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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조선시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 근대 ‘민족’ 관념의 출현/허준.서강대

1. 머리말

2. 조선 지배층의 자기 인식

3. 국가 성원에 대한 인식과 규정

4. 조선의 유교문화와 공동체 정체성

5. 맺음말-문화, 국가, 민족의식

<국문초록>

일찍이 E. J. Hobsbawm과 Linda Colley 같은 학자들은 민족주의의 기원이 각각의 지역 사회가 가진 상이한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지적 은 ‘인쇄 자본주의(print capitalism)’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출현’을 민족의식 형성 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한 Bendict Anderson의 전제가 모든 국가, 사회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중앙 정부의 관료화를 바탕으로 장기간 사회 지속성을 유지해 온 한국 사회에 는 유럽과는 달리 이미 전근대 시기부터 그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된 동질 정체성을 기 반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집합체가 존재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민족’ 개념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일반적 해석에 대 한 재고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특히, 한국 민족의 형성이 서구 열강 혹은 일본 제국주 의와의 접촉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는 근래 한국사 연구자들의 주장이 타당한가를 검증하고자 한다. 조선 사회의 구성원들은 국가의 정치・사회적 구조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거듭하였 으며 그 과정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동일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인식하도록 하는 기 회를 제공하였다. 비양반사족들은 자신들이 습득한 유교적 지식과 행위 규준을 바탕으로 경국대전에 의해 제도화된 사회적 차별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국가의 지 배층들은 법적 규정보다 유교적 가치를 우선시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곤 하였다. 양자 간의 이러한 교류 방식은 한정적인 정치, 문화적 영역에서나마 서로를 동일한 행 위 규준의 적용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호 교 류가 지속적으로 이행되었다면 당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국가’를 기반으로 한 보다 확장된 의미의 집단 정체성이 공유되었을 가능성은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한 국사회에서의 민족 개념과 그 형성과정을 논함에 있어 그것을 단순히 근대 이후의 산 물로 규정하기보다 서구 유럽 사회와는 상이한 그 역사적 경험을 고려하여 면밀한 검 토를 이행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제어 : 민족, 민족주의, 유교, 국가, 집단정체성, 조선

1. 머리말

식민사학자들이 한국 사회의 역사, 문화적 열등성을 부각시키고자 한 이래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역사학계에서 역시 한국의 역사적 자주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한 다양한 노력이 존재해 왔는데, 檀君을 ‘민족’의 시조로 한 ‘단일 민족’ 신화의 건설은 그러한 노력이 낳은 대표적인 결과였다.1) 한민족을 역사 의 태동 시기에 이미 성립된 구성체로 보고 한국의 역사를 ‘민족’의 발전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던 이러한 원초론(primordialism)적 주장은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왔으며 한국사 역사 서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온 것으로 이해된다. 일례로 신용하는 ‘민족’은 근대 이전부터 실존 하고 있던 ‘실재의 공동체’이며,2) 한국의 경우 고조선 시기에 형성된 ‘원민족’이 삼국통일을 거치며 ‘전근대민족’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원초론적 관점은 종종 한국 전근대 사회의 구성원들의 역사행 위를 ‘민족의 자긍심과 자주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전제하는 연구들로 이 어지곤 하였다.3)

1) 이와 관련하여서는 Hyung Il Pai,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Formation Theorie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0, p. 2를 참조할 것.

2) 신용하,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 한국사회학 40(1), 2006; 「한국 ‘원민족’ 형성과 ‘전근대민족’ 형성」, 사회와 역사 88, 2010.

3) 조선 초기 관료들의 정치행위와 발언에서 민족주의적 시각을 찾으려는 노력 등이 그 러한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김홍경, 조선초기 관학파의 유학사상, 한길사, 1996, 韓永愚, 朝鮮前期 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3 등을 참조할 것.

최근에는 이러한 원초론적 주장에 대한 비판적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원초론에 대한 비판론은 ‘민족’은 근대사회에 인위적으로 구성된 관념적 존재일 뿐이며 ‘민족주의’ 역시 근대에 들어와 새로이 생성된 목 적론적 인식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원초론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강조해 오던 ‘역사적으로 지속된 존재로서의 민족’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강한 의심을 제기하였던 것 역시 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비판론이 모두 동일한 논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당 비판론 중에는 단일민족 신화의 허구성에서 배태될 수 있는 ‘전체주의의 도래’와 같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데 보다 치중한 의견들이 있는 반면,4)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를 식민 지배와 같은 비극적 역사적 경험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문화적 활동과 연결 지어 이해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4) 이에 대해서는 Gi-Wook Shin,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Gi-Wook Shin and Michael Edson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등이 좋은 참조가 된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한국 사회에서의 민족 개 념과 민족주의의 등장을 19세기 이후의 역사적 경험들과 연결 지어 이해 하려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원초론적 관점이 상대적으로 보다 목적론적 역사 해석에 치중되어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의 기 원을 근대 이후에서만 찾고자 하는 근대론적 시각 역시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민족’을 근대 이후의 산물로 이해하는 다소 서구적인 역사 해석 방식이 서구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다른 사 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존재한다. 그 리고 이에 대해 E. J. Hobsbawm이나 Linda Colley같은 학자들은 민족주 의의 연원과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은 각 지역, 문화권별로 다양한 것임을 이미 지적하기도 하였다.5) 이는 ‘한국 사회에서의 민족주의의 출현’이 라는 사안을 논의할 때 서구 유럽과는 상이한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고려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하게 하는 것으로, 과연 민족주의가 근대 이 후 서구와의 교류 과정에서야 비로소 한국 사회에 발생한 것인가에 대해 서 또한 재고하게 한다. 또한 근대 서양 문물 소개 이전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의 민족주 의와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도 전근대사회의 구성원들이 나름대로 규정하였을 자기 정체성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중요성을 갖는다. 이와 관련하여 John Duncan, JaHyun Haboush 같은 서구의 한국학 학자들은 조선시대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를 중심으로 한 광의의 공동체 정체성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6) 그리고 국 내에서는 박찬승이 고려, 조선 사회에서 공유되었을 정체성 문제를 검토 하고 한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 과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7)

5) E. J. Hobsbawm,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Programme, Myth, Reality, Cambridge [England]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 John Duncan, "Proto-nationalism in Premodern Korea", Perspectives on Korea, eds. Sang-Oak Lee and Duk-Soo Park, Sydney: Honolulu, Hawaii: Wild Peony;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8; JaHyun Kim Haboush, “Constructing the Center: The Ritual Controversy and the Search for a New Identity in Seventeenth-Century Korea”, Culture and the State in Late Chosŏn Korea, eds. JaHyun Kim Haboush and Martina Deuchler.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7) 박찬승, 「고려・조선 시대의 역사의식과 문화정체성론」, 韓國史學史學報 10, 2004; 「한 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 개념과 소통 창간호, 2008.

본고는 이처럼 한국 전근대 사회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한 연구들과 그 궤를 같 이 하며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연원을 검토해보고자 한 다.8) 특히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부분, 즉 피지배층들이 국가의 지배층들과 자신들을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 집단 안의 ‘동일 구성원’으로 인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는가를 검토하는 데 보다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근대사회에서는 민족의 출현이 불 가능하다고 단정한 Ernest Gellner의 주장9)이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 효한가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관련 학계의 논의를 확장해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주요 의도라 할 수 있겠다.

8) 후술하겠지만 조선시대에 형성 과정을 거친 정체성은 이전에 형성된 한국 사회의 집단의식과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으며, 근대적 정의의 ‘민족’ 개념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본고가 특히 조선시대에 중점을 두는 이유임을 미리 밝혀둔다.

9) Ernest Gellner, Nations and Nationalism, Oxford: Blackwell, 2006, pp. 138~139.

2. 조선 지배층의 자기 인식

많은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바 있듯이 국가 건국 후 조선의 지 배층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독립적이고 고유한 집합체 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을 공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한 인식은 역사서, 문집 등의 출판물 등에서 자주 표출되었음은 물론이거니 와10) 정치체제의 성립과 의례규정의 확립 과정에서도 빈번히 그 영향을 끼쳤다.11) 그러나 이처럼 주로 조선 지배층 사이에서 공유된 자기 정체 성이 곧바로 근대 개념의 ‘민족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은 우선 그러한 자기 인식 자체가 상당 기간 동안 일관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한 파편적이고 분산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 하다. 예컨대 조선 초기 역사서에 이미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의 체계가 구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12) 그러나 이것이 곧 조 선사회 구성원 사이에 그들의 공통된 시조를 단군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世宗 9년 卞季良이 단군과 三國의 시조를 하나의 단에 두고 제사지내기를 청했을 때 세종이 이를 거 부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변계량은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 나라 를 열었으며 “음과 양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단군과 삼국 의 시조를 합사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국왕인 세종은 단군과 삼국의 시조를 변계량의 주장처럼 ‘불가분의 하나’ 로 볼 근거가 없다며 지속적으로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13) 즉, 당시 국 왕인 세종마저도 조선사회를 ‘單一化된 역사적 기원을 가진 공동체’로서 정의하는 관념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사회의 지식인 들이 자신들의 국가의 역사, 문화적 고유성을 강조하고는 있었으나 그러 한 인식들이 하나의 통일된 관념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나타 내는 것이다.14)

10) 예를 들자면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보다 많은 역사적 주체들을 조선의 기원으로 묶은 三國史節要, 신라부터 고려를 거쳐 15세기까지 쓰인 시가 등을 모은 東文選 등이 있다. 삼국사절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鄭求福, 「三國史節要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 歷史敎育 18, 1975가 좋은 참조가 된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박찬승, 주 7)의 논문, 2004, 15~18쪽, 허준, 「조선 전기 공동체 정체성의 형성」, 한국학연구 56, 2020, 410~413쪽을 참조 할 것.

11) Joon Hur, “Ritual and Identity Construction in Joseon Korea”,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ol. 22, 2019, pp. 224~229.

12) 박찬승, 주 7)의 논문, 2004, 15~18쪽,

13) 世宗實錄 卷37, 世宗 9年 9月 己丑.

14)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허준, 주 10)의 논문, 404~406쪽을 참조할 것.

당시 지배층의 인식을 민족 관념과 연결시킬 때 주의해야 할 또 하나 의 문제점은 지배층들이 인식한 조선의 ‘역사적 주체’들이 피지배층까지 를 포함한다는 근거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학자들에게 종종 민족주의적 인물로 설명되는 梁誠之의 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양성지는

“(東方은) 檀君이 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箕子朝鮮, 新羅가 모두 1천 년 을 누렸고 前王의 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다”

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조선 의 역사적 계통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습속과 언 어가 他國과 다름을 지적15)한 인물이었다. 이에 더하여 그는 世祖 1년에 올린 상소에서 “우리 동방 사람들이 다만 중국의 부성함만을 알고 동방의 일들을 상고할 줄 모르는 것은 몹시 불가한 일”이라 지적하고 “예법은 본 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16) 조선만의 고유한 문화의 존재와 그것을 지키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訥齋集에서 중국과 달리 동방에서 국가와 왕조가 난립하지 않았던 것은 동방에 존재한 ‘大家世族’이 서로 의지하면서 도왔기 때문이며 바로 이들의 존재로 인해 간웅들로 인한 내란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17) 즉, 그는 이러한 동방의 역사 지속성이 ‘大家世族’의 존재로 인한 것임을 또한 분명히 한 것인데,18) 그러한 그에게 있어 ‘동방 의 역사’가 ‘대가세족’이라는 지배 계층을 넘어 조선인 전체의 그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15) 成宗實錄 卷134, 成宗 12年 10月 戊午.

16) 世祖實錄 卷3, 世祖 2年 3月 丁酉.

17) 訥齋集 속편.

18) 양성지의 자기 인식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허준, 주10)의 논문, 406~410쪽을 참조 할 것.

따라서 조선 사회의 지배층들 사이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그 들의 자기 인식을 국가 신민 전부를 포괄하는 공동체 의식과 연결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조선 시대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각각의 신분 및 계층을 넘어선 하나의 동일 집단의 구성체로 여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민족주의’ 혹 은 그와 유사한 확장된 공동체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이 공유하고 있던 자기 정체성이 사회 구 성원들에게 전달되고 공유되는 역사적 과정이 있었는가에 대한 검토를 선행하는 것은 전근대 사회의 집단 정체성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무엇 보다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지배층들이 의도한 정 체성 공유 방식은 물론 그러한 시도에 대한 피지배층 나름의 수용 방식 에 대해 살피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지배, 피 지배계층 상호 간의 역사적 활동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통해 전근대 조선사회에서 보다 확장된 공동체 정체성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 공 유되었을 가능성을 논해 보고자 한다.

3. 국가 성원에 대한 인식과 규정

조선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냄에 있어 종종 ‘我族類’라 는 용어를 이용하며 그들만의 역사적, 문화적 고유성을 강조하였다. 박찬 승은 ‘族類’라는 단어가 주로 북방의 野人 및 倭人과의 구분을 위해 이용 된 단어임을 지적하고 이를 근거로 ‘족류’는 자기 정체성을 확정하려는 조선 지배층의 의도가 담긴 단어일 것임을 주장하였다.19)

19) 박찬승, 주7)의 논문, 2008, 83~86쪽.

그런데 조선의 지배층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을 ‘아족류’로 칭한 것은 단지 야인이나 왜인과의 구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는 太宗 7년 上 國인 明과 連姻하기를 꺼려하던 국왕의 발언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태종은 世子가 명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며 다음 과 같이 발언하였다.

만약에 許婚을 한다 하더라도 혹시 황제의 친딸이 아니거나, 비록 친딸 이라 하더라도 언어가 통하지 못하고, 우리의 족류가 아니니 (非我族類)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시부모를 멸시하거나, 혹은 투기로 인하여 片 言隻辭로 사사로 상국에 통하면 문제를 일으킬 걱정이 없지 않고, 또 여 러 閔氏들이 장차 세자의 配偶 세력에 기댈 것이니 더욱 제재하기 어려울 것이다.20)

여기서의 용례를 참고하면 ‘아족류’는 단순히 야인뿐이 아닌, 明의 漢族 까지를 포함한 외부 세력 전체와 조선인들을 분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사용이 조선인의 ‘종족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했던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즉, 조 선 지배층들이 ‘我族’이란 표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국가가 ‘타 종족’과 는 구분되는 ‘단일 종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족’이란 표현은 족보, 문집류 등에서 한 집안을 다른 가문들과 구분할 때 자주 이용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金陵金氏世稿跋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의 고조 (我族古祖)는 文學직을 역임하고 吏曹參議에 추증된 時晉인 데 배필은 淑夫人으로 추증된 김 씨이다.21)

20) 太宗實錄 卷3, 太宗 7年 6月 甲辰.

21) 白水先生文集 卷13, 題跋, 金陵金氏世稿跋.

여기서 ‘我族’은 한 家門을 지칭하는 것으로 금릉 김씨 가문과 그 외의 가문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처럼 한 가문, 혈족을 다른 이 들과 구분하기 위해 ‘我族’이 사용된 예는 義城金氏川上各派篇에서도 찾 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의성 김씨들이 새로운 契安을 작성하여 흩어진 친족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면서 ‘我族’이란 단어를 사용하 였다. 즉, 자신들이 속한 가문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 단 어를 사용했던 것이다.22)

22) 義城金氏川上各派篇, 契安. 새로운 계를 통해 흩어진 친족들을 규합하고 조상의 영예를 기릴 것임을 공표하였다. 당시 친족 중 이미 문・무과 등을 합격한 이들의 수가 22 명에 달하였음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용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시 대에 특정 집단이 자신들을 타 집단과 별개의 것으로 정의하기 위해 종 종 ‘아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이 조선의 신민을 하나의 ‘종족’으로 인식, 규정하는 광의의 의미 또한 가 지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족보류에서 ‘我族’이 하나 의 집안, 즉 혈족 및 친족 집단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보다 중점을 둔다 면 조선 지배층의 ‘我族類’라는 용어 사용 역시 조선인 전체를 하나의 구 별된 ‘종족 집단’으로 정의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지배층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我族’으로 표현했을 때 그 ‘族’의 범위에 그들의 피지배층 역시 포함될 것 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 지배층이 이용한 이러 한 표현을 이해함에 있어 그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건설한 사회의 문화 적, 역사적 독자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문집류에 나온 ‘아족’의 표현 역시 그 해당 가문의 사회적 위상, 문화적 수준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 용되었지 혈통적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족류’라는 표현은 조선 건국 후 국가의 지배력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조선의 지배층들이 자신들과 他정치 지배세력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의 하나 정도로 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해 보인다.23)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국가의 정치 체제가 안정을 이룬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족’의 사용 용례가 감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24) ‘我族’과 유사하게 조선과 그 외부를 경계 짓기 위해 사용된 단어 중 ‘吾民’이 있는데 이 역시 조선 前中期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용례를 살펴보면 이 표현은 ‘我族’에 비해 보다 분명하게 조선의 피지 배층들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明에서 청구한 물품을 조 달하는 일에 대한 成宗代의 논의에서 工曹判書 柳輊는 다음과 같이 ‘吾民’ 을 사용하였다.

臣이 일찍이 韓致禮와 더불어 중국 조정에 같이 갔었는데, 八站의 사이에 사는 우리 백성들의 곤궁함 (吾民之困)은 신이 눈으로 본 바로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면제해 주기를 주청하여 평안도의 백성을 소생하게 하소서.25)

23) 원 제국 붕괴 후 동북아시아의 정치 세력들이 각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피통치 성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은 David M. Robinson,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를 참조할 것.

24) 박찬승은 외족과의 갈등이 적어져서 ‘족류’라는 단어의 사용 용례가 줄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박찬승, 주 7)의 논문, 2008, 86쪽). 그러나 인조대 이후 외족과의 갈등이 과연 전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25) 成宗實錄 卷112, 成宗 10年 12月 壬申.

그런데 이러한 ‘吾民’은 조선의 백성들을 타 집단의 구성원과 구별되는 존재로 정의하기 위해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中宗代 右議政 柳順汀은 함경 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지적하며 “野人은 점점 강성해 가고 吾民은 점점 쇠약해 간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吾民’ 역시 ‘我族’과 마찬가지로 조선 인들을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吾民’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국가 성원으로서의 백성’을 의미함으로써 지배・피지배 계층 양자 간의 밀접성을 강조하게 했다는 데 또한 그 중요함이 있다. 三浦倭亂 이후 일 본과의 화친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국왕 중종이 당시 잡혀간 이들을 가리 켜 국가가 그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吾民’이라고 강조한 경 우26)나 외방의 재변을 다스리는 일을 논함에 있어 중종이 濟州의 백성 역 시 보살펴야 할 ‘오민’으로 지칭한27) 용례 등은 ‘오민’ 안에 내포된 뜻이 무엇인가를 쉬이 짐작하게 한다. 즉, 조선 前中期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피통치 대상을 다른 집단 구성원들과 분별함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의무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오민’은 조선의 지배 층들 사이에 자신들의 피통치 집단을 중요한 국가 성원으로서 인지해야 한다는 자각과 동의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민’에 반영된 지배층의 사회 인식을 ‘종족 의식’ 혹은 근대 의 ‘단일 민족의식’과 연결시킬 수는 없어 보인다. 이것은 국왕과 북방 국 경 지방의 상황에 대한 논의를 갖던 중 李長坤이 발언한 아래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방금 아뢴 귀화한 사람들의 일은, 鏡城, 北靑 등의 고을에서 귀화한 사람들은 지금 우리 백성 (吾民)이 된 지 오래입니다.28)

26) 中宗實錄 卷16, 中宗 7年 6月 甲子.

27) 中宗實錄 卷36, 中宗 14年 8月 壬申.

28) 中宗實錄 卷36, 中宗 14年 8月 戊寅.

위 내용은 종족적, 혈통적 다름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이 원할 경우 조선의 구성원인 ‘오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吾民’이라는 용어가 국가의 중요한 통치 대상이자 타 국가 구성원들과 구분되는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분명하지 만 그것이 어떤 인종적・종족적 차원의 구별을 의도하여 이용되지는 않았 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Duncan이 지적한 바 있듯이 조선 지배층들이 형성하고 있던 공동체 정체성은 근현대 한국인의 민족의식에 투영되어있는 단일 민족의 관념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임을 나 타내는 것이다.29) 요컨대 조선 지배층들에게 자신들이 건설한 사회의 고 유한 역사성과 문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인식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것이 확장되고 체계화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 다는 것이다. 조선은 元 제국의 몰락 이후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정치, 문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하던 바로 그 시점에 건국된 국가이다. 당시 동북아시아 구성원 들 사이에 서로를 다른 민족, 혹은 이질적 존재로서 뚜렷이 구분 짓는 개 념적 의식이 희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30)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지배층 역시 자신들의 공동체의 범위와 그에 속할 피지배대상을 규정하여 국가의 안정을 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 다. ‘아족’, ‘오민’ 등의 사용은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인데 같은 맥락에서 장기적으로 이용된 또 다른 단어로는 ‘同胞’가 있다. ‘同胞’는 다른 단어보다 조선 사회 구성원의 내부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31)

29) 이와 관련하여서는 John Duncan, “Hyanghwain: Migration and Assimilation in Chosŏn Korea,” Acta Koreana 3, 2000; John Duncan, 주6)의 논문을 참조할 것.

30) 이에 대해서는 David M. Robinson,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 8.

31) 박찬승, 주 7)의 논문, 2008, 92~93쪽.

그런데 張載의 「西銘」에 나온 “民吾 同胞, 物吾與也”의 구절이 조선 사회에서 治者와 被治者와의 관계를 정의하 는 데 유효한 용례로써 인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이다.32)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 ‘同胞’를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조선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그들의 신분 및 직역과 상관없이 국가의 동 일 구성원으로서 공포하였다는 점이다. 중종 34년 李彦迪은 ‘동포’인 백성 들에 대한 정치가 관대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백성’의 범주에는 정부 정책으로 인해 거주할 사찰을 잃은 승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3) 肅 宗은 평안도의 기근으로 인해 餓死한 이들을 자신의 ‘동포’인 백성으로 정 의하며 그들을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기도 하였다.34) 이와 같은 용례들에서 나타나듯 조선의 지배층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를 자신들 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중요한 존재로서 인식하게하기 위해 힘썼는데, 이 를 위한 중요한 언어적 장치의 하나로 ‘동포’를 이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조선의 사회 구성원들의 운명이 신분의 고하 및 직역의 귀천과 상관없이 국가와 직결되어 있는 것임을 공론화하기도 하 였던 것이다. 적어도 조선 中後期에 도달하면 당대의 많은 사회 구성원들 이 이러한 ‘동포’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인지하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 된다. 임진왜란 당시 高從厚는 백성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던 격문에서 全羅道民을 향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 道의 모든 어른들이여, 누군들 한 동포로서 단에 올라 피를 찍어 바르는 맹세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35)

32) 明實錄에도 이 ‘同胞’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백성들과 연관되어 사용된 용례는 15 세기 孝宗敬皇帝實錄 卷36, 弘治 3年 3月의 기록에서야 등장한다.

33) 中宗實錄 卷92, 中宗 34年 10月 甲申.

34) 肅宗實錄 卷31, 肅宗 23年 5月 壬午. 숙종은 기근으로 인해 죽은 백성들을 “我同胞之 民”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죽음의 원인과 사후 처리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그들이 양 반 지배계층은 아니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35) 正氣錄, 檄道內. 원문은 “惟我一道諸公 孰非同胞之民 登壇歃血”로 되어 있다. 당시 ‘동 포’ 사용의 의미에 관하여는 JaHyun Kim Haboush,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p.47을 참조할 것.

JaHyun Haboush가 지적하였듯이 고종후는 이 격문을 통하여 전라도민 모두를 ‘동포’라는 하나의 개념적 집합체 안에 포함시켰고, 이후 격문에 서도 그 수신자들 모두가 신분과 지역을 넘어 국가 안의 동질 구성원임 을 강조하였다.36) Haboush는 이 격서의 언어와 그 영향력을 분석하여 적 대적 상대를 만난 조선인들 사이에 자신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의 식’이 싹텄을 것임을 주장한 것인데, 여기서 고종후 역시 이미 장기간 사 용되어 온 익숙한 수사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 안 될 것이 다.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의 긴급함을 고려할 때 그가 대중을 상대로 그들 이 익숙하지 못한 수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당시 많은 이들이 이미 지배층이 사용한 ‘동포’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졌을 것임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배층이 ‘언어’를 통 해 국가 신민들 사이에 확대된 공동체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 장기간의 노력이 일정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었음 또한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37)

36) 이러한 내용은 JaHyun Kim Haboush, 주 35)의 책, pp.44~47.

37) ‘동포’가 내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임은 박찬승, 주 7)의 논문, 2008, 86~93 쪽에 잘 설명되어있다. ‘동포’와 ‘조선시대 공동체 정체성’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허준, 주 10)의 논문, 415~420쪽을 참조할 것.

이처럼 건국 이후 다양한 언어 사용을 통해 조선의 지배층들이 꾸준히 자신들이 건설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구성원들 사이에 공동 운명 체로서의 정체성이 확대, 공유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음은 분명해 보인 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국가의 정립 과정에서 그 신민들을 효율적 으로 규합할 필요가 있는 지배층의 입장과 노력에 대한 것일 뿐, 그러한 노력의 존재만으로는 조선 사회 구성원 전체에 확장된 정체성, 혹은 민족 의식이 공유되었음을 증명할 수 없다.

특히 조선의 지배층들은 일관되게 강고한 신분질서와 그에 기반한 차별을 통해 국가를 지탱하려 했던 만큼 이러한 관념적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제도적・인식적 풍토가 마련되었다 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한 지배층들의 자기규정 노력은 언어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며 다음에 서는 피지배층들이 보여준 대표적 사회적 행위들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 의 공동체 인식에 대한 논의를 심화해 보고자 한다.

4. 조선의 유교문화와 공동체 정체성

조선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전술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건국한 국가 공동체 안에 다양한 신분의 신민들을 포함 하고자 한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논해 보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수 의 구성원들 사이에 보다 포괄적인 공동체 정체성이 공유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사회 인식 체계 및 생활 규준이 존재해 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연대감과 그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을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당대 에 통용되었을 ‘사회 문화38)와 규준’의 확산과 공유 정도에 대한 검토를 선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38) Anthony Smith는 민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그의 연구에서 혈통적 순수성의 유지 보다 문화적 연대(cultural unit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더욱 중점을 두었다. Anthony D. Smith, The Ethnic Origins of Nations, Oxford, UK: New York, NY, USA: B. Blackwell, 1986.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 ‘민족’의 출현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Ernest Gellner마저도 中國의 경우의 예를 들어 예 외적 경우를 언급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Gellner는 중 국의 경우 ‘상위 문화 (high culture)’가 ‘종교적 신념’보다 ‘도덕적 규준과 국가 관료제’에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은 국가와 문화의 근대성을 豫期하게 하는 중요한 현상이라 주장한 바 있다.39)

39) Ernest Gellner, Nations and Nationalism, Oxford: Blackwell, 2006, pp.138~139.

이 주장은 ‘유교’라는 규준과 문화를 국가 정부가 주도하여 확산하려고 했던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히 참고할 만하다. 그것은 당대 조선에 서 발생한 ‘유교 문화의 확산’이 그 사회 구성원의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국가와 신민 사이의 관계와 정체성을 재규정 하게 할 잠재성 또한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하며 이 장에서는 조선에서의 유교 문화의 전파 방식과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 구성원들의 자기 인식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성리학적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에 어울리 는 제도와 의례를 완비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하였다. 따라서 당시 국가 구성원들 사이에 그들의 신분 경계를 넘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 는 문화적 이해나 행동 원리가 공유되었다면 그것은 지배층의 유교 전파 노력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 형성된 소위 ‘유교문화’와 그것에서 비롯된 사회 구성원 간의 연대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지배층이 공포한 유교 전파의 의도에만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문화 확산 과정에 있어 피지배층의 수용 및 내재화 방식, 그리고 이로 인해 양자 간에 비롯되었을 복잡한 상호 관계에 대한 검토 없이는 조선 사회 구성원 간에 형성되어간 ‘포괄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당대 지배층들이 소위 유교적 ‘敎化’라는 것을 진행할 때 그들이 목적한 바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피지배층들 사이에 어떠한 방 식으로 수용되었는지 등을 구체적 일례들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그 의미 가 크다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조선 건국 후 정립된 의례 규정과 그것의 시행과정이다.

사실 성리학적 질서의 수립을 통해 지배층이 의도했던 바 중 중요한 하나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위계의 형성과 유지를 통한 국가의 안정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儀禮 규정은 이러한 위계와 그에 의한 차별을 공식화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즉, 그 규정의 제정과 시행은 당시 정부, 지배층의 정치적 이상과 계획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검토는 당대의 사회와 그 구성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 구성원 들의 행위의 수준을 분별하기 위해 成文法化된 儀禮 규정은 그 정치・사회 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는 매우 탄력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결국 조선 지배층의 유교 문화의 전달과 제도화의 방식, 그리고 그에 대한 피지배층의 반응과 수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 예들은 經國大 典에 기록된 喪禮 규정이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父親 생존시 母親의 상기를 소상 11개월, 대상 13개월, 거상 15개월로 한정한 규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Martina Deuchler도 지적한 바 있듯이 이러한 상례 규정은 정부의 정책 시행이 성별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암시한 예일 수 있을 것이다.40)

40)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pp. 179~186.

그러나 실록의 기록들은 이러한 ‘차별’의 속성에 대해 당대인들은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다음 太宗實錄의 기록에서 그러한 일면 을 찾아볼 수 있다. 驪興 사람 故 抱州監務 卞熙의 딸 卞種生은 나이 겨우 13세에 어미를 잃 었으나 小婢 하나를 거느리고 분묘를 삼 년이나 지켰고 겨우 禫期를 지나 자 그 아비가 죽으니, 斬衰로 상제를 마쳤습니다.41) 위의 기록에 나타난 변종생은 그의 부친이 생존한 상황에서도 삼 년간 모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는 국가가 정한 법령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 인데, 만약 이 禮典의 규정이 남녀 간의 ‘차별적 의례 적용’에 보다 중 점을 두는 것이었다면 그녀의 행위는 법령의 위배라는 관점에서 다루어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변종생의 행위에는 아무런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孝誠을 증명한 이 행위로 인하 여 旌表를 받게 되었다. ‘차별적 의례적용’의 원칙은 남녀 간에서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신분 간 에 있어서 또한 엄격히 준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의 ‘禮 典’은 庶人과 軍士의 喪期를 百日로 규정하고 있다.42) 그러나 이러한 규정 의 시행 주체인 위정자들은 물론 그 적용의 대상인 서인들 역시 해당 규 정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중종 37년 경기도 관찰사 林百齡은 계본을 올려 아래와 같은 내용을 고하였다.

庶人 金仁順은 어릴 적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탓으로 삼년상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여 장성한 뒤 아버지 상을 입어 여막살이 삼 년을 마친 뒤에 어머니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상식하며 삼년복상을 추후하여 마쳤습니 다. 아울러 대전의 예에 의하여 정문을 세우고 복호하소서.43)

41) 太宗實錄 卷25, 太宗 13年 2月 丙辰.

42) 經國大典 卷3, “禮典: 五服”.

43) 中宗實錄 卷97, 中宗 37年 3月 庚寅.

이 내용을 보면 임백령과 김인순 양자 모두 예전의 규정을 크게 염 두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김인순은 서인이지만 자신의 부친을 위 하여 자의적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뿐만 아니라 이미 사망한 모친에 대해서도 삼년복상을 함으로써 삼년상을 자신이 준수해야 할 의무처럼 행동 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만약 해당 규정이 서인과 사족 간의 ‘차별적 대 우’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러한 위반 사항에 대해 사족 집단으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어야 함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임백령은 오히려 국왕에게 이러한 김인순에게 정문복호의 포상을 내릴 것을 청하 였던 것이다. 임백령의 태도는 그가 經國大典의 예전 규정보다는 “삼 년상은 천하에 통하는 상”44)이라는 효에 대한 孔子의 가르침에 보다 중점 을 두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의 진 술에서 부친 생존 시 모친의 상례를 삼 년 동안 치르는 것 또한 문제될 것 없다는 견해를 불식간에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 사족들이 의례와 관련한 차별적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 다거나 經國大典의 규정 준수에 무관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 건국 이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삼년상의 시행은 사족을 넘어 다양한 집단에 의해 영위되었는데45)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지배 관료 계층의 초기 반응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종대 特進官 崔淑生은 “예부 터 사대부와 서인은 제도가 다르니 동일하게 들어줄 수 없는 것” 이라며 三年喪의 차별적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役을 피하기 위해” 삼년상 시행의 허용을 요구하는 例가 많음을 지적하며 소위 非士族 집단의 삼년상 시행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 다.46)

44) 論語, 陽貨篇.

45) 이와 관련하여서는 朴珠, 朝鮮時代의 旌表政策, 一潮閣, 1990이 좋은 참고가 된다.

46) 中宗實錄 卷31, 中宗 13年 1月 甲寅.

사실 최숙생의 의견은 많은 정부 관료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이었 다. 이러한 이유로 중종 11년 領議政 鄭光弼, 右議政 申用漑, 左議政 金應箕 는 서인・공사천례 등의 삼년상 이행의 요구가 포상 및 역의 면탈을 노린 기만적 행위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경국대전 규정의 준수를 주장하였던것이다.47) 그러나 이러한 사족의 기대와는 달리 향리・서인・노비들로부터 삼년상 이행 허가에 대한 요구는 늘어났으며 그것을 자의적으로 시행한 예 또한 증가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와 관련한 논의가 거듭되게 되자 ‘孝’ 의 가치를 국가의 근간으로 내세운 조선의 위정자들로서는 그 가치를 일 상에서 이행하겠다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삼년상 확대 시행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대다수의 관료들이 결국 서인의 삼년상을 찬성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한 사실,48) 그리고 그 이후 결국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삼년상의 시행이 허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의 중론이 되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49) 심지어 삼년 상의 이행으로 인해 군정에 문제가 발생했다며 그 해결을 호소한 관리들 마저 존재했음을 고려한다면50)

47) 中宗實錄 卷26, 中宗 11年 9月 甲辰.

48) 中宗實錄 卷26, 中宗 11年 11月 癸未.

49) 中宗實錄 卷31, 中宗 13年 1月 甲寅.

50) 中宗實錄 卷35, 中宗 14年 1月 庚子.

일정 시점 이후 삼년상례의 보편적 적용 이 대다수의 지배층들의 동의와 지지를 받았음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 한 이유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삼년상을 이행하고 국가로부터 정문복호 를 받게 된 비사족의 수는 현저히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년상과 관련한 이러한 현상은 매우 중요한 논의점을 시사해준다. 그 것은 ‘유교문화’의 확대와 더불어 非兩班士族 집단 역시 그들 자신이 어떠 한 방식을 통해서 지배층이 영위 혹은 독점해 온 지배 사족의 문화를 공 유하고, 이에 수반된 특전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을 가능성을 제시 하기 때문이다. 즉, 법적으로는 양반사족에게만 허락되던 삼년상을 자신 들도 시행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의례 행위를 통해 국가로부터 포 상과 칭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운영체계에 대한 이해임과 동시에 ‘신분경계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가치와 원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즉, 삼년 상의 이행은 단순히 ‘유교’의 가르침에 감화, 감동된 이들의 수동적 반응 이라기보다는 유교문화를 향유하여 국가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추구하고자 한 적극적 움직임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51) 국가 주도 교육기관인 鄕校에서 修學하고자 한 비양반사족 집단의 수가 증가한 현상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향교가 ‘성리 학을 통한 교화’라는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구로써 조선 정부에 의해 중시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는 유교적 군주로서의 정체성을 표방 한 중종이 그의 재위 초기, 小學 등의 보급을 힘쓰는 과정에서 향교를 일으키는 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조선 신 민들의 일상에 변화를 가할 수 있다고 여겨진 소학, 三綱行實圖 등의 찬집과 반포를 명하며, 동일한 맥락에서 향교의 부흥에 대한 명을 내렸던 것이다.52) 물론 훗날 서원의 발달과 더불어 향교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 던 것은 사실이다. 기록에는 “향교에 참여하는 이들은 雜類뿐”임을 적시 한 내용들이 보이는데,53) 이는 유교 경전 수학의 주된 주체인 사족들이 향교를 외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51) 양반사족의 입장에서는 이를 여타 집단의 役을 피하기 위한 기만행위로 여길 수 있 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우리로서는 그러한 입장과 태도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양반만이 누리던 특권을 향유하기 위한 타집단의 적극적 노력의 일환 으로 해석할 여지 또한 있다고 생각된다.

52) 中宗實錄 卷31, 中宗 12年 12月 己巳.

53) 仁祖實錄 卷14, 仁祖 4年 11月 辛卯.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도 불구하고 향교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결코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보 인다. 이는 孝宗 7년, 평안도 향교 대성전이 무너지고 위판이 손상되었을 때 국왕이 대노하여 寧邊府使를 파직하고 守直한 유생도 처벌하려 한 사 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사족에게 외면 받은 이후에도 향교는 ‘유교문 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국가 기관이었던 것이다. 校生들에게 군역 면제의 특권이 주어진 것은 향교의 이러한 중요성에서 기인하는 것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군역 면제는 원래 향교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양반사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사족 지배층 외의 다른 집단들이 교생으로 향교에 출입하게 되면서 그들 역시 이러한 양반들의 특권을 향유하게 되는 현상 이 초래되었다. 이에 대한 양반사족의 비판은 신랄한 것이었다. 그들은 향교가 이미 쓸모없는54) 避役을 위한 장소로 전락했다고 지적하며55) 소 위 ‘雜類’의 향교 출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사족 집단은 그 러한 잡류 교생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꾸준한 방안들을 만들어 내었 는데,56) 이는 강고한 신분질서 유지를 위해 그들이 꾸준한 노력을 지속했 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의 확산을 목표로 하던 지배층에게 교생의 특권 박탈은 결코 용이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 인다. 正祖代에 이르러도 여전히 “군사와 향교에서 일을 보는 자는 각기 정해진 인원이 있는데, 별도로 정원 수 이외의 명목을 만들어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삼는다”라고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57)

54) 中宗實錄 卷32, 中宗 13年 2月 戊戌.

55) 中宗實錄 卷29, 中宗 12年 8月 乙丑; 中宗實錄 卷63, 中宗 23年 10月 丙寅.

56) 이와 관련하여서는 尹熙勉, 朝鮮後期 鄕校硏究, 一潮閣, 1989를 참조할 것.

57) 正祖實錄 卷32, 正祖 15年 3月 戊寅.

결국 이러한 비사족 집단들은 향교에서 수학, 활동하면서 기존에 는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특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 는 결국 당시 사족 외의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국가에 의해 강조된 유・ 무형의 유교 문화를 수용할 경우 국가 역시 그들의 처우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즉, 소위 ‘유교화’를 위한 지배층의 정치, 문화 활동을 접함으로써 조선의 피지배 구성원들은 적어 도 특정 가치와 문화를 향유함에 있어서는 자신들도 국가에 의해 특권계층과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러한 깨달음은 당대의 강고한 신분제의 존속과 그로 인한 사회적 차별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족 집단과 대등한 처우를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 을 인식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결국 朝鮮의 다양한 사회 구 성원들이 당시 존재하던 ‘차별’과 ‘구별’ 속에서도 자신들을 국가에 속한 하나의 동질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공유된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가능 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5. 맺음말-문화, 국가, 민족의식

지금까지 조선에서 벌어진 유교 문화와 제도의 확산 과정에 있어 조선 의 피지배층들이 적극적 수용의 태도를 보였음을 몇 가지 예를 통해 논 하였다. 그리고 삼년상 등의 예를 통해 소위 ‘피지배층’들이 ‘유교 문화’ 를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정책 이행, 결정 과 정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도 지적하였다. Anthony Smith는 “역사의 수동적 객체였던 이들이 권력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지니게 되면서 역사 속의 주체이자 ‘시민 (citizens)’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58) 이러한 주장은 유교의 전파 과정에서 그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으려 했던 조선의 피지배층 사이에 이미 자기 정체성과 관련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Smith는 또한 “문화와 정치의 연결”이야말로 “민족주의의 핵심 요소”라고 주장하였다.59)

58) Anthony Smith, The Ethnic Origins of Nationalism, Oxford, UK: New York, B. Blackwell, 1986, p. 156.

59) Ibid., p. 156.

앞서 살펴본 바와 같 이 조선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지배층의 문화를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음을 배웠으며 이를 통해 중요한 국가의 정치적 결정과 정책의 이행에 간접적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 금 자신들을 신분 경계로 구분되는 각각의 ‘개별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인식하게 하지 않고, 보다 포괄적인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 속한 이들로 서의 확장된 정체성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족’・‘오 민’・‘동포’ 등의 용례 사용에서 보이는 지배층의 끊임없는 자기규정 과정 은 피지배사족들로 하여금 이러한 확장된 공동체 정체성을 갖게 하는 데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교류, 정치 행위, 정체성 형성 과정에 있어 지배층이 강조했던 유교적 가치가 그 근 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Ernest Gellner는 전근대 시대에 ‘민족주의’가 형성 될 수 없는 이유는 지배 엘리트가 자신들의 사회 구성원들을 통합할 수 있는 포괄적 담론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국가의 중요 문화와 그 안에 담겨있는 근본적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상호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Gellner의 주장과는 달리 조선의 사회 구성원들은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공통된 문화와 행위 규준을 상당 부분 공유하 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여기서 당시 조선에 근대 민족주의와 동일한 정체성이 이미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당대에 존재한 강고한 신분질서는 당시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한 공동체 정체성과 현대에 정의된 ‘민족’ 관념을 동일시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진 유교 문화의 전파와 수용과정은 그들 사이에 이미 국가를 중심으로 한 확장된 공동체 정체성이 형성, 공유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역사의식과 문화의 공유로 형성된 이러한 정체성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결정적 기원이 되었을 것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근대 민족관념이 단순히 근대 이후 서구로부터 소개된 것 이라 주장하거나 Benedict Anderson이 제안한 바와 같이 철저한 근대의 산물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1. 1차 사료

經國大典 論語 訥齋集 東文選 明實錄 白水先生文集 三國史節要 義城金氏川上各派篇 正氣錄 朝鮮王朝實錄

2.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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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Construction of State Identity during the Chosǒn Period and the Emergence of Modern Nationalism

Hur, Joon

Scholars such as E. J. Hobsbawm and Linda Colley suggest that ingredients of nationalism and its trajectory are locally embedded and diverse. According to them, Bendict Anderson’s assumption that developments associated with modernity such as print capitalism were crucial to the origin of national consciousness cannot be universally applied to all states. Regarding Korean history, there is a possibility that due to its remarkable endurance and centralized bureaucracy, premodern Korea created a homogeneous collectivity with a sense of shared identity much earlier than happened in European countries. In this vein,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conventional assumption that a nation is a modern phenomenon should be reconsidered. Especially, this study challenges recent Korean historians’ insistence that a Korean “nation” only came into being after the state encountered Western and Japanese imperialism. The social constituents in Chosǒn made efforts to improve their state’s socio-political structure and in the process, came to have a shared sense of same group membership on their own terms. The non-elite challenged social discrimination stipulated in the National Code with their knowledge of Confucian thought and practices, and the state and ruling elite often responded favorably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Confucian values rather than legal regulations. This social interaction provided Chosǒn people with equal behavioral rights, although only in some limited political and cultural spheres.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with continuous and active social interactions, various social constituents in Chosǒn came to share a larger collectivity identified and symbolized by the state. Given this, this study suggests that it is more reasonable to carefully examine how in Korea, whose historical experience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countries of Western Europe, nationalism has been constructed, rather than simply defining the Korean ‘nation’ as a modern novelty.

Key words : Nation, Nationalism, Confucianism, state, collectivity, Chosǒn

접수일자 : 2021년 03월 12일 심사완료 : 2021년 04월 08일 게재확정 : 2021년 04월 22일

서강인문논총 60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