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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1)/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회

고전소설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는

어려운 형편에 수 많은 자식을 먹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흥부는

부친 사후 형 놀부에게 전 재산을 모두 털리고 쫓겨나서 길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살다가

구렁이에게 공격받는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치료한 보답으로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키워 그 박을 갈라보았더니

보물이 나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흥부의 자식숫자가 좀 햇 갈린다.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25명까지 설화마다 숫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흥부의 성씨도 제비 연(燕)씨(소설) 혹은 성 박(朴)씨(흥보가)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1833년에 작성된 흥보만보록의 필사본에는 덕수 장(張)씨로 설정되어 있어 진짜 성씨 또한 햇 갈린다.

흥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형의 집에 가서 밥을 구걸하기도 했다.

하지만 흥부와 그의 부인이 손 놓고 밥만 빌러 다녔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 부부는 ‘조선판 알바의 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알바를 하며 생계 꾸리기에 열심인 사람들이었다.

흥부는

가래질하기(가래로 흙을 파거나 옮기는 일),

논 갈기, 면화 갈기,

이엉(초가집 지붕이나 담을 이기 위해 짚 등으로 엮은 물건) 엮기,

보리타작, 비오는 날 멍석 걷기, 시초(불을 지필 때 쓰는 풀) 베기,

물건 옮기기, 고을 수령 심부름 하기,

말 편자 박기,

분뇨 치우기, 빗자루 만들기,

새벽에 마당 쓸기 등의 일을 했다.

그의 부인 역시

방앗간에서 키질하기,

술을 만들어 파는 매주가에서 술 거르기,

초상집에서 상복 짓기,

제기(제사에 사용하는 각종 그릇) 닦기,

신사집(굿을 하는 집으로 추정)에서 떡 만들기,

추운 겨울날 소변 치우기,

봄나물 캐기,

보리씨 파종하기 등으로 품을 팔았다.

조선시대에는 흥부 내외처럼 품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한 번의 거래를 도와주면 초가집 7채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고수입 직업부터 뼈 빠지도록 일을 해도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일들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엇비슷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회

조선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강문종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말한 조선시대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직업은 ‘사쾌(舍儈)’입니다.

‘사(舍)’는 ‘집’이라는 뜻의 한자이고

’쾌(儈)’는 ’거간, 중개인, 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거간(居間)은 사고 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정을 붙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쾌는 집을 사고 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순우리말로 ‘집주름’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의 용어로 정리하면 부동산중개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개 수수료는 얼마나 받았을까요?

“수수료는 10% 내외였던 걸로 보입니다.

서울 북창동의 7000냥짜리 고택을 소개해준 사쾌는

700냥 정도의 수수료를 받았는데,

당시 그럴듯한 초가집 한 채가 100냥 내외였으니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이 집을 산 사람은 지금으로치면 외교관에 해당하는 역관이었습니다.

역관은 특히 국제무역을 독점 형태로 담당해 조선후기 최고의 경제적 부유층에 해당했죠.”

-지금은 강남의 집 값이 가장 비싼데 당시 집 값이 가장 비싼 땅은 어디였나요?

“조선시대 한양의 남촌(강남)과 북촌(강북)의 경계는 한강이 아니라 청계천이었습니다.

고위 관리들과 부유층이 거주하는 곳은 북촌이었고요.

지금의 북촌 한옥마을 일대이기도 합니다.

이쪽이 지금의 강남이라도 보시면 됩니다. 당시 한강 남쪽의 강남은 한양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한양(漢陽)’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강의 북쪽이라는 의미입니다.

거의 개발되지 않았던 시골에 지나지 않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狎鷗亭)’이라는 그림을 보면 당시 강남의 압구정동 일대는 경치가 좋은 산속이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입니다.

따라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달랐던 것 같습니다.

양반의 경우 역시 과거 시험을 쳐서 공무원이 되는 것을 가장 선호했고, 중인들의 경우에는 자영업(상업), 역관, 의료 분야 등 전문직을 많이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민인 경우 역시 농사와 어업에 많이 종사했고, 천민은 대부분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회

-분뇨를 처리하는 똥장군이나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아주는 사람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직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제가 다른 분들과 함께 쓴 책 ‘조선잡사’에서 다룬 직업에 한 해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공문서를 전달하는 ‘보장사’,

배를 띄울 수 없는 얕은 물가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옮겨주는 ‘월천꾼’,

연고 없는 시신들을 매장하고 처리하는 직업인 ‘매골승’,

인조꽃을 만드는 ‘화장’,

연회(파티) 기획 전문가인 ‘조방꾼’,

군대를 대신 가주는 ‘대립군’ 등이 있었습니다."

-투잡을 한 사람도 있었나요?

“가장 적당한 사례가 18세기 최고의 해금 연주자 유우춘(柳遇春)의 사례인 듯합니다.

그는 하급 무관이었습니다.

그에겐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제적 절박함이 있었고, 하급 무관의 박봉으로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섯 손가락이 닳을 정도로 노력해 해금을 접한 지 3년 만에 뛰어난 실력을 갖췄습니다.

독학으로 최고의 해금 연주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군인으로 근무하고

저녁에는 귀공자들 혹은 명사들의 모임에서 해금 연주를 했습니다.

유우춘은

해금의 대중적 연주보다는

주로 순수 예술성을 중요시하였고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더 이상 해금 연주로 돈을 벌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카페나 치킨집 창업을 많이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유행처럼 번진 가게들이 있었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 말씀드리면

당시 유행했던 자영업 가운데 하나는 세책점(貰冊店)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도서대여업입니다.

소설책이 주된 상품이었습니다.

수많은 한양의 여성들이 소설을 읽느라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렸다는 비판을 많이 받을 정도로 유행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드라마와 영화에 빠져 여성들이 해야할 일에 소홀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채재공, 이덕무 등이 이러한 사회적 형상들을 걱정하고 비판하는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회

-의녀, 기생, 주막 운영 등 이외에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직업들이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좋은 옷들의 경우 모두 해체해 세탁했기 때문에 관련 시장이 매우 크게 형성돼 있었습니다.

바느질 전문 자영업에 해당하는 ‘침가(針家, 지금의 세탁소 및 의류 수선집)’가 있었고,

이 일만 전담하는 여자 종을 ‘침비(針婢)’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단순한 직업이 아닌 전문직에 해당합니다.

혼례에서 신부의 도우미이자 간단한 주례까지 맡은 ‘수모’라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굉장히 특화된 직업이었고 이 역시 전문직이었죠.

지금의 용어로 말하면 수모는 웨딩플래너이자 메이크업아티스트의 역할을 모두 담당했습니다. 각종 혼례 용품 대여업까지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외 비단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염모’,

변방의 군관 및 공무원들의 가사를 돕는 ‘방직기’,

화장품 방문 판매업자인 ‘매분구’,

채소전 주인, 잠녀(해녀) 등도 여성들의 직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해녀는 당시에도 좋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었나요?

“해녀는 제주만의 특화된 직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해녀(海女)’ 또는 ‘잠녀(潛女)’라고 불렀습니다.

전복이나 뿔소라 등을 채취하는 행위를 ‘포작(鮑作)’이라고 하는데

이는 힘들다는 목동의 노동 강도보다 10배가 더 힘든 일이라고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전기까지 이 분야는 주로 남성들의 영역이었고, 아주 일부의 잠녀들이 포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힘들어 도망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여 진상품을 확보하기도 힘들 정도가 됐습니다.

이에 미역을 채취하는 잠녀들에게 전복 등을 강제로 할당해 물량을 확보했습니다.

1695년 전복잡이 잠녀는 9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역을 캐는 잠녀는 800명이었습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을 전후 해서 잠녀가 지금의 해녀의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李健, 1614~1662)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 따르면

‘이들은 전복을 잡아 관가에서 부여한 역에 응하고

그 나머지를 팔아서 의식을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잠녀 생활의 간고(艱苦)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치스러운 관리들이 욕심을 내어

교묘하게 갖은 명목을 만들어 징수하니 1년 내내 조업을 해도

그 역에 응하기가 어려웠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고액 연봉으로 추정되지만 관리들의 착취로 힘들게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5회

-조선시대에는 정말 많은 직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군으로 나누면 160~ 200여개 정도라고 하는데 정확히 몇 가지 직업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 직업의 종류는 대략적으로도 추산하기는 어렵습니다.

직업에 대한 정보가 가장 집약적으로 등장하는 의괘류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대부분 번역이 돼 있지 않아 접근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의괘는 각종 행사들의 결과 보고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행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이름과 직무를 대부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직업을 연구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책으로 이옥의 ‘이옥전집’,

조수삼의 ‘추재기이’ 등을 꼽았는데

두 책을 간략히 소개해 주신다면요.

“이옥 전집은 예리하면서도 새롭고 섬세한 문체로 당시의 생활상을 표현한 시와 산문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습니다.

농업과 수공업 그리고 상품화폐 경제가 급격히 성장합니다.

따라서 시장이 발달하고 순수 소비계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됐으며,

사대부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광범위하게 몰락하게 되죠.

이러한 시대를 반영한 다양한 인간의 군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서학(천주학)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옥은 이러한 시대상을 글에 담아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문인이 바로 이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재기이'는 조수삼이 지은 조선후기 기이한 인물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수삼이 선정한 인물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의 계층이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들 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제도권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장생’,

‘닭 우는 소리 흉내를 잘 내는 노인’,

‘전문 성대모사꾼 박맵새’,

‘고전소설 낭독꾼인 전기수’,

‘대중적으로 해금을 연주하는 연구자’,

‘황진이 춤과 만석중놀이 개성지방에서 유행했던 인형극 전문가 탁반두’ 등

정말 재미 있는 인물들을 모아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6회

-교수님은 고전소설 전공자인데 조선시대 직업을 비롯한 생활상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있다면요.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서는 고전소설을 대상으로 논문은 물론 감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부터 모르니 벽에 부딪히게 되더군요.

생활사와 생활문화에 대한 갈증이 너무 컸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바로 노동이고, 노동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직업이 나오죠.

직업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부터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연구자들과 함께 ‘조선잡(Job)史’라는 글을 언론사 지면을 통해 연재하기도 했고,

지난해 이를 책으로도 묶어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간 연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싶은가요?

“조선시대로 간다면 전 오작인(仵作人)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검시관에 해당합니다.

의료적 지식과 살인사건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죠.

이 일을 선택하고 싶은 이유는

‘이 세상에 억울한 죽음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법의학서 제목이 바로 ‘무원록(無冤錄)’입니다.

당초 원나라에서 제작된 법의학서입니다.

검시를 통해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하는 것은 그 죽음에 대한 원통함 혹은 원망함을 없게 하는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 목표가 궁금합니다.

“고전소설을 포함한 고전산문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생활문화를 계속 연구하고 있고, 당분간 이러한 연구를 지속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전통시대 여성, 성과 사랑 등의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권의 저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주체적 자아가 강했던 여성 40여명 정도를 모은 책과 전통시대 동성애 관련 저서입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7회

조선시대 직업을 소재로 한 책

「조선잡사」(저자: 김문종.김동건 등)에서 소개 된 조선시대의 각종 직업.

그리고 KBS방송에서 소개된 조선시대의 민초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택한 직업 등 조선시대의 각종 JOB史를 발췌 소개하고 우리 조선역사에 등장하는 소소한 雜史도 함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은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엄격한 사회였다.

남녀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으므로 성별 직업분리 현상이 있었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활동은 많은 제약이 따랐지만 남성이 절대 진입할 수 없는 여성만의 직업이 따로 있었다

남녀의 영역을 넘나들던 직업 역시 여성 몫이었다.

조선의 수모(首母) 라는 직업~

수모는 결혼식 주례도 맡았다.

조선에서 혼인과 회갑잔치에 쓰이는 병풍.액자.자리. 향촉 따위는 관청에서 빌리고

그 밖의 골동품은 상점에서 빌린다.

머리장식.가체.비녀.귀걸이.비단.에복.스란치마 등 꾸미는 물건은 장파에게 빌린다

속칭 수모라고 한다

*출처:이규경 「오주(오대양6대주 준말)연문장전산고」

수모는 수식모(修飾母)의 준 말이다.

우리말로는 머리 어멈. 지금의 헤어 디자이너다.

화장과 의상도 담당했으니 메이크 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도 겸했다.

혼례가 있으면 신부가 입을 옷과 장신구를 빌려주고

예식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웨딩 플레너 역할도 했다.

수모는

조선시대에 혼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담했다.

조선시대 한양은 동서남북중 5部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수모는 구역별로 활동을 했다.

가례(왕실 혼례)가 있으면 한양의 수모를 전부 불러 들였다.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머리손질과 화장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궁중 여성들이 착용하는 가체를 손질하는 일도 수모가 맡았다.

대궐에 모인 수모들은 나무빗과 솔로 가체를 다듬어 염색을 하고 광을 내어 새것처럼 만들었다.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에 동원된 수모는 모두 25명이었다.

1788년

정조가 가체(가발)사용 금지령을 내리면서 한양의 수모를 한자리에 모았는데

총 33명이었다.

조선 후기에서 한양에서 활동한 수모는 약 4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양 부잣집은

‘단골 수모’를 정해 놓고 집안 여성의 몸단장을 전담하게 햇다.

반면에 시골은

수모를 구하기 어려웠다.

성호 이익은

“시골에서 혼례를 치르면 한양의 수모를 불러오기 어려웠다.라고 했다.

수모가 한양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경북 성주에 살던 이문건은

손녀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청도에 사는 수모를 불러와야 했다.

청도 군수에게 협조를를 요청하고 수모에게 별도로 뇌물을 줘야 했으며

말을 보내 태워와야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8회

사치풍조가 유행하면 수모가 제재를 받기도 했다.,

1541년

사치스런 혼례를 금지하는 법령에

“신부가 청색, 홍색의 김실을 두른 옷은 입으면 수모까지 죄를 묻는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1788년

정조는 한양의 수모들을 모아 가채(가발)사용을 금지하는 방침을 전달하고 족두리를 착용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권장했다.

그러자 가채 대신 화려한 족두리가 유행했다.

정조는 칠보족두리 따위를 빌려주는 수모는 유배형 처한다는 조항을 추가했을 정도다.

수모는 얼마의 사례를 받았을까?

성호 이익은

‘시골 가난한 집에서 수모를 스려면 비용이 몹시 많이 든다“라고 했다.

이 문건은 수모가 집에 도착하자 쌀과 팥을 열 말씩 주고 돌아갈 때는

무명 두필을 주었다.

모두 합처 쌀 두어 가마 값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수모에게 비단을 지급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령이 있었던 것을 보면 비단으로 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이라는 결혼식 장면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면 수모가 합환주를 마시게 한 다음 덕담을 하며 축복했다,

수모는 신부의 도우미 역할은 물론 신랑과 신부의 주례역할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 혼례는 주례가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사회자에 해당하는 집사보다 수모가 주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의 주례는 여성일 수 밖에 없다.

외간 남자가 새 신부를 앞에 두고 훈계한다는 것은 당시의 도덕관념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년 여성인 수모가 신랑 신부에게 훈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남성은 여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지만

그 반대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혼례를 치르며 보아 온 경험 많은 수모는 주례의 적임자 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9회

조선시대 직업 ‘염모’

“염색 가격이 옛날보다 세 배나 올라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입니다.

한양에 있는 염색집은 으레 부자가 되니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조정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양성지 「놀재집」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을 백의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삼국시대부터 흰옷을 즐겨 입은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은 온통 흰옷으로 뒤덮인 시장의 모습이 흡사 솜방 같다고 했을 정도다.

어째서 흰 옷을 좋아 했을까?

혹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서양에서 흰색은 평화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 흰색은 전쟁의 상징이다.

흰색이 상징하는 것이 또 있다.

죽음이다.

흰 옷은 원래 상복이다.조선시대 사람들은 상복을 자주 입었다.

팔촌이내 친척이 죽으면 상복을 입었고 왕실에 상이 있으면

전국민이 상복을 입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경조사에도 입고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은 흰 옷 밖에 없다.

그래서 흰옷을 자주 입었다.

나라에서는 흰 옷을 입는 풍습을 골치 아파 했다,

평상복과 상복이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흰옷 대신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世宗임금은

관원들에게 푸른 옷을 입으라고 권장했다.

관원들은 염색 값이 비싸다며 다른 색깔로 바꿔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 왈

“노란 옷은 중국에서 훙복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안된다.

푸루 옷을 입어라”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世宗의 푸른 옷 입기 캠페인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유는 염색 비용 때문이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푸른 옷은 부의 상징이었다,

부자들이 화려한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바람에 염색값이 치 솟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가격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조선의 염색 기술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송나라 사람 왕운의 ‘계림지’에서

“고려는 염색을 잘하는데 특히 홍색과 자색이 아름답다고 했을정도다.

조선의 자주색 비단에 반해서 열 필 넘게 염색을 해서 사 갖고 간 중국 서신도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0회

염료는 모두 자연에서 얻었다,

자주색은 지초(芝草),

붉은 색은 홍화(잇꽃) 와 오미자,

노란색은 괴화(회화나무)와 치자.

푸른색은 이기를 사용했다.

여기에 매실, 명반, 잿물 따위를 적절히 섞어 넣었다.

염색 값은 직물과 색상에 따라 달랐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자주색 명주는 노란색 명주의 다섯 배, 붉은 모시는 노란 모시의 열배 가격이 이었다.

조선에서 이러한 염색은 염모(染母)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맡았다.

사실 염색은 고된 육체 노동이다.

그런데도 염색이 여성직업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여성이 입을 옷을 남성이 손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인 듯하다.

남녀 옷을 함께 보관하는 것 조차 꺼리는 시대다.

高宗임금 때 재정백서에 따르면

염모에게는 수공포라고 하는 공임을 지급했다,

비단 한 필(20미터)을 염색하면 삼베 석 자 다섯치 (약 1미터)를 끊어 준다.

비단 열 칠을 염색해야 삼베 한필이 될까 말까 할 정도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의 댓가치고는 결코 많지는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가난한 여성에게는 감지덕지 였을 것이다.

호조(戶曹)의 아전 김 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근무하는 동생의 집에 갔더니 마당에 큰 물동이가 줄지어 있었다.

김수팽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생이 대답했다.

“아내가 염색업을 합니다‘

김수팽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우리 형제까지 염색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느냐?”

김수팽은 물동이를 모두 엎어 버렸다.

값비싼 푸른 염료가 콸콸 흘러 도랑에 가득찼다.

염색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백성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염색업은 가난한 여성의 직업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활동이 불편하고 세탁하기도 힌들다는 이유로

흰옷을 버리고 색웃을 입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지만

일제는 점차 색옷 입기를 강요했다,

면직원과 순사들은 흰옷 입은 사람을 보면 먹물을 칠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꿋꿋이 흰옷을 입었다.

이유냐 어떻건 흰옷은 이미 민족의 상징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1회

변방 군관의 가사 도우미 ‘방직기’

옛날 변방 주둔지에 창기(娼妓)를 두어 아내 없는 군사들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도내의 경원.회령.경성등의 고을은 본국의 큰 진영으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수자리 서는 군사(戍軍)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겨울과 여름을 두 번씩이나 지내므로 일상의 자질한 일도 어려울 것이다

<<세종실록 18년(1436년) 12월17일>>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군관은 1년 동안 의무적으로 최전방인 함경도 등지에서 복무를 해야 했다.

이들을 출신군관이라고 하는데 양반에다 무과에 합격한 신분이라 일반 군사보다 지위가 높은 장교 계급으로 볼 수 있다.

출신 군관은 함경도 지방의 토착민으로 이루어진 토착군관 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출신군관은 이미 가정을 이뤘다 하더라도 가족을 임지로 데려갈 수 없었다.

국방의무에 전념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주거와 식사문제부터 세탁과 수선 등 잡다한 일들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게다가 병이라도 앓게 되면 어디에 몸을 맡겨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 지역에서 온 출신군관에게는 방직기(房直妓)를 한 명씩 배정하여 그 집에서 숙식하며 도움을 받도록 했다.

방직은 원래 관아에 속한 심부름 꾼으로 ‘방지기’라고도 했다.

‘방지기’를 기생이 맡을 경우 방직기, 여종이 맡을 경우 방직비(房直婢)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종의 당번병이자 가사 도우미 역할을 했다.

박계숙. 박취문 부자는

함경도 회령에서 군관으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북일기’로 남겨 두었다.

이 자료를 통해 군관과 방직기의 관계,그리고 생활상을 생생하게 살펴 볼 수 있다.

“ 이 날 낮부터 감기를 앓기 시작하여 몹시 아팠다. 부사가 보내준 죽을 먹고 온돌에 누워 땀을 흘렸다. 월매가 내내 병구완을 해 주었다.

월매와 이야기 할 때 마다 눈물이 흘렸다.

의향의 어머니도 병구완을 하러 왔다.“

<<부북일기(1645년 4월 3일>>

하루는 박취문이 심한 감기에 걸려 방직기 월매의 간호를 받았다.

박취문은 그녀의 구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아마도 객지에서 고생하는 처지에 위로가 된 모양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2회

당시 박취문의 전담 방직기는 의향이라는 기생이었지만

마침 자리에 없었고 그 대신 의향의 어머니 월매와 함께 그를 간호 했다.

이처럼 방직기는 군관이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 주었다.

큰일이 생기면 여러 방직기들이 힘을 모아 처리했다.

방직기 어머니는 땔감.반찬.술.안주등을 제공하며 정성을 다해 군관을 대접했다.

방직기는 BOQ(독신장교 숙소) 제공부터 취시.보급.정비.간호등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다.

군관들은 활쏘기 대회를 자주 열어 실력을 연마했다.

1년 사이에 120일 넘게 시합을 했으니

공무외는 거의 활쏘기로 시간을 보냈다.

군관들은 자기 방직기와 짝을 지어 시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회에서 승리를 해서 받은 쌀.잡곡, 옷감.종이등 대부분 방직기 몫이었다.

그러나 시합에서 패하면 노래.춤.광대 놀이를 제공해야 했다.

꼴찌 군관은 광대 옷을 입은 방직기를 소 등에 태우고 끌고 나녔다.

군관과 방직기 관계는 군관의 임기와 함께 끝난다.

군관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갈 때 많은 선물을 방직기에게 주고 갔다.

방직기는 해당 고을에 소속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개인의 첩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관과 방직기가 뜨거운 사랑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고죽 최경창과 그의 방직기 홍랑이다

「홍랑가」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최경창은 1573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인 편사로 부임하여 홍랑을 만난다.

두 사람은 한 눈에 사랑에 빠진다홍랑이 떠나가는 최경창에게 지어준 유명한 “홍랑가”에는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이 녹아있다.

노래는 노래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3회

여자들의 연지.곤지~~

연지는 볼과 입술에 붉게 칠하던 화장품이다. 연지를 동그랗게 이마에 바르면 곤지라고 부른다

원래 연지 곤지는 생리중이라는 표식이라는 설도 있다.

여염집 아낙들은 그런 표식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컨대 “오늘은 임금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라는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임금에게 말로 표횬하기 곤란한 것을 화장으로 알렸다는 것이다.

이런 풍습이 일반 여염으로 퍼져 유행이 돠었다는 설이고 또는

전통 tv사극 결혼식 장면에서 신부가 연지 곤지를 찍고 등장하는 장면에 익숙하다.

재혼하는 여성은 연지. 곤지를 찍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지 곤지가 숫처녀임을 알리는 표현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희고 깨끗한 얼굴을 선호했다.

송나라 사람이 쓴 ‘고려도경’이라는 책에는 고려의 귀부인들은 연지 바르기를 즐기지 않고 그저 분을 바를 정도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를 보아 얼굴에 짙은 화장이 아닌 옅은 수준의 화장을 했음을 알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연지라는 짙은 화장은 특히 젊음과 처녀성을 강조하는 즉 결혼식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했으며 신라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한다.

옛 문헌에

연지를 바르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잇꽃을 사용한 자연연료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고

둘째는 수은과 계란노른자 등을 섞여 끓여 만든 것으로 훨씬 붉고 광택이 난다고 한다.

화장품 판매원 ‘매분구~~~~

화장품 판매업자를 ‘매분구’라고 불렀다.

“ 종이에 싼 흰가루 한봉지 평쳐 놓고

문 곁에서 말하기를 중국에서 왔다고 하네

늙은아내는 병이 많아 머리도 못감고

화장대는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저있네“

- 이색의 매분자-

조선시대 화장품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기생들을 옹실로 불러들여 연회를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를 두어 왕실에서 필요한 의목과 화장품 공급을 전담하게 했다.

후희춘의 아내 최씨가 화장품을 팔아 집안에 남편 집무실을 지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홍제전저”에는

풍속이 사치해지면서 생긴 병폐중 하나로 예단과 화장품을 갖추지 못해 때를 놓쳐 혼인하지 못하는 일을 거론했다.

안정복이 지은 “여용국전”은

여자의 얼굴(국가)에 각종 이물질(적군)이 침입하자 화장 도구와 화장품(군사)으로 물리치는 내용이다.

빙허각 李氏는

“규합총서”에서 ‘장대록’이라는 제목으로 조선 여성의 미용실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는데 머리모양.눈썹화장. 얼굴화장.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기록은 왕실만 아니라 민간 사대부 여성까지고 화장에 관심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회

‘매분구’ 대한 기록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전한다.

고려 말 학자 이색의 ‘매분자’라는 시는

중국에서 수입한 화장품 판매업자 앞에서 늙고 병들어 화장을 할 수 없게 된 아내를 언급했다.

1488년

성종실록에는 매분구이자 로비스트인 ‘망오자’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화장품판매업자로 일하면서 남의 재물을 받아 조정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청탁하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은 기록이 나온다.

조귀명은 한 남성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여인의 이야기를 남겼다.

아름다운 여인과 이웃집 남자의 애틋한 사랑.실패. 상사병,죽음.정절이 어우러진 짤막한 러부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여성이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한 직업은 바로 매분구다

그녀가 판매한 화장품은 주로 연분(흰가루)이었다.

조귀명이 이 이야기를 글로 남길 때 그녀의 나이가 일흔 쯤 되었으니 17세기부터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한양에는 영화전(현재 선울 중부경찰서 부근) 동쪽 안팎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화장품 판매점 분점이 운영되었다.

화장품이기 때문에 판매자는 전부 여성이었다.

상설매장도 있지만 방문 팜매도 이뤄졌다.

1901년 국영당 약국은 황성신문에 백분과 함께 사용하여 얼굴의 잡티를 제거하는 연녹향이나는 수입화장품 광고를 열네번이나 실었다.

이처럼 19세기 말을 전후해서 화장품 판매업은 약방의 형태로 상설 매장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15년부터 생산된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1918년 특허국에 정식 상표로 등록되면서

화장품 생산은 기업화 길에 접어든다

다만 제조업자들은 자본력의 한계로 유통까지는 주도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도매상이 유통을 담당했다.

그런데 1960년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방문판매가 화장품 유통을 주도하면서서 현대판 매분구의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화장품의 유통은 할인점과 전문점이 주도하다가 통신과 온리인 유통에 그 역할을 넘겨주게 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회

소고기 공급자 백정~~

“서울의 푸줏간은 여염집에서 불법으로 도살하는 소와 교외 및 강가포구의 푸줏간에서 하루에 잡는 소리가 몇백 마리나 됩니다.

팔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하루에 잡는 소가 수천마리는 될 것입니다”

-1858년 7월6일 ‘충청병영제록’에서-

백정은 고려시대 양수척. 화척으로 불렀다.이들은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거나 사냥.도축업 따위를 일삼으며 유랑생활을 했다.

몽고의 일족인 달단(韃靼) 등으로 이루어진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세종임금 때 이르러서야 동화정책으로 호적에 편입되어 백정(白丁)이 된 것이다.

강도나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으면 절반은 백정이었을 정도로 많은 범죄를 저지른 데다 살생한다는 아유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갖은 차별에 시달렸다.

그들은 유목민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농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냥이나 도축업에 종사를 했다.

결국 백정은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소를 도축하려면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다치거나 죽을 위험도 있다.

백정들은 소를 잡는 도축장을 천궁(天宮)이라고 불렀다.죄를 지어 땅으로 내려온 옥황상제의 자식을 하늘로 돌려보낸다고 믿은 것이다.

도축은 승려가 독경하는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은 소를 매우 중요시 했다.장정 십여명이 할 일을 소 한 마리가 했던 만큼 소는 농사에 필수적이었다.

기근이 들면 사람은 물론 소도 중어든다. 소가 부족해 농사를 맟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조정에서는 소를 잡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우금(牛禁) 정책을 시행했다.그럼에도 소 불법 도축은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성균관 노비들이 살던 반촌(泮村)과 한양 안 스물네 곳, 전국 300여 고을에는 관에서 인정한 푸줏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소를 잡아 고기를 팔 수 있는데 백정이 소속되어 일을 했다.

소를 잡으면 그 세금에 해당하는 현방속을 납부했다.

고기를 팔때는 한성부나 관에서 허가하는 표식을 붙엿고 이를 감찰하는 관원도 있었다.사사로이 고기를 잡아 팔면 무거운 벌금을 징수 했다.

장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농사에 쓸 소 500마리가 매일 전국에서 도살되니 씨가 마를 것이라고 걱정했다.

원래는 5일에 한번씩 도축하는게 원칙인데 많게는 한사람이 1년에 100마리 넘게 잡았다고 한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니 고기 굽는 냄새가 집집마다 풍겼다. 시장에 등불이 그윽한데 백정은 소를 해체하고 있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렇게 소를 많이 잡는데도 씨가 마르지 않은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육 두수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소고기가 너무 흔하다고 문제를 삼았다.

조선 초 3만여 마리에 불과 했던 소는 18세기 후반에서 100만 마리가 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로도 계속 늘어난다.

일반 백성들도 도축업에 뛰어 들었다.

소고기를 팔아 얻는 이익이 매우 컷기 때문이다.

큰 부자가 된사람도 많았다.

지방수령과 하급 관리는 도살업자와 결탁을 해서 고기를 얻었으며 심지어 왕족이 백정을 동원해 몰래 도축을 해서 고기를 팔다가 처벌 받기고 했다.

19세기 중엽에는 공공연히 도살이 행해져도 수령들은 세금만 받아 챙기고 엄하게 금하지 않았다.

백정 종류도 여러 가지다.

뼈와 살을 발라내는 거골장. 가죽을 제거하는 거모장. 가죽으로 무건을 만드는 피장이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은 사라졌으나 차별은 여전했다.

1923년에는 참다 못한 백정들이 차별을 없애달라는 이른바 ‘형평운동’을 일으켰다.

백정은 천대 받았지만 그 들 덕분에 조선 사람들은 마음편히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회

여성소상공인

‘채소전’~~

“내가 오랫 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농가에서 채소를 전혀 심지 않아

피 한포기. 부추 한단도 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정약용 ‘목민심서’-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느누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 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을 뿐 아니라 재배할 겨를도 없었다.

벼놀사와 채소 농사는 병행하기 어려웠다. 채소 심을 땅이 있다면 곡식을 심는게 더 낫다.

한양도성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농사를 금했다.

게다가 근처의 산은 마구잡이 벌채로 민둥산이 되었으니 산나물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다.

한양 사람들이 먹는 채소는 모두 근교의 채소 밭에서 재배했다,

당시 도성밖이었던 왕십리의 채소밭이 가장 규모가 컸다.,

“왕십리 백성들은 항상 채소를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채소를 도성안으로 들여와 채소전에서 판매하거나 행상이 팔려 다녔다.

체소전은 한양 시전 가운데 여성이 운영권을 작고 잇는 몇 안되는 가게중 하나이며 채소 행상도 대부분 여성이 담당했다.

윤기의 ‘도성의 새벽 풍경’이라는 시에

“ 별 지고 닭 울자

채소할멈 , 젓갈영감

다투어 도성에 들어오네‘라는 구절이 있다.

신윤복의 그림에도 생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채소 바구니를 어깨에 맨 여성 행상이 자주 등장 한다.

초랑과 부산 등지에 거주하는 왜인에게 채소를 파는 사람도 여성이었다.

왜인이 여성에게 값을 후하게 쳐 주었기 때문이다.

17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권이진은

마을 남자들을 아래와 같이 마구 꾸짖었다.

“듣자니 너희 아내와 딸을 보내 생선과 채소를 판다고 하는구나.

여인이 왜인의 손을 잡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이놈이 어찌하여 이렇게 값을 적게 주는가’라고 말하면

왜인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여삐 여기고 값을 후하게 쳐준다고 한다.

심지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파는 물건은 긴요하지 않아도 값을 갑벌로 쳐준다고 한다.

이것은 생선과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네 아내와 딸 파는 것이다.

너희들도 사람인데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한양만 아니라 큰 고을 주변에는 늘 채소밭이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8회

사형집행자 회자수~~~

조선에도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직업이 많았다.

조선판 3D업종이다.

대분이이 꺼렸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없어서는 안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우라나라 속어로

회자수를 망나니라고 하니 지극히 싫어하고 천시 하는 표현이다.”

<황현 ‘오하기문’>

큰 칼을 들고 덩실 덩실 춤을 추다가

술 한잔 들이키고 입으로 뿜어 칼날을 적신다.

사극을 통해 익숙해진 망나니의 이미지다.

한자로는 ‘회자수(劊子手)’라고 한다.

포수.궁수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회자수는 원래 회자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군인을 말한다.

회자는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외 비슷하다.

일명 협도(挾刀)라고도 한다.

회자수는 붉은 옷차림에 붉은 두건을 쓰고 이 무기를 들고서 대장을 호위한다.

실전용이 아니고 위엄을 과시하고 공포를 심어주는 의장용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회자를 사형도구로 사용하는 바람에 회자수가 망나니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회자는 자루가 길어서 원심력을 이용해서 세게 내리칠 수 있다.

사람의 목을 단번에 베는 것도 가능하다.

서양의 사형집행자가 긴 자루가 달린 도끼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극의 망나니는 칼날이 넓고 자루가 짧은 칼을 사용하는데 이런걸 로는 사람의 목을 베기 어렵다.

채썰기에나 알맞은 칼이다.

사극의 망나니는 어디까지나 허구다. 연출일 뿐이다

사형집행 장면을 묘사하는 옛 그림에서도 회자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산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은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9회

회자수는

사형수 집안에서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죽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윤준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형을 앞두고 있는데 망나니가 돈을 요구했다.

윤준은 거부했다.

“돈을 둔다고 내가 안죽겠는가”

화가 난 망나니는 최대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라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지관 이사복은

순조임 금의 능을 잘못 잡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나중에 시신을 확인 해보니 망나니에게 난도질을 당했다,

뇌물을 주지 않았나 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망나니는 물론 현장에 입회한 의금부 도사와 전옥서(감옥) 관원 모두 처벌을 받았다.

승정원 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망나니의 행패는 이뿐이 아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떼 지어 시장에 나타나 물건을 빼앗고 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쌀가게에 들어가 큰 바구나로 쌀을 마구 퍼 갔다,

주인은 감히 막지도 못하고 손님들은 더럽다며 가버렸다.

원성이 높아지자 보다 못한 고을 원님이 나섰다,

관가의 돈으로 땅을 사서 그 소출을 망나니에게 주었더니 행패가 사라졌다.

철종 임금 당시 기록인 ‘임술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라에서 받는 돈만으로는 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조서시대에는 사형을 집행하는 기관이 여럿이었다,

죄인의 신분과 죄목에 따라 의금부. 형조, 각 지방의 감영과 군영 등이 나누어 집행했다,

사형집행자도 당연히 여럿이었다.

원래는 군인의 임무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특이한 것은 전옥서다.

전옥서의 사형 집행자를 행형쇄장(行刑鎖匠)이라고 한다.

행형쇄장은 사형수 내지 중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사형를 면제 해 주는 대신 형 집행의 책임을 맡겼다,

평소에는 다른 죄과 똑 같이 감옥에 같힌 죄수 신세다.

어째서 죄수에게 사형집행을 맡겼을까?

아무도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짜피 죽을 목숨인 사형수에게 맡긴 것이다,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다. 지원을 받았다.

행형쇄장이 사형집행을 거부했던 사례도 나온다.

첫 번째는 간신히 설득을 해서 집행을 했지만 두 번째는 아무리 달래도 요지부동으로 거부해서 하는 수 없이 도살 업자를 불러서 집행을 하기도 했다.

승정원 일기를 보면 행형쇄장이 죽었으니 후임자를 구해야 한다는 기록이 종종 등장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0회

조선의 우황청심환~~

중국 사신단이 꼭 필요했던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의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 혹은 牛黃淸心元) 이었다.

사행길 2천리를 내쳐 달려 북경까지 가려면 온갖 고생을 다했기에

상비약으로 우황청심환이 필요했을까?

아무리 상비약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당 우황청심환만 200알씩 들고 가는 이유….

그 이유는 바로 뇌물이었다.

“영감, 이번에 청나라 사행 길에 가신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박영감. 북경까지 그 먼 길을 어찌 갈지…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립니다.”

“흠, 길도 길이지만, 떼국 거지 놈들 엄청 달라붙을 터인데..........

우황청심환 하고, 부채…그래, 종이도 좀 챙겨 가시구랴.”

​“예? 우황청심환이요?”

“예, 개인당 200알씩 챙겨가야 할 거요.”

​“우황청심환으로 밥 비벼 먹을 일 있습니까? 약물 오남용이 얼마나 안 좋은데….”

“아따 말 많네, 먼저 간 선배의 충고라니까. 챙기기 싫으면 챙기지 마슈.”

​조선에서 사신들이 길 떠날 차비를 할 그 무렵,

중국에서는 조선에서 사신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저마다 조선 사신들 맞을 차비를 하는데,

​“조선에서 사신들 온다 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환(眞丸)을 구해야 한다 해!”

“안되면 사기라도 치고,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애걸이라도 해야 한다해!”

중국의 민초들, 저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조선의 사신단을 기다리는데….

​“아따, 책문도 지났고…. 쪼메만 더 가면

산해관(山海關 :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전략적 요충지)이구만…. 빨리 가자!”

​사신단을 이끌던 정사(正使)가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때 사신단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중국 마을의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쭉 나와 사신단을 막은 것이었다.

​“야, 네들 지금 뭐하자는 거냐 ? 우린 지금 너네 나라 황제 만나러 가는 길이라니까….

네들 우리 막았다간 너네 황제한테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사신 나리, 지금 바쁘다는 거 우리 안다 해.”

“바쁜 거 아는데 왜 막는 건데? 바쁜 거 알면 후딱 길 비켜!”

​“우리 사람, 조선 사신단 온다는 소식 듣고, 3박4일간 잠도 못 잤다 해….

못 잔거 책임져라 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 하는데, 울리 산 사람 소원 들어 달라 해.”

“…지금 뭐하자는 가냐...?”

“에…아주 간단하다 해, 진환(眞丸)있으면 한알만 달라 해.”

​“진환? 진환이 뭔데? 어이 역관! 동시통역사! 쟤네들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냐?”

“저기…우황청심환 있으면 좀 달라는 소린데요? 어쩌죠? 걍 몇알 던져주고 갈까요?”

“야야, 쟤들 우황청심환을 왜 달라는 건데? 진환(眞丸)이 그럼 우황청심환이란 소리야?”

​“예…거시기, 쟤네들이 우리나라 우황청심환이 무슨 만병통치약 정도로 알고 있어서요….

우황청심환 하나 먹으면 죽었던 사람도 살아나는 걸로 알고 있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1회

​“쟤네도 우황청심환 만들잖아?”

“그게…원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좀 그렇잖습니까? ”

저것들이 돈 된다니까 짝퉁을 만들고, 이상 야리꾸리한 걸 다 섞어서 둥글게 만들고는

전부 우황청심환이라고 속이니까 짝퉁 먹고 탈나고 했답니다.

그래서 진짜배기…메이드 인 코리아 우황청심환을 진짜 우황청심환이라고

진환(眞丸)이라고 말합니다”

​“어휴 .......우황청심환 몇 개 던져주고 후딱 길 떠나자!”

​정사의 명을 받고 종사관이 품안에서 우황청심환을 몇 개 꺼내 던지자, 중국인들 벌떼처럼 달려드는데,

​“영감, 산해관에 들어가게 되면 우황청심환이 더 필요할 겁니다.”

​“그건 또 뭔소리야 ?”

“뙤놈들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조선제 우황청심환이 최고라고

우리가 발자국 뗄때마다 우황청심환 하나 달라고 쌩쑈를 합니다.

아마 우리가 도착했다고 예부(禮部 : 청나라 외교부)에 보고 할 때도

청심환 몇 박스 쥐어줘야 일이 잘 풀릴 겁니다.”

​“하…. 자식들 뇌물 밝히는 건 익히 알았다만, 돈 대신 청심환을 더 밝힌다니….”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청심환 하나만 있으면 왠만한 건 다 패스 되는데….

좋게 생각하십시오 영감.”

​이리하여 조선의 사신단은 청심환을 뇌물로 해서 무사히 북경에 입성하게 된다.

조선시대 중국에서는 조선의 우황청심환을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조선제 청심환 하나를 구하기 위해 별별 짓을 다했다.

시골촌부서부터 시작해 산해관의 관문 관리, 북경의 관리들까지

조선제 우황청심환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는데,

관리들이야 말만 잘하면 얻을 수 있기에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정작 문제는 사신단이 지나가는 마을에서였다.

‘조선 사신단’이라는 소문만 퍼지면 사신단을 붙잡고 진환(眞丸)을 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안되면 사기를 쳐서라도 청심환을 챙기려 들었으니….

사신단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사행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돈 대신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청심환 이었기에

청심환만 챙겨 가면 만사형통이란 것이었다.

<자료출처 : 스포츠칸>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2회

천대 받았던 전문 통역인~~

고려나 조선의 외국의 교육에서 특징적인 것은 전문 통역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은 있었지만 일반인을 위한 외국어 교육은 없었다.

외국에 나가는 사신 일행은 통역관을 별도로 두어 그들에게 통역을 맡겼다.

역관이라고 부르는 전문 통역사들은 중인계급.

혹은 그 이하의 미천한 출신이었고 대접도 역시 시원찮았다.

교역이 늘어나면서 상인들 중에서도 외국어를 배운 사람들이 생겼지만 정식교육과정이 아닌 실무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어깨 넘어로 배운 것이었다.

역관들이 배우는 외국어는 중국어.몽고어.여진어. 서역어 .일본어 등이 있었다.

고려 초에는 사대(史臺)기관이 있어서 통역과 번역을 관장하고 외국어교육도 담당했다.

1276년에는

통문관이라는 기관이 생겨 7품이하의 관리들에게 중국어와 몽고어.여진어를 가르쳤다.

천한 출신의 통역인들이 개인의 이익에 따라 내용을 와전시키거나 오역.졸역 등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리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했던 것이다.

고려말에 司譯院(사역원)이 생겼다.

총무관의 후신으로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 이름으로 유지되어 통역사 양성과 외국어 교육을 맡았다.

조선시대의 편제를 보면중국어 교수 4명.훈도 4명.,그리고 몽고어.일본어.여진어 교육을 위해 훈도를 각 2명씩 두었다.

훈도는 교수보다 품계가 낮은 관원으로 요즘으로 치면 전임강사 쯤 된다.

사역원의 학생수는 70여명 안팍이다.(통상 75명 정원)

이 가운데 중국어가 가장 많은 35명,몽고어 10명.여진어 20명.일본어 10명이었다.

학생 정원은 외교 관계의 중요성에 비례했다.

또 변방의 고을에서도 역관을 양성하도록 했는데 평양.의주.황주에서는 30명씩 중국어 역관을 양성했고

여진어는 북청(10명)과 의주.창성.만포.이산벽동 등에서 각 5명씩 교육을 시켰다.

일본어 역관은 남쪽의 부산과 제포에서 16명.염포에서 6명을 양성했다.

대개 중인계금의 자제들이 이 교육을 받았으며 시험을 거쳐 역관에 임명되었다.

역관이 되기 위해 보는 시험을 譯科(역과)라고 했다.

한학.몽학.왜학.여진학(청학).의 네 과목이 시험과목이다.

역과는 일반 과거시험 때 같이 보았는데 한학은 1회에 13명.

나머지는 2명씩 뽑았다.합격자는 종7품에서 종9품 까지의 관직을 주었고

승진은 정3품 당하관까지로 한정되었다.

역관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급인 중인 이었다.

그런데 외교관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고 중국등지와의 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본업보다 부업에서 각광을 받았다.

주선시대 무역활동의 중심이 중국에 가는 사신일행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이들을 따라 다니는 역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역관중에 밀무역을 통해 크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으며 이에 인기 있는 직업이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4회

인삼 팔려 청나라로 가볼까? 譯官(역관)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네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며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중국 돈)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데 따라 과녁 세우기’나 ‘언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박지원의 ‘연암집’>

조선은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사행을 통해 외교를 맺었다.

한 번에 보통 300명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넘어 요동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머나먼 길이었다.

그중에서 역관은 사신을 보좌하며 통역을 비롯해 현지 관리와 접촉하는 다양한 실무를 맡았다.

문제는 그들에게 정기적인 급료나 먼길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짊어지고 다닐 만한 분량인 인삼 여덟 자루(=약80근 )를 거래할 권리를 부여했다.

이를 팔포권이라고 한다

1682년(숙종 8년)당시 인삼 한근이 은으로 스물닷 냥 정도 였으니 인삼 80근은 은 200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혀능이 입증된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한번만이라고 참여하는게 역관들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정말 어려웠다.

司譯院(사역원)에 소속된 역관이 600여명이나 되었고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70여명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역관들은 인삼을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져가 비싼 값에 팔고 양반들이 필요로 하는 서적이나 비단,모자 등의 사치품을 국내에 들여와 되파는 중개무역으로 큰 부를 얻었다.

글자의 오류가 적은 좋은 판본의 책이나 구하기 힘든 중국 서적은 역관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비단은 딸의 혼수품, 없어서는 안될 물건으로 여겨져 시골이나 산꼴짜기에 사는 부녀자도 비단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동어 이 공은 평소 稗說(패설: 세상에 돌아다니는 건설적인 이야기)을 항상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다.종류를 따지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즐겼다. 당시 사역원의 도제조를 겸하고 있었는데 연정에 가는 역관들이 앞다투어 서로 사다가 바쳐 수천권이나 쌓였다

<이유원의 ‘임하필기’>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5회

이 상황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연정에 다녀온 역관들이 중국의 패설(민간인 유래 전설)을 많이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들여온 소설류 서적은 조선의 문학 경향을 변화 시켰다.

아옥의 ‘동상기’에서 혼수품으로 소개한 잉본산 경대와 러시아산 금갑경은 모두 역관이 들여온 물건이다.

그 뿐 아니라

중국에서 수출을 금지한 화약(유황)이나 중국의 지도.무기를 만들기 위한 물소 뿔, 심지어 회포까지 몰래 들여왔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질수 있는 위험한 임무였다.

사행단은 북경에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중국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돌아갈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담합을 통해 거래 시기를 지체하는 방식으로 인삼 값을 폭락시키기도 했다.

힘들게 실어 온 임삼을 도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거래에 실패하여 재산을 탕진한 사례도 있었다.

이같은 줄다리기 끝에 성공한 역관은 큰 부자가 되었고 대를 이어 역관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 밀양 박씨,안동 장씨, 천녕 현씨 해주 오씨가 있다.

17~18세기 조선 최고의 갑부들은 모두 역관 가문에서 나왔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선뜻 1만 냥을 빌려준 변부자가

바로 한양 최고의 갑부 변승엽의 할아버지다.

그가 죽기전에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을 따져보니 은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1680년 청과 일본이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국내에 들어오는 은이 부족했고

1707년 책문 후시가 열리면서

역관들의 수입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난한 역관들은 자신들이 지닌 팔포의 권리를 송도(개성)오 평양의 상단에 팔아 넘기거나 역관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역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외 무역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조선 말기 까지 존속했다.

역관은 중국 문인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자 노력했고

또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정보를 생성하고 유통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중국 서적을 구하거나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인맥이 꼭 필요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6회

매 사냥꾼 응사~~

「매 사냥꾼은 팔뚝에 매를 얹고 산을 오르고

몰이꾼은 개를 몰고 숲을 누비네

꿩이 깍깍 울며 산모퉁이를 날아가니

매가 회오리바람처럼 잽싸게 날아오네」

-정약용-

옛날에는 고기가 귀했다. 소는 농사용으로 팔요했고 법으로도 도살을 금지해서 먹을 수 없었다.

돼지와 닭을 길러서 먹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대량으로 사육이 가능한 형편이 아니었다.

고기를 구하려면 사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멧돼지와 사슴은 찾기도 어렵고 잡기도 쉽질 않았다.

그나마 흔한게 꿩인데 역시 잡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매를 길들여 꿩을 잡곤 했다.

이렇게 매를 이용하여 사냥하는 매사냥꾼을 응사(鷹師)라고 불렀다.

매사냥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구려 벽화에 매사냥 그림이 있고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진평왕은 배사냥 마니아 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의 충열왕은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매사냥을 육성했다.

하지만 폐단도 만만치 않았다.매사냥꾼들은 매를 뒤쫓느라 논밭을 짓밝았고 달아난 매를 찾는다며 만가에 난입하기도 했다.

수십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행패를 부리자 응방을 폐지하라는 비난이 빗발치기도 했다.

응방은 폐지와 복구를 거듭하면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게 된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도 매사냥을 매우 즐겼다.

심지어 세종임금도 가끔 매사냥에 나가기도 했을 정도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오하려 역정을 냈다.

“신하들은 매를 많이 기르는데 임금은 새 한 마리도 못기르게 하는가 ”

일단 매사냥에 빠지면 그 재미에 푹 빠져 버려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왕실의 응방은 역시 매사냥에 탐닉했던 연산군이 쫓겨나서야 바로소 없어졌다.

그렇지만 임금 수라상에 올릴 꿩고기를 마련하기 위하서라도 매사냥꾼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7회

매사냥꾼들은 응사계(鷹師契)라는 조합을 만들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왕실에 꿩고기를 납품한다.

왕실에 그 많은 꿩을 날마다 납품 할 수도 없고 해서 길러서 납품을 해야 했다

기르다 없어지면 닭을 대신 남품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꿩 대신 닭이다”

숙종 임금 때 조정에 등록된 매사냥꾼만 1,800명이었다. 민간에서도 매사냥이 성행했다.제사상이나 부모님 음식상에 고기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사냥을 할 수 있게 길들인 매는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조년의 <옹골방>,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안평대군의 <고본옹골방> 등은 우리나라 매사냥 문화의 수준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도 한다

매사육과 훈련 방법을 설명한 책도 있다.

이 책에는 매의 풀종과 특성, 길들이는 법. 먹이 주는 법. 사냥하는 번. 병치료법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덫을 놓아 매를 잡는다.

그물에 산 닭을 놓어 매가 잘 다니는 목에 놓아두면 스스로 그믈에 들어가 잡히게 된다.

이렇게 잡은 매를 어두운 방에 두고 수십일 동안 천천히 길들인다.

손에 든 먹이를 받아 먹게 하고 부르면 오게 만든다. 매가 사람과 친숙해 지면 슬슬 사냥을 나간다. 그렇지만 제약도 많다.

날이 덥거나 따뜻해도 안 되고 초목이 무성한 뎨절에도 안된다.

봄에는 오전. 가을과 겨울에는 오후 , 대체로 초저녁이 좋은 타임이다.

야생 동물이라 언제든지 달아 날 수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굶주리면사냥을 못하고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리니 체중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한마디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별들면 약을 빨리 먹이고 추우면 고기를 따뜻하게 대워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 말 상전이 따로 없다.

이렇게 정성껏 길러도 오래 쓰지는 못한다.

길어야 3~4년. 짧게는 1~2년 안에 대부분 죽거나 달아난다.

그게 일반적인데 소개된 매 사육 이야기에 따르면

매 한 마리를 무려35년이나 기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오래 사는 매는 70년 까지도 산다고 한다

그 비결은

바람이 거세면 날리지 말고 날이 저물면 날리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바람이 세면 높이 날아가 버리고 날이 저물면 집 생각이 나서 달아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너무 자주 사냥을 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매도 지치기 때문이다.

꿩3마리만 잡으면 만족하고 더 이상 사냥을 시키지 않았더니 매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욕심 부리지 않는게 매사냥을 오래 하는 비결이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8회

[孝不孝橋(효불효교)]~~~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어린 나이에 시집 왔더니 초가삼간에 화전 밭 몇 마지기가 전 재산이다.

정신없이 시집살이 하는 중에도 아이는 가졌다.

부엌일에 농사일 하랴 길쌈 삼으랴, 저녁 설거지는 하는 둥 마는 둥 파김치가 돼 안방에 고꾸라져 누우면 신랑이 치마를 올리는지 고쟁이를

내리는지 비몽 사몽 간에 일을 치른 모양이다.

아들 둘 낳고 시부모 상 치르고 또 아이 하나 뱃속에 자리잡았을 때 시름시름 앓던 남편이 백약이 무효, 덜컥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유복자 막내아들을 낳고 유씨댁이 살아가기는 더 바빠졌다.

혼자서 아들 셋을 키우느라 낮엔 농사일, 밤이면 삯바느질로 십여년을 꿈같이 보내고 나니 아들 녀석 셋이 쑥쑥 자랐다.

열여섯 큰아들이 “어머니, 이젠 손에 흙 묻히지 마세요” 하며 집안 농사일을 시원시원하게 해치우고,

둘째는 심마니를 따라다니며 약초를 캐고 가끔씩 산삼도 캐 쏠쏠하게 돈벌이를 하고,

셋째는 형들이 등을 떠밀어 서당에 다니게 됐다.

세아들이 효자라, 맛있는 걸 사다 제 어미에게 드리고 농사는 물론 부엌일도 손끝 하나 못 움직이게 했다.

살림은 늘어나고 일을 하지 않으니 유씨댁은 몇달 만에 새 사람이 됐다.

새까맣던 얼굴이 박꽃처럼 훤해지고 나무 뿌리 같던 손이 비단결처럼 고와졌다.

문제는 밤이 길어진 것이다. 베개를 부둥켜 안아봐도,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씨댁은 바람이 났다.

범골 외딴집에 혼자 사는 홀아비 사냥꾼과 눈이 맞았다.

농익은 30대 후반 유씨댁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남자의 깊은 맛을 알게 된 것이다.

삼형제가 잠이 들면 유씨댁은 살며시 집을 나와 산허리를 돌아 범골로 갔다.

어느 날 사경녘에 온몸이 물에 젖은 유씨댁이 다리를 절며 집으로 돌아왔다.

개울을 건너다 넘어져 발을 삔 것이다. 세아들은 제 어미 발이 삐었다고 약방에 가서 고약을 사오고 쇠다리뼈를 사다 고아줬다.

며칠 후 유씨댁은 발의 부기가 빠지고 걸을 수 있게 되자 또다시 아들 셋이 잠든 후 집을 빠져 나와 범골로 향했다.

유씨댁은 깜짝 놀랐다.

개울에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세 아들의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다.

이승에 있는 어미에게는 孝요,

저승에 있는 아비에게는 不孝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어 있으며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다리(경상북도 사적 제 457호지정)이다.

일명 칠성교(七星敎)로 불리기도 한다

요즈음 자식들은 우리들에게 무슨 다리를 놓아줄려는 생각이나 할려나!!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9회

예쁜 글씨 대행자 書手(서수)~~~

1차 기록물의 대부분을 직접 붓으로 작성했던 시기에 글씨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모양 좋은 서법을 읽힐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각종 전자문서가 가능가능한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전문가가 있었으니

이를 書手(서수)라고 불렀다.

서수에 관한 언급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고려시대 문하부에서 서수의 직임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고 하며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吏典(이전) 6조편에서

고려시대 관직중에 庶人(서인)이 담당하는 분야 중 하나로 언급했다.

당초 서수는 관에 속한 낮은 벼슬아치였다.

<영조실록>에 이제동이라는 인물이

신씨 집안에서 10년 넘게 서수 노릇을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심노승이라는 사람의 ‘자저실기’에 정현좌가 심노승 형제의 모든 과거시험 답안지와 원고를 필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을 전후해서 서수들은 미끈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무기로 민간분야에서 전문가집단으로 자리를 잠아갔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로 필사한 자료는 무엇이었을까?

허균은 그의 저서에서 서수가 없어서 조선의 시를 빨리 필사할 수 없다고 했다.

사수가 필사하는 자료에 문학작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8세기 한양의 貰冊家(세책가)에서

취급한 한글 소설 역시 전문 필사자들에 의해 필사되었다고전해진다.

과거시험 부정편에서 잠깐 소개를 했는데 서수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은 과거시험장이었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은

첫째)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군~

.둘째)답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거벽~~

.셋째)작성된 답안지를 깔끔하게 예쁜 글씨체로 필사해주는 서수~~

이들이 모두 원팀을 이뤄 시험을 치뤘다.

이익이 과거시험 답안지를 스스로 작성하는 사람이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고 비판한 점으로 볼 때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 매우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회

답안지를 예쁜 글씨로 가능한 한 빨리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 합격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서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동패락송’의 ‘수원이동지’는 과거시험 대작자 거벽과 대필자 서수를 동행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야기라고 한다.

18세기 야담집 ‘기문습유’에 한 선비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실태는 과거 시험 부정으로 이어지고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정조임금은 거벽과 서수의 과거시험장 출입을 금지했으나 이를 막지는 못했다.

그 외에도 관에 제출하는 공문서 작성과 필사역시 서수가 담당했다.

작문이 불가한 사람들의 글을 대신 적성해 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목민심서’ 6조의 ‘호전’에는 호적조서를 작성해주고 비용과 이를 이용한 비리가 정리되어 있다.

호적대장을 정리할 때 쓰이는 비용은

정서조(正書租) 한 말(약 한냥).

여기에는 문서내용을 필사해 주는 서수의 품삯이 포함되어 있다.

정약용이 직접 목격한 사례도 기록을 했는데 호적대장 한 장 등서 비용이 서푼 정도 되었으며 수정하여 다시 쓸 경우는 별도의 삯을 지불해야 했다.

이처럼 사대부사의 각종 기록물.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소비상품으로 등장한 고전소설.가거시험답안지.각종 공문서 등의 필사와 작성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고

글씨를 잘쓰는 능력은 직업으로 연결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타자기와 컴퓨터사 서수의 역할을 대신하시 전까지 편지같은 생활기록부터 관공서 공문서의 작성까지 글씨는 여전히 중요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1회

조선시대 과학수사대 오작인~

조선시대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고을 사또 어른이 검시관 역할을 맡았다.

물론 사또가 직접 검시를 담당하는 건 아니다.

검시는 변사자를 만지는 험한 일이고 시체의 상혼을 판독하는 법의학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사자를 만지고 검사를 담당하는 전문가는 따로 있었다.

이를 오작인(仵作人). 오작사령(仵作使令)이라고 불렀다.

오작인은 법의학서에 근거하여 사인(死人)을 찾았다.

당시 대표적인 법의학서는 무원록(無冤錄) 이었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때 책인데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정증보를 거듭했다고 한다.

세종 때 <신주 무원록>,

영.정조 임금때 ,<증수 무원록>으로 거듭나며

검사 지침서로 저리매김했다.

또 19세기에 이르러 검시와 문서 작성 방법을 정리한 <검고(檢考)>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검시는 최소 두 번에 걸쳐 진행했다.검시마다 다른 오작인이 진행해 객관성을 확보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오거나 사안이 불분명할 경우 다른지역 오작인을 선정해 시체를 검시하도록 했다.

안장한 다음에도 새로운 증거거 나오면 시체를 꺼내 검시를 진행했다.

이러한 검시는 매장한 시체를 파내어 검시한다는 뜻으로 掘檢(굴검)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시신을 훼손하는 일.

칼을 대는 일은 금기사항이었다.

변사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부를 할 수 없었던 까닭에

오작인은 변사체의 상태나 상흔을 꼼꼼히 관찰해 검시를 진행했다.

상처 부위의 색을 여섯가지로 구분해 살폈으며 사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약품과 도구를 이용했다.

<검고>에 따르면

오작인은 식초.술지게미.삽주뿌리.은비너.백지.단목탕 등등 십여 가지 法物(법물)을 다뤘다.

식초는 흉기에 뿌려 핏자국을 찾는데, 술지게미는 상처부위를 닦아 상흔을 선ㅂ명하게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

은비너와 백지는 독살 여부를 파별하는 데 사용했고

은비너는 항문이나 입에 넣어 병색을 살폈고 백지는 눈.코.입에 붙여 독기가 묻어 나오는지 보았다.

단목탕은 시신을 닦는 데, 삽주뿌리는 태워서 악취를 없애는 데 사용했다.

오작인의 검시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4년(광무 8년)6월 3일.

경상도 문경군 신북면 호지리에 살던 최상보와 저영천은 천민 정이문의 집에서

양반 안재찬의 아내 황씨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관아에 신고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2회

문경 군수 김영년은 오작인 김일남과 함께 현장에 도착.검사를 했다.

오작인 김일남이 진행한 검시에 따르면

은비녀를 입에 놓엇을 때 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시체 곳곳에 구타 상흔이 뚜렸했다.

또 뒷목에 끈으로 조른 일자 흔적이 있었고

아래턱에 혈흔이 있었다.

검시 결과를 토대로

문경 군수 김영년은 자살이 아닌 구타 후 교살로 판단했다.

군수는 남편 안재찬을 집요히 추궁했다.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사건 내막은 이러했다.

5월 14일 천민 정이문이 안재찬의 아내 황씨를 겁탈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도주를 했다.

곧 바로 뒤를 쫓았으나 정이문은 집을 비우고 도주한 뒤였다.

화가 난 안재찬은 대신 정이문 할아버지 정태극을 잡아 구타를 했다.

정태극은 안제찬의 아내 황씨와 손자 정이문이 오랫동안 내연 관계였다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안재찬이 아내 황씨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름남짓 지난 6월 2일 밤

안재찬은 아들 울음소리를 듣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아내 황씨를 보고 격분해 마구 때렸다.

화가 날대로 난 데다 의심이 더해지자 안재찬은 올가미로 황씨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안재찬은 불륜이 발각된 데 수치심을 느낀 아내가 집을 나가 내연남의 집에서 자살한 것처럼 꾸미려고 황씨 시체를 옮겨 정이문 집에 매달았다.

오작인 김일남의 꼼꼼한 검시.군수의 날카로운 추궁 때문에 황씨와 그의 친정은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공익을 위해 일을 했지만 변사체를 만졌던 까닭에 오작인 천시박은 직종이었다.

또 근거 없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사람을 죽인 뒤 간담을 빼내어 치료약으로 파는 사건이 가끔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현상금도 걸기 까지 했다.

오작인의 직무는 검시였지만 연고 없는 시신을 처리하기도 했다.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면 오적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이 돈디고 했다.

천대 속에서 오작인의 책임은 막중했고 덕분에 말을 못하는 시체는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오작인은 조선의 과학 수사관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3회

백성의 변호사 외지부~~

“외지부라 불리는 자들은 항상 관아 근처에 있다가 원고나 피고를 몰래 사주합니다.

또 이들은

송사를 백성 대신 집행하며 시시비비를 어지럽게 만들어 관리를 현혹하고 판결을 어렵게 합니다.

해당 관부에 명하시어 조사해 처벌하소서~“

<성종실록 3년. 1472년 12월1일>

조선은 소송 나라를 꿈꾸었다. 왕이 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억울한 백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질 못했다. 억울함을 풀려는 소송이 넘쳐 났다.

조선시대 소장과 판결을 정리한 <민장치부책>에 따르면

양반은 물론이고 노비나 여성도 거리낌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

옥에 갇힌 죄수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법을 몰라도 소송은 가능했다.민간에서 활약한 법률 전문가 외지부(外知部) 덕분이다.

요즘 같으면 ‘볍률구조공단’과 유사할까?

외지부라는 명칭은 고려 도관지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都官(도관)은 형부소속 관청이고 지부 판결을 맡은 종3품 관리를 말한다.

외지부는 도관 밖 민간에서 지부 노릇 하는 자를 뜻한다.

고소장을 작성 해주고 소송을 자문한 외지부는 요즘 변호사라고 할까?

조선은 귀천을 떠나 백성이 자유롭게 소장을 제출하도록 배려를 했다.

또 백성이 소장을 제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돕는 일을 목민관의 의무로 보았다.

18세기 편찬된 목민서 <치군요결>은 소장 제출을 어렵게 하는 아전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백성에게는 관청은 문턱이 매우 높았다.소송을 제기하려면 법전에 근거해 소장을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문에 능숙하다고 소장을 제대로 작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장은 공문서인 만큼 서식과 내용을 구비하여야 효력이 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법조문을 모르는 마을 훈장이 증거는 빼놓고 감정에 호소하는 문장만늘어 놓는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까닭에 법에 무지한 백성이 스스로 소장을 작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외지부는 법률 지식과 문서작성 능력을 토대로 법을 모르는 이들을 도왔다.

형식을 갖춰 소장을 대신 쓰고 소송이 진행되면 자문도 받았다.

조선시대 소송은 세 차례 진행되엇다.

두차례 승소해야 사건을 매듭 지울 수 있다.

판결에 불복하면 상급기관에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

외지부는 긴 소송과정에서 의뢰인을 보호했으며 법률 대리인 역할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4회

외지부는 글과 법을 모르는 백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

명종 임금 당시 역참 소속 노비 엇동은 양반의 부당한 추노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다.

선조임금때 다물사리는

자신과 자식까지 사유재산으로 만들려던 양반 이지도에 맞섰다.

다물사리는 자기가 나라에 속한 성균관 공노비이므로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다물사리는 이지도측에서 제시한 문서를 인정하라는 서명을 거부했다.

이로써 해당 문건이 지닌 증거효력을 부인한 것이다.

다물사리가 법리를 알아서 그러한 건 아니다.

외지부의 조언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엇동과 다물사리는 글을 모를 뿐 더러 당연히 법률지식도 없다.

외지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외지부는 법을 몰라 보호받지 못한 백성을 보호했다.

그러나 외지부를 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법지식을 이용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중종임금 때

외지부 유벽은 형조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심문 내용을 빼낸 다음

의금부에 수감된 의뢰인게게 답변을 미리 알려 주었다.

또 외지부는 문서를 위조해서 다른 사람을 노비로 만드는 일에도 참여를 했다.

효종 임금때

외지부 최선석. 최선협은 훈련도감 포수 안사민을 노비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안사민은 병자호란 때 남한선성 전투에 참여했던 포수 였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조정은 외지부를 골칫거리로 여겼다.

조정입장에서 외지부는 백성을 꼬드겨 소송을 벌이며 법을 이용해 사회를 어리럽히는 이들이었다.

실제 그런 일이 없지 않았다.

조정은 외지부를 비리호송자, 곧 ‘이치에 닿지 않은 송사를 잘 일으키는 놈’이라고 했다.

연산군은

외지부 열여섯 명을 함경도로 유배 보냈다.

중종 임금 때 편찬한 법전 <대전후속록>은 외지부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외지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외지부는 ‘비리호송자’라는 꼬리표를 달고도 계속 살아 남았다.

법을 모르나 법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백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외지부는 법과 글을 모르는 조선 백성의 변호사였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5회

조선 최고의 책 거간 책쾌~~

저자 김영주의 <책쾌>는 조생(曹生)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의 즐거리를 소개한다.

조선조 영·정조 연간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린다.

중국과 서구의 실용학문을 받아들인 실학(實學)이 융성하던 때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통치를 위해 사고를 통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선 책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아야 했다.

책방의 개점은 금지됐다.

그때 실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중국과 서구의 실용학문 서적을 전해주고 권유한 사람들이 바로 책쾌(冊快) 혹은 서쾌(書快), 즉 책거간이다.

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서적을 매입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오늘날 고서 수집·판매상들이 해당 분야에 높은 식견을 갖추고 있듯,

당시의 책쾌들도 난해한 옛 고서까지 필사하고 해제를 달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있었다.

박지원·정약용 등 실학파들과 교유한 조선 최고의 책거간~

조선시대 책쾌 가운데 ‘조신선(曹神仙)’이라 불리던 조생(曹生)이 가장 유명했다.

‘붉은 수염을 날리며 홑겹 삼베옷의 품과 소매에 책을 잔뜩 넣어다녔다.

‘책을 보고 싶어하는 임자가 나타나면 수십권에 달하는 강목(綱目) 한 질을 꺼내보였다’ 등의

그에 대한 일화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조신선전’,

유만주의 <흠영>,

조수삼의 ‘죽서조생전’,

조희룡의 ‘조신선전’,

서유영의 <금계필담>,

장지연의 ‘조생’ 등 여러 문인들의 문헌에 기록돼 있다.

그는 실학파 선비를 비롯해 양반세도가,

규방의 규수, 장사치,

기생에 이르기까지

단골 고객을 가지고 있던,

‘한양에서 조신선을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돌 정도로 조선시대 한양을 무대로 활약한 최고의 책쾌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6회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딸 화평공주의 남편 박명원은

세자(훗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궁의 나인과의 사이에 딸 용이를 낳는다.

대로한 영조의 눈을 피해 사가로 빼돌려진 용이는 주막에서 자란다.

이 일을 기화로

노론파이던 영조와 조정대신들은 소론파 쪽에 기울어있던 세자 선(宣:장헌세자, 훗날 그가 죽은 뒤 영조가 사도세자로 추증했다)을 뒤주에 가둬 죽인다.

조생은 책 거래가 끝나면 주막에 들러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는 용이를 지켜본다.

영조 기간에 분서갱유 사건인 ‘명기집략 사건’이 일어난다.

청나라의 주린은

<명기집략>에서 조선 개국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인임은 공민왕이 살해된 뒤 우왕을 옹립해 친원정책을 쓰다.

이성계와 최영으로 대변되는 ‘혁신세력’에게 처형된 세도가로 이성계의 새 나라 건국 명분과는 대치되는 인물.

조선의 계속된 항의에 청나라는 <명기집략>을 모두 폐기했다.

그러나 <명기집략>은 이미 조선에 흘러들어와 퍼진 상태였다.

영조는 명기집략을 소지하거나 읽은 선비들과 책쾌들을 가혹하게 처벌한다.

책은 거둬들여져 불태워졌고, 선비들은 유배 길을 떠나야 했다.

수 많은 책쾌들도 벌판에 묶인 채 굶어 죽었다.

명기집략 사건의 화를 피한 조생은 용이와 재회해 부부의 연을 맺는다.

소설은 조생과 용이 부부의 손자대 까지 이어져 용이의 죽음,

조생의 신선으로의 귀환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소설의 줄거리는 평탄하지만

조선 중·후기에 유행했던 서책들과 그에 대한 소소한 지식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불어 지은이의 재해석을 통해 쟁쟁했던 실학자들의 당시의 면면들을 만나보는 것도 또한 이 소설을 주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천일야사에도 등장하는 애깃 거리다.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딸 화평공주의 남편 박명원은

세자(훗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궁의 나인과의 사이에 딸 용이를 낳는다.

대로한 영조의 눈을 피해 사가로 빼돌려진 용이는 주막에서 자란다.

이 일을 기화로

노론파이던 영조와 조정대신들은 소론파 쪽에 기울어있던 세자 선(宣:장헌세자, 훗날 그가 죽은 뒤 영조가 사도세자로 추증했다)을 뒤주에 가둬 죽인다.

조생은 책 거래가 끝나면 주막에 들러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는 용이를 지켜본다.

영조 기간에 분서갱유 사건인 ‘명기집략 사건’이 일어난다.

청나라의 주린은

<명기집략>에서 조선 개국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인임은 공민왕이 살해된 뒤 우왕을 옹립해 친원정책을 쓰다.

이성계와 최영으로 대변되는 ‘혁신세력’에게 처형된 세도가로 이성계의 새 나라 건국 명분과는 대치되는 인물.

조선의 계속된 항의에 청나라는 <명기집략>을 모두 폐기했다.

그러나 <명기집략>은 이미 조선에 흘러들어와 퍼진 상태였다.

영조는 명기집략을 소지하거나 읽은 선비들과 책쾌들을 가혹하게 처벌한다.

책은 거둬들여져 불태워졌고, 선비들은 유배 길을 떠나야 했다.

수 많은 책쾌들도 벌판에 묶인 채 굶어 죽었다.

명기집략 사건의 화를 피한 조생은 용이와 재회해 부부의 연을 맺는다.

소설은 조생과 용이 부부의 손자대 까지 이어져 용이의 죽음,

조생의 신선으로의 귀환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소설의 줄거리는 평탄하지만

조선 중·후기에 유행했던 서책들과 그에 대한 소소한 지식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불어 지은이의 재해석을 통해 쟁쟁했던 실학자들의 당시의 면면들을 만나보는 것도 또한 이 소설을 주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천일야사에도 등장하는 애깃 거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회

물류 유통의 중심 차부(車夫)~~

‘차부車夫’란 마차나 우차 따위를 부리는 사람으로 차부(車部: 자동차의 종착지.집합지)와 구별된다.

「용산의 한 차부가 도성 안으로 짐을 운반하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죄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는 용산 차부가 수레로 실어 가는 것이 상례였다」

<구수운. ‘이순록’>

일상에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일은 다반사다.

국가의 기간산업인 물류유통산업은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물류의 이동이 별로 없었고 있어 봤자 그 양이 별로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물길을 제외하면 원거리 물류 유통시설은 매우 빈약하였다.

도로도 매우 비좁아 우마차 이용도 쉽질 않은 형편이었다.

그나마 조선시대 우마차를 수단으로 하는 운송업은 도시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운송업자를 차부(車夫)라고 불렀다.

이들은 조선 초기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용산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많은 차부들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예종실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구수훈이 지은 <이순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전문적으로 사형수와 그 시신을 이송한 것으로 소개를 했다.

소가 끄는 수레로 사형수를 형장까지 옮기는 사극의 장면을 떠오른다.

1602년, 한성부(서울시)에 속한 차부는 열 한명 이었다.

그 중 네 명은 왕자들이 사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공무를 수행하지 않아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1739년경 보충된<신보수교집록 新補受敎輯錄>에 한성보 소속 관직이 모두 정리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총융청(경기지역 주둔 군영)에 1명.수어청(남한상성 주둔 군영) 2명의 차부를 공식적으로 두었다.

관청 소속 자영업자와 민간인 신분의 차부가 공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사대문 밖에 거주를 했다.

차부는 삯을 받고 각종 화물을 운송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토목 공사에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왕실의 건축 현장에서 목재와 석재 운반은 이들이 도맡았다.

중앙정부 소속과 달리 한성부에서 민간인 차부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심지어 수레 세대에 실어야 하는 짐을 한 대에 다 실으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그런 사례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차부들응 고역을 참지 못해 도망하곤 했다.

정조임금은

화성 공사에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고용했다.

1794년 9월 16일부터 1796년 8월 19일까지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며 위로한 기록 중 열 차례에 걸쳐 차부가 등장한다.

총 646명의 차부가 동원되었다.

이들에게 제공된 음식은 적게는 떡 한 개, 많게는 국 한그릇과 밥 한그릇. 떡 두 개. 술 한잔 등 이었으니

당시 이정도면 위로 차원에서 제공된 음식의 양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송 수단과 동력.화물 종류에 따라 차부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아키야마사다스케가 창간한 <二六新報> 1894년 11월 28일 기사에

인력거부(人力車夫)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람이 직접 수레를 끄는 경우에 부여한 명칭으로 보인다고 한다.

조선 측 자료 역시 이 시기 전후하여 일관되게 우차부(牛車夫)와 인력거부 (人力車夫)를 구분하여 사용했다.

특히 1906년에 발표된 <칙령 81호> ‘지방세 규칙’에서 운송 사업 분야는 교자세, 인력거세.자전거세.짐수레세로 구분하여 과세를 했다.

수레로 사람을 치여 유배간 차부가 있는가 하면 인력거꾼 중에는 단발령을 거부하여 투옥된 이도 있었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도 있었다.

이들은 조합을 설립하여 운송업을 조직화 하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점차 전문 직업ㅈ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8회

부동산 중개업자 집주름~~

「 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큰 집인지 게딱지인지를 속으로 따진다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신택권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연일 빠지지 않는 뉴스가 바로 부동산 시장 뉴스다.

특히 주택은 가장 관심 분야 중 하나다.

부동산 중개업은 조선시대에도 명칭을 다르지만 존재했다.

조선시대엔 부동산 중개업자를 ‘잡주름( 가쾌.家儈)이라 불렀다,

이들 잡주름이 자리를 잡은 시대는 18세기 중반쯤 인 1753년<영조실록>, 기사에는 부마도위(駙馬都尉: 왕의 사위)의 후손 유성동이 집주름으로 전략한 사실이 소개되었는데

그를 무뢰배라고 표현할 정도로 집주름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실학자 박지원 역시 <마장전(馬駔傳>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말 거간꾼(마장)과 집주름을 거론했으며 <광문자전 廣文者傳>에서 표철주가 가난해져 할 일이 없어지자 선택한 직업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들어 집주름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792년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신택권의<성시전도시>에는 집주름이 큰 집.작은 집 할 것 없이 거래를 성사시키고 한 집이 이사하면 집주름이 열 집이 움직이니 짐을 나르고 말에다 싣는 노비가 끝이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이들은 한양의 부유층이 몰려 사는 청계천 북쪽일대 북촌(北村)은 물론 몰락한 양반들과 선비들이 모여사는 남촌(南村).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종로 주변 외진골목과 시장 주변의 집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은 덧 했다.

심노승이 1830년 완성한 <자저실기>에는 이익모(李翊模)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집주름들을 불러 남촌과 북촌에서 가장 좋은 집을 소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이익모가 구입하고 싶어하는 집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 집주름이 그 집은 왕자의 궁이라고 말하자 구입을 포기한다.

얼마 후 그는 상동(尙同: 현재의 북창동과 남창동이 걸쳐 있는 지역)에 있는 청주 목사 홍선양의 고택을 구입했는데 그 가격이 무려 7,000냥이라고 한다.

집 욕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익모가 고민 끝에 사들인 홍선양의 고택은 당대 한양에서 가장 비싼 집중에서 하나로 추정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9회

1냥이 쌀 가격으로 환산 했을 때

당시 1냥의 값은 5만원(?) 정도이니 약 3억5천만원 정도다.

이게 지금 구입한다면 얼마를 줘야 할 까?

그렇다면 그 집 중개 수수료는 얼마 였을까?

궁금하다.

신택권은 <성시전도시>에서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라고 언급했다,

집주름의 중개 수수료가 거래가의 10퍼센트라는 말이다.

지금 보면 사실 비싼 수수료 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보 독점이 가능했던 시대의 수수료이고 당시 고리대금 연 이자율이 30%을 웃돌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그런 집을 구입해야 하는 수요자 입장에선 그 정도는 무리도 아닐성 싶다.

중개 수수료가 나라의 규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1922년<동아일보> 기사에 둥장하는 이야기다.

당시 서울에 활동하는 집주름은 600여명 이상이고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이익집단으로 발전항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들의 대표자를 ‘총대’라 불렀는데 당시 강성구가 총대를 맡고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강성구 외 123명은 가옥중개인 조합의 활동을 반대한다는 진정서를 종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경무국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집주름은 거래가의 0.8%를 조합에 내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각각 거레가의 1.5%씩 받아야 한다.

즉, 1만원짜리 집의 거래를 성사 시킨 집주름은 매도자와 매수자에게

각각 150원씩 총 300원을 수수료를 받은 후 그 중 80원은 조합비로 납부하고 나면 220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조함의 설림과 운영에 반대하는 집주름들은 이 규정이 시세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정도의 수수료를 감당하고 집주름을 활용할 리 없다고 주장한다.

지급 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조선 후기 서울에서 꽤 성행한 직업인 집주름은 일제 강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복덕방(福德房)에게 그 역할을 물려주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법률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필요해졌고

복덕방(福德房)의 주인도 점차 전문지식인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의 '공인중개사' 자격이 도입된 것은 1985년이며,

1990년 이후부터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사무소 개설이 가능하도록 법이 변경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0회

서민들의 부업 염상 (鹽商)~

「염전에 가서 소금꾼들과 약정을 하되 서른 냥을 염전에 맡겨 3년 동안 소금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고

3년 후에는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소금꾼들이 틀림없이 좋아라고 응할 것입니다.

소금을 지고 백리 안쪽을 두루 돌아다니되

값을 당장 받아 낼 일이 아니라

외상을 남겨 두어 인정을 맺고 단골로 만들면 반드시 이득이 많을 것입니다.」

위글은 조선후기 문인 노명흠이 조선의 사회상을 반영한 한문 단편 작품을 수록한 야담집인

<동패낙송東稗洛誦>에 기록된 이야기다(1772년 추정)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쌀가게와 더불어 소금가게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트럭에 소금을 싣고 돌아다니며 판매했고

김장철이 되어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면 직접 배달해 주었다.

광개토 대왕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소금 획득을 언급하고 탐라가 소금을 얻기 위해 남해안을 괴롭힐 만큼 한반도에서 소금은 예로부터 생활필수품이자 귀한 상품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했다.소금을 생산하는 곳을 염소(鹽所). 염장(鹽場).염전(鹽田)이라 불렀고 생산자를 염한(鹽漢). 염간(鹽干).염정,염부(鹽夫)라 불렀다.

관청에 속한 염부는 염장관의 관리하에 소금을 생산하고 그 판매수입을 생활을 했다.

민간업자도 비교적 자유롭게 소금을 생산했다.이렇게 생산된 소금을 소비처로 운송하여 판매하는 사람을 염상(鹽商)이라 했다.

유수원의 <우서迂書>에는 18세기 염상의 실상이 비교적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