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춘원 이광수를 새삼 논의의 마당에 세우는 것은이젠조금은쑥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는 생각도 갖게 된다. 시대와관련되어자신이활동한30여 년 동안, 그가 남긴 수많은 언술만큼이나 이후반세기에걸쳐쏟아진 그에 대한 논의 평설도 이미 그에 못지않게 넘쳐나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왕조시대를 곧바로 이은일제식민지시대를거쳐 해방을 맞았지만 숨 돌릴 사이 없이 발발한6.25 남침이있었다.
이 동족상잔의 상흔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 오늘의현상이고보면, 우리로서는 이른바 개화계몽기의 신문화운동과 근대화과정의중심에있었던 일군의 인문학자들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은 민족분단과민족주의문제와 함께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 ‘민족주의’가민족적정체성의 키워드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재론하고자 하는 춘원 이광수에 대한 시대적 평전 담론도그런맥락의하나로 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이광수에 관한 시대적 상처는 만질수록 더커지는종기와같다고 말한다.2)
그리고 그 종기는 일목요연한 진단이어려운상처여서명료한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서의이논의는이러한 전제를 안고 출발한다. 이광수는, 소설은 물론시, 평론, 수필에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친 문학인이며 시대적 책무까지짊어진‘교육자’ 이고 ‘지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문인도지사도교육자도아닐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일이다.
이광수는역시, 명료하지 않은 시대적 정체성을 지닌, 그런 성향의인물이라고지적되어 온 것은 일면 진실일 싶기도 하다. 모두 알고 있듯이 이광수의 저작은 실로 다양하고방대한양이다. 《李光洙 全集》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춘원의 글모음책은10년간격으로 두 번에 걸쳐 발행되었다.
1962년의 삼중당판(전20권)과역시호화 양장본 삼중당판(전10권)으로 출간된 1971∼2년의‘전집’이그것이다. 조판 형태로 보아 오늘날의 판형이라면 두 전집 모두각각50권분량이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양이다. 모든 글의 편 수가1천여가지가넘는 것으로 보아 30 수년의 문필 세월 동안 매월 빠짐없이3∼4편의글
1) 우리의 개화기에 관한 담론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시대적 상황논리’와 남북분단시대의그것이깊이 연계되어 민족주의의 논리적 당위성 시비로 쟁점화 해 오고 있다.
2) 김춘섭, 이광수의 문학비평 연구 ; 語文論叢 제10호, 전남대, 35쪽
을 써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는 양이다. 개화기(開化期)는 어느 나라에서든 각각 당대의특별한국가적이념을 안고, 이른바 ‘계몽’ 또는 ‘문명개화’로 다가왔다. 우리보다최소한한두세기 앞서 개화기를 맞은 서유럽 3국(프랑스, 영국, 독일)은17세기후반에 이룩한 과학혁명의 승리로 계몽주의적 전제들이형성되었지만계몽주의 자체는 18세기에 와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리고1790년경몇가지 기본적인 원리들이 프랑스 혁명과 로맨티시즘이라는새로운지적운동의 영향과 함께 문명의 등불로 피어났다. 물론이탈리아의비코(Vico)같은 역사철학자나 프랑스의 룻소(Rousseau) 등일부사상가는‘계몽주의’에 적대적이거나 동조하지도 않았지만18세기의사상가들대부분은 새롭고 흥미로운 이 문명적 지적 환경 속에살고있다는느낌을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화 계몽기에는 박식한 인문학자가출현하여나름의시대적책무를 수행한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귀족들과의불화로영국에추방되어 베이컨과 로크의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었다가3년후돌아온프랑스의 볼테르(Votaire)나 백과사전을 편찬한 디드로(Didrot), 그리고비평가이자 극작가인 독일의 레싱(Lessing) 같은 인물들이바로서유럽개화기의 박식한 인문학자로서 자의반타의반 그들에게부여된시대적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있는일이다. 우리의개화 계몽기에도 이와 비견되는 박식한 인문학자들이출현한것으로에둘러 말할 수는 없는지 유추해볼 만한 일이다. 이광수에 관한 종합적 평가서로서, 본고에서검토해볼이광수와그의 시대(김윤식, 2008년)는 그 완결판 평전이라고할만한역저이다. 이책의 초고는 이미 80년대 초반 (문학사상, 81∼85년연재발표)에완성되었으므로 무려 30년이 지났지만 이 책의 성가는지금까지도여전히신뢰받고 있는 연구 업적이다. 무엇보다도 50 수년의이광수생애가폭 152 용봉인문논총 넓게 조사 탐구되어 드러나 있으면서도 어느 한 쪽에치우치지않고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큰장점이라고생각한다. 도합 1천 3백여 쪽의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이광수와그의시대는분명히 저자의 많은 저서 중 단연 압권이라는 생각을갖게하기에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이광수 개인의시대로써가아닌, 당대 우리들 모두의 시대로 보고 이광수 개인사를점검하겠다는저자의범상하지 않은 전제가 이 평전의 무게를 더해주고있다.
이제 우리는 이광수의 시대적 개인사를 따라가면서그의신문화운동이 친일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검토해보기로한다. ‘평전’에기록 되어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하되, 필자 개인적으로조사한참고사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정적 상상력’(?)에 기대면서그길을떠나기로한다. 검토의 초점을 춘원의 생애와 함께 다음과 같이크게세부분으로나누어 살펴보겠거니와 그의 행적을 논단하기보다는역사적‘사실’을나타내 보이는 것을 목표 하고자 한다.
(1) 유소년 시절의 춘원
(2) 신문화에의 열정과 방황의 세월
(3) 민족주의의 허상과 민족적 훼절의 실상 .
Ⅱ. 춘원 이광수의 시대적 환경과 인생행로
1. 유소년 시절의 춘원
1)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춘원의 사실적인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는춘원자신이남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153긴 여러 회고적인 글들이다. 연대순으로 보이면, 인생의향기(1924), 그의 자서전 (1936∼1937), 40년 (1944), 나 (1947), 스무살고개(1948), 그리고 나의 자서전 (1948) 등이 그것인데3) 이들자전적회고담은기억이 불분명하기도 했을 터이고, 또 본인이 의도했든의도하지않았든허구적 혹은 창작적 요소가 많아 각각의 글에 나타난문면을서로비교하여그 행간의 의미를 꼼꼼히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것으로본다. 어린 시절, 이보경(李寶鏡)으로 불린 춘원(春園)이태어난곳은평양에서 북쪽으로 2백 여리 떨어진 정주군, 거기서도산길로4십여리를더들어가야 하는 ‘돌고지’ 라는 마을이며, 그의 생년은고종즉위29년, 곧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1892년이었다. 그가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마흔두 살, 어머니가 스물세살때인것으로확인된다. 춘원 자신의 회고담 글에서 “아버지는 열다섯에장가를들어서삼년 만에 상처를 하고, 둘째 번에 맞은 이는 딸 하나를낳고돌아가고나를 낳은 어머니는 셋째 번 장가든 이였다”라고한것이나“우리어머니처럼 불쌍한 어머니는 또 없을 것이다. 열다섯 살에서른다섯잡순아버지의 재취로 오셔서 일생을 가난 속에서 보내셨습니다” 라고남긴것을보면 어머니 김 씨가 어렸고 또 변변치 못하여아들에게큰감화나영향을 주지 못한 느낌이 짙다. 작첩하여 별도 살림을차린조부의4대장손인 그의 아버지는 착하기는 하나 매우 부실한무위도식꾼이었고어머니는 이 같은 남편을 치다꺼리하는 것만으로도힘겹게지내야했다. 남편은 밤낮 출입이나 하고 밤늦게 돌아올 땐 술이대취해돌아왔고날이 궂은 때면 의관은 젖고 허방에 빠져 돌아오기일쑤인지라이런남편을 섬길만한 능력이 어린 주부에게는 있기 어려웠을것으로짐작은간다. 어머니는 항상 혼자서 우중충한 집을 지키고, 산에가서나무를 해와야 했고, 길쌈도 해야 했고, 아이들을 길러야 했다.
3) 이들 자전적 회고담 기록은 대부분 춘원 개인에 대한 세간의 ‘훼절’ 논의가 회자되는 가운데 쓴 글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춘원은 일생동안 이러한 어머니에 대해 ‘그리움’과 ‘동정’을떨치지못하고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훨씬 훗날에 쓴 ‘자서전’에서춘원은“왜아버지는 저렇게 마르고 두 볼이 움쑥 들어가서 궁상이끼고, 어머니는(왜) 저렇게 못났을까 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이 오랫동안나를괴롭게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춘원에게 어머니는 위에서 보듯이 잘난 어머니는아니었고, 그의아버지도 어린 아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지 아니할수없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아버지 어머니가 춘원의 나이 열한 살 (1902) 때전염병인콜레라로 인해 아흐레 간격을 두고 죽었다. 아버지는 쉰두살이었고, 어머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춘원은 아버지가 먼저 콜레라로쓰러지자어머니는머리를 풀고 앉아 따라 죽기를 결심한 듯했다는 것, “내가안죽으면네가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야 되는구나. 나마저 죽어야네가공부해서후세에 귀히 되지”라고 말했다는 것, 또 그의 어머니는자기와막내누이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가야 된다는 것, 헌데 아직 철이안난막내는버둥대며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 아버지 시신은 수의도없이거적에싸여대문 밖 밭 귀퉁이에 묻혔다는 것, 그로부터 아흐레뒤에그어머니도같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 등의 당시 가족 상황 얘기를감동적인어투로기술한 바 있다.4) 고아로 성장한 춘원에게 부모란버리고싶은부끄러움의 유산이었지만 그 존재는 부정해 버릴 존재도, 그렇다고긍정할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이율배반적‘고아의식’ 이 생애 내내 유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아의식이때로는국권상실의 상실감으로, 때로는 민족주의와 민족 회복운동으로연결되어나타난 것은 아닌지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4) 인생의 향기 , 이광수전집 8권(이하 ‘전집’으로 표기), 238∼239쪽.
2) 정주 소년의 상경
고아가 된 춘원이 정주 지역 동학당의 두령인 박찬명(朴贊明) 대령의 비서가 된 것은 1903년 11월 초겨울이었다. 말이비서이지하는일은‘사환’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열두 살 어린춘원이‘승’씨라는동학당원을 만나 그의 오두막집에 끌려가 동학교에대해이런저런설명을듣게 된 것이 춘원에게는 살 길을 열어 준 운명적인계기였다. 춘원은달포 간 승 씨의 오두막에 머물러 있었다. 승 씨는무극대도(無極大道)를 비롯하여 동학 창시자 수운(水雲) 선생과 2대주해월(海月) 등동학관계의 역사와 교리를 가르쳤고 부인도 친절을다해보살펴주었다. 승씨는 동학교도 1천 명을 거느린 이 지역 대접주였다.
약한달후그승씨는 춘원을 박찬명 대령에게 데리고 갔다. 춘원은그날부터박대령의비서이자 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이제 갈 곳 없었던어린춘원은근방의일가친척 집을 전전하며 기식하던 발랑 생활을청산하였고, 이리하여그의 유년 시절을 이끌어 준 동학에 눈을 뜨는 계기가된것이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어린 소년 춘원이 자만심을 키워가는데에이비밀단체는 크게 유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동학당 박 대령의 비서인 이보경 소년이 서울로간것은1904년9월초순 무렵인 것 같다.
1904년 러일전쟁 전초전의하나로벌어졌던정주성 전투가 일본군의 승 리로 끝났을 무렵이 1904년2월중순경이었다. 춘원은 읍내에서 ‘이보경’을 잡으라는 일본 헌병대의지령이방목으로나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춘원은 잘 피해다니다가박대령이서울에 간 사실을 알고 자신도 서울에 가야겠다고결심한다. 박대령의상경은 당시 동학당이 이용구의 일진회파와 교주손병희의천도교교파가 내분되는 결정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춘원은 진남포까지 걸어서, 진남포에서 인천까지는화륜선을, 다시서울행 화차를 탔다.
1905년 서울의 겨울은 춘원에게 경이감을주기에충 분했다. 특히 남대문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떡집이인상적이었던것 같다. “좁은 길가에 떡집, 보행객주 집, 이러한 납작한집들이늘어선남대문을 바라볼 때에는 그 문이 굉장히 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문통으로 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오는 것을 보고나는신기하게생각하였었다.”라고 훗날 자서전에 적고 있다.5)
5) 그의 자서전 , 전집 6권, 327쪽.
또 다른자서전글에보이는“기와집은 하나도 없고, 모두 초가 집 뿐이었고 떡집이즐비하였다. 웬떡집이 그리 많은지 인절미에 대추를 뻘겋게 박아서거리에내놓았는데…”라는 소회의 글로 보아 그런 풍경이 배고픈고아소년에게강한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춘원은 소공동 일진회가 세운 학교에서 일본어를배우면서세계를향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서울은 춘원에있어동학과일본을연결하는 한 마당이 된 것이다. 춘원은 박 대령의 비서에서이제천도교사숙장(私塾長)의 생도로 바뀌었다. 머리를 짧게 깍고새양복을구해입었으며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다. 1년이 지난 뒤춘원은일본유학을가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러 이곳에 온 수강생들에게일본어를가르치는임시교사 역할까지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열네 살의 일본 유학생 이광수
동학교주 손병희가 주선한 일진회 유학생으로선발된춘원의일본유학은 그가 열 네 살 되던 해인 1905년 8월 무렵으로추정된다. 이것은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유학생으로 파견한 네 번 째그룹에해당한다.
첫 번 째 그룹은 1881년 이른바 ‘신사 유람단’으로갔다가그대로남아 계속 공부한 유길준, 윤치호 등, 그리고 이들보다늦게1883년서재필 등 44명이 게이오 의숙에 입학한 것이 그것이고, 두번째그룹은 갑오경장(1894)을 계기로 다음 해에 무려 2백 여 명의파견유학생이역시게이오 의숙 입학에 이어 1897년에는 일본 육군군관학교에수십명이들어간 일이다.
세 번 째 그룹은 1904년 황실 특파유학생50명이 도쿄부립1중과 와세다 실업학교에 입학한 사례다.
육당 최남선과 천도교의 최린 유학생은 여기에 해당된다.
네 번 째 유학생그룹은1905부터1909년까지 4년 간, 사비 또는 공비(公費)로 떠난 1천여명의일본유학생들이 그들이다. 춘원은 시기적으로 이 4기 유학생에속한다. 춘원 이광수의 유학은 네 번째 제 4기, 그러니까단체관비유학이다 끝나고 이제 사비 유학생으로 바뀌던 시기에해당하는경우이다.
춘원은 위에서 말했듯이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의한 일진회 선발 유학생 의 한 사람으로 도쿄에 온 것이다.
1905년 8월경의일이다. 육당이춘원보다 겨우 두 살 위였지만 유학 시기로 보면 한세대의차이가난다. 바로 이점이 고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춘원과, 처음부터당당한학부참사관 아들인 육당과의 차별성이기도 했다. 12살위의나이차가있었지만 육당의 상대 교우는 최린이었던 것이다. 춘원에게 동학교주 손병희는 당시 우상 그 이상이었을것이다. 손병희교주의 유학생 중에서도 열네 살짜리 춘원은 최연소자였다. 그어린이가아무리 총명했다 하더라도 ‘을사늑약’ ‘포츠머스 조약’ 등당시의세상돌아가는 일들을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알려진유명인사들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손병희선생인지라철부지유학생들 앞에서 시국에 관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않았던선생에대해, 춘원은 훗날 나의 고백 에서 “세상일에 관한 우리들질문에는아무대답을 아니 하고 선생은 늘 근심스러운 표정을 보이고있었다.”고회고한바있다. 이 무렵 손병희 선생은 동학당 교주 신분을감추기위해‘이상헌’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는데 동학교 내에서의 수제자 이용구의배신 이원인이 되어 결국 ‘손병희’의 실체가 밝혀질 수밖에 없어서서둘러귀국하 게 되었다. 귀국일은 1906년 1월 5일이었다. 이용구가 친일파 송병준과결탁하여 동학교의 전 재산을 가진 일진회를 친일세력의선봉으로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진회는 1910년 한일합방이되자 두 주만에해산되었다. 해산 비용으로 15만원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백만명의 일진회 회원들에게 나누면 1인당 15전밖에 안 되는 소 금액임을알수있다.
손병희의 귀국으로 그와 어린 유학생 춘원과의관계는 사실상 멀어져갔다. 더구나 동학의 재산이 모두 일진회로 넘어갔기때문에유학비용조달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대한유학생학보 창간호(1907. 3)의‘학보난’ 의 기사에 의하면 일진회(천도교)의 유학생 파견은1903녀부터였다는것, 1907년 1월 현재 60여 명이 전문학교 및 중학에 다니는데그중상당수가홍명희 문일평 춘원 등이 다니고 있는 도쿄 다이세이(大成)중학교에다녔다는 것, 그리고 학비 중단이 1906년 7월부터 다음 해1월까지라는사실이확인되고 있다.6)
6) 대한유학생회학보 , 학보난 창간호(1907. 3), 86∼88쪽 참조.
학비 중단이 1906년 7월이면 춘원이일본에온지1년정도 되었을 때이다. 학비 중단으로 춘원이 일시 귀국한것은그해12월이었고 불과 3∼4개월 후 학비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일본에오게된다. 학비는 정부 지출이었고 대조선인일본유학생회(회장-윤치호)의보증인으로되어 있어 중학과정(白山학사)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비록멸망해가는나라였지만 그 나라 돈으로 학사가 있는 ‘시로가네’ 동산에서예수의교리와톨스토이의 반전론을 배우고, 문일평과 한 반에서 교우하며마음껏포부를기를 수 있었습니다. 춘원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붙인곳이여기에서였다. 기댈 곳 없는 고아 춘원에게, 망하긴 했으나 아직명맥을유지하고있는 대한제국 정부와 국왕은 가위 구세주처럼 느껴졌을것이다. 그리고시로가네 동산의 푸른 언덕과 서양인 교수들의 영어 수업, 일본친구들과의사귐이 춘원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던 기억으로 오래도록남아있었다.
2. 신문화에의 열정과 방황의 세월
1) 일본과 문명개화 체험
열네 살의 유소년 중학생의 눈에 비친 도쿄의모습은어떠하였을까?또 이른바 문명개화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문명개화’라는용어는아마도 1895년에 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에서부터처음쓰이기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뿐인 ‘허명개화’가 아닌‘실상개화’를통해서구선진국의 문명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의미를담은말이었다.
그런데 어린 소년 춘원의 눈에 비친, 특별히 인상적인도쿄에서의문명개화에 관한 이 무렵의 심경을 나타낸 어떤 흔적도없다. 이는그가서울의일진회 합숙소에서 일본어 교사 노릇을 했다고자랑하곤했지만당시그의 가슴 속에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한갓어린소년에불과했었다는 증표이다. 춘원의 눈에 ‘문명개화’의 도쿄 모습이 보이기시작한것은그의제2차 유학 시기인 1914∼1919년, 그러니까 20대 청년기때부터일것이다.
이때 발표한 글, 기행문 대구에서 와 동경잡신에이어이들글에담긴 생각을 보다 정밀하게 조립해 놓은 신생활론같은논설문등이그것을 말해 준다. 이는 춘원 일생의 지표가 되는‘무실역행’(務實力行)의이른바 ‘준비론’이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하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일본은 2백 5십여 년의 막부(幕府) 정권이무너지고 왕정복고의 메이지 유신시대(1868∼1912)의 개화기였다. 그리고10년도 채 못 되어 우리는 소위 ‘강화도조약’(1876)에의한개항을해야했고, 그해 4월에는 수신사를 보내어 일본과의 친선을도모하기도했던바, 수신사 김기수는 일동기유 (日東記遊)라는 보고서를통해정결함과섬세함의 일본 문화를 베이징의 그것과 비교하여 극구상찬하고있다. 춘원은 이와 비교되는 조선인의 무딘 감성을 훗날나의고백에서피력해 160 용봉인문논총 놓았다. 귀국길 부산역에서 양복을 입은 춘원에게 일본인이타는찻간에타라는 역원의 말에 분노를 느껴 “나도 조선인이오”하고조선인타는칸에 올랐는데 “냄새가 고약하고, 담뱃재를 함부로 버리고, 자리싸움하고, 침을 뱉고…참으로 울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그때춘원은“이동포들이다 이렇지 아니하도록…가르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생각하였다,”는것이다. 수신사 김기수의 단순한 ‘관습 차이론’에 비해당시춘원은정결함과 불결함을 가치의 차이, 나아가 문명개화냐 아니냐에연결시켜, 그것은 교육으로 도달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어보인다.
이철저한‘교사의식’이 ‘준비론’의 텃밭이 되었으며 또한 그교사의식이야말로훗날 춘원을 돈 키호테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 가장큰배경이아니었을까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춘원의 중학 시대는 1905∼1910 의 약 5 년이다. 주지하는바와같이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다. 1868년사쓰마번의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조슈 번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개화파연합 세력이 2백 5십여 년의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교토에있는천황을 에도(江戶/東京)로 옮기면서 ‘문명개화’를 새로운이념으로내세운 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왕정복고 5년 후 즈음, 1873년에돌출된강경론자들의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자체 내 문관들의강력한반대에부딪쳐 좌절되었지만 그 ‘정한’ 의지는 유신시대 내내관류한대조선침략정책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메이지 유신 시대에 문명개화론의 화신이라할만한인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이제일본인의의무는오직 이 국체(메이지 국가)를 보존하는 것 하나에만있다.”라고전제한후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은 옛 관습의 미혹함을일소하여서양에서 행하는 문명의 정신을 배우는 것에 있고, 음양오행같은미욱함에서벗어나야 된다“ 고 역설하였다.
이를 세 가지 단어로요약하면 국권주의→ 반유교주의→ 문명개화주의가 된다.7)
7) 후쿠자와 유키치 (中央公論社, 1969);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2008), 179∼180쪽재인용참조.
결과적으로우리는춘원이지표로 삼은 시대적 명제, 민족주의→반 유학 사상→문명개화사상의배경과 사유 체계를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춘원이 재학한 메이지 중학의 학풍은 기독교였고, 주된수업내용은영어공부에 할애되었다. 한국인 동창회 명부를들치면박영효와김옥균이 첫머리에 나오고, 춘원 문일평 등을 이어 백남훈주요한김동인등이모두 이곳 출신으로 등재되어 있다. 춘원이 문학에경도하게된것도이메이지 중학에서의 주변 환경이 큰 영향을 주었던것으로보인다.
주요한은 메이지학원의 유서 깊은 교지인 시로가네(白金)학보편집위원을역임한 바 있고, 일본어로 쓴 춘원의 첫 소설 작품사랑인가(1909)도이 교지에 발표되었다. 김동인과 주요한은 평양에서같이자란소학교동창인데 주요한의 뒤를 이어 김동인이 갑자기도쿄에온것도남에게지기 싫어하는 김동인의 심성에서였을 것이라는말이전해온다. 춘원의 영어 구사력은 당시 높은 수준으로소문나있었다.
춘원의영어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랜디스와 같은 좋은영어교사의지도가있었고,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로서의영어가절실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춘원 자신의 언어 습득 능력이 타고났기때문이라고알려져 있다.
1919년 2월에 작성하여 낭독 선언한 이른바‘2. 8 독립선언서’ 를 소지하고 상해로 건너가 직접 영역하여 그곳에서몇몇외국언론에송부하여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알린 사건은 그의진정성과관계없이평가 받을 만한 춘원의 행적이다. 당시 ‘재일본도쿄조선청년독립단’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던 춘원은 위 선언서에 서명한11명중의한사람으로서 와세다 대학 철학부 학생 실명으로 확인되고있다. 춘원은 당시 평범한 학생으로 시간이 흘러가는것을 견딜수 없을 정도로 혐오했다.
그것은 “나는 남과 다르다.”는 자부심의자각이고, 이자각을 지속시키기 위해 항상 노력을 게을리 하지않았다. 그가이런저런 글에서 자기를 ‘천재’라고 자처하게 된 것도 이연장선상에서이해되는 사항이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자기가 천재임을증명하는일이다. 그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학업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일이고다른하나는 문사가 되어 작품을 쓰는 것, 그로써 세상을놀라게하는것이었다. 일본인 동급생 ‘야마사키 도시오’(山崎俊夫)의 친절한안내로톨스토이를 읽게 된 것을 춘원은 행운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자신의형서가에서 일역판인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 를 뽑아 빌려주었다고한다. 춘원은 이 책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진리다. 인류가 이모양으로살아야만평화의 세계를 이룰 것이다. 나는 일생 이 주의로살아야겠다.”라고8)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야마사키는 생전에 작성해 놓은자신의연보에서“나는 이 학교(메이지 학원 보통과)에 2년간 다니면서내생애에두가지 큰 영향을 남겼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며, 문학이그다른하나인데 이 두 종류의 씨앗을 심어준 것은 이광수라 부른조선인이었다.”고적었다.9) 춘원의 문명개화가 문화 운동으로서의 ‘문학’이우선된것은메이지 중학 시절의 유산이라고 말해도 좋을 배경이다.
8) 두옹과 나 , 전집 10권, 594쪽.
9) 秋山繁雄, 山崎俊夫 ‘白金通信’ 제138호(1980. 6. 1);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1(2008.), 223 쪽 참조.
2) 초기 소설에 나타난 춘원의 자화상
서구 영향을 받은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하고있었을뿐만아니라특히 가인(可人) 홍명희 급우로부터 강력히 전파된‘바이런’주의, 즉악마주의는 그만큼 춘원에게도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순수하게예수의가르침에 빠져들고자 하기도 했지만 이와는 반대 방향의 악마주의에 경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한 사람의 절친급우문일평은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를 선호했지만 더 깊이 톨스토이주의에빠져있었던춘원은 기독교적 톨스토이주의 사상과 악마적 바이런주의사상, 다르게표현한다면 윤리학과 미학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자신을찾아내야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에대해적절히저항하는 그 무엇,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찾아냈을 때, 춘원은한사람의‘작가’ 가 된 것이다. 여기서 감히 유추컨대 그 정체성은“나는고아이다” 이었다.
이 명제는 그의 초기 소설들을 규정하는 기본모티프이자생애전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원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존과병행한병적증후군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청승꾸러기는고독속에가만히 있었으면 좋으련마는, 사실은 그와는 반대여서세상에나를반가와 하는 사람이 없을수록에 나는 더욱 사랑을 갈망하였다.……게다가나는 돈보다도 지위나 명성보다도 누구의 사랑을 구하는성품이다, 나를 만져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없이는 살 수없을것같이어려서만이 아니라 낫살 먹은 뒤에도 생각하는 가여운 업보를타고난중생이다. 사랑을 구하면서 사랑을 못 받는 배고픈 일이었다.10)
10) 나 , 전집 6권, 438쪽.
위의 말은 1948년, 그의 나이 쉰여섯 살 때의기록이다. 톨스토이적인 오른팔과 바이런적인 왼팔로 자신의 정체성인‘고아’ 의식을세운것, 이것이 이광수의 원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하는언술이다. 윤리의식과 미의식을 두 바퀴로 한, 탐욕스러운 ‘사랑기갈증’ 같은것이춘원문학의 본질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까닭이여기에있다. ‘사랑 기갈증’은 춘원에게 영영 지워지지 않는 콤플렉스였다.
이 콤플렉스가 ‘민족적인 고아 의식’으로 승화하면서사랑인가, 무정 , 어린 희생 , 소년의 비애 , 윤광호 등 초기단편소설과무정, 개척자 와 같은 초기 장편소설을 탄생시켰다고 보는것이다. 위소설의주인공은 모두 춘원의 자화상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11) 그런의미에서이후 춘원의 대부분 작품들도 직·간접으로 그러한고아의식이승화변형된 자전적 글쓰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춘원의첫소설, 사랑인가 (‘白金학보’ 제19호, 1909. 12)가 일본어로 씌어졌다는것에대해김윤식은 “우리 근대 문명의 역사적 성격을 암시하는것이기도하며, 또한춘원 문학의 원점 회귀적인 단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하다. 전자는우리 근대 문학이…많건 적건 일본적인 요소와 연결되었다는것과관련되며, 후자는 이 작품이 그의 사랑기갈증의 근원을 이룬고아의식에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 분석한 바 있다.12)
11) 김춘섭, 이광수의 초기소설 , 식민지시대의 문학연구(1980. 7. 깊은샘), 175∼192쪽.
12) 김윤식, 앞의 책, 250쪽.
3) 육당 최남선과의 만남과 신문화 운동
춘원이 육당을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2월 도쿄에서였다. 도산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 도중 유학생 단체 중의 하나인 ‘태극학회’ (기관지태극확보 발행) 초청으로 보조 강사 육당과 함께 연설하게된장소에서이다. 춘원은 ‘도산 안창호’라는 글에서 “도산과 육당이안것이이때가처음이라 육당은 크게 감동받아 지금까지 선생이라고부르는이가없으나오직 도산 한 분만은 선생으로 안다고 훗날 고백하는것을들었다”고적어놓고 있다.13)
13) 在滿洲의 도산 안창호 , 전집 8권, 500쪽
이 기록에 의하면 춘원이 도산을 본것과육당과도산의만남이 모두 이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만난것이아니라 .멀리서 바라보았을 따름이어서 정확히 만남이라고할수도없다.
앞에서말했듯이, 이때 춘원은 천도교 유학생으로 홍명희와더불어도쿄의다이세이(大成) 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비록 조숙했다고는하나이때춘원은중학 초년 급의 철부지였다.
이때 도산에 이어 연단에선육당의당당한모습은 춘원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처럼 보였을것이다.
춘원보다 두 살위인 것을 감안하면 육당의 조숙함을 짐작할 만한일이다.
춘원이 육당을 정식으로 사귄 것은 홍명희의소개에의해서였다. 다이세이 중학 동급생이긴 했지만 당시 홍명희는춘원보다네살이나위이고, 좋은 집안 출신인데다가 한문 소양이 뛰어났을뿐만아니라바이런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일본 문단에도 정통한성숙한그런청년이었다. 춘원에겐 친구이기보다 형이나 다름없었다. 홍명희는육당과거의동격으로 사귄 친구 사이였다. 육당이 나이로나 가문으로나우위인홍명희와친구로 사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육당의총명함때문이었다. 육당은 중인 출신 집안으로서 무엇보다도 부를 소유한상승계층일뿐만아니라 이미 문명(文名)을 드날린 준재로 알려져있었다. 게다가육당이창설한 신문관과 광문회가 1910년대 당시 한국의아카데미아로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개화기를 이끌어가는 한국 근대사의주역들이대부분육당과 같은 중인 계층인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오경석(吳慶錫), 유대치(劉大致) 등은 현실정치에도 참여한 주요중인계층인물인데개화사상의 주춧돌을 놓은 선각자들이었다. 육당은 15세 때인 1904년 10월에 황실 특파유학생50명중최연소자로 도쿄 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해채두달도안된12월,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해버렸다. 물론부모의병환이란 퇴학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육당이두번째 일본에 유학한 심중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는1906년2월에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다. 그러나이2차유학도 166 용봉인문논총 수개월 만에 중단하고 육당은 귀국해버렸다. 1907년봄, 육당은일본인인쇄 기술자 두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여 서울 을지로입구에인쇄소겸‘신문관’을 창설하고 처음 낸 잡지가 소년 으로 1908년11월에창간호가 나왔다. 육당의 나이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이미문명개화의 가장 좋은 도구이자 그 자체가 ‘잡지’류의 간행물이라고생각했던결과였을 것이다. 소년 창간호의 핵심 게재물은 권두시, 이른바신시작품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다.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첫 연 이하 생략) 소년은 바닷가에 선 것이다.
이 소년은 새로운 힘과순결의상징이었다. 문명개화는 바다 저 쪽에서 오는 것이기에 소년은바닷가에섰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사상이도입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이 시만큼 강하게 들어 낸 시가는 일찍이없었다.
춘원이 먼발치에서가 아닌 홍명희의 면전 소개로육당과만난것은1909년 11월 말경으로 육당 주제의 소년 지 창간호가발행된지만1년이 지난 뒤였다. 1913년 오산학교 교사직을 내놓고약9개월동안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바이칼호 인근의 치타 등 중국 지역을주유하다가돌아온 후, 오산학교에 다시 복직할 때까지 상당 기간을“육당에게잡혀광문회의 편집 일을 도와주느라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가육당과가장가까이 지낸 시기일 것이다. 춘원은 육당의 문명개화 의지에적극동참했을터이고, 육당 역시 춘원의 도움을 받으며 민족 계몽을통한문명개화에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육당이 자기 잡지의 기고자로 인정한것은춘원뿐이어서 소년 과 청춘 (1914년 창간) 지의 필자는 육당을제외하면춘원의글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167이 가장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육당의 마지막잡지사업, 靑春을간행하기까지 신문관에서는 아이들 보이 , 붉은저고리, 새별등소년 잡지를 냈었는데 ‘새별’은 춘원 혼자 발행한 잡지였다. 이들잡지의집필자는 거의 육당이고, 간혹 홍명희의 글도 보이긴하지만육당이자기잡지의 기고자로 인정한 것은 춘원 한 사람이었다.
육당에게 춘원은 아우이고 신실한 동지이자 동격의집필자였다. 이들둘은 인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가이루어진것이다. 육당이 특히 춘원을 아끼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을높이사고사랑한점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춘원이 시골의 미미한집안출신이고또고아였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렇게도생각되는대목이다. 보호본능의 발로로 보인다는 의미이다. 육당은 그의 회고담 병우(病友)생각 이라는 글에서 마치 친 혈육에게처럼 춘원의 건강을 애절할정도로 걱정하는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14)
14) 최남선이 靑春 제13호(1918. 4)에 게재한 病友의 생각 은 춘원에 대한 애절한심중이잘나타나 있다.
4) 와세다 대학 시절부터 2.8독립선언서 까지
춘원이 와세다 대학에 다닌 것은 1915년 9월부터1918년말까지이다. 와세다 대학이 새로 제정된 대학 령에 따라 전문학교에서정식대학으로 승격한 것이 1918년 12월이므로 그가 비록 와세다대학철학과를다녔으나 사실은 전문학교 수준의 구제도에서의 대학생이었다. 참고로이대학에 함께 다녔던 이광수, 현상윤, 최두선, 송계백, 김여제중이광수는 예과 학생 3천여 명 중 2위로서 특대(特待) 성적이고다른이는모두우등이었다고 한다.15)
15) 學之光 제13호, 제14호(1917. 7∼11) 게재의 소식 난 참조
유학생 잡지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위원인 춘원이 이 잡지에 권두으로 쓴 글이 우리의 이상 (제14호, 1917. 12)이다.
학지광 다음호에 발행인 현상윤이 이광수 군의 ‘우리의 이상’을 독함 을써서 더욱 명문으로 알려진 춘원의 이 권두 논설은 2년 후(1919년)에쓴2.8독립선언서 에 필적하는 높은 수준의 논설문으로 평가된다.
이제 춘원은 민적 경륜의 논설로 논객으로서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것이다.
세계문화사상에서 조선민족의 위치, 조선민족 생존의 가치, 조선민족의능력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춘원의 논설은 논리의 혼란이나 미흡한 역사지식으로 인한 편견이 지적될 수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위상과 나아갈방향을 나름대로 개진한 성과의 글로 읽혀질 수 있다.
이논설에서춘원은, “한일 합방이 실행된 뒤로는 거의 몰이상에 빠졌으니이대로가면정신적으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외다. 이에우리는새로운‘민족적 이상’을 정할 필요가 있으니 그것은 즉, ‘신문화의산출’이라합니다.”로 결론을 토로하고 있다. 과연 ‘신문화 운동’이 우리의 민족적 이상이냐 아니냐는논란이있을수 있겠지만 당시 이러한 민족적 지표와 경륜을 모색하는태도는춘원이 아니고는 달리 찾기가 쉽지 않다. 결국 ‘민족적독립’이없는마당에서 ‘신문화를 산출하는 일’이 우리의 ‘새로운 민족적이상’이라는경륜을펴고 있는 바, 이는 식민지로서의 전 기간을 거쳐그가품고있었던‘준비론’ 사상에 근거한다고 보여진다.
‘2.8독립선언서’를쓰고상해로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한 행적의 진정성을 두고 논란이있어온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춘원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에 간략한관계설명이필요할 것 같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매일신보는 1910년8월합방되자마자 폐간 조치된 배일 투쟁지 대한매일신보의 제호에서‘대한’을빼고총독부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기존의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산하에두고‘조선어판’ 일제의 선전 소식지였는데 개화기의 중요한‘신소설’ 작가들, 이 인직 조중환 이해조 이상협 등의 작품이 다수 이지면에발표되었다.
춘원은 이 ‘매일신보’의 지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초의장편소설로1917년에연재 발표된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 무정 도 매일신보를통해서였다. 춘원이 이 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 해 전에 기행문이자논설문성격을띤대구에서 (1916. 9. 20∼23) 와 곧이어 게재된 동경잡신(1916. 9. 27∼11. 9) 두 편의 글 때문이었다. 이 두 글은 무엇보다도춘원이이상화하고있던 ‘준비론’ 사상을 여실하게 드러낸 글이어서 단순한기행문이나소식을전하려는 서간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구에서 는대구에서일어난한소요사건의 해결 방안을 통해 우리는 어찌해야 되고일제황국정부는조선인에게 어떤 방략이 필요한가를, 이른바 ‘준비론적’ 관점에서논술한글이다.
결과적으로 준비론 사상의 싹을 키운 계기의글이되었다. 근한달이넘게 연재한 동경잡신 은 도쿄에서의 유학 생활과관련한여러이야기를수상 형식으로 쓴 글로서, 당시 총독부 쪽에서나우리독자쪽에서나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이 ‘동경잡신’은 총독부의 권유에의해쓰게되었다는 것을 춘원 스스로 밝힌 바 있어 그 배경은 짐작할만한글이다. 이들두 글이 이후 친일 문제로 논란을 지핀 이른바 신생활론으로연결된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대구에서 는 기행문 형식이다. “∼하나이다” 식의윗사람에게보고하는 어투를 사용한 정중한 편지 형식의 기행문이다. 그러나대구에서는 단순한 일반의 기행문이 아니다. 그가 대구에도착하자그곳에서일어난 ‘강도 사건’이 화제거리였다.
수 십명의 청년들이작당하여강도짓을 했는데, 그 청년들은 기실 중류 이상의 상당한교육을받은자들이며, 일찍이 ‘대구친목회’를 만들어 청년운동을 펴던 자들이었다. 이청년들이떼 지어 강도짓을 한 점은 충격적인 사건이라 할만했다. 춘원은여기에서 이 사건을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분석의저변에는식민지하의 한국 청년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총독부에제시하는뜻이담겨져 있었다.16) 곧이어 같은 ‘매일신보’에 연재한17) 동경잡신은‘도쿄세상’ 에서의 잡다한 관심사에 대해 이광수 특유의 신문기자적문체의틀로한 달이 넘게 기고한 글이다. 도대체 도쿄란 어떤곳이기에그러한가. 도쿄생활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당시독자는 독자대로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요구하고 있었다. 동경잡신 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은 춘원은 잇달아장편논문문학文學이란 하何오 18) 를 그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이논문은비평가로서의, 또 문학 이론가로서의 춘원의 면모를 살피는 데중요한부분이자우리 비평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한 만만치 않은 글이다.19)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조선자치론’과 ‘다이쇼데모크라시’, 반사회주의와 친제국주의, 조선 통치관, 김준연, 백남훈, 최승만등의유학생들이 다수 가담한 여명회 (黎明會, 1918), 그리고 여러도쿄유학생모임중의 하나인 ‘조선청년독립단’ 등 이러한 여러 사항들은1919년2월에선언한 춘원의 이른바 2.8독립선언서 가 작성되기까지의과정을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이름’들이다. 자세한 설명은 번거로워생략하거니와독립 선언서가 이루어진 당시의 ‘재일본도쿄조선청년단’의상황과경위만은 적시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시 도쿄에는 일제 당국에서 소위 ‘불온’하다고보는, 열개의조선인 단체가 있었다. 유학생 단체 대표들이 모여 ‘민족자결론’을표방하는‘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자금 조달, 선언문 작성및인쇄와발송, 본국과의 연락 등 실무를 실행해 갔다. 당시 김도연, 백관수등당국의요주의 유학생들은 위장 탈퇴시키는 등 치밀하게준비했다. 2.8독립선언서 에 서명한 ‘재일본도쿄조선청년독립단’의 대표는작성책임자인 이광수를 비롯하여 위장 탈퇴했던 김도연, 백관수, 최팔용등11명으로되어 있었다.
16) 대구에서 , 전집 9권, 134쪽 참조.
17) 매일신보, 1916. 9.16∼11.9.
18) 위 신문, 1916.11.10∼23.
19) 김윤식, 앞의 책, 553쪽.
당시 춘원은 베이징 여행을 마치고귀국, 서울을거쳐도쿄에 돌아 온 바로 그 시기였다. 대표단은 춘원에게독립선언서, 결의문및 민족 대표 소집 청원서의 초안 작성을 맡겼다.
춘원의기록에20) 의하면 자기 쪽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물색한 것이고특히송계백을명주에 베낀 선언서를 지참하고 서울로 가게 했다.
20) 나의 고백 , 전집 7권, 251쪽.
백관수가총수격으로모든 인쇄 관계 일을 책임졌고, 학지광 의 편집부장을역임한바있는최팔용이 본국과의 연락 관계를 맡았으며, 이 운동의지침이될사상적체계는 춘원이 맡았다. 2.8독립선언서 를 쓴 곳은 춘원의 하숙집이었다. 12월말경도쿄에도착한 춘원은 둘째 학기 시험을 치룰 수 있었고, 즉시로그는독립선언서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는 곧바로 영어 번역까지마쳤다. 모든것이다 준비가 되어서 거사일인 2월 8일이 오기만기다리고있는데최팔용이 춘원의 하숙에 와서 그에게 상해에 가라는 전갈이었다.
동지들모두의 뜻이라는 것을 전제한 후, 이유인즉 거사 후우리가모두잡혀가면우리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수도 있으니상해로가서영어독립선언서를 세계만방에 알리라는 취지였다. 춘원은상해로향했고드디어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대거 4백여 명의유학생이모였다.
유학생총회로 위장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였다. 단상뒤에는독립선언서가걸려 있었다. 사회자는 최팔용, 백관수 선언문 낭독, 김도연결의문낭독, 이렇게 선언문 채택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우리의민족독립을 담은 독립선언서는 세 차례 있었다. 신채호김좌진등만주의39인명의로 된 무오독립선언서 와 2.8독립선언서, 그리고기미독립선언서 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춘원의 ‘2.8독립선언서’와육당이쓴‘기미독립선언서’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주관적 분석은다른지면으로미루거니와 다만 문장의 강도가 육당의 글이 훨씬 장려하고‘심정적세계’ 가 명료하게 드러났다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있었다는평가만남겨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춘원의 2.8 독립선언서의문맥적성향이 무엇인가이다. 춘원이 투쟁론자가 아니라 준비론자라는것, 그의전 생애를 통해 변함없이 이 사상을 고수해왔다는것은누구나다아는일이다. 춘원은 육당의 신문관에서 육당을 돕고 육당과더불어글을썼다.
‘준비론’의 또다른 신봉자인 육당의 세계관에동조했다는증거이다. 춘원은 변함없이 ‘준비론의 도산’을 신뢰하고 있었고, 또한도산의심복대리자로서 흥사단 입단식을 주제할 정도였다, 그런춘원이2.8독립선언서 에서만은 유독 “유혈만이 있다”는 투의 강경투쟁론을주장했다는것은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합리주의적 지식으로멋있는수사를 구사하였을 뿐 적어도 춘원의 기본 사상에는 별다를자국을내지는못했다는 평가이다.21)
21) 김윤식, 앞의 책 1권, 682∼3쪽.
3. 민족주의의 허상과 민족적 훼절의 실상
1) 임정에서의 두 해(1919∼1921)와 도산 안창호자신이 영역한 ‘2.8독립선언서’를 들고 춘원이 도쿄를떠나상해에도착한 것은 1919년 2월 5일이었다. “상해는 적어도내게있어서가장적당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며, (……) 귀찮은 일이 없고하찮은친구도없고 언제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며 안온한 느낌의상해에서의밝은 마음을 애인 허영숙에게 전할 수 있을 정도로편안했다.22)
22) 사랑하는 영숙에게 , 전집 9권, 282쪽.
상해에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173도착한 춘원의 첫 번째 일은 영역한 ‘독립선언서’를신문사에돌리고, 세계 요로에 전보를 쳐서 알리는 일이었다.
춘원은상해에도착하자마자설산 장덕수를 찾아갔고 그의 배려로 방과 침대를인계받아지냈다. 빵조각 몇 개와 더운 물 만으로 여러 날을 지내야했고, 그렇게좋아하는담배조차도 못 사 피울 처지가 되였다. 그리고특별히급하게할일도없어 애인 허영숙에게 편지 쓰는 것이 일과처럼되다시피한무료한나날을 보내야 했다.
상해에서의 다른 공적인 일은해방후에쓴나의고백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글을 쓸 당시 춘원은민족반역자로지목되어 있던 만큼 자신의 ‘친일 변명’을 겸한 ‘나의고백’은다른그의어떤허구적 고백록보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이이상의사실기록은찾기 쉽지 않다. 여러 날을 그렇게 보내다가 춘원은 공적인 일을시작했다. 무엇보다도 ‘2.8독립선언서’와 그에 관한 기사를 중국의 여러영자신문에보내어기사화 하도록 부탁을 하는 일이었다. 대부분 헛수고였으나드디어‘노드 차이나 데일리 뉴스’ 2월 10일자 에 “Young Korea’s Ambition”이라는 제목 아래에 “도쿄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이있었다.” 는기사가났다.
다음 날 11일자에는 미국 신문 “차이나 프레스”에좀더자세한기사가 실렸다. 춘원이 제공한 기사를 발췌한 것이었다. 이것이외국신문에 독립선언서가 알려진 최초의 일이였으며, 춘원이상해에온목적은이로써 일단 달성된 셈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2월22일경에, 춘원은 여러 애국지사들의 요청으로 본국의 ‘기미독립선언서’도영역해놓았다. 3.1 운동 소식이 그 선언서의 내용과 함께 상하이신문에보도된것은 3월 5일이 되어서였다. 춘원이 상해에서 도산을 만난 것은 그의 생애에서가장운명적인사건이자 동시에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도층이아닌일반지식인들모두가 기댈 곳을 도산의 ‘흥사단’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춘원은일찍부 터 도산의 지론과 동궤의 ‘준비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그와의만남은 소망했던 일이고, 따라서 도산과의 만남은 분리될 수없는 부자의식의 관계라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고아인 춘원에게는도산과의이런 관계야말로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삶의 핵심이었다.
더구나도산과 춘원 모두 ‘서북촌인’으로 불리었던 동향이 아니던가.
상해 임시 정부의 예비 조직은 1919년 4월 10∼11일양일에걸쳐열렸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김규식이보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 선서문, 정강을 발표하고임정의골격을세웠다.
그리고 임시 정부의 기관지로서 독립신문 이발행되었고, 춘원은사장 겸 편집 책임을 맡았다. 물론 그는 귀국할 때까지신문편집일에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곧이어 춘원은 위기의식에 휩싸이게되었다. 넓게보아 세계의 강대국 환경이 순리대로 되지 않았고, 민족자결원칙은흐지부지되면서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되는 양상이었다. 1차세계대전의 수습 방안이 승전 연합국에 의해 움직였고, 윌슨미대통령이제안한 국제연맹 도 정작 미국 의회에서 부결되어 윌슨대통령의체면이말이 아니었으며, 결국 국제연맹 결성도 실패하고 말았던것이다. 신제국주의, 그 합리주의라는 ‘논리적 세계’는 정확히 진행되고있었지만‘민족자결’에 희망을 가졌던 약소국들의 ‘심정적 세계’는 정확히환상으로끝나가고 있었다.
춘원이 보건대 2.8독립선언서 나 기미독립선언서의부산물인 임정은 ‘우리만의’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보였을것이다. 국내 상황만으로 좁게 보면, 임정 내부도 점차 무능력한모습으로변해갔다. ‘사료편찬사업’도 독립신문 도 재정난에 휘청거릴수밖에없었다.
춘원의 내면 풍경은 매우 초조하고 거칠고 허전해지기시작했다. 춘원이 임정에 절망하고 허영숙과의 로맨스도 위기의식에빠지고, 당시 그가 기댈 곳은 도산뿐이었을 것이다. 춘원이 도산에매료된것은첫째로 도산의 인격이고 둘째는 그가 서북 동향인이라는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도산의 ‘흥사단’ 사상이 춘원의 생각과 잘 맞는것이었다.
그러나 도산의 준비론 사상을 춘원이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주어진 한계 내에서의 이른바 ‘합법적민족운동’이라는춘원의기본적 발상과는 달리 춘원 자신은 흥사단을 중심으로하는도산사상이 합법적 민족운동이라고 그리 생각하지는 않았던것으로보인다.
무엇보다도 생각의 차이는 ‘무실역행’의 흥사단 사상은‘국내에서이어야’ 한다는 것이 춘원의 신념이었다. 게다가 약혼자 허영숙과의사랑문제가흔들릴 수 없는 춘원의 내면 풍경이기도 했다.
춘원은 상해에서 귀국길을 선택했다. 서른 살 고비의 중대 결정이었다.
2) 민족개조론 전후
1921년 3월 말 경, 춘원은 상해를 떠나 천진과봉천을경유하고압록강을 건너 귀국했다. 임정의 대변자, 기관지 ‘독립신문’의사장이며첫장편소설 무정 의 작가 이광수의 귀국은 당시충격적인뉴스였다. 육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지도층 인사들이 아직가출옥전이었던바,
춘원이 왜 체포되지 않고 자유의 몸으로 이렇게 돌아올수있었는지많은 사람들은 일단 의혹의 눈초리를 숨기면서 그를맞았다. ‘변절자춘원’ 이라는 소문이 날 만도 했다. 심지어 춘원은 여자냐임시정부냐, 또는사랑이냐 민족이냐의 갈림길에서 여자와 사랑 쪽을택했다는비난과조소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3.1운동 사건으로 ‘식민지 조선’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에서 예비역 해군 대장 사이토 마고토 (齎藤實) 총독으로바뀌었고, 무단정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겉치레를 하면서회유매수정책으로전환하던 시기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우러러마지않는‘다이쇼데모크라시’의 대부 요시노 사쿠조 (吉野作造)조차도 ‘민족자결의원칙’에대해서는 끝내 언급하지 않으면서 조선 통치 방법으로서
ⓐ조선인에대한차 별 대우 철폐
ⓑ 무인 정치의 철폐
ⓒ 동화 정치의포기
ⓓ언론자유보장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이미 표방한 바 있는‘조선자치론’의재현인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안전한 통치 방법을 제시한것에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개화 계몽기의 시대적 필연이자 때마침 바뀐 총독부의문화정치에힘입어 1920년대는 내면적인 공포 정치와는 달리, 바야흐로식민지시대의르네상스를 맞이한 듯, 각종 신문 잡지가 우후죽순처럼출현했다.
조선일보(1920. 3. 5), 동아일보(1920. 4. 1)의 창간으로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가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고, 창조 , 폐허 , 개벽등의잡지간행으로 글쓰기 문화의 꽃이 일견 만개해 보였다.
이즈음의 정치문화현상을 춘원은 훗날 “조선 민족은 일본 통치하에 있는국민일지언정일본에 화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23)이라고술회했다.
23) 나의 고백 , 전집 7권, 266쪽.
이러한 술회와 함께 그의 논설문 민족문화론에대하여살펴보는것은 전환기의 그에 대한 사유의 행적을 살피는 데에중요한단서가될수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사상 관련 단체는 ‘수양동우회’를중심으로한‘민족개량주의자’에 의한 사회운동 단체들과 ‘조선청년동맹’ 등사회주의단체들이었다.
전자는 국내 부르주아적 지식인 계층으로서계몽주의에의한 민족 실력양성을 목표로 하는 언론, 출판, 연구단체를통해민중을 계몽하는 문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사회주의운동은일본 유학생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연결되고, 여기에공산주의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정치적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3.1 운동이후의1920녀대 초반기는 사회적 정체성이 분명해진 것은아니나두개의큰흐름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쓴 논설이다. 좌우의이데올로기가 대립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초입단계에서하나의쐐기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이 민족개조론 이었던것이다.
이논설을둘러싸고 큰 물의가 빚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천도교에서성장하다시피한 춘원에게 기관지 격의 개벽 지 발표 지면은제2의운명적회전이라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민족개조론 이 나오기까지는여러준비과정이 있었다. ‘수양’과 ‘수학’이라는 어휘가 등장는여러글들이그것이다. ‘수양동맹’ ‘수학동맹’ ‘소년동맹’ 과 같은 단체이름들도그런과정의하나이다. 3.1운동이 폭발한 지 약 4년, 그간 한반도를에워싼극동의정세를분석하지 않고서는 민족개조론 의 바른 이해는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민족개조론 은 바로 우리 민족을 구할 경륜이란무엇인가에대해춘원이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의 신조를 드러낸 대문장의논설이다. 민족개조론 은 상 중 하로 된 장편 논설문으로서 글머리에는변언(辯言)이, 끝마무리에는 결론이 붙어 있다. ‘상’…민족 개조의 의의, 역사상으로 본 민족 개조운동, 갑신 이래의 조선의 개조운동, ‘중’…민족 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의 개조는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는 얼마나한 시간이 필요한가, ‘하’…개조의 내용, 개조의 방법, 위 논설의 핵심은 ‘하’ 편의 개조 내용과 개조의방법이다.
민족개조의 내용은 흥사단 사상 그대로이며, 방법도 흥사단의조직그대로라는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이 논설이 지사적 계층과청년들의격분을산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 재외 동포를 향한 것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
ⓑ 3.1 운동에 대한 모멸적 발언(3.1운동에서가아닌자연적변화, 지각없는 변화)
이러한 격분(?)에 찬 평가의 시비가 충분히 논의되지않은채 이광수의 신문화 운동의 친일적 성향은 거의 일방통행으로굳어져 고정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 연구자들의 은밀한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사항으로서흥사단의‘수양’ 교의와 ‘무실역행’ 지론이 ‘민족개조론’의 속살과어떻게연관되어있는지 구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3)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춘원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대한검토또한매우 필요한 과제로 남아있다고 본다. ‘Nationalism'의서구적어의로사용하고 있는 이들 두 개념에서 민족주의의 역사적당위성못지않게국가주의의 발전적 인식론도 중요하다는 맥락에서이다. 즉역사적’사실‘의당위성과 함께 역사적 해석과 함의의 인식도 중요하다는생각에서이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도 세계시민주의라는근현대적국가주의로환원하여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24)
24) 이상신·최호근 공역, 세계시민주의와 민족주의(F. 마이네케) 제1장 ‘민족, 민족국가. 세계시민주의’ 참조.
4) 정치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
‘민족’ 개념이 특히 강조되곤 했던 시대적 상황은변혁기라는공통점을 지닌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잘 알려진 바와같이18세게후반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변혁기에 나타난 산물인데 이변혁기의시대의지가, 특히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한국의20세기초이광수의 시대의지에 상응한다. 이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시대의지란전통적인 봉건계층의 문명으로부터 일반 민중의 생활, 언어및예술또는역사로부터 눈을 돌리게 된 ‘새로운 계층’에 의해주도되었다.
이새 로운계층은 언제라도 과거와는 결별할 자세가 되어있었으며, 애초부터민족국가(nation-state)보다는 민족정신(nationality)과모국애(patriotism), 그리고 문학, 민속, 모국의 언어와 역사를 통한 민족의정신사적표현과선양에 관심을 쏟았다.
이것은 전통의 부정이면서, 전통의강한긍정이다. 일견 이율배반 되어 보이는 이 같은 근대 민족주의운동의시초를‘문화적 민족주의’라 부르는 것25)은 여러 학자들의공통된 견해이다.
한편 민족주의의 다른 양태의 하나는 ‘정치적민족주의’이다. 즉민족주의는 현실로서든 또는 이상으로서든 경계가 뚜렷하고규모가큰영토를 가진 중앙집권적 정부 형태의 존재를 전제로하게된다는것인데이것은 곧 ‘문화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민족주의’로의이행을의미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이행과정을 ‘한스 콘’(Hans Kohn)은“민족주의의성장이 일반 민중을 공통의 정치 형식으로 통합하는과정”이라고진단했다.26) 말할 필요가 없이 춘원의 민족주의는 바로 ‘문화적민족주의’였다.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시대의지와 그 열망의 계층을대표한다고스스로믿었던 춘원 이광수에 있어서 ‘계몽’하고 ‘설교’하는 문학의입지는이런측면에서 당연한 추세의 결과였고 새로운 가치로의 민족적개조의지는과거의부정이면서 새로운 전통의 강한 옹호로 드러날수밖에없었다고보아야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민족이 하나의 ‘의식운동’ 차원으로이룩될때그 문화적 기초는 동일한 언어와 공통되는 역사적조건이다. 그것이제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교육의 과정을 통하여일반집단대중의‘감정적인 조국애’의 대상으로 될 때 그 결과는 ‘문화적민족주의’로나타난다. 25) 김춘섭, 이광수의 문학론과 민족주의 ;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26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4∼6쪽. 26) Hans Kohn, The Idea of Nationalism Chap.1(The Nature of Nationalism), p. 4. 180 용봉인문논총 5) 훼절의 실상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진 것은 1936년에부임한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의 전조선인 황국신민화를 ‘조선 통치의근본’으로내세운데 있었다. 1937∼8년 사이에 무려 180여 지식인의검거로이어진이사건은 도산 안창호 등 불온한(?) 지식인들의 비협조적인행위에대한대대적인 교정 작업에서 비롯된 일제의 계획된 만행이었다. 이사건의배경은 만주사변(1931년) 이래 일본 군부는 노골적으로정치에관여하여군부의 파시즘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1937년 마침내‘중일전쟁’을일으킨것이었다. 모든 단체로 하여금 황국신민 선서와 신사참배를강요하기시작했던 것이다. 동우회사건은 이와 같은 군국주의일본이전쟁수행을앞두고 모든 사상운동의 말살을 계획한 사실로써 설명될수있다. 검사국에 동우회원 전원이 모두 송치되었다가 이듬해 1939년에는전원무죄, 그리고 1940년에는 주모자급 지식인들에게 5년에서2년까지유죄언도가 내려졌다. 이때 이광수 혼자 가장 무거운 5년형을받아구속되었다가다음 해에 다시 무죄로 풀려나올 때까지 무려 5년에걸쳐재판이진행되었다. 이른바 전향서를 쓰고 선처(?)를 받은 것이다. 이동우회사건을계기로 춘원은 친일의 실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친일을향한이런저런 전조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살아온 행적으로보아친일의민족적 훼절을 이렇게 선명히 드러내리라고는 생각할수없었다는것이평범한 관찰자의 증언이다. 춘원의 일제 말 행적에서 지적되어 온 훼절의 실상은자타의증언이많아 열거할 필요는 없겠으나 춘원 자신의 회고록나의고백중‘나의훼절’에서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자세한 변명을늘어놓고있어애처로운 생각마저 들 정도다. 1939년 3월 14일, 황군 위문작가단을결성하는 일에 발 벗고 나산 것, 다음으로 조선문인협회회장으로추대되어(1938년 10월) ‘천황폐하만세 삼창’으로 폐막한 일, 그리고1940년에실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181시한 창씨개명에서 ‘가야마 미츠오’(香山光郞) 로정한것등잘알려진내용 몇 가지를 ‘훼절’로 고백하고 나름의 배경을들어자위하고있는것은 이광수 개인을 넘어 민족사적 슬픔의 한 장면일수도있는일이다. 그러나 친일의 행적은 춘원의 경우, 그의 행위에서보다는문사로서의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우선이라고보고싶다. 물론결과적인 친일이 아닌 의도된 친일 작품만을 문제삼아야하고이는앞으로도 철저한 분석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많은친일시가와친일소설이 그렇다. 김윤식의 역저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이방면의선구적연구서로서도 중요하게 값하고 있다. 2009년에 이룬출판기회의대역사라할 만한《친일인명사전》27)도 분석보다는 열거형식으로적시했지만참고할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7) 이 문헌은 출판사상 대기획 출판물로 남을게 틀림없고, 나름의 업적이 평가되지만많은인사의친일에 대한 차후의 면밀한 '사실구명'과 함께 ‘친일성향’의 개념에 대해서도더깊은논의가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Ⅲ. 맺음말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 친일문제는 ‘논리적 세계인식’으로포괄할것인가, 아니면 ‘심정적 세계인식’으로 선별할 것인가의문제라고생각한다.
논리적 세계를 합리주의로 포장한 협의의 인식체계라 한다면 심정적세계는 인문주의적 조화로 융합하는 광의의 인식체계라고할수있다.
춘원의 ‘신문화운동’은 문화적 민족주의로 수용하고 친일문제는 정치적 민족주의로 재단하는 역사 인식이 요구되는 ‘춘원 이광수와 그의시대’가 아닐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더 살펴야할 과제로 남겨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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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일제식민시대, 이광수의 ‘신문화운동’을 둘러싼친일문제는그간많은논의가 제기되어져 왔으나 그 논의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젠진부해진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소론 역시 그런연장선상의하나이다.
그러나 본 논고의 목적을 신문화운동의 친일성향여부에관한논단에두기보다는 전통적 민족주의의 개념을 세계계시민주의적‘국가주의’로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본논문은무엇보다도일제식민시대의 신문화운동이 ‘문명개화’로 정리되는역사적필연의과정이라는 전제가 필수적이다. 여기에서 본 논고는 이광수 행적의 시대적 개인사를 따라가면서 그의 신문화운동이 친일 상황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기본과제로삼고, 이를 위해 이광수 평전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김윤식저, 이광수와 그의 시대 1.2의 주요 기록에 의지하면서 검토했다. 검토의초점을춘원 이광수의 생애와 함께 크게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나누어살펴본 것이다.
(1) 유소년 시절의 춘원 이광수
(2) ‘신문화’에의 열정과 방황의 세월
(3) 민족주의의 허상과 민족적 훼절의 실상
위의 세 가지 내용은 본 논고의 “춘원 이광수의시대적환경과인생행로”에 해당하는 본론에 해당한다.
(1)은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소년 춘원의 상경과서울생활’ ‘열네살의 일본 유학생 이광수’ 등과 같이 도쿄 유학 이전의유소년시대춘원의 성장기에 형성된 심리적 저변을 ‘고아의식’과 ‘사랑기갈증’을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2)는 본론 중 본 논고의 첫 중심을 이룬다. 도쿄유학시절, 특히와세다 대학 재학 중의 문명개화 체험 시기로부터 초기단편소설작품시대와1917년 첫 장편소설 무정 의 발표 시기, 그리고 1919년‘2.8 독립선언서’ 를 작성하고 상해로 떠나기까지 대략 15년여 정도의기간에해당한다. 자연인 ‘이광수’에서 국가적 공인으로서의 이광수로 변이되는시기이다. 이시기 춘원의 개인사를 ‘일본과 문명개화 체험’ ‘초기소설에나타난춘원의자화상‘과 ’육당 최남선과의 만남과 신문화운동‘, 그리고’와세다대학시절부터 2.8독립선언서까지‘의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검토했다.
(3)은 춘원 개인사 마지막 행로로서, 많은 평자들이이른바이광수의훼절 징후가 엿보이는 시기로 보는 기간이다.
본 논고는이를‘임정에서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149의 두 해(1919∼1921)와 도산 안창호’ ‘민족개조론전후’ ‘민족주의와세계시민주의적 국가주의’ 그리고 ‘정치적 민족주의와문화적민족주의’ ‘훼절의 실상’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했다.
이부분에서 본연구자는 춘원의 친일문제와 관련된 개개 사안의 분석보다는춘원이광수의친일문제를 포괄적 배경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원칙론을재확인했다.
이에 대한 결론으로서 본 논문은, 이광수의 신문화운동과친일문제를검토하는 중요한 단서에 관하여 두 가지의 시각을제시했다. 즉‘논리적세계인식’으로 포괄할 것인가‘와 ’심정적 세계인식‘으로선별할것인가’가그것이다.
아울러 전자를 서구적 합리주의로 포장한 협의의 인식체계라 한다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조화로 융합하는 광의의인식체계라는소견으로 결론에 갈음하였다.
주제어 : 신문화운동, 이광수, 일본 제국주의
New Cultural Movement Led byGwang-suLee and the Problemof Pro-Japanese
Kim, Choon-sup
This paper aims to analyze New Cultural Movement in termsof cosmopolitan nationalism rather than the traditional concept of nationalism issuing the problem of pro-Japanese in Korea. Therefore, this paper supposes that the new cultural movement should regardcivilization as one of historical inevitabilities during the JapaneseImperial Period in Korea. It follows the personal history of Gwang-su Lee and deals withhow New Cultural Movement led by him relates to the situationof Japanese imperialism based on Yoon-sik Kim’s Gwang-su Lee andHis Age 1.2, which is famous for a definitive edition about Lee’scritical biography. Lee’s lifetime is divided into three sections; the period of childhoodand youth; passion for New Cultural Movement and wandering; thefalse sense of nationalism and betrayal. During the first period, Leeexperiences ‘the consciousness of orphanhood’ and ‘hunger for love’ until going to Tokyo to study. Lee’s second lifetime explores ‘theexperience of Japan and civilization’, ‘his self-portrait in earlynovels’, ‘meeting with Nam-sun Choi and New Cultural Movement’, and ‘fromgoing to Waseda University to 2.8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inally, his last lifetime analyzes ‘living in Imjung(1919∼1921) andChang-ho Ahn’, ‘before and after reconstructing nationalism’, ‘nationalism and cosmopolitan nationalism’, ‘political and cultural nationalism’, and ‘the reality of betrayal’. In conclusion, this paper suggests the two critical views whichcanexaminate Lee’s New Cultural Movement and the problemof pro-Japanese: either tolerating as ‘a logical world view’ or selectingas ‘a sentimental world view’. The former is a narrowperceptivesystem screening western nationalism. The latter is a broadperceptive system merging into humanistic harmony.
Key Words : New Cultural Movement, Gwang-su Lee, Japanese Imperialism, Pro-Japa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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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문학 속의 동방삭 담론: 선비의 복잡한 내면, 인간의 평범한 감정/티안위안(전연田娟).중국해양대 (0) | 2024.10.05 |
강빈옥사에 대한 사실과 소문의 길항/서경희.한신대 (0) | 2024.09.27 |
‘보상’과 ‘처벌’의 서사구조와 그 구술문화적 의미/김현주.서강대 (0) | 2024.09.27 |
조선시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 근대 ‘민족’ 관념의 출현/허준.서강대 (0) | 2024.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