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인조에 의한 강빈옥사의 사건 구성
- 인조실록
1. 후환 제거를 위한 옥사의 추진
2. 옥사의 정당성 확보
Ⅲ. 권력 의지에 대한 반작용, 음모론의 부상
- 인조실록
Ⅳ. 조건의 변화, 강빈옥사 다시 쓰기
- 연려실기술
Ⅴ. 결 론
<논문 요약>
본고는 강빈옥사에 대한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사건 서사의 형성 과정
을 살펴보고 조건의 변화에 따른 재해석의 양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강빈옥사에 대한 당대 기록인 실록에는 사건에 대한 절대 권력의 설
명과 그 설명을 수용하길 저항하는 여론이 함께 서술되었다. 인조는 강
빈의 존재가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그
주변인들까지 처벌하였으며 처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인성과 행실
의 흠결을 찾았다. 강빈의 부도덕성이 강조될수록 강빈과 그 주변인들
에 대한 처벌은 탄탄한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옥사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지 않고 사건의 처리가 권력의 의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자, 당시 신하들과 여론은 옥사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강빈
이 조귀인의 간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라 여겼는데, 이는 무리한
옥사의 책임을 인조에게 전적으로 돌리기보다 평소 품성이 간악하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조귀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조귀인을 원흉으로 설
정하는 논리는 절대 권력을 정조준하여 권위를 훼손하는 위험 부담을
우회하는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숙종 집권 초기에 이르기까지 강빈이 역모를 꾀한 가해자
라는 권력의 입장과 강빈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라는 여론의 동
향이 공존했으나, 숙종 후반기에 이르러 정치적 필요에 의해 강빈옥사
는 조귀인에 의해 조작된 일로 규정되고 강빈이 신원되면서 의혹과 소
문이 사실로 인정받았다.
숙종에 의한 강빈의 신원은 강빈옥사에 대한 최종적 해석이 될 수는
없었다. 100년이 지난 뒤에 편찬된 연려실기술에서는 급박한 정치적
득실과 필요에서 벗어나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동정적 시선과 음모론
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강빈옥사와 관련된 사실 위주의 기록들
을 선택적으로 배치하여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현실 권력을 수긍하고 감정적인
해석에 거리를 두며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인조와 효종, 현종에 의해 패륜적 악녀로 이미지화되었던 강빈은 오
늘날 여성사적 입장에서 여성 리더의 모델로 소환되고 있다. 특정한 역
사적 사건은 그 자체의 실체적 진실보다 그 사건을 해석하는 필요에 따
라 다르게 조망되고 구성되며 의미화된다. 이처럼 강빈옥사에 대한 기
록들은 권력의 의지와 저항, 은폐와 의심, 정치적 현장과 시간적 거리
등이 어떻게 사건의 다른 맥락을 드러내고 재현하는지 보여준다. 역사
적 사실이 시선의 경쟁 속에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제어: 강빈옥사, 인조, 권력, 소문, 정당성, 음모론, 해석.
Ⅰ. 서 론
조선 인조대에 일어난 소현세자의 빈 강씨의 옥사는 강빈이 시아버지
인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 하여 사사된 사건이다. 이 옥
사는 연려실기술이나 병술록에서 다뤄지면서 수라에 독을 쓰고 사
사된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그 전후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즉 소현세
자의 죽음 이후 후사의 교체, 강빈 형제들의 유배, 궁중 저주 사건, 인조
와 신료들의 갈등 등이 모두 망라된 문제로 파악되어 왔다.1) 이는 강빈
이 죽음에 이르게 된 옥사가 당시 왕실과 조정에서 일어난 전후 사건들
과 긴밀하게 관련된 일이며, 그 맥락 속에서 옥사의 성격이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강빈옥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사건의 본질에 대한 진단이 변화하
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부터 강빈
이 세력을 잃고 사사되기까지의 일들이 모두 조귀인의 ‘도움’을 받아 인
조가 본인의 의지를 관철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2)
1) 연려실기술27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에 독립된 장으로 구성
된 ‘강빈지옥(姜嬪之獄)’은 강빈이 사사되기 전 해인 을유년에 소현세자가 급
사한 뒤 강빈의 형제인 문성과 문명을 유배하는 결정부터 숙종 무술년에 강
빈이 민회빈(愍懷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왕이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일까지 포함한다. 강빈의 옥사와 관련된 조정의 논의를 모아놓은 병술록은
을유년 4월 26일 ‘昭顯世子 薨逝’로 시작하여 후사를 봉림대군으로 세운 일부
터 병술년 강빈을 사사한 뒤 그해 8월 과거 시제가 세자를 풍자하고 강빈을
비호한다 여겨 문제가 되었던 일까지 다루고 있다.
2) 김용덕, 「소현세자연구」(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433-490면)에서 소
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강빈옥사에 이르는 사건들이 인조대 명분을 중시하
고 숭명반청 의식이 강했던 국내 상황과 소현세자 내외와 조귀인의 불화를
배경으로 인조가 주도하여 일어난 것이라 보았으며, 김우진, 「肅宗의 昭顯世
子嬪 姜嬪 伸寃과 그 의미」(朝鮮時代史學報 83, 조선시대사학회, 2017,
249-280면)에서도 조귀인 세력의 협조를 받아 인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벌인
사건으로 보았다. 이왕무, 「昭顯世子嬪 姜嬪의 獄事와 伸寃」(역사와 담론
69, 호서사학회, 2014, 109-142쪽)
오로지 인조에 의해 주도된 강빈 사건의 공식적 조사 결과를 사건의 실
체로 인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3) 강빈의 경영과 리더쉽에 주목하면서
심양에서 볼모 생활 중 강빈의 적극적인 역할이 촉매가 되어 옥사로 연
결되었다고 읽어내기도 했다.4) 강빈옥사의 전후 맥락이 청과의 관계나
반정(反正)의 경험, 당쟁과 궐내의 권력 구도 등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까
닭에, 사건의 원인과 배후, 그 동력의 구심을 짚어내는 해석에 차이가
나타나게 되며 사건을 바라보는 현시점의 필요에 따라서 해석의 초점이
옮겨가기도 한다. 특히 강빈옥사의 처리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인조
실록에 당시 옥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입장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는 사
실이 이후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관점을 달리하게 했다.
실제로 강빈옥사는 의혹과 음모가 난무하는 사건이었다. 인조가 후사
를 다시 세우는 동시에 강빈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데 그 결과
에 대해 신료들을 포함한 민심이 승복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에서 강
빈옥사에 대한 기술은 인조의 의지로 밝혀낸 사건의 진상과 이에 대한
인조의 발화가 한 축을 이루고, 다른 한 축은 이에 반발하는 신료들의
발화와 당시 민간의 의심과 소문에 대한 사관의 서술로 채워져 있다. 강
빈옥사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진상’으로 제시한 것과 외부에서 추정하는
사건의 ‘실체’가 다른 모습이며, 두 가지 이해가 실록 속에 공존한다. 따
라서 실록을 통해 어느 것이 ‘진실’인지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
다 강빈옥사는 옥사 처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권력이 만들어낸 사건
의 서사와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압도적 권력 행사에 대한 외부의
소문이 어떻게 구성되고 경쟁하게 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이 사건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강빈지옥(姜嬪之獄)’을 통해서 실록
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3) 김용흠, 「조선후기 역모 사건과 변통론의 위상-김자점 역모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0, 한국사회사학회, 2006.6, 237-264면.
4) 김남윤, 「조선여인이 겪은 호란, 이역살이, 환향의 현실과 기억」, 역사연구17, 역사학연구소, 2007, 71-94면.
에 반영되었던 이질적인 입장이 시간적, 환경적 조건을 달리했을 때 어
떻게 수렴되는지 그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이에 본고에서는 인조실록 등 실록 자료를 주 대상으로 하여 강빈
옥사에 대한 서사의 형성과 작동을 살펴보고, 이 사건에 대한 후대 기록
인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통해서 조건의 변화에 따른 사건 이해의 조
정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 논의는 강빈옥사와 관련 인물의 고정
된 실체, 혹은 진실에 대한 관심은 배제한다. 권력 주체가 활용하는 서
사의 전략과 그에 대한 대응 방식을 이해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
석의 토대와 재현 양상을 드러내고자 한다.5)
5) 본고에서 인용한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의 번
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http://www.itkc.or.kr)에서 제공하는 조선왕
조실록을 활용하였다.
Ⅱ. 인조에 의한 강빈옥사의 사건 구성 - 인조실록
인조실록에서 강빈옥사의 조짐은 소현세자가 훙서한 뒤에 시작된
다. 인조가 며느리 강빈과 그 주변 사람들을 여러 죄목으로 형벌에 처
하고 형(刑)의 필요성을 신료들에게 역설하는 과정에서 옥사를 통해 밝
혀진 ‘사실(事實)’들이 드러나며 처벌의 명분이 언술된다. 이때 ‘사실’은
옥사로 도출된 결과이지만 이것이 당시 실제로 일어난 일의 단일한
‘진상(眞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 이 ‘사실’들을 통해 사건이
구성되는 방식과 옥사를 추진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1. 후환 제거를 위한 옥사의 추진
인조와 강빈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소현세자가 갑
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부터이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으로 끌려간 소
현세자가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훙서하자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
손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장성한 후사를 세워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이에 대해 신하들이 세적(世嫡)이 계통을 잇는 것이 중요하며 원손이 온
나라의 기대를 받은 지 오래이므로 ‘상도(常道)’를 지키야 한다고 반대하
자, 인조는 원손의 자질이 부족해 나라를 감당할 재목이 못 되므로 후사
로 적절치 않다고 했다.6)
6)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윤 6월 2일 기사.
인조는 후사 교체의 이유를 바꿔가면서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운 뒤, 강빈의 형제들을 유배 보냈다. 강문명
이 소현세자의 장사일에 대해 불평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인조는 강씨
(姜氏) 형제들이 모두 어리석고 분수를 몰라서 후계를 바꾼 일로 유언비
어를 퍼뜨리거나 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7) 비슷한 시기에
궁중에 저주 사건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빈 처소의 궁인을 내옥(內獄)에
서 조사하였는데, 원손의 보모였던 상궁 최씨와 궁녀 계향, 계환이 국문
을 받다가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8) 소현세자 사후 진행되는 강씨 형제
들에 대한 처벌과 강빈 처소 궁인들에 대한 국문은 홀로 남은 강빈으로
부터 후계의 생모라는 권력을 몰수한 뒤 이에 대한 반발을 의심하여 저
항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처분이었다. 이 처분이 내려지기까지 강빈
과 주변인물들이 죄를 범한 증거나 진술이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았으나
인조에게 외람되고 불량하여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존재들로 지목
되고 또 불측한 일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강빈옥사가 일어났다. 인조 24년 병술년 새해 벽
두에 인조의 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있자 강빈의 소행이라 여겼다.
강빈 처소의 궁인과 어주(御廚)의 나인들을 내옥에 하옥하고 심문했으며
후원 별당에 강빈을 가둬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 주게
했다. 신료들의 요청으로 궁인과 어주 나인들을 의금부에서 국문하도록
7)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8월 25일 기사.
8)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8월 20일; 9월 10일 기사.
했는데, 궁인들이 다 자복하지 않았다. 특히 강빈이 신임한 정렬과 유덕
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과 같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자복하
지 않고 죽었다.9) 당시 이 사건이 강빈이 저지른 일이라는 확증이 나오
지 않았지만, 인조는 한편으로 어의에게 독을 먹은 증세가 심해진다고
호소하고10) 다른 한편에서는 비망기를 내려 시역(弑逆)의 죄로 다스리겠
다는 뜻을 드러냈다.11)
신하들이 여러 날에 걸쳐 빈청에서 강빈에 대한 지나친 처벌에 반대
했지만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12) 여러 신료들이 강빈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거듭 아뢰었으나 인조의 노여움만 사자 빈청 밖으로 물러났
는데, 인조는 이러한 신료들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했다.
“옛적 성묘조(成廟朝) 때 연산(燕山)의 어머니를 폐출(廢出)한 뒤에 그 사람이
별로 윗사람을 범해 도리에 어긋난 죄가 없는데도 조정에서 후환을 염려하여
사사(賜死)할 것을 계청하였으니, 신하는 나라의 걱정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고금 천하에 언제 그의 시아버지를 시해하고자 하는 자를 대신과 육
경이 함께 나와 버젓이 신구하는 때가 있었으며, 또 어찌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궐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었단 말인가. 공경(公卿)이 나를 어린아이와 같이
보니, 내 몹시 부끄럽고 두렵게 여긴다.”13)
연산의 어머니, 즉 폐비 윤씨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신하라면 나라
를 걱정하고 후환을 염려하여 오히려 강빈을 사사하기를 청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폐비 윤씨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강빈을 위해
9)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1월 3일 기사.
10)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1월 18일 기사. 강씨를 사사한 뒤 이 사실을 심
양에 주문하는 글에 인조가 당시 수라의 독으로 통증을 겪고 위험한 지경이
되어 한 달여 치료를 받았으며 물린 수라를 먹은 시녀들이 광기를 일으키거
나 쓰러졌던 정황이 담겨있다.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3월 21일 기사.
11)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3일 기사.
12) 인조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를 내린 이후 한 달여 동안 강빈의 사사를 반
대하는 신료들의 건의와 상소가 이어진다.
13)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5일 기사.
변호하고 임금의 뜻을 받들지 않는 것에 대해 부끄럽고 두렵다고 했다.
인조 자신의 결정을 신하들이 불신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강빈을
비호하는 형세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여 신하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강빈
에 동조하는 세력에 대해 경계하였다. 며칠 뒤 인조는 신하들이 후환을
두려워하거나 강빈의 꾐에 넘어갔기 때문에 강빈의 사사를 반대하는 것
이라 했다.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사사를 주장했던 자들이 훗날 연산조
때 큰 화를 당했는데 강빈의 아들이 셋이니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며 강
빈이 궁인들과 깊이 결탁했던 것을 미루어 보면 신하들도 자신의 편으
로 끌어들였을 것이라 여겼다.14) 인조가 강빈을 정죄하면서 의심하고 걱
정한 것은 왕권을 위협하거나 보복하는 ‘후환’과 강빈의 편에 선 ‘세력’ 이었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뒤 왕권의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15) 호란을
겪으며 왕위를 지속적으로 위협당해 온 인조로서는 이러한 의구심을 가
지고 방어적으로 사건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심양에 있을 때
내관(內官) 조방벽(趙邦璧)이 강빈을 내전이라 부른 일에 대해 의금부에
서 치죄하도록 했으며16) 신하들이 강빈을 살려달라고 거듭 아뢰는 배경
을 의심하여 좌우 포도대장으로 하여금 순검을 통해 흉도들의 왕래를 막
도록 하고 병조판서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강빈에 대
한 의심은 훗날 일어날 화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당장 궐에 변고가 생길
가능성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인조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또 유배된 강씨 형제들을 불러와 국문할 것을 명하는데,
강문명, 문성 형제가 지난 해 소현세자 장삿날에 대해 불평했던 것은 임금을 업
신여기기 때문이며 강빈이 독을 쓴 일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하교의
14)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7일 기사.
15) 인조는 반정 이후 부친 정원군를 원종으로 추숭하여 선조에서 원종, 인조로
이어지는 종통의 차례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이희환, 「인조대의 정치적
논쟁과 인조」, 전북사학』44, 전북사학회, 2014, 81-86면.
16)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4일 기사.
이유를 밝혔다.17) 뒤에 강씨 형제들은 결국 곤장을 맞고 죽었다.18)
인조는 수라에 독이 든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에 강빈을 폐출
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19) 인조는 비망기(備忘記)에서 강빈을 처
벌하는 이유를 밝혔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갑신년 봄에
청나라 사람이 소현세자와 빈을 보내 주었는데, 그때 내간에서 혹 말하기를 “강
빈이 은밀히 청나라 사람과 도모하여 장차 왕위를 교체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
다.” 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매우 미워하였다. 그러나 외부 사람은 모르고 있었
다.】미리 홍금 적의(紅錦翟衣)를 만들어 놓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
용하였으며【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시종들이 세자를 동전(東殿)으로 불렀고
강빈을 빈전(嬪殿)으로 불렀는데, 대개 저들이 보고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세자와 빈이 스스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진신들 사이에서도 간혹 이렇게 부르
기도 하였다.】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으로 인해 시끄
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도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
다면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
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
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의 사이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율문을 상고해 품의
하여 처리하게 하라.20)
강빈의 죄를 세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 심양에서 지낼 때 역위
(逆位)를 꿈꾸며 참칭한 일, 두 번째 불효한 언행, 그리고 세 번째는 앞
서의 죄로 미루어 강빈의 소행이라 판단되는 저주나 독과 관련된 사건
이다.
첫 번째는 알려진 바의 참람한 죄이고
두 번째는 인조가 경험한 .패륜이며
17)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5일 기사.
18)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29일; 인조실록 25년 정해(1647) 4월 25일
기사.
19)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12일 기사.
20)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3일 기사
세 번째는 미루어 헤아린 모역이었다. 비망기에서 결국 세 번
째 죄에 근거하여 강빈의 사사를 명하였으나, 당시까지 저주 사건이나
독을 쓴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강빈의 소행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까닭에 온당한 처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신하들이 은
혜와 의리에 따른 처리가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궁중에서 저주한 일이나 시역을 도모한 사건에 대해
자복한 사람도 없고 분명한 자취가 없으나 후일의 걱정거리이므로 제거
하고자 한다는 속뜻을 드러냈다.21) 또 신하들이 강빈의 측근들에게 넘어
가 혹시 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걱정하고 강빈에게 다른 죄가 없더라
도 인심의 동향, 즉 강빈을 두둔하는 형세가 이러하다면 죽을 만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강빈을 사사하는 것을 지연하다가 큰 화가 생기지 않
을까 염려하였다.22) 정권 초기부터 이괄의 난 등 역모가 일었고 병자호
란 이후 청에 의해 왕권을 위협받던 상황에서 인조가 강빈 옥사의 처리
에 조급증, 더 나아가 편집증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했다. 인조에게 편집
증은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통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23) 강빈의 당(黨)이 역모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심을 품고 흠
결을 찾아 처벌하는 것은 현 권력에 대한 불안 요인을 제거하는 통치
과정인 것이다. 강빈은 인조가 명을 내린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검은 가마를 타고 궐을 나가 옛집에서 사사되었다.24)
21)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7일 기사.
22)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21일 기사.
23) 잠재적으로 위험한 정치적 환경에서 권력자에게 편집증이 나타나게 되는 현
상에 대한 논의는 전상진, 『음모론의 시대』(문학과지성사, 2014, 129-131면)
참조. 24)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3월 15일 기사.
2. 옥사의 정당성 확보
강빈이 사사된 이후에도 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옥사가 계속되었다.
먼저 강빈이 죽기 전 남긴 유서(遺書) 문제로 그 시비를 내옥에서 국문
하였다. 유서는 손가락 피로 다섯 장의 종이에 써서 자식들에게 남긴 것
으로 시비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은 인평대군과 조
귀인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과 더 참혹한 내용을 담았다고 했다.25)
헌부의 요청으로 강빈의 유서와 관련된 조사를 내옥에서 의금부로 옮겨
진행하게 되자 유서의 일을 자복했던 내인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불복
했다. 다시 조사하여 실상을 밝혀야 한다고 아뢰지만 인조는 이미 자복
한 죄인에게 더 형신(刑訊)하여 죽게 되면 형 집행의 도를 잃게 된다고
반대하고 내옥에서 심문한 바를 죄로 확정했다.26) 또 내인들을 내옥에서
심문할 때 원손은 성질이 민첩하지 못하고 또 보존될 것인지도 기필할
수 없으니 유서를 여러 왕손에게 전하라는 강빈의 당부가 있었다는 진
술이 나왔는데, 이를 결안(結案)에 차마 기록하지 못한 관리가 죄를 얻기
도 했다.27) 강빈 사후에도 인조는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복수에 나서지
지 않을지 경계했다. 이에 강빈이 복수의 의지를 유서에 남겨 왕손들에
게 전하려 한 일을 꼼꼼하게 밝히고자 했다. 인조 자신이 의심해 왔던
후환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빈의 유서를 조사하면서 증명해
냈던 것이다.
25)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3월 23일 기사. 뒤에 인조가 강빈옥사의 처리 과
정에 대해 비판한 이응시의 상소에 대해 논죄하면서 강빈의 유서에 대해 다
시 언급하는데, 유서의 내용이 복수하려고 하는 뜻을 자녀들에게 전한 것이
라 해석하였다. 강빈의 뜻에 부합한 무리가 나라에 충성하는 자들을 공격하
고 뜻을 펼치려 하는 것으로 이응시의 상소를 이해했으며, 강빈이 재물이 많
아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동요케 하는 것도 염려하였다.(인조실록 24년 병술
(1646) 5월 3일 기사 참조) 이러한 걱정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해 10월에
도 과거 시제가 강빈 옥사의 처리를 풍자하는 것이라 여기며 강빈을 옹호하
는 세력에 대해 비판하였다. 강빈을 비호하는 세력이 당을 이루어 붕당의 폐
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보았다.(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10월 3일 기
사 참조)
26)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4월 17일 기사.
27)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4월 21일 기사.
앞서 유서와 관련된 추국의 진행 과정에서 을유년 12월 강빈이 여승
(女僧) 혜영에게 물건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혜영은 받은 물건이 갓
난아이 시체인 것을 알고 양주의 큰물에 던졌다고 진술했다. 인조가 인근
물속까지 샅샅이 찾도록 했으나 던진 아이 시신을 찾지 못했다.28) 강빈이
아이의 시신을 비구니 혜영을 통해 처리한 일이 알려진 것인데, 인조가
그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증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강빈이 죽은 지 1년여 만에 을유년에 있었던 궁중 저주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소현세자의 궁인 신생이 대궐 곳곳에 흉물이 묻힌 장소와
관련자에 대해 진술하여 내사(內司)에서 조사하다가 헌부의 요청으로 국
청을 설치하였다. 그 결과 강빈이 심양에 머물 때부터 저주에 사용할 뼛
가루 등을 구했고 이 일을 강씨 친정이 도왔다는 진술이 나왔다. 또 강
빈이 청에서 세자를 조선으로 내보내고 대전(大殿)-인조-을 인질로 대신
하려 했으며, 어선에 독을 넣은 궁인이 강빈과 굳게 결탁한 자라는 공초
가 있었다. 새 세자가 정해지자 강빈이 본인 자식들이 보전하지 못할 것
이라 하면서 세자궁에도 저주와 독을 쓰라는 명을 했다는 증언 등도 있
었다.29) 저주에 쓰인 흉물들은 이후에도 궁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신생이 강빈이 묻은 것임을 확인하여 강빈의 죄가 계속 밝혀졌다.30) 또
강빈이 심양에서부터 저주할 물건을 구입하거나 역위(逆位)를 도모할 때
역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으로 보고 강빈과 가까웠던 역관 서
상현(徐尙賢) 등을 국문하니 강빈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 공초하고 곤장
을 맞다 죽었다.31) 애초 강빈을 사사하기까지 그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없었으나 신생의 진술로 저주 사건의 관련자와 정황, 물
증을 확보하게 되어 저주 사건과 어선에 독을 쓴 일이 강빈의 소행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 것이다. 강빈옥사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 죄상
28)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6월 3일 기사.
29) 인조실록 25년 정해(1647) 4월 25일 기사.
30) 인조실록 26년 무자(1648) 3월 25일; 3월 28일; 4월 2일 기사.
31) 인조실록 26년 무자(1648) 윤 3월 23일 기사.
을 소명하고 마무리되었다.
이 일로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에 유배되
었다.32) 인조는 청의 칙사들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데려가고자 하자 강빈
의 세력이 사주한 일이라 여겼다. 이에 대신들과 논의 끝에 소현세자의
아들을 청으로 보내면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결론
에 이르렀다.33) 강빈이 청의 조정과 결탁하고 역위를 도모하였으며 자신
을 비호하는 당(黨)을 확보한 데다 죽음에 앞서 복수를 당부한 것을 인
지한 상황에서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청에 보내면 역위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해 강빈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유배지에
서 연달아 죽고 그 다음 해에야 셋째 아들이 유배지를 남해로 옮길 수
있었다.34) 이는 첫째,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청 조정이 개입하거나 강빈
세력이 도모하여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
치였다. 인조가 왕권과 정국에 위협적이라 여겼던 강빈의 영향력이 점
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32) 인조실록 25년 정해(1647) 5월 13일 기사.
33) 인조실록 26년 무자(1648) 3월 4일; 3월 7일 기사.
34) 인조실록 27년 기축(1649) 3월 17일 기사.
인조는 강빈의 죄상을 소상히 밝히기 위해 강빈을 사사한 뒤에도 조
사를 지속하여 증거를 내놓았으나, 인조 사후까지 옥사 처리 과정에 대
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효종 대에 이르러 민정중은 강빈옥사에 대한 민
간의 의심을 아뢰며 잘못 처리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효
종은 강빈옥사를 주도한 왕실의 입장에서 이에 답했다.
이미 말의 실마리를 끄집어냈으니 모두 말을 하겠다. 국가가 불행하여 대역
부도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왔으니 그 일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소현(昭顯)
은 본래 착한 사람이었으나 다만 마음 속에 주장이 없는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비할 데 없는 험악한 역강(逆姜)이 오직 애써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흉패한 일
을 자행하였지만, 소현 역시 제재를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런데 변란 후 내
가 심양에 잡혀 갔을 때 강씨가 하는 행위를 눈여겨 보니 비할 데 없이 흉험하
였는데, 소현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선왕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지난날 심양에 갔을 때 강씨가 평소에 탁자를 받쳐 놓았
던 나무 조각을 다락 위에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소리쳐 말하기를 ‘나무 조각에
서 가지와 잎사귀가 돋았다.’고 하면서, 감춰두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소현의 상을 당해서는 또 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이것을 신기한 상서
라고 여겼는데 지금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 하였는데, 대체로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상서를 바란다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옛날 허 세자 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
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였는데, 이 일 또한 어떠한가. 소현이 병이 나자 의원
이 진찰을 해 보고 조심하여 조섭하지 아니한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강씨가 싫
어하여 이 사실을 숨겼으며, 소현의 상을 당한 뒤에 유복자(遺腹子)마저 살해하
여 그 병을 숨긴 흔적을 엄폐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못
하겠는가. 사람의 아비로서 미혹한 마음에 가리워져서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경우가 옛날에도 간혹 있었으나 어미로서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무조(武曌) 말
고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조차 없다. 내가 효성이 없어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하므로 세상에 떠도는 실없는 이야기가 오래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내 매우 통탄해 마지 않는다.35)
35) 효종실록 3년 임진(1652) 4월 26일 기사.
효종은 자신이 곁에서 본 강빈은 평소 흉험한 인물이었다 했으며 역
심을 드러내기도 했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효종의 증언은 강빈의 사람
됨에 비추어볼 때 심양에서부터 역위를 도모하고 불효를 행하며 궁중에
흉한 물건을 묻고 독을 썼다는 죄목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강조
하는 것이다. 또 강빈 사후에 진행된 옥사에서 밝혀진 바를 근거로 그가
패륜적 범죄를 저지른 죄인임을 드러냈다. 강빈이 남긴 유서 사건을 추
국하는 과정에서는 여승 혜영을 통해 영아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만 알
려졌는데, 효종은 강빈이 아이를 유기하게 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소
현세자가 병이 났을 때 이는 조심하고 조섭하지 않아서 생긴 것, 즉 잠
자리를 삼가지 않아서 생긴 병이라 했는데, 강빈이 이를 감추다가 결국
소현세자가 죽고 아이가 태어나자 자취를 없애기 위해 아이를 죽여 버
렸다는 것이다. 강빈이 소현세자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비난이 자신
에게 쏠리는 것을 꺼려서 영아를 살해했다는 사실은 현종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송시열이 현종 대까지 강빈옥사에 대해 민심이 승복하지
않는 문제를 거론하자, 현종은 강빈이 갓 낳은 아이를 죽인 일로 미루어
보면 옥사에서 밝혀진 역모가 분명하다고 했다.36)
36) “매양 경과 함께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틈이 없어 하지 못했다.
강빈의 악행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일단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금수라도 있
게 마련이다. 소현(昭顯)의 상을 당했을 때 대조(大朝)께서 애통해 하면서 그
를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이다.’ 하셨는데, 강빈이
발악하기를 ‘아무 달 이후에는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 후 자식
을 낳고서는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고자 즉시 스스로 죽여서
감추었다. 그 성질이 이와 같으니 역모한 것이 괴이할 게 뭐 있는가. 또 역모
한 형상은 안에서나 알 뿐이지 밖의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그 일이 낭자하여
완전히 의심이 없는데 밖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억울하다고 여기니, 내가 실
로 마음이 아프다.”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기해(1659) 9월 5일 기사.
강빈의 죄목에는 불효한 언행을 일삼고 역심을 품어 시역을 도모한데다가,
행실을 삼가지 않아서 소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유복자를 살해한 일까지 더해졌다.
강빈의 소행은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즉 부녀로서 정숙하지 못한 실행
(失行)이 아닐 수 없으며 이로써 그는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식을 죽인 일은
사람의 도리조차 차리지 못한 극악한 행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강빈
이 부녀로서의 본성과 본분마저 망각한,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인물임
을 드러낸 것이다. 강빈옥사는 인조에 의해 국가적 위기와 우환을 대비
하고자 선제적인 조치들을 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결국 죄의
물증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강빈의 반인륜적인 행적까지 알려지게 되었
다. 이러한 치명적인 부도덕성은 인조에 의한 옥사 처결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되었다. 인조 사후 강빈의 문제에 대해 강
경한 입장을 취한 효종과 현종은 윤리 강상에 반하는 인간성의 폭로를
통해 강빈의 죄상에 대한 확신을 더하는 것으로 왕권 계승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였다.
Ⅲ. 권력 의지에 대한 반작용, 음모론37)의 부상- 인조실록
실록의 기록에는 인조가 주도한 옥사의 처리 과정이 서술되며 옥사
의 결과에 대한 왕실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가 강한 의
지로 강빈의 문제를 다뤄 나가는 방식이 기술되는 것과 나란히 이 사건
에 대한 당시 신료들의 의혹과 불신, 그리고 여론의 동향도 큰 비중으
로 다뤄졌다.
신하들은 세자를 다시 세우는 일이나 강씨 형제들을 유배 보내는 결
정 등에 대한 명분을 요구했다. 또 강빈에게 최종적인 혐의를 둔 사건들
은 내옥에서 처리하여 궐 외부에서 정보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이경여 등 신하들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소란해질 것을 걱정하
였고38) 헌부나 간원들이 왕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의혹이 생길
것이라는 문제를 지적하였다.39) 애초 민심은 강빈과 그 형제들에게 유리
하지 않았다. 강빈은 성격이 거세고 자기 표현이 거침없는 인물로 묘사
되었고40) 강빈의 형제들 역시 교만하고 허황하며 만용을 부려 남을 업
37) 음모론은 병리적 입장에서 정의하거나 합리적 의심이나 문제제기 일반을 포
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음모론의 정치적 용도에 주목하
여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원인을 권력 유지나 획득을 목적으로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집합행동인 음모에서 찾고 참고하고 설명하는 이론”(전상진, 앞의
책, 33-57면.)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사실과 음모론은 해석과 인정을 둘러싼
투쟁의 관계이며 사회적 ‘인정’이 관건이 된다고 보았다. 강빈옥사를 조귀인
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인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강빈을 억울하게 희생시
킨 사건으로 보는 신하들과 이에 동조하는 여론의 시각은 음모론에 해당한
다. 또한 이러한 음모론은 숙종 대에 이르러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
실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8)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윤 6월 2일 기사.
39)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8월 27일; 8월 28일 기사.
40)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7일 기사에서 인조는 강빈이 자신과의 갈등
으로 불손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큰 소리를 내며 문안을 폐하기도 했다고 언급했으며,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3월 15일 기사에서는 강빈을 폐출, 사사한 일을 기록하면서
평소 강빈의 성격이 거세고 불순한 행실로 인조의 뜻을 거스르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고 썼다.
신여긴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강빈이 형제들 때문에 화를 당할 거
라 일컬어질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옥사의 과정에서 강문
성과 문명 형제가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의심받고 곤장을 맞다 죽
으니 이들의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한 것으로 여기고 민심이 이들의 편
으로 돌아섰다.41) 강빈에 대해서도 그가 폐출되어 검은 가마를 타고 선
인문(宣仁門)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한탄했다고 당
시 상황을 기록하였는데,42) 이를 통해서 강빈과 그 형제들에 대해 동정
여론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인조실록에는 강빈옥사가 일어난 것이 다른 내막, 즉 누군가의 간
계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 소문도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예기
치 않게 잔혹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배후에 악한 인물이 있다고 믿는
관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43) 강빈이 연루된 일들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았으며 강빈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여겼다. 이러
한 일을 꾸민 사람으로 지목된 이가 인조의 후궁 조씨다.
숙원(淑媛) 조씨(趙氏)를 소의(昭儀)로 삼았다. 세자 책봉 후에 으레 있는 은전
이다. 이때 중전 및 장 숙의(張淑儀)가 모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의만이 더더
욱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
함하기가 일쑤이므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소현 세자빈 강씨가 가장 미움을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하였
는데, 강문성(姜文星)이 귀양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강씨에게 화가 미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44)
41)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29일 기사.
42)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3월 15일 기사.
43) 애덤 모턴, 잔혹함에 대하여-악에 대한 성찰, 변진경 역, 돌베개, 2015, 17-20면.
44)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10월 2일 기사.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운 뒤 숙원 조씨의 품계를 소의로 올린 일에 대
한 기사에서 당시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조씨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내용이 보인다.
조씨가 겉으로 보이는 바와 다른 속내를 지니고
남을 잘 속여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곧잘 모함하여 궁중 안 사람들
이 두려워하였는데, 강빈이 가장 미움을 받아서 참소와 이간질이 점점
심해졌다고 했다. 더 나아가 조씨의 성품과 평소 행실로 미루어 강빈도
형제들과 같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조씨가 인조를 속여서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조씨가 일을 꾸며서 강빈의 내인들이 처벌을 받게 된 일이
기술된 바 있다.
궁인 애란은 궁중의 고사(故事)에 밝고 익숙했으므로 상 및 중전과 세자궁이
모두 그를 신임하였다. 그 후 조 숙원이 처음 궁중에 들어왔을 적에 애란이 또
한 궁중의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그와 모자 사이 같이 친하였다. 그런데 조씨가
상의 총애를 받음에 미쳐서는 강빈과 서로 불화하게 되자, 상이 애란에게 명하
여 세자 궁중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애란이 가장 강빈의 신임을 받으므로,
이 때문에 조씨가 강빈을 매우 미워하여 항상 그를 중상모략하려 하였으나 적
절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현 세자가 죽은 뒤에 어떤 요망스런 무당
이 말하기를 “세자가 북경서 올 때에 금수(錦繡)를 많이 구입해 왔는데, 이 물건
이 빌미가 되어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
에 태워서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화가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애란이 이 말을 듣고 강빈에게 고하자, 강빈은 그 말을 믿고
그 금수를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주면서 무당의 말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애란이 이것을 자기 방에 두고 막 그 숫자를 검사하고 있던 차에, 조
씨가 그 말을 듣고는 다른 일을 핑계하고 애란의 방을 찾아가 마치 우연히 지
나다 들른 것처럼 하고서, 애란과 함께 그 숫자를 검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일
부러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리하여 궁중이 크게 놀라 약을 구하느라 분주하였
다. 상이 놀라 그 연유를 힐문하자, 시녀(侍女)가 사실대로 아뢰니,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애란이 감히 요망한 무당과 서로 통했단 말이냐.” 하고는 애
란을 내옥(內獄)에 내려 국문하고 마침내 절도(絶島)에 귀양보냈다.45)
45) 인조실록 23년 을유(1645) 7월 22일 기사.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궁녀 애란은 심양에서 가져온 비단 등이
빌미가 되어 화가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 물건들을 없애야 한다는 무당
의 말을 강빈에게 전했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당하고 귀양가게
되었다. 이 일은 조씨로 인해 인조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기사에는
강빈이 애란에게 비단을 모두 없애도록 한 일을 조씨가 알고 짐짓 찾아
가 돕는 척 하다가 일부러 쓰러져서 일을 크게 만든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숙원 조씨에 대한 평판을 알 수 있는 사건으로, 그가 자신과 가까
운 궁녀를 이용하여 강빈에게 흠이 될 만한 일을 꾸미는 과정뿐 아니라
조씨의 심리와 의도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가 속내를 감추고 연
기하여 강빈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을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하였다. 이
는 조씨의 품성에 대한 확신에 기반한 기술이다. 조씨의 됨됨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당시 수라에 독이 오른 사건의 배후로 강빈이 지목되었
을 때 강빈의 혐의가 조씨의 모함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근거가 되었
다.46) 조씨의 인성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강빈이 억울한 피해자일 가능
성 역시 커지게 되는 것이다.
46)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1월 3일 기사.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
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강빈옥사의 실체가 내옥이나 의금부에서 조사한 바와 다른 곳에 있다
고 믿는 여론에 대해 인조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는 강
빈의 사사를 결정한 뒤,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김자점에게 사대부
의 동향을 물으며 강빈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사사하는 이유를 설명
하고 자신의 결정을 믿지 않는 신하들에 대해 서운함을 드러냈다.
나는 일찍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덕으로 교화하는 것 이외에 또 형법이
있으니, 이 중에 어느 것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이 진실로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법을 시행하였고, 비록 공이 있는 재상이
라 하더라도 관대하게 처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은 죽이고 친
속은 용서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형과 아우, 숙부와 조카
에 있어서는 더러 법을 굽혀서 은혜를 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이 경우와는
다르다. 그리고 또 요즈음 말하는 자들이 진실로 소견이 있어서 말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이것은 우리 임금이 소망하였기 때문이며 간사한 사람이 참소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하지 않는가. 일의 허실을 명백하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물어물 말하면서 다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만 하니, 이러고도 임금을 사랑한
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의 허실에 대해 만일 친히 보아 상세히 알지 못한다면 임금의 말만 믿
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단지 강씨 당의 말에만 의거하여 임금을 천박하게 여기
고 이런 해괴한 일을 말하니, 자못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또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임금과 신하가 이처럼 서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47)
47) 인조실록 24년 병술(1646) 2월 21일 기사
인조는 교화와 형법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로 모두 중요한 까닭에
죄가 있다면 누구도 법을 시행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형
제나 지친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에도 강빈은 해당되지 않으니 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옥사의 결과에 따른 엄격한 법 집행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빈의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는
건의를 배척한다. 또한 신하들이 강빈 사건의 처리가 정대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다만 왕이 원하는 바대로 된 것이며 조씨의 참소로 일어난
것이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반대만 하는 것이 임금을 신
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빈을 사사하는 것이 법에 따른 형
집행임에도 임금이 임의로 형을 적용하고 주변의 참소에 휘둘린다는
소문, 즉 강빈을 비호하는 세력이 퍼트린 말에 대해 신료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왕실 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알 수 없을 때 임금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통
탄하였다. 이처럼 인조에 의한 옥사의 결과와 신료들과 민심이 짐작하는 사건의
실체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강빈이 사사된 후 신생의 자백을 토대로 강
빈이 묻은 흉물들을 여러 차례 찾아내서 강빈이 저지른 죄의 물증을 확
보했는데, 실록의 해당 기사에서 사관은 궐내에서 발견되는 흉물들이
강빈이 묻은 것이라는 신생의 진술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사신은 논한다.
지금 이 저승전에 흉한 물건을 묻은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많다. 자기가 현재 거처하고 있는 궁실에다 스스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어
뒤에 이 궁실에 거처하는 사람을 해치게 하려고 했다 하는데 흉하고 더러운 것
을 묻고 나서 강(姜)이 즉시 떠나지 않았으니, 그 사특한 빌미가 반드시 뒤에 거
하는 사람만 해치고 현재 거처하고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간악한 자의 소위는 반드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
이다. 이것이 첫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강(姜)이 병술년에 죽었는데 어찌하여
그가 살았을 적에 묻은 까치가 땅속에서 두어 해나 지났는데도 형체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채 부패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신생은 강과 함께 악한 짓을 한 사람으로서 이미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 강의
악역(惡逆)에 대한 정상을 다 토로하였으며, 대내(大內)에 묻은 흉물(凶物)들도
일일이 발굴해 내었다. 그런데 또 강에 대해 무슨 애석하게 여겨 돌아볼 것이
있어서 저승전에 묻은 흉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가 이제 도감
에서 발굴한 뒤에야 그곳을 가리켜 말한단 말인가.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아, 신생을 잡아다가 외정(外廷)에 맡기고 이러한 의심스러운 단서를 가
지고 엄히 국문하고 분명히 신문한다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48)
48) 인조실록 26년 무자(1648) 3월 25일 기사.
위 기사는 저승전에서 흉물이 발견되고 신생이 강빈의 소행임을 밝힌
일을 기술한 것으로 사관은 신생의 진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첫번째 강빈 본인이 당분간 머물 곳에 저주 물건을 묻을 리가 없다는 점,
두 번째 두 해 전에 죽은 강빈이 묻은 까치 사체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
세 번째 신생이 앞서 궁중에 흉물 묻은 곳을 진술했을 때 굳이 저승
전에 묻은 것을 숨길 이유가 없었는데 뒤에 저주 물건이 발견된 이후
강빈이 묻은 것이라 다시 지목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
어 신생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신생에 대한 조사가 내옥이 아닌
외정에서 이루어져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소명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조
사되지 못한 점에 대해 한스럽다고 했다.
인조는 강빈옥사가 명확한 물증 없이 진행되었다는 비난을 신생의 진
술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는데, 강빈의 소행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진술
과 증거가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증거를 반박하여 옥사의 결과에 대한 신빙성을 무화
시켜 나갔다. 인조가 강빈 사건의 의혹을 제거하고자 노력할수록 여론
역시 증인과 증거의 문제점을 드러내서 조작된 사건이라는 의심의 크기
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강빈옥사에 대한 의혹은 숙종 대에 강빈이 신원 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아서, 효종, 현종 대에 걸쳐 인심이 여전히 강빈 관련 사건의 처리 결과
를 믿지 않았다. 민정중은 여항간에 조귀인과 김자점이 간교하게 성상의
귀를 가려 강빈옥사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말이 돈다는 사실을 효종에게
아뢰었으며,49) 송시열은 현종을 대하여 강빈옥사에 대해 여전히 민심이
평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선왕-인조-이 강
빈의 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추측하여 단정하니 사람들이 억울한 일로
여긴 것이라 했다.50) 효종과 현종은 이에 대해 강빈의 역모가 분명하다는
입장을 단호히 밝혔으나, 숙종 대에 이르러 강빈옥사는 민간에서의 정서
대로 억울한 일로 확정되고, 강빈은 신원되기에 이른다.
숙종은 강석기의 증손인 강봉서의 격쟁을 계기로 강빈의 신원을 논의
하였는데, 효종 대에 강빈의 신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선대왕과 관
49) 효종실록 3년 임진(1652) 4월 26일 기사.
50)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기해(1659) 9월 5일 기사.
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면서 인조 이후 선대왕들과는 달리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숙종 역시 민비를 폐하던 때까지
강빈을 역적으로 여기며 폐비의 전례로 삼았다.51) 그러나 집권 말기로
접어들면서 숙종은 병신처분(丙申處分) 이후 정유독대(丁酉獨對)에서 이
이명(李頤命)에게 연잉, 연령군을 부탁하고 세자의 교체까지 염두에 둔
상황에 이르자, 애초 송시열, 송준길 등 호서 사림이 명분으로 삼아왔고
노론 인사들이 요구해왔던 강빈 신원을 추진하여 노론의 협조를 받고자
했다.52) 신원의 일에 대해 신료들은 애초 대궐 안에서 일어난 일인 까닭
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거나 선대왕의 처분이 지엄하여 말하지 못한
사정을 밝히기도 했지만, 민진후 등 많은 이들이 국인(國人)들이 오랜 세
월 원통하고 억울한 일로 여겨서 가슴 아파했다고 아뢰며 이의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53)
51) 김우진, 「肅宗의 昭顯世子嬪 姜嬪 伸寃과 그 의미」, 朝鮮時代史學報 83, 조
선시대사학회, 2017, 271면.
52)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아름다운 날, 2007, 113-124면.
53) 숙종실록 44년 무술(1718) 3월 25일; 3월 28일 기사.
신하들의 의견이 모아져 강빈이 복위되고 민회
빈(愍懷嬪)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그 시책문에는 인조 이후 선대왕들
에 의해 강경하게 사실로 지지되었던 강빈의 역모죄가 날조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아아! 나라의 운수가 더욱 불행하여 거듭 궁액(宮掖)의 변고가 있게 되었도
다. 요사스러운 것을 어찌 빈이 스스로 하였겠는가? 참소하고 이간하는 짓이 더
욱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끝내 은혜와
사랑을 보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슬프게도 모자(母子)가 운명
을 함께 하였고 참혹하게도 형제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외로운 무덤이 오
래도록 소나무의 가래나무 숲에 의지하여 있으니 이미 부묘(祔墓)를 하지 못하
였고, 사묘(私廟)에서 겨우 향화(香火)를 이어 왔으니 어찌 정문(情文)에 합치되
는 일이겠는가? 도로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탄식하고 슬퍼하니, 부인과 아들들
도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도다. 옥사(獄事)를 날조한 흉악한 역
적들이 형벌을 받았으니, 족히 천도(天道)는 되돌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징험하
는 것이로다. 그 원통함을 호소하던 강직한 신하도 다시 복관(復官)시켰으니, 성
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도다.54)
54) 숙종실록 44년 무술(1718) 5월 19일 기사.
당시 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강빈의 소행이나 책임으로 돌리
지 않고 참소와 이간질에 의한 변고로 규정했다. 또 옥사를 만든 죄를 김
자점과 조귀인에게 분명하게 돌렸다. 이처럼 시책문에서는 인조 당시부
터 옥사의 처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조귀인에게 혐의를 두었던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근거로 강빈을 신원한다고 밝혔다. 궐이라는 특수
한 공간, 옥사에 대한 한정된 정보, 과도한 공권력의 시행 등은 의혹을
낳았고 권력이 제공한 정보의 신뢰성을 떨어뜨렸으며, 이러한 조건 하에
서 여론은 사건의 내막을 스스로 구성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조귀
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옥사의 결과에 대한 논리적 반박 등을 통해 강
빈옥사가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여론이 구체화되었으며, 이렇게 구성된
강빈옥사의 내막은 정치적 구도와 상황이 바뀌면서 사실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기반하여 강빈옥사에 대한 평가가 조정되었다.
Ⅳ. 조건의 변화, 강빈옥사 다시 쓰기 - 연려실기술
강빈옥사는 사건이 일어난 지 100여 년 후에, 그리고 강빈이 신원된
지 50여 년 뒤에 단일 사건으로 역사서의 한 항목을 차지하였다. 이긍
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에는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가운데 ‘정저사(定儲嗣)’에서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승계 구도의 변화를
서술하고 ‘강빈지옥(姜嬪之獄)’에서 강빈이 사사되기까지의 내용을 다
루었다. 인조 대 병자호란 이후 주요 사건 가운데 하나로 조명하고 있
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훙서한 뒤 봉림대군으로 후사를 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서
술한 부분에서 이긍익은 강빈과 소현세자와 관련된 몇몇 일화를 먼저
배치한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빈을 간택할 때 부덕이 높은 처자를 놓친
일을 두고 탄식한 일을 소개했는데, 강빈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지만 이
처녀의 대척점에 강빈이 위치해 있으며 인조가 강빈에 대해 마뜩잖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소현세자에 대한 일화들은 여러 문집의 기록에서 가려 뽑았는데 세자
로서의 자격에 흠이 될만한 행실들만 나열하고 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서연(書筵)을 드물게 열고 별원(別院)을 지으며 마음에 드는 자에게
사사로이 벼슬을 내리려 한 일, 노여움에 위사(衛士)를 말채찍으로 직접
때린 일 등을 차례로 서술하여 자질이 훌륭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이 일화들은 김신국(金藎國)의 행장,55) 이시백(李時白)의 시장(諡狀),56) 조계
원(趙啓遠)의 행장57)에 실려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55) 任相元, 恬軒集 卷34, 「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金公行狀」.
56) 宋浚吉, 同春堂先生文集 卷23, 「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延陽府院君李公
諡狀」.
57) 南九萬, 藥泉集 第23. 「刑曹判書趙公行狀 癸亥」.
각 기록에서는 김신국, 이시백, 조계원 등이 소현세자의 잘못에 직간하여 옳은 길로 인
도하고자 했던 행적을 남기고 그 충직함을 기리고자 하는 맥락에서 서
술되지만,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일화들이 중첩되어 소현세자의 실덕
을 강조하게 된다.
당시 소현세자의 아들로 후사가 이어지는 것이 상도(常道)라 여겼던
여러 신료들은 인조가 승계 구도를 바꾸고자 하는 의사를 내보이자 반
대 입장을 밝힌다. 이 논의에서 홍서봉 등은 원손이 이미 있으니 바꾸지
못하는 자리라 못박고 후계를 바꾸는 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니라 했으며, 이경여는 승계의 차례를 잃으면 화란이 일어나며 외부
에 알려지면 인심도 출렁일 것이라 반대했다. 특히 후사의 순서를 바꿔
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들어 대외에 설명하지 않고 원손이 어리기 때문
에 교체한다는 뜻을 밝힌 일에 대한 당혹감을 표현하고 사사로운 뜻이
나 참소에 의해 후계의 교체를 결정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도 드러
냈다. 이에 인조는 의견을 표명하길 유보하거나 반대하는 신하들에 맞
서 후사를 교체할 뜻을 관철한다. <인조조 고사본말>에서 봉림대군으
로 세자를 정하는 과정을 기술한 항목에 인조와 신료들의 논쟁을 장황
하게 보여주는 것이 봉림대군의 적통성을 훼손시키는 빌미가 될 수도
있으나, 도입부에 강빈과 소현세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일
화들을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게 된다.58)
연려실기술에서 강빈옥사 항목을 구성할 때에는 병술록과 「조야
기문」 등의 사료에 기반하여 사건의 처리 과정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했
다.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일, 즉 인조와 신료들의 대화, 여러 신료들의
상소, 사건 처리 과정에 대한 기술 등으로 강빈옥사에 대한 논란과 진행
상황을 보여준다. 인조실록에서 사건의 공식적 처리와 이에 대한 조
정에서의 논의, 그리고 조귀인과 관련한 소문이나 사관의 견해 등을 함
께 반영하고 있다면, 연려실기술에서는 강빈옥사의 진행 과정과 인조
와 신하들의 의견 대립을 사실 중심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병술록 등
의 사료에서 발췌된 내용뿐 아니라 정언황의 행장59)이나 이시백의 시장
(諡狀)60) 등의 일부를 인용한 부분도 조정에서 사건을 논의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이를 통해 정언황이 인조의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강빈의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 보내는 일에 대해 반대하는 소를 올리고
58)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강빈의 죄에 연좌되어 유배되고 죽음
에 이른 것이 원통한 일이라는 사관의 입장이 드러나 있으나(인조 25(1647) 8
월 1일; 인조 26(1648) 윤 3월 17일 기사 참조)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에 대한 동정적 시선
으로 인해 효종의 왕권 계승에 승복하는 데 정서적으로 틈새가 생길 여지를
두지 않는다.
59) 洪宇遠, 南坡先生文集 卷9, 「通政大夫 守江原道觀察使 丁公 行狀」.
60) 宋浚吉, 同春堂先生文集 卷23, 「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延陽府院君李公
諡狀」.
이시백이 이경여, 홍무적에 대한 인조의 의심을 풀어준 일화 등을 제시
하여 강빈옥사에 대한 인조와 신료들의 입장 차를 부각한다.
연려실기술이 숙종 대에 강빈옥사가 조귀인과 김자점에 의해 조작
된 일로 규정되고 강빈이 신원된 이후에 편찬된 것이지만, 이 사건과
김자점이나 조귀인과의 관련성은 명시적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다만 정
언황의 행장에서 김자점이 정언황의 상소에 대해 처벌을 주장하자 이
경석이 옳지 않다고 하여 처벌이 중지되었다는 서술로 강빈옥사의 처
리에 반대하는 신료들과 다른 입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데 그쳤고, 조귀
인에 대해서는 강빈옥사에 대한 기록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포사(褒姒)와 여희(驪姬) 등 미색으로 성총을 흐린 역사적 인물
들에 빗대어 여색을 경계할 것을 아뢰는 이응시의 상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여 이것이 당시 조귀인을 염두에 둔 발언임을 짐작하도록 할 뿐
이다. 김자점과 조귀인은 여론에 의해 강빈옥사를 꾸민 장본인으로 지
목되었고 숙종 대에 이르러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것이 사실로 인정
되었으나, ‘강빈지옥(姜嬪之獄)’의 마지막에는 강빈의 위호를 회복하는
시책문이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강빈을 소현세자의 묘에 부장하면서
숙종이 지은 제문을 배치하였다. 시책문에는 강빈이 ‘모함’에 의해 화를
당했다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으나 제문에는 원통함을 씻는다고만 표현
하고 있다. 제문에는 조귀인 등의 모략에 의한 사건이라는 판단이 문면
에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연려실기술에서 사건을 조명
할 때에는 김자점이나 조귀인의 사건 조작설이 행간 사이로 한 발짝 물
러선다.
이긍익은 효종의 왕권 계승의 정당성을 수용하며 강빈에 대한 혐의를
모두 제거하지 않는 방향으로 서술하였다. 인조의 정치적 결단에 대해
당시 거센 저항이 있었고 김자점과 조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존
재했음을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서술 태도는 연려실기술의 편찬의도
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긍익은 당색에 따라 역사적 문제에 대한
평가가 상이한 것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여 공정한 서술에 다
가가려 했다.61) 따라서 인조실록에 이 사건을 둘러싼 소문과 여론 등
이 사건의 배경, 혹은 이면으로 채택되어 사관의 서술을 통해 반영되던
것과 달리, 연려실기술에는 사건을 둘러싼 조정에서의 논의와 옥사
처리 절차에 대한 기술만이 보인다.62)
61) 李存熙, 「李肯翊과 <燃藜室記述>의 編纂」, 진단학보 61, 진단학회, 1986,
181-185면.
62) 이는 실록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수렴하는 공적 기록이지만, 연려실
기술은 개인 편찬자의 시각이 일관되게 반영된 저술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강빈옥사에
대한 이견들이 이긍익의 입장에서 취사선택되어 재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사
료의 성격만으로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사건에 대한 편찬자의 ‘해석’을반영한 차이인 것이다.
실증할 수 없는 소문을 배제하면서 강빈의 신원을 정치적 명분으로 삼은 노론의 태도,
그리고 조귀인과
김자점에게 죄를 돌리고 강빈을 희생양의 자리에 두는 숙종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이긍익은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치열한 당쟁 속에서
화를 입은 소론 명문가의 후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빈을 잘못된 옥
사의 피해자로 보는 노론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배제하지도 않는다. 왕
의 결정에 반발하는 신료들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노론이 내세운 명분
을 일정 반영하면서 그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처럼 강빈옥사는 사건이 일어난 뒤 여러 세대가 지나고 정치적 환
경이 변화하면서 절대 권력에 의한 사건 구성과 이에 저항하는 여론의
사건 이해 간에 힘의 격차가 전복되고 사건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달라
지자 한때 사실로 인정되었던 소문들은 하나의 입장, 주장의 위치로 물
러서게 된다.
Ⅴ. 결 론
인조 이후 강빈옥사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은 각기 자기 입장을 정당
화하기 위한 논리를 구성하였다. 인조와 효종, 현종으로 이어지는 절대
권력은 강빈의 존재가 빌미가 되어 야기될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인성과 행실의 흠결을 부각하였다. 강빈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수록 왕
위를 도모한 참람한 마음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불효를 저지르고 미신
에 현혹되었으며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식을 죽이기까지 한 극악한
인물로 밝혀졌다. 강빈의 부도덕성이 커질수록 후계를 교체하고 강빈과
세 아들, 친정과 그를 비호하던 인물들을 처벌한 일이 정당성을 확보하
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 여론은 강빈옥사가 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옥사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지 않고 사건의 처리가 권
력의 의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자, 옥사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
았다. 다만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왕에게 전적으로 돌리기보다는 강빈
이 조귀인의 간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라 여겼다. 인조실록에
서 조귀인은 그 심성이 애초 간악한 데다 강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일을 꾸미고 이간하여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다.63)
63) 효종 즉위 초 조귀인은 김자점과 결탁하고 궁중을 저주한 일이 밝혀지자 자
진(自盡)을 명 받고 죽는다.(효종실록 2년 신묘(1651) 11월 23일; 12월 14일
기사 참조) 효종 1년에서 4년 사이에 이루어진 인조실록의 편찬 시기는 조
귀인이 자전과 동궁을 저주한 역적으로 규정되고 사사된 때와 맞물린다. 따
라서 인조실록에 조귀인의 성품과 행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간계
로 강빈옥사가 일어났다고 의심하는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보다 적극적으로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인조실록의 서술은 강빈옥사를 잘못 처리했다는 원성의 표적
으로 인조가 아닌 조귀인을 내세운다. 조귀인을 원흉으로 설정하는 논
리는 강빈옥사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는 신하들이
나 강빈을 동정하는 여론이 절대 권력을 정조준하여 권위를 훼손하는
위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처럼 정치적 의도로 처벌할 대상-강빈-이나 무리한 옥사를 책임질
대상-조씨-을 부도덕한 품성, 비인간적 인물로 파악하고 비난하는 것은
권력의 도덕성과 왕권 계통의 정당성 손상을 최소화하는 한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결국 숙종 대 후반기에 이르러 노론의 정치적 명분을 살려주
고 정국 운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강빈옥사를 강빈이 억울하게 누명
을 쓴 일로 규정하게 되면서 의혹과 소문이 사실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숙종에 의한 강빈의 신원은 강빈옥사에 대한 최종적 해석이
될 수는 없었다. 100년후에 편찬된 연려실기술에서는 소현세자의 죽
음으로부터 강빈과 그 친정, 아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한 끔찍하고 잔혹
한 사건을 다루면서 ‘악한 인물’을 부각시키는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효종으로 후계가 옮겨가는 문제와 강빈옥사를 둘러싼 왕과
신료 사이의 대립이 전개된 과정을 ‘보여주며’ 노론의 시각에서 강빈옥
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 거리를 두었다. 쇠락한 소론가의 후예인 이
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서는 급박한 정치적 득실과 필요에서 벗어나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한 동정적 시선과 음모론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강빈옥사와 관련된 사실 위주의 기록들을 선택적으
로 배치하여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현실 권력을 수긍하
고 감정적인 해석에 거리를 두며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처럼 강빈 옥사는 역사적 사건이 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그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재해석 되며, 시간적 정치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다르
게 읽힐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조와 효종, 현종에 의해 패륜적
악녀로 이미지화되었던 강빈은 오늘날 여성사적 입장에서 여성 리더
의 모델로 소환되고 있다. 강빈은 병자호란 때 기지를 발휘하여 전장
의 위기를 모면하고 볼모생활을 한 심양에서는 소현세자가 관소를 비
울 때 장계(狀啓)를 작성하는 등 관소의 업무를 직접 보기도 하였으며,
국제 무역과 농장 경영으로 부를 축적하여 조선인 포로를 속환한 인물
로 평가되었다.64) 강빈 생전에 심양에서의 행적이 왕위를 도모하는 참
64) 박주, 「조선후기 소현세자빈 강씨의 리더십에 대한 재조명」, 韓國思想과 文
化 62, 한국사상문화학회, 2012, 201-227면; 신춘호, 「‘소현세자빈 강씨’ 역사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소고-광명시 영회원 역사주제공원, ‘강빈 야판전(姜嬪野坂田)’조성 제안」,
인문콘텐츠 17, 인문콘텐츠학회, 2010.03, 393-418면.
람함으로 비난받고 옥사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오늘날에는
새로운 여성상과 대안적 리더쉽의 필요에 의해 긍정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의 실체적 진실보다 그 사
건을 해석하는 필요에 따라 다르게 조망되고 구성되며 의미화된다. 그
것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것이든, 역사 기술에 대한 태도에 의한
것이든, 시대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요구에 의한 것이든 인물에
대한 스토리가 다양한 층위에서 만들어지고 여러 계기로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힘을 얻으며 공인된 역사 속에 채택, 배척되기도 한다는 것
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강빈이라는 캐릭터는 악의 화신이나 희생
양의 아이콘, 혹은 국제 감각을 지닌 리더라는 다른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강빈옥사에 대한 기록들은 권력의 의지와 저항, 은폐와
의심, 정치적 현장과 시간적 거리 등이 어떻게 사건의 다른 맥락을 드
러내고 재현하는지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이 시선의 경쟁 속에 놓여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자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丙戌錄(日本 京都大学 河合文庫 所藏)
李肯翊, 燃藜室記述 27 <仁祖朝故事本末>
任相元, 恬軒集 卷34.
宋浚吉, 同春堂先生文集 卷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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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접수일: 20.08.19 / 심사완료일: 20.09.23 / 게재확정일: 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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