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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명대 양명학 태주학파의 조사선 인식/김진무.충남대

Ⅰ. 서언

Ⅱ. 양명학의 흥기와 조사선

Ⅲ. 태주학파의 조사선 인식

Ⅳ. 결어

한글요약

명대(明代)는 국가권력에서 이학(理學)과 관련된 학문 이외에는 강의조차도 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사상적으로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명대 중기에 이르러서 ‘이학’의 맹점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지식인들은 점차 송대(宋代)에서 ‘이학’과 대립하였던 ‘심학(心學)’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왕수인(王守仁)이며, 그의 호인 ‘양명(陽明)’을 따라 그가 제창한 사상을 ‘양명학(陽明學)’이라고 칭한다. 왕수인의 사후에 양명학은 다양한 분파로 나눠진다. 그 가운데 태주학파에서는 전적으로 조사선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 태주학파는 특히 ‘좌파(左派)’로 칭해졌는데, 그것은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을 전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가 쇠퇴함에 따라 조사선이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조사선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조사선의 가풍(家風)을 따르고자 하였는데, 그를 ‘광선(狂禪)’이라고 칭한다. 본 논문에서는 태주학파를 주도한 탁오 이지의 사상을 중심으로 조사선에 대한 인식과 그로부터 유행하게 된 ‘광선’을 고찰하였다.

주제어 양명학(陽明學), 태주학파(泰州學派), 광선(狂禪), 탁오(卓吾) 이지(李贄), 왕간(王艮), 하심은(何心隐)

Ⅰ. 서언(緖言)

중국불교의 발전은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와 수(隋)⋅당(唐)시기를 거치며 유⋅불⋅도 삼교로 정립하면서 중국의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면서 유학에 입각한 통치이념을 채택하였고, 주요한 관직을 모두 유학에 바탕을 둔 과거를 통하여 임명하게 되면서 불교와 도교는 점차 쇠락해져 갔다. 특히 남송(南宋)에 이르러 주희(朱熹)가 북송대로부터 제시된 ‘이학(理學)’을 종합하여 정립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이 더욱 치열해졌고, ‘이학’이 관방(官方)의 주된 학문으로 성립되면서 불교는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대에 이르러서도 더욱 심해졌다.

승려 출신인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즉위 초기에 제유(諸儒)와 함께 치도(治道)를 논하겠다고 밝히고,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여 모든 사찰과 승려들을 통제하였다. 또한 신명불교방책(申明佛教榜冊)을 발포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승려들의 민간(民間)과 교류를 엄격히 금하여 적발되면 머리를 베고, 숨겨준 자는 삼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낸다고 하였다.1)

1) 釋鑑稽古略續集 卷2(大正藏49, 936中), “敢有不入叢林, 仍前私有眷屬, 潛住民間, 被人告發到官, 或官府拿住, 必梟首以示眾, 容隱窩藏者流三千里.”

이처럼 철저한 불교에 대한 통제와 함께 태조는 주자학(朱子學)을 중심으로 하는 이학(理學)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와 태조의 완전한 중앙집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양송(兩宋) 이후 기울어져 가는 선종을 비롯한 전체 불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로부터 불교에 대한 통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명대에서는 승록사(僧錄司)를 통하여 도첩(度牒)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불교에 대한 통제를 늦추지 않았다.

명대 중기에 이르러 관방의 ‘이학’은 주희 등의 저술에 대한 ‘훈고학(訓詁學)’으로 흐르면서 맹점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학자들은 점차 송대 육구연(陸九淵)이 제창한 심학(心學)으로 관심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왕수인(王守仁)이고, 그의 호를 따라 양명학(陽明學)이라고 칭하면서 명말에 이르면서 양명학이 대세를 이루었다.

왕수인의 양명학은 육구연의 심학을 계승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심학은 조사선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에 따라 양명학도 그 사상적 핵심에 조사선, 특히 육조단경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양명학은 왕수인의 사후에 크게 일곱의 학파로 분기되어 발전하는데, 이를 ‘왕학칠파(王學七派)’라고 칭한다.

그 가운데 태주학파(泰州學派)는 직접 조사선의 선리(禪理)를 논하고 있고, 스스로 양명선(陽明禪) 을 표방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를 ‘광선(狂禪)’이라고도 칭하며, 명말에 상당히 유행했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명말에 불교가 중흥의 장을 맞이하게 되어 운서주굉(雲棲袾宏), 자백진가(紫柏眞可), 감산덕청(憨山德淸), 우익지욱(蕅益智旭) 등 ‘사대 고승’이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태주학파의 작용이 상당히 중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왕수인이 제창한 양명학과 조사선의 관계, 그리고 양명학의 흥기와 태주학파의 조사선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양명학의 흥기와 조사선

양명학의 흥기는 사상사의 입장에서는 불교, 특히 조사선과 유학의 관계를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양명학은 무엇보다도 남송대 주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육구연의 심학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구연의 심학은 사상적으로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육구연은 기본적으로 ‘심(心)’과 ‘리(理)’에 모두 도덕적 ‘선단(善端)’을 지니고 있고, 그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의 반성, 바로 ‘절기자반(切己自反)’을 통한다면 궁극적인 ‘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까닭에 도를 밖에서 찾지 말라는 ‘도막외구(道莫外求)’ 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양식은 맹자(孟子)의 모든 만물이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만물비아(萬物備我)’와 그러므로 자기로부터 반성하여 구해야 한다는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심학은 육조단경의 사유양식과 상당히 유사함을 엿볼 수 있다. 심학의 사상은 육조단경에서 만법(萬法)이 자심(自心)에 있음을 강조하고,2) 나아가 불(佛)을 자성(自性)으로 규정하여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을 제창하고 있음3)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사유양식의 일치는 육조단경이 본래 맹자의 사유양식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까닭으로 육구연이 심학을 제창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조단경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4)

2)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51上), “故知萬法, 盡在自心.”

3)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1下), “佛是自性, 莫向身外求.”

4) 김진무, 「육조단경과 육왕(陸王) 심학(心學)」, 유교사상문화연구 88, 한국유교학회,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2022.에서 이와 관련된 논술을 하고 있다. pp.181-184 참조.

심학이 조사선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음은 주희가 “근래에 육구연의 정언(靜言)을 말하는 논풍(論風)의 요지(要旨) 한두 개를 들었는데, 완전히 선학(禪學)이며, 다만 그 명호(名號)를 바꾸었을 뿐이다.”5)라고 비판하는 구절로부터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다.

남송에서는 육구연의 ‘심학’과 주희(朱熹)의 ‘이학’이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는 양상이었지만, 결국 주희를 중심으로 하는 이학이 주류를 차지하였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철저하게 불교를 비판한 주희의 이학에서도 불교의 사상을 받아들인 부분이 농후하다.

특히 이학에서 핵심적인 명제인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중국불교에서 도생(道生)이 최초로 제시한 돈오론(頓悟論)을 제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논리로 출현한다.

예를 들어 “이치와 어그러지면 미혹되고, 미혹되면 반드시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반대로 이치를 깨닫는다면, 이치에는 반드시 둘이 없으니, 여래(如來)의 도(道)가 하나이다.”6)라는 문구와 주희의 “천하의 이치는 만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그 귀결인 곧 하나일 뿐이요, 둘, 셋을 용납하지 않는다.”7)라는 문구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외에 다양한 측면에서 이학에서 논하는 ‘이일분수’의 개념이 불교로부터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논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8)

5) 朱文公文集 卷47. “近聞陸子靜言論風旨之一二, 全是禪學, 但變其名號耳.”

6) 法華經疏(卍續藏27, 10中), “乖理爲惑, 惑必萬殊, 反而悟理, 理必無二, 如來道一.”

7) 朱子語類 卷63. “天下之理萬殊, 然其歸則一而已矣, 不容有二、三也.”

8) 김진무⋅류화송, 「도생(道生)의 ‘리(理)’와 이학(理學)의 ‘이일분수(理一分殊)’」,  동아시아불교문화 33,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에서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pp.236-244 참조.

이처럼 남송 시기에 사상적 주류를 형성했던 심학과 이학이 모두 불교와 깊은 관계를 지니는 점은 명대에 양명학의 흥기에 상당히 중요한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명대는 철저하게 이학이 지배하였지만, 중기로부터 그 사상적 맹점을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점차 육구연의 심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 갔다.

이러한 시기에 왕수인이 바로 송대 육구연의 심학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건립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양명학과 조사선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왕수인이 양명학을 제창하는 과정은 청대 양명학을 계승한 황종희(黃宗羲)의 명유학안(明儒學案) 권10의 「문성왕양명선생수인(文成王陽明先生守仁)」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엿볼 수 있다.

선생의 학문은 처음에는 사장(詞章)을 두루 보았고, 이어서 주희의 책[考亭之書]을 두루 읽고, 다음에 순서를 따라 물(物)을 궁리(窮理)하여, ‘물’의 이치와 내 마음을 돌아보니, 끝내 둘이 되어 얻어 들어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불교와 도가(道家)에 출입하기를 오래 하고, 오랑캐 땅에 머무는 곤경에 처하게 되니,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참으니, 성인(聖人)이 여기에 처한 것을 생각하니, 다시 무슨 도가 있겠는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과 성인의 도를 나의 성품에 스스로 구족(具足)하니, 밖에서 구함을 빌리지 않음을 홀연히 깨달았다. 그 학문은 세 차례 변하여 그 문에 들기 시작하였다.9)

9) 明儒學案 卷10, 「文成王陽明先生守仁」. “先生之學, 始泛濫于詞章, 繼而遍讀考亭之書, 循序格物, 顧物理吾心, 終判爲二, 無所得入. 於是出入佛老者久之, 及至居夷處困, 動心忍性, 因念聖人處此, 更有何道? 忽悟格物致知之旨, 聖人之道, 吾性自足, 不假外求. 其学凡三變而始得其門.”

이로부터 황종희는 왕수인이 사상적으로 “세 차례 변함[三變]”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삼변은 바로 “사장과 주희의 책”을 두루 보았지만 얻을 수 없다고 인식한 것이 첫째이고, 그에 따라 불교와 도가에 출입하였다는 것이 둘째이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성품이 스스로 구족하니, 밖에서 구함을 빌리지 않음[不假外求]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의성품에 스스로 구족하니, 밖에서 구함을 빌리지 않음[吾性自足, 不假外求]”은 명확하게 육조단경에서 제시되는 사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종보본 법보단경에서 “각각 자신의 마음을 관(觀)하여 스스로 본성(本性)을 보아라. …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십이부경(十二部經)이 인성 가운데 본래 스스로 구족[人性中本自具有]하여 있다. … 만약 스스로 깨달으면, 밖에서 구함을 빌리지 않음[不假外求]이다.”10)라고 하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왕수인은 자신이 불교, 즉 단경에서 깨달음을 얻었음을 암시하는 글들이 전습록(傳習錄)의 다양한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문구는 바로 “선(善)도 악(惡)도 헤아리지 않을 때,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는 불씨(佛氏)의 본래면목을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하여 시설(施設)한 방편이다.

본래면목은 바로 나의 성문(聖門)에서 말하는 양지(良知)이다.”11)라고 논술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선도 악도 헤아리지 않을 때, 본래면목을 깨달음”의 구절은 명확하게 종보본 단경을 인용한 듯한 구절이다.12)

10)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1上), “各自觀心, 自見本性. … 三世諸佛、十二部經, 在人性中本自具有. … 若自悟者, 不假外求.”

11) 傳習錄 卷中. “不思善不思惡時, 認本來面目. 此佛氏爲未識本來面目者設此方便. 本來面目, 卽吾聖門所謂良知.” 12)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49中), “惠能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麼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따라서 왕수인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시에 유행하던 종보본 단경 을 통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경 에서 본래면목, 즉 ‘자성(自性)’을 왕수인은 ‘양지(良知)’로 칭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논하자면, ‘자성’과 ‘양지’는 거의 같은 범주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단경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지만, 왕수인의 사상은 다시 변화하는데, 이를 황종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후, 지엽(枝葉)을 다 제거하고 본원(本原)에 뜻을 한결같이 하여 묵좌(默坐)하여 마음을 맑히는 것으로 학문으로 삼았다. ‘아직 발하지 않은 중[未發之中]’이 있어 비로소 능히 ‘중절(中節)의 화(和)’를 발할 수 있으며,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수렴(收斂)을 주(主)로 하지만 발산은 부득이하다. 강우(江右) 이후, 오로지 ‘치양지(致良知)’ 3자(字)를 들어 묵묵하게 앉음을 빌리지 않고, 마음이 맑아짐을 기다리지 않고, 익히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스스로 천칙(天則)이 있음에 나아갔다. 대체로 양지(良知)는 ‘아직 발하지 않은 중’에 즉(卽) 하는데, 이 ‘양지’ 앞에 다시 아직 발하지 않음은 없었고, ‘양지’는 바로 ‘중절의 화’인데, 이 ‘양지’ 뒤에 다시 아직 발하지 않음은 없다.13)

위 구절들을 모두 황종희가 왕수인의 전습록에서 발췌,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황종희의 평가로부터 왕수인의 사상은 다시 변화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구절은 바로 왕수인이 유가의 중용(中庸)의 문구를 원용하여 자신의 학설을 논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미발지중(未發之中)”과 “중절(中節)의 화(和)”는 바로 중용의 ‘수장(首章)’이라고 하여 가장 중요시하는 제1장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른다.”14)라는 문구를 원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3) 明儒學案 卷10, 「文成王陽明先生守仁」. “自此以後, 盡去枝葉, 一意本原, 以黙坐澄心爲學. 有未發之中, 始能有發而中節之和, 視聽言動, 大率以收斂爲主, 發散是不得已. 江右以后, 專提致良知三字, 黙不假坐, 心不待澄, 不習不慮, 出之自有天則. 盖良知即是未發之中, 此知之前更無未發; 良知即是中節之和, 此知之後更無已發.”

14) 中庸 1章.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그런데 왕수인은 이렇게 중용의 논리를 원용하면서도 ‘중용(中庸)’을 수양의 덕목으로 제시하지 않고 “수렴(收斂)”으로 제시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실제로 전습록에서는 “정신과 도덕, 언동은 대체로 ‘수렴’을 주로 하지만, 발산은 부득이하다. 천지인(天地人)과 만물이 모두 그렇다.”15)라고 하는 점으로부터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왕수인이 사용하는 ‘수렴’은 중용의 ‘중용’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하겠다.

위의 인용문에서 “강우(江右) 이후”, 즉 왕수인이 강서(江西) 여릉(廬陵)의 지현(知縣)이라는 관직을 얻은 후에는 다시 그 사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묵좌(默坐)하여 마음을 맑히는 것” 으로 학문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강우 이후에는 “묵묵하게 앉음을 빌리지 않고, 마음이 맑아짐을 기다리지 않고, 익히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스스로 천칙(天則)이 있음”으로 전환하였고, 나아가 이를 “치양지(致良知)”, 즉 양지에 도달, 혹은 맡긴다는 의미로 ‘치(致)’를 붙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명확하게 『중용』의 작용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왕수인은 『단경』, 그것도 명확히 종보본 『단경』을 매개로 하여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단경』에서 강조하는 ‘자성’ 을 ‘양지’로 제시하였고, 그 이후 『중용』을 통하여 더욱 원숙한 사상인 ‘치양지’를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이를 통하여 왕수인은 일종의 ‘유불융합(儒佛融合)’을 실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왕수인이 중용을 원용한 것에는 역시 불교의 작용이 있었다고도 추정할 여지가 있다.

중용을 불교와 원융한 최초의 인물은 바로 당조(唐朝)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활동한 양숙(梁肅)이다.

양숙은 천태종의 중흥조로 잘 알려진 형계담연(荊溪湛然)의 재가 제자이지만, 유일하게 담연의 법을 계승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16)

15) 傳習錄 卷上. “精神、道德、言動, 大率收斂爲主, 發散是不得已. 天地人物皆然.”

16) 宋高僧傳 卷6, 「國清寺湛然傳」(大正藏50, 740上), “其朝達得其道者, 唯梁肅學士.”

양숙은 담연의 입적 후에 산정지관(刪定止觀) 6권과 그 지침서인 지관통례(止觀統例)를 찬술하였는데, 여기에는 천태학의 지관(止觀)과 중용의 사상을 융합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7)

그리고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고산지원(孤山智圓)은 스스로 ‘중용자(中庸子)’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중용을 중시하였으며, 그가 찬술한 한거편(閑居編)의 권19에 중용자전(中庸子傳)(卍續藏56, 上中下 所收)이 실려 있다.

더욱이 왕수인이 깨달음을 얻은 종보본 단경의 원형을 정리한 설숭(契嵩) 은 그의 심진문집(鐔津文集) 권4에는 바로 5편의 중용해(中庸解)(大正藏52 所收)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설숭은 유학에서 강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중용의 사상을 통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나는 ‘중용’이 지극함을 아니, 천하의 지극한 도이다.”18)라고 논술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중용을 중시하는 경향을 왕수인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 하겠다.

특히 설숭이 종보본 단경의 원형인 설숭본 단경을 편찬하였기 때문에 왕수인이 그의 문집을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단경과 깊은 사상적 관련이 있음은 그가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습록에는 ‘지행론(知行論)’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자인 서애(徐愛)가 ‘지(知)’와 ‘행(行)’의 선후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바로 ‘지행합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지행합일’ 의 논리에는 바로 단경에서 ‘돈오(頓悟)’를 통하여 제창한 ‘정혜등학(定慧等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와 관련된 선행연구가 있어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19) 왕수인이 ‘지행합일’에 전개하는 논리는 그대로 단경에서 ‘정혜등학’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논리와 상당히 유사함을 볼 수 있다.

17) 류화송, 「양숙의 천태지관(天台止觀)을 통한 유불융합」, 불교학보 93,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20.에서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pp.62-72 참조.

18) 鐔津文集 卷4, 中庸解(大正藏52, 667中), “吾知夫中庸之為至也, 天下之至道也.”

19) 김진무, 「‘知行論’을 통해 본 禪, 陽明學, 四象醫學의 人間論」, 韓國禪學 31, 한국선학회, 2012.에서 ‘知行合一’과 ‘定慧等學’, 그리고 陽明學과 壇經의 관련성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pp.333-340 참조.

이처럼 왕수인은 조사선의 종전인 단경을 매개로 깨달음을 열고, 나아가 중용을 통하여 그 사상을 더욱 깊게 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나이 56세에 광동에서 묘족(苗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왕수인에게 진압을 명령하였고, 당시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에 퇴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병이 심해져 돌아오는 길에 가정(嘉靖) 7년(1528) 10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왕수인은 출정하기 전날 다음과 같은 사구결(四句訣)을 남겼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뜻의 움직임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다.”20)

왕수인은 51세부터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견제로 아무런 관직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이 시기에 천하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어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고, 그에 따라 양명학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왕수인의 사후에 양명학은 강우왕문학파(江右王門學派), 남중왕문학파(南中王門學派), 민월왕문학파(閩粵王門學派), 북방왕문학파(北方王門學派), 초중왕문학파(楚中王門學派), 절중왕문학파(浙中王門學派), 태주학파(泰州學派) 등 이른바 ‘왕학칠파(王學七派)’로 나뉜다.21)

20) 傳習錄 卷下. “無善無惡是心之體, 有善有惡是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21) 黃宗羲의 明儒學案에는 이 ‘王學七派’에 대하여 그 사상적 개요와 중요 인물들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양명학의 학파는 그 명칭으로부터 바로 지역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지역적 구분만이 아니라 사상적 경향도 크게 달랐다고 하겠다.

그 가운데 태주학파는 양명학에서도 ‘좌파(左派)’에 속하고, 특히 ‘광선(狂禪)’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태주학파를 창립한 이는 왕간(王艮)이며, 이 학파에 속한 주요 인물들은 주서(朱恕), 안균(安鈞), 왕벽(王襞), 라여방(羅汝芳), 하심은(何心隐), 이지(李贄: 李卓吾), 초굉(焦竤: 焦弱侯), 주여등(周汝登)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태주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탁오(卓吾) 이지(李贄)를 중심으로 태주학파의 조사선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Ⅲ. 태주학파의 조사선 인식

양명학은 후대에 이르러 ‘양명선’으로도 칭하고 있는데, 왕수인의 후학이며 명말 유명한 사상가인 유종주(劉宗周)는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옛날에 유자(儒者)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일 뿐이었는데, 한번 전하여 정호(程顥)⋅정이(程頤), 주희(朱熹)가 있었고, 다시 전하여 양명(陽明) 선생이 있게 되었다. (양명 선생에 대하여) 사람들은 혹은 선에 가깝다고 한다. 즉, 옛날의 부처는 석가(釋迦)뿐이었지만, 그것이 변하여 오종선(五種禪)이 되었고, 다시 양명선(陽明禪)으로 변했음을 말한다.”22)

22) 劉子全書 卷19. “古之爲儒者孔孟而已, 一傳而爲程朱, 再傳爲陽明子. 人或以爲近乎禅. 即古之爲佛者釋迦而已矣, 一變而爲五宗禪, 再變而爲陽明禪.”

이로부터 왕수인을 선진(先秦)의 공자와 맹자, 그리고 북송(北宋)의 정호와 정이 형제, 남송(南宋)의 주희 등과 함께 유학의 정맥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 있어서는 석존(釋尊)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오종선(五種禪), 즉 위앙(潙仰)⋅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종(法眼宗)의 조사선(祖師禪)으로 변환되었고, 나아가 명대에 이르러서는 ‘양명선’으로 출현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왕수인은 유가와 불가의 정맥을 모두 계승했다는 상당히 중요한 언급이라 하겠다. 유종주의 이러한 주장은 양명학이 유학을 계승한 측면도 있지만, 불교의 조사선 역시 계승하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구연의 심학(心學)에서 제창한 ‘절기자반(切己自反)’이나 ‘도막외구(道莫外求)’ 등의 사상이 “완전히 선학(禪學)”이라고 비판을 받을 정도로 사상적으로 조사선에 경도되었음이 분명하였고, 나아가 왕수인은 그 육구연의 심학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경을 매개로 깨달음을 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는 왕수인의 친구였던 왕관(王綰)이 그의 저술인 명도편(明道編)에서

“육조단경을 보아 그 본래무물을 깨닫게 하라. 선(善) 도 헤아리지 않고 악(惡)도 헤아리지 않고서 본래면목을 본다면, 곧바로 상승(上乘)을 초월하게 될 것이요, 양지(良知)의 지극(至極)과 합할 것이다.”23)

23) 明道編卷1. “令看六祖壇經, 會其本來無物. 不思善, 不思惡, 見本來面目, 爲直超上乘, 以爲合於良知之至極.”

라는 논술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러나 왕수인은 본래 유학자이며, 유학의 정맥에 편입되기 위하여 태주학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황종희가 찬술한 명유학안 권33에 실린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전체적인 학풍을 소개하는 「전언(前言)」의 첫 단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양명 선생의 학문은 태주(泰州)와 용계(龍溪)가 있어서 천하에 널리 퍼졌고, 또한 태주와 용계로 인하여 그 전승을 점차 잃게 되었다. 태주와 용계는 때때로 그 스승의 말에 불만을 품고, 구담(瞿曇) 의 비밀을 더욱 밝혀 스승으로 귀의했으며, 대체로 양명학을 선(禪) 으로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용계 이후, 역량이 용계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고, 또 강우(江右)에서 그를 바로 잡음이 있었기 때문에 열 가지로 결렬되지 않을 수 있었다. 태주 이후, 그 사람들은 대부분 맨손으로 뱀과 용을 용감하게 잡을 수 있었는데, 안산농(顔山農) 과 하심은(何心隱) 일파에게 전해졌다.”24)

24) 明儒學案 卷33, 「泰州學派」, 「前言」. “陽明先生之學, 有泰州、龍溪而風行天下, 亦因泰州、龍溪而漸失其傳. 泰州、龍溪时时不滿其師說, 益啓瞿曇之秘而歸之師, 盖躋陽明而爲禅矣. 然龍溪之後, 力量無過於龍溪者, 又得江右爲之救正, 故不至十分决裂. 泰州之後, 其人多能以赤手搏龍蛇, 傳至顔山農、何心隱一派.”

여기에서 언급하는 “태주”는 태주학파를 창시한 왕간(王艮)을 가리키고, “용계”는 왕기(王畿)를 지칭하고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왕간과 왕기의 태주학파의 인물들에 의하여 천하에 널리 퍼진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로 인하여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고 평가하는데, 그 원인을 바로 양명학을 선으로 떨어지게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왕간과 왕기를 중심으로 태주학파는 안산농, 하심은에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여기에 태주학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탁오(卓吾) 이지(李贄)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왕간과 왕기 이후의 태주학파는 탁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탁오 이지를 배제하는가? 그것은 탁오가 ‘이단’임을 선언하고, 스스로 출가하는 등 상당히 과격한 행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황종희는 태주학파의 성격을 또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이른바 조사선은 작용으로 견성(見性)을 이룬다. 제공(諸公)들이 천지를 뒤흔들어 앞에서는 고인(古人)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뒤에서는 오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석씨(釋氏)가 한번 몽둥이로 치고 한번 할(喝)을 하니, 근기(根機)에 따라 멋대로 행하고, 주장자를 내려놓으면,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 제공들이 맨몸으로 감당하였으나, 시절(時節)을 내려놓음이 있지 않았다.25)

이러한 평가로부터 황종희가 인식하는 조사선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른바 작용즉성(作用卽性)의 입장이고, 또 함부로 방할(棒喝)을 베푸는 것이고, 이는 시절을 내려놓지 않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황종희의 견해는 조사선을 상당히 오해한 것이라 하겠다.

‘작용즉성’은 조사선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견해이고, 나아가 방할의 설시(設施)에는 엄격한 원칙에 따라 실행되고 있다는 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시절을 내려놓음이 있지 않음”이라는 평가는 조사선 자체를 매도하는 견해라 하겠다.

이러한 평가는 태주학파의 조사선에 경도된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평가로부터 후대에 태주학파의 조사선에 경도된 것을 이른바 ‘광선(狂禪)’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 ‘광선’의 명칭은 바로 탁오 이지의 행적을 본받은 후학들로부터 출현하였다고 하겠다.

이탁오는 유학에 대하여 스스로 ‘이단’임을 선포하고, 마성(麻城) 용담호(龍潭湖)에 선원(禪院)을 세워 출가를 표명했지만, 결코 정식으로 계를 받은 적은 없다.

이탁오는 자신의 출가에 대하여 “지금 나의 출가는 … 다만 내 한평생 남에게 속박당하기를 싫어해서 이루어진 일이다.”26)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의 행적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으며, 말년에 무고를 당하여 그 지역 관리에게 심문을 당하자 스스로 칼을 빼앗아 자살로 생을 마쳤다.

25) 明儒學案 卷33, 「泰州學派」, 「前言」. “所謂祖師禪者, 以作用見性. 諸公掀飜天地, 前不見有古人, 後不見有來者. 釋氏一棒一喝, 當機横行, 放下拄杖, 便如愚人一般. 諸公赤身擔當, 無有放下時節.”

26) 焚書 卷4, 「感慨平生」. “今我亦出家, … 緣我平生不愛屬人管.”

이러한 이탁오의 행적은 오히려 자백진가(紫白眞可)로부터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자백진가전집(紫白尊者全集) 권23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법을 공부하는 재가자와 출가자들을 견주어 보면, 뼈와 마디가 그다지 굳세지 않은 것 같다. 역경(逆境)에 조금이라도 부딪치면 바로 들 여우가 사람으로 변해 이상한 짓을 하다가 개 소리를 들으면 옛 몸이 갑자기 회복되어 개가 비로소 그것이 여우이었음을 알고 감히 함부로 물어뜯지만, 만약 사람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으면 개는 절대로 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탁오(卓吾)는 여우가 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가 무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러나 탁오는 도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도를 쓰지 못했을 뿐이다. 지(知)는 조(照)에 상즉(相卽)하고, 용(用)은 행(行)에 상즉하니, 늙은이(자백진가)는 탁오와 더욱 같지 않구나!(늙은이가 탁오에 더욱 미치지 못하는구나!) 27)

여기에서 자백진가는 이탁오를 골절(骨節)이 굳은 이로 묘사하고, 그의 자살조차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대(淸代)에 거사전(居士傳)을 편찬한 팽제청(彭際淸)도 그의 전기를 찬술하면서 끝머리에 이탁오를 극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8)

27) 紫白尊者全集 卷23(卍續藏73, 343上), “比見學佛緇白, 骨節不甚硬. 稍觸逆境, 即如野狐變人作怪, 一聞犬聲, 故體頓復, 犬始知其是狐, 敢恣口咬之, 儻人形尚存, 犬決不咬. 惟卓吾非狐變之人也. 故不煩犬咬, 遂爾自刎. 然卓吾非不知道, 但不能用道耳. 知即照, 用即行, 老朽更不如卓吾在!”

28) 居士傳 卷43(卍續藏88, 260中), “내가 탁오 거사를 논하고자 살펴보고서 그 행적에 놀랐다. 그의 행적은 바로 세상의 병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거사는 실제로 스스로 행하였다. 거사의 저술을 읽고서는 감동하였다. 오호라! 거사는 근본을 알았구나! 거사는 출가했지만, 계(戒)를 받지 않았으니, 다시 관복을 입는다고 해서 흠이 되겠는가? 그 격한 행적이 이와 같으니, 나는 그를 알지 못하도다. 予始觀卓吾居士論古之書, 駭其言迹. 其行事動為世詬病, 以為居士實自取之也. 既而讀居士論學書, 服之. 嗚呼! 若居士者, 可謂知本者與! 居士既出家, 不受戒, 無何又反冠服, 其戲耶? 其有激而為此耶, 則予不足以知之矣.”

자백진가나 팽제청의 이러한 평가로부터 이탁오가 격한 생애를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이탁오의 행적이 상식을 벗어나는 과격한 행적, 즉 격외(格外)의 가풍으로부터 후대에 이른바 ‘광선(狂禪)’이라고 칭하는 태주학파의 양명선(陽明禪)이 출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29)

29) 탁오 이지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김진무, 「탁오(卓吾) 이지(李贄)의 불교사상과 그 의의(意義)」, 동아시아불교문화 40,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9, p.361- 386 참조.

실제로 ‘광선’의 명칭은 이탁오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대체로 이탁오의 과격한 언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탁오는 저술들을 많이 남겼는데, 불교와 관련된 저술은 화엄경합론간요(華嚴經合論簡要) (卍續藏5, 所收), 반야심경제강(般若心經提綱)(卍續藏108, 所收), 정토결(淨土決)(卍續藏108, 所收) 등이 있지만, 세간에 많이 알려진 저술은 바로 분서(焚書)와 장서(藏書)이다. 이 저술들은 제목에서 ‘이단’의 비판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 “숨겨야 할 책[藏書]”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탁오는 분서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나에게는 사종(四種)의 책이 있다. 하나는 장서인데, 위아래로 수천 년간의 시비(是非)를 육안(肉眼)으로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바를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책을 숨겨두려 했다. 마땅히 산속에 숨겨야 한다고 말한 것은 후세에 자운(子雲)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분서인데, 바로 지기(知己)들의 편지에 실린 물음에 대한 답장이고, 근세(近世) 학자들의 고황(膏肓)에 대하여 자못 절실하게 언급하고 있고, 그 가운데 그 고질(痼疾)을 밝히고 있으니,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고 싶어 할 것이고, 마땅히 태워서 없애고자 할 것을 말한 것이다. … 내 글을 태우려는 자들은 사람의 귀를 거스른다고 말하고, 내 글을 판각하여 출판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온다고 말한다. 귀에 거슬린다는 자는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니,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나이는 예순넷이다. 혹시 어느 하나라도 사람의 마음에 든다면, 나를 알아줄 자도 혹시 있지 않을까! 나는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러므로 이 책을 판각하여 출판한다. 탁오 노자(老子)가 용호(龍湖)의 취불루(聚佛樓)에서 썼다.30)

30) 焚書 卷1, 「自序」. “自有書四種: 一曰藏書, 上下數千年是非, 未易肉眼視也, 故欲藏之. 言當藏于山中以待後世子雲也. 一曰焚書, 則答知己書問, 所言頗切近世學者膏盲. 旣中其痼疾, 則必欲殺之, 言當焚而棄之. … 欲焚者, 謂其逆人之耳也; 欲刻者, 謂其入人之心也. 逆耳者必殺, 是可懼也. 然余年六十四矣. 倘一入人之心, 則知我者或庶幾乎! 余幸其庶幾也, 故刻之. 卓吾老子題湖上之聚佛樓.”

이로부터 이탁오가 자신의 저술을 분서와 장서로 제목으로 삼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서문에 따르면, 64세에 찬술한 일이며, 이 시기는 용담호의 선원에서 활발하게 법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이탁오는 당시 “여인들은 견해가 짧아 도를 배울 수 없다[女人見短不堪學道]” 는 견해를 무시하고 여인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공부시키고 있는 파격을 보였다.

이에 그를 비판하는 서신을 받자 이탁오는 그에게 반박하는 편지가 분서 권2에는 「여인은 도를 공부하기에는 견해가 짧다는 것에 대한 답서[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에는 여인의 견해가 짧게 된 것은 안방 문을 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고 하는 반박과 함께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남녀가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견해에 남녀가 있다는 말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견해에 길고 짧음이 있다는 것이 가능하지만, 견해에 남자의 견해는 모두 길고 여자는 짧다는 말이 또 어찌 가능하겠는가? 설사 여인의 몸이면서 남자의 그 견해를 가져 정론(正論)을 듣기를 즐겨 하고, 속된 말을 듣기에 부족함을 알며, 출세(出世)를 배우기를 좋아하여 부세(浮世)에 미련을 두기에 부족함을 아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세(當世)의 남자들이 그를 보기를 두려워할 것이며, 모두 부끄러워 식은땀을 흘리며 감히한마디도 못 할 것이다. 이것이 공자 성인이 천하를 주유한 까닭일 것이다.”31)

31) 焚書 卷2, 「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 “故謂人有男女則可, 謂見有男女豈可乎? 謂見有長短則可, 謂男子之見盡長, 女人之見盡短, 又豈可乎? 設使女人其身而男子其見, 樂聞正論而知俗語之不足聽, 樂學出世而知浮世之不足戀, 則恐當世男子視之, 皆當羞愧流汗, 不敢出聲矣. 此盖孔聖人所以周流天下.

이로부터 보자면, 이탁오는 여자의 견해가 짧다는 것은 사회환경적인 요인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에서 최초로 여성을 정식 종교인으로 인정한 불교의 전통에서 나온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자가 ‘주유천하’를 한 까닭이 바로 여성의 견해를 존중하였기 때문이라는 논리인데, 당시 유학이 주도하던 세태를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기질이 바로 후대에 ‘광선’의 경향을 이끌 수 있었던 단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인들을 제자로 받아들인 일은 후에 무고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분서의 「증보(增補)1」에 실린 「답주유당(答周柳壋)」에는 자신에 관한 다양한 소문, 즉 탁오가 기생을 끼고 놀거나 여배우를 희롱하며 선기(禪機)라고 주장했다거나 안산농이 갑자기 땅을 구르며 양지(良知)의 표출이라고 했고, 또 과부에게 승려들과 함께 찾아가 재(齋)를 강요했다는 등의 주장에 대하여 하나하나 해명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를 모두 상세히 논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지만,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중간에 말하는 ‘선기(禪機)’라고 한 것도 역시 크게 옳지 않다. 조사(祖師)들은 사방에서 오는 학인(學人)들이 처음 입문할 때, 심천(深淺)을 변석(辨析)하지 않고 간단한 말 한마디나 혹은 방(棒), 혹은 할(喝)로 학인을 시험하는데, 이를 탐수간(探水竿)이라고 한다. 학인들은 알지 못하여 장대 끝에 매달려 놓으려 하지 않으니, 바로 몽둥이로 때려 미미하게라도 뜻을 생하게 하고, 그 후에 채찍의 그림자[鞭影]를 간략히 보이면 학인들은 허(虛)와 실(實)이 나뉘게 된다. 후학들이 무지해서 이를 기봉(機鋒)이라 지목함도 이미 가소로운 일이다. 하물며 나는 바로 모두 진정(眞正)으로 행사(行事)하는 것이니 선(禪)이 아니고, 스스로 쾌락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니 기(機)도 아니다.32)

이로부터 이탁오는 자신이나 안상농 등의 행적이 비록 남들의 안목에는 기이하게 보일지라도 이른바 선기(禪機)라든가 기봉(機鋒), 방할(棒喝)을 흉내 냄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사”함을 밝히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탁오를 중심으로 하는 태주학파에서는 이렇게 기이하고 과격한 행적들을 많이 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분서의 「증보(增補)1」에 실린 「답이여진(答李如真)」에서 첫 문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아우는 불교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단(異端)의 무리이니, 성문(聖門)에서 깊게 배척당합니다. 아우는 이 때문에 공자의 문도들에게 감히 가볍게 가르침을 청하지 못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를 배척하여 뜻을 성명(性命)에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술업(術業)이 같지 않아 나의 안목을 능히 열어주기도 전에 오히려 나의 병이 깊어질까 두려울 뿐입니다.33)

32) 焚書 卷6, 「增補1」, 「答周柳壋」. “中間所云禪機, 亦大非是. 夫祖師于四方學者初入門時, 未辯深淺, 顧以片言單詞, 或棒或喝試之, 所謂探水竿也. 學者不知, 粘著竿頭, 不肯捨放, 即以一棒趁出, 如微有生意, 然後略示鞭影, 而虚實分矣. 後學不知, 指爲機鋒, 已自可笑. 况我則皆真正行事, 非禪也; 自取快樂, 非機也.”

33) 焚書 卷6, 「增補1」, 「答李如真」. “弟學佛人也, 異端者流, 聖門之所深辟. 弟是以于孔氏之徒不敢輕易請教者, 非一日矣. 盖恐其辟己也, 謂其志不在於性命, 恐其術業不同, 未必能開我之眼, 愈我之疾.”

이여진은 이등(李登)으로 이탁오와 비슷하게 불교에 심취하여 관직을 포기한 인물이며, 역시 태주학파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이탁오가 ‘성문(聖門)’, 즉 양명학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 원인이 양명학으로부터 불교로 전환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탁오가 불교로 전환한 원인은 그의 친구인 경정향(耿定向)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늘이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면, 저절로 한 사람의 용(用)이 있는 것이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족(足)함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에서 족하게 된다면, 천고(千古) 이전에 공자가 없었을 때는 끝내 사람이 될 수 없었는가?”34)

이로부터 보자면, 인격(人格) 혹은 위인(爲人)의 완성은 오직 공자의 가르침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당시 지나치게 유학만을 강조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의 견해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 때문에 이탁오는

“삼교(三敎)의 성인(聖人)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망령된 것이다. … 오로지 진실(眞實)만을 자신의 성명(性命)으로 삼는 것을 묵묵히 알아야 한다. 이는 삼교의 성인이 모두 성명을 종지(宗旨)로 삼는 까닭이다.”35)

라고 밝히는 바와 같이 ‘삼교융합’, 혹은 ‘삼교합일’의 입장이라 하겠다.

34) 焚書 卷1, 「答耿中丞」. “夫天生一人, 自有一人之用, 不待取給於孔子而後足也. 若必待取足於孔子, 則千古以前無孔子, 終不得爲人乎?”

35) 續焚書 卷1, 「答馬曆山」. “則爲三敎聖人不同者, 眞妄也. … 唯眞實爲己性命者, 默默自知之. 此三敎聖人所以同爲 性命之所宗也.”

이러한 입장은 사실상 태주학파의 전체적인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이탁오를 중심으로 하는 태주학파에서는 조사선의 입장에서 다양한 과격한 행적을 보였다고 하겠다.

후대에서는 바로 이러한 점으로부터 ‘광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이탁오의 제자인 원굉도(袁宏道)가 찬술한 「논선(論禪)」에서 다음과 같이 논함에서 엿볼 수 있다.

“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의 종류는 광선(狂禪)으로, 본체(本體)에서 존재와 짝하여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일체(一切)를 끊어 현성(現成)으로 가는 것이다. … 또 하나의 종류는 구하지 않고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오직 사상(事上)에 향하여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36)

36) 黃蘗無念禪師附錄 卷5, 「石公袁宏道」, 「論禪」(嘉興藏20, 524上), “禪有二種, 有一種狂禪, 於本體偶有所入, 便一切討現成去. …… 又有一種不求悟入, 唯向事上理會.”

이로부터 원굉도는 ‘광선’을 바로 조사선에서 강조하는 당하즉시(當下卽是), 본래현성(本來現成)의 입장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조사선을 바로 ‘광선’이라고 칭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선을 사상(事相)을 통하여 이치를 깨닫는다고 규정하는데, 이는 명확하게 여래선(如來禪)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사실상 이탁오는 단 한 차례도 ‘광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의 제자인 원광도는 직접 ‘광선’의 용어를 사용하며, 그에 대한 개념도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이후 태주학파를 중심으로 광선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광선’에 대하여 상당히 잘 요약한 중국학자의 논문이 있어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선학사상사에서 본다면, ‘광선’은 최소한 양층의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당송(唐宋) 이래로 ‘오가분등(五家分燈)’의 선법(禪法)을 지칭하고,

둘째는 만명(晩明) 사상계(思想界)의 불유혼융(佛儒混融) 사조(思潮)[혹은 ‘양유음석(陽儒陰釋)’]를 지칭한다.

그 가운데 특히 만명의 ‘광선’이 두드러진다.

만명의 ‘광선’의 풍조는 대체로 네 종류의 함의를 가지는데, 광선의 논(論)[‘교(敎)’], 광선의 해(解)[‘리(理)’], 광선의 행(行)[‘행(行)’], 광선의 폐(弊)[‘증(證)’]라 하겠다.

사회사조(社會思潮)의 영향에서 말하자면, 만명 ‘광선’을 익힘은 정주(程朱) 이학(理學)이 요구하는 사회규범을 돌파하여 당시와 이후의 사조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상적 특징에 대하여 말하지만, 만명의 ‘광선’은 주로 ‘이선증유(以禪證儒)’ 와 ‘이유입선(以儒入禪)’으로 표현할 수 있다.”37)

37) 陳永革, 「从明末时期“祖师禅”与“狂禅”之辨看中国禅法的晚景」, 동아시아불교문화 16,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3. p.92, 필자번역.

이로부터 ‘광선’은 오가분등, 즉 조사선의 흥기 이후에 간혹 언급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유행은 바로 명말, 그것도 태주학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선은 단순히 조사선으로 귀숙(歸宿) 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유학, 특히 양명학으로부터 조사선으로 들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왕수인이 단경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의 중용의 사상과 융합시켜 출현한 양명학에서 본다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양명학은 대체로 유학의 노선을 채택했지만, 태주학파에 속한 이들은 모두 조사선에 경도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온전하게 조사선으로 귀의한 것이 아니고, 유학과 결합한 상태로 조사선으로 들어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Ⅳ. 결어

명대의 불교는 철저한 통제정책으로 인하여 점차 쇠락해져 갔지만, 만명 시기에 왕수인의 양명학이 흥기하면서 그 명맥을 계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겠다.

양명학을 일으킨 왕수인은 바로 종보본 법보단경을 매개로 깨달음을 열었고, 그를 통하여 ‘양지’와 ‘지행합일’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지’는 단경에서 제창하는 ‘자성’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지행합일’도 단경의 ‘정혜등학’과 그 사유양식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후 왕수인은 다시 유학의 중용의 “미발지중”과 “중절의 화”를 통하여 ‘치양지’를 제창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 수양의 방식으로 ‘중용’과 유사한 ‘수렴’을 제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적 과정으로 양명학에는 조사선적인 요소가 깊이 삼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수인의 사후에 양명학은 ‘왕학칠파’로 나뉘는데, 대부분 학파에서는 유학의 정맥을 강조하기 위하여 불교와 조사선의 사상적 삼투와 관련된 내용을 배제하지만, 오직 태주학파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사선을 답습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특히 태주학파를 창립한 태주 왕간과 용계 왕기는 양명학과 조사선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본 논문에서는 왕간과 왕기 이후 태주학파를 주도했던 이탁오를 중심으로 태주학파의 조사선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이탁오 이후에 태주학파는 대체로 ‘광선’을 제창했는데, 이 ‘광선’은 유학, 즉 양명학을 완전히 버리고 조사선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을 통하여 조사선으로 들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체오(體悟)하고, 그를 현실에 투영하고자 하려는 특징을 보인다고 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비록 상세히 논술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태주학파의 유행은 결과적으로 당시 철저하게 쇠락한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는 작용을 일으켰고, 그 결과 명말의 ‘사대 고승’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양명학 태주학파가 실행한 중국불교의 사상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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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Understanding patriarchal Chan by TaiZhou branch of Yangming school in Ming Dynasty

Kim, Jin-moo (Research professor, Chungnam Univ.)

During the Ming dynasty, ideological control was thoroughly controlled so that even lectures could not be held except for LiXue. However, in the middle of the Ming Dynasty, the blind spots of 'LiXue' began to gradually emerge. As a result, many intellectuals gradually turned their attention to 'XinXue', which was opposed to 'LiXue'. is called 'Yangming Study'. The representative figure is Wang Shou-ren, and after his surname ‘Yangming’, the ideas he advocated are called ‘Yangming Study’. After Wang Su-in's death, Yangming Study was divided into various sects. Among them, The Taizhou school totally accepted the ideas of Patriarch-chan thoughts. This Taizhou school was especially called the ‘leftist’ because it fully embraced the ideas of Patriarch-chan thoughts. At that time, as the Buddhist community declined, Patriarch-chan thoughts was not active, so they argued that they had the legitimacy of Patriarch-chan thoughts. They tried to follow the style of Joseon in real life, and they called ‘Crazy Chan’. In this paper, the perception of Patriarch-chan thoughts of the Taeju School was examined through the ‘Crazy Chan’.

Key words : Seongcheol, Dongsan, Dongsanmundo, Beomeosa Temple, Haeinsa Temple, Buddhist Purification

논문투고일 : ’23. 4. 30. 심사완료일 : ’23. 5. 24. 게재확정일 : ’23. 5. 24

淨土學硏究 39집(202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