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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식민지 조선의 노동문제 인식 변화와 ‘계급투쟁론’의 형성과정 - ‘生(life)’·‘文化(culture)’개념을 중심으로 - /김명재.서울대

Ⅰ. 머리말 : 근대 사회주의 사상 수용 연구와 ‘生(life)’·‘文化(culture)’ 개념

Ⅱ. 1910년대 문명 비판 사조와 ‘인권회 복운동’으로서 노동문제 인식

Ⅲ. 사회주의 수용의 사상 지형과 ‘생’· ‘문화’의 ‘능동성’ 강조

Ⅳ. ‘생’을 동력으로 하는 ‘계급투쟁’과 ‘新文化’의 창출

Ⅴ. 맺음말 : 물산장려운동 논쟁 전후 ‘계급투쟁론’의 귀결

Ⅰ. 머리말 : 근대 사회주의 사상 수용 연구와 ‘生(life)’·‘文化(culture)’개념

본 연구의 목적은 근대 한국의 사회주의 수용 연구에서 다뤄져 온 ‘계급투쟁 론’의 형성을 개념어를 통해 재독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 회주의 사상 수용 연구와 관련 개념 연구사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기존 한국의 사회주의 사상 수용은 대체로 사회주의 조직·단체 의 운동 양태 및 운동론, 그리고 굵직한 사건을 매개로 하여 이해되거나,1)

1) 대표적인 연구로는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고양, 역사비평사, 2003); 박종린,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물산장려논쟁」 『역사와 현실』 47(서울, 한국연 사연구회, 2003) 등 참조.

일본을 거쳐 식민지 조선에서 중역된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2) 후자 의 길잡이가 되는 박종린의 연구는 주로 1920년대 초·중반 식민지 조선의 사 회주의 수용 과정을 맑스주의가 주류로 등장하고 전일화되는 과정으로 파악하 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급투쟁론(the theory of class struggle)’의 수용 과 맑스주의 이해에 있어 ‘결정론’과 ‘능동성’이라는 상반된 인식 차이의 틀을 통 해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 논쟁을 선구적으로 해석하였다.3) 여기서 ‘계급투쟁론’은 김윤식 사회장 사건 전후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개념 이자, 물산장려논쟁에서 국내 공산주의 그룹 일부의 생산력증식 논의에 맞선 개 념이었고,4) 이 과정에서 당시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맑스주의의 언어를 사용하여 논쟁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를 ‘맑스주의로의 전일화’라는 관점에서 보 면, 기존의 사상 지형을 고려했을 때 풍부한 함의를 지닌 글들을 상대적으로 협 소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1910년대 혹은 개조론의 지적 분위기는 사 회주의를 비롯한 사상들을 ‘지식 경향’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거나, 사회주의 자체 를 ‘공통지식’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강했다.5) 여기에 ‘계급투쟁론’ 자체도 결정 론과 비결정론, 자유와 필연성, 법칙성과 능동성 등의 문제에서 기존의 기계적 유물론 및 관념론 등과 논쟁하면서 형성된 개념이었다.6)

2) 박종린, 「1920년대 초 공산주의 그룹의 맑스주의 수용과 ‘유물사관요령기’」 『역사와 현실』 67(서울, 한국연사연구회, 2008); 박양신, 「근대 일본의 아나키즘 수용과 식민지 조선으 로의 접속」 『일본역사연구』 35(서울, 일본사학회, 2012) 등 참조.

3) 박종린, 『일제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에 관한 연구』(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7) : 『사회주의와 맑스주의 원전 번역』(서울, 신서원, 2018).

4) 대표적으로 박종린, 「‘김윤식 사회장’ 찬반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재편」 『역사와 현실』 38(서울, 한국역사연구회, 2000): 앞 논문(2003): 앞 책(2018), 77-107쪽.

5) 허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개조론의 확산과 한국지식인」 『한국근현대연구』 50(서울, 한국근현대사학회, 2009a); 박헌호, 「‘계급’ 개념의 근대 지식적 역학」 『근대지식으로서의 사회주의』(서울, 상허학회, 2008).

6) 칼 맑스(Karl Marx)가 언급했듯 ‘계급’은 기존 정치경제학에서 사용되었으며, ‘계급투쟁’ 이라는 계급적 적대관계의 영속성 역시 1829년 『생시몽 독트린의 진술』에서 이미 언급되 었듯 그 나름의 역사적 연원을 가진 개념이었다. 맑스주의에서는 역사적 과정을 생산력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의 변증법이라는 객관적 요소와 계급투쟁이라는 주관적 요소로 설명한다. 여기서 계급 자체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객관적인 요소이지만, 혁명의 추이는 생산력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모순, 즉 객관적인 요소에 개입하는 계급투쟁의 방식에 따라 설명된다. 엠마뉘엘 르노 지 음/유재홍 옮김, 『마르크스의 용어들』(서울, 도서출판 울력, 2012), 20-23쪽; 친구 편집 부,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전』(서울, 도서출판 친구, 1987), 70-73·82-83·179-183쪽.

따라서, ‘계급투쟁론’의 형성을 식민지 조선의 사상 지형과 사회주의의 상호참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계급투쟁론’을 당시 논쟁 지형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특정 지식인·사상에 한정하지 않기 위해 ‘개념어’ 연 구에 천착할 것이다.

두 번째, 개조론을 전후한 시기 사회주의와 계급투쟁론의 형성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生(life)’과 ‘文化(culture 혹은 kultur)’이다. 먼저, ‘生’은 ‘life’의 번 역어로, 일본 다이쇼기 생명주의의 흐름 속에서 ‘生’, ‘生命’, ‘生活’, ‘人生’ 등의 기 표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7) ‘生’개념은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었 는데, 첫째는 정신주의의 흐름 속에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생’ 개념 활 용과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주의 논리에 적용되었다고 본 연구이다.8) 둘째는 ‘생’ 개념이 노동운동의 문맥 속에서 인간(노동자·민중 등)의 ‘자율성’과 ‘본능’· ‘역동 성’의 의미를 가지고 카프(KAPF) 창립 이전 신경향파와 낭만주의·아나키즘문 학·민중예술론 등에서 활용되었음을 지적한 연구이다.9)

7) ‘생명주의’는 헤겔류의 생명일원론, 베르그송류의 생의 비약, 윌리엄 제임스류의 실용 주의, 엘렌케이류의 급진적 페미니즘 사상,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의 흐름으로 정 리되었다. 鈴木貞美, 『生命で読む日本近代』 (日本放送出版協會, 1996), p.8(권정희, 「‘생명력’과 역사의식의 간극」 『한국민족문화』 40(부산,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 2011), 6쪽 재인용).

8) 이철호, 「1920년대 초기 동인지 문학에 나타난 생명 의식」 『한국문학연구』 31(서울, 동국 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6).

9) 김병진, 「20세기 전환기 자유의 각성과 생명의식」 『일본문화연구』 62(서울, 이화여자대학 교 이화인문과학원, 2017); 박양신, 「다이쇼 시기 일본·식민지 조선의 민중예술론」 『한림 일본학』 22(춘천,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3) 등 참조.

 

이들은 ‘생’ 개념이 문화주의 혹은 내적 개조의 흐름을 관통하거나 서구 문명의 물질주의 비판, 인간을 탐구 대상화한 점을 해명하였다.10) 반면 ‘문화’개념은 라틴어에서 농경활동이나 개인의 지적·정신적인 활동에 제한되어 활용되었으나, 18세기부터 지적·정신적·미학적 발달의 전체적인 과 정을 말하는 독립 추상명사이자 국민·시대·집단 또는 인간 전체의 특정한 생활 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11) 기존 연구에서 식민지 조선의 ‘문화’는 대체로 ‘개 량’적인 문화주의나 민족문화운동 차원에서 연구되었고,12) ‘문화’개념 자체는 ‘문 명’개념과의 단절과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검토되었다.13) 그런데 ‘생’과 ‘문화’가 사회주의 수용과 ‘계급투쟁론’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는 점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1910년대 서구의 물 질문명과 사회진화론의 기계론적·물질주의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데 활 용된 개념이었다. 또한, ‘생’과 ‘문화’는 사회주의 역사 발전에 있어서 인간의 자율 성과 능동성을 의미하면서 노동운동 담론을 선취해가던 개념이었지만, 사회주의 지식인과 그 사상이 맑스주의(자)로 성숙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나타내 는 지표로 여겨졌다.14)

10) 허수, 『이돈화 연구』(고양, 역사비평사, 2011): 「러셀사상의 수용과 개벽의 사회개조론 형성」 『역사문제연구』 21(서울, 역사문제연구소, 2009b); 박헌호, 「‘낭만’, 한국 근대문학 사의 은폐된 주체」 『한국학연구』 25(인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11) 레이먼드 윌리엄스 저/김성기 역, 『키워드』(서울, 민음사, 2010), 123-131쪽; 외르크 피 셔 지음/안삼환 옮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서울, 푸른역사, 2010) 참조.

12) 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고양, 역사비평사, 1992); 이지원, 『한국근대문화사 상사연구』(서울, 혜안, 2007).

13) 이행훈, 「1920년대 문명·문화 개념의 교차」 『개념과 소통』 23(춘천, 한림대학교 한림과 학원, 2019); 허수, 「언어연결망 분석으로 본 20세기 초 한국의 ‘문명’과 ‘문화’」 『개념과 소통』 22(춘천,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2018) 등 참조.

14)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고양, 역사비평사, 1992); 최병구, 「1920년대 초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탈자유주의화 과정」 『한국사학보』 26(서울, 고려사학회, 2007).

이를 의식하고 ‘생’개념에 주목하거나 일본 문화주의 철학 의 노동문제 분석에서 그 발상법과 용어가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지 만,15)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그 역할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렇듯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론’의 형성과정을 기존 사상 지 형의 속에서 수정하고, 이것이 맑스주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조에 의해 구성되 어 첨예한 논쟁 속에서 활용되었음을 밝히는 데에 있어 ‘생’과 ‘문화’가 적합한 개 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연구는 단순히 텍스트와 언어라는 소 재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당대 개념과 사회가 상호영향을 받았으 며 역사적 현실에 대한 개념의 역할을 밝히는 데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16)

15) 김경연, 「1920년대 초 ‘공통적인 것’의 상상과 문화의 정치」 『한국문학논총』 71(한국문학 회, 2015), 382-383쪽; 김현주, 『문화』(서울, 소화출판사, 2020), 380-384쪽.

16) 개념이 가진 현실의 ‘지표’이자 역사적 현실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서의 성격에 대해서 는 나인호, 『개념사란 무엇인가』(고양, 역사비평사, 2011) 참조.

제Ⅱ장에서는 1910년대 ‘생’과 ‘문화’가 노동담론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와 경 향 속에서 활용되어왔는지 서술하고, 제Ⅲ장에서는 그러한 사상 지형에서 나타 난 식민지 조선의 노동문제 인식과 노동운동 시기상조론 논쟁에서 ‘생’과 ‘문화’ 개념의 활용을 다룬다. 제Ⅳ장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한층 심화되고 여 러 논쟁으로 갈등이 표면화된 이후, ‘생산력 증식론’에 대립하여 형성된 ‘계급투 쟁론’의 구성에 ‘생’과 ‘문화’의 역할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주요 자료는 1910년대 잡지 자료인 『학지광』부터 물산장려논쟁 이전인 1922 년까지 식민지기 조선인 잡지 및 신문자료이다. 또한 게일(J. S. Gale)과 언더우 드부자(H. G. Underwood·H. H. Underwood)의 이중어사전과 당대 신조어 사전인 『현대신어석의』(1922)도 활용한다.

Ⅱ. 1910년대 문명 비판 사조와 ‘인권회복운동’으로서 노동문제 인식

19세기 말 서양 철학에서는 실증주의와 이성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되었다.17) 이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 결정론과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의문과 연결된다.18) 제국 일본에서도 러일전쟁 전후로 사회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진화론적 자연주의 에 대항한 이상주의적 사조가 유행하였으며, 이 흐름이 일본의 ‘문화주의’를 구성 하였다.19) 니시다 기타로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기계론과 물질편향적인 사고, 사회진화론 등을 과거의 세계관으로 구분짓고, 인간의 ‘영성’·‘생명’을 존중 하여 물질·정신의 대립을 넘어서려 하였다.20) 이를 ‘다이쇼 생명주의(大正 生命 主義)’라고 부른다.21) 여기서 ‘생’ 개념은 서구 근대의 병폐를 재인식하려는 움직 임 속에서 1910년대 기존 문명과 구분되는 맥락에서 사용된 ‘문화’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900년대 대한제국 시기 이중어사전에서는 ‘生’혹은 ‘life’는 사람의 ‘목숨’, 나 아가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로 아직 추상적인 의미를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 었고, ‘문화’ 단어도 표제어로 등재되지 않았다.22)

17)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이신철 옮김, 『헤겔이후 독일철학 1840-1900』(서울, 도서출판 b, 2016), 35-87쪽.

18) 프랭클린 보머 지음/조호연 옮김, 『유럽 근현대 지성사』(고양, 현대지성사, 1999), ‘제5 장 세기말’ 참조. 19) 문화주의의 등장에 대해서는 미야카와 토루 엮음/이수정 옮김, 『근대일본철학사』(파주, 생각의 나무, 2001), 133-141쪽; 이에나가 사부로 저/연구공간 수유너머 일본근대사상 팀 역, 『일본근대사상사』(서울, 소명출판, 2006), 265-266쪽 참조.

20) 이철호, 앞 논문(2006), 201-202·206-207쪽.

21) 鈴木貞美 외 저/박미정 옮김, 「에너지의 문화사로」 『에너지를 생각한다』(서울, 민속원, 2014).

22) H. G. Underwood, 『한영자뎐』(1890), 123·157쪽(황호덕 외,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 어사전』 2권(서울, 박문사, 2012)); J. S. Gale, 『한영자전』(1897), 538쪽(황호덕 외, 『한 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 5권(서울, 박문사, 2012)); J. S. Gale, 『한영자전』 (1911), 643-644쪽(황호덕 외,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 6권(서울, 박문사, 2012)).

잡지·신문 자료에서도 1900년대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생명재산’ 등 ‘생존’과 연결되는 경향을 가졌던 ‘생명’ 이 나타났다.23) 한편, ‘문화’ 개념은 기존의 유교적 ‘文治敎化’, ‘civilization’으로 서 문명(개화)의 의미, 그리고 ‘culture’ 혹은 ‘Kultur’ 의미가 뒤섞여 쓰이는 가 운데, 물질문명 비판의 맥락에서 ‘문화’가 등장하였지만,24) 그 용례가 크게 부각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1910년대 전환을 겪게 되는데, 특히 그 양상은 在東京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 『학지광』에서 부각되었다. 1910년대 제국 일본 에서 유학하며 지식을 쌓은 이른바 ‘학지광 세대’의 개념 활용은 1920년대 식민 지 조선과 사상적·인적 연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특히 이 시기 사 상적인 전환의 핵심은 사회진화론의 물질편향적 성격과 사회진화의 결정론적(숙 명론적) 성격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1910년대 ‘生’개 념은 ‘生’, ‘生命’, ‘人生’, ‘生活’, ‘人格’ 등으로 활용되며, 그 의미와 맥락은 3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 ‘生’ 개념은 물질주의와 기계론 비판의 맥락에서 물질과 정신을 총 체적으로 통합하는 개념이었다. 기존의 ‘모범’이었던 서구문명사회가 제1차 세 계대전을 전후로 흔들리면서, 물질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비판하고 반대 로 인생의 내적 생활, 생명, 정신이 대항 개념으로 활용된 것이다. 문제는 “‘내적 생활의 부활과 정신생활의 재건’으로 유일 최고의 이상을 삼”는 것이었다.25) 물론 식민지 조선인들은 여전히 서구의 ‘물질 문명’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었다.26)

23) 대표적인 예로 「江會上書」 『황성신문』(황성신문사, 1904. 12. 6.); 尹孝定, 「演說 第一回 總會時」 『대한협회회보』 1(대한협회, 1908. 4. 25) 등 참조.

24) 전영작, 「人生 各自에 關 天職」 『태극학보』 6(태극학회, 1907. 3.). 1900년대 문화 개 념의 사용과 1910년대 용례의 변화는 김현주, 앞 책(2020); 이행훈, 앞 논문(2019) 등 참조.

25) 秋松生, 「吾人의 理想」 『학지광』 6(학지광사, 1915. 7. 23.).

26) 徐椿, 「‘우리의 渴과 基督’을 讀함」 『학지광』 13(학지광사, 1917. 7. 19.); 極光, 「最近 의 文明消息」 『학지광』 14(학지광사, 1917. 11. 20.); 余辰于, 「常識과 科學」 『학지광』 17(학지광사, 1919. 1. 3.).

따라서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생’ 개념은 단순히 물질·과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 니라 물질주의적, 기계론 비판의 맥락 위에서 정신과 물질을 포괄하는 ‘총체적’ 혹은 ‘전체적’ 인식을 함의해야만 했다. 최승구는 ‘부분’이 아닌 ‘전체’의 우리가 되 어야하며, ‘肉’과 ‘감정’, ‘양심’과 ‘본능’을 통일하여 ‘생활’의 길로 나아가야함을 강 조한다.27) 이렇듯 ‘生’개념은 영혼·육체, 정신·물질의 단절을 폐기하고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뛰어넘은 자아의 보편성을 보증해 주었다.28) 두 번째로, ‘生’ 개념은 세계대전 전후 휴머니즘 철학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될 수 없는 인 간 정신을 탐구하려는 견해가 생겨났다.29) 즉, 인간의 삶이자 ‘인간생활’, 혹은 인 간 자체를 의미하는 ‘人生’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그 ‘해방’에 관한 글이 소개되 었다.30) 전영택은 유럽이 르네상스 이후 억눌려왔던 ‘生命’의 힘이 나타나 ‘인본주 의’가 일어났다고 하면서 조선의 현황을 르네상스 이전의 인본주의가 필요한 상 태로 묘사한다.31) 특히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 혹은 낭만주의는 기존에 억눌려 왔던 인간의 본성을 해방하는 전환기적 사조로 일컬어졌다.32)

27) 崔承九, 「너를 혁명하라」 『학지광』 5(학지광사, 1915. 5. 2.).

28) 이철호, 앞 논문(2006), 206-207쪽.

29) 박헌호, 앞 논문(2011).

30) 金永燮, 「生의 實現」 『학지광』 13(학지광사, 1917. 7. 19.).

31) 田榮澤, 「宗敎改革의 根本精神」 『학지광』 14(학지광사, 1917. 11. 20.).

32) 金恒福, 「이것이 人生이다」, 『학지광』 21(학지광사, 1921. 1. 1.).

낭만주의·인본주의적 사조의 유행은 추후에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지식인 들에게도 발견되는데, 김명식은 ‘생’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물질문명을 비판하면 서 ‘정의’와 ‘감정’을 강조하였다. 그는 톨스토이가 굳은 신앙이 賢者에게 있지 않 고 오직 ‘이론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뜨거운 情性도 인격자에게 있지 않고 ‘더운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용서하며 우리도 그 ‘감정’을 가져야한다면서, 우리의 목자이자 指南鐵이 될 사람은 ‘情과 義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3) 그는 20세기에 물질문명이 극도에 달하여 일어난 세계대전이 물질문 명의 결함을 발견하는 계기라고 하면서, 정의를 앞세운 도덕과 자각적 개조를 주 창하였다.34) 이러한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감정과 본능을 중시하는 주장은 인본주의 혹은 주정(의)주의로 소개되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나타났다. 1922년 중반 이후 서 울파 사회주의 지식인으로 전화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사국은 ‘인간본위 즉 휴 매니즘(인본주의)’와 ‘정서주의’가 철학의 신경향이라고 소개하였다.35) 또한 ‘人生 문제’를 근저로 하는 ‘生의 실현론자’로서 ‘따쿠르(타고르)’와 ‘랏셀(러셀)’의 충동 설이 조선에서 문화운동을 일으켰다고 설명하였다.36) 이러한 인식은 비단 김사 국뿐만 아니라 『개벽』에서 김기전과 김억도 최근 사조의 핵심을 물질주의·자연 주의·주지주의·실증주의에 대한 반성과 신이상주의·낭만주의·주정주의 및 인 생철학의 흥기로 다루었다.37) 여기에 ‘생’개념의 인본주의는 인간의 엄존하는 권리를 나타내는 ‘인격권’, ‘인 권’, ‘생활권’ 등의 단어와 함께 출현하였다. 식민지 조선인도 남처럼 당당하게 우 리의 ‘생활권’을 요구하려면 우리도 깨어야 한다는 주창이 나타났다.38) ‘생’개념은 기존의 생존경쟁론을 비판하여 사람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되었고 광의의 데모크라시 및 노동 인식과도 결합하였다.39)

33) 김명식, 「雁去鷰來」 『학지광』 13(학지광사, 1917. 7. 19.).

34) 김명식, 「도덕의 타락과 경제의 부진」 『학지광』 14(학지광사, 1917. 11. 20.): 「大勢와 改 造」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0. 4. 2.).

35) 김사국, 「近代哲學과 쩸쓰」 『아성』 3(조선청년회연합회, 1921. 7. 15.).

36) 김사국, 「我人生觀」 『아성』 1(조선청년회연합회, 1921. 3. 15.).

37)YA生, 「近代思想과 文藝」 『아성』 3(조선청년회연합회, 1921. 7. 15.); 金起瀍, 「社會 奉 貢의 根本意義」 『개벽』 10(개벽사, 1921. 4. 1.); 岸曙(김억), 「近代文藝(8)」 『개벽』 21(개 벽사, 1922. 3. 1.).

38) 小星, 「朝鮮靑年과 覺醒의 第一步」 『학지광』 15(학지광사, 1918. 3. 25.).

39)CY生, 「寡婦의 解放論」 『학지광』 20(학지광사, 1920. 7. 6.); 高永煥, 「데모크라시의 意義」 『학지광』 20(학지광사, 1920. 7. 6.).

세 번째로, ‘생’ 개념은 역사 진보 과정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하 여 기계론·숙명론적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진보’ 개념과 결합하였다. 당시 ‘진화 론’이 공통지식으로 활용되면서 “얼음같이 무정한 철칙”40)으로 인식되던 사회진 화론은 ‘숙명론’으로 비판되었다.41) 기존에 사회진화론의 영향력 속에서 단계적· 물질적인 것으로 표상되었던 ‘진보’는 ‘생’을 통해 정해진 단계에 따른 발전이 아 닌 비약적인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진보’ 개념은 ‘생’을 통해 역사 발전의 생동력과 인간의 능동성을 강조하며 비약적·역동적 성격을 지녔다.42) 이렇듯 ‘생’ 개념은 서구 문명과 물질주의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인간을 탐구 대상화하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사조와 함께 활용되었다. 이러한 경항 속에서 ‘생’개념은 제국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와 개조론 의 유행과 함께 노동자와 민중의 자율성, 그리고 본능에 따르는 노동운동 담론에 활발히 활용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 유학생들은 제국 일본에서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문제가 급부상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존의 국가에 대한 기여 로서 ‘노동’개념은 식민화 이후 개인의 천부적 능력이나 사회(민족)에 대한 보편 적 의무로 이해되었지만, 제국 일본에서는 노동문제가 소개되거나, 보호하고 구 제해야할 대상으로서 노동자가 등장하였다.43)

40) 張德秀, 「新春을 迎하여」 『학지광』 4(학지광사, 1915. 2. 27.).

41)「사설 : 天道循環 朝鮮의 生機」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1. 5. 5.).

42) 개조론을 전후로 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의 ‘진보’ 개념의 성격에 대해서는 김명재, 「근 대 전환기 한국 지식인의 진보적 시간의식 연구」 『한국사론』 65(서울, 서울대학교 국사 학과, 2019) 참조.

43) 김현주, 「‘노동(자)’, 그 해석과 배치의 역사」 『근대지식으로서의 사회주의』(서울, 상허학 회, 2008), 제2~3장 참조.

이에 식민지 조선과 관련해서도 사회문제로서 ‘노동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김철수는 ‘노동’을 좁은 의미가 아닌 ‘광의’로 정의해야한다면서, 직접 신체를 움직여 力役을 판매하는 자를 노동자라고 한다면 식민지 조선에는 노동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未覺混同 중’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44) 김양수도 ‘과 학적 사회주의’로서 맑스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가운데, ‘인격의 평등’이 라는 목표를 갖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정의하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노동문제가 존재하지만 이해가 부족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45) 식민지 조선의 노동문제 제기를 정당화하는 경향과 함께 노동담론 속에서 ‘인격’과 ‘생활’ 개념은 사회주의 지식인인 변희용의 글에서 명징하게 나타난다.

노동자는 이 전제군주인 자본가에 대한 절대복종적 생활, 노예적 생활, 금수적 생활에서 노동자 자신을 해방하여야 할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자신의 생활, 자주 자율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생활을 統御하고, 자기가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고,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 그럼으로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자신 을 획득하는 운동이며, 노동자의 자주자율적 생활을 획득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사람의 운동이며 인격 확립의 운동이다.(강조 부분은 인용자)46)

변희용은 ‘인격확립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가 절대복종적이며 노예적이고 짐승과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자주 자율의 생활로 나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노동자 문제는 ‘인격 가치’의 인식과 유지, 즉 경제 적·정신적 조건이 배합되어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노동자가 ‘기 계적 상태’에서 ‘개인적 사람’으로, ‘개인적 사람’에서 ‘사회적 사람’으로 만들어지 는 과정이라고 하였다.47)

44) 金錣洙, 「勞働者에 關하여」 『학지광』 10(학지광사, 1916. 9. 4.).

45) 金良洙, 「社會問題에 對한 觀念」 『학지광』 13(학지광사, 1917. 7. 19.).

46) 卞熙瑢, 「勞動運動의 精神」 『학지광』 22(학지광사, 1921. 6. 2.).

47) 卞熙瑢, 「勞働者問題의 精神的 方面」 『공제』 1(조선노동공제회, 1920. 9. 10.). 이 글에 서 노동자의 자율적 운동과 생활, 그리고 노동조합주의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오스기 사 카에(大杉栄)의 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병진, 「오 스기 사카에의 〈혁명적 생디칼리즘〉」 『일본역사연구』 39(서울, 일본사학회, 2014), 2장 참조.

이와같이 노동운동을 ‘인권회복운동’으로 평가하면서, 그 운동에 정신적·물 질적 개조를 포괄하고 ‘인간의 해방’을 강조하는 견해가 나타났다. 노동문제는 물 질적 문제에 고착되지 않고 노동자의 ‘인격의 자유’, ‘인간성의 해방’에서 출발해 야 하며 사회개조운동은 물질적 생활의 운동인 동시에 내적 생활을 위한 운동으 로 정의되었던 것이다.48) 즉, 노동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문제이자 ‘인(격)권 회복’ 의 운동이고 인격권 요구는 인류 생활과 문화의 근본 방향을 결정하는 절대 가치 인 것이다.49) 결국 식민지 노동운동은 ‘노동’의 개념을 광의로 해석하고, 물질·정 신 생활(생)을 통합적으로 사고하여 ‘인격확립운동’ 혹은 ‘인권보호운동’으로 정의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노동’담론이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이다. 김항복 은 당시 문화 개념을 광의와 협의로 나누면서, ‘광의의 문화’는 문명과 동일한 의 미이며, ‘협의의 문화’는 과학적·물질적 문명이 아니라 고상한 정신적 산물, 즉 예술·종교·학술·도덕을 포괄한 명칭이라고 하였다. 그는 당시 개조론을 의식 하면서 노동운동도 이 의미에 있어서 ‘문화적 가치’를 가지며, 여기서 ‘문화’는 사 람과 인격자로 하여금 전 능력을 자유로 발달시키게끔 하는 것이라고 파악하 였다.50)

48) 赤旋風, 「知識階級의 現狀과 勞働運動」 『공제』 8(조선노동공제회, 1921. 6. 10.).

49) 李堅益, 「勞働問題는 人類全體의 問題」 『공제』 8(조선노동공제회, 1921. 6. 10.).

50) 金恒福, 「文化의 意義와 其發展策」 『학지광』 22(학지광사, 1921. 6. 2.).

그런데 여기서 ‘생’과 ‘문화’ 개념이 노동담론에서 나타나는 것을 단순히 맑스 주의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지 않은 ‘과도기’에 있음을 보여주거나, 일본 문화주의 철학의 경향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개념어들이 사회주의 수용과 노동문제 인식에 있어서 ‘지렛대’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까. 덧붙 여 당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생’과 ‘문화’ 개념을 활용한 식민지 조선의 논의 맥 락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질문들은 이른바 노동운동의 ‘시기상조론’ 논쟁과 연결 되는데, 다음 제Ⅲ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형성에서 ‘생’과 ‘문화’ 개념의 활용을 다루고자한다.

Ⅲ. 사회주의 수용의 사상 지형과 ‘생’·‘문화’의 ‘능동성’ 강조

제국 일본의 노동운동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흥성과 ‘개조론’ 사조가 유행 하면서 폭발하였고, 이어 식민지 조선에서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 속에서 개 조론의 이상주의적 사조들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51) 이때 ‘생’과 ‘life’ 개념은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생활’, ‘생명’, ‘인생’, ‘사람’, ‘인격’ 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현대신어석의』에서 ‘생활의지’, ‘생의 충동’, ‘인생관’, ‘인생철학’ 등이 표제어로 나타나거나 H. H. 언더우드의 『영선자전』에서는 ‘life’의 의미가 세분화 되었다.52) 또 중요한 점은 ‘문화’와 ‘culture’가 표제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53) 여 기서 문화 개념은 문화주의 철학의 자장 속에서 독일어 ‘kultur’의 의미로 인생 의 순수한 이상 생활을 뜻하거나,54) 『동아일보』 등에서는 여기에 정치·법률도 포 함시켰다.55)

51) 허수, 앞 논문(2009a).

52) 崔錄東,『현대신어석의』(1922), 52·63쪽(한림과학원, 『한국근대신어사전』(서울, 선인, 2010)) ; J. S. Gale, 『삼천자전』(1924), 39쪽(황호덕 외,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 8권(서울, 박문사, 2012)); H. H. Underwood, 『영선자전』(1925), 309-310쪽(황호덕 외, 위 책(2012)).

53) 崔錄東, 앞 책(1922), 39쪽; J. S. Gale, 앞 책(1924), 16쪽; H. H. Underwood, 앞 책(1925), 107쪽.

54) 야나부 아키라 지음/박양신 옮김, 『한 단어 사전, 문화』(서울, 푸른역사, 2013), 44-49 쪽.

55) 허수, 앞 논문(2009a), 43-44쪽.

이때 식민지 조선의 언론 속에서도 ‘노동’이 점차 주목되는 가운데, 조선에서 ‘시기가 미숙하였는데 노동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 었다. 이 ‘시기상조론’은 주로 1920-1921년 노동운동 문제가 처음 제기되면서 담론상에서 나타났다. ‘시기상조론’은 노동문제 혹은 노동운동의 시기상조론으로서 주로 서구와 달 리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문제 제기 자체가 ‘수동적인 상태’에 있고 그 조건과 환 경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견해이다.56) 또한, 당장의 노동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우 선 그에 걸맞은 실력과 이해, 제반 조건이 발달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57) 여 기에 노동자의 의무를 완수하도록 지덕과 기능을 숙달해야한다고 주장58)하는 노 자협조적 경향이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노동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즉각적인 노동운동을 제기하는 이들을 ‘과격파’로 경계하기도 하였다.59) 초기 조선청년회연합회에 참여하여 그 기관지인 『아성』을 주도한 안확은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맑스의 자본론이 세계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파악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격문제’에 근거하여 노동·여성· 문화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즉각적인 운동은 맹목적 附從이며 ‘인 생의 본분’, ‘윤리의 근저’에 근거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고 경계하였다.60) 특히 청년들이 물질문명에 빠져 있다면서 정신수 양을 강조하였다.61) 이렇듯 노동문제와 운동 제기의 ‘시기상조론’은 ‘생’이나 ‘인격’을 점진적 혹은 정신주의적으로 국한하려는 경향과 연관되어 보인다. 여기에 ‘문화운동’은 노동 문제에 동의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과 봉건적 잔재의 청산이 보다 시 급하다는 인식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62)

56)「社說 : 世界 三大 問題의 波及과 朝鮮人의 覺悟如何」 『개벽』 2(개벽사, 1920. 7. 25.).

57) 흰가람 金三壽, 「勞働社會의 覺醒을 促함」 『공제』 2(조선노동공제회, 1920. 10. 11.).

58) 石如, 「平等의 光明과 勞働의 神聖」 『공제』 1(조선노동공제회, 1920. 9. 10.).

59)「사설 : 勞働者의 團結이 必要」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1. 7. 5.); 「사설 : 消費組合 의 出現」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1. 7. 30.); 「사설 : 過激派와 朝鮮(一)」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0. 5. 12.).

60) 安廓, 「有識階級에 對하야」 『공제』 2(조선노동공제회, 1920. 10. 11.).

61) 安廓, 「三重危險과 自覺」 『아성』 1(조선청년회연합회, 1921. 3. 15.): 「靑年會의 事業」.

62) 박찬승은 개벽 편집진과 동아일보계열 등이 1921년 이후에 사회개량주의적인 입장에서 노동문제를 조선에서 아직 거론할 때가 아니라는 입장을 폈다고 지적하였다. 박찬승, 앞 책(1992), 199-201쪽.

그런데 ‘시기상조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1920-1921년 사회주의의 소 개 방식에 「유물사관요령기」를 통해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법칙성)’과 그 방법 으로서 ‘유물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63) 이러한 ‘필연성’을 강조 하는 경향은 우선적인 산업 발전의 정당성을 보충해주거나, 반대로 즉각적인 노 동운동의 추진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주의 소개에 있어서 ‘법칙성’ 강조와 ‘유물론’ 주창의 경 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곧 1910년대 지적 경향인 ‘기계론·결정론(숙명론) 비판’ 의 대상이 곧 사회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닌 것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가 기계론 혹은 결정론으 로 비판받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유물사관은 기 존의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지반 위에 있었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시각에는 물질주의와 숙명론을 주장한 사회진화론 비판이 맑스주의의 법칙성·유물론 비 판과 연결되었다.64) 게다가 개조론의 사조 중 버트란트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의 맑스주의 비판이 유행하였고, 『개벽』에서 김기전은 러셀을 인용하여 사회주의를 ‘물질편중’적이며 혁명 이후의 진보를 부정한다면서 ‘결정 론’으로 비판하였다.65) 이광수 또한 「민족적 경륜」에서 유물사관에 대해 사회현상 이 필연적인 자연의 鐵則에 ‘定命論的’으로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비판 하였는데,66)

63) 박종린, 앞 논문(2008) 참조.

64) 개벽 지식인들은 맑스주의를 물질주의 혹은 기계론으로 비판하였다. 이병태, 「이돈화 『신인철학新人哲學』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수용과 비판」 『시대와 철학』 27-3(서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 참조.

65) 妙香山人(김기전) 記, 「思想界의 巨星뻐-츄랜드·러쎌氏를 紹介함」 『개벽』 11(개벽사, 1921. 5. 1.).

66) 이광수, 「민족적 경륜(一)」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4. 1. 2.).

이 또한 사회주의를 숙명론·결정론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사회주의 지식인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백우는 사회주의를 식민지 조선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 이 적고 일본에서도 변증법이 ‘궤변’을 의미하며 유물론자를 저급의 ‘쾌락주의자’ 나 인정과 이상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하였다.67) 이순탁 또한 맑스 학설의 필연론을 ‘기계적’ 또는 ‘자동적’이라고 오해하는 일부 인사가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68) 이러한 ‘오해’는 비교적 보편적이었다. 이렇듯 사회주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맑스주의의 기계론·결 정론적 해석에 대한 비판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수장이었던 칼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의 맑스주의 해석 비판을 염두에 둔 국제적 배경과도 연결 된다. 또, 이러한 구도는 1910년대 일본에서도 ‘대역사건’ 등의 사회주의 탄압 이 후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등 메이지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적 행동을 유보하고 산업발전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기다리는 ‘대기주의’적 입장에 대한 오스기 사카에의 비판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사회주의의 논쟁 구도에 대한 염 두도 필요하다.69) 다만, 특기할 점은 당시 노동운동의 시기상조론을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법칙 성에 대한 ‘오해’를 돌파하기 위해서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지 식인들이 선택했던 방법은 ‘생’과 ‘문화’ 개념을 활용하여 사회주의 이해를 뒷받 침했다는 점이며,70)

67) 申伯雨 抄, 「唯物史觀槪要」 『공제』 7(조선노동공제회, 1921. 4. 17.).

68) 이순탁, 「資本主義生產組織의 解剖(十六)」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3. 2. 9.).

69) 이러한 논쟁의 독일 사례는 최영태, 「카우츠키주의와 독일사회민주당」 『역사학연 구』 11(광주, 호남사학회, 1997), 543-545쪽 참조. 일본의 경우에는 김병진, 앞 논문 (2014); 梅森直之, 『初期社会主義の地形学-大杉栄とその時代』(東京, 有志舍, 2016), pp.247-254 등 참조.

70) 최근 연구에서는 김영진은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식민지 조선에 소련·일본의 기계적 유물론 비판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소개되었으며 이것이 맑스주의 철학 이해에 ‘정 통’으로 자리잡는다는 점을 해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진, 「1920년대 식민지 조선 에 수용된 변증법적 유물론의 계보와 맑스주의 철학의 정전화」 『역사문제연구』 45(서울, 역사문제연구소, 2021) 참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김명식, 정태신, 유진희 등이었다. 먼저 『동아일보』 논설반에서 활약하고 있던 상해파 사회주의자인 김명식은 노동운동을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신성한 人格을 보존하고 합리한 人 道를 건설하기 위한 自衛 또는 人道 상의 투쟁이라고 주장하였다.71) 또한, 노동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를 국부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로 이해하여 그 개선에 만 노력하는 것이 문제이며, 결국 “노동문제를 사회문제로, 人生문제로 해석”해 야 한다고 비판하였다.72) 조선노동공제회를 통해 사회주의 연구와 선전에 주력한 정태신도 당시 사회 주의 지식인의 노동문제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맑스의 유물사관 등을 잡지 『개벽』에 소개하면서도,73) 이와 함께 ‘생’과 ‘문화’개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 였다. 정태신은 민중문화를 ‘생’의 충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창출할 수 있다고 보 았다. 그는 「민중문화의 제창」에서 ‘문화’가 우리 생명의 위대한 표현이고 생명의 원천에서 창조적 충동의 근원을 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민중문화’의 제창 은 우리의 ‘生命衝動’에서 욕구하는 당연한 운동이고 그 방법의 중심에 있는 노 동운동은 “人生 원래의 생존권 회수운동”이며 이를 통해 인간성의 회복에서 신 장될 ‘민중문화의 창조’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74)

71) 김명식, 「現代思想의 硏究」 『아성』 4(조선청년회연합회, 1921. 10. 1.).

72) 金明植, 「勞働問題는 社會의 根本問題이라」 『공제』 1(조선노동공제회, 1920. 9. 10.).

73) 又影生(정태신), 「막쓰와 唯物史觀의 一瞥 (읽은 中에서)」 『개벽』 3(조선노동공제회, 1920. 8. 25.). 74) 鄭又影(정태신), 「民衆文化의 提唱」 『공제』 8(조선노동공제회, 1921. 6. 10.).

이러한 ‘생’을 통한 노동 운동은 통합적인 ‘문화가치’를 추구하며 ‘급진성’을 띠는 것이었다.

현대의 민중은 오즉 전 인류사회가 전일적으로 통합적으로 문화가치에 대한 최고한 사명을 완성하며 人生행복에 대한 궁극의 신앙을 표현함에 가장 용감하며 가장 대담할 것이다 (...) 절대한 진리의 비판으로 환연대각하야 일시의 유예를 假 借치 말고 급속히 해방하야 그들의 생활로 하여금 진리의 가치에 귀의되는 新生活 의 정로에서 그들의 生의 약동을 영작케 할 것이다 (...) 노동문제의 철리적 의의는 人生가치에 극치를 盡하엿나니 (...) 노동은 사회문화의 기초적 가치를 有하엿다. 그뿐안이라 창조에 대한 노동과 생산에 관한 환희는 원래 인류의 고유한 천품성의 본능이다 (...) 이것이 곳 구문명, 구제도의 열렬한 반항성으로 일어나는 노동운동 자 내부에 강렬히 발효되는 정신적 요소이다. 이에 신문명, 신제도에 대한 강대한 윤리적 감정의 의식이 발아되는 것이다.75)

노동운동 담론에서 ‘生’개념과 ‘문화가치’는 물질적·정신적 개조를 통합적으 로 사유하는 것이었다. ‘민중문화’는 ‘신문명’을 의미하며 이를 위한 노동운동자 의 반항성과 정신적·윤리적 감정이 나타나는 이유는 인류 고유의 가치와 본능 을 ‘노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은 “일시의 유예를 假借치 말고 급속히”해야할 인간의 본능과 충동, 감정의 해방을 통한 민중문화 창조의 ‘동력’ 으로 여겨진다. 또한 ‘문화가치’, ‘가치’, ‘인생가치’ 등은 신칸트학파의 빈델반트 가 자주 활용하던 개념으로서,76) 노동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인 식하여 사회주의 수용 과정에서 지식인들에게 전유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77)

75) 鄭泰信, 「眞理의 聖戰」 『공제』 2(조선노동공제회, 1920. 10. 11.), 1-3쪽.

76) 독일의 신칸트학파 중 서남학파는 보편 원칙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의 연구방법론을 모델 로 삼는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사회 문화의 특수성, 그 문화가치를 탐구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리케르트는 ‘문화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적 가치로서 종교, 민족, 법률, 경제, 과학, 예술 등을 포함했다. 하인리히 리케르트, 이상엽 옮김, 『문화과 학과 자연과학』(서울, 책세상, 2004), 51-52·258쪽.

77) 흥미로운 점은 기존 연구에 따르면 리케르트나 람프레히트 등의 문화사에서는 기계론· 맑스주의적인 역사상을 비판하였다는 점이다. (문기상, 「람프레히트 방법논쟁과 문화사 上」 『역사학보』 129(서울, 역사학회, 1991), 131-132쪽 참조.) 또한 당시 리케트르 철학 을 소개한 米田庄太郞은 맑스주의를 “世紀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 및 운동의, 간과하기 어려운 풍부는, 그 견지에서는 전혀 무의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米田庄 太郞, 『リツケルトの歷史哲學』(東京, 改造社, 1922), pp.156-157). 이러한 문화가치론 과 맑스주의의 결합은 수용 초기 사회주의의 혼종성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러한 서구· 일본 사상 전개와의 ‘차이’들도 식민지 조선의 사상·논쟁 지형 속에서 가능했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생’과 ‘문화’는 노동운동의 시급성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능·감정, 그리고 ‘능동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노동운동의 통합적·전체적 성격을 부 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시기상조론’에 대응하고 사회주의의 법칙성 비판에 반박하면서 ‘생’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활용한 것은 유진희였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와 『공 제』 등에서 노동운동과 관련된 글을 차례차례 실었는데, 특히 ‘노동공제회’가 그 발기인들이 주창하는 ‘온정주의’는 곧 노동문제의 순진한 발달을 방해한다고 비 판하였다.78) 유진희는 이러한 세력은 즉각적인 노동운동이나 ‘계급투쟁’을 반대 하는 ‘반동세력’이자 ‘舊문명’이라고 하였다.79) 또, 그는 노동운동이 단순히 개선 된 물질적 환경과 욕망을 얻으려는 활동과 구별되는, “노동자 해방의 문제”로 정 의하였다. 즉, 노동운동을 일체의 무산자를 유산자의 유린에서 해방하여 약탈된 권리를 반환시키자는 ‘인권회복운동’으로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가치’와 ‘생’의 활용이다. 그는 ‘문화가치’를 가진 노 동문제는 자아실현이라는 인생관의 최고관념으로 진전될 것이지만, 이러한 정신 운동에 근저를 둔 문화주의는 지식·자본계급의 운동에 불과하며 한 단계 나아가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노동운동에 참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80)

78) 兪鎭熙 寄, 「勞働者의 指導와 敎育」; 「勞働者의 指導와 敎育(續)」 『동아일보』(동아일보 사, 1920. 5. 1~1920. 5. 2.).

79) 兪鎭熙, 「寸感-이 貧弱한 收穫을 李鄭兩君께 드리오」 『공제』 1(조선노동공제회, 1920. 9. 10.).

80) 兪鎭熙, 「勞働運動의 社會主義的 考察」 『공제』 2(조선노동공제회, 1920. 10. 11.), 13 쪽. 1

이 맥락은 한편 으로 ‘생’과 ‘문화가치’를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 상정한 것으 로 보기 쉽지만, 이어지는 글에서 ‘문화가치’와 ‘생’은 단순한 사회주의로 가기 위 한 단계가 아니다. 그는 노동문제의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을 비판하면 서, 세계적으로 본 조선의 노동문제는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하면서 ‘생’과 ‘문화 가치’를 활용하였다.

금일의 사회관계는 불합리 불평등이라는 자각이 다시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을 갈망하는 인류의 근본요구와 결탁하야 그 긴밀의 도를 증가케한 것이다 (...) 이 초 조하다 못하여 폭발하랴는 生의 力은 감정과 이지에 訴하야 절규하기를 “약탈한 생산수단을 반환하라 그리하고 일체의 인류에게 평등히 그 수단을 소유케하여라 내가 나의 자유를 획득한 때에 나의 성취한 문화가치가 여하히 저열함을 자각하여 도 나는 다만 희열과 쾌락으로 此를 迎할 뿐이라 그것이 나에게 부여된 전부가치 인 까닭에. 그러나 가령 내가 금일의 부자유한 세계에서 자유세계에서보다 3, 4배 고O한 문화가치를 실현하엿다하더래도 만일 나에게 부여된 천부가 그것보다 고 대하다하면 나는 나를 자유롭게 생활케하면 ‘生의 力’이란 나의 요구는 만족한 것 이다. 그런데 근일의 사회는 나에게 그것을 허락치 아니한다.” 이러한 자각과 요 구가 전세계 인류의(문야의 별업시)의식 중에 울발한 절규이니 此가 곳 달성기라 는 준령을 넘는 최후의 일성이다.81)

그는 세계대전이 식민지 조선의 노동문제 제기 시기를 단축시켰는데, 이로 인해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과 인류의 근본요구라는 ‘生의 力’을 창출해낸 것이 었다. 여기서 문화주의가 사회주의로 연결되는 논리이자 접점을 설명하고 있는 데, 그것은 사회주의의 일종의 과도기적 사상으로서 ‘문화가치’가 아닌, 노동운동 이 곧 노동자 자신의 ‘문화가치’와 ‘생의 력’을 통해 ‘최후선의 돌파’로 이뤄지는 것 이라는 점이다. 즉, 경제적·물질적 제도차원에서 압박받은 ‘인간’이 즉각적인 노 동운동으로서 헤쳐나갈 ‘동력’이자 ‘능동성’을 나타내는 개념어로서 ‘생’과 ‘문화가 치’가 위치한 것이다. 이는 유진희가 “모든 필연론과 숙명론을 버립시다. 기계적 세계관에서 떠납시다”82)라며 기존의 사회주의 비판의 논의 지형을 의식하고 있 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81) 兪鎭熙, 같은 글(1920. 10. 11.), 18쪽.

82) 兪鎭熙 寄, 「勞働運動에 關하야」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0. 4. 15.).

나아가 유진희는 ‘문화’를 舊 문명과 구별되는 것으로 여겼다. 舊 문명은 곧 ‘분할’과 ‘대립’을 진리라고 여기는 사상으로 이뤄져 그 대립을 극도로 하여 인생 을 파멸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문화’, 즉 “통일적·전일적·지속적·창조적 문화”이자 “필연 내면 요구에서 자발한 문화”를 위한 노동운동을 주장한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인권회복운동’으로서 다 만 ‘돌진’·‘돌파’뿐이며 순수한 지속적·창조적인 ‘전일’에 ‘비약’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83)

83) 無我生(유진희), 「分割과 對立에서 全一과 統合으로」 『공제』 2(조선노동공제회, 1920. 10. 11.).

여기서 ‘문화’는 새로운 ‘문명’을 지칭하는 데 활용되었고, 경제 제도로 압박받는 노동자의 ‘생’을 확충하고 운동으로 돌진하는 ‘창조적 전일’의 내용이자 동력이었다. 수용 초기 사회주의 논의에서 ‘생’과 ‘문화’ 개념은 기계론·물질문명 비판이라 는 기존 사상 지형을 의식하면서 쓰이고 있었으며, 노동운동의 즉각적인 추진을 정당화하는 역동적 활력을 불어넣는 인간의 ‘반항성’이자 ‘능동성’을 나타내는 징 표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지식인에게 ‘생’과 ‘문화’는 기계론·물질론 적 사고방식에 대한 저항과 자아의 창조적 에너지, 자율성에서 나아가, 이원론을 비판하고 물질·정신 문화 통합적으로 포괄하려는 개념어로서 전유되었다. 이후 ‘생’과 ‘문화’는 표면화된 ‘계급투쟁론’ 논의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Ⅳ. ‘생’을 동력으로 하는 ‘계급투쟁’과 ‘新文化’의 창출

1920~21년 사이 수많은 사회단체와 언론들이 난립했지만, 당시 한 필자가 말한대로 ‘무슨 會’, ‘무슨 會’하는 것들이 다 용두사미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84) 식민권력의 검열과 발행금지로 발행하지 못하는 잡지·신문이 허다하였고,85)

84) 신븬별, 「조선노동공제회 제4회 총회방청기」 『신생활』 5(신생활사, 1922. 4. 22.).

85)「편집을 맛치고」 『신생활』 1 임시호(신생활사, 1922. 3. 15.).

그 식민통치의 지향점으로 선전된 ‘문화정치’는 사상·문화정책으로 동화주의와 문 화적 지배를 강화해나갔다.86) 여기에 1921년 말 1922년 초 혁명적 정세가 점차 퇴조하였고 워싱턴 회의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노동’ 2자가 들어간 단체·강습소가 빈번히 생겨 났으며 농촌의 소작료 및 소작권 문제가 화두가 되었다.87) 또한 사회주의 운동이 점차 대중 운동화되었다.88) 중요한 점은 사상·운동의 분화도 진행되어 대체로 문화주의(운동론)는 정신적 측면에서의 개조를 중시하였고 사회주의는 물질이나 제도 개조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향에 들어섰다는 점이다.89) 대표적인 문화운동론자로서 잡지 『개벽』의 주요 편집진이자 천도교의 이론적 지도자인 이돈화는 인생의 순수한 이상적 생활이 어떤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필 연적으로 발달하는 것으로 보고 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발전하게 하는 것이 ‘문화’이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문화주의’라고 정의하였다.90) 그는 문화주의 철학을 천도교의 인내천 주의를 바탕으로 수용하여 ‘문화’를 인간 을 향상시키는 목표로 상정하였고 이후에는 ‘사람성주의’를 도출하면서 의지론적 요소인 ‘충동’의 측면을 보완하여, 사람 본위의 사회 건설에 주목하였다.91) 사회 주의에 대해 『개벽』의 지식인들은 정신적 방면이 아닌 ‘경제본위’와 ‘물질주의’에 편중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92)

86) 이지원, 앞 책(2007), 149-170쪽 참조.

87) 신백우, 「사회운동의 선구자의 출래를 촉하노라」 『신생활』 1 임시호(신생활사, 1922. 3. 15.): 신븬별, 앞 글(19822. 4. 22.); 一記者, 「「開闢」之動中靜觀」 『개벽』 29(개벽사, 1922. 11. 1.). 88) 임경석, 앞 책(2003), 546-554쪽.

89) 박찬승, 앞 책(1992), 209-217쪽; 허수, 앞 논문(2009a), 49-50쪽.

90) 白頭山人(이돈화), 「文化主義와 人格上 平等」 『개벽』 6(개벽사, 1920. 12. 1.).

91) 이돈화의 문화운동론에서 ‘생’개념과 ‘문화’ 개념에 관한 해석은 이행훈, 앞 논문(2019), 130-132쪽; 안지영, 「1920년대 내적개조의 계보와 생명주의」 『한국현대문학연구』 44(서울, 한국현대문학회, 2014), 149-151쪽; 허수, 앞 논문(2009b), 90-92쪽 참조.

92) 朴思稷 抄, 「人生은 表現이니라, 에드와드·카펜타아를 紹介함 」 『개벽』 13(개벽사, 1921. 7. 1.).

러셀과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등을 인용하여 근대 문명의 물질주의적 폐해를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의 노 동문제 또한 조선의 노동자들이 우선 “精神改造를 徹底히 實施할 必要가 有” 하다 하였다.93) 그들은 사회주의가 물질주의 혹은 물적 개조를 우선으로 한다고 비판하고, 노동문제를 개인적·물질적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물 질·정신적 양측면을 모두 고려해야함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상해파 주류는 『동아일보』 논설반을 중 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혁명을 수행한 다음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한다 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민족주의 세력과 결합하여 문화계몽운동에 주력하 였다.94) 즉, 민족주의 세력과 단계적 혁명론을 가진 국내 상해파 세력들이 각기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갖고도 ‘문화운동론’에 대해서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 며, 이것이 이후 물산장려운동 추진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22년에 ‘계급투쟁’ 논쟁이 나타났다. 이 ‘계급 투쟁’을 둘러싼 논의는 1921년 말 ~ 1922년 초 김윤식 사회장 사건 국면에서 일 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장덕수 등의 『동아일보』 및 상해파 사회주의자를 비판하 고 부르주아와의 계급투쟁 시기가 왔음을 주창하면서 본격화되었다.95)

93) 李敦化, 「生活의 條件을 本位로 한 朝鮮의 改造事業(續)」 『개벽』 16(개벽사, 1921. 10. 18.).

94) 박종린, 앞 논문(2003), 70-72쪽.

95)「全鮮勞働者諸氏의게 檄하여」 『조선일보』(조선일보사, 1922. 2. 5.); 金翰, 「故金允植 氏社會葬反對に際し此の文おを一般民衆に送る」 『朝鮮日報』(1922. 2. 3.), 朝鮮總督 府 警務局 圖書課, 『諺文新聞差押記事輯錄 : 朝鮮日報』(1932), 58쪽(박종린, 앞 논문 (2000), 268-269쪽 재인용).

당시 사 회주의에 관한 이해가 점차 심화되면서 사회주의 방법론 상에서 자본주의의 물 질적·경제적 제도와 조건의 조성이 우선시된다는 ‘생산력 증식’논의, 그리고 자 본주의적 착취를 타파하기 위한 ‘계급투쟁’이 우선시 된다는 논의가 본격화되 었다. 이때, ‘생산력 증식론’을 중시하는 장덕수와의 대립으로 『동아일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명식은 신일용, 유진희, 이성태, 정지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신생활사 그룹을 조직하고,96) 기관지 『신생활』을 발간하여 ‘계급투쟁론’을 강조하 였다.97) 이때 신생활사의 명칭이 된 ‘New Life’에서 ‘life’가 쓰인 것은 의미심장 하다. 김명식은 창간사에서 대중의 불안은 불합리한 사회의 제도와 無理想한 현 대의 문화 때문이라면서 ‘평민문화’와 ‘신생활’을 제창하였다.98) 여기서 ‘문화’의 쓰임에 대해서 김현준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문화의 의의가 3가지인데, 첫 번째로 문화와 문명으로서 문화의 사회적 일반 개념이며, 두 번 째로 문화철학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점, 세 번째로 ‘현대문화’의 일반적 특질, 즉 “뿌르죠아 문화와 푸로레타리아 문화”로 맑스주의의 문화 활용과 관련된 의미로 구분하였다.99) 여기에서도 김현준이 문화철학 혹은 문화주의의 문화 개념과 기 존의 부르주아·자본가 문화를 비판하면서 제기된 프롤레타리아·대중문화라는 대안 문화 개념을 구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운동선 상에서의 구분과 개념선 상 에서의 구분이 이 시기에 확실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의 주필 장덕수와 함께 ‘생산력 증식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자 는 이순탁이었다.100) 그는 일본의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에게서 師事하고 식민지 조선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순탁은 1921년경부터 꾸준히 『동아일보』에 글을 실었는데, 주로 식민 당국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거나 식민지 조선의 산업 미발달을 지적하고 산업조합의 설 치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101)

96)「신생활 주지」 『신생활』 1 임시호(신생활사, 1922. 3. 15.).

97) 박종린, 앞 책(2018), 102-106쪽.

98) 김명식, 「창간사」 『신생활』 1 임시호(신생활사, 1922. 3. 15.).

99) 金賢準, 「문화생활의 철학」 『신생활』 6(신생활사, 1922. 6. 6.).

100) 이순탁은 가와카미의 영향을 받았고, 물산장려논쟁에서 생산력 증식론을 주장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찬, 「한국 근현대 이순탁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역사문제연구』 1(서울, 역사문제연구소, 1996), 86-91쪽. 101) 在京都 이순탁 寄, 「目下의 恐慌과 半島經濟社會의 慘狀」 1~5 『동아일보』(동아일보 사, 1921. 5. 26~1921. 5. 30); 在京都 이순탁 寄, 「조선과 농업」 1~14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1. 10. 23~1921. 11. 1.)

특히 1922년 4월부터 8월까지 끊임없이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면서 카와카미의 맑스주의 이론을 번역·소개하였고,102) 1923년에는 본격화된 물산장려논쟁에 가담하였다. 이순탁이 기술한 1922년경 일련의 논설들은 당시 『동아일보』의 대척점에 있 는 『신생활』을 의식하면서 꾸준히 맑스주의에 관한 글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계급투쟁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가와카미의 맑스 주의 이론을 정리하면서, ‘계급투쟁’ 시기를 2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단순한 경 제적 투쟁에 불과하지만, 제2기에는 일정한 사회조직이 발달되어 계급적 자각이 일어나면 경제적·정치적 쟁투가 일어나고, 나아가 피압박자가 승리하면 고도의 사회조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03)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급투쟁의 ‘조건’ 이었다. 즉, 한 사회조직의 생산력이 그 조직 안에서 한계까지 발전하지 않는 이 상, ‘투쟁’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04) 또한, 맑스의 ‘사회적 혁명’이 반드 시 급속한 변혁이라는 뜻이 아니며 구사회조직의 붕괴와 신사회조직의 건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105)

102) 이순탁 寄, 「[말크쓰]의 唯物史觀」 1~18 『동아일보』(1922년 4월~5월): 「[막쓰]思想의 槪要」 1~37 『동아일보』(1922년 5월~6월): 「[맑쓰]以前의 經濟思想」 1~14 『동아일보』 (1922년 7월~8월).

103) 이순탁 寄, 「[말크쓰]의 唯物史觀 (7)」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2. 4. 24.); 이순탁 초역, 「[막쓰]思想의 槪要 (16)」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2. 5. 28.).

104) 이순탁 寄, 「[말크쓰]의 唯物史觀 (15)」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2. 5. 5.).

105) 이순탁 초역, 「[막쓰]思想의 槪要 (12)」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2. 5. 24.).

즉, 그는 구사회조직과 제도가 최대한 발전해야한다는 ‘조 건적 측면’을 강조하여 즉각적인 계급투쟁론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업발달을 우 선시하는 ‘생산력 증식론’을 주창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순탁은 1922년 6월 경 『신생활』에 직접 투고하여 논쟁을 이어갔다.

20세기를 혹은 칭하야 사회주의의 시대라한다 (...) 세계사조의 권내에 在한 我 반도사회에서도 다못 사상의 조류에만 부화뇌동치 말고 이것이 이믜 중대한 문제임을 각득한 이상에는 모름즉히 성실한 연구의 태도를 취(해야한다 – 인용자) (...) (河上肇 - 인용자)박사에 의하면 (...) 사회문제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러나 이를 위하야는 상당한 준비와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 요하다 (...) 동시에 다시 人生의 도덕적 완성이라는 것을 궁극의 표준을 삼아 사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야는 (...) 人生이란 것은 결코 무병으로만 잇스 면 상책이 아님과 동시에 人生의 본의가 아니오 각자의 도덕적 완성으로 人生의 목적을 삼지 아니치 못할 것이라 하야 질병을 根治함이 여하히 급무라할지라도 肉 을 구제키 위하야 靈을 희생함을 결코 불가하다하며 (...) 그런데 반도인사 중에는 이러한 중대 문제에 대하야 아즉까지도 하등의 이해와 연구와 그에 반한 준비를 시작함이 심히 적고 오즉 熾而後熄하는 景에 잇슴은 유감이니 (...)106)

위 인용문에서 이순탁은 사회주의에 대한 ‘성실한 연구’와 ‘상당한 준비’가 필 요함에도 이를 부정하고 ‘부화뇌동’하는 ‘반도인사’를 비판하는데,107) 여기서 ‘부 화뇌동하는 반도인사’는 신생활파로 보인다.

이순탁은 자신의 스승인 가와카미 의 의견을 인용하여108) 사회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인생’의 도덕적 완성이라는 궁극적인 표준을 삼아야 하며, ‘생’을 영혼의 입장에서 육체와 물질을 통합하려 는 일본 문화주의의 흐름을 의식하고 ‘계급투쟁론’ 비판에 활용하고 있다.

106) 이순탁, 「사회문제에 대한 河上肇박사의 태도와 견지」 『신생활』 6(신생활사, 1922. 6. 6), 30-31·33-34쪽.

107) 이는 당시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사설 : 사회주의적 운동에 대하야」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2. 2. 18.); 박종린, 앞 논문(2000), 264-265쪽.

108) 이순탁은 가와카미와 달리 노자협조 노선을 견지하였지만, 그 사상을 많은 부분 수용 하고 사회개조에 있어서 상당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였다. 홍성 찬, 앞 논문(1996), 81-82쪽.

이후에 도 이순탁은 신생활파 이성태를 겨낭한 물산장려논쟁에서 맑스 주장의 근거는 ‘생산력 발달’에 있는 것이며 조선이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이상 결코 사회주의 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즉, ‘사회의 진화’는 필연적 진화의 ‘계단’을 밟아야 하며, ‘시기가 아즉 미숙할 때’ 단순한 정치적 혁명으로는 사회혁명을 기 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109) 이렇듯 이순탁은 우선적인 생산력 증식론을 바탕으로 즉각적인 계급투쟁론을 비판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학설적’ 연구가 점차 진행되면서 논자들이 생산력 증식론을 통해 ‘계급투쟁론’ 비판으로 나아가자 『신생활』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응할 필요 성이 있었다. 특히 표면적으로 1923년 초반에 물산장려운동 반대의 주요 논자로 부각되는 이성태는 이와 같은 사회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경향과 ‘시기상조론’ 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온건한 ‘학자적 태도’니 ‘연구적 태도’니 하는 것은 자본계급을 옹호하는 ‘주구’가 되는 것이고 사상과 직접행동을 별개로 사유 하는 것은 ‘불구자’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110) 더 나아가 그는 ‘생’을 즉각적인 계급투쟁론으로 연결시켰다. 이성태는 아 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의 ‘생’의 철학과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글 등에 서 사회운동 상에서 인간의 사회적 감정과 의지론적 측면을 『신생활』에 게재하 였다.111) 예를 들어 그는 오스기의 소설 「鎖工場」을 번역하였는데, 이 소설은 일 본 메이지 사회주의자의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는 이른바 ‘대기주의’를 비판하고 즉각적인 노동운동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112)

. 109) 이순탁 寄,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이성태씨의 논문을 평함」 『동아일보』(동아 일보사, 1923. 3. 30.).

110) 셩태생(이성태), 「想片」 『신생활』 9(신생활사, 1922. 9. 5.).

111) 이성태 역, 「사회생활의 진화」 『신생활』 2(신생활사, 1922. 3. 21.); 쿠로포토킨 원작/ 이성태 역, 「청년에게 소함」 『신생활』 6(신생활사, 1922. 6. 6.): 「크로포트킨의 학설연 구」 『신생활』 7(신생활사, 1922. 7. 5.) 등 참조.

112) 김병진, 앞 논문(2017), 34쪽.

여기에서 ‘쇠사슬’에 속 박된 이들을 ‘기계적 정명론자’로 비판하면서 ‘생’을 자신의 가능성(혹은 미지수) 으로 대비시키는데, 이를 통해서 사회주의 이행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성을 강조하는데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놈들(기계적 정명론자 - 인용자)은 (...) 자기들의 이상하는 새로운 공장조직 이 경제행정의 필연한 결과로 금일의 공장조직의 자연의 후계자로 나타나라리고 밋는다 (...) 다만 이 경제적 행정에 조차서 공장조직과 제도를 변하기만하면 조타 고 밋는다 (...) (나도- 인용자) 기계적 정명론자다 (...) 나의 기계적 정명론의 안에 는 꽤 만흔 미지수가 들어안젓다. 나의 이상의 현실은 이 미지수가 판연하지 안는 동안 필연은 아니다. 다만 다소의 가능성을 띄인 개연이다 (...) 나의 소위 미지수 의 대부분은 인간 그것이다 生의 발전 그것이다. 生의 능력 그것이다 (...) 자아의 능력, 자아의 권위를 자각해서 그 쉴줄을 모르는 발전때문에 싸호는 노력 (...)113)

이성태는 눈앞의 노동문제가 아닌 우선의 산업발달을 강조하는 ‘생산력 증 식론’을 ‘대기주의’와 같은 곳에 위치시키고, 인간의 능동성과 의식적 참여를 의 미하는 ‘생’을 자본주의적 착취를 헤쳐나갈 ‘계급투쟁론’의 이론적 토대로 활용하 고 있다. 즉, 생산력의 증식과 산업발전이라는 사회주의 도래의 조건을 강조하는 ‘생산력 증식론’에 대해 ‘기계론’·‘결정론적’ 해석으로 비판하면서 그 과정에서 즉 각적인 계급투쟁의 동력으로서 ‘생’개념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물산장려운동 국 면에서도 이성태는 물산장려운동에서 ‘생산력 증식론’ 주장이 외래의 자본가계 급 대신 조선인 자본가 중산계급이 새롭게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는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자본 가 계급 또한 노동계급의 ‘敵’임을 의식하고 “계급투쟁의 전선을 분명히 하는 것” 이다.114)

113) RST(이성태), 「쇄공장」 『신생활』 9(신생활사, 1922. 9. 5.), 80-81쪽.

114) 이성태 寄, 「中產階級의 利己的運動 -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3. 3. 20.).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기계론적·결정론적 해석에 대한 ‘의식’은 신생활파 지 식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지점이었다. 정지현(정백)은 야마카와의 해석을 인용하여, 맑스의 역사발전론에서 필연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되어 진행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맑쓰의 유물사관이 단순한 숙명론이 아닌 이유”라고 하 였다. 즉, 맑스가 말하는 사회진화가 필연이지만, “이 필연은 인간이라는 요소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잇는 바의 필연”이었다.115) 정백은 다른 글에서도 인간의 의지와 행동, 그리고 노동계급의 출현을 ‘生의 확충’과 ‘生의 반역’으로 표 현하면서, 이를 통해 ‘生의 장애’와 ‘기계화’, ‘상품화’, ‘노속적 생활’에 대항하여 인 간의 본성을 자각하는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을 주창하였다.116) 이렇듯 신생활파 지식인들에게는 사회주의에 대한 기존 논쟁 지점들을 의식 하면서 특정한 개념어들을 사용하고, ‘계급투쟁론’을 옹호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를 당대 지식인들의 사회주의(맑스주의) 이론의 미숙과 한계라기보다는,117) 사 회주의 발전 방법으로서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인간의 주관적·의식적 측면을 기 존 사상 지형에서 쓰이던 개념어 혹은 비맑스주의적 언어들로 보충하고, 현실 운 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개념어를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순탁 또한 맑스주의 학설의 ‘필연론’을 ‘기계적’·‘자동적’이 라고 보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생’개념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 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소수에 집중됨에 따라 그 종국에는 사회 진보가 정지될 것 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生의 본능’에 따라 향상발전의 충동이 있다고 이야기하 였다. 즉, 이순탁 또한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기존 경향을 의식하 면서, 사회조직의 개조는 사람의 의식적 행동으로부터 실현된다는 점을 강조하 면서 ‘생’을 활용하였다.118)

115) 야마카와히토시 작/정백 역, 「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 『신생활』 9(신생활사, 1922. 9. 5.).

116) 栢(정백), 「권두언 - 인간소유와 반역」 『신생활』 8(신생활사, 1922. 8. 5.). 이성태와 정 지현은 오스기 사카에와 야마카와 히토시 등의 글을 소개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기계 론 및 숙명론 해석을 비판하였다. 그 소개 양상은 박양신, 앞 논문(2012); 박종린, 앞 책(2018) 등 참조.

117) 박종린, 위 책(2018), 89-107쪽; 방기중, 앞 책(1992), 59-61쪽.

118) 이순탁, 「資本主義生產組織의 解剖(16)」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3. 2. 9.).

이처럼 ‘생’ 개념의 사용은 보편적이었으나, 이순탁은 사회주의를 기계적·결정론적으로 보는 것을 학설적으로 비판하고 생산력증식론을 보완하기 위해 ‘생’을 활용하였다. 반대로 신생활파는 현실운동 상에서 우선적 인 경제 발전론을 식민지 조선에서 착취 구조의 생성으로 보고 즉각적인 투쟁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생’을 활용했던 것으로, 각각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개념 사용의 차이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생활파는 왜 ‘생산력증식론’을 비판했을까. 그것은 ‘문화’의 의미 와도 연관되어 보인다. 신생활파는 자본주의 문화론에 의거한 문화의 보편성을 비판하고 계급성을 강조하여 ‘노동자의 문화’이자 ‘민중 문화’ 등의 기표로 표현되 는 ‘신문화’를 대안으로 삼았다. 이 신문화의 내용은 혁명 이후의 소련의 예를 참 조하였지만, 소련은 혁명의 선구임과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혁명에 있어 ‘반면교 사의 대상’이었다.119) 정지현도 소련의 문화시설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유행병적 뽈세뷔슴 환자’가 아니며, 다만 그 목적은 ‘민중문화’ 귀추의 일단을 독자들과 음 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120) 이렇듯 ‘볼셰비즘’을 상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비판의 대상이 된 ‘문화’의 내용이다. 이성태는 현대 인의 생활 불안과 현대 문명 폐해의 원인이 모든 방면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비 인간성’이자 ‘비합리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현대인의 생활 불안은 자본주의 경제 조직에서 기인하지만, 경제·사상생활은 전혀 별개로 구별치 못하는 것이며, 이 는 순연한 개인현상이 아닌 사회현상이 잠재하기 때문이다.121) 그는 인간의 도덕 적·사회적 감정과 사회적 생활의 연관을 중시하고, 자본주의 문화를 개인성의 발현으로 보며 그 대안으로 ‘사회성’을 가진 문화를 주창하였다.122)

119) 나산(김명식), 「19세기 물질상태의 변화와 정치생활」 『신생활』 7(신생활사, 1922. 7. 5.).

120) 정백, 「노농로서아의 문화시설」 『신생활』 6(신생활사, 1922. 6. 6.).

121) 이성태, 「생활의 불안」, 『신생활』 1 임시호(신생활사, 1922. 3. 15.).

122) 이성태, 「현대문화의 방향」 『신생활』 9(신생활사, 1922. 9. 5.).

같은 신생활파 사회주의 지식인인 신일용 또한 현대 부르주아 문화의 성격을 ‘이원론’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사상·존재의 대조, 자연·심령의 대조라는 오해 로 인하여 세계의 사물을 그 진실의 상호관계에서 관찰할 능력을 잃게 만든 것이 현대 문화 결점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 도래로 ‘이원론적’·‘초 자연적’ 사상의 최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23) 이러한 비판 위에서 신생활파 의 ‘신문화’란 소수·계급문화가 아니라 ‘전체문화이며 대중문화’인 것이다.124) 이 렇듯 신생활의 ‘문화’ 개념에서는 근대 문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1910년대 문명 비판의 자장 안에 있던 일반 특징들인 ‘비인간성’과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 엿보 인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신생활파 지식인들이 생산력 증식론을 비판했던 이유 는 기존의 ‘문화’·‘생’ 개념이 발화되던 서구 물질문명과 기계론·결정론 비판의 자장과 연관이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지적하듯이 『동아일보』 등에서 이야기하 는 ‘문화운동론’의 ‘문화’개념에서는 1921년 말을 기점으로 하여 현대문명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실리성을 추구하고 초창기에 나타났던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 한 대결의식이 해소되었는데,125) 이에 대한 구체적 비판으로 ‘계급투쟁론’자들의 ‘신문화론’이 제기된 것이다.

123) 신일용, 「자본주의와 철학사상」 『신생활』 8(신생활사, 1922. 8. 5.).

124) 김명식, 「구문화와 신문화」 『신생활』 2(신생활사, 1922. 3. 21.).

125) 김현주, 앞 책(2020), 292~300쪽.

즉, 이들은 사회주의 발전론의 방법론 상에서 드러 나는 생산력 증식론자들의 근대 물질문명 지향과는 거리를 두고, 전 세계적 자본 주의의 발전과 노동문제의 발현이라는 시각에서 제국 일본으로 편입되어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 된 식민지 조선과 그 노동자라는 지역 자체의 주체적이고 즉각적 인 노동운동론으로서 ‘계급투쟁’을 통해 ‘신문화’를 창출하려 했다. 이렇듯 ‘문화’ 는 문화운동론과 사회주의 운동론, 그리고 사회주의 내부에서 현대·자본주의 문 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었던 개념 투쟁의 주요 도구였던 것이다. 이렇듯 ‘생산력 증식론’ 비판과 즉각적인 ‘계급투쟁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성숙과 산업 발달이라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의 필연성(법칙 성)뿐만 아니라, 이를 추동하는 계급투쟁 상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동 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즉, 결정론·기계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생’과 ‘문화’개념을 활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능동적 역할과 의식적인 ‘투쟁’의 정 당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문화’는 서구 문명의 물질주의적 편향성과 이원 론을 극복하고 그 지향점으로서 전체문화이자 민중문화를 의미하였다. 이렇듯 수용 초기 사회주의는 서구 문명의 이원론, 개인성, 비인간성과 지역의 노동문 제 시기상조론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 그리고 근대(서구)중심적 문명 비판의 ‘문 화’가 형성된 1910년대 사상 지형 속에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 속 에서 사회주의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권리와 본성의 해 방, 그리고 정신적 요소 등이 총체적으로 해결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서 ‘生’과 ‘文化’ 개념이 그 동력이자 목표로서 사회적·운동적 전환을 ‘추동’한 것 이다.

Ⅴ. 맺음말 : 물산장려운동 논쟁 전후 ‘계급투쟁론’의 귀결

1922년 말 식민지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필화사건이 일어나 김명식, 신일용, 유진희 등이 체포되었고, 결국 『신생활』이 폐간되었다. 이성태와 정지현은 『개벽』 으로 지면을 옮겨 1923년 본격적으로 확대된 물산장려논전에 적극 참여하고 중 역을 통한 사회주의 사상 정립에 힘썼다. 특히 이성태와 이순탁은 『동아일보』뿐 만 아니라 각자 『개벽』 등의 잡지 지면을 통해 1923년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각각 계급투쟁론과 생산력증식론을 옹호하면서 논쟁을 지속해나갔다. 이성태의 경우 맑스주의의 언어를 논쟁에서 활용하면서도, 꾸준히 인간의 충동과 감정, 인 간 생활의 개조를 강조하면서 ‘생’개념을 사용하였다.126)

126) 이성태, 「가두의 예술」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24. 12. 1.).

사회주의 수용 초기 사상 지형 속에서 일어난 ‘물산장려논쟁’의 ‘계급투쟁론’ 과 ‘생산력 증식론’ 논쟁은 맑스주의 사상 내부 논쟁이라는 성격만 있는 것이 아 니었다. 즉, 이는 1910년대 이래 사상 지형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중심개념은 ‘生’과 ‘文化’ 개념이었다. 기존 연구에서 맑스주의로 해석된 ‘계급투쟁론’ 은, 당대 지식인의 공통지식으로서 맑스주의뿐만 아니라, 1910년대의 사상의 기 계론·결정론 비판과 총체론, 휴머니즘 철학, 기계적·결정론을 비판한 ‘진보’ 개 념이라는 사상 지형 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대변하는 것이 ‘생’·‘문 화’를 동력이자 지향점으로 전유한 결과 형성된 ‘계급투쟁론’이다. 이러한 개념어 의 활발한 활용은 경제적·물질적인 조건이 비교적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등장과 사회주의 자체의 이행 및 동력을 둘 러싼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개념어를 통해 보았을 때 우리는 당대 사회주의가 여러 ‘차이나는 해석’들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자체를 현재나 서구의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 의의 이해 수준을 통해 평가하기는 어렵다. 대신 기존 논의 지형에서 다른 사상 을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해석의 차이’ 혹은 ‘오해의 점철’ 그 자체가 사 상 수용의 기본 전제라는 견지에서 당대 사회주의를 해석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 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당대 지식인들의 기존 사상과 논의 지형 속에서 각 사 상을 어떻게 활용하고 전유하였는지, ‘수용자의 입장’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이후 잡지·신문 언설에서 ‘生’개념은 비교적 부각되지 않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가 치열한 운동론과 이론의 적용 문제에 있어서 점차 ‘과학적’ 방 법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귀결된 측면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일정 한 맥락 속에서 ‘생’과 ‘문화’ 개념이 1920년대 중반 혹은 1930년대 후반기 사회 주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점도 해명이 필요하다.127)

127) 하필원, 「생의 철학」 『학지광』 26(학지광사, 1925. 5. 3.); 손종진, 「생명주의의 입장에 서 본 정의관」 『학지광』 26(학지광사, 1925. 5. 3.) 글과 백남운(방기중, 앞 책(1992), 59-61쪽.) 등 1920년대 중반까지 ‘생’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지식인의 글이 다수 발견 된다. 그리고 1930년대에 신남철도 ‘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유현상, 「신남철의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이상을 꿈꾸다」 『처음읽는 한국현대철학』(서울, 한국철학사상연 구회, 2015) 등 참조.

이렇듯 다양한 사상 으로 구성되었고 주목받던 개념이었지만 현재 사회주의 사상 연구에서 소거되었던 ‘생’과 ‘문화’의 역동적 의미는 후속 연구의 소재로 남겨둔다. 한편 본 논문의 한계점 또한 명료하다. 개념어를 대상으로 한 논문이 좀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니려면 개념과 역사적 현실 간의 상호 관계를 명료하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당시 사회(운동)사의 연구 사료 및 연구사와의 교차 연구 도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개념 및 담론 분석 위주로 연구되었다. 또한, 문명 비판과 사회주의 형성의 지형을 담고 있는 개념어로서 ‘생’에 비해 ‘문화’가 부차 적으로 다뤄졌다는 점은 부족한 부분이며 주로 단일 개념을 다루는 기존 개념사 연구들과 달리 복수의 개념어 연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고 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한계점들은 추후 연구와 글쓰기 과정에서 고민해야할 지 점들이다.

주제어 : 사회주의, 맑스주의, 생(生), 문화(文化), 노동운동, 계급투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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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deological Context of the Recognition of Labor Problems and Formation of “The Theory of Class Struggle” After the Outbreak of The World War I in Colonial Joseon Kim, Myung-jae (Seoul National Univ.)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consider the formation of the theory of class struggle, through the concepts of “life” and “culture” These concepts reveal the continuity between the ideological context of the 1910s and the idea of socialism in the following years. In the 1910s, Korean students formulated the concepts of “life” and “culture” to condemn materialism and mechanism with reference to philosophy of humanism and dynamic “progress” concepts. When labor issues were raised between 1920 and 1921, some people considered the question premature. Against this argument, others used the concepts of “life” and “culture” to insist that labor movements should be organized immediately. In 1922, the “New Life” group, in opposition to the theory of productive capacity, not only presented the advent of socialism as necessary and inevitable, but also put emphasis on the free will and the subjectivity of human being in realizing socialism. In this respect, the concepts of “life” and “culture” played a crucial role as a driving force as well as the goal of the transformation of society. In conclusion, the theory of class struggle was formulated in colonial Joseon in the context which reflects not only the influences of Marxism, but also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1910s and the debates which took place in the following years

Keywords : Socialism, Marxism, Life, Culture(Kultur), Labor movement, The Theory of Class Struggle

歷 史 學 報 第 250 輯 ( 2021.6 )

(투고일자: 2021.04.30. 심사일자: 2021.05.09. 게재확정일자: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