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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퇴계의 양명학 비판과 퇴계심학, 그리고 조선유학의 성립/김형찬.고려大

1. 머리말

국가의 권력이 주로 무력에 의존해서 획득되고 유지되던 시대에 문치국가(文治國家)로서 조선의 장기 지속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요인을 밝히기 위해서 정치, 사회, 역사, 철학 등 여러 방면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철학 또는 이념의 역할에 관심을 가진다면, 특히 14세기 말∼15세기 초 조선의 건국 시기에 활약했던 정도전(鄭道傳, 1337 ∼1398), 조준(趙浚, 1346∼1405), 권근(權近, 1352∼1409) 등과 16세기에 조선유학의 발 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황(李滉, 1501∼1570),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이이(李珥,1536∼1584) 등 지식인 관료들에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그 건국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에서, 지식인들에 의해 기획된 국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

고려 말의 국내 현실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의 변동을 보면서 일군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고, 사실상의 무혈 혁명에 성공 한 뒤에는 그들이 꿈꿨던 나라를 실제로 만들어 갔다.2)

당시 지식인들이 국가 건설의 토대 로 삼았던 철학은 중국에서 수입된 주자학3)이었다.

1) 조선 건국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에 관해서는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이훈상 옮김, 서울: 너머북스, 2013); 김백철,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서울: 이학사, 2017) 참조.

2) 혁명과 건국초의 국가체제 형성에 적극 기여했던 정도전의 피살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에 참여 지 식인의 성격과 그 이론적 성향이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변화의 양상에 관해서는 도현철, 『고려말 사 대부의 정치사상 연구』(서울: 일조각, 1999), 『조선전기 정치사상사』(서울: 태학사, 2013) 참조.

3) 여말 선초에 유입된 중국 유학은 북송성리학, 원대 성리학, 정주학 등의 성격이 복합되어 있었으므로, 하 나의 명칭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양명학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를 분명하게 전개하기 위해서 고려말 이래 조선에서 주류를 이룬 중국 유학을 ‘주자학’이라고 통칭한다.

조선의 건국 시기는 그것을 국가 이념 으로 삼고 조선에 적용하여 국가 체제를 구축하면서 주자학에 기반한 이상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는 중국 주자학을 수용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단계 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학 분야에서 더 주목을 받아온 시기는 16세기였다.

이 시기는 퇴계(退溪) 이황과 율곡 (栗谷)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였고, 그들은 이후에 조선의 지식인사회와 정치권력을 분점하 는 양대 세력의 종주가 되었다.

특히 이들이 직접 참여했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은 조선의 학자들이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관련 논의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조선유학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퇴계와 율곡, 그리고 이후 조선유학자들이 이기심성론 논의에 집중하게 되는 보 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건국 이래로 그들이 추구해 온 주자학에 대한 반성 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 혹은 보완책 모색이라는,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의 과제에 주목 해야 할 것이다.

당시는 이미 건국 후 150여 년, 5세대가 지나면서 혁명세력이 기득권 집단으로 견고하게 자리를 굳혀 가고 그들의 건국이념이었던 주자학의 이상이 퇴색해 가던 시 기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비판하며 성장한 양명학이 유행하고 있었고, 조선 지식인들의 철학적·이념적 반성은 그러한 양명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 선에서 양명학은 강렬한 비판에 직면하였고, 조선유학은 양명학을 배제하고 이기심성론 논의에 주력하면서 독특한 학문적 기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논의 과정 의 중심에는 양명학 비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퇴계가 있었다. 퇴계는 양명학의 학문적 성 과를 수용하는 대신에, 양명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에 적극 대응하 며 주자학을 보완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런데 사단칠정논쟁 및 그 이후 퇴계학파와 율곡학 파의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자학을 보완 혹은 강화하기 위해 퇴계가 제시한 생각 들은 격렬한 논쟁을 유발하였으며,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생각에 찬성 혹은 반대의 입장으로 그 논의에 참여하면서, 이후 300여 년간 조선사회를 이끌어 가게 되는 조선유학 이 구축되었다.

이 글에서는 퇴계가 양명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그 문제의식을 포용해 냄 으로써, 양명학이 조선에서 뿌리 내릴 여지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 기심성론의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유학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2. 퇴계의 양명 비판

퇴계가 양명학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53세 무렵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 퇴계는 중국 명나라 학자인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 1428∼1500)과 그의 제자인 의려 (醫閭) 하흠(賀欽, 1437∼1510), 그리고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 등 명대 학자들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검토하였고 제자들과도 그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4)

퇴계는 이 세 사람이 모두 선학(禪學) 또는 불교에 기울었다고 비판하였지만, 그들에 대 한 평가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진백사의 학문은 왕양명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육구연(陸 九淵, 1139∼1193)에게서 나와서 “본심(本心)을 으뜸으로 삼으니 두 사람의 학문 모두가 선 학(禪學)”이지만, 그래도 진백사는 “(성현의) 서책의 가르침을 다 폐하지는 않았고 사물의 이치[物理]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성현의 가르침에 대해) 심하게 등을 돌리고 떠 난 것은 아니”라고 평하였다.5)

하의려에 관해서는, 그가 스승 진백사에 대해 “선생님은 지나치게 높은 뜻을 가지고 계 셨다”6)라고 한 말을 예로 들면서, 자기 스승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았고, 또한 “의려는 백사에 비해 비교적 진실하고 바름에 가깝다”7)라고 평가하였다.

4) 1553년 6월, 퇴계는 홍인우의 요청에 따라 왕수인의 『전습록』을 그에게 빌려주었고, 11∼12월 경에는 “『醫 閭先生集』을 抄해서 진헌장과 왕수인의 글을 抄한 것을 뒤에다 붙이고, 글(「抄醫閭先生集附白沙陽明抄後 復書其末」)을 지어서 그 끝에 써서, 靜坐之學이 자칫 禪學에 흐르게 됨을 경계하였다.”고 한다.(정석태 편,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2), 서울: 퇴계학연구원, 2001, p.185, p.217) 진헌장과 왕수인의 저술에 대한 비 판적 입장을 밝힌 「白沙詩敎辯」과 「傳習錄論辯」도 이 무렵에, 아니면 53∼66세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 된다. 퇴계의 연보 중 66세에 「心經後論」을 지었다는 기사 뒤에 언급된 다음 구절을 근거로 하여 그 두 글 이 66세에 쓰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정순목, 『퇴계정전』, 서울: 지식산업사, 1992, pp.330∼331) 그 러나 이 구절은 퇴계가 심학의 연원을 천명하고 이단을 배척하기 위해 「심경후론」을 지었다는 것을 말하면 서, 그러한 취지의 글을 퇴계가 이전에도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四十五年丙寅. 先生六十六歲. ○「심경후론」을 지었다. … 선생은 또한 일찍이 중국의 학술이 잘못됨을 근 심하였으니, 백사나 양명 등의 설이 세상에 성행하고 정자와 주자가 서로 전한 학문의 계통은 날로 사그 라져 감에 일찍이 깊이 우려하고 조용히 한탄하였다. 이에 백사의 『詩敎』, 양명의 『傳習錄』 등의 글에 대해 모두 논변한 것이 있으니, 이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하겠다.(作心經後論. … 先生又嘗患中國 學術之差, 白沙陽明諸說, 盛行於世, 程朱相傳之統, 日就湮晦, 未嘗不深憂隱歎. 乃於白沙詩敎陽明傳習錄 等書, 皆有論辯, 以正其失云.”(『퇴계집』, 「퇴계선생연보」)

5)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19b-c.

6)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19c.

7) 李滉, 「抄醫閭先生集附白沙陽明抄後復書其末」, 『退溪集』, 30:420b.

하지만 왕양명에 대한 퇴계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매우 냉혹하다.

양명에 이르면 선학(禪學)과 비슷하면서도 선학(禪學)이 아니고 또한 정좌(靜坐)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 올바름을 해치는 것이 심하다.”8) 양명의 경우는 학술이 매우 잘못되었다. 그 마음은 강하고 사나우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데다 가, 그 말이 장황하고 화려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자신들이 지키던 바를 잃게 하니 인의(仁 義)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힐 자가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9)

양명의 문제점에 대해 퇴계가 지적한 것은 크게 두 방향이었다.

우선 하나는 ‘심즉리(心 卽理, 마음이 곧 리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내서는, 자신의 마음만을 보존하고자 하고 사물 이 마음에 해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는 결국 인륜을 해치고 사물과 단절함이 불교 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성현의 가르침과 비 교하면서 둘을 합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생각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고쳐서 자신의 그릇된 견해를 따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퇴계는 그 대표적인 예로, 주자가 만년에 궁리(窮理)의 공부를 버리고 양명 자신의 생각과 같아졌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양명의 ‘주자만년정론 (朱子晩年定論)’을 들었다.10)

8) 李滉, 「抄醫閭先生集附白沙陽明抄後復書其末」, 『退溪集』, 30:420b.

9)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19c.

10)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19c-420b.

3. 궁리(窮理)와 실천(實踐)의 관계

유학에서 진리에 대한 이지적(理智的) 탐구와 도덕적 자질의 수양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 으로 여겨져 왔다.

진리를 탐구하려면 경건하게 그 탐구에 집중하기 위한 자세가 준비되어 야 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진리에 대한 이지적 탐구를 통해 지적·인격적 성취를 이루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부 방법은 궁리(窮理)와 함양(涵養) 또는 도문학(道問學)과 존 덕성(尊德性) 공부의 병행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양명이 주자학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주자의 학문이 궁리(窮理) 또는 도문학(道問學)에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육상산도 지적했던 것이었다.

양명은 주자가 만년에 그러한 문제점을 스스로 인식하여 궁리 공부의 무용성(無用性)을 인정하고 존덕성 을 공부의 핵심으로 삼았다며 이를 ‘주자만년정론’이라고 설파하였다.

양명의 주자만년정 론설과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가 편찬한 『주자만년정론』에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다.

양명이 『주자만년정론』으로 편찬한 주자의 글들 중 상당수가 만년의 글이 아니거나 집필 시기가 불확실하며, 양명이 주자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명 자신이 주자의 학문을 깊이 존경하고 따랐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가 자 신의 관점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주자에 대한 평가에 과도하게 자신의 입장을 개입시켰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주자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왜곡했다 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11)

11) 양명은 「朱子晩年定論 序」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제 나의 설이 주자와 어 긋나지 않음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또한 주자가 나보다 먼저 나와 같은 마음을 얻었음을 기뻐한다.(予旣自幸其說之不繆於朱子, 又喜朱子之先得我心之同然.)” 『王文成公全書』1(北京: 中華書局, 2015, p.158) 

퇴계는 이러한 양명의 주장에 대해 주자가 궁리 공부를 버리고 존덕성 공부로 돌아간 것 이 아니라, 주자의 학문 자체가 본래 도문학과 존덕성, 궁리와 함양의 공부를 병행하는 것 이라고 반박하였다.

물론 주자가 당시에 자신의 제자들이 글의 뜻에만 얽매이는 것을 보고 는 본체(本體)에 주목하고 존덕성 공부를 중시하도록 여러 차례 충고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서는 퇴계도 인정하였다.

퇴계는 그러한 폐단이 피상적으로 학문을 하는 말학(末學)의 그 릇됨이라고 지적하며 진정한 주자학과 구분하였지만, 주자 당시의 남송이든 퇴계 당대의 조선이든 그렇게 글자 뜻에 얽매이고 피상적으로 경전의 구절만 되뇌는 주자학도들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주자가 그러한 폐단을 인식하고 제자들에게 존덕성과 도문학의 공부를 병행할 것을 강조했던 사실과는 별개로, 주자학 자체가 덕성 함양보다는 이론적 탐 구에 치중하게 하는 학문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폐단이 지속되고 있었다.12)

주자학의 그러한 이론 편향적 경향성은 바로 상산이나 양명의 주자학 비판이 사 람들의 호응을 받았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퇴계는 주자학이 본래 존덕성과 도문학을 별개로 보거나, 도문학에 치중하는 것 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는 자는 먼저 소학을 공부하고, 격물(格物)을 하고자 하는 자는 함양(涵養)에 힘써야 한다”13)는 것이 주자의 본의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경(敬)에 주력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리(理)를 궁구하여 그 앎을 완성한다”는 주자(朱子, 1130∼1200)의 말을 인용하며 함양과 궁리의 공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마음이 경(敬)에 주력하여 사물의 진실로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면, 마음이 리(理)와 의(義)를 깨달아 눈앞에 온전한 모습의 소가 사라지며14) 안과 밖이 두루 통하고 정밀함과 거칢이 하나 로 합치한다. 이로부터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이 이루어져서 가정과 국가에 나아 가고 천하에 이르니 그 세찬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15)

12)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20a-b. 尊德性과 道問學의 관계와 그에 대한 퇴 계의 입장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Kim Hyoungchan, “T’oegye’s Philosophy as Practical Ethics: A System of Learning, Cultivation, and Practice of Being Human”(Korea Journal Vol.47 No.3,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2007) 참조.

13) 李滉,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退溪集』, 30:420a.

14) 莊子의 解牛 비유를 가리킨다. 莊子, 「養生主」, 『莊子』.

15)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7c.

이렇게 함양과 궁리의 공부는 병행되어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지(知)와 행(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현의 학문은 마음에 근본하여 사물에 관통한다. 그러므로 선을 좋아하면 다만 마음으로만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에 행함에 그 선을 이룸이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 해서 구하여 반드시 그것을 얻는 것과 같다. 악을 미워하면 다만 마음으로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을 행함에 그 악을 제거함이 마치 악취를 미워해서 힘써 결단코 그것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16)

그런데 학문이 이렇게 사물에까지 관통하여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혹은 강렬하게 이루어 지는 것은 성현(聖賢)의 경우이다. 양명이 천하에 마음 밖의 일, 마음 밖의 리(理)는 없다면 서, 마음에 사욕(私欲)의 가려짐이 없는 것이 곧 천리(天理)이며, 그것이 곧 심즉리(心卽理) 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17)

 

퇴계는 궁리공부를 실천공부로 돌려서 뒤섞어버렸다고 비판하였 다.18)

16)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8c.

17)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6d-417a.

18)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7b.

 

그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궁리공부와 실천공부를 엄연히 구분하는 셈이다.

퇴계가 보기에 양명의 공부는 궁리와 실천이 뒤섞여 있었다.

양명은 지행합일을 주장하 며 궁리 공부가 실천에 선행해야 한다는 주자의 입장을 비판하지만, 퇴계는 양명의 주장처 럼 그렇게 지행합일이 가능한 공부는 마음이 형기(形氣)와 관련된 일이라고 지적한다.

달 리 말하자면 그것은 감각적인 반응에 해당된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보는 순간 아름답다 는 것을 알고 이미 그것을 좋아하며, 악취를 맡으면 맡는 순간 악취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 미 그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의리(義理)와 관련된 일은 다르다고 지적한 다.

의리에 관한 일은 노력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반응할 수 없고, 따라서 궁리 공부 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퇴계가 지적한 것처럼 실제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선을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불선(不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선악, 의리 등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못 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반드시 마음속의 진정은 아닌”19) 경우도 많이 있다.

19)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8b.

퇴계의 이러한 설명은 성현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러나 그러한 공부의 완성 단계, 또는 그러한 공부의 목표는 성현들처럼 “마음에 근본 하여 사물에 관통”하는 즉, 마음으로부터 도덕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실천으로 구현 되는 것이다.

맹자가 예로 들었던, 어린아이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 측은 지심(惻隱之心)이라는 도덕 감정이 분출하는 그런 현상이 무의식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신 체 반응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퇴계는 마음이 형기(形氣)에 대해 발현되는 경우와 의리(義理)에 대해 발현되는 경우를 구분하고, 전자의 경우는 배우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배우고 노력해야만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러한 공부와 노력의 목표는 의리에 대해서도 마치 형기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진심으로 의리에 따라 반응하여 자연 스럽게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부의 과정에서는 궁리공부와 실 천공부를 구분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식된 혹은 자각된 리가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그 공부의 목표이며, 그 목표에서는 퇴계와 양명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다 만, 그 차이는 리(理)에 대한 인식 혹은 자각에서 실천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 방식과, 그러한 실천을 이루어 내도록 하는 실질적 추동력을 무엇이라고 보는가에 있었다.

4. 리(理)의 체용(體用)

퇴계는 64세에 연방(蓮坊) 이구(李球, ?∼1573)의 「심우체용론(心無體用論)」을 읽고, 그 문제점을 비판하며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을 썼다.

이 글에서 퇴계는 이연방의 글에 대 해 비판하며 체용설(體用說)을 펼쳤고, 심(心)의 체용(體用)과 리(理)의 체용(體用)에 대한 설명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심의 체용에 관하여, 퇴계는 “심은 하나일 뿐이데, 그 체를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 용을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다”라는 정자(程子, 1033∼1107)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연방이 심의 체용 외에 체용이 없는 심의 단계를 설정하여 심의 근본으로 삼은 데 대해 비 판하였다.

심의 체용을 인정한다면 그 이전에 별도로 체용이 없는 심의 단계가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20)

퇴계는 또한 도리(道理)의 체용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리(道理)에 동(動)함도 있고 정(靜)함도 있으므로, 그 정(靜)함을 가리킨 것이 체(體)이고 동 (動)함을 가리킨 것이 용(用)이다.

그렇다면 도리(道理)의 동정(動靜)의 실상이 곧 도리(道理)의 체용의 실상이다.”21)

20) 李滉, 「心無體用辯」, 『退溪集』, 30:413a.

21) 李滉, 「心無體用辯」, 『退溪集』, 30:413a-b.

이 말 역시, 도리(道理)의 동정을 체용으로 보는 것 외에, 체용이 없는 단계를 도리(道理) 의 근본으로 설정한 이연방의 설을 반박한 것이었다.

이 글을 쓸 당시에 퇴계는 이미 도리 (道理)에 체용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연방을 비판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6년이 지난 70세(1570년 10월 15일)에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리(理)의 용(用)을 그제야 이해한 듯이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전에 내가 잘못된 설을 고집했던 까닭은 다만 ‘리(理)는 감정·의지도 없고 계산하거나 헤아 림도 없고 조작함도 없다(無情意 無計度 無造作)’라는 주자의 설만을 고수하여,

‘내가 물리(物理)의 지극한 곳[極處]에 궁구하여 이를 수 있지 리(理)가 어찌 지극한 곳에 스스로 이를 수 있 겠는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물격(物格)의 격(格, 이르다)이나 무부도(無不 到)의 도(到, 이르다)를 모두 내가 격(格)하고 내가 도(到)하는 것으로만 보았습니다. … 그러 나 (주자는) 또한 말하기를 “리(理)에는 반드시 작용[用]이 있는데 어찌 이 마음[心]의 작용[用] 을 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理의) 작용은 비록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작용이 오묘하기 때문에 실제로 리(理)의 발현은 사람 마음이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고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다만 내가 사물의 리(理) 에 궁구하여 이름[格物]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 리(理)가 스스로 이를[自到] 수 없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격(格物)이라는 말은 진실로 ‘내가 사물의 리(理)의 지극한 곳 에 궁구하여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물격(物格)이라는 말이 어찌 ‘사물의 리(理)가 지 극한 곳에 나의 궁구함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라고 해석될 수 없겠습니까? 이로써 감정· 의지와 조작이 없다는 이것은 리(理)의 본연(本然)의 본체[體]이고, 그 궁구함에 따라 발현되어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이것은 리(理)의 ‘지극히 신묘한 작용[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다만 (理의) 본체의 작위 없음[無作爲]만 알았을 뿐, 그 묘한 작용이 현상으로 드러날[顯行] 수 있음을 알지 못하여, 거의 리(理)를 죽은 것[死物]으로 여기듯 하였으니 진리[道]와 동떨어짐이 그 얼마나 심하였겠습니까?22)

22) 李滉, 「答奇明彦-別紙」, 『退溪集』, 029:466c-467b. “前此滉所以堅執誤說者, 只知守朱子理無情意·無 計度·無造作之說, 以爲我可以窮到物理之極處, 理豈能自至於極處. 故硬把物格之格, 無不到之到, 皆作己 格己到看. … 然而又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則其用雖不外乎人心, 而其所以爲用之妙, 實是理 之發見者, 隨人心所至, 而無所不到, 無所不盡. 但恐吾之格物有未至, 不患理不能自到也. 然則方其言格物 也, 則固是言我窮至物理之極處, 及其言物格也, 則豈不可謂物理之極處, 隨吾所窮而無不到乎. 是知無情意 造作者, 此理本然之體也, 其隨寓發見而無不到者, 此理至神之用也. 向也, 但有見於本體之無爲, 而不知妙 用之能顯行. 殆若認理爲死物, 其去道不亦遠甚矣乎.”

위의 인용문을 보면, 퇴계 자신이 이전에 잘못 생각했었다고 하는 것은, 리(理)는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물리(物理)의 지극한 곳([極處]에 궁구하여 이를 수 있지 리(理)가 어 찌 지극한 곳에 스스로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理)에는 반드시 작용[用]이 있는데 어찌 이 마음[心]의 작용[用]을 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주자 의 말을 보고, “그 (理의) 작용은 비록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작용이 오 묘하기 때문에 실제로 리(理)의 발현은 사람 마음이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고 다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퇴계가 보았다는 주자의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 중 제자인 여도(呂燾, ?∼?)의 질문 에 답한 것이다.

여도는 “리(理)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작용[用]의 미묘함은 실 제로 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혹문(或問)』의 구절을 들며, “이때의 작용은 마음의 작용이 아닙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 다.

리(理)에 반드시 작용이 있는데(理必有用) 하필이면 또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라고 이야기하겠 는가! 마음의 본체[體]는 이 리(理)를 갖추고 있으며, 리(理)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사물에 있으나, 그 작용은 실제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 리(理)의 본체는 사물에 있으나 그 작용은 마음에 있다.23)

23) 『朱子語類』 제97조목. 問: “或問云: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 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不知用是心之用否?” 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 夫心之體具乎是 理, 而理則無所不該, 而無一物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 而用實在心也.” 又云: “理遍在天 地萬物之間, 而心則管之; 心旣管之, 則其用實不外乎此心矣. 然則理之體在物, 而其用在心也.” 次早, 先生 云: “此是以身爲主, 以物爲客, 故如此說. 要之, 理在物與在吾身, 只一般.” 燾.

리(理)에는 본체와 작용[體用]이 있는데, 리(理)의 본체는 사물에 있으나 그 작용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리(理)라는 하나의 존재의 본체와 작용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있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진다면, 그 리(理)가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리 (理)는 사람의 마음과 만물에 다 갖추어져 있지만, 도덕적 판단이나 호오(好惡)와 같은 리 (理)의 ‘작용’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식-판단의 대상인 외부의 사물 안에 리가 있고, 인식-판단 주체로서의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인 사물 안의 리(理)를 인식하거나 혹은 그 리(理)를 기준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마음의 인 식-판단 능력은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리(理, 본성)로부터 비롯되고, 그러한 인식-판단 능력으로 외물의 리(理)를 인식함으로써 개인의 가치판단이 보편적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 록 한다.

그렇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작용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인식되거나 혹은 판단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작용’은 리(理) 자체의 ‘작용’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4)

24) 理의 형이상학적 ‘작용’의 의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김형찬,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서울: 바다출 판사, 2018), pp.123∼143 참조. 

그런데 리(理)에 체용이 있다는 것은 퇴계가 이미 「심무체용변」(1564)을 썼던 당시에 분 명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퇴계가 이제야(1570)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격물(格物) 또는 물격(物格)의 과정에서 마음이 물리(物理)를 인식할 때 사물의 리(理)가 단순히 인식 대상으로서 피동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리(理)의 작용이 기능하는 것이며, 그러한 리 (理)의 작용이 마음 안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퇴계는 그러한 리(理)의 작용은 리(理)가 스스로 이르는 것(理自到)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였다.

퇴계의 두 글 사이에 는 약 6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에 퇴계가 리(理)의 체용(體用)에 관해 더 깊이 고민했 던 이유, 그리고 그가 고민 끝에 사망하기 약 50일 전에 제기한 리자도설(理自到說)의 의미 에 대해, 앞 장에서 살폈던 퇴계의 『전습록(傳習錄)』 비판과 연관하여 검토해 볼 필요가 있 다.

5. 의리(義理)의 인식과 실천

양명의 경우에 마음이 곧 리(心卽理)라는 것은 마음에서 사심(私心)만 제거하면 그 마음이 곧 리(理)에 해당한다는 것이다.25)

사심만 제거하면 그 마음이 바로 순선한 리(理)이므 로 “부모를 보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고 형을 보면 자연히 공경할 줄 알며, 어린아이가 우 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할 줄 안다”26)고 그는 주장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뜻이 장애가 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치지격물(致知格物) 공부를 해서 사사로움을 이기고 리(理)를 회복해야”27)한다.

그렇게 되 면, 그 마음은 선을 볼 경우에 선(善)을 알아보는 동시에 이미 선을 좋아하며, 악을 볼 경 우에는 악을 알아보는 동시에 이미 악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명은 그러한 관점에서 주자가 마음과 리(理)를 둘로 나눈다고 비판하였다.28)

25) 王守仁, 『傳習錄』, 제94조목. 

26) 王守仁, 『傳習錄』, 제8조목.

27) 王守仁, 『傳習錄』, 제8조목.

28) 王守仁, 『傳習錄』, 제33조목.

주자는 본성이 곧 리(理)이고 마음은 기(氣)이며, 리(理)로서의 본성이 기(氣)인 마음 안에 있다고 보았으므로, 그것은 마음과 리(理)를 둘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주자의 격 물설(格物說)에 따르면, 마음은 내재하고 있는 본성[理]에서 비롯되는 허령한 지각 능력으 로 외부 사물의 리(理)를 인식한다.

물론 그렇게 인식된 외물들의 리(理)가 마음 안의 리 (理, 본성)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깨달을[豁然貫通] 때, 마음은 그렇게 인식된 보편 적인 리(理)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 마음은 리[본성; 仁義禮智]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 라서 본능적으로 도덕 감정을 발현한다.

그렇다면, 격물(格物)을 통해 인식된 리(理)에 따 라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행동과, 본능적으로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발현되는 도덕 감정 사이에는 간극이 상존한다.

성인의 경우에는 전자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어서 후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주자가 말하 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궁리(窮理) 공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 데 반해, 후자는 맹자가 말한 사단의 발현으로서 궁리 공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 다.

퇴계는 마음이 형기(形氣)에 대해서는 자연히 반응하는 것과 달리 의리(義理)에 대해서 는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올바로 반응할 수 없다며 양명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바 있 었다.29)

하지만 맹자의 말처럼 사단(四端)이라는 도덕 감정이 발현하는 것은 공부도 노력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퇴계는 고봉과의 사단칠정논쟁 때에 그것을 리지발(理之發) 또는 리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평소에 미발시(未發時)의 공부를 해 두어서, 일상에서 외물의 자극이 왔을 때 도덕 감정이 본능처럼 반사적으로 발현하도록 해 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때 본능으로서 도덕 본성인 리에 집중하면 될 뿐, 그 외에 매개체 로서의 기의 역할에 대해서는 별달리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양명의 설에 따르면, 사심(私心)만 제거하면 마음이 곧 천리(天理)이므로 천리인 그 마음 은 천리의 기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고, 동시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감정을 발 현한다.

마음은 그 자체가 보편적 규범이자 그 규범에 따라 도덕 감정을 발현하는 주체이 다.

그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오직 사심이고 그 사심을 제거하면 사람의 마음은 곧 도덕규 범인 동시에 도덕 감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퇴계가 양명을 비판하면서 궁리 공부를 실천 공부 및 그 효과와 뒤섞어서 논한다고 비판했던 것은30) 바로 이 때문이었다.

29)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 418a-b.

30) 李滉, 「傳習錄論辯」, 『退溪集』, 30:417b.

양명의 관점에서는 리[=마음]에 관한 논의를 판단-행위 주체에 관한 논의와 구분하지 않으며, 구 분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어느 관점이 옳으냐 하는 것은 사실의 타당성이나 논리적 정합 성보다, 어느 쪽이 도덕 감정 발현 및 도덕적 판단-행위를 설득하고 이끌어내는 데 더 효 과적이냐 하는 것으로 결정될 것이다.

사심(私心)을 제거하고 천리(天理)와 일치하도록 하는 것은 유가에서 공부·수양의 기본 적 방법이자 목표이다. 사심은 인욕(人欲) 또는 사욕(私欲)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에는 만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보편적 원리이자 규범이 있고 그 구성원으로서의 사람들은 그 원리-규범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적 삶을 방해하는 것은 개체들의 이기적인 사적 욕망들이다. 그러한 개체적 관점의 욕망을 배제하고 개체의 관심과 지향을 자연 혹은 우주 차원의 공적 질서와 합치하도록 하는 것이 주자학과 양명학을 포함한 유 가의 목표이며, 그것을 성취한 자가 바로 유가의 성인이다.

‘알인욕 존천리(遏人欲 存天理)’ 또는 ‘멸인욕 존천리(滅人欲 存天理)’라는 명제는 바로 그러한 공부를 의미한다.

퇴계가 『근사록(近思錄)』이나 『사서(四書)』 못지않게 좋은 책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제자 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기도 했던 『심경부주(心經附註)』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수양 방법 을 담은 책이었다.

그것은 “마음을 기르는 데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 다”31)는 맹자의 말에 따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개인의 기호와 욕구를 제거함으로써 천리(天 理)에 다가가도록 하는32) 마음 수양의 방법을 모아 편찬한 책이었다.

31) 眞德秀, 『心經』(대전: 학민문화사, 1995), pp.272∼273. “孟子曰養心莫善於寡欲.”

32) 眞德秀, 『心經』(대전: 학민문화사, 1995), pp.272∼273. “程子曰人於天理昏者, 只爲嗜欲亂著他.”

그것은 바로 개체로 서 사람 마음의 판단 기준을 보편적 진리[天理]의 수준으로 맞추는 공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퇴계의 입장에서는 사욕을 아무리 제거해도 천리(天 理)는 마음 안에 성으로, 그리고 마음 밖에 사물의 리로서 나뉘어 있고, 격물궁리의 공부를 통해서 인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경우에 도덕 감정의 발현과 가치 판단의 주체로 서의 마음은 도덕규범 자체와 구분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주자학에 서 빼놓을 수 없는 공부이다.

사물에 다가가서 사물들의 리를 탐구하여 그것이 내 마음 속 의 리와 동일한 보편적 이치임을 깨닫는다[豁然貫通]고 해도, 그 리를 구현하는 주체로서 의 마음과 구현되어야 할 원리/규범으로서의 리는 구분된다.

마음이 미발시(未發時)에 충 분한 공부와 수양을 통해, 발현되는 순간 마음이 마치 리 자체인 듯이 발현되는 것으로 이 해할 수도 있겠지만, 퇴계는 그러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은 듯하다.

6. 퇴계심학(退溪心學)의 기제(機制)

퇴계는 고봉과 사단칠정에 대해 논하면서, 마음에 리(理, 본성)가 있고 그 리가 온전히 발현하도록 하는 데 기(氣)인 마음이 리[본성]의 대리 혹은 매개의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발현하는 주체는 근본적으로 리[본성]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것을 리발(理發)이라는 명 제로 설명하려 했지만, 고봉조차도 그것을 기가 리에 순종해서 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 다.33)

33) ‘理發’에 대한 퇴계와 고봉의 이해의 차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김형찬,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 다』, pp.112∼113 참조.

격물(格物)-물격(物格)의 경우에도 인식 주체인 마음이 인식 대상인 사물의 리를 인 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리[본성]를 갖춘 마음이 사물의 리를 인식한다는 것이 되고, 그 렇게 인식한 리를 가지고 기인 마음이 판단-행위를 하는 것이 된다.

마음이 리를 인식하는 과정과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이 구분되는 한 육왕학(陸王學)에서 비판하는, 지리한 공부의 단계에 머무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인식과 실천, 지(知)와 행(行) 사이의 간 극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퇴계는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제기하며 격물 (格物)-물격(物格)의 과정에서 리를 ‘인식되는 주체’로서 볼 수 있음을 주장하였지만, 고봉 의 명확한 답변은 받지 못하였다.

양명은 인식-실천의 주체와 그 기준으로서의 보편적 이치를 일치시킴으로써 인식과 실 천의 간극을 메우고 그 이치에 따른 판단-행위의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논리를 만 들어냈다.

퇴계는 이러한 양명의 방법이 보편적 이치의 탐구와 개체적 실천을 혼동하고, 일 상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지나친 주관화로 빠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양명 이 지적한 문제점, 즉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도덕본성이 도덕감정 으로 발현될 때, 그 자발성을 리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음이 외물의 리를 인식할 때 그 리에 대한 마음의 인식을 리 자체의 드러남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진리의 인 식과 실천이 모두 리 자체의 능동적 구현으로 설명되고, 리 자체가 마음이라는 기, 신체라 는 기를 이용해서 그 자체를 드러내고 구현하는 것이 된다.

퇴계가 사단칠정논쟁 과정에서 제기한 ‘리발(理發)’, 그리고 생애 거의 마지막까지 고민 끝에 제기한 ‘리자도(理自到)’ 등의 논의는 이러한 퇴계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퇴계의 학문에 ‘심학(心學)’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혹은 퇴계의 ‘심학’ 을 양명의 ‘심학’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에 대해 적잖은 논란이 있지만,34) 문제의 관건 은 마음이 도덕적 인식/실천을 하는 과정의 기제(機制, mechanism)에 있다.

34) 퇴계의 心學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T’oegye’s Philosophy as Pratical Ethics”, Korea Journal, Vol.47 No.3, Korea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2007)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근래에 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정리한 글로 김세정, 『한국 성리학 속의 심학』(예문서원, 2015, pp.79∼91)을 참고할 만하다. 

마음이 보편 적 원리로서의 리를 인식하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를 한다면, 인식 혹은 실천의 주체와 그러한 인식/실천의 기준 사이에는 분명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런데 퇴계 는 마음이 아닌 리를 인식/판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제시한 것이다.

퇴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이 외물의 리를 인식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관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되는데, 이 때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마음보다 인식되는 ‘주체’로서의 리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식/판단/행위할 때 그 주체로서 마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간과해 서는 안 될 것은 실제로 인식되어 판단과 행위의 준거로서 ‘역할’을 하는 리라는 입장이다.

퇴계가 양명의 심학에 비판적이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나의) 마음이 곧 리(心卽 理)’라고 간주하는 양명의 방식이 일상세계를 외면하고 지나친 주관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과 같은 퇴계의 심학이 가지는 의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 또는 성리학의 공부는 궁극적으로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마음의 판단 기준이 보편적 이치와 일치하도록 하는 것[遏人欲 存天理]을 지향한다.

양명도 사욕을 완 전히 제거하면 그 마음이 곧 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체로서 살아가는 인간 이 개인의 마음에서 사욕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또한 일순간 사욕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해도 매 순간 사욕은 다시 고개를 들기 마련이 다.

그래서 퇴계는 양명의 공부방식이 사욕의 발흥을 두려워하여 아예 일상세계를 외면하 고 주관화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이에 인식되어 판단-행위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 는 리를 개인의 마음의 관점이 아니라 리 자체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순수하고 완전한 도덕적 기준으로서의 리가 인간의 마음을 통해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를 구현해 나가는, 리와 마음의 이상적 메커니즘을 구상하였던 듯하다.

마음은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 되고 판단과 행위의 준거로서 역할을 하도록 전심전력으로 노력을 다하지만, 그 모든 과 정은 리가 주체로서 그 자체를 드러내고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의 신체적 혹은 기질적 영역 안에 있는 마음의 사적·주관적 편향을 궁극적으로 넘 어서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연과 일치하는 수준의 도덕적 가치 기준이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인식되고 실천되는 가장 이상적인 과정을 그려낸 것이라는 점에서,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한 부단한 공부와 수양은 여전히 과제로 남겨진다.

이처럼 퇴계는 마음에 대한 논의를 리 자체에 대한 논의로 전환시킴으로써 심학(心學)의 방향을 새롭게 열며 그러한 논의를 공론화하였고, 퇴계의 논리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진리 의 인식과 실천의 과정에서 리와 마음의 역할에 대한 문제는 조선유학의 중심에 놓게 되었 다.

물론, 처음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퇴계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그에게 동의할 수도 없었 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주자학이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많은 학자 들이 고봉, 율곡처럼 그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그 논의에 뛰어들었고, 그러한 논의를 진행 하면서 주자학 공부의 목적을 다시 성찰하고, 이론 논의가 수양-실천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논의 과정에서 양명의 마음 중심의 심학은 설 자리를 잃었고, 리 중심 의 퇴계 심학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더욱이 실제로 조선의 건국과 운영을 담당한 주체 들로서 지식인 관료들의 논의는 단지 이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운영과 연관된 속 에서 진행되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선유학이 성립 발전하였다.

7. 맺음말

조선에서 건국의 이념이 된 유학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중국 성리학의 수용 단계를 넘어 서 철학이론과 통치이념이 결합되어 현실에서 기능하는 명실상부한 ‘조선유학’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유학은 이후 300여 년간 조선의 문치를 구현하는 기반이 되 었다.

한국철학사에서 그러한 전기를 이룬 대표적인 학자로 퇴계와 율곡을 드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철학사에서 이 두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주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 論爭)과 연관된 리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의 역할이다.

이 글에서 논자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 시기에 이러한 논의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당시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양명학의 직·간접적 영향과 그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할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퇴계이다.

퇴계는 바로 이 시기 사단칠정논쟁을 야 기한 학자이고, 또한 양명의 『傳習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양명학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물론 남겨진 기록으로 보면 퇴계는 양명의 학문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이후 양명학은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선유학의 전개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양명학이, 단지 몇몇 학자가 비판하고 배척했다고 해서 조선유학 의 전개에서 배제되었다고 본다면, 그것은 쉽게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다.

양명의 주자 학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면,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을 것이고, 논자는 퇴계의 글들 속에서 그러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보고 자 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조선유학이 중국의 주자학과 다른 특색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양명학이 조선유학의 주된 논의 안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하는 데 중요 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논자는 그러한 관점에서 퇴계에게 주목하였고, 퇴계의 리발설(理發說), 리자도설(理自到 說) 등이 바로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성과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퇴계는 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형기(形氣)에 관 한 일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으나 의리(義理)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 판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유학에서 지향하는 것은 의리(義理)에 관해서도 형기(形氣)에 대 한 것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판단·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이었고, 맹자가 도덕감정의 자연 발현의 예로 제시했던 유자입정(孺子入井)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퇴계는 도덕 감정·판단·행위의 자발성을 리(理)의 ‘역할’[發 또는 自到]로 설명 함으로써 양명의 비판을 주자학의 기반 위에서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하려 하였고, 이 는 마음 중심의 양명 심학을 리 중심의 퇴계 심학으로 대체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었다.

이 러한 시도에 대해 조선 지식인들이 반대 혹은 찬성의 의견으로 논의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 선유학은 주자학을 보완하고 양명학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국문요약]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직접 참여했던 16세기 ‘사단칠정논쟁 (四端七情論爭)’은 조선의 학자들이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관련 논의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조선유학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퇴계와 율곡, 그리고 이후 조선유학자들이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논의에 집중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건국 이래로 그들이 추구해 온 주자학에 대한 반 성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 혹은 보완책 모색이라는,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의 과제에 주 목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비판하며 성장한 양명학이 유행하고 있었 고, 조선 지식인들의 철학적·이념적 반성은 그러한 양명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 러나 조선에서 양명학은 강렬한 비판에 직면하였고, 조선유학은 양명학을 배제하고 이기 심성론 논의에 주력하면서 독특한 학문적 기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논의 과정의 중심에는 양명학 비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퇴계가 있었다.

퇴계는 양 명학의 학문적 성과를 수용하는 대신에, 양명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 에 적극 대응하며 주자학을 보완하는 길을 택하였다.

퇴계의 리발설(理發說), 리자도설(理 自到說) 등은 바로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 어진 성과였다.

퇴계는 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형기(形氣)에 관한 일에 대해서 는 적용될 수 있으나 의리(義理)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 만 실제로 유학에서 지향하는 것은 의리(義理)에 관해서도 형기(形氣)에 대한 것과 마찬가 지로 본능적·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판단·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고, 맹자가 도덕감정의 자연 발현의 예로 제시했던 유자입정(孺子入井)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퇴계 는 도덕 감정·판단·행위의 자발성을 리(理)의 ‘역할’[發 또는 自到]로 설명함으로써 양명 의 비판을 주자학의 기반 위에서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하려 하였고, 이는 마음 중심의 양명 심학을 리 중심의 퇴계 심학으로 대체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조선 지식인들이 반대 혹은 찬성의 의견으로 논의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선유학은 주자 학을 보완하고 양명학을 넘어선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퇴계가 양명학을 비판하며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그 문제의식을 포용해 냄으로 써, 양명학이 조선에서 뿌리 내릴 여지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기심 성론(理氣心性論)의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유학이 성립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

[ABSTRACT]

T’oegyeYi Hwang’s Critique of Yangmingism, T’oegyeSimhak, and the Establishment of Joseon Confucianism Kim, Hyoung-chan (Korea, Korea University)

The controversy over the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四端七情論爭),which occurred in the sixteenth century with both T’oegye Yi Hwang (退溪 李滉) and Yulgok Yi I (栗谷 李珥) being directly involved, became a crucial catalyst that made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pay special attention to discussions around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理氣心性論); eventually, this became a key characteristic of Joseon Confucianism. Nevertheless, if one seeks to find theroot cause of T’oegye, Yulgok, and future Joseon Confucianists’ concentration on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one should focus onthe Joseonera intellectual community’s task at hand: to reflect critically on the theories of Zhuxi (朱熹), which had been the mainstream school of neo-Confucianism since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late fourteenth century, with the intent of improving on it or finding an alternative. Around this time, Yangmingism had gained popularity in China, establishing itself through the criticism of the teachings of Zhuxi; there was no way for the Joseon-era intellectuals to be free from the influence of Yangmingism in the self-criticism of their own philosophy. However, Yangmingism faced strong criticism in Joseon, and the school of Joseon Confucianism started establishing a unique academic tradition that focused on discussions of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while avoiding the ideas of Yangmingism. T’oegye stood at the heart of such discussions, because he had made crucial contributions to the criticism of Yangmingism. Instead of accepting the academic achievements of Yangmingism, T’oegye chose to complement the theories of Zhuxi as he actively addressed Wang Yangming’s criticisms toward it. Theories such as the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and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were the outcome of T’oegye’s critical assessment of Yangmingism’s criticisms of the theory of Zhuxi. T’oegye criticized Yangming’s theory of Chin-hsing ho-yi (知行合一說), claiming that it could only be applied to the concept of material disposition (or physical matter, 形氣), not to the concept of moral norm (or righteous principle, 義理). Yet, the actual aim of Confucianism was to promote instinctive and spontaneous moral actions, decision-making, and emotions for moral norm (義理), just like what people would do for material disposition (形氣); one such example is Mencius’ thought-experiment on the natural manifestation ofmoral emotionality, which says “anyone would feel benevolence (惻隱之心) if they were to see a child crawling toward a well (孺 子入井).” T’oegye desired to actively accommodate and overcome Yangming’s criticisms upon the foundations of Zhuxi’s theories by explaining the spontaneous nature of moral actions, decision-making, and emotions as the “role” (facilitated by 發 or 自到) of li(理). As Joseon-era intellectuals joined such discussions, some 338 第28次 退溪學國際學術會議 現代人의 삶, 退溪에게 묻다 339 agreeing and some disagreeing with T’oegye, Joseon Neo-Confucianism took its unique path that complemented the theory of Zhuxi and as a result overcame the school of Yangming. Thanks to T’oegye’s critical attitude toward Yangmingism and the successful counterargument to it within the framework of Zhuxi’s theory, Yangmingism fundamentally lost the opportunity to take root in Joseon. Amidst these circumstances, Joseon Confucianism took the opportunity to establish itself as aunique version of Confucianism, characterized by deeper and more complex discussions of the theory of li, gi, heart-mind and nature (理氣心性論)

논평문/ 羅大龍 成均館大

김형찬 교수님의 「퇴계의 양명학 비판과 퇴계심학, 그리고 조선유학의 성립」을 읽고

 

1. 김형찬 교수님(이하 논자로 약칭)의 「퇴계의 양명학 비판과 퇴계심학, 그리고 조선유 학의 성립」은 기존의 연구 논문이 거의 없는 논문입니다.

그 이유는 본 논문의 영역이 새로운 분야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심오하고 방대하기 때문에 누구든 쉽게 연구할 수 있는 연구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 논문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본질 및 그 차 이’, ‘퇴계학과 양명학의 본질 및 그 차이’, ‘퇴계의 양명학 비판의 의미’, ‘퇴계 심학의 본 질’,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이기논변의 의미’, ‘율곡의 이기설의 본질’, ‘조선 후기의 퇴 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이기설의 본질’ 등을 총망라하여 그 핵심을 꿰뚫지 않고는 쓸 수 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자는 이미 오랜 연구기간 이 분야 를 연구하셨으며 그로 인한 연구 성과를 쌓으셨습니다. 그런 바탕에서 야심차게 본 논 문을 기획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논평자는 본 논문을 통해서 논자의 노고와 열정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논평자의 부족한 학문으로 가능한 부분만을 거론하여 보겠습니다. 論評文 340 第28次 退溪學國際學術會議 現代人의 삶, 退溪에게 묻다 341

2. 우선 본 논문의 목차에 대하여 거론하여 보겠습니다. 본 논문을 처음 읽을 때, 목차와 관련하여 매우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 논문은 “1. 머리말, 2. 퇴계의 양명비판, 3. 궁리와 실천의 관계, 4. 리의 체용, 5. 의리의 인식과 실천, 6. 퇴계 심학 의 기제, 7. 맺음말” 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글의 문맥 속에서 “3. 궁리와 실천의 관계, 4. 리의 체용”이 왜 나왔는지 어리둥절해하면서 본 논문을 읽었습니다.

특히 “4. 리의 체용”은 글을 읽는 내내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어리둥절해하며 읽었습니다. 논평자 는 본 논문을 여러 차례 읽고 난 후에 왜 “4. 리의 체용”을 썼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습 니다.

“3. 궁리와 실천의 관계”는 자세히 읽어보니 앞의 항목인 “2. 퇴계의 양명비판”에 이어서 퇴계와 양명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2. 퇴계의 양명비판”의 말 미에 퇴계와 양명의 차이점을 다음 항목인 “3. 궁리와 실천의 관계”에서 논하겠다고 기 술하였으면 본 논문을 읽어나가는데 매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리고 “4. 리의 체용”은 사실상 “6. 퇴계 심학의 기제”에서 리자도설(理自到說)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논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 “4. 리의 체용”을 갑자기 앞으로 끌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리한 논리 전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본 논문 은 방대하고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다양하게 포함하는 논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논문 의 주제나 내용을 가능한 알기 쉽고 간편하게 요약하는 일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 각합니다.

3. 본 논문은 위에서 말한 바대로 매우 범위가 방대하고 심오합니다.

그래서 본 논문의 연구는 각 분야에 대하여 빈틈없는 연구가 기초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본 논문에는 주자, 양명, 퇴계가 ‘심’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리를 어떻게 이해 하였는가? 아울러 논자는 심, 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등등의 중요한 기초항목들을 명확히 해야만 하는 가치 있는 논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본 논문 속에는 정확하게 원전의 각주를 달지 않은 채, 주자의 주장1), 양명의 주장2) , 퇴계의 주장3)을 기술한 부분이 여러 번 나옵니다.

1) p.8. 14째줄∼19째줄.

2) p.5. 7째줄. p.9. 1째줄∼4째줄. p.9. 5째줄∼8째줄. p.10. 8째줄∼9째줄.

3) p.4. 4째줄∼6째줄, 15째줄∼16째줄. p.8. 밑에서 5째줄∼2째줄. p.10. 24째줄∼29째줄. p.11. 2째줄∼7째줄.

주자, 양명, 퇴계의 주장에 대한 정 확한 원전을 각주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 본 논문에서 논자가 주장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자학은 “덕성 함양보다는 이론적 탐구에 치중하게 하는 학문적 경향을 지니고 있 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폐단이 지속되고 있었다.”(p.4),

2) 이를 비판하며 성장한 양명학은 “(주자학이) 마음과 리를 둘로 나눈다고 비판하였 다”(p.8)

3) 그리하여 “양명은 인식-실천의 주체[心]와 그 기준으로서의 보편적 이치[理]를 일치 시킴으로써 인식과 실천의 간극을 메우고 그 이치에 따른 판단-행위의 자발성을 이 끌어 낼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p.10)

4) 퇴계는 “이러한 양명의 방법이 보편적 이치의 탐구와 개체적 실천을 혼동하고, 일상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지나친 주관화로 빠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양명이 지적한 문제점, 즉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p.10)

5) 그리하여 퇴계는 “마음이 아닌 리를 인식/판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제시한 것이다. 퇴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이 외물의 리를 인식하기 위해 전심전력 으로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관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보 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되는데, 이때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마음보다 인식되는 ‘주 체’로서의 리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식/판단/행위할 때 그 주체로서 마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실제로 인식되어 판 단과 행위의 준거로서 ‘역할’을 하는 리라는 입장이다”(p.10)

6) “도덕본성이 도덕감정으로 발현될 때, 그 자발성을 리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음이 외물의 리를 인식할 때 그 리에 대한 마음의 인식을 리 자체의 드러남 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진리의 인식과 실천이 모두 리 자체의 능동적 구현으로 설명 되고, 리 자체가 마음이라는 기, 신체라는 기를 이용해서 그 자체를 드러내고 구현하 는 것이 된다.

퇴계가 사단칠정논쟁 과정에서 제기한 ‘理發’, 그리고 ‘理自到’ 등의 논 의는 이러한 퇴계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p.10) 7) 그리하여 “퇴계의 理發說, 理自到說 등이 바로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 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p.12)라는 것이다.

즉 “퇴계는 도덕 감정·판단·행위의 자발성을 理의 ‘역할’(發 또는 自到)로 설명함으로써 양명의 (주 자)비판을 주자학의 기반 위에서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하려 하였고, 이는 마음 중심의 양명 심학을 리 중심의 퇴계 심학으로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 (p.12)는 것이다.

6. 논평자의 생각으로는 본 논문에서 핵심적인 논자의 주장은

1) “양명이 지적한 문제점, 즉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p.10)라는 논자의 주장입니다. [5-4)]

논자는 양명은 ‘인식과 실천의 간극을 메우고 그 이치에 따른 판단-행위의 자발성 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p.10)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논자는 퇴계는 “이러한 양명의 방법이 보편적 이치의 탐구와 개체적 실천을 혼동하고, 일상세계로부 터 도피하여 지나친 주관화로 빠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p.10)라고 말하지만, 바로 이어서 “양명이 지적한 문제점, 즉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p.10)라고 말합니다.

즉 논자는 퇴계의 양명 비판에도 불구하고 양명이 지행합일설로 해결한 ‘인식과 실천의 분리’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였다고 주장합니다.

본 논문에서 이 부분은 논자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논자는 이 주장에 근 거해서 이하에서 퇴계의 리발설, 리자도설도 인식과 실천의 분리를 해결한 설로 증명하 고, 따라서 퇴계의 리발설, 리자도설은 ‘양명의 (주자)비판을 주자학의 기반 위에서 능 동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하였다’(p.12)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논자의 주장처럼 ‘양명이 해결한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 제’인가요?

과연 퇴계도 그렇게 생각하였을까요?

논자는 퇴계도 이 점에서는 동의하지 만, 인식과 실천을 합일시키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양명의 마음 중심의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리 중심의 퇴계심학을 주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논자의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주장은 주자, 퇴계의 선지후행 (先知後行), 지행병진(知行竝進)과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충분한 비교한 다음 에, 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닐까요?

본 논문에서 논자가 인용한 「전습록논변」의 후반에 는 퇴계가 지와 행의 분리에 대하여 말한 부분4)이 있는데 논자는 왜 이러한 퇴계의 주 장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까?

4) 『퇴계선생문집』 권41 「전습록논변」 : 夫以知痛痒識饑飽爲性。此本出於告子生之謂性之說。陽明所見。正慣於 此。故信口說出。以飾其辯。然而其說但可施於形氣之欲。而不可喩於義理之知行。故於孝於弟。不曰知孝已自孝。知 弟已自弟。但曰人之稱孝稱弟者。必已行孝行弟。則與前後語意。不相諧應。終言古人所以旣說知又說行處。未免只 依舊分作兩箇說。蓋道理本如此。終衮合不得故也。 

또한 퇴계는 율곡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궁리와 거경(실천)을 ‘머리와 꼬리를 이루는 양단의 공부’라고 말하면서, ‘절대 나누어지 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궁리와 실천이 서로 나아가는 것을 법으로 삼아서 멈추 지 말라’고 말합니다.

퇴계에게는 인식과 실천의 분리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아닌 듯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논자 는 어떻게 단정적으로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주장하는지요?

그 리고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문제를 퇴계 철학(리발설, 리자도설) 에 까지 관통하여 적용하려고 하는 것인지요?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고 싶습니다.

2) 퇴계는 “마음이 아닌 리를 인식/판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제시한 것 이다.”(p.10) 라는 논자의 주장입니다.

‘리를 인식/판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논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관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 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퇴계는 자 신의 이기호발설, 리자도설을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관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되어서 리를 인식/판 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으로 생각했을까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감정의 본래구조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 설이었습니 다. 퇴계의 리자도설(理自到說)도 인식의 본래구조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 설입니다. 즉 퇴계의 ‘理發’, ‘理自到’은 인간의 감정과 인식의 본래구조에 대한 설입니다. “전심전력으 로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관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가 인식되어서 리를 인식/판단/실천의 주체로 보는 관점의 전환”을 말하 는 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논자는 퇴계철학(리발설, 리자도설)을 그 자체로 연구하기보다는 지행합일이라는 관 점에 맞추어서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논자의 주장처럼 ‘양명이 해결한 인식과 실천의 분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인가요?

4) 퇴계철학에서 이기호발설을 인간감정의 구조로 이해하고, 리자도설을 인간인식의 구 조로 이해하면서, 이러한 인간 감정과 인식에 대한 이해가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7. “퇴계의 理發說, 理自到說 등이 바로 양명학의 주자학 비판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p12) 라고 한다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주장하 는 율곡의 이기설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Abstract

After reading Professor Kim Hyong-chan’s “T’oegye Yi Hwang’s Critique of Yangmingism, T’oegyeSimhak, and the Establishment of Joseon Confucianism,”

Na, Dae-yong (Professor in charge of Dongin Cultural Center)

1. Professor Kim Hyung-chan’s “T’oegyeYi Hwang’s Critique of Yangmingism, T’oegyeSimhak, and the Establishment of Joseon Confucianism,”is a paper ,as far as commentator knows, that there are few existing research papers. The reason for this was not because this paper was a new field, but because it was so profound and vast that it was not an easy area to study. This paper has a comprehensive view of ‘the nature and its differences between Zhu xi(朱熹) and Yang Ming(陽 明)’, ‘the nature and its difference between T’oegye(退溪) and Yang Ming(陽明)’, ‘the nature of T’oegye’s criticism on Yang Ming(陽明)’ and ‘the essence of T’oegyeSimhak‘ and so on. Professor Kim Hyung-chan has already studied this field for a long period of time and have built up the results of the research. That is why I think you ambitiously planned this paper. It is a great honor to comment on a paper that can truly feel [ABSTRACT] 346 第28次 退溪學國際學術會議 現代人의 삶, 退溪에게 묻다 347 the hard work and passion of Professor Kim Hyung-chan. But on the other hand, I feel a burden that I can’t handle. Let me mention only the possible aspects of the commentator’s lack of knowledge. 2. Let’s talk about the table of contents of this paper first. When I first read this paper, I felt very incomprehensible about the table of contents. This paper is composed of “1. Headword, 2. T’oegyeYi Hwang’s Critique of Yangmingism, 3. Relationship between consideration and retrogression, 4. Li’s the thing and its function 5. Right’s Recognition and Practice, 6. Mechanism of T’oegyeSimhak, 7. Ending.” I read this paper, puzzled over why it came out in the context of the text. In particular, “4. Li’s the thing and its function” was read the whole time, puzzled by why this story came up. After reading this paper several times, the commentator was able to understand why he wrote “4. Li’s the thing and its function.” I thought that the logic development of this paper was not kind. 3. As mentioned above, this paper is very extensive and profound. So the research in this paper requires a thorough study of each field. For example, this paper has a lot of important basic items such as ‘what is a shim(心)’ and ‘what is a Li(理)’ and so on. So I think it is necessary for this paper to clarify the basic definition of the argument for these basic items. It’s very cumbersome, but I think that by organizing these basic concepts of understanding, further research can be accumulated. 4. In this paper, the argument of 朱子, p.8, 14th and 19th lines, the argument of 陽明 p.5, line 7. T’oegye’s claim p.4 Fourth row to sixth row, 15th line to 16th row, is not accurately attached to original text. 5. In this paper, the core argument of the thesis is: 1) Zhu Jia-hak(朱子學) said, “It is true that the academic tendency to focus on theoretical exploration rather than the cultivation of Deokseong(德性) (p.4); 2) Yang Ming-hak(陽明學), who grew up criticizing Zhu Jia-hak(朱子 學), criticized that “(Zhu Jia-hak(朱子學)) divides the mind(心) and the Li(理) into two” (p.8) 3) Thus Yang Ming-hak(陽明學), “by matching the recognition-practice principal, have created a logic that fills the gap between recognition and practice. 4) T’oegye said, “It seems that these methods of Yang Ming-hak(陽明學) confuse the exploration of universal logic with the individual practice, and fall into excessive subjectivity. However, the problems pointed out by both men, namely the separation of recognition and practice, were tasks to be solved,” (p.10) 5) So T’oegye suggested a shift in perspective of “Li(理)‘s recognition/ judgment/actualization, not mind(心).” According to T’oegye’s explanation, if the mind(心) tries its whole heart to recognize the li(理) of a foreign object, at some point it is perceived as a universal reason that is not distorted by the subjective or private mind.(p.10) 6) “When morality is expressed as a moral emotion, if it can draw its spontaneity out of Li(理) itself, the spirit itself is revealed and implemented using the spirit of the mind and the body. (p.10) 7) Thus, “T’oegye’s the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etc. were achieved in a critical mind to actively overcome the criticism of Yang Ming-hak(陽明學)on Zhu Jia-hak(朱子學)’” (p.12). (p.12). 6. The following questions may be asked about the ‘key arguments’ above.As for 5-1): Did T’oegye think that Zhu Jia-hak(朱子學) have an academic tendency to focus on theoretical exploration rather than moral cultivation? As for 5-2) Did T’oegye think that as Yangming said, in Zhu Jia-hak(朱 子學) is the subject divided between the mind(心) and the Li(理)? Isn’t it too uncritically acceptable for Professor Kim to take the Criticism on Zhu Jia-hak(朱子學) ? As for 5-3) Did T’oegye think that Yang Ming-hak(陽明學) successfully created the logic that he can bridge the gap between perception and practice and derive the spontaneity of judgment-action based on its logic? The writer only sheds light on the significance of Yang Ming-hak(陽明學) in terms of ‘combination of awareness and practice’. As for 5-4) Did T’oegye really think that ‘separation of perception and practice’ was a problem? T’oegye has claimed to keep abreast of knowledge and conduct(知行竝進). Then, if T’oegye insisted on the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and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thinking that “separation of perception and practice” is 350 第28次 退溪學國際學術會議 現代人의 삶, 退溪에게 묻다 351 a problem, the argument is not unreasonable? As for 5-5) Did T’oegye really think that T’oegye’s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and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were “providing a shift in their view of Li(理) as the subject of perception/judgment/actualization?” If so, what is the basis on it? As for 5-6): Wasn’t the argument intended only to see T’oegye’s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and the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from the perspective of ‘Unseparation of the perception and practice of truth’? T’oegye’s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was based on an analysis of the original structure of emotion. T’oegye’s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is also a theory of the original structure of perception. Did T’oegye’s exploration of the original structure of human emotions and perceptions naturally leads to the nonseparation of the perception and practice of truth? As for 5-7): Was T’oegye actively trying to accommodate Yangming‘s criticism on Zhuxi (朱熹)? Shouldn’t ‘Li-centered T’oegyeSimhak’ be called Li-hak(理學), not Sim-hak(心學)? Is there a reason why you call it Simhak(心學)? 7. “If T’oegye’s theory of the manifestation of li(理發說), theory of li arriving of its own accord (理自到說), and others are achievements made amid a critical mind to actively overcome Yang Ming-hak’s criticism on Zhu Jia-hak(朱子學) (p12), how can you evaluate Yulgok’s the theory of li, gi,?

제28차 퇴계학국제학술회의자료집(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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