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시작하며
Ⅱ. 문제의 발단: 십지경 제7지의 서술
Ⅲ. 십지경 제3지: 여덟 연속적인 머뭄
Ⅳ. 멸진에 머무르지만 실현하지 않는다
Ⅴ. 반야바라밀, 멸진정의 창조적인 해석인가?
요약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흔히 ‘반야의 완성’으로 번역되며, ‘최고의지혜’를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반야바라밀’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대로‘개념적 이해를 동반한’ 지혜인지 아니면 이러한 이해가 불가능한 선정인지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있어왔다.
본 논문은 그동안 이러한 연구의주된 대상이 되었던 반야경을 벗어나, 십지경(十地經)을 대상으로반야바라밀을 살펴보았다.
이는 십지경에 반야바라밀을 멸진정(滅盡定) 혹은 상수멸(想受滅)이라는 선정과 동일한 것으로 암시하는 서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II장에서는 제6 현전지에 머무는 보살부터 “멸진에 들어가지만(nirodhaṃ samāpadyate) 이를 실현하지는 않는다”는 십지경 제7지의 서술을 통해 멸진정(nirodhasamāpatti)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제6 현전지의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prajñāpāramitāvihāra)’을 이 멸진정의 후보로 뽑았다.
III장에서는 십지경 제3지에서는 아홉 단계의 연속적인 머뭄(九次第定)에서 가장 높은 아홉 번째 단계의 멸진정을 제한 8단계의 선정을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는 서술을 통해, 선정단계의 맥락에서는 제6지의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과 멸진정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음을 밝혔다.
IV장에서는 ’멸진의 실현‘이 사제관의 맥락에서나 멸진정의 맥락에서나 모두 현생이 마지막 생이 되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아라한이 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밝혔다.
따라서 ‘멸진을 실현하지 않는다(na nirodhaṃ sākṣātkaroti)’는 서술은 모든 붓다의 속성[佛法]을 갖추어 붓다가 될 때까지 최종적인 열반을 유예하는 보살의 방편(方便upāya)과 관련이 있음을 유추하였다.
V장에서는 대비심(大悲心)과 이에 기반한 ‘중생의 무리를 포기하지않겠다’는 보살의 결심이 멸진정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 으로 명명되는 직관적 체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주류불교 의견도 체험과 비견될 수 있는, 빛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러한 체험은 모든인식이 불가능한 멸진정과는 동일한 상태가 아님을 밝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십지경에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에 머뭄’이라는 선정으로 나타나며, 십지경의 편집자들이 이타심이라는 동기를 기반으로 ‘열반의 유예’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위하여 멸진정을 변용한 해석임을 제시하였다.
주제어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멸진정(滅盡定), 상수멸(想受滅), 삼해탈문(三解脫門), 실현[作證], 십지경(十地經)
I. 시작하며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은 흔히 ‘반야의 완성’(perfection of wisdom)으로 번역되며, ‘최고의 반야 즉 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반야바라밀’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대로 ‘개념적 이해를 동반한’ 지혜(prajñā)인지 아니면 이러한 이해가 불가능한 선정의 상태인지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있어 왔다.
최근에 이 논쟁사를 정리한 충 요크메이(宗玉媺)1)에 따르면‘반야바라밀’을 지혜와 연관시킨 학자들은 후라우발너(Erich Frauwallner), 페터(Tilmann Vetter), 델리아누(Florin Deleanu)이다. 이들은 공성·무상·무원이라는 삼삼매에서 일어나는 지혜와반야바라밀을 동일시하였다.
1) 이하의 내용은 Choong(2016), 728-730을 참조 정리한 것이다. 개별적인학자의 좀 더 자세한 견해에 관해서는 Choong(2016)에서 언급한 자료들을 참조할 것.
이중 델리아누는 인식(saṃjñā)이 사라져 이러한 개념적 지혜를 발현할 수 없는 멸진정(nirodhasamāpatti) 을 반야바라밀의 후보군에서 제외했을 뿐 아니라 삼삼매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야바라밀’을 개념적 이해가 불가능한 선정과 동일시하는 학자들로는 슈미트하우젠(Lambert Schmithausen) 과 충 요크메이 그녀 자신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슈미트하우젠은 반야바라밀을 ‘멸진정=상수멸’과 동일시하였다.
또한 그는 페터와더불어 이러한 반야바라밀의 경우 보살도(Bodhisattva path)와공존할 수 없기에, 팔천송반야 20장에서 언급된 실재의 끝[實際]을실현하지 않는 방법인 방편선교(skillful means)가 필요하다고생각했다. 충 요크메이는 반야바라밀의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보살이 선정에 들어가기 전에 ‘실재의 끝[實際]을 실현하지 않겠다’는결심으로 본다.
그리고 열반의 문턱(the doorstep of nirvāṇa)에서행해지는 이러한 반야바라밀에 가장 적합한 후보로 멸진정을꼽았다.
이러한 연구들은 ‘반야바라밀’이라는 명칭에 맞게, 주로 팔천송반야(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를 비롯한 반야경(Prajñāpāramitā) 류 문헌들을 중심에 두고 행해졌다.
본 논문에서는 팔천송반야 와 더불어 최초의 대승경전으로 뽑히며, 대승불교 수행도를 조직화한 십지경을 통해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십지경 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이 경전에 반야바라밀과 멸진정을동일한 것으로 암시하는 서술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서술들을 분석하여 반야바라밀과 멸진정을 동일한 선정상태로볼 수 있는지, 만약 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멸진정’이라는용어 대신에 ‘반야바라밀’을 채택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것이다.
Ⅱ. 문제의 발단: 십지경 제7지의 서술
십지경 제7지(遠行地)의 서술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반야바라밀과 멸진정을 동일시할 수 있는 단초(端初)가 존재한다.
이를7 세기 산문 리센션(recension) 사본인 MS A2)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
2) 십지경의 산문리센션과 운문리센션, 그리고 십지경의 산스크리트 사본과 편집본, 티벳역, 한역의 전반에 관해서는 이영진(2014), 10-16 참조; MS A로 대표되는 산문리센션과 십지경론의 관계에 대한 가설과 이를뒷받침하는 예에 관해서는 이영진(2021), 72의 각주 31 참조.
3) 제7지의 MS A에 대한 편집본인 E S가 있다. 그렇지만 E S는 때때로 기존편집본인 E K로 대표되는 운문리센션을 근거로 하여 산문리센션인 MS A 특유의 읽기를 생략하고 교정하는 등 산문리센션과 운문리센션을 정확히구분하여 편집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인다.
[1] 오 승리자의 아들이여! 실로 이 보살의 일곱 번째 단계에 머무는 그 보살은 몸·말·마음의 심오[甚深]하고 분리[遠離]되고 움직임이없는[無行] 행위[業]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좀 더 뛰어난 것을찾고자 하는 노력을 놓아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좀 더 뛰어난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➊멸진(滅盡)에 도달하게되(nirodhaprāpta)지만 좀 더 뛰어난 것을 증득하기 위하여4) 멸진을실현[作證]하지는 않습니다(na sākṣātkaroti).5)
4) ‘uttariviśeṣādhigamārtham’의 번역으로서 Tibphal의 khyad par gong ma shin tu thob par bya ba'i phyir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자료도 이 읽기를지지하지 않는다. ; 심사자 분 중 한 분께서 본래 ‘이후에 좀 더 뛰어난것을 증득하기 위하여(uttari viśeṣādhigamārtham)’으로 번역했던 것을“최상의 특징을 얻기 위해”라고 이해할 가능성을 제시해주셨다. 이러한이해는 앞의 문장 “그렇지만 좀 더 뛰어난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놓아버리지 않습니다”(na cottaraṃ viśeṣaparimārgaṇābhiyogam avasṛjati)을고려할 때 좀 더 나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uttari를 복합어의 구성요소로볼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BHSD 123 uttari 항목에서 복합어로 쓰이는용례를 참조하였다.
5) 흥미로운 것은 이 문장이 보이는 한역(Ch K·B: “雖行實際。而不證實際” ; Ch Śn : “雖行實際。而不作證”)과 티벳역(Tibphal ...yang dag pa'i mthar gnas pa la'ang yang dag pa'i mtha' mngon du'ang mi byed do)은 nirodha(멸진) 대신 ‘bhūtakoṭī(실재의 끝)’에 상응하는 용어(實際, yang dag pa'i mtha')를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비묵띠짠드라가 묻는다. “오 승리자의 아들이시여! 어떤 보살의 단계를 시작으로하여 보살은 멸진에 들어갑니(nirodhaṃ samāpadyate)까?” 바즈라가르바 보살이 답한다. “오 승리자의 아들이여! 보살의 여섯번째 단계를 시작으로 하여 보살은 멸진에 들어갑니다. 그렇지만이보살의 일곱 번째 단계[인 원행지(遠行地)]에 있는 보살은 각각의 심찰나마다 ❷멸진에 들어가고 [멸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보살에 대해] “멸진을 실현했다(nirodhasākṣātkṛta)”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점에 기반하여 그는 몸·말·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acintya)한 행위를 갖추었다고 말해집니다.”
[1] sa*1 khalu punar bho jinaputra bodhisatvo syāṃ sapta[myā]ṃ(b)o[dh]i(satvabhūmau sthitaḥ gambh)īr(a)s[y]a viviktasyāpracārasya kāya{{sya}}vāṅmanskarmmaṇo lābhī bhavati na cottaraṃviśeṣaparimārga○ṇābhiyogam avasṛjati yena parimārgaṇābhiyogena ➊nirodhaprāptaś ca bhavati • na ca nirodhaṃ sākṣātkaroti • utta ○riviśeṣādhiga[m]ār(tham) (v)i(mukt)i(candr)o (b)o(dh)i(satva āha) • [k]a[ta]māṃ [bh]o [j]i(naputra bodhisatvabhūmim upādāya bodhisat)v(o) [ni]rodh(aṃ) s(a)māpadyate • bajrag(ar)bh(o) b(o)dhisatva āh(a) • ṣaṣṭh(īṃ) bho jinaputra b(o)dhisatvabhūmim upādā○ya • bodhisatvo nir(o)dha(ṃ) samāpadyate • asyā[ṃ] punaḥ saptamyā[ṃ] bodhisatvabhūmau pratiṣṭhito b(o)dhisatvaś cittakṣaṇe *2 cittakṣaṇe ○ ❷nirodha(ṃ) samāpa[d]yat(e) (*3..ca vyuttiṣṭhate ca • na ca nirodhasāk)[ṣ](āt)[k]ṛ(ta..*3) it)i (vak)t(a)[v]y(aḥ) (te)n(a) [s](o cintyena kāyavāṅmanskarmmaṇā sa)m(a)nvāgata ity ucyate • 6)
6) MS A 33r6-33v2, E S 358.04-359.02. 【*1 sa] E S , na A; *2 cittakṣaṇe] E S , cittakṣ[e]ṇe A ; (*3...*3) ca vyuttiṣṭhate ca • na ca nirodhasākṣātkṛta] E S , + .. .. + .. .. A {고맙게도 심사자중 한분이 본래 sākṣātkṛta로 쓴 것을nirodhasākṣātkṛta로 수정하는 것을 제안하셨고 E S를 확인한 결과 필자가nirodha를 생략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복합어는 MS B에 의해서도지지받는다. ; 또 다른 심사자는 필자가 °mansakarmmaṇ°라고 오기한 것을 사본을 직접 참조하셔서 °manskarmmaṇ°로 교정해주셨다. 두 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본 논문의 산스크리트 사본과 편집본, 티벳역 인용에서 사용한 기호는 다음과 같다. ( ) 결락을 복원한 부분; [] 글자가 손상되었으나 확신할 수 있는 읽기; + 결락된 한 음절 ; .. 형태가 흐릿하게 남아있는 한 음절 ; . 형태가 흐릿하게 남아있는 한 음절의 부분; << >> 필사자 혹은 교정자의 삽입 ; {} 불필요한 음절로 생략하고 읽기를 권고; ◯ string hole ; • 단다(daṇḍa)의 역할을 하는 사본의 점 ; ] 필자가 채택한 읽기 ; corr. correction ; em. emendation ; 이 구문에 상응하는 MS A와 E S 이외의 자료는 다음과 같다. MS B 37r5-37v2; E K 122.06-123.01, E R 61.01-13; Ch Dh 480b11-18, Ch K 518c15-21, Ch B 562b11-17; Ch Śn 197b19-26, Ch Ṡdh 557b19-c25; Tibmdo S 100a6-100b4, Z 106b6-107a4 ; Tibphal H 164b1-7 ; DBhVTib D 216a2-3, 216a5-7, Q 273b1-3, 273b6-274a1 ; DBhVCh 177b27-29, 177c06-10.
인용 [1]의 요지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보살의 여섯 번째 단계인현전지(現前地)에 머무는 보살부터 멸진에 도달하거(nirodhaprāpta) 나 멸진에 들어가게 된다(nirodhaṃ samāpadyate). 더욱이 제7지에 있는 보살은 매찰라마다 멸진에 들어갈 수 (혹은 들어갔다나올 수)7) 있다.
그렇지만 제6지 이상의 보살들은 이 멸진에 들어가지만 이를 작증(作證) 즉 눈으로 직접 보는 것(sākṣāt)처럼 직접경험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멸진에 들어간다(nirodhaṃsamāpadyate)”는 동사구문의 명사형이 ‘멸진정’(滅盡定nirodhasamāpatti)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멸진정은 아홉 ‘단계의연속적인 머뭄’(anupūrvavihārasamāpatti 次第定)에서 느낌(vedanā 受)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사정려(四靜慮=색계선)와 인식(saṃjñā 想)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무색정(無色定) 위에 위치하여, 흔히‘인식과 느낌의 소멸’이라는 상수멸(想受滅 saṃjñāvedayitanirodha) 로 불리기도 한다.8)
7) 이 중 “[멸진으로부터] 나온다(vyuttiṣṭhate ca)”를 지지하는 자료는 18세기 이후의 산스크리트 사본과 이를 참조하여 편집한 E K·R 뿐이다. 필자가이들 편집본을 따른 E S의 읽기를 받아들인 것은 MS A에는 “ca vyuttiṣṭhate ca • na ca”로 복원한 8음절에 상응하는 약 6글자가 결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8) 초기불교 텍스트에 나타난 ‘상수멸’에 관해서는 이영진(2005) 참조.
그렇지만 보살의 여섯 번째 단계인 현전지(abhimukhī bodhisatvabhūmiḥ)에서는 멸진정 혹은 상수멸에 관한 서술이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계에 머무는 보살에게는 멸진정이 아니라, 공성·무상·무원이라는 삼해탈문 이후에 ‘장애/집착을 여윈 지혜의현전이라고 이름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9)’ (asaṅgajñānābhimukho nāma prajñāpāramitāvihāraḥ)이 현전(現前) 즉, 눈 앞 혹은 면전(面前)에 나타난다(āmukhībhavati).10)
9) ‘prajñāpāramitāvihāra’라는 복합어를 ‘반야바라밀에 머뭄(dwelling in prajñāpāramitā)’이 아니라 vihāra를 samāpatti와 동의어인 선정상태로보아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dwelling of prajñāpāramitā)으로 번역하였다. 만약 이후의 논의를 고려한다면 ‘반야바라밀≆멸진정에 머뭄’ (dwelling in prajñāpāramitā, approximately but not actully equal to the nirodhasamāpatti)라는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10) 이러한 현전지의 구조에 관해서는 이영진(2019), 44-48와 본 논문 ‘V. 반야바라밀, 멸진정의 창조적인 해석인가?’ 참조.
그렇다면 현전지의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은 9단계의 연속적인 머뭄(anupūrvavihāra)의 꼭대기에 위치한 멸진정(=상수멸)과동일한 것은 아닐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십지경에서 보살의 여섯 번째 단계 이전에 구차제정의 나머지 명상단계가 나타나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Ⅲ. 십지경 제3지: 여덟 연속적인 머뭄[次第定]
십지경 전체를 살펴보면, 보살의 세 번째 단계인 발광지(發光地 prabhākarī bodhisattvabhūmiḥ)에서 구차제정 중 멸진정(=상수멸)을 제한 여덟 연속적인 선정 단계에 대한 서술이 있다.
[2-1] 발광(發光)이라는 이러한 보살의 단계에 보살이 머무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분리되고 해롭고 불건전한 상태로부터 분리된, [이] 분리로부터 생한(vivekaja) 희열(prīti)과 즐거움(sukha)이 있는, [이리저리] 분산된 생각(vitarka)과 [대상을] 옮겨다니는 생각(vicāra)을 동반한, 첫 번째 정려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분산된 생각과 옮겨 다니는 생각을 지닌 [마음]들을 완전하게 적정함으로부터 [즉,] 내적으로 완전히 고요해짐으로부터 [다시 말해,] 마음이 하나의 점에 집중함으로부터 분산된 생각이 없고(avitarka) 옮겨다니는 생각이 없는(avicāra),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삼매로부터 생한(samādhija)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정려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희열에 대한 탐착을 떠남으로부터 평정해진(upekṣaka) 그는 념(念) 과 정지(正知)를 갖춘 채(smṛtimān saṃprajānan) 몸으로써 즐거움/안락(sukha)을 경험한다.
성스러운 자들은 이를 “념을 갖춘 평정한 자가안락하게 머무른다”라고 말하는 [데, 이러한] 세 번째 정려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이러한] 즐거움/안락을 끊고 괴로움을 끊음으로부터 그리고 이전에11) 이미 기쁨(saumanasya)과 근심(daurmanasya)이 사라짐으로부터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과 념이 완성된(upekṣāsmṛtipariśuddha)12) [상태]인 네 번째 정려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11) Ch Śn(斷樂先除苦喜憂滅)와 Tibmdo (snga nas sdug bsngal yang spangs shing)는 pūrvam eva를 '괴로움을 끊음으로부터(duḥkhasya ca prahāṇāt)'와 연관시킨다.
12) 다양하게 풀이되는 이 복합어의 번역은 Tibmdo의 “btang snyoms dang dran pa yongs su dag pa”의 이해를 따랐다.
[2-2] 그는 완전하게 가시적 물질에 대한 인식(rūpasaṃjñā)들을뛰어넘음으로부터, 저촉에 대한 인식(pratighasaṃjñā)들을 사라지게 함으로부터, 다양한 것에 대한 인식(nānātvasaṃjñā)에 주의를 기울이지않음[amanasikāra 無作意]으로부터13) ‘공간은 무한하다’라고 생각하면서(anantam ākāśam iti)14)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13) 십지경론(DBhVCh 156b25-28 ; DBhVTib D 176a2)에서 바수반두는 ‘가시적 물질에 대한 인식’을 ‘안식(眼識)과 결합한 인식’ (*cakṣurvijñānasaṃprayuktā saṃjñā)으로, ‘저촉에 대한 인식’을 ‘이식·비식·설식·신식과 결합한 인식’으로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다양한것에 대한 인식’을 ‘의식(意識)과 결합한 인식’ (*manovijñānasaṃprayuktā saṃjñā)으로 풀이하며, 그 이유에 관해서는“의식은 [안식 등의 다섯 식과 달리 지각된 대상에 대한 사유 즉] 분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savikalpakatvāt, rnam par rtog pa can yin pas) / 모든 다르마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分別一切法故)”라고 덧붙이고 있다.
14) anantam ākāśam iti를 “‘공간은 무한하다’라고 생각하면서”로 번역한 것은 Tibmdo와 DBhVTib의 “nam mkha' mtha' yas so snyam nas”를 참조하였다. 개인적으로는 anantam ākāśam iti 이후에 saṃjānan([언어적으로 명확히] 인식하면서)을 첨가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후에 언급하겠지만❸비상비비상처에는 이러한 언어적 개념화의 사유가 나타나있는 문헌과그렇지 않은 문헌으로 나뉜다.
그는 완전하게 공무변처를 뛰어넘고서 ‘식은 무한하다’라고 생각하면서(anaṃtaṃ vijñānam iti)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그는 완전하게 식무변처를 뛰어넘고서 ‘어떠한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면서(nāsti kiñcid iti)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그는 완전하게 무소유처를 뛰어넘고서 ❸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서머무른다.
그리고 이러한 [명상의 단계들]은 법수법행(法隨法行)을 위해서가아니라면,15) 기뻐하여 집착하며 머무르지 않는 방식에 의해 [머무른다.]
15) “법수법행(法隨法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은 ‘anyatra dharmmānudharmmapratipattim upādāya’의 번역이다. anyatra X upādāya 의 구문을 ‘X를 위해서를 제외하고는’(except, for the sake of X)로 풀이한것에 관해서는 BHSD 145(upādāya 항목 중 (1)(d)의 예시) 참조 ; 보살이지니는 5종의 법수법행에 관해서는 안성두(2015) 150-152를 참조.
[2-1] so syāṃ prabhākaryyāṃ bodhisatvabhūmau sthito bodhisatvaḥ san viviktaṃ kāmair vviviktaṃ pāpakair akuśalair ddharmmaiḥ ○ savitarkkaṃ*1 savicāraṃ vivekajaṃ prītisukhaṃprathamaṃ dhyānam upasaṃpadya viharati •savitarkkasavicārāṇāṃ vyupaśamā○d adhyātmasaṃprasādāc cetasa ekotībhāvād avitarkkam avicāraṃ sāmādhijaṃ prī(sukhaṃ dvitīyaṃdhyānam upa)saṃpadya viharati sa prīter vvirāgād upekṣaka smṛtimān saṃprajānan sukhaṃ ca kāyena pratisaṃvedayate ○ yat tad āryyā ācakṣate upekṣakaḥ smṛtimān sukhavihārī tṛtīyaṃdhyānam upasaṃpadya viharati • sa sukhasya ca prahā<<ṇā>>d duḥkhasya ca prahāṇāt pūrvvam eva ca saumanasyadaurmmanasyayor astagamād aduḥkhā(sukhamupe)kṣāsmṛtipariśuddhaṃ caturtthaṃ dhyānam upasaṃpadya viharati • [2-2] sa sarvvaśo rūpasaṃjñānāṃ samatikramā○t pratighasaṃjñānām amanasikārā<>nantam ākāśam iti ākāśānantyāyatanamupasaṃpadya viharati sa sarvvaśa ○ākāśānantyāyatanasamatikramād anaṃta<ṃ> vijñānam iti •vijñānānantyāyatanam upa(saṃpadya vi)[h]arati • sa sarvvaśo vijñānānantyāyatanasamatikramān nāsti kiñcid ity ākiṃcanyāyatanam upasaṃ○dya viharati sa sarvvaśa ākiñcanyāyatanasama<>kramān*2 ❸naivasaṃjñānāsaṃjñāyatanam upasaṃpadya viharati tac cā○ nabhiratisthānena anyatra dharmmānudharmmapratipattim upādāya •16)
[2-1]에서는 제1정려~제4정려의 색계선이, [2-2]에서는 공무변처~비상비비상처의 무색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소위’ 초기불교 텍스트로 명명하는 니까야(Nikāya)의 전형적인 서술과 일치한다.17)
16) MS A 18r2-5 【*1 savitarkkaṃ] corr., savitarkta[ṃ] A; *2 ākiñcanyāyatana°] corr., ākiñcinyāyatana° A 】; MS A이외의 자료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MS B 18r6-18v5, E K 55.13-56.11, E R 33.31-34.17 ; Ch Dh 469b05-19, Ch K 507c21-508a04, Ch B 551c26-552a09, Ch Śn 188a14-24, Ch Ṡdh 545c26-546a13; Tibmdo S 65b5-66a4, Z 67a5-68a4 ; Tibphal H 113a6-114a4 ; DBhVCh 156a08-22, DBhVTib D 173a7-b7, Q 222a8-223a2.
17) 니까야의 색계선과 무색계정의 전형적인 서술에 관해서는 이영진(2005) 104, 109-110, 111 각주 45 참조.
그리고 이 발광지의 서술이후에 인용 [1] ‘보살의 여섯 번째단계로부터 멸진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 이전에 멸진정 혹은 상수멸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살의여섯 번째 단계에서 삼해탈문 이후에 현전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머뭄’은 연속적인 머뭄의 단계(anupūrvavihāra)를 염두에 두자면, 멸진정(=상수멸)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멸진정/상수멸’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으로 명칭이 바뀌었는가?
명칭이 변화하였다는 것은그명상의 상태 혹은 상태에 대한 해석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할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에 관해서는 보살의 일곱 번째 단계로돌아가 [1]에서 보았던 ‘멸진에 들어가지만 이를 실현하지 않았다’ 는 서술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비상비비상처의 서술 ❸과 관련하여 지적해야할 사항이 있다.
아래의 [표1]에서 보다시피, 산스크리트, 한역, 티벳역의 일부자료에는 MS A에는 없는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naivasaṃjñānāsaṃjñeti)에 상응하는구문이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가서 머무른다” 앞에 추가되어 있다.
[표1: 비상비비상처정의 추가구문 유무] : 생략(첨부 논문파일참조)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흐릿한(?)] 상태인비상비비상처나 인식이 완전히 소멸한 상수멸의 상태에서는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등의 언어로 개념화된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되었다.18)
그렇지만 비상비비상처에서 불가능한 개념적 인식에 관한 구문은 가장 빠르게는412년 구마라집의 한역(Ch K )을 시작으로, 산스크리트, 한역, 티벳역 각각의 절반 정도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또한 십지경론 의 저자 바수반두는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는 수행의 이익(*bhāvanānuśaṃsa)을 설명하는것이다”19)라고 주석한다.
18) 이영진(2005), 98-102: 특히 경전적 증거에 관해서는 각주 31을 참조 ; 상수멸에서 인식(saṃjñā)이 결합되는 마음(citta)이 없는 것에 관해서는 본논문 각주 25 참조.
19) DBhVTib D 176b3: “ 'du shes med 'du shes med pa ma yin no snyamzhes bya bas ni bsgoms pa'i phan yon bstan to ||” ; DBhVTib 156c12-13: “知非有想非無想安隱者, 是名修行利益.”
따라서 우리는 그가 참조한 십지경의구문에 비상비비상처의 상태와 모순된 개념화된 인식에 관한구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일군의 텍스트에 이러한 모순된 구문이 추가되었을까?
필자는 비상비비상처 뿐 아니라 그 이후의 단계인상수멸(=멸진정) 혹은 이에 상응하는 상태를, 개념화된 인식이가능한 상태 혹은 적어도 개념화되지 않은 인식 자체는 남아있는상태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아닐까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심을 염두에 두고 이제 다시 보살의 일곱 번째 단계의 서술로 돌아가보자.
Ⅳ. 멸진에 머무르지만 실현하지 않는다
십지경의 일곱 번째 단계에는 인용 [1] 직후에 “멸진에 들어가지만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일[希有 āścarya]이며, 멸진을 실현한다는 것이 과실(過失 doṣa)을 초래한다는 서술이 나타난다.
[3] 오, 승리자의 아들이시여! ❹ 실로 보살이 ‘실재(實在)의 끝'[實際]에 머뭄으로 머무르지만, 멸진(滅盡)을 실현하지 않는다(bhūtakoṭīvihāreṇa viharati na ca nirodhaṃ sākṣātkaroti)는 점은참으로 놀랍습니다 … 오, 승리자의 아들이시여! 바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보살의일곱 번째 단계에 머무르는 보살은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지혜[一切智智] 라는 커다란 바다에 들어가는 바라밀이라는 커다란 배에 올라타서(pāramitāmahāyānapattrābhirūḍhas) ❹실재(實在)의 끝에 머무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멸진을 실현하지 않으며, ❺조건지어진[有爲] 것들을완전히 적정하게 할 때 일어나는 과실에 의해서도 영향받지 않습니다(na ca saṃskṛtātyantavyupaśamavivarttadoṣair llipyate).20)
20) 이영진(2022), 23-24에서 변형하여 인용. 이 번역의 바탕이 되는 MS A 의 산스크리트 원문과 그 이외 자료의 위치정보에 관해서는 인용한 논문의 각주 23을 참조.
인용을 통해서 보자면, ❹‘실재의 끝에 머뭄’(bhūtakoṭīvihāra)= ‘멸진에 들어감/멸진정’(nirodhasamāpatti)21)이 ‘바라밀이라는커다란(mahā) 배(yānapattra)’에 비유되고 있다. 이를 보살의 여섯번째 단계에서 멸진정의 단계에 위치한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 혹은 ‘반야바라밀에 머뭄’(각주 9 참조)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비유에서 나타난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❺‘유위를 완전히 적정하게 할 때 일어나는 과실’로 묘사된 멸진의실현(sākṣātkriyā)은 [3]의 요약게송에서처럼22) 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배에서 떨어져 멸진=실재의 끝으로 비유되는 바다(sāgara) 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멸진을 실현한다’는 것인가?
이 ‘멸진의 실현’ 은 사성제에 대한 관찰[四諦觀]의 맥락에서 ‘열반에 대한접촉’(nirvāṇasparśa)을 의미하는 멸제(滅諦 nirodhasatya)와 관련이있다.23)
야쇼미트라(Yaśomitra)에 따르면,24)
21) 이 맥락에서 nirodha(滅盡)와 bhūtakoṭi(實際)과 교환가능한 유사동의어라는 점에 관해서는 본 논문 각주 5를 참조.
22) 이영진(2022), 25의 각주26에서 변형하여 인용: “일곱 번째 단계에 있는보살들은] 심오한 상태에 도달하여 더더욱 노력하여 멸진(滅盡)의 마음으로 나아가지만, [그 멸진을] 실현하지는 않는다(cittaṃ nirodh'upagatā na ca sākṣikriyāḥ). 이는 마치 바다로 나아간 자가 모든 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배 안(yānapātre)에 있는 것이지, 배로부터 떨어져 [바다에 빠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23) ŚrBh II 118: “tatra duḥkhasatyaṃ vyādhisthānīyaṃ tat prathamataḥ parijñeyam | ... nirodhasatyam ārogyasthānīyaṃ tac ca sparśayitavyaṃsākṣātkartavyam | (그 [사제] 중에서 고제는 병과 같은 것으로, 처음부터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멸제는 병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접촉해야 하는 즉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3전12행상을 갖춘사제관에서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해야만 한다(sākṣātkartavya).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했다(sākṣātkṛta)”라는세 측면(行相)으로 기술되고 있다. 3전12행상의 사제관에 관해서는Sāratamā 68.19-28 등 참조
24) AKVy 600.06-16.
이 사제관은 더 이상재생하지 않아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아라한 혹은 무학(無學 aśaikṣa)이 되기 직전에 발생하는 두 지혜인 진지(盡智kṣayajñāna)와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와도 연관된다.
좀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멸제의 경우 “‘나는 멸진을 실현하였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nirodho me sākṣātkṛta iti yathābhūtaṃprajānāti)”는 개념적 인식이 모든 번뇌를 끊었다고 아는 지혜인‘진지’에 배치된다. 그리고 “‘나는 멸진을 실현하였고 다시는 실현할 필요가 없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nirodho me sākṣātkṛto na punaḥ sākṣātkartavya iti yathābhūtaṃ prajānāti)”는 언어화된인식이 이미 끊은 번뇌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아는 지혜인‘무생지’에 배속된다.
이러한 설명들을 고려하자면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을 적정하게하는 ‘멸진을 실현한다’는 행위는 현생(現生)을 마지막 생으로하는 아라한이 되는 결과 즉,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할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보살은 ‘붓다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구제한다’는 목표로부터 벗어나는 과실(doṣa)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멸진의 실현’은 사제관 이외에도, 십지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과 동일한 단계에 위치한 멸진정과도 깊은 관련을맺는다.
예를 들어 구사론에서는 설일체유부와 구사론의 저자(kośakāra) 바수반두의 멸진정에 관한 견해를 주석하고 있다.25)
25) AKBh 363.13-18, AKVy 566.16-23 ; AD 348.03-349.02: AKBh의 해당구문을 나머지 자료를 참조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Vaibhāṣika의견해:] 실로 멸진정을 획득한 어떤 불환자는 ‘몸으로써 실현한 자[身證者]’라고 가르쳐진다. 왜냐하면 그는 열반과 유사한 다르마를 몸으로써실현[作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 열반과 유사한 다르마를] 몸으로 실현하는가? [멸진정에서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다르마가] 몸에 의지한 후에 일어나기 때문에(AD: sa khalu dharmaḥ kāyāśrayeṇopajāyate) [오직 몸으로써만 실현하는 것이다(AKVy: kāyenaiva sākṣātkaroti).] [바수반두 자신의 견해(AKVy: evaṃ tu bhavitavyam iti svamatamācāryasya):]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실로 그는 그 [멸진정]으로부터 나오고 나서 이전에는 획득하지 못했던, 의식을 지닌(savijñāka) 몸의 적정을 획득한다. 그리고서(yatas) 그는 ‘오! 멸진정은 실로 적정하다! 오! 멸진정은 열반과 유사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이 [멸진정이] 적정하다는 것을 몸으로써 실현하게 된다. 실로 실현[作證 sākṣātkriyā]은 [멸진정에 적합한 소의=몸을] 획득하여 실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멸진정으로부터 나와서 몸의 적정함을 아는] 지혜의 실현으로부터 현전/지각하는 것(pratyakṣīkāra)이다”
이 중 전자는 인식(saṃjñā)과 결합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cittābhāvāt) 열반과 유사한 다르마를 몸으로써 실현하는(nirvāṇasadṛśasya dharmasya kāyena sākṣātkaraṇāt) 상태”로보고 있다.
바수반두의 경우 이러한 멸진정 내에서 획득의 실현(prāptisākṣātkriyā) 이외에도 멸진정으로부터 나온 직후에 ‘멸진정이 실로 적정하고 열반과 유사하다’라고 개념적으로 아는 지혜의 실현(jñānasākṣātkriyā) 역시 실현[作證]의 범주에 포함시키고있다.
이 경우 양자 모두 멸진정을 열반과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상태의 실현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멸진정과 유사한맥락의 서술에서 ‘갈애의 다함(tṛṣṇākṣaya)=멸진(nirodha)=열반(nirvāṇa)’을 동의어로 보고 있는 문헌들을 고려할 때26) 그리고멸진정이 “오직 죽음 이후에 결정적으로 획득되는 열반의 상태를현생에서 일시적으로 선취(先取 anticipation)한다”27)는 신비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고려한다면, [3]의 인용을 ‘만약멸진정에서 멸진(=열반)을 몸으로써 실현한다면 보살은 현생을마지막 생으로 하는 아라한이 되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결과를초래할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멸진정에들어간 보살이 ‘멸진을 실현하지 않는다’는 서술은 붓다의 속성[佛法 buddhadharma]을 갖추어 붓다가 될 때까지 최종적인 열반을유예하는 보살의 방편(方便 upāya)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28)
26) 이영진(2023), 6(각주 11)과 14의 인용[F-2] 참조.
27) Schmithausen(1981) 214-215 ; 이영진(2023) 4.
28) 인용 [1]의 요약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보살지의 설명{BoBh 348.21-349.03 ; 번역은 안성두(2015) 370 참조}에서는 “실재의 끝에 머무르지만 멸진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방편과 지혜에 의해 산출된것’(upāyajñānābhinihāra)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관련성은 ‘만약 대승경전의 편집자들이 멸진정(상수멸) 의 명칭을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으로 변경하였다면, 그 배후에는 최종적인 목표를 이룰 때까지 윤회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보살의 방편(方便 upāya)이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가능하게한다. 이러한 가설을 염두에 두고 앞서 언급한 보살의 여섯 번째단계(現前地)의 구문을 검토해보자.
Ⅴ. 반야바라밀, 멸진정의 창조적인 해석인가?
보살의 여섯 번째 단계인 현전지(現前地)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이루어져 있다.
[표2: 현전지의 구조]29)
① ②
12지 연기를 10 가지 측면으로 관찰[十重十二因緣觀] → 공성―무상―무원 →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
이중 ①은 12지 연기를 10가지 측면, 즉 아트만이 없다는 측면(nirātmatas) … 자성(고유한 성질/독립적인 존재)이 공하다는측면(svabhāvaśūnyatas)… 무자성(고유한 성질이 없음/독립적인존재가 아님)이라는 측면(asvabhāvatas)으로 관찰할 때, 공성이라는해탈로 향하는 관문(śūnyatā vimokṣamukham)이 생겨나는 과정이다.30)
29) 이영진(2019), 44.
30) 이는 새로운 ‘공성’ 사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12지 연기의 관찰’ 을 ‘공성’에 입각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시도이다. 십지경 편집자들의이러한 정당성의 부여 시도에 관해서는 이영진(2019), 44-48 참조.
이 관문 이후에 무상(無相 ānimitta)과 무원(無願 apraṇihita)이라는 해탈로 향하는 두 관문이 연속적으로 생겨나는데 이 세 종류의 관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상해탈문’ 혹은‘무상삼매’일 것이다. 이 맥락에서 무상삼매는 “12지 연기의 지분들이 저절로 소멸하여(bhavāṅgānāṃ svabhāvanirodhena) 어떠한다르마의 ‘특징’(nimitta)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31)이다.
여기서‘특징[相]’은 ‘인식(saṃjñā 想)의 대상’을 의미하기에, 이 삼매는인식의 대상이 없는 것(ānimitta 無相) 따라서 그 주체인 인식도없는(asaṃjñā 無想) 상태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식(saṃjñā)과 느낌(vedanā)이 없는 선정인 멸진정과 공통점을 갖는다. 유가사지론의 <삼마희다지>에 따르면, ‘인식이 없음’(asaṃjñā)은 (1) 멸진정에 들어간 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도인식이 생겨나지 않음(nirodhasamāpannasya sarveṇa sarvaṃsaṃjñānām apravṛttiḥ) 이외에도, (2) 모든 특징[相]이 사라진[그렇지만 사라진 상태에 대한 인식은 남아있는] 인식(sarvanimittāpagatā saṃjñ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32)
십지경 현전지의 맥락에서는, 무상에 들어간 보살에게 대비심(大悲心)이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중생들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일어난다는 취지의 서술33)을 고려하자면, 무상삼매는 (2) 즉, 12연기지분들의 ‘소멸(nirodha)’에 대한 인식 자체는 남아있는 상태일것이다.
31) 이영진(2019), 45: 각주 48의 인용 참조.
32) 이영진(2023), 11-12: 각주 23의 인용 참조 ; 무상삼매가 본래 (1)의 멸진정과 동일한 상태였다가 (2)로 변형한 것에 관해서는 이영진(2023) 12-13 참조.
33) 이영진(2019), 45: “이와 같이 공성과 무상에 들어간 그에게는 대비(大悲) 가 선행하는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바람도 일어나지않는다. 이와 같이 이 [보살]에게는 무원(無願)이라는 해탈로 향하는 관문이 생겨난다(tasyaivaṃ śūnyatānimittam avatīrṇasya na kaścid abhilāṣa utpadyate 'nyatra mahākaruṇāpūrvakāt sattvaparipācanāt, evam asyāpraṇihitaṃ vimokṣamukham ājātaṃ bhavati |)”
그리고 이러한 삼매의 상태를 반복하여 닦을 때 12연기지분들의 소멸=멸진을 몸으로써 접촉 혹은 실현하는 ‘멸진정’으로나아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비(大悲) 그리고이에 기반한 중생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바람은 이러한 예상진로를벗어나게 한다.
[4] 그 [보살]이 이러한 세 해탈로 향하는 관문들을 반복 수행할때‘나’와 ‘남’이라는 개념(saṃjñā 혹은 나와 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행위자’와 ‘감수자’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존재’와 ‘비존재’라는 개념이사라지는데, 커다란 연민[大悲]을 앞세워 아직 완성하지 못한 ‘붓다의깨달음을 구성하는 지분’[菩提分法]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매우 노력한다.
그는 ‘[원인과 조건(因緣)의] 결합(saṃyoga)로부터 조건지어진것[有爲 saṃskṛta]이 생겨나고, 결합을 떠남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원인과 조건의] 화합(sāmagrī)로부터 조건지어진 것이 발생하고 조건들의 화합을 떠남(visāmagrī)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 나는조건지어진 것이 많은 과실(過失)로 뒤덮혀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❻-1 [그들을 발생시키는] 이러한 결합과 이러한 화합을 단절할 것이다.
❻-2 그렇지만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모든 [조건지어진] 행(行saṃskāra)의 완전한 적정(atyantopaśama)을 증득하지는 않을 것이다(na adhigamiṣyāmaḥ)’라고 생각한다.
승리자의 존귀한 아들들이여! 이러한 방식으로 이 [보살]이 ‘[조건지어진] 행들이 많은 과실(過失)로 뒤덮혀 있으며, 자성(고유한 성질/독립된 존재)을 결여하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不生不滅]’라고 자연스럽게 관찰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커다란 연민[大悲]을 산출함에 기반하여 그리고 중생들의 무리를 포기하지 않음에기반하여 ‘장애/집착을 여윈 지혜의 현전이라고 이름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이 빛이 [밝게 빛나는] 방식으로(avabhāsayogena)34) 현전하게 된다.
34) 이 번역은 티벳역 snang ba'i tshul gyis/du (Tibmdo/Tibphal)를 참조하였다. 한역은 가장 늦은 8세기말의 한역(Ch Śdh)을 제하고는 모두 빛(avabhāsa)에 상응하는 번역어(照曜 Ch Dh ; 光明 Ch K·B·Śn DBhVCh)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혜를 갖춘, 반야바라밀이라는/에머뭄에 의해 밝게 빛나는 그는 ‘붓다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지분’[菩提分法]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을 모은다 [즉,] 끌어 모은다.
그렇지만 유위와 함께 머무르지는 않는다. ❼-1 그리고 [조건지어진] 행들이 본래 적정하다고 개별적으로 관찰하지만(pratyavekṣate), ❼-2 아직 그가 보리분법을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적정함]에 떨어지지않는다(nāvatiṣṭhate). [4] ya imāni trīṇi vimokṣamukhāni bhāvayann ātmaparasaṃjñāpagataḥ kārakavedakasaṃjñāpagato bhāvābhāvasaṃjñāpagato bhūyasyā mātrayā mahākaruṇāpuraskṛtaḥ prayujyate 'pariniṣpannānāṃ bodhyaṅgānāṃ pariniṣpattaye, tasyaivaṃ bhavati : saṃyogāt saṃskṛtaṃ pravartate, visaṃyogān na pravartate ; sāmagryāḥ saṃskṛtaṃ pravartate, visāmagryā na pravartate ; hanta vayam eva*1 bahudoṣaduṣṭaṃ saṃskṛtaṃ viditvā ❻-1 asya saṃyogasyāsyāś ca*2 sāmagryā vyavacchedaṃkariṣyāmo, ❻-2 na cātyantopaśamaṃ sarvasaṃskārāṇāmadhigamiṣyāmaḥ *3 sattvaparipācanatāyai. evam asya bhavanto jinaputrāḥ saṃskāragataṃ bahudoṣaduṣṭaṃ svabhāvarahitamanutpannāniruddhaṃ prakṛtyā pratyavekṣamāṇasya mahākaruṇābhinirhārataś ca sattvakāyānutsargataś *4 cāsaṅgajñānābhimukho nāma prajñāpāramitāvihāra āmukhībhavaty avabhāsayogena. Sa evaṃ jñānasamanvāgataḥ prajñāpāramitāvihārāvabhāsito bodhyaṅgāhārakāṃś ca pratyayān*5 upacinoti upasaṃharati*6, na ca saṃskṛtasaṃvāsena saṃvasati ; ❼-1 svabhāvopaśamaṃ ca saṃskārāṇāṃ pratyavekṣate, ❼-2 na ca tatrāvatiṣṭhate bodhyaṅgāparipūritatvāt.*735)
35) 이는 해당 폴리오의 약 1/3이 결락(缺落)한 MS A(28v4-6)를 비롯한 다양한 사본을 참조한 La Vallée Poussin의 편집본(E P 120.13-31)을, 필자가 MS B(32r2-6)와 편집본(E K 102.09-103.04 ; E R 52.14-34)을 참조하여수정한 버전이다: *1 eva] A B, evaṃ E K•P•R ; *2 saṃyogasyāsyāś ca] A E K , saṃyogasyāsyāḥ E P•R ; *3 adhigamiṣyāmaḥ] E K (supported by thob par yang mi bya'o Tibmdo), abhigamiṣyāmaḥ B, avirāgayiṣyāmaḥ E P•R ; *4 sattvakāyā˚] A E R , sattvakāryā˚ E P•K ; *5 pratyayān] A E K •R , prātyayān E P ; *6 upacinoty upasaṃharati] A E K , upasaṃharati E P •R ; *7 bodhyaṅgāparipūritatvāt] em., bodhyaṃgāni paripūritatvāt A, bodhyaṃgāparipūritatvā B, bodhyaṅgāparityaktatvāt E P•R , bodhyaṅgāparipūritvāt E K ; 한역과 티벳역의 위치정보는 다음과 같다. Ch Dh 476c29-477a14, Ch K 515b21-515c03 ; Ch B 559b04-15 ; Ch Śn 194c06-194c18 ; Ch Śdh 554a02-16 ; DBhVCh 171b23-24, 171c25-172a08 ; Tibmdo S 89b7-90b1, Z 95a1-95b4 ; Tibphal H 149b3-150a6.
우선 ❻-1 “[유위를 발생시키는] 이러한 결합과 화합을 단절할것이다”와 ❻-2 “그렇지만 모든 [조건지어진] 행(行)의 완전한적정을 증득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서술은 각각 ➊/❷/❹“멸진에도달하지만/멸진에 들어가지만/실재의 끝[實際]에 머뭄으로 머무르지만” ➊❷❹ “멸진을 실현하지는 않는다”와 동일하게 해석할수있다.
이는 우선 ❺를 통해 ‘결합과 화합의 단절’=‘모든 행(行)의완전한 적정’이 ‘멸진’=‘실재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추할수있는 점에 기반한다.
뿐만 아니라, 유사한 맥락에서 ‘증득하다(adhigacchati)’와 ‘실현하다(sākṣātkaroti)’가 동의어로 사용되는용례는36) 이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36) ‘모든 덮개[蓋]로부터의 해탈’로 특징지어지는/정의되는 열반계(涅槃界)의증득의 맥락에서 증득(adhigama)과 실현(sākṣātkaraṇa)이 동의어로 사용되는 용례에 관해서는 보성론의 다음 구문을 참조(Rgv 59.03-04: …sarvāvaraṇavimuktilakṣaṇasya nirvāṇadhātor adhigamaḥ sākṣātkaraṇam upapadyate …) ; 또한 이 둘과 ‘접촉(sparśanā)’이 유사동의어로 사용된 용례에 관해서는 ŚrBh II 144.11-13: “tatra nirabhimānatā | adhigame prāptau sparśanāyāṃ nirabhimāno bhavati | aviparītagrāhī, prāpte prāptasaṃjñī, adhigate 'dhigatasaṃjñī sākṣātkṛte sākṣatkṛtasaṃjñī |” 참조.
그렇다면 완전한 적정의 증득=멸진의 실현을 거부하는 이유는무엇인가?
이는 ‘붓다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지분'[菩提分法]들모두 모음으로써 붓다가 되어 중생을 성숙시키겠다는/구제하겠다는대비심(大悲心)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비심에 기반하여그리고 아라한이 되어 홀로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목표를 버림으로써 즉 중생의 무리를 포기하지 않음에 기반하여 멸진정에서 멸진의 실현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이 빛의 형태로(avabhāsayogena) 나타난다.
이러한 빛으로 나타나는 직관적 선정체험 이후에 보살은 붓다가 되기 위하여 보리분법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을 모으는혹은 십력(十力)을 비롯한 붓다의 속성을 완성하는37)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서는 ‘조건지어진 것들이열반=멸진과 같이 본래 적정하다(svabhāvopaśama)’고 관찰할뿐이지 그 적정=멸진에 발을 담가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노력한다.
비록 멸진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개념적인관찰을 통해 멸진의 실현을 유예하는 이것이 바로 최종적인 열반을유예하는 보살의 ‘방편에 대한 능숙함(upāyakauśalya 方便善巧)’일것이다.38)
37) 십지경의 제10지에서 보살은 ‘십력’을 완성해야만 ‘정등각자(saṃyaksambuddha)’가 될 수 있다는 서술에 관해서는 Lee(2015), 22-24 참조.
38) 팔천송반야의 20장(upāyakauśalyamīmāṇsāparivarta)은 그 제목에서처럼 방편선교(upāyakauśalya)를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실재의 끝[實際]을 실현하지 않는 방법은 ①오온 즉 색·수·상·행·식 각각을‘공하다’라고 개별관찰하는 것(rūpaṃ…vijñānaṃ śūnyam iti pratyavekṣitavyam)과 ② 이와같이 관찰할 때 법성을 ‘법성’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것(tāṃ dharmatāṃ dharmatayā na samanupaśyet)이다. 이에관해서는 이영진(2007), 179-180 각주 385의 인용과 번역을 참조 ; 하리바드라(Haribhadra)의 주석(AAA 749.19-23)에 따르면 ‘법성을 법성으로간주하지 않는 것’은 ‘공성을 공성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혹은 ‘공성이공성이라는 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인지하지 않는 것(śūnyatāmśūnyatāsvabhāvenāstīti yathā nopalabheta)이다.
이러한 유예는 보리분법/십력을 완성시켜 붓다/정등각자(正等覺者 saṃyaksambuddha)가 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이를 완성시켰을 때야 비로서 멸진을 실현함으로써 보살은 붓다/정등각자가 되어 중생구제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십지경의 체계는 주류불교/아비달마불교의견도-수도-무학도의 체계를 모델로 고안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이라는 빛 형태의 직관적 경험은 아비달마불교 수행도에 보이는 견도(見道 darśanamārga)가 모델이되었을 것이다.
이 직관적 체험 이후에 이어지는 제행들에 대한개별적인 관찰은 수도(修道 bhāvanāmārga)의 과정을 모델로 하는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보리분법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을모은다”는 것이 주류불교의 수도에서 감정적인 번뇌의 점진적인 소멸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진지+무생지) 아라한이 되는 무학도는 십지경의 맥락에서 보리분법을모두 갖춘 이후에 ‘멸진을 실현함’으로써 붓다가 되는 것이라고추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를 토대로 하자면, 반야바라밀과 멸진정에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십지경의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은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prajñāpāramitāvihāra)에서 사용될 때 개념화된 지혜가 아니라 선정상태로서, 수행의 단계상(!) 9차제정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여 멸진정(=상수멸)과 동일시된다.
2. 이 머뭄은 주류불교의 견도체험에 비견될 수 있는데, 빛(avabhāsa)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직관적 체험은 어떤방식으로도 인식이 불가능한 상태인 멸진정과 동일시될 수없다.
3. 이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은 붓다/정등각자가 되어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이타심[大悲心]이 동기가 되어, 멸진정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멸진을 실현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4. 결국 이는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살로 하여금 멸진을 실현하여 현생이 마지막 생이 되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방지해 주는 방편(upāya)으로서 최종적인 열반을 유예(猶豫)하는 역할을 한다.39)
39) 반야경류 나아가 대승경전 중 최고층(最古層)인 팔천송반야(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1장에서는 두 종류의 ‘반야바라밀’이 언급된다(AAA 52.12-17 ; 53.6-7). 첫째는 오온으로 대표되는 다르마를 [인식대상으로] 취하지 않는 것(yad rūpaṃ…vijñānaṃ na parigṛhṇīte)이다. 둘째는 여래 혹은 정등각자의 자격{=10력(力), 4무외(無畏), 18 공통되지않은 속성[不共法]}을 완전히 완성하기 이전에는 반열반하지 않는 것(na cāntarā parinirvāti aparipūrṇair daśabhis tathāgatabalaiś caturbhis tathāgatavaiśāradyair aṣṭādaśabhiś cāveṇikair buddhadharmaiḥ)을 지칭
5. 긍정적으로 보자면,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은 십지경의편집자들이 이타심(대비심)이라는 동기를 기반으로 ‘열반의유예’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위하여, 멸진정을 변용한 창조적인해석(creative interpre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자면, ‘멸진정의 체험이 현생에서 최종적인 열반을 예기(豫期)한다’는 관점이 ‘붓다가 되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의목표와 상충하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에 맞게 멸진정을 강제적으로 (즉, 열반의 예기라는 효과를 없앤 상태로) 변용한강요된 해석(forced interpretation)으로도 볼 수 있다.
6. 창조적으로/부자연스럽게 변용된 이 ‘반야바라밀이라는/에머뭄’이 ‘멸진정(nirodhasamāpatti)’을 대치하였지만, ‘멸진에도달한다/들어간다(nirodhaprāptaḥ/nirodhaṃ samāpadyate)’는흔적이 여전히 남아 이 둘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말해준다.
7. 주류불교의 수도(修道)에 비견되는 모든 보리분법/십력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의 선정상태를 반복하기 보다는, ‘조건지어진 것들이 열반=멸진과 같이 본래 적정하다’라고 개념적 인식을 통해 개별관찰한다.
이는 개념화된 지혜인 ‘반야바라밀’인데, ‘멸진정 등의 선정상태에서는 반야바라밀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된 근거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지혜는 선정상태의 반야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이라는/에 머뭄’을 경험한 후에 이를 돌이켜 회고하는[反照]하는, 예를 들자면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를 경험한 후에이를 현상들에 적용하는 일종의 후득지(後得智pṛṣṭhalabdhajñāna)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8. 명백하게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보리분법/십력을 완성시켜붓다/정등각자가 된 경우에는 멸진정에 들어가서 멸진을 실현할것이 암시된다. 한다.
이중 두 번째가 십지경의 반야바라밀이라는 머뭄과 동일하게, 보살로 하여금 아라한이 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방편으로 해석할 수 있는반야바라밀이다.
약호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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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ould the Perfection of Wisdom (prajñāpāramitā) be a Creative/Forced Interpretation of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nirodhasamāpatti)?
Lee, Young Jin (Gyeongsang National Univ. )
The prajñāpāramitā is often translated as the perfection of wisdom, meaning ‘the highest wisdom.’ There has been an active debate in academic circles as to whether this perfection of wisdom is a kind of wisdom with conceptual understanding or a concentration beyond such understanding. This paper moves away from Prajñāpāramitā texts, which have been the main focus of such studies, and examines the perfection of wisdom in the Daśabhūmikasūtra. This is because there are narratives in the scripture that imply that the perfection of wisdom is the same as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nirodhasamāpatti) or the cessation of ideation and feeling (saṃjñāvedayitanirodha). In Chapter II, this paper finds traces of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in the seventh stage of the Daśabhūmikasūtra, which states that bodhisattvas from the sixth stage (i.e., abhimukhī bhūmiḥ) can “enter into extinction (nirodhaṃ samāpadyate) but do not realize it.” It singles out the ‘dwelling of/in prajñāpāramitā (prajñāpāramitāvihāra) of the sixth stage as a candidate for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Chapter III clarifies that, in the context of successive dwellings (anupūrvavihāra), the dwelling of/in prajñāpāramitā equates to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nirodhasamāpatti), given the narrative of the third stage (i.e., prabhākārī bhūmiḥ) describes eight dwellings successively except for the nirodhasamāpatti, the culminating point of this succession. In Chapter IV, this paper shows that the ‘realization of extinction (nirodhasākṣātkriyā),’ both in the context of the investigation of the four noble truths and the context of nirodhasamāpatti, results in becoming an arhat who will be free from saṃsara after this life. It, therefore, infers that the statement “he/she does not realize extinction (na nirodhaṃsākṣātkaroti)” relates to bodhisattvas’ means (upāya) postponing final nirvāṇa until he will have attained all the attributes of the [perfectly enlighted] Buddha(s). Chapter V points out that bodhisattvas’s resolve to “not give up on the sentient beings by not realizing the reality limit” based on great compassion gives rise to the intuitive experience of “dwelling of/in prajñāpāramitā” instead of nirodhasamāpatti. This intuitive experience in the mode of shining light, which can be compared to the experience of the path of vision in mainstreamBuddhism, is not the same as the absorption of extinction. Through these steps, this paper suggests that in the Daśabhūmikasūtra, the perfection of wisdom presents itself as concentration and that the author(s) or editor(s) of the Sūtra, keeping in mind the altruism of bodhisattvas, have transformed the nirodhasamāpatti into prajñāpāramitāvihāra, expecting the result of ‘postponing final nirvāṇa’ for the sake of all other beings.
Key Words : Perfection of wisdom (prajñāpāramitā), Absorption of extinction (Nirodhasamāpatti), Three gates to deliverance (trīṇi vimokṣamukhāni), Cessation of ideation and feeling (Saṃjñāvedayitanirodha), Realization (sākṣātkriyā), Daśabhūmikasūtra
투고일 2024. 01. 14 | 심사기간 2024. 01. 31 - 02. 14 | 게재확정 2024. 02. 1
佛敎硏究제6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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