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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동학농민혁명기 재조선일본인(在朝日本人)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박맹수.원광대

1. 머리말

2. 在朝日本人 增加推移와 그 背景

3. 在朝日本人의 戰爭協力 實態와 그 性格

4. 스파이활동 事例分析

5. 맺음말

1. 머리말

894년 봄부터 이듬 해 봄까지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이하, 농민혁명)의 실패 요인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실패 요인 가운데서도 근대식 무기와 전술을 앞세운 일본군이 농민군 진압에 직접 가담한 것, 그리고 근대식 무기와 전술을 앞세운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이하, 농민군) 진압이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치밀한 군사 외교적 전략 아래 실행되었기 때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일본군에 의한 농민군 진압 실상은 오랜 기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韓日 양국 연구자에 의해 그 실상이 밝혀지고 있는 중 이다.1) 그런데,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한일 양 측 사상 자 수를 보면, 다수의 농민군 사상자에 비해 일본군 사상자는 거의 나오 지 않았거나 극소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일본 군에 의한 농민군 진압은 쌍방 간의 대등한 전투라기보다는 일본군이 일 방적으로 농민군을 학살하는 일종의 ‘제노사이드(Genocide)’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3)

1)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의 실상에 대한 한일 양국 연구자에 의한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井上勝生, 「東學黨農民軍指導者と推定される頭骨について」, ꡔ古河講 堂「舊標本庫」人骨問題報告書ꡕ, 北海道大學文學部, 1997 ; 「甲午農民戰爭と日本軍」, ꡔ近代日本の內と外ꡕ, 吉川弘文館, 1999 ; 「日本軍による最初の東アジア民衆虐殺」, ꡔ世 界ꡕ 693, 2001年 10月 ; 「第2次東学農民戰爭の日本軍, 農民大虐殺-兵士の鄕土, 四 國各地を訪ねて-」, ꡔ札幌鄕土を掘る会2004年活動記錄集ꡕ, 2004 ; 「東學農民軍包圍 殲滅作戰と日本政府, 大本營」, ꡔ思想ꡕ 1029, 2010年 1月 ; 姜孝叔, 「第2次東學農民戰 爭と日淸戰爭」, ꡔ歷史學硏究ꡕ 762, 2002年 5月 ; 「第2次東學農民戰爭と日淸戰爭-防 衛廳防衛硏究所圖書館史料を中心に-」, 千葉大學大學院博士論文, 2005 ; 「제2차 동 학농민전쟁과 일본군-일본군의 생포농민군 처리를 중심으로-」, ꡔ전북사학ꡕ 30, 2007년 4월 ; 「제2차 동학농민전쟁 시기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ꡔ한국민족운동사연 구ꡕ 52, 2007년 9월 ; 박찬승, 「동학농민전쟁기 일본군, 조선군의 동학도 학살」, ꡔ역 사와 현실ꡕ 54, 2004년 12월 ; 申榮祐, 「1894年 日本軍 中路軍의 鎭壓策과 東學農民 軍의 對應」, ꡔ歷史와 實學ꡕ 33, 2007 ; 「1894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ꡔ제노사 이드와 한국근대ꡕ,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2009.

2) 1894년 11월부터 본격화된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전 사한 일본군은 불과 10명 이내인데 반해, 농민군 측 전사자는 3만 명에서 5만 명 정 도로 추산되고 있다.

3) 井上勝生, 「東學黨農民軍指導者と推定される頭骨について」, 1999 ; 신영우, 앞의 논 문, 2007 참조. 동학농민혁명기 在朝日本人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101

다수의 농민군이 대량학살에 가까운 형태로 희생 된 것은 농민군과 일본군 양자의 무기와 전술의 차이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 농민군이 일방적으로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무기 와 전술의 차이라는 요인 외에도 다양한 요인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 러한 요인 중의 하나로 바로 양 측의 戰爭指導體制를 들 수 있다. 1894년 당시 일본군은 軍官民이 일체가 되어 전쟁에 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농민군은 京軍(朝鮮政府軍)의 탄압을 비롯하여 地方官과 保守儒生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民堡軍(反農民軍)으로부터도 탄압을 받고 있었으며, 在 朝日本人4)들의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에도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일본군, 조선정부군, 민보군 외에 일본군 스파이로 활 동하는 재조일본인과도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또 하나의 적’이었던 재조일본인 인구는 1890 년 7,245명, 1891년 9,021명, 1892년 9,137명, 1893년 8,871명, 1894년 9,354 명 등 농민혁명기를 전후하여 대체로 9천 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5) 개항 장별로는, 釜山(1876년 개항)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仁川(1883년 開港), 서울(1884년 開市), 元山(1880년 開港) 순이었다.6) 그런데 이들 재조일본 인들은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1894년 6월 7일 일본 내각 및 육해군성 앞으 로 出兵을 請願하는 청원서를 제출한7) 것을 비롯하여, 출병한 일본군을 위한 食事와 宿舍를 제공하고,8) 일본군을 위한 朝鮮語 通譯9)으로 참여하 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군에 필요한 軍需物資 조달을 위한 御用商人10) 등으로 활동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재조일본인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불법적인 朝 鮮王宮占領事件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삼고 大院 君을 추대하는 데 적극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11) 농민군 동향을 정탐 하는 스파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농민군 진압에 직간접 적으로 참여하였다.12)

4) 在朝日本人이란,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45년까지 朝鮮에 居留하고 있던 일본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木村健二, ꡔ在朝日本人の社會史ꡕ, 未來社, 1989, 7쪽).

5)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淸戰爭」, ꡔ岩波講座 近代日本と植民地ꡕ 5, 岩波書店, 1994, 4~5·11쪽 ; ꡔ國民新聞ꡕ 1894년 6월 9일자 2면에 실려 있는 「조선 재류 일본인」에 의 하면, 남자 5,112명 여자 3,713명 등 총 8,825명으로 나온다. 이 같은 숫자는 정확하 지는 않을지라도 당시의 재조일본인 규모를 짐작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6) 위의 신문, 1894년 6월 9일자, 2면.

7) 淵上貞助 氏 談, 「古き思出譚」, ꡔ居留民之昔物語ꡕ, 朝鮮二昔會, 1927, 35쪽 ; 京城府, ꡔ京城府史ꡕ 2, 1936, 626~628쪽.

8) 藤村德一編, ꡔ居留民之昔物語ꡕ, 朝鮮二昔會, 1927, 46쪽.

9) 위의 책, 36~37쪽 및 47쪽.

10) 高橋刀川, ꡔ在韓成功の九州人ꡕ, 寅與號書店, 1908, 15·72·141쪽.

11) 北川吉三郞 氏 談, 「入京當日の困惑」 ; 藤村德一編, 앞의 책, 53~56쪽 ; 岡本柳之介, ꡔ風雲回顧録ꡕ, 中公文庫, 1990, 226쪽.

12) ꡔ時事新報ꡕ 明治 26년 5월 4일자, 4면 ; 北川吉三郞 氏 談, 「入京當日の困惑」, 위의 책, 52쪽.

이처럼 농민혁명기에 재조일본인이 다방면으로 전개했던 전쟁협력 실 태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日帝의 농민혁명 진압이 단순히 정치 가와 관료, 군인에 의해서만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재조일본인 들의 광범위한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농민혁명 당시 재조일본인들의 전쟁협력 실태에 관한 연구 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청일전쟁기 재조일본인에 관한 연구를 시도한 高崎宗司(다카사키 소지)13)와 1894년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ꡔ每日新聞ꡕ 기사를 중심으로 재조일본인들의 실 태를 밝히고자 했던 樋口雄一(히구치 유이치),14) 그리고 재조일본인들이 남긴 回顧錄을 중심으로 그들의 의식과 행동을 분석한 辛美善15) 등에 의 해 극히 부분적인 연구가 시도된 바 있다.

13)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淸戰爭」, 12~13쪽.

14) 樋口雄一, 「日淸戰爭下朝鮮における日本人の活動」, ꡔ海峽ꡕ 8, 社會評論社, 1978, 39~41쪽.

15) 辛美善, 「在朝日本人の意識と行動」, ꡔ日本學報ꡕ 14, 大阪大學, 1995.3, 54~55쪽.

이 논문에서는 농민혁명기 재조일본인의 전쟁협력 활동에 주목하여 그 구체적 실태와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글의 전개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농민혁명 시기를 前後한 在朝日本人 人口增加 推移에 대해 고찰한다. 둘째 재조일본인 증가를 초래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고찰한다. 셋째 농민혁명 시기를 전후하여 재조일본인이 전개한 다양한 전쟁협력 사례와 그 실태를 분석한다. 넷째 전쟁협력 사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스파이 활동 실태를 분석한다.

2. 在朝日本人 增加推移와 그 背景

1) 增加推移

일본인들의 合法的인 조선 도항이 가능해진 것은 조선이 일본과 朝日 修好條規를 체결하고 釜山을 개항한 1876년 이후부터이다. 조선정부는 1876년 부산 개항에 이어 1880년 元山, 1883년 仁川을 차례로 개항하였고, 1884년에는 漢城(서울)의 開市마저 단행함으로써 일본인들의 朝鮮 渡航 이 합법화되었다. 이처럼 1876년의 개항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조선 도항 이 가능해진 이래, 1894년 농민혁명기까지 재조일본인 인구는 과연 어떤 추이를 보이고 있었을까? 16) 일본인 연구자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는 「在朝日本人과 日淸戰爭」 이라는 논문에서 1876년부터 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의 재조일본인 인구 추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우선 먼저 1876년부터 1889년까지의 재 조일본인 인구 추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17)

16) 이 장에서 다루는 1876년 개항부터 1894년 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의 재조일본 인 인구추이에 관한 통계 자료는 불완전한 경우가 많고, 또한 사료에 따라 數値가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가 이 글에서 제시하는 수치와 관련 자료는 일정한 제한점이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한다.

17) 朝鮮總督府, ꡔ朝鮮における內地人ꡕ, 1923, 2~3쪽(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淸戰爭」 에서 재인용).

1876년 54 1877년 345 1878년 117 1879년 169 1880년 835 1881년 3,417 1882년 3,622 1883년 4,003 1884년 4,356 1885년 4,521 1886년 609 1887년 641 1888년 1,231 1889년 5,589(단위 명)

위의 통계에 따르면, 1876년부터 1881년까지의 재조일본인 인구는 급 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년간에 걸쳐 3,363명이 증가하여 개항 초기인 1876년의 54명에 비하면 무려 63배의 증가를 보이고 있 다. 그에 비해, 1881년부터 1889년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증가를 보여 8년 간 2,172명, 약 64% 증가에 그치고 있다. 1882년의 壬午軍亂과 1884년의 甲申政變 등 조선을 둘러싸고 淸日, 朝日간의 정치 군사적 대립과 갈등 요인이 재조일본인 인구 증가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시기, 즉 농민혁명 직전과 직후 의 인구추이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高崎宗司에 의하면, 1890년부터 1893 년까지 4년간 재조일본인 인구 추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18) 1890년 1891년 1892년 1893년 남 4,564 5,601 5,532 5,168 여 2,681 3,420 3,605 3,703 계 7,245 9,021 9,137 8,87119) 위의 통계 가운데 남녀별 인구추이에 대해 주목하면, 1891~1893년까지 남자가 약간 감소하고 있는 데 반해, 여자는 오히려 약간 증가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高崎宗司는 “在朝日本人의 역사가 일시적 돈벌이에서 定住期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20) 高崎宗司는 또한 1892년까지 재조일본인이 꾸준히 증가한 배경의 하나 로 일본 국내의 植民熱의 高潮를 지적하면서, 1893년 3월의 殖民協會 설 립이 그 도달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21)

18) 위와 같음.

19) 위와 같음.

20)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淸戰爭」, 5쪽.

21) 위와 같음.

일본인의 조선 도항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 식민협회는 설립 당초 회원이 약 4백 명 정도였으며, 회장은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 評議員 가운데는 1882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ꡔ漢城旬報ꡕ 창간에 관여하는 이노우에 카구고로(井上角五 郞, 1860~1938), 1895년에 渡韓하여 조선정부의 法部顧問이 되는 호시 토 오루(星亨, 1850~1901), 극우 정당인 熊本國權黨 黨首로서 1893년 조선을 방문한 바 있고 농민혁명기 내내 對朝鮮 및 對淸 강경론을 주장했던 사 사 토모후사(佐々友房, 1854~1906), 제국주의 일본의 植民支配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札幌農學校(지금의 北海道大學) 출 신으로 國粹主義와 함께 海外植民地 개척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시가 시 게다카(志賀重昻(1863~1927), 1895년 明成皇后弑害事件 가담자의 1인인 시바 시로(柴四朗, 1852~1922)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22) 이런 사실은 식 민협회가 이른바 朝鮮에 대한 植民熱이 강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을 반증하며, 이들의 植民熱이 재조일본인 인구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식민협회 설립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식민협회 설립취지서 첫째 우리나라(日本-주)의 과다 인구를 예방한다. 둘째 일본 인종의 번식을 도모한다. 셋째 우리나라의 海權(해양권-주)을 收攬한다. 넷째 우리나라의 商權을 신장한다. 다섯째 對外의 정신을 발양하고 그 기량을 넓히며, 또한 신지식을 수 입함으로써 우리나라 人心을 바꾼다.23)

22) 金子文夫, 「日本における植民地硏究の成立事情」, ꡔ日本帝國主義と東アジアꡕ, アジ ア經濟硏究所, 1979, 57~58쪽.

23) ꡔ殖民協會報告ꡕ, 創刊號, 1893, 104~107쪽.

‘일본의 과다 인구를 예방’하고, ‘일본 인종의 번식을 도모’하며, ‘일본의 海權과 商權을 신장’하기 위해 ‘對外의 정신을 발양’할 목적을 가지고 설 립된 식민협회는 설립 목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 ꡔ殖民協會報告ꡕ를 창 간했다. 또한 회장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 揚)였으나, 실제로 협회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인물은 식민협회 설립에 앞서 日本移住組合을 설립했던 朝鮮 在住의 츠네야 세이후쿠(恒屋盛 服) 등이었으며,24) 이들에 의해 일본인의 조선 도항이 활발하게 추진되 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농민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에 들어와 재조일본인 인구는 어떤 추이를 보이고 있었을까? 이 시기 재조일본인 인구 추이에 대해서 는 樋口雄一이 이미 밝힌 바 있다. 樋口雄一은 농민혁명기에 일본인의 朝鮮 渡航이 급증했음을 ꡔ每日新聞ꡕ 기사를 통해 실증하고25)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4) 金子文夫, 「日本における植民地硏究の成立事情」, 57쪽 ;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 日淸戰爭」, 5쪽. 25) ꡔ每日新聞ꡕ 1894년 11월 13일자.

牙山에서 아군의 승리에 이어 平壤 및 海洋島에서 대승리가 보도된 이후, 한 때 동요했던 當港(仁川-주)의 人心도 갑자기 靜穩으로 돌아갔 으며, 지금까지 귀국한 老幼婦女는 다시 점차 渡航의 길에 오르고, 그와 동시에 당항 商業의 혼란을 기회로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자 및 軍 人, 軍隊의 附屬 人夫를 상대로 하는 각종 商人들이 속속 도래하여, 당시 渡韓取締規則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 이후 입항하는 船便을 기 해 도래한 자는 다음과 같다. 肥後丸 9월 20일 입항 250인 潮州府號 9월 25일 입항 9인 豊島丸 10월 7일 입항 23인 肥後丸 10월 8일 입항 312인 潮州府號 10월 10일 입항 35인 豊島丸 10월 20일 입항 38인 肥後丸 10월 22일 입항 327인 계 994

위와 같이 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조선 도항 자들이 존재했다. 이것은 청일전쟁 승리를 틈탄 일시적 증가 현상이었지만, 일시적 도항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長期 在留者도 증가하기 에 이르렀다. 다음 ꡔ每日新聞ꡕ 기사를 보기로 한다.26) 京城 在留 本邦人(日本人-주)의 증가 同地 주재 우치다(內田) 1등 領事로부터 보고에 의하면, 종래 당지에 거주하는 본방인은 공사 영사관원을 제외하고 그 수 대체로 7백 5~6십 인에서 8백 인 사이를 드나들어 3년간 어느 정도 일정한 평균을 유지해 왔으나 지난겨울(1894년-주) 이래 당지에 도항하는 자 점차 많아져 현 재 지난 달(1895년 3월-주) 말일의 조사에 의하면, 이미 1천 인 이상을 초과하였고, 또 目下 漢江 水路도 열려 京仁間 왕래편도 복구됨으로써 이제 곧 점점 더 在留者의 증가를 보게 될 것이며, 참고를 위해 아래에 在留 인원을 밝힌다. 연월 호수 남 여 합계 27년(1894) 3월 247 464 357 831 28년(1895) 2월 261 570 358 928 28년(1895) 3월 269 657 375 1,032 (비고-위 표에서는 조선정부의 고문관, 고용원 등과 군인, 군속, 기타 일시적 목적으로 체류하는 자는 계산하지 않음) 위에 인용한 통계는 서울 재류 일본인 인구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서 울의 일본인 거류자는 1894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 사이에 2백 명 이상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청일전쟁 승리로 일시적 도항자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장기 재류자 역시 증가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농민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재조일본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함을 보여주는 통계는 또 있다. 다음의 ꡔ帝國統計年鑑ꡕ의 통계 자료가 바로 그것이다.27)

26) ꡔ每日新聞ꡕ 1895년 4월 27일자.

27) 副島昭一, 「朝鮮における日本の領事館警察」, ꡔ和歌山大學敎育學部紀要: 人文科學ꡕ 35, 1986, 3~6쪽.

<釜山> 연도 남 여 계 26년(1893) 2,653 2,097 4,750 27년(1894) 2,406 1,990 4,396(-354) 28년(1895) 2,759 2,194 4,953(+557) <仁川> 연도 남 여 계 26년(1893) 1,530 974 2,504 27년(1894) 2,193 1,008 3,201(+697) 28년(1895) 2,608 1,540 4,148(+947) <서울> 연도 남 여 계 26년(1893) 498 325 823 27년(1894) 510 338 848(+25) 28년(1895) 1,115 725 1,840(+992) <元山> 연도 남 여 계 26년(1894) 487 307 794 27년(1894) 520 389 909(+115) 28년(1895) 833 529 1,362(+453)

위 ꡔ제국통계연감ꡕ에 의하면, 1893년에서 1894년까지 부산은 오히려 354명이 감소하고 인천 697명, 서울 25명, 원산 115명이 각각 증가하여 결 과적으로 483명밖에 증가하지 않은데 비해, 1894년에서 1895년까지는 부 산 557명, 인천 947명, 서울 992명, 원산 453명 등 총 2,949명이 늘어나 1년 사이에 무려 3천여 명 가까운 증가를 보이고 있다. 요컨대, 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재조일본인 인구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서울을 포함한 각 개항장 즉 부산, 인천, 원산 등지에서 급격한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재조일본인 인구증가를 촉진한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재조일 본인 인구증가를 초래한 다양한 배경에 대해 고찰한다.

2) 增加背景

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재조일본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 요인 은 무엇보다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 승 리 외에도 일본인들의 朝鮮 渡航을 촉진하고, 그들의 朝鮮 定住를 부채 질한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그 같은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분석한다. 제1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 재류 일본인 즉 재조일본인 인구는 1876년 개항 이래 1893년까지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894년 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급격한 증가를 보였 다. 이 같은 재조일본인 인구증가는 189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1904~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또다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가히 폭 발적인 증가를 보여 1910년 ‘병합’ 시점에는 그 인구는 이미 17만여 명에 이르렀다.28)

28) 木村健二, ꡔ在朝日本人の社會史ꡕ, 12쪽의 「職業別朝鮮在留日本人數(1910년 12월 말 현재)」에 의하면, 1910년 12월 말 현재 재조일본인 인구는 17만 1,543명에 이르고 있 다.

이처럼 재조일본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 배경에는 첫째 무엇보다도 일 본정부 및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도항자 보호 및 보조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항자 가운데서도 상인층에 대한 다양한 편의가 부여되었다. 예를 들면, 일본이 조선과 체결한 일련의 조약은 한 마디로 조선에게는 불리하고 일본에게는 유리한 不平等條約이었는데, 이 불평등조약 안에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 상인에 대한 日本貨幣流通權, 領事裁判權, 低率關稅 權(當初는 無關稅)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876년 개항 이래 러일전쟁 에 이르기까지 9개의 開市 및 開港場의 설정, 1880년 元山 개항에 즈음한 점포 및 견본진열소의 건설, 軍艦 파견, 병원 건설, 軍醫의 선발파견, 渡 航 수속의 간소화, 여권휴대 의무의 철폐, 內地行商 추진 장려, 보조금 인 가 등등 일본정부와 일본공사관이 도모한 도항자 보호 및 보조정책은 이 루 다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29) 이러한 사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 로의 도항이 ‘移民保護法’이란 이름 아래 엄격하게 관리되고, 일단 도항 이 이루어진 뒤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외면당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 루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정부와 일본공사관 등은 왜 조선 도항자들에 한해서 다양 한 보호 및 보조정책을 펼쳤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농민혁명과 청 일전쟁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제1군 사령관으로 조선에 출 정하고 있던 山縣有朋(야마가타 아리토모, 1838~1922)의 “平壤 이북에서 義州에 이르기까지 樞要의 땅에 邦人(일본인-주)을 移植”하고, 그것을 통해 “淸國의 영향을 끊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에 잘 나타나 있 다.30) 요컨대, 청국과 러시아, 일본 등이 각축하는 조선에서 재조일본인 들을 교두보삼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의도 아래 조선으로 도 항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각종 보호 및 보조정책을 펼쳤던 것이며, 이 같 은 일본정부의 보호라는 우산 아래 재조일본인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이 룰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을 이용하여 “一攫千金의 奇利를 夢想하 고 새로 出征하는 軍隊를 追隨하여 오는”31) 冒險商人의 증가가 농민혁명 기 재조일본인 인구 증가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는 사실도 지적해 두 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9) 木村健二, 「在朝日本人の軌跡」, ꡔ歷史地理敎育ꡕ 416, 1987, 23쪽.

30) 大山梓 編, ꡔ山縣有朋意見書ꡕ, 原書房, 1966, 224쪽 ; 木村健二, 「在朝日本人の軌跡」, 23쪽.

31) ꡔ京城府史ꡕ 2, 1936, 630쪽.

앞의 제1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893년 말에 8,871명이었던 재조일본인은 1894년 말에는 9,354명으로 늘어 전년도에 비해 483명, 약 5%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 고 농민군 진압작전을 ‘성공적으로’ 종결한 1895년 연말에는 12,303명으로 증가하여 전년도에 비해 무려 2,949명이나 증가했다. 이것은 농민혁명과 함께 발발한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의 물품을 운반하거나 또는 일본 군에게 물품을 조달하여 이익을 얻기 위해”32) 일본으로부터 모험상인들 의 도항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군이 상륙한 仁川의 경우는, 일본인 軍人 및 軍夫를 상대로 장사하려고 하는 소상인들이 속 속 입항하여 들어왔는데, 그 수는 1894년 9월 20일부터 10월 22일까지 약 1달 동안에만 무려 994명에 달했다.33) 그런데, 전쟁을 好機로 삼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인 모험상인의 대부분은 無資本이거나 零細資本의 빈곤층이었다. 그 대 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바로 조선에 도항하기 직전까지 ꡔ讀賣新聞ꡕ 주필 대리로 근무했던 中井喜太郞(號 錦城, 1864~1924)34)의 경우이다. 1892년 에 도항하여 후일 京城居留民團 團長까지 역임했던 中井喜太郞는 도항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실로 기이한 것이다. 메이지 25년(1892) 초에 나는 讀賣新聞 主筆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나서 무직의 실업자가 되었다. 거의 3개월이나 놀고 있자니 돈은 없어지고 아내는 임 신하여 불평이 많아지고, 그런가하면 實業上의 머리는 없고 회사로부터 받는 것도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이 때 한 번 해외에서 비약해볼까 하는 기분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가까운 조선이 좋다. 그 나라의 최근 모습을 보면, 며칠 전에도 大院君의 거실 밑에 폭탄을 장치한 일이 있었던 모양 이니, 이 기회를 타서 새 운명을 개척하는 것도 또한 재미있을 것 같아 홀연 조선행을 결정하였다.35)

32) ꡔ通商彙纂ꡕ 17, 1895, 17쪽.

33) ꡔ每日新聞ꡕ 1894년 11월 13일 ; 仁川府 編, ꡔ仁川府史ꡕ, 1933, 431쪽.

34) 「中井喜太郞」, ꡔ明治新聞雜誌關係者略傳ꡕ, みすず書房, 1985, 164쪽.

35) 中井喜太郞, ꡔ朝鮮回顧錄ꡕ, 糖業硏究會出版部, 1915.

위의 인용 내용으로부터 中井喜太郞이라는 인물은 일본 내에서 ꡔ讀賣 新聞ꡕ 주필 대리까지 근무할 정도의 지식인이었으나 失業을 계기로 ‘돈 벌이’를 위해 무자본으로 조선 도항을 결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자본 또는 영세한 자본을 가지고 조선에 건너온 모험상인들 은 그야말로 악랄한 수법으로 폭리를 취하기에 급급했다. 그 실태를 보 기로 한다.36)

36) ꡔ每日新聞ꡕ 1895년 3월 13일.

當地(義州-주)는 淸韓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서 자못 중요한 땅으로, 軍人과 軍馬 기타의 人夫 등 들어오는 食客이 몇 천이 되는 지 알 수 없 으며, 또한 나가는 자와 들어오는 자, 軍人과 軍夫 등이 대부분 한 번 정 도는 이곳에 체재하여 쌓인 피로를 위로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韓商 (조선상인-주)이 開店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 데도 관계없이 日本 商 人도 各所에서 모여들어 각자의 생각대로 상업을 경영하고 있는 자가 1 백 명 이상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상인 모두는 奸猾해서 獸心이라 고 미워할 만한 일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으로-주) 병 든 軍人이나 軍夫 등이 다리를 질질 끌며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게 앞에 서 짚신이나 계란, 煙草(담배-주), 버선 등을 사려고 하면 그들은 이들 불쌍히 여겨야 할 동포에게 몇 푼어치 同情도 표하지 않은 채, 도리어 不 得已 필요로 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서는 짚신 한 켤레를 10錢, 계란 1개 를 7전, 우편엽서 4~5전 등 法外의 代價를 취하고 있다. 위 내용은 「義州府로부터 兵站部 근무 少尉의 私信」이라는 형태로 ꡔ每 日新聞ꡕ에 보도된 내용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건너온 일본 인 冒險商人들은 전쟁을 기회삼아 ‘불쌍히 여겨야 할 동포에게 몇 푼어치 同情도 표하지 않은 채’, ‘法外의 代價’ 즉 暴利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으로 건너온 도항자 가운데 無資本 또는 零細資本의 모험 상인들만이 일확천금이나 폭리를 취했던 것이 아니다. 業者, 즉 상당한 자본을 가진 회사들마저 軍과 결탁하여 일확천금을 하려고 했다, 그 대 표적인 업자가 바로 大倉組(오쿠라 구미)이다. 농민혁명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일본의 1厘 銅貨를 수입해서 조선 화폐 에 섞어 2厘 이상으로 통용시켜 ‘큰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었는데,37) 1894년 농민혁명을 계기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물품 구입과 인부 고용 등 에 조선 화폐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눈을 돌린 大倉 組는 조선인이 사용하는 木棉을 일본으로부터 수출하여 거기서 모은 조 선 화폐를 군대의 제비용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이때 大倉組는 御用船 (官用船-주)을 사용하여 運賃과 關稅 등을 면제받음으로써 보통 상품보 다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조선 화폐를 대량으로 모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일반 상인들은 운임과 관세 등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장사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大倉組의 韓錢 收集策에 관한 紛議」38)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문 기사만으로 大倉組가 얼마나 많은 暴利를 취하였는지 알 수는 없 으나, 전쟁을 好機 삼아 일확천금을 노리고 조선으로 도항한 冒險商人과 일본인 業者들의 존재야말로 농민혁명기를 전후하여 재조일본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음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셋째, 농민혁명기를 전후하여 재조일본인이 증가하는 또 다른 요인 가 운데 하나로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신문잡지 등 매스컴의 朝鮮關 係 기사의 대폭적 증가와 함께 渡港을 獎勵하는 記事가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39)

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조선에 특파원을 파견했던 일본의 신문사와 잡 지사, 통신사는 무려 66개사, 특파원 수는 129명에 달했다.40)

37) ꡔ每日新聞ꡕ 1895년 4월 24일 「韓山書信」.

38) ꡔ每日新聞ꡕ 1894년 12월 8일.

39) 樋口雄一, 「日淸戰爭下朝鮮における日本人の活動」, 39쪽.

40) 參謀本部 編, ꡔ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ꡕ 第8卷, 1907, 1106~1107쪽의 「明治二十七八 年戰役統計」 참조.

이들은 仁 川과 서울, 釜山, 平壤, 그 외의 朝鮮 內地까지 깊숙이 들어가 농민혁명과 청일전쟁 戰況을 비롯하여 朝鮮의 各種 內政에 관한 多種多樣한 기사를 써서 本社로 송고했으며, 일본의 각 신문사들은 그것을 경쟁적으로 보도 하였다.41) 뿐만 아니라, 이들 특파원들은 자신들이 견문한 바를 토대로 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다투어 출판함으로써 일본 내의 ‘朝鮮熱’과 일본인들의 조선 渡航을 자극하는 데 一助하였다. 농민 혁명기 조선특파원 출신으로 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관련 從軍記를 단행 본으로 출판한 인물로는 ꡔ大阪朝日新聞ꡕ 특파원 출신인 西村時輔 (1867~1894)의 ꡔ甲午朝鮮陣ꡕ(1895년),42) ꡔ中央新聞ꡕ 특파원 출신인 川崎 三郞의 ꡔ日淸戰史ꡕ 전 7책(1896~1897)43)이 대표적이다.

41) 농민혁명기 일본신문의 조선관계 보도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지 않 고 있다. 참고할 만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박맹수, 「일본 ꡔ시사신보ꡕ에 나타난 조선 인식-동학농민혁명을 중심으로-」, ꡔ동북아역사재단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중심과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ꡕ, 동북아역사재단, 2007 ; 조재곤, 「한 일본인 종군기자가 본 1894년 청일전쟁과 조선」, ꡔ軍史ꡕ 66, 2008년 4월.

42) ꡔ明治新聞雜誌關係者略傳ꡕ, 1985, 184쪽 ; 朝日新聞社, ꡔ大阪朝日新聞創刊五十周年 記念: 五十年の回顧ꡕ, 1929, 96쪽.

43) 大谷正, 「忘れられたジャーナリスト, 史論家, アジア主義者川崎三郎」, ꡔ専修史学ꡕ 29, 1998年 3月, 50~55쪽.

일본의 신문과 잡지 등에는 조선 관련 기사의 대폭적 증가와 더불어 일본인의 조선 도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기사도 빈번하게 게재되었 다. 그 전형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하자면, 1894년 12월 18일자 ꡔ每日新聞 ꡕ에 실린 「西征所感」이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軍隊視察員 肥塚龍’ 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쓴 이 기사에서는 “그 나라 정부가 뭐라고 하든 관 계없이 일본인이 점거하는 곳은 일본국이 되며, 더군다나 그 토지를 우 리 동포들이 피를 흘려 점령한 곳이야!”라는 침략주의적 논리를 펴면서, 新 占領地에서 유리한 장사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이상 여러 개의 것 은 오늘 문을 열어 오늘부터 의외의 이익이 있을 것을 必定, 당분간은 집 세도 들지 않고, 地代도 필요 없으며, 支那人의 빈 집에서 영업도 자유롭 게 할 수 있을 것이며”라여, 일단 渡航을 해서 장사를 시작하고 보면 마 치 新天地가 열릴 것처럼 조선 도항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그 결과, 이 같은 무지개 같은 도항 기사에 끌려 조선에서 신천지를 개척하고자 하는, 무자본 또는 영세자본의 일본인들이 다투어 조선 도항에 나섰음은 앞에서 이미 검토한 바 있다.

3. 在朝日本人의 戰爭協力 實態와 그 性格

제2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선에서 세력 확대를 노리는 일본정부 및 일본공사관의 조선 도항자에 대한 각종 보호 및 보조정책이라는 우산 속에서 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호기로 삼아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인 들이 속속 도항했다. 그 결과 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재조일본인 인 구는 급격한 증가를 보였다. 그런데, 이들 재조일본인들은 전쟁에서 일본 이 승리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이익에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이 장에서는 농민혁명에 즈음하여 재조일본인들이 전개한 전쟁협력 활동의 실태를 밝히고, 이들의 전쟁협력 활동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그 성격을 파헤쳐보기로 한다. 농민혁명기에 재조일본인들이 벌인 전쟁협력 사례의 첫째로는 日本軍 派兵을 請願한 것을 들 수 있다. 농민혁명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淵 上貞助라는 일본인의 回顧에 따르면44), “메이지 27년(1894-주) 淸日開戰 직전의 京城在住 內地人(일본인-주)은 극도로 긴장하여 風雲이 마침내 급해지기에 이르자, 老幼婦女는 대개 內地로 귀환하였고, 다시 경성거주 내지인의 이름으로 그 당시의 內閣 및 陸海軍省으로 電信 혹은 書面으로 그 實情을 보고하고, 出兵을 독촉하였다”는 것이다. 농민혁명 당시 서울 의 재조일본인들이 일본군 파병을 청원한 사실은 1936년에 간행된 ꡔ京城 府史ꡕ에도 상세하게 실려 있다. ꡔ경성부사ꡕ에 따르면, “1894년 6월 7일에 거류민 중에 대표가 될 만한 68명의 이름으로 出兵 請願文을 제출했다”45) 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정부의 출병방침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청원문 44) 淵上貞助 氏 談, 「古き思出譚」, ꡔ居留民之昔物語ꡕ, 朝鮮二昔會, 1927, 35쪽. 45) ꡔ京城府史ꡕ 제2권, 1936, 626쪽. 1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6집 을 제출한 직후인 6월 10일에 大鳥圭介 주한일본공사가 陸戰隊 433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자 마치 再生한 듯 환호했다고 한다.46) 둘째, 재조일본인은 출병한 일본군을 위하여 食事와 宿所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도모하였다. 농민혁명 직후, 일본군은 6월 10일 大鳥圭介 공사가 인솔하고 入京한 陸戰隊 433명(인천 상륙은 6월 9일),47) 6월 12일 混成旅團 선발대 1,200명, 6월 16일 혼성여단 제1차 수송대 4천 명, 6월 27 일 혼성여단 제2차 수송대 2천 명, 7월 4일 군악대 등(兵力數 不明) 등이 속속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48)

46) 위의 책, 628쪽.

47) 실제 병력은 488명. ꡔ東京朝日新聞ꡕ 명치 27년 6월 23일, 2면, 鷄林風雲錄 2 참조.

48) 위의 신문, 6월 1일자와 6월 28일자, 7월 6일자와 7월 16일자 참조.

그 외 釜山과 元山 등지에도 적지 않은 일본군이 들어왔다. 이리하여 인천과 서울 등지에서는 대규모 병력이 일시에 주둔하게 되 자 그 식사와 숙소 마련이 급선무였다. 이에 부족한 숙소를 위해 재조일 본인들은 자진하여 자신들의 집을 숙소로 제공하는 한편, 군인들의 식사 편의 등을 제공하였다. 이 같은 전쟁협력 분위기에 대해 당시 재조일본 인은 “주택도 1인 다다미 1매로 하고 그 외는 전부 군인에게 제공하였으 며, 식사 등을 보살피는 데서부터 萬事萬端 열심히 일하였으며, 넘치는 喜悅心으로 軍國에 봉공하였다”49)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 외 仁川의 재 조일본인들은 “숙영에 사용할 夜具는 現品 및 義捐金을 모집하여 調達”했 으며, 元山에서는 元山水産會社의 漁船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어선을 이 용하여 군용물자의 하역과 운반을 도모했다.50) 셋째 재조일본인들은 대거 朝鮮語 通譯으로 또는 御用商人으로 군수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전쟁에 협력했다. 당시 재조일본인들은 “결코 수당 이나 보수 때문에 참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義勇奉公 정 신의 발로로써 앞을 다투어 지원했다”51)고 한다.

49) 梶原末太郞 氏 談, 「困苦缺乏に堪へた古き商人」, ꡔ居留民之昔物語ꡕ, 1927, 46쪽.

50) 仁川府 編, ꡔ仁川府史ꡕ, 1933 ; 高尾新右衛門 編, ꡔ元山發展史ꡕ, 1916 참조.

51) ꡔ居留民之昔物語ꡕ, 36쪽.

실제로 농민혁명기 당시 서울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 중에서 通譯으로 종군한 자들을 열거하 자면, 서울에서 韓語學院 ‘樂天窟’을 주재하고 있던 熊本國權黨 출신의 佐々正之,52) 역시 서울에서 여관과 목욕탕을 경영하고 있던 우라오 후미 쿠라(浦尾文藏),53) 參謀本部 명에 의해 조선 내 주요 지점 측량이라는 특 별 임무를 띠고 1887년(明治 20)에 건너온 미쿠리야 켄지로(御厨健次郞) 등이 있다.54) 이 3인 가운데 御厨健次郞이란 인물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군사밀정’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회고 를 보기로 한다.55)

52) ꡔ京城府史ꡕ 제1권, 1934, 714쪽.

53) 村松武司, ꡔ朝鮮植民者-ある明治人の生涯ꡕ, 三省堂, 1972, 25쪽.

54) 辛美善, 「在朝日本人の意識と行動」, 55쪽.

55) 御厨健次郎, 「渡鮮に就て」, ꡔ居留民之昔物語ꡕ, 1927, 37쪽.

메이지 20년(1887-주) 봄 參謀本部의 命에 의해 公使館附 武官으로 부속하여 特別任務를 띠고 渡鮮했다. 일행은 6명으로, 즉 敎導團과 近衛, 廣島, 東京 등의 세 師團에서 1명씩, 熊本師團에서 2명 등 모두 現役 下 士를 選拔 簡派했다. 그 임무는 말할 것도 없이 장차 淸日國交 평온을 缺 하여 東亞의 風雲 차례로 險惡으로 옮겨갈 때를 맞이하여 朝鮮 內 樞要 地點의 측량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원래 외국 토지를 公然히 측량한다든 지 조사한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때로는 賣藥商이라 僞裝하기도 하고 博物學者라고 위장하여 명분을 昆蟲採集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鑛業視察이라고 칭하여 (朝鮮의-주) 山林原野의 답사에 종사 했는데, 그 일이 곤란한 것은 筆紙로 이루 다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東學黨의 박해를 받는 일이 빈번하여 따라서 죽음을 각오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닌 형편이었다. 業務 아직 半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마침내 淸 日 開戰의 幕이 열렸기 때문에 나는 다시 朝鮮語 通譯으로 轉하여 從軍 하였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御厨健次郞는 원래 참모본부의 密命으로 청일전 쟁에 대비한 ‘조선 내 추요지점 측량’이라는 특별임무 수행 중에 청일 개 전이 되어 통역으로 참여하였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특수임무 수행 중에 ‘東學黨’ 즉 동학교도 또는 동학농민군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동학교도들과 조선의 일 반민중이 ‘斥倭洋倡義’를 내걸고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무렵의 체험을 술회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재조일본인 외에 인천에서는 3차에 걸쳐 연인원 57명이 통역으로 참여했으며, 元山에서는 “일본군의 진군을 맞이 하여 통역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은 거류민 중에서 조선어를 아는 장정을 종군시켰지만, 대부대가 출동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조선어의) 貧富르 가리지 않은 채 어떤 店主나 店員이라 할지라도 징발하여 종군시 켰”으며, 大邱에서도 2명의 在大邱 일본인이 통역으로 종군했다.56) 그 외 中村再造와 關繁太郞는 일본군 육군소속 御用商人으로 군수물자 조달을 통해 전쟁에 협력했다.57) 넷째, 재조일본인들이 일본의 軍人이나 軍夫 못지않게 전쟁에 앞장서 협력한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불 법으로 도발한 朝鮮王宮占領事件을 꼽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7월 23일의 조선왕궁점령은 당시의 國際法과 조선의 國內法 을 동시에 위반한 불법행위이자 침략행위였는데,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 과정에 참여한 재조일본인은 당시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명을 받고 청일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스파이 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오 카모토 유노스케(岡本柳之助, 1852~1912)를 비롯한 大陸浪人들이 중심이 었다. 7월 23일 未明에 일본공사관과 일본군 혼성여단은 사전에 주도면 밀하게 준비한 작전 계획58)에 따라, 국왕 고종을 포로로 삼고, 반일적인 관료 대신에 친일적인 관료들로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그 수반에 大院君 을 억지도 추대하는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이 ‘쿠데타’에 서울의 재조일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것이다.

56)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淸戰爭」, 12~13쪽.

57) ꡔ京城府史ꡕ 1卷, 714쪽 ; 「渡韓に就いて」, ꡔ居留民之昔物語ꡕ, 25쪽 ; 高橋刀川, ꡔ在韓 成功の九州人ꡕ, 寅興號書店, 1908.

58) 中塚明, 박맹수 옮김, ꡔ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ꡕ, 푸른역사, 2002 참조.

이 ‘쿠데타’의 목적은 대원군을 입궐시켜 (조선정부를 장악한 후-주) “조선정부의 依賴에 의해 朝日 연 합군을 조직하여 淸國軍을 驅逐하는 것”을 조선정부가 승인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른바 淸日 開戰을 위한 형식상의 명분을 손에 넣기 위한 것 이었다. 당시 일본공사관은 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청일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宣傳文을 작성하여 조선의 각 大臣, 大官, 志士들에게 비밀리에 배포하였는데, 이 선전문은 ꡔ大阪朝日新聞ꡕ 특파원이었던 니시 무라 텐슈(西村天囚)59)가 기초했다. 또한 杉村 濬(1849~1906) 駐韓 임시 대리공사의 지시를 받은 岡本柳之助는 입궐을 거부하고 있던 대원군을 설득하기 위해 대원군 저택으로 침입하였으며, 이때 그는 서울의 거류민 스즈키 슌미(鈴木順見), 기타가와 요시사부로(北川吉三郞), ꡔ國民新聞ꡕ 조선특파원 기쿠지 켄조(菊池謙讓) 등을 대동했다. 또 岡本 등이 대원군 을 가까스로 설득하여 마침내 대원군이 입궐할 때는 서울의 거류민 穗積 寅九郞, 鈴木順見, 西村天囚 등이 그 경호에 임했다.60)

59) 「西村時彦」, ꡔ明治新聞雜誌關係者略傳ꡕ, 1985, 184~185쪽 ; ꡔ居留民之昔物語ꡕ, 1926, 54쪽. 60) 北川吉三郞話, 「入京当日の困惑」, ꡔ居留民之昔物語ꡕ, 53~56쪽 ; 岡本柳之助, ꡔ風雲回 顧錄ꡕ, 中公文庫, 1990, 234쪽.

이처럼, 7월 23일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 때 서울 거주 재조일본인 다 수가 참가한 이 사건은 당시 재조일본인들이 商業 등 그저 개인적인 生 業에만 종사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일본 국 가의 침략행위를 請負 맡아 제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솔선하 여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雄辯하고 있다. 재조일본인 가운데서도 특 히 정치적 변동이 자신들의 처지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수 있었던 서울 거주 재조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소요 사태에 주체적으 로 온 몸을 던짐으로써 일본이라는 국가 차원의 침략을 저변에서 뒷받침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농민혁명기 재조일본인의 전쟁협력 사례 가운데 가장 주목해 야 할 내용은 바로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이다. 일본공사관과 일본군은 재조일본인 가운데, 領事館所屬 警察을 비롯하여 朝鮮語에 능통한 商人 또는 留學生 등을 수시로 고용하여 농민군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 조선 내정 전반에 관한 스파이 활동에 임하고 있었고, 이 같은 방침에 재 조일본인들은 전면적으로 협력하였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ꡔ國民新聞ꡕ 1894년 6월 11일자에 「視察員 出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되 고 있다. 在京城日本領事館은 成相喜四郞, 川幡直介 兩 巡査 및 高島吾八(留學 生) 세 사람을 視察員(스파이-주)으로 삼아 이번 달 3일(1894년 양력 6 월 3일-주) 午後 忠淸道를 향해 派遣하였는데, 그 視察 個所는 아직 未 定이다. 위 내용을 보면, 2명의 순사 즉 영사관 소속 경찰과 유학생 1명이 ‘시 찰’이라는 명목으로 충청도 지방을 향해 스파이 활동을 하러 떠났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 같은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에 재조일본인이 적극 협력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93년부터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1893 년의 斥倭洋運動, 즉 교조신원운동이 한창일 때 경성영사관 杉村濬은 마 츠나가 한지로(松永半次郞)와 사카이 헤이조(堺平造)라는 2명의 재조일 본인을 고용하여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벌이도록 한 것이다. 이 들의 스파이 활동 내역은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ꡔ朝鮮國東學黨動靜ニ関シ帝國公使館報告一件ꡕ이라는 문서 파일 속에 「公 信 第 66號 東學黨事件ニ付忠淸道公州等ノ地方探偵書」라는 제목으로 실 려 있다. 이 탐정서에 의하면, 松永와 堺 두 사람은 1893년 양력 4월 15일 경성을 출발하여 16일 수원을 경유, 19일에 공주에 도착하여 21일까지 정 탐활동을 벌인 후, 다시 22일 공주를 출발하여 24일에 경성에 도착하고 있다. 그들의 정탐 활동에 의하여 공주 일대 ‘동학당’의 동향이 속속들이 경성영사관을 거쳐 일본 외무성으로 보고되고 있었음은 위 ꡔ보고일건ꡕ 이 증명하는 바다.

이처럼, 공사관은 필요에 따라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이나 유학생 등을 고용하여 정탐 활동을 벌이는 것은 물론, 조선 각지를 다니며 행상 을 하던 內地行商의 일본인, 또는 조선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던 일 본인들로부터도 광범위한 정보 수집에 나서고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ꡔ駐韓日本公使館記錄ꡕ 1권에 실려 있는 巴溪生이라는 일본인이 정탐하 여 보고한 「全羅古阜民擾日記」이다.61) 이 일기를 쓴 파계생은 1894년 당 시 전라도 古阜郡 茁浦에 거주하면서 음력 1월의 고부농민봉기부터 음력 4월 11일까지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 동향을 매우 정확하고도 상세하 게 보고하고 있다. ꡔ주한일본공사관기록ꡕ에는 파계생 외에도 다수의 일본인 내지행상들 이 수집한 정보들이 실려 있는데, 1894년 말 기준으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9,354명에 달하고 있었다.62) 그 들을 거주지별로 보면 서울 848명, 인천 3,201명, 부산 4,396명, 원산 909 명 등이었는데,63) 이들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직간접으로 농민군의 동정 을 정탐하여 공사관이나 영사관에 보고하는 경우가 非一非再하였 다.

61) 국사편찬위원회, ꡔ주한일본공사관기록ꡕ 제1권(한글본), 53~59쪽.

62) 高崎宗司, 「在朝日本人と日清戦争」, 11쪽.

63) 副島昭一, 「朝鮮における日本の領事館警察」, 3~6쪽.

이 같은 사실은 재조일본인 대부분이 농민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 하는 정보원 즉 스파이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요컨대 1893년 ‘척왜양’ 운동이 고조된 이후부터 1894년 농민혁명기에 이르기까지 농민군들의 동향은 일본공사관 및 영사관, 일본군으로부터 날카로운 감시 및 정탐 활동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그들의 정탐활동 대부분은 영사관 경찰을 비롯하여 내지행상, 유학생 등 이른바 재조일본 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재조일본인들의 농민군에 대한 감시와 정탐 활 동은 1894년 내내 지속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며, 외무성을 중심으 로 한 일본정부와 대본영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 군부는 이 같은 정보들 을 종합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4.스파이 활동 사례 분석

-ꡔ國民新聞ꡕ 조선특파원 菊池謙讓의 경우-

농민군에 대한 재조일본인들의 스파이 활동은 제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3년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1894년 제1차 농민혁명기 즉 1894년 3월(양력 4월)에 농민군이 전라도 茂長에서 기포하여 全州城을 점령하는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직후부터 본격화되고,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자 진 철수하여 각 군현으로 돌아가 집강소 통치를 하는 9월 초까지 피크를 이루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스파이 활동에 참여한 재조일본인은 領事 館소속 警察을 필두로 하여, 參謀本部 파견으로 영사관에 소속되어 근무 하고 있던 陸海軍 駐在武官, 1890년 초부터 건너와 스파이 활동을 벌이고 있던 大陸浪人들, 서울과 인천 등지의 一般商人과 內地行商, 留學生, 特 派員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참여했다. 우선 1894년 농민혁명 당시 일본공사관 및 영사관 소속 경찰 현황을 보면, 서울의 공사관에 警部 1명과 巡査 4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경성영 사관에는 경부 1명과 순사 12명, 인천 영사관에는 경부 1명에 순사 17명, 부산은 경부 1명과 순사 13명, 원산 경부 1명과 순사 6명 등 경부 5명에 순사 52명이 배치되어 있었다.64) 이들 가운데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경찰로는 警部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65) 巡査 와타나 베 다카지로(渡邊鷹次郞),66) 순사 나리스케 노부시로(成相喜四郞),67) 순사 가와바타 나오스케(川幡直介)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64) 副島昭一, 「朝鮮における日本の領事館警察」, 136쪽의 <표 2: 領事館 警察官 配置數> 참조.

65) ꡔ駐韓日本公使館記錄ꡕ 제1권, 한글본, 413쪽의 「南部民亂地方 視察復命」 ; ꡔ都新聞ꡕ 1894년 8월 2일자, 1면의 「內亂鎭靜後の全羅道」 참조.

66) 防衛省防衛硏究所圖書館 所藏, ꡔ戰史編纂準備書類(58)東學黨狀況ꡕ의 「渡邊鷹次郞 口頭復命筆記」 참조.

67) 外務省外交資料館所蔵, ꡔ朝鮮國東學黨動靜ニ關シ帝国公使館報告一件ꡕ의 「公信 第 6號 東學黨事件ニ付忠淸道公州等ノ地方探偵書」 참조.

다음으로 주재무관 신분으로 스파이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니이로도 키스케(新納時亮) 해군소좌와 와타나베 테츠타로(渡邊鐵太郞) 육군 포병 대위가 있다. 新納 해군소좌는 조선에 파견되기 이전에 이미 “1886년 3월 부터 약 3년간 軍事密偵으로 淸國의 江蘇, 福建, 浙江 三省의 兵要地理調 査에 종사한 적이 있는 인물”68)로, 1893년 2월에 在朝鮮日本公使館付武官 으로 부임하여,69) 조선내지 깊숙이 들어가 스파이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농민혁명기에는 後術하는 ꡔ國民新聞ꡕ 특파원 菊池謙讓과 함께 충청, 전 라 지방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전개하였다.70) 渡邊鐵太郞 포병대위는 1891년 음력 8월 23일에 서울의 일본공사관 駐在武官으로 부임한 바 있 으며71) 당시 계급은 육군 포병대위였다. 그는 조선에서 ‘척왜양’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직후인 1893년 5월 2일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정 황을 정탐하기도 했으며,72) 1894년에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공사관 소속 주재무관 해군소좌 新納 등과 함께 공사관의 스파이 활동과는 별개로 독 자적인 스파이 활동에 임했다.

68) 金文子, ꡔ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ꡕ, 高文硏, 2009, 155쪽.

69) 위의 책, 157쪽.

70) ꡔ東京朝日新聞ꡕ 1894년 6월 20일자, 1면 ; ꡔ國民新聞ꡕ 1894년 6월 24일자 「新納少佐 の消息」 참조.

71) ꡔ舊韓國外交文書ꡕ 第2卷 ; ꡔ日案ꡕ 2, 235쪽.

72) 위의 책, 387쪽.

그 다음, 大陸浪人 출신으로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벌인 인물 들로는 1894년 7월 9일 밤에 전라도 淳昌에서 전봉준을 만난 天佑俠 소속 의 鈴木天眼, 田中侍郞, 武田範之, 大崎正吉 등과, 7월 20일에 전라도 綾 州에서 농민군 지도자 全琫準을 회견한 바 있는 우미우라 토쿠야(海浦篤 彌, 1869~1924)와, 역시 9월 9일 全州에서 전봉준을 만난 姓名 未詳의 日 本人 등이 있다. 일반상인 또는 내지행상 신분으로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1893년의 척왜양운동 즉 교조신원운동 당시 杉村 濬 임시대리 공사에게 고용되어 정탐활동을 벌인 松永半次郞과 堺平造를 비롯하여, 전라도 고부군 茁浦에 거주하면서 1894년 2월(음력 1월)부터 5월까지 농 민군의 동향을 정탐하여 「전라고부민요일기」라는 기록을 남긴 巴溪生 등이 있으며, 留學生 신분으로 정탐 활동을 벌린 인물로는 ꡔ東京朝日新 聞ꡕ 1894년 7월 12일자 부록 1면에 「全州探險報告」라는 기사를 남긴 高 島吾八 등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새롭게 주목하고자 하는 사례는 바로 농민혁명 당시 ꡔ國 民新聞ꡕ 특파원으로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菊池謙讓(1870~1953)라는 인 물이 농민군에 대한 스파이 활동에 직접 참여한 후, 스파이활동을 통해 정탐한 내용을 ꡔ국민신문ꡕ에 3회에 걸쳐 연재했다는 사실이다. 周知하듯 이, 菊池謙讓은 수많은 조선 관계 저술을 남긴 이른바 ‘朝鮮通’으로 알려 진 인물로,73) 1893년 ꡔ국민신문ꡕ 특파원으로 渡韓한 이래, 1945년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敗戰함으로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 53년간이나 조 선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단순히 언론 분야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한국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함과 동시에 일 본정부의 밀명을 수행하는 정보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74)

73) 하지연, 「한말 일제강점기 국지겸양의 문화적 식민활동과 한국관」, ꡔ동북아역사논 총ꡕ 21, 2008년 9월, 215쪽.

74) 하지연, 「한말 일제강점기 국지겸양의 문화적 식민활동과 한국관」, 215쪽.

즉 그는 일제의 이른바 ‘고등스파이’였던 것이다. 스파이로서 菊池謙讓의 활동은 농민혁명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菊池가 농민 혁명기에 수행한 스파이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 다행히 이번에 필자는 ꡔ國民新聞ꡕ 1894년도 기사 속에서 특파원 菊池가 조선 현 지에서 送稿한 다양한 조선관계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 는 우선 농민혁명 당시 특파원 菊池의 動靜이 상세하게 실려 있고, 그 다 음으로 菊池 자신이 농민군 동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서해 연안을 중심으 로 충청, 전라도 지방의 농민군 동정을 광범위하게 정탐하여 보낸 기사 가 특집 형태로 3회에 걸쳐 보도되고 있으며, 菊池 자신의 농민군에 대한 논평 기사인 「東學黨論」도 3회에 걸쳐 실려 있다. ꡔ국민신문ꡕ 기사를 중심으로 먼저 농민혁명 당시 菊池의 동정을 정리 해보면, 우선(1894년) ‘5월 7일 저녁 京城에서 長風生’이라는 이름으로 「停 止中 朝鮮으로부터 도착한 報 第一」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75)

여 기서 ‘長風生’은 菊池의 筆名 또는 雅號인데,76) 이 기사에 의하면 菊池는 적어도 5월 7일 이전까지 서울에 주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75) ꡔ國民新聞ꡕ 1894년 5월 21일자.

76) ꡔ國民新聞ꡕ 1894년 6월 24일자의 「菊池謙讓 氏」라는 기사 ; 靑柳南冥, ꡔ朝鮮史話와 史蹟 全ꡕ, 朝鮮硏究會, 1926, 表紙 참조.

한편, 동 신문 7월 3일자 3면에는 菊池가 충청도 지방의 농민군 동정에 대하여 정 탐한 「東學黨 探偵記」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 속에 ‘5월 10일 仁 川을 發程한 이래’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菊池는 5월 9일경 서 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10일에 충청, 전라 지방을 향해 배를 타고 정탐 활동을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동 신문 7월 7일자 3면에 실린 「東徒 探偵記」 3회분 기사 속에는 ‘6월 19일 濟物(浦)에 도착하였다’는 내 용이 나오는데, 이 기사 내용으로 보아 菊池가 충청 전라 지방에 대한 정 탐활동을 모두 마치고 인천으로 귀환한 날짜가 6월 19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 신문 6월 24일자의 「菊池謙讓 氏」라는 기사 속에는 다시 ‘6월 21일 氏는 京城에서 打電’이라는 내용이 나오는 점에서 6월 20일을 전후하여 서울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 동 신문 8월 16일자 1면에 ꡔ국민신문ꡕ 社告 형태로 실린 「어떻게 日淸 大戰爭을 보도할 수 있을까」라는 기사 속에는 菊池가 경성 주재 특파원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6월 20일 이후부터 8월 16일 전후까지는 종전과 변함없이 경성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 신문 9월 19일 자 1면 社告에는 菊池가 平壤 주재 특파원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일본군이 북상하면서 菊池 역시 종군기자로서 평양까지 올라갔 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동 신문 11월 1일자 2면 社告에 菊池는 다시 경성 주재 특파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일본군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갔던 국지는 10월 말경에는 다시 경성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서울로 되돌아온 국지의 동정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2월 4일부터 6일까지 3회에 걸쳐 그 자신의 농민군에 대 한 논평 기사인 「東學黨論」을 3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1894년 농민혁명 당시 菊池는 주로 경성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천과 평양,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까지 내려가 농민군에 대 한 정탐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것을 기사화하여 ꡔ국민신문ꡕ에 연재하였 다. ꡔ국민신문ꡕ 1894년도에 실린 국지 자신이 직접 정탐한 내용을 바탕으 로 쓴 농민군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다.

東學黨 探情記(一)* 7월 3일 3면 東學徒 探情記(二) 7월 1일 3면 東徒 探情記(三) 7월 7일 3면 東學黨論(上) 12월 4일 1면 東學黨論(中) 12월 5일 3면 東學黨論(下) 12월 6일 3면 * 探情記(一)이 探情記(二)보다 늦게 도착한 관계로 게재 일자가 늦어 진 것임.77)

77) ꡔ國民新聞ꡕ 1894년 7월 3일 「東學黨 探情記(一)」.

위의 기사 중에서 농민군 동정에 대한 정탐 내용을 기사화 것이 바로 「동학당 탐정기(一)」(7월 3일자), 「동학도 탐정기(二)」, 「동도 탐정기(三)」 등이다. 前述한 바와 같이 菊池 자신이 5월 10일 인천을 출발하여 6월 19 일 다시 인천으로 귀환하기까지 41일간의 行程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 다. 국지의 정탐 대상 지역 또는 滯在地를 날짜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월 10일 배로 仁川 출항 5월 10~17일 安山灣, 南陽灣 연해 정탐5월 18일 牙山 後灣을 거슬러 素沙河를 거처 屯浦에 상륙 5월 18~20일 素沙河 일대 정탐 5월 21일 아산 후만 宣化川을 거슬러 九萬浦에 도착 5월 22일 선화천 하류에 정박 5월 23일 아산만 안의 한 섬에 정박 5월 24일 아산만을 출발 泰安半島 일대 정탐 5월 25일 唐津灣을 거쳐 唐津縣에 도착 5월 25~27일 당진현 일대 정탐 5월 28일 黃金灣을 안의 長都村에 도착 5월 29일 安興縣 密村에 도착 5월 30일 밀촌의 富豪 崔某 방문 5월 31일~6월 1일 安興海峽을 배회 6월 2일 淺水灣 안의 積石村에 도착 숙박 6월 4일 泰安縣으로 들어가 정탐 활동 6월 5일 淺水 東灣으로 들어감 6월 6일 천수 南灣을 출발하여 保寧의 忠淸 水營 도착 6월 7일 수영 본진으로 들어가 忠淸水使 李鳳九를 면회함 元山島 근처 西洋人이 운영하는 항구를 정탐하고 松島에 도착 정박함 6월 9일 송도를 지나 藍谷에 도착함 6월 10일 藍浦로 들어감 6월 11일 남포를 출발하여 馬梁 舊鎭에 도착함 6월 12일 舒川郡으로 들어감 6월 13일 서천 출발, 閑也島(開也島의 오기)를 거쳐 群山 도착 이날 밤 마침 인천에서 온 廣濟號 일본인 船長으 로부터 일본군이 인천에 이미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할 것을 결심함 이날 밤 三更에 轉運使 趙弼永을 면회하고 농민 군의 동정에 대해 자세히 문답함 6월 14일 군산을 출항했으나 폭풍우를 만나 竹島 근처에서 이틀간 표류 6월 16일 천수만 도착 6월 17일 안흥 경유 6월 18일 아산 前灣 통과 6월 19일 제물포(인천) 도착 귀환 이상과 같은 41일간에 걸친 일정 속에서 菊池는 충청도 아산 근처의 屯浦와 九萬浦로부터 전라도 群山에 이르기까지 서해 연안 지방을 중심 으로 농민군에 대한 동정을 광범위하면서도 상세하게 정탐해서 기록으 로 남기고 있다.

菊池가 정탐 대상으로 삼았던 지방이 비록 전봉준이 이 끄는 농민군이 봉기한 전라도 서남부 지역은 아니었으나 그가 남긴 정탐 기 속에는 농민혁명 당시 충청도 일대의 일반 민중들이 농민군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菊池는 가는 곳마다 일반 민중들의 농민군 인식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고 정탐기에 적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어제(5월 29일-주) 安興 令使(안흥현감-주) 엄명을 내려 (안흥 密村 일대의-주) 東徒를 포박할 것을 명했으나 人民들은 모두 모르는 척하여 돌아보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東徒에 대한 (일반 민중의-주) 風評은 贊成하는 것 같았다.78) 이로부터 2~3일(6월 7~9일-주) 사이 東徒가 (保寧의 忠淸-주) 水營 을 습격할 것이라는 풍설이 무성했지만 실제로는 뜬구름 잡는 것 같아서 어디로부터 來襲해 올 지, 目下 東徒는 어디에 本營을 설치하고 있는지, 동도의 首領, 人物 전반에 관한 評論 등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반의 人 氣는 東徒의 猖獗을 희망하는 듯하였고, 東徒에 대한 評判은 오히려 歡 待의 뜻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79)

78) 在朝鮮特派員 長風生 特報, 「東學黨 探情記(一)」, ꡔ國民新聞ꡕ 1894년 7월 3일.

79) 長風生, 「東學徒 探情記(二)」, ꡔ國民新聞ꡕ 1894년 7월 1일.

내가 지금까지 經過한 곳은 (서해안 일대의-주) 중요 海邑들로써 東 學에 대한 그들의 思想은 몹시 단순하여 다만 風聲鶴唳(풍성학려: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당치 아니한 사물에도 놀라는 모양-주)로써 東學의 擧 動을 귀로만 듣고 異說을 평판하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東學에 대한 同情을 표하고 있다는 것은 斷信(단언-주)할 수 있다.80) 이렇듯 菊池의 「동학당 탐정기」 속에 나타난 충청도 전라도 서해 연안 의 조선 민중들의 농민군에 대한 인식은 ‘東徒의 猖獗을 희망’하며, ‘東學 에 대한 동정을 표하고’ 있을 정도로 우호적이었으며, 이것은 곧 당시의 농민군이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菊池의 농민군에 대한 정탐 활동이 단순히 취재 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스파이 활동의 일환이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菊池의 충청도 전라도 서해 연안 정탐은 단순한 취재 목적이 아니라, 일본정부(외무성)와 일본 군부(참모본부) 및 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의 조선출병을 포함한 對外强硬論 을 주장한 ꡔ國民 新聞ꡕ을 위한 명백한 스파이 활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국지의 정탐 활동이 단순 취재가 아니라 스파이 활동이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는 농민 혁명 당시 菊池가 바로 일본 해군의 ‘군사밀정’ 新納의 집에 거처하고 있 었다는 점,81) 1894년 6월 24일자 ꡔ국민신문ꡕ의 「菊池謙讓 氏」라는 기사 속에 “我社의 特別通信員으로써 彼地(조선 서울-주)에 있는 長風生 菊 池謙讓 氏는 新納 少佐를 따라 여행하고 있어서”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 는 점, 그리고 新納 소좌에 대한 동향이 ꡔ국민신문ꡕ 6월 24일자의 「菊池 謙讓 氏」라는 기사 옆에 소개되면서 그가 “충청, 전라 해안 지방을 여행 지로 하고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는 점, 그리고 국지가 농민혁명 당시 일 본 外務省 特別囑託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점82)을 종합할 때 너무나 자명 하다고 하겠다.

80) 在京城特派通信員 長風生, 「東徒 探情記(三)」, ꡔ國民新聞ꡕ 1894년 7월 7일.

81) 하지연, 「한말 일제강점기 국지겸양의 문화적 식민활동과 한국관」, 220쪽

82) 위와 같음.

5. 맺음말

19세기 세계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대규모적이며 장기적인 민중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 군사적 개입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이 실패하게 된 배경 에는 단순히 일본의 정치 군사적 개입, 달리 표현하자면 일본의 정치가, 관료, 군인들의 침략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은 그들의 조선 침략 및 농민군 진압을 밑으로부터 지지하고 협력했던 무명의 일본인들의 역할 도 매우 컸다. 무명의 일본인들의 전쟁협력이 바로 동학몽민혁명이 좌절 하게 된 또 다른 요인의 하나인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농민혁명기를 전후하여 다양한 ‘전쟁협력’ 활동으로 제 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 및 농민군 진압을 뒷받침했던 재조일본인의 인 구의 급격한 증가 추이를 살펴본 다음, 그 같은 인구증가를 초래한 역사 적 배경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리고 재조일본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제국 주의 일본의 침략 전쟁 및 농민군 진압에 협력했는지 그 구체적 실태를 밝혀 보았다. 농민혁명기 재조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일본군의 출병을 청원하였을 뿐 아니라, 출병한 일본군을 위하여 식사와 숙소 제 공 등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다수의 재조일본인들이 조선어 통역으로 종군하였으며 御用商人의 신분으로 군수물자 조달에 협력한 재조일본인도 적지 아니하였다. 뿐만 아니라, 大陸浪人 출신 재조일본인 들은 일본군에 의한 불법적인 조선왕궁 점령사건에도 적극 가담하였으 며, 反日적인 관료를 축출하고 친일관료를 중심으로 대원군을 추대한 ‘경 복궁쿠데타’ 과정에서 最一線에 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민혁명기 재조일본인들의 다양한 전쟁협력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바로 다양한 계층의 재조일본인들이 농민군에 대한 정탐활동을 중심으로 한 스파이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기 在朝日本人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131 領事館 警察, 公使館 소속 駐在武官, 內地行商, 留學生, 신문사 특파원 등 이 중심이 된 스파이 활동 사례 중에서도 특히 ꡔ國民新聞ꡕ 특파원 菊池 謙讓이 벌인 스파이 활동은 종래 밝혀지지 않은 사례로, 농민혁명에 관 한 새로운 사실과 함께, 특파원들마저 스파이 활동을 통해 전쟁에 협력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향후 농민혁명기 조선에 특파된 신문사 특파원들의 구체적 행적, 농민 혁명을 보도한 일본신문들의 보도 태도 등을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데 작 은 단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2010년 7월). ▪

▪ 주제어 : 東學農民革命期, 在朝日本人, 戰爭協力, 스파이 활동, 菊池謙讓

접수일 : 2010.6.30 / 심사완료일 : 20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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