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주자학 절대주의의 정체성
3. 북벌론과 주자학 강의
4. 윤휴의 주자, 송시열의 주자
5. 기해・갑인 예송, 회니・원류 시비
6. 맺음말
<국문초록>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를 견지했던 성리학자로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 르기까지 정치와 사상 영역에서 각별한 위상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는 수많은 송시열 관련 기사가 등장하는데, 그의 행적이 항상 주자학적 연관성을 갖는 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대체로는 그의 앎과 삶의 세계가 주자학적 질서와 연동되고 있 다고 말할 수 있다.
송시열의 성정 탓도 있겠지만, 그가 주도한 주자학 절대주의가 조 선사회에 남긴 파열음과 후유증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 는 동문수학했던 윤선거와 윤휴, 그리고 그의 제자 윤증을 적으로 돌리도록 만들었다.
친구를 죽게 만들었고, 제자를 떠나게 만들었으며, 그 자신도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되 었다.
송시열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윤휴 일파가 아니고 바로 주자였다는 미우라 구 니오의 언급은 적실성을 갖는 말이다.
모든 학문과 철학 체계가 그렇듯이, 주자학도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보에 따라 이상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로 전락될 수도 있다.
송시열과 주자학의 역학에 대한 논의를 통 해 한국사상사를 조명하는 작업은 오늘날의 인문학적 지향에 대한 성찰적 논의에 시 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주제어 : 송시열, 윤휴, 윤증, 주자학 절대주의, 파열음
1. 머리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사상체계와 학문경향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지적 기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의 학문적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송시열 의 스승이었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이 이이, 성혼, 송익필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愼 獨齋 金集, 1574~1656)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그 스스로 이이의 적전임을 자임하였다.
조선조 예학의 방향과 지침을 제시한 김장생은 13세에 송익 필에게 나아가 배운 후, 20세에 이이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 이의 학문적 도반, 성혼의 가르침도 받았다.
김장생의 예학은 송익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고, 성리학은 이이의 사상적 자극을 받아 형성되었 다.
그러나 김장생과 김집의 학문을 이어받은 송시열의 송익필에 대한 평 가는 부정적이다.
이는 송익필의 출신이 흉적의 집안이고 천류임에도 불 구하고 이이와 교유하면서 ‘자(字: 叔獻)’를 함부로 부르는 등의 행동에 대 해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1)
1) 宋子大全 卷137, 「栗谷牛溪二先生年譜序」, 附錄 卷17, 「語錄」.
송시열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시대에 출사하였지만 정치적 부침 과 고난을 거듭했다.
당시 송시열과 가까운 이들로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 擧, 1610~1669), 백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 1682) 등이 있었지만, 후일 이들과는 대립과 반목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과 반목에는 송시열의 주자, 그리고 주자학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 및 존숭의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한 주자학자의 길을 걸었던 송시열의 입장에서는, 주자학적 구도를 벗어나 자신의 철학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시열이 걸었던 길은 평생토록 정학을 숭상하고[崇正學], 이단을 물리치고[闢異端], 주자를 지키 고[守朱子], 주의 정통을 높이는 일[尊周統]이었다.2)
송시열의 정치・사상・ 학문의 세계는 주자를 높이고 주자학을 탐구하는 삶을 통해 구축된 것이 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술회한 바와 같이, 그 자신은 주자의 도학을 주장 한 때문에 정치적 부침과 고난을 겪어야 했다.
송시열이 살았던 17세기의 사회상은 공자, 맹자가 처했던 춘추전국의 혼란상, 주자가 경험했던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저항의식, 그리고 이단사 설을 물리쳐야 한다는 사명감을 요하는 상황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통 (道統)을 계승하고 이단사설의 침투를 막는 데 앞장섰던 주자학이었다.
그만큼 주자를 높이고 주자학을 현양하는 일은 당대의 절실한 철학적 관 심사 내지 학자적 책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시열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그의 졸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평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의 졸기는 각각 노론과 소론이 주도하여 작성한 두 개의 버전이 있다.
노론이 주도하여 작성한 졸기에서는, 송시열의 학 덕에 대해 동방 이학의 적전으로 규정하면서 그 학문은 오로지 주자/주 자학을 위주로 삼고 따랐으며 그 성취한 바가 고밀 원대하여 이는 뭇 선 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라는 식의 긍정 평가를 내놓은 반면, 소론이 주도 하여 작성한 졸기에서는, 송시열의 인격에 대해 벗과 벗, 스승과 제자 사 이에 도리를 이루지 못하였고, 만년에는 말과 의논이 정상을 벗어나고 법 도를 잃음이 많아 전혀 도덕이 있는 사람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식의 부정 평가를 내놓았다.3)
2) 宋子大全 卷18, 「進朱子封事奏箚箚疑箚」.
3) 肅宗實錄 1689年(肅宗 15) 6月 3日 「前左議政宋時烈卒記」 및 肅宗補闕正誤, 1689年(肅 宗 15) 6月 3日 「前左議政宋時烈卒記」 참조.
두 버전의 졸기를 놓고 볼 때, 사상사 연구의 난점을 풀기 위해서는 대상 인물 개인과 가문・지역・당파에 의한 경계를 넘 어 조선시대사의 전체 구도를 참작하면서 연구 주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4)
한 인물에 대한 긍정・부정 평가가 크게 갈리는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는 송시열의 앎과 삶의 세계에 대한 천착 과정에서 조선후기의 사상사 및 근대사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상황과 궤적을 읽 어내는 키워드에 주목하여 평론을 작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의 이미지 구축 작업에는 간혹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탁 하여 형용하는 방식이 드러나기도 했다.
18세기 중・후반 이후 송시열에 대한 추모와 숭배 의식이 고조되면서 송시열의 화상5)을 의도적으로 이상 화시켜 가탁・이모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6)
노론 문인들의 학통을 상징하는 송시열의 화상에 대한 가탁・이모・현양 작업에는 송시열의 화상 에 주자의 초상 이미지를 빌어오고 덧씌우는 문학적 전략 및 집단 내부 의 문화 담론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7)
바로 그 정신현상은 송시열의 한국사상사적 위상과 쟁점을 상징적・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해석 장면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학문적 노선은 주자학적 지식인지배체제론 내지 사대부정치체제론에 대한 강고한 입장을 표방하는 것이었다.8)
4) 한기범, 「우암 송시열에 대한 후대인의 추숭과 평가」, 한국사상과 문화 42, 2008, 121~171쪽.
5) 송시열의 화상(畫像)・초상(肖像)에 대해서는 권상하와 김창협의 화찬(畵贊)이 제시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肅宗實錄, 1689年(肅宗 15) 6月 3日 「前左議政宋時烈卒記」 참조.
6) 강관식, 「국보 <송시열 초상>의 이상화 양상」, 미술사와 시각문화 28, 2021, 62~113 쪽.
7) 김기완, 「노론의 학통적 맥락에서 본 송시열 초상화찬」, 열상고전연구 35, 2012, 293~332쪽.
8) 안외순, 「우암 송시열의 정치체제론」, 동방학 46, 2022, 141~168쪽.
강고한 주 자/주자학적 기반 위에서 정치와 사상과 학문을 추구했던 송시열의 정체 성을 해석할 때 표상되는 개념 군으로 주자학 절대주의・보수주의・일존주의・지상주의・완고주의・권위주의・원리주의 등을 들 수 있다.9)
송시열의 정치・사상・학문 세계는 주자를 지키는 삶을 명목으로 한 것이자 주자학 을 정전으로 삼고 그 정전에 대한 연역 작업을 통해 펼쳐진 것이기에 그 의 세계관을 형용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은 주자학 절대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학문적 입장은 주자학 자체의 주지주의적 성향과도 모종의 연관을 갖는다는 지적과 함께 바로 그 주지주의적 속성 으로 인해 공존과 타협과 관용을 본질로 하는 공맹시대의 유교정치론의 속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10)
9) 양승태・안외순, 「한국 보수주의 연구Ⅰ: 송시열과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 한국정치 학회보 33(1), 1999, 111~128쪽; 이선아,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 파주: 한국학 술정보, 2008, 69~74쪽; 박균섭, 「수양론과 북벌론의 불협화음: 송시열과 효종」, 교육 철학 51, 2013, 39~63쪽; 한지희, 「노서 윤선거의 책선지도: 회니시비의 원인과 관련 하여」, 조선시대사학보 75, 2015, 339~367쪽; 강지은, 이혜인 역,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서울: 푸른역사, 2021, 156~157쪽; 안외순, 「우암 송시열의 정치체제론」, 동방학 46, 2022, 141~168쪽 참조. 10) 안외순, 주 8)의 논문, 141~168쪽.
분명한 것은 그 지적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그 구조와 지향을 보면 포용성과 안정성 개념이 박약하게 작동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본고에서는 송시열이 주도한 주자학 절대주의가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적 공간에서 이런저런 파열음을 냈음에 주목하면서, 이 문제의식에 대한 답변을 구하는 차원을 설정하여 보았다.
논의 과정은,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가 갖는 정체성을 탐색하고, 효종-송시열 사이에서 북벌론의 기 저 사상으로 제시된 주자학 강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논하고, 송시열 의 윤휴에 대한 사문난적설이 갖는 주자학적 정신현상은 어떤 설명이 가 능한지를 밝히며, 기해・갑인 예송 및 회니・원류 시비의 주자학적 연관 문 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주자학 절대주의의 정체성
16세기 중반의 성리학은 성리대전을 대표로 하는 성리학 일반에 대 한 연구에서 주자대전을 대표로 하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연구로 관심 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주자성리학이 전면적으로 연구되면서, 성리대전 은 송대 이래의 성리설을 충실히 정리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비판되기에 이르렀다.
성리대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새롭게 부상한 연구서 가 바로 주자대전이었다.
주자의 글을 집대성한 주자대전은 우리나 라에서는 1543년(중종 38)에 교서관에서 인출・배포되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경우만 하더라도, 1543년에 주자대전이 간인되기까지 이 책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 다.11)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주자대전을 중심으로 주자성리학 을 연구하는, 학술상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율곡 이 이(栗谷 李珥)나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교육과정에 관한 구상에도 그대 로 반영되었다.12)
특히 성혼이 선조에게 올린 글 가운데 <신사봉사>는 주자가 송 영종(寧宗)에게 5회에 걸쳐 올린 <갑인행궁편전주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3)
성혼이 주자대전을 초록하여 위학지방을 만들어 우계 서실의 유생들에게 가르친 것도 이러한 학문 경향을 담아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송시열은 성혼의 주자학적 관심과 업적을 일컬어 “대개 선생 의 학문은[蓋先生之學] 오로지 주자를 숭상하였는데[專尙考亭], 학문하는 자 들에게 훈시한 것만이 아니라[不唯以訓示學者] 임금에게 말한 것도[而所以告 於君者] 일찍이 이를 벗어나지 않았다[亦未嘗外此]”고 지적한 바 있다.14)
11) 退溪集 卷42, 「朱子書節要序」.
12) 栗谷全書 卷15, 「學校模範」 卷20, 「聖學輯要」 卷27, 「擊蒙要訣」; 牛溪集 卷5, 「與鄭士朝 書」.
13) 朱子大全 卷14, 「甲寅行宮便殿奏箚一」, 「甲寅行宮便殿奏箚二」, 「甲寅行宮便殿奏箚三[退一 本作裁]」, 「甲寅行宮便殿奏箚四[侵犯之犯一本作擾]」, 「甲寅行宮便殿奏箚五」.
14) 宋子大全 卷146, 「朱門旨訣跋」.
송시열은 평생 동안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읽으면서 의문도 생기 고 난해처도 있었음을 술회한 바 있다.15)
하지만 이 말은 주자학에 대한 접근과 이해 과정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주자의 언행이 나 주자학의 논점에 오류가 있다든가, 그래서 이를 존신하기 힘들다는 것 을 말하지는 않는다.
송시열은 주자학을 삶의 모든 문제를 조회하고 전망 하는 만능의 체계로 보았으며, 이를 철저하게 조술하는 것을 평생의 본무 로 삼았다.
송시열은 주자를 성인으로 규정하고, 그가 정론을 제시한 이 상, 이를 멋대로 고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송시열의 주자에 대 한 특별한 생각을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없었다면[微朱子]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 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입니다[吾其被髮左袵矣].”16)
② “신은 젊어서부터 주자의 글을 읽고[抑臣少讀朱子書] 항상 요, 순, 공자, 맹 자의 도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여겼습니다[每以爲堯舜孔孟之道盡在是矣].”17)
③ “신은 젊어서부터 주자의 글을 읽어왔습니다만[臣少讀朱子書], 그 한 글자 한 구절이 지론과 격언이 아닌 것이 없고[其一字一句無非至論格言], 그 중 에 또한 제왕의 학문에 더욱 절실한 것이 있고[而其中又有尤切於帝王之學 者], 또한 오늘날의 병폐에 꼭 맞는 것이 있습니다[亦有正中今日之病].”18)
④ “나를 알아주는 자도 오직 주자이며[知我者其惟朱子乎], 나를 죄 줄 자도 오직 주자이다[罪我者其惟朱子乎].”19)
15) 宋子大全 卷89, 「奉訣致道」.
16)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 이는 공자의 “관중이 없었다면[微管仲] 우리는 머리를 풀 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吾其被髮左衽矣]”(論語, 第 14, 「憲問」)는 말에서 관중을 주자로 교체한 것이다. 송시열은 주자가 논어의 각주 에서 공자가 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말을 “오랑캐의 풍 속[夷狄之俗也]”이라고 특정한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17) 宋子大全 卷5, 「丁酉封事」.
18) 宋子大全 卷7, 「辭召命兼論聖學疏」.
19) 宋子大全 卷28, 「與李士深」.
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등의 책을 안고[欲抱負朱子大全語類等書] 깊이 산 속에 들어가[深入山中] 위로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저버리지 않고[上不 負付畀之性] 아래로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下 不負父師之敎耳].”20)
⑥ “내가 배운 것은 주자대전 뿐이다[愚之所學只一部朱子大全而已]. 감히 배 운 것을 버리고 다른 학문을 하겠는가[其敢捨所學而經營於他術耶].”21)
⑦ “주자를 믿지 않으면[不信朱子] 오랑캐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則是夷狄 之人也].”22)
⑧ “학문을 하는 자는 하루라도 주자어류가 없이는 안 된다[學者不可一日 無語類]. 없으면 옷을 팔아서라도 사야 할 것이다[雖賣衣買之可也].”23)
⑨ “말이 전부 옳은 자도 주자이며[言言而皆是者朱子也], 행위가 전부 마땅한 자도 주자이다[事事而皆當者朱子也].”24)
20) 宋子大全 卷66, 「答朴和叔」.
21) 宋子大全 卷77, 「與金遠明」.
22) 宋子大全 卷116, 「答閔定甫別紙」.
23) 宋子大全 附錄卷16, 「語錄[朴光一錄]」.
24) 宋子大全 附錄卷17, 「語錄[崔愼錄[上]]」.
⑩ “주자의 문장은[朱子之文]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無所不具] 마음 먹은 대로 말을 토하면 글이 되었으므로[而從心所欲吐辭爲文] 아마 문장도 주자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則竊恐文章亦莫如朱子也].”
송시열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대의 군주를 모셨지만, 자신이 신뢰 받고 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낀 임금은 효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의 배후에는, 주자와 남송 효종과의 군신관계가 멀리 자리잡고 있었다.
효종 은 송시열에게 경은 입만 열면 반드시 주자를 끌어내고 있는데, 언제 주 자의 글을 읽어 그처럼 되었는가를 물었고, 이에 대해 송시열은 젊어서부 터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읽고 마음 깊이 이를 좋아했다고 대답했 다.
다시 효종은 주자가 우리의 현실에 어떠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송 시열에게 물었다.
・ 효 종: “주자의 말은[朱子之言] 과연 하나하나 실행할 수 있는가[果可一一行 之乎].”
・ 송시열: “고대 성인의 말은[古聖之言] 지금과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실행 불가능한 것도 있습니다[或以時勢異宜而有不能行者]. 그러나 주자의 경우는 [至於朱子] 그 시대가 지금과 매우 가깝고[則時勢甚近] 그 처해있는 상황도 [且其所遭之時] 지금과 너무 비슷합니다[與今日正相似]. 따라서 신은 주자의 말을 하나하나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故臣以爲其言一一可行也].”25)
송시열은 17세기 조선의 현실은 12세기 남송의 시대적 상황과 시간적 으로도 매우 가깝고(‘甚近’) 처한 상황도 너무 비슷하다고(‘正相似’) 보았으 며, 따라서 주자의 처방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는 유효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주자의 생각과 주자학의 효능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지녔던 송시열은 일찍이 이황이 주자를 얼마나 존신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황은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주자대전을 전적으로 본받아 학문을 했고, 이 책의 한 글자 한 구절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송시열은 이황이 주자대 전을 숭경하고 열정을 드러낸 결과가 바로 주자서절요라는 사실에 대 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26)
25) 宋子大全 宋書拾遺 卷7, 「幄對說話」.
26) 宋子大全 卷25, 「假注書宋相琦傳諭後書啓」 卷51, 「答金延之別紙」 卷139, 「朱子大全箚疑序」.
이황이 주자를 끌어와서 자신의 논리를 옹호 하고 나아가 그의 학문적 권위를 주자에 투영하여 내세우는 태도는, 이이 보다는 성혼의 경우에 적극적인 형태로 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송시 열은 이러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송시열은 성혼이 주자대전 가운데 일상의 학문과 세상사에 적절한 내용을 뽑아낸 위학지방에 대해, 무릇 학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이 책을 받아 읽어 학풍을 세우고 나 아갈 바를 알게 하였다고 평하면서, 위학지방이 세상에 나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이 책을 자신이 찬술했다는 것을 자처하기 싫어하여 일찍 이 제목도 붙이지 않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의 주자학적 지향이 강한 점을 들어 주문지결이라는 책 이름을 덧붙였다는 점을 논술하였다.27)
이 는 위학지방이 주자학 입문을 위한 필수 교재였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렇게 송시열은 이황과 성혼의 주자에 대한 각별한 이해와 그 구체적 성 과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황도 성혼도 아닌 이이를 주자의 적통으 로 내세웠다.
① “내가 받드는 자는 주자와 율곡이다[吾所主者朱子也栗谷也].”28)
② “율곡의 설은[至於栗翁之說] 오로지 주자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一遵朱子 意] 의심 가는 말이 전혀 없다[更無可疑].”29)
③ “율곡 선생은[若栗谷先生] 진정한 주자의 적통이다[則眞朱子之嫡統也].”30)
④ “대개 율곡 선생의 학문은[盖栗谷先生之學] 오로지 주자를 위주로 삼았다 [專主於考亭].”31)
27) 宋子大全 卷146, 「朱門旨訣跋」.
28) 宋子大全 卷89, 「與權致道」.
29) 宋子大全 卷90, 「答李汝九」.
30) 宋子大全 卷100, 「答兪公佐」.
31) 宋子大全 卷139, 「朱子大全箚疑序」. 송시열은 주자와 율곡을 계승한 학자임을 천명하 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송시열은 율곡이 오로지 주자를 위주로 삼았고 주자의 뜻을 따랐으며 진정한 주자의 적통이었기에, 그 토대 위에서 주자와 율곡을 계승한다는 입장이었다. 송시열이 주자학적 지식인지배체제론=사대부정치체 제론을 강조하면서 기존보다 더욱더 확대된 정치권력의 합리화・세속화를 도모했던 것도 그러한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안외순, 주 8)의 논문, 141쪽). 하지 만 딱 여기까지이다. 평생 비판적 논점과 열린 시각을 유지했고 인(仁)의 실천에 힘 썼던 율곡과는 달리,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 주자학 보수주의자로 부른데서 알 수 있듯이 율곡과는 사상적 차이를 갖는 인물이었다(안외순, 주 8)의 논문, 141쪽).
송시열은 주자-율곡으로 이어지는 도통(일원적 계보)을 구상하면서 ‘공 자-맹자-주자-율곡’이라는 유학의 도통을 확정・제시하였다.
위의 도식에 따라, 노론은 공자-맹자-주자-율곡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성이 송시열 에게 계승되어 후대로 전수되었음을 과시한 반면, 남인은 송시열에 대해 주자-퇴계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성을 위협한 존재로 간주하고, 그를 유 교정치 이념에서 벗어난 패륜적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하였다.32)
송시열이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국’이라고 자처하고, 독자적인 문묘(文 廟) 제위(諸位) 승출(陞黜) 작업을 추진함으로써, 유학의 적통이 조선에 있 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도 주자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으로부 터 연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의 청을 의식한 명에 대한 인식은 초점 불일치의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송시열이 보기에, 명은 부모의 나라이고 은혜의 나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학문경향마저 동조, 지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은 이단사설에 빠져있었으며, 오직 조 선만이 주자학을 제대로 지켜냈다고 보았다.
이제는 조선이 유일한 중화 국이라고 자처하게 된 송시열이 주목한 것은 주자를 중심으로 한 도통을 바르게 확립하는 일, 즉 문묘 종사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조선시 대 문묘 종사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안을 들면, 1682년 (숙종 8) 5월, 9명의 종사자(公伯寮, 荀況, 馬融, 何休, 賈逵, 王肅, 王弼, 杜 預, 吳澄)가 배신・변절・패륜・이단 등의 이유로 문묘에서 퇴출되었고, 동시 에 성균관 학생들의 상소에 따라 송조 4현(楊時, 羅從彦, 李侗, 黃榦)이 새 로이 종사되었다.
송조 4현에 황간이 포함된 것은 송시열의 의중이 적극 반영된 결과였다.
황간에 대한 송시열의 상소 요지를 보면 “면재 황간은 [勉齋黃氏] 주자의 적전이며[實爲朱子之嫡傳] 주자가 부탁한 뜻을[朱子付託之 意] 왕복 서찰에서 볼 수 있는데[可見於往復書札者] 이는 명백하고도 무겁 다[旣明且重]”고 말한 뒤에 “구봉 채침과 함께 배향되지 못함은[獨不得與九 峯蔡氏同祀者] 어찌 사문의 결전이 아니겠는가[豈非斯文之缺典耶]”라고 지적 하였다.33)
32) 우경섭, 「우암 송시열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상과 문화 44, 2008, 194쪽 참 조.
33) 宋子大全 卷17, 「論文廟從祀疏」.
주자의 제자 채침이 종사되는 마당에, 평생 주자를 신봉했던 황간이 빠진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는 이유가 제시된 것이다.
위의 양시, 나종언, 이동 등 3인이 북송성리학과 남송성리학의 연결자로 부각되었듯 이, 황간은 주자학을 계승 전파시킨 공로가 인정되었다.34)
문묘 종사 문 제에 관해, 송시열의 특별한 주장은 바로 노재 허형(魯齋 許衡)을 출향(黜 享)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5)
허형은 원대의 유학자로, 학문에 정통했고 특히 정주학을 신봉했다. 한족이면서도 원나라에 벼슬한 것 때문에 학자 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
송시열은, 허형 출향론과 관련하여, 일찍이 퇴 계는 허형이 원(胡元)의 관직을 맡은 것을 비난하지 않은 반면, 율곡은 허 형이 원의 관직을 맡은 것을 “몸을 망쳤다[失身]”고 비난했음을 지적하였 다.36)
송시열은 공자와 주자의 춘추-강목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하 면서, 주자학적 위기의식을 이어 받아 대통과 정통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인도가 어지럽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 하였다.
이는 송시열 연구에 대명의리와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논의 궤적 이 짙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37)
34) 陳榮捷, 朱子門人, 臺北: 學生書局, 1982, 261~262쪽; 정옥자, 「조선후기 문묘사전의 이정: 중국유현의 승출에 관련하여」, 한국문화 7, 1986, 153쪽.
35)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丁酉封事[八月十六日]」 卷17, 「論文廟從祀疏」.
36) 宋子大全 附錄卷17, 「語錄[崔愼錄[上]]」. 송시열이 허형을 문묘에서 출향해야 한다고 건의했던 사실로 인해, 그는 율곡-우계 이래의 경세론・변통론을 부정하려 했다는 비판 과 함께 제도 개혁에 적극적・구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서는 김용흠, 「숙종대 전반 회니시비와 탕평론: 윤선거・윤증의 논리를 중심으로」, 한 국사연구 148, 2010, 81~82쪽 참조.
37) 대명의리를 둘러싼 조선중화주의에 대한 논의 및 논쟁으로는 정옥자, 조선후기 중 화사상 연구, 서울: 일지사, 1998; 계승범,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 역사학 보 213, 2012.; 우경섭, 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 서울: 유니스토리, 2013 참조. 그리고 작금의 한국사 연구에서 조선중화주의를 환기하는 이유에 대한 논의로 는 김영민, 「조선중화주의의 재검토: 이론적 접근」, 한국사연구 162, 2013, 211~252 쪽, 특히 212~216쪽 참조.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조선시대의 주자학적 사회문화를 파악하 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후기사는 물론 조선 말기 및 대한제국의 정치・학문・사상 지형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는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가 어떤 정체성을 갖는가에 대한 정밀한 탐색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사에서 대한제 국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삼황(洪武帝, 萬曆帝, 崇禎帝)이 라는 유령은 조선에서 융숭한 제사를 받으면서 현실 정치무대에서 여전 히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38)
대한제국 당시 조선인들이 영은문과 남별 궁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환구단을 세운 것은 ‘중국(명)’으로부터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청’으로부터의 단절과 독립을 상징하는 행위였고, 이 는 그만큼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은 대한제국을 세우는 그 순간까지도 명 나라로 대표되는 한족중화로부터의 이탈(완전한 독립=정신적 독립)은 별 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9)
위의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조선의 ‘역사 시계’는 삼전도의 항복(1637)과 명의 멸망(1644) 시점에서 정지된 채 작동을 범추고 말았다는 지적과 함께 들여다볼 장면이다.40)
38) 계승범,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출판부, 2011, 253 쪽, 261쪽.
39) 계승범, 주 38)의 책, 247~248쪽, 260쪽. 계승범은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장면 에 대해, 명과 청을 구분하지 않은 채 단순히 중국으로부터의 이탈이자 독립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조선의 ‘역사 시계’는 삼전도의 항복(1637)과 명의 멸망(1644) 시점에서 정지된 채 더 이상 힘차게 똑딱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이는 조선이 문명의 시계를 쉬지 않고 돌린 주변 국가들에 뒤처지는 원인이 되었음 을 언급하였다(계승범, 위의 책, 260~261쪽, 265쪽). 문명의 시계를 쉬지 않고 돌린 주변국의 예로 일본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림, 「18~19세기 조선 중화 론과 일본 국체론 비교연구」, 사회사상과 문화 19(1), 2016, 165~190쪽 참조.
40) 靑城雜記 卷3, 「醒言」, 林下筆記 卷32, 「朝宗碑」. ‘역사 시계’가 명의 멸망 시점(1644) 에서 작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계승범, 주 38)의 책) 우리 안의 불변의 의식은 송시 열의 표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송시열은 신종황제(만력제)가 베풀어준 ‘재조번방 (再造藩邦)’의 은혜에 대해 “우리나라의 땅 위의 어느 것 하나[凡我東一毫一髮一草一木] 황제의 은덕을 입지 않은 것이 없다[無非帝德攸霑]”는 말, 사람들 모두가 “나의 피와 살이 누가 내려 준 피와 살인가[吾之血肉是誰之血肉]”라는 각오를 통해 형용하였다(宋 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권상하가 송시열의 유명을 받들어 화양서원(華陽書院, 1695)에 이어 명의 1주갑에 해당하는 시점에 만동묘(萬東廟, 1704)를 창건한 것은 이미 망하고 없는 나라 명의 두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함이었다.
성대중은 숭정 제=의종의 남 탓만 하다가 나라를 망친 그 형편없는 인격을 신랄하게 비 판한 반면, 송시열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황제 의종, 내수와 자강에 힘쓴 의연한 황제 의종으로 기리 받들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3. 북벌론과 주자학 강의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에 관한 대화 과정에서는 군사학・국방학 강의가 아닌 주자학 강의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여러 장면이 포착된다. 이는 주 자학은 과연 북벌론의 사상적・이론적 기초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 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벌론에 대한 독특한 접근법으로서의 주자학 강의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송시열과 효종의 관계에 대해 파악해둘 사항 이 있다.
효종-송시열의 관계를 논할 때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효종의 사부 송 시열에 대한 선이해(전이해)를 갖고 있다.
효종시대의 문제에 대한 논의 에 자칫 효종-송시열의 구도를 너무 짙게 가져갈 수도 있음을 경계할 필 요가 있다는 뜻이다.
효종 자신은 과연 그의 ‘사부’ 송시열에 대해 어떤 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송시열은, 효종이 16세 때 6개월 정도 사 부의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효종-송시열의 관계를 스승-제자의 관념과 구도를 통해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훗날 효종은 송시열의 역량을 놓고도 어떤 확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사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효종은 송시열에 대해 “나는 그가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다[予則以爲未及試其有 才無才耳]”고 말했다.41)
오히려 효종은 “심지어 송시열이 자못 지식이 있 는데도[至於山人頗有知識] 내가 처음 즉위했을 때[而予之初卽位也] 과인을 책망하면서[責望於寡昧者] 역시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초기처럼 정사에 임해야 한다고 했으니[亦以癸亥初期之] 그의 시세를 헤아리지 못함이 또한 심하다[其不量時勢亦甚矣]”42)고 말한 것을 보면, 효종과 송시열은 그리 밀 착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3년 동안이나 효종의 사부로 있었던 윤선도에 대한 효종의 기억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장면이라고 말 할 수 있다.43)
41) 孝宗實錄 1652年(孝宗 3) 4月 26日.
42) 孝宗實錄 1654年(孝宗 5) 6月 19日.
43)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는 기축소(1650)에서 효종의 사부로 있었던 때를 회고하면서 “신은 전하가 세자로 계시던 날에[臣於殿下潛龍之日] 외람되게 궁학의 직임 을 맡아[冒忝宮學之任] 무려 5년 동안이나 시강하였습니다[侍講至於五年]”라고 하였다(孤 山遺稿 卷2, 「己丑疏[宣文大王卽位之九月][公在海南時]」). 후세에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 리 효종이 내심 가장 신뢰했던 사부는 송시열이 아니라 윤선도였다. 효종은 윤선도에 대해 “윤선도는 내가 처음 배울 때의 사부이다[尹善道乃予始學時師傅也]. 사부는 나를 잘 가르쳤기에[此人善於訓誨] 선왕께서 가상하게 여겨[故先王嘉之] 특별히 3년 동안이나 사부의 자리에 있게 하였다[特令仍任師傅至於三年之久]. 내가 글자를 깨우친 것은[予之解 蒙] 실로 사부의 공들인 덕택이므로[實賴此人之功也], 항상 내가 마음속으로 잊지 못한 다[予常不能忘于懷]”고 말하였다(孝宗實錄 1652年(孝宗 3) 1月 18日). 이처럼 효종은 송 시열과는 달리 윤선도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갖고, 사부를 받드는 예를 극진히 했음 을 알 수 있다(孝宗實錄 1652年(孝宗 3) 4月 3日).
우리는 흔히 송시열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도모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시간 계열 분석과 구조적 성격 분석에 의하면, 효종 연간 10년 동안 (1649~1659) 북벌을 논하다가, 현종-숙종초 20년 동안(1660~1680) 북벌에 대해 거의 침묵 상태였으며, 숙종 연간 10년 동안(1680~1689) 다시 북벌 을 논하는 등의 비균질성을 드러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송시열이 북벌론 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것은 1658년(효종 9) 9월 이조판서로 임명된 이래 1659년(효종 10) 5월 효종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9개월에 불과한 것 이었다.
효종이 송시열을 예우하면서 독대(獨對)와 밀찰(密札)을 통해 기밀을 논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44)
송시열의 화법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그가 효종에 대해 “인과 의의 도를 잡아 춘추대의를 청천백일같이 밝혔다”45)고 평가한 장면을 그의 북벌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다면 이는 성급한 단정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4) 이영춘, 「우암 송시열의 존주사상」, 청계사학 2, 1985, 131・144・156쪽. 당시의 시대 적 과제였던 북벌론과 관련하여 송시열은 북벌을 주자학적 명분론과 의리론을 울타 리로 삼아 그 안에서 거론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윤선거는 북벌에 필요한 국방력 강 화를 제도 개혁 차원에서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송시열은 주자학(적 명분론)과 의리론을 북벌 추진보다 중시하였기에, 그의 북벌론은 효종을 향해 주자학 강의를 펼 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자를 비판했던 윤휴를 사문난적 이라고 성토하였지만 윤선거는 북벌 대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작은 차이를 문제 삼지 말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윤휴를 두둔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상 의 논점은 김용흠, 「숙종대 전반 회니시비와 탕평론: 윤선거・윤증의 논리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8, 2010, 75~113쪽; 김용흠, 「전쟁의 기억과 정치: 병자호란과 회니시 비」, 한국사상사학 47, 2014, 201~254쪽 참조. 45) 宋子大全 卷17, 「請以孝宗大王廟爲世室疏」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송시열의 북벌론은 북벌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보다는 치자의 수신을 중시하는 주자식 처방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그 구도와 구상을 따라 말한다면 그것은 북벌 단행을 위한 실질적인 군사력을 말하 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망하고 없는 나라 명을 섬기는 명분을 위한 군사력 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야말로 그 북벌론은 명목상의 북 벌론이자 허구적인 북벌론이었던 셈이다. 송시열은 기축봉사(1649)-정유 봉사(1657)-기해독대/악대설화(1659)로 이어지는 효종과의 언설 및 대화 를 통해 북벌론의 분위기 조성 사업에 앞장섰다.
북벌론의 표방은 효종 즉위년(1649)부터 효종이 승하하던 때(1659)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송시열의 전체적인 상황 중의 효종연간의 상황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의 전체적인 삶은 주자학 절대주의에 의해 그려질 수 있었기에, 그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북벌론과는 감각을 상당히 달리하는 송시열식의 북벌론이었고, 이는 효종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논점인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창을 들고 중원으로 달려가 우 리 신종 황제의 망극한 은혜를 갚는 일에 있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오히 려 관문을 닫아걸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게 하여 의리의 온전 함을 지키는 것도 무방하다는 논점이었다.46)
이처럼 송시열의 북벌론은 북벌의 사전적 의미와 군사적 대응에 관한 상식과 통념을 벗어난 논점임 을 확인할 수 있다.47)
송시열은 기축봉사에서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에 관한 정책을 제안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상 정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내수책에 집중 된 것이었다.
송시열의 “안으로 정사를 닦는다[內修政事]”는 내수책과 “밖 으로 오랑캐를 물리친다[外攘夷狄]”는 외양책을 묶어 내수외양책을 제시하 였지만, 그의 관심사는 사실상 내수책에 집중된 것이었다.
이 역시 주자 학적 구상이 갖는 일반적 성격을 닮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48)
46)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47) 송시열은 <기축봉사>(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16조를 올리지만, 이는 주자의 9개조로 구성된 <기유봉사>(朱子大全 卷12, 「己酉擬上封事」)에서 타이틀을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송시열이 주자의 <기유봉사>에서 따온 9개조는 ① 이른바 학문에 힘써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말에 대하여[所謂勉學以正心者], ② 이른바 몸을 닦아 집안을 다 스리는 일에 대하여[所謂修身以齊家者], ③ 이른바 편녕을 멀리하고 충직을 가까이하는 일에 대하여[所謂遠便佞以近忠直者], ④ 이른바 사은을 억제하고 공도를 회복하는 일에 대하여[所謂抑私恩以恢公道者], ⑤ 이른바 적임자를 정선하여 체통을 밝히는 일에 대하 여[所謂精選任以明體統者], ⑥ 이른바 기강을 진작하고 풍속을 쇄신하는 일에 대하여[所 謂振紀綱以礪風俗者], ⑦ 이른바 재용을 절약하여 방본을 굳게 하는 일에 대하여[所謂節 財用以固邦本者], ⑧ 이른바 사부를 택하여 왕세자를 보필하는 일에 대하여[所謂擇師傅 以輔儲貳者], ⑨ 이른바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는 일에 대하여[所謂修政事以攘夷狄 者] 등이다. 송시열의 <기축봉사>와 주자의 <기유봉사>에서 타이틀 ②-③-⑤-⑦은 동 일하고, 타이틀 ①-④-⑥-⑧은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가 있고(①: 所謂講學以正心者, ④: 所謂抑私恩以抗公道者, ⑥: 所謂振綱紀以厲風俗者, ⑧: 所謂擇師傅以輔皇儲者), ⑨는 논점이 크게 달라서 “이른바 의리를 밝게 하여 주술을 끊는 일에 대하여[所謂明義理以絶神姦 者]”로 되어있다. 송시열이 주자의 타이틀 ⑨를 “이른바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는 일에 대하여[所謂修政事以攘夷狄者]”로 고쳐 말한 것은 당시 조선의 특수성(북벌론 정 국)을 고려한 변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48)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卷7, 「辭召命兼論聖學疏」.
송시열의 입장에서 내수책과 외양책의 역학은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
외양 책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수책이며 내수책도 우선순위로 보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군주의 마음이었다.
그야말로 송시열은 주자식 해 법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반복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의 내수책은 그 구조 역시 주자가 송 효종에게 말한 “세상에 둘 도 없는 큰 공은 세우기 쉽지만[不世之大功易立]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 존하기 어렵고[而至微之本心難保], 중원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中原之 戎易逐] 내 한 몸의 사욕은 없애기 어렵다[而一己之私意難除也]”49)는 말과 “그 근본은 위강에 있지 않고 덕업에 있으며[其本不在乎威強而在乎德業], 그 방비는 변경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其備不在乎邊境而在乎朝廷], 그 도 구는 병식에 있지 않고 기강에 있다[其具不在乎兵食而在乎紀綱]”50)는 말을 만세의 지론으로 삼았고, 이를 임금 효종에게 좌우명으로 걸어 놓고 조석 으로 살필 것을 당부하였다.
송시열의 명=부모=군주, 청=부모의 원수=이적, 조선=신자라는 도식51) 에는 재조지은을 베풀어준, 그러나 이미 멸망한 명에 대한 그리움과 추존 의식은 계속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기도 했다.52)
그렇게 가다보면 신종황 제에 대한 원수는 갚지 못하더라도 조선조의 대명 의리는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였다.53)
49)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卷12, 「請懋聖學立大志箚[戊申十一月]」.
50)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51) 宋子大全 卷213, 「三學士傳」.
52) 송시열의 명에 대한 추존의식은 이미 망하고 없는 나라의 두 황제 신종(萬曆帝)과 의 종(崇禎帝)을 제사지내는 사당 만동묘(萬東廟, 1704)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동묘의 창건 시점이 1704년인 것은 명이 멸망한 지 60년 되는 해(明亡一週甲)였기 때문이다.
53)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
이는 분명 북벌의 사전적 의미에 충실한 언 어가 아니다.
북벌이라는 실질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 조건을 외면 한 채 자연의 섭리나 요행에 기대는 운명론이 돋보이는 장면인바, 이를 두고 청에 대한 공격과 복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송시열의 관념에 진정한 의미의 북벌은 자리 잡은 적이 없었 다고 말할 수 있다.54)
효종대의 국시였던 북벌론은 당시 대륙정세 및 정 치상황을 고려할 때, 실제 북벌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정치적 기득권을 유 지하고 통치체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명분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55)
송시열이 춘추대의를 내걸면서 제시했던 “우리가 다투는 것은 오직 대 의일 뿐이다[我等所爭者惟大義而已]. 승패와 존망은 거론할 바가 아니다[勝 敗存亡不須論也]”56)는 말 또한 특별한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원래 이 말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사용 되는 문구이지만, 송시열의 경우에는 이 말마저도 적의 실체를 방기・묵인 하거나 내부 문제를 외부 조건에 전가하는 자기기만성 논리로 특수 해석 되는 것이기도 했다.57)
54) 김준석, 「17세기 정통주자학파의 정치사회론: 송시열의 세도정치론과 부세제도이정책」, 동방학지 67, 1990, 102쪽.
55) 남은경, 「인조말, 효종조의 문풍 변화: 심양장계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한문 학연구 34, 2004, 454쪽.
56) 宋子大全 卷213, 「三學士傳」. 57) 김준석, 주 54)의 논문, 103쪽. 58) 宋子大全 卷5, 「丁酉封事[八月十六日]」.
송시열이 주자가 군사에 대해 논하면서 했던 “근 본이 강하면 정신이 적을 대적할 수 있고[本強則精神折衝] 강하지 않으면 앙흉을 초래한다[不強則招殃致凶]”58)는 말을 인용한 것도 북벌의 언어로 치고나가기를 사실상 포기한 말이었다.
송시열의 이어지는 군사에 관한 얘기는 금위군(방위군)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것은 북벌군에 대한 얘기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송시열이 효종 즉위년에 기축봉사(1649)를 올린 지 8년 만에 다시 올린 정유봉사(1657)를 통해 했던 얘기도 주자 일존주의와 주자학 절대주의에입각한 주자학 강의의 성격을 짙게 띤 것이었다.
정유봉사는 기축봉사에 서 제기한 내수책과 외양책의 역학을 재론한 것에 불과했다.
송시열은 군 사훈련과 군량 확보만 해결되면 북벌을 단행할 수 있을 것처럼 효종을 고무시킨 적도 있지만, 그 실상을 말하자면 이는 북벌군이라기보다는 방 위군의 성격이 노출된 것이었고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복수를 위한 북 벌에 집중되는 그저 마음의 문제로 그치는 성격의 것이기도 했다.59)
1659년 효종이 조정의 엄한 관행을 깨고 독대를 통해 송시열에게 오늘의 급무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송시열은 엄연하고도 여전한 북벌 정국에서 도 주자학의 기본 구조에서 미동도 없는 입장을 일관되게 제시했다.
형식 은 주자학의 보편성에 기대는 포즈를 취했지만 그 실질은 주자학 절대주의 라는 완고성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송시열은 이처럼 북벌 을 지렛대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처신을 드러낸 것이었 다.60)
59) 宋子大全 卷5, 「己丑封事[八月]」, 「丁酉封事[八月十六日]」 卷20, 「自耽羅就拿出陸後遺疏」.
60) 송시열과 효종의 독대(1659.3.11.)를 통해서도 송시열은 사실상 북벌과 상관없는 인 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송시열을 북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주된 계기는 기 해독대 때문이기도 했다(孝宗實錄 1659年(孝宗 10) 3月 11日). 독대 내용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16년 후인 1675년(숙종 1)이었고, 효종이 세자를 통해 송시열에게 전 한 밀찰 역시 1689년(숙종 15)에 그 내용이 알려졌고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 직 후에 숙종에게 전해졌다. 송시열은 불충과 역심의 혐의를 받는 정치적 위기 때마다 독대와 밀찰을 매개로 삼아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과의 특별한 관계를 알리는 수단으 로 삼았다(이영춘, 「우암 송시열의 존주사상」, 청계사학 2, 1985, 129~164쪽; 이희 환, 「효종대의 정국과 북벌론」, 전북사학 42, 2013, 201~222쪽; 우경섭, 「악대설화와 효종의 비밀 편지」, 한국학연구 50, 2018, 219~244쪽). 그런데 독대나 밀찰의 성격 상 그것은 후세에 알려지지 않는 것이어야 맞다. 송시열도 제자 최신에게 말했듯이 독대나 밀찰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은 왕명을 어기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이를 어기고 말았다. 참고로 일찍이 송시열이 제자 최신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신]: “선생께서 1658년(효종 9) 여름에 밀지를 받 들어 도성에 들어갔다는 설이 옳습니까.” [송시열]: “그렇다. 효종께서 상하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대의를 천하에 펴려 하시었다. 이 뜻이 한 번 결정되어 오랠수록 더욱 굳어졌으나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아도 함께 일할 만한 이가 없으므로 특별히 대전별감을 파견하여 나 같은 신하에게 서신으로 비밀리에 말씀하시되 “올라 와서 직분에 이바지하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리하여 내가 임금의……부르신 뜻에 따라 도성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옥체가 편안하지 못하시어 오랜 뒤에야 알현하 게 되었다.” [최신]: “그때의 비밀리에 말씀하신 글이 지금도 있습니까.” [송시열]: “곧 바로 불태워 없애라는 것이 임금의 명이었으므로 비록 간수해 두고 싶었으나 어찌 그러할 수 있었겠는가.”(宋子大全 附錄卷18, 「語錄五[崔愼錄下]」).
송시열과 북벌론의 연계 논리는 하나의 허상이며 효종의 부름에 응하는 형식을 갖추기 위한 그럴듯한 포즈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북벌을 단행하기 위한 구체적・실질적・실천적 제안은 찾아볼 수 없다.
・ 효종: 나와 경은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와 같으니 함께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세가 되오. 10 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의지(志氣)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 망이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고, 그 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오.……
・ 송시열: 전하께서 큰 뜻을 가지고 계시고 또 신을 크게 쓰려고 하시는데, 신이 어찌 물러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죽을 각오로 일을 하겠습니다.……
・ 효종: 경은 오늘날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急務)인지 한번 말해 주시오.
・ 송시열: 그것은 즉석에서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평소에 배 운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의 학설(格致誠正之說) 을 사람들은 진부하고 오활한 말(陳腐迂闊之言)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 에, 그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습니다(心笑之).
그러나 성인이 필시 쓸데없는 말을 해서 후세 사람들을 속였을 리가 없습 니다.……격물・치지를 하여 사리가 이미 통명해지고, 성의 공부를 하여 선 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분별되며, 정심 공부를 하여 마음의 본체가 항상 태연해서 누가 없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모든 사물을 처리 할 적에 올바른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모든 일이 순 조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격물・치지・성의・정심이라는 것이 과연 오활하여 실상이 없는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61)
61) 宋子大全, 拾遺卷7, 「幄對說話」. 본 「악대설화」의 번역・인용은 박균섭, 「수양론과 북 벌론의 불협화음: 송시열과 효종」, 교육철학 51, 2013, 52~53쪽에 의함.
송시열이 효종의 북벌 계획에 대해 “마땅히 죽을 각오로 임하겠다[只當 以死爲期矣]”는 말로 대응한 것은 적어도 효종에게 북벌에 적극 나서겠다 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북벌론으로 가열찬 전진을 보여줄 생 각이 없으면서 단지 수양론을 천명할 요량이면서 죽을 각오를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시열의 주자학 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그것이 과연 북벌군 양성과 전쟁 돌입・투입을 상정한 얘기인지를 갸우뚱 하게 만든다.
주자학의 깊이를 갖춘 집중적・전문적 강론이 이어질수록 그 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론이 급무인 상황에서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이 오활하여 실상이 없는 헛소리일 수 없다면서 그 것이 북벌의 방책이라도 되는 듯이 다그치듯 효종에게 예학강의를 펼쳤 다.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에 입각하지 않은 몸짓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 할 수 없는 노릇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주자학 강의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누구라도 그러한 방향의 어법을 구사할 것이며 거기서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북벌・북벌군・북벌론의 큰 틀을 놓 고 정면대응하듯 말하자면 송시열은 북벌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로 시 작하여 끝을 맺었다.
특히 북벌의 과업을 현실적인 문제로 여기고 있는 임금 앞에서의 주자학 강의는 그저 주자학 강의로 끝날 뿐 그것이 북벌 의 전개로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4. 윤휴의 주자, 송시열의 주자
송시열은 1636년(인조 14)에 충청도 삼산에서 백호 윤휴(白湖 尹鑴)를처음으로 만났다.
이듬해 1637년(인조 15)에는 송시열이 남한산성에서 나 와 속리산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였을 때, 송시열과 윤휴가 복천사(福泉寺) 앞에서 만났다.
이때 윤휴는 송시열에게 “지금 이후로는[自今以後]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며[不復赴擧],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或遇時從政]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不忘今日之羞辱]”고 통곡하였 다.62)
당시 윤휴는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는 뜻을 품고 문을 닫고서 학문 을 강구하였으며 병서 공부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을 대할 때 마다 “이때야말로 사대부들이 무기를 베고 자며 눈물을 흘리면서[此正士大 夫枕戈洒泣] 대의를 천하에 밝힐 때이다[以明大義之秋也]”고 다짐하였다.63)
송시열은 1636년(인조 14)에 충청도 삼산에서 윤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친구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 술회하였는데, 그 내용은 윤휴의 연보 1638년(인조 16)조에 짤막하게 제시되어 있다.
애초에 선생이 삼산에 있을 때, 송시열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직접 찾 아와서 교유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삼산에 가서[吾至三山] 윤휴를 만나보고[見尹某] 사흘 동안 그와 학문 을 논하였는데[與之論學三日], 우리들이 삼십년 동안 글을 읽은 것은[吾輩三 十年讀書]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었다[誠可笑也]”고 하였다.64)
62) 白湖全書 附錄 卷2, 「行狀上」.
63) 白湖全書 附錄 卷2, 「行狀上」.
64) 白湖全書 附錄 卷5, 「年譜[戊寅]」.
본시 가까운 인척관계이기도 했던 송시열과 윤휴는 시와 서간을 주고 받는 등 서로 친애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뒤늦게 윤휴의 학문세계에 대해 송시열의 거부감이 작용하면서 두 사람은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송시열 의 연보를 보면, 1642년(인조 20)에 송시열이 윤휴의 이기설을 배척했다 는 기록이 나온다.65)
윤휴가 이기설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작성하여 송시열에게 보내왔고, 송시열은 이를 보고 매우 놀라 꾸짖었다는 얘기와 함 께 “(윤휴가) 처음으로 퇴계와 율곡의 설을 배척하고[初斥滉珥之說] 우계는 거론하지 않았다[而文簡公臣成渾則不數也]”고 술회한 사실을 조합해 보면, 송시열은 적어도 1642년에는 윤휴의 학문적 지향에 의혹을 갖기 시작했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6)
윤휴가 남긴 저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중용에 대한 저술 이다.
이는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지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특히 주목을 요한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주석을 틀렸다 하고[旣以朱子註說爲不是] 기어코 자신의 견해로 바꾸었는 데[必以己見易之] 중용에 이르러서는[至於中庸] 주자의 분장을 없애고[則 掃去章句] 스스로 새로운 주를 달았다[而自爲新註]”고 지적하였다.67)
송시 열이 윤휴의 중용신주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송시열은 1642년(인조 20) 시점에서 이미 윤휴의 공부와 학문 (이기설)에 대해 의혹을 갖고 놀라 꾸짖고 거부감을 드러냈으며, 윤휴가 중용장구를 개변하여 중용신주를 내놓은 1644년(인조 22) 시점에서 도 이를 문제 삼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를 크게 문제 삼은 것은 아니 었고, 1653년(효종 4)에 가서야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맹비난하 기에 이르렀다.68)
65) 宋子大全 附錄 卷2, 「年譜[壬午]」.
66)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67)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68) 윤휴의 중용신주 관련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선아,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 서울: 한국학술정보, 2008 참조.
윤휴가 중용장구를 개변하여 ‘중용설’을 쓴 1644년(인조 22) 당시만 해도, 그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653년(효종 4)에 가서야 윤휴는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었 다.
송시열의 윤휴를 향한 사문난적설은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고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편향되게 전개된 것은 아닌 지 의심케 한다.
송시열은 그의 종질 송기후의 집을 방문했다가 송기후가 윤휴의 중용신주를 읽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일이 있다.69)
당시 윤휴 의 중용에 대한 해석 작업은 중용신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재 윤휴의 중용신주가 남아있지 않아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며, 윤휴의 중용에 대한 다른 보충 글을 통해 그 의 견해를 대강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70)
송시열은 중용 해석과 관련하여 윤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 였지만, 중용 원문에 대한 저술이 이 시기에 처음 시도되었던 것은 아 니다.
효종시대에 포저 조익(浦渚 趙翼)도 중용과 대학의 주해를 임 금에게 올린 일이 있었다.
실록 기사에서는 조익에 대해
“그가 지은 서 경천설과 용학곤득 등의 책을 보면[其所著書經淺說庸學困得等書中] 주자 의 장구를 제법 고쳤는데[頗改朱子章句]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을 잡는다 [人以此疵之]”는 기록이 등장한다.71)
69) 宋子大全 附錄 卷2, 「年譜」; 白湖全書 附錄2, 「行狀上」.
70) 白湖全書 卷35, 「中庸之圖」 卷36, 「中庸章句次第」, 「分章大旨」, 「中庸朱子章句補錄」. 중 용에 대한 윤휴의 여러 저술 가운데 문제가 된 것은 윤휴가 1644년(인조 22) 시점에 서 주자와 다른 방식으로 장 나누기(分章)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원래 예기에 수록 된 원형 그대로의 중용은 장절의 구분이 없었는데, 주자가 중용 전편을 130개의 문단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33장으로 구분한 뒤, 장의 말미에 그 장의 의의를 총괄 하는 해석을 기록해 두었다(章下註). 그러나 윤휴는 주자의 장구와는 달리 중용을 10장 28절로 나누었다. 중용신주의 문제는 사실상 주자의 구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용의 장 나누기를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652년(효종 3)에 윤휴는 민정중에 의해 재능과 식견이 탁월한 인물로 천거되었으며(孝宗實錄, 1652年 (孝宗 3) 4月 29日), 송시열과 당색을 같이하는 서인들에 의해서도 윤휴는 학문에 힘 써 재주가 많고 품행과 도의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孝宗實錄, 1655年(孝 宗 6) 3月 8日, 1656年(孝宗 7) 1月 28日).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선아, 「백호 윤 휴에 대한 사문난적설 검토」, 조선시대사학보 6, 1998, 68・71쪽 참조.
71) 孝宗實錄, 1649年(孝宗 卽位) 12月 1日. 孝宗實錄, 1655年(孝宗 6) 3月 10日 「左議政趙 翼卒記」.
하지만 그 흠을 잡는 정도나 비판의 강도는 그리 크거나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중용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주자학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으며, 윤휴의 중용신주도 이러한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72)
윤휴가 중용에 대한 접근・해석의 과정에서 주자와 입장을 달리하기 는 하였지만, 주자의 학설에 대해 정면적으로 비판한 사실은 없다.
윤휴 는 송시열이 자신을 두고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왜 나는 사문난적일 수 없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자학적 공부론의 원칙 을 말하였다.
경전의 뜻은 심오하고 경이로워 배우는 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옛사람의 말을 논함에 진실로 앞사람과 더불어 다르게 말한 것이 있 으나 일찍이 조금밖에 다르지 않았을 뿐이며 오직 그 말한 바를 따라서 그 반복한 뜻을 다시 말했을 뿐이다. 일찍이 주자의 책을 읽어보니, 그 주해를 쓰고 다시 지우고, 지우고 또다시 쓰니, 때로는 스스로 뜻을 깨달 아 고치기도 하고, 더러는 붕우와 문하생의 말에 따라 고쳤으니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였다. 경전의 뜻은 연구하기 어렵고 대현의 마음은 매 우 공정하여 바른 곳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옛사람이 쓴 것에 더하여 전하고자 하는 오묘함인데 또한 어찌 속이고 어그러뜨린다 고 한단 말인가.73)
윤휴는 자신은 끊임없이 경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주자의 학 문하는 태도를 본받아 경전의 뜻을 탐구한 것이며 자신의 설 또한 주자 가 말한 것과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74)
72) 이선아, 「백호 윤휴에 대한 사문난적설 검토」, 조선시대사학보 6, 1998, 68쪽, 71쪽.
73) 白湖全書 附錄 卷2, 「行狀上」.
74) 강지은은 조선 유학자들이 경서 해석 과정에서 “주자를 모욕한다”, “주자의 주석을 고쳤다”, “사문난적이다”는 공격을 받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주자가 미완성으로 남 겨둔 공부를 완성함으로써 도통의 계승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 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주자학에 대한 회의나 비판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 다는 해석을 내놓았다(강지은, 이혜인 역, 주 9)의 책, 158~159쪽). 윤휴도, 송시열로 부터 받은 공격과 그로 인한 세간의 오인과는 달리, 주자학에 대한 회의나 비판의식
윤휴의 주자학적 공부론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고 말하자면, 그가 송시열 로부터 ‘사문난적’이라는 공격을 받게 된 것은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윤휴의 사문난적설은 1653년(효종 4) 윤7월, 충청도 강경의 황 산서원(黃山書院: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의 위패를 모신 사당. 1664년(현 종 5) 竹林書院으로 사액을 받음)에서 송시열이 윤선거, 권시, 유계, 권성 원 등 10여 명의 충청지역 출신 서인 학자들을 만났을 때에 표출되었다.
당시 윤휴의 주자에 대한 이해방식을 두고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 오간 대화는 다음과 같다.75)
・ 송시열: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낸 것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을 위한 일이다. 주자가 나온 이후로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없고 밝혀지지 않은 글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마음대로 억지 주장을 내세운다. 공은 우계(성혼)의 외손이면서 도리어 윤휴의 편당이 되어 ‘주 자에 반역하는 사람[朱門之反卒]’이 된 것은 무슨 일인가?” …
・ 윤선거: “의리는 천하의 공도인 것인데,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 게 하려함은 무슨 일인가?
주자 이후에, 주자와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면 북계 진순(北溪 陳淳)과 신안 왕염(新安 王炎)은 어찌하여 주장하는 바가 있었고, 그 주장이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가?”
・ 송시열: “진씨의 여러 가지 설이 진실로 많기는 하지만, 이것이 모두 주자 와 인연이 있는 설을 부연한 것이다.
어찌 윤휴처럼 주자의 장구를 제거하 고 신주(新註)를 만들어 서로 승부를 겨루듯 앞서려고 한 것과 같겠는가?”
・ 윤선거: “이는 윤휴가 너무 고명한 탓이다.”
・ 송시열: “공은 주자는 고명하지 못하고 윤휴가 도리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인가?
또한 윤휴 같은 ‘참적(僭賊)’76)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莽], 동 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한 바를 따라서 그 반복한 뜻을 다시 말했을 뿐” 이거나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뿐”이었다.
75) 宋子大全 附錄卷2, 「年譜」.
76)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 ‘흑수대간(黑水大姦)’ 등으로 부르며 멸시하였다. 특히 윤휴를 ‘흑수’-‘흑수대간’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윤휴가 경 기도 여주(驪州)=여강(驪江)에 살았기 때문인데, ‘검을 려[驪]’자를 ‘검을 흑[黑]’자로 바 꿔 부르고 싶은 심리가 작동했을 것이다. 宋子大全 卷56, 「答金久之[丙寅八月]」, 宋子 大全 卷72, 「答李擇之[丙寅五月初三日]」.
탁[卓], 조조[操], 유유[裕] 같은 자들도 모두 너무 고명한 탓이겠는가?
윤휴 는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之亂賊)’으로서, 혈기가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
춘추의 법이 난신과 적자를 다스릴 적에 반 드시 먼저 그 편당을 다스리게 되어있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공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춘추의 법을 받게 될 것이다.”
윤선거: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윤휴를 겁내고 있다.”
송시열이 윤휴를 공격하면서, 그리고 그를 두둔하는 듯한 윤선거를 일 컬어 ‘주자의 반역자[朱門之反卒]’라고 매도하고 급기야 ‘사문난적’이라는 문구를 들고 나온 것은 그들의 심중한 죄를 묻고 성토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윤휴는 주자의 장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자, 송시열은 윤휴의 이러한 태도가 주자에 대한 반역에 다름없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 극단의 언어적 형용 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시점은 1644년(인조 22)이 아닌 1653년(효종 4)이 었다는 점에서 송시열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적 색조를 정연하게 설명하 기 어려운 점이 있다.77)
주목할 일은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지목하였을 당시, 적어도 당시 사류들은 송시열의 사문난적 시비를 송시 열과 윤휴 두 사람 사이의 학문적 경향의 차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으 며, 송시열의 지목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78)
1659년(효종 10, 현종 즉위), 기해예송 이후 송시열과 윤휴 두 사람은 완전 결별하였다.
송시열은 1660년(현종 1) “이전에 내가 공격한 것은[前 日吾之所攻] 그의 학술의 잘못뿐이었다[只是學術之誤]. 그러나 지금 그가 하 는 짓은[今日所爲] 이처럼 음험하게 되어가고 있다[陰險至此]”79)고 했다.
77) 肅宗實錄, 1687年(肅宗 13) 3月 22日.
78) 이선아,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 서울: 한국학술정보, 2008, 65~67쪽.
79) 宋子大全 卷125, 「寄子」.
윤 휴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드러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송시열이 윤휴를 공격한 것은 예론의 문제보다도 윤휴가 주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실 자체가 용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시 열의 주자학 절대주의가 주자학 연구 일반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 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윤휴의 입장에서 그 장면을 보정하자면, 윤휴는 기해예송(1659) 당시에 이유태, 송시열 등과 관계를 끊었음을 언 급하면서 그 때의 심정에 대해 “저도 마음을 굽혀 그 사람들과 벗하려 하 지 않은 지[臣不欲屈心而友其人] 이제 이미 15-16년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今已十五六年于玆矣]”라고 고백하였다.80)
송시열의 윤휴에 대한 단정은 학술적 차원의 내재적 숙고에 의한 것이 라기보다는 감정이 개입된 판단이라는 생각을 떨구기 어렵다.
이는 윤휴 의 학문세계에 대한 탐구, 그의 공부와 인격에 대한 탐색이 본연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윤휴는 중용에 관한 해석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살피건대 주자는 여러 경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중설(衆說)을 모아 절충 하여 하나의 설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서도 주자는 매번 문 인과 더불어 강습하고 또 스스로 체험하려 하였으며, 혹 명확하지 않은 견해[未透見], 실천하지 못한 일[未到行], 이루지 못한 장면[未得處]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토론하여 고쳐 정하였으니, 멈추지 않고 고쳐 나가기를 죽 음 직전에까지 계속했다. 항상 말하기를 이것은 붕우의 변석과 질정으로 인하여 나의 앞의 주장[前說]이 온전치 않음이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고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선(善)과 시(是) 를 취하고 구하여 옮겨가기를 거리끼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나는 이를 본받아 생각에 힘쓰고자 하였다.81)
80) 肅宗實錄, 1675年(肅宗 1) 1月 21日.
81) 白湖全書 卷36, 「讀書記中庸序」.
이는 윤휴가 주자의 학문 자체보다는 학문에 임하는 자세에 초점을 맞 추어 내린 해석과 평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윤휴의 주자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앞에 두고서 윤휴의 학문적 입장을 반주자학적이라고 규 정하기는 어렵다.
윤휴가 보기에 주자는, 학문적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 진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해가는 충실한 한 학인이었다.82)
윤휴의 이와 같은 주자 이해는, 송시열이 문제 삼은 것처럼, 결코 주자의 학문을 부정하는 뜻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윤휴는 자신의 많은 논설 중 에서 주자의 학설을 적지 않게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학(聖學=聖人 之學) 발전에 기여한 주자의 공로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만 주 자의 학설은 그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고쳐나가기를 꺼리지 않은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일 학인의 입장에서 제시된 것이므로 그 모두가 옳은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자의 미비점을 보완하면서 성학 발전 을 계속해가는 것이 후학으로서 주자를 계승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 했다.
송시열과 윤휴의 주자 해석에 대한 문제를 조선시대 후기의 경향과 추 세로 무대를 넓혀 말하자면, 그 정신풍토는 앎과 삶의 수렴 과정이 아닌 괴리 과정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은 숙명적인 과업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유교 지식인들의 주자 해석을 두고 드러나는 행동 특성은 “한 글자라도 의심하 면 망발[一字致疑則妄也]”이라고 매도하고 “이것저것 참고하여 대조만 해도 범죄[考校參互則罪也]”라고 공격하는 현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83)
82) 한영국・이태진, 「백호전서 해제」, 백호전서, 대구: 경북대학교 출판부, 1974, 2187~ 2188쪽.
83) 星湖僿說 卷21, 「儒門禁網」.
유교 의 수기치인학이 이처럼 학문의 본연으로부터 격절을 드러내는 양상은 후세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5. 기해・갑인 예송, 회니・원류 시비
기해예송을 시작점으로 하여 기해・갑인 예송과 회니・원류 시비가 일어 난 흐름과 맥락을 놓고 보면, 이는 사상적 기반, 정치적 지향, 개인의 성 정 문제 등이 복합 변수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이를 송 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와 사상적 정합성을 갖는다거나 주자학의 교조화 문제와 인과관계를 갖는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해・갑인 예 송과 회니・원류 시비, 그 논란의 중심에 송시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84), 그리고 송시열 자신은 항상 주자-주자학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행동에 나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쟁송과 시비는 주자학 절대주의로 인한 파장・파열음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자가례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는 송익필의 가례주설이다.
주자 가례는 남송시대에 통용되었던 생활의례로서 이민족으로 습속이 다르고 연대상으로도 근 300년의 차가 있음에도 조선시대에는 주자의 저술이란 이 유만으로 교조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이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난점이 많았 다.85)
조선조 예학 연구의 체계를 마련했던 김장생도 “어려서부터 주자가 례를 읽었지만[余自幼受讀家禮] 깨닫지 못함을 늘 병통으로 여겼다[常病其 未能通曉]”고 하였다.86)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주자가례에 대한 신념으로 이어졌다.
송시열은 주자가례가 미완의 텍스트로 유통되다 보니 이를 감히 거론 대상으로 삼는 자들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이 책을 주자의 편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릇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하 였다.87)
84) 肅宗實錄, 1689年(肅宗 15) 6月 3日 「宋時烈卒記」 및 肅宗補闕正誤, 1689年(肅宗 15) 6 月 3日 「前左議政宋時烈卒記」 참조.
85) 龜峯集 卷7, 「家禮註說序」.
86) 沙溪遺稿 卷5, 「家禮輯覽序」.
87) 宋子大全 卷139, 「家禮輯覽後序」.
송시열의 주자가례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주자가례에 실리지 않은 고례(古禮)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고 언급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88)
송시열의 주자가례에 대한 논의는 고례(의 례)-금례(주자가례)에 대한 얘기, 그리고 여기에 시제(時制)=국제(國制) 에 대한 얘기가 역학으로 작용하는 어느 지점에 놓여있으며 그 지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주자의 정신이 짙게 깃든 주자가례에 대한 논의로 이 어지는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정치적・학문적 대립을 초래한 예송은 효종이 승하하면서부 터 비롯되었다(己亥禮訟: 1659).
1659년(효종 10) 5월, 효종이 승하하자, 그 어머니 되는 자의대비(慈懿大妃=趙大妃, 仁祖의 繼妃)가 갖출 복제를 어 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불거졌다.89)
송시열의 관점(朞年服)90)과 윤휴 의 관점(三年服)으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보인 기예예송은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복상하느냐에 관한 논쟁이었다.
88) 김남이, 「17세기 사대부의 주자가례에 대한 인식과 일상에서의 예 실천: 우암 송시 열의 경우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103, 2006, 114~115쪽.
89) 顯宗實錄 1659年(顯宗 卽位) 5月, 1660年(顯宗 1)年 3月.
90) 宋子大全 卷134, 「禮說」, 「辨柳元之禮說」.
문제의 핵심은 혈연상의 친소 관계와 신분상의 존비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복제 문제가 제왕가의 원칙 을 적용할 것인가 사대부가의 원칙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복잡한 사안 으로 성격이 바뀌고 말았다는 점이다.
예송은 서인(송시열)과 남인(허목)의 학문적 대립이라는 양상을 띠지만, 그 발단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아니었다.
송시열의 견해에 문제를 제기 했던 최초의 인물은 남인과 직접 관련이 없는 윤휴였기 때문이다.
윤휴의 반론이 자의대비의 복상을 기년복으로 결정한 송시열 등 서인 일파를 정 치적으로 곤경에 빠트린 예송의 단서가 되었고, 이는 송시열이 그의 동료 와 문인들에게 윤휴와의 교유를 끊도록 압박을 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 다. 윤휴의 발설이 도화선이 되어 남인, 특히 허목의 공격을 받게 되자 주자학 절대주의를 신조로 삼았던 송시열은 자신의 견해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책(경학적 근거)을 의례에서 찾는 기민한 대응을 보였다.
이런 저런 논의가 이 시점에서 주자가례인가 의례인가의 문제로 수렴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91)
동아시아의 17세기는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 속에서 전개되었는바,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처한 국가 정체성의 위기 상황은 명으로부터 이 어진 중화(中華)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청의 대중 화(大中華)의 논리(소위 실력주의)를 따를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기 에 이르렀다.92)
이는 국내 정치・학문의 세계에서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 하여 적통(嫡統)-천합(天合) 우선인가 아니면 종통(宗統)-존군(尊君) 우선인 가의 질문으로 수렴되었고, 이는 조선시대 후기 사상사에서 예론・복제 문 제라는 해결 난망의 장기적인 쟁송으로 이어졌다.93)
윤휴, 그리고 윤휴의 자극을 받은 남인들은 송시열의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므로 삼년 복을 입을 수 없다[體而不正不得爲三年]”는 비정에 대해 부당하다고 지적한 반면 송시열은 “복을 낮추면 종통이 여기에 없게 된다[服降則統不在此]”는 윤휴와 허목의 주장은 화란을 일으키는 참담한 일이라고 대응하였다.94)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서인이 집권하는 상황에서 남인의 예론은 일축 되고 말았다.
현종은 송시열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던 중에 1674년(현 종 15) 2월, 효종비(孝宗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자의대 비의 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또 한 번의 예송이 발생하였다(甲 寅禮訟: 1674).95)
91) 宋子大全 卷26, 「練服變改及許穆圖說辨破議」.
92) 방상근, 「17세기 조선의 예 질서의 재건과 송시열: 현종대 예송논쟁의 재해석」, 한 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6(1), 2017, 123~154쪽.
93) 방상근, 주 92)의 논문, 123~154쪽.
94) 宋子大全 卷134, 「禮說」.
95) 顯宗實錄, 1674年(顯宗 15) 2月, 3月, 7月.
그런데 이번에는 현종이 기해예송 때와는 달리 남인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현종 즉위년부터 남・서인 간에 논란이 되어왔던 예송 문제는 결국 남인의 3년설이 채택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효종을 장자라고 보아 왕실의 대통을 바로잡고 왕실의 권위를 높인 것이 결국 현종과 그 뒤를 이은 숙종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현종에게 주자학적 교학론에 입각하여 성학론(聖學論)・세도론 (世道論)・군주책임론(君主責任論)을 제시하였다.
송시열의 반대파들은 “권 력이 주상에게 있지 않다[權不在上]”는 설이나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 하다[君弱臣强]”는 설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교학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을 지적하였다.96)
이는 항차 현종이 송시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남인의 복제를 지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갑인예송의 결과, 송시열과 서인이 남인에게 밀려 퇴각하는 장면은 성학론・세도론・군주책임론을 전 제로 한 송시열의 견지가 고례설・전도론・사대부책임론을 중심으로 한 허 목의 존군비신론(尊君卑臣論)에 의해 저지당하는 형국으로 해석할 수 있 다.97)
96) 宋子大全 卷15, 「因國舅論斥待罪疏[二疏][癸丑九月二十六日]」; 白湖全書 卷20, 「顯宗純文 肅武敬仁彰孝大王行狀」.
97) 허목은 춘추의 대의에 대해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尊君卑臣], 인과 의를 귀 하게 여기고 속임수와 권력을 천하게 여긴다[貴仁義賤詐力]”고 설명하면서 존군비신론 을 유교적 가르침의 핵심으로 보았다(記言 卷31, 「春秋說」 卷51, 「春秋之義勉學子」 卷 66, 「自序二」).
예송은 기해예송(1659)에서 서인이 승리하고, 갑인예송(1674)에서 남인이 승리하였다가, 경신환국(1680)에 의해 윤휴가 사사되고, 기사환국 (1689)에 의해 송시열이 사사됨으로써 끝이 났다.
송시열의 삶의 궤적에서 예제를 둘러싼 논쟁(기해예송・갑인예송)에 이 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리에 대한 논쟁(회니시비・가례원류시비)을 주목 할 필요가 있고, 여기서는 송시열과 윤휴와 윤선거-윤증 부자에 관한 얘 기, 그리고 유계와 윤선거-윤증 부자에 관한 얘기로 시비가 이어졌다.
주자학 절대주의를 고수했던 송시열의 입장에서는 윤휴에 대한 적개심이 커갈수록 윤휴를 동정했던 40년 우정의 윤선거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윤선거가 1669년(현종 10)에 세상을 떠났다.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송시열은 제문을 보내 조문하였다.98)
제문에서는 “어두운 세상에[兩儀昏濛] 한 별이 홀로 빛났다[一星孤明]”거나 “깨끗하고 때묻지 않 았다[皭然不滓]”는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 윤휴와 완전히 절교한 것으로 믿고 있었 다.
그런데 윤휴 또한 윤선거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99)을 지어 보냈고 윤증은 황망중이라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송 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끝내 절교하지 않은 것을 불쾌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송시열은 1670년(현종 11) 윤선거의 제문을 고쳐 쓰고 거기 에 윤휴(‘江’)와 윤선도(‘海’)를 거론하면서 윤선거를 향한 풀리지 않은 의 혹을 제기했다.100)
1673년(현종 14)에는 송시열의 제자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연보와 박세채가 지은 행장, 그리고 윤선거가 생전에 송시열에게 보내려 했던 편 지101) 등을 보이면서 아버지의 비문(墓碣銘)을 지어줄 것을 간청했다.
이 에 송시열은 박세채가 써놓은 행장을 원용하여 비문을 짓고 그 말미를 “진실로 박세채는 찬사를 다하였다[允矣玄石極其揄楊]. 나는 글을 짓지 않 고 이 명문에 의거하여 적을 뿐이다[我述不作揭此銘章]”는 말로 마무리했 다.102)
98) 宋子大全 卷153, 「祭尹吉甫文」.
99) 白湖全書 卷18, 「祭尹吉甫文」.
100) 宋子大全 卷153, 「再祭文」.
101) 이를 「기유의서」(1669, 현종 10)라 일컬으며 출전은 魯西遺稿, 別集卷1, 「擬答宋英甫 [己酉]」이다. 102) 宋子大全 卷179, 「尹吉甫墓碣銘」.
윤선거에 대한 칭찬은 어디까지나 박세채의 평가이며, 자신은 거 기에 별다른 평가를 덧붙이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송시 열은 1669년(현종 10)의 윤선거에 대한 제문에서 그를 우호적으로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1673년(현종 14)의 윤선거에 대한 비문에서는 윤선거의 주자학에 대한 사상적 태도와 과거 행적을 들추어내어 문제 삼았다.
윤휴 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윤선거를 강하게 비판했을 뿐만 아니 라(尹鑴事=阿附賊鑴),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수비하다가 성이 함락될 때 탈출하여 살아남아 대의명분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추가되었다 (江都事=失身江都).
윤선거의 살아생전에는 송시열-윤선거 간의 감정 대립 이었던 것이 윤선거의 사후에는 송시열-윤증 간의 감정 대립으로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스승 송시열의 처신과 행태를 하나하나 조목을 들면서 통렬히 비판하는 편지103)를 작성하였다.
이 편지 작성은 제자 윤증의 스승 송시열과의 결별로 가는 결정적 사건(“一轉而爲 甲子之相絶”)이었다.104)
송시열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 서인들은 윤증을 소론(少論)의 종주로 받 들기 시작했는데, 회덕(‘懷’德)의 송시열과 니산(‘尼’山)의 윤증 사이에 일 어난 반목과 대립이라 하여 이를 ‘회니시비’라 일컫는다.
회니시비는 대 체로 송시열이 찬술한 윤선거의 묘비(1673)와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게 보 내는 편지(1681)의 노정으로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이 사림 간에 퍼진 직 후인 1683년(숙종 9) 전후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는 누구나 충분히 예 상할 수 있듯이 그 파장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회니시비는 당사자인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나 지 않고, 경종, 영조, 정조 시대에 해당되는 18세기의 노・소 당쟁의 유산 으로 남겨지고 말았다.105)
103) 이를 「신유의서」(1681, 숙종 7)라 일컬으며 출전은 明齋遺稿, 別集卷3, 「擬與懷川書 [辛酉夏]」이다. 윤증 가문과 소론은 송시열이 윤선거를 비판한 이유가 윤휴의 일(尹鑴 事=阿附賊鑴)이나 강도사건(江都事=失身江都)에 있지 않고 윤선거의 책선(責善之道) 때 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논의는 한지희, 「노서 윤선거의 책선지도: 회니시 비의 원인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사학보 75, 2015, 339~367쪽 참조.
104) 南塘集 卷2, 「丙申擬辨師誣䟽」.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가 갖는 구조적 성격 을 정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송시열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 서인들 이 윤증을 소론의 종주로 받들면서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일어났다는 사 실에 주목할 일이다.
그리고 차후에는 노론 내부에서 지역 기반의 차이를 두고 호론(충청 노론: 인성・물성 이론)과 낙론(경기 노론: 인성・물성 동 론)으로 자체 분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자율곡-우암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강조했던 송시열의 고백과는 달리, 율곡우암은 시간의 역학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경향으로 엇갈렸다는 것을 보 여주는 징표라고 볼 수도 있다.106)
호론은 우암 송시열을 따라 춘추대의 를 만고불변의 가치로 고수했던 반면, 낙론은 율곡 이이-농암 김창협의 계열로 분화되면서 송시열의 학문적 위상과는 금이 벌어지는 양상을 보 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107)
105) 이은순, 「회니시비의 논점과 명분론」, 한국사연구 48, 1985, 115쪽.
106) 이경구, 「‘학(學)’에서 ‘주의(主義)’로: 이이와 송시열의 경서 이해」, 태동고전연구 40, 2018, 65쪽.
107) 이경구, 주 106)의 논문, 65~84쪽. 노론 내부의 자체 분화 과정에서 파생된 인물성 동이논쟁과 관련해서는 그 시공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인식 양상을 확인할 수 있 겠지만, 낙론과 호론의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양측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을 때 영 조가 취한 관점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영조는 노론 내부의 낙론과 호론의 논쟁, 그 한심한 장면에 대해 “지금은 싸울 만한 자도 없는데[今則無可戰者], 문의를 가지고 싸 우게 하고자 하는가[以文義欲戰耶]. 나는 유생들이 그들의 다툼을 나에게 판결해달라 고 할까봐 두렵다[予恐儒生欲決訟於予矣]”는 의견을 낸 바 있다(英祖實錄 1758年(英祖 34) 9月 5日). 호론은 낙론을, 낙론은 호론을 이단시하는 입장을 드러내지만 애시 당 초 이들이 송시열을 계보로 한 정신사적 배경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송시열의 주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은 노론계 중에서도 특히 호론계였으며, 그들은 반대파였던 낙론계를 “중화와 오랑캐에 대한 구분이 없다[華夷無分]”고 공격하였다 (방인, 「한국철학사에서 자기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 태동고전연구 50, 2023, 170~171쪽). 대체로 보았을 때 호론의 학파적 계보를 계승한 후예들은 위정척사파 의 길을 걸으면서 항일 의병투쟁에 앞장선 반면, 낙론의 학파적 계보를 계승한 후 예들은 개화파의 길을 걸으면서 일본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행보를 취했 다. 낙론 계열(경기 노론: 인성・물성 동론)로 분류되는 박규수(박지원의 손자)가 자 신의 문하에서 많은 개화파 청년들, 문명개화론자들을 길러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면암 최익현의 관점은 그 계열과 구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勉菴集 卷4, 「請討逆復衣制疏[乙未六月二十六日]」.
1687년(숙종 13) 1월에 송시열은 일련의 문제에 대한 죄가 전부 자신 에게 있다면서 존주대의를 논하는 장문의 변명 상소를 올렸다.108)
송시열 은 한유(韓愈)가 <사설>(師說)에서 스승의 제자 교육은 전도(傳道), 수업 (授業), 해혹(解惑)의 세 영역에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말을 인용 하면서 자신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해당되는 것이 없다고 말한 뒤, 사도를 갖추지 못한 자신을 윤증이 배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라고 말하였다.109)
겉보기에는 자신을 탄핵하는 어투를 취했지만, 사실은 춘추대의의 이름으로 윤선거-윤증 부자를 공격하는 일에 무게가 실려 있 다.
그렇게 볼 수 있는 논거는 송시열이 “사설로 정도를 해치는 자에 대 해서는[邪說害正] 사람마다 공격할 수 있는 것이며[人人得以攻之] 반드시 성 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必聖賢]”는 주자의 말을 인용한데서 찾 을 수 있다.110)
108)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109) 韓昌黎集 卷12, 「師說」. 송시열은 한유의 “스승의 역할은 전도, 수업, 해혹에 있다 [師者傳道授業解惑也]”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스승의 자격이 없음을 자성하는 듯 한 발언을 했지만, 이는 사실상 춘추대의의 이름으로 윤선거-윤증 부자를 공격하기 위한 발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송시열이 한유가 사도를 말하면서 했던 “도가 있는 곳에[道之所存] 스승이 있다[師之所存]”는 말(韓昌黎集 卷12, 「師說」) 에 대해 어떤 고뇌와 성찰을 보였을지가 궁금하다. 윤증의 주장에 의하면, 송시열은 윤휴를 방편으로 삼아 윤선거의 책선을 거짓으로 만들고 자기잘못을 은폐하는 입장 을 취하였다. 그 장면에서 어떤 고뇌와 성찰을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지희, 「노서 윤선거의 책선지도: 회니시비의 원인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사학보 75, 2015, 339~367쪽 참조.
110)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丁卯正月二十八日]」 卷94, 「答李同甫[丙辰二月一日]」. 송시열은 맹자의 “나는 인심을 바르게 하고 사설을 방지하고자 한다[我亦欲正人心息 邪說]”는 말(孟子 卷6, 「滕文公章句下」)에 대한 해석으로 “사설로 정도를 해치는 자 에 대해서는[邪說害正] 사람마다 공격할 수 있는 것이며[人人得而攻之], 반드시 성현만 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必聖賢]”는 말과 이를 이어 춘추 필법의 “난신적자에 대해서는[亂臣賊子] 사람마다 처단할 수 있는 것이며[人人得而誅之], 반드시 사법관만 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必士師]”는 말을 주자의 해석으로 보았다(宋子大全 卷 130, 「朱子言論同異攷」). 송시열은 이 말의 앞부분만 인용하였으나 그의 내심은 춘추 필법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기대했을 것이다.
송시열이 그의 최후의 춘추대의론을 윤증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시 그가 처한 형세가 만만치 않은 처지에 놓여있었 음을 말해준다.
스승 송시열과 제자 윤증에 대한 논의는 관점 차가 워낙 큰 것이어서 각각의 언어가 얼마나 정당화의 힘을 갖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회니시비는 1689년(숙종 15) 서인의 재집권 이후에 야기된 노・소 분당의 책임을 윤선거-윤증 부자에게 돌리려는 노론측이 사제지간의 도리 와 군사부일체론을 앞세워 윤증을 ‘배사(背師)’로 단죄하고 ‘강상범(綱常 犯)’으로 몰아가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1715년 12월의 가례 원류시비는 숙종 말기 노・소 대립이 한층 격화되고 있을 때 노론 2세대 학자들(이이명, 권상하, 정호)이 가례원류 초고본의 간행을 기화로 회 니시비 이래의 배사론을 재확인함으로써 소론측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 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윤증이 “두 스승(송시열, 유계)을 배반했다[背絶兩 師]”는 배사론이 제기된 결과, 국가가 나서서 윤선거-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는 조치를 내렸고(丙申處分: 1716), 이들 부자의 관작은 1722년(경 종 2) 소론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회복되었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 의가 작동되는 공간은 이처럼 여러 상황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병신처 분 직전에 한원진이 윤증의 배사 행위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것은 대표적 인 사례이다.111)
한원진은 송시열-권상하의 논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윤증의 ‘배사(背師)’ 를 ‘난신적자(亂臣賊子)’와 ‘시군시부(弑君弑父)’에 버금가는 패륜으로 간주 하였다.112)
111) 南塘集 卷2, 「丙申擬辨師誣疏」.
112) 南塘集 卷6, 「經筵說下」.
한원진은 군(君)-사(師)-부(父)의 관계를 차등을 두어 논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 아래, 사=군의 일체성을 제기하여 ‘부사경중설’이 ‘군부경 중설’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논리임을 지적하는 가운데 “스승을 배반 한 자는[背師者] 임금을 배반할 수 있다[卽可以背君]”는 점을 극력 강조하였다.
이는 난신적자를 단죄하듯이 스승을 배반한 윤증에 대해서도 그 수위 로 논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배사(背師)-배군(背君)-부국(負國) 으로 접속・확장되는 한원진의 논리는 ‘효’ 절대우선의 강상론에 ‘충’의 선 차성을 강조하는 방향의 변화를 모색코자 하는 논리이기도 했다.113)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 1) 1월 5일자 기사에는 스승 윤증을 변호하 는 유생 이정걸의 상소가 등장한다.
이정걸에 의하면, 스승이란 아버지를 섬기는 효도와 임금을 섬기는 충성을 익히게 하는 존재인지라 그 은혜와 의리가 나를 낳아 주신 부모와 동등하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낳아준 분 들[生之族]’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스승은 부모나 임금과 똑같이 섬겨야 할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군사부일체론의 공간에서 작용하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그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진 헌공(晉獻 公)의 태자 신생(申生)의 고사에서 상상했던 ‘아버지 없는 나라[無父之國]’ 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를 위해 스승을 배신했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말이라는 점을 붐명히 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숙종이 연석에서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父師輕重之訓=父師輕重四 字]”고 했던 말도 누군가의 어렵고 힘든 처지나 상황을 두고 함부로 스승 을 배신한 제자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음을 상기시켰다.114)
113) 김준석, 「18세기 노론전권정치론의 구조: 한원진의 붕당의식과 군주성학론」, 호서 사학 18, 1990, 7쪽. 114) 承政院日記 1725年(英祖 1) 1月 5日.
정묘년(1687, 숙종13)에 송시열은 직접 항장(抗章)을 올렸는데, 곧바로 윤선거를 윤휴보다 먼저 처형했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윤 휴는 이미 처형되어 죽었기 때문에 주자를 배신하였다는 죄목으로 윤휴 를 힐난(追咎)하면서,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다고 하여 또 이렇게 인륜을 저버린 말을 하였습니다.
숙종대왕께서 “자기 아버지가 치욕을 당 하는 것을[其父被辱] 자식이 어찌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其子豈可安 而受之者]”라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천리와 인정의 필연이기에 이를 그만둘 수 없는 도리입니다. …… 박세채는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일거에 남의 부모 두 분을 여지없이 해치고[一擧而傷人之兩尊殆無餘地] 벗이 평생 지킨 의리를 무너뜨리며[壞朋友平生之義] 효자의 망극한 심정을 상하게 하였으 니[傷孝子罔極之情], 이는 스승의 입장에서 덕을 높이는 처사가 아닙니다 [在門下非盛德事云]”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당시의 군자들이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스승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가, 처음에는 “저승에 비난이 미칠까 봐서라는 말[詆訶 泉壤之說]”을 들었고, 두 번째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말[忍人之說]”을 들었 으며, 세 번째는 “잔인한 사람일 뿐만이 아니라는 말[不但忍人之說]”을 들 었고, 네 번째는 “윤휴보다 먼저 처형해야 할 사람이라는 말[先䥴伏法之 說]”을 들었습니다. 한마디씩 진행될수록 점점 심해지면서 한 층 한 층 켜 켜이 쌓여 마디에 마디가 겹쳐 나왔는데, 남의 아비를 모욕하고 남의 어 미를 모욕하는 말 아닌 게 없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고 차마 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아버지와 스승을 둘 다 보전할 수 있다고 하 니, 신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115)
115) 承政院日記 1725年(英祖 1) 1月 5日.
송시열과 윤휴, 송시열과 윤선거,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서 불거진 쟁송 과 시비는 옳고 그름을 가리고 따지고 살피겠다는 것이었으나, 그 실제는 내 방식대로 문제 상황을 판가름하겠다는 공격행위 내지 감정싸움의 성 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십 년 교분을 쌓은 친구가 서로 갈라 서게 되었고, 스승과 제자가 결별을 고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사람들은 평소 탄탄대로를 갈 때는 저마다의 모난 성정도 그런대로 가리고 막을 수 있지만 한번 난관과 역경에 봉착한다면 저마다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 다.
윤선거는 효종 말년에 송시열, 유계 등이 출사하자 이들이 폐정을 개 혁하도록 책려하였으나 이조판서 송시열은 자신에게 영합하는 사람들을 등용하고 윤휴를 이단으로 배척하였기에, 그의 사의를 비판하며 사문의분열을 우려하였다.116)
윤선거가 기유의서를 통해 송시열의 패권적 행동 과 윤휴와의 일을 문제삼았지만, 사문의 종장으로 주자절대주의에 입각해 세도를 담당하려는 송시열의 정치적 학문적 위상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 주되어 송시열 일파와의 충돌을 초래하였다.117)
학문과 경세, 의리 모든 것에서 실심・실덕에 의한 실제적 공효를 부르짖었던 윤선거는 송시열이 주자에 가탁한 패권적 행위로 대의를 무너뜨리고 윤휴와의 갈등으로 사 문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반면 송시열은 책선의 본의는 제 쳐둔 채 기휘를 지적하는 것들에 사의로써 대응하였다.118)
조선후기 사상사적 전개 과정에서 회니시비는 탕평론・탕평책・탕평정치 와 이런저런 작용을 일으켰는데, 탕평의 지향점이 사실상 제도・체제 개혁 과 보수권력의 특권 약화・제거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소론(탕평론)과 노 론(반탕평론) 간의 갈등 관계를 감안한다면, 노론세력이 주자학의 의리론 을 내세워 회니시비를 전개한 배경에는 정책 논쟁보다는 정치 공세적 성 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119)
116) 한지희, 주 9)의 논문, 339~367쪽.
117) 한지희, 주 9)의 논문, 339~340쪽.
118) 한지희, 주 9)의 논문, 339~340쪽.
119) 노론 세력이 윤선거의 강화도에서의 행적과 윤선거-윤증 부자의 윤휴에 대한 태도 를 문제 삼으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공격한 장면을 들여다보면 탕평론을 거부하는 논리에 주자학적 의리론이 원용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회니시비와 관련하여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절의를 잃었다”거나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거 나 “윤선거-윤증이 윤휴를 비호하였다”는 등의 개인사 관련 사항을 정치 쟁점으로 치환하여 문제 삼은 배경에는 전근대적인 주자학적 의리론을 꺼내들어 탕평책을 무 력화시키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상의 논의는 김용흠, 「숙종대 전반 회니시 비와 탕평론: 윤선거・윤증의 논리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8, 2010, 75~113쪽; 김용흠, 「전쟁의 기억과 정치: 병자호란과 회니시비」, 한국사상사학 47, 2014, 201~ 254쪽; 김용흠, 「조선의 정치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탕평론・탕평책・탕평정치를 중 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8, 2016, 549~569쪽 참조.
이런저런 쟁송과 시비, 그 권력의지와 욕망구조를 두고 이를 주자학적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능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강고한 독백을 통해 주자학적 세계관과 논리를 앞세우면서 이런저런 쟁송과 시 비를 주도하거나 그 대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문화 사적 배경에 유의할 때, 우리는 유교 공부의 본연은 무엇이고 그 공부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앎과 삶의 세계에 어떤 안내 및 지도 역할을 담당했는가에 대한 성찰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6. 맺음말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천리-인도와 이적-금수의 구별을 통해 세 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주자식 처방을 특징으로 삼는다.
송시열은 주 자를 법도로 삼지 않는 의견을 안출하거나 이단사설이 정통의 지위를 넘 보는 현실을 용납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이처럼 대의 를 위해 북벌에 임한다는 주장마저도 지난날의 대의를 회고하고 기념하 는 사업에 역점을 둔다는 주자식의 접근법에 경도된 것이었으며, 이는 송 시열이 효종 앞에서 행한 주자학 강의를 통해서도 그의 사상적 저변을 확인할 수 있다.
북벌론의 본질에 충실한 접근이라면 응당 북벌군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의 주자학 강의에서 거론 되는 군대는 북벌군이라기보다는 방위군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1636년(인조 14) 충청도 삼산에서 처음 만났으며, 두 사람은 1637년(인조 15) 속리산 가는 도중의 복천사 앞에서도 만났다.
악연 은 그렇게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윤휴가 1644년(인조 22)에 작성한 중용 신주가 도화선이 되어, 그것도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1653년(효종 4)에 강경의 황산서원 모임에서 만난 송시열과 윤선거 두 사람의 대화 과정에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지목하고 성토하는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 졌다.
이때부터 송시열과 윤휴 사이,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는 금이 가 기 시작했고, 이는 1659년(효종 10/현종 즉위) 기해예송 이후 송시열-윤휴 의 완전 결별, 그리고 송시열의 윤선거의 제문(1669)-비문(1673) 작성 과 정에서 보인 비난적 태도로 인해 1681년(숙종 7) 송시열은 제자 윤증과도 결별하였다.
경신환국(1680)에 의해 윤휴가 사사되고, 기사환국(1689)에 의해 송시열이 사사됨으로써 그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들의 사 상사적 파장과 파동은 끝이 나지 않았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는 1・2차 예송(1차: 기해예송, 2차: 갑인예송) 과 전・후 배사(전 배사: 회니시비, 후 배사: 원류시비) 문제로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사상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윤휴, 윤선거, 윤증 으로 대표되는 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예후로 보아 송시열을 사지 에 몰아넣은 것은 윤휴 일파가 아니고, 바로 주자였다는 미우라 구니오의 주장은 문맥의 핵심을 짚어낸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120)
120) 三浦國雄, 「十七世紀朝鮮における正統と異端: 宋時烈と尹鑴」, 朝鮮學報 102, 1982, 191~243 쪽. 미우라 구니오, 이동희 역, 「17세기 조선에 있어서의 정통과 이단: 송시열과 윤 휴」, 민족문화 8, 1982, 162~201쪽.
자기 존재 그 자체를 주자의 ‘각주’처럼 살다간 송시열은 주자학적 기준을 통해, 이적・ 금수를 복수설욕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단사설의 차단・퇴치에 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곧 송시열이 주자를 진정으로 이 해한 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를 다룰 때 우리는 흔히 송시열의 핵심 어법 이랄 수 있는 조선중화주의는 북벌론 이후 북학론이 대두하는 상황에서 시대사상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북벌론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북학론으로 대체되 는 양상을 보였다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이에 대 한 논의를 위해서는 노론과 소론의 분기・분화에 대한 이해 과정에서 탕 평책과 관련된 논의가 이어질 필요가 있고, 노론 안에서의 호론과 낙론의 분기・분화에 대한 논의 과정이 요청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호론과는 달리 낙론에서는 어느 정도로 화이관・화이론・화이사상을 극복하였고, 그 들의 북학론은 당시 사상계에서 어느 정도의 파급력과 정치사회적 동력 을 지녔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송시열 이래의 북벌론이 상존하는 한, 북학론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 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물성 동이론을 철학적 전제로 삼아 얘기될 문제이기도 한데다가 효율-실용-실학의 개념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이적・금수와 마음을 함께 한다는 비난에 직면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북벌 과 북학이라는 두 구호가 만나는 지점에서의 충돌과 갈등의 정신현상을 두 고, 우리는 이를 복합적・탄력적인 판단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또하나의 과제를 만나게 된다.
정조 시대에, 호란 이후 사상계의 화두였던 조선중화 주의를 발전적으로 극복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노론・소론의 분화 과정에 이어, 노론의 자기 분화 과정에 의한 호론・ 낙론의 등장과 그 행보에 대한 성찰 또한 조선후기사 및 한국근현대사의 사상적 궤적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낙론=북 학론자들의 어법에 기존의 화이관에 주박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 그 어투에 비추어 볼 때 북학론자들의 북학론은 시 대사상의 중심으로 부상하지 못한 주변적 주장, 비주류적 전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121)
121) 계승범, 「조선후기 중화론의 이면과 그 유산: 명・청 관련 호칭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19, 2009, 47~48쪽 참조.
노론의 자기 분화 과정에서 드러난 호론과 낙론의 격차와 괴리에 주목할 때, 그리고 그 안에서 보여주는 힘의 역학 에 주목할 때 적어도 낙론=북학론은 18세기 사상계의 판도 및 지성사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사상사적 특성과 흐름에 유의하면서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의 파장과 파동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 각한다.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승과 제자 의 의리를 명분으로 내걸었던 회니시비・회니지쟁에 주목할 수밖에 없고, 노론과 소론의 분화 과정, 그리고 그 갈래가 갖는 철학・사상・학문적 논점 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적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필시 노・소 대립 구도에 의해 표출되었던 권력욕망・정치역학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를 통해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 개혁 문제가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가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다.
노론(반탕평론)과 소론(탕평론)의 대립 구도는 공동체 및 국가 연구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제도・체제 개혁에 대한 대응 양상이 반영 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북학론은 어느 정도의 중심적 위상을 확 보했고, 시대적 주류를 형성했으며, 추동력을 갖추었는가를 생각해볼 때, 법제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정치사회사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 꿈 의 좌절은 분명 노・소 대립구도에서는 노론의 에너지가 강력했고, 호・락 대립구도에서는 호론의 에너지가 강력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형식논리만 보자면, 호락논쟁에서 낙론 계열에 속하는 북학론자들이 보인 인성-물성 동론의 입장은 송시열 사상(주자학 절대주의)의 반역・반 동・돌연변이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송시열이 주자학적 의리론을 기저사상으로 삼아 북벌론을 표방했을 당시만 해도 차마 상상 하기 힘들었던 북학론이 노론 계열의 사상 범주 안에서 배태되고 있었음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상사적 궤적에 대한 기본 해석에 의하면, 조선 과 청을 동격으로 보는 가운데 청의 문물을 재평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 고, 국내적으로는 유교 지식인・학자・관료 집단의 부정・부패・비리 문제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삼정문란의 정국에서 인성-물성에 대한 보다 미시적이 고도 정밀한 문제의식을 보인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송시열 사상(주자학 절대주의)의 반역・반동・돌연변이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면, 송시열의 계승 자들에 의해 송시열이 극복되는 특수현상에 대한 심층 논의를 통해 그것 이 혹여 송시열의 극복이라는, 송시열을 향한 제2의 배사론이 작동한 것 은 아닌지에 대한 독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특정 의 공간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이 생전에 겪었던 배사론에 이은 송 시열의 세계관에 균열을 가하는 제2의 배사론이 연출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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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Song Si-Yeol: The Plosive Sound of Joojahak Absolutism
Park, Kyoon-Seop
Song Si-Yeol is a Neo-Confucian scholar who advocated Joojahak absolutism and is a person who had a large ripple effect in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fields. Numerous articles related to Song Si-yeol appear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his actions may not always be related to Joojahak, but in general, it may be said that his world of knowled ge and life is linked to the guid elines of Joojahak. There may be problems depending on Song Si-Yeol's character, but the rupture and aftereffects of his absolutism in Joojahak left in Joseon society were not easy. Song Si-Yeol’s Joojahak absolutism made him turn his alumni, Yoon Seon-Geo, Yoon Hyoo, and his disciple Yoon Jeung as enemies. He made his friend die, he made his disciples leave, and he himself suffered an unfortunate death. Kunio Miura’s remark that it was Jooja, not the Yoon Hyoo faction, that caused Song Si-Yeol to die is persuasive. As with all academic and philosophical systems, Joojahak can contribute to creating an ideal world according to the mindsets and actions of those who study it, and vice versa. It can be said that the work of illuminating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 through discussions on the dynamics of Song Si-Yeol and Joojahak has great implications for reflective discussions on today's humanities orientation. Key words : Song Si-Yeol, Yoon Hyoo, Yoon Jeung, Joojahak absolutism, plosive sound
접수일자 : 2023년 11월 25일 심사완료 : 2023년 12월 15일 게재확정 : 2023년 12월 15일
서강인문논총 6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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