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제2차 국내혁명 서사의 의미
Ⅱ.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함께 연 조선인 혁명가들
Ⅲ.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을 보존한 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합류
Ⅳ.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조선 혁명 추진의 목표를 명확히 제시
Ⅴ. 결론
• 국문초록
이 글은 1980년대라는 시점에서 제2차 국내혁명 서사를 통해 중국 초기 공산주의 혁명에서의 조선인들의 역할과 기여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아가 동북이 아닌 머나먼 광주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중국 공산주의 혁명 을 통해 조선 혁명을 추진하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이 들 조선인 혁명가들 앞에 대두된 출신과 혈연이 규정해준 민족성과 그것을 초월해야 하는 중화민족으로의 합류의 문제 즉 중화민족에의 융화와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 보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처럼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조선족의 중국 혁명에의 참가와 기여를 중국 공산주의혁명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재조명하고 중국 혁 명사에서의 위상을 재확인함으로써 조선족의 국민적 자격을 최대한 확고히 하였다. 동시에 조선족의 이러한 중국 국민 및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합류는 조선인의 민 족성과 독자성에 대한 보존을 그 전제로 초기 공산주의 혁명 시절부터 중국 공산당의 인정을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족의 국민적 정체성은 결코 조선인의 민족성이나 독자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역으로 철저한 민족성이나 독자성의 온전한 보존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제어 : 제2차 국내혁명 서사, 중국 조선족, 새벽의 메아리, 김운룡, 조선족의 정 체성
Ⅰ. 제2차 국내혁명 서사의 의미
지금까지 조선족 문단의 혁명 서사1)는 주로 항일 서사와 항일전쟁 승리 후의 국내 해방전쟁 서사, 이민 서사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항일전쟁시기와 국내해방전쟁시기, 그리고 이민의 역사 등에 대한 중국 학계와 조선족 학계 내지 조선족 사회의 발굴과 기록 사업이 비교적 잘 되어 있으므로 역사적 자료가 비교적 충분하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항일전쟁시기와 국내해방전쟁시기 혁명에 참가한 조선족의 주 요 활동반경이 주로 동북지역에 집중되어있어 우리에게 익숙하며 동북지역을 중심으 로 한 조선족의 이민사 발굴사업이 비교적 잘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제2차 국내혁명전쟁 등 항일전쟁 이전 단계에서의 중국에서의 조선인의 투쟁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1차 국내혁명시기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했거나 사업한 조선투사들과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투사들은 250여 명에 이르며2) 대부분 광주봉기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1) 조선족 문단의 혁명 서사의 개념은 이해영의 논문 「Memory and Reproduction: A Study of 1980s Chinese Ethnic Korean Revolutionary Narratives Focusing on Yun Il-san’s The Roaring Mudan River」에서 제기되었다. 이해영은 1980년대 중국 조선족 문단에 항일전쟁, 국공내전, ‘항미원조’ 등 전쟁에서의 조선족의 참전과 기여를 서사화한 작품이 대거 등장하여 문단의 한 현상을 이루었음 을 주목하였으며 이러한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틀어 혁명 서사라고 지칭하였다. 나아가 조선족의 혁명 서사는 항일 서사, 국내해방전쟁 서사, ‘항미원조’ 서사, 이민 서사, 반간첩 서사 등 다양한 형태로 창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서 비단 1980년대 뿐 아니라 건국 직후, 1960년대, 한중수교이후 등 조선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위기와 혼란에 빠질 때 집중적으로 등장한다고 보았다. Haiying LI・Mingjie REN,「Memory and Reproduction: A Study of 1980s Chinese Ethnic Korean Revolutionary Narratives Focusing on Yun Il-san’s The Roaring Mudan River」, Vol.18 No.2, 2018.
2) 곡애국・증범상, 뺷조남기전뺸, 연변인민출판사, 2004, 499면; 政協廣東文史資料委員會, 뺷廣東文史 資料(第27集)뺸, 廣州: 廣東人民出版社, 1980, 145면.
그런데 제2차 국내혁명과 광주봉기 중에서의 조선인 투사들의 눈부신 활약과 영용한 희생에 대해 우리는 정작 광주봉기의 영웅적 인 희생자 중에 조선인 투사들이 있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지식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1986년 중국 요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된 김운룡의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광주봉기를 정점으로 하는 제2차 국내혁명 서사로 중대한 문학사적,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소설은 양림3)과 그의 아내4), 박씨 3형제, 양달부 등 광주봉기에서 피흘려 싸웠던 실존 조선인 투사들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서 조선인의 투쟁의 공간을 기존의 동북지역에서부터 광주, 상해 등 중국 전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3) 이광일은 소설의 주인공 김림이 중국혁명에서 희생된 실존 조선인 혁명가이자 군사가인 양림을 원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광일, 뺷해방 후 조선족 소설문학 연구뺸, 경인문화사, 2003, 207면. 양림의 원명은 김훈이며 1901년 평안북도에서 출생,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아버지는 희생되며 그해 가을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 남만의 조선인반일단 체에서 꾸린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만주’의 항일독립군에 참가하여 청산리대첩에서 용맹하게 싸움. 이동휘의 고려공산당에 가입,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후, 황포군관한교 교련부 교관으로 임용되며 1925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동정부 주임 주은래의 직접적 영도를 받았으며 제1차 동정에 참가. 주은래의 파견으로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임명. 1926년 주은래의 지시로 황포군관학교 로 귀교, 북벌전쟁과 남창봉기에 참가. 중국공산당의 파견으로 소련 모스크바 보병학교에서 유학, 2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30년 중국 동북의 할빈에 도착,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부임. 동북 남만에서 리홍광과 함께 반석로농유격대를 반석로농의용군으로 개편, 중공중앙 서기국 서기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1932년 동북을 떠나 중화쏘비에트로 감. 중화쏘비에트 노동 및 전쟁위원회 참모장, 중국노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으로 부임. 1934년 중화쏘비에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 표대회에서 175명 중앙집행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 베트남인 홍수와 함께 중앙위원에 진출한 두 사람 뿐인 외국 국적 혁명가. 1934년 10월 중앙군사위원회 간부퇀에 소속되어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오르며 1935년 10월 섬북에 도착 장정을 승리적으로 완수. 1936년 홍군의 동정 중, 황하도 하 작전에서 영용히 희생. 중국 혁명 중, 그는 필사제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남창봉기 참가자 명단에는 필사제로 기록되어있다. 姚仁雋, 뺷南昌、秋收、廣州起義人名錄뺸, 北京: 長征出版社, 1987, 24면; 뺷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집(하책)뺸, 중국: 요녕민족출판사, 1987, 1331면; 리광인, 「양림 연보」, 뺷홍군장령 양림뺸, 중국: 민족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2012, 389~402면 참조.
4) 소설에서 리금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김림의 아내는 원명이 김금주이고 “3.1”운동 중에서 김림과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르렀으며 김림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혁명에 참가. 중국에서 는 리추악(李秋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김림과 함께 남창봉기에 참가하였고 소련에 유학 하였다.
소설은 주인공 김림과 그의 아내 금주의 투쟁의 궤적을 따라 중국 초기 공산주의 혁명에서 조선인 투사들의 공헌과 기여를 확인하고 있으며 제2차 국내혁명전쟁 당시, 광주에 모인 조선인 투사들의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하고 광주라는 지역적 공간이 중국 조선족의 혁명사에서 차지하는 중대한 위상과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김운룡은 자기가 뺷새벽의 메아리뺸를 쓰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이 17년전 24살 때, 즉 1968년 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68년은 바로 중국 당대사에서 10년에 거치는 전대미문의 동란인 문혁이 폭발한지 2년째 되는 해로, 중국 전역은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있었으며 조선족은 정치적 투쟁에 더해 중조 국가 간 갈등의 악화 속에서 민족단위의 불신이라는 낙인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 고 있었다.5) 당시 김운룡이 동북항일투쟁사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동북항일전 쟁시기 남만당조직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자 1930년 중공반석중심현위서기였으며 형님 박진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가열처절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박봉을 찾아 갔을 때 박봉은 “반역자”란 큰 패쪽을 목에다 걸고 투쟁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문혁 당시 많은 조선족 혁명가들의 처지였다. 박봉과의 만남을 김운룡은 아래와 같이 회고 하고 있다. 그의 형님 박진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다가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우수 한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그는 박진과 함께 쏘련에서 광주로 오던 일로부터 시 작하여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조선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광주봉기의 눈물겨운 전투과정에 대하여 밤낮 3일동안이나 이야기하였다. 그는 이야기할 때 때로는 울기도 했고 때로는 웃기도 했으며 지어는 조용히 노래까지 불렀다. 그는 이야기를 결속짓자 아주 정색한 기색을 지으며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조선족투사들에 대해 쓰는 사람이 적구만. 만약 내가 조건이 된다면 회상기를 쓰겠는데. 그러나 나는 못쓰오. 동무는 젊은 사람이니까 앞으로 꼭 써보오.》6)
5) 이해영, 「기억과 재현: 1980년대 중국 조선족 혁명서사 연구」, 김재용・이해영 엮음, 뺷귀환과 이산뺸, 소명출판, 2021, 352~355면 참조.
6)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중국: 요녕민족출판사, 1986, 396~397면.
박봉의 술회에서는 고향인 조선반도와 멀리 떨어진 이국 땅 중국의 최남단 광주에 서 중국 혁명에 투신하여 목숨 바쳐 싸웠지만, 그러한 조선인 투사들의 사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과 그 가열처절한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회상기를 써야 할 자기가 정작 “반역자”라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자유와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속수무책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김운룡의 뺷새 벽의 메아리뺸 역시 반우파투쟁과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운동, 문혁 등 중국의 정치적 동란을 겪은 뒤, 조선족의 역사를 재정리하고 중국 역사 속에서 조선족의 위치를 재정립함으로써 조선족의 국민적 정체성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1980년대 혁명의 호출과 혁명 서사 쓰기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라는 시점에서 뺷새벽의 메아리뺸가 기억하고 재현한 중국 초기 공산주의 혁명에서의 조선인들의 역할과 기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동북이 아닌 머나먼 광주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어떻게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 혁명을 추진하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 앞에 대두된 출신과 혈연이 규정해준 민족성과 그것을 초월해야 하는 중화민족으로의 합류의 문 제 즉 중화민족에의 융화와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 보존의 관계를 소설이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중국 초기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연 광주봉기에서 영용히 싸운 조선인 혁명가들의 불굴의 형상과 투쟁 궤적을 기억하고 재현함으로써 통상 30년대 초반 동북항일투쟁으로부터 시작되던 조선족의 중국 혁명에의 참가와 기여를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재조명하고 중국 혁명사에서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있다.
Ⅱ.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함께 연 조선인 혁명가들
1927년 12월 11일 개시된 광주봉기는 남창봉기, 추수봉기와 함께 중국 대혁명의 실패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인 혁명세력으로 봉기를 지도하고 정치무대에 등장하였음을 상징한다. 광주봉기는 기세드높은 제2차 국내혁명전쟁의 정점이자 대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피비란 대도살을 감행한 장개석 반동군대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무장항거이며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연 세기적 장거이다.7)
7) 周家彬, 「試論1920至1950年代中共黨史敘事的轉型-以南昌起義、秋收起義與廣州起義的敘事為主 綫」, 뺷人文雜志뺸 12, 2019; 劉學禮, 「紀念南昌起義、秋收起義、廣州起義80周年研究綜述」, 뺷理论研究 动态뺸 8, 2018; 馮昕, 「1927年廣州起義的特點和教訓-紀念張太雷犧牲90周年」, 뺷史海探迹뺸 3, 2018.
소설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광주봉기의 최고 지도부의 핵심 성원으로 참여하여 광주봉기를 지휘하였고 광주 봉기의 가장 가열처절한 격전지에 투입되어 목숨 걸고 싸웠으며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봉기의 승리를 위해 장렬히 희생되었음을 기억하고 재현하고 있다.
《이번에 주오호동지는 저와의 담화가운데서 〈김림동지는 조선동지들중에서 위망이 높은 공산주의자입니다. 조선동지들이 혁명에 참가한 수자는 비록 적으 나 그 영향만은 아주 큽니다. 그들은 앞으로 광범한 조선대중을 묶어세우는데 골간적인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8. 7〉회의문건을 김 림동무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8)
위의 인용문은 광주봉기의 주요 지도자이며 초기 중국공산당의 핵심간부인 장뢰가 광주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온 뒤, 특별히 김림을 만나서 중국공산당 ‘8.7’회의 정신을 전달하고 남창봉기와 추수봉기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다. 김림과 장뢰의 관계에 대해 소설은
“김림은 오래전부터 장뢰동지와 잘 아는 사이였다. 1925 년, 김림이 동정군의 학생군 제3기 학생대대 제4대 대장직을 맡았을 때 장뢰는 중공량광구위 지도성원의 한사람으로 사업하면서 당의 내부기관지인 《인민주간》의 주필을 담당하였었다. 그 시기 장뢰는 동정 전선에 전투정황을 료해하러 몇차례 왔었 는데 김림이 나서서 소개한적이 있었다.”9)고 서술하고 있다.
8)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279~280면.
9)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278면.
이는 조선인 공산당원인 김림이 중국 공산당의 핵심간부들과 밀접한 동지적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주며 조선인 혁명가가 중국공산당의 핵심 부서에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뢰 는 김림 및 광주의 조선인 혁명가들에 대한 중공 량광성위 군위서기 주오호의 높은 평가와 향후 이들이 조선인 대중을 묶어세우는 데서 골간작용을 할것이라는 기대를 전달하였다. 동시에 장뢰는 한구에서 열린 ‘8.7’회의의 내용과 정신 및 의의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인 정치력량으로 장개석의 반동정변에 맞선 첫 무장봉기인 남창봉기 및 모택동이 지도한 추수봉기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향 후의 투쟁방향과 노선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김림을 위수로 한 광주 의 조선인 혁명가들을 중국 혁명의 중요한 역량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중국 혁명을 위해 함께 몸 바쳐 싸울 운명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밀회담 장소가 적들에게 포위되자 김림은 장뢰의 안전을 위해 함께 피하자는 장뢰에게 먼저 피하라고 한 뒤, 자기는 장뢰를 엄호하면서 적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떴다. 긴급한 관두에 위험을 무릅쓰고 당의 주요 지도자를 보호하는 김림의 모습에 장뢰는 깊이 감동한다. 이를 통해 혁명을 위해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위험 앞에 선뜻 나서며 중국 공산당에 무한히 충성하는 조선인 혁명가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보여주 었다. 김림은 조선인 동지 양달부와 함께 광주봉기 개시 전야의 지휘부의 비밀 회의에 참가하며 양달부와 함께 봉기의 총지휘를 맡게 된 봉기군 총사령 엽정동지의 군사참 모로 행동하라는 성위의 결정을 전달받게 된다. 군사참모는 전투가 벌어지면 각 전투 마당으로 뛰어다니며 전투정황을 살펴야하므로 이는 상당히 위험하고 간고한 임무이 다. 김림과 양달부는 기꺼이 조직의 배치에 복종하며 견결히 임무를 완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어 봉기의 준비정황에 대한 회보 및 적들의 군사포치 정황에 대한 회보와 함께 봉기군 총사령 엽정이 전투임무를 포치하였다. 광주봉기의 모든 중요한 계획과 작전배치가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이다. 회의가 결속되자 김림과 양달부는 엽정, 장뢰, 운대영, 서광영 등 봉기의 핵심지도자들을 배동하여 교도퇀의 병영인 4표영에 도착하며 봉기의 첫 포를 쏘아올린다. 소설은 김림과 양달부 두 조선인 혁명 가가 광주 봉기의 총지휘자인 봉기군 총사령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되어 봉기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밀적인 부서에서 사업하게 되었음을 통해 조선인 혁명가들에 대 한 중국 공산당의 두터운 신임과 긍정을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광주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의 중요한 위상과 눈부신 활약을 잘 보여준다.
“사표영에 주둔하고 있는 교토돤 제5련의 전사들은 모두 다 잠 못이루고 있 습니다. 어떤 전사는 《아리랑》 노래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또 어떤 전사는 《국 제가》를 부르며 총을 닦고 있습니다. 그밖에 많은 전사들은 공책장을 찢어서 자기의 부모처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몇시간만 지나면 가 렬처절한 싸움터로 달려나가게 되는 전사들은 이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다 전쟁마당으로 나가게 되면 희생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밤이 그토록 소중하였던 것입니다. 자고로 생사를 가리는 싸움터에 서는 희생이란 것을 피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대중의 행복과 민족의 래일을 위해 싸우는 이 성스런 싸움에서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그런 만단의 사상적 준비를 갖추고 이 편 지를 씁니다. ……”10)
위의 인용문은 봉기에서 희생된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학생이자 전사인 석수가 돌격전을 앞두고 남긴 편지이다. 희생된 석수의 편지는 바야흐로 돌격전을 앞둔 조선 인 전사들의 불면의 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전사들은 “아리랑”을 흥얼거리고 어떤 전사들은 “국제가”를 부르며 총을 닦았으며 많은 전사들은 부모와 가족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것으로 곧 벌어지게 될 격전에서의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전투가 즉 광주봉기가 대중의 행복과 민족의 내일을 위한 성스러운 싸움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기꺼이 자기의 목슴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다. 군복 리복림의 소굴을 짓부시기 위해 배를 타고 강남으로 진격하는 200 여명의 돌격대원 속에도 조선전사 들 60여명이 포함되어있었으며 이들의 지휘원은 김림이었다. 이처럼 광주 봉기의 전 과정에서 조선인 전사들은 언제나 가장 간고하고 위험한 관두에 앞장서 싸웠다. 봉기군 중, 교도퇀 5련은 전부 조선인 전사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전투력이 뛰어 나고 용맹하여 봉기부대의 “돌격대”로 되었다. 이들은 적의 병영으로 돌격해들어가 기도 하고 또한 강한 적의 화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한치한치 앞으로 밀고나가 고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가열처절한 돌격전을 앞두고 앞의 석수의 편지가 보여 주었듯이 5련 전사들은 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광주봉기는 중국 혁명사상 소비에트 혁명의 시작11)으로 첫 “도시 속의 소비에트 정권”인 광주소비에트정부12)를 탄생시켰다. 광주봉기는 그만큼 적아 간의 치열한 판가리 싸움이었으며 수많은 당의 지도자들과 봉기군 전사들의 희생을 그 대가로 하고 있었다. 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대부분이 희생 되었으며 극 소수만이 살아남아 해륙풍으로 후퇴하거나 조직의 배치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지속하여 중국 혁명에 참가하였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했던 다른 한 걸출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전기에서는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 양달부가 봉기 중 조선인들의 희생을 두고 “우리 조선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말거야. 우리들은 너무나 열정적이야.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는 법만 알지 후퇴해서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몰라”13)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39면.
11) 鄧中夏, 뺷鄧中夏文集뺸, 北京: 人民出版社, 1983, 421면.
12) 中央檔案館 編, 뺷中共中央文件選集(第4冊)뺸, 北京: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89, 30면.
13) 김산・님 웨일즈, 뺷아리랑뺸, 동녘, 1997, 153~154면.
그만큼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은 두려움없이 영용하게 싸웠으며 다수의 희생으로 봉기의 승리를 거두고자 했던 것이다. 소설은 제3국제에서 훈련을 받고 북벌군의 고문으로 파견되었던 안청, 소련에서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다시 중국 혁명을 위해 광주에 와서 광주봉기에 참가한 박영 등의 장렬한 최후를 보여주었다. 또한 사하를 지키다가 마지막에는 탄알이 떨어져 거의 전부 희생된 사하 수비 봉기부 대 중에도 조선인 전사 100 여명이 포함되어있었고 광주봉기 전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는 근 200 여명에 달하며 김규철의 딸 나어린 옥별이도 광주봉기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가며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소설은 중국혁명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의 기여와 공훈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항일전쟁, 국내 해방전쟁(국공내전)으로부터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인 광주봉기에까지 소급하고 확장하였으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 측은 광주봉기에서의 조선인 혁명가들의 기여와 희생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건군시기로부터 말해보기요. 우리 당이 일찍 발동한 세차례의 무장봉 기가운데서 수많은 조선족동지들이 우리들과 어깨겯고 싸웠으며 인민군대의 창건에 참여했소. 례하면 광주봉기에 조선족동지들이 적어도 250명이 참가하 였는데 양달부동지는 명포수로서 봉기군의 포병지휘관이였소. 전투가 긴장할 때 손수 포를 조준하여 장발규의 제4군 군부를 명중했더랬소. 봉기총지휘부 호 위대의 성원들은 일부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오고 일부는 중산대학에서 왔는데 대다수가 조선족동지들이였소. 봉기가 실패했을 때 그들은 쌀가마니로 바리케 트를 쌓고 진지를 마지막까지 굳게 지키면서 봉기군주력의 철퇴를 엄호하였소. 섭영진동지는 당시 이 호위대를 친히 지휘하여 반격하는 적들과 싸웠소. 그는 매번 광주봉기를 회상할 때면 언제나 이 조선족 호위대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하였소.》14)
위의 인용문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던 양상곤이 조선족 간부 조남기를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군부 부장이라는 요직에 임명하기 직전, 그를 찾아 나눈 특별담화 중의 한 단락이다. 당시 조남기는 “저는 종래로 분에 넘치는 욕망을 감히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는 조선족간부이므로 이렇게 중용과 신임을 받게 되리라고는 근본적으로 생각지 못하였습니다.”15)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양상 곤은 확실히 조남기의 임명문제에서 그가 소수민족간부이므로 “몇백만 군대의 총관 리인이라는 이렇게 큰 권력”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양상곤은 자신은 이런 견해를 견결히 반대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는 각 민족이 일률로 평등하다고 명문으로 규정되어있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중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어 양상곤은 “동무에 대한 등용을 두고 나는 허다한 지난 일들을 생각하게 되며 일찍 나와 함께 어깨겯고 싸웠던 조선족전우들을 생각하게 되오. 우리는 오늘 속심을 나누는데 나는 동무와 공동히 중국혁명을 위해 세운 조선족동지들의 위훈들을 회상하려 하오”16)라고 하면서 바로 위의 광주봉기에 대해 회상하였다.
14) 곡애국・증범상, 뺷조남기전뺸, 연변인민출판사, 2004, 499~500면.
15) 곡애국・증범상, 앞의 책, 498면.
16) 곡애국・증범상, 앞의 책, 499면.
중국혁명에 대한 조선족 혁명가들의 공헌과 기여에 대한 양상곤의 회고는 광주봉 기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으로서의 광주봉기가 전체 혁 명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양상곤은 회고에서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족 혁명가들의 구체적인 인원수까지 명시하면서 봉기군 주력의 철퇴를 엄호하기 위해 쌀가마니로 바리케트를 쌓고 마지막까지 싸웠던 그들의 불굴의 정신 을 높이 평가하였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들에 대한 중국공산당 측의 높은 평가와 충분한 긍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조선족 출신의 간부인 조남기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소수민족이라는 자의식과 굴레에서 해방되어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이라는 요직에 발탁될 수 있는 것도, 오늘날 조선족이 중국의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이러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공헌과 기여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주의혁명의 기원으로서의 광주봉기에 참여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희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며 소설은 바로 조선인 혁명가들이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함께 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Ⅲ.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을 보존한 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합류
뺷새벽의 메아리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광주에 모인 조선인 혁명가들의 출신지를 중국 동북이 아닌 조선반도로 기억, 재현하고 있으며 고향으로서의 조선반도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에 출간된 조선족 문단의 대부분의 혁명 서사들이 조선인 혁명가들의 고향을 중국 동북으로 혹은 조선 반도와 중국 동북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했거나 조선반도에 대한 그리움이나 특별한 감정 같은 것을 극력 억제하고 표출하지 않았던 것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점이다. 소설은 초반에 주인공 김림과 그의 아내 금주가 조선반도 출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고향에 대한 그들의 사무치는 그리움과 절절한 애수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압록강을 건너설 때 읊던 그 시말이요. 조용할 때마다 듣고싶소.》 김림은 이렇게 말하고서는 또 방안을 거닐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목석은 아니요. 감정이 있는 산 사람들이란 말이요. 그러기 에 그들도 고향을 생각하고 부모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법이요. 자 그러니 어서 그 시를 한번 더 읊어보오.》 《당신의 마음을 알만해요. 오늘 휘영청 밝은 달밤에 고향이 그립단 말씀이 지요. 그럼 읊어보겠어요.》 ……17) 《저도 무슨 정신으로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서울에서 평양까지 기차를 탄 다음엔 그냥 걸어서 압록강변에 도착했어요. 압록강의 푸른 물결을 건느자니 마치 어머니와 석별하는것처럼 가슴이 아파났어요. 수많은 난민들이 눈물을 뿌 리며 압록강을 건느지 않겠어요. 그래서 전……》18)
17)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7면.
18)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87면.
위의 인용문에는 기타 조선족의 혁명 서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중조 국경의 상징인 “압록강”이 거침없이 드러나며 “압록강을 건너설 때” 즉 국경을 넘을 때 읊었던 두고 온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담은 시가 등장한다. 주인공 김림 자신이 아내에게 공산주의자들도 목석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도 감정이 있는 산 사람이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향수의 감정에 대한 고백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한 조선반도의 마지막 끝인 “압록강”을 넘을 때의 슬픈 심정과 함께 수많은 조선인 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넘었음을 강조하였다. 소설은 고향인 조선반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조선에서 있었던 주인공들의 경력, 가족사항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회억하고 있는데 특히 일본 침략자를 반대하여 전 조선적으 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 대해서는 김림과 금주 그리고 김림의 가족 등을 중심으 로 ‘31.’만세운동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3.1’만세운동에서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림의 아버지의 희생과 주모자로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김림의 행적을 통해 중국 광주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고 있는 조선인 혁명가들의 뿌리가 실은 조선반도에 있으며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비롯한 반일운동이 실은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 의 혁명적 기초가 되었으며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또 곳곳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의 민족적 특성과 독자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자주 조선 여성의 아름다움, 현숙함과 함께 남편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 과 믿음, 지조 그리고 조선인 여성 혁명가들의 용감성, 불굴의 투쟁정신과 희생정신 등에 대해 강조하였다. 아버지를 잃고 절망과 비통속에 모대기는 자기에게 처녀의 순정을 주저없이 준 안해, 남편의 성공을 위하여 자기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안해, 그가 헤쳐온 가시덤불길은 조선녀성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시련의 길이였고 참된 삶을 위하 여 굴할줄 모르는 조선녀성들의 투쟁의 길이였다.19)
《너무 상심해마세요. 참다운 안해들은 다 그런거예요. 우리 조선녀성치고 어 느 누가 성스런 사업에 몸적신 남편을 원망하겠나요, 옥별이 어머니도 마찬가 지지요. 그러기에 조선녀성들의 마음이 비단결처럼 아름답다고 동방에서 이름 나지 않았나요.》20)
19)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21면.
20)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23면.
혁명에 몸바친 남편을 찾겠다고 6년이란 세월을 류리걸식하면서 헤매던 김 규철의 안해, 진리와 정의를 모색하려고 고향을 떠나 광주로 온 설옥이 …… 그는 금주를 비롯한 우리 겨레 녀투사들의 호매로운 기백이 반드시 중국혁명 의 한페이지에 빛나는 자욱을 남기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21)
일제 경찰에 쫓겨 북경, 상해를 거쳐 광주로 와서 혁명에 참가한 남편을 찾아 불원 천리하고 류리걸식하면서 광주까지 왔다가 결국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병으로 길거 리에서 사망한 김규철의 아내의 죽음을 두고 김규철과 그의 동지들은 매우 애석해하 고 비통해한다. 그런데 그들은 남편을 위하여 자기의 순정을 바치고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김규철의 아내를 단지 현숙한 한 아내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조선 민족 여성의 형상을 대표하는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순박함, 고결함, 남편에 대한 충성심, 정조를 소중히 여기는 순결함, 호매로운 기백 등을 조선 여성들 고유의 특징 으로 조선 여성을 대표하는 기표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 조선민족의 여투사들이 중국 혁명의 한페이지에 빛나는 자욱을 남길 것이라고 하면서 소설은 이들 여성들, 아내들 의 민족성을 각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림은 대혁명의 격랑 속에서 국민혁 명군의 군관으로까지 되었으나 곧 대혁명을 배반하고 장개석 수하의 반동군관으로 전락한 그의 운남강무당 포병과 동창생인 량진명의 부인 진옥매에게
“우리 조선녀성 들은 〈동방례의지국의 아릿다운 여인〉으로 이름 떨쳐 실로 외모도 아름답고 마음씨 도 곱답니다”22)라고 스스럼없이 자랑한다. 《…… 그 처녀는 고향이 전라도라더군요 올해 스물한살인데 참 귀엽게 생긴 처녀입니다. 얼굴이 동글사하고 해사한데다 언제나 해실해실 웃기에 우리 조선 동지들의 사랑을 무척 받았지요 …… 전투가 시작되자 그 처녀동무는 자기의 미혼부인 머슴총각옆에서 놈들을 향 해 사격을 했댔습니다. 그 처녀동무는 숨이 지기 전에 자기 미혼부의 손을 꼭 잡으며 〈내가 죽거들랑 무덤에 꼭 조선사람이라고 비문을 쓴 비석을 세워주세 유. 네? ……〉라고 말했지요 ……
21)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213면.
22)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34면.
전투가 끝나자 조선전사들은 그를 높은 산봉우리에 묻은 다음 돌비석까지 세우고 〈조선녀렬사〉란 비문을 큼직하게 써주었습니다. 200여명이나 되는 우 리 조선전사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그 처녀동무의 무덤앞에서 통곡하였지요. 더 욱이 그 머슴총각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때의 정경을 회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솟구칩니다. 얼마나 훌륭한 우리 민족의 녀성입니까? 숨지는 그 시각에도 자기 민족의 넋을 잃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그 처녀동무의 넋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합니까?》23)
23)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09~310면.
위의 인용문은 쏘련에서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와 엽정독립퇀의 포병 대장으로 있으면서 광주봉기에 참여한 김림의 전우 리영이 마음 속으로 열렬히 사모 하는 처녀 설옥에게 전라도 출신 조선 여전사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사실 리영은 이미 편지로 한설옥에게 위의 조선인 여전사의 영용한 사적에 대해 소개하면서 자기가 지은 가사에 작곡을 해줄 것을 부탁하였었다. 리영은 그 처녀의 고향이 전라도였음을 특별히 명기하였고 그 조선처녀가 자기가 죽으면 무덤 에 조선사람이라는 비문을 꼭 세워달라고 간절히 요구했다고 강조함으로써 이를 통 해 그 여전사의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또한 조선인 혁명가들 이 혁명의 수요에 의해 중국에 와서 중국 혁명에 투신했지만 그들이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과 긍지를 마음 깊이 품고 있으며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 보존에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전투가 끝난 뒤에 전우들이 그 조선 여전사의 무덤에 세워준 “조선녀렬사”라는 큼직한 비문은 그러므로 단순한 비문이 아니라 중국 땅에서 조선 인으로서의 민족성과 독자성을 보존하고 지켜가려는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의 굳은 맹세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리영은 “숨지는 시각에도 자기 민족의 넋을 잃지 않”는 숭고함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은 이러한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의 보존이 결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만 돌연히 솟구치는 급작스러운 격정이 아니라 지극히 평온한 삶의 순간순간 에 스며들어있으며 그것이 특별한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의 일 상적 삶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13호 문패가 달린 침실만은 다르다 이 침실은 황포에서 이름난 《조 선사람침실》이다. 여기에 들어서면 조선글로 쓴 표어들이 한눈에 안겨왔고 그 밖에도 《홍길동전》, 《춘향전》 등 조선고전문학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지어는 자그마한 밤나무를 심은 참대통이 출입문 량쪽에 놓여져있었다. 이 침실에는 황포군관학교 중심훈련처 소좌급교관 김규철과 리영, 로어교관 박영과 원지욱, 학생대 대장 최석천과 패장인 석수 등 7명의 조선교관들이 있 었다. 이 《조선사람침실》은 실로 다른 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이 실의 주인들이 다 모이게 되면 조선말을 내놓고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엄금되였다. 그리고 서로 속심을 나누는 것이 자연적으로 습관되였기에 일단 자유시간이 돌아오면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사람학원들은 거의다 이곳에 모이군 하였다. 그들은 한자 리에 모여앉아 고향이야기도 나누었고 지어는 누가 편지를 받아도 가지고 와 서 같이 읽기도 하였다.24) 이처럼 황포군관학교 113호 침실은 “조선사람침실”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이들이 조선사람임을 증명하는 기표인 조선글로 된 표어, “홍길동전”, “춘향전” 등 조선고전 문학작품들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다른 언어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조선말만 통용되고 있다.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중국 땅에서 민족어와 민족적 정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이 중국 속의 조선인으로 스스로의 독자성과 민족적 특징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중국의 광주라는 이국타향에서 이들은 “조선사람”이라는 가 장 원초적인 혈연적 유대에 의해 하나로 이어질 수 있었으며 민족의 보존과 계급혁명 즉 공산주의혁명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소설은 주장한다. 광주에서 혁명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혈연적 유대로 인해 이들은 무릇 어느곳에 조선사람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면목을 알든지 모르든지 꼭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런 끈끈한 정으 로 금주가 광주에 도착하자 김림과 금주의 혼례를 준비했던 것이다. 김림과 금주는 “민족의 얼을 잃지 않은 이 열혈남아들이 그 어디에서나 자기 민족의 풍습과 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오는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웠”25)다.
24)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66면.
25)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85면.
이러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독자성 과 특수성은 단순히 그들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언어와 민족적 전통, 풍속과 습관에서뿐만 아니라 그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혁명의 길에서 그들이 겪어온 준엄한 시련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황포군관학교의 장발규가 조직한 특무영에는 조선동지들이 150여명이나 되는데 대부분 공산당원이다. 이에 광주봉기의 지도자 장뢰가 금방 건립된 적위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동지들을 소개시켜달라고 하자 김림은 이를 쾌히 수락한다. 양달부, 리영, 김산, 원지욱, 무정, 안청, 리빈, 김규철, 박영 삼형제 등 조선동지들의 경력과 그들이 겪은 시련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 김림의 어조에는 긍지가 넘친다. 이들은 대부분 운남강무당이거나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로서 군사지휘능력을 갖고 있으며 또 모스크바군관학교를 졸업하거나 쏘련위국전쟁에 참가한 실전경험을 갖고 있으므로 광주봉기에서 군사적 주력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 거의 전부는 준엄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기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혁명을 지속한 믿음직한 동지들이다. 김림의 소개를 듣고난 장뢰 역시 중국공산 당 량광성위 군위서기 주오호가 조선동지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하면서 “그들 은 우리 당의 보배들입니다. 그들은 대개 다 솔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아주 용감합니 다”26)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 측에서는 조선인 혁명가들의 민족성과 독자성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고 배려하였다. 이제 밤이면 교도퇀과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그리고 중산대학 조선사람대표 들과 제3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조선인 대표들의 특수한 모임이 있게 된 다.27) 엽용은 조선사람이 있는 련의 영장이기에 김림과 김규철이 특별초청을 한 것이다. 또 조선동지들과 오래동안 같이 사업한 관계로 조선동지들의 생활습성 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동지들과 특수한 감정이 있는 엽용동지는 기꺼 이 그들의 초청을 받고 왔던 것이다.28)
26)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283면.
27)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13면.
28)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18면.
《…… 성위에서는 우리 조선동지들의 구체적인 정황을 고려하여 이 모임을 비준하였습니다. 오늘 이 모임에서 우리는 광주봉기에 관한 상급의 지시를 전 달하겠습니다.》 …… 석쉼한 김림의 말이 끝나자 뒤미처 조선음식들로 갖추어진 술상이 차려졌 다.29)
29)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18~319면.
역사적인 광주봉기를 앞두고 교도퇀과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제3국제공산당에 서 파견한 조선인 대표들은 광주 조선인들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경상도 국수집에서 민족단위의 특수한 모임을 갖게 되었다. 모임에는 조선인 혁명가들 외에 조선사람이 모여있는 련의 영장으로 조선인 혁명가들과 오랫동안 같이 사업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생활습성을 잘 이해하고 조선인 혁명가들과 특수한 감정이 있는 엽용이 초대를 받고 기꺼이 참석하였다. 이 모임은 중국공산당 광주 성위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의 구체적 인 정황을 고려하여 봉기 전야에 특별히 이들만의 민족단위의 모임을 허락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 공산당 지도층이 조선인 혁명가들의 민족단위의 보존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이러한 민족적 결집과 응집력이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역시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민족성과 독자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은 중국 남방의 백성들에게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가?
《에헴, 김림 영장과 그의 부인은 우리를 도와 토호렬신을 타도하고 감조감 식까지 하여주었수다. 이렇게 훌륭한분들이 …… 에헴,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조선사람이지유. 저 5년전에 아산 삼촌이 영국상선을 타고 조선 부산항 구에 갔다오질 않았수. 이분들의 고향이 바로 조선이란말이유. 이분들은 우리 와 같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싸우고 있수다. 에헴.》
두보산이 여기까지 말하자 쥐죽은 듯이 조용하던 주위는 삽시에 웅성웅성 끓기 시작했다. 《아, 조선사람이라구?!》 《그런데 우리 말을 저렇게 잘하우?》 모여온 사람들은 혀를 차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기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을 생전 처음 보았던 것이다.30) 농민자위군 두보산을 비롯한 라건촌 농민들에게 김림과 금주는 그들을 도와 토호 렬신을 타도하고 감조감식까지 하여준 훌륭한 사람들이며 생명의 은인들이다. 두보 산은 마을사람들에게 김림과 금주가 조선사람임을 소개하는데 이들에게 조선이란 “5년전에 아산 삼촌이 영국 상선을 타고 조선 부산항구에 갔다온” 아득히 먼 곳으로 인식되며 이들은 조선 사람을 생전 처음 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생전 처음 본 머나먼 조선에서 온 조선사람인 김림과 금주가 자기네와 같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 여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고생하며 싸우고 있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즉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조선인으로서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들의 최종 목표는 가난한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하는 계급혁명 즉 공산주의 혁명에 있음을 명확히 보아낸 것이다. 《여러분, 저와 저의 안해는 모두 조선사람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머나먼 조 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압박과 착취를 받던 사람들 입니다. 이제 금방 두보산 대장이 하신 말씀은 너무 과분합니다. 우리는 가난 한 백성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고 많습니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의 령도밑에 한사람처 럼 뭉쳐 량석찬같은 토호렬신을 타도하고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 니다. 만약 우리가 합심되여 총칼을 들고 싸운다면 우리는 꼭 토호렬신과 군벌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31)
30)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58면.
31)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58~59면.
이에 김림과 금주는 자기들이 머나먼 조선에서 온 조선사람임을 솔직히 인정함과 동시에 자기들 역시 라건촌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압박과 착취에 시달리던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계급성 속에 내포시키고 승화시킨다. 그러면서 김림 과 금주는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우리’ 속에 포함시켜 그들과 라건촌 농민들을 포함 한 압박과 착취에 시달리던 모든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의 영도 밑에 합심하여 토호렬 신을 타도하고 제국주의자를 중국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처럼 김림 과 금주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특수성과 독자성을 보존한 채 가난한 사람들 즉 ‘우리’ 속에 포함된다. 이 ‘우리’는 중국 혁명에 투신한 아버지 김규철을 찾아 어머니 와 함께 낯설은 광주 거리를 헤매다 어머니가 병으로 거리에서 사망하여 의지가지 없는 고아로 되어 울던 옥별의 존재로 하여 더욱 확실해지고 단단해진다. 어머니를 잃고 광주 거리에서 오갈 데 없이 된 옥별이가 의협심이 강하고 선량한 중국인 농민 두보산에게 구원되어 두보산의 양딸로 그의 집에서 성장하게 됨으로 하여 ‘우리’의 의미가 더욱 굳건해진 것이다.
《그건 안되네 안돼! 적은이는 막아낼 수 없네. 나야 이미 쉰이 넘지 않았나! 그러나 옥별이는 아직 어린애야, 조선투사들의 살붙이야, 어서……》……32) 두보산이가 자기 생명을 바쳐 옥별이를 구원한 것이 순전히 딸자식에 대한 사랑에서인가? 아니였다. 비록 아직까지 진정한 무산계급의 선봉전사라고 말 하기는 때가 이른 두보산이었지만 자기의 생명으로 한 조선혁명가의 혈육을 보호한 그 넋만은 고상하였고 위대한 것이였다. …… 《…… 김림영장님은 조선사람이면서도 우리들을 친형제처럼 보살펴주고 사 랑해주었지요. 김영장님의 은혜야말로 우리는 죽어도 다 못갚지유, 못갚아유!》 …… 《…… 이제 너의 친아버지를 만나거들랑 두보산 아버지의 말을 하거라. 너 는 조선사람의 딸이자 중국사람의 딸이라구 말이다!》33)
32)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79면.
33)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82면.
악질민단의 돌연 습격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 두보산이 생각한 것은 자기 의 안위가 아니라 딸 옥별의 안위였다. 그는 옥별이가 꼭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옥별이가 다름아닌 조선투사들의 살붙이였 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보산은 자기의 생명으로 조선투사 김규철의 딸이자 자기의 양딸인 옥별이를 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감격을 금치 못하고 옥별이 아버지 김규철의 동지이자 조선인으로서 깊은 사의를 표시하는 금주에게 두보산의 최후를 목격하고 그의 부탁대로 옥별이를 안전하게 구해낸 중국인 혁명가 곱사등 로인은 조선사람이 면서도 자기들 중국인 농민들을 친형제처럼 보살펴주고 사랑해준 김림의 은혜야말로 죽을 때까지 갚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옥별이더러 아버지를 만나거든 잊지 말고 “너는 조선사람의 딸이자 중국사람의 딸이”라고 전하라고 했던 곱사등로인의 작별인사는 그만큼 의미심장하다. 중국인 아버지 두보산이 생명으로 지켜낸 옥별이 야말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하나의 ‘우리’로 된 상징인 것이다. 이 ‘우리’는 옥별의 친아버지 김규철에 의해 ‘중화민족’으로 명명된다. 이것은 수난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조선민족의 비참한 운명과 갈라놓을 수 없는 민족의 울분의 토로라고 느낀 김규철은 스스로 이를 사려물었다.
(옥별아, 아직까지 너는 모를게다. 너도 크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중화민족 은 지금 고통의 나락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너의 아버지는 전체 중화민족을 고 통속에서 건져주려고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다. 옥별아, 이 아버지는 앞으로도 그렇게 싸워갈 것이다. 너도 함께 싸우자.)34)
34)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03면.
일제경찰의 추격으로 동북에서 생이별한 딸 옥별이를 머나먼 광주 땅에서 우여곡 절 끝에 만나게 된 김규철은 옥별의 고통과 울분이야말로 조선민족의 비참한 운명으 로 인한 민족의 울분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 조선민족의 비참한 운명과 울분을 곧바로 중화민족의 고통으로 내포, 승화시키고 있다. 즉 조선민족은 자연스럽게 중화 민족 속에 내포되며 김규철은 자기가 전체 중화민족을 고통 속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스스로 자신을 중화민 족 속에 포함시키고 중국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웨치는 구호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만세!》 《장개석을 타도하자!》 《중국혁명승리 만세!》 금주가 소리높여 먼저 웨치자 수난자들도 따라 구호를 불렀다.35)
장개석 반동파가 일으킨 반혁명 폭란 속에서 불행히 국민당 반동파에 의해 체포된 금주는 사형장에서 생명의 최후 순간을 맞이하게 되자 주저없이 위의 구호들을 부른 다. 생명의 최후를 맞이한 순간에 가장 자연스럽게 폐부로부터 우러러나온 구호는 바로 “중국공산당 만세”, “장개석을 타도하자”, “중국혁명승리 만세” 등인데 이는 중국인 공산주의자들과 일말의 차이도 없으며 여기서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이 중화민족을 위한 혁명 속에 그대로 융화된 것이다. 그는 상해나 광주에서 만나본 허다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모두 다 중화의 한 성원으로 되어 억세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볼 때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솟 구쳤고 눈앞이 밝아졌다.36) 한번은 악서전투에서 사천군벌과 싸울 때 한 조선녀전사의 희생정황을 눈물 겨웁게 소개한적이 있었는데 끝말에 그는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녀투사를 노래하고싶습니다. 중화민족의 한 성원으로 용 감히 싸우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그래 우리가 노래하지 않으면 누가 노 래하겠습니까!》37)
35)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224면.
36)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70면.
37)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07면.
나아가 소설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막바로 ‘중화의 한 성원’으로 승화시키고 있 다. 상해나 광주 등 지역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화민족의 한 성원’으로 용감히 싸우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을 보존한 채 중국혁명에 투신함으로써 당당히 중화민족의 한 성원으로 될 수 있었던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 즉 소설은 조선반도 출신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의 징표를 보존한 채 중화민족의 한 성원으로 합류하였다고 기억함으로써 중 화민족이 실은 민족적 특수성과 독자성의 보존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족이란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의 희석이 아니라 그것의 보존을 전제 로 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1980년대 다른 혁명 서사들의 민족 성의 희석과 소거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나름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Ⅳ.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조선 혁명 추진의 목표를 명확히 제시
중국 조선족의 모든 혁명 서사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노선 등의 실패를 통해 그 한계를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이념에 동조, 중국 공산당의 이념을 선택하고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합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광복이전의 항일투쟁을 다룬 항일 서사의 경우 이는 불변의 공식처럼 되어왔다. 뺷새벽의 메아리뺸 역시 큰 틀에서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이념 선택의 구체적인 경로, 방향, 중국 공산주의 혁명과 조선 혁명의 관계 등 측면에서 기타의 조선족의 혁명 서사와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소설은 중국 공산당의 이념에 대한 동조와 선택 과정에서 기타 조선족의 혁명 서사 특히 항일 서사와는 다른 경로와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동북으로 아니면 상해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광주로 나온지 반달동안 그는 금주를 기다리는 한편 줄곧 이 문제를 고려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시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조선청년들이 쟁론하던 문제였다. 《우리는 일본, 영국, 프랑스 따위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중국을 구해낼 큰 뜻을 세우고 이 땅에서 싸워야 하오.》 이것은 김림이가 운남강무당에서 한 말이였다. 그러나 지금 군벌혼전시기인 이 어려운 형편에서 큰 뜻만 가지고는 안된다. 반드시 혁명의 인도자인 위대한 중국공산당을 찾아야 한다. 그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지금 형편에서 비 밀리에 활동하는 당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38) ……
그는 1919년 말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온후부터 진리를 찾으려고 헤매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렇지만 그중 적잖은 사람들이 거듭되는 실패와 덮쳐드는 생활난으로 하여 고민하고 방황하다가는 끝내 타락의 길을 걷는 것 을 보았고 지어는 자결하는것으로써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는 것도 보 았다. 그리고 동북에서 조직된 반일단체도 적들의 탄압속에서 실패되고 말았 다. 그는 그들의 눈물겨운 정상을 통해서, 또 오래동안 모색한 자기의 실천을 거쳐서 공산주의만이 진정한 주의이며 자기가 신앙해야 할 주의라는 것을 체 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줄곧 생활이 아무리 곤난해도 자기의 처 지가 아무리 어려워도 중국공산당을 찾아 혁명할 결심만은 변하지 않았던 것 이다.39)
38)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88면.
39)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89면.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김림은 향후의 진로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였다. 이 문제는 김림 뿐이 아니라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조선청년들의 공동의 관심사이자 고민이기도 하였다. 김림은 진리를 찾아 중국에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방황과 실패를 거듭하고 타락의 길을 걷기도 하는 것을 보았고 동북에서 조직된 반일단체 역시 일제의 탄압 속에서 궤멸되어간 것을 보았거니와 그 자신이 직접 반일 민족주의자들 의 지휘 하에 벌어진 청산리 전역에 참가 했으므로 민족주의 계열에 의한 항일투쟁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공산주의만이 진정한 주의이며 중국 공산당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들은 혁명을 위해 위대한 지도자인 중국 공산당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지하에서 활동하는 중국 공산당을 어떻 게 찾아야 할지 막연한 상황이었다. 이런 김림 앞에 중국 공산당 양광성위 군위서기 주오호의 부탁을 받고 조선인 혁명가이자 중국 공산당원인 김규철이 나타난다.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말입니까?》 김림은 리영에게 들은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렇수다. 그분은 중공 량광성위 군위서기 직무까지 받고 있수다. 주오호 동지는 조선청년들을 아주 관심하고 있수다.》그이는 우리에게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조선사람들의 정황을 일일이 물어보았수다. 특히 김림동무의 정황을 듣고나서는
〈그는 아주 유망한 동무이니 꼭 황포군관학교로 데려오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수다.》 김림은 묵묵히 머리만 끄떡였다. 그는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등대를 만나고 암흑세계에서 서광을 본 것 같아 가슴이 부풀어올랐다.40)
40)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90~91면.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겸 중공 량광성위 군위서기라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핵심요직에 있는 주오호는 조선청년들을 무척 관심하고 있으며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조선사람들의 정황을 일일이 물어본 뒤, 김림을 꼭 황포군관학교로 데려오라고 김규 철에게 지시한 것이다. 조선청년들에 대한 관심과 김림에 대한 특별한 지시가 단지 주오호 개인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과 세포를 확장해나가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한 것일 것이 다. 이에 중국 공산당 조직을 찾기 위해 가슴을 태우던 김림은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등대를 만나고 암흑세계에서 서광을 본 것 같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여기서 우리 는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김림과 운남강무당 출신 조선인 졸업 생들이 연결된 조직이,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초기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 즉 핵심층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 수뇌부와는 한참 동떨어 진 중공 만주성위 지도 하의 동북항일연군과 연결되던 동북을 배경으로 하는 기타의 조선족의 항일 혁명 서사와는 상당히 다른 파격적인 서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 수뇌부가 일찍부터 운남강무당과 황포군관학교 등에 있 는 조선인 혁명가들을 주목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쟁취하고 중국 공산당 조직에 가입 시키기 위해 주동적으로 접근해오고 적극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인 혁명가 들에 대한 중국 공산당 핵심 수뇌부의 직접적이고 주동적인 포섭이라는 측면 역시 기타의 조선족의 혁명 서사에 비해 파격적이다. 이미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당 지도부의 지시에 의해 김림과 운남강무당 조선인 졸업생들을 중국 공산당 조직에 받아들이기 위해 찾아온 김규철 역시 청산리 전투 이후 북평으로 갔다가 거기서 중국 공산당 창시자의 한 사람인 리대소의 보고를 듣게 되며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이처럼 김규철의 중국 공산당 가입 경로 역시 연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며 초기의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인 리대소의 보고를 듣는 등 막바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수뇌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김규철은 또 중국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인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무한중앙정치군사학교에 가 사업하게 된다. 또한 박영 삼형제는 국제무 산계급 혁명의 성지인 쏘련에서 조선인 홍군을 조직하여 싸웠고 로씨야극동민족쏘비 에트위원회 주석으로 사업하였다. 리영 역시 북간도의 반일투쟁에 참가하여 영용히 싸웠으나 공산당의 영도가 없이 민족주의자들의 영도에 의한 반일투쟁의 실패로 북 간도에서 남만으로, 남만에서 할빈으로, 할빈에서 쏘련으로 긴 방랑 끝에 쏘련에 갔으며 쏘련 위국 전쟁에 참가하였고 모스크바 홍군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체계적 으로 공부하였다. 그와 한반에서 공부한 조선인 혁명가 양달부는 국제공산당의 파견 을 받고 중국에 와서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였다. 이들은 모두 ‘청산리 전투’, ‘봉오 동 전투’ 등 반일민족단체에 의해 지도된 독립투쟁에 참가하여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공산주의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을 연 광주봉기를 주요 서사내용으로 삼음으로써 중국 공산당 핵심 수뇌부와 직접 연결되는 등 혁명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은 조선인의 항일독립투쟁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이고 큰 전역인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직접 참가해 싸운 빛나는 경력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북의 반일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반일독립투쟁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운남강무당이거나 전세계 무산계급 혁명의 성 지인 쏘련에서 혁명을 지속한다. 이처럼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부와 직접 연결된 혁명 서사는 동북의 항일투쟁을 서사내용으로 했던 기타 조선족의 항일 혁명 서사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다음으로 소설은 제1차 국공합작이 바야흐로 결렬되어가던 광주봉기 전야를 그 배경으로 함으로써 국공 양당 간의 치열한 이념투쟁과 조선인 혁명가들에 대한 이들 양당의 정책과 조직 확장 경쟁을 보여준다. 황포군관학교 우파 반동조직의 핵심성원인 량진명은 조선인 혁명가 김림을 집에 초대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조선인 교관이나 학생들이 매우 적 다고 하면서 유감을 표한다. 그는 공산당을 따르기 보다는 장개석을 따르는 것이 훨씬 전도 유망한 것이라고 김림을 유혹하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국민당의 우파조직인 “손문주의학회”와 공산당 량광성위 군위서기 주오호가 조직한 “청년 군 인련합회”가 동시에 존재했는데 이 두 조직은 수화상극으로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제2차 국내혁명 서사와 조선족의 국민적 정체성 - 335 - 장개석이 직접 개입하여 이념적으로 대립되는 두 조직을 해산하고 “동학회”라는 우 파 조직을 다시 건립했던 것이다. 이 “동학회”의 골간인 량진명은 조선인 교관인 김림을 국민당의 우파조직에 끌어들이기 위해 김림이 자기를 구해준 은인임을 내세 워 네 번 씩이나 자기 집에 초대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당시 국공 양당의 치열한 이념 경쟁을 볼 수 있으며 국공 양당에게 조선인 교관이나 학생들은 매우 중요한 쟁취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장개석의 조직에 가입하라고 공개적으로 권유하는 량진명에게 김림은 조선인 교관들과 학생들은 “언제나 손중산 선생님의 〈련쏘, 련공, 로농부조〉의 3대 정책을 전적으로 옹호”한다고 하면서 “국민혁명을 위하여 싸우는 것을 자기의 신성한 직책으로 삼고 있”으며 각종 〈회〉나 〈조직〉에는 관심이 없다41)고 원론적으로 답변한다. 그런가 하면 황포군관학교 중국 공산당 조직의 핵심 지도자인 주오호 역시 김규철을 통해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김림을 비롯한 조선인 청년들을 적극 중국 공산당 조직에로 영입해 들이며 조선동지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중국 공산당 측에게 조선인 혁명가들이 매우 중요한 혁명의 역량으로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조선인 혁명가들 측에서도 중국 혁명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역할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어떻게 조선인 혁명가들이 중국 혁명에 참여하고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들은 실천적 측면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에 가입 하여 싸울 뿐 아니라 이론적 측면에서도 많은 연구와 모색을 진행하였는데 그 일례로 조선인 공산당원 리영은 《중국 혁명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란 리론문제를 연구하 기 위해 모택동동지가 꾸린 농민강습소에서 혁명리론을 연구하였다. 이처럼 소설은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기 직전을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광주의 조선인 혁명가들의 이념 선택의 과정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을 쟁취하기 위한 국공 양당의 치열한 이념적 경쟁과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볼 수 있다. 이는 통상 민족주의 자들에 의한 반일 독립운동 및 종교적 색채를 띤 반일 독립운동의 한계와 실패로부터 피의 교훈을 얻고 혁명의 승리를 위한 유일한 대안인 공산주의를 선택하는 것으로 설정된 동북지역을 배경으로 한 항일 혁명 서사와는 구별되는 부분이다. 소설은 또한 중국 공산주의 혁명과 조선 혁명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보여주 고 있는데 이 둘 사이를 상호 추진의 관계로 보았으며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41)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36면. 大東文化硏究 제120집 - 336 - 조선 혁명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에까지 나아갔던 다른 한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전기 뺷아리랑뺸에서도 분명히 보여지 는바 김산은 이러한 생각을 “조국을 생각할 때면 우리의 가슴은 미래로 치달렸다. 이 전쟁은 동시에 우리의 조국을 방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다”42)고 적고 있다.
《…… 리영동무는 편지에서 중국혁명이 승리를 하게 되면 조선 혁명도 촉진 시킬 수 있다고 하였소. 박영의 삼형제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리영이 상해까 지 마중갔었소. 리영은 아주 열정적인 동지요. 그분은 통화신흥무관학교에서 나와 같이 공부하다가 쏘련으로 건너가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에 광주로 왔소. 내가 엽정독립퇀 영장으로 사업할 때 그는 포병대장으로 있었소.》43)
중국 혁명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에 대한 이론문제를 연구했던 리영은 중국 혁명이 승리하게 되면 조선 혁명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인 혁명가들의 최종 목표가 조선의 독립과 해방임을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 다.44)
42) 김산・님 웨일즈, 뺷아리랑뺸, 동녘, 1997, 142면.
43)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168면.
44) 軍委會政治部, 뺷十年來朝鮮的反日運動뺸, 青年书店, 1939, 3면.
묻지말아 새벽길을 걷는 동무야 자유와 해방을 찾으려고 곡절의 길을 걸어 공산당을 찾았다네. …… 이 노래는 우리 민족투사들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 노래에서 쓴것처럼 우리 민족의 투사들은 피어린 로정을 걸어서 혁명의 진리를 찾았고 끝내는 위대한 중국공산당의 품속에 안겨 가렬한 투쟁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 해왔다. 부모처자의 원쑤를 갚으려고 일떠섰던 우리는 이 암흑한 세계를 뒤엎 어야만이 민족과 나라를 구원할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투사들은 자기의 넋과 마음을 담은 이 노래를 즐겨불렀던 것이 아닌가!45)
45) 김운룡, 뺷새벽의 메아리뺸, 391면. 大東文化硏究 제120집 - 338 -
“새벽의 메아리”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곡절의 길 끝에 중국 공산당을 찾았으며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암흑한 세계를 뒤엎어야만이 최종적으로 민족과 나라를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소설은 조선족의 기원을 조선반도로 떳떳하게 밝힘과 동시에 중국혁명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조선 혁명이 최종 목표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 혁명가들을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한 역량으로 적극 수용하고 받아들인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승인, 인정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대부분의 조선족의 혁명 서사가 중국 내에서 활약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목표를 중국의 해방과 중국 혁명의 승리에 막바로 귀속시켰던 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이다.
Ⅴ. 결론
이 글은 1980년대라는 시점에서 새벽의 메아리가 기억하고 재현한 제2차 국내 혁명 즉 중국 초기 공산주의혁명에서의 조선인들의 역할과 기여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아가 동북이 아닌 머나먼 광주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이 어떻게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 혁명을 추진하고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 앞에 대두된 출신과 혈연이 규정해준 민족성과 그것을 초월해야 하는 중화민족으로의 합류의 문제 즉 중화민족 에의 융화와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 보존의 관계를 소설이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 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소설은 중국혁명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의 기여와 공훈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항일전쟁, 국내해방전쟁(국공내전)으로부터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인 광주봉기 에까지 소급하고 확장하였으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의 정 통성을 확보하고 강조하였다.
뺷새벽의 메아리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광주에 모인 조선인 혁명가들의 출신지를 중국 동북이 아닌 조선반도로 기억, 재현하고 있으며 고향으로서의 조선반도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소설은 조선 공산주의자들 을 막바로 ‘중화의 한 성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조선반도 출신의 조선 공산주의 자들이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의 징표를 보존한 채 중화민족의 한 성원으로 합류 하였다고 기억함으로써 중화민족이 실은 민족적 특수성과 독자성의 보존을 그 기초 로 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족이란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의 희석이 아니라 그것의 보존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1980년 대 다른 혁명 서사들의 민족성의 희석과 소거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나름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조선인 혁명가들의 최종 목표가 중국의 해방과 중국 혁명의 최종 승리를 통해 조선 혁명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기존의 대부분의 조선족의 혁명 서사가 중국 내에서 활약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목표를 중국의 해방과 중국 혁명의 승리에 막바로 귀속시켰던 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이다. 또한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기 직전을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광주의 조선인 혁명가들의 이념 선택의 과정 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을 쟁취하기 위한 국공 양당의 치열한 이념적 경쟁과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동북을 배경으로 한 기존의 조선족의 항일 혁명 서사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이처럼 뺷새벽의 메아리뺸는 제2차 국내혁명 서사를 통해 조선족의 중국 혁명에의 참가와 기여를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재조명하고 중국 혁명사에서의 위상을 재확인함으로써 조선족의 국민적 자격을 최대한 확고히 하였 다.
동시에 조선족의 이러한 중국 국민 및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합류는 조선인의 민족성과 독자성에 대한 보존을 그 전제로 초기 공산주의 혁명시절부터 중국 공산당 의 인정을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족의 국민적 정체성은 결코 조선인의 민족성이나 독자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역으로 철저한 민족성이나 독 자성의 온전한 보존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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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Narration of the 2nd Domestic Revolution and Chinese Koreans’ National Identity
Li, Hai-ying
This thesis examines the role and contribution of Koreans in the early communist revolution in China through the narration of the Second Domestic Revolutio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1980s. These Korean revolutionaries intended to promote the Korean revolution and realize the independence by devoting themselves to the China’s communist revolution in faraway Guangzhou, rather than in the northeast. In the process, this thesis also discuss the national characteristics that determine the origin and blood relationship of Korean revolutionaries and the combination with the Chinese nation, t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tegration with the Chinese nation and the preservation of Korean nationality and independence. Thus, The Echo of Dawn traced the Korean participation in and contribution to the Chinese revolution to the origin of the China’s communist revolution, reexamined and reconfirmed Koreans’ position in Chinese Revolutionary History, by which tried to maximize the national qualification of Chinese Koreans. At the same time, it is emphasized that Chinese Koreans, as Chinese citizens and members of the Chinese nation, have been recognized by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since the early communist revolution, on the premise of preserving their nationality and independence. It is emphasized that the national identity of Chinese Koreans is not opposed to the nationality or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but is based on the thorough preservation of nationality or independence.
Key Words : narration of the 2nd Domestic Revolution, Chinese Koreans, The Echo of Dawn, Kim Woonryong, national identity of Chinese Koreans
투고일: 2022.10.15 심사일: 2022.11.17 게재확정일: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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