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서론
Ⅱ. 두 부류로 볼 수 있는 아르주나의 딜레마
Ⅲ. 읍참마속의 마속과 BG의 비슈마
Ⅳ. 비슈마에 대한 아르주나의 읍참마속
Ⅴ. 읍참마속으로 본 BG의 가르침
Ⅵ. 결론
<국문초록>
아르주나의 딜레마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불린다.
하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말은 애착과 무관한 거시적 관점의 용어로, 이런 문구는 종종 가족 관계를 위시한 윤리·도덕적 문제만 강조하여 정서적 고통을 다소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윤리를 지켜야 하지만 가족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이라는 것으로 이런 윤리 강조적 문구는 아르주나의 딜레마를 표현하기엔 완전하지 않다.
일례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정서적 애착의 문제지 윤리·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윤리·도덕적 문제와 정서적 문제가 별개임을 시사한다.
즉 아르주나의 딜레마는 가족 관계에 집착하는 경우와 애착에 집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고, 전자는 원한 관계로 윤리적 딜레마를, 후자는 애착 관계로 정서적 고통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르주나의 딜레마를 이야기할 때 윤리와 정서 문제를 공평하게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아르주나와 같은 상황이 가족 윤리의 문제만이 아닌 애착에서 오는 고통임을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삼국지의 읍참마속을 볼 것이다.
읍참마속은 군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제갈량이 마속을 참수해야 했던 이야기로, 대의를 위해 소중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맥락에서 BG의 상황과 유사하다.
이때 마속과 대비할 수 있는 인물로 BG의 비슈마를 들 수 있고, 비슈마의 서사를 확인하면서 아르주나의 정서적 문제를 재확인할 수 있다.
제갈량이 마속을 베고 울었듯 아르주나도 비슈마를 쓰러뜨리고 눈물을 보인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애착을 끊고 의무의 실행이라는 점에서 읍참마속도 카르마 요가라고 말할 수 있다.
주제어: 바가바드기타, 마하바라타, 비슈마, 아르주나, 카르마요가
Ⅰ. 서론
바가바드기타(이하 BG)에서 아르주나는 전쟁에 앞서 자신이 죽여야 할 카우라바(Kaurava) 친족을 보고 괴로워한다.
주지하듯 친족을 죽여야 하는 고민 내지는 동족상잔의 비애라고 말해진다.
이러한 아르주나의 고뇌에 관해서는 선임연구자들에 의해 천착 되어 다르마의 가치 충돌로 인한 윤리·도덕적 딜레마로 교집합이 형성되었다.1)
1) Matilal(2002), Patra(2020), Srivastava 외 3인(2021), Rukmani(1989), 김진영(2016), 김호성(2016), 박효 엽(2009).
하지만 기존 연구 중에는 ‘가족 관계’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도덕적인 문제에 너무 치중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연구는 아르주나의 고뇌에 대해 ‘회의(懷疑)’라고 평가하여 정서적 고통을 배제한 듯 극단적인 윤리적인 관점만으로 해석한다.
이 현상(아르주나의 고뇌-인용자)에 대하여 많은 연구자나 번역자는 ‘절 망’이라는 심리적인 언어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아르주나의 절망/고뇌를 그 행위, 즉 전쟁의 윤리적인 정당성을 묻는 윤리적인 고뇌 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갈등’이라는 심리적인 언어로써 표현하지 않고 ‘회의’라는 윤리적인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르주나는 회의하는 것일까?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금 전쟁터에서 죽이고자 하는 적이 바로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즉 왕위 의 계승, 곧 권력을 위한 동족 간에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2)
것은 정서적 고통을 묻어버리는 경우로 해외 연구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가족 간의 정’을 언급하더라도 이 역시 ‘가족의 틀’에 갇혀 윤리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3)
가장 최근의 연구인 Shunmugam & Maniraj(2024:4)의 경우도 “아르주나의 딜레마는 친족을 죽이는 것에 대한 내적 투쟁”이라 하면서, 무사의 법을 윤리(ethic), 친족을 지키는 것을 인간의 도리인 도덕(morality)이라 표현하여 결국 정서적 고통이 뭉개진 채 친족살해의 옳고 그름에 관한 윤리·도덕의 가치 충돌 문제로 귀결시킨다.4)
2) 김호성(2016), 82.
3) Agarwal(1997), 132.
4) Shunmugam & Maniraj(2024), 7-8.
이것은 마치 ‘군법을 실행해야 하지만 비도덕적’이란 것으로 어느 규칙이 더 합리적인가 고민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음’이 희석되거나 함몰되어 아르주나의 심리가 왜곡된다.
가족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도리의 문제만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연인이나 자식을 죽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애착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도덕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친족이니 당연히 가족애를 전제한다는 추정은 BG 이전의 서사를 고려하지 않은 속단으로, 아르주나와 친족 간 유대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그 딜레마 또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가족애’는 ‘가족 관계’와 무관해지는 특이점이 있다. 세간에서는 가족이더라도 원수보다 못한 관계이거나, 혹은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족보다 깊은 관계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는 가족 관계라고 무조건 사랑을 전제하지 않다는 것과 가족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애가 형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후자의 경우 가족 관계를 떠났기 때문에 적어도 가족 도덕의 문제에서 독립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존 BG 연구에서 애착과 관련한 정서적 문제는 예전부터 언급 되어왔지만, 앞서 말했듯 가족의 틀 안에 머무르며 윤리적 문제로 귀결되거나 몇몇 고찰은 애착의 함몰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문제가 함몰된 채 정서적 문제에 너무 편향되어 있다.5)
가장 적합한 표현은 윤리와 정서를 복합적으로 고려한 것일 테지만,6) 미시적으로 한번 서사를 들여다보면서 도덕적 문제와 심리적 문제에 관해 구체적 윤곽을 잡아 환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본고의 첫 번째 목적은 ‘가족의 관계’에서 오는 ‘윤리적 문제’와 ‘애착’에서 오는 ‘정서적 고통’을 분리하여, 특히 윤리·도덕에 뭉개지는 정서적 고통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 아르주나가 슬퍼하는 결정적 이유가 윤리·도덕의 가치 충돌 문제만이 아닌 감정적인 부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삼국지(三國志)의 읍참마속(泣斬馬謖)에 관한 이야기를 볼 것이다.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아끼는 부하 마속을 참수해야 했던 이야기로 군법(kṣatrya dharma) 수호라는 점에서 BG와 유사하지만, 가족 아닌 가족 같은 부하라는 점에서 가족 윤리를 벗어나 있다.
이때 나타나는 제갈량의 슬픔은 오로지 애착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을 아르주나의 상황과 배치할 수 있다.
마속에 대비되는 인물은 비슈마(Bhīṣma)가 될 것이다.
비슈마는 Mbh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아르주나의 정서적 고통에 핵심이 되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BG와 관련하여 국내에 소개가 잘 안 되어있다.7)
5) Gandhi(2001), Radhakrishnan(1976) 아르주나의 고뇌를 사랑하는 친족을 죽이는 슬픔이라 말 하지만, 이 또한 윤리적 측면을 무시한 채 정서적인 측면에 치우친 표현이다.
6) 김진영(2016), 174.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이렇게 양자를 고려해야 적절하다고 본다.
7) 비슈마를 언급한 국내 연구는 Mbh 전체를 조망하면서 비슈마를 언급한 이재숙(2001), 아르주 나의 동복형제 카르나(Karṇa)를 중심으로 비슈마를 언급한 심재관(2016), 아르주나의 큰형 유 디스티라(Yudhiṣṭhira)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비슈마를 연구한 김진영(2020, 2022)이 있으며, 유일하게 김호성(2004)의 연구가 BG 속 아르주나의 고뇌와 관련하여 비슈마를 언급하지만,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고 이 또한 ‘가족의 틀’에 가둬 버렸다.
따라서 본고의 두 번째 목적은 BG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인 비슈마의 서사 소개를 포함한다.
BG를 Mbh 안에 포함하여 윤리적 문제만이 아닌, 애착의 핵심에 서 있는 비슈마에 대해 아르주나와의 서사를 확인하고, 끝으로 애착을 끊어내는 읍참마속과 같은 상황이 BG의 가르침에 어떠한 함의가 있는지 조망할 것이다.8)
8) 원문 인용에 있어서 BG는 워낙 잘 알려진 경전이라 생략한다. 상대적으로 Mbh의 원문은 소개된 적 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Mbh의 원문만을 인용하였다.
Ⅱ. 두 부류로 볼 수 있는 아르주나의 딜레마
주지하듯이 아르주나의 고뇌는 친족을 죽이는 슬픔, 내지는 동족상잔의 비애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문구는 동족이라는 공통점만 강조된 표현으로 모든 친밀감이 무너진 거시적 관점이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만 보더라도 동족상잔의 비애라 말해지지만, 적과 아군 개개인 간의 그 어떤 친밀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동족’이라는 공통점만 있으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한 용어다.
즉 동족상잔이라는 용어 자체가 안타까움의 어감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애착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다.9)
따라서 아르주나의 고통을 동족상잔의 비애라고 이야기할 때 친족들 간의 모든 가족애가 흐릿해져 동족이라는 가족 관계만 남기 때문에 미시적인 유대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친족의 살해라는 문구 또한 아르주나 한 개인과 친족 개개인 간의 유대관계가 일률적이지 않아 모든 친밀함이 희석되어 평준화된다.10)
9) 모든 동족상쟁이라 불리는 사건들을 살펴보면 애착이나 친밀함은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른 예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흑인끼리의 전투, 시리아 내전 등이 있다.
10) 물론 동족상잔이나 친족살해 같은 이런 표현들이 포괄적이므로 아르주나의 딜레마를 표현 할 때 이것을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가족 관계이니 응당 애정이 전제된다는 것처럼 가정하는 것으로, 100명이 넘는 친족들의 유대관계를 대충 ‘퉁’치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르주나에겐 원한을 가진 친족이 대다수며, 따라서 친족을 원한과 애착이라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고, 이것이 곧 다음과 같은 아르주나의 딜레마의 두 결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가족 관계에 집착하는 경우로 아무리 미워도 어떻게 친족을 죽이는가다.
아르주나와 적대 관계에 있는 친족들에 대한 딜레마로 드르타라슈트라(Dhṛtarāṣṭra 이하 본문에서 ‘왕’이라는 칭호와 병용함)의 아들 100명과 외삼촌 샤쿠니(Śakuni), 매제(妹弟) 자야드라타(Jayadratha)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카우라바들은 아르주나 형제의 아내를 욕보이고, 왕권을 박탈하여 성에서 내쫓았을 뿐 아니라 13년의 유배 중에도 아르주나 형제의 목숨을 위협하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르주나 또한 이들에게 적대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BG 1장에서 친족들이 모인 것을 보고 혈족의 멸망을 두려워한다. 친족을 살해하는 것은 거대한 죄악이고, 그로 인해 가족 윤리가 무너지며, 계급의 혼잡이 일어나고, 조상들도 제사가 끊길 거라며 가족의 법도를 운운하면서 전쟁을 거부한다. (BG 1.39-44)
그리고 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주지하듯 BG 주요 교설이다. 만약 Mbh의 서사 없이 이것을 보면 마치 아르주나가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친족과의 전쟁을 망설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11)
이것이 많이 알려진 무사의 의무(sva-dharma)와 가족에 대한 도리(kula-dharma)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아르주나의 윤리·도덕적 딜레마다. 둘째는 가족이라는 관계와 상관없이 어떻게 소중한 사람을 죽이는가다. 이것은 카우라바 진영에서 아르주나와 애착 관계의 사람에 대한 딜레마다.
BG를 Mbh에 귀속시킬 때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갈등으로 개인적인 정(情)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경우다.12)
11) BG 1.33-46. 이 구절들이 정서적 고통을 함몰시키는 결정적인 이유다. Shunmugam & Maniraj (2024), 김호성(2004) 모두 이것을 근거로 윤리적 문제라고 개진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주장 또한 설득력이 있다.
12) Mbh에 귀속시키더라도 ‘가족 관계’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김호성(2004)은 비슈마를 단지 ‘문 중 최고 어른’이라 언급하여 가족 관계에 가두고 윤리적 딜레마를 강조한 경우다.
비슈마와 드로나가 여기에 해당하며 사사로운 정과 무사의 법률과의 대립이다.
또한 사적인 감정을 욕망으로 본다면 ‘아르타(artha)와 카마(kāma)는 다르마로부터 나온’다는 법률도 무사의 법과 같은 방향을 갖는다.
이 또한 원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딜레마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충돌 지점이 법과 법이 아닌 법과 감정이라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다. 간단하게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1 아르주나의 윤리적 딜레마 분석>13)
아르주나와의 관계 지켜야 할 윤리 충돌하는 것 충돌의 양태
첫 번째 딜레마 원한 관계 (100+3명) 무사의 법 가족의 법 (가족 관계) 법과 법
두 번째 딜레마 애착 관계 (비슈마와 드로나) 무사의 법, 욕망보다 법이 우선한다는 법 법과 감정
소중한 사람에 대한 애착 (애착)
전자와 후자의 심리적인 차이를 도둑질의 예로 들자면, 전자는 싫어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이유가 CCTV와 처벌 등의 두려움 때문이다.
이에 반해 후자의 경우는 좋아하는 사람의 물건이라서 훔치기 싫은 것으로 심리적인 차원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한쪽만 두드러진다면 아르주나의 인간성을 전부 드러내지 못한다.
여기서 논외가 된 불투도(asteya)의 보편 윤리는 아르주나에게 불살생(ahiṃsā)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무사로서 아르주나의 Mbh 행적을 보면 불살생과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제외하는 것이 맞다.14)
13) BG 시점 아르주나에 한정한 개략적인 표이다. 확실한 원한 관계는 카우라바 100명, 카르나, 샤쿠니, 자야드라타가 있다. 최대한 단순화한 것으로 판다바에 중립적인 비카르나도 일단 100명에 포함하였다. 크르파, 아쉬바타마, 외삼촌 샬리아는 비슈마, 드로나와 비교할 수 없 어 우호 관계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해야 한다. 7촌 바흘리카를 포함한 나머지 카우라 바 사단장들도 복잡함을 줄이기 위해 제외하였다. 중요한 것은 원한과 애착이라는 극과 극 의 대치다.
14) Katz (1990), 258.
그리고 첫 번째 윤리적 딜레마와 구분하기 위하여 편의상 두 번째 딜레마를 정서적 고통이라 부르기로 한다.
정서적 고통은 웃어른과 스승을 공경하라는 관습적인 도덕이나 보편 윤리에 포섭될 수 있지만, 형식적인 ‘가족 관계’ 와 무관하며 인륜과 온전하게 독립시킬 수 있는 심리적 고통이 있다.
즉, 아르주나의 정서적인 괴로움은 가족 관계를 배제하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순수한 애착에서 오는 고통이다. 그런데 과연 가족 관계를 떠나서 가족에 상당하는 애착이 형성될 수 있을까.
이런 애착을 뚜렷하게 정제하기 위해 BG와 유사한 상황을 갖는 삼국지의 읍참마속 에피소드를 볼 것이다.
Ⅲ. 읍참마속의 마속과 BG의 비슈마
삼국지 정사(正史)의 39권인 촉서(蜀書) 9권 중 「마량전(馬良傳)」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문자대로 의미를 보자면 ‘울며 마속을 벤다’다.
정사인 「마량전」에 기록된 제갈량(諸葛亮)과 마속과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갈량은 마량의 동생 마속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여 남달리 여겼다.
선 왕 유비가 임종할 때, 마속은 말이 행동보다 과해서 대업에 쓰기 어려우니 잘 보살피라고 말하였으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마속을 참군으로 삼아 매번 불러내어 담론하기를 낮부터 밤까지 하였다.15)
이처럼 제갈량은 친구 마량의 동생 마속을 전폭적으로 믿었고, 누구보다 곁에 두며 지냈다.
보통 제갈량에게 있어서 마속을 “자식처럼 아끼며 총애하던 부하 장수”라고 평가한다.16)
이같이 마속을 굳게 믿고 있던 제갈량은 마속의 출세를 생각해서 중요하지만 비교적 수비하기 수월한 가정(街亭)을 방어하는 임무를 주고, 명장들도 여럿 붙여 주었다.
정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건흥 6년, 제갈량이 병사를 일으켜 기산으로 향했다. 이때 경험 많은 장 수 위연, 오일 등이 있어 논자들 모두 말하길 응당 이들이 선봉에 서야 한다 고 했으나 제갈량은 이과 달리 마속을 선두로 대군을 이끌게 했다.17)
15) 「馬良傳」5. 良弟謖, 字幼常, 以荊州從事隨先主入蜀, 除緜竹成都令、越嶲太守。才器過人, 好論軍計, 丞相諸葛亮深加器異。先主臨薨謂亮曰,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亮 猶謂不然, 以謖為參軍, 每引見談論, 自晝達夜。 Chinese Text Preoject https://ctext.org/ [2024.6.27.] 이하 정사에 관한 인용과 방점은 해당 사 이트를 참조하였다.
16) 최용현 (2013), 268.
17) 「馬良傳」6. 建興六年, 亮出軍向祁山, 時有宿將魏延、吳壹等, 論者皆言以為宜令為先鋒, 而 亮違衆拔謖, 統大衆在前。
그러나 마속은 가정을 수비하라는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가정을 벗어나 물이 부족한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친다.
산으로 올라간 마속군을 무리하게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산 아래에서 보급을 차단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마속군을 궤멸시킨다.
이런 마속의 어처구니없는 실책은 촉군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거점을 잃게 되어 이 한 번의 패배로 사실상 제갈량의 북벌(北伐)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전시 상황에서 상명 불복종의 군법에 적용되어 마속은 처형을 선고받는다.
정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겨루게 되었으나, 장합에게 격파당해 병정 들이 흩어져 버렸다.
제갈량은 진격하여 점거할 곳이 없어 군을 물리고 한 중으로 돌아왔다.
마속을 옥에 가둔 후 죽였는데 제갈량은 그를 위해 눈물 을 흘렸다.
마량이 죽었을 때 나이 36세, 마속은 39세였다.18)
18) 「馬良傳」6. 與魏將張郃戰于街亭, 為郃所破, 士卒離散。亮進無所據, 退軍還漢中。謖下獄 物故, 亮為之流涕。良死時年三十六, 謖年三十九。
정사에서도 마속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제 보다 풍부한 감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정사를 기준으로 각색된 『삼국지연의』에서 마속의 참형 전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군사는 싸움에 지고 장수는 꺾였으며, 땅을 잃고 성을 빼앗기게 된 것은 모두가 네 허물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군율을 밝히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수로 여러 사람을 복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네가 죽더라도 네 스스로 군법을 어겨 그리된 것인 만큼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네가 죽은 뒤에도 네 식구들에게는 봉록을 전처럼 내려 살이를 꾸려가게 할 터이니 그건 걱정하 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는 좌우에게 소리쳐 마속을 끌어내어 목 베라 했다.
마속이 울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저를 아들같이 보아주셨고, 저는 또한 승상을 아버님처럼 여겨왔습니다. 저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나 바 라건대 제 자식들에게는 아비의 죄가 미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마속이 큰 소리로 울자 공명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그 말에 답했다.
“나와 너의 정리(情理)는 형제와도 같았다. 네 자식이 곧 내 자식이니 그 일은 당부하지 않아도 된다.” 잠시 후 마침내 형이 집행되어 무사들이 마속의 목을 공명에게 바쳤다. 공명은 마속의 목을 보며 큰소리로 통곡했다.19)
이처럼 읍참마속은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대의를 위해 사적인 정을 끊고 처벌을 감행하는 에피소드로 잘 알려져 있으며,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큰 목적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림을 이르는 말”이라 등재되어 있다.20)
19) 이문열(2009), 374-376. 읍참마속의 이야기는 후술할 비슈마의 서사에 비해 부족한 면이 있지 만, 그럼에도 본고의 제목에 들어갈 정도로 중요한 이유는 읍참마속을 통해 BG의 심리적 고 통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중요한 것은 대의(dharma)의 수호와 그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가 족 관계’가 아닌 ‘가족과 같은 역할과 유대감’을 파악하는 것이다.
20) 국립국어원 https://stdict.korean.go.kr/ [2024.2.13.]
아르주나와 배대해 보면 마속과 제갈량은 아군, 아르주나와 어른들은 적군으로 피아(彼我) 관계가 다르고, 제갈량과 마속의 수직관계, 아르주나와 어른들 간의 상하관계가 역전된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군사 결정권을 가진 제갈량과 선택의 여지 없이 전쟁에 나온 아르주나의 상황적인 문제도 있지만, 군법 수호라는 대의(dharma)를 위해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사로운 정을 끊어내야 한다는 맥락은 읍참마속과 BG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읍참마속을 살펴보면 군법과 충돌하는 그 어떤 윤리도 없다.
아르주나와 같은 가족의 법도도 없고 제갈량 또한 군사 책략가로서 불살생과도 거리가 멀다.
계급장을 고려하지 않은 유대관계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과 같은 관계다.
그래도 마속을 처형할 때 눈물을 흘린 이유는 일반적인 감성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눈물에는 군법을 지키기 위해 마속을 죽여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죽음으로써 마속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비통함도 있다.
즉 읍참마속의 정서에는 가족과 같은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는 두려움, 내지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괴로움 또한 깔려있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애별리고(愛別離苦)다.
이것이 아르주나의 딜레마 기저부에서 다수의 원한 관계에 희석된 소수에게 갖는 고통으로, 동족상잔이나 가족 관계를 내세워 가족법을 강조할 때 윤리적 딜레마 속에 희석되는 아르주나의 정서적 고통이다.
그렇다면 이 슬픔을 일으키는 친족과 아르주나의 애착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이 정서적 고통에 속하는 인물로 비슈마와 드로나를 지목하였다.
이 두 어른 중 마속의 역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가족은 아니지만 아버지 같은 유대감을 가진 드로나일 것이다.
아르주나가 드로나의 아들 아슈바타마(Aśvatthāmā)를 공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드로나가 슬퍼할까 봐’ 일 정도이고, 드로나 또한 아르주나를 자기 아들 이상으로 여길 정도로 돈독한 사이지만, (Mbh Ⅴ.139.4) 여기서는 종조부 비슈마의 서사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손주와 할아버지라는 가족으로 묶여 드로나보다 변별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비슈마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비슈마와 아르주나는 애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벽한 남이다.
아르주나의 친부는 판두(Pāṇḍu)가 아닌 인드라(Indra)로 엄밀히 말하면 양자(養子)다. 판두의 아버지 또한 브야사(Vyāsa)로 이 또한 샨타누(Śāntanu) 왕과 전혀 혈연으로 엮여있지 않은 사이다.
당사자들뿐 아니라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런 관계에서 피어난 애착이야말로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혈연관계를 초월해서 발생한 순수한 가족애다.
둘째 비슈마는 아르주나에게 죽지만, 드로나는 아르주나의 처남 드리스타듐나(Dhṛṣṭadyumna)에게 죽는다.
따라서 아르주나 입장에서 읍참마속의 감정을 대입하기에 비슈마가 훨씬 유리하다.
셋째 아르주나의 애착이 강하게 드러나는 서사가 드로나보다 풍부하다.
이 애착의 확인으로 윤리·도덕적 문제에 희석되는 정서적 고통을 부각할 수 있다.
넷째 Mbh에서 보통 비슈마와 드로나는 같이 묶어서 언급된다.
일례로 BG에서도 두 어른을 묶어서 5회(1.25, 2.4, 5, 11.26, 34) 언급되며, Mbh 에서도 “비슈마 가는 곳에 드로나가 있다”라고 언급된다.
두 어른 모두 아르주나에게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들로 비슈마와 드로나에 대한 애착을 동등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Ⅳ. 비슈마에 대한 아르주나의 읍참마속
비슈마는 BG 1장부터 언급되는 캐릭터이지만,21) 일반적으로 BG를 전쟁 중에 일어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로 보고 다른 등장인물에 무게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BG에서 비슈마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21) BG에서 비슈마 이름의 직접 언급은 총 7회(1.8, 10, 11, 25, 2.4, 11.26, 34.)다. 할아버지 등의 호칭으로 비슈마를 지시하는 것은 총 2회(1.12, 2.5.)다. 전장을 둘러보면서 할아버지들이라 표현한 1.26 도 확장 적용해 볼 수 있다.
1 장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양 군사가 쿠루크셰트라(Kurukṣetra)에 모여 정렬하고 난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Mbh의 사전 정보 없이 1장을 읽는다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구절은 간단한 관계 파악만 하고, 혹은 관계 파악도 없이 바로 교설로 넘어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BG 1.3-6까지 아르주나가 속한 판다바 군대의 장수들을 설명하고, 이어서 1.8에서는 카우라바 장수들을 언급하며 이때 비슈마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카우라바 왕자 두료다나(Duryodhana 이하 ‘왕자’ 와 병용)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비슈마가 지키는 우리 군대는 한계 없이 강력하다. 하지만 비마가 지키 는 저들은 한계가 있다.
당신들 모두 어디에 있든 맡은 바 위치에 서서 비슈 마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BG 1.10-11) 물론 이것이 BG내에서 비슈마의 마지막 언급은 아니지만 이처럼 1장만 보자면 카우라바의 중요한 장수라는 정보 외엔 비슈마에 대한 별다른 정보를 획득할 수 없다.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맥락으로 보호하고 보호받는 것인지 BG에서는 매우 애매하지만, Mbh에서 비슈마는 가히 아르주나 군대를 학살하는 파괴자로 묘사된다.
하루에 판다바 군을 만 명씩 죽인 것으로 기록되며 전투 중 비슈마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무너뜨릴 수 없는 대용사, 빛으로 활활 태우는 태양처럼 화살의 빛으로 인간들의 왕을 태우는 저 비슈마를 그들은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판다바의 병사들을 도륙하는 사이에 수천의 빛줄기 가진 태양이 졌다.
지치고 지 친 병사들은 이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22)
비슈마는 카우라바 진영의 총사령관으로 아르주나 진영이 상대하기 가장 힘든 강력한 영웅이며, BG를 Mbh에 귀속시켜 이해할 때 반드시 재고해야 할 핵심적인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BG가 속한 Mbh 제6권의 제목이 비슈마파르반(Bhīṣmaparvan)인 것을 생각해 보면, BG가 비슈마 한 사람 때문에 나온 교설이라 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23)
22) Mbh Ⅵ.107.84-85. ; 박경숙(2022a), 486-487. mahārathaṃ bhārata duṣprakampaṃ śaraughiṇaṃ pratapantaṃ narendrān, bhīṣmaṃ na śekuḥ pratibhīkṣituṃ te śarārciṣaṃ sūryamivātapantam, vimṛdnatastasya tu pāṇḍusenāmastaṃ jagāmātha sahasraraśmiḥ, tato balānāṃ śramakarśitānāṃ mano 'vahāraṃ prati saṃbabhūva. 산스크리트 단락 구분과 방점은 M.N.Dutt(2004)를 따랐다. 한글 역은 BORI본을 번역한 박경숙(2022a)을 참고했다. 등장인물의 이명(異名)들, 예를 들어 아르주나의 이명인 ‘다난자야’, ‘프리타의 아들’ 등은 대부분 본명으로 기재하였다.
23) Mbh를 완역 중인 박경숙도 비슈마에게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일례로 박경숙이 Mbh와 별 개로 펴낸 BG는 비슈마의 죽음에 관한 소식(Mbh Ⅵ.13-24.)과 BG 교설 직후 무장 해제하고 어른들에게 인사 올리는 유디스티라(Mbh Ⅵ.43)가 포함되어 있어 다른 역자의 BG보다 범위 가 넓다. 비슈마의 비중에 관해서는 박경숙(2022a), 62. ; 박경숙(2022b), 20. 사설 참조.
비슈마의 서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비슈마는 Mbh 제1권부터 등장한다.
아버지 샨타누 왕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왕위마저 포기하고 범행(brahmacarya)을 자처한 모범적이고 현명한 성자이며, 모두가 존경하는 용맹하고 어진 왕족이다.
조카이자 통치자인 드르타라슈트라 만큼의 권위자이며 그 어떤 왕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성군(聖君)이다.
양 진영 왕자들의 무술 스승 드로나와 더불어 아르주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이 두 사람에 대한 아르주나의 경외심은 BG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어떻게 내가 전투에서 공경받아야 할 두 어른이신 비슈마와 드로나에 대 항하여 화살로 싸우겠소?
크리슈나여. 고절하신 저 어른들을 죽이느니 구 걸하며 이승을 떠도는 게 낫겠습니다. (BG 2.4-5a)
그의 행적을 보면 전쟁 발발 전까지도 왕과 왕자를 회유하여 전쟁을 막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무엇보다 판다바 형제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르주나 형제들도 그를 아버지 대하듯 매우 존경하고 따른다.
비슈마는 양 가문 중에서 판다바에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왕국의 절반은 응당 아르주나 형제가 가져가야 할 몫이라고 주장한다. 전투 전에도 두 가문의 화평을 원했고, 전투가 시작된 후 형제를 잃어 괴로움에 찬 두료다나를 설득하면서 평화조약을 제안하기도 했다. (Mbh Ⅵ.65.36-38)
그가 아르주나의 적군에 선 이유는 단지 왕가의 율법을 위해서이며, 현 상황에서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카우라바에 서는 것이 무사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사로서의 카리스마와 정의, 인간적인 면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신이 아닌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비슈마를 언급하기도 하며,24) 드로나와 함께 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5)
이런 정의로운 성군 비슈마도 아르주나 형제를 상대할 때 고민이 없지 않았다.
BG교설 후 다음 날부터 두료다나는 비슈마에게 아르주나를 죽여달라 애원한다.
여기에 비슈마는 “빌어먹을 무사의 율법 같으니! (dhik kṣatryaṃ dharmam. Mbh Ⅵ.52.39)”라고 말하면서 손주와 싸워야만 하는 이 전쟁에 적잖은 스트레스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왕자는 비슈마가 전장에서 누울 때까지 아르주나를 죽여달라고 반복적으로 닦달한다.
셋째 날 자신의 군대가 또다시 아르주나에게 짓밟히자 비슈마에게 가서 또다시 간청한다.
영웅이시여, 할아버지는 판두의 아들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랬기에 나의 군사가 파괴되는 것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중략) 황소 같은 분들이시여, 이 전장에서 당신 둘(비슈마와 드로나 - 인용자)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면 힘을 다해 싸우심이 마땅할 것입니다.26)
24) 김진영(2022), 209.
25) Gandhi(2001), 24-25.
26) Mbh Ⅵ.58.37, 40. ; 위의 책 268. anugrāhyāḥ pāṇḍusutā nūnaṃ pitāmaha, yathemāṃ kṣamame vīra vadhyamānāṃ varūthinīm. (......) yadi nāhaṃ parityājyo yuvābhyāmiha saṃyuge, vikrameṇānu- rūpeṇa yudhyetāṃ puruṣarṣabhau.
이 말을 듣고 비슈마는 눈을 부라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Mbh Ⅵ.58.41)
하지만 비슈마는 누구보다 무사의 도리에 확고하여 전쟁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르주나를 대적할 때도 용맹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르주나는 전쟁 후 카우라바 병사를 수천 명 죽였음에도 비슈마에 대해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르주나는 BG교설 직후인 전투 첫째 날부터 비슈마를 대할 때 무사로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것을 본 유디스티라는 기가 죽어 크리슈나에게 하소연한다.
크리슈나여, 우리의 앎이 미약해 비슈마에 맞서고 있지만 차라리 숲에 들어가 그곳에 사는 게 낫겠습니다. 이 땅을 지키는 군주들을 비슈마 한 사 람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중략) 내 눈엔 왼손잡이 아르주 나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략) 아르주나는 우리가 비슈마와 드로나에게 당하든 말든 관심조차 없어 보입니다.27)
크리슈나는 유디스티라를 다독이고, 아르주나가 전의를 불태우도록 노력한다.
셋째 날 아르주나는 마음을 잡고 비슈마에게 달려가 그가 들고 있는 활을 두 차례 파괴한다. 이를 본 할아버지는 손주의 솜씨를 기특해한다.
아르주나여, 훌륭하다! 판두의 기쁨이여, 대단하구나! 아르주나여, 이 대 단한 행적이야말로 네게 어울리는 것이니! 참으로 기쁘다. 마음 단단히 먹 고 나와 싸워라!28)
27) Mbh Ⅵ.50.9-10, 16, 20. ; 위의 책 231-232. ātmano buddhidaurbalyād bhīṣmamāsādya keśava, vanaṃ yāsyāmi vārṣneya śreyo me tatra jīvidym. na tvetān pṛthivīpālān dātuṃ bhīṣmāya mṛtyave, (......) madhyasthamiva paśyāmi samare savyasācinam. (......) so'pyasmān samupekṣate, nirda- hyamānān bhīṣmeṇa droṇena ca mahātmanā.
28) Mbh Ⅵ.59.57-58. 위의 책 273. sādhu pārtha mahābāho sādhu bhoḥ pāṇḍunandana, tvayyevaitad yuktarūpaṃ mahat karma dhanaṃjaya, prīto 'smi subhṛśaṃ putra kuru yuddhaṃ mayā saha.
이어서 서로에게 화살을 주고받지만, 전투에 임하는 아르주나의 태도에 크리슈나는 크게 못마땅해한다.
비슈마를 상대로 아르주나가 열심히 싸우지 않자 크리슈나는 슬슬 분노에 차기 시작한다.
팔심 좋은 크리슈나는 전장에서 비슈마의 용맹을 보았고, 싸우는데 너무 나도 무른 아르주나를 보았다. (중략) 크리슈나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29)
이미 아르주나는 전쟁 후 수천 명을 죽였지만 유독 비슈마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반복된다.
BG에서 크리슈나는 평등성(samatva)을 아르주나에게 강조했고, 아르주나도 분명 BG 마지막인 18.73에서 자신의 의혹이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전쟁을 시작했지만, 막상 할아버지와 마주친 전장에서 사람에 따라 죽음을 차별하고 있다.
이런 사사로운 정에 끌리는 아르주나를 보고 크리슈나는 차라리 자기가 무장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늘 내가 판다바들을 위해 무장하고 비슈마를 죽여야겠다.
아르주나는 전장에서 날 선 화살에 상처를 입고도 비슈마를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른다.30)
29) Mbh Ⅵ.59.65, 68. ; 위의 책 274. tatastu kṛṣṇaḥ samare dṛṣṭvā bhīṣmaparākramam, saṃprekṣya ca mahābāhuḥ pārthasya mṛduyuddhatām. (......) amṛṣyamāṇo bhagavānkeśavaḥ paravīrahā.
30) Mbh Ⅵ.59.71-73. ; 위의 책 274. so'haṃ bhīṣmaṃ nihanmyadya pāṇḍavārthāya daṃśitaḥ, bhāram- etaṃ vineṣyāmi pāṇḍavānāṃ mahātmanām. arjuno 'pi śaraistīkṣṇairvadhyamāno hi saṃyuge, kartavyaṃ nābhijānāti raṇe bhīṣmasya gauravāt.
애초 크리슈나가 BG에서 마부로 출전하게 된 이유는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복잡한 사전협약이 있었기 때문인데, 크리슈나가 무기를 드는 것은 명백히 약속의 위반이다.
그 다르마를 파기하고 마차에 내려 원반과 함께 비슈마에게 돌진한다. (Mbh Ⅵ.59.95)
비슈마는 자신에게 돌진하는 크리슈나를 보고 신이 내리는 죽음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이것을 본 아르주나도 허겁지겁 마차에서 뛰어내려 크리슈나를 붙잡는다.
그때 아르주나가 전차에서 황망히 뛰어내려 크리슈나를 향해 달려갔다. 단단하고 긴팔 지닌 그가 더없이 우람하고 긴 크리슈나의 팔을 붙잡았다.
지고의 영혼 크리슈나가 버럭 화를 냈다. 비록 붙잡혔어도 아르주나를 세 차게 끌고 가는 크리슈나는 마치 나무를 옮기는 폭풍 같았다.
아르주나는 두 발로 버티고 서서 힘을 다해 비슈마에게 돌진하는 그를 붙잡았다.
어찌 하여 열 걸음째에 그를 멈추는 데 성공했다.31)
물론 이것은 크리슈나의 비무장 약조 파기를 막기 위해 잡은 것이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애착도 적잖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크리슈나를 멈춰 세운 후 아르주나는 자신이 할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크리슈나에게 결심한다. 이 다짐을 보고 크리슈나가 매우 기뻐하면서 마차에 올라탄다.
그런데 셋째 날의 이 상황, 아르주나가 비슈마의 무기를 파괴한 후부터 그것을 비슈마가 칭찬하는 장면, 무디게 싸우는 아르주나를 보고 크리슈나가 비슈마에게 돌진하는 장면, 돌진하는 크리슈나를 아르주나가 붙잡고 다짐하는 이 레퍼토리는 전투 아홉째 날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러나 아홉째 날은 아르주나가 다짐해도 크리슈나의 화가 안 풀려 침묵 속에 마차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며 셋째 날과 다른 싸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Mbh Ⅵ.107.53-76)
이 상황을 또 보게 된 유디스티라는 도저히 비슈마를 꺾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날 저녁 막사에서 크리슈나와 의논한다.
결국 비슈마에게 찾아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지를 할아버지 당신에게 상담받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맏형 유디스티라는 너무나도 가혹한 이 운명에 탄식한다.
서약 굳은 할아버지는 우리가 승리할 방도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아비 잃은 우리는 그분 손에 길러졌지요. 크리슈나여.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이 자 너무나도 소중한 나이 든 할아버지를 죽이려 합니다. 크샤트리야의 삶 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32)
31) Mbh Ⅵ.59.100-101. ; 위의 책 281. nigṛhyamāṇaśca tadā ''didevo bhṛśaṃ saroṣaḥ kila citmayogī, ādāya vegena jagāma viṣṇur jiṣṇuṃ mahāvāta ivaikavṛkṣam. pārthastu viṣṭabhya balena pādau bhīṣmāntikaṃ tūrṇamabhidravantam, balānnijagrāha hariṃ kirīṭī pade 'tha rājan daśame kathaṃcit.
32) Mbh Ⅵ.108.50-51. ; 위의 책 492. sa no jayasya dātā syān mantrasya ca dṛḍhavrataḥ, bālāḥ pitrā vihīnāśca tena saṃvardhitā vayam. taṃ cet pitāmahaṃ vṛddhaṃ hantumicchāmi mādhava, pituḥ pitaramiṣṭaṃ ca dhigastu kṣatrajīvikām.
비슈마는 자신의 막사에 찾아온 손주들을 다정하게 반겨준다.
크리슈나여, 어서 오시오, 아르주나, 잘 왔구나. 유디스티라, 환영한다. 비마도 쌍둥이도 잘 왔구나. 오늘 내가 무엇을 해 그대들을 기쁘게 해줄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대들을 위해 온 마음 다할 것이다.33)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크리슈나와 손주들에게 자상하게 알려준다.
결국 아르주나만이 끝낼 수 있었다.
예를 갖춰 절을 올리고 막사에 돌아와 아르주나는 괴로워하며 크리슈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리슈나여, 스승이자 쿠루의 어른이고 지혜를 완성한 할아버지와 어찌 전장에서 싸울 수 있으리까. 어렸을 적 저는 놀면서 온몸에 흙먼지 뒤집어 쓰고 저 고결한 할아버지 옷을 더럽히곤 했습니다. 어린 저는 그분 품에 기 어들어가 고결한 제 아버지 판두의 아버지인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 다. 그러면 그분께선, “아르주나여, 나는 네 아비가 아니라 네 아비의 아비 란다.”라고 제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 그분을 제가 어찌 죽일 수 있단 말 입니까. 제 병사가 죽이게 하십시오. 저는 승리하건 죽건 고결한 할아버지 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크리슈나여, 당신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34)
33) Mbh Ⅵ.108.59-61. ; 위의 책 493. svāgataṃ tava vārṣṇeya svāgataṃ te dhanaṃjaya, svāgataṃ dharmaputrāya bhīmāya yamayostathā, kiṃ vā kāryaṃ karomyadya yuṣmākaṃ prītivardhanam, sarvātmanāpi kartāsmi yad api syāt suduṣkaram.
34) Mbh Ⅵ.108.91-95. ; 위의 책 495-496. guruṇā kuruvṛddhena kṛtaprajñena dhīmatā, pitāmahena saṃgrāme kathaṃ yoddhā 'smi mādhava. krīḍatā hi mayā bālye vāsudeva mahāmanāḥ, pāṃsurū- ṣitagātreṇa mahātmā paruṣīkṛtaḥ.yasyāhamadhiruhyāṅkaṃ bālaḥ kila gadāgraja, tātetyavocaṃ pitaraṃ pituḥ pāṇḍormahātmanaḥ. nāhaṃ tātastava pitustāto 'smi tava bhārata, iti māmabravīd bālye yaḥ sa vadhyaḥ kathaṃ mayā.kāmaṃ vadhyatu sainyaṃ me nāhaṃ yotsye mahātmanā, jayo vā 'stu vadho vā me kathaṃ vā kṛṣṇa manyase.
여기서 만약 비슈마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면, 아르주나는 가족법을 들먹이며 ‘가족을 죽이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을 했을 테지만 그런 맥락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아르주나의 전쟁에 대한 망설임이 윤리·도덕적 회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읍참마속을 통해서 보았듯 중요한 것은 가족 관계라는 형식보다 가족 같은 역할과 유대감이다.
결국 비슈마를 죽이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가족 도덕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아버지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죽이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앞서 서사에 나오는 내용들로 감정을 유추해 보자면 비슈마는 아르주나를 아끼고 아르주나 또한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서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사의 의무 때문에 서로에게 활을 겨눈다.
모든 살인은 비윤리적이라는 보편성을 떠나 이런 감정 관계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윤리와 거리가 멀다.
단지 세속적인 관계가 손자와 할아버지라는 가족에 묶여 있어 동족상잔, 친족살해가 성립되면서 패륜이나 비윤리의 프레임을 씌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이나 스승을 떠나 단지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 내가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존재만으로 소중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비극이다.
아르주나와 제갈량이 소중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행위에 대해 슬퍼함은 윤리 때문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부모가 자식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슬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윤리·도덕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주나의 고뇌를 무사의 법을 수호하느냐 가족의 법을 수호하느냐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그 내면 심리를 온전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없게 된다.
Ⅴ. 읍참마속으로 본 BG의 가르침
앞서 아르주나의 딜레마의 두 갈래를 보았고 윤리 문제를 벗어나 애착의 정서만 놓고 보았을 때, 이 문제를 초월하여 무사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 BG의 가르침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서사의 맥락에서 잘 보여주는 BG의 구절이 있다.
드로나, 비슈마, 자야드라타, 카르나 그리고 다른 모든 전사도 이미 나에 의해 죽었으니, 주저 말고 죽여라. 싸워라 그대는 전투에서 적수들을 이기리라. (BG 11.34)
이 구절은 선임연구자들이 의미를 부여해 다룬 적 없는 것으로, 아르주나와 해당 캐릭터들의 유대관계를 알아야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BG의 구절이다.
여기서 자야드라타는 왕의 사위로 아르주나에겐 매제의 관계지만, 유배 기간 중 판다바 아내를 납치한 이력이 있는 원한 관계다.
카르나는 전쟁을 더욱 비극으로 만드는 아르주나의 동복형제지만, BG 시점에서 아르주나는 카르나가 자신의 동복형인지 모를뿐더러, 아내에게 치욕을 준 장본인이 카르나기 때문에 이 또한 원한 관계다.
즉 아르주나에게 비슈마와 드로나가 애착 관계라면, 자야드라타와 카르나는 원한 관계로 이 구절은 극과 극의 구도가 된다.
그리고 주지하듯 BG에서 말하는 요가의 의미 중 하나는 극과 극을 여읜 평등성이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심리상태를 분별하지 않고 무사의 의무를 실행하라는 것이 BG의 가르침이 된다.
결국 애착도 원한도 모두 포기하고 올곧게 의무에 집중하여 나의 할 일을 꿋꿋하게 하는 욕망 없는 행위(niṣkāma-karma)이자 행위를 초월한 행위(naiṣkarmya-karma)인 카르마요가(Karma yoga)라고 볼 수 있다.
결과를 구하지 않는 자가 집착을 제거하고 애욕과 증오 없이 행한 절제된 행위를 순수하다고 한다. (BG 18.23)
제갈량이 마속을 베고 울었듯, 아르주나도 할아버지를 쓰러뜨리고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netrābhyām-aśru-pūrṇābhyām. Mbh Ⅵ.122.1)
이렇게 보면 읍참마속은 소중한 사람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행위의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카르마 요가와 매우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읍참마속은 애착을 끊고 행위 함에 한정하지만, 카르마 요가는 애착뿐 아니라 원한까지 포함하여 더 넓은 외연을 가지며, 아르주나가 눈물을 애써 머금고 있듯, 결과에 대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평정의 지혜에 확고(sthitaprajña)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가진다.
Ⅵ. 결론
BG에서 아르주나는 전쟁에 앞서 자신이 죽여야 할 친족을 보고 괴로워한다.
주지하듯 친족을 죽여야 하는 고민 내지는 동족상잔의 비애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단어는 애착이나 친밀감과 전혀 무관한 단어며, 기존 연구 중에는 가족애를 이야기하더라도 가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윤리·도덕적 문제로 귀결되어 편향되는 경우가 있다.
‘윤리를 위해 친족을 죽여야 하지만 친족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이라는 것으로 이런 결론은 윤리· 도덕 가치만 중요시되어 가족애에서 오는 정서적 고통이 희석된다.
하지만 아르주나의 딜레마는 잘 알려져 있듯이 복잡하다.
이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어느 규칙이 더 합리적인가 고민하는 것만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소중한 사람을 헤치지 못하는 이유는 애착의 문제지 윤리·도덕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을 좀 더 정제하기 위해 삼국지 읍참마속의 이야기를 보았다.
읍참마속은 군법 수호를 위해 소중한 사람을 처형한다는 맥락에서 BG 무사의 의무와 궤를 같이하지만, 가족 아닌 가족과 같은 부하라는 점이 다르다.
결국 읍참마속 이야기를 통해 가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애가 형성될 수 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아르주나가 슬퍼하는 경우도 도덕적인 문제와 독립된 순수한 애착의 문제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르주나의 딜레마를 이야기할 때 가족 관계에 집착하는 경우와 애착에 집착하는 경우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전자는 원한 관계에서 오는 윤리적 딜레마이고 후자는 애착 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고통이다.
물론 정서적 고통 또한 윤리 문제에 포섭될 수 있을 뿐 아니라, Mbh나 BG가 윤리와 정의(Dharma)를 강조한 서사시라 할지라도, 무사법이냐 가족법이냐 같이 윤리관의 충돌에 편향된 해석은 앞서 보았듯 아르주나의 심리를 왜곡한다. 또한 윤리 문제를 벗어나 애착과 원한이라는 정서만 놓고 보았을 때, 이 문제를 초월하여 무사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 BG의 가르침이 될 수 있다.
BG 에서 말하는 요가의 의미 중 하나는 극과 극을 여읜 평등성이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심리상태를 분별하지 않고 무사의 의무를 실행하라는 것이 BG의 가르침이 된다.
결국 애착도 원한도 모두 포기하고 올곧게 의무에 집중하여 나의 할 일을 꿋꿋하게 하는 카르마요가라고 볼 수 있다.
읍참마속은 소중한 사람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행위의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카르마 요가와 매우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읍참마속은 애착을 끊고 행위 함에 한정하지만, 카르마 요가는 애착뿐 아니라 원한까지 포함하여 더 넓은 외연을 가지며, 결과에 대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평정의 지혜에 확고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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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Bhagavadgītā seen through “Crying and Beheading Mǎsù” : Focusing on Bhiṣma in Mahābhārata 3
Kim, Dong-won*
Arjuna's dilemma has been called the tragedy of fratricide. However, the term “fratricide” has nothing to do with attachment or closeness, and the phrase often emphasizes formal family relationships, which tends to dilute the emotional pain by ethical concerns. This ethics-emphasizing phrase is not a complete way to express Arjuna's dilemma: “It has to kill family for ethic, but it is immoral to kill family.” For example, the inability to kill a loved one is a matter of emotional attachment, not an ethical or moral issue. This suggests that ethical and moral issues are separate from emotional issues. In other words, Arjuna's dilemma can be categorized into two types: formal family relationship and essntial attachment, with the former being an ethical dilemma due to resentment and the latter being an emotional pain due to attachment. So when it talks about Arjuna's dilemma, it's fair to say that it's a combination of both ethical and emotional issues. To make it clear that a situation like Arjuna's is not just a matter of family ethics, but of attachment, we will look at the case of 'Crying and Beheading Mǎsù' in the Three Kingdoms. The story of 'Crying and Beheading Mǎsù', in which Zhuge Liang had to behead Mǎsù in order to uphold military law, is similar to situation of Bhagavadgītā in the context of having to kill a loved one for the great purpose (Dharma). It can use Bhiṣma of Bhagavadgītā as a counterpoint to Mǎsù, and it can reaffirm Arjuna's emotional issues by checking in with Bhiṣma's narrative. Just as Zhuge Liang cries when he beheads Mǎsù, Arjuna shows tears when he knocks down Bhiṣma. It can say that the situation of ‘Crying and Beheading Mǎsù’ is also a * Combined MS/PhD course in Indian Philosophy, Dongguk University. 100 Karmayoga in that it involves cutting off attachment to a loved one and fulfilling a duty.
Key Words: Mahabharata, Bhagavadgita, Bhishma, Arjuna, karmayoga ㆍ
논문투고일: 2024.05.01.ㆍ심사완료일: 2024.06.27. ㆍ게재결정일: 2024.06.28
동아시아불교문화 63집(2024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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