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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과 극동 한인정책/李良熙.충남대

1. 머리말

2.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과 4월참변

1) 러시아혁명 직후의 시베리아 ‘出兵’

2) 극동지역 한인과 4월참변

3. 일본군의 극동 한인정책

1) 시베리아 침략 초기

2) 4월참변 이후

4. 맺음말

■ 요약

1918년 4월 5일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상 륙시켰다. 8월 미국의 러시아 내 체코군 철수를 위한 공동 ‘출병’ 요청은 일제가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데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에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만주 일대를 점령해 갔다. 일제의 극동지역 한인 정책은 일본 자국민보호라는 미명 아래 한인의 러시아 및 중국으로의 귀화여부 를 무시하고 이루어졌다. 이 정책은 회유와 단속으로 구분되었다. 회유는 일본 의 발전된 모습을 선전하거나 직접적으로 한인을 친일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단 속은 무력을 동반한 억압책이었다. 4월참변 이후 한인정책은 한인 회유사업으 로 재편되었다. 이는 행정, 경제, 복지 분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1918~1922년 시베리아출병은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의 러시아 극 동지역 및 북만주에 대한 군사적 침략행위이자 내정간섭이었다. 일본은 그중 가장 많은 병력을 시베리아에 배치시켰다. 일제의 시베리아출병은 한인 항일독립운동 억제와 중국에 대한 압박, 시베리아 철도를 중심으로 한 대륙침략의 의 도가 숨어 있었다. 여기에도 이른바 ‘동양평화의 선구자’로서 ‘시시각각 침략해 오는 구미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구호가 사용되었다.

주제어: 시베리아, 출병, 극동, 한인, 일본군, 포조(블라디보스토크), 니항(니 콜라옙스크)

1. 머리말

일제는 1901년 8월부터 경부선을 건설하기 시작해 1904년 12월 완공시켰으 며, 같은 해 3월부터 시작한 경의선을 1906년 3월 완공함으로써 부산, 서울, 신 의주를 연결시켰다. 한편 러일전쟁 이후 요동반도 조차권, 러시아가 소유했던 철도와 그에 따르는 이권, 그리고 사할린 남부를 수중에 넣었다. 이는 일제에게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삼국간섭으로 할양받지 못했던 요동반도를 ‘재탈환 했다’는 의미를 갖기도 했다. 이후 일제는 요동반도를 만주경영의 거점으로 삼아 중국 동북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와 함께 대륙의 주요 도시마 다 일본인 밀매업자와 상점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일제는 일본 본토에서 한국 의 남북을 관통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길’을 확보, 대륙침 략의 기초를 마련했다. 일제는 멈추지 않았다. 이들의 대륙침략은 이미 ‘시베리 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이전부터 이미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었 다.1) 1917년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과 이후 전개된 러시아 내전은 일제에게 대륙 ‘진출’의 빌미로 작용했다. 12월 일본군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出兵’2) 계획을 세 우는 동시에 이에 따른 철도관리 검토를 마쳤다.

1) (外務次官 珍田捨已序 外務省調査) 西伯利及滿洲, 1904; 뺷東部西伯利亞經濟調査資料뺸, 南滿洲鐵道株式會社調査課, 1913.

2) 일제의 시베리아 ‘出兵’이 당시 러시아혁명 간섭을 위한 침략전쟁이라는 본질을 모호하게 하는 용어이기는 하나 동시에 일제의 기만성을 드러내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기존대로 ‘출병’으로 쓰되 부분적으로 작은따옴표를 활용해 침략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본군과 외무성을 비롯한 일본정부 지도층은 시베리아 ‘출병’을 대륙팽창의 호기로 여겼다.3)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주로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1950년대 시작되었고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시베 리아 침략 초기에 초점을 맞춘 출병의 배경, 일본 군부와 정계의 논의, 시베리아 출병을 둘러싸고 펼쳐진 일본의 이중외교 등 주로 정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 다. 이는 출병 결정과 과정, 결말까지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로 이어져 저서가 여러편 나오기도 했다. 이중 시베리아 출병시기에 있던 주민학살 에 대한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시베리아 출병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한 일제의 이권획득과 관련한 연구가 있으며, 경제적 피해에 주목해 橫浜正金은행과 조선은행의 극동지점을 이용한 병기수출대금의 경로를 추적한 연구도 있다. 일 본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평가를 위해 일제의 대륙침략과 영미 등 대외적 관계, 일제 내부에 중점을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4)

3) 細谷千博, 뺷シベリア出兵の史的硏究뺸, 岩波書店, 2005, 33~40쪽.

4) 細谷千博, 뺷シベリア出兵の史的硏究뺸; 細谷千博, 「シベリア出兵をめぐる日米関係」, ≪國 際政治≫17, 1961; 原 暉之, 뺷シベリア出兵: 革命と干涉 1917~1922뺸, 筑摩書房, 1989; 井竿富雄, 뺷初期シベリア出兵の硏究: ‘新しき救世軍’ 構想の登場と展開뺸, 九州大學出版會, 2003; 豊田 泰, 뺷日本の對外戰爭 大正·昭和(一): 第1次世界大戰(シベリア出兵) ‧ 滿洲事變뺸, 文芸社, 2010; 麻田雅文, 뺷シベリア出兵: 近代日本の忘れられた七年戰爭뺸, 中央公論新社, 2016; 広岩近広, 뺷シベリア出兵: 住民虐殺戰爭の眞相뺸, 花伝社, 2019; スヴェン サーレ ル, 「日本の大陸進出とシベリア出兵: 帝国主義拡張の「間接支配構想」をめぐって」, ≪金沢 大学経済学部論集≫ 19, 1998; 柴田善雅, 「シベリア出兵下日本の企業活動の拡張と衰退」, ≪大東文化大学紀要: 社会科学編≫ 59, 2021; 白鳥正明, 뺷シベリア出兵90年と金塊疑惑뺸, ユーラシア硏究所·ブックレット偏集委員會, 東洋書店, 2009; 熊谷直, 뺷軍用鐵道發達物語뺸, 光人社, 2009 등 다수이다. 이외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본의 연구성과는 윤현명의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한국학 연구≫ 53, 2019), 217~219쪽과 柴田善雅의 「シベリア出兵下日本の企業活動の拡張と衰 退」(≪大東文化大学紀要: 社会科学編≫ 59, 2021), 21~ 22쪽 참조.

따라서 일제 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북만주·연해주 등 극동지역 한인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시기 러시아지역 한인의 활동이나 한인 사 회의 동향을 살핀 연구가 있으며, 당시 소비에트 정권에 동참해 反혁명세력인 백위파와 일본군을 대상으로 무장투쟁한 한인 파르티잔에 대한 연구가 있다. 러시아혁명, 4월참변 등 시기를 세분화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제에 의해 조직된 한인 단체에 대한 연구도 있다. 당시 만주지 역 한인에 대한 치안문제에 대해 일본군과 외무성, 일본 정부와 중국과 관계를 통해 살핀 연구가 있으며, 더 나아가 시베리아 출병을 중일전쟁의 원형으로 파악 한 연구도 있다.5)

이 연구들은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나 이 로 인해 파생된 일제의 한인정책에 대해서는 중점을 두지 않았다.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과 관련해 조선철도를 이용한 군사수송에 대한 연구도 있다. 이 연구는 군수정책 연구의 일환으로 대륙으로의 군사수송을 청일·러일전 쟁기, 시베리아 출병기, 만주사변기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지만 한국과 한인에 대한 치안 정책을 상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또한 청일전쟁기 人馬징집, 임금, 통 화 문제와 관련해 일본군과 병참정책을 다룬 연구가 있어 1920년 전후의 일제의 한국에 대한 군수정책을 살피는 데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6)

5) 김준엽·김창순, 「볼쉐비키 革命과 러시아의 韓人」, ≪아세아연구≫ 10(1), 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 1967; 윤상원, 「시베리아내전의 발발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 ≪한국사 학보≫ 41, 고려사학회, 2010;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박 보리스, 「러시아 沿海州에서의 韓人 反日解放運動」, ≪산운사학≫ 9(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0주년기념 특집호), 고려학술문화재단, 2000; 윤상원, 「시베리아내전기 연해주 수찬지방 한인빨치산부대의 조직과 활동」, ≪아시아문 화연구≫ 19, 가천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10; 윤상원, 「시베리아내전기 러시아지역 한 인의 군사활동: ‘한인사회당 적위군’과 ‘에호한인부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 구≫ 6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윤상원, 「시베리아내전 종결과 한인빨치산부대의 해산」, ≪역사연구≫ 20, 역사학연구소, 2011; 윤상원, 「러시아혁명기 원동해방전쟁과 한인부대의 활약」, ≪한국근현대사연구≫ 67,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박환, 「러시아지 역 한인 민족운동과 일제의 회유정책: 니코리스크 지역 懇話會를 중심으로」, ≪한국민족 운동사연구≫ 6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박환,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송영화, 「1920년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 ≪역사 연구≫ 37, 역사학연구소, 2019; 신주백, 「朝鮮軍과 在滿組鮮人의 治安問題(1919~1931): 帝國의 運營方式 및 滿洲事變의 內在的 背景과 關連하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윤현명,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 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53, 2019.

6) 사카모토 유이치, 「植民地期 朝鮮鐵道에 있어서 軍事輸送: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28,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6; 강효 숙,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조선병참부: 황해·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 연구≫ 51, 한국근현대사학회, 2009.

본고에서는 앞선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918~1922년 동안 이루어진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이 대륙침탈을 위한 무력확장을 넘어서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만 주 한인탄압 강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요 자료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관련 문서철, 뺷西佰利出兵 憲兵史뺸 등과 같은 종합보고서를 활용하고자 한다.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이루어진 일제 의 시베리아 ‘출병’ 과정, 극동지역 한인현황과 한인탄압을 4월참변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어 시베리아파견군의 한인에 대한 정책을 시베리아 침략 초기 와 4월참변을 전후해 검토하여 극동지역 한인에 대한 일본군의 정책 변화를 구 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제의 시베리아파견군이 점령한 전 지역의 한인정책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본고 는 조선총독부의 시베리아에 관한 조사보고서, ≪朝鮮及滿洲≫, ≪독립신문≫ 같 은 당시 잡지 등의 편린들로 이를 보완하며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시기 한인정책 을 통해 국외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책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확인하고자 한다.

2.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과 4월참변

1) 러시아혁명 직후의 시베리아 ‘出兵’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페테르그라드에서 노동자·농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소식은 동쪽 끝 연해주에 곧장 전해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 연해주의 주요도시에서 노동자 및 농민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11~12월 세 차례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서 극동지방소비에트대회가 열린 후 하바롭스크에 극동소비에트정부가 들어섰다.7)

7) 한국독립유공자협회, 뺷러시아 지역의 韓人社會와 民族運動史뺸, 교문사, 1994, 168~170쪽.

이후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는 사회주의혁명 정권을 지지하는 적위파와 反혁명·反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백위파, 특히 하바롭스크의 콜차크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베리아정부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이는 內戰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제정러시아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이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세계대전에서 발을 뺐 다.

이는 소비에트정권이 내전으로 인한 부담과 혁명 완수에 전력하기 위해서였 다.

이로 인해 협상국에 참여해 러시아 서남부전선에서 참전 중이었던 체코군 귀향 문제가 발생했다. 소비에트정권은 4~6만 명에 달하는 체코군을8) 시베리아 와 극동을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우회적으로 귀향시키기로 했다. 유 럽의 전쟁지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4월 체코군이 시베리아철도로 귀향하던 중에 조약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 중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들과 충돌했다. 체코군은 소비에트정권의 중재가 불리하게 작용하자 反볼셰비키 봉기를 일으켰다. 곧바로 체코군은 시베리아철도가 경유하는 주요도시를 장악했다. 직후 체코군은 백위파에 협조하며 러시아내전에 가담했다. 6월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는 체코군이 협상국의 일원임을 선포하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했다. 이로써 백위파가 제국주의 간섭군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내전은 더욱 본격화되었다.9)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 던 한인은 러시아내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미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는 러시아에서 독일 로 전쟁물자가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소비에트정권의 확장을 저지하 기 위해 부분적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일제 군부는 시베리아 출병을 이전의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같은 전쟁 수준으로 여겼다.10)

8) 당시 체코군 규모에 대해 적게는 4만 명에서 많게는 6만 명 이상까지 논의되었다. 본고에 서는 기존 연구성과를 반영해 체코군 규모를 범위화했다(白鳥正明, 뺷シベリア出兵90年と 金塊疑惑뺸, 33쪽; 윤상원, 「시베리아내전의 발발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 278쪽; 麻 田雅文, 뺷シベリア出兵: 近代日本の忘れられた七年戰爭뺸, 73쪽; 윤현명, 「근대 일본의 시 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222쪽; ≪중앙일보≫ 2017년 11월 1일자, 「거꾸로 읽는 러시아혁명사 ①: 체코군단, 피바다 뚫고 시베리아 횡단」).

9) 임경석, 뺷한국 사회주의의 기원뺸, 역사비평사, 2003, 79~80쪽.

10) 윤현명,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217쪽.

육군은 러 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 전략을 세웠다. 이는 극동지역을 점령 함으로써 자원획득과 철도확보를 통해 자립적 경제권을 확대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와 연계되기도 한다. 일제는 시베리아를 만주와 몽고를 근간으로 한 경제 발전 지역으로 상정했다. 극동 러시아령에 대한 ‘출병’은 식민지 한국을 유지하기 위한 배후지 확보와 독립운동 세력을 ‘절멸’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에 러시아혁명 직후 혁명의 여파가 중국과 한국에 미칠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일본군 참모본부는 시베리아 출병 관련 사단장에게 주로 연합군 후방지역 치안 유지에 주력하면서 세력을 동부시베리아 지역으로 확장할 것을 지시했다.11) 러시아혁명 직후 일제는 ‘일본인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북만주와 연해주에 군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볼셰비즘 확산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군대 파견 제안을 시베리아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1918년 1월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함 2척을 파견했다.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陸戰隊 상륙 을 개시했으며, 4월 17일 군수공업동원법을 공포하고 군수공업에 대한 보호·장 려·감독을 하기 시작했다. 6월 일본군 참모본부는 「시베리아 작전요령」을 마련 했다. 7월 제3사단과 제12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8월 하순에는 ‘체코군 섬멸 위기’를 빌미로 병력을 증원했다. 8월 2일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 곧이어 남만주에 있던 제7사단은 북만주로 이동했다. 9월 6~9일 제7 사단 중 보병 제26연대를 자바이칼 방면으로 파견하여 치타를 점령했고, 제12사단은 하바롭스크를 점령했다. 니콜라옙스크에 陸戰隊가 상륙했으며, 9월 18일에는 하바롭스크를 점령했던 제12사단이 블라고베셴스크를 점령했다. 9월 25일 제3 사단은 자바이칼 지역으로 진주했다.12)

11) 「通牒案」 內閣書記官室6第48號, 大正7年5月6日(내각서기관 → 각 省차관); 뺷大正7年8 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浦潮派遣軍司令官等ヘ訓 令及指示ノ件」 第69號 西密受 第862號, 大正8年9月6日(군무국군사과 → 육군성); 「第3 師團長及關東都督ヘ指示ノ件」 第26號 秘 西密受 第377號 作第416號1, 大正7年9月15日 (참모총장→육군대신); 原 暉之, 뺷シベリア出兵: 革命と干涉 1917~1922뺸, 124~128·277~ 297쪽; スヴェン サーレル, 「日本の大陸進出とシベリア出兵: 帝国主義拡張の「間接支配構 想」をめぐって」, 270~272쪽; 細谷千博, 「シベリア出兵をめぐる日米関係」, 78쪽.

12) 1918년 11월 4일 일본 육군성 조사에 의하면 당시 출병인원은 연해주 및 아무르주 방면 2만 4,000여 명, 자바이칼주 방면 2만 2,200여 명, 북만주 방면 1만 2,400여 명, 일본 본토 귀환 인원 1만 3,800여 명이었다. 12월 러시아 및 북만주 지역으로 파견된 일제의 시베리아파견군은 浦潮파견군 사령관 예하로 지휘 체계가 통일되었다. 시베리아 출병 초기에 동원되었던 제12사단(1919년 7월 복귀)은 제14사단(1920년 11월 복귀), 제11사단(1922년 6월 복귀), 제8사단(1922년 11월 복귀)과 2년마다 순차적으로 교체 되었다. 제3사단(1919년 10월 복귀)은 제5사단(1920년 9월 복귀)과 제9사단(1922년 10월 복귀)으로 교체되었으며, 제13사단은 1919년 4월부터 증원 병력으로서 약 2년간 파견되었다. 1920년 7월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일부가 사할린파견군으로서 북사할린에 약 5년간 파견되었고, 한국주둔 일본군 제19사단이 중국·길림성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부터 북사할린에 제7사단(旭川)과 제8사단(弘前)의 일부가 파견되었다. 이로써 1922년 10월까지 11개 사단이 시베리아, 북만주, 극동지역에 파견되었다. 이외 ‘간도참변’에 관여했던 한국주둔 일본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도 시베리아파견군과 ‘공동작전’을 펼 쳤다(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 「滿洲里方面 派兵ノ件」 第1號 極秘 西密 第5號, 大正7年8月4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 내각총리대 신); 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 「出征軍隊及 諸機關指揮統一ノ件」 第47號 西密受 第859號, 大正7年12月10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 육군차관 → 외무차관); 憲兵司令部, 西伯利出兵 憲兵史附錄, 國書刊行會, 1976, 193~ 195쪽; 細谷千博, 뺷シベリア出兵の史的硏究뺸, 2005, 209~304쪽; 白鳥正明, 뺷シベリア 出兵90年と金塊疑惑뺸, 33~34쪽; 熊谷 直, 뺷軍用鐵道發達物語뺸, 2009, 92~100쪽).

11월 16일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로 보낸 군인이 5만 8,600명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일본 육군성 조사에 의하면 약 3개 사단 전투인원 4만 4,700여 명을 포함해 7만 2,400여 명을 연해주에 상륙시켰다. 당시 연합국 협정에서는 일본 1만 2,000명, 미국 7,000명, 영국 5,800명 등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출병 인원은 미국 9,000여 명, 영국 7,000여 명, 중국 2,000여 명, 이탈리아 1,400여 명, 프랑스 1,300여 명이었으며, 캐나다가 군인 일부를 파견했다. 당시 러시아에 있던 체코 군은 대략 4~6만 명이었다. 이에 비해 1919년 2월 중순까지 ‘체코군 구원’을 명분으로 파견된 연합군은 대략 14만~15만 명가량이었던 것이다. 이중 일본군은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파견했다. 일본군은 2개월 만에 시베리아철도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북만주, 극동지역을 점령했다.13)

13) 細谷千博, 「シベリア出兵をめぐる日米関係」, 73~77쪽; 原 暉之, 뺷シベリア出兵: 革命と 干涉 1917~1922뺸, 335쪽; 藤原彰, 엄수현 역, 뺷日本軍事史뺸, 시사일본어사, 1994, 167쪽; 白鳥正明, 뺷シベリア出兵90年と金塊疑惑뺸, 33쪽; 윤상원, 「시베리아내전의 발발 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 279~283쪽; 麻田雅文, 뺷シベリア出兵: 近代日本の忘れられ た七年戰爭뺸, 71~74쪽; 윤현명,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쟁 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223~224쪽.

일제의 시베리아파견군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과 청산리전투 직후인 1920년 11월에 크게 재편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 에 파견되었던 부대는 인원이 증가했다.

이후 두 지역의 부대는 시베리아파견군의 이름으로 북만주·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탄압에 동원되었다.

시베리아 침략 초기 일본 헌병대도 제3사단, 제7사단, 제12사단과 병참기관의 동원에 따라 파견되었다. 일본 본토에서 장교를 포함해 160여 명, 한국에서 40여 명이 파견되었다. 1918년 2월에는 130여 명이 지원병력으로14) 증파되었으며, 4월에는 본토와 한국에서 또다시 90명이 증가 배치되었다. 10월 조선군사령관 은 헌병 36명과 함께 보병 제74연대의 1대대, 기병 제27연대의 2소대 및 공병, 제19대대의 1중대로 구성된 1,000명의 병력을 연해주로 보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본토의 유일한 통신선로인 한국과 연해주 간 電線 엄호였다. 한국에서 파견된 헌병에게는 전선 엄호의 일환으로 한인 감시 및 통제가 임무로 주어졌다. 파견된 지역의 상황을 조사해 파견대장에게 보고해 야 했으며, 한국·훈춘·간도·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경찰관서와 긴밀히 연락을 유지할 것을 명령받았다.15)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시베리아파견군 헌병대에게는 병참시설 감 시업무에 대한 강화 지시가 내려졌다. 조선헌병대사령관은 3·1운동 당시 시베리 아 파견으로 140명의 결원이 생겼음을 보고하며 인원 충당을 요청했다.16)

14) 이들은 ‘豫後備’ 병력이었다. 1889년에 제정된 일제 징병령에 의하면 만 17~40세의 남성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병역은 常備兵役, 後備兵役, 國民兵役으로 구분되었다. 상비병역은 現役과 豫備役으로 나뉘었는데, 현역(육군 3년·해군 4년)을 마친 자는 일정 기간(육군 4년·해군 3년) 예비역으로 복무했다. 상비병역을 마친 자는 이후 5년 동안 후비병역으로 복무했다. 국민병역은 상비병역 및 후비병역 이외의 자들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병역 구분은 1927년까지 이어졌다(「御署名原本·明治二十二年·法律第一号·徴 兵令改正」,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A03020030000, 일본국립공문서관).

15) 뺷大正7年至大正13年西伯利出兵編成要領同細則西動綴뺸, 「朝鮮司令官ニ與エル訓令傳宣 等ノ件」 第19號 陸軍省受領 西密受 第152號 參謀本部作 第136號1 軍事西密 第67號, 大正7年8月20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 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部隊派遣ニ關スル命令傳宣濟ノ件」 第34號 西密受 第597號 作第 637號, 大正7年10月7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國 書刊行會, 1976, 108~110쪽.

16) 이양희, 「일본군의 3‧1운동 탄압과 조선통치방안」, ≪한국근현대사연구≫ 65, 2013, 112~113쪽;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103~108쪽.

1919 년 10월 조선헌병대에서는 북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359명을 증가 배치시켰 다. 한국 각지 헌병대에서 차출된 이들은 浦潮헌병대사령부 4명, 沿海헌병대 175 명, 黑龍헌병대 68명, 後具加爾헌병대 49명, 北滿헌병대 63명으로 나뉘어 파견되 었다. 浦潮헌병대사령부·沿海헌병대·黑龍헌병대로 배치될 헌병은 원산·청진·부산에서 승선했으며 後具加爾헌병대·北滿헌병대로 배치될 헌병은 신의주에서 출발했 다.17) 이로써 350여 명이었던 浦潮파견군헌병대 헌병은 700여 명이 되었으며, 이중 반수 이상이 한국에서 파견되었다. 파견된 헌병의 1/4 이상이 니콜스크-우 수리스크 지역을 포함한 연해주 지역에 대거 배치되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극동 지역 중에서도 한인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이었다. 1920년 3월 浦潮파견군 헌병대는 4헌병대-13헌병분대로 체계화되었으며 그 아래에 709명의 헌병이 소 속되었다.18) 그러나 이 수치에는 헌병보조원이 포함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침략 당시 헌병대는 관공서, 경찰서, 정차장과 우편국 등 파견군 운송관련 기관의 연계, 물가조절, 위생사무, 화재예방, 파견군인의 숙식, 승차 (선)의 편리, 징발령의 보급 등의 업무를 하달받고 있었다. 이보다 중요한 업무는 파견군의 소집 및 철도 수송의 근위 업무, 철도 연선과 군수품 보호경비, 파견군 인들의 기강 확립, 주요 항일인사 사찰이었다. 한국의 조선헌병대도 철도로 한국을 통과하는 파견군에 대해 동일한 업무를 지시받았다. 浦潮파견군사령관과 관동군사령관, 조선군사령관에게는 철도연선의 치안유지와 러시아 혁명파의 접근을 경계하라는 훈령이 내려졌다.19)

17) 浦潮는 블라디보스토크, 黑龍은 아무르, 後具加爾는 자바이칼을 뜻한다(憲兵司令部, 뺷西 伯利出兵 憲兵史뺸, 89·155~156쪽; 뺷西伯利出兵 憲兵史附錄뺸, 195~214쪽).

18) 당시 한국에는 조선헌병대 예하 7헌병대-23헌병분대에 상등병 이상의 헌병이 821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일본 본토에는 20헌병대-80헌병분대에 1,473명이 배치되어 있었 다(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88~89쪽; 뺷西伯利出兵 憲兵史附錄뺸, 195~206쪽).

19) 뺷大正7年至同11年西伯利出兵時に於ける憲兵報告西受号뺸, 「動員實施狀況ノ件 報告」 ○ 受第352號 ○秘受第22號, 大正7年8月22日(헌병사령관 → 육군대신); 뺷大正7年8月至大 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浦潮派遣軍司令官 關東軍司令官 及朝鮮軍司令官ニ訓令ノ件」 第99號 西密受 第877號, 大正9年11月2日(참모총장 ⇌ 육 군대신).

2) 극동지역 한인과 4월참변

한인의 연해주 이주에 대해 공식적으로 처음 보고된 시기는 1863년 11월경이 었다. 11월 30일 포시에트만의 노브고로드 초소에서 연해주 지사에게 한인 이주 자에 대해 보고했다. 이에 의하면 1863년경 地新墟에 이미 한인 13세대가 초가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1864년 여름에는 30세대 14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정치적 혼란과 자연재해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농지가 부족했던 함경도의 농민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넜다. 1869년 7월 한반도 북부지역의 대홍수로 인한 흉작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를 촉진시켰다. 1870년 12월 전후 포시에트 일대의 한인은 3,750명가량이었 으며, 1871년부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1890년대가 되면서 한인은 2만여 명으로 증가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블라고슬로벤노예 등 연 해주와 아무르주 일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표 1> 러시아 극동 및 북만주 지역 한인 분포(1920년 1월 현재)

(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 니콜스크우수리스크부근 하바롭스크 부근 기타

5,500 12,000 3,500 67,150

(아무르주)

블라고 베셴스크 부근 黑河 부근 기타

1,500 650 4,750

( 자바이칼주)

치타 부근 이르쿠츠크 부근 기타

700 800 1,000

(북만주)

하얼빈 부근 羅子溝부근 기타

800 5,000 10,000

한인 이주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1910년 이후 더욱 증가했다. 연해주만 보더라도 1905년 당시 에는 2만 8,500여 명이었다가 1914년에 6만 300여 명으로 증가했다.20) 1917년 을 전후해서 한인의 인구는 10만여 명이 넘었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당시 한인은 블라디보스토크 5,500여 명을 비롯해 연해주 지역에 8만 8,150명, 아무 르주에 6,900명, 치타부근의 700명을 비롯해 자바이칼주 지역에 2,500명, 북만 주 지역에 1만 5,800명 등 11만 3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니콜스크-우수리 스크의 경우는 전 인구의 80% 이상이 한인이었다. 일제의 헌병대는 러시아인이 살지 않는 오지에 거주하는 한인을 고려할 경우 그 수치는 더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인은 도시에서는 여관업, 잡화상, 세탁업 등에 종사하고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었으나 일일노동자로 근근이 호구를 이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마적의 약탈은 생활을 더욱 어렵게 했다.21)

20) 1914년 9월 21일 한인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행사가 권업회를 중심으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 기원을 1864년으로 상정하기도 한다(박종효, 뺷러시아 연 방의 고려인 역사뺸, 선인, 2018, 15~121쪽).

21)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44쪽; 조선총독부, 뺷(朝鮮彙報號外)西伯利に關する調 査뺸 和書37550號, 1918, 228~237쪽;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25쪽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3·1운동은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국내외에서 항일기운이 치솟았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한국민의회는 극동지역을 장악한 백위파 옴스크정부의 허가하에 만세운동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3월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인들 집마다 태극기를 배부하고 만세운동 지원을 위해 모금을 했다. 하지만 일제가 옴스크정부에 한인의 항일운동에 대한 단속을 요구함에 따라 집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에 3월 15일에 예정되었던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3월 16일 사할린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3월 17일 한인들은 옴스크정부의 허가 없이 대한국민의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같은날 오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으며,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후 3시 일본영사관과 각 외국영사관, 러시아관공서에 러시아어와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으며, 오후 4시 신한촌 한인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된 가운데 2만여 명의 한인이 모여 독립선언과 함 께 만세를 고창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가두시위는 약 1시간 30분 이후 일제 와 옴스크정부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이튿날인 3월 18일 한인들은 일제와 옴 스크정부의 탄압에 총파업으로 대항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3월 18일 스파스크, 3월 21일 라즈돌리노예, 하바롭스크 등지에서도 전개했다. 만세운동은 4월로 이 어져 4월 9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후 일제는 옴스크정부에 대한국민의회 해산과 한인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2)

22) 이정은, 「3‧1운동을 전후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128~136쪽; 김병기‧반병률, 뺷국외 3‧1운동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67~272쪽.

러시아 혁명세력의 일본 군부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혁명세력은 각지에서 파르티잔을 결성해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 다. 파르티잔과 일본군의 계속적인 교전, 백위파가 장악한 연해주에서의 러시아 군인 무장해제 등으로 인해 혁명세력뿐만 아니라 일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도 排日의식이 높아졌다. 니콜라옙스크와 하바롭스크의 러시아인들은 일본 軍民에 대한 교통수단 제공과 식품판매를 중단하기도 했다.23) 일제는 러시아인들의 반 일감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신문발행 등을 통해 ‘체코군 구원과 극동 러시아의 치안 유지’라는 군대 파견의 목적을 선전하고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보급하며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회유했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이 한인사회에 전파되어 한인 독립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항일적 혁명세력을 탄압했다.24) 한인들은 러시아 혁명세력에 가담하여 러시아인들과 함께 파르티잔 활동을 했다. 한 예로 1920년 초 니콜라옙스크 일대에 러시아인을 비롯해 한인과 중국인 등 2,000여 명 이상의 파르티잔이 연합해 일본군과 대치했다. 하바롭스크의 제1한인 적위병부대, 블라고베셴스크의 박 이반 다닐로비치 부대, 연해주 일대 최니콜라이 다반군대, 수찬지역의 한창걸 부대, 박일리야 등의 사할린대대 등 한인 1,000여 명이 이에 합류했다. ‘흰옷을 입은 한인유격대원들’의 대담한 활동은 파르티잔 속에서도 두드러졌다.25)

23) ≪독립신문≫ 1920년 3월 20일자, 「西比利亞의 排日」, 독립기념관.

24)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露領及北滿洲派 遣部隊ニ指示ノ件」 第42號 西密受 第778號 作第886號1, 大正7年11月12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衆議院議員加藤定吉提出西伯利ニ關スル質問ニ對スル別紙外務陸軍兩大臣ノ 答辯書」 衆甲51, 大正8年3月15日(내각 → 중의원의장); 「浦潮派遣軍司令官, 關東軍司令 官及朝鮮軍司令官ニ訓令ノ件」 第99號 西密受 第877號 西密受 第411號, 大正9年11月2日 (참모총장 → 군무국군사과).

25) 김승화, 정태수 역, 뺷소련 韓族史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104쪽; 한국독립유공자 협회, 뺷러시아 지역의 韓人社會와 民族運動史뺸, 교문사, 1994, 184~189쪽; 임경석, 뺷한 국 사회주의의 기원뺸, 역사비평사, 2003, 309~320쪽; 윤상원, 「시베리아내전기 연해주 수찬지방 한인빨치산부대의 조직과 활동」, ≪아시아문화연구≫ 19, 가천대 아시아문화 연구소, 2010; 윤상원, 「시베리아내전기 러시아지역 한인의 군사활동: ‘한인사회당 적 위군’과 ‘에호한인부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 한국민족운동사학 회, 2011.

1920년 2월 당시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 항구에는 시베리아 ‘출병’ 일환 으로 일본군 보병 약 2개 중대가 주둔 중이었다. 소비에트정권 하의 파르티잔이 니콜라옙스크항 일본군을 포위하고 철수를 요구하였다. 곧바로 파르티잔 부대 는 니콜라옙스크 일대를 포위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곧바로 항복하고 일본인거류민과 함께 철수하는 협정에 동의했다. 일제는 浦潮파견군사령관에게 한인의 정황을 주의하고 주둔 지역의 형세에 따라 ‘自衛상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을 지시했다.26) 3월 12일 일본군은 철수 협정을 위반하고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 승리는 파르티잔의 것이었다. 파르티잔 부대는 닷새 동안 이루어진 전투에서 일본 군인을 포함해 일본영사관원, 일본인거류민 800여 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이른바 니콜라옙스크 사건 또는 尼港 사건이다. 파르티잔의 승리에 박일리야가 이끄는 사할린대대 등 한인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4월 이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일대에서 있었다. 3월 31일 일제는 ‘일본인거류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및 만주 및 조선에 대한 위협 방지’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연해주로 군대를 증파했다. 4월 4일 밤 블라 디보스토크 일본 헌병분대 하사 이하 12명이 신한촌으로 향했다. 자정경 이들은 신한촌을 정찰했다. 4월 5일 새벽 4시 약 40여 명의 일본군이 신한촌에 들이닥쳤 다. 일본군은 신한촌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인 파르티잔 50여 명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신한촌의 집들을 수색해 한인들을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일본군 의 보복은 신한촌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니콜스크-우수리 스크, 스파스크, 하바롭스크, 포시에트 등지에서도 한인의 희생이 있었다. 당시 파르티잔 부대 약 9,000여 명이 무장해제 당했다. 소비에트정권측에 의하면 파 르티잔과 민간인 5,000명 이상이 死傷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60여 명을 체포했으며,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에서는 76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한인사 기록에서는 최재형을 비롯해 300여 명 이상이 체포되고 학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28)

26)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浦潮派遣軍司令 官等ヘ指示ノ件」 第82號 陸軍省受領西密受 第157號, 大正9年3月8日(군무국군사과 → 육군성).

27)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알려지자 일제는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했다. 5월 12일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파르티잔 부대는 니콜라옙스크에서 철군하면서 일본인 포로 들을 전부 사살하고 일본인 가옥을 방화했다.

28) 김승화, 정태수 역, 뺷소련 韓族史뺸, 110~118쪽; 한국독립유공자협회, 뺷러시아 지역의 韓人社會와 民族運動史뺸, 194~199쪽; 임경석, 뺷한국 사회주의의 기원뺸, 139~142쪽; 박환, 뺷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뺸, 민속원, 2013, 302~309쪽.

3. 일본군의 극동 한인정책

1) 시베리아 침략 초기

1918년 시베리아 침략을 단행한 일제는 밀정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浦潮파견군의 헌병대사령관은 첩보 근무를 위한 庸人을 40명까지 고용할 수 있었다. 沿海헌병대에 16명, 黑龍헌병대에 8명, 後具加爾헌병대에 8명, 北滿헌병대에 8명 이 배당되었다. 이들을 통해 시베리아 서쪽으로의 확장을 위해 자바이칼 지역 서쪽과 중국 서북경계 지역의 광산과 같은 경제개발 원천을 탐문하고, 연합국과 러시아의 정치 현황, 군사 및 경제적 시설, 계획까지 정찰했다.29) 현지의 한인정 책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한 예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 소속 ‘통역관’ 木藤克已30)는 러시아 거주 한인에 대해 “무지몽매한 愚民이어서 정치운동 등은 不逞輩의 선동과 협박으로 인해 부화뇌동한 것”이라 말하며, 한인 들의 인심을 얻어 항일세력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물자 공급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9)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第3師團長及關 東都督ヘ指示ノ件」 第26號 秘 西密受 第377號 作第416號1, 大正7年9月15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뺷大正7年至大正13年西伯利出兵編成要領同細則西動綴뺸, 「露領及北滿洲派 遣部隊編成要領細則中改正ノ件」 第47號 西密受 第849號, 大正8年9月2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30) 木藤克已은 블라디보스토크 일제 비밀경찰로 밀정조직 운영의 실무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항일한인들의 사찰과 탄압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4월참 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최재형의 딸 최 소피아 페트로브나가 노트에 ‘아버 지의 죽음은 木藤克已 때문’이라고 썼다며 보고했다[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 比利亞뺸 8, 「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機密 第49號, 大正10年7月13日(블라디보스토크 총영 사 → 외무대신); 「임경석의 역사극장: 독립운동가 찍어낸 밀정계의 대부」, ≪한겨레21≫ 제1216호, 2018년 6월호].

이는 러시아 내분과 외국의 군대 파견으로 루블 화가 폭락하고 물가폭등으로 러시아 내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어 한인들의 생활 도 크게 타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료와 곡물 부족이 심각했다. 이에 粟, 米, 薪炭 등을 한국에서 수입하거나 현지에서 조달해 한인에게 원가에 공급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한인정책은 러시아 내 일본총영사, 조선은행, 육군, 헌병 대와 조선총독부 등 관련 기관간 협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책 의 효율적인 실시와 지도감독을 위해 한인 유력자로 하여금 ‘조선인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해 말단기구로써 활용할 것을 덧붙였다. 당시 일본군 상륙에 대한 한인들의 반응도 정보수집 대상이었다. 이들 보고에 의하면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러시아 귀화 한인이 반감을 가진 반면 비귀화 한인의 경우 일본군 의 상륙이 러시아의 정치적 내분을 잠재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31) 3·1운동 이후 한인의 독립열망과 排日의식이 확산됨에 따라 1920년 평안북도 와 함경도 국경의 독립군 무장투쟁 건수가 1,600여 건이 넘을 정도로 한인들의 독립의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일제는 시베리아파견군, 한국의 제19사단, 중국의 관동군을 한인 탄압에 동원했다.32) 시베리아파견군에서도 한인 통제의 용이성 을 높이기 위해 한국어 통역 인원을 파견군에 포함시켰다. 1919년 3월 浦潮파견군 사령부 및 헌병대 5명, 제12사단 사령부 2명, 남부烏蘇里파견대 2명이 한국어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이후 남부烏蘇里파견대 한국어 통역은 10명으로 증원되 었다.33) 이는 3·1운동 이후 만세운동의 확산과 관련한 것으로, 한인 통제의 강도 를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6월 헌병대 사령부 부관은 한인들이 러시아 혁명세력과 결탁하는 것이 ‘치안상 중대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부관은 각 헌병대장에게 한인에 대한 사찰과 경계를 강화할 것, 필요하다면 러시 아 극동지역 밖으로 추방하는 방법을 강구할 것, 한인의 소재지 정찰과 독립운동 배후조종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것을 명령했다.34)

31)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8, 浦 第307號, 大正8年10月29日(통역관 → 경무국장);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7, 「沿海州地方在住鮮人ノ日本軍 隊派遣ニ對スル言動ニ關スル件」 朝憲機 第637號, 大正7年11月13日(→ 총독·육군대신·군 사령관·내각서기관장·각 헌병대장 외).

32)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87쪽; 채영국, 「해제」, 뺷間島事件關係書類뺸, 국가보 훈처, 2003, 10쪽.

33) 뺷大正7年至大正13年西伯利出兵編成要領同細則西動綴뺸, 「露領及北滿洲派遣部隊編成要 領細則ノ件」 各局課 第31號 西密受 第260號, 大正8年2月21日(육군대신 ⇌ 참모총장); 뺷大正7年至大正13年西伯利出兵編成要領同細則西動綴뺸, 「露領及北滿洲派遣部隊編成要 領細則中改正ノ件」 第47號 西密受 第849號, 大正8年9月2日(육군대신 ⇌ 참모총장).

34)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440~442쪽.

한인에 대한 ‘보호’ 조치 증대를 명분으로 삼아 ‘일본의 혜택과 편의’를 제공해 회유함으로써 장래 일제의 잠정적 영향권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항일활동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앙 과 각 지역의 관련 기관에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도록 했다.35)

그러면서도 극 동이 러시아 혁명군에 의해 공산화가 된다면 러시아령 안에 있는 한인 거주지역 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 무장독립단체를 결성하고, 무기 탄약 등을 조 달하는 등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 1920년 3월 일본군이 주둔하 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독립운동 1주년 기념 국기 게양을 하고, 일본 군에 고용된 한인과 친일한인에 대한 협박·살해가 증가해 일본군의 우려는 더욱 높아졌다. 3월 2일 일본 정부는 각의에서 시베리아 출병의 목적을 ‘체코군 구원’에서 ‘한국·만주에 대한 혁명세력의 위협 저지’로 변경하고,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 역의 일본군 주둔을 지속할 것을 결정했다. 3월 31일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의 정세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철병하지 않을 것을 성명하는 동시에 블라디보스토 크임시정부에게 친일한인에 대한 경호, 철도수비 문제, 러시아인의 한인에 대한 무기 공급에 대해 항의했다. 4월 3일 浦潮파견군 사령관은 일본군 주둔에 필요한 제반시설, 친일한인 활동,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독립운동 단체 설립 저지 등의 정책을 방해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1920년 3월 浦潮파견군 사령관은 한인 감시를 지시하는 동시에 「조선인 취체 에 관한 규정」을 발표했다. 이의 목적은 시베리아파견군의 ‘전진과 이익’을 위해 독립운동의 배후조종자와 근거지를 정탐함으로써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하 는 것이었다.36)

35)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7, 電受 第14950號(暗) 第232號, 大正7年10 月23日(흑하 → 외무대신).

36) <조선인취체에 관한 규정> 제1 조선인취체는 군사령관의 命을 받아 군참모장이 업무를 총괄하고, (업무)처리는 참 모부 제2과 담당으로 한다. 제2 조선인취체의 실행은 浦潮파견군 헌병대사령관으로 하 며, 이를 담당한 헌병대사령관은 본 업무실행에 관한 기획을 세우고 군참모장의 승인을 받아 실시하고 보고한다. 제3 軍 예하 諸 부대 및 특무기관은 조선인취체 관계 諸官으로 부터 원조 청구를 받았을 때는 가능한 원조를 한다. 정무부장은 조선파견관으로서 본 업무에 대한 의견을 군참모장에게 아뢰고, 정황을 조선총독부에 통보해야 한다. 제4 본 업무에 관해 군의 행동지역에 주둔하는 조선파견관은 수시로 소재 헌병대장과 협동해 그 임무에 복무해야 한다. 제5 조선인취체에 관해서 지역의 총영사 또는 영사와 협동 한다(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676쪽).

이를 위해 독립단체 결사, 신문발행과 의연금 모집, 한국으로 무기 반입, 한인의 러시아혁명군 가담, 排日선전, 한인에 대한 감시를 규정했다. 당시 일반 한인에 대한 정책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회유, 둘째는 단속이었다. 회유의 방법으로는 軍醫의 의료봉사, 생활필수품과 학용품 구입에 대한 편의 제공을 통해 환심을 얻고자 했고, 소비조합 또는 구매조합, 금융조합 기관을 설립해 한인의 경제활동을 표면화시켜 통제하고자 했다. 또한 친일단체 를 설립해 특권을 주는 방법이 강구되었다. 북만주 및 러시아 일대에 일본총영사 주도 아래 조선인민회 또는 조선민회, 조선인거류민회 등을 결성했는데, 이외에 도 한인 단체명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얼빈의 共濟會, 니콜스크-우 수리스크나 라즈돌리노예 등의 懇話會, 슬라비얀카 일대의 相信會, 베니야지 일대 의 鮮民會 등이 있었다.37)

아울러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를 물색하고 이들을 앞세워 한인들을 회유시키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이용했다. 슬라이드나 영화 상 영, 한글이나 알기 쉬운 한문으로 된 소책자 또는 카드식 삽화를 배포해 식민지 한국이나 일본의 근대적인 시설을 알려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식민지 한국과 일본 본토로 관광을 주선하고 懇親會·講話會 등을 개최해 ‘세계의 제국주의적 대세’를 주입시키는 데 노력했다. 단속은 회유의 방법으로 통하지 않을 때를 대비한 것으로, 무력을 동반한 것이 었다. 浦潮파견군 참모장은 한인 감시와 억압에 대해 우선 러시아 각 지역당국과 교섭을 하고, 만일 러시아 지역당국이 한인에 대한 단속 의사가 없을지라도 ‘自衛 상 수단’으로써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신한촌에서는 한인 自衛團을 설치해 한인 사회를 분열시키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고 한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게 하 여 항일운동 활동을 사전에 차단하도록 했다.38)

37) 박환, 「러시아지역 한인 민족운동과 일제의 회유정책: 니코리스크 지역 懇話會를 중심으 로」, 2011, 117쪽; 송영화, 「1920년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조선 인거류민회」, 2019.

38)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浦潮派遣軍司令 官等ヘ指示ノ件」 第82號 陸軍省受領西密受 第157號, 大正9年3月8日(군무국군사과 → 육군성); 「北部沿海州派遣隊司令官ヘ指示ノ件」 第87號 西密受 第277號 極秘, 大正9年 5月6日(육군차관 → 참모본부); 조선총독부, 뺷西伯利に關에する調査뺸, 229쪽; 김승화, 정태수 역, 뺷소련 韓族史뺸, 109쪽.

일본총영사관은 일본인거류민중 재향군인회원을 주축으로 자위단을 조직하여 일종의 준경찰임무를 부여해 혁 명세력 탄압에 이용했다. 이는 일제가 러시아에 대해 내정불간섭을 성명했기 때 문에 경찰권 집행이 불가능함에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극동지역의 한인이 러시아로 귀화를 했더라도, 러시아 지역당국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39) 일제는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에 대한 정책을 주로 헌병대를 통해 실시했다. 헌병대는 한인에 대한 회유책을 뜻하는 일반요령과 강압책인 특별요령으로 구분지었다. 일반요령은 ‘愛撫, 懷柔, 保護, 善導’의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생활안정을 도모해 한인의 排日의식을 낮추고, 의료봉사 실시와 어린이·청년 대상의 교육 등을 통해 ‘일본식민제국의 발전상’을 부각시키는 것이 었다. 특히 경제적·재정적 지원은 생활안정 도모를 통한 ‘친일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러시아로 귀화한 원호인에 비해 생활이 빈곤했던 비귀화 여호인을 대상 으로 했다. 반면 한인의 근면성을 평가절하하고 노동쟁의 등으로 중국인과 충돌 하는 경우 중재함으로써 일제의 권위를 인지시켰다. 특별요령은 ‘不逞해 改悛의 여지가 없는 자에 대한 강압, 다수가 단결해 흉폭한 짓을 하는 지역의 일제 검거’ 즉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 당국과 협동을 전제로 독립운동 유력자의 체포, 병기·탄약 압수 수색, 排日단체 수색과 증거서류 압수 등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었다. 일본군과 관련된 사항일 경우는 한인에 대해 임시 군법회의 심판까지도 가능했다. 시베리아파견군 헌병대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및 조선헌병대사령부 등과 연계해 한인에 대한 감시를 실행했다. 항일 인사의 이름과 직업 및 경력, 한인들의 일본군에 대한 태도, 노동자와 러시아 혁명세력 의 상황을 비롯해 마적의 습격상황과 두목에 대한 조사도 헌병에 의해 이루어졌 다. 특히 한인들의 공산주의 사상, 反군국주의 사상에 대한 조사는 철저하게 실 시되었다.40)

39) 原 暉之, 뺷シベリア出兵: 革命と干涉 1917~1922뺸, 127쪽;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 兵史뺸, 677~678쪽.

40)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112·674쪽.

이와 같은 ‘단속’은 일제의 관할지역 일본군 헌병대장과 부대장, 일본총영사 특무기관, 조선총독부 파견원 등의 긴밀한 협조 아래 이루어졌다. 浦潮파견군 헌병대사령관은 한인에 대해 일본의 허가를 받아 러시아로 귀화한 자를 제외하고는 귀화 여부를 불문하고 ‘일본 제국 신민으로 취급’할 것을 지시했다.41)

41)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9, 「朝鮮人取締ニ關スル件」 機密 軍政送 第 35號, 大正9年5月7日(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정무부장 → 외무대신); 뺷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14, 「西伯利亞ニ於ケル朝鮮人ノ分布狀況」; 憲兵司令部, 뺷西 伯利出兵 憲兵史뺸, 680~681쪽; ≪독립신문≫ 1920년 3월 20일자, 「西比利亞의 排日」, 독립기념관.

<표 2> 일제의 한인 회유사업 구분표 :생략(별첨 논문파일참조)

하지만 한인들이 러시아 혁명세력을 움직여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조종하고 독립운동방책을 마련하여 각지로 빠르게 전파하고 있는 상황으로, 일본군이 독 립운동 세력을 쫓아가기 급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 는 한인에 대한 방침이 각지 상황에 따라 탄압강도를 조정하고 다양한 회유책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4월참변’ 이후 본격적으로 전환되 었다.

2) 4월참변 이후

3·1운동 이후 한국의 식민정책이 헌병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 되었음에도 시베리아의 일본군 주둔 지역에서 헌병의 무리한 단속이 빈발했다. 이에 浦潮파견군, 외무성, 조선총독부의 협의를 통해 헌병의 직접적인 한인 탄압 을 우회해 ‘당분간’ 조선총독부 파견원 및 위촉 인원으로 대체하기로 했다.42)

42)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9, 「朝鮮人取締ニ關スル件」 機密 軍政送 第 35號, 大正9年5月7日(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정무부장 → 외무대신).

1920년 5월 浦潮파견군 헌병대는 직접적인 강압책에서 한발 물러서 경제적 통제와 감찰 등 간접적인 방법을 강화했다. 이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이 공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4월참변 이후 한인을 자극시키 는 것이 더 이상 한인 통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헌병대는 파견군, 특무기관, 영사관의 협조 아래 ‘한인 회유사업’을 실시 했다. 한인 회유사업은 軍과 헌병대, 영사관의 역할을 분담하고, 헌병대사령관을 정점으로 종적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對한인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표 2>와 같다. <표 2>를 통해 볼 때 한인 회유사업은 행정, 경제, 복지 분야로 나뉜다.

특히 경제와 관련한 내용이 주목된다. 행정사업이 민회가 친일한인을 대상으로 하거 나 친일한인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경제사업은 농업 및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한인을 간접적으로 압박하거나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해주와 아무르 주 지역 헌병대에서는 사업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헌병대위와 헌병분대 장을 ‘조선인보호위원’으로 임명했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국에서 헌병경찰제 가 폐지된 것과 사뭇 다른 對한인 정책이었다. 더불어 浦潮파견군 헌병대사령관 은 한국과 일본 본토와 연락을 긴밀하게 하기 위해 원산, 敦賀, 門司에 연락근무 원을 설치하고 선박 안에서의 정탐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43) 10월경 浦潮파견군 참모장 高柳保太郞은 소규모로 실시되었던 한인 ‘구제 사 업’을 일반으로 확장시켜 한인의 ‘친일화’를 공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 시계획안으로 한인소학교 신축과 기존 소학교 개혁을 제안했다. 특히 4월참변이 있었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한인 학교의 경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인 소비조합 및 진료병원 시설을 확장할 것을 주장하 고, 관련 비용은 외무성과 조선총독부가 부담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비용까지 산정했다. 이러한 계획안은 일본문화 보급을 확장해 한인의 친일화를 가속화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는 시베리아파견군 철수 이후 대체될 조선총독부의 식민 정책을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44) 이 제안은 이후 연해주 한인 지역에 적용되어 블라디보스토크의 明進학교, 明義학교, 東興학교, 니콜스크-우수리스크 昌新학교 등을 비롯해 일본총영사관 관내, 스파스카야, 노보키예프스키(煙秋) 등지의 한인 소학교에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한인 소학교 지원도 처음에는 파견군 아래 민회, 학교를 설립해 경영하고자 했으나 군대 이동과 철병시를 대비해 일본총영 사가 민회와 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직접 운영도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45)

43)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440·687쪽.

44)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11, 「鮮人救濟事業ニ關スル件」 機密 第67號, 大正9年11月4日(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 → 외무대신).

45)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12, 「浦潮地方鮮人小學校維持費補助請願ニ 關スル件」 浦第234號, 大正10年8月15日(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 → 조선총독부 경무국 장); 뺷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뺸 14, 「在尼市鮮人狀況調査報告寫小進達 ノ件」 公第386號, 大正11年12月19日(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 → 외무대신).

한국어 통역 인원도 늘어갔다. 浦潮파견군 사령부에 특무기관 9명을 비롯해모두 10명을 배치했고, 浦潮파견군 헌병대와 북만헌병대에 각각 5명씩 배치했다. 중국어 통역 18명이 11부대에 분산배치된 것에 비해 한국어 통역이 최상층 부대 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던 것을 보면 일제의 한인 통제책이 중요하게 다루어졌 음을 알 수 있다. 浦潮파견군 사령관은 시베리아 출병이 이중국적을 가진 한인들 을 ‘단속할 수 있는 好時期’라고 보았다.46) 러시아 행정권 범위와 일본군 수비권이 일치하지 않은 지역은 헌병대사령관이 러시아 행정당국과 헌병장교가 포함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民警 의 수효와 배치지역을 협의했다. 1920년 6월 협정된 民警은 블라디보스토크 지 역 2,000명(後備隊 600명 포함), 하바롭스크 지역 600명(後備隊 250명 포함), 니콜 스크-우수리스크 지역 750명(後備隊 300명 포함), 우수리철도 300명 등 4,250명 이었다. 民警은 행정民警, 철도民警, 한국독립운동 조직 같은 단체와의 교전을 위 한 특종民警後備隊로 분류되어 헌병의 감시업무를 보좌했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民警은 1922년 8월 당시 철도民警 374명을 포함해 4,547명에 달했다. 이들에게는 일본군이 보관하고 있던 러시아 무기 안에서 소총과 권총이 지급되었다.47) 한편에서는 1920년 5월 일본 육군대신이 별지를 통해 한인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할 것을 지시해 항일세력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11월 浦潮파견군은 연해주 지역은 물론 吉林省 동쪽 경계와 한국의 북쪽 경계에서, 관동군은 한국 및 남만주 방면에서 한인 독립운동 탄압을 위한 군사력을 증가시켰다.48)

46) 뺷大正7年至大正13年西伯利出兵編成要領同細則西動綴뺸, 「露領及北滿洲派遣部隊編成要 領同細則ノ件」 第66號 西密受 第872號, 大正9年10月28日(참모총장 → 참모본부); 憲兵 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675쪽.

47)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694~698쪽;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附錄뺸, 237~244쪽.

48)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北部沿海州派遣 隊司令官ヘ指示ノ件」 第87號 西密受 第277號 極秘, 大正9年5月7日(육군대신 → 북부연 해주파견대사령관); 「浦潮派遣軍司令官, 關東軍司令官及朝鮮軍司令官ニ訓令ノ件」 第99 號 西密受 第877호 西密受 第411號, 大正9年11月2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헌병대는 민회조직이 一面坡, 海林, 寧古塔, 小綏芬, 포그라치나야 등에 설립되 고, 혁명파의 활동이 줄어드는 등 한인 회유 사업이 상당히 효과를 얻은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헌병대의 자체 평가와 달리 민회의 내분과 재정부족, 파견군 철수로 인해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의 한인 회유 사업은 일제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표 3> 1920~1924년 한국 국경 3道 독립운동사건 관련 상황표

1920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함경북도 616 1,498 16 42 12 165 0 0 7 40

함경남도 127 544 132 933 35 343 19 64 25 94

평안북도 908 2,601 454 2,173 350 1,619 435 2,733 528 3,349

합 계 1,651 4,643 602 3,148 397 2,127 454 2,797 560 3,483

국경 3도인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평안북도의 독립운동 관련사건이 1920년 1,651건(4,643명) 1921년 602건(3,148 명) 1922년 397건(2,127명)으로 낮아졌으나 일제의 시베리아 철수 이후 다시 증가했기 때문이다.49) 1921년 3월 일제는 조선군사령관에게 훈춘 및 간도 지역에 있는 부대를 한국 내로 귀환하도록 지시했으며, 5월 일본 정부는 극동공화국과 교섭을 통해 외국 인의 거주·영업·토지소유의 승인 등을 조건으로 철병 방침을 결정했다.50) 浦潮파 견군 헌병대사령관은 시베리아파견군이 철수해도 헌병대를 ‘存置’시킬 것을 주 장했다. 헌병대사령관은 별지를 통해 첫째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일본을 위협할 수 있고, 둘째 1920년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이 일본군의 세력범위 밖으로 밀려나거나 일본군으로 ‘귀순’하여 친일화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이 철수하면 도리어 1918년 이전보다 훨씬 상황이 악화될 것이며, 셋째 그로 인해 친일한인 과 일본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51)

49) 조선총독부 경무국, 뺷朝鮮警察之槪要뺸, 1925, 123쪽; 이양희, 뺷일제의 自衛團 운영과 성격뺸, 충남대학교 박사학위, 2019, 139~141쪽.

50)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朝鮮軍司令官ニ 訓令ノ件」 第103號 西密受 第206號, 大正10年3月22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51) 憲兵司令部, 뺷西伯利出兵 憲兵史뺸, 201~203쪽.

그러나 자바이칼 지역까지 진주했던 일제의 시베리아파견군은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 철수를 완료했다.

4. 맺음말

1918년 4월 5일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상륙 시켰다.52)

52) 임경석, 뺷한국 사회주의의 기원뺸, 78쪽.

8월 미국의 러시아내 체코군 철수를 위한 공동 ‘출병’ 요청은 일제가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데 명분으로 작용했다.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치타, 하바롭스크, 니콜라옙스크, 블라고베셴스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만주 일대를 점령해 갔다. 시베리아철도 연선을 따라 병력을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하며, 어업, 삼림, 광산 등의 각종 이권을 가져갔다. 당시 시베리아파견군은 철도연선의 치안을 확보하고, 러시아 혁명세력의 확장 을 저지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계속되는 파르티잔의 활동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제의 북만주 및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정책은 일본 자국민보호라는 미명 아래 한인의 러시아 및 중국으 귀화여부를 무시하고 이루어졌다.

3·1운동 이후 한인의 독립열망이 높아지고 한국 북부지역의 越境 독립투쟁이 잦아지면서 일본 육군대신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에 대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시베리아파견군 헌병대는 밀정을 고용해 沿海헌병대, 黑龍헌병 대, 後具加爾헌병대, 北滿헌병대로 배치하고, 시베리아파견군, 조선총독부 경무국 및 조선헌병대사령부 등과 연계해 한인 감시를 실행했다. 이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 3월 浦潮파견군 사령관은 「조선인 취체에 관한 규정」을 발표해 독립운동단체 결사, 의연금 모집, 한국으로 무기 반입, 한인의 러시아혁명군 가담, 排日선전 경계, 한인 감시 를 지시했다.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정책은 회유와 단속으로 구분되었 다.

회유는 일본인과 일본군의 의료봉사 등을 통해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선전하 거나 친일단체 설립 등 직접적으로 한인을 친일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단속은 무력을 동반한 억압책이었다. 4월참변 이후 한인정책은 전환되었다.

이는 무력적 탄압이 한인 통제에 역작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인을 자극 시키지 않기 위한 한인정책을 모색했으며, 그 일환으로 실시한 것이 한인 회유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행정, 경제, 복지 분야로 나누어 실시되었으며 헌병대위와 헌병분대장을 ‘조선인보호위원’으로 임명해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 러나 일제의 한인정책은 재정부족과 시베리아파견군 철수로 실효를 거두지 못 했다.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의 명분을 ‘自衛’에서 체코군 구원으로, 다시 ‘自衛’로 전환했다. 이는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일본군 주둔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 었다. 1920년 9월 체코 군단이 철수를 완료하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철수 했지만 일제는 소비에트정권이 시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보하자 연해주를 중심으로 파견군을 재편했다. 아울러 아무르주와 자바이칼주에서 철수하면서 니콜라옙스크 사건에 대한 배상을 빌미로 사할린 북부를 점령했다. 1922년 소비 에트정권이 연해주 일대를 장악하자 6월 일제는 철병을 결정하고 10월까지 병 력을 연해주에서 귀환시켰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일본인거류민도 시베리아 철병과 함께 대부분 귀국했다. 12월이 되자 러시아 혁명세력은 소비에트 연방을 선포했다. 북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 진출에 실패한 일제는 사할린 북부지역 철수를 미룬 채 니콜라옙스크 사건에 대한 배상 협상을 계속했다. 1925년 1월 일제와 소련 간에 사할린 북부의 석탄과 석유에 대한 이권을 일본에 제공하는 조약이 체결되면서 5월 일본군은 사할린 북부에서 철수했다.53)

1918~1922년 시베리아 ‘출병’은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의 러시아 극동지역 및 북만주에 대한 군사적 침략행위이자 내정간섭이었다. 일본은 그중 가장 많은 병력을 시베리아에 배치한 국가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은 러시아 反혁명세력인 백군지원과 체코군구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루어졌지만 러시 아 극동지역과 북만주의 한인 항일독립운동 억제, 중국에 대한 압박, 시베리아철 도를 중심으로 한 대륙침략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동시에 유럽 열강을 견제하면 서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만주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이득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 도 있었다.

실제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으로 전에 없던 무역흑자를 달성했다.54)

53) 김준엽·김창순, 「볼쉐비키 革命과 러시아의 韓人」, ≪아세아연구≫ 10(1), 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 1967, 4~8쪽; スヴェン サーレル, 「日本の大陸進出とシベリア出兵: 帝国主 義拡張の「間接支配構想」をめぐって」, ≪金沢大学経済学部論集≫ 19, 1998, 280쪽; 윤현 명,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 학연구≫ 53, 2019, 226~228쪽.

54) 뺷大正7年8月至大正14年2月西伯利出兵作戦に関する命令訓令西動綴뺸, 「浦潮派遣軍司令 部ノ沿海州派遣竝該軍司令官ニ與エル訓令傳宣濟ノ件」 第10號 西密 第54號 其1 作 第 55號, 大正7年8月11日(참모총장 → 육군대신); ≪朝鮮及滿洲≫ 1919년 12월 1일자, 「西 伯利문제와 중국문제: 중의원의원 長島隆二」; 細谷千博, 뺷シベリア出兵の史的硏究뺸, 199쪽.

여기에도 이른바 ‘동양평화의 선구자’로서 ‘시시각각 침략해 오는 구미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구호가 사용되었다.55) 그러나 1918~1922년 동안 일제는 시베리아에 11개 사단 12만 5,000여 명의 군인을 보내고, 약 4억 3,860만 円에 달하는 군사비를 투입했음에도 본국에서조 차 러시아 내 반일감정만 높인 채 ‘별 소득없이 끝나버린 전쟁’으로 비판받았 다.56)

55) ≪朝鮮及滿洲≫ 1919년 12월 1일자, 「西伯利문제와 중국문제: 중의원의원 長島隆二」.

56) 加藤高明, 「物價調節と西伯利亞撤兵」, ≪朝鮮及滿洲≫ 177, 1922.

이후 러시아 극동지역은 한인의 적지 않은 간척 경험, 풍부한 물산의 경제 성, 활동의 편의성으로 인해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근거지로써 더욱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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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s Invasion of Siberia and Far East Policies for Koreans

YI Yang-hi

On April 5th, 1918, Japan landed troops in Vladivostok under the pretense of protecting the Japanese. The joint dispatch request of the U.S. for the withdrawal of the Czech Army from Russia in August justified the Japanese invasion of Siberia. The Japanese Empire proclaimed the deployment of military forces accordingly, and it started to conquer areas of the Russian Far East and the Northern Manchuria region. In the name of the protection of the Japanese, the Japanese policies for Koreans were implemented regardless of the individual’s naturalization process to Russia or China. The policies were largely classified into appeasements or regulations. The appeasement policies were to promote Japan’s development or directly make Koreans pro-Japanese. The regulation policies adopted oppressive methods with military forces. After the tragic incident in April, the Korean policies were rearranged around appeasement tasks. These policies were implemented in the administration, economy, and welfare sectors. The joint dispatch in Siberia of Japan, the U.S., Britain, France, and China from 1918 to 1922 was a military act of invasion and interference in domestic affairs in Russia’s Far East and Northern Manchuria regions. Among them, Japan deployed the largest number of troops in Siberia. Japan’s military intervention in Siberia was intended to oppress the anti-Japanese independent movement of Koreans, press China, and conquer China’s mainland through Siberian railroads. The slogan that Japan should keep in check the “the imminent invasion of European and American forces” as the “pioneer for the peace of the East” was used.

Keywords: Siberia, the dispatch of troop, the Far East, japanese forces in siberia, Vladivostok, Nikolayevsk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1집 2022년 여름호

투고일: 5월 5일, 심사완료일: 6월 3일, 게재확정일: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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