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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한국 한문학 속의 동방삭 담론: 선비의 복잡한 내면, 인간의 평범한 감정/티안위안(전연田娟).중국해양대

Ⅰ. 서언 Ⅱ. 한국에서의 동방삭 관련 텍스트 수용 양상 Ⅲ. ‘골계’: 배우와 선비 사이 Ⅳ. ‘조은’: 선비의 진과 퇴 Ⅴ. ‘투도’: 장수, 유선, 일상 Ⅵ. 결언

<논문 요약>

본 연구는 중국의 인물인 동방삭이 한국 한문학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또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우선 한국에서의 동방삭 관련 텍스트 수용 양상을 고찰하였다. 동방삭은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중의 모습과 복잡한 성격을 가진 존재이다. 사기‧『한서 등 공식 담론과 동방삭의 저술, 그리고 동방삭이 작중 인물로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 등 그를 매개로 한 텍스트들이 한국으로 많이 유입되고, 또 광범위하게 읽히면서 이러한 이미지를 형성‧전파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또한 이 텍스트들이 한국 문인들이 동방삭을 해석, 재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골계’, ‘조은’, ‘투도’의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한국 한문학에서 동방삭을 부각시킨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표출된 작가 의식과 내면 감정에 대해 고찰하였다. ‘골계’와 ‘조은’ 관련 담론은 주로 역사적 실존 인물인 동방삭에 대한 주목과 해석으로, ‘士’ 집단의 정체성과 생존전략 문제로 귀결할 수 있다. ‘골계’ 해석의 초점은 ‘俳優化’한 지식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핵심이며, ‘조은’에 대한 해석에는 선비의 ‘진’과 ‘퇴’, 공적 책임과 개인 생존에 관한 고민과 선택이 담겨 있다. 한편, 한문학 속의 ‘투도’, 즉 삼천 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 서왕모의 복숭아를 동방삭이 세 번이나 훔쳐 먹었다는 이야기와 관련한 담론은 주로 인간으로서의 평범하고 보편적인 경험‧감정‧욕망에 대해 쓰고 있으며, ‘장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구비설화와 비교할 때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한 활용 양상을 보였다.

주제어: 동방삭, 삼천갑자, 골계, 조은, 투도.

Ⅰ. 서언 “삼천갑자 동방삭이라”.

동방삭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이름으로, 長壽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식은 매우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며, 과거에 그는 여러 얼굴과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중국 서한 시기 사람인 동방삭1)은, 자가 曼倩이며, 平原 厭次2) 출신이다. 한무제가 즉위한 후 인재를 구할 때 22세의 동방삭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이 상소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과 형수 밑에서 자랐다. 13세에 글을 배워 겨울철 석 달간 평생 쓰기에 족한 文과 史의 지식을 얻었고, 15세에 검술을 배웠으며, 16세에 시경과 사서를 익혀 22만 자를 외웠고, 19세에 병법 등 전쟁과 관련 지식을 배우면서 또한 22만 자를 외웠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을 용맹함으로 유명한 孟賁, 민첩함으로 유명한 慶忌, 청렴함으로 유명한 鮑叔, 그리고 信義가 있음으로 유명한 尾生에 견주었다.3)

1) 동방삭의 생몰연도와 관련해 사기 등 역사서에는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대략적인 시점을 추측해 볼 수 있 다. 현재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161년과 기원전 154년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사망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93년, 기원전 92년, 기원90년, 기 원전 88 혹은 89년 경, 기원전 91년에서 87년 경 등 다섯 가지 설이 존재한 다. 이에 대해 林春香의 「東方朔及其文學形象硏究」(복건사범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12)를 참고할 수 있다.

2) 동방삭의 본관은 사기에서 ‘平原 厭次’라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평원 염차가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오늘날 산동성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으나, 더 구체적으로는 惠民, 信陽, 陵縣 神頭鎭, 無棣, 惠平, 樂陵 등의 설이 있으며 이 가운데 혜민 설과 신두 진 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3) 반고, 한서, <동방삭전>.

이 글을 본 한무제는 그에게 公車署에서 待詔할 것을 명했는데, 공거서는 봉록이 적고 황제를 만나 뵙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이에 동방삭은 꾀를 써서 한무제를 알현하는 기회를 얻었고, 말솜씨로 한무제의 환심을 사서 金馬門 待詔가 되었다. 그 이후 상시랑, 대중대부 등의 직책을 맡았다. 금마문에 들어간 뒤부터 한무제가 그를 가까이 하였지만, ‘賢材’가 아닌 ‘弄臣’으로 취급하였다. 동방삭은 유머가 있고 말재주가 뛰어나며, 박식하고 점치기 및 온갖 유희를 잘하였고, 그렇기에 우스갯소리와 익살스러운 행동, 빠르고 지혜로운 응대로 무제를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그를 <滑稽列傳>에 배치했고, 반고는 그를 ‘滑稽之雄’이라 평하였다.4)

4) 반고, 한서, <동방삭전>.

하지만 동방삭은 그저 골계로 황제의 환심을 산 인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狂’의 평가도 많이 받았다. 동방삭이 자천하기 위해 쓴 글을 보면 우선 스스로를 과시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을 엿볼 수 있으며, 종종 권력 있는 公卿들을 희롱하면서 권력자들 앞에서도 쉬이 굽히지 않았다. 한편, 그는 한무제의 기분을 잘 살피면서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때에 맞춰 바른 소리를 많이 했고, 정치의 득실을 의논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부국강병을 위한 계책을 아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본다면 동방삭은 사실 ‘道’의 실현과 이상적 정치 질서의 구축에도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끝내 중용되지 못했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내적으로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나름의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漢賦의 대표적 작가이기도 한 그가 남긴 <答客難>과 <非有先生論> 등과 같은 글은 바로 자신의 뜻을 밝히면서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동시에, 스스로 위안을 삼을 방편을 찾고자 하는 그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동방삭은 조정에서 은둔을 한다는 이른바 ‘朝隱’의 첫 번째 실천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볼 때, 동방삭은 천자를 가까이 모시는 우스꽝스러운 弄臣의 모습, 재치가 있는 狂人의 모습, 도의 실현과 이상적 통치 질서의 구축에 뜻을 둔 전통 지식인의 모습, 뛰어난 문학적 역량을 갖춘 문장가의 모습 등 다양한 면모를 동시에 지닌 입체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역사적 인물로서의 동방삭의 모습이라면, 후대에 가면서 그는 점차 비인간적인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동방삭과 관련한 일화들은 그의 기이한 말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 중심 요소가 되어 그의 생존 당시부터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기커녕 오히려 온갖 신비스럽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더해지면서 점차 허구적인 이야기로 재생산되었다. 여기에 도교의 발전과 한무제의 지나친 求仙행위 등 역사‧문화적 계기가 작용하면서 동방삭은 신선이 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삭의 신선화는 <동방삭별전>부터5)시작되었으며, 이후 하늘에서 내린 歲星이었다거나, 인간 세상으로 좌천당한 신선의 아들이었다는 등 신분이 달라지게 되었다. 또 그가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명‧청 시기에는 큰 인기를 얻은 희곡 작품의 모티프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동방삭은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관심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이어져 왔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익숙한 삼천갑자 동방삭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부터 이미 동방삭이라는 인물과 관련한 언급이 출현하였으며, 먼 훗날 청나라로 연행을 간 조선 문인들이 중국 산동 지역을 지나면서 동방삭의 묘로 알려진 곳을 찾아가 시를 지었다는 것6)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5) <동방삭전>, <동방삭기>, <동방삭별전> 등의 이름으로 태평어람이나 태 평광기와 같은 유서나 이야기집에서 실려 있고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보이 지만, 모두 동방삭 관련 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이야기들은 한 서, 사기의 기록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창작연도에 관련해서는 한나 라때, 또 위진시기, 육조 시기 등의 설이 있다.

6) 李民宬, 敬亭集 권6, 燕槎唱酬集, <過東方朔墓>. 吳䎘, 天坡集 권2, <過東方朔舊壟>.

학계에서도 동방삭과 관련한 자료에 주목한 연구들이 이루어진 바 있다. 손지봉은 한국 설화 속의 중국 인물을 연구하면서 동방삭 관련 설화를 꼼꼼히 고찰하였고,7) 관미과 최영준은 중국에서의 동방삭 이미지의 변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에서의 상황도 언급하였다.8)

7) 손지봉, 「한국 구비문학에 나타난 ‘동방삭’」, 선문논총 4, 1994. ; 손지봉, 韓 國說話의 中國人物 硏究, 서울 : 박이정, 1999.

8) 관미⋅최영준, <동방삭인물형상연변연구>, 중국어문학지 68, 2019.

다만 전자에서는 구비문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이루어졌고, 후자에서는 한국의 상황은 간략한 소개 정도에 그치고 있어 동방삭에 주목한 한문학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한문학 작품에 투영된 동방삭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특히 동방삭이란 인물에 주목한 이유와 동방삭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바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Ⅱ. 한국에서의 동방삭 관련 텍스트 수용 양상

본 장에서는 한국 한문학 속의 동방삭 담론을 탐구하기에 앞서 먼저 동방삭 관련 텍스트의 한국적 수용 양상에 대해 개괄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동방삭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성격을 가진 전기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형성은 주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동방삭에 대한 사실적인 서사에 목적을 둔 공식 담론으로, 이는 사기와 한서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두 번째는 동방삭이 남긴 저술들이다. 세 번째는 동방삭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인데, 문자를 이용해 이어지는 기록문학과 말로 전승하는 구비문학 두 가지 작품군이 포함한다. 과거 지식인들에게 사기와 한서는 필독 서목이었기 때문에 이들 책에 기록된 동방삭 관련 담론 역시 당연히 널리 읽혔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과정이 명확히 정리될 필요가 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를 중심으로 수용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동방삭이 창작한 저술과 관련한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방삭은 중국 문학사 전체를 두고 보면 다작을 남긴 작가로 평가할 수 없지만, 한나라 때 문인 중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쳤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 洪彦忠이 “문학에 있어 나는 동방삭의 풍부함에 부끄럽네(文學我慙方朔富).”9)라고 하며 탄식한 바 있다. 유협의 문심조룡에서도 10여종 가량의 문체를 논하면서 동방삭이 언급되었는데, 그 중 한부의 대표작으로 꼽는 <답객관>과 <비유선생론> 등은 한국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답객관>은 조선 문인 사이에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解難(혹은 답란)’란 문체를 개척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姜彝天은 이 작품을 읽고 쓴 <讀東方朔客難>에서 “동방선생의 <답객난>은 고금으로 對問解難의 시조이다” 10)라고 하여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를 지적하였고, 또 朴守儉이 <대우책>을 지으면서 동방삭의 <답객난>과 반고의 <답빈희>를 본떠 지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11)은 이 점을 뒷받침해 준다. 또, 한시의 발전사를 논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는 <팔언(상‧ 하)>라는 시는 한서에 동방삭이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국의 문인들 역시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李裕元은 한시 형식의 발전을 논하면서 팔언시의 시작으로 동방삭의 <팔언(상‧ 하)>를 꼽은 점12) 등을 볼 때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9) 洪彦忠, 寓菴稿 권1, <次東坡韻, 送希剛二首>.

10) 姜彝天, 重菴稿 雜著, <讀東方朔客難>. “東方先生客難, 爲古今對問解難 之祖.”

11) 朴守儉, 林湖集卷 권5, 雜著, <對友責>. “竊自效東方朔之<設客難>, 班 孟堅之<答賓戲>, 於是乎作對友責以明之.”

12) 李裕元, 嘉梧藁略 책14, <玉磬觚賸記>. “八言, 漢書⋅<東方朔傳>有<八 言>⋅<七言>上下篇.”

이처럼 사서, 한서, 문심조롱, 문선 등 역사서나 이른 시기에 편찬된 문선집에 수록되거나 언급된 기록을 토대로 동방삭의 저작임을 확정할 수 있는 작품들 외에, 동방삭의 이름을 가탁한 위작들도 많이 있다.

十洲記, 神異經, 東方朔世占, 東方朔書, 射覆經, 探春歷記, 黃帝朔書 등은 그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현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위서로 보고 있지만, 어쨌든 간에 동방삭을 작자로 하고 있고 과거에 그의 저술로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간과할 순 없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저작 중 십주기와 신이경이 특히 많이 읽힌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헌과 관련한 언급이 많이 발견되고, <觀十洲記>13)나 <論曼倩神異經>14)과 같은 작품도 창작된 것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탐춘역기15)와 감흥경16) 등도 조선에 유입된 정황이 포착되며, 張溥가 수집‧정리한 동방삭의 전집인 東方大中集도 유입되어 읽혔다.17)

13) 崔奇男, 龜谷詩稿 권1, <觀十洲記>.

14) 李獻慶, 艮翁集 권23, 雜著, <論曼倩神異經>.

15)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占歲辨證說>. “東方朔也, 有『探春 歷記, 以占雨驗歲也.”

16) 金堉, 朝京日錄, <閏四月二十四日>. “且送禮單蟒段二匹, 縐紗二匹, 牙笏, 牙帶, 詩扇, 感應經一卷.”

17) 李明煥, 海嶽集 권4, 雜著, <讀漢魏六朝百三名家集>. “我觀百三家集, 漢 賈長沙誼, 司馬文園相如, 董膠西仲舒, 東方大中方朔, 褚先生少孫, 王諫議褒, 劉中壘向, 楊侍郞雄, 劉子駿歆九人.”

다음으로 동방삭이 작중 인물로 등장하는 문학 작품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한 주요 작품으로는 동방삭의 골계와 재치 등을 드러낸 흥미로운 일화들을 모은 <동방삭별전>계열의 작품들, 한무제의 求仙 이야기를 다룬 <漢武故事>‧<漢武內傳>‧<洞冥記>, <偸桃捉住東方朔>을 대표로 한 희극 작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인 동방삭의 흥미로운 일화에 재미있는 요소가 포함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다. 이러한 작품들이 널리 읽히는 과정에서 동방삭이 점차 신비함을 간직한 전설적 인물,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신선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희극 극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한국에 유입되어 읽힌 것으로 파악되며, 심지어 구비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 속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이 전파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가) 어느날 대궐 평경이 이상하게 울리니 주문선도라는 명당을 잘 아는 사람 에게 물었다. 그는 동방삭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방삭은 그 평경이 대궐 을 지을 때 오봉산에서 파온 흙으로 만든 것인데 지금 울리는 것은 그 산에서 산사태가 나기 때문이라 하였다. 어머니와 자식 간 서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리고 빨리 산에 가서 살펴보라 하였기에 산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18)

나) 한무제 때 미앙궁 앞에 달려 있는 종이 까닭 없이 삼일 동안이나 울었다. 한무제가 이상하게 여겨 왕삭에게 물으니 왕삭은 兵气 있다 했다. 또 다시 동방 삭에게 물으니 동방삭은 구리는 흙의 아들이니 음양의 기로 이야기로 하자면 이는 모자간의 감흥이다. 산이 꼭 무너질 테니 종이 먼저 우는 것이다. 오일 안 에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 후 삼일 지나니 한무제가 진짜로 지방관으 로부터 산사태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19)

18)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온라인데이터베이스를 참고 하였으며, 1985년에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채록한 윤기석의 <삼천갑자 동방 삭>이다.

19) 태평어람 권575, <악부> 제13조.

가)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려 있는 설화이고, 나)는 <동방삭별전>의 한 대목이다. 두 이야기의 내용을 대조해 보면, 가)가 나)에서 탈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동방삭 관련 문학 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전파되었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이상으로 동방삭 관련 텍스트의 한국에서의 전파와 수용 양상을 간략히 살펴본 결과, 오늘날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방삭이라는 이름과 이미지는 앞서 살펴본 텍스트들의 광범위한 유입과 독자의 수용 및 독서를 통해 한국의 옛 문인들이 인식하고 재해석한 동방삭의 모습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전국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동방삭 관련 설화와 마찬가지로 한문학에서도 신라 시대부터 동방삭을 나름대로 인식‧해석‧재구축하는 과정에서 관련 서사가 꾸준히 창작되었음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최치원의 고운집에서 이미 동방삭과 관련한 언급이 두 차례나 등장하며20), 그 이후에도 동방삭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형상화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구비설화와 한문학 작품에서 동방삭을 해석하는 실제 양상은 차이를 보인다. 구비문학에서의 동방삭은 중국인으로서의 신분과 골계적 특징이 희석되어 있으며, 주로 ‘삼천갑자’, 즉 어떻게 연명의 방법을 얻어 삼천갑자의 수를 누릴 수 있었는지, 또 삼천갑자를 누린 동방삭이 어떻게 어처구니없이 죽게 됐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앞서 제시한 설화 가) 와 같이 박식함을 내세운 동방삭의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오래 살았다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21)

20) 崔致遠, 孤雲集 권3, <大嵩福寺碑銘>. “漢武帝鑿昆明池得灰, 問東方朔, 不 知.” ; 桂苑筆耕集 권17, <謝許奏薦狀최치원>. “東方朔之對漢皇, 寧辭自責.”

21) 손지봉, 앞의 책, 참조.

반면, 한문학 작품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동방삭의 모습과 전설적 인물로서의 동방삭이 가진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에 모두 관심을 두었으며, 이와 관련한 담론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동방삭 관련 고사를 용사하거나, 그의 문학 작품을 비평 혹은 모의하거나, 또한 그의 인물됨을 의논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 속에 동방삭을 투영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양상을 보다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골계’, ‘조은’, ‘투도’를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로 꼽아 이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며, 특히 각 키워드들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에 담겨 있는 작가 의식과 내면 감정을 고찰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Ⅲ. ‘골계’: 배우와 선비 사이

‘골계’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동방삭이 가진 가장 큰 성격적 특징이다. 사기‧『한서와 같은 기록물 등에서 중점적으로 부각하면서 제시된 이 특징은 후대인에게도 확실하게 인지되었다.

한국의 문인 중 최초로 동방삭의 ‘골계’에 주목한 이는 고려 후기 문인 李穡이다. 그는 “동방삭처럼 滑諧하다” 22)라고 기록했으며, 이후 한국 문인들이 동방삭을 언급하면서 ‘골계’, ‘해학’, ‘해’, ‘調諧’ 등의 수식어를 붙인 예가 흔히 발견된다. 그렇기에 이들이 동방삭의 ‘골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 衰年抱病志多乖 나이든 몸 쇠하고 병까지 앓아 성질 괴벽해지는데 野趣如今漸入佳 시골의 정취가 요새 갈수록 좋구나 誰識莊周與方朔 누가 장자와 동방삭을 알까 時時寓語雜詼諧23) 때때로 우언에 해학을 섞였네 나) 我愛馬援能矍鑠 나는 마원처럼 씩씩함을 좋아하건만 人稱方朔好諧詼24) 남들은 동방삭처럼 농담을 잘했다고 하네 위의 두 인용문에서는 동방삭의 골계를 골계 그 자체로 인식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골계를 성격적 특징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런 경우 흔히 ‘徘優’와 연관을 지어 담론을 전개하였다.

가) 俳諧輕曼倩25) 배우처럼 우스꽝스러우니 동방삭을 가볍게 여기네 나) 不妨方朔任詼俳26) 동방삭같이 우스꽝스러운 배우나 해도 무방하네 다) 方朔何傷或類俳27) 동방삭이 무슨 흠 있는가 하면 혹 배우 같다는 것이네

22) 李穡, 牧隱文藁 권13, <書錦南迂叟傳後>. “滑諧如東方朔.”

23) 林億齡, 石川先生詩集 권7, <贈覺公>.

24) 權好文, 松巖集, 續集 권3, <李進士雲長挽>.

25) 趙斗淳, 心庵遺稿 권1, <六月金春山毅卿邀余及景成聽雨於滌宮直所, 雨仍注 三日, 不得㱕, 拈庚韻爲聯句>.

26) 洪重聖, 芸窩集 권1, <樂齋與曺美叔, 偉叔, 士吉聯句>.

27) 蔡彭胤, 希菴先生 권5, <李夏瑞台丈見示寒碧錄, 書此奉還, 詩多遊戱, 頗涉 長慶, 故幷論之>.

인용문 가)와 나)에서는 ‘俳諧’, ‘詼俳’과 같은 표현을 써서 동방삭의 골계를 ‘배우’와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배우란 주로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배’와 음악에 능한 ‘창’ 등 남을 즐겁게 하는 일을 잘하며, 이러한 특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범칭한다. 한서에서 동방삭이 임금의 질문 등에 대한 “응대가 해학스러워 배우와 비슷하다(應諧似優)”고 말한 것처럼, 동방삭이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한무제를 웃게 하는 것은 배우가 종사하는 일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옛 문인들이 동방삭을 ‘俳’, 혹은 다)에서처럼 ‘類俳’라고 말한 것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우로 인식된 동방삭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인용문 가)의 내용이나, “동방삭이 우스꽝스러운 일 즐겨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네(方朔好諧人共棄)”28)라고 한 시구 등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배우 같아 보인 동방삭을 부정적으로 보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가) 如今冷笑東方朔 지금도 냉소한다네. 동방삭이 唯用詼諧侍漢王29) 오로지 해학으로 군주를 모셨음을 나) 동방삭의 골계과 荒唐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무슨 도 움이 되겠는가? 30) 다) 군자는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 조급하고 들뜨면 화를 초래할 것이 니 魏攸의 경박함을 경계해야 한다. 허황한 이야기만 하면 일을 그르치게 할 수 있으니 동방삭의 해학을 응징해야 한다. 말 때문에 수치를 당하거든 차라리 입이 없는 박이 되겠는 말은 잊혀지면 안 된다.31)

28) 朴守儉, 林湖集 권3, <秋興次杜韻>.

29) 李潤慶, 崇德齋遺稿 권2, <禁中雜詠>.

30) 南秉哲, 圭齋遺藁 권4, <心菴趙相公六十一歲壽序>. “曼倩之滑稽恢詭, 何補 於經世庇民之數哉.” 31) 權忭, 遂初堂集 권5, <閒居言志序>. “惟君子先正其心, 浮躁招灾, 戒魏攸之 輕淺, 劇談廢務, 懲方朔之詼諧. 惟口所以起羞, 寧爲無口之匏, 斯言不可磨玷.”

한국 문인들이 배우처럼 행동한 동방삭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까닭은 이들이 견지했던 ‘士’의 전통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옛 문인들은 동방삭을 배우 혹은 배우와 비슷한 존재로 여겼지만, 동방삭은 ‘士’라는 점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배우와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옛 문인들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동양의 ‘사’에 대한 관념과 전통에 입각해 동방삭의 골계적 행동을 평가하게 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동방삭은 ‘徘優化’ 된 선비로 볼 수 있지만, 결국 배우는 아닌 것이다. ‘사’ 집단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도로 자임하는 것(以道自任)’이다. 경우에 따라 구체적인 이해가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양의 ‘道’는 인간적 성격이 강하고, 그 출발과 끝은 모두 이상적인 정치질서의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동방삭의 골계적 행보에 대한 평가를 시도했을 때, 가장 근본이 되는 기준은 도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위의 인용문 가)와 나)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 지향한 ‘도’가 인간적 성격이 강한 만큼, 선비들은 흔히 ‘勢’라고 지칭하는 현실의 정치 세력을 직면해야 한다. 서양에서 왕권을 확실히 견제하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있는 교회라는 조직이 존재했던 것과 달리, 동양에서 도의 실질적 담당자로서의 기능을 하는 선비 집단은 매우 무력했다. ‘도’의 莊嚴과 실현은 거의 전적으로 士 개인의 自尊(self-esteem)에 의지하게 되며32), 그렇기에 내면의 수양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33)

32) 물론 사 집단이 ‘도’의 형식화와 객관화를 위한 노력도 하였다. 예를 들면, ‘도’가 ‘勢’보다 위에 있다는 이념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크게 국면을 바꿀 수 있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33) 余英時, 士與中國文化, 「中國知識分子的古代傳統-兼論‘俳優’與‘修身’」, 上海人民出版社, 2013년, 103-114면.

게다가 사 계층은 형성 단계부터 ‘예’의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양의 선비들은 늘 엄숙한 모습과 점잖은 자세를 갖춰야 했다. 인용문 다)에서 동방삭의 우스꽝스럽고 골계적 행동과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비의 궁극적 목표, 그리고 자존을 중요히 여기고 예를 따라야 하는 선비로서의 자세 때문에 동방삭의 골계적인 모습은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가 비판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以言求士尙平津 직언으로 천거받은 선비가 평진후까지 봉해졌고 徘畜寧知辟戟陳 배우로 여겨 기른 자가 창 내려놓고 직언할 줄 어찌 알랴 只是渠留金馬日 동방삭을 그저 금마문에 머무르게 한 날에 已知終逐避帷人34) 끝내 휘장 속으로 피하게 한 자 물리칠 줄 진작 알았네

위의 인용문은 김안로가 동방삭을 주제로 쓴 영사시이다. 제1구에서 한무제가 지방에 칙서를 내려 “어질고 바르고(賢良方正)”, “직언을 할 수 있는(直言极谏)” 선비를 추천하라고 할 때 천거를 받아 벼슬길에 오른 公孫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손홍은 직언을 잘 한다는 이유로 천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아첨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이 구절 뒤에 감안로가 <평진후열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무제를 알현하기 전에 의론할 사항에 대해 다른 대신들과 미리 의견을 모아 약속을 해놓고도 막상 한무제 앞에 나가면 그는 약속을 깨고 오로지 한무제의 뜻에만 따랐다는 주석을 덧붙였다.35)

34) 金安老, 希樂堂稿 권2, <詠史詩>.

35) 金安老, 希樂堂稿 권2, <詠史詩>. “公孫弘以賢良方正直言擧, 弘嘗與公鄕 約議, 至上前, 皆信其約, 以順上旨.”

그렇지만 공손홍은 나중에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평진후에 봉해졌다. 이어서 공손홍과 대조가 되는 동방삭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한무제가 궁궐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고모이자 장모인 관도공주를 초대하는 자리에 관도고중의 총애를 받은 董偃이란 남자도 함께 부르라 명하였다. 이 때 창을 들고 섬돌 아래에서 서 있던 동방삭은 창을 내려놓고 한무제 앞에 나아가 동언이 지은 세 가지 죄목을 말하며 동언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직언으로 천거를 받은 사람은 실제로 직언을 전혀 안 했는데, 오히려 황제 곁에서 우스갯소리나 하면서 직언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 사람이 직언을 했다는 점에 김안로는 감탄했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 주석을 달아서 “동방삭은 해학으로 총애를 받은 것이지만 그래도 여러 번 直諫을 하였다. 그는 학문을 굽혀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공손홍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였다.36)

36) 金安老, 希樂堂稿 권2, <詠史詩>. “朔雖以詼諧進, 猶數直諫, 其視曲學何世 之公孫則大勝矣.”

‘직간’은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궁극적 목표에 부합하는 행위이며, 김안로는 이 지점에서 동방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김안로는 바른 소리를 할 마음이 있던 동방삭이 왜 평소에는 배우처럼 행동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이어지는 3,4구에서 급안의 예를 들어 답을 제시하였다. 급안은 정의감이 두텁고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직언을 했던 인물로, 김안로가 적은 주석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황제가 쉬고 있을 때 급암이 배알하러 왔는데, 마침 冠을 쓰고 있지 않았던 황제는 급히 휘장 속으로 숨어서 보고를 들었다고 한다. 감안로는 이 일화를 통해 급암의 성격과 정직한 사람에 대한 황제의 태도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급안의 이야기와 함께 동방삭이 총애를 받게 된 까닭을 제시하면서, 구선⋅射覆⋅장난⋅잡기 때문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황제가 ‘곧은 마음(正直之心)’을 두려워하고 꺼린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는 곧 한무제가 급암을 멀리 한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시인이 얻은 답으로, 곧 직언을 할 수 있는 동방삭이 배우처럼 행동한 것의 근본적인 원인을 한무제에게 돌린 것이다. 시에서는 이처럼 동방삭을 포함한 세 선비의 각자 다른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아이러니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도’로 자임하지만 ‘세’를 통해서야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선비들의 어려운 처지를 밝히고 ‘세’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공손홍은 ‘세’의 중용을 받는 대신에 도의 장엄과 선비의 자존을 지키지 못하였고, 급암은 선비의 자손을 지켰지만 중용을 못 받아 결국에 도가 실현되는 이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춘추 시대의 배우였던 優施가 “나는 배우이니, 무슨 말을 해도 죄가 없다” 37)라고 했던 것처럼, 배우라는 가면을 쓰고 있으면 큰 대가를 치를 위험 없이도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다.

 

37)국어, 〈진어〉. “我優也, 言無郵.” 子傳>

 

그래서 김안로는 늘 ‘道’와 ‘勢’의 사이에서 투쟁, 갈등, 타협하여야 했던 선비의 처지에서 세와 도 사이에서 타협했던 동방삭의 선택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우호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동방삭의 골계적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항상 ‘直諫’에 착안한다. 김안로가 동방삭의 행동을 ‘세’의 억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절충으로 해석했다면, 윤기는 ‘세’가 억압하는 측면을 약화시키면서 이러한 선택이 ‘도’의 실현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 더 큰 비중을 실어 평가하기도 하였다.

莫譏方朔好詼諧 동방삭이 익살을 좋아했다 기롱하지 말라 譎諷由來亦自佳 풍간은 예로부터 아름답게 여겼네 禁闥周旋多補益 궁중에서 주선하며 보익한 바가 많았으니 勝如汲黯十年淮38) 십 년간 회양 태수를 지낸 급암보다 나았네

위에 제시한 윤기의 영사시에는 ‘세’에 대한 비판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선비’와 ‘도’의 자존을 보존하려다가 결국 중용되지 못해 ‘도’ 의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없게 된 급암보다는 동방삭의 행동이 도의 실현에 더 도움이 된다고 보았으며, 이 점에 포커스를 맞추어 적극적인 찬양을 하였다. 이외에도 이덕무가 동방삭의 ‘玩世’, 즉 선비의 일반적인 자세와 행동 패턴에서 이탈한 행동을 굴원의 ‘憤世’와 똑같다고 보았으며 “그 고심이 모두 눈물 흐를 만하다” 39)고 하였다.

38) 尹愭2, 無名子集, 無名子集詩稿 권5, <詠史>.

39) 李德懋, 靑莊館全書 권63, <蟬橘堂濃笑>. “方朔玩世, 靈均憤世, 其苦心皆 可涕.”

또 황현은 <金衣公37)에서 “상은 본래가 英明한 분이었기 때문에 만약 師曠이나 동방삭 같은 무리가 있어, 간곡하고 진지한 자세로 은미하게 간언하고 넌지시 풍자했다면, 뉘우침의 싹이 없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40)고 하였다.

40) 黃玹,『梅泉集, 續集 권2, <金衣公子傳>. “上素英明, 如得師曠⋅東方朔之 徒, 微諫譎諷, 抵隙懇摯, 則未必無悔悟之萌.”

이는 모두 도의 실현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점에서 비롯한 해석이라 하겠다.

Ⅳ. ‘조은’: 선비의 진과 퇴

최초 실천자로 여겨진 바, ‘조은’은 동방삭 담론의 두 번째 키워드이다. 앞 장에서 다룬 ‘골계’를 둘러싼 해석 논란이 근본적으로 선비의 정체성과 생존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듯이, 선비의 은거 문화에서 생겨난 ‘조은’의 경우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의 莊嚴이 손상되고 도의 실현이 불가능해졌을 때, ‘세’ 와 대항할 힘이 없는 선비들은 도의 장엄을 지키는 방법으로 ‘隐’을 선택한다. 이는 “도가 행해지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어서 산다(有道則現,無道則隱)”는 말로 요약되어 士가 ‘出’과 ‘處’를 결정하는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이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상태에 불과하고, ‘도’를 실현해야 할 책임, ‘세’를 통해 ‘도’를 실현해야 하는 현실, 그리고 개인의 실제 생존 문제는 선비들로 하여금 ‘出’과 ‘處’의 원칙을 엄격히 지킬 수 있게 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후대에 갈수록 ‘隱’은 점차 세속화되어 갔다. 우선, 후대에 가면서 은거에 대한 해석의 핵심이 점차 ‘身隱’에서 ‘心隱’으로 옮겨갔다. 몸소 은거를 실천하는 것보다 은사다운 마음가짐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선비들이 은거를 ‘도’ 자체, 또는 ‘도’의 담당자로서 자신들의 자존을 지키는 방편으로 간주하면서 실제로 은거를 단행하기에 많은 어려움과 현실적인 유혹이 존재한다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다. 조정에 은거한다는 동방삭의 ‘조은’은 아주 이른 시기에 이러한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골계열전>에는 동방삭이 “나와 같은 경우 말하자면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네. 옛사람들은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세상을 피하였지”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1) 그는 때로 술에 취하면 아래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陸沈於俗 세속에 젖어 避世金馬門 금마문 안에서 세상을 피해 사노라. 宮殿中可以避世全身 궁궐 안에서도 세상을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거늘 何必深山之中 굳이 깊은 산속 蒿廬之下 초가집일 필요 있으랴42) 이처럼 동방삭은 아예 산림으로 물러난 전통적인 은자보다는 ‘세’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여 최초의 조은 실천자가 되었다. 동방삭의 조은은 ‘避世金馬門’의 구절 때문에 ‘金門隱’이라 불리기도 하고, 晉나라 때 王康琚의 〈反招隱詩〉에서 “소은은 산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43)라는 구절이 등장한 이후에는 동방삭의 조은을 ‘大隱’ 혹은 ‘金門大隱’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윤기가 <大隱巖記>라는 글에서 “세상으로부터 숨지 않으면서 은둔하는 것이 ‘대은’이니, 옛사람들이 금마문에 은둔하고 조정과 저잣거리에 은둔한 일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44)라고 하였다.

41) 사마천, 사기, <골계열전>.

42) 사마천, 사기, <골계열전>.

43) 소통 편, 문선 권22, 왕강거, 〈反招隱詩〉.

44) 尹愭, 無名子集책1, <大隱巖記>. “不隱而隱, 乃隱之大. 若所謂大隱金門, 大 隱朝市者皆是也.”

이렇듯 물질적 이익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황제로 대표되는 ‘세’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완곡하게 표현하고자 한 전략으로 볼 수 있는 동방삭의 조은에 대해, 한국의 옛 문인들 역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며 현실 속에서 세, 도, 개인 사이의 고민과 갈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영했다. 조은에 대한 한국 문인들의 해석은 크게 세 가지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동방삭이 ‘조은’을 택한 본질이 중용되지 못해서라고 보는 주장 하에 논리를 펼친 경우이다.

가) 大隱金門不是榮 금마문에서의 대은은 영광이 아니네 徘優畜處主恩輕 임금의 은혜가 가까우니 배우로 길렀지 可憐天上偸桃手 가련하도다. 선계에서 복숭아를 훔친 이가 空得人間竊肉名45) 부질없이 인간 세상에 내려 고기 훔친 이름 얻었네

나) 上林寒日亂鴉喧 상림원 한식날은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垣竹埤梧露氣繁 대와 오동나무에 이슬 잔뜩 맺혔네 頭白侍郞何似者 하얗게 머리 센 시랑은 누구를 닮았는가 漢廷方朔隱金門46) 한나라 금마문에 숨었던 동방삭이라네

45) 南龍翼, 壼谷集 권7, <詠史>.

46) 申晸, <汾厓遺稿> 권3, <省直自嘲,示息菴金尙書>.

가)는 남용익이 동방삭을 대상으로 쓴 영사시이다. 이 시에서는 동방삭이 조은을 단행한 것에 대해 대은이라 칭해졌지만 실은 영광이 아니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 이유는 동방삭의 조은은 재능과 포부가 있어도 황제의 중용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한 부득이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남용익은 동방삭이 조은을 선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자 하였으며, 동방삭의 조은을 통해 선비의 처지와 세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드러냈다. 남용익과 달리, 나)에서 역시 동방삭의 대은을 중용되지 못함이 대은의 실질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비판보다는 동방삭처럼 뜻을 펼치지 못한 실의의 고통을 토론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도’의 장엄과 ‘사’의 자존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동방삭의 ‘조은’을 해석한 경우이다.

時乎聊爾已 때라는 건 원래 그러한 법이니 君子分須安 군자는 분수를 편안히 여긴다네 暴震目無動 갑자기 우레 쳐도 눈도 깜짝 않고 覆盆心自寬 뒤집힌 동이 속에서도 마음은 편안하네 坳堂儲瀚海 좁은 집에 바다를 담고 㽅豆薦鯢桓 작은 그릇에 고래를 올리네 猶勝飢方朔 그래도 굶주린 동방삭이 金門避世難47) 금마문에서 세상의 어려움 피한 것보다 낫네

47) 柳夢寅, 於于集 권1, <送庇仁柳善元>.

위 시는 유몽인의 작품이다. 시에서 말하는 군자는 이상적 인격을 갖춘 선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심성을 함양하는 것이 중요하며 안빈낙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시에서는 동방삭이 금마문에 불리기 전 난쟁이와 같은 봉록을 받아 배불리 못 먹는다고 황제에게 호소한 일과 나중에 조은을 선택한 것을 엮어, 조은을 자신의 물질적 욕망에 기인한 선택으로 이해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는 곧 ‘도’와 ‘도’의 실질적 담당자인 선비가 자존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 이상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조은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타협으로 보아 부정한 것이다. 이유원이 <中嶽泰室石闕帖>에서 한무제의 구선 행위를 비판하면서 “동방삭이 대은을 한 것이 이미 무릎 굻었다는 것이네(曼倩大隱已屈膝)”48)라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8) 李裕元, 嘉梧藁略 책5, <中嶽泰室石闕帖>.

셋째, ‘심은’의 논리를 강조하면서 자신이 원하거나, 혹은 선택한 생존 방식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자네는 금마문에 숨긴 동방삭과 같아, 자취는 세속길에 있지만 뜻은 산야에 있네.(君如方朔隱金門, 迹在塵途志野村)”49)라고 한 이유원의 시나, “동방삭은 봉록을 받지만 그래도 은사이네.(曼倩祿猶隱)”50)와 같은 언급은 모두 ‘심은’의 논리로서 동방삭의 조은을 합리화하는 예들이다.

49) 張混, 而已广集 권8, <疊韻寄同遊>.

50) 南有容, 䨓淵集卷 권6, <和陶靖節飮酒>.

아래에서는 이러한 논리와 해석 방식이 어떻게 개개인의 사정과 결합하는지 더 살펴보기로 한다.

禁林經雨欲花開 궁중 숲에선 비 지난 뒤 꽃이 피려 하고 輦路天香滿袖廻 대궐 길에선 천향이 소매 가득 스며드네 方朔自來稱大隱 동방삭을 예로부터 대은이라 불렀으니 西疇春事莫敎催51) 서쪽 밭을 농사 지으라 재촉하지 마오

 

51) 申翊全, 東江遺集 권9, <次李員外韻>.

위 시는 申翊全이 승정원에 재직하던 시기에 쓴 것으로, 자신의 관직 생활을 동방삭의 조은에 빗대어 득의에 찬 모습을 보이면서 진취적 태도를 드러냈다. 신익전은 궁궐을 나무와 꽃과 임금의 은혜가 함께 모여 있는 곳, 즉 전통적 ‘은’의 방식을 추구하는 은자들이 찾는 자연과 ‘도’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묘사하였다. 이어 과거 이러한 공간에서 ‘조은’을 단행함으로써 ‘대은’이라 불리며 칭찬받았던 동방삭을 좋은 본보기로 여겨, 자신도 산속으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지점에서 신익전에게 ‘조은’은 ‘은’보다 ‘조’를 택하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진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관로에 발을 내딛게 되었으며, 이 시를 관직에 진출한 시기(1637년~1678년 사이)에 썼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그의 이러한 속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 冷卿官況苦難溫 냉경 벼슬살이야 따뜻하기 어렵겠지만 坐覺丹田夜自暾 나는야 단전이 밤에도 절로 따뜻하다오 城市從來堪避世 도시도 예로부터 세상을 피할 만하니 漢朝方朔在金門 한나라 때 동방삭이 금마문에 있었다오52)

52) 李睟光, 芝峯集 권2, <次申玄翁病中見贈韻>.

나) 不學東方朔 나는 옛날 동방삭처럼 混迹群侏儒 난쟁이들과 어울려 살기를 원하지도 않고 難追張季鷹 장계응처럼 가을바람 불어오자 發興思蓴菰 순채국 생각나서 사직하기도 어렵다네 何妨兼吏隱 그러니 어떤가 지방 관리로 숨어 살며 滿意遊江湖 강호에 노닐면서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가)는 李睟光의 시로, 동방삭의 조은을 도시에 숨어 사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조은의 최초 실천자로 여겨지는 동방삭의 위치에 “대은은 朝市로 숨는 것이다”라는 말이 결합되면서, 후대인들은 동방삭의 금마은을 두고 “장차 동방삭과 같이 숨어 살 텐데, 저자 소리 시끄러워도 무방하네(將同方朔隱,未妨市聲喧)53)라고 하는 구절처럼 ‘市’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53) 姜溍, 對山集 권3, <入城>.

가)에서는 ‘市’의 외연을 조금 더 확장시켜 ‘도시’로 해석하였다. 도시에서 제공해 주는 물질적적 번영과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姜溍의 시이다. 시에서는 전통적인 은거도, ‘조은’도 모두 원치 않으며, 그 대신 ‘吏隱’적 삶을 살고 싶다고 하였다. ‘吏隱’은 ‘朝隱’과 함께 모두 ‘居官如隱’의 이른바 ‘仕隱’에 속하는 개념으로, 보통 정치권력 중심과의 거리에 따라 나눈다. ‘朝隱’은 중앙 조정에 있는 경우가 많고, ‘吏隱’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많이 사용한다. 나)의 화자는 동방삭처럼 조정에서 미관말직을 하면서 숨어 사는 것도, 아예 벼슬을 버리고 철저히 은거하는 것도 원치 않으며, 대신 지방관에 있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겠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조은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은’의 논리를 인정하면서 ‘도’ 를 실현하기 위한 책임과 목표만을 강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선비의 개인적 만족과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와 공통된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Ⅴ. ‘투도’: 장수, 유선, 일상 ‘투도’,

즉 삼천 년을 연명할 수 있는 서왕모의 복숭아를 동방삭이 세 번이나 훔쳤다는 이야기가 한국 옛 문인들의 동방삭 담론의 또 다른 키워드이다. 이 이야기는 <한무고사>에서 처음으로 보이며, 역사적 실존 인물인 동방삭이 점차 전설적 비인간의 존재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소이다. 명‧청시기가 되면서 이 이야기를 다룬 <偸桃捉住東方朔> 등 인기 있는 희곡 작품이 여럿 출연할 정도로 민간에서 널리 퍼지면서 비인간적인 존재로 형상화된 동방삭의 이미지 역시 확대될 수 있었다. 앞서 살핀 ‘골계’와 ‘조은’이 지식인 계층이 주로 향유한 한문학 작품에서 주목되는 키워드였다면, 이와 달리 ‘투도’ 이야기는 한문학과 구비문학에서 모두 주목을 받았다. 한문학에서 ‘투도’ 이야기에 대한 활용과 의미는 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長壽’ 관련 담론이 있는데, 이는 한국 설화와 한문학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한국 설화에서는 동방삭이 어떻게 삼천갑자를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한 풀이가 핵심 내용인데, 그 가운데 ‘투도’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서왕모의 복숭아를 먹어서 장수했다고 풀이한 설화가 보인다.54) 한편, 서거정이 “동방삭은 선도를 세 번 훔쳤으니 수명이 장차 기약이 없으리로다(方朔三偸桃, 壽筭知無期)”55)라고 한 것처럼 한문학에서도 ‘투도’ 이야기를 장수와 관련지어 이해한 예시가 많이 보인다.

가) 一歲蟠桃三結子 일년 자란 나무가 복숭아 셋이나 맺었네 誰將此果種巖埛 누가 이 과일나무를 들에 심었을까 想應方朔來偸得 아마도 동방삭이 훔쳐온 건데 遺我能令制短齡56) 나로 하여금 단명을 면할 수 있겠네

54) 손지봉, 韓國說話의 中國人物 硏究, 서울 : 박이정, 1999, 59면.

55) 徐居正, 四佳集권21, <十一月初九日夜,夢與一人拜北斗七星者三四, 一人曰, 我是東方朔, 覺而異之, 詩以爲誌>.

56) 李弘有, 遯軒集 권4, <謝洪送桃實>.

나) 君不見方朔食桃何太卑 그대는 못 보았나 복숭아 훔쳐 먹은 동방삭의 야비 한 짓을 空被西母稱偸兒 공연히 서왕모에게 도둑놈이 되었네 我今不偸亦不乞 내 이제 훔치지도 않고 빌지 않았는데 坐致堆盤光陸離 쟁반 위에 쌓아 놓으니 빛이 아름다워 …… …… 報乏瓊瑤深自愧 귀한 선사 못 갚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但祝爾壽三千載57) 그저 그대 삼천 년 살기를 비네

57) 李奎報, 東國李相國全集 권15, <玄上人饋桃,以詩謝之>.

위의 두 작품은 모두 벗한테서 보내온 복숭아를 받고 쓴 시로 자신이 받은 복숭아를 동방삭이 훔친 서왕모의 蟠桃에 빗대고 있다. 가)에서는 덕분에 자신이 단명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고, 나)에서는 복숭아를 보낸 친구가 동방삭처럼 삼천 년 살기를 기원하였다. 이처럼 한문학에서 역시 동방삭이 훔친 복숭아를 장수의 상징으로 보고, ‘투도’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인 오래 사는 것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투도’ 이야기를 遊仙詩에 사용하는 예로, 여기에서는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잘 드러난다.

瑤海樓臺壓巨鰲 바다같이 넓은 요지엔 누대가 자라를 엇누르고 紫簫淸轉月輪高 맑은 통소 소리에 달이 높이높이 솟았네 花間逢着東方朔 꽃 사이서 동방삭을 만나는데 滿袖偸來碧玉桃58) 소매에 가득 담은 건 훔쳐온 복숭아라네

58) 李彦瑱, 松穆館燼餘稿, <遊仙詞>.

위 시는 이언진의 연작시 <遊仙詞> 중 한수로, 신선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있다. 시의 제3‧4구에 ‘투도’ 이야기를 용사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축복하거나 자신의 수명에 대한 소원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화자는 그저 복숭아와 동방삭이 신선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 여기고, 동방삭이 복숭아를 훔친 일을 신선 세계에서 발생한 에피소드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 투도 이야기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보다는 투도 이야기가 일어난 장소인 신선 세계를 나름대로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것이다. 작품 속에 선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탈속적인 정취가 조성되며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영물시에 활용하는 경우로, 이때에는 일상적 글쓰기의 양상이 뚜렷하며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경험과 감정을 읊는 작품이 많다.

小桃初熟碧團團 작은 복숭아 막 익어 푸르고 동글동글한데 細嚼氷肌齒頰寒 흰살을 살살 씹으니 이와 볼이 시리어라 方朔小兒偸幾度 동방삭이 몇 번이나 훔쳐 먹었던고 蓬萊縹渺紫雲端59) 봉래산은 붉은 구름 끝에 희미하기만 하네

위 시는 이색이 쓴 <小桃>라는 작품으로 막 익은 복숭아에 대해 읊고 있다. 제1‧2구에서는 작은 복숭아의 빛깔과 모양, 과육과 먹은 후의 시원한 느낌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 제3‧4구에서는 본인이 먹은 복숭아를 동방삭이 도둑질까지 해야만 먹을 수 있었던 서왕모의 복숭아에 빗대어 복숭아의 훌륭하고 귀함, 그리고 자신이 이 복숭아를 맛볼 때의 즐거움을 재차 강조하는 효과를 거뒀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투도 모티프를 통해 복숭아의 품질과 먹을 때의 감각적 유쾌함을 읊은 시가 많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읊는 대상이 복숭아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黑葡萄’, ‘朱李’, ‘西苽’과 ‘杏實’, ‘禽果’ 등을 읊은 시에서도 이처럼 투도 이야기를 용사한 것이 확인된다.60)

59) 李穡, 牧隱藁 권8, <小桃>.

60) 洪宇遠, 南坡集 권2, <槐院黑葡萄>. ;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後集 권4, <屢食朱李>. 尹光啓, 橘屋拙稿 하, <謝說之寄西苽>. ; 沈東龜, 晴峯集卷  권1, <食杏實>. ; 李睟光, 芝峯先生集卷 권10, <冬日食來禽果>.

方朔空偸王母桃 동방삭은 부질없이 서왕모의 복숭아 훔쳤는데

齊桓那識古人糟 제환공이 어찌 옛사람의 찌꺼기를 알았으랴

讀書眼瘼眯千古 책 읽는 눈은 병들어 천고의 일이 흐릿한데

可口味眞驅五勞 입에 맞는 맛은 참으로 오로를 몰아내네

始苦何須憐橄欖 첫 맛이 쓰니 어찌 감람을 바랄 필요 있으랴

多酣不用釀葡萄 거나하게 취하니 포도주를 담글 필요가 없네

湖仙散核靑城土 호선이 청성 땅에 과일을 보내고는

齊笑江南醉客螯61)

집게발 든 강남의 취객을 함께 비웃었네 위 시는 시인이 지인한테서 과일을 받고 쓴 연작시 2수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정확히 어떤 과일인지 상정하기가 어렵지만, 제1수에서는 이 과일의 외형과 맛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는데, “네 개의 큰 과일 고루 둥글고 복숭아 색인데(四顆均圓色似桃)”라고 한 것을 보면 외형적으로 복숭아와 흡사한 점이 있는 듯하다. 이어지는 이 시에서 시인은 여러 전고를 끌어와 이 과일을 극찬하였는데, 제1구에서 동방삭은 서왕모의 복숭아 훔쳤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여 이 과일이 서왕모의 복숭아보다 더 좋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또한 이 절에서 인용한 시들 중 지인에게 과일을 선물 받은 후 지은 시가 세 수나 되는 것처럼, 실제로 이러한 시에서 해당 과일에 대해 칭찬하는 것 외에 과일을 보내준 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앞에서 인용한 “귀한 선사 못 갚으니 스스로 부끄러워, 그저 그대 삼천 년 살기를 비네” 62)라는 구절도 그러하거니와 “나에게 선물해 준 고인 마음 진중해라” 63)라고 하는 등의 시구들은 모두 과일을 매개로 한 시인과 벗 사이의 우정의 표현이다.

61) 趙絅, 龍洲遺稿 권3, <謝人惠果>.

62) 각주 58) 참조.

63) 車天輅, 五山續集, 續集 권1, <謝尹子長惠桃>. “故人贈我情珍重.”

그 외에 사람을 복숭아에 비유하여 읊은 시도 보인다.

瀛洲山下碧桃花 영수의 산 아래 피는 복숭아꽃이요

自瑤池阿母家 요지에 있는 서왕모 집에서 온 것이라네

鄭郞偸學東方朔 정씨 낭군이 동방삭을 따라했으니

謫下江南天一涯64) 하늘 끝까지로 좌천당했네

64) 申光洙, 石北集 권7, <戲贈少妓碧桃月>.

이 시는 ‘碧桃月’이란 기생에게 농담 삼아 써 준 것으로, 이름에 ‘桃’자가 있는 기생을 서왕모의 복숭아에 비유하고, 이 기생과 관계를 맺고 있는 鄭都事를 복숭아를 훔친 동방삭에 비유하였으며, 동방삭이 복숭아를 훔친 일로 인간 세상에 내리게 된 전설에 정도사가 해남으로 좌천당한 것을 비유하였다. 사대부의 풍류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읊은 이 시는 영물시는 아니지만, 사람을 疑物化 했다는 점에서 앞에서 본 영물시들과 흡사한 점이 보인다.

Ⅵ. 결언

본 연구는 중국의 인물인 동방삭이 한국 한문학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또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선행 작업으로 한국에서의 동방삭 관련 한문학 텍스트 수용 양상을 고찰하였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중의 모습과 복잡한 성격을 가진 동방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는 사기‧『한서 등의 공식 담론, 동방삭의 저술, 그리고 동방삭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 등의 텍스트들이 있는데, 이들이 한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읽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텍스트들의 유입과 광범위한 독서는 한국의 옛 문인들 동방삭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한국 옛 문인들이 동방삭을 해석 및 재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다음으로 ‘골계’, ‘조은’, ‘투도’의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한국 한문학에서 동방삭을 어떻게 부각시켰는지 또 이를 통해 표출된 작가 의식과 내면 감정은 어떠한지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골계’와 ‘조은’은 주로 역사적 실존 인물인 동방삭에 대한 주목과 해석이고, 주목받은 원인이자 이를 통해 표출하고자 한 것은 ‘사’ 집단의 정체성과 생존전략 문제로 귀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투도’ 이야기는 한문학과 구비문학에서 모두 주목을 받은 화소로서 인간으로서의 평범하고 보편적인 경험‧감정‧ 욕망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았다. ‘골계’ 해석의 초점은 배우와 선비 사이에 있던 ‘배우화’한 지식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늘 웃음을 부르는 말과 행동으로 한무제를 웃게 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를 즐겁게 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배우와 흡사한 점이 보인다. 그렇지만 동방삭은 결국 선비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배우와는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옛 문인들은 동방삭을 언급하며 ‘徘’, ‘類徘’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선비’의 기준에서 동방삭의 골계적인 모습을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 경우,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비로서의 궁극적 목표와 자존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과, 禮를 따라야 하는 선비로서의 자세 및 전통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배우처럼 느껴지는 동방삭의 골계적인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와 ‘세’ 사이에서 부단히 갈등하고 타협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동방삭이 종종 ‘간언’을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동방삭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인정하는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간언을 하는 것은 ‘도’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전제 하에, 동방삭의 골계적 행동은 ‘세’의 억압 속에서 부득이하게 취하는 절충책으로 해석하여 안타까워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고, ‘세’의 억압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동방삭의 선택은 ‘도’의 실현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만 비중을 두어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은’에 대한 해석에는 선비의 ‘진’과 ‘퇴’, 공적 책임과 개인 생존에 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동방삭은 ‘심은’ 논리의 실천 방식 중 하나인 ‘조은’의 최초 실천자로 여겨졌다. 한국 한문학에서의 동방삭의 조은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동방삭이 ‘조은’을 택한 본질은 중용되지 못함에 있다는 것으로, ‘세’를 비판하거나 동방삭처럼 뜻을 펼치지 못한 작자 자신의 실의의 고통을 토로하였다. 두 번째, ‘도’ 의 장엄과 ‘사’의 자존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 선비가 지켜야 할 원칙에 입각해, 동방삭의 ‘조은’은 ‘세’에 대한 굴복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세 번째, ‘심은’의 논리를 강조하면서 자신이 원하거나 하고 있는 생존 방식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투도’, 즉 삼천 년을 연명할 수 있는 서왕모의 복숭아를 동방삭이 세 번이나 훔쳐 먹었던 이야기와 관련한 담론은 특히 인간으로서의 평범하고 보편적인 경험‧감정‧욕망에 집중하고 있다.

구비문학에 비해 한문학 작품 속에서 활용되는 투도 이야기의 양상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해 본문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 번째로 한문학에서도 설화에서와 마찬가지로 ‘長壽’ 관련 이야기로 이해되고 전승된 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인 ‘삶’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로, ‘투도’ 이야기를 유선시에 사용함으로써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다.

셋 번째로, 영물시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대게 일상적 글쓰기로 복숭아가 포함한 여러 과일들을 먹는 경험과 소감, 이러한 과일들을 주고받은 지인과의 우정,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경험과 감정을 읊는 것이다.

<참고문헌>

관미⋅최영준, 「동방삭인물형상연변연구」, 중국어문학지 68, 2019. 손지봉,「한국 구비문학에 나타난 ‘동방삭’」, 선문논총 4, 1994. 손지봉, 한국설화의 중국인물 연구, 서울 : 박이정, 1999. 余英時, 士與中國文化, 上海人民出版社, 2013. 林春香,「東方朔及其文學形象硏究」, 복건사범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Abstract

On the Interpretation of Dongfang Shuo in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Classic - On His Inward Complexity as A Scholar and Ordinary Feelings as A “Human”

Tian Juan

Dongfang Shuo is a legendary figure that is both real and illusory. His deeds and works were spread eastward to the Korean Peninsula as far back as during the Silla period. So far, the story of " Dongfang Shuo had lived a long life of 3,000 years" continues to be well known to the Korean people. The paper focuses on the interpretation of Dongfang Shuo in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classics. It makes it clear at the beginning that texts related to Dongfang Shuo are spread far and wide with an extensive audience in Korea, followed by a specific investigation with three keywords including "funny", "self-effacing courtier" and "stealing peaches of immortality in Chinese mythology". The interpretation of the first two keywords is closely related to the identity and survival strategy of the scholar group which upholds Confucianism and is committed to social progress. The interpretation of "funny" mainly focuses on the judgment of pantomime-related intellectuals; that of the "self-effacing courtier" reflects the deliberation on "elevated to a higher position" and "reclusion" of scholars and the rationalization of their own way of life;while that of "stealing peaches of immortality in Chinese mythology" expresses a person's daily life, desires and feelings.

Key words: Dongfang Shuo; Scholars; "Funny"; "Self-effacing courtier"; "Stealing peaches of immortality in Chinese mythology".

◇ 논문투고일: 22.08.31 / 심사완료일: 22.09.22 / 게재확정일: 22.09.29.

3. 한국 한문학 속의 동방삭 담론 선비의 복잡한 내면, 인간의 평범한 감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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