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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조선전기 ‘발해인’의 사회적 동향 -남원지역 협계태씨 태응진 가계를 중심으로-/박순우.군산대

<차 례> 1. 머리말 2. 여말선초 협계태씨 가문의 남원 이주 배경과 시점 1) 협계태씨 남원 이거 배경: 대집성 가의 쇠퇴 2) 협계태씨 남원 이거 시점 및 입향조의 신원: 재기 의 발판 마련 3. 조선초 태응진의 자녀들 및 혼인관계망 1) 장자 태석란(太石蘭) 2) 차자 태석균(太石筠) 3) 두 딸과 사위 장합, 복오 4. 맺음말

<국문요약>

고려시대 가장 현달한 대집성의 후손들은 고 려 왕실의 정치적 변동기에 화(禍)를 입고, 세거 지를 개경(開京)에서 옥천(沃川)으로, 다시 남 원(南原)으로 이주(移住)를 거듭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기왕의 연구에서는 협계태씨가 몰락했 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 가 있다. 협계태씨(陜溪太氏)의 남원 입향조는 대영재(大永財)로 추정되고, 입향 시점은 14세 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이들 가계의 중흥 노력은 남원으로 이거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거 4세대인 (대영재의 증손) 태응진(太應辰)대에 이르러 상당한 사회, 경제적 재력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 다. 태응진은 협계태씨의 중흥조라 불릴 만하다. 태응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이러한 사회, 경 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식들의 혼인을 성사시 켰다. 차남 태석균(太石筠)만 제외하면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가계의 배경이 분명한 인사의 자 식들과 혼인을 성사시켰음을 확인하였다. 이러 한 혼사가 가능했던 것은 태응진의 증조 대영재 때부터 지속하여온 선대의 노력과 태응진의 노 력이 더해진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핵심어: 협계태씨(陜溪太氏), 남원 입향조(入鄕祖) 대영재(大永財), 중흥조(中興祖) 태 응진(太應辰), 흥성장씨(興城張氏) 장합(張合), 면천복씨(沔川卜氏) 복오(卜吾)

1. 머리말

조선시대 발해인에1) 관한 연구는 매우 부진한 상황이다. 몇몇 연구자가 검토한 바 있지만,2) 여러 이유로 연구가 계속되지는 못했다.3) 그럼에도 조선시대 발해인을 살펴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고려를 찾은 발해인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갔는지를 규명할 수 있을 때, 그들의 한국사 속 존재양상 또한 더욱 온전히 재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남원 및 인근 지역에서 세거(世居)해 온 협계태씨 가문은 고려 중⋅후기 현달한 발해인 대집성(大集成)을 중조(中祖)로 하는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협계태씨 발해인들의 가승(家乘)인 陜溪太氏族譜(이하 陜溪譜로 약칭4))를 근거로 한다.5)

1) 본고에서는 고려초 귀화한 발해유민들의 후손으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을 그들의 선대와 같은 ‘유민’이라 부르지 않고 ‘발해인’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유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 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발산하는 동시에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그들의 삶을 온전하게 드러 내지 못하는 단어라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살았던 (고려초 발해 유민의) 후손을 가리키는 사료상의 가장 일반적 호칭이 바로 ‘발해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완전 한 고려인, 또는 완전한 조선인으로서 삶을 영위했던 이들이 자신의 선조들이 ‘발해’에서 왔던 점만 큼은 망각하지 않았음이 눈에 띄는데, 이는 왕족이었던 선대에 대한 일종의 ‘추념(追念)’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논의는 박순우, 「고려 후기 발해인 세거(世居) 사례와 조선시대 ‘발해인(渤海人)’ 연구 시론」, 한국중세사연구 62, 한국중세사학회, 2020, 263~264쪽 각주 41번 참조.

2) 北村秀人, 「高麗時代の渤海系民大氏について」, 三上次男博士喜壽記念論文集(歷史編), 東京: 平 凡社, 1985; 채태형, 「《협계태씨족보》에 실린 발해관계 사료에 대하여」, 발해사연구론문집 1,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박홍갑, 「발해유민 大氏의 한반도 정착과정 –영순현과 영순 태씨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16, 동북아역사재단, 2007.

3) 조선시대 발해인 연구는 ‘발해인’ 가계의 대표적인 가승자료인 永順太氏族譜와 陜溪太氏族譜의 신빙성이 과도하게 불신되면서 여러 곤란을 겪었다(박순우, 앞의 논문, 2020, 265~267쪽 참조.). 이 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족보의 기록을 보완해 줄 여타의 신빙성 높은 기록을 찾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문제들이 최근 다소나마 해소되면서 조선시대 발해인 검토의 여건이 새로이 조성되 고 있다.

4) 北村秀人이 1928년本 3권 中 1권本을 대략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北村秀人, 앞의 논문, 1985, 註5번 참조). 채태형도 陜溪太氏族譜를 검토하였는데, 어떤 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논문의 내용을 보면 그가 검토한 족보는 1928년本으로 추정된다(채태형, 앞의 논문, 1992, 209쪽). 이후 박 홍갑 역시 陜溪太氏族譜를 검토한 바 있으나(박홍갑, 앞의 논문, 2007), 검토대상은 1997년本에 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5) 일전에는 陜溪譜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도 많이 제기됐지만, 최근의 검토를 통해 陜溪譜의 기술 내용의 상당 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협계태씨의 家乘인 陜溪太氏族 譜를 보완해주는 湖南節義錄과 남원지역 읍지인 龍城誌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박순우, 앞 의 논문, 2020, 264쪽 각주 42⋅43번 참조.

아울러 대집성 사후 고려 조정을 둘러싼 권력지형의 변동 속에 남원 협계태씨 가문의 가세가 크게 흔들리고 무엇보다도 대집성家가 몰락했다고 보기도 한다.6) 다만 최근 필자가 입수한, 이전의 연구에서 전혀 활용되지 않았던 陜溪譜 1856년本에 따르면 또 다른 관측도 가능하다.7)

6) 박홍갑, 앞의 논문, 2007, 119~120쪽.

7) 陜溪太氏族譜(咸北吉州; 雄文堂, 1928刊)에 따르면 1646년 北道舊譜가 처음 간행되었고, 1856년 南道舊譜가 찬수됐으며, 南北合譜는 1928년에 발간되었다. 본고는 陜溪太氏族譜 1856년本과 1928 년本 두 本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이는 현전하는 陜溪太氏族譜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판 본들임을 밝혀둔다.

현전 陜溪太氏族譜 판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를 1928년本 및 여타 자료들과 대조해 보면, 상기한 주장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여말선초 시기에 대집성의 후손이 남원으로 이거(移居)한 배경을 검토하고(1 절), 남원으로의 구체적 이주(移住) 시점 또한 규명하고자 한다(2절). 3장에서는 남원의 협계태씨가 재기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회자되는 태응진과 그 자녀들의 통혼 양상을 검토할 것인데, 먼저 태응진의 장자 태석란(太石蘭)의 활동과 통혼을 검토하고(1절), 陜溪譜에 기록된 차자 태석균(太石筠)이 동 시기 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석균(太石鈞)과 동일인물임을 규명하며(2절), 마지막으로 태응진의 두 딸의 통혼 상대 인물과 가계도 검토하도록 한다(3절). 이를 통해 조선전기 남원 거주 발해인들의 사회, 경제적 위상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2. 여말선초 협계태씨 남원 이주 배경과 시점

본 장에서는 여말선초 협계태씨의 남원 이주 배경과 시점에 대한 의문을 해명하고자 하는데, 1절에서는 여말 선초 시기 발해인들이 남원에 이거한 이유를 검토하고, 2절에서는 이거 시점과 더불어 입향조가 누구였는지도 규명해 보려 한다. 특히 전자가 대집성 가의 쇠퇴로 인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대집성 가문의 재기를 의미하는 측면이 있었음 또한 환기하고자 한다.

1) 협계태씨 남원 이거 배경: 대집성 가의 쇠퇴

고려 후기의 대집성은 고려에 내투했던 발해인들과 그 후손 중 가장 현달한 발해인이었다. 그의 정치적인 현달, 특히 당시 무인 집정자 최우와의 관계에 주목한 연구들이 발표된 바 있으며,8) 그의 사후 15년이 지나 그의 딸들이 무신정권 말기의 권력 변동에 연루되면서 가계가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9) 다만 고려 후기 대집성 家를 지칭하는 “대씨족당(大氏族黨)”이라는 역사적 용어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대집성의 후손들이 비록 권력 교체기에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몰락’했다는 주장만큼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10) 협계태씨 남원 이거 배경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대집성 사후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집성은 1210년을 전후해 고려 조정에 처음으로 출사한 것으로 짐작되고,11) 1220년대 초반부터는 고위 관인으로 활동했으며, 최우 집권 중반기까지 최고위급 관료로 활동하다 1236년 사망하였다.12) 대집성은 여러 고려 관료 가문과도 통혼하였다.13)

8) 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국학자료원, 1996, 113쪽;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연구, 일지 사, 1991, 47~49⋅143쪽; 이효형, 발해 유민사 연구, 혜안, 2007, 254~256쪽; 이효형, 「발해유예 대집성의 출자와 정치⋅군사적 활동」 고구려발해연구 45, 고구려발해학회, 2013; 허인욱, 「고려 시대 ‘발해 유민’과 ‘발해계(渤海系) 고려인’ 연구」, 새롭게 본 발해유민사,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編, 2019. 앞의 연구들은 대집성의 출세 이유를 그가 자신의 딸을 당대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후실 로 들인 것에서 찾았지만, 사실상 추측의 성격이 강하다. 대집성의 출세 과정에 대해서는 박순우, 「10~14세기 ‘渤海人’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7, 287쪽 <표 24: 고려 후기 발해 인의 활동>・294~296・299~300쪽 참조.

9) 박홍갑은 대집성 家가 대집성 사후 16년 만에 ‘몰락’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박홍갑, 앞의 논문, 2007, 120쪽 참조).

10) 박순우, 앞의 논문, 2020, 257쪽 참조.

11) 대집성과 관련한 첫 기사는 1218년에 확인된다. 최충헌이 무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대집성을 포 함한 5명을 낭장(정6품)에서 차장군(정4품)으로 승진시킨 사실을 전하는 기사가 그것으로(高麗史  권129, 列傳42, 崔忠獻 傳, “忠獻欲得武士心, 以郞將大集成等五人爲借將軍.”;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5년(1218), 5월조, “崔忠獻, 欲得武士心, 以郞將大集成等五人, 爲借將軍.”), 이로 보아 대집성 은 늦어도 1210년을 전후한 시기에 고려 조정에 출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高麗史 권23, 世家23, 高宗 23년(1236), 5월, “壬申 守司空太集成卒.”

13) 大集成 딸들의 혼인 관련 기록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高麗史 권129, 列傳42, 反逆3, 崔忠獻 附崔沆 傳 참조; 高麗史 권103, 列傳16, 崔椿命 傳 참조; 高麗史節要 권17, 高宗 38년(1251) 3월조 참조;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 339~347쪽. 아울러 대집성의 두 딸의 혼인 상대에 대한 심층 분석으로는 박순우, 「10~14세기 ‘渤海人’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 위논문, 2017, 294~296쪽 참조.

고려 중기 재추(宰樞)까지 오른 대집성의 가문에 암운이 드리운 것은, 대집성 사후 13년이 지나 1249년 최우가 사망하고 그 아들 최항(崔沆)이 권력을 잡으면서이다. 대집성의 딸 중 ‘대씨 부인’으로 불리는 이가 최우의 측근 주숙(周肅, 주영뢰, ?~1250)과 혼인했는데, 최우의 아들 최항의 집권으로 주숙이 숙청을 당하기 직전14) 주숙의 조카였던 장군 주선(周瑄)이 숙모인 대씨와 간통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대씨는 국문 끝에 옥사(獄死)하고 주선은 참수됐으며, 대씨의 두 딸은 섬에 유배되었다.15) 이 사건이 대집성 家에는 첫 번째 시련이었다. 대집성의 또 다른 딸인 ‘택주 대씨’는 최우의 후실로서, 친정 방문시 최우로부터 20개의 은병을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16) 그런데 최항의 계모(繼母)였던 그녀가 최항을 차기 권력으로 지지하지 않고 김약선의 아들 김미(金敉)를 지지하면서 최항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최항은 정권을 잡자 대씨의 ‘택주(宅主)’ 작호(爵號)를 1251년 박탈하고 재산도 몰수하였다.17)

14) 高麗史 권129, 列傳42, 反逆3, 崔忠獻附崔沆 傳. “沆遣郞將林庚, 押肅流島, 至熊川, 沈殺之”; 高麗 史節要 권16, 高宗 37년(1250), 3월, “崔沆, 遣郞將林庚, 押前樞密院副使周肅, 流于島, 至熊川, 沈殺 之” 15) 高麗史節要 권16, 高宗 37년(1250) 2월, “將軍周瑄, 通其叔父周永賫妻大氏, 事覺, 御史臺, 執大氏 鞫之, 死獄中, 遂斬瑄.” 이후 대씨 부인의 두 딸은 방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에 대해서는 박순우, 앞의 논문, 2020, 254~257쪽 참조.

16) 高麗史 권129, 列傳42, 叛逆3, 崔忠獻・崔怡 傳, “大氏欲歸謁父母, 怡令軍器別監李資敬, 索十品銀 甁二十, 資敬奪五店公私甁, 以充之.”

17) 高麗史 권129, 列傳42, 反逆3, 崔忠獻附崔沆 傳. “沆嘗以繼母大氏, 助若先子敉, 不右己, 深怨之. 乃 奪大氏宅主爵, 收其財産, 令夜別抄皇甫俊昌等, 投大氏前夫子將軍吳承績于海.”

대씨의 옥사(1250)에 이어 이 사건(1251)까지 터지면서, 대씨가문의 가세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세거지 개경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인 남원으로 이동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다음 절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한편 현직 관료에게 출가한 대집성의 딸들이 겪은 禍는 기록에 남아 전하는 것과 달리, 대집성의 아들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아직 출사하기 전이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역시 다음 절에서 검토하도록 하자.

2) 협계태씨 남원 이거 시점 및 입향조의 신원: 재기의 발판 마련

협계태씨 문중 소속 발해인들의 가승(家乘)인 陜溪太氏族譜 1928년본은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자료이지만, 세밀한 검토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확인되는 대집성의 묘지 위치가 오늘날의 충청북도 옥천으로 나타나 주목된다.18) 고려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현달한 발해인이었던 대집성이 옥천에 묻히게 된 시점과 이유는 미상이지만,19) 적어도 1,2세대는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대집성이 옥천에 묻혔다는 사실 자체가 그 후손들의 남원 정착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 하겠는데, 필자가 최근 발견한 陜溪譜 1856년本을 1928년본과 함께 검토할 경우20) 대집성 후손들의 남원 이거 시점 및 입향조의 신원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18) 협계태씨의 중조 대집성의 묘는 1928년本에 따르면 옥천군 청남면 조천리의 한 야산에 소재한 것으 로 기록돼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옥천의 조곡리(鳥谷里)와 도천리(道川里), 영동군 북이면의 도천리 일부가 합쳐졌고, 그 명칭은 조곡(鳥谷)과 도천(道川)의 한 字씩을 따서 조천리라 했으며, 이 새 지역 단위는 우선 옥천군 청남면에 편입된 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되었다. 남원의 협계태씨 종중은 비교적 최근인 2011년 4월 옥천에 소재한 대집성의 묘를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로 이장하여 새 묘역을 조성했다. 현재 협계태씨의 종중이 남원에 대대로 세거해온 만큼 자신들의 중 조(中祖) 대집성의 묘를 천장한 사실은 자신들의 선대를 선양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선대를 추념하 고 자신들의 정체성(자신들의 출자出自)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19) 고려시대 협계현(俠溪縣)은 현종대에 서해도 곡주(谷州)의 속현이었고, 世宗實錄地理志를 보아 도 ‘협계’는 황해도 황주목 신은현에 편입돼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태조 5년 협계현을 황해 도 신계현에 편입시켰음이 언급돼 있고, 고적 조에 ‘협계폐현(俠溪廢縣)’이라는 언급도 확인된다 (이상 高麗史 권58, 地理志, 谷州, 俠溪縣 조; 世宗實錄地理志 黃海道, 黃州牧 新恩縣 조; 新增 東國輿地勝覽 권42, 黃海道, 新溪縣 조 참조.). 그런데 陜溪太氏族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陜溪’ 를 “沃川”의 古號(1928년本), 또는 舊號(1856년本)라 기록하였다(陜溪太氏族譜 권1, 中祖世界, 中祖集成 조, “陜川則陜溪, 陜溪則沃川古號也.”).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협계태씨가 옥천으로 이주한 후 옥천의 협계태씨 인사들이 자신들의 발원지를 협계라 소개하는 과정에서 ‘협계는 옥천의 고호(또는 구호)’라는 언급 또는 통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20) 陜溪太氏族譜 1856년本에 대한 검토는 본고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이다.

물론 陜溪譜 1856년本의 경우, 사료적 차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지닌다. 우선 권1 앞부분 기록이 1928년本에 비해 매우 소략하며, 협계태씨 대수(代數) 설정에서도 적지 않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판본의 기록 차이는 물론 1856년본의 오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56년本이 (고려 중⋅후기 인물인) 대집성을 고려초에 내투한 대광현(“中祖”)의 아들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 오류는 1928년本 이른바 ‘南北合譜’ 가 만들어질 때 수정되었다.) 대집성의 아들에 대한 기록에서도 오류가 발견된다. 1928년본은 대집성의 아들을 대정취, 대정취의 아들을 대영재로 기록했지만, 1856년本은 조손(祖孫) 관계인 대집성과 대영재를 부자관계로 설정하였다. 물론 1856년본이 맞고 1928년본이 틀렸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1928년本에 기록된 대정취는 충렬왕 대에 호장별초(戶長別抄)를 지낸 것으로 적시돼 있어,21) 1856년본이 대정취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 오류가 1928年刊 ‘남북합보’가 간행될 때 바로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1856년본에도, 1928년본에도 동일하게 수록돼 있어 역사적 사실임이 확인되는 부분 또한 적지 않게 담겨 있다. 대집성의 손자 대영재(大永財)의 묘지가 남원부 북쪽 매안방(梅岸) 응봉(鷹峰) 서록(西麓)에 소재한 사실, 그리고 대영재의 아들 대공지(大公砥)의 무덤도 영재의 묘역에 함께 조성돼 있다는 사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22)

21) 陜溪太氏族譜 권1(1928년本), 62面, 貞就 조, “忠烈王朝爲戶長別抄.”

22) 陜溪太氏族譜 권1(1928년本), 62面, 永財 조, “墓在全北南原府北梅岸鷹峰西麓巽坐.” 陜溪太氏族譜 권1(1856년本), 永財 조, “墓在南原府北梅岸鷹峯西麓”; 同書, 公砥 조, “墓考墓同 麓” 한편 두 기록 모두에 대집성의 아들 대정취의 무덤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물론 족보에 묘소의 소재가 기록되었더라도 이를 100% 신뢰할 수 있냐는 논리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당대 사회상을 고려할 때 선대의 묘소를 잘 관리하는 것은 ‘孝’를 다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00%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무턱대고 족보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도 지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표 1> 1856年刊 협계태씨족보의 대수 설정 중조 2世 3世 4世 5世 6世 大光顯 大集成 大永財 大公砥 大慶後 太應辰 <표 2> 1928年刊 협계태씨족보의 대수 설정 중조 2世 3世 4世 5世 6世 大集成 大貞就 大永財 大公砥 大慶後 太應辰 東方學志

그간 1928년본에 대한 불신이 컸던 탓에 이 기록 또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1928년본은 물론 1856년본에도 이 기록이 동일하게 수록돼 있다는 점이야말로 대집성 후손들의 남원 거주를 확증해 주는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23) 아울러 이 기록은 협계태씨의 남원 입향조를 태응진으로, 그리고 입향 시점은 여말선초로 추정해 온 종래의 견해를24) 수정할 필요성을 제공한다. 기록으로 볼 때 태응진의 증조 대영재가 남원 입향조였을 가능성이 매우 커지기 때문이며,25) 이렇게 볼 경우 협계태씨의 남원 입향 시점 또한 14세기 전반을 포함한 고려 후기로 올려잡을 수 있게 된다.

23) 태응진의 행적을 기록한 족보에는 “始居南原”이란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기록을 온전 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태응진 관련 기록에는 추가로 그가 남원부 동문밖에 초곡에 거주 하다, 만년에 남원부 이언(방) 동대로 옮겨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필자는 태응진의 조부와 증 조부의 묘소가 남원부 북쪽 매안방(현 사매면 일대)에 형성된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감안할 때 태응진 항목에 “始居南原”이란 기록은 후손들이 태응진을 현창하려는 목적으로 ‘입 향조’, 또는 ‘중흥조’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4) 박순우, 앞의 논문, 2020, 270쪽. 필자는 해당 논문에서 태응진 관련 기록에서 “始居南原”이란 기록 을 신뢰하였는데, 연구가 거듭될수록 고려해야 할 내용이 많아졌다. 이에 협계태씨 가계의 남원 이 주와 정착, 가계의 성장이라는 시⋅공간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5) 아쉽게도 世宗實錄地理志나 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 남원도호부 성씨 조에서는 ‘太’씨 관련 기록이 찾아지지 않는다.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단순한 누락일 가능성도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남원의 읍지인 龍城誌 권1, 姓氏 조의 경우 ‘舊誌’와 ‘新增’ 항 중 후자에 ‘太’씨 가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면 태응진은 입향조라기보다 남원 이거 협계태씨의 ‘중흥조’ 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응진은 선대의 노력과 유산을 물려받은 후 가계의 현창을 위해 더욱 노력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한편 남원으로 들어온 후 대집성 가문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협계태씨의 남원 입향조로 추정되는 대영재의 향후 행적이 관건이겠는데, 아쉽게도 대영재-대공지-대경후(大慶後)에 관한 기록은 족보에 남은 기록이 전부이고, 교차 확인할 기록도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다만 남원으로 이거한 협계태씨가 재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응진(太應辰) 관련 기록은 그들의 가승 이외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다음 장에서 태응진의 자녀들의 관로 진출과 혼인 상대 등을 검토함으로써 조선전기 협계태씨 발해인들의 사회 관계망을 복원해 보도록 한다.

3. 조선초 태응진의 자녀들 및 혼인 관계망

전근대 가문들의 통혼 상대와 그 가계를 검토하면 쌍방의 사회⋅경제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초기 남원에서 일정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던 협계태씨 구성원들이 어떤 가문의 누구와 혼인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 또한 그에 있다. 앞서 필자는 협계태씨의 남원 입향조가 태응진이 아닌 그의 증조 대영재(大永財)였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대영재의 남원 입향 이후 협계태씨를 본격적으로 일으킨 인물은 대영재의 증손 태응진으로 생각된다.26) 태응진은 고려조에 판병부상서사(判兵部尙書事)를 지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정종 원년(1399년)에 문과 급제27) 후 행담양병마도호부사(行潭陽兵馬都護府使)와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만년에 남원부 최고 명당으로 평가받는 이언방(“伊彦”) 동대(東垈)로 주거지를 옮긴 것으로 전하고 있다[“晩移”].28) 태응진의 증조와 조부의 무덤 위치를 감안하면 남원으로 이거한 협계태씨의 초기 거주 지역은 남원부 북쪽의 매안방(梅岸坊)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태응진이 퇴직한 후에는 남원부 최고 요지로 일컬어지는 이언방 동대로 거주지를 옮긴 셈이다.29)

26) 태응진의 행적과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박순우, 앞의 논문, 2020, 268~272쪽 참조.

27) 1928년本은 2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1856년本은 12월 19일로 기록하였다.

28) 陜溪太氏族譜 권1(1928刊), 應辰 조, “號草谷. 判兵部尙書事. 文科. 我定宗元年己卯二月十九日, 陞 嘉善大夫, 行潭陽兵馬都護府使, 卽皇明建文元年也. 永樂二年, 陞資憲大夫, 行兵曹判書. 始居南原東 門外草谷. 晩移伊彦東垈. 有忠孝及卒. ○遣官禮葬.”

29) 남원부 이언 동대에 대해서는 남원문화유적분포지도(전북대학교박물관・남원시, 2004) 335쪽의 언급이 참고된다.(“윤영채 가옥은 중종 6년(1511)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옛날 남원의 방(坊)이라 는 48개의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이 지역을 이언방이라 불렀는데, 풍수로 보아 48방중 제일 가는 명당이었다고 한다. 동대(東垈)라 불렀던 이 건물은 이언방의 관청이었던 듯한데, 남원 수령 의 별장이었다고도 전한다.”)

본 장에서는 태응진의 장남 태석란(太石蘭), 차자 태석균(太石筠), 그리고 두 딸들의 혼인관계를 살핌으로써, 선초 태응진 가계의 족세(族勢)는 물론 남원지역에서의 이 가문의 사회적 지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고자 한다.

1) 長子 태석란(太石蘭)

태응진의 자녀와 통혼 상대를 정리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가계의 족보 1856년 및 1928년본에 따르면, 장자 태석란은 아버지의 부음[蔭仕]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장수(長水)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냈고 이후 공을 세워 관직이 병조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특히 1928년本은 태석란의 관력을 좀 더 자세히 전하는데, 그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이며 공조(工曹)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으로서 공을 세워 관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從2品下), 병조 참판(參判)에 이르렀음이 기록돼 있다

<표 3> 태응진 자녀와 통혼 상대 6世 7世 8世 太應辰 太石蘭 太異 婿; 朴廷 婿;趙得才 婿;房義文 婿;周命昌 婿;尹智精 太石筠 太倫;無後 婿; 張合 張允華 張允愼 張允文 張允武 婿;李乾文 婿; 卜吾 卜承元 卜承亨 卜承利 卜承貞

태응진이 정2품下의 자헌대부에, 태석란이 종2품下의 가선대부 품계를 받았다면 부자 모두의 품계가 상당한 고위였음을 알 수 있다.30)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태석란이 이춘(李椿, “도조대왕度祖大王”31))의 손자인 이천계(李天桂)의32) 딸과 혼인[女婿]하여 이천계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이다.33) 당시 지역사회에서 왕실가 여성과의 혼인이 성사되었다는 사실은 당대 지역사회에서 최고의 경사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그가 왕실가의 여성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당시 남원에서의 협계태씨 가문의 족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34)

30) 남원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龍城誌는 태석란이 태응진의 아들로서 “縣監”을 지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龍城誌 권7, 人物下, 蔭仕⋅新增, 太石蘭 조, “太石蘭判書應辰之子縣監”). 일반적으 로 족보의 인물 기록은 대개 간략하게 적으려는 경향이 있다. 해당 가계의 족보 역시 그러한 경향이 자주 확인된다. 해당 가계 족보의 인물 항에는 해당 인물의 사적이 龍城誌에 실려있다거나(“事蹟 載龍城誌”), 또는 사적이 朝鮮科宦譜에 실려있다는 기록(“事蹟載朝科宦譜”), 또는 사적이 湖南 節義錄에 실려있다(“事蹟載湖南節義錄”)는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태석란의 경우 족 보의 다른 인물 기록과 비교할 때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왕실가 여성과 혼인이 성사된 사실은 당시 지역사회에서 회자될 만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1) 도조(度祖) 이춘(李椿)은 이자춘(李子春)의 아버지이므로 이성계의 조부(祖父)가 된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 후 조부 이춘을 도왕(度王)으로 추증하였고, 태종은 1411년(태종11) 4월에 이춘에게 공 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이라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도조(度祖)라 하였다.

32) 이천계(李天桂)는 이자흥의 아들이다. 아버지 도조 이춘의 천호직을 세습한 이자흥이 일찍 사망하 자, 아직 어린 이자흥의 아들 이천계 대신 이자흥의 동생 이자춘이 (조카 이천계가 성장하면 천호직 을 돌려준다는 조건 아래) 대신 천호직을 세습했지만, 이자춘은 이천계가 성장한 후에도 천호직을 돌려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조카 교주(이천계)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太祖實錄 권1, 총서 22번째 기사, “咬住稍長, 桓祖欲以職事歸之, 咬住讓而不受.”)고 하지만, 이후의 전개 과정을 보면 그를 신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훗날 이천계가 이성계를 꺼려 “모해謀害”를 하려다 실패했지만, 이성계가 그를 처벌하지 않았고 개국 후에는 이천계의 아들 모두 에게 높은 관작을 주었음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太祖實錄 권1, 총서 참조).

33) 陜溪譜 권1, 七世 石蘭 條에는 “天桂之女”라고 기록돼 있다(1856년⋅1928년本). 1856년本의 ‘判 書公事實’조는 태석란을 “天桂之婿也”로, 1928년本은 “天桂之女婿也”로 기록하였다.

34) 한편 이러한 태씨가문의 족세는 적어도 태응진의 아버지 대경후 대부터 가시화되었을 것으로 생각 되는데, 대경후는 상령장(常領將) 만호위(萬戶衛), 판병부사(判兵部使)를 지내고 청성군(靑城君) 에 봉해졌으며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은 것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에 관한 기록은 陜溪 譜 1928년本에 상세히 언급돼 있으며, 1856년本에는 ‘常領將萬戶衛’만 기록돼 있다).

2) 次子 태석균(太石筠)

태응진의 둘째 아들로 기록된 태석균(太石筠)은 두 本의 족보에 이름만 전할 뿐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족보의 「判書公(태응진-필자 주)事實」조에도 장자 태석란(太石蘭) 만 언급됐을 뿐 차자 석균(石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龍城誌에도 태응진의 차자 태석균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世宗實錄에서 태석균과 활동 시기가 겹치는 동음이자(同音異字)의 인물이 확인된다. 태응진의 활동 시기에서 유추되는 태석균(太石筠)의 생존 시기와 실록에 기록된 태석균(太石鈞)의 활동 시기를 비교하면 동일인인지의 여부가 드러나리라 생각되는데, 검토 결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태석균(太石鈞)은 世宗實錄에 총 8건의 기사가 전하고, 文宗實錄의 황희의 졸기에도 그의 이름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그런데 실록에 등장하는 이 태석균(太石鈞)은 그 이력을 고려하면,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35)의 「先生案」 조에 확인되는 또 다른 태석균(太石勻)이란 인물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선생안’의 태석균(太石勻)은 1428년(세종 10) 6월부터 1430년(세종 12) 8월까지 제주 판관(判官, 종5)으로 재직하였고,36) 동시기 실록 기록에 태석균(太石鈞)이 제주 감목관(監牧官, 종6)으로 재직시 ‘국마(國馬)가 근 천여 마리 정도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37) 이 태석균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주목할 인물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조선초기의 명 재상 황희(黃喜)가 그다. 태석균은 이후 사재 주부(司宰注簿)로 재직할 당시 전임지였던 제주 판관 당시의 일(국마 손실 문제)로 처벌을 받게 되었고,38) 당시 좌의정이었던 황희(黃

喜)가 그를 적극 구제하려다가39) 의금부와 사헌부의 비난 상소로 인해 파면되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40)

35) 濟州大靜旌義邑誌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해 그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청구기호 圭 17436). 濟州大靜旌義邑誌는 濟州邑誌(청구기호 想白古 915.149-J389)와 동일종으로 분류 된다. 36) 濟州大靜旌義邑誌, 濟州牧, 先生案 48~49面 참조.

37) 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1430) 11월 21일(무오) 참조. 다른 기사에서는 단지 “말이 많이 죽었다 [馬多物故]”고 기록하고 있다(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1430) 11월 14일(신해)).

38) 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1430) 11월 21일(무오)에, ○司憲府上疏曰 (…전략…) “又以石鈞之事, 請于李審, 審聞喜之言, 知其不可, 而從之如流, 其因喜枉法, 彰彰明甚矣. 是則殿下以大臣遇喜, 而喜不 以大臣之道, 報殿下也. 殿下雖命就職, 喜將何顔立於朝著, 爲人具瞻乎? 且握權大臣之請, 若非志士, 誰敢不從? 高麗之季, 權在大臣, 爲臺諫者, 承順大臣之頤指, 變亂是非, 有罪反免, 無辜反陷, 而大亂極 矣, 可爲寒心. 石鈞之事, 所枉雖小, 所害甚大, 釋此不論, 臣等恐請托枉法之漸, 將自此始, 不可禁矣, 當 辨之於早也. 伏望殿下, 罷黜不敍, 以杜請托枉法之漸.” 命罷喜職.

39) 황희는 인맥을 동원하여 직접 태석균을 구제하려 하거나(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1430) 11월 24일(신유), ‘그의 죄는 용서해도 된다’, ‘태석균의 죄는 애석하다’(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 (1430) 11월 21일(무오)는 등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40) 世宗實錄 권50, 세종 12년(1430) 11월 24일(신유) 참조.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황희는 무슨 연유로 비난을 감수하며 태석균을 구명하려 했던 것일까?41) 조선의 경우 마정(馬政) 정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주지하듯이 종6품의 감목관이42) 태종 8년(1408) 처음으로 제주도에 배치되었다.43) 대규모 목장이 설치된 제주도에서는 목사(牧使, 정3품)가 마정(馬政)을 총괄하기도 하였다.44) 그러나 태석균이 제주 판관이었을 당시에는 (1428년, 11월 3일 신해) 제주도 전체의 경우 도 판관이 감목관을 겸하고, 정의현과 대정현은 고을 수령, 즉 현감이 마정을 통솔하고 있었다.45) 그리고 태석균이 판관으로 재임하던 시기 제주목사였던 장우량(張友良)과 김흡(金洽)46) 등은 국마 손실을 사유로 태석균에 대한 징계논의를 진행하던 당시에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41) 文宗實錄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는 그의 성격을 “관후(寬厚), 침중(沈重)”으로 표현하였고, 保閑 齋集 권17, 묘표에는 그가 “가정생활에서는 청백하고 신중했다”고 적었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황 희가 대단히 신중한 성격이었다고 보아 왔다(정두희, 「조선초기 황희의 정치적 역할」 방촌 황희의 학문과 사상, 책미래, 2017; 김경수, 「황희의 생애와 현실인식」 한국사학사학보 36, 한국사학사 학회, 2017; 송재혁, 「헌장(憲章)의 수호자: 세종시대 황희의 정치적 역할」 정치사상연구 25, 한 국정치사상학회, 2019 참조). 한편 황희의 행적 및 평가에 대해서는 성봉현, 「방촌 황희 연구의 동향 과 연구자료 검토」 제1회 방촌학술대회자료집, 2015; 이성무, 방촌 황희 평전, 민음사, 2014; 황주연, 「황희 정승에 대한 청백리 논란」 세종대 정치와 방촌 황희선생, 방촌황희선생사상연구회 編, 2016; 이영춘, 「방촌 황희의 淸白吏 논란에 대한 재검토」 방촌 황희의 학문과 사상, 책미래, 2017, 198~242쪽; 이주희, 「세종대 북원의 팽창화 황희 –황희의 국방활동을 중심으로-」, 역사와 세계 57, 효원사학회, 2020 등 참조.

42) 經國大典 권4, 兵典, 外官職 조 참조.

43) 太宗實錄 권15, 태종 8년(1408) 1월 3일(임자)

44) 南都泳,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 한국사연구 4, 한국사연구회, 1969; 韓國馬政史(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제5편 조선시대 마정」 부분 참고.

45) 世宗實錄 권42, 세종 10년(1428) 11월 3일(신해)

46) 濟州大靜旌義邑誌, 濟州牧, 先生案 41~42面 참조.

그런 점에서 태석균은 마정이 체계적으로 확립되기 전이었던 조선초 제주 판관으로서 감목관을 겸한 초기 사례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좌의정으로 재직 중이었던 황희는 마정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태석균에게만 국마 손실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태석균을 구명하려 했을 가능성이 우선 상정된다. 다만 좀 더 개인적인 사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황희가 충녕을 세자로 삼는 문제에 이견을 냈다가47) 1418년(태종 18) 5월 11일(경신) 교하(交河)로 내쳐졌고,48) 28일(정축)에는 남원부로 이배되어 조정 복귀 전까지 4년여간(1418년 5월~1422년말) 머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49)

47) 태종과 황희가 세자 문제로 드러낸 갈등과 이견에 대해서는 소종, 「조선 태종대 厖村 黃喜의 정치적 활동」 역사와 세계 47, 효원사학회, 2015, 113~119쪽 참조.

48) 太宗實錄 권35, 태종 18년(1418) 5월 11일(경신)

49) 太宗實錄 권35, 태종 18년(1418) 5월 28일(정축)

이 시기가 바로 태응진의 남원 거주 시기임을 감안하면, 고향으로 유배 온 중앙 정계의 이름난 인사와 대대로 남원에서 세거하며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닦은 협계태씨의 대표가 서로 교류하며 쌓은 인연이, 이후 황희가 태석균의 구명에 나서게 된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 두 딸과 사위 장합, 복오

(1) 태응진 장녀와 장합(張合)의 혼인

태응진의 장녀는 흥성장씨(興城張氏) 장합(張合)과 혼인하였다.50) 흥성장씨는 흥덕장씨(興德張氏)라고도 하며 고려초 광평시랑을 지낸 장유(張儒)를 시조로 하는 가문인데, 장합은 1세 장영(張英), 2세 장득보, 3세 장헌에 이어 4세에 해당한다. 장합과 태응진 장녀 사이의 자식으로 興城張氏世譜에는 2명의 아들만[允升⋅允愼] 기록돼 있지만, 陜溪太氏族譜에는 총 4남 1녀가 기록돼 있다[允華⋅允愼⋅允文⋅允武⋅女{李乾文}]. 장합과 그의 아들 장윤신은 남원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龍城誌에도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51)

50) 興城張氏世譜 권1, 張合 조, 22a~b面, “配陜川太氏 父判書應辰”. 興城張氏世譜는 1924년 木活 字本으로 총 5卷 5冊으로 간행되었다. 興城張氏世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디지털아카이브 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M35F-10110], 여타사항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흥성장씨 족보’ 조 참조.

51) 龍城誌 권7, 人物下, 蔭仕, 新增 조, “張合” 참조 : 龍城誌 권7, 人物下, 武仕, 新增 조, “張允愼” 참조.

장합은 실록에 모두 5차례 등장하는데, 태종 13년(1413) 9월부터 태종 16년(1416) 3월까지 제주 판관을 지냈고,52) 1422년에는 대호군(大護軍⋅종3품)으로 평안도에 보내져 연해의 경작할 만한 땅을 살핀 후 보고할 것을 지시받았다.53)

장합의 차자 장윤신(張允愼)과 3자 장윤문(張允文)은 세조가 보위에 오르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해(1455년) 9월 5일에 신하 44명을 좌익공신에, 그해 12월 27일에는 2,300여 명을 원종공신으로 녹훈했는데, 당시 녹훈된 이정(李楨)의 「좌익원종공신녹권(佐翼原從功臣錄卷)」 에, 그리고 世祖實錄에서 호군(護軍⋅정4품) 장윤신이 확인된다.54) 장윤신이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될 때 동생 장윤문도 함께 녹훈되었다.55)

52) 太宗實錄 권31, 태종 16년(1485) 5월 6일(정유); 濟州大靜旌義邑誌, 濟州牧, 先生案 48面 참조.

53) 世宗實錄 권18, 세종 4년(1422) 윤12월 2일(을묘)

54) 「좌익원종공신녹권(佐翼原從功臣錄卷)」은 안동 주촌 진성이씨 경류정에 소장돼 있다. 이 자료는 1459년(세조5) 경에 左翼原從功臣 3등에 錄勳된 李禎에게 頒賜된 공신 녹권으로, 공신책봉자 명단 및 이들에 대한 포상내용을 기록한 자료이다. 장윤신이 좌익원종공신으로 녹훈될 때 그의 관직이 호군이었던 사실은 世祖實錄에서도 확인된다(世祖實錄 권2, 세조 1년(1455) 12월 27일(무진)).

55) 世祖實錄 권2, 세조 1년(1455) 12월 27일(무진), “權知參軍張允文.”

태응진의 사위(장합)는 태종대에, 외손(장윤신⋅장윤문)은 세조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태응진 차녀와 복오(卜吾)의 혼인

태응진의 차녀는 한림(翰林) 복오(卜吾 또는 卜倍56))와 혼인하였다. 복오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유명한 복지겸의 10世孫이다.57) 龍城誌와 陜溪譜에는 복오와 태응진 차녀의 아들 4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음이 기록돼 있고,58) 陜溪太氏族譜 1856年本에는 복오의 집안에 대한 설명 및 아이들의 관력까지도 간략하게나마 기록돼 있다.59)

56) 龍城誌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本이 있는데, 두 기관에 소장된 자료 모두 복오(卜吾)를 (복)‘배倍’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복오의 아들 복승정(卜 承貞)의 과거 합격을 기록한 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3538])과 陜溪 譜는 모두 ‘오吾’로 기록하고 있다. 또 복오의 이름이 확인되는 紀年便攷, 世宗實錄과 世祖實 錄 모두 ‘오吾’로 기록하였다. 협계태씨족보의 공신성에 대해 그간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돼 왔 지만, 경우에 따라 陜溪太氏族譜가 오히려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생각된다. 紀年便攷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에서 원문 이미지를 열람할 수 있다 (MF35-267~272).

57) 紀年便攷 권9, “卜承貞沔川人智謙十世孫典翰吾子.”

58) 복승리와 복승정에 관한 간략한 정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복승리의 행적은 世祖實錄에 다수 기록돼 있고, 동생 복승정의 행적은 주로 成宗實 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59) 陜溪太氏族譜 1928년本에는 1856년本과 달리 사위의 이름(복오)만 기록돼 있고, 외손들 역시 이름만 간략하게 기재돼 있다.

복오는 世宗實錄에는 구례 현감으로,60) 世祖實錄에는 도(道)의 판관(判官, 좌익원종공신 녹훈 당시)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61) 복오가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될 때 그의 아들 복승리 역시 함께 녹훈됐는데, 당시 복승리의 관직은 행 사용(行司勇)이었다. 복승리를 포함한 복오의 네 아들, 즉 태응진의 네 명의 외손 모두 과거에 급제했는데,62) 그중 첫째 복승원과 둘째 복승형은 각각 천안 군수와 제주 목사63)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아쉽게도 陜溪太氏族譜에서만 확인된다.64) 복오의 아들 중에서 가장 많은 행적을 남긴 인물은 셋째 복승리와 막내 복승정이다.65) 복승리는 세조대와 성종 초반기에 주로 활동했는데, 무과 급제후 남원 부사를 지내고 관직은 제주 목사에 이르렀으며,66) 퇴직 후에 외조(태응진)의 경제권 내에서 세거했던 사실도 확인된다.67) 또 복승정은 성종 3년(1472)에 처음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절행(節行)이 있었고’, ‘등제(登第)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는 평가가 확인되며,68) 성종 24년(1493)에 경기 관찰사 이계동이 이천 부사(利川府使) 복승정의 성실한 권농을 보고하는 기사69) 등에 등장한다.

60) 世宗實錄 권75, 세종 18년(1436) 10월 11일(계유) 참조.

61) 世祖實錄 권2, 세조 1년(1455) 12월 27일(무진) 참조.

62) 陜溪太氏族譜 1856년本은 첫째 복승원, 둘째 복승형, 셋째 복승리는 무과에 급제하고, 넷째 복승 정은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龍城誌에는 복승리 홀로 “虎榜”, 즉 무과에 급제했다 고 기록돼 있다(龍城誌 권5, 寓居 新增 조, “卜承利沔川人. 高麗開國功臣智謙之後. 翰林倍之子. 兄 承元・承享, 弟承員, 俱擢文科. 承利獨擢虎榜. 官至濟州牧使. 以其外祖判書太應辰. 農庄在本府時羅 山. 故來居.”).

63) 陜溪太氏族譜 1856년本에는 태응진의 사위 복오, 복오의 둘째 아들 복승형, 셋째 아들 복승리 모 두 제주 목사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濟州大靜旌義邑誌 先生案에는 복승리만 제주 목사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濟州大靜旌義邑誌 先生案, 42面 참조).

64) 陜溪太氏族譜 1856년本 참조. 한편 복승형의 이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本과 버클리대학교 소장본 龍城誌에는 ‘承享’으로 기록돼 있는 반면 陜溪譜는 ‘承亨’으로 기록돼 있어 차이를 보인 다.

65) 복승리는 실록에 총 12건의 기사가 확인되고, 복승정은 실록에 총 42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66) 濟州大靜旌義邑誌, 濟州牧, 先生案, 牧使 조, 42面 참조. 복승리는 1462년(세조8) 9월 제주목사로 도임했고 1465년(세조11) 1월에 교체되었다.

67) 龍城誌 권5, 寓居, 新增 조, “卜承利沔川人. 高麗開國功臣智謙之後. 翰林倍之子兄承元承享弟承員 俱擢文科. 承利獨擢虎榜. 官至濟州牧使. 以其外祖判書太應辰, 農庄在本府時羅山, 故來居.”

68) 成宗實錄 권15, 성종 3년(1472) 2월 18일(을유) 참조.

69) 成宗實錄 권273, 성종 24년(1493) 1월 29일(을미) 참조.

여말선초를 전후한 시기에 남원에 뿌리를 내린 협계태씨의 상징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태응진은 협계태씨 가문의 가세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자식들을 모두 고위관료의 여식들과 혼인시키거나, 중앙의 최고위 관료와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결과 외손들도 과거에 급제 후 경관으로, 또는 외관으로서 적지 않은 행적을 남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집성의 몰락 이후 개경의 근거지를 상실한 협계태씨 가문이 옥천을 거쳐 남원에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에도, 태응진을 중심으로 한 혼인관계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4. 맺음말

이상에서, 고려 중기 대집성의 활약에 힘입어 개경에서 번성하던 협계태씨 가문이 대집성 사후 개경을 떠나 남원에 입향하게 된 배경 및 시점을 해명하고, 남원 입향 후 가세의 확장을 주도했던 태응진의 혼인관계망 또한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협계태씨 가문의 남원 입향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고려시대의 발해인으로는 가장 현달했던 대집성 家가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하고, 부득이하게 개경을 떠난 협계태씨 가문이 우선 남쪽 옥천으로 이주했음을 살펴보았다. 2절에서는 대집성 후손들의 묘지 위치를 근거로 남원에 최초 입향했던 이는 태응진의 증조 대영재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그를 근거로 협계태씨 가의 남원 최초 입향 시점 또한 전과 달리 14세기 전·중반으로 올려 잡아 보았다. 3장에서는 입향조 대영재의 증손이었던 태응진의 혼인관계망을 검토하였다. 태응진 대에 이르러 협계태씨 가문은 남원부 최고 요지[“伊彦東垈”]의 주인이 됐는데, 그를 배경으로 태응진의 장자 태석란이 왕실가의 여성과 혼인했음을 1절에서 우선 살펴보았다. 다음 2 절에서 검토한 태응진 차자 태석균의 경우 비록 혼인 상대방은 미상이나, 대신 실록에서 보이는 ‘太石鈞’을 그와 동일인물로 간주한 후 이 인물이 황희와 지녔던 특별한 인연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3절에서는 태응진의 두 사위 장합과 복오를 살펴봤는데, 모두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된 고위 관료들이었던 데다 그 자식들 또한 높은 관직에 올랐음을 확인하였다. 선대로부터 시작된 남원에서의 협계태씨 정착 노력은 이렇듯 태응진대에 이르러 만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태응진은 남원지역 협계태씨의 중흥조라 할 만하다. 개경을 떠난 이래 고전하던 협계태씨 가계 또한 태응진대에 이르러 남원에서 그 가세를 온전히 회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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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Currents of Balhae Descendants in Early Joseon: A Study on Hyeobgye Tae clan in Namweon Park, Soon-woo

The Hyeobgye Tae House prospered in the 13th century Goryeo, thanks to the political career of Dae Jib-seong, who w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Balhae figures during the Goryeo period. Yet with the fall of Dae Jib-seong, the House itself took a hit and was forced to leave the Gaegyeong capital. First they moved to Okcheon, and later relocated to Namweon, where they eventually rebuilt the House. The Head of the House who settled down in Namweon for the first time was Dae Yeong-jae, seemingly during the early half of the 14th century. The House continued to expand its economic profile and elevate its political and social status in Namweon. Tae Eung-jin, who was part of the fourth generation of the House since its entrance into Namweon, successfully renovated the House. He had two sons and two daughters, and with the exception of his second son, all the other three married sons and daughters of prominent houses, even including the royal family. An impressive array of marital relationships was made possible by the House’s reputation, and further solidified the House’s position in Namweon.

Key words: Hyeobgye Tae House(陜溪太氏), Dae Yeong-jae, the First ancestor of the House to establish Residence in Namweon, Tae Eung-jin, who renovated the House, Jang Hab from the Heungseong Jang House, Bog Oh from the Myeoncheon Bog House

투고일: 2022. 1. 27 심사일: 2022. 3. 9 게재확정일: 2022. 3. 14

조선전기 &lsquo;발해인&rsquo;의 사회적 동향 -남원지역 협계태씨 태응진 가계를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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