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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조선 건국의 정당화:신화와 역사의 긴장/최연식外.연세대

􀓛 논 문 요 약 􀓛

조선의 건국은 마상의 건국이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취약한 건국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역성

혁명이 예견된 역사의 숙명이었음을 알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하늘을 나는 용들

의 노래’(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즉 용비어천가의 탄생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해 예견된 것임을 강조하는

용비어천가의 서사구조는 간결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용

비어천가는 용들의 노래인 동시에 백성의 노래가 되어야

했고, 영웅들의 신화인 동시에 역사의 교훈이 되어야 했

다. 이것이 용비어천가에 내재된 긴장의 원천이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

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나는 역사를 신화화하는 방식이

었고, 다른 하나는 신화를 역사화하는 방식이었다. 내용

적으로는 본가 부분이 전자에 해당되고 계왕훈 부분이

후자에 해당된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역사 기록의

공백을 신화로 보충했고, 그 결과 본가에 등장하는 6명

의 건국 주역들은 용으로 승천했다. 동시에 용비어천가

의 편찬자들에 맡겨진 또 다른 과제는 과거의 신화를 미

래의 역사에 합리적으로 전해주는 것이었다. 계왕훈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유자들의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유자들은 제왕들에게

유교적 원칙을 요구했고, 유자들의 왕권에 대한 교정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용비어천가는 조선 건국

에 내재된 정치권력과 지식권력의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 주제어: 용비어천가, 조선 건국, 천명, 역사의 신화

화, 신화의 역사화, 본가, 계왕훈

Ⅰ. 서론

조선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다면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조선의 건국을 문명의 설계자 정도

전을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제도의 건국이었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조선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정몽주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이념의 건국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은 불세

출의 무장 이성계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분명히 마상(馬上)의 건국이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의

숨은 두 주역이었던 정몽주와 정도전이 마상의 혁명을 완수한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혁명 주체들의 군사적 건국은 애초부터 제도적 건국과 이념적 건국을 부정했던 정당성이 취약한 건

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자들은 한 고조 유방(􃟓邦)에게“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

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한 육생(􃡭生)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史記』, 卷97, 􀴂生

􃡭􂈷􃓠傳). 이 점에서 고려의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했고, 따라서 조선

의 건국 주체들은 혁명의 역사적 소명과 건국의 합리성을 백성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해야 했

다.

혁명의 성공은 흔히 승리자들을 위한 송가(頌歌)로 찬양된다. 조선의 건국자들에게도 그들의 혁명

을 자축하는 찬송가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혁명은 역사의 예견된 숙명이었으며, 숙명을

인식한 소수의 선택된 지도자들이 완수한 숭고한 과업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찬송의 노래가

필요했다. 고려의 황혼을 예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의 숙명을 감당한 조선의 건국자들을 위한

찬송가는‘하늘을 나는 용들의 노래’(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즉‘용비어천가’

(􃛼飛御天歌)였다.

이 점에서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건국과 건국의 주체들, 그리고 그것을 이어갈 후세들의 권위와 안

녕을 기원하기 위한 정치적 송가였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와 관련된 대부분의 연구들은 한글로 표현

된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관점에서 용비어천가의 언어학적 또는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 문

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용비어천가의 찬술에 담긴 정치적 동기와 의미 또는 용비어천가의 서사구조

자체에 내포된 정치적 긴장관계를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1)

용비어천가를 건국의 찬송으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용비어천가 찬술의 의도와 서사구조를

정치동학 또는 권력동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기존의 연구들이용비어천가 찬술

의 정치적 동기 또는 용비어천가 자체에 내포된 이념적 성격을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

나 기존의 연구들 대부분은 용비어천가 찬술의 정치적 목적 또는 용비어천가의 이념적 지향을 기정

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 결국 용비어천가를 합목적적이지만 정태적인 문학작품으로 읽는 한계를

보였다. 따라서 용비어천가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위해서는 신화와 역사의 어느 한 편에서 용비어천

가를 독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또는 역사화된 신화)와 역사(또는 신화화된 역사)의 긴장을 이해하

고, 나아가서 신화와 역사의 긴장을 구성하는 권력 주체들의 긴장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예외적으로 권력투쟁에 성공한 이방원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용비어천가 편찬의 정치적 의도로 파악한 연구

(최상천 외 1991), 조선 건국의 사료로서 용비어천가와『태조실록』총서를 교차 검토한 연구(정두희 1989), 용

비어천가에 담긴 유교의 천명사상을 과거의 운명과 미래의 소명이라는 이원적 개념으로 해명하고자 한 연구(전

재강 1998), 그리고 세종의 언어정책을 왕조의 정당성 확립과 관련하여 해석한 연구(유미림 2005) 등은 용비어

천가에 대한 정치적 해석에 유의미한 시사를 주는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용비어천가 편찬의 주체가 이원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용비어천가 편찬의

주체는 청사진을 제시한 세종과 편찬 실무를 맡은 정인지(鄭􃥒趾), 권제(權􂖁), 안지(安止)등 집현전

학사들로 구분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 사이에 신생 유교국가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목표에 대한 전반

적인 합의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지만, 권력의 본질과 운영방식에 관한 왕권과 신권

의 입장 차이는 건국 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따라서 용비어천가에는 세종으로 대표되는 왕권의

입장과 편찬 실무를 담당한 관학파 유자들의 입장 차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가능성이 높았다. 용

비어천가가 표면적으로는 조선을 건국한 용들의 노래(Songs of Dragons)를 구가(謳歌)했지만, 용들

은 또한 유자들의 숙명이기도 한 하늘의 뜻(天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조선

이라는 유교국가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었던 모순과 긴장의 구조를 용비어천가에 나타난 신화와 역사

의 대립 또는 권력과 이념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Ⅱ. 권력의 찬탈과 권력의 합리화: 용비어천가 찬술의 동기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의 건국은 혁명이 아니라 선양(禪讓)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

되었다. 즉 임금의 도리를 잃고 혼암(昏暗)한 공양왕을 폐위시키는 것은 불가항력의 대세였고(『태조

실록』, 1년 7월 17일), 대신에 주위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계승시킨 것은

역사의 순리였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즉위교서를 작성한 정도전은 이 정황을“[이성계가] 여러 사람

의 심정에 따라 마지못해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고 전했다.

적어도 정도전과 이성계는 역성(易姓)의 혁명을 순리에 따른 선양으로 미화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이 비록 선양의 형식을 빌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강제적인 권력의 찬탈이

었다. 일반적으로 전근대 시기의 왕조 교체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피지배층의 저항을 계기로 이루어

졌던 것과 달리, 조선의 건국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난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무장 세력이 무력

을 배경으로 선양을 강요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고려 말에는 이렇다 할 농민반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혁명이 백성들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기본

적으로 백성들의 동의와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정치 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동의 없이 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집권층은 무엇보다도 피지배층에게 건국의 정당성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조선은 애초부터 합리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부당한 권력이었고, 따라서 조선의 건국

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권력을 통합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책적 대안이 제

시되어야 했다.

우선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를 지지하는 개경 세력과 지방에 할거(割據)하는 재지 세력을 정치

적으로 통합하는 데 절치부심하고 있었다(최상천 외 1991, 60). 더구나 동시대의 중국에 비해서 왕

권이 불안정했던 조선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사대부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러한 경향은 수성(守

成)의 시대를 구가했던 세종 연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세종에게도 정치적 통합을 통해 왕권

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정치적 난제들 중 하나였다. 이 점에서 그가 세종

2년(1420)에 집현전을 설치했던 것은 신진기예들을 중심으로 근왕세력을 육성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달성하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박병련 2006, 33-34; 최상천 외 1991, 62-63).

다음으로 당대의 집권세력이 당면한 또 하나의 과제는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동의와 지지를 얻

기 위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민생 안정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세종이 즉위 직후‘시인발정’

(施仁發政;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1일)을 표방하며 성왕(聖王)의 역할을 자임했던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유미림 2005, 133). 또한 그는 문란한 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유교 이

념의 법제화를 추진했고(박영도 2006), 구휼정책을 포함한 일련의 민생안정 정책을 실시하여 통치

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통합과 민생안정책만으로는 찬탈된 권력이라는 역사적 원죄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권

력찬탈이라는 원죄를 정당화화하기 위해서는 왕조의 창업 자체가 신성한 역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역성혁명을 건국신화로 재구성해야 했다. 물론 혁명과정이 신화로 재구성되었던 데에

는 이성계와 그 선대의 역사를 분명하게 밝혀줄 객관적인 기록이 많지 않았던 저간의 사정도 반영되

어 있다. 사실 이성계는 화려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변방인 동북

지역의 무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2)

따라서『태조실록』의 편찬자들은 이성계와 그 선대의 행적을 종합하여 완결된 정사(正史)로 만들

어『태조실록』의 총서(總書)에 기록해 두고자 했다.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기에 앞서 세종이『태조실

록』을 열람하고자 했던 것은『태조실록』총서가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관례에 어긋난다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태조실

록』을 열람했다(『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더욱이 세종은『태조실록』총서의 기록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자료를 보완하고자 했다. 세종의

이러한 관심은 이미 편찬이 완료된『고려사(高麗史)』에 태조의 고려 말 행적에 관한 기록이 너무 소

2) 원래 이성계의 집안은 13세기 후반에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安社, 穆祖) 때 전주(全州) 지역 관리의 박해를피해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던 이주민 집단이었다. 이안사는 몽고의 관직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성계

의 증조부인 이행리(􃤚行里, 翼祖)와 조부인 이춘(􃤚椿, 度祖)의 행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Lee 1998, 13-

14).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子春, 桓祖)은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로서 1335년에 공민왕에게 내조하여 개경

에 처음 입성했고, 이성계는 1335년 지금의 영흥(永興) 지역에서 이자춘(􃤚子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략하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운『고려사』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

난다(『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더욱이『고려사』전문(全文)이 완성된 것은 세종 24년(1442)이

었지만(『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세종은 같은 해 3월까지도 고려 말 태조의 왜구 격퇴에 관한 기

록이 빈약한 점을 지적하면서, 관련 사실들을 현지의 원로들을 면담하여 보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

데 이러한 세종의 지시는 같은 날 사론의 기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려는 의도

에서 내려진 것이었다(『세종실록』, 24년 3월 1일).

이처럼 세종이『태조실록』총서의 기록에 불만을 갖고 현지 조사를 통해 자료를 보완하려 했던 궁

극적인 목적은 용비어천가의 내용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조실록』총서와 용비어천가는 그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

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태조실록』총서에 이성계와 그 선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도 불구하고, 세종이 이성계와 그 선대의 기록 보완에 집착하여 용비어천가에 반영시키려 했던 의도

는 무엇이었을까? 이 점은 앞서 지적했듯이 전대의 실록을 읽는 것은 사관(史官)이 아니면 국왕에게

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딪혔을 만큼(『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실록은 일반 백성들이 쉽

게 접근할 수 없는 자료였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그 내용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을 주석으로 보충했던 것은 이성계와 그 선대의 영웅적 행적을 일반 백성들

에게 공개하려는 의도의 소산이었다(정두희 1989, 89-90). 즉 세종은 선대의 영웅적 행적을 용비어

천가로 신화화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각인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및 반포(『세종실록』, 28년 9월 29일)와 맞물려 진

행되던 용비어천가는 세종 27년(1445) 4월에 초고가 완성되었고(『세종실록』, 27년 4월 5일), 2년

여의 수정과정을 거쳐 세종 29년(1447) 10월에 완성된 550본이 여러 신하들에게 배포되었다(『세종

실록』29년 10월 16일). 즉 훈민정음의 창제와 용비어천가의 편찬은 1년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연속된 프로젝트였다. 이 점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제(御製)에서 밝히고 있듯이, 단순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세종

실록』, 28년 9월 29일)”는 이유에서 기획된 위민의식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는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염두에 두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문자적 도구를 확보하

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에게 선대의 행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은 우선

선대의 실록을 열람하는 것에서부터 반발에 부딪쳤다. 세종 20년(1438) 3월에 세종은 이미 열람한

『태조실록』과 함께『태종실록』도 내전에 가져와 읽으려 했으나, 황희(黃喜)와 신개(申槪) 등의 반대

에 부딪혀 결국 열람하지 못했다. 이는 전대의 실록을 열람하는 잘못된 선례가 후대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유신(儒臣)들의 유교적 합리주의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특히“조종(祖宗)의 역사는 비록

254 동양정치사상사 제7권 1호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편수한 신하들이 모두 살아 있는 마당에, 임금이라 하여 실록

을 직접 열람한다면 그들의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세종실록』,

20년 3월 2일), 왕권의 입장과 신권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세종은 자신의 뜻

을 쉽게 관철시킬 수 없었다.

이 점에서 볼 때, 세종이 왕권의 안정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첫째로 세종은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고 태종의 권력 승계를

합리화해야 했다. 둘째로 세종은 유신들의 유교적 합리주의와 충돌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왕권의 안

정성을 온전하게 확보해야 했다. 세종은 이러한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명사상(天命思想)을

활용했다. 이는 태조의 왕위 찬탈과 태종의 골육상잔에 의한 왕위 승계라는 반유교적인 과거의 역사

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세속적 윤리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소명으로 인간의 역사를 성화(聖

化)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의 천명은 본질적으로 민본주의적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명을 유교적 의미

그대로 건국의 정당화에 이용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맹자가“왕도는 민심을 얻는 것에서 시작된다

(『孟子』, 􃏼惠王上)”거나 또는“백성을 기쁘게 하면 하늘의 뜻을 얻을 수 있다(『孟子』, 􃏼惠王下)”

고 지적했듯이, 유교의 천명 관념은 민심과 유리된 권력의 논리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유교의 민본 이념에 비추어 볼 때, 조선의 건국은 처음부터 반유교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한계

가 세종의 용비어천가 프로젝트를 제약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용비어천가는 천명을 이해하는 방식을 전환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앞에서도 언

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유교에서는 민심이 귀의하는 곳에 천명이 뒤따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맹자

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라고 파악했다(『孟子』,

盡心下). 이 점에서 유교의 천명사상은 인간의 일용평상(日用平常)을 중시하는 지상(地上)의 논리에

충실했다. 반면에 용비어천가에서 하늘은 인간의 일용평상과는 무관한 다분히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

되었다. 예컨대 용비어천가 제1장에 등장하는 하늘을 호령하며(御天) 날아다니는 6마리의 용(􃡧龍)

은 역사에 실존하는 인간들을 초월적으로 신화화시킨 존재들이었다. 이 점에서 용비어천가의 천명사

상은 유교합리적인 지상의 논리보다는 마술적인 천상(天上)의 논리에 충실했다.

프리드리히(Carkl J. Friedrich)와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가 지적했듯이, 신화란

“과거사와 관련된 하나의 이야기로서, 현재를 위해 과거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특정 공동체에

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Henry Tudor 1972, 16).”이

점에서 정치신화(political myth)는 인간의 행위나 사건의 배후에 하늘의 뜻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용비어천가 또한 예

언과 도참, 신이한 능력 등을 천명과 연관시켜 역사 해석에 동원한다는 점에서 신화를 활용하여 권력

을 강화하는 정치신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건국신화는 역사와 신화라는 두 장르의 특성을 모두 포괄한다(김보현 2006,

207). 마찬가지로 건국신화인 용비어천가에도 역사와 신화가 공존하고 있다. 용비어천가를 찬술하도

록 지시한 세종의 목적은 선대의 혁명을 신화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지만, 용비어천가의 집필에

참여한 유신들은 유교적 세계관을 신봉했고, 그들은 세종과 달리 조선 건국의 신화적 정당화 보다는

유교적 합리성을 후왕들에게 권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용비어천가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언급된 계왕훈(戒王訓)은 용비어천가의 이러한 유교적 합리성에 대한 고려를 반영한 결과였다.

Ⅲ. 신화적 천명(天命)과 유교적 천명: 용비어천가의 서사구조

용비어천가는 권력의 찬탈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의 건국은

천명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민본사상에 입각한 지상의 논리를 강조하는 유

교적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신비로운 천상의 논리를 강조하는 마술적 비합리성에 기초

한 것이었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반’(反) 유교적인 조선의 건국을 신화적

서사라는‘비’(非) 유교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정당화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이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첫째로 용비어천가는 고려 말 집권층의 무능과 왕실의 부덕을 지적하며 천명이 이미 고려 왕조에서

떠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둘째로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개국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네 선조들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행위와 업적을 찬양함으로써, 조선의 건국이 결코 일시적인 무력시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선조들에 의해 쌓여온 업적이며 천명에 의해서 암시되어 온 일이었음

을 부각시키고 있다.

셋째로 용비어천가는 건국의 주역인 이성계의 신이한 능력과 무공, 왕자(王者)가 될 자질을 언급함으로써

결코 조선의 건국은 부도덕한 왕위 찬탈이 아니라 숙명적인 하늘의 뜻이었다는 점을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편찬 실무자들의 유교적 가치관이 계왕훈뿐만 아니라 본가(本歌)의 일부에도 반영되어 있

다는 점에서 용비어천가의 서사구조 속에는 신화적 천명의식과 유교적 천명의식이 공존하고 있다.

즉 건국을 정당화하는 본가에서는 주로 천상의 논리에 따른 천명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후반부

인 계왕훈에서는 후왕들이 유교적 가치에 따라 도덕적 성군이 되기를 권고하는 민본주의적 천명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이“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바람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세종과 편찬 실무

자들의 고민은 용비어천가의 이중적 서사구조로 반영되었다.

용비어천가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은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용비어천가의 전체적인 주제와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부분인 3장에서 109장까지는 여섯 마리 용들의 문화적∙군사적 업적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부분인 110장에서 124장까지는 미래의 군주들에 대한 규계, 즉 계왕훈으로 구성되어 있다.

넷째 부분인 125장은 전체의 결론에 해당된다.

용비어천가의 본론을 구성하는 3장에서 124장까지는 각 장이 모두 두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전절은 중국의 제왕들에 관한 것이고 후절은 조선의 왕들에 관한 것이다. 다만 예외

적으로 86장에서 89장까지는 전절과 후절이 모두 이성계의 업적을 찬양한 것이고, 83장의 전절은

중국의 제왕 대신에 고려 태조 왕건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Lee 1998, 64).

1. 천명의 이동과 선조들의 영웅적 사적

조선의 건국 세력이 이성계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했던 상투적인 방법은『태조실록』총서에 집약적

으로 정리되었듯이, 고려 왕실의 무능과 부패를 일반 백성들에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 역

시 이 방법을 준용하여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예컨대 용비어천가에서는 천명이 이미 고

려의 멸망 조짐을 예견했으며, 이반된 민심은 새로운 영웅적 지도자의 출현을 대방(待訪)하고 있었다

고 노래했다.

우선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의 선조들이 동북 지방에 정착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을

천명의 계시와 연관시켜 해석했다.

적인 사이에 가시니 적인이 침범하거늘 기산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니

야인 사이에 가시니 야인이 무례하거늘 덕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니(4장)3)

狄人與處狄人于侵岐山之遷實惟天心

野人與處野人不禮德原之徙實是天啓

전반적으로 용비어천가는 형식상 조선의 고사(故事)를 중국의 고사에 비견하여 조선 건국을 정당

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위 4장의 전절에 묘사된 중국의 고사는 후에 주(周)나라의 태왕(太王)으로 추

존된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적인(狄人)들의 침입을 피해 기산(岐山)으로 이주하게 된 연유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용비어천가의 저자들은 이것을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길도 덕원부에 정착한 사실에 견주어 하늘의 계시(天啓)로 미화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이안사(목조)의 이주가 하늘의 계시를 따른 것이었다고는 했지만, 이들이 낯선

3) 이 논문에서 인용된 용비어천가의 번역은 주로 이윤석(1997)의 것을 따랐고 필자가 필요에 따라 수정했다.

타향에 정착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안사도 덕원부와 삼척 등지를 전전하며 옮겨 다녔

지만, 그의 아들 이행리(익조)도 그 지역 천호(千戶)들의 모해를 피해 적도(赤島)에 움집을 짓고 살

아야 했다(5장). 그러나 용비어천가는 이러한 왕조 창업의 간난(王業艱難)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려

를 버린 민심은 정의로운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찬양했다.

상덕이 쇠하거든 천하를 맡으시려할쌔 서수 강가가 저자 같으니

여운이 쇠하므로 나라를 맡으시려할쌔 동해의 가가 저자 같으니(6장)

商德之衰將受之圍西水之滸如市之歸

􃒦運之衰將受大東東海之濱如市之從

일부가 유독할쌔 아후를 기다려 현황광비로 길에서 바라니

광부가 사학할쌔 의기를 기다려 단사호장으로 길에서 바라니(10장)

一夫􃟪毒爰􃡃我后玄黃筐벧 于路迎候

狂夫肆虐爰􃡃義旗簞食壺漿于路望來

우선 위의 6장에서는 상(商)나라의 덕이 쇠하여 민심이 주나라로 기운 것처럼, 고려의 국운이 쇠하

자 민심은 자연스럽게 조선으로 기울었다는 점을 저자 거리에 모인 많은 수의 사람들에 비유하여 노

래했다. 또한 10장에서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의 패군 주(紂)를 정벌하자 백성들이 폐백을

바치며 무왕을 영접한 것처럼, 우왕(禑王)의 학정에 지친 고려의 백성들은 창의(倡義)의 기치(旗幟)

를 기다려 이성계를 영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용비어천가는 상나라의 주나 고려의 우왕

을 필부 또는 미치광이 필부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생 왕조의 정당성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정

당화하는 맹자의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맹자는“인(仁)과 의(義)를 해친 적잔(賊殘)의 필

부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孟子』, 􃏼惠王上)”고 한 바

있었는데, 이것은 역성혁명을 도덕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유교적 발상의 전형이었다. 이 점에서 위

의 10장에서 나타난 광부(狂夫)와 의기(義旗)의 대비는 고려의 쇠망과 조선을 건국을 유교적 관점에

서 합리화시키기 위해 사용된 상징들이었다.

그러나 광부와 의기의 합리적 대비만으로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한 극적인 요소가 부

족해 보인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이성계와 그 선조들의 영웅적 행적을 신화적으로 재

구성했다. 용비어천가에 소개된 육룡의 영웅적 신화들 중에서 목조에 관한 것은 5개 장, 익조에 관한

것은 9개 장, 도조에 관한 것은 4개 장, 환조에 관한 것은 6개 장, 이성계에 관한 것은 81개 장, 이방

원에 관한 것은 23개 장이 각각 할애되었다(Lee 1998, 65). 아래에서는 이안사(목조), 이행리(익

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의 순으로, 이성계의 선조들의 행적이 신화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검토

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용비어천가는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동북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하늘의 계

시를 따른 것이라고 찬미했다. 용비어천가는 왕업 개척의 첫 출발이 경흥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이것을 주나라 태왕(太王)이 빈곡(?谷)에서 제업(帝業)을 일으킨 것에 비유했다.

주국 태왕이 빈곡에 사셔서 제업을 여시니

우리 시조가 경흥에 사셔서 왕업을 여시니(3장)

昔周大王于블斯依于블斯依肇造丕基

今我始祖慶興是􄅜 慶興是􄅜 肇開鴻業

그런데 사실 이안사가 본향인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하늘의 계시 때문이 아니라 사적인 원한 때문

이었다. 이 사실은 3장의 주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석에 따르면 문제의 발단은 이안사가 총

애하던 기생을 산성별감(山城別監)이 데려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주의 지주(知

州)와 이안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결국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산성별감이 삼척에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자 이안사는 다시 삼척을 떠나 덕원부로 옮겨

살게 되었다(이윤석 옮김 1997, 30-32). 그러나 용비어천가 17장 후절과 18장 후절은 이 사건을 오

히려 왕조 창업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해석했다.

관기로 노하심이 관리의 탓이언마는 조기삭방을 재촉하셨습니다(17장 후절)

官妓以怒官吏之失肇基朔方實維趣只

서울 사자를 꺼리시어 바다를 건너실 제 이백 호를 어느 누가 청하니(18장 후절)

憚京使者爰涉于海維二百戶誰其請爾

이 주장에 따르면 전주 관기 사건은 오로지 관리의 실책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북방에서 왕업의 초석을 처음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안사가 고향을 등지고 낯선 타

향에 정착할 때, 누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200호(실제로는 170여 호였지만 성수(成數)로 말한 것이

다.)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따랐다는 사실에서 천명에 따른 민심의 귀의를 강조했다.

이행리(익조)의 행적에 대한 내용은 앞에서 이미 언급된 4, 5, 6장 이외에 19장과 20장에도 소

개되어 있다. 모두 이행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비한 기적이 일어나 그를 구해준 사건에 관한 기록

들이다.

야인 사이에 가시니 야인이 무례하거늘 덕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니(4장 후절)

野人與處野人不禮德原之徙實是天啓

꾀 많은 도적을 모르시어 보리라 기다리시니 센 할미를 하늘이 보내시니(19장 후절)

靡知􃵔賊欲見以􁒍 􃋧􃋧􂗥􀜓 天之使兮

삼한을 남을 주겠는가 바다에 배 없거늘 얕게 하시고 또 깊게 하시니(20잘 후절)

維此三韓肯他人任海無舟矣旣淺又深

19장 후절과 20장 후절의 이행리와 관련된 기적들은 4장의 주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

들은 이행리가 알동(斡東)의 천호들로부터 모해를 받아 적도(赤島)로 쫓겨 가는 상황에서 만난 신비

한 기적들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19장 후절의 기록은 알동의 천호들이 이행리를 치기 위해 군대를

부르러 간 사실을 모르자 길에서 만난 한 노파가 이행리의 위엄과 덕을 알아보고 그에게 위기를 알려

주었다는 내용이고, 20장 후절의 기록은 이행리 일행이 적도로 건너갈 배를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

자기 물이 빠져 말을 타고 건너간 후 다시 물이 찼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이춘(도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7장과 21장, 22장,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춘의 탄

생과 신비한 활솜씨와 자손의 번창을 예견한 예조(豫兆)를 골자로 하고 있다.

뱀이 까치를 물어 나뭇가지에 얹으니, 성손장흥에 가상이 먼저시니(7장 후절)

大蛇銜鵲􂿳樹之揚聖孫將興爰先嘉祥

하늘이 가리시니 누비중 아닌들 해동여민을 잊으시리이까(21장 후절)

天方擇矣匪百衲師海東􃒧民其肯忘斯

흑룡이 한 살에 죽어 백룡을 살려내시니 자손지경을 신물이 아뢰니(22장 후절)

黑龍卽쨔 白龍使活子孫之慶神物􂷭止

쌍작이 한 살에 지니 광세기사를 북인이 칭송하니(23장 후절)

維彼雙鵲墮於一縱曠世奇事北人稱頌

먼저 21장은 이행리(익조)가 부인과 함께 강원도 낙산 관음굴에 가서 자식을 빌 때, 꿈속에서 누비

옷을 입은 중이 나타나“반드시 귀한 자식을 나을 텐데 그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하라”고 말한 후 아

들 이춘(도조)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7장은 이춘이 백보나 떨어진 거리에서 까치 두 마리를 쏘아 맞

히자 이때 큰 뱀이 나와 까치 두 마리를 나무 가지에 얹어 놓고는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

는데, 이를 통해 용비어천가는 어떤 예조(豫兆)를 보이는 신비한 현상을 묘사하고자 했다(최상천 외

1991, 69). 22장은 이춘이 꿈에서 백룡이 자신을 구해달라는 청을 듣고, 흑룡을 화살로 죽여 백룡을

구해준 뒤“자손에게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 고사를 묘사하고 있다. 23장의 내용은 7장

과 동일하다.

그런데 한국에서‘용’이라는 상징은 고대로부터 대개 국왕과 그 왕족들을 나타냈다. 특히 건국신화

에서‘용의 출현’은 새 왕조의 창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하정룡 2002, 184-185). 즉 건국

신화와 같이 폭넓은 사회적 권위와 승인을 필요로 하는 서사에서는 신성성을 상징하는 용과 같은 동

물을 등장시켜 왔던 것이다.4)‘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은 건국신화에서 왕권을 표상하는 강력한 상징

이었으며, 악한 흑룡을 죽이고 선한 백룡을 구한다는 화소(話素)는 이춘의 이러한 업적이 후대에 큰

경사(慶事)를 불러일으킬 전조로 서술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자춘(환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8장과 24장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차자에 의해서

종통(宗統)이 계승된 연원과 그 정당성을 밝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자를 하늘이 가리시어 제명이 내리시거늘, 성자를 내신 것이외다(8장 후절)

維我世子維天簡兮帝命旣降聖子誕兮

아우는 뜻이 다르거늘 나라에 돌아오시고 쌍성에도 역도를 평하시니(24장 후절)

弟則意異我還厥國于彼雙城又平逆賊

8장 후절에서는 이춘의 장자 이자흥(􃤚子興)이 일찍 죽자 원나라에서는 나이가 어린 자흥의 아들

천계(天桂) 대신에 차자였던 이자춘에게 종통을 잇게 했다는 것이다. 24장 후절에서는 이자춘이 쌍

성총관부의 역도들을 물리친 공으로 처음 중앙의 관직을 받아 내조한 사실과 이자춘의 아우 이자선

(􃤚子宣)은 끝내 귀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차자인 이자춘의 종통 계승이 원

나라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에 의해 국내적으로도 승인된 것이었음을 강

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용비어천가는 이자춘과 이성계로 이어지는 차자에 의한 종통의 승계가 역사

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용비어천가의 해석은 이방원

의 왕위 계승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최상천 외 1991, 69-70).

즉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통해 집권한 이방원의 정치적 한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차자 승계의 선례를 선대의 역사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4) 한국의 고대 신화에서 용은 크게 세 가지를 나타내었는데, 국왕과 그 왕족, 바람∙구름∙비∙안개 등 농경과 관

련된 자연현상, 그리고 국가의 다양한 예조(豫兆)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왕권을 상징한다는 한

가지 결론으로 압축될 수 있다(하정룡2002, 185). 고대 신화에서 왕의 출생, 능력 등이 용과 관련되었던 점은

왕권의 정당성을 신화의 수용자에게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2. 유가화된 군인: 이성계 개인의 신화

용비어천가에서 표현된 고려 몰락의 전조(前兆)와 태조 이전의 선조들에 관한 기록들은 조선의 건

국이 천명에 순응한 결과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였다. 즉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왕권의

찬탈이 아니라 역사적 숙명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성계는 왕권의 찬탈자가 아니라 천명에 순

응한 순천자(順天者)로 합리화되어야 했다.

이성계를 순천자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용비어천가 본가에 담긴 대부분의 내용들은 태조 이성계의

무인적 능력과 무공(武功)을 보여주는 신비한 현상들에 관한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성계는

처음부터 유교의 이상이 지향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군주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따라서 용

비어천가에서는 그의 탁월한 무장으로서의 능력에 천명을 부여하여 그의 건국을 신화화했다. 이 점에

서 이성계는 신화를 통해 유가화된 군인으로 재탄생했다. 용비어천가의 본가 107개 장 중에서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장은 65개이며, 이 중에서 천명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장은 20여 개에 달한다.

즉 용비어천가는 왕조의 창업과정에 동반된 비합리적이고 반유교적인 사실들을 신화화된 천명으로 해

소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왕권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아래에서는 이성계에 관한 용비어

천가의 서술을 내용상 무인적 능력, 무공(武功), 천명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이성계 개인의 무인적 자질과 능력을 묘사한 대표적인 것들로는 87, 88, 89장을 들 수 있다.

모두 이성계의 활솜씨를 성인의 신력(神力), 신무(神武), 신공(神功)에 비유함으로써 한 개인의 타고

난 자질을 신화적 숭배의 대상으로 승화시켰다.

말 위에서 큰 범을 한 손으로 치시며 싸우는 큰 소를 두 손에 잡으시며

다리 밖으로 떨어지는 말을 넌지시 당기시니 성인신력을 어찌 다 아뢰리(87장)

馬上大虎一手格之方鬪巨牛􃏳手執

橋外隕馬薄言􁗶之聖人神力奚􀓊說之

마흔 사슴의 등과 도적의 입과 눈과 차양의 세 쥐 옛날에도 있었던가

엎드린 꿩을 꼭 날리시니 성인신무가 어떠하시니(88장)

땅脊四十與賊口目遮陽三鼠其在于昔

維伏之雉必令驚飛聖人神武固如何其

솔방울 일곱과 이운 나무와 투구 세 살이 옛날에도 또 있었던가

동문 밖에 보득솔이 꺾어지니 성인신공이 또 어떠하시니(89장)

松子維七與彼枯木兜牟三箭又在于昔

東門之外矮松􃧉折聖人神功其又何若

87장의 고사는 이성계가 말 위에서 호랑이를 오른손으로 내려친 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와

싸우고 있는 두 소를 양손으로 잡아 싸움을 그치게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말이 발을 헛디뎌 다리에

서 떨어지게 되자 두 손으로 말의 귀와 갈기를 잡고 끌어 올렸다는 이야기이다. 모두 이성계가 엄청

난 괴력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려는 이야기들이다. 88장과 89장은 이성계의 신비로운 활솜씨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88장의 고사는 이성계가 40마리의 사슴을 등을 쏘아 잡았다는 이야기, 갑옷으로

무장한 적장들의 입과 눈을 정확히 쏘아 맞혔다는 이야기(35장과 37장), 차양의 쥐 세 마리를 상하

지 않게 하면서 떨어뜨렸다는 이야기, 엎드린 꿩을 촉 없는 화살로 맞혔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89장은 원하는 곳의 솔방울 7개를 7발의 화살로 모두 적중시켰다는 이야기, 마른 나무 등걸의 한 곳

에 세 발의 화살을 모두 적중시켰다는 이야기(58장), 100보 밖의 세 투구를 모두 맞혀 꿰뚫었다는

이야기,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에 입성할 때 화살을 쏘아 승리의 조짐을 점쳤더니 한 화살에 바로

소나무가 부려졌다는 이야기이다(9장). 용비어천가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성계는 비상한 힘

과 재주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비상한 그의 능력이 조선의 건국으로 실현되는 것은

하늘이 예견한 뜻이었음을 설득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용비어천가는 이성계의 혁명이 의도된 반역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가 고려를

위해 세운 무공들을 곳곳에 적절히 배치해 두었다. 예컨대 35장 후절은 이성계가 나하추를 물리친 공

훈을 기록한 것이고, 37장 후절은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운 공훈을 기록한 것이다.

스가발 군마를 이길쌔 혼자서 물러나 쫓기사 모진 도적을 잡으시니이다(35장 후절)

克彼鄕兵挺身陽北維此兇賊遂能獲之

나라에 충신이 없고 혼자서 지성이실쌔 여린 흙을 하늘이 굳히시니(37장 후절)

國無忠臣獨我至誠泥ь之地天爲之凝

35장의 기록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 발탁되어 나하추의 침입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격퇴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때 이성계가 보여준 신출귀몰한 활

솜씨는 나하추와 그의 식솔들에게도 놀라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조정에서도 높은 평판

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7장의 기록은 원의 기후(奇后)가 공민왕을 폐위시키려고 침입했을

때 여러 장수들이 주저하는 상황에서 홀로 적군을 물리친 상황과 왜구의 침입을 섬멸시켰다는 상황

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37장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고려에 대한 신민(臣民)의 충성과 신뢰가 자취를 감춘 상

황에서도(國無忠臣), 이성계는 홀로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을 통해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성계의 고려에 대한 단충(丹忠)에

용비어천가(􃛼飛御天歌)와 조선 건국의 정당화 263

도 불구하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이었다는 점이다. 이성계가

보여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찬송한 대표적인 노래는 11, 13, 14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화 진려하심으로부터 여망이 모두 모이나, 지충이실쌔 중흥주를 세우시니(11장 후절)

威化振旅輿望咸聚維其至忠􃧉中興主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되 천명을 모르시므로 꿈으로 알리시니(13장 후절)

謳歌雖衆天命靡知昭玆吉夢帝􀥿報之

성자가 삼양하시나 오백 년 나라가 한양에 옮겼습니다(14장 후절)

維我聖子三讓雖堅五百年邦漢陽是遷

11장은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할 때, 많은 측근들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를 간청했지만,

이성계는 고려 왕실의 중흥을 위해 공양왕을 새 임금으로 세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13장은 이성계

의 무덕과 무공을 칭송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이성계 자신은 그것을 천명으로 여기지 않고 사양하자

결국 하늘이 꿈을 통해 천명을 알려주었다는 내용이다. 14장은 이성계가 공양왕에게 관직을 세 번이

나 사양했지만, 결국 고려의 왕업은 조선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이 의도했

던 것은 고려에 대한 이성계의 충성심은 진실하고 일관된 것이었지만, 결국 천명의 흐름은 인간의 힘

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83, 84, 86장에서는 조선의 건국을 예견한 예언과 전조들을 소개하여 조선의 건국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늘의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송가의 곳곳

에 비기와 도참을 배치함으로써 조선의 건국이 한 인간의 욕망의 결과가 아니라 천명에 대한 순응의

결과였음을 설득하고자 했다.

군위를 보배라 하실쌔 큰 명을 아뢰려고 바다 위에 금탑이 솟으니

자에서 제도가 날쌔 인정을 맡기려고 하늘 위의 금척이 나리시니(83장)

位曰大寶大命將告肆維海上􀥿湧金塔

尺生制度仁政將託肆維天上􀥿降金尺

나라가 오래건마는 천명이 다해갈쌔 이운 나무 새잎 나니이다(84장 후절)

維邦雖舊將失天命時維枯樹茂焉􂷭盛

석벽에 숨었던 옛날 글 아니라도 하늘 뜻 누가 모르리(86장 후절)

巖石所匿古書縱微維天之意孰􂸝之知

83장의 전절은 고려 왕건이 바다에 솟아오른 금탑에 올라타는 꿈을 꾸고 왕이 되었다는 설화를 소

개한 것이다, 83장의 후절은 이성계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자(􂑿尺)를 주며 나라를 바로 잡

으라고 예언했다는 설화를 소개한 것이다. 고려의 왕건이 하늘의 뜻을 받아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이

성계의 건국도 하늘의 뜻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자(尺)는 통치를 위한 제도와의 연관성 때문에 동

양문명에서 일찍부터 왕권과 관련하어 해석되었다. 일찍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 관한 신화에서도

그러한 관련성이 드러나는데 혁거세가 왕이 되기 전 신인으로부터 금자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東

京雜記』金尺院). 84장은 말라 죽은 나무에서 새 가지와 잎이 자랐다는 기담(奇談)을 소재로 국운이

쇠한 고려와 새로 국운을 열어가는 조선을 대비시켰다. 나무는 고대로부터 왕조의 지속성 또는 국가

의 창업이라는 영광스러운 위업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의 84장에서 말라 죽

은 나무는 고려가 천명을 잃을 것임을 상징한 것이며, 새잎이 돋아난다는 것은 하늘이 길조를 내려

건국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 것이다(Peter Lee 1998, 260). 86장은 이성계가 잠저에 있을 때, 어

떤 중이“목자가 돼지를 타고(木子乘猪) 내려와 삼한의 경계를 바로 잡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도

참서(圖讖書)를 전해 준 일을 소개했다. 여기에서‘목자(木子)’는 이성계의 성인 이(􃤚) 씨를 지칭한

것이고, 돼지(猪)는 이성계가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3. 신화의 역사화: 계왕훈(戒王訓)

용비어천가 총 125장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내용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내용은 그 개인의 자질과 공훈, 그리고 천명의 부여를 신화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10장부터 124

장까지의 계왕훈은 후왕들에게 올바른 정사를 펼쳐 국가의 안녕을 지킬 것을 경계하는 유교적 교훈

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왕훈은 모두“이 뜻을 잊지 말으소서(此意願毋忘)”라는 구절로 끝맺기 때문에

물망장(勿忘章)으로 불리는 계왕훈은 선조들에 관한 예언이나 도참, 신이함을 다루는 대신에 후왕들

이 유교적 학문과 도덕을 갖추어 인정을 실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서 계왕훈은 역사를 신

화화했던 3장에서 109장까지의 구성과 달리 선대의 신화들을 후대의 역사 속에 구현해 갈 것을 당부

하고 있다.

대업을 나리오리라 근골을 먼저 괴롭혀 옥체창반이 한두 곳 아니시니

병위엄연커든 수공임조하샤 이 뜻을 잊지 말으소서(114장)

天欲降大業􀥿先􂗜筋骨玉體創不一

儼然兵衛陳垂拱􃥤朝臣此意願毋忘

먼저 계왕훈에서는 후대의 임금들이 구중궁궐에 살면서(111장) 호의(112장) 호식(113장)하더라

도 선대 4조가 왕조 창업을 위해 애쓴 뜻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114장에

서는 하늘이 왕조 창업의 대업을 내릴 때에는 먼저 몸을 수고롭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성계가

몸에 상처를 입어가며 적과 싸웠던 사실(33장, 50장)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하늘이 대업

을 내릴 때 근골을 수고롭게 한다는 말은 원래『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순(舜) 임금, 부열

(傅􃓨), 교격(膠􀐒), 관중(管仲), 손숙오(孫叔敖) 등이 시련을 겪던 중에 중용되어 대임을 맡은 사실

을 지적하면서, 하늘이 이들에게 대임을 맡길 때에 먼저 그들의 심지(心志)를 괴롭혔고, 근골을 수고

롭게 했으며,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했으며, 몸을 궁핍하게 했다고 전했다(『孟子』, 告子下). 비록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114장을『맹자』와 직접 연관 짓지는 않았지만, 후대에는 이성계의 무공이

유교적 교훈으로 전해져 신화가 아닌 역사로 기록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영웅의 신화가 역사의 교훈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역사는 신화 속의 영웅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이 점에서 민심

을 천심으로 파악했고,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民?苟不識天心便棄絶, 116장). 따라서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고려 말 급진개혁파의 사전 혁파

논의도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백성은 임금이 하늘로 섬겨야할

대상이었고(民者王所天), 이 점에서 사전 혁파란 나라의 근본을 바로 잡은 행위였다(120장).

신화를 역사로 재구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유교적 합리주의를 제시하는 것

이었다. 이 점에서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을 유학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유학의 관점에서 이단을

배격할 것을 권고했다.

성여천합하시어 사불여학이라 하샤 유생을 친근하시니이다(122장 전절)

性雖與天合謂思不如學儒生更親􀨘

수사정학이 성성에 밝으실쌔 이단을 배척하시니

예융사설이 죄복으로 위협하거든 이 뜻을 잊지 말으소서(124장)

洙泗之正學聖性自昭셴 異端獨能斥

裔戎之邪說􂽙誘以罪福此意願毋忘

122장은 먼저 이성계의 성품 하늘의 이치에 합당하다는 점을 찬미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스스로

아무리 혼자 열심히 생각해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만은 못하다고 판단하여 유생들을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함이 배움만 못하다는 말은 원래『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하루 종일 생각만 했으나 유익함이 없어 배우는 것만 못했다”(『􂗳語』, 衛靈公)고 했다.

또 공자는“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語』,

爲政)고 했다. 즉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이성계가 유생으로부터 배우려 했다는 일화를 근거로 후

왕의 정치가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정치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124장은 이방원이 정통유학

의 원칙에 따라 이단을 배척했던 것처럼 인과응보의 사설(邪說)로 혹세무민하는 불교를 배척할 것을

당부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이방원의 불교혁파를 107장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사

실 조선은 유교입국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는 공공연히 불교 신앙과 행사가 진행되고 있

었다. 이 점에서 유생들의 학문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거나 불교를 정통과 이단의 관점에서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는 모두 왕권의 논리였다기보다는 유학자들의 논리였다.

용비어천가에 담긴 유교적 합리주의는 기본적으로 편찬자인 유신들에 의해 기획된 것이다. 발문

(跋文)을 쓴 최항(崔恒)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뒤에 오는 임금이 이것을 보

면, 오늘날 흥한 바의 근본을 미루어 볼 수 있고, 계속 뒤를 이어 가면서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

각이 더욱 일어나, 나라의 법을 감히 스스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오늘날

평안한 바의 근원을 미루어 보고,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더욱 일어나, 애모의 정

성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이윤석 옮김 1997, 426).”

Ⅳ. 결론: 신화 vs. 역사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해 예정된 것이었음을 125개의 장편 서사를 통해 일관되게

설득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용비어천가의 서사 구조는 치밀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용비어천가는 용

들의 노래인 동시에 백성의 노래가 되어야 했고, 영웅들의 신화인 동시에 역사의 훈요(訓要)가 되어

야 했다. 이것이 용비어천가에 내재된 모순이자 긴장의 원천이었다.

원래 괴력난신(怪力􂕊神)을 언급하지 않았던 공자의 관점에 충실하자면(『􂗳語』, 術而), 유교의 천

명 개념은 신화와는 무관했다. 그러나 유교입국을 천명으로 정당화하려던 조선의 건국 주체들과 용

비어천가의 편찬자들로서는 적잔(賊殘)의 필부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화의 도입이 필요했고, 동시

에 그 신화들을 살아있는 역사로 재구성해야 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했던 방

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사를 신화화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를 역사화하는 방식이었다.

내용상으로는 본가 부분이 전자에 해당되고 계왕훈 부분이 후자에 해당된다.

사실 이성계의 선조들은 역사에서 소외된 집단이었다. 이성계의 시조는 어쩔 수 없이 동북 지방으

로 옮겨 살아야 했던 이주민 집단이었고, 이성계의 증조부와 조부는 당시에도 알려진 행적이 거의 없

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조실록을 열람했고, 관련된 기록과

행적을 수집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신화 창조의 필요성을 증

대시켰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자들은 역사의 공백을 영웅적인 기담으로 보충했고, 그 결과 그들은 모

두 하늘을 나는 용으로 승천했다. 따라서 본가의 대부분은 6용들의 영웅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영웅들의 신화는 강력하고도 효과적이지만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용비어

천가의 편찬자들은 신화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화를 유교적 합리주의로 분

식시키려 했고, 신화적 서사의 곳곳에 인간의 판단을 개입시켰다. 그러나 신화가 이야기의 흐름을 주

도하는 한 유교적 합리주의는 언제나 부차적인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용비어천가의 편찬

자들은 과거의 신화를 미래의 역사에 합리적으로 전해주는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왕훈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역사의식은 현세에 군림하는 제왕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담지하고 전파하는 주체는 적어

도 이 시대에는 유교 지식인들이었다. 그래서 계왕훈에는 유자들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유자들은

제왕의 독단적 판단이 가져올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왕에게 학문할 것을 요구했고, 제왕의 정치

에 대한 유자들의 개입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

은 반드시 배척되어야 할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후왕들에게 생각만 하지 말고 유자들과 함께 학문할

것을 권고한 122장과 유학에 힘써 이단을 배척할 것을 권고한 124장의 내용은 용비어천가에 반영된

지식권력의 대표적인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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