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머리말
2. 조선의 유교 사회 지향과 훈민정음의 창제
1) 조선의 유교 사회 지향과 유교 문화의 수용
2) 세종의 주체적 인간론 모색과 훈민정음의 창제
3. 문자 활용 교화와 유교 교화의 확대
1) 유학의 교화와 문자의 활용 교화
2) 언해의 간행과 유교 교화의 확대
4. 맺음말
<국문요약>
조선 왕조는 유교를 국정교학으로 삼고 국가 를 유지하는 정치이념으로 파악했고, 유교에서 제시하는 정치사상을 활용하여 국가의 운영 원 리와 운영제도를 마련하였다. 세종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전제로 한 유학의 교화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절대선인 天 性을 전제하는 가운데 스스로 새롭게 하는 이치 를 강조하여 쉽게 보고 느껴 분발 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는 인정에 기반한 교화 특히 문자를 활용한 교화책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한문으로된 농상집요와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하 도록 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백성은 문자 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체계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 지배층은 한문에 익숙해 있어서 훈민정음을 외면하였다. 훈민정음은 국가의 공용문자가 되지 못하였고, 사적인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 창제는 백성들 이 문자 생활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사고하며, 도덕적 자각 능력을 함양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백성의 자신의 생각을 지배층에게 전달할 수 있 는 길을 열었다.
핵심어: 백성, 세종, 훈민정음, 교화, 문치
1. 머리말
세종(1397-1450)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 25년 12월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소략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라고 일렀다1)고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농사직설과 같은 농학, 향약채취월령‧향약집성방과 같은 의학, 측우기‧간의대와 같은 천문학 등의 성과와 함께 세종이 ‘풍토부동(風土不同)’ 곧 유교적 문명사회를 지향하면서 지리적으로 중국과는 다른 특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합당한 자국의 문화를 재발견한 것이었다.2) 그리고 여기에는 당시 생산력 발전과 달라진 민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여 형률, 법제와 같은 외재적 강제보다는 문자를 통한 설득, 자각, 소통의 인문 문치적 지배 방식의 변화를 내포하는 것이었다.3)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정교학으로 삼아 삼강오륜으로 집약된 윤리 규범을 강조하여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면서, 명분론를 통하여 남자·장자·적자 중심의 상하존비의 관계를 정당화시키고, 이를 교화라는 이름으로 지배층뿐만 아니라 농민· 부녀자·어린이까지 포함하는 전국민에게 알려 왕조의 상하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4) 말하자면, 세종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 하에 유교 문명사회로의 전환을 꾀하는 가운데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쉽게 표기하도록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창제한 것이다. 곧 훈민정음에는 백성들이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히 하려는 목표는 물론 문자를 통하여 윤리 도덕을 강화시키고 지배질서를 옹호하려는 목표도 함축되어 있다.5)
1) 세종실록 권101, 25년 2월 경술(4책, 533쪽)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 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2) 김용섭, 「조선왕조의 문명 전환 정책과 고조선 문명의 계승 육성」, 東아시아 역사 속의 한국문명의 전환 - 충격, 대응, 통합의 문명으로(신정·증보판), 지식산업사, 2015, 180~193쪽.
3) 도현철, 「조선초기 민 인식의 변화와 언문을 통한 유교 문명화」, 동방학지 193, 2020.
4) 金駿錫, 「儒敎思想論」, 韓國史認識과 歷史理論(金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1), 1997.
5) 국가의 훈민 정책의 대상, 예컨대 삼강행실도의 愚夫愚婦는 지배 신분 계급이고, 일반 농민은 유 교 도덕에 의한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법률적 통치의 대상이라는 견해가 있다(김훈식, 「15세기 민 본이데올로기와 그 변화」, 역사와 현실 창간호, 1989).
그러므로 세종이 유교 사회를 지향하면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문자를 통하여 교화를 확대하고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세종대 나아가 조선초기의 문화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한 연구는 세종의 업적과 연관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이 백성들 자신의 의사를 쉽게 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백성의 문자를 만들었고6) 중국 한자음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며, 한문을 쓰는 양반 지배층을 대신하는 한글을 쓰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의도했다거나7) 민의 성장을 반영하여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혹은 민본책의 일환으로 창제된 것이라는 견해,8) 그리고 조선의 명나라의 언어 표준의 수용의 일환9) 혹은 유교적 보편성을 구현하기 위하여 조선의 개별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연구10)가 있다.
6) 이기문, 「훈민정음의 창제」 신편한국사(조선초기의 문화1) 26, 2007.
7) 정출헌, 「조선전기 언해 사업의 지평과 문명전환의 맥락–새로운 언어문자의 창제와 새로운 학문주 체의 탄생」, 어문논집 84, 2018.
8) 이우성, 「조선왕조의 훈민정책과 정음의 기능」, 진단학보 42, 1976 : 강만길, 「한글창제의 역사적 의미」, 창작과 비평 44, 1977: 정창렬,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 한국민중론 1984.
9) 정다함, 「여말선초의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한국사학보 36, 2009. 10)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에 대한 재검토」, 세종의 국가경영, 지식산업사, 2006.
2. 조선의 유교 사회 지향과 훈민정음의 창제
1) 조선의 유교 사회 지향과 유교 문화의 수용
조선왕조는 유학을 국정이념으로 삼아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조선은 고려말 개혁 정치 과정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정치 사회 체제를 유교 이념에 맞게 개편하고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화를 추진해 갔다. 유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이시기 확산된 성리학은 종래 불교를 대신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화를 진전시키는 토대였다. 불교나 민간신앙에 결부된 고려의 사회적 정치적 유제를 청산하고 성리학의 그것으로 대체하여 갔던 것이다. 유교화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주도하는 집권체제의 진전은 물론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농민을 안정적으로 국가의 인민으로 포섭하여 사회화하는 과정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법제와 의례를 성리학의 원리대로 재정비하고 인륜에 기초한 교화를 통하여 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그 규범에 합치시켜가도록 하였다. 조선왕조는 명으로부터 많은 서책과 신지식, 신문화를 수용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핵심이 되는 자치통감강목‧주자가례‧대학연의‧사서대전‧오경대전‧성리대전‧서산독서기와 같은 성리학서적뿐 아니라 문수‧문선‧문장궤범· 옥해· 통지· 주례정의· 산당고색 등 ‘박문고거(博文考據)’의 류서(類書)를 받아들였다. 이 류서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문물제도와 법령, 고대 제왕의 행적이 포함되었으므로 고금의 변천을 하나로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정치체제를 새롭게 재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제도정비를 위한 실천적‧공리적 측면에 집중하되11) 성리학의 본성 함양론이나 격지(格知) 공부론과 함께 중국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12) 당시 수용된 중국 서적, 신지식은 중국 중원의 지배자로 성장한 한족(漢族) 중심의 종족적, 지리적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인류사의 진전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보편성이라는 양면성을 가지며,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의 유교적 보편 문명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중국학의 이러한 특성을 파악하고 지리적,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조선 상황에 맞는 정치사상을 확립하여 갔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태조 3년 3월)과 경제문감(태조 4년 6월), 불씨잡변(태조 7년), 조준‧조박‧하륜‧조용‧이첨‧정이오 등의 사서절요(태조 7년)13), 권근의 입학도설(태조 7년)과 예기천견록(태종 5년)14), 그리고 치평요람(세종 27년)15)과 대학연의집략(성종 3년)16) 등은 조선 상황에 맞는 유교 이념의 확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1) 韓永愚, 「朝鮮前期 性理學派의 社會經濟思想」,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3 : 文喆永,「 朝鮮初期 新儒學 수용과 그 性格」,韓國學報 36, 1984 : 李泰鎭, 「15‧16세기 新儒學 정착의 社會經 濟的 배경」, 朝鮮儒敎社會史論 1989 : 鄭亨愚, 「<<五經‧四書大全>>의 輸入 및 그 刊板 廣布」,東方 學志 63, 1989.
12) 아울러 조선왕조는 명나라의 勅撰勸戒書도 도입하였다. 명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안정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확립하고자 하여 윤리교화서인 勅撰勸戒書를 만들어 주변국에 전래 하였다. 조선은 명의 勅撰勸戒書의 도입하여 유교의 모범적인 실천의 사례를 참고하여 삼강행실도 와 같은 교화서를 만들었던 것이다(이상민, 「조선초 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간행」, 한국사상사학 64, 2017).
13) 郊隱先生文集 상, 撰進四書切要箋 : 태조실록 권15, 7년 12월 기미(1책, 141쪽)
14) 홍원식, 「권근의 성리설과 그 철학사적 위치」, 韓國思想史學 28, 2007 : 이봉규, 「권근(權近)의 경전 이해와 후대의 방향」, 韓國實學硏究 13, 2007 : 「조선시대 禮記 연구의 한 특색:朱子學的 經學」, 한국문화 47, 2009 : 강문식, 권근의 경학사상 연구, 일지사. 2008.
15) 治平要覽은 세종 27년(1445)에 왕명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가운데 정 치인의 거울이 될 만한 사실을 뽑아 엮은 것이다(金慶洙,「治平要覽에 대한 연구」,湖西史學 21‧ 22, 1994: 오항녕, 조선초기 治平要覽의 編纂과 典據, 아세아문화사, 2008).
16) 정재훈, 조선전기 유교정치사상 연구, 태학사, 2005.
이 과정에서 조선은 그 이전의 유불도 삼교 혼용의 문화를 유교 단일의 문화, 문명으로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지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고려와 조선의 문명 전환과 세계화를 통해 새로운 학문‧학풍으로 무장한 지도자, 새로운 정치집단의 형성 등 다양한 변화를 추동하여 한층 진전된 조선왕조의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17) 한편 조선왕조는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서 국가의 자율성과 문화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의 건국과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알렸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은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이 다스릴 지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인의 교화는 조선의 사정에 맞게 자유롭게 하라(聲敎自由)고 하였다.18) 사대외교의 대상은 외국으로서의 중국과 문명으로서의 유교를 구분할 수 있다. 조선은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선진 유교 문화, 문명을 수용하는 방식의 사대외교를 전개하였다. 조선은 명으로부터 교화의 자유를 인정받아, 성인의 교화를 조선에 적용하는 것은 조선이 알아서 할 일로 규정되었다. ‘성교자유(聲敎自由)’의 구체적인 내용은 ‘의제는 본속을 따르고 법은 옛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결국 의제와 법을 조선이 스스로 시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9) 세종대 명 홍무제는 ‘조선은 중국과 수천리 떨어져 있으니 스스로 교화를 행하라’고 하였고, 명에 대명률을 청하자 명은 ‘의례는 본속에 따르고 법은 구법을 지키라’ 하였다. 이는 명나라 율을 조선이 반드시 준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대명률을 사용하더라도 시속과 사세로 인하여 가볍게 하거나 혹은 무겁게 하며 혹은 따로 조장(條章)을 세울 것이 많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20) 중국의 법률인 대명률을 조선 사회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상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21) 조선초기에는 성리학의 사상적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되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우리에게 적합한 문화 창달, 문명 전환을 지향하였다.22)
17) 김용섭, 앞의 논문, 180~193쪽.
18) 明太祖實錄 권221, 洪武 25年(1392) 9월 경인(明史 권320, 外國列傳 朝鮮傳) : 태조실록 권2, 1년 11월 갑진(1책, 36쪽)“高麗知密直司事趙胖等持其國都評議司奏言, …… 上曰, 我中國綱常所在, 列聖相傳, 守而不失, 高麗限山隔海, 僻處東夷, 非我中國所治 ……”
19) 최종석, 「조선초기 국가이상과‘ 聲敎自由’」, 한국사연구 162, 2013.
20) 세종실록 권112, 28년 6월 계묘(4책, 678쪽) “下書議政府曰, …… 高皇帝詔本國曰, 據數千里之地, 自爲聲敎. 建文時, 本國請大明律, 詔旨不許曰, 儀從本俗, 法守舊章. 是則明律, 非本國要須遵守者也. 故本國雖用大明律, 因時俗事勢, 或輕之, 或重之, 或別立新條者多”
21) 정종의 즉위를 명에 알리자 명 황제는 “태조 황제께서 본국에 유시하기를 ‘의례는 본국의 풍속에 따르고 법을 구장을 지키며 스스로 성교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셨으니, 이후로 나라의 사무는 스스로 하는 것을 허락한다(정종실록 권1, 1년 6월 병인(1책, 151쪽)고 하였다.
22) 유교 문명을 지향하면서 국가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것은 세종이 명의 군대 파병 요청을 거부한 것 에서 알 수 있다. 세종 31년에 명나라는 몽골 원정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10만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출병할 경우 여진이 그 틈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워 완곡히 거절하고, 그 대신 조선의 강토를 굳건히 지켜 藩國의 도를 다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조선에서 파병에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의 관심은 예상되는 반란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다. 너무 갑자기 징집하면 농민들의 피해가 심하다는 이유가 주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한 어떤 조치도 없었 고, 조선의 파병 거절에 대하여 명에서 아무런 이의 없이 수용하였다(계승범, 「파병 논의를 통해 본 조선전기 對明觀의 변화」, 대동문화연구 53, 2006).
특히 세종대의 문화와 과학기술의 성과는 새로운 왕조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의 산물로서, ‘풍토부동’, ‘신토불이’에 입각하여 중국과 구별되는 국가의 독립성과 문화의 독자성, 유교사회로의 문명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2) 세종의 주체적 인간론 모색과 훈민정음의 창제
조선왕조의 국가적 독립성을 전제한 유교 문명의 지향은 세종의 정치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하은주 삼대의 이상 사회를 조선에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유교의 탄생지인 중국의 고제를 연구하여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운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유교 경전과 중국 역대왕조의 문물 제도를 폭넓게 수렴함은 물론 중국과 다른 조선의 실정에 맞는 문화의 창출을 시도하였다.23) 세종은 유학 군주로서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경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제시하였고, 경연을 강화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 학술 연구를 활성화하였다. 그는 치용적 학문관, 경세론과 시조지의(時措之宜) 곧 때에 따라 일의 경중과 완급을 헤아려 조치하여 현실에 맞추는 실용주의적 관점의 제도, 정책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致用)하기 위한 것이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깊이 연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차례로 살펴보면, 그것이 보여주는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 그러나 실지의 일에 당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24)”고 하였다. 또한 선비를 뽑는 것은 현실을 위한 실용의 문제이고,25) 인재를 배양하는 것도 현실에 유용한 인재를 양성하는 실용의 문제26)라고 하였다.
23) 韓亨周, 「朝鮮 世宗代의 古制硏究에 對한 考察」, 歷史學報 136, 1992 : 金容燮, 「世宗朝의 農業技 術」, 韓國中世農業史硏究 지식산업사, 2000.
24) 세종실록 권30, 7년 12월 계유(2책, 461쪽) “上曰 …… 窮經所以致用也. 方其窮覽經史, 歷觀治道, 則其視爲國猶反手, 及其臨事, 不知所措者有之. 予雖涉獵經史, 猶且未能, 其與此何異?……”
25) 세종실록 권55, 14년 3월 경오(3책, 375쪽) “下敎曰, 設科取士, 將以致用也. ……”
26) 세종실록 권94, 24년 7월 병술(4책, 424쪽) “上曰 …… 培養人材, 將以致用 ……”
결국 경학과 경서에 대한 탐구와 그에 기초한 논리 또는 이론은 실용(致用) 곧 구체적인 현실에 적합한 효율적인 방책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세종은 유학의 인성론에 기초하여 사람의 천성(天性)의 본연을 이해하였다. 그는 자식으로서 부모에 효성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그 슬픔을 다하는 것이 천성의 자연인데, 다만 오래도록 습속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27)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는 도덕성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8) 세종은 백성이든 관료든 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스스로 자각하여 인간의 도리를 터득하는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곧 ‘스스로 새롭게 하는 이치’(自新之理), ‘스스로 새롭게 하는 뜻’(自新之志)를 제시하여 보고 느껴 분발(觀感而興起)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간행하면서 삼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알아서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하였다. 단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 그 뜻을 알기 어려우니 학식자가 가르쳐 사람들이 천성(天性)의 본연을 감발하게 하면, 효도와 충성을 다하고 남편과 아내 모두가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自新之志)을 진작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하였다.29)
27) 세종실록 권44, 11년 4월 기묘(3책, 174쪽) “下敎禮曹曰, 人子之於父母, 生則盡其孝, 歿則致其哀, 天性之自然, 而職分之所當爲也. 高麗之季, 外方無知之民, 父母歿則反生邪意, 卽毁其家. 且父母垂死, 氣猶未絶, 出置外舍, 雖有復生之理, 終或不免焉. 及其葬期, 多會香徒, 置酒張樂, 無異平昔, 乃何遺俗 尙未殄耶? 嗚呼! 人固各有秉彝之天, 誰不愛其父母! 但狃於習俗之久, 不之思耳. 自今攸司體予至懷, 明示敎條, 俾家家曉然知舊習之汚, 擧得自新, 以成仁孝之風, 如或不悛, 監司守令, 嚴加禁止“
28) 안재순, 「세종대왕의 도덕 실천 운동과 윤리 정신」, 세종문화사대계 4(윤리‧교육‧철학‧종교편), 1999.
29) 세종실록 권64, 16년 4월 갑술(3책, 562쪽) “上曰, 三綱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 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奬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 …… 命中樞院使尹淮製敎書. 辭曰, 予惟降衷秉彝, 生民之所同, 厚倫成俗, 有國之先務. 世道旣降, 淳風不古, 天經人紀, 浸以失眞, 臣不能盡臣道, 子不能 供子職, 婦不能全婦德者, 間或有之, 良可嘆已. 思昔聖帝明王, 躬行身敎, 表倡導率, 使比屋可封. 顧予 涼德, 雖不能企其萬一, 而竊有志焉. 惟是敦典敷敎之道, 夙夜盡心, 載念愚民懜於趨向, 無所則效, 爰命 儒臣, 編輯古今忠臣孝子烈女之卓然可法者, 隨事記載, 幷著詩贊, 尙慮愚夫愚婦未易通曉, 付以圖形, 名曰三綱行實, 鋟榟廣布. 庶幾街童巷婦, 皆得易知, 披閱諷誦之間, 有所感發, 則其於誘掖開導之方, 不 無小補. 第以民庶不識文字, 書雖頒降, 人不訓示, 則又安能知其義而興起乎? 予觀周禮, 外史掌達書名 于四方, 使四方知書之文字, 得能讀之. 今可做此, 令中外務盡誨諭之術, 京中漢城府五部外方監司守令, 旁求有學識者, 敦加奬勸, 無貴無賤, 常令訓習, 至於婦女, 亦令親屬諄諄敎之, 使曉然共知, 口誦心惟,朝益暮進, 莫不感發其天性之本然, 爲人子者思盡其孝, 爲人臣者思盡其忠, 爲夫爲婦亦皆盡道, 人知義 方, 振起自新之志, 化行俗美, 益臻至治之風. 惟爾禮曹, 體予至懷, 曉諭中外”
또한 세종은 삼대에는 인륜이 밝았는데, 후세에 군신‧부자‧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않고 타고난 천성에 어두워서 각박한 데에 빠지는데,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에서 뛰어난 것을 뽑아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면, 우매한 남녀들까지 보고 느껴서 분발(觀感而興起)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30) 또한 세종은 “사람은 常道를 지키는 天性이 있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 다만 오래도록 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攸司가 나의 뜻을 알고 집집마다 舊習의 나쁜 점을 알도록 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여(自新) 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고 하였다.31) 천성의 본연을 바탕으로 스스로 새롭게 하는 자율성에 호소하며 교화된 풍속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농사직설를 간행하면서도 “제 스스로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강제로 시킬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권과하기를 시종 게을리 하지 말아서 점차로 흥행하도록 하라”32)고 하여 스스로 알아서 원하는 바를 행하는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세종은 사람 본연의 천성을 긍정하고 구습의 잘못을 시정하도록 가르치되 스스로를 새롭게 하여 분발하도록 하는 인간론, 수양론, 교화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론의 지향은 백성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자 표기, 훈민정음의 창제로 이어진다. 세종은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언문)을 창제하고33) 1446년 9월에 해설서인 예의본(例義本)과 해례본(解例本)을 반포하였다.34) 예의본에는 한글의 창제 이유와 사용법이 설명되었고,35) 해례본은 한글의 창제 원리 곧 사람의 발음기관을 모방하여 만든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
30)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병신(3책, 396쪽) “……宣德辛亥夏, 我主上殿下, 命近臣若曰: "三代之 治, 皆所以明人倫也. 後世敎化陵夷, 百姓不親, 君臣父子夫婦之大倫, 率皆昧於所性, 而常失於薄, 間有 卓行高節, 不爲習俗所移, 而聳人觀聽者亦多. 予欲使取其特異者, 作爲圖讃, 頒諸中外, 庶幾愚婦愚夫,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化民成俗之一道也. ……”
31) 주) 29와과 같음.
32) 세종실록 권75, 19년 7월 신해(4책, 93쪽) “傳旨各道監司…… 今又印若干本, 加送諸道, 卿體予至 意, 可卽分布各官守令, 令曉諭農民, 依書試驗, 使成風俗. 若愚民資力不足者、不願自爲者, 不必强使 爲之, 隨宜勸課, 終始不怠, 漸致興行”
33) 주) 1과 같음.
34) 세종은 25년 12월에 한글 자모 28자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 하고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 8인에게 문자 체계 및 제자 원리에 대한 해설과 자모의 실제 표기 용례 등을 보이는 해설서를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훈민정음해례본이다. 이 책은 1940년 간송미술관에 소장되면서 알려졌는데 세종이 親製한 글인 본문(禮儀)과 정인지 등이 작성한 解例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창제한 고문자의 이름이면서 이 문자에 대하여 설명하고 표기용례를 보인 해설서의 이름이기도 한다(김무 봉, 훈민정음, 그리고 불경 언해, 역락, 2015)
35) 세종실록 권113, 28년 9월 갑오(4책, 702쪽)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 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 日用耳. …… 禮曹判書鄭麟趾序曰……”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은 세종이 양반층의 전유물인 한문을 대신해서 백성들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자로 창제되었다. 훈민정음은 이른바 언문의 탄생 곧 입으로 하는 말(口語)과 문자로 쓰여진 글(文語)이 일치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반포와 창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모든 신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실록 기록자의 의도대로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36) 세종은 백성이 우리의 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여, 지식을 넓히고 자각 능력을 키우는 문자를 활용한 훈민 교화책을 전개했다. 곧 백성을 위한 문자를 창제함으로써 지식을 습득하여 도리와 선악 시비를 알아 선을 행하고 악을 막아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교화, 나아가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지배질서를 옹호하는 순기능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문자를 통한 교화는 도덕적 우열에 따른 차이를 전제함으로써 신분제 사회의 성격을 드러낸다.37)
36) 정윤재, 「훈민정음 해례본 발간 전후의 정치 과정 분석」, 세종의 지식 경영연구, 한국학중양연 구원출판부, 2016, 89~90쪽.
37) 세종대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방 주민과 지방관의 관계는 자식과 아버지, 신하와 군주의 관계와 같아서 결코 범할 수 없는 것이다.” 세종실록 권52, 13년 6월 임자(3책, 326쪽). “상하의 명분은 반드시 엄격해야 하는데 만약 지방 주민의 고소를 청리하여 수령을 벌하게 되면 존비의 질서가 무너지고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세종 실록 권62, 15년 10월 기사(3책, 521쪽)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만약 卑下가 尊上을 고소 하는 것을 금지하면 사람의 冤抑이 펴지 못한다. 자기에 절박한 것을 고소하면 청리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관리를 고소하는 것은 청리하지 않은 것은 어떠냐” 세종실록 권51, 13년 정월 갑신(3 책, 290쪽) “上曰, 若禁卑下告訴尊上, 則人之冤抑, 無所伸矣. 其告訴迫切於己者聽理, 如訴官吏者勿 聽, 何如?") 하였다. 세종은 상하 존비의 신분질서를 인정하였지만, 卑下라는 하층민의 입장을 존중 하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적 인간론의 핵심 개념인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현실 세계 인간의 차별상, 즉 성인(=군자)과 우인(愚人)(=소인)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차등을 긍정하게 하고, 본성을 가진 모든 인간은 기질의 치우침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성=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역설한다. 전자는 인간이 현실의 자기 위치와 분수를 불가항력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분론의 근거가 되고, 후자는 인간은 모두 인륜의 완성자인 성인을 모범으로 삼고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교화론의 성립 근거가 된다. 조선왕조는 유학을 국시로 하고 이에 기초한 신분제를 옹호하였으므로, 수기‧수양을 통해 성인(= 군자)가 된 부류를 지배층으로, 인민들을 기질과 인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우인(=소인) 인 피지배층으로 설정하여, 교화 곧 인륜의 확립을 통하여 존비‧귀천의 지배와 복종관계로 나타나는 신분질서를 정당화하였다.38) 세종은 조선의 신분 차별적 질서와 유학의 차등적 인간론을 전제하면서 이러한 차별과 차이를 완화하려 하였다. 그는 천인(賤人)39)도 천민(天民)40)이고, 국민(國民)41)이라는 인식42)에 동의하였고, 천인(賤人)에 대한 시책을 일반 백성들과 동일하게 시행하였다. 그런데 백성을 교화하더라도 도덕적 우열에 따른 사람의 구별, 도덕적 능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은 있었다. 세종은 중인 이상 곧 성인과 중인 이하, 곧 우부우부(愚婦愚夫)·하민(下民)·무지지민(無知之民)·우민(愚民)·소민(小民)을 구분하였다. 세종은 중인(中人) 이하는 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다. 세종은 상피법을 언급하면서 근원이 맑고 깨끗한 사람과 비교하여 중인 이하는 사정에 빠지기 쉽다고 보았다.43)
38) 金駿錫, 「朝鮮前期의 社會思想」, 東方學志 29, 1981, 151~159쪽.
39) 賤人은 정치의 객체로서 국가의 통치 대상이었다. 公私賤人도 삼년상이 허용되었고(세종실록 권 52, 13년 5월 무진)(3책, 314쪽) 養老宴에 참석하였다(세종실록 권61, 15년 윤8월 계축)(3책, 503 쪽). 세종 14년에 중궁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80세 이상의 奴夫에게 연희를 베풀었는데, 여기에는 4품 이상의 아내 30인과 9품 이상의 아내 66인, 公賤, 私賤의 부녀 118인이 좌우에 행랑과 뜰에 나 누어 앉았다(세종실록 권57, 14년 8월 갑인(3책, 411쪽)). 세종 15년에 중궁이 사정전에 나아가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사대부의 아내로부터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62인이었다(세종실 록 권61, 15년 윤8월 병진)(3책, 503쪽). 그런데 승정원에서 노인으로 천한 자는 양노연에 참여하 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세종은 養老하는 이유는 노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극히 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참여하게 하고, 다만 贓罪를 범하여 刺字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세종실록 권57, 14년 8월 계묘)(3책, 410쪽)고 하였다
40) 세종실록 권105, 26년 윤7월 신축(4책, 579쪽) “ ……然賞罰人君之大柄, 以人君而殺一無辜, 天之 福善禍淫, 尙且不僭, 況奴婢雖賤, 莫非天民也? 以人臣而役天民 亦云足矣, 其可擅行刑罰而濫殺無辜 乎? 人君之德好生而已. 坐見無辜之多死, 恬然不禁, 而乃曰揚其主可乎? 予甚以爲不可也. …… ”
41) 태종실록 권18, 9년 7월 임오(1책, 498쪽)“前東北面都巡問使李之源進便民事宜. 其書曰, ……其營 造之資, 雖曰出於私財私奴, 然私奴乃國民也, 私財乃國財也. 公私瓦窰土木之役, 乞限豐年一禁…… ”
42) 최이돈, 「조선초기 賤人天民論의 등장」, 朝鮮時代史學報 57, 2011.
43) 세종실록 권47, 12년 2월 갑오(3책, 223쪽) “上謂左右曰, 前朝之季, 朝士相避之法甚煩, 異姓七八 寸亦避, 故獄訟淹延, 久而不決. 若無相避, 則本源澄澈者, 自不陷於私, 而易於處決, 中人以下, 則必陷 於不公, 相避之法, 其參酌折衷以啓.”
또한 중인 이하의 사람들은 착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어서, 여울의 물과 같이 동쪽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르게 된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아니하므로, 비록 성인과 함께 거처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44)고 하였다. 성인은 사물을 통찰하여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알고, 조정의 위에서 승부를 결단할 수 있지만, 중인 이하는 일을 하는 데에 의심하는 생각이 있다45)고 본 것이다. 이때 기준이 되는 중인(中人)을 구별해내기는 쉽지 않지만, 대체로 신분제 사회에서 도덕적 판단 능력이 결여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논어에서 중인 이상은 예를 이해할 수 있지만, 중인 이하는 예를 이해할 수 없다46)고 하였고,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변하지 않는다47)고 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교화되기 어려운 사람도 상정된다. 세종은 유교 경전 상의 추상화된 성인이나 중인 등으로 도덕 능력을 구분하였고, 삼강행실도를 간행하면서 유식자를 통하여 우부우부들이 알도록 하라고 하였듯이48) 후천적인 변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49)
44) 세종실록 권75, 18년 11월 무술(4책, 39쪽) “召見辛引孫及權採于思政殿, 敎曰,…… 大抵中人以下, 可 與爲善, 可與爲惡, 猶湍水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唯下愚不移, 雖聖人與居, 亦無如之何矣.” 45) 세종실록 권59, 15년 3월 경오(3책, 459쪽) “上曰, …… 但聖人洞照事物, 明見萬里, 決勝負於廟堂 之上矣. 中人以下, 於作事當有疑慮, 若疑慮而猶豫.”
46) 논어 권6, 雍也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47) 논어 권17, 陽貨 “惟上智與下愚不移”
48) 주) 29과 30 참조.
49) 세종의 뜻을 이은 문종은 下愚라도 허물을 고친다면 스스로 새롭게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문 종실록 권2, 즉위년 8월 경술(6책, 252쪽) “上曰, …… 崇善世宗非欲終廢之也. 雖下愚, 苟能改過, 當許自新, 如斯人者, 未易得也. …… ”)고 하였다.
세종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전제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우열의 차이를 인정하였는데, 모든 사람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고 문자를 창안하여 지식을 넓히고 자각하여 이치와 도리를 깨닫는 문자를 통한 교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3. 문자의 활용과 유교 교화의 확대
1) 유학의 교화와 문자의 활용 교화
조선왕조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유교적 명분질서에 확립하고자 오륜으로 집약되는 유교 윤리를 보급하려 하였다.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인륜을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로 강조하여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의 참된 가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지배층 뿐만 아니라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전국민에게 알려 조선이 인의도덕을 바탕으로 한 유교사회가 되도록 유도하였다. 유학의 정치는 예치와 덕치로, 인간의 도덕적 신뢰를 바탕에 두고 대화, 설득, 자각을 통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도덕 사회를 지향한다. 이는 문치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일본의 무치사회처럼 힘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명분과 의리를 밝혀 백성을 설득하는 정치이고, 법치가 아닌 예치와 덕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교화는 성종대에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 것을 풍(風), 훈도되어 물들 듯이 젖어가는 것을 화(化), 함께 어울려 휩쓸리는 것을 류(流), 여러 사람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속(俗)이라 규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 풍화(風化)가 위에서 실행되고 류속(流俗)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50) 요순시대 성인의 정치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감화가 행하여져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 즉 도덕적 감화를 통하여 세상이 안정되고 교화가 실현되기를 바랐다.51) 조선왕조에서 교화의 중심은 학교였다. “학교는 敎化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人才를 양성한다.”52)고 했듯이 교화의 내용이 바로 인륜이었으며, 인재란 인륜을 제대로 연마한 관인‧식자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과업은 모두 학교로 불리우는 향교‧성균관과 서당‧서원에서 이루어져, 유교 사회를 지향하는 인륜 질서의 확립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였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가리키는 인륜(五倫)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보편적인 당연지칙(當然之則)인 리(理), 즉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합당한 도리로 이해하고 이것이 지배하는 윤리도덕 사회를 지향하였다.53) 조선왕조는 국가 운영의 과정에서 예치와 덕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법제와 형률의 도움을 받았다.54)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이 정치를 윤리도덕의 실현과정으로 보고 인정과 덕치의 유교 정치론을 지향하면서도, 제도와 형벌은 예치와 덕치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기왕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이다.55)
50) 성종실록 권174, 16년 1월 임진(10책, 665쪽)
51) 이석규, 「朝鮮初期 ‘敎化’의 性格」, 韓國思想史學 11, 1998 : 이상민, 「15세기 지방 유식자의 활용 과 평민교화」, 역사와 현실 118, 2020.
52) 三峯集 권7, 朝鮮經國典 상 禮典 學校“學校敎化之本也. 于以明人倫, 于以成人才,……”
53) 김훈식, 「麗末鮮初 儒佛交替와 朱子學의 定着」,韓國 古代‧中世의 支配體制와 農民(金容燮敎授停 年紀念韓國史學論叢 2), 1997.
54) 정긍식‧조지만, 「조선전기 대명률의 수용과 변용」,진단학보 96, 2003.
55)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서울대출판부, 1983.
태종 18년(1418)에 복간된 의옥집과 세종 20년(1438)에 완성된 신주무원록은 조선이 예치와 덕치를 근본으로 하고 인정에 기반한 형률을 운영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56) 유학을 국정교학, 정치이념으로 삼아 예치와 덕치를 기본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지만, 한나라 때 국교화되면서 유학의 이념을 담아 성문화한 법제와 형률에 의해 국가를 운영했던 경험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두 가지 지배 정책을 병용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예와 덕에 기반한 자율적이고 자각적인 교화를 지향하였다. 조선왕조는 사람의 마음에 기초한 자각적이고 이성적인 교화론을 전개하였다. 문자를 활용하여 지식을 넓히고 지식에 기반하여 도덕적 각성을 유발하는 자각적이고 자율적인 교화책을 썼다. 처음에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한문을 활용하여 윤리 교화서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세종대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부자, 군신,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효‧충‧열의 사례를 모아 만든 것으로, 백성의 인륜 교화를 도모한 것이다. 처음 세종은 살부(殺父) 사건을 계기로 효행을 중심으로 편집한 효행록을 간행하고자 하였는데,57) 여기에 충신과 열녀를 묶어 보다 확장된 인륜 관계를 포섭하고자 하였다.58)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반포하는 교서에서 고금의 충신‧효자‧열녀 중에 뛰어난 행적을 보여 본받을 만 한자를 모았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삼강행실이라 하였으니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골목 안 여염집 부녀들까지도 쉽게 알아, 느껴 깨달음이 있게 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 그 뜻을 알아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니, 주례에 外史가 주관하듯이 서울과 지방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깨우치도록 하라59)고 하였다.
56) 김호, 「신주무원록과 조선전기의 檢屍」, 법제사연구 27, 2003 : 「조선초기 疑獄集 간행과‘無 冤’의 의지」, 한국학연구 41, 2016.
57) 세종실록 권42, 10년 10월 신사(3책, 147쪽) “……上謂直提學偰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欲刊行孝行錄, 以曉愚民. 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
58) 삼강행실도 序(權採)‧跋(偰循); 世宗實錄 권45, 14년 6월 병신(3책, 396쪽); 世宗實錄 권64, 16년 4월 27 갑술(3책, 562쪽) : 김항수, 「<<삼강행실도>> 편찬의 추이」, 진단학보 85, 1998.
59) 세종실록 권64, 16년 4월 갑술(3책, 562쪽) “上曰, 三綱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 掖奬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 …… 其辭曰, 予惟降衷秉彝, 生民之所同, 厚倫成俗, 有國之先務. 世道旣降, 淳風不古, 天經人紀, 浸以失眞, 臣不能盡臣道, 子不能供子職, 婦不能全婦德者, 間或有之, 良可嘆已. 思昔聖帝明王, 躬行身敎, 表倡導率, 使比屋可封. 顧予涼德, 雖不能企其萬一, 而 竊有志焉. 惟是敦典敷敎之道, 夙夜盡心, 載念愚民懜於趨向, 無所則效, 爰命儒臣, 編輯古今忠臣孝子 烈女之卓然可法者, 隨事記載, 幷著詩贊, 尙慮愚夫愚婦未易通曉, 付以圖形, 名曰三綱行實, 鋟榟廣布. 庶幾街童巷婦, 皆得易知, 披閱諷誦之間, 有所感發, 則其於誘掖開導之方, 不無小補. 第以民庶不識文 字, 書雖頒降, 人不訓示, 則又安能知其義而興起乎? 予觀周禮, 外史掌達書名于四方, 使四方知書之文 字, 得能讀之. 今可做此, 令中外務盡誨諭之術, 京中漢城府五部外方監司守令, 旁求有學識者, 敦加奬 勸, 無貴無賤, 常令訓習, 至於婦女, 亦令親屬諄諄敎之, 使曉然共知, 口誦心惟, 朝益暮進, 莫不感發其 天性之本然, 爲人子者思盡其孝, 爲人臣者思盡其忠, 爲夫爲婦亦皆盡道, 人知義方, 振起自新之志, 化 行俗美, 益臻至治之風. 惟爾禮曹, 體予至懷, 曉諭中外”
즉 세종은 문자와 그를 통한 지식을 기반으로 백성이 도리를 깨닫게 하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교화의 방식을 도모하였다. 또한 조선왕조는 형률서를 이두와 구결을 이용해 번역함으로써 백성들의 문자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율문 곧 형법에 대한 백성의 이해를 높여 범죄 예방 효과를 달성하려는 목적에서였다.60) 태종 4년 의정부에서 대명률의 번역을 요청하였다.61) 고려말에는 형법에 관한 일정한 기준이 없었으므로 혹독한 형벌을 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일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 관청이나 관리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심하여 백성의 원성은 높아지고 법률의 권위는 떨어졌다. 이에 정몽주는 대명률과 지정조격 그리고 고려의 법령을 참작해서 신율을 제정하였고,62)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헌전에서 대명률를 채용하였다.63) 이와 함께 한문으로 된 대명률을 이두, 구결로 번역하여 담당 관리와 실무 아전이 익히고 나아가 백성들이 이를 문자로 알 수 있도록 하였다.64) 세종은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율문에 의거해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는데, 어리석은 백성이 죄의 경중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백성 모두에게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으나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이두문[吏文]65)으로 번역하고 이를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다.
60) 박병호, 「朝鮮初期 法制定과 社會相」, 국사관논총 80, 1998 : 강명관, 「한글서적, 오로지 번역본으 로만 존재하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 상상, 2014.
61) 태종실록 권8, 4년 10월 병신(1책, 313쪽) “議政府請譯律文, 定笞杖枷鎖制作之法, 從之. 其書曰 …… ”태종실록 권22, 11년 12월 무자(1책, 612쪽) ”命譯大明律, 勿雜用元律“ : 세종실록 권8, 13년 6월 을묘(3책, 327쪽) “命舍人趙瑞康·少尹權克和, 譯解大明律于詳定所”
62) 高麗史 권117, 列傳30 鄭夢周(하책, 571쪽) “(공양왕)四年 夢周取大明律‧至正條格‧本朝法令, 叅 酌刪定, 撰新律以進”
63) 三峯集 권8, 朝鮮經國典 下 憲典 : 末松保和, 「三峯集編刊考」, 朝鮮學報 11, 1951(靑丘史草 제2, 1965) : 도현철, 조선전기정치사상사, 태학사, 2013.
64) 세종실록 권52, 14년 1월 무진(3책, 426쪽) “知申事安崇善啓, 謹稽元典, 凡斷獄者, 多不曉律文, 私 意出入, 刑罰不中, 冤抑無訴, 致傷和氣, 以召災沴. 大明律時王之制, 所當奉行, 然國人未易通曉, 宜以 俚語譯之, 頒諸中外, 使之講習, 一笞一杖, 必依律施行, 以示仁厚之德”
65) 하지만, 언문을 창제하는 입장에서 이두의 한계는 명료하다. 후에 언문 창제 이후 정인지가 말하듯 이 이두는 신라의 설총 이래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이를 쓰고 있지만,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어렵고 막혀서 비루하여 근거가 없고 언어에서 만분의 일도 통할 수 없다(세종실록 권113, 28년 9월 갑오(4책, 702쪽) “禮曹判書鄭麟趾序曰, …… 昔新羅 薛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 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세종의 문자를 통한 교화책은 유학자에게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허조는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할 것이라 반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죄를 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전제하고, 세민(細民)들이 금법(禁法)을 알게 되면 두려워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66) 세종의 의도는 대명률 요약본을 번역하고 보급하여 우부우부의 범죄를 예방하고자 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刑殺 獄辭로 인하여 생기는 백성의 억울함은 문서의 문자 때문이 아니라 獄吏의 마음가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언문을 사용하면 옥사가 공평하게 처결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세종은 설총이 이두를 만든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었고 지금의 언문 역시 백성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67) 세종은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정창손이 “삼강행실을 반포하더라도 충신열사의 무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니, 사람의 행하고 행하지 않음은 다만 자질 여하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반드시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본받을 것인가”하며 반대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창손이 말한 ‘人之資質如何’에서의 ‘자질’은 차등적 인간관을 전제한 것으로, 민을 신분제 하에서 열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민 스스로의 사유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견해였다.68)
66) 세종실록 권58, 14년 11월 임술(3책, 425쪽) “受常參, 視事. 上謂左右曰, 雖識理之人, 必待按律, 然後知罪之輕重, 況愚民何知所犯之大小, 而自改乎? 雖不能使民盡知律文, 別抄大罪條科, 譯以吏文, 頒示民間, 使愚夫愚婦知避何如? 吏曹判書許稠啓, 臣恐弊生也. 姦惡之民, 苟知律文, 則知罪之大小, 而無所畏忌, 弄法之徒, 從此而起. 上曰, 然則使民不知, 而犯之可乎? 民不知法, 而罪其犯者, 則不幾於 朝四暮三之術乎? 況祖宗立讀律之法, 欲人皆知之也. 卿等稽諸古典, 擬議以聞. …… 稠出, 上曰 許稠 之意以爲 民知律文, 則爭訟不息, 而有凌上之漸. 然須令細民, 知禁而畏避也. 遂命集賢殿, 稽古使民習 法之事以啓.”
67) 최만리의 주장은 문자와 문자 관련 지식, 정보를 양반 지배층이 독점하려는 의도로 해석한 연구가 있다. 이에 의하면, 한문에 대한 능력을 바탕으로 유교 경전을 연구하거나 시와 산문을 짓는 능력을 갖추어 문과 시험을 통해 핵심 관료가 되고, 이두를 익혀서 서리나 향리에 진출하도록 제도화함으 로써 신분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한글을 사용하게 되면 누구나 과거에 급제할 수 있게 되고, 중세적 신분 질서의 붕괴를 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오종록, 「훈민정음 창제와 반대상소」, 내일을 여는 역사 32, 2008).
68) 세종실록 권103, 26년 2월 경자(4책, 543쪽) “…… 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 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 耳, 何必以諺文譯之, 而後人皆效之? 此等之言, 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前此. 上敎昌孫 曰,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 도현철, 앞 의 논문, 15~16쪽.
그 점에서 세종의 입장은 민의 주체적 사유능력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언문을 통해 도리를 깨달아 범죄를 예방하고 교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2) 언해의 간행과 유교 교화의 확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언해 작업을 추진하였다. 훈민정음을 사용해 찬술한 최초의 산문인 석보상절은 세종 29(1447년) 7월에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석가의 일대기와 설법을 엮은 것이고,69) 사리영응기는 1449년 7월에 세종이 김수온에게 명하여 부처님 사리의 영험함에 대해 기록하게 한 불교서이다.70) 세종 27년(1445) 4월에 완성된 용비어천가는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까지 6명의 선조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세종은 이를 통하여 언문의 실용성을 검증하고 왕조의 정통성을 천명하였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다음 달인 10월에 한문으로 자신의 뜻을 유시(諭示)하였다.71)
69) 월인천강지곡은 그 다음 해에 세종이 수양대군이 엮은 석보상절을 보고 한글로 그 가사를 지은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말은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라고 한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에 부응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시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합철되어 월인 석보라는 이름으로 세조 5년(1459)에 간행되었다.
70) 태종은 문소전(文昭殿) 옆에 불당(佛堂)을 세워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빌었으나 지금은 그러지 못하다고 하면서 이를 安平大君이 총괄하여 다시 경영하도록 하였다. 이 책의 끝에는 참여자 명단 이 있는데 그 가운데‘韓실구디, 朴검’등 한글로 표기된 이름 50개 가량이 나타나 있어 고유어로 된 인명을 연구하는 자료로 이용된다(拭疣集 권2, 舍利靈應記 : 김수온 저, 이종찬 역, 역주사리 영응기,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2013).
71) 세종실록 권114, 28년 10월 갑진(4책, 708쪽) “上數臺諫之罪, 以諺文書之, 命宦官金得祥, 示諸義 禁府承政院”
세종이 죽은 왕비를 위하여 사찰에서 재(齋)를 올리고 불사를 거행하자, 대간들이 이를 정지하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세종은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작성하여 제시하고 그들을 처벌하라고 하였다. 이에 집현전 학사들이 대간의 처벌을 거두어 달라고 하였다,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자신이 의금부에 내린 언문으로 된 유시를 보여주도록 하였다.72) 이 일이 있던 같은 해 11월에 언문청이 만들어졌다.73) 세종은 같은 해 12월에 이과와 이전(吏典)의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을 부가했고74) 다음 해인 세종 29년 4월에 함길도 자제로서 이과 시험에 응시하는 자는 다른 도의 예에 따라 육재(六才)를 시험하되 훈민정음을 시험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할 것이며, 각 관아의 이과 시험에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75) 관공서의 문서 행정을 이두에서 한글로 대체하려는 뜻이었다. 세종 30년(1448)에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도록 상주사 김구에게 명하였다.76) 세종은 서연에서 세자에게 언문과 의서를 가르치도록 하였고77) 왕세손에게 국운(國韻, 언문)을 강의했다.78) 세종은 31년 6월에 20여장이 되는 언문 유시를 만들어 좌의정 하연 등 대신들에게 보여주면서, 불사를 행할 때 감찰은 모든 제사에 반드시 배례(拜禮)를 행하는 예에 따라, 승도가 비를 빌 때도 감찰이 배례를 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恒式을 삼는 것이 어떠한가79) 하였다. 아울러 이 언문 유시는 앞에 것과는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내용이라 사초(史草)에 들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세종이 언문의 확산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대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80)
72) 세종실록 권114, 28년 10월 갑진(4책, 708쪽) “…… 首陽大君傳上旨曰, 爾等之言是矣. 然爾等不知 予心, 乃以諭義禁府諺文書示之曰, ……”
73) 한영우, 「세종대 어문 사용」, 세종평전, 경세원, 2019, 761~766쪽.
74) 세종실록 권114, 28년 12월 기미(4책, 716쪽) “傳旨吏曹,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 竝令 試取. 雖不通義理, 能合字者取之.”
75) 세종실록 권116, 29년 4월 신해(5책, 17쪽) “傳旨吏曹, 正統九年閏七月敎旨, 節該, 咸吉道子弟欲 屬內侍茶房知印錄事者, 試書算律家禮元續六典, 三才入格者取之, 然吏科取才, 不必取俱入六才者, 但 以分數多者取之. 咸吉子弟三才之法, 與他道之人別無優異, 自今咸吉子弟試吏科者, 依他例試六才, 倍 給分數, 後式年爲始, 先試訓民正音, 入格者許試他才, 各司吏典取才者, 竝試 訓民正音.”
76) 세종실록 권119, 30년 3월 계축(5책, 57쪽) “驛召尙州牧使金鉤. 鉤爲尙州未半年, 時集賢殿奉敎以 諺文譯四書, 直提學金汶主之, 汶死, 集賢殿薦鉤, 故特召之, 尋拜判宗簿寺事.”
77) 세종실록 권118, 29년 11월 계묘(5책, 43쪽)
78) 세종실록 권121, 30년 9월 병신(5책, 99쪽)
79) 세종실록 권124, 31년 6월 무진(5책, 135쪽) “召議政府左議政河演等謂曰 ……且監察凡祭祀必行 拜禮, 自今僧徒祈雨, 令監察亦行拜禮, 永以爲式何如? 援引古辭, 以諺文書之, 辭語反復, 幾二十餘紙. 抵意在群下不從風向佛, 私自譏議, 又深斥集賢殿諫說之非 …… ”
80) 한영우, 위의 논문, 761~766쪽.
세종은 6개월 후 사망한다.81) 문자로서의 언문은 벽서를 통하여 당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세종 31년(1449)에 영의정 하연(河演)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 위에 “河政丞아, 또 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82) 벽서가 많지는 않았지만, 성종 16년(1485)에는 저자 사람들이 언문을 써서 호조 당상을 욕하기도 하고,83) 중종 4년(1509)에는 종실이었다가 천민으로 전락한 여성 노비인 철비가 언문으로 종량(從良)해 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84) 글을 해독할 능력이 있는 사대부와 왕실 여인, 일반 백성 중 극히 일부가 언문을 불만과 민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인해 일반 백성은 쉽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의사를 문자화하고 체계적으로 정돈하여 지배층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었다.85) 한문에 익숙해 있던 양반 사대부는 훈민정음을 외면하였고 오랫동안 문자 없이 살았던 백성들에게 국문자를 습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훈민정음은 국가의 공용 문자가 되지 못하였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국가의 공적 기록은 한문으로 되어 있고 관청에서 공무로 작성하는 문서도 한문이었으며 한글로 작성된 문서는 그 법률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글 문헌은 대부분 왕실이나 간경도감과 같은 국가기관이 주관해서 만든 관판본이 주를 이루었다. 언해 곧 한문 문헌에 대한 국어역은 정속언해와 소학언해, 삼강행실도언해86) 등이 간행되면서 시작되었다.87)
81) 성종은 세종의 뜻을 이어 의정부에서 국왕이 절검을 행하는 말을 언문으로 번역해서 관문, 시장, 촌락에 걸어두어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고, 한문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전국의 모든 백성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성종실록 권22, 3년 9월 경자(8책, 685쪽)).
82) 세종실록 권126, 31년 10월 임자(5책, 149쪽) “演苛察, 又老耄, 行事多顚錯, 人有以諺字書壁上曰, 河政丞且休妄公事.”
83) 성종실록 권185, 16년 11월 병진(11책, 72쪽) “……(조)之瑞曰, 市人書諺文辱戶曹堂上, 固可憎也, 然此小民常事…… ”
84) 중종실록 권9, 4년 9월 경자(14책, 363쪽) “下鐵非上言于該司. 鐵非宗室女, 以諺字書上言之辭, 援 例願蒙上德, 免爲私賤. 政院啓曰, 鐵非以諺呈上言, 至爲褻慢. 且其所願, 不可從也, 請推考治罪. 從之. 鐵非, 乃李顆母也.”
85) 도현철, 앞의 논문, 16~22쪽.
86) 성종 21년(1490)에 삼강행실도 언해본을 간행하여, 서울과 지방 士族의 家長 父老, 敎授, 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다음해 4월에는 전국 각지에 이를 보급하 게 하였다. 또 조선왕조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에서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을 읽도록 규정함으로 써 제도적으로 한글을 통한 유교의 윤리 규범인 오륜의 확대를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경국대전 권3, 禮典 獎勵).
87) 김무봉, 「조선전기 언해 사업의 현황과 사회 문화적 의의」, 한국어문학연구 58, 2012.
한글의 창제는 민의 의식을 진전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조선왕조는 양반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건국되었고 그들이 근간이 되어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왕조의 군주로서 국정 이념인 유학의 경전을 익혔고, 인륜의 확립을 통하여 존비‧귀천의 지배와 복종관계의 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면서, 문자를 통한 교화로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다. 세종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도덕적 자각을 강조하였고, 백성들이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를 창제하여 문자를 통한 인륜 교화, 유교 윤리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신분제가 강고히 존재하고 도덕적 우열의 차이가 강조되던 시기에, 문자의 내재적인 힘과 논리에 의하여 문자 생활을 통해 지식을 확대하고 생각을 정돈하며, 소통을 활성화하고 민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4. 맺음말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를 통한 유교 교화의 확대를 살펴보려는 것이 본고의 목표였다. 내용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정교학으로 삼고 유학에서 제시하는 정치사상, 정치제도를 활용하여 국가 체제의 운영 원리와 운영제도를 마련하였다. 또한 조선왕조는 원과 명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유교의 조선화와 자국화를 도모하였다.
세종은 유교 군주로서 중국의 고제를 연구하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유교 이념의 운용을 꾀하였다. 그는 유학의 경학과 경세론에 기반하여 치용적 학문관을 견지하였다. 그것은 시조(時措), 즉 현실 변화에 적합한 조치를 취하고 치용(致用), 즉 현실에 맞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기초하여 제도를 마련하고 정책을 펴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선한 본성을 전제로 한 유학의 교화론을 제시하였다. 인간의 절대선인 천성을 전제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하는 이치(自新之理)를 강조하여 보고 느껴 분발(觀感而興起)하도록 유도하였다. 조선왕조는 예와 덕에 의한 국가 통치와 윤리 교화책을 견지하지만, 형률에 의한 교화책도 활용하였다.
정도전은 정치를 윤리도덕의 실현과정으로 보고 인정과 덕치의 유교 정치론을 지향하면서도, 제도와 형벌을 예치와 덕치를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였다. 조선왕조의 인정에 기반한 교화책은 문자를 통한 교화책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종래부터 사용된 한문을 기본으로 하는 것에서, 이두와 구결문으로 풀어쓰는 방식으로 진전되고, 점차 백성의 문자인 언문(훈민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른다. 세종은 백성이 이두라도 알아서 율문을 알고 법을 어기는 것을 막고자 한문을 이두문으로 번역하도록 했다.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율문에 의거해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는데, 우민(愚民)이 범한 죄를 알고 스스로 고치는 것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종은 문자에 의한 교화를 목적으로 삼강행실도을 간행하여 백성이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오륜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세종은 설총이 이두를 만든 뜻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고, 언문 역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세종은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한글(언문)을 창제하여 법률을 이해하고 교화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세종은 양반층의 전유물인 한문을 대신해서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였는데, 훈민정음은 이른바 언문의 탄생 곧 입으로 하는 말(口語)과 문자로 쓰여진 글(文語)이 일치하도록 한 것이다.
문자를 활용한 훈민 교화책, 곧 백성을 위한 문자를 창제하고 문자를 통해 백성들이 자각 능력을 키우게 함으로써 선을 행하고 악을 막아 범죄를 저지르게 하지 않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언해 작업을 추진하였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통하여 언문의 효율성을 실험하였을 뿐 아니라 왕실의 권위나 왕조의 정통성을 천명하였다. 또한 세종은 한문으로 유시하였고 이과와 이전의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을 부가했으며, 이과 시험에 응시하는 자는 다른 도의 예에 따라 육재(六才)를 시험하되 훈민정음을 시험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하며, 각 관아의 이과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였다. 이는 관공서의 문서 행정을 이두에서 한글로 대체하려던 의도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일반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문자의 보급이 이루어지고 문자 생활을 통하여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문자화하고 사유를 체계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비록 신분제 사회이기는 했지만 백성들이 자신의 의사를 문자화하고 체계적으로 정돈하여 지배층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문에 익숙해 있던 양반 사대부는 훈민정음을 외면하였고 오랫동안 문자 없는 상태로 지냈던 백성들이 국문자를 습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훈민정음은 국가의 공용문자가 되지 못하였고, 사적이거나 개인적의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국가의 공적 기록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관청에서 공무로 작성하는 문서도 한문이었으며 한글로 작성된 문서는 그 법률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글 문헌은 대부분 왕실이나 간경도감과 같은 국가기관이 주관해서 만든 관판본이었다. 언해 곧 한문 문헌에 대한 국어역은 16세기에 간행된 정속언해와 소학언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통해 생각하고 사고하며 도덕적인 자각 능력을 함양하는 길을 열었다. 양반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건국된 조선왕조는 그들이 중심이 되는 국가 운영을 도모하고 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법제와 형률과 함께 문자를 활용한 교화책을 썼다.
당시는 사회변동과 왕조교체를 지나면서 생산력이 발전하고 토지 지배 관계가 변화하였고 이에 수반하여 백성의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성장한 백성들의 의식을 수렴하면서 지배체제를 옹호할 방법을 강구하였고, 새롭게 수용된 성리학을 활용한 유교적 교화론을 제시하였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하여 교육, 교화를 강조하고 문자를 활용한 백성 교화를 추진해 갔다.
처음에는 한문책의 확대 보급에서 시작하여 한문책을 이두와 구결로 풀이하는 단계를 거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백성이 문자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자신의 의사를 문자로 체계적으로 정돈하여 지배층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백성의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는 문자의 내재적인 힘과 논리에 의하여 문자를 통해 지식을 확대하고 생각을 정돈하며, 소통을 활성화하고, 민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길로 더욱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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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eation of Korean Alphabet and the expansion of the Confucian Edification
Do, Hyeon-Chul( Yonsei University)
The Joseon Dynasty recognized Confucianism as the national ideology, and arranged the principle of operation and management system of the state by utilizing the political ideology suggested by Confucianism. King Sejong suggested the Confucian theory of education based on human good nature. He emphasized the principle of self-renewal through presupposing the absolute goodness of a human being. The Joseon Dynasty provided the edification based on the benign rule, especially through the Korean alphabet. For example, Nongsangjipyo and Daemyeongryul written in Chinese were made to translated into Idu. King Sejong created the Korean Alphabet so that the people might easily use it. Consequently, the people were able to systematize their thoughts through the literacy life. However, the Yangban, the traditional ruling class, turned away from the Korean Alphabet because they were familiar with Chinese characters. So the Korean Alphabet did not become the official script of the country but was used on a private and personal level. Nevertheless, the creation of the Korean Alphabet paved the way for the people to think logically, and to cultivate moral awareness through the literacy life. In addition, it made the people communicate their own thoughts to the ruling class.,
Keywords: People, King Sejong, Korean Alphabet, Governance in humanitie
투고일: 2021. 1. 19 심사일: 2021. 1. 26 게재확정일: 2021.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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