의 또 다른 편지에는 3,000냥을 들여 한양에 마계전을 차리려는 동생을 뜯어 말리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한양의 괜찮은 기와집이 300냥 안팎이었으니 마계전 점포하나 차리려면 기와집 열 체 값 수준 필요로 했다.

세마를 내면 견마잡이라는 말몰이꾼이 따라 붙었다.

견마는 원칙적으로 문무백관에게만 허용되었지만

민간에서도 유행하여 견마잡이가 없으면 체면치례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견마잡이는 손님을 목적지 까지 데려다 주고 말을 세마꾼에게 돌려주는 일을 했다.

차를 빌리면 내비게이션과 기사가 딸려 오는 격이다.

이들은 목적지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기에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여울을 많이 건너야 할 경우 업어서 건네주는 월척꾼에게 따로 품삯을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비용을 줄일 수 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견마잡이가 말 고삐를 잡고 걸어갔기 때문에 말도 그에 맞춰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드라마처럼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는 모습은 조정에 급한 보고를 위한 파발 이외는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는 손님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에 탄 채 주변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갔다.

실학자 박제가는 이를 두고 “말의 속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바판했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하고 빨리 달릴수록 비싼 말의 사고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당시로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착불로 보내는 택배처럼 세마를 보낸 뒤 받는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급한 환자는 세마를 태워 의원에게 보냈으니 119구급차 역할까지 했었다.

나라에서 사용하는 역마(驛馬)가 부족하거나 북경으로 사행을 떠나는 경우에도 세마꾼에게 말을 빌렸다. 이처럼 세마는 백성의 발 노릇을 충실히 해 준 것이다.

하염없이 길을 걷던 말은 이제 그 고역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심지어 머지않아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가 열릴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4회

조선의 전문 나무꾼~~

「아침에는 골짜기 울리도록 나무 베고

해 지면 도끼 베고 노래하며 돌아오네

잔가지는 밥 짓는 땔감으로 제공하고

큰가지는 잘게 썰어 숯으로 만드네

돈 생겨 술 마시면 추위도 두렵지 않아

나무 아래 취해 자면 부르는 사람없네」

<성현의 ‘나무꾼 아이의 노래>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취사와 난방을 우한 연료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나무뿐이었다,

나무꾼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오래된 직업이다.

‘선녀와 나무꾼’설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전해오는 고대 설화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전업 나무꾼이 없고 어린이나 젊은이가 틈나는 대로 도성 밖의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나무꾼이 고려시대에 없었을리 없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과 그 주변 10리(4㎞)까지 벌목을 금지했다.

나무를 하려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니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은 할 수가 없을 정도다.

도성 사람들은 나무를 시장에서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덕택에 나무꾼은 일찌감치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도성근처가 아니라고 아무 곳에서나 나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곳곳이 국유림이기 때문이다.

왕능의 나무라도 배었다가는 사형감이다.

나무꾼 출입을 감시하는 것은 관리의 주 임무다.

사대부 선산은 양반과 노비가 직접 순찰을 돌았다.

충남 덕산의 선비 조극선(趙克善)은

선산을 오르내리다 나무꾼을 발견하면 도끼를 빼앗곤 했다.

나무꾼은 갈수록 깊은 산속으로 내 몰렸다.

인적드문 산속을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나무꾼은 위험성이 있는 직업이었다.

가장 흔한 위험은 호랑이다. 갚은 산속이 아니어도 호랑이는 자주 나타난다.

인왕산에 들어간 나무꾼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일도 있었다.

짐승보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나무꾼 아이가 소에 나무를 싣고 팔러 가다가 도적을 만나 소를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5회

아이의 시신은 장통교(長通橋: 서울 중구 장교동에 있는 청계천 다리) 아래에 놓인 독안에서 발견되었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국경지대는 숲이 울창했지만 더욱 위험했다.

청나라 사람들이 나무꾼을 납치하여 국경을 넘었다는 빌미로 몸값을 요구하곤 했다,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니 잔가지를 줍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무꾼이 사용한 도구는 도끼보다 낫이나 갈퀴였다.

땔감으로 쓴다면 굳이 굵은 나무를 벨 필요는 없다.

베기도 힘들고 무겁기만 하다.

잔가지만 주워도 충분하다. 풀도 땔감으로 쓸 수 있다.

그래서 잔가지를 꺾기 위한 낫과 풀더미를 긁어 모우는 갈퀴를 선호했다.

허리에 낫을 차고 지게를 짊어진 나무꾼을 묘사한 기록은 많이 나온다.

나무꾼은 새벽에 나가서 해 질 녘에 돌아오곤 한다.

일을 빨리 마칠 필요는 없다.

일찍 돌아와 봐야 다른 일을 시킬 테니 나무를 많이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직접 짊어지고 와야 하므로 한 짐 이상은 무리다.

일찌감치 나무 한 짐만 해 놓으면 남는 시간은 자유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동법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경제학자 김육(金堉)은 나무꾼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가평 잠곡(지금 청평면)에 살았다.

매일 나무를 해 서울에 내다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틈틈이 책을 읽어 과거시험에 합격을 해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일자무식이던 나무꾼이 심심풀이로 글을 읽다가 깨우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여춘영 집안의 노비 정봉(정초부)이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이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저절로 글을 깨친 사람이다.

특히

시를 잘 지어 주인집 자제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주인이 노비 문서를 불태워 그를 해방 시켜 주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져 여기저기서 그를 초청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나무꾼 노릇을 그만 두지 않았다.

정초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무를 해다 팔았다.

당시에는 수운을 이용하여 양평과 가평 일대에서 동대문까지 땔감을 실어왔다.

정초부도 거기에 모인 많은 나무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래서 나무꾼 생활을 묘사한 대목이 시에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신세

(翰墨餘生老採樵)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滿肩秋色動蕭蕭)

동풍이 장안 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 東風吹送長安路)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

( 曉踏靑門第二橋)

​새벽에 나무를 지게에 지고 동대문으로 들어오는 고단한 삶이 서정적으로 그려졌다.

동풍이 나무꾼을 밀어 동대문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표현에는 생활에 쫓겨 나무하는 시인의 심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쓸쓸하고 맑고 고고한 정취를 그림처럼 담아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백미에 해당한다고 한다

출처: <안대회교수 글에서: 성균관대 한문학>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6회

19세기 최고의 시인이었던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이웃집에는 나무꾼 이 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낮이면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고 밤이면 불을 밝히고 소설을 읽었다. 한번은 신위가 그를 집으로 불러다 소설을 읽게 했는데 어찌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누워서 듣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한양에서 소비되는 땔나무의 양은 엄청났다.

나무꾼이 등에 짊어지고 오는 정도로는 감당이 되질 않았다.

결국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나르는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대량 운송이다.

이 선박을 시선(柴船)이라고 한다.

수많은 시선이 한강을 오르내렸다.

정약용이 어느 날 충주로 가는 뱃길에서 강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산을 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것은 땔감을 운반하는 시선이었던 것이다.

서울에는 땔나무 시장이 여러 곳 있었다.

그 중 용산 땔나무 시장이 가장 큰 시장이다. 서강. 마포.서빙고 .뚝섬.두모포 등에도 있었다.

모두 한강 근처 나루다.

지방에서 땔나무를 가득 싣고 올리 온 배가 이곳에 하역하면 땔감 장수들이 한양 각지로 가져가 팔았다. 수요가 많았으므로 경쟁이 치열했다,

땔감 실은 배가 포구에 도착하면 서로 밀치노라 다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목만중의 <판초행>에 등장하는 땔감 장수 노인은 새벽마다 아이종을 데리고 양주에 가서 땔나무를 구입한다.

말 등에 땔 나무를 산처럼 싣고 한양으로 돌아와 시장에 내다 판다.

아침에 40리. 저녁에 60리 도합 100( 40㎞)를 걸어 다닌다.

나무를 모두 팔면 돈 100전이 남는다. 그 노인은 이렇게 생계를 꾸렸다.

나무하는 일만 맡는 노비를 초노(樵奴)라고 했다.

초노가 게으름을 피우면 제아무리 주인이라도 밥을 굶는 수밖에 없다,

대개는 어린 노비가 나무 베는 일을 도맡았다.

나무꾼의 삶은 고된 가운데 여유도 있었다. 그래서 은자(隱者:산야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의 상징이기도 했다.

박세당은 나무꾼이 되어 여생을 마치겠다며 호를 서계초수(西溪樵叟)라고 지었다. 수락산 계곡의 나무꾼이라는 뜻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부친을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 숙종 때 영의정)의 누이와 결혼하여 1660년 과거에 장원을 하고

벼슬길에 올라 주요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송시열과 대립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다산 정약용도 한강의 나무꾼이라는 뜻의 열초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나무꾼 은자(隱者)의 사례는 이만부(李萬敷)의 「송충의전 宋忠義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충의는 서대문 밖에 살았다.

새벽마다 수 십리 떨어진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한양 시장에서 내다 팔았다. 그는 아침.저녁 두 끼를 마련할 돈만 벌면 만족했다.

굳이 제값을 받으러 하지 않고 헐값에 넘겼다. 남은 돈은 거지에게 주었다.

누군가 물었다.

“기왕에 나무꾼이 되었으면 제값을 받고 여유롭게 사는 게 좋지 않은 가?”

 

송충의는 나무꾼 노릇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하루 벌어 이 틀 억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끼니만 해결하고 남는 것은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사람이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놀고먹는 사람은 벌레와 같다고 경멸했다.

그는 나무꾼 이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7회

명사(?)들의 명언(?)

10여년 전에 kbs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리에 방송 돤 적이 있다.

조선의 창업과 관련된 ‘려말선초’를 그린 드라마다.

최근 2021년12월 부터 kbs에서 방영한 이방원도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 진행되는 드라마인데 여기서도 잠깐씩 등장했다.

등장인물은 고려말 공민왕. 집정대신 귀족 이인임. 장군 최영. 고려 충신 정몽주. 혁명가 정도전. 그리고 이성계 .이방원 등이다.

그런데 주연은 ‘정도전’인데 오히려 고려 말 집정대신 이인임이 주인공(?) 역할이 되어버린 드라마였다.

그 원인은 이인임의 명대사 때문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정치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게 일품이다(탈렌트 박영규)

당시 드라마에 나오는 명사(?)들의 명언(?)을 골라 재미삼아 소개하고자 한다.

실제는 명언(?)은 아니고 정치실태를 비꼰 인상 깊은 말들의 모음이라고 할까

역사에서 우리들이 이인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알아야 할 인물이다.

이인임(李仁任, 1312년 ~ 1388년 6월)은 고려 시대 말기의 권신(權臣)이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의 문하에 있었으며,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374년(공민왕 23년) 곧 수문하시중(총리)에 임명되고,

공민왕이 시해되자 공민왕을 죽인 홍륜, 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는 명덕태후(공원왕후)의 뜻에 반하여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인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견지하여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과 개혁 세력의 관료들을 추방했고, 10년간 우왕을 직접 섭정했다.

정몽주를 필두로 한 신진사대부도,최영을 필두로 한 무장 세력도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을 누르지 못 했다

신진사대부나 무장 세력은 이제 막 떠오르던 신인이었지만권문세족은 몇 십년 간 권력을 유지해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권문세가의 수장으로 대단한 권력욕을 자랑했던 이인임(박영규 분)은 비록 악역이었지만,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사리에 맞는 어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1386년(우왕 12년)에는 좌시중이 되었고 이듬해 노병으로 은퇴하였다.

그가 은퇴한 이후 그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관오리들은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했다.

결국 1388년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의 일당이 축출되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은 가족, 친척, 측근, 악노(惡奴)들과 함께 참수되었고, 이인임은 최영의 건의로 경산부에 안치되었으며 곧 병사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8회

권문세족들은 자신들의 탐욕에게 잡아먹히게 된 것이다.

권문세족들은 미친듯이 백성들의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고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강탈하거나 노비로 삼았다.

이제 더 이상 빼앗을 백성들의 땅이 없자권문세족들은 힘이 약한 귀족들의 땅을 노리게 된다.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할까?

오래전에 한번 스크린 했었는데 한번 더 요약하면

1387년 '조반 사건'이 있었다.

이인임의 측근이자 대표적 권문세족이었던 염흥방이조반이라는 귀족이 가문대대로 사용해왔던 황해도의 땅 일부를공문서를 위조하여 강탈했다.

이는 엄연히 불법이었기 때문에 조반은 노발대발하며염흥방을 찾아가 따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염흠방의 노비였던 이광이 다른 노비들과 조반을 구타하는 사건이 터진다.

고려의 귀족이 고작 노비 따위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다.

.조반은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수치심에 조반은 사병을 동원해 이광을 비롯한 노비들을 살해하고는 자수합니다.

염흥방은 이 일이 고려 조정과 왕실 귀에 들어가면

자기가 불법적으로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소식이 알려질까 두려워측근이었던 임견미와 함께 조반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운다.

아니 갑자기 역모죄라뇨??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권문세족이었던 염흥방과 임견미는이 말도 안되는 일을 말이 되게 합니다.조반은 한순간에 반역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 이인임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이인임은 조반사건이 터지기 직전 건강상의 문제로 우왕에게 사직을 청하고 집에서 치료 중이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인임이 조정에서 물러나있을 때 '조반 사건'이 터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이인임이 염흥방과 임견미에게 조반 사건을 사주한 것으로 나왔는데 이인임이 시켰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다만 앞뒤 상황으로 볼 때이인임이 뒤에서 염흥방을 조종한 것 같은 분위기 내지는 모른 척 했을 수도 있다.

"어거지니까!! 그래도 밀어붙이니까 사람들이 더 겁을 집어먹지 않겠습니까...모름지기 집정대신이란 한없이 부드럽다가도,

힘을 보여줄 땐 미친놈이 되셔야하는 겁니다 아시겠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9회

최영과 이성계는 더는 권문세족들의 이러한 추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반 사건'은 권문세족이라는 더러운 고름이 결국 터져버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인임도 병중에 있겠다, 최영과 이성계는 거병을 한다

최영이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무장세력과이성계가 동북면에서 몰래 들여온 동북면 군대들로임견미와 염흥방 등을 체포하고이인임도 체포를 한다

"이인임, 당신 이제 끝났소."

임견미와 염흥방은 조반 무고죄, 공문서 위조죄, 불법 토지 겸병죄, 불법 세금착취 죄, 뇌물수수죄 등열거하기에도 너무 많은 죄목들이 밝혀져 모두 처형당했다.

이때 제거된 권문세족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해 1000 명 정도였다 하니권문세족의 완전한 실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인임 이었다.이인임의 처리를 두고 공론이 갈렸는데 최영장군이 오랜 정을 생각하여 귀양살이를 보냈고 거기서 병사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나 자식들에게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 같다.

동생인 이인립(李仁立)은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사위인 강서(姜筮)와 특히 조카사위 하륜(河崙), 조카인 이제(李濟)·이직(李稷) 등은 조선건국 후 재상직에 올랐다.

즉 그의 가문은 종래의 권문세족뿐 아니라

신진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이러한 양다리를 기반을 바탕으로 이인임은 공민왕 이후 새롭게 성장하는 신진세력과 권문세족이 상충하는 과도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인물이다.

난세를 붓으로 평정한 사나이 정도전과 그를 둘러싼 진짜 정치가들의 살아있는 정치 이야기를 다룬 ‘정도전’은 현실 정치보다 더 재미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고려의 제2인자 이인임은 주인공 정도전의 최대 걸림돌이자 고려말 국정을 농단하던 세력인 권문세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정적들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정치력 최고수 캐릭터다.

이성계. 최영. 정몽주 등 당대 최고 문무 신료들을 농락하며 이들보다 몇 수나 앞서는 계략으로 고려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권력을 향한 야망 앞에서는 심복마저 거리낌 없이 버리고, 태후 앞에서도 칼을 휘두르는 등 거침이 없다.

또 뒤에서는 걸림돌로 여기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능구렁이처럼 작전을 짜는 등 그는 노회한 정치인의 전형이자 부패하고 악랄한 기득권 세력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0회

이인임은 스스로 ‘늙은 호랑이’를 자처하며

‘미친 개’ 정도전과 날선 대결을 보인다.

늙은 호랑이는 가슴 속에 구렁이를 백마리 정도 담고 있는 닳고 닳은 정치인의 전형이다.

당시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던 명대사들이다

주인공 정도전은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친다.

정도전의 정적들은

그에게 정치판의 원칙을 충고하듯 전하는데,

그 대사 하나하나가 현실감이 넘쳐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이인임이 남간 말을 한번 되새겨 보자.

권력 주변에 맴돌던 이성계를 비롯한 배극렴 장군 등은 황산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의 중요 관직을 받았고,

떳떳히 고려의 재상이 되어 도당(국무회의)에 입당한다.

도당은 도평의사사의 줄인말로고려 말 고려 재상들의 회의기구였다.

최고 의결기구다.

최영 입장에선 도당에 자기 군대 후배들이 생기고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전장에서 누빈 이성계에게 정치는 너무 먼 존재였다.

의기와 패기만 넘쳤던 이성계는 이인임과 척을 졌지만정치 문외한 이성계에게 이인임은 너무 큰 벽이었다.

이인임은 커녕 권문세족 재상 한 명도 정치력으론 이길 순 없었던 곳이다.

그러나

고려의 장군답게 이성계는 겁도 없이 이인임을 자주 공격한다.

이인임이 자신의 측근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지 않느냐?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결코 이인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인임은 어느 날 이성계 장군에게 한 마디 한다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정치를 오래할 생각이라면 새겨 들으시오.

의혹은 궁금할 때 제기 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오"

등의 말로 '정치 9단'다운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 내가 아니어도 정적은 또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정치란 게 그런 겁니다"

"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물과 같소이다. 권세와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고 싶다면 정적을 곁에 두세요"

"나랏일을 재물과 칼로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머리좋은 자들도 있어야지요"

"권세를 오래 누리고 싶으면 내 말을 명심하세요. 권좌에 앉아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만 다스리면 됩니다. 자기 자신"

"굽힐 땐 굽히세요. 정치하는 사람이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것이오"

"불행해지고 싶지 않거든 용상을 쳐다보지 마세요

. 분수에 맞는 자리까지만 탐하세요. 용상은 지옥이 될 것임니다 “

이인임은 이성계의 맘을 읽은 것일까? 독심술 일까?

결국 이성계 장군은 이인임에 의해 지방으로 밀려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1회

1382년, 이성계는

재상이 된 지 2년 후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다시 함경도라는 지방으로 가게 된다.

명목은 여진족 격퇴를 위해서이지만 재상이 지방의 지휘관이 된 건 거의 좌천이다.

그래서 이성계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정몽주였다.

신진사대부 중 가장 똑똑하다고 소문난 정몽주와 친하게 지내면서

이성계는 차차 정치 공부를 했던 것이다.

1384년 이성계는 이인임과 사돈관계가 된다.

이성계의 딸과 이인임의 조카가 결혼을 한 것이다.

이성계는 왜 그렇게 싫어하던 이인임과 사돈지간을 맺었을까?정확히 그 이유는 기록에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이성계가 이인임에게 또 정치적 공작에 당하지 않기 위한유일한 돌파구가 아니었다 싶다.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해석했다.

이인임과 사돈을 맺은 이성계는 더 이상 정치적 공격을 받을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겨우 말단 관직에 다시 제수된다.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했던 명언(?)~~

"정치하는 사람에겐 딱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에요. 하나는 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정치엔 선물이란 게 없어요. 나중을 위해 주는 뇌물만 있을 뿐이지”

"만두 한쪽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만두 접시를 노리지 않으니까요.

구걸에 맛을 들인 자는 결코 대들지 못합니다"

. "상투를 잡은 아이는 매부터 쳐야 합니다. 떡은 울 때 줘도 늦지 않습니다"

이인임이 정도전에게 했던 명언(?)을 좀 들어본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 정도가 때려 준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대 또한 잠시나마 허튼 기대에 부풀었겠지만 앞으로 이것만은 기억하면서 사시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인임 : "짖는 개는 물지 못합니다. 모르시오? “

정도전: “미친 개라면 얘기가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인임: “늙은 호랑이는 영물이라 하는 데 그리 쉽게 잡히겠소이까?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 정도가 때려 준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당시 드리마에서 인기를 얻었던 명 대사~~~~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새로운 물을 따를 수 밖에요"

"이기지 못할 적 앞에서는 싸울 각오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답답하다고 먼저 찾아 가서야 쓰나. 상대가 찾아 오게 만들어야지. 타협은 그리하는 것일세"

"정치라는 전쟁터에 혼자 거닐 꽃길 같은 건 없으니깐 말입니다"

"숙명하고 선택의 차이는 아주 큰 것입니다"

"궁지로 더 몰아 넣으세요. 사람의 진면목은 그 때 더 드러납니다"

“더 이상의 공짜쌀은 없다. (구휼미는)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백성들이 궁만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공짜도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

“왜구보다 더 무서운 건 나라의 빈 곳간이다.'

"힘 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

"잘 들으시오. 힘이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헌신하지 마시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무릎을 꿇는 사람이오. 그런 사람은 밥만 제때 주면 절대 주인을 물지 않거든요"

"기억해 두게. 포기하지 않는 한 패한 것은 아닐세"

"산은 하나인데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있겠는가?"

"정치에서 서열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실세와 허세"

고려 말 혁명가이자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제자들에게 머리가 아닌 몸으로 직접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2회

정도전은

"사서오경을 달달 외우고 주댕이로 공맹의 말씀을 달달 왼다고 해서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고통을 모른다면 머리에 똥만 가득찬 밥버러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라 했습니다. 해서 백성의 고통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라며

리더의 가치를 설명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다시금 일깨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기타 명언들 모음~

♣"장님에게 등불을 쥐어 준들 길이 보이겠습니까?"

♣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가시가 언젠가 단검이 되서 돌아올 것입니다"

♣ "세상에 팔자 같은 것은 없다. 허니 무당 될 팔자 또한 없는 것이다"

♣ "배워라 배우면 너의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돌탑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위야 비불능야(不爲也 非不能也)라 하셨다.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 "나라 법을 못믿겠거든 나를 믿어라. 아무리 세상이 섞었다 할지라도 티끌만한 정의는 남아 있을 터. 내 너에게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

♣ "도적 놈의 것을 훔친 것이니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 "지조있는 여인의 가슴 속에 정인이 하나 듯이 신하의 가슴에도 임금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 "힘도 없는 놈이 허리까지 뻣뻣해서야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고구려의 영광 이전에 오늘 저녁에 먹을 따뜻한 밥 한 그릇입니다"

♣ "네 죄가 아니다. 백성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한 이 빌어먹을 나라의 죄다"

♣ "내가 생각한 대의는 아주 평범한 것이네. 백성들 앞에 놓여진 밥상의 평화"

♣. "스승과 제자는 부모 자식과 같은 것이니 우린 이미 천륜으로 맺어진 것이다.

서로 몸이 떨어져 있다해도 늘 함께 있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니 외로워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 "장수의 운명이 그런거지요. 무찌를 적이 있으면 살고 적이 사라지면 죽는 것이지요"

♣"남을 속이려면 자기 자신을 속이라고 말했습니다"

♣ "힘을 앞세운 나라는 곧 망합니다. 그러나 덕을 앞세운 나라는 천년을 갑니다"

♣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네"

♣ "놈들의 탐욕이 어디 백성들 땀만 갖고 지워지겠는가. 조만간 먹잇감이 떨어지면 지들끼리 물어뜯게 될 것일세"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3회

♣ "기억해 두거라. 싸움에서 가장 긴장해야 될 순간은 이겼다 싶을 때 이니라. 해서 지금이 위기다"

♣"왕도정치에서 군왕의 덕목은 오직 한가지 덕입니다"

♣"위중한 사안일수록 스스로 결정해야 하느니라. 그래야 미련이 남지 않는다"

♣ "최영은 이상을 따랐고, 이성계 장군은 현실을 따랐을 뿐이네"

♣ "인과 의를 지켜야만 비로소 군왕일세. 인과 의를 해치면 군왕이 아니라 도적일세"

♣"사람은 모름지기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닮는 거라 하였습니다"

♣ "백성을 구원할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외면하는 건 그건 죄악입니다"

♣"자질 없는 군주가 보위에 오르는데도 좌시하는 것이 금도입니까?"

♣ "힘없는 백성들이 기댈 곳은 미우나 고우나 정치뿐 입니다"

♣"민본대업. 이제부터 우리의 목숨이고 영혼이고 전부입니다"

♣ "포은(정몽주)이 대업의 대의를 인정하고 주군의 신하가 된다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이 될 것입니다"

♣ "군주의 권위와 힘을 갖지 못한 자가 용상에 앉아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비극이네"

♣ "정치의 소임은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 "사대부에겐 아비란 군왕이고 가족은 백성입니다"

♣ "참으로 나약해 보이지만 더없이 끈질기고 강인한 존재. 그게 백성들일세"

♣ "머리 속에 똥만 가득 찬 밥버러지가 무엇을 알겠는가? 자네들이 군자이니 자네들이 하는 말이 맞을 것일세"

♣ "다음 세상의 임금은 덕망을 갖춘 순진한 영웅이면 충분합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필요치 않습니다"

♣ "어디 임금만 없다 하더냐. 주군을 따르던 민심도, 대업의 정당성도 헛개비처럼 사라져 버렸느니라"

♣ "산다고 다 사는 것입니까. 사람답게 살아야지요. 그것이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대업이었습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4회

14세기 고려 말~

거의 모든 이가 '개혁'을 외친다.

정몽주는 국정농단의 주범인 권문세족을 견제하겠다고 한다.

최영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솔선수범하되 아래로부터는 법질서를 바로잡아 국가의 기강을 다시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인임은 '안정 속의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라 우긴다.

허지만

백성들의 암담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시대정신의 정곡을 찌르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달랐다.

그는 시대정신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목청 높여 강조하는 우리 시대의 최대 문제는 바로 '민생'이었다.

「“농민들이 피땀으로 농사를 지으면 뭐합니까.

탐욕의 발톱을 부라리는 권문세가 앞에 바치는 공물 때문에 백성들의 허리가 휩니다.

수탈도 정도껏이어야지요.

공문서를 위조해 가면서까지 나라의 땅을 사전으로 둔갑시켜 이중으로 농민의 알곡을 빼앗는 만행을 저지르는 치들이 권문세족입니다.”」

일찍이 정도전은 유배 간 나주 거평부곡에서 이와 같이 이 땅의 민초들이 매일 마주하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그들과 함께 어깨를 함께하고 같이 울었다.

도당의 집정대신들이 탁상에 앉아 나랏일을 왈가왈부할 때, 정도전은 민심대기행 속에서 '민생'이라는 시대정신을 보았다.

덧붙여 민본을 추구할 처방전까지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계민수전(計民授田,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눠준다)!

즉, 경자유전에 의거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토지개혁을 하겠다는 것이다.

밥을 하늘로 삼는 백성들에게 생존의 길을 열어주는 가히 이 시대 개혁의 시금석이라 할 만한 정책이다.

이는 나라가 부강해지고, 번영과 발전으로 가는 첩경으로 생각했던 인물이다

조선 창업의 주인공 정도전

그러나 시대는 그대의 편이 아니었다.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다 잡은 물고기를 그물에서 놓치고 만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5회

고려 말 정치가 정몽주~

그는

"정치가로서 할 일은 화합" 임을 강조한 인물이다

지조와 충효의 상징인 정몽주

오로지 고려에 대한 충절 뿐이었던 그는 성리학의 대가였던 만큼 역시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 중 몇 마디를 보자

"학자이기 전에 정치가로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네.

결론은 화합이더군"이라는 말은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멧시지와 상통하지 않겠는가 ?

또 "못난 부모라고 외면하면 그것을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못난 부모라서 더욱 애착이 가고 가슴이 아립니다"는 말은

나라에 대한 원망보다는

충절을 강조하는 말로 현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명언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의 명언을 더 들어보자

♣ "애들은 아무나 가르친다던가? 자기를 포기하는 자와는 말을 섞지말고 자기를 버리는 자와는 행동을 함께하지 말라 하였거늘. 자네가 이러고도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 "사실과 진실은 다른 것입니다"

♣ "거꾸로 선 세상을 바로 세우기에는 저희들이 너무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패배를 선택했습니다"

♣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 왕실을 폐하고 진짜 왕실을 세운다. 이것이 폐위의 명분이 될 것입니다"

♣ "못난 부모라고 외면하면 그것을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못난 부모라서 더욱 애착이 가고 가슴이 아립니다"

♣"정치의 소임은 절충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을 서슴치 않는 것은 야만이란 말입니다"

1390년대 고려말 정몽주

그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정도전과 이성계에 반대하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려를 안정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6회(11.30)

최영 장군은

'고려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늘 고려 생각뿐이다.

우왕에 대한 걱정이 많은 인물이다

자신의 딸을 영비로 바쳐 든든한 임금의 지원군이 되었고

게다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려의 귀신이 되겠다"며 강직한 충심을 보여준 인물이다

요동정벌에 최영 장군 자신이 대장군으로 직접 출정해야 했는데

우왕의 만류로 출정하지 않은 것이 고려멸망의 원인이 될 줄이야~~~

최영장군이 죽자 개경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는데

이는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한 것이라고들 한다.

사후에는 백성들이 제사를 모시며 넋을 기릴 정도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야사에는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를 ‘적분의 전설‘ 이라고들 한다.

최영장군의 묘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데 실제 풀이 나질 않았다고 한다.

1976년부터 풀이 돋아 무성하다.

이유는 후세에 풀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색(정몽주 스승)의 명언

♣"관즉득중(寬則得衆). 큰 정치를 하시려거든 관대해져야 합니다"

♣ "형벌의 경중만큼 중요한 것이 형평입니다"

♣"이성계는 훌륭한 무장이다. 허나 정치가로서는 위험한 사람이야"

이방원

그는 정도전을 죽이고~

♣ "인명은 재천이니 뭐니 하는 말들 모두 위선이오. 사람 목숨은 결국 사람 손에 달려 있는거 아니었소?“

♣. "이건 어디까지나 정치니까요.

좋은 사람과도 뜻이 맞지 않으면 적이 되는 것이고,

싫은 사람도 뜻만 맞으면 언제나 동지가 되니까요.

그게 정치이지 않습니까"

♣산에는 대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꺾인 칡넝쿨도 있는 것입니다"

♣ "피 흘리지 않는 대업은 몽상입니다........

대업은 새로운 권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7회

이번에는 역사학자 김영수의 글「조선왕조 창업 秘錄」 그리고 권경율 저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에서 발췌,편집하여.소개한다.

하루 차이로 갈린 이성계의 運~~

고려 타도에 끝까지

우유부단했던 이성계,

아들 이방원의 독촉으로 역사 바뀌어~

반대파 정몽주

그는 선제공격 타이밍을 놓쳐 고려는 망하고~

자신도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1392년 3월 17일

이성계가 낙마했고,

1392년 3월 23일

그 소식이 공양왕에게 알려졌다.

1392년 3월 24일

세자가 개성에 도착했고,

1392년 3월 28일

상춘정에서 세자 위로연이 개최됐다.

1392년 4월 1일,

정몽주·이색 등의 요청에 따라 대간이 (이성계 세력)정도전을 죽이고, 조준 등을 심문하라고 탄핵했다.

공양왕은 이를 보류했다.

1392년 4월 2일

대간은 재차 강요했다. 더욱 강경해져서,

정도전뿐 아니라

모두를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왕은 정몽주, 심덕부와 논의한 뒤 이를 윤허했다.

하지만 극형은 아니고,

일단 귀양만 보내도록 했다.

이날 이성계가 개성 부근의 국제무역항 벽란도(예성강 하류)에 도착했다.

이성계는 그곳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1392년 4월 3일

개성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벽란도 근처 속촌에서 생모 한씨의 시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이 달려왔다.

그는 이성계에게 즉시 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대로 있으면 정몽주가 해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거듭해 끈질기게 요청하자, 밤에 견여를 타고 개성에 돌아왔다.

그 하룻밤이 역사를 바꾸었다.이성계가 예상보다 빨리 개성에 귀환함으로써 고려수호파는 허를 찔렸다.

이 하루의 의미가 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8회

이성계의 처음 뜻대로 벽란도에서 하루를 더 지체했다면

(이성계의 최측근)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은 아마 그때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운명도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조선건국도 어려웠을 것이다.역사를 사는 사람들의 행위는 각자의 입장에서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 전체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어떤 연쇄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야말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적용되는 대표적 영역이다.

인간의 역사적 행위가 자율적이지만 동시에 운명적이라는 뜻이다.

역사에서 인간의 노력은 이 모호한 합리성을 찾아가는 고투이다.

이방원이 재촉하고, 이성계가 아픈 몸을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온 것 같은 행위가 그렇다.

역사는 합리적인가, 운명적인가?

고려왕조를 지키려면,

고려 수호파는 이성계가 개성에 귀환하기 전까지 역성혁명파를 모두 제거해야 했다.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자의 위로연 등으로 헛되이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방원의 기민한 대처로 하루를 잃었다.

이 하루가 결정적이었다.

고려 수호파에게 대처할 타이밍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할 때는 사소한 변화조차 심각한 심리적 불안을 초래한다.

정몽주조차 “일이 성사되지 못할까 우려해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정몽주전)

이성계가 벽란도에 도착한 날부터 4월 4일 자신이 피살된 날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한 것이다.정몽주는 문관이지만 무관만큼 호방하고 담대한 인물이었다.

고려말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중요한 기밀사항이 매우 많았는데,

정몽주는 의심스러운 큰 사건을 처결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조리 있고 합당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외교에서도 그런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377년(우왕 3년) 우왕초 친원정책에 반대한 정몽주를 죽이고자

이인임 등 권신들이 그를 일본 보빙사로 천거했다.

당시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구류되거나, 바다에서 왜구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373년 정지 장군이 남해 관음포대첩을 거둘 때,

왜구의 배를 나포해 보니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배 밑에 갇혀 있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왜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왜구는

“만약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너를 먼저 죽여 버릴 것”이라고 으르렁 거렸다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9회

1375년 2월,

일본 규슈 하카다(霸家臺)에 통신사로 파견된 나흥유는 첩자로 오인당하여 구속되었다.

거의 굶어 죽을 뻔했지만 1376년 10월 생환했다.

당시 일본은 1336년부터 남북조 전란이 시작돼, 남조와 북조가 치열하게 싸울 때였다.

1371년 북조인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본명은 今川貞世, 또는 源了俊)을 규슈 탄다이(九州探題)로 파견해 남조를 공격하게 했다.

탄다이란 해당 지역의 군사지휘권과 재판권, 집행권을 모두 장악한 장관이다.

그는 1377년 히젠(肥前) 니나우치(蜷打)에서 남조군을 대파했다.

료슌은 13세기 중엽 이후 왜구 문제에 대해 고려 정부와 대화를 나눈 최초의 일본 정치가이기도 하다.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와는 독립된 외교 행위였다.

료슌은 고려가 통신사를 파견한 답례로 바로 이해에 보빙사로서 저명한 밀교 승려인 신홍(信弘)을 고려에 파견했다.

답서는 부정적이었다.

왜구란 초적으로서, 막부의 법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금지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정몽주와 신숙주,

역대 최고의 대일 외교관~~

어쨌든 1377년 고려 정부도 보빙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인임이 정몽주를 지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지만,

정몽주는 전혀 난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377년 9월,

정몽주는 규슈 하카타에 가서 왜구 문제의 득실을 료슌에게 성공적으로 납득시켰다.

정몽주의 설명에 “주장(主將)이 경복(敬服)해 매우 후하게 접대했다”고 한다.

주장이란 료슌이다.

그는 용맹한 장군이자 뛰어난 시인으로서, 당대 일본 최고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정몽주의 국량을 인정한 것이다.

정몽주는 일본 승려들과도 교유를 나눴다.

“일본 승려들이 시를 얻으려고 찾아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날마다 가마를 메고 모여들어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라고 청하였다.”

(정몽주전)

조선 시대에도 통신사들에게 너무 많은 일본인이 시와 글씨를 받으려고 해 팔이 아플 정도였다고 한다.

료슌은 1378년 6월,

즉시 신홍과 군사 69인을 고려에 보내 왜구를 토포하도록 했다.

신홍은 7월에 조양포(兆陽浦)에서 왜구의 배 1척을 노획하고 왜구를 모두 죽였으며,

포로가 된 부녀자 20여 인을 돌려보냈다.

조양포는 지금 전남 보성의 대전리로서,

660년 백제가 멸망했을 때 그 유민이 저항하다가 일본으로 떠났던 포구이기도 하다.

1378년 7월,

10개월 만에 정몽주가 귀국할 때 료슌은 주맹인(週孟仁)을 사신으로 대동시키고, 포로가 되었던 윤명·안우세 등 수백 명을 보내줬다.

또한 왜구의 근거지인 이른바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삼도란 한반도 남부 해안을 향하고 있는 쓰시마(対馬), 잇키(壱岐), 마쓰우라(松浦)를 말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60회

일본인이 기억하는 역대 최고의 한국 외교관은 정몽주와 신숙주이다.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역관인 요시라(要矢羅)는

1390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 황윤길·김성일·허성을 혹평했다.

반면

“홍무 연간에는 정몽주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감으로써 오랫동안 해구를 제어했고,

성화 연간에는 신숙주가 또한 일본에 들어감으로써 두 나라가 오랫동안 우호를 유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두 사람은 능히 일본의 강하고 약한 형세를 살펴 조선과 비교하면서 적절하게 조처하였기 때문에,

능히 싸움을 멈추고 우호를 닦아 오랫동안 변함이 없게 하였다”고 찬양했다.

[선조실록 선조 29년 1월 23일]

요시라는 반간계를 써 이순신을 투옥시킨 이중간첩이었지만,

외교관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다.정몽주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372년(공민왕 21년),

홍사범(공민왕 때 병부상서)의 서장관(書狀官:사신.기록담당)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귀국길에 배가 부서져 홍사범은 익사했다.

정몽주는 표류하다

바위섬에 표착해 13일간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버틴 결과 간신히 살아남았다.

말다래(障泥)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을 말한다.

재질은 주로 유기질이나 신라 시대 유물은 자작나무, 대나무제이다.

정몽주의 말다래는 짐승 가죽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담대하고 의지가 굳센 정몽주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 고려수호파의 심리적 불안은 형언할 수 없었다.

1392년 4월 3일.

공양왕은 환관 김사행을 보내 이성계에게 백은 1정과 비단 1필을 하사했다.

이성계에게 위로의 뜻을 표한 것이다.

상황의 위중함을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다.

공양왕은 급격한 상황 변화에 크게 당황해,

이성계의 동태를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개성에 돌아온 이성계는 위급한 상황을 저지하려고 했다.

조준, 정도전 등에 대한 대간의 탄핵을 중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이방과와 아우 이화, 사위 이제, 휘하 장군 황희석, 조규를 공양왕에게 보내,

대간의 탄핵을 공박하고 대질신문을 요청했다.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합니다.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조선時代의 雜(job)史산책>>>61회

이방원의 최후 통첩

공양왕을 옹립할 때 조준이 반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조준의 입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정몽주가 그 현장에 있었다. 핵심 중인이다.

1389년 11월 15일,

이성계를 비롯한 정몽주·정도전·조준 등 위화도 회군파 핵심요인 9명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의 폐위와 새 왕의 옹립을 논의했다.

이성계(우군통도사는 )처음부터 정창군 왕요(공양왕)를

추천했다.

그러나 조준(좌군통도사)은

“정창군은 부귀하게 생장하여 치재할 줄만 알고

치국할 줄은 모르니 세워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결국 추첨에 의해 정창군이 공양왕에 올랐다.

그러나 조준은 공양왕을 옹립한 9공신에 책봉됐다.

그리고

“내가 일찍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대간은

“왕의 곁에 있는 여러 재상이 이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높지마는 이 낮은 곳의 말을 두려울 만큼 환하게 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공신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불충한 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신의 반열에 참가하여 화상을 그려 빛나게 전한 것이 큰 공신과 다름이 없으며,

품계를 뛰어 관직을 받은 것이 참 공신보다도 십 배나 되니, 영화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성계의 낙마 후 위기가 닥치자,

조준은 공양왕 앞에서 울며 거짓 반성하는 척했다고 한다.

대간은 “조준이 전하의 앞에서는 거짓으로 울고 슬퍼하여 겉으로는 고치고 뉘우치는 형상을 보이고,

속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계책을 부리니, 이것은 곧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고려사절요])라고 비판했다.

조준이 이렇게까지 위선적으로 행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반대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성계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가리기보다,

일단 조준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를 위해 아들과 동생, 사위, 최측근 장군을 공양왕에게 보냈으니,

이성계의 의사는 강력한 것이었다.그러나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았다.”

공양왕이 이성계의 강력한 의사를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사태가 초래될 것인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의 의지도 강력했다.

고려수호파도 침식을 잊는 불안 가운데에서도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진 듯하다.

“여러 소인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인들’이란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수호파를 조선 사가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성계파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고려수호파는 공세를 더 강화한 것이다.상황은 점점 더 타협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측이 한 발자국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사태가 이렇게 진전될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이방원은 개성 남쪽 속촌(粟村)에서 생모 한씨(1337-1391, 신의왕후)의 상을 치르고 있었다. 속촌은 현재 황해도 개풍군 대련리에 있다.

강화도 맞은편 해안인 승천부에서 개성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이 그곳에 있다.

그는 그곳에서 개성의 정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연락은 매제 이제(李濟)의 몫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셋째 딸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아버지는 이인임의 동생 이인립이다.

이인임이 그의 숙부인 것이다.이제는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로서,

1388년 무진정변 이후 자연스럽게 반이인임 노선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차와 과일 등 제사 물품을 공급하면서 이방원에게 자연스럽게 정보를 전한 듯하다.

이제에게서 정몽주 등의 공격을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고 말했다.

정몽주가 어느 편인지 명확히 판단을 내리고,

그를 제거할 결심도 분명히 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2회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시묘살이 하며 효자 노릇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속촌과 벽란도는 직선거리로 10㎞ 정도이다.

이성계가 벽란도에 오기를 기다려 속촌에서 직접 달려갔다.

정치가로서 이방원의 큰 장점 중 하나는 기민함에 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그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방원의 인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방원의 주장에 답하지 않았고, 즉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아직 정몽주를 타협 불가능한 적으로 보지 않았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판단에서도 이방원과 온도 차가 있었다.

그래서 개경에 도착한 이튿날 아들 이방과 등을 보내 공양왕과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공양왕의 완강한 거부로 좌절됐다.

더구나 대간의 공세는 더욱 격화됐다.

그러자 이방원은 다시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죽일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여전히 거부했다.

허락을 받지 못한 이방원은 둘째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와 함께 의견을 나눴다.

이 3인은 이방원이 최후의 결정을 할 때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이성계 외에 전주이씨 일족의 향방을 결정한 4인 위원회 멤버였다.

결론은 같았다.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다시 이성계에게 가서, “지금 정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정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합니다.

사세가 이미 급한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일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방원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라”고 명했다.

인제 그만 하고,

어머니 산소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성계는 갑자기 운명주의자가 되었다.

그 의미는 자신이 직면한 당시의 상황이 이미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늘에 결정권을 넘긴 것이다.

이성계는 북변에서 태어나 소싯적부터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고, 평생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빈 용사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3회

그는 활과 승마의 명인이었었다.

<태조실록> 총서에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태조가 환조(부친 이자춘)를 따라 나가서 사냥하다가 짐승을 보고 빙판의 비탈길에 말을 달려서 쏘면, 번번이 맞히어 한 마리도 빠져 도망가지 못하였다.

야인(野人, 여진족)이 놀라 탄식하기를, ‘사인(舍人, 이성계)께서는 세상에서 당적할 사람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들에서 사냥하는데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태조에게 달려들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말고삐를 돌리지 못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피해 가는데,

깊은 못의 얼음이 처음 얼어서 굳지 않았으므로, 사람도 오히려 건너갈 수 없었으나,

말이 얼음을 밟고 달아나매 발자취가 뚫어져서 물이 솟구쳐도 마침내 빠지지 않았다.”

어떤 지형에서도 자유자재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면 어느 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성계가 겨우 새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얼마나 심하게 낙마했는지 15일 동안 개경에 돌아오지 못했고, 견여를 타고 간신히 귀환했다.그 시기에 이성계의 고뇌는 극심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391년 4월, 공양왕의 구언교서를 계기로 벌어진 역성혁명파와 고려수호파,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도전과 정몽주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혁명파가 패배했다.

표면적인 논쟁은 척불 문제와 윤이·이초사건의 진상이었다.

정도전은 공양왕의 불교 신앙을 비판하고, 윤이·이초사건의 주모자로 이색, 우현보의 극형을 강하게 요구했다.

‘윤이.이초사건’은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고려의 무신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에 찾아가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 무고임을 해명하고 돌아와 이색, 우현보 일파까지 엮어서 제거한 사건이다.

그러나 공양왕은 불교 신앙이 고려의 국가이념이며, 윤이·이초사건은 죄상이 불확실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이 사건의 여파로 ‘김종연사건’이 일어난다.

아버지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하자 피신하였다가, 신돈이 주살된 뒤에 나와서 원수로 왜구와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1388년(우왕 14) 7월 전라도부원수로서 광주(光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킨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도절제사·전라도원수 등으로서 왜구와의 싸움에 나아가 구례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봉주(鳳州)에 숨어 있다가 붙잡혔으나, 다음 날 다시 도망하여 포위를 뚫고 평양에 이르러 전 판사 권충(權忠)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때 이방춘(李芳春) 등과 이성계(李成桂)를 죽일 모의를 꾀하다가 윤구택의 밀고로 발각되자 다시 도망하여 곡주(谷州)의 숲속에 숨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끝에 순군진무(巡軍鎭撫) 임순영(任純永)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다가 죽은 사건이다.

이성계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이 연루되고, 고문당하고, 유배되고, 처형됐다.

주로 유력한 무장들이 대부분 제거됐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4회

그런데 공양왕은 이 사건의 진상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성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왕실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지, 신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김종연을 숨겨주고 또 일부러 놓아주기도 하였으니,

반역 음모를 몰래 도와주거나 함께 꾀한 것입니다.”

(고려사 공양왕 2년 12월 5일)

또한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해오려고 윤이·이초와 함께 도모한 사람들은 공술과 증거가 이미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고려사 공양왕 3년 6월 30일)

이성계가 이처럼 강하게 주장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은

“시중을 아버지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라며 눈물을 터트렸다.7월 들어

이성계는 공양왕과 화해했다.

한편 정몽주는 7월에 반격을 개시했다.

위화도회군 이후 벌어진 옥사를 최종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자는 것이었다.

9월에 사헌부와 형조가 정몽주의 요청대로 모든 사건을 논핵하고,

왕과 정몽주 등이 모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

9월, 정도전이 마침내 축출됐다.

그해 말까지 잇달아 혁명파 인사들이 물러나거나 제거됐다.

이성계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정도전은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다.

그것은 이성계가 정도전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정몽주의 중흥노선으로 선회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성계는 1391년 초부터 정계 은퇴를 깊이 고려하고 있었다.

증오와 질시, 유혈이 낭자한 정치의 세계에 깊은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동북면으로 귀향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도전 등 측근과 경처 강씨가 강하게 만류했다.

이성계는 길을 떠나려고 행장까지 다 쌌다가 주저앉았다.

1391년 한 해 동안 그는 혁명과 은퇴, 중흥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1392년 3월,

세자 왕석의 귀국을 영접하러 황주로 떠나는 이성계의 마음은 조각난 유리 같았다.

벌써 1년이나 그런 상황이 지속하고 있었다.

죽으면 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황주로 가던 행로에서 해주에 이르러, 이성계는 새 사냥에 나섰다.

시름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자신의 몸의 일부와 같았던 말에서 떨어졌다.

천운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다쳤다.

그런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계속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어려운 전투보다 난해했던 건 정치였다.

정치는 전쟁보다 어려웠다.

무인으로서 이성계에게는 적수가 없었다.

어떤 전투도 피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싸움에서 단 한 차례도 진 적이 없다.

13세기 중엽 이후 한반도에 닥친 거센 전쟁의 회오리는 오히려 이성계의 빛나는 무대였다.

한반도 전역을 물론 만주에까지 그의 말굽이 이르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5회

「“석자 칼로 사직을 편안케 하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기 전) 일찍이 시 한 구절 짓기를

「“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안케 하다”」고 하니

당시의 문사들이 댓구를 만들지 못했다.

이 때 최영이 되받아 짓기를

「“ 한 가닥 채찍으로 천지를 평정하다

(一條鞭末定乾坤)”」고

댓구를 하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바투’라는 몽골어가 있다.

’용감하여 상대가 없는 사나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이름에 많이 쓰였는데 칭기스칸의 손자로 킵차크한국을 창업한 바투가 대표적이다.

전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무적의 용사에게도 ’바투‘라는 칭호를 붙였다.

고려 역사 후기 기록에 나오는 ’ 발도 拔都‘는 바투를 음차한 단어다.

당시 몽골어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동아시아에서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그 무렵 바투, 혹은 발도로 불린 인물이 적지 않게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1380년

운봉에 집결한 왜구를 이끌었던 아지발도 (阿只拔都)는 무적의 소년용사’였을 것이고

1382년

동복면을 노략질한 여진족의 수장 호발도(胡拔都)는 ‘무적의 오랑캐 용사? 였을 것이다.

그런데

영웅적인 무용으로 이들을 제압한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1335~1408)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는 석 자칼로 외적을 평정하고 사직을 편안케 하였다.

생존의 기로에 선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든든한 버팀목이자 최영과 더불어 고려를 지키는 양대 수호신이었다.

“한 가닥 채찍으로 처지를 평정한다”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동아시아 정치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대륙의 지배자인 원나라는 명나라에 패퇴하여 중국 땅에서 쫓겨났고( 1368년)

이에 앞서 열도의 무사정권 가마쿠라 막부 역시 천황 시력의 공격을 받아 와해 되었다( 1333년)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산의 주인인 호랑이가 자리를 비우면 이리 떼가 자기 세상인 양 설친다.

당시 고려를 둘러싼 만주와 동남해안이 그런 상황이었다.

1360년 경

원나라가 내부 권력투쟁과 각지의 폭동으로 흔들리는 틈을 타 만주 벌판에 홍건적 무리가 출현을 했다.

그 중 산동일대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한 지파가 근거지를 옮겨 고려의 북쪽 변방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6회

1361년 겨울,

업록강이 얼어 붙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려의 땅으로 밀고 내려와 개경까지 점령을 했다.

홍건적의 파죽지세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갔고 고려의 국위는 땅에 떨어졌다.

공민왕의 반원(反元)정책도 외침의 빌미가 되었다.

1362년에는 원나라 장수이자 만주의 군벌인 나하추가 홍원(洪原: 함경남도 군청 소재지) 일대를 짓밟았다.

1364년,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으로 봉해진 덕흥군이 최유를 앞세워 평안도로 쳐들어 왔다.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도 이때다 하며 들도 일어났다.

여진족은 삼선.삼개의 지휘아래 한 때 함주( 현재 함흥)를 함락시키는 등 기세가 대단했다.

고려의 북방은 전운이 짙게 드리웠다,

남방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건재할 때에는 잠잠하던 왜구가 그들이 힘이 빠지는 혼란기를 맞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 뛰었다,

삼남(영남.호남.충남) 지방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개경의 턱밑인 강화도까지 침입해 고려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왜구를 피해 농민들이 내륙으로 이주하면서 비옥한 해안지대는 황폐해졌고

해상교통의 단절로

조운(漕運;배물건을 실어 나름)이 끊겨 개경은 경제적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

당시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 영주들이 대거 합류하여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군사을 실은 500척이 넘는 대규모 선단이 진포( 현재 군산)에 닻을 내리고

운봉( 현재 남원)일대에 집결한 왜구는 한반도의 곡창 호남을 거의 손에 넣었다.

남북에서 외적이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데도 고려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그야말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잔 주먹도 계속 맞으면 심한 내상을 입는 것이다. 고려 조정이 그랬다.

게다가 토지제도의 문란의 국가 재정이 부실하려 정규군 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급도 못받고 사기가 당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군사들은 정장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있거나 조직할 수 있는 세력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가운데서 동북면 군벌 이성계는 곧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말 잘타고 활 잘 쏘는 당대 최고의 바투였다.

남북의 바투들과 어우러져 싸운 이성계의 무용담은 설화로 구전 되었는데

특히 앞서 소개한 아지발도와의 전투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7회

「나이가 어리지만 무예가 뛰어난 왜장 아지발도는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아지발도가 황산으로 올라오자 통두란(이성계 의형제 여진족)이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다. 아지발도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입을 벌렸다.

이 때 이성계가 아지말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아 죽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 아지발도 이야기‘>

전쟁은 혼자 하는게 아니다.

이성계가 「바투 중의 바투」로 근림한 데에는 본인의 출중한 무예뿐 아니라 그가 거느린 군대의 힘이 컸다,

그사 이끈 사병집단은 고려와 여진의 혼성부대로 대대손 이성계 집안에 충성을 햇다.

여기에는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을 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시는

원래 전주에 살았는데 지방관과 시비가 붙어 다투다가 일족을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을 했다.

그는 두만강 하류인 알동(연해주 지역)의 천호(千戶: 순군만호부에 속한 벼슬.)로서 다루가치에 (중국 원나라 때에, 고려의 점령 지역에 두었던 벼슬로서 점령 지역의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거나 내정에 관여한 사람)임명되었다.

다루가치 관직은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에게 대물림 되었다.

이성계 집안은 알동에서 의주, 의주에서 함주로 근거지를 옮기며 세력을 키웠다.

이 일대에 섞여 살던 고려인과 여진인이 이성계 집안의 세력 기반이었다.

그들은 농사와 목축으로 부를 축적하고 강력한 정예군을 거느렸다.

이성계 집안은 고려출신의 원나라 군벌로 자리를 단단히 잡은 것이다,

20대 초반까지 이성계는

혈통만 고려인이었고 정체성은 원나라 사람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사회에 진입한 것은 1356년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을 도와 원나라 쌍성총관부를 축출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자춘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원나라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가운데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펼치자 그는 고려 편에 섰고 이로써 이성계 인생이 반전을 맞는다.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의 당주가 된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8회

“ 위화도 회군까지 기다릴 것도 업었도다.”

장수로서 이성계의 활약은 눈부셨다.

1361년.

공민왕의 명령으로 그가 맡은 첫 소임은 독로강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동북면 상만호(上萬戶) 이성계는

강계까지 쫓아가 박의 일당을 척결했다.

또한 그 해 겨울,

홍건적 10만 대병에 함락된 개경 탈환 작전에도 참여를 했다.

이성계는

2천여 군사로 개경에 가장 먼저 입성, 홍건적 수장을 활을 쏘아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고려 땅으로 쳐들어왔다. 쫓겨난 쌍성총관부 총관 조소생의 부추김을 받은 것인데 이는 이성계 집안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조정으로부터 동북면병마사에 제수된 이성계는 여러 차례의 전투 끝에 함흥평야에서 나하추 부대를 격퇴했다.

이 승전은 그가 무장으로서 독자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이 태조 2년(1393년)

<납씨곡 納氏曲>을 지어 바치며 “공을 이룸이 이 거사에 있었으니 이를 천년 만년 전하리다.”

라고 노래 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승리였다.

1364년,

여진족 삼선과 삼개가 함주를 점령했을 때 이를 물리친 것도 이성계 였다.

1370년,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로 쳐 들어가기도 했다( 1차 요동정벌)

이성계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전공을 쌓아 나갔다.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벼슬길로 활짝 열렸다.

밀직부사(정3품) 등 중앙정계의 요직이 연이어 내려졌다. 외적의 침입이 나라와 백성에게는 큰 과로움이었지만 무장 이성계에게는 출세의 발판이 된 셈이다.

이성계의 활동 무대는 북방에 그치지 않았다.

공민왕 사후에는 남방으로 내려와 왜구 상대했다.

1377년,

지리산에서 절벽위로 말을 달려 혼비백산하는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베었고

1378년,

강화도를 유린하고 개경으로 진군하던 왜구를 최영장군과 함께 협공하여 궤멸시켰다.

이성계의 기마군단은 왜구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등장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9회

많은 전투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전투는

1380년(우왕 6년) 9월 황산전투이다.

왜구의 도발은 계속 이어졌다.

1380년.

왜구 2만 대군이 500대의 함선에 나눠 타고 진포( 충남 서천)에 나타났다.

다행히 최무선이 화포공격으로 수군을 격파하긴 했지만(진포 대첩) 내륙으로 진출한 왜구가 더 문제 였다.

진포대첩에서 500척의 배를 잃은 왜구 2만 명이 남원 지리산 자락 인월역에 이르렀다.

고려조정은 아홉명의 장수를 파견해 그 뒤를 쫓았지만 사근내(경기 과천~수원 길) 전투에서 대패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지기도했다.

이제 고려의 마지막 희망은 이성계였다.

양광, 전라,경상도 순찰사 자격으로 운봉(백두대간.경남 전북 경계)에 다다른 이성계는

알단 왜구의 동태를 파악했다.

이들을 쫓아 남하한 이성계의 친병 2000명은 인월역 근처 황산에서 왜구와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왜구의 전력도 막강하여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다.

험악한 황산(충남 논산)일대에 주둔하면서 배후를 기습하려는 왜구들의 의도를 알고 있는 이성계는 이를 역 이용했다.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적의 기습경로를 치고 들어간 것이다.

왜구는 필사적으로 저항 했다.

특히 적장 아지발도는 신의 경지에 이른 기마창술로 고려군을 위협했다.

왜구 진영에는 걸출한 용장이 있었다.

“나이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

아지는 어린 사람을 뜻하는 아기이며, 발도(拔都)는 용사나 영웅을 가리키는 몽고어 바투르(ba’atur)이다.

소년용사쯤 되겠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0회

이성계로서도 이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자 즉시 바꿔 탔으며,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다시 바꿔 탔다.

날아온 화살에 왼편 다리가 맞았으나,

태조는 화살을 뽑아버리고 더욱 기세를 올려 전투를 더욱 세차게 몰아가니, 군사들은 태조의 부상도 알지 못하였다.

적이 태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몇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으며,

적이 또 태조의 앞으로 돌격해오니 태조가 그 자리에서 8명을 죽이자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좌우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겁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과 싸우다 죽으리라!’고 하니 장수들이 감격하여 용기백배하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적은 요지부동이었다.”

<변안열전>

이성계는 이 어려운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무인으로서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고려에는 무장 이성계가 있었다.

싸움의 결말은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아지발도는 이성계의 화살로 목구멍이 뚫려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왜구는 오합지졸,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자가 겨우 7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거의 도살 수준이다.

역사는 이 쾌거를 ’황산 대첩‘이리고 기록했다.

황산대첩은 이성계를 북방과 남방을 어우르는 그야말로 ’전국구 스타‘로 업그레드 시켰다.

그가 후일 조선을 창업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뿌리를 따져보면 ’황산대첩‘ 덕분이었다.

선조8년(1575년)에 세워진 황산대첩비를 보고 조선 후기의 문신 정약용은 이런 시를 남겼다,

「“이 거사로 한 밤중 골짝에 있던 배 이미 자리 옮겨

위화도 회군 때 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도다.”」

<정약용 ’讀荒山大捷碑. 독황산대첩비‘>

하지만 이성계의 명성은 여전히 최영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출신성분도 한 몫을 했다.

최영의 집안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돕고 대대로 고관대작을 배출해 온 개경의 명실상부한 문벌 귀족 집안이었다.

반면에 이성계는 한때 원나라에 붙어먹은 변방의 촌뜨기에 불과했다,

최영을 넘어서기에는 기득권의 벽이 너무 높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1회

이성계 본인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京妻( 수도 개경의 아내) 강씨( 훗날의 신덕왕후)의 도움을 받아 차근 차근 중앙 정계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고려 후기 지방의 세력가는 본처인 향처(鄕妻: 고향에 있는 아내)외에 개경에 경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 풍습은 지방 출신 사대부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경처 강씨 집안은 몽골 지배기에 요직을 두루 섭렵한 권신 가문으로 이성계의 큰 아버지 이자흥과도 사돈 관계였다.

’부원배(附元輩: 원나라를 등에 업고 출세한 무리)라고 욕을 먹던 집안끼리 결탁한 셈이었는데

어쨌든 이 ‘혼인동맹’ 덕분에 이성계는 변방의 촌티를 벗고 주류 사회에 입성을 한 셈이다.

역사에 획을 긋는 변화는 늘 변방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변방의 촌 뜨기들이 북을 치며 중심으로 행군할 때 이 북소리를 제일 먼저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그랬다.

이성계의 출신성분과 군사력,그리고 영웅담은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수장으로 이성계르 택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외침으로부터 백성을 구출하는 영웅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성 혁명은 무력과 유명세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에 눈을 뜨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의 이른바 ‘ 사불가론 四不可論’을 곱씹어 볼만하다.

「“하나) 적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일은 옳지 않다

둘)요동정벌을 틈타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

셋)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 동원은 적절치 않다.

넷)장맛비에 활의 아교가 녹으면 무기로 쓰기 어렵다.

以小逆大

倭乘其虛

夏月發兵

署雨弩弓” 」

<태조실록 총서>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맞서 최영과 우왕이 요동정벌을 결절하자,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사불가론’은 일리가 있지만 모순도 적지 않았다.

먼저, 이성계 본인이 여름철 장맛비에 전투를 치러 본 장수었다.

또 왜구의 칩임은 일상적이 일인데다 초;영도 충분히 대비하는 사인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영웅 이성계는 왜 그답지 않은 신중론을 펴렸을까?

‘시불가론 ’은 매우 정략적인 주장이었다.

그 뒤에는 친명파 사대부들의 입김이 있었다.

정치는 세력이다. 지지세력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그들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이는 그가 장군에서 점차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우군통도사 이성계는 연일 비가 내리는 위화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가 마침내 오랜 전우였던 최영에게 칼끝을 돌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개경을 점령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2회

우왕은 왕좌에서 쫓겨났고 최영은 유배를 떠났다가 곧 처형되었다,.

「“내 평생 탐욕으로 품었으면 무덤에 풀이 자랄것이고 결백하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성현. 용재총화>

최영의 죽음은 비장했다.

아버지에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물려받은 최영이었다,

그는 참수를 앞두고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에 이렇게 항변하며 최후를 맞는다.

고려사람들은 최영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길가의 시신을 향해 말에서 내려 절을 했다.

<이익: 해동악부海東樂府>

실제로 최영의 무덤에는 오랜기간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하다.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우다”」

“웃으세요, 무장의 칼은 칼집에 감추지만 정치인의 칼은 옷음속에 감추는 겁니다.”

조선 건국 과정을 다룬 kbs드리마 <정도전>에서 극중 이인임이 이성계에계 건넨 조언이다.’

과연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성계는 웃음속에 칼을 감추고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 했다.

이인임과 최영이 가장 큰 표적이었다.

이들을 쓰러뜨리고 수문하시중( 정1품)에 오른 이성계는 중앙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사대부들이 대거 그의 곁으로 모여든 시기가 이 무렵이다.

이후 고려는 이성계측의 역성혁명 프로그램에 따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이색 계열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긴 했지만

이내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내세운 이성계측의 반격에 밀려났다.

폐가진입은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진짜)이 아닌 신돈(가짜)의 핏줄이라는세간의 소문을 공식화 한 것이다.

1389년,

허울뿐인 왕위는 공양왕에게 돌아갔다,

이와중에 최영의 족당(族黨)이 우왕의 밀지를 받아 이성계를 살해하려하다가 들통이 났다.

이 사건은 주모자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장 변안열 등 그나마 이성계에게 대항할 힘이 있던 세력마저 깡그리 몰락케 했다.

정몽주가 고군 분투했지마 대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토지개혁은 새나라의 출범을 예고했고 정몽주는 역성혁명의 마지막 희생양이 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3회

옳은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이긴다하지만

이것은 왕조를 바꾸는 일이다.

그것도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한 왕조였다.

당시 고려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고려왕조 외에는 어떤 왕조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하지만 실은 거대하고 복잡한 관념의 퇴적물 위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 전통의 깊이와 관념의 견고함에 직면해 무인으로서의 이성계의 단호함과 기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정치가란 인간과 조금 다른 종족이다.

인간이면서 야수(?)여야 한다.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르(Kentaur)족 현자 카이론(Chiron)에 의해 양육됐다.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는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랐고, 동생 로무스를 죽였다.

그리고 동생의 이름을 따 로마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이복동생을 죽였고,

당의 실질적 건국자 당 태종 이세민은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

조선 태종 이방원도 이복동생 둘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쫓아냈다.

보통 사람에게 이런 행위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하지만 위대한 정치가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왕의 신체는 인간이지만,

그 존재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왕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의 본질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렇고,

로마의 황제가 그랬다.

진시황이 그랬고,

칭기즈칸이 그랬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도 모두 그랬다.

불생불멸의 생명을 갈구했으며,

생전에 이미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모두는 인간 욕망의 한 종류이며, 그런 의미에서 삶의 한 형식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가도 신이 되지는 못했다.인간의 그런 절대적 한계를 깊이 자각한다면,

인간은 철학자나 신자가 되어야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4회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그런 사람이다.

조선의 세종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가는 매우 희소하다.

그러나 정치가가 야수적이며 신처럼 되고자 한다고 해서,

인간의 역경에 직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자주, 더 빈번하게 그런 일에 부딪힌다.

그럴 때 아우렐리우스는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2차대전 말 원자탄을 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그런 문제에 직면했다.

1945년 7월 16일,

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한 다음 날 미국의 핵 과학자들은 대통령에게 두 가지 요청을 했다.

첫째는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 것,

둘째, “결정에 앞서 모든 도덕적 책임과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해줄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리처드 러셀(Richard Russell Jr.)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일본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지만,

나의 목적은 가능한 많은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앞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야수의 길을 마다치 않을 용의가 있었다.

결국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일본이 극도로 잔인하고 야만적인 전쟁 국가지만,

그들이 짐승이라고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1392년 4월 2일에서 4일 사이에

이성계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정치가로서 절대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 없다.

아니 위대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

그리고 인간적 한계를 솔직히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성혁명은 천명이다.

역성혁명이 천명인 것은 단순히 유덕자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명의 문제에 직면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치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4회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그런 사람이다.

조선의 세종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가는 매우 희소하다.

그러나 정치가가 야수적이며 신처럼 되고자 한다고 해서,

인간의 역경에 직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자주, 더 빈번하게 그런 일에 부딪힌다.

그럴 때 아우렐리우스는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2차대전 말 원자탄을 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그런 문제에 직면했다.

1945년 7월 16일,

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한 다음 날 미국의 핵 과학자들은 대통령에게 두 가지 요청을 했다.

첫째는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 것,

둘째, “결정에 앞서 모든 도덕적 책임과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해줄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리처드 러셀(Richard Russell Jr.)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일본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지만,

나의 목적은 가능한 많은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앞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야수의 길을 마다치 않을 용의가 있었다.

결국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일본이 극도로 잔인하고 야만적인 전쟁 국가지만,

그들이 짐승이라고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1392년 4월 2일에서 4일 사이에

이성계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정치가로서 절대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 없다.

아니 위대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

그리고 인간적 한계를 솔직히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성혁명은 천명이다.

역성혁명이 천명인 것은 단순히 유덕자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명의 문제에 직면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치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5회

1392년 7월

이성계는 마침내 개경 수창궁에서 국새를 인수하고 왕좌를 차지한다.

변방의 촌뜨기가 조선의 창업자가 된 것이다.

20대 까지만 해도 그는 고려출신의 원나라 사람, 즉 경계인이었다.

이 변방의 정체성은 그가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는 때때로 심약했다.

1391년 초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것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물론 이씨 일족, 추종 집단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지막 순간이 도래했는데도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치를 전쟁으로 생각한다면, 이성계만큼 우유부단한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 산하는 의구하데 사람은 어다 있느뇨?”」

1400년8월(정조2년).

이성계는 왕(방과) 세자(방원)가 마련한 연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태조는 고적한 마음을 시구에 담아 지난날을 회고 했다.

「”밝은 달이 발에 가득한데 나홀로 서 있도다.

산하는 의구한데 사람은 어디 있느뇨

明月滿簾吾獨

山河依舊人何在“」

<정종실록 2년(1400,8.21)>

창업자의 회한이 뚝뚝 묻어나는 구절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용의 눈물’이 맺혀 있는 듯하다.

전장을 누비던 영웅 이성계에게 큰 뜻을 심어준 역성혁명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토록 홀로 남게 된 것일까?

” 달이 가득한데 나홀로 서 있도다.“

고려시대 무장과 재상시절(수문하시중.정1품) 승승장구했던 것과는 달리 임금 이성계에게 펼쳐진 길은 가시밭길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개경을 중심으로 反 이성계 정서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당시 도성에서는 ‘성계탕’이라는 움식이 유행 했다.

태조 이성계가 돼지 띠라는 점에 착안해 돼지고기로 끓인 탕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6회

‘조랑떡국’도 마찬가지다.

떡국을 만들 때 덕을 칼로 거지런히 썰지 않고 손으로 수제비를 뜨듯 둥글게 떼어 넣었다.

마치 이성계의 목을 비틀 듯, 떡을 비틀어 넣은 것이다.

이 같은 반 이성계 정서는 역성혁명 과정에서 고려왕조의 기득권 세력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한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인임, 최영, 우왕, 장몽주 등이 혼자만 즉었겠는가?

정치에서 숙청당하는 본인은 물론 그 일가와 측근들의 때 죽음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토지개혁으로 경제적 기반을 강탈당한 개경의 권문세족과 지주층이 한 둘이 아니었다.

당시 개경에 거주한 사람 치고 주변에 역성혁명의 불똥을 맞지 않은 이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도성 저잣거리에서 성계탕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조 이성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국초기 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민심이 따르지 않으니 식물 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민심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개경을 중심으로 한 구 세력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국민통합’이 절실한 시국이었다.

향처(鄕妻) 한씨에게서 낳아 장성한 아들이 아니라 경처(京妻)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도 태조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는

신덕왕후 강씨의 부추김도 있었겠지만 누구보다 태조 본인의 의자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신들은 대부분 역성혁명에 기여한 다섯째 이방원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사사로이 고집을 부렸다.

그동안 공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던 모습가는 영 딴판이었다.

세자 책봉은 태조 즉위 20여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정몽주를 격살하여 민심을 잃은 이방원은 애초부터 이성계의 후계자 목록에서 빠졌을(?) 것이다.

권력을 쥔 정치인은 과거의 공에 연연하기 보다는 난국을 타개할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마련다.

이 무렵 이성계 조정의 가장 큰 국정과제는 ‘구 세력의 달래기’였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구세력 중 한 축인 경처 강씨 소생중에서 세자를 고르는게 바람직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막내아들 방석이어야 했을까?

<태조실록>에 나오는 것처럼 이방석이 어질고 총명해서 였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77회

나이 어린 왕자를 세자로 책봉한 데에는 이성계의 개인적인 욕심이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을 놓기가 쉽질 않을 것이다.

정도전이 주창한 재상정치에 동의하긴 했지만 태조 이성계라고 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게다가 창업군주였으니 자신의 힘으로 조선을 반석 위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머리굵은 세자는 선뜻 내키지 않았을 터,

협력자 보다 적이 더 많은 개국초기에 세자를 중심으로 친위 세력이 형성되면 자신의 등 뒤에 칼날이 될지도 모룰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정변의 주역으로 떠 오를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어린왕자가 적격일 수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곳을 우리 땅으로 삼는다면“

그러나 불행히도 이 선택은 이성계의 역성혁명 프로그램에 오점을 남긴다.

‘용의눈물’은 단순히 개인적인 회한이 아니었다.

자식과 공신들을 잃은 슬픔 뿐 아니라 대업의 기회를 상실한 아쉬움도 컷을 것이다.

역성혁명 2막으로 추진한 요동정벌 계획 두 차례의 ‘왕자의 난( 1398년.1400년)’ 으로 인해 좌절되었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곳을 모두 우리 땅으로 삼는다면

초(楚) 월(越), 강남(江南)인들 어찌 마다 하랴 」

<서거정 ‘東人詩話’>

서거정이 채록한 태조 이성계 시다.

그의 야망이 얼마나 컷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성게의 군령하나로 대군을 수족처럼 부리고 남북을 오르내리며 외적을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무장으로 홍건적, 원나라,여진족,왜구 등 동아시아의 바투를 모두 제압 했던 인물이다.

한때 원나라 사람이었던 그에겐 대륙의 기질이 다분했다.새로운 나라를 창업한 마당에

명나라의 주원장 까지 꺾고 대륙의 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겠는가?

태조 이성계는 집권 초기인 1394년,

한양(서울)으로 천도하며 반 이성계 정서 민심의 본거지인 개경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정도전과 함께 요동정벌을 추진하여 국론을 하나로 모으려 도모했다.

국초의 어려운 정국을 무마하는데 전쟁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여기에는 명나라와의 험악한 외교관계도 한몫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8회

앞서 정도전은 1392년 겨울에 정조사(正朝使: 새해 축하사절)로 명나라에 다녀 온 바 있다.

명나라 주원장은

정도전이 사신으로 오는 길에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고

뒤이어 국서에 자신을 희롱하는 문구를 넣었다며

그를 명나라에 넘기라고 이성계 조정에 요구를 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이를 거부하자 조선의 사신들을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에 정도전과 이성계는 오히려 공세로 전환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진법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온 나라에 영을 내려 군량을 획보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고려 말 최영이 추진하던 요동정벌과는 달리 차근차근 현실화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왕족과 공신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정식 군대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사병혁파는 중앙집권제 국가로 나아가는데 필수 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왕자들은 어린 세자의 스승인 정도전이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며 이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을 했다.

특히 방석의 세자 책봉에 가장 불만이 컸던 이방원이 총대를 메고 앞장을 섰다,

이방원은 1398년 8월에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 개국공신은 물론이고 배다른 형제인 세자 방석과 방번까지 살육했다.

이게 ‘1차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는 이런 ‘폐륜극’에 노발대발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실권을 잡은 방원은 신의 왕후 한씨( 향처)소생 중 연장자인 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헸고

(장남 방우는 1393년 사망)

태조 이성계도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라고도, 말라고도 할 수 없는 일 “

「하라고도, 말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선위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

<정종실록 2년. 1400년.11월.11일.>

정종 2년(1400년) 11월 11,

임금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태조 이성계는 이 말을 남기고 궁을 떠나

동북면으로 향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9회

이방원에 대한 뼛속 깊은 증오와 경멸이 묻어난다.

동북면은 이성계가 나고 자라 신화를 일군 곳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동북면에서는 조선인은 물론이고 여진족까지

이성계를 경외하고 따랐다.

태종 2년(1402년)12월에 터진 안변부사 ‘조사의 난’은 그 재기(?)의 징표가 아니었을까?

동북면의 민심이 심상치 않자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에게

여러차례 차사(差使: 특사)를 보내 환궁을 권유했다.

여기서 비롯된 말이 ‘함흥차사 .

이방원이 보낸 차사들이

모두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여 돌아오지 못했고

이로써 떠난 뒤 감감무소식인 경우를 일컬어 ‘함흥차사’하 했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역사기록을 보면 차사들 중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차사는 한명도 없었다.

개국공신 성석린

예문관 대제학 이직

청원군 심종

환관 김완 등이 문안을 드리고 무탈하게 돌아왔다,

다만

장군 박순, 송류 등이

'조사의의 반군'을 회유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 일이 돌아오지 않은 ‘함흥차사’로 와전된 것으로 본다.

아무튼 태조 이성계의 재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만큼 태종 이방원의 왕권은 튼튼했다.

‘조사의의 난’이 실패로 끝난 1403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환궁했다.

그 이후 이성계는 그가 쓴 시구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동지들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말년을 보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후궁도 얻어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

태종 8년, 1408년 5월

풍질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기전에 자신을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무담을 덮었다,

지금도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에는 억세풀이 무성하다고 한다.

권력무상(權力無常)!!!

‘용의눈물’은 대륙을 도모하려 한 원대함 꿈의 좌절을 의미했다고 할까!!

출처: 역사학자 권경율 저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

김영수 글 「조선왕조 창업 秘錄」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0회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거짓된 무고와 싸운 정몽주의 진정한 절의

그는 과연 고려를 지키려 이성계와 맞섰을까

이성계 측근들이 역성혁명을 위해 옥사(獄事)를 남용하자

성리학적 신념으로 이를 저지하는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장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죽교’ 아닌

포은의 옛집이 있던 ‘태묘동 입구’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부패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지만 방법론을 두고 엇갈렸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포은에게 술을 권하고 시조를 지어 불렀다.

「“이런들 어떠하리(此亦何如)

저런들 어떠하리(彼亦何如)

황당 뒷담이(城隍堂後垣)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하여(我輩若此爲)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不死亦何如).”」

속마음을 떠보고 회유하려는 뜻도 있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굽히라는 협박도 슬며시 얹었다.

포은 정몽주는

빙긋이 웃고는 술잔을 돌려보내며 응수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 죽어(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寧有改理也歟).”」

조선 중기 문신 심광세가 1617년에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와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가 실려 있다.

두 노래가 나오는 현존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여기서 ‘하여가’는 ‘단심가’를 끌어내기

위한 노래일 뿐이다.

조선시대에 뜨거운 화두가 됐던 것은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 포은의 충절이었다.

정몽주는 누구이고, 그의 절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정몽주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을 건국한 조선왕조의 창업 군주다.

정몽주는 1360년 23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며 빼어난 학문과 재능을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