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들어가는 말
2. 중국과 동국(東國), 문화 정체성의 경계
3. 중국 및 일본 관계에서 본 조선의 위상
4. 기자설(箕子說)의 활용과 조선 방식 의 문명론
5. 나가는 말
<국문요약>
이 글은 유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 이 생각한 유교적 문명의식과 민족적 자의식에 대해 분석한다. 주지하듯이 ‘민족’ 개념은 서구 근대의 국민국가(nation-state) 체제를 전제하 며 신분적으로 평등하고 단일한 민족 구성원을 상정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 민족 혹은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19세기 중후반 서구와 일본의 침략 및 국권 침탈, 이에 맞선 한국인의 저항과 투쟁 을 통해 구성된 것이며,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 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이다. 그런데 근대적 민족 관념이 부재했다고 해서, 이 것이 19세기 이전 조선인의 민족적 자의식, 즉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유교 공동체와 그에 수반 된 동질적 관념이 부재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세에 저항하면서 한국인의 집단 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민족에 준하는 통일적인 자의식과 정서를 주조했다고 보면, 우리는 이런 동질적 관념이 늦어도 13세기 몽골 항쟁기에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민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 만 스스로 ‘동인(東人)’이라고 불렀고 단군과 기 자담론을 통해서 자신들의 고유한 민족적 시원 과 보편문명에 대해 성찰했다. 보편문명에의 지 향은 자신들의 특수성, 종족적・지역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이면에 가진 이중적인 사유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인으로서의 주체성은 자신이 보편문명의 담지자라는 자부심의 결과 이기도 하다. 고려 말 지식인처럼 조선후기 유학자 정약용이 동인의 주체성을 피력할 때도 그는 스스로 선진문명의 전수자라는 확신을 가졌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문화를 중화문명의 극치로 보았고 동국(東國)이 곧 중국인데 어디서 문명 화된 중국을 따로 찾을 것인지 반문한다.
중국이 추구해온 유교적 이상 정치를 18세기 조 선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 다.
정약용이 설계한 유교적 이상사회와 문명담 론에는 동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공존했으며, 그는 공유 가능한 보편문명을 추구할 때 비로소 동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의 의미도 존립할 수 있 다고 보았다.
핵심어: 민족, 민족의식(민족관념), 유교문명, 중화주의, 단군담론, 기자담론
1. 들어가는 말
‘민족’ 개념은 그간 인문학 분야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이 된 개념 가운데 하나다.
서구근대의 역사발전에 기초한 ‘내셔널리즘’은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를 전제로 하며 신분적 으로 평등하고 단일한 민족 구성원을 상정한다.1)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민족 혹은 한국 인의 민족의식은 19세기 중후반 서구와 일본의 침략 및 국권 침탈, 그리고 이에 맞선 한국 인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 구성된 것이며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중국을 문명의 모국으로 사대하고 숭배하던 관 념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난 것도 아편전쟁 이후이며, 당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을 더 는 문명의 담지자가 아닌 일국으로 간주하는 시선이 확연해진 상황을 보더라도 이 점을 수 긍할 만하다.
다만 선행연구에서도 보이듯이 서구근대적 민족 관념이 부재했다고 해서, 이것이 19세기 이전 조선인의 민족적 자의식, 즉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통일적인 유교 공동체와 그에 수반된 동질적 관념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2)
1) 근대 민족 관념과 민족주의의 유래 및 성격에 대해서 다음 저술의 서론 도입부를 통해 살필 수 있 다: 이광규, 신민족주의의 세기, 서울대출판부, 2006; 신기욱・이진준, 한국민족주의의 계보와 정 치, 창비출판사, 2009; 이용희, 정치사상과 한국민족주의, 연암서가, 2017; 진덕규 한국의 민족 주의론, 지식산업사, 2021 참조.
2) 사학계에서는 서구근대 민족 관념과 상이한 성격의 동질적 자의식, 근대 민족담론과 어느 정도 구별 되는 통일적 정체성이 이미 우리 역사에 존재했다는 점을 분석한 바 있다. 다만 이 글은 이런 동질적 자의식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춘 글이 아니므로 그간의 논쟁사를 상술하지는 않는다. 이우성, 강만길, 이만열, 한영우, 신용하, 노태돈, 박광용, 조성을, 신운용 등의 선행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몇 해 전 김자현교수의 저서가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으로 번역되었다.3)
그녀는 서구의 민족 개념 연 구사와 비교하며 한국의 ‘민족담론’은 1592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서 ‘임진전쟁’이 발발했 을 때 나타났으며 1627년~1637년에 걸친 만주족의 조선 침략이 한국의 민족담론을 재형 성하고 강화했다고 주장한다.4)
재지사족의 의병투쟁과 민중동원 그리고 전쟁 후 각종 기 념사업들, 전쟁영웅을 사당에 모시거나 무명용사를 기념하는 의례를 시행하는 등 전쟁 유공자를 추존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이고 공공적인 의식, 즉 전쟁을 매개로 한 기억의 국유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기억의 정치에서 조선정부는 민족적 기억의 형성 및 관리자였고, 조선 백성은 공적인 기념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기억의 정치학 속 행위 주체였다고 평가한다.5)
외세에 저항하면서 한국인의 집단적 정체성, 통합적인 자기의식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민족 관념에 준하는 통일적 정서와 의식을 주조했다고 본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13 세기 몽골 제국에 장기간 저항하며 일체감을 형성한 고려인을 떠올릴 수 있다.
원제국에 대한 필사적 항쟁은 고려인으로 하여금 통일된 자의식과 공동체적 감각을 경험하게 했고 당시 단군신화에 기반한 역사서술과 고려 문인들의 저작이 다수 등장한 것은 이런 민족적 동질성 의 체험을 잘 보여준다.6)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가 위서(魏書)와 고기 (古記)에 기반해서 제시한 단군이야기,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에서 소개한 단군과 기자조선 이야기는 중원의 대제국과 다른 자기 종족에 관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물론 이들은 ‘민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동인(東人), 동이(東夷) 혹은 해동(海東), 동방(東方)[我邦], 동국(東國)[本國] 등을 자신과 자기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7)
3) 원제는 The Grear East Asain War and The Birth of Korean Nation이다. 울리엄 허부시, 김지 수 편집, 주채영 번역, 너머북스, 2019.
4) 김자현,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2019, 너머북스, 23쪽.
5) 김자현, 위의 책, 2019, 48~49쪽.
6) 한 심사평에서 대몽항쟁기, 원간섭기의 경우 이를 지배와 피지배라는 ‘민족적 시각’에서 일원적으로 분석한 그간의 연구경향을 반성하면서 민족의식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을 조명하거나 당시의 동질적 정체성을 민족담론과 구별하여 규명한 연구도 있다고 지적했는데 중요한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의 격변기를 근대 민족담론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동질적 정체성을 말할 때 민족적 혹은 종족적 성격을 논하는 것을 지나치게 배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7)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민족적 서사시 「東明王篇」, 이승휴의 帝王韻紀, 최해의 東人之文, 이제현의 益齋亂藁, 「益齋亂藁」의 서문을 쓴 이색의 牧隱集 등에서 위 용어들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동인의식의 배경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임형택, 「고려말 문인 지식층의 동인의식과 문명의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비, 2002; 「문명 개념과 한국의 역사 전환」, 문명의식과 실학, 돌베개, 2009; 정선모, 「고려 중기 동인의식의 형성과 시문선집의 편찬」, 동양한문학연구 36, 동양한문학회, 2013.
이규보(李奎報:1168~1241), 최해(崔瀣:1287~1340),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색(穡:1328~1396) 등 원제국에 유학을 갔던 동국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을 ‘동인’이라고 의식했고 중국과의 분명한 구별의식 그리고 문화적 자 부심과 긍지를 피력했다.
해외 유학파로서 이들이 가진 자부심의 근저에 기자조선의 문명 담론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신화 속의 단군은 나라의 고유한 국조(國祖)로 자리매김되 었고, 기자는 비록 중국 은나라의 유민이지만 주나라 무왕의 신하도 아니었으며[箕子不臣說] 조선 땅에 와서 비로소 동방 교화의 원류[洪範九疇]를 펼친 인물로 존숭되었다.8)
단군신화의 소환은 당연히 독립된 국가로서 동국의 시원을 말하기 위함이지만, 기자담론도 선진적 문명의식과 함께 동국의 문화적 자립성을 말하기 위한 전략적 언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임형택 교수는 기자의 형상이 문명의 개창자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국의 상대적 자립성을 주장하는 논거로 원용되었다고 주장한다.9)
단군으로부터 기자로 이어지는 구도에 동인의식과 문명의식이 혼종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다.10)
8) 牧隱集「益齋先生亂稿序」, 「送偰符寶使還詩序」, 「贈金敬叔秘書詩序」, 「貞觀吟 楡林關作」 참조. 특 히 「정관음 유림관작」은 이색이 20대 초 지은 것인데 “三韓箕子不臣地, 置之度外疑亦得.”라며 기자 가 중국의 신하가 아니었으니 (고려를 간섭하지 말고) 치지도외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표현했 다. 앞의 김경숙에게 준 시 서문에서도 “東方敎化之源, 蓋發於箕子之受封.”이라고 언급했다.
9) 임형택, 「고려 말 문인 지식층의 동인의식과 문명의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비, 2002, 93~96쪽. 10) 임형택, 위의 글, 2002 참조. 최영성은 최치원 연구에서 이와 유사한 관점으로 신라인 최치원의 동인 의식과 보편적인 문명지향적 同文意識을 규명했다. 최영성, 「최치원 철학사상 연구 서설」, 한국사 상과 문화 16, 한국사상문화학회, 2002. 최영성에 따르면(위 논문, 2002, 246쪽) ‘동인의식’이란 표 현은 유승국의 최치원 연구에서 처음 보인다{유승국, 「최치원의 동인의식에 관한 연구」, 화엄사상 과 선문형성: 최치원과 관련하여(제4회 국제불교학술회의 논문집),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1.
보편문명에의 추향은 특수성, 종족적・지역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이면에 가진 이중적인 사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동인으로서의 주체성은 자신이 보편문명의 담지자,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긍지의 결과다.
고려 말 지식인,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동인의 자긍심을 피력할 때 그들은 공통적으로 선진문명의 전수자라는 확신을 가졌다.
문명지향 의식에 주체성과 독립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열등감, 피해의식, 맹목적 모방에 불과 하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문인들이 단군과 기자담론을 매개로 보편문명을 추구할 때 이들 논의에는 동인의 고유함과 특수성에 대한 상이한 감각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 글에서 다루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당시 조선문화를 중화문명의 극치로 보았고 동국이 곧 중국인데 어디서 중국을 따로 찾는지 반문한 인물이다.
그의 다양한 작품들은 정약용이 추구한 보편문명에의 기대와 염원을 담고 있다.
그는 조선인, 동이(東夷)라고 자신을 불렀고 조선인으로서 시문을 쓰는 것을 당당하게 내세웠다.11)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我是朝鮮人)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이다(甘作朝鮮詩).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卿當用卿法) 오활하다고 비난할 자 그 누구인가(迂哉議者誰). (중국의) 구구 한 시격이며 시율을(區區格與律) 먼 데 사람[東夷]이 어찌 알 수 있으랴(遠人何得知).”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니(梨橘各殊味)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다(嗜好唯其宜).”
명나라 시인 이반룡이 동이를 희롱한데 대해 자신이 조선인으로 조선풍의 시를 쓴다는 것 을 자부한 말이다.12)
그의 이 같은 주체적 발언은 물론 중국이 추구해온 삼대의 이상 정치 를 다름 아닌 18세기 조선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본 강한 자부심의 표현 이다.
이전 시대 선배들보다 강한 어조로 유교문명의 보편성을 내세운 정약용, 그가 설계한 유교적 이상사회와 문명담론에는 동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공존했으며 또한 공유 가능한 보 편문명을 추구할 때 비로소 민족적 특수성과 고유성의 의미도 존립할 수 있다고 보았음을 서술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2. 중국과 동국(東國), 문화 정체성의 경계
17세기 중반, 조선은 두 번의 전란을 겪었고 중국은 명청 교체기를 맞았다.
특히 청국과 벌인 전쟁의 패배와 참상은 조선 지식인의 정체성을 크게 동요시켰다.
주희의 성리학에 기반, 화이론적 측면에서 중화주의를 중시하고 조선과 중국의 일체감을 강조한 노론계 학풍이 더 강화되기도 했지만, 한편 소론・남인계 지식인은 자기 정체성의 변화를 새로운 고대사 인식에 투사했다.13)
11) 茶山詩文集 卷六, 「老人一快事」 六首 중 5수. “老人一快事, 縱筆寫狂詞. 競病不必拘, 推敲不必遲. 興到卽運意, 意到卽寫之.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卿當用卿法, 迂哉議者誰. 區區格與律, 遠人何得知. 凌凌李攀龍, 嘲我爲東夷. 袁尤槌雪樓, 海內無異辭. 背有挾彈子, 奚暇枯蟬窺. 我慕山石句, 恐受女郞嗤. 焉能飾悽黯, 辛苦斷腸爲. 梨橘各殊味, 嗜好唯其宜.”
12) 송재소, 다산시 연구, 창작과 비평, 2014, 42~44쪽; 송재소, 「다산의 조선시에 대하여」, 한국한 문학연구 2집, 한국한문학회, 1977, 95쪽 참조.
13) 정재훈, 「조선후기 사서에 나타난 중화주의와 민족주의」, 한국실학연구 8, 2004 참조. 소론계 지식 인들의 북방 고대사 인식과 기자 중심의 상고 중화주의, 남인계 지식인의 관점에 대해서 조성산, 「조선후기 소론계의 고대사 연구와 중화주의의 변용」, 역사학보 202, 역사학회, 2009; 조성산, 「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대청인식의 변화와 새로운 중화관념의 형성」, 한국사연구 145, 한국사연구회, 2009 참조.
‘단군정통론’, 즉 단군을 혈연적 시조로서뿐만 아니라 고대 조선문화의 원형으로 간주, 단군과 기자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혈연과 문화(문명)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이종휘(李種徽:1731~1797)의 동사(東史)가 등장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종휘는 한국사 서술에서 최초로 「단군본기」를 기전체 역사서에 편입시켰는데, 이 것은 「단군세가」를 작성해서 최초의 교화군주를 환웅으로 설정, 단군 이전으로 올라갔던 남인학자 허목(許穆:1595~1682)이 지은 동사(東事)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 다.14)
허목은 동사의 서문에서 “신시(神市)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의 제곡(帝嚳)과 요순의 시대에 해당한다[神市檀君之世, 當帝嚳唐虞之際.]”고 보았고15) 환인의 아들 환웅을 신 시로 표기하며 그가 ‘생민지치(生民之治)’를 펼쳐 민이 귀의했다고 서술했다.16)
은나라 종실인 기자를 주나라 무왕이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은 것은 아니며[武王因以封之而 不臣也] 이로부터 동국(東國)은 이미 중국 삼대에도 없던 교화를 구현했다고 평가한다.17)
「단군세가」와 「기자세가」를 병렬하여 서술한 허목의 의도는 물론 동방[동국]이 별국으로서 독립성을 지녔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는 1677년 숙종에게 동사를 올린 글에서 동방구역(東方九域)을 상고시대부터 입후건국(入后建國)한 나라들로 방외별국(方外別國) 이라고 표현한다.18)
중화와 이적[九夷]의 구분을 무력화하는 허목의 관점은 남인학자 이익(李瀷:1681~1763)에게서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이익은 제자 안정복의 동사강목 집필에 주도적으로 간여하며 자신의 사론을 피력했다.19)
14) 정재훈, 위 논문, 2004, 313쪽; 조성산, 「조선후기 소론계의 고대사 연구와 중화주의의 변용」, 68~69쪽; 김태희, 「근대 이전 시기 ‘동인’의식의 구조와 그 변천」, 민족학연구 8, 한국민족학회, 2009, 135쪽 참조. 15) 許穆, 記言 권32, 東事, 「序」. “神檀君之世, 當帝嚳唐虞之際.”
16) 許穆, 記言 권32, 東事, 「檀君世家」. “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 之. 허목이 동사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을 ‘신시’로 표기한 것은 특이한 용례인데 도가류 작품 규원사화 같은 곳에 비슷한 용례가 나타난다. 양난 이후 선가계통에서 만들어진 규원사화는 환인, 환웅과 단군을 중심으로 동이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정영훈, 「한국사 속에서의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적 성격」, 한국정치학회보 28, 1995, 36쪽 참조.
17) 許穆, 記言 권32, 東事, 「箕子世家」. “箕子, 殷之宗室也. 封於箕, 子爵, 故曰箕子. (…) 箕子乃去 之, 至朝鮮, 殷民從之者五千餘人. (…) 武王因以封之而不臣也. 都平壤, 古有檀君朝鮮, 謂之箕子朝鮮. 始至言語不通, 譯以通其志. (…) 東國被箕子之化, 門不夜扄, 婦人貞信不淫, 治敎長久, 國祚不絶千有 餘年, 此三代之所未有也.”
18) 許穆, 記言 권52, 「上經說東事箚」. “蓋東方九域, 上古立后建國, 大小二十二, 爲方外別國.”
19) 이익과 안정복의 서신 문답을 통해 동사강목 작성에 미친 이익의 관점과 두 사람의 사관 차이를 분석한 글로 김문식, 「성호 이익의 역사인식: 한국사와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성호 이익 연구, 사람의무늬, 2012 참조.
이익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상이하게 이해하여 종래의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을 반어적으로 해석, 결국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다고 풀이했지만, 중화와 이적 간의 문화적 우열, 문화적 차등성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20)
“중화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을 천시하는 것은 아무 의리 가 없다”고 제자 안정복에게 강조한 것이다.21)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익은 원・명과 요・금의 정통성을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한다.
국가에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받은 것은 공통적이고 국왕이 직접 중국에 입조한 것은 원나라에만 해당되기 때 문에 외교 의례만 구분하면 될 뿐 원・명과 요・금의 정통성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22)
성호학파 선배들과 학술적으로 깊이 교류한 정약용은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자의 평양고도설도 회의했던 만큼23)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을 피했다.
정조 책문에 답한 「지리책」에서 조선이란 국호가 단군시대로부터 연원한다고 본 국왕의 발언에 동조했지만, 당연히 정약용은 단군과 관련된 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다만 유배기에 작성한 아방강역고「조선고(朝鮮考)」에서 ‘조선’이란 명칭이 평양의 옛 이름인데 이것은 본래 기자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라고 주장하였다.24)
20) 단군과 기자문명에 대한 이익의 변화된 관점에 대해서 김문식, 「성호 이익의 기자 인식」, 퇴계학과 한 국문화 33, 경북대 퇴계학연구소, 2003; 김문식, 「성호 이익의 북방 인식」, 성호학보 14, 2013 참조.
21) 李瀷, 星湖先生全集 권25, 「答安百順問目」. “貴夏賤夷, 爲無義也. 我自反覆, 何賤乎彼哉?”
22) 김문식, 위의 글, 「성호 이익의 역사인식: 한국사와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2012, 304쪽 참조.
23) 茶山詩文集 권14, 跋, 「跋箕子井田圖」. “箕子之必都平壤, 本無明據. 平壤若係箕子故都, 則不應以王 儉城得名也.”
24) 我邦疆域考 卷一, 「朝鮮考」. “朝鮮之名, 起於平壤, 寔本箕子之所都也.(...)知朝鮮之名, 必起於平壤者.”
본론 마지막 장에서 상술하듯이, 정약 용은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도 구체적 논거로써 고증했다기보다는 경전에 대한 의리적 해석을 통해 기자설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주목할 점은 정약용도 성호 이익과 마찬가지로 서학 유입을 비롯한 시대의 지적 변화에 민감했고 더는 혈연・지리 등에 기반한 화이설을 주장하지 않았던 점이다.
문화적 차이에 따른 우열을 말했지만 이것도 이적이 중화의 문물을 습득하면 소멸되는 임시적인 구별일 뿐이다.
이 점에서는 다산도 이익과 유사한 입장을 개진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이적[九夷]이 중화문명을 구현한 역사적 사례들에 대해 「동호론(東胡論)」, 「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선비, 거란, 여진 등이 모두 문명에 합류한 경험이 있다고 봄으로써 화이론의 폐쇄적 논리를 돌파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는 선비족인 척발위가 중국에 들어가서[北魏] 예악을 숭상하고 문학을 장려했으며, 요 (遼)의 태조 아보기(阿保機)는 천륜에 돈독한 자로 순임금 이후 보기 드문 인물이며 이후 거란의 정치가 성대하고 장구했다고 호평한다.
여진족도 두 번 중국에서 권력을 잡는데 금 나라와 청나라 모두 모범이 될 훌륭한 정사를 펼쳤다고 평가했다.25)
물론 동이 가운데 조선이 정동쪽에 위치해 풍속과 예절이 빼어나고 무력을 천시했기 때문에 비록 유약했을지라 도 난폭하지 않았기에 가장 군자국이라 할 만하다고 자부한다.
무력을 멀리한 군자국 조선에 대한 정약용의 평가는 뒷날 「일본론」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된다.
일본의 군사적 침략 위험을 그들의 문명화 정도로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성인의 법이 중국이면서도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취급하고 오랑캐라도 중국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했기에, 중국과 이적의 구분은 도리와 정치에 달린 것이지 지역에 따른 구분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26)
그는 척발위 같은 인물이 스스로 중국이 되어 문명을 실현했 는데 편협한 사가들이 이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요순우탕의 유민이 괄시받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정약용은 화이 구분을 지역과 혈연으로 따지지 않고 동질적인 문화 정체성의 유무로 판 단했기 때문에 중원 지역인 중국 땅에 출입하는 것을 뽐내는 세태를 경계했다.
자신의 벗 교리 한치응이 이런 부류에 속했기에 다산은 의도적으로 중국과 동국이란 말로 그를 자제 시켰다.
“내가 살펴보니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중앙[中]’이 되는 까닭을 나는 모르겠으며, 이 른바 ‘동국’이란 것이 ‘동쪽’이 되는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닌 곳이 없으니 어찌 ‘동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미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닌 곳이 없으면 어찌 별도로 ‘중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중국’이란 무엇을 두고 일컫는 것인가? 요순우탕의 정치가 있는 곳을 중국이라고 말하고, 공자와 안자, 자사와 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을 중국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중국이라고 말 할 만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성인의 정치와 성인의 학문을 우리 동국이 이미 얻어서 옮겨왔는데, 다시 멀리에서 구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27)
25) 茶山詩文集 권12, 論, 「東胡論」. “拓跋魏, 鮮卑也, 其入中國也, 崇禮樂獎文學, 制作粲然. 契丹, 東胡 也. 阿保機【遼太祖】敦於天倫, 刺葛三叛而三釋之, 此虞舜以來所未有也. 其制治之盛, 歷年之久, 實 中國之所堇獲也. 女眞再主中國, 而其在金也, 虜宋之二帝, 而終不加害. (...) 淸之得國也, 兵不血刃, 市 不易肆. (...) 史稱東夷爲仁善, 眞有以哉. 況朝鮮處正東之地, 故其俗好禮而賤武, 寧弱而不暴, 君子之 邦也. 嗟乎, 旣不能生乎中國, 其唯東夷哉.”
26) 茶山詩文集 권12, 論, 「拓跋魏論」. “聖人之法, 以中國而夷狄, 則夷狄之, 以夷狄而中國, 則中國之, 中國與夷狄, 在其道與政, 不在乎疆域也.”
27) 茶山詩文集 권13, 序, 「送韓校理【致應】使燕序」. “以余觀之, 其所謂中國者, 吾不知其爲中, 而所謂 東國者, 吾不知其爲東也.(...) 夫旣得東西南北之中, 則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東國哉?夫旣無所往 而非中國, 烏覩所謂中國哉? 卽所謂中國者, 何以稱焉? 有堯舜禹湯之治之謂中國, 有孔顏思孟之學之 謂中國, 今所以謂中國者, 何存焉? 若聖人之治, 聖人之學, 東國旣得而移之矣, 復何必求諸遠哉?”
지구설 등 다양한 서구의 자연과학 지식이 유포된 상황에서 더는 동서남북의 절대적인 기준이란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다.
정약용도 동서남북의 중앙이란 누구라도 자신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천문의 별자리 가 항상 이동하기 때문에 특정한 자리에 붙어 있지 않은데 이것을 사방에 붙박아 놓은 것 자체가 억지며, 특정한 방향으로 불지 않는 바람을 곡풍(谷風:동풍), 양풍(涼風:서풍), 개 풍(凱風:남풍), 태풍(泰風:북풍)이라고 부르며 동서남북의 정해진 방소로 정의한 것도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다.28)
“각국에는 본래 본국의 사방(四方)이 있어서 사방의 문을 통하게 되고 중국에는 중국의 사방이 있어서 사방의 국경을 통하게 된다.”29)
정약용 의 이런 발언은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개진된 실옹의 발언을 연상시킨다.
“각기 제 나 라 사람을 친애하고 제 나라의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의 풍속을 편하게 여기는 것은 중국 이나 오랑캐나 모두 마찬가지다.”30)
중국에 천문과 사방, 생활풍속이 있다면 구이(九夷)의 각국에도 구이의 천문과 사방, 생활풍속이 있기 마련이다.
춘추의리와 중화문물은 나라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구현 가능하며 더는 누구에게도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다.31)
문화 정체성에 의해 화이를 구분했지만 보편문명의 이치는 누구라도 자신 의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문화 정체성에 의한 구별도 항구불변적인 것일 수 는 없었다.
이 정체성의 경계에서 보면 중화와 이적, 중국과 동국의 실체적 구별은 무의미 하다.
다산이 「동호론」에서 동이를 말할 때도 조선만이 아닌 동북방 지역 여러 이민족[九 夷]을 포괄했는데 이 역시 공존 가능한 문화적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지 반드시 일국으 로서 조선만을 가리킨 표현이 아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32)
28) 茶山詩文集 권9, 策問, 「問東西南北」
29) 茶山詩文集 권9, 策問, 「問東西南北」
30)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四, 毉山問答. “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是以各親其人, 各尊其君, 各守 其國, 各安其俗, 華夷一也.”
31) 정약용의 이런 생각은 사환기 때 ‘孟子不尊周說’를 묻는 정조 책문에 답할 때도 유사하게 드러났다.
정조는 춘추에서 유독 주나라만을 높이라고 했는데 맹자는 누구라도 왕도정치[王政]를 시행하 라고 권했으니, 맹자의 소원이 공자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이처럼 반대되는 듯한 견해를 피력한 이 유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맹자책」에서 정약용은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도 주나라를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도정치를 촉구한 것이라고 답함으로써 맹자에서 제시된 ‘行王’의 의미가 보편적인 시대적 요청이었음을 상기시켰다. 茶山詩文集 권8, 對策, 「孟子策」 참조.
32) 정약용의 ‘동호론’을 ‘동이론’으로, 포괄적인 동아시아 담론으로 확장하면 20세기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동양평화론, 세계평화론의 대두를 역사적으로 재소환된 문명담론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질적인 문화적 정체성, 보편문명을 추구한다는 것이 각국의 정치・사회적 경계, 강역에 따른 군사적 경계까지 무력화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리책」에서 정약용은 본국, 즉 ‘아방(我邦)’이나 ‘동방(東方)’으로 표현한 조선의 통치와 교화를 위해 제대로 된 지리서를 완비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비록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은 중국에서 모방해 왔을지언정 도서(圖書)에 기록하 는 것에서는 마땅히 우리나라 것에 밝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경 밖에 있는 신기한 것을 탐색하며 연구할 수 없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어찌 우리나라 국토 안에 있는 가깝고 실 한 것을 조사해서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밝히는 것과 같겠습니까? (...) 우리나라 선 비들은 지리서를 상고하고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지리에 소홀하고 어두운 점이 많으므로, 세상 천하의 일은 멀찍이 버려두고 우리나라 안의 일도 망연히 분별하지 못합 니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범례(凡例)를 모방하되 소략하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서 지리서 한 부를 편찬할 때 피차 강역의 분계를 세밀하게 밝히고 고금의 연혁 된 제도에 대해서도 그 사실을 상세히 (기록)해야 합니다.”33)
33) 茶山詩文集 권8, 對策, 「地理策」. “雖聲明文物, 摹擬於中華, 而圖書紀載, 宜明乎本國. 與其探奇搜 神於方域之外, 欲窮其不可窮之理, 曷若察邇覈實於方域之內, 以明其不可不明之事哉? (...) 唯是我東 儒者, 艱於考檢, 理多疎暗, 普天之下, 逖矣姑舍, 方域之內, 茫然不辨. (...) 取大明一統志, 倣其義例, 正其疎失, 纂成一書, 疆域彼此之分, 旌其絲髮, 沿革古今之制, 詳其事實.”
정약용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조차 모두 ‘미상(未詳)’ 으로 처리했고, 정인지의 고려사 「지리지」에도 잘못된 기록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이 나오며, 여지승람은 연혁에 대한 사실을 싣지 않았고, 문헌비고도 빠뜨린 명론(名論)이 너 무 많다는 점을 열거하면서, 지금까지 지리서를 편찬할 때마다 자신들의 견해만 잡기(雜 記)하여 취택하고 두둔하려는 사심이 작용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지리서 한 부가 아직도 편찬되지 못했음을 개탄한다.
우리나라 동국의 지리를 탐구하고 변화된 제도들을 기 록하되, 대명일통지의 범례를 따르더라도 그것의 잘못된 점을 확실히 수정해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유교적 보편문명을 지향하더라도 본국의 지리와 물정에 더 밝아야 함은 물론이고 나라 간의 경계와 강역의 구분을 엄밀히 할 것을 주장하며 국방 경비에 관 심을 기울인 점은 당연히 통일적인 정치 공동체로서 조선이라는 국가 관념을 전제한 발언 이라고 볼 수 있다.
3. 중국 및 일본 관계에서 본 조선의 위상
정약용은 민간의 이용후생을 위해서 중국의 신식묘제를 하루속히 배워야 한다고 보았 다.34)
우리나라의 낡은 백공의 기예가 모두 옛날에 익힌 중국 법제이기 때문에 신기술을 수입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백성이 사용하는 기물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부히 해서 생 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긴요한 기술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수용해야 할 지 식이라고 보았으니35) 이른바 북학의 실용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정약용도 철저히 공감했다 고 볼 수 있다.36)
근래 유구국(琉球國) 사람들이 중국 태학에 입학해서 문물과 기술을 배 워갔다는 논의가 지봉집(芝峯集)에 인용되었음을 상기하고, 일본이 중국 강소성과 절강 성을 왕래하며 정교한 기술을 익힘으로써 적어도 기술 차원에서는 중국과 대등해졌기에 군대가 강성하고 백성이 부유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이웃 나라가 침략하지 못할 방책도 마련했다는 점에 주목한다.37)
다산은 효제와 예의의 풍속이 우리나라가 가장 밝기 때문에 외국에 힘입을 필요가 없지만 부민강병을 위한 방책에서는 외국의 기예를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청국의 기술뿐만 아니라 일본 기물의 정교함과 조련법, 선박제도 등이 탁월하기 때문에 수용해야 하는데, 일본을 방문하는 제술관조차도 그런 점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38)
「지리책」에서 정약용은 우리나라 국토가 삼면이 바다인데 모두 적과 인접하고 있음을 우려하며 왜적과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경계했다.39)
원나라가 대마도를 침략한 후부터 고려는 왜적과 원한을 맺게 되었고 국조 중엽 임진년 때 그 피해가 극심해졌다고 보았다.
다산은 과거 폐사군(廢四郡) 지역을 다시 복구해서 백성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본 것처럼40) 일본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울릉도와 손죽도(損竹島) 등을 빈 섬으로 방치하는 것이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상술한다.
34) 茶山詩文集 권11, 論, 「技藝論」 1 참조.
35) 茶山詩文集 권11, 論, 「技藝論」 3 참조.
36) 정약용은 經世遺表 卷二 「冬官工曹」, 事官之屬, ‘利用監’을 통해 북학을 배우고 활용하는 방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37) 茶山詩文集 권11, 論, 「技藝論」 3 참조.
38) 茶山詩文集 권14, 跋, 「跋海槎聞見錄」. 정약용은 海槎見聞錄을 작성한 申維翰이 일본을 방문했 을 때 이 같은 점에 주목하지 못했음을 우려했다.
39) 茶山詩文集 권8, 對策, 「地理策」 참조.
40) 茶山詩文集 권12, 論, 「廢四群論」. 폐지된 사군(四郡)은 무창(茂昌), 여연(閭延), 우예(虞芮), 자 성(慈城)이다. 다산은 폐지된 사군을 하루속히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이라도 백성을 모집해서 울릉도로 이주시키는 한편 진보(鎭堡)의 설치도 지연시킬 수 없음을 강조했다.
특이한 점은 정약용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좋은 계책만 미리 세운다면 크게 염려할 것이 없다고 안심한 점이다.
심각하게 우려할 곳은 오히려 국토의 서북쪽 지역이라고 말한다.
민보의(民堡議) 「총의(總義)」에서 다산이 언급했듯이 북방 지역의 청과 몽골에 비해 남방의 일본 세력은 비교적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다만 일본 내 관백(關白)의 지도력이 느슨해져서 일본 전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일본 변방의 무리들이 조선을 침략하는 일만 없다면 충분히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41)
정약용의 이런 판단은 과거 임진년 침략에 대한 성찰을 거친 것이지만 결국 어긋난 예측 이 되고 말았다.
19세기 말 일본식의 문명화는 무력에 기반한 대외팽창 정책으로 드러났는 데, 다산은 일본의 문명화가 오히려 동아시아의 무력 충돌을 억제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낙관했던 것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근래 자신이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 명 유들-적생조래(荻生徂徠), 태재 순(太宰純) 같은-의 글을 보니 문장이 정밀하고 날카로워서 배울 만한 점이 있다고 논평했다.42)
41)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새문사, 2009, 제3부 5장, 「정약용의 대외인식과 국방론」, ‘일본에 대한 인식’, 2009, 359~365쪽 참조.
42) 茶山詩文集 권21, 書, 「示二兒」. “日本近者, 名儒輩出, 如物部雙柏號徂徠, 稱爲海東夫子, 其徒甚多. 往在信使之行, 得篠本廉文三度而來, 文皆精銳. 大抵日本本因百濟得見書籍, 始甚蒙昧, 一自直通江浙 之後, 中國佳書, 無不購去. 且無科擧之累, 今其文學, 遠超吾邦, 愧甚耳.”
오늘날 일본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면서 문물을 신 속히 받아들이고 과거제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은 조선보다 낫다고 보았다.
일본에 대해 군사적으로 크게 경계할 것이 없다고 안심한 것은 결국 그들의 문화와 문명이 예의염치를 아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명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졌 던 것이다.
“지금은 일본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 내가 이른바 고학선생(古學先生) 이등유정(伊 藤維楨)이 지은 글과 적선생(荻先生)[(荻生徂徠)], 태재 순(太宰純) 등이 논한 경의(經 義)를 읽어보니 모두 문채가 찬란했다. 이 때문에 지금 일본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음 을 알았다. (...) 대개 오랑캐를 방어하기가 어려운 것은 문물이 없기 때문이다. 문물이 없 으면 예의염치로 사나운 마음을 분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할 수 없고 원대한 계책으 로 무턱대고 뺏으려는 욕심을 중지시킬 수가 없다. (...) 이것이 방어하기 어려운 이유다. (...) 지금 우리나라의 주현이 일본과 싸우지 않은 지 이미 2백여 년이 되었고, 중국도 서로 물화를 매매하는 배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진실로 예의와 문물이 그들의 천박 하고 탐욕스러운 풍속을 대폭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고칠 수 없었던 것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저항도 없이 그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 문(文)이 우세해지 면 무사(武事)를 힘쓰지 않기 때문에 망령되이 이익을 노려 움직이지 않는다. 위에 열거 몇 사람들이 경의와 예의를 말한 것이 이러니, 일본에도 반드시 예의를 숭상하고 나라 의 원대한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일본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다 고 생각한다.”43)
정약용은 문치가 우세해서 경의와 예의를 아는 상황이 되면 결코 무력으로 이익을 탐하 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우리나라에 문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수양제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오거나 당태종이 군사력을 총동원했어도 동국을 치지 못했던 것, 고려가 여진을 굴복시 켰고 유구국을 위력으로 제압했던 것도 모두 예의염치를 몰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자성한다.
반대로 문물이 성대해지고 예의를 숭상하는 자들은 외적이 침입해도 두 손을 맞 잡고 공물을 바치며 화친한다고 보았으니 이것이 사대교린의 기본 입장인 것은 분명하지 만, 오늘날 민족국가 간 치열한 경쟁논리와 침략전쟁을 생각하면 다산의 발언이 부당하게 보일 수 있다.
두 번째 「일본론」에서도 정약용은 당시 일본이 강소성, 절강성을 통해 중국과 활발히 교통하면서 문물을 익히고 있기에 과거처럼 함부로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만약 국력의 허실과 무비(武備)의 소밀(疏密)을 살펴 승패의 형세를 헤아린 다음 일을 도모했다면 일본이 이미 백 번 쳐들어왔을 것이고 우리는 이미 백 번 패했을 것이 라고 추정하며 어떻게 지금까지 우리가 무사히 편안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한다.44)
43) 茶山詩文集 권12, 論, 「日本論」1. “日本今無憂也. 余讀其所謂古學先生, 伊藤氏所爲文及荻先生太 宰純等所論經義, 皆燦然以文, 由是知日本今無憂也. 雖其議論間有迂曲, 其文勝則已甚矣. 夫夷狄之 所以難禦者, 以無文也. 無文, 則無禮義廉恥, 以愧其奮發鷙悍之心者也, 無長慮遠計, 以格其貪婪㩴取 之慾者也.(...)斯其所以爲難禦也.(...)今我邦州縣不與交兵, 已二百餘年. 中國互相市貨, 舟航絡續. 苟 非有禮義文物, 有以大變其輕窕貪賊之俗, 何累千百年莫之或改者, 能一朝而帖然寧息如此哉?文勝者, 武事不競, 不妄動以規利, 彼數子者, 其談經說禮如此, 其國必有崇禮義而慮久遠者. 故曰, 日本今無憂 也.”
44) 茶山詩文集 권12, 論, 「日本論」2. “日本未通中國, 凡中國之錦綉寶物, 皆從我得之, 又其所孤陋我人 之詩文書畫, 得之爲奇珍絶寶. 今其舟航直通江浙, 不唯得中國之物而已, 竝得其所以製造諸物之法, 歸 而自造而裕其用, 又安肯劫掠鄰境, 取竊盜之名, 而僅得其粗劣苦惡之物哉? 此日本之無可憂五也. 若夫 覘國力之虛實, 察武備之疎密, 量度於勝敗之數, 而爲之權而已, 則彼已百來, 我已百敗, 無噍類矣, 豈至 今安然無事哉?
다산의 이런 해명은 앞서 「동호론」에서 우리는 “무력을 천시했기 때문에 비록 유약했을 지라도 난폭하지 않았기에 가장 군자국이라 할 만하다”고 했던 그의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비록 군사적 힘이 없어서 조선이 전란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것이 무력과 폭력을 함부로 휘두른 상대국 일본의 정당성, 즉 그들의 도덕성과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결 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민보의 등을 통해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군 사적 계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는 동시에 맹목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거나 대외팽창 정 책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경계심도 보여준다.
전란의 고통이 심해도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우리도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이 추구할 가치, 보편문명은 무력이나 폭력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행 재잡록(行在雜錄)」 서문에서 구별했던 것처럼, 명과 청에 대한 조선인의 관점은 단순히 그 들이 한족인지 이족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예의로 맺어진 자율적 관계인지 무력으로 맺어진 타율적 관계인지에 따라 상대방을 문명국가[上國]와 군사적 대국[大國]으로 구분했다.45)
청국이 조선을 후하게 대해도 이것은 고마운 은혜가 아니라 굴욕적인 시혜일 뿐인데, 그 이 유는 조선이 폭력[병자호란] 앞에 굴복해서 대국으로부터 혜택과 이득을 타율적으로 받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암 혹은 다산이 생각한 국가와 민족의 경계에는 무력과 폭력 이라는 반-문명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데 반대로 문명화된 곳은 폭력과 무력 없이도 서로 다른 종족들이 공존하는 세상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정약용이 생각한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기 위해 2008년 학계에 처음 소개된 사대고 례(事大考例)라는 조선국의 대청외교 관련 문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46)
책의 앞부분에 수록된 「사대고례찬집인기(事大考例纂輯因起)」에 의하면 이 책은 중국과의 외교의례 절 차와 제도 등을 정리하기 위한 정조 23년(1799)의 어명에서 시작되었고 실질적인 완성은 순조 21년(1821)에 이루어졌다. 담당부처인 사역원에서 이 일을 진행했는데 사대고례의 편찬 주체는 전임 사역원정(司譯院正) 이시승(李時升)으로 되어 있다.
사암선생연보는 정약용이 60세 때(1821년) “봄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를 완성하였다”고 기록했 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사대고례의 공식 편자는 이시승이지만 정약용이 편찬의 실질적 인 주재자로서 전체 구성을 관장했고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직접 집필하였으며 강진의 제 자 이청은 편찬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작품을 다산학단 전체의 성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47)
45) 朴趾源, 熱河日記「行在雜錄」, ‘行在雜錄序’ 참조.
46) 임형택 교수에 의해 학계에 처음 소개된 이 책의 원본은 현재 일본 오사카 府立 나카노시마(中之 島)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필사본 26권 10책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출간한 다산학단 문헌집성(2008) 제8책에 수록되어 있다. 책의 앞부분에 이 책의 전체 편찬 경위를 설명 하는 「事大考例纂輯因起」가 실려 있다. 1899년 정조의 어명에 의해 시작된 이 책의 원래 편찬 동기, 취지와 기본 방침을 설명했다. 임형택, 「事大考例와 정약용의 대청관계 인식」, 다산학 12, 2008 참조.
47) 임형택, 위의 논문, 2008, 31쪽 참조.
현재 여유당전서 제15권에 「사대고례제서(事大考例題敍)」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사례고례 전체의 범례와 각 편에 붙은 머리말, 제일 마지막에 수록한 「대청세계략」 등이 실려 있다.48)
조선과 청국 사이에 실질적인 사대외교 가 시작된 것은 청나라 황제 태종이 ‘숭덕(崇德)’ 연호를 쓴지 두 해가 된 1637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봉전고서(封典考敍)」에서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중국에서 책봉을 받았는 데,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을 그 시초로 보았고 한무제 때는 위만을 외신(外臣)으 로 삼았다고 기록한 점이다.49)
송나라 때도 계속 책봉을 받았음은 물론인데 요와 금을 함 께 섬겨 양쪽에서 봉작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상국 명나라를 잘 섬겨서 국왕은 물 론이려니와 곤전을 정하고 동궁을 책봉하는 일까지도 모두 상국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근래 청태종 숭덕 이후에도 전례에 따라 청나라를 섬기는 예에 부족함이 없도록 함을 기술 했는데, 전반적 기조는 외교의례에 걸맞는 절차와 절목을 상세히 열거하되 “사정이 중국에 중요한 것이면 중국의 연호로 기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면 우리의 연차로 기록했다” 고 하듯이 아국, 아방의 연차에 따라서 서술하려고 한 노력이 엿보인다.50)
사대고례가 청국에 적용되는 시점(1637년)에는 달랐지만, 정약용이 활동할 당시 18세기 후반에는 이미 화이론이 크게 일변했고 청국의 신기술과 문예 등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유행하였다.
더는 숭명반청(崇明反淸)의 명분론만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형택 교수는 “ 사대고례가 청황제 체제에 대한 정신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청과의 문화적 소통이 활발 하게 진전된 시대에 대면해서 대청관계를 제대로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편찬한 문헌이다” 라고 논평하였다.51)
중국과 우리나라의 연호를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사용하고자 한 범 례의 취지를 보더라도 대국 청과의 관계에서 고착된 기존의 명분론을 벗어나 현실 정세에 맞는 실용적 태도를 취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대목에서도 정약용이 동국의 현실적 정세나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 여부를 떠나 조선이 지켜온 도덕적 정통성, 즉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속 주목한 점을 상기할 만 하다.
이 점은 청국에서 책봉을 받게 된 경위, 책봉 전후 발생한 사건들을 소개한 「군무고 (軍務考)」 내용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52)
48) 茶山詩文集 권15, 敍, 「事大考例題敍」 참조.
49) 茶山詩文集 권15, 敍, 「封典考敍」 참조.
50) 茶山詩文集 권15, 敍, 「發凡」. “事情歸重於大國者, 紀中朝年號, 歸重於我邦者, 紀本朝年次.”
51) 임형택, 위의 논문, 2008, 43쪽 참조.
52) 事大考例 「軍務考」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다산학단 문헌집성(2008) 제8책에 수록되어 있다. 事大考例 卷九, 「軍務考」, ‘鼎革交兵例’, 525~544쪽 참조. 이곳에 수록된 주요 사 건을 소개한 임형택 교수의 위 논문, 2008, 40~41쪽 내용을 참조하여 요약, 정리하였다.
「군무고」의 첫머리에 ‘정혁교병례(鼎革交兵 例)’가 기록되어 있다.
청국과 군신의 예를 맺은 후부터 조선은 청국이 명나라 군을 칠 때 전쟁 지원군 파병을 강요당했다.
조선은 “(崇德 2년) 정월 30일 이전에 명조(明朝)의 신자 (臣子)였지만 30일 이후부터는 대청(大淸)의 신자(臣子)입니다.”라고 맹서했고, 조약문에 서 청국이 요청할 시 수륙 양군을 의무적으로 파병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조선은 청국의 파 병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었지만 반대로 명군을 척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몹시 주저했다.
책봉 관계가 명에서 청으로 바뀐 것을 개가한 부인의 사례에 비유하여 여자가 어쩔 수 없 이 개가했다고 해서 전남편을 해칠 수는 없다고까지 변명했다.
주목할 곳은 「군무고」 ‘정혁교병례’ 마지막에 정약용이 ‘신근안(臣謹案)’에서 자신의 견 해를 피력한 대목이다.
“정혁하던 때 남북이 서로 싸울 때 우리가 (명과) 내통한다고 의심 하여 여러 번 문책하는가 하면 혹은 싸움을 돕는 태도가 불성실하다고 탓하기도 하고 혹 은 명과 화전(和戰)할 것인지 아니면 싸움을 계속할 것인지 물어보면서 우리를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의리를 지키고 구은(舊恩)을 저버리지 않 는 모습이 저들을 충분히 감복시켜서 용서를 받았다”
라고 기술했다.53)
53) 事大考例 卷九, 「軍務考」, ‘鼎革交兵例’, “臣謹案[공식 편찬자 이시승을 대신해서 정약용 본인의 생각을 기술함], 鼎革之際, 南北交兵, 疑我內通屢有嘖言, 或咎助戰之不誠, 或問和戰之便否, 其猜疑 如是矣. 然我朝秉義念舊, 有足以感服原恕. 故康熙皇帝御製文集云, 康熙四十五年十月二十三日, 諭大 學士馬齊等, 觀朝鮮國王凡事敬愼, 其國人亦皆感戴. (...) 且更有可取者, ‘明之末年, 彼始終未嘗叛之, 猶爲重禮義之邦也.’ 卽此一語, 亦足以有辭於天下後世矣.”
조선인이 청국에 성실하게 협조하지 않고 명과의 전쟁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처벌과 징계를 받은 사례도 소개했지만, 결국 명과 의리를 지키고 옛 은혜를 저버리지 않은 조선인의 태도가 청국을 감동시켰다고 기술했다.
이어서 다산은 강희제의 어제문집에 수록된 발언을 소 개하는데 “명말의 상황에서 저들 조선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을) 배반하지 않았으니 오 히려 예의를 귀하게 여기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전 사역원정 이시승을 대신해서 이 책을 주관한 정약용은
“이 한마디 말씀이야말로 천하 후세에 충분 히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확신한다.
청과의 전쟁과 정치적 긴장은 소국 조선의 처지에 촉각을 곤두서게 했지만, 조선인으로서 다산의 반성에는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서 자기 평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관행숭명반청-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 개방적 태도로 청국과의 외교관계도 성찰할 수 있었 을 것이다.
4. 기자설(箕子說)의 활용과 조선 방식의 문명론
기자담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동인의 문명의식을 표상하는 중요한 소재였다. 기자동래 설과 기자의 평양도읍설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상이한 견해를 피력했는데 고증적으로 문헌 기록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에 대한 중국 문헌의 대부분도 한대 이후의 것이다.54)
정약용은 「지리책」에서 국왕의 질문에 답할 때 조선이란 국호는 단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본 정조의 발언에 관례적으로 동조하면서 기자 이전에 이미 조선이란 명칭이 있었다고 답 했다.55)
그런데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발기자정전도(跋箕子井田圖)」에서는 상이한 견해를 개진했다. 이곳에는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정전도가 함께 수록돼 있는데 그가 젊은 날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정전 터를 보고 옛 제도를 고증할 수 없게 될까 우려해서 정전도를 남겼다는 말을 전한다.56)
54) 사마천 사기「宋世家」, 한서「地理志」, 상서대전「殷傳」, 삼국지「魏志」 등, 기자조선에 대해 언급하고 담론을 강화한 기록들은 대부분 진한지제 혹은 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서는 다음 논문에서 상술했다. 한영우, 「기자조선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진단학보 136, 진단학 회, 2021 참조.
55) 茶山詩文集 권8, 對策, 「地理策」 참조.
56) 茶山詩文集 권14, 跋, 「跋箕子井田圖」. “右井田圖, 故戶曹參議韓公百謙之所作也. 韓公少遊平壤, 就 箕子井田, 圖畫其畎畝溝澮之制. 且曰, 恐田疇之有毀傷, 而古制無徵也, 故爲圖以壽之. 然箕子之必都 平壤, 本無明據. 平壤若係箕子故都, 則不應以王儉城得名也. 句麗之亡, 李世勣經理平壤, 百濟之亡, 劉 仁軌經理南原, 故兩地皆起屯田, 其謂之井田者, 好古之過也. 如非然者, 南原何得有井田? 且其田形, 皆非井文, 乃田字形也.”
정약용은 이곳에서 기자가 평양에 도읍을 정 했다는 것은 본래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평양이 만약 기자조선의 고도였 다면 왕검성(王儉城)으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왕검은 단군의 이름이므로 기자 가 아닌 단군과 평양도읍과의 관계만 잠정적으로 인정한 듯하다.
다산이 제기한 다른 문제 는 평양에 남아 있는 격자형[田] 유적지가 기자의 정전제[井] 형태와 그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다.
다산은 평양 유적지가 고구려가 멸망할 무렵 당나라 사람 이세적(李世勣)이 평양 에서 둔전을 운영한 곳이며, 백제가 멸망할 때도 당나라가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帶方 州) 자사(刺史)로 임명했는데 당시 유인궤가 남원(南原)에서 둔전을 경영하던 흔적이 격 자형 터로 남았다고 풀이했다.
그는 두 곳 모두 ‘둔전(屯田)’을 설치한 곳인데 그것을 지금 ‘정전(井田)’의 옛 흔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옛것을 무리하게 취한 설이라고 비판한다. 유배기에 작성한 아방강역고에 이르면 조선의 강역을 해석하는 다산의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이란 곧 평양의 구명(舊名)인데, 단군이 아니라 기자가 바로 이곳을 도읍 삼아서 문명교화를 펼쳤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거로 삼은 문헌들은 과거에 도 정약용이 이미 보았던 것인데 문헌의 기록에 대한 자신의 믿음 여부가 달라진 것이다.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본래 기자가 도읍한 곳이다. (...) 내 가 살펴보니, 오늘날 사람들이 기자조선이 혹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사 기의 「소진전(蘇秦傳)」, 「화식전(貨殖傳)」에 나오는 조선(朝鮮)ᆞ요동(遼東)ᆞ진번(眞 番)은 모두 다른 말들로서 이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평양 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리지(地理志)」에서 낙랑군에 딸린 현이 25개 현으로 조선이 그 첫머리에 있다고 하였다. 당시 위만의 도읍도 실재 평양에 있었다. 그 뒤에 낙 랑의 군치(郡治)도 평양에 있었기에 으뜸 되는 현을 조선현이라고 했으니, 조선이란 곧 평양의 옛 이름이다. 역에서 ”기자가 동이로 가서 밝힌다“고 한 것은, 기자가 군주가 되 어 바깥 오랑캐의 지역을 문명화한 것을 말한다. 다만 (기자의 교화가) 요동 지역에만 그 쳤다면 어찌 갑자기 동이(東夷)(까지)였겠는가?”57)
기자의 평양도읍설과 문명교화는 다산에게서도 고증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문제가 아니 었다. 다만 인용문에 나오듯이 주역의 ‘명이괘(明夷卦)’ 효사(爻辭)와 상전(象傳)을 둘 러싼 의미 해석 지평에서 정약용은 기자의 동래와 동이의 용하변이(用夏變夷) 가능성을 역 사적 사실로 수용하게 되었을 뿐이다.58) 말하자면 경전에 대한 본인의 해석을 통해 불명확 한 역사적 실재를 의미론적 접근이 가능한 대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정약용은 주역사전 에서 명이괘 다섯 번째 효사 “六五,箕子之明夷,利貞.”과 「상전」의 “箕子之貞,明不可 息也.”를 기자가 동이로 옮겨와서 교화를 펼쳐 문명화한 사건으로 해석한다.59)
기자가 동 이족을 개명시키기 위해 [조선으로 갔으니] 일을 맡아 처리함에 곧음이 이로울 것이고, 기 자가 일을 처리함이 곧은 것은 그 개화시키는 광명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 론 다산의 이런 해석은 기존의 대표적인 주석서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명이괘의 형상 을 흔히 은말의 현신 기자와 폭군 주왕, 기자와 무왕의 군신관계에 적용해서 정치의 밝음이 감추어진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했기 때문이다.60)
57) 我邦疆域考, 其一, 「朝鮮考」. “朝鮮之名, 起於平壤, 寔本箕子之所都也. 鏞案, 今人多疑箕子朝鮮或 在遼東. 然蘇秦傳貨殖傳, 朝鮮遼東眞番之等, 皆別言之, 不可混也. 知朝鮮之名, 必起於平壤者. 地理志 樂浪郡屬縣二十五, 朝鮮居首. 當時, 衛滿之都, 實在平壤. 其後, 樂浪之治, 亦在平壤, 而其首縣爲朝鮮, 則朝鮮者, 平壤之舊名也. 易曰‘箕子之明夷’, 謂箕子爲君, 而外夷文明也. 若但遼東而止, 豈遽夷哉?”
58) 周易四箋의 ‘명이괘’ 해석이 정약용의 箕子說 인식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윤석호의 논문 에서 상술되었다. 윤석호, 「정약용의 기자 인식」, 한국실학연구 42, 2021, 246~248쪽 참조.
59) 周易四箋 卷四, [卦]地火 明夷【离下坤上】. 六五, 箕子之明夷,利貞. 象曰, “箕子之貞, 明不可息也.”
60) 황종희 명이대방록도 군신 간의 관계로 명이괘를 풀이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정약용이 ‘명이’의 ‘이(夷)’ 를 ‘동이(東夷)’로 해석해서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교화를 펼친 것을 주역에서 기술했다 고 본 것은 본인의 매우 독특한 경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명이괘가 기제괘로 변하는 경우이다. 기제괘는 태(泰) 괘로부터 왔다.
진(震) 괘의 방향의 바깥쪽으로 곤(坤)의 나라가 있다고 했으니 이것이 곧 동국(東國)이다[우리 나라 조선을 가리킨다].
건왕(乾王)의 족속이 외국으로 나가서 마침내 군주의 자리를 잡 으니 이 사람이 기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남면함으로써 그곳을 다스려서 동이족의 나라를 밝게 하였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箕子之明夷’, 즉 기자가 동이족을 개명시키기 위 해서 조선으로 갔다고 말한 것이다.
감(坎) 괘의 덕이 바르고 곧음이니 일을 주간함에 이 로운 것이다. 두 개의 이(离)가 서로 이어지니 밝음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태양이 땅 밑 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운행하니 광명이 중간에 끊어질 수가 없다.
기 자는 선왕의 도를 품고 있었지만 중국 내에서 교화를 펼칠 수가 없어서 이에 동쪽의 조선 으로 갔으니 동이족의 나라에서 이 선왕의 도를 밝혀서 그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으므 로, 그 광명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고심했던 점이고,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서 살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61)
61) 周易四箋 卷四, [卦] 地火 明夷【离下坤上】 此明夷之旣濟也. 旣濟自泰來.【二之五】 震方之外 【泰互震】, 曰有坤國【泰上坤】, 是東國也. 【卽朝鮮】 乾王之族出于外國【二之五】, 遂正君位 【陽居五】, 非箕子而誰也? 南面以治之【下今离】, 夷國以明【上互离】, 箕子之明夷也。坎德貞固 【上今坎】, 利幹事也【利於貞】. 兩离相繼【上互离】, 明不息也. 太陽之行由於地底【上本坤】, 自 西而東【小過時,有兌】, 明不可間斷也. 箕子抱先王之道【如〈洪範〉】, 旣不能內明中國. 於是, 東 出朝鮮, 明此道於夷邦, 其道不絶, 則其明不息. 此聖人之苦心也. 孔子之欲居九夷, 亦此意也.
정약용의 명이괘 해석에 따르면 기자는 동이로 와서 교화를 펼침으로써 동국에 비로소 문명의 기원을 연 인물이 된다.
이는 단군왕검의 평양도읍설을 자연스럽게 부정하는 결과 를 낳았다.
아방강역고 「조선고」에서 해명하듯이, 평양은 왕검(王儉)이 아니라 원래 다 른 이름이 왕험(王險)으로 불렸다[平壤亦謂之王險]고 말한다.
다산의 이 발언도 주역 감 괘(坎卦) 단전(彖傳)의 ‘왕험(王險)’ 해석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정약용은 군주가 험준한 곳에 도읍을 설치해서 나라를 지킨다고 한 감괘의 풀이를 근거로 ‘왕검’은 주역의 ‘왕험’ 을 차용한 지역명, 즉 평양의 다른 이름[왕험]이 잘못 와전된 것이라고 풀이했고, 명이괘 해석과 연결하여 동이로 온 기자가 도읍을 정한 곳이 바로 왕험이란 이름을 붙인 오늘날 평양이라고 보았다.62)
62) 我邦疆域考, 其一, 「朝鮮考」. “鏞案, 易曰, “王公設險, 以守其國.” 平壤之別名王險, 蓋此義也. 檀君 之都於平壤, 亦無信文, 況姓名之爲王儉, 有誰知之?仙人王儉之說,徧載東人之筆, 然改險爲儉, 旣甚穿鑿. 且史記直云王險【不云王險城】, 明是地名, 以之爲檀君之名者, 妄也.”
이로써 단군왕검에 대해서는 어떤 신빙성 있는 문헌도 없으며 왕검이라는 이름조차도 단군의 것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단군담론을 탈락시키는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명이괘를 동이에 대한 특 칭적 발언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자 문명론과 동이의 특수성을 재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도 문명개화의 보편성과 동이 고유성의 결합이 엿보인다.
정약용은 「조선고」에서 대명일통지 등을 인용하면서 기자조선의 영역이 평양으로부터 확장되고 다시 축소되는 역사적 변천을 겪었다고 상술한다.63)
이곳에서 흥미로운 점은 다 산이 기자의 평양도읍설을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평양 외성 안에서 기자가 시행했다고 한 정전제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점이다.
사환기 때의 「발기자정전도(跋箕子井田圖)」 에서도 그랬듯이, 아방강역고를 지을 무렵에도 여전히 평양의 유적지가 기자 정전제의 흔적이 아니라 당나라 이세적의 둔전 운영터라고 일축했던 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말하 기를 기자의 정전이 평양부 남쪽 외성 안에 있다고 했다. 내가 살피건대, 그것이 정전의 자 취라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기자가 이미 정전제를 실시했다면 왜 단지 평양부 남쪽의 한 조각 땅에서만 시행했겠는가?”64)
대동수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평양 외성의 터를 가지고 추론해서는 기자 정전제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고 회의적으로 서술했다.65)
63) 我邦疆域考, 其一, 「朝鮮考」. “箕子當時, 其疆域未必曠遠. 其後世嗣君. 拓地恢廓, 西過遼河, 以與燕 接. 明一統志云:“朝鮮城在永平府境內, 相傳箕子受封之地. 後魏置縣, 屬北平郡. 北齊, 省入新昌縣” 鏞案, 今之永平府, 古之北平郡也. 且據魏略, 潘汗以西二千餘里, 在古爲箕氏之有. 今自遼東而西, 行二 千餘里, 正得永平府境. 明一統志所言, 眞有據也. 燕之旣亡, 箕氏黽勉事秦. 漢興, 彌失其西鄙, 唯以鴨 水爲界.”
64) 我邦疆域考, 其一, 「朝鮮考」. “輿地勝覽云, “箕子井田, 在平壤府南外城之內.” 鏞案, 井田之跡, 吾斯 未信. 箕子旣畫井制, 奚獨平壤城南一片之土, 是疆是理乎? 李勣旣克平壤, 開府留屯, 今所存溝洫阡陌, 卽李勣屯田之遺址也. 今南原城外, 亦有井田, 一如平壤之制. 此劉仁軌嘗爲帶方州刺史, 開府留屯之舊 田也. 並與箕子無涉.” 65) 大東水經, 其三, 「浿水」 二【平壤,中和,江西】 浿水又西南至平壤府南. 先生云, “孟子所言夏殷 周分田多少之數, 本據龍子之說, 徵諸實理, 不能脗合. (...) 箕子井田之說, 吾斯之未敢信也.”
주역사전의 명이괘 해석을 통해, 그리고 아방강역고의 「조선고」에서 기자의 평양도 읍설을 재해석하고 수용했지만, 현존하는 평양 유적만으로는 정전제 실상을 고증하기 어렵 다고 본 정약용은 상서에 대한 경학적 해석과 경세유표에 드러난 경세학적 문제의식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자찬묘지명에서 정약용은 주례에 관한 자신의 학문적 공헌으로 ‘육향제’를 새롭게 조명한 점을 들었다.
그가 원래 계획한 주례 연구 서(周禮全注)가 없기 때문에 ‘육향제’에 대한 다산의 관점은 상서고훈・대학공의, 경세유표・목민심서 등 다른 저술을 통해 살펴야 한다.66)
주례「동관(冬官)・고공기(考工 記)」에는 “匠人建國, 匠人營國, 匠人爲溝洫” 등 국가운영을 위한 세 방침이 제시되어 있는 데, 앞 두 가지가 국도(國都)[왕성(王城)]를 결정하고 건설하는 사업이라면 세 번째는 도 랑・강의 경계를 지표로 전지를 마련하고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는 지방운영 사업을 말 한다.67)
「고공기」 사업은 다산이 볼 때 왕정을 구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략이었는데, 바로 이 방법이 기자가 평양성을 구축할 때 썼던 방책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주례에 익숙하여 새로운 뜻을 많이 세웠다.
육향제(六鄕制)를 논할 때 이렇게 생각하였다.
육향은 왕성 안에 있다.
장인이 국성(國城)을 경영할 때 9개 구역으로 나누 었는데 왕궁은 중앙에 위치하고 앞에는 조정의 관서가 있고 뒤에는 시전(市廛)이 있으며, 좌우에 육향이 둘씩 서로 향하게 했다. 향(鄕)이란 향(嚮)한다는 뜻이다. 하관(夏官)의 양인(量人)이 무릇 도비(都鄙:도성과 시골)를 구획할 때도 모두 구주(九州)로 만들었다. 기자가 평양성을 만들 적에 성 중에 정형(井形)을 그어서 성을 만든 것이 모두 이 방법이 다. 정현이 육향을 교외(郊外) 지역에 있다고 여겼으니, 그렇게 되면 향삼물(鄕三物)로 만민(萬民)을 가르쳤다는 말은 모두 시행할 곳이 없게 된다. 승지 신작(申綽)이 오히려 정현의 해의(解義)를 고수했으므로 내가 서너 차례 왕복하며 논란해서 그렇지 않음을 밝 혔다.”68)
정약용은 기자의 평양도읍 운영은 위와 같은 주례 ‘육향제’ 구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고 추정했다.
그는 이미 중국고대 세계에 ‘육향제’의 도성 운영 방식이 보편화 되었다고 보 았는데, 이러한 다산의 경학적 해석 관점은 주역사전, 상서지원록, 경세유표, 목민 심서, 상서고훈 등 유배기와 해배 이후 작품들에서 연속적으로 유사하게 드러난다.69)
66) 해배 이후 정약용이 신작(申綽:1760~1828)과 벌인 주례 ‘六鄕制[鄕遂制]’ 논의에 대해서는 김문 식, 「丁若鏞과 申綽의 六鄕制 이해」 한국학보16, 1990); 안병직, 「다산과 체국경야」 다산학 4, 2003); 백민정, 「주례 ‘六鄕制’ 해석을 통해 본 다산의 경세 구상: ‘鄕三物’과 ‘鄕八刑’ 논의를 중심 으로」 다산학 29, 2016); 윤석호, 「정약용 향수론의 추이와 그 함의」 민족문화연구 84, 고대민 족문화연구원, 201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67) 주례 육관 서문에 “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體國’이 수도 건설사업을, ‘經野’가 지방 田野 관리, 즉 井田 사업을 의미한다.
68) 茶山詩文集 권16, 「自撰墓誌銘(集中本)」. “鏞習於周禮, 多建新義. 其論六鄕之制, 曰六鄕在王城之 內. 匠人營國體爲九區, 王宮居中, 面朝後市, 左右六鄕, 兩兩相嚮. 鄕者, 嚮也. 夏官量人, 凡作都鄙, 皆 爲九州. 箕子作平壤城. 城中畫爲井形皆此法. 鄭玄以六鄕謂在郊外, 則鄕三物敎萬民, 皆無所施矣. 申 綽承旨猶守鄭義, 鏞往復三四, 以明其不然.”
69) 윤석호, 「정약용의 기자 인식」, 2021, 256~261쪽 참조. 윤석호는 맹자요의의 다산 발언을 통해 그가 강조한 우물 정자 형[井]의 운영원리에 대한 이해가 주역사전에서 처음 비롯되었다고 보았 는데, 이 점에 대해서 선후, 인과관계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주역사전에서 말한 坤卦의 「說卦傳」 설명법과 상서지원록 등에 보이는 ‘홍범구주설’에 대한 설명 방식이 어떻게 연결 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다산의 주역 해석은 매우 독특한데, 명이괘 등에 대한 그의 관점이 주역만이 아니라 그 전에 주례「考工記」 ‘體國經野’, 상서「周官」과 「洪範」에 대한 다산 의 고유한 독해와 병행되면서 혹은 아홉 가지 통치원리라는 선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산은 주례의 ‘영국(營國)’ 원리와 육향제, 상서의 ‘홍범구주론(洪範九疇論)’ 해석에 기반해 이들 논의에 공통적으로 전제된 9가지 영역과 원리의 구분이 고대사회 통치질서의 기본구조였다고 이해했다.
말하자면 이것을 유교적 문명국의 핵심 통치원리로 본 것이다.
그는 하은주 삼대의 보편적 통치원리로 아홉 영역의 구별을 상정했기에, 은나라 현인 기자 가 평양에서 교화를 펼칠 때도 당연히 위와 같은 ‘정전구구(井田九區)’의 모델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이 평양성의 축성과 운영에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려사 「지리지」에 “평양에 옛 성터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기자 때 쌓은 것으 로, 성안의 구획이 정전제를 사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성종 때에 쌓은 것이다.”라 고 하였다. 생각건대, 성안의 구획이 정전제를 사용했다는 것은 성의 사방 9리를 아홉 구 역으로 구획하여(「考工記」) 중앙이 왕궁이고 그 앞은 조정이며, 그 뒤쪽은 저자이고, 좌 우 여섯 마을이 둘씩 서로 마주하게 한 것이니 이 또한 정전구구(井田九區)의 방법이다. 만약 기자가 평양에 도읍하지 않았더라면 평양에 이런 제도가 있었을 까닭이 없다. 성인 이 남긴 자취가 3천여 년이 되도록 없어지지 않았으니 매우 지극하구나! (...) 고려사에 서 말한 것은 성의 내부를 아홉 구역으로 구획한 것이 정전의 모습과 같았다는 것이지 정 전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70)
정약용이 말했듯이 평양성 내부 구획이 아홉 영역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이지 평양 외성 안에 정전 터가 있어서 실제 토지제도로서 정전제가 운영되었던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 었다.
이 대목에서 다산에게 중요한 것이 정전제 자체인지 아니면 ‘홍범구주’나 ‘육향제’에 내장된 아홉 가지 통치질서인지 되묻게 된다.
물론 필자는 후자의 원리적 해석을 통해 정약 용이 정전제의 가치도 수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정전제가 성인의 경법(經法)이므로 오늘날도 반드시 적용 가능하다고 역설하는데71) 이것은 아홉 가지 통치 원리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70) 經世遺表 권6, 「地官修制」, 「田制考」六, ‘邦田議’ 참조.
71) 經世遺表 권5, 「地官修制」, 「田制」一, ‘井田論’一. “井田者, 聖人之經法也. 經法, 可通於古今. 利行 於古而不便於今者, 必其法有所不明而然, 非天下之理, 有古今之殊也. (…) 何堯舜三王之能沛然行之, 而今終不可效也? 嗟呼! 天下之理一也, 今人之所必不能, 亦堯舜三王之所不能, 堯舜三王之所已能, 亦 今人之所必能. 豈有疑哉! (…) 下焉者, 沈漸於無根之俗說, 上焉者, 拘滯乎先儒之誤注. 雖赫赫經文, 可證可據, 有足以破千古之惑者, 則莫之察焉, 此天下之通患也. 臣亦習聞其說. 謂必酌古今之宜, 施變 通之術, 卑之無甚高論, 令可以擧而措之而後, 其法可小行. 及觀聖經諸文, 乃臣之所欲參酌而變通之者, 原是先王之本法. 但當表章經文, 按而行之, 不必鑿鑿然裁損修潤也. 嗟呼! 聖人而迂闊, 孰爲縝密? 聖 人而瞢昧, 孰爲疏明? 信道篤, 無往而不釋然也.”
맹자는 정전제가 은나 라 유제라고 했고 주희도 그 설을 따랐는데 훨씬 뒤의 조선 유학자 정약용이 정전제의 원 리가 은나라에 앞서 이미 하나라 우임금 시대의 ‘홍범구주론’에 반영되어 있었다고 봄으로 써 맹자의 기록과 주희의 관점도 벗어났다.
결국 정약용이 지향한 정전의 원리[‘井形’]는 토지제도 자체를 초과해서 추상화되어 더 포괄적인 유교적 문명담론 안에 흡수되었다고 생 각한다.
정약용은 아홉 가지 통치원리가 축성과 도성운영의 원리로, 그리고 지방전야의 토 지운영 원리로 확대 적용되었다고 보았다. 정약용의 주례와 상서 해석을 관통하는 ‘구주론(九疇論)’은 다음과 같이 도표화될 수 있다.
<표 1> 상서고훈의 ‘홍범구주론’72)
하늘의 영역 7. 계의(稽疑) 4. 오기(五紀) 1. 오행(五行)
군주의 영역 8. 서정(庶正) 5. 황극(皇極) 2. 오사(五事)
백성의 영역 9. 복극(福極) 6. 삼덕(三德) 3. 팔정(八政)
‘홍범구주’의 통치원리는 전통적으로 하나라 우임금이 하늘로부터 받은 신비한 서책의 내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통념에 반대하며, 홍범구주란 우임금이 적극적 인 경세적 사유를 통해서 정립한 일종의 성왕 이론, 즉 ‘성왕론(聖王論)’이라고 주장한 다.73)
72) 尙書古訓 卷四, 「洪範」. “皇極在內, 建中建極. 於是上律天時, 下馭人衆. 此所以戴五紀而履三德也. 恭己端本, 以召和氣, 此人主密切之功驗也. 左五事者, 恭己而端本也. 右庶徵者, 和氣致祥, 乖氣致災也. 此所以左右照應, 而事徵相通也. 原夫天生材物, 謂之五行, 受而修之, 謂之八政. 故五行戴之在上, 所以 尊天賜也, 八政履之在下, 所以敍人用也. 此一與三相應之妙也. 吉凶未著, 仰詢天明, 謂之稽疑. 禍福已 判, 俯驗人事, 謂之福極. 在天者戴之在上, 在人者履之在下, 此又七與九相應之妙也. 此之謂天道, 此之 謂大法.”
73) 尙書古訓 卷四, 「洪範」. “禹能嗣興, 遂得天下, 建皇極而領九疇, 是天乃錫禹洪範九疇也. 豈有書自天 降來乎? 特禹受天之命, 宅此皇極之位, 運智設法, 創立九疇洪範.”
상서「홍범」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 범주[九疇]’는 위의 도표와 같다.
가운데 황극은 ‘성인=군주[聖王]’ 지위를 의미한다.
다산은 ‘성인=군주’의 위상을 하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오황극이 오기와 삼덕 사이를 매개하는 구조라고 보았다.
그는 ‘성 인=군주’ 위상을 ‘성인’의 측면과 아울러 ‘군주’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한다.74)
‘성인’이 란 기본적으로 ‘부성지명(賦性之命)’, 즉 하늘이 부여한 도덕적 기호(嗜好)에 따르는 윤리 적 인격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황극이 오사와 서정 사이를 매개하는 구조로 표현된다.
반면 ‘군주’란 기본적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통치하는 천명, 즉 ‘득위지명(得位之命)’을 얻은 자다.
다산은 이 점을 황극이 오행과 팔정 사이를 매개하고 계의와 복극 사이를 매개 하는 관계로 양분해서 설명한다.
그의 사유에서 ‘구주론(九疇論)’은 ‘육향제’ 논리와 연동되 면서 정전제의 보편적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경전적 근거로 자리매김되었다.
정약용은 우임금으로부터 기자에게 그리고 무왕에게 다시 전수된 성왕론을 통해서 황극 의 자리에 있는 군주 중심의 통치철학을 제시했다.
이 점에서 다산의 상서 해석과 경세 유표에서 제시된 조선 방식의 제도개혁론은 그의 학문 세계를 체계화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군주의 강력한 유위정치를 지지했지만 이것은 군주 개인의 사적 국가운 영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었다.
선행연구에서 알려진 것처럼 경세유표 국가운영론에서 군 주에게 허용한 역할은 인재선발과 관리고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75)
삼공[삼정승]이 중추부와 의정부를 통해 국정 전반을 관리하도록 정부조직을 구성했고, 두 조직은 서로 고 적하며 견제하고 삼정승도 엄정한 인사고가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양민에서 사족에 이르기 까지, 능력이 있는 자를 우대해서 국가기관의 적재적소에 배치하고자 했던 인재의 공적 운 영과 관리 정신도 돋보인다.
말하자면 정약용이 제시한 유교적 문명국가론은 탁월한 소수 인재들의 능력 혹은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권력전횡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다수의 인 재를 폭넓게 활용하는 것이 가능한 공적인 국가조직과 체계를 구현하려고 시도한 것이 다.76)
74) 필자는 다산이 이해한 ‘홍범구주론’의 논리와 구조에 대해 다음 글에서 상술했다: 백민정, 정약용 의 철학, 이학사, 2022년 개정판, 375~380쪽 참조.
75) 이봉규, 「경학적 맥락에서 본 다산의 정치론」, 다산 정약용 연구, 사람의무늬, 2012, 104~108쪽; 「명청교체기 사상변동으로부터 본 다산학의 성격」, 다산학 25, 다산학술문화재단, 2014, 172~175 쪽 참조. 76) 경세유표의 국가운영론이 단순히 군주 중심의 강력한 유위적 통치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다 산이 구상한 유가적인 공적 시스템을 제시한 것임을 밝힌 선행연구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청대 국가 개혁론자들의 국가운영 구상과 다산의 학술적 관점을 상세히 비교한 논문으로 다음을 참조 할 수 있다. 김선희, 「다산 정약용의 유가적 공적 세계의 기획: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다산학 31, 2017 참조.
이러한 다산의 정치적 지향이 유교적 보편문명을 전제한 것은 물론이며, 그 근저에는 조선인으로서 정약용이 성취했던 독특한 경전 재해석이 자리잡고 있다.
기자조선의 동 방 교화와 정전제 시행을 주저 없이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자신의 성찰이 중국과 동국 어디에서든 적용 가능한 가장 보편적인 유교적 이상을 제시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인정한 기자조선에서도 방점은 ‘기자’가 아닌 ‘조선’에서 구현될 조선 방식의 문명담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나가는 말
정약용이 조선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삼대의 이상 정치를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런 문명적 자부심이 그가 조선인, 동인이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 하게 했다.
다시 보면 조선 중화주의라는 것도 이미 문명의 보편성과 조선이라는 지역성, 민족성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이것을 단순히 중국 다음의 ‘소중화’ 담론 혹은 내부 단속 이 데올로기나 사상 통제용 발상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약용은 유교문명권에서 누구보다도 ‘세계인’ 혹은 ‘국제인’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대청 관계나 일본 관계를 고려하는 그의 태도에는 민족적[혹은 종족적] 구별의식이 분명했고 이 점은 아방강역고나 대동수경에서 보이는 인문지리적 경계의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화주 의라고 하든 문명의식이라고 하든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에는 불가피하게 자신이 그 것을 추구한다는 변별적 자의식과 자신이 견지한 상이한 시대감각이 깊이 침윤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전쟁이나 전란이 없으면 중국과의 문화적 일체감이 강화된 것도 사실이다.
고려시대 대 원 항쟁 때, 원명 교체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명청 교체기, 19세기 중후반 서양 및 일본 세력의 침투와 그에 맞선 저항의 시기에 민족적 의식, 동질성이 좀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인정하더라도 19세기 후반 중국문화의 쇠퇴, 일본과의 대립을 통 해 비로소 ‘민족’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근대적 민족관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고 본다.
고려 말 원제국에 대해 동인의식을 표방한 지식인들은 보편문명을 지향하는 상이 한 존재로서의 변별적인 자기 정체성을 자각했다. 이것을 근대 민족관념으로 환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종족에 기반한 동질적인 정체성이 있었던 것을 과도하게 경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대국 청국과 군사 강국 일본 사이에 처한 유학자 정약용의 의식에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고려 말 지식인들의 단군신화 재구성과 기자조선의 문명담론은 17세기 중반 전쟁을 경험한 조선인들에게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단군과 기자담론은 노소론, 남인 계 지식인들-정약용을 포함한-이 구성한 자기 정체성의 이면 혹은 자기인식의 상호보완적 소재로 다양하게 재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식 프레임은 일제시기 식민주의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대종교 혹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고대사 연구에서 단군신 화가 재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기자담론은 이미 탈락되고 그 자리에 대신 동양평화, 세계평화라는 보다 진전된 형태의 문명의식이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근대 적 민족 관념이 선명하게 분화되면서 중국인 기자에 연원을 둔 문명담론은 퇴조했다.
20세기 초 한국 지식인들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민족적 압박을 경험하면서도 일 국의 독립이 아닌 동양평화, 세계평화론을 구상했던 점을 상기하면, 민족의 특수성과 세계 평화라는 보편지향을 대립적으로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중화주 의를 강조한 것도 특수한 지역성으로서 조선에 대한 인식 없이, 동국인이라는 의식 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중화주의든 보편성의 강조는 자 연히 민족적, 지역적 한계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사유운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중화[문 명]와 민족[東夷]의 경계에서 사유한 정약용의 시대에도 여전히 보편과 특수, 세계성과 지 역성 간의 갈등과 공존에 대한 고민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서구근대적 민족 관념을 경험한 오늘날 우리에게 한국민족이란 무엇이며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주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기자담론 혹은 동양평화론보다 진전된 보편문명을 지향하고 있는가?
한국인의 고 유성이 있다면 그것은 미리 주어진 어떤 토착적, 전통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중국과 서구근 대의 문명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며 형성해온 경험의 역사에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고 유한 성향과 역할을 가늠하기 위해서도 오늘날 시대가 요구하는 보편적이고 포용력 있는 문명담론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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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ract
On the Boundary between Zhonghua(中華) and Ethnicity: A Confucian Jeong Yagyong' Theory of Civilization and the consciousness of Dongin (東人)
Baek, Min-jung( The Catholic Univ. of Korea)
This paper explores the consciousness of Confucian civilization and the ethnic identity that Jeong Yagyong (丁若鏞, 1762~1836) thought, a prominent Confucian in the Joseon Dynasty. As already well known, the concept of ethnic nation presupposes the nation-state system originated from the modern Western and postulates equal and homogenous ethnic members. According to this account, Korean ethnicity or the ethnic identity of Koreans is the idea gradually formulated in the course of aggression and invasion of national sovereignty of the Western and Japanese empires and Koreans’ resistance and struggle against them. However, the absence of the modern Western notion of ethnicity does not justify the claim that the ethnic identity of Koreans before the 19th century, that is, the Confucian community that shared history and culture and the accompanying homogeneous conception were also absent. At that time, although people did not use the word nation, they instead called themselves Dongin (東人). Koreans appreciated this term, developing the idea about their own national progenitor and universal civilization through the discourse of the myth of Dangun (檀君) and Giza (箕子). Jeong Yagyong, a Confucian schol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convinced that Joseon was the successor of advanced civilization. A sense of distinctive identity as Dongin[Joseon people] coexisted in the discourse of Confucian ideal society and civilization that Jeong Yangyong designed. He believed that the value of national specificity and uniqueness could exist only when a universal civilization that everyone can share is pursued.
Key words: Ethnicity, nation-state, Confucian civilization, Zhonghua, discourse of Dangun(檀君), Discurse of Giza(箕子).
투고일: 2022. 8. 3 심사일: 2022. 9. 14 게재확정일: 2022. 9. 14
東方學志 제20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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