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이야기

韓國禪의 보편성과 특수성 - 普照 知訥과 眞覺 慧諶을 중심으로 -/한가람.동국大

Ⅰ. 서론

Ⅱ. 韓國 선법과 중국 선법의 접점

Ⅲ. 普照 知訥의 看話禪

1. 知訥의 返照法 계승

2. 知訥의 看話禪 통로와 특수성

Ⅳ. 眞覺 慧諶의 看話禪

1. 慧諶의 看話禪 계승

2. 慧諶의 狗子無佛性話의 독자성

Ⅴ. 韓國의 看話禪의 위치

Ⅵ. 결론

<국문초록>

본고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법인 간화선(看話禪)이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고 누구를 중심으로 대중화 됐으며, 과연 어떻게 오늘날에 정착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추적하는 논문이다.

사실 오롯한 한국만의 ‘불교’, 한 국만의 ‘선법’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불교가 지정학적으로 인도에서 시작되 었으며 이후 동점(東漸)된 사실만 보더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불 교의 ‘선법’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한국에서 유행했던 선법, 그리고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선법 역시도 불교의 ‘동점’이라는 사실 관계를 무시하고 한 국만의 독자적인 선법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지금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선법은 동아시아 내에서 중국, 일본 등과는 다른 특수성을 담지(擔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한국 선 법 형성에 기여했던 보조 지눌과 이를 대중화하고 정착화 시킨 공로가 큰 혜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비단 당시 중국 불교에서 유행했던 선 법을 수용한 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현재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 법으로 계승·발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보조 지눌은 규봉 종밀과 대혜 종고의 선법을 수용하여 한국 불교의 선법을 형성한 인물이다.

지눌은 규봉 종밀과 대혜 종고의 사상을 많이 접하고 그들의 저서를 많이 탐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지눌은 단순히 이들의 사 상을 순수하게 수용하는 입장에만 그치지 않고 비판적으로 받아 들여 한국 의 선법으로 형성하였다.

보조 지눌이 생존하였던 당시의 상황과 밀접한 관 계를 가지고 있는데, 두 중국 불조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시대상을 고려하여 불교의 선교일치(禪敎一致), 그리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 였다.

이를 바탕으로 ‘반조법’과 ‘간화선’이라는 한국의 선법을 형성하였다.

보조 지눌을 통해 형성된 한국의 선법은 혜심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지눌이 한국에 간화선을 받아들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 체계와 방향성, 나 아가 현재 한국에 존재하고 있는 간화선에 가깝게 발전시킨 인물은 혜심으 로 볼 수 있다.

慧諶은 간화선의 대중화에 주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狗子 無佛性話’를 통한 중국 불교 선법과의 변별성, 그리고 한국 불교만의 독자성 을 담보할 노력도 시도하였다.

더욱이 혜심은 지눌이 최상근기에 간화선을 둔 것과는 달리, 화두를 참구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 는데, 이러한 변별적 계승으로 현재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법인 ‘간화선’이 자리매김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현재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법인 ‘간화선’이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고 정착되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에 한국에서 확고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간화선’이 단순히 불교의 동점 과정에서 중국적 요 소의 이식(移植)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선법은 보조 지눌의 ‘비판적 수용’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를 혜심이 더욱 대중화시키 려는 노력이 더해진 산물이다.

이러한 결과를 확인해 볼 때, 한국의 ‘간화선’ 은 지역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내에서의 특수성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주제어 : 보조 지눌, 진각 혜심, 간화선, 한국선, 반조법

Ⅰ. 서론

불교는 인도에서 발원한 이래로 동점(東漸)하였다. 그런데 불교는 인도로 부터 중국, 한국, 일본으로 동점하는 과정에서 각기 그 나라의 특수성에 맞게 변화하여 정착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주로 선불교의 특성이 강하게 자리 잡았는데, 이는 한국 불교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이기 때문이다. 인도 로부터 전래된 중국 불교는 선종(禪宗)이 성립 된 이래로 선불교가 주도한 맥 을 이뤄왔다.

이에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 불교계에서는 선 사상의 비중이 커져갔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불교가 중국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도 에서부터 동점한 불교는 지형적으로 중국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위치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불교의 유입이 중국에서부터 들어온 이유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한국의 고승들이 구법 행위를 중 국에서 행했던 까닭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전 래 방식이나 고승들의 구법 행위를 통하여, 중국 불교계의 많은 전적이나 불 법 등이 한국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불교의 선사상도 전래되었다.

본고에서 논하게 될 간화선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년~1210 년)을 통해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간화선은 ‘화두를 보는 선’이라는 뜻으 로, 보조 지눌이 이렇게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인 데에는 고려 시대의 상 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당시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이 양분되고 정치적으 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사인 보조 국사 지눌은 그 해 결책으로 교종의 영역을 가져와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고, 간화선을 불교에서 최상근기에 배치하여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불교계를 정리하고 자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간화선’을 한국에 최초로 전파했던 인물이 보조국사 지눌이라면, 지눌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체계화시키고 대중화 시킨 인물은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년~1234년)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보조국사 지눌 이 ‘간화선’을 한국에 최초로 전파한 상황을 확인하고, 나아가 진각국사 혜 심이 ‘간화선’을 어떻게 보조 지눌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체계화 시키고 대 중화 시켰는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보조 지눌로부터 전래되 어 혜심 선사로부터 정착된 간화선이 한국 불교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 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Ⅱ. 韓國 선법과 중국 선법의 접점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 간화선이 대표적인 선수행인 것처럼 시대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수행법이 다르게 나타난다. 동아시아도 역시 많은 선법들 이 존재했었고 시대마다 대표하는 선법들도 마찬가지로 다르게 나타났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동아시아의 선법을 살펴보면 천태선, 화엄선, 여래(청 정)선, 조사(돈오)선의 가풍과 염불선, 간화선, 묵조선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하 는 수행선풍이자 수행방법이다.1)

본고에서 논의 하는 간화선은 송대(宋代 960년~1279년)에 발달된 선법으로 문자 그대로 ‘화두를 보는 선’이라는 뜻이다.

‘화두를 보는 선’이라는 뜻은 간화선의 실질적 수행방법과 관련이 있다.

간화선의 구체적인 수행법은, 주 로 선사들이 ‘공안’이라고 불리는 조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 선사들이 제자들의 이해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하였다.2)

1) 고영섭, 보조선과 임제선의 동처와 부동처 , 󰡔동아시아불교문화󰡕 제26집(부산: 동아시아불 교문화학회, 2016), p.217.

2) Robert E. Buswell, Jr, 간화선(看話禪)에 있어서 의정(疑情)의 전환 , 제41집, 󰡔보조사상연구 원󰡕(서울: 보조사상, 2014), p.19. 참고.

이러한 간화선이 한국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시대 선사인 지 눌(知訥 1158년~1210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 시 고려시대 혼란스러웠던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불협하였던 불교계의 상황 을 보조 지눌 선사가 선교일치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의 혼란은 선종과 교종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보조 지눌 선사는 구산선문으로 출가하여 선종과 밀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종 주장을 수용하여 “선은 석존의 마음이요, 교는 석존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 是佛語)”라는 설법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설파하고, 당시 혼란스러웠던 불교계를 화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지눌이 선과 교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선종의 대표적 가르침인 교외별전 (敎外別傳)·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장애물, 그리고 당시에 교종의 주류인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동시에 극복해야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 조 지눌은 자신의 선사상을 세 가지로 나누고 이를 활용하였다.

첫 번째는 돈 오점수와 정혜쌍수이고,

두 번째는 삼종법문(三種法門)인 성적등지문(惺寂 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經截門), 그리고 세 번째는 선교관 으로(禪敎觀)으로 선교일원(禪敎一元)이다.3)

3) 이덕진, 혜심의 선사상연구 , 󰡔지눌󰡕 권기종 편(서울: 예문서원, 2002), p.346 참조.

보조 지눌은 이와 같이 선사상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고, 이와 더불어 세 번의 깨달음을 통하여 전기가 구분되었다. 지눌의 첫 번째 깨달음은 󰡔육조단경󰡕을 통해서였고, 두 번째는 이통현(李通玄, 635~730)의 󰡔화엄경론(華嚴經 論)󰡕을 통해서였다.

세 번째는 󰡔대혜어록(大慧語錄)󰡕을 통해서이다.

이처럼 지눌은 자신의 깨달음을 선과 교라는 양자택일적인 상황을 취한 것이 아니 라, 이를 뛰어넘어 선과 교를 두루 취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를 통해 보조 지눌의 선법은 단순히 선법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선과 교를 아우른 방 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나아간 선법이 바로 간화선이라 고 볼 수 있는데, 바로 현재의 간화선이라 불리는 면모를 보조 지눌 선사로부 터 갖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간화선, 즉 선의 사상은 회통이나 혜능(慧能 638년~713년)으로 시작되는 남종선에서 계승되었다는 시각도 있고,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 년~1163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불 교의 선법이 단순히 중국 불교의 수입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 한 의미에서 따져보자면, 중국에서 ‘간화선’이라고 불리는 것과 한국에서 ‘간 화선’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현재 한국의 간화선에 있어 중국 불교계의 지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특수성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보조 지눌의 역할과 많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보조 지눌이 주도적으 로 중국으로부터 최초로 ‘간화선’이라고 불리는 선법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고, 이와 더불어 보조 지눌의 사상과 선수행법을 후대 선사들이 많이 활용하 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 보조지눌은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 다.

나아가 보조 지눌이 간화선을 받아들인 방식을 상기해본다면, 보조지눌의 간화선이야 말로 동아시아 선법이라 볼 수 있고, 단지 한국만의 선사가 아 니라 동아시아의 선사라고 볼 수 있다.

Ⅲ. 普照 知訥의 看話禪

1. 知訥의 返照法 계승

간화선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 앞서 우선, 보조 지눌의 선수행 특징에 대 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보조 지눌이 간화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이와 같은 특징적인 요소들이 반영되어 한국의 간화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 다.

한국 대표적인 선사인 보조 지눌의 수행법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조자심(返照自心)’과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看話)’인데, 이 두 요소가 융화되 어 한국선의 근간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수행방법 중 ‘반조자심’은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통해 자성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지눌의 저서인 󰡔수심결(修心訣)󰡕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고, ‘간화’는 󰡔절요사기󰡕의 후반부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 타나나는 수행방법으로 화두 참구를 통하여 알음알이 병통을 제거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보조 지눌의 핵심적인 선수행법의 바탕이며, 이 둘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고 조화적인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4)

그런데 지눌의 선수행법은 온전히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맥락 에서 그의 방식대로 수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선후관계, 즉 역 사적 맥락을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접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한 선 대(先代) 중국의 불조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조 지눌이 주로 접하 고, 논쟁적으로 수용하였던 선대의 인물은 바로 중국의 규봉 종밀 선사이다.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은 중국 화엄종(華嚴宗) 제5조(祖)로서 보조 지눌과 마찬가지로 선교일치를 주장하였다.

종밀의 저서󰡔법집별행록(法集別 行錄)󰡕을 지눌이 읽고 이 서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요약하고 자 신의 견해를 붙여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이 하 󰡔절요사기󰡕로 표기)를 저술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지눌은 종밀의 저서 를 통해 그의 사상을 접하고 받아드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지눌의 반조법 역시 종밀의 사상적 자장 아래 형성된 것 임을 알 수 있다.

몸을 움직이고 뜻을 일으키되 “내가 불법을 위한 것인가”를 스스로 헤아 려 보아야 합니다. 맛있거나 꺼칠한 음식에 대하여 “내가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이 없는가”를 스스로 챙겨보아야 합니다. 춥거나 따뜻한 것 에 대하여 “내 몸에 좋은 것만 챙기고 나쁜 것은 피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이익과 손해·모욕과 명예·칭찬과 비방· 고통과 즐거움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서 “진실로 중생의 생각이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반조해 보아야 합니다.5)

4) 오홍석, 大覺義天과 普照知訥의 會通思想 比較 硏究 (전북: 圓光大學校 大學院 박사학위논 문, 2016), p.169.

5) 宗密, 󰡔禪源諸詮集都序󰡕, 卷下二, (T48, 411b) ;動身舉意 自料為佛法否 美膳糲飡 自想無嫌 愛否 炎涼凍暖 自看免避就否 乃至利衰毀譽稱譏苦樂 一一審自反照實得情意一種否

위의 인용문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이하 󰡔도서󰡕로 표기)에 ‘도를 닦는 마음가짐’을 설명한 부분으로 이는 지눌이 저술한 󰡔수심결󰡕의 전체적 의의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지눌은 법(法) 또한 공(空)한 것이 고 그것에서부터 오는 신령스러운 앎에 대하여 강조하며 이것을 ‘공적영지심 (空寂靈知之心)’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도 규봉 종밀과의 맥락적 유사성을 찾 아 볼 수 있다.

“모든법(諸法)은 꿈과 같다고 모든 성인은 동일하게 말한다. 그렇기 때 문에 망념은 본래 적적하고(本寂) 티끌의 경계는(塵境) 본래 공하나니. 공적한 마음의 영은 어두운 것을 아니 바로 이 공적의 앎이니 이것이 바로 너 의 진성이다.6)

6) 宗密, 󰡔禪源諸詮集都序󰡕, 卷上一, (T48, 402c) ;諸法如夢 諸聖同說 故妄念本寂塵境本空 空 寂之心靈知不昧 即此空寂之知 是汝真性

공적(空寂)의 지(知)는 하택종(荷澤宗)의 근본사상으로 하택 신회의 맥을 잇는 종밀은 󰡔도서󰡕에서 영지불매(靈知不昧)의 지(知)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보조 지눌의 선수행 특징인 반조자심은 종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지눌은 종밀의 선행(禪行)인 반조자심에서 그치지 않고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2. 知訥의 看話禪 통로와 특수성

이처럼 지눌은 종밀의 사상을 받아드렸지만, 그의 사상을 아무런 비판 없 이 수용하지 않았다. 당시 고려의 상황에 맞게 변용할 부분은 바꾸고, 다른 사상적 견해가 필요한 부분을 첨입하여 지눌의 사상체계 내로 융화시켜 수 용하고 있다.

이는 지눌이 “사람에게 경전 읽기를 권할 때에는 언제나 󰡔금강 경󰡕 으로 법을 세우고, 이치를 언설할 때는 반드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썼으며, 이통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과 대혜의 󰡔語錄(어록)󰡕으로 양 날개를 삼았다.”7)고 한 부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7) 金君綏撰, 昇平府曹溪山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 󰡔普照全書󰡕, p.420. “其勸人誦持, 常以金剛經, 立法演義, 則意必六祖壇經, 申以華嚴李論, 大慧語錄, 相羽翼.”

만약 지눌이 종밀의 사상을 의심 없이 받아드렸다고 한다면 그의 비명(碑銘)에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등이 거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혜능의 남종선 사상의 핵심은 頓悟에 있다.

그리고 돈오에 바탕한 닦음이 있다.

돈오에 바탕한 닦음으로 自性三學, 즉 자성의 戒, 定, 慧 삼학을 강조한 다.8)

8) 김방룡, 간화선과 화엄 회통인가 단절인가 , 󰡔불교학연구󰡕 제11권(경기: 불교학연구회, 2005), p.202.

이처럼 교와 선이 함께 하기 위해선 이통현의 󰡔신화엄론󰡕에 보광명지 (普光明智)를 기준으로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야 했다.

① 우선 여실한 지해로써 자신의 마음의 진실됨과 허망함[眞妄], 생사, 본 말(本末)을 마치고서 결단하라.

② 그 이후 못을 베고 철을 자르는 말로써 세밀하고(密密) 깊고 자세히 참구하여 그곳에서 몸을 나갈 수 있게 하면, 즉 가히 네모서리가 분명히 땅에 붙어있게 됨으로, 들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 고, 태어남으로 나오거나 죽음으로 들어가는 큰 자재함을 얻게 된다.

 

위 󰡔절요사기󰡕에 ①은 반조자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②는 수행으로 간화 선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지눌의 비명(碑銘)을 살펴보면 수행체계를 삼문(三門)인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 (徑截門)으로 나눠 보고 있다.

지눌은 마지막에 경절문은 강조하였는데 이는 화두 참구를 통하여 바로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며 간 화선을 말하고 있다.

“내가 보문사에서 머물게 된지 10여년이다. 비록 뜻을 얻고 움직여 닦아 허망하게 시간을 보낸 적은 없지만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않아,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이 원수와 같이 있는 것과 같았다. 지리산 에 머물 때에 얻은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에서 말하길, ‘선 은 조용한 곳에 있지 않고 반대로 시끄러운 곳에 있지도 않으며 날마다 반 연하여 응하는 곳에 있지도 않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곳에 있지도 않다. 그 러나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용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 연하여 응하는 곳이나 사량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서 참구하는 것이니,홀연히 눈이 뜨면 비로소 사방이 각기 집안일(屋裏事)임을 알 것이다.9)

김군수가 찬한 비명을 통해 지눌의 세 번째 깨달음은 대혜 선사를 통해 이 뤄졌음을 알 수 있다.

󰡔간화결의론󰡕에서 지눌은 화두를 ‘한 덩어리의 불’과 같 다고 표현하면서, 대혜 선사의 “이 무자는 잘못된 앎과 지적인 이해를 깨뜨리 는 무기이다.”10)라는 주장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대혜가 제시한 8가지에 2가 지를 더 추가하여 ‘무자화두십종병(無字話頭十種病)’에 10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11)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 화두를] 제시하여 들고 깨달기 를 곧 왼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고, 오른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 곧, ➀‘있 다’, ‘없다’라고 이해하지 말고, ➁절대적으로 ‘없는’ 없음이라고 이해하지 말 며, ➂이치(理致)를 따져서 알려고도 말고, ➃의근(意根) 아래에서 이리저 리 헤아리지도 말며, ➄눈썹을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 뿌리를 흔들어 심으려 하지 말며, ➅말길 위에서 살길을 짓지도 말며, ➆일 없는 곳에서 드 날리지 말고, ➇들어서 일으키는 곳에서 긍정(肯定)하지도 말며, ➈문자 중 (文字中)에서 인증(引證)하지 말고, ➉미혹한 마음을 갖고 깨닫기를 바라지 말아야 하며. 바로 마음을 사용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음 사용이 없을 때 공함에 떨어질까 겁내지 말라. 여기가 다시 길한 곳이니, 홀연 늙은 쥐가 소 뿔에 들어감과 같이 문득 반대로 끊어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12)

9) 金君綏撰, 昇平府曹溪山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 󰡔普照全書󰡕, p.420. “予自普門已 來, 十餘年矣. 雖得意動修, 無虛廢時, 情見未忘, 有物礙膺, 如讐同所. 至居智異, 得大慧普 覺禪師語錄云, 禪不在靜處, 亦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 然第一不得捨 却靜處鬧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處? 忽然眼開, 方知皆是屋裡事. 予於此契會自然, 物不 碍膺, 讐不同所, 當下安樂耳.”

10) 知訥, 看話決疑論 , 󰡔普照全書󰡕, p.91. “此無字, 破惡知惡解底器仗也.”

11) 知訥, 節要私記 , 󰡔普照全書󰡕, p.163. “牧牛子曰此法語, 但彰八種病, 若檢前後所說, 有眞 無之無, 將迷待悟等二種, 故合成十種病也.”

12) 知訥, 看話決疑論 , 󰡔普照全書󰡕, pp.96~97.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只管 提撕擧覺,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不得作有無會, 不得作眞無之無卜度, 不得作道理會, 不 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挅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颺在無事甲裏, 不 得向擧起處承當, 不得文字中引證, 不得將迷待悟,直須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 裏却是好處, 驀然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지눌은 대혜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선은 조용한 곳에 있지 않고 반대로 시끄러운 곳에 있지도 않듯이’ 일상생활과 수행이 따로 있 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지눌이 대혜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답습한 것 은 아니다.

󰡔대혜어록󰡕을 살펴보며 대혜는 전쟁과 농사에 참여하는 것 역시 권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3)

대혜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불교의 특징인 삼 교일치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눌의 저서를 살펴보면 대혜가 주장하는 삼교일치와 유사한 사상은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이것이 지눌과 대혜의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지눌은 대혜의 주장 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체험과 성찰을 통하여 대혜의 사 상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사상을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지눌은 자신이 마지막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완전한 간화선을 이 루었다고 보기 힘들지만, 간화결의론 을 저술하고서 마침내 경절문의 주된 사상을 완성하였고 간화선을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지눌 의 간화선은 궁극적으로 언어라는 방편을 벗어나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일 깨뜨리는 논법과 깨뜨려지는 논법을 간택하여 취사하는 견해가 있 다면, 즉 완연히 언변에 집착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이를 어 찌 뜻을 얻어 다만 화두를 드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14)”

13) 宗杲, 󰡔大慧普覺禪師語錄󰡕 卷第三十 (T47, 939c)"佛法世法打作一片, 且耕且戰, 久久純熟, 一舉而兩得之." 참고.

14) 知訥, 看話決疑論 , 󰡔普照全書󰡕, pp.91. “若有能破所破, 取捨揀擇之見, 則宛是執認言迹, 自 擾其心, 何名得意參詳但提撕者也.”

지눌의 경절문의 깨침을 보면 삼문 중 앞선 이문의 깨달음과 다른 방식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지눌이 간화선을 받아들여 고려에 정착시킬 때, 단순 한 수용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문 중 이문을 버렸다기보다는 시대적인 상황에 맞게 간화선을 변용시킨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특징은󰡔원돈성불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선은 삼현문이 있다.

일 체중현(體中玄), 이 구중현(句中玄), 삼 현중현 (玄中玄)이다.

처음 체중현문이란 ‘끝없는 찰나의경계는 나와 타인과 붓끝 만큼도 다르지 않으며, 십세의 고금은 처음과 마지막의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문을 인용하여 처음 근기의 깨달아 들 어가는 문으로 삼았다. 이 역시 언설의 가르침 중 생각 생각을 잊지 않음으 로 이 구중현은 흔적 없이 평평하여 상쾌한 언구로 그 집착을 파괴하여 단 숨에 불법을 생각 생각을 잊게 한다.

이 역시 상쾌한 지견과 상쾌한 언구가 있음으로 현중현의 오래되어 변하지않는 고요함과 방(棒)과 할(喝)의 작용 으로 단련한다.

󰡔원돈성불론󰡕에서 지눌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지눌은 앞 선 체중현과, 구중현의 경우에는 언 어, 즉 교를 사용하여 깨달음으로 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궁극의 깨달음으 로 갈 수 있는 삼현문인 현중현은 언설을 초월한 경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 이 바로 지눌이 가지고 있는 선수행법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조 지눌 선사의 선사상적 특징은 돈오견성에 더해 공적영지의 체험을 중요시하며, 그리고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서는 언어를 벗어난 경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눌은 혜능 의 선맥에서 많은 부분을 수용하면서도 본인만의 독창적인 선사상을 구축하 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지눌의 선사상은 혜심ㆍ태고ㆍ나옹 등의 선사를 거 쳐 현재의 한국 간화선이 존재할 수 있게 된 시원(始原)으로 볼 수 있다.

Ⅳ. 眞覺 慧諶의 看話禪

1. 慧諶의 看話禪 계승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년~1234년)은 보조 지눌을 이어 수선 사(修禪社)의 두 번째 사주(社主)가 되어, 수선사를 고려불교계에서 정점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보조 지눌이 한국에 간화선을 받아들인 인물이 라고 한다면, 그 체계와 방향성을 더욱 확실하게 제시해준 인물은 혜심으로 볼 수 있다.

혜심이 활동했던 당시의 고려는 불교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권강화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국자감과 향교와 같은 유학 교육기관을 곳곳에 설치 하여 그곳에서 배우는 것을 장려하였다.

혜심은 어렸을 때 부친상을 겪은 후 출가를 하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반대로 당시 고려의 풍조대로 유학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혜심은 모친상 이후에는 결국 출가하게 되지만, 앞의 정황을 고려한다면 혜심의 사상에 있어서 유학적 요소를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힘들 다.

실제로 혜심이 수선사의 주(主)가 되었을 때에도 많은 유학자들을 입사 시켰고, 유불합일론(儒彿合一論)을 주장한 바로 보면 그렇다.15)

그런데 본고에서 논하는 ‘간화선’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면, 혜심은 지눌을 이어 수선사를 고려불교의 중심적인 위치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간화선 (看話禪) 중심의 선풍(禪風)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공고 히 한 인물로 볼 수 있다.16)

처음 진각국사가 보조국사를 뵐 때에 보조국사가 그를 보고 승려라고 생 각하였으나 다시 살펴보니 아니었다.

이에 앞서 보조국사가 설두 중현(雪 竇重顯 980년~1052년) 선사가 사원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마음속으로 이상 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진각국사가 와서 참예하였으니 이 로 말미암아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17)

이 인용문은 혜심과 지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혜심 과 지눌의 조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지눌은 혜심을 만나기 전날 꿈속 에 설두중현18)이 나타난다.

15)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7집(부산: 동 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4), p.245. 참고.

16) 김방룡, 진각 혜심의 선사상 체계와 불교사적 의의 , 󰡔한국선학󰡕 제40권(서울: 한국선학회, 2015), p.202.

17) 조명제 외, 󰡔역주 조계산 송광사사고-인물부󰡕(서울: 혜안 2007), p.72.

18)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지금의 절강성 봉화현(奉化縣)에 있는 자성사(資聖寺)에 머 물면서, 전래되는 고칙(古則) 화두 100 개를 가려 뽑고 그에 대하여 송(煩)을 붙였다. 이것을 󰡔설두송고(雪竇頌古)라 한다.

또 위에 첫 만남 이외에 지눌에게 인가도 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 지눌과 혜심은 단순한 선사 대 선사의 관계가 아니라 법을 주고받아, 그 사상을 이어받은 관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혜심 역시 지눌에게 세 번의 중요한 시험으로 인가를 받는 과정이 나타 난다.

그 첫 번째가 을축년(1205) 가을 억보산에서 선승 몇 사람과 함께 스 승 지눌을 뵙기 위해 가다가 지눌이 기거하는 암자 가까이에서 잠시 쉬는 동안, 지눌이 시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혜심이 게송을 지어 올렸다.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松蘿)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 오네” 이에 지눌은 머리를 끄덕거리고 손에 든 부채를 혜심에게 주었다.

부채를 받은 그는 그에 화답하는 게송을 다시 올린다.

“전에는 스승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 안에 왔네. 만일 더위에 허덕일 때 만나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그 어떠하리”19) 부채를 넘겨줬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의 전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눌 이 혜심의 깨달음을 인가했다는 것을 뜻하며, 마치 가섭이 붓다의 뜻을 이심 전심(以心傳心)알아 낸 것 같은 것이다.

19) 김달진, 󰡔진각국사어록󰡕(서울: 세계사, 1993), p.396.

지눌은 혜심을 인가할 때 화두를 던 져 혜심의 경지를 헤아려 보고 결정하였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두를 주고받아서 가르침을 전수하던 전통적인 간화선의 방식으로, 지눌 역시도 간 화선의 방식을 활용하여 혜심에게 자신의 선맥을 이어 준 것이다.

수행의 요점은 止觀과 定慧를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텅 비어 空한 사실을 비추어 보는 지혜를 觀이라고 하며, 모든 분별 망념을 쉬는 것을 止라고 한다.

止란 번뇌 망념을 자각하여 망념을 방지하는 것이 며, 마음을 써서 억지로 번뇌 망념을 끊는 것이 아니다.

觀이란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보고 깨닫는 것이며, 마음을 써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다. 경 계에 대하여 마음에 동요됨이 없는 것이 선정이지, 힘써 망념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다.

불성을 깨닫고(보고) 미혹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지 힘써 지혜 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불법을 공부하여 (지혜의) 힘을 얻 었나 힘을 얻지 못했나를 점검하여 그 소식을 알 때 가능한 것이다.

이 밖에 선승들의 話頭를 읽는 간화선의 수행(一門)이 있다.

간화선은 불법을 체득 하는 최고의 지름길(徑截)이기 때문에 止觀과 定慧를 함께 닦는 수행이 모 두 그 가운데 있다.

간화선의 수행법은 구체적으로 󰡔大慧書答󰡕에 제시하고 있다.20) 위에 인용된 󰡔眞覺國師語錄󰡕을 본다면 혜심의 수행 요점은 지눌과 동일하 게 지(止)와 관(觀), 정(定)과 혜(慧)에 있다.

혜심도 지눌과 마찬가지로 수행 에 있어서는 제법(諸法)의 공함을 비추어 보는 것인 관, 모든 분별을 쉬는 것 을 止, 또 경계를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不動] 定, 성품을 보아 미(迷)함이 없 음을 혜(慧)를 수행의 요점이라고 생각했다.21)

20) 慧諶, 眞覺國師語錄 (H6, 40a). “修行之要, 不出止觀定慧, 照諸法空曰觀. 息諸分別曰止. 止 者悟妄而止,不在用心抑節. 觀者見妄而悟, 不在用心考察, 對境不動是定, 非力制之. 見性不 迷是慧, 非力求之. 雖然自檢工夫, 得力不得力, 消息知時乃可耳.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 截, 止觀定慧自然在其中. 其法具如大慧書答中見之.”

21) 이덕진, 혜심의 선사상연구 , 󰡔지눌󰡕, 권기종 편(서울: 예문서원, 2002), p.355.

2. 慧諶의 狗子無佛性話의 독자성

혜심의 대표적인 저술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拘子無佛性話看病論)󰡕,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금강반야바라밀경찬(金剛般若波羅蜜經讚)󰡕, 󰡔금 강반야바라밀경발문(金剛般若波羅蜜經跋文)󰡕, 󰡔심요(心要)󰡕와 30권의 󰡔선문 염송(禪門拈頌)󰡕이 있다.

이중 혜심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방법과 선병(禪病)에 막는 방법 을 담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을 저술하고 이후 간화선 수행의 기초가 되는 공안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 1125칙과 선승들의 게송(頌古) 등을 정리하 여 편찬하였다.

이는 지눌에게 인가받은 간화선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대중 화 위한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눌이) ‘조주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狗子無佛性話)’를 들고 서, 이를이어 대혜 종고선사의 무자 화두에 대한 ‘십종병’을 들어 물어 보았 다.

아무런 대중도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혜심이 말하기를 “3종병을 가진 사람이어야 비로소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지눌이 말하길 “그 3 종병을 있는 사람은 어디로 숨을 쉬고 있는가?”하니, 혜심은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쳤다.

지눌국사는 크게 웃으며 방장실로 돌아가서 다시 몰래 불 러 대화를 나누고 기뻐하며 말하길 “내가 이미 자네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 이 있겠는가. 너는 응당 불법을 수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를 삼아 그 본 원(本願)을 버리게 하지 마라.”하였다.22)

이 후 태화 무진년23)에 지눌은 혜심에게 수선사의 법석을 이어주기를 요 청하였으나, 혜심은 끝내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그 후 경 오년24)에 지눌이 입적한 후 결국 왕명 때문에 수선사를 계승하게 된다.

22) 李智冠 校勘譯註, 高麗篇 , 󰡔歷代高僧碑文󰡕 권4(서울: 伽山佛敎文化硏究院, 1997), p.122. “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 因續擧大慧杲老, 十種病, 問之. 衆無對, 師對曰. 三種病人, 方解斯 旨. 國師曰, 三種病人, 向什麽處出氣. 師以手打窓一下. 國師, 呵呵大笑, 及歸方丈, 更密召 與話, 乃嘉曰. 吾旣得汝, 死無恨矣. 汝當以佛法自任, 不替本願也.”

23) 태화는 금나라 장종은 연호이며, 무진은 태화 8년, 희종 4(1208)년을 말한다.

24) 대안은 금나라 영제의 연호이며, 경오는 대안 2년, 희종 6(1210)년을 말한다.

 

이에 혜심은 수선사에 들어가 개당하고, 이후 수선사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게 된 다.

이를 단순히 특정한 일개 ‘사’만의 번창으로도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 혼 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고려 선종을 대표하는 수선사를 혜심 이 맡아서 선종이 나아갈 방향을 바로 잡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이다. 혜심의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은 지눌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간 화결의론(看話決疑論)󰡕의 내용을 아우른 요체를 담고 있다.

혜심은 󰡔구자무 불성화간병론󰡕에서 위에서 살펴 본 10종병을 열거하면서, 고치기 힘든 병이 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대혜 선사나 보조 지눌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 고 있다.

자세하게 말하면 열 가지 병통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느냐와 침묵만 하느냐를 벗어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옛사람(대혜 종고 선사)은 “유심으로(무자 화두를) 깨달아 알 려 해도 안 되고, 무심으로 (무자 화두를)깨달아 알려고 해도 안 되며, 언어를 사용해서 (무자 화두의 의미를) 조작하려고 해도 안 되고, 침묵으로 (무 자화두의 의미를)통하려 해도 안 된다.”라고 했다.25)

혜심은 10종병을 4가지로 줄여서 ‘유심’과 ‘무심’, ‘언어’와 ‘적묵(寂默)’으로 요약하였다.

그리고 4가지를 다시 둘로 요약하여 ‘사의(思議)’와 ‘불사의(不 思議)’로 보았고, 결국 무자 화두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조차도 병통으로 보 고 무자화두를 간화참구(看話參究)하는 것에만 열중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

이처럼 혜심의 사상은 보조 지눌의 사상의 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

즉 혜심은 ‘교설을 벗어나 별도로 전함으로써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26)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지눌은 삼문 수행법을 근기에 따라 나누고 있다.

하 지만 혜심의 경우 지눌과는 달리 근기를 구분하지 않았고, 수행의 처음부터 간화를 시작하여야 한다는 ‘간화일문(看話一門)’을 주장하고 있다.

혜심은 지눌의 삼종문중 성적증지문과 원돈신해문에 간화문의 중요성을 덧붙여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에 일상생활에서도 끝임 없이 화두 를 참구하여 불법을 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일상생활을 떠나서 달리 불법을 구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파도를 버리고 물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릇을 버리고 금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니 불법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27)

25) 백파 긍선, 󰡔선문수경󰡕, 신규탁 역(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2), p.154. “師乃云, 佛法要 妙, 離言說相, 離文字相. 離心緣相. 不可以有心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語言造, 不可以寂 默通. 如塗毒鼓, 聞著則腦門百裂. 似猛火聚, 近之則燎却面門.”

26) 󰡔孫侍郎求語󰡕(이종욱 편, 󰡔曹溪眞覺國師語錄󰡕), p.38. “夫敎外別傳, 直截根源, 一着子.”

27) 진각국사어록 (H6, 25c). “若離日用, 別有趣向則是, 離波求水, 離器求金, 愈遠矣.”

 

그리고 혜심은 지눌의 선교일치를 받아들이면서, 선의 비중을 더 강화하 여, 10종병을 4종, 2종으로 줄이는 한편, 근기의 구분을 나누지 않아 간화선 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눌 과 혜심의 간화선의 차이이자, 혜심의 독창적인 선의 면모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지눌은 간화선의 중요성을 교학으로 분석하고 관찰하여 고려에 수용 했다고 한다면, 간화선의 방법을 간소화하여 실질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리고 고려불교에 자리를 잡게 한 선사는 진각국사 혜심이라 할 수 있다.

Ⅴ. 韓國의 看話禪의 위치

수선사가 퇴조하면서 간화선의 흐름은 새롭게 떠오른 일연(一然 1200~ 1289)선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이 주도하기에 이른다.28)

28)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간화선󰡕(서울: 조계종출판사, 2005), p.39.

일연은 처음에 는 밀교와 관음신앙에 경도되어 있었으나, 후일에는 보조 선사의 법맥을 잇 게 되고 혜심의 󰡔선문염송󰡕을 보고 󰡔선문염송사원󰡕을 저술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당시 고려 선승들은 주로 원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이와 같은 활 동을 통해 고려에 선과 관련된 저술과 새로운 선 수행법이 전해지게 되고 이 를 통해 고려의 선종은 새로운 지형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주도적으로 활동 했던 주요 선사들이 바로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 그리고 태고 보우 선사인 데, 이들 선사들은 각기 원나라로 들어가서 선맥을 잇는 종사들을 만나 법을 받은 뒤에 다시 고려로 돌아온다.

나옹 혜근 선사는 20대 후반에 원나라로 들어가서 편산 처림선사와 지공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 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 節)󰡕의 편저자인 백운 경한 선사의 경우는 원나라에서 석옥 청공 선사에게서 법을 받아 왔다.

태고 보우 선사의 경우도 백운 경한 선사와 마찬가지로 석옥 청공 선사를 찾아가서 법을 받아 다시 고려로 돌아오게 되는데,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 선 사도 고려의 선에 많은 기여를 하지만, 고려 말에 간화선을 확산시키고 정착 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태고 보우 선사로 볼 수 있다.

태고 보 우 선사는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超佛越祖] 격외선(格外禪)을 따라 “대장경 의 가르침과 천칠백 공안, 임제의 할, 덕산의 방일지라도 본분으로 비춰본다면 다 부질 없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면서 간화선을 수행함에 있어서 는 화두의 참된 뜻을 궁구하여 의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고, 화두가 해결된 이후에는 반드시 선맥을 잇는 종사를 찾아가 자신의 경지를 확인받게 하였 다.

태고 보우 선사는 이를 통해 화두를 통해 깨친 자신의 경지가 올바른 것 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일구(一句)로 된 화두를 ‘이뭣고’라고 한다면, 조주(趙州)의 ‘無字話頭’는 특 히 한국 선종의 근간을 이루는 화두일 뿐만이 아니라 현 한국 불교계의 대표 적 화두로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Ⅵ. 결론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은 고려가 혼란스러웠을 당시 지눌의 삼문수행법으로 말미암아 태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태동하게 된 간화선은 지눌의 제자 혜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혜심은 지눌이 최상근기에 간화선을 둔 것과는 달리, 화두를 참구하는 것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이 혜심의 간화선과 지눌의 간화선의 차이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지눌은 선교일치를 주장하면서도, 삼문 중 경절문에서 언설을 떠나 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최상근기로 보고 있다. 이는 지눌의 사상적 모순성 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눌이 살고 있었던 시대가 왕권과 귀족, 선 과 교가 분열되었던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의 입장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사상적 모순성으로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혼란했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고 정법 불교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석 존의 말씀인 교와 석존의 마음인 선이 동시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 여 분열된 고려 불교를 화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눌은 대혜 종고가 언급하 고 있는 선종병을 10가지로 구분하여 간화선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지눌이 분열되었던 당시 불교를 선교일치를 통하여 회통하였다면, 제자인 혜심은 그의 가르침 속에서 지눌이 구분한 10종병을 4가지, 2가지로 가다듬 었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여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을 강 조하여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보조 지눌의 특수성이 간화선을 체계화시키 고 구체화시키는데 있었다면, 혜심은 간화선의 대중화에 주의를 기울여 보다 손쉽게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의 방식을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지눌이 태 동시킨 간화선은 안정적으로 고려불교에 정착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에서 간화선이 대표적인 선법으로 자리맺음하고 있는 까닭은 이 두 인물이 시대 와 상황에 맞게 간화선을 활용하고 변용시키는 노력이 있어서이다.

인도에서 확산된 불교가 지금은 각 나라마다 각기의 특수성을 담보하면서 존재하고 있듯이, 중국 송대로부터 전래된 간화선도 한국의 특성에 맞게 변 화하여 자리 잡았고, 지금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법으로 불리고 있다.

‘화두’를 들어 수행하고, 그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병을 멀리하여 궁극적인 깨 달음의 문으로 가는 것이 중국과 한국 간화선의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한국 간화선의 특수성은 구체화되지 않았던 선병을 체계화 시키고, 그 중에서 핵 심 요체를 뽑아내어 이를 대중화시키는데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 암아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참구할 수 있는 한국의 간화선이 존립하게 된 것 이다.

참고문헌

󰡔韓國佛敎全書󰡕 知訥, 󰡔普照全書󰡕 李智冠, 󰡔歷代高僧碑文󰡕 慧諶, 󰡔曹溪眞覺國師語錄󰡕 宗密, 󰡔禪源諸詮集都序󰡕, 김달진, 󰡔진각국사어록󰡕(서울: 세계사, 1993).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간화선󰡕(서울: 조계종출판사, 2005). 백파 긍선, 󰡔선문수경󰡕 신규탁 역(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2). 이덕진, 지눌 선 사상에 있어서의 돈오의 함의 󰡔지눌󰡕 이덕진 편(서울: 예 문서원, 2002). 이덕진, 혜심의 선사상연구 󰡔지눌󰡕 권기종 편(서울: 예문서원, 2002). 조명제 외,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인물부󰡕(서울: 혜안, 2007). 지눌, 󰡔화엄교학과 간화선의만남: 간화결의론󰡕 인경 역(서울: 명상상담연구 원, 2006). 지눌, 󰡔정선지눌: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전해주 역(서울: 대한불교조계 종, 2009). 고영섭, 보조선과 임제선의 동처와 부동처 , 󰡔동아시아불교문화󰡕 제26집 (부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6). Robert E. Buswell, Jr, 간화선(看話禪)에 있어서 의정(疑情)의 전환 , 제41집, 󰡔보조사상󰡕(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14). 김방룡, 동아시아 선(禪)문화의 형성과 한국불교의 변천과정 , 󰡔인문학연구󰡕 제35권(충남: 인문과학연구소, 2008). 김방룡, 진각 혜심의 선사상 체계와 불교사적 의의 , 󰡔한국선학󰡕, 제40권(서 울: 한국선학회, 2015). 김방룡, 간화선과 화엄 회통인가 단절인가 , 󰡔불교학연구󰡕 제11권(경기: 불 교학연구회, 2005). 오홍석, 大覺義天과 普照知訥의 會通思想 比較 硏究 (전북: 圓光大學校 大 24 / 동아시아불교문화 39집 學院 박사학위논문, 2016). 전호련, 看話禪과 華嚴敎의 비교 연구 , 󰡔불교학보󰡕 제63권(서울: 동국대학 교 불교문화연구원, 2012). 최은희,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 ,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7집(부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4). 이덕진, 혜심의 선사상연구 , 󰡔지눌󰡕 권기종 편(서울: 예문서원, 2002). 조명제 외, 󰡔역주 조계산 송광사사고-인물부󰡕(서울: 혜안, 2007).

Abstract

The universality and specificity of Korean Seon - Focused on Bojo Jinul and jingak Hyeasim

Han, Ga-ram(Dongguk University)

This study set out to track a process of Ganhwaseon, a zen doctrine representing Korean Buddhism, being developed including which channels were involved in its formation, who led its popularization, and how it could settle down in today's world. There can be no “Buddhism” and “zen doctrine” unique only to Korea, indeed, which cannot be denied given that Buddhism originated in India geopolitically and later moved eastward. It is the same with the “zen doctrine” of Korean Buddhism. Both the zen doctrines that were in vogue in the nation in the past and the zen doctrine representing Korea today cannot ignore the fact relevance of Buddhism' “eastward move” and argue that there is Korea's own independent zen doctrine. Despite these, however, there is no denying that the current zen doctrine in Korea contains its own unique features different from that of China and Japan in East Asia. The present study thus decided to investigate Bojo Jinul that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Korean zen doctrine and Hyesim that contributed to its popularization and settlement since they accepted the zen doctrine that was in vogue in Chinese Buddhism those days and further inherited and developed it into the zen doctrine representing Korean Buddhism today. Bojo Jinul accepted the zen doctrines of Gyubong Jongmil and Daehye Jonggo, forming the zen doctrine of Korean Buddhism. He was much exposed to their ideas and indulged in the reading of their works, in which process he accepted their ideas critically instead of accepting them purely and based the formation of Korean zen doctrine on them.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situations where he was in. While accepting the ideas of these two founders of Buddhism in China, he took into * Ph. D. student, Buddhist Studie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consideration the aspects of his times and put an emphasis on Seon-Gyo Agreement and Donojeomsu in Buddhism. Based on these, he created two types of Korean zen doctrine called “Banjobeop” and “Ganhwaseon.” The zen doctrine of Korea formed by Bojo Jinul was further developed by Hyesim. While Jinul introduced Ganhwaseon into Korea, Hyesim developed its system and directionality close to the Ganhwaseon that was found in today's Korea. He focused on the popularization of Ganhwaseon, in which process he made an attempt at distinguishing it from the zen doctrine of Chinese Buddhism through “Gujamubulseonghwa(狗子無佛性話)” and securing Korean Buddhism's own independence. Furthermore, he maintained that one could achieve a realization just through the Chamgu of Hwadu unlike Jinul that put Ganhwaseon in Choisanggeungi (最上根機). Thanks to his distinctive inheritance, “Ganhwaseon” was able to establish itself as a zen doctrine representing current Korean Buddhism. This research process helped to figure out the process of “Ganhwaseon,” a zen doctrine representing current Korean Buddhism, being formed and settling down. The findings show that “Ganhwaseon,” which holds a firm place in Korea, does not simply represent the transplant of Chinese elements in the process of Buddhism moving eastward. The zen doctrine representing today's Korean zen doctrines was formed by Bojo Jinul's “critical acceptance” and completed by Hyesim's efforts to promote its popularization further.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Ganhwaseon” of Korea has not only acquired universality beyond locality, but also has its unique features in the Buddhism of East Asia.

Key Words: Bojo Jinul, Jingak Hyeasim, Ganhwaseon, Korean Seon(禪), BanjoBeop ㆍ

논문투고일: 2019년 8월 15일 ㆍ심사완료일: 2019년 8월 27일 ㆍ게재결정일: 2019년 9월 28일

동아시아불교문화 39집

한국선(韓國禪)의 보편성과 특수성 - 보조(普照) 지눌(知訥)과 진각(眞覺) 혜심(慧諶)을 중심으로 -.pdf
0.48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