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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중국에서 아리랑의 역사적 존재 양상 -「기쁨의 아리랑」에서 「새 아리랑」까지-/정우택.성균관대

Ⅰ. 머리말

Ⅱ. 중국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 구성에서 아리랑의 위치

Ⅲ. 「기쁨의 아리랑」의 창작과 수용

Ⅳ. 「새 아리랑」과 새로운 주체의 구상

Ⅴ. 맺음말

• 국문초록

본 연구는 중국 내의 조선인들이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서 아리랑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변화와 관련하여 재창작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 시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직후까지 한정하 였다. 기존의 문헌 자료를 근거로 2015년 6월 18일부터 25일까지 중국 연변 연길시, 용정시, 도문시, 안도현 일대에서 필자가 현지 답사하고 채록한 아리랑과 인터뷰 자료 를 보충하였다. 중국의 조선인들은 ‘국적’과 ‘민족’이 길항하는 사이에서, 아리랑이라는 문화적 기 제를 통해 민족을 상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생성해 왔다.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역사 는 민족 정체성의 구성 및 정서체계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의 계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 기원을 1920년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본조아리랑」에 두고, 이후 조선 민족의 이산과 유랑, 중국으로의 이주와 정착이라는 역사적 고난과 연결되는 아 리랑 계열이다. 또 하나는 광복 이전에 화북지역 조선의용군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렸 던 「기쁨의 아리랑」 계열로, 1945년 광복을 거쳐 1950년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 립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족의 주체적인 역량과 현실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기쁨의 아리랑」은 고향과 고국을 떠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랑하던 고난의 서사를 환기한다. 이런 고난과 죽음의 위협에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생의 의 지와 미래로의 企投를 멈추지 않았고 혁명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탄식과 죽음의 고개’가 ‘기쁨과 승리의 아리랑 고개’로 전환된다. 이들이 「기쁨의 아리랑」을 부르며 꿈꾸었던 “새 나라”는 바로 “태극기”-“무궁화”-“삼천리”로 표상되는 조선이었다. 그 런데 광복 후에 토지개혁으로 땅을 획득하고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함께 「기쁨 의 아리랑」은 ‘조선’을 연상시키는 4절을 노랫말에서 배제하게 된다. 또한, 중국에서 조선 민족이 독자적으로 새 터전을 이루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희 망과 포부를 새로운 국면과 형식에 맞춰 「새 아리랑」으로 창작하여 공연하였다. 「기 쁨의 아리랑」과 「새 아리랑」은 조선 민족이면서 중국 공민으로서의 주권과 주체성, 독자적 고유성이 편입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피눈물’과 연대, 혁명 적 이상, 헌신적인 항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아리랑의 창작 과 전승을 통해 ‘조선인’으로서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또한 ‘조선족’ 으로서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생성하며 ‘건설적’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려는 기획을 드러내고 있다.

주제어 : 조선족, 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새 아리랑, 민족 정체성, 디아스포라, 조선 의용군, 토지개혁, 연변조선족자치주

Ⅰ. 머리말

일찍부터 중국의 조선인들은 유랑과 이주의 역사적 경험과 정서를 아리랑의 가사 와 가락에 얹어서 불러왔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에서 아리랑은 그들의 삶과 존재, 민족 정체성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존재하였다. 또한, 같은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 로서 공통의 감각과 정서체계를 표현한 아리랑은, 중국의 조선인 공동체를 엮어주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아리랑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환기하고,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희망을 드러냈다. 아리랑에는, 정든 고향과 고국을 떠나와 중국 대륙을 유랑하면서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역사적 경험이 압축되어 있으며, 아리랑 고개를 넘듯이 그 고난을 넘어, 광복 후 중국에서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 풍요로운 삶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 있다. 본 연구는, 중국 내의 조선인들이 광복 이전과 이후, 토지개혁과 ‘해방전쟁’ 참여,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에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의 지위와 조선민족자치구를 획 득하기까지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 아리랑과 어떻게 교섭해나갔 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 고난의 민족 서사를 창안한 「본조아리랑」에 기원을 두고 있는 아리랑 계열과 광복 이전에 조선의용군이 만들어서 불렀던 「기쁨의 아리 랑」 계열이 중국 조선인들에게 전승・전파되면서 어떻게 변형되고, 새로운 아리랑의 창작으로 연결되는지 실증 자료들을 바탕으로 추적해 볼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에 대한 연구는 국내의 학자와 중국의 조선족 학자 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2000년 이후 중국 조선족 아리랑에 대한 주요 연구 경향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특히, 중국과 한국, 북한에서 무형문화유산으로 아리랑의 위상이 변화하면서, 이에 따라 중국 조선족 아리랑에 대한 연구 경향이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연구로, 조태흠1)은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수집 사업, 전승 양상, ‘지역 아리랑’ 의 쇠퇴 현황, 아리랑 후렴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질 문화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간 아리랑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지역 아리랑과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관련성을 밝힌 논문으로는, 임동철・이창식2)이 도문 정암촌 「청주아리랑」의 형성과 전승을 조선족의 이주 경로와 함께 규명하였고, 안상경3)이 훈춘시 아리랑과 「청주아리랑」을 중심에 놓고 중국 조선족 사회의 문화 원형으로서 아리랑이 정착되는 과정을 정리하 였다. 김남호4)는 조선족 아리랑의 주제의식을 항일투쟁과 승리, 광복 후 행복의 기쁨, 아름다운 산하와 미풍양속의 찬양 등으로 유형화하였다.

1) 조태흠,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전승 양상과 의미」, 뺷한국문학논총뺸 31, 한국문학회, 2002.

2) 임동철・이창식, 뺷중국 조선족의 문화와 청주아리랑뺸, 집문당, 2004.

3) 안상경, 「중국 동북지역 ‘아리랑’의 전승 양상」, 뺷지역문화연구뺸 11,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12.

4) 김남호, 「중국 조선민족의 아리랑과 주제의식」, 뺷한국문학과 예술뺸 7,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2011.

 

2011년 5월 중국 국무원의 〈제3차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등록에 관한 국무원 통지〉에 의하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신청한 「아리랑」을 중국 국가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재 승인하면서, 중국 조선족 아리랑에 대한 연구의 경향도 변화하였 다.5)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2012년 ‘대한민국’은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 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승인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조선민요, 아리랑〉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 여 2014년 등재되었다. 2011~2014년 중국, 한국, 북한에서 아리랑을 둘러싼 문화-상징 투쟁이 벌어지는 현실을 반영하여,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정체성을 문화상징 기호 또는 문화 표상의 관점에서 규명하려는 연구가 대두하였다. 장익선6)은 중국에서 아리랑이 민요를 넘어 문화 상징 기호가 된 현상을 정리하였으며, 이정원・공정배・김용범7)은 아리랑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사건을 추적하면서 중국 조선족 문화의 이중 정체성을 파악하였다. 강보유8)는 아리랑을 한국음악의 대표이자 한국문화의 상징이라는 측면 과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의의로 나누어 살펴보았고, 김혜자9)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를 중심으로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을 민요, 문학, 무용, 연극, 상징물 전반에 대한 문화 연구를 수행하였다.

5)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문화국이 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보면, “아리 랑타령은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민가이고 다종다양한 ‘아리랑’으로 하나의 가요집합체를 이루고 있다. ‘아리랑’ 가요집합체의 내포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는 님’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안해를 버리고 떠나는 남편에 대한 미움 그리고 산을 넘으면 닿을듯한 아름다운 미래와 생활에 대한 념원 등이 망라되고 있다. 조선족의 내심세계를 생동하게 그려낸 이 타령은 선률이 명쾌하고 우아하고 감동적 이며 애절한 감정이 특징적이다.”(연변주문화국 편, 뺷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뺸, 연길: 연변인민출판 사, 2011, 60면.)라고 서술하였다.

6) 장익선, 「중국에서의 ‘아리랑’ 상징성」, 신대철 편, 뺷한국문화와 그 너머의 아리랑뺸, 한국학중앙연구 원출판부, 2013.

7) 이정원・공정배・김용범, 「<아리랑>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목록 등재로 비롯된 한중간 문화갈등 배경 연구」, 뺷한민족문화연구뺸 40, 한민족문화학회, 2012.

8) 강보유, 「중국인이 느낀 아리랑의 이미지」, 뺷남도민속연구뺸 26, 남도민속학회, 2013.

9) 김혜자, 뺷중국 조선족의 아리랑 문화 연구뺸, 부산외국어대 석사학위논문, 2015.

김성희10)는 아리랑이 중국 조선족의 문화적 표상으로서 발전해 온 역사와 장르를 문헌 자료 현황을 통해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중국 조선족 아리랑에 대한 이론적 기틀을 세우고, 아리랑의 문화 상징적 측면, 제도적인 의의를 규명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리랑 연구에서 문화상징과 제도적인 관점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중국 조선 족 아리랑에 대한 실증적 현장 조사 연구와 역사적인 연구가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 실증적인 조사에 근거하여 아리랑이 중국 조선족의 삶에서 실현되거나 재매개되는 양상을 밝힌 연구들이 있다. 진용선11)은 중국 조선족 아리랑을 직접 채록한 자료와 문헌 자료를 망라하고, 또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까지 장르를 확장하여 종합적 으로 연구하였다. 박경수12)는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으로서 아리랑이 현대 시 작품으로 재매개되는 양상을 정리하였으며, 이주미13)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KBS라디오 사회교육방송국에 보내온 중국 조선족의 서신에 나타난 ‘아리랑’을 가지 고 중국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10) 김성희,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전승 기반과 양상」, 뺷통일인문학뺸 82,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2020. 11) 진용선, 뺷중국 조선족 아리랑 연구뺸, 정선군, 2008.

12) 박경수,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 시의 아리랑 수용과 담론 양상」, 뺷비교한국학뺸 20(2), 국제비교한 국학회, 2012.

13) 이주미, 「중국 조선족 서신을 통해 본 조선족의 경계인 의식과 민족 정체성」, 뺷한국문학과 예술뺸 35,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본 연구는, 중국 내의 조선인들이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서 아리랑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변화와 재창작이 이루어졌는지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후 50년대까지 한정하였다. 이 시기구분은, 안상경의 논문에서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역사적 단계를 정리한 것을 참고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은 1930년 대~2000년대까지 당대의 정치적, 역사적 조건을 반영하여 5단계로 나누어진다.

1) 조선 농민의 집단이주에 따른 ‘아리랑의 이주단계’(1930~1940)

2) 중국 동북지역에 터를 잡고 삶을 영위하던 ‘아리랑의 정착단계’(1940~1960)

3) 문화대혁명으로 민족어와 문화를 펼쳐 보일 수 없었던 ‘아리랑의 침체단계’ (1960~1980)

4) 소수민족의 민간예술을 적극 장려하던 ‘아리랑의 재생단계’(1980~1990)

5) 개혁 개방정책에 따른 ‘아리랑의 단절 단계’(1990~2000)14)

위의 시기구분에서 ‘아리랑의 이주단계’와 ‘아리랑의 정착단계’에 해당하는 시기, 중국 조선인이 아리랑을 통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던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는, 기존의 문헌 자료를 근거로, 필자가 2015년 6월 18일부터 25일까지 중국 연변의 연길시, 용정시, 도문시, 안도현 일대에서 아리랑 관련 답사를 실시하면서 채록한 아리랑과 현지 인터뷰 자료를 보충할 것이다.15)

14) 안상경, 앞의 논문, 314~315면.

15) 조사자는 정우택(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진용선(아리랑박물관 관장), 김선우(성균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주요 제보자는 리상각(연길시, 1936년생,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라철룡(도문시, 수남촌 촌장), 엄길자(도문시, 1943년생, 주민), 김제동(도문시, 1940년생, 주민), 박봉수(도문시, 1954년생, 송림촌 촌장), 김등만(도문시, 1940년생, 연변인민방송부장), 한석윤(연 길시, 1943년생, 연변 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황상박(용정시, 1938년생, 연변가사협회 기관지 뺷해란강 여울소리뺸 편집장), 심범극(도문시, 1938년생, 정암촌 노인협회 문예책임자), 허송절(도문 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도문지회장)과 안도현 마을 주민 등이었다.

특히, 광복 이전 부터 최근까지 60여 년에 걸쳐서 동북지역에서 전승・전파되어온 「기쁨의 아리랑」 의 창작과 수용 과정, 광복 이후 역사적 맥락의 변화 속에서 노랫말이 변형되는 원인, 그리고 「새 아리랑」의 창작과 관련 등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를 통해, 근대 초기 민족의 대규모 이산 과정에서 아리랑이 중국으로 전파되 어 전승되고, 중국 내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응하며 창작되고 재전유되는 양상, 또한 중국 내 조선족의 위상 변화와 정체성 구성의 측면에서 아리랑이 갖는 민족적, 정서 적, 심미적 영향 관계 등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중국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 구성에서 아리랑의 위치

민족 정체성은 공통의 기억을 환기하고 집적하는 가운데 구성되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인들은 ‘국적’과 ‘민족’이 길항하는 사이에서, 아리랑이라는 문화적 기제를 통해 민족을 상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다.

아리랑은 언제나 민족의 역사하고 민족의 길하고, 우리 중국에서는 이게 연 결되어 있거든요. 아리랑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이라는 거를 알려주 거든요. 건강한 민족, 우리 민족이 저 뭐 지난날 일본놈과 싸울 때 어떻게 왔던 민족인가. 그게 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어떻게 해 온 민족인가. (한석윤)16)

16) 한석윤(韓錫潤, 1943년 훈춘시 반석진 태양촌 출생). 이주민 3세. 아동문학가이자 시인, 중간자 소학교 다니다 5학년 때 1955년 연길 중앙소학교로 전학. 홀어머니가 폐지와 폐철을 주어서 공부 시킴. 1967년 연변대학 조선어문계 졸업. 문화혁명시기 1969년 2년간 흑룡강성 쑤이링현(绥棱县) 북대황 부대농장에서 노동 단련. 조사 당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뺷중국조선족소년보뺸 사장과 연변방송국 청소년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방정환문학상(한국),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수 상하였다. 조사는 2016.6.22.(월) 오전 10:12~11:55, 연길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사무실. 한석윤 단독 인터뷰.

위의 진술은, 중국의 조선인에게 아리랑이 민족의 역사, 민족의 길, 민족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리랑에는, 조선인으로서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생성하고, ‘건설적’ 주체로서 거듭나려는 기획이 들어 있다. 특히, 중국의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쪽박 차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왔다’는 자신 들의 역사적, 민족적 기원을 환기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사실은 아리랑에서, 거기서 우리한테 많이 오는 거는 어느 건가 하면, 아리 랑 고개를 넘는다는 거거든요. 우리 올 때부터 아리랑 고개를 넘어왔거든요. 그래서 여기 오면, 오랑캐령을 넘던 그 얘기가 많은데 그 령을 넘으면서도 부 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란 말입니다. 예, 그러고 나를 버리고 가는 님, 이 이면 에, 내 머리에 떠오르는 거는 고국이 나를 버렸는데, 사실은 고국이 버려서 우 리 예 온 게지요. 먹지, 멕이지 못하고. 그러니까 우리 여기 우리 부모 조상님들이 여기 건너 왔거든요. 정말 살자고. 그래 그게 자꾸 생각나거든요 허허. (한석윤) 이거[아리랑-인용자] 부르는데 우리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이래 해야지. 우리 쪽박 차고 두만강 넘었다는 역사마다 엄청난 기분이 일었는데, 그러고 무시긴 가 하면 …… 애잔하고 쓸쓸하고 그러니까 뭔가 아직도 저희가 자립해 살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 댕기고 뭔가 가슴 뭉클합니다. (박봉수)17)

17) 박봉수(朴鳳洙, 송림촌장, 62, 1954년생). 조사는 2016.6.20.(토) 16:20~17:00, 도문시 석현진 송림 촌 촌장실. 아리랑은 민족의 얼이라고 말하고 아리랑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송림촌은 조선족 마을로서 124가구, 426명이 살고 있으며 조선 전통문화, 농악 가무를 지켜나가고 있다. 젊어서 공청단 서기를 역임했다. 한국에서 4년 동안 이주 노동한 경험이 있다. 라철용(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촌장), 허송절(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도문지회 회장)이 합석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다.

한석윤에게 ‘아리랑 고개’는 “우리 부모 조상님들이” 고향과 고국을 떠나 유랑하다 가 “오랑캐령”(두만강 넘어 중국 용정으로 들어오는 통로)을 넘어 북간도로 넘어와야 만 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기제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랑 고개’는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넘어‘오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아리랑 고개(또는 오랑캐령)’를 넘는 행위 는, 이들에게 고국을 떠난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고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인식과 감각은 후대의 조선인의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어 전승 되었고, 그 디아스포라의 서사가 아리랑에 전형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송림촌 촌장 박봉수도, 아리랑을 부르면, 과거에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중국 조선인 의 역사와 자신의 내력을 떠올리게 되어 “엄청난 기분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유랑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 조선족의 현실, 농촌에 사는 중국 조선족들이 여전히 자립하지 못하고 도시로, 타국으로 이주하며 노동하는 처지 에서 애잔하고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 박봉수는 한국의 시화공단에서 이주 노동자로 4년간 노동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에겐 ‘아리랑 고개’가 현재에도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리랑 고개’와 조선 이주민들의 역사에 대한 이들의 인식 속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안타까움과 원망도 들어 있는데, 자신들이 디아스포라로 떠돌아야 했던 것은 “고국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국에 대한 원망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원망 있지요. 예 거 원망, 우릴 안아주지 못했으니까, 우리 부모들 여기 떠나왔거든요”(한석윤)라고 대답하였다. 중국 조선족 3세대에 속하는 이들의 정체성 은 고국을 떠나 낯선 땅을 유랑하며 살아야 했던 고난과 설움, 원통함이 하나의 정서 체계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는 그러한 이주의 역사와 감각을 상기시키고 재현하는 노래였다. 그런 점에서, 한석윤과 박봉수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아리랑을 잘 모르고 잘 부르지 않으려는 현상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18)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이자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우리 현대 아리랑은 또 고쳐져 가지고 우리 민족의 진흥과 발전에 유익한 아리랑으로 저도 보고 있습니다. 근데 그 노래를 모르니까 부르지 못하는데 우리의 민족의 얼하고 민족의 이익을 꼭 지켜야 된다”(박봉수)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중국 조선족의 현대적 관점에서 ‘아리랑 고개’를 다양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시각도 발견할 수 있다. 하하하 여기서 뭐 아리랑고개 뭐 사랑의 아리랑고개 뭐 무슨 고개가 많대 요. 무슨 기쁨의 아리랑고개도 있고 그게 그 피눈물의 아리랑고개도 있고 생각 하면 여러 가지지. 제정[일제시대-인용자] 때 일 생각하면 그건 아주 피눈물의 아리랑고개고. 울며 넘던 고개 (심범극)19) 중국 조선족 3세인 심범극의 말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는 “아주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울며 넘던 고개”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뭐 사랑의 아리랑 고개”, “무슨 기쁨 의 아리랑 고개”도 있고 “뭐 무슨 고개가 많”다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라고 설명한 다.

18)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아리랑을 수용하고 표상하는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한 연구는 중국 조선족의 공동체, 종족과 민족,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19) 심범극(沈範極)은 1938년생, 길림성 훈춘시 춘화진 출생. 이주민 2세. 의사였던 아버지가 함경도 에서 이주해 훈춘시 춘화진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1947년 훈춘시 춘화진에서 량수진 정암촌으로 이사. 정암촌은 1938년에 충청도 사람들이 집단이주하여 만든 마을. 심범극은 현재 정암촌 노인협 회 문예책임자로서 <청주아리랑>을 지도하고 있다. 조사는 2015.6.23.(화) 11:35~13:25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 심범극 댁에서 이루어졌다. 심범극의 아내 강정숙(1942년생), 정암촌 촌장, 허송절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도문지회 회장)이 합석하였다.

이러한 진술에는,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 사회에서 꾸준히 전승되고 있는 「기쁨의 아리랑」의 영향이 나타난다. 「기쁨의 아리랑」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노래로, 2015년에 필자가 중국 연변 지역의 아리랑을 조사할 당시에도 계속 불리고 있었다. 앞서 인터뷰했던 심범극도 「기쁨의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이상의 인터뷰와 조사・채록한 아리랑을 근거로 하여,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역사 에서 민족 정체성의 구성 및 정서체계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의 계열을 추출할 수 있다. 하나는, 그 기원을 1920년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본조아리랑」 에 두고, 이후 조선 민족의 이산과 유랑, 중국으로 이주라는 역사적 고난과 연결되는 아리랑 계열이다. 또 하나는 “항일전쟁 승전의 기쁨이라는 활력의 노래”20)로 만들어 진 「기쁨의 아리랑」 계열로, 1945년 광복을 거쳐 1950년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족의 주체적인 역량과 현실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이 한민족의 고난 서사를 표상하면서 민족의 노래로 정전화된 것은 1920년 대 들어서 대대적으로 발생한 ‘생이별’ 현실과 관련이 깊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과 그 주제가인 「본조아리랑」은 북간도와 만주로 대규모의 이산과 이주가 일어났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21) 1880년대 越江금지정책이 폐지됨에 따라 조선인들의 중국 동북지역 이주는 크게 늘어났다. 이후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조선인의 이주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에 밀어닥친 농업 공황과 재해는 조선 농촌을 파괴시키고 농민의 유랑민화를 격화시켜 20만 명 이상이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1926년 북간도 이주민은 35만 6천여 명이었다.22)

20) 김남호, 앞의 논문, 134~136면.

21) 정우택, 「아리랑 노래의 정전화 과정 연구」, 뺷대동문화연구뺸 57,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7, 299면.

22) 현규환, 뺷한국유이민사뺸, 어문각, 1967, 161면.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에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이산과 이주, 유랑이 일어났던 원인은 농민들이 땅이 없거나 소작료 등 빚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영화 〈아리랑〉과 연극 〈아리랑 고개〉을 구성하는 극적인 갈등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개봉 당시, 신문에 게재되었던 영화 〈아리랑〉의 광고문을 보자.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北丘의 아리랑23)

춤추며 아리랑 보내며 아리랑 떠나며 아리랑 ―門前의 沃畓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 보라! 이 눈물의 하소연!

一大 農村悲詩! 누구나 보아 둘 이 훌륭한 사진! 오너라! 보아라.

이 광고 문구는, 문전의 옥답을 빼앗기고 쪽박의 신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 했던 비극이 당시 조선 농촌의 보편적인 현실이었고, 이것을 영화 〈아리랑〉이 대변하였음 을 보여준다.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비참한 농촌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고향과 조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의 농민들이 중국 조선족의 기원이 되었다.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자연재해, 전쟁, 마적 피해, 기근, 중국 지주 및 관민의 착취와 학대, 집단 추방과 조선인 驅逐 운동으로 생존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중국에 거주한 조선인은 1930년대 초반에 대략 100만 명,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말기에 170~22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그중 약 70만 명 이상이 국적이 없는 무적자로 방치되었다.24) 일찍부터 중국의 조선인들은 유랑과 이주의 역사적 경험과 서사, 정서 등을 아리랑의 가사와 가락에 얹어서 불러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전옥답을 다 빼앗기고 만주땅 신세가 웬말인가 - 「아리랑」(추병호, 71세, 2008년 요녕성 신빈현 장령자촌)25)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생활에 쪼들려 넘는 고개 북간도 오는 길손 눈물의 고개 - 「눈물의 고개」(미상, 길림성 용정시, 1956.여름)26)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부모 동생을 다 버리고 아리랑 고개로 돈 벌러 간다 - 「아리랑(2)」(조종주 창, 리황훈 채보)27)

23) 광고, 「아리랑」, 뺷조선일보뺸, 1926.10.1.

24) 유선영, 뺷식민지 트라우마뺸, 푸른역사, 2017, 225~229면 참조.

25) 진용선, 앞의 책, 91면.

26) 리용득 수집 정리, 뺷조선족 구전민요집(상)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8, 49면.

27)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편, 「아리랑(2)」, 뺷민요곡집뺸,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0, 265면

 

이주한 곳(중국, 만주)에서도 불안정한 삶과 생존의 위기가 계속되었기에, 이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부모 형제와 문전옥답이 있는 고향 을 떠나 타국의 만주 땅을 유랑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이처럼 같은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서 공통의 감각과 정서체계를 표현한 아리랑은, 중국의 조선인 공동체 를 엮어주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가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본조아리랑」의 후렴에 서 ‘아리랑 고개’는 “넘어간다”라는 의지적 표현과 함께 ‘지금, 여기의 고난’을 뛰어 넘어 ‘미래의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염원하는 근대적인 시간 의식을 담고 있다. 즉, ‘아리랑 고개’에는, 현실의 고난을 견디며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동력이 내장되어 있었다.

중국의 조선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북간도를 자신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 로 만들어냈던 경험을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에 투영시켜서 부르기도 하였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아리랑 고개는 왜 그리 머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 북간도 벌판이 좋답니다

아리랑 고개는 왜 그리 머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북간도 벌판」(최금녀 노래, 길림성 안도현, 1954년 채록)28)

28) 리용득, 앞의 책, 5면.

이렇게 재창작된 아리랑에는, “눈물의 고개”였던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머나먼 땅까지 쫓겨왔지만,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북간도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나아가 고난의 땅이었던 북간도에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세우겠다는 의지와 기획을 노래하기도 했다

.. 아버지 어머니 / 북간도로 갑시다 / 거기에는 우리 동포가 산대요 / …… / 아름다운 금수강산 / 다시 세우리 - 「북간도로 갑시다」(천봉희, 김봉녀, 안도현 소사하향 무주촌, 1981.11.9.)29)

중국의 조선인들이, 이주 초기부터 자신들이 경험한 역사적인 고난과 성취의 이야 기를 아리랑에 담아서 부르며 후대의 자손들에게 전승했다는 점에서, 아리랑은 일종 의 민족 ‘서사시’30)같은 성격과 위상을 갖는다.

29) 위의 책, 2면.

30) 여기서 사용한 ‘서사시’는 장르 개념이나 양식 개념으로서 ‘서사시’가 아니며, 중국 조선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고난-위기-투쟁-승리’라는 서사를 정념화해서 불렀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이 다. 중국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와 자신들이 낯선 중국 땅에 정착하기까지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압축해서 공동체 안에 전승하고 공유하는 노래였다. 아리랑의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민족 ‘서사시’ 또는 서정적 ‘서사시’라는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이 항일 혁명운 동의 본거지였다는 사실과 자부심, 그 역사적 현장에 아리랑이 함께 했다는 점은, 이러한 민족 ‘서사시’ 같은 아리랑의 성격을 강화한다. 저는 제일 싸움이 치열하게, 우리 민족이 싸운 곳은, 사실 일본놈들과 싸운 곳은, 뭐 이전에 상해라든가 그 쪽이 아니고 이곳이라고 생각하지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나라를 찾겠다고, 또 우리민족이 다시 일어서겠다고 목숨 바쳐 싸웠거든요. 우리 연변만 해도 그 일본놈들과 싸우다 죽은 사람, 백성들, 일반 백성들이가 정말 몇 천 명, 몇 만 명이 죽는단 말입니다. 이름 없이. 독립 유공자를 찾지만은, 그 독립유공자 가운데 백분지 구십오는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그 사람들은 또 이름을 봐서 한 게 아니고, 뭐 정 치하는 사람들은 이름 보고 하겠지만, 여기 와서 죽은 많은 사람들은 정말 내 민족을 찾고 내 나라를 찾고 그래서 죽은 사람이거든요. 정말 독립군 하는 사 람들이 산에서 싸우면 쌀을 몇 근 가져가다 메고 가다가 죽은 사람도 있는 게 고, 또 총을 숨겨줘서 죽은 사람도 있는 게고, 또 같이 싸우다 죽은 사람도 있 지만, 이런 사람까지 하면 몇 만 명이 된단 말입니다. 이 싸움이가 제일 치열했 던 곳이 여기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한석윤) 한석윤의 회고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동북지역은 항일혁명의 본거지였으며, 몇 만 명에 이르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처럼- 중국 조선족들의 정체성에서 항일혁명의 역사적 투쟁을 주체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항일 독립운동 시기에 「광복군 아리랑」, 「독립 군 아리랑」, 「혁명의 아리랑」 등이 만들어져서 불렸다.31)

31) 진용선, 앞의 책, 112~120면 참조.진용선은 이들 아리랑을 ‘항일 저항민요 아리랑’으로 개괄하였다.

Ⅲ. 「기쁨의 아리랑」의 창작과 수용

1. 광복 이전 「기쁨의 아리랑」

지금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에게 꾸준히 전승되고 있는 「기쁨의 아리랑」은 항일 혁명투쟁의 현장에서 창작된 것으로, 광복 이전에 화북지역 조선의용군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렸던 노래이다. 1944년, 상급의 지시에 의하여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사생들 은 태항산을 떠나 연안으로 향하였는데 4월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그들은 ‘풍의족식’하라는 당중앙의 호소에 호응하여 대생산에 일떠섰다. 조선혁명군사 학교에서 추석만회를 준비하면서 「호메가」(평안도 민요곡에 류동호가 작사)가 나왔고 녀성대에서 미나리를 캐면서 「미나리타령」(「도라지」 곡에 리화림이 작 사)이 나왔다. 조선의용군 속에서는 이외에 또 「기쁨의 아리랑」, 「조선의용군 추도가」(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 「의용군과 팔로군」, 「의용군송가」, 「닐리리 타령」(민요에 작사한 것) 등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1945년초에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구락부를 화북지대선전대로 개칭하고 진 찰기변구에서 싸우고 있는 군민에게 위문공연과 선전사업을 하였다.32)

32)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뺷20세기 중국 조선족 음악문화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5, 43면.

「기쁨의 아리랑」은 항일투쟁 가운데 태동한 아리랑으로 조선의용군 선전과 장 양계가 작사(작곡자 미상)했다.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와 탄식의 고개를 넘 어 일제 침략자들을 쳐부수고 마침내 승리의 고개를 뛰어서 넘어온다는 「기쁨 의 아리랑」은 전통 음계를 바탕으로 하는 항일 아리랑과 달리 6음계로 민요풍을 벗어난 창가풍의 노래다.33)

33) 진용선, 앞의 책, 121~122면.

위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을 떠나 옌안에 도착한 뒤, 조선 혁명군사학교가 준비한 추석만회에서 「기쁨의 아리랑」을 지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신범극을 비롯한 일반 대중은 「기쁨의 아리랑」이 1945년 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 로 알고 있다.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7, 74면)에는 「기쁨 의 아리랑」을 〈광복 후 시기〉에 배치했고, 뺷조선족 구전민요집(하)뺸(리용득 수집 정 리, 북경: 민족출판사), 2008, 253쪽)에서는 〈해방의 북간도〉 편으로 분류하여 배치하 고 있다. 필자의 조사팀이 2015년 답사할 당시에 심범극(1938년생, 도문시 정암촌 노인협회 문예책임자)은 「기쁨의 아리랑」을 부르면서 “광복 날 때 광복 그때” 부르던 노래라고 말해줬다. 이처럼 「기쁨의 아리랑」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대한 ‘기쁨’ 또는 광복 후에 토지 분배와 토지개혁으로 땅을 얻게 된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쁨의 아리랑」을 둘러싼 이러한 사실과 기억의 교착에는 나름의 역사적 맥락이 작용하고 있다. 광복 이전에 조선의용군이 옌안 혹은 태항산 등지 혁명투쟁의 현장에서 지어 불렀 던 「기쁨의 아리랑」이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에게 전파된 것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의용군의 동북 진출 및 혁명 활동과 관련이 있다. 중국 항일근거지에서 혁명 활동을 수행하던 조선의용군은 1945년 11월 동북지역으로 진출하였다. 8.15의 해방과 함께 조선 민족 집거지구에서는 군중성적인 문예단체들이 우 후죽순처럼 일떠섰다. 연변에서는 1945년 9월에 간도예문협회, 10월에는 도문 노농예술동맹, 이스크라 극단 …… 이러한 군중성적인 예술단체들은 그후에 폭발한 제3차 국내 혁명전쟁(국공전쟁)의 복잡한 국세와 더불어 점차적으로 동 북 각지에 널려 있는 조선족 무장부대인 조선의용군(이 부대는 원래 태항산에 서 항일전쟁을 하였는데 항전이 끝나자 중공중앙의 지시에 의하여 동북지구에 전이하였음) 제1지대(요녕 일대), 제7지대(길림 지구), 제3지대(흑룡강성), 제5 지대(연변 지구) 등에 편입되어 부대의 문예단체로 얼마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하나하나 합쳐져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금의 연변가무단과 연변연극단의 전 신인 연변문공단으로 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족 부대에서나 민중들 속에서는 대중적인 가창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벌어졌다. 여기에서 불려진 노래들로는 30년대에 장백산 항일근거지 에서 보급되었던 혁명가요들과 40년대 초반에 태항산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 군에서 창작 보급되었던 혁명가요들, 그리고 이때에 와서 새롭게 창작된 가요 들이다.34) 동북지역의 해방군으로 들어온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보면, 요녕성 일대에서 조선 의용군 제1지대가, 흑룡강성은 제3지대가, 길림 지구는 제7지대가, 연변 지구는 조선 의용군 제5지대가 배치되어서, 민주정권의 안전을 보위하고 토지개혁 운동을 이끌며 혁명을 주도해갔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 내에는 군악대와 문예선전대를 조직하여 조선인의 주체적 혁명을 이끌어 갔다. 조선의용군은 동북지역 조선의 ‘인민’들에게 혁명가요를 선전하였고, 조선인들도 이 노래와 메시지를 자신의 ‘혁명적 기제’로 받 아들였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맞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라는 「조선의용군행진 곡」, 「기쁨의 아리랑」, 「최후의 결전」 등, 조선의용군의 노래가 중국 동북지역 조선 민족의 노래로 전파되어 울려 퍼진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이후 「기쁨의 아리랑」 은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연변에 자리잡고 있던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학생들 이 주로 불러 전승되었다.35)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길동군정대학,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의용군 제7지대의 군정대학, 의용군 제5지대 교도대가 합병하여 1946년 10월 18일 용정에서 개학하였으며, 4기에 걸쳐 군정간부 3,760명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2520여 명이었다.36) 1945년 초 화북 항일근거지에서 창립된 조선의용군 선전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제5지대 선전대는 1946년 1월에 연변에 도착하여 조양천에 주둔하면서 혁명가요 보급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37)

34) 전성호, 뺷중국 조선족 문학예술 연구뺸, 이회, 1997, 68~69면.

35) 뺷노래집-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때 부르던 노래묶음뺸,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90, 38면.

36) 주성화 편저, 뺷사진으로 보는 중국 조선족 이주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9, 132면.

37)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앞의 책, 110면.

화북지역에서 항일 혁명활동을 하던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구락부 선전대에서 만들어져서 불리던 「기쁨의 아리랑」도, 이 러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광복 이후 길림, 연변 등지의 조선 민중들에게 전파되었다.

2. 「기쁨의 아리랑」의 전승과 변형

「기쁨의 아리랑」은 광복 이전에 조선의용군에서 만들어지고 불렸던 노랫말과 오늘 날 중국 조선족들이 부르는 노랫말 사이에서 차이가 생겨났다. 즉 「기쁨의 아리랑」이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두 4절로 된 「기쁨의 아리랑」, 그리고 제4절이 생략된 채 총 3절로만 된 「기쁨의 아리랑」(그리고 제2절에 약간의 가사 차이가 있는) 이 있다. 원래 조선의용군이 지어 부르던 「기쁨의 아리랑」은 총 4절로 만들어졌다. 「기쁨의 아리랑」의 기원과 역사는 조선의용군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되고 소개된다. 예를 들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때 부르던 노래”38)라든지, “력사가요”39) 혹은 동북해방과 조선의용군 제3지대 군악단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의 아리랑」을 배치하 는 경우40) 등이 그렇다. 조선의용군이 지어 부른 원래의 「기쁨의 아리랑」을 보자.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 한번 가면 소식 없던 탄식의 고개 업고지고 쫓겨서 흘러가더니 /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넘어오네 (후렴)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헤 /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 꽃도 지고 잎도 졌던 아리랑 고개 / 우리 부모 뼈를 묻은 무덤의 고개 막대 끌고 돌아보며 흘러가더니 / 원쑤 갚고 떼를 지어 뛰넘어오네 붉게 붉게 무궁화 핀 아리랑 고개 / 웃음소리 터져나는 승리의 고개 원쑤 피로 삼천리에 땅을 걸구고 / 보금자리 춰세우러 뛰넘어오네 태극기 휘날리는 아리랑 고개 / 고향산천 찾아 넘는 기쁨의 고개 다시 오마 맹세하고 떠나간 사람 / 새 나라의 살림꾼이 뛰넘어오네 - 「기쁨의 아리랑2」(출처 미상)41) 전문

38) 뺷노래집-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때 부르던 노래묶음뺸,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90, 38면.

39) 뺷력사가요뺸, 연길: 연변문학예술공작자련합회, 1980, 31면.

40) 뺷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4, 222~223면.

41) 리용득 수집 정리, 뺷조선족 구전민요집(하)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8, 253면.

조선의용군이 지어 부른 「기쁨의 아리랑」 1절과 2절은, 고향과 고국을 떠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유랑하던 고난의 서사를 환기하며 시작한다. 중국의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서사는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탄식의 고개”, “업고 지고 쫓겨서 흘러가던 시절”, “부모 뼈를 묻은 무덤의 고개” 등으로 재현된다. 이산과 유랑의 삶 속에서 죽음까지 감내했던 아리랑 고개, “꽃도 지고 잎도 졌던” 상황, 한 줄기의 생명과 희망조차 갖기 어려웠던 아리랑 고개가 바로 이들이 지나온 세월이 었다. 하지만 죽음을 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생의 의지와 미래로의 企投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원수와 싸우는 혁명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탄식과 죽음의 고개를 기쁨과 승리의 아리랑 고개로 전환시켰다. 이들의 뜨거운 혁명적 파토스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행위 표현으로 부족하여 “뛰넘어오네”를 반복하는 것으 로 표현했다. 후렴구에서는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에”라고 분투・응원하며, 민중들에게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로 함께 넘어갈 것을 추동하고 있다. 「기쁨의 아리랑」 3절과 4절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세상은 “무궁화 핀 아리랑 고개” 와 “태극기 휘날리는 아리랑 고개”이며, 삼천리의 땅을 갈아 보금자리를 일구고, 고향 산천을 다시 찾아가는 고개이다. 이들이 꿈꾸었던 “새 나라”는 바로 “태극기”- “무궁화”-“삼천리”로 표상되는 한반도 조선이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에서 불리는 「기쁨의 아리랑」은 변형을 겪게 되었다.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 한번 가면 소식 없는 탄식의 고개 업고지고 쫓겨서 흘러가더니 /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넘어오네 (후렴)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헤 /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 꽃도 피고 잎도 피는 아리랑 고개 / 우리 부모 뼈를 묻은 아리랑 고개 막대 끌고 돌아보며 흘러가더니 / 원쑤 갚고 떼를 지어 뛰넘어오네 붉게 붉게 무궁화 핀 아리랑 고개 / 웃음소리 넘쳐나는 승리의 고개 원쑤 피로 삼천리의 땅을 걸구고 / 보금자리 터 세우러 뛰넘어오네 - 「기쁨의 아리랑1」42) 전문

42) 김남호, 앞의 논문, 135~136면. 김금옥 노래, 김덕균이 채보한 악보가 실려 있다.

위에서 김남호(연변대학)가 소개한 「기쁨의 아리랑」은 김금옥이 노래했고 김덕균 이 수집・기보한 것이다.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43)에도 위의 총 3절 버전의 「기쁨의 아리랑」이 실려 있다.

43)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 편,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7, 74면.

<악보> 「기쁨의 아리랑」(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 연변교육출판사, 2007, 74면)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은 연변의 대표적인 문화단체인 연변음악가협회・연변조선 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이 공동으로 편찬한 2007년 당시의 정전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에서 부르는 총 3절의 「기쁨의 아리랑」 을, 광복 이전에 조선의용군이 지어 부르던 버전과 비교해보면, 제4절이 통째로 빠졌고, 제2절에서 “꽃도 지고 잎도 졌던 아리랑 고개 / 우리 부모 뼈를 묻은 무덤의 고개”가 “꽃도 피고 잎도 피는 아리랑 고개 / 우리 부모 뼈를 묻은 아리랑 고개”로 바뀌었다. 이렇게 제4절이 탈락하면서 노래 제목인 「기쁨의 아리랑」의 근거가 되었던 ‘기쁨의 고개’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흑룡강성 연수현에서도 「기쁨의 아리랑」이 발견44)되는데, 총 4절까지 있는 원형 그대로 채록했다. 제2절의 노랫말도 바뀌기 전의 “꽃도 지고 잎도 졌던 아리랑 고개/ 우리 부모 뼈를 묻은 무덤의 고개”로 되어 있다. 흑룡강성에서 발견된 「기쁨의 아리 랑」이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 군악단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의용군이 화북 항일근거지에서 만들어 부르던 「기쁨의 아리랑」을 가지고 동북해방을 위해 흑룡강성으로 들어왔고, 향후 흑룡강성의 인민들 은 「기쁨의 아리랑」을 “일제가 물러간 후 승리의 희열을 담은 아리랑”45)으로 기억하 고 있다. 김남호는,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승된 「기쁨의 아리랑」의 주제와 구조를 분석하여, ‘항일 저항과 승전에 대한 기쁨의 노래’로서 “‘기쁨 싣고 떼를 지어’(①), ‘원쑤 갚고 떼를 지어’(②), ‘보금자리 터 세우러’(③)로 나타나고 있는데, 앞의 두 부분은 일본군 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을 나타낸 반면, 뒷부분은 민족의 미래를 노래”46)하였다고 설명한다.

44) 뺷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4, 222~223면.

45) 위의 책, 222면. 조선독립동맹이 발전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1945년 11월부터 흑룡강성을 중심 으로 활동했다. 연수현 남쪽에 접해 있는 흑룡강성 뺷상지시 조선민족사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용 군 제3지대는 “조선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각성을 높이며 함께 뭉쳐 무장대오를 묶어 세우고 토비 숙청, 민주정권의 안전보위, 나아가서는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운동에 적극 참가하게끔 이끌어주는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켰으며 상지 지역 전체 조선족들 마음속에 혁명에 대한 각오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평시에는 대중들 속에서 항상 정치형세를 선전하며 「호메가」, 「적기가」, 「의용군행진곡」, 「공산당이 없이는 새 중국이 있을 수 없다」, 「최후의 결전」, 「의회주권 가」 등 여러 가지 혁명가요를 불러 조선족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으며 때로는 문예공연도 가졌 다.”고 기록되어 있다(상지시 조선민족사 편집위원회, 뺷상지시 조선민족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9, 147~149면). 46) 김남호, 앞의 논문, 136면.

그러나 이처럼 「기쁨의 아리랑」을 ‘항일전쟁의 가요’, ‘항일’에만 주목할 경우, 1945년 해방을 거쳐서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중국 조선족에게 「기쁨의 아리랑」 이 널리 불리게 된 이유−노래의 파토스와 생명력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기쁨의 아리랑」에는 두 개의 서사와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쪽박 차고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유랑민과 이주민의 목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고난을 끊고 해방된 아리랑 세상을 쟁취하려는 ‘혁명 주체의 목소리’이 다. 이러한 두 개의 목소리는 두 갈래의 길, 두 개의 아리랑 고개로 연결된다. 「기쁨의 아리랑」에 표상된 두 개의 아리랑 고개−“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와 “탄식 의 고개” / “무궁화 핀 아리랑 고개”와 “웃음소리 넘쳐나는 승리의 고개”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두 개의 목소리, 두 개의 길이 역사와 삶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연대하 고, 협력하면서 함께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를 만드는 것이다. 「기쁨의 아리랑」이 계속 중국 조선족들에게 생명력을 갖고 불리는 이유도 이러한 노래의 구조와 파토스 에 있다.

3. 토지 개혁과 혁명 주체로서 ‘기쁨’의 실현

필자의 아리랑 답사과정에서 「기쁨의 아리랑」을 불렀던 심범극 씨는 ‘아리랑 고개 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노래[「기쁨의 아리랑」-인용자]는 확실히 이게 정말 울고 넘던 피눈물의 과거사를 회한하며 하던 노래라요. 일본 제국주의 착취 밑에 생활하다가 어느 날 기쁨에 넘치는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는 두 가지가 나오지. 구슬프게 하면 저렇게 지냈다는 거예요. (심범극)

그의 말처럼, 광복 후에 조선족이 불렀던 「기쁨의 아리랑」에는 “울며 넘던 피눈물 의 아리랑 고개”에 대한 고통과 통한, 그리고 이를 극복하여 일본 제국주의 착취를 이겨내서 마침내 “기쁨 넘치는 아리랑 고개”를 성취했다는 자부심이 함께 깃들어 있다. 역사적 사실로서, 광복 후 동북지역 조선 민중들이 「기쁨의 아리랑」을 실질적인 기쁨으로 구가할 수 있었던 근거로 토지 개혁과 토지 분배가 있었다.

연변의 토지개혁 은 1946년 7월에 시작해서 1948년 4월에 끝났다.

첫 단계(1946.7~1947.6)는 양곡 대여, 사출, 청산이며,

두 번째 단계(1947.7~10)는 지주 부농이 감춘 재산을 들춰내는 운동이었으며,

세 번째 단계(1947.11~1948.4)는 재심사하고 토지를 평균 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중국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토지가 없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 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다. 1946년 5월 4일, 중공 중앙에서는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 를 발표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해주는 ‘경자유기전’ 정책을 결정 지었다. 조선족 마을에서는 1947년 10월부터 1948년 초까지 토지개혁운동을 진행하 여 조선족 농민들이 계급성분을 획분하고 토지를 분배받아 농민들이 토지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 당의 토지개혁정책은 조선인 농민들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았다.47) 해방 전, 연수현(흑룡강성-인용자) 조선족 농호의 97%가 자기 토지가 없었 다. 하여 만선척식회사의 토지가 아니면 한족 지주들의 토지를 세맡아 농사지 었다. 토지개혁은 조선민족에게 부활제나 다름없었다. …… 조선이주민들에게 있어서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조선이주민들은 토지개혁에 누구보다 더 적극 적으로 호응해 나섰다.48)

47) 서명훈, 뺷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7, 244~245면 참조.

48) 뺷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4, 71면.

토지개혁은 조선 이주민이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이었다. 심범극은 광복 이후에 조선인들이 주체가 되어 토지개혁 시기에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45년도 한 4~5년에 지주 부농 다 때려 뒤집어엎었어요. 심한 건 다 죽여 버 렸어요. 그리고 여기서 투쟁했어요. 그러고 청산해 버렸어요. 제정[일제-인용 자] 때 압박 착취해서 한 거는 다 청산했어요. 인민들이, 지주 부농은 압박 착 취했다는 거지. 지주 부농의 물건 다 뺏어다가 인민들에게 나눠줬어요. 그렇게 했어요. 광복을 그렇게 했어요.(심범극)

광복은 인민이 주체가 되고 땅을 갖게 되는 해방과 혁명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조선의용군이 「기쁨의 아리랑」에서 노래하고 상상했던 “새 나라의 살림꾼이 뛰넘 어오”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토지개혁을 통해 「기쁨의 아리랑」은 ‘무궁화 피고 태극기 휘날리’는 조국, 그 ‘삼천리에 땅을 갈아서 보금자리 세우’며 ‘새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실현하고, 혁명적 투쟁의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기쁨을 담아내 기에 이른다.

<사진> 토지개혁을 경축하는 연길현 광개향(光開鄕) 문예공연대49) (사진: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한편, 1946년 7월 장개석의 국민당은 160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해방구를 공격해왔 다. 국내 해방전쟁시기 동북 삼성에서는 조선족 인구의 5.7%인 62,942명이 참전했 다. 이 중 연변의 5개현에서만 1948년까지 모두 34,855명의 조선인이 참전했는데, 이 숫자는 해방전쟁시기 연변 5개 현에서 참전한 5만 2천 명의 8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해방전쟁시기의 지대한 공로는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조선인’이라는 신분에서 중국 공민으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낳게 했다.50)

49) 주성화 편저, 뺷사진으로 보는 중국 조선족 이주사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9, 136면.

50) 진용선, 앞의 책, 124면.

광복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인은 토지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국내 ‘해방전 쟁’에 참여함으로써 이 땅과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갔다. 이렇듯 중국 조선인들이 자기 운명의 주체로서 자기 공동체와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리랑의 전승과 재창조가 이루어졌다. 한석윤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 속에서 아리랑이 새롭게 생성되어 간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리랑이 원래는 한의 노래인데 우리는 이렇게 밀착되니까 한을 넘어서 기 쁨까지 올라가고 있거든요. 우리 선생님 그 이전에 [아리랑을-인용자] 많이 모집해서 알지만은, 못 살던 사람이 나라를 찾은 다음에, 우리 학교를 세우고 우 리 자치주를 세우고 할 때, 그 기쁨을 또 무엇으로 하냐면 아리랑으로 표현한 단 말입니다. 사실은 아리랑 자체는 워낙 한의 노랜데 우리는 마지막에 그걸 넘어서 일단 그거까지도 우리가, 그러니까 아리랑이가 어떻게 우리 같이 민족 과 접착되어 있다는 거 이거 말하는 거지. 모든 게 아리랑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으니까 지금은 기쁨까지도 아리랑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하거든요. (한석윤) 중국 조선족의 역사에서 아리랑은 그들의 삶과 존재, 민족 정체성을 감각하고 표현 하는 형식으로 존재하였다. 고국에서 문전옥답을 다 빼앗기고 생존의 위기에 몰려서 쪽박을 차고 넘어올 때 아리랑은 ‘피눈물의 아리랑’, ‘탄식의 아리랑’이었는데, 해방 된 지금, 땅을 얻고 자치주를 획득하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기쁨을 아리랑으로 표현하였다. 아리랑의 곡조까지도 흥겹고 경쾌해졌 다. 아리랑은 조선 민족의 감정과 사상, 언어가 되었으며, 자신들의 삶과 역사에 맞는 그들만의 아리랑을 새롭게 창조해 갔다.

Ⅳ. 「새 아리랑」과 새로운 주체의 구상

1. 「새 아리랑」에서 ‘지금 여기’의 감각

광복 후에 중국 조선인들이 고국으로의 귀향과 타향에의 정착이라는 기로에 있을 때, 정착의 동기와 확신을 부여한 것은 토지개혁과 토지 분배였다.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보았다.

광복 후 시기(1945.8.15.~1949.9.30.) 중국에 이주하여온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과 함께 고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중국에 남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 였고 따라서 력사적인 선택을 하여야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복직전 210만에 달하던 우리 민족은 100만은 고향을 찾아 조선반도로 돌아갔지만 100만을 웃 도는 겨레들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개척해온 이 땅을 버리지 않고 중국에 남았 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중국 조선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광복 후 1947년 7월에 중국에서 국내전쟁이 폭발되자 조선반도와의 교통이 차단되였다. …… 이 시기에 주를 이루는 것은 「토지 얻은 기쁨」, 「무산대중의 봄이 왔네」와 같이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것과 「농민의 노래」, 「농촌의 사시」, 「새 아리랑」과 같이 해방된 이 땅에서 마음껏 농사짓는 농민들의 심정을 담은 노래들이다.51)

51)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 편,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7, 69~70면.

토지 분배는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고, 이 땅의 나라가 내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문전옥답을 다 빼앗기고 만주땅 신세가 웬말인가”(「아리랑」), “태극기 휘 날리는 아리랑 고개 / 고향산천 찾아 넘는 기쁨의 고개”(「기쁨의 아리랑」)를 부를 때만 해도, 그들에게 고향산천과 아리랑 고개는 조국인 한반도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북지역에서 토지를 분배받은 뒤에는 ‘지금 여기, 이 땅’이 ‘우리나라’, “우리 네가 나라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심범극은 “이게 우리 광복나자마자 농민 들이 토지 분배 받으니깐 이런 노래 나왔드랬어요.”라고 말하면서 「토지를 얻은 기쁨」이라는 노래를 자발적으로 불렀다.

오막살이 우리집에도 광명한 새 아침 닥쳐왔다 에헤라 좋구나 에헤라 좋구 좋다 /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지주 토지 한간 토지를 우리의 손으로 분배했으니 에헤라 좋구나 에헤라 좋구 좋다 /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 「토지를 얻은 기쁨」 (심범극)

지주와 한간들이 소유했던 “토지를 우리의 손으로 분배”하는 것은 새로운 주체,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였다. 「토지를 얻은 기쁨」은, 스스로 땅과 나라, 운명의 주인이 되는 “광명한 새 아침”이 도래했으니 “새로운 우리 살림”을 꾸려보자는 기쁨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거[토지 분배-인용자] 광복 나자마자 했어요. 아, 정말 농민들이 일본제국 통치 밑에 그렇게 착취 받아 오막살이집에서 살다가, 새로운 중국 공산당의 밑 에서 지주 토지 한간 토지 뺏어다 분배하니깐, 정말 광명한 새 아침이 밝아 왔 다는 거니, 나라의 주인이 되고 토지는 우리 토지가 됐다는 거. 그때는 정말 완 전히 마음이 바뀌어지는 거 같아요. 일본 제국주의는 다 뒤집어엎고 우리네가 나라 주인이 됐고, 이런 농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돼서 토지 분배까지 하니깐, 이 얼마나 광명한 새 아침이 왔다 는 거. 이런 가사가 됐지. (심범극) 토지개혁을 막 시작했던 1947년에 「새 아리랑」이 나왔다. 「새 아리랑」은 조선의용군 선전대의 동북지역 후신인 연변전원공서 문공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쁨의 아리 랑」과 함께 공연되면서 널리 전파・전승되었다.52)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새로운 이 마을에 봄이 왔네 보슬비 내리여 땅이 녹고 / 풍기는 흙냄새 구수하다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뻐꾹 뻐뻐꾹 / 뻐꾹새 밭갈이 재촉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뻗어가는 이 마을에 봄이 왔네 희망이 넘치는 넓은 들에 / 거름내는 우마차 오가누나 음매음매 음-매 음매음매 음-매 / 어미소 송아지 부른다 - 「새 아리랑」(채택룡 작사, 허세록 작곡)53)

52)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전대는 급변하는 전시상황 속에서 1946년 8월 길림지구에서 온 조선의용 군 제7지대와 합병하여 길동보안퇀 선전대로 되었고 인차 길림군구 문공단 제2대대로 개편되었으 며 1947년에 5・1부대 선전대와 합병하여 길림군구 연변분구 선전대로 개변되었다가 1948년 3월에 연변전원공서 문공단, 훗날의 연변가무단으로 정착하였다.”(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앞의 책, 112면). 연변문공단 음악교원이던 허세록이 작곡한 「새 아리랑」은 연변문공단 공연의 주요한 레퍼토리였다.

53)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 편,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7, 84면.

「새 아리랑」은 새롭게 분배받은 자기 땅에서 봄갈이하는 농촌 마을의 희망찬 풍경 을 노래하고 있다. “새로운 이 마을”의 “땅”과 “흙”에서 “희망”을 보며 “봄이 왔네”라 고 환호한다. 「새 아리랑」은 중국 동북지역을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이 마을”, “뻗어가는 이 마을”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토지 분배를 통해 확보한 “땅”, “넓은 들”, “흙” “거름”, “밭” 등은 이제 그들의 ‘나라’가 되었다. “뻐꾹새”와 “어미소 송아 지”, “봄” 등의 천지자연도 “새로운 이 마을”을 축복하고 있다. 「새 아리랑」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새로운 아리랑이다. “이 가요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아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기법을 도입한 현대적 작품으로, 5음계 조식과 3박자 계통의 박자를 사용하였으며, 민요 아리랑 리듬 형태와 유사하게 창작되었다. 이름 그대로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한결같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연변의 「새 아리랑」이 다”54) 1950년 9월과 10월 사이 북경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첫돌 경축 행사 에 허세록을 비롯한 연변 조선민족대표단(가무단) 45명이 초청되어 모택동 주석을 만났다. 조선민족가무단은 북경의 여러 곳에서 공연했는데, 공연 목록 중의 하나가 「새 아리랑」이었다. 이때 방초선이 부른 「새 아리랑」은 중앙신문기록영화촬영소가 기록영화로 촬영하여 전국에 방영하였다.55)

54) 김성희, 앞의 논문, 295면.

55)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앞의 책, 184~186면 참고.

「새 아리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환희와 미래와 연동되어 표상되고 있었다. 「새 아리랑」은 중국에서 조선 민족이 독자적으로 새 터전을 이루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희망과 포부를 새로운 국면과 형식에 맞춰 창조한 것이다. 「새 아리랑」에서 “새로운 이 마을”은 나중에 ‘조선족 자치구’로 제도화되었고, 이들의 역사적 주체성 과 이상, 긍지와 자부심은 계속해서 「새 아리랑」으로 구가되었다. 이후 조선족에 의해 새롭게 창작되는 아리랑은 「새 아리랑」의 연장 속에서 생성되었다. 「새 아리랑」 에는 기존의 본조아리랑에서 유래한 아리랑 고개의 표상, 고난을 넘어 희망을 향해 분투하는 주체의 의지 등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희망 넘치는” 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조선족’의 이중적 위상과 아리랑의 변화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1950대 들어 중국 정부에 의해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의 지위와 조선민족자치구를 보장받기 시작한다.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중화인민 공화국에 의해 민족 식별과정에서 발명된 단어이다. ……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처 음 공식적인 문건에 등장한 것은 중국 중앙인민정부 정무원에서 〈소수민족을 차별하거나 모욕하는 성격을 띤 명칭, 지명, 비석, 현판 등에 관한 지시(关于处理带有歧视或 侮辱少數民族性质的니称谓, 地名, 碑碣, 匾联的指示)〉”56)를 발표한 1951년 5월이다.

56) 임지현・서정민, 「재현되는 공간으로서의 연변」, 뺷문화와 정치뺸 5(2), 한양대 평화연구소, 2018, 36면.

그리고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었다. 1955년 4월, 중국 신헌법의 규정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되면서 동북 거주 조선인은 한반도와의 연계 를 단절하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조선족’은 공식 적이고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또한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 으로서의 국민 정체성과 조선 민족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을 지닌 이중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토지 분배와 획득,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과 국적의 취득, 교육 기회 부여 등의 정책에 크게 고무되었다.

만청정부는 우리한테 국적을 주지 않았지 않았습니까. 땅도 안 주고 했는데, 우리 공산당을 좋아한 게, 보통 말로 말하면 우리 웬 가지고 싶어하는 땅을 주 니까. 우린 대부분이 다 농민이 아닙니까. 농촌에서 와서 그 농사질을 중요하 게 지었고, 그런데 그 사람들에다가 무료로 땅을 줬단 말입니다. 땅 떼주며 이 게 당신의 것이요. 당신이 가지고 이제 농사질 하면서 사시오 하니까 이처럼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그랬지. 그 다음에 중국의 국적을 가지지 못했는데 어 느 날 하루 당신 중국 국적을 가지면 주겠습니다. 국적을 줬단 말입니다. 그리 고 학교를 또 지어주거든요. (한석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감각 속에서 새로운 아리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족으로 서 그간 경험했던 이주와 개척, 투쟁과 혁명, 건설의 과정을 서사화하고, 이를 아리랑 으로 표현했다. 이때 만들어진 아리랑은 넘치는 기쁨과 희망의 파토스가 주조를 이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울며 넘던 아리랑 고개 / 오늘은 춤추며 넘어가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아리랑 고개는 열두나 고개 / 한 고개 두 고개 기쁨의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청 하늘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엔 노래도 많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지상락원이 하두나 좋아 / 아리랑 타령이 절로난다 - 「아리랑」57)

57) 민요 「아리랑」(임효원 편사), 뺷가요곡집(3)뺸,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79, 69면.

3절에 본조아리랑의 구절(“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을 변형 삽입한 것은 민족 ‘서사시’로서 아리랑과의 연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정서와 세계관은 기존의 아리랑에서 벗어나 있다. 실제로, 본조아리 랑의 구절을 과거형으로 제시한 뒤, 현재의 언어와 감각으로 새로운 구절을 대비시키 고 있다. “울며 넘던 아리랑 고개”를 “오늘은 춤추며 넘어가”고, 한 많고 고통스러운 아리랑의 “열두나 고개”는 “기쁨의 고개”로 바뀌었다. 지상낙원을 실현한 ‘지금 여 기’가 하도 좋아서 “아리랑 타령이 절로난다.” 3절의 마지막 구절은, 본조아리랑의 “요 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나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를 대신하여 “우리네 살림엔 노래도 많소”로 대체하였다. 이 노래에서 춤추며 아리랑 타령을 부를 정도의 지상낙원으로 표현된 곳은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사회이다.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이 ‘중국 조선족’으로 법적 제도적 위상이 바뀜에 따라 문화적 예술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면 1940년 전후로 조선의용군 이 만들어서 불렀던 항일가요 「최후의 결전」(윤세주 작사)의 가사도 바뀌게 되었다.

무거운 쇠줄을 풀어 헤치고 / 뼈 속에 사무친 분을 풀자 삼천만 동포여 모두 뭉치자 / 승리는 우리를 재촉한다 (후렴) 총칼을 메고 혈전의 길로 / 다 앞으로 동지들아 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 다 앞으로 동지들아 - 「최후의 결전」58) 2절「최후의 결전」은 원래 중국 關內에서 조선의용군이 “삼천만 동포”의 단결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조선의 독립투쟁가였다. 이 노래는 1950~60년대 연변의 소년 소녀들에게 널리 불리는 친숙한 노래였다고 한다.59) 그런데 1950~60년대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채록된 것은 위의 가사와 다르다. 무거운 쇠사슬 벗어 메치고 / 가슴에 사무친 원한 풀자 무산 대중아 모두 다 나가자 / 승리는 우리를 재촉한다 (후렴) 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 / 다 앞으로 동무들아 혁명의 기는 우리 앞에 날린다 / 다 앞으로 동무들아 -「최후의 결전」60)2절

58) 「최후의 결전」, 뺷광복의 메아리뺸, 서울; 독립군가보존회, 1982, 69면.

59) 김관웅・사방예, 「조선의용군 항일가요 〈최후의 결전〉의 혼종성에 대한 탐구」, 뺷근대서지뺸 13, 근대서지학회, 2016, 434면. 「최후의 결전」에 대한 분석은 이 논문에 의거했다.

60) 「최후의 결전」(리숙 노래, 김덕균 채보),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동북 아예술연구원 편, 뺷중국조선족가요대전뺸,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7, 59면.

뺷광복의 메아리뺸에 실린 「최후의 결전」이 “삼천만 동포여 모두 뭉치자”, “독립의 깃발”을 날리며 조선 독립 전쟁에 나설 것을 노래했다면, 연변음악가협회・연변조선 족문화발전추진회・연변동북아예술연구원이 공동으로 편찬한 뺷중국조선족가요대 전뺸에 실린 「최후의 결전」은 “무산 대중아 모두 다 나가자”, “혁명의 기”를 날리며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대오에 혁명적으로 앞장설 것을 촉구하는 ‘무산대중’ 주체의 노래로 바뀌었다. 노래를 부르는 주체도 “삼천만 동포”를 호명하던 조선독립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교체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기쁨의 아리랑」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도 같은 맥락 에서 설명할 수 있다. 원래 조선의용군이 만들어서 불렀던 「기쁨의 아리랑」 4절이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동북지역의 조선족들 사이에 전승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태극기 휘날리는 아리랑 고개 / 고향산천 찾아넘는 기쁨의 고개 다시 오마 맹세하고 떠나간 사람 / 새 나라의 살림꾼이 뛰넘어오네 - 「기쁨의 아리랑2」(출처 미상)61) 4절

61) 리용득 수집 정리, 뺷조선족 구전민요집(하)뺸, 북경: 민족출판사, 2008, 253면.

“태극기 휘날리는 아리랑 고개”와 “고향산천”. “새 나라”는 조국 한반도를 상정하고 만들었던 조선의용군의 독립 투쟁 노래였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조선족 으로서 법적・제도적 위치를 획득하게 되면서 “새 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을 표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한반도를 연상케 하는 “태극기 휘날리는 아리랑 고개”(「기쁨의 아리랑」 제4절)는 배제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쁨의 아리랑」에서 피눈물과 탄식의 고개, 무덤의 고개를 넘어, 승리와 기쁨의 고개에서 “새 나라의 살림꾼”이 되고자 했던 간절한 희망과 의지는 그대로 남아 「새 아리랑」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의 아리랑」과 「새 아리랑」은 ‘조선 민족’이자 ‘중국 공민’으로서의 주권과 정체성, 독자적 고유성이, 중국으로 단순하게 편입되거나 중국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피눈물’과 연대, 혁명적 이상, 헌신적인 항쟁을 통해 쟁취한 것임을 보여준다.

Ⅴ. 맺음말

아리랑은 생활과 운명, 역사의 국면마다 그 형식과 미학을 조정하면서 새롭게 생성 되어왔다. 중국의 조선인들은 ‘국적’과 ‘민족’이 길항하는 사이에서, 아리랑이라는 문화적 기제를 통해 민족을 상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생성해 왔다. 이들에게 아리랑 과 ‘아리랑 고개’는 고국을 떠나 낯선 땅을 유랑하며 살아야 했던 고난과 설움, 이주의 경험과 역사를 환기하고 재현하는 노래였다.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 사회에서 꾸준히 전승되고 있는 「기쁨의 아리랑」은, 1945년 광복 이전에 화북지역 조선의용군들에 의해 민족 수난의 서사를 조국 해방의 의지적 정념으로 전환하려는 기획으로 창작되었고, 광복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 전파되었다. 「기쁨의 아리랑」은 토지 개혁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중국 내 조선인의 제도적・경제적 위상이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아리랑 고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새 아리랑」은 중국에서 조선 민족이 토지개 혁 운동으로 새롭게 땅을 획득하면서, 독자적인 터전을 이루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희망과 포부를 담아서 창작한 노래이다. 「새 아리랑」에는 기존의 본조아리랑에서 유래한 ‘아리랑 고개’의 표상, 즉 고난을 넘어 희망을 향해 분투하는 주체의 의지와 시간 의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 ‘지금 여기’를 “희망 넘치는” 땅으로 구가하고 있다. 이후 조선족에 의해 새롭게 창작되는 아리랑은 「새 아리랑」의 세계관과 정서를 연장・반복하는 것이었다. 「기쁨의 아리랑」과 「새 아리랑」의 창작 및 전승 과정은, 조선 민족이면서 중국 공민으로서의 주권과 주체성, 독자적 고유성이 단순하게 중국 정부의 제도적 승인으 로 주어진 시혜가 아니라, 조선인들의 ‘피눈물’과 연대, 혁명적 이상과 헌신적인 항쟁 을 통해 획득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은 ‘쪽박 차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왔다’라는 자신들의 종족적인 기원을 보존하면서,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 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경험, 자긍심 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 아리랑 을 통해 중국 조선인(조선족)이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존재와 운명 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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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rirang’s Historical Existence in China - From ‘Arirang of Joy’ to ‘New Arirang’

Jeong, Woo-taek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historically clarify the role of Arirang and how it has been changed and recreated while Koreans in China form their ethnic and cultural identity. Based on existing literature, this study also used Arirang and local interviews that the researcher obtained during the field investigation to Yanji, Longjing, and Antu in Yanbian from June 18th to 25th in 2015. Although ‘ethnicity’ and ‘nationality’ were contradictory for Koreans in China, they imagined ethinicity and formed their own identity through Arirang which is the cultural mechanism. The history of China’s ethnic-Koreans’ Arirang can be divided into two classes. One originated from 〈Bonjo Arirang〉, which was the theme song of the movie 〈Arirang〉, and connected to historical sufferings like the separation and displacement of Korean ethnic groups, and their migration and settlement in China. The other one is 〈Arirang of Joy〉 which was created and sung by Korean Volunteers Army in the northern part of China before the independence of Korea. 〈Arirang of Joy〉 expresses the subjecthood of China’s ethnic-Koreans and their sense of reality during the period from the independence of Korea in 1945 to the establishment of Yanbian Autonomous Prefecture in the 1950s. 〈Arirang of Joy〉 reminds the narrative that they wandered around going through all the difficulties after leaving their hometown and homeland. Despite the sufferings and death threats, they did not lose the will to live and Entwurf towards the future, singing “We are going over Arirang Pass”. After they joined the revolutionary struggle, their ‘Pass of moan and death’ is changed to ‘Arirang Pass of joy and victory’. “The New World” that they dreamed of while singing 〈Arirang of Joy〉 is Joseon, which is symbolized by the national flag of Korea(Taegeukgi)-the national flower of Korea(Mugunghwa)-the whole land of Korea(three thousand li). However, verse 4 of 〈Arirang of Joy〉, which reminds of ‘Joseon’, was excluded from the lyrics when the get the land after land reform and establishe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s Korean people independently made new livelihoods in China, they created and performed 〈New Arirang〉 expressing their hope and ambition for independent life. 〈Arirang of Joy〉 and 〈New Arirang〉 shows that their sovereignty and identity as ethic-Koreans and national-Chinese, and their own characteristic are not simply given to them, but achieved through Koreans’ ‘tears of blood’, solidarity, revolutionary ideal, and dedicational struggle. By creating and handing down Arirang, they share historical experiences and memories as ‘Koreans’, and they try to create their own values as ‘China’s ethnic-Koreans’ and establish themselves as ‘constructive’ subject.

Key Words : China’s ethnic-Koreans, Arirang, Arirang of Joy, New Arirang, diaspora, ethnic identity, Korean Volunteers Army, land reform,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투고일: 2022.10.23 심사일: 2022.11.26 게재확정일: 2022.12.12

 

중국에서_아리랑의_역사적_존재_양상―_「기쁨의_아리랑」에서_「새_아리랑」까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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