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아시아・아프리카 발(發) 중립 : 반둥회의
2. 서유럽 발(發) 중립 :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
3. 동유럽 발(發) 중립
1) 동유럽의 변화와 헝가리혁명
2) 유고슬리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강령 초안
맺음말
머리말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와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는 적대적 이고 이분법적인 냉전의 질서가 더욱 견고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처참한 전쟁의 경험과 세계 제3차대전의 위협은 반전(反戰)과 평화를 지 향하며 냉전의 어느 한편에 서기를 거부하는 ‘중립주의(中立主義, neturalism)’ 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1949년 3월 인도의 네루가 “우리는 권력 진영에 동맹을 맺어서는 안된다”고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1)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신 생국들은 “한국전쟁의 비극이 자국에서만큼은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의 경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립주의를 지향했다.2)
서구 중립주의 의 “맹아”는 2차대전의 “참혹한 폐적(廢跡)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유럽 인들에게 “1951년 소련의 원폭 소유 발표와 동시에 원자력 시대가 가지는 전율적 파괴력”에 따른 “전쟁의 참화를 피하려는 염전(厭戰)주의 속에서” 시작됐다.3)
1956년 7월 주한미국대사관은 태국의 장래를 우려하면서 “살 금살던 기던 중립주의가 이제는 기지를 않고 뛰기 시작하고 있다”고 표현 하기도 했다.4)
1) 네루 발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should not align ourselves with what are called power blocs.” 백원담, 2022 「전후 아시아에서 ‘중립’의 이몽과 비동맹운동: 한국전쟁 종전에서 인도 요인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138, 196쪽
2) 백원담, 2022 「전후 아시아에서 ‘중립’의 이몽과 비동맹운동: 한국전쟁 종전에서 인도 요인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138, 196, 206쪽
3) 「근대 서구 중립주의(中立主義)의 정체(正體)」(上) 조선일보 1955년 8월 30일, 1면 이 칼럼은 공군본부정보국 차장 박병식(朴炳植)이 3회에 걸쳐에 기고한 것 중 첫 번째 글로, 당대 서구의 중립주의의 발흥 양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4) 「점차 대두하는 중립주의」 조선일보 1956년 7월 24일, 1면
이처럼 본고는 6・25전쟁 이후 1950년대 지구적 차원에서 발흥한 중립주의에 대해 남한과 북한이 각각 어떠한 인식과 반응을 보였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950년대 중립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다음의 세 사건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다.
이 회의는 냉전 시기 최초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국제회의로 냉전의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거부하는 ‘제3세력’의 집단적・조직적 현실화였 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최종의정서」의 ‘평화 10원칙’에는 군사적・외교 적・경제적 측면에서 중립의 내용이 포함됐다. 둘째 반둥회의 한달 후인 1955년 5월 실현된 오스트리아 중립화 통일이 다.
오스트리아는 어떠한 군사동맹에 참석하거나 자국 영토에 어떤 외국 군사 기지의 창설도 허용치 않는다는 중립 원칙하에 독립을 달성했다.
서유럽에서 현실화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은 전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 았다.
셋째 공산진영에서 발생한 1956년 10월 헝가리혁명과 1958년 3월 유고 슬리비아 공산주의자 동맹(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이 새 로운 강령 초안을 발표한 사건이다.
헝가리혁명에 성공한 너지 임레(Nagy Imre) 수상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며 대외적 중립을 선포했다.
또한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펼쳐온 티토(Josip Broz Tito) 대통령 하의 유고슬 라비아에서 발표한 수정된 정책강령은 외교정책에서 ‘동서 진영의 블록정 책’에 반대함을 명시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립주의는 신생 독립국이 대다수였던 아시아・아프리 카 지역에서는 반둥회의라는 국제회의로, 자유진영인 서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로, 공산진영인 동유럽에서는 헝가리혁명과 유고슬라비 아의 새로운 정책강령이라는 형태로 등장했다.
이러한 세계사적 사건들에 대해 남・북한 정부는 큰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심했다.
그런데 남・북한은 6・25전쟁이라는 열전(熱戰)을 갓 겪은 냉전의 최전선이 었을 뿐 아니라 신생국이자 한반도 분단이라는 위치에 함께 놓여 있었다.
따라서 본고는 1950년대 남・북한이 중립주의에 보인 반응을 분석할 때, 냉 전과 탈식민 그리고 한반도 분단과 통일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어떠한 ‘대칭적’ 양상을 보이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1950년대 중립주의 관련한 한국현대사 연구는 남한과 북한을 각기 다루어왔다.
북한 관련하여 2018년 홍종욱의 연구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50년대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분석했다.
그는 북 한은 1955년 반둥회의를 정점으로 반식민주의가 고양됨으로써 냉전 논리가 어느 정도 억제되었으나, 1950년대 후반 헝가리혁명과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내세운 중립과 평화공존을 수정주의로 비판함으로써 냉전의 진영 논리에 다시 강하게 제약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5)
그의 연구는 처음으로 북한이 생산한 1차사료를 활용하여 북한이 이해하는 반둥회의와 중립주의, 비동맹의 시각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그런데 이 연 구는 1950년대 지구적 냉전질서 하에서 북한이라는 위치를 고려하지 못했 기 때문에, 반둥회의와 헝가리・유고슬라비아에 대해 보인 북한의 반응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측면이 있다.
김태경의 연구는 냉전기 북한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인식을 1950년대 부터 1970년대까지 분석했다.
특히 양국의 관계가 소련이 1956년 헝가리혁 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 균열을 보이다가 1958년 유고슬라비아의 동맹 강령 초안 수정을 전후하여 적대관계로 전환했음을 밝혔다.6)
5) 홍종욱, 2018 「1950년대 북한의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61, 398~399쪽
6) 김태경, 2021 「비동맹운동 60주년에 돌아보는 냉전기 북한의 유고슬라비아에 대 한 인식 변화」 역사문제연구 46
그런데 이 연 구의 초점이 북한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 양상과 평화 문제에 집중됐기 때 문에 중립 관련한 북한의 구체적인 인식과 논리를 밝히지는 못했다.
남한 관련하여 2010년 이후 반둥회의를 다룬 연구들이 상당히 축적됐 다. 7)
특히 장세진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8)
7) 김학재, 2013 「동아시아 냉전의 세 가지 평화 모델」 역사비평 105 ; 임예준, 2015 「1955년 반둥회의가 유엔체제와 국제법질서에 미친 영향」, 국제법평론 42 ;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반둥회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했는지 다룬 연구들 도 제출됐다. 이병한, 2010 「‘두 개의 중국’과 화교정책의 분기: 반둥회의(1955) 전후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45 ; 옥창준, 2015 「미국으로 간 “반둥 정 신”: 체스터 보울즈의 제3세계」 사회와역사 108
8) 장세진, 2013 「안티테제로서의 “반둥정신(Bandung Spirit)”과 한국의 아시아 상상 (1955~1965)」 사이間SAI 15
그는 1955년 제1차 반둥회의 개최부터 1965년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개최가 무산되는 시점까지 생산된 지식인의 관련 담론을 분석했다.
특히 그의 연구는 남한 지식인들 이 1955년 반둥회의의 핵심 정신이던 반식민의 연대를 ‘인터내셔널리즘’으 로 이어가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아쉽게도 그의 연구는 신문자료에 의존했 기 때문에 당시 남한 정부의 구체적인 인식과 반응을 다루지 못했다.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화 통일 관련해서는 남한에서는 당대부터 큰 관심을 보였으며, 최근까지도 여러 연구들이 진행됐다.9)
그러나 대체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사례’로서 주목받았을 뿐 냉전사 맥락에서 연구되지 못했 다.
특히 북한의 오스트리아 중립화통일 관련한 인식은 아직까지 전혀 다 뤄지지 못했다.
또한 1956년 발생한 헝가리혁명도 당시 남한의 반응은 연 구됐으나, 북한의 인식은 밝혀지지 못했다.10)
1950년대 대두된 중립주의는 대부분 평화 문제와 함께 논의됐다.
1950 년대 평화 관련한 연구로 정용욱은 1950년대 북한 평화운동의 전개 양상 을 밝혔다.
그는 북한의 평화운동의 강조점이 1955년 반둥회의를 기점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으로 변화했음을 제시했다. 특히 중립주의 관련하여 그는 북한이 “아시아에서 비동맹 국가들의 출현을 평화공존의 승리로 파 악”했다고 언급했다.11)
9) 이서행, 2005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국정책으로 본 통일방안」 평화학연구 6 ; 안병영, 2013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문학과지성사 ; 박태균, 2019 「미국의 대한정책을 통해 본 한반도 중립국화 방안」 한국과국제정치 35(3)
10) 김도민, 2017 「1956년 헝가리 사태에 대한 남한의 인식과 대응」 역사비평 119
11) 정용욱, 2014 「6・25전쟁 이전 북한의 평화운동」 역사비평 106 : 「6・25전쟁~ 1950년대 후반 북한의 평화운동」 역사와현실 91. 그 외 1950년대 남북한의 평 화와 관련한 연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김태우, 2019 「1948~50년 사회주의진영의 평화론과 평화운동의 동아시아적 수용과 변용」 동북아문화연구 58 ; 김태경, 2020 「1950년대 북한의 ‘평화공존의 마음들’」 개념과소통 26
그렇다면 왜 북한은 중립주의 국가들의 출현을 평화공존의 ‘승리’로 판단했을까.
이는 본고에서 남・북한이 중립주의를 지향 하는 국가들의 출현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 전체적인 양상을 드러냄으로 써 이해가능할 것이다.
즉 본고는 남・북한이 중립과 평화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도 드러내고자 한다.
이처럼 기존의 1950년대 한국현대사 연구들은 남한과 북한을 따로 다루 었으나, 본고는 남・북한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12)
특히 본고가 주목하는 중립주의라는 연구대상은 어느 한편의 ‘승리사관’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지구적 냉전과 탈식민, 남북한 관계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 하다고 본다.
본고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정부의 인식과 반응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정부가 생산한 공식 문서를 기본 자료로 삼아 분석했다.
또한 남・북한 정부의 인식을 더욱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립 이 발원한 상대국이 생산한 자료의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지리적・언어적 제약 때문에, 본고는 반둥회의 주최국인 인도네시아가 영문으로 발행한 반둥 공보(Bandung Bulletin)만 확보하여 활용할 수 있었다.13)
12) 남북관계사의 장점은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빠지거나 자국 중심주의 혹은 일방에 의한 승리의 냉전사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김승렬・신주백 외 지음, 2005 분단의 두얼굴, 역사비평사, 13쪽
13) 1955년 4월 반둥회의 발기국이자 주최국 인도네시아 외무부(ministry of foreign affairs)는 1955년 3월부터 6월까지 회의 관련한 소식을 전하는 Bandung Bulletin 를 총 10회 발행했다. 이 잡지는 반둥회의 개최 6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BANDUNG+60’ 웹사이트’(https://bandung60.wordpress.com/)에서 피디에프 파일 로 모두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 웹사이트는 캐나다 비숍대학교(Bishop’s University) 역사학부(Department of History) 웹스터(David Webster)가 제작했다. 1
1. 아시아・아프리카 발(發) 중립 : 반둥회의
1953년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정전(停戰)을 이루었고, 1954년 인도차이 나에서는 휴전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아시아에서는 두 개의 열전을 거치면서 더 이상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반전 평화의 흐름이 켜져갔다.
먼저 중국은 ‘평화적 공존의 5개 원칙’이라는 새로운 외교정책에 기반하여 아시아 국가들과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다.
평화적 공존의 5개 원 칙은 주권과 영토 완정에 대한 상호존중, 상호 불침범, 내정에 대한 상호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적 공존을 의미했다.
1954년 6월 중국 주은래는 인도와 버마를 방문하여 각각 양국간 ‘5개원칙’에 합의를 보았다.14)
이어 1954년 4월 28일부터 5월 2일까지 실론[스리랑카]・인도네시아・인도・버마・ 파키스탄이 참석한 콜롬보회의가 열렸다.15)
1954년 8월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 한설야는 당시 진행된 일련 의 사건에 대하여 모두 “평화 역량의 거대한 승리”라고 규정했다.16)
14)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지음, 2014 중국공산당역사: 상, 홍순도・홍광훈 옮김, 서교출판사, 538~540쪽
15) 홍종욱, 2018 「1950년대 북한의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61, 383쪽
16) 한설야의 이 시기 직위는 로동신문 1954년 7월 16일, 1면 참조.
제네 바회담에 따른 인도차이나 전쟁의 휴전은 민족해방투쟁을 펼친 인도차이나 인민들이 승리한 결과였다.
또한 중국이 제창하는 평화적 공존의 5개 원칙 및 중국과 인도 그리고 중국과 버마 간의 회담은 “평화와 민족적 독립을 념원하는 자유 애호 아세아 인민들의 결의의 표시”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콜롬보회의에 참여한 국가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조작하려는 동남아세 아 군사동맹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할 것을 표명”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그가 보기에 이제 “아세아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략탈의 대상으로 되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탈식민과 평화 그리고 중립을 내용으로 하 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17)
이처럼 중립과 관련해 그는 이들 국가들이 미국이라는 자유진영의 군사동맹에서 포함되지 않으려는 중립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커져가는 평화와 중립을 강하게 비 판했다.
1954년 8월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은 먼저 1954년 세 계 정세를 소련 “위성국가 숫자의 놀랄만한 증가”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저지할 수 없”으니 “방치해 두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진 단했다.18)
그는 반공주의자이던 저명한 구주의 몇몇 정치가들조차 현재 공 존주의자, 유화주의자, 중립자 등으로 변신했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1954년 3월 3일 영국은 “미국에 대하여 공산제국과의 통상제한을 완화하도록 공식 적인 압력”을 가했다.19)
17) 한설야, 「평화 력량의 거대한 승리」 근로자 8, 1954년 8월(국사편찬위원회, 2008 북한관계사료집 58, 403쪽)
18) 이승만, 「상항(桑港) 콤몬웰스 클라브에서의 연설」, 연설일자(1954.8.7.) ‘대통령기 록관〉기록컬렉션〉연설기록’(https://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 index.jsp) (검색일:2022.12.14.)
19) 「대공통상(對共通商)의 완화, 영(英)서 미(美)에 공식적 압력」 경향신문 1954년 3월 5일, 1면
이어 이승만은 과거 “중립이란 단어”가 “하나의 명예스러운 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재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양극적인 냉전적 투쟁에서 “중립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도 1954년 거세지는 평화의 목소리에는 “우리 모두가 다 평화를 소망”하기 때문에 강력한 호소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세 력이 외치는 평화는 “사상통제와 세뇌공작”에 희생되어 개성도 희망도 없는 “허위 평화”라고 규정했다.
1954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콜롬보회의에 참석했던 5개국 수상들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보고르에서 다시 만났다.
12월 29일 「보고르회의 공동선언(Joint Communique of the Bogor Conference)」이 발표됐다.
이들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폭넓고 지리적인 기반을 가져야 하며 독립 정부를 가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초대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수상들은 총 25개국을 초대하기로 결정했다.20)
그런데 초청 대상국에서 분단국이며 전쟁을 겪은 아시아 국가 중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모두 포함됐으나, 남한과 북한은 제외됐다.
주최국 인도네시아 수상 알리 사스트 로아미조조(Ali Sastroamidjojo)에 따르면, 분단국가는 기본적으로 제외하려 했으나 콜롬보회의 때부터 인도차이나 문제에 전념해온 발기국의 수상들은 “특별한 책임감(special responsibility)”을 느꼈기 때문에 남베트남과 북베트 남을 포함하여 인도차이나 국가 모두를 초청했다고 한다.21)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인도네시아 반 둥의 자유회관(Gedung Merdeka)에서 열렸다.
발기국 5개국과 초대 받은 25개국 중에서 중앙아프리카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 29개국이 참가 했다.
회의 마지막날 「반둥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최종 의정서」(Final Communique of Asian-African Conference of Bandung, 이하 「최종 의정서 」)가 발표됐다.22)
20) 25개 참가국은 아프가니스탄・캄보디아・중앙아프리카연방(Central African Federation)・중국・이집트・에티오피아・골드코스트(Gold Coast)・이란・이라크・일본・요르 단・라오스・레바논・리베리아・리비아・네팔・필리핀・사우디아라비아・수단・시리아・ 태국・터키・북베트남・남베트남・예멘 등이었다. Bandung Bulletin Issue 1, March 1955, p.5
21) Bandung Bulletin Issue 1, March 1955, p.7
22) 반둥회의 최종의정서 영어본은 다음에 실려 있다. Bandung Bulletin Issue 9, 24 April 1955, pp.2~6. 로동신문은 1955년 4월 25일자 4면에 최종의정서의 전문 을 번역하여 실었다.
「최종 의정서」는 전문(前文)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지닌 공통의 이익과 관심사를 숙고하고 그 들 인민의 경제적・문화적・정치적 협력을 최대로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최종 의정서」는 A.경제 협력 B.문화 협 력 C.인권과 자결 D.종속국 인민들의 문제 E.기타문제 F.세계 평화와 협 력의 증진 G.세계 평화와 협력의 증진에 관한 선언 등 총 7개 항목으로 작성됐다.23)
반둥회의 발기국 중 하나이자 주최국 인도네시아는 반둥회의라는 ‘사건’ 이 가능했던 이유를 동남아 식민지 국가들이 그동안 경제적 낙후 및 국제 적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서 찾았다.24)
즉 반둥회의는 탈 식민 국가들이 만나서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식민지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협력과 발전의 모델을 제시하는 국제회의였다.
또한 아직까지 완료 되지 못한 식민지의 자결과 독립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다.
나아가 식민 주의의 평화적인 철폐뿐 아니라 현존하는 국제 긴장 및 핵무기가 사라진 세계 평화를 염원했다.
「최종 의정서」는 반식민의 전제조건인 평화의 실현은 세계 모든 국가들 이 전쟁을 일삼는 냉전적 적대감에 기반한 진영론에서 벗어나 중립주의를 지향할 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최종 의정서」는 군사적・외교적・경제적 영역 모두에서 블록이 형성되는 것에 반대했다. 제1항은 경제협력에서 지 역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폐쇄적인 경제 블록의 형성에는 반대했다.
그리 고 군사적・외교적 중립과 관련한 원칙은 “어떤 강대국의 특정한 이익에 봉 사하는 집단적 방어 제도의 불용”, “한 국가가 다른 나라에 압력을 행사하 는 것을 금지,”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공격 행위나 위협 혹 은 힘의 사용을 금지” 등으로 표현됐다.25)
23) 한국어 번역은 다음 책을 참고했다. 이동기, 2013 20세기 평화텍스트 15선 아카 넷, 100~112쪽 24) Bandung Bulletin Issue 1, March 1955, p.2
25) 이동기, 2013 20세기 평화텍스트 15선 아카넷, 111쪽
북한은 반둥회의에 초청받지 못했지만, 로동신문은 관련 소식을 중국의 신화사 통신을 통해 연일 자세히 보도했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 가로서 반식민을 표방하는 반둥회의의 개최를 방해하는 반면, 소련은 반식 민주의와 민족 자주권을 옹호하기 때문에 반둥회의를 적극 지지한다고 주 장했다.26)
반둥회의 폐막 직후, 신문은 반둥회의는 ‘평화적 공존’과 ‘민족 적 독립과 자유에 대한 공통적인 지향’을 보여줬다며, 즉 평화와 반식민을 가장 중요한 성과로 제시했다.27)
반둥회의가 열린 지 1년이 지난 1956년 4 월 23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 에서 반둥회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작년 4월, 29개국 대표가 참가한 반둥회의는 식민주의를 반대하여 공고한 평화를 지향하는 수억만 아세아, 아프리카 인민들의 일치한 염원을 표명하였으 며 유명한 5개 원칙에 입각한 이 지역 인민들의 단결을 뚜렷이 보여주었으며 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28)
26) 로동신문은 소련이 반둥회의에 보내는 축전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5개 원칙은 평화와 민족적 독립을 위한 아세아 및 아프리카 인민들의 견결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 원칙들은 또한 아세아 외부 국가들로부터도 더욱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 쏘련은 각국간의 관계를 평등, 내정에 대한 불간섭, 불 가침, 타국의 영토 안정에 대한 침범의 거부 및 주권과 민족적 독립의 충분한 존중 등 제 원칙의 토대 위에 설정하려는 아세아 및 아프리카 제국의 노력에 변함없는 동정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 「쏘련 및 가맹 공화국들의 최고 쏘베트 상임 위원회 로부터 아세아 및 아프리카 회의에 축전」 로동신문 1955년 4월 20일, 4면
27) 「아세아 및 아프리카 회의의 성과를 환영한다」 로동신문 1955년 4월 27일, 1면 ; 「아세아 및 아프리카 회의의 성과는 무엇을 말하여주는가」 로동신문 1955년 4 월 29일, 4면
28) 「자료102: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서 진술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결 보고-1956년 4월 23일」(김준엽 편, 1974 북한연구자료집 2권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 683~684쪽)
로동신문의 평가처럼, 김일성도 반둥회의 성과로 반식민과 평화를 제 시했다.
물론 그는 한설야와 달리 구체적으로 반둥회의의 중립이 어떠한 효과를 낳는지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그는 반둥회의 가 ‘제국주의’라는 냉전의 적을 타격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긍정적으로 평 가했다.
이처럼 김일성의 반둥회의 평가의 기준은 냉전의 반대 편인 자유 진영의 이른바 ‘제국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였다.
한편 남한에서 정부관계자로서 1955년 1월 6일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이 반둥회의 관련하여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반둥회의가 열린다면 “중공으로 하여금 제마음대로 선전을 자행케 하는 동시에 중공의 선전반향권으로 하여금 아세아 도처에 있는 그들의 간첩과 공작원을 고무”시켜줄 뿐 아니 라 “가까운 장래에” 반둥회의에 참석하는 나라들을 “병탄(併呑)하려는 사건 을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9)
1955년 3월 1일 이승만은 제36회 3・1절 기념사에서 반둥회의를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현재 평화나 중립 같은 “새로운 파동이” 세계에서 일어나 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전처럼 그는 남한이 “세계전쟁 전선(前線)” 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공상적 안전인 중립 지위”나 “침략자에게 양보해서 정하는 평화”가 이뤄진다면 모두 “패망의 첩경”이라고 주장했다.30)
1955년 4월 18일 반둥회의의 개최까지 남한 정부는 “아무런 의사표시” 도 하지 않았다.
반면 4월 18일 국회는 제29차 회의에서 첫번째 토의 안건 으로 「반둥회의 개최 조사・연구에 관한 건」을 논의한 후, 외무위원회에 위 촉하여 조사케 했다.
국내 신문에서는 “연일 반둥회의가 대서특필”되고 있 었다.31)
29) 「아・아(亞・阿)회담 비난 양(梁)주미대사」 동아일보 1955년 1월 8일, 1면
30) 이승만, 「제36회 3・1절 기념사」 연설일자(1955년 3월 1일) ‘대통령기록관〉기록 컬렉션〉연설기록’(https://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이하 웹주소 생략, 검색일: 2022.12.14.) 31) 「제3대국회, 제20회-제29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1955년 4월 18일, 2쪽 대한민국 국회는 ‘국회회의록’(https://likms.assembly.go.kr) 사이트에서 회의 속기록 파일을 ‘원본 PDF’와 한문을 한글로 바꾼 ‘한글 파일본’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각기 쪽 수가 상이하기 때문에 이하 한글 파일본을 기준으로 쪽수를 적었다.
반둥회의 폐막일(24일)에 침묵하던 남한 정부는 갈홍기 공보실장을 통해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남한 정부는 “현재 반둥에서 개최되고 있는 아・아 (亞・阿)회의는 공산진영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또 하나의 무모한 기도”이기 때문에 “동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32)
또한 4월 25일 변영태 외무부 장관도 비판에 동참했다. 그는 반둥회의가 표방한 ‘반식민・ 평화・중립’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반둥회의가 평화와 반식민을 내세 우지만, 정작 공산침략자 “중공”과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을 초청하면서 도 희생자 남한을 빼놓은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즉 그는 반둥 회의가 냉전의 어느 편에 서기를 거부하며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산진영의 중국을 초청했기 때문에, 이미 공산측에 유리한 선전장이 되어버렸다고 비 판했다.
외려 그는 반둥회의가 남한을 초청하지 않은 것이 우리 입장을 존 중해준 “호의”라고 해석했다.
왜냐하면 남한 정부는 “공산침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앉기를 거절하는 확고한 방침”에 따라 초청됐어도 어차피 참 석을 거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반둥회의에 참가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 터키 등 “자유우방국가”들에게 앞으로는 “공산침략자들의 면영(面影)을 도와주는”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말기를 요청했다.33)
32) 「대공공존(對共共存)이란 무모」 동아일보 1955년 4월 25일, 1면
33) 「현재의 조직엔 흥미없다」 동아일보 1955년 4월 26일, 1면
흥미롭게도 변영태는 반둥회의가 표방한 반식민의 모순을 지적하는 근 거로 일본을 제시했다.
이 논리는 앞서 갈홍기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갈 홍기는 반둥회의에 참석한 일본이 자유진영의 우방인 “미국을 배반”한 채, “새로운 아세아제국(帝國)을 몽상”하며 “공산주의자들과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이 반둥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일본이 자유진영을 배신한 채 공산세력과 가까워지고 있으며 나아가 새로운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주장은 ‘반식민=반공=반일’이자 ‘제국주의=친일=친공’이라는 논리의 구조를 취했다.34)
34) 「대공공존(對共共存)이란 무모」 동아일보 1955년 4월 25일, 1면
이처럼 1955년 반둥회의에 대해 북한은 정부수립 이전부터 주목해온 평 화와 민족해방운동의 맥락에서 적극 공명하며 지지했다.
반면 남한은 제3세 력이 주창하는 중립과 평화는 자기 기만적인 행동일 뿐 아니라 식민제국이 던 일본의 초청은 그들이 내세운 반식민의 주장과도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2. 서유럽 발(發) 중립 :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
1945년 7월 4일 “연합국 4개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모스크바 선 언」(1943.11.1.)에 준거하여 제1차 통제조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4개국 에 의한 오스트리아 “분할점령 지역을 획정했다.”
이후 1953년까지 연합국 들은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조약 체결을 둘러싸 고 지리한 협상을 전개했다.
1947년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대통령 레너 (Karl Renner)는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스위스 식 중립화안’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비쳤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일관되게 중립화 의사를 천명했다.
1949년 4월 NATO가 출범하고, 9월 독일연방공 화국(서독)이 탄생했다.
1950년대 초 동서 간의 냉전이 가열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국가조약 협 상은 진전되지 못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NATO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대통령과 의회 모두 일관되게 동서 냉전에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며 ‘중 립화’를 해결 방안으로 제시했다.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1954년부터 오 스트리아 국가조약 협상은 진전됐으며, 1955년 초 소련이 제의하고 오스트리아가 확인함으로써 중립화정책이 포함된 합의 각서가 발표됐다.
1955년 5월 15일 빈의 벨베데레(Belvedere) 궁전에 모인 4개국 외상들은 오스트리 아와 ‘대오(對墺)국가조약’을 체결했다.
소련과 합의대로 “1955년 6월 7일 오스트리아 의회가 만장일치로 영세중립을 선포”했으며, 이어 “10월 26일 ‘오스트리아 중립에 관한 헌법’을 통과시켰다.”
10월 23일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했던 4개 연합군은 철수했다.”35)
이렇게 오스트리아는 분할점령 된 지 10년 만에 ‘중립화통일’과 ‘독립’을 실현했다.
북한 로동신문은 오스트리아 문제 해결이 ‘상시적 중립’이라는 원칙에 따라 해결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오스트리아가 어떠한 군사동맹에 참석 하거나 자국 영토에 어떤 외국 군사 기지 창설도 허용치 않는다는 중립 원 칙하에 독립이 실현됐다고 보았다.36)
나아가 신문이 보기에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은 서독 여론을 “중립주의”로 기울게 만들었으며, 이탈리아도 중립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신문은 오스트리아에서 발원 한 중립이 서유럽에 더욱 거대한 중립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긍정 적으로 평가했다.
비록 “우려”를 나타낸 것이었지만, 남한의 조선일보도 미국 관변 측의 평가를 인용하면서 “오지리[오스트리아]에 대한 중립 부여는 서방제국에 대하여 중대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했다.37)
이처럼 서독과 이탈 리아에서 중립주의 원칙이 대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를, 로동신문은 다 음과 같이 설명했다.38)
35) 안병영, 2013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문학과지성사, 140~156쪽 ; 「대오(對墺) 강화 조약전문승인」 조선일보 1955년 5월 16일, 1면
36) 「대오 국가 조약 체결을 위한 4렬강 외상회의에서」 로동신문 1955년 5월 17일, 4면 ; 「쏘련 미국, 영국, 불란서 및 오지리 대표들이 윈나에서 대오 국가 조약에 조인」 로동신문 1955년 5월 17일, 4면
37) 「정략재검토필지(政略再檢討必至) : 미, 소련의 중립화공세에 대비」 조선일보 1955년 5월 26일, 1면
(…) 구라파와 중앙부에서 특히 서부 독일과 이태리에서 중립의 원칙이 대대적 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서서[스위스]의 력사적 성 립은 중립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리득을 가져다 주는가 하는 것을 명백 히 보여 주고 있다. 중립적 서서는 구라파의 정세가 심각한 변동을 일으킨 조건 하에서도 근 1세기 긴 동안이나 평화를 보장 받고 있다. 오늘날 미국 지배층이 조작한 침략적인 군사 집단에서 빠져나와 중립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구라파 를 위하여 유리할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십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 영의 침략 계층은 대오 국가 조약의 체결로 구라파의 중앙부 에 서서와 더불어 중립적 오지리[오스트리아]가 존재하게 되였으며 그에 따라 이러한 중립의 원칙을 지키는 운동이 구라파 정치 무대의 의사 일정에 오르게 된 데 대하여 극히 불안과 초조감을 가지게 되였다. 중립의 원칙은 침략 정책 수행 도상의 거대한 장애로 되는 것이다. (…) (밑줄은 인용자)
인용문처럼 신문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중립이 “미국 지배층이 조작 한 침략적인 군사 집단에서” 빠져나왔다는 점일 강조했다.
나아가 이 기사 는 오스트리아 문제 해결은 바로 소련이 추구해온 “평화애호정책의 거대한 성과”라고 규정했다.39)
38) 홍성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 오지리의 중립이 구라파에 미친 영향에 대 하여」 로동신문 1955년 7월 3일, 4면
39) 같은 자료
이처럼 북한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을 약화 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력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중 립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남한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은 큰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55년 5월 16일 자유당 정기원 의원 외 9명이 제안한 「오지리 독립회복 을 축하하는 멧세지(안)」이라는 긴급동의안이 18일 열린 국회본회의에서 토의됐다.
먼저 메시지는 “대한민국 국회는” 오스트리아가 “숙망한 독립을 회복한 데” “충심으로 축하”드린다고 했다.
이어 메시지는 오스트리아가 4 개국의 공동점령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은 채,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말미암아 종전 후에도 장구한 시일 외군의 점령하에서 벗어 나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았다.40)
본회의에서는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발송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펼 쳐졌다.
무소속 강세형 의원은 “중립국의 성격이라는 것”이 가지는 “애매” 함을 거론했다.
그는 확실한 반공국가인 서독에 국회의 축하 메시지를 발 송하는 데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 되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립국 오스트리아가 만약 공산진영에 가담한다면, 축하 메시지를 보낸 우리 국회에도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 다며 발송보류를 요청했다.
제시된 논거는 달랐지만 자유당 박영종 의원도 발송보류를 요청했다.
그 는 오스트리아가 “자유진영으로 들어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었다.
다 만 그는 국회가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면 “국가가 외교적으로” 국회 결정에 기반해야 하기 때문에 차후에 “중대한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외교전략적 이유를 제시했다.41)
또한 외무위원장 정기원은 “오지리가 쏘련에 10여 년 동안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아주 여러 가지 어려운 난경을 당하다가 주권 회복하는 날에 다시금 쏘련 편에 들어가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 리아가 “다시 자유진영에 들어와 가지고 우리와 같이 어깨를 같이”하리라 는 “그런 자신력을 가지고” 메시지안을 제출했다고 밝혔다.42)
40) 「제3대국회, 제20회-제46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1955년 5월 18일, 1쪽
41) 「제3대국회, 제20회-제46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1955년 5월 18일, 13쪽
42) 「제3대국회, 제20회-제46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1955년 5월 18일, 14쪽
이처럼 메시지 발송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의원 모두 중립국 오스트리 아가 자유진영으로 넘어올지 아니면 공산진영으로 넘어갈지를 판단의 준거 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인식 하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중립국으로 계속 남아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동료 의 원들과 달리 자유당 도진희 의원은 메시지 발송을 찬성하며 다음과 같이주장했다.
약소국가(弱小國家)인 오지리[오스트리아]가 강대국가 세력에 휩쓸려서 17년 동 안을 신음하다가 천우인력으로 이번에 주권을 찾게 된 이 마당에 있어서 우리 가 국제적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견지에서 멧세지를 보내자는 데에 강세형 박사 는 이것을 반대했읍니다. (…) 나는 경고하니 약소국가의 한 국민으로서 약소국 가를 도웁는 견지에서 강세형 박사의 발언을 열 번 스무 번 반대하면서 이 안 을 선배 여러분께서 지지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밑 줄은 인용자)43)
도진희는 강세형이 과거 히틀러 밑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강대국 시각에 갇혀 긴급동의안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냉전의 진영논리보 다 강대국에 신음해온 동일한 ‘약소국가’라는 동정(同情)의 관점에서 메시 지 발송을 찬성했다.
결국 이 안은 재석의원 106인 중 찬성 68표, 반대 1표 (강세형)로 가결됐다.
이는 도진희의 약소국가의 동정론보다 경향신문의 평가대로 “현 오지리가 자유진영에의 가맹을 열절히 희구한다는 점”이 “참 작”된 것으로 보인다.44)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6・25사변 제5주년 기념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 문제를 언급했다.45)
43) 「제3대국회, 제20회-제46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1955년 5월 18일, 14쪽
44) 「오지리 독립에 국회서 축하 멧세지」 경향신문 1955년 5월 19일, 1면
45) 이승만, 「6・25사변 제5주년 기념사」 연설일자(1955년 6월 25일) ‘대통령기록관〉 기록컬렉션〉연설기록’(검색일: 2022.12.14.)
그는 유럽지역에서 거세지는 공산세력의 ‘중립공세’로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을 규정했다.
그가 보기에 중립화 란 공산세력이 “자유세계의 방위할 수단”을 없애버림으로써 공산화하려는 전략이었다.
나아가 그는 중립화라는 공산화 전략이 오스트리아를 넘어 차 후 독일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1955년 8월 15일 이승만은 제10회 광복절 기념사에서 공산당이 “중립주 의”를 활용하여 냉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냉전에서 공산진 영이 승리전략으로 “아직 공산군의 속박 받지 않은 백성들을 중립국가로 만들어 빗그러” 매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소련이 이러한 전략 을 성공시키면서 “계속해나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공산당은 자유진영의 일부를 “떼어내서 불완전한 중립국 자격으로 만들어놓는”, 즉 자유진영을 분열시키는 전략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모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은 중립공세라는 전술의 배후에는 ‘평화적 공존주의’라는 전 략이 있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평화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했다.46)
46) 이승만, 「제10회 광복절 기념사」 연설일자(1955년 8월 15일) ‘대통령기록관〉기록 컬렉션〉연설기록’(검색일: 2022.12.14.)
첫째 그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평화적 공존을 ‘위장평화’로 규정했다.
즉 공 산진영이 주창하는 평화는 자유진영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세계지 배를 위한 위장전략이었다.
둘째 공산당과 협상으로 만들어낸 ‘거짓평화’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판문점의 휴전회담이었다.
“타협과 양보 로 잠시 평화”가 실현된 듯 보이지만, 이는 가짜평화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공산당은 실질적인 문제해결 없이 전쟁을 “잠시 연기”한 후, 그동안 공산군을 “늘려” “마침내 적을” 정복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셋째 인도 수상 네루가 퍼트리는 “타조(駝鳥)의 평화”가 있었 다.
이승만은 타조가 “머리를 모래 속에 묻어놓고 크게 부르짖기를 위험한 것이 조금도 없다”라고 생각하듯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평화이니 중립 주의”를 타조의 평화라고 규정했다.
마지막으로 미국 대통령이 주장하는 평화가 있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양편에서 서로 전쟁이 유해무익(有害無 益)한 것을 깨닫고 각각” “무력을 쓰지 않고 자기의 평화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승만에게는 같은 진영의 동맹국 미국에서 발원하는 평화만이진정한 평화일 뿐, 적대 진영의 공산당이나 중립국에서 발원하는 평화는 모두 공산세력을 이롭게 하는 평화공세인 것이었다.
물론 그도 현재 “평화 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데는 동의했 다.
특히 그는 우리가 “근대 전쟁 중으로는 다른 나라보다 가장 많은 희생 을 당했고 아직도 우리 인명과 경제에 말할 수 없는 참상”을 겪고 있기 때 문에, 평화의 호소력도 크다는 점을 인정했다.
요컨대 자유진영인 서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 발원한 중립주의는 서독을 거쳐 이탈리아 등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중립주의가 자유진영 내로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칭적으로 남한의 대통령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자유진영을 분열시키는 중립・평화의 ‘공세’라며 비판했다.
3. 동유럽 발(發) 중립
1) 동유럽의 변화와 헝가리혁명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했다.
1956년 2월 열린 제20차 소련공 산당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판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을 표방했다.
소련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벨그라드를 방문하여 티토 를 만났으며 “사회주의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 다.
유고슬라비아가 배제됐던 공산주의 정보국 코민포름(Cominform)도 해 체됐다.
이후 동구권의 사회주의 진영에서 “반소운동(反蘚運動)이 날로 격 화”되고 있었다.
1956년 10월 26일 동아일보는 동유럽 관련 해설 기사 를 게재하면서 “동독과 체코와 헝가리 등”, “이 지역이 유고까지 합쳐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사이의 한 개의 ‘중립지대’의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 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47)
이러한 1950년대 중반 동유럽 변화의 최정점 에 헝가리혁명이 있었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대학생 중심의 시위는 부다페스트 전역으로 확대됐고, 시위대의 요구사항 중 하나인 너지 임레의 총리직 복귀가 24일 전격 이뤄졌다.
너지 정부는 10월 30일 동유럽 내 사회주의 국가 간의 군 사동맹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하면서 대외적으로 소련과 서 방 강대국 간의 중립노선을 표명했다.48)
그런데 11월 4일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너지 정권을 무력 진압함으로써 정권을 전복시킨 후 친소적인 카다 르(János Kádár) 정권을 수립시켰다.
소련군이 무력 진압한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한 무장혁명청년단은 “중립, 자주, 민주, 사회주의 항가리를 위하여!”를 외쳤다고 한다.49)
47) 「허물어지는 쏘련권」(1~3) 동아일보 1955년 10월 24~26일, 3면
48) 재스퍼 리들리, 2003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434쪽
49) 서울신문사 조사부 역편, 1957 「항가리 무장 혁명청년단 선언문」(1956.11.12.) 피로 물든 일요일 : 자유 항가리인들은 이렇게 싸웠다 서울신문사, 6쪽. 이 책은 서울신문사에서 헝가리 사태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9 일까지 19일간 부다페스트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을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헝가리 혁명의 전개과정은 다음 논문의 내용에서 가져왔다. 김도민, 2017 「1956년 헝가리 사태에 대한 남한의 인식과 대응」 역사비평 119
북한은 헝가리혁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소련의 타스통신을 인용보도하며 소련의 입장을 지지했다.
1956년 10월 27일 로동신문은 헝가리혁명 관 련 첫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 따르면 “외국 반동세력은 합법적 주권을 반대하여 나서도록 반인민적 분자들을 체계적으로 선동하였”으나 “웽그리 야[헝가리] 인민 공화국 정부는 쏘련 정부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에 따라 와르샤바 조약에 의하야 웽그리야에 있는 쏘련 군부대들은 부 다뻬슈트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데 웽그리야 공화국 군대에 방조를” 제공함으로써 “10월 23일이 끝나 갈 무렵 적대적 모험은 진압되었다.”고 전했 다.50)
1956년 11월 4일 너지 정권이 소련군에 의해 축출됐을 때, 신문은 “히틀러 군대에 복무한 수백명의 웽그리야 장교 및 병사들이 서방으로부 터” 헝가리에 잠입했다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헝가리혁명이 민중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으로 변질됐다고 보도했다.51)
11월 6일 신문은 헝가리가 반동으로 가는 길을 저지시켰다는 프라우다 지의 사설을 그대로 인용하 면서 소련을 지지했다.52)
또한 11월 12일 김일성은 신임 수상 “야노수 까다르”에게 “웽그리야로 농혁명 정부의 창건을 축하하며” “웽그리야의 애국적인 혁명 력량이 쏘련의 방조하에서 반동 분자들의 파괴적 활동을 분쇄하고” “반혁명 세력의 폭행의 후파를 조속히 청산”한 데 대해 축하와 지지를 보내며 그리고 선 물도 발송했다.53)
50) 「부다 뻬슈트에서 반인민적 모험 파탄」 로동신문 1956년 10월 27일, 4면
51) 「호르찌 및 히틀러에 복무한 이전 웽그리야 장교와 병사들 웽그리야로 잠입」 로 동신문 1956년 11월 5일, 6면
52) 「웽그리야에서 반동에로의 길을 저지 시키라! 《쁘라브다》지 사설」 로동신문 1956년 11월 6일, 5~6면 다만 북한이 소련의 헝가리 무력진압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했는지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는 소련이 발표한 선언을 북한이 보 도하는 양상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1956년 10월 30일 소련은 헝가리에서 소련군 을 철수하고 헝가리에 평등과 독립을 부여하며 다른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겠 다는 내용을 담은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친선 협조의 발전」이라는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션즈화 지음, 2017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 김동길・김민철・김규범 옮김, 선인, 528쪽 그런데 로동신문은 곧바로 소련이 발 표한 성명을 11월 1일자 1면 맨 앞에 「쏘련과 기타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친선 협 조의 발전 및 그 가일층의 강화의 기본에 관한 쏘련 정부의 선언」이라는 제목하에 그대로 실었다. 로동신문 1956년 11월 1일, 1면
53) 「반혁명을 타승한 웽그리야 인민에게 열렬한 축하와 지지를 보낸다」 로동신문 1956년 11월 14일, 1면
그리고 2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1958년 5월 16일 북한 잡지 국제생활는 유고슬라비아 수정 강령 초안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웽그리야[헝가리]에서 중립을 운운하던 너지 임레”를 “반혁명적 정체”라 고 규정했다.54)
한편 남한 정부와 여당은 헝가리혁명이 한반도에 위기를 낳았다고 판단 했다.
이승만은 다시금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자유당은 사회통제를 강화 하는 ‘국정보호임시조치법’을 만들어 통과시키고자 했다.
반면 야당인 민주 당은 헝가리혁명을 일인독재가 민중 봉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 는 생생한 반독재 및 자유와 민주화의 근거로 제시했다.
이처럼 정부・여당 이나 야당은 헝가리혁명에 대한 강조점이 달랐을 뿐 모두 반공주의의 관점 에서 해석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55)
54) 허창봉, 「국제 관계문제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의 주장을 배격한다」 국제생활 1958-8, 1958.5.16., 8쪽
55) 헝가리혁명에 대한 남한의 인식은 다음 논문을 참조했다. 김도민, 2017 「1956년 헝가리 사태에 대한 남한의 인식과 대응」 역사비평 119
요컨대 북한 지도부는 헝가리혁명을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는 “반 (反)혁명”으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대칭적으로 남한 정부는 반소(反蘇)에서 출발한 혁명이 반공의거(反共義擧)가 됨으로써, 공산국 헝가리가 자유진영 으로 넘어오기를 원했다.
2) 유고슬리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강령 초안
소련의 헝가리 무력 진압은 1955년 이후 복원되던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56년 11월 16일 유고슬라비아 기관지 보르바 는 “11일 이스트리아 풀라에서의 티토 연설을 공개”하면서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 이면에 숨겨온 양국간 긴장을 드러냈다.”
“티토는 또한 헝가리 봉 기와 너지 임레의 중립 선언에 대한 소련의 두 차례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비판”했다.56) 1958년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류브랴나에서 개최된 유고슬라비아 공산 주의자 동맹 제7차 대회에서 새로운 정책강령 초안이 채택됐다.57)
여기에 는 외교정책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즉 “동서 어느 진영을 불구하고 쁠럭 (Bloc)정책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58)
이에 따라 1958년부터 유고 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쁠럭에 반대하는 ‘중립외교’를 전개하기 위해 “많 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59)
1958년 5월 16일 북한의 국제생활사가 발행하는 반월간 국제정치 시사 종합잡지 국제생활 에 “현대 수정주의를 배격”하는 글이 실렸다.
허창봉 의 「국제 관계문제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의 주장을 배격한다」는 유고슬라 비아의 새로운 강령 초안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60)
56) 김태경, 2021 「비동맹운동 60주년에 돌아보는 냉전기 북한의 유고슬라비아에 대 한 인식 변화」 역사문제연구 46, 111쪽, 각주 35번
57) 1952년 유고슬라비아는 제6차 전당대회에서 기존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공산주의자 동맹(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 L. C. Y.)’으로 바꾸었다. 재스퍼 리들리, 2003, 유경찬 옮긺,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 상, 을유문화사, 418쪽
58) 「공산권의 삼파전 중공→소련←유고 (1)」 동아일보, 1958년 7월 10일, 3면
59) 이정희, 2005 「동유럽에서의 동요와 유고슬라비아」 동유럽사 미래엔, 350쪽
60) 허창봉, 「국제 관계문제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의 주장을 배격한다」 국제생활 1958-8, 1958.5.16., 7~10쪽 ; 홍종욱, 2018 「1950년대 북한의 반둥회의와 비동맹 운동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61, 391쪽
먼저 그는 유고슬리비아가 엄연히 다른 두 진영을 동일한 ‘군사 동맹’으 로 설정하는 데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보기에 “유고슬라비야의 지도자들 과 강령 초안 작성자들은 현 세계가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인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력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이를 다만 두 개의 《군사 쁠럭》의 존재로 묘사”했다.
즉 그는 “국제 긴장 상태의 원인”은 “두 개의 군사-정치 쁠럭”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정책” 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이 “특히 쏘련”도 “《힘의 립장》에 서 있다” 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정책을 감싸”주었 다고 비판했다.
허창봉은 한반도 문제 관련하여 이 강령 초안의 서술 내용이 “특히 우리 를 격분케” 한다고 했다.
그는 “강령 초안에는 마치 독일, 조선, 월남의 분 렬도 《두개의 군사 쁠럭》으로 인하여 조성된 듯이” 서술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가 “오늘까지 통일되지 못하고 민족적 불행 속에 살고 있는 그 원인”은 “바로 미제국주의의 남조선 강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그는 1958년 2월 5일 “공화국 정부 성명에 호응하여 중국 인민 지 원군이 조선으로부터 철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미제는 남조선을 계속 강 점”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1958년 6월 14일 로동신문도 유고슬라비아가 발표한 새로운 ‘강령 초 안’을 “현대 수정주의의 집대성”이자 “전형”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신문은 유고슬라비아가 대외정책으로 내세운 ‘중립’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61)
61) 「현대 수정주의자와의 투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의무」 로동신문 1958년 6월 14일, 1면
그들은 흔히 저들의 행동을 ‘제3 로선’에 빙자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자의 견지에서 볼 때 정치에서 ‘중간 로선’보다 더 해독스러운 것은 없다.
력사 적 경험은 사회적 계급들 또는 집단들의 투쟁에 있어서 ‘중간적 립장’은 그러한 립장에 서려는 자들의 주관적 의도 여하를 막론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항상 근 로자들의 계급적 원쑤들에게 유익하였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유고슬라비야는 소위 ‘중립’을 표방하는 자기의 대외정책으로써 항상 제국주의자들에게 리롭게 행동하였다.
그는 국제 반동의 괴수 미제가 15개국 무력 침공자들을 사촉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적 전쟁을 감행하였을 때에 유엔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 하였다. (…)
북한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의 “중립을 표방하는” “대외정책”은 “항상 제국주의자들에게 이롭게” 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특히 6・25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유엔에서 던진 기권표를 상기시켰다. 이어 앞서 허창봉의 논리처럼 “오늘 조선, 독일 월남에서의 통일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쏘련과 미국의 ‘영향권’을 위한 투쟁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 지도부는 사회주의 진영 한복판에서 발원하는 유고슬라비 아의 중립에 대해서는 한반도 분단과 외국군 주둔 문제를 언급하며 적극적 인 비판에 나섰다.
한편 남한 정부는 이에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1957년 12월 3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은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정책 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언급했다.
비판의 핵심은 미국이 “자유세계에 대한 충성심을 실증할 수 있는 국가에게만 원조를 제공”해야 함에도,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하여 인도 등 “의심스러운 국가”에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62)
요컨대 북한은 1950년대 중립주의의 세 거두라 불리는 네루(인도)와 나 세르(이집트) 그리고 티토(유고슬라비아) 중에서, 군사동맹에 대한 네루와 나세르의 비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티토의 비판에는 부정적이었 다.63)
62) 「미외원(美外援) 재평가 필요」 조선일보 1957년 12월 4일, 1면
63) 1950년대 남한 언론에서 네루와 티토, 나세르는 자주 “중립권의 삼거두(三巨頭)” 로 지칭됐다. 「중립권정상회담을 주시」 조선일보 1956년 6월 20일, 1면
이는 북한이 판단하기에 세 곳의 중립주의가 발원하는 위치가 상이 할 뿐 아니라 그것이 냉전에 미치는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맺음말
본고는 한국전쟁 이후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흥한 중립주의에 대해 남・북한이 각각 어떠한 인식과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남・북한 정부가 1950년대 중립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1955년 반둥 회의와 오스트리아의 중립화통일 그리고 1956년 헝가리혁명과 1958년 유 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강령 초안에 대해 보인 반응을 분석했다.
1955년 반둥회의에 대해 북한은 정부수립 이전부터 주목해온 평화와 민 족해방운동의 맥락에서 적극 공명하며 지지했다.
반면 남한은 제3세력이 주창하는 중립과 평화는 자기 기만적 행동일 뿐 아니라 식민제국이던 일본 의 초청은 그들이 내세운 반식민의 주장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또한 북 한은 오스트리아 중립화통일이 미국을 공격하기 때문에 환영했다.
반면 북 한은 1956년 헝가리혁명과 1958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강령 초 안에서 표방된 중립은 사회주의 진영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각각을 반(反) 혁명 및 수정주의로 규정하며 비난했다.
‘대칭적’으로 남한은 반둥회의와 오스트리아 중립화통일은 자유진영을 약화시킨다며 비난했다.
나아가 남한은 헝가리혁명을 반소이자 반공이라며 환영했으며,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는 한국이 받아야 할 미국의 원조가 유고슬라비아에 제공됨으로써 줄어드 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다.
1950년대 아시아・아프리카지역(반둥회의)과 자유진영(오스트리아), 공산 진영(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원한 중립주의에 대하여 남・북한은 ‘대 칭적인’ 인식과 반응을 보였다.
남・북한 정부가 중립주의를 평가하는 기준 은 냉전의 자기 진영에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따라 결정됐다.
결국 1950년 대 이분법적이고 적대적인 냉전질서를 거부하며, 탈식민과 평화를 지향하 며 제3의 길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중립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은, 냉전의 최 선전이자 전쟁과 분단의 한복판인 한반도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양극단 으로 굴절됐다.
남・북한 정부는 가까운 아시아뿐만 아니라 머나먼 동유럽과 서유럽의 지역에서 중립주의가 만들어낸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며 직접적으로 반응했다.
이는 1950년대 한반도를 살아가는 당대인들에게 냉전질서는 한반 도와 동아시아만의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고 글로벌한 차원에서 동시다발적 으로 전개되는 트랜스내셔널한 구조로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950년대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자 세계 다수 국가가 참전한 6・25전쟁 을 갓 겪었으며 외국군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이처럼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기 글로벌 차원의 냉전(정치외교적, 국제무역 관계 등)과 서유럽과 동유럽, 아시아, 아 프리카 지역, 나아가 개별 관련 국가들에 대한 냉전사 연구가 충분히 축적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여전히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많은 부 분들이 남아 있다.
자료적으로 반둥회의의 경우는 인도네시아가 발행한 공 보를 통해 중립이 발원한 그곳의 관점을 일부 확보할 수 있었지만, 오스트 리아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서 생산한 자료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특 히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향후 비동맹회의를 이끄는 주역이자 1970년대 김일성과 만나 비동맹외교를 함께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이 글은 관 련 개별 국가의 역사와 지역사 그리고 사회주의의 역사 등을 충분히 이해 하지 못한 채 서술된 한계도 존재한다.
이는 추후 연구를 통해 보완하도록 노력하겠다.
향후 남북관계사 연구도 글로벌하면서도 지역적이고 동시에 개별 국가의 차원까지 함께 아우르는 종합적인 냉전사 연구와 더욱 결합되 기를 기대한다.
주 제 어 : 냉전사, 남북관계사, 중립, 반둥회의, 오스트리아, 헝가리혁명, 유고슬라비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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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e Emergence of Cold War Neutralism in the 1950s, and Responses from South and North Koreas Kim Do-min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both South and North Koreas perceived and responded to the concept of Neutralism, which emerged all around the globe after the Korean War. Analyzed in particular is rather ‘symmetrical responses’ displayed by both South and North Korean governments, to global events that occurred in the wake of such ideology emerging in the 1950s, such as the Bandung Conference in 1955, Austria’s Neutralization and Unification during the same year, the Hungarian Revolution in 1956, and the drafting of the first version of the Yugoslav Communist Alliance Code in 1958. Research shows that both South and North Korean governments responded rather symmetrically toward the Asian and African regions where Neutralism prevailed(as we can see from the Bandung Conference), the Free World(as in the case of Austria), and the Communist realm(as in cases of Hungary and Yugoslavia), during the Cold War of the 1950s. Their such responses varied, depending on whether they could benefit from the effects of supporting neutrality. Previous studies of the Cold War History, either from Korean scholars or from scholars abroad, have concentrated on the relations between ‘Central regions,’ or relations between regions which were rather ‘Central’ while the other was mostly categorized ‘Peripheral.’ Attempted in this work conversely is to define and deter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regions that could both be considered as ‘Peripheries.’ It should be noted that South and North Koreas have together formed one of the last front-lines of the Cold War on the Korean peninsula which has always been perceived as a ‘Peripheral region,’ and that other countries which declared Neutralism in the hope of escaping clutches of the polarizing nature of the Cold War order were also such peripheries.
Key words : History of the Cold War, History of the South and North Korean relationship, Neutrality, the Bandung Conference, Austria, the Hungarian Revolution, Yugoslavia
투고일자 : 2022.10.31. 심사일자 : 2022.11.21. 게재확정일자 : 2022.12.01.
역사와 현실 1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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