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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민족개조론」 비판논쟁-최원순의 「이춘원에게 문하노라」를 중심으로/이동순.조선대

< 목 차 >

Ⅰ. 서론

Ⅱ.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한 비판논쟁

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한 감정

적 비판

2.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한 이론

적 비판

Ⅲ.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은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있던 젊은 학생/

지식인들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분노한 이유와 원인을 최원순의 글 이춘원에게

문하노라 를 통해서 밝혀보고자 하였다.

최원순은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에서 개조의 근거와 이유로 제시한 내용을 5가지

로 압축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최원순은 이광수의 주장에 대하여 열악하다는 조선

민족성의 의미, 민족성 개조의 윤리적 근거, 민족성을 판단하는 표준, 조선인을 무지몽

매한 야만인종으로 규정한 이유, 3.1만세운동을 자각 없는 변화일 뿐이라고 주장한 근

거, 민족개조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따진 다음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

으로 문제점을 비판하였고, 개념적인 오류와 이론의 오류를 짚었다. 그것을 통해 민

족개조론 의 허점과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 지점에서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분노했던

이유와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원순의 글을 게재한 <동아일보> 기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해서 인식

공격과 감정적인 비판이 보다는 ‘이론은 이론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전제를 드러냈는

데 이것을 통해서 대중들이 거세게 비판했다는 사실, 인식 공격과 감정적인 비판이 심

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최원순은 문제를 제기하고 오류를 짚어서

논리적인 증명으로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비판이었다.

*주제어: 최원순, 이광수, 민족개조론, 민족성, 야만성, 논리적 근거, 지식인

Ⅰ. 서론

역사는 개인의 삶을 관통하며 개인의 삶은 역사를 관통한다. 역사 안

에서 개인은 혼자일 수 없고, 개인의 삶 또한 역사를 피할 수는 없다. 특

히 강제로 점령당한 식민지라는 특수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조선의 독

립을 포기하지 않고 ‘민족’에 온몸으로 맡기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지식인

과는 반대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민족’을 동원한

지식인이 공존했다. 한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갈래의 삶을 선택했던 지

식인들의 행적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해서 선명하고도 극명하게

갈린다. 민족주의자를 자청하였던 지식인 중에서도 특히 ‘민족’을 기표로

내세워 젊은 청년/지식인들의 지도자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는 식민지라는

특수성을 누린 인물들이었고, 2인 문단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 속에서 젊

은 학생/지식인들은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지식인의 상징이

었던 이광수가 개벽에 민족개조론 을 발표한 뒤에 젊은 학생/지식인

들은 이광수를 거세게 비판하였다. 당시의 ‘개조론’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식인들의 반전운동은 정치체제에 대한 사상운동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

로 ‘개조론’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은 ‘조선’과 ‘민족’을 동원하여 ‘민족성’의 개조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신상

우, 신일용과 김제관은 잡지 신생활에, 최원순1)은 <동아일보>에 글을

발표하며 비판하였다. 그런 반면에 이광수와 함께 활동한 작가/지식인들

이 비판한 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이광수라는 이름의 지위에 당대

작가/지식인들의 묵인하거나 동조하여 민족개조론 에 힘을 실어준 것이

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민족개조론 은 다양한 시선으

로 연구가 집적2)되었고 특히 이광수의 행적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와 맞

물려 이른바 ‘친일’로 변절하게 된 근거를 민족개조론 에서 소급해서 찾

아왔지만,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에는 소홀하

였다.

따라서 본고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3)에서 주장한 내용을 5가지로 압

축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주장한 내용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비판한 최원순의 이춘원에게 문하노라 4)을 주된 논의의 대상

으로 삼아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있던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분노한 이유와 원인, 그리고 민족개조론 의 문제

점과 한계를 밝혀보고자 한다. 신상우, 신일용과 김제관도 민족개조론 을

비판하였지만 특히 최원순의 글의 주목한 것은 이광수보다 먼저 개조의

1) 최원순(崔元淳,1896.12.18~1936.7.6)은 광주광역시 수기옥정 292번지에서 태어나 광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고보를 거쳐 와세다 대학 재학 중 2·8독립선언의 배후

에서 업무를 총괄하였다. 1923년 와세다대 정경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 정치부

장을 거쳐 편집국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그 과정에서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신간회 발기인으로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전조선기자대회를 제안하고 주관하였으나

병이 깊어 광주로 내려와 요양 중에 요절하였다.

2) 김현주, 논쟁의 정치와 민족개조론 의 글쓰기 , 역사와현실 57, 한국역사연구회,

2005.

안지영, 근면한 ‘민족’의 탄생-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을 중심으로- , 한국현대문학연

구 50, 한국현대문학연구회, 2016.

김형국, 1920년대 초 민족개조론 검토 , 한국근현대사연구 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김택호, 개화기의 국가주의와 1920년대 민족개조론의 관계연구 , 한국문예비평연구

13,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003.

3) 이광수, 民族改造論 , 개벽 23, 1922. 5, 18~48면.

4) 최원순, 李春園(이춘원)에게 問(문)하노라 , 동아일보, 1922.6.3.~6.4 (이하 인용문의

출처는 여기에 따른다.)

근거 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론적인 근거를 확보한 뒤 민족개조론 을 논

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논지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신상

우, 신일용과 김제관의 글도 필요에 따라 인용하면서 비판의 쟁점을 보완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민족개조론 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하게 정

리하고 이광수가 동원한 민족과 야만적인 민족성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행태를 <동아일보> 기자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

광수와 당대 작가/지식인들의 침묵에 균열을 낸 젊은 학생/지식인의 비판

적 도전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당시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바라본 민족

개조론 의 문제점을 확인할 것이다.

Ⅱ.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대한 비판논쟁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비판 논쟁에 앞서 이광수와 최원순의 관계를 먼

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광수와 최원순은 와세다 대학 선후배이며 2·8

독립선언 을 함께 했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 를 썼고 최원순은 비밀

리에 등사했다. 그리고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 는 낭독

되었다.5) 최원순과 이광수의 인연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6)

1920년 와세다 대학 재학생 최원순은 잡지 현대 등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광수에 앞서서 개조의 근거 7)를 통해 ‘개조의 필요

5) 조선청년독립단약사 , 경향신문, 1947.2.6.

백관수, 조선청년독립단약사 , 동아일보, 1958.2.8

6)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과 최원순의 부인 현덕신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선후배로, 최

원순과 이광수는 사적인 인연과 공적인 인연이 얽혀 있다. 유학을 마친 최원순은 1923

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였고 이광수와 함께 근무하였다. 이광수가 편집국장 자리를

옮기자 최원순이 편집국장 대리로 그 자리를 이었다.

7) 최원순, 改造의 根據 , 현대 5호,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 1920.5.10

성’을 제기하였고, 현대사회를 “불공평”한 사회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병

이 만한 현대의 조직과 제도로는 일사회의 건전한 진취와 향상은 불가능

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라 “일사회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야 우는 각

민족도 호상적 협조에 인하야 전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기할 수 잇다는

의미에서 현대세계는 개조되여야”하고 “진실한 생존은 적극적인 진취와

향상에 잇”기 때문에 “더욱히 강대하고 심절한 개조의 필요”8)가 있다고

주장했다.9)

최원순이 발표한 개조의 근거 는 일제의 검열에 걸려 글 전체를 다시

수정한 글인데도 ‘조직과 제도’에서 개조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은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민족’을 개조의 대상

으로 삼아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였다. 이 지점에서 최원순과 이광수는 개

조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개조의 대상도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광수의 민조개조론 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대한 감정적 비판

최원순의 이춘원에게 문하노라 를 논하기 전에 민족개조론 의 체계

와 내용을 정리하고, 민족개조론 을 쓴 의도와 목적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먼저 민족개조론 의 구성과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

8) 최원순, 改造의 根據 , 현대 5호,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 1920.5.10

9) “독자제군이여 이 논문은 당국의 주의에 인하야 다시 개조를 하엿는 개조라도 잘 되

지 못한 개조임으로 처음에 마암 먹엇던 본지가 어대로 가고 히미하여진듯 하오. 매우

불만족하고 자미가 적지만은 하는 수가 업소!”(최원순, 改造의 根據 , 현대 5호,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 1920.5.10.)356 |65집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구성과 내용>

구성체계 내용의 제목

변언

민족개조의 의의

역사상으로 본 민족개조운동

갑신이래의 조선의 개조운동

민족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 개조는 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는 얼마나한 시간을 요할가

하 개조의 내용

개조의 방법

결론 결론

위 표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이광수는 변언 에 민족개조론 을 쓰는

이유와 목적을 제시한 다음 ‘상, 중, 하, 결론’으로 글을 구성하여 ‘민족개

조란 무엇인가’, ‘민족개조의 역사적 전개 과정’, ‘민족성개조의 내용’, ‘민

족성 개조를 위한 소요 시간’, ‘민족을 개조할 내용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

다. 이 중에서 변언 은 민족개조론 을 쓴 의도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

고 있기 때문에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만흔 希望과 는 精誠으로, 이 글을 朝鮮民族의 將來가 어할가,

어하면 이 民族을 現在의 衰頹에서 건져 幸福과 繁榮의 將來에 引導할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兄弟와 姉妹에게 들입니다.

이 글의 內容인 民族改造의 思想과 計劃은 在外同胞 中에서 發生한 것으

로서 내 것과 一致하야 마츰내 내 一生의 目的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朝鮮內에서 이 思想을 처음 傳하게 된 것을 無上한 榮光으로 알며,

이 貴한 思想을 先覺한 偉大한 頭腦와 共鳴한 여러 先輩 同志에게 이 機會

에  한번 尊敬과 感謝를 들입니다.

願컨대 이 思想이 사랑하는 靑年 兄弟姉妹의 純潔한 가슴 속에 깁히 

리를 박아 이 피고 열매가 매쳐지이다

辛酉 十一月 十一日 太平洋會議가 열리는 날에 李春園

이광수, 弁言 10)

이광수는 1920년대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식민지 조

선에서 그의 글은 젊은 학생/지식인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 영향력 잘 알고 있었던 이광수는 변언 을 통해서 ‘어찌 하면 이 민족

을 현대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가’를 고민하였고

그 결과 민족을 쇠퇴에서 건져 올려 행복과 번영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민족개조’임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

하는 지식이니만큼 ‘사랑하는 청년 형제자매의 순결한 가슴 속에 깁히 뿌

리를 박아 꼿치 피고 열매가 매쳐’지기를 바랬다. 그 이유로 꼽은 것이 ‘이

미 가진 민족의 목적과 계획과 성질이 민족적 생존 번영에 적합치 아니’하

기 때문이고, 특히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을 전하는 것에 ‘일생의 목적’

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민족개조의 당위성보다 이광수

자신의 목적성을 강조하여 영향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광수가 변언 을 통해 설정해 놓은 ‘청년 형제자매의 순결한 가슴 속

에 깁히 리를 박아 이 피고 열매가 매쳐지’기를 바랐던 것과는 반대로

1919년의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있던

젊은 학생/청년 지식인들은 거세게 분노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당시 신문

잡지의 총공격”과 “사회인사로부터 만흔 비난”이 이어졌으며, ‘장사 여섯

사람’이 한 밤에 “분김에 달려”간 뒤 “개벽사”의 “사무실을 들부시고” “최

린씨 집에 달려가서 천도교종학원교수로 웨 그 납분 이광수를 쓰느냐”11)

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젊은 학생/지식인들은

감정적인 분노를 누르고 이성적인 대응을 하려고 애썼다. 가장 먼저 신상

우가 春園의 民族改造論을 讀하고 그 一端을 論함 12)으로 비판했다. 그리

10) 이광수, 民族改造論 , 개벽 23, 1922. 5, 18면.(이하 인용문은 여기에 따른다.)

11) 이광수, 最近 十年間 筆禍, 舌禍史 - 民族改造論 과 經綸 , 삼천리 14(제3권4호),

1931.4.1

12) 신상우, 春園의 民族改造論을 讀하고 그 一端을 論함 , 신생활 제6호, 1922. 6, 73~77면.

고 일본 유학생 최원순이 李春園에게 問하노라 13)를 통해 비판했다. 뒤이

어 신일용이 春園의 民族改造論을 評함 14)을, 김제관이 社會問題와 中心思

想 15)으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을 비판하였다. 신생활은 색채를 분명

하게 갖고 있었던 잡지였고 한정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서 여론을 수렴하고 발산하는데 언론과 비교해서 더디었던 반면에 언론은

여론의 수렴과 발산이 빨랐다. 그런 점에서 최원순의 글 이춘원에게 문

하노라 는 대중들에게 빨리 확산되어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최원순이

비판한 민족개조론 의 쟁점을 짚어가면서 필요에 따라서 신상우, 신일

용, 김제관의 비판을 동원하여 본 논의를 보강하고자 한다.

2. 최원순의 ‘민족개조론’ 비판

최원순이 비판한 민족개조론 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동

아일보> 기자의 글을 옮겨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한 대중들의 분

노와 비판의 강도를 가늠해 보기로 한다.

이글은 東京留學生 崔元淳氏의 寄稿인데 元來 朝鮮民族을 如何히 하여야

그 生活의 充實과 그 文化의 享上을 期할가 하는 것은 單히 一二 個人의 問

題가 아니며 所謂 知識階級 또는 有志者의 問題가 아니라 적어도 眞實노 朝

鮮사람의 前途를 생각하고 그 生活改善에 對하야 그 前途開拓에 對하야 利

害의 關係가 切實한 者는 누그든지 모다 반다시 解決하여야 할 問題며 覺

悟하여야할 것이라. 이럼으로 우리는 春園의 民族改造論을 매우 興味잇게

읽는 同時에 그 論旨와 그 提唱하는 改造方法에 對하야는 各方面으로 批判

이잇고 討論이잇기를바랏노라

이와갓흔 見地에서 우리는 이제 이글을 紹介하는 同時에 어데까지든지

13) 최원순, 李春園에게 問하노라 , 동아일보, 1922.6.3~6.4

14) 신일용, 春園의 民族改造論을 平함 , 신생활 제7호, 1922.7, 2~18면.

15) 김제관, 社會問題와 中心思想 , 신생활 제7호, 1922.7, 38-49면.

그 論文自體에 대한 批判만 紹介하고 그 他에 조금이라도 人身攻擊의 嫌이

잇는 것은 紹介하기 躊躇하얏스니 元來 討論과 批判은 그 性質上 批判의 對

象되는 그 自體에 대하야 行할것이오 決코 그 裡面 惑은 그 背後의 人格에

對하야 行할것이 아닌 까닭이라. 그럼으로 이때에 우리가 이글을 本紙上

에 紹介하는 同時에 一般社會에 希望하는 것은 理論에 對한 批判은 理論으

로써하며 學說에 對한 討論은 學說로써하되 決코 感情論으로써 하거나 或

은 暴力으로써 又는 輿論을 憑藉하야 個人의게 社會的壓迫을 加치아니하는

그것이니 萬一如此할것갓흐면 自由의 硏究는 가히 期할수업스며 따라 言論

의 眞正한 自由와 따라 眞正한 理性化한 輿論은 可히 望하지 못할것이라

이 朝鮮의 將來를 위하야 歎息할바 이 안인가 朝鮮의 將來前途가 困難하면

困難할사록 그 解決方法에 對하야 各方面으로 硏究하여야하며 討論하여야

하며 觀察하고 批判하여야할 것이라 이 問題에 對하야서도 우리는 各種意

味의 “自由”의 徹底를 바라노라 (記者)16)

민족개조론 이 발표되자 대중들이 분노하였다는 것을 <동아일보>

기자가 쓴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대중들이 분노한 것은 민족개조론

자체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광수

에 대한 인식공격이었다는 것인데 ‘논문자체에 대한 비판만 소개하고 그

타에 조금이라도 인신공격의 혐이 잇는 것은 소개하기 주저하얏’다는 데

서도 확인된다.17) 그래서 기자는 ‘이론에 대한 비판은 이론으로’하고 ‘학설

에 대한 토론은 학설로’하고, ‘감정론으로써 하거나 혹은 폭력으로써’ 또는

‘여론을 빙자하야 개인의게 사회적 압박’을 가하기보다는 ‘조선의 장래전

도가 곤난하면’ 그 ‘해결방법’에 대해서 ‘각방면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관찰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최원순의 이춘원에

게 문하노라 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며, ‘학설에 대한 토론’임을 확언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최원순도 대중들의 분노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이 나는 점을

그대로 바리는 것은 생명을 이 고귀한 사업이 기초에 한줌 흙으로 밧치시

는 선각자에게 대하야 쇠퇴 우 쇠퇴하고 열악 나타자가 되어서 실

경”이 되지 않도록 감정적인 태도가 아닌 “정중한 태도”18)로 문제를 제기

를 하고 있다. 최원순이 ‘이론에 대한 비판’과 ‘학설에 대한 토론’으로 민

족개조론 에서 주장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서 비판하고 질문한 내용을 정

리하면 5개항으로 집약된다.

민족개조론 비판 내용

1 “劣惡”하다는 “朝鮮民族性”은 엇더한 것을 意味하는가?

2 民族性 改造主義의 倫理的 根據가 무엇인가?

3 한 民族性이 優善하다 “劣惡하다” 判斷하는 그 標準이 어대잇는가?

4 朝鮮人의 過去變遷을 “다 無知蒙昧한 野蠻人種이 自覺업시 推移하야가는 變化와 갓

흔 變化외다”하는 이유는 어대잇는가?

5 “民族改造는 道德的일 것”이라고하는말은 무엇을가라치는가?

16) 기자, 李春園(이춘원)에게 問(문)하노라 , 동아일보, 1922.6.3.

17)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는 이광수가 적은 글에서도 확인된다. “ 民

族改造論 에 대하여는 當時 新聞雜誌의 總攻擊를 밧엇슴은 勿論 社會人士로부터 만흔 非

難을 입엇섯다. 이에 대하야 지금도 記憶에 남는 일은 하로 밤은 子正 한시나 되는 深夜

에 그때 내 집이든 西大門町 一丁目집에 누가 와서 문을 두다리는 이가 잇다. 下人도 업

섯슴으로 내가 나가서 문을 열어주니 壯士 여섯 사람이 우루루 몰러 서 잇다. 李光洙

가 잇느냐? 「네 - 내가 李光洙요 「아니 이집 主人 李光洙말이냐 「글세 내가 이집 主人

李光洙요 하고 나는 그 여섯 사람을 내 방안에 引導하엿다. 必然 그분들은 말에만 끈치

안코 딴일을 생각하고 憤김에 달려왓든 모양이나 門깐에 내가 直接 나가서 서로 正面하

게 되엇슴에 多少 氣 를 꺽기엇슴인가. 처음부터 손울 부치지안코 그제는 自己들끼리

强硬派와 軟派의 둘로 갈너저 나를 한참 꾸짓고 辱하고는 冷水를 떠오라 하여 먹고는

그러고는 가버리엇다. 하마하드면 이 深夜에 무슨 變이 이러낫슬가 그 뒤에 드르니 그

길로 그분들은 天道敎안 開闢社에 이르러 同社의 事務室을 들부시고 그러고는 또 崔麟씨

집에 달려가서 天道敎宗學院敎授로 웨 그 납분 李光洙를 쓰느냐. 고 危害를 加하고 도라

왓더라한다. 崔麟씨 집에 갓든 것이 새벽 네시 엇다하니 第一着으로 그날밤 내 집에 왓

섯든 모양이다.”(이광수, 最近 十年間 筆禍, 舌禍史 - 民族改造論 과 經綸 , 삼천리

제14호(제3권4호), 1931.4.1)

18) 최원순, 李春園에게 問하노라 , 동아일보, 1922. 6. 3

「민족개조론」 비판논쟁 361

최원순은 5개 항 중에서 첫 번째로 ‘“劣惡”하다는 “朝鮮民族性”은 무엇을

意味하는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은 이광수가 말한 ‘민족성’이라는 개념과

정의가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구체적인 문제는 아래에 밝히

고 있다.

“朝鮮民族性이 “劣惡”함을 痛論하엿다 果然 우리가 “살아날 唯一한 길”

을 가르치는 “先覺者” 李春園의 民族性에 대한 見解는 正當한가?

르,본 博士의 말에 依하면 民族性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條件을 要한

다고 볼 수 잇다

一, 다른 民族과 區別되는 特徵일 것

二, 遺傳的일 것

三, 그 民族의게 共通的일 것

과연 “先覺者” 李春園이 指摘한 “虛僞, 非社會的利已心, 懶惰, 無信, 怯懦,

社會性의 缺乏” 이것이 朝鮮人의 特徵이며 遺傳的이고 共通的으로잇는 成格

(성격)일가?19)

 

최원순은 ‘조선민족성’의 ‘열악’함을 논하려면 먼저 ‘민족성’이란 개념에

부합해야 할 것이나 이광수의 민족성은 귀스타브 르봉이 정립한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광수가 주장하고 있는 ‘열악한 조선민족성’

인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타,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은 조선의 민

족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민족성’이라고 통론한

‘열악’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즉 이광수가 말하는 ‘조선민족성’은 ‘다른 민

족과 구별되는 특징’도 ‘유전적’이지도 ‘민족에게 공통적’이지도 않기 때문

19) 이광수의 “朝鮮民族 衰頹의 根本的 原因이 道德的인 것이 더욱 分明하지 아니합니까. 곳

虛僞, 非社會的 利己心, 懶惰, 無信, 怯懦, 社會性의 缺乏 ― 이것이 朝鮮民族으로 하여곰 今

日의 衰頹에 빠지게 한 原因이 아닙니까./英米族의 興旺도 그 民族性의 原因이오, 吾族의

衰頹도 그 民族性의 原因이니 民族의 盛衰興亡이 實로 그 民族性에 달린 것이외다. 그럼

으로 一民族을 改造함에는 그 民族性의 根柢인 道德에서부터 始作하야야 한다 함이외다.”

에 대한 질문이자 반론이다.

 

에 이론적인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 ‘열악한 조선민족성’은

조선의 민족성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민족 즉 한족이나 만족 몽고족

이나 인도족 혹은 일본족과 구별되는 일견에 직시 분별할 수 잇는 조선족

의 독특한 유전적 성격이며 이상적” 타이프 일가? 현대 과학적 지식과 현

실적 사실을 능히 무시하고 그에서 초월한 “선각자” 이춘원이 아니면 도

저히 이춘원이 지시한 열악한 조선민족성을 그대로 긍정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현대 과학적 지식과 현실적 사실을 능히 무시”20)한 주장이라는

것을 비판하였다. 귀스타프 르 봉이 정리한 ‘민족성’의 개념을 이해하고

뜻을 파악하는 것이 민족개조론 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선행되었어야 할

지식인데도 불구하고 선행지식 없이 주장한 이광수의 허위를 짚었다. 최

원순은 이광수가 주장한 근거를 파헤쳐 문제를 쟁점 삼아서 이론적으로

비판을 하였다.

두 번째로 제기한 문제는 이광수가 주장한 “민족의 개조는 도덕적 방면

으로부터 들어가야만 할 것이라 ― 특별히 조선민족의 쇠퇴의 원인은 도

덕적 원인 근본이니 이를 개조함에는 도덕적 개조, 정신적 개조가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라 함이외다. 이 점을 자각치 못하고 그네는 오즉 신지식

의 주입만을 절규하엿습니다. (…) 조선민족의 쇠퇴의 근본원인을 도덕적

부패에서 차즐 줄을 모르고 오즉 지식의 결핍만에서 차즈려 한 것은 큰

불총명, 불자각이외다.”21)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써 ‘민족성 개조주의의

윤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20) 최원순은 거기에 “그에서 超越한 “先覺者” 李春園이 아니면 도저히 李春園이 指示한 劣惡

한 朝鮮民族性을 그대로 肯定하기가 어렵지 아니할가 萬一그러하다고하면 先覺者 李春園

이여 남의글이나잘 理解하고 그 글의 뜻에서 超越화는 것이 엇더할가 하는 生角이난

다.”고 덧붙였다.

21) 이광수, 民族改造論 , 개벽 제23호, 1922. 5.

 

한 民族性이라고 하는 것은 民族的 個性이다 그럼으로 民族性의 改造는

그 個性의 改造라고 볼수 밧게업다 “道德”을 高唱하는 “先覺者” 李春園이여!

個性을 尊重하자는 現代 世界的思潮를 無視하고 “道德的일 것”이라고 하면

서 個性 개조를 “끌는 精誠으로” 主張하는 理論的 根據와 倫理的 價値가 어

대잇는가

최원순은 이광수가 ‘조선민족의 쇠퇴의 원인’을 ‘도덕적인 부패’에서 찾

으면서 ‘도덕적 개조, 정신적 개조’를 주장한 것은 ‘민족적 개성’을 무시한

것이며, ‘개성을 존중하자는 현대 세계적 사조’를 무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광수가 “끌는 정성”으로 주장한 ‘조선민족의 쇠퇴의 근본원인’이

라고 주장한 ‘도덕적 부패’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근거가 있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이광수의 이 주장이야말로 ‘조선 민족’

을 무시하는 비윤리적인 주장이며,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조선의 역사적 조건을 두고 조선의 민족성이 문제라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민족의 개조를 주장한 것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광수가 주장한 민족개조론 의 세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와 연관

되어 있는 것으로 ‘한 민족성이 우선하다 열악하다고 판단하는 표준’이 어

디에 있는지를 밝히라는 요구로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民族性이 民族的個性인 以上에는 그 個性의 劣惡이나 優善을 어느 民

族의 幸福과 繁榮을 目標로하고 하는 말인가? 적어도 個性에 對한 理解

가잇는 사람이면 더욱 先覺者 李春園은 그 民族自身의 繁榮과 幸福

을 위하는 見地에서는 그 民族自身의 個性이 劣惡하다고하는 矛盾은 말

하지 아니할 것이다 한 個性이 劣惡하다고 하는 것은 劣惡한 實은 劣惡하

다고하는것이지요

個人의게잇서서도 그러할터인대 하물며 한 民族的個性이 劣惡하다고

判斷을 나리는 것은 世界의 風土가 均一하지아니고 生活條件이 同一하지

아니한 以上에는 그 자신의 繁榮과 幸福을 위한다는 標準下에서는 아모

리 生角하여도 民族性을 改造 하여야 살아날 唯一한 길이 잇다고 하는

先覺者 李春園이 아니고는 알수가 업는 眞理다 劣惡한 (實은 劣惡하다

고하는것이지만) 그 自身의 “行福과 繁榮”을 위하는 것보다도 어느 다른

民族의 幸福과 繁榮을 위하는 標目下에서 劣惡하다는 判斷이 生길 수 밧

게 업는 것이 아닐가

조선의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해서 ‘어느 다른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는 표목 하에서 열악하다는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세계의 풍토

가 균일하지 아니고 생활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도 ‘행복과 번영’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진리라고 강조한 ‘민족성개조’가 결국 ‘선각자 이춘원’

만 알 수 있는 주장일 뿐,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그러므

로 ‘민족적 개성이 열악하다고 판단’한 것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즉 ‘개성’이 ‘열악’하다는 것은 정립되지 않는 개념이고 성립할 수 없는 논

리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네 번째는 이광수가 “더욱이 재작년 삼월 일일 이래로 우리의 정신의

변화는 무섭게 급격하게 되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금후에도 한

량업시 계속될 것이외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변화외다. 또는 우연의

변화외다. 마치 자연계에서 끈힘업시 행하는 물리학적 변화나 화학적 변

화와 가티 자연히,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행하는 변화외다. 또는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업시 추이하여 가는 변화와 가튼 변화외다./

문명인의 최대한 특징은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하기

위하야 계획된 진로를 밟아 노력하면서 시각마다 자기의 속도를 측량하는

데 잇습니다.”22)에 대한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였다. 특히 “조선의 과거변

천을 다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업시 추이하야 가는 변화와 갓흔

변화외다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따지고 있는데 구체적인 비판의 내

용은 아래와 같다.

22) 이광수, 民族改造論 , 개벽 제23호, 1922. 5.

再昨年三月 事實이 우리의 精神의 變化는 무섭게 急激하게 되얏슴을

不拘하고 贍大하고 明快한 歷史哲學者 李春園이 斷言하는바와갓치 이것은 自

然의 變化며 는 偶然의 變化인가 物理學的 變化와갓치 自然히 偶然

히 行하는 變化이여서 無知蒙昧한 野蠻人種이 自覺업시 推移하여가는 變

化인가?

果然 計劃과 努力이 업는 일이엿슬가 그 事實에 對하야 計劃도 없

고 努力도 업든 일이얏섯다고 明言하는 史家는 全世界를 통하야 民族的

性格을 改造하여야 우리가 살아날 唯一한길이 잇다고 하는 李春園 以外

에는 다시 한사람도 업슬 것이다

이와갓치 史的眼光이 全世界에 唯一한 李春園의게 나는 다시 무러보

고십다 文明人의 最大한 特徵은 그 特色은 計劃과 努力에 잇다고 하얏

스니 再昨年 事實에서는 (所謂 李春園이 말하는 無知蒙昧한 野蠻人種이

自覺업시 推移하야가는 변화라고 한 이 事實에서는) 發見하지 못하는 自

己의 目的을 意識的으로 確立하고 그 目的을 達하기 爲하야 計劃과 努力

이 낫타나는 文明人의 歷史的事實을 가라처지이다!

엇더한 計劃과 努力이라야 無知蒙昧한 野蠻人種이 自覺업시 推移하여

간다는 말을 免하고 文明人이라고 하는말을 드를수가 잇는가

여기서 특히 비판한 부분은 ‘3.1만세운동’이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

각업시 추이’했다는 주장과 1919년의 3·1만세운동을 ‘자연의 변화’ ‘우연

한 변화’라고 규정한 것이다.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에 이어

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어떻게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일 수 있는지,

주체적이고 거국적이었던 운동을 ‘자기의 목적을 의식적으로 확립하고

그 목적을 달하기 위하야 계획과 노력이 낫타나는 문명인의 력사적 사

실’을, 그리고 계획하고 노력하였던 과정을 부인하고 있는지 비판하고 있

다. 또한 조선의 민중을 ‘야만’과 연결시켜 조선인은 문명인이 아니라는

주장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논박하였다. 이광수가 조선인

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본 것이 ‘3·1만세운동’의 주체였던 조선민중들을 폄

하하려는 의도를 숨긴 ‘문명인’ 이광수의 야만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을 읽은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비판한 부분이 바로 최원순이 비판하고 있는 조선인을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으로 치부한 부분이다. 최원순 뿐만 아니라 김제관도 “조선민족의 위

대한 희생적 정신과 확고한 의식적 노력을 무시하고 결국 자시 스스로 자

기민족의 존엄을 모욕”23)했다고 비판했고, 신일용은 야만인보다 못한 동

물도 반드시 목적과 계획이 있다고 맞서며 비판에 가세했다.

이광수가 야만인종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선민족 쇠퇴의 근본적 원인이

도덕적인 것이 더욱 분명하지 아니합니까. 곳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

타,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 ― 이것이 조선민족으로 하여곰 금일의 쇠

퇴에 빠지게 한 원인이 아닙니까./영미족의 흥왕도 그 민족성의 원인이오,

오족의 쇠퇴도 그 민족성의 원인이니 민족의 성쇠흥망이 실로 그 민족성

에 달린 것이외다. 그럼으로 일민족을 개조함에는 그 민족성의 근저인 도

덕에서부터 시작하야야 한다”24)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최원순은 ‘민족

개조는 도덕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따진 것이

다섯 번째 비판이자 반박이다.

“더욱 根本的이라하야 根柢부터 改造를 하여야한다고 主張하는 先覺者

李春園이여! 民族이 根柢인가? 道德이 根柢인가? 다시 말하면 民族에서 道

德이 생긴 것인가? 道德에서 民族이 生긴것인가? 先覺者 李春園의 理論으

로보면 根柢인 道德에서부터 始하여야한다 하엿스니 根柢인 道德에서

民族이 生긴것인줄밋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모리 事實에서 超越하는 先覺

者의 말이라고 하더래도 發生學的理論으로 보아서 民族이 잇서서 그 民族

의게서 民族的 道德이 生긴것이오 決코 어느 先覺者가 생각하는 그 道德

이잇슨 後에 그 道德에서 民族이 生긴것이라고는 볼수가 업는 줄 밋는다

23) 김제관, 社會問題와 中心思想 , 신생활 제7호, 1922.7,

24) 이광수, 民族改造論 , 개벽 제23호, 1922. 5,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최원순은 이광수가 민족을 ‘근저에서부터 개조’할

것을 주장하고,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이며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개조가

아닌 ‘도덕적’일 것을 주장하였는가에 의문을 품고 있다. 특히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대항담론으로써

독립투쟁의 담론이 전개되던 때에 이광수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한 민족성 개조는 그 자체로 의심스러웠고, 일제의 식민화전략을 합리화

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원순이 이렇게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을 비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광수가 변언 에 ‘조선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한다고 사명감

을 드러냈지만 이보다도 먼저 개조의 근거 라는 글을 통해 ‘개조론’을 소

개하였고 개조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이광수가 언급한 귀스타프 르

봉의 이론을 먼저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토대로 개조의 대상

을 ‘제도’에서 찾고 제도의 개조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광수의

주장과는 상반된 것으로 이광수의 주장이 객관적이고 타당한 논리를 갖고

있지 않았던 허점 핵심쟁점으로 삼아서 논리적인 근거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최원순이 쓴 개조의 근거 일부분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不公平한 - 病이 만한 現代의 組織과 制度로는 一 社會의 健全한 進取와

向上은 不可能한 일이다. 그와갓치 各 民族의게 잇는 現今의 關係로는 世界

人類는 眞正한 向上과 發展을 하지 못할 것이다. 一 社會의 眞正한 幸福을

爲하야 又는 各 民族도 互相的 協調에 因하야 全 人類의 眞正한 幸福을 期

할 수 잇다는 意味에서 現代世界는 改造되여야 할 것이라 하노라.25)

최원순은 여기서 ‘불공평한 - 병이 만한 현대의 조직과 제도’의 개조를

주장하고 있다. 이 ‘조직과 제도’의 개조는 일본의 총독정치를 거부하는

25) 최원순, 改造의 根據 , 현대 5호,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 1920.5.10368

조선의 독립이다. 이광수가 “절대적으로 정치와 시사에 관계함이 업고 오

즉 개인의 수양과 문화사업에만 종사하므로 정부의 해산을 당할 염려가

업”는 “규칙의 엄수와 정치와 시사에 불간섭”을 요구하고 있는 것과는 근

본적으로 달랐다. 그래서 일제의 통치제도를 개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민족’을 개조의 대상으로 삼아 ‘규칙의 엄수’를 주장한 민족개조론 을 단

호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조선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

적인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제도’를 개조의 대상으로 본 최원순과 ‘민족’을

개조의 대상으로 본 이광수가 이후 다른 길을 걸었다는 데서도 누가 주장

한 개조가 진정한 개조였는지 알 수 있다.

최원순이 주장한 개조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년을 살다가 죽드래도 가치잇는 유위한 생활을 하얏다하면 무의

미하게 칠팔십이나 백여세를 사는 것보다는 그야말노 사람다운 사람””26)

으로 살고자 했던 젊은 학생/지식인이었고, 끝까지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

하였다. 반면에 이광수는 반민족행위를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당

시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하였음에도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 십년간 필화, 설화사- 민족개조론 과 경륜

이라는 글을 통해 주장의 당위성을 언급하였다.

나는 最近 10年 內外 間에 내가 쓴 글 때문에 社會人士의 激怒와 非難을

산일이 한두번만 아니엇다. 아모에게도 阿諂할줄 모르는 내 붓끗이 이것

이 眞理다! 이것이 올타하고 良心이 命하는대로 記錄하여 노흐면 그때마다

筆禍事端이 따러오고야 마는 것을 바라볼 때 내 붓끗에는 그야말로 살

이 잇서 이러함이든가.

年代順으로 보아 내 身邊에 이러난 筆禍事端 가운데 가장 컷든 것은 첫

재 開拓者 에 대한 破門事件, 新生活論 에 대한 儒林奮起事件, 民族改造

論 에 대한 崔麟氏 及 開闢社의 被禍와 一般社會의 總攻擊, 民族的 經綸 에

26) 최원순, 生存의 意義와 要求에 對하여 , 현대 2호,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1920.3.2.

대한 所謂 硏政會 事件으로 東亞日報 非買同盟 등이다.27)

이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는 필화와 설화를 언급하면서 민족

개조론 도 그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고 일축하였다. 특히 ‘일반사회의 총공

격 을 언급하면서 ‘아모에게도 아첨할줄 모르는 내 붓끗이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올타하고 양심이 명하는대로 기록하여 노흐면 그때마다 필화사단

이 따러’왔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개조론 은 ‘진리’이며,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붓끝의 진리’라는 주장을 이어나갔다. 그가 민족

을 동원하여 개조를 주장한 것은 옳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광수가 최원순의 공개 질의와 비판에 대한 답변이나 반론이 있었

다면 그리고 신생활을 통해 비판하였던 젊은 청년/지식인들의 비판에 대

한 반론이 있었다면 조선의 민족문제에 대한 그리고 개조에 대한 건강한

담론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앞으

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더불어 당대의 지식인들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다만 민족개조론 이 발표된 다음 호 개벽에는 편집실로부터 에

“우리는 다못 민족개조와라는 그것이 여하간 일차 토의할 거리가 됨과 가

틈으로 이를 일반민중의 비판의 조상에 공한 것  이은 바 이에 대한 비

판의 여하는 오즉 현명한 사회 여러분의 공안에 일임할 이외다.”28)로

입장 아닌 입장을 표명하였을 뿐이다. 이에 따라 ‘개조론’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항 담론

도 생산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 매몰되고 말았다.

27) 이광수, 最近 十年間 筆禍, 舌禍史 - 民族改造論 과 經綸 , 삼천리 제14호 (제3권4호),

1931.4.1

28) 편집실로부터 , 개벽 제24호, 1922. 6.

Ⅲ. 결론

이광수는 1920년 5월 개벽에 민족개조론 을 발표하였다. 1919년 ‘2

8독립선언’과 ‘3 1만세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있던 젊은 학생/지

식인들은 공개적으로 민족개조론 을 비판했다. 신석우, 신일용, 김제관

은 잡지 신생활에, 최원순은 동아일보에 글을 발표하여 민족개조론

의 문제점 비판하였다. 여기서는 대중들과 소통이 긴밀하고 원활하여 수

렴과 확산이 빨랐던 동아일보 지상에 이춘원에게 문하노라 를 쓴 최원

순의 비판에 주목하여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에서 펼친 주장의 문제점을

짚고 젊은 학생/지식인들이 분노한 원인과 이유를 밝혀보았다.

최원순은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에서 주장한 열악하다는 조선민족성의

의미, 민족성 개조주의의 윤리적 근거, 민족성의 우열을 판단하는 표준, 조

선인이 야만인종이라는 규정, 민족개조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지적

하고 비판했다. 민족성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다는 점, 개조가 윤

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점, 민족성에는 우열이 없다는 점, 조선인이 야만인

종일 수 없는 근거, 민족개조의 출발은 도덕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라는 것

을 밝힌 것이다. 인식공격과 감정적인 비판보다는 ‘이론은 이론으로 대응’

한다는 기자의 전제에서 이미 최원순의 비판이 건강한 담론을 생산한 비판

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는 하였지만 최원순의 이 비판은 민족개조론 에

서 펼친 오류와 주장의 근거를 찾아서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젊은 학생/지식인들의 비판과는 다른 지점이다. 최원순의 글이 완전하게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타

의 비판과 다르게 이론을 제시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비판하였다

는 점에서 건강한 담론을 생산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최원순이 귀스

타프 르 봉의 이론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일본의 식민통치 ‘제도’

를 문제 삼았던 개조의 근거 를 발표했기에 문제점과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에 작가/지식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여 대조를 이루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최원순을 비롯한 젊은 학생/지식인들은 비판

에 나섰으나 당대 작가/지식인들이 침묵한 것은 식민지를 극복하려는 노

력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 매몰되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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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순, 이춘원에게 문하노라 , 동아일보, 1922.6.3.~6.4

이 논문은 2019년 12월 27일에 접수되어,

2019년 12월 28일에 심사를 의뢰하여 2020년 1월 9일에 심사 완료되었으며,

2020년 1월 14일부터 2020년 1월 17일까지 수정하여

2020년 1월 30일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게재가 확정되었음.

Criticism of Lee Gwang Soo's 「Theory of national reform」

-Focusing on Choi Won Soon’s 「I hereby ask Lee Chun-won」-

Lee, Dong-Soon

Lee Gwang Soo's 「Theory of national reform」, which was published in

「Dawn of Civilization」, was criticized by the public. It faced strong criticism

from young students and young intellectuals who had a heightened sense of

national consciousness due to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is study reviewed the issue that

criticized the 「theory of national reform」, focusing on the abovementioned

public criticism. It studied the causes of controversy and criticism, focusing

on 「I hereby ask Lee Chun-won.」 in which Choi Won Soon criticized and

questioned the theory publicly in the press.

Choi Won Soon highlighted five problems in the theory. First, why was

Chosun ethnicity eval‎uated as inferior? Second, what is the moral ground of

the theory of national reform? Third, what is the criteria used to judge a race

as superior or inferior? Fourth, why did Lee Gwang Soo consider our history

as unconscious changes in the ignorant barbarians by ignoring the past

transition? Fifth, why did he insist that the national reform would be moral?

These five problems differ in their point of view from young students and

intellectuals, in that Choi Won Soon criticized Lee Gwang Soo's claims of the

「Theory of national reform」 and clarified that they have no ground. This was

revealed when Dong-A Ilbo's reporter published a series titled 「I hereby ask

Lee Chun-won」 on the premise that theories should be discussed rather than

personal attacks and emotional criticism. While emotions cannot always be

completely excluded, producing a healthy discourse is meaningful in that it 374 |65집

enables critical questioning and suggests different theories and frameworks

from other criticisms.

As shown above, Choi Won-soon and other young students and intellectuals

took the lead in criticism. However, the fact that other intellectuals at the

time were silent revealed that they accepted the reality rather than attempting

to overcome the colonial rule.

Key words: Choi Won-soon, Lee Gwang Soo, theory of national reform, Ethnicity,

Brutality, logical basis, intelligentsi

「민족개조론」 비판논쟁-최원순의 「이춘원에게 문하노라」를 중심으로.pdf
1.60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