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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유식이십론의 논변 전략에 대하여/이길산.경남大

Ⅰ. 켈너‧테이버의 유식이십론 독법 소개

Ⅱ. 켈너‧테이버 독법의 문제점 진단

Ⅲ. 유식이십론의 바른 인식수단 담론 이해하기

Ⅳ. 결어

요 약 문

켈너‧테이버의 새로운 제안에 따르면, 유식이십론 전체는 무지로부터의 논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바수반두는 인식 독립적인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제대로 보증해주는 바른 인식수단이 부재하다는 점을 차례로 보여주 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기획하였다. 이 이해에 따르면 유식이십론의 제1송 부터 제7송까지는 추리 파트이고, 제8송부터 제15송까지는 전승 파트이며, 제16송 이후는 지각 파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들의 독해는 상당 부분 자의 적으로 보인다. 특히 텍스트 전체의 논리를 표명하는 것으로 치켜세웠던 ‘존 재 판정은 바른 인식수단에 달렸으며 특히 지각이 중요하다’라는 원리에 대 한 그들 자신의 해석이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 석궤론에서 바수반두는 정지와 후득지만을 바른 인식수단으로 인정했다. 지각‧추리‧성취자의 전승 등 통상적인 바른 인식수단은 오로지 일정한 해석을 부여해야만 그 부차적인 지 위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유식이십론의 논의를 석궤론에 연속하는 것으로 볼 경우, 바른 인식수단에 대한 바수반두의 이항적 인식은 켈너‧테이 버에 해석적 제안을 철저하게 거부할 이유를 준다. 나아가 바수반두의 이 독 특한 발상을 받아들일 경우, 이제껏 잡다한 나머지 논변 모음 정도로 받아들 여져 왔던 유식이십론 제16송 이후의 논의에 나름의 서사적 통일성을 부 여할 수 있게 된다.

주제어(7개) 켈너‧테이버, 바수반두, 무지로부터의 논증, 석궤론, 바른 인식수단, 후득지, 지각(pratyakṣa)

Ⅰ. 켈너‧테이버의 유식이십론 독법 소개

켈너‧테이버에 따르면, 일견 산만해 보이는 유식이십론의 논변들은 실상 바른 인식수단(pramāṇa)의 부재를 차례로 보여주는 전체적인 전 략적 기획 하에 고안되어 배치된 것들이다.1)

그들에 따르면, 바로 이 접 근법이 동일 저자에게 귀속되는 아비달마구사론 「파아품」에서 이미 구사된 적이 있다. 즉 바수반두는 텍스트 전체에 걸쳐 문제의 뿌드갈라 의 존재 여부를 입증해주는 지각(pratyakṣa)이나 추리(anumāna) 등의 바른 인식수단이 없다는 점을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다.2)

그리고 이와 동일한 전략적 고려가 유식이십론의 구도에서도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1송부터 제7송까지는 인식 외부의 대상을 상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추리 파트에 해당하고, 제8송부 터 제15송까지는 불교 경전군의 여러 층차의 취지를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승(āgama 혹은 āptāgama) 파트에 해당하며, 제16송 이후는 지각 파트에 해당한다.3)

특히 소위 지각 파트의 도입 부분이 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바로 이곳에서 ‘논의 전체를 지배한다고 보이는 원칙, “즉 어떤 것의 존재 여부는 바른 인식수단들에 따라 확인된다”는 원칙을 저자가 밝히고 있기 때 문이다.’4) 텍스트에서 문제의 ‘원칙’은 대론자의 목소리를 빌려 발화된다.

[대론자:] 바른 인식수단의 힘에 근거해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 하지 않는가가 정해진다. 그리고 모든 바른 인식수단들 중에서 지각이 가 장 무거운 바른 인식수단이다.

이런 한에서 대상이 비존재할 경우 ‘내게 지 각된 것이 있다’는 이 인식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5)

1) Kellner & Taber(2014), 709-711.

2) 위의 책, 719-734.

3) 앞의 책, 740-743. 유식이십론의 원문과 영역은 Silk(2018)과 철학적 주해는 Siderits(2021) 제7장 참조.

4) Kellner & Taber(2014), 743.

이상의 ‘원칙’에 따라 이미 유식이십론 모두에서부터 3종의 바른 인 식수단의 잣대에 따라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하나씩 확인해 왔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인식 독립적인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식화하여 표현하자면,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는가 여부가 적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무지의 전제(ignorance premise) 로부터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앎의 결론(knowledge conclusion)이 도출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전제1: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볼 증거1이 검토 결과 거부된다.

전제2: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볼 증거2가 검토 결과 거부된다.

전제3: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볼 증거3이 검토 결과 거부된다.

⁝ 전제n: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볼 증거n이 검토 결과 거부된다.

(즉)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는가 여부가 적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인식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증 유형을 서양의 논리학 전통에서는 ‘무지로부터의 논증 (argumentum ad ignorantiam)’이라고 부른다.6)

5) Vś, 111, “pramāṇavaśād astitvaṃ nāstitvaṃ vā nirddhāryate|sarveṣāñ ca pramāṇānāṃ pratyakṣam pramāṇaṃ gariṣṭham ity asaty arthe ka(tham) iyaṃ buddhir bha(vatīdaṃ me) pratyakṣam iti∥”

6) 코피를 위시한 많은 수의 현대 논리학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논증을 오류 논증으로 간주한다. Copi(1972) 및 김광수(1995) 참조. 이에 비해 월튼 등은 무지로부터의 논증이 전부 오류 논 증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Walton(1996) 참조.

그들이 보기에 바로 이 무지로부터의 논증이 유식이십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커다란 줄 기에 해당한다. 켈너‧테이버의 새로운 접근법에 따르면, 유식이십론의 개별적인 논증들은 물론 그 자체로도 유식성, 즉 불교적 관념론7)을 입증하는 하나의 작은 시도들이지만, 무지로부터의 논증이라는 하나의 총괄적인 패턴 아 래에서 ‘함께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을 철학적으 로 검토하고자 할 때 개별 단위의 논증들을 넘어서는 보다 거시적인 차 원의 접근 또한 정당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8)

이처럼 ‘큰 그림’을 포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연구는, 주석 전통과 근현대 연구사 모두를 포함해, 이제까지의 접근법과 선명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9)

7) 비교사상적 맥락에서 유가행유식학파의 사상을 버클리류의 주관적 관념론이 아닌 다른 틀로 포착하려는 움직임이 일각에서 포착된다. 필자는 유식이십론 및 유식삼십송 등으로 대표 되는 바수반두의 철학은 서양 근대의 버클리와 비교할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본다. 그리고 바수반두 이전의 유가행유식학파의 사상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 수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해석적 다기성은 해석자들 탓이라기보단 해석대상의 모호성에서 우선 기인한다고 본다. 이 부 분에 대한 변론은 다른 기회를 빌려 펼치도록 하겠다. 바수반두의 유식사상을 버클리의 관념 론과 체계적으로 비교한 시도로는 Siderits(2021) 제7장 참조. 유가행유식학파의 사상을 관 념론으로 보길 거부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안성두(2016), 정현주(2018) 참조.

8) 그러나 두 사람은 이 거시적인 접근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새로운 이해의 지평에 대해 서는 그다지 구체적인 언급을 남기지 않고 있다.

9) 시더리츠의 유식이십론 독해를 하나의 유일한 예외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 면, 유식이십론은 표상주의―경량부적 세계관과 관념론―유식적 세계관 사이의 철학적 투 쟁이며 판단 기준은 어떤 쪽의 세계 그림이 이론적으로 가벼운가, 즉 부담스러운 존재자를 덜 상정하는 가에 있다. 본고 19번 각주 및 Siderits(2021) 제7장 참조. 물론 그의 접근법을 택 한다 하더라도 유식이십론의 전체 내러티브가 왜 하필 현재 우리가 접하는 방식으로 짜여 졌는가는 썩 잘 해명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식이십론의 대론자의 사상적 성분 이 깔끔하게 표상주의로 나눠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더리츠가 제공하는 ‘표상 주의 대 관념론’의 내러티브는 텍스트 자체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이길산(2022a) 참조.

Ⅱ. 켈너‧테이버 독법의 문제점 진단

필자 역시 유식이십론을 하나의 체계적인 텍스트로서 그 전체적인 방향성을 한번 찾아보자는 켈너‧테이버의 제안에 커다란 지적 유인을 느 낀다.10)

10) 익명의 심사자께서 옳게 지적하셨듯, 저자 바수반두가 총괄적인 기획 하에서 유식이십론 을 작성했다고 확정할 만한 별도의 증거는 없다. 즉 유식이십론은 유식무경 내지 불교적 관념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논변들을, 근대적 독자의 눈으로 볼 경우, 다소 잡다하게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텍스트의 완결성 이념을 과거 저 작에 과도하게 기대하는 태도 또한 엄연히 오독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태도의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과도함의 기준점을 누구도 미리 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켈너‧테이버의 시도는, 비록 결론이 틀렸다고 보이나, 유의 미하며 계승될 가치가 있다.

다만 그들이 도달한 구체적인 결론 자체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유식이십론의 전체적인 논변 구조를 그들처럼 ‘무지 로부터의 논증’으로 읽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기 때문 이다. 전술했듯, 저들의 이해 방식에 따르면, 제1송부터 제7송까지가 추 리 파트, 제8송부터 제15송까지가 전승 파트, 제16송 이후가 지각 파트 이다. 이처럼 일견 말쑥해 보이는 도식은 정작 원전을 조금만 유심히 들 쳐 보아도 곧바로 깨져 버리는 것 같다. 제1송은 십지경의 ‘一切唯心’ 명제에 대한 대승적11) 해석이기에 그 들처럼 추리 파트에 포함시키는 것보다는 전승 파트에 해당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바수반두 자신이 십지경의 구절에 하나하나 주석적 해설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이후 행해진 바비베까의 비 판의 초점이 바수반두가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데에 있었기 때 문이다.12)

다음으로 제11송부터 제15송까지는 극미의 결합 문제라는 형이상학적 퍼즐 풀이가 논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끔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전승보다는 추리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13)

11) 이때의 ‘대승적’이라는 표현은 ‘유가행유식학파적’으로 대체되어도 별문제가 없다. 다만 이 경우 후일 바비베까가 명시적으로 ‘유식’에 대항해 ‘중관’의 학파적 정체성을 세우기 이전에 ‘유가행유식학파’들은 스스로를 그저 대승이라고 명명했을 따름이라는 점만 조심한다면 말이 다. 이점은 나가르주나, 아리야데바 등을, 혹은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길장 등을 과연 ‘중관 학파’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斎藤 明(2007) 참조.

12) 십지경 해석에 대한 대승 내의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김성철(2016), 274-281 참조.

13) 바수반두의 극미론과 관련한 가장 주목할 만한 최신의 연구로는 이규완(2018), 이길산(2022b), Yi(2022) 참조.

 

한편 제17송 후반 이후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지각 파트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니 심지어 지각 파트가 과연 어디서 끝나는 것인지마 저 제안자들 스스로가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인상비 평 수준에서 가볍게 훑어보더라도 그들의 도식화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제16송부터 제17송 전반까지는 ‘지각이 제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명시적인 진술과 함께 논의가 개시되기에 일단은 ‘지각 파트’라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14)

14) 지각적 인식 부분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Dhammajoti(2009) 제8장, 권오민 (2019) 제5장 5절 참조.

그러나 이러한 분류를 승인하기에 앞서 엄밀히 따져봐야 할 문제가 하나 남겨져 있다. 켈너‧테이버가 텍스트 전 체를 조직하는 원리로 치켜세우기도 했던 ‘어떤 것의 존재 여부는 바른 인식수단에 따라 확인된다’나 후속하는 ‘바른 인식수단들 중에서 지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술이 유식이십론 본문에 기재되어 있다는 점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언명들은 모두 1인칭 화자가 아 니라 2인칭 대론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본인 스스로 발화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해당 명제들을 과연 바수반두가 동의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 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수반두가 해당 명제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니 라면 켈너‧테이버의 해석적 제안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저 두 원칙이 해당 대목의 논지 전개에 있어 대론자의 이해관계 에 봉사한다는 점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바른 인식수단들 중에서 지각 이 가장 중요해야만 추리나 전승 따위에 기대 이제껏 진행되어 온 모든 논의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고, 그래야만 기울었던 승부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전까지 바수 반두는 극미와 얽힌 복잡다단한 형이상학적 논변 끝에 인식 독립적인 물질적인 대상의 존재가 원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강변하였 다.

그런데 대론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매 순간 지각 경험을 통해 인식 바깥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알게 되는 것 같다.

추상적인 철 학적 사변보다는 우리가 늘 반복하는 경험적 직관을 보다 존중하는 것 이 상식인의 온당한 태도가 아닐까? 이처럼 문제의 원칙은 대론자의 핵 심주장을 그 자체로 뒷받침하는 동시에 이제껏 바수반두에게 기울었던 논의의 형세를 단박에 원점으로 되돌려 버리는 효과까지 발휘하도록 정교하게 배치된 것 같다.

더 나아가 바수반두의 답변에서는 문제의 원칙들에 대한 철학적인 차 원의 커미트먼트(commitment)15)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내게 지각 된 것이 있다’는 이른바 ‘지각적 인식(pratyakṣabuddhi)’이 상대방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실상 지각이 아니라는 것이 이후 바수반두가 수행 한 철학적 해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대상의 존재를 보증해주리라 기대되는 지각의 ‘직접성’이 지각적 인식 단계에서는 도저히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반박이 애초에 잘못 제기된 것이라는 게 답변의 골 자다.16)

이처럼 바수반두는 자신의 답변을 제출함에 있어 상대방이 기 껏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원칙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닐까? 이점과 관련해, 비록 켈너‧테이버는 누락하고 말았지만, 비슷한 태도가 아비달마구사론에서도 유지된다는 점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17)

장작 등이 불 등과 결합하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 실로 경험(dṛṣṭa)된다. 그리고 경험보다 무거운 바른 인식수단은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의 소멸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18)

15) 익명의 심사자께서 ‘커미트먼트’는 개념어가 아니기에 불필요한 외국어 차용을 자제하는 편 이 좋겠다고 충고해주셨다. 약속, 전념, 연루, 개입, 헌신, 책무, 의무, 투입 등등 실로 많은 한국어 단어가 commitment의 번역어로 제시되고는 있지만, 모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굳이 적당한 한국어 단어를 찾자면 ‘진심’ 정도가 근사(近似)하나 commitment보다 주관적 이고 심리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에 따라 부득불 음차어를 도입하였다.

16) 주지하다시피 바수반두는 지각적 인식을 근거로 해서 지각된 대상의 실재성 여부를 도출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지각적 인식, 즉 지각에 대한 메타인식이 지각에 ‘후속하는’ 의식적 판 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각적 인식=의식적 판별은 후대 인식논리학 전통의 관 점에서 보자면 유사지각 내지 위장된 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추리 구 분법을 바수반두에게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착시(錯時, anachronism)의 위험 때문에 매우 조 심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바수반두의 동시대인이자 사상적 라이벌 상가바드라의 경우, 5감의 내 용을 확인해주는 저 후속 의식 또한 지각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Dhammajoti(2009) 제8장 참조.

17) 이 대목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탐구는 강형철(2015) 참조.

18) Pradhan(1967), 193, “dṛṣṭo vai kāṣṭhādīnām agnyādisaṃyogād vināśaḥ|na ca dṛṣṭād gariṣṭhaṃ pramāṇam astīti|na ca sarvasyākasmiko vināśaḥ|”

이는 동작(gati)을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업(kāyavijñaptikarman)의 본성으로 간주하는 정량부(Sāṃmitīya)에 대해 바수반두의 저 유명한 학설, 즉 ‘소멸은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온 직후에 대론자 의 입에서 나온 반응이다. 여기서 ‘경험’으로 옮긴 dṛṣṭa는 보통 지각 (pratyakṣa)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즉 대론자는 장작이 불에 타 없어진 다고 보고하는 우리의 지각 경험에 근거해 소멸의 원인을 상정할 수 있 고 나아가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식적 반론19)에 대한 바수반두의 재응답은 유식이십론 의 경우와 비슷하나 보다 직접적이다. 따라서 이 대상은 [경험, 즉 지각이 아니라] 추리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20)

이 문장을 통해서도 문제의 ‘경험’이 곧 바른 인식수단 중 하나인 지 각과 같은 뜻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론 의 주제인 소멸의 원인 유무를 지각이 아니라 추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바수반두의 저 언명이다. 이 발언 역시 유식이십론에서 ‘바른 인식수 단 중에서 지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대론자의 출발점으로부터 대상의 존 재성 문제를 절연시켰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반박 효과를 발휘하기 때 문이다. 여기서도 해당 명제의 효력정지(suspension)가 이루어진 것이 지 무효화(defeasance)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21)

19) ‘상식적’이라는 표현으로 필자가 특히 의도한 바는 저 반론의 성격이 꼭 ‘정량부적인 것’으로 특정해 이해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20) Pradhan(1967), 193, “tasmād anumānasādhyo ’yam arthaḥ|”

21) 익명의 심사자께서는 현량각, 즉 지각적 인식의 문제 자체가 바른 인식수단 담론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테마’라고 평가하며, 본고에서 시도한 것처럼 석궤론 을 경유하지 않고 오로지 유식이십론의 구절들만 가지고서 나름의 해결책을 줄 수 있으리 라 기대하셨다. 바수반두가 문제 삼는바 지각적 인식의 철학사적 무게에 대해서 필자는 심 사자 선생님과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필자는 유식이십론의 바수반두가 바른 인식수단 담론과 관련해 매우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 이 모호성은 의도된 것으로까지 보이기에 유식이십론에만 머물러서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아비달마구사론 등을 적극적으로 참조해 바른 인식수단에 대한 바수반두의 전체적인 이해를 복원하는 작업

이처럼 상황은 애매하다. 혹은 반대의 해석이 우세해 보이기까지 한 다. 그럼에도 켈너‧테이버처럼 유식이십론의 거시적인 구조를 무지로 부터의 논증의 형태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먼저 저 문제의 원칙들이 어 떻게 바수반두 자신의 것일 수도 있는지 나름의 해명 노력이 선행되어 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켈너‧테이버의 작업 어디에서도 이를 수행하는 대목이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해석상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 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상을 통해 필자가 켈너‧테이버의 결론을 따 르지 않는 이유의 일단을 밝혔다.22)

22)켈너‧테이버의 저 새로운 해석 제안은 복합적인 동기에서 발원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본고 에서 전면적으로 수행하고 있지 않으나, 각각의 동기들을 추적해 봄으로써 그들의 제안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음미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일례로 그들은 시더리츠로 대표되 는 기존의 관념론적 독해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시더리츠에 따르면, 바수반두 는 소위 ‘가벼움의 원리(Principle of Lightness)’를 곧잘 사용한다. 이 원리는 설명력이 동 등한 두 이론 중에서 비가시적인 존재자를 덜 상정하는 쪽을 택하라는 형이상학적 요청으로 서,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별명으로 학문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유식이십론에서도 이 원칙이 유감없이 활용된다는 것이 시더리츠식 독해의 특징이다. 그런데 켈너‧테이버가 보기에 바수반두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존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따라서 그들로서는 관념론 적 독해를 유지하되 시더리츠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경로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외 트케의 유식이십론 독해 또한 그들의 새로운 독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더리츠의 독 법 및 이에 대한 켈너‧테이버의 비판적 시각은 Siderits(2021) 제7장, Kellner & Taber(2014), 725, n.49 참조. 외트케의 독해 및 이에 대한 수용은 Oetke(1992), Kellner & Taber(2014), 713-714 참조.

Ⅲ. 유식이십론의 바른 인식수단 담론 이해하기

1. 제16송 이하의 비체계성 문제 소개

그렇다면, 유식이십론 전체를 관통하는 전략 내지 서사적 골조를 찾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이대로 좌초되어야만 하는가?

현재로서 는 그렇다. 그러나 유식이십론의 일부에 한정한다면 약간의 긍정적인 전망이 여전히 가능해 보인다.

켈너‧테이버가 지각 파트로 구분했던바 으로까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의 결과는 가까운 미래에 발표할 예정이다.

제16송 이하는 오랜 기간 잡다한 논변 모음으로 취급되었다.23)

바수반 두 자신의 한계를 노정하는 제22송은 일단 성격상 별개의 것으로 차치 해준다 하더라도24), 지각적 인식과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제16송부터 제17송 전반, 꿈과 각성의 은유에 기댄 제17송 후반, 물질의 매개성이 논점이 되는 제18송 전반, 꿈과 생시의 차이가 관건이 되는 제18송 후 반, 유식무경의 윤리적 함축을 논한 제19송과 제20송, 타인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과 연관된 제21송까지, 유식이십론의 마지막 1/3은 실로 난삽한 것인양 보인다. 제1송부터 제7송까지에 대해서는 그 핵심이 ‘유식무경의 입론과 대상 의 인식적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탐구’라고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비 슷하게 제8송부터 제10송까지는 ‘경전 해석학상의 논구’라고 그리고 제 11송부터 제15송까지는 ‘부분‧전체론적25) 논변’이라는 식으로 일정하게 그룹화가 가능할 것이다. 여기까지의 패턴과 비교해보자면, 제16송 이 하 여러 논변들은 그저 무질서하게 모여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기껏 해야 이전의 논의를 보충하거나 확장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26)

이 논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일한 키워드는 고사하고 그럴듯한 내러티 브조차 제공하기 어려워 보이며 실제로 이런 접근 시도는, 관견에 따르 면, 켈너‧테이버 이전에 단 한 건도 보고된 바 없는 것 같다.27)

23) 대표로 프라우발너를 들 수 있다. Gelong Lodrö Sangpo & Jigme Sheldrön(2010) 유식 챕터 참조.

24) 물론 제22송 또한 단순한 겸사로 보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따르며 추가적인 분석을 요한다. 이길산(2023) 참조.

25) 부분‧전체론(mereology)이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이다. 이를 특 히 극미론과 연결시킨 논자는 캡슈타인 그리고 시더리츠 정도를 들 수 있다. Kapstein(2001), 181-204, Siderits(2021) 제5장 참조.

26) 이를테면 복수의 개체 사이에 교육적 교류가 가능하기 위해 물질적인 소리 따위가 반드시 요청되는지를 따지는 제18송 전반부의 논의는 단일한 개체에 국한해 논의를 진행시켰던 제 2송부터 제7송까지의 논의를 확장시킨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Siderits(2021) 제7장 참조.

27) 근대 연구자들은 물론 비닛따데바, 다르마빨라, 규기와 같은 전통 주석가들 역시 제16송 이 하를 일관하는 서사적, 논리적 골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석궤론의 관련 구절 독해

그런데 소위 바른 인식수단 원리들, 즉 ‘어떤 것의 존재 여부는 바른 인식수단으로 확인 가능하다’ 및 ‘지각이 가장 중요한 바른 인식수단이 다’에 대한 바수반두의 태도를 좀 더 구체화해볼 경우, 제16송 이하 유 식이십론의 후반부 논의 중 상당수에 일정하게 패턴을 부여하는 해석 을 제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 우선 바른 인식수단에 대 한 바수반두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석궤론의 다 음 구절을 세심히 독해해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28) [대론자:] 여기서 세간적 앎[이 바른 인식수단(*pramāṇa)인가], 아니면 출 세간적 [앎]이 바른 인식수단인가라고 하면? [바수반두:] 단적으로는 출세간적 [앎이 바른 인식수단]이다. 세간적 [앎]에 는 구분이 있으니, 출세간적 [앎] 이후에 얻는 [앎]은 바른 인식수단이다. 다 른 [세간적 앎]은 바른 인식수단이 아니다. 이에 대중부(*Mahāsaṃghika) 승가의 게송, [즉] “눈‧귀‧코도 바른 인식수단이 아니고, 혀‧몸‧마음도 바른 인 식수단이 아니니, 만약 이 감관(*indriya)들이 바른 인식수단이라고 하면, 성자들의 길(*āryamārga)이라는 과업(*kṛtya)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한 것 과도 부합한다.29) 여기서는 통상적인 지각‧추리‧성취자의 전승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종점에 도달한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출세간정지 및 후득청정세간지30)만이 ‘바른 인식수단’으로 언급된다.31)

28) 3성설과 2제설의 구도에서 석궤론의 이 대목에 주목한 연구성과로는 김재권(2009) 참조.

29) VyY, 234, “’dir ’jig rten pa’i shes pa ’am|’jig rten las ’das pa tshad ma yin zhe na|gcig kho nar ni ’jig rten las ’das pa yin no∥’jig rten pa ni dbye ba yod de |’jig rten las ’das pa’i rjes las thob pa gang yin pa de ni tshad ma yin no∥ gzhan ni tshad ma ma yin no∥de ltar na dge ’dun phal chen sde pa rnams kyi tshigs su bcad pa | mig dang rna ba sna yang tshad ma min∥lce dang lus dang sems kyang tshad ma min∥gal te dbang po de dag tshad yin na∥’phags pa’i lam kyi bya ba med par ’gyur∥zhes bya ba ’di dang yang mthun par byas pa yin no∥”

30) 석궤론의 구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후득지는 세간적인 앎의 일종이다. 이때 이 ‘세간 적’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 인용한 유식이십론술기의 해설 중 특히 밑줄 친 부분을 참조할 경우, 한 가지 해결 방향이 확보된다. 견도에서 여기서 이야기된 무분별지를 얻고 후에 세간적인 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무루의 지혜가 있으니 [이것이] 눈 앞에 전개되는 상태에서는 바야흐로 이치에 부합할 수 있게 되어서 저 생사윤회하는 식의 대상영역이 비실재함을 있는 그대로 아니, 곧 후득지이다.

세간적인 것을 인식대상으로 하기에 ‘세간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 자체가 유루여서 ‘세간적’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자체가 루 (*āsrava)가 아니기에 ‘청정’이라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대상영역에 부합해 알기에 ‘있는 그대로 안 다’라고 이름을 붙이니, 앞의 무분별지는 이치대로인 것을 인식대상으로 하기만 할 뿐이어서 단지 ‘진실한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이 후득지는 세간적인 것을 두루 인식대상으로 하여 대상 영역의 비존재를 알 수 있기에 ‘있는 그대로 안다’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진실한 깨달음’이라고도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 지혜가 발생하게 됨에 무분별지에 바탕을 두니, 무분별지만을 ‘진실한 깨 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생사윤회하는 식의 경우, 비록 약간이나마 [대상의 비실재성에 대해] 스스로 안다 하더라도, ‘진실한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T1834, 1001c26-1002a5, “於見道中. 得此所說無分別智. 後有緣世間無漏之智. 現在前位. 方能稱理.如實了知彼生死識境非實有. 卽 後得智. 緣世間故. 名爲世間. 非體有漏名世間也. 體非是漏. 立以淨名. 稱境而知. 名如實知. 前無分別. 唯緣如理. 但名眞覺. 此後得智. 遍緣世間. 能知境無. 名如實知. 亦名眞覺. 此智得起. 藉無分別. 無分別智. 獨名眞覺. 若生死識. 雖少自知. 不名眞覺.”)

31) 익명의 심사자께서 지적해주셨듯이, 석궤론의 정지‧후득지를 바른 인식수단 담론과 연계해 사유하는 것의 연원은 유가사지론 성문지의 upapattisādhanayukti 개념 및 「섭결택분」 「5사장」의 구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정주(2019) 및 안성두 외(2023), 822-823 참조.

특히 이어지는 대목에 나타난 감 각적인 인식에 대한 철저한 불신은 ‘지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유식이십 론 제16송의 대론자가 보이는 관점과 완전한 대척점에 놓인다.32)

석궤론의 바른 인식수단 이해는 명료하고 강력하다. 붓다(들)의 깨 달음 자체를 상징하는 정지, 그리고 중생 교화라는 일대의 과업을 위해 부득이 세간에 맞춰 작동하는, 그러나 그 뿌리만큼은 정지에 내린 후득 지33)만이 예외적으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고, 나머지 세간의 모든 잡다한 ‘인식장치’들은 기준에 미달하는 실망스러운 것들일 뿐이다.

바 른 인식수단 담론이라는 새로운 지성적 조류에 맞서 한껏 보수적 목소 리를 내는 것은 불교철학사 전체에서 보자면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힐 것이다.34)

32) 석궤론의 바수반두가 소환한 대중부의 감각지각 불신론은 물론 극미와 지각 이미지의 간 극에서 발원한 슈릴라따 류의 감각지각 불신론처럼 단단한 철학적 토대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감각 그대로 우리가 진실로 인도된다면 진리를 얻고자 고생을 사서 할 이 유가 도대체 없다는 정도의 요청적 사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석궤론의 이 회의 적 언사를 저자 바수반두가 승의/세속 구분 문제에 후속해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아비 달마적 극미 담론과 완전히 무관하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슈릴라따의 감각지각 불신 론에 대해서는 박창환(2009) 17-27 참조.

33) 후득지에 대해서는 長尾雅人(1978) 제12장, Schmithausen(2005) 54쪽 이하 참조.

34) 회쟁론에 나타난 나가르주나의 태도가 가장 원색적인 것으로 보인다. 바른 인식수단 담론 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회의적 입장에 대해서는 Westerhoff(2021), 3.4 참조.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출세간적’ 목표를 가지는 불교 전통으로서는 최신의 유행하는 담론에 무턱대고 휩쓸려 갈 수도 없는 노릇이 기에 바수반두의 저 단호함은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태도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바른 인식수단 담론 전체가 전적으로 오도적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나간다면 과도한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각과 유사지각의 차이, 추리와 유사추리의 구분 등은 건 강한 상식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석궤론이나 유식 이십론 같은 논서들은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청중을 전제로 하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지‧후득지를 유이(唯二)한 앎의 원 천으로 역설하는 석궤론의 논의는 상당한 이해력을 전제로 한다. 그 렇다면 일견 단호해 보였던 저 바수반두의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려도 괜찮지 않을까? 바로 이 지점과 관련해 필자는 한 가지 해석적 제안을 하고자 한다.

석 궤론의 상기 구절에서는 ‘진정한’ 바른 인식수단은 출세간정지‧후득지 에 한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상기의 이유들로 통상적인 지각‧추리‧성취자의 전승 또한 세속적인 효용 차원에서 제한적 이나마, 바른 인식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는 해석을 취하는 편 이 온당할 것이다. 물론 후자는 전자와 엄연히 다른 레벨이기에 혼동되 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정한 단서 조항이 붙긴 했으나 일상적인 의미의 바른 인식수단 역시 어쨌든 바른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바수반 두는 바른 인식수단에 대해 모종의 이항적(binary) 태도를 견지하고 있 었던 셈이다.

이러한 해석적 시도는 앞서 인용했던 석궤론의 직전의 선행 구절에 의해서 일부 뒷받침되는 것 같다.

[대론자:] 세존께서 승의공경에서 “업(*karman)도 존재하고 이숙(*vipāka) 도 존재하나 행위자(*kāraka)는 지각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저 [업‧이 숙]은 승의적으로(*paramārthataḥ) [존재하는가] 아니면 세속적으로(*saṃvṛtitaḥ) 존재하는가?

[바수반두:]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대론자:] 만약 승의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모든 법이 자성이 없는 것이겠고, 만약 세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행위자도 세속적으로 존재하여 ‘행위자는 지각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면?

[바수반두:] 먼저 ‘세속’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무엇이고 ‘승의’는 어떤 것 이길래, 그에 따라 무엇이 세속적 존재(*saṃvṛtisat)이고 무엇이 승의적 존 재(*paramārthasat)라고 알아야 하는가?

[대론자:] 명칭(*nāma)‧언어(*abhilāpa)‧가설(*prajñapti)‧언설(*vyavahāra)이 세 속이고 법들의 자상(*svalakṣaṇa)이 승의라고 하면?

[바수반두:] 그러면 그 경우 업과 이숙 양자는 명칭으로도 존재하고 자상으 로도 존재하니 저 양자는 [세속적 존재‧승의적 존재 중 어느 쪽이든] 바라 는 대로의 존재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뿌드갈라(*pudgala) 가 세속적으로 존재하나 실체적으로는(*dravyataḥ) [존재하지] 않으니, [5] 온들에 대해 그것의 명칭이 가설되기 때문이다. 업과 이숙은 세속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나 승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니, 세간적 (*laukika) 앎의 대상영역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것(*parama)은 출세간적 앎(*lokottarajñāna)으로, 그것의 대상이라서 ‘승의(*paramārtha)’이다. 저 [업과 이숙] 양자의 자상은 이 [출세간적 앎]의 대상영역이 아니니, 이것의 대상영역은 언어화될 수 없는(*anabhilāpya) 공상(*sāmānyalakṣaṇa)이기 때문이다.35)

35) VyY, 233-234, “bcom ldan ’das kyis don dam pa stong pa nyid las|las kyang yod rnam par smin pa yang yod la byed pa po ni mi dmigs so zhes gsungs pa gang yin pa de ci don dam pa nyid du ’am|’on te kun rdzob nyid du yin zhes na|de las cir ’gyur|gal te don dam pa nyid du yin na|ji ltar na chos thams cad ngo bo nyid med pa yin|gal te kun rdzob tu yin na byed pa po yang kun rdzob tu yod pas byed pa po ni mi dmigs so zhes brjod par mi bya’o zhes na| re zhig kun rdzob ces bya ba ’di ni ci yin|don dam pa ni gang zhig yin|de las ci kun rdzob tu yod dam|ci don dam par yod par shes par bya’o∥ming dang|brjod pa dang|gdags pa dang|tha snyad ni kun rdzob yin la chos rnams kyi rang gi mtshan nyid ni don dam pa yin no zhes na|’o na de lta na las dang rnam par smin pa gnyis ming du yang yod|rang gi mtshan nyid du yang yod pas de gnyis ji ltar ’dod par yod pa nyid du rtogs la rag go∥nged ni gang zag kun rdzob tu yod kyi rdzas su ni ma yin te|phung po rnams la de’i ming gdags pa’i phyir ro∥las dang rnam par smin pa dag ni kun rdzob tu rdzas su yod|don dam par ni med de|’jig rten pa’i shes pa’i yul yin pa’i phyir ro∥dam pa ni ye shes ’jig rten las ’das pa yin te |de’i don yin pas don dam pa’o∥de gnyis kyi rang gi mtshan nyid ni de’i yul ma yin te|de’i yul ni brjod du med pa’i spyi’i mtshan nyid yin pa’i phyir 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