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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1회

공민왕 때 성균관에서 강론을 펼쳤는데,

이치에 두루 통달해 대사성 이색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고 추켜세웠다.

1374년 성균관 대사성,

1385년 동지공거,

1388년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학자라고 해서 포은을 샌님으로 본다면 오산이다.

정몽주는 대범하고 유능하며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신으로 나서면 명 태조 주원장과 일본 규슈절도사가 그의 인품, 학식, 논리에 반해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고려 백성들에게는 구세주로 추앙받았다.

포은은 왜구의 노예가 된 고려인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재상들을 설득해 속전(贖錢)을 모았다.

권문세족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펼쳐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썼다.

백성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남다른 관리였다.

조정에서도 신망이 두터워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성계 또한 두 살 아래인 정몽주를 흠모해 가까이 두고자 했다.

1364년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가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를 화주(영흥)에서 격퇴할 때

정몽주는 종사관으로 주장(主將)을 보필했다.

1380년 이성계가 삼도 도순찰사가 돼 황산(운봉)의 왜구를 섬멸할 때도 포은은 판도판서로서 보급을 지원했다.

1383년 여진족 호발도가 함주(함흥)를 점령하자

정몽주는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 휘하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해 함께 적을 물리쳤다.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두 사람 사이에 끈끈한 신뢰가 형성됐다.

포은은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를 개혁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면

이성계의 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봤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과 최영을 몰아냈을 때 이성계 편에 선 것도 그래서다.

이성계가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 급진파 사대부들과 손잡고 사전(私田) 혁파에 나섰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급진파가 대농장이라는 권문세족의 인적·물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필요한 민심을 얻고자 함을 몰랐을 리 없다.

정몽주는 고려를 되살리려는 온건파 사대부들을 대변하면서 실권자 이성계의 균형추가 되고자 했다.

역성혁명 세력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고려왕조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1388년 10월 문하시중 이색과 제자 이숭인이 명나라에 들어가 창왕의 친조(親朝)를 청했는데,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서장관(사신)으로 동행했다.

황제는 창왕의 친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는 이방원을 주목했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2회

고려의 새 실권자 이성계가 친아들을 보낸 만큼 특별한 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다음 해에 나왔다.

“어린 왕(창왕)에게 오지 말라고 전하라.

고려는 왕씨 임금(공민왕)이 시해되어 후사가 끊기는 바람에 다른 성이 왕씨를 가장하고 임금 노릇을 하니 삼한에서 대대로 지켜온 좋은 법이 아니다.”

<고려사. 세가 ‘창왕 1년’>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1389년 9월,

윤승순·권근이 명나라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아왔는데,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376년 신돈의 비첩 반야가 태후궁에 잠입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한 이래,

저자에는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 저자의 풍문이 명 태조 주원장의 성지로 기정사실이 돼버렸다.

황제로부터 명분을 얻었으니

이제 임금을 갈아치울 차례다.

이성계는 11월에 흥국사에서 회동을 가졌다.

판삼사사 심덕부, 문하찬성사 정몽주와 지용기, 정당문학 설장수, 문하평리 성석린,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혜부사 박위, 밀직부사 정도전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9인 회동에서

고려의 운명을 바꿀 결의가 나왔다.

“마땅히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廢假立眞).

이에 신종의 7대손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고려사.세가 ‘공양왕 총서’>

이성계 등은 그 길로 군사를 몰고 정비 안씨(공민왕비)의 궁으로 가서 교서를 받아냈다.

그리하여 고려 제34대 공양왕이 즉위하고

가짜로 몰린 우와 창은 서인으로 강등돼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정통성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말았다.

거꾸로 보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정몽주는 왕을 옹립해 공신의 영예를 누렸지만,

내적인 갈등에 빠졌을 것이다.

고려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고,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포은(정몽주)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역성혁명 세력이 연거푸 벌인 무리한 옥사(獄事)였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우왕이 죽기 전에 일으킨 도발이나 명나라에서 일어난 실체가 불분명한 고변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고려에 충성하는 대신과 장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역성혁명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음모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3회

1389년 11월,

‘김저의 옥사’는 생전에 여흥(여주)에 머물던 우왕이 발단이었다.

최영의 친족 김저와 정득후가 우왕의 사주를 받고 이성계를 습격했다.

그러나 습격은 실패했고,

김저는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옥리들은 공모자를 실토하라면서 대신과 장수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모진 고문 끝에 김저는 변안열, 우현보, 우홍수, 우인열, 왕안덕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고 했다는 공술을 토해냈다.

역성혁명 세력은

그 진술을 공양왕 옹립 직후에 썼다.

공양왕이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해 이색을 판문하부사, 변안열을 영삼사사에 임명하자

대간(臺諫)이 들고 일어났다.

감찰을 담당하는 사헌부,

간쟁에 종사하는 낭사를 이성계 일파가 장악한 것이다.

김저의 공술에 이름을 올린 변안열은 집중 표적이 되었다.

이성계에 필적하는 무장인 만큼 반드시 제거하려고 했다.

결국 그는 한양으로 유배를 갔다가

1390년 1월 국문을 받지 않고 처형됐다.

고문당하면 또 다른 ‘충신’들이 연루될까 봐 왕이 한양 부윤에게 첩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측근들은 관련자를 고문하고 김저의 공술을 보태 정적들을 죄인 명부에 올렸다.

우왕과 창왕을 옹립한 이색,

창왕의 외조부 이림,

전 시중 우현보는 물론 그 자식들인 이종학,

이귀생, 우홍수까지 ‘신우·신창의 당’이라고 해 국문을 받고 유배길에 올랐다.

이숭인, 권근 등 이색 문하 또한 죄를 뒤집어썼다.

왜구 토벌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들인 정지, 왕안덕, 우인열 등도 화를 입었다.

역성혁명 세력은 장차 이성계에게 대항할 가능성이 있는 무장들을 어떻게든 옥사에 엮으려고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자백이나 증거가 없어 죽이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얼마 후 가중처벌할 수 있는 후속 옥사가 터졌다.

1390년 5월,

사신 조반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라는 자가 명 태조 주원장에게 고변했는데,

이성계와 공양왕이 모의해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이와 이초는 지위를 사칭한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유배지에 있는 재상들이 은밀히 자신들을 파견해 고변하게 했다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털어놓았다.

이성계 일파가 이미 유배 보낸 죄인들과 함께 여러 중신과 장수들의 이름이 윤이의 글에 적혀 있었다.

은밀히 고변한다면서 마치 보란 듯이 면면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파 대간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다.

윤이의 글에 이름을 올린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4회

그러나 공양왕이 거부했다.

실체가 불분명하고 저의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때 연루자 가운데 김종연이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전해에 박위와 함께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한 장수였다.

켕기는 게 있으니 달아났을 것이라며 대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났다.

중신과 장수 수십 명이 순군옥으로 끌려갔다.

각지에 흩어진 유배 죄인들은 청주옥으로 모았다. 가혹한 국문이 예고됐다.

감옥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고문으로 죽어 나가자 포은 정몽주가 나섰다.

1390년 7월 정몽주는

“(공양왕의 선조) 4대를 추봉하는 기회에 이색 등 죄인들을 사면하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임금에게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대간이 반발하자

그는 “윤이와 이초의 옥사는 죄가 명백하지 않고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들이 선을 넘었다고 봤다.

역성혁명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죄 없는 사람들을 무고하는 것은 절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은 정몽주는 신망이 두터운 명신이다.

그가 움직이자 조정에 ‘정몽주당’이 형성돼 역성혁명 세력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그해 11월 ,

도망자 김종연의 정변 음모에 연루됐다며 공신 심덕부, 지용기, 박위를 숙청했다.

그들의 군권을 빼앗은 이성계는 1

391년 2월 군제를 삼군도총제부로 바꾸고 삼군도총제사(이성계), 좌군총제사(조준), 우군총제사(정도전), 중군총제사(배극렴) 등 수뇌부를 자신과 측근들로 채웠다.

역성혁명 세력이 고려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포은 정몽주는 기죽지 않았다.

공양왕의 신임을 얻어 수시중에 오른 정몽주는 조정을 일신하고 대간을 물갈이했다.

정몽주 대간의 화력은 이성계 군부의 창칼에 못지않았다.

포은 정몽주는 명백한 죄가 없는데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숙청당한 인사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해 문서로 경고했다.

“지금 이후로 이 사람들의 죄를 다시 논하는 자는 무고(誣告) 죄로 다스릴 것이다.”

<고려사 열전 ‘정몽주’>

신망으로 대세 이뤘으나 이방원에 살해된 정몽주

<고려사>와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수하들이 정몽주의 집 근처에서 그를 살해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 지배층은 정몽주의 충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가 선죽교에서 살해된 것으로 바꿨다.

공양왕은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됐다며 정몽주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내렸다.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크다는 것이다.

포은 정몽주는 명나라 법전 <대명률(大明律)>과 원나라 법규집 <지정조격>, 그리고 고려의 법령을 참고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올렸다.

정치적 음모를 꾸며 옥사와 무고를 남발하지 못하도록 법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정몽주의 공명정대한 처사에 감복해 사대부들이 모여들었다.

세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신우·신창의 당’이라고 낙인 찍혔던 구세력도 포은에게 동조해 힘을 실었다.

물론 공양왕도 뒷배가 돼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5회

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를 수호하려는 세력이 모두 결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1392년,

오히려 정몽주 대세론이 역성혁명 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다.

조준과 정도전은 탄핵을 받아 귀양길에 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성계가 3월에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정몽주를 따르던 좌사의 김진양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유배 중인 조준·정도전 등을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왕의 재가만 얻어낸다면 이성계의 좌우 날개를 꺾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양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틈을 비집고 이방원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몸을 다친 아버지를 빨리 집으로 모시고, 사람을 보내 측근들의 극형을 막도록 했다.

그리고 위급한 집안을 구하기 위해 포은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성계의 병문안을 다녀가자 이방원은 수하들을 포은이 사는 동리로 보냈다.

조영규, 고여, 이부 등이 동리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오는 정몽주를 마침내 격살했다.

마지막 버팀목이 쓰러지자 고려는 거짓말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 후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거머쥔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인생역전~~~

1405년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건국에 공헌한 정도전은 역적으로 전락하고,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정몽주는 충절의 표상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몽주의 절의파 학통은 조선 전기 사림(士林)으로 이어졌다.

포은의 문묘 종사는 선비들의 숙원이었다.

성인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유자(儒者)로서 최고의 영예다. 그 숙원은 중종 12년(1517)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의해 이뤄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숭모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포은이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곳으로 선죽교(善竹橋)가 떠오른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데 <고려사>와 <태조실록>을 살펴보면 이방원의 수하들이 포은의 집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살해했다고 기록돼 있다.

1485년 개성을 유람한 남효온도 현지 노인의 증언을 빌려 최후의 장소가 포은의 옛집이 있는 태묘동 입구라고 했다

<추강집. ‘송경록’>

어째서 선죽교로 바뀌었을까?

‘선죽교’와 ‘단심가’로 만고의 충신 현창

선죽교는 고려의 도읍 개성을 대표하는 다리다.

고려의 운명을 짊어진 신하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그 피를 빨아들여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자라는, 그래서 정몽주의 최후를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무대 장치다.

전란을 겪고 나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해야 했던 조선 지배층은 만고의 충신 정몽주를 현창했고, 그의 충절을 부각하기 위해 선죽교를 이야기 무대로 활용했다.

‘단심가’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정말로 포은 정몽주가 부른 노래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극적 효과를 높여주는 주제가에 가깝다.

조선시대에 극적으로 현창된 이야기를 걷어내고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또 다른 ‘단심(丹心)’이 돋보인다.

정몽주의 절의는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국한되지 않는다.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등을 돌린 계기는 역성혁명 세력이 터무니없는 옥사를 일으키고 무고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무고(誣告)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짓은 심성을 더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행이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거짓에 현혹되기 쉬운 오늘날, 우리가 포은 정몽주의 절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는 거짓에 맞서 도리를 지키다가 의로운 최후를 맞았다.

출처: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6회

“子房乃用漢高

장자방이 도리어 한 고조를 쓴 것”

정도전이 송현방(남은 대감의 안가)에서 술을 마사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은 것은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의 일이다.

정도전은

「사병철폐」로 이방원을 막다른 코너로 몰아 넣다가

‘왕자의 난’으로 오히려

역습을 당한 것이다.

이 날이 정도전의 제삿날이 된 것이다.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태조실록에 기록된 정도전 부음 기사에 정도전의 죽음을 설명해 주는 구절이 나온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도리어 한 고조를 쓴 것이다.

( 不是漢高用

子房 子房乃用漢高)」

<태조실록 1398.8.26. 태조7년 정도전 졸기>

언젠가 정도전이 취중에 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장자방은 유방을 주군으로 택하고

한나라 창업을 배후 조정한 인물로서

여기서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요

한고조는 이성계로 볼 수 있다.

중국의 한나라 건국에 빗대 본인의 통치관을 드러낸 것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소신은 반대파에게 처형의 명분이 되었다.

왕권을 옹호하는 측에선 역심의 근거로 쓰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악연은

1392년 이방원 ‘정몽주 암살사건’‘으로 올라간다.

고려를 허물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역성혁명파」와

개혁은 하되 고려 왕조를 유지 하려는 「온건개혁파」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방원이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격살 한 것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돌출행동이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정몽주와의 사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이 그린 그림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온전한 ’사대부의 나라‘를 설계했다.

그런데 정몽주의 죽음으로 반대파 사대부가 이탈해 버리면 개국을 하더라도 원하는그림이 나오질 않는다.

'사대부'라고 다 똑 같은 '사대부'가 아니다.

사대부(士大夫)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배운 사족(士族)집단을 말하는데

학문적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출신 성분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은 다양했다.

예컨대

이색과 조준은 넓은 토지를 보유하고 고위직을 배출해온 전형적인 권문세족이었던 반면

정도전. 하륜 등은 지방의 중소 지주, 향리 집안이었다.

또 이방원은 독자적인 땅과 백성을 거느린 변방의 군벌이었다.

이들이 정치적 소신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며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의 양자 구도를 이룬 것이다.

온건개혁파는 전통적인 지배 세력을 대신해 역성혁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특히

정도전의 오랜 벗이자 사대부의 지도자였던 정몽주는 역성혁명파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그는 온화한 인품과 깊은 학식, 그리고 검증된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말 백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7회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사고로 부상을 입자

정몽주는 공양왕의 재가를 받아 정도전등 역성혁명파 일당을 잡아들였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방원의 움직임을 계산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이러한 낌새를 눈치채고 이성계 신병을 가마에 태워 개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자객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마지막 버팀목을 잃은 고려는 그 해 7월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기고 문을 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 섰지만 사대부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임금이 할 일은 한 사람의 재상을 결정하는 것 뿐”」

온건개혁파 사대부들은 조선을 위해 일 해달라는

정도전의 요청을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72명의 선비가 두문동(현재 횡해도 개풍군)에 들어가 평생 나오지 않았다는 설화가

전할 만큼 철저하게 조선에 등을 돌렸다.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두문불출 杜門不出‘ 한 것이다,

’부조현(不朝峴)‘과 ’갓걸재‘등의 지명에 얽힌 전설도 같은 맥락이다.

수많은 고려 유신들이 새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산중으로 숨어 버렸다.

정도전은 이 난국 타개의 비책을 제시했다.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 뿐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라는 기구를 통해 국정 현안을 결정했다,

실권은 사대부들이 쥐고 임금은 그냥 이를 재가할 따름이었다.

<태조실록>을 보면

이 무렵 왕은 신하들에게 어서 결정사항을 고하라고 할 뿐 논의하거니 제동을 거는 대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은

당대의 통치 관념에 비춰 봤을 때 정말 파격적인 면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재상정치」다.

임금은 재상을 결정. 임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재상 중심의 중안집권제( 입헌군주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할 일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의하여 결정하는데 있다.

재상은 위로는 왕을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린다.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 결 같지 않다.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 중용)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 출처 : 정도전의 朝鮮經國典>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9회

「” 천하가 모두 임금에게 간쟁하다“」

그렇다면 재상의 자리에는 어떤 사람을 앉혀야 할까?

정도전은 사대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를 선발해서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가 구상한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제는

임금 한 사람의 비범함에 기대지 않고 다수의 재능으로 짜인 통치체제 였다.

단 , 이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로란

재상이 사대부의 뜻을 반영하는 말길이자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4년( 1395년)

정도전은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편집하고 수정해 임금에게 올렸다.

이 책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관직을 운용하는 지침이 담겨 있었다.

그는 특히 간관(諫官) 즉,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벼슬에 대해 역사와 경전을 두루 인용하면서

정성을 들여 설명을 했다.

성리학자로서 언로에 대한 사상을 드러 낸 것이다,

「 ”옛적에는 간하는 데 정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언로가 더욱 넓었다.

삼대(三代: 중국의 하. 은 주 나라))의 경우,

위로는 백관(百官: 벼슬아치)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공(百工:장인)에 이르기 까지

간하지 않는자가 없었고 만약 간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벌을 주었다,

이는 천하가 모두 간쟁(諫諍) 인 것이다,

그러다가 후세에 간관의 직(정원)을 둠으로써 오히혀 언로가 막히었다.

간관이 된자는 간 할 수 있으나 간관이 아닌 자는 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 경제문감 經濟文鑑. 간관諫官>

유가(儒家)의 성현들은

요순과 삼대(三代) 등 상고의 정치를 되 살려야 할 모범으로 보았다.

공자부터 주자 까지 한결같은 복고주의 전통이다.

언로 또한 마찬가지다. 벼슬아치부터 장인까지 누구든 임금을 비판하는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유가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언로였다.

정도전은

이를 아쉬워 하면서도 간관의 책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언로를 활성화 시키려고 했다.

그는 나라의 큰 청사진부터 백성의 소소한 이해관계 까지 직무에 얽메이지 않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재상과 간관」뿐이라고 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0회

간관은 바록 지위는 낮지만

그 책무는 재상과 동등하다고 하였다.

「”천자가 ‘안된다’고 하더라도

재상은 ‘됩니다’할 수 있으며

천자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상은 ‘그롷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니

묘당(廟堂:조정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천자와 더불어 가부(可否)를 상의 할 수 있는 자가 재상이다.

천자가 ‘옳다’고 하러라도

간관은 ‘옳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며

천자가 ‘꼭 해야겠다’고 하더라도

간관은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할 수 있으니

전폐(殿陛: 궁궐 계단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다불어 시비를 다 툴 수 있는 자가 간관이다“」

<정도전 경제문감 經濟文鑑. 간관諫官>

이런 간관은 재상을 견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상정치가 야기 할 수 있는 폐단을

언로로써 막고자 한 것이다,

이는 임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옛날 어느 간관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짐은 그대가 재상의 뜻을 그대로 봉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신은 재상의 뜻을 그대로 봉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폐하의 뜻 또 한 그대로 봉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

하였더니

“장하다, 그말이여 !!

간관들이 모두 사람만 같다면 기강이 떨쳐지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정도전 경제문감 經濟文鑑. 간관諫官>

간관은 항상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따라 붙으며 ‘삐딱선’을 타야 한다고 정도전은 생각했다.

그래야 임금이 사사로운 마음을 목을 틈도, 불의힌 무리가 임금을 현혹할 기회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정도전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재상이 앞장서고 언로가 뒷받침하는 민본의 도덕정치가 실행에 옮겨 졌을까?

하지만 장자방과는 달리 정도전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장자방은 한나라 건국 후 속세를 떨치고 적송자(赤松子: 중국위 전설적인 신선)를 따라

장가계로 숨어 버렸다.

반면에 정도전은

정치적 이상을 몸소 실험하려 했고 그 중심에 섰으며 결국은 표적의 되고 만 것이다

군왕 중심의 중앙집궘제를 추구한 이방원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삼봉 정도전이 죽은 후 조선은

사대부의 언로를 열고 도덕의 나라를 완성하기 까지 근 18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출처: 발칙한 조선 일물 실록( 김성주)글 옮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1회

“대간에게 과실이 있다면 어떻게 죄를 줄 건인가?”

-臺諫筍有過失罪之如何-

태종 8년(1408년) 11월 9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정평이 난 권근이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왕이 내린 어명을 받들어

대간(임금이나 어른,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크게 간함)의 임무에 관한 규칙을 중국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아뢰었다.

‘대간’은 감찰을 수행하는 대관과 간쟁을 담당하는 간관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그들은 조정의 기강을 확립하고 임금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나라의 공식적인 언로를 책임졌다.

간단히 보면 임금께 직언을 직업으로 하는 직책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었다.

중국 주나라에 기원을 둔 대간제도는 한나라 대 제도로 학립된 뒤 송나라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우리는 고려시대부터 대간을 두었는데

대관은 어사대(御史臺)에 속했고

간관은 낭사(郎舍:고려시대 정삼품 이하 벼슬아치들이 근무하던 곳)에서 활동을 했다.

조선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대간의 본산이었지만

권근이 대간의 임무에 관해 고할 무렵인 태종 때에는 아직 그들이 미완성 상태였다.

권근의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의미심장한 전교를 내린다.

「“나의 뜻은 이게 아니다.

대간에게 과실이 있다면 어떻게 죄를 줄 것인가. 하는 항목이 예 법에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예조와 권근으로 하여금 송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그 명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말한 바가 대단히 좋으니 내 항상 두고 법칙으로 삼고자 한다.”」

<태종실록 8년(1408년)11월9일>

대간의 임무보다 처벌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태종은 나라의 비판적인 언로를 통제할 근거를 중국의 예제도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군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추구한 임금이다.

허지만 대사헌(사헌부 수장)을 지낸 바 있는 권근은 간곡하게 임금을 만류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과감하게 말하여 숨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굳센 절개요,

너그러이 용납하여 어기지 않는 것은 인군의 두터운 덕입니다.

그러므로 언로의 책무를 가진자는 그 말이 비록 과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지나친 말이라 하여 죄를 주면 내일 곧은 말을 드리려는 자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진언을 하지 못할 터이니 이는 언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태종실록 8년(1408년). 11월9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2회

그러면서 권근은 태종에게 읽어 보라며 책을 한 권 올렸다.

정도전의 <경제문감經濟文鑑>이었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 대간과 간관의 임무를 밝히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책으로 권근 자신도 교정에 관여한 바 있었다.

정도전을 죽인 장본인에게 <결제문감>을 들이민 것은 언로에 대한 권근의 소신이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언로를 넓혀 사대부의 절개를 장려하는 것은 성리학의 가르침이자 조선의 건국정신이었다.

성리학자인 권근은 이 원칙에 충실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임금과 절개를 지키려는 신하들은 언로를 둘러싸고 그렇게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군왕중심의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태종 이방원의 의지는 완고하고 집요했다.

「“영웅호걸이란 하나같이 속이 시커먼 자들”」

옛날의 영웅호걸이란 하나같이 낯가죽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먼 자들 뿐이로군.

<이종오 후흑학>

청나라 말엽 지식인 이종오는 중국의 역사와 고전을 연구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신해혁명이 시작된 1911년, 그는 저서 <후흑학厚黑學:마음이 더러운 자의 처세학)>을 내놓는다.

말 그대로 낯가죽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먼 자가 출세한다는 내용의 이 책은 일약 당대의 베스트 셀러로 떠 올랐다.

반청혁명 조직에서 활동한 이종오는 봉건사회를 통렬히 풍자할 의도로 썼겠지만 동시대 이들에겐 처세서로 읽히지 않았을까

중국역사에서 이종오가 ‘후흑’의 대명사로 거론한 인물은 한 고조 유방이다.

항우가 그의 부친을 인질로 잡은 다음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유방은 오히려 태연하게 그 국 한사발을 달라고 대꾸했다.

또한 유방은 그토록 원하던 천하를 얻고 난 다음 신명을 바쳐 공헌한 충신 한신과 팽월을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강동의 부형들을 뵐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삶을 마감한 항우는 <후흑학>의 관점에서 보면 제왕의 자질이 떨어진다(?) 하겠다.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임금 중 가장 낯가죽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먼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태종 이방원이 아닐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후흑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했으며 태조7년(1398)에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배다른 동생인 세자 방석과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고 부왕 이성계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종오는 제왕의 조건으로 후흑을 제시하면서 반드시 ‘인의도덕’을 탈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악업을 어떤 식으로든 포장하라는 것이다.

권력자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인의도덕을 가장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위엄이라고 유지해야 한다.

태종 4년(1404)2월, 왕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시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몸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지만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테종은 좌우를 둘러보며 사관史官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관은 역사 기록인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곧 자신의 평판을 위해 역사까지 왜곡하려 한 것이다.

사관은 이를 숨기려 했다는 태종의 언행까지 기록했다.

이러한 태도는 한 때 혁명동지이자 아버지의 부인인 신덕왕후를 격하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3회

태종 16년(1416)8월 어느날,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예법을 논하였다.

이날의 토론 주제는 다름 아닌 계모(繼母)였다.

먼저 태종이 운을 뗏다.

“계모란 무엇을 말하는가”

유정현이 이에 답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계승하는 여인이 계모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정릉(신덕왕후 강씨)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

왕의 의중을 헤아린 유정현은

“그 때에 신의왕후(방원의 친어머니)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는 답이 나오자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릉을 깎아 내렸다.

”정릉은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랐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이 애중(愛重)하신 의리를 생각하여 제사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

<태종실록 16년(1416) 8.21>

‘정릉貞陵’은 부왕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이름이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이방원은 자신이 신덕왕후에 대해 은의 즉,

은혜와 의리가 없다고 애써 강조한 한 것이다.

왕자의 난은 이방원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일단 권력을 손에 쥐기는 햇지만 도덕적 지탄 또한 거셌다.

그러잖아도 건국 초라 나라가 불안정 한데 권력자가 명분을 잃었으니 혼란이 가중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때 이방원이 수습책으로 꺼내든 것이 신덕왕후에게 책임을 전가 한 것이었다.

”정릉은 내게 조금도 은의가 없었다“

신덕왕후는 고려에서 재상을 지낸 강윤성의 딸로 태조 이성계의 경처였다,

고향에 조강지처 한씨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이성계가 강씨를 새 아내로 맞이 한 것은 그녀의 집안 배경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변방의 무장 출신이 고려의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면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강씨 집안은 개경에서도 내노라하는 권문세족이었다.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서 후원자가 되어줄 가문과 일종의 혼인 동맹을 맺은 샘이다.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혼인동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지방의 호족세력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혼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고려후기에 지방의 세력가들이 향처 외에 경처를 따로 얻은 것과 같은 취지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유교에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관행적으로 이루어 졌지만

도덕의 나라 조선은 다르다.

태종은 그 틈을 파고 들어 신덕왕후

강씨에게 ‘국모’ 자격을 빼앗는다.

그래야만 왕자의 난을 자격없는 여인이 부당한 방법으로 세자책봉에 관여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로 몰아갈 수 있었다.

태종 16년(1416년)에 벌어진 예법 논의에는

이런 정략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방원은 유교 예법을 소급적용해 신덕왕후 강씨를 격하시켜 잃어버린 도덕적 명분을 되찾고자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4회

그러나 <태종살록>에 실린 태종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선 태종 이방원과 과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 은의가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둘 사이에는 은의를 따질 일이 적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까지 신덕왕후가 기여한 공로는 상당히 컸다.

그녀의 집안은 변방의 무장 이성계가 중앙 정계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맺도록 뒷받침 돕고 위화도 회군 이후 그가 실권을 장악할 수 있게 뒷받침 했다.

신덕왕후 본인도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섰다.

다음은 후일 먼저 세상을 뜬 왕후(강씨)를 추모하고자 절을 지으면서 태조가 권근을 불러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임금이 되기 전까지 신덕왕후(경처 강씨)의 내조가 실로 많았다. 여러 가지 중요한 정무를 처리할 때도 충고하고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제 뜻밖에 세상을 떠나니 경계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을 잃은 것 같아서 매우 슬프다.“」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흥천사조성기>

”어진 정승을 잃은 것 같다“는

태조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덕왕후(강씨)는 동지이자 참모로서

조선건국에 동참했다.

심지어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사위인 이제(李濟)가 모의에 가담했으며

또한 선죽교의 비극을 알고 이성계가 불같이 화를 내자 이방원은 강씨에게 변명을 해 달라고 청하는데,

이는 강씨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일 태종은 신덕왕후에 대해 은의가 없다고 했지만

역성혁명 과정만 놓고 본다면 생모 한씨를 능가하는 은의를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성혁명 과정에서 동지적 관계였던 강씨와 이방원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는

조선 개국 작후 이루어진 세자책봉 문제였다.

당시 태조의 맏아들인 방우는 역성혁명에 반대해 은거한 상황이었다.

이방원의 적장자가 왕권을 이어 받지 못 할 경우 역성혁명에 공이 큰 왕자가 대신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그의 논리대로라면 강씨가 낳은 아들들에게 우선순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하고 양위를 성사시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성계가 이미 실권을 잡은 다음의 일이다.

신덕왕후와 강씨 집안은 ‘촌뜨기’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에게 날개를 달아 줬다는 점에서 그 공을 따지자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신덕왕후는 태조 5년(1396년)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세자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격하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도성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녀가 묻힌 정릉을 파헤쳐 옮기고 능 주변의 12개의 석물을 실어다 청계천 광통교 돌다리를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그 석각 흔적이 역력하다

<태조실록>에 나오는 대화에서

예법 운운하며 제사를 생모와 다름없이 올린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이엇다.

설상은 왕비 제레에서 신덕왕후를 제외시키고 후궁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물론 그것은 앞서 밝힌대로 개인적인 화풀이만이 아닌 고도의 계산이 깔린 정치행위였다.

신덕왕후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조선 현종 대의 일이다.

그녀의 신원(伸冤: 개인자료) 앞장선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그는 태종의 신하들이 예법을 잘 몰라 순리를 거슬렀다고 비판했다.

선대 임금의 잘못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하니 죄를 신하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결국 신덕왕후는 현종 10년(1609년),

국모의 자리로 돌아왔다.

신의 왕후 한씨(이방원의 생모)는 조선 건국전에 죽었으므로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 최초의 국모라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5회

“물가에서 탄식한들 무슨 소용인가?”

초택성음(楚澤醒吟)이아 녀는 됴ㅎ녀(그대는 좋은가)

녹문장왕(鹿門長往)이아 녀는 됴ㅎ녀 (그대는 좋은가)

명랑상우(明朗相遇) 하청성대(河淸聖代)

총마회집(驄馬會集)이아 나 됴ㅎ녀(나는 좋구나)

<권근 상대별곡>

<상대별곡>은 권근(1352-1409)이 경기체가 형식으로 지은 노래다. 여기서 상대(霜臺)는 사헌부를 말한다.

사헌부는 서릿발 같은 규율로 나라의 기강을 잡는 조선의 감찰( 검찰.감사원)기관이다.

권근이 정종 2년(1399년)에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맡았으니 ,상대별곡.도 이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대별곡>은 궁중 연회에 쓰인 노래가사다.

여기에는 고려 유생들을 향한 권근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도읍 한양의 활기찬 모습으로 시작하는 <상대별곡>은

사헌부 관원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며 새 나라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린다.

마지막에 이르러 권근은 「굴원과 맹호연」의 고사를 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속내를 내비친다.

‘초택성음’은

초나라 대부 굴원(屈原)이

상수(湘水)의 물가에서 탄식한 일화를 가르킨다.

‘녹문장왕’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세상에 뜻이 없어 녹문산에 은거한 옛일을 이른다.

초택성음과 녹문장왕은

고려 유신들의 행태를 비유한다.

권근은

굴원과 맹호연에 빗대어 고려 유신들의 저의를 치켜 세우면서도

고려는 이미 망했는데 물가에서 탄식하고 산중에 은거한 들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어서 지금 조선은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만나(명랑상우.明朗相遇) 태평성대를 이루고 (하청성대 河淸聖代)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으니(총마회집 驄馬會集)

그대들도 함께하자고 권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5회(24.1.26)

“대간에게 과실이 있다면 어떻게 죄를 줄건인가?”

-臺諫筍有過失罪之如何-

태종 8년(1408년) 11월 9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정평이 난 권근이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왕이 내린 어명을 받들어 대간(임금이나 어른,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크게 간함)의 임무에 관한 규칙을 중국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아뢰었다.

‘대간’은 감찰을 수행하는 대관과 간쟁을 담당하는 간관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그들은 조정의 기강을 확립하고 임금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나라의 공식적인 언로를 책임졌다.

간단히 보면 임금께 직언을 직업으로 하는 직책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었다.

중국 주나라에 기원을 둔 대간제도는 한나라 대 제도로 학립된 뒤 송나라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우리는 고려시대부터 대간을 두었는데 대간은 어사대(御史臺)에 속했고 간관은 낭사(郎舍:고려시대 정삼품 이하 벼슬아치들이 근무하던 곳)에서 활동을 했다.

조선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대간의 본산이었지만 권근이 대간의 임무에 관해 고할 무렵인 태종 때에는 아직 그들이 미완성 상태였다.

권근의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의미심장한 전교를 내린다.

「“나의 뜻은 이게 아니다.

대간에게 과실이 있다면 어떻게 죄를 줄 것인가. 하는 항목이 예 법에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예조와 권근으로 하여금 송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그 명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말한 바가 대단히 좋으니 내 항상 두고 법칙으로 삼고자 한다.”」

<태종실록 8년(1408년)11월9일>

대간의 임무보다 처벌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태종은 나라의 비판적인 언로를 통제할 근거를 중국의 예제도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군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추구한 임금이다.

허지만 대사헌(사헌부 수장)을 지낸 바 잇는 권근은 간곡하게 임금을 만류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과감하게 말하여 숨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굳센 절개요,

너그러이 용납하여 어기지 않는 것은 인군의 두터운 덕입니다.

그러므로 언로의 책무를 가진자는 그 말이 비록 과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지나친 말이라 하여 죄를 주면 내일 곧은 말을 드리려는 자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진언을 하지 못할 터이니 이는 언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태종실록 8년(1408년). 11월9일>

그러면서 권근은 태종에게 참고하라며 책을 한 권 올렸다.

정도전의 <경제문감經濟文鑑>이었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 대간과 간관의 임무를 밝히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책으로 권근도 교정에 관여한 바 있었다.

정도전을 죽인 장본인에게 정도전이 지은 <경제문감>을 들이민 것은 언로에 대한 권근의 소신이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언로를 넓혀 사대부의 절개를 장려하는 것은 성리학의 가르침이자 조선의 건국정신이었다.성리학자인 권근은 이 원칙에 충실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임금과 절개를 지키려는 신하들은 언로를 둘러싸고 그렇게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군왕중심의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태종 이방원의 의지는 완고하고 집요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6회(1.29)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가운데에 하륜처럼 새 질서 수립에 깊숙이 관여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길재와 같이 협력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후진 양성에 힘쓴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근도 처음에는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지만

뒤늦게 출사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를 한다.

이와같은

고려유신들의 엇갈린 행보는 조선 건국 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신권(臣權)의 정통성을 놓고 자웅을 겨루며 새 나라의 면모를 한층 다양하고 풍성하개 만든다.

고려유신 하륜과 길재, 그리고 권근의 족적은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향방을 헤아리는 나침반이 된다.

“탁한 물을 거르면 구슬이 밝아진다”

하륜(1347-1416)은

태종 이방원의 책사이자 킹메이커로 널리 알려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일등공신이 된 후 신하로서 부귀와 영화를 한껏 누렸다.

이상적인 국가를 꿈꾼 정도전과는 달리 하륜은 진즉부터 권력의 현실적인 향배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 말 이색에게 가르침을 받은 신진 사대부 이면서 동시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서 권문 세족의 일원이었던 하륜은 어찌 보면 ‘경계인’이라 할 만하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는 온건개혁의 노선을 걸었다.

하륜이 정도전과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수난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하륜은 고려 조정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

처음에는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고

두 번째는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추방당했도

세 번째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직후 이색계열로 분류되어 이성계의 눈 밖에 났다.

그는 급진 개혁이나 정책.사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반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시련을 묵묵히 감수한 인물이다.

온건했지만 흐릿하지 않았고 집요했다.

하륜의 온건개혁 노선의 중심에는 왕권이 있었다. 그가 반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하로서 왕권을 위협하는 자들이었다.

신돈.최영. 이성계 등은 무력해진 고려 왕권을 대신해 백성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하륜의 눈에 그들은 그대로 두면 고려가 무너질 수도 있어 보였다.

하륜은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이인임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인임도 권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고려라는 틀 안에서였고 왕권 그 자체는 신성 불가침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7회

그런 하륜이 조선 개국에 동참 한 것은 의와가 아닐 수 없다.

하륜은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대해 가타 부타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지방관으로서

묵묵히 소임을 이어갔다.

그는 이때 부역제도를 개편해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 기여를 했다.

하륜은 왕권이 제대로 서려면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본 듯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는 학설이<東門選 >에 실려 있다.

“구슬은 맑은 물속에 있으면 밝고 탁한 물속에 있으면 흐리디.

탁한 물은 걸러서 맑게하면 원래 맑은 뭏속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서거정 외 東文選>

여기서 구슬은 왕권을, 물은 정치를 빗대었다.

구슬이 빛을 발하려면 물이 맑아야 한다. 탁한 물을 거르는 작업이 바로 정치개혁이다.

고려 말기의 난세를 지켜보던

하륜의 심경은 복잡(?) 했을 것이다.

개혁이 절실한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역성혁명 세력은 득세를 했다.

현실적인 정치가였던 하륜은 조선의 개국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 개혁은 추진하되 고려 왕권을 바탕으로 !

나라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하륜의 소신은 꺽이지 않았다.

그러하니 재상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이 그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을 것은 당연하다

세상천지에 임금이 백성의 도구일 뿐이고 나라를 재상이 다르려야 한다니....

신하의 권력이 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나라가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이것은 같은 조정에 함께 몸을 담을 수 없는 패악(悖惡)이었다.

이 때 하륜이 시야에 들어오는 인물이 바로 왕자 이방원이었다.

권력의 향배에 밝은 하륜은 정도전에게 압박을 받고 있던 이방원에게 다가섰고

그는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며 방원을 설득했다.

결국 이방원은 저 살길을 찾아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마침내 군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실현했다.

이 과정에서 하륜은 이조.병조 등 여섯 관부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육조(六曹)직제를 도입, 사병제도의 혁파, 호패법 시행등을 입안하여 자신의 오랜 소신을 펼치게 된다.

그 후 조선은 왕권 우위의 나라가 되었다,

사대부의 목소리가 움츠러들며 언로도 위축되었다.

정도전의 재상중심의 중앙집권제와는 거리가 멀어진 정치체제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륜이 조선의 통치권제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비록 후대 사림에게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비판을 받은 인물이지만

알고보면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관되게 소신을 견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8회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선생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리운 학자에 속한다.

그는 고려 멸망 직전에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조선개국에 동참한 하륜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길재의 학통은 초야에 면면히 이어지다가 후일 조선 정계를 뒤흔들게 된다.

도덕적 의리를 주창하며 조선의 언로를 본격적으로 연 사림(士林)집단이 바로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후배들이다.

길재는 어린 시절에 유학공부를 시작했지만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 한 것은 서른살이 넘어서 였다.

성균관에 부임 하자마자 태학생도와 사대부 자제들이

배움을 청하려 몰려들었는데

이는 당시 길재의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이방원도 길재의 집을 오가며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행보는 엇길리기 시작한다.

길재가 선산으로

귀행 항 것은 1390년,

그이 나이 서른 일곱 살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으로 우왕이 쫓겨나고

창왕이 즉위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직감한다.

길재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 후 여러차례 괸직에 임명되지만 모두 거부를 한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우왕의 부고에 삼년상을 행한 인물이다.

오백년 도음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ㅎ되 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ㅎ노라

<김천택. 청구영언>

영조임금 때의 가인(歌人) 김천택이 채록(採錄)한 이 시조는

길재가 남긴 회고가(懷古歌)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9회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구절은 앞서 소개한 이성계의 한시와 유사하다.

아마도 당시 널리 쓰인 문구.표현이거나 후대로 전해지면서 혼용될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개국했지만

그는 고려 유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길재는 새 왕조로부터 배척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정종 2년( 1400년) 가을, 세자 이방원은 그를 조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길재는

“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이방원의 태도다.

그는 오히려 길재의 절의를 갸륵하게 여기며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왕이 된 후에는 길재에게 풍족한 전원을 하사하여 옮겨 살게 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길재를 후대한 대목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젊은 시절 학업으로 맺어진 인연도 작용했겠지만

그 보다는 정도전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누가 뭐래도 역성혁명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데 그 인물을 자신의 손으로 베었으니 뒷말이 무성할 수 밖에 없다.

태종 이방원은 절의의 표상인 길재를 떠받듦으로써 간접적으로 임금을 갈아치운 정도전을 깎아 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할 것 또한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길재는 새 왕조의 은밀한(?) 후원에 힙입어 학문에 매진 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그를 흠모하는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길재는 성리학적 정통성에 입각해 도(道)를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라는 가르침을 후학들에게 남긴다.

그가 이야기 하는 도(道)는 사실 거창한게 아니고

단순하게 보면 자신처럼 선비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도(道)이다.

그러나 왕권안정과 강화를 추진한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갸륵하지 아니한가

길재의 학풍은

김숙자. 김굉필. 정여창을 거쳐 조광조에 이르며 이른바 ‘조선사림’의 근간이 된다.

그들은 ‘성공한 쿠테타’인 계유정란(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에게 실권을 빼앗은 정변)과 중종반정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관점을 고수하다 결국 화를 입는다.

이렇게 사림의 언로를 탄압한 것이 바로 16세기 조야(朝野)를 휩쓸었던 일명 ’사화(士禍)‘인 것이다.

그리고 보면 조선의 사화도 길재와 같은 고려 유신의 절의와 결코 무관치 않은 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0회

“산중에 은거함이 그대는 좋은가”

양촌 권근은 고려 유신의 또 다른 유형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려말선초(麗末 鮮初)의 명망높은 학자이자 문장가로서 성리학 연구와 대명 외교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길재처럼 고려에 절의를 지키지도 하륜처럼 조선에서 소신을 펼치지도 않았다.

권근은 고려유신을 향한 조선왕조의 회유책에 동원되어며 양반관료 체제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한 권근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고려 조정을 주름잡았다,

왕조 교체기에 권근이 저술한 <입학도설 入學圖說>은

성리학 입문서로서 훗날 이황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또 조선 조정에 출사한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황제의 명으로 시를 비어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문제는 권근이 조선 조정에 출사한 과정이다.

사실 그는 고려 말기에 「윤이와 이초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역성혁명 세력에게 찍힌 상태였다.

이 옥사는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 정벌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허위사실(무고)을 고한 사건이다,

주원장이 노발 대발하자 이성계측은 무고의 장본인인 윤이와 이초는 물론 이색, 이숭인, 우현보, 등 온건 개혁파를 몽땅 옥에 가둬 버렸다.

권근도 이 때 유배를 떠나 충주에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여러모로 궁색한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권근에게 조선왕조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려면 권근과 같은 거물급 지식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용가치가 있었다는 것인데 권근은 그 손을 덥썩 잡아 버린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자 그는 계룡산으로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와 함께 환조(桓祖: 태조의 아버지)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앞서 살펴 본 <상대별곡>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권근은 초야에 묻혀 사는 것보다 새 왕조에 이바지 하는 것이 보람찬 일이라고 선전을 했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식민통치에 부역한 지식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일제와 조선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 고려 유신들 눈에는 권근의 행위가 고려에 대한 변절로 비쳤을 것이다.

후대의 사림(士林)이 권근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아유 때문이다.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고 중국에 까지 문명(文名)을 떨쳤지만 선비로서는 귀감이 되지 못하였다.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거나 고초를 겪은 길재의 후예들이 조선 후기까지 ’기묘인‘이라 불리며 숭상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성리학에서 학문적 업적이나 문명보다 중요한 것은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이다.

만약 절의를 꺽을 수 밖에 없다면 그만한 명분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히 꾸미는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을 하는 것)을

경계하며 후학에게 언행 일치를 당부했지만 삶 속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이들은 그리 많질 않았다.

여말선초(麗末 鮮初)의 지식인들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뒤로는 제 잇속만 챙기는 두 얼굴을 지녔다.

실제로 권근처럼 새 왕조에 출사한 ’관학파官學派‘는 머지않아 조선의 이른바 훈구대신(훈구파勳舊派)으로 변신하며 그들은 탐욕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길재의 후학들인 조선의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하면서 조선역사의 중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1회

조선의 공신(功臣)들....그들의 회맹(會盟)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호족의 힘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개국공신은 3,200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은 나라를 건국할 때는 한편이 되지만,

건국 이후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나라를 세운 왕에 이어서 공신들을 제거하여 왕실과 나라를 지키는 수성(守成)의 군주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려 제4대 임금 광종은 고려왕조의 수성 군주였고,

이를 위해 피의 군주가 되기를 자청한 군주였다.

조선에도 그런 군주가 있었을까?

공신들이 모여 잔치하는 것을 조선시대에는‘ 회맹’이라고 불렀다.

‘공신들이 모여 맹세한다’는 의미다.

조선 초는 이런 공신의 시대였다.

조선 태조(이성계)부터 9대 성종 때 까지 무려 6차례의 공신책봉이 있었다.

조선 건국년의 개국공신(52명)과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한 논공행상인 정사공신(29명).

태종 즉위 초의 좌명공신(46명).

수양대군 때의 정난공신(43명).좌익공신(46명).이시애의 난 진압의 적개공신(45명).

그리고 예종 때의 익대공신(39명).

성종 때의 좌리공신(74명)이 그것이다.

모두 374명이다. 이들은 모두 툭권층이 된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태조(이성계)1년(1392년) 9월,

개경의 왕륜동에서 모여 회맹했다.

참석자중에는 조준.정도전.박포.조영무 등 3등으로 분류된 공신은 물론 조선개국에 공이 잇음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아들이란 이유로 공신책봉에서 탈락한 이방원 등 여러 왕자들과 왕세자 방석도 참석을 했다.

그야말로 신왕조 건국 개척 공신들이 모여 회맹을 한 것이다.

“우리는 감히 황천.후토와 송악.성황 등 모든 신령에게 고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대명을 받았으므로 신 등이 힘을 합쳐 마음을 함께하여 큰 왕업을 이루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회맹은 조선건국이 천명을 받아 정당성이 있음을 설파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2회

서약은 공신 상호간의 단결을 강조했다.

“무릇 동지들은 각각 임금을 성심으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를 다투어 서로 해치지 말며.......(중략)

질병이 있으면 서로 돕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가 구원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자손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반드시 죄를 줄것입니다“ 라고 맹약 한 것이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공신들이란

특권층이기 때문에 달가운 존재가 아님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개국공신들의 회맹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은 그다지 차갑지는 않았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고려 말에 농민들을 도탄에 빠트렸던 권문세력들의 토지를 몰수한 후

좀 더 합리적인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공포하여 농민들의 처지가 한결 나아졌기 때문이다.

과전법에 대해서는 이후 산책하기로 한다

즉 조선의 개국이 농민들의 이익과도 부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회맹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진 않았던 것이다.

회맹 때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제물로 소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신다.

이는 공신들은 피를 나눈 동기(同氣)와 같으니 영원히 변하지 말자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그렇게 뜻대로 되진 않는 것이 그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자손만대에까지 지키자는 회맹은 자손은 커녕 당대 6년도 못가 깨지고 말았다.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 서울에 있는 처) 신덕왕후 강씨 의 2남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성계의 첫 부인이자 향처(=鄕妻: 고향에 있는 처) 신의태왕후 한씨의 아들 방간과 방원 등이<제1차왕자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골육상쟁이자 개국공신 사이의 칼부림 사건이다.

여기서 ‘제1차’라는 말이 상징하듯 조선은 이때부터 거듭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는 곧 공신들의 시대이자 헌정질서 파괴의 시대가 오래 지속됨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개국이외 모든 난은 ‘헌정수호세력’ V ‘헌정파괴세력’ 간의 대결이다.

이방원은 강씨 소생의 2남이 왕세자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그 자신도 한씨 소생 5남에 지나지 않아 왕자의 난을 주도할 명분도 약했다고는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조선 창업의 주도적인 역할과 요동정벌을 주장한 정도전과 남은이 주살된 것은

갓 출범한 조선건국 이념과 거리가 멀어져 불안한 그림자가 비추기 시작했다고 할까?

불안한 그림자는 태조 7년(1398년)에 29명의 정사공신(定社功臣)이 책봉되는 것으로 모습을 들어낸다.

‘사직을 바로 잡았다‘는 공이다.(1차 왕자의난 진압)

태조의 5남 방원.4남 방간 .조영무 등 12명이 1등공신에 책봉되고

방원의 처남 민무구.무질.형제와 이숙번 등이 2등 공신이 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3회

이들의 등장이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것은 비단 정치적인 의미외에도 경제적 측면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공신책봉이란 소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신 후 공신첩(功臣帖) 한 장씩을 나누어가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자급(自給)이 수직 상승하는 것은 물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기게 된다.

개국 1등 공신인 배극렴과 조준은

1,000호의 식읍(=食邑:공신에게 내려주는 하나의 고을로 그 지역의 조세를 받게했음)과

300호의 식실봉(=食實封:공신에게 내려주는 민호로서 조세와 부역 전부를 소유할 수 있음).

220결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

그리고 30구의 노비화 7인의 구사(=丘史:관노비).10인의 파령(=把領: 임금이 공신에게 특별히 딸려준 군사)을 지급 받았다.

이렇게 많은 토지를 「공신전(功臣田)」이라 하는데

「공신전」은 「과전」과 달리 세습이 가능하였다.

태종 2년 사간원에서

“ 경기도 내의 전결(=논,밭 조세) 14만 9000여결 가운데

과전이 8만 4000여결.공신전이 과전의 반에 가까운 3만 1000여결에 입니다” 면서

“공신전도 1/10세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건의를 했다.

이 공신전은 세금도 면세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조선은 또한 2품이상 고위관료 자제에게 과거 없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음서제도를 운영했는데

‘음서제’와 ‘공신전’은 공신들로 하여금 자자손손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된 것이다.

이들은 음서와 공신전을 통해 고려 말 권문세족이 누렸던 특권과 경제적 이권을 자신들도 누리는 제도를 다시 도입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창업의 새나라는 구호에 불과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5남 방원이 정국을 주도하는데 불만을 품은

4남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형재간의 실육전쟁이 일어 난 것이다.

조선2대 임금 정종 2년이다.

<제2차왕자의 난>은 박포가 주실되고 4남 방간이 토산으로 유배된 다음날

방원이 세자로 책봉됐다가 그해 11월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면서 정리된다.

두 번의 난리 끝에 방원이 즉위했으나

또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는 노릇이다.

즉위 즉후 태종 1년. 정월에

좌명공신(= 佐命功臣: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사람을 도운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46명이 공신으로 책봉된다.

이 때에도 막대한 공신전이 지급된다.

9명의 1등 공신 중에는

사촌지간인 이저와 그 아비 이거이,그리고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 등 방원의 인척 4명이 포함돼 있는 것은

제2차 왕자의 난의 성격이 이성계 일가의 왕위계승권 다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4회

조선 3대임금 태종 즉위 4년.

1404년 11월에 개국공신.좌명공신.

모두를 대청관 북쪽에 모여 회맹하게 했다.

태종이 회맹시의 서약문에 미리 서명만 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그 희맹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당시 개국공신들의 회맹과는 분위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권문세족의 특권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창업했는데 창업후 불과 10년 만에 권문세족의 길을 그들이 걷고 있기 때문이다.

공신 회맹을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조선국왕 신(臣;방원)은 개국공신.좌명공신.등을 삼가 거느리고 감히 황천의 상세와 종묘사직과

산천의 여러 신령에게 밝게 고합니다.......(중략)

마땅히 충성과 신의와 성실로 그 마음을 굳게 맺어서 길이 종시(終始)를 보존해야 하는데

하물며 굳게 약속을 지켜 충성하겠다고 귀신에게 맹세하고 피를 나누어 마신 사람들이겠습니까?”

고려 末 보다 더 한 朝鮮의 특권층 功臣들~~

군주국가 조선에서

국왕과 군신관계를 뛰어 넘는 동지적 개념의 공신회맹은 일반 백성들은 물론 여기에 들지 못한 사대부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공신들은 국왕과 동지로서 법위에 군림한 존재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 공신책봉은 없었다.

그런데 또 다시 정변이 일어난다.

모사꾼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의 중추세력 영의정 황보인.좌의정 김종서 등을 주살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들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글쎄 수양이 역모 주모자 인가?,

아니면 김종서가 역모 주모자 인가?

수양대군이 쿠테타를 성공 시켰으니 또 공신 책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란의 주역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 한명회.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된 것이다.

‘정난’이란 나라의 위태로움을 평정했다는 것이다.

신규로 공신을 책봉했다는 것은 막대한 국가재정이 소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양대군은

식읍 1000호,식실봉 500호.전 500결.노비 300구(口). 그리고 별봉으로 해마다 600석의 살과 금 25냔.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는

전지 200결.노비 25구.구사7명. 반당(병졸)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자손의 품계 비례 반영)하고

직계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을 제수(벼슬을 올려준다)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등이 차등있게 배분되었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주석)

‘결’은 농경지를 구분하는 단위다.

정해진 면적이 있긴 한데 그것이 땅의 비옥도에 따라 달라서 정확하게 몇 평방미터인지는 추산하기 어렵다.

대략 세종 때를 기준으로 하면 농토를 6개 등급으로 구분하여 1등전이 약 3,000평, 2등전이 약 3,500여 평, 3등전이 4,200여 평, 4등전이 5,400여 평, 5등전이 약 7,500평, 6등전이 약 12,000평이라고 한다.

통상 1결의 수확량이 300두이고 세금이 수확량의 10%인 30두로 정해져 있었다.

즉, 결은 300두가 생산될 수 있는 넓이의 농경지를 말한다.

조선이 이러했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5회

헌법에 따라 즉위했던 단종이 계속 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생산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숙주와 삼문은 이 아이를 잊지 마라”

세조 2년 (1456년)6월 2일

임금이 편전에 나와 앉자 좌부승지 성삼문(1418~1456)도 입시(入侍: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만남)하였다.

세조는 즉시 군사를 시켜 그를 무릎 꿇렸다.

왕은 이미 김질의 밀고를 받은 터라 성삼문 등이 전날 자신을 죽이고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조가 이를 까져 물으며 김질을 대질시키자 성삼문은 웃으면서 시인했다.

“상왕(문종)의 보령이 한창이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신하된 도리 아니오?

나리는 평소 주공(周公)을 읊으셨지만 주공이 이처럼 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소.“

주공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다.

그는 무 왕에 이어 조카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맡아 국가 질서를 잡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렸다.

분봉제(分封制:천자가 땅을 하사. 제후로 봉함).

종법제(宗法制: 적장자 상속 등 가족제도의 근간이 되는 법)로 대변되는 주나라의 통치체제는

진시왕이 천하를 통일 할 때까지 1천 년 동안 중국을 지배 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주공은 조카의 왕좌를 탐하지 아니하고 평생 신하로서 본분을 다했다.

이에 공자는 그를 흠모해 상고시대 최고의 성인(聖人)으로 추앙한 바 있다.

단종 1년,

세종의 셋째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권신을 죽이고 실권을 잡자 천하의 이목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허수아비기 된 단종은 심촌인 수양대군에게 교지를 내려 주공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 달라고 애원을 했다.

도덕의 나라 조선에서 명분 없는 왕위찬탈은 후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수양대군이 한동안 주공을 입에 담으며 짐짓 겸손을 떤 것은 그래서 였다.

그러나 종친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친위 세력이 결집하자

1455년,

위기의식을 느낀 수양대군은 기어코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양위)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은 비록 계유정난은 어쩌지 못했으나 왕위 찬탈만은 바로 잡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들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 연회장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무신 유응부가 칼을 차고 세조의 경호를 맡기로 했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한명회가 경호를 없애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 틈에 김질이 장인 정창손을 통해 역모를 밀고하였다.

국문은 참혹했다.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은 <동각잡기>에서 이 살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쇳조각을 불에 달구어 성삼문의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었다.

허지만 그는 의연했디.

오히려 쇳조각이 식자.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라고 외쳤다.

살이 타고 팔이 끓어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성삼문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이윽고 죽음을 직감한 그는 돌연히 현장에 나와 국문을 지켜보던 신숙주( 1417~1475)를 꾸짖었다,

「“옛날 너와 함께 집현전에서 당직할 때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당부하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잊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으냐?“」

<이정형 ‘동각잡기’>

세종이 당부했다는 원손이 바로 단종이다.

신숙주가 엣 동료의 질타에 쩔쩔매자 세조가 그를 물러가게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6회

성삼문은

”너희는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뵈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 하다“

종친이 양반 관료들을 대거 살육하고 삼촌이 조카를 왕위에서 몰어내는 것은 조선의 국기를 뒤흔드는 일이다.

그것은 예(禮)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가 무너지면 국가 질서도 무너진다.

유교 예법을 정비해 문치의 기반으로 삼은 세종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종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세종은 자식농사도 잘지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고

다섯명의 후궁에게서도 10남 2녀를 봤다.

그 가운데 적장자는 세자 이향(李珦: 문종)이었다.

세자는 어질고 총명했지만 몸이 허약했다.

세종이 건강상 문제로 대리청정을 맡기고 서무결재를 떠 넘기자 세자는 밤낮으로 정무에 매달렸다가 가뜩이나 좋지 않은 건강이 더 악화 될 수 밖에 없었다.

세종 말년에는 세자가 등창을 앓았다. 세종도 부모 입장에서 병약한 큰 아들이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을 안했을 리 없다.

당시 조선은 문치의 기틀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아직 통치기반이 튼튼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임금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새로운 휴계자를 찾아 보는 방안도 고려 해 봄직도 했다.

세종이 사랑했던 광평대군(다섯째).평원대군(일곱째)은 요절했지만

수양대군(둘째).안평대군(셋째).금성대군(여섯째)도 왕의 재목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세종은 세자를 바꿀 의향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절차와 권한을 따지지 않고 해법을 모색했지만

예법에 관한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국왕은 계속 큰 아들이 아닌 왕자가 이어 받았다.

부왕 태종 이방원이 그랬고 세종 자신도 그랬다.

유교정치를 추구한 세종은 자신의 아들대에서는 이러한 관행을 바로잡고자 마음먹었던 것 같다.

종법(宗法; 장자승계)에 따라 적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전통을 만들려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세손 이홍의(단종)의 존재도 큰 영향을 미친 듯 싶다.

세종 30년(1448년).

세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 여덟 살 손자를 세손에 책봉한다.

병약하세자가 더 버터 주면 세손이 이어 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 때를 대비해 세종은 (성삼문이 국문장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이 키운 유능한 신하들에게 세손을 보필해 달라고 당부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신숙주와 상삼문이다.

세종 치세의 집현전은 ‘인재 사관학교였다.

세종은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 신하들을 치국(治國)에 쓸모는 인재로 육성을 했다.

직접 과제를 내주며 책을 읽으라고 독려를 했다.

잡무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모자라면 특별히 휴가를 줬고(사가독서제), 혹시라도 책을 읽는 방법을 모를까봐 지도교사(변계량)까지 붙였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이런 인재양성 시스템을 통해 나라의 기둥으로 길러졌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7회

세종은 진심으로 두 사람을 아꼈다.

세종 32년(1450년)

명나라의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이 사신으로 오자 세종은 특별히 신숙주와 성삼문을 그 와 교류하게 하였다.

예겸은 학자이자 문장가로 천하에 명성이 높았다.

세종은 조선의 학문도 명나라에 못지않음을 보여주고자 이들을 내세운 것이다.

「경오년 봄에 한림시강 예겸 등이 조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당도하다 세종은 공에게 명하여 공유하게 하니 대개 중국의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를 물어서 알고 또 운어(韻語:윤율이 있는 글)를 배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예겸이 한번 보고 친한 친구처럼 여겨 서로 창수(唱酬: 시와 문장을 지어 화답을 함)하며 공을 ‘동방의 거벽去闢: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 칭하였다’」

<신용개 외‘속동문선’ 신숙주 묘비명>

특히 신숙주는 집현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궐내 장서각의 귀중한 책들을 마음껏 읽으려고 시도 때도 없이 집현전의 숙직을 자청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내관을 시켜 신숙주의 동태를 지켜보게 하였다.

과연 그는 밤을 세워 책을 읽다가 세벽녘 첫닭이 울자 잠자리에 들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몰래 집현전으로 행차를 해 자신이 입고 있던 가죽옷을 덮어 주었다.

세종은 평소 세자에게

”신숙주는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6년. 1475년 6월 21일. ‘영의정 신숙주 졸기’>

세자가 중한 병을 앓았지만 신숙주 같은 인재들을 믿은 것이다.

앞서 추정한대로 그 것은 세자는 물론 세손의 왕위등극까지 내다본 포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에게 천거하고 세손의 미래를 맡긴 세종의 믿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패륜은 잊히겠지만 위업은 오래도록 기록될 것“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은 병약한 몸으로 무리하게 부왕(세종) 상을 치르다가 재위 2년만에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단종은 열두살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어린 왕을 위해 수렴청정해 줄 대비도 없었다.

세종비(소헌왕후 심씨)와 문종비(단종 모친 현덕왕후)응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되었다.

더구나 문종은 삼년상 중이라며 계비를 들이지 않았다.

어린 임금 단종은 하는 수 없이 부왕의 탁고유명(託孤 遺命 ; 왕이 죽기 전에 후사의 장래를 부탁함)을 받은 대신 김종서에게 정사를 맡겼다.

좌의정 김종서는 의정부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정을 주물렀다. 심지어 왕의 인사권을 사실상 박탈(?) 하는 ’황표정사‘르 시핼하기도 했다.

원래 관리 인사는 담당부서인 이조와 병조(군)에서 후보 3명을 올리면 임금이 낙점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김종서는 후보 선정부터 의정부 당상관이 참여해 간섭하도록 했으며

3인 가운데 의중에 둔 사람의 이름에 노란 표식을 붙여 단종에게 올렸다.

종친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는 오히려 안평대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전횡을 이어갔다.

단종 1년(1453년) 10웧 10일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은 이러한 김종서의 전횡을 역모로 규정하고 응징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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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계유정난은 많은 사람이 죽긴 했지만 명분은 통했다.

’정난‘은 ’난신을 다스린다’ 는 뜻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어린 조카(건문제)를 칠 때 내건 구호다. 이는 명나라를 사대하던 당시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꽤나 먹히는 이야기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8회

김종서의 횡포가 워낙 컸던 데다 대국(明)의 선례가 있으니 사대부도 뭐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해서인지 성삼문도 이 사건에는 크게 반감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오히려 계유정난 공신에 삼등공신으로 이름을 올리기 까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는 공신 명부에서 빼달라고(당일 당직근만 했을뿐 사실 역할이 없음)청했지만 계유정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수양대군은 ‘정난’이라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얻었을까?

아마도 계유정난 직전 사신으로 북경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수양대군은 명나라가 단종을 국왕에 책봉한 데 대한 답례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큰물에서 놀면 시야가 트이는 법. 수양은 천하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더 큰 포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포부를 실현 할 모델로 영락제(황위 찬탈)를 마음에 뒀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실제 그렇게 했으니까)

뿐만 아니다.이 사행길에 그는 향후 국정의 축으로 삼을 인물을 얻었으니 바로 서장관(문서정리)으로 데려간 신숙주 였다.

신숙주는 당시 조선에서 잘 나가는 지식인이었다.

집현전이 낳은 기린아로서 양반사회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물과 어울리면 시선도 모으고 평판도 올릴 수 있다. 실제로 신숙주는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구애를 받고 있었다.

특히 안평대군이 적극적이었다.

시문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자신의 재주를 뽐내며 신숙주에게 다가 갔다.

수양대군은 이를 두고 볼 리 없다. 야심가일수록 사람 욕심이 많다.

그는 신숙주를 북경 사행길의 사정관으로 지명하고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는 내내 극진하게 대접을 했다.

사핼길은 멀고 험난한 길이다.

6개월 이상 함께 고생하며 말동무로 지내다 보면 ᅟ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재래(再來)“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늠늠하고 호방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가는 도중 길위에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수양대군은 북경에서 사신 임무를 마친 뒤 신숙주를 데리고 영락제 묻힌 장릉을 찾았다고 한다.

장릉앞에서 그들은 영락제가 남긴 유지를 음미하지 않았을까?

어린 조카인 건문제를 쫒아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는 충성을 거부하는 방효유의 10족을 멸한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히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 될 것이다“」

<명사 明史>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9회

”성삼문이 옥새를 들고 실성 통곡를 하니“

신숙주가 계유정난에 어느정도 개입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않다. 당시 그는 외직에 있었다.

하지만 거사후 43명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을 책봉 할 때 신숙주는 이등공신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모의에 참여를 하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은 가지만 역사기록은 없다.

성삼문 .박팽년 등 신숙주와 가까운 인사들이 공신명부에 오른 걸 보면 집현전 세력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계유정난 이후 신숙주는

노골적으로 수양대군 편에 줄을 선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직하며 정무와 인사. 그리고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그는 신숙주를 도승지(왕명 출납)에 기용하여 단종을 감시(?)하고 겁박했다.

어린 임금은 금성대군, 한남군.여웅군 등 자신을 지켜 주려 한 왕족들 마저 유배를 떠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됨을 알고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했다.

이 때 왕명에 따라 옥새를 세조에게 전해준 사람이 성삼문이다.

「동부승지 성삼문이 옥새를 들고 실성 통곡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수양은 짐짓 사양함) 」

<남효온 ‘육신전’>

세조와 성삼문의 관계는 이 시점에서 어긋나기 시작(?) 한다.

성삼문은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세종이 키운 인재였다.

그는 신숙주와 달리 왕위찬탈에 가담하지 않았다,

성리학의 나라 유교국가에서 지켜 나가야 할 예의

마지막 선을 넘어 섰기 때문이다.

이는 사대부들의 시각도 일치했다.

성삼문은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했다.

훗날 김질의 고변(자수)에 따르면 신숙주에게 동참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거절했다.

신숙주는 한 살 아래인 성삼문의 절의를 존중했지만 그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숙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조에게 함구해 옛 벗들에 대한 마지막 의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사실 ‘불고지죄’도 엄청난 죄가 된다.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죄.....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

성삼문이 성리학을 파고든 반면에

신숙주는 훨씬 폭 넓게 공부를 했다. 천문,지리,법률. 운학,외국어 등에 능통했다.

당시 양반들은 외국어를 천시해 습득하는 것도 어려운데

신숙주는 중국어는 기본이고 왜, 여진어. 몽골어 등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구사했을 정도다.

역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능히 외교문서를 번역할 정도니 수준급이었다.

「신숙주는 경사(經史)에 밝고 결단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세조가 큰일을 만나면 반드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성종실록.6년 1475년6월21일‘영의정 신숙주의 졸기’>

세조는 즉위 후 좌익공신(佐翼功臣)47명을 다시 책봉하고 신숙주를 일등공신에 올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0회

신숙주는 세조에게 충성을 다했다.

특히 국제외교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국왕책봉 문제를 청하고 황제의 고명을 받아왔다.

왜와 여진에게도 환심을 샀으며 문제가 생기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 소탕을 하기도 했다.

세조에게의 반역은 단호하게 임했다.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단종 복위를 꾀하자 두 사람을 죽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세조는 “당태종에게 위징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숙주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신숙주는 성종 6년(1475년) 사망할 때 까지 영의정.병조판서.예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섭렵했다.

그렇다고 다른 훈구대신들 처럼 위세를 부리지도 않은 인물이다.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검소하게 처신을 해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후일 사림(려말선초의 길재 후예들)이 집권하면서 ‘변절자’로 몰렸다.

상하기 쉬운 녹두를 ‘숙주’라고 부른데도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심지어 그가 단종의 비(妃)였다가 관노로 전락한 송씨를 취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윤근수.월정만필>

이에 반해 성삼문은 사림에 의해 만고의 충신으로 받들어 졌다.

「 “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이긍익 연려실기술>

성삼문이 지었다는 이 단가는 충절의 본보기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신숙주로서는 다소 억울할 수 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절친한 친구였지만 자신의 소신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특히 성삼문의 단종복위 참여를 권유했어도 거절은 했지만 세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후대 평가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조가 정권 유지 차원에서 훈구공신들에게 보장해준 특권 때문이 아닐까?

공신들은 세조가 베푼 공신전.대납. 분경.면책권 등을 남용해 온갖 반칙을 일삼았다.

이것이 사림의 전면적인 등장을 불렀고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조선의 운명까지 바꿔 놓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1회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겁박(?)해서 특별한 관직은 모두 독점하여 모든 권력을 누렸으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3년,1455년에 윤6월에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양위) 자신이 조선 제7대 임금 세조로 등극을 하였다.

임금 팔자가 아닌 사람을 왕이 될 팔자로 바꾸어 임금으로 등극을 하게 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국고가 오로지 그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 ......그 댓가는 고수란히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좌익공신으로 총 46명이 책봉되었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될 수 있도록 도운 공신이라는 의미다.

또 다시 수많은 국가재정을 투입하게 된다.

결국 조선은 초기 이렇게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정난공신 등 4대 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임금도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단종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자신이 왕위를 뻬앗은 그 임금(단종) 앞에서 춤을 춘 것이다.

잔치가 끝난 후 수양 동생 영흥대군의 사저로 자리를 옮긴 세조는

장난 삼아 이구에게 이계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 내가 때리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를 해도 소용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하는등 군신 사이에 격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들에겐

새벽이 될 때 까지 술마시고 춤을 추며 즐거웠겠지만

백성들이나 다른 사대부에겐

그야말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그야말로 특권층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하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 「정난 1등(2등.3등) 공신 이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소서”라고 주청을 했다.

기가 막힐 일이다.

‘공신이 죄를 범하면 용서’ 가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하면 영원히 용서...............’

당시 공신 특권층이 이러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2회

[공신들의 만행]

법위에 있는 공신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이들의 전횡이 일반 백성들에게 끼칠 피해는 엄청 날 것이다.

태종의 권력 장악에 많은 공을 세운 이숙번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도성의 서문을 개통 할 때

이숙번의 집앞에 길을 내야 했으나

담당자들이 그를 두려워 하여 공정왕(정종임금)의 전문(殿門)을 지나게 할 정도로 그 위세가 당당했다.

 

그는 태종 16년,

온천에 목욕하러 가면서 갑사 수십 명을 동원해서 위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다.

무예가 뛰어난 개국3등.정사2등 공신에 올랐던 장사정은

정종 1년에 전 판서 남궁서의 아내를 붙잡아 귀를 자르고 때려 죽였다.

그 이웃 남녀 5-6명을 매질해서 임신한 여자를 죽게도 만들었다.

이런 경우 국법은 당연히 사형이다.

그러나 정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그를 처벌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여론이 너무 나빴고

결국 이방원도 어쩔수 없었고 함주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태종 2년 10월에는

공신의 아들인 박실이 부사직 윤하의 첩을 도둑질하여

자기 집으로 데려온 사건이 발생했다.

윤하가 박실의 집에 가서 첩을 찾아가자

박실은 왕손 이정에게 처리를 부탁했다.

이정은 윤하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 아내의 머리채를 끌고 마당으로 나와 매질을 해서 죽게 만들었다.

남의 첩을 뺏으려다 실패하자

왕손에게 청부하여 관리의 정실부인을 매질로 죽게 만든 것이다.

이는 강상범죄( 성리학 유고 사상 위배)로 엄벌대상이다.

그러나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유배를 당하고 마무리 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려 갈 때 수양을 따라갔던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 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 달라고 하자

그 노파를 돌위에 거꾸로 매달아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가에 두었으니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홍윤성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다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했다. 홍윤성은 숙부에게 논 20두를 요구했다.

숙부 왈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렇 수 있는가”라고 홍윤성에 따졌다.

홍윤성이 숙부를 박살내서 후원에 묻어 버렸다.

이에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 접수를 거부하고 사헌부도 거부했다.

세조가 온양 온천에 거동한다는 소문을 들은 숙모는

잔말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세조행차를 기다렸다.

어가가 마침 지나가자 숙모는 길게 호곡을 했다. 세조가 궁금해서 알아보라고 한즉

숙모는 관리에게 말하길

“공신에 관계된 일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으며

이 말은 전해들은 세조은 직접 그 사연을 듣기로 했다

 

숙모는 세조에게 직접 홍윤성의 만행을 하소연 했다.

세조는 분노했지만 공신 홍윤성을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 죽어도 임금은 그들을 보호할 뿐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3회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계유정난) 왕위를 찬탈하였고

이에 항거한 사육신을 찢어 죽이고

아버지,형제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고

그 부인.딸, 여자들과 재산은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홍삼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 그리고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성삼문 동생)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숭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 그리고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했다.

이들 수십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의 헌정질서을 수호하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하루아침에 공신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공신들은 사육신의 토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들의 만행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비단 조선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반역으로 인한 결과는 대부분 그러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4회

“ 어찌 공론을 두려워 하는가? ”

[何畏公論]

세조12년(1466년) 8월 29일.

예문관 유신(儒臣) 김종련이 임금 앞에서 <논어>을 강론하다가 주자의 태극설에 대해 언급했다.

“주자의 말 가운데는 틀린 곳이 많습니다.

신이 왕명을 받들어 아뢰려고 하지만 천하의 공론이 두려워 비난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세조가 강론을 끓고 질문을 던졌다.

이른바 ‘공론’이란 것이 세조의 귀에 거슬린 것이다.

「“이미 틀린 곳이 있다고 말을 해놓고 어찌 공론을 두려워하는가?

공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세조실록 12년 1466년 8월29일>

기습적인 질문에 김종련은 더럭 겁이 났던 것 같다.

세조실록에 기록은 없지만 세조의 표정과 말투가 심상치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그는 허둥대며 자신의 말을 주워 담았다.

“무릇 유자(儒者)에게는 모두 공론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이 어릴 때부터 배운 바를 하루아침에 훼손한다면 유자들이 신을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세조도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세조는 끈덕지게 꼬투리를 물고 늘어졌다.

「“유자(儒者)들은 모두 공론(公論)이 있다고 했겠다, 그럼 조정의 대신들도 유자이거늘 그대는 누구를 두려워 하는가?

지금 나라에 권신(權臣)이 없는대 그대가 두려워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임금의 질문이 거듭되면서 밑도 끝도 없던 몽니의 실체가 서서히 수면위로 떠오른다.

애초 세조가 못마땅했던 것은 왕명보다 공론을 두려워하는 김종련의 자세였다.

세조에게 왕권은 절대권력이었다.

그러니 왕권위에 공론을 두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공적인 논의를 뜻하는 “공론公論”은 요즘으로 치면 ‘여론’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유자(儒者), 즉 유학을 배우는 사대부의 의견이 ‘공론公論’ 이었다.

김종련도 임금의 질문에 그리 답을 했다,

주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강론은 유자의 공론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입에 올리기 두렵다고 변명을 했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 답변이 왕권을 적대시하는 세조의 마음에 불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김종련의 말대로라면 유자가 임금보다 두려운 존재가 되니 말이다,

세조는 그 두렵다는 유자가 누구인지를 거듭 물었다. 심지어 의금부로 끌고가서

압슬형(壓膝刑:꿇어앉은 죄인의 무릎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 놓고 압력을 가하는 고문)

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김종련이 말한 유자가 특정인이 아니라는 걸 세조가 모를리 없었다.

다만 세조는 본보기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유자도 권신도 왕권 위에 존재할 수 없음을 그는 사대부를 비롯하여 널리 과시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해 12월 김종련이 참형에 처해진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너는 내가 죽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조선은 왕조국가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전제군주제(군주가 통치권을 장악하고 단독으로 행사하는 체제)는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임금이 신하와 협의해 나라를 다스리는 ‘군신공치 君臣共治’에 가까운 체제였다,

그것은 성리학에 뿌리를 둔 이상적인 통치철학으로 개국의 중추 세력인 사대부들의 뜻이었다.

실제로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제국가로 조선을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권력은 나누기보다 독점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왕은 왕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권력을 추구하는데 ‘군신공치’가 어찌 순조롭겠는가?

결국 권력욕이 컸던 태종 이방원이 육조직계제( 각 부서 장관이 바로 임금에게 보고)를 시행함으로써 조선에서는 한동안 왕권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세종이 의정부서사제(의정부의 정승들이 육조의 업무를 심의한 후에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로 회귀하기는 했지만

태종이 다져 놓은 왕권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5회

그러나 문종과 단종을 거치면서 왕권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결정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은 왕정의 정당성 마저 흔들어 놓은 것이다.

민심이 떠나자 세조는 오히려 왕권을 절대화 하며 다시금 나라의 기강을 잡고자 했다.

그가 먼저 꺼내든 카드는 태종 이방원의 육조직계제의 부활이었다.

사실상 국정을 이끌어 온 의정부의 심의 기능을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육조(이조,병조.호조.예조,형조.공조)의 직무를 장악한 것이다.

당연히 신하들은 반발했다.

육조 당상관(3급이상)들이 세조에게 육조직계제를 거두어 달라고 요구를 했다.

나중에 사육신이 된 하위지는 이 때 총재(冢宰: 재상→2품이상 벼슬)가 임금으로 위임을 받아 국정을 총괄하는 것이 주나라의 제도임을 역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리어 하위지의 관을 벗기고 곤장을 친 후 극형에 처하려 했는데 주위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세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총재(冢宰)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홍(승하)하였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또 내가 아직 어려서 서무를 재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끝내 대권을 아랫 사람에게 옮겨 보겠다는 말이냐?“ 」

<세조실록 1년 .1455.8.9.>

세조는 재상이 국정을 총괄하게 되면 임금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기왕에 힘으로 쟁취한 권력이다.

허수아비 왕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공론(여론)을 앞세우는 사대부의 언로를 공포정치로 억눌렀다.

곤장을 치고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김종련의 경우처럼 말 몇마디 트집잡아 본보기로 죽이기도 했다.

“누가 구훈(舊勳) 인가? 한명회로다”

당시 도덕적 명분이 없는 무조건적인 왕권 강화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즉 헛되이 목소리만 높임에 지나지 않았다.

실상은 그 반대로 흘러간 것이다,

정통성이 취약한 세조는 소수의 공신들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권력은 세조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아래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훈구파(勳舊派) 즉, 공훈이 있는

신하와 가문이 대대로 권력을 쥐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조는 정난공신(定難功臣: 계유정난을 도운 공신) 46명, 적개공신( 敵愾功臣:이시애 난 평정 공신)45명을 양산하여 그야말로 공신집단의 덩치를 엄청 키웠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 역시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에 익대공신(翊戴功臣:남이장군의 옥사에 관여한 공신) 33명을 배출했고

성종임금도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댓가로 좌리공신(佐理功臣:자신의 즉위에 공이많은 공신)75명을 무더기로 공신으로 책봉을 한 것이다.

여기에 태조의 개국공신 52명 등 그 이전에도 수많은 공신잡단이 탄생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6회

조선은 사실상 공신과 그 가문 즉, 훈구파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 가운데 이중.삼중으로 녹훈(錄勳:공신으로 기록됨)의 은혜를 입고 부귀영화를 누린 권세가들도 나타났다.

한명회(정난.좌악,익대.좌리).

신숙주(정난.좌익.익대).

정인지(정난.좌익.익대,좌리).

정창손(좌익.익대.좌리).

홍윤성(정난.좌익,좌리).등이 대표적이다.

훈구공신들은 공신전. 대납.분경,면책권 등 온갖 특권을 모두 누리고 보장을 받았다.

‘공신전功臣田’은 세습이 허용된 경기도 땅을 나눠 줬고 이 공신전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반 관리들에게 지급할 과전이 부족해 질 수밖에 없었다.

세조 후반에 실시된 ‘직전법職田法’은 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충의 산물이다.

이전의 과전법이 전현직 관리 모두에게 수조권(세금을 받을 권리)을 줬다면

직전법은 이를 현직 관리로 한정했다.

가용토지와 국가세수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었지만 일반 관료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게다가 공신전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향촌의 사대부들도 갈등이 발생했다.

이것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 숨은 사회경제적 배경인 것이다,

‘대납代納’은 돈 없는 백성을 대신해서 세금을 미리 납부한 후

다시 그 백성들에게 징수하는제도인데 보통 고을단위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선납한 세금의 두세 배를 백성들에게 거둬들였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일종의 고리대금 장사와 유사하다.

물론 이런 대납은 백성들도 원하지 않았고

임금도 이를 승인한 적이 없는 기형적인 제도인데 출세에 눈이 먼 지방관들이 훈구파들과 짜고 가난한 백성의 등을 쳐 먹은 것이다.

‘분경奔競’은 고관을 찾아다니며 벼슬을 청탁하는 것으로 부정축제의 또 다른 통로였다.

태종 이방원은 이러한 분경을 차단하고자 대신들과 인사권를 가진 관헌들과의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도록 금지를 했다.

이른바 「분경금지령」이다.

친척이나 이웃이 아닌 자가 분경금지대상자의 집을 기웃대다가 잡히면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을 정도다.

세조는 훈구공신들의 분경을 허락했는데 이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발도 소용이 없다. 공신들에겐 면책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양민의 땅을 빼앗고 항의하는 백성을 때려죽이는 등 그들의 횡포는 하늘을 찌른 것이다.

세조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바야흐로 훈구 공신들이 임금을 손에 쥐고 흔드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를 세조는 우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훈구공신들에게 대적할 인물을 키우기 시작한다.

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아들인 구성군 이준과 정선공주(태종의 4녀)의 손자 남이장군 등을 의식적으로 키우게 된다.

「왕이 말하길 세자와 이준이 술을 올리고 9기(妓)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다.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대훈(大勳)인가? 구성군이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구성군이로다.

<세조실록 14년 1468년 5월 1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7회

구성군 이준과 장군 남이는 둘 다 패기 넘치는 왕실의 지친이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적개공신이었다.

적개공신은 기존의 정난공신.좌익공신과 각을 세우는 신(新) ‘공신집단功臣集團’ 이었다.

세조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아들 예종을 보좌해서 기존의 훈구공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의 의중을 성급하게 드러낸 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정도의 커다란 실책을 한 것이다.

한명회는 세조를 임금으로 만든 자신을 ‘옛 공신( 舊勳)“으로 깍아내리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이준에게 ’ 큰공신(大勳). 신 공신(新勳)‘ 운운하는 작태를 좌시하지 않았다.

세조의 이 섣부른 포석은 결국 비극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

“자을대군은 이미 대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

1468년 세조에 이어 즉위한 예종(1450~1469년)은 개혁에 착수했다,

그 출발점은 아버지가 구 공신(舊勳)들에게 보장해준 특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대납’을 엄중하게 질타했다.

공신이든 종친이든 대납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는 사지를 찢어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법에도 없는 면책특권 역시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면책특권을 믿고 양민을 억압해서 노비로 삼으면 예외없이 교수형에 처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분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숙주에게 부하를 보내 표범 가죽을 상납한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이 국문을 당한 끝에 관직을 파직당했다,

정인지 집을 감시하던 사헌부 관리가 종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예종의 개혁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열아홉의 군주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구 공신들에게는 조정과 궁궐은 물론 온 나라를 움직일 힘이 있었다 .

그들의 부와 권력에 포섭된 수많은 수하들이 조정과 궁궐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정보는 세나가고 구 공신들의 눈과 귀가 되어 있었다.

세조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상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임금이 아닌 구 공신 바로 그들이었다.

게다가 구공신들은 어지러운 정국을 헤쳐오면서 정치력이 카워왔다.

그러나

어린 임금은 자신을 믿고 있었지만 사전수전 다 겪은 구 공신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자신들을 ‘구 공신’ 운운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독기가 올라있던 그들은

세조가 자신들의 견제세력으로 키운 구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그리고 적개공신을 분열,이간질 시켰다.

남이장군의

역모사건(南怡 獄事)이 그 신호탄이 된다.

남이는 이시애난을 평정한 후 20대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제수된다.

별로 한것도 없는 동갑내기 이준이 영의정에 오르자 불만을 표시했다.

그 후 예종임금이 남이장군을

겸사복장(兼司僕將:종이품의 무관 벼슬로 100명씩 편성한 두 부대에 각각 한 사람씩 두어 통솔하게 함)으로 좌천되면서 예종임금과 구성군을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구공신들은 남이의 역모사건을 빌미로 적개공신의 대부격인 영의정 강순마저 제거하는데 결국 성공했다.

최고의 무장과 후견인을 잃어버린 신공신 집단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구성군 이준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8회

세조가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선택한 新공신 그룹의 중심인물 남이의 몰락과정을 살펴보자

젊은 장군 남이 옥사(獄事)~~

한명회 등 세조의 킹메이커들은 권력의 실세들로서 세조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다 결국 세조 말년에 북방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젊은 공신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병마도총사 구성군(龜城君) 이준(수양대군 동생 임영대군 아들),

병마부총사 조석문, 진북장군 강순, 좌대장 어유소, 우대장 남이(세종 손자) 등이 그들이다.

이시애의 난으로 빛을 본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유자광이다.

그는 조선의 최고의 모사꾼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사관의 사초)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이라 했다.

유자광은 모함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공신에 이르기까지 했으나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과 노공필을 모함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까지 일으킨 죄인으로 분류되어 공신록에서 삭제되고 파직되어 유배형에 처해 졌다.

그 후

1512년(중종 7년) 6월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자광은 경주 부윤(종2품)을 지낸 유규의 얼자로 태어났다. 서얼은 사대부인 아버지가 혼외 관계로 낳은 자식을 말한다. 첩에게서 얻은 자식이 여기에 속한다.

서얼은 양인 어머니 소생인 서자와 천민 어머니에게서 난 얼자로 나뉜다, 정실부인의 자식인 적자와 달리 이들에게는 사대부의 신분이 주어지 않았다.

사대부도 양인도 천민도 아닌 애모모호한 잉여집단.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모순적인 존재. 유자광은 날 때부터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얼은 출셋길이 막혀 있었다. 소과인 생원과와 진사과에는 진출 할 수 있었지만

과거의 꽃인 대과(문과)에는 응시 할 수 없었다.

생원과.진사과는 향리 등 시골 양반 벼슬아치 수준이다.

그들은 관직에 나가 봤자 고작 무과나 잡과를 통해 말단에 머무는 것이다.

하지만 유자광은 달랐다.

그는 이례적으로 얼자라는 결격사유를 극복하고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세조 13년(1467년) ,

이시애의 난이 터지자 유자광은 상소를 올려 세조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 장수와 병사들은 머물기만 할 뿐 진격하지 않습니다.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불이인폐언 (不以人廢言:옳은 말이면 말한 사람의 신분이 낮다고 할지라도 결코 버려서는 안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보잘것없다고 하여 버리지 마소서. 신은 비록 미천하지만 혼자서라도 이 싸움에 한몫할 것입니다.

이시애의 머리를 시원하게 베어 전하께 바치기를 갈망합니다.”」

<세조실록13년 (1467년)6월14일>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는 토벌군을 파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위 찬탈문제로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었던 세조였다.

그는 재야의 불만 새력이 동조해서 난이 확산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방자하기 위해선 조기진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전황은 지지 부진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9회(3.5)

세조의 속마음은 타들어 갔다.

그때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을 지키던 유자광의 상소는 그야말로 한 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 주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과도 같았다.

갑사 유자광은 고대 중국의 병법가 손무의 손자병법을 인용해 ‘속전속결’을 주장했다.

세조가 얼마나 듣고 싶은 말이었던가

게다가 문장이 기개가 넘치는 것은 물론 박람강기(博覽强記:고금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기억함)가 엿보였다.

세조는 미천한 신분을 개의치 않고 그를 등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材木)이다. 내 장차 임용하여 그 옳은 바를 시행하리라“」

<세조실록 13년(1467년)6월14일>

세조는 유자광에게 병조정랑(정 5품)을 제수했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부 사무관으로 특채를 한 셈이다. 서자도 아니고 얼자에게 내린 관직치고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유자광이 인용한 <논어>의 ‘불이인폐언 (不以人廢言:옳은 말이면 말한 사람의 신분이 낮다고 할지라도 결코 버려서는 안됨’ 이라는 문구가 세조 맘에 와 닿아던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자는 출세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 세조의 유자광에 대한 인사를 보고 시비가 일어났다.

이에 세조는 굴하지 않고 아예 유자광의 얼자 신분을 허통(許通) 해 줬다

그에게만 특별히 서얼금고(庶孽禁錮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가는데 일정한 제한을 두었던 신분차별제도법으로

1415년(태종 15년), 특정 인물(정도전)을 경계하고자 서얼자손에게 높은 관직을 주지 말자고 건의 것에서 비롯되었다)를 풀어

과거 응시기화를 부여 한 것이다. 뿐 만 아니다.

유자광을 위한 별시(別試: 임시로 치르는 과거시험)를 치르도록 했다, 별시는 왕의 책문(策問:임금의 정책)에 답하는 시험이었다.

시험결과는 낙방이었다, 이유는 감독관 신숙주가 ‘문법이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낙방시킨 것이다.제대로 된 교육을 받질 못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같다

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검토를 하여 장원으로 급제를 시키고 병조참지(정3품) 벼슬을 내린다,

당산관 즉,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 당상의 교의에 앉는 자리였다.

이쯤 되면 세조의 단순한 쇼가 아나라 뭔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자광은 서자 출신이었기에 벼슬길에 나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세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대담하게 진압계책을 올렸고

세조는 그를 불러 자질을 살펴본 뒤 각종 특혜를 베풀어 전장에 투입했고, 그는 보란 듯이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유자광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도 얻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난이 끝난 후 모두 적개공신(신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유자광의 등용은 앞서 설명한 구성군 이준 그리고 남이를 키운 의도와 연결된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진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조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뜨자 그들은 예종을 보필하기는 커녕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며 파멸의 길로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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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대신(구공신)과의 신진세력(신공신)의 갈등~

신공신들의 등장으로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던 정국에는 작은 파란이 일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시애의 난으로 잠시나마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시애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역모에 내통했다는 모함이 원인이었다.

물론 후일 모함으로 밝혀져 풀려나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신공신들은 무골 기질의 세조에게 총애를 받음으로써, 신·구세력 간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세조 말기 조정은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등의 훈구대신과 구성군 이준, 남이 등이 신진세력이 세력을 다투는 형국이었다.

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대의 인물로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 17세에 무과에 급제했던 기린아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그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여 출셋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변에 건주위 여진족이 출몰하자 남이는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이 지휘하는 정벌군에 우상대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그는 주장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파저강 인근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지도자 이만주와 아들 고납합을 죽이는 대공을 세웠다.

남이는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남이와 동갑나기였던 구성군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 이구의 아들로 세조의 신임을 받아 이시애의 반란 당시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고,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직위를 남이에게 넘긴 다음

1468년 7월, 28세의 나이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조석문은 좌의정이 되었다.

세조 말년에

남이는 태종 이방원과 원경황후 사이에 때어 난 정선공주가 외할머니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구성군 이준의 뒤를 이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가 된 것이다.

바야흐로 세조가 의도 한 대로 新 공신들이 정국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는 종친의 정사 참여를 금지한 국법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조치로 항상 그의 뒤를 따라야 했던 남이의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남이는 젊은 혈기로 가득차 기운이 넘치고 있었으니 언젠가 구성군 이준을 뛰어넘어 정계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남이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新 공신 세력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들을 그토록 아꼈던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제8대 임금 예종은 즉위 당시 열아홉으로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이제 구(舊) 공신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될 무대가 꾸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